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2022-09/ 조선일보
09.01(목) 고르바초프
영화 ‘록키4′는 미·소 대결이 한창이던 1985년 만들어졌다. 레이건 미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명명하던 때다. 영화는 소련 권투 선수를 전체주의 체제가 만든 살인 병기로 그렸다. 영화는 그해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조롱했다. 3년도 안 돼 이 평가가 뒤집혔다. 서방 지도자들은 군축과 냉전 해체, 소련의 개혁·개방에 나선 그를 ‘고르비’라 부르며 반겼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그를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사망했다고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 2008년 10월 2일 제1회 한민족 국제평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충남 논산 한민대를 찾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환영나온 학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연합뉴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이전 지도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던 스탈린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자서전에선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을 길게 고백했다. 아내 라이사 여사가 혈액암으로 죽어가자 “부부싸움 때 내가 심한 말 했다”며 눈물을 흘린 남편이었다.
▶인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군비경쟁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소”라고 아내에게 먼저 밝혔다.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옥죄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아프가니스탄 철군, 냉전 체제 해체 등을 추진한 것이 그 약속의 실천이었다. “누구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러시아 문학”이라 대답하고, 마르크스와 레닌 사상을 “공식 이데올로기가 먹여주는 한 줌 양식”이라 비판하는 최고 지도자를 소련 대중은 낯설어하면서도 반겼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인의 폭음 악습도 개혁하자며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했다가 국민적 분노를 샀다. 개혁·개방에 따른 혼란보다 금주법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보드카 사려는 줄이 1㎞를 넘자 화가 난 이들이 “고르바초프를 죽이자”며 크렘린궁에 갔다가 돌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그쪽 줄은 더 길어.” 당시 유행하던 우스개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해체하지 않는 변화’를 시도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변혁의 에너지에 휩쓸려 버렸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나쁜 정부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스스로 개혁에 착수할 때”라는 ‘토크빌의 딜레마’에 고르바초프가 빠졌다고 했다. ‘통제받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적 시장’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그제 영면에 들었다. 냉전 종식이란 세계사적 위업을 달성했지만 조국에선 손가락질당하다가 갔다. 그는 동족에게 배척당해 십자가에 매달렸던 모스크바의 예수였을까. 어쨌든 우리에겐 북방 외교의 새 지평을 열어준 지도자였다. 그의 안식을 빈다.
09.02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
화가 이중섭과 일본인 아내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의 첫 만남은 여느 청춘 남녀처럼 풋풋했다. 원산에서 일본에 유학 간 부잣집 아들 이중섭은 학교 후배 마사코에게 첫눈에 반했다. 웃음 많고 활달한 이중섭이었지만 그녀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 보다 못한 친구가 자기 생일이라 속여 두 사람을 초대한 뒤 둘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중섭은 연애 시절에도 소를 그렸다. 1940년 작 ‘소와 여인-정령1′에 여인과 그녀 몸에 머리를 기댄 소를 그려 넣었다. 누가 봐도 사랑 고백이었다.

▶둘의 사랑은 이중섭이 일제의 징병을 피해 원산으로 돌아갔을 때 끝날 뻔했다. 그러나 이중섭이 보낸 ‘결혼이 급하다’는 편지를 받은 이남덕은 1945년 4월, 소를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살려고 관부 연락선을 오작교 삼아 바다를 건넜다. 전쟁 중 목숨 건 뱃길이었지만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여행이었다”고 했다.
▶6·25 중이던 1952년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이중섭의 목적은 단 하나, 가족과의 재회였다. 그로부터 행려병자로 죽기까지 4년간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읽는 이를 목메게 한다. ‘이 세상에 나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미친 듯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글을 쓸 줄 알게 된 아들로부터 첫 편지를 받아 든 감격도 담았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도무지 잘 안 되는구먼요. 어떻게 쓰면 아이들이 기뻐하겠는지.’
▶희망과 절망은 손등과 손바닥이다. 뒤집히면 극단을 오간다. 하루를 국수 한 그릇으로 버티면서도 ‘작업에 몰두하면서 어떻게 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라던 이중섭은 1955년 서울과 대구 전시회가 잇달아 실패하자 허물어졌다. 일본에 갈 수 없게 됐다는 절망에 음식마저 끊었다. 아내가 보내온 편지도 열어보지 않았다.
▶2016년 6월 서울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이남덕 여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에서 ‘다시 태어나도 함께할 거예요, 우린 운명이니까’라 적었던 이 여사가 지난달 101세로 별세한 사실이 그제 알려졌다. 임종은 병원에서 맞았지만 살던 집은 이중섭이 편지 200여 통을 보낸 도쿄 세타가야 주소지 그대로였다. 이 여사는 이중섭과 7년을 함께했고 70년을 홀로 살았다. 그 세월을 버틴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여사는 ‘잘생겨서 좋아했다’던 이중섭을 만나러 마지막 오작교를 건넜을 것이다. 다리 끝에서 남편이 두 팔 벌려 아내를 맞이했을 것이다.
09.03(토) 중국의 남 탓 DNA
버스나 지하철에서 실수로 발을 밟거나 어깨를 치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상식이고 에티켓이다. 중국에선 그렇지 않다. 중국 생활이 익숙지 않은 외국인들이 흔히 당하는 일이다. 버스, 지하철뿐이 아니다. 중국어 회화 책엔 분명히 ‘두이부치’(對不起·미안합니다)가 나오지만 정작 중국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 “두이부치는 사어(死語)”라는 말도 있다. 사과는 고사하고 눈을 부라리는 고약한 상황만 피해도 다행이다.

▶봄·겨울이면 전 국민을 괴롭히는 미세 먼지의 상당 부분이 중국발임은 오래전 과학으로 입증됐다. 중국에서 발생한 미세 먼지가 한반도로 넘어오는 위성사진이 수도 없이 공개됐다. 우리가 쏘아 올린 천리안 위성도 2020년부터 증거 영상을 전송하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서울의 미세 먼지는 서울에서 나온다”고 한다. “중국 탓만 하다가는 미세 먼지를 줄일 기회를 놓칠 것”이란 말도 했다.
▶3년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의 시작은 2019년 12월 중국 우한의 집단감염이었다. 박쥐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야생동물이 사람과 접촉하면서 팬데믹을 유발했다는 게 과학계 중론이다. 처음엔 수긍하던 중국 과학자들이 얼마 전부터 “코로나는 중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중국인 4만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98%가 “코로나 팬데믹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답했다. 코로나 기원을 조사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엔 비협조와 훼방으로 일관했다.
▶지난 1일 중국 톈진시는 최근 급속 확산 중인 코로나19의 감염원으로 한국산 수입품을 지목했다. 한국에서 수입한 냉동식품 표본에서 코로나19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올봄에도 다롄시가 한국산 수입 의류를 코로나19 감염원으로 지목해 우리 정부의 항의를 받았는데 다시 한국 탓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원래 사과에 인색하고 남 탓만 하진 않았다. 1960~70년대 문화 대혁명의 트라우마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인민재판을 받고 투옥·처형당하는 걸 보면서 ‘잘못을 인정하면 죽는다’는 강박이 생겼다는 것이다. 문화 대혁명보다 더한 걸 70년 넘게 하고 있는 곳이 북한이다. 얼마 전 김여정은 북한 내 코로나 확산을 한국의 전단 탓이라 주장하며 “보복”을 위협했다.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KAL기 폭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사살,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때도 “특대형 모략극”이라 했다. 이들에겐 우기고 뒤집어씌우는 DNA가 있는 걸까.
09.05(월) 괴물 태풍

▲태풍 ‘힌남노’가 북상하고 있는 가운데 4일 오후 경기 수원 수도권기상청에서 예보관이 태풍의 향후 경로를 분석하고 있다. / 뉴스1 김영운 기자
지구에 닿는 태양에너지의 93%가 결국은 바다에 축적된다. 바람과 해류는 적도에 쌓인 열을 극지방으로 분산시키는 기상 현상이다. 그걸로도 안 돼 바닷물이 너무 뜨거워지면 열 운반량을 극대화시킨 태풍이 등장한다. 수퍼 태풍이 운반하는 열에너지는 히로시마 원폭 1000만발, 또는 100만㎾급 원전 2만개를 1년간 가동시킬 때의 전력 에너지와 비슷하다고 한다. 아찔하다.
▶기후변화 온도 상승은 극지방에선 빠르고, 적도에서 느리게 진행된다. 열대와 극지방 사이 에너지 낙차가 점점 작아지게 된다. 그래서 기후변화가 진행될수록 발생 태풍의 개수는 줄어든다. 그렇지만 강력한 태풍은 개수도 늘고 힘도 세진다. 열대 바닷물이 태양열을 받아 워낙 가열되기 때문이다. 2015년 과학 논문은 태평양의 수퍼 태풍이 지금은 연간 3개꼴이지만 60~80년 뒤 연 12개로 늘 것으로 봤다. 수퍼 태풍의 풍속은 평균 88m에 달할 걸로 예측했다. 지금까지 측정된 태풍 최대 풍속은 2013년 하이옌의 초속 87m였다. 사라호(1959년) 이후 최강이었다는 2003년 매미 때는 ‘일 최대 풍속’이 초당 51.1m였다.

▶태풍 힌남노도 초강력 태풍이라고 한다. 기상청에서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규모”라는 말까지 나왔다. 기상청은 될수록 좀 더 심각한 쪽으로 예보하는 경향이 있다. 낙관했다가 큰 곤욕을 치른 것이 1987년 셀마 때였다. 기상청은 대한해협으로 빠져나가겠다고 예보했는데 실제론 순천만에 상륙해 내륙을 훑고 지나갔다. 기상청은 예보 실패라는 추궁이 두려워 국회 답변에서까지 실제 경로가 대마도 위쪽이었다고 우겨댔다. 5개월 뒤 ‘진로 조작’이 드러나 혼쭐이 났다.
▶기상청은 힌남노가 2003년 매미와 비슷한 경로, 강도일 걸로 예측했다. 매미 때는 경남 마산이 큰 피해를 당했다. 저기압으로 바닷물이 부풀어오른 상태에서 만조와 강풍이 겹쳤다. 큼지막한 해일이 해안가 매립지에 조성된 아파트와 상가를 덮쳤다. 당시 매미로 인해 100명 이상 인명 피해가 났다. 마산에서만 침수 차량이 8000대였다. 그 이후 마산과 창원 일대 아파트들은 1층을 비운 필로티 형태로 지어진 것이 많다.
▶내일 남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기상청이 예보한 힌남노의 진로가 이번엔 대한해협 쪽으로 빗나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태풍의 경로를 인간이 어쩌기는 어렵다. 게다가 기후변화로 ‘괴물 태풍’은 점점 늘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마산의 필로티 건물들처럼 강력 태풍에도 견딜 수 있게 철저히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09.06 미술 시장에 몰리는 젊은이들
지난 3월 서울 평창동의 한 갤러리 앞에 캠핑용 텐트 수십개가 늘어섰다. 안에선 20~30대 ‘MZ 컬렉터’들이 다음 날 시작되는 전시에서 작품을 사려고 밤샘 중이었다. 이 갤러리는 관행대로 단골에게 예약 판매를 하려다가 MZ 컬렉터들로부터 “현장 판매하라”는 항의를 받을까 걱정됐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선착순 1인당 1점’ 방식. 갤러리 앞 텐트 밤샘이 생겨난 이유다. 줄을 대신 서는 ‘웨이팅 알바’도 등장했다. 신세대 컬렉터들이 만든 미술품 구매 신풍속이다.

/일러스트=박상훈
▶몇 해 전부터 젊은 컬렉터들이 미술품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지난 2일 코엑스에서 개최된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Frieze)와 토종 아트페어 키아프(Kiaf)의 공동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재력 있는 VIP만 초청한 첫날엔 피카소, 콘도 등을 선보인 3층 프리즈에만 사람이 들고 1층 키아프는 한산했다. 키아프가 프리즈의 ‘들러리 페어’가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일반 관람이 시작된 둘째 날부터 20~30대 청년들이 대거 전시장에 몰렸고 주말 내내 1층도 북새통을 이뤘다.
▶학계에선 1인당 소득 1만달러를 넘어선 1995년부터 한국이 의식주 중심 소비에서 여행·레저 위주로 바뀌었다고 본다. 25~39세인 MZ는 그때 부모 손잡고 모마(MoMA)와 구겐하임, 오르세를 찾아가 일찌감치 미술을 즐긴 ‘미술 친화’ 세대다. 이들은 이번 코엑스 행사도 즐겼다. ‘에곤 실레를 여기서 보다니, 감격!’ ‘다리는 아파도 눈은 즐겁다. 헥헥’ 같은 경쾌한 감상평을 작품 사진과 함께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작품 앞에서 찍은 셀카도 곁들였다. “3층에서 눈호강하고 작품은 1층에서 산다”며 동선을 올린 이들도 있다.
▶주머니 가벼운 MZ 컬렉터들은 한 작품을 여럿이 소유하는 공동 구매에도 적극적이다. 아트앤가이드, 테사, 소투, 아트투게더 등 공동구매 플랫폼 중심으로 500억원 규모 시장이 형성돼 있다. 일부는 작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린다. 인터넷에는 컬렉터가 되려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강좌가 개설되고, ‘나는 샤넬백 대신 그림을 산다’ 같은 젊은 컬렉터 겨냥 책들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젊은 컬렉터들이 작품 감상은 뒷전이고 돈만 밝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부모 세대 컬렉터도 재테크나 상속 수단으로 입문했다가 미술을 공부하며 안목을 키웠다. 그들보다 어릴 때 미술과 놀고 즐긴 게 MZ 컬렉터들이다. 그들이 한국 미술의 저변을 확대하고 K아트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를 기대한다.
09.07 이승만 죽이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일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했다. 외교적 폭언이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등을 향해 이 대통령은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이런 한국 대통령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한국을 아는 일본인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어업 협정 등 일본에 득이 되는 정책을 많이 했다. 과거사는 거의 문제 삼지 않았다. 일본의 좌우를 막론하고 싫어하는 한국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반일 독립운동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승만은 일본에 이익을 주는 미국의 모든 정책을 거부했다. 일본 입장에서 이승만은 자기 영토(독도)를 빼앗은 유일한 한국인이다. 이런 일본 사람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에서 친일파 소리를 듣는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백년전쟁'에서 이승만과 불륜관계였던 것처럼 묘사된 여대생 김노디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일원이었다. '백년전쟁' 영상에 발췌돼 쓰인 얼굴 사진은 1920년 3월 1일 워싱턴에서 찍은 것이다. 전면 하단에 영문으로 '워싱턴 DC, 1920년 3월 1일'이라고 적혀있다. 노디 김 바로 아래 있는 사람이 이승만이다/이승만연구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상징이다. 공산주의를 반대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전쟁에서 북한을 물리쳤다.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소련의 위성국화’를 막아낸 지도자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그가 만든 안보와 경제의 토대에서 이루어졌다. 민주화조차 그가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때문에 가능했다. 북한을 추종하는 이들이 왜 그렇게 이 대통령을 증오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0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 공개한 ‘백년전쟁’은 독립운동가 김노디 지사를 이 대통령의 정부(情婦)처럼 묘사했다. 이미 거짓으로 판명됐다. 두 사람이 불륜 때문에 미 경찰에 체포돼 사진을 찍힌 것처럼 화면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법적 심판을 받지 않았다. 친일파 왜곡도 모자라 이 대통령의 도덕성을 흠집 내려고 조작까지 한 것이다. 그러면서 친일파 단죄를 해본 일이 없고 친일 인사를 더 많이 기용한 김일성은 영웅처럼 떠받드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번엔 김노디 지사가 이 대통령의 양녀(養女)라는 기록이 새로 나왔다고 한다. 부녀 사이였다는 것이다. 정부는 작년 김 지사의 독립운동 공헌을 인정해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래도 ‘백년전쟁’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그대로 유통되고 있다. 사실 이런 왜곡을 하는 세력들만큼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집단이 드물다. 온갖 성 추문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이 어딘가. 그럴 때마다 사실을 감추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한다. 그런 그들이 거짓으로 건국 대통령의 도덕성을 공격했다. 수십 년 동안 집요하게 이어진 ‘이승만 죽이기’야말로 도덕적 파탄에 이른 것이다.
09.08 북한 포탄까지 구하는 러시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당시 노동당 제1비서)이 2015년 6월 한 비행장에서 여성 비행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항공기는 북한 공군의 주력 전투기 미그-21이다. /조선중앙TV
북한 김정은이 2015년 6월 공군 여성 파일럿들을 격려하며 기념 촬영을 했다. 배경은 미그-21기였다. 북한이 보유한 전투기 800여 대 가운데 150여 대로 가장 많은 기종이다. 생산된 지 60년이 넘었다. 800여 대 중에는 6·25 전쟁 때 미그-15, 미그-17기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전투기의 90%를 고철 덩어리로 본다. 최신예라는 미그-29기도 도입 시기가 1980년대다.
▶전투기뿐 아니라 북한 육·해·공군이 쓰는 거의 모든 재래식 무기의 원산지가 소련이다. 소련 해체 후 지원이 끊어지며 북한은 노후 무기 대국이 됐다. 소련 영향권 아래 있던 동유럽의 사정도 비슷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양측 모두 소련·러시아제로 싸운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도 소련 무기가 있다. 1990년대 초반 소련과의 수교 때 제공한 차관을 러시아가 갚지 못하자 T-80U 전차, BMP-3 장갑차 등으로 현물 상환을 받았다. 이 탱크·장갑차로 편성된 기계화부대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탐낸다고 한다.

▶미국 백악관은 6일 “러시아가 북한제 로켓탄과 포탄 수백만발을 구매하려는 징후가 있다”고 밝혔다. 국제 제재로 탄약 생산 보급에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가 북한 탄약을 사들이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를 확인한 것이다. 백악관은 “푸틴 대통령이 얼마나 절박한지 보여준다”고 했다. 세계 2위 군사 대국이라는 러시아가 낡은 북한 무기까지 들여와야 할 정도로 다급하게 됐다.
▶개전 초기 푸틴 대통령은 “48시간이면 끝난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엉터리 작전 지휘와 훈련 부족으로 사상자가 치솟았다. 약 8만명으로 추측된다. 기갑부대 위주 전격전에서 포병 위주 화력전으로 급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군 전문가는 “교착 상태가 장기화하며 재래식 포탄과 다연장 로켓포탄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을 것”이라며 “러시아군이 쓸 수 있는 규격 맞는 포탄이 가장 풍부한 곳이 북한”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이 북한 포탄을 들여올 경우 낭패를 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 전문가는 “각종 포탄류는 전시에 대비해 탄약창에서 대량 보관하는데 너무 오래되면 불발탄이 나올 확률이 커진다”고 했다. 북한은 온도, 습도를 맞춘 대규모 보관 시설을 짓고 유지할 능력이 없다. 포탄 재생 작업도 거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북한이 쏜 장사정포탄 절반 이상이 바다에 떨어지거나 불발됐다. 비슷한 광경을 2022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
09.09(금) 추석 날짜

▲8일 광주 서구 치평동 거리에서 개장한 상무금요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매주 금요일 상무시민로 일부 구간에서 열리는 상무금요시장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일자를 변경해 임시 개장했다. /연합뉴스
추석 선물용 배가 짙은 황색이 아니고 푸른빛이 살짝 남아 있었다. 깎아보니 역시 단맛이 떨어지고 과즙이 적어 좀 딱딱한 느낌도 들었다. 올해 유난히 추석 과일 맛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얘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추석은 예년보다 2주 정도나 빠르다. 올해 추석(10일)은 2014년 추석(9월 8일) 이후 가장 이른 추석이다. 들판의 벼도 아직 누런 빛조차 들지 않았다.
▶추석은 음력을 기준으로 쇠는 명절이라 날짜 변동 폭이 크다. 추분(9월 23일 무렵)을 전후로 빠르면 9월 8일(1976년, 2014년), 늦으면 10월 8일(1919년, 1938년)까지 올 수 있다. 윤달이 앞쪽에 가까이 있을수록 추석이 늦어지는데 올해는 그 반대여서 이른 추석을 맞은 것이다. 송편은 그해 수확한 쌀로 빚어야 제맛이라는데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일러스트=박상훈
▶우리나라의 공식 역법은 양력이다. 조선 말기인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바꾸면서 그레고리력을 공식 채택했다. 그로부터 126년이 지났다. 이제 실생활에서 음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은 음력의 원리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실제로 알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유독 ‘설(1월 1일)’과 ‘추석’은 음력을 쓰고 있다. 설날에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어보면 “1월 1일”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추석은 한 해 농사를 끝내고 추수를 하는 것과 관계가 깊은 명절이다. 9월 10일은 추수하는 때가 아니다. 쌀 농사 추수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언제나 10월 중순 전후다. 미국의 추석이 추수감사절이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을 11월 넷째 목요일으로 정해 놓았다. 그때쯤이면 미국 많은 지역에서 추수가 끝난다. 매년 추수감사절은 일요일까지 4일간 연휴가 고정된다. 미국에서 보니 상당히 편리하고 합리적인 제도였다. 일본이 미국을 벤치마킹해 2000년 이른바 ‘해피먼데이’ 제도를 도입했다. 공휴일 일부를 월요일로 옮겨 토일월 3일 연휴를 만드는 것이다. 연휴는 소비 진작에 도움이 된다.
▶우리도 미국처럼 추수 시기의 특정 요일을 추석으로 정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본다. 예컨대 ‘10월 셋째 주 목요일’로 추석을 정하면 언제나 수목금토일 5일 연휴가 고정된다. 직장이나 개인 모두 편리할 것이다. 다만 ‘추석 보름달’은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전통은 바꾸기 힘들고 우리 경우는 더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때로는 전통 고집보다 합리적인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09.13(화) 英연방의 군주

▲1961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영연방을 벗어나 소련에 다가가는 가나를 방문했다. 여왕은 은크루마 대통령에게 댄스를 제의했고, 과거 군주와 신민이었던 두 사람의 댄스는 세계의 화제가 됐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한국인의 시각에서 영국과 옛 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된 ‘영연방(英聯邦)’의 존재는 이해하기 어렵다. 자존심이 있다면 식민지 잔재를 하나라도 더 지워버려야 정상 아닌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아픈 기억이 없을 리 없다. 인종차별은 기본이고 인도와 케냐처럼 학살을 겪은 나라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옛 식민지가 독립 후에도 연방을 유지하면서 우호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모잠비크나 르완다처럼 영국이 아닌 다른 제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도 스스로 영연방에 들어왔다.
▶한국·일본·중국에서 편의상 부르는 ‘영연방’은 사실 잘못된 명칭이다. 공식 이름(국가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서 ‘영국(British)’을 삭제한 지 오래다. 동아시아 연방국인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선 ‘공화 연방’이라고 부른다. 식민지 독립 후 연방 유지를 위해 지배국의 색채를 최대한 뺀 결과인데 국왕에 대해선 좀 달랐다. 영국 국왕은 여전히 연방의 원수다. 56개 연방국 중 식민지 역사의 맥락이 다른 캐나다·호주·뉴질랜드와 카리브해 국가 등 14개 나라는 지금도 영국 국왕을 자국의 왕으로 섬긴다.

▶영연방과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가 1961년 아프리카 가나 방문 때의 사진이다. 서른다섯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나의 초대 대통령과 얼싸안고 춤을 추고 있다. 흑백의 대조가 선명하다. 16년 전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아버지 조지 6세는 식민 당국의 인종차별 때문에 백인하고만 악수할 수 있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순방에 동행한 엘리자베스는 “영국과 영연방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영국은 여왕의 방문에 힘입어 독립 직후 소련으로 기울던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을 연방에 묶어뒀다.
▶물론 이익이 뒷받침한 이유가 컸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은 쇠락하고 있었으나 유럽 최대 공업국이었고 세계 무역의 10% 가까이 차지했다. 갓 독립한 나라들은 연방국에 부여된 무역, 이주, 노동 등 특권이 필요했다.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처럼 신흥 패권국인 미국의 전폭적이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옛 종주국 영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1973년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들어가면서 특권을 폐지했을 때 가입국이 “영국이 우리를 버렸다”며 아우성친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 왕실의 구심력이 없었다면 특권이 사라진 이후 연방은 서서히 해체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선량한 식민 지배란 없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던 영국이야말로 미국, 아프리카, 중국 등 세계 전역에서 수백년 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영국은 식민 지배의 역사가 수십년에 불과한 일본보다도 피지배 국가들로부터 비난받지 않는다. 많은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제국 영국이 이식한 크리켓을 국민 스포츠로 즐긴다. 몇몇 나라 국민은 영국 국왕의 얼굴이 실린 지폐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영국이란 나라의 그릇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70년 동안 그 그릇을 키운 존재가 여왕 엘리자베스 2세였다.
09.14 암흑기 넘어선 이정재
성기훈. 1974년생. 대한공고 졸업 후 드래곤모터스 조립1팀에서 일하다 구조조정으로 실직, 치킨집·분식점을 하다 망해 대리 기사로 일하지만 도박 빚에 허덕임. ‘오징어 게임’ 456번 참가자 성기훈 역의 배우가 이정재(50)다. 이정재가 비영어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탔다. 2020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그랬듯, 올해는 ‘오징어게임’이 에미상 역사를 새로 썼다.

▲이정재가 엘 패닝과 손을 잡고 수상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 /Television Academy 유튜브
▶연기자를 두고 “딕션이 좋다”는 말은 발음을 넘어 대사 전달력이 좋다는 뜻이다. 한석규, 설경구, 조승우 같은 배우가 그렇다. 용모가 출중한 배우 대다수는 ‘연기력 논란’을 통과의례처럼 겪는다. 이정재는 고교 졸업 후 압구정 카페에서 서빙을 하다 디자이너 하용수에게 모델로 스카우트됐다. 그가 전국구 스타가 된 건 드라마 ‘모래시계(1995)’ 때였다. 멋진 양복을 입었지만 말수는 매우 적은 보디가드 백재희 역이었다.

▶1998년 영화 ‘정사’, 이듬해 ‘태양은 없다’ 이후 뚜렷한 히트작이 없던 이정재는 2010년 영화 ‘하녀’에서 재벌 2세로 나와 호평을 받았다. 작품과 배역 고르는 눈이 확실히 좋아졌다. 공짜로 생긴 건 아니었다. ‘이정재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기간 그는 무던히 노력했다. 대학교수에게 연기 과외를 받고, 역사, 스릴러, 코미디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영화계에 “정재가 잘돼야 하는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외신이 쓰는 ‘이정재 흥미로운 점(fun fact)’ 기사에는 주로 두 가지가 들어간다. “이정재의 여자 친구는 재벌가 딸(chaebol daughter), 삼성 후계자 전 부인”이 첫째다. 둘째는 ‘셀피(자기 사진)’ 이야기다. 그가 지난해 말 인스타그램 계정을 열고 휴대폰으로 찍은 셀카 사진과 글을 올렸다. “이렇게 올리면 되나요?” SNS 사진에 영혼을 담는 세대가 보기엔 허술했다. ”그렇게 찍을 거면 그 얼굴 저 주세요.” “셀카 압수하자.” “외모 낭비.” 젊은 대중이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신호였다.
▶연기자로 상을 받았지만 그에겐 직업이 더 있다. 연예 매니지먼트사 설립자 겸 영화감독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헌트’는 데뷔작인데 평이 좋다. “’오징어 게임’의 주연이 아니라 ‘헌트’의 감독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는 다소 과장된 찬사도 나온다. 이정재와 남우주연상을 두고 경쟁한 밥 오든커크(베터 콜 사울), 제이슨 베이트먼(오자크)은 물론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도 배우 겸 제작자다. 이제 그 트랙에 들어선 이정재가 또 우리를 놀라게 해주기를 바란다.

09.15 재일교포와 파친코
몇 해 전 일본 오사카 카지노에서 일하는 재일 교포 소설가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바쁜 일 하며 소설까지 쓰는 이유를 들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카지노는 일본에서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다. 자존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설가는 존중받는다”고 했다. 이민진 소설 ‘파친코’에 비슷한 대목이 있다. 자식을 둔 일본인 이혼녀가 파친코를 운영하는 한인과 재혼하려 하자 어머니가 말린다. “조선인과? 파친코 하는 사람과? 불쌍한 자식들에게 못할 짓을 할 만큼 하지 않았니?”

▶'파친코 하는 한인’은 냉대와 멸시를 견디며 산다. 천한 직업이란 인식 때문에 일본인은 기피하던 것을, 일제 패망 후 마땅한 일자리 없던 재일 한인들이 생계를 위해 택했다. 일본 파친코 업계의 80%를 재일교포와 그 후손이 운영하며 ‘파친코=재일 한인’ 인식이 굳어졌다. 혐한 성향의 일본인들은 ‘조선 도박’이니 ‘조선 구슬넣기’니 하며 손가락질했다.
▶일본인들 태도는 이중적이다. 파친코는 회사원들이 퇴근길에 들러 즐기는 대표적 게임이다. 전성기 땐 연간 3000만명이 출입했다. 파친코 업소 순례 유튜브도 인기다. 100만명 넘는 구독자를 거느린 곳도 있다. 스마트폰 앱이나 잡지, 게임을 보여주는 TV 프로도 있으니 일본의 국민 오락이다. 그런데 정작 업소를 운영하는 한인들을 내려다본다.
▶많은 재일 교포에게 삶의 터전인 파친코 산업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소식이 엊그제 본지에 보도됐다. 1990년대 초만 해도 2만 곳 넘던 전국 점포 수가 지난해 8000개까지 줄었다.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당국이 파친코의 사행성을 낮춰 대박 기회를 차단한 데다 코로나까지 겹치며 찾는 발길이 줄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전철과 버스에서 온갖 스마트폰 게임을 내려받아 즐기는 시대다. 파친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소설 ‘파친코’는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한인의 개미지옥’으로 파친코를 그린다. 명문 와세다 졸업생도, 미국에 유학 가 금융인이 되어 돌아온 이도 다른 삶을 꿈꿨지만 종착지는 파친코였다. 일본이 지금도 그런 사회라면 파친코의 쇠락은 재일 한인에게 재앙일 것이다. 현실에선 다른 신화가 생겨나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아버지는 파친코로 돈 벌어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 세계적 사업가로 키웠다. 한인은 세계 어디서든 그 나라 평균 국민 이상의 삶을 산다고 한다. 그 억척 DNA가 파친코 쇠락 시기를 맞은 재일 교포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09.16 수리남의 분노
007 시리즈를 쓴 소설가 이언 플레밍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소련을 악의 화신으로 그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007은 달랐다. 악당은 소련 KGB가 아니라 KGB 출신이 가담한 국제 테러 조직 ‘스펙터’라는 식이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1986년 ‘탑건’에 나오는 적국 전투기는 미그 28이다. 그런데 미그 28이란 전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과의 혹시 모를 분란을 이런 식으로 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가 특정 국가를 대놓고 악당으로 묘사한 사례는 많지 않다.

▶탑건 후속작 ‘탑건-매버릭’도 마찬가지다. 전투기 조종사 임무는 유엔 결의를 위반한 적국의 우라늄 농축 시설 파괴다. 그런데 적국 전투기에 국기가 없고 그들이 쓰는 언어도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다. 북한이나 이란일 거란 분위기만 낸다. 한국 영화는 이런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범죄도시 2′는 베트남 호찌민(옛 사이공)을 납치·살인이 난무하는 무법 도시로 그렸다. 베트남은 이 영화의 자국 내 상영을 불허했다.
▶남미 국가 수리남이 이달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법적으로 문제 삼겠다고 했다. 이 나라를 마약 거래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했다는 게 이유다. 마약 운송 국가 이미지를 벗기 위한 그간의 노력이 한국 드라마 탓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14일 기준 ‘수리남’은 넷플릭스 TV쇼 부문 전 세계 3위다. 이런 주목도 높은 드라마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어떤 나라든 자국 이미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자국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외국 콘텐츠에 참기만 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을 마약이나 성매매 천국으로 묘사한 영화가 세계 3위로 관객 몰이를 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옛 국명이 터키였던 튀르키예는 1980년대 일본 퇴폐 목욕업 명칭이 도루코부로(トルコ風呂·터키탕)인 것에 항의해 ‘소프랜드’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 이탈리아는 한국 때수건 이름이 이태리타월이라는 걸 불쾌해한다.
▶K팝과 영화·드라마 강자로 도약한 한국은 이제 영미와 유럽의 문화 강국들처럼 전 세계를 의식하며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나라가 됐다. 세계는 우리를 향해 박수만 치는 것이 아니다. 전엔 그냥 넘어갔던 것들에 섭섭해하고 화도 낸다. 수리남이란 국명을 굳이 쓰지 않고도 같은 내용의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갈등이 원만히 수습되길 바란다.
09.17(토) 횡재세
횡재(橫財)를 뜻하는 영어 ‘Windfall’의 어원이 재미있다. 중세 시대 영국에선 숲의 주인들이 땔감을 얻기 위한 도둑 벌채를 엄격히 금지했다. 다만 폭풍에 쓰러진 나무를 주워가는 건 눈감아 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런 나무는 횡재나 다름없었다. 현대판 횡재 사냥꾼들이 캐나다에 있다. 캐나다 제재 업자들은 폭설로 숲 벌목이 어려울 땐 강물에 떠내려온 나무를 건진다. 20m짜리 삼나무 하나만 건져도 1만달러(약 1400만원)를 벌 수 있다.

▶1997년 영국 노동당은 집권 직후 횡재세(windfall tax)라는 이름의 세금을 새로 만들었다. 보수당 대처 정부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많은 국영기업이 민영화됐는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은 기업에 뒤늦게 횡재세를 부과한 것이다. 이렇게 조달된 1조원가량 세금은 복지 재원으로 활용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횡재세를 부활시켰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차단 등으로 에너지 위기에 처한 유럽연합(EU)이 위기 극복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정유사, 발전회사 등에 횡재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기업의 3년 치 평균 이익의 20%를 초과하는 수익에 대해 33% 세율로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횡재세로 1400억유로(약 195조원)을 걷어 전기료·난방비 급등에 시달리는 가계,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횡재세는 과세권이 미치는 영토 내 자국 기업에 국한된다. 세계 4위 천연가스 수출국 노르웨이의 경우 석유·천연가스 가격 폭등 덕에 연평균 500억달러 수준이던 에너지 수출액이 2000억달러로 불어났다. 전 국민에게 1인당 4만달러씩 나눠줄 수 있는 돈이다. 샘이 난 유럽 가스 수입국들은 노르웨이에 횡재세 대신 ‘할인 판매’ 선의라도 베풀라고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 주주들도 대박을 향유하고 있다. 올 상반기 중 55조원대 이익 덕에 특별 배당금을 두둑이 받았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정유사에 횡재세를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 간간이 나온다. 유가 폭등 탓에 한국전력이 올해 30조원이 넘는 적자를 낼 지경이니, 이런 얘기가 나올 만도 하다. 만약 횡재세를 걷는다면 정유사 외에 은행과 가상화폐 거래소도 과세 후보에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국내 은행들은 물가를 잡기 위한 한국은행의 공격적 금리 인상 덕에 가만히 앉아 막대한 추가 수익을 거두고 있다. 가상화폐 거래소들도 코로나 극복 과정에서 엄청나게 풀린 돈과 그에 따른 코인 광풍 덕에 조(兆) 단위 이익을 누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09.19(월) 라면 값 변천사

▲18일 서울의 한 대형 마트에서 시민들이 라면을 살펴보고 있다. 오뚜기는 내달 10일부터 라면류의 출고가 기준 제품 가격을 평균 11% 올린다. 대형 마트 판매가 기준 진라면은 620원에서 716원으로 15.5%, 진비빔면이 970원에서 1070원으로 10.3%, 진짬뽕이 1495원에서 1620원으로 8.4% 오른다. /뉴스1
삼양라면이 일본 기술을 도입해 1963년 라면을 처음 내놓았을 때 가격은 10원이었다. 그 당시 짜장면 가격이 20원 정도였으니 그렇게 싼 가격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히트를 친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부가 1965년 혼·분식 장려운동을 하고 느끼한 국물 대신 얼큰한 국물 라면이 나오면서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라면 값은 7년 만인 1970년 20원, 1978년에 50원, 1981년에 100원으로 올랐고, 1990년에 200원, 1995년에 300원으로 올랐다. 그래서 첫 라면 값을 얼마로 기억하느냐로 대략 그 사람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막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열 살 전후 가격일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첫 라면 값은 50원이다. 지금은 120그램 신라면 한 봉지가 편의점 가격으로 1000원이다. 59년 만에 100배 오른 셈이다. 지금은 5000원은 내야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수 있으니 라면 값만 올랐다고는 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라면 값은 시내버스 요금과 비슷하게 출발해 90년대 중반까지 유사한 가격 상승 곡선을 그렸다. 지금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200원이니 라면 값보다 약간 더 올랐다. 라면 값이 생각보다 덜 오른 것은 정부가 음으로 양으로 가격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라면·치킨 값 등은 서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격이다. 70년대 라면 업체들은 가격을 올리기 전에 정부와 협의를 해야 했다. 공정거래위는 2012년 농심, 삼양라면, 오뚜기, 팔도 등 4개 업체가 9년 동안 가격을 담합했다며 135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라면은 다른 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다. 지난달 태국 5대 라면 업체들은 ‘가격 인상’ 청원서를 들고 상무부를 찾았다. 업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밀가루·팜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몇 달째 손실을 보고 있다며 33% 인상을 정부에 간청했다. 태국에서 라면은 가격 통제 대상 품목이라 가격을 올리려면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태국 정부는 절반인 16.5% 인상만 허용했다.
▶업체들이 일제히 라면 가격을 올렸다. 농심은 지난 15일부터 신라면 등 주요 제품 출고 가격을 평균 11.3% 올렸고, 팔도는 다음 달부터 평균 9.8%, 오뚜기도 평균 11% 올린다고 밝혔다. 12개들이 초코파이 한 상자도 편의점 가격이 며칠 전 4800원에서 5400원으로 12.5% 올랐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속에서 소비자에게 친숙한 제품 가격이 껑충껑충 뛰고 있다. 라면 하나 사는 것도 주저하게 만드는 시대가 오고 있다.
09.20 ‘조용한 퇴사’
“방금 회사를 그만뒀어. 밤 9시까지 일하고 5시간밖에 못 쉬었어. 회사는 정말 날 힘들게 해.” 팝스타 비욘세의 7집 앨범에 수록된 ‘브레이크 마이 솔(Break my soul)’의 가사다. CNN은 이 노래를 ‘대퇴직 시대(Great Resignation)에 대한 찬가’라고 보도했다. 2020년 코로나 사태 후 미국에선 매달 400만명이 넘는 직장인이 자발적으로 사표를 던져 ‘대퇴직 시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택근무 탓에 직장 소속감이 옅어지고, 일과 삶의 경계가 흐려져 근로자들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 주원인이라는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많다. 두둑한 실업수당 때문이라는 경제적 분석도 있다. 미국 정부가 코로나 대응을 위해 뿌린 실업수당 7000억달러(약 980조원) 덕에 매달 3000달러 넘는 공돈을 받게 되자 일자리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팬데믹이 근로자들로 하여금 형편없는 일자리에 계속 매여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코로나 거리 두기가 끝났는데도 근로자들이 직장으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에는 비어 있는 일자리가 1000만개가 넘는다. 스타벅스가 종업원 시급을 14달러에서 17달러로 올리는 등 구인난은 임금 상승을 낳고, 인플레이션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최근엔 MZ세대 직장인들 사이에서 ‘딱 받는 만큼만 일한다’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현상이 확산해 기업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조용한 퇴사’란 진짜 회사를 때려치우는 게 아니라 시키는 일만 하고 초과 근무는 거부한다는 ‘심리적 퇴사’를 의미한다. ‘대퇴직 시즌2’인 셈이다. 미국 갤럽 조사에서 직장인 50%가 ‘조용한 퇴사자’라는 충격적 결과가 나왔다. “번아웃(탈진)을 막고자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행태”(영국 BBC)라거나 “근로자와 고용주가 서로 멀어지는 현상”(갤럽)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MZ세대 직장인 75%가 이미 한 번 이상 이직 경험을 가진 한국 직장에서도 ‘조용한 퇴사자’가 많을 것이다.
▶기업마다 조용한 퇴사자의 확산을 막느라 비상이 걸렸다. 미국 고용주들이 찾은 자구책은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다. 연봉 동결, 승진 배제, 업무 지휘 제외 등의 방법으로 압박해 ‘조용한 퇴사자’를 실제로 퇴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눈에는 눈’인 셈이다. 한쪽에선 구인난, 다른 한쪽에선 해고가 일상인 전례 없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일’에 대한 정의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가 됐다.
09.21 황금 티켓 증후군

▲/일러스트=박상훈
1960년대 영국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등장인물인 초콜릿 회사 사장 윌리 웡카는 초콜릿에 황금 티켓 다섯 장을 무작위로 끼워 파는 이벤트를 연다. 초콜릿을 사 먹다 운 좋게 이 티켓을 뽑는 어린이에겐 신기한 공장을 견학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행운을 잡아보라’는 취지는 변질된다. 부모가 초콜릿 사재기를 하고 초콜릿 포장을 빨리 깔 사람까지 고용한 부잣집 아이들이 대부분 티켓을 차지한다. 돈으로 운까지 끌어올리는 사회를 풍자한 동화였다.
▶동화가 인기를 끌면서 영미권에선 ‘황금 티켓’이 열망하는 무언가를 단숨에 거머쥐게 해주는 수단을 은유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소매상들이 여는 경품 이벤트 등에서 자주 쓰여온 이 말이 19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국경제 보고서’에 등장했다. 명문대 진학, 대기업 정규직 취업에 집착해 극도의 노력을 쏟아붓고 이에 성공하면 실제로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한국적 현상을 ‘황금 티켓 증후군’이라고 표현했다.
▶명문대 학력 같은 ‘간판’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학력이 가져다주는 득이 그만큼 커서일까. 학부 졸업장이 맘에 들지 않으면 학력 업그레이드만을 목적으로 대학원에 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회인을 위한 특수대학원이 한국엔 700개 넘게 있다. 이런 나라는 드물다. 인터넷에서 인물을 검색하면 이름·소속 다음에 학력이 뜰 정도로 한국인은 학력·학맥·학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한국만 출신 학교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일본 기업인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회장의 원칙은 “신제품 아이디어는 와세다, 영업 전략은 지방대, 문제 파악은 도쿄대 출신이 잘한다”였다고 한다. 미국도 아이비리그 명문대 출신이면 득을 본다. 하지만 한국처럼 명문대 졸업장이 인생 전체를 바꿀 ‘황금 티켓’이라 믿고 목숨 걸고 달려드는 풍토의 사회는 별로 없다.
▶1993년 조선일보엔 ‘선보는 자리에서 학벌 타령 하는 저질 결혼 문화가 한심하다’는 독자 투고가 실렸다. 워싱턴포스트는 2014년 ‘명문대에 가기 위해 명문초·중·고를 나오고 그래야 좋은 일자리와 배우자를 얻는 사회’라고 한국을 묘사했다. 이젠 OECD까지 개선이 필요하다고 한다. 학력만이 아니다. 고시 합격증은 한번 따면 평생 먹고살게 해주는 황금 티켓이라고 한다. 의사·변호사 등 진입 장벽을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문직이 한둘이 아니다. 부모들은 황금 티켓을 자식에게 쥐여주려 모든 희생을 다 한다. ‘저출산 부르는 사회’ 아닌가.
09.22 3년 만의 일본 여행
일본에 야리가타케(槍ヶ岳)라는 산이 있다. 도쿄에서 차로 5시간 가고 등산로에 들어서 9시간 넘게 올라가야 해발 3180m 정상에 오른다. 첩첩산중 한가운데 있는 준봉(峻峯)이다. 2008년 일본에서 근무할 때 이 산 정상 부근 산장에 머문 적이 있다. 익숙한 냄새에 돌아보니 한국인 중년 등산객 수십 명이 김치통을 열고 밥을 먹고 있었다. 한국 100대 명산 등반을 끝내고 일본 100대 명산 등반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놀랐는데 곧 평범한 얘기가 됐다.

▲일본 정부가 3년만에 외국인 관광객의 비자 면제 및 개인 여행을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국제선 출국장 게시판에 일본 하네다행 여객기 탑승 정보가 안내되고 있다./뉴스1
▶일본에 있으면서 틈이 나면 등산을 하고 여행을 다녔다. “후지산을 4번 올라가고 47개 지자체를 모두 여행했다”고 하면 일본 사람도 대개 인정한다. 그런데 3~4년 뒤부터 이런 자랑도 별 게 아니게 됐다. 인스타그램 유행과 더불어 한국 젊은이들이 일본 구석구석을 후벼 파듯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웬만한 일본인은 평생 발들일 일 없는 서태평양 절해고도까지 간다는 말을 듣고 “역시 젊음은 다르다”고 느꼈다.
▶일본이 뭐가 좋으냐고 물으면 “볼 것, 살 것, 먹을 것이 많고, 게다가 싸다”고 한다. 한 달 전 3년 만에 도쿄 편의점에 갔더니 서울 편의점에서 2100원인 코카콜라가 160엔(약 1600원)이었다. 생활 물가를 비교할 때 자주 쓰이는 빅맥 햄버거는 서울 4900원, 도쿄 390엔. 도심 한식당의 점심 냉면값은 1000엔을 받았다. 일본 샐러리맨에게 물어보니 “심리적으로 점심값 1000엔 벽이 아직 높다”고 했다. 교통비는 여전히 비싸지만 식음료 값은 서울의 70~80% 정도인 듯했다.

▶2018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753만명이었다. 국민 7명 중 1명이 그해 일본을 다녀왔다. 5년 전보다 3배 늘었다. 일본 여행을 늘리는 정책이 나온 것도 아니다. 외교 관계도 좋지 않았지만 “싸고 좋다”며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떠났다. 2019년 한국의 ‘NO 재팬’ 운동, 이듬해 코로나 대유행과 장기간의 국경 봉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연 1000만명을 내다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일본이 3년 만에 무비자 입국과 자유 여행 재개를 검토한다는 소식에 일본 여행 예약이 822% 늘었다고 한다. 꽉 눌린 것이 터질 조짐이다. 관광공사에 따르면 요즘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 여행지도 일본이다. 엔화 하락으로 더 싸졌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한다. 한때 대일 여행수지 적자가 37억달러에 달했다. 무역수지까지 적자인 마당에 과소비가 걱정되기는 한다. 그래도 여행은 좋은 것이다. 많이 보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09.23 퇴비장

그룹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1991년 에이즈로 사망하자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 교도인 그의 부모가 아들을 조장(鳥葬)지내려 했다. 신성한 불로 인간의 시신을 화장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영국인인 퀸 멤버들은 유해를 새 먹이로 준다는 사실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시신은 결국 매장됐다. 조로아스터교와는 다른 이유지만 티베트 불교도 조장을 지낸다. 기이하고 야만적으로 보여도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춥고 메마른 티베트에선 미생물이 부족해 시신이 잘 분해되지 않는다. 화장도 쉽지 않다. 해발 3000m 넘는 고원이라 화력이 약하고 땔감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농사짓기에도 부족한 땅을 묘지로 쓰기도 어렵다. 시신을 새 먹이로 준다 해서 고인을 기리는 뜻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인들은 망자의 넋이 새와 함께 하늘에 오른다고 믿는다. 영혼이 떠난 육신을 새에게 줌으로써 마지막으로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도 있다.
▶장례 방식이나 장례에 대한 인식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우리만 해도 화장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게 불과 한 세대 전이다. 그러나 2005년을 기점으로 화장이 매장을 추월했고, 지난해 화장률이 90%를 넘었다. 고령화 추세도 장례 문화를 바꾸는 큰 요인이다. 연간 사망자 수가 지난해 처음 30만명을 돌파했다. 내후년이면 65세 이상 인구도 1000만명을 넘어선다. 유골 대란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에 따른 장례 방식도 바뀔 것이다. 납골묘나 납골당 대신 수목장·잔디장 같은 자연장이 느는 것도 이런 변화의 반영일 것이다. 화장 후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해양장까지 등장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가 엊그제 인간 시신을 거름용 흙으로 만드는 퇴비장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신을 철제 용기에 담아 풀과 꽃, 나뭇조각, 짚 등을 섞어 미생물이 자연 분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매장이나 화장에 따른 환경오염을 최대한 줄일 수 있어 친환경 장례로 떠올랐고 2027년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이미 미국 여러 주가 도입했고 확산하는 추세다.
▶오늘날 장례의 큰 화두는 친환경이다. ‘녹색 죽음’이라고도 한다. 영국에선 시신을 가수분해기 통에 넣어 서너 시간 만에 뼈만 남기고 살을 녹이는 장례법도 등장했다. 캘리포니아가 퇴비장을 도입한 이유도 폭염·산불·가뭄 등 기후가 갈수록 극한 환경으로 바뀐 데 있다고 한다. 고인을 기리는 뜻만 바뀌지 않는다면 새로운 장례 방식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은 점차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09.24(토) 러시아 엑소더스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은 지뢰밭을 우회하지 않았다. 대인 지뢰를 밟아 죽으나 총포에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800만명 넘게 죽었지만 독일군 전사자도 280만명에 이른다. 미·영 연합군과 싸운 서부 전선 전사자(40만명)의 7배나 된다. 민간인까지 합치면 소련인 2900만명이 독·소 전쟁 때 희생됐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에 해당한다. 소련이 흘린 피에 히틀러가 빠져 죽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전쟁 초기인 1941년 9월 8일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시민들은 혁대, 책상 다리,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 100만명이 죽었지만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군은 1944년 1월 27일 봉쇄를 풀었다. 872일 만이었다. 러시아가 ‘대조국전쟁’이라 부르는 독·소 전쟁 기간 탄생한 ‘불굴의 소련’ 신화 가운데 하나다.
▶스탈린이 독일만큼이나 미워한 게 미·영 연합군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과 싸우다 공멸하는 상황을 미·영이 기다렸다고 의심했다. 실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때 독일은 이미 소련과 벌인 총력전으로 국력을 대부분 소진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1945년 5월 8일 독일군 참모장이 프랑스 랭스에서 미·영 연합군에 먼저 항복하자 격분했다. 다음 날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는 베를린 근교로 독일군 총사령관을 불러 항복 문서에 다시 서명하게 했다. 소련의 전승절이 연합군의 전승절과 하루 차이 나게 된 이유다.
▶푸틴은 스탈린의 길을 걸어왔다.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의 재산을 빼앗아 내쫓고, 방사성물질 ‘폴로늄’이나 화학무기 ‘노비초크’ 등으로 정적을 제거했다. ‘강한 러시아’를 부르짖으며 체첸(1999년), 조지아(2008년), 크림반도(2015년)를 잇따라 침략했다. 스탈린의 반대파 숙청과 동유럽 공산화 과정을 빼닮았다. 서방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도 스탈린과 판박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푸틴의 지지율은 80%가 넘었다.
▶러시아를 탈출하려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대적 반격으로 수세에 몰린 푸틴이 예비군 동원령을 내린 뒤 벌어진 현상이다. 조지아, 핀란드와 맞댄 국경엔 수㎞에 걸쳐 차량이 늘어섰다.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튀크키예, 아르메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이 매진되고 가격도 몇 배씩 뛰었다. 푸틴이 기대했던 ‘불굴의 러시아’ 속편과는 다른 흐름이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침공에 맞섰지만 푸틴은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을 벌인 차이 때문일 것이다.
09.26(월) 투명 투표함
고대 그리스에선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등 국가에 해를 끼칠 자를 국외로 쫓아내는 ‘도편(陶片)추방제’가 있었다. 시민들이 도자기 조각에 이름을 적어 내는데, 6000표 이상 받으면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그런데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친 전쟁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 추방의 제물이 됐다. 최근 고고학자들이 그의 이름이 적힌 도편들을 조사한 결과 많은 도편이 한 사람 글씨체로 쓰인 사실이 발견됐다. 정적(政敵) 제거를 위한 투표 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23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의 한 주택가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와 합병을 묻는 주민 투표용지를 투명 투표함에 넣고 있다./TASS 연합뉴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렸다. 당시 여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온갖 꼼수가 동원됐다. 투표함의 4할을 이기붕 표로 미리 채워 놓는 ‘4할 사전 투표’, 사망자를 선거인 명부에 끼워 넣는 ‘강령술’, 개표 검표원을 매수해 야당 표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줍는 척하며 지장을 잔뜩 찍어 무효 표로 만드는 ‘피아노표’(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한다는 뜻) 같은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다. 1992년 군 부재자 투표에서도 ‘여당 후보 찍기’ 부정선거가 폭로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독재국가에선 지금도 반문명적 부정선거가 횡행하고 있다. 북한에선 투표 방식이 단일 후보에 대한 찬성과 반대뿐이다. 투표 용지 앞면은 후보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은 ‘찬성’이 적혀 있다. 찬성은 그냥 접어서 투표함에 넣으면 되지만, 반대할 경우 후보 이름 옆에 X표를 해야 한다. 100% 찬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2000년대 들어서도 볼리비아, 페루, 키르기스스탄 등에서도 부정선거가 탄로나 대통령이 쫓겨나는 정치 혁명이 있었다.

▲/일러스트=양진경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밀리자 푸틴 대통령이 군 동원령을 내리고,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의 편입을 위한 주민 투표를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투표함이 ‘투명 투표함’이어서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기표를 마친 투표 용지를 선관위 직원에게 펼쳐 보이고, 접지도 않은 채 투명 투표함에 넣는 장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공개투표나 다름없다.
▶투명 투표함은 프랑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한 번에 2~3개 투표 용지를 넣는 부정 투표를 감시하기 위한 장치다. 단 비밀투표를 보장하기 위해 투표 용지를 별도 봉투에 담아 함에 넣는다. 같은 투명 투표함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능을 발휘한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공정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무덤이 될 수 있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저열한 공격이다.
09.27 들리는 소리, 안 들리는 소리
‘머레이의 잘생긴 백작’이란 스코틀랜드 노래에 ‘레이드 힘 온 더 그린(laid him on the green·그를 풀밭에 눕혔네)’이라는 대목이 있다. 노래를 들은 한 미국 작가는 해당 구절을 ‘레이디 몬더그린(lady Mondegreen·몬더그린 아가씨)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작가는 훗날 귀로 듣는 것의 부정확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사례를 들었다. 그 후 특정 문장을 자신이 아는 다른 말로 잘못 듣는 현상을 ‘몬더그린(Mondegreen) 효과’라고 부른다.

▶가수 올리비아 뉴턴 존의 노래 ‘피지컬’ 가사엔 ‘렛 미 히어 유어 보디 토크(let me hear your body talk)’라는 부분이 있다. 이게 한국말로 ‘냄비 위에 밥이 타’로 들린다는 이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들린 것은 아니다. 한 개그맨이 “팝송에 우리말 가사가 있다”며 ‘냄비 위에 밥이 타’라고 말한 뒤부터다. 특정 정보에 점령된 귀가 팩트를 외면하는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욕설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노 후보가 연설 도중 안상영 부산 시장을 거론하며 “아이x”라 욕설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노 후보는 “안 시장이라 말한 것”이라며 부인했다. 녹음을 반복해 틀어봤지만 발음이 불분명해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 대선을 좌우했던 김대업씨의 녹음테이프도 음질이 나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는 자기들 듣고 싶은 대로 들으려 했다.
▶인간은 눈으로 대화하는 기술을 발달시켜 왔다. 입을 보며 대화하는 ‘독순술’(讀脣術)이 대표적이다. 첨단 기술일수록 귀보다 눈을 활용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지난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DeepMind)는 화자의 입술 모양만으로 전체 문장을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선보였다. 인공지능이 읽는 입 모양이 귀로 듣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고 한다. 앞서 유튜브도 2009년, 동영상에 자막이 자동으로 표시되는 기술을 개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미국 뉴욕에서 회의장을 나오며 한 사적 대화를 두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MBC는 ‘XX’와 ‘바이든’이란 자막을 달아 해당 화면을 내보냈다. 막상 윤 대통령 말에서 또렷이 들리는 건 “쪽팔려서 어떡하나”뿐인데도 그렇게 했다. 미국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눈은 리얼리스트이지만 귀는 믿고 창조한다”고 했다. 귀보다 눈이 진실에 가깝다는 의미다. 그런데 한국에선 방송 자막조차 귀만큼이나 못 믿을 게 되고 있다.
09.28 핵의 절차
영화 ‘크림슨 타이드’에서 미국은 러시아 군부의 핵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 미 잠수함에 온 대통령 지시문이 통신 장애로 중간에 끊긴다. 함장은 핵미사일을 쏘자 하고 부함장은 반대한다. 함장·부함장이 모두 동의해야 핵을 발사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극한 갈등 와중에 러시아 군부 반란이 진압돼 발사 명령이 취소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다. 영화 ‘울프 콜’에선 프랑스 정부가 테러 단체의 위장 핵 공격에 속아 자국 잠수함에 핵 보복 발사 명령을 내린다. 뒤늦게 속은 걸 알고 취소하지만 잠수함장이 핵 명령 취소가 적의 기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핵전쟁을 막으려면 주변 아군 잠수함이 이 잠수함을 격침할 수밖에 없었다.

/일러스트=박상훈
▶실제 미국의 핵 발사 시스템은 영화보다 복잡하다. 대통령이 국방부, 국립군사지휘센터, 전략사령부 등과 회의한다. 결론이 나면 대통령이 핵 가방(nuclear football)의 보안 카드로 발사 지시를 내린다. 국방부 전시상황실은 잠수함과 미사일 기지 등에 암호문을 보낸다. 잠수함에선 선장과 담당 장교·실무진이 복수의 인증을 하고 암호를 넣어야 한다. 지상 기지도 복수 팀이 암호를 맞춰야 발사가 가능하다. 결정부터 발사까지 5~15분이 걸린다. 일단 발사되면 되돌릴 수 없고 자폭 기능도 없다.
▶러시아는 대통령이 국방장관, 총참모장을 통해 핵 발사 명령을 내린다. 대통령이 결정권을 갖지만 실행은 총참모장이 한다. 직할 핵미사일 부대에는 직접 명령한다. 잠수함이나 지역 기지엔 인증 코드를 보낸다. 러시아는 핵 공격을 받을 때뿐 아니라 국가 안보가 위태로울 만큼 전세가 불리해도 핵을 쓸 수 있다.
▶프랑스는 대통령이 핵 가방에 보안 코드와 생체 정보를 입력해 명령을 내린다. 파키스탄도 비슷하다. 인도는 핵집행위원회에서 승인받아야 한다. 중국과 북한은 최고 지도자에게 권한이 집중돼 있다. 특히 북한은 김정은이 모든 결정권을 갖도록 법제화했다. 김정은이 비화기나 컴퓨터로 암호를 내려보낸다고 한다. 김정은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대(對)우크라이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노골적으로 핵 위협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중남부 평원이나 흑해 등지가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가설도 나온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국방장관이나 전략사령관이 위법·부당한 핵 사용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지만 만에 하나 푸틴이 진짜 미쳐서 핵 명령을 내리면 러시아 군이 항명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지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09.29 다시 북적대는 명동
코로나로 관광객이 끊기며 ‘생업 파괴의 고요’가 감돌던 서울 명동이었다. 그 명동에 드릴과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 28일 낮, 명동길은 병가를 마치고 출근을 준비하는 직장인 같았다. 공실 점포가 몇 곳 보였지만, 리모델링 공사가 요란한 점포도 여럿이었다. “이제 조금 살아난 거예요. 매출은 한창 때 비하면 한 20%? 아직 멀었어요.” 닭꼬치 노점 주인은 아직은 심드렁했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서울시 통역안내원 말은 이랬다. “오늘이 제일 많고요, 내일은 더 많을 거예요.”

▶'외국 관광객이 온다손 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도호텔-조선호텔-명동에 이르는 거리가 거지들의 전시장이자, 구걸 경연장이 됐다…' 1960년대 6월 일간지 내용이다. 그래도 6개월 후 장면(張勉) 총리는 1961년을 ‘한국 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그때 한국을 찾은 외국인은 1만명 수준이었다.
▶1990년대까지 명동을 가장 많이 찾은 외국인은 일본인이었다. 명동 관광객 중 80% 내외였다고 한다. 1997년 중국 정부가 단계적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하며 ‘유커(遊客) 시대’가 왔다. 중국인은 관광도 ‘인해전술’로 했다. 최고치를 찍은 2016년에는 807만명이 입국했다. 부산, 인천, 광주 시민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 유커는 많은 걸 바꿨다. 명동 대표 음식이 교자, 칼국수에서 ‘닭꼬치’로 바뀌었고, 명동에서 임차료가 가장 비싼 매장은 화장품 가게였다. 사드 갈등으로 큰 폭으로 줄었지만 2019년에는 600만명까지 회복하다 코로나로 발길이 끊겼다.
▶요즘 명동 관광객은 국적과 인종이 다양해졌다. 통역안내원은 “체감상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인이 가장 많고, 유럽, 미국인도 많다. 중국인은 20%쯤인 것 같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미국인 부부는 22년 만의 재방문이었다. “노스탤지어(향수)여행이다. 전에 묵었던 사보이호텔을 찾다가 깜짝 놀랐다. 같은 곳인가 싶더라. 달러 강세(strong dollar)라 한국이 마치 30%, 40% 세일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좋다.”

▲28일 낮 명동성당 근처의 카페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일랜드 관광객. /박은주기자
▶대개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친구가 한국 남자와 전통 혼례를 올릴 예정이라 2주 일정으로 왔다. 서울의 중심이라 명동에 호텔을 잡았다.”(독일) “동생이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명동 카페 커피랑 음식이 맛있다.”(아일랜드) “중국, 일본은 코로나 관련 입국 절차가 까다로워 한국에만 2주 있을 예정이다. K드라마 팬이라 더 좋다.”(독일) 한국인이 글로벌해지니 관광객도 더 다양해졌다. 출발이 좋다.
09.30 ‘한강 2.0′
1955년 상경한 아버지가 본 한강엔 백사장과 판잣집뿐이었다고 한다. 겨울 갈수기엔 50m인 강폭이 여름 홍수 땐 2000m를 넘었다. 그럴 땐 판잣집이 잠기고 사람이 쓸려 갔다. 최대 유량과 최소 유량의 비를 하상(河床)계수라 한다. 유럽의 강은 이 수치가 작아 50 안쪽이지만 그 시절 한강은 450을 넘었다. 전형적인 후진국 강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은 서울의 폐허를 목도하고 “이 나라를 재건하려면 최소 100년은 걸리겠다”고 했다. 그 예상을 뒤집고 연간 10% 넘나드는 성장률로 커가는 한국을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며 상찬했다. 정작 한강 자체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66년의 한강 개발,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1982년 시작한 한강 종합 개발은 문화 인프라까지 구축할 여력이 없었다. 올림픽도로가 뚫리며 교통은 좋아졌지만 시민의 한강 접근은 막혔다. 인구 폭증을 감당하느라 강변엔 아파트만 병풍처럼 들어섰다.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세계 각국이 LED 조명으로 우크라이나 국기를 만들어 자국 명소를 비췄다. 한 외신은 이 소식을 전하며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파리 에펠탑, 로마 콜로세움, 독일 브란덴부르크문과 함께 한강 세빛섬 사진을 실었다. 한국과 한강에 대한 세계의 인지도가 이 정도다. 경제만 잘나가던 시절엔 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강이 세계적 패션 회사와 IT 기업의 프레젠테이션 장소로 인기라는 뉴스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이탈리아 패션 업체 발렌티노, 프랑스의 카르티에가 잇달아 한강을 발표 무대로 택했다. 세계적 모델 타이라 뱅크스가 몇 해 전 한강에서 연 패션쇼는 전 세계 140나라에 중계됐다. 반포대교 아래서 사랑을 나누는 한류 드라마에 매혹된 외국 청춘 남녀는 ‘한류 명소 10′ 같은 지도를 들고 한강의 영화, 드라마 무대를 찾는다. 얼마 전 한강에 산책 갔다가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에 나오는 가면과 의상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이들도 봤다.
▶한국인이 땀 흘려 이룬 경제 기적이 ‘한강의 기적 1.0′이라면, K팝·드라마·영화가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은 한류 열풍은 ‘한강 2.0′일 것이다. 영국인들은 템스강을 ‘흐르는 역사(Liquid history)’라고 부른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시절 무역의 강이었던 위상이 20세기 국력 하강과 함께 추락했다가 21세기 테이트모던 미술관 등 미술·공연의 메카로 거듭난 것을 자랑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한강의 기적’도 3.0, 4.0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