英雄 朴正熙12
■하얀 목련이 지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건설 발자취와 육영수 여사 서거의 비사속에 박정희 대통령의 심정을 그려 놓은 역사 장면으로서 우리가 한번 꼭 봐야할 내용입니다.
□하얀 목련이 지자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http://m.cafe.naver.com/hyanggun/380 - 서독방문 육영수 여사 서거
■ 박정희 일화
박정희가 논바닥에서 펑펑 울던 경기도 김포 들녘에서 모심기를 하시고 농수로에서 고무신 씻는 대통령!!
1979, 5, 23, (박정희 대통령 서거 5개월전~~)
1960년대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들이 고통을 겪을 때 아주 늦은 밤 마침내 기다리던 단비가 내렸다고 한다. 모두 잠든 시간, 박정희 대통령은 조용히 운전기사를 깨워 농촌 들녘으로 향하셨다.
논이 보이자 차를 세우신 박 대통령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논 한가운데로 저벅 저벅 걸어 들어 가셨는데, 한참을 지나도 안 나오셔서 운전기사가 가까이 가 보니 논바닥에 주저앉은 박대통령이 어린아이 처럼 펑펑 울고 계셨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운전기사도 박 대통령을 따라 한참을 울었다고ᆢ (박정희 대통령 운전기사의 증언)
박정희 대통령은 왜 그랬을까??
박정희 대통령 에게는 그가 어릴 때 그를 등에 업고 다니며, 극진히도 돌봐주시던 누님이 딱 한 분 계셨다. 동생이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 누님은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어렵게 살아 올케가 되는 육영수 여사에게 좀 도와 달라고 어려운 부탁의 편지를 보냈다. 이를 받은 육 여사는 친인척 담당 비서관 에게 이 편지를 건네 주었다.
당시 이 비서관은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생이었고, 박 대통령의 집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 모르게 은행에서 대출을 알선해 (일종의 압력이었음) 박 대통령 누님의 아들에게 택시 3대를 사서 운수업으로 먹고살도록 주선을 해 주었으나, 나중에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박 대통령은 대노 해서 친구이기도 했던 담당 비서관을 파면하고, 택시를 처분함과 동시에 누님과 조카를 고향으로 내 쫓아 버렸다.
이 조카는,
"삼촌!! 대한민국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습니다."라며 울먹이면서 대들었지만, 박 대통령은 단호하게 고향으로 쫓아 버렸다. 누님의 원망을 들은 박 대통령은
"누님 제가 대통령 그만 두면 그 때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냉정하게 누님을 외면했다
그 후 누님은 할 수 없이 대구에서 우유 배달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통령인 동생을 원망하면서…….단 한 분 그것도 자신을 극진히 돌봐 주시던 누님이 어렵게 살고 있는데, 대통령이 된 지금 이렇게도 냉정하게 뿌리친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총을 들고 혁명을 일으킨 진정 메마른 눈물을 가진 독재자 였기 때문에 감정 없는 그런 인간 이었을까??
피를 나눈 혈육의 정까지도 마다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며, 사리사욕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관이 확실한 애국심을 가지고 이 나라 4,000만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탁월한 영웅,
대한민국 역사 이래 진정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보라.....!! 후임 지도자들을......
그 누구 하나 부정부패 비리로 국민들을 실망 시키지 않은 지도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며, 전직 대통령들의 자식들이 감옥에 갔었음을….
박 대통령 집권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친인척 그 누구도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고 청와대 초청 한번 안 했으며, 또, 박 대통령 자녀 중 누구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지도 않았고, 단 한푼의 재산도 물려주지 않았으며, 특혜도 베풀지 않았다.
인간이 재물에 대한 욕망은 그 끝이 없음이 현실이다. 그러나 재산은 죽은 후 주머니에서 십만 원과 고물시계를 팔에 차고 있었던 것 뿐이였으며, 그 이상 발견된 것이 없다.
단군이래 대한민국 지도자 중, 단 한 건의 비리도 없었던 박 대통령 말고 또 그 누가 있었던가?? 대통령은 커녕, 장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제 자식 취직 자리부터 먼저 챙기는 썩어빠진 것들이, 현 정권은 개혁을 외치며, 박 대통령을 헐뜯으려 단점만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어찌 기가 막힐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대한민국 역사 이래 누가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훌륭한 지도자였느냐??
혈육의 정까지도 냉정하게 공과 사를 분명히 한 청렴결백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진정한 지도자!!
■ 2022. 05.15 “5.16으로 문 연 박정희 18년...가장 위대한 ‘전진의 시대’였다”
[송의달이 만난 사람] ‘5.16 61주년’ 특별 인터뷰...
‘박정희는 옳았다’의 저자 이강호 연구위원, “박정희는 근대화 이룬 진정한 진보적 정치가”
“5.16은 안정된 자유민주헌정(憲政)을 훼손한 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헌정을 수호하고 재건한 것이다. 1972년의 10월유신(維新)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실력 배양을 위해 ‘중단없는 전진’을 재결의한, 또 한 번의 5.16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 지방을 찾아가 공사현장을 시찰하고 지시하는 박정희(사진 왼쪽). 1962년 경기도 김포에서 모내기 후 동네 어른에게 두 손으로 막걸리를 따르는 박정희(오른쪽 위). 사진 찍기를 즐겼던 박정희가 즉석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부인 육영수 여사에게 보여주고 있다.(오른쪽 아래)/조선일보DB
이강호(59)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이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에서 내린 분석이다. ‘이강호’는 대학 시절부터 써온 필명(筆名)이며, 그의 본명(本名)은 ‘김용철’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1982년 입학한 그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한 차례 복역도 했다.
이 위원의 진단은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며 사회변혁에 앞장선 운동권 핵심의 생각이라고 믿기 힘든 180도 전향(轉向)이다. 그는 심지어 10월유신 이후 박정희(朴正熙) 집권 후반기(1972~79년)가 ‘민주주의의 암흑기’라는 주장을 강하게 반박한다.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흠집 많다고 보는 견해는 크게 잘못됐다. 10월유신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 같은 부강한 나라가 결코 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박정희가 정치적 흠집 많다는 견해는 잘못”
그는 나아가 “박정희 집권 18년(1961~79년)은 한국인을 누천년(累千年)의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번영으로 인도한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진(前進)의 시대”라고 했다. 그는 왜 박정희 치세(治世)를 적극 옹호·예찬하며 아직도 남아있는 ‘박정희 금기(禁忌)’ 깨기에 앞장서고 있는 걸까? 기자는 이달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이강호 위원을 만났다. 마침 5.16 61주년을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이강호(59)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그는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던 좌익 운동권 출신이다. '미래한국' 편집위원을 지냈고 청년·학생들과 시민 대상 교양 강좌와 연구, 글쓰기 등에 주력하고 있다./송의달 기자

▲이강호 위원의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5.16과 10월유신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2019년 출간됐다./기파랑
- 1961년에 5.16은 왜 일어났나? 박정희의 거사(擧事)는 불가피했나?
“윤보선(尹潽善) 당시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말한 게 여럿을 시사한다. 1960년 4.19로 민주당 정권이 권력을 잡았지만, 1천만 노동인구 중 240만명이 완전실업자였고 200만명은 잠재실업자였다.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이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장면(張勉) 총리 정권은 경제발전 계획을 만지작만 거릴 뿐 경제난 수습에 전혀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 그 이유 뿐이었나?
“더 큰 문제는 데모 천국인 상황에서 벌어진 극심한 이념적, 정치적 혼란이었다. 1960년에만 침투 간첩이 100명 넘게 체포됐고 ‘통일 운동’을 한다는 인사들의 월북(越北) 시도가 이어졌다. 1961년 3월22일 야간 횃불시위자들은 서울 명륜동 소재 장면 총리 집으로 몰려가 ‘미군 철수’와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장면(오른쪽) 총리가 경무대를 찾아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 DB
◇“4.19 이후 간첩 100여명 체포...‘김일성 만세’ 외쳐
그는 “나중에 공개된 알렉산더 푸자노프 평양주재 소련대사의 기록을 보면, 4.19 직후 김일성은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남 전략 추진에 들어갔다. 당시 남한에선 6.25 이후 숨죽이고 있던 친북좌익세력들이 다시 발호했다. 시위 때 ‘적기가(赤旗歌)’가 불렸다”고 했다.
“계속 이 상태였다면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궤멸됐을 것이다. 1961년 5월13일 서울운동장에 4만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16, 17일에도 전주, 대구에서 혁신계(좌익)의 시위가 예정돼 있었으나 5.16으로 무산됐다.”

▲1961년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군중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서울 을지로- 종로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월혁명회
- 박정희가 5.16으로 지향한 목표는 무엇이었나?
“반공(反共)과 자유민주주의의 재건이다. 5.16 당일 발표된 6개 혁명 공약 가운데 2개가 ‘반공’ 내용이다. 박정희가 1961년 직접 쓴 35쪽 분량의 팸플릿 ‘指導者道(지도자도)’와 1962년에 낸 277쪽 분량의 ‘우리 民族의 나갈 길’이란 책을 보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겠다는 내용 일색이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守護者)로서 5.16을 일으켰다.”

▲5.16 직후 선포된 혁명 공약 6개항. '反共(반공)'을 되풀이해 강조하고 있다./송의달 기자

▲박정희 소장이 1961년 5.16 직후에 쓴 '지도자도'. 35쪽 분량에 5.16의 목표와 지도자의 자질, 원칙 등을 담고 있다./송의달 기자
◇“5.16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재건”
기자가 확인해 본 결과, 박정희는 실제로 이렇게 밝혔다.
“이번 혁명은 진실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독재와 전체주의를 수립하기 위함이 아님은 명명백백하다.”(‘지도자도’, 23~24쪽)
“국가가 파멸에 직면하고 국민의 주권이 비참히 유린되었을 때, 여기에 일대 수술(手術)을 가하여 국가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소생(蘇生)시키고자 한 것이 이번 군사혁명이다.”(같은 책, 26쪽)

▲5.16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지지 시위(사진 위)가 벌어졌다.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5.16 혁명군 수뇌부가 이에 경례로 답하고 있다(사진 아래)./조선일보DB
- 박정희는 어떤 사람인가?
“1917년생인 그는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내내 반장을 했고 학업성적도 뛰어났다. 100명 모집에 1070명이 응시한 대구사범학교 입시에서 51등으로 합격했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예과)는 240명 중 수석 졸업했다.
일본 육사는 300명 중 3등으로 졸업했다. 일본 육사는 당시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근대적 인물이었다.”
- 박정희의 경제적 공(功)은 인정해도 3선 개헌, 10월유신, 긴급조치 같은 그의 강압 통치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에이브러험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대통령의 경우 재임 중 ‘비상대권’을 내세워 ‘긴급조치’를 발동해 수백 개의 신문을 폐간시키고 3년동안 1만 3000여명을 투옥했다. 이에 반해 박정희 후반기 7년간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이는 1000여명에 불과하다. 링컨의 10분의 1 미만인 것이다. 이런데도 링컨은 ‘민주주의의 성자(聖者)’로 떠받들고, 박정희는 영원히 ‘反민주 독재자’로 멸시해야 하나?”

▲에이브러험 링컨(1809~1865년) 제16대 미국 대통령
이강호 위원은 이어 말했다.
“유신시대의 한 복판인 1974년에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찬양하고 베트남 공산화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됐다. 이어 3년 뒤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를 또 냈다. 리영희는 나중에 반공법으로 기소돼 형(刑)을 살았지만 책은 버젓이 출간됐다. 그러나 2017년 8월, 문재인 정권 아래 법원은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 회고록’의 출판·판매를 금지했다. 박정희와 문재인 정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에 부합하나?”
◇“링컨은 박정희 보다 10배 많이 투옥시켜”
- 그래도 강경한 ‘반(反)박정희’ 논자들은 지금도 ‘10월유신은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유린한 반민주적인 폭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탈취당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 눈감는다. 서독(西獨)은 이를 인식하고 2차 세계대전 후 나치와 공산당을 불허하는 ‘방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정보기관인 헌법수호청을 통해 잠재적 용공(容共) 의심분자들을 끊임없이 사찰했고, 공무원의 자유민주기본질서에 대한 충성서약을 의무화했다. 문제있어 보이는 단체는 강제해산했다. 이런 서독은 진짜 민주이고, 유신만 반(反)민주인가? 유신 선포 당시 한국이 직면한 도전은 서독보다 훨씬 엄중했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는 자유민주체제 유지를 위해 위헌정당 해산 제도 같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채택운용했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 독수리를 담은 사진은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장(國章)
- 10월유신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조치였단 말인가?
“그렇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은 독재와 민주의 싸움이 아니라 자유민주체제의 근본을 부정(否定)하고 위협하는 세력과의 싸움이 근원적인 대결이었다.”
이 위원은 이어서 말했다.
“박정희는 10월유신 선포 특별선언에서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민주체제처럼 나약한 체제도 없다. 나는 우리 민주체제에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활력소를 불어넣어주고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이 개혁을 단행하고자 한다’고 했다. 박정희의 이 언명(言明)은 정론이다. 공산 좌익들도 항상 민주를 내세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달고 있는 민주주의가 기만적(欺瞞的) 장식물에 지나지 않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 묘역/조선일보 DB
그는 “민주주의는 양식 있는 시민의 손에 있을 때는 자유의 활력을 꽃피우지만 불순한 무리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흉기(凶器)가 된다.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 우리는 이를 목격했다. 유신시대는 종국에 이해될 것이나 최근 문재인 정권 5년은 ‘재앙의 시대’로 불릴 것”이라고 했다.
◇“민간 정치인들, 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결사 반대”
- 박정희에 반대하는 민간 정치인이 집권해 10월유신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박순천(朴順天)·김대중 같은 야당 정치인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물론 외자(外資) 유치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줄기차게 결사 반대했다. 1971년 4월 대선 당시 김대중(金大中)은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세종대왕 시대가 성군(聖君)의 시대라는 것은, 당시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울산공업단지도 없었지만,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녔지만, 국가의 혜택이 고르게 분배되었던 것이오’라고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1971년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후보로 각각 출마한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은 '조국근대화론'과 '대중경제론'을 각각 내걸었다./조선일보 DB
- 일부에선 유신시대에 용공(容共) 조작을 비롯한 인권 탄압이 극심했다고 주장한다.
“‘용공 조작은 없었다. 이것은 진짜 남한 변혁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다.’ 나를 포함한 86세대 운동권이 박정희 시대 4대 공안사건(인혁당, 통혁당, 해방전략당, 남민전 사건)에 대해 배우고 후배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 당시 ‘명백한 공산좌익’ 무리들이 설쳐댔다. 그런 무리를 단속한 게 탄압인가? 내막을 모르고 엮인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과오이지 자랑일 수 없다.”
- 5.16을 필두로 10월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치’의 요체(要諦)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자유’를 심장(心臟)으로 하는 자유민주체제일 때만 생명력을 가지며, 자유를 부정하는 공산 전체주의를 반대하지 않으면 사망한다는 진리를 알고 실천한 것이다. 5.16의 목표가 반공 태세 재정비 강화였다면, 10월유신은 공산주의와 대결해 이기는 실력 배양을 향해 확고히 나아간 것이었다. 10월유신은 5.16의 연장선에 있는 또 한번의 5.16이다.”
◇“박정희의 핵심은 반공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
그의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은 ‘반공·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愛國愛族)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기반이다’고 갈파했다. 이것은 5.16과 10월유신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치’의 핵심에 대한 압축적 설명이다. 동서양 세계 모든 나라의 현대사는 ‘반공민주 정신’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존립할 수 없음을 증명해 오고 있다.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더없이 취약하고 허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반공(反共)민주정신을 굳건히 했기에 지켜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2022년 4월 14일 부산 남구 신선대부두에서 컨테이너 선적 및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박정희가 5.16을 일으킨 1961년 우리나라 수출액(1억2000만달러)은 태국의 4분의 1, 필리핀의 7분의 1 수준에 못 미쳤다. 그러나 20년 후인 1980년에는 태국, 필리핀 보다 2.5배 더 많이 수출하는 수출주도 공업국가로 변신했다./
▲우리나라의 최근 연도별 세계 무역 순위. 2003년 세계 12위에서 2021년 세계 8위로 상승했다./뉴스1
- 박정희는 16년 대통령 재임 기간(1963~79년) 중 9%대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는 감성(感性)팔이, 즉 포퓰리즘(populism·여론영합 정치)을 하지 않았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고 했고, 자조(自助)정신의 원칙을 지켰다. 우량기업을 우대하는 수출진흥정책을 폈고 새마을운동에서도 앞서가는 쪽을 먼저 격려하는 차등 지원을 했다. 이런 접근이 국민들의 분투(奮鬪)를 용솟음치도록 했다.”
- 1964년 1억달러대이던 우리나라 수출은 박정희 후반기인 1977년에 100억달러로 13년 만에 100배 성장했다. ‘박정희 경제학’으로 불릴만한 성취인데.
“박정희가 ‘기업천하지대본(企業天下之大本)’을 최고 국정 지표로 삼고 기업 키우기에 혼신(魂神)을 다한 결과다. 그는 1965년 2월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매월말 청와대나 중앙청에서 2시간씩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1966년부터는 매달 월간경제동향 보고회의를 열었다. 기업대표들이 참석한 민관 합동회의를 148차례 직접 주재하며 지원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서울 광화문 중앙청에서 열린 수출진흥 확대회의 모습/연합뉴스
그는 “박정희의 탁월(卓越)함은 그가 단순히 중소기업 배려·지원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누비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독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 있다”고 했다.
◇“20년 연평균 9% 성장...5천년 역사 물길 바꿔”
- 박정희 집권이 한민족 역사에서 갖는 가치(價値)라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전반에 7.3%, 60년대 후반에는 5년 평균 11.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민족(韓民族)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고도성장이다. 1961년부터 80년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연평균 9%대라는, 인류사에 없던 성장률을 달성했다. 박정희는 5000년 한민족 역사의 물길을 바꾸었다. 이런 사람이 영웅(英雄)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영웅인가?”
- ‘박정희의 근대화’에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가?
“그가 주도한 ‘근대화’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 성취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공산주의로 붉게 채색된 상태에서 6.25로 폐허의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세계적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울산 현대중공업 현장을 찾아 정주영 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조선일보DB
이강호 위원의 이어지는 말이다.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망국(亡國), 건국(建國)과 부국(富國)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 망국의 굴욕을 딛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운 이승만의 위업을 물려받은 박정희는 민족중흥에 매진해 부강한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져놓고 삶을 마감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근대화를 이룬 진정한 진보적 정치가(statesman)이다.”
◇“근대화 이룬 진정한 진보적 政治家”
- 박정희가 꿈꾼 것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었나?
“그는 가난 탈피를 넘어 우리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발전된 ‘문명적 삶’을 가져 보자고 외쳤다. 그의 ‘조국 근대화’는 그런 의미였다. 국민들은 이에 호응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기원과 각오로 달렸고, 마침내 국가적 가난의 질곡을 끊고 약소국의 자격지심(自激之心)도 떨쳐냈다. 이 시대는 실로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진(前進)의 시대였다. 박정희의 발목을 잡으려 한 수많은 반대파들이 득세했다면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겠나?”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제2고로 화입식(火入式)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함께 불을 넣고 있다./조선일보DB
- 최근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이라면?
“박정희는 1963년 10월13일 수원과 인천에서 마지막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지금 여건으로는 누가 집권해도 당장 잘 살게 할 수 없다.(…) 내가 집권하면 여러분에게 근면과 내핍, 피땀 흘려 일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고 했다. 이게 진짜 지도자의 면모이고, 윤석열 대통령이 본받아야할 자세다. 국민에게는 박정희처럼 말하고, 악적(惡敵) 무리들에는 단호히 맞서기 바란다.”
◇“자유(自由)는 곧 자조(自助)다”
- 박정희의 ‘근대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나 원리가 있다면?
“자조(自助·self help)의 원리라고 본다. 이것이 반(半) 만년 동안 우리 민족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국가 부흥’이라는 한(恨)을 푼 열쇠이다.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조와 자립·자강의 정신으로 의타(依他)와 낙담, 무기력(無氣力)을 떨쳐버리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자유(自由)는 곧 자조다. 이 원리를 국민정신으로 되살려 낼 때, 현재의 위기 극복과 일류국가로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각오를 적은 박정희 대통령 친필/'새마을운동 10년사'(내무부,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저도 휴양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박정희’(기파랑)
- 박정희를 원래 조금이라도 좋아했었나?
“정반대이다.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모두 다녔는데, 1960년대부터 민주당 신파 청년당원으로서 김대중의 동교동계에서 활동한 아버지 영향으로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생각은 단 한 개라도 입력될 틈 조차 없었다. 대학 입학 후에도 유신을 적대시하고 비판하는 운동권 논리에 흠뻑 빠져 있었다.”
-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전향했나?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 해체 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대적 재정립을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지속적으로 작동가능한 경제체제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러다 칼 포퍼(Karl Popper)가 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서구 지식인들은 플라톤 이래로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회공학에 몰두해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다’라는 내용이 뼈에 저리게 다가왔다.”
▲칼 포퍼가 1945년에 출간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책은 두 권으로 돼 있다./민음사
◇“운동권 결별...보수우파 전향에 15년 걸려”
그는 이어 말했다.
“1992년 초에 10년의 운동권 생활을 마감하고 고민 끝에 김영삼 대선캠프에 참여한 뒤 1993년부터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 근무했다. 당시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참조하기 위해 들여다본 여러 객관적 지표들이 운동권 시절 대자보와 유인물에 적었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확인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상태나 다름없던 ‘국가보안법’을 굳이 폐기하려던 386운동권 출신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운동권 정권’ ‘전대협 정권’이란 생각을 굳혔고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고 했다.
- 나름 고통과 번민이 많았을 듯 하다.
“예전의 인간관계가 속속 끊어지면서 많은 외로움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덧없이 세월이 흘러버렸다. 모두 감내해야 할 업(業)이었다. 청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에서 보수우파로의 전향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뤄지지 않았다. 기존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15년쯤 걸린 것 같다. 지금 나에게 박정희는 ‘영웅’이다.”
▲이강호 위원이 쓴 '박정희가 옳았다'의 2편. 2022년 2월 출간됐다./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다시 위기의 한국...‘박정희 정신’ 부활 절실해”
이강호 위원은 인터뷰 내내 “박정희 체제는 ‘상시적 비상(非常) 체제’일 수밖에 없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닉슨 독트린 선포(1969)와 주한미군철수론 같은 안보위기 요인이 상존했고, 대내적으로는 ‘이면(裏面)에 좌익이 도사린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등 안팎의 도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최악의 여건에서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경제성장으로 자유민주체제의 영속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으니, 박정희야말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얼마라고 평가하는 것은 평론가적인 쉬운 접근이다. 박정희 시대는 세계사적으로도 반복하기 어려운, 불멸(不滅)의 성취 시대”라고 했다.
- 정작 지금 우리 사회는 박정희를 잊고 있지 않나?
“‘박정희의 업적을 인정해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박정희식(式) 정치’를 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히 각인해야 할 점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당시, 우리에겐 ‘상무(尙武)정신·기업가정신·자조정신’이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폐기된 유물이 아니다. 한국에 또다시 안팎의 큰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 지금 같은 비상(非常)한 시기에는 비상한 의지와 결단, 무엇보다 박정희 정신의 현대적 부활이 절실하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산책하고 있는 모습. 그는 1917년에 태어나 만 62세인 1979년 10월 영면했다./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5.16 이듬해인 1962년 박정희가 직접 쓴 책 '우리 민족의 나갈 길'/기파랑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
월간조선 07월 호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한국의 헤리티지재단으로 키우겠다”
⊙ 도로에 박정희재단 이정표, 박정희 동상 세운다
⊙ “박정희는 좌·우·중도가 아닌 그 위를 걸어간 분”
⊙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데려와 뛰노는 공간으로 바꿀 것
유영구
1946년생. 경기고·연세대 법학과 졸업, 미국 트리니티대 명예문학 박사, 일본 후쿠이공업대 명예박사 / 명지학원 이사장·LG트윈스 프로야구단 고문·한국국가기록연구원 이사장·대한체육회 부회장·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역임. 現 명지의료재단 명예이사장·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제5대 이사장 / 체육장관표창·봉황장·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제5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유영구 전 KBO 총재.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이라고 말합니다. 좌파, 우파, 보수, 진보, 연령대에 따라 각기 다른 평가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존경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이니까요.”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함축된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명지학원 이사장,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이사장, KBO 총재를 지낸 유영구씨가 지난 3월 제5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하 박정희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앞으로 3년간 박정희재단을 이끌게 됐다.
飮水思源
“제 인생에 있어 마지막 봉사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자리가 많이 무거워요. 박정희(朴正熙)라는 인물이 훌륭하고, 업적이 많아서 누가 와도 잘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 여건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니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이해할 만한 정권이 들어섰으니, 그동안 못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갈 생각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땠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에 대해 ‘좌도, 우도, 중도도 아니다. 그 위를 걸어갔다’고 평가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그대로입니다. 어느 정당이든, 사상이든, 좌우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제약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일부의 잘못된 평가는 오해에서 비롯됐다고요.
“우리의 오천년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이만큼 풍요로운 적이 있었습니까? 그 토대를 박정희 대통령이 마련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일부에서는 ‘그럼 박정희가 잘살게 했느냐? 근로자의 피땀은 없었냐?’고 합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를 평가할 때 단원이 연주를 훌륭하게 해서라고 말하기보다 지휘자의 역량이 뛰어났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강한 국가가 되는 데 사회 각층이 노력한 것은 맞지만, 지휘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습니다.”
― 당연한 얘기인데, 여러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흠집을 내려고 하죠.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샘을 판 사람에 대한 고마움, 수고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였던 일본과 중국이 1972년 일중(日中) 수교를 맺었죠. 덩샤오핑(鄧小平)과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자민당 총재의 결단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두 사람이 수교하고 덩샤오핑이 일본을 답방했을 때 다나카 총재는 미국 록히드사 여객기 도입과 관련한 ‘록히드 사건’으로 가택에 구금 중이었습니다. 세간의 관심은 ‘덩샤오핑이 구금 중인 다나카 총재를 만나겠느냐’였습니다. 그때 덩샤오핑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고 말하면서 다나카 총재를 찾아가 한 시간 반 동안 환담을 했습니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수원을 생각한다는 뜻이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것입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살게 한 그분을 잊지 말아야죠.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도 1년에 한두 번은 기념관을 찾아 그분을 기리고, 젊은이들도 국가 부강의 토대를 닦은 그분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대에 걸친 박정희 일가와의 인연으로 이사장 맡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전시실 로비.
유영구 이사장이 박정희재단 일을 맡게 된 것은 박 대통령 일가와의 2대(代)에 걸친 인연 때문이다. 선친은 학원법인 명지학원의 설립자이자 충청북도 산업국장, 내무부 통계국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토통일연구원 장관을 지낸 방목(邦牧) 유상근 선생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명지보국(明知報國)’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줄 정도로 유상근 선생을 아꼈다. 유영구 이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부친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자주 접했고, 박근혜 전(前) 대통령, 박지만 EG 회장과도 교분을 쌓아왔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고, 국무회의에 들어갔다 오시면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정부가 돈을 투자해 시골의 기차역을 재정비하는 일을 논의할 때였답니다. 다들 역사에 꽃을 심자고 했는데, 한 분이 ‘콩을 심자’고 했대요. 다른 장관들이 ‘콩을 심으면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콩 서리가 빈번할 텐데’라며 반대를 했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이 ‘콩 서리하는 것도 우리 국민 아닙니까?’라고 해서 모두 숙연해졌답니다.”
― 저도 얘기만 들었습니다만, 국민이 배곯던 시절이었죠.
“박정희 대통령 유품을 보면 값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친이 하루는 통일원에서 대통령과 회의하고 식사를 하시고 오셨습니다. 청와대에서 식사를 준비한다기에 뭘 가져오려나 기대를 했는데 햄버거였다고 하더군요. 소탈하고 인간적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분이었습니다. 많은 분이 박정희 대통령의 면모를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젊은 세대는 그분에 대해 잘 모릅니다. 박정희의 자조, 자립, 협동 정신, 그것을 후대가 어떻게 올바르게 기억하도록 하느냐가 재단의 임무입니다.”
젊은 세대에 박정희 업적 알리는 것이 임무
― 후대들이 박 대통령을 마치 미국 링컨 대통령처럼 역사 속의 인물로 느끼는 날이 오겠죠.
“요즘 세대들은 ‘우리는 원래 잘살았어요’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요. 세계에서 이만큼 급속도로 잘살게 된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회의에 참석했을 때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홀대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1인당 GDP가 고작 128달러에 머물고 있었지만, 필리핀은 200달러로 동남아시아에서 선두그룹에 있었죠. 동행한 수행원들이 느낄 정도로 박 대통령을 홀대했는데, 그때 박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10년 뒤에 저 사람을 꼭 다시 만난다’고 했습니다. 그즈음에 우리나라와 필리핀의 경제 상황은 역전돼 있었습니다. 과감하게 산업화를 진행한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죠.”
―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분이죠.
“당시에 야당에서 ‘농업 인구가 500만 명인 국가에서 무슨 산업화냐. 농업으로 먹고살아야지’라고 비난했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엘리트 코스인 사범학교 교육을 받은 분 아닙니까. 당시 사범대는 수학, 영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개발계획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국가 경제를 두고 종합적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봅니다.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린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으로 치자면 슈퍼 컴퓨터처럼 두뇌가 작동한 겁니다.”
좌파도 의식적으로 반대할 뿐, 마음속으로는 존경할 것
― 박정희 대통령의 여러 업적 중 경제 부문을 주로 알릴 생각이십니까.
“적어도 그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좌파도 의식적으로 반대할 뿐, 마음속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봅니다. 지난 5년 동안 진행이 늦춰졌던 일들을 하나씩 할 겁니다.”
― 마포구 상암동이 외진 곳이어서인지, 여기에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죠.
“표지판 사인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전(前) 정권에서 여러 제약을 가했습니다. 유명한 조각가가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동상도 못 세웠습니다. 조각가가 보관 중인데 조만간 박정희 대통령 동상 세우기도 해야 합니다.”
― 지난 5년간 하지 못한 일을 하려면 바쁘시겠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나아가야죠. 이념에 경도되어 박정희라는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좌파에서 늘 얘기하는 것이 장기 집권인데, 저는 그 덕분에 보수나 진보의 색이 오히려 옅어졌다고 생각합니다. 5년만 집권하면 자기 색깔을 고집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하다 보면 보수만으로 국정 운영이 되지 않으니 다른 이념도 받아들입니다. 가령 건강보험을 시작한 것은 보수 쪽에서 보면 다소 놀랄 일이지만 밀어붙였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지만 박 대통령은 ‘1981년에 핵무기만 개발하면 이제 내가 그만둬도 북한의 위협은 없을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게 본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부에서 ‘박정희의 숨겨진 재산이 몇조원이다’라는 둥 허황한 얘기를 여전히 늘어놓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만원 후원금 내는 백만 명 모집에 매진할 것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전시실 모습.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연도별로 소개하고 있다.
유영구 이사장은 취임 이후에 박정희재단 소개 팸플릿 제작을 주문하는 등 아주 기초적인 작업부터 지시했다고 한다. 유 이사장은 “두 명의 독지가에게 5000만원씩 1억원의 후원금을 받는 것보다 1만원 후원금을 내는 100만 명을 모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박정희재단은 기부금으로 운영됩니다. 월남참전용사, 재향군인회, 새마을운동협회 등 재단 후원에 열정적인 분들이 있지만, 저는 1만원을 내는 회원을 많이 모으려고 합니다. 그런 회원이 많아야 재단에 힘이 생기거든요. 박정희기념관을 많은 분이 찾도록 홍보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 기념관이 개관된 이후 관람객이 15만 명을 돌파했죠.
“너무 적은 숫자죠. 박정희 대통령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는 어르신들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젊은 부모들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와서 뛰어놀 수 있는 공간, 누구나 문턱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실제로 유영구 이사장은 과거 경찰박물관을 론칭했을 당시에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1년 방문객이 15만 명을 돌파했다. 그는 당시 경찰박물관을 아이들을 위한 체험장으로 만들도록 조언했다. 아이들용 경찰복, 쇠고랑, 권총을 체험관에 전시해 아이들이 편견 없이 경찰관 체험을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또 기성세대에는 ‘음수사원’의 심정으로 1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 박정희라는 위대한 분을 기념하는 곳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저는 기념사업이라는 것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하늘에서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그리움에 눈물을 쏟는 곳으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젊은이들이 편하게 찾고, 아이들이 ‘우리 할아버지들 때 저렇게 못 살았구나. 박정희 할아버지가 우리가 잘사는 데 기틀을 다졌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나아가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국가의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유족들도 그걸 원하겠지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때 뵐까 했는데 못 봬서, 조만간 대구에 내려가서 뵐 생각입니다. 박지만 회장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고 각종 루머에도 시달렸지만, 생각이 상당히 건전한 분입니다. 판단력이 뛰어나죠. 그분들도 재단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실 겁니다.”
― 지난해 9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구미시에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 개관했죠.
“저희 재단에서 유품 5600여 점을 위탁했고, 근현대 산업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관입니다. 박 대통령이 사용하던 은제 담뱃갑, 재떨이, 가죽가방 등이 전시돼 있는데 더욱 활성화되도록 도울 예정입니다.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 유품을 찾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유품을 보관 중이던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2, 3세들이 소지품을 보관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보이는데, 그분들께 기증받는 일을 계속할 겁니다.”
― 손자들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잘 모르죠.
“아무래도 낯설죠. 30~40대 기성세대들도 박정희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재단에서 ‘박정희 키즈’를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세대들에게 소상히 알릴 계획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초기 재임 시절 사진만 제대로 전시하더라도 오늘날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연히 느낄 겁니다.”
2011년 명지학원 사학비리의 실체
유 이사장이 기자들을 만난 것은 2009년 KBO 총재로 취임할 때 취임식장에서 기자회견을 했던 것이 전부다. 이후 그는 2011년 명지학원 이사장으로 재직 중일 때 수백억원대의 비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 생활을 했고, 2012년에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런 그가 10년이 지나 박정희재단 이사장으로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이다. 자신도 “10년 만이라 망설임이 많았다”고 했다.
“세상일에 염증이 생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정희재단으로 부터 이사장직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선뜻 답하지 못하고 몇 달 동안 고민했던 이유입니다. 그래도 이 일만큼 제 인생에 있어 보람된 일이 없을 것 같더군요. 박정희 올바로 알리기에 제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 박정희재단과 연관은 없지만, 먼저 말씀해주시니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간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명지재단이 주식의 100%를 출자한 명지건설이 2009년에 경기도 용인시에 실버타운을 착공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였는데, 노인들에게 혜택을 준다는 이유로 실버타운이 ‘1가구 1주택’에서 제외되도록 했습니다. 명지건설이 실버타운을 분양했는데 첫날 97%가 분양 완료됐습니다. 굉장히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국세청이 반대해서 정부가 실버타운을 ‘1가구 1주택’에 포함하도록 했습니다. 1가구 2주택이 되니까, 실버타운 계약을 맺었던 고객의 85%가 해약했고 명지건설이 부도 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제가 명지학원 이사장으로서 상황을 보니까 명지건설이 부도나면 영세업자의 연쇄 부도로 이어져 사회문제가 되겠더군요. 그래서 명지학원 법인이 명지건설에 500억원을 지원했는데 그게 배임 횡령이 된 겁니다.”
배임 횡령 혐의로 구속됐으나, 벌금·추징금 10원도 없어
― 개인 착복, 뭐 그런 거 아니었습니까.
“학교 법인에서 10원도 챙긴 것이 없습니다. 제가 500억원을 배임 횡령했다는데, 나중에 재판부는 벌금, 추징금을 10원도 선고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법인 돈을 유용했다면 당연히 뱉어내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도날 뻔했다가 살아난 명지건설로 인한 피해자도 한 명도 없었고, 제 배임에 동조한 공범도 한 명도 없습니다. 명지건설 부도를 막기 위해서 그런 결정을 한 저, 딱 한 명만 구속됐습니다.”
― 개인 유용이 아니고 피해자, 공범도 없는데 구속됐다고요.
“마지막 재판 때 판사가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떤 결정을 하겠느냐’고 해서 제가 ‘똑같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제가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일종의 괘씸죄로 7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학교 법인에 여유 자금이 있고, 학교 법인이 100% 소유한 회사로 인해 수백 명이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 왜 이런 얘기를 여태 안 했습니까.
“해명하고 다닐 이유도 없고, 그냥 세상이 싫더라고요. 명지건설 영세업자들이 오히려 재판부에 저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으니까, 적어도 직접 당사자인 그분들은 알 거 아닙니까. 그럼 됐지, 뭘 계속 얘기합니까. 달랑 집 한 채 있는 것도 명지학원 재단에 기증했습니다.”
― 그럼 지금 무주택자세요?
“네. 이태원에 30평짜리 4층 건물의 4층에 살고 있는데 재단에 기증했습니다. 제가 당장 살 곳은 있어야 하니까 ‘나 죽을 때까지는 이 집에 살게 해주고, 그다음 재단에서 알아서 처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육부에서는 그것도 편법 지원이다 뭐다 말이 많더군요(웃음).”
― 사학 법인들이 비리에 종종 휩싸이니까 제목만 보고 ‘명지학원’도 그런 비리겠거니 했는데요.
“재판부가 오히려 밝혀줬잖습니까. 구속은 했는데, 추징금도 벌금도 선고할 것이 없다는 걸요. ‘공범도 없고, 저 혼자 했다’니까 검사가 그렇게 진술하면 안 된다더군요.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걸 어쩝니까. 저는 복잡한 게 싫어요. 학교 법인에서 돈을 착복하면 숨겨야 하는데 그런 거 못 합니다. 명지학원 이사장을 20년 했는데 땅 산 적도 없고, 주식 산 적도 없고, 통장도 없어요.”
국가기록원 이사장 맡아 해외 古書 발굴
인터뷰를 하기 전에 질문할까 망설였는데 유영구 이사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박정희재단과는 무관한 과거의 일이지만, 그의 소신과 신념이 앞으로 그가 얼마나 저돌적으로 박정희재단을 이끌어갈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유영구 이사장은 거침없었고, 굉장히 담백한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명지학원 이사장을 하면서 여기저기 관여하고 그 결과로 비리에 연루됐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거든요. 저는 과거에 대학총장을 선임할 때 ‘학교 팔아먹는 것 빼고는 총장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늘 말했습니다. 고건 전(前) 국무총리, 송자 전 총장, 선우중호 전 총장을 뽑았을 때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 진짜 일절 학교에 관여하지 않으셨습니까.
“취임식에 딱 한 번 가고 학교에 간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학교 직원들이 왜 안 오느냐고 연락이 오면, ‘태양이 2개 뜨면 헷갈린다. 학교와 관련된 건 총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보면 제가 시간이 많으니까 참 다양한 일을 했잖아요. 학교에 관여하느라 바빴다면 국가기록원이며 문화유산국민신탁이며 했겠어요?”
― 이력을 보니 국가기록원 이사장을 하셨더군요.
“명지대에 관여하기보다 제 스스로 재밌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야구 구경을 좋아해서 야구인들과 30년 이상 인연을 쌓았고, LG트윈스 고문을 8년 동안 했습니다. 야구인들과의 인연 덕분에 나중에는 KBO 총재를 했죠. 정말 신나게 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유홍준씨가 문화재청장을 할 때 문화유산국민신탁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고요. 국가기록원은 김학준씨와 둘이 만들었습니다.”
― 국가기록원은 왜 만드셨나요.
“우리가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관리가 안 돼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환자에 관한 기록이 정확하면 진료가 쉽지만, 기록이 틀리면 어렵잖습니까. 교수들 몇백 명이 저희 일에 합류하고, 김학준씨가 연구원장, 제가 이사장을 맡았죠.”
― 명지대 안에 ‘LG연암문고’도 만드셨던데 기존 도서관 외 별도의 도서관을 만드신 겁니까.
“고서 모으는 취미가 있습니다. 한적고서(동양고서)는 서울대 규장각이 충분히 소장하고 있는데, 1950년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서양에서 발간된 책은 많지 않더라고요. 서양 국가를 다니면서 한국을 다룬 책을 모았습니다.”
― 1950년 이전의 책을 주로 모은 이유가 있습니까.
“1950년 이후, 서양에 한국이 알려진 것은 6·25전쟁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10권 중 9권은 전부 그 얘기뿐이에요. 서양에서 바라본 우리의 근현대사 기록이 있을 텐데 싶어서 ‘한국고서찾기운동’으로 1950년 이전의 기록을 집중적으로 찾았습니다. 또 고병익 당시 서울대 총장께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고 총장이 고서를 많이 모으려면 자금이 꽤 필요할 것이라 조언해줘서 LG의 후원을 받아 고서를 수집했습니다. 명지대 안에 있는 별도 도서관에 1만2000여 권 정도가 있습니다. 희귀 도서가 많아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만난 기록, 덕수궁에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만난 기록 등 흥미진진한 근대사 기록이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 위대한 어른으로 평가할 때”

― 명함만 명지학원 이사장이지 다른 일에 몰두하셨네요.
“제가 원래 두루두루 관심이 많습니다. 좌파, 우파, 여당, 야당, 나이, 신분에 상관없이 친구가 많고요. 제가 실없는 소리 많이 해서 주위 사람들 웃게 하자는 생각이 강합니다. 명지학원 이사장이 제게 준 것은 감방 생활이네요(웃음). 그런데 거기서도 재밌더라고요. 제가 복역 중일 때 이상득 전 의원, 최시중 고문, 천신일 회장 등이 있었거든요. 제가 그 안에서 웃고 지내니까 최시중 고문이 ‘뭐가 그렇게 즐겁나’고 묻더군요. ‘집사람이랑 딸들, 여자들 잔소리 안 들어서 살 것 같다’고 했습니다.”
― 진심이셨나요.
“제가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하도 집사람이 잔소리해서 하나님께 ‘여자들 잔소리 좀 안 듣게 해주세요’ 기도했거든요. 하긴 나중에 집사람이 저한테 인생을 잘못 산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더군요. 지인들이 5만원, 10만원 이렇게 영치금을 넣어줬습니다. 영치금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제가 지정한 개인 계좌로 넘어갑니다. 저를 챙겨주는 지인이 많다 보니 집사람 계좌로 매월 200만~300만원 정도 넘어갔나 봐요. 집사람이 그 얘기를 하기에 ‘내가 300만원 받고 교도소에 취직했나’ 싶긴 합디다(웃음).”
―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유쾌하시네요. 박정희재단에도 그런 식으로 많은 분의 관심을 끌어오시겠죠.
“그런 일 하라고 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겠습니까. 손학규 전 지사가 경기고등학교 동창인데 제가 박정희재단으로 왔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네가 갔으니까 내가 한 번 가야지’ 하기에 좋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더는 좌, 우, 중도 이런 이념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위대한 어른으로 평가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참, 요즘 제일 관심사는 ‘박정희TV’인데 아이디어 없어요? 유튜브야말로 가볍게 가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제일 고민이네요.”
시종일관 유쾌했던 유영구 이사장과의 대화는 결국 ‘박정희TV’를 끝으로 끝났다. 그의 쾌활한 웃음으로 보건대 그가 앞으로 박정희재단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월간조선 07월 호
■ 朴正熙 대통령과의 마지막 5년
10·26 아침 “李군, 어제 입었던 그 양복과 구두 가져다주게”
⊙ 朴 대통령, 1979년 2월 초부터 옛 문서 正書 지시, “타이핑 연습 많이 해두게”… 물러날 생각한 듯
⊙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다가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이니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
⊙ 초소 근무자에게 “발이 시리지 않으냐?”며 군화를 벗게 하고 양말까지 직접 확인
⊙ 집무실 전화기가 오래되어 교체하자 “아직 쓸 수 있는데 왜 바꿨나?”
⊙ “에어컨은 外貨를 벌어들이는 곳에서 사용하는 것”…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더운 날 땀을 훔치며 부채질
⊙ 여름날 창문으로 파리 날아들면 직접 파리채 들고 파리 잡아
[편집자 註]
이광형(李光炯·73) 전 (주)EG 부회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마지막 부관(副官)’이다. 육사(陸士) 27기 출신으로 1975년 경호실에 들어가 1979년 2월까지 수행경호관으로 근무했다. 1978년 9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고, 이듬해 2월부터는 제1부속실 행정관으로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이 시절 청와대 내에서는 그를 ‘이(李) 부관’이라고 불렀다. 10·26사태 후에는 최규하 대통령 비서실의 정무수석비서관실·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KBS로 자리를 옮겨 사장비서실장·경영관리실장 등을 지냈다. 1993년 삼양산업(현 (주)EG) 상무로 박정희 대통령의 영식(令息)인 박지만 현 (주)EG 회장을 돕기 시작, (주)EG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오래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라는 권유를 받아온 이광형 전 부회장은 우선 10·26사태 당일부터 박정희 대통령 국장(國葬)까지 있었던 일들과 1979년 봄에서 가을 사이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에 얽힌 일화들을 글로 써서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한자를 덧붙이고 약물을 손본 것을 제외하면, 글의 구성과 내용, 중간 제목 등은 전부 필자가 보내온 글 그대로이다.

▲1979년 4월 12일 청와대 정원에서 벚꽃을 구경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부속실 직원들. 왼쪽부터 이광형 부관, 부속실 직원 이혜란,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광형 제공
1970년대에 TV에서 김일성(金日成)에게 열광하는 북한 군중을 보면서 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각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그런 심정으로 모시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당시 이 어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보릿고개도 넘기기 어려웠던 헐벗고 못 살던 우리나라를 이만큼 잘살게 만든 조국근대화, 민족중흥(民族中興)의 길에 벽돌 한 장이라도 놓을 수 있다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소탈하고 정감 넘치던 모습과 자나 깨나 잘사는 나라 만드는 일에 자신을 바치며 희생했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자립경제·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일부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장(國葬)이 끝나고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걸려 있던 달력이 ‘10월 26일’에 정지되어 있는 걸 보며 숨이 멎는 것 같았었다. 매일 아침 각하께서 직접 한 장씩 뜯어내던 일력(日曆)이 주인 없이 멈춰버린 것이었다.
42년이 지났지만 내 손을 흠뻑 적셨던 그날 각하의 붉은 피를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내 손을 보면 그때가 떠오르기도 한다.
◆1부 그날 - 1979년 10월 26일
그날 아침

▲이광형 부관은 대통령 집무실 앞 前室에서 근무했다. 1979년 4월 4일 찍은 사진이다. 사진=이광형 제공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 6시가 되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인터폰이 울렸다.
“네, 이광형입니다”라고 인터폰을 받자 “운동하러 가자”라는 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현관 앞에서 기다리니 각하께서 운동복 차림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각하와 나란히 실내수영장에 있는 배드민턴장으로 가볍게 달려갔다.
석유파동 이후부터 각하께서는 골프를 나가면 경호원들이 많이 나오니 경비가 많이 든다며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하셨다. 어느 화창한 날 집무실 옆에 있는 잔디밭에 나가셔서 드라이버로 연습 스윙을 하시다가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시더니 이내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이니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라고 혼잣말을 하실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본관 옆 잔디밭에서 배드민턴을 치시다가 하루는 “수영장에 물을 넣어두고 관리하려면 돈도 많이 들 텐데 물을 빼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배드민턴장을 만들어보게”라고 말씀을 하셔서 이왕이면 시합도 가능할 정도의 규격에 맞춰서 배드민턴장을 만들게 되었다. (각하께서는 나 같은 아랫사람들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으시고 ‘하게’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약 40분간 각하와 1대 1로 운동을 하였다. 각하께서는 볼을 좌측으로 보냈다가 다시 우측으로 보냈다가 하였는데 30대 초반인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모습에 웃으시면서 재미있어하셨다.
쉴 새 없이 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게 되지만 운동을 마치고 가볍게 본관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입은 운동복도 지난번 운동하러 나오실 때 각하께서 들고 나오셔서 “이거 내가 몇 번 입던 건데 이군한테 맞을지 몰라” 하시면서 슬그머니 건네주신 운동복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티셔츠나 점퍼, 전기면도기, 볼펜 등을 직접 주실 때도 많았다.
각하께서 2층으로 올라가시고 나는 1층에 있는 부속실로 들어와서 곧바로 샤워를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나면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다. 식사를 마치고 용모와 복장을 단정히 하고 일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인터폰이 왔다.
“이군, 어제 입었던 그 양복과 구두 가져다주게”라고 하셔서 다려놓은 양복과 닦아둔 구두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각하께서는 바지를 입지 않은 채 거울 앞에서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계셨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어, 어, 이리 가져오게” 하셨고 그 양복을 입으시는 것을 보고 나는 내려왔다.
그 양복은 얼마 전에 각하께서 양복 하의를 들고 오셔서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를 늘려달라고 하셔서 세기양복점에 보내서 늘려온 양복인데, 이유는 주치의가 코 수술 후 금연(禁煙)을 건의하여 담배를 끊으시고 나서 체중이 조금 늘었기 때문이다. 구두는 금강제화에서 구입한 것인데 얼마 전에 뒤축을 갈아드린 것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는 8시40분에 집무실의 상태를 점검하고 전실(前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9시 정각에 각하께서는 연설문, 안경 등을 넣은 소형 가방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며 집무실로 들어오셨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으시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신 후에 ‘삽교천 준공식’ 참석을 위해 집무실을 나설 때도 “삽교천에 다녀올게” 하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농촌 지역, 특히 새마을 현장을 가실 때는 늘 그러셨듯이 각하의 기분은 최상의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되었다.
오후 2시 반경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 조금 지나서 각하께서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집무실로 들어오셨다. 오후에는 별다른 일정 없이 집무실에서 수석비서관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지시하거나 결재(決裁)를 하시며 보내셨다.
오후 6시경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전실에 도착하였고 곧이어 각하께서 나오셔서 보시던 책과 서류, 안경을 주시며 이거 2층 서재에 갖다 두라고 하시며 “근혜 인터폰 안 받던데 경호실장하고 저녁 먹고 올 테니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으라고 하게”라고 하시며 나가셨다.
가장 길었던 밤

▲10·26사태 궁정동 만찬 현장 검증 장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모습이다. 사진=조선DB
나는 각하를 배웅하고 난 후 바로 집무실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전실 문도 잠근 후 열쇠는 부속실에 보관하였다. 각하께서 주신 책과 서류, 안경을 2층 서재에 가져다 놓고 큰 영애(令愛)에게 인터폰으로 “각하께서 저녁 식사하러 나가시면서 기다리지 말고 식사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고 간소복으로 갈아입고 잔무 처리를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TV를 켰다. KBS TV에서 보도 특집으로 ‘삽교천 준공식’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마침 그날 본관 경호 근무를 하고 있던 육사 동기생인 이정섭 경호계장이 와서 함께 보고 있었다.
오후 7시40분쯤에 본관 경호 데스크에서 인터폰이 왔다. “이정섭 계장님, 거기 계십니까?”라고 하여 인터폰을 건네주자 “뭐야? 뭐라고?” 하더니 나에게 “저기 12초소 쪽에서 총소리 같은 게 났는데 빨리 가서 알아보고 연락해줄게” 하며 뛰어나갔다.
12초소는 궁정동 부근에 있는 경찰과 군인들이 외곽 경비를 담당하던 초소인데 근무 중 가끔씩 오발(誤發)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약 10분 후 이정섭 경호계장이 전투복 차림으로 와서 “조금 이상한 거 같아”라고 하여 “무슨 일이야?” 하니 “아직 모르겠어. 확인 중이야. 일단 비상 경호 체제로 강화시켰어”라고 하고 급히 돌아갔다.
나는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인가?’
혼자 있는 부속실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TV를 끄고 본관 경호 데스크로 갔다. 교대 근무를 하고 있던 경호원 5명이 전투복 차림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직 모릅니다. 확인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데모가 심해져서 경계를 강화시키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부속실로 돌아와서 밀린 일을 계속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계는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몰려왔다.
‘부마(釜馬)사태로 나라 안이 복잡한데 혹시 청와대 인근에서 시위가 일어난 건가?’ 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후 8시20분경에 경호 데스크로부터 다시 인터폰이 왔다.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이 들어왔습니다” 하고는 속삭이듯이 “그런데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어오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김 실장이 총에 맞은 각하를 국군 서울지구 병원에 옮겨 놓은 뒤 택시를 타고 삼청동 쪽 입구를 통해 청와대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잠시 후 비서실장이 본관에 있는 비서실장실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어왔다는 연락이 왔다.
‘비서실장이 왜 이 밤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어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본관 2층에 있는 비서실장실에 가보기로 했다.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장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정기옥 비서관(의전비서실 소속)이 당직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기옥 비서관이 “비서실장이 최규하(崔圭夏) 총리, 국방장관 등 몇 분을 불러서 회의를 하고 있다”라고 말해주었다. 안보 관계 장관들을 불러 모으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들어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정기옥 비서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최광수(崔侊洙) 의전수석비서관 등 수석비서관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도착하는 대로 비서실 벽면에 놓여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그들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답답해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가족들이 인터폰으로 찾지 않을까 조바심도 났다. 그러면서 정기옥 비서관의 책상 주위를 왔다 갔다 하다가 정 비서관과 눈이 마주쳤다. 정 비서관이 메모지 위에다 ‘쿠데타’라고 쓰더니 이내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아니, 아니, 아니 몰라, 몰라, 몰라” 하면서 자신이 쓴 메모를 볼펜으로 새까맣게 덧칠을 해 지워버렸다.
내가 “무슨 말이오?” 하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갔다가 오히려 불안감만 키운 채 부속실로 돌아왔다.
다시 경호 데스크로 가봤지만 거기도 역시 아는 게 없었다. 오직 비서실장실 방안에 모인 사람들만 아는 것 같았고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확실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알아볼 수 있는 곳은 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차지철 경호실장도 정인형 경호처장도 안재송 부처장도 찾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왜 각하께서는 들어오시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는 각하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2층, 비서실장실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정기옥 비서관과 수석비서관들만 의혹과 불안에 찬 눈동자를 굴리며 앉아 있을 뿐 김계원 실장과 최규하 총리, 장관들은 모두 나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 옆에 앉아서 나직하게 물어봤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했더니 “영애님들은 지금 어디 계시냐?”고 하셨다. “지금 방에 계십니다”라고 했더니 “아무 연락 없었지?”라고 하여 “네”라고 대답했다.
“수석비서관님! 각하께서 아직도 안 들어오시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응, 조금 늦으실 거야. 만약 영애분들이 물으시면 곧 들어오실 거라고 말씀드려”라고 했다.
나는 다시 부속실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부속실로 돌아온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혼자 감당하기가 불안해져서 박학봉 비서관을 찾았으나 연락이 되질 않았다. 본관 관리인인 우인철 관리관을 전화해서 좀 나오라고 했다.
나중에 부속실 출신인 전석영 총무비서관이 비상연락을 받고 부속실에 들어왔다. 박학봉 비서관이 자정이 다 되어서 비상연락을 받고 들어왔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씀드렸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계는 밤 12시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속이 타들어가서 다시 경호 데스크에 가보았다. 무전기를 스피커에 연결해놓아서 긴급 보고되는 소리들로 인해 소란스럽고 분주했지만 긴박감만 더해질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무전기 스피커를 통해 “경호처장 차가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서 달려가고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확인되지 않은 각종 루머성(性) 보고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경호실장도 경호처장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청와대 본관에서 노심초사하며 소식을 기다리던 나는 적막강산 같은 처절함을 체험하며 생애 가장 긴 밤을 보내고 있었다.
10월 27일 새벽 2시 무렵에 김계원 비서실장이 청와대로 다시 들어왔다. 와이셔츠 차림이었던 김 실장은 어느새 양복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김 실장이 처음으로 실장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석비서관들을 불러 “각하께서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그리고 부속실의 박학봉 비서관과 나를 불러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순간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김 실장은 얼이 반쯤은 나간 표정을 지었다.
다시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궁정동에서 만찬을 하다가 김재규(金載圭)하고 차지철이 다투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탄에 각하께서 맞으셨다”라고 말하고 더 이상의 아무 설명도 없었다.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자지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각하께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그 시각 큰 영애와 작은 영애는 이미 각자의 방에서 잠들어 있었고 영식(令息) 박지만 생도는 육군사관학교에 있었다.
김 실장은 “가족들에게 연락해라”고 지시했다. 그때 누군가가 “중대 사안이니 비서실장이 직접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고 곧이어 부속실에서 전석영 비서관이 큰 영애 방으로 인터폰을 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으니 옷을 입으시고 복도로 좀 나와주십시오”라고 보고했다. 김 실장과 전석영 비서관, 박학봉 비서관과 나는 2층에 있는 큰 영애 방 앞 복도에 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큰 영애가 나오셨다. 김 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보고하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라고 했다. (그때까지 큰 영애는 아버지가 침실에서 주무시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김 실장이 다시 “김재규 부장이 차지철 실장과 싸우다가 잘못 쏜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으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해하던 큰 영애가 잠시 후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세요?”라고 했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계십니다”라고 하자 “그럼 모셔와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큰 영애는 작은 영애를 깨워서 알렸고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경황이 없었다. 어떻게 모셔오고 어디에 모셔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일단 소접견실을 임시 빈소(殯所)로 하기로 하고 작은 영애와 전석영 비서관과 경호원들은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각하를 모셔오기로 했다.
작은 영애는 각하 침실로 가서 큰 영애가 준비해준 양복과 속옷을 챙겨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고 전석영 비서관과 함께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갔다.
큰 영애는 안쪽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나는 임시 빈소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소접견실에 각하를 눕힐 곳을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행사 시에 사용하던 정사각형 탁자와 시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비상연락을 받고 들어온 본관 근무 직원들을 불러서 피아노방에 있던 사각탁자를 소접견실로 옮겨서 필요한 만큼 연결해 붙이고 그 위에 하얀 시트를 깔고 구김살이 펴지게 분무기로 물을 뿌리니 이내 팽팽하게 펴져서 하얀 제단(祭壇)이 완성됐다.
그리고 본관 지하실에 가서 평소 제사 지낼 때 쓰던 병풍과 향로, 향, 제기(祭器)들을 옮겨와서 제단 앞에 병풍을 치고 분향(焚香)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현관 밖으로 나가서 국화 화분 두 개를 옮겨와서 제단 양옆에 두었다. 그리고 부속실에 걸려 있는 각하 사진 액자를 가져와서 검은 리본을 붙이고 제단 앞에 세워놓았다.
임시 빈소를 마련하고 나니 새벽 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현관 앞에서 차량 소리가 들려와 나가 보았다.
각하께서 군용(軍用) 앰뷸런스에 실려 돌아오셨다. 군용 들것에 실려 하차된 각하께서 경호원들에 의해 임시 빈소의 제단으로 옮겨졌다. 나는 경호원들과 함께 조금 전에 마련한 제단 위에 각하를 눕혔다. (머리가 접견실 입구 쪽을 향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30일 박정희 대통령 빈소의 박근혜 큰 영애. 박정희 대통령의 관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진=조선DB
큰 영애와 작은 영애가 처음으로 분향했다. 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후벼 파는 듯 아팠고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절간처럼 조용하던 청와대는 일순 통곡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경호원들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병풍 뒤에 눕혀진 각하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살아계실 때처럼 평온한 모습을 하고 계셨다. 다만 왼쪽 콧등 부위가 약간 부어 있었다. 울면서 각하의 얼굴도 만져보고 손도 만져보았으나 총에 맞은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새벽 3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상주(喪主)가 되어야 할 영식은 육사 생도 신분이었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체 없이 박지만 생도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를 드는 순간 비로소 대통령 서거(逝去) 사실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 사실을 북한이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보안 유지를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육사 교장 백석주(白石柱)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득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 박지만 생도를 급히 찾으시니 교장님 혼자만 아시고 박지만 생도를 깨워서 교장 차로 빨리 청와대로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청와대 정문 초소에서 박지만 생도를 태운 차량이 정문을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서 박지만 생도를 맞이했다. 현관에는 이른 새벽부터 비보(悲報)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청와대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차에서 내린 박지만 생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안이 벙벙한 채 “아니 왜 이래요?”라고 물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박지만 생도는 순간 비틀거렸다. 나는 박지만 생도를 임시 빈소로 모셨다.
임시 빈소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버지 영정(影幀) 앞에서 분향하며 통곡하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가까운 친인척들이 하나둘씩 비보를 받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하의 누님이 현관으로 들어오더니 엉금엉금 기다시피 임시 빈소까지 와서는 “정희야! 이게 우짠 일이고!” 하시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친인척들이 함께 울면서 임시 빈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國葬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운구 행렬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오열했다. 사진=조선DB
10월 27일 아침 김계원 실장이 임시 빈소에 나타났다. 분향을 마친 김 실장에게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을 쏟아냈다.
이날 오전부터 국무위원들과 정치인들이 오기 시작했다. 오전에 분향을 마친 최규하 총리와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 등 국무위원과 정치인들은 대식당에 모여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있었다. 친인척들은 부속실에 모여 울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결정되고 9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다고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슬픈 가운데 바빠지기 시작했다. 각 방에 있는 손님 접대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해야 했고 무엇보다 비탄에 젖어계신 각하 가족들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장례 준비를 위해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오후 2시경에 국장 기간 동안 시신의 방부(防腐) 처리를 위해 대통령 주치의 민헌기 박사(서울대 외과과장)가 전문의 2명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왔다.
빈소 앞은 친인척과 가족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민 박사와 전문의 두 명과 나는 병풍 뒤에서 방부 처리를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부 처리를 위해 시트를 벗기고 각하의 손과 발을 만져보니 살아계신 것처럼 부드러웠고 얼굴도 너무나 평온해서 마치 잠들어 계신 것 같았다.
민 박사가 나에게 큰 대야에 물을 떠 오라고 했다. 그러고 각하의 옷을 벗겨달라고 했다. 내가 각하의 옷을 벗기기 위해 상체를 들어 올리려고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얼른 손을 빼내어 보니 붉은 피였다. 20여 시간이 지났는데도 각하의 오른쪽 옆구리 뒤편 쪽에 핏덩이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순간 내 손에 흥건히 묻은 각하의 피를 보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숨이 가빠왔다.
나는 옷을 벗기고 피를 깨끗이 닦았다. 온몸의 피를 다 닦고 나서 보니 각하의 몸을 뚫고 들어간 총상(銃傷)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른쪽 쇄골(鎖骨) 아래로 약 10cm 부근에 총탄이 들어간 자국이 보였다. 살점에 덮여 마치 작은 상처가 아문 듯이 보였다. 그리고 등 뒤로 총탄이 빠져나간 자리는 앞부분의 총상 위치보다 훨씬 아래쪽에 나 있었다. 뒷부분의 상처 난 구멍은 꽤 크게 보였다. 비로소 많은 피가 흐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각하의 온몸을 정성스레 닦으면서 살펴보니 오른쪽 귀 윗부분에도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총탄이 얼굴의 왼쪽 콧등과 광대뼈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콧등 부위가 조금 부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주치의 민 박사가 총알을 제거하는 문제를 잠시 고민하다가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몸에 칼을 대는 것을 포기하고 얼굴에 박힌 총알을 그대로 둔 채 방부 처리를 하기로 했다.
내가 각하의 온몸을 깨끗이 닦은 후 의사들이 온몸을 소독했다. 그리고 전문의들이 방부 처리액(液)이 담긴 5갤런짜리 통을 가져와 스탠드에 걸고 각하의 허벅지 안쪽을 절개하고 정맥에 주삿바늘을 꽂자 방부액이 몸 안으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그동안 나는 의사들이 요구하는 일들을 해결해주어야 했다.
오후 11시경 방부 처리가 끝나고 의사들이 절개된 곳을 봉합(縫合)했다.
그로부터 30분 뒤인 오후 11시30분경에 각하에게 수의(壽衣)를 입혔다.
대식당에서 장례 준비를 하던 각료들과 정치인들이 국장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국장준비위원장에 최규하 국무총리, 집행위원장에 신현확(申鉉碻) 부총리, 의전 담당에 박동진(朴東鎭) 외무부 장관, 재정 담당에 김원기(金元基) 재무부 장관, 홍보 담당에 김성진(金聖鎭) 문화공보부 장관, 묘지를 담당하는 치산(治山)은 노재현(盧載鉉) 국방부 장관이 맡았다. 국장준비위원회는 장례에 필요한 수의와 제반용품을 준비해주었다.
그리고 입관(入棺) 시각도 정해서 알려주었다. 수의를 입힌 후 즉시 입관하되 오후 11시30분이 길하다고 하여 정해졌다. 가족들은 국장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한 대로 따랐다.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國葬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유족들. 오른쪽부터 박근혜 큰 영애, 박지만 생도, 박근영 작은 영애. 사진=조선DB
소접견실에 차려진 임시 빈소는 국장 절차에 따라 넓은 대접견실로 옮겨 정식 빈소를 차리기로 결정됐다.
이 결정은 입관식 후 즉시 이행됐다. 빈소를 대접견실로 완전히 옮긴 시각은 10월 28일 02시 정각. 어전 용어로 재궁(齋宮)이라 불리는 정식 빈소가 차려졌다.
그리고 방부 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 방지를 위해 뒤편에 안치된 관 주위를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만들고 관과 판자 사이에 드라이아이스를 채웠다.
그리고 병풍으로 가린 뒤 제단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대접견실에서 조문객을 맞게 되었다. 장지로 출발할 때까지 9일장 동안 매일 다섯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매일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시각을 정해 다섯 차례 제사를 지냈다. 이때는 가족과 친인척들이 다 모였다.
그리고 청와대 정문 우측에 위치한 비서실 건물 앞에 분향대를 크게 설치해 일반인도 분향할 수 있도록 했다.
친인척들과 장례를 돕는 청와대 직원들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제단의 각하 사진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9일장을 지내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분주하게 심부름을 하고 각종 수발을 들었다.
그때 현관에서 누군가 나를 찾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기 구두 왔어요” 하며 전해주었다.
바로 그날 아침, 내가 닦아드린 각하의 그 구두였다.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매시면서 양복바지와 구두를 기다리시던 각하께서 “어, 어. 이리 가져오게” 하시며 그날 아침 그렇게 기분 좋게 소풍 가는 소년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나가셨는데… 바로 그 신발이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부속실로 돌아온 그 구두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오열(嗚咽)하기 시작했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 통곡하며 서럽게 울었다. 주위에 있던 친인척들이 ‘왜 저러지?’ 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두에 얽힌 사연을 모르니 갑자기 오열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학봉 비서관이 “여러 사람 앞에서 왜 이래!” 하면서 “진정하라”고 했고, 친인척 중 누군가가 내 옆으로 와서 “오죽 서러우면 그러겠나” 하면서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11월 3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발인(發靷)을 했다. 발인을 마치고 운구(運柩) 행렬은 청와대를 뒤로한 채 중앙청 광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에 중앙청 광장에서 영결식(永訣式)을 가진 뒤 오후 2시에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안장식(安葬式)을 하였다. 나는 검은 리무진을 뒤따르며 오열하는 가족의 소리를 들으며 청와대에 남아 뒤처리를 하였다.
국장을 마치고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가족과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11월 21일 오전 10시30분 큰 영애와 작은 영애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신당동 사저(私邸)로 출발하였다.
◆2부 그해 봄과 여름
서류 정리
1979년 2월 초에 각하께서 나에게 특별한 일을 시키셨다. 각하께서 평소에 일하시는 장소는 집무실 책상 우측에 있는 직사각형 테이블이었다. 그 자리에서 보고도 받으시고 회의도 많이 하셨다.
각하께서 앉으시는 의자 뒤편에 붙박이로 캐비닛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루는 각하께서 그 캐비닛 문을 열고 오래된 서류 한 뭉치를 주시면서 한문을 섞어서 글씨도 좀 크게 펜글씨로 다시 쓰라고 하셨다.
나는 정성을 들여 정자(正字)로 새 용지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오후 퇴근 시각이 가까워 오자 각하께서 전실로 나오셔서 “이군,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내줄게. 내일 또 하게” 하시면서 서류를 가지고 들어가서 다시 그 캐비닛에 넣고 잠그셨다.
서류에는 5·16혁명 시절부터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매일 아침 캐비닛을 열고 하루 분량만큼의 서류를 내어주시고 오후 퇴근 무렵에는 다시 가져가셔서 캐비닛에 넣는 일이 반복되었다. 약 2주 정도 걸려서 마칠 수 있었다.
타이핑 연습
어느 날 각하께서 전실로 나오셔서 “이군, 타이핑 연습을 많이 해두게” 하셨다. 나는 속으로 ‘아! 나중에 회고록 쓰실 때 구술하시면 받아서 타이핑하게 하시려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틈나는 대로 열심히 타이핑 연습을 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부속실에서 타이핑 연습을 하고 있을 때 각하께서 들어오셔서 “이군. 이 자리에서 시간에 쫓겨 지내다 보면 금방 지나가니까 틈나는 대로 책도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하게”라고 하시며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시며 격려해주셨다.
각하께서 잡은 손을 놓으실 때 내 손에 담배 한 개 정도 크기의 도르르 말린 것이 있어서 놀라서 쳐다보았더니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하시고는 웃으시면서 2층으로 올라가셨다. 펴 보았더니 십만원권 수표 몇 장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이 자리에서 근무하면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쳐올 수도 있으나 한눈팔지 말고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자고.
명절이 다가오면 각하께서는 본관과 주위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을 파악해서 명단을 적어오라고 하셨다.
본관 지하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보일러실과 기계실 직원, 그리고 청소원, 주방근무자, 운전기사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잊지 않으시고 명절 떡값(우리는 하사금이라고 했다)을 봉투에 넣어서 직접 챙겨 주셨다.
어느 추운 날 경내 산책을 하시다가 경비 근무하는 초소에 들어가셔서 “춥지 않으냐?”고 물어보시며 바닥에 손을 대 확인하시고 “발이 시리지 않으냐?”고 물어보시자 근무자가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어디 보자” 하시며 군화를 벗게 하시고 양말까지 직접 확인하신 일도 있었다.
집무실 정리 정돈
▲군부대 시찰 중 내무반에서 취침 중인 병사들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군 지휘관 뒤가 이광형 경호관.
그해 봄부터 각하께서는 여유가 생기면 직접 집무실을 정리하시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집무실 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책들을 정리하셨다.
한 편에 책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버릴 것과 따로 보관할 책들을 분류하셨다. 가을 즈음에는 집무실 서가 정리가 거의 다 끝나 있었다.
각하께서 쓰시던 모든 것은 언제나 반듯하게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필기구, 서류 등도 제자리에 질서 정연하게 수시로 직접 정돈하시곤 하셨다.
책상 위나 회의용 탁자 위나 소파의 탁자 위에도 필기구와 메모지를 언제나 스스로 정돈하셔서 정위치에 반듯하게 두셨다.
의자에 앉아 일하실 때도 허리를 반듯하게 하여 일을 하셨고 한 번도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를 타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헬리콥터를 타실 때는 언제나 쌍안경으로 아래를 살펴보시다가 낯선 것이나 이상한 것을 발견하시면 주위 상공을 몇 바퀴 돌게 하시며 세세히 살피시고 물어보시거나 지시를 하셨다.
매달 정기적으로 월례(月例)경제동향보고회의와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외부에서 개최되었는데 그곳에 참석하셨을 때도 자리에 앉자마자 메모지와 필기구를 반듯하게 다시 정리하곤 하셨다. 심지어 서빙하는 여직원이 커피 잔을 가져다 놓으면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위치하도록 다시 정돈하시기도 했다.
회의 시에는 보고를 받으시면서 일일이 메모하셨고 참석자들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신 후에 마지막에 지시를 하셨는데 나중에 비서실에서 대통령 지시사항을 정리해서 해당 부처에 내려보내 참고하게 했다.
南北작전상황도
한번은 각하께서 부르시더니 ‘남북(南北)작전상황도’의 커튼을 벗기고 남한과 북한의 군(軍)부대 배치도를 보여주시며 (내가 육사 출신인 걸 아시고) “이군 이거 볼 줄 알지?”라고 하셔서 “네”라고 대답했더니 서종철(徐鐘喆) 안보특별보좌관에게 연락하여 변경된 것을 반영하여 최신 상황으로 다시 기재하게 하라고 분부하셨다. 나는 즉시 서종철 안보특별보좌관에게 연락해 신속히 고쳐놓았다.
카터 대통령 訪韓(1979년 6월 29일~7월 1일)
▲1979년 7월 10일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청와대를 예방한 카터 미국 대통령 일가족을 환송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 영애. 뒤에 차지철 경호실장,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DB
그해 6월 29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카터 대통령은 당선 후 거듭해 한국의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 의지를 밝혀왔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선 카터 대통령을 영접하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 환영행사에 다녀오신 후 다음 날 청와대에서 있을 한미정상회담 준비 상황을 직접 살펴보시고 이것저것 지시를 하셨다.
회담 장소인 소접견실을 둘러보시고 의전비서실에 몇 가지 지시하시고 회담 장소 앞에 있는 화장실을 둘러보시더니 여자화장실이 별도로 없는 것을 아시고 그곳을 여자 전용 화장실로 꾸미고 스킨·로션 등 여성용 화장품도 비치해놓으라고 하셨다. 카터 대통령 영부인과 영애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였다.
그리고 집무실로 들어오셔서 카터 대통령과 단독 정상회담을 하기 위한 집기들의 자리 배치를 일일이 지시하시고 탁자와 의자들을 옮겨서 재(再)배치를 했는데 집기가 있던 자리의 카펫이 움푹 패 자국이 난 것을 보시더니 “이군, 주방에 가서 물 한 주전자 담아오게” 하셔서 얼른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아왔더니 자국 난 자리에 물을 부어보라고 하셔서 그렇게 하고 한참 지나니 자국 난 자리가 감쪽같이 편편해졌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현장에서 체험적 학습을 통해 또 한 수 배웠구나’라고 생각하며 각하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욕실 버튼
부속실은 수시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므로 24시간 대기 상태로 빈틈없이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2층의 각하 침실 옆에는 각하 전용 욕실이 있었다. 욕조 위의 천장에서 전선줄을 내려뜨려 조그만 버튼을 만들어놓았다. 이 버튼은 부속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각하께서 욕조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버튼을 누르시는데 부저가 울리면 나는 즉시 메모 준비를 해서 욕실로 달려갔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욕조에서 “이군, 내가 말하는 것을 메모해서 2층 내 서재에 갖다 두게” 하셨다. 나는 메모한 것을 2층 서재에 가져다 두고 부속실로 내려오곤 했다.
가습기 소동
하루는 밤에 각하께서 인터폰으로 좀 올라오라고 하셔서 2층 침실로 갔더니 “이군, 가습기가 안 나와” 하시면서 가습기를 이리저리 만지고 계셨다.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이리저리 조작해보아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각하, 다른 것으로 바꿔 오겠습니다” 하고 1층 부속실로 내려와서 부속실에 켜져 있는 가습기를 가지고 가서 설치해드리고 내려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각하 방에서 가져온 가습기를 부속실에 와서 다시 켜보았더니 잘 나오는 것이었다. 기계도 각하 앞에서는 긴장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름밥
▲1979년 4월 12일 벚꽃이 만발한 청와대 정원에 선 필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찍어준 사진이다. 사진=이광형 제공
그 당시 청와대 본관의 점심은 주로 우동이었다. 쌀이 부족할 때라 정부시책으로 분식 장려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청와대가 솔선수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각하께서 비름밥 이야기를 하셔서 알아보았더니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비름나물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종묘시장에 가서 비름나물의 씨앗을 구해오게 해 본관 뒤편 약수터로 올라가는 산비탈에 소규모의 텃밭을 만들었다. 이내 씨를 뿌리고 가꾸었더니 싹이 트고 비름나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텃밭에서 가꾼 비름나물을 캐다가 주방에서 비름나물 비빔밥을 만들 수 있었다. 밥 위에 비름나물을 얹고 참기름 한 방울과 고추장을 넣어서 비비면 비름밥이 되었다. 나도 어렸을 때 자주 먹었었는데 못 살고 배고플 때 시골에서는 늘 먹던 음식이었다.
각하께서 이 비름밥을 드시고 옛날을 회상하시면서 좋아하셨다.
勤儉節約과 국산품 애용
각하께서 지방 출장을 가시게 되면 부속실은 여러 가지 챙겨야 할 일로 분주해졌다. 평상시에 할 수 없었던 집무실과 침실 등의 수리와 보수 작업을 이때 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곳곳이 낡아서 비가 새는 곳도 있었다. 지붕 수리와 커튼 교체, 카펫 세탁, 창문 수리 등을 이 기간에 해야 했고 각하와 가족분들에게 필요한 것들도 챙겨야 했다.
각하께서 주로 사용하는 필기구는 모나미 플러스펜이었다. 결재를 하실 때는 검은색 플러스펜, 밑줄을 그으실 때는 파란색 플러스펜, 고쳐야 할 부분에는 붉은색 플러스펜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친필(親筆) 서신을 쓰실 때는 휴대하고 계시는 만년필을 사용하셨다. 친필 서신은 엷은 색 노란 봉투에 넣어서 봉한 후에 장관들이나 어렵게 살고 있는 옛 동지 등에게 보내셨다. 장관들에게 보내는 서신은 부속실의 연락을 받고 장관 비서관이 직접 와서 가져갔고, 옛 동지 등은 담당 비서관을 보내서 전달하였다(장관들에게 보내는 친서는 주로 경고성 메시지와 참고하라는 내용들이었고, 어렵게 살고 있는 옛 동지들에게는 격려금과 함께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집무실 전화기가 오래되어서 잡음이 많이 나기 때문에 안 계실 때 새로 나온 국산품 전화기로 교체하였는데 각하께서 출장에서 귀저(歸邸)하신 후에 전화기가 바뀐 것을 아시고 “아직도 쓸 수 있는데 왜 바꿨나”라고 하셔서 새 전화기를 반납하고 다시 쓰던 전화기로 되돌려놓은 적도 있었다.
각하 침실 옆에 있는 화장실은 혼자 사용하시는데도 물 절약을 위해 변기 뒤 물이 담겨 있는 통에 벽돌 2장을 넣으실 정도로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한번은 주말에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수석비서관들을 불러서 배드민턴 시합을 하였다. 복식(複式)조를 짜서 시합을 하고 나는 심판을 보았다.
김재규 부장이 서브를 넣는데 라켓을 휘둘렀는데도 셔틀콕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니 각하께서 웃으시면서 “이군, 김 부장과 옆으로 나가서 연습 좀 시켜드리게”라고 말씀하셔서 내가 경기장 옆 공간에서 서브하는 방법과 스윙 연습을 개인 지도한 후에 시합에 임한 일도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 오찬 준비가 되어 있는 상춘재(常春齋)로 함께 이동하였다. 각하께서 상춘재로 들어오시다가 그곳에 있는 밥솥을 보시고 살펴보시더니 “우리 국산 밥솥도 이렇게 잘 만드네” 하시며 매우 기뻐하셨다.
매월 실시하는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나 수출진흥확대회의 후에 전시되어 있는 국산 제품을 보실 때도 매우 흡족해하시며 기뻐하시곤 하셨다.
두 차례 만찬
대식당에서는 매달 두 차례의 만찬이 이루어졌는데 한 번은 비서실장을 포함하여 수석비서관들과 하고, 또 한 번은 특별보좌관들과 하였다(특히 장관급 경력의 연배 있는 특별보좌관들과의 만찬 시에는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여서 시중에 오가는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자유롭게 다 말하는 것 같았다).
이때는 막걸리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하던 대로 원당에 있는 원당막걸리주점에 부속실 기사를 보내 사 오게 했다.
어느 날 만찬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만찬장에서 서빙하던 웨이터(본관 주방 근무자)가 막걸리 한 사발을 가지고 내 방에 들어왔다.
“각하께서 직접 따르셔서 갖다주라고 해서 가져온 하사주(下賜酒)니까 얼른 마셔요”라고 해서 나는 사발째 받아서 마셨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누렇고 뻑뻑한 원당 막걸리는 꽤 독했다.
웨이터는 또 조그만 접시에 담긴 안주도 각하께서 주신 거니 먹으라고 했다. 안주는 청와대 주방에서 개발한 멸치에 밀가루를 약간 발라서 튀긴 것이었다.
부채와 파리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하셨다. 에어컨은 외화(外貨)를 벌어들이는 곳에서 사용하는 것이지 일반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켜는 것은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셨다.
하루는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더웠다. 땀을 훔치며 부채질을 하시는 각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심지어 각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틀 수도 없고 해서 관리관과 기술자를 불러서 상의해보았다. 나는 “집무실의 공기가 너무 후덥지근해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환기통을 통해 집무실의 더운 공기를 빼내고 대신 시원한 공기를 불어넣으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부속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큰 영애께서 “부속실 앞 복도로 좀 나오세요”라고 인터폰이 왔다.
잠시 후 복도로 나갔더니 큰 영애께서 오셔서 “오늘 집무실에 에어컨을 켜셨어요? 아버지께서 걱정하세요”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더니 큰 영애는 “앞으로는 그런 것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고 했다.
무더운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니 창문을 열어서 바람이 들어오게 했는데 어쩌다 파리가 들어오면 각하께서는 직접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기도 하셨다.
일국의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직접 부채와 파리채를 사용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까!⊙
글 : 이광형 박정희 전 대통령 비서
■朴正熙 대통령의 ‘마지막 副官’ 李光炯
“朴正熙 대통령은 스승 같고 부모 같은 분… 평생 고맙지요”
⊙ 陸士 27기 출신, 8·15 저격 사건 후 경호실 개편할 때 육군 대위로 들어가 수행경호관으로 근무… 1979년 2월 부속실로 전보
⊙ 박지만 陸士 진학 앞두고 골프장 그늘집에서 陸士 생활에 대해 설명… “깍두기를 씹는데 입안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 “朴正熙 대통령, 1979년 봄 옛날 서류·책 정리시키고,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해… ‘마무리’한다고 생각”
⊙ “청와대는 정말 구중궁궐…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 나온 것은 잘한 일”
⊙ 박정희 대통령 國葬 후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집무실 모습 사진으로 남겨

▲사진=조준우
1974년 10월 어느 날. 서울대 ROTC 교관이던 이광형(李光炯·육사 27기) 대위에게 육군본부에서 “지금 즉시 육군본부로 들어오라”는 구두(口頭)명령이 내려왔다. 육군본부로 달려갔더니 시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구두 시험, 상식, 영어 시험을 치렀다. 마치 입사(入社) 시험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날 시험을 치른 장교는 모두 700명으로 육사(陸士)나 ROTC 출신 대위·중위급 장교들이었다. 시험이 끝나자 육군본부 장교가 말했다.
“오후 5시쯤 육군본부 중앙게시판에 합격자를 발표할 것이다. 거기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원대복귀(原隊復歸)하라.”
근처에 있는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5시에 육군본부로 가니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합격자는 모두 40명이었다. 육사 출신 대위 6명, ROTC 출신 중위 34명이었다. 이광형 대위의 이름도 거기에 있었다. 육본 장교가 나와서 훈시를 했다.
“너희는 국가의 중요한 임무를 위해서 선발되었다. 지금부터 집으로 가서 목욕하고 옷을 다려 입고 사흘 후에 다시 육본으로 나온다. 오늘 있었던 일은 부인에게도, 소속 부대장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라. 여러분의 언동은 전부 조사받고 보고될 것이다.”
이광형 대위는 바짝 얼었다. 그는 직속상관인 서울대 학군단장은 물론 1년 전에 결혼한 아내에게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사흘 내내 혼자서 고민을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임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두 달 전에 영부인(육영수 여사)께서 문세광의 총탄에 돌아가셨는데, 혹시 김일성의 목을 따러 북한으로 투입되는 건 아닐까?’
대통령 경호관이 되다

▲1978년 11월 24일 문경새재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 이광형 경호관(뒤)은 박정희 대통령을 밀착 경호하는 수행경호관으로 4년간 근무했다. 사진=이광형 제공
사흘 후 다시 육군본부로 갔다. 장교가 나와서 한 명씩 호명(呼名)하더니 버스에 태웠다. 함께 탑승한 선임장교가 말했다.
“지금부터 청와대로 간다!”
청와대에 도착하자 직원이 나와서 명단을 체크한 후 일행을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경호실 연무관(演武館)이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40개 놓여 있었다. 장교들이 자리에 앉자 아무 소리도 안 하고 바로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일반상식, 국사 등 종합시험이었다. 시험지를 거두어 가더니 다음에는 영어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영어 시험이 끝나자 이번에는 8절지 백지 두 장을 나누어주었다. 논문 시험이었다. 누군가 나오더니 흑판에 시험 제목을 적었다.
‘대통령 경호란 무엇인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 사람은 경호실 기획처장이었다. 대통령 경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아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교로서 알고 있는 경호·경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필기 시험을 마친 장교들은 청와대 헬기장으로 이동했다. 체력 시험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체력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채점이 끝나 있었다. 청와대 직원이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은 경호실 역사상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경호실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광형 대위는 지금까지 치른 시험이 청와대 경호실 공채(公採) 시험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합격자들의 평균 성적은 94점.
이광형 대위 등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남한산성에 있는 공수훈련장으로 보내져 4주간 공수 훈련을 받았다. 이미 육사 4학년 때 공수 훈련을 받았지만, 경호실 작전차장보 이광로(제13대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장군은 “무조건 다 훈련시켜!”라고 명령했다. 공수 훈련을 마치고 난 후에는 30경비단 내무반에 마련된 교육장에서 5주간 대통령 경호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경호실 과장급들이 강사로 나와서 미국 대통령 경호실(Secret Service)의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육했다.
이광형 대위는 그해 11월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으로 발령받았다. 그것도 경호실 안에서 가장 엘리트들만 간다는 수행과(隨行課) 경호관!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밀착 경호하는 자리였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이후 5년 동안 경호실과 제1부속실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지근(至近)거리에서 모시게 되고, 이후 50년 가까운 인생을 박정희 대통령의 자장(磁場) 안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을….
‘충무계획’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한 수기를 《월간조선》에 보내온 이광형 전 EG 부회장을 지난 5월 26일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만났다.
― 육사 출신 장교가 어떻게 해서 경호실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8·15 저격 사건 후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車智澈) 실장은 경호실 시스템을 완전히 개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종래 경호실은 무술 고단자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 대통령 경호실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엘리트들로 새판을 짜자는 것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국방부에서는 ‘충무계획’을 수립, 군(軍)의 중위~대위급 중에서 무술 유단자급을 선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시험을 치르고 경호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 육사 27기면 동기생들이 누가 있나요.
“잘 알려진 사람은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 이희원 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이 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1년 3월 육사 졸업식에서였지요. 졸업식 때 사열대에 올라가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악수를 했습니다. 그때는 나중에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지요.”
― 소대장은 어디서 했습니까.
“15사단 최전방 대성산에서 했죠. 그러다가 오자복(국방부 장관 역임) 연대장이 불러서 연대 작전장교로 일하다가 그 후 김학순 사단장 밑에서 전속 부관으로 근무했습니다.”
― 경호실의 첫 보직은 무엇이었습니까.
“수행과였습니다.”
― 대통령을 근접 경호하는 자리죠.
“네. 차도 같이 타고, 열차도 같이 타고, 비행기도 같이 타고…. 늘 대통령 옆에 있다 보니, 자잘하게 대통령 심부름도 하곤 했지요. 보통 경호1~5과에서 3~4년 정도 근무한 사람들이 수행과에서 근무했는데, 우리는 바로 수행과 근무를 하게 되니, 견제도 좀 받았어요.”
朴正熙 대통령과의 첫 대화

▲1977년 3월 2일 박지만 생도의 육사 입교식을 마치고. 왼쪽부터 이광형 경호관, 박지만 생도, 박근혜 큰 영애, 박근영 작은 영애. 사진=이광형 제공
― 경호관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언제였습니까.
“1974년 12월경이었을 겁니다. 수행과에 배치된 후 차지철 실장이 새로 들어온 40명의 경호관을 선보이는 의미에서 효자동에서 중앙청으로 향하는 길에 도열하게 했어요. 그때 박 대통령을 처음 뵈었지요.”
― 그럼 박정희 대통령과 지근거리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언제였나요.
“사실 청와대 직원들이 대통령과 대화할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맨 처음 대통령과 대화를 한 것은 1976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옷차림이 가벼웠으니까…. 고(高)3이던 박지만 회장(이광형 전 부회장은 박지만 EG 회장을 ‘회장’이라고 지칭했다)이 육사에 진학하기로 결정됐을 때였죠.”
― 어디서였나요.
“한양골프장이었나, 뉴코리아골프장이었나? 각하께서 골프장을 도시다가 그늘집에서 잠깐 우동을 드실 때였는데, 갑자기 골프장 경내 방송이 나오더군요. ‘이광형 대위, 어디 있나? 이광형 대위 즉시 어느 그늘집으로 오라.’ 급히 뛰어갔더니 라운드 테이블 주위를 둘러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전두환(全斗煥) 경호실 작전차장보, 박지만 학생이 앉아 있었어요. ‘거기 앉으라’고 해서 자리에 앉았지요. 우동을 한 그릇 갖다 주더군요.”
― 박 대통령이 왜 부른 것이었나요.
“각하께서 ‘지만이가 육사를 가려고 하는데, 육사의 제도, 시험 등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 육사 생활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였죠. 입학 시험, 필기 시험, 체력 시험, 신체검사 등에 대해 죽 설명을 했지요.
그랬더니 각하께서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쳐주라’고 하셨어요. 1~4학년 동안 육사에서 공부하는 것, 학점, 3금(禁)제도가 있어서 술·담배·여자관계를 하면 퇴교(退校)된다는 것, 거짓말·커닝·도둑질을 하면 무조건 퇴교된다는 것 등을 전부 설명해줬어요. 내가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박 대통령이 간단한 질문을 하셨고, 육사 출신인 전두환 장군도 간간이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각하께서 ‘훈련하는 것에 대해 알려주라’고 하시더군요. 1·2학년 때는 기초훈련, 3학년 때는 레인저 코스(유격 훈련), 4학년 때는 공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죠.”
― 긴장이 되지 않던가요.
“대위 시절이니까 씩씩하게 설명하는데, 각하께서 ‘먹으면서 해, 먹으면서 해’ 하셨어요. 깍두기 한 알을 입에 넣고 씹었는데, 하도 긴장해서인지 입안에서 천둥소리가 나더군요. ‘아, 이 소리가 각하께 들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삼켰어요. 그걸 보고 각하께서 막 웃으시면서 당신께서 군대 생활할 때 얘기를 해주시더군요. 마지막으로 ‘그거 말고 기합 받는 거 얘기 좀 해줘 봐’라고 하시기에 육사에서의 기합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각하 일행은 다시 라운드에 들어갔고, 나는 현장으로 돌아갔지요.”
건축설계사 자격증 공부한다던 장세동
육군 대위로 청와대에 들어간 이광형 전 부회장은 1978년 6월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가 석 달 후에 예편했다. 그러고 이듬해 2월 경호실에서 제1부속실로 자리를 옮겼다.
― 예편 전에는 언젠가 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까.
“그럼요. 저도 육사 출신으로 꿈을 갖고 있었어요. 육사 재학 중에는 동기 중에서 나름 선두 그룹에 속해 있었기에 프라이드도 강했습니다. 졸업할 때에는 소위 때부터 별을 달 때까지의 청사진을 도표로 작성해서 군복에 넣고 다닐 정도로 군에 대한 애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장군 등 경호실에 있는 장군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를 드리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홍주(12·12사태 당시 합참 본부장) 경호실 차장이 직접 불러서 ‘예편해서 여기서 경호 업무 계속 수행해’라고 지시하더군요.”
― 뭐라고 했습니까.
“‘군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라고 했죠. 문홍주 장군은 ‘안 돼, 군인이 명령대로 하는 거지!’라고 하더군요. 여러 번 군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10·26 때 세상을 떠난 정인형 경호처장도 ‘여기서 대통령 모시라’고 권했어요. 내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느 날 육사 선배인 30경비단장 장세동(張世東·전두환 정권 시절 경호실장·안기부장 역임) 대령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점심때 다른 약속 없으면 단장실로 오라고 하더군요.”
― 장세동씨와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저를 무척 아껴주었습니다. 30경비단장실로 갔더니, ‘이광형, 너 예편해서 대통령 모시라고 하는데 못 하겠다고 했다며? 원대복귀 하겠다 했다며?’라고 하더군요. ‘네.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 장세동 단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야, 나도 군에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지만, 군인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몰라. 너, 오래 한다고 해서 장군 된다는 보장 있어?’라면서 자기는 나중에 진급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해, 공부를 해서 건축설계사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장 단장은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군인이 알겠습니다라고 해야지,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건 말이 안 돼’라며 타일렀습니다. 자꾸 그러기에 ‘선배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나 같으면 명령대로 따른다. 네가 뭐 잘났다고 버티고 그러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겠습니다’라며 꼬리를 내렸죠.”
― 결국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지요.
“전두환 장군 방에 가서 ‘제가 그래도 명색이 육사를 나왔는데, 대위로 예편하기는 싫습니다. 소령 진급은 하고 나가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알았어’라고 하더군요. 소령 진급하고 석 달 만에 예편, 공무원이 됐지요.”
대통령의 副官

▲1979년 4월 12일 청와대 정원에서 벚꽃을 구경하는 부속실 직원들. 왼쪽부터 이광형 부관, 이혜란, 박학봉 비서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찍은 사진이다. 사진=이광형 제공
청와대에 정책실이나 국가안보실이 생기기 이전, 청와대에는 흔히 3실(室)이 있다고 했었다. 비서실, 경호실, 부속실이 그것이다. 부속실은 다시 대통령을 모시는 제1부속실과 영부인을 모시는 2부속실로 나누어진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경호실(1975~1979년), 부속실(1979년), 비서실(1980년)에서 모두 근무한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다.
― 부속실로는 어떻게 해서 가게 된 건가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던 전석영 비서관이 총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속실에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어요. 경호실 쪽에서 그 후임을 복수(複數)로 추천했는데, 각하께서 제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식 발령이 나기도 전에 ‘빨리 본관으로 올라와’ 소리를 듣고 바로 부속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지요.”
―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副官)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게 정식 직책이었나요.
“정식 직책은 행정관이었는데, 부속실로 가니 부속실 사람들은 물론 경호실, 비서실에 있는 분들도 모두 저를 ‘이 부관’이라고 부르더군요.”
― 당시 부속실에는 누가 근무했습니까.
“경호실 출신인 박학봉 비서관, 저, 그리고 이혜란씨가 근무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앞 전실(前室)에는 책상이 두 개 있었는데, 책상 하나에서 박학봉 비서관과 제가 교대로 근무했고, 다른 책상에서는 이혜란씨가 근무하면서 차(茶) 심부름이나 타이핑을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대통령에 대한 모든 심부름이죠. 전화 심부름부터 서류 심부름까지. 대통령께서 이발하신다고 하면 이발사 불러서 대기시키고…. 대통령에 대한 모든 수발을 들었어요.”
― 육사 나온 젊은 장교 출신으로 한창 팔팔한 나이에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게 갑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수행과에 있을 때도, 부속실에 있을 때도, ‘이분이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요.”
― 거의 매일 청와대에 매여 있었겠습니다.
“일주일의 3분의 2는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3분의 1은 잠깐 집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빨리 출근했지요. 아내와 애들을 볼 시간이 별로 없었죠.”
― 집은 어디였나요.
“난지도 옆 성산동에 있는 15평짜리 시영연립주택이었습니다. 1979년 봄 부속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각하께서 이 사실을 알고 제 방에 오셔서 손에 수표를 쥐여 주셨어요. 집값의 두 배쯤 되는 큰돈이었는데 ‘융자금 갚고 살림에 보태 써.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청와대 근방에 아파트 마련해줄 테니…’라고 하셨어요. 눈물이 나더군요.”
―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 심부름을 했다고 했는데, 혹시 그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내용을 볼 수는 없지요. 박 대통령이 직접 봉해서 주시니까…. 그걸 담당비서관들에게 전해 주었지요. 옛날 혁명동지들이나 형편이 어려운 분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을 했던 비서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편지를 받는 분들은 ‘대통령 각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고 하면 ‘잠시 기다리시라’고 한 후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나왔다 해요. 그러곤 작은 상을 하나 갖다 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서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옛날 사극(史劇)에서처럼 말이죠.”
집무실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1979년 11월 21일 16년간 살았던 청와대를 떠나는 박근혜 큰 영애. 왼쪽에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DB
《그때 청와대에선》을 보면, 이광형 전 회장이 부속실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오래된 기록들을 다시 정서(正書)하는 얘기, 박 대통령이 그에게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하는 얘기가 나온다.
― 당시 정서했던 서류들의 내용을 기억합니까.
“부속실로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각하께서 서류를 이만큼 안고 오시더니 내 책상 위에 놓고 ‘이게 오래되어서 잘 안 보이니 펜글씨로, 큼직큼직하게 한문 좀 섞어서 정리를 다시 하라’고 하셨어요. 쓰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읽어보니 5·16혁명 초기의 이야기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으로 중요한 얘기들에 대한 것이었어요. 다만 그때는 그 내용을 숙지할 생각은 없이 그냥 필기하는 기분으로 썼기 때문에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 그 기록들은 후에 어디로 갔을까요.
“내가 다시 정서한 기록들은 각하께서 가져다가 집무실 캐비닛에 보관했는데, 아마 큰 영애(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가져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장(國葬)이 끝나고 이사 준비를 할 때 큰 영애께서 집무실 서류 정리를 직접 했습니다. 공적(公的)인 서류는 해당 비서실로 다 내줬지만, 사적(私的)인 것들은 큰 영애께서 판단해 버릴 건 버리고 보관할 건 정리해서 내놓으면 우리가 이삿짐을 쌌어요. 각하께서 쓰시던 부채, 효자손, 파리채, 슬리퍼 등등 정리해서 포장을 하고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고, 이삿짐을 싸는 와중에, 이광형 전 부회장은 역사를 위한 기여를 하나 했다. 바로 당시 집무실에 있던 책의 리스트를 만들고, 집무실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놓은 것이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고, 그때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이 있을 것이고, 그러자면 대통령 집무실을 복원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책의 리스트를 만들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했어요. 그때 찍은 사진은 거의 큰 영애에게 드렸어요. 여기 기념관(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있는 달력도 당시 집무실에 있던 것입니다. 각하께서 매일 한 장씩 달력을 뜯어내셨는데, 1979년 10월 26일이 그 마지막 날짜이지요.”
“박 대통령이 마무리 작업한다고 생각”
― 박정희 대통령이 옛날 서류나 책들을 정리시키고, 타이핑을 배워두라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그 어떤 마무리 작업을 하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이핑 연습을 하라고 하실 때 ‘아, 은퇴하시면 회고록을 쓰시려고 그러시는구나’ 싶었어요. 나폴레옹 같은 경우를 보면, 말년에 걸어 다니면서 구술(口述)하면 비서가 받아 적었다고 하잖아요.”
― 박정희 대통령이 은퇴를 염두에 둔 듯한 말씀을 한 적이 있나요.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대통령에게 모든 걸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죠.”
― 주한미군 철수, 인권문제 등을 놓고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갈등이 심했는데, 박 대통령은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 문제가 있을 때에 그걸 내색하는 편이었습니까.
“내색하진 않으셔도 각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늘 곁에서 지켜보니, ‘지금 어떤 심기시구나’ 하는 건 느꼈지요. 카터가 고집불통이었잖아요. 제가 느끼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너는 그러지만, 나는 왜 미군 철수를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너를 교육시켜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어요.
카터 환영행사에 나갔다가 들어오시는데, 표정은 밝으셨어요. 웃으면서 ‘아, 부자나라 손님 모시려니…’ 하면서 중얼중얼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소접견실이나 집무실 집기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일일이 지시하셨어요.”
― 집무실에서 박 대통령이 카터와 단독회담을 할 때, 분위기가 안 좋았다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까.
“안에서 하는 얘기는 제가 있는 전실에서는 안 들렸어요. 큰 소리를 내면 들리지만, 조용조용 얘기하니까. 중요한 얘기가 나오면 톤이 조금 올라가기는 했지요.”
―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얘기할 때, 톤이 올라가는 적이 많았나요.
“제가 느끼기로는 부하들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카터가 한국에 대해 되지도 않을 압박을 가하는 것에 대해 보고받을 때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굴하는 것이 없으셨어요.”
“그 연세에도 턱걸이를 10개씩 했다”

▲청와대 경호실 연무관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0·26 당일 아침에도 이광형 비서와 배드민턴을 쳤다. 사진=조선DB
― 당시 증언들 가운데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박정희 대통령이 많이 지치고 총기(聰氣)가 흐려졌다는 얘기들이 있는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돌아가실 때 62세셨는데, 굉장히 강건하셨어요. 그 연세에도 턱걸이를 10개씩 하셨어요. 30대인 저하고 배드민턴을 쳐도 전혀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지시하거나 말씀하실 때에도 흐려지셨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없었어요. 한번은 각하께서 어떤 기관장에게 일을 시켰는데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어요. 다음 날 그에게 전화를 연결하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속으로 크게 질책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껄껄 웃으시면서 ‘오, 수고했어. 괜찮아’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격려하시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박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대통령을 독대(獨對)해서 30~40분만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면 설득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 박 대통령은 아랫사람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중간 말투를 쓰셨죠. 제가 집무실 문을 열고 ‘○○ 장관 왔습니다’ 보고하면 ‘알래하게’라고 하셨죠.”
― 알래하게요?
“경상도 사투리로 ‘안내하게’를 ‘알래하게’라고 하시더군요. ‘안내해’ 이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막사이다와 시바스 리갈

▲1977년 회갑연에서 이광형 부관에게 술을 따라주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주로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은 막사이다를 마셨지만, 양주 시바스 리갈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이광형 제공
― 《그때 청와대에선》을 보면, 원당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대개 청와대에서 파티가 있으면 부속실 전속 기사를 보내 원당에서 막걸리 두 되를 받아왔어요. 그냥 거무튀튀하고 뻑뻑한, 거의 동동주에 가까운 막걸리였어요. 저도 마시면 핑 돌 정도였어요. 너무 진하니까 대통령이 사이다를 섞어서 막 저었지요. 그걸 막사이다라고 했어요. 그걸 좋아하셨지요. 안주는 청와대 본관 주방에서 만든 멸치튀김이 전부였어요.”
― 박 대통령은 술을 많이 드셨나요.
“그냥 기분 좋게, 얼큰하게 취하시는 정도였어요. 비교적 나이가 젊은 수석비서관들과 함께할 때는 덜 드셨지만, 특별보좌관들과 함께 드실 때에는 좀 드셨어요. 아무래도 특보들이 연세도 좀 있고, 장관급 커리어가 있는 분들이다 보니, 그분들과는 막역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술을 드시면 부속실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셨는데, 때때로 문틀에 어깨를 부딪히시면 제가 잡아드리곤 했지요. 술을 드신 다음 날에도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었어요.”
― 10·26사태 후 시바스 리갈이 화제가 됐었지요.
“그게 시중에서 그렇게 비싼 술이 아니잖아요. 그거를 무슨 고급술인 것처럼….”
― 청와대에 근무할 때 시바스 리갈을 드셔보셨나요.
“1977년 도고관광호텔에서 박 대통령 회갑연을 했는데, 각하께서 직접 한 잔씩 따라주셨지요. 그때 시바스 리갈을 처음 마셔봤습니다.”
― 10·26사태 후 김재규 재판 과정에서 대연회니, 소연회니 하면서 궁정동 만찬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 말대로라면 거의 매일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 생각도 안 했고, 우리도 짐작으로만 알았습니다. 다만 거의 매일같이 그런 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대통령이 퇴청(退廳)해서 물러가 계실 때는 혼자잖아요. 사모님도 안 계시고, 큰 영애도 조금 앉아서 얘기 나누다가 방으로 가고…. 그러면 혼자서 책도 읽고 글도 쓰셨어요. 제가 올라갔다가 그렇게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술 좀 마신 게 뭐 그렇게 나쁜 건가요? 그렇다고 대통령이 무교동 골목으로 갈 수도, 인사동 한정식집으로 갈 수도 없으니 가까운 데 있는 정보부 안가(安家)를 이용했던 것이죠.”
―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한 일입니다. 내가 청와대에서 5년을 근무했잖아요? 정말 구중궁궐(九重宮闕)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구중궁궐에 들어갔다가 결국 그렇게 됐고…. 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나온 거는 정말 잘한 일입니다.”
전두환

▲1978년 1월 16일 신임 경호실 작전차장보 노태우 소장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 끝이 전두환 전임 작전차장보. 사진=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던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장군과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전두환 장군은 저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노태우 장군은 그렇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전두환 대통령은 KBS에 왔다가 저를 보곤 끌어안으면서 ‘이광형, 여기 있구나’ 하면서 좋아했어요.”
― 전두환 장군에 대해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소소하게 몇 가지 있지만, 그런 것까지 얘기하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마친 후에 보안사령부로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중에 찾아갔더니 ‘고생 많이 했다’면서 12·12사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일어서는데 ‘애들 과자나 사주라’면서 금일봉을 주더군요.”
― 당시 하나회가 있는 줄 알았습니까.
“암암리에 알았지요. 우리 동기생 중에도 하나회 회원이 몇 명 있었어요. 김영삼 정권 시절에 대령으로 있다가 장군 진급에 탈락하고 옷을 벗었지요. 사실 동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친구들이었는데….”
― 하나회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회라는 게 알음알음으로 조금 쓸만하고 똘똘한 애들 불러서 밥 먹고 유대(紐帶)관계를 갖는 정도였지, 아주 조직적으로 뭘 한 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차지철

▲1978년 11월 15일 강릉 오죽헌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끝이 이광형 경호관, 왼쪽에서 두 번째가 차지철 경호실장. 사진=이광형 제공
― 차지철 경호실장은 언제 만났습니까.
“경호교육을 마치고, 실장실에 올라가서 신고할 때 처음 봤지요. 훈시를 하고 나서 양복 한 벌씩 맞춰 입으라고 금일봉을 주더군요.”
― 첫 느낌이 어땠습니까.
“차지철이라고 하면 5·16 때 공수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그 모습만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틀도 좋아지고 말도 잘하더군요. ‘아, 자리가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는구나’ 싶었습니다.”
― 경호실에서 근무하면서 보니 어떻던가요.
“당시 차 실장은 경호실이 이권(利權)에 개입하거나 특권(特權)의식을 가지고 군림하는 것을 못 하게 하고, 제대로 경호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고쳐나가고 있었는데, 참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청렴결백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실장 방 옆에 기도실을 만들어놓고 늘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게 봤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망하게 됐지만요.”
― 어떤 점에 대해 실망했나요.
“경호실 조직이 점점 커져가는 데다 제가 부속실로 올 무렵에는 위력시위(威力示威)로 경호 방향이 바뀌는 걸 보고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에서 탱크까지 가져다가 30경비단에서 열병식(閱兵式)을 하는 것이나, 경호원들이 교대 근무 때 효자동 거리를 시가행진하듯 하면서 경호실가나 군가를 부르는 걸 보면서, 차 실장에게 실망했어요.”
― 그 시절의 차지철 실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요.
“경호실 사람들에게 들은 얘긴데, 한번은 각하가 나갔다 돌아오시다가 경호원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고 언짢아하셨답니다. 본관 앞에서 차에서 내리면서 ‘차 실장, 저런 거 하지 마. 시가행진하면서 소리 지르는 거 하지 마’라고 지시를 하셨대요. 그러고 들어가셨는데, 차 실장은 박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면서 전두환 작전차장보를 부르더니 ‘그대로 해. 각하는 그러시지만, 경호를 위해 그대로 해’ 그랬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전해 듣고는 ‘대통령이 지시하면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10·26 당일 정말 실망했어요.”
― 그렇죠.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렇게 네 분이 밥을 먹을 때는 차 실장이 경호원이에요. 당연히 권총을 차야지요. 차 실장이 권총을 차고 갔으면 달라졌을 거예요. 설사 총이 없더라도, 김재규가 총을 들었을 때는 육탄으로 막았어야지, 화장실로 도망가서 대통령에게 ‘각하, 괜찮습니까?’ 그러는 게 경호실장입니까?”
침실의 영부인 사진
― 최근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침실이 80평이 넘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지 않았어요. 침대 하나, 창가에 놓는 거(협탁) 하나, 그 옆에 붙박이장이 하나 있었어요. 침대 앞에는 창문이 있고, 영부인 사진이 큰 게 놓여 있었어요.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영부인 사진이 보일 수 있게…. 침대 옆에 약간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조금 있었지요. 옆에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고…. 모두 합쳐서 20평이 안 됐을 겁니다.”
《그때 청와대에선》에는 어느 날씨 좋은 날 박정희 대통령이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더니, 이내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여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이 부회장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아쉬움을 꾹 누르시는 게 보였어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치고 싶으시면, 좀 치러 나가시지…’ 했는데, 늘 그런 걱정을 하셨어요.”
비서실 근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 박정희 대통령 자녀들의 이사 등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2·12사태가 일어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최광수(체신부·외무부 장관 역임) 의전수석비서관이 최규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최 실장은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이광형 부관을 찾아왔다.
“이 부관이 충격을 받은 것은 내가 이해하는데, 그래도 대통령도, 국정(國政)도 이어가야 하니, 청와대에 남아서 최규하 대통령을 계속 모셔줬으면 좋겠다.”
“저는 싫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대통령으로 모신 거지, 각하 밑에서 총리 하던 분을 다시 모시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생을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대통령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여야 할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하고, 제일 가까운 경호실장이라는 사람은 화장실로 숨고,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은 방조한 거 아닙니까? 이런데 제가 무슨 청운의 뜻을 품고 뭐를 더 하고 싶겠습니까? 이제 공직 생활은 그만하렵니다. 여기서 끝내렵니다.”
“그럼 뭐 하면서 살려고?”
“밥이나 먹고살 수 있게 시멘트 대리점이나 하나 내주십시오. 조용히 살겠습니다.”
최광수 실장은 막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젊어서 몰라서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좀 더 생각해봐.”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온 최광수 실장은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광형 부관에게 “정 그러면 비서실에 내려가 있으라”면서 정무수석비서관실로 발령을 냈다. 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있는데, 부속실 선배인 전석영 총무수석비서관이 불렀다. 전 수석은 새로 민정수석비서관이 된 이원홍(KBS 사장·문화공보부 장관 역임)씨가 그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저는 조금 있다가 그만둘 생각인데 다 싫어요. 새로 뭘 하겠어요”라며 시큰둥해하는 그에게 전 수석은 “내가 보니 지금 최규하 대통령 비서실에서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는 데가 민정수석실”이라면서 민정수석실로 가라고 권했다.
그를 만난 이원홍 민정수석은 그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게 말했다.
“나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던 분을 이렇게 보좌관으로 같이 일하자고 하는 게 황송스럽소. 하지만 지금 긴박한 일들이 많은데 내가 잘 모르니까 날 좀 도와주시오.”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이원홍 민정수석은 주일 문화원장과 공사로 8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 장군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격동기 동안 이원홍 민정수석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이 수석과 신군부 간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KBS 시절
이원홍 민정수석은 1980년 7월 KBS 사장으로 나가면서 그를 사장 비서실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신군부의 실세(實勢)가 된 육사 선배들은 “KBS에 가서 몇 년만 고생하고 오라”고 했다. 방송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사장실을 드나드는 실·국장들에게 과외교습(?)을 받으면서 방송인이 되어갔다. 6개월쯤 지나자 방송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를 ‘동지’로 생각한다던 이원홍 사장이 문화공보부 장관이 되어 떠날 때, 그를 요직인 경영관리실장으로 발령을 냈다. 하지만 후임 사장은 그를 자금관리국장으로, 다시 청주방송총국장으로 밀어냈다. 요로(要路)에 있는 선배들과 이원홍 장관에게 기대면 다른 기회를 노릴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KBS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청주방송총국장으로 있을 때는 실적평가에서 KBS 지방총국 중 꼴찌였던 것을 1등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KBS에 노조(勞組)가 생기면서, 그는 ‘특채자(特採者) 1호’로 지목되었다. 결국 1988년 7월 KBS를 떠났다. 마흔 살의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지인(知人)들의 도움으로 몇몇 회사에 들어갔지만, 잘 맞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과 함께
1991년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육영재단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영애인 박근영 이사장 체제가 자리 잡는 것을 도왔다.
1993년 박근영 이사장이 삼양산업(현 EG) 부사장으로 있는 동생을 도와주라고 했다. 포철(현 포스코)에서 나오는 산화철(酸化鐵) 부산물(副産物)을 활용한 제품들을 생산하는 삼양산업은 원래 산화철 전문회사인 삼화기업과 포철의 자(子)회사인 거양상사가 4억원씩 출자(出資)해서 설립한 회사였다. 박태준 포철 회장은 육군 대위로 예편한 후 쉬고 있던 박지만 현 회장에게 삼양산업 부사장 자리를 맡겼다. 하지만 회사 사정은 좋지 않았다. 기술력이 좋지 않아서 불량품이 쌓이고 있었다. 박태준 포철 회장은 박지만 부사장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회사 지분을 아예 인수하라고 권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은의를 느끼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8억원을 빌려주었다. 여기에 4억원을 증자(增資)했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1993년에 가서 보니, 자본금이 12억인데 자본잠식이 11억8000만원, 전년도 매출이 7억원인데 결손이 6억5000만원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광형 삼양산업 상무는 박지만 사장과 머리를 맞대고 회사 회생(回生) 방안을 강구했다. 우선 박태준 회장의 도움으로 원료 구입비를 줄이고, 대금 결제 조건들을 개선했다. 포철 부사장을 지낸 김철우 박사를 고문으로 모셔온 후, 그의 도움으로 은퇴한 일본 기술자들을 초빙해 기술력을 높였다. 삼화기업 서종규 사장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2년여를 노력한 끝에 최고급 품질의 제품을 일본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매출이 늘기 시작, 1997~1999년 사이에는 1년에 30~40%씩 성장했다. 2000년 1월에는 코스닥 상장(上場)에 성공했다. 이광형 전 부회장은 2012년 부회장이 되어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충남 금산에 있는 공장을 지켰다. 2014년 그가 대표이사를 그만둘 때 회사 매출액은 1700억원으로 200배 성장했다.
― 세간에서는 박태준 회장과 김우중 회장이 박지만 회장을 도와주기 위해 땅 짚고 헤엄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준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아니었군요.
“전혀 아니에요. 물론 현금을 빌려준 김우중 회장, 포철에서 원료를 공급받고 납품할 수 있게 도와준 박태준 회장께서 보이지 않게 혜택을 주면서 울타리가 되어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면 자본잠식이 됐을 때 회사는 벌써 망했을 겁니다. 박지만 회장과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도 늘 고맙지요”

▲사진=조준우
― 이번에 1979년에 부속실에서 경험한 일들과 10·26사태 전후의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다른 이야기들도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조금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 부회장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부모 같고, 스승 같은 분이었지요. 늘 인자하시고, 늘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평생 고맙지요. 늘 고맙지요. 지금 생각해도… 늘 고맙지요.”
이렇게 말하는 노(老)신사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먼 훗날 그가 저세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박 대통령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광형, 고맙다! 열심히 나를 섬겨줘서 고맙고, 내 아들을 잘 도와줘서 고맙다. 넌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정말 수고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https://youtube.com/shorts/e3ntyT83hF0?feature=share - 박정희 가족
월간조선 10월 호
■維新 50주년 - ‘維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신 시대 경제발전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 없다
⊙ “민주주의 국가도 위기 상황 때는 독재권 발동… 본질적으로 자유민주헌정이 허용하는 것”(클린턴 로시터)
⊙ 유신 시대의 제한은 무책임한 선동 일삼는 僞善的 政商輩 세력의 ‘국민에 대한 접근 제한’
⊙ 링컨, 남북전쟁 당시 美연방 보존 위해 비상대권 행사
⊙ 유신 당시 한국은 건국 이래의 ‘상시적 비상 상태’에 주한미군 철수 등 ‘긴급한 비상 상황’이 더해진 위기 상황
⊙ 朴正熙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일을 했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1976년 5월 31일 포철 제2고로 화입식에서 직접 불을 댕기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조선DB
10월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관련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달이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維新)이 있었다. 그리고 9일 뒤의 날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2022년 올해는 10월 유신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한국의 국제적 순위는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밑바닥이었다. 그랬던 한국이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천지개벽의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유신 시대에 본격화된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한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
‘朴正熙 부정론’의 逆說
이 같은 절대적 위업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정치’는 여전히 시비의 대상이다. 10월 유신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박정희의 업적을 인정한다 해도 유신만큼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아직 높다. 기준은 민주주의다.
‘박정희의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은 어떻든 민주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비판론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것을 공허(空虛)하게 만들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결과다. 박정희의 정치를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객관적 결과’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원칙’과 분리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경제와 관련해선 민주주의라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게 되고 만다.
이 역설(逆說)이 논박되려면 민주주의가 없는 상태에서의 경제발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마다 보릿고개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 앞에서 민주주의가 없으면 굶주림을 면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되면 비판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민주주의의 가치가 허무해지게 된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박정희 부정론에는 경제성장의 주역은 국민이었다는 것도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인정한다 해도 그 성과는 박정희의 업적이 아니라 국민의 업적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음의 비판이 날카롭다.
“어떤 정치지도자는 국민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것이지 박정희가 정치를 잘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정치인들을 보면 암담한 생각이 든다. 국민이 모두 열심히 일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이들의 얘기를 뒤집어보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 된다.”(‘나는 왜 박정희를 존경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1년 5월호, 김상기 당시 미국 남일리노이 대학 교수)
국민 운운은 감성적으로 일견 그럴듯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국민을 탓하는 논리가 되고 악한 지도자에게 면죄부(免罪符)를 주는 논리가 될 수 있다. 김상기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덧붙인다.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은 박정희 때문이라기보다 국민이 열심히 일한 결과이다’라는 주장은 ‘북한 경제가 낙후한 것은 김일성 부자(父子)의 위대한 영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포가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라는 주장과 똑같은 낮은 수준의 오류이다.”
‘독재’라는 용어의 적용은 합당한가?
박정희를 폄훼하는 이들은 최종적으로 ‘독재(獨裁)’라는 용어로 ‘박정희 정치’에 대한 부정을 완결한다. 민주주의의 시대, 독재라는 딱지는 결정적인 비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간단찮은 문제가 있다. 객관성과 엄밀성이 허술하다.
수많은 독재자가 열거될 수 있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폴 포트, 남미(南美) 군사독재, 이디 아민, 리콴유(李光耀) 등등은 어떻든 일단은 모두 독재자다. 이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아무튼 독재’라는 범주로 묶어버리게 되면, 진짜 폭정(暴政)의 실체가 오히려 가려지게 된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등도 그렇지만 크메르루주(Khmer rouges)의 폴 포트는 단적인 경우다. 폴 포트는 800만 명 남짓의 자국민 가운데 200만여 명의 인명을 살해하는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그런 자를 그저 독재라는 용어로만 규정하는 것은 극히 안이하다. 그런 주장은 오히려 그자의 악행(惡行)을 가리게 된다.
리콴유의 경우는 반대의 문제점이 생긴다. 리콴유도 정치 행태로만 보면 독재라는 용어를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사실상 종신(終身) 집권을 했으며 권좌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폴 포트 등의 경우에 비춰보면 리콴유를 독재라는 동일선상의 용어로 규정하는 것은 시시비비를 떠나 일종의 모독이 된다. 박정희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발독재’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개발독재는 경제개발을 위해 불가피하게 민주주의를 억제했다는 논리지만 어떻든 ‘민주정에 대한 억압’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독재라는 개념은 여전하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독재·인민민주독재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불가피성의 논리를 갖고 있다. 차이가 희석돼버린다.
독재를 정치 행태상의 범주적 용어로 사용하게 되면 같이 묶어선 안 되는 것을 동일 범주화시키는 문제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독재를 정치적 가치판단의 수사(修辭)로 사용하게 되면 폭정의 악행에 대해선 도리어 가림막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선 부당한 딱지가 된다.
金日成에 대해선 內在的 접근, 朴正熙에 대해선?
김일성(과 김가 일족)의 경우와 박정희의 경우를 대비하면 특히 그렇다. 김일성 일족 3대(代)의 통치 행태는 독재라는 용어가 싱겁다. 북한의 김일성 일족의 지배체제는 그냥 독재가 아니다. 전체주의(專制主義), 전제정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를 앞세우면서 실제 지배는 공포의 폭정으로 행한다. 그러면서 이데올로기로 정신적 지배를 강제하여 구호와 폭정 사이의 간극을 메꾼다. 폭력을 동반한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다. 범죄적 지배다.
그런데 박정희의 정치를 독재라고 비난하는 자들 대부분은 북한 김가 일족의 범죄적 지배에 대해선 독재라는 용어조차 삼간다. 마치 예의를 갖추듯이 조심스러운 접근을 한다. 이른바 ‘내재적(內在的) 접근(immanent approach)’이다.
재독(在獨) 사회학자 송두율이 대표적이다. 송두율은 “북한은 사회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잣대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을 기준으로 북한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핏 사회과학 방법론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의 시각으로 유대인 학살을 헤아리고 폴 포트의 시각으로 킬링필드를 이해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본색은 바로 그런 식으로 북한의 폭정을 변호하고 방어하는 논리다.
그럴 만했다. 송두율은 그냥 친북(親北)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1973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는데, 이때 북한노동당에 입당(入黨)했다. 북한의 지원금을 받았다. 북한노동당 입당 이듬해인 1974년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고, 독일에서 ‘유신독재 반대시위’를 했다.
모든 반(反)박정희 인사가 송두율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 하지만 반대 투쟁의 행적이 누적되면서 감염되듯이 닮아갔다. 김일성에 대한 내재적 접근은 그럴듯하게 여기면서도 박정희에 대해선 마치 천상(天上)의 기준과도 같은 잣대로 비난을 이어갔다. 이런 뒤틀린 의식이 어느덧 상식처럼 퍼져 급기야 교과서 서술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기왕의 일반적 통념에 있는 허점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제 자체가 ‘독재관’의 의미 내포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미국의 민주주의 안에는 ‘독재’가 제도적으로 내재화돼 있다. 바로 로마 공화정의 딕타토르(dictator), 즉 독재관(獨裁官) 제도다. 미국은 민주정(民主政)의 중우(衆愚) 정치의 위험성 예방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모델로 삼은 것은 고대(古代) 로마의 공화정(共和政)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제도는 로마 공화정의 제도와 매우 닮아 있다. 미국의 상원(上院)은 로마의 원로원(元老院)에, 하원(下院)은 민회(民會)에 해당한다. 미국의 상원(Senate)과 로마 원로원(Senatus)의 영어식 표기는 거의 같다. 대통령(President) 제도도 로마의 공화정 제도에서 착안하여 응용한 것이었다. 공화정 시대 로마는 평상시에는 임기 1년의 집정관(執政官·Consul) 2명을 선임하여 합의에 의해 통치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임기 6개월의 1인의 독재관(dictator)을 뽑아 전권(全權)을 위임했다.
마키아벨리(1469~1527년)는 《로마사 논고》(1517)에서 로마 공화정의 힘은 바로 딕타토르(독재관) 제도가 있었던 덕분이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이 같은 고대 로마의 독재관과 집정관을 합쳐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마식 1인 독재관이 평상시에도 집정관의 임무를 겸하도록 한 셈이다. 이것은 대통령은 그 자체로 이미 독재관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독재라는 용어는 본래는 부정적 함의의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그 어원은 로마의 딕타토르이다. 그런데 권력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딕타토르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딕타토르적이지 않은 권력은 둘 중의 하나다. 무능(無能) 아니면 무책임이다. 그래서 독재라는 용어를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는 것은 부족하거나 부당한 것이 된다. 진짜 악랄한 폭정을 행한 자들에 대해선 부족한 용어이며, 위기에 맞서 단호하게 통치의 본질적 의무를 행한 경우에 대해선 부당한 용어가 된다.
링컨의 憲政的 독재
▲남북전쟁 당시 비상대권을 행사했던 링컨 대통령.
민주공화국은 스스로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를 제도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다. 대통령제 자체가 본래 그런 기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든 자유민주헌정은 위기에 대한 대응체제를 발현시킬 수 없으면 지탱할 수 없다. 그래서 ‘헌정적(憲政的) 독재(Constitutional Dictatorship)’를 기본원리로 허용한다.
미국 정치학자 클린턴 로시터가 1948년 펴낸 《헌정적 독재(Cons-titutional Dictatorship)》는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副題)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위기 정부(Crisis Government in the Modern Democracies)’다. 로시터는 민주주의 국가도 위기 상황에 봉착할 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비상대권의 독재권을 발동하게 되며, 이것은 형태상 독재의 모습을 띠어도 본질적으로 자유민주헌정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남북전쟁 상황에서의 링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링컨은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비상 행정명령을 발동해 군사적 대응을 시작했다. 군(軍) 지휘관들이 군사작전상 필요하다면 영장 없이 미국 시민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명령도 내렸다. 링컨의 이 모든 조치는 의회의 승인이 없이 행해진 대통령 단독의 비상대권 행사였다. 즉 헌정적 독재였다.
링컨 대통령이 독재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미연방은 지켜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은 큰 희생을 치렀지만, 연방이 붕괴됐다면 이후의 희생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미 대륙 내에 수많은 국가가 난립(亂立)해 유럽이 그랬듯이 그들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수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 강국 미국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 그리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제가 아닌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의 전시(戰時)내각이 행사했던 비상대권도 본질적 성격에선 동일했다. 자유민주체제라고 해서 그 같은 비상대권을 부정해버리면 오히려 그 자유민주국가 자체가 근본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 특히 유신 전후 시기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敵은 민주주의 자신
민주주의(democracy)는 본질적으로는 가치적 함의를 가진 주의(主義·ism)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政體)로서의 민주정(民主政)이다. 그러나 역사가 거듭되면서 민주는 정치적 가치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인식을 수용한다면 민주주의는 더욱이 섬세하게 고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중하게 여기는 이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가장 흔한 통념은 독재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물론 실제 역사상으로도 틀린 생각이다.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는 때로는 헌정적 독재가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험은 오히려 민주주의 자신에 의해 발생한다.
민주주의는 기회와 유혹을 동시에 제공한다. 기회 자체가 유혹으로 작동한다. 부실한 자들도 정치적 영달을 꿈꾸게 만든다.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은 능력과 소명(召命)의식보다는 선동(煽動)의 기량에 더 치우치게 만든다. 그 결과 본질적으로는 싸구려 출세꾼인 정치적 사이비(似而非)들이 선동을 무기로 발호한다. 대중이 그에 현혹되면 정치에서 진정한 실력과 공적(公的) 책임의 덕목이 사라진다. 당선만을 목적으로 한 정치공학적 포장과 마케팅의 술수만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건강성을 상실한다.
현명한 소비자가 시장의 건강을 지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렇듯 민주주의는 양식(良識) 있는 시민이 있어야 건강이 유지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정은 그 속성상 양식과 책임감보다는 수적인 다수에 쏠리게 되는 경향이 있다. 포퓰리즘의 위험이 상존한다. 민주정의 이 같은 약점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우상화(偶像化)하게 되면 결국에는 민주주의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建國과 近代化
그런데 이런 상황에 중대한 ‘국가적 과업의 추진’과 ‘국내외적 위기 대응’ 문제까지 겹쳐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신을 선포할 당시는 어땠을까?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을 제기할 수 있다. 그에 대해 각각 다른 입장이라 해도 원칙이 있음을 전제(前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을 갖든 그 ‘추상적 원칙’을 ‘구체적 현실’에 곧바로 대입하여 평가하는 것은 방법론상으로 오류(誤謬)다. 현실에 대한 분석이 먼저이며 그다음에 일반 원칙이 어떻게 구현돼갔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순서가 바뀌면 현실은 증발하고 원칙은 관념으로만 남는다. 그런데 현실 없는 관념만의 원칙은 이미 원칙도 아니게 된다.
유신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실제 상황의 전개에 대해 살피는 것이 먼저이고 평가의 잣대를 갖다 대는 건 그다음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신성의 잣대로 삼아 유신 시대를 평가하고 싶다고 해도 순서는 그래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建國)되었다.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민국가다. 이로써 대한민국에 소속된 사람들은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國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건국이 국민에게 원하는 삶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건국은 하나의 약속이요 시작일 뿐이었다. 국민다움도 곧바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근대(前近代)의 농민적 정체성(正體性)과 습속(習俗)이 여전하며, 시민사회적 성숙도 이제 막 시작된 것일 뿐이었다.
건물을 세우는 것은 완공(完工)으로 완결된다. 그러나 국가는 건국이 완공이 아니라 시작이며 국가 건설이 이어져야 한다. 국가는 그렇게 하여 부강함을 향해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동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국민과 국가는 그렇게 하여 함께 성장해간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과업을 이루어나가는 총체적(總體的) 과정을 ‘근대화(近代化)’라고 지칭했다. 즉 단순히 경제성장이 아니었다. 경제성장이 핵심이었지만 국민다움의 성장과 성숙도 함께였다.
‘성숙 상황’의 잣대로 ‘미성숙 상황’을 공격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건국됐다. 하지만 건국과 동시에 이 같은 원칙과 원리가 곧바로 성숙한 수준에서 구현될 수는 없다. 경제가 그러하고 국가 자체가 그렇듯 국민주권의 민주정치 또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건국하자마자 불과 3년 만에 6·25전쟁이라는 대한민국의 생존이 달린 중대한 시련을 경험한 터였다. 휴전이 된 뒤에도 그 위협은 계속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건설은 이 같은 위협에 맞서가면서 진행돼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李承晩) 때도 박정희 때도 반대파들은 ‘국가 건설의 진행’에 힘을 함께 모으기보다는 ‘일반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공격을 해댔다. 이것은 ‘성취기 상황’의 잣대로 ‘진행기 상황’을 재단(裁斷)하고 관념으로 현실을 공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다움의 성장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성숙 상황’의 잣대로 ‘미성숙 상황’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미성년에게 성년다움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비판자들의 행태는 따지자면 그 자체가 미성숙이었다.
유신 시대 평가에서 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비상 상황이라는 점이다. 우선 한국은 유신 당시만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 건국 때부터 상시적(常時的) 비상 상태였다. 건국부터가 양립(兩立)할 수 없는 적대적 대립 속에서 비상한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3년간 겪어야 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일 뿐이었다. 북한 공산 세력은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전복을 겨냥한 도발과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이 같은 전복전에 의한 위기는 미국의 역사상 여러 시기의 경우와 비교해 가벼운 게 결코 아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엄중하다. 북한과 그 배후 세력인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전복전(顚覆戰)을 막아내지 못하면 한국은 그냥 사라진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안보환경의 급변과 야당의 무책임
▲1970년 들어 주한미군의 감축설이 보도되자 주한미군 감축 반대 운동이 벌어졌지만, 결국 이듬해 미7사단이 철수했다. 사진=조선DB
유신이 선포될 당시는 그 상시적 비상 상태에 더해 위험이 더한층 가중되어가던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이라는 안보 환경의 급변이 닥쳐오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 안보의 틀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그러나 닉슨은 주한미군의 철수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미국은 1971년 3월 27일 한국에서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제7사단·2만2000명)을 결국 철수시켰다.
한국에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4월 27일)의 선거전이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상시적 비상 상태’에 ‘긴급한 비상 상황’이 더해진 위기였다. 유신이 선포되기 1년 전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당시 야당 신민당은 위기에 대한 대응은 외면한 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여전히 거듭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오도(誤導)하는 갖가지 포퓰리즘적 선동도 더해갔다. 정치적 야심만 있을 뿐 무분별했으며 무책임했다.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해선 집권 세력의 양식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야당 세력도 집권 세력을 대체할 만한 능력과 양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 교체는 안 하느니만 못 한 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반박정희 야당 세력들은 이 같은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야당 세력의 자질과 행태 자체도 대한민국의 중요한 위기 중의 하나였다.
한국 야당의 이 같은 문제점은 뿌리가 깊었다. 건국 당시 한국민주당(한민당)부터 그랬다. 한민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목을 끊임없이 잡았다. 내각제를 요구하며 대통령 이승만을 계속 공격했다. 내각제만 민주적이며 대통령제가 반민주적인 것일 수는 없다. 더욱이 한국은 신생국일 뿐만 아니라 6·25전쟁이 보여주듯 비상한 위기가 항상 동반(同伴)하는 나라였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체제가 필요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확립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은 이에 계속 제동을 걸었다. 6·25전쟁 도중에도 그랬다.
한민당의 이 같은 문제점은 박정희 시대의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5·16 후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진영 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은 “먼저 당선되는 게 중요… 일단 당선되고 나면 상황을 분석… 동냥을 해서라도 국민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도 없고 계획도 없다. ‘일단 당선’은 조선 시대 양반 유생의 ‘입신(立身)’과 다르지 않다. 발상도 태도도 모두 전근대적이다.
야당의 이 같은 속성은 윤보선 이후에도 내내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상징적 사례가 김영삼(金泳三)이었다. 김영삼은 중학생인 소년 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는 걸 내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업을 이루어내겠다’가 아니라 ‘지위에 올라가겠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그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임을 몰랐다. 김영삼은 당시 야당의 촉망받는 대표적인 젊은 정치 주자였다. 그런 사람의 의식 수준이 그랬다.
保守야당에 스며든 좌익 성향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4대국 안전보장’ ‘예비군 폐지’ 등을 주장했다. 사진=조선DB
그런데 야당의 문제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어느덧 이념적 위험성이 스며들고 있었다. 한민당은 물론 그 맥을 계승한 한국의 야당은 기본적으로 반공(反共)정당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서서히 좌익적 성향이 배어들고 자라나고 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개발도상국 사이에 유행이 돼 있던 종속이론적 발상의 영향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계속 잔존(殘存)하던 좌익 성향 인사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김대중(金大中)이었다. 김대중의 내면적인 이념적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떻든 드러낸 정치적 면모는 좌익적 성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선 1971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대중경제론》은 좌파적 구상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그 책을 쓴 박현채(朴玄埰·1934~1995년)는 소년 빨치산 출신이었다.
한편 김대중은 이에 더해 1971년 대선에서 ‘4대국 안전보장론’을 들고나왔다. 1971년 대선은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으로 한국의 안보 환경에 중대한 시련이 닥쳐오고 있는 가운데 치러지는 선거였다. 그런데 김대중 후보는 안보태세 강화가 아니라 반대 방향의 공약을 내걸었다. 남북은 긴장 완화와 남북 교류를 통한 평화 지향으로 나아가고 미국·일본·중국·소련이 한반도의 안전보장을 해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예비군 폐지론’도 제기했다. 파격적 제안이었고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보의 근간을 흔드는 파괴적 발상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더 당연하게도 대남(對南) 적화(赤化) 책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4대국 안전보장’은 미국이 한국에서 발을 빼려는 여지가 있음에도 한국에 소련과 중국의 간섭과 영향력 확대를 자청해서 불러들이는 꼴이었다. 북한과 공산권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안보 환경에 국제적으로 중대한 위기가 엄습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이런 위험한 공약을 들고나왔다. 그의 경제 공약대로면 이제 막 본격화되기 시작한 경제성장도 중단될 게 틀림없었다. 당시의 야당이 박정희 정권을 대신할 만한 대한민국을 위한 책임 있고 건강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아니 대한민국은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을까?
유신은 政商輩 세력에 대한 제한
유신은 분명히 민주정의 일상적 원칙에 대해 제한을 가했다. 유신은 국민의 직접적인 대통령 선출권을 제한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토록 하여 국회의원 선출권도 제한했다. 그러나 그 제한은 본질적으로는 국민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무책임한 선동을 일삼는 위선적(僞善的) 정상배(政商輩) 세력의 ‘국민에 대한 접근 제한’이었다.
비상한 상황임에도 무책임한 무리가 정략적(政略的) 선동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위기 요인이었다.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당시 한국에 닥쳐온 국내외적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위험이 있었다. 유신은 그 위기들을 이겨내고 절박한 국가적 국민적 과업을 중단 없이 이루어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 결단을 비난하는 게 합당하려면 그만한 대안(代案)과 대안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이 직면했던 비상 상황을 이겨내고 역사적 성취를 해낼 가능성을 인정할 만한 대안 세력은 없었다. 당시의 야당은 그런 능력도 책임감도 없었다. 야당만이 아니라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 전반이 다 그런 수준이었다. 다음의 예화는 그 점을 보여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이력을 가진 어느 현대사 저술가가 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박정희를 비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그는 박정희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희는 독재를 위해 경제성장을 추구했을 뿐이다.”
기괴한 논리다. 그가 이런 이상한 논리를 확신에 차서 펼치는 것은 ‘아무튼 독재는 나쁜 것’이라는 집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언설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투쟁 세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경제성장’이라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진정으로 좋은 일을 외면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런 철없는 반대를 무릅쓰고 ‘좋은 일’을 해내기 위한 결단을 선택했다.
할 일은 한 박정희
“독재를 위한 경제성장 추구”라고 한 것은 박정희를 비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으면 예찬이 된다. ‘독재’가 ‘경제성장’이라는 좋은 일을 하게 했으니 결국에는 독재는 좋은 것이 돼버린다. 그런데 유신은 실제로 그랬다. 유신을 어떻게 비난하든 유신 시대는 결국 좋은 일을 해냈다. 유신 시대의 경제발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기 때문이다.
유신은 당시에도 지금도 흔쾌하게 이해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일을 했다. 박정희는 ‘지금 여러 가지 불만과 비판이 있다 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고수했다. 달콤한 언사로 당장을 모면하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국민을 설득하며 결연하게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리고 평가는 역사에 맡겼다. 그 평가는 분명하다. 어떤 시비가 있든 박정희 시대는 ‘기적의 역사’로 자리매김된다.⊙
■ 2022.10.17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어떻게 한국의 ‘위대한 성공’ 됐나?
10월 유신 50주년...‘역사 속 神의 옷자락’을 잡아챈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이 57세 때인 1974년 5월20일 , 10월 유신을 선포한 심정(心情)과 의지(意志)를 담아 쓴 휘호(揮毫)
올해 10월17일로 ‘10월 유신(維新)’ 50주년을 맞는다. 반세기 전인 1972년 10월17일 오후 6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오후 7시 기점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날 대통령 특별 선언으로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정치 활동 같은 헌법 기능도 일부 정지됐다. 다음날 계엄사령관은 8개항의 계엄포고 1호를 내렸다. “정치활동 목적의 모든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 사전 검열, 대학 휴교, 위반자는 영장없이 수색·구속….”
▲'10월 유신' 대통령 특별 선언과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를 보도한 조선일보 1972년 10월18일자 1면/인터넷 캡처
◇박정희는 최악 독재자 vs 최고 대통령?
1979년 박정희가 62세로 서거(逝去)할 때까지 7년간 지속된 ‘유신 체제’가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그해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91.5% 찬성률로 가결된 유신헌법은 반(反)민주적 독소 조항이 가득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접선거,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선출, 임기 제한없는 대통령에 긴급조치권 및 법관 임명권 부여 등으로 초유의 ‘막강한 대통령 권력’이 탄생했다.
야당 정치인 등에 대한 불법 감금·고문에다 1974년 1월8일부터 79년 12월8일까지 2159일동안 ‘긴급조치’가 계속됐다.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피해자는 사망 8명을 포함해 1140명, 기소된 재판은 589건에 달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22년 8월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배석해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금됐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본인, 가족, 상속인 등이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사건 상고심을 진행했다. 긴급조치 9호는 1975년 5월 제정·선포됐다./뉴스1
이 때문에 박정희의 역할을 인정하는 이들 조차 ‘유신 체제’에 대해서는 “종신(終身) 집권에 눈이 먼 박정희가 일으킨 또 하나의 쿠데타”, “유례없는 민주주의 암흑기”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최근 30여년 동안 박정희는 대통령 대상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달리고 있다.
1992년 6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압도적 1위(88.3%)였다. 2015년 8월,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을 물은 조사에서도 전국 남녀 2003명 중 가장 많은 44%가 박정희를 꼽았다.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압살한 희대의 독재자를 왜 가장 유능하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지목할까? 박정희의 ‘유신’은 어떻게 외국의 비판적인 학자들로부터도 ‘위대한 성공’이라고 호평받고 있는 걸까? 이런 모습들은 ‘유신 체제’가 어느정도 불가피했고, 대한민국 발전에 긍정적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북한 위협·미군 철수가 ‘10월 유신’ 재촉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0월 유신 무렵인 1970~1972년 한국의 국력은 북한에 뒤져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384달러)은 한국(275달러)보다 높았고, 그해 군사비 지출은 북한(7.4억달러)과 남한(3.3억달러)의 격차가 두 배 넘었다. 한국군은 소총(小銃) 조차 자력 생산 못하는 반면, 북한군은 소련 현역군 수준으로 무장돼 있었다.
▲197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75달러로 북한(384달러)보다 뒤졌으나 유신 체제 중에 역전했다
▲유신 5년차인 1976년에 한국은 국방비 지출 규모에서도 북한을 능가했다.
1970년대를 ‘적화 통일의 호기(好期)’로 판단한 북한은 게릴라전 공격을 감행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특공대를 동원한 청와대 습격 사건, 이틀 후인 1월23일 미 해군 푸에블로호 납치, 그해 10~11월 울진·삼척 지역에 100명의 무장공비 침투가 대표적이다. 1969년 4월15일에는 미 해군 정찰기 EC-121이 북한기에 격추당해 승무원 31명이 모두 사망했다.
1970년 6월22일 공비 3명의 서울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과 74년 8.15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가 노린 표적은 모두 박정희 살해였다. 박정희는 1968년 2월 250만명 향토예비군 창설과 70년 8월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출범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비상(非常) 상황의 연속이었다.
▲평양 대동강변에 정박돼 있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왼쪽)와 1976년 8월18일 발생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모습(오른쪽)/조선일보DB
동맹국인 미국은 도움은커녕 불안을 가중시켰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7월25일 괌에서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인들이 맡아야 한다”는’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고 한국 정부의 반대에 아랑곳않고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했다.
1970년 8월 내한(來韓)한 애그뉴 부통령은 “71년 6월말까지 미군 7사단을 철수하고 향후 5년 이내에 나머지 미군도 완전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했다. 2만여명의 주한미군 제7사단은 예정보다 3개월 빠른 71년 3월27일 한국을 떠났다.
▲1971년 3월27일 미군 제7사단 2만여명이 철수함에 따라 그 직전부터 한국 군이 휴전선 155마일을 방어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겨울 모습이다./국방부 제공
▲1972년 2월 21일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DB
미국은 그 대신 적국(敵國)인 중공과 손잡았다. 1971년 10월 중공은 정식 국제연합 회원국이 됐고,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은 주은래 총리와 5차례 회담을 갖고 ‘상하이(上海)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2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해 놓고 있던 박정희로선 6.25 전쟁 당시 교전 상대국인 중공과의 화해를 위해 베트남과 한국에서 전격 철군(撤軍)하는 미국의 냉정함에 배신감을 느꼈다. 박정희는 71년 2월8일 대(對)국민 담화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의 국제 사회에서는 강력한 자주, 자립 정신이 없는 민족은 그 누구의 동정이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중략)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자주국방의 정신을 더욱 굳건히 살려 나가는 결의와 각오를 새로이 해야겠다.”
▲2022년 9월29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제74주년 국군의날 미디어데이 행사에 K-2전차가 전시돼 있다./뉴스1
▲1978년 한 한국군 장교가 북한군이 비무장 지대에 파놓은 제3땅굴 안에서 손으로 지지대를 가리키고 있다./조선일보DB
이춘근 이춘근국제정치아카데미 대표는 “달리 말하면 10월 유신의 목표는 ‘미군의 도움 없이도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가 위기관리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 방위를 사실상 포기하고 한미(韓美)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치 구도에서 경제 발전과 자주국방을 이뤄야한다는 ‘절박함’이 10월 유신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침 준비를 당시 완료했다는 사실은, 1996년 5월22일 발레리 데니스포 러시아 외무부 아주국 제1부국장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그는 “김일성이 75년 4월 중국을 방문해 ‘남한과 전쟁할 준비가 다 됐다’고 지원을 요청했었다”며 “김일성은 ‘(남조선과의) 전쟁에서 잃을 것은 군사경계선이며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이라며 당장 적화통일하려는 야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국내 정치 보다 ‘김일성과의 대결 승리’ 노려
유신 체제 출범의 직접적인 계기로 흔히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꼽힌다. 박정희는 대선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95만표 차이로 신승(辛勝)했다. 한달 후 실시된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개헌 저지선을 돌파하며 약진했으나, 여당인 공화당은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에서 참패했다.
▲1971년 4.27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공화당 후보(사진 위)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유세(遊說) 모습/조선일보DB
4년 후에는 야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10월 유신은 박정희의 무한(無限) 집권 야욕을 충족시키려는 무모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당시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다른 분석도 나온다.
박정희가 1970년 8월15일, 해방 25주년 기념식에서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한 간에 어떤 체제가 좋은지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자”고 제안한 게 실마리이다. 박정희는 71년 4월 대선 유세 연설에선 “나의 경쟁 상대는 야당 후보가 아니라 바로 북한에 있는 김일성이다”고 말했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청와대 경제 2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은 “북한이 1970년 11월, 1976년 완성을 목표로 석유화학공업 건설 등에 초점을 맞춘 6개년 계획을 내놓았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의 3차5개년 계획목표 연도(1972~76년)와 같았다. 1977년에는 양자 간에 결판이 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라는 저서를 쓴 김두영 청와대 비서관은 “박 대통령은 늘 김일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 보다는 우리가 잘 살아야지’하는 오기가 대통령의 언동에서 자주 비쳤다”고 했다.
▲1972년 12월1일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북한 부수상(왼쪽)과 악수를 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 박성철은 당시 노동당 정치위원이었다.
1969년부터 78년까지 10년간 청와대에서 일한 김정렴 비서실장은 “남북적십자회담 경험이 유신의 결정적 요인”이라며 이렇게 증언했다.
“1972년 5월31일과 12월1일 청와대에서 남북조절위원회 북한측 대표인 박성철 일행을 접견한 박 대통령은 북한 권력 서열 10위 내에 있는 김일성의 측근 중 측근인 박성철이 수첩에서 깨알같이 적어온 내용을 한 자라도 틀릴세라 긴장하며 읽어내려 가는 것을 보고, 북한 체제의 경직성과 김일성 유일 체제가 얼마나 강한가를 실감했다.” (김정렴, 165~168쪽)
야당에 대한 불신도 ‘10월 유신’ 결단에 한몫했다. 1971년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내건 ‘대중경제론’은 농업 주도 근대화론으로 박정희식(式 공업화와 산업화의 중단을 뜻했다. 야당의 ‘4대국 안전보장론’과 ‘예비군 폐지’는 북한의 국력이 우세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발을 빼는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인기영합적 술수라고 박정희는 판단했다.
1972년 10월3일 개천절 경축사에서 박정희는 “다양성을 분열로 착각하여 파쟁을 일삼는다든지, 민주제도의 ‘견제와 균형’ 원리를 비능률의 구실로 삼으려는 정략과 간계가 우리 주변에서 횡포를 부린다면, 이 모든 것은 마땅히 광정(匡正)되어야 한다”고 했다.
▲유신 기간 중이던 1975년 9월1일 서울 여의도에 준공한 국회의사당. 원자재, 자본 조달, 설계 등 모든 과정을 우리 힘으로 해냈고 당시로선 아시아 입법부 건물 가운데 가장 컸다./조선일보DB
유신 시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은 “박 대통령께서는 돈이 들지 않는 민주주의를 해 보자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경제 발전에 쓸 돈도 모자라는데 그 알량한 ‘정치’ 한답시고 돈을 낭비하는 것에 몹시 언짢아하셨다. 그는 국력을 북한 보다 막강하고 압도적인 우위에 올려놓는 데에 국정 목표를 두었다”고 회고했다. (김성진, 67~68쪽)
◇수출·방위산업·중화학공업 ‘1석3조’ 달성
결과는 어땠을까? 박정희는 유신 2년 만인 1974년 1인당 국민소득 543달러를 달성해 그해 북한(515달러)을 사상 처음 제쳤다.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76년부터 북한을 추월했다. 박정희 통치 18년(1961~79년) 동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1640달러로 뛰었지만, 북한은 195달러에서 1114달러 증가에 그쳤다.
이런 역전승을 낳은 원천이자, ‘10월 유신’의 백미(白眉)는 중화학공업화이다. 중화학공업화는 시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한국은 1971년 수출 10억달러 고지를 넘었으나 주력 수출품이 여전히 의류·직물·합판·가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인데다, 채산성 악화로 무역 적자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런 배경에서 10월 유신 선언 3개월 만인 1973년 1월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했다. 그는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달러, 1인당소득 1000달러 ▲총 수출품 중 중화학제품 비중 50% 초과 ▲비철금속·기계·전자·제철·조선·석유화학 등 6대 전략공업 육성 등을 약속했다.
▲1970년대 10월 유신 홍보 책자. 100억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은 10월 유신이 대표적인 구호였다.
보름 전인 72년 12월28일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박정희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달러를 기한 안에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유신 체제의 명운(命運)과 정당성(正當性)을 100억달러 달성에 거는 정면 승부수였다.
김세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중화학공업화는 자본·기술·경영능력이 미흡한 한국의 정상적인 성장 경로를 이탈한 파격이었다.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밀어붙이기(Big Push)’에 성공하려면 ‘유신’이라는 특수한 정치 체제가 필요했다”고 했다.
1973년 3월 박정희는 오원철 제2경제수석 비서관을 중심으로 43명의 실무 기술관료로 중화학공업기획단을 구성했다. 미국식 시장 경제논리에 물든 관료들을 배제하고 자신의 계획을 성실히 실현할 테크노크라트로 진용을 짰다. 유신 체제는 이들이 ‘정치 바람’을 타지 않고 일하도록 모든 압력을 막아내는 장치였다.
오원철 비서관은 “중화학공업 건설은 수출과 방위산업도 해결하는 ‘1석3조’였다”고 했다. 창원(기계), 여천(석유화학), 옥포(조선), 구미(전자), 포항(제철), 온산(비철금속) 등 6개 공업단지부터 방위산업 핵심 기지였다.
▲1976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경북 포항시에 있는 포항제철 2고로에서 화입(火入)을 하고 있다./포스코 제공
자주 국방 강화를 위해 율곡 사업을 승인(74년 3월15일)하고 방위세를 도입(75년 7월16일)했다. 77년 6월에는 핵무기 개발에 용이한 중수로(重水爐)형 경북 월성 원전을 착공했다. 한국은 78년 9월 180km 장거리 미사일 ‘백곰’ 시험 발사 성공함으로써 세계 7번째 미사일 기술 보유국이 됐다.
박정희는 100억달러 수출 목표를 계획보다 4년 빠른 1977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년 앞당긴 1978년(1330달러)에 각각 이뤄냈다. 1971~77년의 6년간 한국의 연평균 수출 증가율은 43.9%로 세계사적 기록이다. 71년부터 78년까지 한국 경제와 제조업 평균 성장률은 각각 11%, 16.6%에 달했다.
▲1977년 12월 26일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고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수출 100억달러 기념 석찬회'가 열렸다./조선일보DB
좌승희 박정희학술원 원장은 “중동산 두바이유가 3배 넘게 급등하는 1973~74년의 1차 오일쇼크 위기를 이겨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성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성취는 공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중단과 자신의 암살이라는 값비싼 희생을 동반했다.
◇“국력의 조직화로 진짜 민주주의 역량 배양”
박정희는 1972년 10월27일 ‘특별담화문’에서 “(유신)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74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선 “유신 체제는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自由)를 지키자는 체제”라며 이렇게 말했다.
▲1978년 '백곰' 지대지 미사일 발사 시험발사 후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ADD) 직원들을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목적은 자유를 일부 제한해서라도 ‘효율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로 진짜 민주주의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었다”며 “유신 체제에서 고통받은 민주 인사들도 자유·민주를 위해 고귀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반발을 알았으나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나 개인은 조국 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라며 “오늘의 성급한 시비(是非)나 비방보다는 민족의 유구(悠久)한 장래를 염두에 두고 내일의 냉엄한 비판을 바란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유신 7년 동안 ‘청렴한 독재자’로서 솔선수범했다는 사실이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정치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997년 출간한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정치 회고록/조선일보DB
◇비리 없고 검소하며 청렴한 독재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박 대통령의) 점심은 멸치나 고깃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육영수 여사와 나, 의전수석, 비서실장 보좌관 등 본관 식구들은 똑같이 국수를 먹었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점심은 국수였다. (중략) 박 대통령이 살던 본관 2층과 집무하던 1층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전기를 아끼려는 뜻에서였다. 선풍기는 있었지만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박 대통령은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휘두르곤 하였다.(중략) 그는 양복, 외투, 내의, 구두 등 모든 것을 국산품을 썼다.” (344~345쪽)
10월 유신과 중화학공업의 상관관계를 10년에 걸쳐 면밀하게 분석한 연구서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쓴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박정희 집권 당시 율곡사업에 관련됐던 공무원들은 놀랄 정도로 청렴했고, 박정희의 청렴을 반박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제5차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조선일보DB
박정희는 1965년 2월부터 79년 9월까지 15년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매월 상공부가 개최하는 수출진흥 확대회의와 경제기획원 주관의 월간경제동향회의에 총 299차례 참석했다
매월 두 차례씩 회의를 주재하며 경제성장을 지휘하며 세밀하게 챙긴 국가 지도자는 동시대에 박정희가 유일했다. 김형아 교수의 말이다.
“박정희는 최고사령관처럼 나라를 통치했고 그의 비서관들은 유사 전시(戰時) 내각으로 기능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었고, 특정 목적에 맞추어졌으며, 탈(脫)정치화되었다. 비서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 및 공업 정책을 운영했다는데 있다.” (257쪽)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는 1977년 6월6일자에서 한국 경제 특집 기사를 실으면서 표지에 '한국인들이 오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인터넷 캡처
◇80년대 초 자진 下野...유신은 한시적 조치?
흥미롭게도 박정희 사후(死後)에 그가 1980년대 초 자진 하야(下野)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언들이 꽤 나왔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그 근거로 78년 7월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의 그해 연말 인사를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유신 헌법 자체의 개정 문제를 은밀히 연구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신직수씨에게 이에 대한 작업 지시가 떨어졌다. 신직수씨는 (1978년) 연말 개각 때 새로 생긴 대통령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신직수씨로 하여금 유신헌법 개정 작업을 계속 담당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김정렴, 232쪽)
김정렴 실장은 또 “박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이 우리에게 통고한 주한 미 지상군의 완전 철수 시한인 82년까지 우리 손으로 만든 무기로 20개 예비사단을 완전무장시켜 놓은 다음, 자신의 대통령 임기 만료 1년 전인 83년에 하야하시겠다, 이렇게 스스로 본인의 거취 문제를 결심해 놓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성진, 75쪽)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환영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함께 손을 들고 있다./조선일보DB
하순봉 전 경남일보 회장은 회고록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 있다>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월1일 공보비서관 출신의 선우연 의원을 부산으로 불러 ‘나 혼자 결정한 비밀 사항인데, 2년 뒤 1981년 10월에 그만둘 생각이야.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핵무기를 내외에 공개한 뒤 그 자리에서 하야 성명을 낼 거야. 그러면 김일성도 남침을 못할 거야’라고 했다.” (조우석, 232쪽)
유신 기간 중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으로 국민들에게 자조(自助) 정신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었다. 1973년부터 79년까지 80여만명의 기능공을 양성한 결과, 한국은 77년 네덜란드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사상 첫 종합1위에 올랐다. 1960년 55.3세이던 한국인 기대 수명(壽命)은 79년 65.9세로 늘었고, 77년 7월에는 국민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2전시실에 있는 사진과 기념패.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기능경기대회 출전 근로자와 대화하고 있다./송의달 기자
◇“최악 조건에서 최대 업적 낸 지도자”
1975년 2월12일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贊反)’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박정희는 투표율 79.8%, 찬성율 73.1%의 지지를 받았다. 야당의 투표 거부 운동과 언론의 비판 논조 속에서도 상당수 국민들은 유신 체제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는 “박정희는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 시간 내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긴 지도자”라며 “박정희는 18년 집권 기간 중 수많은 폭력 시위 앞에서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사망한 시위자가 1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근대화는 세계적 성공 사례”라고 말했다.
1970년대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자로서 <박정희 시대(The Park Chung Hee Era)>라는 영문 단행본을 2011년에 낸 고(故)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받친 리더였다”고 했다.
▲<박정희 시대>(원제는 The Park Chung Hee Era)를 쓴 에즈라 보겔(Ezra Vogel·1930~2020) 전 하버드대 교수/조선일보DB
1972년 당시, 대한민국은 건국 24년, 6.25 휴전 19년째인 신생국이었다. 북한의 실존하는 군사 도발과 요동치는 국제 환경에서 박정희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하느님은 아니다”며 10월 유신의 깃발을 들었다.
이강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은 “1961년 5.16이 ‘반공(反共) 태세·재정비 강화’로 시작됐다면, 10월 유신은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을 향해 더욱 확고히 한 것이었다. 10월유신은 또 한 번의 5.16이었다”고 말했다.
◇“국가 경제 건설...한국인 자신감 가져”
그래서 ‘10월 유신’의 가치와 기여도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박정희에게 민족사를 위한 충정이라 할만한 다른 의도는 없었는가. 유신으로 인한 민주제 정치의 훼손이라는 비용보다 그로인한 국가 경제의 건설이라는 편익이 훨씬 컸다는 재평가의 여지도 있지 않나”고 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1943~) 박사. 시카고대 석좌교수를 지냈고 한국 현대사와 현대 국제정치를 전문 연구해오고 있다./조선일보DB
▲브루스 커밍스 박사가 1997년에 쓴 저서/인터넷 캡처
한국현대사를 좌파 시각에서 해석하는 브루스 커밍스 박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누구도, 심지어 슘페터도 한국이 첨단전자 기술 분야에서 미국, 일본과 어깨를 겨루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 대추진(the big push·유신 체제에서 중화학공업화)후 한국은 종합적인 산업구조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그것은 위대한 성공(a grand success)이자, 한국의 독립 선언이었다. 한국인들은 이후로 어깨를 펴고 자신만만하게 걸어다니게 됐다. 바로 이것이 박정희를 전후(戰後)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지도자로 만들고 있다.” (Cumings, 325~326쪽)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한 프로이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1815~1898)
독일 통일을 이룬 철혈(鐵血) 재상 비스마르크는 “신(神)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다”라고 했다. 달리 표현하면 ‘신’은 아무 때, 누구에게나 옷자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다수 정치인들은 신의 미세한 움직임을 낌새조차 채지 못한다. 한국민을 위해 박정희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신의 옷자락을 잡아챈 진짜 정치가가 아닐까?◎
◇참고한 책
김성진, 박정희 시대(1994),
김정렴, 아, 박정희(1997)
김형아,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2005),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유신 50주년 그때 그리고 오늘(2022),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2006),
이강호, 박정희가 옳았다(2019)
이춘근, 10월유신과 국제정치(2018),
조갑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2009),
조우석, 숨결이 혁명 될 때(2022),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1997/2005)
<저자명 가나다 순서>◎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