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4/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 장자방(張子房)의 후예들, 자기를 망치는 기술(1) -(3)
■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 장자방(張子房)의 후예들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 『여류(余流) 삼국지』 저자
◆노숙(魯肅)
세상을 살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수호천사 같은 사람이 있기도 하고, 자신도 생각지 못한 사이에 누군가를 보호해준 수호천사가 되어 있기도 한다. 노숙은 유비에게 있어서 이런 수호천사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다.
▲노숙(魯肅, 172~217) :자 자경(子敬) / 소속-동오 손권 / 출신-양주 임회군 동성현(臨淮郡 東城縣).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부유하여 일찍이 재산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주위에 베풀어 칭송을 받는다. / 출사-주유의 소개로 동오의 손권에게 출사. 주유 사후 동오의 대도독에 오른다. / 사망-217년 병사(病死).
후한 말 이후 삼국시대가 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고의 전략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노숙을 제일 앞자리에 세우고 싶다.
깊이 생각하고 멀리(深慮遠謨) 내다본 통 큰 참모
조조가 형주를 아우르고, 동오의 목전에서 군사시위를 할 때 유비에게 찾아가서 제갈량을 데리고 동오로 온 것이 노숙이었다. 당시 동오의 명사(名士·지식인) 우두머리인 장소를 비롯해 대부분의 모사들이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손권을 조르고 있는 판국에 그 홀로 조조와 항전을 우기면서 조조의 허실을 알려 손권에게 항전의지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런 항전을 위한 노숙의 동분서주 덕분에 다 죽게 생겼던 유비가 회생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개성 강한 수하들과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 있었던 손권은 유비 집안과 서로 협력하여 조조를 견제하며 삼국의 캐스팅 보트를 쥔 중간자로 나서면서 무난히 삼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나라를 정착시킨다. 그 뒤에는 노숙의 배려와 온화한 중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뒤 동오에서 유비 진영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자 관우를 토벌하고, 유비와 전쟁을 벌이는 등 곧바로 촉과 오가 가장 큰 원수지간으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유·관·장 삼형제가 모두 죽음에 이르렀고, 손권은 위 황제 조비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하를 자처하는 일이 벌어진다. 실로 수호천사 노숙이 사라지자 유비와 손권은 점입가경으로 달려간다.
『삼국지』 인물 중 가장 안정되고 성공적인 모사
노숙의 흉상. 필자에게 어떤 신하의 삶을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단연 노숙이다.
노숙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뛰어난 모사(謀士)들 중에서 가장 안정되고, 성공적인 모사였다. 그는 비록 45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죽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했다. 그리고 그 어지러운 난세의 국제적 역학관계와 유비·관우·제갈량 같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방과 손권·주유처럼 쉽지 않은 아군 사이에서 양자가 빚어내는 역학관계들을 부드럽고 순조롭게 풀어나갔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 속의 노숙은 제갈량에게 속아 넘어가고, 유비와 손권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소설 속에서도 그가 한 역할과 행적을 쫓아가보고 그 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노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군인 손권조차 선뜻 나서지 못하는 조조와의 전쟁을 밀어붙여 적벽대전으로 대승리를 거두기까지, 그리고 적벽대전에서 나라의 막대한 자금과 군사를 기울여 조조를 물리쳐 놓으니 얄밉게 형주를 차지한 유비 진영과 평화를 유지하며 조조를 견제해 동오를 지킨 것도 실은 노숙의 공로였다.
노숙의 경쟁력은 냉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주군인 손권보다 꿈이 더 컸던 ‘통 큰’ 참모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제갈량이 융중의 초려로 찾아온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건의한 것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노숙이 손권에게 이 비슷한 전략을 제안하는 장면이 『삼국지』에 나온다.
노숙이 손권을 처음 만나게 되는 사연은 이렇다. 노숙은 원래 친구 유자양과 함께 다른 제후의 초청을 받아 가려고 하던 중이었다. 이때 적벽대전의 영웅이 되는 동오의 큰 신하 주유가 노숙에게 와서 손권에게 출사하라고 권한다. 주유와 노숙은 두텁게 사귀었던 친구였고, 주유는 죽을 때 자신의 후임으로 노숙을 추천할 만큼 믿는 사이였다.
주유는 “군주가 신하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신하도 임금을 골라 섬겨야 한다”며 손권을 섬기는 이로움에 대해 설득한다. 노숙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손권에게로 간다. 손권은 첫눈에 노숙을 좋아하고 각별하게 대하면서 하루 종일 노숙과 담론을 하면서도 지루한 줄을 모른다.
손권은 하루 업무가 끝나고 문무관원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노숙만을 남겨두고 함께 술을 마시고 밤이 깊도록 얘기하며, 함께 나란히 누워 잠을 잔다. 손권이 말한다.
“나는 부형의 가업을 이어받아 강동을 경륜할 것이나 이왕에 이 자리에 오른 이상 춘추오패인 제환공이나 진문공처럼 황실을 떠받들어 패업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소. 공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나를 가르쳐 주셨으면 하오.”
이에 노숙은 다른 처방을 준다.
“한고조께오서 의제(義帝)를 받들어 섬기려 했으나 항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마치 항우와 같사옵고, 자기가 마치 제환공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사온데 무슨 수로 춘추오패의 뜻을 잇겠습니까? 지금이 시국을 관망하건데 한실의 부흥은 물 건너 간 이야기입니다. 그보다는 지금은 오직 강동에서 세를 확립하고 천하의 틈을 관망하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방이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황조와 유표를 쳐서 형주 일대를 장악하여 장강 전역을 차지하고 지키다가, 황제로 오르면 이는 곧 한고조가 대업을 이룬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손권에게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갈량의 삼분지계도 조조를 항우의 위치에 두고, 유비에게 유방이 되라고 한 것이었다. 노숙의 대업과 제갈량의 삼분지계는 모두 유방의 건국을 롤모델로 하고 있었다. 유방이 되어 대업을 이룬다면, 반드시 얻어야 할 인물이 바로 한신이다. 당시 노숙에게는 ‘한신’의 존재가 미미했고, 다만 기회를 보아 유표의 땅을 빼앗고 익주를 아울러 초한의 대립처럼 양국이 대립하는 형세로 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반면 제갈량의 삼분지계에서는 조조가 항우, 유비가 유방, 손권이 한신이라는 틀을 갖춰 설명했으므로 훨씬 구도가 안정적이었고 분명했다.
그런데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노숙이 유비를 향해 분주히 움직인다. 이때부터 노숙은 유비를 손권의 대업을 위한 ‘한신’으로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눈앞의 이익만 따지던 다른 손권의 모사들이나 심지어 주유와도 달리 심려원모(深慮遠謨·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본다)의 혜안을 가지고 움직였다.
이를 알아봐준 것이 주군인 손권이었다. 노숙은 주군을 제대로 고른 것이다. 손권은 욕심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으나 방향을 제대로 못 잡고 있었다. 이에 노숙이 방향을 알려주고 청사진을 그려 내놓자 그는 단박에 알아차리고 이를 접수한다. 뜻이 통하는 주군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노숙은 행복한 신하였다.
조조가 형주를 아우른 뒤 강동과 마주 보이는 강변에 300리에 걸쳐 83만 대군을 집결시키며 시위하는 것은 강동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중원을 거의 다 먹은 패자(覇者)와 더불어 싸우고자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조조는 황제의 칙명을 앞세우고 있으니 명분상 우세하고, 이들 군대에 대적한다는 것은 황제의 칙명을 어기는 것이니 신하의 나라 강동으로서는 만일 패한다면 갈 곳이 없는 역모의 땅이 되는 것이었다. 승리할 자신이 없다면 항복하는 것이 이치상 맞았다.
“패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조를 넘어야”
손권의 모사들은 모두 항복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노숙만 홀로 부지런히 제갈량을 모셔오고, 손권을 붙들고 “저 수구 꼴통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는 왜 항전해야 하느냐고 묻는 손권에게 말한다.
“주군과 신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신하들이야 조조에게 항복한다 하더라도 돌아갈 고향 땅이 있고 그곳에서 미관말직이나마 할 수 있고, 잘 하면 황제의 직인이 담긴 임명장을 받아 계속해서 한실의 신하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항복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물론 후(侯)에 봉해지고, 수레 한 대에 말 한 필, 종자 두어 사람은 붙여주겠지만, 모든 야망과 힘을 내려놓고 그저 세월이 흐르기만을 기다려야 하실 것입니다. 남면(南面, 임금의 자리)하시어 천하를 내려다보고 패업을 달성할 꿈을 어찌 꿀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야 항복하는 것이 환란을 피하고 처자식과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지키며 자기 신상에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니 모두 제 한 몸을 생각해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결코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노숙의 야망은 다른 문신들과 애당초 크기도 방향도 달랐다. 패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조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손권은 영명한 지도자였다. 말귀를 알아들었을 뿐 아니라 욕심도 그만큼 큰 리더였다. 그는 노숙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문관들의 의견이 내 뜻과 벗어나고 실망스럽더니만, 오로지 자경만이 나와 뜻이 같구려. 자경은 내게 하늘이 내린 사람이오.”
그래도 강동 백성들의 생명이 걸린 문제에 군주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고민을 거듭하는 손권에게 노숙은 제갈량과 주유를 들이대며 항전 쪽으로 밀어붙인다. 그리고 주유가 적벽대전에서 화공으로 조조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노숙은 대업을 향한 한 걸음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내딛는다.
그러나 손권을 위한 ‘한신’으로 영접한 유비라는 인물이 정말 만만치가 않다. 승리를 얻어 손권에게 바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오가 얻은 승리의 이익을 몽땅 자기가 털어먹어버린다.
주유가 독화살까지 맞고, 피를 토하며 자기가 죽은 것처럼 위장해 겨우겨우 승리의 기틀을 마련한 남군성을 제갈량이 손가락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조자룡이 말을 달려 들어간 것만으로 냉큼 집어삼킨다. 그리고 연이어 남군성의 병부를 이용해 형주와 양양에서 위나라의 군대를 밖으로 불러내 역시 전광석화로 먹어버린다.
토인비 선생이 말했다. 과거에 성공했던 전략이 오늘 비슷한 상황에서도 먹힐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오히려 사건의 구도가 비슷해도 상황은 달라지기 때문에 과거 성공의 경험이 발목을 잡아 실패를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이다.
구도는 과거 항우와 유방이 맞섰던 때와 비슷하지만, 조조는 항우가 아니었고, 유비는 한신이 될 생각이 없었다. 이미 후한 말을 전개한 인물들 중에는 항우·유방·한신으로 분류할 만한 비슷한 점이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상황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사건 구도가 비슷해도 전개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노숙은 여기에서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점은 뒤통수를 얻어맞고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주유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원한에 사무쳐 유비와 일전을 치르려고 한다. 실제로 주유 성격에 그러고도 남았다. 만일 이때 주유와 유비가 부딪쳐 싸웠다면, 승리는 조조가 챙겼을 것이다.
그러나 노숙이 있어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았다. 노숙은 주유를 말리며 말한다.
“지금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적은 조조입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조조와 승패가 가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인 유비 측과 싸우면 조조에게 빌미를 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양쪽의 적을 맞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쳐서 사태가 급하게 돌아갈 경우 유비가 형주 땅을 모두 조조에게 바치고 합세하여 동오를 치려고 하면 어찌할 것입니까?”
동오와 유비 진영을 오가며 양쪽을 진정시키고 협력
▲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에 등장한 노숙. 뜻이 통하는 주군 손권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노숙은 행복한 신하였다. / 중국 바이두 백과
노숙은 유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유비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어디에라도 붙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엔 공손찬을 도와 원소와 싸우고, 나중엔 도겸을 도와 조조와 싸우고, 그러더니 또 조조와 더불어 여포와 싸운 다음엔 원소를 도와 조조와 싸우고, 유표를 도와 조조를 막는 등 필요에 따라 순식간에 적도 됐다 아군도 됐다 하며 정신없이 파트너를 바꿔치우는 데 이골이 난 인물이었다.
그래도 노숙은 유비가 정족지세(鼎足之勢)의 한쪽을 차지해 동오의 협력 상대가 되어야 조조를 견제할 수 있다는 현실을 결코 놓치지 않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친다. 손권조차도 형주를 냉큼 삼켜버린 유비를 향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수시로 출병하려고 하는 마당에 이성을 잃지 않고 세력이 약한 동오와 유비 진영이 협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강한 세력인 조조에 맞서는 길임을 잊지 않는다. 그는 분주히 동오와 유비 진영을 오가며 양쪽을 진정시키고 협력의 끈을 이어가는, 참으로 욕먹을 일은 많고 빛도 나지 않는 고단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시 정국 구도를 안정시키는 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렇게 빛도 나지 않고 욕이나 얻어먹는 일을 군소리 없이 자청해 해낸 것은 그의 욕심과 야망이 끝도 없이 컸기 때문이다. 노숙의 욕심과 야망을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적벽대전 이후 합비를 공격하던 손권에게 노숙이 찾아간다. 이때 손권은 친히 군영 밖으로 나와 노숙이 오자 말에서 내려 노숙을 맞이한다. 이 모습에 모든 장졸들이 놀라고 노숙도 황망하게 말에서 내려 절을 한다. 손권은 노숙과 함께 말을 타고 군영으로 들어가면서 말한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공을 영접하여 빛나게 하려 하였소. 흡족하시오?”
노숙이 대답한다.
“아닙니다.”
“어찌해야 그대의 마음이 흡족하겠소?”
“주공의 위엄과 덕망이 사해에 떨치고, 중원 9주를 통솔하고, 능히 제업(帝業)을 이루어, 이 노숙의 이름이 죽백(사서)에 오르는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 마음이 흡족함을 알 듯 합니다.”
이는 단순히 아부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킹메이커’ 외길을 선택했고, 실제로 천하의 제갈량과 유비를 상대로 주군인 손권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고단한 여정을 계속하며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쨌든 노숙이야말로 참으로 부러운 행복한 신하였다. 뛰어난 제갈량도 워낙 기반 없는 주군을 모시다보니 온갖 양심 없는 짓을 수시로 저질러야 했고, 청아한 순욱도 마지막엔 주군에게서 버림받는다. 그러나 노숙은 자기를 알아봐주고, 자기 욕심의 크기만큼 따라오는 영명한 주군을 모셨고, 주군의 기반이 튼튼하니 양심에 꺼리길 것 없이 유비 진영을 상대로 갑(甲)의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내게 어떤 신하의 삶을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노숙이다.
부유하면서도 지연·혈연·학연에서 자유로워
이렇게 젊은 손권의 튀는 모사, 노숙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노숙은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부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집안내력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부자였던 것이다. 나중에 위나라 황제 조비가 오나라 사신 조자(趙咨)에게 손권에 대해 묻자 “저의 주공은 지위가 낮은 집안의 노숙을 발탁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손권의 모사 주류를 이루고 있던 호족 명사들과는 다른 신분이었던 것이다.
지연·혈연·학연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는 남다른 생각을 하고, 남다른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탯줄을 끊으면서부터 엘리트 인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틀에 박힌 사고와 안정성 추구에 진력하는 반면, 시대의 창의성을 개척하는 사람들은 ‘변방’에서 많이 나온다. 그들은 기존 세력의 기득권에 대항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다.
『삼국지』에서도 남다른 성취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타고난 귀공자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소위 명사로 불린 호족 출신 지식인들 중엔 순욱·순유 등과 같이 관료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많으나 그다지 튀는 업적을 보인 사람은 많지 않다. 제갈량도 호족 출신이었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를 지으며 귀공자의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본 인생의 쓴맛을 아는 지식인이었다.
출신 성분과 인맥·학맥의 불리함은 꿈을 꾸고 대업을 성취하는 데 불리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탄탄한 지연·혈연·학연은 돌아볼 곳만 많게 만들어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다. 외인부대의 경쟁력은 더 큰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후한 말 난세에 손권을 앞세워 새로운 패업을 달성하고자 했던 노숙은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훗날 손권이 제위에 올라 단에 올라갔을 때, 공경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 노자경(노숙)이 일찍이 내가 제위에 오를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형세 변화에 밝았다 할 것이오.”
노숙은 오직 주군인 손권이 그를 알아봐 주었지만 살아서도 동오의 부중에서 칭찬받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는 염치라고는 없는 유비 진영과 평화를 유지하며 삼국시대를 정립하는 일에 고단하고 분주하기만 했다. 그런 궂은 인생을 버티게 해준 힘은 바로 손권이라는 탁월한 주군을 만나 자신도 ‘킹 메이커’가 될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조직에선 욕먹고 빛나지 않는 일 중에 진짜 큰 성취를 이룰 만한 일이 많다. 꿈과 희망이 있다면 ‘조직의 쓴맛’과 궂은일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법이다.
◆방통
소설 『삼국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을 꼽으라면, 방통이 낙봉파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장면을 드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내 경우엔 그렇다. 10대 때나 50이 넘은 지금이나
▲방통은 사마휘가 ‘남주(南州) 선비들 중 제일기재는 방통’이라고 꼽을 정도로 중원에서도 그 이름이 떠들썩한 선비였다. [중국 바이두 백과]
떠돌이 영웅 유비의 성공시대는 제갈량을 얻으면서 시작되고, 유비가 패업으로 가는 기반인 촉(蜀)을 얻게 된 것은 방통의 공이 으뜸이다. 소설에서도 방통의 이름은 제갈량과 함께 처음부터 거명된다. 유비가 길을 잃고 수경선생 사마휘의 장원에 갔을 때, 사마휘는 유비에게 천하기재 두 사람을 천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방통(龐統) 못생긴 외모 때문에 저평가됐던 우량주
“복룡과 봉추 둘 중 하나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룡은 제갈량이었고, 봉추는 방통이었다. 명사(名士)들의 본거지 영천에서도 마당발이었던 사마휘 선생이 방통이 스무 살 때에 한 나절을 이야기한 뒤 ‘남주(南州) 선비들 중 제일기재는 방통’이라고 꼽으며, 동네방네 소문을 낸 덕에 이미 중원에서도 그 이름이 떠들썩한 유명한 선비였다.
그런데 유비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초려로 찾아가 울며불며 매달려서 모셔오고, 방통은 제 발로 찾아왔는데도 썩 탐탁찮게 대접한다. 그리고 사방 백 리밖에 안 되는 뇌양현 현령으로 발령을 낸다.
실제로 방통은 뇌양현령에서 면직됐다가 노숙 등의 천거로 유비가 제대로 면접을 본 뒤에야 그 재주가 ‘백리지재’가 아닌 비상한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비서실장 격인 치중종사로 삼은 뒤 나중엔 제갈량과 함께 군사로 삼는다.
그 전에도 방통은 주유가 죽은 후 노숙의 천거로 손권을 만난다. 하지만 손권도 이 유명한 기재에게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 천하기재가 이렇게 박대를 받은 이유는 외모 때문이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도 첫 마디가 ‘어릴 때 소박하고 노둔해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다’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작고 못 생겼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의 외모는 괴상하게 생긴 것으로 묘사된다. 제갈량은 키가 180cm가 넘고, 당당하고 호감가게 생겨서 외모부터 먹고 들어가는데, 방통은 일단 겉이 호감을 주지 못하니 내면까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아 군주로부터는 저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일을 시작하자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평화시의 도리와 난세의 도리는 다르다”
▲진수는 『촉서』에서 방통을 평하며, 조조의 모사 중 순욱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선비의 풍모가 강했다는 말이다. 사진은 중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방통. [중국 바이두 백과]
방통은 제갈량과 같은 군주를 모셨고, 둘은 친구였고, 애당초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재사들로 꼽혔기 때문에 늘 제갈량과 비교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제갈량은 언제나 주군의 뜻을 받들어 그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도모하여 성취하는 ‘과잉보호형’이라고 한다면, 방통은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목표지향형’이었다.
예를 들어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를 취하라고 권하지만 유비가 “그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거부하니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는 유비가 그렇게 목을 매는 명분까지 챙기는 데 세심하다. 나중에 유비의 결정적인 실책, 관우 사후 동오로 진격하는 문제도 조자룡에다 진복까지 나서서 결사적으로 말리는 동안에도 제갈량은 총력으로 말리지 않는다. 다만 다른 신하들에 등이 떼밀려 조정신료들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대변해 아뢰는 정도다. 그는 언제나 유비의 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다. 그러나 유비의 심기에 대단히 민감해서 주군이 맘속으로는 하고 싶으나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는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자신이 대신 저질러 주군의 이익을 챙겨줄 뿐이었다. 그는 주군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하면 기다렸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일도 있었고, 시기를 놓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유비의 입장에선 ‘입안의 혀’와 같은 존재였고, 실제로 제갈량은 주군인 유비를 깊이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때문에 유비가 촉 땅으로 들어갈 때 방통을 군사로 삼아 데려간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방통은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주군을 성공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먼저 방통은 목표를 정해놓고 주군까지도 밀어붙여 선택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서촉을 정벌하는 일을 놓고 유비는 인의(仁義)와 실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마다 방통은 답안지를 마련해놓고 유비를 강하게 밀어붙인다.
조조가 서량을 정벌한 뒤 다시 한중을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중원 서쪽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한중은 촉 땅을 빼앗아 조조와 맞서려 하면서 정국이 변화한다. 이때 촉의 유장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에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유비와 모사들은 그 기회에 촉을 자신들이 빼앗겠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착한 유비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주군은 고민에 빠진다.
유비는 자신의 오늘날의 명성이 조조가 급하고 포악하게 굴면 자신은 느긋하고 어질게 행동해 얻은 것인데 자신이 종친인 유장의 기업을 빼앗을 경우 닥쳐올 비난을 두려워한다. 이에 방통은 말한다.
“이런 난세에 한 가지 도리만 좇고, 일상의 이치만 따진다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평화시에 따라야 할 도리와 난세의 도리는 다른 것이며, 난세에는 뒤로는 무력으로 취하고 앞으로는 권위로 다스려 평정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이 말에 현덕은 확 깨닫는다. 방통은 서촉으로 들어가서도 처음 유장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유장을 쳐서 없애려고 한다. 유비가 말렸지만 방통은 도모하는 바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 유비가 나서서 막긴 했지만, 그는 이렇게 목표가 정해지면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실전에서의 계책과 실행력에선 제갈량을 앞서
서촉공방전은 3년을 끌었던 전쟁이었고, 방통은 그 전투 과정에서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가맹관에서 이젠 서촉을 공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는 유비에게 세 가지 계책을 들이밀며 선택하라고 한다.
“상책은 정예병을 가려 뽑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름 길로 달려가서 성도를 급습하는 것이며, 중책은 먼저 부수관을 점령하고 곧장 성도로 향하는 것이며, 하책은 백제(白帝)로 물러났다가 형주로 곧장 귀환해 서서히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유비는 여기에서 중책을 선택하고, 방통은 신속하게 군사를 움직여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부수관을 지키던 양회와 고패를 계책으로 불러내 참수한다. 이 두 장수를 참수하는 문제에 대해 유비는 머뭇거린다. 그러나 방통은 그런 주군의 머뭇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집행해버린다.
이렇게 방통은 실전에서의 계책과 실행력에선 과감하고 신속해 제갈량을 앞서는 면모를 보인다.
소설 『삼국지』에선 방통이 제갈량을 질투해 제갈량의 우려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리며 낙성으로 진군하다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제갈량과 방통 사이의 질투가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공사(公事)에선 원래 친구도 형제도 없는 법이다. 유비에게 익주(서촉)를 바치기 위해 모의했던 장송의 역모를 고변한 것은 그의 친형이다. 제갈량도 친형인 제갈근이 손권의 사자로 와서 자기 식구들이 다 죽게 됐다고 하소연해도 유비와 연극을 벌이며,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물며 친구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뜻이 맞으면 힘을 합치고, 경쟁상대가 되면 원수가 되는 거야 조직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같은 조직에서 공명을 다툴 때는 우정이 아니라 실리를 따지기 때문이다. 실리 앞에선 친구가 순식간에 적도 되고, 적도 순식간에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군으로부터 막상막하의 사랑을 받는 두 친구 사이에 심한 경쟁심과 질투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없었다면 그건 신선의 세계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물론 그런 질투심이 길을 잘못 들면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 동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경쟁심과 질투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조직에서의 성패를 가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통의 죽음이 소설에서처럼 질투심에 눈이 멀어 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부수관을 점령한 후 낙성을 얻는 데까지 꽤 후다닥 지나가 버리지만, 실제로는 1년이 넘게 걸렸던 전투였다. 또 서촉 공방전은 3년을 끌었던 전쟁이었고, 방통은 그 전투 과정에서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는 방통이 죽은 후 제갈량이 장비와 조자룡을 데리고 익주로 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방통이 낙성을 깨는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제갈량은 이미 서촉의 다른 지방들을 함락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장자방의 지모를 가졌으나 신하의 처세에선 부족
▲방통은 신하로서 정점에서 죽었기에 능력 있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로 유비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사진은 방통의 묘. [중국 바이두 백과]
방통은 장자방의 지모를 가졌으나 신하의 처세에선 제갈량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면모를 보인다. 한 예로 방통은 주군의 잘못된 처신에 대해 직선적으로 지적한다.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죽이고, 부수관에 무혈입성한 뒤 잔치를 열며 흥에 겨워 말한다.
“군사, 오늘 이 자리야말로 흥에 겹지 않소?”
이때 방통이 말한다.
“남의 나라를 치고 나서 이토록 즐거워하시니 어진 사람이 취할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이 말에 유비가 화를 내며 나가라고 소리치고, 이내 반성하고 사과한다. 반성과 사과, 낮은 자세를 보일 줄 아는 것은 유비 리더십의 큰 덕목이었다. 그러자 그는 두 번의 사과를 받고 나서야 말한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방통은 자아가 너무 강해 주군과 이런 부딪침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이럴 때 제갈량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앞으로는 유비의 말을 들어주며, 유비가 취한 것을 핑계 삼아 다른 곳으로 데려가 남들이 못 보게 했을 것 같다. 사실 유비의 행동은 그동안 유비가 앞세운 이미지, ‘인의의 군자’가 해야 할 바가 아니었다. 밖으로 알려지면 분명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길 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마음속이 진정 즐거웠다 해도 밖으로 드러내고 알려지면 안 되는 거였다.
제갈량도 이런 이치는 깨달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주군의 잘못은 드러내지 않고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혼자서 주군도 다른 병사들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감추는 방도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방통은 대놓고 지적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실제로 방통은 사람들의 인물 평을 즐기고, 칭찬을 많이 해서 스스로 격동되도록 격려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좋은 선생의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아랫사람에게는 좋지만 윗사람과는 불화할 가능성이 많다.
그에겐 사람의 행실과 됨됨이가 보이고, 잘못된 점은 고쳐주려는 강한 욕구가 있어서 윗사람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윗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더욱이 옳은 지적일 때는 더욱 불편하고, 화가 나게 만든다.
윗사람은 늘 자신이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고 믿고 싶어 하고, 그렇게 주변을 믿도록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가 주군에게 진실과 옳은 말을 할 때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옳은 말을 하고 핍박당한 뒤 이에 저주하며 분노하는 것은 이런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한 바보 같은 짓이다.
나중에 유비가 황제로 즉위한 지 3개월 만에 동오를 정벌하겠다며 나서자 제갈량은 유비를 떠나보낸 후 한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법효직(법정)이 살아 있었다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법정은 유비가 서촉에서 얻었던 또 한 명의 모사였다. 그는 익주를 얻는 데 내부 동조자로써 큰 공을 세웠고, 나중에 유비가 한중을 얻는 데 장군으로 나가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제갈량은 이 순간 자신의 친구이자 유비에게 서천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던 절대 모사 방통이 아니라 법정을 떠올린다. 법정은 기기묘묘한 재주로 유비가 한중을 얻는 데 대활약을 했던 재능이 뛰어난 모사였다. 하는 짓을 보면 격이 좀 낮았지만 오히려 유비가 매우 사랑했던 모사로 알려져 있다.
제갈량은 유비가 고집을 피울 때 말리는 스타일이 아니고, 방통은 강직해서 자칫 들이받을 수 있는 스타일이어서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법정처럼 주군을 기분 좋게 꼬이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방법을 활용할 줄 아는 스타일이 먹힌다. ‘꿩 잡는 게 매’라고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주군과 대립각을 세우며, 강직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대체로 열등한 전략이다.
선비의 풍모, 조조의 모사 중 순욱과 같은 사람
진수는 ‘촉서’에서 방통을 평하며, 고아하고 준수했으며 조조의 모사 중 순욱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유가적 선비의 풍모가 강했다는 말이다. 유비는 다른 군주들과 달리 자기 부하들을 깊이 믿는 남다른 경쟁력이 있었고, 수하들에게 워낙 관대했기에 방통이 오래 살았다 해도, 순욱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거다.
사실 제갈량이 건국과 수성까지 함께 하는 재상으로 죽는 날까지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자기 사람을 아끼고 믿는 유비의 남다른 리더십 덕분이었다. 그러나 방통은 조직 내 경쟁에서 분명 군주의 심기까지 관리할 줄 아는 제갈량에게는 밀렸을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신하는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강하게 지키며 살 수는 있다. 어느 순간까지는 말이다. 주군이 성장과 발전을 위해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를 지키려면 항상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주군이 욱일승천하여 강해진다면, 잽싸게 자리를 내놓고 주군의 눈에서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게 영리하다. 그러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아와 자리를 동시에 지키는 방법은 흔치 않다. 더구나 자아란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주군에게도 있다. 주군은 지식과 지혜와 재능이 신하에 못 미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능가하고 제압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권력자는 자신의 자아를 양보해가며 자기 부하가 옳다고 우기는 일에 맞추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자신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고 자신이 흔쾌히 생각할 때는 받아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자의 자아이지 부하의 자아가 아니다. 권력자는 부하가 스스로 자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이나 주군에게 대드는 꼴을 보지 않는다.
어쩌면 방통의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큰 공을 세우고, 누려볼 기회도 없이 일찍 죽자 유비는 심하게 애통해하며, 그의 아버지·형·동생에다 어린 아들까지 모조리 불러다 벼슬을 주고 보살핀다. 또 방통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이 크게 슬퍼하지 않으며 삐딱하게 말하자 유비는 진노해 그를 내쫓아버리기도 한다. 그야말로 방통은 신하로서 정점에서 죽은 것이다. 죽은 타이밍이 절묘해 그는 내내 능력 있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로 유비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훨씬 구차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됐을 것이다. 자아와 원칙이 강한 신하는 주군과 축성(築城)은 함께 하며 고생은 나눌 수 있으나 수성(守成)을 하며 복록을 함께 누리기는 어렵다.
◇방통(龐統, 178~213)
자: 사원(士元)
별호: 봉추(鳳雛-봉황의 새끼) 선생
소속: 후한말, 유비
출신: 양양군(襄陽郡)에서 출생해 사마휘로부터 ‘남주(南州)의 제일 기재’라는 평을 듣고 일찍이 유명한 선비의 반열에 올라선다.
출사: 남군(南郡) 공조(군사들의 공로를 기록하는 자리)로 시작해 주유가 남군 태수 당시 잠시 함께 일한 것으로 기록됨. 유비에게 발탁돼 치중종사를 거쳐 군사중랑장이 된다.
사망: 유비의 서촉공방전 당시 낙성 점령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 당시 나이 36세.
■자기를 망치는 기술
(1) 독설가 예형(禰衡)과 공융(孔融) 2017.06.17
자타가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인정할 만한 성공을 거두는 신하는 10명 중 한 명 정도나 나올까? 대부분은 평범하게 자신의 일을 하면서 가족들 부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조직생활을 한다. 그리고 10명 중 한두 명 정도는 크게 실패한다. 성공하는 신하와 자기를 망치는 신하들은 모두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다. 개성이란 좋게 쓰면 좋고, 삐끗하면 자신을 망칠 수 있다.
『삼국지』에서 예형은 독설가· 궤변가라고 하면 그를 꼽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삼국지』에는 기이하게 잠깐 나타났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바로 예형(禰衡)이다. 그는 출사한 지 1년 만에 분노한 조조에서 유표로, 다시 황조에게로 갔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절친한 친구 공융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독설과 궤변에 분노하고 화를 낸다. 그는 역사에 짧게 왔다 갔지만, 독설가·궤변가라고 하면 그를 꼽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예형은 당대의 천재로 꼽혔던 공융(孔融)이 조조에게 천거한 사람이다. 당시 조조는 원소와 싸움을 앞두고 양진영 모두에 거리를 두고 중립을 지키는 형주의 유표를 설득하기 위해 사자로 보낼 사람을 물색하였는데, 이때 공융이 나서 ‘황제를 보필할 만한 인물’이라며 예형을 천거한 것이다. 공융은 예형을 천거하는 표에 다음과 같이 쓴다.
“예형은 자질이 맑고 곧으며, 타고난 재주 또한 남달라서 어려 처음 글을 익히자마자 곧 그 깊은 뜻을 깨우쳤고, 눈앞에 한번 스친 것을 입으로 외우고, 귀로 한번 들은 것을 마음에 잊지 않으며, 성품과 도(道)가 합치되고 생각은 신에 가깝고, 성실하고 정직하며, 지조가 곧아 착한 일을 들으면 기뻐하고 악을 보면 미워하고, 절개가 남다른 절세의 위인이라. 재주로 말하자면 사리에 밝고, 변설에 능하며, 지모가 심원하고, 일을 과감히 결단하니 가히 국난을 진정시키기에 족할 인물입니다.”
조조에게 독설을 퍼부은 예형
▲조조가 자신을 망신주자 옷을 훌렁 벗어버리며 좌중을 놀라게 한 예형.
이에 조조는 사람을 보내 예형을 불러온다. 그런데 조조는 그를 한 번 보더니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고 세워둔다. 이에 예형이 말한다.
“천지가 광활하나 사람은 없도다.”
조조가 말한다.
“내 수하엔 당대의 영웅이라 할 인물만 수십 명이다. 어찌 사람이 없는가?”
이에 예형은 조조 밑에 있는 수하들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순욱은 남의 집 문상이나 다니면 제격이고, 순유는 무덤이나 지키고, 정욱은 관문이나 여닫고, 곽가는 글이나 읊조리면 딱 맞을 위인입니다. 또한 장요는 북이나 치고, 허저는 마소나 먹이고, 악진은 조칙이나 읽고, 이전은 격문이나 띄우고, 여건은 칼이나 갈고 쇠나 두드려 창검을 만들라 하고, 만총은 술이나 거르며 지게미나 마시면 딱 알맞을 것이오. 우금은 등짐으로 흙을 날라 담이나 쌓고, 서황은 개돼지나 잡는 백정노릇을 시키면 제격일 것이오. 하후돈은 덩치만 크고, 조인은 돈을 긁어모으는 데 이골이 났고, 나머지들이야 모두 허우대만 멀쩡한 옷걸이 아니면 밥통일 뿐, 들어 말할 게 있겠소이까?”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천문지리를 환하게 꿰고, 삼교구류(三敎九流, 유·불·선 3교와 유가·도가·음양가·법가·명가·묵가·종횡가·잡가·농가의 아홉 갈래 사상)에 대해 모르는 게 없소이다. 위로는 임금을 요·순 임금처럼 만들고 아랫사람들은 공자와 안연 같은 덕을 갖추게 할 수 있으니, 어찌 세간의 속된 무리와 더불어 논할 수 있겠소이까?”
조조는 그의 독설에 마음이 언짢았지만 그는 어쨌든 장안에 이름난 기재다. 이에 조조는 그를 망신주기 위해 아침조회나 잔치에 북을 치는 자리를 내준다. 예형은 이에 앙심을 품고, 다음날 조회 때 옷을 갈아입지 않고 북을 치다가 이를 지적하자 그 자리에서 옷을 훌렁 벗어버린다. 좌중은 모두 놀라고 조조도 당황하여 꾸짖는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탁한 장소에서 나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청백한 몸을 드러내 깨끗함이 무엇인지를 보였을 뿐이오이다.”
조조가 화를 내며 무엇이 탁하냐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탁함의 근원은 바로 너다. 네가 어진 이와 우둔한 자를 분간하지 못하니 눈이 탁하고, 시서를 읽지 않았으니 입이 탁하고, 옳은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귀가 탁하고, 고금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니 네 몸이 탁하고, 제후를 용납하지 못하니 이는 네 배가 탁하고, 불철주야 찬역의 염에 불타니 마음이 탁한 탓이라. 나로 말하면 천하의 명사이고, 시류에 능하며, 동서고금의 이치를 깨고 있는 재사 중의 재사이거늘 네가 나를 북이나 치게 하니, 이것이 무례하지 않으냐. 사람을 이렇게 우습게 아니 네가 어찌 천하를 얻으려는 배포를 가진 자라 할 수 있느냐.”
이는 시쳇말로 ‘자뻑 대마왕’ 정도가 아니라 병적인 정도의 자아도취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예형이 조조에게 출사하기 싫어서 그렇게 막말을 했다고도 한다.
결국 조조는 그를 유표에게 보낸다. 유표도 재사로 유명한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유표의 덕을 칭찬한다는 것이 모두 은근히 비꼬며 욕을 하는 것이니 참을 수가 없다. 유표는 그를 강하에 있는 황조에게 보낸다. 황조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하는 말마다 상대를 깔아뭉개고 욕하는 것이니 분개해 죽여 버린다. 그는 머리가 떨어져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욕을 했다고 한다.
▲공융(오른쪽)은 조조를 비판하는 체제 내 야당 노릇을 하다 죽임을 당한다.
어설픈 정의감에 불타는 예형의 후예들
남의 시시콜콜한 약점들을 끌어내 비판하고, 막말을 퍼부으면서 어설픈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예형의 후예’들은 요즘도 많다. 남의 약점을 공격하고 독설을 퍼붓는 것을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부류들이다. 예형은 그런 사람들의 큰 형님뻘일 것이다.
물론 그의 말에는 일견 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속에 구린내 나는 것을 품고 살기에 구린내가 날 수밖에 없다. 그가 “네 창자 속에 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몰라서 이런 걸 끌어내 세상에 진열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런 게 세상에 돌아다니면 세상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 것만 아니면 남의 구린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조롱하고 욕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니 이런 것만 끌어내 욕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이라는 허명(虛名)을 쌓는다. 원래 진실을 얘기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와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거칠게 대놓고 끌어내 욕을 하니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예형은 죽었을 때 가슴 속에 세상을 경륜할 계책서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지모도 채택되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다. 지모를 타고난 자가 세상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써보고자 한다면 먼저 말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예형이 ‘인격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옳은데 세상이 다 틀려먹었다’는 생각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 아니다. 예형 같은 천하 기재도 ‘세상이 다 틀렸다’고 외치다 불과 스물다섯 살에 죽임을 당했다.
공융은 공자의 20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다. 집안 좋고, 명석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성격도 곧으니 한마디로 국가대표 ‘엄친아’였다. 그는 북해태수로 있을 때, 황건적 관해가 쳐들어오자 태사자를 유비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이후 유비가 서주를 얻는 데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조조를 비판하는 체제 내 야당 노릇을 하다 죽임을 당한다.
공융은 조조의 조직 내에서 직언과 쓴 소리, 비판을 많이 했고, 조조가 하는 일에 주로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주군에게 좋은 신하였다는 사례는 별로 없다. 다만 그는 조직 내 평론가 혹은 비평가 같은 인물이었다. 조직에는 반드시 이런 비평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자신이 아는 것을 실무보다는 말로 풀어내는 데 정력을 낭비한다. 이런 비평가들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닌데 이로써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높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을 사고, 조직에서도 중용되기 어려운 타입이다.
물론 먹물깨나 먹은 선비들 중 상당수는 불평과 비판을 일삼고, 현실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런 현실적 실력 부족을 쓴 소리와 비판으로 포장하여, 자신이 중용되지 못하는 것은 실력부족이 아니라 군주가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경향도 있다.
이런 선비들이 넘치는 판국이니 비판과 쓴 소리를 했다 하여 주군들이 곧바로 죽이는 것은 아니다. 주군들은 이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 밑에 수두룩하게 두고 있기 때문에 일단 이런 인물들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포기할 줄도 안다. 말 많은 신하를 죽일 때에는 주군의 가슴 속에 그만큼의 증오가 있거나 자신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양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때이다.
‘미스터 쓴 소리’ 천하기재 공융(孔融)
▲공융은 공자의 20세손으로 국가대표 ‘엄친아’였다.
공융은 정황상 전자와 후자의 경우를 아울렀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군에게 넌덜머리가 날 정도의 증오와 혐오감을 심어줌으로써 명을 재촉한 혐의가 짙다. 그는 어떤 ‘기술’로 자기를 위기로 몰고 갔을까.
첫째, 공융은 남의 일에 너무 많이 나섰다. 한 예로 조조가 황실 백관들의 대표이며 원술의 친척인 태위 양표를 제거하기 위해 술수를 꾸밀 때였다. 겉으로는 조조임이 드러나지 않게 일을 꾸미는데도 공융은 조조에게 달려가 “양공이 황제를 모심에 있어 청렴하고 덕이 높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설사 원술과 내왕이 있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죄가 된다 하십니까?”하고 따진다. 조조가 “조정에서 하는 일인 모양”이라며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성왕(成王)이 소공(召公)을 죽였다고, 주공의 입장에서 모르는 일이라 발뺌할 수 있겠소이까?”하며 반박한다.
조조가 양표를 제거하려 한 데는 자칫하면 자신이 곤경에 빠질 수 있다는 방어적 이유가 있었다. 물론 옳지 않은 일이었지만 원래 주군들은 이기적이어서 자기가 우선이다. 이런 일을 이렇게 대놓고 비판하고 말리니 양표의 목숨은 구했지만 자신의 목숨은 점점 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둘째,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그는 예형 같은 인물을 천거함으로써 사람 볼 줄 모르는 허황된 안목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게다가 무능한 게 아니라 주군을 모욕했으니 연좌제에 걸릴만한 빌미를 제공했다.
셋째, 주군이 사활을 걸고 하는 일에 늘 반대하면서도 그 이유는 고리타분하고 창의성이 없었다. 예를 들어 원소를 칠 것인지를 논의하는데, 공융은 “원소는 땅이 넓고 백성들도 안정돼 있고, 수하에 지략가와 용맹한 장군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순욱은 그들이 모두 쓸모없는 인물들이라며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넷째, 주군의 도덕적인 부분을 공격했다. 조조가 형주로 유비와 유표를 정벌하러 떠나려는 순간 공융은 조조에게 들어가 간한다.
“유비와 유표는 모두 한실 종친인데 함부로 치면 아니 되며, 손권은 범처럼 여섯 군에 웅거하여 지역을 평안하고 윤택하게 다스리며 백성들은 안전합니다. 또 큰 강을 끼고 있어 형세가 험난하니 공격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승상께서 대의명분도 없는 군사를 일으키시면 천하의 인망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대책 없는 쓴 소리로 화를 자초하다
그러나 이미 준비를 끝낸 조조는 화를 내며 그를 물린다. 일이 이쯤 되었으면, 신하가 해야 할 도리는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궁리하거나 전쟁이 불리하다면 말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도저히 주군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면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공융은 거꾸로 간다. 그리고 나가면서 혼잣말이랍시고 한다.
“진짜 도적이 지극히 어진 이를 치니 어찌 패하지 않을꼬…….”
세상의 모든 조직엔 벽에도 귀가 있어서 혼자 한 말이라도 비밀이 지켜질 거라 생각해선 안 된다. 이 말을 빌미로 결국은 그를 옭아 넣을 모략들이 짜이고, 결국 과거 예형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빌미로 ‘효’를 왜곡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처형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정황적 이유에 불과하다. 그를 진짜 위태롭게 만든 것은 공융이 자신의 주군인 조조를 ‘진짜 도적’으로 생각하며 혐오했다는 점이다. 그는 천하기재였으나 주군을 위해 제대로 된 꾀를 내지 않았고, 늘 반대만 한다. 이는 그가 지략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군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은 순식간에 상대방에게 전이된다. 조조도 이를 알아차렸고, 그러므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미웠고, 다만 그의 명성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빌미를 잡자 죽여 버린 것이다.
주군을 사랑하는 신하의 경우 주군에게 쓴 소리를 하고 반대를 해도 주군은 그를 살려둘 가능성이 더 높다. 더욱이 조조는 많은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상과 원희를 잡으러 멀리 오환정벌을 하고나서 반대했던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며, “언제든 기탄없이 반대하라”고 주문했던 군주였다. 쓴 소리를 할 때는 진정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야 하며, 대책도 함께 내놓아야 한다. 조직 내에서 대책 없는 쓴 소리는 그야말로 헛소리나 다름없는 말이다.
어쨌든 공융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옳은 말’이었다기보다는 그가 가진 조조에 대한 혐오감이었다고 생각한다. 주군을 참을 수 없이 혐오한다면, 자신을 파괴하기 전에 떠나는 것이 나았다. 공융은 자신이 증오하는 주군을 모시는 일이 얼마나 신하를 위험에 빠뜨리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예형(禰衡, 173~198
자: 정평(正平)
소속: 후한 말
출신: 청주 평원군 반현(靑州 平原郡般縣)
출사: 공융의 천거로 출사했으나 조조에게서 북치는 자리를 받았다가 이후 유표(劉表)에게 사자로 갔다, 다시 유표의 심복인 황조(黃祖)에게 보내진다.
사망: 황조를 능멸하다 처형당한다. 당시 25세.
◇공융(孔融, 153~208
자: 문거(文擧)
소속: 후한, 조조
출신: 예주 노국 곡부현(豫州 魯國曲阜縣) 출신으로 공자의 20세손의 명문가 자손으로 문필에도 능하여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저서로 『공북해집(孔北海集) 총10권』이 있다.
출사: 헌제 때 북해의 상으로 임명받아 학교를 세우고 유교를 가르치기도 했고, 이후 조정으로 출사. 명망이 높았으나 치적은 별로 없음
사망: 조조의 형주 정벌에 분개해 조조를 비판하다 처형당하고 가족도 몰살당함
◆(2) 주인을 잘못 고른 탁월한 신하들 2017.05.21
신하의 처세에 성공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면, 반드시 마스터해야 할 사람이 가후다. 가후는 수없이 주인을 바꾸고, 앞선 주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홀로 살아남아 삼공에 반열에 오르고 천수를 누리다 자기 침상에서 편히 눈을 감은 ‘처세의 달인’이다.
▲『삼국지』 위서 가후전에서 진수는 가후에 대해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었다”고 평했다.
가후(賈?), 삼국지 최고의 처세술과 책략의 달인
가후는 주군을 고르는 눈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는 자리가 있는 곳에 우선 뛰어들고 보는 스타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첫 출발은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당하면서 동탁의 천하는 햇수로 3년 만에 끝났고, 우보 역시 자신의 심복이었던 호적아에게 살해당한다. 게다가 명분 있게 죽은 것도 아니고, 재물을 들고 도망치다 재물에 눈이 먼 심복이 죽인 것이니 우보라는 인물의 됨됨이가 참으로 변변찮았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그 다음 주인은 천하의 무도한 이각과 곽사 같은 무리들이다.
이렇게 신하의 첫 번째 원리, 주인을 제대로 골라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못한 가후는 어떻게 천수를 누리며 명성을 떨치는 신하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아니다 싶으면 지체 없이 떠나라
첫째, 가후는 주인을 움직여서 자기 자리를 만들 줄 알았고, 아니다 싶으면 지체 없이 떠나는 이적(移積)의 달인이었다. 조폭 조직이나 다름없었던 동탁의 잔당들은 동탁이 살해당한 후 그저 죽음이 목전에 이른 상황이었다. 동탁의 부하 이각, 곽사, 장제 등은 장안의 실권을 잡았던 왕윤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왕윤은 “모두 용서해도 너희들만은 안 된다”고 거절한다. 이에 이들은 군대를 버리고 도망칠 궁리를 하는데, 가후가 이들을 설득하고 단결시킨다. 그리고 정국을 뒤엎을 수 있는 계책을 내어 장안으로 쳐들어가 여포를 추방하고, 왕윤을 죽인 뒤 동탁보다 더 무도하고 끔찍했던 이각과 곽사가 연합한 건달 정권을 탄생시킨다.
머리라고는 없는 조폭의 중간 보스쯤 됐던 이각과 곽사가 집권하면서 가후는 이 정권의 머리 노릇을 한다. 그렇다고 높은 직책에 앉은 것은 아니다. 다만 관리 선발을 관장하는 자리에 앉아 무도한 권력자들이 저질러놓는 폐단을 인재를 통해 막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건달패거리인 이각과 곽사는 저희들끼리 의심하며 난을 일으켜 장안을 초토화하고 황제를 핍박한다. 이때 가후의 선택은 천자를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모셨던 주군 이각의 무도함이 극에 달하자 떠나버린다.
다음에 선택한 것이 역시 동탁 잔당의 한 사람인 장제의 조카 장수다. 가후는 별 근거지 없이 떠도는 장수를 도와서 조조·원소의 세력으로부터 중립을 지켰던 유표와 화친을 맺게 한다. 그리고 조조가 쳐들어오자 계책을 세워 조조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또 장수가 원소와 조조 중 어느 편인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섰을 때, 가후는 원소가 보낸 사자 앞에서 원소의 편지를 찢으며 거절 의사를 밝힌다. 그리고 장수에게 조조 편에 설 것을 설득한다. 사실 장수와 조조는 워낙 치열하게 싸웠던 데다 조조의 맏아들과 조카까지 죽였던 터라 장수는 조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그 당시엔 누가 봐도 원소의 세력이 워낙 컸기에 조조 편에 선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가후는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읽는 눈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장수를 설득한다.
“조조와 손을 잡는 것이 세 가지 면에서 옳소이다. 첫째, 조공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는 것이니 명분이 있고, 둘째 원소는 지금 형세가 강성하니 우리 같은 적은 세력이 저를 따른다 해도 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나 조공은 형세가 약하니 반드시 환영할 것이며, 끝으로, 조공은 오패(五覇)의 뜻을 품고 있는 자라 사사로운 원한으로 대사를 그르치지 않을 것이오.
세태를 읽는 눈이 정확했다
▲가후는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읽는 눈이 있었다. 사진은 중국 드라마 속 가후.
마침내 가후는 장수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귀순한다. 조조는 원래 가후의 능력을 높이 샀던 터라 그를 얻은 것을 기뻐하며, 경찰서장 격인 집금오에 임명하고, 후에 관도대전에 함께 데리고 간다. 그 후 장수는 원소의 장남인 원담이 남피까지 도망갔을 때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며, 조조의 장수로 살았고, 가후 역시 조조의 모사로 관도대전부터 대활약을 펼친다.
둘째는 탁월한 실력이다. 신하에게 있어서 실력이란 어디서나 통하는 궁극의 경쟁력이다. 그는 곽가가 죽은 이후 조조 무리들 가운데 전술과 전략을 담당하는 핵심을 차지한다. 그는 세태를 읽는 눈이 정확했다. 조조가 관도대전에 임해서 반년이나 대치를 하며, 군량 위기로 몰린다. 이때 가후는 조조에게 조조가 이길 수밖에 없는 네 가지 이유를 들며 대치만 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간한다. 조조가 남정하여 손권을 치려 할 때는 “전쟁을 하지 말고 선비들에게 상을 주고, 백성을 위로하고, 편하고 즐겁게 일하도록 한다면 손권이 저절로 머리를 숙일 것”이라며 화친 전략을 간한다. 그러나 조조는 듣지 않고 전쟁을 벌이다 패한다.
또 가후의 인상적인 활약은 막무가내 젊은 장수 마초를 이기는 계책이다. 조조의 장수들은 힘으로 마초를 대적하지 못하고, 그래서 나가 싸우기보다 지키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조조는 평소 침착한 태도로 병사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군심을 잘 다스리는 리더다. 그런데 조조는 마초가 자기 군영 밖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성을 잃고 투구를 벗어던지며 소리친다.
“저 놈이 살아있는 한 내 묻힐 땅조차 없겠구나.”
마초와 대적하며 조조의 스트레스도 그 정도로 극에 달해 있었다. 가후는 이런 천하무적 마초를 같은 편끼리 의심하도록 이간책을 쓰는 방법을 제안하고, 이를 실행함으로써 마초를 멸망시킨다.
또 조조가 후사를 결정하는 문제로 장남 조비와 삼남 조식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가후에게 묻는다. 이때 가후는 즉답을 피하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다만 원본초(원소)와 유경승(유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원소와 유표가 모두 장남을 후사로 세우지 않아 망했음을 넌지시 일깨워주는 것으로, 조조는 이 말을 듣고 조비를 후사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 삼국지』 위서 가후전에서 진수는 “순유와 가후는 잘못된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둘은 권모에 빈틈이 없었고, 변화에 따르는 융통성이 있었으니 가히 장량과 진평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한다. 그는 실력으로 수퍼S급 인재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삼가고 조심하는 낮은 자세 전략으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업무 실력이란 어느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는 경쟁력일 뿐이다. 이는 살아남는 경쟁력과는 다르다. 오히려 뛰어난 실력 때문에 일찌감치 뿌리 뽑혀 어느 귀신한테 잡혀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은 흔하다. 실력보다 중요한 게 살아남는 처세술이다.
가후는 언제나 외인부대였다. 동탁이 죽고 난 뒤 이각과 곽사의 무리에 속하게 되나 그는 원래 동탁 사위인 우보의 참모였다. 같은 편이긴 했으나 정통파 이각의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동탁의 무리들이 궁지에 몰린 시점이라 그는 이각의 무리를 돕는다. 그리고 드디어 이각의 무리가 권력을 쟁취한다.
이에 이각은 가후를 제후에 봉하려 한다. 그러자 그는 사양하며 말한다.
“그저 목숨을 구하려는 계책을 낸 것이 무슨 공이겠습니까?”
삼가고 조심하는 낮은 자세 전략
가후는 삼가고 조심하는 낮은 자세 전략으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실력이 뛰어날수록 몸을 낮추는 처세야말로 제 한 몸의 위태로움을 피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서 완강하게 사양하며 큰 벼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기관장인 상서복야를 맡기려 하자 이 역시 맡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인사부서의 일을 보는 상서를 맡았을 뿐이다. 그 후에도 가후는 이각이 내리는 관직들을 거절하며, 낮은 자리에 머물고 이각과 곽사가 서로 싸우며 난리를 부리는 통에는 대신과 황제를 보호하는 일에 나선다.
그는 계책과 모략이 깊고 뛰어난 데다 사람이 영민함에도 이처럼 삼가고 낮추는 태도 때문에 무도한 이각 등도 그를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주군들에게 경계심과 두려움을 주는 기운이 있었는데, 언제나 자세를 낮춰 자신의 영민함이 자신의 목을 치지 않도록 했다.
또 조조 진영에 합류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는 외인부대였다. 이에 그는 깊고 인상적인 실력을 보여주면서도 결코 나대지 않는 처세로 남들의 눈에서 비껴나려고 애썼다. 그는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으며, 집에 돌아와서도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았고, 자식들도 권문세가와 혼인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력이 뛰어난 것 자체로도 그의 주변에선 손톱을 세우고 노리게 돼 있다. 하물며 보호막도 없는 외인부대일 때에야 더하다. 그는 책잡히지 않는 전략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실제로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는 순직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에서 천수를 누리고 자기 집 침상에서 죽는 것이다.
원래 소문난 마당발이 허명(虛名)은 얻으나 실속이 없고, 때로는 그 숱한 인맥의 어느 부분에 치여 명예도 잃고 목숨도 잃는 일이 허다하다. 진정 실력 있는 사람은 숨어서 몸을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주군의 선택에서 실수할 수 있다.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무도하거나 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주군에게서는 영화를 구하지 않고, 때가 왔을 때는 떠날 줄 알고, 실력이 못 미치는 주인과는 함께 실력 있는 주인을 찾아 투항할 줄 아는 처세가 중요하다. 또 실력이 뛰어날수록 몸을 낮추는 처세야말로 제 한 몸의 위태로움을 피하게 하는 방법이다.
동탁의 모사 이유(李儒) - 주군을 완전히 잘못 고른 지식인
▲동탁의 모사 이유는 주군을 완전히 잘못 골라 자신의 능력을 세상을 파괴하는 데 사용한 불우한 지식인이었다.
소설 『삼국지』에 나타난 동탁 진영에서 가장 맹활약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 모사는 이유(李儒, 자는 문우(文優))다. 이유는 동탁이 당시 황제인 유변(劉辯)을 폐하고, 그의 아우인 유협(劉協)을 황제로 앉히는 문제에서부터 관여하기 시작하여 동탁 진영의 모든 전략이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 소설에서 이유는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원소가 맹주가 된 반동탁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원소의 숙부인 태부(太傅) 원외(袁隗)를 죽이고, 낙양(洛陽)에 불을 지르고 떠나 장안(長安)으로 천도하도록 건의하여 성사시키는 등 동탁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계책을 내놓은 모사로 그려진다.
이유가 간하는 대로 할 때 동탁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사도 왕윤(王允)이 동탁에게 초선을 보내고, 이로 인해 동탁과 여포(呂布) 사이에는 갈등이 깊어지자 이유는 초장왕(楚莊王)의 절영지연(絶纓之宴)의 이야기를 하며, “초선을 여포에게 보내라”고 간한다. 동탁은 워낙 이유의 말을 잘 듣는지라 처음엔 보내려 하다가 나중에 초선이 반발하자 마음을 바꾼다. 이에 이유는 “우리 모두 한 계집의 손에 죽겠구나”라며 통탄한다. 이유의 계책이 먹히지 않으면서 동탁 진영은 무너진다. 동탁은 수양아들 여포에 의해 살해당하고, 그 직후 이유도 함께 처형되는 것으로 소설은 그리고 있다.
최악의 무뢰배 동탁을 섬긴 불운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유는 동탁 사후에도 살아남아 이각이 이유를 헌제에게 천거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유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는 점에서 일단 소설에 나타난 그의 면모만으로 본다면, 이유는 판단에 실수가 없는 모사 중의 모사였다. 그러나 그는 주군을 완전히 잘못 골라 자신의 능력을 세상을 파괴하는 데 사용한 불우한 지식인이었다.
이유가 모셨던 동탁은『삼국지』‘동탁전’의 첫머리에 따르면, ‘젊은 시절 협기를 숭상하여 일찍이 강족이 사는 곳까지 떠돌아다니며 그 우두머리와 사귄 사람’이다. 한 마디로 건달 혹은 깡패였다는 얘기다. 완력이 대단했고, 염치와 도덕이 없었으며, 무식하고 배포가 컸다. 원래 구질서가 무너지는 시기에는 이런 인물들이 등장해 기존 질서를 완전히 허물고 무정부 상태와 같은 혼란을 야기하여 새로운 영웅들을 불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인물들은 권력 내부에서도 나타나고 외부에서도 나타난다. 가깝게는 명나라 말기의 이자성이라든지,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서도 신군부 쿠데타 세력과 같은 이들이다. 동탁은 그들 중에서도 최악의 무뢰배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역사 속에서 후한 말의 혼란을 단기간에 극적으로 ‘혼란의 궁극’까지 밀어붙인다. 후한 말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뛰어난 인물들이 동시에 튀어나와 일전을 벌인 것은 동탁이 가져온 엄청난 충격의 여파로 인한 것이다.
동탁은 나쁜 권력이 갖는 모든 특징, 무식함·파괴·포악함·공포·탐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악한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식인, 즉 모사의 계책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뛰어난 지식과 지능과 재능을 갖고 태어난 자가 때로는 세상을 악하게 만드는 데 가장 앞장서기도 한다. 바로 이유가 그런 인물이 된다. 재능이 뛰어난 자들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용처는 아주 달라진다는 점을 이유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 (3)자기를 망치는 기술 마지막회 2017.08.05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를 남긴 마속은 역사에서도 대표적인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남은 인물이다. 양의(楊儀)는 자신의 공로보다 보상이 적다고 불평하다 목숨까지 잃은 사례다
몸으로 익히지 않고 책으로 아는 지식은 실천적 상황이 벌어지면 무용지물이거나 오히려 자신을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마속이 그렇다.
삼국지』에서 마속이 등장하는 ‘분량’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제갈량의 남만정벌 당시 ‘칠종칠금(七縱七擒)’과 관련한 제언과 ‘읍참마속’ 고사 등을 남기며 소설에서도 존재감이 분명한 인물 중 하나다. 마속은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주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 뽑았던 인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양 지역에서도 재주 많기로 손꼽혔던 마(馬)씨 5형제 중 막내였다. 그의 형인 마량(馬良)이 다섯 형제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눈썹에 흰 터럭이 나 있어 ‘백미(白眉)’로 불렸다는 데서 ‘백미’라는 고사성어가 나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제갈량과 마량·마속 형제의 우정은 친형제 이상이었다고 할 만큼 각별했다. 마량이 오촉전쟁 당시 죽은 후 제갈량은 마속과 사사로운 대화도 나누며 아낀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속 역시 병법에 밝아 제갈량의 의논상대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가정전투의 실패 한 번으로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한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위기로 몰고 간 것일까.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마속을 처형한 후 목 놓아 울며 그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마속의 처형을 말렸던 장완이 제갈량에게 스스로 참해놓고 우는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제갈량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속 때문이 아니라 지난날 선제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러오. 선제께서 백제성에서 유명을 달리하시기 전에 내게 ‘마속은 말이 실제를 넘어서니 크게 쓰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내 그 일을 잊고, 급한 마음에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선제의 영명하신 선견지명을 오늘에야 깨달으니 애통할 뿐이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그 주인공
마속이 위기에 몰린 것은 바로 유비의 말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속은 그야말로 ‘검색’해보면 다 나오는 잡다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머리에 잔뜩 담아 놓고선 자신이 꽤나 총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부류의 ‘잡학다식(雜學多識)’형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몸으로 익히지 않고 책으로 아는 지식은 실천적 상황이 벌어지면 무용지물이거나 오히려 자신을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인간 네이버’라는 평을 듣는 똘똘한 사람들이 실전에선 무능하고 써먹을 데라고는 없는 허황한 경우가 많다. 마속은 이런 허황한 부류의 인간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렇다.
먼저 그가 꽤 똘똘한 병법의 전문가처럼 나오는 일화가 바로 제갈량이 남만정벌에 나섰을 때 ‘칠종칠금’ 전략의 힌트를 얻는 것으로 나오는 마속의 제언이다. 남만평정의 지략을 묻는 제갈량의 질문에 마속은 “앞에서는 누르고 뒤에서 배반하는 전쟁을 피해야 한다”며 이렇게 제언한다. “무릇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심전이 상책이고 병전이 하책입니다.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이에 제갈량은 “그대가 내 폐부를 꿰뚫어보는구려”라며 기뻐한다.
이 말은 이후에도 마속의 꽤 빛나는 명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는 병법을 공부한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한 예로 손자병법 ‘모공(謀攻)편’이 바로 이얘기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설파한 모공편에선 최상의 전쟁방법으로 심리전을 제안한다. 병사를 써서 전쟁하는 것은 하책이라고 논한다. 이는 특별히 지략이 높아서가 아니라 평소 병법에 밝았던 마속으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다.
마속이 허황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을 제갈량이 몰랐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유비가 말이 실제보다 앞서고 있는 그의 정체를 알았고, 이를 제갈량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또 마속을 가정으로 보낸 후 제갈량이 취했던 조치를 보면 그 역시 충분히 그의 허황함을 간파하고 있긴 했던 것 같다. 1차 북벌 당시 위군을 압박하자 사마의가 출정하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제갈량은 가장 먼저 가정을 걱정한다. 이때 가정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 마속이다. 제갈량은 마속을 가정으로 보내면서 신신 당부를 하고도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가정 동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열류성에 장수 고상을 보낸다. 그러고도 안심을 못해 촉군의 맹장인 위연까지 가정의 배후 지역에 주둔토록 한다. 가정은 말 그대로 산골짜기에 있는 길목이다. 제갈량은 마속을 보내놓고는 이 길을 하나 지키자고 위연까지 빼냈을 정도로 마속에 대한 믿음은 크지 못했던 것이다.
가정에서 보여준 마속의 행태는 먹물만 든 ‘똑똑한 멍청이’들이 얼마나 일을 그르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속은 그의 부장 왕평이 길목에 군영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하자 이를 거절한다. 왕평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무장이었지만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다. 실전에선 왕평의 대비책이 옳았다. 그러나 마속은 병법을 내세워 왕평의 기를 죽이고, 결국 산위에 기어 올라가 군영을 세운다. 왕평이 자신들의 임무는 길목을 지키는 것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마속은 꿈쩍도 않으며 병법을 들먹인다.
“병법에 이르기를 높은 곳에 의지해 아래를 보면 그 형세가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고 했다”는 둥의 흰소리를 하며 끝내 산으로 기어 올라가버려 스스로 퇴로도 없는 곳에 고립돼 버린 것이다.
똑똑한 멍청이’들이 일을 그르친다
▲마속은 가정전투의 실패 한 번으로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한다.
제갈량 역시 마속을 잘못 기용한 용병의 책임을 지고, 승상 자리에서 사직하고 스스로 세 계급 강등을 청하는 표를 황제에게 올린다.
원래 세상 물정 제대로 모르고 책을 외우곤 안다고 생각하는 똑똑한 것들과 입씨름하는 것이 10만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학교 성적 좋고, 공부 잘 하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 중에 실전에 무능한 사람들을 찾는 건 쉽다. 온갖 지식을 줄줄 외는 사람 중에 생각이 깊고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소설 『삼국지』에 양의(楊儀)가 빈번하고 비중 있게 등장하는 것은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면서다. 그는 제갈량을 따라 종군하면서 군중의 군수품과 군량 조달 등을 도맡아 하고, 제갈량도 그에게 빈번히 의견을 묻는 등 실무 능력을 인정한다. 『촉서』양의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여러 번 출병할 때마다 양의는 늘 계획을 짜서 부대를 편성하고 군량미를 계산했는데 생각할 것도 없이 짧은 시간에 처리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양의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는 것이다.
또 제갈량이 북벌 중 오장원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군사를 퇴각하는 것을 총지휘하는 일을 양의에게 맡긴다. 이로써 양의는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한중으로 퇴각한다.
이 과정에서 상장군 위연과 대립하고, 위연은 양의의 철군 결정에 반발하면서 양측이 격돌한다. 원래부터 양의와 위연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 제갈량 생전부터 애를 먹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선 양의의 실무능력이 필요했고, 위연의 용력이 전투에 필요했기에 둘을 중재하며 끌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자 이 두 사람은 브레이크도 없이 달려 나가 맞부딪친다. 이때 양의가 위연을 죽이고 제갈량의 영구를 모시고 성도로 돌아온다.
그리고 제갈량 사후 조정 인사가 개편되는데, 공명이 유언한대로 장완이 승상이 되고, 비의가 상서령이 되는 등 승진하고 양의는 예전 관직에 그대로 남는다. 이에 양의는 억울하다. 자신이 사투를 벌이며 위의 전선에서 군사들을 모두 안전하게 철수시켜 돌아온 공로가 큰데 보상받지 못한 억울함이 쌓인다.
또 양양 출신인 그는 형주에서부터 벼슬을 할 때, 장완보다 먼저 시작하고 급수도 높았었다. 그런데 장완이 승상이 되니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에 양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불평하기를, “벼슬을 지낸 햇수로 보아 내가 장완보다 먼저인데 어찌 그 밑에 있으며, 북벌에서 세운 공로가 적지 않은데 어찌 이리 박대하는가?”하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꺼리게 된다. 또 제갈량 사후 함께 한중으로 철군했던 동료 비의가 찾아가 위로하자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차라리 모든 군사를 이끌고 위에 투항했다면 내 지금처럼 적막했겠는가?”하고 말한다.
실무능력이 뛰어난 ‘소인배’ 양의
▲자신의 공로보다 보상이 적다고 불평하다 목숨까지 잃은 소인배 양의.
이에 놀란 비의가 은밀히 표를 올려 황제 유선에게 고하니, 황제는 격노하여 양의의 벼슬을 거두고 유배에 처한다. 그래도 양의는 유배지에서 불평을 하고, 이에 황제가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여기까지가 양의의 스토리다. 그는 실무능력이 뛰어났고, 실제로 힘든 제갈량의 북벌에 종군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이에 그는 조정 백관들 중 자신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승진 인사에서 누락되고, 원래는 자기보다 직위가 낮았던 장완이 승상에 오르자 분노하여 사방에 대고 불평을 한다. 자신의 공로보다 보상이 적다고 불평하다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은 양의만 있는 게 아니다. 양의를 비롯해 위연과 팽양 등도 이런 경우다.
이런 사례는 어느 조직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이다. 자신의 공로와 능력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분개하고 불평하다 더욱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흔하다. 이런 사람들은 늘 비분강개하고, 본인에겐 평생이 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분노에 아무도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 곁에선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지긋지긋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부풀려진 자신과 객관적인 자신의 현주소의 격차가 큰 경우다. 양의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그건 그가 제대로 조직생활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실무능력과 리더십은 다르다. 특정한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안심해도 된다. 양의는 군수물자와 식량을 조달하고, 적절하게 배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갈량도 인정해 그와 위연이 빚어내는 갈등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를 썼다.
그러나 제갈량은 죽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는 장완과 비의를 추천한다. 양의를 추천한 것이 아니다. 양의의 쓰임새는 바로 그의 실무능력에 있었지 조직 전체를 총괄하고, 조정을 이끌어나가는 일은 아니었다.
실무능력이란 한 분야에 특화된 능력이다. 타고났을 수도 있고, 오랜 세월 동안 그 일에 숙련됨으로써 탁월해졌을 수도 있다. 일을 수월하게 하는 능력, 숙련된 기술과 같은 것이다. 그 분야 하나 잘 한다고 다른 일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는 자신이 북벌에서의 공로가 있으므로 벼슬도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만심과 욕심이 능력을 앞지른 것이다. 이렇게 높은 자리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조직에서의 자리란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향후 그 조직을 이끌고 나갈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공로가 많아도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면 비전과 그 자리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조직 내에서 은원관계를 드러내놓고 갈등을 빚는 사람은 높이 올라가기 힘들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그의 인성에 대한 불안감을 준다. 대표적으로 위연과의 갈등이다. 어느 조직에서나 갈등을 빚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관계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이다. 그는 위연에 대한 혐오와 미움을 드러냈고, 갈등을 드러냈고, 이 때문에 제갈량까지 고민하게 했고 끝내는 위연의 식솔까지 모두 도륙을 냈을 정도로 깊은 증오심을 표현했다.
인간관계의 불화보다 나쁜 것은 이를 표현하고, 이 때문에 일에 지장을 받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높은 자리는 갈등을 관리하는 자리다. 그런데 자기 갈등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부하직원들의 갈등을 관리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 대한 과다한 환상이 덫
▲자신에 대한 과다한 환상과 자만심은 조직인생뿐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의 인생마저 망가뜨릴 수 있다. 양의가 그 사례다. 사진은 중국 드라마속 양의.
셋째, 고생에 대해서 보상받아야 한다는 기대감이 잘못이다.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녹봉을 받으며 일한다. 그 일의 양과 질은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좀 더 편하게 일하며 녹봉을 받을 것이고, 누군가는 고생고생하며 녹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달치 고생은 한 달치 임금 안에 포함돼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월급을 받지 못했을 테니까. 이를 모두 합산해 언젠가는 그만큼 높은 자리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기대감을 키운다면, 조만간 그 기대가 무너지고, 그 기대가 무너진 만큼 인성이 황폐화될 것이다. 사람은 조직인으로서의 삶이 자기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관리해야 할 것은 ‘나의 인생’이다. 조직에서 월급 받으며 한 지나간 고생을 조직에 대해 내가 빚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신은 인생으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다. 조직의 보상과 자신의 고생에 쿨해질수록 자신의 인생은 훨씬 살만해진다.
넷째, 그에 대한 평판이다. 제갈량이 죽고 촉군을 물려 한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위연과 양의가 갈등을 빚으며, 서로 상대방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성도에 표문을 올린다. 이때 조정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의론과정에서 양의에 대한 평판이 나온다. 장완은 “양의가 성품은 급하고 포용력은 없으나…”라고 말하고, 후에 동오의 손권도 “위연과 양의는 모두 소인배”라고 말한다.
이들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승진 누락 후에 양의가 보여준 행태, 즉 조직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투항하지 못해 한이라는 등의 발언을 함부로 한 행동으로 보아 그는 소인배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조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이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상대가 있는 만큼 질 수 있는 게 조직에서의 경쟁이다. 제 맘대로 되지 않아서 저주한다고 그 조직이 잘못되지 않는다. 오히려 잘 못되는 것은 자신이다. 조직에서 신하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실패할 수 있고, 질 수 있고, 물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점을 새겨두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인생이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진수는 “양의는 실무 처리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의 거동을 보고 언행이 예법에 부합되는지 아닌지 살펴보면 재앙을 부르고 허물을 취한 원인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기술했다.
신하의 삶은 자기수양의 과정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고생과 노력의 공로에 대한 평가보다 조직의 평가는 훨씬 박하다는 사실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일도 그런 수양 중의 하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과다한 환상과 자만심은 조직인생뿐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의 인생마저 망가뜨릴 수 있다. - 연재를 마칩니다
◇마속(馬謖, 190~228
자: 유상(幼常)
소속: 촉한, 유비
출신: 양양(襄陽) 의성(宜城)
출사: 촉한으로 들어갈 당시 형주종사(荊州從事)였으며, 면죽령(綿竹令)과 성도령(成都令), 수태수(嶲太守)에 올랐다.
사망: 제갈량 1차 북벌 당시 가정전투 패배로 처형당함. 당시 나이 39세
◇양의(楊儀·?~235년
자: 위공(威公)
소속: 촉한의 관료
출신: 양양군 출신
출사: 양양 태수 관우의 공조로 출사했다 유비가 초빙하여 촉한까지 쫓아가 관료 생활을 한다. 제갈량의 남정과 북벌에서 군수를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망: 한가군 유배지에서 자결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 『여류(余流)삼국지』 (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 『5월의 파리를 사랑해』 (문예중앙)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