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7/ 박승준의 차이나 워치2/ 2018.1.1. 2488호 맞고, 감금당하고, 해킹당하고, 중국 주재 외국 기자들의 수난 - 2539호 12.31 “국운 위기” 예언 난무 2019 중국 불안에 떨고 있다
■박승준의 차이나 워치2 - 주간조선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2018.01.01
2488호 맞고, 감금당하고, 해킹당하고, 중국 주재 외국 기자들의 수난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베이징 특파원이었던 티지아노 테르자니(Tiziano Terzani·1938~2004)는 1980년대 초 중국의 한 농촌을 취재하다 어느 날 밤 숙소로 들이닥친 공안원들에게 양쪽 어깨가 붙들리고 뒷덜미를 붙잡힌 채 파출소로 끌려갔다. 이유는 “왜 숫자를 묻고 다니느냐”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곡물 생산량 등 숫자는 당 간부나 고위 관리가 알고 있어야 할 사안이지 외국 기자가 묻고 다녀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테르자니는 1984년 공안국에 연행되어 골동품 밀반출 혐의를 ‘시인’한 뒤, 조사 결과 ‘반(反)혁명 음모죄’가 드러나 추방됐다. 외국인을 상대로 국가 기밀을 보호하고 대간첩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1983년 6월 국무원 직속기구로 창설된 중국 국가안전부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가혹한 비판자인 테르자니를 일찍부터 지목해왔다. 테르자니가 베이징을 떠난 다음날 최초의 외신기자클럽이 베이징에서 문을 열었다. 테르자니는 나중에 홍콩에 주재하면서 ‘천안문의 뒤편(Behind The Forbidden Door)’이라는 책을 썼다.
베이징에는 중국 주재 외국 특파원들이 결성한 FCCC(Foreign Correspondent Club of China)라는 단체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중국 민정부(民政府)에도, 외교부에도 등록하지 못한 사실상 불법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FCCC는 중국 공안당국과 각종 마찰을 겪었고 웹페이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운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베이징 주재 600여명의 외국 기자 가운데 200여명을 회원으로 확보한 상태에서 베이징과 지방 각지에서 취재 중 구타당하거나, 감금당한 사례, 그리고 이메일을 해킹당한 사례에 대한 고발을 받아 웹페이지에 게시하고 있다. FCCC는 각종 취재 방해 사례가 발생할 경우 fcccadmin@gmail.com으로 메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2010년 4월 10일 뉴욕타임스는 ‘나는 베이징에서 해킹을 당했다’는 제목으로 중국 공안당국이 중국 주재 외국 기자들에게 가하는 각종 취재 방해 사례들을 폭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4년 한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가 은퇴할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한 뒤 뉴욕타임스 베이징 지국의 중국인 직원 자오옌(趙岩)이 사기혐의로 체포되는 일을 겪었다고 폭로했다. 자오옌은 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베이징 주재 외국 기자들은 외국 특파원 사무실의 중국인 직원들이 매주 목요일 오후에 공안국의 회의에 참석해서, 자신을 고용한 외국 기자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외국 기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구금당한 경우는 마오쩌둥(毛澤東) 통치 시절이던 1967년 로이터통신 베이징 특파원을 지낸 안토니 그레이(Anthony Grey)였다. 그레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2년간 가택연금을 당했는데, 알고 보니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홍콩에서 중국 기자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데 대한 보복이었다. 그 중국 기자가 홍콩에서 풀려나고 얼마 안 가 그레이에 대한 가택연금은 해제됐다. 문화대혁명 끝무렵이던 1975년부터 베이징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작가 겸 저널리스트 오빌 셸(Orville Schell)은 베이징에서 중국인 가이드의 안내로 시내를 취재하다가 갑자기 가이드들이 사라져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다가 공안원들에게 발견돼 겨우 귀가하는 일도 있었다.
1989년 천안문사태 때 생생한 현장 보도를 해서 나중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는 베이징에서 아침 조깅을 나갈 때 자신을 따라다니는 자동차 행렬을 보고 놀라곤 했다. 크리스토프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민, 대학생들에게 실탄을 발사하기 시작한 1989년 6월 3일 밤 자전거를 타고 총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 천안문사태 현장을 취재한 공로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의 또 다른 특파원 존 번스(John Burns)는 군사시설에 들어가 취재를 한 직후 당시 통역을 맡았던 중국인 직원이 1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폭로했다.
FCCC는 2014년 9월 ‘중국 주재 외국 특파원들의 근무조건에 대한 보고서’라는 일종의 선언서를 채택했다. FCCC는 여기서 대체로 여섯 가지의 영역으로 나누어 외국 기자들이 중국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보고했다. 이 여섯 가지는 ‘취재 제한과 방해, 현지 채용인에 대한 박해, 뉴스 취재원과의 만남 차단, 정부에 대한 접근 거부, 중국 시장에 대한 직접 취재 거부, 징벌적인 취재 비자 제도’ 등이다. FCCC는 이 보고서에서 특히 TV카메라와 스틸카메라 기자에 대한 폭행과 장비 훼손, 필름과 데이터 삭제, 취재 방해 사실에 대한 부정(否定) 등이 심각하다고 적시했다.
FCCC와 서양 매체들에 대한 각종 취재 방해와 폭력에 대한 폭로가 아니더라도 필자가 1992~1997년과 2006~2009년 두 차례 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필자가 불편을 신고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조선일보 베이징 지국에 전기기술자들이 들이닥쳐 벽을 뜯고 뭔가 수리를 한 일도 있었다. 홍콩의 매체와 인터뷰를 한 후배 특파원 집에 밤중에 공안원들이 찾아와 가택 수색과 여권 조사를 한 일도 있었다. 그때 그 가족들이 느꼈던 공포는 말도 못 한다. 필자도 국내 신문 칼럼으로 중국 외교부장의 잘못을 꼬집었다가 외교부로 호출되어 가서 조사를 받은 경험도 있었다.
1990년대 초에는 국내의 한 방송사가 조선족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 고분을 취재했다가 구금을 당하고 조사를 당한 뒤 풀려나 귀국했으나, 가이드와 통역을 맡았던 30대 조선족 여인은 남자 사형수 여섯 명이 쓰는 감방에 6개월 동안 구금됐었다.
국경없는기자회 평가에 따르면 중국은 2014년 전 세계 180개국 가운데 언론자유 지수가 175위를 기록한 나라이고, 프리덤하우스의 언론 지수로는 ‘언론자유가 없는’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중국 공안들이 외국 기자들을 두들겨 패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중국 주재 외국 기자들 사이에 공인된 사실이다. 두들겨 패고도 중국 당국이 사과하는 일 또한 없다는 것을 중국 주재 외국 기자들은 잘 알고 있다.
2490 김정은 신년사 ‘시위(示威)’ ‘시호(示好)’에 숨은 배경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에는 ‘시위(示威)’와 ‘시호(示好)’가 동시에 나타나 있으며, 김정은이 시위와 시호를 동시에 보여준 사실을 잘 따져보면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다고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해외판 국제문제 칼럼 ‘협객도(俠客島)’가 날카롭게 분석했다. ‘시위’란 좌전(左傳)에서부터 나오는 용어. 좌전은 2500여년 전 중국 춘추시대 말년 노(魯)나라의 좌구명(左丘明)이 쓴 편년체의 역사서다. 기원전 722년에서 기원전 468년까지의 춘추시대 역사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 고전이다. 좌전의 ‘문공(文公) 7년’ 편에는 “반이불토 하이시위(叛而不討 何以示威·반감을 갖고 있어도 토벌하지 못할 처지일 때는 어떻게 시위를 해야 하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호(示好)’는 현대에 들어 쓰이기 시작한 중국어로 ‘여성이나 남성이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해 선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협객도는 1월 3일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미국에는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시위를 하고, 한국에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과적으로 잘 치르기를 바란다’면서 ‘조선의 대표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는 시호를 보냈다”고 분석했다. 협객도는 “김정은이 시위와 시호가 동시에 들어 있는 혼란한 메시지를 내보냈는데 이 점에서 김정은의 책략을 읽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협객도는 김정은의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 대해 4가지의 문제를 제기했다. 첫 번째 문제는 ‘김정은은 왜 이런 시점에 한국에 시호(示好)를 보냈을까, 이런 자세는 김정은이 집권 이후 보여준 일이 없는 자세인데…’라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김정은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선의(善意)일까’이고, 세 번째 문제는 ‘조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김정은의 신년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문은 ‘김정은은 왜 이번 신년사에서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을까’라는 것이다.
협객도는 김정은이 이 시점에 왜 한국에 시호를 보냈나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김정은의 본래 목적은 미국과 대화하는 것인데 최근 미국이 조선과 대화할 용의를 일절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궁즉통(窮則通)의 수단으로 미국 주변의 가장 약한 고리인 한국을 대상으로 시호의 전략을 구사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칼럼은 한국이 취약한 고리가 된 이유가 문재인 대통령이 놓인 현재의 처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많은 정치세력들로부터 ‘봉문필반(逢文必反·문과 만나면 반감을 표시한다)’의 대접을 받는 처지이고, 국제적으로는 한·중(韓中) 관계나 한·미(韓美) 관계에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문제에서 박근혜나 이명박 정권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협객도는 김정은이 한국에 보여준 것은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중국을 방문해서 중국의 한반도 문제 해결방식인 ‘쌍잠정(雙暫停·북한의 핵실험 중단과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안)’에 동의하는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활용해서 한·미 간의 긴밀한 군사협력 관계의 틈을 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김정은이 계산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협객도는 김정은이 보기에 한국은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국제사회 가운데서 가장 취약한 고리이며, 여러 차례 “아주 괜찮은 카드”라는 뜻을 밝혀왔다고 아울러 전했다.
협객도는 김정은이 보여준 것이 단순한 선의일까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진단했다. 김정은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국제적인 제재 아래서 조선의 경제가 받는 타격이 상당히 크고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형편인 데다가 아직 핵무기의 운반수단에서 여러 가지 기술적 어려움에 부딪혀 있기 때문에 일단 “내 책상 위에 핵단추가 있다”는 시위(示威) 수단을 사용하기로 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시위란 상대방을 공격해야 하나 자신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될 때에 사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협객도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북한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북한에 대한 완제품 석유 수출이 금지돼 있어 북한 내의 주유소 기름 가격이 잇달아 오르는 데다가 공급량도 제한적이어서 북한 차량들의 주유 차수가 상당히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평양의 사정을 전했다. 이와 함께 유엔 2395호 결의에 따라 올해 3월까지 해외 노무자들의 귀국이 완료되면 무려 10만여명의 노무자가 벌어오던 외화수입이 차단되는 데다가 이들 귀국 노무자 10만여명에게 줄 일자리도 없는 형편이라는 난관에 김정은이 부딪혀 있는 중이라고 협객도는 전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11월 판문점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병사의 몸에서 회충이 검출됐다는 사실은 북한에서 화학비료가 제대로 생산·공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분을 제대로 발효시키지도 못하고 사용해야 하는 조선 농업의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활용해서 한국으로부터 원조를 얻어낼 수도 있다는 판단을 김정은이 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협객도는 진단했다.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이번 신년사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을 일절 거론하지 않은 이유는 올해가 자신의 집권 만 5년이 되는 해로, 올해부터는 자신이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려는 국내 정치적 책략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협객도는 국내판과 해외판이 많이 다른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해외판에 실리는 무기명 칼럼이다. 칼럼은 이른바 중국식 논리로 김정은의 신년사에 나타난 미국에 대한 시위와 한국에 대한 시호의 배경을 찬찬히 따져보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외교 지휘 당국자들은 김정은의 신년사와 관련해 “국제사회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는 말로 물 샐 틈을 다 막았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우리 외교, 통일 정책 지휘부는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말아야 한다. 보기 싫어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도 검토해가며 김정은과의 협상을 진행해야 협객도의 말처럼 “한국이 가장 약한 고리”라는 평가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2491호 “공산당원이요, 혁명가임을 잊지 말라” 시진핑의 ‘1·5 강화’
중국 대륙 전역의 중국공산당 조직에서는 요즘 시진핑(習近平)의 ‘1·5강화(一五講話)’를 학습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다. 시진핑의 1·5강화란 지난 1월 5일 중국공산당 당원 재교육 기관인 중앙당교에서 시진핑 당 총서기가 한 연설을 가리킨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은 지난해 10월 제19차 당 대회에서 새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에 당선된 376명과 각 성과 행정기관의 지도간부들을 모아놓고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19차 당대회 정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는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비롯 리잔수(栗戰書), 왕양(汪洋), 왕후닝(王滬寧), 자오러지(趙樂際), 한정(韓正)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모두 나왔다.
“우리가 중국공산당인(中國共産黨人)임을 잊지 말라. 우리는 혁명가들이므로 혁명정신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어제의 성공이 앞으로의 영원한 성공을 대표하지 않는다. 과거의 휘황한 성공이 미래의 휘황한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는 문제의 출제자이고, 우리는 답안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며, 인민들은 우리가 쓴 답을 검열하는 사람들이다.”
시진핑은 ‘우리가 중국공산당인임을 잊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공산당인들이므로 공산주의의 이상과 신념을 확고하게 수립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며,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인류사회 발전의 객관적 규율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학설의 기본 결론이다. 공산당원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신념을 확고하게 하고, 공산주의 사업의 정확성과 필연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공산주의 이상을 확고하게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평생을 바쳐 분투해야 한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이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강조하는 연설로 개혁개방 시대에 접어든 이래 39년 만에 당 총서기가 “우리가 공산당인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이며, 공산주의 실현이 인류사회 발전의 객관적 규율”이라고 강조하고 나서자 9000만 중국공산당원과 인민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9년간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체제’에 젖어 있던 중국공산당원들은 그 다음날인 1월 6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실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일이관지(一以貫之) 견지하고 발전시켜 나가자”는 논평을 읽어 보아야 했다. 인민일보 논평은 “3개의 일이관지를 견지해야 한다. 첫째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일이관지하고, 둘째는 당 건설의 새롭고 위대한 공정을 일이관지해야 하며, 위험과 도전에 잘 대비하는 일에 일이관지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인민일보의 논평은 이어 “시진핑 총서기는 그동안 여러 차례 개혁개방의 역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중국공산당의 역사, 중화민족의 근대사, 중화문명 5000년사(史)를 배경으로 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고 했다. 인민일보 논평은 또 “사회주의 500년사를 되돌아보면 전 세계의 사회주의는 그동안 많은 곡절을 거쳐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며 “사회주의는 멸망하지 않았고, 멸망할 수도 없으며, 생기와 활력을 뿜어내고 있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21세기 과학사회주의의 기치를 들고, 전 세계 사회주의 진흥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당한 이래 제1세대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순수한 사회주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경제의 붕괴로 중국을 전 세계 최빈국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그런 마오쩌둥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마오쩌둥 사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사상해방’과 마오쩌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구호를 통해 “현실을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한다”는 새로운 당의 방향을 설정했다. 이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지도에 따라 개혁개방의 시대를 열었으며,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채택할 수 있다”는 방향 설정에 따라 빠른 경제성장을 동반한 개혁개방의 시대 39년을 보내왔다.
이런 개혁개방사를 가진 중국에 대해 지난해 10월 연임한 시진핑이 새해 들어 갑자기 “우리가 중국공산당원임을 잊지 말라,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결론”이라고 강조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시진핑은 중국에서 자연계 대학을 대표하는 칭화(淸華)대학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의 전공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상 정치 교육학’이다. 그런 전공의 연장선상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30년 넘게 중국공산당 당료로 성장해온 시진핑은 지난 2012년 첫 번째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데 이어, 지난해 10월 제19차 당 대회에서 두 번째 당 총서기로 선출됐다. 지금까지 개혁개방시대를 이끈 덩샤오핑의 국가발전 전략은 시장경제 시스템 도입을 통해 중국을 중산층이 충분히 갖추어진 중진국 수준을 뜻하는 샤오캉(小康)사회로 끌어올리자는 것이었다. 샤오캉사회 건설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물론 샤오캉사회의 건설 다음에는 사회주의를 강화한다는 부분이 붙어 있기는 했으나 형식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시진핑은 그 형식 논리에 지나지 않던 사회주의 강화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시간표를 당 대회 업무보고를 통해 제시했다. “2020년까지 전면적인 샤오캉사회를 건설한 다음 15년 후인 2035년까지 우리의 사회주의를 현대화하고, 다시 15년을 더 열심히 노력해서 2050년까지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한다.” 그런 배경에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우리가 공산당원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혁명가임을 잊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는 1·5연설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진핑이 1·5연설을 하는 중국공산당 당교에는 리커창 이하 6명의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국공산당의 핵심인 376명의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각 성과 행정부처의 최고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미 G2의 위치를 차지한 데 이어 인류 운명공동체 건설의 주역이 되겠다는 중국의 이념 변화는 앞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시그널을 전 세계에 던지고 있다.
2492 중국이 등 떠민 남북 UN 동시가입 과연 잘한 일인가
2018년 1월 한반도 남쪽에서는 2월 9일의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 공동입장과 한반도기 사용,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등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광경을 전하는 중국의 국영 중앙TV는 어떤 때는 ‘조·한(朝韓)’, 어떤 때는 ‘한·조(韓朝)’라고 불러가며 서울발 상보(詳報)를 신난다는 듯 매일같이 전하고 있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한 직후부터 남북한을 각각 ‘한궈(韓國)’와 ‘차오시엔(朝鮮)’이라고 자기네 세계지도에도 못 박아 놓았다. 이와 함께 ‘조·한 양국(朝韓兩國)’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대로 역사가 흐른다면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별개의 나라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될 것이다.
1991년 9월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를 성사시킨 중국의 외교부장은 첸치천(錢其琛·2017년 5월 9일 사망)이었다. 첸치천이 2003년 10월에 출판한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외교에 관한 10가지 비망록)’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중국이 한국과 무역대표부를 상대방 수도에 설립하고 나서 부딪힌 문제는 조선 남북 쌍방이 유엔에 가입하는 문제였다. 유엔은 국제사회 최대 조직이고, 유엔 가입은 주권국가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은 그때까지 남북 쌍방의 유엔 가입을 줄곧 반대해왔다. 조선반도 남북의 분단이 영구화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조선과 한국은 유엔에서 모두 옵서버 신분이었고, 한국은 줄곧 유엔 단독 가입을 도모해왔다. 당시 유엔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한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는 국가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펑(李鵬) 중국 총리가 1991년 5월 방북해 북한 총리와 북한의 유엔 가입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이 열렸다고 외교십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리펑 총리는 북한 총리에게 “올해 유엔 총회에서도 한국은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인데 중국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됐다. 일단 한국이 유엔에 단독 가입하면 조선이 나중에 유엔에 가입하려 해도 곤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리펑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첸치천은 평양 방문이 끝나기 직전 김일성으로부터 만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일성은 첸치천과 만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과 협의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음날 조선의 신문에는 한 편의 논평이 실렸는데 “조선도 이제 북·남 조선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리펑 중국 총리는 1991년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김영남 당시 북한 외교부장은 리펑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조선이 유엔에 단독 가입하려는 음모를 우리 조선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유엔에서 조선이 불리해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도 유엔 가입 신청을 하기로 했다. 우리는 북·남의 유엔 가입이 한꺼번에 처리되기를 바란다. 만약 미국이 북·남 조선의 유엔 가입을 분리해서 심의하자고 하면 중국이 반대를 해달라. 미국이 조선의 유엔 가입에 반대한다면 중국도 남조선의 유엔 가입에 반대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북한이 걱정하던 것은 한국의 유엔 가입 신청은 순조롭게 처리되고, 북한의 가입 신청은 저지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리펑 총리를 수행한 첸치천 외교부장은 북한 측에 유엔에서 남북한 동시가입안이 어떻게 처리될 전망인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당시 리펑 총리 일행은 묘향산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났다고 외교십기는 기록해놓았다. 김일성은 이런 말을 했다. “북·남 조선의 유엔 가입 문제는 어떻든 일괄 처리되어야 한다. 만약 분리해서 토론한다면 미국이 우리의 유엔 가입 신청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될 경우 우리 조선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다.”
첸치천은 김일성의 그런 걱정에 대해 “조선반도 북과 남이 유엔에 동시가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유엔 내에서 이미 공통인식이 이뤄져 있으므로 조선이 걱정하는 그런 상황은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1991년 9월 17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안이 통과되는 역사가 이뤄졌다고 외교십기는 기록하고 있다.
27년 전에 있었던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과 그 다음 해 있었던 한·중 수교를 되돌아볼 때 한·중 수교는 우리로서는 어떻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판단을 지금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1년 전에 있었던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는지는 지금에 와서 보면 다시 판단해 볼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통일을 하려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해체하고 하나의 주권국가로 가입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과연 쉬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이른바 대국들의 의견이 일치되어 남북한의 동시가입을 해체하고 하나의 주권국가로 유엔 회원국 자격을 정정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2011년 8월 8일에 초판이 나온 ‘노태우 회고록 하권-전환기의 대전략’에 보면 중국이 등을 떠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의 배경에는 당시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하되 북한이 반대하면 단독으로 가입한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구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90년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다음 해인 1991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외무장관과 외교안보수석에게 확고한 지침을 내렸다. 북한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단독으로라도 유엔에 가입하자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6년. 한·중 수교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갖고 있던 ‘유사시 단독 유엔 가입’이라는 방침을 확인한 중국이 슬쩍 김일성의 등을 떠밀어 성사시킨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과거 동서독도 유엔 동시가입은 추구하지 않았다. 또 지금의 중국·대만도 유엔 동시가입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493 역학자들이 보는 2018 중국의 國運
한(漢)나라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무술년의 무(戊)는 ‘육갑(六甲)과 오룡(五龍)이 서로 힘을 겨루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로 전쟁을 뜻한다. 술(戌)은 사라질 멸(滅)을 뜻하는 글자로, 양(陽)의 기운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형세를 가리킨다. 술은 또한 랑(狼)을 가리키는 글자로 늑대, 이리, 개를 지칭한다.
중국의 역학자들은 그래서 무술년이 전란(戰亂)의 해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기축(己丑)년 계유(癸酉)월 갑자(甲子)일 신미(辛未)시에 정부 수립을 선포한 중화인민공화국은 1958년 첫 번째 무술년을 맞았고 60년 만인 올해 두 번째 무술년을 맞았다. 중국에 1958년은 절대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이 갑자기 영국의 철강생산량을 3년 만에 따라잡겠다고 선포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전국 마을마다 토로(土爐·마을 용광로)를 설치하고 군중노선으로 강철생산량을 끌어올리겠다는 대약진(大躍進)운동이라는 무리수를 두어 대륙 전역을 재앙에 빠뜨리기 시작한 해였다.
나이가 채 열 살이 안 된 당시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약진운동으로 강철생산량을 끌어올리기는커녕 역청탄이 아닌 목탄으로 강철을 생산하려던 전국의 토로에 땔감을 대느라 삼림의 25%를 사라지게 만드는 재난에 빠졌다. 대약진운동에 실패한 마오쩌둥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해 보기 위해 1966년부터 10년 동안 전국의 중·고·대학생들을 동원한 홍위병운동을 벌였다. 류사오치(劉少奇), 린뱌오(林彪) 등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끌고 들어갔다.
1958년에 시작한 대약진운동과 이어진 10년간의 문화대혁명으로 전국에서 4000만명 이상의 인민들이 굶어죽거나 맞아죽는 천하대란에 빠졌다. 천하대란은 1976년 9월 마오가 병사(病死)함으로써 겨우 불이 꺼졌다. 마오의 내연의 처 장칭(江靑)이 이끄는 사인방(四人幇)으로부터 권력을 뺏은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부터 사회주의 체제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는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서 39년 만에 빠른 경제성장을 통한 국력 증강에 성공했다.
대약진운동이 시작된 1958년 이후 두 번째로 무술년을 맞는 중국 대륙의 역학자들은 대체로 2018년에 중국이 전란에 휩싸이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다. 역학자들의 인터넷 네트워크인 ‘주역점복망(周易占卜網)’은 전쟁을 뜻하는 무(戊)에 오랑캐 융(戎)들이 사는 곳을 뜻하는 술(戌) 자가 결합된 2018년에 중국 대륙의 변방에서 군사활동 또는 반(反)중국 세력들의 활동이 증가해서 중국의 경제발전 형세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주역점복망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특히 동북 방향의 한반도와 서남 방향의 인도, 중동 쪽을 꼽는다. 여기에서 중국인민들을 힘들게 만드는 전쟁활동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점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전쟁이든 지진이든 힘들어지는 것은 중국 인민들이므로 전 중국 인민들이 동북방이나 서남 방향에서 일어날 일에 잘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역학자들은 별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7월 28일로 예정된 개기일식에 주목하고 있다. 화성이 달과 태양에 상대적으로 근접하게 되어 중국 주변에 전란이나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하고도 있다. 태양과 달, 화성으로 이루어진 삼성(三星)이 우주 태양계의 양인궁(羊刃宮)과 비인궁(飛刃宮)에 들고 천왕성과 삼성이 나란히 형도(刑道)에 진입하면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전쟁 일촉즉발의 형세가 될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그러나 2018년에 맞을 전쟁위기는 추분을 기점으로 전기가 마련되고, 겨울이 되면서 1년 내 결핍되어 있던 물(水)의 기운이 되돌아와서 연말이면 위기가 해소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무술년인 2018년에는 전쟁의 위기가 다가올 예정이기 때문에 경제활동은 저조해지고 부동산시장은 널뛰기를 하게 될 것이고,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줄도산을 하게 될 조짐이 있다고 중국 역학자들은 예상한다. 일부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감옥에 들어갈 전망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민들의 부동산 열기는 식지 않아 부동산 가격은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무술년의 술(戌) 자는 화기(火氣)가 무덤에 들어가는 형세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이름에 불 화(火)나 날 일(日) 자가 들어간 사람들은 병이 나서 입원하는 화를 당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중국 역학자들은 점치고 있다. 연예오락계통이나 미디어, 과학기술 등에 종사하는 거물들이 세상을 떠날 운세이며,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이 주색(酒色)으로 인한 스캔들로 감옥에 가는 일도 많을 것이라고 점치기도 한다. 반면에 역학이나 종교, 철학, 교육 종사자들에게는 대운(大運)이 돌아오는 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특히 무술년에는 에너지 방면이나 반도체, 생물의료, 스포츠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투자 호기가 마련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문제는 많은 중국 역학자들이 중국 대륙 동북방의 변경, 다시 말해서 한반도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또 다른 대규모 지진이 발생할 것이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병이나 부상으로 안전을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그런 정도야 역학에 의존하지 않고 일반 시사상식만으로도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중국의 많은 역학자들이 인터넷에 그런 정보를 띄움으로써 우리가 입게 될 불리한 상황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봄 직도 하다.
중국 역학자들의 점복은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조성된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가 어느 순간 전쟁위기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스테레오타이프화된 진영논리나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굳은살 박인 사고로 안이하게 대처하는 일은 어쨌든 피하고,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 역학구조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심하게 챙기는 것이 우리 정부와 정치권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는 교훈을 얻어야 할 때다.
2496 외국 유력 언론 잇달아 쇼핑 그들은 ‘빅브라더’가 될 것인가
앞으로 전 세계 오프라인 신문 시장에 중국 미디어 그룹들이 쇼핑을 하러 나서는 날도 머지않았다. 문제는 중국 매체들이 여전히 마오쩌둥의 ‘창간쯔와 비간쯔에 관한 교시’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도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재 중국 미디어의 현실이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자신의 소설 ‘1Q84’의 제목에 대해 이런 취지의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벌어진 오옴진리교 사건이나 적군파(赤軍派) 사건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1984’와 비슷한 ‘1Q84’를 붙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따르면 책 제목에서 Q는 ‘Question(의문)’의 뜻이라고 했다. 마침 Q가 일본어 9(규)의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에 9의 자리에 Q를 갖다놓은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문학비평가들과 중국 지식인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빅브라더가 나오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1Q84’라고 붙인 것은 1949년 1월생인 자신과 같은 해 10월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는 풀이도 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앞날에 빅브라더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1Q84’의 Q는 ‘의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중국 근대 작가 루쉰(魯迅)의 ‘아Q정전(阿Q正傳)’에서 따온 것이라는 해석도 하고 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헛된 자존심만 앞세우는 무기력한 청 말 지식인의 표상인 아Q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삼촌이 모두 중국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 병사였다는 점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도 편다.
LA타임스 인수한 중국계 거물
지난 2월 8일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과 함께 3대 유력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LA타임스가 천쑹시웅(陳頌雄)이라는 중국계 미국 부자에게 넘어갔다는 뉴스가 미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미묘하게 만들어놓았다. 당초 LA타임스를 인수한 중국인은 ‘황신상(黃馨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두 이름의 영어 표기가 모두 ‘Patrick Soon-Shiong(패트릭 순시웅)’인 것으로 밝혀져 결국 한 인물인 것으로 확인됐다.
LA타임스는 1881년 미 서부 로스앤젤레스를 근거지로 창간된 유력지로, 창간 137년 만에 주인이 중국계 미국인으로 바뀌었다. 매매가격은 5억달러로, 2013년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할 때 들인 가격의 2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LA타임스의 새 주인 패트릭 순시웅은 이번에 직원들 연금 축적액 9000만달러를 끌어안고 LA타임스를 구매했으며, 미 서부의 또 다른 유력지 샌디에이고 유니언 트리뷴(San Diego Union Tribune)도 함께 사들였다고 한다.
순시웅은 2012년 미 포브스 평가로 73억달러의 재산을 보유, 400대 부호 가운데 47위를 기록한 인물이다. 그는 195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출생한 중국인으로, 부모는 광둥(廣東)성 타이산(台山) 사람이라고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전한다. 본인은 천쑹시웅이든 황신상이든 중국어 이름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고, 자신은 중국말을 할 줄도 모르며, 중국어 이름에 대해서는 “중국 매체들이 잘못 번역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의 상식은 “이 세상에 만다린(Mandarin·표준어)이든 칸토니즈(Cantonese·남부지방 광둥어)든 중국어를 못 하는 중국인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 세대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패트릭 순시웅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16세에 고교를 졸업하고 23세에 현지 의대를 졸업했다. 이후 부모가 LA로 이주했고 순시웅은 캐나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약 개발에 관심이 많은 순시웅은 이후 미국에서 제약회사를 설립했고, 미 FDA의 허가를 받은 유방암 치료약과 당뇨병 치료약, 다른 항암치료제 등을 개발해서 단기간에 자신의 제약회사 매출을 연 2억9000만달러로 올려놓았다. 2012년 9월에는 저명한 금융서비스 회사 ‘구겐하임’그룹의 일원이 됐고, 스포츠와 부동산 거래를 겸업하는 ‘AEG’라는 회사를 사들여 전 세계 120개 스포츠 오락관을 보유한 다국적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발언권 갈구해온 중국공산당
순시웅의 부모가 중국인이라고 해서 순시웅의 정신세계가 중국인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LA타임스를 사들인 순시웅의 뒤에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손길이 미쳤는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손길을 완전히 배제하기도 석연치 않다. LA타임스는 전통적 유력지이긴 하지만 직원 숫자가 1999년 1만3000명에서 지금은 400명 선으로 쪼그라들었다. 사양길을 걷는 오프라인 신문을 의약계의 중국계 거물이 사들인 진짜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에 대한 발언권을 애타게 갈구하는 중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의 입장이 순시웅의 LA타임스 인수에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의 중심인물인 마오쩌둥(毛澤東)은 “창간쯔(槍杆子·총)와 비간쯔(筆杆子)를 양손에 쥐고 있어야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고 교시를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현재도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을 대변할 미디어로 인민일보(人民日報)와 신화(新華)통신, 그리고 중앙TV(China Central TV) 등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들 매체의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한 실정이다.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G2국가로서 전 세계에 대한 발언권을 확대하는 데에는 무기력하다. 최근 중국은 CGN(China Global Network)이라는 위성TV 채널을 열어 미 CNN처럼 서양 남녀 앵커들을 등장시켜 전 세계 문제에 대한 보도와 해설을 24시간 영어로 진행한다. 하지만 이 역시 시청률이 미미해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중국 유일의 세계적 온라인 네트워크의 강자 마윈(馬云)은 2014년 미국 뉴욕 증시에 알리바바를 상장하면서 쓰라린 경험을 한 바 있다. 당시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알리바바의 뉴욕 증시 상장에 훙얼다이(紅二代·중국공산당 거물의 아들)가 개입했다”는 보도를 한 이후 주가가 50%나 떨어졌다. 알리바바는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알리바바의 배후를 파헤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들’이라는 장편 추적 보도를 한 이후에는 주가가 25%까지 빠진 일도 있었다. 마윈은 그때마다 이를 깨물며 “세계적 발언권을 사들여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알리바바 인수한 SCMP의 변신
실제 알리바바그룹은 3년 전인 2015년 12월 11일 홍콩의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중국어명 南華早報)의 소유권을 20억홍콩달러(약 2억500만달러)에 사들였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903년에 창간된 영자지. 영국 언론인들이 만든 신문답게 중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감시견(워치도그)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1989년 천안문사태 때 세계적인 대특종을 해 유명해졌다. 뉴욕타임스와 AP통신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들이 ‘대학생, 시민들이 지지하던 자오쯔양(趙紫陽) 전 당 총서기가 군부 강경파 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 중앙군사위 주석과 보수파 리펑(李鵬) 총리를 누르고 새롭고 민주화된 중국이 건설되는 쪽으로 움직여갈 것’이라는 보도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미스터 덩(鄧)이 자오(趙)를 배반자라고 비난했다”라는 1면 배너 컷 뉴스를 조간에 터뜨려 중국 내 흐름을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음을 알렸다.
SCMP는 1976년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도 “탕산 대지진 사망자가 20만명이 넘는다”는 획기적인 보도를 해서 피해 규모를 숨기던 중국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보도들은 세계 최고의 중국 전문 기자라는 평가를 받는 데이비드 첸이 이 신문의 차이나 데스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데이비드 첸은 대륙에서 넘어온 홍콩의 비판적 중국 지식인이었다.
그러던 SCMP의 중국 관련 비판 보도는 주인이 알리바바로 바뀐 후 근본이 달라졌다. 지난해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가 개막된 이후 전 세계의 미디어들은 시진핑(習近平)이 ‘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해 지난 30여년간 잘 지켜오던 ‘칠상팔하(七上八下·67세까지는 당과 정부의 요직에 오를 수 있지만 68세부터는 불가)’ 원칙을 깰 것이라는 추측 보도를 했다. 시진핑이 자신의 오른팔인 왕치산(王岐山)이 69세에 이르렀는데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유임시키고 자신의 연설문 비서 출신의 천민얼(陳敏尔·58) 충칭(重慶)시 당 서기를 중앙위원에서 곧바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해서 자신의 후계자로 포진시킬 것이라는 추측도 했다. 당시 전 세계 여론은 중국공산당 1중전회를 앞두고 시진핑이 칠상팔하뿐만 아니라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최고지도자가 권력을 물려주면서 그 권력자의 후임자를 미리 결정해주는 것)까지 무너뜨릴 것으로 내다봤다. 시진핑의 이미지가 나빠질 대로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알리바바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를 사들인 효과가 번쩍하고 나타났다.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인의 명단은 2017년 10월 25일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전회)가 열려야 알 수 있다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이 원칙이 SCMP에 의해 깨졌다. 이 신문은 지난해 10월 22일 “사흘 뒤의 1중전회에서 발표될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은 시진핑·리커창(李克强)·리잔수(栗戰書)·왕양(汪洋)·왕후닝(王滬寧)·자오러지(趙樂際)·한정(韓正)의 7인으로, 왕치산은 칠상팔하에 따라 은퇴할 것이며 중앙위원인 천민얼이 두 단계를 뛰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돼 시진핑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세계적인 특종 보도를 했다.
SCMP의 이 특종 보도에 긴가민가 하던 전 세계 유력 미디어들은 10월 25일 오전 10시 시진핑 총서기가 SCMP가 보도한 명단과 꼭 같은 정치국 상무위원단 7명의 선두에 서서 인민대회당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야 절실히 깨달았다. 홍콩의 유력 영자지 SCMP의 주인이 알리바바의 마윈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또한 마윈이 사들인 SCMP의 정보가 얼마나 깊숙이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시진핑에게 닿아 있는지도 절감했다. 앞으로 중국공산당 권력의 변화를 알려면 꼼짝없이 SCMP를 봐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마윈은 상술로서도 훌륭한 특종을 한 셈이었다.
마오쩌둥 시대(1949~1976) 중국 헌법은 중국 당과 정부의 매체 지원을 합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덩샤오핑 시대(1978~현재)가 열린 이후에 제정된 1982년 헌법에는 당과 정부의 매체 지원을 삭제하고 각 매체들이 자체적으로 이익을 창출해서 운영하도록 바꾸어놓았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신문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보도에 제한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없앨 것이며, 각 보도기관들은 정보 자원을 개발해서 현대화 건설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는 교시를 했다.
그때부터 베이징 청년보를 비롯한 중국 오프라인 신문들은 편집을 화려하게 해서 가판에 내놓는 비율을 늘렸다. 또 각 대도시별로 신문과 방송, 온라인 매체를 결합하는 그룹화를 진행했다. 현재 중국 각 대도시의 미디어 그룹들은 시장경제화된 중국 광고시장을 거의 독점해서 여유 있는 경영을 하고 있다. 여전히 가판을 내놓지 않고 답답한 문자 위주의 편집을 하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조차도 국제 문제를 주로 다루는 환구시보(環球時報)를 창간해서 광고 수입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현재 미국의 뉴욕타임스뿐만 아니라 영국의 더타임스, 파이낸셜타임스는 물론 한국의 전통적인 유력지들도 인터넷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몰려 있다. 그런 상황은 핀란드 같은 인터넷 강국에서는 더 빨리 진행되고 있다. 이 흐름에 전통적인 오프라인 신문들은 전 세계적으로 퇴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오프라인 신문들만 그룹화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아 권위와 수입을 누리고 있다.
앞으로 전 세계 오프라인 신문 시장에 중국 미디어 그룹들이 쇼핑을 하러 나서는 날도 머지않았다. 문제는 중국 매체들이 여전히 마오쩌둥의 ‘창간쯔와 비간쯔에 관한 교시’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도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재 중국 미디어의 현실이다. 만약 중국 미디어 그룹들이 전 세계의 유력 미디어를 장악하는 때가 온다면 중국공산당은 전 세계의 빅브라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비판받지 않고 권력을 마음 놓고 행사하는 빅브라더. 무라카미 하루키가 걱정하던 ‘1Q84’의 세상이 앞으로 전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2498 시진핑 황제 등극? 개헌만으론 안 된다
헌법이 아닌 당규약 38조 고쳐야
당규약 제38조는 “당의 각급 지도자와 간부들은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됐든, 영도기관이 임명했든, 직무가 종신이어서는 안 된다. 연령과 건강이 직무를 담당하기에 부적합할 경우 국가 규정에 따라 은퇴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종신으로 하려면 이 당규약 38조를 개정하거나 삭제해야 한다.
중국 헌법의 국가주석 2연임 초과 금지 조항 삭제 문제로 중국 안팎이 시끌벅적하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이 지난 2월 2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곧 열릴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을 앞두고 헌법 79조의 국가주석 임기 관련 조항을 수정하는 건의안을 마련했다”고 전하자 전 세계의 미디어들이 “시진핑의 장기집권 기도 의사가 드러났다” “시진핑은 과거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훨씬 넘어서는 ‘종신직 황제’의 자리에 등극할 것”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370여명으로 구성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실제 그런 개헌안을 마련 중이다. 지난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열어 개헌안을 확정한 다음 3월 5일 개막한 전국인민대표대회(의회격)의 표결에 부칠 계획이다. 개헌안의 핵심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임기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임기와 일치시키며, 연임은 2회를 초과할 수 없다”고 되어 있던 제79조에서 ‘연임은 2회를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한 마지막 부분을 삭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53년생으로 올해 65세인 시진핑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중요 직위 3개는 국가주석과 중국공산당 중앙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당정군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외적으로 중국 정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자리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이번에 철폐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시진핑은 지난해 10월 18일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진핑 신(新) 시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명칭으로 임기 중 자신의 이름이 중국공산당 규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때도 시진핑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위한 작업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개정하는 작업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나선 것이다.
“시진핑을 위한 개헌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3월 1일 시진핑의 장기집권 기도를 긍정하기 위한 의도인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정하기 위한 의도인지를 가늠하기 힘든 논평을 실었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인민해방군이 ‘3위1체’의 영도체제를 구축한 것은 장기적으로 이어져온 집권과 치국의 성공적인 경험이 축적돼 이루어진 것이다. 당장(黨章·당규약)과 헌법의 상관 규정을 보면, 1982년 제12차 당대회 때 통과시킨 ‘중국공산당 장정’과 그 이후 수정된 당장들은 당 중앙위원들의 임기에 대해 ‘한 번에 5년’이라고만 규정하고, 당 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임기에 대해 ‘연속 두 번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1982년에 새로 마련된 헌법 제93조는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임기에 대해 ‘인민대표대회의 임기와 일치시킨다’고만 규정했을 뿐 ‘연속 두 번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을 삽입하지 않았다. 이번에 헌법 제69조의 ‘국가주석 임기는 인민대표대회와 일치시키되, 연속 두 번을 초과할 수 없다’에서 뒷부분의 ‘연속 두 번을 초과할 수 없다’를 삭제키로 한 것은 당과 국가, 인민해방군 영도체제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3위1체’의 영도체제가 헌법에 확립하게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중국공산당 내부 사정에 밝은 신문임을 과시하고 있는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역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전날인 3월 4일 아침 국가주석 3연임 허용 개헌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최대의 부호 마윈(馬云)의 알리바바가 호주 언론재벌 머독으로부터 인수한 뒤 중국 내부 사정에 가장 밝은 신문임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제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새로 선출될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의 명단을 100% 적중시키는 보도를 했다. SCMP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구사해가며 국가주석 임기 3연임 허용이 시진핑을 위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번 개헌이 만약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라면 의례적일 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실권이 없는 국가주석직 3연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 시진핑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당중앙군사위 주석의 세 자리 가운데 시진핑의 권력에 가장 중요한 자리는 당 총서기 자리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묵시적 연령제한 규정(七上八下·67세까지만 취임 가능, 68세 이후는 불가)과 다음 당 총서기를 미리 지정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원칙은 1976년에 종결된 문화혁명 이후 권력 분산을 위해 마련된 합의로, 지난 15년 동안 장쩌민(江澤民)에서 후진타오(胡錦濤)로, 그리고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두 차례의 평화적인 권력 교체를 이룩했다. 만약 시진핑이 그 두 가지 원칙을 파괴한다면 정치적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러면서 SCMP는 지난해 10월의 19차 당대회에서 격대지정의 원칙에 따라 후진타오가 지명한 후춘화(胡春華)가 다음 후계자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격대지정의 원칙이 무너진 상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부패척결의 실무를 떠맡아온 왕치산(王岐山)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유임시키지 않음으로써 7상8하의 원칙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주미대사 출신의 외교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대변인을 맡은 장예쑤이(張業邃)는 3월 4일 오전 이번 전인대 취재를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CNN은 장 대변인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국가주석의 임기에 관한 이번 개헌이 중국이 지금까지 실행해온 10년마다 한 번씩 최고지도자를 교체하는 원칙을 버리고 시진핑 주석의 종신집권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없나?”
“중국공산당 당규약은 당 중앙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임기에 대해 3연임을 금지시키는 조항을 담고 있지 않다. 국가주석의 3연임 금지 규정을 헌법에서 삭제하는 것은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권위와 영도체제의 통일적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장예쑤이 대변인의 답변 역시 당 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 주석의 3연임 금지에 관한 규정이 당규약에 없어도 지금까지 3연임 이상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적시하는 내용이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당한 이후 지난해까지 별다른 예외 없이 1년에 한 차례씩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중전회)를 개최해왔다. 그러나 지난 가을 19차 전당대회를 개최한 중국공산당은 올해 1월 2중전회를 개최한 다음, 한 달 남짓 만에 또다시 3중전회를 열어 국가주석 임기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를 미리 노출한 것이 신화통신의 2월 25일 보도였다. 그런 보도가 나가고 중국 안팎이 시끄러워지자 중국공산당은 지난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중전회를 개최하면서 “개헌안을 확정적으로 마련했다”는 발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중국의 효율적인 발전을 위해 통치조직을 재정비하는 개헌안이 필요하다”는 대회 발표문만 내놓았다.
시진핑이 임기 제한이 없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은 국가주석 3연임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총서기 3연임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였던 1952년에 제정되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시대가 시작된 1982년에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그 전문(前文)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중국 정치를 리드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진짜 장기집권의 황제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 총서기 3연임이 가능해야 한다. 중국공산당 고위 지도자들은 누구나 제1세대 지도자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의 자리에 오른 뒤 중임을 하지 않고 국가주석직에서 내려온 이유를 알고 있다. 당시 마오는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책을 더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7상8하’에 묶인 시진핑의 운명
그만큼 중국 정치에서 국가주석이란 실권(實權)은 없고 대외적으로 중국 정부를 대표하는 명예직일 뿐이다. 1989년에 덩샤오핑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장쩌민(江澤民)이 1982년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겸임하기 전까지는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자리에 서로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정치권력의 몰락으로 동유럽과 소련의 정치체제가 변하며 공산당 독재에서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이 늘기 시작했다.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지도자들 가운데 당 총서기 직위를 가진 사람이 사라지는 흐름이 조성됐고 중국 국내 신문과 TV 뉴스에서도 당 총서기 관련 뉴스가 톱뉴스가 되는 경우가 줄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원로 지도자들은 그런 흐름을 반영해 당 총서기가 국가주석을 겸직하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시진핑이 당 총서기 3연임을 달성해 보려 한다면 헌법보다는 당규약 38조를 먼저 개정하거나 삭제해야 한다. 당규약 제38조는 “당의 각급 지도자와 간부들은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됐든, 영도기관이 임명했든, 직무가 종신이어서는 안 된다. 연령과 건강이 직무를 담당하기에 부적합할 경우 국가 규정에 따라 은퇴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당규약 38조를 개정하거나 삭제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것이 현실이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한 당사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데다가 주룽지(朱鏞基),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 등 장쩌민, 후진타오 지지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은 지난 40년 가까이 개혁개방의 흐름을 탔고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이제는 인터넷 기반의 IT사회로 바뀌면서 각종 SNS를 통한 비판적 여론 조성이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로 탈바꿈했다. 이런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실권이 없는 국가주석 3연임 제한 조항 삭제 작업부터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 시진핑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꼭 필요한 당 총서기 3연임 분위기 조성은 시진핑이 달성하기에는 너무 높은 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올해 65세인 시진핑은 다음 당대회가 개최되는 2022년에 69세가 된다. 시진핑이 지난해 당대회 때 극복하지 못한 7상8하의 규정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시진핑 역시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당 총서기직 중임 후 물러나는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2500 시진핑의 황제行과 후춘화의 부활
후춘화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주석을 지내 이른바 후진타오를 리더로 하는 ‘투안파이(團派)’의 대표자였다. 후춘화가 이번에 부총리로 발탁된 것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55세라는 젊은 나이를 감안하면 2022년의 제20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수장인 당 총서기로 선출될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시진핑은 과연 황제의 권좌에 앉은 것일까.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를 통해 장기집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일까. 이번 전인대에서 이뤄진 여러 가지 결정들의 배경을 짚어 보면 적지 않은 의문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폐막 이틀 전인 3월 19일에 발표된 4명의 부총리 인선 결과가 주목된다. 이를 보면 시진핑이 편안하게 황제의 권좌에 앉은 게 과연 맞느냐는 의문을 던져준다. 이날 발표된 4명의 부총리는 발표 순서대로 한정(韓正·64), 쑨춘란(孫春蘭·68), 후춘화(胡春華·55), 류허(劉鶴·66)였다. 이 가운데 한정은 이미 지난해 10월의 제19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 1명으로 발표된 상하이(上海) 세력의 대변자다. 쑨춘란은 지난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발탁해두었던 여성세력의 대표자이고, 류허 역시 지난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발탁해두었다가 이번에 부총리로 임명함으로써 총리 리커창(李克强)의 경제 지휘권을 무력화시킬 히든카드로 평가된 인물이다. 앞으로 류허는 당의 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을 맡아 경제 전반에 대해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인물이다.
문제는 전임 광둥(廣東)성 당위원회 서기에서 부총리로 임명된 후춘화다. 그는 지난해 당대회에서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의 한 명으로 발표되어 5년 뒤 2022년 가을의 제20차 당대회에서 당총서기로 선출될 것으로 점쳐지던 인물이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76) 당총서기가 시진핑에게 당정군의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당신의 후계자는 후춘화’라고 귀띔을 해두었다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후진타오가 격대지정(隔代指定)을 해두었던 미래의 황태자라 할 수 있다.
후춘화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주석을 지내 이른바 후진타오를 리더로 하는 ‘투안파이(團派)’의 대표자였다. 시진핑은 지난해 가을 당대회에서 격대지정의 대상이었던 후춘화를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중국 안팎을 놀라게 했다. 시진핑 스스로 장쩌민(江澤民·92)이 후진타오에게 격대지정을 귀띔함으로써 당정군의 최고지휘권을 물려받은 처지이면서도 후진타오와 맺은 격대지정의 정치적 약속은 지키지 않은 셈이다. 그런 후춘화가 이번에 부총리로 발탁된 것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55세라는 젊은 나이를 감안하면 2022년의 제20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수장인 당 총서기로 선출될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당대회를 앞두고 충칭(重慶)시 당서기 자리를 박탈당하고 반(反)부패 드라이브의 희생자가 된 쑨정차이(孫政才·55)의 자리에는 제일 가난한 성(省)으로 평가되는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로 있던 천민얼(陳敏尒·58)이 들어앉았다. 천민얼은 저장(浙江)성 당 기관지 절강일보 사장 출신으로, 시진핑이 저장성 당 서기 경력을 쌓고 있을 때 시진핑의 연설문을 담당하던 인물이다. 천민얼은 당대회 직전까지도 ‘시진핑의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중앙위원에서 두 단계를 뛰어올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후춘화가 이번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시진핑이 미래의 황태자로 점찍어 두었던 것으로 관측되던 천민얼은 당 총서기 경쟁에서 후춘화에게 밀린 것으로 평가된다.
후춘화는 지난해 당대회 이후 시진핑의 해외방문을 수행해왔다. 그래서 5년후의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할지 모른다고 평가된 딩쉐샹(丁薛祥·56) 정치국원 겸 당 서기처 서기, 중앙판공청 주임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선점한 것으로 판단된다. 후춘화·천민얼·딩쉐샹 세 인물은 연령으로 따져 2022년의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2027년의 21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될 나이대에 속한다. 세 명 모두 잠재적 당권자로 간주될 수 있다.
세 명 중 후춘화가 가장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는 관측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 후춘화가 지방 성들 가운데 경제력이 가장 막강한 광둥성 당 서기 자리를 내놓고, 이른바 부빈(扶貧·빈민문제 해결) 담당 부총리에 임명된 것이 과연 천민얼과 딩쉐샹을 제치고 당 총서기 후계자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진핑이 후춘화를 다음 당 총서기 경쟁 후보군에서 빼내지 않은 것이 혹시 장쩌민·후진타오를 위시한 전임자 그룹의 압력 때문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많다.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된 왕치산(王岐山·69) 문제도 간단치 않다. 왕치산은 지난해 가을 당 총서기로 재선출된 뒤 이번 전인대에서 국가주석으로 재선임된 시진핑과 함께 국가 부주석으로 선임됐다. 그는 현재 당직이 없기는 하지만 지난 3월 11일 통과된 개헌안에 따라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3연임도 가능한 법적 조건을 획득했다. 이로써 중국 안팎의 관찰자들은 그를 사실상 8번째(실제 정치국 상무위원은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시진핑 다음의 두 번째 실권자 지위를 확보한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많은 차이나워처들의 그런 진단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국무원의 역대 국가 부주석은 리셴녠(李先念) 국가주석(1983~1988) 당시의 소수민족 출신 우란푸(烏蘭夫) 이후 양상쿤(楊尙昆) 주석(1988~1993) 당시의 왕전(王震), 장쩌민(江澤民) 주석(1993~1998) 당시의 룽이런(榮毅仁), 후진타오 주석(2003~2008) 당시의 쩡칭훙(曾慶紅) 등으로 이어져왔다. 이들 국가부주석들은 각각 실권이 없는 국가주석 아래서 소수민족 안정, 군부 안정, 해외투자 지휘, 주석 감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자인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1954년에서 1959년까지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등의 부주석들과 함께 국가주석직을 수행했으나 “다른 바쁜 일이 많다”면서 국가주석직을 내려놓는 바람에 부주석들도 이렇다 할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왕치산을 정치 전면에 부각시켜 미국과의 외교를 총지휘하게 하고, 경제 전반을 감독하게 하기 위해 부주석으로 선출했다는 논리에는 결함이 많아 보인다. 차라리 시진핑이 함께 반부패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공을 인정해서 그를 버리지 않았다는 해석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왕치산을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남겨 두기를 바랐지만 이는 당의 연경화(年輕化)를 촉구한 덩샤오핑의 ‘칠상팔하(七上八下)’ 원칙에 막혀 실패로 귀결됐다. 이후에도 왕치산은 중국공산당 내에 이렇다 할 지위가 없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앞으로 대미(對美)외교와 경제를 부드럽게 장악할 수 있는지 잘 지켜봐야 할 것이다.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3연임 초과 금지 조항 삭제와 함께 신설된 국가감찰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된 양샤오두(楊曉渡·65)에게도 문제가 있다. 당원과 정부 조직원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반부패 운동을 주관할 핵심 기구의 책임자는 적어도 왕치산급의 거물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비교적 연로한 나이의 정치국원으로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를 맡고 있던 양샤오두를 감찰위원회의 주임으로 임명함으로써 중국 안팎의 관찰자들에게 많은 화제를 뿌렸다. 시진핑의 고민은 분명해 보인다. 양샤오두를 자신의 재임 이후에도 반부패 운동을 강화하는 데 더없는 적임자라고 생각했으나 만약 당 밖의 국가감찰위원회가 강력한 반부패운동을 지휘할 경우 정치국원이자 당내의 기율검사위원회 주임인 자오러지(趙樂濟)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민 끝에 당의 부서기급을 국가감찰위원회 주임 자리에 앉혀 당의 행정부에 대한 지휘감독 체제를 보다 분명하게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이번 인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시진핑의 당초 구상과는 달라진 것이다. 국가감찰위원회의 힘과 당 기율검사위원회의 힘이 충돌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조정이 불가피해지자 국가감찰위원회 서기에 당 기율검사위원회 부주임을 앉히는 다소 본말이 전도된 인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시진핑으로서는 이번 전인대 기간 ‘시진핑 신시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그리고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도노선 뒤쪽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명기하는 커다란 소득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이 개헌을 통해 삭제된 것이 과연 시진핑에게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줬는지는 의문이다. 국가주석이 별다른 실권이 없는 의전적인 지위라는 점에서 황제 등극은 논리상 허점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해두지 않을 수 없다. 시진핑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기집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려면 무엇보다도 당규약 38조의 당직 종신임기 금지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보더라도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왕치산을 국가부주석에 앉혔다고는 하나 그것이 칠상팔하 원칙을 무너뜨렸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지난 당대회에서 후춘화를 정치국원에 주저앉힘으로써 격대지정의 원칙을 무너뜨렸다는 해석이 나왔지만 이번에 후춘화를 부총리에 선임한 것을 보면 격대지정의 원칙 파괴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 원로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이 군사력을 키워가는 과정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한 영국의 책임 때문에 전쟁이 빚어졌다고 지적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Mearsheimer) 교수는 지난 3월 20일 한국고등교육재단 강연에서 시진핑의 장기집권 기도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으로, 앞으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억제(contain)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그렇게 될 경우 중국은 많은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는 지적도 했다. 시진핑과 푸틴이 장기집권이라는 형태로 미국적 가치인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할 경우 미국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시진핑이 황제의 권좌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도 평탄하지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2501 8년 만에… 2010년 아버지 손잡고 후계자 신고차 방중했던 김정은 다시 중국 가기까지
김정은은 스물여섯 살이던 2010년 8월 26일 아버지 김정일을 따라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으로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열린 환영 연회에서 김정일은 김정은을 데리고 나와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에게 인사를 시켰다. 당시 김정일은 3남 김정은을 인사시키면서 “우리들의 후대가 조·중(朝中) 우의라는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게 합시다”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중국 측에 통보한 것이었다. 실제 한 달 뒤인 9월 27일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명령을 하달해서 김정은을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발령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보름 뒤인 12월 30일 김정은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됐고, 이듬해 2012년 4월 11일 조선노동당 제4차 대표회의는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상은 중국 측이 파악하고 있는 김정은의 김정일 후계 승계 과정이다.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자를 중국 최고위층에 인사시킨 것과 비슷한 장면을 중국 측이 연출한 적도 있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가 벌어져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던 덩샤오핑(鄧小平)의 권좌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이해 6월 말에 열린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자오쯔양(趙紫陽) 출당으로 공석이 된 당 총서기 자리에 상하이(上海)시 당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을 발탁했다. 그해 11월 김일성이 열차편으로 베이징역에 도착하자 85세의 덩샤오핑은 플랫폼까지 나가서 김일성을 기다렸다. 당시 덩샤오핑은 63세였던 장쩌민의 손을 잡고 열차에 올라가 김일성에게 인사시켰다. 그때 덩샤오핑은 2010년 8월 김정일이 후진타오에게 김정은을 인사시키면서 한 것처럼 ‘조·중 우의’ 운운하는 말을 김일성에게 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2013년 2월 12일 세 번째 핵실험을 했다. 당시 시점은 시진핑(習近平)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2012년 11월 8일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로 처음 선출된 뒤 2013년 3월 5일 개막되는 제12차 전국 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다시 말해 시진핑으로서는 ‘권력 교체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김정은이 중국에 제대로 통보도 하지 않고 핵실험을 하자 시진핑 당 총서기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 뒤로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의 당대당 관계는 낮은 차원에서 유지됐다. 시진핑은 5년간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지도 않았고, 평양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지난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3박4일간 이뤄진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은 의미심장하다. 김정은 본인으로서는 2011년 김정일 사망 이후 7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고 시진핑으로서는 2012년 11월 당 총서기 자리에 앉은 뒤 거의 6년 만에 처음으로 만남을 이룬 것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당 중앙총서기 겸 국가주석 시진핑의 초청으로” 김정은의 방문이 이뤄졌다고 전했고,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3월 26일 만찬 연설에서 “우리의 전격적인 방문 제의를 쾌히 승낙해준 지성과 극진한 배려에 깊이 감동했으며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그런 속사정까지 알려줄지는 모르지만 주미대사와 외교부장을 지낸 양제츠(楊潔篪) 정치국원이 3월 29일 서울을 방문했다. 중국은 양제츠의 서울 방문 발표를 김정은 방중 사실 공개와 거의 동시에 했다. 시진핑의 표현대로 김정은과 시진핑은 이번에 회담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마치 친척처럼 왕래하던” 이전 관계로 회복하자는 말을 하는 데 쓴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앞으로 시진핑 동지를 자주 보게 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시진핑은 이번 김정은의 방문이 “시기도 특수하고, 의의도 중대한 방문”이라고 했다. 시진핑은 또 “이번 김정은 동지의 방문은 중국과 조선이 양국 관계와 양당 관계를 중시한다는 것을 체현했다”고도 표현했다. 이에 대해 김정은은 “조선반도 정세가 급속히 진전하는 가운데 적지 않은 중요 변화가 발생해서 정의상으로나 도의상으로 내가 시진핑 동지에게 당면한 정황을 통보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진핑과 김정은의 이런 언급들에서 김정은과 시진핑이 이번 만남을 통해 5월에 성사될 김정은·트럼프 회담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적 방안을 모색했을 것이란 추론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회담 말미에 시진핑은 앞으로의 북·중 관계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요약했다. 첫째는 중·조 우호협력 관계의 회복이고, 둘째는 두 나라 간 전략적 소통을 하는 것이 ‘법보(法寶)’이므로 중대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의견교환을 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양국 협력의 방향은 평화발전이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은 결론적으로 김정은의 ‘평창 드라이브’로 형성됐던 북한 핵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우리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또 북한 핵문제 해결과 함께 뒤따를 것으로 기대되던 한반도 평화와 남북 관계, 미·북 관계의 새봄도 이전보다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은 시진핑에게 “북남 관계를 평화협력으로 전환시키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며, 조·미 수뇌회담을 통한 조·미 관계 완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어서 “만일 남조선과 미국이 나의 노력에 선의로 답해 평화 안정 분위기를 조성하고, 평화실현을 위해 단계적 동시 조치를 취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가 추구하던 목표”라는 말도 했다.
여기서 ‘단계적 동시 조치’와 ‘조선반도 비핵화’는 북한과 중국이 오랜 세월 전가의 보도처럼 써오던 헌 칼이다. 김정은의 이런 언급들은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고민에 빠뜨릴 전망이다. 후진타오, 장쩌민 등 중국 지도자들이 김정일과 회담만 하면 합의 제1조로 내세우던 것도 ‘한반도 비핵화’였다. 이들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와 미국이 추구하던 북한 핵의 제거와는 거리가 멀다. 즉 미군의 핵무기 보유도 금지시키면서 ‘한반도 남북이 동시에 추진하는 비핵화’라는 낡은 카드이다.
왜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5월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핵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진전을 보기 전에 중국으로 달려갔을까. 미국·한국을 2 대 1로 상대하기에는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결국 김정은의 이번 방중으로 ‘남·북·미’ 회담 구도가 ‘남·북·미·중’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평창 드라이브’로 기대감이 일었던 북한 핵문제 해결 전망도 물 건너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일고 있다.
2018.04.17 주간조선
2503 호 연길서 목격한 중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들
지난 4월 1일 연길(延吉)공항에 내린 한국인들은 요란한 중국 공군 전투기와 전폭기 훈련 굉음에 놀라야 했다. 2~4대로 편대를 이룬 중국 공군 최신예기들은 해가 질 무렵까지 훈련을 계속했다. 훈련에는 삼각날개와 이중 삼각날개를 장착한 4~5종의 전투기와 전폭기들이 참가한 것으로 목격됐다. 말로만 듣던 ‘젠(殲)-10’과 ‘젠-20’ 계열의 최신예기들 같았다. 전투기와 전폭기들은 연길공항 공군용 활주로에서 이륙해 여러 가지로 고도를 바꿔가며 편대비행을 하는 모습을 과시했는데 전투기들은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굉음을, 전폭기들은 낮으면서도 묵직한 굉음을 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 북동쪽 끝에 위치한 연길공항에서 중국 공군 최신예기들이 해가 질 무렵까지 많은 수의 소티(sorty·출격 횟수를 세는 단위)를 소화해가며 작전훈련을 하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기록은 이전에는 없었다. 이날은 때마침 한반도 남쪽 상공 일원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합동 야외 기동 군사훈련인 독수리훈련(Foal Eagle)이 시작된 날이었다. 올해의 독수리훈련에는 E3 조기경보통제기와 B100 지휘통제기, 특수부대 수송용 MC130J 등 미 공군의 특수전기들이 대거 참여했다. 오는 4월 27일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과 5월 말~6월 초로 예정된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앞두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특수전기가 대거 날아왔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한반도 제공권 맞대응 의지
이날 연길공항에서 이뤄진 중국 공군 최신예기들의 작전훈련은 지난 3월 25~28일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북·중 정상회담 직후에 목격된 광경이어서 서울~연길 직항 여객기를 타고 공항에 내린 한국인들의 가슴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6·25전쟁에 참전한 원인을 놓고 “미 공군기들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 영토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전쟁의 불길이 중국 영토로 넘어와…”라는 구실을 대던 중국군이 미 공군력에 제압당해 쩔쩔매던 1950년대의 모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다”는 뜻을 가진 ‘항미원조(抗美援朝)’ 구호를 외치며 1950년 10월 25일 압록강 하류 단둥(丹東) 일원에서 얼어붙은 강을 줄지어 건너던 중국군의 모습은 지나간 낡은 것이 될 것이며, 일단 유사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연길공항을 비롯한 북·중 접경지대에 전진 배치된 중국 공군 최신예기들이 한반도 상공 제공권을 놓고 맞대응 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과시하는 듯했다.
지난 3월 28일 이루어진 북·중 정상회담은 2월 9일부터 2주간 개최된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남북한과 미국 3자가 펼치던 비핵화 회담 드라이브에 중국이 끼어든 ‘한 수’로 평가된다. 중국은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3자 구도를 남북한과 미·중 간의 4자 구도로 만들어놓았다. 지난 6년간의 소원했던 흐름을 깨고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불러 ‘트럼프급’의 대접을 한 시진핑의 계산은 무엇이었을까. 한반도 비핵화 문제 해결에 중국이 소외되는 이른바 ‘차이나 패싱’이 현실화될까봐 전전긍긍하던 차에 “베이징을 방문하겠다”는 김정은의 연락을 구조의 신호로 받아들였을까.
북한 측이 공개한 김정은 중국 방문 동영상을 보면 시진핑은 이번 김정은 방문 기간 동안 과거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보여줬던 ‘칙사 대접’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도시 단둥역 일대를 차단막으로 가리고, 김정은 특별열차가 달리는 단둥~베이징 구간에 거의 전봇대 2개마다 한 명씩 인민해방군 병사를 배치한 특별경호를 제공했다. 회담 직후에는 김정은보다 키가 더 큰 도자기병을 비롯한 선물을 한 방 가득 준비해서 선사했다.
3월 28일의 북·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김정은의 이번 방문이 “특수한 시기”에 이뤄졌다고 말했고, 김정은은 “조선반도의 급속한 정세 변화를 중국 측에 통보해주는 것이 ‘정의상으로나 도의상’ 마땅하다”고 표현했다. 회담 말미에 시진핑은 “앞으로의 북·중 관계가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요약했다. 첫째는 중·조 우호협력 관계의 회복이었고, 둘째는 두 나라 간 전략적 소통을 하는 것이 ‘법보(法寶)’이므로 중대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의견교환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양국 협력의 방향은 평화발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서로 “친척처럼 왕래하자”고도 했다.
평양의 중국군 무덤 68년 만에 수리
김정은·시진핑 회담 열흘 뒤인 지난 4월 6일 평양 주재 중국대사 리진쥔(李進軍)은 평양 근교에 있는 이른바 ‘인민지원군 열사 능원’에 나와 68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수리공사’를 시작하는 의식을 가졌다. 북한 측에서는 정무원 도시경영 담당 부상(副相) 최성철과 인민무력성, 외무성, 국가설계지도국, 평양시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나왔다. 이 공동묘지에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국군 1300여명이 묻혀 있다. 리진쥔 중국대사는 “중국과 조선 양국 최고 영도인들이 최근 중요한 합의를 이루고 지시를 내려 두 나라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나가기 위한 실제행동을 하라고 했다”며 “이 인민지원군 열사 능원을 수리하는 공사는 중국과 조선 간의 전통적인 우의를 새롭게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북한 측 최성철 부상은 “조선 인민들은 중국 인민지원군 전사들이 조선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고, 자신의 가슴을 열어 적의 총탄을 받아내며, 함께 손을 잡고 적의 탱크에 수류탄을 던져 조선의 대지에 승리의 함성을 외칠 수 있게 해준 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러면서 “이번 수리공사로 중국 인민지원군 병사들은 ‘신가(新家·새집)에서 잠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또 쑹타오(宋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이끄는 예술단을 4월 11일 평양으로 보내 김정은·시진핑 회담 이후 개선된 북한과의 관계에 새로 칠을 하는 행동에 나섰다. 쑹타오 부장은 불과 5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시진핑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지만 김정은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쑹타오는 지난 3월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 때 중·북 접경도시 단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김정은의 열차에 올라타 인사를 하고 베이징까지 모셔오는 칙사 역할을 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4월 11일 쑹타오가 인솔하는 중국 예술단이 평양을 방문해서 제31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한다고 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동지의 역사적인 첫 중국 방문 시 조·중(북·중) 두 당, 두 나라 최고 영도자들께서 문화교류를 강화해나갈 데 대하여 합의한 이후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중국의 관록 있는 큰 규모의 예술단”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북한과 중국은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으로 6년 만에 개선된 양국관계의 발전을 위해 시진핑의 평양 방문이라는 문제만 남겨놓은 양상이다. 시진핑은 10년 전인 2008년 6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을 만난 일이 있다. 당시 시진핑의 평양 방문은 북한 정부 수립 6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와 함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이 6자회담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당시 김정일은 백화원 초대소에서 시진핑과 만나 양국 간의 전통적인 우의를 강조하는 말들을 했다.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의 타이틀로 2009년 12월에는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놀랍게도 시진핑 부주석을 만나주지 않아 많은 뒷말을 남겼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시 시진핑 부주석을 만나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우리 외교부의 설명은 “청와대에 시진핑 부주석을 만나줄 것을 권했으나, 대통령으로부터 ‘특정국가 부주석까지 만나줄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절의 의사가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후 2015년 중국 측이 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까지 23년간은 말 그대로 “더 좋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2015년 이후 최근까지는 한·중 관계가 낮은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반면 중국과 북한 관계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 2010년까지 8년간은 어떤 유형의 고위급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는 썰렁한 관계를 유지해오다 2010년 5월 3일 김정일이 베이징을 전격 방문함으로써 관계 회복이 잠시 이루어졌다가 2012년 김정은의 핵실험으로 다시 악화됐다. 이번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은 이후 6년간의 북·중 냉기류를 다시 온난기류로 바꾸어놓는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청와대와 우리 외교당국은 남북한과 중국 관계를 단기적인 안목으로 대처하지 말고 보다 장기적이고 넓은 안목으로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505호 김정은이 제2의 덩샤오핑이 되려면
“조선이 개혁개방을 선포했다.”
북한 조선노동당은 지난 4월 21일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결정서는 “우리 공화국이 세계적인 정치사상 강국, 군사 강국의 지위에 확고히 올라선 현 단계에서 전당 전국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것, 이것이 우리 당의 전략적 노선”이라고 밝혔다. 조선노동당의 이 결정 발표 이틀 전부터 중국의 SNS 웨이신(微信)에서는 “조선이 개혁개방을 선포한다”는 뉴스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이 개혁개방을 하면 투자를 해야 하는 곳은?”이라는 물음에 대한 수많은 Q&A가 뒤따랐다.
중국 SNS에서 북한이 실제 개혁개방을 할 경우 투자할 대상은 대체로 이렇게 순위가 정리됐다. 첫째 북한의 부동산 중에서도 평양 최고층인 류경호텔의 리모델링과 같은 관광업 관련 투자, 둘째 인구 2500만의 ‘소국(小國)’이 싼 노동력을 활용해서 ‘세계의 또 다른 공장’이 될 상황에 대비한 제조업에 대한 투자, 셋째 현재 휴대전화 사용인구가 300만명에 불과한 통신과 인터넷 관련 사업에 대한 투자.
물론 중국 내에서는 이런 장밋빛 전망과 함께 부정적인 견해도 나왔다. “조선이 개혁개방을 한다고?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해외판 칼럼 ‘협객도(俠客島)’는 조선노동당 7기 3차 전원회의가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한다”는 결의를 발표하자 다소 부정적인 전망을 소개했다. 협객도는 “현재 조선의 개혁은 물이 절반쯤 채워진 병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 이유로는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에 필수적인 평화 확보, 다시 말해 핵무기 포기가 선포되지 않고, 핵실험 중단과 핵실험장 폐기만 발표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선포한 것은 40년 전인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를 통해서였다.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당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해 “평화의 요소가 전쟁의 요소보다 커져서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게 됐으며, 장기적인 평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평화와 발전이 이 시대의 양대(兩大) 주제”라고 제시했다. 마오쩌둥이 19세기 최대 강국 영국과 20세기 최대 강국 미국과의 한판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며 제시한 ‘초영간미(超英赶美)’라는 국가전략을 ‘화평발전(Peaceful Development)’이라는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의 국가전략이 “한판 전쟁에 대비하는 것”에서 “평화 속에서 경제건설에 전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증거로 미국 방문을 택했다. 마오쩌둥이 평생 적으로 간주했던 미국과 1979년 1월 수교를 단행한 데 이어 그해 9월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다. 덩샤오핑은 미국 방문에서 당시 카터 미 대통령과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보여줬다. 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미국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중국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덩샤오핑은 1985년에는 350만명 정도이던 인민해방군 병력을 250만명으로 줄이는 실천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덩샤오핑의 그런 평화공세의 목적은 중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직접투자(FDI)를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그런 대외적인 조치에 앞서 국내 정치적으로도 경제건설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해나갔다. 인민 모두가 잘사는 ‘다퉁(大同)사회’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에서 중산층이 적절히 확보된 ‘샤오캉(小康)사회’로 당과 정부의 정책 최고목표를 바꿨다. 이를 위해 11기3중전회에서 ‘사상해방(思想解放)’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당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다. 마오쩌둥이 죽기 직전에 후계자로 선택한 화궈펑(華國鋒)이 말한 이른바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을 뒤엎은 것이다. ‘양개범시론’은 마오쩌둥이 죽기 전에 한 지시와 내린 결론은 무엇이든 옳다는 유훈통치 방침이다. 덩샤오핑은 이미 죽은 사람이 내린 지시와 결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상을 해방해야 하며, 지나간 과거보다는 당장의 현실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실사구시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를 통해 당의 이념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조치들을 내리면서 당원들과 인민들 사이에서의 사상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당의 기본 방침이 ‘하나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이라고 정리해주었다. 여기서 하나의 중심은 ‘경제건설이 가장 중요한 중심점’이라는 의미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와 인민민주독재, 중국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네 가지의 이념’과 ‘개혁개방의 견지’라는 이념이 당의 기본점”이라고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이와 함께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채택할 수 있다”(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부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죄악이 아니라 누구든 먼저 부자가 되어야 모두들 잘살 수 있게 된다”(선부론)는 전략적 문구들을 만들어 냈다. 덩샤오핑의 이런 정책 방향 개혁과 이데올로기 전환 등을 중국 사회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정리해서 받아들였다.
과거와의 단절이 시작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성공적인 경제발전으로 이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공유와 인민공사 제도를 폐지시키는 데서 출발했다. 토지를 농민가정에 실제로 배분하는 혁명을 단행한 것이다. 진(秦)나라 이후 2300년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실제 농토를 배분받은 중국 농민들은 매년 생산량을 3배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런 변혁이 현재의 중국 경제발전의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과연 김정은이 이런 덩샤오핑의 뒤를 따라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김정은은 덩샤오핑이 제시했던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라는 과거와의 단절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이 나서야 할 과거와의 단절은 바로 김일성·김정일과의 단절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과 함께 추진한 개인숭배 금지에 따라 중국 전역에서는 마오쩌둥의 동상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천안문의 마오쩌둥 초상화는 덩샤오핑의 특별 지시로 그대로 걸어두었지만 마오쩌둥의 동상들은 대부분 철거됐다. 김정은도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 초상화를 제거하는 작업에 나설 수 있을까. 스위스 유학파 김정은이 프랑스 유학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뒤따라 가려면 과거 사상과 단절하고 현실로부터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2507호 뒤숭숭한 베이징대
해마다 5월 4일은 중국 최고학부 베이징대학의 개교기념일이다. 이 대학은 1898년 7월 3일 ‘경사(京師)대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1912년 교명을 ‘베이징대학’으로 바꾸었다. 1919년 일본의 산둥(山東)반도 점령에 항의하는 5·4운동이 벌어지자 시위의 핵심이었던 베이징대학은 개교기념일도 5월 4일로 바꾸었다.
지난 5월 4일 베이징대학은 서울대 성낙인, 영국 옥스퍼드대 루이스 리처드슨, 미국 예일대 피터 샐러비, 일본 도쿄대 마코토 고노카미 총장을 비롯한 전 세계 44개 대학 총장을 초청해서 개교 12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린젠화(林建華) 총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우선 대학을 대표해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와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틀 전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께서 학교 시찰을 와서 베이징대학이 민족 해방과 국가 건설에 탁월한 공헌을 한 것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총서기는 연설을 하면서 특히 청년들이 홍곡의 뜻을 지니고 분투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벌어졌다. 시진핑 총서기가 베이징 대학생들에게 가져야 한다고 당부한 ‘홍곡(鴻鵠·기러기와 고니)’의 뜻은 당연히 ‘훙후(hong hu)’라고 읽어야 한다. 그런데 린젠화 총장이 ‘훙하오(hung hao)’로 잘못 읽은 것이다. 중국 중학교 과정에 나오는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제비와 참새가 어찌 높이 나는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의 홍곡을 비록 화학박사이기는 하지만 중국 최고학부 베이징대학의 총장이 잘못 읽은 것이다. 좌중의 중국 대학 총장들과 베이징대 동문과 교수, 학생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린젠화 총장은 다음날 오후 베이징대 BBS를 통해 장문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개교기념 행사에서 홍곡을 잘못 읽은 것은 실제로 내가 이 글자의 발음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입니다. 내가 이 글자를 잘못 읽은 데 대해 학생 여러분들은 실망했겠지만 나의 문자 실력이 이 정도로 낮다는 점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린 총장은 자신의 그런 문자에 대한 무식함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됐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수년간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을 외우라고만 했습니다. 나의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도 마오쩌둥 문선(文選)의 주석을 읽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뿐입니다. 지식욕이 제일 강한 열몇 살 때 다른 책은 읽지 못하고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을 달달 외웠으니 나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이런 사상들이었습니다.… 나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7년에 다시 치르기 시작한 가오카오(高考·대학입시)에서 작문은 80점을 받았지만, 어휘와 문법은 겨우 20점을 받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베이다(北大·베이징대학)에 입학했지만 중국어 어휘와 문법을 공부할 시간은 없었고, 영어 공부에 많은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린 총장은 “앞으로 그런 착오를 하지 않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문자 공부란 것이 하루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 단기간에 문자 수준을 올린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북경청년보(北京靑年報)를 비롯한 유력 신문들은 린 총장이 개교기념 축사에서 홍곡의 한자를 잘못 읽은 사건을 린 총장이 온라인으로 발표한 사과문 전문을 붙여서 보도했다. 1955년생인 린 총장은 내몽골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야 대학에 들어왔다. 당시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이 대학입시를 부활시킨 첫 해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린젠화는 베이징대 화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를 마치고 1988년 독일로 유학가서 막스플랑크 고체연구소를 거쳐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을 통해 무기체 고체화학과 무기체 재료공학 분야의 권위자가 됐다. 귀국 후 베이징대로 돌아와 여러 보직을 맡다가 지방 명문 충칭(重慶)대학과 저장(浙江)대학 총장을 거쳐 2015년 모교인 베이징대의 총장으로 임명됐다.
젊은 교수들 항의 사표 파문
요즘 베이징대는 안 그래도 뒤숭숭한 분위기다. 얼마 전 대학 소속 연구소 원장급 3명의 젊은 교수가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난 3월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을 한 데 항의해서 사표를 내고 성명을 발표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표를 낸 세 교수는 생명과학원 교수 겸 위안페이(元培)연구원 부원장 리천젠(李沈簡·47), 데이터연구원 원장 어웨이난(鄂維南·54), 동아시아 연구원 주임 장쉬둥(張旭東·52). 이들은 모두 베이징대 출신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들이다. 각각 미 퍼듀대학에서 신경생물학과 분자유전학으로, 미 캘리포니아 대학 LA분교에서 수학으로, 미 듀크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이들 3명의 인재급 교수 가운데 대표격인 리천젠은 지난 3월 22일 오후 온라인으로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개 같은 선비가 되기를 거부하자(挺直脊梁 拒做犬儒)’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성명의 주요 대목은 이랬다.
“베이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나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초대 총장을 기리고자 한다. 차이 총장은 우리 베이다 사람들에게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개 같은 선비가 되기를 거부하라’고 가르치셨다. 젊은 시절 청왕조의 관원들을 암살하기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한 차이 총장은 베이다 총장이 된 후 여덟 차례에 걸쳐 불의에 항거하여 총장직 사표를 내는 의기를 보여주셨다.… Freedom is never free(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골기(骨氣)를 가진 사람들이 무거운 대가와 바꾼 것이다. 베이다 선배들은 그런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후스(胡適)는 평생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의 전제를 용감하게 비판했다. 마인추(馬寅初)는 마오쩌둥 앞에서도 자신의 학술 관점을 바꾸지 않았다.”
리천젠의 격문은 시로 마무리됐다.
‘흑암에서 광명이 나온다/ 절망에서 희망이 솟아난다/ 의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생겨난다/ 미움이 있는 곳에서 사랑이 나온다/ 베이다 교수와 학생들이여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개 같은 선비가 되기를 거부하자’.
리천젠의 격문은 발표된 지 얼마 안 가 인터넷 검열 수단으로 삭제됐지만 이미 베이징대 교수와 학생들은 대부분 읽은 뒤였다.
이런 베이징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시진핑 당 총서기는 지난 5월 2일 베이징대를 시찰한 후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베이다의 개교 120주년을 축하합니다. 5·4운동의 진원지는 베이다입니다. 5·4운동의 정신은 애국·진보·민주·과학의 네 가지입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새로운 장정(長程)에 나선 지금, 베이다 사생(師生)들은 5·4정신을 발양해서 민족과 국가, 인민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꿈을 좇는 사람,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홍곡(鴻鵠)의 뜻을 지니고 분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칭화대와 비교되는 베이징대
베이다와 이웃한 칭화(淸華)대 출신인 시진핑은 이날 왕후닝(王滬寧)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몇 명을 대동하고 베이징대학 시찰을 했고, 5월 4일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는 정치국원 겸 국무원 부총리 쑨춘란(孫春蘭)을 보냈다. 시진핑은 베이징대 개교기념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식’에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과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을 대동하고 참석해서 장문의 연설을 했다.
“동지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를 심각하게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도 심각하게 변화시켰습니다. 중국공산당 탄생 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기본 원리와 중국 혁명, 건설의 실제를 결합시켰습니다. 개혁개방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기본원리를 현실과 결합시켰습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중국의 대지 위에 생동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베이징대 개교 120주년 기념식이 열린 다음날 베이징대 국제회의장이라 할 수 있는 ‘영걸(英傑)센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인류 운명 공동체 건설’을 주제로 한 대규모 국제 세미나가 개최됐다. ‘인류 운명 공동체 건설’은 지난해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임기 5년의 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이 제시한 중국의 국제사회 역할을 압축한 용어. “앞으로 인류 운명 공동체 건설은 중국이 책임지고 해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베이징대 구내에 세워진 대규모 세미나 안내 보드에 열거된 세미나 제목들 가운데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과 21세기 세계의 사회주의’라는 것도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정부를 대표해서 베이징대 개교 1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쑨춘란 정치국원 겸 부총리는 축사를 통해 시진핑 총서기가 지난해 10월 총서기로 선출될 때 제시한 ‘쌍일류 프로젝트’에 대해 “반드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쑨춘란이 강조한 ‘쌍일류’ 프로젝트는 2030년까지 중국 내 100여개 중요 대학들을 세계 일류 대학으로 키우고, 44개 학과를 세계 일류 학과로 배양해서 오는 21세기 중반에는 중국을 세계 일류의 교육 강국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항상 실무적인 칭화대의 전통과는 달리 비판적인 정신을 기르는 것을 중요시하는 베이징대는 앞으로 2050년까지 이른바 쌍일류 대학에서 빠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입장이다. 하지만 2018년 봄, 베이징대는 학교 전체가 뭔가 어수선했다.
2509 중국과 북한의 은밀하고 비정상적인 관계史
지난 3월 25일부터 나흘간 이뤄진 김정은의 베이징(北京) 방문과 5월 7일부터 이틀간 진행된 김정은의 다롄(大連) 방문은 국제사회에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중국 외교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과 조선 관계는 정상국가 관계”라고 밝히지만 정상국가 사이의 외교 관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행태를 이번에도 보여주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2012년 11월 8일부터 1주일간 개최된 제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되고, 이듬해 3월 5일 개막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임됐다. 김정은은 2011년 12월 7일 김정일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틀 뒤인 12월 9일 조선중앙방송이 김정일 사망 발표문에서 “존경하는 김정은 지도자의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공식적인 후계자로 발표됐다. 별다른 이유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등장해서 북한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뒤 6년5개월 동안, 그리고 시진핑이 당권을 장악한 뒤 5년6개월 동안 서로 한 번도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지 않았다.
양국이 소원했던 이유는 북한이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을 강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2년 11월에 당 총서기에 취임하고, 2013년 3월에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이 “중국의 국가 권력 교체기에 핵실험을 하다니…”라면서 불같이 화를 낸 뒤 중국공산당 당 총서기에 선출되면 으레 평양을 방문하던 관례를 깨고 김정은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중국과 북한의 관계와 달리 시진핑은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받아들이고, 2014년 7월에는 서울을 방문함으로써 김정은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와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함을 과시했다.
6년간 김정은과 썰렁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진핑이 이번에 김정은의 방중을 받아들이면서 과거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하던 대접을 거의 되살려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는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를 선언한 이후 시진핑이 느끼던 ‘차이나 패싱’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진핑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는 듯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베이징 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조선반도 형세가 급속히 진전되고, 중요한 변화가 적지 않게 발생한 데 대해 정의(情義)상으로나 도의(道義)상으로나 제때에(중국어로는 ‘及時’라고 번역됨) 시진핑 동지에게 통보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자신의 베이징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김정은은 회담이 끝난 후 만찬 연설을 하면서도 “내가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연락을 했더니 방문을 받아주어 감사하다”라는 말을 했다.
김정은과 시진핑의 베이징 회담 한 달 뒤인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의 판문점 회담이 이뤄지고, 도보다리 위에서의 독대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자 불과 열흘 뒤인 5월 7일부터 이틀간 시진핑과 김정은은 베이징과 평양의 가운데쯤에 있는 랴오둥(遼東)반도의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했다. 1차 정상회담 이후 불과 1개월 남짓만의 일이었다. 부랴부랴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다롄 회담이 김정은과 시진핑 어느 쪽의 요청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 북한과 중국 외교당국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롄 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의 도보다리 독대 회담을 흉내 낸 것이 분명해 보이는 다롄 해안가 산책이 연출된 점을 보면 김정은이 “정의상 도의상 남조선 대통령과의 독대에 대해 통보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해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또 문재인·김정은 도보다리 독대를 보고 ‘차이나 패싱’에 대해 더욱 강하게 우려한 시진핑 측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물론 두 가지 이유가 맞아떨어져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다롄 회담에 시진핑을 수행한 중국 측 인사들이 시진핑의 국제문제 책사 왕후닝(王滬寧) 정치국 상무위원과 외교 담당 국무위원 출신의 양제츠(楊潔篪) 정치국원, 왕이(王毅) 외교부장, 그리고 시진핑의 집사 격인 딩쉐샹(丁薛祥) 정치국원 등이었고, 북한 측 수행원들이 이수용 노동당 국제부장, 김영철 통일전선부 부장, 이용호 외무상,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었던 점이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주로 문재인·김정은 사이의 판문점 회담, 특히 도보다리 회담을 분석하고, 6월에 이뤄질 예정인 김정은·트럼프의 진터회이(金特會)에 대비하기 위한 회동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김정은·시진핑의 다롄 바닷가 산책은 문·김의 도보다리 회담의 효과를 지우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외교 당국은 문재인·김정은의 도보다리 독대에 집착하지 말고, 시진핑과의 다롄 바닷가 산책을 통해 변화된 김정은의 의사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에 따라 김·트럼프 회담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북한과 중국 사이에는 이번 베이징·다롄 회담과 같은 긴급 회동이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1989년 6월의 천안문사태로 국내적 혼란과 국제적 고립에 위기를 느낀 당시 중국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가 개최되기 하루 전인 1989년 11월 5일 열차 편으로 베이징역에 도착한 김일성에게 자신이 5개월 전에 후계자로 발탁한 장쩌민(江澤民)의 손을 잡고 열차로 올라가 소개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이때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앞으로는 이 장쩌민 동지와 중요 문제를 상의하라”는 말을 했다고 장쩌민은 2006년 7월 출판된 자신의 전기를 통해 밝혔다.
1991년 10월에는 다음해에 이뤄질 한·중 수교의 기미를 간파한 김일성이 덩샤오핑에게 항의하기 위해 선양(瀋陽)을 긴급 방문했고, 2010년 8월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당 총서기와 김정일은 장춘의 지린(吉林)성 국빈관에서 비공개 회동을 했다. 김정일은 이때 불과 26세의 김정은을 비밀리에 데리고 와서 후진타오에게 인사를 시켰다. 김정일이 사망 1년여 전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해두고 있었던 셈이 된다. 따져보면 김정은과 시진핑 사이의 이번 베이징·다롄 긴급 회동은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서로 긴밀히 협의한다”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외교 당국은 중국과 북한 사이에 그런 비정상적 국가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2511 ‘차이나 패싱’ 현실화 벙어리 냉가슴 앓는 중국
“한국전쟁은 끝!(Korean War to end!)… 미국과 그 위대한 국민들은 지금 코리아(Korea)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하게 될 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 동부 시각으로 4월 27일 오후 7시55분에 트위터에 남긴 말 때문에 중국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중국 없는’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할 경우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잃게 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체면 때문이다. 트럼프는 오후 7시41분에는 이런 트윗을 날리기도 했다.
“짜증나는 몇 년간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끝에 남북한 사이에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뿐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언급도 중국의 속앓이가 깊어지게 만들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두 번째로 ‘깜짝’ 정상회담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그 다음날 기자회견을 갖고 김정은과의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설명하면서 “미·북 정상회담이 성공할 경우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이 추진됐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분명한 어조로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한 종전선언”을 언급하자 중국 외교부는 5월 31일 화춘잉(華春瑩) 대변인을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다.
“우리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조속한 시일 내 전쟁상태 종결을 지지하고 있으며, 지구적(持久的)인 평화체제가 임시적인 정전체제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우리는 반도 문제의 중요한 당사자이자 정전협정의 체결 당사자로서 그동안도 그래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응당한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Global Times)가 중국 지도층의 속내를 밝히고 나섰다.
“우리가 보기에 조·미·한(朝美韓) 3국이 종전선언이라는 것에 서명한다면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언을 통해 3국이 앞으로 어떠한 적대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종전선언이 반도의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는 없는 일이며, 법적으로도 모자라는 점이 있어 불확실성을 내포한 선언이 될 수 있다. 우리 중국은 그런 선언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지지할 것이지만, 그 선언에 대해 장기적인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면서 합법적인 한반도 정전상태를 종결시킬 종전협정에는 중국이 서명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남·북·미 3국 간 정전선언을 추진하는 한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반도의 지정학적 정치 형세는 대단히 미묘해서 늘 오락가락해 왔다. 영구적인 평화 협의를 하려면 보다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중국이 그 협정에 서명을 해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며, 이 점을 각 당사자들은 참작해야 할 것이다. 한국 여론은 조·한·미 3국이 종전선언을 한다면 그것은 ‘차이나 패싱(환구시보는 中國被邊緣化로 표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이 과도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은 반도의 일에 대해 강력한 현실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중국의 태도는 지정학적 각도에서나 유엔의 틀이라는 각도에서나 반도 문제의 구조에 언제든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은 지금은 말을 안 하고 있지만, 늘 오락가락하는 한국보다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만은 말해 두고 싶다.”
지난해 초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져왔다. 워싱턴에서는 ‘아메리카 더 퍼스트’가 큰소리로 울려나오고, 베이징에서는 미국을 제외한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주장하는 시진핑(習近平)의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노래가 나왔다. ‘중국이 주관하는 인류운명공동체 건설’이 매일같이 중국 관영 미디어를 채우는 동안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대화 채널인 ‘전략과 경제 대화’는 슬그머니 실종됐다. 지난 3월 25일부터 나흘간 이뤄진 김정은의 베이징(北京) 방문과 5월 7일부터 이틀간 진행된 김정은의 다롄(大連) 방문도 트럼프 행정부 취임 이후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2012년 당 총서기 취임 이후 6년간 김정은과 썰렁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진핑이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을 받아들이면서 과거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하던 대접을 거의 되살려 극진하게 대접하는 ‘오버’를 연출한 점에서도 ‘차이나 패싱’에 대한 우려를 짐작할 수 있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한 관계 개선을 선언한 이후 시진핑이 느끼던 ‘차이나 패싱’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 시진핑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는 듯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베이징 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조선반도 형세가 급속히 진전되고 중요한 변화가 적지 않게 발생한 데 대해 정의(情義)상으로나 도의(道義)상으로나 제때에 시진핑 동지에게 통보해주는 것이 마땅했는데…”라고 자신의 베이징 방문 이유를 밝혔다. 이 역시 중국의 한반도 관련 정보가 제한적으로 변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한 대목이었다.
더구나 4월 27일 이뤄진 문재인·김정은의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도보다리 독대가 이뤄지자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부랴부랴 평양으로 달려가서 김정은·시진핑의 다롄회담을 만들어내면서 밝힌 “중국의 조선에 대한 5개항의 전력(全力) 지지”의 내용도 중국 외교당국이 느끼는 ‘차이나 패싱’에 대한 두려움을 잘 보여주었다.
왕이는 5월 2일 북한 외무상 겸 노동당 정치국원 이용호를 만나 “첫째 조선이 정세에 부합하는 발전의 길을 걷는 것을 전력 지지, 둘째 조선반도 정세에 최근 출현한 긍정적 변화를 전력 지지, 셋째 조선의 비핵화 노력 전력 지지, 넷째 조선의 합리적인 안전보장에 대한 관심을 전력 지지, 다섯째 조선반도 북남 간의 관계개선 전력 지지”를 내용으로 하는 ‘5개항의 전력 지지’를 전달했다.
항모 과시도 안 통하고
왕이의 평양 전격방문으로 이뤄진 5월 7~8일의 김정은·시진핑 다롄회담은 우선 왜 회담 장소가 다롄이냐는 점을 둘러싸고 다롄에서 있었던 중국 제2의 국산항모 진수식에 김정은을 초청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중국의 첫 번째 항모인 랴오닝함이나 랴오닝함을 좀 더 크게 만든 두 번째 항모에 대해 미국이 별로 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정은을 다롄으로 초청한 이유가 항모라고 보기에는 미달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보다는 한반도에 인접한 중국의 해안도시에 다롄에서 시진핑·김정은이 회담을 함으로써 전 세계에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지분과 소유권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한 장소 선정이라는 평가가 더 타당해 보였다. 이는 중국 지식인사회에서 우세한 설로 자리 잡고 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미·북 회담 장소를 싱가포르로 결정한 것도 최근의 미·중 관계 악화가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무역 문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계속되는 불협화음을 내고 있고, 지난 6월 3일 윌버 로스 상무장관의 베이징 방문으로 진행된 3차 무역협상도 소득 없이 끝나 갈등이 높아졌다. 미국과 중국의 ‘시 오브 트러블드 워터(Sea of troubled water)’인 남중국해 갈등의 파도는 최근 들어 최고로 높아지고 있다. 5월 31일 미 합동참모본부 케네스 매켄지 중장은 남중국해에 있는 중국의 인공섬 중 하나를 폭파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질문을 받고 “미국 군대는 서태평양에서 작은 섬들을 없애버린 경험이 매우 많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다”고 말해 중국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매켄지 중장은 미군이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동맹국들 이익을 보호할 준비가 돼 있다고도 했다. 거기에다가 미국이 B-52 폭격기를 동원한 훈련을 남중국해에서 실시한 사실도 알려졌다. 트럼프가 군 통수권자로 버티고 있는 미군은 최근 하와이 주둔 미 태평양 사령부의 이름을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확대 개명함으로써 중국의 숙적 인도와 협력해 중국을 견제할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특히 트럼프는 베이징이 싫어하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민진당 정부가 대만에 들어선 것을 발판으로 대만과의 군사협력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환경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 시각 6월 3일 발표한 성명도 중국 지도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폼페이오는 “우리는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비극적으로 희생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며 “사망자와 구속자, 실종자를 공개하고 시위 참석자와 가족을 향한 괴롭힘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동안의 금기를 깬 폼페이오의 말에 중국도 발끈했다.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 정부는 1980년대 말 발생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 이미 명확한 결론을 내렸으며, 미국이 중국 정부를 이유 없이 비난하며 내정에 간섭하는 데에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공개적 불평도 못 하고
트럼프가 중국이 주장하는 대국주의를 거부하고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중국과 협의하지 않고 밀고 나가자 중국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을 패싱해 한국을 통해 북한과 직접 접촉하면서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드라이브해왔다. 환구시보가 잘 대변한 것처럼, 그동안 왕이 외교부장을 통해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주장해온 중국으로서는 트럼프가 김정은과 남중국해 근처의 싱가포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을 여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왜 우리와 의논 없이 하느냐”고 공개적으로 불평도 못하고 “지금은 말을 안 하고 있지만, 늘 오락가락하는 한국보다는 영향력이 분명히 크다는 점만은 말해두고 싶다(即使中国一言不发,真实影响力也比跑来跑去的韩国要大)”면서 한국에만 사팔뜨기 눈치를 보내고 있다.
2513호 몸 단 중국 북한 관계 재조정 나선다
“현재 세계와 아시아태평양 정세에는 새롭고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조선반도 각 당사자들은 희망에 충만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정세와 지역 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지난 6월 19일과 20일 열린 세 번째 북·중 정상회담에 대한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해외판 칼럼 망해루(望海樓)의 논평이다. 여기서 말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몇 가지’는 이렇다. ‘첫째 중국이 앞으로도 중·조 관계의 발전을 위해 흔들림 없는 노력을 할 것이다. 둘째 중국과 조선 인민들 간의 우호가 변해서는 안 된다. 셋째 사회주의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지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민일보의 논평은 “중·조 관계의 대국(大局), 반도의 평화안정을 유지하면서도, 국제 핵 비확산 체제가 유지되도록 해야 하며, 중국의 전략적 안전과 이익의 각도에서 조선 핵 문제를 처리한다는 것은 일관된 중국의 입장”이라고 정리했다.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문제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Global Times)도 앞으로 중·북 관계가 ‘새로운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중국 지도부에 건의했다. “중국과 조선은 두 개의 주권국가로, 지난 세기 1990년대에 조선 핵위기가 폭발한 이래 양호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비핵화의 긍정적 자산을 만들어왔다. 중국은 중·조 관계를 이용해서 반도의 안정을 파괴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일부 국가들이 해오던 속 좁아터진 추측은 연기처럼 사라지게 됐다.… 앞으로의 중·조 관계는 일종의 신형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이 지역에서 건설적 역할을 해야 하며, 현재 조선이 평화발전을 희망하고 있다면 조선 스스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완화하고, 스스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럴 경우 미래 중·조 관계의 협력 공간도 대단히 넓어질 것이다.”
환구시보의 중국 지도부에 대한 건의는 김정은이 중국의 품을 벗어나 남북한 회담과 미·북 회담을 성공적으로 한 이상 북한에 대한 과보호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취지로 보인다. 앞으로 주권국가 대 주권국가로서 1 대 1의 대등한 국가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한다는 요지다. 그런 점에서 환구시보는 “이번에 당국이 김정은의 방문 뉴스를 지금까지 북한 지도자가 중국을 떠난 다음에 공표하던 관례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것은 잘된 일이며, 앞으로 북한 지도자의 외교 활동은 더욱 개방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북한이 2006년부터 모두 여섯 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는 동안 중국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반도 6자회담 의장국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왔다. 대북 제재에도 어정쩡한 자세를, 북한 핵실험에 대해서도 불투명한 태도를 보여와 국제사회로부터 의심을 사왔다. 그러나 최근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의 폭로를 담은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증언록에는 “북한 핵실험에 가장 분노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는 주장이 실려 있다.
“핵실험 사흘 후인 2006년 10월 12일 중국 선양에서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와 중국 외교부장 리자오싱(李肇星)이 비밀리에 만났다. 중국이 북한에 비밀회담을 요구한 것은 중국의 강력한 유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회담 기록문에 따르면 리자오싱은 강석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일성 동지는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매우 전략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조선 동지들은 그의 사상과 유산을 허물고 있다.’ 리자오싱의 말에 강석주는 이렇게 되받아쳤다. ‘내가 지금 중국 외교부장 리자오싱과 담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 시절 리훙장과 회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선반도 비핵화란 우리만의 비핵화가 아니라 남조선까지 포함한 전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뜻한다.’”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은 중국과 북한 관계가 지금까지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보다는 독립적이라는 관점을 제공한다. 중국은 북한이 말을 잘 듣지 않아 냉가슴을 앓으면서도 북한에 대한 유일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자신임을 국제사회에 은근히 과시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상황에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북 정상회담까지 소화해내자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민일보와 환구시보의 김정은·시진핑 3차 회담에 대한 논평과 사설은 그런 중국 지도부의 속내를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평창올림픽 때 변화 시작됐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 재정립은 평창 동계올림픽 때부터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지난 2월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이 참석하고, 2월 25일의 폐막식에는 김영철 당 정치국원이 참석하자 중국 지도부는 부랴부랴 사태 파악에 나서야 했다. 이후 평창올림픽 폐막 한 달 뒤인 3월 26일 김정은이 베이징(北京)을 전격적으로 방문해 2박3일 동안 환대를 받았다.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조선반도 형세가 급속히 진전되고 중요한 변화가 적지 않게 발생한 데 대해 정의(情義)상으로나 도의(道義)상으로나 제때에 시진핑 동지에게 통보해주는 것이 마땅했는데…”라고 자신의 베이징 방문 이유를 밝혔다.
이로써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최고권력을 승계한 지 7년 만에 두 나라 관계의 결빙기(結氷期)는 끝났다.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9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당 총서기에 오른 뒤 6년간 김정은과 시진핑은 평양과 베이징을 서로 찾아가지도 상대방을 초청하지도 않았었다. 중국과 북한 관계가 얼어붙었던 주된 이유는 북한의 3차 핵실험 때문이었던 것으로 관측돼왔다. 김정은은 이른바 중국의 ‘권력 교체기’인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당시는 2012년 11월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선출되고, 3월 5일 개막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취임하기 전이었다.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록 주장은 양국 관계의 결빙기가 3차 북한 핵실험 때문에 왔다는 관측이 별로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의 돌발적인 평창올림픽 참가 선포와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북 정상회담은 시진핑이 지난해 19차 당 대회를 통해 표방한 ‘대국(大國)외교’의 체면을 크게 손상했다. 시진핑이 선포한 대국외교 논리에 따르면 북한 핵 문제는 G2 사이인 중국과 미국이 협의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트럼프가 김정은을 동원해서 직접 비핵화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자 중국이 대응수(對應手)를 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2515호 중국 네티즌 일깨운 한 대학의 졸업식 연설
“금년 들어 3월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의 시선을 가장 많이 모으고 있는 사건은 시리아 문제도 아니고, 북조선 문제도 아니며, 러시아월드컵도 아니다. 그것은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중·미 무역전쟁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던 것이며, 애써 회피하려던 문제이다. 이 문제의 주도권은 우리 손안에 있지 않다. 나의 관심은 무역의 문제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며, 깊은 우려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에 있는 지린대학 경제금융대학원 리샤오(李曉·55) 원장은 지난 6월 2일 이 대학원 졸업생들 앞에서 그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말
하고자 하는 내용이 “첫째 중·미 무역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둘째 우리는 이 무역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등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학생들의 미래 생활과 관련 몇 가지 희망을 밝히고자 한다”고도 했다.
리샤오 원장의 졸업식 치사는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제가 됐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경제 실력을 솔직히 설명하고, 현재 중국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관점에서 학생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리샤오 원장의 연설은 중국의 트위터라고 할 수 있는 미니 블로그 웨이신(微信·Wechat)을 통해 중국 전역에 퍼날라졌다.
“이 무역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따라서 미국 측 통계에 따라 이 전쟁을 설명해보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중국이 미국으로 수출한 500억달러어치에 대해 25%의 보복관세를 매겼다. 이후 중국이 반격에 나서자 다시 2000억달러 상당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했고, 앞으로 또다시 중국이 반격할 경우 다시 2000억달러어치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할 작정이라고 한다. 간단한 계산으로, 지난해 중국이 미국으로 수출한 총액 5000억달러 가운데 4500억달러에 대해 보복관세를 매겼으니 이제 중국의 대미 수출액 가운데 500억달러 정도만 보복관세를 피할 수 있을 전망이다. 우리는 지난해 미국에서 1300억달러 정도를 수입했다. 그중에 500억달러 상당에 대해 우리가 보복관세를 매겼으므로, 우리에게는 보복관세를 매길 대상이 800억달러 정도만 남아 있다. 우리로서는 당할 도리가 없다. 우리의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아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면서 리샤오 원장은 중국의 대미 수출 의존도뿐만 아니라 대미 수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현실도 솔직하게 설명했다. 특히 중국 제조업의 미국 제조업에 대한 기술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 지난 6월에 벌어진 통신장비업체 ZTE(中興) 사건에서 중국은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당해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 2위 통신장비업체인 ZTE의 주가는 최근 하한가를 8번 기록하면서 주가가 약 60% 폭락했다. 증발한 시가총액만 약 740억위안(약 12조6000억원)에 달했다. 국제사회의 대(對)북한, 대(對)이란 제재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가 7년간 ZTE의 미국 반도체 구매를 금지한 이후 벌어진 일이었다. ZTE는 지난 4월 17일 주식거래가 중지된 후 2개월여 만인 6월 13일 거래가 재개됐다. 그러나 홍콩증시에 상장된 H주는 6월 13일 42% 폭락했고, 선전(深圳)증시에 상장된 A주는 지난 6월 25일까지 8일 연속해서 가격 제한폭(10%)까지 떨어졌다. 첫 번째 하한가를 기록한 6월 13일에는 하한가에 8억주의 매도주문이 쌓였다.
리샤오 원장은 중국이 미국의 농산물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도 설명했다. 현재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1년에 1400만t의 콩을 수입하고 있다. 이 양은 현재 중국이 해외에서 수입하는 전체 콩 수입량(9554만t) 중 1위 기록이다. 이만 한 콩을 미국에서 수입하지 않고 중국에서 재배하려면 모두 7억6000만무(畝)의 땅이 필요한데, 중국의 농업용지 전체면적이라고 해봤자 21억무에 불과한 실정이다. 중국의 실정으로는 전체 농업용지의 3분의 1을 콩 재배에 투입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브라질에서 수입하는 콩도 대부분 미국 업자들이 브라질에서 생산하고 있는 형편이므로 농업부문에서도 미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리샤오 원장의 고백이었다.
리샤오 원장은 수출입의 문제뿐만 아니라, 1980년대부터 발전해온 중국 경제의 근간이 근원적으로 미 달러 체제 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국제적인 원유 거래도 이 달러 체제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이 그동안 해외수출을 해서 벌어들인 달러의 대부분도 미국 정부의 국채 형태로 저장돼 있고, 중국의 총통화량 M2가 GDP 대비 2.1 대 1의 비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미국의 M2는 GDP 대비 0.9 대 1로 안정돼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리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을 발동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차이나 브랜드’를 만들어내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는데 미국이 그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국가이익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는 데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무역전쟁은 무역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국가 운명을 건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고 리 원장은 설명했다.
리 원장의 설명은 현재의 중·미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얻어야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한 역설(力說)로 이어졌다. “먼저 두 가지의 교훈을 얻어야 하는데 그 하나는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크게 평가하는 정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는 서방의 침략을 받았고, 그 압박이 너무 오래되어서 마음속에 스스로 대국이 되고자 하는 정서가 절박하게 자리를 잡았다. 개혁개방 40여년 동안 이뤄진 중국의 경제발전은 비범한 성취를 이룬 것이었고,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어떤 영역에서는 세계의 선두 그룹에서 달리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거국적인 자부감을 갖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정서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중·미 무역전쟁의 과정에서 벌어진 ZTE 사건은 우리와 미국의 기술 격차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우쳐주었다. 실제로 우리 중국은 허다한 기술 영역에서 외국과 거대한 차이를 갖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번 무역전쟁의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경제성장 방식이 과연 지속가능한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의 토로는 계속 이어졌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미국에 대한 중국의 연구가 깊지 못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가 시작되고 올해 3월 무역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우리의 미국에 대한 판단은 거듭되는 실수를 해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거대한 대국과의 경쟁을 하려면 무역 분야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전문가들의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극히 비정상적인 것이다. 우리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려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할 상대방 패권국가에 대한 계통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미국에 대한 이성적 비판은 없었다. 그 결과 감정이 이성보다 앞섰고, 전형적인 농경민족의 근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 중국인들이 상인 근성을 지닌 미국과 어떻게 구별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인식이 별로 없었다. 우리 중국은 1993년 덩샤오핑(鄧小平) 지도자가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이래 불과 20여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이는 우리 중화민족이 농경민족에서 상업민족으로 변하기 시작한 지 불과 2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미국이 중국계 미국인을 주중 미국대사로 보낼 때도 우리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자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지식상의 의화단(義和團·권법으로 서양을 몰아내려던 운동)’적인 경향을 보였다. 현재의 무역전쟁 과정 중에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식상의 의화단’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트럼프 본인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다. 2016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출판된 트럼프 자서전 중국어판은 너무나 얇은 소책자로 출판됐다.”
리샤오 원장은 중국의 미국 경제구조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고, 미국 사회와 미국의 주류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며,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수단과 방식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다고 통렬하게 자체 비판을 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가져야 할 희망에 대해 몇 가지 당부를 하겠다. 무엇보다도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세계를 어떻게 맛볼 것인가에 대한 학습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당부하고자 한다. 시야를 넓히고, 많은 인류가 어떻게 우리와 다른지를 알아야 하고, 더욱 넓은 관용을 배워야 한다. 관용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나는 ‘아바타’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는데, 그 영화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이 왜 그 영화를 찍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 이유는 인류의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유년시대의 환상과 호기심을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리샤오 원장은 지린대학 출신으로, 지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7세가 된 2000년 10월에 일본 국제교류기금회의 초빙 연구원으로 일본에 가서 3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고 2004년에 지린대학으로 복귀한 것이 경력의 전부다. 이런 경력의 리샤오 원장이 중국에 대한 가혹한 자체 비판을 하고 제자들에게 넓은 안목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중국이 정면으로 마주쳐야 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환경의 변화다.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여기에 있는 학생 여러분이 진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우리 사회가 부단히 진보할 수 있으며, 중화민족은 그래야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2518호 창군 91년 만에 흔들리는 인민해방군 예비역들의 분노
8월 1일은 중국군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 창설 91주년 기념일이다. 중국군은 1927년 8월 1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최초의 무장봉기가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일어난 날을 창군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들이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킬 당시 군대 명칭은 ‘공농(工農)혁명군’이었다.
줄여서 ‘홍군(紅軍·Red Army)’이라고 불리던 중국군은 1947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군이 대만 섬으로 옮겨갈 때까지 20년간에 걸친 내전에서 승리했다. 중국군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베이징(北京) 천안문광장에서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인민 정부가 성립됐다”고 외칠 때까지 중국공산당의 이른바 ‘혁명’ 주도세력이었다. 내전 과정에서 국민당군은 미국이 제공하는 자동기관총을 비롯한 우세한 무기 체제를 갖추고서도 홍군에 패했다. “승리하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겠다”는 약속으로 당시 중국 인구의 80%가 넘는 농민들을 고무한 중국공산당의 전략이 먹힌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역시 1966년에 출판한 세계적 명저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현대사회 형성에서 지주와 농민의 역할(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Lord and Peasant in the Making of Modern World)’에서 중국공산당군의 국민당군에 대한 승리의 원인은 2300년 동안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중국 농민들에게 토지분배를 약속한 마오쩌둥의 전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에 승리함으로써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1949년 이후 69년간 이어온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지역적 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제1의 힘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1978년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끈 개혁개방정책이 “중국을 분열로 이끌 것”이라는 외부의 수많은 관측에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버팀목 역시 인민해방군이었다.
그러던 인민해방군 내부에서 최근 ‘전역 후 대우 문제’를 놓고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중국 동부 장쑤(江蘇)성 전장(鎭江)시 시청 청사 앞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예비역 해방군들이 시위를 벌였다. 중국 군 당국은 2개 전차 사단과 수만 명의 진압군을 투입해서 시위를 해산시켰으나 최근까지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고 중국 내부 사정에 밝은 홍콩의 ‘아주주간(亞洲週刊)’과 미국의 반(反)중국 인터넷 미디어 ‘보쉰’, ‘미국의소리’ 등이 전했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의 보도가 통제된 가운데, 유튜브는 전장 시 시청 주위에 모여 ‘영웅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는 예비역들의 시위 장면과 진압 과정에서 부상당한 예비역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놓았다.
홍콩과 대만의 인터넷 미디어들은 ‘예비역들의 불만은 전역 후 취업 알선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반발’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진행된 ‘30만 감군(減軍)’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전체 규모 5700만명으로 추산되는 예비역 해방군들 가운데 일부는 2016년 5월에도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그해 10월 11일에는 중국 국방부 건물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들 시위에 대해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도 군 지도자 회의를 소집해 강력 대처와 함께 예비역들의 불만해소를 전담할 기구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고 홍콩과 대만 미디어들은 전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도 시위는 계속되는 양상이다. 장쑤성뿐만 아니라 안후이(安徽)성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또 예비역들은 SNS를 통해 장쑤성의 시위 장소로 추가 시위대가 집결할 것을 호소하는가 하면, 시위 현장으로 물과 음료수, 먹을 것 등을 탁송하는 지지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고 반(反)중국 인터넷 매체들이 전했다. 이들 매체들은 시위 현장에서 촬영된 동영상도 첨부하고 있는데 실제 이를 보면 전국 10개 성에서 SNS 연락을 통해 모인 예비역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모여드는 장면이 나온다. 시위 현장으로 장쑤성이 선택된 것은 장쑤성이 중국 대륙 동해안 중심부라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군에서 병력 동원 교육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이 시위 현장으로 장쑤성 전장시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비역들의 시위로 이미 3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낸 가운데 시위 현장에는 더 큰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옹호 공산당’ ‘옹호 시진핑 주석’ 등의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내걸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중국 인터넷 매체들은 예비역들의 장쑤성 시위가 여러 측면에서 1989년 베이징 천안문광장 시위를 중국 인민들에게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시위 가담자들 가운데에는 1979년 베트남과의 국경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역한 장교와 병사들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 예비역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이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나와 발언한 “영웅들에게 피나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不能讓英雄流血又流淚)”는 말을 시위 현장 구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내 많은 지식인들은 “시진핑 중앙군사위 주석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최근 항공모함 2척 건조, 남중국해에 대한 군사기지화 사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기 체제 발전에는 많은 예산을 쓰는 반면, 군의 인적 자원에 대한 생활 개선과 예비역 군인들에 대한 전업 프로그램이 부실화되고 있는 것이 장쑤성 시위의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민해방군은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인민들을 공격한 인민해방군”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 중국 지식인들은 이번 장쑤성 시위가 인민해방군이 더 이상 ‘인민을 해방시키는 혁명 전위대’가 아니라 먹고살아가야 할 구체적 직업인들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2519호 중국 지식인은 아직 살아있다
자유아시아방송(Radio Free Asia·RFA)은 지난 7월 26일 “쉬장룬(許章潤·56) 칭화(淸華)대 법학대학원 교수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겸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통치 방식을 비난하는 글을 웹사이트에 올렸다”고 보도했다. RFA는 1994년 미국 의회가 입법한 국제방송법(International Broadcasting Act)에 따라 1996년 미 의회가 출자해서 설립한 국제방송국. 중국 안팎의 일반 온오프라인 미디어들이 잘 보도하지 않는, 미국에 유리하고 중국에 불리한 뉴스를 자주 보도하는 방송이다.
RFA가 전한 쉬장룬 교수의 시진핑 비난 글은 ‘우리가 당면한 우려와 기대(我們當下的恐懼与期待)’라는 제목으로, 중국 내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만든 민간 싱크탱크 톈쩌(天則·하늘의 규칙) 경제연구소 웹사이트에 지난 7월 24일 올랐다. 이 글은 RFA가 보도한 이후 중국 인터넷 공간에서는 삭제됐지만 중국 바깥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이미 전문이 올라 유포되고 있다. 쉬장룬 교수는 글을 올릴 당시 해외여행 중이었으며, 현재 소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전파됐다.
중국 바깥의 인터넷 공간에서 중국에 관한 핫이슈들을 다루는 China Strategic Analysis(中國戰略分析·CSA)는 쉬장룬 교수의 ‘우려와 기대’를 전문 게재하면서 쉬장룬 교수가 최근 중국 정치의 후퇴현상을 비판하며, 지난 3월 시진핑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제를 폐지한 것을 철회하고 국가주석 임기제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CSA는 쉬장룬 교수가 개인숭배를 비판해서 외부세계의 강렬한 관심을 끌었다고도 했다.
안후이(安徽)성 출신인 쉬장룬 교수는 2005년 ‘전국 10대 걸출한 청년 법학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 인물로, 칭화대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인 ‘법치와 인권 연구센터’ 주임을 맡고 있다. CSA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부터 중국 정치와 사회가 최후의 마지노선을 넘어섰다고 평가하면서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극권(極權·전체주의)으로 회귀하고 있다” “개인숭배를 제지해야 한다” “국가주석의 3연임 금지 조항을 회복해야 한다” “관리들의 재산 공개” 등을 주장해왔다고 한다. CSA는 특히 쉬장룬 교수가 ‘평반(平反)’의 주장도 펴왔다고 전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사건 때 벌어졌던 유혈진압 사태를 제대로 평가해서 정확한 사망자 숫자 등 희생자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쉬장룬 교수의 주장은 그가 칭화대학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칭화대는 비판적인 베이징대 출신들과는 달리 ‘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실무적인 졸업생들을 길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칭화대는 시진핑 당 총서기의 모교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이루어진 시진핑 체제 비판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중국 안팎 지식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쉬장룬 교수는 ‘우리가 당면한 우려와 기대’라는 글에서 자신이 중국의 현 시국을 보는 8가지의 우려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는데, 첫째는 인민들의 재산권 보호에 대한 우려다. 그에 따르면 지난 40년간의 개혁개방 결과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아직 재산권 보호에 대한 입법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데다가 2012년 말 시진핑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反)부패 캠페인으로 파산하는 기업과 가정, 파괴되고 무너지는 개인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와중에 최근 들어서는 부자들이 해외로 이민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그는 적시했다. 그는 등 따뜻하고 배 부르면서 살 만하게 된 일반 중산층도 뜻밖에 예금통장이 위협받는 사태가 많아 불안해하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그런 가운데 개혁개방 시대의 최후 승자로, 권력과 지위를 함께 확보한 권귀층(權貴層)들이 부까지 누리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쉬 교수의 두 번째 우려는 “중국 정치에 다시 전제주의적인 절대지도자가 등장하는 괘수(挂帥)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인민들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야만의 세월이 문화대혁명 기간인데 요즘 다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선호하는 ‘신(新)극좌파’가 등장해서 여기저기서 ‘때려라,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세월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 건설 위주의 정치를 펴왔으면, 그 다음에는 헌정(憲政) 건설 중심의 현대국가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의 방향은 역주행(背道而馳)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쉬 교수의 세 번째 우려는 “최근 들어 계급투쟁이 다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근년에 들어 관영매체와 관원들이 자주 계급투쟁을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는 바람에 인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는 진단이다. 각종 정치 현장에서 놀랍게도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鬪, 鬪, 鬪!)”라는 구호가 들리는가 하면, 사유재산 보유를 보장하는 개헌과 인권을 존중하는 개헌은 유보되는 사태가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고발했다.
최근 들어 시진핑 지도부가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양세계와 투쟁 국면을 보이며 쇄국을 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 그의 네 번째 걱정이요, 중국이 미국에 이어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 대외원조를 과도하게 늘리는 바람에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경제 국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 그의 다섯 번째 걱정이었다. 이어 여섯 번째 우려는 당국의 지식인에 대한 정책이 점차 좌적인 사상개조를 시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점이며, 일곱 번째 우려로는 ‘전면적인 내전상태에 돌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을 옹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군비경쟁을 가속화하면서 국제사회에 신냉전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점이 꼽혔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우려는 개혁개방의 시대라면서도 개혁은 실종되고 국내 정치가 전체주의를 향해 방향을 잡고 있는 점을 들었다. 그는 “국내 정치는 어떻든 방향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쉬장룬 교수의 선언문 발표 이전에 중국 지식인 사회는 안 그래도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지난 3월부터 칭화대 인근 베이징대에서도 지식인들의 반정부적 움직임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베이징대학 소속 연구소 원장급 3명의 젊은 교수가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개헌을 한 데 항의해서 사표를 내고 성명을 발표한 사건이 대표적. 당시 사표를 낸 3명의 교수는 생명과학원 교수 겸 위안페이(元培)연구원 부원장 리천젠(李沈簡·47), 데이터연구원 원장 어웨이난(鄂維南·54), 동아시아연구원 주임 장쉬둥(張旭東·52)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베이징대 출신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들이다. 각각 미 퍼듀대학에서 신경생물학과 분자유전학으로, 미 캘리포니아대학 LA분교에서 수학으로, 미 듀크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이들 3명의 인재급 교수 가운데 대표 격인 리천젠은 지난 3월 22일 오후 온라인으로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개 같은 선비가 되기를 거부하자(挺直脊梁 拒做犬儒)’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성명의 주요 대목은 이랬다.
“베이다 개교 120주년을 맞아 나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초대 총장을 기리고자 한다. 차이 총장은 우리 베이다 사람들에게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개 같은 선비가 되기를 거부하라’고 가르치셨다. 젊은 시절 청 왕조의 관원들을 암살하기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한 차이 총장은 베이다 총장이 된 후 여덟 차례에 걸쳐 불의에 항거하여 총장직 사표를 내는 의기를 보여주셨다.… Freedom is never free(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골기(骨氣)를 가진 사람들이 무거운 대가와 바꾼 것이다. 베이다 선배들은 그런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후스(胡適)는 평생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의 전제를 용감하게 비판했다. 마인추(馬寅初)는 마오쩌둥 앞에서도 자신의 학술 관점을 바꾸지 않았다.”
리천젠의 격문은 시로 마무리됐다. ‘흑암에서 광명이 나온다/ 절망에서 희망이 솟아난다/ 의문이 있는 곳에 믿음이 생겨난다/ 미움이 있는 곳에서 사랑이 나온다/ 베이다 교수와 학생들이여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개 같은 선비가 되기를 거부하자’.
리천젠의 격문은 발표된 지 얼마 안 가 인터넷 검열 수단으로 삭제됐지만 이미 베이징대 교수와 학생들은 대부분 읽은 뒤였다. 이런 베이징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시진핑 당 총서기는 지난 5월 2일 베이징대를 시찰한 후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베이다의 개교 120주년을 축하합니다. 5·4운동의 진원지는 베이다입니다. 5·4운동의 정신은 애국·진보·민주·과학의 네 가지입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새로운 장정(長程)에 나선 지금, 베이다 사생(師生)들은 5·4정신을 발양해서 민족과 국가, 인민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꿈을 좇는 사람,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홍곡(鴻鵠)의 뜻을 지니고 분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840년부터 두 차례 있었던 영국과의 아편전쟁의 결과 청조(淸朝)가 1912년에 붕괴하자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중국 지식인들의 열망은 불타올랐다. 량치차오(梁啓超)의 변법자강(變法自疆)운동을 비롯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사건’ 등을 거치면서 각종 실험을 진행하다가 결국은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 건설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중국 지식인들의 저항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전제주의 끝판의 통치 아래서도 제1차 천안문사건을 일으켰으며,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끄는 개혁개방의 시대에 들어서도 평범한 잡지 편집인이던 웨이징성(魏京生)의 민주화 요구 벽보 사건과 1989년의 제2차 천안문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중국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979년 3월 25일 베이징시 서쪽 번화가 시단(西單)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要民主还是要新的独裁)’라는 벽보를 붙여 공안에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웨이징성은 1994년 석방 후 CNN과의 인터뷰에서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한마디를 한 죄로 다시 15년형을 받아 복역하는 당찬 결기를 보였다. 그는 복역 중 미국의 요구로 풀려나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3월 시진핑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제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킨 뒤 지식인들의 반발이 계속 이어지는 분위기다. 베이징대 대학원장급 세 교수의 사표에 이어 이번에 시진핑의 모교 칭화대 쉬장룬 교수가 반시진핑 선언을 한 것은 앞으로 중국 국내 정치에 태풍의 눈이 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이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당 규약의 종신제 금지 조항 삭제’라는 난관 돌파는 더욱 험한 길이 될 전망이다.
2521호 중국~대만 135㎞ 해저터널의 국제정치학
요즘 중국과 대만 관계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타이베이(臺北)에는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민진당(民進黨) 정권이 들어서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 아닌 ‘대만공화국(Republic of Taiwan)’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은 빠른 경제발전 40년 만에 경쟁자로 성장한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을 견제하기 위해 타이베이에 미 해병을 주둔시키겠다는 등 대만 활용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8월 6일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중국 과학자들이 대만해협 해저에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을 뚫는 계획을 긍정 평가하는 보고서를 중국공정원에 제출했다”고 커다랗게 보도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원래 호주의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 최대의 인터넷 재벌 마윈(馬云)이 사들이면서 베이징(北京) 권부를 가장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에서 베이징 권부의 내부사정을 가장 잘 아는 신문으로 변신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지난해 10월 중국공산당 제19차 당대회 때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을 당의 발표에 앞서 정확하게 보도함으로써 베이징 권부의 내부사정을 가장 잘 아는 신문으로 국제사회에 재등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베이징과 타이베이의 관계가 가장 얼어붙었을 때 대만해협 해저터널 건설이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당연히 여기에는 베이징 지도자들의 생각이 반영됐을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중국 대륙의 핑탄(平潭)섬과 대만섬 타이베이 근처의 신주(新竹)를 연결하는 135㎞의 해저에 터널을 뚫어 시속 250㎞로 달리는 고속철도를 까는 계획이 지난해 중국공정원에 제출됐다. 이 계획에 대해 일단의 중국 과학자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고서를 최근 들어 정부에 제출했다.”
135㎞의 해저터널이면 영국·프랑스 도버해협을 연결하는 총길이 37㎞ 해저터널의 4배 규모로 세계 최장이 된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2003년에 경제무역시험구로 지정된 핑탄과 대만의 첨단 테크노밸리인 신주를 연결할 이 해저터널은 두 군데의 지진 취약지역을 통과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깊이 200m의 해저를 연결하는 개념도까지 게재해서 중국 안팎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실 대만해협 동서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건설계획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이 종전되기 직전인 1940년대부터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장이청(張以誠), 장다취안(姜達權) 등 몇 명의 학자들 명의로 중국 정부에 보고서가 제출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장강 중류 싼샤(三峽)에 댐을 건설한 다음에 추진해야 할 프로젝트”라는 의견이 달려 당시 최고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비준을 받았다고 중국어판 위키피디아는 전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해저터널의 길이는 125~150㎞가 될 것이고, 이 해저터널의 연결로 베이징과 타이베이, 중국 남부 쿤밍(昆明)과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2개 노선의 고속철로를 건설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다시 칭화(淸華)대학의 우즈밍(吳之明)이라는 교수가 대만해협 해저터널을 추진해야 한다고 공개 제안했고, 1998년에는 대만 건너편의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서 대만해협 해저터널의 건설 가능성을 따져보는 학술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했다.
샤먼의 학술세미나에는 대륙과 대만, 미국 학자들이 참가해서 공정의 성공 가능성과 일정 등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전시켰다. 이런 세미나는 2008년까지 미국과 싱가포르 등지로 장소를 옮겨가며 모두 6차례 개최됐다.
5년 전인 2013년 6월에는 중국의 ‘국가도로망 건설계획 2013~2030’에 122㎞의 대만해협 해저터널 건설계획이 공식적으로 포함됐고, 2016년 5월에 작성된 중국 국무원의 제13차 5개년 경제계획에는 베이징과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계획이 상정됐다. 이들 계획들은 대부분 해저터널 준공연도를 2030년으로 잡았다.
중국은 대역사의 나라다. 만리장성은 물론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을 실현시킨 전통을 이어받아 쑨원이 꿈처럼 제시한 세계 최대의 싼샤댐 건설도 성공시켰다. 황허(黃河)의 모자라는 수원을 보충하기 위해 남수북조(南水北調)라는 세계 최대급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중국공산당이다. 중국공산당의 추진력으로 보면 대만해협 해저터널 건설 가능성을 낮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중국공산당과 40년 넘는 내전을 벌인 국민당이 만들어놓은 대만 정부다. 더구나 그런 국민당마저 부인하는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는 대만과 마주 앉아야 한다. 해저터널 건설을 위한 협상테이블이 마련될 가능성이 너무 낮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베이징 정권을 지지해온 마윈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대만해협 건설 계획을 다시 들고나온 것은 왜일까. 이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 가능하다. 쑨원이 청나라가 무너진 혼란기에 세계 최대의 싼샤댐 건설계획을 중국 인민들에게 제시한 것은 중국인들의 통합을 촉구하는 일종의 정치 메시지였다. 또 중국공산당이 쑨원의 싼샤댐 건설계획을 실현시킨 것도 중국공산당이 리드하는 중국 정치에 안정성을 강화한다는 차원이었다. 정치적 의미가 경제적 의미에 더해졌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행정부는 대만해협에 구축함 2척을 파견해서 대만해협이 공해임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고, 타이베이에 있는 사실상의 미국대사관인 아메리카인스티튜트에 해병대를 파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하와이의 태평양 사령부의 명칭을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개칭해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기도 했다.
또 호주와의 군사협력을 강화해 중국을 원거리에서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김정은을 싱가포르로 오게 해서 북·미 회담을 개최한 데에도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힘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마윈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대만해협 해저터널 계획을 다시 공론화시키는 의도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국면에서 전 세계 화교사회를 겨냥한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를 연결하는 135㎞의 해저에 터널을 뚫어 시속 250㎞로 달리는 고속철도를 까는 계획이 지난해 중국공정원에 제출됐다. 이 계획에 대해 일단의 중국 과학자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고서를 최근 들어 정부에 제출했다.”
135㎞의 해저터널이면 영국·프랑스 도버해협을 연결하는 총길이 37㎞ 해저터널의 4배 규모로 세계 최장이 된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2003년에 경제무역시험구로 지정된 핑탄과 대만의 첨단 테크노밸리인 신주를 연결할 이 해저터널은 두 군데의 지진 취약지역을 통과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깊이 200m의 해저를 연결하는 개념도까지 게재해서 중국 안팎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실 대만해협 동서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건설계획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국공내전이 종전되기 직전인 1940년대부터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1987년에는 장이청(張以誠), 장다취안(姜達權) 등 몇 명의 학자들 명의로 중국 정부에 보고서가 제출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장강 중류 싼샤(三峽)에 댐을 건설한 다음에 추진해야 할 프로젝트”라는 의견이 달려 당시 최고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비준을 받았다고 중국어판 위키피디아는 전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해저터널의 길이는 125~150㎞가 될 것이고, 이 해저터널의 연결로 베이징과 타이베이, 중국 남부 쿤밍(昆明)과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2개 노선의 고속철로를 건설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다시 칭화(淸華)대학의 우즈밍(吳之明)이라는 교수가 대만해협 해저터널을 추진해야 한다고 공개 제안했고, 1998년에는 대만 건너편의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서 대만해협 해저터널의 건설 가능성을 따져보는 학술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했다.
샤먼의 학술세미나에는 대륙과 대만, 미국 학자들이 참가해서 공정의 성공 가능성과 일정 등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전시켰다. 이런 세미나는 2008년까지 미국과 싱가포르 등지로 장소를 옮겨가며 모두 6차례 개최됐다.
5년 전인 2013년 6월에는 중국의 ‘국가도로망 건설계획 2013~2030’에 122㎞의 대만해협 해저터널 건설계획이 공식적으로 포함됐고, 2016년 5월에 작성된 중국 국무원의 제13차 5개년 경제계획에는 베이징과 타이베이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계획이 상정됐다. 이들 계획들은 대부분 해저터널 준공연도를 2030년으로 잡았다.
중국은 대역사의 나라다. 만리장성은 물론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을 실현시킨 전통을 이어받아 쑨원이 꿈처럼 제시한 세계 최대의 싼샤댐 건설도 성공시켰다. 황허(黃河)의 모자라는 수원을 보충하기 위해 남수북조(南水北調)라는 세계 최대급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중국공산당이다. 중국공산당의 추진력으로 보면 대만해협 해저터널 건설 가능성을 낮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중국공산당과 40년 넘는 내전을 벌인 국민당이 만들어놓은 대만 정부다. 더구나 그런 국민당마저 부인하는 민진당이 집권하고 있는 대만과 마주 앉아야 한다. 해저터널 건설을 위한 협상테이블이 마련될 가능성이 너무 낮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런데도 베이징 정권을 지지해온 마윈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대만해협 건설 계획을 다시 들고나온 것은 왜일까. 이는 일종의 통일전선전술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 가능하다. 쑨원이 청나라가 무너진 혼란기에 세계 최대의 싼샤댐 건설계획을 중국 인민들에게 제시한 것은 중국인들의 통합을 촉구하는 일종의 정치 메시지였다. 또 중국공산당이 쑨원의 싼샤댐 건설계획을 실현시킨 것도 중국공산당이 리드하는 중국 정치에 안정성을 강화한다는 차원이었다. 정치적 의미가 경제적 의미에 더해졌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행정부는 대만해협에 구축함 2척을 파견해서 대만해협이 공해임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고, 타이베이에 있는 사실상의 미국대사관인 아메리카인스티튜트에 해병대를 파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하와이의 태평양 사령부의 명칭을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개칭해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기도 했다.
또 호주와의 군사협력을 강화해 중국을 원거리에서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김정은을 싱가포르로 오게 해서 북·미 회담을 개최한 데에도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힘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마윈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대만해협 해저터널 계획을 다시 공론화시키는 의도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국면에서 전 세계 화교사회를 겨냥한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523호 시진핑 평양행 과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9월 9일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싱가포르 영자신문 스트레이츠타임스가 지난 8월 18일 보도했다. 스트레이츠타임스의 시진핑 평양 방문 예상 보도는 일본 NHK TV가 8월 23일 후속으로 받아씀으로써 다시 주목을 받았다.
중국 외교부 루캉(陸慷) 대변인은 8월 20일 “시진핑 국가주석의 다음 달(9월) 조선 방문을 확인해 달라. 중국은 조선반도 무핵화(無核化) 과정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하겠다. 우리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반도의 무핵화와 평화안정에 부단한 노력을 해온 점은 국제사회가 함께 목도해왔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중국과 조선은 우호를 바탕으로 한 이웃나라이며, 중국과 조선의 양당(兩黨·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은 그동안 우호의 왕래를 지속해왔다.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나는 귀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소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평양 방문 여부는 워싱턴 시각 8월 24일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위터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전날 평양 방문 계획 발표와 관련해 트위터를 통해 “북한에 가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북한의 비핵화가 충분히 진전되지 않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라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트럼프는 트위터에서 “우리가 무역 문제에서 중국에 대해 취하는 보다 강력한 자세 때문에 중국이 비핵화의 진전을 위해 도와주던 자세가 이전만 못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또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우리와 중국의 무역 문제가 해결된 뒤 가까운 장래에 북한으로 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는 “나는 김 위원장에게 따뜻한 안부를 전한다. 곧 김 위원장과 만날 것을 기대한다”고도 했다.
트럼프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시진핑이 평양을 방문해서 북·중 관계 강화를 과시하려는 데 대해 못마땅하다’는 것 아니었을까.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8월 25일 트럼프의 트위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말은 기본 사실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엄중한 항의를 이미 전달했다. 중국의 조선반도 핵문제에 대한 입장은 시종일관 명확하다. 우리는 조선반도의 무핵화(無核化)를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중국은 조선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중요하면서도 건설적인 역할을 해왔다. 중국은 그동안 유엔 안보리의 조선 제재 결의안을 엄격하게 집행해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진핑의 평양 방문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시진핑이 9월 이후에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면 9월 9일의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 10월 6일의 북·중 수교기념일, 10월 10일의 북한 노동당 창건일 등을 계기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은, 북한 정부 수립이 주로 소련의 주도로 이뤄진 날이라는 점에서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지금까지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에 정상급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김정은이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시진핑이 답방 형식으로 평양을 방문할 것이라는 논리도 북·중 양국 외교일지를 보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1992년의 한·중 수교로 북·중 관계가 틀어지는 바람에 8년간의 외교공백 끝에 2000년 5월 비공식적으로 베이징을 방문해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만났다. 이후 2001년, 2004년, 2006년 잇달아 중국을 방문해서 장쩌민과 회담했지만 장쩌민은 당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인 1990년과 2001년에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을 뿐 답방이라는 형식으로 북한 방문을 하지는 않았다. 후임 후진타오(胡錦濤)의 시대로 들어선 뒤인 2010년의 경우에도 1년에 세 차례나 김정일의 중국 방문이 이뤄졌지만 후진타오의 평양 방문은 2005년과 2009년 두 차례 실행됐을 뿐 김정일의 빈번한 중국 방문에 특별히 답방이라는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후진타오의 후임인 시진핑은 국가부주석 시절이던 2008년 6월 17일부터 사흘간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난 일이 있다. 당시 평양 순안공항에서는 꽃술을 든 북한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열렬히 꽃을 흔들었다. 당시 시진핑의 평양 방문은 자신이 부주석이 된 후 첫 해외순방이었다. 시진핑은 평양 방문을 시작으로 동남아 5개국 순방을 했다. 시진핑의 한국 방문은 다음 해인 2009년 12월에야 이뤄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진핑이 국가부주석 자격으로 처음 서울을 방문한 2009년 12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진핑 부주석을 접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진핑으로서는 1년 반 전에 평양에 갔을 때 받은 열렬한 대접과, 서울에서 받은 냉대를 깊이 기억했을 것이다. 시진핑은 다음해인 2010년 10월 8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 자격으로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북한 노동당 창당 6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이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주로 당 대 당 관계를 기본으로 유지돼왔다.
시진핑과 김정은의 관계는 2012년 11월 시진핑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뒤인 2013년 2월 김정은이 제3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냉랭한 관계에 빠졌다. 시진핑은 당시 “감히 중국 지도부의 권력교체기에 핵실험을 하다니…”라면서 분노했다고 중국 외교부 소식통들은 전한다. 시진핑은 이후 5년간 평양으로 가지도 않았고,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지도 않았다.
중국의 태도가 바뀐 것은 올해 들어서다.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선언하고,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갑자기 유화 국면으로 돌변하자 부랴부랴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초청해서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북한과 중국 관계뿐만 아니라 남북한 관계와 북·미 관계, 미·중 관계는 항상 급변할 가능성을 안고 있고 실제 그 변화는 어지러울 정도다. 이 4자 간의 관계를 보다 냉정하게 보려면 어느 쪽이 독립변수이고 어느 쪽이 종속변수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자존심과 관계없이 이 4자 간의 관계에서 미·중 관계가 독립변수이고 한·미, 한·중, 미·북, 북·중, 남·북 관계는 종속변수로 보는 것이 보다 냉정한 자세일 것이다. 이를 무시한 과거의 중간자 역할론이라든가, 요즘의 운전자 역할론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보는 것이 보다 냉정한 자세일 것이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4자 관계에 대해 중국 외교부 아주국 동북아처 팡쿤(方坤) 처장은 지난 8월 27일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중국에 대해 남북한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중국이 한국에 대해 미국과 중국 가운데서 한쪽을 택하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중국은 한국에 대해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2525호 시진핑 대신 평양行 서열 3위 리잔수가 쓰는 권력 드라마
지난 9월 9일 오전 10시 김정은은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 퍼레이드 사열대 위에서 자신의 바로 오른쪽에 서 있던 리잔수(栗戰書·68)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왼손을 꼭 쥐고 퍼레이드 대열을 향해 번쩍 들어 보였다. 리잔수는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특별대표 자격으로 당정 대표단을 이끌고 9월 8일 평양에 도착했다. 김정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김정은은 다음날 저녁 리잔수와 중국 당정 대표단을 만수대 예술극장으로 초청해서 만찬과 함께 예술공연을 보여주었다. 김정은은 리잔수와 만난 자리에서 “시진핑 동지가 특별대표가 이끄는 당정 대표단을 파견해서 축하해준 것은 시진핑 총서기와 중국의 당과 정부, 인민들이 본인과 조선의 당과 정부, 인민들 간의 두터운 정을 충분히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귀빈들을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 환대해서 우리들 사이의 특수한 정을 양당과 정부, 인민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여줄 것이며, 조·중 우의가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튼튼하다는 것을 과시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대해 리잔수는 “나는 시진핑 총서기 겸 국가주석을 대표해서 당정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에 온 것”이라며 “뿌리 깊고 잎이 무성한 중·조 우호는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얻어 새로운 역사를 향해 매진해나갈 것이며, 앞으로 두 나라 최고 지도자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치국(治國)의 경험을 교류하고, 두 나라 사회주의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리잔수는 지난해 10월 25일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직후에 열린 제19기 1차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선출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베이징(北京)에 모여든 전 세계 기자들 앞으로 걸어나올 때 시진핑과 리커창(李克强) 총리 다음으로 걸어나온 인물이다. 이를 통해 그는 당내 서열 3위의 자리를 확보했음을 과시했다. 중국공산당 내부 사정에 밝은 중국 안팎의 관찰자들은 이미 5년 전인 2012년 11월 15일 중국공산당 제18기 1차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시진핑이 총서기로 선출될 당시 리잔수가 정치국 위원 겸 당 중앙서기처 서기로 결정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가 이미 시진핑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심복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리잔수는 시진핑 주석이 외국 순방을 나갈 때나 중국을 방문한 외국 지도자들과 만날 때 시진핑에게 가장 근접한 자리에 항상 앉았다. 그 다음 자리에는 시진핑이 발표하는 모든 정책을 만들어낸 왕후닝(王滬寧)이 있었다. 외교 담당 국무위원 양제츠(楊潔篪)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그 다음 자리에 앉았다.
리잔수는 시진핑이 외국 순방을 위해 비행기에 탈 때도 시진핑에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리잔수는 당 중앙 판공청 주임 자리에 앉아 시진핑의 일정은 물론, 시진핑이 보아야 하는 모든 서류를 사전에 검토하고, 시진핑의 경호 업무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리잔수는 시진핑의 첫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임기 5년간 시진핑의 집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지난해 19차 당 대회에서 서열 3위의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됐고, 올해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지난해 19차 당 대회 이후 리잔수의 역할은 상하이 푸단대 출신의 딩쉐샹(丁薛祥·56) 신임 중앙판공청 주임에게 넘어갔다. 시진핑의 첫 임기에 리잔수가 맡던 역할은 이제 딩쉐샹이 수행하고 있다. 딩쉐샹은 시진핑의 해외 순방이나 국내에서 외국 지도자 접견 때 시진핑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보좌하고 있다. 지난 3월 김정은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도 시진핑의 그림자 역할은 딩쉐샹이 맡았다.
시진핑의 복심 리잔수의 숙조부(조부의 동생) 리자이원(栗再溫·1967년 사망)은 산둥(山東)성 부성장과 산둥성 당위원회 서기처 서기를 지낸 사람이었고, 아버지 리정시우(栗政修)는 중국공산당 창당 13년 만에 입당한 초기 공산당원이었다. 리잔수는 일가친척들이 모두 중국공산당을 열렬히 지지한 ‘홍색(紅色) 가정’ 출신이라고 중국 측 자료들은 전한다. 시진핑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미움을 사 박해를 받은 것처럼 리잔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초기 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박해를 받은 비슷한 가정 내력을 가지고 있다.
시진핑과 리잔수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시진핑이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아버지가 복권되면서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현당위원회 서기로 임명됐을 때였다. 시진핑보다 세 살 위였던 리잔수는 당시 바로 이웃 우지(無極)현 현당위원회 대리서기를 하고 있었다. 30㎞ 정도의 거리에 있는 두 현의 당 간부는 의기투합했고 그때부터 30년간 호형호제하며 의리를 쌓았다. 이후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주장한 ‘당 간부의 연경화(年輕化)’ 흐름을 타고 당내 출세를 거듭해갔다. 시진핑은 동부 연안의 경제특구 성에서 당 서기를 하는 동안 리잔수는 허베이, 산시(陝西), 헤이룽장(黑龍江) 등 북부지방에서 당 서기와 성장을 지냈다. 시진핑이 장쩌민 전 당 총서기에게 발탁돼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 시절 다음 당 총서기 내정자로 황태자 생활을 할 때 리잔수도 지방에서 승승장구했고, 2012년 11월 시진핑이 당 총서기로 선출되자 정치국원 겸 중앙판공청 주임의 자리에 앉아 시진핑의 집사 역할을 맡았다.
시진핑의 두 번째 당 총서기 임기 중 리잔수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으로 국내정치적으로 시진핑을 돕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리잔수 대신 시진핑의 집사 역할을 맡고 있는 56세 딩쉐샹의 최대 경쟁자는 부총리 후춘화(胡春華·55)가 될 전망이다. 오는 2022년 개최될 제20차 당 대회에서 누가 시진핑의 후임 당 총서기로 선출될 것인지, 권력 드라마 시나리오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시진핑의 전임 당 총서기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지명해준 후춘화와, 시진핑이 후춘화의 경쟁자로 내세운 딩쉐샹 중 누가 승리할 것인지는 앞으로의 4년이 결정해줄 것이다. 시진핑의 복심 리잔수가 우리의 국회의장 격인 전인대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어떤 국내정치 변화를 보여줄 것인가도 앞으로 중국 국내정치 관찰 포인트가 될 것이다.
2526호 문·김 백두산 등반과 영화 ‘안시성’ 댓글에 숨은 중국인들의 속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9월 20일 백두산 천지를 등반하자 중국 일부 네티즌들이 거친 반응을 보이고 있다. 9월 25일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 달린 댓글들은 이랬다.
“영토를 요구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동북지방에 주둔하는 군대를 증가시켜야 한다. 왜 토론들을 안 벌이냐?”(닉네임 ‘삼국살v부운·三國殺v浮雲’)
“스스로 재수 없는 걸 찾아다니면, 재수 없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닉네임 ‘li864’)
“조선인 더하기 한국인 해봤자 장쑤(江蘇)성 인구도 안 된다. 중국이 접수하는 건 어떨까.”(닉네임 ‘초급·超級 ZHENGYUEAN’)
“남북 쌍방이 직접 이야기한다지만, 미국이 곁에서 간장을 치고 있네.”(닉네임 ‘boss2099’)
“문재음(文在淫)은 결국 노무현과 유사해질 것이다.”(닉네임 ‘늘 눈물이 고여 있는 눈동자·常含泪水的眼睛’)
“(문·김은) 두 마리의 파리.”(닉네임 ‘란저우 쇠고기 칼국수 88·蘭州牛肉拉麵 88’)
“조선 신화에 보면 백두산은 옛날 조선 민족의 발원 성지(聖地)다. 서방의 예루살렘에 해당한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닉네임 ‘중국·아프리카 우호의 사자·中非友好使者’)
중국의 메이저 온라인 네트워크인 텅쉰(騰迅·Tencent)에는 9월 19일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를 인용해서 “파천황(破天荒·전례 없던 놀라운 일): 한국 총통 문재인이 20일 처음으로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을 중국 측이 부르는 이름)을 등정한다고 한다”는 예고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 기사의 한 대목이다.
“중국인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한국 측이 백두산을 말할 때 무슨 뜻인가를. 백두산이 한민족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대표하는가를 중국인들은 모두 알고 있다. 남북 영도인들이 백두산을 등정한다는 것은 남북 민족의 통일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리 판단을 내려본다면, 반도의 남북이 만약 통일을 한다면 첫째, 창바이산 문제가 폭뢰(爆雷)가 될 것이다. 둘째, 동북지역의 출해구(出海口) 문제는 해결 전망이 없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이틀 동안의 한국 매체 보도를 보면 가장 많이 제기되는 용어가 한민족이라는 말이며, 민족에서 민족주의 사이의 거리는 한 걸음밖에 안 된다.”
경제뉴스를 주로 전하는 ‘중국경제 네트워크(中國經濟網)’도 9월 18일 한국 매체의 보도를 인용해서 “문재인 대통령은 등반 애호가로, 조선 측이 창바이산 등반 일정을 준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하면서 “문재인은 왜 백두산을 오르려고 하는가, 그 배후에는 대단히 깊은 정치적 함의가 깔려 있다”는 제목의 논평을 띄우기도 했다.
“백두산, 즉 광의의 창바이산은 중국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3개 성과 러시아 원동(遠東) 지역과 조선반도에 걸쳐 있는 산맥의 총칭이다. 협의의 창바이산은 바이산(白山)시 동남부 지역에 있는 중·조(中朝) 양국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사실상 금년 4월 문재인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제1차 회담을 개최할 때부터 ‘백두산’은 둘 사이의 화제였다.… 동북아 지역의 명산으로서 창바이산은 옛날부터 그 지역 각 민족의 숭배를 받아왔다. 만주족과 조선족 등 많은 민족들이 모두 민족의 기원을 이 산의 전설에 두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학설에 따르면, 조선민족의 신화에 나오는 소위 ‘태백산’과 ‘백두산’은 지금의 조선 경내 묘향산을 가리키는 산이라고 한다.… 경계해야 할 것은 한국이 백두산에 대해 과분한 강조를 한다는 점이며, 한국 국내에 극단적 민족주의가 다시 대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오랫동안 한국 내에는 일단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은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군중들과 중복된다는 점이다. 문재인이 최근 조·한 회담 중에 민감한 백두산 문제를 빈번하게 제기하는 것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신경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 부득불 이 가능성을 방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광망협애한 민족주의” 비난
일부 중국인들은 9월 19일로 한국에서 관객수 210만을 넘어선 영화 ‘안시성’에 대해서도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의 메이저 문화 콘텐츠인 ‘더우반(豆瓣·콩꽃잎)’은 ‘안시성’을 겨냥해 “일부 영화가 일으키는 잡감(雜感)”이라는 장문의 평을 올렸다.
“모국(某國)의 광망협애(狂妄狹隘·미치고 망녕되며 협소하기 짝이 없는)한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모국 사람들의 실제 감정은 비교적 복잡해서, 일부의 민중들에게는 (중국에 대한) 우호의 감정도 있지만, 모국의 일부 사람들의 뼛속에 흐르는 광망협애하고 일말의 근거도 없는 무법적인 감상적 태도에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반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광망(狂妄)함은 심지어는 무지와 역사에 대한 혼란에 이르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모국의 항일(抗日) 드라마들은 열혈적인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것들로, 우리(중국인들)에게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모국의 지식분자와 사학자들은 민족의 우월감으로 두 눈을 가리고, 방문좌도(旁門左道·정당한 길이 아닌 잘못된 길)를 취해 자신들의 깊은 믿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런가 하면,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안시성 성주 양만춘(楊萬春)에 대해서도 이상한 주장을 폈다. “원래는 ‘梁萬春’이었으나 ‘梁’의 한국어 발음 ‘양’과 ‘楊’의 한국어 발음 ‘양’이 같아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양만춘은 전설의 고구려 안시성 성주였으나 근대 애국 계몽운동 과정에서 신채호 등의 선전에 따라 조선반도의 민족영웅으로 바뀌었고, 최근 들어서는 한국의 구축함 이름에까지 쓰이게 됐다.” 바이두(百度) 쯔다오(知道·지식백과)의 주장에 따르면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이라는 주장은 1553년 푸젠(福建) 사람 슝다무(熊大木)가 쓴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에 나오는 양만춘(梁萬春)이라는 이름이 원래 조선에 전해 내려오던 ‘당 태종이 화살에 맞아 눈을 잃다’라는 전설과 결합돼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양만춘 논란의 진실
양만춘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명대 중국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며, 이것이 조선왕조 말에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바이두 지식백과의 주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놀랍게도 2013년 명지대학교 국문과 모 교수가 교내연구비 지원사업에 따라 작성한 논문 ‘안시성 성주 성명 양만춘 고증(Ⅰ)’이라는 논문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중국 검색엔진 바이두 주장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의 양만춘 성명 고증은 “조선 중·후기의 다양한 문헌들을 검토해보면 조선의 지식인 중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년 전부터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안시성주의 성명이 ‘양만춘’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경우가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논문은 중국 검색엔진 바이두의 주장과는 달리 양만춘이라는 안시성 성주 이름이 ‘당서연의’라는 소설에서 먼저 유래한 것이 아니라 “임란 발발 이후인 1593년 선조 26년부터 조선에 출정을 온 명나라 장수들을 통해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사실이 폭넓게 알려지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당서연의’에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梁萬春)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울러 알려지게 됐다”고 고증하고 있다.
조선일보 2008년 8월 6일자에 실린 ‘이덕일 사랑(舍廊)’의 필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당 태종의 눈을 쏘아 맞힌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정작 ‘삼국사기’나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고 소개하고, “조선의 윤기(尹耆·1741~1826)가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당시의 사관들이 중국을 위해서 휘(諱·꺼려서 쓰지 않음)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덕일 소장에 따르면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비롯한 많은 조선시대 문적들에 나온다. 특히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내가 명나라 학자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상고해보니 안시성 장수를 양만춘이라고 썼다”고 적었다고 한다. 이덕일 소장은 “당 태종의 눈이 양만춘의 화살에 떨어진 사실은 고려 말에도 알려져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라는 사람은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용의 수염 눈동자를 화살 한 대에 떨어뜨렸네’라는 한시를 남겼다고 전했다.
문·김의 천지 등정도 비난
당 태종의 공격으로 시작된 안시성전투는 서기 645년 고구려 보장왕 4년에 일어난 전쟁이다. 당시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5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서 88일간 안시성을 공격하다가 패전하고 철군했다는 사실은 중국 측 기록들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불과 23년 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고려와 조선왕조, 특히 중국의 유교를 국가철학으로 삼은 조선의 문화사대주의 속에서 당 황제의 눈을 쏘아 맞힌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기록은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조선 말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실학의 흥기와 함께 양만춘의 이름이 되살아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번에 올라간 백두산 천지는 북한과 중국이 1964년 3월 20일 베이징(北京)에서 체결한 ‘중·조변계의정서(中朝邊界議定書)’에 따라 중국이 전체 면적의 54.5%를 북한의 영토로 인정한 곳이다. 정당한 국제법에 따라 획정된 한반도의 일부인 천지에 남북한 정치 지도자가 등정한 데 대해 중국인들이 민족주의를 걸어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우리 해군이 양만춘의 이름을 국산 구축함에 사용했다고도 시비를 걸고 있다. 중국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야말로 실로 문제이며, 동아시아 평화 안정에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528호 ‘도둑질’ 발언 펜스 부통령의 대중 연설이 의미하는 것
허드슨인스티튜트는 미래학자이자 군사전략 분석가인 허만 칸이 1961년 뉴욕에서 설립한 싱크탱크다. 정치적으로 보수를 지향하는 허드슨인스티튜트는 현재는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다. 미 공군을 위한 정책 개발을 하고 있는 RAND연구소도 지원하고 있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지난 10월 4일(현지시각) 허드슨인스티튜트에 나가 ‘미 행정부의 중국 정책’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부통령이 중국에 대한 미 행정부의 기본 시각을 정리해서 발표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펜스 부통령은 이 연설에서 중국에 대해 “도둑질(theft)”이라는 표현을 구사해가며 강력한 내용의 연설을 했다. 펜스 부통령은 연설 앞부분에서 미국과 중국의 전함이 지난 9월 30일 남중국해에서 거의 충돌할 뻔했던 사건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베이징 당국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 함정들은 정기적으로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주위를 순찰하고 있다. 센카쿠열도는 일본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섬들이다. 2015년 백악관 로즈가든에 섰던 중국 지도자는 중국이 남중국해를 군사화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이징은 더욱 발전한 대함(對艦)미사일과 대공(對空)미사일을 장착한 군함들을 남중국해의 인공섬에 건설한 중국 군사기지들에 이미 배치했다.… 중국의 공격적인 태도는 이번주에 잘 나타났다.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수행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 디케이터(Decatur)함 45야드 거리로 중국 해군의 구축함이 다가왔다. 우리의 디케이터함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긴급 기동을 해야 했다. 미 해군 함정은 중국 해군의 그런 공격행위에도 국제법이 허용하는 항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우리의 국익을 지킬 것이며 결코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미 해군이 제공한, 디케이터함과 중국의 구축함 란저우(蘭州)함의 대치 사진을 보면 길이 150여m의 최신 미사일 구축함 두 척이 초근접하는 장면과, 디케이터함이 충돌을 막기 위해 회피 기동하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미 해군은 란저우함이 선미로 디케이터함의 뱃머리 쪽을 가로막아 충돌 일보직전이었으며, 두 군함의 거리는 41m에 불과해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디케이터함이 오른쪽으로 선수를 돌렸다고 주장했다. 펜스 부통령은 두 구축함 사이의 거리를 ‘45야드’라고 표현했는데 골프가 생활화되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45야드라는 거리는 그린 주변에서 웨지 클럽으로 짧은 어프로치를 하는 거리로 인식되고 있다.
디케이터함은 당시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南沙群島)의 게이븐(중국명 난쉰자오·南薰礁), 존슨(중국명 츠과자오·赤瓜礁) 암초 12해리(약 22㎞) 이내 해역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미국은 2015년 10월 구축한 라센함의 스프래틀리제도 진입을 시작으로 1개월에서 7개월 단위로 총 12차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수행했다. 디케이터함은 2016년 10월 21일에도 스프래틀리제도의 게이븐·존슨 암초에서 지그재그 기동을 수행한 바 있다.
펜스 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지난해 4월 6일과 11월 8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했다. 4월 6일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소유의 마라라고 골프장에서 서로 친근감을 과시한 때이고, 11월 8일은 트럼프가 베이징을 방문해서 황제 대접을 받던 날이다.
“지난 2년간 우리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서로 긴밀히 협조해왔다. 그러나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연설을 하게 된 것은 미국 국민들이 왜 베이징 당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 그리고 선전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미국 내 자신들의 영향력과 이익을 확대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 미국의 국내 정책과 정치에 간섭하려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 행정부로서는 중국의 그런 행동에 결단력 있는 반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원칙과 정책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펜스는 중국의 현대사와 자신의 개인적인 배경을 들어가며 연설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시작됐을 때 우리 미국과 중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같은 편에 서 있었다. 전쟁 후반부까지도 우리 미국은 중국이 유엔의 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전후 세계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국가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1949년 권력을 잡은 뒤 그들은 독재체제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불과 5년 뒤에 (펜스의 착각, 실제로는 1년 뒤 1950년) 우리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의 산과 계곡에서 서로 싸웠다. 나의 아버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최전선에서 전투를 목격했다. 잔인한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상호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런 관계는 1972년에야 끝났다. 우리는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했고, 경제를 서로 개방했고, 미국의 대학들은 중국의 새로운 세대와 엔지니어, 기업인, 학자, 관리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붕괴되자 우리에게는 보다 자유로운 중국이 필요했다.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미국은 낙관적인 생각에 따라 중국이 우리 경제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했고, 중국을 WTO(세계무역기구)로 안내했다.”
이어 펜스의 연설은 이런 내용으로 이어졌다.
“우리의 이전 정부들은 중국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유가 확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경제적으로는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정치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사유재산, 종교의 자유, 그리고 온 가족이 누리는 인권 자유가 잘 자리 잡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런 희망은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자유의 꿈은 중국 국민들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베이징 당국은 여전히 ‘개혁과 개방’을 할 것이라고 립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개혁개방 정책은 요즘에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25년 만에 중국 재건축하겠다
“지난 17년간 중국의 GDP는 9배로 커져서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갖게 됐다. 이런 성공의 대부분은 중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투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 관세와 환율 조작, 강제적인 기술이전, 지적재산권에 대한 절도행위, 그리고 산업 보조금 지급 등의 정책들을 마치 캔디를 뿌리듯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이런 정책들은 베이징에 산업기지를 만들었고, 주로 미국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중국의 그런 행동들은 미국에 무역적자를 안겨주었다. 지난해 미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는 3750억달러에 달했다. 그 규모는 우리 미국의 전 세계에 대한 무역적자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주에 ‘25년 만에 중국을 재건축(rebuild)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중국공산당은 ‘메이드 인 차이나 2025(中國製造 2025)’라는 계획을 세우고, 전 세계 선진기술의 90%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로봇산업, 생명공학, 인공지능이 모두 포함돼 있다. 중국은 21세기의 경제 수준 확보를 위해 관리와 기업인들을 총동원하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미국의 지적재산을 획득하려고 하고 있다. 베이징 당국은 많은 미국 기업인에게 중국 내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대가로 미국 기업의 비밀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 기업을 사들이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악의 상황은 중국 정보기관들이 미국의 최첨단 군사 청사진들을 대규모로 도둑질(theft)해왔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아시아 곳곳에서 미국의 군사적 이점들을 잠식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그런 시도들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우주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미국을 태평양 서쪽 지역에서 밀어내는 것이고, 미국이 이 지역의 동맹국들을 돕지 못하도록 차단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의 ‘도둑질’ 공개 비판
펜스 부통령이 말한 ‘태평양 서쪽 지역’과 관련해 7년 전 오바마 행정부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이 지역의 우리의 전통적인 친구들, 일본과 한국, 필리핀,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힘을 합해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잘 발전하는 지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은 2011년 10월 하와이 이스트웨스트센터에서 한 ‘21세기는 미국의 태평양 세기’라는 연설을 통해 그렇게 선언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뤄진 펜스 부통령의 이번 연설 내용으로 보면 오바마 행정부의 서태평양 중국 저지 정책은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국정 전반의 부족한 곳을 메우는 것이 주임무인 펜스 부통령이 직접 나서 중국에 대한 정책을 종합적으로 재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번 연설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로서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이처럼 심상치 않은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점을 잘 관찰해야 한다.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대외정책 수립에 이러한 미·중 관계부터 심각하게 참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진행 중인 미·중 관계 흐름과는 동떨어진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구축 방안은 실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혹시라도 우리 정부가 미국보다는 중국 쪽에 기울어지고 있다는 판단을 미국이 하게 될 경우 우리는 혹독한 부담을 떠안지 않을 수 없게 될 전망이다. 펜스 부통령의 연설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스터블리시먼트(기성체제)에서 진행되는 중국에 대한 정책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말고 잘 지켜보아야 할 때다.
2530 북한 학자들 아직도 “새 길은 없다 선대 수령의 길로”
지난 10월 13~14일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주도 옌지에서는 옌볜대와 한국고등교육재단 주최로 두만강 포럼 학술회의가 열렸다. ‘인류운명 공동체 건설과 두만강 유역 국제교류와 협력’을 주제로 한 포럼에서는 북한 학자들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 이른바 ‘조·중(朝中) 대화’ 자리가 마련됐다. 10월 14일 오후 옌볜대 과기루(科技樓)에서 열린 조·중 대화에는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김경철 역사학부 강좌장, 김창해 외국어문학부 중국어 강좌장, 김홍일 경제학부 무역경제학 강좌장이 참여했고, 중국 측에서는 장위산(張玉山) 지린성 사회과학원 교수, 장둥밍(張東明) 랴오닝(遼寧)대학 교수, 정지융(鄭繼永) 상하이 푸단대학 교수, 박영애(朴英愛) 지린대학 동북아연구원 교수, 왕지에(王傑) 윈난(雲南)대학 교수, 정랴오지(鄭遼吉) 랴오둥대학 교수 등이 참석해 1 대 1 맞토론을 벌였다. 토론 주제는 ‘동북아 평화발전 중의 중·조 협력’이었다. 이 토론에서 나온 발언들이 북한의 속내를 드러낸 듯해서 현장에서 녹취해 전달한다.(중국과 북한이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북한과 중국 학자들의 발언 내용을 실명을 밝히면서 1 대 1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조·중 친선과 관련 우리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장군님 선대가 마련해놓으신 업적이 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한 관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의 전략적 위치는 중요하고, 동북아가 국제관계의 중심이었다. 냉전 시기 동북아는 국제정세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냉전시기에 조선반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장이었다. 이후 전략적 중심 지위는 유럽으로 이동해갔다. 동북아는 인구도 많고, 열강들이 동북아 지역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왔다. 동북아 정세에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지만,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의사소통과 전략적 협동이 중요하다. 이때까지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반도는 육상세력과 해상세력이 적대관계를 이루는 접경지대가 되어왔다. 조선반도를 거쳐야 육상세력과 해상세력이 옮겨다닐 수 있었다. 근대 시기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도 조선반도를 대단히 중시해왔다. 우리도 2012년 7월부터 사회주의 경제노선을 추진하기 위해 주변국들과 국제사회와의 긴밀한 연계를 중시해왔다. 공화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의사소통과 협력을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께서도 첫 대외활동을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하셨다.”
“이 지역에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는 평화와 안전이다. 첫 번째 문제인 안전 문제에는 중·조 간의 협력과 노력이 중요하다. 중국 정부도 안전을 위한 협력을 동북아의 중요한 문제로 판단하고, 새로운 협력 발전관을 마련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는 시장경제가 중요 작용을 한다고 보고 정부 주도로 미래 협력발전 기제를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포럼의 주제인 인류운명 공동체 건설은 평화·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국가의 건설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다.”
“동북아의 발전과 평화 발전 문제라면 이 분야를 담당할 인재를 키워야 한다. 그런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 중요하며, 인재가 준비돼야 그 문제를 담보할 수 있다.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도 그에 관해 강령적 지침을 주셨다. 얼마 전 어느 정도 역사가 깊은 항저우(杭州)에 갔댔는데 차를 타고 마오쩌둥 동상을 지나다가 어떤 어린이에게 그 동상이 누구 동상이냐고 물어보았다. 그 동상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본 건데, 놀랍게도 대답은 ‘교통순경 아니냐’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신문·잡지를 봐도 중·조 친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당 나라(중국을 가리킴)의 조선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 해당 나라의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지만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데 우리나라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질문에 맞는 대답인지는 모르나 선생께서 시장경제체제 국가 주도의 방식에서 시장 주도 방식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얘기했는데 제 생각에는 중국에는 중국 방식이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사회주의를 건설해나갈 것이며, 결코 국가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 지역의 화평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에 새로운 협력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얄타 체계로는 불가능하다. 앞으로의 중·조 협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큰 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자는 기치를 들었다. 동북아에는 열강 대국들이 모여 있다. 중국도 일본도 있다. 누가 패권을 쥘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우리 당은 이미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남북 수뇌회담과 조·미 수뇌회담이 전쟁이 없는 역사적 기회를 만드는 데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나도 한마디 합시다. 동북아 지역 평화와 중·조 협력을 위해 우리 공화국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공화국의 경애하는 지도자께서는 배짱에 의해 평화와 안전을 담보했다. 우리 공화국이 그야말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쟁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도 중국식 사회주의로 경제 건설을 하고 있지만, 우리도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으로 경제 발전을 시키고 있다.”
“나도 한마디 합시다. 내 개인적 생각에 조·중 친선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선대 수령께서는 1962년에 마오쩌둥 주석과 조약(조·중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계승 발전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것을 잘 계승하면 된다. 공동체 문제에 관해 중국은 우리와는 다르다. 유럽공동체에서도 이미 많은 문제점이 있는데 동북아에서 이런 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선대 수령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계승하면 되는 것이다. 정치·문화·경제 모든 면에서 계승하자. 남북 조선 사이에서는 6·15선언을 계승한 것이 10·4선언이고, 이 정신을 계승한 것이 4·27선언이다. 이번에 우리의 지도자들께서 백두산에 오른 것에는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들께서 오른 백두산 남쪽으로 남조선 모든 사람들이 오를 날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날 이뤄진 북한과 중국 학자들 간의 대화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의 4·27선언 이후 처음 이뤄진 북한과 중국 지식인들 간의 공개토론이었다. 중국 학자들이 경제발전의 중요성과 개혁개방을 강조했으나,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의 북한 학자들은 아직 새로운 사고방식을 마련하지 못했는지 “위대한 수령, 위대한 장군님, 위대한 지도자 동지가 마련해놓으신 길을 따라가면 된다”는 말을 주로 반복했다.
2531호 아베와 시진핑의 ‘同床異夢(동상이몽)’ ‘同夢異床(동몽이상)’?
청과 일본의 해군은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전쟁을 개시했다. 현재 중국 측이 ‘갑오(甲午)전쟁’, 일본이 ‘일청(日淸)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이었다. 전쟁은 1895년 2월 12일 일본 해군이 산둥(山東)반도 웨이하이(威海)에 주둔해 있던 청 북양함대의 본부기지를 급습, 대부분의 전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종결됐다.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과 일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종전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2000년 이상 중국 왕조의 영향권 내에 있던 한반도를 처음으로 중국대륙으로부터 떼어낸 것이었다.
일본은 1931년과 1937년에 각각 만주사변과 일·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과 중국의 전쟁 상태는 일본군이 미 하와이를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선포함으로써 종결됐다. 이후 26년간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이나 교류가 없었다.
1971년 7월 9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는 전 세계가 모르는 가운데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회담을 시작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이래 26년간 미·중 간에 아무런 접촉이 없던 시대의 종결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8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79년 1월 1일 공식 외교 관계의 회복을 선포한다.
미국과 소련이 두 개의 축이 되어 유지되던 양극화 시대는 닉슨과 마오가 각각 상대방을 이용해서 소련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는 판을 짬으로써 미·소·중 3극화 시대로 바뀌었다. 국제정치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감지한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미국을 앞질러 1972년 7월 25일 베이징을 방문해서 중국과 일본이 수교를 하기로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1978년 10월 23일에는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부총리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국의 평화우호조약’에 서명한다.
중국과 일본은 중·일 공동성명 발표 40주년이 되는 2012년에는 아무런 기념행사를 하지 않았다. 2011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하와이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 정책을 다시 시작하는 ‘미국의 21세기는 태평양 세기’라는 연설을 하면서 일본의 중국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정책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일본명 센카쿠(尖角)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을 앞세워 중국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10월 25일부터 이틀간 ‘일·중 평화협정 체결 4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을 방문해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 결과는 아무런 주목거리도 없는 내용이었다. 발표된 회담 결과는 “중국과 일본은 세계의 주요한 경제적 위치와 영향력을 가진 국가로서 두 나라 관계가 장기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된 발전을 하는 것이 두 나라 국민과 이 지역과 국제사회의 보편적 기대에 부합한다”라는 것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만남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였다.
일본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근대사에서 일본의 행동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변화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중국에 대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일본이 올해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40주년에는 왜 중국에 우호적으로 다가갔을까. 아베 총리가 베이징 방문길에 나선 데에는 현재 미국과 중국이 두 개의 축이 되어 유지되는 국제질서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관련 중국 내 종이신문 가운데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참고소식(參考消息)’은 10월 31일 ‘일본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계속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일본 방위연구소 고급연구원 사타케 도모히코(佐竹知彦)의 아베 방문 진단 글을 실었다.
“일·미 동맹이 아직도 일본 외교정책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반드시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지지하는 이전의 태도를 넘어서야 하며, 이 지역에서 일본의 독립적 역할을 확보해야 한다.… 2차 대전 종전 이래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지지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고, 미국의 기술을 획득해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룬다는 전략을 추진했는데 일본은 경제 기적을 이룩함으로써 그 전략이 옳았다는 판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미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등장으로 국제질서라는 거함이 이미 누수(漏水)가 시작된 마당에 일본이 미국의 침몰에 동반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일본은 이 지역에서 친구와 동반자에 대한 낡은 사고방식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이 미군의 수중에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되찾아오려는 방향을 설정하는 한편, 중국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북)조선과도 평화 담판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베가 일본 총리로서 7년 만의 베이징 방문길에 나선 것이 앞으로 일본의 대외정책 변화를 시사하는 행동으로 보는 것은 좀 시기상조라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미국 내 일본 권위자인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을 통해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 쪽으로 이전보다는 좀 더 다가섬으로써 미·중 양국에 양다리를 걸치려 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나이 교수는 “그러나 아직은 아베 총리가 시 주석에 다가가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보다 더 나가지 않는 한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아 있는 게 최선일 것”이라고 권고했다.
결국 아베 일본 총리의 이번 베이징 방문은 현 단계에서 아베와 시진핑이 같은 침대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同床異夢), 또는 서로 다른 침대에서 자면서 같은 꿈을 꾸는 동몽이상(同夢異床)의 상황 이상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판단된다.
2534 화제의 책 ‘백년의 마라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11월 30일~12월 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GDP 총액 규모로 1·2위 국가가 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이미 무역전쟁이 불붙고 있는 가운데 만나는 트럼프·시진핑의 ‘트시 미팅(特習會)’에서 과연 또 다른 불꽃이 튈 것인지, 돌연한 화해라는 극적 반전(反轉)이 이뤄질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베이징(北京)의 분위기는 극적 반전을 기대하는 편이지만 워싱턴의 분위기는 또 다른 불꽃이 튈 것이라는 예상이라고 한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무역전쟁이 세계 패권을 놓고 대결하는 신냉전이 될 것인지,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져 미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갈수록 증폭되는 가운데 미 허드슨연구소 중국전략연구센터 소장 마이클 필스버리(Michael Pillsbury)가 쓴 ‘백년의 마라톤(The Hundred Year Marathon)’이라는 책이 미국 안팎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의 관점에 따라 “미·중 관계는 앞으로 패권 전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마이클 필스버리는 보수 성향의 허드슨연구소의 대표적인 중국전략 전문가로, 미 국방부 중국 전략 담당관을 지냈다.
필스버리의 ‘백년의 마라톤’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36계 가운데 제1계인 ‘만천과해(瞞天過海)’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바로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는 뜻이다. 강한 적과 싸울 때의 손자병법 제1계는 기만전술로, 적의 눈을 피해 적이 모르는 가운데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계략이다. 필스버리의 ‘백년의 마라톤’은 미국이 그동안 중국의 만천과해 계략에 빠져 속아왔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중국을 공부하는 많은 미국 학생들은 중국을 서양 제국주의 앞에서 무기력했던 피해자로 보는 시각을 갖도록 교육받아왔다. 1945년생인 나(필스버리)도 196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면서 국제정치학 교수들이 서양과 일본은 어떻게 중국을 잘못 상대해왔는지에 대해 반복해서 강조하는 강의를 들었다. 우리 세대는 무언가 중국에 대해 속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우리를 가르치는 많은 교과서들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 시각은 우리에게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중국을 도와주어야 하며, 중국을 선의의 국가이며, 서양제국주의의 희생 국가로 단정하는 맹목적인 고정관념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런 시각은 미 행정부에서 중국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일방적인 견해를 형성했으며,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미 대통령과 미국 지도자들에게 제공하는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필스버리는 미국의 중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중국어조차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중국어는 알파벳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있을 뿐이며, 예를 들어 ‘ma’라는 발음을 가진 단어는 성조에 따라 4개의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로 변화한다는 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ma’가 제1성으로 발음되면 ‘mother’라는 뜻을 가진 ‘ma(媽)’가 되고, 제2성으로 발음되면 ‘마비된다’는 뜻의 ‘ma(麻)’가 된다. 또 제3성으로 발음되면 ‘horse’라는 뜻의 ‘ma(馬)’가 되고, 제4성으로 발음되면 ‘욕한다’ ‘비난한다’는 뜻의 ‘ma(罵)’가 된다. 중국어가 미국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언어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스버리는 “중국어는 너무 복잡해서 마치 비밀 암호코드와 같으며 외국인들은 웬만큼 번역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오판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필스버리는 1983년에 출판된 ‘덩샤오핑 문선(鄧小平文選)’에서 사용된 생략화법을 베이징을 방문하는 미 상원의원 대표단에 설명해주어야 했다고 한다. 또 1987년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주 총리가 사용하는 모호한 표현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를 만들어야 했고,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미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 한 말은 거의 암호를 해독하듯 풀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1971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과의 화해정책을 펴며 이른바 ‘건설적인 개입(constructive engagement)’이라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에 대한 지원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건설적인 개입’ 정책은 학자들과 외교관, 대통령들과 정책 입안자들, 저널리스트의 생각을 지배한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필스버리 자신도 수십 년 동안 그런 생각으로 중국에 대한 정책을 입안했다고 고백했다. 그 과정에서 필스버리 자신을 포함한 미국의 중국 정책입안자들은 허약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중국을 민주적이고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일방적 생각(wishful thinking)’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필스버리는 자신을 포함한 미국의 중국 전문가와 연구자들의 그런 잘못된 선입견들은 5가지의 잘못된 견해를 갖도록 만들었다고 정리했다. 첫째 적극적인 개입이 미국과 중국의 협력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판단, 둘째 미국의 지원이 중국을 민주주의의 길로 안내할 것이라는 판단, 셋째 중국이 허약한 꽃송이라는 판단 등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넷째 중국은 미국과 같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일방적인 판단을 미국이 하게 됐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중국 내 매파(강경파) 세력이 약하다는 터무니없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필스버리는 미국이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시작 이래 40년 동안 중국을 지원해왔는데, 그 결과 미국의 국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중국의 정치적 개입 상황과 마주치게 됐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것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100년이 되는 2049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 패권국을 차지하는 전략”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필스버리는 결국 2049년에는 전 세계의 질서를 중국이 재편하는 판이 짜일지도 모르며,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중국의 계략은 손자병법 36계 가운데 30번째 계략인 ‘The guest becomes the owner(反客爲主·손님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다)’ 계략이라고 진단했다. 필스버리는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을 거쳐 현 시진핑까지 100년간에 걸친 마라톤을 통해 중국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바로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 패권국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지난 10월 4일 “미국은 앞으로 중국을 rebuild(재건축) 하겠다”고 경고한 것이 바로 필스버리의 ‘백년의 마라톤’의 영향이라는 것이 워싱턴 중국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한다.
2536호 ‘新三民주의’ 등장 대만 운명에 중대 변화 예고?
지난 11월 24일 치러진 대만 중간선거 결과 ‘신삼민(新三民)’이 등장, 대만의 앞날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다고 홍콩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시사주간 아주주간(亞洲週刊)이 12월 9일자로 보도했다. 전 세계의 화교들을 주 독자로 하는 아주주간은 베이징(北京) 편도, 타이베이(臺北)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태도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매체다.
아주주간이 말하는 대만 ‘신삼민(주의)’의 등장은, 전통적으로 민주진보당(民進黨)의 가장 중요한 지지 기반인 남부 가오슝(高雄)시 시장 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이 대만 정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6년 이래 최초로 국민당 후보 한궈위(韓國瑜·61)에게 패한 배경 설명으로 제시한 것이다. ‘삼민주의’는 2100여년의 중국 왕조사를 끝내고 1912년 최초의 국민국가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수립한 주역 쑨원(孫文)이 제시한 ‘민족, 민생, 민권’을 국가의 최대 정책목표로 삼는다는 이념이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공통으로 ‘국부(國父)’라고 인정하는 쑨원은 100여년 전 자신이 제시한 삼민주의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물자의 왕성한 유통, 자원의 최대한 활용, 인재의 최대한 활용(貨暢其流 物盡其用 人盡其才)’을 내세웠다. 가오슝에 전혀 정치기반이 없어 공천한 국민당조차도 ‘버리는 카드’로 계산했던 한궈위는 이번 선거 구호로 삼민주의를 현대적 용어로 풀이한 ‘물자는 수출할 수 있어야 하고, 인재는 받아들여야 하며,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는 것(貨出去 人進來 發大財)’을 제시해 국민당이 예상하지 못한 대승을 거두었다. 한궈위는 가오슝 전체 선거인 수 228만1338명 가운데 73.54%가 투표한 11월 24일 지방선거에서 유효 투표수의 53.84%인 89만2545표를 확보해서, 44.80%인 74만2239표를 얻은 민주진보당 천치마이(陳其邁) 후보를 15만표 이상 따돌리고 승리했다. 한궈위의 소속 정당인 국민당조차도 당초 ‘30만표 차이 이상의 패배’를 예상했었는데 엄청난 반전이었다.
한궈위의 승리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지난 11월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2016년 5월 당선된 이래 양안의 평화발전이라는 정치기초를 파괴하고, 대만 독립이라는 양안 분열 활동을 지지하며, 양안 민중들 간의 교류와 협력을 제한해서 ‘하나의 중국’을 두 개의 국가로 분리하자는 ‘양국론(兩國論)’을 내세워 양안 간의 적대감정을 고양시키며 대만 동포들의 이익에 엄중한 손해를 끼쳐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민진당은 대만 독립의 입장을 버리고 양안 간 평화발전의 정확한 길로 되돌아오라”고 촉구했다.
대륙의 수도 베이징에 특파원을 두고 있는 우리 미디어들은 약 1800만명의 유권자가 특별시와 현급 시의 시장 및 시의원을 비롯해 9개 분야 1만1130명에 달하는 공직자를 한 번에 선출하는 이번 ‘구합일(九合一)’ 선거에 대부분 현장 취재기자를 파견하지 않았다. 우리 미디어들은 대부분 가오슝시를 비롯해 22개 지역 선거에서 15명의 국민당 후보가 압승을 거둔 이유에 대해 “대만 민심이 대만 독립보다 하나의 중국을 선택한 결과”라고 전했다. 그런 분석은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의 진단과 같은 흐름의 결론이다.
그러나 아주주간은 한궈위 후보가 정치보다는 경제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과, 농어민 권익 보호, 기업과 정권의 우호적인 관계 정립, 혁신의 중시 등을 내세우며, 무엇보다도 양안관계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가오슝의 가치’와 ‘대만의 가치’를 상승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에 가오슝 시민들이 지지를 보냈다고 진단했다. 한궈위는 선거 과정에서 “국민당을 상징하는 남색(藍色)과 민진당을 상징하는 녹색(綠色) 진영 간의 ‘남록지쟁(藍綠之爭)’은 이제는 신물이 난다”면서 더 이상 국민당과 민진당 간의 투쟁으로 대만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만의 내각도 그 출신이 남색(국민당 출신)이냐, 녹색(민진당 출신)이냐를 기준으로 선발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전문성과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열정을 갖고 있느냐”는 3개항만을 기준으로 발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가오슝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대만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분열해서 내전을 치르기 이전 쑨원이 건립한 중화민국을 양안 간의 국체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그는 실제 선거과정에서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흔들었고 ‘산천은 장려(壯麗)하고, 물산은 풍성하네…’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국기가를 선거운동원들에게 부르게 했다. 이 점이 가오슝 시민들의 정서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주주간은 한궈위 후보가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중국인이며, 대만 사람들도 모두 중국인이다”라면서도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자신들만이 ‘중국’이라면서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라는 논리를 편 점이 역사적으로 국민당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오슝 시민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다고 분석했다.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의 주장처럼 “대만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대만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대만과 대륙은 하나의 중국에 두 가지 표현(一中各表)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었다.
한궈위는 특히 “세계 3대 항구의 위치에까지 올라갔던 가오슝이 중국 경제의 부상과 대만 민주진보당의 분리독립 추구로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세계 12대 항구에도 겨우 끼이는 처지가 됐다. 가오슝의 영광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득표의 주요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한궈위는 자신의 전공인 ‘농업’ 분야에서도 대륙의 기업들이 농산물 품질 향상과 포장, 물류 방면에서 대만을 앞서면서, 대만 농산물 수출이 위축된 점을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농산물 분야에서 대만과 대륙이 윈윈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 많은 가오슝 농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또한 그는 ‘ABC 방안’이라는 농업 분야 활성화 방안을 제시, “대륙이 현재 앞서가고 있는 인공지능, 블록체인,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에서 대만과 대륙이 상호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환영을 받았다.
한궈위 후보가 전통적인 민진당 지지 기반 가오슝에서 15만표 이상의 압승을 거둔 배경은 결코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라는 베이징 주장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각자의 대표권을 가지고 윈윈협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주주간의 분석이다. 아주주간은 “한궈위의 주장은 ‘한궈위 주의’로 자리매김되어야 하며 쑨원의 삼민주의의 새로운 판본으로 자리 잡아 대만의 운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2538 중국공산당 정치국원들은 ‘집체학습’에서 무얼 공부하나
중국공산당 권력구조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돼 있다. 14억 인민을 리드할 유일 정당이라는 헌법적 권리를 부여받은 중국공산당 당원 숫자는 2017년 말 현재 8956만여명이다. 중국 사람들 가운데 6.5% 정도가 중국공산당원이다.
세계 최대의 거대정당인 중국공산당의 핵심 지도부는 25명의 정치국원들이다. 정치국원들은 국가와 당의 현안이 있을 때 수시로 모여 회의를 한다. 이 가운데에서도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를 비롯한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베이징(北京) 중심부인 중남해(中南海) 일대에 함께 거주하면서 언제든 국가와 당의 현안에 관한 회의를 소집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체로 중·고교를 다니는 동안 공부 잘하고, 인간관계 좋고, 사회봉사에 적극적인 학생들 가운데에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단원들이 선발되고, 이 공청단원들 가운데 만 18세가 넘으면 중국공산당 입당 자격이 주어진다.
중국공산당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8년 12월 18일에 열린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의 주도로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래 빠른 속도로 당원수를 늘려와서 현재 당원수 1억명에 가까운 세계 최대 정당이 됐다.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주도로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래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빠른 속도의 경제발전을 해왔다. 그런 발전속도에 적응하기 위해 핵심 지도부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 당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일본식 벤쿄가이(勉强會) 형식의 ‘집체학습’을 끊임없이 해왔다. 국내외 전문가를 초빙해서 하는 집체학습의 내용은 개혁개방 초기에는 경제학 원론 수준이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현대경제학의 체계,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빅데이터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에까지 논의가 깊어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인 과목이나 헌법, 합법적인 반부패 활동에 대한 토론도 집체학습에 포함돼 있다. 중국공산당의 집체학습은 링다오(領導)들이 솔선수범한다는 원칙 아래 진행되고 있다.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평가되는 덩샤오핑 역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와 재미 중국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을 초청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핵심 25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의 집체학습은 그 내용이 전 인민에게 공개된다. 또 ‘학습시보’라는 신문을 통해 중국공산당원들의 학습의욕을 자극하는 교재로도 활용된다.
지난 12월 13일 중국공산당 정치국원들은 제11차 집체학습을 실시했다. 지난해 10월 제19차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치국원 25명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체학습을 하는 중이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정치국원들은 지난 5년간 모두 43차례의 집체학습을 했다. 최근의 중국공산당 정치국 집체학습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국가전략’을 논의하면서 시진핑은 이런 당부를 했다.
“빅데이터는 정보화의 새로운 발전단계에서 출현한 것이다. 빅데이터를 구현하려면 빅데이터 기술산업의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 관건은 디지털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국가 거버넌스의 현대화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민생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데이터의 획득과 분석, 운용, 당 간부들의 공작 수준도 높일 수 있다.”
시진핑은 경제 시스템의 현대화 집체학습에 나가서는 이런 당부를 했다.
“강한 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경제시스템이 현대화되어야 한다. 현대화된 경제시스템을 갖추어야 국제사회에서 현대화된 발전조류에 순응할 수 있고 국제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의 꿈도 현대화된 경제체제를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현대화된 경제체제의 빠른 건설만이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려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게 해줄 것이다.”
시진핑은 지난 10월 31일에 있었던 ‘인공지능 발전의 현상과 추세’라는 집체학습에 나가서는 이런 인사말도 했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과학기술혁명과 산업혁명의 중요한 구동역량이다. 새로운 제너레이션의 인공지능을 갖추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우리 중국이 과학기술혁명과 산업혁명의 기회를 잡느냐 못 잡느냐는 운명이 걸린 전략적 문제이다. 새로운 세대의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데 대해 심각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경제사회의 발전과 인공지능의 건강한 발전을 어떻게 융합시키느냐에 대해서도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현 정치국원 25명을 이끄는 시진핑 당 총서기와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각각 중국 최고의 대학으로 평가받는 칭화(淸華)대와 베이징대에서 각각 법학 박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들 외에 정치국원 25명 중 30%에 가까운 7명이 박사학위 소지자다. 56%에 해당하는 14명이 석사학위 소지자이고, 나머지 모두가 대학 학력 소지자들이다. 이 가운데 중국공산당의 브레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왕후닝(王滬寧)은 미 아이오와대학과 UCLA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한 경력이 있고, 경제를 전담하는 류허(劉鶴) 부총리는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공공관리학 석사 소지자이다. 외교담당 정치국원인 양제츠(楊潔篪)는 난징(南京)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중국공산당은 40년 전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래 ‘교육을 통해 국가를 재건한다’는 목표 아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체제이면서도 교육에서만큼은 철저한 경쟁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지난해부터는 시진핑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쌍일류(雙一流)’ 계획에 따라 중국 내 100개의 대학과 그 대학 내 100개의 학과를 대부분 세계 100위권 대학과 학과 대열에 진입시킨다는 의욕적인 교육혁명 계획을 추진 중이다.
2539호 12.31 “국운 위기” 예언 난무 2019 중국 불안에 떨고 있다
201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70주년이 되는 해다.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던 청(淸) 왕조가 인력과 짐승의 힘이 아닌 증기기관의 동력을 만들어 인류 최초의 산업혁명을 선도한 영국을 앞세운 서양의 무력에 굴복한 것이 1840년 아편전쟁이었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2000여년 중국 전통사회를 유지해오던 왕조체제는 1912년 쑨원(孫文)의 국민혁명에 붕괴됐다. 아편전쟁 이후 100여년이 흐른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리더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누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30여년 동안의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 국내에서는 ‘Who lost China(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나)’라는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끝은 미국의 정치·경제 리더들 사이에 마치 중국이 이 세계에 없는 나라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을 형성했다. 미국이 중국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동안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소련 의존 일변도의 군사·외교 정책을 유지했다.
그런 인식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1969년 미 대통령에 당선된 리처드 닉슨과 닉슨의 외교안보 고문 헨리 키신저 미 하버드대 국제정치학 교수였다. 닉슨과 키신저는 주적(主敵)인 소련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이는 미국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추구했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선언한 이래 ‘억제(Containment)’를 주제로 하던 미국의 중국정책을 닉슨 행정부가 처음으로 ‘개입(Engagement)’으로 전환한 것이다.
지난 10월 4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에 나가 ‘미 행정부의 중국정책’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중국을 재건축하려고 한다(We rebuild China)”고 선언한 것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펜스 부통령은 “중국은 미국의 하이테크기술을 훔쳐 경제성장을 해왔으며,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펜스 부통령의 연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최고의 중국 전문가”라고 평가한 허드슨연구소 소속 국제정치학자 마이클 필스버리(Pillsbery)의 역저 ‘100년간의 마라톤(The Hundred Year Marathon)’의 주장을 받아들여 작성된 것이었다. 필스버리의 주장은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의 화해를 통한 개입정책을 시작한 이래 중국은 계속해서 미국을 속여왔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후 100년이 되는 2049년에는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현재의 시진핑(習近平)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중국 지도자들은 전술을 달리하면서도, 전략적으로는 미국을 속이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손자병법식 기만전술을 구사해왔다는 주장이었다.
공산당 지도부 대책 논의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정책이 이전의 오바마와 부시,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지난 12월 19일부터 사흘간 열린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마이클 필스버리의 말대로 상대방과 전투가 벌어지면 우선 기만전술을 쓰는 것이 기본인 중국의 손자병법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경제공작회의의 발표문은 조용하고 평범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2019년은 신중국 수립 70주년이 되는 해다. 전면적인 샤오캉(小康·중산층이 잘 확보된 중진국) 사회 건설에 관건적인 한 해가 될 것이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2017년의 19차 당대회 정신을 관철하기 위해… 안정된 가운데 전진하는 ‘온중구진(穩中求進)’을 경제공작의 기조로 삼되, 새로운 발전 이념과 고질량(하이 퀄리티) 발전, 공급 사이를 구조 개혁의 기본 라인으로 삼아 시장 시스템 개혁 심화와 고수준의 개방, 현대화된 경제체제 구축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중국공산당 중앙경제공작회의는 2019년도 경제공작의 중요 임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미국을 의식한 평범한 ‘중점 공작 임무’를 발표했다. 첫째 제조업의 고품질 발전, 둘째 국내시장의 확대 촉진, 셋째 농촌 진흥 전략의 내실화, 넷째 지역 간 협조체제 발전, 다섯째 경제체제 개혁 가속화, 여섯째 전방위 대외 개방, 일곱째 민생의 보장과 개선 등이었다. 공식 발표문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결의문에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 주위에 전체 당과 국가가 긴밀하게 단결해서 상하가 같은 마음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경제 사회 발전의 우수한 성적으로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70주년을 맞이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중앙경제공작회의가 끝난 나흘 뒤인 12월 25일에 발표된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논평은 이 회의가 얼마나 심각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지금이 아국 발전의 중요한 전략적 시기임을 정확히 인식하자’는 제목 아래 “중앙경제공작회의의 정신을 관철하자”고 촉구한 이 논평이 전한 분위기는 발표문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대변국(大變局)이다. 국내외 형세에 심각하고 복잡한 변화가 발생해서 아국 발전의 중요한 전략적 기회가 아직도 존재하는가에 의심을 던져주고 있다. 이 전략적 시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국 발전은 현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하는 화위위기(化危爲機), 전위위안(轉危爲安)의 시기에 놓여 있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은 주체적이고 주동적이어야 하며, 우세를 확보해서 미래를 열어야 한다.… 현재 세계의 대변국에는 풍험(風險)과 도전이 충만해 있지만, 평화와 발전이 이 시대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우리 중국은 현재 각종 세계적인 난제를 해결하는 데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의 글로벌화는 전 세계 역사의 대추세로, 결코 역전될 수 없는 추세다. 우리 중국은 과학기술 영역에서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이 우리 시장에 의존하는 대세는 결코 역전될 수 없는 추세다.… 올라타야 할 것은 추세이며, 결코 상실해서 안 되는 것은 시간이다. 정확한 인식으로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지도 아래 중국호의 커다란 바퀴가 멀리 굴러갈 수 있도록 추동할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이 광명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천하대변의 국면”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느끼는 그런 위기의식을 반영해서인지 중국의 주역 전문가들의 온라인 웹사이트에도 2019년 중국의 국운(國運)이 위기에 처해 있으며, 천하대변(天下大變)의 국면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주역을 바탕으로 한 역술에 정통한 명대(明代)의 관리가 지었다는 ‘황금책(黃金策)’에도 2019년의 괘들이 불길하게 예상돼 있다는 말들이 많다. 이런 식이다. ‘천지만물에 관한 괘는 귀신을 만날 괘로 매우 불길하며,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두 번째 괘는 재난이 빈발하고 도적이 창궐하는 괘이며, 관리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세 번째 괘는 재산이 바닥나는 화가 닥칠 것이며, 재상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네 번째 괘는 고난과 우려가 겹쳐 반복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황금책’과 같은 역서(易書)를 바탕으로 주역 전문가들은 2019년 기해(己亥)년에 관한 네 가지 예측을 내놓아 중국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새해에는 국제 경제 형세가 거대한 변화를 겪을 것이며, 외환시장이 불안해질 것이다. 중국의 하이테크 제품 생산이 좌절될 것이며, 이에 따라 부동산 시장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관리들의 인사이동도 크게 이뤄질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지휘권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중국 주역 전문가들은 예측했다.
미국의 투자 자문회사 매킨지(Mc-Kinsey & Company)도 2018년 겨울 리포트 ‘우리는 2019년 중국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를 통해 중국 시장의 불안정성을 예측했다. 매킨지는 고든 오어(Gordon Orr)가 대표 작성한 리포트에서 “지난 20년간 유지되어오던 미국과 중국의 경제 균형은 이미 깨졌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균형이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세계 2대 경제체제인 미국과 중국의 분리가 얼마나 진행될 것인지, 비즈니스 업계가 비즈니스 모델을 어느 정도로 바꿔야 할지, 그들이 타깃으로 하는 고객들을 어떻게 다시 설정해야 할지 현재로서는 예측이 불가능한 정도라고 매킨지 리포트는 예고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우려, 불확실성이 장기 투자의 수준을 낮추어놓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시장의 성장과 부동산 시장에 대해서도 불안을 가중시킬 것은 분명하다고 예상했다.
대중정책 수정 필요
매킨지리포트는 이와 함께 “한국 삼성그룹이 이미 많은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을 개조하려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점차 중국에 투자된 외국 기업과 공장이 터키, 인도, 동유럽 국가들로 이전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매킨지의 이 보고서는 국제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국가 간 산업이전 이론이 현재의 중국에 적용될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그동안 중국의 하늘에 머물러 있던 경제발전의 기러기가 이제 중국 남쪽이나 서쪽의 국가들로 옮겨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예측한 것이다.
현재도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제일 높은 우리 경제와 안보, 국제정치의 기본구조도 이제는 수리를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 2019년 예측의 기조라는 점을 우리 정부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보다 발 빠른 대책을 수립해야 할 분위기라는 것이다. 미·중 관계를 바탕으로 한 국제 경제와 정치 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과연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증진에만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있어도 좋은지 반문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