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3/
◆김용한의 한 글자로 본 중국2/ 2016년 01월 호 원난성 - 12월 호 홍콩
◆01월 호 원난성
◇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
云 ‘세상의 끝, 새로운 세계’
윈난성의 아름다운 자연과 개성적인 문화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높은 산과 대협곡, 강, 호수, 석림(石林), ‘민족전시장’이라 할 다양한 소수민족. 서양과 중국은 이 땅이 ‘오지’로 남아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건 동물원에 동물을 가두는 것과 다름없는 욕심 아니냐고 윈난은 되묻는다.
▲윈난의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석림(石林).
어느 해 1월 말, 윈난성 쿤밍(昆明)에 사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추위에 시달리던 터라 반갑게 응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한국은 맑은 날 최고기온이 5℃를 넘을까 말까 한데, 쿤밍은 최저기온이 6℃, 최고기온은 20℃를 넘나들었다. 한국의 가을 날씨니까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겠지.
그런데 웬걸? 쿤밍은 의외로 쌀쌀했다. 낮은 괜찮았지만, 밤이 문제였다. 남중국은 난방 없이도 겨울을 버틸 만하기에 난방을 전혀 하지 않는다! 북방은 난방을 잘하기에, 밖은 추워도 안은 따뜻하다. 남방인과 결혼한 북방인들이 춘절에 남방집이 춥다며 가기 싫어하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 그래도 따사로운 낮은 참 좋았다. ‘영원한 봄의 도시(春城)’라는 별명답게 날씨는 화창했고 도처에 꽃이 만발했다.
꿈과 낭만의 무대
윈난(雲南)성의 약칭은 ‘구름 운(云, 번체는 雲)’자다. 아득히 먼 구름보다도 더 남쪽에 있는 곳. 속세를 벗어난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는 곳. 꽃구름 피어오르는 남쪽 땅(彩雲之南). 윈난성은 중국인에게 꿈과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소설 속에서 환상적인 무대로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제갈량은 독천(毒泉)을 넘고 맹수부대와 등갑병을 격파해 남만(南蠻)을 평정했고, 대리단씨(大理段氏)는 절세무공 육맥신검(六脈神劍)과 일양지(一陽指)를 구사하며, 오독교(五毒教)의 먀오족은 맹독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윈난성은 지질학적으로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충돌한 경계지대다. 히말라야부터 바다로 가는 중간에 있어 해발 76.4m에서 6740m까지 다양한 지형이 펼쳐지고, 그 위에 북회귀선이 지나간다. 사시사철 어느 때고 열대부터 한대까지 모든 기후를 만날 수 있다. ‘산 하나에 사계절이 다 있고, 십리만 가도 날씨가 다르다(一山有四節,十里不同天)’고 할 만큼 윈난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운귀고원(雲貴高原)에 발달한 대표적인 도시는 성도 쿤밍과 대리국의 근거지 다리(大理)다. 두 도시는 산과 호수를 끼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북쪽의 산은 매서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의 호수는 뜨거운 남풍을 식혀준다.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따뜻해서, 1년 내내 봄처럼 꽃이 피니 농사짓기도 좋다. 거대한 호수는 깨끗한 물과 풍부한 물고기를 선사한다.
살기 좋은 만큼 일찍부터 사람이 모여들었다. 쿤밍의 뎬츠(滇池) 호수 부근에서 발견된 위안머우(元謀)원인은 약 20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유명한 베이징원인의 생존 추정 시기는 70만 년 전에 불과하다. 윈난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윈난은 오랜 세월 중국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독자성을 지켜왔다. 춘추전국 말기 초장왕의 후예 장교(莊蹻) 장군이 윈난을 정벌했으나 진이 초를 치는 바람에 귀국할 수 없었다. 이에 장교는 ‘옷차림을 바꾸고 그곳 풍속을 따라 그들의 우두머리가 됐다.’(사마천, ‘사기’,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중국의 장군이 토착세력을 정복한 뒤 현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지도자가 된 것은 위만조선, 조타의 남월과 유사한 사례다. 장교는 전왕(滇王)을 자칭했다. 쿤밍 일대를 지칭한 ‘땅 이름 전(滇)’자는 윈난의 또 다른 약칭이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헤아려봐도 2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담은 이름이다.
투쟁과 반란의 땅
한 무제와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했을 때도 토착지배층을 제거하지 않고 자치권을 인정했다. 삼국지 팬들은 제갈량이 윈난의 우두머리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줬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이 진짜냐 아니냐 논쟁하곤 한다. 그러나 핵심은 제갈량의 유화정책에 있다. 오는 노련한 사섭이 죽자마자 교주를 점령하는 등 적극적인 정복정책을 폈고 현지인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반면 제갈량은 촉한이 절대 우위임을 현지인에게 각인시키면서도, 관리 파견도 주둔군 배치도 없이 곱게 물러난다. 오히려 현지인들의 신망을 얻던 맹획을 어사중승(감사원 사무총장급)이란 요직에 앉히고 윈난의 자치권을 보장했다.
윈난의 독자적 발전은 당송시대에 절정에 이른다. 250년 남조(南詔)와 300년 대리국 등 500년 넘게 독립왕조가 이어졌다.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당 현종의 10만 대군 원정을 두 차례나 격파하는 등 만만찮은 역량을 과시했다. 불교가 융성하며 윈난의 대표적 문화재인 법계통령명도승탑(法界通靈明道乘塔)을 세우고 고유 문자를 만드는 등 문화의 꽃도 활짝 피었다.
그러나 무적의 몽골군을 이기지는 못했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포위 공격하려 대리국을 멸망시켰다. 원대에 이르러 쿠빌라이 서자 혈통의 왕이 윈난을 다스렸지만, 대리 단씨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어 연합정권적인 면을 보인다. 원나라가 몰락하며 윈난은 다시 독립을 꿈꿨지만, 명 태조 주원장은 윈난의 은광산을 탐내 윈난을 무력으로 복속시켰다. 이때부터 한족 이주민이 많아지고 윈난은 중국과 일체화한다. 조선 개국 때만 해도 독립성을 유지하던 지역이 결국 중국에 편입된 것이다.
하지만 명 이후에도 윈난의 독특한 자립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초, 청말 윈난은 반란의 거점이 된다. 평서왕 오삼계는 윈난에서 군사를 일으켜 순식간에 중국 대륙의 절반을 휩쓸었다. 운귀·양광·복건 세 지역의 반란, 즉 삼번의 난(三藩之亂)은 강희제에게 최대의 시련을 안겼다. 청말에는 국정이 문란해지자 윈난 역시 가혹한 토지세와 금은광 분쟁에 시달렸다. 회족 두문수(杜文秀)는 베이징에 가서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족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윈난 전체도 장악하지 못한 채 끝나기는 했지만 두문수는 술탄을 자처하며 16년 동안 회족 독립국을 운영했다.
항일전쟁 시기 장제스는 충칭을 임시 수도로, 윈난을 후방 지원기지로 삼았다. 후방기지의 임무 중 하나는 인재 양성이다. 서남연합대학은 피난온 베이징대, 칭화대 등 당대 최고 명문대 교수와 학생이 한자리에 모인 인재의 요람이었다. 운남육군강무당은 중국의 주더·예젠잉, 한국의 이범석, 북한의 최용건,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등 4개국의 국방부 장관과 많은 전쟁영웅을 배출했다.
윈난은 그대로인데…
윈난의 역사는 이처럼 만만찮은 투쟁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멀고도 험한 변방, 사나운 이민족, 풍토병 등에 대한 중원인의 두려움은 소설에 적나라하게 투영됐다. 닿기만 해도 죽는 독천(毒川), 창으로 찔러도 죽지 않는 등갑병. 야만인들은 맹수를 부리고, 오독교는 거미, 지네, 두꺼비, 뱀, 전갈 등 기괴망칙한 동물의 독을 쓴다. 사악한 독을 쓰는 윈난 먀오족은 광명정대한 검법과 권법을 쓰는 중원의 명문정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21세기 삭막한 현대화에 시달리는 중국은 사유의 전환을 겪는다. 윈난은 잃어버린 인간미와 파괴된 자연을 되찾고 힐링할 수 있는 곳이 됐다. 이에 따라 야만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이해 못할 차이는 신비로움으로, 독천으로 상징되던 거친 환경은 깨끗한 자연으로 이미지가 180도 변했다.
실제로 윈난의 아름다운 자연과 개성적인 문화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해발 5000m가 넘는 위룽쉐산(玉龍雪山)과 하바쉐산(哈巴雪山), 그 사이에 낀 18km의 대협곡 후탸오샤(虎跳峽), 히말라야의 마지막 봉우리 창산(蒼山), 아름다운 호수 얼하이후(洱海湖)와 루구후(瀘沽湖).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삼강병류(三江並流) 지역에 나란히 흐르는 세 강은 장강의 원류 진사강(金沙江), 메콩강의 원류 란창강(蘭滄江), 중국과 미얀마를 관통하는 누강(怒江)이다.
다채로운 카르스트 지형은 창검이 도열한 듯한 석림(石林), 거대한 지하세계를 방불케 하는 구향동굴을 빚었다. 대리석 문양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해 중국인은 말한다. “베이징에 가면 만리장성에 올라야 하고, 시안에 가면 진시황릉의 보물을 봐야 한다. 상하이에선 사람을, 쑤저우·항저우에선 여자를 구경해야 한다. 그리고 윈난에서는 돌을 감상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기후와 복잡한 지형은 다양한 식생을 낳았다. 또한 ‘민족전시장’이라 불릴 만큼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어 다채로움을 더한다. 윈난의 500년 중심지 다리엔 바이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시 리장엔 나시족, 루구후엔 모계사회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숴족, 라오스 접경지대 시솽반나엔 타이족, 다랑논으로 유명한 위안양엔 하니족이 산다.
하지만 이들이 옛날에는 없었나? 천하 정복을 위해 웬만한 풍광은 다 봤을 법한 쿠빌라이조차 “황제가 아니라면 윈난왕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왜 최근에야 각광을 받고 있는가. 윈난은 예전과 다름없되 중국인의 시선이 변한 것이다.
무릉도원의 그림자
산업화에 신물 난 서양인들이 오리엔털리즘의 시선으로 동양을 동경했듯이, 현대화한 중국인은 윈난을 동경한다.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샹그릴라다. 샹그릴라(Shangri-La)는 원래 소설가 제임스 힐턴이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창조한 가상의 공간이다. 가상의 공간이기에 실존 여부를 따질 수도 없건만, 중국은 대대적인 탐사대를 파견하더니 윈난의 중뎬(中甸)이 바로 샹그릴라라며 이름마저 샹거리라(香格里拉)로 고쳐버렸다. 김윤식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일찍이 무릉도원이라는 멋진 이상향을 창조해낸 중국인들이 어째서 “그 좋은 자기 것을 헌신짝 모양 버리고, 한갓 케임브리지 대학생이 지어낸 ‘샹그릴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라고 탄식했다. 이제 속세에서 벗어난 이상향 샹그릴라는 단체관광객들로 바글대는 관광지로 변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돈에 영혼을 팔아먹었다고 개탄하기도 힘들다. 중뎬은 낙후한 오지 마을로 인근 신도시로 인구가 빠져나가 텅빈 유령마을로 변할 위기에 있었다. 샹거리라로 개명하고 관광지로 변질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없어질 뻔한 마을이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상업적인 샹거리라가 마뜩지 않던 미국 작가 마크 젠킨스는 진정한 샹그릴라를 찾겠다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숙한 오지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만난 스너는 17세 소녀이지만, 3개월 된 아기의 엄마이기도 했다. “한쪽 팔로는 아기를 안고 젖까지 먹이면서 동시에 화로에 땔감을 넣고, 밥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야크버터차를 저으며, 감자껍질을 난간 아래 돼지들에게 던져주고, 설거지를 하고, 고추를 고르면서 얘기까지 나눈다.” 깜깜한 새벽부터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고, 아기는 정체불명의 병을 앓고 있다. 스너는 마크의 샹그릴라를 떠나 샹거리라 시에 가고 싶어 했다. 또래 친구들과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곳, 주말에는 친구의 팔짱을 끼고 쇼핑할 수 있는 곳으로.
동부 티베트 직업훈련소를 운영하는 호주국립대의 벤 힐만 교수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환상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꼬집었다. “경제개발 덕분에 전통문화가 관심을 받기 쉽지만, 이런 관심이 결국은 문화를 왜곡시킨다. 일종의 문화 엘리트주의다. 오지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소수의 운 좋은 부자들이 동물원에 동물을 가두듯 지역색 담긴 볼거리가 보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시족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이 노새 열 마리를 사는 것보다 낫다’는 리장 속담이 있다. 그만큼 나시족 여성들이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다는 말인데, 이런 걸 전통문화니 미풍양속이니 말하기도 힘들다.
동남아로 가는 관문
2013년 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고 있었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아침 먹고 산책하다가 ‘云’ 번호판을 단 윈난 자동차들이 기차놀이하듯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것을 봤다. 태국은 ‘여행자의 천국’인 만큼 전에도 중국 관광객들이 오긴 했지만 2012년 말부터 부쩍 많아졌다. 태국을 배경으로 한 중국 코미디 영화 ‘로스트 인 타일랜드(人再囧途之泰囧)’가 2012년 12월 12일 개봉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이 히트하자마자 중국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직감했다. ‘다음에 다시 태국에 오면 지금과는 달라져 있겠지.’
슬픈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 2014년 12월 다시 치앙마이를 찾았다. 채 2년도 안 되는 사이 치앙마이 풍경은 완연히 달라졌다. 거리 곳곳마다 중국인을 위한 여행사, 상점들이 들어섰다. 작은 노점들도 중국어 팻말을 놓았다. 전에는 영어가 공용어였으나 어느새 중국어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훠궈 식당도 곳곳에 보였다. 노천무대의 태국 가수는 ‘첨밀밀(甜蜜蜜)’을 불렀다. 태국인이 중국인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역시 지갑 앞에 장사 없다. 2011년에서 2013년 사이 태국 풍경은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2013년에서 2014년 사이에는 크게 달라졌다. 중국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주변국의 풍경까지 변한다. 중국이 무섭긴 무섭다.
중원의 관점으로 보면, 윈난은 세상 끝에 있는 변방이지만, 실상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이다.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국경이 맞닿아 있고, 인도도 멀지 않다. 다양한 사람과 나라가 만나는 곳이라 일찍부터 교역이 발달했다. 서남 실크로드는 아시아의 양대 대국인 중국과 인도를 이었고, 차마고도(車馬古道)는 윈난의 푸얼차와 티베트의 명마를 교환했다.
한 무제가 윈난을 정벌한 것도 교역 때문이다. 한 무제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대월지(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로 파견했다. 장건은 현지에서 촉의 옷감을 발견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흉노 때문에 교역로가 막혔는데 어떻게 중국 물건이 흘러들어왔을까. 알고 보니 윈난이 쓰촨과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지였고, 다시 인도에서 대월지까지 비단이 흘러간 것이었다. 한 무제는 서남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해 윈난을 정벌한다.
제국주의 시대 윈난의 가치는 더더욱 커졌다. 동남아시아를 장악한 프랑스는 윈난을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여기고 베트남 하노이와 윈난을 연결하는 전월(滇越) 철도를 건설했다. 철도 개통식을 본 윈난육군강무당 교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전월철도가 개통됐으니 이제 윈난은 프랑스 세력 범위 안에 들어가 재난이 코앞에 닥쳤다. 모두들 오늘을 잊지 마라.”
▲500년 남조·대리국의 수도였던 다리고성(大理古城), 다리의 고등학생들이 점심시간에 학교 앞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자전거로 다리고성 일대를 둘러보는 관광객.
항일전쟁 시기 영국은 인도·미얀마에서 윈난으로 보급품을 지원했다. 이때 건설된 것이 미얀마의 라시오부터 쿤밍까지 장장 1000km에 달하는 버마 로드다. 16만 명의 중국인이 투입돼 별다른 건설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산을 깎아 만들었다. 일본이 동남아를 장악해 육로가 차단되자 미국은 인도에서 쿤밍까지 화물기로 보급을 지원했다.
국공내전 시기 윈난의 국민당 패잔병들은 미얀마를 거쳐 태국 북부의 산골로 도망쳤다. 살아남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은 마약을 재배했다. 이들이 만든 태국의 중국인 마을 도이 매살롱은 마약 산지가 됐고, 이들이 기른 소년 장치푸(張記福)는 골든 트라이앵글을 지배한 마약왕 쿤사가 됐다. 훗날 태국 왕실은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해 마약상을 토벌하는 한편, 마약밭을 녹차밭으로 바꾸게 했다. 아편전쟁으로 망한 중국을 되살리려던 국민당의 정규군이 마약상인이 됐고, 마약으로 탄생한 마을은 오늘날 녹차마을로 명성을 떨친다.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분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낳는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근대 제국주의 열강은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철도를 놓았지만, 현대에는 중국이 동남아로 진출하기 위해 동남아에 길을 닦고 있다. “길이 있으면 사람, 물건, 돈이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기” 때문이다. 도로, 철도뿐만 아니라 전력망,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등의 인프라까지 설치하고 있다. 윈난과 싱가포르를 잇는 축을 중심으로 삼고 메콩강 유역과 광시성 베이부만(北部灣) 경제권을 양 날개로 삼는 일축양익(一軸兩翼, One Axis, Two Wings) 전략이 추진 중이다. 윈난-미얀마 교통망 확충에도 공을 들인다. 미얀마 회랑을 건설하면 인도양이 직접적인 세력권으로 들어오고 남중국해로 우회하던 물류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윈난과 동남아의 연계가 강해짐에 따라 동남아 진출을 노리는 많은 기업이 쿤밍에 자리 잡고 있다.
중화주의의 기막힌 기상
윈난의 급속한 개발은 주변 국가들의 환경마저 크게 바꾸고 있다. 태국 북부 반팍잉 마을의 주민들은 중국 일기예보를 본다. 중국 남부에 폭우가 내려 중국 댐에서 물을 방류하면 자기네 마을이 침수되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원래 어업으로 먹고살던 마을이지만 중국 댐 건설로 유량이 줄어들자 어선을 팔고 옥수수와 담배를 재배하고 있다.
윈난의 란창강(蘭滄江)은 바로 동남아의 젖줄 메콩강이다. 중국,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 6개국을 흐르는 메콩강은 9000만 주민의 생존과 직결된다. 중국은 20년간 란창강에 7개 대형 댐을 건설했고, 5개 댐이 추가 건설 중이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중국의 댐 건설로 메콩강의 유량과 흐름이 변화하고 수질 악화와 생물 다양성 파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동남아 원조는 메콩강 유역국의 반발을 무마하는 측면도 있다.
중국의 동남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과연 경제에만 머무를까. 2014년 7월 27일, 서울 신촌에서는 태국의 송크란을 본뜬 물총축제가 열렸다. 신촌 거리에 모인 사람들과 서로 물을 쏘아대고 맞아가며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고 재미있게 보냈다. 중국의 SNS인 웨이신 펑유취안(微信朋友圈)에 “신촌 물총축제는 태국의 포수제(潑水節)를 모방하긴 했지만 꽤 재밌었다”고 글을 올리니, 중국 친구 한 명이 즉각 답을 달았다. “태국의 포수제가 아니라 타이족(泰族)의 포수제야!” 중국인에게 포수제란 시솽반나에서 타이족들이 물을 뿌리는 축제로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다.
참으로 떨떠름했다. 물론 일리는 있다. 송크란은 남중국에서 동남아 북부 일대의 주민들이 제일 더운 4월에 물을 뿌리며 노는 행사다. 타이족이 중심인 태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하게 벌어지기는 하지만, 타이족은 윈난, 미얀마, 라오스 등지에도 퍼져 살고 이들이 모두 송크란을 즐긴다. 따라서 송크란이 태국만의 문화는 아니다. 한데 그렇다고 중국이 송크란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건 더욱 웃긴다. 타이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약한 편인데, 이들을 빌미로 포수제는 중국 것이다?
소수민족도 곧 중국인이니, 이들의 문화도 다 중국문화라고 주장하는 중화주의의 기상은 정말 기가 막힌다. 아리랑이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문화라며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중국의 행보가 떠올랐다. 중국이 이웃 국가에 진출할 때 지역주민과 동족인 소수민족은 확실히 훌륭한 첨병이 되겠지.
리장의 여인, 아름다운 밤
복잡한 속사정이야 어떻건 윈난은 중국에선 확실히 때가 덜 묻은 곳이다. “생활이 불만스럽고 지금 있는 곳이 싫어지면 다리로 가요”라는 ‘다리로 가요(去大理)’ 노랫말처럼 많은 중국인이 윈난을 찾는다. 더러는 코믹 영화 ‘신화루팡(心花路放)’처럼 로맨스를 꿈꾸기도 하면서. 윈난 사람들은 순박하고 여행객들도 이곳에서는 마음이 열려 로맨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어땠냐고? 쿤밍에서 다리로 가는 기차 침대칸에서 리장의 자매를 만났다. 언니가 임신 3개월인데, 보다 정확한 진찰을 받기 위해 성도 쿤밍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동생은 리장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줬다. 다리 여행 후 리장에 가서 그를 다시 만났다. 다소 늦게 나온 그는 헐레벌떡 뛰어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하루 종일 리장 곳곳을 안내했고 저녁에 바에서 맥주를 함께 마셨다. 다리 특산 맥주인 ‘풍화설월(風花雪月)’이었다. 시원한 바람, 향기로운 꽃, 새하얀 눈, 아름다운 달. 아마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맥주 이름이리라. 바에는 가수가 있었는데 손님이 노래하고 싶다면 반주를 해주기도 했다. 그는 류뤄잉의 ‘나중에(後來)’를 부르고는 내게 말했다. “딱히 오빠 때문에 부른 거 아냐. 그냥 이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야.” 누가 뭐랬나.
중국어를 모를 때였다. 노래 가사처럼 나중에, 정말 나중에야 가사의 뜻을 알았다. “나중에야 난 마침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았어요. 안타깝게도 당신은 이미 멀리 떠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렸죠. 나중에야 마침내 눈물 속에서 깨달았어요. 누군가는 일단 놓치면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걸.”
오랜만에 가사를 음미하며 서정적인 노래를 들으니 여행의 추억, 아름다운 리장의 밤, 다정하던 그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윈난에서는 돌을 봐야 한다고? 윈난에서도 봐야 할 것은 사람이었다. 만나야 할 것은 사람이었다.
“황제가 아니라면 윈난왕이 되고 싶다.” 천하를 정복하며 웬만한 풍광은 다 둘러봤을 쿠빌라이조차 눈을 떼지 못했을 만큼 이 땅은 중국인에게 아득한 이상향 같은 곳이다. 윈난에서 파는 맥주의 이름은 ‘風花雪月’. 이보다 더 낭만적인 맥주가 또 있을까.
▲나시족의 민가가 모여 있는 리장구청(麗江古城). 1996년 대지진에도 붕괴되지 않았을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나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리장구청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
▲다리에서 마주친 할머니. 새벽부터 일 나가시느라 분주하다
▲후타오샤(虎跳峽)에서 바라본 진사(金沙)강.
◆2월 호 구이저우 성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貴 마오타이酒의 고향
구이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이곳 주민들이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속 편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열풍은 구이저우인에게 욕망을 선물했다. 도로도 나기 전에 너나없이 자동차를 사들이는 바람에 성도(省都) 구이양은 베이징 다음으로 자동차 구매 제한 도시가 됐다
▲산을 개간해 자리 잡은 시장 천호 먀오족 마을. 구이저우에서 가장 큰 먀오족 마을로, 오늘날 구이저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오후 5시에 출발, 다음 날 새벽 6시에 도착하는 밤기차였다. 저녁을 못 먹어 도시락 판매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저녁 6시쯤 되자 승무원들이 도시락을 들고 지나다녔다. 한 여성 승무원에게 “도시락을 어디서 사요?”라고 묻자 뭔가 말을 했는데 중국어가 아닌 듯했다. 내가 멍하게 있으니 표준어로 말했다. “이건 승무원 도시락이에요.”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하는 게 꼭 외국인이 구사하는 중국어처럼 들렸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그녀는 구이저우 소수민족 출신일까. 구이양에 가는 사람은 구이저우 사람밖에 없다고 여겨 그곳 방언을 썼을까.
낙오자의 땅 ‘그레이저우’
구이저우성의 약칭은 ‘귀할 귀(貴)’자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아주 가난한 땅이다. 이곳에선 오히려 ‘모든 것이 귀하다’고 해야 할까. 구이저우엔 “하늘은 3일 맑은 날 없고, 땅은 3리 평탄한 곳이 없으며, 사람은 3푼 돈도 없다(天無三日晴,地無三里平,人無三分銀).” 천(天)·지(地)·인(人)이 모두 가난하다. 인구도, 면적도 보잘것없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중국에서 가장 낮다. 오지를 좋아하는 서양 여행자들조차 흐린 날씨에 넌덜머리가 나는지 ‘구이저우(Guizhou)’ 대신 ‘그레이저우(Greyzhou, 잿빛의 주)’라고 한다.
광시(廣西)의 습한 공기가 구이저우의 아열대 고원에서 비와 구름으로 변해 이곳 날씨는 대체로 흐리다. 강수량은 많으나 땅속으로 사라지는 물이 많아 수리시설을 잘 갖추지 않으면 사용할 물이 풍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평지가 3%밖에 안 된다. 농사짓기가 힘들다. 드넓게 펼쳐진 카르스트 지형은 자못 아름답지만 윈난(雲南)·광시의 명성에 밀려 관광객도 적다. 국경지대가 아니라 교역의 이점도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었다. 소외된 땅은 소외된 이들의 안식처가 됐다. 한족에게 내몰린 이민족들, 주류에게 밀려난 낙오자들이 이 땅에 모였다.
구이저우는 중원의 당·송과 윈난의 남조·대리 사이에 끼인 땅으로 힘의 공백지대였다. 이 균형은 원나라가 등장하며 무너진다. 원나라는 남송과 대리를 정복하며 구이저우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그러나 중앙집권세력이 있어 지배층만 교환하면 되는 윈난과 달리 구이저우엔 이렇다 할 중앙집권세력이 없었다. 정복하기는 쉬웠지만 관리하기는 까다로웠다. 원은 일단 지역 유지들에게 관직을 주고 중앙 조정으로 포섭하는 토사(土司) 제도를 실시한다.
원·명·청 700여 년에 걸쳐 구이저우는 중국에 소화된다. 토사 제도로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한 후 토착 세력인 토사를 중앙 조정에서 파견한 유관으로 바꿨다. 이를 개토귀류(改土歸流)라 한다. 친중국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지배에서 직접통치로 전환한 것. 토사 지역과 중국 내지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한인(漢人)은 경계를 넘지 않고, 만인(蠻人)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던” 지역에 한인이 대거 유입됐다. 개토귀류 전 구이저우에는 극소수의 한인만 있었으나, 교류가 확대되면서 결국 한인이 주류 거주민으로 변했다. 오늘날 3000만 구이저우 인구의 62%가 한족이다.
끈질긴 저항, 끝없는 반란
말은 간단해 보여도 통합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먼저 대규모의 주둔군이 배치됐다. 오늘날 구이저우에서 비교적 유명한 도시 중에는 군사도시로 출발한 곳이 많다. 후난과 윈난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전위안(鎮遠), 칭옌구전(青岩古鎮), 안순(安順)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안순의 천룡둔보(天龍屯堡)는 명 태조 주원장이 파견한 30만 둔전병 가운데 현지에 눌러앉은 이들이 만든 마을이다. 툰바오인(屯堡人)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한족이기는 하지만, 600여 년이나 명나라의 말과 옷,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바람에 현대 중국인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툰바오인은 중국의 ‘57번째 민족’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강압적인 지배와 수탈에 항거하는 소수민족의 반란이 이어졌다. 큰 반란만 꼽아보자. 먀오족(苗族) 토사 양응룡의 반란은 임진왜란, 몽골족 보바이의 반란과 함께 명 만력제의 3대 전쟁(萬曆三大征)으로 꼽힌다. 건륭제가 갓 즉위한 1735년의 반란 진압 때 청 조정의 집계로 1만8000여 지방민이 학살되고, 1224개 마을이 불에 탔다. 1795년의 먀오족 대반란은 청의 상당한 전력을 소모시켰고, 연달아 일어난 백련교의 난 이후 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구이저우의 반란은 명·청 양대 제국의 쇠퇴기를 이끈 도화선이었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단결력이 높은 먀오족은 대중매체에서 곧잘 희화화된다. 영화 ‘쉬즈더원(非誠勿擾)’의 주인공 진분은 돈을 벌자 짝을 찾기 위해 연달아 인터넷 미팅을 한다. 그가 만나는 별의별 여자 중에서도 가장 희한하게 나오는 게 먀오족 여자다. 은장신구를 치렁치렁 단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서 결혼하면 진분이 무조건 데릴사위로 자기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집에 어떻게 가요?”
“일단 비행기로 쿤밍에 도착해서 버스로 24시간 거리인 몽자에 간 다음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병변까지 가요. 거기서 다시 하루 종일 경운기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면 집이에요.”
“혹시 살다가 사이가 안 좋아지면 이혼은 가능하겠죠?”
“오빠가 선생님 다리를 분질러놓고 말 거예요.”
코믹 영화라 악의 없이 만든 장면이겠지만, 먀오족이 낙후한 오지에 살고, 희한한 전통을 고집하며, 야만적이라는 전형적 이미지를 근거로 한 연출이다.
그러나 한족이 먀오족의 습속을 비웃는 건 부조리하다. 먀오족이 왜 오지에 살까. 한족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왜 은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까. 한족이 침략할 때 쉽게 피난 가기 위해서다. 먀오족은 한족에게 밀려 계속 피난을 가야 했다. 피난 때마다 짐을 챙기기 힘들어 먀오족은 전 재산을 은장신구로 만들어 늘 걸치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제 한 몸만 건사해서 피난 가면 되니까.
먀오족과 한족의 투쟁 역사는 장장 3000년에 달한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중원의 황제(黃帝)는 동쪽의 치우(蚩尤)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다. 중원의 한족이 동이(東夷) 세력을 몰아냈음을 의미한다. 치우가 죽으며 피를 단풍나무에 쏟아 매년 가을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게 된 후 먀오족은 기나긴 이주의 역사를 시작한다. 동북쪽에서 정반대편인 서남쪽까지의 긴 여정, 황하와 장강을 건너고 숱한 산을 넘었다. 정착해서 살 만하면 한족들이 와서 다시 밀려나고, 또 이주해서 살 만하면 다시 밀려나는 삶이 반복됐다.
오지 중 오지
▲가파른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시장의 당나귀, 멜대 하나로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시장 사람들.
밀려나고 밀려난 끝에 정착한 곳이 구이저우성이다. 그중에서도 산골짜기에 먀오족 최대의 마을인 ‘시장 천호 먀오족 마을(西江千戶苗寨)’이 있다. 시장은 구이저우 동남부의 중심지 카이리(凱里)에서 직선거리 20km에 불과하지만, 총알택시로도 1시간이나 걸렸다. 굽이굽이 산길을 빙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포장도로가 잘 깔린 지금도 이 정도니 길도 제대로 없던 옛날에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을 것이다. 더 이상 외부 세력에 시달리지 않고 피난도 가지 않으려고 이토록 산속 깊숙이 콕 박혀 살았을까.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란 만만찮다. 구이저우 소수민족들의 문화에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먀오족은 은이나 나무로 된 소뿔 혹은 큰 모자를 써서 머리를 커 보이게 한다. 조상인 치우가 전쟁의 신으로서 머리에 소뿔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보자면 숲 속에 사는 동물을 쫓기 위해서였다.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남아야 하기에 소수민족의 삶은 매우 생태친화적이다. 환경과 인간의 삶이 균형을 이루며 지속가능한 생활을 이어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둥족(侗族)의 삶을 잘 그려낸 영화 ‘군라라의 총(滚拉拉的枪)’을 보자. 바사(岜沙) 마을의 둥족은 멜대 한 짐만큼만 나무를 베서 나를 수 있다. 소년 군라라가 수레로 나무를 옮기자 촌장은 일장 훈시를 한다. “수레로 나무를 나르다보면 트럭으로 나르고 싶어지고, 트럭으로 나르다보면 결국 기차로 나무를 나르고 싶어질 게다. 그렇게 욕심이 커지면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 결국 우리 삶의 보금자리인 숲이 사라지고 말 게야.” 군라라는 첩첩산중 산골에서 읍내까지 멜대로 나무를 지고 걸어서 운반한다. 그 대가로 고작 5위안을 받는다. 전통을 따르는 소수민족의 삶은 이처럼 고단하다.
그나마 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잔리(占里) 마을의 둥족은 대대로 철저하게 산아제한을 실시해왔다. 전통사회에서는 보통 노동력을 투입하는 만큼 살림이 나아지기에 다산을 장려하지만, 잔리 마을은 가용자원이 너무 모자라 700명이 좀 넘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다. 맬서스의 덫이 불과 700명부터 작동하기에, 이들은 ‘160호 700명’의 인구 제한을 지키기 위해 피임과 낙태술을 발전시켰다.
잔리마을의 서사시에 따르면 이들은 원래 광시에 살았다. 인구가 점차 늘자 “총각들이 골목에 가득 차고 처녀들이 마을에 가득 차게 됐다.” 인구가 늘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안으로는 분쟁, 밖으로는 전쟁이 일어났다. 피난 끝에 잔리에 정착한 이들은 오늘도 “아들 많으면 경작할 논이 없으니 며느리 얻지 못해, 딸 많으면 은이 없으니 시집 못 보내지…”라고 노래하며 작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전통과 정체성의 미래
▲푸른빛이 감도는 돌로 지은 칭옌구전(青岩古鎮). 명초 구이저우 주둔군의 전초기지로 발전하기 시작한 마을이다
▲먀오족의 생활상을 그린 벽 앞을 지나가는 여행자.
그러나 환경이 열악할수록 힘을 합해야 할 필요도 커진다. 없는 살림에도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단적인 예가 먀오족의 흘고장(吃牯臟) 행사다. 흘고장은 13년에 한 번 열리는, 지역 마을들의 연합 제사다. 적게는 30~40마리, 많게는 200~300마리 소를 잡고 조상에게 “여기 당신의 자손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디 보호해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이때 먀오족은 전통의상을 입고 여러 먀오족을 만나며 먀오어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조상의 후손이잖아요”라며 사이좋게 쇠고기를 나눠 먹는다. 제사를 주관한 마을은 경제적으로 크게 휘청거릴 지경이지만, 먀오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를 보존하며 평소 흩어져 살던 다른 먀오족들과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사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아름답지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외부의 압력,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 강요 등도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치, 종교, 철학, 사회규범 등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제어했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없던 욕망도 갖게끔 부추긴다. 갈증이라는 ‘본능’을 코카콜라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욕구로 전환시키는 게 자본주의의 요체 아닌가.
전통가옥은 나무집이다. 주변에서 가장 조달하기 쉬운 건축자재가 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집은 화재에 취약하다. ‘군라라의 총’에서 군라라는 여행 중 화재가 난 집을 본다. 사람들은 불을 끌 생각을 전혀 못한다. 물이 없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살림살이 몇 가지만 옮긴 뒤, 정든 집이 무너져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다. 실제로 디먼 둥족 마을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마을의 중심인 고루(鼓樓)를 비롯해 상당 부분이 전소됐다. 전통 방식의 나무집을 지으면 정부 보조금이 나오지만 마을 주민들은 벽돌집을 짓고 싶어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내구성, 안전성, 생활편의성이 나무집과 비교할 수가 없는데.
‘딸’ 관광업, ‘어머니’ 전통문화
2008년 디먼을 방문한 미국 작가 에이미 탠은 두 10대 소녀가 둥족 서사시를 배우기 싫어하는 것을 본다. “그 노래는 지루해요. 할 일도 많은데 싫어하는 것까지 어떻게 배워요?” 민족의 유래를 담은 서사시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소녀들의 관점에선 시험에도 안 나오고, 만화처럼 재밌지도 않고, 가요처럼 신나지도 않은 옛날 노래일 뿐이다. 당시 디먼 주민 2372명 중 절반이 넘는 1200명이 이미 외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녀들에게는 서사시를 외우는 것보다 외지에서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현지 문화는 지역 환경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온 결정체다. 현지인들이 그저 아름답기 때문에, 외부인들 보기 좋으라고 문화를 고수한 게 아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했다. 소를 치고 농사를 짓는 것보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편이 훨씬 편하고 수입도 좋다.
중세 천문학자 케플러가 “딸인 점성술이 빵을 벌어오지 않았다면 어머니인 천문학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고 했듯, 현대사회에서는 딸인 관광업이 돈을 벌지 않으면 어머니인 전통문화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운동은 당초 주창자들의 예상과 달리 단순히 서양의 기술만을 수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서양의 문화, 정신, 사회제도까지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소수민족 역시 생활용품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부인의 눈에는 색다른 전통의상이지만, 현지 아이들은 촌스럽다고 여긴다. 인구 통제를 엄격히 해온 잔리 마을에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성의 손도 잡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청소년들은 TV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사춘기 때부터 연애하고 싶어 한다.
2007년 ‘오마이뉴스’ 기자는 12세 둥족 소녀를 만난다. 멋진 옷을 입고 첨단 전자기기를 갖고 다니는 관광객을 부러워한 소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출해서 광둥성 식당에서 일하다 아버지에게 끌려온 경험이 있다. “내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광둥에 가서 돈을 벌어 원하는 물건을 모두 살 것”이라던 소녀는 이제 20대 처녀가 됐으리라.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원하던 대로 광둥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멋쟁이 처녀가 됐을까.
가난하지만 비싼 도시
많은 관광객이 구이저우를 여행하고서 이곳 주민들을 일컬어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속 편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군주 손호는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치에 열을 올렸다. 가혹한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상류사회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선망했다. 화핵은 당시의 망국적 세태를 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세상은 점점 더 빈곤해져 가는데,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지려는 욕망에 발버둥칩니다. 집에는 쌀 한 항아리 없는데 밖에서는 비단옷을 입고 쓸모없는 장식을 하는 등 사치에 매달립니다.” 1800년 전이나 현재나 사람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2014년 구이저우의 1인당 GDP는 4297달러. 남미의 파라과이, 몽골과 비슷한 수준이고, 태평양의 작은 섬 통가 왕국, 아프리카의 튀니지보다도 떨어지며, 톈진의 25%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성’이라는 낙인은 구이저우인에게 큰 열등감을 안긴다. 가난하기에 사치에 대한 욕망이 오히려 더욱 크고, 변두리에 있기에 외지에 대한 선망이 더욱 크다.
성도 구이양 사람들은 ‘소득은 아프리카 수준, 소비는 유럽 수준’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3000위안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30위안의 비싼 커피를 보란 듯이 마신다. 자동차, 명품백 같은 사치재 소비 열풍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2010년 구찌(Gucci) 구이양 매장이 첫 오픈한 날 400만 위안의 매출을 올려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도로가 확충되기도 전에 자동차 구매가 폭증해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구이양은 베이징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자동차 구매 제한 도시가 됐다.
스스로 ‘구이저우의 베이징’이라 여기는 구이양 사람들은 베이징과 같은 생활을 꿈꾼다. 2004년 월마트가 구이양에 문을 열었다. 당시 토착 상점인 다창룽(大昌隆)은 월마트보다 가격도 쌌고 교통도 편리했지만, 월마트에만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영업을 중지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유를 묻자 시민들은 답했다. “월마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라 베이징, 상하이 지역에 일찍이 들어왔다. 지금까진 구이양이 가난해서 들어오지 않았는데, 마침내 구이양에도 들어왔으니 물건을 안 사고 그냥 가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사치하지 않는다면 살림이 나아질까. 2015년 10월 구이양에 처음 와서 쇠고기면(牛肉麵)을 먹었을 때 다소 놀랐다. 싼 음식의 평균가가 10위안 정도로 시안이나 청두 등 쟁쟁한 대도시와 차이가 없었다. 1인당 GDP가 낮으니까 물가가 쌀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나중에 현지인에게 들으니 구이양은 소득은 적어도 물가는 결코 싸지 않았다. 이 식당에서 만난 활달한 종업원이 맘에 들어 SNS 웨이신 친구를 맺었다. 그녀는 얼마 뒤에 웨이신에 이런 글을 썼다. “며칠 뒤면 생일이다. 그렇지만 손안에 마오 할아버지가 없다.” ‘세종대왕님이 지갑에 없다’는 말처럼 ‘돈이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한 달 내내 부지런히 일해봐야 맘에 드는 옷 한 벌 사기에도 빠듯하다며 삶의 고충을 털어놨다.
구이저우의 저력은 뭘까. 산이 많은 만큼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경제개발이 늦은 탓에 자연과 소수민족의 전통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관광업에 유리하다. 구이양은 시내 공원에서도 원숭이를 볼 수 있을 만큼 삼림이 풍부하고, 여름에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선선해서 중국 제1의 피서도시로 손꼽힌다. ‘산림지성 피서지도(森林地城 避暑之都)’라는 별명도 얻었다.
황과수 폭포는 일찍이 대여행가 서하객이 “흰 물이 저절로 하얀 꽃으로 변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직포기도 없이 수놓아지네”라고 찬탄한 아시아 최대의 폭포다. 남미의 이과수, 북미의 나이애가라, 아프리카의 빅토리아와 함께 세계 4대 폭포의 반열에 든다.
75km의 마링하 대협곡은 너비 50~150m, 절벽 높이 150~200m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두 봉우리가 유방 같은 쌍유봉(雙乳峰)은 ‘대지의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방’이라는 별명을 지녔다. 거리와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져 “도로변 관봉정에서 보면 20대 여인의 유방처럼 단단해 보이고, 300m 거리에서 보면 30~40대 유부녀의 성숙한 유방처럼 보이고, 500m 거리에서 보면 60대 할머니의 유방처럼 보인다.” 매년 9월에 가슴왕 선발대회도 연다.
마오타이酒 닮은 운명
다양한 민족문화와 축제로 이벤트 달력도 풍성하다. 랑더(郎德) 먀오족 마을은 ‘1년 중 100일이 축제’로 유명하며, 포의족은 장탁연(長桌宴)을 벌인다. 짧게는 몇 m, 길게는 200m에 이르는 긴 탁자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는 축제다. 개를 즐겨 먹어 “포의족의 말소리가 들리면 개가 도망간다”는 속담도 있다. 둥족 마을은 ‘시의 고향, 노래의 바다(詩之鄉,歌之海)’로 유명하다. “말할 줄 알면 노래하고, 걸을 줄 알면 춤을 춘다”고 할 만큼 춤과 노래를 즐긴다. 젊은 남녀들의 목소리가 청량하고 높아 ‘하늘의 퉁소 소리처럼 들린다(天籟之音)’는 명성을 얻었다.
구이저우의 가장 유명한 특산물은 단연 마오타이주(茅台酒)다. 1972년 마오쩌둥이 닉슨과 중미수교조약을 맺을 때 마신 ‘국주(國酒)’로 유명하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때 마신 마오타이주를 못 잊어 국가 행사에서 마오타이주를 쓰게 했다. 선조가 임진왜란 피난길에 먹은 도루묵을 못 잊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가 마오타이주를 즐긴 건 그저 술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중 구이저우의 쭌이(遵義)에서 비로소 당권을 장악했으니, 그에게 마오타이주를 마시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의 순간을 돌이켜보는 것이었을 게다.
속사정이야 어쨌건 마오쩌둥 덕분에 마오타이주는 명성을 얻게 됐으며, 비싼 값에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구이저우의 마오타이 판매점에서 80년산 한 병이 12만 위안인 것을 보고 반문한다. “한 병에 1700만 원짜리 술, 누가 마시는 것일까?”
마오타이주는 뇌물과 재테크 수단으로 변질됐다. 부패 척결 과정에 중국군 장성의 집에서 1만 병의 마오타이주가 발견되자 시진핑은 진노했다. “전쟁 준비에 이런 물자가 필요한가?” 2012년 이후 사정(司正)의 된서리를 맞아 마오타이 가격이 폭락했다. 주위의 여론에 따라 좌지우지된 마오타이의 운명은 고향 구이저우와 묘하게 닮아 보인다.
말할 줄 알면 노래하고 걸을 줄 알면 춤춘다
먀오족 전통문화 寶庫 구이저우성
구이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지만, 다양한 민족문화와 축제로 늘 흥겨움이 넘친다. 여러 소수민족 중에서도 둥족의 젊은 남녀들은 목소리가 청량하고 높아 ‘하늘의 퉁소소리처럼 들린다(天籟之音)’는 명성을 얻었을 정도. 카르스트 지형이 낳은 천혜 절경과 산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빚어내는 풍광이 이채롭다. 〈관련기사 446쪽〉
▲후난과 윈난을 잇는 교역 도시 전위안(鎮遠). 스핑(石屏)산과 등양허(㵲陽河)가 태극 문양처럼 휘돌아 아늑한 정취가 있다.
▲햇볕 좋은 날, 쌀을 말리느라 분주하다.
▲먀오족의 전통 공연. 화려한 은장신구와 활동적인 짧은 치마가 인상적이다
▲현대적으로 변모한 구이양 공원
▲시장 전망대에서 먀오족 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구이양 사람들은 첸링(黔靈)산 공원에서 운동, 춤 등 다채로운 취미활동을 즐긴다.
◆3월 호 대만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수난의 ‘반쪽 국가’
대만 사람들이 “나는 차이니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는, 자신들은 중국인과 달리 선진 경제, 우아한 사회, 고상한 문화를 누린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대만은 지난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을 선택함으로써 중국 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비쳤다. 토네이도 같은 양안관계는 다시금 시험대에 올랐다.
▲대만의 제2 도시이자 남부 최대 항구도시 가오슝. 가운데 솟은 빌딩은 이 도시의 랜드마크 ‘가오슝85빌딩’이다.
대만 남자와 중국 여자가 만나 마음을 통하고 몸을 통하고 정을 통하게 됐다(三通). 둘이 처음 관계를 맺는 순간, 대만 남자가 감격에 겨워 외쳤다. “대만이 대륙을 통일했어!” 그러자 중국 여자가 맞받아쳤다. “천만에. 대만은 중국에 완전 포위됐고, 두 개의 작은 섬 진먼(金門)과 마쭈(馬祖)만 가까스로 포위를 면했지.”
가장 사적인 연인관계도 쉽게 정치 관계로 변하는 곳. 중국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23번째 성’인 대만성(臺灣省)으로 여기고, 대만인은 쑨원의 적통을 이어받은 중화민국으로 여기는 곳. 대만이다.
정치·문화사적 이름
▲대만의 약칭은 ‘땅 이름 대(台, 번체자는 臺)’다. 폴리네시아인 등 다양한 원주민이 살던 대만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찾아왔다. 시라야족 원주민은 희한하게 생긴 네덜란드인을 ‘타이오안’(외국인)이라 불렀고, 네덜란드인은 이를 땅 이름이라 여겼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았다. 훗날 네덜란드인을 몰아낸 중국인은 이 이름을 음차해 중국식 명칭 ‘타이완(臺灣)’을 만들었다.
대만이라는 이름엔 많은 사연이 담겼다. 원주민과 네덜란드인의 만남에서 만들어진 이 이름은, 대만이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만나는 섬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이 이름이 원주민의 말에서 네덜란드인의 로마자 표기로 옮겨졌다가, 다시 중국인의 한자로 바뀐 것은 섬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즉 ‘타이완’은 정치사적, 문화사적 이름이다.
대만 섬은 한반도처럼 중국 대륙과 하나였다. 1만 년 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한반도는 황해가 생겨 반도가 되고, 대만은 대만해협이 생겨 섬이 됐다. 해수면이 상승해도 가라앉지 않은 데서 보듯 전체 면적의 64%가 산이다. 100개가 넘는 산은 평균해발 3000m이고, 최고봉인 위산(玉山)은 3952m의 높이를 자랑한다. 환태평양 화산대라 지진이 잦지만 온천도 많다. 북회귀선은 대만 북부를 온대습윤 지역, 남부를 아열대 지역으로 가른다. 작은 섬이지만 식생이 풍부하고 다양한 작물을 기르기 좋다.
180km의 대만해협 덕분에 대만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나름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다. 태평양권이라 일본, 동남아 등과 왕래하기도 좋다. 섬인 만큼 대만은 뱃사람들과의 인연을 떼려야 뗄 수 없다. 대만의 역사는 바다를 건너온 정복자들이 교체돼온 역사였다.
‘태평양의 왕자’ 폴리네시아인은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만 해도 수평선 너머 섬까지의 거리와 방위를 알 정도로 항해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대양 항해는 오늘날의 우주여행에 맞먹는 스케일이었다. 폴리네시아인은 대만은 물론 필리핀, 말레이시아, 호주, 뉴질랜드, 하와이, 통가 등을 두루 누볐다. 이들의 흔적은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Austronesian Languages)족 또는 남도어(南島語)족은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 통가, 동남아의 말레이어, 타갈로그어(필리핀 원주민 언어) 등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다. 특히 대만은 모든 종류의 남도어족이 다 살고 있다.
최초의 정복자
바다에 살던 해양민족은 대만에서 정착 생활을 하며 평지에 사는 평포족과 산에 사는 고산족으로 변했다. 여기에 중국인들도 찾아와 더러는 정착해 농사를 지었고, 더러는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대만을 거점으로 밀무역과 해적질을 했다.
이때만 해도 대만에는 확고한 지배자가 없었다. 대만의 첫 공식 지배 세력은 생뚱맞게도 멀고먼 나라 네덜란드였다. 대항해시대를 연 유럽은 중국과 인도 무역을 위한 거점 마련에 열을 올린다. 선발주자 포르투갈은 중국 최대의 무역항 광저우와 가까운 마카오에 일찍 터를 잡았고, 후발주자 네덜란드는 대만을 거점으로 삼았다. 대만은 푸젠과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간 지점으로서 중일무역에도 적합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대만을 점령한 뒤부터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대만 원주민은 수도 적고 생산력도 낮았기에 주둔군은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중국인들에게 농토와 농기구를 지원하며 이주를 장려했다. 때마침 명말청초 흉년과 전쟁에 시달리던 중국인이 대거 대만으로 건너왔다.
타고난 일꾼인 중국인은 잠자던 대만을 깨웠다. 점령 초기 동남아, 일본에서 식량을 수입하던 대만은 곧 사탕수수, 쌀 등을 수출했다. 대만의 급속한 농업생산력 발달은 중국인의 급속한 이주와 맞물렸다. 따라서 역사가 토니오 안드레이드는 대만 사람이 ‘중국인’이 된 것은 네덜란드가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태평양에 놓인 대만은 중계무역으로서도 최적지였다. 네덜란드는 중국, 일본, 동남아, 중동과의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당시 동인도회사 사원 중 표류하다 조선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벨테브레(박연)와 하멜이다. 네덜란드의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이 엿보인다.
정성공 견강부회
그러나 네덜란드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푸젠의 실력자 정성공은 반청복명(反清復明) 전쟁을 일으켰다가 청나라에 패했다. 정성공은 바다로 격리돼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으면서 언제라도 다시 대륙으로 쉽게 갈 수 있는 대만을 거점화하기로 했다. 1661년 정성공은 ‘홍모귀’(紅毛鬼, 네덜란드인)를 물리치고 마침내 대만의 왕이 된다.
훗날 중국 공산당은 정성공을 칭송한다. 정성공은 푸젠성 출신으로서 외세를 물리치고 대만을 정복했으니, 대륙이 대만을 정복한 모범사례다. 대만 국민당도 정성공을 떠받든다. 정성공은 대만을 근거지로 대륙 본토의 야만스러운 정부에 굴하지 않고 항쟁을 펼친 만큼 대만이 대륙을 정벌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일본 식민통치자 역시 정성공을 좋아했다. 정성공은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대만을 정복한 최초의 ‘일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1898년 일본의 대만총독은 부임하자마자 정성공의 사당을 참배했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의 아들, 해적 가문의 후예이며 해상무역상이던 정성공의 복잡한 배경은 대만의 복잡 미묘한 역사를 반영한다.
정성공은 한결같이 반청복명을 꿈꿨지만, 청과 대만의 세력차는 너무나 컸다. 정성공의 아들 정경은 청의 패권을 인정하되 대만의 독립성을 지키는 현실주의 노선을 택했다. 정경은 사신을 보내 “조선의 예를 따라 삭발하지 않고 다만 신하를 칭하며 공납을 바치는 선에서 관계 유지를 희망”했다. 그러나 청은 이를 거부하고 만주식 변발을 하고 투항하기를 원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패전 후 굴욕적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했으되 청에 협력하자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청은 대만이 조선과 달리 중국의 영토임을 못 박았다.
다만 청은 반란자의 집합소인 대만을 토벌하고자 한 것이지, 대만 섬 그 자체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탁월한 수군제독 시랑이 대만을 정복했을 때 청은 대만인을 이주시켜 섬을 아예 비워버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랑은 대만의 가치를 꿰뚫어보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대만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해 경제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장쑤, 저장, 푸젠, 광둥 등 연해지역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긴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시랑의 말은 정확했다. 먼 훗날 이 땅에 눈독을 들여 병약한 청나라 대신 대만을 차지한 것은 신흥 열강으로 부상하던 일본이었다.
孔廟에서 코스프레
▲가오슝 시립문화센터에서 춤 연습 중인 청소년들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의 기념관인 타이베이의 중정기념당.
2014년 대만 에바(EVA)항공의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항공권에 헬로키티가 그려져 있어 깜찍했다. 그뿐 아니라 기체 전체에 헬로키티를 그려 넣었고, 기내 좌석에도 헬로키티 쿠션이 놓여 있었다. 기내식의 티슈, 아이스크림, 심지어 샐러드 안의 어묵도 헬로키티 상품이었다.
대만 지하철의 마스코트는 일본 만화풍의 귀여운 여자 캐릭터였다. 일본 걸그룹 AKB-48 상점 광고도 자주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가오슝의 공묘(孔廟) 안에 ‘코스프레’ 하는 여성이 많았다는 거다. 공묘가 뭔가? 중국의 영원한 스승 공자의 사당, 즉 중화 문명의 자존심이라 할 만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대표적 일본 문화 활동인 코스프레를 하다니! 대만인들의 일본 문화 사랑은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었으면서도 한국과 대만의 대일(對日) 감정은 사뭇 다르다. 한국이 일본에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다면 대만은 일본에 친근감을 갖고 있다고 할까. 일본은 대만에서 문관(文官) 위주의 문화통치를 했고, 수탈을 비교적 적게 하고 근대화의 혜택을 많이 줘서 일본의 과(過)보다 공(功)이 크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식민통치는 식민통치다. 철도와 항만을 건설한 것은 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군대를 대만에 신속히 전개하고 대만 물자를 일본으로 더 많이 수탈해가기 위해서였다.
일제가 대만을 할양받기는 했지만, 점령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이 타이베이에서 타이난까지 진군하는 데 4개월이 걸렸을 만큼 대만의 저항은 격렬했다. 점령 후에도 소요가 빈발해 일본은 1억 원을 받고 대만을 프랑스에 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일본 부역자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다. 대만 소설가 정칭원은 ‘흰 코 너구리’에서 그 시절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당시 대만 사람들은 일본인을 다리 넷 달린 개라고 그랬는데, 일본인을 위해 일하는 주구(走狗)는 그만도 못하다는 의미에서 다리 셋 달린 놈이라고 했지.”
대만의 대일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일본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민당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인이 비우고 간 고급관료, 사업가 자리를 죄다 국민당이 채웠다. 대만인은 여전히 ‘2등 국민’일 뿐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대동아전쟁’ 때문에 대만의 물자를 수탈한 것처럼, 국민당은 대륙의 국공내전 때문에 대만의 물자를 착취했다.
그러나 양자의 역량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본은 행정·경영력을 발휘해 대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해가며 수탈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수도꼭지를 아무 데나 달면 바로 수돗물이 콸콸 나온다고 생각할 만큼 근대화에 어두웠으니 행정·경영 역량은 기대할 게 없었다. 국민당은 기업 경영을 제대로 못해 자금이 모자라자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해 자금을 메웠다. 대출 때문에 통화량이 부족해지자 통화 발행량을 늘렸고 이에 물가가 폭등했다. 1947년 쌀·밀·면포 가격은 전년 대비 4~5배, 설탕 가격은 21배로 폭등했다.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
국민당이 온 후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대만에는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이 돌았다. 개는 사납기는 해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절도가 있다. 돼지는 더럽고 먹는 것만 밝힐 뿐 일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돼지는 개보다 더 사납고 흉악한 멧돼지였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 직원이 밀수담배 판매 단속이라는 명분하에 담배를 팔던 노점상 할머니를 총으로 구타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급기야 시민 한 명이 사망한다. 그간 쌓여온 대만의 울분이 이를 계기로 폭발했다. 다음날 1만 시민이 경비대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위는 대만 전역으로 확대됐고, 지역 자치와 개인의 자유 보장, 민생 안정, 사법제도 개혁 등 전방위적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협상으로 시간을 끄는 한편 대만에 추가 병력을 파견해 가혹하게 시위를 진압한다. 훗날 대만 정부 공식 발표로만 2만8000여 명이 사망했고, 1960년 호적조사 때는 실종자가 12만 명이 넘은 대참사였다. 대만의 현대사는 이처럼 피로 얼룩진 ‘2·28 사건’으로 출발했다. 정칭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후 초기 대만인들은 중국을 ‘조국’이라 불렀어요. 중국인은 대만인을 ‘동포’라고 했지요. 그런데 ‘조국’의 사람이 ‘동포’를 잔인하게 살해한 2·28 사건이 벌어지고 ‘백색공포’의 통치시대가 전개된 겁니다.”
1989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비정성시(悲情城市)’는 이 시대의 아픔을 다룬다. 주인공인 문청은 귀머거리에 벙어리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시대라는 은유일까. 문청은 감옥에서 만난 친구의 유언 쪽지를 유가족에게 전한다. ‘태어나며 조국을 이별했고, 죽어서 조국에 갑니다(生離祖國, 死歸祖國).’ 조국이란 뭔가. 정 붙이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대만인들은 그런 조국을 태어나자마자 박탈당했고, 죽어서야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문청의 아내는 시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는 도망가려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 그리고 곧 엔딩 자막이 뜬다. ‘1949년 12월, 대륙은 공산화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해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외지인인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쳐왔지만, 원래의 주인인 대만인은 정작 도망갈 곳이 없었다.
▲가오슝 보얼 예술특구에서 만난 ‘오토바이를 탄 관우’. 전통과 현대를 유머러스하게 조화시킨 대만의 오늘을 보여준다.
덩리쥔, 장후이메이의 수난
대만에서 장제스(蔣介石)는 황제와도 같았다.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계엄령을 유지하며 종신 총통의 권좌를 지켰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사망하자 대만 정부는 제왕이 승하했을 때나 쓰는 말인 ‘붕조(崩殂)’란 표현으로 서거 성명을 발표했다. 38년간 계엄령(1949~1987)이 유지됐고, 타이베이 천도(遷都) 37년 만에 비로소 야당이 생긴 대만을 당시 한국은 ‘자유중국(自由中國)’이라고 불렀다. 한데 자유중국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후계자인 장징궈(蔣經國, 장제스의 장남)와 리덩후이(李登輝)는 시대의 요구를 아는 지도자들이었다. 대만은 비교적 순탄하게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대만의 아들’을 자처한 민주진보당 천수이볜(陳水扁)은 2000년 대만인 스스로 뽑은 최초의 대만 지도자가 된다.
영화 ‘쉬즈더원’에서 베이징 남자 진분은 대만 여자와 맞선을 본다. 여자가 말한다. “우리 가족도 원래 베이징에 살았어요. 그런데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할 때, 할아버지가 대만으로 도망치셨죠.” 진분은 재빨리 끼어든다. “잠깐만요. 우리는 그걸 ‘점령’이 아니라 ‘해방’이라 부릅니다.”
양자의 관점이 이처럼 다르니 말썽이 안 생길 수 없다. 농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예능을 다큐로 받는다’고들 하는데, 한없이 가벼운 예능도 양안 사이에서는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덩리쥔(鄧麗君)은 대만이 배출한 세기의 가수다. 세계 어디에서든 차이나타운이 있고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덩리쥔의 노래를 한 번쯤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금지됐다. 중국은 그의 노래를 ‘대중을 현혹시켜 나라를 망치는 노래(靡靡之音)’로 간주했다.
덩리쥔은 국민당 군인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군 위문공연을 열심히 다녀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공공연히 국민당의 처지에 섰다. “제가 중국 대륙에서 노래하는 날은 (대만의 국가이념인) 우리의 삼민주의가 중국 대륙에서 실행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이야 어쨌건 중국인들은 덩리쥔의 노래에 사로잡혀, 낮에는 덩샤오핑의 교시를 듣더라도 밤에는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다(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
장후이메이(張惠妹)는 ‘아시아의 여신(亞洲天后)’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걸출한 가수다. 그러나 그녀는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 때 대만 국가를 불렀다가 중국 활동을 금지당했고, 코카콜라와의 광고 계약도 취소됐다. 2004년에야 다시 중국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국제무대나 공식석상에서 대만 국기나 국가를 사용하는 것을 반국가활동으로 간주한다.
▲금이 고갈된 후 금광시대를 보여주는 관광마을로 변한 진과스(金瓜石)
▲강남 스타일’을 표방한 타이베이의 옷가게, 타이베이 명물 야시장에서 만난 상인
‘Chinese ≠ Taiwanese’
대만은 면적 3만6193㎢로 벨기에(약 3만㎢)보다 크고, 2014년 기준 명목 GDP(국내총생산) 5300억 달러로 벨기에와 거의 비슷하다. 인구는 2300만 명으로 벨기에(1100만 명)보다 훨씬 많고 호주와 엇비슷하다. 웬만큼 넓은 영토, 강한 경제력, 많은 인구를 갖췄지만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닉슨은 1972년 “7억5000만 명을 배제하고는 세계평화를 이룩하기 어렵다”며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대만을 퇴출시켰다. 대만은 반공 자본주의 정권, 빠른 경제성장으로 자유 진영의 ‘모범생’으로 통했지만, 미국은 덩치 큰 중국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대만은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대만이 겪은 수난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국제기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불이익을 가져온다. 일례로 세계기상기구(WMO)를 살펴보자. 태풍(颱風)이란 말이 ‘대만의 바람’이라는 뜻에서 나온 데서 보듯, 대만은 태풍이 빈번히 몰아닥치며 피해도 매우 크다. 주변국들과의 원활한 기상정보 교류가 절실한 대만은 WMO의 창설 회원국이지만, 유엔 축출과 함께 WMO에서도 제명됐다. 현재도 재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2003년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외국 친구를 여럿 사귀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경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때라 중국인은 보기 힘들었고 대만인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스스로를 중국인(Chinese)이 아니라 대만인(Taiwanese)으로 일컬었다. 그들이 중국인에 대해 가진 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이기적이야(Chinese are selfish).”
당시는 중국인들을 만난 적이 없던 터라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훗날 직접 경험해보고 알았다. 중국인은 공공질서와 에티켓 관념이 희박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조심하지 않아 매우 이기적으로 보인다. 당시 대만 친구들은 선진 경제, 우아한 사회, 고상한 문화를 누리고 있어 자신들이 천박하고 이기적인 중국인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나 대만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만은 매년 ‘올해의 한 글자(台灣年度代表字)’를 선정한다. 이 글자들의 변천사를 보면 대만의 고충과 민심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2008년은 ‘어지러울 난(亂)’의 해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경제가 큰 타격을 입자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만 경제도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열며 세계를 삼킬 듯한 대륙굴기의 기세를 보여줬다. 더욱이 중국은 대만 독립론을 주장하는 민진당을 곱게 보지 않아 경제제재를 취했고, 이에 대만 경제는 이중고를 겪었다. 양안관계의 위기와 독립 찬반론의 치열한 대립은 큰 혼란을 일으켰다. 대만 국민은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를 총통으로 뽑아 일단 양안관계를 안정시키도록 했다.
양안관계의 회복은 바로 효험을 보여 대만은 2010년 경제성장률 10.8%, 2011년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했다. 그러나 민생은 오히려 악화됐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3%가 소득불평등이 심각하다(2009년)고, 80.5%가 빈부갈등이 심각하다(2010년)고 답했다. 2009년엔 불안한 현실을 지켜봤지만(盼, 바랄 분), 2010년 사회 분위기는 냉담했다(淡, 싱거울 담). 2011년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讚, 칭찬할 찬), 2012년 다시 걱정에 휩싸였다(憂, 근심할 우). 임금은 낮아지는데 물가와 부동산은 올라 양극화는 심해져만 갔다.
換! 차이잉원 당선의 숨은 뜻
2013년은 ‘가짜 가(假)’였다. 가짜 식용유 파동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기는 대만인들을 공분케 했다. 중국요리는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데 기름에 문제가 있다면 뭘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는가. 대만인은 중국의 경제와 국제적 위상이 아무리 막강해도, 문화 수준과 윤리의식만큼은 대만이 중국보다 더 낫다는 자부심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에 빠진 것이다.
가짜 식용유 이슈는 곧바로 식품안전, 환경오염 문제를 거쳐 사회 기강과 윤리 문제로까지 파급됐다. 경제발전을 내세워 재집권에 성공한 국민당은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 병들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백년부패정당 국민당은 대만을 1949년으로 되돌리고 있다.” “마잉주는 장징궈와 리콴유의 능력도, 쑹추위의 부지런함도, 리덩후이의 민주헌정에 대한 신념도 없다.”
2014년은 ‘검을 흑(黑)’이었다. 대만은 ‘시커먼 마음과 가짜 상품, 검은 돈 등 모든 것이 다 암담하다(黑心啊,黑心商品啊,黑錢啊。 什麼都黑啊!)’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가장 암담한 순간에 변화의 희망이 생기는 법이다. 대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변화를 원했다.
2014년 11월 29일, 타이베이 여행의 첫날이라 수시로 숙소를 들락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런데 숙소 여주인은 하루 종일 TV로 지방선거 개표결과만 지켜보고 있었다. 국민당이 꽤나 강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민진당이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청색 대신 녹색이 대만을 덮었다. 전통적으로 국민당 강세인 북부에서도 아주 보수적인 일부 지역 빼고는 다 야당의 승리였다. 전통적으로 야당색이 강한 남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만 사람들이 정말 화났군요.”
“아니, 우리는 정말 아주아주 화난 거지.”
“천수이볜 다음에 국민당의 마잉주가 당선돼서 국민당이 여전히 강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거죠? 도대체 6년 동안 국민당은 뭘 한 건가요?”
“아주 나쁜 일들.”
다음 날 대만 친구 슈를 만났다. 그는 선거 전 페이스북에 이번 선거를 잘 치러야 한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고, 이번 결과에 흡족한 듯했다.
“놀랐어. 이번 선거 결과 보니 온통 녹색이더라.”
슈의 여자친구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그런데 넌 왜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니? 조심하라고.”
중국이라는 ‘돈맛’
국민당이 도대체 뭘 한 거냐는 질문에 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여주인은 국민당이 아주 나쁜 일을 했다고 말하고, 슈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한다. 종합해보면, 대만인들이 보기에 국민당은 좋은 일이라곤 아무것도 안하고, 나쁜 일들만 잔뜩 한 것이다. 민심의 이반이 놀라웠다. 며칠 후, 마잉주는 선거 대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민당 대표에서 사퇴했다.
변화의 기운이 넘치는 대만답게 2015년의 대표문자는 ‘바꿀 환(換)’자였다. 2016년 1월 16일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의 총통 당선은 이때 이미 예고된 셈이다.
이제껏 대만을 지배한 세력은 모두 외부에서 왔고, 주된 관심사 역시 대만 자체가 아닌 외부에 있었다. 대만은 언제나 무역기지나 중국 진출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다. 오랜 진통 끝에 대만은 드디어 스스로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게 됐다.
그러나 마음대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까. 중국과 대만의 격차는 너무도 현격하며, 중국은 대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중국은 대만에 무역흑자를 양보한 대신, 대만의 대중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중국이라는 ‘돈맛’을 보고나면 대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계산이다.
중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애교 있는 여자가 최고(撒嬌女人最好命)’에서는 상하이 여자와 대만 여자가 중국 남자를 놓고 사랑전쟁을 벌인다. 대만 여자는 매우 간교하고 위선적인 내숭덩어리이고 상하이 여자는 매우 진실한 사람인데, 결국 상하이 여자가 고난을 딛고 승리한다. 중국이 대만에 꼭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나한테는 안 되거든.”
쯔위 사건에서 보듯 양안관계는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사소한 일로 순식간에 큰 긴장을 낳기도 한다. 양안관계는 평온해 보이다가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토네이도를 닮았다.
중국과 다른 일본과 닮은
외지인의 섬 대만
고구마를 닮은 지형의 대만 섬은 벨기에와 비슷한 면적에 호주만큼의 인구가 산다. 지진이 잦지만 온천이 많고, 식생이 풍부해 다양한 작물이 자란다. 한국처럼 일제의 지배를 당했지만, 일본에 대한 감정은 그리 나쁘지 않아 대만 곳곳에서 일본 문화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 랜드마크인 ‘타이베이 101’ 빌딩이 우뚝 솟아 있다
▲가오슝 롄츠탄 공원의 용호탑. 용의 입으로 들어가서 호랑이 입으로 나오면 ‘악운이 행운으로 변한다’는 가오슝의 명소다
▲가오슝 롄츠탄 공원에 있는 북극현천상제상(像). 복을 비는 신상이다.
▲대만 북부의 대표적 관광지 예류지질공원.
풍화작용으로 독특한 모양을 갖게 된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타이베이의 국립국부기념관. 쑨원을 기념하는 곳이다.
▲국립국부기념관에서 만난 대만 어린이들.
▲영화 ‘비정성시’에서 나온 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주펀(九麼) 수치루.
◆04월 호 허난성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豫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중국의 모든 것은 허난성에서 시작됐다. 허난의 화하족은 한족의 뿌리다. 중원사상, 음양오행론도 이 땅에서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 허난성은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벌여야 할 정도로 같은 중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 허난성의 확장판이 중국이란 것을, 그들은 모르는 걸까
▲송·금의 황궁터이던 곳에 세워진 룽팅공원. 수영하지 말라는 팻말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하는 중국인들이 있다.
대륙의 교차로, 정저우 기차역을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을 때 한 아가씨가 다가왔다. 손에 든 전단을 흘끗 보니 미용실 광고 전단이었다. 중국에 ‘삐끼’가 많기는 해도, 필요 없다고 하면 대개 더는 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반 블록이나 계속 따라오며 헤어컷을 하라며 졸라댔다. “한번 와서 상담 받아보세요. 헤어스타일이 달라지면 기분이 달라지고, 기분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져요.”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하는 일(利國利民)’이라는 대의명분까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연신 사양하자 아가씨는 말했다. “멋진 오빠, 저기부터 여기까지 날 데려와 놓고 필요 없다고만 하기예요?”
아니, 누가 따라오라 했나? 그래도 아가씨가 귀엽게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있게 말하자 일순 마음이 약해져 ‘까짓것 헤어컷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차 시간이 빠듯해 끝내 아가씨를 돌려보냈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허난(河南)성 사람들의 분위기를 느꼈다.
‘화려한 여름(華夏)’의 민족
허난성의 약칭은 ‘편안할 예(豫)’ 자다. 사람(子)이 코끼리(象)를 끌고 가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황허의 남쪽인 허난성은 코끼리가 살 만큼 풍요로웠으니 사람 살기에도 편했으리라. 고대에 기후가 변하기 전까지 이 지역의 기후는 오늘날 동남아와 유사한 열대·아열대성이었다. 드넓은 평야지대엔 온갖 기화요초가 자라고 코끼리, 거북 등 다양한 동물이 살았다. 그 위에 거대한 젖줄, 황허가 흐른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 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마다 기름진 토양이 실려와 풍년을 맞은 것처럼, 진흙을 날라오는 황허 덕분에 허난성은 써도 써도 지력이 고갈되지 않는 화수분 같은 땅이었다.
코끼리가 뛰놀던 시절의 허난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 ‘산해경(山海經)’ 속의 전설 같은 땅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맛 좋은 콩, 벼, 기장, 피 등이 있고, 온갖 곡식이 절로 자라며 겨울과 여름에도 씨를 뿌린다. 난(鸞)새가 절로 노래 부르고, 봉(鳳)이 절로 춤춘다. 약초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며, 온갖 초목이 모여 자란다. 여기는 온갖 짐승이 서로 무리 지어 살고, 풀들이 겨울과 여름에도 죽지 않는다.”
이 땅에서 중국의 모든 것이 시작됐다. 대제국 중국의 근원인 중원(中原)이 바로 허난성이다. “중국의 1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 5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시안에 가야 한다. 그러나 5000년 역사를 보려면 허난에 가야 한다.”
황허는 “낙양에 천 가지 꽃을 피웠고, 개봉(옛 양원)의 만경 땅을 기름지게 했다(滋洛陽千種花,潤梁園萬頃田).” 그러나 이 거대한 ‘용’은 평소에는 중원을 풍요롭게 하다가도 한번 화가 나면 무지막지한 시련을 내렸다. 치수(治水)는 황허 유역 사람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전설 속 성군이며 하나라 시조인 우 임금이다. 우(禹)는 몸이 산처럼 우람해 한 걸음에 2리 반(1km)을 가고, 큰 손으로 천 석(180t)의 돌을 들었다. 그런 능력자에게도 치수는 버거운 숙제였다.
우는 결혼한 지 나흘 만에 집을 떠나 천하 방방곡곡으로 ‘출장’을 다녔고, 13년간 집 앞을 세 번 지나치면서 단 한 번도 들를 수 없었다. 이 신화는 치수 사업이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 광범위한 지역을 관리해야 하는 대역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련을 이겨내려는 분투 속에 역사는 발전한다. 중국은 초기 단계부터 치수 사업 때문에 대규모 인력동원 체제가 필요했는데, 이는 국가제도의 정비로 이어졌다. 큰 것을 숭상하던 이들은 만물이 번성하는 여름을 아름답게 여겼기에, 스스로를 ‘화려한 여름의 민족’인 화하족(華夏族)이라 불렀고, 나라 이름 역시 하(夏)라고 지었다. 훗날 통일제국 한(漢) 이후 화하족을 중심으로 90여 개 민족이 점차 통합해 한족(漢族)이 탄생했다. 즉, 오늘날 중국인의 뿌리가 바로 허난성의 화하족이다.
‘中州’이자 ‘神州’
화하족은 황하의 풍족함, 많은 인구, 수준 높은 과학기술과 문화, 일찍이 정비된 국가제도 등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주변에 자신과 견줄 만한 세력이 없어지자 이들은 자연스럽게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하면서 이를 매우 그럴듯하게 철학적, 과학적으로 포장했다. ‘주례(周禮)’는 말한다.
“하지에 그림자가 1척 5촌인 곳이 천하의 중심이다. 천지가 화합하는 곳, 사시가 교차하는 곳, 풍우가 만나는 곳, 음양이 조화하는 곳이다. 그러하므로 만물이 풍성하고 편안하여 여기에 왕국을 세운다.”
따라서 화하족의 땅은 천하의 중심이며 근원이 되는 ‘중원(中原)’이고, 여기 세워진 국가는 ‘중국(中國)’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원은 천지만물의 조화가 아름답게 이뤄진 땅이고, 변방은 음양의 조화가 깨져 있어 상서롭지 못한 땅이다. 중앙일수록 고귀하므로 사방의 만이융적(蠻夷戎狄)은 천하디천한 오랑캐다. 순자도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했다. “사방에서 두루 가깝게 하고자 한다면 중앙만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왕자는 반드시 천하의 한가운데 거처하니, 이것이 예다.” 중원에 살면 그 자체로 예를 지키는 것이고, 변방에 살면 그 자체로 예를 어기는 것이다.
매우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기네 땅에 대한 애착이 큰 탓이리라. 화하족은 황허의 물을 마시고, 황토 진흙으로 집을 지으며,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곡물을 먹고살았다. 모든 것을 길러내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흙에 대한 사랑은 중국인의 과학적 인식론인 음양오행론에 반영됐다. 나무·불·흙·쇠·물(木火土金水) 등 5개 요소가 상생상극하며 천지의 조화가 빚어진다는 오행론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흙이다. 흙은 물이나 불만큼 개성적이지 않고 다소 밋밋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이들을 다 받아들인다. 이처럼 흙은 다른 이들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자기 본연의 성질은 잃지 않는 군자의 덕(和而不同)을 지닌다. 중국인은 토덕(土德)을 구현한 황제(黃帝)를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 부른다.
우 임금은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중에서 예주(豫州)를 중심으로 삼았다. 예주는 곧 중주(中州)로도, 신주(神州)로도 불렸다. 중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이후로 허난은 중원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삼국지의 무대
▲중악(中岳)으로 숭상받는 쑹산
▲향산사(香山寺)에서 바라본 뤄양.
중국 8대 고도(古都) 중 4개가 허난에 있다. 베이징, 시안, 항저우, 난징 등 쟁쟁한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허난의 4대 고도는 9개 왕조의 수도 뤄양(洛陽),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 5개 왕조의 수도였으며 허난의 성도인 정저우(鄭州), 7개 왕조의 수도 안양(安陽)이다. 천하의 중심인 중원은 고도의 상징성을 가졌다. 중국의 오악(五岳) 중 허난의 쑹산(嵩山)은 동악 타이산(泰山)의 수려함도, 서악 화산의 웅장함도 없다. 그러나 중원인들은 쑹산을 중악으로 우러러봤다. 중원의 높은 산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하늘에 쉽게 닿을 것 아닌가. 그래서 쑹산에 큰 절을 지었다. 천하 무술의 근원으로 더욱 유명한 천년고찰 소림사(少林寺)다.
대륙 한복판에 탁 트인 대평원, 동서남북 어디로든 사통팔달 열린 땅. 풍부한 자원과 많은 인구, 게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상징성까지. 중원을 얻는 자가 곧 천하를 얻었다. 유방이 항우에게 승기를 잡은 성고전투,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1만 농민군으로 신(新)나라 43만 정규군을 격파한 곤양대전 등 굵직굵직한 대전들이 중원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삼국지’ 독자에게 허난성은 매우 친숙한 장소다. 원소·조조를 중심으로 한 18로(路) 제후 연합군은 후한 말 ‘최강최흉’의 군벌 동탁을 타도하러 허난으로 진격했고, 뤄양의 관문인 호뢰관에서 천하무적 여포가 유비·관우·장비 삼형제와 겨뤘다. 중원의 샛별 조조와 허베이의 패자 원소가 맞붙은 관도대전은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다.
애초에 조조가 허난의 쉬창(許昌)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도 중원을 기반으로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군웅할거 시대에 중원은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조조는 그 누구보다 많은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북쪽의 원소와 오환·선비족, 동쪽의 유비와 여포, 남쪽의 원술과 유표, 서쪽의 장로와 마초 등 주변의 강적을 모두 평정하자 조조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됐다.
하·상·주부터 송까지 중원은 명실상부한 천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북방 유목민족이 득세하고 강남이 개발되며 중국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원(元) 이후 동북부 베이징은 정치의 중심, 동남부 강남은 경제의 중심이 됐다.
중원의 영광이 사라지고 오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명판관 포청천이 활약하던 북송의 화려한 수도 카이펑은 2700년 동안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118번 진흙탕을 뒤집어썼고, 궁성까지 진흙 속에 파묻힌 것이 일곱 차례나 된다. 전쟁, 수재, 가뭄, 정부의 수탈, 기근…이 모든 일이 ‘종합선물세트’로 터진 사건이 있다. 바로 1942년의 대기근이다.
“人肉 먹은 자도 굶어 죽었다”
중일전쟁에서 밀리던 장제스는 1938년 허난 화위안커우(花園口)의 제방을 비밀리에 폭파했다. 물로 병사를 대신한다는 작전이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도 못했고 허난 주민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89만 명이 사망했고, 80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1250만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허난의 비옥한 농토 8000㎢가 황폐화하며 더욱 큰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수재에 가뭄, 노동력 부족이 겹쳤다. 방치된 땅에서 엄청난 메뚜기떼가 날아들어 간신히 키운 작물을 먹어치웠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대참극은 피했을 것이다. 국민당의 부정부패는 상황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국민당은 허난성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수탈했다. 허난성은 징병수 전국 1위(260만 명), 곡물 징수 전국 2위였다.
곡물 징수 1위인 쓰촨은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후방인 데다 날씨도 좋아 농사에 문제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허난이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부사령관 탕언보의 착취가 가장 심해서 허난인들은 ‘수해, 가뭄, 메뚜기, 탕언보’를 4대 해악으로 꼽았다. “적군에게 불타 죽는다 해도 탕언보 부대가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허난이 현지 사정을 탄원하자 파견 된 국민당 관료는 현지조사를 하고도 중앙의 뜻을 전했다. “허난성에 재난이 닥친 것은 사실이지만, 군용 식량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어떤 관료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주민이 죽더라도 땅은 여전히 중국 땅이지만 군대가 굶어 죽으면 일본군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대기근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전 밀과 좁쌀은 한 근에 0.6위안이었지만, 1943년 봄에는 300위안으로 뛰었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내다 팔고도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은 배추를 팔 듯 자식을 팔았다.” 너도나도 사람을 팔자 사람값이 옷이나 가구 값만도 못했다. 나중에는 팔려 해도 팔리지 않자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떻게든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그냥 버리고 갔다. 허난에서 희망을 잃은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기러기 똥을 먹고, 흙을 먹고, 가죽을 끓여 먹고, 사람 고기를 먹은 자들도 결국 모두 굶어 죽었다.” 허난 대기근은 일본군이 점령한 40여 군데 현을 제외한 국민당 통치지역 통계로만 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대참사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허난성 정부는 우수한 ‘곡물 및 현물 징수’ 실적으로 중앙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이때 헐값에 땅과 사람을 사들여 더 부자가 됐다.
‘허난상보’ 관궈펑 기자는 1974년 태어난 허난 토박이인데도 대기근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다가, 2009년 말 홍콩 인터넷에 올라온 당시의 기록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42 대기근’을 썼다. 국민당의 큰 오점이라 선전에 활용하기 좋았을 텐데, 왜 공산당은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자연재해로 시작했지만 정부의 실책으로 확대된 인재(人災)성 대기근이라는 점에서 공산당 최대 실책인 대약진운동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인간이 역사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헤겔의 독설이 씁쓸하게 떠오른다.
지구인 60명 중 1명
▲룽먼산 룽먼석굴.
나는 숱하게 중국을 찾아가 길게도, 짧게도 머물며 이 나라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국이 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더럽고 시끄럽고 황당한 중국’은 한 달만 지내도 매우 피곤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는 수준 낮은 중국인들은 중국에 정이 뚝 떨어지게 만든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고막이 찢어질 듯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사람을 마구 밀쳐대며 버스를 탄다.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버스의 2인용 좌석에 앉아 있는데 한 중국인이 옆에 앉았다. 그가 버스 안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게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바지에 음료수를 엎질렀다. 그러나 그는 내게 사과하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자리만 닦았다. 그때는 정말 ‘화났다’거나 ‘짜증났다’는 점잖은 말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빡쳤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저토록 웅장한 만리장성을 건설하고 정교한 보물을 만들었는지 의아했다.
그러다가 기차여행을 했다. 옆자리에 꾀죄죄한 초로의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는 자면서 코를 엄청 골아댔다. 한밤중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코 고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저리치던 중국인과 수준 높은 중국 문화가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냄새가 나는 것은 씻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코를 시끄럽게 고는 것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도외시하고 자기만 챙기는 것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겹기 때문이다. 저 많은 인민이 여유를 박탈당하고 헐값에 온갖 고난을 감수하기에 비로소 중국의 놀라운 경제발전,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발전이 놀라운가. 그 화려함을 떠받치는 수많은 중국 민초를, 그들의 험난한 삶을 보면 세상만사엔 공짜가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중국의 성장을 일궈낸 농민공들은 말한다. “우리들은 닭보다 먼저 일어나고, 고양이보다 늦게 잔다. 당나귀보다 힘들게 일하고, 돼지보다 나쁜 음식을 먹는다.”
가장 많은 농민공을 배출한 곳이 바로 허난성이다. 허난은 중원답게 인구가 많은 인구대성(人口大省)이다. 2013년 기준 허난 인구는 9410만 명으로 중국 내 3위다. 1위 광둥성(1억430만 명)과 2위 산둥성(1억 명)은 모두 개혁·개방 정책의 수혜로 인구가 유입된 연안경제권이고, 허난은 그다지 수혜를 보지 못해 인구가 유출된 내륙 지역임에도 근소한 차이로 3위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허난이 단연 1위였다. 중국인 13명 중 1명, 지구인 60명 중 1명은 허난인이다.
이처럼 인구가 많으니 국내총생산(GDP)도 만만치 않다. 2014년 기준 허난의 명목 GDP는 5687억 달러로 중국 내 5위이며 스웨덴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스웨덴 인구는 1000만 명이 채 안 돼 1인당 GDP가 5만 달러인 반면, 허난은 5000달러에 불과하다. 중국 내 31개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 중 27위이고, 중동의 요르단 수준이다.
가진 것이 몸뚱이뿐인 많은 허난인은 외지에 나가 일자리를 찾았다. 가난이 죄라고, 허난인들은 중국 안의 이주노동자 신세였다. 더욱이 일을 시켜놓고 임금은 주지 않고 도망가는 ‘먹튀’ 사업가들이 생겨나자 허난 농민공들은 뼈 빠지게 일해놓고도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들이 생계형 범죄자가 되거나 거지가 되자 사방에서 성토가 쏟아졌다. “베이징과 톈진 거지는 대부분 허난 사람이다” “불과 도둑과 허난 사람은 막아라”….
▲옛 뤄양의 모습을 잘 보전한 뤄양노성(老珹)
▲베이징부터 후베이 우한까지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복판에 허난이 있음을 보여주는 정저우 2·7광장
▲북송 시대 수도 카이펑의 운하. 이 운하를 통해 강남의 곡식을 실어왔다.
좀도둑, 범죄자, 요괴
허난인은 어느새 좀도둑, 범죄자, 요괴 취급을 받게 됐다. ‘허난인은 이력서를 제출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버젓이 쓴 구인광고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처럼 이미지가 나빠지자 허난은 외자 유치와 경제개발에 곤란을 겪었다. 2001년 허난성 정부는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라며 반요괴화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런 노력을 비웃듯 2005년 3월 광둥성 선전시의 한 공안국은 “허난 출신 사기꾼들을 때려잡자(堅決打擊河南籍敲詐勒索團)!”는 현수막을 걸었다. 참다못한 허난 변호사 2명은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특정 지역 출신을 범죄자로 취급한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신중국 건설 후 최초의 지역차별 소송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법원의 중재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선전시 공안국이 원고에게 사과하는 대신, 원고가 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 그런데 허난인 전체에 대한 공개 사과가 아니라 원고 2명에 한정된 사적 사과였고, 선전 공안국의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원고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유리했지만, 우리는 밝힐 수 없는 여러 곳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법원은 공안국의 불법적 지역차별 행위에 대한 재판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또 일어날 수도 있는 다른 지역차별 행위가 처벌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나쁜 선례만 남겼다.”
인민의 인권보다 국가기관의 체면을 중요시한 결과다. 그리고 허난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1년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실연 33일(失戀33天)’에서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진상 고객으로 허난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매우 까다롭고 골은 비었다. 겉멋만 잔뜩 들어 희한한 것, 신기한 것, 명품만 찾는 꼴불견이다. 새벽 5시에 주인공을 불러내 어이없는 요구를 늘어놓는다.
많은 중국인은 허난인이 음흉하고 가짜를 잘 만든다고 매도한다. 실제로 그러한가.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리페이푸(李佩甫)의 ‘양의 문(羊的門)’은 허난의 모습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한 촌장은 마을 전체가 가짜 담배를 만들도록 지휘했는데, 단속 나온 현 서기에게 당당히 궤변을 늘어놓는다. “담배는 사람을 해치는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담배는 진짜 해가 되는 물건이고, 가짜 담배는 가짜 해가 되는 물건이 아닐까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다른 성은 가짜를 안 만드는가. 다른 지역은 얼마나 깨끗한가. 소설 말미에 나오듯, 개혁·개방 초기 중국의 사정은 시 서기의 항변처럼 전국이 피장파장이었다. “시장경제는 누구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라고! 지금 상황은 전국이 다 똑같네. 문제없는 곳은 없어. 조사하면 할수록 더 큰 문제가 나올 거네. 가만히 접어두면 아무 문제가 안 되지만, 들춰내기 시작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네.”
동족 혐오, 희생양 만들기
결국 허난성이 가짜의 대명사, 허난인이 추한 중국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희생양 만들기와 동족 혐오에 가깝다. 피차일반이면서 자기는 깨끗하고 저놈만 더럽다고 욕하는 것이다. 허난인은 추악한 중국인의 대표라기보다, 오히려 전체 중국인의 대표다. 교육학자 양둥핑은 말했다. “‘중국인’이라는 개념 또한 무척 광범위해 결코 베이징인이나 상하이인과 같은 범주에 담아낼 수 없다. 중국인의 총체적인 형상, 문화적 근간이 어디에 있냐에 대해 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북방의 농민이 될 것이다. 상하이인 혹은 베이징인이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북방의 농민, 그중에서도 허난성이야말로 중국의 참모습을 대변한다. 허난성은 중국의 축소판이며, 중국은 허난성의 확장판이다. 중국은 인구대국이고, 허난성은 인구대성이다. 전체 GDP는 많지만, 1인당 GDP가 적은 점도 같다. 2014년 중국의 명목 GDP는 10조 달러로 세계 2위지만, 1인당 GDP는 7589달러로 79위였다. 또한 중국이 급속히 산업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농업 비중이 높은 점도 허난성과 판박이다. 그래서 허난인은 지적한다. “중국인이 허난인을 대하는 시각은, 외국인이 중국인을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면이나 나쁜 면이나 허난은 중국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난과 낙후, 외성인(外省人)들의 따가운 눈총까지. 허난의 수난은 눈물겹다. 그러나 이곳은 누가 뭐래도 중원이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들의 자존심은 굳건하다. 타 지역 은행의 이름은 보통 해당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허난성의 은행은 당당하게도 ‘중원은행(中原銀行)’이다. 타 지역이 오랜 역사를 자랑할 때, 허난은 조용히 은허 갑골문과 정주상성(鄭州商城)을 보여준다. 산시성이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얻어온 불경을 보관한 대안사를 자랑할 때, 허난은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를 보여준다.
산둥성이 인류의 스승 공자를 자랑할 때, 허난은 말한다. “주공이 예악(禮樂)을 정하다. 공자가 주나라에 와서 예를 묻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복원해 천하가 평화를 되찾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주나라 예법을 정한 이는 공자가 평생 흠모한 주공이었다. ‘노나라 촌놈’인 공자는 주나라 유학으로 예악을 배웠고, 당시 왕립 도서관장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노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비유하자면, 주공이 구약성서를 미리 써놓았기에 공자는 이를 기반으로 신약성서를 쓸 수 있었다. 결국 허난이 없었다면 공자도 없었다는 말이다.
상하이와 광둥성 등 연안 지역이 압도적인 경제력을 자랑할 때, 허난은 말한다. “초나라 왕이 구정(九鼎)에 대해 묻다.” 춘추전국시대의 패자 초장왕은 주나라의 왕손 만이 찾아왔을 때 말했다. “구정은 얼마나 큽니까. 그 정도는 우리 초나라 군대의 부러진 창날만 모아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구정은 당시 귀금속인 청동을 크고 정교하게 만든 기물로, 주나라 왕실의 상징이며 주의 경제력, 문화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신흥강국 초나라에는 주 왕실의 권위도, 구정도 별것 아니게 보였다. 왕손 만은 말한다. “천자의 권위란 덕에 있는 것이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자가 덕을 밝히면 정이 작더라도 그 무게는 무거우며, 난잡하고 어두우면 정이 비록 크다 해도 가벼운 것입니다.” 급속히 부국강병을 이룬 초나라는 졸부와 같다. 비록 껍데기는 따라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안에 담아야 할 정신은 채우지 못한다. 경제력, 군사력만으로는 넘지 못하는 것이 문화다.
중원의 자부심
연안 지역이 오늘날 경제를 뽐내지만, 옛 초나라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달은 차면 기운다. 흥하면 쇠한다. 핵심은 흥망성쇠의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꿋꿋이 전통을 지켜온 중원의 자부심이 읽힌다.
허난 정저우는 중원답게 교통의 중심지다. 남북으로 베이징과 광저우를 잇는 징광선(京廣線), 동서로 장쑤 렌윈강과 신장 우루무치를 잇는 룽하이선(隴海線)이 교차한다. 허난성 셰푸잔(謝伏瞻) 성장은 2015년 양회에서 ‘미(米)’자형 고속철 건설 구상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정저우에 방사형 고속철 네트워크를 건설해 중국 각지를 사통팔달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허난은 대륙의 허브로 재도약을 꿈꾼다. 늘 중국의 영광과 오욕을 함께해온 중원 허난이 어떤 내일을 맞게 될까.
河南 없으면 孔子 도 없다
‘중국의 축소판’ 허난성
중국의 오악(五岳) 중 허난성의 쑹산(嵩山)은 수려함도, 웅장함도 없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쑹산을 중악(中岳)으로 우러러보며 큰 절, 소림사(少林寺)를 지었다.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와 은허 갑골문도 허난이 가졌다.
공자를 가르친 땅도 허난이다. 비록 오늘날의 허난은 가난하지만, 흥망성쇠를 견디는‘문화’를 굳건하게 다졌다. 〈관련기사 474쪽〉
▲굴마다 절 한 채를 지어놓은 용문석굴(龍門石窟).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다.
▲포청천이 활약한 개봉부(開封府)에서 바라본 카이펑 시내.
▲룽팅(龍亭)공원에서 큰 팽이를 즐겁게 돌리는 할아버지.
▲중국 오악(五岳) 중 중앙의 자리를 지키는 쑹산(嵩山).
▲정저우 2·7광장과 2·7기념탑. 1923년 2월 7일에 일어난 철도노동자 봉기를 기념한다.
◀ 은허 갑골문. 거북의 등딱지로 점을 치고 결과를 기록한 것으로, 전설로만 전해지던 상나라가 실재했음을 입증해주는 유물. 정저우 허난성박물관에 있다.
▶ 카이펑박물관의 불상. 중국인들은 박물관에서도 불상에 돈을 쥐여주고 소원을 빈다.
▲야시장이 열려 인기가 높은 구러우(鼓樓廣)광장
◆5월 호 산시성
◇長安의 봄이여 秦의 영광이여
陕 - 중국을 세상에 알리다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장안의 화제’라 한다. 여기서 ‘장안’은 산시성 시안의 옛 이름이다. 산시성은 중국 초기 통일왕조 주, 진, 한, 당나라가 근거지로 삼은 땅이다. 당나라 때 시안은 외국의 인재도 흔쾌히 등용하며 개방과 자유로움의 정신을 구현했다. 오늘날 옛 영광을 다시 찾으려는 시안은 ‘산시 속도, 시안 효율’을 내세우며 달린다.
▲자은사 대안탑에서 내려다본 시안.
‘주·진·한·당(周秦漢唐)’
큰 글자 몇 개가 셴양(咸陽) 국제공항에서 시안(西安)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풍당당한 비석처럼 줄지어 서 있다. 셴양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은 곧 진(秦)의 수도 함양에서 당(唐)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중국 초기 통일왕조는 모두 이 땅을 근거로 삼았다. 중화의 인문학을 태동시킨 주나라,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 대통합을 통해 한족 문화를 만든 한나라, 세계로 열린 대제국 당나라. 마오쩌둥 역시 이 땅을 근거지 삼아 끝내 장제스를 물리치고 신중국을 세웠다. 산시성은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며 천하를 제패한 땅이다.
商周革命=人文革命
산시(陝西)성의 약칭은 ‘땅 이름 섬(陕, 번체는 陝)’자다. ‘陜’자는 ‘언덕과 언덕(阜/阝) 사이에 끼어(夾) 있는 골짜기가 좁다’는 뜻으로 ‘좁다/골짜기 협’으로 쓰기도 한다. 지도를 살펴보면 그 뜻대로 산시성이 골짜기 사이에 끼인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산시(陝西)는 허난성 산현(陕县)의 서쪽으로, 여기서부터 지형이 크게 달라진다. 허난성이 황토평원이라면 산시성은 황토고원이다. 산시의 동쪽으로는 진진대협곡(秦晉大峽谷), 남쪽으로는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 진령산맥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놓인 관중평원(關中平原)은 3만9000㎢(한국의 약 39%)의 면적에 황하 최대의 지류인 위수(渭水)가 흘러 농사가 잘된다.
유목민족인 북적(北狄)과 서융(西戎)으로부터는 중요 전략자원인 말을 얻을 수 있다. 동쪽의 함곡관만 막으면 산시는 철벽의 요새다. 약할 때는 굳게 방어하고 관중에서 착실히 힘을 키우다가, 강할 때는 불시에 밖으로 치고 나왔다. 산시에서 팽팽하게 압축된 공기는 함곡관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태풍이 되어 중원을 삼키고 대륙을 휩쓸었다. 주·진·한·당은 산시에서 일어나 천하를 호령했다. 18로 제후군에게 몰린 동탁이 재기한 곳도, 8개국 연합군을 피해 서태후가 달아난 곳도 산시다.
산시의 중원 공략사를 살펴보자. 중원의 상나라는 강한 국력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갖췄지만 시대의 한계 역시 컸다.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노예를 확보했고, 상제(上帝)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숱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그 결과 주위를 온통 적으로 만들었다. 주나라는 주변 세력을 규합하고 목야대전 한 판의 싸움으로 강대한 상나라를 물리친다.
주는 ‘덕이 있는 자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천명(天命) 사상을 내세우고 무력 지배보다는 덕치와 교화를 중요시했다. 상은 우연히 불에 갈라지는 흔적으로 길흉을 점치는 갑골점(甲骨占)을 애용했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하늘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주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주역(周易)을 썼고, “조상을 믿지 말고 스스로의 덕을 닦으라”는 노래를 시경에 남겼다. 이 같은 합리성, 인본주의, 덕치교화의 사상은 공자의 유가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이처럼 상주혁명(商周革命)은 단순한 왕조교체를 넘어선 인문혁명이었다.
秦, ‘근간’을 세우다
그러나 무왕·주공 등 사려 깊은 창립멤버가 세상을 뜨자, 못난 후손들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원정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중원이 약해지자 변방이 나래를 폈다. 산시·간수 일대의 융(戎)은 이름 그대로 ‘갑옷(甲)과 창(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사였다. 유왕 때 융족이 주의 수도 호경(오늘의 시안)을 함락해 주가 낙양으로 천도하자, 서주(西周) 시대가 끝나고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됐다. 동주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지방정권이 난립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으니, 당시를 그린 소설이 바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다.
융족이라고 다 같은 융족은 아니다. 주에 협력적이던 융족 일파는 목축 전문가로 인정받아 지역 정권인 진을 세웠다. 주가 망할 때 진의 지도자는 왕실을 호위한 공로로 진나라 최초의 제후인 진양공(秦襄公)으로 봉해져 융족으로부터 주의 서쪽을 지키는 울타리가 됐다. 일찍부터 찬란한 발전을 이룬 중원은 진을 오랑캐로 여겨 ‘진융(秦戎)’이라 불렀다.
그러나 진나라는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혁신할 수 있었고, 중원에서 잉여 취급받던 인재들을 재상으로 삼았다. 25명의 진나라 재상 중 외국 출신이 17명, 평민 출신이 9명이었다. 상앙의 변법개혁, 장의의 연횡책, 범저의 원교근공(遠交近攻)에 진시황의 웅대한 비전과 추진력이 더해져 전국칠웅 중 가장 낙후국이던 진은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진의 천하통일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황하 중류에 국한된 중국은 진부터 비로소 광활한 대륙 전역에 세력이 미쳤다. 엄청난 변화를 가혹하게 밀어붙인 탓에 진 자체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진이 창조한 질서는 중국 역대 왕조의 근간이 됐다. 사마천은 말한다. “배운 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에만 얽매여 진의 통치기간이 짧은 것만 보고 진을 조롱할 줄만 알았지 진지하게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도 않으니, 이야말로 귀로 음식을 먹으려는 격이다.”
잔인했지만 근면성실한 군주 진시황이 죽자마자 진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왕후장상에 씨가 있더냐”라고 외친 진승·오광의 뒤를 항우·유방이 이어 진은 멸망한다. 패권을 차지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고향인 강남과 가까운 팽성(장쑤성 쉬저우)을 근거지로 택했다. 신하 한생은 철벽 요새인 데다 관중평원에서 인력과 자원을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산시를 근거지로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항우는 “성공하더라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錦衣夜行)”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생은 사리분별을 못하는 항우를 “모자 쓴 원숭이”라고 비웃다가 끓는 물솥에 삶겨 죽었다.
“중원을 차지하라”
▲시안 성벽의 해자(垓字)는 강처럼 넓어 유람선이 다닌다
▲한나라 경제의 무덤에서 출토된 흙인형
촉(쓰촨)에 갇혀 있던 유방은 명장 한신을 기용해 항우의 세 명장을 격파하고 산시를 얻었다. 관중과 촉의 풍부한 물자 덕분에 유방은 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한을 건국할 수 있었다. 다만 유방도 수도를 정할 때 갈등을 겪었다. 신하들이 관중파와 낙양파로 갈렸다.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고 사방으로 탁 트인 중원은 수도로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논의를 최종 정리한 장량은 관중의 손을 들어줬다. “관중은 옥토가 천리에 펼쳐져 있고, 한 면만 막으면 동쪽으로 제후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안정되면 황하와 위수를 통해 도읍으로 천하의 물자를 공급하고, 제후들이 변란을 일으키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니 쉽사리 군수품을 댈 수 있습니다. 이를 금성천리(金城千里)요,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나라 초기 아직 황실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 지방 제후들의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장량의 혜안대로 관중의 중앙정부는 지방 반란을 수월하게 진압할 수 있었다. 최대, 최후의 반란인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한 후 한은 광활한 대륙을 통치하고 90여 민족을 융합해 한족을 탄생시키며 대제국의 위용을 뽐냈다.
그러나 흥망성쇠는 덧없이 흘러간다. 오래 나눠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오래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갈라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 400년 한실이 쇠퇴하고 중국사에서 가장 치열한 군웅할거의 역사가 펼쳐진다. 유비·조조·손권의 삼국이 정립했지만, 세 나라의 국력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중원을 차지한 조조가 단연 최대·최강의 세력이었고, 강동을 장악한 손권이 2등, 촉(쓰촨) 하나만 차지한 유비가 꼴찌였다. 가장 약한 세력으로 어떻게 가장 강한 세력을 꺾을 수 있을까. 제갈량의 타개책은 산시 공략이었다. 촉과 관중을 아우르면 다시 한 번 진한(秦漢)의 통일을 재현할 수 있다.
물량이 풍부한 위(魏)가 지구전으로 촉의 침공을 거듭 막아내자 제갈량은 아예 산시 남부의 오장원(五丈原)에서 농사를 지으며 주둔했다. 섬남(陝南) 지역을 실효지배하면서 틈만 생긴다면 바로 관중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중원을 차지한 후 천하를 통일한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그의 전략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촉의 승상으로서 나라와 대규모 원정군의 크고 작은 일까지 도맡아 처리하니 몸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큰 별은 오장원에서 스러졌다. “공명은 여섯 번이나 기산으로 나아갔으나(孔明六出祁山前)”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出師未捷身先死)” 제갈량은 산시성을 차지하려 애쓰다가 결국 산시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마염의 진이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5호 16국의 난세를 맞았고, 수(隋)가 천하를 재통일했지만 기반이 다져지기 전에 고구려 원정, 대운하, 궁전 건설 등 무리한 사업을 한꺼번에 벌이는 바람에 역시 곧 망했다. 한나라 이후 진정한 안정기를 확립한 것은 당(唐)나라였다.
大唐長安의 영광
시안은 사각형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둘레 14km에 달하는 성벽 위에선 매년 11월 시안 성벽 국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1993년부터 개최된 이 대회는 빼어난 유적을 십분 활용하는 문화상품이다. 마라톤이 힘든 일반인은 자전거로 성벽 위를 달린다.
한 초로의 미국인은 시안에 반해 영어교사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저 성벽을 보라고. 눈요기용 관광지일 뿐인 베이징의 자금성에 비하면, 시안은 전통이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야. 스케일도 더 크고.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도시야.” 시안 토박이 중국인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당나라 때의 장안성은 이보다 열 배는 더 컸답니다. 지금 성벽은 명나라 때 축소해 지은 것이에요.” 10배는 과장 아니냐고? 정확히 말하면 9.1배 컸다.
주·진·한·당 모두가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산시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로 꼽는 것은 당나라다. 시안 시내 곳곳에 ‘대당장안(大唐長安)’을 기리는 흔적들이 있다. 시안인은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으로 나들이 가고, 쇼핑하러 대당서시(大唐西市)에 가고, 아프면 대당의원(大唐醫院)을 찾는다.
중국의 중심이 동부로 옮겨간 후 시안은 서쪽 변방이 되어 이름에 ‘서(西)’자가 붙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는 중국의 중심을 넘어 세계의 중심인 장안이었다.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면 ‘장안의 화제’라고 할 만큼,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였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고구려를 치고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군기 빠진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 부르고, 고구려를 치다 실패한 당태종을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그러나 당태종 이세민은 ‘막장 군주’ 수양제와 전혀 다르다. 그는 고구려 침공 이외에는 전쟁에서 져본 적이 거의 없고, 중국의 오랜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열었다. 덕분에 국력이 신장된 당나라는 화려한 성당기상(盛唐氣象)을 자랑할 수 있었다.
당의 영광을 뒷받침한 것도 산시다. 산시는 진왕(秦王) 이세민의 근거지였고, 부병제(府兵制)의 핵심이었다. 60% 이상의 부병이 수도권 관중에 집중돼 관중 이외의 모든 병력으로도 관중을 당할 수 없었다. ‘관중의 힘으로 사방을 다스리는’ 전략이 천하를 안정시키자 “구주(九州)의 도로에는 도적이 없어 먼 길을 떠나는 데 길일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활력, 개방, 자유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묘인 건릉. 능으로 향하는 길에는 문무백관상(像)이 도열해 있다
명재상 위징, 적인걸 등의 인재가 나라를 튼튼히 하자 당나라의 국력은 세계 으뜸이 됐다. 당률(唐律)의 율령격식(律令格式)은 동아시아 법전의 전형이었고, 장안성은 동아시아 도성의 모범이었다. 신라의 서라벌,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의 나라·교토가 모두 장안성을 본받아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한 사각형 도성을 세웠다.
5호 16국은 중국사 최고의 혼란기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이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 활력의 시기이기도 했다. 당은 왕족·귀족들이 모두 한화(漢化)한 호인(胡人)들로서 외래 문화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 결과 당은 놀라운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보여줬다.
장안의 봄은 화려했다. “도성의 대로마다 꽃피는 시절, 만 마리 말과 천 대 수레가 모란을 보러”가니 “비단수레 구르는 소리, 마른천둥이 치는 듯” 했다. 꽃놀이하던 이들은 낙화를 즈려밟으며 페르시아 여자의 술집으로 향했다. “피부는 옥 같고 콧날은 송곳 같”은 호인이 “흰 뿌리 잘린 다북쑥이 회오리바람에 구르듯” 빙빙 도는 호등무(胡騰舞)를 췄고, “푸른 옥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 황금빛 곱슬머리에 붉은 구레나룻”의 호인이 피리를 불었다. 구당서(舊唐書)는 민관(民官)을 초월한 아랍문화 사랑을 이렇게 전한다. “개원 이래 태상(太常, 국가의전 집행부서)의 음악은 호곡(胡曲)을 숭상하고, 귀인의 밥상은 모두 호식(胡食)을 올리며, 사녀(士女)는 전부 호복(胡服)을 입는다.”
여성들도 외출할 때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즐겨 타는 등 자유롭고 활달한 기풍을 한껏 누렸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이때 나타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에서 인재도 쏟아져 나왔다. 당 태종과 위징은 정관지치를 열었고, 측천무후를 보필한 적인걸은 1만7000여 건의 장기 미결 과제를 1년 안에 해결했는데 단 한 명도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역사는 신화가 됐다. 현장법사가 불경을 얻어온 여행담은 중국 4대 기서인 ‘서유기’가 됐고,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가 됐다. “봄에는 봄놀이에 밤에는 잠자리에, 후궁에 미인이 3000이나 되지만, 3000명에 내릴 총애를 한 몸에 받았네.”
‘밥그릇 모임’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곳으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華淸池),
▲산시 역사박물관의 화려한 유물,
▲이 슬 람풍 광장무를 추는 시안 사람들.
개방적인 당나라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인재를 품에 안았다. 세계 70여 개 국과 교류하며 외국 상인이 중국에 장기간 머무르고 중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고, 외국인 유학생들도 과거로 채용했다. 당에는 3만 명의 유학생이 있었고, 당 말기 최치원 등 과거 급제한 신라 선비가 50여 명이었다. 신라의 의상, 일본의 엔닌 등 승려들도 당에서 불법을 닦았다. 고구려계 고선지 장군은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가 되어 서역 전선을 관할했고, 안사의 난을 일으킨 하동절도사 안록산은 이란계였다. 대당장안은 백만 인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대도시였다.
그러나 성장은 극에 달하면 쇠퇴한다. 장안의 봄은 성장의 한계 역시 명확하게 보여줬다. 관중평원은 비옥하긴 해도 중국 기준으로는 그리 넓지 않아 당나라 때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당 전반기인 고종 때부터 이미 황제들은 이따금 문무백관을 이끌고 허난성 낙양까지 행차해서 곡식을 얻어갔기에 ‘식량을 쫓아다니는 천자(逐糧天子)’란 말을 들었다. 결국 송나라가 개봉을 수도로 삼은 후, 장안은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되지 못했고, 서쪽의 대도시인 ‘시안(西安)’은 중심에서 멀어져갔다.
따라서 산시인들이 21세기에도 세계의 중심이었던 옛날을 그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나라의 영광이 민초에겐 얼마나 실질적으로 이익이었을까. 국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민초들은 큰 희생을 감수하고 열악한 삶을 견뎌야 했다.
산시인은 호방하다. “국수 면발이 허리띠만 하고 밀전병 하나가 웬만한 가마솥 뚜껑만 하며 찐빵은 큰 사발만 하고 사발은 세숫대야만 하다.” 그러나 그 호방함은 풍요와 여유가 아니라 열악함에서 나왔다. 산시의 음식에 얽힌 전설을 들어보자.
양러우파오모(羊肉泡馍)는 찢은 빵을 양고기 탕에 넣고 끓여 먹는 요리다. 일설에 따르면,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때 6국의 군대는 매번 밥을 짓고 반찬을 하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한 반면, 진나라는 빵을 양고기 국물에 넣어 잽싸게 식사를 마치고 전쟁해서 6국을 제압할 수 있었다. 솥뚜껑만한 밀전병 궈쿠이(鍋盔)의 전설도 비슷하다. 당고종의 무덤 건릉(乾陵)의 공사 시간 규율은 매우 엄했다. 한 병사가 요리하고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급한 김에 밀가루 반죽을 투구에 넣고 구워 먹은 게 궈쿠이의 유래라고 한다.
요즘도 산시 시골사람들은 세숫대야만한 대접(老碗)을 든 채 쪼그리고 모여앉아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한다. 이를 ‘밥그릇 모임(老碗會)’이라고 한다. 밥을 양껏 먹은 다음에 농사일을 나가면 밥 먹으러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탁자에 그릇을 놓고 의자에 앉아 식사하지 못하고, 그릇을 든 채 쪼그려 앉아 밥을 먹는다니, 얼마나 마음이 급하면 그럴까.
이를 종합해보면 산시인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전쟁, 토목사업, 농사 등 바깥일에 쫓기며 살아왔다. 덕분에 성격 역시 급하다.
산시 사람들은 직설적이므로 이쪽에서도 우회전략 대신 정공법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은 할 말이 있으면 기피하지 않고 바로 해버리며, 이야기를 하다가 뜸을 들이는 것을 절대로 참지 못한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조바심이 나서 견디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뜸 들이는 사람은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멀리한다.
-왕하이팅,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
일은 바쁘고 성격은 급하니 한가롭게 미식을 만들고 즐길 여유가 없다. 대신 최대한 시간을 절약하며 생존할 수 있는 음식을 개발했다. 워낙 열악하게 살다보니 웬만한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이 산시인의 호방함이라고 할까.
2010년 시안 여행을 할 때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마트에서 찐빵과 오리구이를 샀다. 점원이 찐빵을 꺼내고 슬라이드식 유리덮개를 옆으로 닫으려 할 때 덮개가 쪼개지며 떨어지다 말았다. 원래 금이 쩍 가 있는 유리덮개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는데, 테이프의 접착력이 약해서 떨어지다 만 것이다. 이제 덮개와 빵을 모두 치우겠지? 그런데 웬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빵 위에 떨어진 비교적 굵은 유리 파편 한두 개 골라내고는 덮개를 다시 닫았다.
아니 세상에, 미세한 유리 파편이 떨어졌을 텐데, 고객이 그걸 먹고 다치면 어쩌려고?! 허름한 시골 구멍가게도 아니고, 대도시 시안시 중심의 큰 쇼핑몰에 있는 번듯한 마트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다니!!! 그다음부터 중국에서 물건 살 때 유리진열대가 온전한 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다행히도 숱한 중국 여행 중 이런 일은 단 한 번만 겪었지만, 중국의 안전불감증은 여간 충격적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산시인의 열악함에 대한 인내력, 호방함이 한몫하기도 했으리라.
열악해서 호방하다
관중평야는 비옥하되 그 산출물은 민중에게 돌아가지 않고 군량미로 쓰인 것처럼, 산시의 역사는 찬란하되 그 영광은 민중의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것이었다. 진의 정복전쟁, 아방궁·병마용·만리장성 등의 대규모 건축 등으로 가장 큰 희생을 한 것 역시 산시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산시인에게 진이 흑역사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산시의 또다른 약칭이 바로 ‘진(秦)’이다. 산시인은 노래한다. “팔백리 진천(秦川)에 흙먼지 휘날린다. 삼천만 민중이 진강(秦腔, 민요)을 불러댄다. 국수 한 그릇에도 기분은 그만이야. 고춧가루 안 넣어도 후룩후룩 잘도 먹네.”
사람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여서 꼭 나 자신이 직접 겪어야만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의 천하통일을 떠올리면 웅장한 패기가 용솟음친다. 열악함 속에서도 대업을 성취했음을 떠올리면 자신감이 넘친다. 당의 영광은 오래전에 사라졌어도 그 시절의 영화를 상상하면 나 자신도 페르시아 여자와 술을 마시던 부자처럼 느껴진다. 장안의 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산시인들은 아직도 따뜻하던 봄날의 꿈을 잊지 못한다.
꿈은 약일까, 독일까. 둘 다 된다. 꿈은 현실도피의 몽상이기도 하고, 현실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이상이기도 하다. 관건은 어떤 현재를 만들어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산시가 만들고 있는 오늘은 어떤 모습인가.
삼성이 시안으로 간 이유
당 이후 산시의 전성기는 끝났지만, 이 땅에 서린 왕기(王氣)는 죽지 않았다. 산시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은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비록 그는 군율을 바로잡지 못해 민심을 잃고 청나라에 패해 사라졌지만, 마오쩌둥은 그를 농민반란 지도자로 높이 평가했다. 정규군이 아닌 공산당의 홍군을 이끈 마오에게는 주·진·한·당보다 이자성의 중원 정복이 더 많은 힌트를 줬으리라.
장시의 징강산에서 양산박을 재현하려던 마오는 장제스의 토벌을 피해 도망 다녔다. 마오가 9600km의 대장정을 마치고 정착한 곳은 산시의 옌안(延安)이다. 한편 장쉐량은 화청지에 있던 장제스를 연금하고 국공합작을 종용했다. 대장정이 끝나고 시안사변이 일어난 산시는 공산당의 기적적인 승리가 시작된 땅이 됐다.
이때 활약한 걸출한 산시인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다. 그는 1913년 산시의 푸핑현 시자좡(富平縣習家莊)에서 태어나 13세 때 농민운동에 참여했고, 14세 때 공산당원이 됐으며, 17세에 량당 무장봉기(兩當兵變)를 일으켰다. 42세의 젊은 혁명가 마오도 22세의 시중쉰을 처음 만나고 깜짝 놀랐다. 쟁쟁한 명성을 날리고 착실한 기반을 닦은 시중쉰이 이토록 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시중쉰은 서북 지역을 호령하던 서북왕이었으며, 부총리로서 저우언라이의 오른팔이었다.
시진핑은 금수저를 물고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권력의 심장 중난하이(中南海)에 놀러갔다. 중난하이는 당정 주요 기관, 최고 지도부의 거주지와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민초들은 절대 갈 수 없는, 현대판 자금성이다. 그러나 시중쉰이 하루아침에 실각하며 가족들도 고난을 겪게 된다. 마오쩌둥이 시중쉰을 모함하고 정치사건을 일으켜 대약진운동 후 잃은 권력을 되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반동가족의 일원으로 몰린 시진핑은 15세 때 생산대에 자원입대해 산시에 갔다. “밭을 매러 가려면 20리 길은 족히 걸어야 밭이 나오고, 땔감을 주우려면 30리 길을 걸어야 숲이 보이며, 소금을 사려면 40리 길을 걸어야 시장이 나오”는 깡촌에서 7년을 보내며 주위의 신임을 얻었다. 부친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인 데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인생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이기에 시진핑은 “산시는 나의 뿌리이고, 옌안은 나의 영혼”이라고 했다.
삼성이 70억 달러를 투자해 시안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 연달아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이 국가를 이끄는 중국에서 공산당 최고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뇌물을 주는 것은 수준 낮은 일이다. 뭘 하면 시진핑이 좋아할까. 현재 중국의 과제는 전 국토 균형개발이고, 산시는 시진핑의 고향이다. 따라서 시안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면 국가시책인 서부 대개발에도 부합하고 최고권력자의 애향심도 만족시킬 수 있다.
‘China’와 ‘唐人街’
최고권력자가 좋아하는 것은 부하도 좋아하기 마련이니, 사업하며 생기는 온갖 문제에 대해서 중국의 전폭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산시의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서부 개발에 협조하며 이미지도 높일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2015년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은 연간 생산액 100억 위안(약 2조 원)을 돌파했다. 중국은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거둔 대성공을 두고 ‘산시 속도, 시안 효율’이라고 부른다.
산시는 문화·외교기지로도 각광받는다.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이 병마용을 보고 “피라미드를 못 봤다면 진정 이집트에 간 것이 아니고, 병마용을 보지 않고는 진정 중국을 본 것이 아니다”라고 찬사를 보낸 후, 중국은 레이건, 클린턴, 박근혜 등 숱한 외국 정상들을 ‘병마용 외교’로 맞이했다. 지난해 시진핑은 인도의 모디 총리를 시안에서 영접하고 자은사 대안탑을 찾았다.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구해온 불경을 보관한 곳으로, 중국과 인도의 뿌리 깊은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비록 최근 들어 양국 관계는 서먹했지만, 오랜 친구이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으냐는 메시지가 읽힌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서 산시는 핵심적 위치에 있다. 중국의 낙후한 서부지역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자원과 유럽의 시장을 차지하려는 대전략은 당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영어 이름 ‘China’는 진나라의 중국식 발음 ‘친(秦)’에 기원을 뒀다. 또한 ‘차이나타운’의 중국식 명칭은 ‘당인가(唐人街)’다. 일찍이 중국을 해외에 알린 산시는 다시 해외를 향해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비단수레 소리 마른천둥 치듯
‘세상의 중심’ 산시성
周·秦·漢·唐을 모두 꽃피운 산시성이지만,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는 단연 당나라다. 화려했던 장안의 봄을 오늘날 시안에서도 언뜻 엿볼 수 있다. 광장에선 사람들이 이슬람풍 군무를 추고, 잘 보존된 성벽 위에서 자전거를 탄다. 시안 사람들은 ‘大唐西市’에서 쇼핑하고, 아프면 ‘大唐醫院’을 찾는다.
▲서악 화산(西岳 華山). 중국 오악 중 가장 험난한 산으로 무협지에도 자주 등장한다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군대인 병마용 출토지. 6000 병사의 얼굴이 제각각이다.
▲종루에서 바라본 시안시 풍경
▲명나라의 성벽과 현대 건축물이 어우러진 시안의 야경.
▲양귀비가 머문 온천 화청지(華淸池)에서 온천수를 마시거나 세수하는 관광객들.
▲당나라 황실 사찰 법문사. 부처의 손가락뼈 사리가 안치돼 있다
▲야시장에서 음식을 파는 회족(回族) 여인.
◆6월 호 후베이성
◇제왕의 자본 兵者必爭의 땅
鄂 천하삼분 맹주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벌어진 땅에 사는 것은 녹록지 않다. 가만있어도 난리가 벌어지는 탓이다. 그래서 후베이 사람들은 거친 세파를 통쾌하게 헤쳐 나가는 강호의 협객 같은 삶을 꿈꾼다. 이들은 의리를 버린 자를 ‘반수(反水)’라 일컫는다. 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본성에 어긋난 짓을 했다는 뜻이다.
▲이창 장강대교.
충칭(重慶)에서 출발한 장강삼협(長江三峽) 크루즈 여행의 종착점은 후베이의 이창(宜昌)이다. 유비가 육손에게 대패한 이릉대전이 일어난 땅에서 다시 장강을 따라 내려가니 징저우(荊州)가 나왔다. 삼국시대에 형주 강릉성(江陵城), 위·촉·오가 격전을 벌인 곳이다.
징저우 곳곳에는 삼국시대를 그리는 흔적이 있다. 여관은 ‘삼국빈관(三國賓館)’이고, 공원은 ‘삼국공원(三國公園)’이며, 심지어 노래방 이름은 ‘동작대(銅雀臺)’였다. 물론 ‘삼국’이라고는 해도 민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유비·관우·장비였다. 삼국공원 입구에선 유·관·장 삼형제의 석상이 나그네를 반겨주고, 형주성벽 위엔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징저우를 지키는 신물처럼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삼국시대 최대의 격전지인 후베이다웠다.
초나라 본거지
▲후베이(湖北)성의 약칭은 ‘땅 이름 악(鄂)’자다. 후베이 수상방어의 요충지인 우창(武昌)에 옛날 악(鄂)나라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약칭이다. 후베이란 중국 최대의 호수이던 동정호(洞庭湖)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후베이의 가장 큰 지리적 특징은 ‘중국의 배꼽’이라는 점이다. 후베이의 성도 우한(武漢)의 특징을 들어보자. “하나의 선(징광선, 京廣線)이 관통하고, 두 강(長江,漢水)이 교차해 흐르는 곳에 삼진(三鎮, 우창(武昌)·한커우(漢口)·한양(漢陽))이 정립해 있다. 오방 사람이 잡거하고 아홉 성으로 두루 통한다(五方雜處,九省通衢).”
남북으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달리는 징광선, 동서를 잇는 장강. 중국의 대동맥인 징광선과 장강이 만나는 곳이 바로 후베이다. 중국의 양대 철도인 징광선과 룽하이선(隴海線)이 만나는 허난성이 중국 교통의 중심이라면, 후베이는 중국 지리의 중심이다. 후베이는 허난, 산시(陝西), 충칭, 후난, 장시, 안후이와 접하며 수륙교통으로 장쑤, 광둥, 쓰촨도 쉽게 오갈 수 있다.
특히 성도인 우한은 장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우창, 한커우, 한양 등 세 항구가 합쳐진 도시다. 따라서 사방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치세에는 상인들이 오가고, 난세에는 군대가 충돌한다.
후베이의 또 다른 약칭인 초(楚)가 이 지역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주요 영역이 바로 후베이다. 중원의 화하족은 황하를, 남방의 초인(楚人)은 장강을 젖줄로 삼았다. 일찍부터 국가를 정비한 화하족에게 남방의 오랑캐들은 남만(南蠻)에 불과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형만(荊蠻)은 초나라를 세우고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빠르게 발전한다.
초나라는 당시의 선진국인 주나라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지만, 주나라는 초를 오랑캐로 여겨 상종하려들지 않았다. 초의 지도자는 주 왕실에 작위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당차게 말한다. “좋다. 올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스스로 올리겠다. 우리는 만이(蠻夷)다. 그러니 주나라 왕실의 시호를 따르지 않는다.” 바로 이 사람이 강한(江漢, 장강·한수)의 맹주 초 무왕이다. 남의 인정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초의 자긍심이 드러난다.
一鳴驚人 一飛沖天
춘추시대에 주 왕실은 쇠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권위가 살아 있었다. 따라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은 춘추시대를 주름잡은 패자(覇者)인 동시에 여전히 주 왕실을 섬기는 일개 귀족이며 신하였다. 그러나 황하가 아닌 장강을 무대로 등장한 신진 강국 초·오·월은 모두 독자적으로 왕을 칭했다. 초장왕, 오왕 부차, 월왕 구천은 주나라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의 수장이 됐다. 주 왕실은 오랑캐를 무시하다가 오랑캐에게 무시당하며 권위가 땅에 떨어졌으니 자업자득이랄까. 이후 주 왕실의 권위가 살아 있던 춘추시대는 끝나고, 오로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열렸다.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요, 한번 날면 하늘을 뚫을 것이다(一鳴驚人,一飛沖天).” 그 유명한 초장왕의 호언장담대로 초나라의 약진은 눈부셨다. 대동맥 장강을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무수히 퍼져나간 강과 호수는 풍부한 쌀 생산의 원천이다. 또한 후베이에는 청동기시대의 핵심 전략자원인 구리가 풍부했다. 구리는 당시 매우 값진 귀금속이라 주 왕실은 거대한 청동기물인 구정(九鼎)을 만들어 권위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풍부한 구리광맥을 장악한 초장왕은 구정을 두고 코웃음을 쳤다.
“구정이 과연 얼마나 큽니까. 그 정도는 우리 초나라 군대의 부러진 창날만 모아도 만들 수 있습니다.”
초장왕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선진국 주나라에 꿀리지 않고, 초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한껏 과시하며 신흥 강국의 활력과 자신감을 보여줬다. 그러나 초장왕은 그저 혈기만 왕성한 ‘막무가내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용맹하고 호방하면서도 치밀하고 사려 깊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차를 타고 앞장설 정도로 뛰어난 전사이면서도 “무(武)란 ‘창(戈)을 멈춘다(止)’는 뜻”이라며 무력 사용에 신중을 기했다.
초는 장강 일대를 급속히 장악해간다. 초에 맞설 만한 세력이 적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초가 점령지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대규모 관개시설을 설치해 점령 전보다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 것이 원인인 듯하다.
남방의 맹주 초는 천하무적의 진(秦)에도 힘겨운 상대였다. 초 공략은 진의 천하통일 중 최대의 고비였다. 진시황은 백전노장 왕전에게 초를 정벌하려면 몇 만의 군사가 필요한지 물었다. 왕전은 강국 조(趙)나라를 10만 군사로 멸망시킨 명장이었지만, 초나라 정벌을 위해서는 60만 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삼국시대 화약고
진시황은 왕전이 늙어 무능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장군 이신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초를 정벌케 했다. 하지만 초의 명장 항연이 그간 패배를 모르고 연승하던 진의 20만 대군을 격파한다. 이에 진시황 역시 초나라가 최강의 호적수임을 절감하며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준다. 60만 대군을 거느린 명장 왕전도 1년이나 지구전을 펼친 끝에야 항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초를 멸망시킨 진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져 노도(怒濤) 같은 기세로 천하통일을 완성한다.
그러나 초의 군대는 꺾였지만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초의 저잣거리에는 괴이한 노래가 나돌았다. “초나라에 단 세 집만 남아도 반드시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楚雖三戶,亡秦必楚).” 과연 그 말대로 훗날 항연의 손자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지만, 성공의 열쇠는 실패의 문 역시 여는 것일까. 근본을 잊지 않아 성공한 항우는 근본을 잊지 못해 실패한다. 물의 나라 초에 뿌리를 둔 항우는 강남을 못 잊어 관중·중원(산시·허난) 일대를 소홀히 하다가 한의 유방에게 천하를 넘겨준다.
한나라 때 후베이와 후난을 포괄한 지역이 그 유명한 형주(荊州), 즉 징저우다. 그러나 아직 후난은 후베이에 비해 개발이 덜 됐고 현지 이민족의 세력이 만만찮아서, 보통 형주라고 하면 후베이의 양양성, 강릉성 등을 중심으로 생각했고 후난만을 지칭할 때는 남형주라 불렀다.
한의 치세가 저물고 군웅할거의 시대가 되자 형주는 지극히 중요해진다. 동오의 대도독 주유는 말한다. “형주는 천하의 중심에 있는 요새입니다. 그곳을 차지해야만 중원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노숙 역시 거들었다. “형초(荊楚) 땅은 밖으로는 장강과 한수를 두르고 안으로는 험준한 산과 구릉이 있으며, 견고한 성이 있고 기름진 평야는 만리나 되고, 관리와 백성은 풍부합니다. 이곳을 차지한다면 제왕의 자본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갈량은 융중대(隆中對)에서 형주가 천하삼분지계의 핵심임을 역설했다.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와 면수를 두어 남해에 이르기까지 다 이로운 땅이요, 동쪽으로 오회 땅과 닿고 서쪽으로 파촉 땅과 통하니, 이곳이야말로 군사를 거느리고 천하를 경영할 만한 곳입니다.”
형주의 중요성을 설파한 제갈량은 미묘하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러나 참다운 주인이 아니면 지킬 수 없는 곳입니다.” 모든 이가 이 땅을 차지하려 다투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3대 대전 중 2개가 바로 후베이에서 일어났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이다.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위의 조조·조인·방덕·서황, 촉의 유비·관우·제갈량, 오의 주유·여몽·육손 등 당대 최고의 명장과 지략가들이 불꽃 튀는 쟁탈전을 벌였다.
조자룡이 백만대군을 헤치고 유선을 구하고, 장비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떨게 한 장판파 역시 형주 땅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총 120회 중 무려 72회에 등장하는 형주는 삼국시대의 화약고였다.
기주(허베이)의 원소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숙적 유비와 손권을 제거하기 위해 형주로 진격한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얌전히 형주를 바친다. 단숨에 천하통일을 완수하려던 조조의 군대는 장강에서 유비-손권 연합군에 패한다. 거대한 불길이 조조의 대군을 불태워 장강의 절벽을 붉게 물들인 적벽대전이었다.
“皇子를 형주 장관으로”
▲장강 중류에 위치한 요충지 징저우에 있는 형주성(위)과 형주성벽 위에 전시된 관우의 청룡언월도.
승전 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곧 촉을 얻고 한중왕이 되어 제갈량의 융중대를 실현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 촉과 연합해 위를 친 오는 이제 위와 연합해 촉을 쳤다. 유비는 여몽의 기습으로 관우와 형주를 동시에 잃는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탈환을 위해 전 국력을 기울여 출진했지만, 육손은 이릉대전으로 유비의 칠백리 영채를 불살라버린다.
결과적으로 위·촉·오는 형주를 삼분하지만, 세 나라의 국력은 형주 점유율에도 반영됐다. 위와 오의 영향력이 가장 컸고 촉은 실질적으로 형주를 잃었다. 애초에 제갈량은 촉을 보급기지로 삼고 형주에서 군사를 움직이려 했다. 형주는 사통팔달의 땅이라 어디로든 치고 빠질 수 있어 신출귀몰한 병력 운용이 가능한 데다, 북으로 조금만 가면 수도 낙양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형주를 잃자 첩첩산중인 촉에서 나갈 길은 기껏해야 세 갈래에 불과했다. 따라서 위는 침공 지점을 예측해 방어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형주를 잃음과 동시에 이미 천하삼분지계는 망가진 꼴이었다.
후베이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후 역사에서도 줄곧 드러난다. 5호 16국 시대 장강을 장악한 송나라의 왕 유유는 “형주는 장강 중류지대의 요충지다. 황자를 차례대로 형주 장관으로 임명하라”는 유서를 남겼다. 형주는 황실이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할 땅이라는 의미다.
훗날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국방력은 약했지만 도시와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장강 한복판에 있는 수상교통의 요지 후베이 역시 도시혁명과 상업혁명의 혜택을 입었다. 강기는 “우창의 10만 호, 석양에 낮게 드리워진 자줏빛 연기여”라며 우창의 번영을 노래했다.
부유하되 약한 남송을 삼키기 위해 원나라가 움직였다. 조조가 장강의 물길을 따라 손권을 정벌하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의 쿠빌라이가 쇠약한 남송을 정복할 때 제일 먼저 공략한 곳 역시 후베이의 양양성이다. 쿠빌라이가 남송의 보루 후베이를 차지하자 ‘장강 중류를 장악해 하류를 제압한다’는 전략이 수월하게 달성됐다. 손쉽게 임안(저장성 항저우)까지 진격한 쿠빌라이는 남송을 멸하고 중국을 재통일한다.
청대(清代)에 제2차 상업혁명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의 상품들이 제국 전역을 오갔다. 자연스레 후베이는 각 지역의 온갖 산물이 모여드는 곳이 됐다. 후난·푸젠의 차, 안후이의 소금, 쓰촨의 약초, 산시의 목재, 동북지방의 수수·삼, 서북지방의 가죽·담배, 동남지방의 설탕·해산물·아열대 식품들이 장강 중류의 항구 한커우를 교차했다. 상업이 번성하던 항구도시 한커우에서 학문은 크게 대접받지 못했다. 19세기 한커우에는 ‘훈장’이라는 간판을 걸면 학생은 오지만 거지는 오지 않아 일거양득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훈장은 가난해서 거지가 구걸하러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지동의 洋務운동
▲형주성에서 바라본 징저우 시.
“십리에 걸쳐 돛이 늘어서 있고 수만 가게의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며 상업도시로 발전하던 우한은 청말 장지동을 만나 공업도시로 거듭난다. 장지동은 “중국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활용한다(中體西用)”고 주장한 양무파(洋務派)였다. 증국번, 이홍장 등과 함께 양무운동을 이끈 장지동은 호광총독을 20년이나 맡으며 239명의 외국인을 포함해 600명이 넘는 막료를 채용했다. 장지동은 다양한 배경과 지식을 가진 신진 인재들을 활용해 후베이에 철도를 깔고 독일식 군대를 육성했으며 탄광을 개발하고 공장을 세워 ‘우한의 아버지’라 불렸다. 특히 우한에 설립한 한양철광은 중국 철강 생산의 거점이 돼 ‘동방의 시카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도배를 새로 한다고 썩은 집을 고칠 수는 없다. 양무운동은 중국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청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이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제 남은 길은 청을 엎고 새 국가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쑨원은 1895년 10월 광저우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고향 광둥성에서 10번이나 봉기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정성 들여 심은 나무에선 꽃이 피지 않고 무심코 꽂은 버들가지가 자라 그늘을 드리운다”던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의도하지도 않은 후베이 우창에서 1911년 10월 10일 무장봉기가 성공한다.
사건의 전말은 코미디처럼 황당하다. 10월 9일 혁명파 인사들이 폭탄 제조실험을 하다 실수로 폭발사고를 일으켰다. 관군은 혁명파의 거점을 수색해 혁명파의 명단을 비롯한 서류와 무기, 자금을 압수하고, 즉시 혁명파 3명의 목을 베어 성문에 걸었다. 곧 대대적인 혁명파 색출·처형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 군대 내부에 혁명파 인사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장교급 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문제는 혁명파들이 만든 명단에 누구 이름이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혁명파가 일면식 있는 사람들 이름까지 죄다 적었을 수도 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군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제대로 된 지휘관도 없고 2000명의 봉기군 중 혁명파는 절반이나 될까 말까 한 오합지졸의 반란이었다.
‘의도치 않은 혁명’ 진원지
▲높이 2.73m, 길이 7.48m의 거대한 초나라 편종(왼쪽), 초나라의 군사력을 보 여주는 청동합금 복함검.
다행히도 당시 호광총독 루이청은 청말의 전형적인 팔기자제(八旗子弟, 사치스럽고 방탕한 청말 기득집단)였다. 한때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하던 팔기군의 후손은 무사안일에 젖어 말도 탈 줄 모르는 겁쟁이가 됐다. 루이청은 포성이 울리자마자 잽싸게 총독부 담장에 개구멍을 뚫고 줄행랑을 쳤다. 역사가 장밍은 ‘신해혁명’에서 루이청이 당시 귀족 중에서는 그나마 유능한 인재였기에 도망이라도 쳤지, 다른 이였다면 그저 방안에서 얼어붙어 얌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혁명군이 얼떨결에 접수한 우한은 보물창고였다.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막대한 재부를 축적해온 후베이성의 재정예금은 은 4000만 냥에 달했다. 일찍이 장지동이 독일식 군대를 육성하고 우한을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으로 만들었기에 무기도 어마어마했다. 수만 정의 소총, 산포, 야포, 요새포 등 비축 무기는 몇 개 사단을 완벽히 무장시키고도 남았다.
민심은 불안 반, 희망 반으로 일을 지켜봤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언론은 혁명파의 역량을 과대평가했다. 신문들은 우한의 혁명군이 3만 명이 넘으며 병사들 모두 수년간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엘리트라고 보도했다. 유언비어는 신화가 됐다.
당시 청의 최정예 병력인 북양군은 진압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보름 넘게 미적거렸다. 그동안 천하의 중심 후베이에서 일어난 봉기는 동심원을 그리듯 전 중국에 퍼져나갔다. 후베이의 인접지역이 동요하자 인접지역의 인접지역이 또다시 동요했다. 허난성의 진압부대는 총 한 방 안 쏴보고 혁명군에 투항 의사를 전했고, 후난·장시를 필두로 내륙 18개 성 중 14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그토록 굳건했던 청 제국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쑨원은 고향인 광둥성에서 혁명을 일으켜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해외도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쑨원의 의도대로 광둥성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한들 과연 우창 봉기만큼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광둥성은 풍요롭긴 해도 동남부 변방인 데다 남령산맥으로 타 지역과 격리돼 있다. 일찍이 광둥성에서 벌어진 아편전쟁도 굴욕적 패배이긴 했지만, 변방의 일이라 민심이 그리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난징을 점령한 태평천국운동이 오히려 청 조정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쑨원 등 혁명파들이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후베이 경우는 워낙 중심이라 일단 반란이 일어나면 즉시 사방에서 진압하러 올 것이기에 혁명이 일어난들 지킬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의도대로 되지도 않고, 의도를 항상 뛰어넘음을 신해혁명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우창 봉기에서도 후베이의 지리적 특성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머리 아홉 달린 새
▲후베이의 성도 우한의 노을.
‘중국 지리의 중심’이라는 말은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민초의 처지에서 병자필쟁지지(兵者必爭之地)요 용무지지(用武之地)인 땅에서 사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다. 어제는 위나라, 오늘은 촉나라, 내일은 오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시시각각 정세가 변한다. 후베이의 소설가 팡팡(方方)은 ‘사무치는 사랑’에서 삶의 고충을 토로한다. “세상은 이렇게 크고 어지럽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결국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이 아닌가.” 오늘 당장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후베이의 삶은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철로와 같은 운명이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투쟁심이 필요하다. 사마천은 “대체로 형초(荊楚) 지역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럽고 가볍고 사나워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예부터 기록된 바”라고 말했지만, 실상 형초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키기 좋아한다기보다 정작 자신들은 가만히 있어도 난리가 나고, 일단 난리가 나면 잽싸게 대처할 줄 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후베이인의 과감함과 눈치, 호전성은 중국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하늘에는 구두조(九頭鳥), 땅에는 후베이의 늙은이”라는 말이 있다.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새처럼 눈치가 빠르고 교활하다는 말이다.
후베이인은 거친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이 너무 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속고 말이 온순하면 사람이 올라타게 마련(人善被人欺,馬善被人騎)”이라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매사에 기선을 제압하고 이기려든다. 그래선지 입이 매우 거칠다. 툭하면 “갈보자식(婊子養的)”이라고 욕하는 우한 사람을 보고 역사가 이중톈은 재치 있게 놀린다.
“우한이 무슨 기생 집합소도 아니건만 왜 그렇게 ‘창녀’가 많단 말인가. 정말 기이한 일이다. (…) 우한 사람들이 무엇인들 무서워하겠는가. 그들은 자기 엄마라도 욕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런 욕은 후베이 출신 작가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등장인물이 친구에게 “요즘 어떤 창녀랑 붙어먹기에 통 안 보이냐?”라고 인사하면, 친구는 이렇게 맞받아친다. “이 어르신께서 네 엄마랑 놀아주느라 바빴다.”
이런 곳에서 욕을 안 하고 말이 없으면 후베이인은 오히려 이상하게 본다. 팡팡의 소설 ‘풍경’에서 한 가족의 일곱째 형은 매우 과묵한 성격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하방(下放)운동 때문에 그가 후베이의 시골에 내려가서 말없이 일만 하자 동네에서 희한한 평판을 얻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일곱째 형이 대단히 성실한 젊은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정말 음흉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짖지 않는 개가 사납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강호 협객 꿈꾼 民草들
그러나 이토록 매사에 긴장하고 사는 삶은 얼마나 피곤한가. 살얼음판을 걷듯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세 번 돌아보는 마음(一步三回頭)’으로 살아도 현실은 여전히 힘겹고 팍팍하다. 후베이 소설가 츠리(池莉)의 ‘번뇌 인생’에서 한 사람이 출근길에 말한다. “어떤 젊은 시인이 시 한 수를 썼는데, 단 한 글자입니다. 기발해요! 들어보세요. 제목은 ‘생활(生活)’, 내용은 ‘그물(網)’. 이 세상에 그물 속에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서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고, 죽어서는 먼지와 같은” 삶을 견디기 위해, 후베이인은 어떤 탈출구를 찾았을까. 일단 고개를 들면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다. 장강은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사방에는 호수가 있다. 신선이 사는 듯한 선눙자(神農架)와 우당산(武當山), 장강의 협곡 싼샤(三峽)는 어떠한가.
힘겨운 삶과 아름다운 자연은 도가(道家)의 양대 원천이 됐다. 삶의 번뇌를 모두 벗어던지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을 꿈꿨다. 노자란 인물은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나, 후베이는 노자를 초나라 사람으로 여긴다. 장자는 안후이 출신이기는 하나, 당시 안후이는 초나라 영역이었다. 즉 노장(老莊) 사상은 강남의 초나라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 후베이에는 노자를 빗댄 말이 많다. 거드름 피우는 친구에게는 “노자가 사람으로 만들어주니 아예 노자랑 놀려고 한다”고 꼬집고, 천방지축인 친구에게는 “제멋대로 살려면 노자나 찾아가 보시지”라고 하며, 싸울 때는 “노자가 죽어도 난 절대 양보 못해!”라고 외친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도 속세를 완전히 초월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은원(恩怨)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평범한 민초들은 억울한 일도 고마운 일도 톡톡히 되갚아주고 싶었다. 속세의 법률 따위는 따르지 않되 속세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고, 속세와 자연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며 노니는 존재. 칼 한 자루를 품고 거친 세파를 헤쳐가며 은혜도 원한도 통쾌하게 열 배로 되갚아주는 존재. 민초들은 강호의 협객을 꿈꿨다.
후베이인은 실제의 삶에서도 강호의 규칙을 따른다. 중국인들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후베이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베이징에서는 관청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광둥에서는 돈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후베이에서는 친구가 많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 된다.” 각별한 친구(梗朋友)를 팔아먹는 사람은 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본성에도 어긋나고 지극히 어리석다 하여 ‘반수(反水)’라고 한다.
물론 강호의 규칙이 꼭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호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다. 따라서 용기와 힘이 있는 사람이 두목(草頭王)이다. 상하이의 만원 버스 승객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내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우한의 만원 버스 승객들은 기선제압하듯 몸싸움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이런 평가도 내린다. “우한인은 같이 걸어가면 절대로 남보다 앞서서 걷지 않는다. 예의를 차리려는 게 아니라 앞서서 걸으면 위험과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 파고든 강호의 조심성이다.
2개의 디트로이트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후베이는 매우 역동적인 땅이다. 일찍이 연해 지역에 개혁·개방의 수혜가 집중됐을 때, 후베이는 내륙 지역 중에서 가장 빨리 경제가 발전했다. 장강을 따라 난징, 상하이와 연결되고, 철로를 따라 베이징, 광저우와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후베이는 장강의 수로를 활용하는 연강교통대동맥(沿江運輸大通道)의 중심이며, 장강중류도시군의 중심이다.
2015년 중국 국무원은 장강 중류의 후베이 우한, 후난 창사, 장시 난창 세 도시를 삼각벨트형 특대형 도시권으로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옛날 초나라의 중심이던 과거를 재현하려는 것일까. 삼각 벨트의 맹주가 되려는 듯, 우한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규모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우한 시내의 공사판만 7000개가 넘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시 개발에 적극적이던 우한은 2012년 상반기 기준 정부 채무액이 2000억 위안(약 35조 원)이 넘어 ‘중국 최고의 부채 도시’로 꼽힌 바 있다.
그러나 우한의 질주는 여전히 거침없다. 지난해 우한은 향후 5년간 2조 위안을 도시 개발에 퍼부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영국이 20년간 전국 인프라 건설에 투자할 3750억 파운드(약 624조 원)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중국의 디트로이트’를 꿈꾸는 우한이 ‘자동차의 도시’인 디트로이트가 될 지, ‘파산도시’ 디트로이트가 될지, 초나라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후베이가 과감한 투자의 성공 사례가 될지, 과잉투자의 실패 사례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중국의 배꼽’ 후베이성
삶을 견디라고 長江은 흐른다
삼국시대의 ‘화약고’. 후베이 사람들은 갖은 난리를 겪어왔다. “살아서는 땅강아지 같고, 죽어서는 먼지 같은” 삶을 견디라고 위로하는 듯, 후베이는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여 있다. 장강이 유유히 흐르고 사방에 절경을 자랑하는 호수가 있다. 〈관련기사 418쪽〉
▲장강의 절경 싼샤(三峽).
▲중국 전국시대의 냉철한 전략가이자 대시인인 굴원(屈原)은 후베이의 자랑이다.
▲형주성벽 길을 걸으면 옛 형주성과 오늘의 징저우 시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장강 수영으로 건강을 과시한 마오쩌둥을 본받아 장강에서 수영을 즐기는 우한 시민들
▲형주성과 주변 노점상들
▲인파가 넘쳐나는 우한의 먹자골목
▲비록 관우가 형주를 차지한 시간은 짧았으나 징저우 사람들은 관우를 형주의 주인으로 여긴다.◎
◆7월 호 후난성
◇張家界에 흐르는 유배자의 이야기
中原의 바깥세상 후난성
카르스트 바위가 거대한 기둥처럼 줄지어 늘어선 풍경이 ‘장씨의 세계’라 불리는 배경에는 ‘버려진 이들의 땅’ 후난의 역사가 녹아 있다. 중원은 남쪽의 만리장성인 남방장성(南方長城)까지 세우며 후난을 견제했지만, 후난은 신중국을 세운 걸출한 인물 마오쩌둥을 보란 듯 키워냈다. 〈관련기사 416쪽〉
▲후난의 대표적 관광지 장가계.
▲남방장성에서 바라본 마을.
▲펑황고성의 저녁 노을.
▲창사 천심각(天心閣). 창사 시내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요충지다.
마오쩌둥 품은 百折不屈 저항정신
湘 ‘중국의 스파르타’
후난은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고향이다. 마오의 불같은 성미는 ‘적과 싸울 때도 칼을 쓰고, 친구를 사귈 때도 칼을 쓴다’는 후난의 후예답다. 이런 저항정신은 오늘날 후난에도 살아 있다. ‘마오의 박물관’ 창사 박물관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을 버젓이 전시한다.
▲펑황고성의 뱃사공.
라메이즈 라~ 라메이즈 라~ 라메이즈~ 라메이즈~ 랄랄라~(辣妹子辣,辣妹子辣,辣妹子,辣妹子,辣辣辣)”
가무잡잡한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날씬한 몸매, 섹시한 건강미를 물씬 풍기는 후난 아가씨가 경쾌하게 노래한다. “후난 아가씨는 매워, 후난 아가씨는 맵지, 후난 아가씨는 맵고 화끈하고 열정적이라네.”
마오쩌둥이 “고추를 안 먹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不吃辣椒不革命)”고 했을 정도로 후난인은 매운 것을 즐겨 먹는다. 네 줄기 강물이 교차하는 쓰촨(四川)의 아가씨가 촨메이즈(川妹子)라 불리듯이, 후난 아가씨는 라메이즈(辣妹子)라고 불린다. 공교롭게도 ‘매울 랄(辣)’은 경쾌한 유성음이라 노래의 맛을 한껏 살린다. 랄랄라!
중원의 밖
후난(湖南)성의 약칭은 ‘강 이름 상(湘)’자다. 후난성은 중국 최대의 호수이던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에 있고, 장강 최대의 지류인 상강(湘江)이 흐르는 땅이다. 중국 남부답게 산지가 많아 서북쪽은 무릉산맥, 서쪽은 설봉산맥, 동·남쪽은 남령산맥으로 둘러싸였다. 평야지대는 총면적의 20%에 불과하지만, 동정호와 상강의 풍부한 물이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다.
“후난에 벼꽃이 피면 천하의 기근이 끝난다”고 할 만큼 후난의 농업생산력은 높았다. 북방인이 아침에 꽈배기튀김이나 죽으로 끼니를 때울 때, 후난인은 아침부터 쌀밥을 든든하게 먹었다. 현대사회의 번잡함이 후난을 지배하기 전까지 후난에서 아침에 죽을 먹는다는 건 삼시세끼 먹을 쌀이 없을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었다. 중국에서 쌀농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답게 쌀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런 풍족함은 훗날 개발된 후에야 진가를 발휘한다. 애초에 초나라의 중심이던 후베이(湖北)성부터가 중원과는 판이한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후베이는 중원과 맞붙고 교통이 편리해 중원과 교류하며 상당 부분 닮아갔으나, 후난은 멀고먼 변방이요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미개척지였다. 후난성에 중국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인 형산(衡山)이 있다. 오악은 중원의 세력권 범위를 상징한다. 즉 후난성의 중간인 형산 지역까지는 중원의 세력이 가까스로 미치지만, 그 아래로는 세상의 바깥(世外)이었다.
오지(奧地) 후난은 유배와 피난으로 이곳까지 흘러든 이들에게 비탄과 수심을 더했다. 초나라 충신 굴원은 후난에 유배되자 “세상은 취해 있는데 혼자서만 깨어 있다”고 노래하며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졌고,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는 악양루에 올라 외롭고 고단한 신세를 한탄했다. “가족과 벗에게서도 소식 한 글자 없고, 늙고 병든 몸이 의지할 것은 외로운 배 한 척뿐이네(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미개척지 후난에 대한 두려움은 남송시대 시인 엄우(嚴羽)의 노래 ‘답우인(答友人)’에서도 드러난다. “상강의 남쪽으로 가면 다니는 사람 없으니, 장우만연으로 흰 풀이 난다네(湘江南去少人行, 瘴雨蠻烟白草生).” 장우만연(瘴雨蠻烟)이란 남방 오랑캐 땅의 독기 서린 연기와 비를 일컫는 말이다. 멀쩡하던 장정들이 후난에만 가면 별다른 이유 없이 픽픽 쓰러지니 중원인들은 남방 땅에 독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개척지인지라 정글의 모기와 벌레가 말라리아와 풍토병을 옮겼기 때문이리라. 중국 전역에서 개발이 상당히 진척된 남송시대까지도 후난은 중원인에게 경외의 땅이었다.
人傑의 요람
이 거친 땅에 일찍이 정착한 이들은 먀오족(苗族)이다. 중원의 황제(黃帝) 세력에 밀려난 동이(東夷)의 치우 세력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중원인에게는 세상의 밖이었지만, 먀오족에겐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산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산 속의 풍부한 물은 곡창지대를 가져다줬다.
먀오족이 정착한 후난에 남방의 맹주 초나라가 나타났다. 그러나 초나라의 중심은 후베이였고, 후난은 아직 유배지로 활용됐다. 여기 사람들은 상강의 지류 멱라강에 몸을 던진 굴원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물고기가 그의 시신을 먹지 않도록 강에 밥을 퍼부었다. 이 활동은 오늘날 단오제(端午節)가 됐다고 전한다.
한나라는 후베이와 후난을 형주(荊州)로 묶었다. 당시 형주의 중심은 양양과 강릉 등 후베이 지역이었고, 미개척지 후난은 남형주로 따로 불리기도 했다. 미개척 상태에서도 후난의 생산력은 이미 돋보였다.
사마상여는 ‘자허부’에서 “운몽(雲夢, 초나라의 큰 연못 7개 중 하나)은 사방 900리에 이르고, 들짐승과 물고기, 온갖 산물이 말할 수 없이 풍부하다” 했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사(長沙)는 초의 곡창”이라 했다. 장사는 오늘날 후난의 성도(省都)인 창사다.
후한 말 동오의 손견은 도적을 토벌한 공로로 장사 태수로 임명돼 관록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탁 타도 등 중원의 일에 신경 쓰느라 장사에서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난세에 형주를 평화롭게 지킨 유표가 죽은 뒤, 삼국지 3대 주인공인 유비·조조·손권이 형주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인다. 후베이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지고 주유와 조인이 강릉 공방전을 벌이는 등, 후난의 지배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유비가 형남(荊南) 4군에 손을 뻗쳤다. 조운은 영릉·계양,장비는 무릉을 차지한다. 관우는 황충과 불꽃 튀는 접전 끝에 장사를 장악하고 맹장 황충과 위연을 얻는다. 위와 오가 강릉에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유비는 재빨리 형남 4군을 석권한 것이다.
손권은 이릉대전으로 유비를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한 후 동정호에 수군 조련을 감독하기 위한 누각 악양루(岳陽樓)를 세운다. 그러나 이후 남형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4대 거점인 형남 4군 이외에는 먀오족 등 원주민의 세력이 강해 실질적인 지배력이 곳곳에 미치지는 못한 듯하다.
중국 전역이 개발되고 교통·무역로가 발달하면서 후난도 점차 중요해진다. 후난은 영남(광둥·광시성) 지역과 중원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후난은 개발되면서 더욱 풍요로워져 호상(湖湘) 문화가 피어난다. 창사의 악록서원은 송나라 주자와 명나라 왕양명이 가르침을 편 곳이다. 송·명을 주름잡은 유학자들이 성리학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초나라의 인재들, 이때부터 성하였다(惟楚有材,於斯爲盛)”라는 악록서원의 자부심이 부끄럽지 않다. 명나라 최고의 명재상 장거정,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해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증국번,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등 명·청·현대를 주름잡은 인물이 후난에서 나왔다.
‘張氏의 세계’
▲펑황고성에선 먀오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후난의 펑황고성(鳳凰古城)은 강가에 자리한 마을이다.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한 아름다운 마을로 유명해 많은 여행객이 찾는다. 그런데 이토록 외따로 떨어진 마을 근처에 생뚱맞게도 거대한 성벽이 있다. 남방장성(南方長城)이다.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만리장성과 달리, 유목민이 없는 남쪽에 이토록 거대한 장성이 있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북방 유목민 못지않게 한족을 두렵게 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후난의 먀오족 등 소수민족들이다.
오늘날의 펑황은 먀오족, 투자족(土家族), 한족이 함께 어울려 사는 관광마을이지만, 원래는 한족이 먀오족, 투자족 등을 제압하려던 군사기지였다. 한족 주둔군과 친한파(親漢派) 먀오족은 장성 안에 살고, 반한파(反漢派) 먀오족은 장성 밖에 살았다. 친한파 먀오족은 ‘잘 익은 먀오족(熟苗)’, 반한파 먀오족은 ‘날것 그대로의 먀오족(生苗)’이라 불렸다. 산줄기를 따라 축성된 남방장성에 오르니 저 멀리 평지마을과 산간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숙묘의 수상한 동태를 감시하기 좋은 위치다.
먀오족과 한족의 혼혈 작가 선충원(沈從文)은 고향 펑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칠면서도 큰 돌들을 쌓아 만든 원형의 성곽을 가운데로 해서 사방으로 펼쳐진다. 그 변방 벽지의 외로운 도시를 둘러싸고 7000여 개의 보루와 200군데가 넘는 진영이 있다.” ‘산이 아름답고 물이 아름답고 노래가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다운 곳’ 이면에는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있다.
후난 최고의 명승지는 단연 장가계(張家界)다. 카르스트 바위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처럼 줄지어 늘어선 풍경은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에도 큰 영감을 줬다. 그런데 왜 이곳의 이름이 ‘장씨의 세계’일까.
전설에 따르면, 유방은 한 건국 후 황제의 절대권력을 강화하려고 명장 한신, 영포 등 수많은 공신을 토사구팽했다. 장량은 대숙청을 피해 도를 닦겠다며 후난에 은거한다. 그는 현지의 투자족에게 수차를 만들어주며 신임을 얻었다. 유방이 죽은 후 여태후가 장량을 제거하려 군대를 보내지만 장량은 투자족을 규합해 49일간 막아낸 끝에 저항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이 지역은 ‘장량 가문의 세계’, 즉 장가계(張家界)로 불리게 된다. 후난의 전설과 일화는 도망자, 유배자, 피난민, 산적의 이야기이며, 중원과 현지의 투쟁 이야기다.
중원에서 멀찍이 떨어진 후난의 첩첩산중은 훌륭한 은신처였다. 먀오족이 피난 온 이래 후난은 도망자들의 온상이었다. 후난에는 “산적들이 머리털만큼 많다(衆盜如毛)”고 악명이 높았다.
중국 관광객들은 현지 소수민족이나 역사적 특색을 살린 옷을 입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펑황고성에서 여자는 화려한 먀오족 옷을 입고, 남자는 토비(土匪), 즉 산적의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중원의 눈엣가시이던 먀오족과 산적이 이젠 추억거리가 됐다.
싸울 때도 칼, 사귈 때도 칼
▲후난대학의 마오쩌둥 동상
▲380리에 걸친 남방장성.
자연이나 사람이나 거칠고 야성적인 후난. 그만큼 후난인의 개성은 강하다. 후난 남자는 ‘후난 노새(湖南騾子)’라는 별명을 가졌다. 고집 센 노새처럼 길들이기 힘들고 진심으로 승복하지 않는 한 고분고분해지길 기대하기도 힘들다. “적과 싸울 때도 칼을 쓰고, 친구를 사귈 때도 칼을 쓴다”고 할 만큼 호전적이다.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혼, 호전성은 군인으로는 적격이다. 그래서 “후난인이 없으면 군대를 만들 수 없다(天下無湘不成軍)”는 말이 생겼다. 장쑤·저장인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닦아 관료의 길로 나섰을 때, 후베이·후난인들은 군사요충지 출신답게 군인의 길로 나섰다. 그래서 “문인들 중에 오(吳) 방언을 쓰는 사람이 많고, 무장들 중에 초(楚) 방언을 쓰는 사람이 많다(文多吳音, 武多楚腔).” “후난에는 장군이 많고 저장에는 책략가가 많”아서 “후난 사람들이 전쟁하면 저장 사람들이 관리한다.”
광시성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군대가 남방의 주요 대도시를 함락하며 남중국 일대를 뒤흔들 때, 후난의 창사는 태평천국의 맹공을 꿋꿋이 버텨냈다. 초기에 태평군은 창사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궤멸 직전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태평군은 후베이의 우창, 장쑤의 난징을 함락시키며 기사회생하지만, 다시 한 번 후난과 악연을 맺는다. 무능하고 부패한 관군 대신 태평군을 위협하는 강력한 군대가 후난에서 등장한 것이다. 증국번의 상군(湘軍)이다.
원래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나라였기에 사적 모임과 회합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나 무능하고 의지박약한 관군이 태평천국군에게 연패하는 상황에서 지방의 의용군이 의외로 잘 싸우자 생각을 고쳤다. 일개 무명인사가 조직한 촌구석의 의용군이 저토록 잘 싸운다면, 현지 유명 인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의용군은 더욱 잘 싸울 것 아닌가.
청 조정은 후난의 증국번에게 군대를 조직하도록 했다. 증국번은 타락한 관군과 전혀 다른 군대를 만들기 위해 원점에서 출발했다. 정부와는 관련 없는 근면성실한 사람을 우선 채용했다. “흙냄새 나고, 순박하고 착실한 젊은이, 즉 시골 사람일수록 좋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이 매끈한 남자나, 한량 같은 사내나, 관공서에 뜻이 있는 자는 채용 하지 않겠다.”
또한 증국번은 자기 문하생들을 대거 간부로 등용했다. 탁월한 유학자이며 명망 높은 관리였던 증국번을 따르는 인재가 많았다.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상군은 뛰어난 단결력과 투지를 보여줬다. 전투 경험은 없었으나 “계속 패배하면서도 계속 싸웠다(屢敗屢戰).” 결국 이들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다만 상군은 청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직되기는 했지만, 사조직은 사조직이었다. 사조직은 지역의 권력을 장악하고 중앙에 반기를 들기 쉬웠다. 증국번이 태평군을 격파하고 우창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풍제가 기뻐하자 군기대신 기준조가 진언한다. “필부가 여염에 머물며 한번 외쳐 궐기하자 만여 명이 따랐으니, 이는 필시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그토록 신망이 높고 유능한 증국번이 황제를 자처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될 야심이 없던 증국번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상군을 해산하고 공로를 과시하지 않았다. 양강 총독으로 강남에 머물 뿐 중앙 정계에 얼굴 내미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어디까지나 청의 충신으로 남길 원했다.
그러나 증국번의 충성심과는 무관하게 상군은 지역 군벌의 모델이 됐다. 지방의 혈연·지연·학연 등 각종 연줄로 묶인 군벌이 등장했고, 청조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결국 청은 우창봉기 후 각지의 독립선언과 함께 붕괴했다.
스파르타, 프로이센
이 혼란을 과연 누가 수습할 수 있을까. 중국이 내우외환에 싸여 있던 근대에 위안스카이의 참모 양두(楊度)는 ‘호남소년가(湖南少年歌)’에서 말했다. “중국이 지금 그리스라면, 후난은 스파르타다. 중국이 독일이라면, 후난은 프로이센이다. 여러분은 진실로 이와 같다. 말과 일을 급히 해 쓸데없이 눈물 흘리지 말라. 후난 사람이 모두 죽지 않고서는 중화국가가 진실로 망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말대로 후난에서 신중국을 탄생시킬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마오쩌둥이다. 그의 이름(毛澤東)에 이미 후난의 색이 짙게 배어 있다. ‘습지 택(澤)’ 자는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쌀의 산지다. 할아버지가 돼서도 장강에서 수영하며 건강을 과시한 마오는 물에 능한 강남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소년 마오는 ‘수호지’를 탐독하며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의적을 꿈꿨고, 훗날 장시의 징강산에서 양산박을 재현했다. 훗날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을 때, 마오는 “여러분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으로 홍군을 만들어 여러분과 싸우겠다”고 했다. 산적 기질을 못 버린 것이다.
“후난인은 성격이 너무 급해 뜨거운 두부를 먹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후난인은 성격이 너무 급해 뜨거운 두부도 단숨에 삼킨다”고 해야 좀 더 적확하다. 마오쩌둥도 불같은 성미의 후난인답게 말했다. “아주 급하니 만년은 너무 길고 하루 만에 당장 해치워야 한다.”
마오쩌둥은 학생 시절 스승 양창지(陽昌濟)를 찾아가 상담했다.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퇴학을 하고 싶습니다.” 양창지는 마오의 의견에 반대하며 말했다. “먼저 기초를 잘 닦게.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친구들을 만들어야 하네. 공동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 그러자 마오는 당장 동지를 모으겠다며 신민학회를 창립했다.
마오쩌둥, 시작이자 기준
훤칠하게 큰 키에 언변이 뛰어난 데다 열정적인 미남 청년 마오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학창 시절 마오의 친구였지만 훗날 다른 길을 걷게 된 샤오위는 마오를 이렇게 평가했다.
“첫째,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신중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대단한 책략가이자 조직가죠. 둘째, 적의 힘을 정확하게 평가할 줄 압니다. 셋째, 관중을 매료시킵니다. 대단한 설득력을 지녀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말에 동조하면 친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됩니다.”
국민당에 비해 절대적 열세이던 공산당 군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마오는 게릴라 전법의 요체를 명쾌하게 제시했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적이 멈추면 교란시키며,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 적이 퇴각하면 추격한다(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 또한 군기를 엄격하게 단속해 민심을 사고 명분을 쌓았다. 마오는 결국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신중국을 건설해 인민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차마고도(車馬古道)는 윈난과 티벳이 차와 말을 교역하던 길이다. 교환무역에 종사하던 마방의 삶은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극도로 힘들고 위험한 삶이었다. 집을 몇 달이나 떠나야 했고, 천길만길 낭떠러지 위험천만한 길을 가야 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게 싫어서 마방의 삶에 종사한 것이 아니다. 땅이 몇몇 지주에게 집중돼 있어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1949년 마오가 신중국 탄생을 선포하고 지주의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해주자 마방들은 위험한 교역을 하지 않아도 됐다. 마방이던 루오 노인은 토지를 분배받던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힘든 날은 모두 끝났다고 술회했다.
전란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사회의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에게 평등을 가져다준 마오의 위업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마오의 권력을 정당화한다. 중국 공산당 당헌은 말한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사상을 모든 활동의 지침으로 삼고, 교조주의적이거나 경험주의적인 어떠한 일탈에도 반대한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시작이며 기준이다. 어떠한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다.
정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어떨까. 중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자장커 감독의 영화는 중국 내에서 종종 상영이 금지되지만 해외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06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스틸 라이프’의 원제는 ‘삼협의 착한 사람(三峽好人)’인데, 지장커는 영화 제목에 마오쩌둥의 서체를 활용했다. 지장커는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천심각이 있는 천심공원에서 태극권을 하는 시민들.
▲여행객의 컵라면을 훔쳐 먹는 장가계의 원숭이
“마오쩌둥에 대해 모두가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정치가들 중 인민의 역량을 진정으로 인식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마오가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가 인민 스스로에게 자신의 역량을 인식하게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중국의 인민을 이해하려면 마오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배워야 합니다.”
정치에 별 관심 없는 민초들에게 마오는 어떤 의미일까. 중국 위안화는 모두 마오의 초상화로 도배돼 있다. 마오는 곧 돈이고, 돈은 좋은 것이다. 마오는 21세기 중국의 재물신(財富神)이다.
중국인이 돈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맛난 음식이다. 창사의 취두부(臭豆腐)는 마오의 평을 홍보 문구로 쓴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은 향기롭다(聞起來臭,吃起來香).” 창사의 대표 맛집 ‘불의 궁전(火宮殿)’ 앞에 세워진 마오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은 줄지어 사진을 찍고, 마오의 이웃집에 살던 탕루이런(湯瑞仁) 여사는 전 세계에 300개의 가맹점을 거느린 ‘마오네 밥집(毛家飯店)’의 주인이 됐다. 마오는 그만큼 친근하고 소탈한 서민의 벗이자 수호신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광둥성 친구가 느닷없이 내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한국인은 중국 정부를 어떻게 생각해?” 중국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대화 소재인 정치, 그중에서도 정부에 대해 물어보다니 난감했다. 역으로 친구에게 물어봤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친구는 의외로 진솔하게 말했다. “별로야. 그저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存在就合理)’라고 말할 수밖에.”
헤겔의 말 아닌가. “존재하는 것은 이성적이요, 이성적인 것은 존재한다.” 헤겔의 미묘한 명언을 두고 그의 제자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다. 보수파인 헤겔 우파는 전자를 강조하며 현재의 상태를 정당화했고, 급진파인 헤겔 좌파는 후자에 방점을 찍고 이성의 진보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다. 중국 청년들은 아직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현실을 더는 용납할 수 없을 때는 “이성적인 것이 존재해야 한다(合理就存在)”라고 외칠 것이다.
산시성 친구는 술을 마시며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정부를 비판했다. “정부는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자세야. 그 어떤 것도 도와주지 않아.” 정치 얘기는 경제 얘기로 흘렀다. “문화대혁명 전후의 20년은 잃어버린 세월이었어. 그사이 일본, 한국, 대만은 눈부시게 발전했지. 만약 중국이 그 때 개방했더라면 오늘날 중국은 어땠을까.”
마오 후반기 최대의 실책인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은 망가졌고 많은 기회를 놓쳤다. 또한 현재의 정부는 그나마 마오 시절에 있었던 복지마저 걷어치웠다. 마오로부터 정당성을 찾는 것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창사 박물관을 찾았을 때 마침 예술가들의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중 셰샤오저(謝曉澤)의 ‘밤의 노래(夜曲)’ 연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차들이 뒤집혀 있고, 특히 권위의 상징인 공안 경찰차가 두 대나 쓰러져 있었다. 2011년 6월 6일 차오저우(潮州)와 6월 10일 정청(增城) 사건을 그린 것이었다.
마오가 꿈꾸던 사회인가
차오저우 사건은 한 공장주가 노동자 61명의 월급 80만 위안을 주지 않은 데에서 시작됐다. 한 노동자가 2000위안의 월급을 달라고 요구하다 다쳤으며, 그의 아들 역시 폭행당했다. 200명의 이주노동자가 항의하다가 진압됐다.
정청 사건은 정부가 고용한 보안요원들이 노점을 단속하다가 쓰촨 출신 20세의 임산부를 거칠게 다루고 그녀의 남편을 폭행하며 벌어졌다. 1000여 명의 이주노동자가 가세하는 등 시위 군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살포했고, 군중은 경찰차를 뒤집고 지방정부 사무실을 불 지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중국 언론들도 쉬쉬하며 넘어간 사건이 창사 박물관에 전시물로 버젓이 걸려 있다는 게 놀라웠다. 창사 박물관은 마오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마오의 서예 작품, 마오의 초상, 마오의 동상, 마오와 양카이후이(楊開慧)의 살림집을 자랑스럽게 전시한다. 그런 곳에서 이토록 정부 비판적인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니! 박물관은 묻는 듯했다. ‘노동자의 임금을 떼어먹은 자본가는 멀쩡하고, 체불 임금을 달라고 정당한 요구를 하는 노동자들은 진압되는 사회, 어린 임산부마저 거칠게 다루는 공안, 이들이 마오 주석이 꿈꾸던 사회인가.’
마오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기보다 마오의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박물관. 불의에 비타협적인 후난인의 정신, 백절불굴의 의지는 오늘도 강렬하게 살아 있다. “후난인이 모두 죽지 않고서는 중화국가가 진실로 망했다고 말할 수 없다”던 양두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8월 호 산시성
◇북방 선비의 기풍 탐욕 앞에 흔들리다
晉 중원의 방패
산시(山西)성은 옛 중국의 ‘북방한계선’으로 진문공 때 춘추시대의 패자가 되고, 명대(明代)에 중국의 ‘월스트리트’ 기능을 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시성은 탐욕스러운 석탄 개발로 민중의 삶을 외면한 부끄러운 얼굴을 내보인다.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의 먹자골목 식품가.
“‘인디아나 존스’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
산시성 다퉁(大同)의 윈강석굴(雲崗石窟)을 보고 미국인 친구가 말했다. 산을 깎아 만든 석굴에 자리한 거대한 불상은 정말 모험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윈강석굴은 스케일이 클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헬레니즘 예술, 인도의 간다라 예술, 북방 선비족의 기풍이 표현 양식에 녹아 있어 매우 개성적이다.
산시는 어떻게 이토록 개성적인 문화를 갖게 됐을까. 산시는 옛 중국의 북쪽 끝이다. 중국의 오악(五岳) 중 북악 항산(恒山)이 산시에 있다. 중원의 북방 영역이 산시성에서 그친다. 매서운 겨울바람 삭풍(朔風)이 부는 삭주(朔州)가 산시의 북쪽에 있다. 기러기가 오가는 길목인 안문관(雁門關), 당태종의 딸 평양공주가 낭자군을 거느리고 지켰다는 낭자관(娘子關) 등 만리장성의 중요한 관문들이 산시성에 즐비하다. 즉, 산시는 옛 중국의 최북단이며, 산시 북쪽의 만리장성은 중국의 북방한계선이었다.
한 지역의 끝은 다른 지역의 시작이다. 산시 제2의 도시 다퉁에서 차로 서너 시간만 가면 내몽골의 성도 후허하오터(呼和浩特)가 나온다. 따라서 산시는 다양한 유목민족, 이민족들과 한족이 만나며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민족과 전쟁도 잦지만 교류도 잦았던 산시는 문화 융합을 통해 중원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모든 게 어중간하다
산시성의 약칭은 ‘나라 이름 진(晉)’이다. 산시성은 태행산(太行山)의 서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고, 진(晉)나라는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 진문공(晉文公)이 이끌던 강국이다. 즉 산시성의 약칭 ‘진(晉)’은 태행산 호랑이 진나라의 영광을 추억하는 이름이다.
산시성은 산악지역이다. 이웃인 산시(陝西)성 역시 산 많기로 유명하지만 중심부는 비옥한 관중평원이다. 그러나 산시(山西)는 성 전체가 황토고원이다. 산과 구릉이 전체 면적의 80%가 넘는다. 이백은 ‘길을 가기 어렵구나(行路難)’에서 산시의 추운 겨울과 험난한 지형을 노래했다.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이 막고, 태행산을 오르자니 눈발이 하늘을 가리네(欲渡黄河冰塞川,將登太行雪滿山).”
중국에서 산 안의 분지로 유명한 성은 쓰촨, 산시(陝西), 산시(山西)다. 산 높고 분지 넓기로 쓰촨이 으뜸이고, 산시(陝西)는 중간이며, 산시(山西)가 꼴찌다. 나는 새조차 넘기 힘든 험준한 산 안에 거대한 분지가 있는 쓰촨은 폐쇄적이고 독립적이다. 산시(陝西)는 쓰촨만큼은 아니나 역시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산이 높고 분지도 넓다. 함곡관을 보루로 삼고 관중평원을 근거로 삼은 산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산시(山西)의 태행산은 기어코 넘어가려면 못 넘을 것은 없지만, 막상 넘으려면 만만찮은 참 애매한 높이다. 분지 역시 내부의 인구를 적잖게 유지할 수 있긴 해도 쓰촨과 산시의 생산력에는 훨씬 못 미친다. 어중간한 산과 어중간한 생산력. 이것은 산시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시의 이웃 역시 화려하다. 동쪽에는 태행산맥을 사이에 두고 산둥성, 서쪽에는 진진대협곡 너머로 산시(陝西)성이 있다. 남쪽에는 중원 허난성, 북쪽에는 내몽골자치구가 있다. 춘추전국시대로 말하자면 험준한 산의 양쪽에 강국 제(齊)와 진(秦)이 있고, 남북으로 중원의 농경민족과 북방의 유목민족을 잇는 것이다.
초기 산시 일대에는 황하중류 평지의 농경민족인 화하족과 구별되는 유목민족 융적(戎狄)이 살았다. 수많은 산속에 여러 군소집단이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산으로 나뉜 탓에 통일국가의 형성은 융적이 아닌 화하족의 몫이 된다.
산악국가 어드밴티지
진(晉)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장난으로 탄생했다. 주 무왕의 아들 성왕이 친구인 숙우와 놀다가 “그대를 제후로 봉하노라”라고 농담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관은 “천자는 실언을 할 수 없다”며 숙우를 제후로 봉해야 한다고 했다. 성왕이 어쩔 수 없이 숙우에게 갓 차지한 당(唐)의 영토를 주면서 진나라가 생겼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재벌 2세가 친구에게 “너 상무시켜줄게”라고 농담한 것이 화근이 돼 술상무를 맡긴 꼴이다.
믿거나 말거나의 탄생 설화지만 한 가지 함의는 분명하다. 당시 산시는 중원에 그다지 중요한 땅이 아니었다. 산시는 북방의 산악지대로 생산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전투 종족’인 북적·서융과 직접 맞닿아 있어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진나라가 발원한 진청(晉城)시는 산시성의 남부이며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鄭州), 천년고도 뤄양(洛陽)의 바로 위쪽에 있다. 진청시의 별명은 ‘중원의 울타리(中原屛翰).’ 진나라는 태생적으로 중원의 방패였다.
그러나 산악지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중원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진을 제어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거친 산악지형에서 융적과 부대끼며 자라난 진인(晉人)은 강인한 전사였다. 주위에 득시글거리는 융적은 귀찮은 적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용병이요, 명마를 공급해주는 납품업자이기도 했다. 강한 전사와 명마, 험한 지형은 진나라를 군사강국으로 만들었다. 진후는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우월한 점이 세 가지나 있는데 적들이야 하나라도 있소? 우리의 지형은 험하고, 말(馬)은 믿을 만하며, 초나라나 제나라처럼 난리가 많지도 않소.”
평원국가는 백성이 모이기도 쉽지만 떠나기도 쉽다. 공자·맹자 등이 선정(善政)을 강조한 것은 도덕적 이상주의라기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바른 정치를 베풀면 사방에서 백성이 몰려든다. 인구는 곧 국력이다. 늘어난 인구는 국력을 강하게 하고, 더 좋은 정치를 하면 더 많은 백성을 불러오는 선순환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강한 국력에 방심해 정치를 잘못하면 그 많던 백성이 순식간에 떠나버려 국력이 약해진다.
중국의 오디세우스
▲산시성의 항산. 중국의 오악(五岳) 중 북악에 해당한다.
반면 산악국가는 정치를 잘하든 못하든 백성이 찾아오기도 어렵지만 떠나기도 힘들다. 평원국가의 인구는 탄력적인 반면 산악국가의 인구는 비탄력적이다. 따라서 진나라는 가난했지만 거주민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진나라는 “땅의 힘을 최대한 뽑아내는 정책”으로 일약 강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진나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장점을 살려 성장하다가 진문공 시대에 이르러 북방의 초강대국이 된다. 진문공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왕위 싸움에 휘말린 그는 43세 때부터 19년이나 천하 각지를 방랑하는 망명객 노릇을 했다. 62세 때 비로소 귀국해 왕좌를 차지하고 불과 9년 만에 진나라를 북방의 최강국으로 키워낸다. 대기만성의 전형이요, 늦깎이 인생의 희망이다.
진문공의 긴 방랑과 재건 스토리는 영락없이 오디세우스를 닮았다. 오디세우스는 신화 속 인물이지만 진문공은 실제 인물이라 더욱 생생하다. 게다가 진문공은 북방인답게 희로애락을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방랑하던 진문공이 배가 고파 농부들에게 밥을 구걸하자 농부는 밥이 아니라 흙을 그릇에 담아줬다.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우리처럼 가난한 농부에게 밥이 어딨어? 사지 멀쩡한 놈이 밥 구걸하러 다니지 말고 열심히 땅을 일궈 먹고 살아라.”
깡촌 무지렁이들의 푸대접에 잔뜩 화가 난 진문공이 이들을 패려 하자 신하 호언이 말린다. “백성들이 땅을 바치겠다니 매우 상서로운 일입니다.” 이 일화에서 보듯 진문공은 그 자신이 특출 나게 어질고 지혜롭진 않았지만,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을 곁에 두고 그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 자신도 매우 현명해져서 단기적 이익을 탐하는 신하들을 대의명분과 실리로 설득하는 면모를 보인다.
진문공은 어떻게 단기간에 패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방랑하며 여러 나라를 두루 살펴본 진문공은 나라의 체질에 적합한 운영 방식이 모두 다름을 깨달았다. 진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것은 제나라다. 제나라는 드넓은 산둥평야를 황하가 적시고 황해가 감싸주는 풍요로운 나라였다. 따라서 명재상 관중은 전면적인 경제 개혁을 통해 부유함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첩첩산중 속 빈약한 황토고원이 전부인 진나라가 제나라를 따라 하다가는 뱁새가 황새 흉내 내다 가랑이 찢어지는 꼴이 된다. 진나라는 아껴야 잘산다. 그래서 제환공이 부유한 나라를 만들었다면, 진문공은 검소한 나라를 만들었다. 둘의 대비를 묵자가 잘 표현했다. “(올바른) 행동은 의복에 있지 않소. (…) 옛날에 제환공은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르고 좋은 금(청동) 칼에 나무 방패를 들고도 나라를 잘 다스렸고, 진문공은 포의에 양가죽 옷을 입고는 허리에 띠를 둘러 (볼품없는) 칼을 꽂고도 역시 나라를 잘 다스렸소.”
애초에 내부 생산력을 기대하기 힘들다면 나아갈 길은 군사력으로 외부의 재부(財富)를 차지하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진문공은 절약을 통해 확보한 예산을 군대에 투자했다. 이미 군사강국이던 진은 진문공의 군제 개혁을 통해 최강국으로 거듭난다. 기존의 2군(상·하군)체제를 5군3행 체제로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말을 조달하기 쉬운 이점을 극대화해 압도적인 전차 병력을 갖추고 이를 유기적으로 보완·엄호하는 보병부대를 확충했다.
진(晉)과 진(秦)의 대결
▲타이위안에 흐르는 분하의 노을 풍경
▲평야오 고성에서 광장무를 추는 주민들
▲윈강석굴의 불상.
그러나 진문공이 정말 뛰어난 것은 막무가내로 군사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겼다는 점에 있다. 주(周) 양왕이 왕위 다툼으로 동생에게 쫓겨났을 때 진문공은 양왕이 천자의 자리를 다시 찾게 도와줬다. 왕실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황하 북부의 노른자 같은 땅을 얻었다. 또한 초가 중원을 위협하자 중원의 연합군을 이끌고 초군을 대패시켰다. 성복대전을 통해 진문공은 남방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원을 수호해(尊王攘夷)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된다.
당시 진(秦)의 지도자는 목공이었다. 진목공은 진문공의 훌륭한 전략적 파트너였지만, 결국 천하를 두고 다투는 동상이몽의 처지였다. 진문공이 죽자마자 진목공은 문상 사절도 보내지 않고 바로 중원의 정나라를 기습공격하려 했다. 진목공은 진나라를 신흥 강국으로 만든 탁월한 군주였지만, 이때만큼은 매우 경솔했다.
진나라와 정나라는 대단히 멀다. 시안에서 정저우까지는 오늘날 기차로도 예닐곱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제대로 기습할 수 없었다. 정나라가 진나라에 비해 약하다고는 하나 기습전이 아니면 단숨에 함락시킬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나라도 아니었다. 진군은 먼 길을 왔기에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수는 없으니 애꿎은 약소국 활나라를 쳐서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런데 활나라는 진(晉)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였다.
진(秦)은 진(晉)에 큰 잘못을 범한 노릇이었다. 문상도 오지 않고, 길을 빌려달라는 말도 없이 멋대로 진군해 활나라를 공격했다. 진(晉)은 효산에 매복해 있다 회군하던 진군(秦軍)을 몰살했다. 승패만 확인되면 싸움을 멈추던 춘추시대에 벌어진 최초의 몰살전이었다. 당시 진(秦)의 병력은 전차 300대에 2만 대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목공은 체면도 잃고 소중한 병력도 잃었다. 다만 진목공은 이를 거울삼아 더욱 훌륭한 정치를 폈으니 그 역시 명군은 명군이다.
진(晉)은 성복대전으로 초를 격파하고, 효산대전으로 진(秦)을 격파한다. 연달아 남방과 서방의 강대국을 패배시켜 진의 군사력이 당대 최강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성공은 교만을 낳는다. 최강의 군사력에 지형이 험해 외부의 근심이 없으니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소모전으로 자멸한 三晉
더욱이 산시의 숙명인 산악지형이 문제를 더욱 심화했다. 산둥성과 산시성을 가르는 태행산맥은 산줄기가 매우 복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진 산은 산시성 내부조차 복잡하게 갈라놓는다. 진(秦)은 관중평야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했지만, 진(晉)은 세 귀족가문이 나라를 셋으로 갈랐다(三家分晉). 여기서부터 두 나라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진(秦)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만, 진(晉)은 진(秦)의 첫 희생물이 된 것이다.
분열 초기에 삼진(三晉)의 각개약진은 꽤 화려했다. 삼진, 즉 조·위·한(趙魏韓)은 모두 당당히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된다. 조의 무령왕(武靈王)은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胡服騎射)’ 전대미문의 개혁을 단행해 군사강국의 전통을 이어갔다. 위는 명장 오기를 등용해 진(秦)과 76전 64승 12무의 무패 싸움을 벌여 진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은 삼진 중 가장 약했지만, 그래도 20만 대군과 명검, 강궁을 보유했으며 산시 남부와 중원의 요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삼진은 가장 위험한 적인 진(秦)을 무시하고 사방팔방으로 전쟁을 벌였다. 순간적인 이익을 탐하다 장기적인 우방과 친구를 모두 잃었고, 전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영토와 백성을 늘리지 못하고 오히려 낭비하는 소모전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승리하면 할수록 오히려 국력이 약해졌다. “군사를 좋아하는 자는 망하고, 승리를 이로운 것으로 여기는 자는 욕을 당한다”는 손빈의 말은 삼진의 약점을 정확히 꼬집는다.
당시 선비들은 “삼진이 합치면 진이 약해지고 흩어지면 진이 강해지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라고들 했다. 삼진이 함곡관을 틀어쥐면 진은 중원으로 갈 수 없다. 그렇기에 진과 삼진은 살육의 전국시대에서도 가장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진의 전신(戰神) 백기는 장평대전으로 조나라를 격파하고 40만 병사를 모두 생매장해버린다. 이때의 흔적이 산시의 ‘시골갱(尸骨坑, 시체와 뼈의 구덩이)’과 ‘고루묘(骷髏廟, 해골을 제사 지내는 묘당)’에 남아 있다.
조나라는 이후 결코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한다. 이때의 원한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산시요리 중에는 ‘츠바이치(吃白起)’가 있다. ‘백기를 먹는다’는 뜻으로 두부를 물에 삶아 먹듯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는 원한이 투영됐다.
훗날 이연은 산시의 고대왕국 이름을 따서 당(唐) 왕조를 열고, 분하를 타고 내려가 속전속결로 산시(陝西)를 정복한 후 천하를 통일한다. 진에게 당한 삼진이 다소나마 설욕을 한 셈이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관우의 상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참 좋아하는구나.” 중국 친구는 답했다. “응, 관우가 돈을 가져다준다고 믿거든.” 엥, 이게 웬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관우는 돈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인물이었는데?
財神이 된 武神
관우는 평생 떠돌이 신세이던 유비를 섬겼기에 그 자신도 떠돌이 신세였다. 정사 삼국지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란 표현을 관우와 장비, 단 두 명에게만 쓴다. 그토록 뛰어난 무예에 인품까지 훌륭하니 당대의 실력자 조조는 관우를 부하로 삼고 싶어서 관우가 말을 타면 금을 내리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걸어줬다. 높은 관직에 보물, 미녀를 아낌없이 퍼부어댔건만 관우는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떠돌이 유비를 찾아 만리길을 떠난다. 관우는 이처럼 부귀영화를 저버리고 충성과 의리를 지킨 인물이다. 그런 관우가 왜 돈을 가져다준다는 말인가.
관우는 산시 출신이고, 산시 출신의 상인집단인 진상(晉商)은 관우를 숭배했다. 명대 10대 상방 중 진상은 단연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고, 여타 상인들이 진상을 벤치마킹하며 진상의 수호신 관우마저 따라 모셨다. 관우가 원래 가진 좋은 이미지에 돈을 가져다준다는 믿음까지 더해지니 관우는 졸지에 무신(武神)에서 재신(財神)이 된 것이다. 오른손에 청룡언월도, 왼손에 은자를 들고 있는 관우의 상은 매우 얄궂어 보인다.
산시의 지정학적 위치는 진상 형성에 큰 영향을 줬다. 명이 원을 북방으로 내몰고 중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몽골군은 여전히 막강했다. 정통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親征)했다가 몽골군에게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포로로 사로잡힌, 이 보기 드문 사건이 ‘토목의 변(土木之變)’이다. 명은 몽골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건축하고 변방 9개 진에 80만 대군을 주둔시켰다. 산시성은 다시 한 번 중국의 최전방으로 중요해졌다.
80만 대군이 소모하는 어마어마한 보급품을 감당하기 위해 명 조정은 상인을 활용했다. 이에 현지의 산시 상인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초기에는 식량 위주로 교역을 시작했지만, 곧 산시의 특산물인 소금, 철, 석탄, 비단 등을 다뤘다. 교역 품목과 범위는 점점 넓어져 진상은 전국적 상인으로 부상한다. 나중에는 국경을 넘어 몽골의 말과 중국의 차를 교역했다. 진상이 성장함에 따라 허베이, 몽골, 닝샤 등 인접 지역의 도시들도 교역 거점으로 발달했다. 그래서 “참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지역이면 어디든지 산시 상인이 있다”는 평판을 얻었다.
진상은 유통업뿐만 아니라 금융업, 물류업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진상의 표호(票號, 금융기관)는 예금, 대출, 어음 업무를 수행하는 은행이었다. 청의 도광제는 진상에게 ‘회통천하(匯通天下, 금융망이 천하를 관통한다)’ 편액을 내렸고,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8개국 연합군에게 쫓길 때 진상에게 40만 냥을 빌려 긴급 자금으로 썼다. 진상은 청 조정의 거의 모든 금전 출납을 총괄하며 재무부 기능까지 수행했다.
以義制利 상도덕
▲다퉁시 중국조각박물관의 관우상
▲평야오 고성에서 청나라 춤을 추는 무희들.
진상의 근거지 산시는 중국의 월스트리트였다. 명의 작가 사조제(謝肇淛)는 산시의 번영에 찬사를 보낸다. “아홉 군데의 변방 중에 다퉁 같은 곳도 그 번화함과 풍요로움이 강남 못지않았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이나 집기의 정교함이 다른 변방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다.”
산시의 핑야오 고성(平遙古城)은 명의 성벽이 잘 남아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성곽은 둘레 6163m, 면적 2.25㎢로, 한족 고성의 전통미를 뽐내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 지역을 더욱 빛내주는 것 역시 진상의 유산이다. 중국 최초의 표호인 일승창(日昇昌)을 위시해 많은 표호, 표국(票國, 운송기관)이 핑야오의 역사와 개성을 자랑한다. 교가대원에서 그 유명한 영화 ‘홍등(紅燈)’을 촬영한 이래 핑야오는 매우 인기 높은 사극·방송 촬영지가 됐다.
진상의 상도덕은 매우 윤리적이다. 진상은 진문공의 근검절약과 관우의 의리를 상도덕으로 승화시켰다. 척박한 환경은 강인한 생활력과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줬다. 잔머리를 굴리면 단기적인 이익은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인 이익은 바랄 수 없다. “똑똑한 사람은 작은 장사를 하고, 정직한 사람은 큰 장사를 한다.” 따라서 정도(正道)를 걷고 신용을 지키는 길이 최선이다. 동업자와의 의리, 고객과의 의리를 지켜야 장기적으로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진상은 ‘의로써 이를 제어한다(以義制利)’는 원칙 아래 “성실한 자세로 천하의 인재들을 모으고 의롭게 온 세상의 재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청 조정을 대표하던 진상은 청과 함께 몰락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앞에 청조의 신용도가 급락한 데다가, 서양식 근대 은행이 영업을 시작하자 시대에 뒤떨어진 표호는 쇠락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산시의 지역은행은 ‘진상은행(晉商銀行)’으로 진상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오늘날은 황량해 보이는 산시성이지만 아득히 먼 옛날에는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던 땅이었을 것이다. 식물이 탄화한 돌, 즉 석탄이 산시에 매우 풍부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석탄 매장량은 1145억t으로 전 세계 매장량의 12.8%이지만, 생산량은 46.9%, 소비량은 50.6%를 차지한다. 특히 산시의 석탄 매장량은 중국 전체의 3분의 1에 달한다. 중국은 석탄대국이고, 산시는 석탄대성[煤炭大省]이다.
중국의 에너지원 중 석탄의 비중은 76%로 압도적이다. 중국의 고속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것은 석탄이고, 따라서 산시는 중국 경제 발전의 숨은 공신이다. 산시인들은 말한다. “산시로 통하는 길이 막히면 베이징의 고귀하신 분들이 모두 얼어 죽는다.”
GDP 1만 달러의 그림자
그러나 석탄을 둘러싼 정황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산시의 ‘석탄부자(煤老板)’는 권력과의 유착, 무허가 채굴, 잦은 탄광사고, 졸부적 행태 등으로 진상의 후예답지 않게 이미지가 매우 나쁘다. 석탄부자는 탈세를 일삼고, 부동산을 싹쓸이하고, ‘황제의 기운’이 서린 고급차를 사기 위해 베이징까지 간다고 조롱받는다.
2009년 4월 상하이 모터쇼에 19세 여성이 세련된 옷차림과는 안 어울리는 마대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그녀는 주위의 관람객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후 촬영을 마치자 마대 가방에서 수천 위안의 지폐를 꺼내줬다. ‘상하이 모터쇼의 마대녀(麻袋女)’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그녀가 산시 석탄부자의 딸로 밝혀지자 석탄부자의 원체 안 좋은 이미지와 겹쳐 더더욱 공분을 샀다.
악덕 탄광주들의 광부 착취는 역사가 매우 길다. 이미 원나라의 희곡작가 관한경(關漢卿)은 악덕 탄광주를 “쪄도 흐물흐물거리지 않고, 삶아도 익지 않고, 방망이로 쳐도 깨지지 않고, 볶아도 터지지 않는, 동으로 만든 완두콩(銅豌豆)”이라 조소한 바 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사정이다.
석탄부자의 이윤은 원가 절감에서 나온다. 광부의 임금은 턱없이 낮고, 안전시설에 대한 투자도 매우 적다. 그 결과 탄광사고로 매년 2500여 명의 광부가 죽는다. 대형 탄광사고가 연달아 터진 2010년에는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격노해 광산 간부들을 갱내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간부들을 갱 안에 집어넣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전조치를 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민중예술가 장젠화(張建華)는 2007년 3월 한 달 동안 산시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움막 같은 숙소에서 20여 명이 함께 살면서 지하 800m의 막장까지 내려가 석탄을 캤다. 그가 베이징에 급한 일이 생겨 탄광을 뜬 사이 매몰사고가 발생해 같은 방을 쓰던 20대 청년이 죽었다. 그러나 이 일은 뉴스에 나지 않았다. 장젠화는 ‘광부 시리즈’를 완성하며 말했다. “해마다 1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 1만 달러를 향해 급성장하는 GDP.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캐낸 석탄으로 중국의 불이 켜진다.”
“이렇게 사는 게 두려워요”
석탄 자체도 문제가 있다. 에너지 효율이 낮을뿐더러 연소될 때 많은 오염물질을 배출한다. 바다 건너 한국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미세먼지의 주원인은 중국의 석탄 대량 소비다. 산시의 린펀(臨汾)은 세계 최악의 환경오염 도시이자 탄광사고 다발 지역으로 악명이 높다. 2010년 한 미국 매체는 세계 9대 환경오염 도시 중 린펀을 1위로 꼽으며 말했다. “린펀은 막 세탁한 옷을 입더라도 금방 새까맣게 오염될 뿐만 아니라, 하루 정도 지내면 담배 3갑을 피우는 정도의 유독가스를 흡입하게 된다.”
바로 이 린펀에서 환경오염을 고발한 사람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린펀 출신의 아나운서 차이징(柴菁)은 중국의 환경오염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Under the Dome(柴菁霧霾調查)’을 자비로 제작했다. 차이징은 대기오염의 원인을 조사하다가 그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다. 공장을 돌리는 것은 석탄이다. 장쑤성은 30㎢마다 한 개의 발전소가 있고, 상하이는 1㎡당 10kg의 석탄을 쓴다. 1970년대 이후 중국의 폐암 환자는 30년간 465%나 증가했다.
석탄의 대량 소모로 고품질탄은 귀해지고 저품질탄이 많이 사용된다. 저품질탄은 탄화가 덜 돼 태우면 검은 매연이 훨씬 많이 발생한다. 이보다도 못한 저질탄은 발암물질까지 배출한다. 유럽에서는 석탄을 세척한 후 사용하지만, 중국은 세척량이 절반도 안 된다.
차량이 내뿜는 오염물질도 상당하다. 베이징에 오가는 3만 대의 불량 화물차는 엄청난 오염물질을 뿜어댄다. 그러나 당국은 화물차가 베이징 시민의 생계를 쥐고 있기에 은근히 눈감아준다. 화물차의 환경보호장비를 규제하면 물류비가 상승하고 결국 베이징 물가가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공해의 악취는 돈의 악취다.
차이징은 다큐멘터리에서 중국 정부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대기오염과 암 발병률의 관계를 알았지만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이런 문제를 수수방관했다고 고발했다. 중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환경오염 관계단체만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관계단체의 요건을 충족하려면 5년 이상 환경보호사업을 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통제와 관여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다. 결국 중국 환경오염은 정치, 경제, 사회제도, 사법기관 등이 모두 얽히고설킨 총체적 문제다.
중국 정부가 당돌한 문제 제기를 허용할 리 없다. 차이징의 다큐멘터리는 발표된 지 이틀 만에 1억5000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곧바로 삭제됐다.
중국 정부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고 말한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사실상 인민은 그저 정부가 베풀어주는 봉사를 받기만 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주체적으로 권리를 요구할 자격 같은 건 없다. 매사에 투명함이 없는 정부는 석탄처럼 시커멓고 속을 알 수 없다. 차이징이 다큐멘터리에서 한 말이 새삼스럽게 심금을 울린다.
“사실 저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그저 이렇게 사는 게 두려워요.”
광업에서 관광업으로
중국 정부는 의뭉스럽긴 해도 바보는 아니어서 그 나름대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개시했다. 가정의 개별난방을 중앙난방으로 바꿔 석탄을 쓰더라도 오염을 한결 덜 발생하게 했다. 아직 미흡하지만 환경오염 규제도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중국의 변화에 발맞춰 산시 역시 상당히 변했다. 전에는 산시성 전체가 탄광촌이다시피 했지만 이제 웬만한 곳에서는 석탄과 관련된 것을 보기 힘들다. 다퉁시는 시내 중심에 있던 석탄 작업장을 없애고 가짜 옛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시안과 핑야오가 옛 모습을 잘 보존해서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리는 것을 보고, 아예 성벽과 옛 거리를 새로 만드는 중이다. 광업에서 관광업으로 산업의 중심을 옮기려는 산시의 염원이 읽힌다.
검은 눈물 흘리는 관우의 고향
옛 중국 최북단 산시성
산시성의 선조들이 남긴 것은 ‘가난할수록 정직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석탄대국 중국의 석탄대성(石炭大省)일 뿐이다. 석탄 부자는 열악한 탄광에서 죽어나가는 광부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의리의 상징 관우의 고향이되 관우답지 않은 모습이다. 〈관련기사 420쪽〉
▲산시성 항산의 현공사(懸空寺).
절벽에 붙여 지어 허공에 매달린 듯 보인다
▲평야오 고성에서 청나라 시대 복장의 순라꾼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돋운다.
▲명대의 성벽이 잘 보존된 평야오 고성.
▲평야오 고성의 경극 공연
▲중국 오악 중 북악에 해당하는 항산
▲평야오는 인기 촬영지여서 중국 연예인들을 곧잘 볼 수 있다.
▲산시성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윈강석굴. 1km의 석굴에 5100여 개 불상이 조각돼 있다.
◆9월 호 허베이성
◇특명! 천하의 중심을 보위하라
북방과 중원의 접점 허베이성
허베이는 유목민족의 근거지 북방과 가깝고, 한족 문화권으로 경제와 문화가 발달했으며, 남방 공략의 전초기지였다. 원나라 이후 800년 동안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이었고, 허베이는 ‘800년 수도권’이었다. 천하의 중심을 보위하기 위해 허베이인들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다. 2200년 전 진시황에게 칼을 겨눈 협객의 기개는 전설로 남았다. 허베이성 산해관의 자오산 장성(角山長城).
▲허베이성 산해관의 자오산 장성(角山長城).
허베이 평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다.
▲산해관 항구의 환경미화원. 바다에서 청소하는 모습이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1780년 건륭제 70세 생일 축하를 위해 방문한 판첸라마 6세를 위해 지은 행궁 수미복수지묘.
침전 꼭대기에선 황금 용이 황금 기와를 타고 날아오르려 한다.
▲천하제일관 산해관
▲열하 피서산장. 청나라 황실 피서지이자 연합군사훈련의 중심지였다
▲1626년 누르하치의 13만 대군을 물리친 명나라 원숭환 장군상이 산해관을 지킨다.
베이징을 위한 베이징에 의한
冀 - ‘800년 수도권’의 비애
허베이(河北)성은 중원의 젖줄 황하의 북쪽임을 뜻한다. 남부엔 드넓은 기중(冀中)평원이 펼쳐지고 북부의 산과 고원은 내몽골의 고원과 이어진다. 중원과 북방이 만나는 땅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슬픈 운명을 살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청더(承德).
“외국인은 우리 숙소에 머물 수 없어요.”
“이름이 ‘국제’인데 외국인이 머물 수 없다니요?”
“개업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정부의 외국인 체류 허용 허가가 안 났어요.”
허베이 산해관 ‘국제’ 숙소의 주인은 ‘국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황당한 소리를 했다. 외국인과 내국인 요금에 차등을 둬 관광수입을 올리려는 꼼수는 아닌 듯했다. 같은 중국인이라도 티베트, 신장, 홍콩, 마카오, 대만 사람 역시 머물 수 없단다. 수도 베이징이 지척이라 베이징에 잠입하려는 불순분자(?)를 막으려는 의도로 읽혔다.
명나라 관료 기순이 산해관에 남긴 글을 보고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산해관은 베이징에서 가까운 동북지역의 중진(重鎭)이며 화이(華夷)를 구분하는 곳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펴 간사하고 포악한 자를 막고 강역을 굳게 하는 곳이다.”
수도 베이징을 지키고 보필하는 수도권 도시답다.
허베이(河北)성의 약자는 바랄 ‘기(冀)’자다. 허베이는 중원의 젖줄 황하의 북쪽임을 뜻한다. 허베이의 남부엔 드넓은 기중(冀中)평원이 펼쳐지고, 북부의 산과 고원은 내몽골의 고원과 이어진다.
허베이는 이렇게 중원과 북방이 만나는 땅이다. 허베이의 약칭인 ‘기(冀)’를 풀어보면 ‘북방 유목민족과 중원 농경민족이 함께(共) 살아가는 북녘(北) 땅(田)’이 된다. 중국어로 기방(冀方)은 중국 북방을 뜻하니, ‘기(冀)’ 자를 이 ‘이민족(異)이 사는 북방(北)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三祖聖地
중원의 농경민과 북방의 유목민이 부딪치는 곳이다 보니, 허베이에는 예부터 전쟁이 많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서 황제는 판천(阪泉)에서 염제를 격파하고, 탁록(涿鹿)에서 치우를 꺾었다. 두 격전의 현장인 탁록현은 중국의 세 시조, 황제·염제·치우의 자취가 깃들었다 해서 삼조성지(三祖聖地)로 불린다.
우임금은 치수 사업을 하며 천하를 아홉 주(九州)로 나눴다. 이때 기주(冀州)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 기주는 주로 산시(山西)성의 영역이라 오늘의 영역과는 크게 달랐고, 한나라 이후 허베이의 비중이 높아졌다.
춘추전국시대 허베이 남부는 북방의 강자 진(晉)나라의 영역이었고, 북부는 연(燕)나라 영역이었다. 진이 셋으로 쪼개졌을 때 조(趙)나라는 허베이의 한단(邯鄲)을 수도로 삼았다. 촌사람이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어설프게 따라 하다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고사성어 ‘한단지보(邯鄲之步)’는 한단이 얼마나 풍요롭고 세련된 문화의 중심지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진(晉)·조(趙)부터 중원에 비해 이민족의 색채가 짙었으니 그보다 더 북쪽에 있던 연나라는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먼 훗날 연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 조수인 진무양이 겁을 먹고 벌벌 떠는 바람에 산통을 깼다. 형가는 진시황의 의심을 풀기 위해 이렇게 변명했다.
“북방 오랑캐 땅의 천한 사람인지라 천자를 뵌 적이 없어서 떨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연이 전국시대 말기까지 오랑캐 취급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起伏의 역사
연의 역사는 기복이 심했다. 연의 명군 소왕(昭王)이 즉위하기 전 연의 정치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였다. 오죽하면 반전주의자인 맹자마저 제나라 선왕에게 연을 쳐 연의 백성들을 구하라고 했을까. 제나라 선왕은 과연 두 달도 안 되는 사이 연을 정복했지만 연의 피폐한 상황을 구제하지는 않았다. 연의 백성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 제 선왕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는데 왜 반란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하자, 신하 순우곤은 제 선왕의 정치가 실패했음을 일깨워줬다.
“왕께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시나, 사람이란 굶어도 죽고 얼어도 죽으니 굳이 칼날로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록 혼란한 상황에서 즉위한 소왕은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힘을 기른 후 제(齊)를 쳤다. 이때, 연의 명장 악의는 제의 7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동방의 강대국 제는 단 2개의 성만 남긴 채 5년간 사실상 멸망 상태를 유지했다. 연 소왕이 등용한 또 한 명의 명장 진개(秦開)는 동호(東胡)를 공격해 만주의 1000여 리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소왕이 죽자마자 연의 전성기는 거짓말처럼 끝난다. 악의를 시기한 혜왕이 악의를 몰아내자 제는 순식간에 전 영토를 수복하고, 연은 다시 약소국이 됐다. 이후 연의 행보는 한심했다.
진(秦)이 장평대전에서 조(趙)의 40만 대군을 몰살하자 연은 조에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한편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신이 “조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었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니 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연은 이익에 눈이 멀어 조를 침공했다. 조는 이미 장정의 대부분을 잃은 데다 5대 1의 전력으로 위태롭게 싸워야 했지만, 조의 명장 염파는 연을 격파하고 수도 계(薊, 베이징)를 포위했다. 연은 5개 성을 내주고서야 휴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염파가 실각하고 방난이 후임자가 되자, 연의 장수 극신은 “방난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가 방난에게 전사하고 2만 군사를 빼앗겼다. 연은 신의를 잃었고, 이익은커녕 손해만 보며 나라가 기울어갔다.
참새가 죽어도 짹한다던가. 연은 멸망의 위기 앞에서 진시황 암살을 꾀했다. 진(秦)이 본격적으로 사방을 정복하며 천하통일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진이 연을 치는 것은 화로의 숯불이 가벼운 기러기 깃털 하나를 태우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의 태자 단이 호걸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의뢰하자 형가는 비장하게 노래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바람소리는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사나이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협객의 아이콘
형가는 안타깝게도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고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형가는 칼 한 자루로 강포한 권력과 맞서는 ‘협객(俠客)의 아이콘’이 됐고, 그의 노래는 ‘비분강개의 노래’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최약체로서 최강의 심장을 대담하게 노린 허베이는 ‘비분강개하는 장사의 고향’으로 명성을 떨쳤다.
허베이 협객은 후한 말 난세에 빛을 발했다. 일세의 효웅(梟雄)인 유비와 연인(燕人) 장비는 탁현 출신이고, 조운은 상산(常山) 출신이다. 굳센 의리로 똘똘 뭉친 이들은 맨 몸으로 당대의 군웅과 치열히 싸웠고 끝내는 나라를 연다.
다만 ‘흙수저’이던 이들이 명성을 떨치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허베이를 지배한 영웅은 ‘금수저’인 원소였다. 원소는 후한 말 최고의 명문인 원씨 가문의 수장인 데다 자신의 능력도 뛰어나 당대 군웅 중 으뜸이었다. 그런 원소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 허베이다. 청년 원소는 절친한 친구인 조조에게 자신의 야망을 밝혔다.
“나는 허베이를 근거로 하여, 연(燕)과 대(代)로 울타리를 삼고, 북으로 사막에 흩어져 사는 무리까지 아우른 뒤에 다시 남쪽으로 천하를 다툴 작정이네.”
그러자 조조는 당차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슬기와 힘을 모아 도리에 맞게 다스려 가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하필 땅의 위치나 넓이겠는가.”
말은 통쾌했지만, 원소는 확실히 당대 최강의 군벌이었다. 기주에서 착실히 힘을 기른 원소는 물량과 보급에서 조조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원소의 참모 허유의 기밀 정보 덕분에 조조는 원소의 보급을 끊고 승리한다. 승전 후 원소 진영에서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건함이 나오자 조조는 문서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태워버리며 말했다.
“원소가 강성할 때에는 나조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마음이 흔들렸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느냐?”
그만큼 조조의 승리는 본인도 믿기 힘든 기적이었다.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인 관도대전에서 이긴 조조는 원소 대신 중국의 최강자로 자리를 굳혔다.
안에서 무너진 산해관
▲산해관 부근의 연새호(燕塞湖). 댐이자 저수지, 관광지 역할을 한다.
중국의 역사는 중원 중심의 역사다. 난세가 끝나자 허베이는 동북 변방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이 강성해지면 중원을 뒤흔들 거라던 곽가의 예측은 5호16국과 요·금·원 등 유목민족의 제국을 통해 실현된다.
북방 이민족들이 패권을 잡자 허베이는 매우 중요해진다. 허베이가 유목민족의 근거지인 북방과 가깝고, 한족문화권으로서 경제와 문화가 발달했으며, 남방 공략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후 현재까지 800년 동안 줄곧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이 됐고, 자연스레 허베이는 ‘800년 수도권’이었다.
수도는 나라의 심장이다. 단 한순간도 기능이 멎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도권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의 방패가 돼야 했다. 산과 바다를 연결하며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베이징을 보호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천하제일관 산해관(天下第一關 山海關)이 단적인 예다. 산해관은 동쪽으로는 태양을 맞이하고(旭迎), 서쪽으로 베이징에 조배를 드리며(京朝), 남쪽으로 바다와 통하며(通海), 북으로 첩첩이 이어진 산을 바라보는(巒觀) 요충지다. 연암 박지원은 산해관을 보며 찬탄했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 크기를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르며, 산해관 밖의 장대(將臺)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모른다.”
한창 떠오르는 태양 같던 기세의 청나라도 자력으로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 산해관이 청의 맹공을 버티는 동안, 산시(陝西)의 풍운아 이자성은 민란을 일으키고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어이없게도 이자성은 베이징을 불 지르고 약탈해 민심을 잃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청군을 맞아들인 후 이자성에게 패배를 안겼다. 산해관을 넘은 청군은 중국 전역을 석권한다. ‘위엄이 중국과 오랑캐를 누른다(威鎭華夷)’던 산해관은 허무하게도 내부에서 무너졌다.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신하들은 장성을 수리해 베이징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반대했다.
“역대 중국 왕조 모두 백성을 고생시켜가며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 내란이 일어나 망했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두가 합심하면 견고한 성과 같이 허물어지지 않는다(衆志成城))는 말처럼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국토 수호라는 주장이었다. 영명한 황제 강희제는 아름다운 대의명분과 실질적인 대안을 조화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겨 우리에게도 친숙한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바로 강희제의 만리장성이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제들이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피서를 즐기던 곳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피서산장은 국제외교와 합동 군사훈련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피서산장을 보며 말했다.
다민족 연합국
▲자오산 장성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객들.
▲티베트 포탈라궁의 축소판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 청 황실이 여러 종교를 포섭하려고 지은 외팔묘(外八廟) 중 최대 사원이다
▲열하 피서산장의 독서인.
“지형적으로 험하고 중요한 곳을 차지해 몽골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변방 북쪽의 깊숙한 곳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나서서 오랑캐를 막으려는 속셈이다.”
강희제는 48번이나 몸소 사냥에 참가했다. 이때의 사냥은 유희가 아닌 군사훈련이라 규율을 강조했다.
“1년에 두 차례 사냥을 하는 것은 오로지 무술을 연마하기 위함이니 병력 동원과 다를 바 없으며, 사냥터의 규율 또한 엄정해야 한다.”
비록 황족이라도 규율을 지키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면 처벌을 내렸다. 강희제가 움직이면 수많은 왕공대신이 함께 움직였고,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양한 민족 역시 함께 사냥에 참가했다. 170개 천막은 내성이 되고, 250개 천막은 외성이 되는 장관이 펼쳐졌다. 사냥은 북방 유목민족에게 청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다국적 합동 군사훈련인 동시에 이곳으로 찾아온 북방인들과 교분을 나누는 친선 외교 무대였다.
강희제는 청에 충성하는 한 타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존중했다. 현판에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개 국어를 병기해 청이 다민족 연합국임을 알렸고, 라마교를 존중해 몽골족과 티베트족의 환심을 샀다. 피서산장엔 중국식 별궁·원림(苑林)과 유목민족의 천막이 공존했으며, 산장 주변에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뜬 보타종승지묘 등 외팔묘(外八廟)를 세우고 라마승을 국사(國師)로 대접했다.
이처럼 피서산장은 정치, 군사, 외교, 종교, 문화의 총화였다. 그러나 중국의 화려함 이면에는 항상 민초의 고통이 있다. 열하가 흐르는 청더(承德)는 원래 산골짜기 작은 마을인데 이 곳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피서산장이 차지했다. 황제의 산장행이 잦아지자 산장 주변에는 황제를 모시는 귀족, 관료, 몽골의 왕공 귀족이 살 저택이 들어섰다. 자연스레 현지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서 밀려나 좁고 복작복작한 빈민굴에서 살아야 했다.
直隸의 서글픈 운명
건륭제는 총명하긴 했지만 사치향락을 좋아했고, 강희제만큼 민초의 고통을 헤아리지는 않았다. 더욱이 청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황제라 자만심이 지나쳤다. 산업혁명에 성공하고 세계 최강을 향해 달려가던 영국의 대사 매카트니가 1793년 건륭제를 만난 후 통상교역을 요청하자 건륭제는 “천조(天朝)에는 없는 것이 없어 교역 따위를 할 필요가 없다”며 거절했다.
매카트니는 청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남겼다.
“청 제국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일류 전함에 비유할 수 있다. 과거 150여 년 동안 이 전함이 침몰하지 않은 것은 능력 있고 경각심이 강한 일부 군관들이 지탱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갑판 위에서 지휘를 맡을 인재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기율과 안전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매카트니의 예언은 50년도 안 돼 1840년 아편전쟁으로 실현됐고, 다시 20년도 안 돼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한다. 이때 함풍제는 피서산장으로 도망쳤다. 게다가 외교와 전쟁을 잊고 음악과 연극에 빠져들며 현실도피를 하다가 피서산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1912년 청은 멸망했고, 1933년 3만의 일본군은 열하를 접수해 피서산장을 일본군의 대본영으로 사용했다.
수도는 국가의 중심이다. 따라서 수도권이라는 말은 제법 영예롭게 들린다. 허베이는 명나라 이후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로 ‘직예(直隸)’라고 불렸다. 직예. 그 말 속에는 아픔이 배어 있다. 필자가 잘 아는 허베이 친구는 ‘허베이는 가난하다’고 말한다. 나는 허베이 친구의 말에 의아해 질문했다.
“허베이는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2개를 품고 있어. 게다가 그 2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 1인당 GDP가 중국에서 가장 높은 톈진이야. 그런데 왜 허베이는 가난한 거지?”
“허베이는 그 2개의 도시에 너무 많은 걸 줬거든.”
허베이 중부 도시 바오딩(保定)은 ‘베이징을 보호해 천하를 안정시키는 곳’이라는 뜻이다.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인 산해관은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베이징을 보호하는 곳이었다. 청나라 황제들이 피서산장에서 군사훈련과 외교활동을 하며 휴식을 취한 것처럼,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매년 여름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휴양을 즐기며 은밀히 회의를 연다. 그 유명한 베이다이허 회의다.
결국 허베이는 베이징의 방패이며, 피서지이고, ‘빵셔틀’이다. 허베이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기보다 베이징을 위해 존재했기에, 허베이인은 베이징에 대해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품고 있다.
대지진의 추악한 진실
▲황해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 라오룽터우(老龍頭).
▲산해관의 자오산에 쌓은 장성.
탕산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도 베이징에 예속된 수도권의 비애는 묻어난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허베이 탕산(唐山)에서 리히터 규모 7.5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160만 인구 중 24만여 명이 죽고, 16만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시 대부분이 파괴됐기 때문에 이 수치조차 축소·은폐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정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고 밝혔지만, 국가지진국의 일부 과학자들은 이미 7월 말에서 8월 초에 탕산 일대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976년 당시 중국에서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 걸출한 인물들이 세상을 떠났고,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곧 꺼질 생명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4인방과 화궈펑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였다.
이런 와중에 탕산 대지진을 예측한 보고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탕산 인근의 칭룽(靑龍)현 현장(懸長)은 주민들에게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알린 뒤 민병대를 조직해 순찰을 돌게 하고 지진 대처방법을 교육했다. 그 결과 7000여 채의 건물이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도 사망자는 1명에 불과했다. 그 1명도 심장마비로 사망해 지진이 직접적 사인은 아니었다. 칭룽현 현장은 인민영웅이 돼야 마땅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이 사실을 오랫동안 은폐했다. 칭룽현의 사례가 밝혀지면 지진 자체는 천재지변이지만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는 인재(人災)임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위정자들이 탕산 대지진의 경고를 무시하고 넘어간 이유는 탕산이 중요하지 않은 도시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리라. 당시 탕산은 중국 면적의 0.001%, 인구의 0.01%에 불과했지만, GDP의 10%를 생산하는 핵심 공업도시였다. 중국 석탄 생산량의 5%를 차지했고, 전력 생산·철강·자동차·기계·시멘트·방직·도자기 등 수많은 기간산업이 있었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를 지진 때문에 베이징의 공장인 탕산 가동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탕산인들은 비로소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부모형제를 잃고도 꾹꾹 눌러온 통곡을 한 달여 만에 터뜨릴 수 있었다. 10월 6일 화궈펑은 4인방을 체포하며 탕산 대지진을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왕리보(王利波) 감독의 다큐멘터리 ‘얀마이(掩埋, 매장)’는 국가지진국 과학자들이 탕산 대지진의 조짐을 지속적으로 보고했는데도 정부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사회, 민초의 고통보다 과시적 성과를 우선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산해관 장성(長城)박물관은 만리장성을 극찬한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정신의 물질적 상징으로 문화교류 ·민족융합의 장이었고, 고대 노동인민의 피와 땀과 지혜의 결정체로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약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찬사가 지나쳐 궤변이 됐다. 만리장성은 한족과 북방 유목민과의 전쟁 때문에 탄생했고, 민초들의 피눈물로 지어진 괴물이다. 민초들은 만리타향에서 만리장성을 짓다 죽고, 싸우다 죽어야 했다. 상건은 애달피 노래하며 허무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위로했다.
“구르는 해골들은 장성의 병졸들인데, 해 저무는 모래밭에 재가 되어 흩날리네.”
민초의 피눈물
맹강녀는 머나먼 산둥성에서 산해관까지 노역으로 끌려온 남편을 찾아왔으나, 남편은 이미 공사 중에 죽었다. 맹강녀가 통곡하자 장성이 돌연 무너지며 엄청난 수의 백골이 쏟아져 나왔다. 공사 중 죽은 인부들이었다. 맹강녀는 백골이 사랑하는 사람의 피를 빨아들인다는 말을 듣고,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에 일일이 피를 떨어뜨려 마침내 남편의 백골을 찾았다. 맹강녀는 고향에 돌아와 남편을 장사 지낸 뒤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는다.
중국 민초들은 맹강녀 설화를 통해 노역의 고통, 가족이 파괴되는 슬픔, 위정자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했다. 강희제는 민초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만리장성 대신 피서산장을 국방과 외교의 대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으로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 장성에 얽힌 대립과 적대의 역사를 무시하고 민족 친목과 융합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옛 전쟁들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 내전’이라며 오늘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과거를 재단한다. 장성을 짓느라 희생된 민초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고 위대한 성과만 강조한다. 너희 인민들도 위대한 중화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이나 하라는 소리다.
산해관 장성박물관은 중국 정신세계의 명백한 퇴행을 보여준다. 옛 시인만큼 진실하지도 않고, 맹강녀와 민초의 원혼을 위로하지도 않으며, 강희제의 애민(愛民)정신도 없다. 중국이 이처럼 인민을 외면하고 ‘위대한 성과’에만 집착하는 한 중국은 부강한 나라는 될 수 있어도 아름다운 나라는 될 수 없다.
◆10월 호 텐진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津 - 베이징의 ‘수호 거인’
톈진(天津)은 ‘천자의 나루터’였다. 명(明)나라 영락제가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톈진은 베이징의 목줄이자 항구였다. 수도를 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서양 열강과 중국이 충돌한 공간이다. 톈진은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그래서 톈진 사람들은 ‘톈진 무인(武人)’ 곽원갑을 그리워한다
▲하이허 강변에는 유럽식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姐姐講一下.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인과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해졌지만, 아무래도 중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다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톈진 여행 중 발랄한 스무 살 아가씨를 만났다. 내가 인사차 “간마야(干嘛呀)?”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내 표현이 어색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누나가 가르쳐줄게(姐姐講一下). ‘간마야(干嘛呀)?’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하는 거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고, 일반적으로 ‘뭐해?’라고 물어볼 때는 ‘간마너(干嘛呢)?’라고 해.”
내 나이의 반밖에 안 되는 어린 친구가 천연덕스럽게 ‘누나’라고 자칭하자 헛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발랄하고 귀여우니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자부심이 강해 20대 중반 청년도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이 어르신네가 어찌 네 말을 듣겠느냐”고 말하는 곳, 초등학교 꼬마 아가씨에게도 ‘누님(大姐)’이라고 불러줘야 하는 곳, 톈진이다.
영락제의 루비콘
톈진(天津)의 약자는 ‘나루 진(津)’ 자다. 톈진이란 ‘천자의 나루터’라는 뜻으로, 명나라 영락제가 여기서 배를 탄 것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루비콘 강을 건넜듯,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영락제로 등극했다. 즉, 톈진은 영락제의 루비콘이다.
톈진은 아홉 줄기 강물이 황해로 흘러가는 교통의 요지다. 일찍이 수양제가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을 때부터 베이징의 관문도시 톈진은 크게 발달했다. 특히 송대(宋代) 북방 유목민족 국가들이 베이징을 중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톈진의 중요성도 급부상했다. 톈진은 강남의 물자를 베이징에 끌어오기 위한 물류도시였다.
톈진은 영락제와 인연이 깊다. 주원장은 원을 물리치고 명을 건국하며 장쑤성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송대부터 강남은 이미 중국 경제의 중심이었으나, 북방 국가들이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의 중심은 되지 못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우며 난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일치시켰다. 주원장이 죽고 손자 건문제가 황위를 계승하자, 건문제의 삼촌인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체는 톈진에서 수로를 따라 진군해 ‘정난의 변(靖難之變)’에 성공한다.
주체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민심은 싸늘했다. 대의명분도 없이 황제가 되고 싶어 일으킨 정변이었다. 명분 없는 정변이라 당대의 관료·지식인들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황제의 스승이었다. 영락제의 측근들은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글 읽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며 살려주길 청했고, 영락제 역시 그의 재주와 명성을 아껴 방효유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영락제의 제의를 단칼에 자르고 “연적(燕賊)이 위(位)를 찬탈했다”며 돌직구를 날렸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일가 친척에다 지인들까지 873명을 방효유 앞에서 죽이고, 끝으로 방효유도 죽였다. 유배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을 통해 명나라 초기 인재들이 대거 사라졌다. 더욱이 당시 문화의 중심이 강남이기에 처형당한 사람은 대부분 강남의 명사들이었다. 강남의 민심은 더더욱 영락제에게 등을 돌렸다.
조계지 톈진의 비애
영락제의 책사 도연(道衍)은 정난의 변 직후 고향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20년 만의 금의환향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여든 살에 가까운 도연의 누이는 도연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이런 초라한 집에 오실 용무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잘못 아시고 오셨겠지요.”
민심이 이렇게 차가워지자 영락제는 자신의 본거지 베이징을 수도로 삼으며, 강남의 물자를 끌어올리기 위해 대운하를 개수했다. 톈진은 자연스럽게 교역·물류의 중심지가 됐다. 영락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는 출병기지, 황제가 되고 난 후에는 ‘물류센터’가 된 셈이다.
베이징의 목줄로서, 군사·경제적 요지로서 톈진은 매우 중요했다. 베이징을 지키려면 톈진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베이징에 들어오려면 톈진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근대에 톈진을 지키려는 중국과, 톈진에 들어오려는 서양 열강은 첨예하게 맞부딪쳤고, 톈진은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동시에 충돌하는 공간이 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는 걷기 좋은 길이다. 드넓은 강변엔 최첨단 고층건물과 함께 근대 유럽식 건축물들이 늘어서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다. 유럽풍 건축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낸다. 톈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서개천주교당(西開天主敎堂)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천주교인과 놀러온 구경꾼들이 모두 즐겨 찾는다. 오늘날에는 서양적 가치와 중국적 가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 역사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특히 조계지 톈진은 커다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거대한 생산기지이자 탐나는 시장이다. 서양 열강은 중국의 귀한 상품을 얻고 중국 시장에 물건을 팔려 했으나, 당시 세계경제의 으뜸이던 중국은 폐쇄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중국은 서양인을 천박하게 돈만 밝히는 오랑캐 장사꾼으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로 봤다. 상호 경멸은 갈수록 심해져 중국은 서양인을 털북숭이 원숭이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아편 피우는 동양 원숭이로 봤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니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안하무인 정복자
해가 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간단히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안이한 청 조정은 아편전쟁을 베이징에서 머나먼 변방 광둥성에서 일어난 해프닝쯤으로 인식했다. 영국은, 청을 진정으로 굴복시키려면 베이징을 점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억지 트집을 잡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과연 수도권 점령은 청나라에 크나큰 충격을 줬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톈진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함풍제는 바로 베이징을 버리고 열하 피서산장으로 줄행랑쳤다.
1858년 톈진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일단 끝났지만, 청 조정이 침략자들을 비난하며 조약 이행을 거부하자 1860년 영·프 연합군은 다시 톈진에 상륙해 베이징을 점령했다. 새로 베이징 조약을 맺으며, 톈진 조약 때만 해도 개항지가 아니었던 톈진도 개항한다.
톈진항은 열렸지만, 톈진인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톈진인의 눈에 톈진·베이징 조약은 불합리했고, 서양인은 정복자처럼 안하무인이었다. 특히 서양의 위세를 업은 교회는 무척 고까웠다. 중국 민중은 ‘톈주자오(天主敎)’를 ‘주자오(猪叫)’, 즉 ‘돼지 멱따는 소리’로 바꿔 불렀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교회는 고아원 운영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는 자선사업이기도 했지만, 선교 활동이 어려운 중국에서 신도를 확보하기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더욱이 죽어가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엔 중요한 실적이어서, 곧 죽어갈 아이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아를 데려오면 사례금을 주자 불량배들은 민가의 아이들을 유괴해 사례금을 받고 교회에 넘겼다. 중국인의 눈에는 이것부터가 인신매매로 보였는데, 교회에서 죽는 아이가 많자 의혹이 증폭됐다.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심장, 눈 등 장기로 약재를 만든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면서 중국 관청도 수사에 나섰다.
조사 과정에서 중국 관청, 중국인, 서양인들이 충돌했다. 프랑스 외교관이 중국인을 총으로 쏴 죽이자 격분한 중국인들이 서양인과 중국 기독교인 20여 명을 죽이고 교회, 영사관, 고아원을 불태웠다. 1870년의 톈진 종교사건은 청이 프랑스에 46만 냥을 배상하고 톈진 지부·지현을 면직했으며, 20명의 난동자를 처형하는 것으로 끝났다. 총을 먼저 맞았는데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고 여러 명이 처형당하자 중국인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8대 1의 싸움
제아무리 ‘선박은 견고하고 화포의 성능은 우수하다(船堅砲利)’지만 결국 서양인은 ‘하찮은 재주를 가진 교활한 무리’에 불과했다. 왜 찬란한 문명을 가졌고 예의범절을 숭상하는 중화가 인간의 도리 따위에는 관심 없고 돈만 밝히는 오랑캐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됐는가.
답은 간단하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는 군사력을, 백성은 체력을 길러야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전에는 어느 중국인이 조계지의 외국 여자가 공놀이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저 여자는 공을 차면 돈을 얼마나 받기에 매일 저처럼 힘들게 사나?” 그러나 이제 체육은 나라를 구원하는 길이 됐다. 해군사관학교인 톈진수사학당(天津水師學堂)은 생도들에게 검술, 봉술, 권투 등을 가르쳤다. 논객들은 체력을 국력과 동일시했다.
“개인이 약하면 사회 진보에 방해가 된다. (…) 이것은 당연한 자립의 의무, 생존의 원칙이다.”
또한 중화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중국인들은 서양·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중국 고유의 것을 고집했다. 중국 전통문화와 체육을 강조하는 두 흐름이 합쳐져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중국무술이었다.
상무(尙武)의 기풍 속에서 톈진의 ‘무인(武人) 곽원갑’은 높은 명성을 떨쳤고,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단체는 무술을 수련하며 인기를 모았다. 무술을 수련하면 기공으로 칼과 총알도 튕겨낼 수 있다는 과장은 무술로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반외세 감정과 결합했다. 급기야 1899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당대 최강국들이 한데 뭉쳤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8개국 연합군이었다. 이들은 각기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식민지를 지배했고, 두세 나라가 연합해 다른 연합국들에 맞선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1개국만을 상대로 한꺼번에 8개국이 뭉친 적은 없었다. 제국주의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열강은 뭉쳤건만 중국은 오히려 분열했다. 서태후와 의화단원들이 열강에 맞섰지만, 광둥의 리훙장(李鴻章), 산둥의 위안스카이(袁世凱), 후베이의 장즈퉁(張之洞) 등 당대의 실력자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의화단을 민란집단으로 여겼고, 의화단 운동도 가망 없다고 봤다.
이들의 예측대로 무술 실력만 믿은 의화단은 열강의 총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이때에도 8개국 연합군은 톈진에 상륙해 베이징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시안(西安)으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난 후 톈진은 승리한 8개국에 벨기에를 더한 9개국의 조계지가 됐다. 제2차 아편전쟁과 유사하게 진행됐으나 결과는 훨씬 비참했다.
窮則變 變則通
▲톈진의 명물 진흙인형(泥人形)은 도심 곳곳에 보인다.
▲톈진 우다다오(五大道) 거리
▲이탈리아풍경구의 마르코폴로 광장.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던가(窮則變, 變則通). 가장 중국적인 방식으로 서양을 물리치려 했으나 참패했다. 이제 남은 길은 과감히 전통을 버리고 서양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신문물이 중국을 지배했다. 그림은 사진으로, 그림자극(劇)은 영화로, 청동거울은 유리거울로 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의 변화였다. 많은 중국인이 전통 관념을 버리고 서구적 가치를 수용했다. 일례로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여행을 두려워했다. 중국은 땅이 너무 넓고 별의별 사람이 워낙 많기에, 중국인은 집 떠나기를 겁냈고 꼭 가야 한다면 길일(吉日)을 택해 움직였다. 그러나 근대식 창가(唱歌)는 이런 관념을 조롱했다.
“세상사 기구해도, 도처에 사람들이 다니네. 가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면, 다시 물러나면 되지 않는가. 만약 미로를 만나면, 입을 열어 물어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힘써야지. 길흉이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 기선은 물로 다니고, 마차는 육지를 다니네. 천리를 오가는데도 참으로 빠르도다. 갖가지 속된 금기(禁忌)들 모두 떨쳐내고, 오로지 서양 사람들의 장점을 따라 배우세.”
서양을 추종하는 분위기는 근대 속담에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학생은 속성 3년 공부면 천하를 다닐 수 있으나, 수재는 3년을 더 공부한다 한들 촌보도 움직일 수 없네.”
이 말은 한나라의 대학자 동중서의 고사를 빗댄 말이다. 동중서가 하도 열심히 공부하느라 ‘3년 동안 집안의 정원도 보지 못했다(三年不窺園)’는 고사는 수천 년간 중국 지식인의 귀감이 됐으나, 이제는 ‘퇴물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서양 문물을 배우고 세계를 두루 다니는 유학생이 돼야 했다.
톈진 조계지는 세계 각국의 은행이 들어차 국제금융 중심지가 됐다. 9개국 조계지답게 다양한 풍격의 건축물이 들어서 ‘만국 건축박물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청말의 실력자 위안스카이는 톈진에 중국 최초의 신식 경찰을 만들었고, 중국 최초의 민주적 지역의회 선거를 감독했다.
근대 톈진은 중국 제2의 공업도시였고, 1949년 이전만 해도 상하이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오늘날에도 톈진은 1546만 명이 사는 대도시다. 인구밀도는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중국 본토(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 3위이고, 1인당 GDP는 1위(2014년 1만6874달러)다. 중국에 4개뿐인 직할시 중 하나임에 부끄럽지 않은 실적이다.
‘베이징의 무엇’
톈진은 중국 정치의 중심 베이징, 경제의 중심 상하이, 내륙 제일의 메트로폴리스 충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톈진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톈진의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도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톈진은 베이징과 불과 117km 거리에 있다. 자동차로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시속 300km의 고속철을 타면 30분 만에 도착한다. 중국이 폐쇄적이고 교통이 불편할 때 톈진은 베이징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매우 중요했지만, 베이징으로의 접근성이 높아진 지금은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
톈진은 톈진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베이징의 무엇’으로서만 존재한다. 톈진은 베이징이 바다로 오갈 수 있는 베이징의 항구다. 톈진은 베이징에 비해 인구가 적고 생활환경이 쾌적하며 물가가 싸다. 그래서 베이징인은 주말에 톈진에 와서 바람을 쐬거나 쇼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즉, 톈진은 베이징의 휴식처이자 할인 쇼핑센터다.
베이징, 톈진, 허베이를 묶어서 ‘징진지(京津冀)’ 지역이라 한다. 수도권이긴 하되 강남의 경제력에 밀려 체면이 서지 않자 정부는 수도권을 발전시키기 위해 ‘징진지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런데 세 지역이 서로 협력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을 나눠 먹는 제로섬 게임처럼 경쟁하는 탓에 성과가 지지부진한 편이다.
수도 베이징은 돈 되고 폼 나는 3차 산업으로 가려고 ‘3고(高)1저(低)’ 기업(노동력·자본 투입, 에너지 소모, 오염 물질 배출은 많고 효율은 낮은 기업)들을 톈진과 허베이가 가져가길 원한다. 톈진과 허베이는 당연히 부루퉁하다. 베이징이 그간 징진지 일대의 인재, 자원, 우수 기업, 고부가가치 산업들을 몽땅 독차지하고도 이제 와서 힘들고 돈 안 되는 것들만 떠넘기려 한다고 원망한다.
빈하이 대폭발
허베이는 워낙 낙후돼 있기에 협의에 따라 여러 산업을 받아들여 발전을 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톈진은 이미 상당히 발전했고, 베이징과 산업·경제노선도 비슷하며, 시민들의 요구 수준도 높다. 베이징과 허베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격이다. 톈진시의 한 간부는 “베이징과의 합병 이외에 톈진을 발전시킬 방도가 없다”고 탄식했다. 숱한 저발전 지역에 비하면 배부른 엄살이긴 해도, 베이징에 치여 사는 톈진의 고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북아 국제물류·항운의 중심으로 거듭나려는 톈진의 야망은 빈하이 신구(濱海新區)에서 드러난다. 톈진 빈하이 신구는 1980년대 광둥성 경제특구, 1990년대 상하이 푸둥 신구를 잇는 핵심 경제특구로, 환발해경제개발구의 중심이다. 2010년 말 이미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중 285개 회사가 투자하고 사무실을 여는 등 외국인 직접투자(FDI) 성과도 눈부셨다. 미국 보잉사와 함께 세계 항공시장을 양분하는 유럽 에어버스 항공사는 빈하이에 공장을 세웠다.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고급 제조업을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고향 톈진의 숙원을 풀어준 셈이다.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이던 빈하이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 8월 12일 밤 빈하이에서 발생한 대폭발 사고가 그것이다. 근처 빌딩에서 폭발 동영상을 촬영하던 사람은 잠시 후 두 번째 대폭발이 일어나자 그 충격파로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군 채 천장만 보여주던 휴대전화는 옆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려줬다.
“사람이 쓰러졌어!”
거대한 화염은 불의 신이 강림한 것 같았고, 시커먼 버섯구름은 핵폭탄이 떨어진 듯했다. 다음 날 아침, 톈진항 야적장에 빽빽하게 주차돼 있던 새 차들은 불에 타 잔해만 남았다. 화재 현장의 검은 잿더미는 지구의 심연으로 통하는 구멍처럼 보였다. 여기에 고인 물웅덩이는 시안화나트륨이 기준치의 40배를 초과했고, 일부 지점에서는 800배를 초과했다. 사고 현장에서 1.8km 떨어진 한국 교민 아파트의 창문이 박살 난 장면이 한국 뉴스에 보도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에는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시안화나트륨은 비를 만나 시안화수소가 된다. 시안화수소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맹독성 기체다. 중국발(發) 미세먼지에 시달리던 한국 역시 시안화나트륨이 미세먼지와 함께 바람을 타고 와서 독극물 비가 되어 내릴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중국 규정에 따르면, 주거 지역 반경 1km 내에서는 위험물 창고를 설치할 수 없고, 시안화나트륨은 24t만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하이 물류회사는 이 모든 규정을 어겼다. 애초에 허가도 없이 창고를 운영했고, 아파트 단지가 사고 현장에서 불과 600m 안에 있었으며, 시안화나트륨을 700t이나 쌓아뒀다. 규정을 이렇게까지 어긴 배경에 위험물을 감독·규제하는 공안국의 묵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장멍판(張夢凡)은 당시 사건 현장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는 소방서에서 통신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최근 BBC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밤 10시 53분에 신고 전화가 걸려왔고, 동료들은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첫 폭발 후 동료들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열폭풍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했는데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고, 소방서의 문, 지붕, 창문이 날아가버렸다.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취해 2명의 운전사와 교신이 됐으나 곧 연락이 끊겼다. 동료들의 휴대전화는 모두 끊겼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통제와 불신
▲톈진 음악정. 톈진의 상업·금융·행정 중심지인 허핑구(和平區)에 있다.
결국 그의 동료 8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중에는 19세 소방관도 있었다. 173명의 사망자 중 104명이 소방관이었다. 그러나 소방관 가족들은 정부가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며 오열했다.
사건이 터지자 루이하이의 즈펑(只峰) 사장은 정신적 충격으로 쓰러져 입원했으며 말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사건 조사 중 교통운수위원회 행정심비처 둥융춘(董永存) 처장이 추락사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톈진 빈하이 대폭발 사건으로 173명이 죽었고(8명은 실종), 797명이 부상을 당했다. 건물 304채, 차량 1만2428대, 컨테이너 7533개가 파괴됐고, 11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이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애초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재(人災)였으며, 주요 관계자들은 규정을 어기고 진상을 은폐했다. 사건 조사는 투명하지 않았고, 처리 방식은 매우 미적지근했다. 언론 보도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철저히 통제됐다. 사건 처리가 속 시원하지 않은데 언로를 막아놓으니 온갖 유언비어와 괴담이 횡행했다. 현지 공영방송 톈진위성TV가 뉴스 보도는 하지 않고 한국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을 방영한 것은 뭇 사람의 공분을 샀다.
여행 중 만난 중국인 친구는 “외국 언론은 톈진 폭발사고 희생자를 몇 명이라고 보도했느냐”고 내게 물었다. 외국 언론도 중국의 공식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고 말하자, 그는 석연치 않다는 듯 말했다.
“현장 근처엔 많은 거주민이 있었고, 세 차례나 투입된 소방수들은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어. 그런데 죽은 사람이 200명도 안 되겠니? 중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사망자 수보다 5배쯤 많을 거라고 생각해. 내 친구 한 명은 소방관으로 2~3년 일했는데, 톈진 폭발사고가 일어난 후 퇴직하고 딴 일자리를 구하더군.”
그의 말은 정확한 정보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해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러나 비단 톈진 폭발사고만이 아닌 다른 사건·사고에 대해서도 정부와 언론이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분위기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속성장의 그림자
▲톈진에는 고층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톈진 빈하이신구 폭발사고는 중국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중국은 외견상 화려하고 힘차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법규를 무시하며, 막대한 피해를 내고서도 진상을 은폐하고 언론을 통제한다. 물론 중국은 아직도 발전 도상에 있고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사고들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려면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불합리를 시정하는 한편, 죄지은 자를 엄격하게 벌하고 인민들과 소통·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사건이 계속 재발할 것이다.
중국의 2015년은 대형 인재(人災)의 해였다. 광둥성 선전에서는 산비탈에 위법으로 쌓은 건축·산업 폐기물이 무너져 7명이 죽고 70여 명이 실종됐으며, 상하이 황푸강에서는 새해맞이 레이저쇼를 보려고 31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가 35명이 죽고 43명이 다치는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주장 삼각주의 중심 선전, 장강 삼각주의 중심 상하이, 환발해의 중심 톈진에서 벌어진 인재는 중국 성장의 그림자를 드러냈다.
톈진 폭발사고 1주년이 돼가던 지난 8월 11일 후베이성 당양(當陽)시에서는 화력발전소의 고압 증기관이 폭발해 21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수도의 관문이며 환발해경제권의 중심으로 성장해온 톈진. 그러나 고속성장 이면에 수많은 숙제가 산적한 중국의 현실을 톈진 역시 공유하고 있다.
핏빛 역사가 빚은 中體西用 미학
首都의 목줄 톈진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는 금융가와 상점, 문화지구가 발달한 중심지다.
베이징에서 117km 떨어진 톈진은 천하의 중심과 가까운 ‘원죄’를 안고 살았다. 서구 열강은 베이징의 목줄을 틀어쥐려 톈진을 강제 개항했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의화단원들은 총탄에 스러졌다. 피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중국적 가치와 서양적 가치의 평화로운 공존을 낳았다. 환발해경제권 중심도시를 지향하지만, 열강이 빠져나간 톈진은 이제 베이징 사람들의 휴식처가 됐다. 〈관련기사 386쪽〉
▲도자기로 외관을 치장한 도자기의 집(瓷房子).
▲이탈리아 풍경구의 마르코폴로 동상. 중국-이탈리아 교역의 상징이다.
▲톈진의 번화가 빈장다오(滨江道).
▲1917년 프랑스인이 세운 톈진 최대 성당 서개천주교당.
▲이탈리아풍 조각상과 고층건물 공사 현장은 톈진의 조계지 역사를 말하는 듯하다.
◆11월 호 간쑤성
◇굶주리고 목 졸린 서북의 늑대들
甘 中華의 끝
간쑤성은 중화(中華)의 끝이다. 천하의 경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자 모험이 시작되는 곳.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니 문화가 오가고 무역의 문이 열린다. 그러나 사막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극한의 생존 공간은 ‘서북의 늑대’ 목을 조른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란저우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지난 4월 사막지대인 간쑤(甘肅)성의 공기는 탐욕스러웠다. 젖은 수건을 걸어두면 순식간에 바싹 말랐다. 조금의 습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바싹 마르다 못해 뻣뻣하게 굳어버린 수건은 흡사 흡혈귀가 피 한 방울 안 남기고 빨아먹은 말라 비틀어진 시체 같았다.
정원에서 노트북을 펴놓으면 금세 노트북 화면에 ‘모래 코팅’이 입혀졌다. 매년 고비사막에서 일어난 황사는 광활한 대륙과 바다를 지나 한국과 일본을 덮친다. 2000km 떨어진 한국의 황사가 성가신 정도라면, 황사 발원지가 코앞인 간쑤성의 황사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모래폭풍이 부는 명사산(鳴沙山)은 ‘모래가 우는 산’이란 뜻이다.
피부는 거칠어지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극도로 건조하니 마음도 황량해지고 생활도 피폐해진다. 나오느니 탄식뿐이요, 느는 건 한숨뿐이다. 낭만적인 시를 읊으며 기분을 전환해보려 해도 떠오르는 시는 간쑤성의 황량함을 한탄하는 시뿐이다.
“오랑캐의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봄이 오지 않는 것은 봄바람이 옥문관을 못 넘기 때문이라.”
중국에서 가는 곳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찬사를 늘어놓던 마르코 폴로조차 1년이나 머문 간쑤성의 성도 란저우(蘭州)를 “지저분한 도시”라고 짤막하게 평했다. 그때에도 간쑤성은 척박하고 황량했으리라.
천하의 경계가 끝나는 곳
간쑤성의 약칭은 ‘달 감(甘)’자다. 간쑤는 성 서쪽 끄트머리의 두 지역인 간저우(甘州)와 쑤저우(肅州)를 합친 이름이다. 현재 이 지역은 장예(張掖), 주취안(酒泉)으로 불린다. 이 곳이 ‘다디단(甘) 술 같은 샘물(酒泉)’이라니. 황량한 사막으로 뒤덮인 간쑤성의 자연환경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이름이다. 하지만 죽음의 사막에 둘러싸여 있기에 이 지역 사람들은 물의 고마움을 잘 안다. 수질과 상관없이 물만 있다면 그 자체로 다디단 감로수 같았으리라.
이곳이야말로 중화(中華)의 끝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양관(陽關) 밖에 나서면 아는 이 하나 없다”며 절절하게 막막함을 토로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비관하며 술에 취했다.
“취해서 모래밭에 누운 병사를 비웃지 말게. 예부터 몇 명이나 전쟁에서 돌아왔던가.”
그러나 한 세계의 끝은 다른 세계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곳을 나선 장건은 실크로드를 개척했고, 현장은 천축국에서 불경을 구했으며,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남겼다. 사막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간쑤성은 극도로 위험한 곳인 동시에 천하의 경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이 열리며 모험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니 문화가 오가고 무역의 문이 열린다.
간쑤성 지형은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보통 한 영역은 중앙으로부터 고르게 세력이 퍼져 원 또는 사각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그러나 간쑤성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길고 가늘게 삐죽 튀어나왔다. 간쑤성은 왜 이처럼 독특한 영역을 갖게 됐을까. 간쑤성 동북방에는 내몽골 고원이 있고, 서남방에는 티베트 고원이 있다. 이 지역들은 오늘날 다 같은 중국 땅인 네이멍구(內蒙古)와 칭하이(靑海)성이지만, 예전에는 몽골족과 티베트족이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한 곳이다. 양대 고원 사이의 골짜기인 간쑤성은 두툼한 빵 사이에 끼인 치즈 한 장과 같은 땅이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간쑤성을 “호(胡, 몽골족)와 강(羌, 티베트족)이 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호전적인 유목민족 사이에 끼인 가냘픈 길.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지는 길. 폭이 좁고 긴 간쑤성은 생긴 모양대로 ‘길’이다. 동서로는 중국과 서역을 잇고, 남북으로 몽골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이 길은 ‘황하의 서쪽에 있는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 불렸고, 중세 시대 세계 최고의 교역로인 실크로드였다.
묵특선우와 유방
중원의 황토 고원은 간쑤성에 이르러 사막이 된다. 그러나 평균해발 4000m, 길이 2000km인 기련(祁連)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린 물은 간쑤성 군데군데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우웨이(武威), 장예, 주취안, 안시(安西), 둔황(敦煌) 등 간쑤성의 대표적인 5개 도시는 모두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이 도시들은 걸어서 닷새 거리마다 놓여 있어, 기나긴 간쑤성을 지날 수 있게 해줬다. 길고 긴 사막길에 점점이 놓인 5개의 오아시스 도시는 고달픈 나그네의 생명을 구원해주는 진주 목걸이였다.
간쑤성은 서역, 중국, 티베트, 몽골 등 다양한 세력과 접하지만, 동시에 어느 나라에서 봐도 중앙으로부터 먼 변방이었다. 광활한 사막으로 둘러싸였고 독자적 생활이 가능한 오아시스가 있어 폐쇄적인가 하면, 활발하게 무역할 수 있는 개방성이 공존한다. 따라서 간쑤는 어느 한 나라가 강해지면 그 나라에 예속됐고, 사방이 혼란해지면 독립적인 소국이 됐다. 간쑤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패권국이 어디인지 가르쳐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중앙아시아를 정탐하는 안테나였다.
중국 북방에는 여러 유목민이 살았고, 간쑤성 일대는 흉노와 월지 사이 지역이었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뒤 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몽염 장군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군을 격파한 뒤 만리장성을 세웠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으며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져들 때 흉노에선 묵특선우(冒頓單于)라는 영걸(英傑)이 등장했다. 묵특은 동으로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서쪽의 월지(月氏)를 제압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마침내 천하를 재통일했지만, 당시 중국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흉노는 쇠약한 한나라 변경을 마음껏 휘저었다. 흉노의 기세를 꺾기 위해 황제 유방이 친정(親征)했으나, 천하를 통일한 유방조차 흉노의 40만 대군에 7일이나 포위돼 북방 동토(凍土)에서 얼어 죽을 뻔했다. 기고만장한 묵특은 훗날 유방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음담패설을 버젓이 국서로 보냈다. 이런 치욕을 겪고도 한나라는 자그마치 90여 년이나 힘을 기르고 나서야 흉노를 상대할 수 있게 됐다.
한무제는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장건을 대월지에 사신으로 파견해 흉노를 양면에서 협공하고자 했으며, 위청, 곽거병, 이광 등 많은 명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마침내 기원전 121년 곽거병이 간쑤 일대 하서주랑을 장악하고 오늘날 몽골공화국 지역까지 흉노를 추격해 토벌했다.
대탐험가’ 장건
곽거병의 하서주랑 장악은 한과 흉노의 성쇠를 갈랐다. 하서주랑은 유목민인 흉노가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던 지역이었고, 동서남북 여러 민족과 장사할 수 있는 무역로였다. 또한 연지산(燕支山)은 특산물인 연지(홍화꽃을 원료로 한 화장품)를 생산하고, 기련산은 목축을 할 수 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서주랑을 빼앗긴 흉노는 비탄에 젖어 노래했다. “연지산을 빼앗겼으니 우리네 여자들의 고운 빛이 사라지겠구나. 기련산을 빼앗겼으니 육축(六畜, 말·소·양·닭·개·돼지)을 기를 수 없게 됐구나.”
한무제의 흉노 토벌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대탐험가 장건이다. 대월지 사신으로 파견된 장건은 흉노에 10년이나 붙잡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대월지에 도착했다. 원래 목적인 대월지와 흉노의 협공은 끌어내지 못했지만, 장건의 서역 탐험은 의외의 성과를 가져다 줬다.
장건은 중앙아시아 일대의 여러 나라를 방문해 각국의 외교·교역관계와 특산물 정보를 수집했고,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잇는 초원 실크로드, 간쑤성과 서역을 잇는 사막 실크로드 외에도 쓰촨-윈난-버마-인도로 가는 서남 실크로드를 탐색했다. 장건의 정보 덕분에 중국은 외교관계가 다양해지고 무역로를 확충했으며, 변방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군대 보급은 흉노 정벌에서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장건은 실크로드 주변의 물과 풀이 있는 지역과 보급을 얻을 수 있는 국가를 잘 파악해 대군의 원정을 수월하게 해줬다. 덕분에 일개 궁중 경호대장이던 장건은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져 제후 반열에 올랐다. ‘박망’은 ‘견문이 넓고 널리 바라본다’는 뜻으로, 장건의 넓은 시야를 찬미하는 이름이다.
장건은 대원국에 한혈마(汗血馬, 하루에 1000리를 달리고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는 전설의 말)가 있다고 보고해 한무제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한무제는 말과 같은 크기의 금 조각상을 주고 한혈마를 사려 했지만, 대원국은 이를 무시하고 사신을 죽였다. 격분한 한무제는 1차 원정군으로 수만 명의 병사와 6000명의 기병을 보냈고, 2차 원정군으로 6만 병사, 말 3만 마리, 소 10만 마리, 낙타 1만 마리를 파견했다. 엄청난 대군을 파견한 데 비해 전리품은 준마 10여 마리, 말 3000마리에 불과했지만, 대규모 원정은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 서쪽 가장 먼 변방인 간쑤성은 중요한 원정 근거지가 됐다. 수만 병사와 수십만 마리의 소·말·낙타가 오가며 장사를 하게 되자 간쑤성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급격히 팽창했다.
한족과 이민족의 동거
▲간쑤성은 실크로드(絲綢古道)의 중요 거점이었다. 장건과 마르코 폴로, 현장법사 등이 이 길을 지났다.
▲거대한 모래산맥 명사산(鳴沙山). ‘바람에 날린 모래가 윙윙 울어댄다’는 뜻이다.
▲맥적산 석굴에는 194개의 석굴과 7200개의 조각상이 있다.
동양과 서역의 중계지인 간쑤가 성장하면서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옥문관(玉門關)이란 이름은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문자 그대로 ‘서역의 옥이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서역의 옥, 아라비아의 향료, 로마의 유리 그릇, 중국의 비단이 옥문관을 오갔다. 간쑤를 거쳐 들어온 천리마가 간쑤의 상징이 되면서 서역은 상상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 잔뜩 있는 곳이라는 로망이 생겼다. 포도, 석류, 깨, 후추, 오이, 마늘 등 외래 작물과 비파, 하프 등 서역 문물이 간쑤를 통해 들어왔다.
한무제가 강역을 넓히고 흉노가 약해지긴 했어도 유목민족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간쑤에서 한나라와 유목민의 힘겨루기는 계속됐다. 그 결과 서량(西凉)의 군인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과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강인함으로 한나라 정예 병력이 됐다. 머나먼 변방이라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면 서량의 군인들은 쉽게 독립 군벌이 될 수 있었다. 동탁, 마등, 마초, 한수 등이 서량을 근거지로 활약한 군벌들이다.
이들 군벌은 한족과 이민족이 어울려 살던 간쑤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탁은 농사를 짓고 있을 때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그자리에서 밭을 갈던 소를 잡아 대접했다. 이에 감동한 강족은 동탁에서 가축 1000마리를 선물했다. 또한 서량 태수 마등의 아버지 마평은 집이 가난해 아내를 얻지 못하자 강족 여자를 아내로 맞아 마등을 낳았으니, 마등은 한족과 강족의 혼혈아다. 마등의 아들 마초가 조조를 상대로 두 차례나 대규모로 거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집안 환경 덕분에 강족, 저족(氐族, 티베트계 유목민) 등 유목민의 습속과 문화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리라. 서량을 장악하려면 한족뿐만 아니라 현지 유목민족들 역시 잘 이해하고 포섭할 수 있어야 했다.
서량 군벌의 힘은 대단했다. 후한 말 실권을 쥔 동탁은 18로 제후 연합군이 모두 달려들었어도 끝내 버텨냈고, 당대 제일의 군략가 조조는 마초에게 여러 번 위기에 몰리자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서 묻힐 땅이 없겠구나” 하고 탄식할 정도였다.
제갈량의 恨, 읍참마속의 땅
제갈량이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에 나섰을 때, 간쑤는 핵심적 작전 지역이었다. 북벌의 궁극적인 목표는 장안과 낙양을 차지해 중원을 제압하는 것이었지만, 촉이 형주를 잃은 후 낙양으로 갈 방법은 없었다. 장안은 천하제일 방어성인 데다 서량의 조진과 형주의 사마의가 양쪽에서 보좌했다. 제갈량은 일단 서량부터 차지해 한 날개를 꺾어버리고 장안을 공략해 중원의 목줄기를 죄어가는 전략을 세웠다.
마침 위나라와 서량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위는 서량을 군사 거점과 물자 기지로만 봤고, 서량인에 대한 처우도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위에 불만이 많은 서량인을 포섭하면서 신속하게 진군하자 천수 태수 마준은 현지 백성을 못 믿고 도망쳤다. 제갈량의 첫 북벌은 ‘임팩트’가 컸다. 천수, 남안, 안정의 3군(郡)이 호응하며 중원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제갈량의 군대는 가정(街亭)에 이르렀다. 가정은 남안, 천수, 안정 중심에 있으며 농서, 장안, 서량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길목 하나만 차지하면 위의 대군을 쉽게 방어하는 한편, 촉군은 수십 갈래 장안 공략 루트가 생겨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 방어의 책임자 마속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마속은 제갈량이 신뢰하던 유망주로 나름대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병법서를 어설프게 읽고선 길목을 지키지 않고 산 위에 영채를 지었다. 위의 맹장 장합은 노련했다. 마속을 직접 치지 않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을 끊자 마속군은 기아와 갈증으로 자멸했다.
가정을 잃자 승승장구하던 제갈량의 북벌은 어이없게 물거품이 됐다. 애초에 물량 면에서 촉은 위의 상대가 못 됐다. 촉은 예상치 못한 속도로 위를 치고 연달아 허를 찔러야 서량과 장안을 ‘접수’할 수 있었다. 간쑤와 산시(陝西), 두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해야 위와 붙어볼 만했다. 그 전에 기습이 실패한다면 소모전이 되고,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위가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판세를 뒤집을 뻔한 북벌이 실패하자 제갈량은 울면서 아끼던 마속의 목을 쳤다(泣斬馬謖). 쓰촨과 산시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간쑤는 제갈량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의 진면목
외국 문물 전파에서 종교를 빼놓을 수 없다. 간쑤는 중국에 불교와의 인연을 맺어준 길이다. 간쑤를 통해 불교는 동아시아로 퍼질 수 있었고, 현장과 혜초는 구법여행(求法旅行)을 할 수 있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소설 ‘서유기’ 덕분에 친숙하다. 작품 속에서 현장은 매우 덕망이 높은 고승으로 나오지만, 정작 독자에게는 와 닿지 않는다. 저팔계 말만 믿고 손오공을 꾸짖으며 내쫓기도 했으니 지혜롭지도 않고, 싸우는 손오공과 저팔계를 제대로 중재하지도 못하고, 위기에 빠지면 “얘들아, 이걸 어쩌면 좋으니” 하며 울기만 하니 무능해 보이기도 한다. 매번 요괴에게 납치돼 손오공 등 제자가 구하러 가야 하는 ‘민폐 덩어리’다.
‘서유기’는 주인공 손오공을 띄워주기 위해 현장을 깎아내렸다. 실제 현장은 만능의 천재다. 현장의 별호인 삼장법사(三藏法師)는 부처의 가르침인 경장(經藏), 그 주석을 모은 논장(論藏), 교단의 생활규칙과 계율을 모은 율장(律藏) 3가지에 모두 통달한 자라는 뜻이다. 현장은 젊은 나이에 ‘석문(釋門)의 천리마’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유망주였다.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사막을 횡단해 ‘생존술 전문가’ 베어 그릴스 못지않은 생존력을 과시했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중국에서 인도까지 왕복한 대모험가다. 더욱이 어학의 천재여서, 인도에서 수집한 불경 75부 1335권을 번역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중세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정치외교,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빼어난 보고서다.
‘서유기’에서는 현장은 당태종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인정받고 환송을 받으며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떠난다. 중국 안에서는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여행했지만, 국경 밖을 나서자마자 온갖 기기묘묘한 사건을 만난다.
실제 역사는 정반대다. 28세 청년 현장은 당시 불교계의 유망주이긴 했지만, 큰 영향력은 없었고, 당태종을 만난 적도 없다. 중국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지명수배를 피하며 이동하다가 사막에서 죽을 뻔했다. 오히려 중국을 벗어나자 외국에서 온 고승으로 대접받으며 비교적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개국 초기 당나라는 몸을 추슬러야 하는 단계였다. 당은 귀중한 노동력이자 병력인 인구의 이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게다가 간쑤 주변은 토번·돌궐과 대립하는 상당한 긴장이 감돌고 있어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더욱 허용되지 않았다.
唐 서역 공략 도운 求法여행
현장은 동료 승려들과 함께 천축에 가서 불경을 얻어오겠다는 탄원서를 올렸지만, 조정에서는 출국금지 입장을 고수했다. 모든 이가 포기했을 때, 현장만큼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현장은 나라에서 안 보내준다면 몰래 나가겠다며 밀출국을 계획했다. 현장은 불법(佛法)을 위해서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 만큼 대담한 사내였다.
현장은 일단 서량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불경을 설법했다. 서량에는 서역 상인이 많아 설법을 하면서 돈도 벌고 서역에 대한 정보도 얻고 서역어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현장이 인도 여행을 꾀한다는 소문을 들은 서량 태수 이대량은 현장에게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간쑤엔 불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곳답게 불심이 깊은 사람이 많았다. 현장의 천축행을 도와주는 간쑤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서량의 고승 혜위법사는 현장에게 길잡이를 붙여줬고, 과주의 향리 이창은 현장의 지명수배서를 찢었으며, 옥문관의 경비대장들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줘 현장의 도망을 도왔다.
국경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고비는 막하연적 사막 횡단이었다. 막하연적은 현장의 표현대로 “하늘에 나는 새가 없고, 땅에 달리는 짐승도 없는(上無飛鳥 下無走獸)” 죽음의 사막이었다. “사방천지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내 그림자 하나뿐(顧影唯一)”이었다. 실수로 물을 사막에 엎지르자 현장은 “천리 길에 써야 할 밑천이 하루아침에 바닥났다”며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사막의 날씨와 환경은 변화무쌍했다.
“밤만 되면 온갖 도깨비와 요괴들이 횃불을 치켜들어 그 찬란하기가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과 같고, 한낮이면 사나운 폭풍이 모래를 휩쓸어 올려 소나기 퍼붓듯 휘몰아쳤다.”
극단적인 피로와 배고픔, 갈증, 긴장으로 별안간 한 무리의 군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환각증세에 시달렸다. 이 모든 것은 요괴와 마귀의 장난으로 여겨졌다. 하늘의 뜻인지 현장은 기적적으로 사막을 횡단해 무사히 중국 밖으로 나왔다. 현장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가면서 많은 나라와 사람을 만났다. 현장이 모험하며 겪은 혹독하고 이질적인 환경,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와 사람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는 ‘서유기’의 모티프가 됐다.
현장의 가장 큰 공헌은 불경 번역·해석 작업이지만, 당나라가 국력을 떨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공헌했다. 장건의 정보가 한무제의 흉노·대완 원정과 실크로드 개척을 도왔듯,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당태종의 서역 공략을 도왔다. 현장의 구법여행은 ‘장건도 전하지 못하고, 반고와 사마천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큰 위업이었다.
강희제의 ‘최후 토벌’
▲바람과 물에 깎인 바위들이 거대한 조각공원을 연상케 하는 야단지질공원
▲옥문관은 중국의 끝이다.
▲옥문관의 초원.
당나라 말기부터 간쑤엔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 주변 민족들이 발호하며 티베트의 토번, 탕구트의 서하, 몽골족의 원나라가 간쑤를 차지했다. 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졌을 때에는 토착 호족들이 거의 독립적으로 간쑤를 지배했다. 특히 9세기 중엽에서 11세기 초는 당제국이 붕괴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이 일어났으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요·금·원·서하·토번 등 수많은 유목민족이 각축을 벌인 파란의 시대였다. 이 시기 둔황에서는 토착 호족인 장씨와 조씨, 두 가문의 소왕국이 미묘한 세력 균형을 잘 활용해서 200년 동안 살아남았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했지만 간쑤성에 대한 영향력은 전만 못했다. 명대의 간쑤 영역은 서부 끝의 옥문관에서 중부의 가욕관으로 크게 줄었고, 둔황 방어에 몽골족 일파를 활용하는 등 지배력이 현저히 줄었다. 더욱이 투르판이 침입해 약탈을 일삼자 1524년 명은 가욕관을 폐쇄하고 동서 교통을 차단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투르판의 동진을 막지 못해 간쑤성은 16~18세기 ‘투르판 지배기’를 맞았다. 청나라 강희제가 숙적 몽골의 준가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간쑤를 석권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며 중국의 간쑤성 지배는 비로소 안정됐다. 이민족에게 위협받던 간쑤는 결국 이민족인 만주족 황제에 의해 안정을 찾았다.
간쑤성은 뜨겁고 건조한 열사(熱沙)의 땅이다. 사람이 살기에 혹독한 날씨이지만, 그 덕분에 간쑤의 멜론, 수박 등 과일은 달콤하기로 유명하다. 뜨겁고 건조한 날씨가 과일의 수분을 날려 당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쑤의 날씨는 의외의 소득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그 부산물 중에선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3대 석굴 중 하나인 둔황 막고굴 역시 혹독한 환경이 피워낸 꽃이다. 둔황은 중앙아시아로 가는 북도(北道)와 인도로 가는 남도(南道)가 만나는 곳으로, 중국을 오가는 모든 여행자는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둔황을 넘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지나야 한다.
“서북풍을 마신다(喝西北風)”
▲가욕관성 무술 공연.
▲후한시대 청동상 마답비연(馬踏飛燕). 제비 등을 밟으며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를 표현했다.
승려 낙준은 상인, 여행자들의 불안, 공포를 잘 이용했다. 낙준은 석굴을 아름답게 꾸며 부처님께 봉헌하면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극도의 공포심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싶은 게 인간이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이가 막고굴에 석굴사원을 지어 봉헌했다. 그 결과 735개의 동굴, 1만3600여 평의 벽화, 2415개의 채색 조각상을 가진 막고굴이 탄생했다.
둔황 막고굴은 석굴사원으로만 끝나지 않고 문서보관소 기능도 했다. 이것 또한 간쑤의 날씨가 가져온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습기, 곰팡이 등으로 손상되기 쉽다. 그러나 건조한 간쑤에서는 문화재가 잘 썩지 않아 모래에 묻힌 문화재가 모래를 털기만 해도 원래의 자태를 자랑한다. 중국 내륙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문서들이 간쑤에서는 무더기로 출토된다.
특히 막고굴의 제17호 동굴은 ‘문서가 묻힌 동굴’이라는 뜻으로 장경동(藏經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출토된 4만여 건의 문서는 ‘둔황문서’로 불리며, 중세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됐다. 이 문서들만을 연구하는 ‘둔황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생길 정도다.
이처럼 간쑤는 다디단 과일과 화려한 문화를 지녔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달프고 열악하다. 중국어로 ‘서북풍을 마신다(喝西北風)’는 말은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린다’ ‘고생한다’는 뜻이다.
변방 간쑤의 잦은 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일본 사학자 니시무라 겐유는 둔황 6향의 문서를 검토한 뒤, 모든 장정(壯丁) 중 약 70%가 병역 복무자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간쑤성에서 널리 읽힌 시를 보면 민초들의 고초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16세에 부역을 하고, 20세에 부병에 충당된다. (…) 장군은 말 위에서 죽고, 병사는 땅의 군영에서 죽는다. 피는 널리 황야에 흐르고, 백골은 변경에 있다.”
병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생활은 궁핍했다.
“빈궁한 촌사람 (…) 지금 부부가 되어, 부인은 방아 찧는 일을 하고, 남편은 날품팔이 일을 한다. 황혼 무렵 집에 들어오면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다.”
아무리 국법이 지엄하다지만 이토록 험한 땅에 병사를 보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형수나 비행 청소년을 간쑤 지역 병사로 파견했다. 불량소년이 제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결국은 어린 소년이다. 변방의 사막까지 끌려와 모래 섞인 ‘짬밥’을 먹는 심정은 “14, 15세에 전장에 나가, 손에 장창을 들고 머리를 떨궈 눈물을 흘리고 후회하며 배를 채운다”는 시에 잘 드러난다.
마초가 조조를 급습해 거의 죽일 뻔했을 때, 보급품을 관리하던 교위 정비는 소와 말을 서량군에게 풀었다. 가난한 서량 병사들이 소와 말을 한 마리라도 챙기려고 난리가 난 틈을 타 조조는 위기를 간신히 벗어났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강하지만 오합지졸 같던 서량군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편 가난했던 간쑤의 일면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불법 금 채취
중국인은 북방인을 가리켜 “동북의 호랑이, 서북의 늑대”라고 말한다. 늑대는 호랑이의 위풍은 없어도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생존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간쑤인의 삶은 어떨까. 간쑤성의 면적은 45만4000km²로 남한의 4.5배나 되지만, 70%가 사막과 고원지대다. 인구는 2600여만 명. 2015년 간쑤성의 1인당 명목 GDP는 4201달러로 중국에서 가장 낮다.
가난한 만큼 많은 간쑤인이 외지로 나가 일한다. 행동반경이 넓은 ‘늑대’답게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불법으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가나 정부는 불법 금 채취 협의로 2012년 101명, 2013년 124명의 중국인을 체포했다. 2005년부터 중국인들이 가나에서 불법 금 채굴을 시작해 2013년 당시에는 5만여 명의 중국인이 수천 개의 금광을 개발하고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간쑤인이었다. 중국인답게 통도 커서 가나의 연간 금 채굴량 98t의 4분의 1에 달하는 24t의 금을 채굴했다. 많은 중국인이 불법 입국해서 무차별로 개발하는 바람에 하천이 오염되고 환경이 파괴됐으며, 조직폭력배와 결탁하는 바람에 치안까지 악화돼 가나의 골칫거리가 됐다.
간쑤성에서 ‘가난 탈출’은 지상과제다. 간쑤인들은 일대일로(一帶一路) 바람을 타고 21세기 신(新)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돼 물류와 관광업 등 서비스업이 활성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미래가 썩 밝아 보이진 않는다. 창양쉬(長楊恕) 란저우대 중앙아시아연구소장은 이렇게 단언했다.
“간쑤성은 서쪽으로는 신장(新疆)보다 못하고, 동쪽으로는 산시(陝西)보다 못한 조건을 갖고 있어 황금지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북의 늑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 동안 악전고투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2월 호 홍콩
◇京과 紅에 짓눌린 港人治港의 꿈(베이징·공산당)
港 | 중국과 세계를 잇는 항구
아편전쟁 당시 홍콩은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황폐한 섬”이었지만, 지리적 이점과 아편무역은 홍콩을 재화와 문화가 모이는 교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오랫동안 참정권을 박탈당한 채 “‘포주’ 영국에 돈을 바치는 창녀” 신세였다. 마지막 홍콩 총독은 중국 반환 직전 ‘민주화 지뢰’를 묻었지만,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리는 꿈(港人治港)은 멀기만 하다.
지난 9월 초, 더위가 한풀 꺾인 한국과 달리 홍콩은 여전히 무더웠다. 나는 쇼핑몰보다는 거리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홍콩에서는 달랐다. 숨 막히게 무더운 홍콩에서는 조금만 걸어도 지치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활짝 열린 쇼핑몰 입구에서 상쾌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쇼핑몰 안에 들어와 있었다.
홍콩이 왜 쇼핑으로 유명한지 깨달았다. 쇼핑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더위에 지치면 시원한 쇼핑몰로 들어오게 마련이다. 홍콩 쇼핑몰이 왜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에어컨을 켜놓는지도 알았다. 쇼핑몰 에어컨 바람이야말로 최고의 영업사원이었다. ‘쇼핑 천국’ 홍콩에선 날씨가 쇼핑을 부추긴다.
홍콩(香港)의 약자는 ‘항구 항(港)’이다.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대표적 항구인 홍콩다운 약칭이다. 중국이면서도 중국 본토와는 사뭇 다른 땅, 그래서 역설적으로 세계와 중국을 이어주는 항구가 홍콩이다.
홍콩이 ‘향기로운 항구’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된 유래에는 다양한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 ‘향고(香姑) 선녀’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향나무가 많아서, 또는 향로가 떠내려와 생긴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어떤 전설이든 홍콩은 향기로운 항구라고 한다. 향나무의 산지로 출발했다가 인도·동남아·아라비아 향료를 (아마도 은밀하게) 거래하는 작은 항구로 성장했기에 붙은 이름이리라. 그러나 작은 항구가 국제무역항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국제무역항 홍콩의 탄생엔 매혹적인 향기 대신 매캐한 화약 냄새가 깔려 있다.
아편으로 탄생, 아편으로 성장
청나라 말기 조정은 부패하고 무능했지만 경제력만큼은 무시무시했다. 영국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저렴한 면직물로 당대 세계시장을 휩쓸었지만, 중국에서만큼은 큰 적자를 봤다. 중국은 유럽에서 수입하고 싶은 것이 없었지만, 유럽은 중국에서 차, 비단, 도자기 등 수입하고 싶은 게 많았다.
영국이 청나라에 비해 우위를 가진 것은 군사력밖에 없었다. 신식 군대를 통해서 부당 거래를 강요해야 했다. 덩치 크고 둔한 중국은 한두 번 맞는다고 정신을 못 차리진 않을 것이니 계속 수시로 때려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영국은 중국 가까운 땅에 해군 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당대 최강인 대영제국의 해군력으로 청나라에 꾸준히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국이 눈독을 들인 땅이 홍콩이었다. 홍콩은 중국 본토와 최단거리가 불과 400m일 정도로 바짝 붙은 섬이다. 그러면서도 섬답게 경계 구획이 확실하고, 만일의 경우 본토로부터의 침공을 수월하게 막을 수 있다. 수심이 깊고 해안선 깊숙이 만입된 지형은 항구로서 이상적이다. 게다가 중국 남방무역의 중심지인 광둥성 광저우와 매우 가깝고, 동남아시아, 대만, 일본, 조선 등 다양한 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다. 말라카-싱가포르와 홍콩 두 지역만 장악하면 동아시아의 제해권과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장은 영국이 홍콩에 건설한 요새를 견학한 뒤 영국의 국력과 군항 홍콩의 막강함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상층으로 통하는 통로는 연와석(煉瓦石)으로 축조돼 무릇 20칸으로 짐작되는 탄약고·막사 등의 설치가 세밀하고, 땅굴의 덮개는 연화석(煉化石)으로서 1m 반 정도로 건축돼 수뢰기(水雷機) 발사 시설도 있다. (…) 일본은 1000만 엔을 육군에 써도 전국에 아직 완전한 요항(要港)이 없고, 에도만(灣)의 방어도 올해에야 구색을 갖추게 됐다. 그런데 홍콩은 동양 영국령의 일단(一端)에 불과함에도 그 방어가 이와 같아 그들이 우리를 모욕함은 까닭이 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영국은 아편으로 중국인들을 중독시켰고,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를 굴복시켰다. 제2차 아편전쟁 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할 때는 아편을 양약으로 분류해 아예 아편무역을 합법화해버렸다. 국제무역항 홍콩은 아편으로 태어나고 아편으로 성장했다. 1844년 홍콩 총독 존 데이비스는 부임 직후, 사적 자본을 가진 거의 모든 홍콩 거주민이 아편무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아편은 홍콩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거래되고 비중이 가장 높은 주력 수출품이었다. 아편 가격이 주식 시세처럼 매일 신문에 보도됐다.
1910년대는 국제사회 여론도 아편금지 추세로 흘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시아의 작은 섬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당시의 목격자는 말한다.
“독일인들은 억류되고 독일 사업체는 폐쇄됐다. 홍콩 거주 영국인 다수가 자원병으로 전장에 나갔다. 그래도 홍콩이 번영일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정도 아편이라는 비상용 물자 덕분이었다.”
핵심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기업 등 경제 단위들도 운영이 정지되는 상황에서도 아편이라는 ‘비상용 물자’는 불황과 전쟁을 모르는 ‘효자상품’이었다. 아편 무역과 재배를 오래 하다 보니 전문지식도 축적됐다. 훗날 마약이 세계적으로 불법화하자 동남아 국가들의 통치력이 쉽게 미치지 못하던 태국·라오스·미얀마 접경 산악지역 일대에 마약 재배 기지 ‘골든 트라이앵글’이 나타났다.
골든 트라이앵글은 반군, 범죄조직, 현지 농민과 외부 고급인력이 유입되며 기업화했다. 홍콩·대만 출신의 화학자들이 마약 연구소와 정제소에서 일했다. 이렇게 재배된 마약은 삼합회 등 범죄조직에 의해 홍콩, 마카오, 대만으로 흘러들었다. 홍콩과 마약의 인연은 이렇듯 질기고도 질겼다.
황폐한 섬의 대변신
홍콩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사업가는 국제금융 도시를, 관광객은 쇼핑과 음식 천국을 떠올릴 것이다. 그 모든 이미지는 홍콩이 돈과 온갖 재화, 문화가 모이는 곳이며 교역의 중심임을 의미한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외무장관 파머스톤의 말처럼, 홍콩은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황폐한 섬”이었다. 지리적 식견이 부족한 파머스톤은 전쟁까지 치르면서 기껏 쓸모없는 섬을 얻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홍콩은 급속히 달라졌다. 해안선을 따라 큰길이 놓였고, ‘여왕의 길(Queen´s Road)’ ‘국왕의 길(King´s Road)’이라는 영국식 이름이 붙었다. 1865년 로빈슨 총독은 홍콩에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구축한다. 근대식 병원, 학교, 경찰서, 교도소, 가로수, 종탑을 세웠고, 은행, 상공회의소, 상하수도를 마련했다.
홍콩의 변화는 중국의 사상가들에게 크나큰 문화충격과 영감을 안겨줬다. 청말의 대표적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는 홍콩을 방문한 뒤 “서양에도 법도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며 감탄했다. 홍콩의 우아한 서양식 건물, 깨끗한 거리, 효율적 치안,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보며 서구의 시스템에 매료된 캉유웨이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혁신을 꾀하는 변법자강운동을 구상했다. 쑨원(孫文) 역시 홍콩에서 혁명을 배웠다고 말했다. 홍콩은 신사상·신중국의 어머니였다.
알제리 모델, 홍콩 모델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통치엔 프랑스의 알제리 모델과 영국의 홍콩 모델이 있었다. 절대왕정의 중앙집권성이 강한 프랑스는 알제리를 프랑스의 하나의 도(道)로 간주하고 직접 통치했다. 이에 반해 봉건영주의 지방분권성이 강한 영국은 작은 식민지 정부가 홍콩을 간접 통치했다. 식민지 정부는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인프라를 완비하되, 토착지도층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홍콩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기에, 중앙정부가 장악해야 할 중앙은행도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민간 기업과 상업회의소가 알아서 운영하도록 했다. 작은 총독부와 토착사회의 자치조직, 경제기구들이 병존하게 됐는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사조직, 향우회, 상방(商幫, 상인 집단) 문화와도 잘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중국 상인들은 홍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홍콩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접점이며, 남부 중국과 동남아의 중심에 위치한 요지다. 게다가 근대 인프라 위에 근면 성실한 중국 상인들이 움직이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19세기 중반은 홍콩의 신시대였다. 영국에 홍콩은 극동의 거점이며 자유무역항으로서 매우 중요해졌다. 다만 이때의 자유무역이란 떳떳하지 않은 밀무역이었고, 중요 거래 품목은 아편과 ‘현대판 노예’인 쿨리(苦力, 중노동에 시달린 하층 노동자)였다. 작가 진순신(陳舜臣)은 당시 홍콩의 세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가장(假裝)한다는 것은 홍콩의 습성이 돼버렸다. 아편은 없는 것으로 가장하면서 실은 듬뿍 있었으며, 쿨리 매매 따위도 않는 체하면서 음성적으로는 성업 중이었다.”
진통을 겪으면서도 홍콩은 발전을 거듭했다. 지역 발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도시를 만드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사람이다. 길을 닦고 건물을 지을 사람이 필요하고, 장사할 사람이 필요하다. 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넘쳐나는 중국에서 인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人海를 빨아들이다
홍콩엔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 돈과 안전이 있었다. 안정적일 때는 돈을 찾아, 혼란스러울 때는 피난을 위해 대륙에서 엄청난 사람이 홍콩으로 몰려왔다. 1895년 홍콩 인구 24만8498명 중 23만7670여 명(95.6%)이 중국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홍콩 인구는 바로 100만 명이 됐고, 1941년에는 160만 명으로 늘어났다.
격동의 중국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국공(國共)내전 끝에 공산당이 승리하자 많은 기업가, 자본가, 고급 기술자, 숙련공들이 홍콩으로 들어왔다. 1950년 봄 홍콩의 인구는 236만 명에 이르렀다. 대거 유입된 고급 인력은 의류, 해운, 전자 산업에 뛰어들어 홍콩을 국제금융과 현대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62년 대약진운동과 대기근,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대륙이 고통 받자 1971년 홍콩의 인구는 393만 명으로 다시 껑충 뛰었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톈안먼(天安門) 사건을 일으키자, 1980년 홍콩의 인구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경제인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인, 활동가들도 홍콩에 ‘망명’해 홍콩 문화의 밑거름이 됐다. 현재 홍콩의 인구는 723만 명에 달한다.
홍콩인들에게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으면 홍콩인 대부분은 반문할 것이다. “어떤 나라를 말합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홍콩인들은 난감해하며 제각각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홍콩인(HongKongese, HongKonger), 중국인(Chinese), 홍콩 중국인(Hong Kong Chinese) 등등.
홍콩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변화는 많다. 홍콩 사람들이 특정한 정체성을 가질 만하면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했다. 홍콩은 영국 식민통치와 함께 역사를 시작했지만 식민통치 아래서 현지인들은 주인이 아닌 노예였다. 영국은 홍콩인들에게 참정권도, 영국 영주권도 주지 않았다. 영화 ‘차이니즈 박스(Chinese Box)’에서 영국 저널리스트 역을 맡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말했듯 “홍콩은 부지런히 몸을 팔아 영국이라는 포주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성실한 창녀”와도 같았다.
‘철도역’의 ‘성실한 창녀’
▲동남아 출신 가정부들은 휴일이면 밖으로 나와 시간을 보낸다.
▲홍콩의 야시장.
▲고층 건물 뒤 골목길에서는 홍콩의 서민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영국인들은 홍콩에 정을 주지 않았다. 애초부터 홍콩에 간 영국인들은 대개 고향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하류계층이었다. 본토인들은 홍콩에서 거들먹거리는 ‘쓰레기(filth)’들이 ‘런던에서 실패해 홍콩을 기웃거리는 놈(Failed In London, Try Hong Kong)’의 줄임말이라고 비아냥댔다.
고향에서도 뜨내기였던 영국인들은 새로 정착한 홍콩에도 정을 붙이지 않았다. 영국의 한 식민통치자는 말했다.
“홍콩은 ‘철도역’이라 불려왔다. 사람들은 이곳을 왔다 갔다 하고, 이 거리와 바람을 피우거나 정사를 경험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사랑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1997년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다. 반환 전후로 홍콩인들은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식민통치를 끝내고 모국의 품으로 돌아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태 등을 떠올리면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정세 불안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홍콩은 과연 어떤 곳이고 홍콩인은 누구인가.
홍콩인 스스로는 문화시민임을 자부한다. ‘미개한 중국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영국인들이 보기에 홍콩인들은 중국인이다. 더럽지는 않지만 냄새나고, 미신과 유교를 숭상한다. 홍콩인 스스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부하지만, 영국인이 볼 때 홍콩인은 정체불명의 빨간 부적을 덕지덕지 붙이고, 향을 사르고, 풍수(風水)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땅을 사고 희한한 건물을 짓는다.
성질이 너무 급해서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가야 할 층의 버튼을 이미 눌렀음에도 끊임없이 버튼을 계속 눌러댄다. 마치 버튼을 계속 눌러대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할 듯이.
함께 일할 때도 갑갑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기 의도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끈다. 공공연히 표현하지 않고 논의를 지지부진하게 끌어 은근슬쩍 책임을 회피하는 홍콩의 방식을 영국인은 ‘구술 태극권’이라 불렀다. 홍콩에 오래 산 영국인들은 홍콩인들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융통성을 기대하지 말라. 홍콩 교육제도의 실패라 불러도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정 내리도록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中-港 지역감정 고조
그러나 홍콩인들은 이미 대륙의 중국인들과는 크게 달라졌다.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홍콩을 망가뜨리는 것에 눈살을 찌푸린다. 중국인들은 큰길가에서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쉰다. 거리에 침을 뱉는 것은 예사고, 어린아이가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게 한다. 홍콩인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중국인은 예의를 모르고, 무례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질서의식이 희박하다. 자유의식이 결핍됐을 뿐 아니라 더럽고 지저분하다.”
중국인들은 중국인들대로 홍콩인들이 못마땅하다.
“홍콩 사람들은 그동안 자본주의에 너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만 알고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을 기울일 뿐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이런 점에서 홍콩에는 문화다운 문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문화적 차이에다 경제·정치 문제까지 겹치니 해결은 난망해진다. 홍콩 반환 전후로 외국으로 이민을 간 주민이 많았지만, 홍콩 인구는 오히려 늘었다. 이민자 대신 본토인들이 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좁디좁은 홍콩에 많은 사람이 몰리니 집값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게다가 중국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부동산 가격을 한껏 올려놓아 홍콩 주택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집값 상승은 물가 상승을 이끌며 홍콩 서민들의 삶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2008년 중국에서 멜라민 분유 파동이 발생하자, 중국인 부모들이 대거 홍콩에 몰려와 분유를 싹쓸이해갔다. 홍콩 주민들은 중국인들 때문에 자기들 아기에게 먹일 분유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홍콩은 중국의 슈퍼마켓이 아니다”라던 불만은 어느새 “홍콩은 홍콩인들을 위한 도시여야 한다”는 정치적 자각으로 발전했다.
지역감정은 한번 생기면 어떤 일에든 개입한다. 2011년 7월 홍콩은 성매매 단속을 벌였다. 중국에서 넘어와 홍콩에서 성매매로 돈을 버는 ‘북쪽 언니(北妹)’ 60명을 적발해 중국에 넘겼다. 지역감정을 유발할 만한 사건은 아니건만, 네티즌들은 지역감정 싸움을 벌였다.
홍콩인들은 “대륙 남자들은 홍콩에 와서 도둑질하고 여자들은 매춘하고…이러니 1997년 이후에 홍콩 사람들이 죄다 이민 간 것”이라며 대륙인들을 싸잡아 비판한다. 대륙인들은 대륙인들대로 “홍콩놈들, 예전에 광둥성에서 살다가 거지꼴로 넘어간 놈들이 이제 와 잘난 척한다”며 아니꼽게 여긴다.
‘진짜 민주주의’ 경험 못해
사실 중국인들의 불만에도 일리가 있다. 오늘날의 홍콩이 있었던 것은 중국 덕분이니까. 홍콩은 애초부터 영국이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뒤집어 말하면, 중국이 없었다면 홍콩도 없었다.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황폐한 섬’을 개발할 때는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그 사람들은 중국 본토에서 왔다. 중국에서 온 막노동꾼, 날품팔이꾼, 뜨내기들이 바로 오늘의 홍콩을 만들어낸 밑거름이다. 좁고 척박한 홍콩에서 그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과 물, 전기도 중국에서 왔다. 홍콩의 풍부한 자본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몰려든 자본이다.
개혁·개방 이후 홍콩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과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광둥성 선전(深圳)이 제조기지 역할을 맡아주면서 홍콩은 고부가가치 산업인 금융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계 금융위기로 세계가 휘청거릴 때에도 홍콩은 중국의 대대적인 자본투자 덕분에 번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오늘의 홍콩을 만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다. 중국 처지에서는 다른 형제들이 희생해가며 홍콩을 밀어줬는데, 이제 홍콩이 잘나간다고 배은망덕하게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였고 ‘작은 식민지’ 정책을 지향했다. 그래서 홍콩 사람들은 고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살았을 것만 같다. 그러나 종주국이 제아무리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식민지를 강압 통치하지 않더라도 식민지는 식민지다. 홍콩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
홍콩인은 영국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대영제국 시민으로서의 공민권과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총독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명목상 몇 명의 중국계 의원은 있었지만, 1991년까지 정부의 입법안은 언제나 무사통과됐다. 영국은 1981년 영국국가법(British Nationality Act)으로 포클랜드와 지브롤터 주민들에게는 영국에서 거주할 권리를 보장해줬지만 홍콩은 예외였다. 영국 식민지 중 홍콩은 영국에 경제적 이익을 가장 크게 주면서도, 정치적 이익은 가장 작게 받았다.
우물물과 강물이 섞이다
▲촛불집회를 벌이는 시민들. 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홍콩의 밤거리.
“홍콩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선입관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홍콩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관심하기를 강요받은 것이다. 정치 참여가 봉쇄된 홍콩인들은 경제에 ‘올인’했다. 지도자를 선택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옷은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중국 반환(1997년 7월 1일) 전 영국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정치 개혁을 이끌었지만 이는 매우 속 보이는 행위였다. 영국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사랑한다면, 150여 년 동안 가만있다가 반환 3년 전인 1995년 입법의회 선거를 치르며 부랴부랴 민주화를 들고 나왔을까.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지 않았다면 홍콩을 민주화했을까.
그러나 경위야 어찌 됐든, 홍콩 주민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대표를 뽑을 수 있게 됐다. 홍콩 사람이 홍콩을 다스리는 일(港人治港)은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민주화가 달갑지 않았다. 공산당 일당독재체제와 홍콩의 직접선거는 상충되는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 통치를 곤란하게 만드는 영국의 꼼수가 매우 불쾌했지만, 중요한 것은 일단 홍콩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금 알 낳는 거위’ 홍콩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국에도 중요한 일이었다.
홍콩은 특별행정구로서 ‘높은 수준의 자치권(a high degree of autono-my)’을 보장받았다. 1국가 2체제로 중국에 속하기는 하되 사회주의 체제와 다른 독자적 체제를 꾸려갈 수 있다.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井水不犯河水) 것처럼, 홍콩과 중국은 각자의 한계를 분명히 해서 서로 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애당초 베이징 정부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고, 홍콩인들도 베이징이 약속을 지키리라 믿지 않았다. 많은 홍콩인은 반환 전후 미국, 영국,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인기가 좋았던 캐나다 밴쿠버는 홍콩인들이 워낙 많아 ‘홍쿠버(Hongcouver)’로 불릴 정도였다. 많은 예술가와 영화인도 홍콩을 떠났다. 1980~90년대 세계를 휩쓴 홍콩 영화의 화양연화(花樣年華)도 저물었다.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는 홍콩 반환 직전 마지막 불꽃, 회광반조(回光返照)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홍콩의 변화는 별로 없었고, 오히려 더욱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홍콩인들은 다시 고향 홍콩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紅人治港, 京人治港
▲흰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2014년에 홍콩은 또 한 번 역사의 전환점을 맞는다. 홍콩 반환 이후 지켜져온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홍콩인들은 2017년부터 행정장관을 직접 선거로 뽑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꼼수를 부렸다. 행정장관 후보자를 중국 정부가 구성한 선거인단에서 선출토록 해 홍콩인들은 누구를 뽑든 베이징의 입맛에 맞는 사람일 수밖에 없게 됐다. 더욱이 베이징은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 친절하게 ‘후보자는 애국애항(愛國愛港, 중국과 홍콩을 사랑한다) 인사여야 한다’고 해설했다.
일찍이 덩샤오핑은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조국이 추상적인 것인가. 공산당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신중국을 사랑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인가”고 애국을 정의한 바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데, 왜 그 조국이 꼭 공산당이 지배하는 조국이어야 할까. 그러나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곧 반역이다. 따라서 애국 인사란 공산당을 지지하고, 또한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뜻한다. 홍콩인들은 누구를 뽑든 베이징의 충신만을 뽑게 된다. 베이징의 충신이 홍콩을 지배하는 것과 영국 총독의 식민통치와 무엇이 다를까.
홍콩인들의 부푼 꿈, ‘항인치항’ 대신 공산당이 홍콩을 지배하고(紅人治港) 베이징이 홍콩을 통치한다(京人治港). 급기야 홍콩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정치에 관심 없다던 홍콩인들이 2014년 9~10월 거리를 가득 메웠다. 경찰의 최루액을 우산으로 막아내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홍콩인들의 투쟁은 ‘우산혁명’이 됐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래 중국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집단행동이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완강하다. 일국양제에서 ‘일국(一國)’을 강조하고,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한다고 했지 ‘전면적인 자치권’을 보장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결혼 전 아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던 남편이 결혼 후 고무장갑 사주는 걸로 끝내려는 격이었다.
현재의 대립구도를 단순히 ‘중국 vs 홍콩’으로 볼 수는 없다. 홍콩인들은 중국 정부를 절대 믿지 않는 ‘반중파’와 중국 정부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더라도 별 상관없다는 ‘방관파’,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라는 ‘친중파’ 등 세 부류가 엇비슷한 세력을 형성해 팽팽하게 대립한다. 홍콩의 난해함을 지적한 진순신의 말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홍콩이 모략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보이지 않게 대립하는 배후 세력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홍콩이 비록 영국 영토의 작은 섬이지만 그곳은 중국 대륙을 움직이는 온갖 세력이 반목하면서 공존하는 도시였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사람들.
2014년 11월 2일 홍콩 시민 184만 명은 시위 중단과 경찰을 지지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이는 전체 홍콩 시민의 4분의 1, 성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한편 시위를 지지하는 쪽은 시위가 “안정을 흔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정을 지키고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올해 9월 4일 열린 홍콩 입법의회 선거엔 홍콩 유권자 380만 명 중 약 220만 명이 참여했다. 1997년 홍콩 반환 이래 역대 최고의 투표율(58%)이다. 우산혁명의 지도부인 네이선 로 등의 약진에 힘입어 홍콩 자치를 주장하는 범민주파는 지역구 전체 35석 중 절반이 넘는 19석을 차지했다. 이들이 내년 3월에 있을 행정장관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완고하고, 홍콩이 어디로 갈지는 불투명하다. 1989년 톈안먼 사건 때 홍콩인들은 “오늘의 베이징은 내일의 홍콩”이라며 불안해했다. 이제는 대만인들이 홍콩을 보며 “오늘의 홍콩은 내일의 대만”이라며 불안해한다. 과연 홍콩이 자율성, 인권, 민주주의를 얼마나 지켜갈 수 있을까.
홍콩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陳浩基)는 자신의 책 ‘13.67’에서 “나는 2013년 이후의 홍콩이 1967년 이후의 홍콩처럼 한 발 한 발 올바른 길로 나아가 소생할지 아닐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한 공장의 파업이 중국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봉기로 이어져 5000여 명이 투옥된 1967년 홍콩 봉기 이후 홍콩 경찰은 내부 부패를 척결하고 조직범죄를 뿌리뽑으며 시민의 신뢰를 간신히 회복했다.
우산 밑의 민주화 지뢰밭
대륙의 숨통 홍콩
지난 세기, 격변의 땅 중국과 달리 홍콩은 돈과 안전이 보장된 ‘대륙의 숨통’이었다. 20여만 명이던 인구는 100년 새 500만 명이 됐고, 늘어난 인구만큼 이들의 정치 성향도 친중·반중·방관파로 분화해 저마다 목소리를 낸다. 현대판 노예 ‘쿨리(苦力)’의 후예들은 “영국 총독이 빠져나간 자리에 ‘베이징의 충신’이 앉았다”며 ‘우산혁명’을 시도하고, 친중파는 시위 중단 서명운동으로 맞불을 놓는다. 홍콩은 ‘민주화의 지뢰밭’이 됐다. 〈 관련기사 430쪽〉
▲빅토리아 피크에서 바라본 풍경.
▲홍콩의 명물 트램(노면 전차)은 세련된 광고판 같다.
▲홍콩의 밤거리.
▲대륙의 마오쩌둥과 홍콩 영화스타 리샤오룽의 영화 포스터.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하는 홍콩을 보여준다.
▲해안가에 즐비한 고층 건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