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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여담 2022-09/ 09월 01일(목) 페라리 전기차 - 09월 30일(금) 박영택 수집품 손잡이잔

상림은내고향 2022. 9. 30. 16:42

후여담 2022-09/  문화일보

09월 01일(목)  페라리 전기차

이신우 논설고문

자동차 파워 트레인은 엔진에서 구동 바퀴에 이르는 전 과정의 기관을 지칭한다. 포르쉐나 람보르기니, 부가티 등과 함께 슈퍼카 대접을 받는 페라리는 파워 트레인에서 남다른 기술을 자랑한다. 게다가 페라리는 요란한 엔진 소리가 애호가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이런 페라리가 요즘 전기차 등장으로 고민에 빠져 있다. 전기차는 모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엔진, 즉 내연기관이 필요 없어 엔진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페라리도 어쩔 수 없었나, 자신의 특징을 모두 버리면서까지 전기차 비중을 점차 늘려갈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 자동차 제조사들은 오는 2035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엔진 생산을 완전 중단하겠다는 입장이다. 페라리 역시 내연기관과 전기차 병행 생산을 당분간 지속하겠다는 방침이나, 종국적으로는 전기 모터로의 완전 전환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후변화 시대를 맞아 탄소 중립은 인류의 산업혁명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다. 이런 상황이니 슈퍼카 제조업체들이라고 석기시대가 끝나가는 마당에 여전히 돌칼의 예리함만 자랑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전기차 시대에도 기존 슈퍼카들이 소비자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전기차 시장은 이미 미국 테슬라가 주도하고 있으며, 중국 전기차 선두업체인 비야디(BYD)는 올 상반기에 판매 1위에 올라설 만큼 추격세가 만만치 않다. 한국도 버금가는 복병이다. 현대차 그룹의 아이오닉5와 EV6는 이미 800V 고속 충전 기술을 바탕으로 뉴 에너지 부문 최고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EV6는 자동차 산업의 본산인 독일에서 올해의 차 프리미엄 부문 우승을 차지할 정도다.

독일 자동차사 오펠의 카를 토마스 노이만 전 사장은 얼마 전 미국 뉴욕타임스를 통해 페라리의 아픈 상처에 소금까지 뿌렸다. “단순히 전기차를 만들고 그 위에 페라리 로고를 붙인다고 ‘전기 슈퍼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기 슈퍼카를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전기차가 워낙 소리가 없다 보니 최근에는 전기차에 부착하는 가상 배기음 장치까지 출현하고 있다. 이래저래 엔진 소리마저 경쟁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09월 02일(금)  프란체스카 여사의 유산

 이현종 논설위원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제612호로 등록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전 유품 5점을 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검소했는지 고개가 숙어진다. 36년간 착용한 투피스 정장과 핸드백, 장갑, 구두 등이 등록돼 있는데 아무리 못살던 시대라고 하지만 너무나 초라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출신임에도 늘 한복을 입었다.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고 수수한 보랏빛 색채의 한복이다. 별세 후 입관 때 생전에 입었던 한복 착용을 원했다고 한다

 

계절마다 한 벌씩밖에 없었던 여사의 정장 중에 36년을 입은 진회색 옷은 목깃이 접히는 부분에 수십 번 천을 덧댄 자국이 선명하다. 검은색 정장은 이 전 대통령이 자기 저서를 타이핑하느라 수고했다며 준 인세로 마련했다. 40년을 입고 며느리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옷은 국산 모직물 제품으로 만들어졌고, 애국심 고취 차원에서 무궁화무늬 안감을 주문 제작해 만들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서 자신의 옷은 물론 손자들 옷까지 일일이 꿰매고 기워 입혔다고 한다.

 

당시 시대가 넉넉하지 않았지만, 대통령 부인으로 사치를 할 만도 한데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런 삶의 자세는 두고두고 귀감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도 마찬가지다. 늘 수수한 한복 차림에 앞치마를 두르고 봉사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 우리 세대가 누리는 풍요함도 이런 모범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김정숙 여사와 김건희 여사의 옷과 장신구를 둘러싼 구설은 씁쓸하다. 김정숙 여사는 퇴임 직전 많은 옷 때문에 논란이 됐다. 수백여 벌이 되는 옷이 청와대 특활비로 산 것은 아닌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샤넬에서 협찬받은 재킷도 논란이다. 김건희 여사는 취임 초만 해도 언론에 노출된 중저가의 슬리퍼, 발찌 등이 완판되면서 화제를 불렀지만 지난 6월 말 나토 순방 때 6000만 원이 넘는 고가 명품 목걸이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굳이 정상외교 때 해외 명품 목걸이, 팔찌 등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도 문제이지만, 이를 지인에게 빌렸다고 해명하면서 논란을 더 부추겼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와 국격은 고가의 장신구가 아닌 국민의 지지와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09월 05일(월) 文정부 안보硏 술판

 이도운 논설위원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은 말 그대로 국가 안보 및 한반도 통일 전략을 연구하는 국책연구기관이다. 1977년 출범한 국제문제조사연구소가 모태다. 1994년 북한문제조사연구소, 1995년 국가안보정책연구소가 잇따라 설립됐는데, 2007년 세 연구소가 통합해 국가안보전략연구소로 재편됐고 2014년에 국가안보전략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사장과 연구원장 아래 북한체제·통일전략·동북아전략·신안보 연구실이 있다. 신안보 연구실에서는 테러리즘과 사이버 안보를 집중 연구 중이다. 연구 네트워크도 단단한데, 국내에서는 국립외교원·통일연구원·한국국방연구원 등과 상호 협력 협약서를 맺었고, 중국의 현대국제관계연구원, 일본의 국제문제연구소, 몽골의 전략연구소 등과 학술교류 협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대테러연구소와도 긴밀하게 교류 중이다.

전략연에는 통일·외교·안보 분야 박사와 국가정보원에서 수십 년 근무했던 전문가들과 함께 엘리트 탈북민 등 수십 명이 포진돼 있기 때문에 연구의 정확성과 실효성이 큰 편이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탈북 외교관 출신 고영환 씨가 부원장을 지냈다.

 

안보 분야 국책연구소이기 때문에 연구원 채용 절차도 까다롭다. 서류전형-인성검사-심사위원 면접-심층 면접-신체검사-신원 조회 등을 거쳐 임용된다. 최근 전략연 채용 공고를 보면 북한 정치·경제와 함께 미국·일본·중국 전문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분야 전문가를 우대하는데, 이민·난민 전문가도 새롭게 채용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요지의 17층 건물에 자리 잡은 전략연의 운영은 국정원에서 지원했다. 연구기관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가급적 일상적 행정 등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시절 캠프 출신 낙하산 간부가 전략연의 604호 사무실에서 여성까지 참석한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사무실 자체를 아예 술 마시는 데 적합하도록 인테리어까지 바꿨다는 것. 참석 여성들의 정체도 의심스럽다고 한다. 문 정권의 안보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보다 못한 연구원들의 제보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문 정부 시절 자행된 국책안보연구소의 기강 해이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09월 06일  가수 최헌

 김종호 논설고문

석래명 감독이 1979년 개봉한 영화로, 정윤희·신성일·문정숙·김자옥 등이 출연한 ‘가을비 우산 속에’는 노래의 큰 인기가 제작 계기였다. 최헌(1948∼2012)이 1977년 발표한 뒤, 그의 1978년 제4집 앨범 타이틀 곡으로 삼았던 ‘가을비 우산 속’이다. 이두형 작사, 백태기 작곡이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어진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하고 시작한다.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가 후렴이다. 서정성 짙은 가사와 애잔한 멜로디를 최헌이 특유의 풍부하고 허스키한 음색으로 표현한, 가을 명곡 중의 하나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3개월이던 1948년 6월 가족의 등에 업혀 경기도 파주로 내려왔다가 서울로 이주했다. 명지대 경영학과에 다니던 그는 1967년 록 그룹인 차밍 가이스(Charming Guys)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대중음악계에 데뷔했다. 1971년엔 걸출한 뮤지션 김홍탁이 이끌던 전설적인 록 밴드 히식스(He 6)에 스카우트됐다. 요즘도 찾아 듣는 사람이 많은 ‘초원의 빛’ ‘초원의 사랑’ 등이 그의 목소리였다. 1977년 솔로 가수로 독립하면서, 그는 ‘오동잎’으로도 새삼 명성을 떨쳤다. ‘오동잎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밤에/ 그 어디서 들려오나 귀뚜라미 우는 소리/ 고요하게 흐르는 밤의 적막을/ 어이해서 너만은 싫다고 울어대나’ 하는 노래로, 안치행 작사·작곡이다.

 

록 밴드 검은나비, 불나비 등도 결성했던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은 이 밖에도 ‘구름 나그네’ ‘가수의 어느 날’ ‘바람개비’ ‘잎새의 노래’ ‘울다 웃는 인생’ ‘순아’ 등 수두룩하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하는, 안치행 작사·작곡의 ‘앵두’도 있다. ‘여기에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가슴에 기대어 수줍던 그 모습이’하고 시작하는 ‘당신은 몰라’는 강찬호 작사, 김홍탁 작곡이다. 식도암 투병 중에 별세한 최헌의 10주년 기일(忌日)이 올해 추석인 오는 10일이다. 그의 명곡을 추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09월 07일  서봉수 9단 ‘치수 고치기’

 문희수 논설위원

한국 프로바둑에서 레전드 중 한 명인 69세의 서봉수 9단이 ‘치수 고치기’ 바둑에 도전해 화제다. 바둑TV가 주관하는 추석 이벤트로, 부동의 세계 1위인 신진서 9단은 빠졌지만 국내 랭킹 2위 박정환 9단과 변상일·강동윤·신민준·김지석 등 정상급 프로 5명과 7일부터 오는 13일까지 한 판씩 대국한다. 호선(互先)으로 시작해 한쪽이 연속으로 질 때마다 정선(定先), 두 점, 석 점 등으로 치수가 올라가는 방식이다. 프로기사에겐 바둑 인생을 건 진검 승부다.

 

 치수 고치기 바둑이라면 불세출의 천재로 기성(棋聖)으로 추앙되는 고(故) 우칭위안(吳淸源)이 단연 독보적이다. 대만 출신인 우 9단은 지금 같은 기전이 없던 시절, 당시 바둑 선진국인 일본에서 28세였던 1942년부터 17년 동안 치수 고치기 10번기를 11차례 두어 모두 이긴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상대는 호선에서 0.5점 접바둑 꼴인 선상선(先相先, 하수가 호선·정선·호선으로 번갈아 두는 치수) 내지 정선까지 치수가 내려갔다. 당시 금기시됐던 천원, 화점, 삼삼 등을 두는 신포석을 같이 창안했던 기타니, 세계 최초의 9단 후지사와, 사형이자 관서기원 창립자인 하시모토, 날카로운 기풍의 ‘면도날’ 사카다 등 명인급 고수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국내 프로기사 치수 고치기는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 지난 1985년 바짝 추격하던 강호 5명과 대결했던 게 시발점이다. 모든 타이틀을 제패한 전관왕을 세 번이나 이뤘던 조 9단은 두 점 접바둑을 2승 3패로 끝내 막강한 실력을 과시했다. 인공지능(AI) 알파고를 유일하게 이겼던 이세돌 9단이 2014년 맞수이던 중국 구리 9단과 겨뤘던 10번기도 유명하다. 치수 고치기는 아니었지만, 이 9단이 6승 2패로 이겼다. 일각에선 세계 최강 신진서 9단과 숙적인 중국 커제 9단 간 대결도 거론되지만 패자는 워낙 타격이 크고 대국료도 변수여서 성사되기 어렵다는 평가다.

서봉수 9단은 과거 조훈현 9단을 이길 방법을 찾으려고 거의 매일 초속기 바둑 수십 판을 둔 끝에 조 9단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독학으로 바둑을 배운 잡초같이 끈질긴 승부사다. 이번 대국은 아무래도 서 9단이 불리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연휴에 지켜볼 만한 멋진 도전이다.

 

09월 08일  혹세무민과 이전투구

 김세동 논설위원

복잡한 정치 현실을 한마디로 정리해 상대편을 공격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자성어를 애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윤핵관과 사생 결단의 쟁투를 벌이고 있는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는 최근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양두구육(羊頭狗肉·양의 머리를 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것으로, 겉으론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이라는 말을 썼다가 친윤(親尹) 인사들로부터 “어떻게 윤석열 대통령을 개고기에 비유할 수 있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이 전 대표에 동정적인 사람들은 그가 토사구팽(兎死狗烹·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당했다고 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경기지사 때인 2018년 11월 경찰이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과 관련해 부인 김혜경 씨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힌 직후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경찰이 수사가 아닌 정치를 했다”고 비난했다. 공교롭게 이준석 전 대표도 지난 4일 대구 김광석거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윤핵관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을 때, 왜 초선 의원들이 그것을 말이라고 앞다퉈 (비대위를) 추인하느냐”며 두 번째 비대위 출범에 앞장서는 “지록위마” 행태라고 비판했다.

여권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혐의 검찰 소환을 정치보복이자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이자 견강부회(牽强附會·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우김)라고 비판한다. 민주당이 윤 대통령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공소시효 만료 나흘 앞두고 검찰에 고발하고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에 대해 특검 도입을 추진하는 것은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탕에서 개들이 서로 싸움)로 끌고 가려는 물타기이자 물귀신 작전이라고 비난한다. 권성동 여당 원내대표가 윤 대통령의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대표’ 문자메시지 공개 파문에도 비대위 직무대행까지 맡은 것과 정청래 민주당 최고위원이 관례에 맞지 않게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직을 겸직하겠다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손실을 본다)이 될 수 있다.
 

 

09월 13일(화)  퇴계의 제사

 박민 논설위원

추석 연휴 풍속도 역시 해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추석을 앞두고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간소화한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하면서 정신적 부담까지 줄었다는 가정도 적지 않다. 표준안에 따르면 제사상에는 과일(밤, 사과, 배, 감)과 3색 나물, 구이(적), 물김치, 송편, 술을 올린다. 전이나 유병 등 기름진 음식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꼽히면서도 간소한 제사상으로 유명한 퇴계 이황이나 명재 윤증 집안에 비하면 6종에 10가지 음식은 여전히 많다는 지적도 있다.

 

파평 윤씨 종가 명재 고택의 추석 차례상에는 포와 과일 3가지, 백설기, 차 등 4종류 6가지 음식만 올라간다. 차례상은 음식상이 아니라 다과상이기 때문이다. 음식량도 적어 과일은 종류별로 1개, 포도 1가지만 올린다. 명재는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써 살림이 늘 궁핍했다. 숙종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그에게 우의정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고사하기도 했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명재는 ‘제사는 간소하게 하라’ ‘부녀자들의 수고가 크고 사치스러운 약과나 전은 올리지 마라’ ‘제사상의 크기는 가로 99㎝, 세로 68㎝를 넘지 않게 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퇴계의 조부 노송정 종택은 추석 차례는 지내지 않는 대신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시제(한식이나 10월에 5대조 이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낸다. 설 차례상에는 과일 한 쟁반, 떡, 대구포나 명태포, 술 정도가 올라간다. 전은 원래 올리지 않았다. 시제 때도 과일, 전, 떡, 포 정도만 올린다. 퇴계는 제사의 형식과 예절에 대해서도 유연했다. 불천위 제사상을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 대구포가 놓인다. 퇴계 손주 며느리가 혼자 음식을 준비하는데 치맛자락에 걸려 대구포가 자꾸 넘어졌다. 이를 본 퇴계는 대구포를 가운데로 옮겨 놓고 제사를 지냈다. 퇴계는 상처한 뒤 재혼을 했는데 새로 맞은 부인 권씨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갑자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권씨가 한번은 제사상에서 떨어진 배를 치마 속에 감추다 손윗동서에게 들켰다. 퇴계는 대신 사과를 한 뒤 부인을 방으로 불러 연유를 물었다. 부인이 ‘배가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답하자 퇴계는 그 배를 직접 깎아주었다고 한다.

 

09월14일  양건의 ‘하산 길’

 이미숙 논설위원

“마른오징어 장사꾼으로 위장한 아버지는 큰 아이 손을 잡고, 어머니는 작은 아이를 업고 청진을 떠나 원산을 거쳐 연천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초가을 비가 부슬거리던 밤 안내꾼을 따라 한탄강을 건넌 뒤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 먼동이 틀 무렵 ‘이제 이남이오’라는 말에 어머니는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양건 전 감사원장이 최근 펴낸 문집 ‘하산 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연천은 당시 38선 이북에 위치해 월남행 인파가 몰리던 접경 마을이었다.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가 양 전 원장인데 한탄강을 넘던 1948년 9월 9일은 마침 돌날이었다. 남행자들은 우는 아이 입을 틀어막아 아이를 잃는 일이 많았는데 돌배기는 신통하게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양 전 원장은 말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하산 길’에는 양 전 원장 가족이 서울에 정착한 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떠난 얘기, 경기중·고 및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의 교유기를 비롯해 한양대 법대 교수 시절 1987년 민주화 시위 때 포니 자동차를 몰고 서울시청 앞 경적 시위에 참여한 일화, 그리고 이명박 정부 때 국민권익위원장·감사원장을 지낸 일 등이 소개된다. 특히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박세일 교수에 대해선 “신념의 정립에 주저함이 없었던 지사이자 행동가”로, 43세에 세상을 떠난 조영래 변호사에 대해선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짧지만 명작인 인생”이라고 회고했다. 2013년 8월 감사원장 퇴임 후 은퇴 모드로 전환한 그는 법철학·법 사회학 및 헌법 관련 저서를 연속 펴내며 “평생 사랑하지 않았다”고 여긴 법학과도 “화해했다”고 썼다. 그 자체로 남북분단 이후 70여 년에 걸친 한 지식인의 성장사라 할 만하다.

74년 전 북한 정권이 출범한 날 북을 벗어난 양 전 원장은 “나를 키운 8할은 어머니”라고 했다. 가족의 탈북 결심은 김일성 폭압 체제 본질을 꿰뚫어본 어머니의 혜안 덕분이었다. 어머니가 없었으면 아마도 추상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과 같은 운명이 됐을 것이라고도 했다. 어머니 사금자(1921∼2015) 여사 덕분에 돌배기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헌법학자가 됐고 이제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엄마보다 강한 사람은 없다’는 평범한 격언을 되새기게 된다.
 

 

09월 15일  ‘비대위’ 정치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10년간 한국 정치에서 ‘비상대책위원회’는 필요악이다. 국민의힘은 정진석 비대위원장까지 10년 동안 10번의 비대위 체제를 경험했고, 더불어민주당도 ‘우상호 비대위’까지 10번째나 된다. 산술적으로 보면 여야 모두 1년에 한 번씩 비대위 체제를 경험한 셈인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전당대회에서 뽑힌 당 대표체제가 임기 2년을 제대로 채운 적이 드물 정도로 비정상이다.

비대위 체제가 수립된 것은 대부분 선거에 당이 패배한 후 국면 전환을 위해 지도부가 사퇴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면서다. 그만큼 당 지도체제가 취약하다는 방증이다. 이 중에서 김종인 전 의원은 양당의 비대위원장을 모두 경험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고, 두 번이나 비대위를 맡았던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몸이 비대(肥大)해서 자꾸 비대위원장을 시킨다”고 농담했을 정도다. 최근엔 여야 3당이 모두 비대위 체제일 정도로 정치 구도가 불안정한 상태다.

국민의힘 계열선 2010년 6월 6·2 지방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정몽준 대표 이하 당 지도부가 총사퇴한 후 김무성 원내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가 구성됐다. 2011년 4·27 재보선 패배 직후엔 안상수 체제가 무너지고 정의화 비대위가 출범했다. 같은 해 12월엔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참패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DDoS)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체제가 붕괴하고 박근혜 비대위가 세워졌다. 이후 황우여-이완구-김희옥-인명진-김병준-김종인-주호영을 거쳤다.

 

그러나 이 가운데 ‘성공한 비대위’라고 할 만한 케이스는 2011년 박근혜 비대위가 유일하다. 박근혜 비대위는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한나라당을 당명 교체, 현역 의원 25% 공천 배제 등 ‘극약처방’으로 되살려 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주호영-정진석 비대위 체제는 법원의 판단에 의해 운명이 좌지우지될 처지다.


민주당 계열에서는 임채정 정세균 유재건 박지원 박기춘 문희상 김종인 도종환 우상호 비대위 체제가 있었다. 문제는 기소된 이재명 대표의 운명에 따라 민주당은 또 한 번의 비대위 체제로 갈 수 있고, 국민의힘도 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지경이다. 씁쓸한 비대위 전성시대다.
 

 

09월 16일(금)  무기 경쟁력

이신우 논설고문

유럽은 19세기 이후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역사학자들의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그중 의외로 많은 공감을 사는 것이 바로 서구 세계가 보유하고 있던 압도적 경쟁력의 군사기술 시스템이다. 하지만 15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무기 체계는 보잘것없었다. 당시 세계를 석권하고 있던 곳은 오히려 무굴제국, 모스크바대공국, 오스만제국 등이었다고 한다(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이들 강대국의 지배 범위는 군대의 대포가 어디까지 운반될 수 있는지에 의해 지도가 그려졌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서는 중앙정부가 중포의 사용과 독점을 통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된 뒤부터 더 이상 무기의 자발적 개량이 진척되지 않았다. 새로운 무기나 장치를 위한 연구 필요성도 사라졌다.

 

 반면,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던 서유럽에서는 무기 개발 경쟁이 치열했다. 새로운 무기가 알려지면 그것은 궁정에서 궁정으로, 병영에서 병영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 갔고 결국, 다른 지역 군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맥닐에 따르면 특히 네덜란드가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1570년 이후 상인들로 이뤄진 과두 정부가 권력을 장악, 민간 기업의 영리 추구와 정부 운영이 밀접하게 화학 결합했다. 이곳에서는 다수의 공급자와 구매자들이 공존·경쟁하면서 기술적 진보가 촉진됐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했던 펠리페 2세의 스페인에서는 시장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비대해졌다. 후일 스페인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고속기동 포병로켓시스템(하이마스)과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 등이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고 있다. 레이더파 추적 미사일, 피닉스 고스트 등 최신형 드론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주역들이다. 반면, 러시아제 무기들은 스펙 상의 성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야포나 장갑차가 부품 및 타이어 불량으로 진창에서 허덕이는 장면도 보도되고 있다. 러시아 군수산업은 애초 비리의 온상으로 유명했다. 시장경제가 살아 있고 민간 기업들이 주축을 이룬 미국 군수산업과, 강력한 중앙 통제와 국영 기업이 지배하는 러시아와의 차이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한국도 군수산업은 다행히 민간 기업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09월 19일(월)  소장개혁파의 타락


 김세동 논설위원

이준석 대표와 권성동 원내대표 발(發) 사고와 내분에 따라 집권여당 대표가 짧은 기간 ‘대표 권한대행→비대위원장→비대위원장 직무대행→새 비대위원장’으로 ‘춤을 추는’ 과정에서 우리 정당사에 보기 힘든 또 다른 진풍경이 연출됐다. 땜질 처방이 아닌 근본적 쇄신을 요구하는 다선 중진 의원들을 초·재선들이 나서 비판하며 입을 틀어막아 고비마다 흐름을 바꾼 것으로, “소장파와 중진의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검수완박법 중재안 합의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의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 문자를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출한 권 원내대표의 재신임, 법원의 주호영 비대위원장 직무정지 결정에도 당헌 개정을 통한 새로운 비대위 재구성 등 상식을 넘는 무리수를 이들이 윤심(尹心)을 앞세워 주도했다. 비대위 체제 전환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던 초선 의원은 비윤(非尹)을 겨냥해 “사찰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연부역강해야 할 소장파들이 대통령과 윤핵관의 전위대·홍위병을 자처한 것으로, 두고두고 정당 민주화에 역행한 상흔으로 남게 됐다.

 

 예전 소장파들은 공천권 피해 등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대통령이나 당 대표 등 기득권 주류 지도부에 쓴소리를 하며 당내 민주주의와 개혁을 이끌었다. 그래서 소장파는 개혁파와 등치돼 소장개혁파로 통칭됐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카리스마적으로 지배하던 1990년대 민주당에서 노무현·유인태·제정구 등 소장파들은 패권적·반민주적 정당 운영을 과감히 비판해 국민과 언론의 응원과 사랑을 받았다. 한나라당에선 2000년 남경필 전 경기지사,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정병국 전 장관의 ‘남원정’ 트리오가 이회창 총재와 영남권 중진들에 맞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2010년 이명박 정권에선 ‘민본21’이 여당 내 야당을 자처하며 청와대와 정부, 여당 지도부에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여당의 초선들은 대통령이나 윤핵관의 돌격대·전위대가 돼 당내 비판세력 재갈 물리기에 앞장서고 있고, 검수완박법 통과와 조국 수호에 앞장섰던 민주당 초선 모임 ‘처럼회’는 ‘이재명 사법 리스크 방탄’ 최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여야 모두에서 소장파 및 정치의 타락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09월 20일 ‘트바로티’ 김호중

 김종호 논설고문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댄 느낄 수 있나요/ 지나온 시간도 그대가 있기에 이렇게 난 견딜 수 있죠/ 내겐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댄 알고 있나요/ 세월의 아픔도 그대가 있기에 이렇게 난 웃을 수 있죠.’ 류찬 작사, 홍정기 작곡의 노래 ‘나의 사람아’ 첫 대목이다. 대중음악 장르인 트로트와 세계적인 이탈리아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합성한 ‘트바로티’가 별명인 김호중(31)이 2013년에 낸 첫 앨범 ‘나의 사람아’ 타이틀 곡이다.

 

 어린 시절부터 파란만장했던 김호중의 삶 일부는 윤종찬 감독의 2013년 영화 ‘파파로티’에도 담겼다. 축구에 심취하고 대통령 경호원이 꿈이던 중학생 때 이종격투기 전국 대회에서 우승도 했으나, 승리를 장담하던 후배에게 KO패 당하자 그만뒀다. 학교 바깥을 떠돌던 그는 파바로티가 절창한,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의미의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를 우연히 듣고 성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불리는 테너 곡으로, 그것이 그의 경북예술고 진학 계기였다. 폭력조직에 발탁돼 활동하기도 한 그는 그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어 경북 김천예술고로 전학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서수용 교사는 헌신적으로 그에게 힘을 쏟았고, 2008년 별세한 할머니가 남긴 유언 “하늘에서 지켜볼 거니까 똑바로 살아라”를 가슴에 새긴 그를 조폭과 결별하게 했다. 서 교사가 김호중이 부르는 ‘네순 도르마’ 영상을 제작해 인터넷에 올린 일은 그의 2009년 ‘고교생 파바로티’ 방송 출연, 독일 유학 등으로도 이어졌다.

‘하면 된다’가 좌우명인 그는 세기적 테너인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지난 6월 26일 부산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공연했다. 가을에 어울리는 곡들을 재해석해 부른, 그의 클래식 제2집 앨범 ‘파노라마(Panorama)’는 지난 7월 나왔다. ‘저 숲 그 향기로 우릴 감싸던/ 수줍은 우리 얘길 엿듣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곳/ 거친 이 세상 속에 주인공처럼 맑은 네 얼굴에/ 푸르르던 그 숲이 그곳이 매일 그리워’ 하는 노래 ‘친구’도 담겼다. 그가 전국 순회 콘서트를 시작하는 공연이 오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다. 그의 끊임없는 도전과 음악 지평의 확장은 또 감동을 줄 것이 분명하다.

 
 

09월 21일  용산 영빈관

이도운 논설위원

미국 백악관은 북쪽으로 라파예트 공원과 맞닿아 있다. 라파예트 공원 서쪽에 4층짜리 타운하우스 4채가 연결돼 있는데, 외국 정상 등 국빈이 머무는 ‘블레어 하우스’다. 너무 평범한 외관이어서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주목하지 못할 정도다. 블레어 하우스는 1942년부터 영빈관으로 쓰였는데, 수행원이 많은 외국 정상에게는 숙박·회의 공간이 협소한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호텔을 선택하는 외국 정상도 많다. 1997년 워싱턴을 방문한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은 블레어 하우스를 고집했는데, 국빈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베이징 하이뎬구의 댜오위타이(釣魚臺)는 중국의 국빈관이다. 금나라 황제들이 낚시하던 곳이어서 댜오위타이로 불렀는데, 청나라 건륭제가 황실 정원으로 사용했고, 1958년부터 국빈 숙소 및 회의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1㎞, 동서로 500m 부지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숙소·행사장의 건축 면적만 16만㎡에 이르며, 5만㎡에 이르는 호수를 끼고 있다.

 

 청와대 영빈관은 1978년에 만들어졌다. 경복궁의 외관에 프랑스 궁전 양식으로 인테리어를 했는데, 외국 정상 만찬 등 행사와 함께 대통령 기자회견, 대통령 직속위원회 회의 등 다목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블레어 하우스, 댜오위타이와는 달리 외빈의 숙소는 없었다. 이 때문에 외국 정상 등이 방문할 때 묵을 수 있는 영빈관 숙소 건설은 외교부의 숙원이었다. 송현동 부지 등에 전통 한옥을 짓는 아이디어 등이 제시됐지만 현실화하지 못했다.

최근 대통령실의 비공개 예산 편성으로 논란이 된 영빈관 건립은 숙소와 행사장을 함께 짓는 개념이었다. 대통령실이 새로 자리 잡은 용산 개발 방향을 놓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은 여러 아이디어를 검토 중이었다. 대통령실 주변에 각종 부속 건물은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다른 정부 부처도 옮겨올 필요는 없는지, 용산 정비창 개발 계획 등과는 연계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런 과정에서 영빈관 건립도 각 부처나 언론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논의될 사안이었다. 그런데 맥락도 없이 영빈관 예산이 불쑥 불거져 나오면서 논란이 된 것. 결국, 대통령실의 기획·추진·위기 대응의 총체적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되고 말았다.

 
 

09월 22일  국민연금 뒤통수 친 건보료


 문희수 논설위원

건강보험료 2단계 개편이 이달부터 적용된다. 문재인 전 정부가 지난 2017년 만들었던 개편안이 지난달 윤석열 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시행되는 것이지만, 후유증이 심상치 않다. 소득요건이 강화되면서 국민연금 등 4대 공적연금·임대·금융 등의 연간 합산 소득이 2000만 원 이상인 사람들의 부담이 커진 것이 문제다.

특히, 은퇴한 고령층의 충격이 크다. 공적연금이 월 166만6700원 이상이면 소득·재산이 늘지 않았어도 자식의 건보 피부양자에서 탈락하고 지역가입자로 변경돼 꼼짝없이 건보료를 새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령자가 현재는 국민연금 2689명을 포함해 13만여 명인데, 국민연금 수령자는 앞으로 급증하게 돼 있어 파장이 클 전망이다.

 

 불똥이 튄 국민연금은 후폭풍이 상당하다. 연금액이 늘면 건보료를 더 내야 하는 탓이다. 그동안 연금액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고 국민연금공단의 권유에 따랐던 가입자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며 항의와 함께 탈퇴를 요청하는 등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우려되는 변화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만 60세 이후에도 연금에 가입했던 임의계속 가입자와 전업주부 등 임의가입자가 올해 감소세로 전환하고 취소해 달라는 민원이 증가세다. 연금액을 늘리려고 수령 시기를 늦추는 연기 연금과 못 냈던 보험료를 나중에 내는 추납 역시 취소 요청이 늘고 있다. 반면, 연금액 감소를 감수하고 수령 시기를 최대 5년 앞당기는 조기노령연금 수령자는 올 상반기에 오히려 늘었다. 노후의 버팀목이 흔들리고 있다.

‘문재인 케어’의 여파다. 문 정부는 5년(2017∼2022)간 건보료를 14.2% 올렸다. 박근혜 정부 4년(2013∼2017)간 인상률 3.9%보다 3배 이상으로 높다. 그런데도 2018년부터 3년 연속 적자다. 건보료는 내년에도 올라 직장가입자의 월급 대비 건보료는 7.09%로 법정 상한선(8%)에 근접해 간다. 그런데도 건보 재정은 오는 2029년께 바닥날 전망이다. 장차 퇴직연금·개인연금 등 사적연금에도 건보료가 부과될 것이란 경고다. 국민을 지켜준다는 건보료가 노후를 위협한다. 보건복지부는 문 정부에선 침묵하더니 이제는 건보 지속성을 위해 보장범위 축소 등을 거론한다. 건보 개혁을 외면한 결과, 혹독한 청구서가 날아오고 있다.

 
 

09월 23일(금)  쌍방울과 이재명

박민 논설위원

쌍방울그룹의 출발은 1954년 전북 익산에서 이봉녕·창녕 형제가 개업한 ‘형제상회’다. 이들은 1962년 삼남메리야스공업을 설립했고 1964년부터 ‘쌍방울표’라는 브랜드를 사용했다. 편안할 녕(寧)을 돌림자로 썼지만 음(音)만 차용해 ‘두 형제(雙:두 쌍) 봉녕·창녕(鈴:방울 령)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의미로 작명한 것이다. 이후 쌍방울은 ‘리(Lee)’ ‘트라이’를 출시하며 섬유 기업으로 입지를 굳혔고, 프로야구 제8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를 창단하는 등 1980년대 호남 연고 기업 중 금호그룹 다음으로 잘나가는 기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무주리조트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다 막대한 빚을 떠안으면서 1997년 부도가 났다.

 

 쌍방울을 인수한 대한전선그룹이 2010년 유동성 위기에 몰리자 전주 폭력조직 출신으로 알려진 김성태 씨가 자신의 회사 레드티그리스를 통해 쌍방울 지분 40.86%를 인수해 경영권을 장악한다. 주가조작 세력을 상대로 사채업을 해 대금을 마련한 김 씨는 2014년 쌍방울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 기소된다. 검찰에 따르면 김 씨는 시세 조종을 통해 쌍방울의 주가를 2배 이상 끌어올려 350억 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쌍방울이 다시 관심을 받은 것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의 변호사 수임료 대납 혐의로 고발되면서. 수임료를 20억 원대의 전환사채로 받은 의혹이 제기된 이모 변호사는 이 대표 선거법 위반 사건의 1심 재판부터 파기환송심까지 맡았는데, 쌍방울 계열사 사외이사를 지냈다. 이 대표 부인 김혜경 씨 변호를 맡은 나모 변호사도 사외이사를 지냈다. 대장동 주모자 김만배 씨는 천화동인 1호로부터 빌린 돈 일부를 최모 전 쌍방울 대표에게 건네 수십억 원의 비상장 기업을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력조직 목포새마을파 출신으로 알려진 최 전 대표는 김만배 씨에 대한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헬멧을 쓴 채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해 김 씨를 보호하기도 했다. 이 대표가 경기지사일 때 평화부지사를 지낸 이화영 전 의원은 쌍방울로부터 법인카드를 통해 1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쌍방울과의 인연은 내복 사 입은 것밖에 없다”는 이 대표 해명의 진위를 밝히려면 쌍방울 실질 사주 김성태 씨 조사가 필수지만 그는 해외 도피 중이다.

  

09월 26일(월)  몬더그린 현상


 이현종 논설위원

스코틀랜드의 노래 ‘The Bonny Earl of Murray’의 가사 중 ‘앤 레이드 힘 온 더 그린(And Laid him on the green)’을 여러 차례 듣다 보면 ‘앤 레이디 몬더그린(And Lady Mondergreen)’이라고 들린다. 특정한 발음이 듣는 사람에게 익숙한 말로 들리는 현상을 ‘몬더그린 현상’이라고 하는 유래다. 예전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에서 팝송 ‘All by my self’(올 바이 마이 셀프)를 ‘오빠 만세’로 바꿔 부른 코너가 있었는데 바로 몬더그린 현상을 이용한 개그다. ‘바베큐성 사전각인 효과’라는 것도 비슷하다. ‘바베큐’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주면 ‘밥익혀요’‘밤에키워’ ‘아늑해요’ 등의 발음과 비슷하게 들린다. 특히 자막을 보여주면 효과가 배가돼 마치 그 단어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청자(聽者)에게 불분명한 소리를 들려주고 자막에 특정 단어를 보여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음향이 좋지 않을 때 이런 혼란 현상은 더 심해진다. 충남 서산의 해미 성지의 ‘여수머리’는 천주교 박해 시기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형장으로 끌려가던 천주교인들의 말을 동네주민들이 ‘여수머리’로 알아들은 데서 유래했고, 함안의 각대미산도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 욕설 ‘갓뎀’이라고 말하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듣다가 이렇게 됐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순방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최한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박진 외교부 장관 등을 향해 “국회에서 이××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언급했다는 것을 MBC가 자막을 달아 가장 먼저 보도했다. 다른 언론도 뒤따라 이를 보도했고 국내외 파장이 일었다. 그러나 13시간 후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했고, 미국이 아닌 국내 정치권을 향한 말이라고 했다. 김 수석의 설명처럼 ‘날리면’이라는 자막을 보고 들으면 그대로 들리기도 한다. 1억 달러 공여를 약속한 것을 ‘야당이 날려버리면 어쩌나’라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소음이 많아 불분명한 말을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MBC가 확정적으로 보도하면서 문제를 키웠다. 언론의 본령은 ‘팩트 체크’에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다.

 

09월 27일  클린턴의 자선 파워

이미숙 논설위원

매년 유엔총회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던 초대형 자선 회의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CGI)’가 재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각국의 정상 및 외교부 장관 등이 참석하는 유엔총회와 달리, CGI 회의에는 전·현직 정상 및 최고경영자(CEO), 자선사업가, 사회운동가 등이 참석해 자선을 통한 글로벌 문제 해결에 대해 논의하고 기부를 약정한다. 지난 19∼20일 뉴욕 힐튼호텔에서 열린 CGI 회의엔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비롯해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 패트릭 케네디 하원의원, 래리 핑크 블랙록 CEO, 자선사업가 멀린다 게이츠와 로린 파월 잡스, 사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 2100명이 참석했고, 보건의료 및 기후변화, 난민 문제 관련 144개의 기부 서약이 발표됐다.

 

 CGI 회의는 빌 클린턴(76) 전 미 대통령이 2005년 유엔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시작했다. 유엔총회 기간에 개최돼 ‘자선을 주제로 한 장외 유엔총회’로 불리기도 했다. 화려한 글로벌 인맥을 보유한 클린턴 전 대통령의 파워 덕분에 첫 회의 때 300명의 명사가 25억 달러를 기부 약정해 화제가 됐다. 이후 매년 유엔총회 때마다 개최된 CGI 회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면서 중단됐다. 각국의 정치인과 기업이 대미 로비를 위해 CGI에 기부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회의가 취소된 것이다. 클린턴재단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6년까지 CGI 회의를 통해 이뤄진 기부 서약은 3700개로 180개국 4억3500만 명이 혜택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6년 만에 재개된 올 회의의 하이라이트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지난 20일 진행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화상 인터뷰. 젤렌스키 대통령의 유엔 화상 연설은 러시아의 반대를 넘기 위해 유엔총회 표결까지 실시한 끝에 진행됐지만, CGI에선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직접 인터뷰어로 나서 우크라이나 상황 및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CGI가 다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회의 재개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자선업계의 로켓 엔진’으로 불려온 클린턴 전 대통령의 놀라운 파워가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할지 궁금하다.

 
 

09월 28일 '일구이언’법


 이신우 논설고문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은 매일 형무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한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경제 형벌(형사처벌)을 규정한 국내 법령은 모두 6568개에 이른다. 일례로 현행 공정거래법에서는 기업이 대기업집단 지정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거짓으로 제출했을 때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부과한다. 고의가 아니라 단순 실수로 서류를 누락해도 순간적으로 ‘전과자 함정’에 빠진다. 부당노동행위나 대체근로에도 징역 1∼2년쯤은 각오해야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고마다 CEO가 책임져야 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내용은 한결같이 ‘기-승-전-경영자’다. ‘경영자 타도’의 혁명 구호가 노골적이다. 하청 기업에 의한 사고에도 원청 기업의 대표이사를 처벌한다. 보호구 착용 지시의 경우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은 하청에 의무를 부과하게 돼 있으나 신설 중대재해처벌법에서는 원청 기업 CEO로 바꿔치기해 놓았다. ‘실질적 지배·운영·관리’라는 조항만 내걸었을 뿐 정작 이 조항의 실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기업과 경영자는 일심동체라는 논리뿐이다. 주식회사라는 법인(法人)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이렇게 사사건건 CEO를 걸고넘어지려고 애쓰면서도 노조의 불법 행위에 관한 처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노조 임원들의 처벌을 면제하려 든다. 정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이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일명 노란봉투법)은 파업·태업·피케팅 등 노조의 불법쟁의행위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야당 측에서는 무조건 불법을 면책해주는 것이 아니라며 노조의 불법 행위 중 ‘폭력·파괴 행위’는 제외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쥐구멍이 뚫려 있다. ‘폭력·파괴 행위가 노조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면 노조 임원이나 조합원, 그 밖의 근로자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CEO는 법인과 자연인을 분리할 수 없지만, 노조는 분리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일구이언(一口二言)법이다. 일구이언 다음에 이어지는 경구가 뭔지는 아는가.

 

09월 29일  ‘명상록’ 황제의 오점


 김세동 논설위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제국 전성기에 잇달아 제위에 오른 오현제(五賢帝)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로, 1800년 긴 세월을 넘어 살아남은 스테디셀러 ‘명상록’의 저자다. 재위 기간(161∼180) 제국 방위를 위해 최전선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틈틈이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명상록엔 주옥같은 내용이 많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담히 풀어낸 철학자 황제의 명언은 동서고금에 수많은 애독자를 낳았다. “행복은 너의 생각에 달려 있다” “지독히 화가 났을 때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하라” 등은 학생 때 한 번쯤 필사해 본 명문이다. 특히 “죽음은 피조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해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원소들의 변화와 해체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죽음은 자연의 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 유익하고 이롭다” 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가 생각날 정도로 유사해 눈길을 끈다.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에드워드 기번)는 마르쿠스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가 즉위하면서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네르바 이후 4명의 황제는 전임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 일찍부터 제왕 수업을 받은 뒤 원로원의 인준을 얻어 즉위했지만,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에서 전통이 깨졌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희대의 폭군이자 암군으로 그려진 코모두스를 마르쿠스는 생전에 공동황제로 임명하는 등 오랫동안 권력세습을 준비했다. 세속적 욕망, 명예욕, 물욕 등을 버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파한 철인 황제가 정작 함량 미달인 아들에게 로마 황제를 물려준 건, 이 완벽한 인간의 거의 유일한 오점으로 꼽힌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티투스를 제외하면 혈연관계의 세습을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들이 모두 암군이었던 반면, 네르바부터 마르쿠스에 이르기까지 양자 관계로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모두 명군이었다. 그리고 양자 대신 혈연관계에 의한 세습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로마의 붕괴는 재개되었다”라고 썼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 부정마저도 무작정 옹호하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이 권력을 내준 것에서 보듯 동서고금 ‘자식 내로남불’ 유사성이 신기하면서 안타깝다.

 
 

09월 30일(금)  박영택 수집품 손잡이잔

김종호 논설고문

“수집은 뭔가를 갈망하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사로잡는 조형들, 예쁘고 깜찍한 것들, 매혹적인 색채와 질감을 두른 것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고, 그것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투정이다. 나를 유혹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그 감각들을 나의 것으로 수렴하는 일이기도 하다.” 미술평론가이면서 고미술품 수집가인 박영택(59) 경기대 미술경영학과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오래된 사물·오브제들은 생명의 얼룩들로 가득한, 얼굴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고도 했다. 컬렉터 요건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첫 단계는 작품의 질에 대한 냉정하고 날카로운 안목을 갖춰야 한다. 눈이 밝은 사람을 지팡이로 삼아, 안목의 높은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 실패의 반복을 경험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격언은 컬렉션에도 적용된다. 돈을 주고 사봐야 진짜 경험이 된다.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하는 일이어서,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박 교수가 집중 수집한 품목 중의 하나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 흙의 느낌이 오롯이 살아 있는, 신라·가야 시대의 손잡이 달린 잔(盞)이다. 그런 잔을 두고,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저서 ‘한국 미술사 강의’를 통해 ‘세계 문명사에서 1500년 전의 신라·가야처럼 질그릇으로 다양한 손잡이잔을 사용한 나라는 없다’고 밝혔다. ‘잔의 형태도 다양하고, 손잡이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가야 도기 중에는 고화도(高火度)로 구워, 얇고 검정 빛깔이 짙게 나는, 현대적 세련미를 갖춘 명품이 많다’고 했다. 박 교수가 전국을 돌며 모은 신라·가야의 손잡이잔 350여 점 중에서 100여 점을 골라 선보인 전시회 ‘아르카익 뷰티(Archaic Beauty)-삼국시대 손잡이잔’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지난 8월 25일 개막해, 오는 10월 16일까지 이어진다.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자리다. 좁은 원통형 몸통에 직사각형 손잡이가 크게 달린 잔도 돋보인다. 만물의 기원이면서 불멸을 상징하는 물·비·구름 등의 무늬가 표면에 새겨져 현대 추상화 못잖은 느낌을 주는 잔도 많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간결한 형태와 소박한 멋에서 연유하는 자연스러운 미감(美感)이 압권”이라는 박 교수 표현에도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