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10/ 시진평 독재의 꿈3/ 習주석, 집권 1기 5년간 어떻게 軍을 장악했나 - 시진평 독재의 꿈 - 중국의 발전 모델은 싱가포르 - 아내 펑리위안
■習주석, 집권 1기 5년간 어떻게 軍을 장악했나
軍인사 제대로 못해본 후진타오 거울 삼아 취임전 軍에 측근 심어 부패정보 등 수집
집권후 궈보슝 등 부패 혐의 걸어 줄숙청… 빈자리엔 먀오화 등 '젊은 腹心'으로 채워
장유샤 등 軍내 태자당 세력 지원도 업고 마오쩌둥·덩샤오핑 넘어선 1인 체제 구축
지난 3일 베이징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허베이성 바오딩(保定) 중국 육군 112사단. 얼룩무늬 군복에 검은색 털방한모를 쓴 시진핑 주석이 연병장을 시찰했다. 인근 부대에서 열린 '2018년 훈련 시작 동원 대회'에서 전군(全軍) 훈련 명령을 내린 직후였다. 연병장에 세워진 99A 탱크에 탔던 그는 훈련 중인 신병 30여 명을 격려했다. 신병들은 "시 주석의 좋은 전사가 되겠다(做習主席的好戰士)"고 외쳤다.
중국 군 통수권자가 신년 벽두에 전군에 훈련 명령을 내리고 훈련 현장을 직접 둘러보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지난해 건군절(8월 1일)을 전후해 시 주석은 공식 행사에 부쩍 자주 군복 차림으로 나오고 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 말대로 집권 1기 5년에 걸쳐 군부를 완전 평정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당 총서기도 軍 장악 못 하면 '허수아비'
덩샤오핑 같은 혁명 원로 세대와 달리 관료 출신인 화궈펑·장쩌민·후진타오 등은 군부 장악이 '제1 과제'였다. 중국 국가주석은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군 최고 사령탑) 주석을 겸하는데, 중앙군사위 주석이 됐다고 해서 군이 절로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태(1989년) 직후 당 총서기에 임명된 장쩌민은 다음해 군사위 주석이 되고도 노골적으로 홀대받았다.
▲신화 연합뉴스·뉴시스·그래픽=김현지
당시 군부 실권자이던 양상쿤(국가주석)·양바이빙(중앙 군사위 비서장) 형제가 장쩌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군사위 회의를 열어 대사(大事)를 결정할 정도였다. 장쩌민은 1992년 두 사람을 축출한 뒤에야 군부를 틀어쥘 수 있었다.
후임인 후진타오 주석은 10년 임기 내내 장군 승진 인사도 제대로 못 하는 허수아비 신세였다. 쉬차이허우, 궈보슝 등 두 중앙군사위 부주석은 '상황(上皇)'인 장쩌민에게 충성을 다했다.
◇장쩌민 군맥 440명 숙청… '習 인맥'으로 물갈이
이런 실태를 꿰뚫은 시 주석은 일찌감치 숙군(肅軍)에 나섰다. 2010년 10월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임명된 지 2개월 후인 다음 해 1월, 류샤오치 국가주석의 아들로 자신의 오랜 친구인 류위안 상장(한국의 대장 격)을 총후근부 정치위원으로 승진시켰다. 군수 지원 담당인 총후근부는 군부 부패의 온상으로 꼽히던 곳. 류위안은 2012년 2월 구쥔산 총후근부 부부장을 면직한 데 이어 2014년 장쩌민 군맥(軍脈)의 핵심인 쉬차이허우와 궈보슝 2명을 부패 혐의로 제거해 시 주석의 군 기반을 굳게 다졌다.
쉬차이허우의 집에서는 뇌물로 받은 현금·보석 등 물품이 트럭 12대분 나왔다는 후문이다. 시 주석의 집권 1기 5년간 부패 혐의 등으로 숙청당한 군 장성과 고위 간부는 440명이며 조사 과정에서 장군 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 주석은 빈자리를 '시자쥔(習家軍)'이라고 하는 자기 인맥과 '젊은 피'로 교체했다. 만 11년간 해군 소장(별 1개)이던 먀오화 현 정치공작부 주임을 2012년 중장(별 2개)으로 진급시키고 다시 3년 만인 2015년 인민해방군 최고 계급인 상장(별 3개)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먀오화는 시진핑이 푸젠성장 시절부터 오랜 친분을 맺어온 복심(腹心)이다. 상장을 제쳐놓고 중장 직급자에게 각각 해군·공군·로켓군 사령관과 장비발전부장 등 중책을 맡김으로써 군부 내 영향력 강화와 물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23년 軍 통수권 경력과 태자당이 최대 友軍
시 주석이 군부 장악에 성공한 데는 그만의 경력과 배경도 작용했다. 시 주석은 대학 졸업 직후인 1979년 26세에 당 중앙군사위 판공청 비서(중위급)로 발탁돼 3년 동안 겅뱌오 국방부장 겸 중앙정치국원을 보좌했다. 또 해군과 미사일 부대 밀집 지역인 푸젠성과 저장성 등에서 성장(省長)으로 근무하면서 미사일 예비역 사단 제1정치위원과 국방동원위원회 주임을 맡는 등 23년간 군 통수권자 경력을 쌓았다.
강효백 경희대 교수는 "공산당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부터 7위 장가오리 부총리까지 모두 두세 지역의 성장이나 당서기를 지냈지만 해당 군구 통수권까지 장악했던 이는 시진핑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군부 내 태자당(혁명 원로나 고관 자제로 구성된 정치 세력)도 같은 태자당 동료인 시진핑에게 큰 힘이 됐다. 건국 원수인 예젠잉의 아들 예쉬안닝(葉選寧) 전 소장과 시 주석 아버지(시중쉰)의 고향 친구이자 전우(戰友)였던 장쭝쉰 인민해방군 상장의 아들 장유샤 현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대표적이다.
시 주석은 작년 10월 제19차 공산당 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을 11명에서 7명으로 줄여 군부 통제력을 극대화했다. 그가 마오쩌둥·덩샤오핑을 능가하는 '1인 체제'를 구축해 막강 권력자가 된 것은 이런 군부 장악 성공 덕분이 크다.
조선일보 최유식 중국전문기자
■시진평 독재의 꿈
종신집권 꿈꾸는 시진핑… 5년 만에 '1인 천하' 어떻게 가능했나
장쩌민·후진타오의 수족 차례로 쳐내
2018.02.28 조선일보
정적 보시라이 비리사건 터지자 反부패 앞세워 경쟁세력 무력화
후진타오 정권 핵심 저우융캉에 장쩌민 군부 인맥까지 사정 칼날
권력 놓는 순간 보복 당할까봐 장기집권 추진한다는 분석도
2012년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에 대한 서구의 평가는 "역대 최약체 지도자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에 과묵하고 무색무취한 그에게서 13억명을 이끌 강력한 리더십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서구 언론 평가는 그러나 완전히 달라졌다. 개혁·개방 이래 40년간 이어진 '국가주석 10년 임기제' 헌법 조항을 폐지하려는 시진핑을 그들은 '21세기 마오쩌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를 거치며 제도화된 권력 계파 간 안배와 집단지도 체제는 시진핑 주석에 의해 폐지될 처지다. 그는 어떻게 단 5년 만에 1인 종신 집권을 꿈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것일까.
첫째 동력은 시대적 배경이었다. 시진핑 정권 출범을 전후한 2010년 '아랍의 봄', 2014년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은 중국 공산당에 충격을 안겨 줬다. 부패한 독재자들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은 '지금처럼 가다간 중국 공산당도 망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겨 줬다. 그런 위기감은 부패와의 전쟁에 나설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시진핑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대형 부패 사건이 터졌다. 첫 장본인은 시 주석의 최대 후계 경쟁자 보시라이 충칭 서기였다. 그는 혁명 원로 보이보의 아들로 시진핑보다 네 살 위인 태자당 그룹의 맏형이었다.
시 주석이 권좌에 오르기 한 해 전인 2011년 그는 비리·조폭 척결을 내세워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핵심 측근인 충칭 공안국장의 미국 망명 시도, 아내의 살인 사건이 잇따라 밝혀지며 몰락했다. 그가 낙마한 2012년 3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후진타오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 당 중앙 통일전선부장의 아들이 만취 상태로 최고급 페라리 스포츠카를 몰다가 숨진 것이다. 사건 당시 차에는 알몸의 여대생 두 명도 타고 있었다. 링지화는 후진타오 주석의 비서실장이었다.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시진핑 주석은 대대적인 반(反)부패 사정으로 연결했다. '호랑이(부패한 권력층)든 파리(지위가 낮은 비리 공무원)든 다 때려잡겠다'는 시진핑 정권의 선언에 여론은 열광했다. 시 주석은 반부패 캠페인을 철저히 정치적 경쟁 세력을 척결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했다. 같은 태자당 출신인 왕치산을 사정 책임자로 앉히고 칼날을 휘둘렀다. 타깃 설정은 신중하고 전략적이었다. 상대 세력의 수장(首長)이 아니라 2인자 그룹을 노렸다. 후진타오 정권의 공안 실권자 저우융캉, 중국 군부 내 장쩌민 인맥의 대부인 궈보슝·쉬차이허우 군사위 부주석이 그렇게 날아갔다. 온갖 비리 혐의를 들이밀면서 잘라내겠다는데,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수족을 지킬 명분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당·정·군 3대 권력 집단을 자기 세력으로 물갈이했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군권은 나중에 넘겨받는 관행을 깨뜨린 그의 승부 근성은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2012년 당시 후진타오 주석은 자신의 전임자 장쩌민이 그랬던 것처럼 후임자에게 군사위 주석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시 주석은 집무를 거부하며 압박했고 후진타오는 결국 군사위 주석까지 한 번에 넘겨주고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덕분에 시진핑 주석은 취임과 동시에 군권까지 완벽히 쥔 상태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전선동에서도 그는 훨씬 더 노골적이고 과감했다. 장쩌민 주석 시절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그를 다룬 기사는 한 해 3000건이었다. 후진타오 시절은 2000건이었다. 시 주석은 무려 5000건이었다. 그는 또 인터넷을 완전히 틀어쥐고 반대 여론을 원천 차단했다. 작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그는 '2050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제시하고 " 그 같은 난제를 성취하려면 강력하고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집권 연장을 예고했다. 하지만 반부패로 인해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그가 권력이라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이 장기 집권을 노리는 또 다른 이유라는 분석도 나온다. 마오쩌둥 시대에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03.12 2958:2… '시황제 시대' 열렸다
주석 연임제한 폐지 개헌안 통과
중국, 집단지도·임기제 기반의 36년 덩샤오핑 체제 막 내리고
1인 지배 마오쩌둥 체제로 회귀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등 시진핑 주석으로의 '권력 집중'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 헌법 개정안이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에 해당)를 통과했다. 이로써 중국의 권력 구조는 집단지도체제와 임기제에 기반을 뒀던 덩샤오핑 체제가 36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마오쩌둥 시대의 1인 지배체제로 회귀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3기 전인대 3차 전체회의에서 열린 개헌안 표결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전인대가 이날 압도적 다수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시 주석은 장기 집권을 향한 길을 열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전인대는 이날 오후 3시(현지 시각)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찬성 2958표, 반대 2표, 기권 3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찬성률 99.79%다. 개헌안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표결은 반대표가 얼마나 나올지 관심사였지만, 장쩌민 전 주석의 3개 대표 사상을 헌법에 명시한 2004년 개헌안 표결 때의 반대 10표보다 적었다. 중국의 헌법은 국민투표 없이 전인대 대표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통과된다.
당초 2023년 퇴임 예정이던 시진핑 주석은 이번 개헌으로 레임덕 없는 절대권력을 구축하면서 이론상 종신 집권도 가능해졌다. 총 21개 항으로 구성된 개헌안은 국가주석 연임 제한 철폐 외에 '시진평 신시대'사상을 헌법 서언(序言)에 지도사상으로 반영해 시 주석에게 절대적인 이념적 권위를 부여했다. 또 헌법 1조에 '중국공산당의 지도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 특징이다'라는 구절을 추가해 공산당 일당독재의 정당성을 처음으로 헌법에 명시했다. 시진핑 집권 2기 반(反)부패를 이끌 수퍼 사정 기관인 국가감찰위원회를 신설하는 안도 포함됐다.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03.12 21세기 황제 시진핑의 중국, 폭력적 패권 휘두를 수 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국가 주석의 10년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시진핑 장기집권 체제의 막이 오른 것이다. 시 주석의 '시진핑 신(新)시대 사상'은 중국 공산당 당헌뿐만 아니라 새 헌법 전문(前文)에도 삽입됐다. 반(反)부패 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감찰위가 새 헌법기관으로 신설됨으로써 그의 권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중국 내에서 견제 세력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당 총서기·국가주석·중앙군사위주석을 종신토록 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시(習) 황제'가 됐다는 게 빈말이 아니다.
시 주석은 지난해 19차 당 대회에서 2035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겠다고 한 바 있다. 시 주석이 자신이 내세운 중국몽(中國夢·중국의 꿈) 완성을 위해 82세가 되는 2035년까지 집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관측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중국은 마오쩌둥 장기 집권의 폐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차차기 후계자를 내정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등을 통해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해왔다. 시진핑은 이를 모두 무너뜨리며 권력을 무한대로 키워나가고 있다. 당과 정부, 군부에서 반대 파벌이 대거 쫓겨나고 시 주석의 측근을 의미하는 시자쥔(習家軍)으로 교체됐다. 중국 인터넷에선 1인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글은 남김없이 삭제되고 있으며 '황제' 등의 단어는 금기어가 됐다. 시곗바늘을 어디까지 거꾸로 돌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시진핑은 과거 중국이 몰락한 수치스러운 역사를 아시아 패권 확립을 통해 씻으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내세우는 중국몽은 과거 '중화 제국(帝國)'의 재건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우연히 트럼프 미 대통령을 통해 시진핑의 한반도관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시진핑이 트럼프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시진핑의 역사 인식이며 한반도관이다.
시진핑이 북핵 방어용 사드 문제로 핵 피해국인 한국에 폭력적인 보복을 가하고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을 의도적으로 푸대접한 것 모두가 한·중 관계를 대등한 주권국가 간 관계로 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4년 뒤 동계올림픽을 주최하면서 평창올림픽 때 방한(訪韓)은커녕, 중국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인사를 대신 보냈다. 한반도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고 한반도를 미국과의 패권 경쟁 무대로만 보는 사람이 견제 세력 없이 1인 독재체제를 확립했다는 것은 우리의 외교·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중국은 다른 나라와의 문제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나라다. 전면 침공, 포격, 발포, 충돌을 예사로 감행한다. 그런 나라의 장기 집권 독재자가 자국에 대한 자부심·자존심이 도가 넘을 정도로 강하다. 앞으로 한반도, 센카쿠(댜오위다오), 남중국해, 대만 등의 문제에서 시진핑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주시해야 한다. 1인 독재에 대한 중국 내 비판이 커지면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시진핑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과 충돌할 경우도 예상해야 한다.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다른 나라의 내정(內政)으로만 볼 수 없다.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목전에 닥친 심각한 외교 환경 변화다. 시진핑 1인 치하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조선일보 사설
◆03.12 1에 100을 때리며 굴종 요구했던 중국
마늘파동 때 일방적 굴종 강요, 사드 때는 불투명·無道한 보복
韓에 공격적인 중국의 독재화… 1인 '변덕'에 위기 올 수도
1990년대 말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마늘 때문에 국내 마늘 농가들이 비명을 질렀다. 통마늘·깐마늘·절인 마늘이, 국산 마늘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수입돼 들어왔다. 정부는 마늘 농가 피해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2000년 6월 통마늘을 제외한 깐마늘과 절인 마늘에 대해 관세를 크게 올리는 세이프가드 조치를 내렸다.
중국의 대응이 기가 막혔다.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전면 중단시켰다. 당시 한국의 중국산 마늘 총수입액은 연간 1000만달러 정도. 그에 비해 한국 전자업체들이 중국으로 수출하는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출액은 연간 6억7000만달러가 넘었다. '1000만달러'에 대한 대응이 '6억7000만달러'였다.
중국은 이런 나라다. 국가 간 무역 분쟁에서 보복 조치를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3~4배로 대응하는 것도 과하다 할 수 있다. 중국은 67배로 갚겠다고 했다. 통마늘은 수입 제한 대상이 아니었으니, 실제로는 100배쯤 되갚겠다고 한 것이다. 한국 무역 분쟁사(史)에서 이런 예는 없었다. 정상적인 국가 간 협상이 아니라 일방적인 굴종을 요구했던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이해와 상충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 비슷한 행태를 반복했다. 사드 배치 결정 후 내린 한한령(限韓令)과 한국으로의 단체관광객 차단, 중국에 공장을 지은 한국 기업의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판매 봉쇄, 롯데마트 영업 정지가 그런 사례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가 일시에 중국 TV에서 사라졌다.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는 드라마·영화 제작도 중단됐다. 그 과정에서 어떤 공식적인 법적·행정적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중국 당국은 "한한령이라는 건 없다", "민심이 반영된 결과일 뿐"이라고 했다. 단체관광객 차단 때도 똑같았다. 그러나 중국의 그런 민심은 너무나 일사불란하게 나타났다. 중국은 투명성과 합리(合理)가 없다. 어떤 법 절차에 따라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고, 설명도 없다.
이런 비합리와 불투명성,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폭력적 패권 성향을 드러내는 중국이 1인 독재체제로 변하고 있다. 몇 개의 정치세력이 상호 견제하고 조율하던 집단지도체제는 와해됐다. 시진핑 주석은 경쟁자 없이 당·정·군 3권(權)을 모두 장악했다. 사상은 더 통제하고 있다. 국가 주석의 임기 제한까지 철폐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인구 14억의 지구상 최대·최강의 독재국가 등장은 세계 각국에 큰 리스크일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수석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독재는 국가 전체를 한 사람의 견제되지 않는 변덕에 노출한다"고 했다. 잘못된 정책 결정이나 오판에 제동을 걸고 스크린하는 내부 시스템이 약화되기에 그렇다. 독재는 한 사람의 판단과 변덕이 시스템을 압도한다.
마오쩌둥의 오판과 변덕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라는 비극을 낳았지만, 그건 중국 내부에 그쳤었다. 지금 중국은 죽(竹)의 장막을 치고 있던 마오의 시대가 아니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자 군사 대국이다. 한 사람의 오판과 변덕으로 전 세계가 '중국 리스크'에 휩싸일 수 있다는 말이다.
독재체제는 목적과 효율을 위해 인권과 합리,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다. 중국은 지난 30년간의 굴기 과정에서 국가 자원의 계획적인 배치,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고도의 효율성을 보였다. '시진핑 1인 체제'의 중국은 목적을 위한 효율은 더 강조될 것이고, 합리와 정당성은 더 약화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그런 양면성을 가장 가까이서 상대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조중식 국제부장
◆03.12 마오쩌둥 비서의 목숨건 비판 "시진핑 종신제 원하나"
중국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 폐지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99.79%에 가까운 찬성으로 가결된 것과 관련, 한때 마오쩌둥(毛澤東)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비서가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고 나서 주목받고 있다.
명보 인터뷰서 "베트남,쿠바도 변했는데 중국, 북한만 남아"
"인민일보 매일 헛소리만 해" 관영매체에도 쓴소리
마오쩌둥 비서를 지낸 리루이(李銳) 전 공산당 조직부 상무부부장은 11일 홍콩 명보와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은 종신제를 원하는 것 같다”며 “베트남과 쿠바도 변했지만, 중국과 북한만 남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3차 전체회의에서 2964표 가운데 찬성 2958표, 반대 2표, 기권 3표, 무효 1표로 국가주석 3연임을 금지하는 조항을 폐기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직전 개헌인 지난 2004년 장쩌민 전 주석의 ‘3개 대표론’과 사유재산권 강화 등을 반영한 4차 개헌안 표결의 찬성률(99.1%)을 훌쩍 뛰어넘은 결과다.
리루이는 “서방국가들은 개인숭배를 경계하지만, 중국은 공자의 영향으로 쉽게 개인숭배를 만들어 낸다”며 “소련은 붕괴했지만 중국 전통과 문화 덕에 공산당은 보존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쿠바와 베트남도 변화했지만, 중국과 북한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중국 관영 매체들이 잇따라 헌법 수정안을 옹호하고 나선 데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그는 “현재 모든 성의 간부들은 시진핑을 옹호하고 신문은 매일 (시진핑을) 치켜세운다”며 “인민일보(人民日報)가 매일 헛소리만 해 읽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됐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의 비서를 지낸 전 공산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리루이. [홍콩 명보 캡처]
그러면서 “현재 시진핑을 포함한 일부 세력들은 마오쩌둥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며 “마오쩌둥이 무너지는 순간 시진핑 역시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2016년 정부의 압력으로 진보 월간지 옌황춘추(炎黃春秋)가 폐간된 데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드러내며 “(중국 당국이) 언로를 넓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04.04 김정은 ‘황제 대접’ 뒤에 숨은 중국의 세계전략
번개와 파격이라는 말이 딱 맞다. 거의 ‘황제 대접’에 가깝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중국 방문 얘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이었고 중국이 그렇게 파격적인 예우를 할 줄 몰랐다. 이후 국제사회는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복잡한 방정식 풀기에 바쁘다. 김정은의 ‘번개 방중’을 보는 트럼프의 주산판, 북한의 향후 전술, 중국의 속셈, 일본과 러시아의 심산, 그리고 한국의 집념과 전략까지 어우러진 고차원 방정식이다.
북핵 문제 차이나 패싱 막고 절대 권력 체면 세워
시진핑 절대 권력 첫 외교 시험대...'실용 외교' 계속될 듯
그러나 이 복잡한 바둑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하나가 있다. 예전과 다른 중국의 대외 행보다. 김정은의 방중을 번개처럼 성사시킨 걸 보면 이전 중국과 뭔가 다르다. 그런 변신이 북핵 이후 동북아 정세, 나아가 국제 질서에 어떤 충격을 가져올 지 살펴봐야 한다.
▲시진핑 주석(우)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 신화망]
지난 3월에 열린 전인대(全人大· 국회 격)는 중국 헌법을 개정해 국가 주석 임기 제한 규정을 없앴다. 시진핑 주석에게 종신 집권의 길을 터준 거다. 덩샤오핑 이후 30년 넘게 유지돼온 집단지도체제가 1인 권력 체제로 회귀했다는 의미다. 중국은 이제 절대권력을 향해 일렬종대로 편성된 국가 지배 체제의 국가다. 절대 권력은 협상과 합리 그리고 소통보다는 일반성과 획일성 그리고 힘의 논리에 익숙하다.
국가 자원을 일사불란하게 집중시켜 정책 수행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정책 결정과 시행 과정에서 오는 오류는 덮고 가기 쉽다. 절대 권력의 권위와 체면에 누가 되는 언행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오류가 축적돼 폭발하면 혼란과 파국으로 치다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시진핑 체제가 안고 있는 장점과 단점은 어느 쪽이든 국제 사회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 부부(좌)를 환송하는 시진핑 주석 부부 [사진 조선중앙통신]
절대 권력은 권위의 손상을 두려워한다. 김정은의 방중이 ‘번개’처럼 이뤄진 배경에는 북핵 문제 못지 않게 시진핑의 절대 권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 근거다. 평창 동계 올림픽으로 시작된 남북 대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발표는 자연스럽게 북핵 문제에 있어 ‘차이나 패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황제 권력을 막 완성한 시진핑 주석에겐 날벼락이자 ‘쪽팔림’이 아닐 수 없다. 북미 정상회담 발표 직후 중국이 서둘러 김정은의 방중을 강행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번개팅’ 성사를 위해 중국은 북한을 상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채찍과 당근을 동원했을 것이다. 북한은 향후 대미 비핵화 협상에서 활용 가치가 큰 ‘중국 지렛대’ 카드가 싫지는 않았을 터다. 다시 말하면 김정은 방중으로 중국은 북핵의 차이나 패싱을 막고 절대 권력의 체면을 살렸다. 그리고 북한은 향후 북핵 협상에서 미중 모순을 활용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새 카드를 얻었다
▲김정은 전용 열차에서 김정은과 대화하는 쑹타오 중국 대외연락부장(우)[사진 조선중앙통신]
김정은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과거와 분명 달랐다. 잠시 시간을 2013년 5월로 돌려보자. 당시 김정은은 자신의 최 측근인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중국에 특사로 보냈다. 하지만 시진핑은 군인이었던 최용해에게 군복을 벗고 인민 대회당으로 오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진핑은 최용해가 전달한 김정은의 친서를 열어보지도 않고 옆에 있던 당시 양제츠 국무 위원에게 던지듯 넘겼다. 그리고 1시간도 못 되는 회견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해 2월 북한의 제3차 핵실험에 대한 시진핑의 불편한 심기는 그렇게 차가웠다.
그러나 이번 김정은 방문에는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 왕후닝 정치국 상무위원, 왕치산 부주석 등 중국의 최고 지도부가 총출동해 파격적인 의전을 이어갔다. 거의 ‘시 황제’에 준하는 ‘황제 대접’을 했다. 시 주석은 김정은의 베이징 24시간 중 무려 8시간을 김과 함께 했는데 이는 중국 외교사에서도 보기 드문 파격 의전이다.
▲김정은 부부에게 차를 대접하는 시진핑 부부 [사진 조선중앙통신사]
그럼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 한 마디에 김정은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 북핵이 대화 국면으로 돌아선 건 환영이지만 북한의 저의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의 비핵화까진 갈 길이 멀다는 걸 모를 중국이 아니다.
작금의 중국에게 더 중요한 건 북핵 문제가 갖 출범한 시진핑 절대 권력의 첫 외교 시험대라는 점이다. 만약 중국 주도로 북핵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간다면 시진핑 절대 권력은 더 강한 탄력을 받을 것이다.
반면 차이나 패싱이 현실화되면 시진핑 주석이 부르짖는 중화 부흥의 동력은 떨어지고 그의 국내 통치 기반도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마뜩잖은 김정은에게 ‘황제 대접’을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시진핑 절대 권력의 역설이다.
▲김정은 부부를 맞는 시진핑 부부 [사진 조선중앙통신사]
황제 권력과 권위를 수호하기 위한 중국의 파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완력이고 때로는 비상식이 그 파격의 이름으로 위장할 것이다. 물론 중국은 이를 국익을 위한 실용 외교라 부른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당장 한국에겐 사드 보복 문제가 그렇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으로 해결된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다. 그건 착시고 착각이다. 주중 한국 기업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롯데 등 한국 기업에 대한 제재도, 한류 콘텐츠 방송 통제도, 중국 단체 관광객의 한국 방문 억제도 사드 보복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그 이유를 중국의 한 교수에게 물었더니 답이 이랬다. “사실 사드 보복 결정은 시진핑 주석이 했다. 따라서 보복 해제도 시 주석이 풀어야 한다. 한데 그의 권력이 워낙 강해지다 보니 아무도 그에게 이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 집단 지도 체제 시절에는 다양한 채널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면 협의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시 주석 목에 방울을 달려고 안 한다.” 리커창 총리가 직접 나서 평창 동계 올림픽에 중국 관광객을 많이 보내겠다고 약속해도 지켜지지 않은 이유가 시진핑 절대권력에 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절대 권력 폐해의 첫 번째 희생양이 한국이돼 버렸다. 이 같은 중국의 비 상식적 행보가 한국 외교에 ‘상수(常數)’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 전쟁이 시작됐다 [사진 중금망]
북핵이 대화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한반도에 봄이 왔다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지만 국제 정세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중국 발 신 냉전도 가시권 내에 들어와 있다. 당장 미중 무역 전쟁이 걱정이다. 미국이 중국 제품에 대해 500억 달러의 보복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도 30억 달러 대미 보복 관세를 부과하며 버티고 있다. 중국은 대화와 맞대응을 병행하고 있지만 미국이 강공을 할수록 밑질 게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중국의 절대 권력은 미국과의 대결에서 양보는 패배이고 국내 권력 기반 와해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중국해 영토 분쟁과 대만 문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토 분쟁 등에서 그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중 스파이 독살 문제로 촉발된 영국과 러시아 대립이 서구와 러시아의 외교관 추방전으로 악화되고 있다. 동병상련의 중국과 러시아가 연합해 서구와 맞서는 신냉전 시나리오가 곧 방송될 태세다. 중화부흥을 부르짖고 미국과 일전을 벼르는 시 주석이 이런 국제 형세를 마다할 리 없다.
▲김정은 중국 방문을 보도한 인민일보 [사진 인민일보 캡처]
중국은 강해지는 군사력을 믿고 있다. 리커창 총리는 지난 3월 전인대 정부 업무 보고에서 올 국방예산을 작년보다 8.1% 늘어난 1조 1100억 위안(약 190조원)으로 책정했다고 밝혔다. 지난해(1조 443억 위안)에 이어 2년 연속 1조 위안을 넘는 수치고 한국 국방 예산(43조원)의 4.4배, 한국·일본(52조5000억원)·인도(67조원)의 국방예산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
그 돈으로 첨단 무기를 집중 개발하다보니 군사 강국은 말이 아닌 현실이 됐다. 중국의 국방예산은 2011~2015년 5년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며 가파르게 증가하다 2016년 7.6%, 2017년에는 7%로 29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이 작년 10월 중국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2050년 세계 일류군대'를 국가지표로 제시하자 올해부터 팽창 예산으로 돌아섰다.
▲중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힘의 외교를 하고 있다 [사진 바이두 백과]
중국의 국방예산은 미국(6920억 달러)의 4분의 1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의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중국이 공개하는 국방예산에는 정부의 각종 지원금, 전략미사일 부대 및 핵 운용 부대 관련 자금, 우주 프로그램 예산, 지방전구(戰區) 운용 비용 등이 빠져 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숨은 예산'을 포함하면 중국의 실제 군사비는 공개된 수치보다 55% 더 많은 300조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 국방 예산의 6배 이상이다.
군사력이 커지면 자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 완력 자랑 대상에서 한국은 빠지지 않는다. 이미 그 대상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군함은 지난해부터 올 2월까지 서해에서 한·중 양국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중간선을 100여 차례 넘어왔고 군사용으로 추정되는 부표까지 설치했다. 3월엔 중국 군용기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해 울릉도 서북방 55㎞ 지점(영해 경계 기준 33㎞)까지 날아와 정찰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 대한 군사 도발을 통해 한미 연합 전력의 대응 태세를 테스트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핵 문제가 대화로 해결되는 기적(?)이 온다 해도 시진핑의 절대 권력이 가져올 ‘차이나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 한국은 차이나 리스크를 헤징하고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짜야 한다. 시진핑 절대 권력이 가져올 거친 행보에 태클을 걸 힘을 길러야 한다. 대중 외교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재 검토가 필요하고 한미 동맹은 물론 주변국과 협력을 강화해 대중 외교 카드도 늘려야 한다. 물론 다양한 채널에서 중국과의 소통 강화는 필수다. 한국은 지금 북핵 대화 훈풍에 가슴 설레고 있을 때가 아니다.
베이징=차이나랩 최형규
04.05 中國夢이 촉발한 美·中 무역전쟁
中 경제성장하면 민주화할 것, 낙관론 비웃듯 '1인 독재' 치달아
'독재+市場경제' 확산될 우려도… 무역 전쟁 결과에 국제 질서 달려
'중국 버블 붕괴' '고립해 자멸하는 중국' '단말마의 중국 경제'….
일본 서점가에 깔려 있는 '중국 붕괴론' 관련 서적들이다. 기자가 도쿄 특파원으로 4년간 일본을 취재하면서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 일본에 만연한 '중국 붕괴론'이었다. TV 시사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중국이 곧 망한다는 주장이 수시로 등장했다.
빈부 격차, 공산당 부패, 소수민족 문제, 부동산 거품 붕괴, 환경오염 등으로 중국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체제 불만과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을 침공한다는 '중국 위협론'도 빠지지 않았다. 일본방위백서에도 이런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보다 더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중국을 벤치마킹하자'는 주장을 한국에서 수시로 접했던 기자는 일본의 '중국관'이 무척 낯설었다. 중국 붕괴론이 일본에서 맹위를 떨치는 것은 아시아 맹주 자리를 내준 상처 난 자존심, 영토 갈등, 군사 동맹 미국 쇠퇴의 불안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도쿄에서도 요즘 '중국 붕괴론의 붕괴'가 화제이다. '중국 붕괴론'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로 끝나가면서 국익을 위해서라도 편견 없이 중국을 보자는 반성론이 나온다. '세계를 좌우하는 중국론'도 등장했다. 일본 대표 경제신문 니혼게이자이는 '중국화가 진행되는 세계'라는 연재 기사를 내보냈다. 14억 인구와 막강한 경제력으로 지구촌을 좌우하는 중국을 보여주는 기사들이다.
한국이 당한 사드 보복은 빙산(氷山)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관광, 무역, 경제 지원, 군사력을 지렛대로 아프리카·중남미는 물론 일본, 미국, EU에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일부 영화 제작사와 언론조차 중국의 압력에 굴복, 중국 비판적 콘텐츠를 포기하고 있다.
중국의 급성장 덕분에 '근접 국가' 한국은 수출과 관광객 증가 등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누렸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에 비해 '중국 낙관론'과 '친중(親中)적 시각'이 강하다. 하지만 G2를 넘어 미·중(美中) 역전론까지 나오는 상황에 대해 경제적 계산기만 두들기고 있을 수는 없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단기간에 성취한 한국은 경제적 이익만을 우선하는 '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이 아니다.
세계 최강국을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은 자유 민주주의, 인권 중시, 국제법 존중 등 인류가 쌓아오고 추구해온 '이상적 가치'를 허물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가 더 개방적으로 바뀌고 결국 인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중국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중국의 경제 기적은 결국 '1인 독재'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모바일, 인터넷, 공유경제 등 첨단 미래 산업은 자유의 공기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도 허물어지고 있다. 알리바바, 바이두, 텐센트 등 전 세계 유니콘(10억달러 넘는 스타트업 기업) 3분의 1이 중국 기업이다.
인터넷을 통제하고 인권을 제한하고 힘으로 국제 질서 변경을 시도하는 국가가 글로벌 경제를 좌우하고 미래 산업까지 주도한다면 '자유 민주주의+시장경제' 모델의 효율성과 우월성을 누가 믿겠는가. 이미 중국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국가들에 '독재+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중국 모델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최근 발발한 미·중(美中) 무역 전쟁은 중국몽에 대한 미국의 본격적 반격이다. 무역전쟁의 결과에 따라 경제주도권뿐만 아니라 국제 질서와 '이데올로기'의 판도도 바뀔 수 있다.
차학봉 산업1부장
07.05 1인체제 넘어 개인숭배로… '시진핑 사상 열차' 까지 등장
창춘시 운행… 객실에 어록 도배
▲지난 1일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서 첫선을 보인 '시진핑 사상 열차'의 내부 벽면에 '모두가 먹고 살 만한 사회(소강사회) 건설을 반드시 이루어내자(決勝全面建成小康社會)' 등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 말이 새겨져 있다. /중국 웨이보
중국 지린성 성도인 창춘시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어록으로 도배된 '시진핑 사상 열차'가 등장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4일 보도했다.
임기제 폐지, 시진핑 사상의 헌법 명기를 통해 1인 지배 체제를 굳힌 시 주석에 대해 개인숭배까지 본격화되고 있는 신호로 해석된다.
SCMP에 따르면 시진핑 사상 열차의 객실은 창문이 있는 측면뿐만 아니라 천장과 좌석이 모두 붉은색이다. 그 붉은 바탕 위에 '不忘初心 牢記使命'(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는 등 시 주석의 주요 어록과 정치적 구호들이 노란색 서체로 새겨졌다.
이 사상 열차는 창춘시 정부가 중국 공산당 창당 97주년 기념일인 지난 1일부터 운행하기 시작했다. 창춘시 정부는 이 열차에 대해 "시진핑 사상을 집약해 놓은 정신적 매뉴얼"이라고 설명했다.
조너선 설리번 영국 노팅엄대 중국 정책 연구소장은 SCMP 인터뷰에서 "중국 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1면에 매일 시 주석 관련 기사가 올라오고, 모든 연구소가 시진핑 사상 연구에 몰두하고, 지하철이 시진핑 어록으로 장식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신호"라면서 "마오쩌둥 이후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인숭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고 지도자의 특정 사상이 인민의 모든 생활 영역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의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시 주석은 지난해 10월 중국 공산당 당 대회에서 총서기로 재선출됐고, 올해 3월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 3연임 제한 조항까지 삭제해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또 공산당 당장(黨章)과 헌법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시진평 신시대 사상'을 명기 했다.
이후 시진핑 신시대 사상은 '시진핑 경제 사상' '시진핑 외교 사상' 등으로 확대되며 1인 체제를 확고히 하고 있다.
중국 전역에서는 시진핑 사상 학습 붐이 일고 있다. 각급 학교 학생들이 시진핑 사상을 학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대입 수학 능력 시험인 가오카오의 논술(작문) 시험에서 시진핑 사상과 관련된 문제들이 다수 출제됐다.
조선일보 베이징=이길성 특파원
월간조선 08월 호
■시진핑 시대 중국의 발전 모델은 싱가포르
⊙ 淸史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임계순 교수, 《중국의 미래, 싱가포르 모델》 출간
⊙ 1978년 싱가포르의 발전상에 충격받은 덩샤오핑, “내 꿈은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1000개 세우는 것”
⊙ 중국-싱가포르, 쑤저우공업단지, 톈진생태도시, 광저우 지식도시 합작 건설… 싱가포르의 도시발전·관리·운영, 사회보장·조직관리·서비스·체계 등 전수
⊙ “시진핑, 싱가포르 본받아 부패척결 등 달성한 후 리콴유처럼 ‘上皇’이나 ‘資政’으로 물러나 영향력 행사할 것”
▲쑤저우공업단지는 싱가포르의 경제·사회개발경험이 중국에 처음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사진=조선일보DB
임계순(任桂淳·73)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는 청사(淸史)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기자는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가 쓴 《만주족의 역사》라는 책을 읽다가 임계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임 교수는 청나라의 핵심 무력(武力)이었던 팔기(八旗)의 지방 주둔군인 ‘청조만주팔기주방(淸朝滿洲八旗駐防)’에 대한 연구로 특히 유명하다.
그런 임 교수가 최근 《중국의 미래, 싱가포르 모델》이라는 책을 펴냈다.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이 책이 나온 때는 마침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의 미북(美北)정상회담으로 세계의 이목이 싱가포르에 집중되어 있던 무렵이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와 2부는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 역대 정권, 특히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싱가포르 모델에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는 사실과 함께 중국-싱가포르 합작으로 건설된 쑤저우(蘇州)공업단지, 톈진(天津)생태도시, 광저우(廣州)지식도시 등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3~5부에서는 중국의 모델이 되고 있는 싱가포르의 국가경영과 정체성(正體性) 확립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발간 이후 여러 매체의 서평란에서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으며, 6주 만에 2쇄 인쇄에 들어갔다.
중국의 발전에 대한 책이나 리콴유(李光耀·1923~2015. 재임 1959~1990) 전 총리와 싱가포르에 대한 책들은 좀 읽어보았지만, 두 나라를 접목(接木)한 책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세계 2위의 경제강국으로 부상(浮上)한 중국도, 작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부국(富國)이 된 싱가포르도 더 나은 미래,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야말로 표류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서초동 남부버스터미널 인근에 있는 임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을 원활하게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 형식을 지양(止揚)하고 내용을 정리했다. 《중국의 미래, 싱가포르 모델》의 순서와는 달리 중국이 모델로 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사례를 앞에, 중국의 사례를 뒤에 제시한다. 싱가포르의 경우는 현재 한국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만한 제도와 정책들을 위주로 소개한다. 중국의 경우는 쑤저우·톈진·광저우 합작사례, 시진핑 정권하에서 중국의 정치개혁 가능성 등을 주로 보여주기로 한다.
1978년 11월 중국의 덩샤오핑은 부총리 자격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이때 덩샤오핑은 1918년 프랑스로 유학 가는 길에 들렀던 싱가포르는 낙후한 항구도시에 불과했는데 아주 깨끗하고 선진적인 도시로 변모한 것을 보고 놀랐다. 74세의 덩샤오핑은 아주 격앙된 심정으로 리콴유 총리에게 싱가포르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리콴유는 이렇게 말했다.
“싱가포르에 온 중국인들은 모두 광둥성이나 푸젠성에 한 뼘의 땅도 없었던,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노동자들의 후예입니다. 중원(中原)에는 관리, 문인, 학사, 장원(壯元)의 후예들이 많은데, 싱가포르같이 만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중국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만들어도 이보다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싱가포르가 외국자본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와 싱가포르의 경제건설과 사회관리를 보고 온 덩샤오핑은 이후 싱가포르를 거울삼아 국가를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중국의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 1000여 개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개국공신으로 재무부 장관·국방부 장관·부총리 등을 역임한 고켕스위(吳慶瑞·1918~2010)를 1985년부터 중국 국무원 경제고문으로 초청, 직접 싱가포르의 경험을 받아들였다. 고켕스위는 6년간 중국의 첫 외국 고문으로 활동하며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와 샤먼(厦門) 4곳의 경제특구 발전과 세계 각국 기업들의 생산 공장 유치 및 관광산업에 관해 조언했다.
난양이공대학은 중국 공산당 ‘해외당교’
경제개혁의 선두 지역인 선전 특구는 처음에는 홍콩을 모델로 삼았으나 곧 싱가포르를 본보기로 배우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싱가포르의 잘 확립된 사회질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선전의 지도자들은 이때부터 ‘싱가포르를 배우자’는 열풍을 급속도로 확산시켰다.
1993년 싱가포르 총리직에서 물러난 리콴유 선임장관은 쑤저우공업단지를 합작 개발하는 데 싱가포르의 경험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이후 처(處)급 이상의 중국 간부 1000여 명이 싱가포르에 가서 법·제도, 시구(市區)의 구획·발전과 관리, 외국투자, 업무기술 훈련, 사회보장과 고객 서비스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합작과 투자뿐만 아니라 1992년부터는 싱가포르 난양이공대학이 중국 공산당 간부의 연수기지가 되었다. 난양이공대학은 중국 간부들을 위해 다양한 레벨의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고급반을 위해서는 전·현직 각료들이 강사로 나섰다. 때문에 난양이공대학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의 ‘해외 당교’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중국 중간층 간부들 사이에서는 “당신 싱가포르에 갔다 왔나?”가 인사말이 될 정도로 많은 간부가 싱가포르에서 연수를 받았다. 1992~2012년 난양이공대학에서 연구한 중국 간부의 수는 1만3000여 명에 달한다. 난양이공대학 이외의 학교나 기관에서 연수·교육받은 중국 간부의 수는 2만여 명이 넘는다.
중국이 싱가포르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국 지도자들이 싱가포르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싱가포르가 권위주의 사회이면서도 경제 수준과 시민생활 수준은 매우 양호하고, 관료사회가 청렴하며, 사회질서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이러한 성과가 나온 것은 서양식 민주주의가 아닌 일당 장기 집권체제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그 밖에 중국이 싱가포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싱가포르는 인구 74% 이상의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간 화인(華人·중국인) 사회다. 싱가포르의 아시아적 가치관, 난양이공대학에 가면 중국어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친밀감과 공동체 의식이 중국 관료들로 하여금 싱가포르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싱가포르의 총리 리콴유가 뛰어난 지도자라는 점이다.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 50여 년간 장기집권하고 있지만 관료의 청렴도는 아시아에서 으뜸이다.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多民族)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민족 간 갈등이 거의 없었다. 경제 상황이나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양호하고 사회 노령화에 대한 준비 또한 잘 되어 있다. 리콴유가 어떻게 싱가포르를 이런 국가로 건설하고 관리하였는가가 중국 지도자들이 배우고 싶은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중국 지도자들은 작은 섬나라로 제3세계 개발도상국이었던 싱가포르가 선진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서양 모델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여 ‘경제가 먼저이고 민주는 나중’이라는 싱가포르 정황에 맞는 노선을 선택한 결과라고 보았다. 중국 공산당 정권도 ‘중국식의 사회주의’를 기치로 하여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을 우선하기 때문에 ‘싱가포르 모델’에 더욱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일당이 장기집권하는 싱가포르식의 정치운영은 국가가 개방의 진전 과정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집권당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당내(黨內) 정치를 조정·처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지도자들이 ‘싱가포르 모델’에 대하여 친근감과 매력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싱가포르는 엄격하게 법치를 실현하여 공직자들이 청렴과 효율을 유지하기 때문에 “정책을 실행하여 효과를 보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중국에서도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이 효과를 보려면 싱가포르식으로 중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부터 척결하고 법치국가를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 지도자들은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도박장도 건립하는데, 무엇인들 못하랴”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호텔. 마리나베이와 센토사 개발로 싱가포르는 새로운 활력을 얻기 시작했다. 사진=조선일보DB
싱가포르의 선거제도는 서방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다소 불공평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거는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반대당이 있다. 5년마다 치르는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선거를 통해 선거구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집권하고 있다.
인민행동당 정부가 건국 이래 국가발전에 성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속 국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리콴유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실용주의(實用主義)’ 노선 때문이다. 홍콩의 사오루산(邵盧善) 사회정책연구고문유한공사 총재는 “리콴유는 어떤 주의나 어떤 국제적 표준을 높이 주창하지 않았고 다만 국가의 필요에 따라 번영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다수 국민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즐겁게 일하게 했다”고 말한다.
리콴유를 위시한 지도자들은 전통에 매달리거나 맹목적으로 서방 민주주의 모델을 복사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그들에게 적합한 제도를 찾아 연구하고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또한 그들에게 적절하게 응용하면서 그들의 상황에 적합한 제도를 창조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리나베이에 건설한 20만m2 넓이의 도박장이다. 2000년대 초 싱가포르의 관광산업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외국 관광객들이 싱가포르에 머무는 시간은 사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싱가포르 정부는 2005년 센토사와 마리나베이에 도박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싱가포르에 도박장은 절대로 건설하지 않겠다던 국부(國父) 리콴유의 선언을 뒤집는 조치였다. 리콴유도 경제발전을 위해 이에 동의했다. 2009년, 2010년 개장한 두 휴양지는 3만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마리나베이와 센토사의 성공은 싱가포르 자체의 개조와 변화를 촉진했다. “도박장도 건립하는데, 무엇인들 못하랴” 하는 도전정신은 싱가포르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세계도 싱가포르의 높은 효율성과 실무체제, 경제적 활력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이는 싱가포르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다.
사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조화
싱가포르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경제운영에서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리콴유를 중심으로 한 인민행동당 설립자들은 당초 영국의 노동당과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ety)의 영향을 받았다. 리콴유는 정치적 안정은 미래의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고, 국민들의 높은 생활 수준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국가의 사회경제생활에서 거시적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공정성과 사회정의를 견지하며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수준·교육·취업·주택·의료 등을 보장하는 ‘싱가포르 특색의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리콴유는 국가가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는 대신 국민들은 일치단결하여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며, 대신 이에 따른 모든 결실을 국민 모두가 공유(共有)하도록 했다. 리콴유는 취약한 그룹에게 교육·주택·공공보건·의료에 보조금을 제공하기 위해 국민수입이 반드시 적당하게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정부는 국민의 복지를 위한 중앙공적금 제도와 주택소유권 제도를 추진했다. 취약계층들이 주택을 소유하고, 자녀교육의 혜택과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중앙공적금 제도다. 이는 고용주와 노동자가 매월 노동자의 월급에 비례하여 일정액씩 강제적으로 저축하여 조성한 기금이다. 중앙공적금 가운데 의료계좌는 한국의 건강보험과 기능이 비슷하지만, 일반계좌는 주택 구매나 교육은 물론 투자 등에도 사용할 수 있다. 특별계좌는 양로와 은퇴 관련 상품 투자나 비상 시 목적으로 사용한다. 55세 이후에는 은퇴계좌를 개설한다. 노사(勞使)가 함께 기금을 조성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국민연금이나 국민건강보험과 흡사하지만, 국민들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또 자기 책임 아래 운용하기 때문에 유럽의 복지제도처럼 국민을 정부에 의타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여기에서도 국민들에게 주택·의료·교육 등 기본적인 복지와 기회균등은 보장해 주는 한편, 자유·경쟁·효율도 강조하면서 각 개인에게 전력을 다하도록 요구하는 싱가포르식 사회민주주의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변하겠느냐, 죽겠느냐”며 勞組 설득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노조(勞組)를 설득하고 순치(馴致)시킬 수 있었다. 건국 초기 리콴유는 “변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만약 이렇게 하면 집을 가질 수도 있고, 자녀들이 학교에 갈 수도 있고,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리콴유는 외자(外資) 유치 등에 도움이 될 수 있게 노동법·고용법·노동조합법을 개정했다. 조합원들은 파업하기 전에 투표를 해야만 했다. 대신 리콴유는 부패가 없는 청결한 도시국가, 범죄가 없는 살기 좋은 나라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노조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싱가포르산업노조(SIGO), 선진산업 고용노조(PIEU) 등 좌익 성향의 노조들은 도태되고, 정부에 협조적인 전국노동조합총회(National Trade Union Congress·약칭 전국노총)가 뿌리를 내렸다.
1972년에 정부는 고용주·노조·정부대표로 구성된 국민임금협의회(National Wage Council)를 만들었다. 국민임금협의회는 임금체계 유연화, 공정한 고용규칙, 고용창출의 문제 등 모든 노동현안을 대화로 풀어 정책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만든 심의체였다. 여기에서 “결코 임금인상이 노동 생산성 증가율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원칙이 마련되었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의 논의에 대해 싱가포르는 돈을 벌어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국민 모두의 원칙으로 삼았다. 국민임금협의회의 임금결의안은 고용주는 물론 대다수 노동자의 지지를 얻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노조를 동반자로 인정하면서 노조의 교육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노조의 운동방향이 정부 정책을 수렴하도록 주력했다.
민주주의도 수단일 뿐
▲고촉통 전 총리와 리셴룽 현 총리는 리콴유 밑에서 오랜 정치수업 기간을 거쳐 총리직에 올랐다.
이런 실용주의 때문에 싱가포르에서는 민주주의조차도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리콴유와 인민행동당 지도자들은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서양 문화에 바탕을 둔 서구민주주의가 반드시 모든 국가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의 안정과 질서가 민주주의나 인권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콴유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입각하여 통치해 왔으며,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했다는 비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리콴유는 후계자를 선정할 때, 기성세대와 생각이 다른 젊은 세대의 동향을 잘 파악하여 결정해야 하며, 새 지도자가 현 장관들과 팀을 만들어 팀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제2대 총리 고촉통(吳作東·재임 1990~2004)이나 제3대 총리 리셴룽(李顯龍·재임 2004~) 모두 장기간에 걸쳐 각료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리콴유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 고문장관(mentor minister)으로 내각에 남아 후임자들을 지켜보면서 조언했다. 이렇게 후계자 선정에 있어 정책의 일관성·연속성을 중시하고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유지했기 때문에 싱가포르는 일류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국방, 원칙 중시하는 외교
싱가포르가 추구해 온 실용주의가 잘 나타나는 부문 가운데 하나가 국방이다. 싱가포르가 총병력 35만명(직업군인 2만명, 의무복무병 4만5000여 명, 상근예비군 25만명, 민방위대 2만3000명, 경찰 1만2000명)에 달하는 강군(强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상비군과 예비군을 조화시킨 병력 구조를 비롯해 소수정예로 구성된 장교단, 효율적인 방위산업 등은 이스라엘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싱가포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나라들에 둘러싸인 싱가포르는 건국 초기부터 비밀리에 이스라엘로부터 군사고문단을 받아들여 국방력을 건설했다. 국토가 작아 군사훈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육군은 대만과 미국에서, 공군은 미국 등에서 훈련받고 있다. 《제인정보리뷰》는 “싱가포르 군대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가장 잘 장비를 갖추었으며, 잠재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군대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제적으로도 국익(國益)을 추구하는 실용주의 원칙을 고수해 왔다. 정부는 외국 기업의 이권을 법으로 보장하고 불공정한 간섭을 하지 않음으로써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여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이념·종교·정치체제와 상관없이 모든 국가와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역대 싱가포르 외무장관들은 지적 능력과 교양, 국제전략에 대한 식견 등이 뛰어난 것으로 국제 외교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면서도 싱가포르는 외교정책에서 원칙과 신의를 고수하는 것을 중시해 왔다. 싱가포르는 국방력 건설 과정에서 이스라엘에 크게 신세를 졌지만, 점령지 문제를 둘러싼 이스라엘-아랍 점령지 분쟁에서는 아랍 측 입장을 지지하곤 했다. 또 미국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1983년 그레나다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에 반대했다. 이는 영토주권의 보전이라는 원칙이 유린되면 큰 나라들에 둘러싸인 싱가포르의 독립도 보장받기 어렵게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리콴유는 덩샤오핑 이래 역대 중국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는 생전에 33번이나 중국을 방문했다. 싱가포르는 중국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해 온 중국은 싱가포르에도 대만과의 관계를 축소할 것을 요구해 왔다. 싱가포르가 대만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중국은 자기들이 훈련장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리콴유는 이를 거절했다. 어려웠던 시절에 싱가포르에 군사훈련장을 제공해 준 장징궈(蔣經國) 대만총통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리셴룽 현 총리는 총리 취임 한 달 전인 2004년 7월, 중국의 항의를 무릅쓰고 대만을 방문하기도 했다.
실용주의를 취하면서도 원칙과 신의를 중시하는 외교노선 덕분에 싱가포르는 국제적으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외교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6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미북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물론 싱가포르가 완벽한 나라는 아니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서방 기준에서 보면 갈 길이 멀다. 정부와 집권당이 일체화되어 있고, 야당이 견제받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싱가포르 언론은 각각 독립된 관점으로 보도하는 것은 용인되는데, 행정부 정책을 약화시키거나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싱가포르가 가까운 시일 내에 서방 민주국가 수준의 복수(複數)정당제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 시스템이 일반 국민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파탄 수준으로 무너지지 않는 한, 싱가포르는 앞으로도 현재의 플랫폼을 가지고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싱가포르 모델의 첫 사례 쑤저우공업단지
▲생태도시를 표방하는 톈진 빈하이신구는 소금기가 있는 바닷가 땅에 건설됐다. 사진=조선일보DB
리콴유는 1989년 톈안먼 사태를 보면서 결국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중국과 싱가포르의 합작이 상호학습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92년 덩샤오핑에게 양국 합작으로 쑤저우공업단지를 개발, 싱가포르의 경험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리콴유는 이를 통해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친(親)싱가포르 정서를 심어주어야겠다는 계산도 했다.
경제발전만을 앞세워 난개발(亂開發)된 다른 중국의 신흥 도시들과는 달리 쑤저우공업단지는 도시설계에서부터 인프라 구축, 도시관리체계 등에서 싱가포르의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선(先)발전 후(後)건설, 선지하 후지상, 선2차산업 후3차산업, 선기초시설 개발 후상업부동산 개발 등의 원칙이 준수됐다.
1994년부터 3단계에 걸쳐 진행된 개발사업의 결과, 원래 양어장이 뒤얽혀 있던 교외의 한적한 농촌은 278km2의 지역에 110여만 명이 거주하는 현대적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2013년 1인당 평균 GDP는 4만4000위안, 도시화된 지역의 평균 GDP는 4만9000위안에 달했다. 싱가포르를 본받아 각종 주민편의시설, 복지, 원스톱행정서비스, 행정기관과 주민들 간의 피드백 시스템 등도 구축했다.
오늘날 쑤저우공업단지는 도농(都農)이 공생하는 창조·스마트·친환경생태도시로 자리 잡았다. 나노기술, 생물의약, 소프트웨어·벤처, 융합통신, 환경 관련 첨단기술산업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그 결과 2013년 이 지역 공업총생산의 64.2%가 첨단신기술 분야에서 나왔다. 세계 500개 우수기업 중 91개 기업이 150개 분야에 걸쳐 투자했다. 1억 달러 이상 투자한 분야가 133개이며, 그중 10억 달러 이상 투자한 분야도 7개이다.
쑤저우공업단지는 싱가포르 경험의 중국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첫 번째 사례였다. 중국 각지에서 25만명 이상의 공무원들이 쑤저우공업단지를 방문, 이곳의 체험을 배워갔다.
쑤저우공업단지의 성공에 고무된 중국과 싱가포르 정부는 2007년 톈진에 빈하이(濱海)신구라는 생태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빈하이신구는 열악한 거주환경이나 대기오염 등으로 악명 높은 중국의 도시들도 환경친화적 생태도시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모델 케이스로 건설됐다. 이를 위해 일부러 장소도 경작지가 아니라 담수(淡水)가 부족하고 오염이 심한 척박한 바닷가를 선정했다.
톈진생태도시 역시 싱가포르의 경험을 살려 효율적 수자원 활용, 치밀한 도시계획, 환경보호, 경제사회발전의 일체화 등을 지향했다.
일례로 생태도시는 30km2의 면적에 인구는 35만명으로 제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쓰레기 무해화(無害化) 처리율은 100%, 회수이용률은 62.75%에 달한다. 신재생에너지 사용에도 적극적이어서 풍력(風力)을 가로등에 사용했고, 모든 주택에는 태양열 온수기를 설치했으며, 대부분의 공공건물은 지열(地熱)을 이용해 온냉방을 조절하고 있다.
산업도 애니메이션산업 등 문화창의산업, 생태환경보호산업, 금융산업, 회의-컨벤션산업 등을 발전시키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광저우의 주장(珠江)삼각주 지역은 개혁개방 초기부터 중국 경제발전의 주축이 되었던 곳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200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첨단과학기술산업을 중심으로 한 지식산업도시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 광저우지식산업도시는 앞의 쑤저우공업단지, 톈진생태도시가 중국과 싱가포르 중앙정부 간의 합작사업이었던 것과는 달리 처음에는 싱가포르 중앙정부와 광저우성 정부의 합작사업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관리체계 등에서 문제가 드러나 2015년 중국 중앙정부의 사업으로 바뀌었다.
지식산업도시 발전계획 면적은 123km2이지만, 개발될 건설용지는 60km2이다. 지식산업도시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선진제조업, 바이오산업, 정보통신산업, 신재생에너지산업, 환경보호산업, 벤처산업 등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광저우지식산업도시 합작사업의 모토는 “기업이 선행(先行)이고, 시장에 운영을 맡기며, 정부는 추진한다”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세계에서 100명의 리더급 중국인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해 이노베이션단지를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중국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한 의료산업을 육성하고 의료관광산업도 유치한다거나, 3D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산업 유치 계획 등도 눈길을 끈다.
시진핑의 개혁
▲2017년 10월 18일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 개막식에서 공작보고를 발표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 이 대회 이후 시진핑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상의 사례들을 보면 중국은 이제 양적(量的) 성장을 넘어서 질적(質的) 성장, 지속가능한 성장을 강력하게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발전 이후의 중국은 어떻게 될까? 중국 지도자들이 여러 번 천명했고, 리콴유도 말했던 것처럼 중국은 서방식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의 주도하에 나름의 정치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는 할 것이다.
그중 핵심은 부패척결이다. 이는 공산당 지배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시진핑은 이를 위해 싱가포르의 부패행위조사국을 모델로 해서 국가반부패총국을 신설했다. 중국은 워낙 거대한 나라인 데다가 정치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싱가포르처럼 엄격한 반부패정책를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을 위시한 지도자들이 사심 없이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어느 수준까지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시진핑이 부패척결 등 개혁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까? 시진핑은 은퇴한 고위 관료들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왔으며 부하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는 등 능력 있는 당원들을 단결시키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덕목을 갖춘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리콴유는 생전에 시진핑에 대해 “대범하고 시야가 넓으며 통찰력이 깊고 신중하고 당당한 데다가 카리스마까지 넘치는 인물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에 비할 만하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시진핑, 리콴유처럼 上皇 역할 할 것
▲톈진생태도시 앞에 선 임계순 교수.
시진핑 집권 이후 국무원 총리(리커창)의 위상이 하락하고 시진핑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게다가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후계자를 선정하던 전례(前例)도 깼다. 이를 두고 시진핑이 절대권력자가 되었다는 관측이 많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진핑은 부패와의 전쟁으로 계속 분열 상태인 공산당의 재정비·강화, 기득권층에 대한 대수술, 소득 격차 해소, 지방정부의 난개발 중단,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응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나는 지금 시진핑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싱가포르식의 제도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게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에 이어 ‘핵심’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그가 절대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기대와 격려, 응원, 협력의 차원이라고 본다.
아마 시진핑은 아직 공개하지는 않고 있지만, ‘중국몽(中國夢)’이라는 그의 비전을 완성할 수 있는 후계자를 이미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집권 2기를 마치기 전에 후계자를 정한 후, 임기가 끝난 후에는 자리에서 물러나리라고 본다. 퇴임 후 그는 아마 선임장관·고문장관으로 후배들을 지도했던 리콴유처럼 상황(上皇) 혹은 자정(資政·정치자문역)이 되어 자기가 시작한 개혁의 완성을 보려 할 것이다.
《아주주간(亞洲週刊)》 편집장 추리번이 “많은 사람이 시진핑의 모습에서 마오쩌둥의 그림자를 보고, 강력한 슈퍼맨의 힘을 본다고 하지만 정치발전상으로 보면 시진핑은 사실 덩샤오핑의 기질(태도, 스타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서 “그는 용감하게도 공산당 이외의 정치적 지혜, 즉 리콴유의 정치에서 영감(靈感)을 찾은 것 같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국이 서방 수준의 자유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싱가포르 수준의 정치 민주주의까지만이라도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러기를 기대하지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싱가포르 수준의 민주주의를 하기에도 중국은 너무 큰 나라고, 싱가포르와는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이 나아갈 길
양적 성장을 넘어 지속가능한 질적 성장을 향해 무섭게 질주하는 중국을 보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찌 될지 밤잠을 설치게 된다. 하루속히 그에 대한 대응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금 중국은 경공업 분야뿐 아니라 휴대폰, 반도체, 4차혁명 산업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선두그룹에 있는 사이언스 엔지니어는 대부분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5년, 10년 후면 과학기술 분야의 선도적 인재들이 중국에서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분야를 찾아 파고들어야 한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 방식의 세계화나 인재양성 방안으로는 중국과 경쟁을 할 수 없으니 비상한 정책으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부존자원이 하나도 없는 싱가포르도 일류국가가 되는데 우리도 지혜를 모으고 단결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특히 싱가포르의 핵심 정신인 ▲위기를 직시한다(똑바로 본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실무적인 사업 수행에 힘쓴다 ▲변화를 추구하는 데 용감하다 ▲국민을 근본으로 한다 ▲단련하고 용감하게 나아간다 등의 이념은 우리도 참고할 만하다.
지도자는 국민이 한마음이 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우왕좌왕하며 싸우면 배는 뒤집힌다. 갑판장이 맘에 안 든다고 갑판을 때려 부순다면 어찌 되겠나? 갑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고 그 문제가 된 부분만 고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인터뷰] 임계순 교수
“이제 중국·중국인은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던 중국·중국인 아니다”
- 전공이 청사(淸史)인데, ‘역사 속 중국’에서 ‘현실의 중국’으로 관심이 바뀐 느낌이 듭니다.
“역사가는 과거 역사를 연구하고 분석하며 습득한 역사적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아가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낸 것도 싱가포르처럼 변하고 있는 중국을 냉철히 분석하고 판단하라고 우리 국민들, 특히 정계(政界)와 재계(財界) 지도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제 중국과 중국인은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던 중국과 중국인이 아닙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대한민국이 그런 운명에 빠지지 않도록 국가적 대응전략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냈습니다.”
- 어떻게 싱가포르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둘째 아들(조남준 박사)이 싱가포르에서 선발하는 세계 젊은 국가과학자로 선발되어 난양이공대학에 교수로 영입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전에는 나도 막연히 리콴유라는 독재자, 아들이 총리직을 이어받은 나라, 무더운 열대 도시국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보니 놀랍게도 제가 전공하는 중국의 발전모델이더군요. 그래서 중국의 미래를 예측해 보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싱가포르를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싱가포르와 중국을 하나로 묶어 700페이지가 넘습니다.
“싱가포르에 대해서만 쓴 책을 출판했을 경우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싱가포르에 관해 큰 관심이 없습니다. 쑤저우공업단지, 톈진생태도시, 광저우지식도시 건설 과정을 살펴보면서 ‘싱가포르가 중국의 미래’라는 확신이 생기면서 두려웠어요. 그러니 우리나라에 영향력이 큰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과 싱가포르, 두 주제를 다루다 보니 책이 두꺼워졌습니다. 중국을 잘 모르는 독자는 싱가포르를 다룬 3부를 먼저 읽고 1부와 2부를 읽으면, 싱가포르 모델이 무엇이고, 그것이 중국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한중수교 초기만 해도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을 열심히 배워가려 하던 중국이 이제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홀대하고 사드 문제 등에 대해 아주 고압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중국학계 인사들과 꾸준히 교류를 해왔는데, 나도 중국인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태도변화를 피부로 느낍니다. 그러나 정말 친분이 있는 분들과의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 중국의 곁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가 중국·미국·일본, 그리고 러시아에 중요한 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되겠지요. 우리의 강점은 보완하고 단점은 수정 보완해서 이들 국가에 필요한 국가가 되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줄이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다원화하는 한편, 일본의 존재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청대사(淸代史) 연구의 독보적인 학자이신데 앞으로 그에 관해 더 연구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우리 애들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청나라 이야기》(가제)를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요. 청나라 역사를 풀어서 고1 정도 수준에서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써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실 청나라 역사는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고, 현대 중국과도 직접 연결이 됩니다. 청왕조의 흥망성쇠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도 관심이 가요.”
정리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시진평과 평리위안
2014-06-23
11월8일로 예정된 18차 당대회(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를 거치면서 시진핑(習近平, 59)은 명실상부한 중국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다. 하지만 그가 2007년17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차기 중국을 이끌 '태양'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저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의 원로 故시중쉰(習仲勳)의 아들,중국의 유명 가수 펑리위안(彭麗媛, 50)의 남편 정도로 알려졌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13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혁명에 참여했으며,15살 때 학생운동으로 국민당에 구금된 적이 있는 중국 공산당의 핵심 멤버였다. 그는불과 21살의 나이에 중국공산당 시베이(西北)지구 소비에트주석을 맡아 산시(陝西), 간쑤(甘肅) 일대에서 3인자의 지위에 올랐다. 이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의 최후 근거지 역할을 하면서, 중국 혁명의 보루 역할을 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한 이후 시중쉰은 베이징으로 건너와 중앙선전부장,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 등을 맡았다.
그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휘하로 들어가 중국 국무원 부총리 겸 비서장 직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제거되고, 16년간의 연금 생활을 당한다.
◆유년시절
시중쉰이 베이징에서 한창 자리를 잡은 당시인 1953년 시진핑이 태어났다. 검소한 집안의 환경 속에서 고위 간부의 자제였던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어려움을 맞게 된다. 그는 아버지를 몰락시킨 일파에 의해 14살에 소년교도소에 끌려갈 위기를 맡기도 했으나 산시성 옌안(延安)으로 생산대 입대를 자원해 위기를 피했다.
당시 중국은 도시지식 청년들을 농총으로 보내는 샹산샤샹(上山下鄕) 운동을 전개 했는데, 시진핑이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왔던 시진핑은 옌안의 생산대에서 고된 일과 낯선 환경, 거친 음식, 벼룩이 들끓는 잠자리 속에서 힘든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현지 적응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집안 문제로 번번이 공산당 입당을 거부당했으나 주변의 도움 속에서 수차례 도전 끝에 1974년 21살의 나이에 가입해 집안의 족쇄를 스스로 벗는데 성공했다.이후 그는 지부 서기에 올랐으며 주민들의 삶을 끌어올리는 활동들을 벌였다.
문화혁명기간 동안 폐지됐던 대학입시가 1970년 재개되면서 일부 교육기관이 농촌으로 내려간 지식청년 중 일부를 대학 청강생으로 모집했다. 시진핑이 있던 옌안에 중국의 명문 淸華대에 두 명의 인원이 배정됐는데, 시진핑은 옌안지구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다.끌려가다시피 농촌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어린 소년이 이제 지역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젊고 유망한 예비 지도자로 자라난 것이다.
22살이 된 시진핑은 예안을 떠나 칭화대 화학공정과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농촌시절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까닭에 대학에서 별도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중국 정치지형 변화로 1978년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정치적으로 복권되면서 시진핑의 삶 역시 달라졌다. 시중쉰이 광둥(廣東)성의 경제 발전을 진두지휘했으며, 1979년 시진핑은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인 겅뱌오(耿飆)의비서가 된다. 이 기간 중 시진핑은 실제 현역 군인이 되어 겅뱌오를 수행했다.
1982년 시진핑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군복을 벗고 기층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군문의 길을 열어 주겠다는 겅뱌오의 제안을 뿌리치고 지방에서 일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중국 고위 간부의 자제 가운데 기층으로 내려가 실무를 경험하겠다고 선택한 것은 시진핑이 처음이었다. 시진핑은 허베이(河北)성 스좌광(石家莊)시 정딩(正定)현 위원회 부서기를 맡았다. 그의 이같은 결정으로 그는 기층 경험을 쌓으면서 후일5세대 정치 지도자 가운데 시진핑이 가장 두드러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는 정딩 시절 롱궈푸(榮國府)를 개발해 정딩현을 전국적인 관광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롱궈푸는 중국의 드라마 홍루몽의 배경인데, 시진핑은 룽궈푸를 정딩현에 유치할 경우 관광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현 재정을 파탄시킬 것이라며 현지 관료들의 강한 반발을 샀던 정딩은 롱궈푸 및 드라마 홍루몽의 성공과 함께 중국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었다. 이후 시진핑의 사례는 중국 중앙조직부에서 특별 보고서로 작성되면서 중국 지도부 간부를 기층으로 내려보내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만들게 했다.
이후 그는 푸젠(福建)성으로 자리를 옮겨 샤먼(廈門)시, 푸저우(福州)시의 당위원회 서기를 맡은 뒤, 푸젠성당위원회 부서기, 성장에까지 오른다. 이 기간중 시진핑은 텐안문(天安門) 사태 등의 혼란기 속에서 정치적 신중함을 유지, 반부패 활동, 경제 개발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후 2002년16차 당대회를 앞두고 중앙의 전근 명령을 받고 저장(浙江)성 위원회 부서기에 취임했다. 그후 불과 40일만에 시진핑은 광동성위원회 서기가 된 장더장 (張德江)의 뒤를 이어 저장성위원회 서기가 된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곳을 맡게 되면서 시진핑은 랴오닝(遼寧) 성위원회 서기 리커창(李克强), 장쑤(江蘇)성위원회 리위안차오(李源潮), 상무부장 보시라이(薄熙來) 등과 함께 차세대 중국 정치인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
2006년 9월 25일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천량위(陳良宇)가 부패 혐의로 실각한 뒤, 2007년3월 시진핑은 상하이시위원회 서기로 발령받는다. 정파간의 대립 양상 과정에서 시진핑이 천량위 이후 혼란에 빠진 상하이를 맡을 책임자로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특히 그는 리커창이 차기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상무위원회에서 리커창보다 높은 서열을 맡게 됐다. 이로서 사실상 시진핑은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선택된 것이다.
앞으로 열릴 18차 당대회는 차기 지도자로 정해진 시진핑이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최고 수장이 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곧 시진핑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시진핑의 아내 펑리위안
*펑리위안
(彭丽媛, Peng Liyuan,1962년 11월 20일 ~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 가수이다. 인민해방군 계급은 소장이다.
남편은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다. 산둥 성 출신. 14살 때 산둥예술학교 입학. 18살 때 중국 인민해방군 문예병으로 입대. 1986년 시진핑과 만나 다음해 결혼.
노래하는 퍼스트레이디. 15일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習近平·59)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가수다.
빼어난 미모와 고운 목소리로 이미 오래전 중국의 국민가수 반열에 올랐다.‘모란의 요정’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가 태어난 산둥(山東)성은 모란으로 유명하다. 이제 펑리위안은 남편의 1인자 등극과 함께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까지 끌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 카를라 브루니를 떠올릴 만하다.
펑리위안은 가수 이상이다. 노래 중 90%는 공산당 업적을 찬양하는 선전 가요다. 이미 18세 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산하 가무단에 스카우트돼 군 소속 가수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중국이 키운 첫 번째 민족음악 석사이기도 하다. 현재 그는 군 산하 가무단을 이끄는 인민해방군 소장(우리의 준장)이다
이런 그가 문화 외교 사절로서 시진핑을 내조하는 데 힘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09년 당시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함께 방문한 일본에서 그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즉위 2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일본인 애창곡 ‘사계절의 노래’를 열창했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는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냈다.
2주 후 시진핑 측은 일왕 부부 접견을 타진했다. 그리고 2주 만에 일왕을 만날 수 있었다. 최소 한 달 전에는 신청해야 접견할 수 있는 관례에 비추어 시진핑 부부를 파격적으로 환대한 것이었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나날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펑 여사에 대한 외교적 기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처음엔 시진핑 무시했던 펑리위안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국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2) 여사가 3일 한국을 방문한다. 시 주석은 저장(浙江)성 당서기이던 2005년 이미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펑 여사는 이번이 첫 방한이다. 남편이 국가주석이므로 펑 여사는 퍼스트레이디이다. 중국말로는 ‘제1부인’이다.
펑 여사가 한국에 1박2일 머무는 동안 조윤선 정무수석이 펑 여사를 ‘영예수행’한다. 퍼스트레이디 대행 자격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위해 전담 수행키로 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1일 설명했다. 청와대는 지난해 5월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준비하면서 퍼스트레이디 대행은 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이번에 이 원칙을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펑 여사는 방한 기간 중 시 주석과 별도로 움직이며 고궁 및 문화공연 관람이나 전통문화체험 등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정상간 국빈만찬에는 참석한다. 그가 어떤 패션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관심거리다. 널리 알려져 있듯 펑 여사는 미모의 가수다. 중국 최고의 국민가수로 불린다.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 만큼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
그는 시 주석을 처음 만났을 때인 1986년 당시 샤먼(厦門)시 부시장이었던 시 주석보다 더 유명한 명사였다. 친구가 인민해방군 가무단에 있던 그에게 시 주석을 소개팅 시켜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심드렁했다고 한다. 만날 남자가 외모에나 신경쓰는 쫌생이가 아닌지 시험해보겠다며 그냥 군복을 입고 맞선 자리에 나갔다.
두 사람의 첫 만남과 결혼까지의 스토리는 중화권 보도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86년 말 어느날, 중국 남부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에서 33세 남자와 24세 여자가 만났다.
“성악에는 몇가지 창법이 있소?” 남자가 물었다. 여자가 설명을 하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미안하지만 난 TV는 거의 안 보는데 당신은 무슨 노래를 불렀소?” “‘희망의 들판에서‘를 불렀어요.” “어, 그 노래는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아주 좋습디다.”
남자는 시진핑이었고, 여자는 펑리위안. 시진핑은 샤먼시 부시장이었고 펑리위안은 군 가무단에서 부처장급 가수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가수였다.
시진핑은 당시 한차례 이혼 경력이 있었고 펑리위안은 미혼이었다. 펑리위안 집안에서는 시진핑과의 결혼에 반대했었다. 시진핑이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勛)의 아들로 소위 ’태자당(太子黨ㆍ고관 친인척)‘이었기에 집안 좋은 자식이 딸을 고생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시중쉰은 당시에도 당중앙 서기처 서기라는 고위직에 있었다.
▲젊은 시절의 펑리위안과 시진핑 부부.
중국 일부 매체가 “펑리위안은 결혼할 때까지도 시진핑의 집안 배경과 시진핑의 직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홍콩 등 중화권 언론들은 “과장이 심하다.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한다.
이듬해인 1987년 9월 1일, 시진핑은 샤먼에서 베이징의 펑리위안에게 전화를 걸어 샤먼으로 오라고 한다.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자는 거였다. 사전에 얘기가 충분히 됐는지 펑리위안은 즉각 비행기에 올랐다. 샤먼 공항에 내리자마자 시진핑은 그를 데리고 사진관에 가 즉석 결혼 사진을 찍었다. 이후 일사천리였다.
기다리고 있던 결혼 등록 담당 관리가 결혼증을 발급했고 샤먼 시장이 전화로 시당위원회와 시정부 지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7시 회식이 있다”고 알렸다. 영문도 모른 채 연회장에 소집된 사람들은 얼떨떨해했다. 누군가 시진핑에게 옆에 있는 펑리위안을 가리키며 “저 아가씨는 왜 왔냐”고 물었고 시진핑은 “내 아내”라고 답했다. 사람들이 즉각 상황 파악을 못하자 시진핑은 재차 “이 사람은 내 아내 펑리위안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사람, (그렇게 은밀하다니) 정보국장 해도 되겠네”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펑리위안은 그날 노래 여러 곡을 불렀다.
시진핑은 멋이나 낭만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펑리위안도 그와 처음 만난 뒤 “연애를 할 타입은 아니다”고 했다. ’신혼‘은 단 3일간이었다. 4일째 펑리위안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전국예술제에 참가했고 뒤이어 캐나다와 미국 등지로 해외 공연을 나갔다. 돌아온 건 두세달 뒤였다. 당시 관영 매체들은 두 사람의 신혼에 대해 “만남은 짧았고 이별은 길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결혼 5년이 지난 1992년에야 외동딸 시밍쩌(習明澤)를 얻었다. 시밍쩌는 2012년 외신에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라는 보도가 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펑리위안은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 백과사전에 “공익에 열정적이고 아동에 관심이 많으며, 일은 열심히 하고 자신은 낮추는 타입”으로 평가돼 있다. 펑리위안은 공연 등을 위해 시진핑을 떠나 있는 날이 많아 시진핑이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는 보도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시진핑은 첫 부인 커샤오밍(柯小明)과 3년을 못 넘기고 헤어졌다. 커샤오밍의 아버지는 부총리를 지낸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에게 발탁돼 영국대사까지 한 직업외교관 커화(柯華)였다. 시진핑과 커샤오밍은 결혼 후 불화설이 나돌더니 커샤오밍이 영국에 가서 살겠다고 고집하고 시진핑이 동행을 거부하면서 파경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는 없었다. 시진핑과 친했다는 한 교수는 “두 사람은 이혼 직전 거의 매일 부부 싸움을 했다”고 회고했다. 성격 차이와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많았다.
▲시진평, 평리위안의 옷 색깔에 따라 넥타이 색깔을 고른다
☞펑리위안 여사는…
▲1962년 산둥(山東)성 허쩌(菏澤)의 평범한 가정에서 출생
▲1978년(16세) 산둥성 성도(省都) 지난(濟南)으로 가 산둥57예술학원에서 공부한 뒤 산둥예술학원에서 수학
▲1980년(18세) 지난군구 전위가무단에 들어가 군부대 가요계에 데뷔
▲1982년 대표작 ‘희망의 들판에서’와 ‘너를 사랑해, 장성(長城) 너머의 눈(雪)’으로 히트를 치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짐
▲1987년(25세) 시진핑과 결혼
▲1990년 민족음악 분야 석사학위 받음. 이 분야 첫 석사
▲2002년 인민해방군 소장으로 진급
▲2009년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단장
▲2011년 제1회 중화예술문화상 수상, 2013년 타임 선정 100대 영향력 있는 인물에 선정
▲중국음악학원 객좌교수, 베이징대와 상하이사범대 겸직교수
여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