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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2/ 유상철의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 제1화 길을 떠나며 - (31) 금에도 순금은 없다는 데…시진핑 매형의 페이퍼 컴퍼니 구설수

상림은내고향 2022. 10. 18. 20:53

중국 전문가들의 생각12/

◆유상철의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

2015-12-08  중앙일보  중국전문 기자

1화 길을 떠나며… 100리를 가려는 자는 90리가 반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천하가 태평하지 못하다(天下不太平)’는 말을 즐겨 쓰곤 한다. 1998 3월 중국 총리에 오른 주룽지(朱鎔基)가 베이징(北京)의 인민대회당에서 이 말을 마치 한숨처럼 토해내던 걸 들은 게 엊그제 같다.

한데 그로부터 무려 17년이 지난 2015 9, 전승절(戰勝節)이라 일컬어지는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및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 행사에서 중국의 5세대 리더 시진핑(習近平)이 “세계는 여전히 매우 태평하지 못하다(世界仍?不太平)”고 말하는 걸 들으니 감회가 새롭기 그지 없다.

천하가 어찌 태평할 수 있을까. 세상은 늘 변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은 또 내일과 다르다. 올해 핀 꽃은 지난해 핀 꽃과 같지 않으며 내년에 필 꽃 또한 올해의 그 꽃은 아니리라.

살아 있는 생명체 모두가 분주히 활동하며 이 세상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있으니 세상은 변화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라는 것 자체가 불안정을 뜻하는 것일지니 천하가 어찌 태평할 수 있을까. 그저 사람들의 허망한 바람일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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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들어 세상의 변화 중심에는 중국이란 나라가 놓여 있다.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이면서도 한때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100년의 치욕(百年恥辱)’을 겪었네 어쩌네 하는 중국이 다시 제 자리를 되찾기 위해 바삐 움직이면서 일고 있는 변화다.

그리고 현재 그 중국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핵심 인물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자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며 또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중국을 어디로 이끌어 가려 하는 것일까.

 

시진핑이 제시하고 있는 중국꿈(中國夢 China Dream)은 무언가. 중국꿈이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택하고 있는 전략은 또 무언가. 시진핑의 중국이 숨가쁘게 창출해 내고 있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그리고 그런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을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중국에 ‘100리를 가려는 자는 90리가 반이다(行百里者半九十)’라는 말이 있다. 100리가 골인 지점인데 90리를 왔어도 절반 정도 온 것으로 여기라는 이야기다. 남은 10리를 가기 위해선 더 신중하고 진지하게 노력을 기울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중국에 대한 이해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쉽사리 잡히지 않은 게 중국의 모습이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색 여정을 떠나고자 한다

 

 

2화 한국에 중국은 무엇인가... 이웃은 선택할 수 있지만 이웃나라는 선택할 수 없다

‘중국’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몇 해 전 중앙일보의 고품격 일요 신문인 중앙선데이가 중국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냐는 연상(聯想) 단어 설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자장면(炸醬麵)에서 황사(黃砂)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답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이 중국 할 때 가장 먼저 머리 속에 그렸던 건 ‘크다 또는 넓다’는 개념이었다. 이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인구가 많다’가 세 번째 위치에 올랐다.

흔히 중국을 가리켜 ‘땅은 넓고 물산은 풍부하며 인구는 많다(地大物博人多)’는 말을 하는데 그 함의가 우리의 의식 속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참고로 자장면은 여섯 번째, 황사는 여덟 번째의 순위를 기록했다.

중국은 우리에게 천()의 얼굴로 다가온다. 젊은 청춘에겐 새로운 유학의 땅이 되기도 하고 중년의 비즈니스맨들에겐 일터가 되기도 한다. 누구는 중국에서 성공해 미소가 떠나지 않지만 또 누구는 『중국 가서 망하는 법』을 책으로 낼 정도로 한숨을 짓기도 한다.

중국은 과연 한국에 무엇인가. 이와 관련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15 5 23일 중일(中日)우호교류대회에서 한 말을 인용해도 무방할 듯싶다. 시진핑은 일본대표단을 향해 “이웃은 선택할 수 있지만 이웃나라는 선택할 수 없다(隣居可以選擇 隣國不能選擇)”고 말했다.

이웃나라 관계라는 것이 그냥 이웃처럼 서로 싫다고 짐을 싸서 이사 갈 형편이 되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한중 관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국이 우리에게 있어서 변함 없는 사실 하나는 바로 이웃국가라는 점이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이웃나라인가. 2012 2,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이던 시진핑(習近平)의 미국 방문에 대한 LA 타임스의 보도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미 언론은 시진핑의 도착 소식을 전하며 ‘프레너미(frenemy)가 왔다’는 표현을 썼다.

프레너미는 친구(friend)와 적(enemy)의 합성어다.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며 유지되는 친구 관계를 뜻하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된다. 중국을 보는 이런 미국의 시각이 우리의 시각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중국은 경우에 따라 친구도 적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애증(愛憎)이 한데 섞여 있는 상대는 정말로 대하기가 어렵다. 2010년 중국의 안방 극장을 점령한 건 95집의 장편 드라마 ‘신삼국(新三國)’이었다. 여기에서 오()나라의 전략가로 등장하는 노숙(魯肅)의 대사가 이런 고민을 잘 대변해준다.

노숙은 말한다. “적은 상대하기 쉽다(敵人好對付). 벗 또한 상대하기 쉽다(友人好對付). 그러나 적이면서 또 벗인 자는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但是亦敵亦友却最難對付). 그는 언제든 너의 큰 적이 될 수 있고(他隨時可以成爲?的大敵) 또 그는 언제든 너의 아주 가까운 벗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他隨時可以成爲?的盟友)”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숙의 말은 이어진다. “결국 그를 적으로 만들 것인지(究竟視他爲敵) 아니면 그를 친구로 만들지는(還是視他爲友) 우리의 지혜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却要看我們的智慧了)

이 같은 노숙의 말은 마치 중국을 친구로 만들지 아니면 적으로 돌릴 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지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 틀린 말 같지는 않다. , 그러면 우리에겐 어떤 지혜가 필요한 것일까.

 

방법을 찾을 땐 병법(兵法) 전문가인 손자(孫子)에게 기대는 게 좋다. 『손자』 ‘모공편(謀攻篇)’에 익숙한 말이 나온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가 그것이다.

이어지는 말은 상대를 모른 채 나만 알고 싸우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는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다. 또 다시 이어지는 말은 상대도 모르고 나도 모른 채 싸우면 매 번 반드시 위태롭다는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다.

우리가 중국 알기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 관련 일을 도모한다면 절반은 지고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은 그런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3화 시진핑이 걷는 길은?…등체모용(鄧體毛用)의 

중국에서는 물길이 곧게 나 있으면 강(), 구불구불하게 흐르면 하()라 한다. 따라서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의 구별은 물길의 생김새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데 황하의 흐름이 이리저리 몹시 심하게 굽이치다 보니 ‘하동삼십년(河東三十年) 하서삼십년(河西三十年)’이라는 말이 나왔다. 황하의 동쪽에 있던 마을이 30년을 지나고 보니 어느새 황하의 서쪽에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변화무쌍한 인간사(人間事)를 비유할 때 자주 쓴다.


건국 60여 년을 지난 중화인민공화국의 현재가 이 말을 떠올리게 한다. 대략 30년을 주기로 역사의 변곡점(變曲點)을 그려왔던 까닭이다. 시진핑이 중국의 1인자인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되던 2012 11월 이전까지의 중국 역사를 우리는 크게 ‘두 개의 30년’으로 나눌 수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30년과 덩샤오핑(鄧小平) 30년이 그것이다. 1949년 건국 이후 1978년 덩샤오핑이 확실하게 집권하기 이전까지의 시대를 마오의 30년으로 부를 수 있다. 이 시기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두 개다. 전쟁과 투쟁이다. 전쟁은 국제정세와 관련한 것이다. 마오는 국제정세와 관련해 대국(大國)간의 전쟁을 늘 염두에 뒀다. 처음엔 미국 나중엔 소련의 침공을 염려하며 이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투쟁은 ‘계급투쟁’을 말하는 것으로 국내적 상황과 결부해서다. 마오 시대엔 갖지 못한 자와 가진 자간의 투쟁인 무산계급과 유산계급간의 투쟁이 끊임없이 강조됐다. 그런 마오의 30년 시대는 관료는 비교적 청렴했고 민중은 단결됐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배고프고 추운 30년의 시대이기도 했다.

반면 “자네가 일을 맡으면 내 마음이 놓인다(?辦事 我放心)”는 마오의 말에 따라 후계자가 됐던 화궈펑(華國鋒)을 따돌리고 권좌에 오른 덩샤오핑의 30년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무얼까. 역시 두 개로 귀결된다. 평화와 발전이 그것이다. 평화는 국제정세와 관련해서다. 덩은 당분간 국지전(局地戰)은 몰라도 큰 나라 사이의 전쟁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일단 평화를 국제 흐름의 대세로 본 것이다.

따라서 국내적으론 발전을 추구해야 할 시기라 믿었다. 발전은 특히 경제발전을 말한다. 덩은 우선 마오가 쳐놓은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싶었다. 사상해방(思想解放)을 외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한 이유다. 그래서 세 가지에 유리하기만 하다면(三個有利于) 어떤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종합국력 증진에, 생산력 발전에, 인민의 생활개선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장(市場)’ 개념의 도입은 그래서 가능했다. 그런 덩의 30년 동안 배고픔은 추억이 됐고 국력은 신장됐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커졌고 부패는 인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덩의 30년은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의 치세(治世)까지를 포함하는 시기다.

마오의 30년과 덩의 30년을 이어 받은 시진핑이 문을 열 중국의 향후 30년은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시진핑이 2013년 초 중앙당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시진핑은 “개혁개방 전후의 역사는 서로 부정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덩샤오핑이 78년 개혁개방을 추구한 것을 계기로 마오의 30년과 덩의 30년을 나누던 기존 관점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시진핑은 말한다. 마오의 30년과 덩의 30년은 “서로 대립하는 것도 또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시진핑은 마오가 사회주의의 기본 제도를 쌓았기에 그 토대 위에서 덩의 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 민간에선 ‘중국을 일으켜 세운 것은 마오쩌둥이요, 살찌운 건 덩샤오핑’이라는 말이 떠돈다. 시진핑은 바로 마오의 30년과 덩의 30년 등 지난 60년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려는 것이다.

그런 시진핑의 행보에 대해 세간에서 나오는 말이 ‘시진핑이 걷고자 하는 길은 등체모용(鄧體毛用)의 길이다’라는 것이다. 등체모용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것을 기본으로 하되 서양의 것을 활용한다는 뜻)에 빗댄 표현이다. 즉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실용적인 경제발전 노선을 계속 추구하되, 정치적으로는 군중의 힘에 의존하려 했던 마오쩌둥의 권위주의 스타일을 차용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경제적으론 자본주의 논리에 가능한 최대한 충실 하려고 하면서도 정치적으론 매우 강경한 중국의 모습을 보게 될 공산이 크다. 시진핑이 걸으려 하는 등체모용의 길은 19세기 중엽 이래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중국의 행보에 다름 아니다.

 

방법을 찾을 땐 병법(兵法) 전문가인 손자(孫子)에게 기대는 게 좋다. 『손자』 ‘모공편(謀攻篇)’에 익숙한 말이 나온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가 그것이다.

 

④ 중국이 미국을 이기는 길... 90년의 마라톤 레이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어떻게 변모해나갈까요. 그에 맞춰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나가야 할까요.

 

 

시진핑 시대의 키워드는 ‘중국꿈(中國夢, China Dream)이다. 2012년 11월 총서기 취임 후 2주 만에 그가 중국 인민에게 제시한 비전이다. 한데 시진핑이 이를 거론하기 2년 전인 2010년 이 중국꿈이란 말이 이미 중국 국내외적으로 한 차례 주목을 받은 바 있다.

2010년 1월 출판된 『중국꿈(中國夢)』이란 책을 통해서다. 중국 국방대학 교수 류밍푸(劉明福)가 저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중국 언론은 물론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중미 수교의 다리를 놓았던 헨리 키신저 또한 2011년 펴낸 『중국 이야기(On China)』에서 수 차례 『중국꿈』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중국 국방대학 정치위원인 류야저우(劉亞洲) 상장(上將)이 주인공이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중 수교 이전 신분을 위장하고 여러 차례 한국을 드나들며 나름대로 한중 수교를 위해 애를 쓴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그의 추천사 내용이 아니다. 그의 신분이다. 류야저우의 장인은 중국 국가주석을 지낸 리셴녠(李先念)이다. 부인은 리셴녠의 딸인 리샤오린(李小林)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이다. 리샤오린은 1953년생으로 시진핑과 동갑내기다. 어릴 적 함께 자랐고 현재도 막역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진다.

류밍푸의 『중국꿈』이 주목을 받는 건 시진핑 인맥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전하고자 하는 골자는 ‘중국은 어떻게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것인가’이다. 류밍푸는 중국이 미국을 뛰어 넘는 대국(大國)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대국인가. 네 가지 대국이다. 경제대국과 과기(科技)대국, 군사대국, 그리고 끝으로 문화대국이다. 경제적 힘에서 시작해 과학기술이 뒷받침되는 무력을 갖추고 마지막에는 남의 마음까지 살 수 있는 세계 문명의 스승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게 중국꿈이다.

중국이 세계 넘버 원의 대국이 되기 위해선 미국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과의 경쟁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류밍푸는 세 가지 싸움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결투식이다. 이는 전쟁을 말한다.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하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다.


두 번째는 권투식이다. 이는 냉전(冷戰)을 뜻한다. 글로벌 시대엔 서로 협력할 것도 많은데 냉전 모델을 따를 경우 중미 모두 피해가 막심하다. 역시 추구할 바가 아니다. 세 번째는 육상식이다.

육상 종목 중 100m 뛰기나 1만m 달리기가 아니다. 류밍푸가 말하는 바람직한 중미 경쟁은 마라톤 레이스다. 중미 경쟁은 지구전이며 문명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류밍푸는 마라톤의 42.195Km 거리를 90년의 시간으로 환산한다. 즉 미국과의 경쟁엔 90년이 소요되는데 이 90년을 30년 단위로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첫 30년은 이 책이 2010년 정초 출판됐으니 2040년까지다. 이 기간 중국은 국가 GDP에서 미국을 추월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30년을 투자해 2070년까지는 종합국력에서 미국을 따라 잡자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시 30년의 세월을 이용해 1인당 GDP에서 미국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즉 2100년에는 미국보다 잘 사는 중국을 건설하자는 이야기다.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다 19세기 중엽 이래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해 100년의 치욕을 겪었던 중국이 향후 90년의 시간을 투자해 즉 22세기 진입과 함께 다시 세계 넘버 원의 국력을 회복하자는 게 바로 류밍푸의 『중국꿈』이 말하는 골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류밍푸가 설계한 시간표대로 중국이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겁나는 건 세계의 많은 경제 기관이 중국의 국가 GDP가 미국을 추월하는 시점을 2040년보다 훨씬 빠른 2020년대, 늦어도 2030년대로 전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⑤ 천안문 성루의 마오쩌둥…한쪽 귀만 그려 한쪽 말만 듣는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어떻게 변모해나갈까요. 그에 맞춰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나가야 할까요.

 

시진핑(習近平) 시대의 비전인 중국꿈(中國夢)은 무얼 말하나. 후술하겠지만 중국꿈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우리는 천안문 광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한데 천안문 광장에 가면 꼭 만나게 되는 인물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또는 바람이 부나 1 365일 한결같이 천안문 성루를 지키고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가 주인공이다. 오늘은 이 마오 초상화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떤 이는 마오의 초상화를 보고 사진을 크게 확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그린 초상화다. 유화(油畵). 30평방미터 크기의 이 대형 초상화는 신중국 건국에 맞춰 1949 10 1일 처음 등장했다.

 

▲마오 초상화 변천사[첫번째 사진 출처 노컷뉴스]

 

마오의 첫 초상화를 그린 화백은 당시 중앙미술학원에 재직하던 저우링자오(周令?)였다. 그가 그린 마오는 지금과는 딴판인 팔각모(八角帽)를 쓰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마오 주석은 내게 정치가라기보다는 호쾌하고 풍류를 아는 문인(文人)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컸다”는 게 저우 화백의 설명이다. 마오는 낭만적인 혁명가로서 당시 중국인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국 초기 혁명의 낭만이 넘치던 중국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국가의 틀이 잡히며 초상화 또한 정형화한 모습으로 바뀐다. 장전스(張振仕) 화백에 의해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 표준상이 정립됐다. 그러나 그 바통을 이어받아 1964년부터 76년까지 마오를 그렸던 왕궈둥(王國棟) 화백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狂氣)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홍위병이 몰려 와 몽둥이 찜질 세례를 퍼부었다. 초상화를 그릴 때 “마오 주석의 한쪽 귀만 그려 마오 주석이 한쪽 말만 들을 우려가 있다. 이는 화가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는 것이다.


왕 화백에 따르면 중국 당국이 애초에 정한 초상화의 표준상이란 한쪽 귀만 나오게 하는 측면상이지, 양쪽 귀가 다 나오는 정면상은 아니란 것이다. 그를 인터뷰했을 때 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면서도 흥분해 목소리가 높아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튼 터무니 없는 이유로 왕 화백이 곤욕을 치른 이후 천안문 성루의 마오 초상화는 이제까지 모두 두 귀가 나오는 정면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혹시 누가 아나. 어느 날 갑자기 시대가 바뀌어 제2의 홍위병이 튀어 나올지’ 하는 걱정이 잠재돼 있는 것이다.

참고로 천안문 성루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는 마오 초상화는 1년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매년 10 1일 중국 국경절에 맞춰 새로 그려진다. 매년 8월 말부터 작업에 들어가 9월 중순 전후해 일을 마친다.

초상화 완성엔 짧게는 2,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린다. 가로 5미터, 세로 6미터 크기로 근거리와 중거리, 또 원거리 모두에서 마오의 얼굴이 잘 드러나도록 그려야 하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⑥ 중국꿈이 말하는 ‘부흥’은··· ’왕(王)의 귀환’을 뜻하나

시진핑은 중국꿈(中國夢)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방점은 부흥(復興)에 찍힌다. 부흥이란 다시 부()와 흥할 흥()이 더해져 만들어진 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흥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다.

시진핑이 뜻하는 중국이 과거에 흥한 적은 언제인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때인가, 아니면 국력을 크게 떨쳤던 한() 무제(武帝) 때인가. 그도 아니면 ‘정관(貞觀)의 치()’란 말을 낳았던 당() 태종(太宗) 당시를 가리키는 것인가.

다 아니다. 중국꿈이 말하는 부흥은 1840년 아편전쟁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그렇게 말할 근거가 있는가? 있다. 천안문 광장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높이 38m의 인민영웅기념비가 답이다.

 

이 기념비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1949 9 30일 쓰여진 것이다. 이튿날인 10 1일 건국을 선포하기 전날 쓰여진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초안을 잡고 저우언라이(周恩來)에 의해 쓰여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 비문을 통해 중국 건국의 두 주역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비문은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 단락을 읽으면 ‘지난 3년 이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에서 희생된 인민영웅이여 영원하라’다.

 

 

지난 3년이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던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가리킨다. 이 때 희생된 선열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은 ‘지난 30년 이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에서 희생된 인민영웅이여 영원하라’다. 지난 30년이란 1919년부터 1949년까지의 30년을 말한다. 1919년에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있었다면 중국에선 5.4 운동이 있었다.

항일운동인 5.4 운동이 중국 공산당에게 중요한 건 바로 이 시위에서 드러난 노동자와 학생의 파워를 보고 코민테른이 이제 중국에서도 공산 혁명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보이딘스키를 파견해 중국 공산당 창당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21년 만들어진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설립 이후 스러진 많은 무명 용사를 기리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마지막 문단이다. 중국에서 곧잘 말하는 ‘재미 있는 내용은 뒤에 나온다(好戱在后)’는 경우와 같이 말이다.

세 번째 단락은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1840년 그 때부터 국내외 적들에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투쟁 끝에 희생된 인민영웅이여 영원하라’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두 건국의 주역이 개국을 선포하기 전날 목욕재계하고 선열을 추모하는 글을 쓸 때 바로 1840년의 아편전쟁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은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기 위해 벌인 전쟁으로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여기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아편전쟁의 상처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오와 저우가 돌아가고자 하는 시대는 아편전쟁 이전의 시기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이 회귀하고자 하는 시대 역시 아편전쟁 이전의 시기다.

 

 

 

아편전쟁 이전 시기의 중국, 즉 청()나라가 어땠길래 그런 것일까. 영국의 경제사학자 앵거스 매디슨은 한 국가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GDP를 연도별로 조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조사 가운데 아편전쟁 발발 20년 전인 1820년의 경우가 있다.

 

당시 청나라 GDP는 전 세계의 32.96%를 차지했다. 유럽 전체는 22.91% 정도였고 신생 국가 미국은 1.81%에 불과해 유럽과 미국을 합해도 중국보다 무려 8% 이상 모자란다. 즉 청나라가 단연 세계 1위임을 알 수 있다.

시진핑이 중국꿈에서 말하는 부흥이란 따라서 중국의 국력이 세계 최강이었을 당시로 돌아가자는 외침에 다름 아니다. ‘왕()의 귀환’을 이루자는 포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⑦ 백년치욕(百年恥辱)의 상처를 딛고 피우는 꽃…중국꿈(中國夢)

돈을 빌린 이는 고의는 아니지만 이따금 돈 빌린 사실을 까먹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돈을 빌려준 사람은 결코 잊지 않는다. 상처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어도 상처받은 이는 그 아픔을 죽어도 지울 수 없다.

시진핑의 중국은 과거 상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면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그 상처란 바로 중국인들이 ‘백년치욕(百年恥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이 터진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까지 약 100여 년을 치욕 속에 보냈다고 한다. 백년의 상처는 아편전쟁을 시발점으로 한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또한 건국 전날 선열을 추모하는 비문을 쓰면서 아편전쟁을 언급하지 않았나.


아편전쟁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세상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가 달라지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은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과 같은 존재다.

오직 중국만이 존귀하다. 나머지는 오랑캐라고나 할까. 한 마디로 중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는 대등하지 못하다. 무역(貿易)은 대등한 국가끼리 하는 것이니 중국으로선 필요 없는 것이다. 조공(朝貢)을 바치면 회사(回賜)를 할 수는 있을 망정 말이다.

이처럼 중국이 다른 모든 나라의 위에 서 있는 상태가 천하(天下)질서다. 이런 천하질서가 무너진 게 아편전쟁으로 인해서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중국은 영국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며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의 지위가 다른 나라와 같아진 세계(世界)질서가 열리는 것이다. 이후 중국에게 붙여진 별명은 ‘동아시아의 병자(東亞病夫)’다. 국토는 갈갈이 찢긴 채 한마디로 빈사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중국의 자구(自救) 노력이 없을 수 없다. 중국은 고민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서구에 기술이 뒤진 게 아닌가. 그래서 우선 유학을 근본으로 하되 서구의 군사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노력을 펼친다.

이것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번엔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을 벌이지만 이 역시 효험이 없자 중국의 정신 상태를 뜯어 고치자는 신문화운동에 나선다.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대륙의 패권을 놓고 맞붙는다. 장제스는 “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며 공산당 토벌에 나서고 마오는 “태양이 두 개면 어떠냐. 인민에게 그 중 하나를 택하게 하라”며 도전한다.

결과는 마오의 승리. 그 마오가 아편전쟁 이전 시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내세운 구호가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초영간미(超英?)’ 아니었던가. 그리고 바통을 이어 받은 덩샤오핑의 입에선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이 나왔다.

 

중국의 3세대 리더 장쩌민은 발전을 위해선 사영 기업가의 역할이 절대적임을 인식하고 마침내 공산당이 과거 타도의 대상이던 자본가의 이익까지 보장해 주겠다는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을 내세운다.

그리고 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는 30년 넘게 10% 가까운 달려온 고속 성장의 그늘을 치유하기 위해 조화사회(和諧社會)를 외친다. 중국의 5세대 영도인 시진핑의 중국꿈은 이처럼 아편전쟁 이후 간단 없이 지속돼온 중국 영광의 되찾기 운동 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편전쟁을 출발점으로 중국이 겪어 온 중국의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선 시진핑이 제시한 중국꿈의 탄생 배경을 알 수 없다. 현재 중국에 아편전쟁은 아득한 옛날의 일이 아니다. 바로 엊그제 발생한 것처럼 생생하다.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은 바로 아편전쟁의 상처를 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⑧ China Dream vs American Dream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어떻게 변모해나갈까요. 그에 맞춰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나가야 할까요.

시진핑의 중국꿈(中國夢) 즉 차이나 드림을 들으면서 곧바로 떠오르는 말이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다. 시진핑이 이야기하는 차이나 드림은 아메리칸 드림과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슨 종교를 믿든 또 피부색과 상관 없이 또한 집안이 어떻든 오직 자신의 땀과 눈물 그리고 노력에 의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인의 재능과 열정으로 개인에 방점이 찍힌다.

시진핑은 차이나 드림이 지향하는 건 세 가지로 이는 국가의 부강, 민족의 진흥, 인민의 행복이라고 설명한다. 인민을 언급하긴 했지만 차이나 드림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국가의 부강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가 갈갈이 찢기다 보니 개인의 안녕을 추구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강해야 백년치욕(百年恥辱)과 같은 수모를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중국의 오랜 공동체 의식 때문이다. 가(家)를 중시하는 중국의 문화 속에서 개인은 집단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며 집안의 체면을 위해 개인의 권리가 희생되는 것쯤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전통이 있는 까닭이다.

차이나 드림과 아메리칸 드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따라서 중국이 나라의 발전과 같은 국가의 목표 달성을 우선하는 데 반해 미국은 개개인의 행복 추구에 보다 비중을 두는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차이나 드림은 또한 단계적으로는 두 개 100년의 꿈으로 나뉜다. 중국이 말하는 첫 번째 100년의 꿈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 즈음해 중국을 전면적인 소강(小康)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사회 발전 단계를 셋으로 나눈다. 맨 처음은 온포(溫飽)사회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수준으로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부른 사회를 말한다. 1인당 GDP가 1000달러를 돌파한 2000년쯤 중국은 온포사회 목표를 달성했다고 본다.

그 다음 중간 단계는 소강사회다. 소강사회는 온포사회를 이룬 바탕에 인민들이 약간의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중국의 대도시는 이미 소강사회를 달성한 지 오래다.

그러나 중국 전체로 보면 아직도 하루 수입이 1달러가 안 되는 빈곤인구가 7000만 명에 달하듯 전면적인 소강사회를 이룬 건 아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까지 중국의 모든 인민을 소강사회에 올려 놓는 게 시진핑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인 것이다.

 

사회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대동(大同)사회이지만 이는 이루기 어려울 전망이다. 덩샤오핑이 외국 손님을 만난 자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이 추구하는 대동사회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이상사회다.

‘모든 사람이 남의 부모도 내 부모 같이 생각하고…도둑이나 불량배 같은 게 있을 수 없고…집집마다 문을 열어두고 닫는 일이 없는’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소득 몇만 달러 시대가 열린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아니다.

중국이 말하는 두 번째 100년의 꿈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 즈음해 중국을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또 문명적이고도 조화를 이루는 현대화된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바로 이런 두 개 100년의 꿈을 단계적으로 밟으며 궁극적으론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다. 다음 회부터는 시진핑이 이런 중국꿈 달성을 위해 어떤 내치(內治)와 외교 전략을 펼치고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⑨ 중국인민해방군은 국군(國軍)인가 당군(黨軍)인가

 

시진핑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비전으로 제시한 중국꿈(中國夢)을 실현하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한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권력은 총구(銃口)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맞는 말이다.

손문(孫文)이 아무리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설파하고 다녀도 혁명의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 해 줄 무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의 무력이 절대 복종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이다. 시진핑도 ‘당이 무력을 지휘한다(黨指揮槍)’는 점을 틈만 나면 강조한다. 시진핑의 힘은 바로 당권(黨權)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위원회 주석이라는 세 개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권력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공산당 총서기란 직책이다.

중국은 건국에 앞서 공산당이 먼저 만들어졌다. 1921 7월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뒤 28년의 투쟁 끝에 1949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중국인민해방군 또한 국가의 군대인 국군(國軍)이 아니라 공산당의 군대인 당군(黨軍)인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이해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란 점이다. 8개의 민주당파가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론 중국 공산당 혼자서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간다. 우리는 이를 ‘당국가체제(黨國家體制)’라고 일컫는다.

시진핑이 힘을 갖기 위해선 바로 이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위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간략히 공산당 권력 구조를 살펴보면 13억 중국 인구 중 2012년 기준으로 공산당 당원은 8500여 만 명을 넘는다.

시진핑은 청년 시절 무려 10번 가까이 입당 원서를 제출한 끝에 간신히 당원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실각한 상태에 있었기에 시진핑으로선 당원이 되는 데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8500
만 당원 중 5년마다 개최되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는 2000여 명 이상의 전국대표가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다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이 선출된다. 시진핑이 총서기로 선출되던 2012 18차 당 대회 때 중앙위원은 205, 후보위원은 171명이다.

 

2000여 명 가량의 전국대표는 잘 모르겠지만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을 더한 376명은 장관급 이상의 신분으로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로선 만약 이들과 네트워킹 할 수 있다면 중국 내 큰 자산을 갖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인민일보 사장이나 신화통신사 사장 모두 장관급이지만 인민일보 사장이 그냥 전국대표인데 반해 신화사 사장은 중앙위원의 신분이다. 당 내 서열로 따지자면 적지 않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376명의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중 25명의 정치국 위원이 선출되고 이 25명 중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배출된다. 중국은 바로 이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 중국을 이끌어가고 있는 나라다.

집단지도체제는 후술하겠지만 시진핑은 이 7명 중에서도 서열이 가장 높은 총서기다. 시진핑의 힘은 바로 중국을 이끌어가는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시진핑 시대는 2012 11 15일 시진핑이 총서기에 오름으로써 그 막을 올린 것이다.

 

 ⑩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길…먼저 사람이 되라

시진핑은 어떻게 중국 공산당의 1인자 자리에 올라 중국의 지도자가 됐을까. 중국은 국민의 직접적인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시스템이 아니라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중국 지도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살펴 보자.

몇 해 전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한 민간 단체에서 중국의 한 관리를 초청했다. 전도가 유망한 정치인이라고 하기에 친분을 쌓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식사 때가 돼 괜찮은 한식집을 잡았다.

저녁이다 보니 두 시간 가까이 식사가 이어졌다. 문제는 의자가 아닌 방바닥에 털푸덕 앉는 집을 고른 점이었다. 중국 관리를 수행한 다른 중국인들은 다리에 쥐가 나는지 모두들 쩔쩔매 모습이 역력해 이들을 초청한 한국측 인사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데 중국의 가장 중요한 손님인 그 관리는 꼿꼿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아주 태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가 씩 웃으며 답했다. “이것도 훈련입니다” 힘들더라도 남의 풍속에 따라 예를 갖추고자 노력하는 것 또한 자기 수양이라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현재 중국 최고인민법원 법원장인 저우창(周强)이다. 1960년생으로 60년대 출생한 정치인 중 유명 인사다. “앞으로 중국을 이끌 인물이 다르긴 다르구나”. 우리측 참석자들의 소회였다고 한다.

중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선출되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흔히 투명성이 부족하며 밀실 협상의 결과란 지적을 받는다. 지도자 선발이 공개적이지 않으며 보통의 경우 경쟁하는 세력 간의 타협으로 이뤄진다는 의심을 받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어떤 방식으로 선출되건 중국 지도부에 포진한 인사들의 능력이 한결같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중국의 지도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조영남 서울대 교수는 당성(黨性)과 능력, 태도의 3박자를 갖춰야 한다고 설명한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당성은 기본이다. 당 이념에 충실하고, 당 중앙과 자신의 입장을 일치시켜야 한다. 정작 문제는 능력과 태도다. 이 가운데 중국 관리들이 가장 목을 매는 게 능력 입증이라고 한다.

능력을 보이려면 자신이 쌓은 업적을 제시해야 한다. 중국 최고 지도부에 입성하기 위해선 지방의 성()정부 수장을 포함해 장관급 자리를 최소 두 번 이상은 맡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실적을 과시하고 또 인정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시진핑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시진핑은 저장(浙江)성 당서기로 있던 2005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의 국정연구조사팀을 초청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저장의 경험’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프로젝트에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등 무려 60여 명의 학자가 참여했다. 1년 반 뒤 나온 140여만 자에 달하는 보고서에선 저장의 발전 경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시진핑 이름 석 자가 전국적으로 홍보된 건 당연지사다.

그 다음은 태도다. 업무 태도, 청렴도, 이미지 등 한마디로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가다. 야심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는 여기서 발목이 잡혔다고 한다. 그는 혁명가요 부르기인 창홍(唱紅)으로 당성을, 조폭 퇴치인 타흑(打黑)으로 능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람 됨됨이가 문제였다. 가족의 부패와 살벌한 공안 정치로 원성을 사며 낙마했다. 이런 3박자 갖추기에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검증’이다. 중국은 초급 간부 때부터 공장과 지방, 중앙 부처 등 이런저런 자리를 돌게 하며 지속적인 검증을 실시한다.

 

이때 세 가지 사항을 눈여겨본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전문성이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을 얼마나 꿰고 있느냐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좋은 예다. 지질 기술자로서 11년 동안 간쑤(甘肅)성 오지를 누비고 다니던 그가 중앙으로 발탁된 계기는 업무 브리핑이었다.

해박한 그의 설명에 쑨다광(孫大光) 지질광산부 부장은 원자바오를 ‘간쑤의 살아있는 지도(甘肅活地圖)’라 극찬했다. 두 번째는 창조성이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행동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국제성이다. 부상하는 중국의 리더가 되기 위해선 국제적 안목을 갖춰야 하는 것도 필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시스템이 있기에 중국은 민주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능력 있는 지도자를 뽑을 수 있다. 우리도 참고할 게 있다. 제대로 된 검증이다. 마침 오는 4 13일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출마하는 이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 왔는지 철저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

 

 ⑪ 중국 권력 교체의 길…긍정의 역사와 격대지정(隔代指定) 시스템

지도자 교체는 어느 나라에나 모두 큰 변화를 수반한다. 민심이 바뀐 게 지도자 교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회적 격변이 따르기 십상이다.

한데 중국의 권력 교체는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이후에는 비교적 매끄럽게 굴러간다.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일까.

권력 교체와 관련해 우리는 부정의 역사, 중국은 긍정의 역사를 걷는다는 말이 있다. 역대 우리 대통령은 많은 경우 끝이 좋지 않았다. 이승만은 하야했고 박정희는 피살됐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는 옥살이를, 노무현은 투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 정치판엔 불행하게도 전임자를 밟고 일어서려는 묘한 풍토가 자리잡고 있다. 자신을 키운 이를 배신하는 게 마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으로 착각한다.

반면 중국의 정치판에선 선대의 잘못보다는 그 업적을 앞세우기 일쑤다.

‘공() 7이요 과() 3이다(七分功勞 三分過失)’라는 말로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평가를 결론지은 덩샤오핑이 대표적이다. 중국에선 후계자가 전임자의 노선을 높이 떠받드는 게 하나의 미덕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중국은 긍정의 역사를 걷는다는 말을 듣는다.

중국의 지도자 교체는 어떻게 긍정의 역사를 걷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거론할 수 있다.

하나는 권력의 승계 매커니즘이 ‘넘겨주는 쪽’의 시스템이지, ‘이어받는 쪽’의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에선 차기 지도자가 앞선 세대 지도부의 낙점에 의해 뽑히는 것이다. 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노선에 가장 충실하고 또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잘 지켜줄 수 있으며 또 자신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인재를 선발해 대권을 넘겨준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정책의 연속성’과 ‘권력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한다. 이에 따라 후계자는 자신의 정통성 근원을 전임자에 두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대를 밟고 일어선다는 것은 자기 권력의 합법성을 부인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자연히 ‘과거가 없이는 미래도 없다’는 인식 하에 과거사의 공과 과를 한데 끌어안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대와의 차별화를 꾀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선대의 장점에 자신의 독창성을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지도 이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중국이 지도자 교체에 있어서 긍정의 길을 걷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격대지정(隔代指定)’ 시스템에 있다. 격대지정이란 현 지도자가 한 세대를 건너뛰어 그 다음 세대의 지도자를 미리 낙점하는 방식이다.

 

 

덩샤오핑이 장쩌민(江澤民)을 중국의 제3세대 지도자로 확정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쩌민의 뒤를 이을 제4세대 지도자로 후진타오(胡錦濤)를 내정한 게 그 시작이었다.

중국에 ‘마누라는 남의 마누라가 좋을 수 있어도 아들과 후계자는 자기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장쩌민으로선 당연히 자신의 사람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겠지만 덩샤오핑은 후진타오를 지정해 장쩌민의 독주를 막을 수 있게 했다. 시진핑 역시 격대지정에 의한 지도자 선발 원칙의 도움을 받았다.

 

후진타오의 직계는 현재 총리인 리커창(李克强)이다. 후진타오로선 리커창을 1인자로 밀고 싶었겠지만 이번엔 장쩌민의 후원을 받는 인물인 시진핑을 자신의 뒤를 이을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정치 권력은 10년을 주기로 주인이 바뀌는 시스템을 갖추게 됐다. 자연히 집권 기간 자신의 권세가 영원할 것과 같은 전횡을 부리기 어렵다. 결국 과거를 부정하는 극단의 길 대신 과거와 타협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진핑 시대의 뒤를 이을 차기 선두 주자로 후진타오 파벌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의 후춘화(胡春華) 현재 광둥(廣東)성 당서기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금도 100퍼센트 금이 없고 사람도 완전한 이가 없다고 한다.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격대지정의 원칙이 앞으로 얼마나 더 온전하게 굴러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⑫ 중국 집단대통령제는 미국 대통령제보다 우월한가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권력이 가장 막강한 1인 지도자 체제다.

관료는 대통령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다. 소신은 온데 간데 없고 감히 대통령 귀에 거슬릴 간언은 꿈에도 꾸지 않는다.

중국은 어떨까.

시진핑 국가주석의 1인 체제일까.

이런 말을 들으면 중국인들은 손사래를 친다.

중국은 1인이 권력을 전횡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집단으로 권력을 분점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집단지도체제라는 것이다.

 

중국은 공산당 서열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 정치국 상무위원들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인 것이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멤버 수는 시기별로 다른데 보통 5~11명으로 구성된다.

정치국 상무위원 중 톱 랭커인 총서기는 ‘동급자 중 첫 번째(first among equals)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정치국 상무위원 모두 똑 같이 한 표씩에 해당하는 권한을 행사하며 총서기는 이들 가운데 첫 번째에 불과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1927년 처음 출범해 1935년 마오쩌둥이 자신의 공산당 내 권력을 확립한 쭌이(遵義)회의 이후엔 마오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형성됐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독재 체제가 확립되며 집단지도체제란 말은 사라졌다. 이를 부활시킨 게 덩샤오핑이다. 덩은 자신의 사후 중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경제개혁을 계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이 우선이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선 마오쩌둥과 같은 ‘괴물 황제’의 등장을 예방해야 한다고 봤다. 그 결과 덩이 고심 끝에 부활시킨 게 바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의한 집단지도체제였다. 이는 각 파벌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어 특히 좋았다.

후진타오 집권 2기 시대엔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중국을 통치하는 것을 두고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구룡치수(九龍治水)’라는 말까지 나왔다. 시진핑 시대엔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포진했다.

 

후안강(胡鞍鋼) 칭화(淸華)대 교수는 이 같은 집단지도체제를 중국 특유의 ‘집단대통령제(集體總統制)’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집단대통령제는 다섯 가지 특징을 갖는다. 집단으로 학습하고 집단으로 연구하며 집단으로 결정하고 집단으로 업무를 나눠 협력하며 집단으로 세대교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또 보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1인 대통령제보다 더 민주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2012 7월엔 이 같은 생각을 정리해 『중국집단지도체제(中國集體領導體制)』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늘 ‘제왕적(帝王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 현행 우리 대통령제로선 참고할 부분도 적지 않아 보인다. 집단 지성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후안강의 책은 그 해 나오자마자 휴지통으로 가는 운명이 됐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이야기는 다음 회로 이어진다.


 ⑬ 시진핑이 ‘1인 체제’ 구축에 나선 이유는?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중국은 어떻게 변모해나갈까요. 그에 맞춰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하고 도전해나가야 할까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후안강 칭화대 교수가 중국 최고 지도부 소식에 밝다고는 하지만 때론 흐름을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가 책까지 펴내며 중국의 집단대통령제가 미국의 1인 대통령제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찬양하고 있을 때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1인 체제’를 굳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1인자 행보가 외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13년 말부터였다. 당시 중국을 찾았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당초 리커창 총리와의 만찬이 예정돼 있었다. 방중 목적 또한 경제 문제에 집중돼 있었다. 과거 중국 경제는 총리가 맡고 있었기에 이상할 게 없는 일정이었다.

한데 중국측에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만찬을 리커창 총리가 아닌 시진핑이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이젠 경제도 시진핑이 직접 챙긴다는 시그널에 다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진핑은 이어 관례대로라면 총리가 주재해야 할 중앙경제공작회의도 자신이 직접 회의를 이끌고 또 중요 담화까지 발표했다.

그러고 보니 2013 11월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설립이 결정된 ‘전면개혁심화영도소조’와 ‘국가안전위원회’ 모두 결국엔 시진핑이 이끌게 됐다.  

중국은 진()·한() 이래 황제와 재상의 권한을 나누는 ‘제상(帝相) 분권’의 전통이 있다.

중국 공산당 또한 총서기는 정치와 외교·안보 등 총괄적 업무를, 총리는 경제를 중심으로 구체적 사무를 맡는다. 그리고 당내 여러 소조를 두고 이를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나눠서 관리한다.

이른바 후안강이 말하는 집단 지도체제다. 총서기는 여타 정치국 상무위원 중 한 명으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총리가 총서기가 이끄는 소조에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누가 누구를 이끈다는 인상을 주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한데 전면개혁심화영도소조에서 조장은 시진핑, 부조장은 리커창으로 분명한 상하의 차이를 뒀다.

시진핑은 이제 당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전면개혁심화영도소조 조장, 국가안전위원회 주석 신분으로 확고하게 1인 체제를 다져가고 있다.

마오쩌둥 이래 최대의 권력을 확보했으며 외관상으론 덩샤오핑의 위치를 능가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가 안정화, 나아가 제도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던 시점에서 시진핑의 1인 체제 구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개혁의 필요성 때문이다. 시진핑은 2013 10월 “이제 중국의 개혁은 단단한 적을 공격해야 하고 깊은 물을 건너야 하는 시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의 개혁은 기존 이익구조를 타파해야 하는 고비를 맞았는데 이를 어느 한 부문에만 맡겨선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力不從心)’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시진핑이 직접 나서 개혁의 완성이라는 대임(大任)을 수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역사학자 샤오궁친(蕭功秦)이 “중국은 현재 강인(强人)을 필요로 한다. 권력 집중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배경이다.  

시진핑의 1인 체제를 가능케 하는 둘째 요인은 보시라이(薄熙來)에서 시작해 저우융캉(周永康)으로 불똥이 튀며 불거진 집단지도체제의 폐해다. 부패 혐의로 처벌된 저우의 진짜 문제는 보시라이를 감싸면서 보여줬던 그의 무리한 행태다.

저우는 보시라이 실각을 막으려 무력까지 동원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른바 2012 3월 말의 정변설이다. 저우는 부하를 동원해 중국 권력의 심장부인 중난하이(中南海) 포위를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어떻게 이런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저우는 당시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서열이 가장 낮았다. 그러나 자신이 맡고 있던 정법위원회의 권력을 극도로 팽창시킨 결과 공안과 무장경찰, 검찰, 국가안전부 등에 파벌을 형성할 수 있었고 나아가 무력 시위 내지 정변 도모까지 꿈꿀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됐다. 집단지도체제하의 분업 시스템에 따라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저우가 맡고 있는 분야엔 전혀 간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집단지도체제는 황제와도 같았던 마오쩌둥 1인 치하의 폐해가 재발되는 걸 막기 위해 덩샤오핑이 부활시킨 것이다.

한데 그 시스템도 30년 정도 작동하다 보니 저우의 경우처럼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결과 다시 권력의 집중이 희구되며 시진핑에 의한 1인 체제 탄생을 자극하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돈다.

 

(14) 시진핑 국가 주석의 비중은 리커창 총리의 두 배?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상대의 실패가 곧 나의 승리’라는 인식 아래 무조건 상대가 제기하는 정책엔 반대부터 하고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상대가 잘못해야 내가 다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효과적인 국정 운영이 안 된다.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름 아래 정작 필요한 정책이 타이밍에 맞춰 실시되지를 못한다. 결국 피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중국은 어떨까. 덩샤오핑이 마오쩌둥과 같은 ‘괴물 황제’가 재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활시킨 게 중국 공산당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의한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다.

5~11
인으로 구성되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상무위원들은 이론상으로는 똑 같은 파워를 갖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총서기는 단지 여러 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 중 첫 번째에 지나지 않는다(first among equals)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덩샤오핑은 그러나 이래가지고는 통일된 국정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 봤다. 총서기에게 보다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이후 갑작스레 발탁한 장쩌민의 경우 권위가 부족해 이를 보완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장쩌민에게 부여한 게 ‘핵심(核心)’이라는 타이틀이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장쩌민을 핵심으로 하는(以江澤民爲核心的)’ 당 중앙이 무얼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한다는 식의 표현을 써 왔다.

장쩌민은 이 ‘핵심’ 타이틀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릴 때 자신의 말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을 이은 후진타오가 이 ‘핵심’ 지위를 받았느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일부 중국 매체에 ‘후진타오를 핵심으로 하는’ 표현이 나오긴 하지만 후진타오 집권 시기 대부분의 표현은 ‘후진타오를 총서기로 하는(以胡錦濤爲總書記的)’ 당 중앙 운운이다.

시진핑은 어떨까.

역시 ‘시진핑을 총서기로 하는(以習近平爲總書記的)’이라는 표현을 쓴다.

장쩌민이야 덩샤오핑이 핵심 타이틀을 주었지만 후진타오나 시진핑으로선 자신이 이런 타이틀을 붙이는 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시진핑의 집단지도체제 내 비중이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등가(等價)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통신사가 시진핑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한 지 약 한 달 정도 지난 2012 12 25일 ‘중국 고위층의 새로운 진용(中國高層新陣容)’이라는 제목 아래 새 지도부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내용이야 시진핑 지도부 7인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을 최대한 변호하는 것이지만 눈에 띄는 것은 7인 소개를 위해 신화사가 할애한 글자의 수다. 서열 3위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부터 7위인 장가오리 상무 부총리까지는 한 사람당 3000자씩을 썼다.

 

이게 서열 2위 리커창 총리를 소개할 때는 3배 가까운 8000자로 뛰었다. 그리고 1인자 시진핑을 위해선 서열 3~7위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1 5000자를 사용했다. 리커창 총리보다도 두 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글자 수의 많고 적음을 갖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집단지도체제 내 각 상무위원의 파워를 짐작하게 해 주는 하나의 잣대라고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15) 시진핑의 1인 체제 굳히기 작전…소조정치(小組政治)를 주목하라

 

시진핑은 7인으로 구성된 집단지도체제를 사실상 자신의 1인 체제로 만들기 위해 어떤 전략을 썼을까. 소조정치(小組政治) 활용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의 최상층부에 영도소조(領導小組)를 만들고 자신이 이 소조를 이끄는 형식으로 말이다.

영도소조는 중국 공산당의 임시기구다. 중국의 정상적인 당정(黨政)통치 방식에 대한 보충이라고 설명된다. 특정 시기에 만들어져 여러 부문을 포괄하는 권력을 갖고 특별 임무를 수행한다.

상설 기구이긴 하지만 고정적인 사무실이 없고 또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평상시엔 종적이 보이지 않다가 큰일을 만나면 모습을 드러낸다(尋常無踪迹 大事現眞身)’는 말을 듣곤 한다.

재미있는 건 리커창 총리가 지휘하는 중국 국무원이 2013년 봄 이런저런 영도소조(領導小組)를 무려 30여 개나 없앤 점이다. 당시엔 정부 기구 간소화와 권한을 하급기관으로 이양하는 간정방권(簡政放權)의 방침이 표방됐다.

그러나 웬걸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4년부터 상황은 180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4 1월 말 ‘전면 개혁심화 영도소조’가 문을 열었다. ‘개혁’은 시진핑 정권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그 개혁을 책임지는 곳이다. 멤버 구성도 최고다. 조장 시진핑(習近平), 3명의 부조장엔 리커창과 류윈산, 장가오리 등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4명이 이 소조의 지도부에 포진했다. 중국 국정의 최상위 기구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어 중국의 대내외 안전문제를 총괄하는 ‘국가안전위원회’가 생겼고, 2월 말엔 “인터넷 안전 없이 국가의 안전이 없고, 정보화 없이 중국의 현대화는 없다”는 시진핑의 말에 맞춰 ‘인터넷 안전 및 정보화 소조’가 닻을 올렸다.

3월 중순에는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戰之必勝)”는 시진핑의 요구에 따라 ‘국방 및 군대 개혁심화 영도소조’가 출범했다. 주목할 건 이 모든 소조 또는 위원회의 수장이 시진핑이라는 점이다.

시진핑은 당 총서기, 국가 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당·정·군의 3권을 쥐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소조를 만들고 또 직접 책임자가 되고 있는 걸까. 두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첫 번째는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비서 출신인 우자샹(吳稼祥)의 분석이다.

우자샹에 따르면 개혁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칼을 들이댔다가는 큰일 난다. 모든 부서, 모든 이권은 알게 모르게 권력의 심층부와 선이 닿아 있다. 이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기득권 세력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

이럴 경우 좋은 방법은 아예 새로운 기구, 즉 새 영도소조를 만들어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와 같은 원성, 나아가 보복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설명엔 의문이 따른다. 당에 소조를 만드는 대신 정부 기관인 국무원에 별도의 기구를 두고 문제 해결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진핑의 ‘소조정치(小組政治)’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이 나온다.

그것은 시진핑이 당권(黨權) 강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당이 곧 국가인 당-국가(-國家) 체제다. 공산당이 정부 부처 위에 군림하는 이당영정(以黨領政)은 마오쩌둥 시기가 절정기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당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붉은 마음()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자연히 당정(黨政) 관계에서 당()보다는 정()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장쩌민과 칭화(淸華)대학 수리공정학과를 나온 후진타오 시대의 20년 동안 중국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중국 경제의 급속한 부상을 이끌었다.

 

그러나 찬란한 햇살 뒤엔 언제나 어두운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고위 기술관료 아버지를 둔 자제들, 즉 관이대(官二代)의 부패가 그것이다. 이들은 부모가 맡고 있는 부문에서 권력과 금전이 유착된 권전교역(權錢交易)을 통해 무한대의 이익을 탐했다.

시진핑은 이제 이 같은 비상 시기를 맞아 당의 비상 기구인 영도소조를 이용해 정()의 역할이 커지면서 생긴 부작용을 치유하겠다는 계산이다. 아울러 자신이 직접 수장을 맡았다. 소조정치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지겠다는 이야기다. 배수의 진을 쳤다.

그래서 중국에선 후진타오 시기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중국을 다스리는 구룡치수(九龍治水)의 세월을 지나 시진핑이라는 하나의 달을 중심으로 뭇 별이 그 주위를 도는 중성공월(衆星拱月)의 시대를 맞았다는 말이 나온다. 시진핑의 1인 체제는 바로 자신이 최고 위치에 있는 공산당 안에 ‘소조(小組)’라는 여러 임시기구를 만들고 그 중 중요한 소조들을 자신이 직접 이끄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16) 백성은 먹는 걸 하늘로 삼는다…시진핑의 먹거리 정치

 

시진핑의 1인자 굳히기는 권력으로 밀어 부친다고만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중국 인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인민의 마음은 어떻게 얻나. 선정(善政)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친민(親民)의 이미지 수립이 필요하다.

친민의 이미지 수립을 위해선 밥을 같이 먹는 식구(食口)임을 부각시키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런 까닭인지 시진핑은 틈만 나면 서민과 어울려 식사를 한다. 이른바 시진핑의 ‘샤오츠(小吃, 간단한 먹거리) 정치’다.

시진핑의 먹거리 정치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그가 당 총서기에 오른 2012년 말부터였다. 그 해 12 29일 시진핑은 영하 10도를 밑도는 매서운 추위를 뚫고 베이징에서 약 300㎞ 떨어진 허베이(河北)성의 푸핑(阜平)현으로 민정 시찰을 떠났다.

이때 중국 민간의 관심을 모은 건 시진핑의 식단이었다. ‘사채일탕(四菜一湯·네 가지 반찬에 국 한 그릇). 시진핑이 그날 먹은 건 현지인들이 흔히 먹는 채소와 닭고기볶음 등이었다. 물론 술은 없었다. 이후 이 사채일탕은 시진핑의 지방 시찰 때 표준 식단이 됐다.

시진핑의 검소한 식사에 중국 대륙이 열광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년 후였다. 2013 12 28일 점심 무렵 베이징 웨탄(月壇)공원 부근에 위치한 칭펑(慶豊) 만두집에 시진핑이 불쑥 나타났다.

시진핑은 줄을 서지 말고 주문하라는 주인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가 주문한 것은 시민들의 추천에 따라 돼지고기와 파가 속으로 들어간 만두, 그리고 간볶음과 갓요리였다.

모두 21위안( 3560). 이는 이후 ‘주석(主席) 세트’라는 이름으로 칭펑 만두집의 ‘대박’ 메뉴가 됐다. 시진핑은 만두집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점심을 즐겼다. 이 모습이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를 타고 중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두고두고 회자가 됐다.

2014
2월 중순 시진핑이 대만 국민당의 원로 롄잔(連戰)과 회견한 뒤 함께 식사할 때는 고향 산시(陝西)성의 대표적 서민 음식인 양고기 국물에 넣은 만두가 등장했다. 시진핑의 한 고향 사람은 시진핑이 대접째 들어 국물을 마시는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말한다.

시진핑이 서민 음식을 즐기는 것은 초급 관리 때부터 다져진 습관이다. 그가 관리로 첫 발을 내디뎠던 허베이성 정딩(正定)현의 옛 관리들은 시진핑과 함께 밥 먹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 같이 큰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데 시진핑은 왼손 엄지부터 중지까지 세 손가락으론 밥그릇을 들고 나머지 무명지와 새끼손가락으론 반찬 그릇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놀려 밥을 먹는데 바람이 불어 흙먼지나 나뭇잎이 날려 밥그릇으로 떨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시진핑의 먹거리 정치 행보에 대해 ‘쇼’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 시진핑이 들른 칭펑 만두집도 사전에 철저하게 기획한 것이다. 만두집 부근 주차장 관리인이 이른 아침 ‘차 세워 들 공간을 확보해 두라’는 교통 관리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주차 관리인은 당시 시진핑 밥값의 10배나 되는 200위안을 팁으로 받았다. 그러나 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연출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시진핑의 먹거리 정치가 쇼인 것은 맞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 쇼가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느냐의 여부다. 이제까지 시진핑의 먹거리 정치는 중국인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이 점에선 분명 성공이다. 시진핑의 먹거리 정치가 추구하는 것은 무얼까.

‘백성은 먹는 걸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는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변하지 않는 금언이다. 그런 중국에서 관리는 흔히 육식자(肉食者)로 통한다. 서민이 채소로 허기를 채울 때 관리는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관리와 서민은 먹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시진핑은 바로 이런 관념을 깨려 한다. 서민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공산당과 서민의 거리를 좁히려는 의도에서다. 시진핑의 먹거리 정치 성공은 그의 1인자 이미지 굳히기에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17) 시진핑 달력은 왜 168위안일까

중국 공산당은 인민이 물()이라면 당원은 물고기()라고 말한다. 당원은 인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민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당원이다.

그래서일까. 시진핑의 친민(親民) 이미지 다지기는 시각적으로도 활발하다.
 

 

우선 시진핑이 만화로 그려지고 있다. 2014 2월 베이징시 당위원회 선전부가 주관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첸룽왕(千龍網)은 시진핑이 집권 이후 바삐 활동하는 모습을 ‘시진핑 주석의 시간은 다 어디로 갔나’라는 제목하에 만화로 그렸다.

회색 점퍼에 남색 바지 차림의 소박한 시진핑의 모습은 정치인을 더 이상 차가운 얼굴이 아닌 인정미 넘치는 인물로 대중에게 다가서게 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과거 중국 영도인은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함부로 말하지 않으며 또 좀처럼 웃지 않는 엄숙한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중국의 리더 시진핑은 서민과 함께하는 친민 지도자의 모습을 구축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고 또 이제까지는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엔 부정적 보도를 막을 수 있는 중국 공산당 선전부의 막강한 파워가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시진핑이 2016년엔 달력에도 등장해 서민의 집에 걸리게 됐다. 상하이 화따(華大)인쇄공사가 ‘성세중화(盛世中華)’라는 제목의 2016년 달력에 시진핑과 부인 펑리위안 여사를 모델로 등장시킨 것이다.

시진핑이 외치는 중국꿈을 달성하자며 강국(1~2) 번영(3~4) 책임(5~6) 초월(7~8) 조화(9~10) 탐색(11~12)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가수 출신의 인민해방군 소장으로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펑리위안 여사에 맞춰 시진핑 또한 뽀샵을 적잖게 한 게 눈에 띈다.
 

 

근데 달력 가격이 만만치 않다. 우리 돈 3만원 가량 되는 168위안이다. 168위안일까. 중국어 발음에 빗대 행운을 비는 중국인의 기지가 돋보인다. 168을 중국어로 발음하면 ‘이료우빠’인데 이는 ‘이루(一路, 가시는 길 또는 하시는 일)’ ‘파(, 발전하시기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에 필자 또한 책상 앞에 큼지막한 이 달력을 걸었다. 혹시 누가 아나. 효험이 있을 줄.

 

(18) 시진핑은 펑리위안을 사랑하네…시진핑의 유행가 정치

연예인이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산다면 정치인은 국민의 지지를 먹고 산다. 시진핑이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화법(話法)과 노래다. 시진핑은 우선 말투와 관련해 상투적인 관방 언어를 피하고 듣는 이를 배려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2012
11 15일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뒤 기자회견에서 시진핑이 던진 첫 말이다.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따위로 시작되는 판에 박힌 중국식 인사 대신 기자들에 대한 안부 인사로 말문을 연 것이다.

2013
7월 우한(武漢) 시찰 때는 한 여성에게 “미인이시군요. 안녕하세요”라며 악수를 청해 주민의 환호를 샀다. 인터넷 유행어도 거침없이 사용한다. 지난해 말 새해 축하메시지를 보내는 자리에서 시진핑은 “일을 잘하기 위해 우리 관리들이 ‘만핀’ 뛰고 있다”고 말해 네티즌의 웃음을 자아냈다. ‘만핀’을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허벌나게’ 정도다.

 

 

다음은 그에 대한 호칭 유도다. 중국 관방에서는 시진핑을 ‘시쭝(習總)’이라고 일컫는다. ‘시진핑 총서기’를 줄인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박통’이라 부르는 셈이다. 그러나 민간에선 그를 ‘시따따(習大大)’라고 부른다.

‘따따(大大)’는 시진핑의 고향인 산시(陝西)성 방언으로 ‘아저씨(叔叔)’라는 뜻이다. 그의 총서기 취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생긴, 그를 지지하는 인터넷 팬클럽의 멤버들이 붙여 준 별칭이다.

지난해 9월 시진핑이 전국 교사 대표와의 만남을 가졌을 때 한 교사가 “당신을 ‘시따따’로 불러도 괜찮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대한 시진핑의 대답은 “예스(Yes)”였다. 이는 1984년 중국 건국 35주년을 맞았을 때 베이징(北京)대 학생들이 ‘샤오핑 안녕하세요’라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 행진을 했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당시 중국 최고 영도인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鄧小平)에 대한 중국인들의 애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란 평가를 받았다.

 

시따따에도 시진핑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흠뻑 담겨 있다. 인터넷상에서 시따따가 시진핑을 가리킨다면 ‘펑마마’는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난해엔 ‘시따따가 펑마마를 사랑하네(習大大愛着彭麻麻)’라는 노래가 등장했다. 노래에서는 펑마마 대신 발음이 같은 펑마마(彭麻麻)를 썼다.

시진핑의 행동을 빗댄 노래는 또 있다. ‘만두집(包子鋪)’이라는 중국 민요풍 노래다. 이는 시진핑이 2013년 말 베이징의 칭펑(慶豊) 만두집을 불쑥 방문해 서민들과 함께 21위안( 3560)짜리 식사를 같이한 걸 풍자했다.

‘만두집에서 그가 내가 선 줄의 맨 뒤에 섰네’ 또는 ‘21위안어치 음식을 시켰지’ 등과 같은 가사가 등장한다. 이는 시진핑이 줄을 서지 말고 주문하라는 주인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신의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음식을 시킨 것이나 훗날 21위안짜리 ‘주석(主席) 세트’로 알려진 만두와 간볶음, 갓요리를 주문한 것 등을 빗댄 것이다.

노래는 반복해서 불려진다. 일종의 세뇌에 해당한다. 그렇게 시진핑은 중국 인민의 마음 속을 파고 들고 있다. 시진핑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중국인의 뇌리에 13억의 1인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가…시진핑의 신형국제관계

한·중 관계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얼굴 붉힐 일이 없을 때는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논리 아래 양국 관계는 그저 ‘하오(, 좋다) 하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잘 굴러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러나 ‘친구는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 곤경에 처했을 때 상대가 이에 대해 어떻게 나오느냐를 보면 대개 그 친구가 말로만 친구인지 아니면 인생을 함께 할 친구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최근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이 야기한 한반도 긴장 상태를 둘러싸고 한·중 간 골이 자꾸 깊어지는 양상이다. 한국은 대북 제재에 소극적인 중국이 못마땅하기 이를 데 없고 중국은 한국이 들여오려는 사드 체계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리로선 중국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불량배 북한을 전략적 자산이라며 끌어 안은 채 한국의 사드 도입 움직임에 대해선 핏대를 올리는 중국의 모습에서 역시 ‘중국인은 불의(不義)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구나’ 하는 우스개 말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중국이 과연 국제 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을까. 중국은 과연 국제 사회의 존경을 받는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을까. 중국은 과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으로 국제 사회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많은 의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시진핑의 중국은 도대체 어떤 국제 관계를 바라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지난해 봄 시진핑이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신형국제관계(新型國際關係)’를 음미할 필요가 있겠다. 시진핑이 말하는 신형국제관계란 무언가.

이에 앞서 역대 중국 지도자들의 국제관(國際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세상에서 한 바탕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봤다. 그는 아예 ‘전쟁으로 평화를 유지하겠다(以戰保和)’는 판단 아래 한국전쟁에 뛰어드는 만용(蠻勇)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鄧小平)은 달랐다. 미국과 소련이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에 큰 전쟁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세계의 주된 흐름은 평화이며 중국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발전에 나서야 한다고 봤다. 이는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인도하게 된 사유다.

그렇다면 이제 시진핑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나. 오랜 세월 국제사회는 대국(大國)이 세력을 나눠 대치하고 작은 나라는 대국의 어느 한편에 줄을 서는 냉전(冷戰) 구도를 형성했었다.

이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이 냉전 구도가 무너졌지만 적과 나를 구분하는 냉전의 사유는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뭉치는 동맹(同盟) 체제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시진핑은 따라서 이젠 국제 질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與時俱進)’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 모든 나라가 운명 공동체라고 말한다.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본다.

새로운 국제 질서는 세계 각국 국민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협력(合作)과 윈윈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인 신형국제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형국제관계 속에선 세계 어떤 국가든 그 크기나 강약, 빈부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또 각국 국민은 자신이 선택한 발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존중 받아야 한다‘신발이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자신이 신어보면 제일 잘 안다(鞋子合不合脚 自己穿了才知道)는 게 시진핑의 지론인 것이다.

 

이 같은 시진핑의 신형국제관계 주장에선 미국에 의한 단극(單極) 질서를 부정하는 냄새를 짙게 느낄 수 있다.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건 바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 세계 각국 국민은 자신이 선택한 발전의 길을 존중 받아야 한다며 특유의 신발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를 무슨 색깔혁명 운운하며 흔들지 말라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특히 동맹은 냉전 사유의 잔재로 세계 각국을 편 가르기 하는 것이란 비난은 미국 중심의 동맹 체제를 직접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시진핑의 신형국제관계 주장은 한 마디로 미국의 견제를 피하며 중국이 성장할 시간과 공간을 벌자는 취지가 강한 것이다.

말로는 세계 모든 국가의 발전 운운하고 있지만 실제론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논리 형성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다는 이()를 앞세우는 중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20) 북핵 해결의 ‘중국 방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뜨뜻미지근한 중국의 대() 북한 정책을 답답해 하지만 중국은 중국 역시 북한의 핵 개발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국도 나름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여러 노력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방식’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중국이 말하는 ‘중국 방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2014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 때 시진핑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중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확실히 반대하며…현재 중국 측 방식으로 북한을 설득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게 바로 시진핑이 처음 언급한 ‘중국 측 방식’이다.

뭐가 중국 방식인가. 중국은 한반도를 포함해 향후 각 지역의 갈등 문제에 개입할 때의 원칙을 정했다. 이것을 중국 방식이라고 한다. 2014 1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만났을 때 ‘중국 방식’에 대해 말한 게 가장 상세하다.

왕이에 따르면 중국은 앞으로 지역 분쟁 해결과 관련해 다섯 가지 원칙을 견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내정불간섭. 두 번째는 유엔 틀 아래에서의 활동. 세 번째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 네 번째는 시비를 따져 중국의 입장을 정하며 자신의 사리(私利)를 취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분쟁 당사국 인민의 뜻을 존중하되 관련 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을 찾겠다는 것이다.

왕이는 또 중국은 지속 가능한 해법, 점진적인 방안, 근본적인 해결 등에 역점을 둔다면서 이런 것을 중국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진핑이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말한 중국 방식은 바로 이런 함의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를 갖고 현재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접근 자세를 추론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내정 불간섭이다. 이는 중국이 북한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주미 중국대사 추이톈카이(崔天凱)가 “중국에 북한을 압박해 핵을 포기시키라는 미국의 요구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불가능한 임무)’”이라고 말한 건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두 번째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선 유엔의 결의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남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다자주의를 촉진하고 있다. 중국은 부상이 다른 나라에 위협으로 비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유엔 등 다자기구의 틀 아래서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대북 제재는 반드시 유엔 결의에 따른다는 방침이다.

세 번째는 분쟁이 생겼을 땐 무력 사용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북핵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국이 6자회담에 매달리는 이유다. 또 북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다.

네 번째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선 중국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고 부화뇌동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사리를 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행여 북한 급변 사태라도 발생하게 되면 중국 단독으로 북한에 진주해 중국의 이익을 취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주목된다.

 

다섯 번째는 분쟁 관계국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남북한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중국 등 관련국들의 이해도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시진핑 시대에 등장한 중국 방식이란 결국 다자주의 틀 안에서 대화로 관련국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점진적으로 찾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중국 방식은 중국이 고민한 결과다. 중국의 입장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한국은 한국 방식이 있을 터이고 미국은 미국 방식, 북한은 북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방식이 중국이 정한 중국 방식에 맞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중국이 무조건 중국 방식을 고수하겠다면 다른 나라는 무조건 중국 방식에 맞춰야만 중국과 합의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중국이 중국 방식을 정하는 건 좋지만 다른 나라가 꼭 중국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일방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지 우려가 앞선다

 

(21) 북핵은…중국의 핵심이익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연초부터 터진 김정은의 무모한 핵실험 도박 이후 국내외적으로 중국에 대한 실망과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중국에 속았다는 말도 있고 더 이상 중국을 믿지 말자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정이 앞선 ‘중국 무용론(無用論)’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핵을 막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제재든 대화든 계속돼야 하며 그 어떤 노력에도 중국이 빠진다면 제대로 된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국을 설득할 것인가. 현실적 사고를 하는 중국엔 보다 현실적 이해 관계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중국의 ‘핵심이익(核心利益)’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 중국은 눈에 띄게 중국의 핵심이익 수호를 강조한다. 중국의 핵심이익이 주목을 받는 건 만일 이것이 침해를 받는다면 중국은 무력 동원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중국의 핵심이익인가. 이에 대해선 후진타오(胡錦濤) 시절 외교담당 국무위원으로 일했던 다이빙궈(戴秉國)의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핵심이익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핵심이익은 중국의 국가체제, 정치체제 및 정치적 안정이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제도,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노선, 공산당 일당제 등이 포함된다. 즉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체제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다당제를 외치거나 서구식 민주화를 주장하는 것은 용납될 수가 없다. 특히 중동을 휩쓸었던 아랍의 봄 같은 운동이나 색깔운동 등은 지극한 경계의 대상이다. 홍콩의 우산혁명 운운 움직임에 중국 당국이 초()긴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 핵심이익은 주권 보호 및 영토 보전, 국가 통일이다. 여기엔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중국명 釣魚島)의 영유권 문제, 티베트와 신장 등 소수민족 지역의 분리독립 움직임 등의 문제가 포함된다. 대만 문제는 국가 통일과 직결된 핵심이익 중 핵심이기도 하다.

세 번째 핵심이익은 중국 경제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현재 시진핑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는 중국 공산당이 창당 100주년을 맞는 2021년에 즈음해 중국을 전면적인 소강(小康) 사회로 이끄는 것이다.

이 같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중국은 경제 발전에 매진하고 있으며 이런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게 바로 외부 환경의 안정이다. 이는 바로 중국이 이제까지 웬만한 북한의 불장난을 참아 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북한의 거듭되는 핵 개발 실험이 중국의 세 번째 핵심이익인 중국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서게 된 것이다. 북한의 이번 4차 핵실험은 중국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안정된 외부 환경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그 동안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던 한국이 드디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 동안 한국에 거의 반()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한국의 사드 도입에 반대 의사를 표현해 왔다.

한국 또한 중국의 압박에 의해 사드 도입을 서두르지 않았던 게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핵을 머리 위에 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몰린 한국으로선 중국의 압박 따위 정도는 고려할 때가 아닌 시점을 맞았다.

 

한국 사회 일각에선 핵무장 운운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중국이 그토록 경계하는 한국과 일본, 대만으로 이어지는 핵 도미노 현상이 꼭 꿈 같은 이야기라고만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현실적으론 쉽지 않지만 국민 정서는 핵무장으로까지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는 중국으로선 악몽에 해당한다. ()이성적인 북한의 핵에 맞서야 하는 한국으로선 사드든 핵무장이든 자구책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 됐고 일본 또한 나름대로의 자위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한데 이런 행동들이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 시켰지 완화시킬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중국이 마음 놓고 발전에만 매진할 수 있을까. 마침내 중국이 사활을 걸고 지키려 하는 중국의 세 번째 핵심이익이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심대한 침범을 받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중국도 소위 ‘중국 방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전면적인 소강사회를 달성하겠다는 100년의 꿈 시간표를 멀리 뒤로 밀어놓든지 아니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단호한 행동에 동참할 것인지 중국의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22) 중국은 왜 한국의 사드 도입에 결사 반대하나

 

이임설이 나도는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가 한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지난 23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만나 한국의 사드 도입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게 문제가 됐다.

중국은 이제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사드 도입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해 왔다.

이번에 문제가 된 건 추 대사가 쏟아낸 발언의 내용이다. ‘한·중 관계 파괴’ ‘한국의 안전이 보장되는지 고민해야 한다’ 등 내정간섭 성격이 짙은 말을 마구 토해내는 바람에 경솔했고 결례였으며 무례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중국은 왜 이렇게 북핵 대비용이라는 한국의 사드 도입에 거의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일까. 사드의 레이더 시스템이 중국까지 탐지한다거나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무력화 시킨다는 등 군사적 요인이 거론되지만 핵심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중국의 진정한 의도는 추 대사의 말에 숨어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우리 여론의 격분을 산 한중 관계 파괴 운운 부분이다. 우리는 ‘파괴’란 표현 자체가 도를 지나쳤다고 보지만 중국은 적어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파괴가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들어선 이래로 과거 장쩌민(江澤民)이나 후진타오(胡錦濤) 시대에 볼 수 없었던 강한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태평양은 매우 넓어 중·미의 이익을 다 포함할 수 있다는 시진핑의 말은 미국 입장에선 태평양을 반분하자는 그야말로 당돌하기 그지없는 발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의한 단극(單極) 질서를 부정하고 세계를 다중심(多中心) 체제로 이끌려 한다. 자신에게 불합리한 기존 국제 규칙은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자연히 미국의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키워드는 흔히 봉쇄(containment)와 개입(engagement)을 결합한 봉쇄적개입(congagement) 정책으로 불린다. 한편으론 중국과 협력을 하면서도 꾸준하게 중국을 에워싸는 작전이다.

이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에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구축이 있다. 한국이 사드를 도입하면 중국을 견제하는 한·미·일 미사일방어 시스템이 완성되는 것으로 중국은 본다. 중국이 결사 반대에 나서는 이유다.

중국 입장에선 미국과 일본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국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대상이다. 시진핑이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로 지극 정성을 들이는 이유다. 2013 6월 박 대통령이 중국 방문에 나섰을 때 시진핑은 부인 펑리위안과 함께 박 대통령을 맞는 특별 오찬을 마련했다.

집으로 초청한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리는 ‘한 집안 식구(一家人)’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중국은 우리와 맺고 있는 동반자 관계를 훠반(?) 관계라 부른다. 이 훠반이라는 말은 바로 한 솥 밥을 같이 먹는 친구를 뜻한다.

이 같은 시진핑의 환대에는 제발 한국이 중국을 에워싸는 미국의 전략에 동참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진핑이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미국이 사드를 배치하려고 하면 반대해 달라’고 직접 요청까지 했을 정도다.

 

결국 중국의 눈에 한국의 사드 도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반()중국 한·미·일 삼각 연대의 제도화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한·중 관계가 파괴된다는 추 대사의 발언에는 이런 인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듣는 우리 입장에 대한 배려가 소홀했음은 중국의 문제다. 특히 한국이 사드 도입을 생각하게 촉발시킨 원흉인 북핵의 위험성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규탄이나 사태 초기 대북 제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점 등은 중국의 큰 문제다.

한국이 사드 도입 운운하니 굼뜨기 그지 없던 중국이 그제서야 강력한 대북 제재에 나선 것 아니냐는 시각이 한국 사회에 많이 퍼져 있다. 무엇보다 연초 북핵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점은 두고 두고 중국 외교의 뼈아픈 실수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해 나온 한국의 중국경사론(傾斜論)이란 신조어가 사라지게 됐으니 말이다.

 

(23) 중국은 왜 ‘조선 인민의 복지’를 주장하나

 

중국은 실리를 탐한다. 이를 보며 혹자는 중국이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구나 하며 혀를 찬다. 그러나 중국이 실리를 취하기 위해 명분을 버리는 건 아니다.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선 오히려 더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래야 국론을 한 곳으로 모아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중·미가 합의한 대북 제재 방안에서도 우리는 중국의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번 제재 방안은 역대 최강이란 평가를 듣는다. 제대로만 실행되면 북한이 핵 개발은커녕 북한이라는 국가 유지 자체에 타격을 받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트럭 한 대도 돈 되는 건 북한으로 못 간다’며 ‘모든 화물 검색 의무화’ ‘항공유·로켓연료 공급 금지’ ‘광물자원 수출 금지’ ‘2000달러 이상 물품은 사치품으로 규정해 금수’ 등 촘촘하게 북한의 현금 수입원을 차단하고 있다.

관건은 중국이다. 제재 이행 여부가 핵심인데 이에 대한 키는 중국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노련한 중국은 제재 방안을 마련하면서 자신의 유연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다. 북한 정권의 숨통을 조이는 손아귀의 힘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비결은 ‘조선(북한) 인민의 복지’라는 문구에 담겨 있다.

이는 중국이 연초 북핵 위기가 터진 뒤 일관되게 주장해온 말이다. 북한의 나쁜 행동에 벌은 줘야 하지만 북한 주민의 복지까지 손상을 받아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번 결의안을 마련하면서 자신의 이 같은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대 중국 최대 수출 품목인 광물자원이 북한 주민 생활의 필요에 따른 것이면 제재를 피해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렇다면 그 광물자원 수출이 북한 주민의 생계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누가 판단하나.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중국이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국제 사회가 대 북한 제재의 촘촘한 그물을 펼쳤지만 그 그물 사이의 구멍은 있게 마련인데 그 구멍의 크기를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있는 건 결국 중국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이번 유엔 결의안 채택으로 북·중 관계가 손상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북한 주민의 생계형 무역 거래까지는 막지 않겠다고 말한 배경이다.

‘북한 주민의 복지는 고려하자’는 중국의 주장은 중국이 고심해 만든 논리다. 여러 함의가 있다. 우선 북한에 대해서다. 북한 주민의 복지는 살피겠다는 말에선 김정은과 김정은을 둘러싼 북한 권력층의 앞날에 대해선 그게 어떻게 되건 말건 중국은 모르겠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불장난을 일삼는 북한 지도부와 이에 따라 애꿎게 피해를 보는 북한 주민과는 분리하겠다는 것으로 김정은 체제에 대한 압박이다.

다음은 국제 사회에 대해서다. 잘못된 행동을 거듭하는 북한을 중국도 더 이상 감싸기는 어렵다. 혼을 내줘야 한다. 한데 무작정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 방안에 따라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속도 조절을 위해 살짝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국제 사회에 대한 호소로 ‘북한 주민 복지’를 주장하는 것만큼 설득력이 있는 게 없다는 판단이다. 여기엔 인도주의적 정신이 흐른다. 중국 입장에선 이런 주장을 하는 중국 스스로가 대견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중국 인민들에게도 체면이 선다.

그러나 중국이 북한 주민의 복지를 외치는 정작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중국은 김정은 정권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직은 북한이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 붕괴 시 밀어닥칠 혼란이 중국 동북지방을 흔들어 중국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할 것이고 또 만약 한국 주도로 통일되면 미군이 압록강까지 오게 되는 것인지 등 따져봐야 할 게 많다.

아직은 중국의 국력이 이런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고 본다. 자연히 중국의 힘이 더 커지기 전까지는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바란다. 이 같은 여러 가지 고려 하에 김정은 정권에 일정한 압박을 가하면서도 북한 전체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제재는 피하고자 하는 고심 끝에 내놓은 게 바로 ‘북한 주민 복지는 챙겨야 한다’는 논리로 보인다.

 

중국은 무엇이 북한 주민 생계형 무역 거래인지에 대한 자의적인 잣대를 갖고 북한을 압박하면서 북한을 회담 테이블로 끌어내려 할 것이다. 왕이 부장이 이미 제기한 대로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은 무엇이 북한 주민 생계형 거래인지를 판단하는 데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역대 최상이라는 한·중 관계란 말을 다시 믿어보고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도 활용하는 등 모든 채널과 노력을 다 경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접근에서는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중국이 어떤 속셈을 갖고 말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북한 주민의 복지’ 운운하는데 우리가 이 같은 명분 싸움에서 뒤져서는 결코 안 된다.

지금은 제재 국면으로 그런 말을 할 단계가 아니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제재 이후 전개될 국면에 대해선 우리가 치밀하고도 정교한 준비를 통해 미·중을 설득하며 이끌어나가야 할 것이다.

 

(24) 우다웨이 방한은 사드 반대 외교의 시작인가

▲북핵 6자회담의 한국 수석대표인 황준국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 중국 수석대표인 우다웨이 중국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28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회동을 하고 북핵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맞나 보다. 올해 만 70세의 한 중국 외교관이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간과 분을 쪼개 가며 한국의 각계 인사 접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의 한반도사무 특별대표이자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가 주인공이다. 2 28일 한국을 찾은 그는 우리 외교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 청와대 국가안보실 차장 등 고위 관료는 물론 언론계와 기업계, 학계 등 곳곳을 찾아 다니며 그야말로 ‘광폭 외교’를 펼치고 있다.

1998
4월부터 2001 11월까지 한국에서 대사로도 근무한 적이 있어 국내에 지인이 많은 까닭도 있지만 이번 경우에는 우다웨이 대표 스스로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해 국내 여러 분야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일정도 보통의 2 3일보다 긴 4 5일을 할애해서다.

그는 왜 왔나. 그 스스로 세 가지 사항을 말했다.

첫 번째는 유엔에서의 대북 제재 결의안 마련에 중국과 한국이 서로 긴밀하게 협력했고 중국이 충실하게 결의안을 이행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중국과 한국이 수교 이래 양국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양국 관계는 오로지 오르막을 향해 나아가야지 내리막이나 되돌아가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사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한국이 배려해줬으면 한다는 점이었다. 중국말에 ‘구경거리는 뒤에 있다(好戱在後)’고 하는데 맨 마지막 말이 그의 이번 방한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임을 말해준다.

우다웨이의 방한은 사드 반대 입장을 한국에 지속적이고도 강력하게 알리려는 중국 행보의 시작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이맘때부터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을 부탁하는 중국 고위 인사들의 방한 러시가 이어졌었다.

아마도 올해 한 동안은 사드 문제로 한중 간 줄다리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어찌 해야 하나. 우리 입장에선 우리의 안보에 관한 주권적 문제로 우리의 방위 필요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긴 해도 이게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대북 제재와 이후 전개될 국면 등을 생각하면 미국은 물론 중국과도 긴밀한 관계 유지가 필수다. 이런 입장에서 중국의 ‘결사’ 반대를 무시로 일관하기도 어렵다. 이런 시점에서 미국의 말이 바뀌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지난달 말 미국을 찾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에게 ‘사드 배치에 조급해하지 않는다’고 말한 게 좋은 예다. 우리 또한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중국을 포함한 각국의 제재 이행 여부를 보아가며 속도 조절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케리 장관의 말이 갖는 진의 여부도 더 알아보면서 말이다.

한편 우다웨이 대표는 지난 2월 초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 북한을 방문했다가 베이징으로 돌아오면서 기자들에게 “북한에 할 말은 다 했고 할 일도 다 했다. 결과는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는데 무슨 말을 했는가가 궁금했다.

그에 따르면 두 가지란다. 하나는 6자회담에 복귀하라는 주문이었다.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기로 한 9.19 공동성명의 정신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북한은 그가 돌아간 지 사흘 만에 쏘아 올렸다. 그의 말을 북한이 왼쪽 귀로 듣고는 오른쪽 귀로는 흘린 결과란다.

 

(25) 중국은 이제 시진핑 경제학인 시코노믹스로 간다

 

지난 5일 리커창 중국 총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에서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 목표를 6.5~7%로 제시했다. 중국이 7% 8%와 같이 특정 수치가 아닌 ‘6.5%에서 7%까지’라는 구간으로 성장률 목표를 제시한 것은 1995년 이후 즉 21년 만에 처음이란다.

경제를 운용하는 데 변수가 많아 딱 부러지게 하나의 수치로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걱정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건 리커창이 ‘공급측면의 구조적인 개혁’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리커창은 “공급체계의 질과 효율을 향상시켜 시장의 활력과 사회의 창조력을 불러일으키겠다”고 했다. 이 말은 중국 경제가 이제 거대 전환을 시작했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공급측 개혁이란 무슨 말인가.

우리나 중국 모두 보통 경제성장의 삼두마차로 투자와 소비, 수출을 꼽는다. 그런데 이것은 수요 측면에서 본 것이다. 투자를 확대하고 소비를 늘리며 수출을 증가시키는 건 모두 수요 측면의 경제성장 방식이다.

문제는 중국 경제의 경우 수출과 소비가 모두 부진해 정부 투자에 의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공급 측면의 경제성장 방식이란 제품을 공급하는 측면에서의 개혁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기업의 혁신을 격려하고 낙후 산업을 도태시키며 세금 부담을 낮춰 경제발전을 이끄는 것을 말한다. 산업과 기업의 각도에서 문제를 인식해 경제를 장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자 한다.

중국은 왜 지금 이 시점에 공급측 개혁을 강조하는 걸까. 미국 경제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2009년까지 미국은 물론 중국 모두 경제가 어려웠다. 그러나 2010년 이후 미·중 경제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미국 경제가 신속하게 회복하고 있는 데 반해 중국은 2010년 이후 계속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왜 그런가. 미국의 경우 애플의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상품 공급에 의해 수요가 새롭게 창출되고 이것이 미국 경제 발전의 새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2008년에 푼 4조 위안 덕분에 2009년 경기가 반짝 회복됐을 뿐 2010년 이후엔 하강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리커창이 토해 내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리커창은 지난해 3월 “중국인들이 일본 여행을 가서 비데를 사재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또 한국에선 화장품을, 독일과 호주 등에선 분유를 싹쓸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낙 싹쓸이가 심하다 보니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할 것마저 부족 현상이 일어날 정도란다.

리커창은 또 “중국 기업들은 왜 볼펜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냐”는 불만도 토로했다. 중국이 매년 380억 개의 볼펜을 생산하지만 그 볼펜 잉크의 90%를 일본이나 독일 등에서 수입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된 지 오래건만 정작 중국인이 원하는 것을 중국은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생산한다 해도 제품의 질이 조악해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재고가 쌓이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과잉 생산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스티브 잡스의 애플과 같이 새로운 공급을 일으켜야 한다고 본다. 현재 다섯 개의 소프트 부문이 주목을 받는다. 지식산업, 정보산업, 문화산업, 금융산업, 서비스업 등이다.

중국 일각에선 바로 이와 같은 공급측면의 개혁을 시진핑 경제학(Xiconomics)이라 부른다. 시진핑이 지난해 11월 당 중앙재경영도소조 회의에서 이 공급측 개혁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은 분명하다. 다섯 개 소프트 부문의 산업 발전을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정부가 강조해 온 혁신(創新)과 연결된다.

그리고 낙후 산업 도태와 관련해선 정부의 지원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면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제품만 양산하는 이른바 좀비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퇴출 작업이 진행될 전망이다. 기업하기 좋게 세() 부담도 낮출 것으로 보인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건(長江後浪推前浪)’ 자연의 이치다. 중국은 이제 경제의 수요측면 강조에서 공급측면 강조로 거시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이루고 있다.

시코노믹스가 추구하는 중국의 길을 면밀히 따져 우리의 나아갈 바를 계획해야 하겠다.

 

(26) 시진핑의 용인술 … 능력보다 충성이다?

 

무슨 일이든 도모하려면 자신을 받쳐줄 수족이 필요하다. 수족이 갖춰야 할 건 능력인가 아니면 충성인가. 언뜻 생각하기에 일을 하려면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할 법 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능력 있는 자는 대개 말이 많다. 주군이 도대체 이 일을 왜 하려는 지에 대한 헤아림이 부족하기 일쑤다. 고로 듣기 거북한 간언을 곧잘 올린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쓰기가 어렵다.

당 태종 이세민이 위대한 이유는 목숨을 걸고 충성스러운 간언을 했던 위징(魏徵)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을 때는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겠지만 어쩌랴 좋은 약이란 게 입에는 써도 몸에는 이로운 것을.

중국꿈을 외치는 시진핑은 주로 어떤 사람을 쓰고 있나. 능력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잠시 유보하겠다. 하나 시진핑의 용인술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 또는 옛 부하들을 대폭 기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이 정권을 장악할 무렵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이른바 ‘지강신군(之江新軍)’의 약진이었다. 지강(之江)은 저장(浙江)성을 대표하는 첸탕(錢塘)강을 일컫는다. 갈 지()자처럼 이러저리 굽이쳐 흐른다 하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는 저장성을 뜻한다. 따라서 지강신군이라 함은 저장 출신의 관료를 뜻한다. 저장성은 시진핑이 2002년부터 약 5년 동안 당 서기로 근무하면서 중앙 무대로의 진출을 준비했던 곳이다. 그는 저장에서 치국(治國)을 위한 각종 정책을 설계하고 또 시험했었다.

그래서 현재 시진핑의 치국 방략을 이해하기 위해선 10여 년 전 저장 언론에 실렸던 시진핑의 글을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게 저장(浙江)일보 1면에 실렸던 ‘지강신어(之江新語)’ 코너다.

시진핑은 이 지강신어 코너에 저신(哲欣)이란 필명으로 기고했다. 저장촹신(浙江創新)의 맨 앞()과 맨 뒤() 글자와 발음이 같은 다른 두 글자(哲欣)를 선택해 자신의 필명으로 삼아 무려 2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발표했다.

이 같은 지강신군의 선두 주자로 중사오쥔(鍾紹軍) 중앙군사위 판공청 부주임과 샤바오룽(夏寶龍) 저장성 당서기, 리창(李强) 저장성 성장, 바인차오루(巴音朝魯) 지린성 당서기 등이 꼽힌다.

두 번째로 주목 받는 시진핑의 옛 부하 그룹은 ‘민강구부(?江舊部)’다. 민강은 푸젠성을 대표하는 하천이며 구부(舊部)는 옛 부하를 뜻한다. 따라서 민강구부란 푸젠성에서 시진핑과 동고동락한 옛 부하를 가리킨다.

시진핑은 저장으로 가기 전인 1985년부터 17년 동안 푸젠성 곳곳을 전전했다. 이 그룹의 대표적 인물로는 차이치(蔡奇) 중앙국가안전위원회 판공실 부주임과 황쿤밍(黃坤明) 중앙선전부 부부장 등이 있다.

시진핑의 또 다른 인맥은 자신의 동창이다. 그 중 하나가 시진핑의 모교를 연줄로 하는 ‘신청화계(新淸華系)’다. 칭화(淸華)대학 출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붙은 이유는 장쩌민(江澤民) 집권 시절 주룽지, 후진타오 등 칭화대 출신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잇따라 배출되면서 대청(大淸)시대란 말을 낳았기 때문에 이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현재 신청화계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이는 시진핑의 화공학과 동창인 천시(陳希). 둘은 학창 시절 위아래 침대를 쓴 사이다. 천시는 시진핑의 출세와 더불어 승승장구해 현재는 중앙조직부 상무 부부장으로 시진핑의 인사(人事)를 돕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또 다른 동창은 시진핑의 경제 책사라는 이야기를 듣는 류허(劉鶴). 실제로 중국 경제를 움직이는 이는 리커창 총리가 아닌 류허라는 말을 낳고 있는 인물이다. 류허는 시진핑과는 베이징 101 중학 동창 관계다.

이런 시진핑의 용인술 탓에 중국에선 시진핑의 집안 사람들이란 뜻의 ‘시자쥔(習家軍)’이란 말이 나온다. 장점은 시진핑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기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점은 파벌 형성의 우려다. 당이나 국가에 충성한 게 아니라 시진핑이란 개인에 충성한 인물로 정가를 채우고 있다는 비난이다.

중국의 경우나 현재 우리의 경우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7) 시진핑 주석에 주연 자리 빼앗긴 리커창 총리

 

중국엔 봄·가을로 중요한 정치 행사가 열린다. 보통 가을에 중국 공산당 회의가 열려 대략의 방침을 정한다. 이게 이듬해 봄인 매년 3월 열리는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정부의 정책으로 굳혀지는 공식화의 길을 걷는다.

가을의 당 대회는 중국 공산당 자체의 행사라 외부 노출이 잘 안 된다. 반면 봄에 열리는 양회는 내외신 기자에게 개방된다. 취재를 하고 싶어도 이런 저런 걸림돌이 많아 취재가 안 되곤 하는 중국인지라 양회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행사다.

최근의 관행을 보면 3 3일 자문기구 성격의 정치협상회의(政協)가 먼저 열리고 5일엔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가 개최된다. 정협은 별 주목을 받지 못한다. 정협 위원들의 돌출 발언이 나오거나 스포츠 스타나 영화 배우 등의 정협 위원이 모습을 드러내면 모를까 ‘깍두기’ 같은 정치 행사다.

양회에서 중요한 건 전인대다. 전인대의 관전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개막식날 총리의 정부공작보고다. 정부의 업무를 보고하는 것으로 총리는 보통 두 시간에 걸쳐 지난해 상황을 살핀 뒤 앞으로 할 일을 말한다.

여기에 중국의 그 해 경제성장률 목표 등 여러 중요 수치가 나온다. 국방비 지출이 10%대 이상으로 밝혀지면 외신은 호들갑을 떤다. 중국의 군사대국화 운운 등 하면서. 올해의 경우 한 자리수인 7.6%에 그쳤는데 중국군 내부에선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나오는 반면 외신은 ‘감춰두고 공개하지 않은 군사 비용이 많다’며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총리는 젊게 보이려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목청을 가다듬어 두 시간 여 보고를 한다. 중국 전역에 생중계될 뿐 아니라 CNN 등을 통해서도 세계에 생중계 되기도 해 그야말로 전인대의 주인공이 총리란 점을 실감하게 된다.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양회 기간 진행되는 여러 장관급 인사들의 기자회견 중 중국 외교부장에 의한 내외신 기자회견이다. 각국 기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나라와 관계 있는 질문할 기회를 얻기 위해 ‘저요 저요’ 손을 드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교 교실을 연상하게 할 정도다.

이 또한 TV로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생중계된다. 질문권을 얻느냐 마느냐가 그 기자가 속한 나라가 중국에서 얼마나 대접을 받고 있는가, 또 어느 언론사 기자이냐가 때론 그 나라 언론사 중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느냐의 잣대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어 기자들로선 필사적이기도 하다.

세 번째 관전 포인트는 양회 폐막일이자 전인대 폐막일(정협 폐막일은 보통 이보다 이틀 빠르다)에 전인대 폐막 직후 진행되는 총리에 의한 내외신 기자회견이다. 이 또한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행이 생긴 건 중국 경제의 짜르란 별명을 얻었던 주룽지(朱鎔基) 1998년 총리에 취임하면서다. 100개의 관을 준비해라. 그 중 하나는 내 것이다’라며 반부패 운동을 펼쳐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주룽지 총리의 기자회견은 거침이 없었고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주룽지가 직접 지명해 질문권을 주었던 홍콩 피닉스TV의 앵커 우샤오리는 일약 스타가 돼 이후 자서전을 내기도 했을 정도다. 주룽지를 이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절만 해도 전인대의 총리 기자회견은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지질학을 전공한 원자바오이건만 고전에 조예가 깊어 중국 고사에서 끌어 쓰는 명문장의 답변이 많아 총리의 박식함과 중국의 깊이를 동시에 세계에 선전하는 효과도 있었다. 원자바오가 인용했던 고전의 경구를 모은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아무튼 중국 봄철 정치행사의 주인공은 중국 공산당의 1인자인 당 총서기가 아닌 서열 2위나 3위인 총리였다. 한데 원자바오 총리를 이은 리커창 총리 시대 들어 전인대 행사가 예전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모양새다.

워낙 강한 1인자 시진핑의 기세에 눌린 탓일까. 전인대 개막식 날 시진핑의 무거운 얼굴로 인해 행사 분위기가 싹 가라 앉았고 정부공작보고에 나선 리커창은 목이 잠기는가 하면 진땀까지 흘리는 모습이었다고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형식은 그대로 진행하고 있지만 주인공인 총리의 모습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해진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중국 언론들도 시진핑의 말과 행동 전하기에 열을 올려 총리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는 모양새다.

중국 정가의 이 같은 변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내년 가을에 열리는 19차 중국 공산당 대회 때 리커창 총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중국은 무섭게 시진핑 1인 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28) 시진핑의 지도부 사상 통일 방법은…집단학습에 있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실행하기 어렵다. 굳이 싸움만 일삼는 우리 국회를 볼 필요도 없다. 주위 동료들과 어떤 일을 상의해 보면 의외로 생각을 하나로 모아 어떤 방향을 하나로 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대여섯 명이 모인 자리도 그러한데 8000만 명이 넘는 지구촌 최대의 정당인 중국 공산당을 이끄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어떻게 사상을 통일해 이끌고 가는 것일까. 특히 중국 지도부 내의 의견 통일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구현하고 있나.

이와 관련한 여러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중국 공산당 정치국 집단학습이다. 중국 권력의 정점에 있는 25명의 정치국 위원 전원에 각 부처 장관 등 약 40여 명이 참석하는 정치국 집단학습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이 정치국 집단학습은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등이 80년대 말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기도 해 시진핑으로선 더욱 애착이 간다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 시대부터 시작해 장쩌민 시기까지는 간헐적으로 열리곤 하던 정치국 집단학습이 정례화된 것은 후진타오가 집권하면서다. 2002 11월 당 총서기가 된 후진타오는 그 해 12 26, 즉 마오쩌둥이 태어난 지 109주년이 되는 그 날 첫 집단학습을 개최했다.

주제는 ‘헌법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인치(人治)의 대명사인 마오쩌둥이 태어난 날 법치(法治) 공부에 나섰다는 점이 아이러니칼하다. 2007년까지의 후진타오 집권 1기까지 44회가 열렸고 후진타오 집권 2기인 2012년 가을까지 33회가 더 열려 모두 77회가 열렸다.

당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총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첫째, 중대 결정을 하기 전에 반드시 관련 지식을 잘 공부한다. 둘째, 각계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청취한다. 세 번째 집단토론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집단학습이었던 것이다.

후진타오를 이은 시진핑은 자신이 총서기로 선출된 지 불과 이틀 만에 집단학습을 열기 시작해 지난 1월까지 모두 30차례의 집단 공부 모임을 가졌다. 무얼 공부했나. 대략 내용을 살펴보니 경제 공부가 7차례, 당 건설에 관한 공부가 7차례로 가장 많았다. 이어 역사와 외교·안보에 대한 학습이 각 5회에 달했다. 역사 공부가 많다는 게 특징이다.

이 같은 중국 최고 지도부에 대한 교육을 위해 당 중앙판공청과 중앙정책연구실 등이 긴밀하게 협의해 교육 주제와 강사를 선발한다. 강사는 보통 짧게는 석 달에서 길게는 반 년 가까이 준비를 한다. 몇 차례 강연 리허설까지 해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조절한다는 후문이다.


중국 지도부는 연 8~9, 약 한달 반에 한 번씩 열리는 집단학습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중요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당의 리더가 이 같은 집단학습을 통해 당 지도부의 의견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주제 선정부터가 그렇다. 시진핑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주제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학습의 방향을 대략적으로 지도할 수 있다. 이에 부합하는 강사가 선발돼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쳐 정교한 이론으로 무장한 채 강의에 나선다면 그에 맞서 다른 의견을 개진할 정치국 상무위원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치국 집단학습의 사회를 보는 총서기로서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어떤 중요 정책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방안인 셈이다. 이처럼 집단학습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학습과 토의를 거친다는 점은 대내외적으로 중국 의사결정이 투명하게 이뤄진다는 것을 과시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부수적인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은 이처럼 지도부의 하나된 사상 통일을 통해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29)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안다는 데…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 열릴까

 

“두 나라 정상은 한반도 정세를 포함해 양국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입니다.

지난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리바오둥(李保東)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밝힌 말이다.

여기서 ‘두 나라’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한반도 정세’라는 말이 나와 언뜻 보기엔 한국과 중국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리바오둥이 언급한 ‘두 나라’는 중국과 미국을 가리킨다.

오는 31일부터 4 1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제4차 핵안보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란 이야기다.

이 회담엔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한다. 우리로선 자연스럽게 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은 안 열리나 하는 궁금증이 든다. 리바오둥은 시진핑이 이번 회담 기간 다른 국가 정상들과도 양자회담을 열어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리바오둥의 말을 감안하면 한중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뒷맛이 어쩐지 영 개운치가 않다. 한국 또는 박근혜 대통령을 콕 집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에선 박근혜 정부, 중국에선 시진핑 정권이 출범한 이후 한중 관계는 역대 최상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밀월을 구가해 오지 않았나. 심지어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중국경사론(中國傾斜論)까지 나오던 상황이 아니었는가.

이런 지난 3년여의 세월을 감안하면 현재 한중의 모습은 양국 관계의 소원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안타까움마저 든다. 반면 놀랍게도 일본 언론에선 이번 핵안보 정상회의 기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 대통령을 만나 회담을 가질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우리 당국자도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선 ‘가능성이 높다’ 하면서도 한중 정상회담 개최 여부엔 말을 아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중 관계의 현주소가 예전 같지만은 않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한다.

한중이 한 목소리로 아베의 일본이 우경화 움직임을 보인다며 성토하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바뀌고 말았다. 이런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건 물론 북한이다. 연초 4차 핵실험에 이은 장거리 로켓 발사 실험으로 한중 관계를 시험대에 올렸다.

우리는 북한의 잇단 도발에도 불구하고 시원찮은 반응을 보이던 중국에 실망이 컸고 중국은 한국의 사드 도입 움직임에 적지 않게 실망한 모양새다. 그리고 이 같은 서로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은 치유되지 않은 상태다.

우리는 중국이 과연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안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고 중국은 한국의 사드 도입을 막기 위해 한국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등 백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사람은 오래 사귀어봐야 그 사람의 진정을 알 수 있다(路遙知馬力 日久見人心)’고 한다.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은 초기의 밀월 기간을 지나 이제 까다로운 장애물에 부딪힌 상태다. 과연 이 장애물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 첫 발자국은 만남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워싱턴에서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눠야 할 것이다. 한중 정상의 우의가 북핵 문제로 인해 어그러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한중 관계가 나빠지면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칠 것은 북한과 일본 등이 아니겠는가. 반면 그 피해는 바로 한중 두 나라로 이어지는 것이고. 북한 핵 도발로 한반도 정세가 긴박해진 이 상황에서 마침 열리는 핵안보 정상회의는 한중 정상이 세간의 의혹을 날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30) 시진핑과 신발…신발이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신어봐야 안다

옛날 그리스에선 신발 착용 여부로 노예와 자유민을 구별했다고 한다. 노예는 신발을 신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자유민은 신발 없이는 공공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노예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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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인도에서 인도인은 영국인 사무실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했지만 영국인은 인도의 사원에 갈 때도 구두를 벗으려 하지 않았다니 신발을 신는 것은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가름하는 행위와도 같은 것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신발로 자신의 권위를 한껏 높인 인물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다. ‘태양왕’으로 불릴 정도로 포부가 컸지만 키는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160cm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키높이 구두를 신었다. 공식 행차에 나설 때 그가 신던 특제 구두의 굽 높이가 무려 13cm에 달했다는 후문이다.

우리는 신발 선물에 조심스럽다. 신발을 받은 이가 그 신발을 신고 내게서 떠나간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군대 간 병사의 입으로부터 입대 전 사귀던 여자 친구가 떠나면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데 현재 중국 국가주석으로서는 처음으로 체코를 국빈 방문 중인 시진핑이 체코의 제만 대통령으로부터 세 켤레의 신발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정장 구두와 캐주얼 구두, 그리고 운동화다.

제만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구두를 선물한 건 시진핑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인 시중쉰 전 부총리로부터 처음 받은 외국산 제품이 바로 체코의 제화업체인 ‘바타’로부터 구입한 신발이었다는 데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시진핑의 마음을 사기 위한 체코의 지극정성이 놀랍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챙겨야 할 점이 한두 가지 있지 않나 싶다. 첫 번째는 어떻게 해서든 시진핑의 마음을 얻어 체코의 경제 발전에 중국의 지원을 받으려는 체코 당국의 처절하기까지 한 노력이다.

시진핑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한 체코 당국자의 고민이 마치 눈에 환히 보이는 듯 하다. 그런 지극정성이 있다면 체코의 앞날이 밝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는 체코 의전팀과 시진핑 비서진과의 긴밀한 교류다. 선물 준비 등은 실무진의 몫인데 실무진끼리 이 정도 깊숙하게 의견을 나누며 교류할 수 있는 관계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꽌시(關係) 수준으로 봐야 한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중국에서, 또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고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중국에서 이 꽌시의 중요성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시진핑 집안은 매우 검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시진핑이 어렸을 적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이 있는데 누나가 신던 분홍 꽃신을 물려 받아 신고 나갔다가 당한 일이라 한다. 아버지 시중쉰은 손녀인 시진핑 딸에게도 냅킨 한 장을 반으로 잘라 쓰게 할 정도였다.

중국의 지난 정권에선 원자바오 총리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지방 시찰을 다녔던 게 화제가 됐었다. 시진핑 시기 들어선 신발은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는 대명사로 쓰인다.

 

시진핑은 ‘신발이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신어봐야 안다’는 신발론을 내세운다. 정치체제와 관련해 그것이 그 나라에 맞고 안 맞고는 그 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즉 중국의 공산당 일당제에 대해 서방 각국이 다당제의 필요성 운운하며 중국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나저나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신발 회사의 신발을 세 켤레나 선물 받은 시진핑이 체코에 어떤 선물을 안길 지 궁금하다.

한편으론 우리 시각으로 4 1일로 예정된 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과연 어떤 선물을 주고 받을까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참고로 박 대통령은 이제까지 칠보 바둑세트와 은다기, 천삼 세트 등을 시진핑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아마도 양국 정상 모두에게 가장 큰 선물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이 아닐까 싶다.

(31) 금에도 순금은 없다는 데…시진핑 매형의 페이퍼 컴퍼니 구설수

 

덩샤오핑이 ‘먼저 부자가 되자’는 선부론(先富論)을 제기한 건 1978년 무렵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狂氣)가 잦아든 뒤 화궈펑(華國鋒)과의 2년에 걸친 투쟁 끝에 권력을 잡은 덩의 앞에 놓인 중국의 현실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동자·농민의 천국을 만들겠다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건만 건국 30년이 됐는데도 중국의 궁핍한 상황은 하늘을 찔렀다. 하루는 한 고위 관리가 민정 시찰을 나섰다. 허름한 가옥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 둘과 함께 이불을 쓰고 앉아 있는 노인이 일어나지도 않고 손님을 맞는 게 아닌가.

사연인즉 엄동설한에 바지 한 벌 제대로 없어 딸들과 같이 나눠 입느라 벗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한 덩은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지 않은가’라며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 먼저 부자가 되라고 독려했다. 이른바 선부론의 출현이다.

한데 어떻게 부자가 되라는 말은 안 했나 보다. 이후 중국엔 부자가 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가 속출했다. 특히 고위 당원의 자제나 친인척이 권력을 이용해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권력과 금전이 한데 어우러져 부패의 앙상블을 연주하는 권전교역(權錢交易)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이 중국 인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는 건 그만큼 부패가 심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데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가 폭로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사람들 중 시진핑의 매형인 덩자구이(鄧家貴)의 이름이 거론돼 시진핑은 물론 중국 국가 자체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시진핑은 위로 두 명의 누나가 있다. 옌안(延安)의 차오얼거우(橋兒溝)중앙의원에서 태어나 차오차오(橋橋)란 이름을 가진 큰 누나와 시안(西安)에서 출생해 안안(安安)이란 이름을 갖게 된 작은 누나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어머니 치신(齊心)의 성을 따 치차오차오와 치안안으로 불린다.

시진핑은 형제자매 가운데 큰 누나 치차오차오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직장을 포기하고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1년 간 수발을 들 정도로 효심이 깊었던 까닭이다.

 

2002년 시중쉰이 타계한 뒤 직업이 없었던 치차오차오는 이듬해부터 생계를 위해 부동산업계에 뛰어든다. 그리고 함께 뛴 이가 남편인 덩자구이다. 사업 수완이 좋았는지 아니면 관시(關係)를 이용했는지, 또는 운이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업은 성공했다. 블룸버금 통신이 2012년 보도한 바에 따르면 덩자구이 일가의 재산이 76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으니 말이다.

지난해 뉴욕타임스는 또 덩자구이 부부가 과거 완다(萬達)그룹 자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완다그룹의 왕젠린(王健林) 회장은 덩 부부가 주식 공개 이전에 주식을 모두 처분해 사실상 막대한 이익을 포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시진핑이 중국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할 무렵 어머니 치신은 가족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가족들 모두 상업계에서 손을 떼라는 엄명이었다. 중요한 공직을 맡게 될 시진핑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덩자구이의 행보와 같이 과거에 있었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계속 따라 다니며 시진핑 명성에 흠을 내고 있다. 중국에 금도 순금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완벽하기란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보다.◎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전문기자

 

2016.06.22   힐러리와 트럼프…중국은 누구에게 표를 던질까

미국 대선은 세계적 관심사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제 정치에 엄청난 파장을 낳는다. 우리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주한미군 철수를 운운할 정도다. 중국도 비상한 관심을 쏟는다. 겉으론 미 대선이 미국의 국내 정치일 뿐이라 말하지만 어떤 후보가 당선돼야 중국에 유리한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미 대선 후보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나라가 중국 아닌가. 중국은 누구의 당선을 바라나. 또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미 정치인들이 중국을 존중하게 할 수 있나.’ 지난해 7월 차오신성(喬新生) 중국 중난(中南)재경정법대학 교수가 홍콩 언론에 기고한 글이다. 며칠 전 있었던 힐러리 클린턴 미 민주당 대선 후보의 ‘중국 때리기’에 발끈해 쓴 것이다.

당파 불문 미 대선 후보 공통점은
갖가지 비난 동원해 중국 때리기
‘미 일자리와 기밀 훔친다’ 주장서
‘티베트 중국 영토 불인정’도 나와

 힐러리는 “중국이 미국의 기밀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는 힐러리가 유세 중 처음으로 중국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에 미 대선 후보들의 본격적인 레이스 시작과 함께 중국 때리기 또한 그 막을 올렸다는 해석이 나왔다.

 

미 대선 레이스는 중국 때리기와 함께 간다. 2012년 대선 때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밋 롬니 공화당 후보는 경제와 외교, 내정 등 모든 방면에서의 주장이 달랐다. 그러나 한목소리를 낸 분야가 있다. 중국 공격에서다.

 

롬니는 중국이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고 오바마는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번 미 대선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대선 무대가 마치 중국 때리기의 경연장 같다. 누가 더 중국에 공격적인가를 입증하려는 모양새다.

 

 

미 대선 후보들이 거론하는 중국의 문제는 무언가. 힐러리는 중국이 미국 상업 및 정부 기밀에 대해 무차별적인 해킹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또 남중국해에서는 군사시설을 건립해 미국의 우방인 필리핀을 위협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화당 후보가 된 트럼프의 중국 성토는 중국이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데 집중돼 있다. 중국이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들의 중국 비판은 수위가 더 높았다. 힐러리를 끝까지 괴롭힌 버니 샌더스 민주당 후보는 티베트를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라싸(拉薩)에 별도의 외교기구를 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2001년 이래 미국 공장 6만 개가 문을 닫으며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중국과의 무역 확대가 한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테드 크루즈는 워싱턴의 중국대사관 앞 거리 이름을 중국 반체제 인사의 이름을 따 류샤오보(劉曉波)광장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면 중국대사관 직원들이 주소를 쓸 때마다 류샤오보에게 ‘존경’을 표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미 대선 후보들은 왜 중국 때리기에 열을 올리나. 우스갯소리로 ‘중국에 투표권이 없어 마음 놓고 때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전혀 틀린 말 같지는 않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미 정치인이 중국을 공격하는 건 자신이 외교 업무에 아주 밝은 정치인이며 미국의 국가 이익을 지키는 데 추호의 물러섬도 없다는 것을 유권자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라는 게 차오의 해석이다. 중국을 때리면 때릴수록 득표엔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한 이제까지의 중국 반응은 무반응에 가깝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 왔다. 지난 2월 말 중국 외교부 정례 기자회견에서 “만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그간 그가 해 왔던 발언에 대해 중국은 우려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그러자 화춘잉(華春瑩) 대변인은 “미국 대선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내정으로 그런 질문엔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중국은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게 중국 당국의 일관된 입장이란 것이다.

 

여기엔 중국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가 한 말이 있다. “미 대선 과정에서의 중국 때리기는 새로운 카드가 아니다. 그 누구든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면 현실적으로 미·중 양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는 경험론적 인식이 작용한다.

 

양시위(楊希雨) 중국 국제문제연구원 부원장 또한 “일단 집안일을 맡게 되면 땔감과 쌀, 소금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듯이 미국의 새 지도자는 중국과 교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런 인식이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지난 3월 미 대선 관련 질문을 받았을 때 “누가 대통령이 되든 중·미 관계는 발전의 대세를 걸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게 한 배경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건 없다. 굴기에 따른 중국의 자신감 증대, 인터넷 발달로 미 대선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면서 미 대선 후보의 중국 때리기에 대한 중국인의 반응이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차오신성은 “중국이 욕을 먹어도 가만있다 보니 미 유권자들이 정말로 중국을 나쁜 나라로 인식하게 된다”며 이젠 강력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미 대선 후보 캠프에 직접적인 경고를 보내 그들의 ‘막말’을 막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내 화인(華人) 세력을 압력단체로 적극 활용하자고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이와 함께 최근 중국 사회에 미 대선과 관련해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중국 네티즌들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미 대선 후보의 팬클럽 결성에 나선 것이다. 이는 미 대선 후보에 대한 중국의 호오(好惡)를 가늠할 수 있는 풍향계와도 같다. 바로 누구의 당선을 바라는지,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힐러리와 트럼프를 바라보는 중국의 속내는 과연 어떤 것일까.

 

 

우선 힐러리를 보자. 미안하지만 중국에서 힐러리 팬클럽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에 대한 중국의 우려는 이제까지의 힐러리 행보에서 잘 드러난다. 퍼스트 레이디이던 1995년 힐러리는 유엔 회의 석상에서 베이징(北京)의 인권문제를 거론했고 15년 후 국무장관 시절엔 중국의 인터넷 자유와 인권문제를 도마에 올렸다.

 

또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인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주장해 중국을 자극했고 몽골 방문 시에는 “정치 자유를 실현하지 않는 국가의 경제 자유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중국을 꼬집었다.

 

물론 힐러리가 국정 경험이 풍부해 미·중 관계에 큰 상처를 내지 않을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 해외판이 힐러리가 국무장관에서 떠날 때 반기는 글을 게재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그에 대한 중국의 불편한 심기를 읽을 수 있다.

 

 

반면 트럼프에 대한 중국 내 인기는 높다. ‘촨푸(川普)’나 ‘촹포(床破)’ 등 다양한 애칭을 갖고 있으며 현재 ‘촨푸 팬클럽’ 등 다양한 트럼프 지지 팬클럽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촨푸 팬클럽 개설자 딩추스(丁秋實)는 “남들이 속에만 담아둔 말을 시원하게 토해 내는 트럼프의 기백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부동산 재벌로 거래에 익숙한 트럼프의 실용주의가 중국과 궁합이 맞는다는 이야기 또한 많다. 사실 중국은 줄곧 민주당보다는 공화당 후보를 좋아해 왔다. 원칙과 이념을 이야기하는 민주당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공화당에 호감이 간다는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 또한 72년 방중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우파가 집권하는 게 나를 더 기쁘게 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리고 트럼프가 말끝마다 중국을 거론하지만 사실 경제문제 외엔 중국을 비난하는 게 없다는 점이 그의 중국 내 인기 비결 중 하나다. 진찬룽(金燦榮) 중국인민대학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중국인은 미 대선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유희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데 그러다 보니 오락성을 많이 갖춘 트럼프를 주목하게 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리 치나 저리 치나 트럼프의 인기가 높은 건 사실이다.◎
유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