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8/ 박승준의 차이나 워치3/ 2019.01.14. 2541호 노영민 전 대사 주연·연출 1급 블랙코미디 - 11.11. 2582 시진핑, 당 총서기 3연임 금지의 벽도 넘을까 - 韓中 이야기
■박승준의 차이나 워치3 - 주간조선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2019.01.14
2541호 노영민 전 대사 주연·연출 1급 블랙코미디
녹색 바탕에 노란 줄로 장식된 김정은이 탄 특별열차가 베이징(北京)역에 도착한 것은 지난 1월 8일 오전 10시55분이었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이날 오전 7시2분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대변인은 1월 8일 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의 초청으로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정은이 1월 7일부터 10일까지 중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는 한 줄짜리 뉴스를 전 세계 신화뉴스 단말기로 타전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노영민 전 주중 한국대사가 임지인 베이징을 출발해서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8일 오전 11시5분이었다.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을 출발한 항공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데는 2시간10분 정도 걸리므로, 노 전 대사가 탄 항공기는 오전 9시쯤 서우두공항을 이륙했을 것이고, 주중 한국 대사관저가 있는 베이징 차오양취(朝陽區) 싼위안차오(三元橋) 부근에서 서우두공항까지는 차가 막히지 않을 경우 30분 정도 거리이므로 노 전 대사는 오전 8시쯤 관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노 전 대사는 김정은의 중국 방문 사실이 신화통신을 통해 보도된 뒤 1시간 후쯤 관저를 떠나 서우두공항으로 출발한 셈이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노 전 대사는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취재진과 만나 ‘북·중 정상회담 기간 중 주중 대사 부재 상황’과 관련해서 “원래 어제 저녁에 귀국하기로 티케팅을 했는데 오늘 온 것”이라며 “한국과 중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 상시적으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어젯밤, 오늘 아침 회의를 통해 마무리하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사가 “원래 어제 저녁에 귀국하기로 티케팅을 했는데…”라고 말한 것은 그 시간까지는 김정은의 방중 사실을 모르고 있었거나,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랬다가 8일 오전 7시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가 신화통신을 통해 김정은의 방중 사실을 발표하자 ‘김정은의 방중 사실은 확인됐으니, 나머지는 정무공사에게 맡기고 청와대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으러 출발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티케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과 시진핑 사이의 북·중 정상회담은 노 전 대사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5시간30분쯤이 흐른 후 베이징 중심부의 인민대회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화통신과 중국중앙TV를 비롯한 중국 관영 미디어들은 북·중 정상회담을 9일 밤까지도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 웹사이트에도 발표되지 않았다. 8일 오후에 진행된 북·중 정상회담 내용은 10일 오전 7시가 되어서야 신화통신을 통해 발표됐다. 이미 노영민 전 대사의 신분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바뀌어 있을 때였다.
물론 국제정치나 중국 문제 전문가가 아닌 노영민 전 대사가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으러 오는 날짜를 늦추고 베이징에서 김정은 방중 관련 정보수집 업무를 총지휘했어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2017년 10월 주중 한국대사로 부임해서 기껏해야 1년3개월간 대사직을 수행한 점을 감안하면 복잡미묘한 북·중 관계의 깊은 부분을 이해하기는 물론 중국어와 영어, 외교 실무의 기초를 이해하기에도 부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대통령의 측근이 주중 한국대사로 부임한 것은 노영민 전 대사가 처음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전임 박근혜 대통령은 군인 출신을 보내기도 했고, 그 이전 김영삼 대통령도 측근 정치인을 주중 한국대사로 파견했었다. 그나마 두 경우는 강변할 거리라도 있다. 군인 출신은 안보 문제와 관련된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이 파견한 정치인은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한·중·일 산업화와 유교 비교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 전문가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특히 이 대사는 베이징에 부임한 후 중국어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국 특파원들에게 밝힌 뒤 실제 중국어 사전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기 시작해서 사전 한 권을 완독하기도 했다. 사전 완독 기념 점심을 한국 특파원들과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 전문가를 자처하던 이 대사도 재임 시 실수를 했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로부터 “당 총서기가 정치적으로 센 인물이냐, 총리가 센 인물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만 “총리가 센 사람이다”라고 잘못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서 당 총서기와 회담을 하면서는 중국 측이 마련해준 시간을 다 쓰지 않고 회담 석상을 뜨는 일이 벌어졌다. 반면 총리와는 예정된 시간을 넘겨 회담을 연장하는 바람에 중국 총리실 관계자들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미숙한 중국 외교가 낳은 엽기적인 사건은 시진핑 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국가부주석이던 시절 발생했다.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 서울을 방문했는데도 청와대는 “대통령이 국가부주석을 접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어이없는 명분을 내세워 회동을 거절했다. 당시 시진핑 부주석은 평양을 먼저 방문해 김정일 당시 노동당 국방위원장이 주도하는 엄청난 환대를 받은 후 서울을 방문한 길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판단은 부주석이나 부부장 등은 중국의 한 부서에도 네댓 명씩 있으니 국가부주석도 네댓 명쯤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중국 권력구조에서 국가부주석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더욱이 시진핑 부주석은 그 무렵 다음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이미 내정돼 있던 상태였다.
노영민 전 대사도 미숙한 외교 실력을 노출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 11일 노 전 대사는 베이징 대사관저에서 개천절과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연회를 개최했다. 이 리셉션에 중국 측에서는 쿵쉬안유(孔鉉佑)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파견했다. 이보다 한 달 앞선 9월 6일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는 북한 정권 수립 기념 리셉션이 개최됐는데 이 자리에는 중국 권력서열 4위인 왕양(汪洋) 정치국 상무위원 겸 부총리가 왔다.
중국에 대한 우리 외교가 이처럼 ‘레벨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정부와 대통령의 잘못 때문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뒤 27년간 국제정치와 중국 문제에 어두운 우리의 대통령들은 대사와 총영사 선정 과정에서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인과 교민들이 보기에 우스운 결정을 내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노영민 전 대사는 김정은의 3차 방중 때도 베이징을 비우고 한국으로 휴가를 와서 개인적인 집안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줘 베이징 한국 교민들의 비웃음을 샀다.
제대로 된 대사를 원하는 한국 교민들은 “레벨 낮은 대사는 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외교적 실수를 한 대사를 불러들여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장을 주고, 그렇게 임명된 대사는 청와대 직원들을 향해 ‘춘풍추상(春風秋霜·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하라)’이라는 대통령의 좌우명을 들려주었다니, 1급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다.
2544호 02.11 트럼프·시진핑·김정은 베트남서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한다면?
트럼프·김정은·시진핑, 미·북·중 3개국 정상이 2월 27~28일 베트남 다낭에서 한국전쟁 휴전 66년 만에 종전선언을 하는 일이 과연 벌어질 것인가. 한국은 1953년에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당사자 자격을 미국에 맡기고 한발 비켜서서 구경만 하게 될 것인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온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벌어질 역사적인 한반도 종전선언에서 아웃사이더가 될 것인가.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2월 6일 오전(한국시각) 워싱턴 의회 의사당에서 한 국정연설을 통해 “오는 2월 27~28일 베트남에서 북한 김정은과 2차 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2차 회담이 베트남 어느 도시에서 열릴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2월 3일 홍콩의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트럼프가 중국 무역대표단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2월 27~28일 베트남에서 무역전쟁을 종결짓는 회담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중국 무역대표단에 가까운 인사에 따르면 트럼프·시진핑 회담이 이루어질 도시로는 다낭이 유력하다”고 보도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최대의 부호 마윈(馬云)이 경영권을 소유하고 있어 중국 내부 사정에 밝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보도가 맞다면, 트럼프는 2월 27~28일 이틀간 베트남에서 미·중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 머물 것이며, 이 경우 미·북·중 3개국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트럼프는 의회 국정연설을 통해 김정은과의 2차 미·북 정상회담을 베트남에서 할 것이라고 밝히기 직전에 중국과의 무역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중국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훔쳐가는 상황을 종결시키기 위한 구조적 변화를 중국과의 무역회담에서 끌어내야 하며, 중국과의 불공정한 무역관행들을 끝내 엄청난 무역적자를 축소시켜야 한다.” 트럼프는 이미 2월 3일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중국 무역대표들에게 “(3월 1일로 예정된 양국 무역 담판 최종시한을 앞두고) 시진핑 국가주석과 2월 27~28일 베트남에서 만나 양국 간 무역전쟁을 종결시키는 담판을 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를 받아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도시로 다낭이 유력하다고 2월 3일 보도한 것이다. 트럼프로서는 베트남 다낭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미·중 무역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면서, 트럼프·시진핑·김정은 3자 간의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하는 극적인 효과를 구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낭 도심에는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이 위치해 있기도 하다.
미·중 무역전쟁도 종전?
베트남에서 진행될 트럼프·김정은 2차 회담은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미·북 정상회담의 후속 회담이다. 트럼프·김정은 2차 회담에서 무엇이 논의될지를 예상해 보기 위해 1차 회담의 합의사항을 되돌아보자. 당시의 4가지 합의사항은 “첫째,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양국 관계를 수립한다. 둘째,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셋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 넷째, 한국전쟁 포로와 실종자의 유해복구를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합의사항에 담긴 ‘새로운 미·북 관계’는 영어로는 ‘new US, DPRK relations for peace and prosperity’라고 표현됐는데, 트럼프가 국정연설을 앞두고 “북한이 전례 없는 번영의 기회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 합의사항을 두고 한 말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베트남에서 미·중 무역전쟁과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이 이뤄진다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으로서는 경제적으로, 또 외교적으로 만족할 만한 정치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비롯한 미국 내 반중(反中) 인사들이 “미국의 첨단기술을 훔쳐 경제적 번영을 이루면서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기 원하는 중국을 재건축(rebuild)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역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중국의 소비재 생산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미국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한 만큼 2월 말 베트남에서 미·중 무역전쟁 종전이 선언된다면 시진핑으로서는 미·중 무역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국내 정치적 평가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외교적으로도 베트남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1월 8일 김정은이 베이징(北京)을 방문해서 시진핑과 미리 상의하는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에 시진핑으로서는 지난해 싱가포르 트럼프·김정은 회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내외에 과시할 수 있게 된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이루어진 시진핑·김정은 4차 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은 조·미(朝美) 수뇌회담이 성과를 거두기를 희망하며, 조선반도의 평화안정과 비핵화, 지역 장치구안(長治久安)을 실현하는 데 건설적 작용을 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정은은 “조·미(朝美) 영도인 간의 제2차 회담이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성과를 거두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관련 당사국(미국)이 조선 측의 합리적인 관심을 존중해서 반도 문제의 전면적 해결을 위해 공동 노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었다.
이런 언급들을 보면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회담을 통해 트럼프와의 2차 회담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시진핑은 시진핑대로 중국이 그동안 주장해온 한반도 정전(停戰)체제의 종결과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바탕으로 한 쌍잠정(雙暫停, 한·미 군사훈련 중단과 북핵무기 개발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 정전체제 종결과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을 실현하는 가시적 성과를 베트남에서 확보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한국을 제쳐두고 미·북·중 3개국 간의 ‘한국전쟁 종전 베트남 선언’이라는 판문점 휴전 회담의 재판(再版)이 이뤄질지는 한국 내 여론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의 싱가포르 회담이 이뤄지도록 중재 역할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아웃사이더로 만들 경우 문 대통령이 국내 정치적으로 겪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상쇄할 수 있는 카드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도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2월 6일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회담 계획을 발표한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으로 갈 가능성은 낮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진짜 ‘메콩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봐야 한다. 2차 미·북 회담 개최 전까지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2546호 “조선은 제2 베트남이 안 될 것” 중국의 불안한 자신감
“우리 중국은 조선과 미국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우리는 조선과 미국 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순리대로 진행되어 적극적인 성과를 거두어, 조선반도의 비핵화와 지구적인 평화 실현에 공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2월8일 김정은과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될 것이라고 발표하자, 사흘 뒤인 11일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발표한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변함없는 중국의 입장”이다.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핵무기를 포기할 경우 북한 역사에 전례가 없는 경제적 번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무지갯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결국 “조선이 제2의 베트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중국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한(漢) 무제(武帝)가 기원전 111년 베트남을 정복해서 938년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지배를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후 베트남은 중국에 만만하게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939년 응(Ngo·吳) 왕조가 중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송·원·명·청 왕조의 네 차례 침공을 좌절시켰다. 가까이는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로 “엉덩이를 때려(打屁股) 가르침을 주기 위해” 25만의 인민해방군 병력을 동원해서 침공했으나 참담한 패배를 안겨줬다. 그런 베트남을 김정은이 공식 방문하고, 더구나 수도 하노이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갖는데 중국 지도부의 속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베트남 전문가들과, 북한과 베트남 문제에 밝은 블로거들은 “겉으로 보기에 조선과 베트남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르다. 결코 조선이 제2의 베트남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활발하게 인터넷 공간에 올리고 있다. 우선 북한과 베트남은 다 같이 내전을 경험했지만 두 나라가 처한 국제정치적 상황이 서로 다르며,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베트남이 중국과 맺어온 관계의 컨텍스트가 서로 달라 김정은이 한 번 베트남을 방문한다고 해서 북한이 제2의 베트남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닉네임이 ‘퍄오잉랑즈(飄英浪子)’인 베트남 문제 전문가는 ‘왜 조선전쟁의 결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베트남전쟁은 통일로 종결됐을까’라는 제목의 분석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과 1973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베트남전쟁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로 크게 다르다고 분석했다.
우선 한국전쟁의 경우 전쟁에 간여했던 ‘완자(玩家·player)’가 미국, 소련, 중국, 대만과 남·북한 등 6개국이었다. 이 가운데 미·소·중 3개 대국이 주요한 플레이어였고, 나머지 3개 플레이어의 군사력은 3개 대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쟁론’을 쓴 칼 폰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에 따르면 “전쟁은 특정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데 한국전쟁 당시 북의 김일성과 남쪽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은 ‘자신이 주도하는 통일 한반도’로 서로 같았지만 다른 나라들은 다 달랐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의 목표는 한반도에 미국과의 군사적 완충지대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소련 스탈린의 정치적 목표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될지도 모르는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회피한 채 기습을 당한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체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당시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 억지(containment)를 주장하던 세력과 주일미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대표로 하는 미국의 중국 복귀(rollback)를 주장하던 세력으로 서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트루먼을 대표로 하는 억지파의 정치적 목적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맥아더를 대표로 하는 중국 복귀파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30년 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원했다가 국민당이 패배하는 바람에 세계 패권국가로서 체면에 손상을 입은 미국이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맥아더 장군 직위 해제로 미국 내에서 억지파가 승리했다. 당시 중국과 소련도 한반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한반도에 미국과의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 정치적 목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결론은 통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한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트남전의 경우 전쟁 과정에서 마오쩌둥에 의한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혼란이 중국 대륙에서 진행됐다. 또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망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미국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 후반 10년간 베트남전의 ‘완자(player)’는 존슨 대통령을 대표로 하는 미국과 남·북 베트남 3자밖에 없었다. 전쟁기간 군사력은 남베트남이 북베트남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통일을 바라는 열망이라는 점에서는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뒤져 있었다. 더구나 가장 강력한 대국인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표가 땅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를 대량 살상함으로써 북베트남 군대와 지도부의 전쟁 의지를 꺾어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북 베트남 국민의 민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살상 위주의 전쟁을 하는 미군의 전쟁 행태에 대한 미국 내 비판도 거세어져서 결국 미군 철수와 북베트남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베트남과 한반도의 역사에 밝은 중국 블로거들은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도 편다. 조선왕조의 중국에 대한 기본 태도가 진심으로 승복(‘眞心鐵服’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역사적 태도는 ‘표정은 복종하되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면복심불복(面服心不服)’이 기본 태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의 경우 청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조공체계를 구축했던 반면, 베트남의 경우 송(宋) 왕조 이후 점차로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역사까지 남겼다. 베트남이 스스로 황제를 칭한 것은 조선과 특히 대비되는 대목이라는 것이 중국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조선의 경우 중국에 맞서 황제를 자칭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칭왕(稱王)의 관례를 잘 지켜 왕실에 걸린 용 그림의 발톱마저 중국과 달랐다. 중국 황실 그림에서는 용의 발톱이 다섯 개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발톱이 네 개짜리 용만 그렸다는 역사적 사실도 남아 있다.
중국의 베트남 전문가와 많은 역사학자들이 블로그를 통해 “미국이 조선의 제2 베트남화를 겨냥해 하노이에서 트럼프·김정은 2차 정상회담을 기획했지만 조선이 제2의 베트남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감을 과시하는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깔려 있다.
2548호 중국인이 사랑하는 중국 대사들을 봐라! 장하성 내정의 무모함
노영민 전 주중 한국대사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낙점돼 2개월간 비어있던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대한민국 대통령 특명 전권대사’ 자리에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야당의 비판이 쏟아졌다. 노영민 비서실장 역시 주중 대사로 일하던 지난해 6월 김정은의 3차 방중이 있던 날 자신의 지역구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돼 야당들로부터 쓴소리를 들은 바 있다. 비서실장으로 내정돼 귀국한 지난 1월 8일에는 김정은이 4차 방중을 위해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것으로 확인돼 주중 한국대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인 북한 관련 정보 수집과 판단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3월 5일 논평을 통해 “장 전 실장은 소득주도성장 실험 강행 등 문재인 정부의 정책 폭정과 경제 파탄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라며 주중대사 임명에 반대를 표했다. 이양수 원내대변인은 “주중대사는 주미대사에 버금갈 정도로 한국 외교의 중책을 수행해야 하는 자리”라며 “장 전 실장의 외교 전문성을 논하기 이전에, 주중대사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른미래당의 김정화 대변인 역시 지난 3월 5일 논평을 내 “실패한 인사의 자리까지 보존해주는 문재인 정권의 의리가 눈물겹다”며 “끼리끼리 인력풀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은 “장 전 실장은 소득 격차와 실업률을 재난 수준으로 만들고 경질됐다”며 “경제를 망친 것도 모자라 외교도 망치려고 작정한 모양”이라고 했다. 김 대변인은 “제발, 염치 있는 대통령이 돼라, 지금이라도 중국 외교전문가를 찾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6일 ‘무지개를 좇는 주중 대사’라는 제목의 정치부 기자 칼럼을 통해 “장 전 실장은 외교·안보 경험이 전무한 경제·경영 학자로, 중국어 능력은 의문이고 중국 전문성도 검증된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장 전 실장이 작년 11월 청와대를 나와 두문불출 하다가 지난 2월 26일 고려대 교수 정년퇴임식에 나와 자신은 이상주의자로 무지개를 좇는 소년으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무지개를 좇는 소년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 전 실장의 전문성 논란과 관련해 지난 3월 5일 청와대 참모들과의 티타임에서 “과거 중국에서 두 번이나 교환교수를 했고, 최근에 저서가 중국어로 출판되는 등 중국통”이라고 말하며 장 전 실장이 주중대사로 가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고 보도됐다. 장 전 실장은 2017년 6월 30일 문 대통령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에 배석한 자리에서 “제 저서가 중국어로 출판될 예정이었는데 사드 때문에 중단됐다”고 중국과 자신의 인연을 소개한 것으로 보도됐다. 문 대통령이 장 전 실장의 중국 대사 내정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저서의 중국어 출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장 전 실장이 중국어로 쓴 게 아니고, 중국에 대해 쓴 것도 아니며,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없는 책이 중국어로 번역된 건데 무슨 중국통?”이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장 전 실장의 저서는 중국어로 ‘韓國式 資本主義(한국 자본주의)’라는 제목이 붙은 서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 국제문제연구소 한반도연구센터의 싱리쥐(邢麗菊) 교수가 번역한 책이다. 현재도 온라인 중국 도서시장에서 ‘2014년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도서’라는 소개글과 함께 66위안(元), 우리 돈으로 약 1만원에 팔리고 있다. 싱리쥐 교수는 서울 성균관대에서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로, 한국어에 능통해서 많은 한국 서적을 번역한 업적이 있는 한국통 학자이다. 장 전 실장의 저서에는 ‘경제민주화에서 경제정의로’라는 부제와 함께 “한국의 좌파와 우파 사이에 ‘반(反)자본주의’와 ‘반시장경제’를 놓고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 책”이라는 광고글귀가 붙어있다.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의 좌·우파 대결의 핵심을 분석한 책이라는 광고인 것이다
중국어도 못 하는 주중대사들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이래 27년간 베이징에 부임한 주중 한국대사는 모두 12명이었다. 초대 노재원(작고), 2대 황병태, 3대 정종욱, 4대 권병현, 5대 홍순영(작고), 6대 김하중, 7대 신정승, 8대 류우익, 9대 이규형, 10대 권영세, 11대 김장수, 12대 노영민으로, 이 가운데 노재원·권병현·홍순영·김하중·신정승·이규형 등 6명의 대사들은 정통 외교관 출신이었다. 2대 황병태 전 대사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재학 중에 고등고시 외교과에 합격해서 외교부 3등서기관으로 근무한 전력이 있는 데다가 미 캘리포니아 대 버클리에서 ‘한·중·일 유교와 현대화 비교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아 주중대사로 근무하던 중 이 박사논문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중국어 번역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3대 정종욱 전 대사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미 예일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 국제정치학자 출신이다. 황 전 대사와 정 전 대사는 고위 외교관 출신은 아니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해서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12명의 전임 주중 대사들 가운데 정통 외교관 출신이거나 중국 전문 학자가 아닌 경우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류우익 전 대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권영세·김장수 전 대사, 그리고 문재인 현 대통령이 임명한 노영민 전 대사 등 4명이다. 이들은 모두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점이 발탁 배경으로 중국 외교부 등에 설명됐다.
이번 장하성 전 실장의 경우도 역시 중국 외교부에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설명이 첨부될 것으로 판단된다. 1988년부터 조선일보 베이징 주재 특파원과 홍콩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로 31년째 중국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판단으로, 12명의 전임 주중 대사들 가운데 중국어 구사가 가능한 대사는 6대 김하중 대사가 유일했다. 김하중 대사는 베이징 TV에 출연해서 중국어로 인터뷰를 할 정도의 중국어를 구사했고, 중국 외교관들로부터 “우아한 중국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이징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 가운데 특히 주중 미국대사들은 내로라하는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부임하는 것이 베이징 외교가의 상식으로 돼 있다. 만주 출생으로 리제밍(李潔明)이라는 중국어 이름까지 갖고 있던 제임스 릴리(James Lilly) 전 대사가 대표적이다. 테리 브랜스태드(Terry Branstad) 현 주중 미대사는 옥수수와 콩의 주산지인 아이오와 주지사를 16년간 지낸 인물로, 1983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많은 중국인과 관계를 쌓아왔다. 1985년 시진핑(習近平) 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중국 동남부의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부시장 시절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35년간 ‘라오 펑여우(老朋友·오랜 친구)’로 서로가 공인하는 사이다. 브랜스태드 대사의 전임 맥스 보커스(Max Baucus) 대사는 1978년부터 2013년까지 미 하원의원을 지내면서 하원 재정위원장 재직 기간 한국을 비롯한 11개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통과시킨 국제무역 전문가다. 특히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협정(WTO) 가입을 통과시키자는 의견을 제시해 중국인들로부터 ‘우리 경제발전에 중요한 도움을 준 친구’로 통하고 있다.
보커스 대사의 전임인 게리 록(Gary Locke) 대사는 아예 할아버지가 미 워싱턴주로 이민한, 이른바 중국 외교부가 ‘화인(華人)’으로 분류한 인물이다. 검은 머리의 중국인 외모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뤄자후이(駱家輝)라는 중국어 이름으로 호칭됐다.
이들 미 대사들은 대부분 3년 정도의 주중 대사 재임 기간 동안 중국과 출신 주 사이의 무역거래액을 보통 10여배 이상씩 올린 실적을 쌓았다.
주중 미국대사뿐 아니라 현 중국 외교를 총지휘하는 양제츠(楊潔篪) 정치국원은 거꾸로 미국통으로 통한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CIA지국장을 하던 시절 베이징에 놀러온 대학생 아들 부시와 인연을 쌓았다. 갓 외교부에 입부한 양제츠가 아들 부시를 데리로 만리장성을 안내해서 구경시켜줬다. 그 인연으로 주미 중국대사, 중국 외교부장을 거치며 여러 차례의 중·미 충돌 위기를 해소한 경력으로 유명하다.
미국 외교관뿐만이 아니다. 중국 외교관들 사이에 “가장 중국어를 잘 구사하는 서양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케빈 러드(Kevin Rudd) 전 호주 총리는 호주국립대학(ANU)에서 중국 문학과 역사학을 공부한 이래 끊임없이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외무장관 시절 중국 외교관들과 접촉하면서 원어민과 다름없는 중국어를 구사해서 중국인들 사이에 ‘오랜 친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케빈 러드라는 영어식 이름보다는 루커원(陸克文)이라는 중국어 이름으로 중국 내에서 더 유명하다. 그는 지금도 중국 TV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중국인들에게 ‘호주는 중국의 영원한 친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푸단대학의 한국통 중국인 교수가 ‘한국 자본주의’라는 서적을 번역 출판했다고 장 전 실장을 ‘중국통’이라고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이 인지해야 할 것은, 한국에서 근무하는 중국대사관 외교관들이 거의 예외 없이 한국어에 능통한 외교관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한국인들과 폭탄주를 마시고 쓰러지면서도 한국어로 중얼거리는 투철한 외교관 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주중 한국대사관에서는 주한 중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중국 외교관의 한국어 실력만 한 중국어 실력을 갖춘 외교관을 찾아보기 힘들다. 북핵 문제를 비롯,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중국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국내 중국통들 사이에서는 ‘설마’ 하던 인물을 선택한 무모함이 놀랍다. 제대로 확인도 되지 않는 두 번의 중국 대학 교환교수 경력과 중국 증권감독위원회 자문위원 경력의 장하성 전 실장에게 ‘중국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대통령의 그 무모함에 국내의 수많은 중국통들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전하고 싶다.
2550호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국·베트남의 개혁개방 북한이 쫓아가려면
베트남은 1979년 중국과 벌인 국경 전쟁에서 승리했다.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린 전쟁에서 중국은 베트남에 ‘교훈’을 주지 못하고 패배, 후퇴했다. 미국 자료를 바탕으로 한 우리 계산으로 당시 중국은 10개 군 3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정규군 10만명에 민병조직 5만명을 동원한 베트남에 패배했다. 물론 중국 측 입장은 다르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에 따르면 “베트남의 끊임없는 국경 도발과 이웃 캄보디아에 대한 침공을 ‘바로잡기’ 위해 2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작전을 벌인 결과 중국군 전사 2만7000명, 베트남군 사망 5만여명을 내고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라는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전쟁의 이름도 ‘베트남에 대한 보위 환격작전(對越保衛還擊作戰)’으로 정리돼 있다.
당시 베트남은 1975년 남북 내전에서 승리해 통일을 이룩한 후 경제적으로는 1950년대 마오쩌둥(毛澤東)의 노선을 택하고, 외교적으로는 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채택했다. 미군의 철수 결정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베트남 공산당은 남쪽 수도 사이공(西貢)을 호찌민(胡志明)시로 개명하고, 남부에 확산돼 있던 자본주의를 지워버리기 위해 전면 공유제를 실시했다. 중국이 보기에 당시 베트남은 “전쟁으로 입국(立國)하고, 전쟁으로 치국(治國)하던” 나라였다. 중국과의 국경전쟁을 치른 결과 국방비가 재정지출의 50%를 차지하는 전쟁국가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소련과의 관계만 열려 있고, 중국과 서방과의 관계는 꽉 막힌 폐쇄국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5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택하자 소련의 베트남에 대한 원조가 대폭 감소했고 베트남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1945년 독립을 선포한 후 1975년 남부를 제압하고 통일을 달성하기까지 30년 동안 국력이 소진될 대로 소진된 상황에서 소련의 원조가 대폭 줄어들자 통화팽창률은 800%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12월에 개최한 베트남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통일 이후 11년간 당이 잘못 선택한 엄중하면서도 장기적인 정책적 과오를 반성하고, 인민의 역할을 망각한 채 경제공작과정에서 저지른 합리적인 규칙을 무시한 과오를 자아비판하면서 도이모이(혁신개방)정책을 채택하기로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 공산당은 6차 당대회의 도이모이 결정으로 “시장시스템으로 운행하되 국가가 관리하고, 사회주의 방향을 견지한 채 다양한 상품경제 방식을 채택한다”는 노선을 채택했다. 베트남 공산당 6차 당대회는 이와 함께 ‘국영기업 자주경영에 관한 결정’ ‘외국투자법’ ‘국영은행과 상업은행을 구분하는 결정’ ‘농가의 자주경영과 토지사용 권리 확보에 관한 결정’ 등을 통과시켰다. 당시 베트남보다 8년 먼저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끄는 개혁개방 정책을 택한 중국에서는 이미 빠른 경제발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베트남 공산당 6차 당대회 이후 5년이 흐른 1991년 6월에 개최된 7차 당대회는 “새로운 국제·국내적 정세에 따라 정치·경제·외교 정책을 전면 조정하고, 특히 경제 정책 면에서는 관료통치제도를 폐지하고, 법률과 계획, 정책에 따라 관리되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채택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농업 분야에서도 개혁개방 정책을 택한 중국의 영향으로 1980년대 초부터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시한 단위면적별 생산량 계약제를 인정했다. 1993년이 되자 베트남 국회는 ‘토지 전민소유제’를 전제로 한 15~50년 사용권 제도를 입법화했다. 이 역시 중국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학습한 결과였다. 당시 중국은 안후이(安徽)성 샤오강(小崗)촌을 시범 마을로 선정해 주민 자율결정으로 토지사유화를 인정하고, 토지와 주택의 50~70년 사용권을 허용하는 한편, 사용권을 사고팔 수도 있게 입법하는 과정을 거쳤다.
베트남 공산당 7차 당대회는 국민총생산에서 민간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을 10%에서 45%로 끌어올리는 결정을 내리면서 상품과 노동의 가격을 시장시스템이 결정하도록 하는 시스템도 채택했다. 1993년에는 전력과 우편, 항만운수, 석유가격, 화학비료 가격, 시멘트 가격을 제외한 모든 상품 가격을 정부가 아닌 시장이 결정하는 체제를 선택했다. 이와 함께 1992년부터는 다원적인 금융체계와 환율 활성화 정책을 채택하면서 고속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96년의 8차 당대회, 2001년의 9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시장경제화에 가속 페달을 밟은 결과 2001년에서 2006년에 이르는 기간 경제성장률이 6.89~8.17%에 이르는 성과를 달성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중국 다음으로 빠른 경제성장률은 베트남이 올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베트남 공산당은 정치개혁 면에서는 오히려 중국공산당을 앞지르는 속도를 기록했다. 2006년 4월에 개최된 제10차 당대회에서는 중국식 표현으로 ‘차액(差額)선거’ 방식을 당간부 선거 방식으로 채택했다. 차액선거란 당선자보다 후보자 수가 많은 선거를 말한다. 이전 선거는 이른바 ‘등액(等額)선거’ 방식으로, 당선자 수와 후보자 수가 똑같은 상황에서 인민들에게 찬반만 묻는 방식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정치개혁에서 중국공산당을 훨씬 추월해서 당과 정부의 주요 직위에 당이 추천하지 않은 후보의 출마도 허용하는가 하면, 출마자 없이 선거구민들의 자유로운 무기명 투표를 통해 최고 득표를 한 사람이 특정 직위에 당선되도록 하는 자유투표제도도 도입했다. 물론 이런 정치개혁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중국이 1980년대 초부터 덩샤오핑 주도로 도입한 집단지도체제 덕분이었다. 현재 베트남 공산당의 권력구조는 당총서기와 행정부 수장인 총리, 의회 의장이 권력을 분점하는 집단지도체제다.
베트남의 경제 번영과 베트남 공산당의 선택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남 남부에서 피어났던 자본주의 경제를 1975년 통일 이후 질식 사망시켰다가 다시 소생시키는 과정으로 비친다. 중국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의 성공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집단지도체제를 바탕으로 한 권력 승계의 투명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중국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의 시장경제 체제 선택의 길을 뒤쫓아가려면 무엇보다도 김일성·김정일식의 1인 지배체제를 김정은이 포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달성한 대한민국에서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이 혹시라도 1970년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베트남과 중국의 개혁개방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크게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2552호 미국과 발맞춰 중국 겨냥하는 일본 한국 대중 전략은 제로
중국 국영 중앙TV ‘채널4’ 국제뉴스 기획 프로그램에 ‘포커스투데이(今日關注)’라는 하루 30분짜리 고정물이 있다. 그날 전 세계에서 일어난 국제뉴스 가운데 중국이 가장 관심을 가진 뉴스를 전문가들을 출연시켜 좌담식으로 해설하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지난 3월 28일 포커스투데이는 ‘일(日) 자위대 4대 기지가 하나의 선을 이루다, 일본은 제1도련(島鏈·Island Chain)을 봉쇄할 생각인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일본 방위성이 오키나와(沖繩) 본도에서 남서쪽으로 300㎞쯤 떨어진 해역에 있는 아마미오(奄美大島)섬과 미야코(宮古島)섬에 지대함(地對艦)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육상 자위대 실전부대를 배치한 사실에 초점을 맞춘 군사 프로그램이었다.
일본이 새로 건설한 이 두 개의 미사일 기지와 기존의 이시가키(石垣), 요나구니(與那國) 기지가 일본 본도에서 중국 대륙을 향해 남서 방향으로 일본도(刀) 모양의 비스듬한 사선(斜線)을 형성했다는 지도도 곁들였다. 일본이 오키나와 열도 4개 섬에 해상 탐지 레이더와 대함(對艦) 미사일을 배치하고 육상 자위대 실전부대를 배치해서 중국을 포위한 모양을 갖추었다는 게 중국 군사전문가들의 해설이었다.
일본이 기존의 오키나와 열도 2개 기지에 지대함 미사일 기지를 구축함으로써 중국이 ‘제1도련’이라고 부르는, 일본 열도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섬에 이르는 섬들의 체인(chain)에 중국의 해군 활동을 봉쇄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것이었다. 이들 기지에 미국에서 도입한 최신예 스텔스기 F35-B를 탑재한 준항모 이즈모(出云)호의 전력을 더하면, 중국 해군의 활동을 제1도련 안에 가두어 두는 전략을 완성할 수 있다는 해설이었다.
중국은 지난 30여년의 빠른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그동안 해군력을 강화해서 중국 해군의 활동 해역을 제1도련을 넘어 제2도련, 즉 일본 본도에서 사이판과 괌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연결되는 태평양 서부 해역으로 넓히는 작전개념을 구축해왔다. 역사적으로 해군력 부재였던 중국 인민해방군은 2010년 2월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도입한 구소련의 중형 항모 랴오닝(遼寧)호를 앞세워 일본 오키나와 열도의 허리쯤에 있는 미야코해협을 넘어서 제2도련 해역으로 나가 작전훈련을 하는 광경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미국과 함께 새로운 인태(印太·인도태평양) 전략을 수립해서 중국 해군의 활동영역을 제1도련 안에 가두어 두기 위해 미야코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지대함 미사일기지의 라인을 구축했다는 것이 중국 중앙TV의 보도였다. ‘포커스투데이’는 4월 1일에는 미국이 일본과 함께 협력해서 우주공간을 감시하는 방어군 형성을 추진 중이라는 프로그램도 내보냈다.
일본 군사력이 중국군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0월 오바마 행정부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하와이 이스트웨스트센터에서 ‘21세기는 미국의 태평양 세기’라는 연설을 한 직후부터였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국무장관은 하와이 연설을 통해 “태평양 서쪽 지역에 있는 미국의 전통적인 친구들, 일본과 한국, 필리핀,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힘을 합해 이 지역에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잘 발전하는 지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클린턴 장관은 그 연설을 통해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이 국제적인 규칙과 개념(rules and norms)을 잘 지키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1972년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사이의 대(大)화해를 통한 개입(engagement) 전략에서 견제(containment) 전략으로 전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 연설 직후 일본 열도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에 배치돼 있던, 러시아를 최대의 적으로 가정한 일본 자위대 최강 전차부대를 남하시켜 오키나와에 이동 배치함으로써 중국을 놀라게 했다. 미국의 대중 기본 전략이 개입에서 억제로 대전환을 하자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자세를 취하고 나선 것이었다.
“중국군을 가상 적으로 전략 세운 일 없다”
필자는 그 무렵 동료 언론인 몇 명과 함께 우리 국방장관과 점심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2009년까지 중국에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주재하면서 봤던 중국 중앙TV의 산둥(山東)성 일대 인민해방군 훈련 보도와 관련해 “우리 군의 중국에 대한 전략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우리 국방장관은 “우리 군이 중국군을 가상적으로 하는 전략을 세운 일은 없다”면서 “우리 군의 주적은 북한이며, 중국군은 우리의 전략 수립 대상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중국군은 한반도 넓이와 비슷한 산둥성에서 과거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상정한 인민해방군 작전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중국 중앙TV가 보도하는 훈련 모습에는 낙하산으로 공정부대를 상대지역에 투하하는 모습도 있었는데…”라면서 “만약 한반도 남쪽 지역에 중국 인민해방군 공정부대가 투하될 경우 우리 군의 방어전략은 무엇입니까”라고 추가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럴 경우 내가 김유신 장군처럼 전장에 나가 싸울 것”이라는 조크였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 프로세스 정책에 따라 주적인 북한군에 대한 우리 군의 긴장이 완화되는 듯하다. 이를 보고 있자니 우리 군에 중국군에 대한 방어 또는 견제 전략은 애초부터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새삼 하게 된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에 진행된 베이징(北京) 비밀회담의 내용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통치 사료들을 읽어보면 주한미군의 역할은 대북 억지보다는 중국군에 대한 억지 전력이라는 성격이 더 강한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지난 정권이나 현 정권이나 우리 군과 주한미군이 대중 억지 전력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략개념은 아예 고려 대상에 넣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군사전략에 문외한인 듯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도 주한 미국대사에 전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해리 해리스를 선임한 것을 보면 한반도 주둔 군사력이 대중 억지 전력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 군의 대중 억지 전력으로서의 측면은 아직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우리 군사력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위협이나 견제력을 갖추지 않고 있다. 그런 그늘에서 한반도 남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위협과, 우리 해군함정에 대한 일본 자위대의 초계기 감시활동, 한국 군사력을 무시하는 듯한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도발적인 발언이 가능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2554호 문 대통령이 동북아의 ‘아Q’가 되면 안 된다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은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이런 언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중앙아시아 순방을 떠나기 전인 4월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 나와 “4차 남북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4월 16일 이 일을 서울발로 전하면서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바미엔링룽(八面玲瓏)’한 조정자, 촉진자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장소와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제4차 남북 수뇌회담을 개최하자는 제의를 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최고 영도인 김정은이 발표한 시정연설을 고도로 평가하면서, 어떠한 곤란함을 만나더라도 남북 간 체결된 공동선언의 내용을 이행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바미엔링룽’이라는 말은 ‘아무데나 끼어들어 잘난 척하는’이라는 뜻으로, 우리말의 ‘오지랖 넓은’이라는 말을 약간 긍정적인 요소를 첨가해서 번역한 말이다. 우리말의 ‘오지랖 넓은’이라는 말은 중국어로는 대체로 ‘하오관 시엔스(好管閑事)’, 즉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독특한 ‘정신승리법’의 대가
많은 중국인들은 ‘바미엔링룽’이나 ‘하오관 시엔스’라는 말을 들으면 대표적인 근대문학가 루쉰(魯迅·1881~1936)의 대표소설 ‘아Q정전(阿Q正傳)’에 나오는 주인공 ‘아Q’를 떠올린다.
아Q는 출신도, 성씨도 불분명하고 행색도 초라한 데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동네 사당에서 잠을 잔다. 그러나 항상 자존심만은 높아서 걸핏하면 동네 젊은이들한테 얻어맞으면서도 ‘아이구 자식 같은 애들한테 맞았으니 내가 참아야지, 참는 것이 내가 승리하는 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아Q는 그런 자신의 독특한 ‘정신승리법’으로 버릇없는 동네 건달들을 ‘마음속으로 혼내준 뒤’ 스스로 의기양양해져서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신다. 술집에서 자신이 정신적으로는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떠들면서 옆 사람들과 시비를 벌이다 혼자 사당으로 가서 잠들어버리는 ‘정신승리법’의 대가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무기력한 지식인들을 미워하고 싫어했지만 루쉰만은 높이 평가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마오는 루쉰의 고향 부근인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에 루쉰의 동상을 세우고 공원 이름을 아예 ‘루쉰공원’이라고 개명하도록 했다. 루쉰이 1920년대에 쓴 ‘아Q정전’이나 ‘쿵이지(孔乙己)’ 등의 소설에 나오는, 무기력하면서도 자존심만 강해서 걸핏하면 두들겨맞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는 파락호(破落戶)의 모습은 사실 많은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반식민지 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이라는 나라의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11일 왕복 30시간의 비행 끝에 미국 워싱턴까지 날아가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불과 2분 만에 끝난 단독 회담을 갖는 수모를 당한 데 이어, 다음 날에는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가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그것도 70이 가까운 나이에 불과 30대의 김정은이 행한 공식 대외 연설문에서 “오지랖 넓은”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음에도 관대한 듯 4차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그러자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뉴욕타임스도 “김정은에게 ‘오피셔스(officious)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한국 대통령이 또 한 차례 정상회담을 하자는 제의를 했다”고 전했다. 오피셔스란 단어는 ‘주제넘은’ ‘부질없이 참견하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중국과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사용한 ‘오지랖 넓은’이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해서 뉴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오지랖’이라니…
문 대통령이 2017년 12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도 홀대당했다는 구설이 있었다. 방문 첫날 시 주석이 난징(南京)대학살 추모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베이징을 비운 것은 물론 공식 만찬 등 식사 회동 스케줄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 대통령은 숙소 부근에서 중국 전통 꽈배기와 콩국물로 수행원들과 혼밥을 먹는 외교 홀대를 당했지만 그러고서도 “홀대를 당하지 않았다”고 강변했었다. 당시 문 대통령에 대한 의전과 바로 직후에 베이징을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의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중국 당국이 문 대통령을 위해서 예포 한 발 쏘지 않았고 환영의식도 약식으로 때웠다는 사실을 마크롱 대통령을 위한 상반된 의전 때 알 수 있었다.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행한 “오지랖” 운운 등 불손한 언사를 보고 비분강개한 필자의 페이스북 친구는 자신의 뉴스피드에 준엄하게 김정은을 나무라는 글을 올렸다. “네가 네 손으로 주워 붙인 최고 존엄이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민이 투표로 뽑은 존엄이다. 어디다 대고 ‘오지랖’이 어떻고 ‘중재자, 촉진자 행세’ 그만두라 마라 하며 오만불손하게 구느냐?… 공식 연설문에까지 그런 무도한 말을 집어넣을 만큼 OOO 같은 O이라니….” 이 페이스북 친구는 실제로는 훨씬 심한 용어를 구사해서 김정은을 혼냈지만, 오프라인 인쇄물에 차마 그걸 옮길 수는 없다. ‘오지랖’ 운운하는 원색적인 용어를 공식 연설문에 넣은 김정은은 참으로 한심한 인물이라는 점이 요지였다.
‘아Q’와 ‘1984’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2009년 발표한 ‘1Q84’라는 소설은 1949년생인 하루키가 자신이 출생한 해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운명에 대한 관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의 존재와 무기력한 인간들, 그리고 루쉰이 1922년에 발표한 ‘아Q정전’에 나오는 아Q라는 무기력한 중국인의 표상 같은 인물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하루키 스스로 밝힌 일이 있다. 옴진리교에 희생된 무기력한 인물 등이 바로 하루키의 관심 대상이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이 아Q 같은 인물이 되어서도 안 되고, 또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중·일·러 4강과,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에 둘러싸인 우리 한국은 자칫하면 아Q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외교 안보 책임자들이 국민들이 다시는 김정은으로부터 “오지랖 넓은” 운운하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2556호 정종욱 전 주중대사 ‘회고록’의 충고
김영삼 정부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과 주중 한국대사를 지낸 정종욱(79) 전 서울대 교수가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정종욱 외교비록’. 본인은 서문에서 “기록의 기본 자료는 핵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청와대를 떠나면서 가지고 나온 여러 권의 노트”라고 밝혔다.
“내가 북한이 NPT 탈퇴를 발표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시점은 대통령이 (옥포조선소에서 있었던 최초의 국산 잠수함 최무선호의) 진수식을 마치고 조선소 구내의 오찬장으로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발표할 당시 청와대 상황실장이 보낸 메모를 본 후 대통령 옆으로 다가가서 “북한이 NPT를 탈퇴했습니다”라고 알렸다. 그때 대통령 옆얼굴을 쳐다봤는데 “표정이 굳어지면서 긴장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잠시 생각한 뒤 국무회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을 지시했고, 수행 중인 국방장관에게 “군 비상경계령 발동을 검토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렇게 시작한 북한 핵 문제는 1년 남짓 흐른 1994년 5월 18일 윌리엄 페리(Perry) 미 국방장관이 펜타곤(국방부)에서 미국의 거의 모든 4성급 지휘관들이 참여하는 주요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미 합참의장과 한·미 연합군 사령관을 포함, 한국에서 전쟁이 났을 경우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될 거의 모든 4성급 미군 지휘관이 참석한 이 회의의 결론 중 하나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90일 이내의 승리가 확실하지만, 미군 5만2000명, 한국군 49만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며, 전쟁 비용은 619억달러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결론을 갖고 다음 날인 5월 19일 페리 장관과 합참의장, 한·미 연합군 사령관이 빌 클린턴(Clinton)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또 다른 상황 전개가 있었다. 1990년과 1991년, 1992년 3년 동안 김일성이 제40대 미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지미 카터(Carter) 전 대통령에게 북한 방문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쌍방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미국 내에서 제기됐고, 그런 생각은 1994년 당시 제임스 레이니(Laney) 주한 미국대사가 5월 초 애틀랜타의 카터를 방문하는 것으로 현실화됐다. 카터 전 대통령은 레이니 대사의 부탁을 받아들여 6월 14일 한국에 도착해서 김영삼 대통령과 만났다. 당시 김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의 김일성 면담 계획에 동의를 표했고 북한 핵 문제는 1년3개월 만에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김영삼·김일성 남북 정상 간의 회담을 앞두는 급박한 상황 변화로 연결됐다. 하지만 역사는 1994년 7월 25~27일로 예정됐던 남북 정상회담을 보름 앞둔 7월 9일 82세의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돌연 사망함으로써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김정은 현 북한 국무위원장은 불과 11세의 어린이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최고권력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인내심을 발휘할 것”을 촉구했다. 정종욱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 측은 “유암화명(柳暗花明)”이라는 말도 했다. “입구가 버드나무 그늘로 가려진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처음에는 어둡지만 한참 들어가면 복사꽃이 피어 있는 환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진심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기 힘든 중국 특유의 입장 표명이었다.
그런 중국의 진심을 알게 해준 것은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1996년 1월 주중 한국대사로 자리를 바꾸어 베이징(北京) 현지에 도착한 1년 후인 1997년 2월이었다. 바로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황장엽의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 망명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진 때였다.
황장엽의 망명은 중국에는 한마디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이었다. 정종욱 대사는 황 비서가 한국 영사부에 진입한 직후부터 중국 외교부에 “황 비서의 자의 타의 여부를 확인할 면담 편의를 제공할 테니 교섭을 시작하자”고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망명 사흘 후인 2월 14일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당시 유종하 장관이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에게 “황장엽 망명에 대한 외교 교섭을 시작하자”고 제의했지만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말뿐이었다.
황장엽 망명 5일 만인 2월 17일 평양방송이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는 방송을 하고, 이 방송을 하기 전에 북한 외교부가 김정일의 그런 뜻을 중국 외교부에 전했지만, 중국 외교부는 무려 1개월을 더 끌다가 3월 17일에야 황장엽이 제3국인 필리핀을 거쳐 서울로 가는 데 동의했다. 정종욱 비록에 따르면, 중국은 황장엽 비서를 중국에 장기체류시킨 후 사건이 잊힐 때 쯤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황장엽 망명 당시 중국의 태도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이 있던 베이징의 구어마오(國貿)빌딩 5층 엘리베이터 앞 복도는 실탄을 장전한 기관총을 거총한 30~40명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전투태세로 에워싸고 있었고, 황 비서가 있던 한국 영사부 건물은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들이 경비했다. 정종욱 비록에 따르면 당시 중국 정부는 한국 영사부 인근 한 아프리카 국가 대사관에 “한국 영사부 부근에 저격병들을 배치해서 한국 영사부로 잘못 넘어가면 사살하도록 해놓았으니 주의하라”는 통보까지 해놓았다고 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집의 입구(家門口)에 해당한다. 집의 입구에 화재가 나면 집안 연못의 물고기에 재앙이 미친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전쟁도 어떤 난리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결국 관심사는 중국 자신들의 안전뿐이며, 중국의 안전을 해치는 어떤 일도 한반도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중국은 2003년 클린턴 미 행정부가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만들어 중국에 의장국을 맡기는 결정까지 했으나 이후 16년이 흐르도록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않은 바 있다. 북한이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바통을 이어가며 핵실험을 하고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 되도록 방치하는 무책임의 극단을 보여준 것이다.
1차 핵위기를 관리했던 정종욱 전 주중대사는 ‘정종욱 외교비록’의 ‘성찰과 교훈’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1차 위기 때와는 달리 이제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다. 사실상 전략적 핵보유국가로 등장한 셈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실천할 것이라는 기대는 1차 핵위기에서 얻은 교훈과 배치되는 희망적 사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우리 정부나,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이런 생각을 북핵 해결을 위한 전략 선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558호 “미국과 싸우기는 일러” 무역전쟁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불안
“우리 중국은 거듭해서 밝혀둔다. 미국이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것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미국이 무역전쟁으로 거둘 수 있는 것은 ‘쑨런하이지(損人害己·남에게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손해를 입힘)’일 뿐이다. 우리 중국은 무역전쟁을 생각해본 일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절대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둔다. 만약 우리나라로 찾아와서 전쟁을 건다면, 반드시 끝까지 상대해줄 것이라는 점도 밝혀둔다. 중국은 지금까지 어떤 외부압력에도 굴종한 일이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익을 지켜낼 결심이 서 있다.”
중국 외교부 겅솽(耿爽) 대변인은 지난 5월 14일 정례 뉴스브리핑에 나와 결연한 목소리로 전의를 다졌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2000억달러어치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10%에서 25%로 인상한다고 밝힘으로써 선포된 무역전쟁에서 중국도 국가적인 대응의 첫걸음을 내딛겠다는 각오였다. 겅솽 대변인이 입에 올린 “미국과의 무역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전쟁을 해야 한다면 끝까지 상대해줄 것”이라는 말은 외교부 대변인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 말은 2012년 말 중앙군사위 주석에 취임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인민해방군 통수권자로서 평소 인민해방군에게 강조해온 “전쟁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能打丈, 打勝丈)”는 어법을 반영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민들이여 일어나라”
중국 정부가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보복관세 부과 선언이 시진핑이 발탁한 류허(劉鶴) 경제 총괄 부총리의 방미 기간 중 마치 뒤통수를 치듯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아직 관세를 부과하지 않은 나머지 3250억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서도 최대 2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혀놓은 상태다. 이에 중국도 60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6월 1일부터 기존 5~10%에서 10~25%로 인상하겠다고 맞불을 놨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구조를 보면 중국의 대미 수출 흑자가 미국의 대중 수출 흑자에 비해 5배 이상 많은 형편이므로 수입품에 대한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형태의 전쟁에서는 중국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구조다.
문제는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 전면전을 각오하고 관영매체를 동원해서 “인민들이여 일어나라”고 투쟁 정신을 고취하면서 무역전쟁 이상의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이다.
만약 중국이 미국과의 일체 무역 거래 중단, 미국에 대한 14억 인구의 시장 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나설 경우 무역전쟁은 순식간에 이념 전쟁과 세계 패권 다툼으로 한 단계 열기가 올라갈 위험성이 있다.
이와 관련 중국 관영 중앙TV는 지난 5월 15일 대륙 전역을 동시에 연결하는 뉴스 네트워크 ‘신원리엔보(新聞聯播)’를 통해 ‘중국 경제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라는 특별논평을 내보냈는데 여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 경제의 저력은 광활한 공간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시장과 거대한 인구와 인재를 보유하고 있다는 데에서 온다. 13억 인구와 9억이 넘는 노동력 자원,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기능을 보유한 1억7000만명의 인재, 1억이 넘는 경제주체가 중국 경제의 저력이다. 중국 경제의 저력은 지속적인 기술 이노베이션이 이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 경제의 저력은 그동안 경제의 세계화를 전방위적으로 추진해온 결과 더 이상 한 개의 특정 국가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도 두고 있다. 중국 경제의 저력은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강력한 영도력과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제도의 우세에서도 온다.”
중국 관영 중앙TV가 마지막 부분에서 시진핑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강력한 영도력을 거론한 것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이 경제전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전쟁과 군사적인 전쟁으로 언제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경우 중국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대륙 전역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영도력 운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우리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역설적으로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는 중국인들 스스로의 말처럼 미국과의 무역전쟁에 임하는 중국인들의 패배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예컨대 최근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은 저명한 경제학자로 미국과의 경제무역 전쟁을 자세히 관찰해온 중신(中信·중국대외신탁업무) 개혁발전연구소 자문위원 장지에(張捷) 교수의 견해를 8000만 중국공산당원들에게 전달했는데 여기서 장지에 교수는 솔직한 불안감을 토로했다.
중국이 승리할 수 없는 이유
그는 자신의 불안감과 ‘중국이 승리할 수 없는 이유’를 잘 정리해서 온오프라인 정보 확산 네트워크에도 올렸다. 여기서 그는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승리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우리는) 생산과 분배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미국은 글로벌한 분배체계를 이미 주도하고 있지만 중국은 아직 그럴만한 체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GDP라는 개념은 우리의 생산이 얼마만 한 규모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분배체계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성장과 경제성적도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장을 추구해왔지만 이전의 중국은 너무나 가난하고 허약했으며 역사적으로 진 부채도 대단히 크다.”
장지에 교수가 8000만 중국 공청단원들을 겨냥해서 강조한 ‘무역전쟁에 임하는 중국의 실력’은 한마디로 중국이 서방에 비해 뒤져온 역사를 직시한 것이다. 즉 15세기부터 과학기술에서 유럽과 서방세계에 뒤져서 17세기의 유럽 산업혁명도 뒤따라가지 못하다가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 패해 2300여년 지속해온 왕조체제가 무너진 것이 중국의 아픈 역사다.
이후 100년간의 혼란과 식민 상태를 경험한 끝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는 했지만 제1세대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역시 과학기술과 경제에 대한 무지로 경제발전이 뒤처진 후진국이었다. 1978년에 시작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추진으로 겨우 빠른 경제발전에 나섰지만 경제발전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40년밖에 안 된 국가가 중국이다. 장지에 교수의 불안감에는 이러한 중국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학자의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다.
2560 천안문 30주년, 고발은 끝나지 않았다
“천안문사태 30주년, 중국 인민해방군 내부자가 ‘사태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민해방군 소속 전직 기자였던 이 내부자는 그날 베이징에서 있었던 유혈진압을 정치적인 금기로 삼아서는 안 되며 중국 사회 전체가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천안문(天安門)사태’ 30주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 5월 28일 이런 제목의 베이징발 기사를 실었다.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베이징(北京)시 중심부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중국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중국 인민해방군이 유혈진압한 사건을 잊지 말자는 내부자의 경고를 담은 기사다. 이 기사의 인터넷 중국어판 제목은 ‘30 Years After Tiananmen, a Chinese Military Insider Warns: Never Forget’이라는 영어판 제목보다 더 끔찍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6·4사태 30주년: 전 군관의 천안문 도살(屠殺) 회고(永志不忘:六四30年,前軍官回忆天安门屠杀)’.
뉴욕타임스는 자신들이 발굴한 ‘장린(Jiang Lin·江林)’이라는 이름의 내부자가 30년 전 천안문사태 당시 36세의 해방군 소속 기자로 계급은 중령이었다고 밝혔다. 지금은 66세 초로의 예비역 군인인 장린은 그해 6월 3일 밤 12시 가까운 시각에 천안문광장으로 달려갔다. 사복 차림을 한 채 자전거를 타고 계엄령이 내려진 천안문광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취재하던 중 무장경찰이 휘두른 방망이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장린은 시위 군중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은 건졌으나 머리에는 지금도 당시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증언했다. 뉴욕타임스는 장린이 “당시 인민해방군 일부 지도부는 민주적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력진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으나 덩샤오핑(鄧小平·당시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이끄는 당과 군의 최고 지휘부는 해방군 내부의 그런 견해를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인민해방군 내부자 장린의 이야기를 전하는 뉴욕타임스 기사 중 ‘crush student protest in Tiananmen Square’라는 푸른 글씨를 클릭하면 30년 전 6월 4일 당시 뉴욕타임스 베이징 특파원이었던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기자가 쓴 ‘CRACKDOWN IN BEIJING; TROOPS ATTACK AND CRUSH BEIJING PROTEST; THOUSANDS FIGHT BACK, SCORES ARE KILLED(베이징의 진압; 군대가 베이징 시위를 진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압에 저항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뜬다.
“수만 명의 중국 군대가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수도 중심부의 광장을 민주적 시위자들로부터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수의 학생과 시민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시위 군중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군대는 천안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베이징의 주요 도로를 따라 광장으로 진입했고, 길을 비켜주지 않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하거나 공중으로 총을 발사했다.”
니컬러스 크리스토프 특파원은 6월 3일 자정쯤 광장에서 시작된 총성을 듣고 광장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던 뉴욕타임스 베이징지국 사무실에서 자전거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용감한 취재정신으로 다음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물론 혼자 달려간 것은 아니고 몇 명의 중국인들에게 카메라를 쥐여줘서 현장 사진을 찍게 했다.
당시 천안문광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가 그해 4월 8일 정치국 회의 도중 심장병 발작으로 쓰러져 4월 15일 사망한 직후부터였다. 후야오방은 1986년 말 중국 대륙 전역에서 벌어진 대학생 시위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당내 원로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다 실각했었다. 광장의 시위대는 처음에는 후야오방 당 총서기 추도를 내걸었지만 구호는 점차 반(反)부패와 민주화 요구로 바뀌어갔다. 처음 시위를 주도한 것은 베이징대학을 비롯한 베이징 시내 대학 재학생들이었지만, 시위에는 일반 시민과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관영 신화통신 기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시위 군중의 수는 100만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당시는 한·중 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홍콩에 특파원으로 주재하던 필자를 포함한 한국 기자들은 마침 5월 16일로 예정돼 있던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30년 만의 중·소 화해’를 취재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천안문광장의 시위를 목격하게 됐다. 당시 필자를 포함한 한국 언론사 홍콩특파원 대부분은 취재 목적이 아니라 홍콩 기업의 컨설턴트 자격으로 비자를 받아 취재를 하던 상태였다. 비자 만료일인 5월 30일, 천안문광장 시위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홍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홍콩으로 나온 직후 비자를 다시 신청해 인민해방군의 유혈진압이 있은 5일 후인 6월 9일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취재를 계속했다.
뉴욕타임스 베이징특파원 크리스토프 기자의 6월 4일자 기사는 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사망자 수와 관련해 이렇게 보도했다. “베이징 시내 3개 병원에 68구의 시민들 시신이 들어왔고, 다른 4개 병원에도 다수의 시민들 시신이 들어왔으나 그 숫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5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대부분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부 사망자들은 해방군의 장갑차들이 시민들이 설치해놓은 바리케이드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장갑차에 깔려 죽기도 했다고 한다.”
크리스토프 기자는 퓰리처상을 수상할 자격이 있는 냉정한 기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베이징발 서양 통신사 기사들은 1500명이 넘는 시민, 대학생들이 사망했다고 전하기도 했으나 크리스토프 기자는 ‘냉정’을 유지했다. 사태가 한참 지난 후 발표된 중국 국무원 대변인의 발표도 “시민과 군인들 합해서 수백 명 정도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천안문사태는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1978년 12월에 시작한 개혁개방 정책이 10년쯤 지나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덩샤오핑이 이끄는 ‘빠른 속도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이른바 ‘개혁파’와, ‘사회주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천천한 속도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천윈(陳雲)의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개혁파와 보수파 지도부들은 시위 때문에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장안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간 점, 시위대들이 덩샤오핑의 이름과 발음은 같고 글자는 다른 샤오핑(小甁)을 낚싯줄에 매달아 광장에서 끌고 다닌 점, 천안문 바로 앞에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본떠 만든 ‘민주 여신상’을 세운 점 등에 격분해서 시위를 강경진압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지도부와 천윈을 중심으로 한 개혁보수파 지도부들은 천안문사태를 진압한 후 사태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시위의 기본 성격도 ‘부르주아 리버럴리즘’을 추종하는 일부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벌인 ‘폭란(暴亂)’ 또는 ‘동란(動亂)’으로 규정했다. 이들 지도부는 아예 사태의 기억을 중국인의 머릿속에서 지우는 작업을 벌였다. 이와 함께 경제발전에 집중해서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자전거 이론’ 방식을 적용했다.
실제 지난 30년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빠른 경제발전에 집중함으로써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민주화에 관심을 두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이 구상했던 장기적인 정국타개 방안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천안문사태는 중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실제 지워지거나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뜻에 맞는 방향으로 성격 규정이 이뤄졌다. 다음은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1989년의 정치 풍파’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천안문사태에 대한 공식 입장이다.
“1980년대 말 우리 사회에는 자산계급 자유화 사조가 유행했다. 자유화 분자들은 부르주아들의 민주와 자유 개념을 선전하고 반당(反黨), 반(反)사회주의적 활동을 진행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 서거를 계기로 청년학생들과 많은 군중들은 추도 활동을 했는데, 극소수의 자유화 분자들이 추도 활동을 구실로 반당, 반사회주의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선동으로 수도와 지방의 각 대학 학생들은 시위 활동을 벌였고, 시안(西安)과 창사(長沙) 등 지방의 불법분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부수고, 불태우고, 약탈을 자행하는 동란 사태를 벌였다. 이에 인민일보는 ‘동란에 반대하는 기치를 선명하게 들자’는 사설을 발표해서 당의 영도와 사회주의 제도에 반대하는 동란을 제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태 당시 인민일보의 사설을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운 중국공산당 원로들은 6월 3일 밤 10시쯤부터 100만명이 시위 중인 천안문광장 좌우 장안가 도로 동서쪽에 2개 군단을 투입했다. 그리곤 다음날 새벽 4시 이전에 광장 중심부 인민영웅기념비 주위에 시위본부를 설치해두고 있던 학생 지도부를 ‘청소’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천안문사태’라는 단어는 중국 지식인은 물론 일반 인민들 사이에서도 청소된 듯 금기어가 됐다. 그동안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대학생을 포함한 청년들이 할 일은 오로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도 축적하는 길을 걷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다.
천안문사태에 대한 공식 평반(平反·재평가)은 아직까지 중국 내부에서 제기되지 않고 있지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해마다 6월 4일이 되면 천안문사태를 기사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를 비롯한 현재의 중국공산당 지도부 역시 당시 사태에 대한 재평가 언급이 전혀 없다. 시진핑 당 총서기는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36세로, 중국 남부 푸젠(福建)성 닝더(寧德)지방 당 서기여서 사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
2562 김원봉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올해는 일본 군국주의가 패망한 지 74년,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66년이 되는 해다.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주축이 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10월 1일) 이런 때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뜬금없이 1898년에 출생해 1958년에 사망한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약산 김원봉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 그 바람에 우리 사회에서 뜻밖에 격렬한 좌우 대립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추념사 가운데 김원봉에 대한 표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3월 충칭에서 우리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청사복원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지난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는 뜻깊은 날 미국 의회에서는,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의 시초로 공식 인정하는 초당적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과 번영의 토대가 되었으며 외교, 경제, 안보에서 한·미 동맹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앞뒤 맥락을 잘 짚어보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한 주체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아니라 한국광복군이었고, 조선의용대를 흡수한 광복군의 역량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추념사는 광복군의 다른 주체세력과 인물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으로써 민족의 독립 역량이 결집됐다”고 표현함으로써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이 결집한 민족 독립운동의 역량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적시해버린 셈이 됐다. 이에 따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가장 중요한 힘을 구성한 광복군의 역량이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으며,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는 결론을 내는 난센스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전범 가운데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가장 중요한 3인 중 한 명인 김원봉에 대해, 그것도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국군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현충원에서 대통령이 존경을 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크게 훼손돼버렸다.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 최대의 관영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중국공산당의 역사 평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김원봉의 일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원봉(金元鳳), 일명 김약산, 한국 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소장·부총사령관, 조선민족혁명당 부당수 겸 총서기, 인민공화당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초대 감찰상, 조선전쟁 폭발 후 검열상, 전쟁 후 1954년 노동상,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당선, 1957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1958년 11월 남조선노동당과 연안파(延安派) 숙청 때 피살. 학력 진링(金陵)대학 졸업, 신앙은 공산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김원봉에 대한 중국공산당 평가의 결론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김원봉은 1898년 8월에 출생해 어릴 때는 고향 밀양에서 한문과 전통 유가 교육을 받았다. 12세 때 밀양 동화(同和)학당이란 곳에서 교장 전홍표(全鴻杓)로부터 배일(排日)사상을 배운 후 16세 때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로 상경해서 애국지사가 설립한 중앙고보에 입학해 무예 연마단을 조직했다. 이후 항일 역량을 기르기 위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항일 의사(義士)들과 만나 거사를 일으킬 방안을 논의했다고 중국공산당은 기록했다.
김원봉은 그러나 일본의 무력이 강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8세 때인 1916년 중국 톈진(天津)으로 건너가 덕화(德華)학당이란 곳에서 독일어를 배워 독일의 선진 군사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917년 당시 중화민국 정부가 1차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단교하는 바람에 독일어 공부를 중단했다. 독일로 유학해서 군사학을 공부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김원봉은 1918년 20세 때 중국 남부 난징(南京)으로 가서 진링대학에 입학해 서양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진링대학은 기독교 침례회가 설립한 대학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시각으로는 “독일을 비롯한 서양을 공부해서 일본을 극복한다”는 김원봉의 점진적인 독립운동 방식이 무력을 통한 조선 국권회복(武力復國)으로 바뀐 것은 1919년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이 계기가 됐다. 1919년 21세의 김원봉은 난징을 떠나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 지린(吉林)시로 가서 단순한 무장투쟁으로는 국권회복의 희망이 멀기만 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한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과 김원봉이다. 일본이라는 ‘강도’를 쫓아내려면 폭력혁명적 수단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며 특무를 동원해서 조선 혁명의 적들을 소멸하고 민중이 기초가 되는 이상국가를 만드는 것이 의열단의 목표였다. 의열단의 당장의 목표는 일본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이 독립국가가 되고 나면 조선의 공인(工人) 계급과 농민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강령으로 세워두고 있었다. 의열단의 주요 투쟁 수단은 홍색 공포였으며, 조선 각지의 경찰서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 신문사, 일본 행정기관 등을 파괴한다는 ‘5파괴’와, 조선 총독과 총독부 고관들, 일본군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와 앞잡이들, 민족을 배반한 토호(土豪) 등 일곱 부류를 죽여 없앤다는 ‘7가살(可殺)’이라는 규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1927년 8월과 12월에 중국공산당이 최초로 일으킨 무장폭동인 난창(南昌)폭동과 광저우(廣州)폭동에 ‘아리랑’의 주인공이었던 김산(金山)을 비롯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참여했다가 100여명의 조선인 동지를 죽게 만드는 희생을 겪은 뒤 의열단의 분열이라는 흐름과 부딪히게 된다. 중국공산당이 무력을 동원해서 국민당 세력과 싸우기 시작한 난창폭동과 광저우폭동을 겪으면서 의열단은 공산주의자로 자임하는 그룹과 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하는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이때 김원봉은 공산주의 좌익사상을 견지했다. 반면 김산은 무정부주의를 지향했다. 김원봉은 1930년에는 당시 베이핑(北平)으로 불리던 현재의 베이징(北京)에서 조선 독립의 방향을 공산주의 국가 건설로 잡고, 레닌주의 학습을 위한 정치학교 설립과 간행물 ‘레닌’을 출판하는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평가다.
이후 김원봉은 1931년 일본이 9·18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다시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가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광복동지회 등 조선인들의 항일 조직을 묶어서 ‘한국 대일(對日) 통일전선 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2년 3월부터는 ‘천궈빈(陳國斌)’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흐름과는 별도로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평가다.
김원봉의 사상적 흐름과 행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한국광복군이 조선 민족의 독립 역량을 결집했다고 평가한 것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1948년 11월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에 가서 연석회의를 하기 무려 21년 전인 1927년에 중국공산당이 난창과 광저우에서 일으킨 무장폭동에 가담한 이후 의열단이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두 개의 흐름으로 갈라질 때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견지했다고 정리돼 있다. 김구 선생과 평양으로 갈 때 김원봉의 생각은 이미 다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950년 김일성과 함께 일으킨 6·25전쟁은 이미 30세가 되기 전에 품게 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의 이익을 위한 새로운 조선 건설’에 따른 것이었다는 사실을 중국공산당의 김원봉에 대한 공식 기록은 증언하고 있다.
1921년 창당해서 올해 7월 1일로 창당 98주년을 맞는 중국공산당은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중요한 고비에서 회의를 열어 당의 입장을 정리하는 관행을 갖고 있다. 입장을 정리한 다음에는 특정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라는 형식으로 당내의 역사 문제에 대한 통일적인 견해를 발표하는 전통도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뜬금없이 김원봉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내리려는 시도를 했다면 문 대통령의 시도는 무모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많은 역사학자들과 역사연구학회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연구와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나서서 특정 역사 문제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면 중국공산당으로부터도 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식 연설을 통해 분위기를 띄운 ‘김원봉 서훈’에 대해 청와대가 금방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발표를 하고, 국방부는 국방부대로 “조선의용대 결성과 광복군 참여를 군의 역사 기록에 편입시킬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것도 중국공산당의 시각으로 보면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다.
2564호 북·중 관계 첫 등장 ‘벽화’가 의미하는 것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6월 20일부터 이틀간 평양에 가서 김정은을 만났다. 시진핑은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됐으나 그동안 평양 방문을 하지 않았다. 전임자들의 사례를 보면 당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 한 차례 평양 방문을 하는 것이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 사이의 관례였다. 시진핑의 전임자인 후진타오(胡錦濤)도 그랬고, 장쩌민(江澤民)도 그랬다. 1989년 천안문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은 천안문사태가 시작되던 그해 4월 평양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당 총서기로 선출된 이후 평양 방문길에 나서지 않았다. 201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해 2월에 김정은이 3차 핵실험을 감행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에는 미·중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더구나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의장국이 중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국가주석으로 임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국 최고 권력 교체기에 김정은이 핵실험을 하자 시진핑은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2018년 3월 김정은이 베이징(北京)을 최초 방문할 때까지 6년 동안 시진핑은 평양을 방문하지도,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지도 않았다. 시진핑의 평양행은 2008년 국가부주석 자격으로 김정일을 만난 이후 11년 만이다. 그 사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미·중 관계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충돌 일보 직전으로 바뀌었다. 특히 트럼프가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중국이 관리한다’는 1972년 닉슨-마오쩌둥 원칙을 깨고 중국을 넘어 김정은과 직접 접촉하기 시작하자 시진핑이 평양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시진핑과 김정은의 회담은 지난 6월 20일 ‘금수산 영빈관’에서 열렸다. ‘금수산 초대소’라는 이름을 중국식으로 개칭한 곳에서 열린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이전에 중국과 북한 지도자들 사이에 주고받지 않던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용어는 주로 시진핑이 구사했고, 김정은은 과거의 북·중 관계의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단어들로 두 나라 관계를 표현했다.
“나는 오늘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곳곳에서 중국과 조선은 ‘한집안처럼 가깝다(一家親)’는 분위기를 짙게 느낄 수 있었다. 조선반도 문제는 이제 정치적인 해결을 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우리는 중·조관계의 아름다운 미래를 공동으로 벽화(擘畵)하고 중·조 우의의 ‘새로운 장(新篇章)’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시진핑의 말에서는 ‘정치적인 해결’ ‘공동으로 벽화하고’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정치적인 해결’이라는 말 뒤에는 곧이어 이런 말들이 등장했다.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이 중·조관계의 본질이며, 공동의 이상과 신념, 분투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이 중·조관계의 전진 동력이다.… 두 나라는 장기적이면서도 원대한 대국(大局)에서 만들어진 전략적 선택으로 국제적인 풍운이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동요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양국 관계를 설명하는 많은 용어가 사용됐지만 ‘벽화(擘畵)’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벽화’란 ‘엄지손가락으로 하늘에 대고 맹세하고 함께 미래를 그려본다’는 용어이다. 시진핑이 ‘벽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엄지손가락을 가슴과 입에 댄 뒤에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는 중국 북방 민족들의 풍습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벽화’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이나, “국제적인 풍운이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두 나라 관계가 변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한 것은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트럼프-김정은 회담이나, 지난 2월 하노이 미·북 회담 당시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이러다가 혹시 조선을 미국의 영향권으로 넘겨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강하게 느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11년 만에 시진핑을 평양으로 가게 만든 가장 큰 동력은 트럼프다. 그가 김정은을 미·중관계에서 가장 충돌 가능성이 높은 남중국해 근처의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중국의 어깨를 넘어 직접 만나 회담한 사실이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에 상당한 충격을 줬다고 진단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 이전의 미 대통령들은 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전격적인 비밀 회동으로 이루어진 미국과 중국의 대화해(Rapprochement) 당시의 합의에 기반해 한반도를 관리해왔다.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이 배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중국도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형 대국관계’라는 용어를 구사하면서 한반도 핵 문제는 일단 미국과 중국이 먼저 협의하자는 틀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중 간의 그런 전통적인 틀을 깨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무시한 채 김정은과 직접 접촉했다. 그것이 시진핑의 불안을 키워왔다고 봐야 한다. 다행히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중국이 끼어들 틈이 생기자마자 시진핑은 이번 평양행을 통해 이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시진핑의 이번 평양행에는 정치국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 딩쉐샹(丁薛祥), 외교담당 정치국원 양제츠(楊潔篪), 외교부장 왕이(王毅),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 허리펑(何立峰) 등이 수행했다고 중국 관영매체들은 전했다. 이 가운데 딩쉐샹은 올해 57세로 중국공산당 당무를 총괄하고 있는 인물이다. 20차 당 대회가 열리는 2023년에 63세가 되어 시진핑의 후임 당 총서기 후보로 주목받고 있다.
특이한 수행원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인물은 올해 64세로 시진핑보다 두 살 아래인 허리펑이다. 그는 시진핑이 1980년대 초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당 상무위원과 부시장을 할 때 샤먼시 재정국 국장을 한 인연으로 발탁된 재정금융 전문가다. 샤먼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이기도 하다. 시진핑이 허리펑을 이번에 수행원으로 선택한 것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구체적으로 밝힐 경우 유엔의 대북 경제제재 조치에 위반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자신의 심복을 데려감으로써 앞으로 대북 경제지원을 총괄해서 실현할 책임자를 미리 선보이는 선에서 북한을 안심시킨 것이다.
시진핑의 이번 평양 방문의 의미에 대해 중국 공식 국책 국제문제연구소인 현대국제관계연구원 천샹양(陳向陽) 부연구원은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북한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를 분명하게 밝힌 점, 둘째 ‘일괄 타결식으로, 단계별 접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국제 문제에 대응하기로’ 한 점, 셋째 앞으로 양국 간의 전면적 교류를 양국 주민들 사이의 민의에 기초하기로 한 점, 넷째 서로의 치국이정(治國理政) 경험을 앞으로 공유하기로 한 점 등이 새로운 변화라는 진단이다. 천샹양의 이같은 진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앞으로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2566 낡은 이념의 홍(紅)에서 전문 지식의 전(專)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인 위화(余華)는 1960년생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벌어졌던 문화혁명을 어린 눈으로 지켜본 세대다. 1966년부터 1976년 사이 10년 동안 중국대륙 전역에 불었던 문화혁명이라는 태풍은 마오쩌둥(毛澤東)이 국내 정치에서 불리한 입장으로 몰리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사실상의 정치투쟁이다.
마오쩌둥은 중고교생들과 대학생들에게 ‘홍위병(紅衛兵)’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는 전위대’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기성 권위를 때려부수도록 부추겼다. 기득권자들을 때려 죽여도 되는 신나는 권한을 부여해줌으로써 중국 전역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문화혁명은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여러 가지 성인병이 겹쳐 사망함으로써 종결됐다.
1977년에 중학(우리의 중고교)을 졸업한 위화는 1994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정신으로 쓴 소설 ‘살아간다는 것(活着)’을 발표했다. 1978년 12월 권력을 장악한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가 추구하던 혁명정신(紅)보다는 전문지식(專)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중국을 바꾸어놓은 지 15년쯤 됐을 때였다. 어린 위화가 지켜본 문화혁명이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소설은 개혁개방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謨)에 의해 영화화됐고, 우리 나라에도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영화 ‘살아간다는 것’의 광경
영화 ‘살아간다는 것’에는 말 못하는 벙어리 딸을 둔 아버지 얘기가 나온다. 이 아버지는 비록 절름발이기는 하지만 붉은 완장을 찬 사위를 맞아 딸이 임신하는 기쁨을 맞본다. 하지만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딸은 출산 도중 출혈을 막지 못해 목숨을 잃는다.
장이머우의 영화에서는 기가 막힌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산부가 출혈을 하는데 이를 막을 만한 의학지식을 갖춘 의사는 없고, 혁명정신에 투철한 애송이 의사들만 나와 안절부절못한다. 딸의 출혈이 계속되자 아버지는 “진짜 의사 선생님은 안 계시냐”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젊은 혁명가 의사들이 원로 의사를 집에서 데려오지만 그는 일주일째 굶은 상태였다. 우선 먹을 것을 주어야 진료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 딸의 아버지가 거리로 뛰어나가 만두를 사오지만 만두를 급히 먹던 원로 의사 역시 목이 막혀 죽는다. 이런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광경이 영화 ‘살아간다는 것’에 그려져 있다.
지난 7월 9일 ‘민간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를 발표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서울 아파트 가격과 씨름을 벌이는 과정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매사에 열심이고 진지한 성격일 것으로 보이는 김현미 장관의 프로필을 보면 1962년생이다. 50대 후반인 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언론홍보대학원을 수료하고 정치 경력의 대부분을 언론과 홍보 담당자로 일해왔다.
김 장관은 2015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간사, 2016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비로소 예산과 재정 문제를 다루게 된, 결코 ‘국토교통 문제 전문가’라고 할 수 없는 프로필을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왜 김 장관에게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국토교통부 장관이라는 직책을 맡겼을까. 3할 이상의 여성 장관을 기용하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그것도 ‘제대로’ 지키기 위해 국토교통 분야 비전문가인 김 장관에게 중책과 함께 당혹감을 안겨준 것일까.
전주의 자사고인 상산고의 일반고 전환 문제와 서울의 13개 자사고 가운데 8개 자사고의 일반고화를 밀어붙이고 있는 유은혜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역시 1962년생으로 50대 후반의 비(非)교육전문가이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와 이화여대 공공정책학 석사 학력을 갖고 있는데, 54세 때인 2016년 20대 국회 재선의원으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교육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교사나 교수 경험은 물론 교육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 않은 교육부 장관으로, 그 역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비슷한 당혹감을 많이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왜 교육 비전문가인 유은혜 장관에게 국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로 표현되는 교육문제를 맡겨 당혹감을 안겨주고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노영민 현 청와대 비서실장을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로 임명했을 때 중국에 사는 한국교민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동운동의 수단으로 딴 자격증이기는 했겠지만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전기공사기사와 위험물처리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전기회사 사장 출신의 노 실장 프로필 어디에도 중국대사직 수행과 관련된 경력이 발견되지 않아서였다. 노 실장 역시 중국대사직을 수행하면서 곤혹감과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적폐 청산이 아니라 주류 청산"
공관병 갑질 의혹으로 옷을 벗은 예비역 육군 대장 박찬주씨는 법원 2심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춘천지법원장이던 사람이다, 대법관도 안 거쳤다, 외교부 장관은 과거에 통역사였고, 민정수석도 검찰 출신이 아니다, 모두 비주류다, 적폐 청산이 아니라 주류 청산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장의 이 말은 이들이 비주류이기 이전에 비전문가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은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사회주의 대동(大同) 사회를 추구하다가 중국을 세계 최빈곤국의 대열에 빠뜨렸다. 전문지식은 무시하고 혁명성만 따지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끊이질 않았다. 참새가 곡식 낟알을 주워 먹는다고 인민들에게 참새를 모조리 잡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한 예다. 그 결과 해충이 만연해져 중국은 기근에 빠졌고 수천만 명이 아사했다. 인민들의 힘으로 3년 만에 영국보다 강철 생산량을 높이려다가 중국 삼림의 많은 부분을 황폐화시키기도 했다.
그런 사회에서 눈물로 참고 지내던 덩샤오핑은 마오가 죽자 1978년 12월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당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논리적 근거가 없는 마오의 비과학적 사상과 마오가 살아서 한 지시와 결정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고 정책 판단을 하는 합리적 사고를 하라고 전체 중국공산당원에게 촉구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1970~1980년대의 낡은 운동권 이념에 집착하는 홍(紅)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 전문가와 전문지식을 중시하는 전(專)의 시대로 정부 분위기를 전환해줄 것을 권해본다.
2568 07.29 중국 신국방백서 발표 인민군은 싸우면 이기는 군대?
러시아 폭격기 TU(투폴레프)95 2대와 조기경보 통제기 A50 1대가 독도 우리 영공을 침범하자 우리 공군이 비상 출격해 300여발을 경고 사격하는 일이 지난 7월 23일 벌어졌다. 고노 다로(河野太) 일본 외무상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갖고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는 우리의 고유 영토로, 영공 침해를 한 러시아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대응해야 하지 한국이 조치를 한다는 것은 우리 정부 입장과 양립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범상치 않은 때 중국 국무원은 ‘신시대 중국 국방백서’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중국 국방부 대변인 우첸(吳謙) 대령은 7월 24일 이번 백서에 대해 “1998년 이래 10번째 국방백서”라며 “2012년 제18차 당 대회 이후로 처음 발표된 종합형 국방백서”라고 강조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당 대회가 시진핑(習近平) 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선출한 대회이므로 이번 국방백서가 시진핑의 군 통치 이념을 제대로 반영한 첫 번째 국방백서라는 설명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새로운 시대 군사전략을 담았다는 2만7000자 길이의 이 백서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이 한국에 미사일 방어망 사드를 배치함으로써 이 지역의 전략적 평형을 파괴하고 이 지역 국가들의 전략적 안전과 이익에 엄중한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중국군 백서에 미군이 특정 지역에 배치한 특정 무기체제에 대한 반대 주장을 담은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중국이 한국의 군사주권을 무시하고 특정 무기체제의 한국 배치에 대한 반대의견을 발표한 것이 무리한 주장이라는 중국 안팎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전체 전략이 아닌 특정 무기체제의 특정 국가 배치에 관해 중국 정부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경우는 이전에 볼 수 없던 행동이다. 이런 반대 의사 표명이 바로 시진핑의 견해이기 때문이라는 중국 안팎 군사전문가들의 판단이 사실이었음을 이번 백서가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국방백서는 미군의 사드체계 한국 배치에 중국이 특별히 반대의사를 밝혀온 이유가 “세계 경제와 군사전략의 중심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강대국 간 경쟁의 초점으로 부각되고 이 지역의 안전에 불확실성을 증가시켰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이 아태 지역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군사력 배치와 간섭의 정도를 높임으로써 아태 지역의 안전에 복잡한 요소를 추가했다”는 비난도 추가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군사정책을 조정해서 2차대전 이후의 체제에 새로운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군사적 외향성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적시했다.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이 지역의 열점(熱點)은 의연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조선반도 정세는 다소 완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불확실한 요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국방백서 핵심은 ‘적극적 방어’
중국공산당은 2012년 11월 시진핑 당 총서기 선출 이후를 ‘신시대(新時代)’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번 국방백서에서 밝힌 신시대 국방전략 방침은 ‘적극적 방어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불범아 아불범인 인약범아 아필범인(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적이 나를 공격하지 않으면 나도 공격하지 않으며, 적이 나를 공격하면 반드시 공격한다)’이라는 시진핑의 16자 방침도 명기했다. 핵무력에 대해서도 시진핑의 ‘적극적 방어’ 원칙을 적용해서 “어떤 시기, 어떤 상황 아래에서도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비핵 국가와 비핵 지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 세계적 핵무기 확산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면적이고 최종적인 핵무기 확산 금지와 폐기를 주장하며, 어떤 국가와도 핵군비 경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의 핵 무력은 국가안전의 필요에 따른 최저수준으로만 유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중국 국방백서의 이 핵 정책에 따르면, 만약 북한 핵 폐기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국·일본·대만 등의 동북아 국가들도 핵무기 보유 정책을 추진할 경우 중국이 핵확산 금지 원칙을 내세워 적극 저지할 방침임이 분명하다.
중국 국방백서는 중국군이 현재 추진 중인 군사력 건설의 목표를 ‘중국 특유의 강군의 길(强軍之路)’이라고 규정했다. 구체적으로는 “시진핑의 군사전략 사상을 관철해서 ‘싸울 수 있는 군대(能打仗), 싸우면 이기는 군대(打勝仗)’ 건설을 위해 기계화와 정보화를 융합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시간상으로는 “2020년까지 기계화와 정보화에서 중대한 진전을 이루고, 2035년까지는 국방 개념과 군대의 현대화를 쟁취하고, 21세기 중반까지는 세계 일류의 군대 건설을 목표로” 전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7년간 30만 감축, 200만 병력 유지
중국 국방백서는 2012년 제18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 이후 군의 편제 개혁도 적극적으로 추진했음을 강조했다. 전국을 7대 군구(軍區)로 나누어 각 군구 아래에 육·해·공군과 제2포병 부대를 배속시켜 각 군구가 독립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했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즉 시진핑이 주석인 중앙군사위원회 아래에 육·해·공군과 미사일군(제2포병을 개조), 전략지원부대, 병참 지원부대를 직속시키고 각 군 지휘부가 각 부대를 통제하는 구조로 바꾸어놓았다는 설명이다.
해방군의 지역 분할 구조도 과거의 베이징(北京)·란저우(蘭州)·지난(齊南)·난징(南京)·광저우(廣州), 청두(成都) 군구 등 7대 군구 체제에서 동부·남부·서부·북부·중부의 5개 지역 분할 구조로 간결하게 만들었다고 내세운다. 시진핑 시대에 들어와 병력 감축과 군 정예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서 지난 7년 동안 30만명을 감축, 현재 200만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해방군은 1979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결정으로 베트남에 “교훈을 주기 위해” 25만을 파병했다가 대패한 기록을 남겼다. 중국군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시절이던 1990년과 1991년 미국이 두 차례 걸프전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중국군의 현대화가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군 현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르는 기간 동안 중국군의 현대화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는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고 있다. 시진핑이 중국군에 요구한 “싸울 수 있는 군대, 싸우면 이기는 군대”가 실제 얼마나 현실화됐는지는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2570 08.12 지도자의 현실인식 부족과 주관적 의지가 낳은 참극
1958년 5월 5~23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2차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주석은 이런 연설을 했다.
“앞으로 5년 이내에 우리가 강철생산량 4000만t을 달성한다면 우리는 7년 이내에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고, 다시 8년을 노력하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
한 해 전인 1957년 중국 전체의 강철생산량은 535만t톤이었다. 마오가 “5년 이내에 강철생산량 4000만t톤을 달성한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전 인민이 나서서 대약진의 정신으로 나아가 ‘판이판(飜一番·2배로 만들기)’을 이룩한다면 1958년에는 강철생산량을 1000만t으로 만들 수 있고, 1959년이면 3000만t을 생산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마오는 5억 인민들이 역량을 다한다면 5년 이내에 19세기를 지배한 패권국가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고, 다시 8년을 노력하면 20세기 최강대국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차오잉 간메이(超英赶美·영국을 넘어서고 미국을 따라잡자)’라는 구호까지 내걸었다.
세계 역사가 기록한 것처럼 제1차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라는 인류 최초의 동력을 갖게 된 영국은 증기기관 동력를 갖춘 군함에 최고의 폭발력과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대포를 장착하고 남아프리카와 인도대륙, 인도차이나반도 남쪽을 돌아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앞바다에까지 도착했다. 그리고는 교역을 거부하던 청나라 군대와 포격전을 벌였다.
포격전의 결과는 중국에 참담했다. 해안을 지키는 청나라 해안방어부대의 대포는 영국 군함에 가닿지 못한 반면, 영국 군함에서 쏘는 대포는 청나라 해안방어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른바 ‘아편전쟁’으로 기록한 그 전쟁의 결과 청나라는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영국과 교역이 가능한 ‘개방항’으로 열어주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허위보고 만연
마오쩌둥이 선포한 ‘대약진’ 운동은 바로 그런 영국과,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을 당시의 5억 중국 인민들이 나서서 노력하면 경제력에서 앞설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산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는 ‘웃픈’ 일들이 속출했다. 일단 마오쩌둥이 불을 붙인 대약진운동에 따라 마을마다 철을 생산한다면서 ‘토로(土爐)’라는 이름의 용광로가 곳곳에 설치됐다. 그 결과 대체로 4분의 1 정도의 중국 산림이 훼손되었는데 이는 무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강철 생산을 위해서는 고화력의 역청탄이 필요한데 나무를 베어 만든 목탄으로 아무리 가열해봤자 철광석이 녹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각 마을들은 각 가정의 쇠붙이를 모두 모아 덩어리를 만들어 상부에 납품한다면서 목탄 고로에 쇠붙이를 넣어 녹이느라 애썼다. 마을 청년들이 교대해가며 24시간 용광로를 지키는 웃지 못할 광경도 연출했다.
당시 중국 전역에서 어린이들의 눈으로 관찰한 대약진운동의 비극은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이른바 ‘지청(知靑)작가’들의 작품 곳곳에 기록돼 있다. 대표적인 지청작가 위화(余華)가 1993년에 쓴 장편 ‘산다는 것(活着)’에는 이런 기막힌 장면도 나온다. ‘마을 쇠붙이를 모두 걷어 아무리 불을 때도 녹지 않으니까 한 노인이 아이디어를 낸다. 이 노인은 “역시 끓이는 게 최고야”라며 뭉친 쇠붙이를 물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쇠붙이를 삶는 현장을 마을 젊은이들이 24시간 지켰다.’
대약진운동 기간 전국적으로 허위보고도 만연했다. 당시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강철생산량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량에서도 ‘2배 만들기 판이판’의 정신을 살리자고 외쳤다. 1957년 곡물생산량 3900억근을 1958년에는 80% 증산한 7000억근으로 올리고, 1959년에는 또다시 2배가 넘는 1조5000억근으로 높인다는 증산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런 과욕은 농업생산량 허위보고로 이어졌고 결국 40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아사자가 생기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수천만 아사자 부른 대약진운동
실제로는 매년 2배 가까운 증산이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현실과 너무나 떨어진 허위보고를 하고, 그 허위보고에 맞추기 위해 거의 모든 마을 생산 곡물을 상부에 갖다 바치다 보니 마을 곳간이 텅텅 비어버린 것이다. 급기야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살던 곳을 떠나 도망가는 바람에 마을이 텅 비는 ‘귀신 마을’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났다.
일본 지식인들이 영국 산업혁명의 힘을 깨닫고 전통사회를 현대사회로 바꾸기 위한 메이지(明治)유신 혁명에 나선 것이 1868년이었다. ‘좌파 역사학자’로 분류되는 미 시카고대학의 브루스 커밍스가 1984년에 쓴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의 기원(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economy)’에 따르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시작으로 산업화와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해 벌써 1880년대에 섬유산업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 기초를 확보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중공업 기반 구축에도 성공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1930년대 일본에서 쓰던 ‘기러기 이론(Flying Geese Model)’이라는 용어를 이용해서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경제발전이 19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Four Tigers)’로 불린 한국과 대만의 경제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했다. 커밍스의 결론은 ‘일본의 산업발전이 한국과 대만의 산업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산업발전은 산업이 발전한 다른 나라로부터 이전해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과 달리 마오는 인민들이 힘을 결집하기만 하면 단시간에 산업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정치적 목표부터 설정했고 그 결과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참극을 불렀다. 현재 중국공산당 역시 마오의 대약진운동에 대해 “오만한 자만심에 빠져 경제발전의 규칙을 무시한 채, 중국 경제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도한 주관적 의지만으로 밀어붙여 3년간 좌경적 모험주의를 시행한 결과 중국 경제가 균형을 잃고 엄중한 곤란함을 조성했다”고 공식 평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6일 “남북한을 합한 평화경제를 달성하면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60여년 전 마오쩌둥이 벌인 대약진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1950년대 말의 중국과 1870년대에 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의 거리는 지금 한국과 일본의 거리보다 더 멀지 모르지만 우리 대통령이 경제 현실에 대한 인식 결핍과 과도한 주관적 의지에 빠질 경우 대약진운동 이후 중국이 겪었던 참사를 우리라고 겪지 말란 법이 없다.
2573호 2019.09.03 중국공산당 노멘클라투라들의 부패
2014년 12월 22일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장 링지화(領計劃·당시 58세)가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타전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12년 11월 당 최고 권력자로 선출된 이후 2년 남짓 흐른 때였다. 시진핑은 중국 최고 권좌에 오른 후인 2014년 3월에는 전임자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 시절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정치국원을 겸임하던 쉬차이허우(徐才厚)에 대한 부패 혐의 조사를 시작했고, 6월에는 후진타오 당 총서기 시절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자 9명 가운데 한 명이던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의 부패 혐의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들의 부패 조사에 대한 시진핑의 의지는 “호랑이와 파리를 모두 때려잡으라(打虎拍繩)”는 지시로 잘 표현됐다.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홍콩의 봉황주간(鳳凰週刊)을 인용해서 ‘군사위 부주석이던 쉬차이허우의 베이징(北京) 중심가 서쪽의 호화주택 2000㎡ 지하실에서 약 1t 무게의 현금이 발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쉬차이허우와 저우융캉은 전직 고위 당 간부였지만, 링지화는 시진핑이 당 총서기가 된 이후 당 통일전선공작부장에 오른 현직 최고위 간부였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 내에 충격을 주었다.
시진핑은 현재도 반(反)부패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 중이다. 요즘엔 ‘파리들’에 해당하는 지방 당 간부들에 대한 부패와 당 기율위반 조사 활동이 진행 중이다. 시진핑이 ‘때려잡은’ 대표적인 ‘호랑이’ 가운데 하나인 링지화는 17세 때인 1973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27세 때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 운영하는 ‘중국 청년 정치학원’에 입학해 정치교육을 전공했다. 이후 29세 때 공청단 중앙선전부 이론담당 부처장, 32세 때 공청단 판공청(사무처) 주임, 38세에 공청단 선전부 부장을 역임한 뒤 중국공산당 판공청(사무처) 직원으로 승급했다.
그는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선출된 2012년 말까지 30년 가까이 당의 내부 행정기관인 판공청과 서기처를 장악하고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 두 총서기의 신임을 받아왔다. 또 두 총서기의 신임을 바탕으로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선출되자 중국공산당과 국내외 정치 조직들과의 통일전선 업무를 총괄하는 통일전선공작부장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결국 시진핑은 장쩌민과 후진타오 두 전임 총서기뿐만 아니라 자신에 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을 링지화를 부패 혐의와 당 기율위반 혐의를 걸어 목을 자른 것이다. 2016년 7월 4일 톈진(天津)시 중급 인민법원은 링지화에게 수뢰와 국가비밀 불법 취득,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종신 정치권리 박탈을 선고했다.
중국공산당이 당의 최고위 권력자를 부패와 당 기율위반 혐의로 처단한 것은 시진핑 시대에 처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상하이(上海)시 당 서기를 하다가 1989년 6월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돼 벌어진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중앙당 총서기로 발탁된 장쩌민이 중앙당 내에 권력을 다지는 과정에서도 당시 베이징시 당 서기였던 천시퉁(陳希同)을 각종 부패와 기율위반 혐의를 걸어 제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수사 과정에서 천시퉁의 오른팔 왕바오썬(王寶森) 부시장이 미녀 TV앵커들에게 베이징 시내 아파트를 10여채씩 선물하고, 천시퉁의 아들은 호텔에 불법적으로 CCTV를 설치해서 호텔 방을 훔쳐보는 음란행위를 한 죄상 등이 공개되기도 했다.
시진핑의 후임 총서기인 후진타오가 2002년 당 총서기로 선출돼 당내 입지를 다지는 과정에서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 서기가 역시 사회보장기금을 횡령한 혐의가 공개돼 숙청됐다. 시진핑 현 당 총서기가 2012년 당 총서기로 선출되기 전에는 시진핑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당 서기가 부인의 외국인 독살과 치정 혐의, 심복인 충칭시 공안국장의 청두(成都) 주재 미 영사관 망명 기도 사건 등으로 제거됐다.
지정학(geopolitics) 전공의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셈파(Sempa)는 2016년 ‘더 디플로맷’ 10월호에 ‘두 개의 중국: 노멘클라투라와 그 나머지’라는 글을 기고했다. 셈파는 미 최고의 중국 전문가 아서 월든(Waldon)의 글 ‘베이징에서 보낸 편지(Letter from Beijing)’를 인용해서 “안에서 본 중국은 두 개의 중국으로 쪼개져 있다. 하나의 중국은 도시에서 각종 혜택을 누려가며 살고 있는 노멘클라투라(nomenclatura·특권계층)의 중국이고, 농촌에서 교육도이나 교통·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사는 수억 보통 사람들의 중국이 다른 하나의 중국이다”라고 했다. 셈파에 따르면 월든은 이 말을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편지에 적었다.
셈파가 인용한 월든의 글에 나온 ‘노멘클라투라’는 이탈리아의 소련 전문가 마이클 볼렌스키(Volensky)가 1984년에 쓴 ‘Nomenclatura’라는 책의 제목이다. 라틴어가 어원인 노멘클라투라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USSR(소련)이 수립된 지 10년 후 스탈린 집권기에 국가를 이끌 소련공산당 간부와 정부 관리들의 리스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레닌이 이끌던 혁명기에는 혁명의 주축세력이었으나 점차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노동자들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차지하게 됐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최고급 별장 ‘다차’까지 확보하는 계층으로 변해갔다.
소련공산당의 노멘클라투라들은 199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시장경제 개혁에 나선 페레스트로이카의 틈을 타 다시 많은 부를 축적했다. 고르바초프가 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시작하자 장악하고 있던 당권을 활용해서 글라스노스트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고급 주택과 별장을 소유한 노멘클라투라들은 고르바초프 정권이 무너지자 보리스 옐친을 지지하는 것으로 권력을 유지해갔다.
중국공산당은 1934년에서 1936년까지 22개월간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이른바 ‘2만5000리 대장정’에 나섰다. 당시 중국 남부 구이저우(貴州)성에서 출발해 북서부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까지 성공적으로 행군한 8000여명의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노멘클라투라를 형성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이 모두 중국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일원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노멘클라투라들의 생활은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이른바 부총리 이상 최고권력자들이 베이징 중심부의 호숫가 집단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사는 모습이 공개됐다. 이들이 바깥에서는 팔지 않는 고급담배를 피우고, 식수도 일반 베이징 시민들이 마시는 석회질 많은 수돗물이 아니라 특별공급된 생수만 마시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개혁개방 10년 만인 1989년 천안문사태에 원인을 제공했다.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타락은 자신들이 혁명을 이끈 공적을 과도하게 평가해서 도덕적 타락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중국의 노멘클라투라 체제(China’s Nomenclatura System)’의 저자 존 번스(Burns)는 진단했다. 이들은 생산력을 담당하는 노동자와 농민 계층과는 달리 생산력을 담당하지 않으면서도 혁명의 관리자로서 각종 호화로운 생활조건을 누린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란 기본적으로 인민들의 평등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계획과 통제된 규율을 필요로 하는데, 중앙계획과 규율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 이후를 관리할 계층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혁명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노멘클라투라들은 생산에는 가담하지 않으면서도 손쉽게 재화와 권리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부패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구조가 사회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한창 반부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시진핑 현 당 총서기 역시 딸 밍쩌(明澤)를 하버드대학에 유학시키고 있다. 중국 당 고위간부의 월급만으로 하버드대학의 1년 등록금을 대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베이징 특파원인 미네무라 겐지는 2015년 출간한 ‘JUSANNOKU BUN NO ICHI NO OTOKO(13억분의 1의 남자)’라는 책에서 시진핑의 딸이 다른 이름으로 하버드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폭로했다. 시진핑뿐만 아니라 장쩌민·리펑(李鵬) 전 총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들이 자녀를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대학에 유학시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노멘클라투라들이 “아들딸을 미국에 유학 못 시키면 바보”라는 말이 중국의 일반 라오바이싱(老百姓) 사이에서 상식처럼 되어 있을 정도다.
자칭 타칭 ‘강남좌파’라는 조국 법무장관 후보나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정부의 장관들을 포함한 더불어민주당 정권의 고위 당정 관료들이 소련이나 중국의 노멘클라투라 흉내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행태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아직 언론 자유가 살아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노멘클라투라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산력에 기생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론 자유가 없는 비공개 비밀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개방되어 있고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돼 있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와 같은 이른바 ‘혁명 관리자’를 자처하는 좌파들의 생활 역시 투명한 유리상자 속에서 춤추는 인형과 같이 모든 국민들이 관찰 가능하다. 이들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투명하고 개방돼 있는가를 왜 깨닫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자칭 좌파와 사회주의 추종자들은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이 1997년 2월 사망하기 전에 가족들에게 했다는 유언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덩샤오핑은 당시 “사고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므로, 태워서 바다에 뿌려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뼛가루는 부인 주오린(卓琳)의 오열 속에 동중국해 일원에 뿌려졌다. 유언에 따라 덩샤오핑 기념관은 건립되지 않았다.
2578 홍콩 시위에서 문 대통령이 배워야 할 것
미 NBA(농구협회) 휴스턴 로케츠 팀의 커미셔너 대릴 모레이(Morey)는 지난 10월 4일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홍콩을 지지한다(Fight for freedom. Stand with Hong Kong).” 그러자 중국 내 모든 TV 채널을 장악하고 있는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은 지난 10월 8일 “스포츠 채널에서 NBA 프리시즌 경기 중계를 즉각적으로 잠정 중단하고 NBA와의 모든 협력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CCTV는 지난 10월 10일 상하이(上海), 12일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에서 열릴 예정이던 LA 레이커스와 브루클린 네츠의 프리시즌 시범경기 중계부터 당장 취소해버렸다.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0월 8일 브리핑에 나와 “중국 관영 중앙TV가 미 프로농구 중계를 안 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중국이 경제적인 실력으로 언론자유를 위협하고 조종하겠다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한 겅솽의 대답은 단호했다. “휴스턴 주재 중국 총영사관이 이미 휴스턴 로케츠 구단에 항의를 했다. 나는 질문한 기자가 이 일에 대한 중국 보통 민중들의 반응과 태도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중국과의 교류와 협력은 중국의 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1978년 중국공산당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을 위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스포츠를 포함한 미국 대중문화가 중국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는 것을 허용했다. 덩샤오핑은 미국 자본이 중국에 투자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1978년 미국을 방문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인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미국의 NBA 농구는 중국인들 절반 가까이가 즐겨 보는 스포츠가 됐고, 미 NBA 무대에서 뛰는 야오밍(姚明)이라는 스타까지 배출했다. 베이징(北京)과 상하이,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 카페나 레스토랑 어디를 가도 TV에서 밤새도록 미 NBA 농구가 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휴스턴 로케츠의 커미셔너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홍콩을 지지한다”는 짤막한 글귀를 트위터에 올렸다고 휴스턴 로케츠뿐만 아니라 NBA 전체 경기의 중계를 중단하겠다고 관영 중앙TV가 발표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중앙TV의 발표가 중국 정부와 조율된 것이라는 입장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밝힌 것이다.
요즘 홍콩에서 주말마다 벌어지는 시위는 10월 9일로 4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요즘 홍콩의 거리 모습은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와,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던 서울의 거리를 데자뷔처럼 떠오르게 한다. 시위의 발단은 현 홍콩의 특별행정구(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당국이 중국과 범죄인인도협정 체결을 바탕으로 하는 송환법 추진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2014년 9월 중국 당국이 홍콩 행정수반을 뽑는 선거에서 후보 결정 권한을 쥔 위원회 위원들을 중국 정부가 지명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이른바 우산혁명이라는 시위가 벌어졌다가 시들어진 이후 두 번째 시위가 불붙은 것이다. 700만 홍콩 시민들 대부분은 본인 아니면 부모나 친척들이 1949년 중국 사회주의 정부 수립 이후 본토에서 엑소더스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홍콩과 중국이 범죄인인도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피난민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떤 진압 수단도 통하지 않는 시위가 이어지자 지난 9월 4일 홍콩 행정수반 캐리 람(林鄭月娥)은 범죄인인도협정 제정을 위한 송환법을 철회한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시위 진압 경찰이 총기를 사용해서 중환자가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인 역시 대륙에서 이주해온 부모를 둔 ‘우등생’ 캐리 람은 지난 10월 8일 “시위가 계속되면 중국 정부에 개입을 요청하겠다”는 발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1997년 6월 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할 당시 홍콩에 인접한 광저우에서 각종 무술 시범을 과시하던 중국 특전부대가 진압군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고를 한 것이었다.
독립영화 ‘10년’의 메시지
캐리 람의 송환법 취소 발표에도 홍콩의 시위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2015년 12월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에서 개봉된 독립영화 ‘10년(Ten Years)’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홍콩 시위에 20대, 30대 젊은이들이 주로 가담하는지 이 영화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독립영화 ‘10년’은 영화 제작 당시로부터 10년 후인 2025년의 홍콩을 그리고 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옴니버스로 묶는 형식으로 제작됐는데, 각각의 제목은 ‘엑스트라’ ‘겨울매미’ ‘방언(Dialect)’ ‘분신자살자’ ‘현지 계란’ 등이다.
‘엑스트라’는 홍콩 정청이 2020년 보안법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을 상정하고 있다. 보안법 제정 추진에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조폭을 고용해 친중파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 기도를 하는 사건을 조작하는 이야기이다. 이 단편은 50만달러라는 거금을 받기로 하고 조폭으로 고용된 홍콩의 힘 없는 서민 두 사람이 암살 기도 현장에서 경찰에 사살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또 다른 단편 ‘방언’은 중화인민공화국 표준어인 ‘만다린(Mandarin)’을 구사하지 못하고 영어로 ‘캔터니즈(Cantonese)’라고 부르는 광둥어밖에 못하는 한 택시운전사의 불만을 그린 영화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영어를 잘 못해 택시운전사가 되는 데 애를 먹었던 이 운전사는 2025년 홍콩 정청이 “표준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택시운전사는 공항이나 관광지 등 중요 장소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을 발표하자 먹고살기가 어렵게 돼 절망감에 빠진다. ‘분신자살자’는 홍콩이 사회주의 지역으로 변해가는 것에 항의하려면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하는데 홍콩 주재 영국 총영사관 앞에서 분신하는 사람들이 없자 한 80대 할머니가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현지 계란’은 중국어로 ‘본지단(本地蛋·홍콩 현지에서 생산된 계란)’이라고 써붙인 계란 가게에 2025년 빨간 완장을 차고 초록 군복을 입은 초등학생 홍위병들이 나타나 “왜 불순하게 본지단이라는 글자를 붙였느냐”라고 따지는 장면을 그렸다. ‘본지단’이란 말에는 중국 대륙 식품을 믿지 못하는 홍콩 사람들의 부정적인 관념이 담겨 있어 금지어로 올랐다는 의미이다.
북한의 사회주의화를 피해 흥남 철수선을 탔던 아버지를 둔, 1970년대 박정희 독재통치에 반대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1980년대 초 전두환 군부독재에 반대했던 운동권이 주축이 된 현재의 우리 집권층은 이른바 ‘1987년 체제’에서 벗어나는 시각 전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런 시각 전환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1970년대, 1980년대 운동권 주축들이 교과서로 삼던 마오쩌둥(毛澤東)과 김일성이 목표로 했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는 경제난으로 실패해버렸다.
그들이 구호로 내걸던 혁명이나 개혁은 다 용도폐기됐다. 현재 중국을 미국과 경쟁하는 G2 국가로 만든 것은 덩샤오핑이다. 그는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주의도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다”면서 박정희식 개발경제를 모델로 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했다. 그 덕분에 중국은 지금 G2 반열에 올랐다. 1984년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로부터 홍콩 주권 반환 약속을 받아낸 덩샤오핑은 ‘1국가 2체제(One country Two Systems)’라는 통합 방식을 제시했다. 홍콩에 50년간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하고, 외교와 국방에 관해서만 중국이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결과 홍콩의 헌법인 기본법(Basic Law) 제5조에 ‘50년간 홍콩에서 사회주의를 시행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담겼다. 그리고 1997년 6월 말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홍콩의 주권 반환 행사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다.
20~30대가 시위에 나선 이유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2019년 현재 홍콩의 20~30대 젊은이들에게는 “앞으로 20여년 뒤인 2047년부터는 홍콩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체제가 시행된다”는 현실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면 홍콩이 사회주의 체제로 변한다는 사실은 홍콩 젊은이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고 그런 절망감을 그린 영화가 바로 ‘10년’이다. 덩샤오핑이 홍콩에 1국가 2체제를 약속한 것은 어린 시절 프랑스에 유학 가서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개방이 제대로 자리 잡으면 중국의 정치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개혁개방과 40년간의 빠른 경제성장 덕분에 강력해진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하드파워를 갖게 된 시진핑의 중국은 정치체제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다. 그런 중국의 흐름은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홍콩의 사회주의화는 결코 우리가 선택해서는 안 될 미래’라는 판단을 갖게 해준 것이다.
“그래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되돌아온 것은 잘된 일이 아니냐”는 판단을 우리 입장에서는 할 수 있겠지만, 홍콩인들이 대륙의 표준어를 북방 청나라의 만주족 집권층이 주로 사용하던 ‘만다린(원어는 滿大人의 발음 mandaren)’이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서 벗어난 것과 홍콩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기본 정서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요한 점은 홍콩을 일국양제로 통합하는 ‘일시적’ 성공을 거두는 데 도움을 줬던 중국의 지식인들, 예를 들어 베이징대학 국제정치학과 원로교수 천펑쥔(陳鋒君)이나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의 스위안화(石源華) 등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근년 들어 “남북한도 1국가2체제에 의한 통합을 해야 한다”고 권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남북한 통합 방식으로 남북한이 서로의 체제를 일정 기간 인정하는 방식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현재 홍콩이 보여주듯이 한반도의 미래에 커다란 불안 요소를 안겨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30년간 남북한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전제하에 통합을 할 경우 그로부터 15년쯤 흐른 한반도에서 현재의 홍콩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시위와 혼란이 벌어질 경우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의 홍콩 시위 사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투쟁 방식을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방편으로 생각했던 우리 운동권 출신 집권층에 각성제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계의 흐름부터 다시 학습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2580 홍콩 염정공서와 공수처는 뿌리부터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조국(曺國) 사태에 이어 정국 키워드로 등장시킨 화두가 이른바 ‘공수처’다.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를 줄인 ‘공수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안은 현재 2개의 안이 발의돼 국회에 계류돼 있다. 2개의 공수처안은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을 비롯한 의원 12명이 지난 4월 26일 발의한 이른바 ‘백혜련안’과 권은희 의원을 비롯한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정의당 의원들이 지난 4월 29일 발의한 이른바 ‘권은희안’이 있다. 후일의 역사를 위해 백혜련안 발의자 12인은 박범계·송기헌·이종걸·표창원·박주민·이상민·채이배·안호영·김종민·임재훈·김정호 의원임을 기록해둔다. 권은희안 발의자는 김동철·김관영·주승용·최도자·임재훈·이찬열·채이배·박주선·추혜선 의원임을 같은 이유로 기록해둔다.
우선 백혜련안은 ‘제안 이유 및 주요내용’에서 “고위공직자의 직무 관련 부정부패를 엄정하게 수사하기 위한 독립된 수사기구의 신설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음… 실제 이런 취지와 기조로 설치된 홍콩의 염정공서,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은 공직자 비위 근절과 함께 국가적 반부패 풍토 조성에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개의 공수처안은 대체의 흐름은 비슷하나 백혜련안이 홍콩의 염정공서와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을 벤치마킹한 반면, 권은희안은 홍콩과 싱가포르의 예를 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혜련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홍콩의 염정공서(簾政公署)와 싱가포르의 탐오(貪汚)조사국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의안을 만들어 발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1974년 설치된 홍콩의 염정공서(ICAC·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와 1952년에 설치된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CPIB·Corruption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은 그 설치와 운용에서 백혜련 공수처안이나 권은희 공수처안이 목표로 하고 있는 3부 요인(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공직자에 대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독립된 수사기구와는 뿌리부터 다른 기구이기 때문이다.
백혜련안과 권은희안에 제시된 공수처의 수사와 기소 대상인 ‘고위공직자의 범위’는 ‘대통령,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및 헌법재판관, 국무총리와 국무총리 비서실 소속의 정무직 공무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정무직 공무원’ 등으로 돼 있다. 3부의 최고위 공직자들을 모조리 열거하고 있는 셈이다. 권은희안에는 검찰총장도 수사와 기소 대상임을 명시해놓았다.
그러나 1974년 2월 15일 홍콩 입법국에서 관련 조례가 통과됨으로써 2월 17일 발족된 홍콩 염정공서는 발족 36년이 된 지난 2010년까지 모두 7만건의 공직자 부패를 수사하는 업적을 남겼지만 대부분 마약범죄 수사 경찰의 비리, 성접대를 받은 경찰 체포, 재벌 아들의 부정행위 적발 등에 그쳤다. 우리의 공수처안이 목표로 하는 국정 최고 책임자들의 일탈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공수처, 3부 요인들을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는 공수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염정공서(ICAC)가 발족되기 이전 홍콩 사회는 홍콩 시민들의 말처럼 “불을 끄기 위해 소방서에 연락해도 뒷돈을 요구하고, 경찰들은 마치 매일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부패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던” 사회였다. 그러다가 1973년에 발생한 경찰 고위책임자의 420만홍콩달러(약 5억원) 횡령과 해외도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염정공서가 발족됐다. 행정수반인 역대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들이 보통 국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규모의 돈을 횡령하거나 남용해온 선례를 남긴 우리 사회와 염정공서를 발족시킨 홍콩 사회는 그 배경부터가 다르다고 봐야 한다.
“경무처를 포함한 어떤 홍콩 정부 부문과 관계가 없는 독립적 반탐(反貪) 조직”이라고 스스로의 지위를 밝혀온 염정공서는 기구의 독립, 인사의 독립, 재정의 독립, 수사권의 독립 등 4가지의 독립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염정공서의 수사관이라 할 수 있는 ‘염정전원(簾政專員·Commissioner)’들은 홍콩 행정부 소속의 공무원 신분이 아니며, 인사도 전적으로 염정공서의 판단으로 이뤄진다.
재정도 홍콩 행정부의 소관이 아니며 행정수반만이 직접 독립 예산을 조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염정공서의 수사는 독립적인 수사권에 따라 진행되고, 필요할 때에는 무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CPIB) 역시 총리 직속기구로, 조사국장은 총리의 제명(提命)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사에 대한 지시와 보고는 총리에게 한다.
중국공산당이 2018년 3월에 발족시킨 국가감찰위원회(The State Committee of Supervisory) 역시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인사권을 가지며, 위원회의 반부패 수사는 전인대의 감독을 받는다. 중국공산당의 경우 당원들의 부패에 관해서는 당의 기율(紀律)검사위원회가 수사를 해왔으며, 수사 결과 유죄가 인정되면 인민법원으로 넘겨 판결을 받는 관례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베이징·상하이·충칭 등 3개 직할시의 당 조직 최고책임자가 수사와 판결을 받고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경우는 있었어도, 당의 1인자인 당 총서기가 범죄혐의로 체포돼 수사와 판결을 받은 일은 없었다. 1989년 천안문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 총서기직을 상실한 자오쯔양(趙紫陽)의 경우 반혁명죄로 당 기율위원회의 조사가 이뤄져 출당처분이 내려졌었다.
공수처 백혜련안이나 권은희안이 대통령과 3부 요인을 수사와 기소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근거는 모호하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반부패 기구를 인용한 이른바 백혜련 공수처안은 그 기본 접근법에서 하위법인 법률로 대통령을 비롯한 헌법기관을 수사와 기소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난센스 입법’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고위공직자 범죄의 수사 대상이 되는 경우라면 내란이나 혁명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을 포함한 3부 요인을 수사와 기소 대상으로 삼는 법안의 입법은 한 국가의 거버넌스(Governance)를 기초부터 흔들어보려는 의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홍콩의 염정공서나 싱가포르의 탐오조사국에 대한 제대로 된 검토과정도 없이 이 기관들을 빙자해서 국가의 기본 체제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공수처안을 통과시키려는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저의가 과연 무엇인지 국민들은 마땅히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2582 11.11 시진핑, 당 총서기 3연임 금지의 벽도 넘을까
중국공산당은 지난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제19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4중전회)를 개최했다. 당 중앙조직부가 지난 7월 1일 발표한 공보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 현재 당원 숫자는 8875만8000명. 11월 5일 현재 기준으로는 당원 수가 9000만명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약 30만분의 1에 해당하는 376명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 중앙위원들 전체가 모여 당에 관한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하는 회의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중전회)이고, 중전회는 대체로 1년에 한 차례씩 열린다. 중앙위원들의 임기는 5년. 이번 19기 중앙위원회는 2017년 11월에 전국에서 2287명의 당 대표들이 모여서 개최한 제19차 당대표 대회(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제19기 중앙위원들로 구성됐다.
이번 19기 중앙위원회의 임기는 2022년 10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제20기 중앙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다. 중국공산당 제1차 당 대회는 1921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됐다. 5년마다 한 번씩 재구성되는 중앙위원회는 대체로 임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점에 개최되는 중전회에서 다음 당 대회에서 선출될 새로운 당 최고 지도부의 윤곽을 구성하는 ‘인사 문제에 관한 결정’을 해온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런 전통에 따라 이번에 열린 19기 4중전회는 2022년 10월 말에 개최될 당 대회에서 등장할 새로운 당 총서기가 누구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회의였다. 중국공산당 내부 사정에 밝은 홍콩의 명보를 포함한 중화권 매체들은 지난 10월 23일 이번 19기 4중전회에서 시진핑(習近平·66) 당 총서기의 후임 당 총서기 후보로 천민얼(陳敏尒·59) 충칭(重慶)시 당위원회 서기와 후춘화(胡春華·56) 부총리를 꼽기도 했다. 이들이 새로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9000만 중국공산당원들을 이끄는 핵심지도부이자, 헌법에 ‘중국 정치를 영도하는 유일한 정당’이라는 보장을 받고 있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들 가운데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25명이 정치국을 개최한다. 이들은 수시로 회의를 열어 당을 이끄는데 이들 중에서도 다시 7명이 상설 회의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정치국 상무위원회 가운데 회의를 주도하는 1명이 바로 당 총서기로, 현재 시진핑이 맡고 있다. 시진핑은 2012년에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돼 2017년까지 5년간의 첫 번째 임기를 마친 후, 2017년 11월에 열린 제19차 당 대회에서 2022년까지의 5년 임기를 추가로 보장받았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최근 관례에 따라 10년의 임기를 마친 이후 2022년 10~11월 개최될 20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 자리를 천민얼이나 후춘화에게 물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한 이후 중국공산당의 핵심 요직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돼 당의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가 추구하던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개혁개방의 시대를 선언하면서 중국 국내 정치 지도자들의 ‘연경화(年輕化·젊게 만들기)’를 추진한다는 목표 아래 ‘칠상팔하(七上八下)’, 다시 말해 당 총서기를 포함한 당 지도부 요직에 67세를 넘어 68세 이상의 인물은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부 관행을 만들었다. 이 내부 관행에 따라 덩샤오핑 자신이 발탁한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두 명의 시진핑 전임자들은 10년의 임기를 마치고는 은퇴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지정한 후진타오를 후계자로 발탁하고, 후진타오는 장쩌민과의 약속에 따라 시진핑을 후계자로 등장시켰다. 시진핑은 2012년 첫 번째 5년 임기의 당 총서기로 등장하면서 전임자 후진타오와 약속한 후춘화를 시진핑 자신의 후임자로 지정했어야 하지만 지난해 열린 제18차 당대회에서 후춘화를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지명하지 않음으로써 중국 안팎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오는 2022년이면 69세를 넘어서는 시진핑은 “내가 겪어보니 미리 당 총서기 후계자로 지명되는 방식은 위험한 측면이 있다”고 당내에 설명하면서 자신의 후계자 등장을 연기시켰다. 그렇게 연기시킨 자신의 후계자 등장이 최소한 이번 19기 4중전회에서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 홍콩 명보의 주장이었다.
1년에 한 차례 개최되는 중앙위 전체회의는 회의 폐막일에 ‘공보(公報)’를 발표한다. 중국공산당이 1978년에 시작한 개혁개방 시대 이래 40년간 형성해온 국내 정치 관행에 따른다면 이번 4중전회 공보에는 후춘화를 포함한 2명의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 발표가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31일 발표된 공보에는 2022년 제20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와 총리로 등장할 2명의 젊은 당 지도자 이름 대신 “국가 통치체계와 능력을 현대화하기 위해 오는 2035년까지 각 방면의 제도를 완비한다”는 구절만 있어 중국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원수직인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폐지시켜 중국 안팎에 충격을 준 데 이어 이번에는 후계자 발표를 하지 않아 또다시 놀라움을 안겨준 것이다. 중국 외부에서는 전인대 헌법 개정에 따른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 폐지로 시진핑이 장기 집권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했으나, 대학교수들을 포함한 중국 지식인들은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 폐지를 위한 개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당 총서기직 3연임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당규약 개정이 이뤄져야 실제적인 장기 집권으로 가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혀왔다.
시진핑을 주축으로 하는 현 중국공산당 권력 실세들은 지난 11월 5일 신화통신을 통해 이번에 열린 4중전회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제도와 국가 통치체계와 능력 현대화를 위한 중대 문제에 대한 결정”이 별도로 이뤄졌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이 결정은 “현 세계는 지난 100년간 보지 못하던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해야 하는 관건이 걸린 시기에 처해 있고, 이런 시대 조류와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들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국가 통치체계와 능력의 현대화를 위한 노력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지난 3월의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삭제한 데 이어 최소한 이번 중전회에서 이뤄져야 할 시진핑 후계자 발표가 이뤄지지 않자 놀라움을 넘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물론 후계자 발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번 중전회에서 후임 발표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시진핑 총서기 시대의 중국 정치가 지난 40년간 개혁개방 시대의 투명한 정치 권력 승계 전통에서 벗어나 비정상 궤도를 걸을 가능성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러나 앞으로 관련 당규약 개정이라는 고비가 시진핑에게 남아 있어 그때까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박승준의 韓中 이야기
2015.03.30 사드와 위(魏)나라 사마소(司馬昭) 이야기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사마소(司馬昭)라는 권신(權臣)이 있었다. 황제는 13세의 조모(曹髦)였다. 황제는 자신을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사마소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황제는 심복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들 누구나 안다. 나는 더 이상 사마소에게 치욕을 당할 수 없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힘을 모아 사마소를 제거하자.”
조모의 충직한 신하 왕경(王經)이 어린 황제에게 간(諫)했다. “대권은 이미 사마소의 수중에 넘어가 있습니다. 조정 대신들이 모두 사마소의 편입니다. 폐하의 힘은 약하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소서.” 황제는 왕경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신하 수백 명을 이끌고 사마소를 급습했다. 그러나 황제의 계획은 이미 사마소에게 보고돼 있었고, 사마소는 황제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다가 역공에 나섰다. 황제 조모는 사마소의 병력에 죽임을 당한다.
중국의 전고(典故)에 나오는 ‘사마소의 야심은 길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司馬昭之心 路人皆知也)’의 스토리다. 군사 전문가를 자칭하는 중국인들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즐겨 인용하는 글귀가 바로 이 ‘사마소지심 로인개지야’라는 글귀다. 그동안 미국은 한국에 사드를 배치할 계획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며, 한국과 구체적인 협의를 한 일이 없다고 해왔다. 하지만 사드를 한국에 배치해서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 방어망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미국의 내심은 바로 사마소의 마음과 같은 것이며, 그런 사마소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部長助理·차관보)가 지난 3월 16일 서울에 와서 한국 외교부 이경수 차관보, 조태용 제1차관과 나눈 일종의 전략대화에서 사드의 한국 배치에 반대하는 중국의 생각을 중요시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외교부 부장조리가 한국을 방문해 한국 외교 당국자에게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한 우려를 직접 전달했다고 하니 이제 더 이상 중국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의도는 마치 사마소의 마음과 같은 것이니 더 이상 확인할 것도 없으며, 미국의 사드 한국 배치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군사 전문가들이 회원인 인터넷 블로그 ‘철혈(鐵血)’에는 최근 “한국은 중국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 미국의 뺨을 때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韓國醒悟了 當中國的面狠打美國的臉)”라는 글이 올라왔다.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했다면, 결연히 미국에 대해 배치 반대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사드 배치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로는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인데 중국 측은 사드 한 세트에 한국 돈 2조원이 필요하고 앞으로 20년간 운용하는 데 드는 경비로 1조2000억원 추가된다고 했다. 둘째로 사드는 명백히 중국이나 러시아의 미사일을 방어하는 시스템이지 한국이 말하는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세 번째 이유인데 블로그에는 “만약 한국이 사드의 배치를 허용한다면 한·중 관계는 ‘최후의 선(紅線)’을 넘어서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블로그에 떠있는 글을 읽어보면 중국 네티즌들의 생각은 한마디로 아전인수(我田引水·내 논에 물 대기) 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블로그 철혈에 나온 “만약 한국이 사드 배치를 허용한다면 한·중 관계가 파탄에 이를 것”이라는 말도 현실의 맥락을 너무 모르는 이야기이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끌고 가고 있는 한·중 관계는 이른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관계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억지 전략을 가동시켜 중국의 동쪽에 한국·일본·필리핀·태국·호주의 5개국으로 연결되는 포위망을 형성해 놓고 있는 국면에서, 한국을 제외한 4개국이 미국의 외교전략에 동조해서 이미 중국과 갈등관계에 빠졌는데 한국만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판국이다. 만약 한·중 관계가 나빠진다면 더 큰 손해를 볼 것은 중국이지 한국이 아니다.
거기에다가 중국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양분하던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을 향해 선포한 ‘평화공존 5원칙’이라는 외교 원칙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의 원칙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한국 국방부가 이미 밝힌 것처럼 사드의 한국 배치를 우리가 받아들이건 말건 중국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평화공존 5원칙의 기본정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중국 주도로 2003년에 시작해서 12년이 흐른 지금 흐지부지되고 만 6자 회담을 복구하자고 지금도 외치고 있으면서도 북한 핵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중국 외교가 갑자기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구소련의 2급 항모를 사 들여와서 항모 랴오닝(遼寧)함으로 리모델링한 다음 우리의 서해 앞바다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에게 양해라도 구한 일이 있는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제2항모를 만든다고 해군 전문가들이 자기네 TV에 나와 자랑처럼 떠들어대고 있는 건 또 어찌할 것인가. 중국 지도자들이 일본에 대해 즐겨 쓰는 시구 “좋은 황동이 있으면 거울을 만들어 자신의 옷매무새를 비춰 보아야 한다”는 구절을 다시 음미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불과 23년 전 한국의 경제 발전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정리해 가면서까지 서둘러 수교했던 당시를 벌써 까맣게 잊었는지, 자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한국이 참가하려는 의사를 빨리 밝히지 않는다고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은 실로 포용력이 가장 큰 장점인 중국 대인배의 모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로서는 이 기회에 사드의 한국 배치는 한국의 비용 지불 없이 미국이 주한미군에 도입하는 형태로 허용해서 중국에 가르침을 주고, AIIB에는 이미 영국·독일·프랑스도 가입의사를 밝힌 마당이니 한국도 가입의사를 밝혀 미국에 한국의 경제주권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결정을 내려 보면 어떨까. 두 가지 모두를 미국 마음에 들게 결정하는 일이나, 두 가지 모두를 중국 마음에 들게 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무래도 균형 잡히지 않은 결정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결코 실력도 없이 사마소를 치려던 황제 조모가 되어서도 안 되고, 누가 실력자 사마소이고 누가 충신 왕경인지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다.
2015.04.14 한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
도광양회(韜光養晦)’란 ‘그믐 밤 같은 어둠 속에서 칼 빛을 감춘다’는 뜻이다. 1989년 9월 초 당시 중국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공산당 간부들과 당시의 국제 정세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국제 정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세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첫째는 냉정하게 관찰할 것, 둘째는 발걸음을 조심해서 옮길 것, 셋째는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고개를 쳐들지 말라는 것, 이것이 국책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한마디로 말하면 ‘도광양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정치·경제 체제가 흔들리면서 무너지기 시작할 때였다.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의 결단으로 빠른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시작한 지 10여년 만에, 미국이나 유럽식의 자유민주주의를 중국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100만명의 베이징(北京) 시민과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를 유혈진압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시위는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으로 번져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시위를 진압하려던 정부가 오히려 붕괴되는 역사적 흐름이 나타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세계사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중국 정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때 덩샤오핑이 제시한 말이 ‘도광양회’였다. 무언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절대로 고개를 쳐들지 말고 묵묵히 걸어가라는 말이며, 중국 사회에 중산층이 자리를 잡아 사회가 안정될 것으로 추정되는 2020년까지는 납작 엎드려서 정세를 잘 관찰해야 한다는 당부가 바로 ‘도광양회’였던 것이다.
그런 도광양회를 중국이 아닌 미국이, 그것도 덩샤오핑이 중국 지도자들에게 도광양회를 하라고 당부한 2020년까지 아직 5년이나 남은 때에 구사하고 있다는 진단이 중국에서 나왔다.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왕지쓰(王緝思) 원장은 지난 3월 30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 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Global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행정부가 구사하고 있는 대외 전략이 최근 외향적이 아닌 내향적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미국은 도광양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왕지쓰 원장은 특히 최근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전전략 보고서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이 보고서의 작성 책임자인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미국은 우크라이나 문제나 이슬람 국가(IS) 문제로 방향을 상실해서는 안 되며 기후변화와 무역, 빈곤과 네트워크 안전, 공공 위생 등 보다 장기적인 도전에 전략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왕 원장은 최근 국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뚜렷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유를 “첫째 미국의 EC(유럽)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경제력도 하향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들의 국력이 빠른 속도로 강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시대에 정부나 국가의 힘이 약화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고, 그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미국이 최근 자신들의 국내 문제 해결에 더 역점을 두는 내향형 정책을 채택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고 봤다.
왕지쓰 원장은 “그러나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는 그런 가운데서도 중점적 전략으로 추진되고 있으므로 중국으로서는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다만 중국을 중점적으로 견제하는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의 정책 선택에 대해 미국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에서도 추진력을 잃고 점점 ‘내향적(內向的)’으로 변해 국내 문제 해결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한국을 의식한 듯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의 풍향이 그렇게 바뀌는 가운데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두 개의 배에 동시에 다리를 걸치고 있거나 심지어는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적시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3월 30일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한·미관계, 한·중관계를 역대 최상의 수준으로 만들었다”느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것은 결코 골칫거리나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자화자찬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왕지쓰 원장의 분석이 대체로 적절하고, 왕지쓰 원장이 말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에 훌륭한 사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윤병세 장관이야말로 최근의 국제 정세를 다원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으로만 일차원적으로 판단한 결과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역대 최상의 수준에 이르고 있고,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황당한 진단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이 도광양회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왕지쓰 원장의 분석이 맞는다면 한국이 걱정해야 할 것은, 앞으로 미국의 내향적 자세가 두드러져 미국 사람들이 자기네 행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 정책이나 중국에 대한 견제정책에 대한 지지를 줄이게 될 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좌표가 변하면서 맞게 될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윤병세 장관이야말로 “냉정하게 관찰하고, 발걸음을 조심해서 옮길 것이며, 침착하게 대처하고, 절대로 잘났다고 고개를 쳐들지 말라. 한마디로 말하면 ‘도광양회’를 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이 1989년에 한 말을 잘 되새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2015-04-24 시진핑의 브레인 왕후닝((王滬寧) 주목해야
왕후닝(王滬寧·60). 더 이상 ‘은둔의 책사’도 아니고, 이제야 정치 전면에 나선 ‘흑마(黑馬·다크호스)’도 아니다. 2002년부터 13년째 중국공산당의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을 맡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공개된 지낭(智囊·지혜의 주머니·브레인)이다.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 시절에는 중앙정책연구실 정치팀 팀장(組長)으로, 후진타오(胡錦濤) 시대에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 겸 당 서기처 서기로 당의 브레인과 당무 총괄 담당자 역할을 겸해왔다.
장쩌민의 대표적 업적인 ‘3개 대표이론’, 즉 중국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대표하는 정당이 아니라 부르주아(유산계급)를 포함한 모든 인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이론이 왕후닝의 머리에서 나왔다. 후진타오 시대를 이끌어온 ‘과학적 발전관’, 즉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는 국가 목표도 왕후닝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2012년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시작되면서 왕후닝은 25인의 정치국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현재 시진핑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국의 꿈(中國夢)’과 ‘신실크로드 전략(一帶一路)’도 그가 책임지고 있는 당 중앙정책연구실의 건의로 수립된 국가전략이다.
물론 왕후닝 혼자서 그런 전략들을 수립한 것은 아니다. 왕후닝은 정치, 경제, 철학, 문화, 국제, 농촌, 사회 문제와 당의 건설과 유지를 연구하는 9개 국(局)이라는 방대한 조직을 가진 당 중앙정책연구실의 책임자로 그런 정책들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그리고 시진핑으로 당 최고 지도자가 바뀌면서도 왕후닝에 대한 신뢰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오른팔로 불리던 후야오방(胡耀邦)이 당 총서기로 일하던 1981년에서 1987년까지 지금의 왕후닝이 맡고 있던 역할은, 마오쩌둥(毛澤東)의 비서 출신으로 좌파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던 덩리췬(鄧力群)이 수행했다. 당시에는 현재의 중앙정책연구실의 전신인 중앙서기처 연구실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덩리췬이 주임을 맡고 있었다. 후야오방의 후임 당 총서기이던 자오쯔양(趙紫陽) 시절에는 바오퉁(鮑彤)이 ‘중앙정치체제 개혁연구실 주임’이란 이름으로 2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당의 브레인 역할을 수행했다. 바오퉁은 1989년 천안문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오쯔양과 함께 덩샤오핑에 의해 제거됐다.
왕후닝은 한국전쟁 종전 2년 후인 1955년에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에서 출생했다. 17세에 상하이 사범대학을 다닌 뒤 베이징(北京)대학, 칭화(淸華)대학과 함께 중국 3대 명문대학의 하나인 상하이 푸단(复旦)대학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서 학위 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됐다. 1988년부터 2년간은 미국 아이오와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미국을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 귀국한 뒤에는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주임교수, 법학원 원장으로 일했고, 1995년 장쩌민 전 당 총서기에 의해 발탁돼 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팀 팀장이 되어 베이징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후 당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거쳐, 후진타오 집권 때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발탁됐고, 이후 2012년 11월 시진핑 집권 때 정치국원으로 선출됐다.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부교수이던 그를 눈여겨본 사람은 상하이(上海)시 당서기 우방궈(吳邦國)였다고 중국 매체들은 기록하고 있다. 우방궈는 덩샤오핑의 손에 이끌려 베이징으로 가 당 총서기가 된 상하이시 당서기 출신 장쩌민에게 왕후닝을 등용할 것을 여러 차례 추천했다. 나중에 우방궈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왕후닝은 베이징으로 가게 됐다. 장쩌민은 그런 왕후닝에게 “내가 당신을 등용하지 않았으면, 상하이 사람들에게 귀찮은 소리를 들을 뻔했다”는 조크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우방궈가 강력하게 왕후닝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당규에 따르면, 중앙정책연구실의 주 임무는 국가의 상황에 맞는 정책의 개발과 각종 당 대회 결정문의 초안, 그에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5년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는 당의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때 발표해야 하는 공작보고와 당 총서기의 각종 연설문 작성도 중앙정책연구실 소관이다. 전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조사와 자료수집, 보고서 작성, 그리고 당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한 정보수집과 보고서 작성 역시 중앙정책연구실의 중요임무다. 우방궈의 추천으로 장쩌민 시대에 중앙정책연구실에 진입한 왕후닝은 장쩌민 시대에 장쩌민의 외국 방문과 국내 시찰에 수행원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고, 시진핑 시대에 들어와서는 시진핑의 외국 방문과 외국 정상과의 회담, 시진핑의 국내 시찰에 반드시 수행하고 배석하는 인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중국의 국책 연구기관으로는 당 중앙정책연구실과 함께 국무원의 싱크탱크인 국무원연구실이 있고, 당 간부 재교육 기관인 당교(黨校)와 국무원 고급 관료들의 재교육 기관인 국가행정학원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왕후닝은 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팀장, 부주임, 주임으로 지금까지 20년째 중국공산당의 정책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실제로 정책을 수립해서 당 최고 지도자에게 건의해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장쩌민의 ‘3개 대표론’과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중국의 꿈’과 ‘신실크로드 전략’, 그리고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구상이다. 다시 말해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시대에 탄생한 중국공산당의 대내외 전략은 당 총서기의 구상이라기보다 당 중앙정책연구실의 집단 연구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연구기관의 책임자가 3대 총서기에 걸친 20여년 동안 왕후닝이라는 인물이 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담당해왔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5년에 한 번씩 바뀔 때마다 각종 연구기관의 책임자가 거의 대부분 교체되는 것은 물론 대통령 교체와 관련 없이 남북한 통일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의 책임자 한 사람 갖고 있지 못한 한국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그런 한국의 현실이 왕후닝을 갑자기 등장한 혜성으로 보이는 착시(錯視)현상을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2015-07-17 박 대통령은 9월 3일 천안문 위에 서야 한다"
한국인은 9월 3일이 어떤 날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9월 3일은 9월 2일의 다음 날이다.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있었다. 20분 정도 진행된 항복문서 조인식에는 미국 대표로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MacArthur) 장군이 목 양쪽 칼라에 둥글게 디자인된 별 다섯 개를 달고 나왔고, 일본 측에서는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상이 히로히토(裕仁) 일왕을 대신해서 나왔다.
항복문서 일어본에는 히로히토 일왕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王) 총리대신 이하 14명의 내각이 연명으로 서명했지만, 미주리함상에서 영어본에 서명한 사람은 외무상 시게미쓰였다.
당시 항복문서 조인식 광경을 녹화한 미국 유나이티드뉴스(United News) 동영상을 보면, 미주리함상에는 먼저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국·중국·영국·소련·프랑스·네덜란드·호주·캐나다·뉴질랜드 대표가 갑판 위에 나와 있고, 일본 외상 시게미쓰가 작은 함정을 타고 미주리함상으로 올라오는 장면이 생생하다. 그런데 미주리함 갑판에 올라선 시게미쓰 외상은 지팡이를 짚고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의 처연한 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시게미쓰가 다리를 절고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데 대해 미 유나이티드뉴스의 앵커는 “시게미쓰 외무상은 몇 년 전 상하이에서 ‘Korean patriot(한국인 애국자)’에게 공격을 당해…”라고 설명한다.
시게미쓰의 다리를 절게 만든 한국인 애국자가 누구일까. 윤봉길 의사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공원(지금의 루쉰魯迅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출생 기념일인 천장절 기념식에 참석한 일본 군인들에게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 장성을 죽인 그 현장에 시게미쓰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로 참석했다가 오른쪽 다리가 날아가버렸다.
그로부터 13년 후에 열린 항복문서 조인식에 오른쪽 다리를 의족으로 해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것이었다. 1887년생 도쿄대 법대 출신으로 일 외무성에 들어가 마침내 외무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오른쪽 다리를 잃고 58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다리를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중국 측은 미주리함상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국민정부군(국부군) 군사위원회 군사령부장 쉬융창(徐永昌) 장군이 참석한 것을 기려 1946년 4월 중국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결정으로 항복문서 조인식 다음날인 9월 3일을 승전기념일로 공포해서 휴일로 지정했다.
중국공산당이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49년 12월 23일 승전기념일을 8월 15일로 반포했다가, 1951년 8월 13일 정무원령으로 승전기념일을 8월 15일에서 9월 3일로 변경했고, 지난해 2월 27일을 승전기념일로 확정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올해부터는 ‘중국 인민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 겸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일’로 지정해서 9월 3일부터 6일까지 나흘간을 연휴로 지정했다.
중국이 말하는 반파시스트 전쟁이란 2차 대전의 다른 말이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가 파시스트(Fascist·전체주의자)들이며, 세 나라의 파시스트들이 일으킨 전쟁을 미국·영국·중국·소련·프랑스 등이 맞서 싸워 패배시킴으로써 종결됐다고 본다.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상에서 있었던 일본 군국주의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연합군 대표들이 참석한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이뤄진 것이며, 중국은 국부군 대표인 쉬융창 장군이 중국의 국민대표로 참석했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항복문서 조인식 다음 날인 9월 3일을 승전기념일로 지정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중국에서 힘을 합해 항일전쟁을 벌인 것을 한국인은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에서 24세의 젊은 몸을 던져 한민족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와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깊이 각인시킨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윤봉길 의거로 더 이상 상하이에 주재하지 못하게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를 비롯한 여러 중국 남부 도시를 전전하다가 충칭(重慶)까지 옮겨 갔다. 충칭에 그나마 번듯한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는 데에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상당한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상하이 중국 학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9월 3일 베이징(北京) 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 최초의 ‘중국 인민 항일전쟁 승리와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일’ 퍼레이드 때 천안문 위에 올라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사열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윤봉길 의사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본 천장절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미주리함상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서명한 일본 외무상 시게미쓰의 다리를 절게 만든 윤봉길 의사의 넋을 위로하는 뜻에서라도, 중국이 처음으로 준비한 9월 3일 항일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를 천안문 위에 올라 사열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인은 그동안 1945년 8월 14일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 방송을 한 다음 날인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고 기념해왔다. 당시 일본 왕의 항복 방송은 다소 슬픈 어조로 방송돼 일본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일본 왕의 슬픈 항복 방송 음성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윤봉길 의사가 다리를 부러뜨린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상이 미주리함상에서 절뚝거리며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광경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오는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은 천안문 위에 서서 중국군의 퍼레이드를 다른 승전국 대표들과 함께 사열해야 한다. 그래야 윤봉길 의사의 의거도 완성되는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다.
09-11 중국과 북한, 그 미묘한 관계의 현주소①②
포격에 核실험까지 감행하는 北에 고개돌린 중국
지난 8월 20일 군사분계선에서 남북한이 포격을 주고받자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다음 날인 8월 21일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반도(한반도)의 이웃으로서 중국은 반도의 정세와 동향에 대해 고도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최근 발생한 사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한다. 중국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기를 희망하며, 긴장을 조성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우리는 관련 당사자(有關方面)들이 냉정하게 자제심을 발휘하고, 대화를 통해 당면한 사태를 잘 처리하도록 촉구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어떤 행동도 중지하기를 촉구한다. 중국은 관련 당사자(有關各方)들이 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를 바란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8월 25일 새벽 남북한 고위회담이 합의를 이끌어내자 화춘잉 대변인은 다시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과 한국(朝韓)이 장시간의 협상 끝에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일련의 합의에 도달한 데 대해 환영을 표시한다. 조선과 한국은 대화와 협상을 유지하고, 화해와 협력을 촉진하며, 관련 협의가 순조롭게 결실을 맺어 공동으로 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성명을 발표하면서 화춘잉 대변인은 남북한을 ‘유관방면(有關方面)’ ‘유관각방(有關各方)’ ‘조한(朝韓)’ 등으로 표현했다.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8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習近平)이 2013년 3월 5일로 예정된 국가주석 취임을 기다리고 있던 그해 2월 김정은의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이때 이후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을 만나러 평양에 가지도 않았고, 김정은을 평양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2013년 6월과 2014년 7월 베이징(北京)과 서울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두 차례 한·중(韓中) 정상회담을 가졌고, 오는 9월 2일 베이징에서 다시 한·중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중국과 북한 관계 사상(史上) 가장 썰렁한 관계가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데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조한(朝韓)’이라는, 북한을 앞세우는 표현은 아직도 중국 외교관들에게는 북한이 한국보다 우선이라는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2013년 5월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을 방문한 최룡해(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주간조선
같은 날 장밍(張明) 외교부 부부장은 국무원 신문판공실이 마련한 기자회견장에 나가 오는 9월 3일로 예정된 중국 인민 항일전쟁과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되어 중국 인민해방군의 퍼레이드를 사열할 외국 국가지도자 30명과 정부 고위대표 19명 등 49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외국 지도자 49명의 명단을 보도하면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박근혜 한국 대통령, 그리고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 세 사람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들었다. 특히 최룡해에 대해서는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당 중앙위원회 서기,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라고 소개했다. 최룡해의 직위 가운데 당 중앙위원회 서기라는 직책이 시진핑이 보유하고 있는 ‘당 총서기’라는 직책에 상응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룡해는 2013년 2월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해서 시진핑 등 중국 지도부가 격분하고 있던 5월에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과 만난 일이 있다.
<①편에서 계속>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과 북한을 대하는 중국의 본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원유 공급일 것이다. 2013년 2월 북한이 중국의 권력 교체기에 제3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은 유엔의 대북(對北) 제재에 찬성했고, 리바오동(李保東) 유엔주재 중국대사는 발언을 자청해서 흥분한 어조로 “문제는 제재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행(implementation)하는 것”이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이 당시 북한의 핵실험에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2014년 1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원유 수출은 0을 기록했고 지금까지 1년8개월째 중국의 세관 통계에 북한에 대한 원유 수출액은 0을 기록 중이다.
이에 대해 존 케리(Kerry) 미국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을 다루는 데는 중국이 도움이 된다”면서 “중국은 실제로 북한에 대한 항공기용 제트유(油)의 공급을 감축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북한에 대해 마지막으로 남은 동맹국이며 동시에 식량과 원유의 가장 중요한 공급국이지만,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북한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일 경우 북한에 불안정 사태가 발생해서 중국의 이익에 손상을 끼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케리는 설명했다. 케리의 설명은 아마도 중국 외교관들이 케리를 설득한 논리일 가능성이 크다.
▲존 케리 美 국무장관. /조선일보 DB
그러나 미국의 군사문제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에 대한 원유 공급을 끊었다는 중국 정부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 올 소스 애널리시스의 선임분석관 조지프 버뮤데즈는 지난 7월 10일 미국의 북한 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에 기고한 보고서에서 “작년과 올해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중국으로부터 원유를 공급받아 정제하는 평안북도 소재 봉화 화학공장이 정상으로 가동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이 북한에 원유 수출을 중단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봉화 화학공장은 1975년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중국의 지원을 받아 건설한 정유공장으로, 중국이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있는 다칭(大慶)유전에서 채굴한 원유를 랴오닝(遼寧)성 단동(丹東)에서 신의주를 거쳐 연결해 놓은 송유관을 통해 공급받아 정유한다. 봉화 화학공장의 정유 능력은 연간 150만t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수의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1990년 5월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도와주기 위해 대신 핵폭발 실험을 해준 사례를 북한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은 중국의 숙적인 인도를 괴롭혔고 결국 중국에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었다. 같은 논리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G2로 부상해서 미국을 숙명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비밀리에 자신들을 도와주는 것이 된다. 이는 중국의 세계 전략에도 맞다는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이며, 적을 괴롭히는 친구는 도와주는 것이 맞다”는 논리이고, 중국의 대북 정책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이 미국 전문가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는 중국의 대북한 정책을 ‘표리동일(表裏同一)’하게 만들 묘책은 아무래도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10.13 위압적인 중국 학자들, 위축된 북한 학자들
“동북아 지역이 맞고 있는 많은 위기와 도전 가운데 제일 첫 번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조선반도, 특히 조선 지역에 대한 것이다. 금융 시스템의 낙후, 전반적인 경제의 낙후, 유통 시스템 또한 아주 낮은 단계여서 전반적인 동북아의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법치(法治)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영어로는 ‘룰 오브 로(Rule of Law)’라고 한다. 우리도 아직 완전한 법치는 아니지만, 이미 법치를 향해서 가고 있다.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서로 협력을 하려고 해도 개념이 맞아야 하지. 법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류협력을 하고, 사업을 공동관리 하겠느냐….”
지난 9월 19일 연변대학이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에서 주최한 국제학술회의 ‘두만강 포럼’이 마련한 ‘중·조(中朝)학자 대화’ 자리에서 나온 한 중국 학자의 발언이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중·조 국경지대인 연길에서 개최한 학술회의 ‘기회와 도전: 일대일로(一帶一路)와 두만강 지역 국제협력’에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수 리명숙과 부교수 최수광을 비롯한 7명의 북한 학자들이 참석했다. 길림대학과 연변대학 소속의 중국 측 교수들은 북한 학자들과 지난 2010년부터 중국과 북한이 공동 관리해오고 있는 나진·선봉 지역의 발전 방안에 대한 토론을 벌이다 차례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덩샤오핑(鄧小平) 동지는 지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상해방(思想解放)’을 내걸었다. 사상해방에 대한 당신네들의 관점은 어떤 것이냐. 덩샤오핑 동지는 가난한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라고 했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 동지는 시장개방을 통해 각국과의 교류와 평화적인 협력을 이끌어냈다. 우리는 ‘평화와 발전’이라는 전략 목표를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그 결과 빠른 경제발전이 이루어졌고, 인민들의 생활도 나아졌다. 이제 내일이면 창춘(長春)과 훈춘(琿瑃)을 연결하는 고속철도 개통된다.”
“우리 중국은 이제 더 이상 동북아를 중시하지 않는다. 우리 중국은 동북아에 대해 지난 20년 동안 많은 꿈과 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실현을 거두지 못했다. 우리의 관심은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중·일(日)·한(韓) 3개국과 아세안 비동맹 10개국 정상회의도 개최하고 있고,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했다. 우리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대일로 구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협력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다. 일대일로 사업에서 두만강 지역은 이미 최우선 지역이 아니다. 정말로 말하지만 과거는 흘러갔다, 완전히 흘러갔다.”
중국 학자들이 김일성대학 교수들에게 흥분해서 고함을 질러가며 자랑 반 몰아붙이기 절반의 떠들기를 계속하는 동안 왼쪽 가슴에 김정은 배지를 단 북한 학자들은 위축된 표정으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중국 학자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소리 지르기를 마치자 북한 학자들이 북한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대일로 전략에 대해 우리는 국가적인 토론을 해본 일이 없습네다. 이번 두만강 포럼에 참석해서 토론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됐습니다. 개인적인 학자의 입장은 말하기 힘듭네다. 경제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더 연구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대일로 전략에 참가하는 경우 좋은 측면에서 공감은 갑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그 기차를 탈 수는 없습니다. 아직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특수한 입장에 있습니다. 평양에 와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라도 지켜야지, 남들처럼 갖춘 조건에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일대일로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한 학자들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일까. 동북아 지역 국가 간 협력과 두만강 하류지역 개발, 과거의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 협력과 경제 진흥을 목표로 한 일대일로 전략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논리야 다 옳은 말들이지만 있는 대로 목청을 높여 북한 학자들을 압박하는 위압적인 태도에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워싱턴 시각으로 지난 9월 25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백악관에서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에 위배되는 어떤 행동도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미국 땅에 가서 북한을 겨냥한 경고의 발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제7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의 잔재인 한반도 분단 70년의 역사를 끝내는 것이 곧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당 70주년을 기해 과시하고 있는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위협에 대해서도 “세계와 유엔이 추구하는 인류 평화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과 우리 외교당국이 펼치고 있는 국제사회를 통한 북한에 대한 압박은 물론 북한의 핵위협과 미사일 발사 시위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정당하면서도 올바른 방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통일에 대한 남북 간의 협의와 합의의 병행은 어려운가 하는 점이다. 연길에서 열린 두만강 포럼에서 중국 학자들이 당당한 논리로 고함을 지르는데 위축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그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어떻게 타겠느냐”고 말하던 북한 학자들의 그늘진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리 학자가 북한 학자에게 질문을 하면서 “북한”이라고 말하자 손을 들고 일어서서 “저, 고거 ‘북측’이라고 고쳐쓰믄 어떻겠습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던 모습도 겹쳐 보였다.
12.21 일국양제(一國兩制) 한반도 통일 권고하는 중국의 속내는...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s, 다시 말해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체제를 허용한다는 뜻이다. 중국이 1997년 6월 30일 홍콩의 주권을 영국으로부터 되찾아올 때 적용한 통합의 방식이다. “홍콩의 주권 회복 이후에도 2047년까지 50년간 홍콩에 자본주의 체제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핵심으로, 1980년대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홍콩 주권 반환 회담을 하면서 제시한 대담한 제의였다.
홍콩의 주권 회복과 동시에 중국 대륙의 사회주의를 홍콩에 강요하지 않겠다는 덩샤오핑의 제의를 대처 총리가 받아들여 홍콩의 주권은 중국에 반환되도록 결정됐다. 주권 반환 이후 홍콩은 외교와 국방권만 중국에 넘기고 중국의 특별행정구(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로 남았다. 홍콩특별행정구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Basic Law) 제5조는 “홍콩특별행정구는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시행하지 아니하며, 원래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50년 동안 변동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일국양제는 이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가 1999년 중국으로 주권이 귀속될 때도 적용됐고, 앞으로 대만이 중국과 통일할 경우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그런 일국양제 통합 방식을 한반도에 적용해서 한반도가 평화통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가 지난 12월 5일 베이징(北京)대학에서 개최된 한 세미나에서 제시됐다. 베이징대와 지린(吉林)대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 학술세미나의 제목은 ‘전후(戰後) 동북아 국제질서의 연속과 변화’. 2차 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된 현재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어떤 질서는 계속되고 있고, 어떤 질서는 변화하고 있느냐에 대해 토론해 보자는 세미나였다. 세미나에는 베이징대 국제관계 대학원과 아시아태평양연구원, 지린대의 동북아연구원과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관영 신화(新華)통신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들이 40명 가까이 참석했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중국이 필요로 하는 평화와 안정을 제공할 수 있으므로 중국에 도움이 된다”는 놀라운 발제는 베이징대 국제관계 대학원의 원로교수 천펑쥔(陳峰君)이 한 것이었다. 그의 발제 제목은 “조선반도 형세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와 모략(謀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는 중국과 미국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급소(急所)와 같은 곳이다. 최근 중국의 굴기(崛起)는 동아시아에서 대국 사이의 실력 대비에 절대로 낮게 평가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발언권은 상승하는 추세에 있다. 미국의 전략을 중국이 제어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 한반도 주변 형세가 이처럼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외교 공세를 펼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한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이 경쟁하는 상황을 중국이 독점하는 상황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한반도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정전(停戰)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을 전방위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천펑쥔 교수의 논리였다. 천펑쥔 교수는 한반도 평화통일 방식으로 중국이 홍콩을 흡수한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식을 제안하면서, 최근 중국과 대만 최고지도자 사이에 있었던 시마회(習馬會·시진핑과 마잉주 회담)와 같은 방식으로 ‘박김회(朴金會·박근혜와 김정은 회담)’를 개최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일국양제에 의한 한반도 평화통일 권고는 지난 12월 9일 인천대 학술세미나 ‘한반도 통일과 중국의 역할’에서도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인 스위안화(石源華) 교수가 또다시 제시했다.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 주변국외교연구센터 주임인 스위안화 교수는 ‘한반도 통일과 중국의 역할-일국양제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함의’라는 발제를 통해 베이징대학의 천펑쥔 교수에 이어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중국에 유리하며, 통일 방식으로는 일국양제가 좋을 것”이라는 분명한 표현을 사용했다.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의 관계, 한반도 정전(停戰) 체제를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방안 등에 관해 많은 저서와 논문을 지난 30여년간 발표해온 스위안화 교수는 ‘중국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입장’을 10개의 글자로 정리하면 “화평, 무핵(無核), 통일, 우호, 공영”일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통일된 한반도는 중국에 유익하며, 아시아 공동체가 뉴실크로드 전략을 실현하는 데도 유익하다”고 정리했다. 그는 한반도 통일의 방식으로는 “중국은 중국이 이미 실시해본 일국양제 방식을 남북한이 공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하며, 일국양제가 한반도 통일의 앞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베이징대학의 천펑쥔이나 푸단대학의 스위안화 두 원로교수는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로 중국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 두 교수가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중국에 유리하며, 한반도 통일의 방식으로는 일국양제를 권고한다”고 분명한 표현으로 밝힌 것은 무언가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현재 중요한 변화의 언덕에 섰다는 예고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유리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나서는 중국 한반도 전문가들의 의견 제시가 앞으로 중국의 현실적인 한반도 전략에 어떤 변화로 연결될 것인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스위안화 교수는 “한반도 통일이 중국에 유리하며, 한반도 통일 방식으로는 일국양제가 좋을 것이라는 권고를 천펑쥔과 내가 제시한 것은 어디까지나 학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학계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정부의 관계에서 학계가 당과 정부의 입장과 동떨어진 흐름을 보여주는 일은 없으며, 학계의 의견을 당과 정부가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중국의 국가전략이 형성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이 중국에 유리하다는 중국의 속셈이 무엇인지, 남북한 통일방식으로 일국양제를 권하는 중국의 계산은 무엇인지 우리는 따져보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2016.02.22 중국 평론가 차오바오인(曺保印)이 털어놓는 중국인들의 국민성
"거짓말은 중국인들의 행위습관, 수준도 높고 빈도도 높아"
“중국인들은 특히 거짓말하기를 즐긴다. 거짓말하는 수준도 높고, 거짓말 빈도도 높다. 거짓말은 중국인들의 집단적인 행위습관이다. 조상 모신 사당의 높이라든가, 강과 호수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등 중국인들의 거짓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거짓말은 중국인들의 혈액 속에 녹아 있다. 중국인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중국의 유명 평론가 겸 방송작가 차오바오인(曺保印)이 쓴 책 ‘바오인이 국민성을 말하다(保印說國民性)’에 나오는 글의 일부다. 중국인이란 특별히 거짓말을 잘하는 민족이다 보니 “참말을 하면 손해 본다” “참말 한다 해놓고 참말 하는 사람 없다”는 격언까지 믿고 사는 풍토가 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차오바오인은 청 건륭 58년(1793년) 최초로 중국에 파견된 영국 사절단이 중국에 와서 느낀 실망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영국 사절단들은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문명국이고, 예의의 나라이며, 사람들은 모두 군자(君子)로, 상호 신뢰가 가득한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사람들은 온통 사기꾼들이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폭력과 노예 근성이 만연해 있는 데다가, 더럽기 짝이 없는 사회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서 시인 후스(胡適·1891~1962)는 “입만 열면 도덕을 말하고, 고상한 규범과 공평무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거짓 군자와 더러움이 온 사방에 널려 있는 나라”라면서 국민성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차오바오인은 그런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하는 거짓말 중의 하나가 ‘량서우쭈아(兩手抓·두 손 모두 꽉 쥐기)’라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두 손에 각각 하나씩의 물건을 들고 어느 손 하나 느슨하게 하지 않고 양손을 모두 꽉 쥐고 물건을 놓지 않는 것이 바로 량서우쭈아다. 이성은 얕고 욕심은 두텁다 보니 두 손에 모두 물건을 들고는 두 손 모두 꽉 쥐기 위해 쩔쩔매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국인의 딱한 모습이라고 차오바오인은 설명했다.
1980년에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량서우쭈아를 활용해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모두 잘 붙들고 있어야 하며,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설과 대외개방 양쪽을 모두 다 꽉 붙들고 잘 해나가야 한다”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오른손을 꽉 쥐면 왼손은 느슨해지기 마련인데, 양손을 모두 꽉 쥐고 있어야 한다는 량서우쭈아의 개념을 한반도 정책에 적용한 것이 바로 한국과 북한에 대한 량서우쭈아 전략(兩手抓 戰略), 즉 양다리 걸치기 외교 전략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후 1950년대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착수한 경제의 대약진 운동이 효율보다는 목표 위주의 군중주의 때문에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중국 경제를 세계 최저 수준의 바닥으로 끌고 갔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고,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경제건설을 위해 1992년 한국과 수교하는 결단을 내렸다. 화가 난 김일성이 한·중수교를 통보하러 온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을 밥도 안 먹이고 돌려보냈고, 이후 10년 가까이 정상 교환방문 한 차례 없이 지냈다.
하지만 2002년에 집권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이후에는 김정일이 1년에 세 번이나 중국을 방문할 정도로 북한과의 거리를 다시 좁히며 탐욕스러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량서우쭈아의 전략을 남북한에 대해 적용해온 것이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었다. 북한과 한국을 각각 양손에 쥐고 둘 다 잃지 않으려고, 어느 순간에는 오른손이, 어느 순간에는 왼손이 느슨해지지 않나 노심초사해 온 것이 바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을 쥐고 있는 손을 놓자니 미국의 중국에 대한 포위전략에서 한국이 하는 역할 때문에 아깝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북한을 쥐고 있는 손을 놓자니 중국 자신들이 보기에는 대단치도 않은 핵무기로 동북아 현장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을 효과적으로 괴롭히는 북한의 역할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한국과 북한을 양손에 쥐고 두 손 다 꽉 쥐고 있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탐욕스러운 중국 외교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2003년에 미국이 의장국 역할을 맡겨준 6자 회담이 이미 13년이 흐르면서 아무런 기능을 못하는데도, 또 그 사이에 북한이 모두 네 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해도 6자 회담이라는 물건 역시 결코 손에서 놓아버리지 못하고 쥐고 있다. 이번에 북한이 이른바 수소폭탄 폭발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는데도, 어떻게든 북한을 붙들고 있기 위해서 주중 북한대사를 소환하면서 동시에 주중 한국대사를 자기네 외교부로 소환해 ‘엄중한 경고’를 전달하는 ‘량서우쭈아’의 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중국 외교 전략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량서우쭈아에는 어느 한 손에 침을 놓아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이 특효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또 다른 병자호란 같은 걱정을 하지만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른 주권국가 개념을 바탕으로 한 현대 국제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이다. 이런 걱정은 버려두고, 한·미·일 공조를 통한 일본과의 협조를 강화하고, 때마침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주진보당 여성 총통 차이잉원(蔡英文)이 당선된 국제정치적 자산을 활용해서 일본과 한국, 한국과 대만, 그리고 그 이남의 필리핀과 베트남을 연결하는 이른바 중국에 대한 ‘합종책(合縱策)’이라는 침을 준비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를 하면서 우리가 받아들인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한 점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새로 당선된 민진당 차이잉원 여성총통 당선자와의 교류를 잘 활용하면 량서우쭈아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 중국 외교당국을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중국의 두 손 가운데 한반도 남쪽을 쥐고 있는 손에 일침을 가한다면 좋은 협상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들은 엄청난 양의 핵무기와 미사일을 한반도 북부 지린성(吉林省)에 배치해 두고, 북한의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통해 미국과 한국을 관리하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게 중국이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에 흔들림 없는 사드(THAAD) 배치와 대만과의 교류 확대를 통해 일침을 가함으로써 탐욕스러운 중국 외교 당국자들의 잠을 깨워놓아야
04.08 ‘한류(韓流)’와 중국 ‘인해(人海)’의 실체
‘아오란(奧藍)’이라는 중국 화장품 회사 직원 5800여명이 인천 월미도에서 3월 27일부터 이틀간 치맥 파티를 벌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오란이라는 중국 기업은 얼마나 큰 회사이기에 한꺼번에 5800명이 한국에 포상휴가를 왔을까.… 중국에는 정말로 한류(韓流)가 대단한 모양이구나.… 중국 여배우들도 예쁜데 도대체 중국 사람들은 한국 탤런트들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죽고 못 살아 할까.… 치맥 그게 뭐라고, 중국 젊은이들은 왜 몇천 명씩 한꺼번에 인천 월미도로 몰려와 튀긴 닭과 맥주를 높이 들고 정신 못 차려 할까.… 이러다 우리나라는 14억 중국 인해(人海)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까.”
분명한 것은 중국 사람들 사이에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K-pop)을 좋아하는 열기는 분명히 흐름으로 존재하고 있고, 14억이라는 중국 인구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지능력을 초월한 규모의 숫자라는 점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한류라는 흐름의 규모와 실체를 보다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커다란 바위 아래에 깔려 사는 가재를 짓누르고 있는 듯한 중국의 14억 인구가 주는 스트레스에 대해 보다 정확한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과거 역사를 통해 보면 삼국시대 백제의 멸망과 조선시대의 병자호란이라는 난리는 중국 대륙의 당(唐)왕조와 청(淸)왕조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비극적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류에 대해. 몇 년 전 필자는 중국 남부 후난(湖南)성 옌링(炎陵)현 산골마을에서 난감한 상황에 빠진 일이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전설의 조상으로 모시는 염제(炎帝)를 제사 지내는 광경을 구경하고 시간에 맞추어 글을 노트북으로 송고할 생각이었는데, 와이파이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는 산골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리 뛰어다녀도 인터넷을 연결할 랜선이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 거의 절망감에 빠져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전뇌수리(電腦修理)’라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빨갛고 조그만 간판이 보이는 게 아닌가. 뛰어 들어갔더니 벽에 딱 두 개의 랜선이 보이는데 책상 한 개에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마주 앉아 데스크톱에 각각 랜선을 연결해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창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저걸 어떻게 빼앗아서 내 노트북에 연결하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노트북을 부팅시키며 “이것 좀 봐 달라”고 하자 내 노트북으로 슬쩍 눈길을 던지던 한 아가씨가 “아니 이거 한국 노트북 아냐? 와, 처음으로 한국 노트북을 구경하네.… 이거 봐 자판도 한국 글자인가 봐.… 아저씨, 여기 한국 노래도 들어있어요?”라고 말한다. 그 아가씨는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두말도 않고 자신의 작업을 중단하고 랜선을 뽑아 내 노트북에 연결해 주면서 사진과 글을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겨우 1mbps짜리 정보 전달량을 가진 랜선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한류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해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에서 방문학자로 머물면서도 한류를 실감했다. 상하이 동쪽 훙취안(虹泉)루의 코리안 스트리트에서 중국 젊은이들이 한 잔에 1만2000원이나 하는 일본 기린 얼음거품 맥주를 우리 식으로 튀긴 닭과 함께 파는 치맥집에 길게 줄을 늘어서서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가게 앞에는 ‘별그대’의 김수현과 전지현의 브로마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김수현과 전지현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자 “말도 마시라, 우리 중국에도 김수현이나 전지현만 한 탤런트는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김수현, 전지현 같은 한국 탤런트들의 그 천변만화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를 보면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성장과정에서 중국 젊은이들보다도 자유분방하게 자란 한국 배우들이 생각을 얼굴에 표정으로 나타내는 연기가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150개가 넘는 중국 전역의 TV채널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한류 드라마를 밤새도록 보고는 직장에 나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졸면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있다는 중국 매체 보도도 있고, 요즘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 중국 공안당국이 자기네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중국 관영매체의 보도를 보면 한류의 흐름은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류 때문에 아오란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 직원들이 몇천 명씩 한국으로 몰려와 인천 월미도에서 치맥파티를 했다는 보도에는 실제와 다소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 검색엔진 바이두를 통해 아오란(奧藍)이라는 회사를 검색해 보면, 정확한 명칭은 ‘아오란미용미발용품유한공사(奧藍美容美髮用品有限公司)’다. 우리 언론들이 소개한 것처럼 직원 수가 몇만, 몇십만 명이 되는 ‘집단(集團·Group)’이 아니다.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에 있는 직원 수 ‘미상(未詳)’에 법인대표의 이름도, 자본금 액수도 공개되어 있지 않은 ‘유한회사’에 불과하다. 홈페이지에 인천행 비행기표를 파는 코너도 만들어 놓고 인천행 관광객 모집도 하는, 말 그대로 한류의 덕을 보아 돈을 벌려는 회사임을 알 수 있다.
지난해 5월 8일 프랑스 관광도시 니스에서 중국인 단체관광객 6400명으로 인간 띠를 만들어 기네스북에 최다 단체관광객 기록을 올린 톈스(天獅)라는 기업은 그래도 톈진(天津)에 있는 직원 수 1만2000명의 건실한 기업이다. 1995년부터 바이오산업과 호텔경영, 건강관리, 교육학원, 금융업 투자 등의 분야에 투자해서 기업을 잘 유지해오고 있는 이 톈스그룹은 그나마 ‘집단’이라는 회사명을 정식으로 쓰고는 있는 기업인데, 직원의 절반가량을 프랑스 니스로 포상휴가를 보냈다가 기네스북에 오른 것이었다.
비록 중국을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당원수 8600만명을 자랑하는 공룡정당이고, 인구가 많은 1위, 2위 지방인 광둥성과 산둥(山東)성의 인구가 이미 1억을 넘어섰으며, 특별시인 충칭(重慶)시의 인구가 3000만에 가까운 것으로 조사됐지만, 중국의 인해에 무턱대고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고전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위험하지 않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터넷 세상이니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를 비롯한 중국 검색엔진들을 잘 활용해서라도, 정확한 규모와 실체 파악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07.01 창당 95주년 중국공산당의 예상 수명은?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1차 당대회 개최지
중국공산당이 7월 1일로 창당 95주년을 맞았다. 원래 창당기념일은 중국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린 1921년 7월 23일이지만, 1938년 5월 마오쩌둥(毛澤東)의 제의에 따라 제1차 당대회가 열린 달의 첫째 날인 7월 1일을 창당기념일로 결정했다.
중국공산당 집계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당원 수는 8779만3000명. 전년에 비해 110만7000명 증가했다. 남성 당원과 여성 당원의 비례는 3 대 1 정도로, 여성 당원의 숫자가 전체의 24.7%에 해당하는 2167만2000명이다. 학력은 대졸 이상이 43%로, 3775만5000명이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들이다. 직업별로는 노동자가 734만2000명, 기술자가 1253만2000명, 국유기업과 민간기업 경영인이 901만6000명이고, 당정 기관 관료가 739만7000명, 학생이 224만7000명, 기타 직업 종사자 710만5000명, 은퇴자들이 1621만6000명이다.
중국공산당은 지난 38년간의 개혁개방에 따른 빠른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미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옷을 벗어버렸다. 이론적 배경은 장쩌민(江澤民) 전 당 총서기가 2000년 2월에 제시한 ‘3개 대표이론’으로, 당시 장쩌민 총서기는 “중국공산당이 전 인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제시하며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라는 이론적 기초를 제거하고 ‘전 인민의 대표’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12월 개혁개방에 착수하면서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부자와 기업인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중국공산당의 존재 근거가 옅어지게 된 것이다.
2016년 현재 9000만명이 넘는 당원 수를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이지만 95년 전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제1차 당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의 숫자는 12명이었고, 전국의 당원 숫자는 50명에 불과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창사(長沙) 대표로, 12명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제1차 당대회를 개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베이징(北京) 대표 천두슈(陳獨秀)와 광저우(廣州) 대표 리다자오(李大釗)였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1921년에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과 항일(抗日)전쟁을 거쳐 승리자가 되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주도했다. 이후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3년 이내에 따라잡겠다’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잇달아 시행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의 정치투쟁을 10년 가까이 계속한 끝에 마오가 사망할 당시 중국 경제는 세계 최빈국의 나락에 떨어져버렸다.
마오의 사망으로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공산당 정치국 연설을 통해 ‘사상해방(思想解放)’과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개혁개방 시대의 정책을 펴나갈 것을 강조함으로써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개혁개방 38년 만에 미국 다음가는 G2로 올라선 가운데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등장한 시진핑(習近平)은 2012년 11월 선출되면서 ‘두 개의 100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1921년 이후 100년이 지난 2021년까지는 중산층이 충분히 확보된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를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 이후 100년이 흐른 2049년까지는 중국이 과거 당(唐)이나 청나라 초와 같은 세계 최강의 나라로 복귀한다는 내용의 야심 찬 구호다.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11년 만인 1989년 6월 천안문광장에서 반부패와 민주화 요구를 내건 시민·대학생들의 시위를 군대를 동원해서 유혈진압함으로써 ‘민중의 해방자’라는 공산당의 존립 기반을 잃고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정치 민주화는 보류하고, 경제의 민주화와 자유화라는 중국 특유의 ‘신권위주의’를 내세워 위기를 극복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인민의 불만 표시를 유혈진압한 과거를 남겨 아직도 그 그늘이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내년 가을의 제19차 전당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전당대회를 할 때마다 새로 선출되는 중앙위원회 위원들과 정치국 상무위원, 당 총서기의 임기는 5년이다. 중국공산당은 대체로 1921년 창당 이후 5년마다 한 차례씩 전당대회를 개최해왔다. 5년마다 개최되는 전당대회를 중국공산당은 과연 언제까지 개최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 중국의 인터넷 블로그에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글이 떠서 주목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중국공산당의 수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우선 윤회(輪回)하는 문제를 남기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 방면에서 중국의 개인 재산은 국가 전체 자산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게 돼 있다. 중국공산당이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세수(稅收)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당의 권력을 뺏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둘째는 사회주의적 정치제도 방면에서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5년 또는 10년마다 규칙적으로 정권교체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당교(黨校)를 통해 인재와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고, 자신을 대신할 다음의 정치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중국공산당에서 체계화되어가고 있는 점은 중국공산당의 수명을 확장하는 데 커다란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반복해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진(秦)·한(漢)·수(隋)·당(唐)·송(宋)·원(元)·명(明)·청(淸) 왕조가 그랬듯이 발전기와 쇠락기를 거쳐 왕조의 붕괴에 직면해온 것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거기에다가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최대의 난제인 소수민족 문제는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라는 문제와 겹쳐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 근거까지 흔들어놓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시진핑이 두 개의 100년을 통해 2050년의 중국에 대한 그림을 그렸고, 덩샤오핑은 1980년대에 “중국공산당 100년 부동요(不動搖)”를 주문해서 2080년까지도 중국 사회를 중국공산당이 리드할 것을 요구했다. 어떨까. 거기까지가 중국공산당의 수명이 되고 말 것인가.
08.24 중국과 미국이 한판 전쟁을 벌인다면…
‘중국과의 전쟁, 생각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생각(War with China, Thinking Through the Unthinkable)’.
미국 랜드(RAND)연구소가 미국의 가상적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벌일 경우 누가 이길 것인가, 또 두 나라는 각각 어떤 피해를 입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보고서를 최근 내놓았다. 미 공군에 관한 용역 보고서를 자주 작성하는 랜드연구소는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아무도 승자는 없을 것이지만, 피해는 중국이 더 많이 입게 될 것”이라는 대체적인 결론을 내렸다.
▲중국 항공모함 랴오닝함에서 출격하는 젠-15 전투기. /신화통신
8월 1일로 창군(創軍) 89주년을 맞은 중국 인민해방군은 창군 초기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전쟁’을 통한 ‘완전한 승리’를 기본 전쟁 개념으로 하고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점차로 제한된 목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개념을 적용해가고 있다.
랜드 보고서는 중국군이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과의 기본적인 전쟁 개념은 태평양 서쪽 중국 근해에 미국 군사력이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고, 최소한 패배는 피하자는 전략이라고 규정하고, 중국의 이 같은 전략을 A2AD(Anti Access, Area Denial·反접근)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JOAC(Joint Operational Access Concept·합동작전에 의한 서태평양 침투 개념), 다시 말해 남중국해 등이 있는 태평양 서쪽 해역에 대해 중국이 반접근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뚫고 들어가는 전략이라고 했다.
랜드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과 전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중국과 일본이 동중국해 센카쿠열도(중국명 釣魚島)를 놓고 무력충돌을 벌일 경우, 미국은 미·일 동맹에 따라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둘째,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필리핀·베트남과의 해양영토 분쟁에서 조급하게 압박을 하는 경우, 미국은 평화적인 분쟁해결 방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셋째, 북한이 붕괴할 경우 중국과 한국,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개입을 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조정이 되지 않을 경우, 미국이 중국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넷째, 중국이 대만에 대해 무력을 사용해서 영토 통합을 시도할 경우이다. 다섯째, 중국이 배타적경제수역이라고 주장하는 해역의 상공에서 미국 공군기와 중국 공군기가 우연한 충돌을 할 경우이다.
보고서는 미국이 중국과 벌이는 전쟁을 기간과 심각성을 기준으로 보면 4가지의 경우(단기 고강도(短期 高强度), 장기 고강도, 단기 저강도, 장기 저강도)로 나누어 예상해 볼 수 있다고 적시했다.
▲관영 중국중앙(CC)TV가 지난 7월 남중국해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사<西沙>군도·베트남명 호앙사 군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국 해군의 대규모 훈련 장면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 단기 고강도(brief severe) 미국과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각자의 군대에 “적에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라”고 명령할 경우 심각하고 격렬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미국은 항모가 파괴되거나, 괌 같은 서태평양 공군기지가 파괴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군은 미 해공군의 서태평양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대륙에 건설되어 있는 반(反)접근 기지들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미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수일 내에 중국은 미국과의 손실 차이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전쟁을 중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장기 고강도(long severe) 2015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고강도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심각한 피해를 입는 쪽이 중국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2025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어느 쪽이 승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이 승리하더라도 승리의 폭이 2015년 기준시점보다 좁아질 것이다.
■ 단기 저강도(brief mild) 신속한 승리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할 경우, 패배의 피해 극복이 어렵다고 전망될 경우, 그리고 경제적인 피해가 심각할 것으로 예상될 경우, 미국과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삼가게 될 것이다.
■ 장기 저강도(long mild) 전투가 잘 통제되고, 피해가 극복될 만한 것으로 예상될 경우 미국과 중국 양측은 정치적 타협보다는 장기적이고 강도가 낮은 전투를 지속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7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중재 판결 직후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강화하는 가운데 '중국판 B-52'로 알려진 신형 전략폭격기 훙(轟)-6K(H-6K)가 분쟁도서 상공을 비행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중국 공군 웨이보
랜드 보고서는 미 공군을 위한 보고서를 많이 생산하는 랜드연구소의 속성상, 미군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대체로 상황을 확대해석하고, 대체로 미군에 불리한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아야 할 보고서다. 랜드 보고서의 그런 속성을 감안한다면 현재로서 중국군의 전력이 미군의 적수가 되기에는 아직도 많이 모자란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특히 남중국해에서 중국 해군과 미국 해군이 충돌하는 상황을 설정할 경우,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온갖 경험을 다 해본 미 해군과, 전통적으로 해군 부재의 중국군의 전통으로 인해 중국 해군이 적수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항모의 경우에도 중국 해군이 보유한 랴오닝(遼寧)함은 구소련이 조지아에서 건조 중이던 중소형급 항모로 중국 해군은 최근 이 항모 갑판에서 이착륙 훈련을 하던 젠-15 전투기가 바다에 추락해 중국군 공군 장교가 사망하는 사건도 겪었다.
중국 해군의 진정한 실력은 미군과의 일전이 아니라 이지스함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일본 해군과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를 먼저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미·중 갈등이 심각해질 경우 일본이 중국과의 해전에 끼어들 경우를 고려해야 할 것이며, 1895년 청일전쟁 때 일본 해군에 참패함으로써 나라가 기울어졌던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다시 되새겨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최근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우젠민(吳建民) 전 프랑스 주재 중국대사가 경고한 것처럼 ‘혁명과 전쟁에 대한 습관적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비판 기능이 없이 자화자찬만 일삼는 환구시보(環球時報·Global Times)를 비롯한 중국 관영언론들의 부추김에 도취해서 미국과의 일전을 생각한다면 지난 30여년간의 빠른 경제발전이 일시에 물거품이 되는 심각한 국운 상실을 또다시 경험할지 모른다는 점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정치지도자들은 뼈저리게 명심해야 할 것이다.
09.24 중국에 맞서 21세기판 합종책을!
지난 9월 4일과 5일 항저우(杭州)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주재로 열린 G20 정상회의는 기원전 206년 지금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열린 ‘홍문(鴻門)의 파티’를 생각나게 했다. ‘홍문연(鴻門宴)’의 주재자는 산이라도 뽑을 것 같던 ‘역발산(力拔山)의 기개세(氣槪世)’를 과시하던 항우(項羽)였다. 이 파티에 초대된 손님은 항우의 최대 경쟁자 유방(劉邦)이었다. 이 파티의 기획자는 항우의 브레인 범증(范增)이었다. “유방을 초청해서 파티를 하는 도중에 기회를 봐서 목을 베어버리자”는 것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얼마 안 가 범증은 항장(項庄)을 들여보내 칼춤을 추게 한다. 칼춤을 추다가 기회가 오면 유방의 목을 베어버리라는 주문을 해놓고 있었다. 사태가 위험해지자 유방의 책사(策士) 장량(張良)은 무장 번쾌(樊噲)를 들여보낸다. 번쾌가 들어가 보니 항우의 삼촌 항백(項伯)이 항장과 함께 칼춤을 추고 있었다. 항장의 계획을 모르는 항백은 항장이 유방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항장의 칼끝이 유비에게 닿지 않도록 보호하는 행동을 취했다. 파티장의 유방을 구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 번쾌는 춤판 옆에 서서 항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을 부라리며 관찰하고 있었다. 항우는 그런 번쾌를 보고 훌륭한 장숫감이라고 칭찬하며 한 잔의 술을 상으로 내린다.
항우의 진영이 방만하게 돌아가는 틈을 타 유방은 슬그머니 빠져나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자신의 군영(軍營)으로 도망을 가버린다. 그로부터 4년, 항우는 실력을 키운 유방의 군대에 패해 오강(烏江)에서 자결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유방은 승리자가 되어 한(漢) 왕조의 창시자가 된다. 70세가 넘은 범증이 유방을 제거할 기회를 잃었고, 유방의 책사 장량이 홍문연에서 유방을 제거하려는 범증의 그런 생각을 이미 간파하고 대비책을 세운 덕분이었다.
중국 측은 사드(THAAD)를 한국에 배치하려는 미국에 대해 홍문연의 고사를 인용해서 비난해왔다. 중국 자신이 유방이고, 유방을 홍문연에 초청해서 목을 베려는 미국을 항우와 범증에 비유하면서, 그리고 칼춤을 추려는 항장을 한국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그런 미국과 한국의 간계에 놀아날 줄 아느냐”면서 사드의 한국 배치를 맹렬히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항저우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를 시후(西湖) 국빈관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맞이하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홍문연을 주재한 항우의 기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 측은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붉은 카펫을 깔아주지 않는가 하면, 맬컴 턴불 호주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는 호주 정부가 지난 4월 중국 측의 대규모 호주 목장기업 인수에 제동을 건 데 대해 불편한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미국 수행원들과 충돌한 중국 외교부 관리들은 “여기는 중국이니까 중국의 법을 지켜라”고 소리치며 고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이 차지하는 경제볼륨으로 보아도 아직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의 20%에도 미치지 못하고, 미국이나 유럽 전체의 GDP 규모에도 뒤져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이번 항저우 G20에서 너무 속을 내비치고 말았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은 중국이 이번 항저우 G20 회의를 계기로 경제적으로 전 세계 경제를 리드하는 ‘중국 작용(역할)’을 보여주게 될 것이며, 앞으로 세계사의 흐름은 이번 항저우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국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까지 오버하는 표현을 많이 만들어냈다. 하지만 항우는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홍문연에서 스스로 왕을 자처하며 천하를 제패한 듯이 속을 내비치고도 유방을 제거하지 못하는 바람에 불과 4년 만에 스스로 자결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 홍문연 고사를 이번에 정상회의를 주재하는 시진핑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듯했다면 과장일까.
아마도 이번 항저우 G20 회의에 참석한 세계 20강 국가원수들은 각자의 가슴속에 중국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항저우를 떠나 귀국했을 것이다. 이번에 국가원수들은 개별회담이 개최된 시후 국빈관 내 도로를 보안이라는 이유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길 양옆이 손을 흔드는 시민들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하게 텅 비어 있는 광경을 봤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현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지지도를 걱정했을 것이다. 고압적 자세로 “사드 한국 배치 반대”를 거론하는 시진핑 주석에게 위압감을 느꼈는지 “별로 넓지 않은 저의 이 어깨에 한국 5000만 국민들의 안위가 걸려 있다”고 감성적으로, 비외교적으로 호소한 박근혜 대통령도 속으로 중국 체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됐을 것이다.
홍문연에서 항우의 범증에 패배를 안겨준 유방의 책사 장량은 원래 전국시대 한(韓)나라 사람이었다. 부모형제를 진왕(秦王) 정(政)에게 잃은 장량은 진왕 정을 살해하기 위해 그가 다니는 협곡의 산 위에서 바윗돌을 굴러 내리게 하는 등 여러 차례 살해 기도를 했다가 서쪽으로 달아나 숨어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숨어 사는 동안 열심히 병법(兵法)을 연구해서 마침내 유방의 책사가 되기에 이르렀고, 나중에 항우가 오강에서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부모의 복수를 한 사람이기도 하다.
진왕 정이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동진(東進)하면서 연초제조위한(燕楚濟趙魏韓)을 하나씩 무너뜨리자 이에 맞서서 종(縱)이나 횡(橫)으로 인접한 나라들끼리 동맹을 맺고 힘을 합해서 진에 맞서자는 것이 합종책이요, 연횡책이다. 어떨까. 우리의 국방 주권을 무시한 채 “한국 내 사드 배치 반대”를 외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우리나라는 중국 동해 연안의 일본,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과 종으로 연결해서 중국에 맞서는 합종책을 구사해보면 어떨까. 특히 최근에 뽑힌 대만 민진당의 여성 총통과도 잘 교류한다면 훌륭한 합종책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중국 남쪽의 인도와도 교류를 확대하면 중국에 대한 훌륭한 견제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10.12 중국의 권력 나눠 먹기 2017 감상법
▲ 중국공산당 중앙전체회의(중전회)
조선일보 베이징(北京) 주재 특파원 시절 잘 알고 지내던 베이징대학 중문과 출신의 조선족 동포 지식인은 중국인과 우리 민족 사이의 형제간 다툼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변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결혼한 두 형제가 부모와 함께 한 집에서 살다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형이나 동생 한쪽의 가족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중국인 형제는 그대로 한집에 살면서 집도 나누고, 마당도 가운데에 울타리를 세워 둘로 나누어서 씁니다. 출입하는 사립문도 각자 내어서 드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동포 형제간이 서로 대립적이고, 중국인 형제간은 타협적이라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 형제간은 잔칫날이건 별미 음식을 만든 경우이건 함께 즐기고 나누어 먹지만,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 한쪽이 방을 비워주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중국인 형제간은 잔칫날이건 별미 음식을 만든 경우이건 서로 알려주지 않고 각자 즐기고, 나누어 먹지 않으며, 손님들도 각자 초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북적대도 형이나 동생이 서로 초대하지 않은 경우에는 모른 척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온 동네 어른들을 모이게 한 다음 집도 분할하고, 마당도 정확히 둘로 쪼개 울타리를 세우고 사립문까지 각자 내어 서로 다른 문으로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형이나 동생이 불만을 가지게 될 경우 형제간에 칼부림을 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동포 지식인이 들려준 중국인 형제간 이야기는 중국인이 재산이나 권력을 놓고 서로 다투는 방식, 다시 말해 서로 투쟁하고 타협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게 핵심이었다. 우리와는 다른, 중국인들의 권력 투쟁과 타협 방식은 2012년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8차 당대회 과정과 결과에서 잘 나타났다. 당시 당대회는 형님뻘인 장쩌민(江澤民) 전임 당 총서기와 동생뻘인 후진타오(胡錦濤) 전임 당 총서기가 벌인 투쟁과 타협의 과정과 결과였다. 2012년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 자리에 오른 시진핑(習近平) 현 당 총서기는 장쩌민의 ‘꼬붕(子分·부하라는 뜻의 일본어)’이었고, 새로 서열 2위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리커창(李克强)은 후진타오의 수하(手下)였다. 중국 전역에서 3000명에 가까운 대표들이 모여든 가운데 장쩌민과 후진타오 사이에서 정확하게 나뉜 권력 배분은 동포 지식인이 들려준 중국인 형제간의 집과 마당 나누기 그대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는 10월 24일부터 열릴 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전회)의 화두는 내년에 열릴 제19차 당대회의 권력 배분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라고 홍콩과 대만의 유력지들이 보도하고 있다. 2012년 당대회 때 이뤄진 권력 배분과 내년 가을의 당대회 때 진행될 권력 배분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쩌민과 후진타오 사이에 얽힌 관계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로 돌아간다. 당시에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최고의 실권자였던 원로 덩샤오핑(鄧小平)은 천안문사태 시위 군중들로부터 ‘부패한 권력’으로 비난을 받고, 당시 상하이(上海)시 당 서기였던 장쩌민(당시 63세)을 발탁해서 당 총서기에 앉히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물려주었다. 그러면서 덩샤오핑은 자신이 평소 마음에 찍어두었던 후진타오(당시 47세) 티베트 당 서기에게 다음 권력을 넘겨줄 것을 장쩌민에게 당부했다.
1989년 당 총서기에 올라 13년간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을 행사한 장쩌민은 2002년 덩샤오핑과 한 약속대로 당과 정부의 최고권력을 후진타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덩샤오핑이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후진타오 당신의 후계자는 내가 결정할 것’이라는 다짐을 받아두었다. 2012년 11월 8일에 개막해서 11월 15일에 발표된 중국공산당의 최고 핵심 정치국 상무위원 7인의 면면은 장쩌민의 수하들 일색이었다. 후진타오의 수하는 리커창 1명뿐이었다. 시진핑도 시진핑이지만 서열 3위의 장더장(張德江)은 장쩌민이 젊은 시절 출세의 길로 발탁해준 사람의 아들이었고, 서열 4위의 위정성(兪正聲)을 비롯 류윈산(劉云山), 왕치산(王岐山), 장가오리(張高麗) 등 6명 모두가 장쩌민의 사람 일색이었다. 후진타오가 키운 당 조직부장 리위안차오(李源潮)와 광둥(廣東)성 당 서기 왕양(汪洋) 두 사람은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절묘한 것은 2012년에 최고 권좌에 오른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 가운데 시진핑과 리커창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의 상무위원은 5년이 지난 내년 2017년 당대회 때는 모두 68세를 넘겨 퇴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장쩌민이 1989년 당 총서기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책사 쩡칭훙(曾慶紅)이라는 인물의 제의에 따라 ‘칠상팔하(七上八下)’라는 당 고위 간부에 대한 인사원칙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칠상팔하란 특정 직위에 오르는 해에 68세 이상이 된 사람을 걸러내는 인사원칙으로 그해에 67회 생일이 걸쳐 있으면 보임이 가능하지만 68세 생일이 걸쳐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임명이 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둔 것이다.
그러니까 5년 뒤인 내년 당대회에서는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7명 가운데 시진핑과 리커창 총리만 남고 나머지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모두 은퇴하는 상황이 현실화할 예정인 것이다. 이에 따라 2012년에 빠진 후진타오 사람들, 후가 2012년 퇴임 전 10년 동안 키워온 인물들로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채워지게 되는 상황이 올 것으로 보인다. 2012년 당대회에서는 형님뻘인 장쩌민의 사람들이 제18기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장악하기는 했지만, 내년에는 동생뻘인 후진타오의 사람들이 제19기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장악하게 되는 권력분할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서로 권력 배분을 하면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도입해 권력을 나누는, 이른바 ‘격세간택(隔世揀擇)’이라는 방식으로 타협을 한 셈이다.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장쩌민 사람들 일색으로, 그리고 2017년에는 후진타오 계열의 인물들이 상무위원회를 지배하는 구조가 현실화할 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권력 배분을 현실화하기 위한 준비를 이번 제18기 6중전회에서 진행할 거라고 중국 지식인들은 말하고 있다.
12.01 박근혜의 실패와 西太后의 저주
“박근혜는 자희(慈禧)태후(서태후·西太后) 사망 이후 104년 만에 동아시아에 처음으로 여성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2011년 말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자 중국의 한 인터넷 매체가 이런 글을 올렸다. 통칭 ‘서태후’로 불리던 청나라 자희태후는 청나라 말기를 마음대로 농단(壟斷)하다가 1908년에 사망했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해 기초가 흔들리던 청나라는 서태후가 죽은 지 3년 만인 1911년에 왕조의 멸망을 맞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74세에 병사한 서태후가 이런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차후로는 여인이 국정(國政)에 간여하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라. 이는 우리 청조(淸朝)의 가법(家法)에도 어긋나는 일이니 엄격한 제한을 가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도록 하라.”
서태후가 자금성(紫禁城)에 들어간 것은 17세 때이던 1852년이었다. 서태후는 함풍제(咸豊帝)의 비빈(妃嬪)으로 자금성에 들어간 지 4년 만인 1856년 함풍제의 장남인 애신각라 재순(愛新角羅 載淳)이라는 아들을 낳아 동치제(同治帝)의 생모가 됐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의 황제들은 모두 ‘금(金)’이라는 뜻을 지닌 ‘애신각라’라는 성을 갖고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지 5년 만인 1861년 함풍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 자희(慈禧)’라고 불린다. 청조의 황실에서 첫째 태후는 자금성의 동쪽에 거주하기 때문에 ‘동태후’, 둘째 태후는 서쪽에 거주하기 때문에 ‘서태후’라고 불렸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 서태후는 동태후이던 자안(慈安)태후와 힘을 합해 8명의 고명대신들을 주살하고 자안태후와 함께 이른바 ‘이궁수렴(二宮垂簾)’ 체제를 형성한다.
1875년 불과 열아홉 살의 동치제가 세상을 뜨자 서태후와 동태후의 양궁(兩宮) 수렴청정 체제는 동치제의 조카를 내세워 함풍제의 뒤를 잇게 하고, 연호를 광서(光緖)라고 칭한다. 동서 양 태후의 수렴청정 시대는 1881년 동태후 자안(慈安)이 세상을 떠나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청나라 천하는 서태후 한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서태후는 8년 뒤인 1889년 짐짓 정권을 광서제(光緖帝)의 손에 쥐여주는 척하기 위해 베이징 한가운데의 자금성을 떠나 베이징 북서쪽의 이화원(頤和園)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러나 이화원 거주 9년 만인 1898년 청나라를 개혁하려던 개혁운동가들이 자신에 대한 살해음모를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자 이른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켜 개혁세력을 숙청하고 1900년 다시 광서제에 대한 수렴청정을 실시한다. 그러다가 1908년 광서제가 죽자 서태후는 불과 세 살의 애신각라 부의(溥儀)를 황제로 내세우고 또다시 수렴청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은 법. 세 살짜리 부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바로 다음 날 오후 5시 서태후는 권력과 부를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 살짜리 푸이가 지탱하고 있던 청왕조는 1911년 쑨원(孫文)이 이끄는 개혁세력에 무너져 1644년부터 267년간 지속되던 왕조의 문을 닫았다.
남편인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1861년 이후 1908년 사망할 때까지 37년간 청 황실을 좌지우지하다가 마침내 청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서태후의 통치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자금성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함풍제의 아들을 낳아 다음 황제의 생모가 된 서태후는 남편 함풍제가 병약하여 당시의 내우외환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자신의 뛰어난 붓글씨 솜씨로 함풍제가 구술하는 교지를 대필하고 옥새 인장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함풍제는 얼마 안 가서 아예 서태후에게 당시 국정에 대한 견해를 발표할 수 있도록 윤허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1860년 청 황실은 베이징을 침공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피해 만주족의 본거지인 열하(熱河 ·지금의 청더承德)로 몸을 피했다. 함풍제는 1861년 8월 피란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함풍제는 숨을 거두기 전에 동치제의 배다른 아들들 8명에게 동치제를 보좌하도록 하면서, 이들과 서태후를 상호 견제하기 위해 황제의 옥새를 똑같이 2개를 만들어주는 실수를 범했다. 이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은 물론이요, 동태후와 힘을 합해 동치제의 배다른 아들들 세력을 거세한 서태후는 동태후와 이른바 ‘양궁 수렴청정’ 체제를 구축한다.
나중에 혼자 수렴청정을 하는 복을 누린 서태후는 자신이 황제의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걸핏하면 “이화원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했다. 해군 전함을 사서 일본과 서양세력에 대비해야 할 예산을 빼돌려 베이징 북서쪽에 지금의 이화원을 만들어 놓았다. 이화원의 거대한 호수는 인공으로 판 것이며, 판 흙을 뒤편에 쌓아올려 산을 만들어 놓았다.
서태후는 결국 60세 생일 다음해인 1895년 청일전쟁에 임하던 청의 북양(北洋)함대가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의 류궁다오(劉公島) 해군기지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는 꼴을 보게 됐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류궁다오의 해군기지 기념관에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과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종전협정인 시모노세키조약에 도장을 찍는 모습의 밀랍인형들이 전시돼 있다.
중국공산당의 세상인 지금 이화원을 구경하면 중국인 안내원들은 침을 튀겨가며 서태후의 죄상을 낱낱이 설명해준다. “서태후는 매일 밤 환관 옷을 입은 남자들을 이화원 안으로 끌어들여 환락의 밤을 보내고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의 머리를 빗기게 하고 손에 머리카락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남자들의 목을 잘랐다. 그 사실을 안 어느 남자가 서태후의 머리를 빗으면서 머리카락을 재빨리 소매 안쪽에 감춰 목숨을 건졌는데, 그 가짜 환관이 나중에 프랑스 발전기를 이화원에 설치하고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오색등을 설치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떼먹었다.”
2011년 박근혜 후보 당선 때 중국 사람들이 강조한 ‘서태후 이후 104년 만에 처음으로 동아시아의 여성 지도자가 된다’는 말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서태후의 저주’였던 셈이다. 박근혜의 실패 때문에 또다시 앞으로 100년 넘게 동아시아에서는 여성 권력자가 탄생하는 일은 없게 될까.
2017.02.16 中 네티즌 예상 2017 최대의 ‘블랙 스완’은 美의 北 김정은 제거 작전
‘블랙 스완(Black Swan)’은 ‘검은 백조’로 번역하면 안 될 듯하다. ‘검은’과 ‘백’이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검은 고니’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원래 ‘블랙 스완’이라는 말은 학문적으로는 ‘현재 있는 개념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기’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존 레이섬이라는 영국 생물학자가 1790년 호주에서 실제로 검은 고니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블랙 스완’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출신의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팔레브(Nassim Nichlas Paleb)는 ‘검은 고니 이론(black swan theory)’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칠면조는 자신을 기르는 주인에 대해 자신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판단을 내린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으며, 오늘도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주인은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것 이외의 판단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12월 어느 수요일 칠면조 앞에 나타난 주인은 먹이를 주지 않고, 칠면조의 목을 비틀어 끌고 간다. 칠면조의 입장에서는 결코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경제학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날 수 있으며 미국의 프라임모기지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실제로 발생한 금융위기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 스완’은 중국어로는 ‘헤이티엔어(黑天鵝)’라고 한다. ‘고니’ ‘백조’라는 뜻의 ‘바이티엔어(白天鵝)’에서 ‘희다’는 뜻의 ‘바이’를 빼내고 그 자리에 ‘검다’는 뜻의 ‘헤이’를 집어넣은 말이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최근호에서 2017년을 ‘블랙 스완’이 잇달아 출현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2016년에는 영국의 EU 탈퇴를 말하는 브렉시트(Brexit),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사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일으킨 ‘친신간정(親信干政·친구가 정치에 간여한 사건)’이라는 세 가지 사건이 2016년에 일어난 검은 고니급 사건들이라고 진단했다.
신랑(新浪), 소후(搜狐) 등 검색 엔진들은 2017년에는 더 많은 검은 고니들이 중국 하늘에 날아다니겠지만, 우선 예상으로는 3월 15일로 예정된 네덜란드 총선, 4~5월의 프랑스 대선, 그리고 10월의 독일 대선 등에서 놀라운 결과가 빚어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탄핵 결과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킬 물의 등이 또 다른 검은 고니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에 최대의 헤이티엔어(검은 고니)가 될 것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트럼프 행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 제거 특수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최근 국내 인터넷 매체들은 미 공군 특수전 사령부(USAF Special Operation Command)가 2월 3일에 웹페이지에 올렸다는 사진을 인용해가면서 “3월 김정은 제거를 위해 미 공군 특수전사령부가 미국 시각 2월 3일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Osprey) 2개 대대를 동원하여 저공침투를 위한 편대훈련을 실시했다”고 전했다. 작전에 참가한 제8, 20 특수작전비행대대는 전 세계를 작전지역으로 삼는 부대로, 이번 훈련은 뉴멕시코주의 캐논 공군기지에서 이륙하여 약 1700㎞ 떨어진 플로리다주 헐버트 공군기지로 이동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매체들은 오스프리는 최소속력 시속 509㎞로 일반 헬기에 비해 약 2배 빠르며, 헬기와 달리 활공도 가능하기에 최대항속거리는 약 359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번 훈련과 별도로 미 해병대는 국내 강원도 지역에서 우리 해병대와 1월 15일부터 2월 17일까지 5주간 혹한기 동계훈련에 돌입했다. 국방부는 한·미 해병대 혹한기 훈련에 참여한 병력 및 장비에 대해서 밝히지 않은 채 “장진호전투의 교훈을 잊지 않겠다”고만 밝혀 김정은을 제거하기 위한 훈련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했다고 인터넷 매체들은 전했다.
국내 인터넷 군사뉴스 미디어들이 전하는 이 충격적인 뉴스의 신뢰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에 따르면, 미 공군 특수전 사령부가 김정은을 참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한다는 사실은 지난해부터 이미 중국 인터넷 공간에 많이 돌아다닌 구문(舊聞)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1971년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의 세기적 비밀 회담 이래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방에게 의논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에 나선다는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로 간주돼왔다. 만약에 미국이 사전에 중국에 알리지 않고 공군 특수전 사령부를 동원해서 김정은 제거 작전을 감행한다면, 미 트럼프 행정부가 1971년 이래 5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미국과 중국 관계가 독립 변수이고 한국과 북한 관련 문제는 종속 변수라는 공식을 깨버리는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실제로 러시아 푸틴 정부와의 관계를 중국보다 중시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친(親)중과 반(反)러시아를 주조로 하는 세계 전략을 수정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중국 매체들은 트럼프가 취임도 하기 전에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통화를 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꼭 지켜야 하는가”라고 말하는가 하면, 트럼프가 키신저 박사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꼭 지켜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두 개의 중국이 아니라 세 개의 중국을 인정한들 어떠냐”라고 했다는 소식도 워싱턴발로 전했다.
그런 언저리를 보고 있으면, 트럼프 행정부가 실제로 북한의 김정은 제거에 나선다면 아무래도 그 사건이 중국에 최대의 검은 고니가 될 것이 뻔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진행된다면 중국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중·조 우호협력조약 제2조에 명시된 대로 ‘이 조약 체결 쌍방 중 일방이 제3국의 공격을 받으면 즉각 전면적으로 개입한다’는 조항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까. 어쨌든 한반도에서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중국에는 2017년 최대의 ‘블랙 스완’이 될 것이 분명하다. ◎
출처 | 주간조선 2444호 글 |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