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5/ 동방일삼(東方一三)의 중국 관통 - 모종혁의 마오쩌둥 이야기
◆ 동방일삼(東方一三)의 중국 관통
중국의 일류 평론가 E-mail : hanguozhuanlan@126.com
2014-12-03 조선일보
(1) 민족주의를 비즈니스에 이용하는 중국 언론
얼마 전 방송사에서 근무하는 친구와 밥을 먹고 있는데 마침 TV에서 그 방송사의 뉴스가 나왔다. 아나운서와 전문가들이 돌아가면서 강경한 어조로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본 필자가 친구에게 “너희 방송사는 어찌 된 것이 일본 문제에만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요즘 TV만 틀면 마치 국제뉴스란 일본 뉴스만을 가리키는 것처럼 일본에 관한 내용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데다가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전문가든 아나운서든 모두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
이에 친구는 시청률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자신들도 (일본이 아닌) 다른 지역의 뉴스도 다루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시청률이 낮아서 간부들에게 한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강경한 태도로 일본 뉴스를 보도하면 시청률이 금방 올라간단다.
그제야 왜 일부 매체들이 일본 뉴스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는지 알게 됐다. 그들은 시청률 때문에 시청자들의 반일(反日)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의를 비즈니스에 이용하는 전형적인 예다. 시청자들은 이런 뉴스를 보며 방송사가 진정으로 분개할 줄 아는 애국자고 이런 뉴스 보도가 곧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실상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 매체들은 이런 일본 이슈에 흥분하는 척하며 협소한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해 이목을 끌어 시청률을 올리려는 의도뿐이다. 뉴스를 보며 시청자들의 피가 부글부글 끓는 동안 방송사는 올라가는 시청률을 보며 광고료 세기에 바쁘다.
필자는 그 후 많은 아나운서 친구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사실 일본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극단적인 단어 사용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상사들이 일본 문제에서는 강경한 단어를 사용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한 친구는 일본 문제를 이야기할 때 많은 아나운서들이 “강력히 비판한다”, “몰염치한 행위”, “추악한 면모”, “극도의 파렴치함”, “미친 듯한 도발” 등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쓰는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자신은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방송사 간부들은 단어 사용이 극단적일수록 시청률이 높아진다며 뉴스를 보도할 때 강경한 태도를 취하길 요구한다. 중국 아나운서들이 일본 뉴스를 보도할 때 유난히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다.
중국 매체들이 일본 문제를 보도할 때 쓰는 단어들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다음의 사설은 이것의 전형적인 예다.
“귀신은 음(陰)의 것이다. 일본의 귀신 참배 성행은 양기(陽氣) 부족의 징조이기에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과거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약소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거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 ‘거인’이라는 지위도 다른 나라에 뺏길 위기에 놓여있으니 자신감을 얻을 곳이 없어 귀신 참배로 위안을 얻으려 한다. 아베는 총리로서 국가 발전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귀신 참배로 이를 해결하려 든다면 결국 남아있는 양기도 모두 뺏겨 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슨 사설인가? 길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욕지거리와 다를 바 없다. 한 나라에 대한 저주와 모욕일 뿐이다. 이런 상업적인 민족주의는 전문가와 평론가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한다. 저명한 평론가 장톈웨이(張天蔚)는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서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방송사와 협력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제작진이 상부의 지시라며 프로그램을 더 자극적으로 만들길 원했다. 그들(방송사)이 시청자들에게 몇 분간의 통쾌함을 선사하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래도 협조하기 싫었다.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팽배한 시대에서 나라도 이성적인 목소리를 내야지 안 그러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방송사는 평론가와 전문가들의 태도가 더 극단적이고 자극적이기를 바란다. 필자도 언젠가 모 방송사 프로그램 촬영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주제가 크게 논쟁할 거리가 아니어서 평론가들은 서로를 심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작진은 당황하며 촬영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서로를 어떻게 공격하고 관점을 어떻게 극단적으로 만드는 지를 ‘지도’했다. 만약 방송사 관계자인 친구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촬영이고 뭐고 자리를 당장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시청률을 원한다면 펑제(鳳姐∙중국판 ‘자뻑녀’), 아오이 소라(蒼井空∙일본의 유명 포르노 배우),간루루(甘露露∙중국의 ‘노출여왕’)를 게스트로 불렀어야 했다. 제작진은 시청률 때문에 게스트들을 서로 물어뜯게 했다.
일본 문제에 대한 중국 전문가들의 극단적인 태도의 배후에는 이렇게 시청률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매체들에게 있어 전문가들의 발언은 그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중국 민간사회에는 이와 같은 극단적인 반일 정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협소한 민족주의도 소수의 이야기다.
그런데 매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런 정서를 부풀린다. 일부 매체들은 걸핏하면 “중일 간에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며 또 한 차례의 청일전쟁을 부추긴다. 그들은 이 새로운 전쟁이 “중국인들의 치욕을 씻겨줄 것”이라고 한다. 또 중국과 베트남,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중국 군대가 이미 어떤 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성적이고 온화한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어 오로지 극단적인 발언만 매체에 공개된다. 그래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대다수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이런 극단적인 발언들이 일본 매체를 통해 전해지면 결국 우익(右翼)을 자극해 악순환을 초래할 뿐이다.
[중국어 원문]
中国媒体的商业民族主义
跟某电视台的朋友一起吃饭,酒店电视屏幕上正放着该电视台的新闻节目,又是关于日本话题,主播和专家轮番激烈地批评着日本。我对朋友说,你们频道怎么整天都只关注着日本,一打开电视就是谈日本,一谈日本,专家和主播就像打了鸡血一样。国际新闻只剩下“日本新闻”了吗?
朋友说,没办法,收视压力啊。我们也想多播点儿其他国际新闻,可是,一播其他国家的新闻,收视率就会下来,领导就会批评。一播日本话题,态度和立场鲜明强硬一些,收视率立马就上来了。所以,你懂的。
原来如此,终于明白为什么某些媒体那么热衷日本话题,原来纯粹是为了收视率,为了消费反日的民族主义情绪。这是典型的商业民族主义,把兜售和消费民族主义当成了一种生意,你以为他真的是愤慨,真的是爱国,真的是捍卫国家利益,错,不过是借这种话题打鸡血,挑逗和激发潜在的狭隘民族主义,吸引眼球拼收视率。你的热血在心中流淌,他在那边盯着收视率提高广告价数钱数到手抽筋。
跟好几个主播朋友交流过这个话题,其实她们在播日本话题时也不愿用那么狠的词,可领导有要求,谈到日本时,用词必须狠。一个朋友说,他无法理解,很多人播到日本时用起“强烈抨击”、“无耻行径”、“丑恶嘴脸”、“气焰嚣张”、“疯狂挑衅”时是那么地自然和顺口,他就是说不出口。可领导有要求,播新闻时立场越鲜明,用词越激烈,收视率就越高。所以,必须语不惊人誓不休,必须狠,必须极端和激烈,才能调动起收视和围观的情绪。
难怪一些媒体在谈到日本时用词都那么狠,某媒体的一篇评论很典型:鬼乃至阴之物。日本拜鬼之风盛行,实乃阳气不足之兆,实在不足为惧。曾经,日本虽政治上被称为矮子,经济上却被称为巨人。如今,这巨人二字也被后学赶超,日本自无优越感而言,只能事鬼,以求安慰。安倍作为首相,真应该思考国家强盛之源,切忌以“鬼”求补,最终会被吸了阳气,不治而亡。
瞧,这哪里是评论,分明是诅咒和谩骂,如街头骂街那般。
这也对专家和评论员提出了要求。著名评论员张天蔚曾在微博里抱怨:做一档合作节目,编导捎话说电视台高层希望我再“激烈”一点。我了解他们渴望让观众在几分钟里“爽”一下的心理,却真心不打算配合。在一个民粹横行、戾气爆棚的时代,如果我不能提供一点理性的声音,那就不如闭嘴。
希望评论员和专家态度激烈一点,很多电视台都要这样的要求。有一天参加某台一个节目录制,话题本身并没有什么冲突性,评论员们没有掐起来,一边的编导非常着急,几次叫停,“指导”评论员应该如此去掐,如何让观点激烈一点。如果不是顾及朋友面子,当时真想拂袖而去了。要收视率的话,请凤姐请苍井空请干露露去。很多编导,为了那点儿收视率,恨不得让嘉宾们打起来才高兴。
日本话题上,专家态度的激烈,背后多有着这样的收视率和阅读率驱动,专家言论不过是收视率的工具。
中国民间并没有激烈的反日情绪,狭隘的民族主义情绪也只是极少数,而商业媒体为了自身利益,放大了这种情绪。比如一些媒体动辄“中日必有一战”,打一场甲午战争,“中日新战争一定是中国人洗刷耻辱的战争”。还有什么“中越必有一战”、“中美必有一战”、“解放军已做好对某作战”、“做好战争准备”等等,煽动战争情绪。温和理性的声音得不到传播,呈现在媒体上的多是极端,客观中立的声音成为沉默的大多数。鹰鹰相激,这番声音在日本媒体那边一呈现,激起的必然是右翼的亢奋,形成对抗的恶性循环。
呈现,激起的必然是右翼的亢奋,形成对抗的恶性循环。
(2) 인터넷에 난무하는 中공무원 부패 소문의 진실
쉬차이허우(徐才厚), 저우융캉(周永康) 등 중국의 고위급 관료들이 부패로 낙마했다. 사건의 진상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일련의 부패안을 보며 점차 한 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어떤 호랑이(고위급 관료)든 낙마하기 전 그의 구체적인 부패행위 등에 관련한 소문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는 것이다. 이런 소문들은 비록 근원지를 알 수 없고 때로는 정부에 의해 반박되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어떤 소문들은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고 어떤 소문들은 심지어 사실로 밝혀졌다. 저우융캉과 쉬차이허우가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은 일찍이 해외매체 및 웹사이트를 통해 전해졌다. 상당수 중국인도 알고 있던 바다.
이 때문에 공무원 부패와 관련된 루머들은 점차 공신력을 얻고 있다.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이런 루머들로 중국 반부패(反腐敗)의 추세를 알 수 있기에 시대를 내다보는 ‘예언’쯤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어떤 관료가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루머가 인터넷에 나타났다고 하자. 만약 그 관료와 소속 부문이 이를 반박한다면 이 관료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어느 누구도 이 소문을 공식적으로 반박하지 않는다면? 이 관료에게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링지화(令計劃·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의 비서실장을 지냄)의 형이 낙마한 후 인터넷에서는 링지화도 곧 체포될 것이라는 루머가 퍼졌지만 이튿날 신원롄보(新聞聯播·중국 중앙방송국의 메인 뉴스프로그램)는 링지화가 공개행사에 참여한 화면을 내보내 소문을 우회적으로 반박했다. 한 매체가 국가에너지국 국장을 지낸 류톄난(劉鐵男)의 부패 혐의를 당국에 제보하자 해당 부문은 이를 반박했지만 얼마 후 그는 낙마했다. 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퍼진 뒤인 작년 국경절, 백발의 쉬차이허우는 국경절 행사에 참석해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결국 낙마했다.
그렇다면 보시라이, 류톄난, 쉬차이허우, 저우융캉 같은 관료들이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을 도대체 누가 해외 사이트에 흘린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해외 사이트 관계자나 기자가 엄청난 능력으로 중국 고위층 사회에 잠복해 정보를 얻어냈다고는 볼 수 없다. 중국 정부가 실수로 이런 소식을 흘렸을 리도 없다. 이렇게 대량의 관료 부패 정보를 규칙적으로 정확하게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분명 내부 인사의 소행이다. 정치권 내부인사가 고의로 해외 매체에 이런 소식을 흘려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관료 부패 소식은 사실 국내매체에 의해 공개되기 어렵다. 중국 국내매체들은 당국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서 이런 소식이 들어와도 공개적으로 보도하길 두려워해 여론이 형성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부인사들은 해외매체라는 경로로 관료 부패 소식을 흘리는 것이다. 해외 매체와 웹사이트는 중국 국내에서 비록 통제를 받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소식들은 삽시간에 국내로 들어와 퍼진다. 최근 들어 이런 내부 인사들은 전파효과가 좋다는 이유로 홍콩 매체들을 선호하고 있다. 적지 않은 홍콩 매체들 배후에는 모종의 세력이 존재하는데 이들 매체는 각기 다른 정치 세력들을 위해 소문을 전달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렇게 많은 소문들을 접하지만 과연 누가 이런 소문들을 전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루머를 퍼뜨리는 이런 행위는 정치권에서 점점 더 선호되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모 지방정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책을 내놓기 전 신분이 애매한 전문가(정부 측에 서 있는 민간인)를 통해 이 정책에 관한 소문을 흘린 뒤 민의를 살핀다. 반대의 목소리가 크면 해당 소문은 정부의 견해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식이다.
부패 관련 루머가 너무 많아 때로는 정부도 헷갈릴 때가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인터넷에 모 지방정부의 간부가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정부는 관련 당국에 이 글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글 삭제 담당자가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삭제해 소문을 낸 정치 세력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어쩌나’, ‘이 글을 삭제하고 얼마 후 정부에서 이 간부를 부패 혐의로 조사했다고 발표하면 어쩌나’하는 우려에 난처해 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관료 부패에 관한 수많은 루머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해외매체에 소식을 흘리는 행위는 정치권 세력다툼의 표현이다. 서양 국가들의 당파 투쟁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 다르게 서양 정객들은 자기 진영이 조종하는 매체를 통해 소식을 흘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 매체가 더 많은 자양분을 먹고 상대 세력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다.
(3) 현대판 중국 황제의 몰락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 낙마했다. 한때 저우를 학교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던 모교 석유대학교는 그 후 ‘저우 지우기’에 열중이다. 작년, 저우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저우는 학교 개교 기념 행사에 나타나 소문을 반박하며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저우의 낙마 후 석유대학교는 교훈 뒤에 새겨진 그의 친필 사인을 화살표로 가려버렸고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삭제했다. 득세하면 ‘자랑스러운 동문’이고 실세하면 흔적을 지워야 할 대상이 되니 참으로 냉혹하고 잔인한 세계다.
사실 석유대학교의 처사는 과한 감이 없지 않다. 어찌됐던 저우융캉이 그 학교 출신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론이 저우를 어떤 식으로 짓밟든 모교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여론에 부응해 그의 흔적을 모조리 지울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모교란 자신이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욕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모교 또한 교우가 어떤 잘못을 했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짓밟든 그를 감싸주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전 사회 계층이 저우융캉이라는 ‘죽은 호랑이’를 짓밟으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낼 때 그의 모교는 이 대열에 합류했다.
▲중국석유대학의 조감도/석유대학 홈페이지 캡처
득세할 때는 어떻게든 그 세력에 묻어가려고 하다가 실세하니 바로 등을 돌린다. 이런 교활한 모습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고위급 관료 낙마 사건 후 그 관료가 써준 글자를 파내는 곳까지 생겼다.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던 천안중(陳安眾) 전 장시성 인민대표회의 부주임이 낙마하기 전 글씨를 부탁했던 많은 기관이 그가 낙마하자 그 글씨들을 지우느라 깨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같은 해 후창칭(胡長清)이라는 관료에게 글씨를 부탁했던 기관들도 그가 낙마하자 글씨를 재빨리 없애버렸다. 충칭시 공안국은 ‘왕리쥔(王立軍) 사건’이 일어나자 그가 바위 위에 새겨준 ‘칼’, ‘방패’라는 글자들을 제거했다. 푸젠성 미디어그룹 정문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에 수잔(舒展) 전 이사장이 쓴 ‘용(龍)’자도 올해 5월 수잔이 낙마하자 재빨리 제거되었다. 중국 관료사회의 이런 모습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일어났다. 리모델링을 하느라 모 관료가 써준 글씨를 잠깐 떼어낸 한 병원으로 인해 한동안 그 관료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했던 것이다.
저우융캉이 낙마하고 중국 정치계는 현재 ‘저우융캉 지우기’에 열심이다. 저우융캉이 이끌었던 부문들은 중앙의 결정에 지지한다는 뜻을 차례로 밝혔고 다른 부문들도 이러한 결정에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일부 성(省)들은 입장 표명을 늦게 한 탓에 의심의 눈초리를 샀다.
국가 사법 부문이 주관하는 연구 프로젝트에서 ‘저우융캉의 정치법률사상연구’라는 주제로 지원을 받은 한 젊은 교수는 내년이면 연구가 끝난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녀 많은 이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샀는데 그 연구대상인 저우융캉이 낙마해 연구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해졌다.
정치국 상무위원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저우융캉은 많은 곳에서 지도자를 역임해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에 관한 보도자료, 그가 쓴 글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상무위원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의 낙마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체제를 의심하게 됐다. 중국 정치에서 ‘저우융캉 지우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저우융캉이 남겼던 모든 어두운 면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저우융캉 지우기는 단순한 입장 표명이나 보도 자료 몇 개, 글씨 몇 개 지우기와 같이 겉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 제도 전반을 살피며 저우융캉을 자생시켰던 체제의 허점을 보완해 제2의 저우융캉이 나타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저우융캉 지우기다.
진정으로 저우융캉의 흔적을 지우려면 우선 ‘형불상상위(刑不上常委·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처벌받지 않는다)’의 불문율부터 타파해야 한다. 중국의 정치체제에서 저우융캉과 같이 상무위원까지 올라간 고위관료들은 거의 감시를 받지 않는다. 이런 고위급 관료들은 언론은 물론, 기율위원회도 감시하지 못한다. 특히 정법위원회 서기는 중앙기율위원회 서기에 못지않은 위치다. 정법 부문(공안·검찰·법원)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장악하고 있기에 실질적인 정치적 지위는 정법위원회가 기율위원회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저우융캉을 감시할 수 있었겠는가? 관본위(官本位) 사상이 지배하는 중국 사회에서 일반인들은 최소한 상사 혹은 상급 기관의 견제라도 받지만, 상무위원이라는 자리까지 오르면 아무도 감시하지 못한다. 거대한 권력이 아무런 감시도, 견제도 받지 않으니 부패로 치닫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반성할 것은 파벌정치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저우융캉을 낙마시키기 위해 그의 날개를 하나둘씩 꺾는 방법을 취했다. 저우융캉은 오랜 기간 석유 부문과 정법 부문에서 관직을 맡아 이 두 개의 부문을 자신의 파벌로 만들었다. 그는 인사권을 내키는 대로 휘두르고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황제와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 인맥과 이익으로 점철된 이러한 파벌정치가 감시의 부재를 낳아 황제를 탄생시킨 것이다.
(4)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 한 덩샤오핑과 시진핑
많은 중국인들은 시진핑과 덩샤오핑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시 주석 자신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정말 시 주석의 행동 스타일과 집정 방향, 개혁에 대한 태도를 보면 ‘개혁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전임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 덩샤오핑은 ‘개혁의 총설계자’로, 시진핑은 ‘심화개혁의 설계자’로 불린다. 총서기에 취임한 후 시 주석이 선택한 첫 시찰지는 바로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지, 선전(深圳)이었다. 덩샤오핑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또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덩샤오핑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를 방영했으며 연설을 통해 덩샤오핑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시 주석이 자신을 덩샤오핑 개혁의 계승자로 여기고 덩샤오핑의 정치적 자산을 이어받아 덩샤오핑이 이루지 못한 개혁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덩샤오핑은 시 주석 연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지도자다. 개성 있고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체계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시 주석의 연설에서는 인용문이 잘 등장하지 않는데 유일하게 수차례 인용한 것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많은 언론은 시 주석이 덩샤오핑 이후로 개혁의 색채가 가장 강한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심지어 한 외신은 시진핑이야말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잇는 진정한 3세대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시진핑은 덩샤오핑처럼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잘 알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덩샤오핑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했다. 바로 집권당의 정당성과 적법성 확립이었다. 당시 공산당은 30년 가까이 집권했지만, 여전히 ‘혁명당’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혁명의 이름으로 투쟁을 일삼아 중국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권력의 적법성은 인민과 함께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중국으로 하여금 빈곤과 침략에서 벗어나게 한 것에서 근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임무는 이와 달랐다. 그는 빈곤과 낙후는 사회주의의 대명사가 아니며 만약 공산당이 민중을 부의 길로 이끌지 않으면 인민이 등을 돌릴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초기에 공산당이 인민들에게 했던 정치적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지로 개혁개방을 추진한 것이다. 그 근원에는 ‘인민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산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시진핑도 자신의 임무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취임 후 그가 부패 척결을 단행한 것도 집정권력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과거 민중들은 경제의 고속 성장과 안정적인 사회질서 속에서 중국 공산당을 지지했다. 개혁의 성과를 나눠 가질 수 있었기에 공산당의 집권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개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졌다. 어떤 이들은 이득을 보는데 어떤 이들은 손해를 보는 현상이 나타나고 관료들이 공권력을 남용하는 등 부패도 심각해졌다. 이제 민중은 개혁을 인내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게 됐다. 그리고 집권당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시 주석 취임 후 부패척결의 피바람이 불면서 많은 탐관들이 낙마했다. 시 주석은 거대한 정치적 압박을 견디며 쉬차이허우(徐才厚·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와 저우융캉(周永康·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을 끌어내렸다. 이는 지도부가 집권당의 앞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증거다. 더 이상 부패를 좌시하면 민심을 잃고 당과 국가가 존립의 위기의 놓일 것이라는 우려다. 경제의 빠른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패 관료를 견제함으로써 이 사회가 공정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덩샤오핑이 재임 기간 이루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정치체제의 개혁이다. 그래서 시 주석은 이를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 부패 척결은 가장 큰 개혁이다. 부패 척결과 동시에 반드시 근본적인 체제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현재 중국 공산당이 회피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집권당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인민들의 존경을 되찾는 것이다.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시진핑도 정치개혁과 여론의 기대 사이의 모순이라는 문제를 맞닥뜨렸다. 어떤 이는 개혁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여론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시진핑의 모습을 비판한다. 개혁은 오른쪽으로 여론 통제는 왼쪽으로 가는 모습은 얼핏 이해하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균형을 위해서다. 시 주석은 여론이 정치체제 개혁에 대해 정치권이 부응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거는 것을 우려했다. 개혁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그 여파는 사회를 위험으로 몰고 간다. 과거 정치 파동은 개혁의 행보와 여론의 기대가 충돌했을 때 폭발한 것이다. 시 주석은 개혁의 강도를 높이는 한편 부패 척결을 진행하면서 대중의 기대치가 높아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여론을 통제해 대중의 기대수준을 낮춘 것이다. 덩샤오핑은 과거에 개혁과 여론 간의 균형을 위해 개혁은 오른쪽, 여론은 왼쪽 노선을 택했다. 왼쪽 불을 켜고 우회전한 셈이다. 이런 균형적인 정치전략으로 개혁은 안정적으로 속도를 냈다. 시진핑도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5) 미국의 전략도 과감히 지지하는 시진핑의 실용외교
8월 16일 난징 유스올림픽 개최 두 시간 전, 중국이 11명의 탈북자를 석방시켰다는 외신기사가 올림픽의 열기를 뒤덮었다. 12일, 중국 국경 경찰은 중국과 라오스 국경에서 20, 30대 젊은 여성들이 다수인 11명의 탈북자를 체포했다. 여기에는 4세 아동 한 명도 포함됐다. 중국 정부는 북송을 원치 않는 이들 탈북자를 석방한 후 한국으로 보냈다.
중국 여론은 여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거 중국은 이런 류의 탈북자들을 체포했을 때 기본적으로 정치적 ‘벗’인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이렇게 북송된 탈북자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런 조치는 국제인권기구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국제사회는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한 중국에 박수를 보냈다. 이번 조치에 여론은 말을 듣지 않는 김정은 정권에게 따끔한 한 수를 보여주고 국제사회에서 ‘인권 존중 국가’로의 이미지를 형성하며 한국, 미국, 중국, 북한 간의 관계를 조정하려는 시진핑 외교부의 전략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비록 중국 정부의 확인은 없었지만, 소식의 전달 경로로 보았을 때 정부 측이 먼저 외신에 소식을 흘린 뒤 다시 중국 국내로 들어온 케이스임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중국은 마약을 들여온 혐의로 북한인 한 명을 사형시켰다. ‘북한 마약범 공개처형’에서 ‘탈북자를 한국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중국이 북한이라는 ‘과거의’ 정치적 동맹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사실, 북한이 친중(親中)파 장성택을 처형한 후로 북중관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최근의 외교 사건으로 볼 수 있듯이 시진핑의 외교전략은 전임 주석들과는 매우 다르다. 전임 주석들의 외교전략은 냉전 시대의 사고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북한, 베트남,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과거 정치적 동맹이었던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자주 방문했으며 국가의 ‘색깔’을 중시했다. 그러나 시진핑의 외교 스타일은 이들과 다른 듯 보인다. 그는 구태적인 국제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균형관계에서 전략적 이익을 취하려 한다. 전통적인 지정학적 요소가 시진핑의 외교에서 새롭게 정의되는 듯하다. 시진핑 스타일 외교에서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용주의가 시진핑 정부의 외교 전략을 지배하고 있다.
미군이 이라크 내 이슬람 무장단체를 공습했을 때 중국 외교부는 의미심장한 태도를 취했다. 중국은 이라크가 주권, 독립, 완전한 영토, 테러리즘 척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지지한다며 이라크 주권 존중을 전제로 한 이라크의 안보와 안정을 위한 모든 행동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이라크가 조속히 안정과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이 표현의 행간에서 중국이 미국의 공습에 지지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중국 외교부는 줄곧 민간인 살상행위를 비난하고 무력을 통한 분쟁 해결에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최근 중국은 정식으로 수교하지 않은 바티칸의 교황이 중국의 영공을 비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교황은 이 허가에 감사를 표했고 중국도 여기에 ‘바티칸과의 건설적인 대화와 관계 개선을 원한다’고 화답했다. 이런 행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구속에서 벗어난 실용주의 외교를 구현하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인 것이다.
시진핑의 이러한 실용주의 외교는 덩샤오핑의 외교 스타일과 비슷하다.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변화하는 세계질서를 맞이했다. 소련은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베트남과 동맹을 맺고 동남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해 중국을 고립시키려고 했다. 이때 덩샤오핑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국가 이익을 핵심으로 한 실용외교 전략이었다. 덩샤오핑은 동남아시아 각국을 순방하며 이들이 베트남 일변도 정책을 취하지 않도록 했고 과거사를 청산하여 중일 간의 우호관계를 수립했으며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며 중미관계를 수립했다.
푸가오이(傅高義)의 저서 ‘덩샤오핑 시대’는 이런 덩샤오핑의 실용외교를 매우 흥미롭게 서술했다. 애국심이 들끓는 중국 애국자들에게 일본을 벤치마킹하자고 설득하는 것은 덩샤오핑에게 있어 실로 큰 정치적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닉슨 대통령이 적국이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견실한 정치적 기반이 작용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확실한 반공파(反共派)라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덩샤오핑에게도 8년간 항일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으로서 쌓은 견실한 정치적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에 중일관계를 대담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실용외교에는 정치적 자본이 필요하다. 시진핑이 덩샤오핑을 따라 실용주의 외교 전략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임 주석보다 더 견실한 정치적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근본적으로 확실한 공산당 혁명 원로의 후손이다. 충분한 ‘홍색’ 기반이 있는 그의 이데올로기와 신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는 그가 필요한 권력을 이미 장악했다. 따라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외교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6) 인터넷에서 선동을 일삼는 중국의 극좌파
개혁개방이 시행되면서 중국 사회에서 사라진 듯했던 극좌파는 익명성을 지니고 감정적이며 극단적인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서식지에서 부활해 중국 여론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됐다.
몇 달 전 난징(南京)에 위치한 중화민국 건축물 ‘수도대극장(首都大戲院)’이 보수 공사 후 ‘수도대극장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대외 개방을 시작했다. 모든 건축물은 해당 도시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역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원래 수도대극장이라 불렸던 건축물을 수도대극장 박물관이라 이름 짓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역사 복원 차원에서 우리가 일부 지역을 ‘옛터’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름 자체가 아닌 그 당시의 역사 재현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도대극장’이라는 이름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 극좌파 네티즌은 다음과 같은 웨이보(微博 중국판 트위터) 글로 극좌파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장쑤(江蘇)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중화민국 시기 난징의 4대 극장 중 하나였고 1949년 이후 해방극장으로 불렸던 수도대극장에 대한 보수 공사가 1년의 기간 끝에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곳이 수도대극장이라는 옛 이름으로 다시 불린다고 한다. 이것이 어느 나라의 수도인가? 난징시는 화이하이(淮海·회해) 전투의 개명을 시도한 뒤로 또다시 역사를 농락하려 한다.’
이들 극좌파는 난징시가 국민당 반동파의 수도였던 역사에 미련을 가져 당을 배반하고 선열들을 모욕하는 ‘심각한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야간 조명을 밝히고 있는 수도대극장.
이런 논리는 순전히 억지일 뿐이다. 언론은 ‘수도대극장’이 아닌 ‘수도대극장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당시의 역사를 회고할 수 있는 ‘박물관’이라는 단어가 핵심어라고 명확하게 보도했다. 수도대극장은 당시의 난징을 엿볼 수 있는 역사의 자취인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필자는 몇 명의 난징시 관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극좌파들이 인터넷에서 이 정도로까지 활개를 치고 악의적으로 그들을 공격하며 진상을 모르는 네티즌들을 선동하고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유스올림픽 개최지 난징은 극좌파의 무차별 공격 대상이다. 난징시 관광 주무부처는 8월 <중화민국 문화 해설 단어 사용의 적절한 조정에 관한 통지>를 하달했다. <통지>에는 난징시 관광지에 방문한 타이완 기업인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가 일부 표현에 거북해 했다는 난징시 정협 위원의 보고를 받았다는 내용과 함께 ‘관련 관광지와 여행사는 현실 상황을 고려해 중화민국 문화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에서 최대한 중립적인 단어가 사용되도록 조정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통지>는 또 ‘화이하이 전투를 쉬방 결전(국민당식 표현)으로 바꾸는 등 타이완 손님들의 감정을 충분히 배려해야 한다. 각 부처는 이 통지를 받은 뒤 조속히 조정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난징시가 양안(兩岸 중국과 대만)을 잇는 교량 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이는 별로 큰일이 아닌데도 극좌파들은 난징시가 심각한 정치적 과오를 저지르고 역사를 배반했으며 중공의 역사를 부정했다고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인터넷상에서 엄청난 풍파를 몰고 왔다. 결국, 난징시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이 <통지>는 한 직원이 난징시 지도자의 이름을 빌려 하달한 것이고 해당 <통지>는 이미 철회됐다’고 발표하며 타협했다.
위의 두 사건으로 현실 속에서 사라진 듯했던 극좌파가 사이버 공간에서 서식지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이 사라졌던 적은 없다. 극좌파는 호시탐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을 찬양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발전을 부정하고 개혁개방을 방해해 중국의 개혁과 역사를 퇴보시키려 한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극좌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공개적으로 극좌적 발언을 하거나 극좌적 입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이는 개혁개방으로 중국 사회가 상식을 되찾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면서 역사를 거스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극좌 발언이 설 자리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은 다르다. 익명성이 보장되어 발언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인터넷 공간은 자주 비이성으로 치닫는다. 또 인터넷 공간에서는 합리적인 논리와 상식보다는 감정적인 선동이 더 많은 공감을 얻기에 억지 논리가 횡행한다.
극좌파들은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부자와 관료, 엘리트를 증오한다. 극좌적 입장은 비록 논리와 상식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자칭 개혁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 개혁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에는 충분하다. 실제로 중국의 개혁은 많은 이들에게 이득을 안겨다 주었지만 동시에 일부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하기도 했다. 특히 실업자, 토지를 잃은 농민, 도시의 빈민들은 자신들이 개혁의 보너스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극좌는 주로 이런 집단에서 자생하고 이들의 정서를 달래면서 이용한다. 극좌파는 개혁 때문에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추종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가난한 자들의 이익을 빼앗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 개혁개방 시행 이전으로 돌아가야만 빈부 격차가 없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선동한다.
이러한 논조는 반역사적이고 비이성적이지만 충분한 선동력을 가져 인터넷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극좌파들은 이러한 사회적 정서 속에서 서식하고 사회적 감정을 소비하며 개혁에 반대하고 발전을 부정한다. 또 문화대혁명을 운운하며 깨어있는 개혁파들을 공격하고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며 이데올로기적 언사로 여론과 정부를 옭아매려 한다.
정부와 여론은 빈부격차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빈곤계층에 동정심을 가지고 개혁을 통해 빈부격차를 해소해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의 보너스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개혁을 반대하는 극좌파들을 경계해야 한다. 당국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적 언어 사용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극좌세력을 양산해서는 안 된다.
(7) 중국 산시성이 초토화 됐다는데...
중국에 부패 척결 칼바람이 불면서 산시성(山西)이 초토화됐다. 상무위원들이 줄줄이 낙마해 상무위원회의도 제대로 개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지방정부 부패의 신기록을 세웠다. 산시일보는 ‘현재 통일된 사상이 가장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산시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 놓여 있다. 단기간에 시스템적이고 파괴적인 부패 문제가 나타났다. 매우 경악스럽고 가슴 아프고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빈번한 부패 현상은 정치적 생태계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산시성과 당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대중의 이익을 침해했으며 개혁의 발전을 저해했다”라는 내용을 실었다. 이 글에서 산시성 신임서기 왕루린(王儒林)의 통렬한 반성과 굳은 결심을 느낄 수 있다.
‘시스템적이고 파괴적인 부패’라는 표현은 중국 공산당 당 기관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강한 비판이다. 과거에는 부패 사건이 나오면 ‘소수 간부의 부패’라고만 표현했다. ‘시스템적’이라는 것은 부패가 소수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관료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고 심지어 체제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파괴적인 부패’는 부패가 주는 충격이 파괴적이고 관료체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 정상 운영이 어려워졌음을 뜻한다. 당 기관지는 당의 홍보기관으로, 줄곧 단어 사용에 신중하고 관료들의 과실을 덮어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언어적 수사로 문제를 무마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당 기관지 사설은 모든 단어, 문장마다 출처가 따로 있고 주로 지도자의 연설에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지방의 당 기관지는 해당 지방의 이미지를 최우선 순위에 둔다. ‘파괴적인 부패’라는 말은 산시성 관료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같다. 이러한 표현은 일개 논설위원이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위층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왕루린 서기가 부임하기 직전에도 유사한 일은 있었다. 일반적으로 지방정부의 서기가 교체될 때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이 나와 교체 사실을 발표했는데 이번에는 정치국의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이 회의장에 나타나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강한 어조로 이를 비판했다. 그는 “산시성의 정치 생태계에 문제가 많아 청렴한 정치 환경을 조성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중앙당은 산시성의 문제를 고도로 중시하고 있으며 산시성의 지도부와 간부 대오를 건설하는 작업을 매우 중시한다. 따라서 산시성 위원회 지도부에 중대 조정 조치를 결정한다”라고 발표했다. ‘정치 생태계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시스템적 부패’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과거 정부 당국은 ‘시스템적 부패’, ‘제도적 부패’와 같은 표현에 매우 큰 반감을 가져서 언론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부패는 단지 개별적인 사안이고 우연히 발생한 문제지 체제와는 관련이 없고 개인의 문제라는 입장이었다. 당국은 ‘체제적인, 시스템적인 부패’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여론과 국민들이 전반적인 체제를 의심하고 부정할까 우려했던 것이다. 체제 부정은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태다.
그런데 공산당 18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 주석과 왕치산 기율위 서기가 부패척결의 칼을 빼들자 ‘시스템적 부패’라는 표현에 대한 금기가 점차 풀렸다. 시진핑은 여러 차례 부패의 심각성을 강조했고 심지어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당과 국가가 망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어느 정도의 부패가 당과 국가를 멸망시킬까? 바로 시스템적인, 체제적인 부패다. 왕치산도 ‘현상을 바로잡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간을 벌어 준다’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근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고 ‘근본’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근본’ 문제는 바로 시스템, 체제의 문제다.
앞서 위정성(俞正聲) 상무위원도 정치협상회의에서 부패 척결에 대해 같은 문제를 언급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매주 관료가 하나씩 낙마하는 상황이 도대체 언제쯤 끝날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는 우리가 전례 없는 성과를 거뒀고 (저우융캉, 쉬차이허우, 보시라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전례 없이 심각한 부패 국면을 맞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물쭈물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과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추악한 현실을 대면하고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출구다”라고 말했다. 위정성의 이런 발언은 체제적인 부패에 대한 우려를 심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체제에 문제가 생겼고 체제가 부패를 유발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부패를 척결하려면 병폐를 숨겨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현실을 대면하는 것이다. 중국의 부패는 체제가 유발한 것이다. 법치가 아닌 인치의 체제에서는 부패가 자생하기 쉽다. 만약 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패 척결은 그저 한 마리의 호랑이를 처리하고도 또다시 한 무리의 호랑이를 맞는 격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부패를 척결해도 계속해서 부패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체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개혁도 심화시킬 수 없다. 또 시스템 전반에서 산시성과 같은 문제를 겪을 것이고 대중은 인내심을 잃을 것이다. 이번 산시성 사태는 시스템적인 부패가 정부를 어떻게 붕괴시키는지 보여주는 축소판이자 경고다. 산시성 사태를 절대 개별 사안으로 봐서는 안 될 이유다.
(8) 말만 번드르한 중국의 법치
‘의법치국(依法治國 법에 따른 통치)’을 주제로 한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8기 4중전회)는 법치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특히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가 법을 공부한 이력이 있기에 이러한 기대가 더 큰 상황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계급투쟁’이니 ‘인민민주독재’니 하는 단어들이 언론에서 나타나면서 여론이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은 4중전회가 이러한 혼란을 잠재울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으므로 ‘의법치국’이라는, 개혁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단어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된다. 진정한 법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닿을 수 없는 꿈 같은 존재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의법치국’은 법치가 최우선적인 원칙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서양의 사법제도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중국 정치인들은 법치라는 단어 앞에 무수히 많은 형용사와 수식어를 덧붙인다. ‘사회주의 법치’, ‘중국 특색의 법치’, ‘중국의 복잡한 현실에 부합하는 법치’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법치는 말 그대로 법치여야 한다.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사족이고 부정이며 법치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 형용사를 갖다 붙이는 것은 법치의 권위를 훼손하고 법치를 언어의 틀에 가두는 행위다. 이렇게 하면 해석권을 독점해 언제든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달리해 법치 위에 군림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 조직이든, 정부 기관이든 간에 그 누구도 법의 위에서 군림할 수 없다는 말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삼권 분립과 유사한 상호 견제체제가 법치의 시행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중국은 아직 그것이 부족하다.
‘의법치국’은 법치가 아니다. 여기의 핵심은 ‘법’이 아닌 ‘치(통치)’에 있다. 이 짧은 말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 누가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것일까? 바로 당이다. 권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런 체제에서 당이 우선인가, 법이 우선인가’, ‘입법권을 가진 인민대표대회가 위인가, 당 위원회가 위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것이다. 한 혁명 원로는 문화대혁명을 반성하면서 ‘중국 혁명의 근본적인 문제, 즉 당과 법의 관계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도대체 당이 먼저인가, 법이 먼저인가? 법이 당을 관리하는가, 아니면 당이 법을 관리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국에서는 다시 재앙이 발생할 것이다’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런데 4중전회가 ‘의법치국’을 연구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까? 터무니없는 소리다. 지금의 현실로 보면, 각 분야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강화할 뿐이다. 그리고 당이 진정으로 법의 통치 아래에서 존재할 리도 만무하다. 당과 법의 관계는 이 체제 아래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당이 인민을 이끌고 입법권을 가지며 법의 집행을 보장하고 법 준수를 이끈다’와 같은 말장난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누가 법의 집행을 제대로 보장할 것이며 당이 법을 준수하는지는 또 어떤 제도로 감시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말해 이번 사법 개혁에는 큰 혁신이 없을 것이다. 서구의 삼권분립과 같이 행정권과 입법권이 상호 견제하는 독립적인 시스템이 구축될 리 없고, 그저 중국의 특색을 가진 ‘제한적인 독립’만 있을 뿐이다. 사법시스템이 인사권, 예산권 등 방면에서 지방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난다 해도 결국에는 더 높은 지도자와 당 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사법체제가 행정체제, 입법체제와 독립된 하나의 시스템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핵심적인 안건은 여전히 당의 의지로 입안되고 판단될 뿐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당국이 ‘의법치국’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갈등과 사회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는 행정차원의 법 집행력 강화일 뿐 정치차원의 통치 개혁은 아니다. 이러한 ‘의법치국’은 권력을 법의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성벽으로 권력을 보호하며 권력을 집중시키고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 서민들은 부패와 법률의 부재를 가장 증오한다. 법 집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부 간부들이 무법 천하에서 살고 있어 정부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 부패척결로 이미 적지 않은 민심을 얻은 시진핑 주석은 현재 ‘의법치국’을 통해 정부가 법을 수호하는 이미지를 형성해 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높이려 한다. ‘의법치국’ 추진 후 지방정부의 사법 부문에 대한 간섭 감소, 사법 부패 억제, 기층 관료(하급 관료)들에 대한 법적 구속력 강화 등을 예상할 수 있다. 또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은 해선 안된다는 관념이 관료 사회에 스며들고 ‘법적 근거 유무’가 권력을 견제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로써 법대로 처리하지 않던 관행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모든 것들을 실현시키려면 정치체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의법치국’이 행정차원에 국한된 것이라면 당과 법의 관계에서 오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9) 중국의 겉치레 정책
‘APEC블루’라는 색이 있다. 지난번 중국 APEC개최가 낳은 인기검색어를 꼽으라면 단연 APEC블루일 것이다. 베이징은 이번 APEC개최 기간 동안 희뿌연 스모그 하늘을 피해보려 난방 공급도 미뤘고 기업들은 연차까지 내주었다. 차량 홀짝제 실시와 기업들의 조업 중단이 이어졌고 택배업계도 한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했다. 망자에게 입힌 수의도 못 태우게 할 정도로 큰 불편과 손실을 감수했으니 역대 APEC개최국 중 가장 많이 고생한 나라라고 할 만하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즉효가 나타났다. APEC개최 기간 내내 베이징 하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쪽빛 하늘을 드러냈고, 예상됐던 스모그도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APEC블루’라는 말은 좀 특별하다.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기간에 꾸며낸 일시적 아름다움이란 뜻과 전시효과를 위해 시민들이 겪을 불편과 손실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실 베이징 스모그와 중국 환경오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APEC블루가 반짝 있었다고해서 베이징과 중국에 가산점을 줄 수는 없다. 오히려 공공연하게 도시조경을 꾸며내다보니 다른 나라의 비웃음과 자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니 감점거리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점은 중국 정부가 작위적으로 APEC블루의 시범효과를 노렸다는 점이다. 윗물이 맑지 않고 아랫물이 맑을 수 없는데 베이징시는 APEC블루 반짝효과를 위해 어떤 대가도 마다 않겠다고 나섰으니 이를 따라하는 지방도시들은 그 양상이 더 심하다.
이런 일은 원래부터 지방도시를 능가할 데가 없다. 전국적으로 깨끗한 도시를 건설하자는 ‘도시 조경 창조’ 사업으로 일부 지방에서는 겉치레만 하는 조경이 당연한 일이 됐다. 일례로 산둥성 지난시가 정화사업 실사단에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점이나 작은 식당들을 강제 휴업시켰고, 이 때문에 애꿎은 시민들은 아침 점심 식사도 걸러야 했다. 또 어떤 도시에서는 미장원 신문가판대 호텔레스토랑 할 것 없이 모조리 문을 닫아야 했다. 도시 정화를 위한다던 ‘깨끗한 도시’는 어느새 ‘위선과 작위의 도시’로 변질됐다. 베이징시의 APEC블루와 지방정부의 이런 강제가 뭐가 다른가?
이보다 심한 작위적인 강제조치들은 수두룩하다. 일부 지방에서는 ‘푸른 산, 맑은 물’ 이미지를 만들려 민둥산에 녹색 페인트칠을 하는가 하면, 어떤 곳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지저분한 곳들과 빈촌을 가리기 위해 이곳 앞에 높다란 담을 쌓았다가 언론에 ‘치부를 가리는 담’이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외지의 손님을 맞을 때 길가 담벼락에 페인트칠을 다시 해서 새것처럼 보이게 하는 ‘페인트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지방에서는 고목에 가짜 나뭇가지를 꽂아 진짜처럼 연출해 눈속임을 하는 수법도 동원됐다.
일부 지방정부들이 이렇게 할 때 마다 여론에선 정부의 죄상을 성토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대개의 경우 이런 작위적 조치가 중앙정부를 따라한 것이라는데 있다. 중앙정부가 이런 심미적 기준으로 현장을 대충 둘러보기 일쑤니 지방정부도 이 정도에 맞게 인위적으로 꾸며대고 눈속임만 하는 행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 상부에서 이렇게 하니 지방정부도 체면을 위해 가용자원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이다. 베이징시가 잠깐 파란하늘을 보여주기 위해 값비싼 대가도 치르는 시범을 보였으니 다른 지방정부라고 시의 이미지를 위해 분칠을 하고 녹색 페인트칠을 못할 것이 무어랴. 정부의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수치를 조작해도 국가의 위상이나 국익 또는 공공이익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둘러대면 허위에 보기좋은 외피를 씌워지게 된다.
APEC블루는 꾸며낸 반짝 효과에 불과하다. APEC이 종료되고 일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각지에서 도시조경 실사단이 떠나고 나면 다시 예전의 지저분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솔직하지 못한 APEC블루는 가뜩이나 위선으로 가득 찬 지방 관료들에게 다음 번에 실사단이 와도 거리낌 없이 또 페인트칠을 하면 될 거라는 인상만 남길 뿐이다.
2015-02-14 오전 9:47
(10) 좌파-중도파-우파 모두에게 비난받는 중국의 관변 인터넷 논객
그동안 중국의 인터넷 여론은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퀴는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한 쪽에서는 미국을 찬양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미국을 헐뜯는 등 의견 충돌이 빈번해 이들 간의 교집합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터넷 상의 설전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 주목을 끈 SNS글도 있다.
“댓글이 천 개가 넘는 글을 읽어 볼 때마다 어쩌면 중국인들의 사상은 영원히 통일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뜨거운 논쟁에 뛰어들고, 여기에 단순히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들부터 팔로워를 판매하는 사람들, 매출을 올리려는 타오바오 업주들까지 합세하는 광경을 보자니 ‘세상살기 참 힘들구나’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이 일치하는 진귀한 광경은 아오이 소라의 SNS에 남겨진 ‘오늘도 당신을 컴퓨터에서 만났어요. 새로운 작품 기대합니다’ 정도의 댓글에서나 볼 수 있다.”
영원히 대립할 것만 같았던 ‘지식인’들과 ‘우마오(五毛: 인터넷 댓글 부대)’가 최근 들어 유독 친해진 모습을 보이며 ‘인터넷 통일 전선’까지 구축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할 만큼의 매력을 지닌 자가 누구란 말인가? 누가 이들에게 ‘최대 공약수’를 제공하였나? 그는 다름아닌 얼마 전 시진핑(习近平) 주석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인터넷 관변작가 저우샤오핑(周小平)이다. 인터넷 상에서 오랜 대립의 역사를 이어온 좌파와 우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저우샤오핑을 조롱하고, 비꼬며 반박하고 나선 것.
체제 내 언론도 고작 ‘애국주의 칼럼’ 몇 편으로 유명인사가 된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시선은 저우샤오핑을 ‘은근히 까고 있는’ 신화통신사의 기사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일반적인 논리로 봤을 때, 문예좌담회에서 최고 지도자로부터 친히 접견을 받은 저우샤오핑을 찬사 하는 게 마땅하지만, 신화통신사는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우샤오핑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으로 대신 했다.
실제로 이 기사문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치정향 외에도 그의 글은 논리가 뒤죽박죽하고 기본적인 사실과 상식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저급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비평을 받고 있다. 일례로 저우샤오핑은 또 다른 인터넷 유명인사인 쉐만즈(薛蠻子)를 향해 정수기를 팔기 위해 중국의 수질이 나쁘다고 폄하하는 바람에 저우샨 일대 갈치 양식장들이 매출 부진을 겪고 있으며 수많은 양식장이 파산 위기에 놓여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바 있지만, 이는 곧 네티즌들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고, 있지도 않은 ‘양식 갈치’를 거론한 저우샤오핑에게 ‘저우갈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보도했다.
▲저우샤오핑./유튜브 캡처
신화통신사가 지닌 권위와 파급력에 힘입어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별명 ‘저우갈치’가 다시 한번 주목 받게 되었다. 대중 매체가 최고 지도자로부터 찬사를 받은 유명인사를 풍자하고 나선 것은 그만큼 체제 내 인사들이 저우샤오핑을 경멸하고 있다는 의미로 비춰진다. 물론 관련 당국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기사를 즉각 삭제시키고 책임자를 문책했지만, 체제 내 언론의 불만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전 국민이 나서 ‘저우갈치’를 구워 삶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저우샤오핑 때리기’는 팡저우즈(方舟子)의 합류로 절정에 달했다. 팡저우즈는 중도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물론 좌파인사 쓰마난(司馬南)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의견을 같이 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지식인’들과 싸우고, 네티즌들로부터 ‘우마오’라 욕 먹으며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와중에도 팡저우즈는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팡저우즈가 저우샤오핑 때리기에 합세하게 된 배경에는 사적인 원한이 크게 작용했다.
저우샤오핑은 몇 년 전 팡저우즈를 비난하는 글을 쓴 바 있다. 당시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아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저우샤오핑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고, 호사가들에 의해 이 글이 다시 거론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팡저우즈는 원래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고야 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팡저우주는 즉시 저우샤오핑의 글 ‘미국의 깨진 꿈’을 겨냥한 반박글을 작성해 매 단락마다 숫자 하나, 표현 하나 놓치지 않고 특유의 방식으로 저우샤오핑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결국 거짓말을 일삼던 저우샤오핑은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공권력의 개입만 없었다면, 한 번 문 것은 결코 놓아주는 법이 없는 팡저우즈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버려졌을 것이 분명하다.
공권력이 저우샤오핑을 보호하고 나서면서 팡저우즈는 인터넷 상에서 종적을 감췄고, 결국 해외로 도피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싸움을 말리면서 한 쪽 편만 드는 정부의 행태에 좌파 인사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쓰마난과 우파톈(吳法天) 등 열성 좌파들은 팡저우즈를 지지하며 공권력을 비난하고 나섰고, 정부가 저우샤오핑을 감싸고 돌수록 국민들은 좌파, 우파, 중도파 할 것 없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부가 저우샤오핑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원한을 사고 있다”, “저우샤오핑의 거짓말을 덮어주려다 오히려 더 많은 거짓말을 양산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정부가 팡저우즈 죽이기에 나설 때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치고 받을 사람들을 정부의 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팡저우즈 배후에 서 있는 수 많은 지지자들과 인터넷 상에서의 호소력 역시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좌파, 우파, 중도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저우샤오핑에게 돌을 던지나? 물론 이유는 다양하다. 경멸, 질투, 반감의 시선도 있겠고, 그를 혐오하거나 어이없다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제대로 된 지식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을 선전수단으로 이용해 최소한의 공감조차 얻지 못한 정부 탓에 있다. 좌파는 그를 자신과 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고, 우파는 그를 적수로 생각하지 않는다. 체제 내 엘리트들은 정부가 애국주의를 운운하며 거짓말로 먹고 사는 사람을 내세운 것 자체를 자신들의 지능을 무시하는 행위라 보고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중도파 네티즌들이 “저우샤오핑은 겉으로만 애국을 논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려고 저급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기회주의자”라며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도 중국 정부는 각종 수단을 동원해 저우샤오핑의 편을 들어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고집이 결국 더 많은 친(親)정부인사들을 자신의 적으로 돌릴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15.02.12 중국 인터넷에서 불거진 공산당 일당독재 종식 논쟁
한동안 중국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색깔혁명(정권교체 혁명)’ 논란이 흥미롭다. 중국사회주의학원 왕잔양 교수는 한 언론사의 연례회의에 참석해 ‘색깔혁명과 중국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색깔혁명을 단순하게 폄훼할 수는 없다. 중국사회와 정치는 깨끗해졌다. 정치는 평등해졌고 인민들의 삶은 윤택해졌는데 색깔혁명이 무서울 게 무어냐”고 일갈했다. 그는 이어 “덩샤오핑이 창시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노선만 견지해 나간다면 중국은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중국은 대국이다. 중국에 미치는 외부의 영향력은 극히 미비하다”고 역설했다.
왕교수는 또한 “색깔혁명이 전적으로 외세 개입으로 일어났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을 전부 바보로 아는가? 지식인들을 걱정할 게 아니다. 이들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수재들이다. 나라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문제는 총을 든 (권력을 가진) 부패사범들이다. 이들이 가장 위협적이다”며 중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를 꼬집었다.
왕교수의 이 발언은 연례회의 토론에 불을 댕겼다. 플로어에서 뜨거운 박수가 터져나왔지만 한편에선 비난의 목소리가 일었다. 회의장에서 시작된 논쟁의 불길은 신문지면으로 빠르게 번졌고 인테넷 토론방에서는 그 열기가 한층 거세져 여기 저기 격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 주제가 이렇게까지 여론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주제는 지금껏 중국내에서 쉬쉬해오던 민감한 사안으로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한 언급을 극히 꺼렸다. 그러던 참에 언론사 연례회의라는 형식으로 이 민감사안에 대한 난상토론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당연한 상식선의 견해라고 할지라도 일반인들은 이를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다. 반공산당, 반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서다. 이런 상황에서 왕교수가 공개적으로 이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셋째, 발언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매우 분명한 관점으로 문제의 본질에 날카롭게 접근했으니 토론장에 직격탄을 날린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 참석자들은 첨예하게 맞섰다. 합의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왕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으므로 각자 견해에 따라 앞으로도 토론이 이어지리라 믿는다. ‘색깔혁명 논쟁’을 괴물 보듯 하는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번 토론이 있었던 후에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논쟁으로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옳고 그름은 민중이 판단할 몫이다. 무엇을 ‘긍정적 파장’이라고 하는가? 이런게 바로 긍정적 파장이다. 민중의 지혜를 얕잡아 보지 말라. 이런 자유토론이 정신을 혼란스럽게 할거라 여겨 토론을 피하고 하나의 주장만 존재하게 하거나, 공개석상에서 토론하지 못하게 한다면 언로와 사상은 차단됐고 진실과 진리는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한다.
이번 ‘색깔혁명’ 논쟁의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여론에 적잖은 긍정적 파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첫째, 사상과 토론에 금지구역은 없다. 사안을 인위적으로 민감하게 몰고 가지 말자. 지금 정부서부터 국민들까지 모두 개혁심화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보고 있다. 민감한 사안을 공개적으로 다루고, 공론의 성역을 없애며 사상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개혁의 전제조건이다. 특히 강이 너무 깊어 돌다리조차 두드릴 수 없는 개혁의 전환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럴 때는 충분한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사상은 해방될 것이다. 또한 민주적인 토론만이 중지를 모아 문제해결을 가능케 할 것이며, 자유로운 토론만이 실수를 최소화할 것이다. 지도자들은 다 똑똑할 거라는 착각은 버리라던 추이용위안 정협(정치협상기구)위원의 말이 참 맞다. ‘색깔혁명’을 보는 시선도 예전에는 한가지만 있는것 같았는데 그렇다면 이 관점만 맞는 것일까? 왕잔양 교수의 관점도 매우 귀담아 들을만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하면 ‘외부 적대세력’ 노래를 하던데 그렇다면 과연 허구의 ‘적대세력’이 무서운 것일까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같은 부패사범이 더 무서운 것일까?
둘째, 툭하면 정치·교조주의적 잣대로 죄명을 갖다 붙이거나 인신공격에, 문화대혁명시절 용어를 동원해 정적들을 매도하던 행태를 멈추어야 한다. 색깔혁명에 관한 이번 논쟁에서 보면 어떤이들은 사상적으로 상당히 좌편향적이라 걸핏하면 다른 사람을 반동분자라고 몰아세우고, “중앙당교 교수가 반동분자다”, “사회주의학원 교수가 반사회주의자다”, “체제내부자가 반체제인사다”라고 모함한다. 논쟁에도 지켜야할 기본 원칙이 있다. 사실을 말하고 이치를 따지며 논리를 가려야지 정치적으로 상대를 겁박하면 안된다. 덩샤오핑도 “‘좌’라는 것은 공산당 창당 이래 가장 무서운 것이다. 멀쩡하던 사람들도 하루 아침에 ‘좌경세력’에 제거당한다”라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휘둘러대며 인터넷 토론방에서 문화대혁명때 용어를 써가며 자기와 다른 견해들을 공격하고 말로 자해공갈이나 모함하기를 서슴지 않는 극좌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즉, 이치를 따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구호를 외치거나 어록속에 있는 말을 하라는 게 아니다. 오직 이치로 상대를 설득시켜야 한다. 판단할 때는 논거를 대야한다. 없는데서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이런 판단 과정을 거쳐 다른 판단으로 확장될 때도 논거가 있어야 한다. 말만 있고 논거가 없어서는 안된다. 논거나 논증이 없이 이분법적으로 본다면, 색깔혁명을 ‘외부 적대세력’의 탓으로 돌려야 애국자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과 나라를 배신한 반동분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치를 따질 수 있을리 만무하다.
2015.03.24 북한 뺨치는 중국 극단주의자들의 시진핑 신격화
송성(頌聖)문화’라는 단어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 즈종윈(資中筠) 선생이 만들었다. 성군을 찬양하고 황제의 봉건문화를 찬미한다는 뜻이다. 이는 사회 속에서 지도자를 신격화하고 시스템적으로 개인숭배와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송성문화가 현대 중국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 예가 있다. 바로 산둥성 작가협회 전 부주석 왕자오산(王兆山)이다. 2008년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낸 원촨대지진 이후 왕자오샨은 이런 시를 썼다.
“천재(天災)는 피할 길이 없고, 주석과 총리가 함께 걱정하니, 폐허 속에서 당과 국가의 사랑이 넘쳐난다. 13억 인구가 함께 통곡하니 귀신이 되어도 행복하다.”
송성문화는 어떤 극단까지 치달았는가? 그의 논리에 따르면 천재지변은 아무것도 아니다. 주석과 총리가 관심을 가지고 당과 국가가 사랑하니, 지진으로 죽어 귀신이 되어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귀신이 돼도 행복해”는 송성문화가 골수까지 침투한 결과다. 송성은 원래 봉건시대의 현상이다. 중국은 현대사회에 진입했지만, 전통적인 봉건주의가 관본위 정치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송성문화가 부활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송성은 지도자에 대한 과도하고 집중적인 숭배에서 나타난다. ‘시다다(習大大)’는 중국 민중들이 시진핑 주석에게 붙여준 애칭이다. ‘다다(大大)’란 중국에서 가까운 어른을 부르는 말이다. ‘시다다’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것은 국민들이 시 주석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정도가 있다. 이러한 호칭이 중국의 언론 환경에서 끊임없이 나타날 때, 이러한 개인 중심의 과도한 홍보는 대중으로 하여금 ‘개인숭배’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한다. ‘학습팬클럽’이라는 웨이보 계정이 막 나타났을 때는 사람들이 지도자에 대해 친근감을 느꼈으나 여론에서 이러한 이름표들이 가득할 때, 그리고 무슨 무슨 ‘학습팀’, ‘학습대국’ 등의 퍼블릭 계정들이 SNS에서 활개칠 때는 대중이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친민(親民)’과 ‘개인숭배’는 한 끗 차이다. 친민이 과해지면 송성으로 치닫는 것이다. ‘학습팀’과 같은 부류의 이름은 그나마 낫다. 대중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지도자의 신격화다. ‘학습팬클럽’이 인터넷에서 시진핑 주석이 과거 사용했던 브랜드를 판매하고 당의 구 매체와 신매체가 모두 개인의 중요 담화를 보도하고 지도자의 과거 정치 경력과 연설을 모두 끄집어내 이미지를 형성하고 지도자의 가족들까지 모두 매체의 보도, 찬양 대상으로 만들었다.
웨이보에서는 이들을 공공연하게 숭배하는 시도 나타났다. 류신다(劉信達)라고 하는 작가는 매일 웨이보에 이런 시를 썼다. 다음은 그중 몇 가지다.
1. 국모 펑리위안,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한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공익을 위해 헌신한다. 외교를 위해 아름다운 자태를 가끔 드러낸다. 까만 미셸(미국 영부인)은 뭘 해도 초라하다. - <국모 펑리위안을 찬양하다>
2. 성현의 글을 읽고 성현의 업적을 찬양하는 나는 시 주석만을 기리네. - <시 주석만을 기리네>
3. 모택동 주석은 말 위에서 강산을 이뤘다. 시진핑 주석은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큰 책임을 짊어지며 꿈을 이루려 한다. 복잡한 세계 질서 속에서 외교력으로 위험을 헤쳐나간다. 주석님께 간절히 부탁드린다. 조금 쉬면서 일하시길. - <시 주석님, 고생하십니다>
▲중국작가 류신다의 웨이보 메인페이지 화면./사진=웨이보 캡처
비록 류신다와 같은 아부꾼은 극소수지만 은근하게 아첨을 하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주석 어록’, ‘시 주석은 모택동 주석 이후의 또 하나의 위인’과 같은 개인숭배 색채가 강한 언사들은 쉽게 접할 수 있다. ‘시 아저씨가 펑 아줌마를 사랑한다’와 같은 서민적인 표현 방법도 아첨에 포함된다.
송성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은 각종 ‘이론’으로 현행 체제를 옹호하며 필요한 개혁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는 병폐, 특히 현재 심각한 사회적 불공평과 만연한 부패를 변호한다. 이러한 송성은 현재 전문가와 언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도자가 무슨 말을 하면 전문가와 언론이 바로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지도자가 무슨 말만 하면 바로 반응한다. 지도자가 틀린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지도자의 말에 조금이라도 반박하는 사람은 모조리 ‘반당(反黨)’, ‘반사회주의’라는 딱지가 붙는다. 언론이 국가를 찬양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고 정부와 국가를 감히 비판이라도 하면 ‘전제정치’로 혼나야 하는 나쁜 세력이 되는 것이다.
시다다 본인은 이런 송성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을 ‘성군’이라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선전 기계는 작동하기 시작하면 개인숭배와 송성의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 춤추는 마법 구두를 신은 것처럼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개인에 대한 과도한 선전은 절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심각한 악을 초래한다. 처음에는 신선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반감만 살 뿐이다. 송성의 말로(末路)는 지도자에 대한 해악이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에 대한 해악이다.
2015.04.16 스톡홀름대학 공자학원 폐쇄에 중국이 조용한 이유
독일 매체 ‘도이체 벨레’ 중문망의 보도에 따르면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는 최근 공자학원과의 협력 계약을 2014년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대해 스톡홀름대학교 측은 “현재 중국과 다양한 분야의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있어 이러한 (공자학원과의) 협력은 과다한 것으로 판단했다”라며 공식적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는 중국의 체면을 고려해서 내놓은 해명으로 보인다. 이 학교의 부총장은 자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통상적으로 대학 내에 다른 나라 정부의 경비 지원을 받는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 있는 행동’이라며 완곡한 방법으로 진짜 생각을 드러냈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민족 정서와 관련된 ‘중국에 불리한’ 뉴스는 중국의 민족주의 정서를 매우 쉽게 자극해 중국 매체와 인터넷이 들고 일어나 비판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번 스웨덴 공자학원 사건은 중국 여론에서 폭풍을 일으키지 않았다. 외교부도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관영 매체들도 조심스럽게 보도했고 심지어 이러한 문제를 과장되게 보도해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길 좋아하는 <환구시보(環球時報)>조차 이 일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기 드문 조용함의 배후에는 흥미로운 이유가 숨어 있다.
첫째, 스톡홀름대학이 제시한 공자학원 폐쇄 이유가 매우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계약이 만료되었으니 연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계약 위반이 아니다. “중국과는 이미 다양한 학술교류 시스템이 있어서 이러한 협력은 과다하다”라는 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 아니다. 이 대학은 실제로 많은 중국 대학들과 협력을 하고 있고, 특히 활발한 민간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이유에 대해 이렇다 할 결점을 찾을 수 없고, 철저하게 계약에 따라 일을 진행하니 민족정서나 “서양인들이 중국에 편견을 갖고 있다” 등을 이유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공자학원은 전 세계적으로 중국어를 보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국의 이미지를 대외에 홍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좋지 않은 소문으로 서양국가와 대중들에게 반감을 샀다. 일례로 서양의 일부 평론가들은 영국문화원과 괴테 인스티튜트처럼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들과 달리 중국의 공자학원은 다른 국가들의 학교 내부에 직접적으로 설립되고 중국 정부로부터 경비(經費)와 교사를 지원받고 허가받은 교재만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작년, 미국 대학 교수연합회는 100개에 달하는 미국 대학들에 공자학원과의 협력을 취소하고 재협상을 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공자학원이 중국의 정부기관이며 중국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학문의 자유를 위반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일부에는 부패도 존재한다고 했다.
▲공자학원에서 한 여학생이 붓글씨를 들어 보이고 있다./신화통신
이러한 비판에는 서양인들의 (중국에 대한) 습관적인 편견이 숨어있다. 서양국가들도 중국에서 공자학원과 비슷한 문화교육기관과 육성프로그램을 많이 설립했다. 서양국가들은 항상 민간기관을 앞세워 교류를 진행하는 반면 중국은 국영∙관영기관이 직접 진행하니 이것이 ‘중국위협론’ 등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서양인들의 반감을 샀을 만하다. 서양 정서에 맞지 않는 교류방식으로 인해 중국은 대외적으로 공자학원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항상 어려움을 맞닥뜨렸다. 사실 스웨덴 공자학원이 외국에서 폐쇄된 첫 공자학원은 아니다. 따라서 크게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중국의 대외전략이 가지고 있는 결점과 관련 있다. 일부 외국 기업에 대해 중국은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인터넷 분야에서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중국 진출을 막아 중국인들이 국내에서 접속할 수 없게 했다. 중국의 인터넷을 관리하는 한 책임자는 외신 기자들의 “서양의 일부 웹사이트,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중국에서 접속할 수 없다. 중국은 왜 이런 사이트들을 차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중국은 예로부터 손님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문화가 있다. 하지만 누구를 손님으로 초대하느냐는 주인이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러한 개방적이지 못한 태도로 인해 외국인들이 공자학원을 폐쇄했을 때도 (외국인들이)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중국의 지도부에게 “우리는 예로부터 손님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문화가 있는데 누구를 손님으로 초대하느냐에 대해서는 나도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이 외국 기업들을 환영하지 않고 외국도 중국의 공자학원을 폐쇄하면 국제교류에서 서로를 적시하는 악순환을 초래할 뿐이다.
마지막 이유는 다른 서양국가들도 스웨덴 대학의 결정을 보고 이를 따르는 연쇄반응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이다. 공자학원은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 논쟁거리였다. 만약 중국이 공식적으로 스웨덴 대학의 태도를 과장해서 말한다면 공자학원을 반대하는 정서를 자극해 더 많은 국가와 대학들에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2015.06.30 문화대혁명을 연상시키는 중국의 4대 극좌 매체
중국은 대대적인 부패 척결과 함께 이데올로기 부문에서 여론 전쟁 중이다. 정부는 반정부 인사들에게 점령됐던 여론을 다시 장악해 발언권을 되찾고, 미디어와 인터넷이 정부의 목소리를 더 많이 전달해 여론에서의 권력을 되찾길 원한다. 정부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를 단속하고 관영 매체를 지원하는 한편, 말을 듣지 않는 민영 매체를 손보며 여론에서의 목표를 실현했고 결국 관영매체가 여론을 장악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관영 매체가 흥하고 민영 매체가 후퇴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갈수록 줄어들게 된 과거의 ‘천편일률’적 여론 환경의 부활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여론 환경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선 관영 매체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러한 여론 전쟁이 탄생시킨 극좌 매체다. 이런 극좌 매체는 자신을 이데올로기 전쟁의 기수라 여기고 여론 전쟁의 진두에서 아젠다 설정에 나서며 이데올로기라는 방망이를 휘두르고 문화대혁명 시절처럼 다른 관점에 대해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이러한 극좌 매체들은 영향력을 잃었다. 표면적 지위와 달리 실질적으로는 영향력이 없어 발행 부수가 아무리 많아도 독자가 없었다. 현실 속에서 존재감이 없어 좀비 매체나 다름없다.
그러나 최근 이런 좀비 매체들이 여론 전쟁에서 부활해 극단적인 언사로 지위를 되찾고 교조주의로 자신의 ‘정통적 지위’를 강화하고 있다. 포퓰리즘과 협소한 민족주의로 선동을 일삼고 이데올로기와 여론에서의 혼란을 초래한다. 대표적인 매체로 4곳이 있다.
첫 번째는 <해방군보(解放軍報)>다. 본래 매우 폐쇄적으로 발행되던 이 신문의 독자층은 주로 군인들이다. 발행의 압박이 없고 군대의 성향도 보수적이어서 이 신문 또한 보수적인 성향이고 다수의 글이 정부 일변도의 쓸데없는 말들이다. 관점은 7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선동을 일삼는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이 신문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공공 아젠다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낙마한 쉬차이허우(徐才厚)를 ‘국민 요괴’로 비판하며 군대에는 이런 ‘두 얼굴’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신문이 군대의 부패를 비판하기보다는 여론 전쟁을 위한 사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최근 이 신문이 실은 “한 웨이신(중국판 트위터) 퍼블릭 계정이 공산당의 집정 지위를 흔들려 한다”, “역사허무주의의 ‘독화살’이 선열들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 투쟁의 진영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누군가 문화와 여론을 이용해 중국에 대해 함부로 말하려 한다”, “‘정치적 변종’에게 근본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등의 사설 제목에서 이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해방군보의 인터넷 사이트 중국군망(中國軍網).
두 번째는 <구시(求是)> 잡지와 산하의 <홍기문고(紅旗文庫)>다. 이 잡지는 매우 높은 정치적 지위를 갖고 있다. 인민일보와 나란히 장관급 매체이고 문화대혁명 기간에 활약한 바 있다.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2보 1간’중의 1간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다른 신문 매체의 중역들은 모두 타도 당했지만 <인민일보>와 <홍기문고>는 중앙문화대혁명소조 조장인 천보다(陳伯達)를 필두로 한 공작조의 지도를 받았고 <해방군보>는 ‘마오 주석의 친밀한 전우’인 2인자 린비아오의 지도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구시>는 주로 일부 고위 간부의 사상이론 관련 글을 실으며 영향력을 잃은 채 자유화 개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런데 이 매체가 최근 1년 사이에 갑자기 활발해져 ‘고위급의 목소리’로 인식되고 있다. 이 매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싣는다.
“적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VPN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법치로 인민민주 전제정치를 대신할 수 없고 서양식의 민주는 진정한 민주가 아니다. 계급투쟁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서양의 이데올로기가 침투한 새로운 발언 수단을 경계하자.”
▲구시 홈페이지.
세 번째는 <당건(黨建)> 잡지와 인터넷 사이트 ‘당건망(黨建網)’이다. 이 잡지는 주로 인터넷 작가 저우샤오핑(周小平), 화첸팡(花千芳) 등이 쓴 비논리적인 칼럼을 싣는다. ‘리카이푸(李開復∙전 구글 차이나 사장)에게 묻는 10가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후 두 작가는 지도자와 접견까지 했다. 당건과 당건망은 두 사람의 비상식적인 칼럼들을 퍼뜨리는 주요 루트라고 할 수 있다
▲당건망 홈페이지.
네 번째는 <환구시보(環球時報)>다. 당 매체 중 발언의 특권을 가지고 있고 민감한 이슈에 관해서 독점적인 평론권을 가지고 있다. 이 매체만 언급할 수 있고 다른 매체는 건드릴 수 없는 이슈가 많다. <환구시보>는 이러한 발언권을 이용해 자주 사실을 왜곡하거나 진상을 뒤바꾼다. 하지만 다른 매체는 이를 반박할 수 없다. 이 매체의 사설에서 자유파 지식인들은 자주 공격을 받고 각종 오명을 뒤집어쓴다.
▲환구시보 홈페이지.
이들 4대 매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60, 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머물러 있는 듯 구태적이다. 일상에서는 이미 사라졌고 심지어 주류 매체들조차도 사용하길 꺼리는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강한 언어다. 그런데 오늘날 이들 매체가 다시 여론에 나타나 대중의 반감을 사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과격하지만 논리가 부족하다. 그러나 교만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정통성’을 대표한다고 여겨 기세가 매우 등등하다.◎
동방일삼
◆모종혁의 마오쩌둥 이야기
◇ 마오쩌둥 주석 서거 40주년: 한 시대를 뒤흔든 위인의 품격
[인민망 한국어판 9월 9일] 1976년 9월 9일 오후 4시 중국 중앙인민라디오방송국(中央人民廣播電臺)은 아주 비통한 심정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명예주석인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이 당일 새벽 0시 10분에 베이징에서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소식을 전하고 15분 후 로이터 통신사, AP 통신사, AFP 통신사 등 세계 주요 언론사는 앞다투어 마오쩌둥 주석의 서거 사실을 보도했다.
세계 주요 언론사들은 마오쩌둥 주석 찬양 기사, 마오쩌둥 주석의 혁명 스토리 등을 대량으로 발표하거나 배포하기 시작했고 일부 국가의 신문에는 마오쩌둥 주석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10면 넘게 실리기도 했다. 이어 세계 각국의 정치계, 국제 조직 등 역시 이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53개국 국기 ‘반기 게양’, 각국 지도자 호평 잇따라
마오쩌둥 주석이 서거하자 세계 각지에서 마오쩌둥 주석을 위한 찬양과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일부 기자는 ‘9월 9일 오후 4시 모두가 비통해하자 지구도 자전을 멈췄다’라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마오쩌둥 주석 서거 후 10일 동안 총 123개국의 정부와 지도자가 중국 정부에 조전 또는 조문 편지를 보냈고, 105개 국가의 지도자 및 대표는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중국 대사관을 방문했으며, 53개 국가에서 국기를 반기 게양했다. 또한 많은 국제기관과 국제회의 석상에서 애도 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유엔 본부 역시 곧바로 반기 게양을 하며 마오쩌둥 주석의 서거에 대해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다.
40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고 우리는 당시 사진을 통해 마오쩌둥 주석의 위대했던 혁명과 생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번역: 은진호)
원문 출처: 중국군망(中國軍網)
◇ 2015.07.13 흉노족을 정벌한 漢나라의 18살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 이야기
주천(酒泉)의 한무어(漢武御)와 신장 카자흐 유목민의 마유주(馬乳酒)
▲신장위구르자치구 카나스진의 카자흐족. 유목민의 전통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다.
기원전(BC) 141년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 16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당시 한나라는 대외적으로 편치 못했다. 북방의 유목국가가 번영을 구가하며 핍박해 왔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BC 209년 묵돌 선우(冒頓單于)가 제위에 오르면서, 동으로는 만주(滿洲), 서로는 서역(西域)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BC 200년 한고조 유방(劉邦)이 이끌고 온 32만명의 대군도 물리쳤다. BC 3세기부터 600여년 동안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초원의 제국 흉노(匈奴)가 그 주인공이다.
유방은 친정(親征)에 나서기 전 아주 자신만만했다. 초한(楚漢)전쟁에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BC 202년 통일제국을 세웠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이덩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되어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뒤로, 항상 흉노에 대한 공포에 떨었다. 유방은 묵돌 선우와 화친을 맺었는데, ▲한이 흉노를 형으로 모시고 ▲매년 곡식·비단·술 등 공물을 바치며 ▲한의 공주를 선우에게 출가시키는 굴욕적인 맹약이었다. 숨을 거둘 때는 “절대 흉노와 싸우질 말라”는 유언도 남겼다.
묵돌·노상(老上)·군신(軍臣) 선우로 이어지는 3대 81년 동안 흉노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에 한무제도 즉위 초기에는 화친정책을 이어 갔다. 하지만 BC 135년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두(竇)태후가 죽자, 개혁정책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먼저 국정을 농단하던 두태후 일족과 추종 대신들을 숙청했다.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효렴(孝廉)제를 실시해 효행이 뛰어나거나 청렴한 인재를 등용했다.
BC 133년 내정을 다진 한무제는 흉노와의 일전에 나섰다. 흉노와 교역하던 상인 섭일을 위장 투항시켜 군신 선우를 유인했다. 군신 선우는 기병 10만을 이끌고 내려왔는데, 지금의 산시(山西)성 숴현(朔縣)인 마읍(馬邑)에 도착하기 전 한군(漢軍)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선우는 철군을 단행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군은 아직 기병이 취약해 추격전을 감행할 처지가 못 됐다. 결국 한무제는 대군을 동원한 데 따른 인적·물적 손해만 감수해야 했다.
衛靑의 흉노정벌
그로부터 4년 뒤 한무제는 위청(衛靑), 공손오(公孫敖), 공손하(公孫賀), 이광(李廣) 등 네 장군에게 각각 1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본래 화친맹약에 따라 한과 흉노는 진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이때 한군은 처음으로 장성을 넘어 북진했다. 네 방향에서 흉노 땅에 진입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공손오는 흉노군에 패해 부하 7000명을 잃었고, 이광도 대패해 포로까지 됐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공손하는 길을 잘못 들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위청만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이었다. 장성을 넘어 흉노 땅을 휘저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이듬해에도 위청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가서 수천 명의 흉노군을 참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원래 위청은 첩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종처럼 불우하게 보냈다. 하지만 노래하는 기녀(唱妓)였던 누나 위자부(衛子夫)가 한무제의 애첩이 되면서 신분이 수직상승했다. BC 127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내몽골(內蒙古) 오르도스(鄂爾多斯)까지 차지하여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해가 바뀌면서 흉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군신 선우가 죽자, 동생인 이치사(伊雉斜)가 어린 태자를 쫓아내고 즉위했다. 묵돌부터 군신까지 흉노가 번성한 데에는 선우의 뛰어난 용인술이 한몫했다. 한나라는 패전한 장수를 사형에 처한데 반해, 흉노는 적장을 포로로 잡아서 장군으로 삼아 중용했다. 한데 이치사 선우는 한 황제와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훗날 전투에서 패한 혼야왕(渾耶王)이 부족을 이끌고 한군에 투항한 것은 이치사 선우가 내릴 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BC 123년 위청은 전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내몽골 전역을 휩쓸며 적군 1만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치사 선우의 주력 부대와 조우하면서 대패했다. 우(右)장군 소건은 휘하 병사를 모두 잃고 혼자 도망쳐 왔다. 전(前)장군 조신은 전투에서 져서 기병 800을 이끌고 투항해 버렸다. 단지 한 장수가 치고 빠지는 기습공격을 능란하게 펼치면서 흉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위청의 생질이자, 18살이었던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자르다”
곽거병은 평양공주의 시녀였던 위소아(衛少兒)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2살 때 일가족이 모두 귀족이 됐다. 어릴 적 집안이 풍족하진 못했지만, 이모가 황후에 오르면서 궁을 자주 드나들며 한무제의 눈에 들었다. 학문에 정진하고 무예를 익혀 16살부터 군문(軍門)에 몸을 담았다. 18살에는 표요교위(剽姚校尉)로 참전해 위기에 빠졌던 한군을 구출했고, 수하 800명을 이끌고 진격해 흉노군 28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무제는 그 공로를 인정해 곽거병에게 작위(爵位)를 내렸다.
BC 121년에는 표기(驃騎)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최정예 기병 1만을 줬다. 그에 부응하듯 곽거병은 지금의 간쑤(甘肅)성에 3차례 출격해서 큰 전공을 세웠다. 흉노의 번왕 절란왕(折蘭王)과 노호왕(盧胡王)을 죽였고, 혼야왕을 항복시켜 치롄산(祁連山)까지 평정했다. 훗날 “흉노의 오른쪽 어깨(右肩)를 잘랐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같은 시기 출정한 이광은 흉노군과 일진일퇴만 거듭했고, 공손오는 행군이 늦어 전장에 늦게 도착했다.
한무제는 BC 119년 위청과 곽거병을 쌍익(雙翼)으로 삼아 각각 5만의 기병을 줘서 흉노 토벌전에 나섰다. 위청은 본진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이치사 선우가 이끄는 정예병과 조우했다. 양군이 격전을 치르던 중 모래폭풍이 불어 왔다. 그 와중에도 한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선우는 호위대를 이끌고 도망쳤다. 위청이 추격에 나섰지만 종적을 찾질 못했다. 이 전투에서 위청은 흉노군 1만90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반해 예하 장군들은 길을 헤매다 싸움에 참여하질 못했다.
막료 없이 전장에 나선 곽거병은 젊은 장수들을 과감히 발탁했다. 곽거병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인 우북평군(右北平郡)에서 출병해 1000리까지 북진하며 흉노의 왼쪽 어깨를 잘랐다. 번왕 3명을 주살했고 장군과 신하 83명을 붙잡았다. 병사 7만443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왔다.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서 보급을 제대로 받질 못하자, 적의 것을 빼앗아 군량미와 말먹이로 충당했다. 위청이 한 전투에서 1만명의 기병을 잃은 데 반해, 10배나 더 많은 전투를 치른 곽거병은 수하 1만5000명이 죽었다.
이렇듯 곽거병은 한무제의 날카로운 비수로 흉노를 난도질했다. 흉노는 제국의 좌우견이 잘려나갔기에 내몽골 남부와 간쑤성을 완전히 포기했다. 한군의 예봉을 피해 수도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옮겼고, 한동안 한을 넘보질 못했다. 그러나 곽거병은 불과 23살에 요절했다. 사막과 초원을 전전하면서 풍토병에 감염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史記)》의 〈위청·곽거병전〉에 따르면, 곽거병은 생전에 6차례 출정했다. 그중 4번은 장군으로 나서서 흉노군 11만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常勝장군 곽거병
한무제는 이런 곽거병의 공로를 인정해 4차례에 걸쳐 식읍(食邑) 1만5100호를 하사했다. 곽거병을 따라 출정했던 교위와 군리(軍吏) 중 6명에게도 작위를 수여했고, 2명을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점은 곽거병의 뛰어난 리더십이다. 첫째, 곽거병은 뛰어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공정히 배치했다. 그가 발탁한 조파노(趙破奴)는 유목민 출신으로 흉노에서 살다가 한으로 귀순했었다. 조파노는 곽거병이 올린 장계에 따라 작위를 받았고, 훗날 장군까지 되어 크게 활약했다.
둘째, 곽거병은 전쟁터의 상황에 맞춰 전술을 펼치는 ‘언제나 이기는 장군(常勝將軍)’이었다. 《사기》에는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무제가 곽거병에게 손오병법(孫吳兵法)을 가르치려 했다. 곽거병은 “어떤 작전을 쓸 것인가 생각하면 됩니다. 굳이 옛 병법을 익힐 필요는 없습니다”고 말했다. 실제 곽거병은 임기응변의 달인으로 전장을 고려해 수시로 전술을 바꿔 가며 전투를 벌였다. 병사들은 곽거병의 지휘를 믿고 따르면 항상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다.
셋째, 곽거병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했다. 위로는 장수부터 아래로는 말단 군졸까지의 전공을 꼼꼼히 기록해서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이런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일처리 덕분에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 대부분은 승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상승장군 밑에서 전투에 이기고 전공도 챙길 수 있었기에 누구나 곽거병 휘하로 들어가길 갈망했다. 이에 반해 BC 119년 토벌전에서 승리했지만, 위청의 막료들과 병졸들에게는 별다른 은상(恩賞)이 없었다.
▲곽거병의 흉노정벌을 기리는 馬踏匈奴像. 漢의 기병이 흉노를 밟고 있는 모습이다
곽거병이 샘터에 술을 부어 마셨던 주취안
▲주취안공원에 보존되어 있는 샘터. 곽거병은 이 샘터에 술을 부어 병사들과 나눠 마셨다.
물론 곽거병에게도 허물은 있었다. 황후의 일족으로 성장했기에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거침이 없었다. 사마천은 《사기》에 그런 성품을 보여주는 사례를 기록하며 비판했다. ‘표기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귀한 신분이라 병사를 돌볼 줄 몰랐다. 황제는 그가 출정하면 음식을 가득 실은 수레 수십 대를 보내줬는데, 되돌아오는 길에 굶주린 병사가 있음에도 남은 고기와 양식을 버렸다. 요새 밖에서 주둔할 때는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려도 표기장군은 공차기를 하며 놀았다.’
반면 위청에 대해서는 ‘성품이 인자하고 겸허하며 온화했기에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세상은 그를 칭송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위청은 분명 실력과 인품을 갖췄고 수많은 전공을 올렸던 장군이다. 한데 어찌하여 한무제와 병사들은 곽거병을 더 사랑하고 높이 평가했을까? 한무제는 어릴 적 종살이를 해서 겸손함이 몸에 배었던 위청보다, 위풍당당한 곽거병이 훨씬 더 사내답다고 여겼다. 곽거병을 너무나 아꼈기에 언제나 최고의 말·무기·장비 등을 배정해 주었다.
곽거병의 대장부 기질이 드러나는 고사가 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한 곽거병이 간쑤성에 출정해 큰 공을 세우자, 한무제는 어주(御酒) 한 병을 보내주어 승전을 축하했다. 당시 병사들은 전투에서 이겼으나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머나먼 전쟁터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도 깊었다. 이에 곽거병은 진영 앞 샘터로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술병을 높이 들고 “이 술은 황제께서 너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하셨으니 우리 모두 함께 마시자”고 외쳤다. 그러곤 술을 샘물에 쏟아 부었다.
곽거병이 먼저 바가지에 떠서 마셨고 병사들이 돌아가며 샘물을 마셨다. 곧 군영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뒤이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고작 한병의 술로 타이밍을 잘 잡아 군심(軍心)을 움직인 곽거병의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곽거병은 과묵하고 오만했지만, 이처럼 병사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았기에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인 한서사군(漢西四郡)을 개척했다. 한서사군은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둔황(敦煌)인데, 곽거병이 샘터에 술을 부었던 곳은 주취안이다.
주취안 최대의 주류업체 한무주업이 내놓은 ‘韓武御’
▲漢代 레이타이묘에서 출토된 靑銅騎馬兵俑.
오늘날 간쑤성 곳곳에는 곽거병과 관련된 유적지가 개발됐다. 란저우(蘭州)는 시 중심가에 곽거병 테마공원을 조성했다. 우웨이에서는 한대 레이타이묘(雷臺墓)에서 출토된 청동기마병용(俑)을 ‘곽거병 군단’이라고 부른다. 이 청동용은 1969년에 99개가 발견됐는데, 이 중 마답비연(馬踏飛燕)이란 말용이 있다. 마답비연은 ‘나는 제비의 등을 밟고 뛰는 말’이라는 뜻으로, 예술성이 뛰어난 천고의 보물이다. 현재는 중국 국가여유국의 상징 로고로 쓰이고 란저우의 간쑤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곽거병이 술을 샘물에 부어 병사들과 나눠 마셨던 주취안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주취안이란 지명은 BC 106년 한무제가 곽거병을 기리며 지었다. 비록 송·원·명·청대 1000년 동안은 숙주(肅州)라 불리기도 했지만, 1949년에 다시 복원됐다. 술을 부었던 샘물은 현재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주취안에는 한무제와 곽거병의 스토리를 인용해 론칭된 술 브랜드도 있다. 주취안 최대의 주류업체 한무(漢武)주업이 내놓은 한무어(漢武御)다. 한무어는 ‘한무제가 내린 어주’라는 뜻이다.
한무주업은 1970년대 초 설립된 국영 주취안시술공장(酒廠)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에는 값싼 주취안주(酒)를 양조해 팔면서 현지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의 소득수준이 급상승하면서 고급 바이주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양조기술을 개발해 1997년 한무어를 내놓았다. 주취안시술공장도 2002년 곡물유통기업인 쥐룽(巨龍)그룹에 인수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무어는 농(濃)·장(醬)·청(淸)·미(米) 등 향기와 숙성방식에 따라 나뉘는 분류법을 거부하고, ‘중국 유일의 사조형(沙窖型) 바이주’라는 명칭을 고집스레 내세우고 있다. 왕잉훙(王英鴻) 한무주업 부사장은 “한무어를 양조할 때 쓰이는 누룩은 교외의 모래산에 마련된 저장고에서 발효된다”며 “다른 바이주와 달리 원료로 수수보다 밀의 비율이 높은 점도 특징이다”고 말했다. 저장고에 가 보고 싶었지만 공개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너무 아쉬웠다. 현재 한무어는 간쑤성 일대에서만 판매되지만, 재미있는 스토리와 양조법을 지니고 있어 판매망을 더 확장하면 앞날은 밝아 보였다.
신장위구르자치구 고산초원에 남아 있는 흉노의 생활상
▲카나스진은 울창한 산림과 맑은 물 때문에 ‘중국의 스위스’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흉노제국의 유목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북부의 한 고산초원에서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푸른 옥과 같은 물빛, 녹음(綠陰)을 한껏 뽐내는 산림, 호수 주변을 품고 있는 설산…. 사시사철 이 모든 것을 간직해 ‘중국 속의 스위스’라 상찬(賞讚)받는 부얼진(布爾津)현의 카나스(喀納斯)진이 바로 그 현장이다. 본래 카나스는 ‘협곡 중의 호수’라는 몽골어에서 유래됐다. 해발 1374m, 남북 24km, 수심 188.5m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고산 호수다.
카나스진은 이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촌락으로, 신장에서도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다. 카나스가 속한 알타이(阿勒泰)지구는 하나의 시와 6개의 현으로 구성된 알타이산맥의 중국 영토다. 전체면적이 11만8000km²로 한국(9.9만km²)보다 크지만, 2010년 현재 인구는 60만3000명에 불과해 인구밀도가 아주 낮다. 알타이지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시베리아계의 자연생태계를 품고 있다. 798종의 식물, 39종의 동물, 117종의 새, 7종의 어류, 300여종의 곤충류가 서식하는 생명의 보고다.
1년 중 절반이 겨울로 사나운 바람이 밤마다 몰아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땅에는 카자흐(哈薩克)인과 투와(圖瓦)인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 투와인은 몽골인의 방계로 투르크계의 언어, 몽골의 종교와 문화, 카자흐의 생활습관을 갖춘 원시부족이다. 민족 분포는 한족이 38.5%(23만3000명)이고 카자흐인(32만8000명), 회족(回族·2만3000명), 위구르족(維吾爾族·8703명), 몽골인(5376명) 등 소수민족이 61.5%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신장자치구 전역에는 12개의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다. 인구수가 가장 많은 위구르족은 정주민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이와 달리 카자흐인과 몽골인은 유목민의 전통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이들을 도시로 이주시키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지금도 유목민들은 수천년간 이어져온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카나스의 아름다움이 1990년대 말부터 세상 밖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개발이 가속화했다. 이제는 유목생활이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유목민의 요람’ 알타이
알타이산맥은 중국,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4개 국가에 걸쳐 있을 만큼 거대하다. 평균 해발이 1000~3000m이고, 가장 높은 벨루하산은 무려 4506m에 달한다. 지질은 혈암(頁岩), 녹니편암(綠泥片岩), 사암(砂岩) 등으로 이뤄졌고 곳곳에 화강암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납, 아연, 주석, 금, 백금 등 다양한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런 알타이를 ‘루드니(광석이 많은) 알타이’라 부른다.
겉으로 드러난 알타이는 더욱 풍요롭다. 알타이는 전형적인 대륙성 한대기후의 고산지대다. 낙엽송과 활엽수가 무성한 숲, 드넓은 고산초원,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호수, 만년설에 뒤덮인 빙하 등이 산맥 전체를 덮고 있다. 특히 산맥 허리인 1500~2500m 지대는 다양한 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여 있다. 이런 산림은 총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연평균 강수량이 1000~2000mm로 적당한 데다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산림을 적셔 주기 때문이다.
천연의 자연환경 덕분에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알타이산맥에는 다양한 유목민이 발원해 살아왔다. 흉노와 투르크 계열 민족의 일부가 여기서 시작했다. 칭기즈칸도 몽골고원을 통합한 뒤 알타이를 무대로 세력을 확장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알타이를 ‘유목민의 요람’이라 부른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유목민의 생활을 체험하려는 투어는 중국의 카나스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바르나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알타이지구는 카자흐인(54.4%)이 가장 많다. 카자흐인은 생김새가 작은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키가 작아 몽골인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살았던 투르크 계열 민족으로, 알타이어계의 카자흐어를 쓴다. 지난 천여 년 동안 카자흐인은 실크로드에서 무역거래를 했던 상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뛰어난 기마술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뽐내며 상인들을 노략질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밀려나는 유목민들
근대 들어 카자흐인은 겨울에는 고도가 낮은 도시에 정착해 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알타이산맥 곳곳을 누비며 유목생활을 해 왔다. 이런 생활방식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카자흐인과 카자크(Kazak)를 동일시한다. 하지만 카자크는 슬라브족으로 러시아어를 쓰는 군사집단이다. 이들은 제정 러시아를 지탱하던 기병부대의 핵심으로서 볼셰비키혁명에 반대했다. 백군에 가담해 5년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렀으나, 전쟁은 1922년 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과 무관했던 카자흐인은 자치공화국을 설립해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 됐다. 소련이 붕괴되자 1991년 12월 독립을 선언해 지금의 카자흐스탄을 건국했다. 오늘날 카자흐인은 카자흐스탄과 중국 외에도 러시아, 몽골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만의 언어·문화·풍습 등을 유지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한 16세기경부터 받아들인 이슬람교는 카자흐인이 전통 가치를 이어오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유목민은 목축을 생업으로 풀과 물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종족 집단을 가리킨다. 오랜 옛날부터 이들은 몽골, 중앙아시아, 아라비아 등지의 초원과 건조·사막지대에 넓게 분포해 살아왔다. 한때 스키타이, 흉노, 돌궐, 몽골 등과 같은 대제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오늘날 유목민으로서 정체성과 생활습관을 모두 간직한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현실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55개 소수민족 중 몽골인, 티베트인, 카자흐인, 키르기스(柯爾克孜)인 등 극소수만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목민이었던 몽골인은 금세기 들어 초원에서 쫓겨나고 있다. 중국 내 주요 거주지인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가 빠르게 사막화하면서 황사가 빈번하게 일어나 황폐화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네이멍구 대부분 지역에서의 유목을 금지했고, 몽골인 대다수는 유목생활에서 탈피해 도시의 정주민으로 변신하고 있다. 이에 반해 카자흐인은 알타이산맥과 톈산(天山)산맥의 울창한 산림과 드넓은 고산초원을 무대로 유목민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손님 대접을 위해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정성들여 양머리를 굽는 바인무랏의 큰아들.
2007년 9월 필자가 찾았던 카나스진 북부 카잔춈쿠르 초원은 알타이지구의 유목지 중 하나다. 카잔춈쿠르는 평균 해발 1600m로, 카자흐스탄에서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카자흐인은 5월 초 중국정부의 허가 아래 유목에 나선다. 먼저 부얼진현 내 겨울 주거지에서 살림살이를 꾸려서 낙타에 짐을 싣는다. 보통 모든 가족이 친척, 이웃과 함께 무리를 짓는다. 키우던 양, 소, 말 등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4~5일까지 길을 나서서 묵을 곳을 정한다. 그 뒤 온 가족이 생활하고 잘 수 있는 집을 짓는다. 바로 펠트 천으로 만든 둥근 천막 ‘유르트(Yurt)’다. 유르트는 몽골의 ‘게르(Ger)’와 아주 유사하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천막 같지만 안은 따뜻해서 고산의 추위를 막아 준다. 유르트 안은 놀랍게도 문명의 이기가 두루 갖춰져 있다. TV, 전기장판, 전화 등을 완비했고 이동식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까지 돌린다.
필자는 카잔춈쿠르 초원에서 바인무랏 일가족을 만났었다. 바인무랏은 부인,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 등 3대가 함께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키우던 동물은 낙타 6마리, 말 15마리, 소 30마리, 양 200마리 등 넉넉했다. 그 정도면 부얼진에서 중산층에 속한다. 바인무랏은 “옛날에는 유목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겨울 주거지에서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그대로 가져와 쓸 수 있기에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고산초원에서 몇몇 가정만 어울려 살아야 하는 유목민에게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방객은 반갑고 흥미로운 존재다. 천성이 유쾌한 유목민답게 카자흐인은 어느 민족보다 융숭하고 극진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이들은 보통 손님 대접을 위해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는다. 카자흐인은 평소 양고기를 삶거나 구워서 먹는다. 3~4시간 동안 푹 삶는데, 양파와 파를 듬뿍 넣어서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앤다. 여기에 소금과 카자흐 전통향료를 넣어 요리를 완성한다.
‘예락(醴酪)’이라는 덜 익은 감주(甘酒)가 마유주의 기원인 듯
▲마유주를 만들기 위해 소젖을 짜는 바인무랏의 큰며느리.
유목민의 일상은 해가 저물어야 끝난다. 이 때문에 밤 8시가 가까워서야 밥상이 차려진다. 먼저 준비한 양고기를 중앙아시아 전통 빵인 난, 채소 등과 함께 밥상 위에 올린다. 식사 전 빼먹지 않고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알라께 올리는 예배다. 카자흐인은 무슬림이라 끼니마다 코란을 암송하면서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의식이 끝나면 양고기를 상석에 앉은 손님께 바친다. 만약 손님이 여럿이면, 가장 나이가 많거나 존경할 만한 이에게 정성 들여 구워 삶은 양머리를 드린다.
손님은 코나 입술 부위를 조금 베어 먹은 뒤 가장에게 주거나, 다른 부위를 조금씩 잘라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고 주인에게 넘겨 준다. 보통 가장은 손님에게 눈을 베어 바치는데,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주인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기에 반드시 먹어야 한다. 목젖은 자라서 노래를 잘하라는 의미로 아이들에게 준다. 귀는 집안에서 가장 어린 꼬마에게 잘라 준다. 어른들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을 귀담아 들으라는 뜻이다.
양머리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면 본격적으로 음주를 즐긴다. 카자흐인의 술 ‘크므스(Qimiz)’를 마시는 것이다. 크므스는 말젖, 소젖, 양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馬乳酒)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술이라기보다 영양음료에 가깝다. 간단하게 양조할 수 있어 신석기시대부터 마유주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에는 ‘예락(醴酪)’이라는 덜 익은 감주(甘酒)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예락이 마유주의 기원일 가능성이 높다.
소는 유순해서 여자가 젖을 짜지만 말은 예민해서 남녀가 함께 일한다. 여자가 말젖을 짜면 남자가 망아지를 붙잡아 옆에 두어 그 젖을 먹게 하는 것처럼 위장한다. 소젖도 마유주를 만들 수 있지만 말젖보다는 질이 떨어진다. 보통 소젖은 한 마리에서 3L를 채취할 수 있으나 말젖은 1L도 못 나온다. 소젖은 한번 끓인 뒤에야 발효할 수 있고, 소가 바닥에 엎드려 생활해 젖병이 날 수 있다. 이에 반해 말젖은 짜서 바로 발효해 신선도가 높고, 말이 서서 지내기에 젖병이 전혀 없다.
마유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
이런 마유주를 유라시아 전역으로 전파한 민족은 몽골인이었다. 마유주라는 명칭은 몽골어인 ‘아이락(Aikag)’에서 유래했다. 마유주는 한 차례 발효시킨 뒤 젖을 여러 차례 부어 다시 발효시켜야 맛이 좋아진다. 이때 마유주통에 긴 막대를 꽂아 두고 넓은 막대로 쉴 새 없이 저어야 한다. 보통 온 가족이 돌아가며 막대를 젓는다. 젖 속에 있는 지방과 단백질 조직을 깨뜨려 발효를 돕기 위해서다. 숙성이 끝난 마유주는 막걸리처럼 걸쭉한 색감과 3~4도의 알코올을 생성한다.
처음 마실 때는 비린내에 비위가 상하지만, 철 성분에 많이 함유되어 있어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약간 새콤한 맛이 나서 마실수록 알코올이 섞인 요구르트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무슬림인 카자흐인이 알코올이 함유된 마유주를 마시는 이유는 술이 아닌 음료라 여기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마유주를 마시면 몸을 따뜻하게 해서 감기를 이겨내고 식욕을 돋운다고 해서, 아이들에게도 마시도록 한다. 그야말로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딱 알맞은 술인 셈이다.
유목민은 식사하면서 흥이 나면 노래 부르고 춤춘다. 힘이 부치면 다시 음식을 먹고 영양을 보충한다. 이는 손님을 접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방문 첫날 바인무랏 아들·조카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늦게까지 술판을 이어갔다. 담가 놓은 마유주가 동나자, 무슬림답지 않게 술꾼인 조카가 주변 마을에서 술을 사 오겠다며 지프를 몰고 나갔다. 한데 금방 온다던 사람이 1시간 반이 지나서야 보드카 2병을 들고 돌아왔다. 놀랍게도 카자흐스탄이 코앞인 국경마을까지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술판을 다시 벌였고 새벽 2시경에 끝났다. 이튿날 오전 잠에서 깬 필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대경실색했다. 입었던 상의는 누군가 벗겨서 빨아 놓았고 덮고 있던 담요도 빨려져 있었다. 바인무랏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괜찮냐”고 물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쓰렸지만 “견딜 만하다”고 대답했다. 중국 전역을 누비며 다양한 중국인들과 술을 마셨지만,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카자흐인은 정말이지 손님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대접을 잘하는 민족이었다.
◇ 2015.12.29 中 마오쩌둥과 버림받은 후계자 후야오방에 얽힌 술 이야기
차가운 가을날 홀로 서니, 샹강이 북으로 흘러가는 쥐쯔저우 섬 끝머리에서
(獨立寒秋, 湘江北去, 橘子洲頭)
바라보니 온 산이 붉게 퍼졌고, 숲도 층층이 물들었네.
(看萬山紅遍, 層林盡染)
유유한 강물은 푸른데, 수많은 배가 물길을 다투는구나.
(漫江碧透, 百舸爭流)
매는 창공을 가르고, 물고기는 물속을 헤엄치며, 만물은 서리찬 하늘 아래 자유를 뽐내네.
(鷹擊長空, 漁翔淺底, 萬類霜天競自由)
가없어라 아득한 세상, 묻노니 이 창망한 대지에 누가 흥망성쇠를 주재하는가?
(帳寥廓, 問蒼茫大地, 誰主沉浮浮)
벗들과 손잡고 와서 놀았던, 옛날 험난했던 시절이 새삼 그립구나.
(携來百侶曾遊, 億往昔崢巆歲月稠)
흡사 동문수학하던 어린 시절, 재기는 만발했고 기개가 넘쳐서
(恰同學少年, 風華正茂)
서생의 뜻과 기상이 하늘을 찔렀었네.
(書生意氣, 揮斥方遒)
세상을 꾸짖고 가슴을 울리는 글을 쓰며, 그 시절 썩어빠진 것들을 업신여겼었지.
(指點江山, 激揚文字, 糞土當年萬戶侯)
기억하는가, 강 한가운데로 나아가, 물결을 헤치며 배를 저으려 했던 것을!
(曾記否, 到中流擊水, 浪渴飛舟!)
이 시는 마오쩌둥(毛澤東)이 1925년에 지은 ‘심원춘·창사(沁園春·長沙)’다. 1936년에 쓴 ‘심원춘·설(雪)’과 더불어 ‘시인’ 마오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두 편은 가을과 겨울의 풍경을 각각 노래하면서 당시 마오가 품었던 심정을 잘 표현했다. 후난(湖南)성 성도인 창사는 마오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1913년 마오는 후난제일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창사에서 6년간 생활했다. 1927년 10월 농민군을 이끌고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기 전까지 줄곧 고향인 샹탄(湘潭)현 사오산(韶山)이나 창사에서 살았다.
마오쩌둥 아버지는 富農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마오쩌둥 고거.
마오가 ‘심원춘·창사’를 쓴 것은 32세 때였다. 사오산을 떠나 광저우(廣州)로 가기 전 창사에 머물렀다. 잠시 짬을 내어 사범학교를 다닐 때 학우들과 자주 놀러갔던 쥐쯔저우를 찾았다. 쥐쯔저우는 모래톱이 쌓여 생긴 섬이다. 마오는 섬 끝머리에서 늦가을의 찬 강바람을 맞으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순수했던 학우들과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썩어빠진 위정자들을 비판하며 이상을 불태웠던 그날들…. 이 시만 살펴보면 마오는 맑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시인이었다.
20세기 중국사는 마오를 빼놓고 서술하기 힘들다. 마오는 1893년에 태어나 1976년에 죽을 때까지 중국 정치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주연 혹은 조연으로 등장했다. 마오가 태어나기 전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전 국토를 유린당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에 패해 마지막 자존심마저 지킬 수 없었다. 그 뒤 중국은 ‘동아시아의 병자(東亞病夫)’로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00년 의화단사건 때는 제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이 서구 열강 및 일본 8개국 연합군에 점령당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연명하던 청조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뒤이어 탄생한 중화민국은 혁명을 실행할 준비가 안 됐고 능력도 없었다. 황제를 꿈꿨던 위안스카이(袁世凱), 각지의 수구세력과 함께 근거지를 쌓은 군벌 등 잇단 반동(反動)으로 1920년대 후반까지 중국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런 정세를 틈타 서구 열강과 일본은 대륙을 사분오열(四分五裂)했다. 하나 중국이 조선처럼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땅이 너무 넓었고 인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훗날 중일전쟁 시기 일본이 이 ‘대륙의 늪’을 톡톡히 경험한다.
마오는 부농(富農) 집안에서 출생했다. 마오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아버지 마오순성(毛順生)은 가난한 농민이었으나, 군에 입대해 돈을 모아 사업을 했다. 농사지을 땅과 쌀가게를 사들였고 돈놀이까지 했던 것을 보면 경제적으로 풍족했음을 알 수 있다. 생가에서 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오씨종사(毛氏宗祠)’가 이를 잘 보여준다. 마오순성은 1758년에 지어져 황폐해진 사당을 재정비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돈본당(敦本堂)에서 마오순성의 손길이 느껴진다.
선진 문물을 배운 마오쩌둥
▲후난사범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학우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마오.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마오다.
마오는 4세 때 외가로 가서 외삼촌에게 글자를 익혔고, 9세에 돌아와 서당에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웠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농사일보다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자수성가했던 마오순성은 아들의 글공부가 못마땅했다. 마오는 셋째로 태어났으나, 두 형이 일찍 죽어 장남이나 다름없었다. 장남이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기에 읽고 쓰기와 주판알을 튕길 실력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아버지와 마오는 갈등이 심했다.
1910년 마오는 처음 고향을 떠나 샹샹(湘鄕)에 가서 공부했다. 다음해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해 군 생활을 했다. 반년 뒤 군대를 떠났고, 마음에 드는 학교를 찾지 못해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913년 학비가 면제고 기숙사비가 싼 후난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마오 일생에 있어 사범학교 시절은 아주 중요하다. 영국 유학파인 양창지(楊昌濟) 교수를 만나 괄목할 만한 지적 성장을 이뤘다. 실제 양 교수의 소개로 1915년 창간한 《신청년(新靑年)》을 읽게 됐고 새로운 사상을 흡수했다.
여름방학에는 학우들과 농촌을 도보로 돌아다니며 중국 농민의 현실에 눈을 떴다. 1918년에는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한 사회단체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설립했다. 신민학회의 회원은 70여 명에 달했는데, 뒷날 대부분 공산당원이 되어 마오의 든든한 지지자가 됐다. 특히 양 교수의 딸로 같이 활동한 양카이후이(楊開慧)와는 1920년에 결혼까지 했다. 본래 마오는 1907년 열세 살 때 여섯 살이나 많은 뤄(羅) 씨와 결혼했었다. 뤄 씨는 순종적인 여인으로, 마오 부모를 모시고 농사일을 돕다 21세에 요절했다.
마오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양 교수의 소개로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했다. 베이징 생활은 반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존경해 왔던 리다자오(李大釗), 후스(胡適) 등의 강의를 들으며 선진사상을 받아들였다. 러시아의 볼셰비즘 혁명이론을 접한 것도 그때였다. 1919년 4월 창사로 돌아온 마오는 5·4운동이 터지자 《샹강평론》을 창간했다. 잡지 내 기사를 거의 혼자 썼고 거리에서 직접 팔았다. 10월에 어머니가, 다음해 1월에는 아버지와 양창지 교수가 잇달아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21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중국공산당 창당과 더불어 1차 당대회가 열렸다. 마오는 13명의 창당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이듬해 5월에는 후난을 대표하는 샹취(湘區)위원회를 조직해 서기가 됐다. 공산당은 1924년 군벌 타도와 제국주의 축출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당과 합작했다. 하나 마오는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과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가 상하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자, 여름에 샹탄을 중심으로 추수폭동을 일으켰다. 한때 수천 명의 농민군을 조직했으나 국민당군의 공격에 패퇴해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장악
징강산은 후난성 동남부와 장시(江西)성 서남부에 넓게 퍼져 있다. 평균 해발이 1000m에 불과하나 산림이 울창하고 동굴이 많다.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마오는 유격전을 펼쳤다. 먼저 암약하던 화적떼를 수하로 거뒀고 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줬다. 마오는 전열을 정비한 뒤 국민당군이 장악하지 못했던 장시 남부 전역을 점령했다. 1931년 공산당은 이를 기반으로 루이진(瑞金)을 수도로 한 인구 1000만명의 소비에트공화국을 건립했다. 마오는 공이 가장 컸기에 국가주석이 됐다.
당시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코민테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모스크바 유학파 보구(博古), 당서기 저우언라이(周恩來),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등 3인단이 마오를 밀어내고 실권을 잡았다. 소비에트의 확대에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공산당의 군대 홍군(紅軍)은 국민당군의 4차례 공격을 물리쳤지만, 5차 공격에서는 대패했다. 이로 인해 ‘장정(長征)’이 결정됐다. 공산당과 홍군은 1934년 10월 장시성 위두(于都)현을 떠나 2만5000리를 행군해 1935년 10월 산시(陝西)성 우치(吳起)현에 도착했다.
산시에 도착할 때만 해도 공산당의 운명은 암울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토벌을 피하려 ‘내전중지’ ‘항일합작’을 주창했다. 장제스는 ‘내부의 적을 일소한 뒤 외부의 침략을 막고자(安內攘外)’ 했다. 하나 시안사건(西安事件)과 중일전쟁이 잇달아 터지자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제2차 국공합작을 세력 확대의 호기로 삼았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기에(槍杆子裏面出政權)’ 농촌을 기반으로 농민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따라서 마오는 농민의 바람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쳤다. 공산당은 도시(點)와 철로(線)를 장악한 일본군과 국민당군을 피해 농촌(面)에서 지주의 땅을 몰수하고 농민에게 분배했다. 지주의 협조가 필요한 마을에선 농민의 세금과 부채를 없애줬다. 이런 ‘해방구’ 정책은 농민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고, 1945년 8월 중일전쟁이 끝날 즈음 국민당에 버금가는 세력 기반을 마련했다. 1947년 초 국민당군은 대륙의 모든 대도시를 차지했지만, 공산당군의 반격에 연전연패했다. 결국 마오는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위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선포했다.
신중국 건설에 실패한 마오
일각에서는 이념의 도그마에 빠져 중국 공산혁명을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20세기에 100년이 넘는 외세 침략과 수십 년간의 내전을 종식하고 자력으로 혁명을 완수한 나라는 중국과 베트남밖에 없다. 또한 마오는 여느 공산당 지도자들과 달리 도시와 공장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조직해 혁명을 달성했다. 이는 학정(虐政)을 일삼는 왕조에 대항해 농민 봉기를 일으켜 새 왕조를 세운 유방(劉邦), 주원장(朱元璋) 등과 같은 방식이었다. 마오만큼 중국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민심을 얻을 줄 아는 인물은 드물었다.
분명 마오는 타고난 혁명가였다. 하지만 ‘신중국’ 건설에 걸맞은 지도자는 아니었다. 행정을 이해하고 경제를 재건해야 했는데, 마오는 그 방면에 소질이 전혀 없었다. 당면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문제를 선전선동과 대중동원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에 따라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운동을, 1957년부터 1959년까지 공산당 내외의 비판자를 제거하기 위해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1958년부터 1960년까지는 농업 집단화와 대중적 경제부흥을 앞세운 대약진(大躍進) 운동을 잇달아 벌였다.
이 중 대약진 운동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줬다. 마오는 “15년 안에 영국을, 20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며 마을마다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평등주의에 입각한 공동체였다. 마을의 모든 재산은 공사에 귀속됐고, 주민은 막사에서 공동생활하며 수입을 고루 분배했다. 공업생산력의 기초가 철강이라며 원시적인 토법로(土法爐)를 둔 제철소를 세웠다. 겉으로 보면 농촌에 무소유의 이상사회가 건설됐고, 용광로의 불빛이 밤낮없이 타올라 밝은 미래를 장담하는 듯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1958년 농촌은 풍년이었지만 남자들은 제철소에 매달렸다. 여자와 아이들이 들판에서 일했지만 제대로 수확을 못 해 곡식은 썩었다. 게다가 열심히 일해도 빈둥대며 노는 주민과 수입이 똑같아 노동의욕이 떨어져 생산성이 낮았다. 제철소는 철광석을 제련해 철강을 주조하질 못했다. 집안과 마을에 있는 모든 철제용품을 용광로에 던져 쓸모없는 쇳덩어리만 생산했다. 하나 관리들은 마오의 비위를 맞추려 실적을 부풀려 보고했다. 결국 이듬해 파탄이 났다. 대기근이 닥쳤고 무려 3000만~40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마오는 실권을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무파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마오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했다. 대중동원으로 권력 장악을 기도해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켰다. 문혁은 홍위병(紅衛兵)의 난동과 하방(下放)으로 상징되는데, 대륙은 상상을 초월한 재난을 당했다. 홍위병의 파괴로 온전히 남아 있는 문화재와 유적지가 드물 정도였다. 마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을 동원해 홍위병을 제압했지만, 문혁의 광기는 1976년 9월 마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훗날 마오의 후계자 화궈펑(華國鋒)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마오의 공은 7할이고 과오는 3할이다. 과오 속엔 나의 과오도 있다.”
덩이 마오를 이렇게 ‘과장’한 데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첫째, 마오는 공산당을 창당하고 공산혁명을 완수한 ‘신중국’의 아버지였다. 그를 격하(格下)시킨다면 공산당의 지위와 업적이 흔들릴 수 있었다. 둘째, 중국 각계에는 수많은 마오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자극해 국론분열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인민의 술’ 마오궁주
▲사오산의 모든 식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마오궁주
그 덕분인지 오늘날 마오는 생전과 다름없는 영화(榮華)를 누리고 있다. 고향 사오산은 공산혁명의 성지로, 중국 전역에서 참배객들이 1년 내내 몰려온다. 그들이 사오산에서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술이 있다. 모든 식당에 비치되어 있는 ‘마오궁주(毛公酒)’다. 마오궁주는 마오를 봉건시대의 왕처럼 모셔서 이름 지은 술이다. 가격은 ‘인민의 술’을 지향해 100위안(약 1만7900원)을 넘지 않는다. 맛은 혀끝에 닿을 때는 톡 쏘면서 묵직한 느낌이지만, 식도에 닿을 때는 시원스레 넘어간다. 이런 짜릿한 술 맛은 매운 후난 요리에 잘 어울린다.
현재 마오궁주를 출시한 주류업체는 4곳이다. 생산지는 한 곳이 창사에, 나머지는 사오산에 있다. 이들은 지난 수년간 저마다 ‘원조’임을 내세우며 법정 다툼을 벌였지만 아직 결론이 나질 않았다. 같은 이름의 술이 쏟아진 데는 사오산을 찾는 엄청난 관광객을 겨냥해서다. 지난해 사오산 인구는 12만명에 불과하나 무려 1314만명의 관광객이 사오산을 찾았다. 관광객들이 뿌린 돈도 35억 위안(약 6265억원)에 달했다. 마오 관련 유적지가 모두 무료임을 감안할 때 순전히 먹고 마시고 자는 데만 쓴 비용이다. 이런 상업주의 현실을 죽은 마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몹시 궁금했다.
마오의 대중연설 충격으로 사회주의에 빠진 후야오방
창사에서 동쪽을 향해 자동차로 1시간을 가면 류양(瀏陽)이 나온다. 류양은 중국 정치사에서 지워진 한 공산당 지도자의 고향이다. 덩샤오핑을 뒤이을 후계자가 됐다가 ‘우파’로 몰려 쫓겨났던 후야오방(胡耀邦)이 그 비련의 주인공이다. 후야오방은 1915년 류양에서 1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중허(中和)향 창팡(蒼坊)촌에서 태어났다. 후의 아버지 후쭈룬(胡祖倫)은 빈농이었다. 18세 때 동갑내기 처녀 류밍룬(劉明倫)과 결혼했는데, 분가할 처지가 못 돼서 형제들과 같이 살았다. 그들은 열두 자녀를 낳았지만 중간에 일곱 아이를 잃었다.
후쭈룬은 살아남은 아들 야오방을 끔찍이 아꼈다. 야오방이 5세 때 서당에 보냈고, 7세 때 초등학교가 생기자 정규교육을 받게 했다. 1926년 후야오방은 중허향 아래 원자스(文家市)의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에는 자신의 운명을 바꾼 이와 조우했다. 추수폭동을 일으킨 마오쩌둥의 농민군이 원자스에 잠시 머물렀는데, 후는 마오가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을 듣게 됐다. 그때 받은 충격으로 후는 사회주의 사상에 몰입했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에 가입했다.
1930년 징강산의 홍군이 류양에 쳐들어오자, 후는 공청단에서 여러 활동을 벌였다. 3년 뒤 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에 찾아가서 정식으로 입당했다. 1934년에는 공청단 중앙국의 비서장에 임명되어 간부가 됐고, 1년 뒤 대장정에 참여해 2만5000리를 행군했다. 후는 산시에 도착해서는 공청단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수학했다. 1939년부터 당내 여러 위원회에서 경력을 쌓다가, 1942년부터 전장에 나가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1949년 후의 직위는 18병단(兵團·우리의 군단)의 정치위원이었다. 또한 공청단이 해산한 뒤 재조직된 신민주주의청년단의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의 첫 대표회의에 참석했고, 개국대전(開國大典)에도 참가했다. 이듬해 촨베이(川北)당위원회 서기, 촨베이군구 정치위원 등에 임명되면서 쓰촨(四川)성 북부의 1인자가 됐다. 이때 쓰촨,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티베트 등을 통치하는 서남국(西南局) 제1서기 겸 군구 정치위원이 덩샤오핑이었다. 후와 덩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공청단과 반평생
1952년 후야오방은 신민주주의청년단 제1서기로 임명되어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신민주주의청년단은 1957년 이름을 다시 공청단으로 바꿨는데, 후는 문화대혁명 전까지 무려 19년간 제1서기로 일했다. 1929년 공청단에 가입해 인연을 맺었던 점을 감안하면, 반평생을 공청단과 함께 살았다. 공청단은 1920년 상하이에서 공산당이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교육과 예비 당원 양성을 위해 설립한 대중조직으로, 2년 뒤 정식 발족했다. 처음에는 사회주의청년단이라 명명했지만 1925년 공청단으로 바꿨다.
공청단의 입단 조건은 14세 이상 28세 이하의 청소년과 젊은이다. 맘대로 가입할 수 없고 공산당원이나 학교 교원, 다른 공청단원이 추천해야 들어갈 수 있다. 초창기 공청단은 당세와 당원 확장을 위해 일정한 지적 능력과 이해력을 가진 학생층에 대한 선전공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연극을 열어 혁명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학생들은 가입 신청을 하면 누구나 입단할 수 있었다. 후야오방이 대표적인 예다.
공청단에 들어가면 사회주의 사상학습을 이수하고 다양한 대내외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학업과 봉사 성적, 공산당 및 인민에 대한 공헌도 등을 평가해서 공산당원으로 추천된다. 공청단 전국대표대회는 5년마다 개최된다. 지난 2013년 베이징에서 1500명의 대표가 참석해 17차 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중국 전역의 8990만명 단원, 359만 개 기층조직에서 선발됐다. 단원의 경우 2002년 말 6986만명, 2007년 말 7500만명으로, 10년 만에 2000만명이나 증가했다. 기층조직은 중국 내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기업체, 농어촌 등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흥미롭게도 공청단은 산하 기업을 두어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인다. 중국국제유한공사, 청년실업발전총공사, 청년여행사 등 각종 회사를 설립해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에 청년정치대학 등 교육기관을, 베이징에 《중국청년보》, 중국청년출판사 등 신문, 출판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광화(光華)과기기금회, 중국청소년발전기금회 등 비영리기금도 설립해 운영자금을 끌어 모은다. 또한 중국 각지의 청소년궁과 청소년협회, 아동협회 등을 관리하고 있다.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의 인연
▲1954년 신민주주의청년단 전국대회에서 연설하는 후야오방 제1서기.
후야오방이 베이징으로 영전한 같은 해 덩샤오핑도 국무원(國務院) 부총리로 임명됐다. 덩은 당·정·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후의 능력을 눈여겨봤다. 1956년 후는 덩의 추천으로 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마오쩌둥이 일으킨 대약진 운동이 중국에 재앙만 가져다주자, 덩은 무너진 경제와 산업을 재건하는 데 노력했다. 특히 어느 곳보다 피해가 컸던 서북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따라 1964년 후를 서북국 제3서기 겸 산시성 당서기로 임명해 시안으로 보냈다.
하지만 시안에 간 지 2년도 안 되어 문혁이 발발했다. 홍위병들은 후를 반당(反黨)분자로 지목해 온갖 모욕과 구타를 가했다. 그 와중에도 후는 “문혁소조(小組)의 일처리는 정상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이 때문에 외양간에 갇혀 돼지죽을 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가족들도 심한 박해를 받았다. 부인은 공직에서 쫓겨나 날마다 자아비판장에 나갔다. 베이징대학에 다니던 장남은 수시로 홍위병에게 얻어맞았다. 그러나 후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 일이 발생했으니, 1967년 봄 노모가 죽은 것이었다.
후는 1954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공무가 바빠 고향에 가질 못했다. 실제 1933년 중허향을 떠난 뒤 고향을 단 2차례만 방문했다. 1963년에는 지방시찰을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중허향을 찾았다. 결국 후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질 못했고 부모의 장례를 모두 참석하질 못했다. 특히 모친의 유체는 홍위병의 눈을 피해 급히 화장해야 했다. 훗날 동료들에게 후는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자다”라며 자책했다.
1968년 5월 외양간에서 풀려났지만, 5개월간 변소 옆에서 지내며 똥을 퍼야 했다. 이듬해 5월에는 허난(河南)성 황촨(潢川)으로 쫓겨나 2년간 노동개조와 군중비판을 받아야 했다. 1971년 10월이 돼서야 베이징으로 돌아와 구금상태로 지낼 수 있었다. 이런 후의 고난은 문혁 시기 실무파 관료들이 겪었던 나날과 대동소이하다. 후는 ‘공청단을 이끌면서 청년들을 주자파(走資派)로 만들려 했다’는 죄목이 덮어 씌워져 더 많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덩샤오핑 후원으로 급성장
1973년 저우언라이 총리의 병세가 심해지자,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부총리로 복권시켰다. 1975년 1월 덩은 공산당 중앙 및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임명되어 저우 총리의 모든 업무를 대신했다. 실무파 관료들을 하나둘 제자리로 불러들였다. 같은 해 7월 후도 중국과학원 부원장으로 임명됐지만 반년 뒤 덩이 실각하자 함께 쫓겨났다. 이듬해 10월 마오가 죽고 4인방이 체포되자, 덩은 오뚝이(不倒翁)처럼 권부에 복귀했다.
그 뒤 덩은 문혁 시절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던 후를 중용했다. 1977년 3월 공산당교 부교장에 임명했고, 같은 해 12월 중앙조직부장으로 끌어올렸다. 이듬해 12월에는 정치국 위원, 기율위원회 제3서기, 선전부장 등 요직을 겸임케 했다. 1980년 2월에는 정치국 상무위원, 서기처 서기 등으로 고속 승진시켰다. 이때부터 베이징 정가에서는 덩이 후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를 뒷받침하듯 1981년 6월 후는 중앙위원회 주석이 됐다. 1949년 이래 공산당 주석이 된 이는 마오쩌둥과 화궈펑(1976~81년)이 유일하다.
이듬해 9월 12차 전당대회에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총서기제로 바뀌었는데, 후가 첫 총서기가 됐다. 명실상부한 덩의 후계자로 대내외에 인정받은 것이다. 후와 함께 권력의 전면에 나선 이는 자오쯔양(趙紫陽) 총리였다. 자오는 후와는 전혀 다른 성장 배경과 경력을 지녔는데, 뛰어나고 노련한 행정가로 덩의 신임을 받았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덩은 마오가 남긴 패악을 청산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에 바빴다. 후와 자오 쌍두마차는 덩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개방을 가속화시켰다.
먼저 농촌에서 인민공사를 해체해 원래의 행정 단위로 복원했고, 농민이 정해진 생산량 이외의 이득을 취하도록 독려했다. 도시에서도 국유기업의 경영책임제를 확산시켰고, 한계기업 퇴출과 노동자 해고를 가능케 했다. 또한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샤먼(廈門) 등 경제특구에서 자본주의 실험을 더욱 촉진시켰다. 1984년에는 14개 연해도시로 개방을 확대해 외자를 유치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중국 경제는 1983년 10.9%, 84년 15.2%, 85년 13.5%, 86년 8.8%라는 높은 성장률을 거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탄생 100주년을 맞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후야오방 생가.
급속한 개혁개방은 경기 과열과 인플레를 야기했다. 또한 자본주의가 밀물처럼 밀려오면서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1986년 긴축정책과 사정 바람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중국인들의 불만은 가라앉질 않았다. 결국 그해 12월 대도시에서 학생들이 “민주주의 없이 현대화는 없다”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되자, 당내 보수파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자산계급의 자유화를 옹호한다”며 후야오방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후를 희생양으로 삼은 덩은 자오쯔양을 총서기로 앉혔다.
자오는 개혁개방은 추진하되 공산당 독재를 견지하는 ‘사회주의 초급단계’ 개념을 내걸었다. 1988년에는 보수파의 요구에 따라 경제환경과 사회질서를 정비하는 치리정돈(治理整頓)도 추진했다. 하지만 강력한 긴축정책은 경제를 침체시켰고 개혁을 후퇴시켰다. 그런 와중에 1989년 4월 후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후를 추모해 톈안먼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6월 4일 덩은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버리고 자오를 권부에서 쫓아냈다. 그 뒤 오랫동안 후와 자오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됐다. 자오는 실각 후 줄곧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2005년에 사망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후와 자오가 키운 분신은 훗날 대권을 잡았다. 후가 총서기로 지낼 때 공청단 제1서기로 임명했던 후진타오(胡錦濤)와 자오가 총서기로 재임 시 중앙판공청(비서실) 주임이었던 원자바오(溫家寶)가 그들이다. 덩은 후와 자오를 가차 없이 축출했지만, 미래는 개혁개방을 지속할 인재가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따라서 1992년 티베트(西藏)자치구 서기였던 후진타오를 가장 젊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했다. 원자바오는 1993년까지 판공청 주임을 지냈고 1997년 정치국 위원, 이듬해 부총리가 되어 입지를 굳혔다.
후야오방이 반평생을 바쳐 키운 공청단은 오늘날 중국 권력의 주요 파벌인 ‘퇀파이(團派)’로 성장했다. 후진타오는 2002년 총서기가 되어 10년간 중국을 통치했고, 후계자인 리커창(李克强)과 리위안차오(李源朝)는 2013년 총리와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됐다. 비록 퇀파이는 2012년 18차 전당대회에서 리 총리 1명만 상무위원이 됐지만, 왕양(汪洋) 부총리,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성 당서기 등 당과 국무원 핵심 포스트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차세대 주자군에서는 큰 두각을 보이고 있다.
톈안먼사태 이후 중허향에 있는 후야오방의 생가는 방치됐었다. 후의 유해가 장시(江西)성 궁칭청(共靑城)에 묻혔기에 찾는 이도 없었다. 1995년 너무 낡아 무너질 지경에 놓였던 집을 류양시 정부가 몰래 복원했다. 이를 1998년 류양시 문물관리소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후난성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 증축했다. 2005년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고, 지난해 4월에는 중허향을 방문해 생가를 둘러봤다. 2013년에는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다. 하지만 탄생 100주년인 올해도 후야오방의 공식적인 복권은 불투명하다.
‘민주주의와 경제개혁’을 모색했던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 물결
이런 정치 상황과 달리 최근 후의 생가는 찾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필자가 중허향을 찾았던 지난 8월 8일에도 적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왔다. 필자가 몇몇 사람에게 방문 이유를 물어보니, 한결같이 “평생 청렴하게 살았던 후 총서기를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생가 입구 바위벽에 적힌 ‘염(廉)’처럼 후는 청렴을 공직자의 필수신조로 강조하며 살았다. 오늘날 부정부패가 만연한 중국에서 민중은 이런 후의 청렴결백함을 그리워하고 있다.
또한 후는 공직생활 내내 대중친화적인 업무 방식으로 일해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당 독재는 국가발전에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며 “민주주의와 법치 강화가 경제개혁과 함께 가야 한다”는 신념도 가졌다. 이런 전통을 계승해 퇀파이는 주민과의 소통에 능숙하고 승진 때마다 엄격한 검증을 거쳐 부패와 거리가 멀다. 필자가 중허향에서 맛본 류량허(瀏陽河)는 청렴했던 후와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술이다. 류양허를 생산하는 류양허주업은 1956년 지역 내 흩어져 있던 술도가들을 통합해 문을 연 국영 류양현술공장(縣酒廠)을 전신으로 한다.
1993년 류양이 시로 승격되면서 류양시술공장으로, 1998년 회사가 민영화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술 브랜드는 류양 전역을 끼고 돌아 흐르는 강 류양허에서 따왔다. 류양허는 샹강의 지류로, 145만명인 류양 주민들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바이주(白酒) 류양허는 색깔이 맑고 맛은 부드러우며 향이 향긋해 아향형(雅香型)으로 분류된다. 이런 술 맛 때문에 담백한 상하이 요리와 궁합이 잘 맞아 상하이 바이주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후의 고향에서 류양허를 음미하며 중국이 하루속히 정치개혁을 추진해 존경받는 나라로 변모하길 기원했다.
출처 | 월간조선 12월호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2016.04.06 中 ‘객가(客家)’의 냥주 & 타이완 전쟁터에서 빚는 ‘진먼고량주’
1980년대 어느 날 미국 중앙정보국(CIA) 내 위성사진판독실. 분석요원들이 첩보위성으로 찍은 사진을 판독하고 있었다. 당시 첩보위성은 갓 운용하기 시작해 지구 곳곳을 초정밀로 촬영해 나갔다. 한 요원이 중국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이상한 건축물 수십 개를 발견했다. 원형으로 된 대형 건물이었으나 중간이 비었다. 사각으로 지은 건축물도 있었다. 분석요원은 중국이 새로운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독 결과를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각계의 중국 전문가들이 모여 사진을 재판독한 결과 객가인(客家人)이 사는 집으로 판명됐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해프닝이다. CIA 분석요원을 멋쩍게 만들었던 건축물은 토루(土樓)다. 토루는 흙으로 쌓아올린 집이란 뜻이다. 오직 중국에서만 보이는 객가인의 전통 건축물이다. 객가는 중국 전역에 퍼져 살지만, 토루는 오직 푸젠(福建)·광둥(廣東)·장시(江西) 등 3개 성에서만 지었다. 형태는 원형, 방형(方形), 장방형, 사각형, 타원형 등 다양하다. 한 채가 마치 성채만큼 거대하다. 고운 점토, 삼나무(杉木), 돌, 기와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었다. 특히 외벽이 아주 두껍다. 보통 폭이 150cm를 넘는다.
외벽은 오리나무와 대나무를 뼈대로 흙으로 다져서 철근처럼 단단하다. 이렇듯 튼튼해서 웬만한 외부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다. 대문도 마찬가지다. 돌이나 철판 입힌 나무로 만들어 웬만한 충격에 끄떡없다. 이 문만 닫아 놓으면 토루는 든든한 보루(堡壘)가 된다. 왜냐하면 외벽 층의 창문 구조도 방비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1층은 창문이 전혀 없다. 2층에는 조그만 창을 만들어 바깥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3층부터 정상적인 창문을 두어 외부 침입을 원천 봉쇄했다. 꼭대기에는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복도를 만들었다.
이 같은 건축양식은 어떤 형태의 토루이든 적용된다. 단지 층수만 3층 혹은 4층으로 다를 뿐이다. 외부와 달리 내부는 완전한 개방형 구조다. 형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1층에는 거실과 부엌, 묘당(廟堂)이 있다. 2층은 침실이나 창고로 쓰고 3~4층은 모두 침실이다. 마당에는 사당을 지었다. 그 옆에는 수백 명이 한 달 동안 충분히 마시고 쓸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수맥을 갖춘 우물이 있다. 이 넓은 주택에 적게는 수십 가구에서 많게는 300여 가구가 생활한다. 하나의 거대한 씨족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가는 것이다.
▲토루는 보통 개울 옆이나 수맥이 풍부한 곳에 지었다. 특히 난징현의 객가 마을이 모두 이러하다.
토루를 명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객가의 역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객가는 본래 황허(黃河) 중류를 중심으로 중국 북부에 살았던 한족이다. 이들은 과거 대륙에서 일어난 전란과 자연재해를 피해 여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1차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 남부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파견하면서부터다. 214년에는 추가로 50만명을 파병했다. 군사들은 식솔을 데리고 근무지로 가 둔전(屯田)하면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적지 않은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아 최초의 객가인이 됐다.
2차는 4세기 초에 벌어진 영가(永嘉)의 난에서 비롯했다. 300년 서진(西晉) 혜제 때 황족들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다. 회제가 황위를 이었으나 정국은 안정되질 못했다. 311년 흉노의 족장인 유연이 독립을 선언하고 거병해 뤄양(洛陽)을 함락했다. 흉노군은 전쟁에서 진 병사 10만명을 학살했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서진이 망하자 일부 황족이 난징(南京)에서 동진을 건국했다.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혼란과 전쟁을 피해 약 96만명이 양쯔강(長江) 이남으로 이주했다.
3차는 당대 후기 안사의 난과 황소(黃巢)의 난 때다. 755년 돌궐 출신 무장인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켜 당의 명운을 바꿨다. 전쟁은 8년간 지속됐는데, 그 사이 가구 수가 890만호에서 293만호로 줄어 약 3000만명이 죽었다. 당대판 ‘킬링 필드’로 불러도 과하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874년 일어난 황소의 난도 대륙 전역에서 크고 작은 민중봉기를 동반하면서 7년이나 계속됐다. 부패한 관리의 수탈로 경제적 기반을 잃은 농민들이 봉기에 적극 합세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전란을 피해, 일부는 당군의 진압을 피해 중국 남부로 이주했다.
4차는 정강(靖康)의 변으로 촉발됐다. 북송 휘종은 금과 동맹을 맺어 요의 연운(燕雲) 16주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금에게 북송의 군사력이 허약한 꼴만 보여주면서 내침을 받게 됐다. 1126년 금군은 카이펑(開封)을 함락했고 휘종과 흠종 그리고 왕족 3000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했고 중국 북부는 북방 유목민족의 수중으로 완전히 떨어졌다. 북부에서 탈출한 고관대작과 사대부가 대거 남부로 이주했고, 이듬해 항저우(杭州)에서 남송이 건국됐다. 지식 소양이 높은 사대부가 객가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객가의 문화 수준이 괄목상대해진다.
▲샤먼-진먼다오지도(○ 표시한 곳에 토루가 있다).
토루가 생겨나게 된 까닭
▲토루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단 하나의 문만 갖췄다.
5차는 명말·청초로, 왕조의 교체보다 자연재해의 영향이 컸다. 당시 푸젠과 광둥의 객가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먹고살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수년 동안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자, 여러 씨족공동체 사이에서 서진(西進)운동이 일어났다. 마침 청 조정도 오랫동안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인구가 급감한 쓰촨(四川)으로의 이주를 장려했다. 이 시기 쓰촨으로 옮겨갔던 객가의 후손으로는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 주더(朱德)와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대표적이다.
6차는 태평천국 운동으로 비롯됐다. 태평천국은 1851년 비밀결사인 ‘배상제회(拜上帝會)’가 건국했다. 배상제회는 겉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객가 공동체를 배경으로 조직됐다. 수장인 홍수전과 대다수 지도부가 객가 출신인 데서 잘 드러난다. 태평천국은 한때 중국 남부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지만, 지도층의 내분으로 1864년 붕괴했다. 그 뒤 청조는 객가를 혹독히 탄압했다. 이에 수많은 객가인들이 동남아와 미주로 이주했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 및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당선자 등이 이들의 후손이다.
▲토루의 내부 모습. 토루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 우물이다.
객가가 이주했던 땅에는 이미 토착민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객지인이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객가는 산악지대로 들어가 독자적인 씨족공동체를 구성했다. 또한 토착민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개념으로 ‘손님’이란 뜻인 객가라 부르게 됐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들의 후손은 얼마나 될까? 중국에서는 푸젠, 장시, 광둥, 광시(廣西) 등 19개 성·시에 7400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미국, 칠레 등 전 세계 80여 개국에 2500만명이 거주한다.
객가인은 어디에 살든 자신들이 ‘진짜배기 한족‘이라 여기면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원에서 내려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축했고 독특한 객가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객가어는 당·송대 한족 언어의 순수성이 잘 보존됐다. 이에 반해 현대 중국어는 서역어, 몽골어, 만주어 등 북방 유목민족의 발음과 억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옛 제례의식과 풍습을 1000여 년 동안 변치 않고 보존해 왔다. 음식문화도 원형 그대로 계승하면서 이주한 지역의 환경에 접목해 재창조했다. 객가의 차(茶)문화는 서구세계에 큰 영향을 줬을 정도로 풍성하다.
이런 문화와 생활의 특징은 토루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토루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은 푸젠성 난징(南靖), 융딩(永定), 화안(華安) 등지다. 그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토루가 무려 3000여 개나 남아 있다. 그중 보존이 완벽한 46개를 2008년 중국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토루는 12세기 송대에 처음 나타났다. 객가는 깊은 산속이나 험한 고개에 대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집을 건축했다. 북부에서 가족 모두가 이주해 와 척박한 대지를 일구며 정착해야 했기에, 대가족이 함께 살며 힘을 합치는 것은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토루는 보통 4층으로 짓고 수직으로 나누어 한 가족이 한 칸을 사용한다.
토루의 건축은 전통 풍수지리와 첨단기술을 총동원했다. 특히 풍수를 고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토루를 지을 때는 먼저 어떤 위치에 지을지를 선정한다. 여기에 ‘산은 사람을 다스리고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山管人丁水管財)’는 객가의 속담이 잘 응축되어 있다. 실제 대부분 토루는 산에 기대어 있으면서 앞이 트인 작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전면이나 측면에 하천이 있거나 지하수맥이 풍부한 곳이 보통이다. 이처럼 풍수는 객가인과 토루에 있어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결의 요소다. 오늘날 홍콩과 대만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풍수가도 대부분 객가 출신이다.
집터를 정했으면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간다. 먼저 대문을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정한다. 대문을 건축물의 기준으로 삼아서 원을 그린다. 그 선상에 외벽의 기둥이 될 말뚝을 줄지어 박고 지반을 다진다. 이 작업이 끝나면 음식을 준비해 살 곳을 짓도록 도와주신 조상께 제사를 지낸다. 제사 뒤에는 외벽 공사에 돌입한다. 외벽 하단은 돌담으로 세우고, 그 위로는 오리나무와 대나무로 촘촘히 다져서 강철과 같은 흙벽을 만든다. 이 흙벽의 하단 폭은 170cm, 평균 150cm로 웬만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1층의 흙벽 공사를 어느 정도 진행하면, 그 안쪽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방을 짓는다. 층별로 한 칸씩 정교하게 나무로 맞추어 간다. 여기서 흙벽과 나무의 이음이 정교하게 맞아야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 있다. 보통 층마다 외벽을 먼저 세우고 내부의 방과 복도를 짓는다. 그런 뒤 다시 위층 공사를 진행하는 식이다. 이 공사가 모두 끝나면 기와로 지붕을 얹는다. 끝으로 안과 밖의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장식하고 보수작업을 마친다. 대문은 단 하나만 둔다. 철판 입힌 나무로 만든 대문 위에는 작은 관을 설치한다. 이는 외부에서 공격받을 때 뜨거운 물을 뿌리기 위해서다.
객가가 생산하는 품질 좋은 찹쌀을 주원료로 빚은 냥주
▲4층에서 바라본 토루의 내부는 흡사 작은 성 안을 연상케 한다.
문과 외벽은 토루의 특징인 강력한 방어성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산적의 노략질이 끊이질 않았고, 야생동물의 공격도 흔했기 때문이다. 토루 건설에 있어 마지막 작업은 마당 조성이다. 마당에는 선조(先朝)와 전통을 존중하는 객가의 관념이 잘 나타나 있다. 중앙 한복판에는 조당(祖堂)을 지어 조상신을 모신다. 여기에 모시는 조상은 남방으로 갓 이주해 왔을 때 혹은 토루를 처음 건설했던 선조를 가리킨다. 매년 선조의 생일과 기일에는 온 씨족이 조당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객가인은 이런 전통 건축술과 사상을 바탕으로 1960년대까지 토루를 지었다.
보통 한 토루에 한 씨족 또는 한 대가족이 살았다. 그렇기에 성을 앞에 붙여 ‘○○루(樓)’라고 불렀다. 하나의 토루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다. 객가인은 토루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서당, 식당, 목욕탕 등 필요한 시설을 골고루 갖췄다. 토루의 침실은 2층부터 4층까지 두는데, 보통 한 가족을 한 단위로 해서 수직적으로 배열했다. 흥미로운 점은 집을 지을 때는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고 규모를 크게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대 지어졌던 원형 토루의 경우 방은 300여 칸에 달했고 최대 90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독립된 토루에서 사는 이들답게 객가는 철저히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를 갖췄다. 토루 주변에는 개천이 흐르거나 수맥이 있다. 이 물을 이용해 객가인은 쌀, 옥수수, 감자, 야채, 과일 등을 심어 수확한다. 특히 객가가 생산하는 쌀과 차는 품질이 아주 뛰어나다. 객가쌀에는 북방과 남방의 도작(稻作)문화가 한데 융합되어 있다. 그렇기에 남부의 여느 쌀보다 윤기가 흐르고 맛있다. 객가차는 청대 최상품으로 쳐 줄 만큼 유명했다. 청대 유일한 대외무역항이었던 광저우(廣州)의 13행을 통해 서구세계로 수출했던 차가 바로 푸젠의 객가차였다.
▲토루는 객가인의 심오한 풍수사상과 뛰어난 건축술이 응집된 건축물이다.
푸젠의 객가인들은 경작한 찹쌀로 ‘냥주(娘酒)’를 빚는다. 이 냥주의 양조법은 우리의 쌀술과 유사하고 제조과정이 간단하다. 먼저 찹쌀을 씻은 뒤 물에 담가 하루 동안 불린다. 불린 쌀은 건져서 물기를 빼고 시루에 푹 찐 다음 차게 식힌다. 여기에 누룩과 고두밥을 섞고 물을 부은 뒤 비비고 증류한 술을 더한다. 이것을 술독에 담아 적당한 온도에 반나절 정도 끓이면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난다. 이때 술독 주둥이에 구멍을 내고 다시 이틀 정도 놔둔다. 그러면 냥주는 어느덧 일정하게 발효되어 숙성된다.
그렇다면 미주(米酒)라 하질 않고 왜 냥주라 부를까? 여기에는 객가의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객가는 전란을 피해 북방에서 내려왔다. 4차 이주시기 한 무리의 대가족이 고향을 떠나 수개월 동안 남하한 끝에 푸젠의 산골까지 걸어왔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탓에 온 가족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해 버렸다. 모든 토착민들이 그들을 적대시했지만, 한 백발의 노파는 달랐다. 그는 가족들에게 커다란 대나무 통에 담긴 술을 건넸다. “어서들 마셔 보게나. 금방 기력을 회복할 걸세.”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는 술을 연장자부터 들이켰다. 잠시 후 혼미한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이 점점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노파는 “이 술은 찹쌀로 지었다”면서 자세한 양조기술을 가르쳐 줬다. 자신들을 따뜻이 반겨 주고 술 제조법까지 알려준 노파를 온 가족은 그 뒤 어머니처럼 받들었다. 그리하여 술 이름을 ‘어머니(娘)의 술’이란 냥주로 명명했다. 객가인들은 “누구나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냥주를 제조한다. 임산부는 산후조리(坐月子)를 할 때 냥주를 마신다. 그 때문에 지금도 어느 토루를 가든 특색 있는 맛과 향내를 지닌 냥주를 마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명절이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거행할 때,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도 담가 놓았던 냥주를 꺼내어 마신다. 평소에도 음식을 만들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조미료가 바로 냥주다. 이처럼 푸젠 객가인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술 예절에 있어서 객가인은 손님을 대접할 때 술주전자의 꼭지를 절대 손님에게 향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렇게 두는 것은 상대방을 경원시한다는 뜻으로 아주 실례되는 행위다. 또한 술잔을 부딪칠 때 잔 윗선이 연장자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 이런 전통적인 술 예절은 오늘날 중국에서 오직 베이징(北京)인과 객가인만이 철저히 지키고 있다.
푸젠 앞바다 섬에 동서 융합건축물이 들어선 이유
▲서양의 건축술에 진먼의 개성이 담긴 건축물 더웨러우.
산간지방에 토루가 있다면, 푸젠 앞바다의 섬에는 동서 융합건축이 있다. 우리에겐 개혁개방 이후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나로 유명한 샤먼(廈門)의 코앞 진먼다오(金門島)가 그 현장이다. 진먼의 모든 섬은 샤먼에서 10km도 안 될 만큼 가깝다. 샤먼의 양탕(陽塘)에서 진먼의 시위안(西園)은 2.4km에 불과하다. 중국과 대만(臺灣)을 가로지른 대만해협(海峽)의 거리는 남북한을 둘로 쪼갠 비무장지대만큼이나 좁다. 이에 비해 진먼에서 대만까지는 165km나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진먼은 엄연히 대만의 영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진먼은 행정구역상 대만 본토 소속이 아니다. 대만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시에 속한다. 이 때문에 진먼은 대만에서 유일한 특별자치현으로 중앙정부 직속이다. 어찌하여 이리 복잡한 내력을 지니게 된 것일까? 진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계바늘을 과거로 되돌려 살펴봐야 한다. 이 섬은 3세기 진(晋)나라에서 건너간 소(蘇), 진(陳), 오(吳) 등 여섯 성씨의 가족이 처음 개척했다. 803년 당대 취안저우부가 5대 목장 중 하나를 진먼에 설치하면서 다른 열두 성씨의 가족이 이주했다.
원대부터 청대까지는 조정에서 염전을 개발하면서, 진먼은 푸젠에서 으뜸가는 소금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다. 소금은 지역경제를 활성화시켜 긴 세월 동안 섬 주민들을 굶주림 없이 살게 했다. 진먼이 중국 역사에 첫 등장하는 것은 청대 초기다. 해적 출신으로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치를 들고 청에 대항했던 정성공(鄭成功)의 본거지가 진먼과 샤먼이었다. 정성공은 당시 대만을 점령했던 네덜란드와 대륙 사이에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고 군비를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658년 17만의 대군과 선단을 이끌고 난징(南京)을 공략했으나 청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그 뒤 정성공은 청조의 압박을 피해 대만으로 건너갔다.
1680년 청은 우환덩어리인 대만을 정벌하기 위해 먼저 진먼을 쳤다. 3년 뒤 진먼에서 출발한 청군은 대만 점령에 성공했다. 진먼은 청대에는 퉁안(同安)현에 속했는데, 1915년 독립된 현으로 승격했다. 이런 역사적 연혁과 배경 때문에 지금까지 대만정부는 진먼을 푸젠성 관할로 두고 있다. 대만은 자국 헌법상 대륙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비록 행정권은 미치지 못하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진먼을 푸젠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동남아에 진출한 진먼인들은 약방을 통해 고향에 돈과 안부를 전했다.
그렇다면 앞서 거론한 동서 융합건축은 어찌된 영문일까? 여기에는 진먼다오의 눈물과 환희 어린 역사가 서려 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아시아의 늙은 용’ 청은 영국에 참패했다. 1842년 맺어진 양국 간의 난징조약으로 청은 상하이(上海), 닝보(寧波) 등 5개 항구를 대외 개방했다. 이 중 하나가 샤먼이었다. 샤먼은 외국과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경제와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이에 따라 소금의 소비도 늘어나자, 진먼 이외에 염전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시장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진먼의 소금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잃어 갔다.
생존을 위해 진먼인들이 선택한 출로는 해외진출이었다. 본래 진먼에는 어민들이 많아 각지로 나가는 뱃길에 익숙했다. 따라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교(華僑)’가 된 것이다. 진먼인들은 동남아 각국에 도착해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번 돈을 고향으로 보냈다. 1920년대까지 그들이 이용했던 송금창구는 흥미롭게도 차이나타운의 약방(藥房)이었다. 약방은 중국 본토에서 대부분의 약재를 사들였다. 동남아에 진출한 진먼인들은 약방 주인의 귀향 길에 돈과 편지를 딸려 보냈다.
20세기 초부터 사업에 성공한 진먼 출신 화교의 금의환향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구와 가까운 수이터우(水頭)촌에 몰려 살면서 독특한 양식의 집을 지었다. 바로 동남아 현지에서 본 서구의 건축술과 접목시킨 동서 융합식이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더웨러우(得月樓)다. 더웨러우는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에 성공한 화교 황옌황(黄延煌)이 1930년대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이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황옌황은 네덜란드 건축술을 이식해 와 진먼의 전통건축술과 접목시켰다.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진먼의 사정을 고려해 담장을 높이 쳤고, 높은 망루(望樓)를 지었다.
귀향 화교들은 수이터우에 진먼 최초의 근대식 초등학교도 열었다. 서구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진수이(金水)소학교다. 오늘날까지 동남아에 진출했던 진먼인들의 귀향과 투자는 끊이질 않고 있다. 푸젠성 전체로 봤을 때 전 세계 화교의 30%, 싱가포르 화교의 70%가 푸젠 출신이다. 이들의 투자는 진먼에 큰 힘이 됐다. 왜냐하면 진먼은 전체 면적 153km²(다진먼은 135km²)에 불과한 작은 군도(群島)이기 때문이다. 다(大)진먼, 샤오(小)진먼, 다단다오(大膽島) 등 1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됐다.
진먼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일촉즉발 위
▲오늘날 스쯔산(獅子山) 포대에서는 매일 4차례씩 1958년 포격전을 재연하고 있다.
이런 작은 군도가 20세기 중반에는 참혹한 전쟁터로 변했다. 무려 21년간 역사상 최장의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른바 ‘진먼포격전’이 그것이다. 1949년 10월 1월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위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3주 뒤 샤먼에서 화동야전군 10병단이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대만으로 도망간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 군대를 치기 위해서였다. 10병단 사령관 예페이(葉飛)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예는 “저 눈앞에 보이는 진먼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대륙과 대만을 연결해 주는 통로다”라며 작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당시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파죽지세로 샤먼까지 밀고 내려와 사기가 높았다. 또한 진먼에는 국민당 패잔병만이 지키고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진먼에는 대만인으로 구성된 2만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여기에 대륙에서 넘어온 18군도 합류했다. 이들을 이끈 후롄(胡璉) 사령관은 중일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명장이었다. 10월 24일 사위가 어두워지자, 10병단 병사들은 목선 수백 척을 타고 샤먼을 출발했다. 상륙부대가 구닝터우(古寧頭) 해변에 도착할 쯤 샤먼에서 포격으로 지원했다. 병사들은 기세당당하게 배에서 내렸으나 지뢰와 포탄·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상륙작전은 3일 뒤 3000여 명의 전사자와 7000여 명의 포로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첫 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중국군은 진먼 점령을 포기하질 않았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자, 중국군은 육·해·공으로 완벽한 상륙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마오는 출정을 명령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첨단병기의 쓴맛을 톡톡히 봐서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다. 그랬던 마오가 1958년 8월 23일 진먼에 대한 공격을 명령해 진먼포격전의 서막이 열렸다. 이날 샤먼의 포병부대는 459문의 대포를 동원했다. 또한 80여 척의 군함과 2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원해 진먼을 공격했다.
갑작스런 중국군의 습격으로 진먼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하루 만에 부사령관 3명과 수백 명의 대만군 장병이 숨졌다. 수일간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바다에선 양국 함정이 치열한 해전을 펼쳤다. 하늘에선 양국 전투기의 공중전이 장관을 이뤘다. 이에 미국은 항공모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 등을 대만에 출동시켰다. 일본에 주둔했던 해병대 3800명도 수송기를 나눠 타고 대만에 내렸다. 금방이라도 중국과 미국 사이 전면전이 벌어질 기세였다. 하지만 전황은 이해 못할 방향으로 전개됐다. 중국군은 진먼으로 진입하는 대만 함선과 비행기만 공격했다.
▲8·23기념관에 전시된 각종 대만군 병기. 1958년 당시 사용했던 무기다.
마오는 장군들에게 미군 군함으로부터 포격을 받더라도 절대 선제공격이나 반격을 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미군 선단도 진먼에 진입하는 흉내만 냈을 뿐 선수를 곧 대만으로 돌렸다. 9월 말 진먼은 식량과 탄약이 거의 바닥나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데 중국군은 진먼에 상륙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마오는 애초부터 전면전을 치를 의사가 없었다. 포격전이 벌어지기 한 달 전 이라크에서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심 왕조가 타도되고 공화국이 수립됐다. 미국은 혁명의 불길이 중동 전역으로 퍼지는 양상을 막기 위해 6함대를 파견했다.
중국은 6함대의 화력을 분산시켜 중동의 혁명세력을 간접 지원하고자 했다. 이에 진먼 공격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국도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1957년에는 소련이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다. 만약 중국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소련과 핵전쟁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이에 미군 선단은 대만해협을 떠돌며 군사시위만 벌였다. 10월 13일 중국은 돌연 포격중지를 선언했다. 평화회담을 제의하면서 미국과 대만 사이를 이간질했다. 10월 말에는 진먼으로 들어가는 대만 함정의 진입을 용인했다.
그 뒤 국공(國共) 양군은 짝수 및 홀수 날을 번갈아 가며 포탄을 쏘았다. 이듬해부터는 적지가 아닌 바다를 향해 쏘아댔다. 전쟁이 진먼에 끼친 피해는 엄청났다. 군인과 민간인 618명이 죽었고 2600여 명이 다쳤다. 전체 군도에 떨어진 포탄은 무려 47만 발이었다. 진먼포격전은 1979년 1월 중국과 미국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는 날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대만은 진먼을 요새화했다. 1958년부터 모두 12개, 총 연장 10여km에 달하는 지하갱도를 건설했다. 각종 군사시설, 주민 4만여 명이 생활할 수 있는 거주공간 등 엄청난 대역사를 벌였다. 이 지하갱도를 1992년에야 완공했다.
1961년부터 5년간 화강암을 뚫어 조성한 자이산(翟山)갱도가 대표적이다. 자이산갱도는 바다에서 섬 안으로 연결되는 수로와 지하도로로 구성되어 있다. 수로는 A자로 높이 8m, 폭 11.5m, 길이 357m에 달한다. 도로는 높이 3.5m, 폭 6~7m이다. 수로는 상륙용 주정(LST) 42척이 한꺼번에 머물 정도로 크다. 도로는 탱크가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갱도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담수로 바꾸는 시설을 만들어 게릴라전까지 준비했다. 또 다른 진청(金城)갱도에는 현정부 청사, 관공서, 은행, 학교 등을 조성했다. 지하 6~7m 아래에 총연장이 2.6km에 달한다.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총통이 마신 진먼고량주
이 같은 전쟁터 체험을 위해 오늘날 진먼다오를 찾는 관광객 중 적지 않은 수가 중국인이다. 2014년 진먼을 방문한 중국인은 54만4000명이었다. 이는 전체 관광객 141만명 중 39%에 달했다. 중국인은 진먼·마쭈(馬祖)와 푸젠 간에 소삼통(小三通)이 허용된 2001년에는 951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5년 1만4000명, 2010년 15만명 등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본래 진먼은 대만인들도 쉽게 방문하질 못했다. 대만은 1987년 계엄이 해제됐지만, 진먼은 1992년까지 계엄통치가 계속됐다. 이때까지 진먼인들은 어로활동을 못했고, 밤 10시 이후 통행과 점등이 금지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계엄기간 진먼 주민들을 먹여살린 구세주는 10만명의 주둔군이었다. 대만정부는 군인들에게 진먼에서만 쓸 수 있는 지폐로 월급을 지급했다. 이 때문에 군인들은 진먼에서 먹고 쓰고 놀았다. 1937년 설립된 칼 제조공장 진허리(金合利)도 이때 급성장했다. 군대 내 부엌칼과 대검 수요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쩡둥(吳增棟·59) 사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섬 곳곳에 박힌 수십만 발의 포탄 중 일부를 수거해 다양한 칼을 만들었다. 바로 현재 중국인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양대 특산품 중 하나인 포탄 칼(砲彈鋼刀)이다.
또 다른 특산물은 진먼고량주(高粱酒)다. 진먼고량주는 대만의 대표 전통주로, 동아시아의 주당들도 인정한다. 이 술을 생산하는 진먼술공장(酒廠)은 진먼현 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이다. 1952년 설립한 주룽장(九龍江)술공장이 전신이다. 1956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하지만 가내 수공업 형식으로 빚던 고량주를 지금처럼 현대적인 생산방식으로 발전시킨 이는 예화청(葉華成)이다. 예화청은 1950년 진청(金城)술공장을 세워 진먼고량주의 기틀을 다졌다. 진먼현 정부는 이 진청술공장을 흡수해 주룽장술공장을 설립했다.
▲양안 정상이 마셨던 진먼고량주와 똑같은 술병을 들고 포즈를 취한 린더궁 회장.
진먼고량주가 대만 술의 대표주자로 도약한 데는 10만 대군의 힘이 컸다. 지난해 11월 4일 필자와 만났던 진먼술공장 린더궁(林德恭) 회장은 “진먼에 주둔했던 장병들이 부대 회식 때 진먼고량주를 즐겨 마셨는데 휴가를 나가거나 제대하면서 여러 병을 사 갔다”고 말했다. 이런 경로로 진먼고량주의 뛰어난 술맛은 대만 전역에 알려졌다. 대만정부도 진먼고량주를 의전용 술로 지정해 밀어 줬다. 이 덕분에 한때 진먼고량주는 대만 전통주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했다. 지금도 대만 3대 명주 중 최고봉으로 70~80%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포격전과 계엄 상황 아래 놓였던 탓에 진먼은 섬답지 않게 어업이 발달하질 못했다. 사시사철 바람이 세서 기후가 건조하다. 바위와 모래가 많아 땅은 메마르다. 이 때문에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지는 전체 면적의 1/3(50km²)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수는 잘 자란다. 이런 자연조건으로 인해 청대부터 수수를 주원료로 보리, 쌀, 옥수수 등을 더해 양조하기 시작했다. 고량주 제조는 진먼의 지주산업이라 할 정도로 지역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수수가 잘 자라지만, 고량주의 원료로는 절대 부족하다. 실제 고량주 생산에 필요한 10~20%의 수수만이 진먼에서 공급되고 있다.
놀랍게도 진먼술공장은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수수보다 2배나 비싼 가격에 현지 수수를 매입한다. 린 회장은 “수수를 경작하는 농가는 작은 규모와 낮은 수확량으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며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는 진먼에서 수수 공급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주민들의 수입 증대를 위해 경작 농가와의 상생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먼술공장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도 힘쓰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선 경쟁 업체의 도전과 젊은이들의 저도주(低度酒) 선호로 더욱 절박했었다. 소삼통은 진먼고량주에 있어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2004년 진먼술공장은 중국시장 공략을 위해 샤먼에 법인을 설립했다. 린 회장은 “푸젠에는 딱히 내세울 만한 명주가 없기에 빠른 속도로 대륙 술시장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진먼고량주는 진먼을 방문하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즐겨 마시고 있다. 2010년에는 중국정부가 수여하는 ‘중국유명(馳名)상표’를 획득했다. 진먼술공장은 2014년 총판매액이 132.9억 대만달러(약 4795억원)를 기록했다. 금세기 들어 처음 역성장을 기록한 수치인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반부패전쟁으로 인해 중국인 소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7일 진먼고량주에 재도약의 날개를 달아 줄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서 만났던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과 시 중국 주석이 만찬주로 진먼고량주를 함께 마셨던 것이다. 분단 66년 만에 처음 대면한 두 최고지도자는 일곱 가지의 음식을 더해 술을 들이켰다. 진먼고량주는 마 총통이 두 병을 가져갔는데, 시마회(習馬會)를 빛냈던 최고의 조연이었다. 무엇보다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분단의 무대였던 진먼다오가 양안 화합의 상징으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이렇듯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진먼고량주이기에 그 앞날은 더욱 밝다.⊙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