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문가들의 생각2/ 김용한의 한 글자로 본 중국1/ 2015년 01월 호 베이징 - 12월 호 상하이
◆김용한의 한 글자로 본 중국1/ 2015년 01월 호 베이징 - 12월 호 상하이
신동아 2015년
김용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01월 호 베이징
◇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京 베이징을 바꾼 자가 천하를 바꾼다
“베이징과 상하이, 어디가 더 좋아?”
베이징이 고향인 친구 제임스가 물었다. 중국에선 베이징 시민인 것만으로도 상당한 특권이다. 주택, 교육, 취업 등의 형편을 고려하면 베이징 호구(戶口)의 가치가 100만 위안(약 1억7000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제임스는 영국 유학생이니 상당한 고위층 자제일 가능성도 높다. 훗날 제9세대 공산당 지도자가 될지도 모를 전도유망한 중국 청년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수준의 질문을 하다니.
“둘 다 각자의 장점이 있지만 난 베이징이 더 좋더라. 베이징은 유서 깊은 도시여서 가는 곳마다 역사와 고유의 문화가 있잖아. 상하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만 할 뿐이고.”
제임스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지금 나한테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묻는 거니?”
아아, 그 거만한 웃음을 본 순간 절감했다. 이 녀석, 뼛속까지 베이징 사람이구나. 천하의 중심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 베이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구나. 만약 내가 상하이가 더 좋다고 했다면, 적어도 3박4일은 ‘정신교육’을 받을 뻔했다. “그 따위 천박한 도시가 뭐가 좋다고?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를 가진 중국의 중심, 베이징의 진가를 모른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경산에서 굽어본 자금성의 전경.
베이징의 약칭은 ‘서울 경(京)’ 자다. 京은 원래 침수되지 않도록 인공으로 만든 언덕을 뜻한다. 의도적으로 만든 터전 위에 도시가 탄생했고, 정치의 중심 궁궐이 세워졌다. 이제 京은 도시 중에서도 최고의 도시, 수도(首都)를 뜻한다. 베이징을 京으로 약칭한 데서 ‘베이징은 수도다.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베이징 사람들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京이 말해주듯 베이징은 인공적으로 건설된 도시다. 도시 중의 도시인 수도이며, 중국의 중심이다.
“이게 불상이야, 마징가 제트야?”
옹화궁 만복각(萬福閣)의 미륵불상은 너무나 컸다. 불상의 키가 18m. 지나치게 크다보니 흡사 마징가 제트처럼 보였고, 만복각은 마징가 제트 격납고 같았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서태후의 별장이었던 이화원을 찾았다. 만수산 위의 불향각(佛香閣)에서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니 절로 호연지기가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이 산과 호수는 모두 가짜다. 순전히 인간의 손으로 평지를 파서 여의도공원 면적의 10배(2.2㎢)에 달하는 곤명호를 만들었다. 파낸 흙은 쌓아올리니 높이 60m의 만수산이 됐다.
▲옹화궁 만복각의 미륵불. 높이가 18m에 달한다.
대륙의 기상은 만리장성에서 절정을 이룬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 위로 만리장성이 쭉쭉 뻗어나간다. 거대한 용이 산 위에서 춤추는 듯하다. 그런데 이 높은 산으로 돌을 날라 와 하나하나 쌓아올렸다니! 내가 만리장성의 인부가 아님을 천지신명께 감사드렸다.
흔히 중국을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라고 한다.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다(人多)’,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의 저력은 바로 사람, 많고도 많은 사람에서 나온다.
부수고 새로 만든다
베이징은 ‘사람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공 도시다. 연암 박지원은 “(베이징) 도성이 바로 서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너스레가 아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유학자 박지원은 베이징에서 유교의 질서를 읽어냈다. 공자는 평생 주례(周禮)의 회복을 염원했고, 유교는 예(禮)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주나라 예법인 주례는 일종의 국정관리 매뉴얼이다. 6대 부처 산하 360개 관청의 인원과 직무를 명시했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에 해당하는 각종 부처를 나누고 국가의 예산 운용, 산업·물류 등 국정 전반을 체계적으로 논한다. 또한 주례는 국가 운영과 인프라 구축을 강조한다. 주례 고공기(考工記)는 도성의 설계를 설명한다. 성벽을 둘러 성의 방위에 만전을 기하되, 원활한 물류 관리에도 차질이 없도록 동서남북 네 방향마다 세 개의 성문을 뚫고 각 문을 넓은 길로 연결했다. 도성 중심에는 종묘사직, 시장, 조정을 두었다.
▲황제의 정원이었던 북해공원은 오늘날 베이징 사람들의 쉼터가 됐다(왼쪽). 베이징 근교에 만리장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 도시가 북방 변경의 군사도시에서 정치의 중심지로 변해왔음을 나타낸다.
주례 고공기의 법도에 맞게 도시를 건설하니 예의가 확립되고, 예의가 확립되니 질서가 바로잡히고, 질서가 바로잡히니 천하가 바로잡힌다…. 계획도시 베이징이 구현한 유교 질서에 연암 박지원은 감탄했으리라.
베이징은 이처럼 인공(人工), 즉 사람이 만들었으며, 인위적인 법도에 따라 움직이는 도시다. 하늘이 내린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은 얼마든지 부수고 새로 만들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바로 황제의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어차피 사람은 넘쳐나니까.
몽골족의 원나라는 금나라를 정복한 후 베이징을 사흘 동안 불태우고 쿠빌라이의 야심 찬 기획 아래 새로운 베이징을 건설했다. 그 뒤 명나라는 원대 성벽의 기초 위에 명나라의 성벽을 쌓고 원나라의 연춘각이 있던 자리에 인공 토산 ‘진산(鎭山)’을 쌓았다. ‘누를 진(鎭)’은 몽골족과 원나라의 기운을 누른다는 뜻이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은 명나라 때 건설된 자금성만 남기고 베이징성의 내성과 외성을 모조리 파괴했다.
현재 내성 자리엔 지하철 2호선, 외성 자리엔 베이징시 이환도로가 들어섰다. 관광객은 자금성만 보고도 그 엄청난 규모에 감탄하는데, 지금 내성과 외성까지 존재했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러나 중국인은 스스로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중국인에게 파괴와 재건설은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 전통이다. 베이징성의 보존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붙자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과거를 경시하고 미래를 맹신한다’라고 비판하는데, 설마 전족을 경시하고 변발을 경시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경시하고 미래를 믿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과격한 마오쩌둥이 아니라 온건파 지도자라고 해도 별로 다르지 않다. ‘영원한 인민의 총리’라 칭송받는 저우언라이는 베이징 궁성 보호론자인 량쓰청과 두 시간 대화를 나눴다. 량쓰청은 노을 지는 패루(牌樓)가 먼 산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시로 읊었다. 그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고시의 한 구절을 빌려 화답했다. “노을은 더없이 좋지만 황혼에 가깝구나.”
이 말은 당시 공산당의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따라서 수도 베이징은 황제들의 절대 권력이 아닌, 사회주의의 이상을 표현해야 했다. 더욱이 베이징성 보존 논쟁이 공산당 찬반론으로 변하자 더 이상 합리적인 토론이 어려워졌다. 결국 베이징은 모스크바 방식을 따르기로 한다.
이처럼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가 된 이래 시대가 변할 때마다 변신을 반복했다. 베이징의 새 주인은 기존 베이징을 파괴하고 재건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음을 천하에 알렸다. 베이징을 바꾸는 자가 천하를 바꾼다.
40%가 입과 붓으로 먹고살아
도시는 잉여의 산물이다.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먹을거리 등 온갖 물자가 유입되지 않는다면 도시는 죽어버린다. 그러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장악한 도시인들은 거꾸로 도시 밖 세상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베이징은 도시의 잉여적 특성이 극대화한 곳이다. 이 천자(天子)의 도시엔 황족, 재력가, 관료, 선비가 모여들었다. 청나라 말기인 1908년 베이징 인구 70만 명 중 28만 명이 직접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구의 40%가 공문서를 꾸미고 간언하는 등 입과 붓으로 먹고산 셈이다.
베이징은 생산하지 않으나 군림한다. 일례로 요리를 보자. 베이징만의 요리나 특산물은 없다. 하지만 전국 각지의 요리를 죄다 불러들여 맛이 있네, 없네 품평하며 요리를 발전시켜왔다. 팔자 좋고 입맛 까다로운 나리가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합격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최고만 살아남았다. 그 유명한 ‘베이징덕’도 산둥성의 오리 요리를 몽골족 궁중 요리사 흘사혜(忽思慧)가 발전시킨 것이다.
요컨대 베이징은 스스로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서 생색은 다 내고 특혜는 다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대감 같은 도시다. 호의와 특혜가 계속되면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법. 천하가 있기에 베이징이 있는 것이지만, 800여 년 동안 이어져온 특혜는 베이징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낳았다.
▲베이징 뒷골목 후퉁의 인력거꾼과 그의 딸. 베이징의 명동 격인 왕푸징의 포장마차 거리에는 전갈, 해마 꼬치 등 온갖 요리를 판다. 베이징의 이태원이라 할 싼리툰(三里屯)의 살사 바 공연 모습(왼쪽부터).
‘중(中)’을 숭상하는 중국인에게 ‘천하의 중심’, 베이징은 가장 높고 귀한 존재다. 천하는 마땅히 베이징을 따라야 한다. 베이징어는 중국의 표준어 보통화(普通話)가 됐고, 베이징의 방송국 베이징뎬스타이(北京電視臺)는 중국의 중앙방송 CCTV(China Central Television)가 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베이징은 사실 오랫동안 변방이었다. 베이징은 베이징원인(北京原人)의 흔적이 발견될 만큼 일찍부터 인류가 살던 곳이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베이징은 주나라 제후국인 연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이었고, 북방유목민족 요·금나라의 송나라 공략기지였다. 즉 주나라부터 요·금나라까지 2000여 년 동안 지방 정권의 수도에 불과했다.
칭기즈 칸의 원나라가 아시아 일대를 석권한 뒤에야 베이징은 제국의 수도가 됐다. 그러다 명 태조 주원장이 원나라를 물리치고 난징(南京)에 도읍을 정하자 베이징 시대는 끝난 듯했다. 하지만 주원장이 죽고 난 후 조카의 황제 자리를 빼앗은 영락제가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로써 베이징은 다시 중심을 차지했다. 한족 문화를 존중한 여진족의 청나라는 명나라의 베이징과 자금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세월이 흐르고 청나라가 서구열강과 민중의 손아래 무너졌다. 그 와중에 야심가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새롭게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됐고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지만, 장제스에게 토벌된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난징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수도를 다시 베이징으로 돌린다.
이처럼 중국 역사를 되짚어보면 베이징은 정통성을 가진 수도라고 하기엔 어딘가 찜찜하다. 베이징은 변방 도시였고, 이민족의 경영 기지였으며, 찬탈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이제 중국 정부와 역사학계는 ‘칭기즈 칸도 중국인’이라며 원나라를 중국 안으로 끌어들인다. 영락제는 카리스마와 능력을 겸비한 명나라 최고의 군주로 손꼽힌다.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아버지다. 오늘날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과 동의어가 됐다. 시간은 새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고 강력한 권력은 가짜를 진짜로 만든다. 베이징의 아이러니를 보며 사람과 시간의 힘을 느낀다.
5월 35일
▲다산쯔(大山子) 798 예술구에서 만난, 해태를 타고 천하를 호령하는 인민해방군 조각상. 정치의 중심지답게 예술도 강한 정치성을 띤다.
“손님, 이 신발을 사십시오. 신발의 수명이 선생님의 수명과 같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빨리 죽을 거라고요?!”
베이징의 신발가게에서 주인과 손님이 나눈 대화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던 베이징답게, 베이징 사람들은 언변이 뛰어나고 유머감각이 있다.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다. 정치의 중심지로서 온갖 정치담론을 생산하던 곳답게, 베이징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치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치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는 없다.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반쪽에 불과하다. 당과 국가, 정부기관 등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할 순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해 소설가 위화는 독일 기자에게 재치 있게 말했다.
“어느 국가든 간에 언론의 자유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국민이 총리를 욕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람을 욕해선 안 될 겁니다. 중국에서는 총리를 욕해선 안 되지만 이웃은 욕할 수 있지요.”
비판조차 자유롭지 않은데, 집단행동이 용인될 리 없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광장에 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인민이 모였다.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을 모델 삼아 중국의 민주화를 촉구했지만, 덩샤오핑은 탱크까지 동원하며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했다. 오늘날까지 중국에선 톈안먼 사건을 자유롭게 언급할 수 없다. 중국 정부가 ‘6월 4일’을 인터넷에 올릴 수 없게 막자 중국 네티즌은 ‘5월 35일’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위화는 “우리에겐 6월 4일의 자유는 없고 5월 35일의 자유만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은 검열받고, 톈안먼광장에는 자유롭게 모일 수 없다. 중국 인민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길은 ‘상팡(上訪)’뿐이다. 베이징의 중앙 관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아뢰고 정부에 선처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의 신문고와 유사하다. 베이징 남역 주변에는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상팡하러 온 사람이 넘쳐나고, 상팡인을 위한 쪽방촌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임금체불, 공안비리, 토지보상, 의료사고 등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위에 정책이 있다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나라다. 지방공무원들은 상팡을 저지하는 제팡(截訪) 조직을 만든다. 상팡을 가는 사람을 곧장 쫓아가 갖은 회유와 협박을 해서 상팡을 막는다. 시 단위 이상 지방정부는 제팡을 위해 베이징 출장소를 항상 잡아둔다고 한다.
설령 상팡에 성공했다 해도 상팡인은 맘 편히 살 수 없다. 고향 공무원들이 사사건건 트집 잡고, 심지어는 뇌물수수 등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허용된 언로인 상팡마저 좌절되면서 중국 네티즌은 “얼빠진 신문들이 ‘상팡이 줄었다’고 써대는데, 사실은 이런 식으로 상팡 자체를 막는 것”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13억 개의 꿈
중국의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의 정치다. 그래서 ‘베이징’의 또 다른 동의어는 ‘중국 공산당’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정한 인민의 정치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인류학자 김광억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베이징 뒷골목 ‘후퉁(胡同)’을 찾아갔다. 중국 정부는 세계에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후퉁에 담장을 쳐놨다. 담장에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라는, 올림픽 표어가 붙어있었다. 후퉁에 살던 허난성 출신 농민공은 그에 대해 “저건 후진타오의 꿈이지, 내 꿈은 아냐”라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은 하나의 천하를 꿈꾼다. 획일화한 천하를 베이징이,중국공산당이 통치하기를 바란다. 하나가 아닌 것은 곧 분열이요, 분열은 대혼란을 가져온다고 인민에게 공포를 주입한다. 하지만 13억 개의 꿈을 품에 안는 자세가 중국에 진정한 안정을 가져오지 않을까.
◆02월 호 하이난
◇욕심의 그늘 드리운 사랑과 휴양의 섬
琼 ‘하늘의 끝’을 더 넓혀라!
한국인들도 즐겨 찾는 하이난(海南)은 예부터 뜨거운 햇살과 열정적 사랑으로 표현되던 중국의 대표적 휴양지다. 그러나 요즘 하이난은 부동산 투기 붐에 몸살을 앓고, 중국의 영해 확장 요충지로 활용되고 있다.
코발트 빛 바다 늘어진 야자수 아래
아롱만 해변에서 처음 만난 남국의 아가씨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둘이서 새긴 그 사랑
젊음이 불타는 하이난의 밤
아아, 잊지 못할 하이난의 밤
-권성희, ‘하이난 사랑’ 중에서
뜨거운 남국의 해변에서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인류의 공통적인 로망인가보다. 권성희의 트로트와 중국 속담은 일맥상통한다. ‘베이징에 가면 자신의 직급이 낮다는 걸 알게 되고, 하이난에 가면 자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지방에선 온갖 유세를 떨던 관리도 베이징에 오면 말단 공무원에 지나지 않고, 하이난 여자와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면 힘이 달린다는 말이다.
로맨스 영화 ‘쉬즈더원(She’s the one, 非誠勿擾)’에서 여주인공 수치(舒淇)는 하이난의 미녀 스튜어디스로 나온다. 감정에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하이난 여자에 대한 중국인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한겨울에도 야자수와 꽃이 만발하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하이난은 중국의 대표적인 피한지다.
원시의 자연에서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불태운다. 이 얼마나 달콤한 꿈인가. 중국 최남단 하이난에서도 남쪽 끝인 톈야하이자오(天涯海角)는 중국인에게 세상의 끝으로 통한다. 연인이 이 관광명승지까지 함께 오면 세상의 끝까지 온갖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셈이니 이별 없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톈야하이자오의 광장은 ‘사랑의 광장(愛情廣場)’으로 불린다. 광장 앞 바다에는 두 개의 바위가 하트 모양으로 교차해 연인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이 바위 역시 ‘사랑의 돌(愛情石)’이라 불린다.
하지만 내가 1년 전 하이난을 찾은 까닭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했다. 사랑은커녕 ‘죽음의 공기’로부터 도망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겐 신선한 공기가 있습니다. 중국에선 매우 드문 물건이지요!”
재치 있는 하이난 호스텔의 광고 문구다. 2014년 1월, 예년보다 심각한 수준의 미세먼지가 중국 대륙을 짓눌렀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중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의 외딴섬이라면 공기가 맑겠지. 엄청난 인파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겠지. 이런 기대를 안고 하이난으로 떠났다.
그러나 하이난으로 향하는 배는 새벽부터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꾸역꾸역 태웠다. 괜찮은 숙소는 만원이었고, 기차표도 동이 났다. 하이난은 이제 중국의 대표적인 피한지가 돼 춘절이 초성수기였다. 송·원·명 700년 동안 하이난을 찾은 여행자는 18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1년 하이난에 온 관광객은 3000만 명을 넘었고, 2014년 춘절 기간에만 26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중국인 친구들도 “하이난에 이토록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훠거 식당은 하이난 서민들과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다.
‘매우 드문 물건’
하이난의 약칭 ‘경(·#29756;)’은 ‘옥 경(瓊)’ 자다. 옥 같은 바다와 빼어난 풍경으로 하이난은 옥[瓊]이나 진주[珠]로 즐겨 묘사됐다. 그러나 동시에 벼랑[崖], 끝[涯], 모서리[角] 등의 글자도 함께 딸려왔다. 한나라가 하이난에 설치한 군의 이름이 바로 주애(珠崖)다. 중심을 숭상하는 중국인에게 하이난은 세상의 끝이었다. 한족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아 유배지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유쾌한 천재 소동파는 평생 유머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소동파조차 예순 나이에 하이난 유형(流刑)을 받자 “하이난에 도착하는 대로 관을 만들겠다”고 유언에 가까운 글을 남겼다. 하이난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탄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고기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도 쓸 약이 없다. 안심하고 살 만한 집도 없고, 밖에 나가봐야 친구도 없다. 겨울이면 목탄도 때지 못한 채 자고, 여름에는 시원한 샘물조차 구할 길이 없다.”
결국엔 하이난에 적응한 소동파는 “하늘의 끝이라 한들 향기로운 꽃이 피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天涯何處無芳草)”라고 노래한다. 하이난을 찬미하는 듯하지만, 뒤집어보면 하이난이 아름다워봤자 하늘의 끝인 궁벽한 땅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지리적으로는 중원과 멀고, 문명의 혜택을 못 받았기에 하이난은 중국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중국의 가치관은 바뀌어갔다. 개혁개방 불과 30여 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G2로 거듭난 중국의 발전은 분명 경이롭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성장통이 있다. 공장, 자동차, 가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먼지가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게 한다.
대기상태지수가 150이 넘으면 보통사람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중국에선 300~400은 예사다.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대기상태지수 표에서 500 이상의 구간은 아예 없지만, 중국에선 999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래서 짧게는 ‘폐 청소’ 여행을, 길게는 ‘공기 이민’을 떠나는 게 트렌드가 됐다. 가장 각광받는 곳이 하이난이다.
‘쉬즈더원’에서 남자주인공이 하이난에 사는 친구에게 근황을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아주 좋아. 깨끗하고 오염도 없어. 사람답게 살아야지.”
‘인구적 물갈이’
“한국에서 왔어요? 나 이민호 좋아해요!”
하이난 아가씨에게 길을 물었더니 길은 안 가르쳐주고 한국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보였다. 요즘 정말 배우 이민호의 인기가 중국 대륙 전체에서 하늘을 찌른다. 하이난에서도 이민호를 필두로 한류는 인기 최고였다. 김연아(金姸兒)를 ‘김옌얼(金硏)’로 쓴다거나, ‘오서오세요’라고 오자를 쓰기도 했다. 이 어설픈 흉내조차 한류에 대한 선망이리라.
하이난은 중국 본토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같은 것을 욕망한다. 중국 본토와 문화 및 취향의 통일을 이룬 것이다. 본토가 하이난을 포섭하는 데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중국 본토가 하이난에 손을 뻗친 역사는 대단히 길다. 서기전 110년 한무제는 남월을 정벌하고 하이난에 주애(珠崖)·담이(?耳)라는 2개의 군을 설치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행정기구와 인력을 모두 철수했다. 사리사욕에 눈먼 관리들이 원주민의 극렬한 저항을 산 탓이다. 탐관오리들은 원주민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송나라 때는 행정과 교통이 발달해 중국 대륙 전체가 하나의 경제·문화권으로 묶였다. 하지만 하이난을 완전히 복속시키기엔 모자랐다. 하이난에 사는 소수의 한족(漢族)들은 본토와 가까운 북쪽 하이커우(海口) 주변에 흩어져 살았다. 원주민은 대부분 여족(黎族)이었다.
하이난의 역사는 본토 한족과 원주민 간 대립으로 점철된다. 한족 상인은 원주민을 등쳐 먹기 일쑤였고, 한족 관리는 팔이 안으로 굽듯 한족 상인을 감싸는 불공정 판결을 내렸다. 원주민들은 이에 대항해 무력시위와 게릴라전을 펼쳤다. 소동파의 아들 소과(蘇過)는 ‘한족이 공정해져야 원주민을 포섭할 수 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초기 중국의 하이난 지배는 이처럼 식민통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이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 지배 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 유럽 국가들은 인구가 많지 않아 식민지 지배 계급의 일부만을 자국민으로 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한족은 인구가 엄청 많다. 식민지 인구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널 평생 사랑해”. 사랑의 섬다운 백사장의 낙서.
▲싼야의 푸른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피한객들
현재 하이난 인구는 867만 명이다. 이 중 80% 이상인 722만 명이 한족이고, 여족은 127만 명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숫자의 여족은 중국 소수민족의 88%를 차지하는 최대 세력이다. 그러나 12억 한족 앞에서는 티끌과도 같다. 원주민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고, 소수 이주자이던 한족이 하이난의 주류가 됐다. 중국사에서 되풀이된 ‘인구적 물갈이’가 하이난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하지만 하이난의 한족도 최후의 승자는 아닌 듯하다. 오늘날 하이난은 외지인의, 외지인에 의한, 외지인을 위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이난은 경제특구로 지정됐고,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무비자 입국이 허용됐다. 내국인 면세 쇼핑도 가능하다.
대국굴기의 현장
이에 부동산 개발상들이 하이난에 몰려들었다. 투기가 절정에 달하던 2010년에는 싼야(三亞·하이난 섬 남부의 도시)의 아파트 매매가가 베이징, 상하이를 제치고 중국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이후 투기 광풍이 한풀 꺾이나 했더니, 대기오염이 심각해지자 대도시 부호들이 하이난 별장을 잔뜩 사들여 2014년 초 집값이 전년 대비 48%나 뛰었다.
부동산 버블의 과실은 외지인에게 돌아간다. 현지인에게는 물가 상승의 압박만이 남는다. 게다가 하이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라며 본토인의 멸시까지 받는다. 중국 경제전문가 천관런의 저서 ‘중국 각지 상인’은 하이난 사람들에 대한 본토인의 인식을 드러낸다.
열심히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조언해도 그들(하이난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성공을 한다는 건 너무 힘들어 보이니까. 그들은 게으르고 나약하고 더욱이 성공에 대한 열망조차 희박하다. 그렇기에 외지 상인들이 하이난을 ‘최적의 투자 대상’으로 점찍는 것이다. 시장을 개척하기만 한다면 독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 있는 곳이 바로 하이난이다.
-천관런, ‘중국 각지 상인’, 한길사
하이난 개발은 리조트, 골프, 레저시설 등 고급 휴양지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민이 아닌 부유층을 위한 개발인 셈이다. 하이난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중국 경제 발전의 이면을 보여준다.
“우리 중국은 정말 큰 나라야. 같은 계절에 북방에는 광활한 설원이 펼쳐져 있고, 하이난에선 해수욕을 즐길 수 있으니까.”
하이난 여행 중에 만난 광둥성 출신 50대 남자의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 얼마 전 20대 장쑤성 여자가 한 말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중국인의 말은 똑같다. 그 저변에는 모든 인민의 생각을 획일화하는 중국의 교육이 깔려 있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늘 품고 있는 생각 두 가지. 하나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땅은 넓고 물산은 풍부하다(地大物博)는 ‘대국주의’다. 광활한 땅을 가졌다는 자부심은 다시 중국이 천하제일이라는 중화주의를 강화한다. 큰 것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중국인에게 대국주의는 애국심의 원천이 된다. 하이난은 변방의 외딴섬에 불과해 보이지만, 중국인의 애국심을 부추기는 대국굴기(大國·#54366;起)의 현장이다.
남중국해 향한 야망
하이난은 과거 광둥성에 속했으나 1988년 하이난성으로 승격됐다. 하이난 섬은 경상도만한 크기로 비교적 큰 섬이지만 별도의 성(省)으로 승격될 정도는 아니어서 다소 의아했다. 그러나 하이난성 지도를 보고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중국해까지 하이난섬에 포함시킨 것이다. 드넓은 남중국해와 비교하자면, 하이난 섬은 하이난성의 북서쪽 귀퉁이에 놓인 작은 섬에 불과하다.
하이난 섬의 면적은 3만5000㎢로 중국의 31개 성·시·자치구 중 28위에 그친다. 그러나 중국의 ‘하이난통계연감(海南統計年鑑)’에 따르면 하이난성의 면적은 210만㎢로 4위를 차지한다. 남중국해를 영해로 보고 면적 계산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2012년 중국은 신여권의 중국지도에 남중국해를 포함시켜 국제적으로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하이난성의 면적에는 하이난섬과 남중국해가 포함된다.
하이난성이 분리 승격된 것은 중국이라는 국가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 예다. 개혁·개방 후 중국은 내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변했고, 영토를 넘어 영해 문제를 중요시하게 됐다. 중국의 전략적 시야가 확대된 것이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 러시아 등과의 국경분쟁을 해결하고 남중국해에 힘을 집중하고 있다.
남중국해는 어떤 곳인가. 동남아시아의 한복판으로 태평양, 인도양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동중국해는 미국, 일본, 대만, 한국, 러시아 등에 가로막혀 있지만 남중국해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국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 중국이 ‘가상 적국’ 미국과 동맹국들의 봉쇄를 뚫기가 제일 쉬운 곳인 셈이다. 남중국해는 전 세계에서 무역 선박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이고 중국 수입 원유를 실은 유조선의 83%가 지나는 곳이다. 한국 및 일본의 수입 원유 수송선의 99% 역시 남중국해를 지나니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중국은 교통·물류·군사·자원의 요지인 남중국해의 패권을 차지하려 한다. 중국은 동남아 각국에 따로따로 압력을 넣어 유리한 협상 결과를 얻어내는 차륜전법을 펼치고 있다. 무력은 말을 뒷받침한다. 산둥성·저장성·광둥성의 북해·동해·남해 함대에 이어 중국의 제4함대가 하이난성에 설치될 것으로 전망된다. 싼야에는 이미 핵잠수함 기지가 운용되고 있다.
하이난성의 싼샤(三沙)시는 서사군도(西沙群島), 중사군도(中沙群島), 남사군도(南沙群島)를 포괄한다. 모두가 영토분쟁 지역이지만, 중국은 자기 땅으로 간주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했다. 싼샤시의 청사 소재지 융싱다오(永興島)는 행정·군경 인력이 상주하고 전투기 활주로, 구축함 계류시설이 있다.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융싱다오란 ‘영원한 번영의 섬’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번영은 동남아 국가들의 치욕과 직결된다.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패권을 수수방관할 순 없지만, 정면 승부로 이길 수도 없는 처지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중국 해군을 기습 타격할 수 있는 잠수함 전력을 확충하고 있다. 휴양과 사랑의 섬이라는 하이난에 전쟁의 그림자가 깔려 있는 것이다.
하늘 밖 하늘
다시 하이난 남쪽의 톈야하이자오로 돌아가보자. ‘하늘에 끝이 있다(天涯)’는 발상 자체는 우습지만, 옛 중국인은 그나마 하늘의 끝을 규정하고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았다. 천하통일의 대업도 중국의 하늘, 중국의 천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하늘이 생각보다 더 넓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듯하다. 그런데 하늘 밖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겸허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욕심만 늘었다. ‘중국의 하늘’을 더 넓히기 위해 이웃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형국이다. 톈야하이자오를 넘어서려는 오늘날 중국은 과연 어느 곳을 새로운 하늘의 끝으로 여길 것인가.
◆03월 호 광둥성
◇가장 먼저 열려 가장 많이 아픈 땅
粤 -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
중국에는 ‘선전속도’라는 말이 있다. 광둥(廣東)성의 경제특구 선전(深?)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 강도와 속도를 감내하기에 생겨난 말이다. 덕분에 광둥성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자본주의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다.
“하압! 합!”
꼬마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유치원에서 무술수업이 한창이었다. 전설의 무술가 황비홍과 엽문의 고향, 광둥성다운 광경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공원에는 말 타며 활 쏘는 조각상이 놓여 있다. 중국 남방의 거친 야성과 상무 정신이 오롯하게 전해졌다.
광둥성의 약칭은 ‘땅이름 월’이다. 옛 중국인들은 장강 남쪽에 살던 이들을 월족(越族)이라고 불렀다. ‘월’은 ‘월(越)’과 발음과 뜻이 같은 이체자(異體字)다. 광둥성은 남월의 땅이었다. 남월은 월남(越南), 즉 베트남을 가리킨다. 이름 자체가 개척지란 뜻을 가졌을 정도로 광둥성은 이질적인 곳이었다.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손권은 광둥성과 광시성을 개척하며 ‘새롭게 넓혀진 땅’이라는 의미에서 ‘넓을 광(廣)’ 자를 붙였다.
광둥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지리적 특성을 살펴봐야 한다. 광둥성은 중원과 매우 먼 데다 다섯 개의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척박한 땅은 아니다. 중국에서 세 번째로 긴 주강(珠江)이 풍요로운 삼각주를 만들며 바다로 이어진다. 농사와 무역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다. 험한 산이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고 토양이 비옥하니 독자적인 나라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마천은 ‘사기’에 “반우는 큰 도시로서 진주, 코뿔소, 바다거북, 온갖 과일과 삼베가 모이는 곳”이라고 기록했다. 반우는 광저우(廣州)의 옛 이름으로 가깝게는 동남아, 멀게는 로마까지 상인들이 오가던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오랑캐가 부처가 되겠다고…”
▲유치원 꼬마들의 무술수업.
진시황은 반우를 정벌해 역사상 최초로 광둥성을 중국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고 항우, 유방 등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가 되자 진의 장군 조타는 반우를 근거지로 남월국을 세웠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열었지만, 아직 내부 정비를 마치지 못해 남월까지 정벌할 수는 없었다. 한 황제가 남월의 왕을 임명하는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는 선에 그쳤다.
조타의 남월은 위만조선과 닮았다. 조타는 한족이지만 베트남식으로 상투를 틀고 남중국과 북베트남을 아우르며 두 문화를 조화시켰다. 그는 유방의 외교관 육가에게 “내가 중원에 있었다면 어찌 한나라 황제만 못했겠는가”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베트남은 조타를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황제 찌에우 다로 숭상한다. 베트남 역사가 레 반 흐우는 ‘대월사기(大越史記)’에 “진정한 베트남의 역사는 찌에우 다의 남월로부터 출발한다”고 썼다.
훗날 한무제는 남월을 멸망시키고 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중앙의 감독이 제대로 미치지 않고 지방 관리들이 착취를 일삼아 반란이 잦았다. 후한 광무제 때에는 북베트남 지역에서 쯩 자매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복파장군 마원의 진압으로 끝났지만, 베트남은 오늘도 쯩 자매의 난을 중국의 폭압에 맞선 항쟁으로 기리고 있다.
남월의 광둥성 지역과 북베트남 지역은 점차 다른 길을 걸었다. 광둥성은 중국에 동화해갔고, 북베트남은 남부를 정벌해 오늘날의 베트남이 됐다. 고구려가 만주 일대를 잃고 남하해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격이다.
광둥성이 중원과 동화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중원인들에게 광둥인은 오랑캐에 불과했다. 당나라 때 광둥성의 한 소년이 불법(佛法)을 닦으러 중원의 홍인대사를 찾아가자 홍인은 소년에게 면박을 준다. “남쪽의 오랑캐가 어찌 감히 부처가 되겠다고 하느냐?” 이에 소년은 당차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남과 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불성은 개미에게도 가득하거늘, 어찌 오랑캐에게만 불성이 없겠습니까. 오랑캐의 몸이 스님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불성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귀족과 천민이 엄격하게 나뉘던 시대였다. 중원인과 오랑캐가 섞일 수 없는 때였다. 그러나 소년은 불법을 제대로 닦기 전부터 이미 깨우침을 보여줬다. 구분과 차별이란 애초부터 무의미하고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소년의 말은 혁명적 선언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불세출의 선승 혜능대사다. 홍인은 다른 제자들의 반발이 두려워 혜능에게 밤에 몰래 의발을 물려주며 “도망쳐 숨어 살다가 때를 보아 불법을 전하라”고 했다. 혜능은 야반도주한 지 15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광저우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불법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 승려들조차 이토록 광둥인을 차별했으니, 일반 대중의 차별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광둥인’ 쑨원
▲선전의 덩샤오핑 동상.
지난 1월 4일 리커창 총리가 광둥성을 방문하자 중국 언론들은 ‘리커창의 남순(南巡)’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덩샤오핑이 1992년 개혁개방 의지를 역설한 담화 남순강화(南巡講話) 후 광둥성은 개혁개방의 상징이 됐다. 변방은 변혁의 땅으로 거듭났다.
광둥성이 변혁의 중심이 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대 무역이 활발해지자 중국 유일의 대외무역항 광저우는 외국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떠올랐다. 일찍부터 무역으로 해외를 출입하다 현지에 살게 된 광둥성 출신 화교들은 고향의 가족, 친구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중국 밖 세상 소식을 전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평화로운 교류만 있을 순 없었다. 광둥성은 중국과 서양이 충돌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전쟁, 청나라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알린 태평천국의 난이 이곳을 휩쓸었다.
사상가들은 엄혹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분투했다. 서양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캉유웨이,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한 쑨원은 모두 광둥인이다. 캉유웨이는 영국령이 된 후 급속히 성장한 홍콩을 보며 서구 시스템에 눈을 떴다. 쑨원은 하와이 화교이던 형 덕분에 영국 학교에서 공부하며 민주주의를 익혔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군웅할거 시대가 되자 외부와 고립된 수도 베이징은 정부의 살림을 제대로 꾸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둥성은 풍요로운 물산, 활발한 무역, 부유한 화교의 지원으로 능히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쑨원은 광저우를 근거지로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이 됐고, 후계자 장제스는 북벌에 성공해 중국을 장악했다.
광저우는 국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훗날 공산당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을 재통일하지만,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살림꾼 덩샤오핑은 광둥성에서 시장경제체제를 실험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했다.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편 지 불과 30여 년 만에 G2로 우뚝 섰다. 이처럼 중국 근현대사의 중요 사건과 인물들은 광둥성과 얽혀 있다. 그러니 광둥성의 근현대사는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촌은 어머니와 같다는 말 못 들었어?”
“마오쩌둥 주석이 가족보다 가깝다는 말만 들었어요.”
영화 ‘도협’에서 홍콩 삼촌이 광둥성 조카 주성치와 주고받는 대화로, 1990년대 홍콩과 광둥성의 의식 차이를 풍자하는 대목이다. 홍콩과 광둥성은 한집안이나 다름없지만 체제가 다르니 의식도 크게 달라졌다. 긴 세월 동안 광둥성은 중국과 완전히 동화해 이제는 중국적인, 너무나 중국적인 곳이 됐다. 아래는 필자가 선전박물관에서 중국인 가이드와 주고받은 대화다.
“중국엔 부동산 소유의 개념이 없습니다. 부동산을 70년 동안 국가로부터 빌려 쓸 뿐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아직까지는 임대기간이 만료되지 않아서 아무도 모릅니다. 기간을 연장해줄 수도 있고, 거액의 임차료를 다시 내야 할 수도 있죠. 그래서 우리 중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풍요로운 광둥성이지만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불안함이 읽혔다.
가이드는 큐큐(QQ) 펭귄 마스코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국에서는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겐 그와 비슷한 큐큐, 웨이보, 유큐 등이 있죠.”
“왜 중국에서는 페이스북을 쓸 수 없나요?”
“좋은 질문이지만 저는 답변할 수가 없군요. 중국에서는 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뉴스도 정부로부터 내보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후에 보도할 수 있습니다.”
선전과 홍콩은 지하철로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맞붙어 있다. 오늘날 선전의 외양은 홍콩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중후장대한 건축물이 중국의 부유함을 뽐내며, 중국에서 평균연령이 가장 낮은 도시답게 거리에는 젊고 화사한 여성이 많다. 그러나 허용되는 언론 자유의 폭이 매우 다르다. 경계 하나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포산시 황비홍 생가의 사자춤 공연(왼쪽)과 광둥성 서민들의 일상 풍경.
시간은 돈, 효율은 생명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광둥성 선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바쁜 도시 선전에서 느긋한 도시 청두로 오자 여유로워 좋다며 “마음이 너무 편해!”를 연발했다. “선전은 엄청 바빠. 빨리빨리,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
‘시간은 돈이요, 효율은 생명’이라고 강조하는 선전은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다. 중국 정부가 1978년 외국 기자들을 경제특구 선전에 초대했을 때 기자들의 눈에는 진흙뻘 위의 17가구만 보였다. 그러나 개혁개방 30여 년 만에 선전은 인구가 1000만이 넘는 대도시로 거듭났다. 거리는 깔끔하고 젊은이가 넘쳐나며 여자들은 세련됐다. 1982년 국제무역센터 빌딩을 지을 때 사흘에 한 층씩 올리더니, 1990년대 지왕(地王)빌딩을 세울 때는 9일에 4층씩 올렸다. 그 결과 ‘선전속도(深?速度)’라는 말이 생겼다.
▲짧은 시간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선전의 모습. 선전박물관 자료사진.
‘선전속도’ 후유증
오바마가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미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지 묻자 잡스는 “이제 그런 일자리는 미국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중국 노동력은 싸다. 그리고 가혹한 노동 강도와 속도를 기꺼이 감내한다.
2007년 아이폰 출시 한 달 전, 화면 내구성 결함을 발견한 잡스는 6주 안에 흠집이 나지 않는 유리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기존 협력업체는 잡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선전의 회사는 인력과 실험 재료를 24시간 내내 거의 공짜로 제공했다. 이 회사는 유리 개발을 마치자마자 아이폰 제조사 폭스콘에 보냈다(폭스콘도 광둥성 기업이다). 그때가 자정 무렵이었지만 폭스콘은 직원 8000여 명을 작업에 바로 투입해 96시간 만에 4만 대의 아이폰을 생산해냈다. ‘선전속도’가 없었다면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 더 늦어졌을 것이다.
선전속도는 분명 고속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대신 사람들은 극도로 피곤하고 바빠졌다. 삶은 팍팍해졌고, 과도한 노동강도가 생명을 위협할 지경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폭스콘이다. 이 회사에선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노동자 24명이 자살을 시도해 19명이 사망했다. 2010년 한 해에만 14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청춘남녀였다. 그럼에도 폭스콘의 CEO 테리 고우는 당당하다. 폭스콘의 처우가 다른 기업보다 더 낫다는 이유에서다.
빈말은 아니다. 광둥성의 주강삼각주 지역은 제일 먼저 문호를 개방한 까닭에 의류, 신발, 장난감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융성해 임금과 복지 수준이 낮다. 상하이, 장쑤(江蘇)성, 저장(浙江)성 등 장강삼각주 지역은 광둥성보다 늦게 개발된 대신 후발주자의 이익을 얻었다. 기술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뤄 임금과 복지 수준이 광둥성보다 높다. 노동자들이 어디로 몰려갈지는 자명하다. 광둥성은 2004년부터 농민공이 부족해져 현재 일자리에 비해 노동력이 30% 가까이 부족한 형편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노동자 권리의식은 높아지고 있지만, 광둥성의 노동 여건은 여전히 열악하다. 노사 갈등이 첨예하고 파업도 자주 벌어진다. NGO 중국노공통신(中國勞工通信)에 따르면, 2011~2014년 중국에서 발생한 노동쟁의 2601건 중 광둥성에서 발생한 건수가 30%에 가까운 752건으로 압도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둥인들의 집요한 이익 추구는 황당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중 하나가 전자쓰레기 밀수다. 폐기되는 전자제품에선 많은 유해물질이 발생하는데, 광둥인들은 이를 기꺼이 사들인다. 산터우(汕頭)시 구이위(貴嶼)진은 세계 최대의 전자쓰레기장이다. 전 세계에서 해마다 5000만t의 전자쓰레기가 발생하는데, 그중 70%가 이곳으로 모인다. 후유증은 막심하다. 구이위 일대의 암과 백혈병 발병률은 다른 지역 평균의 5배가 넘는다. 혈액이 굳는 혈전증 발생률은 산터우 시내에 비해 두 배나 높다.
가장 먼저 깨어났지만…
이에 비하면 ‘섹스도시’라는 광둥성 둥관(東莞)은 차라리 애교로 보인다. 둥관의 성매매업 시장은 종사자 30만 명, 500억 위안(8조8000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둥관은 한때 ‘둥관에 차가 막히면 전 세계에 부품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제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나 임금과 토지 비용이 상승하면서 공장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바로 성매매업이다. 가장 먼저 자본주의 성과를 맛본 동시에 가장 먼저 그 폐해를 입고 있는 것이 개혁개방의 선두주자 광둥성의 현실인 셈이다.
명청 쇄국시기 중국의 유일한 무역항. 광둥성은 가장 먼저 열리고 가장 먼저 깨어난 땅이다. 예부터 광둥인들은 고난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다른 세상을 꿈꿨고,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다. 변화의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고통을 겪었다. 광둥인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나는 풀과 같다. 중국의 내일을 한발 앞서 말해온 광둥인들이 급속한 발전의 후유증을 앓는 중국의 숙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주목되는 이유다.
◆04월 호 장쑤성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운하의 古都
풍요와 전쟁의 공존
장쑤성의 ‘자랑’은 꽤 많다. ‘물고기와 쌀의 마을(魚米之鄕)’이라 불릴 정도로 예부터 물산이 풍족했고, 운하가 만들어낸 절경과 부드러운 말투의 미녀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개혁·개방의 여파로 장쑤성의 아름다움이 점점 색이 바래져 안타깝다.
강남의 봄은 따뜻하다. 훈훈한 남풍에 꽃은 일찍 피어나고, 운하에는 쪽배가 한가로이 떠다닌다. 강남에 몰려든 사람들은 제각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진을 찍고 낭만적인 풍경을 화폭에 옮겨 담는다.
‘소’는 ‘자소 소(蘇)’자다. 쑤저우(蘇州)의 고소(姑蘇)산에 자소(紫蘇) 박하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소생하다’는 다른 뜻처럼, 쑤저우의 봄은 실로 소생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장쑤(江蘇)성은 이 지역 양대 중심도시 장닝(江寧·난징의 옛 이름)과 쑤저우(蘇州)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를 단 한 글자로 압축하니 ‘소(蘇)’가 되었다. 장쑤성의 성도는 난징이지만, 문화적 헤게모니는 쑤저우가 쥐고 있다.
베이징 능가한 강남의 영화
‘하늘 위에 천국이 있고, 땅 위에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
이 속담에 ‘낚여’ 쑤저우를 찾은 중국인들은 “이게 천국 같다고 한 거야?”라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쑤저우 역시 급속한 개발로 옛 정취가 상당 부분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천국 같다’는 말이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맹자는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배고픔에 대한 투쟁의 역사다. 장쑤성은 ‘물고기와 쌀의 마을(魚米之鄕)’이라고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했다. 사마천도 “(강남은) 쌀로 밥을 짓고, 물고기로 국을 끓인다. 과일과 어패류를 자급할 수 있고, 땅에 식물이 풍부하여 기근 걱정이 없다”고 했다. 이런 땅이 천국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으리라.
풍부한 물산이 밖으로 유통되지 않고 자체 소비로만 끝난다면 부를 창출할 수 없다. 사마천의 말처럼 “강남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없지만 천금을 가진 부자도 없다.” 강남은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로 큰 전환점을 맞는다. 고구려를 침공한 장본인이기도 한 수양제는 6년간 550만 명을 동원해 총 1750km의 운하를 건설하고 향락적인 뱃놀이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쑤저우 강남명원에서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운하는 강남과 강북의 교역을 활성화해 경제를 성장시켰고, 중국을 사회문화적으로 통합하는 데도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징항대운하는 중요한 수상 교통로로 여겨지니, 대운하 건설은 여러모로 큰 업적이다. 당나라 시인 피일휴는 “사치스러운 뱃놀이만 안 했다면, 수양제의 공로가 우임금보다 어찌 작겠는가!”라고 탄식했다.
풍요로운 경제는 화려한 문화를 낳았다. 많은 시인묵객은 강남의 정취에 흠뻑 젖어 시와 노래를 남겼다. 은퇴한 고관대작들 역시 날씨 좋고 풍경 좋은 강남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들은 집에 있으면서도 자연 속을 노니는 처사(處士)처럼, 초야에 은거한 선비처럼 살고자 했다. 이런 배경에서 강남명원(江南名園)이 탄생했다. 정원에 기암괴석이 있고 연못이 있다. 집 안에서도 산과 호수를 벗하며 사는 기분을 내게 해준다.
강남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명대에 이르러 강북을 완전히 압도했다. 조선 선비 최부(崔溥)는 중국을 두루 살핀 후 물산, 재력뿐 아니라 인심과 문화적 수준까지 모두 강남이 강북보다 낫다고 기록했다. 천자가 사는 베이징조차 “주민의 번성함, 누대의 훌륭함, 물화의 풍부함이 쑤저우나 항저우에 미치지 못한다”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청말(淸末) 서태후는 별장 이화원을 지으면서 쑤저우 거리를 재현한 구역을 만들었다. 강남의 영화는 천하의 중심마저 능가했다.
반복된 대학살의 역사
장쑤성은 강북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다. 물산은 풍부하고 도시마다 중요한 거점이 된다. 쑤저우는 신흥강국 오나라의 수도로서 춘추전국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오왕 합려는 이곳에서 힘을 키워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고, 그 아들 부차는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중원을 위협하며 춘추시대의 네 번째 패자로 등극했다.
난징은 삼국시대 손권이 오나라의 수도로 삼은 이래 6개 왕조, 10개 정권의 수도가 되어 ‘육조고도 십조도회(六朝古都 十朝都會)’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북쪽은 거친 장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다. 제갈양도 난징을 보고 “종산(鐘山)에 용이 서려 있고, 석두(石頭)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으니 실로 제왕이 자리 잡을 땅”이라고 극찬했다. 오의 손권, 명의 주원장, 태평천국의 홍수전, 중화민국의 쑨원과 장제스 등 숱한 영웅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았다.
장강 북변에 자리 잡은 양저우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요지로 대운하 건설 이후 크게 부유해졌다. 당나라 시인 장호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양저우에서 살다 죽는 것만이 합당하다”고 노래했다. 양저우에 온 수양제는 수도 낙양에 되돌아가지 않았고, 건륭제는 수서호(瘦西湖)의 별장에서 휴가를 즐겼다.
▲강북의 경극과는 다른 쑤저우의 쿤취(昆曲), 전통 방식으로 옷감을 만들고 있는 장쑤성 저우장의 여인, 쑨원의 묘가 안치된 난징의 중산릉(中山陵).
쉬저우(徐州)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다스리던 서주다. 쉬저우는 장강과 회하 사이의 비옥한 화중 평원을 끼고 있고, 교통이 편리해 백만 대군을 육성하는 최적지였다. 또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고, 초패왕 항우의 근거지였다. 이 땅을 두고 후한말 조조, 유비, 여포가 다투었고, 먼 훗날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결전을 벌였다.
이외에도 창저우(常州), 전장(江鎭), 우시(無錫) 등 여러 지역이 풍요를 누리며 국제도시 상하이의 배후지역으로 눈부신 성장을 한다.
하지만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장쑤성은 평화로운 때에는 번영을 누렸지만, 난세에는 중요 전쟁터가 되었고 대량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삼국시대 조조는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서주대학살을 벌였다. 너무 많은 시체로 강이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의 대학살이었다. 명말청초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하한 청나라 군대는 장쑤성에서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라는 대학살을 벌였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6주에 걸쳐 난징대학살을 벌였다. 지난해 중국은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국가추모일로 지정했다. 시진핑 주석은 ‘대도살희생동포 기념관’을 참관하며 “(일본이) 역사 범죄를 부인하는 것은 다시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한국 영화 ‘명량’이 예정보다 2주 늦춰진 12월 12일 중국에서 개봉한 것도 난징대학살 추모일에 맞춰 항일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겠냐는 해석이다.
장쑤성의 역사는 치세의 화려한 번영과 난세의 처참한 학살로 점철된다. 좋은 위치에서 풍요를 누리는 장쑤성의 행운이자 불운이다.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인 장강은 강북과 강남을 매우 이질적인 지역으로 갈라놓았다. “강북 사람은 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고, 강남 사람은 쌀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생활방식까지 다르다. 장강은 장쑤성을 관통한다. 같은 장쑤성이라도 쉬저우를 위시한 강북 지역은 중원 문화권이고, 난징·쑤저우 등 강남 지역은 남방 문화권이다.
평야지대인 쉬저우는 중요한 곡창지대였지만, 자연환경의 변화와 함께 쇠퇴했다. 황하가 물길을 바꾸고 기후가 변하며 농업생산량이 감소한 탓이다. 반면 개혁개방 후 장강삼각주 지역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요한 상공업지대로 발전했다. 장강 이남의 난징, 쑤저우, 우시 등이 상하이의 배후지역으로 성장하자 남부와 북부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장강 바로 북쪽에 위치해 ‘강북의 강남’이라 불릴 만큼 번영을 누렸던 양저우조차 이제 가난하고 낙후한 지역으로 취급받는다.
장쑤성 남부와 북부는 경제적으로 분단됐다고 할만하다. 여행 가이드북에서도 장쑤성의 북부는 거의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
한편 장쑤성의 도시들은 역사적으로 독자성을 강하게 유지했다. 중원이 빠른 속도로 중앙집권화를 이룬 것에 비해, 강남 지역은 토착 호족이 제각기 세력을 형성했다. 손권의 오나라는 강남 호족의 연합체적인 성격이 강했다. 중앙집권을 일찍 이룩한 위와 촉에 비해 오는 잦은 내란에 시달렸고 대외공략에 소극적이었다.
이질적인 강북·강남 지역의 행정적 병합, 지역 간 경제 격차, 뒤늦은 중앙집권화, 독자적인 토착 호족, 강한 개성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작용해 장쑤성 사람들은 애향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쑤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 사람들은 웬만하면 동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싱글벙글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하는데, 장쑤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입니까?”, “장쑤인데요”, “그렇군요” 하고는 그만이다. 대화를 더 이어가더라도 “장쑤 어디입니까?”라고 묻고는 “참 좋은 곳이지요” 하고는 끝낸다. 그래서 장쑤 사람의 애향심에 호소하면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왕하이팅,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 중에서
“아츠꿜라?”
“밥 먹었어요?”라는 뜻의 중국 인사인 “츠판러마(吃飯了?)?”의 난징 사투리다. 귀여운 난징 아가씨는 말도 참 예쁘게 했다. 얼굴은 생글생글, 말투는 사근사근. 인사만 들어도 마냥 흐뭇해졌다.
미녀는 돈을 좋아해
장쑤성은 미녀로 유명하다. 처음 장쑤성에 갔을 때는 생각보다 별로 미녀가 없어서 실망했지만, 차츰 헛된 명성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쑤성 여자는 비교적 싹싹한 성격에 강남의 부드러운 말투 덕분에 실제 미모보다 더 예뻐 보인다. 장쑤성에서도 유명한 쑤저우 미녀 역시 달콤하고 부드러운 쑤저우 사투리 덕을 보았다.
그런데 미녀의 고장 쑤저우에서 기막힌 말을 발견했다. 자동차의 뒤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女人一生只愛兩種花,一是有盡花,二是錢量花!’
‘화(花)’는 ‘꽃’이라는 뜻도 있지만, ‘쓰다’는 뜻도 있음을 이용한 언어 유희다. 따라서 이 말은 ‘여자는 평생 두 가지만 사랑한다. 하나는 돈이고, 또 하나는 돈을 펑펑 쓰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아, 결국 미녀는 돈을 좋아하는 걸까.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본주의적인 중국을 보여준다.
▲서양 관광객이 삼륜차를 타고 쑤저우를 둘러본다.
공교롭게도 장쑤성을 의미하는 ‘소(蘇)’는 소비에트를 뜻하기도 한다. 소비에트의 중국어 음차가 ‘쑤웨이아이(蘇維埃)’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회주의적인 글자를 약칭으로 삼은 지역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셈이다. 참으로 통렬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쑤성의 화시(華西)촌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로 손꼽힌다. 건평 400~600㎡의 유럽식 저택이 즐비하고, 고급 외제차들이 굴러다닌다. 으리으리한 74층 5성급 호텔의 60층에는 1t짜리 황금소를 놓았다. 돈을 들고 춤을 추며 돈 자랑하는 공연도 있다.
우런바오(吳仁寶) 화시촌 촌서기는 독특한 행복론을 피력했다. 행복을 위해서는 5가지, 즉 ‘돈, 자동차, 집, 자녀, 체면’이 있어야 한단다. 철저하게 물질적이다. 꿈이나 친구 따위는 거론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유물론이 ‘돈밖에 없다’는 유전론(唯錢論)으로 변한 걸까.
개혁·개방은 장쑤성에 다시 번영을 가져다줬다. 이제 장쑤성은 중국 내 GDP(국내총생산) 2위로 광둥성에 버금가는 부유한 지역이다. 그러나 급속한 개발 속에서 잃은 것도 많다. 쑤저우는 한때 390개의 다리와 200개의 원림이 있는 아름다운 운하 도시였다. 그러나 수로보다 육로가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운하가 복개돼 전통적인 개성미가 크게 파괴됐다. 여행안내서 ‘론리플래닛’은 현재의 쑤저우에 실망한 나머지 독설을 퍼붓는다.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건설된 현대 중국의 여느 도시처럼 매력 없고 보기 흉한 쑤저우에는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지은, 못생긴 현대 건축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수많은 전통 촌락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개혁·개방이 시행된 지 20여 년이 지난 2000년만 해도 중국에는 360만여 개의 전통 촌락이 있었지만 2010년엔 270만 개로 90만 개나 줄었다. 환산해보면 매일 250개의 촌락이 사라진 셈이다. 2014년 중국 주택건설부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1만2000개 전통 촌락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직껏 연명해온 89만 개의 전통촌락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촌락들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쑤저우 인근의 퉁리(同里), 저우장(周莊) 등은 옛 운하마을의 정취가 여전히 남아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갈 때 입장료를 내야 한다. 옛 모습을 지키는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마을 자체가 민속촌 또는 테마파크로 변했다.
장쑤성과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은 일찍이 인민과 공산당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인민이라는 물속에서 공산당이라는 물고기가 살 수 있다. 그러나 고래처럼 거대해진 물고기는 오늘날 조그만 물웅덩이 따윈 안중에 없는 걸까.
국공내전 초반 마오쩌둥의 홍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피해 숨 가쁘게 도망 다녔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우리가 언젠가는 중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전국을 떠돌아 더부살이하면서도 “한실을 중흥하겠다”고 큰소리친 유비 같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진짜로 대륙을 통일해 천하의 3분의 1만을 차지한 유비를 넘어섰다.
국공내전은 장쑤성에서 결판났다. 마오쩌둥은 회해 전투에 승리하고 장강을 건너 난징의 국민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마오쩌둥은 적벽에서 패해 장강을 건너지 못한 조조도 넘어섰다. 한편 장제스는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 장강을 참호 삼아 강남을 지킨 손권만 못하다.
두 영웅의 승패가 역량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천하를 움직인 것은 바로 민심이었다. 국민당은 천하를 거의 장악했으나 일찍부터 부패했다. 국민당은 전쟁을 핑계로 민중의 재산을 멋대로 수탈해 ‘백비(白匪, 국민당 도적)’라고 불렸다.
이에 반해 홍군은 민중에게 가능한 한 피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도망 다니면서도 마을 일을 도왔다. 꼬마들은 홍군을 ‘백비나 일본군과 싸우도록 도와주는 사람’ ‘우리 군대’라고 생각했고, 촌로들은 ‘쑤웨이아이 선생’을 만나러 홍군을 찾아왔다. 국민당은 땅을 차지했으되 민심을 잃었기에 땅마저 잃었고, 공산당은 땅이 없어도 민심을 얻었기에 땅도 얻었다.
때문이다.
6년 뒤면 중국 공산당은 창당 100주년을 맞는다. 현재로서는 승승장구하지만, 초심을 잃은 공산당은 부패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이제 중국인은 공산당을 ‘우리’가 아닌 ‘그들’로 생각한다. 민심의 향방에 따라 중국의 앞날은 달라질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05월 호 저장성
◇날래고도 끈기 있는 ‘사천(四千)정신’ 본고장
浙 - 루쉰과 마윈의 고향
민첩하면 끈기가 없고, 끈기가 있으면 둔하기 쉬운데 저장성 사람들은 이 둘을 다 갖췄다. 춘추전국시대 때 ‘오랑캐 중의 오랑캐’로 취급받던 저장성은 수양제 대운하 건설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다. 현재 중국에서 민영기업이 가장 발달한 곳도 저장성이다.
▲중국에서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곳,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의 서호(西湖)를 찾았다. 중국 관광지가 으레 그렇듯 입구에서 실제 목적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서호 입구에서 한 어르신에게 서호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시계를 보더니 냅다 외쳤다. “뛰어!”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 달렸다.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이 턱에 닿았다. 왜소한 어르신이 하도 잘 뛰니 힘들다 할 수도 없었다. 평소의 게으름과 운동 부족을 원망할밖에.
한참 달리다가 너무 힘들어 쫓아가기를 포기하려 할 때, 눈앞에 탁 트인 호수가 펼쳐졌다. 태양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뇌봉탑(雷峰塔) 저편에 내려앉고 있었다. 서호십경(西湖十景) 중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였다.
때는 10월 중순의 오후 5시. 어르신은 해가 지는 때를 알고 있었다. 그냥 어슬렁어슬렁 걷다가는 서호의 노을을 놓치기 십상이라 몸소 뛰어서 서호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이다. ‘아름다운 쑤저우(蘇州) 아내를 얻고, 인심 좋은 항저우에서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던가. 이날 함께 여행한 베이징 친구는 항저우에 반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거리는 깨끗하며, 여자들은 예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절(浙)’은 ‘강 이름 절(浙)’자다. 절강(浙江)은 항저우의 젖줄, 전당강(錢塘江)의 옛 명칭이다. 또한 ‘절(浙)’은 강물[水]이 급하게 꺾여[折] 흐른다는 뜻도 있다. 전당강은 황산(黃山)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다 북동쪽으로 꺾이고 다시 동남쪽으로 꺾이며 바다로 들어간다. ‘갈 지(之)’자로 굽이치는 강은 긴 세월 동안 크나큰 격변을 겪은 저장성의 역사와 닮았다.
피 튀긴 吳越爭패
춘추전국시대에 장쑤(江蘇)성은 오나라였고, 저장성은 월나라였다. 상하이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30분만 가면 장쑤성 쑤저우, 남쪽으로 1시간 반을 달리면 저장성 사오싱(紹興)이다. 오와 월, 두 나라의 수도가 이토록 가까웠다.
그러나 친해지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이었다. 오나라의 명신 오자서는 오월이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 오나라와 저들 월나라는 서로 원수로 싸울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삼강(三江)이 둘러싸고 있어 백성들은 싸움을 피해 옮길 곳이 없습니다. 하여 오나라가 살면 월나라가 죽을 것이요, 월나라가 살면 오나라는 죽게 되어 있으니 장차 이런 형세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월나라의 재상 범려도 이 점에 동의했다.
“우리와 삼강오호(三江五湖)의 이익을 다투던 자, 바로 오나라가 아닙니까.”
오나라와 월나라가 패권을 놓고 극렬하게 다투니(吳越爭패), 다툼은 미움을 낳고 전쟁은 원한을 낳았다. 땅을 두고 다툰 싸움이 복수를 위한 전쟁으로 변하면서 마침내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었다.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원수를 갚기 위해 딱딱한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실력을 키운 끝에 월왕 구천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구천은 쓰디쓴 치욕을 잊지 않겠다며 쓸개를 핥은 지 10여 년 만에 오왕 부차에게 설욕하고 오나라의 뒤를 이어 5번째 패자(覇者)가 되었다. ‘부차는 장작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구천은 쓸개를 핥은 끝에 복수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다.
중국사는 ‘오랑캐’를 중원에 포섭해가는 역사다. 일찍이 문화의 꽃을 피운 중원은 남방의 신흥 강국 초나라를 오랑캐로 보았다. 그러나 초나라에는 사나운 오나라가 오랑캐였고, 중원의 법도를 아는 오나라엔 개념 없는 월나라가 진짜 오랑캐였다.
오의 수도 쑤저우성이 월에 포위된 지 2년째,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의지도 없는 오나라는 월나라에 화친을 청했다. 사실 굶어죽을 지경이니 한 번만 봐달라는 통사정이었다. 춘추시대는 아직 인간미가 있던 시절이라 서로 좋게 전쟁을 끝내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월나라의 범려는 화친을 매몰차게 거절하며 말한다.
“우리가 지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금수나 마찬가지요. 우리가 어찌 중원의 그런 교묘한 말씀을 알아듣겠소?”
▲항저우 서호의 뇌봉탑에 노을이 지는 뇌봉석조(雷峰夕照). 서호십경(西湖十景) 중 하나다.
‘중국의 유대인’
이처럼 월나라는 거칠고 사나운 야만인이었다. 중원의 도리 따위는 몰라도 당당한, 오랑캐 중의 오랑캐였다. 그러나 전당강이 물길을 바꾸듯 저장성은 야만적인 변방에서 문화의 중심으로 변했다. 수양제의 대운하가 열리자 저장성 경제는 크게 발전한다.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중원을 잃은 송나라는 항저우를 수도로 삼아 남송 임안(南宋 臨安) 시대를 열었다.
당시 항저우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저잣거리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이 즐비하고 집집마다 화려한 비단이 넘쳐’났다. ‘후저우(湖州)의 곡식이 여물면 천하를 배부르게 할 수 있고, 만 가구에서 베틀의 북 소리가 울리니, 금화(金華)의 옷이 천하를 덮는다’는 말은 저장성의 경제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준다. ‘장쑤성과 저장성이 없다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할 정도로, 저장성은 줄곧 중국을 지탱해왔다.
저장인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민첩하고 날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동의 날랜 병사들은 저장성을 삼오(三吳)의 근거지로 만든 힘이었다. 간장·막야 전설과 검의 대명사 용천검(龍泉劍)에서 알 수 있듯 오월은 명검으로 유명했다. 날랜 병사가 날카로운 칼로 승부를 벌이는 단병접전 전술은 오월의 장기였다. 오월 지역을 기반으로 삼은 초패왕 항우, 소패왕 손책 모두 속전속결로 단기간에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저장성 펑화(奉化)현이 배출한 명장 장제스는 천하를 거의 다 얻었다가 호적수에게 뺏긴 점에서도 항우의 후배답다.
저장성 문인 역시 민활하다. 대문호 루쉰(魯迅)과 ‘문림(文林)의 고수’ 위화(余華), 모두 촌철살인의 재치가 번뜩인다. 중국 최고의 명필 왕희지, 양명학을 창시한 왕양명, 혁명가이자 작가인 추진(秋瑾) 역시 저장성이 낳은 인재들이다.
저장인은 상업에서도 빛을 발한다. ‘중국의 유대인’ 저장상방은 민첩하게 움직이고 끈기 있게 노력한다. 민첩한 사람은 끈기가 없고 끈기 있는 사람은 둔하기 마련인데, 두 미덕을 겸비한 저장 상인들은 ‘빠른 물고기 이론(快魚論)’과 ‘사천정신(四千精神)’을 낳았다.
빠른 물고기 이론이란 ‘빠른 자가 살아남는다’는 주장이다. 즉, 크고 강한 물고기가 작고 약한 물고기를 잡아먹지만,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저장 상인들은 시장 조사·제품 개발·생산·판매·유통 등 사업 전 과정을 빠르고 유연하게 수행한다. 그래서 첫날 정보를 알아내고 바로 다음 날 주문을 내는가 하면, 사흘 안에 샘플을 만들고 일주일 안에 대량생산을 한다.
사천정신(四千精神)이란 온갖 고생을 감당하며 우직하게 일을 추진하는 마음자세를 말한다.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다 가고, 천언만어(千言萬語)를 다하며, 천방백계(千方百計)를 다 짜고,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다 겪는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면 성공은 다가오기 마련이다.
‘천하와 통하는 항구’
▲운하마을 시탕(西塘). 영화 ‘미션 임파서블3’ 촬영지로도 유명하다(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인 듯한 여자 상인(왼쪽)이 관광객을 응대하고 있다(아래).
저장성은 민영경제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2014년 중국 500대 민영기업 중 51개가 항저우에 있다. 공동 2위인 상하이, 톈진은 각각 15개에 그친다. 저장성은 중국에서 인터넷 쇼핑몰이 가장 많은 곳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항저우가 근거지다. 대표주자는 단연 마윈의 알리바바. 국내총생산(GDP) 대비 특허 출원 건수가 중국 내 2위로서 과학기술 혁신 잠재력이 강한 곳으로도 손꼽힌다.
2012년 억만장자가 많은 도시 순위에서 항저우는 베이징, 상하이, 선전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홍콩 제외). 부유층이 많은 만큼 명품 소비가 많고, 유명한 관광지답게 외지인들의 지출도 크다. 항저우다샤(杭州大厦) 백화점은 2010년 중국 최초로 연매출 50억 위안(약 8800억 원)을 돌파했고, 랑콤은 2012년 항저우 내 단 한 개 매장에서 전 중국 최고 매출인 1700만 위안(30억 원)을 달성했다.
닝보(寧波)는 안으로는 강남, 밖으로는 한국, 일본, 동남아 등 환황해권에 갈 수 있어 일찍이 ‘천하와 통하는 항구’라고 불렸다. ‘온 세계를 두루 다니는 것보다는 영파의 강변을 거니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해외교역이 발달했다. 지난해 닝보는 부산을 누르고 물동량 기준 세계 5위의 항구로 등극했다. 동해함대가 주둔한 핵심 군항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18일에는 저장성 이우(義烏)에서 화물열차가 출발해 12월 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후, 올해 2월 22일 이우로 귀환했다. 중국과 유럽 사이 1300km를 잇는 ‘이신어우(義新歐)’ 철도가 21세기 실크로드를 연 셈이다. 저장성은 신(新)실크로드 시대를 맞아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영화 ‘쉬즈더원’에서 벼락부자 진분은 중국을 두루 유람한다. 저장성 시시(西溪)의 가이드는 진분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송 고종은 금나라 군사에게 쫓기던 중 시시의 아름다움에 반해 행궁을 차리고 싶었다. 그러나 피난 가는 처지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송 고종은 “시시여, 잠시 기다리시게”라는 시를 지어 아쉬움을 애써 달랬다. 이 이야기를 듣자 진분은 말한다.
“송 고종 늙은이야 돈이 없어 그딴 말밖에 할 수 없지만, 나는 가진 게 돈뿐이니 시시가 맘에 든다면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남은 인생밖에 없네.”
그러자 가이드는 진분을 호숫가에 지어진 호화주택에 데려가 집 사기를 권한다. “앞에 보이는 호수가 선생님 개인 소유가 되는 겁니다.”
이 대목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중국의 벼락부자는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이 황제보다 낫다며 자고자대(自高自大)한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큰 부를 낳았고, 부유함은 자신감을 낳았다. 돈과 자신감은 부동산 버블을 한껏 부풀렸다.
자력갱생형 투기?
둘째, 저장성은 부동산 투기의 온상이다. 2012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중국에서 퇴직 후 노후를 보내기 가장 좋은 도시, 자연환경과 가장 잘 어우러진 도시로 항저우를 꼽았다. 삶의 질이 높은 저장성은 많은 중국인이 살고 싶어 하는 만큼 투기열이 대단하다.
저장 상인들이 부동산 투기에 지나치게 관심이 높은 것도 문제다. 저장성에는 ‘사기꾼은 있어도 거지는 없다’는 말이 있다. 저장인은 구걸하느니 스스로 돈을 벌지만, 돈 버는 수단을 가리지도 않는다. 이익에 밝은 저장상방은 옛날부터 금융, 부동산을 중요시했다.
부동산은 중국 GDP의 13%를 차지하고, 광의의 부동산은 고정 자산 투자의 3분의 1에 달한다. 부동산 침체가 당장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다 해도 당분간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다. 2010년 중국 최고의 집값을 자랑하던 항저우는 7위로 떨어졌다. 원저우(溫州)는 3년 연속 부동산 값이 하락해 집값이 반 토막 났고 1인당 GDP는 4만3632위안(약 770만 원)이 되었다. 항저우, 닝보에 이어 저장성 3위였던 도시가 순식간에 꼴찌로 추락했다.
그러나 원저우에 대한 중국인의 시선은 차갑다. ‘사방으로 출격하고 팔방에서 뿌리내리자’며 천하를 누빈 원저우 상인이 부동산 값을 한껏 올려놨기 때문이다. 황웨이핑 인민대 교수 역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원저우의 자금난은 투기꾼의 자금난이다.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원저우 기업인을 정부 자금으로 구제하는 것은 국민의 혈세로 투기꾼의 밑천을 마련해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본업보다 돈놀이에 맛 들린 기업들이 위탁대출에 나섰다. 저장성 내에서 위탁대출에 종사하는 기업이 25개로 중국에서 가장 많다. 2012년 말 기준으로 본업과 무관한 부동산업체에 위탁대출을 제공한 전국의 상장기업이 25개인데, 그중 저장성 기업이 9개로 독보적 1위였다.
원저우 상인은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원저우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개발했다. 개혁개방 후 유일한 사례라 ‘원저우 모델’로 불렸다. 그러나 자력갱생의 길은 힘들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기업은 첨단산업에 뛰어들어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은행은 규모도 크고 안정성도 높은 국유기업 위주로 대출해줬다. 그러나 원저우의 중소 민영기업들은 대부분 노동집약적인 분야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투자자금을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저우 상인이 사채, 부동산 투기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호의 아름다움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거이와 소동파는 항저우로 좌천당했지만, 곧 항저우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피난 온 송 조정은 옛 수도 카이펑(開封)을 다시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항저우에 빠져들었다. 항저우를 화려하게 만든답시고 10년치 세금을 한꺼번에 거두자 백성들은 “서호가 서시 같다”고 원망했다. 절세미녀 서시에 홀린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에게 멸망했듯, 서호에 홀린 송 조정도 사치향락을 일삼다 원나라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이다.
▲운하마을 시탕의 가옥에 그려진 그림, 뱃사공, 노을진 풍경, 항저우 시장에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 불상, 저장성 출신으로 풍만한 배를 드러내며 웃는 이 고승의 불상은 매우 인기 있는 사진 촬영 포인트다(왼쪽부터).
서호에 서린 원망
맹자의 말처럼 위정자가 돈과 여자를 좋아하더라도 백성과 함께 즐기면 괜찮다.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혼자 독차지할 때 문제가 된다. 서호의 땅, 저장성에서 태어나 중국의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한 루쉰은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 못지않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위화는 “루쉰은 더 이상 한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이 다 아는 단어, 정치와 혁명의 의미를 내포한 중요한 단어였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친구와 말다툼할 때 “루쉰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야!”라고 말하면 친구가 곧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루쉰의 작품은 교과서에서 퇴출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차단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민이 루쉰의 비판의식을 접하기를 원치 않는다. 쉬둥보(徐東波) 사오싱 루쉰기념관 부관장은 말한다.
“감히 쓰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면 학생들과 국가에 미래가 있겠는가.”
◆06월 호 푸젠성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闽 - “사장 못 되면 남자 아니다”
타이완과 마주보는 푸젠성은 예부터 과거 급제자와 상인, 그리고 해적을 많이 배출하기로 이름난 땅이었다. 이유는 하나. 영토의 8할이 험준한 산이라 살아남으려면 죽어라 공부하든 장사하든 해야 했기 때문이다. 푸젠인들은 한족의 핍박을 피해 바다로 나갔고, 광둥성과 함께 가장 많은 화교를 배출했다.
2011년 핼러윈데이. 한국에도 핼러윈 파티가 보급되긴 했지만 아직 대중적이진 않던 때였다. 그런데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서는 백화점 직원들이 핼러윈 의상을 입고 특별 세일 행사가 한창이었다. 나이트클럽 호객꾼들도 핼러윈 분장을 하고 핼러윈 파티 홍보전단을 돌렸다. 한국보다 더 일찍, 더 적극적으로 핼러윈을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날 밤, 바닷가에 있는 하바나 클럽을 찾았다. 많은 이가 핼러윈 분장을 한 채 파티를 즐겼다. 특별 이벤트로 ‘패션 콘테스트’와 ‘섹시 콘테스트’도 열렸다. 패션 콘테스트 1등은 능글맞은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던 손오공 의상을 입은 서양인에게, 섹시 콘테스트의 1등은 칭다오 맥주걸로 분장한 팔등신 금발미녀에게 돌아갔다. 두 1등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인물 좋은 서양인이 중국 친화적인 콘셉트를 잡았다는 점이다. 서양에 대한 동경과 중화의 자부심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것. 조계지(租界地)로서 서양에 일찍 문호를 개방한 샤먼의 특징을 읽을 수 있던 밤이었다.
문에 달라붙은 벌레
푸젠성의 약칭인 ‘민’은 ‘종족 이름 민’ 자다. ‘종족’이라고 쓰고 ‘오랑캐’라고 읽는다. 한족과 다른 종족을 뜻하는 한자는 많으나 ‘민’ 자만큼 오랑캐에 대한 중원인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자가 있을까. ‘민’ 자를 풀어보자. ‘문[門]’ 앞에서 알짱거리는 ‘버러지[蟲]’!
푸젠성은 한족의 경계 바로 앞이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 푸젠성에 대해 민월왕 무제(無諸)는 월왕 구천의 후손으로 초한전에서 유방의 편을 든 공로를 인정받아 민월왕이 됐다고 썼다.
훗날 민월은 옆 나라 동구(東·저장성 남부)와 전쟁을 벌였다. 민월이 정복에 성공하기 직전, 동구는 한무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태위(太尉·국방부장관) 전분은 ‘오랑캐의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고, 중대부(中大夫) 장조는 ‘천자의 나라가 소국의 어려움을 방관해서는 안 되므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천조국으로서 외국의 일에 개입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낼지 말지 논쟁한 것과 같다.
한나라는 동구를 구하고 동월을 평정했지만, 산은 험하고 사람들은 거칠어 복속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영토 욕심이 많던 한무제조차 동월 지역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고, 동월 백성을 장강과 회수 사이(안후이·장쑤 북부의 평야지대)로 옮겨 살게 했다. 중원의 통치력은 강북의 평야지대까지는 미쳤지만, 강남의 산악지대는 감당할 수 없었다. 민월은 이후 1000여 년 동안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남송 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동화했다.
유구한 시간 동안 한족에 흡수·동화하지 않은 민월인들. 한족의 시선으로는 당시 ‘글로벌 스탠더드’이던 한족의 찬란한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 ‘미개인’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자신의 경계, 문[門] 주위에 귀찮게 달라붙는 벌레[蟲]라는 뜻으로 ‘민’이라는 글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뱀을 숭상하는 민월인이 문 안에 뱀을 키웠기 때문에 ‘민’ 자가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이 경우에도 한족의 눈에 민월인의 풍습은 괴이하고 야만적으로 비쳤으리라.
“단결만이 살길”
푸젠 친구에게 추석 때 뭐 할 거냐고 묻자, 사당에 가서 소원을 빌 거라고 했다.
“아, 마조(祖) 사당에 가려고?”
“아니, 마조는 뱃사람들의 신이야. 우리 집은 장저우(州) 산골이라 토지신 사당에 갈 거야.”
푸젠은 바다의 여신 마조로 유명하니까 마조 사당에 갈 거라는 예상을 깼다. 푸젠 문화가 지역별로 다양함을 새삼 일깨웠다.
‘민월은 8할이 산, 1할이 물, 1할이 밭’이라고 할 만큼 산이 많다. 푸젠의 역사는 산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산악지형은 이동하기 힘든 데다가, 많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도 아니다. 그렇다보니 산에서는 소수의 부락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작고 폐쇄적인 공동체에 있으니 언어와 문화도 독자성을 갖게 된다.
게다가 푸젠은 종족도 다양하다. ‘백월(百越)’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월족, 고산족(高山族), 피난 온 한족 등이 산다. 같은 산 안에서도 종족이 다르고 산을 넘어가면 언어가 다르다. 지방마다 말이 다른 중국에서도 푸젠은 언어가 가장 다양한 곳으로 손꼽힌다.
산은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어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중원의 끊임없는 전란은 대규모 피난민을 여러 차례 발생시켰다. 푸젠에 내려간 피난민은 전쟁을 피해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토착민인 토가(土家)와 비교해 피난민들은 새롭게 찾아온 손님과도 같아서 객가(客家)라고 불렸다.
객가인은 불안했다. 전쟁의 공포는 아직도 생생한데, 생경한 땅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다. 게다가 주위에는 거친 오랑캐들이 득시글거렸다. 산은 임자가 없는 대신에 거칠고 험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약자에게 살길은 단 하나였다. 단결.
그래서 객가인들은 거대한 원형의 흙집을 지었다. 온 마을 주민이 두세 채 흙집에서 함께 살았다. 산속 요새를 방불케 하는 토루(土樓)는 그들의 공동 숙소이자 병영(兵營)이었다. 1950년대 미군이 인공위성으로 토루를 처음 보고는 핵 군사시설로 착각했을 정도다.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어도 수확은 신통찮았다. 이에 푸젠인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공부를 하거나 장사를 했다. 아이들은 “두꺼비야, 두꺼비야, 하하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내를 얻지 못한다”라는 동요를 부르며 놀았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는 오늘날의 ‘권학가’와 놀랄 만큼 닮았다.
서민적, 실용적, 세속적
푸젠은 강절(江浙·장쑤성과 저장성) 지역과 함께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강절의 학문은 풍요와 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푸젠의 학문은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방도였다. 따라서 강절 문화는 귀족적이고 이론적이며 고아했으나 푸젠 문화는 서민적이고 실용적이며 세속적이었다.
장쑤 쿤산(昆山) 출신의 대학자 고염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의를 위해 학문을 했지만, 푸젠 취안저우(泉州) 출신의 선비 이탁오(李卓吾)는 관리가 되는 목적은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먹고 입는 것이 인륜”이라며 당대 사회의 위선에 돌직구를 날렸다.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朱熹)도 푸젠의 대학자다. 주자는 대의를 중시하는 유학과 실리적인 푸젠 문화를 조화시켰다. 당시 푸젠에선 고시 준비를 위한 참고서 출판업이 성행했고, 주자는 인기 수험서 저자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탁월한 중국역사서지만 너무 방대했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핵심 정리집으로 고시생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사서집주(四書集註)’도 인기 해설서였다. 오늘날로 치면 족집게 강사가 ‘하룻밤에 읽는 자치통감’, ‘공무원시험에 꼭 나오는 논어’ 등을 펴낸 셈이다.
태국을 여행하다 푸젠 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관광객이 으레 찾는 사원이나 옛 성터 등에는 별 관심이 없고 태국 물건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자기가 앞으로 무역상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서양 여행자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사업가 기질이 대단했다. 나중에 같이 저녁을 먹으며 그 얘기를 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역사와 문화보다 돈과 음식에 관심이 많아.”
상인 문화가 발달한 푸젠의 딸다웠다. 농사로 먹고살기 힘들고, 공부를 잘해 과거 급제하기도 어려운 푸젠인은 일찍부터 장사에 나섰다. 푸젠인은 “장사 속에 황금의 집이 있고 옥 같은 얼굴의 가족이 있”으며, “사장이 되지 못하면 용감한 남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산이 많아 상업이 발달한 면에서 푸젠성과 안후이(安徽)성은 닮았다. 내륙지역인 안후이 상인들은 강으로 풍요로운 강절 지역에 갈 수 있어 국내 상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해안 지역인 푸젠 민상(商)은 바다로 나가 해외무역을 했다.
푸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면 한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이 거의 비슷한 거리에 있다. 무역의 중심이 될 만한 곳이다. 송·원대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던 취안저우는 10만 명의 아랍 상인이 살던 국제무역항이다. 아프리카·아랍·아시아를 두루 여행한 대모험가 이븐 바투타는 취안저우를 “세계에서 유일한 최대의 항구”라고 극찬했고, 마르코 폴로는 “후추를 실은 배 1척이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갈 때 취안저우에는 100척이나 들어온다”고 경탄했다.
고구마,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 들어오는 창구였고, 해외 우수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인재 풀’이었다. 정화(鄭和)의 대항해는 서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90년이나 앞서 동남아, 인도, 중동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의 케냐까지 이르렀다. 이때 정화는 취안저우에서 아랍 선원을 고용해 천문항해술을 활용하고 이슬람권의 현지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푸젠인의 활발한 상업 활동은 조정의 의구심을 샀다. 농업이 아닌 상업에 힘쓰고,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며 이상한 물자가 유통되는 푸젠은 매우 수상한 곳이었다.
‘해금령’ 비웃은 생존의지
명나라는 물자의 국외 반출과 해외 교류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나마 해외무역 창구인 시박사(市舶司)가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명나라는 왜구가 시박사에 나타나자 “왜구의 재난은 시박사에서 일어난다”며 시박사를 폐쇄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때부터 왜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푸젠 순무 담륜이 말한 대로, 푸젠인은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 굶어 죽으나 해적질하다 죽으나 다를 바 없었다. 일본인만이 왜구가 아니었다. 푸젠·저장·광둥의 현지인도 해적이거나 해적과 한통속인 경우가 많았다. 해적이라 불렸지만 실상 합법적으로 장사할 수 없는 상인인 경우가 많았다. 취안저우의 관료 임대춘은 탄식했다. “연해의 도시와 향촌 사람은 모두 해적이다. 해상의 뱃사람과 상인은 모두 해적이다. 주나 군을 다스리는 장관 좌우의 서리는 모두 해적이다. 연해의 빈민은 모두 해적이다.”
왜구를 막겠다고 먹고살 길을 막아버리자 멀쩡한 백성들조차 왜구가 됐다. 해금령(海禁令)은 전혀 실효가 없었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됐다. “판자 하나라도 바다에 들어오는 것을 불허했지만, 강 입구를 막을 정도로 큰 배가 들어왔다. 소량의 물건도 외국인이 가져가는 것을 불허했지만, 큰 배는 아이들과 아름다운 비단을 가득 싣고 갔다.”
해적질도 하다보면 실력이 느는 법. 급기야 명나라 말기 해적 정지룡은 황제에게 푸젠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훗날 명나라가 망했을 때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전개했을 만큼 푸젠의 실력자였다.
▲구랑위 섬에서 바라본 샤먼 전경.
겨우 2km 떨어진 兩岸
청나라는 반란의 고향인 푸젠이 불편했다. 대륙에서 패해 타이완으로 도망친 정성공을 고립시키기 위해 해안 50km 이내의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1661~1663년간 8500명의 푸젠 어부와 농민이 죽었다. 해외무역을 금지하고 화교를 ‘외국과 밀통한 매국노’로 간주했다. 이에 많은 화교가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중톈은 구랑위(鼓浪嶼) 섬을 파도와 피아노 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섬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내가 찾은 구랑위는 관광객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일치기 관광객이 대부분이라 저녁이 되면 비교적 한산해졌다. 평화롭고 조용한 섬의 골목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어느 집 문 앞에 붙은 대련(對聯)을 보게 됐다.
廈門金門門對門 大小打
(샤먼과 진먼, 문과 문이 서로를 마주 보네 큰 포와 작은 포, 포와 포가 서로를 때리네)
기가 막힌 대련이다. 이 대련을 이해하려면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민당 군대는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 군대에 패배했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공산당은 이제 샤먼의 코앞에 있는 진먼다오(金門島)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타이완까지 정복해 완벽한 통일을 이루려 했다. 이미 광활한 중국 전역을 해방시켰으니, 눈앞의 조그만 섬은 하루면 충분히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함이 없어 어선을 징발해서 1만 명의 병사, 하루치 식량, 승전 잔치에 쓸 소를 진먼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진먼에는 4만 명의 국민당군이 철벽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데다가, 무기의 화력과 해·공군력은 공산당군을 압도했다. 공산당의 1만 병사 중 3000명은 전사, 7000명은 포로가 돼 단 한 명도 진먼을 탈출하지 못했다. 공산군은 강력한 해·공군력이 없으면 타이완 정복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포기했다. 진먼 전투는 국지전이 전체 판세에 큰 영향을 준 사례다.
중국과 타이완 정부가 각각 안정돼 갈 무렵 중동에선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은 함대를 급파해 혁명을 억제하려 했다. 마오쩌둥은 중동의 혁명 세력을 지원하고자 타이완을 침공하는 시늉을 했다. 1958년 8월 23일, 중국은 진먼에 포격을 퍼부었다. 23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동안 4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40일 동안 47만 발의 포격이 가해졌다.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600여 명이 죽고 2600여 명이 부상했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포격이 계속됐고, 1979년 1월 1일 미중수교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포격이 중단됐다. 구랑위의 대련이 말해주듯, 샤먼과 진먼이 맞붙어 큰 포와 작은 포를 날리던 세월이었다.
▲노점에서 두유를 파는 할아버지.
문 밖의 용, 문 안의 용
오늘날의 샤먼과 진먼은 나른할 정도로 평화롭지만,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기나긴 세월 동안 포탄이 날아다니던 전장이었다. 샤먼과 진먼의 거리는 2km밖에 안 된다. 린이푸(林毅夫) 전 세계은행 부총재는 1979년 진먼에서 육군대위로 근무할 때 농구공 하나를 끌어안고 헤엄쳐서 샤먼으로 탈영했다고 한다. 이제는 탈영 대신 양안 수영대회가 열려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러면서도 샤먼에는 ‘일국양제 통일중국(一國兩制 統一中國)’, 진먼에는 ‘삼민주의 통일중국(三民主義 統一中國)’ 구호가 각각 걸려 있어 미묘한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님을 엿볼 수 있다.
활발한 무역을 펼친 푸젠은 광둥과 함께 세계 화교를 양분한다. 중국 안에 있을 때는 별 볼일 없이 살다가 해외에 나가면 펄펄 날아다니는 푸젠인을 보고 중국인들은 “문 안에 있는 벌레가 밖에 나가면 용이 된다”고 신기해한다.
오늘날 푸젠은 사상 최고로 격려받고 있다. 지난 4월 21일 푸젠은 신설 자유무역구로 선정됐다.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해상 실크로드의 기항지가 돼 옛 영광을 다시 찾으려 한다. 타이완의 교류·포섭에서도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중국은 외국의 돈을 좋아할 뿐, 외부 생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싫어한다.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고 제도는 받아들이지 않던 중체서용(中體西用)의 21세기판이다. 폐쇄적인 중국에 개방적, 실용적인 푸젠이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푸젠인은 이제 문 안에서도 용이 될 수 있을까.
◆07월 호 산둥성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魯 - 호방하고 의리 있는 이웃
천혜자원이 풍부한 산둥은 예부터 공자, 강태공, 제갈량 등 걸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산둥인은 호방하고 의리가 있어 ‘친구 삼기 좋은 사람’으로 통한다. 이런 산둥과 한국은 고조선 때부터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바닷물이 짜다는 말이 사실이네!”산둥성 칭다오의 바닷가에서 중국 소녀들은 바닷물을 맛보며 즐거워했다. 바닷물이 짜다고 배웠어도 내륙에 사는 중국인들은 바다 볼 일이 없으니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할 도리가 없다. 저 소녀들은 세상이 얼마나 넓고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달았기에 저토록 즐거워하는 거겠지. 오늘의 첫 경험을 평생 간직하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겠지.
어린 소녀들뿐만이 아니다. 칭다오에 놀러온 중국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바닷물을 발로 차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며 일생에 하기 드문 바다 체험을 즐기고 있었다. 내륙국가 중국의 특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닷가에 사는 중국인들은 산둥이 별로 안 신기할까. 2박3일간 기차를 타고 푸젠에서 산둥까지 온 친구는 “산둥은 온통 평야구나!”라며 감탄했다. 장저우 산골에서 태어나 산이 많은 푸젠에서 자랐기에 산둥의 넓은 평야가 마냥 색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중원 평야와 황해 바다가 만나는 곳. 산둥성은 땅과 물의 이점을 활용해 일찍부터 부강함을 자랑하던 곳이다.
東夷의 땅
산둥성의 약칭은 ‘노나라 노(정자는 魯)’ 자다. 우리에겐 공자의 고향으로 친숙한 곳이다. ‘산둥(山東)성’은 태행산(太行山)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한족들이 황하 중류, 태행산 서쪽의 중원에 살 때 동쪽에 사는 오랑캐들을 뭉뚱그려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산둥 지역은 내이(萊夷) 등 여러 이민족이 살던 동이의 땅이다.
산둥은 주나라 초기 때 중국에 포섭됐다. 주무왕(周武王)은 일등공신 강태공을 제나라의 제후로, 조카를 노나라의 제후로 봉했다. 재능이 뛰어나지만 한 핏줄이 아니라 왕실에 위협이 될지도 모를 강태공을 변방으로 보내 새 영토를 개척하게 하고, 그 중간에 친척을 둬 제를 견제하게 했다.
당시 제 지역은 한족의 미개척지였고 내이의 세력이 강해 기반 닦기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군략과 내정에 모두 뛰어난 강태공은 성공했다. 사마천이 경제를 논하며 제나라를 첫 사례로 꼽을 만큼 제의 성장은 눈부셨다.
이전에 태공망이 영구(營丘)에 봉해졌을 때, 그곳 땅은 소금기가 많고 백성이 적었다. 그래서 태공망은 부녀자들의 길쌈을 장려해 기술을 높이고, 또한 각지로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켰다. 그러자 사람과 물건이 줄을 지어 잇달아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제나라는 천하에 관, 띠, 옷, 신을 공급하였고, 동해와 태산 사이의 제후들은 옷과 관을 바로하고 제나라로 가서 조회하였다.
-사마천 ‘사기’ 중 ‘화식열전’
제나라는 명재상 관중을 만나 전성기를 맞았다. 상인 출신으로 경제에 밝은 관중은 부국강병의 계책을 묻는 제환공에게 명쾌하게 답한다. “농민들의 일할 시간을 빼앗지 않으면 그들은 부유해질 것입니다. 가축을 빼앗지 않으면 소와 양이 번성할 것입니다.” 관중은 일상 영역은 자유방임하고, 당시의 핵심 전략산업인 철과 소금은 국유화해 단시간에 제나라를 천하의 패자로 만들었다. 제나라는 춘추시대 140여 나라 중 ‘베스트 5’인 춘추오패(春秋五覇)였고, 전국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도 부강한 나라에 속했다.
한편 노나라는 주왕실과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정통성이 강했다. 노나라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변 강대국들의 역학관계를 살폈다. 뛰어난 정보력과 대의명분에 입각한 외교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겨 국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했다. 공자는 노나라의 역량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공자의 육예(六藝)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는 정치외교, 문화예술, 국방, 행정, 경제 등을 총괄하는 실용학문이었다.
▲우리 귀에 익은 태산(泰山)은 산둥성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는 1532m로 백두산, 한라산보다 한참 낮다.
태산, 황하, 공자
산둥성은 ‘제노의 땅(齊魯之地)’으로서 제나라의 하드 파워와 노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드넓은 평야에 황하와 제수(濟水)가 흐르고,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농수산업이 중국 내 1위, 인구가 9637만 명으로 2위다. 지하자원도 풍부해 금, 은, 유황, 석고 매장량이 중국 1위, 석유는 2위다. 풍부한 자원 덕에 예부터 기초산업과 교역이 발달했다. 지리적 요충이기도 해서 내륙으로는 중국의 양대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고, 해외로는 한국, 일본과 통한다.
인재도 많다. 800년 주나라의 역사를 연 강태공, 제나라를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만든 관중, 지략의 대명사 제갈량은 중국사 최고의 명재상이다. 뛰어난 사상가도 많아 유가의 공자와 맹자, 묵가의 북자, 병가의 손무 · 손빈 · 오기 등 제자백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산둥에서 활약했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신비한 자연은 도교와 문학에도 영향을 줬다. 전진교를 발전시킨 구처기 등 전진칠자(全眞七者), 중국 최고의 재담가로 손꼽히는 동방삭, 판타지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를 쓴 포송령도 산둥인이다.
▲바닷물을 맛보며 즐거워하는 중국 어린이들(위). 아래는 중국 전통 건축물과 근대 독일 건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개성을 발산하는 칭다오
대장부의 풍모
이처럼 산둥은 자랑거리가 많다. 그러나 호방한 산둥인은 한마디만 한다. “하나의 산, 하나의 강, 하나의 사람!” 하나의 산이란 산의 대명사 태산이요, 하나의 강이란 중화 문명의 젖줄인 황하요, 하나의 사람이란 지고무상의 성인 공자를 가리킨다. 중화의 정수가 모두 산둥에 있다는 말이다.
‘갈수록 태산’ ‘걱정이 태산’ ‘티끌 모아 태산.’
태산에 대한 말은 너무나 많아서 마치 옆 동네 산처럼 친근하다. 높은 산의 대명사인 태산은 얼마나 높을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말이 생길 만큼 높다면 해발 3000m? 5000m? 의외로 태산의 정상 높이는 1532m에 불과하다. 백두산, 한라산은 고사하고 덕유산, 태백산보다도 낮다. 북한을 제외하고 남한의 산만 따져도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높이다.
그렇다면 왜 태산이 산의 대명사가 됐을까.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고 만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원인에게 황해가 시작되는 산둥반도는 세상의 끝이었다. 태산은 화북평야에 우뚝 서서 태양이 솟구치는 바다를 바라본다. 삼라만상을 기르는 태양에 소원을 빌기에 완벽한, 천연의 제단이다. 진시황이 태산에서 천하통일을 완수했음을 하늘에 고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봉선의식을 행한 이래 한무제, 광무제, 당고종, 강희 · 건륭제 등 걸출한 황제들이 태산에서 천하의 안녕을 빌었다.
게다가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유학이 동아시아의 지배사상이 되자 태산은 중화문명의 정수가 깃든 곳으로 승화한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 강희제는 “태산의 맥이 장백산에서 온다(泰山山脈自長白山來)”고 주장했다. 태산은 한족의 산이고 장백산은 여진족의 산이지만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한족과 여진족은 한집안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그러면서도 근본은 장백산이듯 여진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태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 문화적 상징이 된 ‘중국의 올림푸스’다.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했듯이, 바다를 보면 웬만한 물은 물로 보이지 않고, 성인을 만나면 웬만한 말이 말로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맹자의 말은 산둥인의 호방함을 대변한다. 산둥인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고, 바다를 봐서 큰물을 알며, 공맹의 가르침을 받아 의로움을 안다. 호연지기 가득한 대장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중국에서 산둥인은 “호방하고 의리가 있어 친구로 사귀기에 좋다”고 정평 나 있다. “남방인은 한 푼의 돈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산둥인은 한 마디의 말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한다.
산둥인은 체격이 커서 대장부다운 풍모가 더욱 돋보인다. ‘산동대한(山東大漢)’답게 공자는 9척6촌, 제갈량은 8척의 장신이었다. 튼튼한 체력에 강인한 생활력을 갖춘 산둥인은 난세에는 난리를 일으키는 도적이 되기도 으뜸이고, 난리를 평정하는 군인이 되기도 으뜸이다. 평화로울 때는 척박한 땅을 앞장서 일구는 개척자이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일꾼이 된다.
후한말 청주(靑州 · 당시의 산둥)에서는 황건적이 크게 활개쳤다. 조조는 토벌한 황건적을 청주병(靑州兵)으로 조직해 휘하에 거느렸다. 청주병은 조조의 최정예 부대로 조조가 삼국시대 최대의 세력이 되도록 도왔다. 송말 산둥의 양산박에서는 송강 등 36인의 도적이 날뛰었다. 송 조정은 도적 토벌에 성공했지만, 금나라에 밀려 강남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산둥의 잔존 관군과 도적을 충의군(忠義軍)이라는 유격부대로 만들어 금나라의 후방을 교란케 한다. 훗날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 ‘수호지’의 모티프가 됐다.
저력이 된 식민 유산
청말에는 의화단운동이 산둥에서 시작됐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산둥 출신 장군이 많아 군내 산둥 인맥이 산둥방(山東幇)이라고 불렸다. 산둥인은 평화로울 땐 성실한 일꾼이었다. 청대 베이징은 급수 시설이 좋지 않아 물장수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산둥인이어서 “산둥인이 장사 안 하면 베이징 우물물 모두 마르리”라는 노래가 있었다. 동북3성 개발 전에는 많은 산둥인이 그곳으로 이주해 황무지를 개간했다. 영국은 홍콩을 통치할 때 남부 중국인보다 체격 좋고 규율이 잘 잡힌 산둥인을 홍콩 경찰로 많이 채용했다.
칭다오 여행 중에 만난 항저우 사람은 “칭다오가 항저우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고 했다. 중국인은 자기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특히 항저우는 “하늘엔 천당, 지상엔 항저우가 있다”고 할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항저우에서 온 사람이 이토록 칭다오를 칭찬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작은 어촌 마을 칭다오가 항저우 사람들을 감탄시킬 만큼 변한 것은 독일 덕분이다. 빌헬름 2세는 중국으로부터 칭다오를 99년간 할양받고 대대적으로 개발했다. 중국 공략을 위한 핵심 군항이자 무역항으로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에서였다. 붉은 지붕, 화강암 벽의 독일 고전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칭다오에 온 캉유웨이는 “붉은 기와에 푸른 나무, 파란 바다에 쪽빛 하늘, 중국 제일이로다(紅瓦綠樹,碧海藍天,中國第一)”라고 찬사를 보냈다.
칭다오와 독일의 인연은 뿌리 깊다. 독일이 1903년 세운 칭다오 양조장은 중국의 대표 맥주 ‘칭다오 맥주’가 됐고, 비스마르크 병영은 중국해양대학교가 됐다. 개혁 · 개방 시기 칭다오의 한 중소기업은 독일 립헤르(Liebherr)사와 합작해 냉장고를 만들었고, 훗날 립헤르의 중국식 발음으로 이름을 고쳤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백색가전 회사 하이얼이다.
“칭다오에선 홍수 날 염려가 없어요.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금세 빠져나가죠. 옛날에 독일인들이 지어놓은 하수도는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답니다. 독일인들이 100년 전에 지은 건물도 여전히 튼튼해요. 그런데 중국인이 지은 건물은 입주하기도 전에 금이 가고 무너진다니까요.”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는 칭다오 여성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칭다오 사람이 독일에 느끼는 친근함은, 대만인이 일본에 느끼는 친근함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굴욕적인 역사로 식민지가 됐지만, 식민 유산은 훗날 저력이 됐다. 강제 개항된 중국 조계 항구의 특성을 칭다오 역시 갖고 있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인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산둥성을 방문해 이곳이 자기 조상의 고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盧)씨가 강태공의 강(姜)씨에서 나온 성씨라는 의미였지만, 중국 언론은 “나무의 키가 1000척을 넘어도 잎사귀는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樹高千尺落葉歸根)”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산둥과 한국의 인연을 희극적으로 보여준 일화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산둥 술집들,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화된 상점이 혼재하는 칭다오, 1970년 중국에서 설계·건조한 최초의 구축함인 지난함(중국해군박물관), 칭다오 바닷가(왼쪽부터).
‘인천광역시 칭다오구
▲독일인들이 1934년 세운 성 미카엘 성당. 칭다오 구시가지의 랜드마크다.
산둥과 한반도는 역사의 첫 단계부터 질긴 인연을 맺었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고 하지만 사실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그런데 고조선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것이 바로 산둥이다. 기원전 7~6세기에 쓰인 ‘관자(管子)’에 제나라가 고조선과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이 최소한 기원전 7~6세기에는 외국과 교역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양자 교역의 역사가 얼마나 뿌리 깊은 지도 보여준다.
그럴 수밖에. 백령도와 산둥 청산터우(成山頭)의 거리는 불과 180km다. 서울~전주 간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인천에서 닭이 울면 산둥인이 잠에서 깬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산둥과 한국은 서로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세계에 퍼진 화교의 상당수는 푸젠과 광둥 출신이지만, 한국의 화교는 산둥 출신이 많다. 1944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 화교의 약 90%가 산둥 출신이다.
산둥은 우리 식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추김치와 짜장면은 산둥에 빚을 지고 있다. 배추는 산둥이 원산지이고, 단어 자체도 중국어 ‘바이차이(白菜)’에서 파생됐다. 짜장면이 인천부두에서 일하던 산둥 노동자의 끼니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역으로 한국인도 산둥에 많이 산다. 칭다오에서 우연히 한국인 한 사람을 만났다. 10년째 칭다오에서 살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칭다오에선 한국인 만나기도 쉽고 한국 간판도 많이 볼 수 있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말했다. “인천광역시 칭다오구죠”
산둥은 중국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동북3성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조선족이 사는 지역이다. 2013년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35만 명의 한국인 중 8만 명(23.8%), 조선족 222만 명 중 20만 명(9.2%)이 산둥에 산다. 그만큼 교역도 활발하다. 2012년 기준, 한국의 중국 성 · 시별 직접투자 누계액 비중에서 산둥은 22.1%를 차지해 1위인 장쑤(22.3%)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가까운 만큼 다투기도 쉽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치기 위해 창해군을 설치할 때 산둥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창해군을 설치하기 위한 인프라를 마련하려면 인근 지역인 산둥의 인력과 물자를 크게 소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산둥은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한 핵심 지역이다. 중국은 전국을 총 7개의 군구(軍區)로 나눠 관리한다. 군구별 전투력 순위는 수도인 베이징 군구가 1위, 북한 ·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선양군구가 2위, 산둥의 지난군구가 3위다. 특히 지난군구엔 중국의 최강 해군인 북해함대 본부가 있다. 지도를 보자. 수도 베이징이 중국의 목구멍이라면, 그 목구멍을 감싸며 보호하는 이빨은 산둥 · 랴오둥 반도이고, 입술은 황해와 발해(渤海)다. 산둥반도는 베이징을 방어하는 해양 저지선인 동시에,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진 기지다. 반대로 점령군의 처지에서는 중국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요충지다.
산둥인은 ‘술 바다’ 선원
산둥과 한국은 너무나도 가까워 평화적이든 적대적이든 교류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모쪼록 언제나 화목하게 술잔을 나누는 사이이기를 바란다. 사실 산둥과 한국의 공통점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엄청난 대주가였다. ‘논어’에서 공자는 “술의 양에 제한이 없지만 취하지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는 증언이 나올 정도다. 삼국시대 조조가 곡물 부족 때문에 금주령을 내리려 할 때, 공자의 20대손인 공융은 금주령에 반대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술의 덕을 찬양해야 할 것이오. 요 임금께서 1000잔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태평천하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공자도 10말의 술을 들지 않았다면 성현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오. 홍문의 회합에서 한 고조를 구한 번쾌가 돼지고기와 1000잔의 술이 없었다면 어찌 용맹함을 떨칠 수 있었겠소. 한 고조가 술에 취해 백사를 베지 않았다면 어찌 큰 뜻을 펼칠 수 있었겠소. 이로 보건대, 술이 어찌 정치를 저버린단 말이오?”
그 후손답게 오늘날의 산둥인도 술을 사랑한다. 오죽하면 “산둥의 경제는 술의 바다 위에 떠 있고, 산둥 사람은 이 바다의 선원”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매년 8월 칭다오에서는 맥주축제가 열린다. 호방한 산둥인과 술을 마시며 친구가 돼보자. 중국의 엄청난 인파는 감당해야겠지만.
◆08월 호 안후이성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皖 ‘와호장룡’ 무대
중국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요충지 안후이성은 ‘삼국지’의 주요 무대였다. 이곳 사람들은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황산과 닮아 생존의지가 투철하면서도 유학을 숭상했다. 중국 근대의 문을 연 리훙장을 배출한 땅이지만, 개방 이후에는 상하이 등 인근 도시에 저임 농민공을 공급하는 배후 지역으로 전락했다.
무협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 무대로 유명한 안후이(安徽)성 훙춘(宏村)에 오니 개성적인 옷차림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검정 재킷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흰 블라우스와 핑크 손가방으로 포인트를 줬다. 홍춘의 동선은 무척 단순해서 그녀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경하다 한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그런데 그녀가 잠시 전화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휴지가 금세 다 떨어졌길래 내 휴지를 건넸다. 중국에서 흔한 10장들이 휴지 한 통에서 2장을 쓰고 8장이 남아 있는 거였다. 그녀는 8장의 휴지를 단숨에 다 써버렸다. 한국에서라면 한두 장쯤 빼서 눈물을 닦고 돌려줬을 텐데, 역시 대륙의 기상이 다른가보다. 휴지 한 통을 놓고 한중 간 문화 차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마칠 때쯤 그녀도 울음을 그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남자친구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남자친구가 바쁘다며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어딜 가나 남녀의 일은 비슷하구나.
안후이는 청대(청代) 정치의 중심 안칭(安慶)과 경제의 중심 후이저우(徽州)를 합친 말이다. 안후이성의 약칭인 ‘땅 이름 환’ 자는 안칭의 옛 이름. 이곳은 삼국시대 최고의 미녀 자매 대교 · 소교의 고향이다. 천하를 통일하고 대교와 소교를 얻으려던 조조의 야심은 적벽대전으로 좌절됐다. 적벽의 불길은 이미 오래전에 사그라졌지만 남녀상열지사의 불길은 ‘휴지녀’에서 보듯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태산보다 황산!
안후이는 강남과 강북, 중원과 동부 해안 지역을 잇는 요충지다. 유방과 항우의 최후 결전인 해하전투가 여기서 벌어졌다. 한신은 십면매복(十面埋伏)으로 항우의 군대를 격파했고, 장량은 한 자루 퉁소로 초나라 병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부르게 했다. 항우와 우미인은 죽음의 작별[패王別姬]을 나눴다.
삼국시대 안후이 북부는 난세의 간웅 조조, 신의(神醫) 화타, 일급책사 유엽을 낳았고, 남부는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 노숙, 여몽을 배출했다. 안후이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조조와 손권은 몇 차례나 격전을 벌였다. 허페이는 ‘강남의 머리이며, 중원의 목구멍(江南之首 中原之喉)’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안후이는 원술이 황제를 참칭한 수춘, 장강을 낀 요충지 여강 · 환 등 삼국지의 팬들에게 친숙한 지역이 많다.
격동의 현장 안후이는 판관 포청천, 명태조 주원장, 청나라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 등 선 굵은 인물을 여럿 배출했다. 후진타오 전 주석, 주룽지 전 총리는 안후이 출생은 아니지만 본적지가 이곳이라 안후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곤 했다.
황산 등산의 전초기지 툰시(屯溪)에서 마트에 들렀다. ‘참이슬’ 소주가 매장 한 코너를 가득 채웠다. 작은 마을에 이토록 많은 소주라니,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 소주를 마셔대는 걸까. 다음날 황산에 가자 관광버스 단위로 온 한국 등산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안후이에는 산의 지존 황산과 4대 중국 불교 성산 중 하나인 구화산이 있어 등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황산의 가파른 바위와 소나무, 구름이 어우러진 풍경은 속세에서 벗어난 듯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황산이 없으면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올 곳이 없”으며, “오악(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을 보고나면 다른 산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황산을 보고나면 오악마저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성지로 청말 전성기에는 300개의 절과 4000명의 승려가 있음을 자랑했다. 신라 성덕왕의 장남인 교각대사가 지장보살로 추대된 곳이라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러나 황산과 구화산은 안후이의 많은 산 중 일부일 뿐이다. 중원의 평야는 장강을 넘지 못한다. 험한 장강을 기껏 건너면 거친 산이 겹겹이 놓여 있다. 한족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후한말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온 한족 이주민은 거칠고 야성적인 원주민을 만난다. 한족은 그들을 ‘산속에서 살아가는 야만인’, 즉 산월족(山越族)이라고 불렀다.
산월족은 장쑤 · 안후이 남부부터 장시 · 저장 · 푸젠 · 광둥에 이르는 광대한 산악지대에서 살았다. 이 영역이 어디인가. 바로 손권의 오나라 땅이다.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실상 오나라는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위로는 토착 호족세력이 강했고, 밑으로는 산월족 등과 민족갈등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미개척지를 개발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위와 촉에 대비하는 것 말고도 산월족의 내란을 토벌해야 했다. 220년 위 · 촉 · 오 삼국이 정립된 후에도 오나라는 산월족에 시달렸다. 234년 제갈각이 단양군(안후이 쉬안청)의 산월족을 토벌하겠다고 했을 때, 오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단양군 평정을 만류했다.
리훙장의 고군분투
“외지고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 모두 들녘에서 무기를 쥐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수풀 속에서 늙어 죽습니다. 도망자나 오랫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자는 모두 함께 이곳으로 달아나 숨어 있습니다. (…) 그곳 습속은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익히며 기력을 높이 숭상합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험난한 곳을 넘으며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질주하고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 그들은 싸울 때는 벌이 이르는 것처럼 하고 지면 새처럼 사방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산월족이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언이다. 제갈각은 300명의 토벌대를 4만 명의 정병으로 불렸지만, 이는 제갈각이 제갈양의 조카답게 재주가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예외적 성공이다.
안후이인의 강인함은 청말에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중국 남부를 석권했던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것이다. 허페이인 리훙장이 조직한 안후이 의용군인 회군(淮軍)은 증국번의 후난성 의용군인 상군(湘軍)과 쌍벽을 이뤘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전쟁영웅이 된 리훙장은 청의 군권을 장악한 북양대신이 되어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청을 되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리훙장을 제외한 다른 성과 세력들은 수수방관했다. 일본이 류궁다오를 점령했을 때 광둥 수군 소속의 배를 접수하자, 광둥에선 청일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배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정황을 보고 어느 서양 평론가는 말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리훙장 한 사람과 전쟁을 한 것이다.”
비록 절반의 성공만을 거뒀지만 리훙장은 중국의 근대를 열었다. 그가 주도한 양무운동은 개화의 출발이었다. 무기와 기계의 도입만으로는 중국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 청일전쟁으로 밝혀지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고, 그조차 실패하자 아예 신체제 신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정경유착으로 ‘官商’ 별명
또한 리훙장이 무능한 관군을 대신해 조직한 회군은 근대 군벌의 시작이었다. 전란의 시기에 각 지역에서 군벌들이 등장해 일제의 침탈을 견뎌냈고, ‘현대판 초한지’였던 국공내전을 거친 이후에는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국민당이 대만을 차지하게 됐다. 청나라를 안정시키려고 조직한 사병(私兵)이 훗날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과 대만을 만들어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수련(양자경)은 표국을 운영한다. 표국은 산적 등으로부터 물건과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며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업체다. 경호업체와 물류업체가 합쳐진 격이다. 물류업에 종사하는 수련은 강호인인 동시에 후이저우 상인, 즉 휘상(徽商)이다.
안후이 남부 후이저우는 산이 많아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땅은 적고 인구는 많으니 농사 아닌 길로 먹고살아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후이저우는 산으로 막혔으면서도 강으로 트여 있었다. 신안강은 전당강으로 이어져 저장성 항저우로 갈 수 있고, 창강(창江)을 통해서는 장시성 파양호로 갈 수 있었다. 또한 후이저우에는 질 좋은 삼나무와 대나무가 많고, 차를 재배하기도 좋았다. 후이저우인은 고향의 특산물인 삼나무, 대나무, 차를 배에 싣고 다른 지역에 가서 장사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장사하는 후이저우인들은 중국의 대표적 상인인 휘상이 됐다. 물론 이런 성장과정은 만만찮아서 “전생에 덕을 쌓지 않으면 후이저우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외지를 떠돈다”는 속담이 생겼다.
휘상은 고향 특산물을 내다 파는 보따리 장수로 시작했지만, 자본금과 경험이 쌓이면서 방직, 소금, 금융 등 다방면에 손을 뻗쳤다. 명대(明代)에 “휘상이 없으면 도시를 만들 수 없다[無徽不成鎭]”는 말이 생겼고, 휘주 방언은 중국 금융업계의 공용어가 됐다.
휘상은 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유상(儒商)이라고도 불렸다. 휘상들의 꿈은 큰돈을 벌고 은퇴해서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닦고 좋은 집과 사당을 지어 가문을 빛내는 것이었다. 휘주가 배출한 최고의 학자는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朱熹, 주희의 고향은 오늘날 푸젠성이지만 당시 휘주는 푸젠성의 일부 영역까지 포함했다). “진상(晉商, 산시 상인)은 관우를 섬기고, 휘상은 주희를 추앙한다.”
휘상이 학문을 장려한 것에는 실용적 목적도 깔려 있었다.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관리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쌓았다. 친해지다보면 작게는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크게는 이권을 챙기거나 불리할 때 보호받을 수도 있다. 이처럼 휘상은 정경유착을 일찍부터 실현해 관상(官商)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휘상이 건륭제에게 화려한 생일상을 바치자 건륭제는 “부유하도다, 휘상들이여, 짐도 그대들에게 미치지 못하겠노라!”라며 감탄했다.
휘상의 경제력은 휘주 문화도 활짝 꽃피웠다. 휘주 건축양식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은 영화 ‘와호장룡’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안칭의 가극인 황매희(黃梅戱), 휘주의 가극인 휘극이 탄생했다. 문방사우 생산도 발달해 쉬안청(宣城)의 종이, 서현의 먹과 벼루는 선지(宣紙), 휘묵(徽墨), 흡연(흡硯)으로 불리는 명품이다.
도시 위해 희생하는 농촌
농촌의 가난은 단순한 생산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비대한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고,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농촌을 희생시켰다. 농산물 가격은 싸게, 공산품 가격은 비싸게 책정해 부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가게 했다. 호구제를 통해 도시와 농촌을 나누는 일국양책(城향分割 一國兩策)을 썼다. 이에 따라 농민공은 도시에서 불법 체류자가 돼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성상(聖商) 호설암은 휘상의 절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호설암은 청 300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황마괘(黃馬괘)를 하사받고 종2품에 오른 상인이다. 자신만만했던 호설암은 서양 열강의 자본과 한판 승부를 벌였다. 1882년 호설암은 생사(生絲)를 매점매석하고 1200만 냥의 이윤을 줘야만 외국 자본에 팔겠다고 했다. 외국 자본은 호설암에게 굴복하면 가격결정권을 잃을까봐 타협하지 않았고, 호설암은 호설암대로 중국 상인들을 설득해 생사를 모두 매점매석했다. 중국 자본 대 외국 자본의 중외대전(中外大戰)이 발발한 것.
쌍방 모두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탈리아의 생사가 풍년이 들었다. 생사는 쉽게 썩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없다. 결국 호설암은 1000만 냥의 손해를 입고 생사를 처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설암이 생사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호설암의 전당포에 돈을 맡겨둔 사람들이 일제히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호설암의 사업은 연쇄부도를 맞았다. 성상(聖商)이라는 별명이 무색한 몰락이었다. 호설암은 결국 근대 산업자본의 시대를 넘지 못한 전통 자본가였다. 그의 파산은 중국 경제의 허약함을 드러낸 일이었다.
오늘날 치루이(奇瑞, Chery) 자동차의 인퉁야오(尹同耀) 회장 등 휘상의 후예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치루이 자동차는 중국 최초로 해외 수출에 성공한 토종 자동차회사다. GM대우가 Chery QQ 자동차를 ‘마티즈를 베낀 짝퉁’이라고 고소해 유명세를 탔다.
1990년 가난한 안후이 진자이(金寨)현의 농촌 마을에서 한 사진작가가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일곱 살 소녀가 등교하는 것을 본다. 작가는 교실에서 공부하는 소녀의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소녀의 인생을 바꿨다. 가난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이 소녀가 바로 ‘공부하고 싶어요(我要독서(讀書)’ 캠페인으로 유명인사가 된 ‘왕눈이(大眼睛)’ 쑤밍쥐안(소明娟)이다. 훗날 소녀는 안후이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원이 됐다.
‘중부굴기’가 영광 재현할까
그러나 이런 미담은 녹록지 않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 쑤밍쥐안의 사례도 가난하고 낙후한 안후이 농촌의 현실을 반영한다. 천구이디 · 우춘타오의 ‘중국 농민 르포’는 2000년대 초 안후이 농촌을 고발해 금서(禁書)가 됐다. 2001년 겨울 ‘안후이의 시베리아’라고 불리는 푸양의 대로변에서 천구이디는 파와 배추를 파는 농민을 본다. 파 1근에 6펀(10원), 배추 1근에 1자오(18원)였다. 정작 채소를 파는 농민은 맨밥만 먹었다. 채소를 저토록 싸게 팔면서 왜 먹지 않느냐고 묻자 농민은 답했다. “내가 한 근을 먹어버리면 그 값만큼 덜 벌게 되잖소?” 이토록 가난하니 “작은 병은 견디고, 큰 병에 걸리면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오늘날 상하이, 장쑤, 저장 지역의 풍요는 안후이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인근 지역인 안후이의 많은 농민이 장강삼각주 지역으로 옮겨가 저임 농민공으로 일하며 경제를 발전시켰다. 노동력뿐만이 아니다. 회하가 홍수로 범람하려 할 때면 장강삼각주 지역의 도시 · 철도 · 시설 등을 보호하기 위해 안후이의 제방을 폭파시켜 ‘홍수가 지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중하류 지역은 평온을 누리지만 안후이 회하 주변의 농촌은 물바다가 되곤 했다.
장강삼각주의 풍요를 위해 안후이가 희생을 강요받은 것처럼, 중국의 성장을 위해 9억 중국 농민은 희생을 강요받았다. 이런 성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덩샤오핑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의 경제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면 아마 농업에서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은 가장 홀시되기 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해결하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커다란 문제가 돼 있을 것이다.”
중국 정부로서도 지역격차와 빈부격차는 매우 신경 쓰이는 문제다. 성장의 한계가 드러난 동부 연해 지역을 대체하려는 신성장 전략으로 중부굴기(中部굴起) 정책이 제시됐다. 중부지역의 6개성, 즉 안후이 · 장시 · 산시 · 허난 · 후베이 · 후난을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고난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남아 휘상의 번영을 이룬 옛 영광을 안후이가 재현할 수 있을까.
◆09월 호 광시성
◇해상 실크로드 대박 꿈 중국 · 동남아 혼혈지대
桂 ‘태평천국’ 진원지
광시(廣西)성은 베트남과 800km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인종·문화적 측면에서 중국보다 동남아에 가까웠고, 오랜 세월 이방인으로 핍박받았다. 하지만 최근엔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기지로 부상했다. 광시성에서 발원해 실패로 끝난 ‘태평천국’이 21세기에 실현될 수 있을까.
영화 ‘이별계약(分手合約)’에서 주인공 커플은 이별 후 오랜만에 재회한다. 여자가 “좋아하는 향이 뭔가요?”라고 묻자 남자가 “계수나무향”이라고 답한다. 여자가 외친다. “그래, 맞아, 계수나무향! 10월 이른 가을 무렵 비를 머금은 잎의 향!”
여자는 계수나무향을 좋아했고, 남자는 그걸 잊지 않았다. 계수나무향은 서로를 잊지 않았음을 확인해준 사랑의 향이다. 중국에서 계수나무향을 맡기에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 약칭으로 ‘계수나무 계(桂)’를 쓰는 광시 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가 아닐까.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서도 야망이 식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영역이 아니던 남방을 정복해 진나라에 편입시켰다. 광시 일대는 계림군(桂林郡)이 됐다. 2000년 전에도 이 땅은 계수나무 숲이었다는 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들짐승’
진시황이 죽고 중원이 전란에 휩싸이자 장군 조타는 남월(南越)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 남월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광둥 · 광시 · 북베트남을 석권한 남방의 강자. 한(漢)이 천하를 재통일하고 국력을 축적한 뒤 한 무제는 남월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때의 정복이란, 한의 지배를 인정하고 세금을 바치는 수준이었다. 문화적 통합은 요원했다. 당시 양광(兩廣 · 광둥과 광시) 지역은 인종 · 문화적으로 중국보다는 베트남 홍강삼각주 주민과 더 비슷했다. 원주민은 원주민대로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국인들도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여겼다.
후한말의 대학자 설종은 중원의 전란을 피해 어린 나이에 교주(交州)로 왔다. 당시 교주는 광시 · 광둥 · 하이난 · 북베트남을 포괄했다. 교주에서 자란 설종은 이곳 지역 문화를 잘 알았지만 존중하지는 않았다. 교주 백성은 남녀가 거리낌 없이 몸을 허락해 부부가 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으며, 알몸으로 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들짐승으로 오직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경멸하는 사람을 착취하기란 쉬운 일이다. 후한 조정에서 임명한 교주 관리가 이민족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자주 벌어졌는데, 정황상 소수민족이 가혹한 수탈에 항거하다가 관리를 죽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교주 지역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까. 중국 사정에 정통한 동시에 현지 문화를 잘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사섭(士燮)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사섭의 선조는 노나라 사람으로 산둥인이지만, 전란을 피해 광시성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사씨 일가는 착실하게 기반을 닦아 6대손인 사섭의 아버지는 일남 태수를 지냈다.
광시성 정착 7세대인 사섭은 현지의 공기를 마시고 자랐다. 동시에 수도 낙양에서 유학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칠 만큼 중국 문물과 사정에도 밝았다. 숱한 군웅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스러지는 난세에 사섭은 중원의 조조, 형주의 유표, 동오의 손권 등과 시기적절하게 동맹을 맺기도, 대립하기도 했다. 덕분에 중원이 전란에 휩싸인 시기에 교주는 오히려 평안했다. 원휘는 순욱에게 사섭을 극찬했다. “사섭은 학문과 정치에 모두 뛰어나 혼란 속에서도 한 군을 보전했으며, 20여 년 동안 그의 영내에는 일이 없고 백성은 가업을 잃지 않았으니 타향을 떠도는 사람은 모두 그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섭은 중국 유교문화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인도-동남아-중국을 잇는 해외무역을 통해 풍요를 누렸고, 동남아 · 인도 문화를 융통성 있게 수용했다. 사섭이 외출할 때마다 “오랑캐 수십 명이 길 양쪽에서 향을 태웠다”는 기록에서 보듯 인도 불교문화도 일찍이 받아들인 듯하다.
거위 배를 가르다
사섭이 다스리는 동안 교주 지역은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베트남인들은 사섭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고 ‘씨 브엉(士王)’이라며 존경을 표했다. 베트남 역사서 ‘대월사기전서’는 “우리나라가 시서(詩書)가 통하고 예악(禮樂)을 익히며 문헌(文獻)의 나라가 된 것은 사왕(士王)으로부터 시작됐다”고 기록한다.
사섭은 손권의 신하임을 자처하고 조공을 바쳐 교주의 평화를 유지했지만, 손권은 늘 교주의 풍부한 물산을 탐냈다. 사섭이 죽고 손권이 교주를 정벌토록 하자, 명장 여대는 전격전을 감행한다. 주위에서 준비가 불충분하다고 우려하자 여대는 말했다. “신속히 움직이지 않아 사씨 일가가 성을 굳게 지키고 일곱 군의 원주민이 구름처럼 모여 호응하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소?” 삼국시대 한족의 전투력은 모든 이민족을 압도했지만, 구름처럼 많은 소수민족과 험준한 지형은 여대도 두려워했음을 엿볼 수 있다.
여대의 정벌은 성공했다. 그러나 수탈과 반란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아 조세 수입이 사섭의 조공만도 못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격이었다. 오랜 시일이 흘러서야 광둥 · 광시 · 하이난은 중국에 통합되고 북베트남은 독립한다.
광시가 중국에 통합됐지만, “이곳 땅은 광활하고 인구가 많으며 지세가 험준하고 산림이 좋지 못하므로 이 조건을 이용해 소란을 일으키기는 쉽지만, 이곳 사람들을 다스림에 복종시키기는 어렵습니다”라던 설종의 우려는 청나라 말기에 재현된다.
아편전쟁은 서양의 탐욕과 청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난징조약에 따라 5개 항구가 개항하자 중국 무역을 독점하던 광저우는 상하이에 무역 중심의 자리를 내주며 침체의 몸살을 앓았다. 인근 광시에서 광저우로 온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로 전락했다. 고향에 돌아가도 별수 없었다. 원래 가난하던 광시는 때마침 가뭄까지 겹쳐 기근에 허덕였다. 일부 광부들은 허기를 달래려 석탄을 먹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홍콩에 자리 잡은 영국이 광둥 일대의 해적을 소탕하자, 궁지에 몰린 해적은 강을 거슬러 광시로 도망쳤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비밀결사 천지회도 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광시성에서 암약했다. 먹고살기 힘든 데다 불량배들까지 설치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지역 토호들은 빈민을 구휼하기보다 자기 이익만 챙겼다.
‘예수의 아우’ 훙시우취안
외세의 침탈, 기근과 실업, 불안한 치안과 민심,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 선지자 이사야의 말은 마치 청나라 말기를 보며 한탄하는 듯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 너희 땅은 황폐해졌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눈앞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폐해졌다.”
이때,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며 예수의 아우인 훙시우취안(洪秀全)이 나타났다. 예수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가난하고 수고로운 이들에게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설파했듯, 훙시우취안은 고향 광둥을 떠나 광시의 척박한 산골마을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것조차 어렵고, 한 달을 살아가기는 더욱 어려운”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했다. 광시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들불처럼 대륙을 휩쓸었다. 광시인들은 용맹한 군인으로서, 충실한 신자로서 태평천국 초기에는 열정과 활기를, 후기엔 신념과 노련함을 불어넣었다.
“누구든 하느님의 자녀이고, 모두가 형제자매”임을 표방한 태평천국은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훙시우취안 일가부터 사치향락에 빠져들어 부패했고, 핵심 인물들은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을 벌였다. 청의 관군은 무능했지만, 안정을 지키려는 쩡궈판(曾國藩) · 리훙장(李鴻章) 등 신진 군벌이 등장했다. 결정적으로 서양 열강도 이해득실을 따져본 끝에 이단적인 태평천국보다는 고분고분한 청나라가 낫다고 판단해 청나라를 지원했다.
14년에 걸친 태평천국은 200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지옥으로 끝났지만, 꿋꿋이 청 · 지주 · 외세에 맞선 태평천국의 신화는 오랫동안 회자됐다. 태평천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어린이들은 훗날 신중국을 여는 주역이 됐다. 신중국의 아버지 쑨원(孫文)은 “제2의 훙시우취안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고, 공산당의 전쟁 영웅 주더(朱德)는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려서는 안 된다오”라던 태평천국의 명장 스다카이(石達開)의 무용담을 들으며 불굴의 의지를 키웠다. 실패로 끝난 실험은 중국의 근대를 여는 시작이기도 했다.
뜨거운 역사를 뒤로한 채, 오늘의 광시는 평온하다. 광시의 풍광을 보러 많은 관광객이 각지에서 몰려든다. ‘구이린의 산수는 천하제일이고, 양숴의 산수는 구이린 제일(桂林山水甲天下,陽朔山水甲桂林)’이므로 “구이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신선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願作桂林人,不願作神仙).”
‘서양 사위’ 많은 동네
구이린의 산수를 보면 지형의 변천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태곳적 이곳은 바다였다. 조개와 산호의 사체가 쌓여 석회암이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충돌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며 해저 석회암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 석회암은 탄산이 섞인 물에 약하다. 남부는 아열대 · 열대성 기후로 비가 많이 오고 식물이 잘 자란다. 빗물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지하수는 식물의 뿌리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를 포함한다. 탄산수가 끊임없이 석회암을 녹여내면서 계곡과 동굴이 만들어지고, 비교적 산성에 강한 석회암 부위는 독특한 모양의 산으로 남았다.
그 결과 오늘날 광시는 430km의 리장강과 3만6000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지는 절경을 자랑한다. 또한 여건이 비슷한 중국 남부와 동남아 일대에 유사한 카르스트 지형이 조성됐다. 윈난성, 구이저우성, 베트남의 하롱베이, 라오스의 방비엥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명소는 언제나 많은 인파로 붐빈다. 천하명승지인 구이린도 예외가 아니라, ‘론리 플래닛’은 특유의 독설을 날린다. “구이린은 관광 의존도가 매우 높은데, 이는 잘 관리되고 있고 깨끗하지만, 떼거지 군중과 부대껴야 하며 대부분의 명소에서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 헨리 키신저는 노적암(芦笛岩)을 시적인 곳이라 평했는데, 아마 이때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의 크고 아름다운 아우성이 없었나보다.”
양숴는 작은 마을이라 한적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밤이 되자 쿵짝쿵짝 클럽 음악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더니 새벽 2시가 돼서야 그쳤다. 양숴가 왜 ‘중국에서 가장 서양 사위가 많은 마을’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 짐작이 갔다. 젊은 서양 배낭여행자들이 낮에는 풍경에 취하고, 밤에는 술과 음악에 취해 놀다가 혈기를 못 이기고….
숙소를 양숴 외곽으로 옮긴 후에야 비로소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숙소 매니저 잭은 무척 유머러스한 쓰촨인이었다. 처음 이곳에서 일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KFC도 없는 곳에선 일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는데, 양숴에도 KFC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일하게 됐단다.
“광시는 좡족자치구라고 해서 뭔가 특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네?” 잭은 나의 질문에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중국엔 56개 민족이 있고, 좡족은 그중 하나일 뿐이야.” 소수민족을 대단찮게 여기는 한족의 시각이 엿보였다.
좡족은 중국 내 최대 인구(1618만 명)의 소수민족으로, 그중 87%(1420만 명)가 광시에 산다. ‘소수’라고는 하지만 네덜란드, 과테말라, 에콰도르 등 웬만한 나라의 인구와 맞먹는다. 그러나 큰 것을 숭상하는 중국인에게 소수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다. 4000만 광시인 중 62%는 한족이고, 좡족은 32%에 그치며 3위인 야오족은 3%에 불과하다.
야오족의 서사시는 모세의 출애굽기를 방불케 한다. 야오족의 경사스러운 혼인잔칫날 “글자로 춤을 추고 먹을 가지고 놀 줄 아는” 한족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족과 야오족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한족에 맞서는 것은 고사하고 안전하게 달아날 길조차 막막했다. 현명한 야오족 노인은 북 위에 기장을 뿌려서 새들이 모이를 쪼느라고 북을 둥둥 울리게 했다. 한족들이 북소리를 경계하는 동안 야오족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머리카락 전설
그러나 이들이 밀려난 땅은 척박했다. 산 전체를 통째로 논으로 만든 룽성(龍勝)은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다. 흰 바지야오족(白袴瑤族)이 사는 난단(南丹)현은 고산 협곡 사이에 위치한 땅으로 ‘7층의 돌에 1촌(寸)의 흙’이라 지력이 약하다. 2~3년 농사짓고 7~8년 휴경하기 일쑤다. 큰 강은 아예 없고 작은 강도 드물지만,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이다. 큰비가 얕은 흙을 쓸어가버려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오족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풍습이 있다. 머리카락을 잘랐더니 영혼을 잃어 죽었다거나, 힘을 잃어 전쟁에서 졌다는 등 여러 전설이 있다. 그런데 다양한 전설 속에서 공통된 점은, 지나가던 상인에게 머리카락을 팔았더니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한족 상인이 화려한 도자기, 예쁜 빗과 노리개, 맛있는 향신료 등을 잔뜩 가져왔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라 급기야는 머리카락까지 내놓는다. 가난한 상태에서 과소비를 하게 되니 더욱 가난해지고, 한족에게 경제적으로 얽매인다. 경제적 예속은 정치 · 사회적 지배로 확대되고, 문화적으로도 한족에 동화해 종족의 정체성까지 잃을 위험에 처한다. 전설 속의 패배는 문화의 패배를, 전설 속의 죽음은 종족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한족의 지배를 받는 탐욕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독립선언이다. 자신의 긍지와 문화, 종족을 지켜가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전통이란 결국 내용은 잊히고 형식만 남기 마련이다. 이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을 뿐, 왜 그러는지 그 뜻을 잊어버렸다. 룽성 장발촌의 야오족은 머리를 푸는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라 한다. 돈 대신 자존심을 택하며 생긴 장발의 풍습이 오늘날 돈 버는 수단이 됐다.
베트남과 얽히고설켜
나는 구이린에 처음 갔을 때 꽤나 당혹스러웠다. 산수로 유명한 곳이라 전원적일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도시스러웠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내 당혹감을 눈치챈 듯 말했다. “구이린은 중국에선 작은 곳입니다. 하지만 시 중심부만 80만, 외곽까지 합해 총 500만이 사는 곳이라 외국인들에게는 작게 느껴지지 않죠.”
광시의 성도 난닝(南寧)에 가보니 구이린이 작긴 작았다. 난닝은 성도답게 큰 건물이 널찍널찍하게 들어섰고, 사람도 더 많아 활기가 넘쳤다. 난닝에서 아침에 버스를 탄 지 7시간 반 만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도착했다. 마치 이웃동네 가듯 버스로 국경을 넘었다. 한국에서는 느끼기 힘든 대륙의 매력이다.
광시의 약칭 ‘桂’가 말해주듯 진나라가 계림군을 설치한 이래 광시의 중심은 구이린이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광시의 중심을 베트남과 가까운 난닝에 뒀다. 난닝에서 하노이로 가는 중국 도로 위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 시설물이 설치돼 있어 동남아로 가는 기분을 한껏 낼 수 있다. 동남아로 뻗어가려는 중국의 야망이 느껴진다.
광시는 베트남과 800km의 국경선을 접한다. 그래서 광시와 베트남은 전쟁, 국경분쟁, 이민, 이권다툼 등 크고 작은 일들로 항상 복잡하게 얽힌다. 광시는 베트남을 관리하는 전진기지다. 사이가 나쁠 때는 전쟁터가 되고, 좋을 때는 협력의 장이 된다.
중국은 진나라 이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공식 이벤트처럼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다. 그때마다 광시는 베트남 공략을 위한 진군로 겸 병참기지였다. 중국은 동남아 일대에서 중화 중심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고, 그 열쇠인 베트남에 직 · 간접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다. 근대에는 중국과 프랑스가 동남아 패권을 두고 다퉜다. 일본이 조선을 대륙 공략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손을 뻗치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프랑스 역시 중국 공략을 위해 베트남을 점령하는 와중에 베트남에서 청불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와 맞붙은 반도국의 지정학적 운명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일시적 지배는 중국의 장기적 지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을 뺏었다가 패전 후 중국에 지배권을 넘겨줬다. 동남아 패권을 탐낸 프랑스는 중국과 조약을 맺고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한다. 중국군이 철수하고 프랑스군이 재진주하는 것을 우려하는 베트남인에게 호찌민은 쏘아붙인다.
“중국군이 머무르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아십니까? 중국군은 올 때마다 100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잠깐만 머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떠나게 될 겁니다.”
이후 역사는 호찌민의 예상대로 흘렀다. 베트남은 프랑스군과 미군을 차례로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다. 베트남 독립에는 중국, 특히 광시의 공이 컸다.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남 혁명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광시의 소도시 징시(靖西)에 모였다. 프랑스 · 미국과 전쟁을 치를 때에도 중국은 대량의 물자 · 무기를 지원했다. 원활한 보급을 위해 광시에 도로 · 철도를 새로 깔기도 했다.
베이부만(北部灣) 경제권
그러나 동남아의 패자가 되고 싶던 베트남은 끝내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1978년 중월전쟁을 치른다. 오랜 다툼 끝에 육지 국경분쟁이 해결되는가 싶더니, 오늘날에는 남중국해를 두고 분쟁을 벌인다. 멀리 있는 미국 · 프랑스보다는 역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베트남의 심복지환(心腹之患)이다.
물론 자국의 안위에 급급한 소국 베트남보다 대제국 중국의 시야는 더 넓다. 중국은 2007년 난닝 · 베이하이가 중심인 베이부만(北部灣) 경제권 건설에 착수했다. 광둥 중심의 주강 삼각주, 상하이 중심의 장강 삼각주, 톈진 중심의 보하이만(渤海灣) 경제권의 뒤를 잇는 중국의 제4 경제권이다. 동남아의 관문인 광시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동남아 교역과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기지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긴 역사 동안 소외됐던 광시가 빛을 볼 날이 드디어 오는 것일까.
◆10월 호 쓰촨성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
川 ‘하늘의 곳간’
덩샤오핑과 쓰촨 요리의 공통점은 ‘실속’에 있다. 쓰촨 출신 덩샤오핑은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그저 ‘쥐 잘 잡는 고양이’가 되고자 했고, 쓰촨 요리는 돼지고기 · 두부 · 가지 등 흔한 재료로 한 끼 식단을 푸짐하게 만든다. 쓰촨의 ‘실용’은 효율보다는 삶의 ‘윤택’에 가깝다. 내일의 중국에 중요한 힌트를 주는 것은 분명 쓰촨이리라.
▲청두시장 푸줏간에서 만난 상인
쓰촨 아가씨들은 무척 사랑스럽다. 미모도 미모지만 잘 웃고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더 예뻐 보인다. 게다가 어떤 주제든 대화를 계속 즐겁게 이어가는 재주가 있다. 숙소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쯔궁(自貢)’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우리 고향은 공룡이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데, 중국에서는 못생긴 여자를 공룡이라 부르거든요. 그래서 우리 동네 여자들에겐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 말이 겸손한 농담으로 들릴 만큼 그녀는 예뻤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나보다.
“베이징에 가면 자신의 지위가 낮음을 깨닫게 되고, 쓰촨에 가면 자신이 너무 빨리 결혼했음을 깨닫게 된다.”
天府之國
쓰촨 여자를 ‘촨메이쯔(川妹子)’라고 한다. 강가에 사는 누이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 별칭이 아깝지 않게 쓰촨 여자들은 강물이 흐르듯 활달하고 냇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조잘거린다. 쓰촨성의 약칭 ‘내 천(川)’과 참 잘 어울린다. 쓰촨(四川)은 송대 행정구역인 천협사로(川陝四路)의 줄임말이다. 장강(長江), 민강(岷江), 타강(타;江), 가릉강(嘉陵江)의 4줄기 강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쓰촨은 험준한 산속에 거대한 평야가 있는 분지다. 풍부한 강물이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기후가 온화해 온갖 동식물이 잘 자란다. 굳게 닫혀 있지만 막상 문을 열면 풍부한 물산이 넘쳐나는 곳이라 천부지국(天府之國), 즉 ‘하늘의 곳간’이라 불렸다. 얼마나 물산이 풍부해야 하늘의 곳간이 될 수 있을까. ‘전국책(戰國策)’은 말한다.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며, 만 승의 전차를 구비해 떨쳐 일어나면 백만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고,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며, 지세가 편안한 곳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다.”
이토록 좋은 땅에 촉인(蜀人)들이 살았다. 쓰촨의 또 다른 약칭 ‘나라이름 촉(蜀)’은 벌레가 머리로 실을 토해내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원래 누에를 뜻했다. 촉인들이 누에를 숭상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촉에선 일찍이 양잠업이 발달했다.
풍요로운 경제 덕분에 촉은 상주(商周) 시대에 이미 고도의 청동문명을 발달시켰다. 촉의 삼성퇴 도성은 상나라의 초기 도성보다 크고 중기 도성과 비슷하다. 삼성퇴의 유물은 중원의 유물과 판이하다. 상의 유물이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의 제기(祭器)인 데 반해 촉의 유물은 사람, 새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청동상 등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난 삼성퇴 유물을 보면 촉의 탁월한 예술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부리부리한 눈의 청동상은 중원보다는 오히려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촉의 국력은 중원을 능가할 정도였고, 독창적 문명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잠총과 어부, 나라 세운 지 얼마나 아득한가. 그로부터 사만팔천 년 동안 진나라와 서로 왕래하지 않았네.” 이백의 노래가 과장되기는 했지만, 촉이 독자적인 긴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항우를 죽인 땅
상나라는 주변 나라에서 약탈을 일삼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신흥 강국 주나라는 이들과 동맹을 맺고 상을 정벌한다. ‘상서(商書)’에 따르면 “무왕이 상을 정벌하는 데 파촉의 도움을 받았다. 파촉의 군사들이 앞과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상군은 창을 거꾸로 들고 항복했다.”
그러나 중원을 장악하자 주나라는 지척에 있는 강국 촉이 불편했다. 주는 상을 정벌한 지 불과 37일 만에 촉을 공격한다. 그러나 정벌하지는 못했고, 800년 뒤에 오히려 먼저 망한다. 촉은 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져 진나라 때에야 복속된다.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전에 촉에 먼저 난리가 나고, 천하가 다스려져도 촉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전통이 이미 이때부터 확립된 듯하다.
강병을 자랑하던 진도 촉을 정벌하기는 쉽진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진은 촉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소 석상을 만들고 꼬리에 금을 입혀 ‘금똥을 싸는 소’라고 소문을 내며 촉의 국경 앞에 갖다놓았다. 촉왕이 소를 가져오느라 진나라까지 길을 뚫자 진은 이 길을 통해 촉을 정벌했다. 촉이 스스로 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외부에서 뚫고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전설이다.
촉의 풍부한 물자는 진이 천하통일을 이룩한 원동력이 됐다. 사서에 따르면 “촉나라가 귀속되자 진나라는 더욱 강력해졌고, 재원이 풍부해 제후들을 우습게 여겼”으니 “진나라의 6국 병합은 촉나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중원인은 촉을 산속의 오지로만 여겼다. 항우는 천하를 장악한 뒤 눈엣가시인 유방을 촉으로 보냈다. 촉은 ‘산세가 험하고 낭떠러지에 에워싸여 나는 새들도 쉬지 않으면 넘지 못하는 곳’으로 ‘죽으러 들어가는 땅이니 아마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유방은 오히려 촉에 숨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항우가 팽성전투에서 3만 정병으로 유방의 육십만 대군을 박살냈을 때, 소하는 촉의 물자를 최대한 활용해 유방이 빠른 시간 내에 재기하는 것을 도왔고, 유방은 해하전투로 기어이 항우를 제압했다. 유방을 죽이려고 보낸 땅이 도리어 항우를 죽인 꼴이 됐다.
항우에게 연전연패하다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대세를 뒤집자 후한 말에 ‘어게인(again) 해하전투’를 꿈꾼 영웅들이 등장한다. 바로 제갈량과 유비다. 일세의 효웅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변변한 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떠돌던 유비는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난다. 물산이 풍부한 익주(쓰촨)와 전략적 요지인 형주(후베이)를 얻으면 조조, 손권과 능히 견줄 수 있다는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유비는 촉한(蜀漢)의 황제가 됐다. 훗날 촉한은 형주를 잃고 세력이 크게 꺾였지만, 쓰촨 하나만으로도 중원을 차지한 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내륙 깊숙이 위치한 ‘하늘의 곳간’은 근현대 중국에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이 만주, 상하이를 시작으로 중국을 급속히 잠식해오자 국민당은 충칭(당시 쓰촨성)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쓰촨은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힘들고 물산이 풍부하기에 든든한 후방이었다. 올해 중국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은 것도 쓰촨의 공이 크다.
바보 셋이 제갈량보다 낫다
훗날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했을 때, 중국의 중요 공업지대는 모두 연해에 있었다. 연해는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미국의 세력권과 맞닿아 있기에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은 순식간에 모든 생산능력을 잃어버릴 판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연해 생산기지의 일부를 쓰촨으로 옮겨 전략공업지대로 육성했다.
마침 6 · 25전쟁, 베트남전쟁 등이 연달아 일어났기에 쓰촨의 군수공장은 상당한 호황을 누렸고, 노동자에 대한 대우도 당시 중국 기준으로는 매우 좋았다. 자장커 감독의 영화 ‘24시티(二十四城記)’에 따르면, 30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은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 때도 이 지역 노동자에게는 매달 2근의 고기가 배급됐고, 노동자 부모는 자식이 대학에 가지 말고 평생 이곳의 노동자로 살기를 바랐다.
전략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땅이지만, 정작 쓰촨인들은 매우 평온하다. 오랜 세월 동안 산이 천하의 난리를 막아주고, 전쟁이 나더라도 후방 포지션이었기 때문인가. 쓰촨 여행 중 스페인 친구 하비에르를 만났다. 그는 쓰촨에 반해 쓰촨에서 스페인어 강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보통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이 시끄럽다고 싫어하는데, 나는 오히려 편해. 아마 스페인인들도 중국인들처럼 시끌벅적하기 때문인가 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쓰촨인이나 스페인인이나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교적, 외향적, 낙천적인 성격도 비슷하다. 다만 화려한 립서비스로 끝나기 일쑤인 라틴계보다는 쓰촨인들이 더 성실하고 약속도 잘 지키는 편이다.
중국의 큰 도시는 어디에나 인민공원이 있지만, 쓰촨성 성도(省都)인 청두(成都)의 인민공원이 가장 개성적이다. 구김살 없고 소탈한 청두인들이 노는 모습이 무척 흥겹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아저씨, 아줌마들이 말춤을 추다가 패션쇼 스타일의 음악이 나오니 폼을 재며 레드 카펫을 밟는다. 신선하고 유쾌한 패션쇼 워킹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소신을 당당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줬다. 한편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요가, 서예, 합창 등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이들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차 한잔을 즐기고 안마와 귀청소를 받는 사람도 많았다.
쓰촨인들은 제갈량을 숭상하지만 ‘바보 셋이 모이면 제갈량보다 낫다(三個臭皮匠,頂個諸葛亮)’고도 말한다. 소박한 생활 속에서 길러진 민초들의 자신감이 대륙의 역사를 바꿔왔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고대 촉나라는 독창적이고 정교한 삼성퇴 문화를 꽃피웠다. 청두 진장(錦江)의 야경, 인민공원에서 유머러스한 패션쇼를 벌이는 쓰촨 사람들(왼쪽부터).
쓰촨의 문화 코드 ‘실속’
쓰촨의 자랑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쓰촨 요리[川菜]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너무 느끼하고 기름이 많은 중국 요리다. 그러나 매콤한 쓰촨 요리는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매콤함이 기름의 느끼함을 없애주고 고소한 감칠맛을 살린다.
쓰촨 요리는 재료가 싸고 구하기 쉬우며, 간편하고 신속하게 조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맛과 영양까지 좋다. 가정식으로도 최적의 조건이다. 여기서 쓰촨의 중요한 문화 코드인 ‘실속’을 발견할 수 있다. 진귀한 중국 요리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둥 요리다. 중국의 요리 영화에서 볼 수 있듯 곰 발바닥, 상어 지느러미, 원숭이 골 등 희한한 재료를 조각하듯 멋있게 차려낸다. 그러나 쓰촨 요리는 두부, 돼지고기, 가지 등 흔하디흔한 재료를 쓴 마파두부, 회과육, 가지볶음 등이 대표적이다. 요리 초보자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말한다. “체면치레로 대접하려면 광둥 요리를 시키고, 실속 있게 먹으려면 쓰촨 요리를 시켜라.”
중원이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천하에 널리 알리는 데 골몰한다면, 산 속의 쓰촨은 천하가 알아주든 말든 조용히 실속을 차렸다. 매콤한 삼겹살 볶음이라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회과육(回鍋肉)은 원래 먹다 남은 고기를 어떻게 새 고기 못지않게 맛있게 먹을까를 궁리하다 나온 요리다. 솥에서 나온 고기(肉)가 다시 솥(鍋)으로 돌아가니(回) 회과육이다. 물산이 풍부해도 낭비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내실 있게 살 수 있다.
중원이 오랑캐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만리장성을 쌓은 반면, 쓰촨은 2200년 전에 거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을 만들었다. 만리장성은 전시 상황이 아닌 평시에는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도강언은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전시에도 평시에도 풍부한 작물을 선사했다. 중원이 용이나 호랑이를 숭상할 때 촉이 숭상한 것은 누에다. 폼 나는 동물보다 보잘것없어 보여도 비단을 만드는 누에를 숭상한 것도 실속을 중시하는 쓰촨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제갈량이 쓰촨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실속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천재 전략가 이전에 명재상이었다. 도강언의 수리시설을 보강해 “평년만 돼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도록 했다. 제갈량은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비단마을 진리(錦里) 거리인 것도 제갈량과 비단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준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공평무사한 법집행을 통해 상을 줘도 시기하는 이가 없고 벌을 받아도 억울해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량이 군사 천재이기만 했다면 결코 오늘처럼 뭇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의 평가대로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동틀 무렵 아미산의 금정(金頂), 쓰촨 어린이의 밝은 미소.
철학 없는 철학
실속을 중시하는 쓰촨이 배출한 또 다른 큰 인물은 바로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이름부터가 얼마나 소박한가. ‘작고 평범한 덩씨’라는 뜻이니. 이름값 하듯 덩샤오핑은 150cm의 아담한 키에 질그릇처럼 투박했다. 그에게는 후난인 마오쩌둥의 위풍도, 장쑤인 저우언라이의 준수함도 없었다.
덩은 중국공산당의 초창기 멤버로서 거의 평생을 공산당과 영욕을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정치, 외교 등 다양한 일을 해냈지만, 사실 어떤 분야에도 전문가가 아니었다. 개혁 · 개방을 이끌었으니 경제에 밝을 거라는 인상과 달리 덩샤오핑은 “나는 경제학 분야에 문외한”이라고 자인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대세와 핵심을 파악하고, 단 한마디의 슬로건으로 표현하는 일에 능했다. 항일전쟁 시기에 덩은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했고, 경제가 피폐해진 대약진운동 때는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무슨 상관인가.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며 핵심을 찔렀다.
그의 정책은 복잡한 계산이 아니라 명쾌한 상식을 통해 나왔고, 적절한 인사관리를 통해 추진됐다. 모든 일에 대세와 사람들의 욕구를 따랐고, 자신은 물꼬를 트고 수위를 조절하는 일에 힘썼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그리 힘들여 일하지 않고 주위를 닦달하지 않으면서도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중국 제왕학에서 강조하는 ‘무위의 치(無爲之治)’를 실천한 셈이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안정을 중시해 “오직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기실 그 자신은 특정한 주의와 사상에 경도되지 않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대장정 중에도 ‘자치통감’을 애독했고, 시를 즐겨 지었으며, 사상적 무장에도 투철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덩은 역사와 고전, 사상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마르크스, 엥겔스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평가를 내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다.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오늘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성에서 사회주의 교육에 힘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슬쩍 비꼬기도 했다. “사회주의 교육이라고? 교육에 참여하는 인민들을 먼저 잘 먹여서 굶주리지 않게 해주게.”
덩샤오핑이 외교 노선을 천명한 24자 방침에는 그 어떤 사상과 가치도 찾아볼 수 없다. 외교정책이라기보다 오히려 동양 처세술의 핵심을 요약한 듯하다. ‘상황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우리 자신의 입지를 지키며, 신중하게 대처하고 때가 이르기 전까지 자기를 노출하지 않으며, 굳게 지키고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실용주의가 ‘이론 없는 이론’인 것처럼 덩샤오핑주의가 ‘철학 없는 철학’이라는 평가는 꽤 적절하다. 덩 자신도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가 되기보다는 쥐를 잘 잡는 고양이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진정한 사치
덩의 성격 역시 쓰촨인의 실용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덩샤오핑이 소년 시절 동향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 유학을 갈 때 상하이 조계지에서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란 팻말을 보았다. 한 소년이 격분해 팻말을 떼어버리려고 했다. “여기는 중국 땅인데 중국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다니!” 그러나 다른 친구 한 명이 말렸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 빌어먹을 나무조각 하나 떼버린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니?”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쓰촨인다운 태도다.
그런데 쓰촨의 실용주의와 자본주의적 실용주의는 다른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는 최대한의 효율, 최대한의 속도를 강조한다. 일찍 개혁 · 개방을 한 광둥성이나 상하이는 자본주의적 실용주의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쓰촨의 실용주의는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실용주의다. 무엇을 위해 잘살려고 하는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 그만이다.
따라서 쓰촨의 실용주의는 최대한 돈을 버는 것에 있지 않다. 주어진 여건에 따라 적당히 돈을 벌고 불필요한 낭비는 하지 않되 인생을 누릴 수 있는 일에는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사서에 따르면 촉인들은 예부터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치하기를 바라며 문학을 존중하고 오락을 좋아한다” “음악을 좋아하고 고민을 적게 하며 사치하기를 즐기고 허황된 칭찬에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쓰촨인이 진정 사치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인생의 유일한 자원인 시간이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정 자체가 중요한 경험이다.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하나의 특정한 목적,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살기보다 삶의 매 순간 순간을 즐겁게 보낼 때 한결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쓰촨에 반한다. “이렇게 느긋할 수가(好安逸)?!”라며 왜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던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본다. 중국은 그동안 급속한 성장을 이뤘지만 그 와중에 피로와 고단함도 심각하게 쌓였다. 이제 삶의 질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중국인들은 쓰촨성을 주목한다.
‘주관적 지표’ 우수한 도시
2014년 베이징대에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가고 싶은 도시를 설문조사한 결과 청두는 상하이, 선전을 앞질러 3위를 차지했다. 아시아개발은행의 거주 적합도 조사에서 청두는 중국 33개 도시 중 1위였다. 청두는 대기, 수질, 환경관리 등 객관적 지표와 쾌적함, 여유로움, 느린 생활리듬 등 주관적 지표가 모두 우수한 도시다. 쓰촨의 자랑인 요리는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인터넷 포털 텅쉰(騰訊)이 2013년 1000만여 네티즌에게 행복도 조사를 했을 때, 음식 영역에서는 쓰촨이 단연 1등을 차지했다.
한 푼의 돈을 더 벌기보다 한 마디의 말을 사람들과 더 나누려고 하는 곳, 한 등급 위의 지위를 탐하기보다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려 하는 곳. 쓰촨은 내일의 중국에 중요한 힌트를 줄 것이다
◆11월 호 충칭
◇서부 제일 메트로폴리스 갈 곳 잃은 ‘강호’들의 고향
渝 두 얼굴의 山水之城
한때 쓰촨에 속했지만, 충칭은 쓰촨과는 꽤 다르다. 땅은 덥고, 사람은 다혈질이고, 음식은 맵다. 이런 충칭이 중국 서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로 비상 중이다. 고층빌딩 숲이 빚어내는 야경이 홍콩과 닮아 ‘작은 홍콩’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 속에서 개발 바람으로 고향 잃은 이들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간다.
▲구릉지대에 있는 홍야동(洪崖洞)의 야경
충칭에서 서양 여행자들과 함께 훠궈(火鍋, 중국식 샤부샤부)를 먹으러 갔다. 서양인들은 대체로 매운 것을 못 먹는 데다가 충칭 훠궈는 맵기로 유명해서 ‘조금 매운맛(微辣)’으로 시켰다. 곧 새빨간 훠궈가 나왔다. 입에 대는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매워 종업원을 불렀다.
“우린 조금 매운 걸 시켰는데요, 잘못 나온 거 아닌가요?”
“이게 조금 매운 거예요.”
쓰촨 훠궈도 맵기로 유명하지만 충칭 훠궈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매웠다. 이게 조금 매운 거라면 ‘극도로 매운맛(加麻加辣)’은 도대체 얼마나 매울까. 론리 플래닛이 충칭 훠궈를 ‘물로 된 불(liquid fire)’이라고 한 것은 꽤나 적절한 표현이다. 훠궈만큼이나 화끈한 사람들이 사는 곳, 이곳이 충칭이다.
발칙한 다혈질
충칭의 약칭은 ‘변할 유’ 자다. 충칭은 장강의 지류인 자링(嘉陵)강의 옛 이름 유수를 따서 수나라 때 유주라 불렸다. 강 이름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이 된 데서 보듯 충칭은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다. 남송의 황태자 조돈이 이 지역 왕이 된 지 한 달 만에 광종으로 즉위했기에 ‘경사가 두 번 겹쳤다(雙重喜慶)’는 뜻에서 충칭(重慶)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겹경사 도시’인 셈이다.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歸蜀途)’ 중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란 절창이 귀에 익을 것이다. 파(巴)는 충칭이고, 촉(蜀)은 쓰촨성이다. 쓰촨성과 충칭은 파촉 문화권으로 묶일 만큼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지역으로 묶기에는 뚜렷한 자기만의 개성이 있다.
쓰촨은 험준한 산악지대 안에 펼쳐진 거대한 평야지대로, 외부와 접촉하기는 힘들고 내부는 풍요롭다. 풍족한 환경에서 산을 울타리 삼아 조용히 숨어 살 수 있다. 그러나 충칭은 거친 강물로 에워싸인 험한 구릉지대다. 안이나 밖이나 다 척박한지라 충칭의 문화는 쓰촨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다소 거칠고 극단적인 성향을 보인다.
쓰촨도 흐린 날이 많아 ‘촉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蜀犬吠日)’란 말이 있지만, 충칭은 ‘안개의 도시(重慶霧)’로 유명하다. 산과 강이 빚어낸 안개는 여름이 되면 찜통더위로 변해 중국 ‘3대 화로(충칭, 우한, 난징)’ 중 하나가 된다.
촉(蜀)은 머리로 실을 뿜는 벌레, 즉 누에를 본뜬 글자고, 파(巴)는 길다란 몸에 머리가 달린 동물, 즉 뱀을 본뜬 글자다. 촉인들은 누에를 숭상했고 파인들은 뱀을 숭상한 만큼, 두 지역은 초창기부터 색깔이 달랐다.
쓰촨인이 활달하다면 충칭인은 다혈질인 편이다. 명랑하고 외향적인 면은 쓰촨인과 비슷하지만,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한다. 충칭인들은 두세 마디 말다툼을 하자마자 이내 주먹이 나가기 일쑤라 ‘야만적인 한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불과 1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조조의 40만 대군을 유린한 용장 감녕이 충칭 출신이다. 쓰촨 여자들이 발랄하다면, 충칭 여자는 다소 제멋대로인 성격이 발칙한 매력(?)을 더한다.
쓰촨과 일맥상통하면서도 극단적인 성향은 음식에도 나타난다. 충칭은 쓰촨처럼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훨씬 맵게 먹는다. 충칭 음식을 먹다보면 구강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입안이 얼얼해진다.
유비, 장비의 영욕 서린 곳
충칭의 지형도를 보면 이 지역의 중요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충칭은 자링강과 장강의 두 줄기 거대한 강물을 낀 반도형 구릉지대로 ‘산수지성(山水之城)’이라 불린다. 장강은 충칭에서 자링강과 합쳐져 크게 용틀임하며 대륙을 가로지른다. 반도라 물길과 육로 교통이 모두 발달했고 쓰촨, 후베이, 장쑤, 상하이 등 핵심 지역과 통한다. 높은 구릉지대여서 주변 지역을 감시하기도 쉽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도 쉽다. 거친 장강은 천연의 참호였고, 높은 지역에 버티고 선 충칭은 철옹성이었다.
충칭은 한나라 때 강을 끼고 있어 강주(江州)로 불렸다. 강주는 촉의 관문으로 오랜 난세에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치 않은 요충지다. 유비가 촉을 공략할 때 장비가 물길을 따라 도달한 곳이 강주성이고, 당시 강주성을 지키던 이는 백전노장 엄안이다.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용맹을 천하에 떨치던 장비도 강주성을 힘만으로는 빼앗지 못해 계략으로 엄안을 사로잡고 의로써 엄안을 감복시켜 유비의 수하로 들게 했다. 장비는 지(智)·인(仁)·용(勇)을 모두 발휘해 장수로서의 원숙함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줬고, 무난하게 촉을 접수한 유비는 황제에 오른다. 충칭은 유비와 장비에게 영광의 장소였다.
그러나 영광의 장소는 이내 오욕의 장소로 바뀐다. 형주에서 조조를 위협하며 승승장구하던 관우가 손권에게 뒷치기를 당해 전사하자 의형제 유비와 장비는 동오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간다. 장비는 관우가 죽은 뒤 연일 폭음하고 부하들을 닦달하다가 결국 자던 중에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삼국지 최고의 용맹을 자랑하던 장수로선 무척 허망한 최후였다.
복수를 하기도 전에 장비마저 잃은 유비는 제갈량을 비롯한 모든 중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군을 이끌고 동오로 진군한다. 그러나 오의 샛별 육손에게 대참패를 당한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 3대 대전 중의 하나인 이릉대전이다. 이릉(후베이 이창)에서 패한 유비는 강주성 외곽 백제성(白帝城)으로 간신히 도망친다. 촉의 모든 국력을 긁어모은 대군을 잃어버려 신하와 백성을 대할 면목도 없고,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수도 없던 유비는 결국 백제성에서 죽음을 맞는다.
얻은 것, 잃은 것
장강을 따라가는 싼샤(三峽) 크루즈 여행은 충칭을 출발해 장비의 사당 장비묘, 유비가 최후를 맞은 백제성을 거쳐 유비가 참패를 당한 이창에서 끝을 맺는다. 촉한의 굴욕사나 다름없는 루트다. 그러나 짚신을 짜던 일개 청년이 황제가 된 성공 스토리, 인의(仁義)로써 천하를 얻으려던 아름다운 꿈, 의형제들과의 의리를 지키다 끝내 좌절하고만 비극은 여전히 중국인, 아니 삼국지의 모든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유비의 대군은 초기에 엄청난 기세로 쾌진했다. 그 결과 전선이 길게 늘어지고 병력이 분산돼 육손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유비를 격퇴했다. 장제스는 이 전략을 중일전쟁에서 활용했다. 유비는 충칭에서 동쪽으로 진격했지만, 장제스는 충칭을 거점으로 일본의 서진을 막았다.
장제스는 충칭을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로 정하고 대일전선을 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옮겨갔다. 광활한 대륙을 활용해 적의 김을 빼는 육손의 전법은 1700년 뒤에도 성공한다. 일본은 단숨에 만주, 상하이를 점령하며 중국을 정복하려 했지만, 대륙 깊숙이 들어갈수록 예기가 꺾였다. 더욱이 충칭의 지세(地勢)는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기는 쉬우나 밖에서 안을 점령하긴 어려웠다. 짙은 안개와 잦은 비 때문에 공군으로 공습하기도 어렵고, 산과 강으로 에워싸여 육군으로 진군하기도 어려웠다.
충칭은 국민당 임시수도가 되면서 한층 발전한다. 공업뿐만 아니라 정치와 학문도 발전해 종합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한때 쓰촨성의 일부로 편입됐지만 1997년 다시 승격돼 서부 유일의 직할시로 중요한 위상을 자랑한다.
충칭의 싼샤는 10위안권 지폐의 뒷면에 실릴 만큼 중국을 대표하는 명소다. 그런데 싼샤댐이 건설되면서 자연경관이 크게 변했다. 수면이 자그마치 160m 이상 상승하는 바람에 예전처럼 웅장한 기풍이 사라졌다. 유비가 최후를 맞은 백제성도 삼면이 장강에 접하고 한쪽이 산으로 이어지는 요새였지만, 댐 건설 후 수위 상승으로 사면이 강에 에워싸인 섬이 됐다. 또한 약 2000개 마을이 사라졌다. 장강 물길을 따라 꽃핀 마을과 문화, 역사가 통째로 물에 잠겼다. 대신 10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생겼다.
싼샤댐은 오늘의 중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 위로는 지상 최대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세계 최고의 발전량을 자랑한다. 물 밑으로는 방대한 수몰지구가 묻혔다. 거대한 물량과 압도적인 수치, 경제발전을 자랑하는 중국의 이면에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희생당하는 중국인들이 있다.
▲충칭은 장강 싼샤(三峽) 크루즈 여행의 출발점이다. 관광객의 승선을 기다리는 유람선들. 유비가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백제성(白帝城). 쓰촨 요리보다 훨씬 매운 충칭 훠궈(왼쪽부터).
싼샤댐과 ‘스틸 라이프’
충칭의 싼샤박물관은 중국이 자랑하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싼샤댐이 건설되면서 홍수가 방지되고, 풍부한 발전량으로 동부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며(西電東送), 물류경제가 발전하고 있다고 부각한다. 선각자 쑨원의 숙원사업을 이룬 공산당의 치적을 홍보한다. 물 밑에 어떤 마을들이 있었고, 여기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2006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자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三峽好人)’는 원래 미리 기획된 영화가 아니다. 자장커는 화가 친구 리샤오둥의 부탁으로 싼샤 노동자를 그리는 리샤오둥의 모습을 담으러 함께 싼샤에 갔다. 싼샤는 댐 건설을 앞두고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고, 리샤오둥은 현장 인부 11명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 중 한 명이 벽에 깔려 죽었다. 리 일행은 그의 가족을 찾아 죽음을 알렸다. 가족들은 슬퍼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이웃에도 모두 일하러 객지로 떠난 가족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죽는 사람이 계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격과 슬픔으로 일하기 힘들어진 리 일행은 태국 방콕으로 떠났다. 리는 방콕에서 11명의 태국 여자를 그려 중국인이 좋아하는 음양대칭을 맞추고 죽은 자의 원혼을 위로했다. 그런데 때마침 태국에 수해가 났고, 여자 모델 한 명이 수재가 난 고향을 찾으러 갔다. 싼샤나 태국이나 물난리가 난 상황은 비슷하지만, 하나는 그 때문에 고향이 사라졌고, 하나는 고향을 찾았다. 삶의 터전이 파괴됐더라도 다시 돌아갈 곳이 있으면 사람들은 다시 모이고 재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돌아갈 곳 자체가 사라진다면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2000년이나 된 도시가 2년 만에 사라지고 가족을 잃고 사람이 죽어가지만 아무도 말을 못하는 상황. 자장커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스틸 라이프’를 찍었다. 싼샤 노동자 한산밍은 아내와 딸을 찾아 16년 만에 아내의 고향에 온다. 그러나 쓰촨성이던 곳이 충칭시로 행정구역 자체가 바뀌었고, 찾아간 곳은 이미 장강 저 깊이 잠겼다.
한국 드라마는 뭘 만들든 멜로가 되고, 중국 드라마는 뭘 만들든 무협이 된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자장커는 제시한다. 자장커는 ‘스틸 라이프’를 자기 나름의 무협영화라고 표현한다. 한순간 가족과 고향을 잃고 맨몸으로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도는 사람들, 중국인들 자신이 바로 무림을 떠도는 강호인이기 때문이다.
충칭은 ‘공사 중’
충칭의 인간 명물은 짐꾼 방방(棒棒)이다. 중국의 도시는 대체로 평지이지만, 충칭만큼은 예외적으로 구릉지대다. 다른 도시처럼 수레를 이용할 수가 없어 오직 발로만 짐을 운반하는 짐꾼이 생겨났다. 대나무 작대기 하나로 짐을 운반하기에 ‘막대기 방(棒)’ 자를 썼다.
이들은 이미 수백 년의 역사를 가졌지만, 1990년대 싼샤댐 건설 이후 그 숫자가 폭증했다. 변두리에 살던 변변한 기술 없는 저학력자들이 무작정 도시로 오자 만만한 게 짐꾼이었다. 방방족은 오늘도 하루 50위안을 간신히 벌며 자기 체중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중국에서 가장 무덥고 가장 가파른 도시를 오르내린다. 강호 협객이 칼 한 자루로 험난한 무림을 헤쳐가듯, 충칭의 방방은 멜대 하나로 대도시의 무게를 떠받친다.
변해가는 것은 싼샤만이 아니다. 2012년 충칭은 중심 번화가인 제팡베이(解放碑) 거리부터 장강변까지 모든 곳이 ‘공사 중’이었다. 사방에서 고층 빌딩이 올라가고, 숙소 앞에선 장강대교가 건설되고 있었다. 서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라지만 정돈되지 않고 한창 개발 중이라 어수선했다. 폐허 같은 부두에는 낡디낡은 유람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그러나 무림을 떠도는 중국인들은 어수선한 순간도 즐기는 법을 안다. 폐허 같은 강변도 소박한 유원지처럼 꾸렸다. 풍선을 터뜨리며 인형을 따고, 자갈이 깔린 강변을 소형 로드러너(沙灘車)로 질주하며, 연을 날린다. 엉성한 강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한편에서는 강바닥을 캐며 보물찾기에 여념이 없다. 화물선이 빠뜨린 보물이라도 찾으려는 걸까. 정작 찾은 것들은 옛날 동전, 열쇠, 도자기 파편, 예쁜 돌 등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뿐이었지만.
충칭은 면적 8만2368km²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다. 오스트리아 전체 면적과 비슷하고, 한국 국토의 82%에 달하는 크기다. 3200만 충칭 인구는 800만 오스트리아 인구를 압도한다. 이 거대한 지역 곳곳에서 개발이 진행 중이다. 쉴 새 없이 옛 건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는다. 흥청스러운 큰길 뒤편에는 ‘철거(折)’라고 쓰인 집들이 가득했다. 그중 한 집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환경보호 모범도시, 5개 충칭 건설을 추진하자(創建環保模範城市 助推五個重慶建設)’. 철거되는 집 주인은 이 표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러한 개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찰이 생긴다. 원래 거주하던 사람이 이주하지 않고 남은 경우 ‘못집(釘子戶)’이라 부른다. 주변은 다 개발됐는데 못처럼 혼자 튀어나와 움직이지 않음을 빗댄 표현이다.
國富民窮
2007년 충칭은 ‘사상 최고의 못집(史上最牛釘子戶)’을 만들어냈다. 상권 개발에 불복하고 홀로 남은 못집의 주위를 파내 깊이 20m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사진을 보면 백척간두 절벽 위에 살짝 얹혀진 집을 보는 듯하다. 그래도 집주인 우핑이 꿋꿋이 버티고 나가지 않자 결국 법원은 국가 이익을 구실로 강제 철거령을 내렸다. 우핑의 재산권은 무시되고, 상권 개발은 국가 이익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건만, 인민은 못 박을 만한 땅에서도 살 수 없다.
서부 대개발의 거점 도시이며 2011년 ‘포춘’ 지가 선정한 최고의 신흥 비즈니스 도시 충칭. 2007~2012년 부유층이 무려 80%나 증가해 부유층 수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 충칭. 그러나 주민소득 증가는 도시의 성장에 미치지 못한다. 국가는 부유해지지만 국민은 오히려 가난해진다(國富民窮).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사는 것이 이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양극화가 극심해지니 불만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보시라이 열풍’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나왔다.
보시라이를 둘러싼 의혹은 한둘이 아니다. 막대한 뇌물 수수, 부적절한 성(性)관계, 아내의 살해, 미국대사관 도피, 무기징역 판결로 이어진 보시라이의 몰락은 그 어떤 막장 드라마보다 파란만장하다. 그러나 의혹을 제쳐놓고 보면, 보시라이는 인민의 신망을 한 몸에 얻던 유능한 정치가였다.
보시라이는 다롄 시장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퇴임할 때 “우리는 일하느라 늙었지만 다롄은 젊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훗날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가 다롄을 여행할 때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다롄 사람들이 보시라이를 좋아합니까?” 기사는 답했다. “그리워하죠.” 보시라이는 퇴임 후에도 다롄 발전의 공로자로서 현지인들에게 인정받았다.
당시 시진핑은 이미 차세대 지도부에 안착해서 튈 필요가 없었지만, 계속 외지를 떠돌며 지도부에 진입하기 어렵던 보시라이는 어떻게든 당과 인민의 신망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보시라이의 충칭 시장 임명은 사실상 좌천이었으나, 보시라이는 여기에서 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충칭 시장 보시라이의 이력은 눈부시다. 보시라이는 중국에 ‘충칭 모델’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선부론(先富論)에 입각해 성장을 우선시한 광둥 모델을 반성하고, 공동부유론에 입각해 부의 분배와 형평성을 강조했다. 보시라이의 정책으로 사회복지, 주거, 의료 등 다방면에서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도 충칭의 성장률은 10%가 넘었다. 또한 그는 부패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조직 폭력과의 전쟁을 벌여 사회 분위기를 일신했다. 2009년 63개 범죄 조직원과 배후의 고위 공무원 3348명을 체포해 ‘현대판 포청천’이란 칭송을 받았다. 2010년 충칭은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 10개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4개 직할시 중 유일했고, 충칭으로선 처음 겪는 일이었다.
보시라이에 열광한 까닭
미국인 피터 해슬러는 충칭 장강변의 작은 마을 푸링에서 2년간 영어교사로 일했다. 그때 가르친 학생 한 명은 보시라이의 개혁이 자기네 같은 변두리의 작은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며 그의 실각을 안타까워했다. “왕리쥔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줬고 보시라이는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줬어요. 그들은 완전하진 않았지만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거예요.”
‘인민일보’의 설문조사 결과 보시라이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 1등에 올라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애초에 당내 지지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차세대 지도부에 들어가기란 힘들었던 걸까. “돼지와 사람은 튀면 먼저 죽는다”는 중국 속담대로 보시라이는 온갖 의혹에 휩싸인 채 정계에서 불명예스러운 강제추방을 당하고 무기수 신세가 됐다.
보시라이는 사라졌지만 이후 시진핑의 행보는 여러모로 보시라이를 떠올리게 한다. 시진핑 역시 부패 척결과 사회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한편, 무리한 성장에 대한 반성으로 신창타이(新常態) 개념을 제시했다. 중국의 민심이 갈구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리라.
중국의 중부와 서부를 잇는 요충지, 서부 제일의 메트로폴리스로서 충칭의 발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침에 구름 사이로 백제성을 떠나, 천리길 강릉을 하루에 돌아왔네(朝辭白帝彩雲間,千里江陵一日還)”라던 이백의 노래처럼 충칭은 하루 만에 후베이의 한복판 강릉(징저우)을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21세기 실크로드인 위신어우(逾新歐) 열차는 충칭에서 출발해 러시아·폴란드를 거쳐 독일에까지 이른다.
정책도 전폭적으로 충칭을 후원한다. 충칭의 양강신구(兩江新區)는 다양한 혜택으로 ‘신특구 중의 특구’로 불린다. 신구 설립 3년 만에 500대 글로벌 기업 중 118개가 입주했다. 쓰촨성과 묶어 서부의 광활한 시장을 발전시키려는 ‘청위(成逾)경제구 발전규획’도 일찍이 2011년 제정됐다. 여러모로 충칭은 서부 중국 진출의 거점이다.
▲충칭의 인사동, 츠지커우(磁器口).
‘작은 홍콩’에 남은 숙제
안일한 쓰촨보다 진취적인 분위기도 장점이다. “젊어서는 촉에 들어가지 말고, 늙어서는 촉에서 나오지 말라(少不入川, 老不出蜀)”는 속담이 있다. 젊어서 쓰촨에 들어가면 너무 일찍 패기를 잃고 안일함에 젖게 되고, 반대로 나이가 들면 이만큼 편한 곳도 없으니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이에 비해 충칭은 거칠고 경박한 대신 적극적이라 야심 만만한 청년은 쓰촨보다는 충칭을 선호한다.
밤이 되면 충칭은 화려한 야경을 자랑한다. 좁은 면적, 많은 언덕에 밀집된 고층건물은 홍콩과 비슷해서 ‘작은 홍콩(小香港)’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흐린 날씨, 낡은 건물이 어둠 속에 몸을 감추며 화려한 조명이 빛나 충칭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다만 성장의 현란한 불빛에 현혹돼 어둠 속에 묻힌 소외계층을 잊지 않고 살피는 것이 충칭의 숙제로 남아 있다. 성장 우선 모델로 알려진 덩샤오핑의 선부론은 “먼저 몇 사람이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이런 말로 끝맺는다.
“그리고 아직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
◆12월 호 상하이
◇부자도시의 열등감 국제도시의 고단함
沪 아편전쟁이 바꿔놓은 어촌
상하이에서 눈치 없는 말을 하면 “너 외지인이지?”라는 핀잔을 듣는다. 그만큼 상하이인들은 자신을 중국과는 별개의 존재로 여긴다. 그렇다고 이 첨단 도시의 삶이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상하이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50년을 모아야 한다.
“어떻게 여기서 여자친구를 만들 수 있지?”
상하이 인민공원을 산책하다 만난 서양 친구는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진 훙커우 공원,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지? 녀석은 인민공원에 가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그 밖의 구체적인 정보는 전혀 몰랐다. 그저 소문 하나만 듣고 오다니! 서양인의 모험정신과 연애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다. 100년 전 서양인들도 일확천금의 소문만 믿고 상하이를 찾았겠지.
‘절대甲’ 상하이 호구
하여튼 신기한 얘기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여러 게시물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게시물에는 사람들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다. 이름, 나이, 학력, 경력, 키 등등. “여기는 그저 인력시장 같은데? 직업 구하는 사람들의 정보 같아.” 이렇게 말하자마자 불현듯 깨달았다. 인력시장은 인력시장인데, 노동력이 아니라 배우자를 구하는 거라면? 저 많은 정보가 결혼 정보라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중매쟁이라면?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다.
다시 찬찬히 게시물을 훑어봤다.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호구다. 상하이 여자는 ‘후뉘’로 따로 분류했고, 다른 지역 여자는 호구 말고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다. ‘창저우의 재주 있는 여자(常州才女)’는 피아노 10급이고 전국청년성악 1등상을 탔다. 아버지는 ‘외지’의 공안, 어머니는 정부의 부국장으로 집안도 빵빵하다. 저장성 여자는 부모가 사업가로 집도 있고 차도 있다며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물론 나이가 제법 많은 여자들도 있지만, 조건 좋은 20대 초반 여자도 많았다. 중국 여자는 대체로 20대 중반에 결혼한다.
신랑감 후보 역시 상하이 호구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외지 여자가 상하이 남자를 찾는 건 당연했다. 상하이 호구를 얻기 위해서니까. 의외는, 상하이 여자가 상하이 남자를 찾는 거였다. 이 경우는 호구가 문제가 아니다. 같은 상하이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상하이 여자들의 고집이 읽힌다.
결혼시장에서 상하이 호구, 상하이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 그 서양 친구는 어떻게 됐냐고? 중국 여자들이 남자친구가 아니라 진지하게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는 것에 우선 실망. 그리고 콧대 높은 중국 여자들의 까다로운 조건을 맞출 수 없어 절망했지.
상하이의 약칭은 ‘강 이름 호’자다. 송강(松江) 하류 지역인 상하이를 지칭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통발을 뜻한다. 물고기를 잡고 살던 어촌. 바로 최첨단 국제도시 상하이가 지닌 ‘출생의 비밀’이다.
전쟁이 선물한 번영
‘삼국지연의’의 애독자라면 송강농어라는 말이 귀에 익을 것이다. 조조가 잔치를 열었을 때 불청객 도사 좌자가 나타나 “잔치라면 송강농어 정도의 별미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딴지를 걸었다. 동진의 대사마(국방부 장관) 장한(張翰)은 고향의 농어가 그리워 낙양의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때 장한은 “가을바람 불어와 경치 아름다울 때, 오강에는 농어가 살찐다네(秋風起兮佳景時, 吳江水兮魚肥)”라고 노래했다.
송강농어는 송강의 자랑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오늘날의 초거대 국제도시 상하이는 원래 농어밖에 자랑할 게 없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청나라 말기까지 상하이에는 열 갈래의 도로밖에 없었고, 인근의 쑤저우가 중심이라 ‘작은 쑤저우(小蘇州)’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상하이의 발전은 아편전쟁(1840~42)에서 비롯됐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상 그 자유란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아먹을 자유였다. 영국 국회가 아편전쟁에 대한 결의안을 논의할 때 토리당원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릴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의회 투표 결과는 찬성 271표 대 반대 262표. 아홉 표 차이로 아편전쟁 결의안이 통과되자 글래드스톤은 “262… 영국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라고 한탄했다.
영국은 당대 최강의 군사력으로 청군을 격파하고, 난징조약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조계지를 얻었다. 영국은 난징조약을 기념해 상하이 중심가를 난징루(南京路)라고 이름 붙였다. 치욕의 이름이지만 난징루는 세계적인 번화가로 성장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인 아편전쟁은 상하이의 개항과 번영을 가져왔다.
개방 후 20년도 안 돼 상하이 수출액은 중국 무역총액의 절반을 차지했다. 1870년에 이르니 중국 최초이자 최대의 무역 항구인 광저우는 상하이에 비하면 구멍가게처럼 보이게 됐다. 당시 광저우가 중국 무역의 13%에 머무른 반면, 상하이는 63%로 중국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상하이는 전기, 수도, 전차, 가스등 등 최첨단 기술과 문물을 서양과 거의 동시에 도입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지 반 년 만에 상하이도 영화를 상영했다. 1930년대 상하이 사람들은 재즈를 들으며 댄스홀에서 찰스턴 춤을 췄다.
‘I Shanghai You’의 뜻
검색 엔진인 고유명사 ‘Google’이 ‘검색한다’는 뜻을 갖는 것처럼, 영어에서는 자주 명사가 동사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상하이한다(shanghai)’라는 동사는 무슨 뜻일까.
① [바다 속어] (선원으로 만들기 위해) 마약 또는 술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배로 끌어들이다, 유괴하다
② [구어체 속어]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
참으로 적나라한 표현이다. 영국이 마약으로 중국의 정신을 잃게 만들고 억지로 상하이를 빼앗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가 전성기를 맞이할 때, 상하이는 궁벽한 시골이었다. 중국이 굴욕을 당할 때, 상하이는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금융 중심지로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처럼 상하이의 흥망성쇠는 시작부터 제국주의 열강과 동기화하는 한편 중국과는 비동기화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상하이인은 스스로를 타 지역 중국인과 다른 존재로 여긴다. 상하이에서는 누군가가 눈치 없는 말이나 답답한 행동을 하면 “너 외지인이냐?”라고 핀잔을 준다. 농담이지만 외지인을 바라보는 상하이 사람들의 시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에게 외지인이란 ‘멍청하고 덜떨어졌으며 민폐나 끼치는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아이러니하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인 것처럼 상하이 역시 이민자의 도시다. 상하이 해방 직후 상하이 호적상 인구는 554만 명이었는데 그중 원래 고향이 상하이인 사람은 23만 명에 불과했다. 오늘날 인구 2415만 명 중에 진짜 상하이 출신은 1%도 안 된다. 자신도 외지 출신이면서 조금 일찍 와서 자리 잡았다고 새로 온 외지인을 차별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격이다.
1% 안에 드는 진짜 상하이 출신이라도 자랑스러울 게 없다. 상하이의 약칭 ‘호’자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말 속에는 “너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강에서 물고기나 잡아먹고 살던 촌놈에 불과하지!”란 속뜻이 담겼다. 본적이 상하이라면 깡촌 어부에 불과하고, 상하이가 아니라면 결국 외지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상하이인 그 누구도 원래 출신 앞에 떳떳할 수가 없다. ‘호’는 상하이의 짧은 역사, 얄팍한 문화, 뼈대 없는 출신을 지적한다.
▲세계적인 번화가 난징루(南京路), 20세기 전반 중국의 명작 영화를 많이 배출한 상하이의 영화박물관, 인민공원에 나붙은 구혼 게시물(왼쪽부터).
기회주의적 속성
상하이 사람들이 ‘호’ 대신 사용하고 싶어 하는 약칭은 ‘밝힐 신(申)’자다.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중 한 명인 춘신군(春申君)에서 따온 글자다. 상하이인은 약 2500년 전 초나라 재상 황헐이 상하이 지역에서 춘신군으로 봉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약칭에 따르면 상하이는 유구한 역사, 고귀한 혈통,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다.
외지인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상하이어를 쓰는 문화인이라고 과시하는 상하이인의 태도는 사실 열등감의 산물이다. 일천한 역사와 문화는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확실히 심어주지 못했다. 개항 이후 상하이는 토박이에게도, 최초의 이주민에게도 낯설었다. 서양 귀신들이 판을 깔고 주도하는 세상,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 속에서 살면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또 어디인가?’ 그러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상하이인은 자신과 남을 구분 짓고 나서야 정체성을 얻었다. 자긍심을 갖지 못하고, 남을 깔보고 나서야 자신을 높일 수 있었다. 외지인과 다른 존재이기 위해 그들은 많은 돈을 벌어야 했고, 영악해야 했고, 상하이어를 써야 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상하이인의 기회주의적 속성은 베이징과 외국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도 베이징인은 상하이인이 말하는 ‘외지인’의 범주에서 열외가 된다. 또한 상하이는 외국에는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다. 외지인은 무시하면서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하이인의 이중적 태도를 중국인은 이렇게 풍자한다. “광둥인은 돈이라면 무슨 돈이든 벌고, 베이징인은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떠들고, 동북인은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상하이인은 외국이라면 어느 나라든 간다.”
중국인은 손님 대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상하이인은 손님 대접은커녕 오히려 외지인이라고 깔보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따라서 중국인은 대체로 “상하이는 좋지만, 상하이 사람은 싫다”고 한다. 사학자 이중톈은 이를 “상하이 외부 사람들은 상하이라는 도시는 과대평가하면서, 상하이 사람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어느 유학생이 상하이에서 일하는 외지 출신 아가씨에게 “따가운 차별에도 불구하고 상하이가 매력적인 이유가 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상하이는 선택의 폭이 넓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더라도 일단 기회는 주어진다는 거지. 재미있는 콘텐츠도 많고. 게다가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서도 몰려드니까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굉장히 자유로워. 국제도시라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깨어 있는 편이지. 결론적으로 상하이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그에 도전하는 중국인들의 파라다이스야!”
▲밤에도 인파가 넘치는 예원상성(豫园商城)
상하이식 빈곤
▲상하이 미술관 전시 작품, 물화(物化) 연작 중 한 작품.
개항 이후 상하이는 매우 위험하지만 크게 성공할 수도 있는 마도(魔都)였다. 외국인과 중국인 모두 상하이에서는 본국의 법률과 도덕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전 세계의 상인과 모험가가 몰려든 상하이에는 기묘한 활력이 넘쳐흘렀다. 무엇이든 가능한 마도의 신통력에 대해 사람들은 말했다.
“우둔한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현명하게 된다. 성실한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교활해진다. 못생긴 사람이라도 상하이에서 한번 살아보면 아름다워진다. 일자 눈썹에 납작코인 여자라도 상하이에서 며칠만 지내면 어엿한 귀부인이 된다.”
근대 상하이에는 “가난이 부끄럽지, 성매매는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 나돌았고, “좋은 남자는 일하지 않고 좋은 여자는 사장님에게 시집간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상하이가 얼마나 일찍부터 자본주의에 물들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뉴욕’이라고 불리는 상하이는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급속한 자본주의화만큼 양극화도 빠르다. 상하이의 임금과 수입은 타 지역에 비해 높지만, 동시에 물가도 비싸고 소비의 유혹도 크다. 명목임금은 높지만 지출이 많아 실질적으로는 더 가난해지는 현상을 중국에서는 ‘상하이식 빈곤’이라고 한다.
경제성장기에 돈을 버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부동산 투자다. 외국인 투자자와 중국 부동산업자들의 투기로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정작 상하이인은 상하이에서 살 자리가 없어진다. 갈수록 시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상하이인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내부순환선 안에서는 영어로 말하고, 내부순환선과 외부순환선 사이에서는 표준어를 쓰며, 외부순환선 밖에서는 상하이어를 한다.”
2009년 ‘워쥐’(蝸居, 달팽이집)라는 상하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달팽이집처럼 좁디좁은 집에서 벗어나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성공담이다. 왜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는지는 명확하다.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애환에 공감하고, 번듯한 내 집을 갖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한다.
그러나 현실은 차갑다. 상하이 도심의 아파트 평균 가격이 300만 위안(약 5억4000만 원)으로 상하이 근로자 연평균 임금(약 5만8000위안)의 약 51배 수준이다. 월급의 절반을 고스란히 저축해도 집 사는 데 100년, 한 푼도 안 쓴다 해도 50년이 걸린다.
추억 속 황금시대
외부 사람들의 선망과 질투를 받는 상하이지만, 그 속에서 사는 것은 실상 매우 고단하다. 상하이의 영광과 대다수 상하이인의 일상은 따로국밥이다. 대만 지식인 우샹후이는 국제금융의 중심지를 꿈꾸는 상하이를 비판했다.
“국제적인 공신력을 갖추지 못하고, 화폐와 정보의 자유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법제도 구축되지 못했으며, 정부가 청렴하지도 않고, 효율성이 떨어지고, 사회의 신뢰도마저 낮은 국가는 결코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
이를 비웃듯 중국은 상하이-홍콩 증시 연동 시스템인 후강퉁을 출범시켰다. 많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모은 중국 증시는 반짝 상승 후 다시 폭락했다. 일찍이 ‘중국 증시 콘서트’를 쓴 한우덕 ‘중앙일보’ 기자는 현재 중국 주식이 하나도 없다며, 중국 증시의 속성 3가지를 경고한다. 첫째, ‘중국 경제의 양심’인 우징롄 교수의 비판대로 중국 증시는 내부자 거래, 허위 공시, 주가조작 등 불법의 온상이며 거대한 도박장이다. 둘째, 국가가 나서서 증시를 왜곡한다. 셋째, 주가가 시장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기꾼과 투기꾼이 어떻게 어울려 노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떨까. 인민공원 지하의 풍경가(風情街)는 1930년대에 대한 상하이의 애착을 잘 보여준다. 양우기념관의 편집자 친링은 상하이의 1930년을 ‘황금시대’라고 회고한다. “이 시대는 자유, 개방, 선진이라는 3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서방의 새로운 문화와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개방적인 기운이 넘쳐흘렀다.”
20세기 100대 중국어 영화 중 수십 편은 20세기 전반 상하이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현대 상하이는 예전만큼의 활력이 없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고 옛 영화만 회고한다. 경제에 상응하는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중국 현대 예술의 이단아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의 사례를 살펴보자.
상하이는 상하이를 이겨야
▲개항 전 상하이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한 상하이 교외지역 주자자오(朱家角). 운하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2011년 1월 11일 밤, 상하이 정부는 아이웨이웨이의 상하이 스튜디오를 기습 철거했다. 아이웨이웨이는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명망 있는 예술가로,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중국 정부에 맞서왔다. 그중 하나가 양지아(楊佳) 사건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은 것이다. 양지아 사건은 상하이 공안이 양지아를 자전거 도둑으로 오해해 일어난 사건이다. 취조 중 성불구가 된 양지아는 보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찰서에 난입해 경찰 6명을 살해했다.
아이웨이웨이의 상하이 스튜디오는 원래 상하이 고위 관리가 문화특구를 만들기 위해 아이웨이웨이를 특별 초빙해 지은 것이다. 관리들은 그의 건축에 열광했고, 건축 과정이 모두 정부의 감독 아래 진행됐다. 그러나 아이웨이웨이의 고발이 거슬린 상하이 정부는 돌연 ‘스튜디오가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건축물이므로 철거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재기발랄한 아이웨이웨이는 당국을 조롱하는 ‘철거 기념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서 사람들은 상하이의 명물 민물게를 먹었다. 중국어로 민물게는 ‘허셰(河蟹)’로, 후진타오의 슬로건 ‘허셰(和諧, 조화)’와 발음이 같다.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면 허가받은 건물도 불법건축물로 바뀌는 사회. 이것이 당국이 그렇게도 떠들어대는 ‘조화’인지 묻는 퍼포먼스였다. 상하이 경찰은 파티 전 아이웨이웨이를 가택연금했다가 파티 다음 날 풀어줬다.
국제적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상하이, 그러나 이면에선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탄압받고 정부에 대한 도전이 허용되지 않는다. 상하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한 큐레이터는 말한다. “홍콩은 아시아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어요. 홍콩 정부는 미술관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중국처럼 이런저런 규제를 거의 두지 않지요. 중국이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중화권 상류층 미술 애호가들의 구매력이 홍콩으로 몰려가는 추세입니다.”
중국처럼 이런저런 규제가 거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상하이 출판계 역시 “99권의 좋은 책을 포기할지언정 나쁜 책은 한 권도 내지 않겠다”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 활력이 생길 리 없다. 중국의 교육학자 양둥핑은 말한다.
“상하이의 경쟁 상대는 런던이나 뉴욕, 도쿄가 아니다. 상하이가 이겨내야 할 상대는 상하이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