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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1/ 중국 신화 - 100년 전 중국인의 생활상 - 지난 100년간의 중국 복장 변천사 - 중국 역사상 여인들

상림은내고향 2022. 9. 24. 12:53

중국 이야기1/ 중국신화 - 

■『 중국신화사 』 위안커 / 웅진지식하우스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선 그리스 신화에 관한 만화책이 유행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그리스 신화를 모르면 왕따를 당한다고 한다. 이는 단지 우리나라뿐 아니라 연령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신화란 단어는 이 시대를 읽는 하나의 코드가 되었다. 아울러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는 각기 나름대로 신화를 갖고 있다.


중국신화의 의미

중국신화는 분명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그 성격과 차원이 다르다. 서구의 학자들이 정해놓은 틀인 신화, 전설, 민담이라는 삼분법으로는 도저히 구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중국신화에 담겨 있다. 문헌 속에 활자로 고정되어 읽히기만 하는 신화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신화, 그것이 바로 중국신화라고 한다따라서 중국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영적 DNA의 일면을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신화를 알 필요가 있다. 여와라는 문헌 신화 속의 창세 여신이 지금도 여전히 민간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듯이, 중국신화는 그 발생과 전승 배경이 그리스, 로마와는 분명히 다르다. 특히 중국에선 신화가 역사와 매우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황제(黃帝)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역사 만들기 과정을 보아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위안커는 이런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시야를 좀 더 넓혀서 그러한 민간전설까지도 신화의 범위에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신화라는 명칭에 있지 않다. 문제는 다만 실질적인 정신에 있는 것이다. (『중국신화전설』 「도론편」, 8)라고 말했다. 위안커는 이 책 『중국신화사』 외에도 『중국신화전설』 (,. 1984), 『중국신화대사전』 (1998)도 저술 했다.『중국신화전설』이 이야기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중국신화대사전』 이 신화를 위한 일차적인 매뉴얼이라고 본다면, 『중국신화사』는 학술적 성격과 원전 자료로서의 가치를 두루 갖추고 있는 위안커의 최고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위안커가 주장하는 중국신화에 대한 오해 몇 가지

첫째, 중국신화는 선진(先秦)과 한()이후의 옛 문헌에 자질구레하고 단편적으로 기록되었는데, 그리스의 호메로스처럼 ‘신화시대를 노래한 시인’이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단편적 신화 조각들이 한데 녹아 거대한 작품을 이루지 못했다.

둘째, 후세 민간에 전해지는 ‘우랑직녀(牛郞織女)’나 ‘동영(董永)’과 ‘칠선녀(七仙女), ‘침향구모(?香救母), ‘백사전(白蛇傳), ‘망낭탄(望娘灘)’ 등의 신화는 일반 학자들의 눈에 그저 보통 민간고사로 보였지 신화로 간주되지 않았다.
 
셋째, 도교는 중국 본토에서 생겨난 종교로 이미 1700~18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도교의 선화(仙話)는 그 기원이 더 오래되어,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생겨났다. 선화 중에서도 적극적 의미가 있는 부분은 중국 문화에 좋은 영향을 미쳤는데, 과거에는 그것을 신화로 간주하여 고찰하지 않았다.

 
넷째, 중국의 역사 인물들에게는 종종 신화적 요소가 많이 붙어 있는데 강태공, 이빙, 진시황 등은 역사 인물인 동시에 신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의 신화 이야기는 신화로 간주되지 않았다.

 
다섯째, 중국은 다민족국가로서, 역사상 한족(漢族)외에도 다른 수많은 민족들이 이 광활하고 풍요로운 땅에 모여 살아왔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는 현재 55개 소수민족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신화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소수민족의 신화전설이 홀시되어 중국신화의 고찰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중국신화사()』 

상권에는 「원시사회 전기의 신화」 -‘신화전설 속의 중국 원시사회’를 시작으로 ‘위진육조시대의 신화’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산해경(山海經)』을 신화자료가 가장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는 책으로 뽑는다. 『산해경』의 지은이는 신화 인물인 하우와 백익이라고 되어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결국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원시시대 원시인들은 외부 세계의 사물을 탐구하고 인식하는 과정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이에 대한 답을 ‘신화적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 탐구하고 인식된 모든 것에는 신화나 종교적 색채가 덧씌워졌다.
  

『산해경(山海經)

그렇다면 『산해경』에 나오는 여러 신들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대부분 종교적 신들이며, 자연숭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새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한 신, 용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한 신, 용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신, 사람의 얼굴에 말의 몸을 한 신, 사람의 얼굴에 소의 몸, 다리는 넷에 팔은 하나, 지팡이를 걷고 있는 신, 새의 몸에 용의 머리가 달린 신등 매우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산해경』속 여러 신들은 모두 신만 있지 신화는 없다. 즉 스토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화’로 구분한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먼저 그림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글이 뒤따랐다.

 
『산해경』과 함께 거론되는 것은 『목천자전(穆天子傳)』이다. 선진(先秦)시대의 중요한 문헌 중 하나로, 『산해경』과 어깨를 겨룬다. 위안커는 신화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목천자전(穆天子傳)』의 중요성은 『산해경』에 한참 못 미친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산해경』은 풍부한 원시신화 자료를 갖고 있지만, 『목천자전』은 단지 약간의 신화자료를 가지고 신화적 성격의 역사소설로 엮어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의 그림자(史影)

위안커는 ‘역사의 그림자(史影)’라는 말을 통해 신화의 허구성과 비 허구성을 설명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화가 완전 허구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화라는 오색찬란한 프리즘을 통해 역사의 모습이 다양하게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 이렇게 신화를 확대해석 하는 점이 위안커의 특징이기도 하다. 반고처럼 개벽신에 속하는 여와에 대해 다시 언급하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 허구냐 아니냐를 단정 짓기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여와는 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인간을 만들고 하늘을 메웠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점이 논리적으론 따지면 분명 허구지만 100퍼센트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 여와에겐 먼 옛날 대모신(大母神)의 그림자가 남아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역사상 확실히 존재했던 신화 인물도 있다. 그가 한 일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사람들은 민간전설과 같은 구비 전승을 통해 그에게 많은 신화적 요소를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 인물인 동시에 자연스럽게 신화전설 인물의 신분으로 신화전설에 출현하게 되었다. 막심 고리키는 이런 말을 했다. “고대의 ‘유명한’ 인물은 바로 신을 만드는 원료이다”

 
중국에서 문자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 시기를 대략 은()나라부터 판단할 때 은나라의 첫 번 째 제왕이 성탕이고, 성탕을 보좌한 첫 번째 현신(賢臣)이 이윤이다. 그들은 역사 인물인 동시에 신화 인물로 등재된다. 성탕에 관한 신화는 『산해경』에도 나온다. 강태공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육도(六韜), 『금궤(?)』 등에서는 강태공이 정후(丁候)의 그림을 그려놓고 활을 쏘아 그를 병들게 했다가 다시 그 화살을 뽑아서 낫게 해주는 능력을 지녔다고 서술한 것이다. 또한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일곱 명의 신들이 눈 내리는 날 멀리서 찾아왔을 때, 강태공이 신들의 이름을 알아내 그들을 감탄하게 만든 지혜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

 

“강태공이 여기 있으니,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다.”라는 민간에 전해지는 속담은 바로 역사 인물이자 신화 인물인 강태공의 특수한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신화사』 의 의의

위안커의 세계 어느 나라와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중국신화의 풍부함과 웅장함을 보여주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중국신화사』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중국 신화의 무성한 가지와 잎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택한 방식은 ‘신화사’의 서술이다. 신화와 사()가 결합한 ‘신화사(神話史)’라는 개념은, 원시사회 이후로도 각 역사 시기마다 새로운 신화가 생겨난다는 ‘광의의 신화’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어지는 『중국신화사()』 에선 당, , , , , 청의 신화를 비롯해 중국내 소수 민족의 신화와 중국신화가 문학에 끼친 영향 등으로 이어진다.

 

『중국신화사』(

상권에 이어 하권은 당, 오대의 신화를 시작으로 송, , , 청을 거쳐 민간에 전승되는 신화. 소수민족의 신화 등으로 이어지며 ‘중국신화가 문학에 끼친 영향’으로 마무리된다.


기록 신화에서 설화문학으로

당나라에 이르러 중국신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당나라 이전의 신화는 대체로 필기체 형식의 소박한 기록으로서 책에 보존되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그 가운데 한 지류는 고대신화와 새로 생겨난 신화를 예전과 마찬가지로 필기체 형식으로 기록하는 한편 또 다른 지류는 신화전설을 자료로 삼아서 의식적으로 신화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록에서 벗어나 스토리텔링의 단계까지 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전자각적(全自覺的) 예술 가공이라고 표현한다. 대중들은 문학적 측면에서 그것을 감상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 믿기도 했다. 신화소설 유의(柳毅)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동정호에 동정신군이 생겨나고, 『서유기(西遊記)』의 작가에 의해 손오공의 형상이 빚어진 후 어떤 지방에 바로 제천대성의 사당이 생겨난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신화의 과도기적 현시(顯視)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일부에선 받아들이고 일부에선 반대 입장에 서기도 했지만, 이미 신화소설이 대중 속에 뿌리를 내렸기에 그것을 신화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신화소설 중 몇 편을 소개하고 있다. 왕도의 「고경기(古鏡記), 심기제의 「침중기(枕中記), 이복원의 「정혼점(定婚店), 「이조위의 유의(柳毅), 이공좌의 「고악독경(高岳瀆經)」 등이다.


() 시대, 신화소설의 쇠퇴

중국신화는 송(), ()시대에 이르게 되면, 민간에 구전되는 신화는 점점 발전하는 반면 문인이 신화 자료에 근거해서 지은 신화소설이나 신화 이야기는 확실히 쇠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신화 자료를 보존하고 있는 중요 서적을 거의 한 권도 뽑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송나라 초기 장당영의 촉도올(蜀禱?)을 소개한다. 기상(奇相)에 관한 신화이다. 두 권으로 된 촉도올의 내용은 모두 오대(五代)의 왕건과 맹지상이 촉을 차지했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심괄의 『몽계필담(夢溪筆談) 26권 및 『보필담(補筆談), 『속필담(續筆談)』의 몇몇 부분은 모두 유명한 과학 저작이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각 방면을 거의 포괄하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서서히 학문의 지경의 넓어지는 시기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몽계필담(夢溪筆談)』 권3에는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 관한 고대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해주 염택은 둘레가 120리인데 오랫동안 비가 와서 사방에 있는 산의 물이 모두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 넘친 적이 없으며, 큰 가뭄이 들어도 마른 적이 없다. 염전의 색깔은 붉고 판천 아래에 있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치우의 피라고 한다. 


, 청의 신화 

()나라 지괴서(志怪書)중에서 신화전설 자료가 상당히 풍부한 책으로는 상역의 『낭현기(?)』 세 권이 있다. 『낭현기』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사고전서총목제요』라는 책에선 『낭현기』가 ‘황당하고 자질구레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신화전설이라는 것의 전체적 분위기가 황당한 면이 많다. 자질구레하다는 것은 세밀한 묘사가 많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제대로 본 셈이다. ‘황당하고 자질구레하다’는 것.
 
신화적 색채를 지닌 명나라 때의 소설 중 오승은의 『서유기(西遊記)』는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하다. 『서유기』를 신화소설이라고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작품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신화 영웅 손오공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이 작품은 누적된 민간전설에 근거하여 점차 소설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손오공이라는 형상을 창조한 것 역시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포송령의 『요재지의』는 청나라 지괴소설 가운데 가장 이채롭고 특이한 책이다. 필자도 몇 권 읽어봤는데 기이하게 재미있다. 그 스토리의 일부가 여전히 영화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모두 16 43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간에 전승되는 신화

모든 신화가 민간을 통해 전승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민간에 전승되는 신화’는 무엇인가첫째, 우랑직녀 신화, 이랑이 얼룡을 잡은 신화처럼 짧은 이야기가 오랜 구비 전승을 거치면서 비교적 틀을 갖춘 이야기가 되고, 그 후 다시 계속 발전하면서 지금까지도 정형화되지 않은 것들이다.   둘째, 화합이선이나 유해가 금 두꺼비를 가지고 노는 신화처럼 여러 가지 짧은 신화 단편들이 한데 섞여 이루어진 신화 이야기로, 고대 문헌의 기록에 보이지 않는데다가 이야기 자체도 아직 정형화되지 않은 것들이다셋째, 동영과 칠선녀 신화처럼 연원이 오래되어 비교적 일찍 고대 문헌에 기록되었고 후에 다시 민간에서 계속 발전하면서 내용이 새로워져 고대 문헌의 기록을 뛰어넘은 것들이다넷째, ‘침향이 어머니를 구한’ 신화나 ‘백사전(白蛇傳)’처럼 고대 문헌의 정식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민간에 널리 전해지면서 소설과 희곡, 창본(唱本), 고사(鼓詞)등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이다. 

 
소수민족의 신화

현재 중국에서 단일민족으로 확정된 소수민족으로는 몽골, 만주, 조선, 허저, 다우르 등을 비롯해 모두 55개 족이다. 소수민족의 인구는 2000년 제5차 전국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모두 1 643만 명으로 전국 총 인구의 8.4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소수민족의 경제와 문화 발전 정도는 매우 낮은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예술의 번영 시기가 반드시 사회의 일반적 발전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인류 경제 문화 발전의 낮은 단계에 생겨난 특수한 예술이다.
 
삶의 굴곡이 많은 만큼 신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그 어려움을 겪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수 민족들의 신화들의 절대 다수는 구전을 통해 전해져 왔다. 지금까지 수집하고 정리한 것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의 ‘해경(海經)’ 부분에는 중국의 사방을 둘러싼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모두가 고대의 소수민족들이 신화전설 속에 투사된 것이다. 


중국신화가 문학에 끼친 영향 

이 점이 궁금했다. 중국신화는 당연히 한족(漢族)과 소수민족 신화를 모두 합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챕터에선 소개하는 중국신화는 주로 한족 신화를 의미한다. 신화가 문학이나 예술에 준 영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원시사회의 신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을 뿐 문자로 기록된 것을 찾긴 쉽지 않다. 간혹 상형문자나 그림 정도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중국신화의 기록을 봉건사회 초기인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원시 기록과 문학작품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숙제다. 문학작품인가 보면 고대신화의 직접적인 기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공이 비교적 적고(비자각적 가공) 내용 구성이 간단한 것을 가리켜 신화의 원시 기록이라 하고, 가공이 비교적 많고(자각적 가공) 내용 구성이 복잡한 것을 신화소설이라고 부른다.
 

명나라 소설 『수호전(水滸傳)』과 청나라 초기의 소설 『홍루몽(紅樓夢)』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작품들이다. 『수호전』에 나오는 108명의 영웅들은 장천사에게 진압되어 강서 용호산에 갇혀 있다가 홍태위에 의해 풀려난 ‘요마’들이라고 책의 맨 앞에서 말하고 있다. 『홍루몽』의 가보옥 역시 여와가 하늘을 보수할 때 쓰지 않고 청경봉 아래에 내버려 둔 돌이라고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이 각각 어떤 우의(寓意)를 내포하고 있는 건지와 상관없이 신화가 그 작품들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변성래

 

● 2015.01.07  전설에서 정설로…中 신화의 주인공 '황제'

세계 어느 민족이나 모두 전해 내려오는 신화가 있다.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나 인도, 이집트 신화 등이 그러하다.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중국에도 많은 신화가 전해지는데, 인간창조에 대한 황제() 신화가 가장 유명하다. 이 신화의 주인공인 황제는 중화민족의 시조로 한국의 단군왕검과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중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황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여겨지는 장소가 있다. 바로 허난성 정저우시 남쪽에 위치한 황제고향(皇帝故里)이다

 

▲ 황제고향에 세워진 중화민족의 시조 황제의 석상.

 

신화 속에서 찾는 중화민족의 뿌리

황제고향의 배경이 되는 인간 창조 신화는 한국인에게 다소 생소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중국 고대에 황제와 상변(上騈), 쌍림(雙林), 여와(女媧)라는 네 신이 존재했다. 그들은 흙으로 인간을 빚었는데, 상변은 얼굴, 쌍림은 손발, 황제는 남녀 신체 중 가장 중요(?)하고 은밀(?)한 부분을 만들었고, 여와는 이런 작업을 마무리하는 역할이었다. 창조를 어느 정도 마친 그들은 인간에게 일을 주고, 스스로 번식할 수 있도록 혼인제도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 황제고향의 넓은 광장 풍경()과 황제고향 입구 패방().

 

신화를 기초로 하는 만큼 민간에서 신으로 받아들여졌던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위대한 인간 황제로 역사화됐지만 신화자료가 적어 실존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듯 역사가 아닌 민간 신앙으로만 여겨지던 이곳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된다. 바로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황제가 통치했다던 유웅국(有熊国)의 존재를 증명할 토기가 발견된 것이다. 고대 유웅국의 위치에서 발견된 이 토기는 양사오(仰韶文化) 문화의 무늬를 띄고 있어 전설의 인물인 황제를 정설로 바꾸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 유웅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무늬가 새겨진 토기.

 

이런 배경 아래 설립된 황제고향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성씨문화와 시조(始祖) 참배 의식이다.

 

성씨문화는 중국인 모두가 황제의 자손이라는 사상에서 기인하는데, 이곳의 중화성씨광장(华姓氏广场)에 잘 표현돼있다. 그중 광장 바닥의 나무 동판에는 중국 4600여 개 성이 가득 새겨져 중국인의 뿌리는 결국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시조참배의식은 민족의 조상인 황제를 기리는 행사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战国)부터 이어지는 역사 깊은 전통문화로 매해 행사마다 중국과 화교권의 중요인사가 참석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황제가 태어난 날을 '중국 크리스마스'로 만들려고 한다는데, 결과가 어떨지는 미지수다

 

▲ 성씨광장 바닥의 나무 동판(), 매년 진행되는 시조 참배의식의 풍경 ().

 

신화를 역사로 증명하는 허난박물관

"신화는 신화일 뿐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백문불여일견'이다. 정저우 북쪽에 위치한 허난박물관은 중국 내에서도 건립 시기가 비교적 이른 곳으로 중화민국 시기인 1927년에 지어졌다. 축구장 10개 크기의 전시면적을 갖는 박물관에는 14만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선사시대 유물, 주나라 청동기, 역대 도자기, 옥 공예품 등이 가장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전시품으로는 새의 뼈로 만든 피리인 '가호골적(賈湖骨笛)'과 옥 조각을 금실로 엮어 만든 금루옥의(金褸玉衣)라는 수의가 있다.

 

이곳 선사시대관에서는 황제가 생활했던 시기의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당시의 문자 기록만 없을 뿐 유물이 남아 신화를 역사로 증명한다.

 

▲ 피라미드 같은 외형이 특징인 허난박물관(), 대표 전시물인 가호골적과 금루옥의().

미디어취재 중국팀

 

●인류 발전의 초석 다진 '왕해'와 '수황'

▲ 중국 상업의 조상 왕해와 불의 조상 수황.

 

세계 각 지역에는 대표 신화가 있는데, 그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신화마다 태양과 땅, 바다 등 자연을 관장하는 신이 있는가 하면 생명과 마음을 다스리는 신도 있다. 오늘 소개할 중국의 신화 속 인물 왕해(王亥)와 수황(燧皇) 역시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와 프로메테우스의 닮은 꼴이다.

 

신화 속 인물인 그들이 실존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그들과 관련된 유적지는 허난성 상추시(河南省商丘市)에서 볼 수 있다.

 

▲ 허난성 상추시에 있는 화상문화광장의 입구.

 

중국의 헤르메스, 왕해

먼저 소개할 곳은 상추시 남서쪽에 있는 상조사(商祖祠)이다. 이곳은 중국 상인의 조상이라 여겨지는 왕해의 사당으로 화상문화광장(华商文化广场) 안에 있다.

 

우선 화상문화광장 입구를 들어서면 바닥에 돈이 새겨져 있는 큰길을 볼 수 있다.

 

▲ 하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시대별 통화가 새겨져 있는 길.

 

'돈길'은 넓이 5m, 길이 198m로 광장 입구에서부터 왕해 동상까지 펼쳐져 있으며, 바닥에는 하나라부터 청나라까지 19종의 동전문양이 새겨있다. 중앙에 커다란 동전 주위로 작은 동전을 배치했는데, 이는 '티끌 모아 태산'을 상징화한 것이라 한다.

 

길 끝에는 왕해의 동상이 보인다. 중국 상고시대 상() 7번째 수령인 그는 왕 씨의 시조로 여겨지며, 소와 말을 길들여 농업 생산력을 크게 늘렸고, 우마차를 발명했다. 생산량의 증가는 잉여 농작물을 만들었고, 남는 물건은 우마차를 이용해 다른 부족과 교환하기 시작했다.

 

▲ 중국 상인의 시조, 왕해(), 그의 업적을 형상화한 그림().

 

시간이 지나고 다른 부족에서는 이런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을 상족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인이라 불렀고, 교환품은 상품, 이런 교역을 상업이라 부르게 됐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만든 왕해는 상인들의 조상으로 여겨져 오랜 세월 많은 중국인에게 숭배받는다.

 

지금도 중국인하면 떠오르는 왕 씨의 돈을 좋아하는 상인 이미지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 왕해를 모신 상조사()와 중국 최초의 천문대라 여겨지는 화신대().

 

동상과 벽화를 지나면 좌우로 넓게 지어진 건물을 볼 수 있다. 바로 왕해를 모신 사당이다. 중앙이 상조사고 좌우로는 관우를 모신 관제전(帝殿)과 재물의 신이 있는 재신전(神殿)이 있다.

 

사당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높은 계단 위로 건물이 하나 보인다. 이곳은 중국 최초의 천문대라 불리는 화신대(火神台). 계단에 올라 바라본 광장의 풍경도 볼만하다

 

▲ 중국 최초로 나무에 불을 피운 것으로 전해지는 수황의 동상.

 

중국의 프로메테우스, 수황

상조사에서 가까운 수황묘는 신화 속 존재인 수황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정식 이름은 수인씨(燧人氏)로 원시시대에 인공으로 불을 만들어낸 기술을 인정받아 지위를 높여 수황이라 부른다.

 

상고시대에는 날것을 그대로 먹었으나 수황이 불을 발명하고 전파함으로써 질병이 크게 줄었다. 또한 인류역사는 이 불을 이용해 토기를 굽고, 금속을 제련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인류에게 불씨를 알려준 수황 전설은 제우스가 감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준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

 

▲ 수황묘 내부의 무덤 사진(), 축제 때 공연 사진().

 

넓은 면적에 비해 무덤과 동상 이외에 볼거리가 부족하지만 행사나 축제 때는 공연 등 볼거리가 많다. 떠들썩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원하면 미리 행사일정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비교적 큰 정규행사로는 설날에 하는 묘회(庙会)가 있다.

 

상조사(商祖祠, shāngzǔcí, 상쭈츠)
주소: 허난성 상추시 쑤이양취(河南省商丘市睢
阳区)

 

■ 100년 전 중국인의 생활상 - 2016.09.

[인민망 한국어판 11 9]이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소장한 중국의 옛날 사진들이다. 청조(淸朝) 시대 말에서 민국() 시대 초까지 국민들의 실제 생활상을 나타낸다. 100년 전 중국인의 생활상을 함께 들여다보자. (번역: 유현정)

원문 출처: 인민망(人民網)

 

 

 

 

 

 

 

 

 

 

 

 

 

 

 

 

 

 

 

 

■ 2017.09.05  지난 100년간의 중국 복장 변천사...'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

▲2016 3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경축하기 위해 중국 충칭(重慶)시에서 열린 치파오쇼에서 여성들이 전통미를 뽑내고 있다. /신화사

 

옷에는 당대 문화와 문명이 녹아있다. 도서출판 선이 펴낸 《옷으로 읽는 중국문화 100년》은 제목 그대로 지난 100년간의 중국 복장 변천사를 통해 중국의 생활 문화를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위안저와 후웨는 부부로 둘 다 베이징복장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 복장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1901년부터 2000년까지 한 세기 동안 중국인의 옷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10년 단위로 보여줌으로써, 시대에 따른 중국인들의 심미관과 심미적 취향의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페이지마다 실린 풍부한 자료 사진은 그 자체만으로 격동의 중국 100년사를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초기 10년은 청()나라 왕조 통치의 마지막 10년이었다. 여전히 왕조는 살아있었지만, 종이호랑이 신세가 된 청 제국은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은 중국의 의상(衣裳)문화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만족(滿族)은 강제로 한인(漢人)들에게 변발을 강요하며, 만족의 옷을 입게 했다. 그 이유는 첫째 만족들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는 물질적 형식에서 이데올로기까지 철저히 한족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한족들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족들도 점차 만족의 복장과 변발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밀려오는 서양문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서양 물건들과 현대 공업기술은 점차 중국의 서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돗물, 성냥, 휘발유, 자동차, 서양옷감 등은 점차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물건이 되었고, 카메라, 전등, 전화, 축음기 등 고급품들이 귀족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당시 한 잡지에 상하이의 기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날 풍속은 날로 화려하고 사치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의복의 차림이 사치스럽고 상·하의 구별이 없는데 상하이의 정황이 가장 심각하다.

 

▲청나라 말기의 변발.

 

신구가 혼존하는 시대- 변발과 전족의 폐지 노력

 1911 10월 우창(武昌)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200년 대청제국의 몰락을 고한 신해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듬해 새로 성립된 국민정부는 ‘복제법령’을 반포해 청나라의 관복색을 일률적으로 폐지하고 서구식 복장을 복제법령에 수록시켰다. 새로운 복색제도는 중국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음을 상징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법령이 2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바로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정국의 혼란과 마찬가지로 신구의 복장이 뒤섞이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모든 것이 혼란하였고 빠르게 변했다. 양복에 구두, 군복에 가죽 장화, 두루마기에 마고자, 청나라 관복에 이도 저도 아닌 복색들이 섞여서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이 치켜든 중요한 혁명 하나가 바로 변발 자르기였다. 변발은 혁명 세력과 청나라 정부가 갈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변발 자르기는 ‘혁명’의 상징이었고, 당대 문명의 ‘패션’이었다.

 

당시 보도에는 촌민들이 군인들에게 변발을 잘릴 때의 공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변발을 잘리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고향으로 도망치고, 군인들이 그 뒤를 쫓았다. 어떤 사람들은 핍박에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옆에서 구해주었기에 죽음은 면했다.

 

1916년과 1928년 국민정부는 천 년이 넘도록 중국 여성들을 속박해온 악습인 전족을 금지하는 통고와 조례를 발표했다. 1912년부터 1928년까지 변발 자르기와 전족금지에 대한 법령이 점차 강도를 높여 갔지만, 그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았다.

 

낡은 것을 없애야 새것이 온다-중산복의 도래와 모던 타임즈

▲중산복을 입은 중국 국민당 주석 장개석과 중공을 세운 모택동. 중산복은 모택동 이후 인민복으로 변화되었다

 

1920년대 이후 민국의 각종 화보, 문예잡지, 신문들은 문자, 사진, 패션회화, 광고, 만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양복 문화와 해당 정보들을 소개했다. 1926년 상하이에서 창단된 〈양우〉라는 잡지는 표지에 여성사진을 실었다. 표지여성의 옷차림과 정신적인 기질은 ‘아름답고, 모던하고, 매력적’이라는 정보를 전달해 주었고, 유행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의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중산복’은 민주혁명 선도자인 손중산(손문:孫文)이 창도한 의복이다이 옷은 민국 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남성복이었으며, 가장 정치색채가 농후한 복장양식으로 정치역사의 기복에 따라 역사와 함께 호흡을 같이 해왔다.

 

중산복 양식이 기본상 결정된 것은 20년대 후기이다. 그 주요 특징들을 보면, 낮은 칼라거나 번진 칼라로 끝 부분이 팔자형을 띠고 있다. 위아래에 네 개의 덮개 달린 주머니를 달았고, 앞섶에는 다섯 개의 단추를 드러나게 달았고, 소매에는 각각 세 개의 단추를 달았다. 난징 국민정부는 중산복을 공식 복장으로 발표하고, 네 개 주머니를 예, , , 치라 비유했으며, 앞섶 다섯 개의 단추는 오권분립을 상징하며, 소매의 3개의 단추는 삼민주의를 상징한다고 했다.

 

192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들이 장포(長袍: 치파오)를 입었다. 민국 초기 한족 여성들 가운데 치파오를 입은 자가 많지 않았지만, 20년대 중기부터 유행하여 점차 일반의상으로 되었고, 30년대와 40년대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입으면서 상의와 치마를 입던 방식을 대체했다.

 

19316월 상하이 대화호텔에서 중국 최초의 패션쇼가 열렸다. 치파오는 도시 여성들의 중요한 복장이 되었다. 치파오의 길이는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고 하고, 칼라도 높아졌다 낮아지면서 전반적으로 점점 몸에 맞게 변해갔다. 상하이 무역항이 발달하면서 중국식과 서양식이 뒤섞이는 문화생활이 번졌고, 이런 삶을 영유하는 해외파 문화가 시작됐다. 대다수 상하이 사람들은 중국 재단사의 손에서 만들어진 양복을 입었다.

 

1949 10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날 마오쩌둥은 올리브색의 중산복을 입었다. 이날 마오쩌둥이 입은 소박한 옷차림은 이후 인민복으로 변형되어 수십 년간 중국의 복장문화에 광범위하면서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일보  글이상흔 조선pub 기자

 

■ 중국 역사상 여인들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측천무후 무조 武照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가 바로 측천무후(則天武后). 왕족도 아닌 신분으로 수많은 환란과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의 힘으로 왕좌를 쟁취하였고 '()'라고 하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원래 목재장사를 하던 상인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당고조 이연을 만나 그의 행군사개[行軍司鎧, 태원부(太原府)의 무기를 관리하던 직책]를 맡게 되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에 그는 작은 군직을 샀고, 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픈 마음에 몰락한 귀족 가문과 관계를 맺고자 수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냈던 양달의 딸을 후처로 삼았다. 양씨는 두 딸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 딸이 무조, 바로 무측천이었다.

 

▲측천무후

 

아버지가 일찍 죽은 후 어린 무측천과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내몰리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사냥을 나왔던 당의 2대 황제 태종의 눈에 띄어 열네 살에 그의 하급 후궁인 재인(才人)이 되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측천에게 애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신분차별과 가난으로 고생했던 무측천이 독한 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어느 날 천리마를 한 필 얻었는데, 성질이 매우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무측천은 "저에게 그 말을 길들일 수 있는 방법이 있사옵니다. 먼저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때립니다.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그 목구멍을 자릅니다"라고 하여 태종은 그녀의 잔혹한 성격을 깨닫고 멀리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중국 최초의 여황제 자리까지 올랐으니만큼 그녀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12년이나 태종의 승은을 받지 못한 그녀에게 정작 눈길을 준 것은 태자인 이치(李治)였다. 그는 태종의 문안을 드리러 왔다가 무측천의 아름다움에 반해 태종이 죽기 전 이미 정을 통했을 정도로 대담한 사이가 되었다. 무측천 역시 나이 든 태종보다는 이치의 환심을 사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정관 23(649) 5,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황실의 전통에 의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야만 했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에게 비구니 생활은 맞지 않았으나 그녀는 권토중래할 날을 기다리며 절 생활을 견뎌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잊지 못한 고종(高宗) 이치는 아버지의 제삿날이 되자 새벽같이 절로 가서 무측천을 만났다.

 

고종이 감업사에서 무측천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은 황후 왕씨는 그녀를 데려오라고 건의했다.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소숙비에게서 고종의 마음을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영휘 2(651)에 무측천은 소의(昭儀)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사람됨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 왕씨의 무모한 계획은 역효과를 내어 결국 스스로를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처음에 무측천은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내쫓았다. 하지만 그녀는 비의 자리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황후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왕씨를 내쫓아야 했다. 그녀는 환관들에게 뇌물을 주어 왕씨의 신변을 감시하는 한편 주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고종과 왕씨 사이를 떨어뜨려 놓기 시작했다. 또한 고종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기 위해 무서운 계략을 꾸몄다.

 

영휘 5(564)에 무측천은 딸을 낳았다. 아이를 좋아했던 왕황후는 공주를 보기 위해 무측천의 방을 찾았고, 무측천은 자리를 피했다. 빈 방을 찾았던 황후는 잠시 방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온 무측천은 딸의 목을 졸라 아이를 죽인 다음 싸늘하게 식은 아이를 안고 달려나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달려오자 무측천은 황후가 다녀간 후 아이가 죽었다고 참소하였고, 황후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희곡 〈무측천〉의 삽화

 

결국 이렇게 황후 왕씨와 소숙비는 쫓겨나 별원의 좁은 방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재기하지 못하게 하려면 확실하게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측천은 환관을 보내 그들을 죽였으며, 자신이 황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원로대신들까지 모두 음해하여 자리에서 내쫓거나 자결을 명했다. 이는 무측천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녀가 정치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황후가 된 후 그녀는 현명한 황후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이 안질과 두통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고 자신에게 정사가 맡겨지자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는 스스로를 천후(天后)라 칭하고 왕씨의 소생인 태자 충()을 폐하고 자신의 소생인 홍()을 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홍이 장성하여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기 시작하자 모반의 혐의를 씌워 사형시켰다. 다시 현()을 태자로 세웠다가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자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폐하고 다시 셋째인 철()로 바꾸었다. 이렇게 그녀는 정적이라면 자신의 자식이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함하거나 살해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그동안 형성해놓은 자신의 심복들과 더불어 자신만의 절대권력의 기틀을 짜나가기 시작했다.

 

683, 고종이 죽고 태자였던 철이 중종(中宗)에 즉위하자 무측천은 두 달 만에 그를 왕위에서 폐하였으며 자신의 친아들인 현도 주살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690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아울러 당 왕조를 해체하고 무씨(武氏)에 의한 주 왕조를 세웠다. 중국 역사상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무측천은 황제에 오르자마자 당 왕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고 신흥 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당 현종이 다스렸던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를 성립시키는 데 일조한다. 무측천은 젊고 영리한 신흥 세력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시절에도 실력이 있던 적인걸, 장간지 등의 대신들을 중용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녀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 사회가 군사적, 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 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측천이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했다. 무측천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했으며,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고 불렀다.

 

705, 82세가 된 측천무후는 기력이 쇠약하여 더 이상 왕좌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간파한 재상 장간지가 난을 일으켜 그녀를 폐하고 그녀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리하여 중국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시대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당 왕조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측천무후는 그해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황후의 지위로 돌아와 고종의 곁에 안장되었다.

 

▲건릉벽화 -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벽화

 

측천무후가 중국 최초의 여황제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잔인하고 악랄한 방법을 썼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황제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형제와 일가를 죽인 사람은 그녀뿐이 아니다. 그녀를 평가할 때에는 권력을 잡기까지의 행보보다는 잡은 이후에 어떤 치적을 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중국 역사가들이 여황제라는 측천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하기에 급급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녀가 이룩한 사회개혁과 당 왕조가 이후 공고히 이어지게 된 사회 문화적 기틀을 세웠다는 점을 재평가하고 있다.

김상엽

 

◆현종, 경국지색 '양귀비'를 품다 

구름 같은 머릿결, 꽃 같은 얼굴에 금보요 팔랑 雲髮花顔金步搖
부용 휘장 하늘대는 침실, 황홀한 봄 지새우노라니 芙蓉帳暖度春宵
봄밤은 짧디 짧아 한 낮에야 눈을 뜨고 春宵苦短日高起
이로부터 임금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네. 從此君王不早朝


모든 왕은 호색가다. 여인들의 숲에 있으니 그렇다. 현종은 특히 더하였다. 삼천의 궁녀로도 성이 안차 아들의 여자를 빼앗았다. 그녀가 바로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치열하여 피를 부른다. 현종은 여자를 차지하는 것에서도 아들과 다퉜다. 현종은 양귀비를 품고 살았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었다. 정치도 싫고, 인사도 싫었다. 알아서 다 해주길 바랐다. 현종은 오직 황제의 침실에서 양귀비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태평성대였다. 도대체 양귀비가 어떤 여인이기에 현종은 이처럼 헤어나질 못한 것인가.

 

양귀비는 현종 개원 6(718)경에 태어났다.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태어날 때 왼팔에 옥고리 문양이 있고, 고리에는 ‘태진’이라는 글씨가 있어서 ‘옥환’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출생부터 심하게 미화(美化)되어 있다. 그런데 청나라 때에는 한 술 더 뜬다. “귀비는 어머니 태내에 13개월 동안 있었는데 태어날 때에는 방에 향기가 감돌았고 탯줄은 연꽃과 같았다. 3일 동안 눈을 뜨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신인(神人)이 손으로 아이의 눈을 쓰다듬는 꿈을 꾸고 나서야 눈을 떴다. 피부는 옥과 같고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용모였다.

 

천하일색이니 탄생부터 신비롭지 않으면 어찌 황제가 관심을 갖겠는가. 따지고 보면 양귀비의 집안이나 태생에 대하여 밝힐 만한 것이 없으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에 가까운 양귀비는 어떤 여인인가?

‘구당서’ ‘양귀비 열전’에 보면, 그녀의 부친은 지금의 사천성인 촉주(蜀州)의 사호참군(司戶參軍)을 지낸 양현염(楊玄琰)이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숙부인 양현요(楊玄邀)가 길렀다고 한다. 현종 때의 일을 정리한 책인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도 양현염이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정할 때 내려진 비문인 ‘책수왕양비문(冊壽王楊妃文)’에는 하남부 사조참군(河南府 士曹參軍) 양현요의 장녀로 되어 있다
 

 

양귀비의 족보를 고쳐라”

둘 다 역사적 사료인데 왜 다른 것일까? 어떤 자료가 보다 사실에 가까울까? 비문이 1차적 사료이니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황제가 내린 것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황제의 비문과는 달리 역사서에서는 모두 양현염을 부친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수왕의 비가 될 때의 양귀비는 숙부에게서 양녀로 키워졌으니 양현요의 장녀로 표기하였는데, 현종이 빼어난 미모에 반해 아들로부터 빼앗으려니 세간의 이목이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친아버지인 양현염을 내세우고 양부(養父)는 없앤 것이다. 현종이 아들로부터 양귀비를 빼앗을 때도 잠시 도교의 여도사가 되게 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필요하다면 족보나 가계를 위조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에 며느리를 빼앗고자 혈안이 된 황제의 명령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미인은 가는 허리에 늘씬한 풍모를 지닌 여성이지만, 당나라 때의 미인상은 풍만한 육체에 이국적인 풍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양귀비가 바로 이러한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가무와 음률에도 뛰어난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음악과 문학 등 예술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현종이 이러한 양귀비에 어찌 매료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종도 염치는 있었던가. 도교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현종은 양귀비를 도사로 삼는 방책을 만들어 세간의 관심이 멀어지기를 기다린다. 황녀(皇女)들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일은 있었지만 황자의 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여도사가 되는 것은 있을 수도, 허용되지도 않는 일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5년간 도사생활을 지내게 한 뒤 궁궐로 데려온다.


화청지, 현종과 양귀비의 파라다이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도덕한 사랑놀이는 화청궁(華淸宮)에서 이뤄진다. 장안 동쪽 여산(驪山)에 있는 화청궁은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지역인데 특히, 수도인 장안과 가까워 황제의 요양지로 애용된 곳이다.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면서부터 신년 조회도 화청궁에서 할 정도가 되었으니, 정무를 보는 관청뿐 아니라 귀족의 저택이 화청궁에 즐비하게 들어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온천탕은 또 얼마나 요란했을까. 양귀비가 목욕하던 부용탕(芙蓉湯), 현종의 욕실이 있던 구룡전(九龍殿)은 물론이고 옥녀탕(玉女湯), 소양탕(少陽湯), 연화탕(蓮花湯), 의춘탕(宜春湯), 태자탕(太子湯)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옥으로 장식된 화청궁은 그야말로 환락의 궁전이었다.

 

화청지는 서안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여산의 산기슭에 위치한 곳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미인들이 있는 연회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현종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풍만한 몸매를 특별히 부각시켜 놓았다. 연둣빛을 내뿜는 연못은 늘어진 버들가지와 어울려 운치를 더하고 있다. 연못 안에는 막 온천을 마치고 나오는 순백의 양귀비상이 요염한 자태를 하고 있다. 호수를 돌아가면 석류나무 한 그루가 고목인 채로 길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모두들 이 나무 앞에서 무언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불로목(不老木)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양귀비가 얼굴을 기댄 나무라하여 오늘도 미인이 되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반질반질한 나무둥치에 얼굴을 비비려고 서있는 것이다. 뜬금없는 소문이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자 그녀의 집안사람들도 덩달아 득세한다. 그중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양씨 집안을 대표한다. 젊은 시절 주색잡기에 빠져 천대 받으며 살던 그는 장부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던 그가 양귀비의 후광으로 재상까지 오르더니, 40여 가지의 직무를 겸직한다. 현종을 주무르는 양귀비 덕에 날아가던 새도 내려않지 않으면 안 될 권세를 누린 것이다.


세상이 시끌벅적해도 현종은 양귀비만 있으면 평안하였다. 세상이 태평하다고 여겼으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현종의 일상은 양귀비가 웃고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다름 아니다. 양귀비가 장안에서 수천 리 떨어진 남방에서만 나는 과일인 여지(
)가 먹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여지전용도로를 개통한다. 여지는 3-4일이 지나면 맛과 색이 변하는 과일이다. 신선한 여지를 장안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역참을 설치하였는데, 여지를 나르는 파발마가 지나가면 누구든 뽀얀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으리라.


“고력사 이놈! 냉큼 와서 내 신발을 벗겨라”

장안이 온통 모란축제로 들썩이는 봄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에서 주연을 열다가 궁정시인인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한다. 술 취한 이백은 양귀비의 치마폭에 쌓인 현종이 미웠던 것일까. 현종의 최측근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한다. 당시 신발을 벗기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고력사가 황제의 눈치를 보며 신발을 벗기자 이백은 일필휘지로〈청평조사淸平調詞〉를 짓는다.


요염한 꽃가지에 향기 머금은 이슬一枝濃艶露凝香
무산의 사랑도 부질없이 애만 끊나니雲雨巫山枉斷腸
묻노라, 누가 한나라 황후와 비교하는가借問漢宮誰得似
가련한 비연은 화장으로 다듬은 미인인 것을可憐飛燕倚新粧

아름다운 꽃과 양귀비가 서로 반기니名花傾國兩相歡
임금은 언제까지나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데常得君王帶笑看
봄바람의 끝없는 시샘을 녹이려는 듯解釋春風無限恨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 있네沈香亭北倚闌于

 

흥경궁공원은 서안시내의 동쪽, 서안교통대학 앞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만 현종시기에는 그야말로 현종과 양귀비만을 위한 궁전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인공호수를 지나 침향정에 이른다. 침향정은 모란을 좋아한 양귀비가 모란꽃을 감상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지금도 주변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다. 정자 앞에는 얼큰하게 술에 취한 이백이 머리를 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이백취와상’이 있다. 현종과 양귀비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하게 취한 모습을 보였을까. 이백의 호탕한 성격에 미루어볼 때 충분히 그랬으리라.


양귀비의 양자 안록산, 반란을 일으키다

화청궁과 흥경궁을 오가던 현종은 점점 정사를 멀리한다. 그러자 재상 이임보와 양국충, 고력사 등이 서로 이익을 다투며 정사를 주무른다. 그리하여 모든 이권과 자리는 그들의 사람으로 채워진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출신의 번장(番將) 안록산도 상황판단능력이 뛰어난 자였다. 우둔한 척하며 감언이설로 교활함을 감추고 당나라 전체 병력의 1/3을 휘하에 거느리는 최고의 절도사로 성장한다. 안록산이 권력을 장악할수록 양국충과의 알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마침내 755, 양귀비의 양자로서 현종을 향한 일편단심만을 외치던 안록산이 드디어 칼을 빼어든다. 명분은 양국충의 죄상을 밝히고 처단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해 온 안록산이었기에 진격은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순식간에 낙양성이 함락된다.

756
6 13일 부슬비 내리는 새벽. 현종 일행은 백성들의 눈을 속이고 극비리에 장안을 벗어나 촉 땅으로 몽진(蒙塵)한다. 장안을 떠나기 전날, 현종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안록산군을 정벌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한다. 현종의 발표는 피신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거역하거나 배반하는 황제는 이미 황제가 아니다. 현종은 천심과도 같은 민심을 배반하면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수도 장안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마외(馬嵬)에 도착하자 이탈자가 속출한다. 아울러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한다.

 

천하가 도탄에 빠져 백성들은 도산하고 황제마저 수도를 버린 상황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흉인 양국충을 죽여 천하에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쩔 수 없구나, 네가 죽어줘야겠다.

일촉즉발. 현종은 병사들의 험난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양국충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양국충은 그 동안의 폭정을 참아온 병사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다. 피 맛을 본 병사들은 현종을 에워싸고 양귀비도 죽이라고 청한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고 고력사가 비단수건으로 양귀비의 목을 졸랐다. 경국지색으로 황제와 나라를 휘저으며 살았던 양귀비의 종말은 이렇게 처참하고 허무하였다.

758
. 난을 수습하고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종은 양귀비가 죽은 마외역을 지나게 된다. 백거이는 현종의 마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였다.


정세가 수습되어 황제 돌아가는 길,天旋日轉廻龍馭
마외에 오니 발길을 뗄 수가 없구나.到此躊躇不能去
마외 언덕 밑 진흙 속에 묻혔을 사랑,馬嵬坡下泥土中
고운 얼굴은 없고 죽은 자리만 남아있네.不見玉顔空死處
황제와 신하 모두 눈물로 옷깃만 적시는데君臣相顧盡沾衣
동쪽 성문을 향해 말이 스스로 길을 열고 가네.東望都門信馬歸

 

양귀비묘는 서안 시내에서는 50여㎞가 넘는 곳이다. 마외파(馬嵬坡)에 있는 그녀의 묘는 자그마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분과도 같다. 그런데 봉분이 돌로 만들어졌다. 틈새는 시멘트로 모두 메워놓았다.

 

묘의 흙을 가져다 바르면 양귀비처럼 미인이 된다는 속설로 여러 번 망가졌기 때문이다. 봉분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의 묘치고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경국지색도 한줌 흙이 되어 이처럼 초라한 무덤으로 남았으니 공수래공수거인 인생사 부귀영화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도 애잔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던지 그들이 남긴 시가 비랑(碑廊)에 아롱져있다. ‘아름다움’ 때문에 원 없이 살았으나, 그것이 또한 죄였던 여인. 이제는 바람만이 그녀를 품는다. 그녀를 품은 바람이 비랑으로 향할 제, 내 마음도 한 조각 얹어 보내고 저무는 들녘으로 발길을 돌린다

허우범

 

♠양귀비

▲목욕하고 나온 양비비를 그린 '화청출욕도'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흥도

 

▲당현종과 양귀비의 여흥도2

 

▲화청지의 양귀비상

 

▲화청지 전경

 

▲양귀비가 목욕을 즐긴 부용탕

 

▲흥경궁 공원의 침향정과 이백상

 

▲양귀비묘 전경

 

▲양귀비묘

 

◆중국 역사상 최고의 4대 미녀...서시, 왕소군, 초선, 양옥환

중국 역사 속에는 수많은 미녀가 등장한다. 사서에 기록될 정도의 미모를 지녔던 인물로만 간단히 세어 봐도 백 단위는 가볍게 넘어간다. 그러한 미녀들의 미모에 대한 칭송은 현재에까지 이어지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역할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의 캐스트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미인을 일컫는 대표 성어로 경국경성(傾國傾城), 즉 나라도 성도 무너뜨리는 미색이라고 표현했을까. 미녀들이 등장하며 좋은 일보다는 나쁜 결과가 많았다는 말이다.

 

▲사대미녀도


사실 대부분의 미녀는 왕조의 멸망에 즈음하여 등장하면서 왕조의 종지부를 찍는데 크게 한몫을 해왔다. 최초의 왕조 하나라를 멸망케 한 말희(), 상나라를 무너뜨린 달기(妲己), 서주 시대를 끝내고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스타트 시킨 포사() 등등.

 

그러나 역사는 역사고 오로지 관심은 미모였던지, 누구의 미색이 더 뛰어난가 하는 논란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시도

 

그 많은 미인들 중에서 중국인이 손꼽는 만년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미인을 들라면, 춘추 말기 오월대전에서 오왕 부차로 하여금 미색에 빠지게 하여 월나라의 침공을 도운 서시(西施). 지금도 중국에서는 ‘제 눈의 안경’이라는 뜻의 속담으로 ‘연인의 눈에는 서시만 보인다.’ 라는 말을 쓸 정도다.

 

▲왕소군도

 

그 뒤를 이어 주지육림의 말희와 달기, 웃음 한 번에 천금을 들인 포사, 초상화 한 장 때문에 오랑캐 땅으로 팔려간 왕소군(王昭君), 당나라의 최후에 불을 붙인 양귀비로 알려진 양옥환(楊玉環), 전설 속의 인물로 불사약을 먹고 달로 간 항아라고도 불리는 상아(嫦娥),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었다는 조비연(趙飛燕), 실존인물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럽고, 후대 사람들이 이야기 속에서 가상으로 만든 인물로 추정되는 후한 말기 동탁을 양아들 여포에게 죽게 만든 초선() 등이 여전히 최고 미녀의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귀비도

 

▲초선도

 

중국은 항상 베스트를 뽑으면 네 가지를 자주 거론한다

 

그래서 사대기서, 사대 자객, 사대신화, 사대천왕이라는 말들이 많은데, 중국 최고의 미녀라고 일컫는 소위 사대미녀 네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는 서시, 왕소군, 초선, 양옥환 이다. 이들 네 사람은 매란국죽의 사군자처럼 화폭에 옮겨지는 단골들로 미인을 나타내는 대표어휘 네 가지를 하나씩 꿰차고 있다.

 

서시가 냇가에서 수건을 씻는 모습에 물고기가 그 미모를 보고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浸魚).

 

변경을 나서 흉노 땅으로 떠나는 왕소군의 비파소리에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졌다 해서 ‘낙안(落雁).

 

초선이 달을 쳐다보면 달이 그 미모에 움츠려져 구름 뒤로 숨었다 하여 ‘폐월(閉月).

술에 취한 양옥환이 화원에서 꽃을 만지면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는 이야기의 ‘수화(羞花).

 

침어낙안 폐월수화

 

그래서 경국경성 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그 미모에 대한 최고의 찬사어로 ‘침어낙안 폐월수화’ 가 절세가인을 대표하는 말이 된 것이다. 오천 년 역사 속의 챔피언급 미모인 침어낙안 폐월수화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 인지상정인데 타임머신이 있지 않고서는 그 자태를 볼 수가 없으니 안타깝고, 초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포함된 것으로 볼 때 상상으로 만족해야 함이 옳을 듯하다.

 

 역사 속 수많은 미인들의 기록을 볼 때 지금도 그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래도 해외토픽에서조차 하늘을 날던 새가 미인을 보고 떨어졌다는 말은 안 들리네.

| 김성민 중국문화연구소 소장 

 

◆중국 4대 미녀, 4대 추녀는 누구?

중국의 4대 미녀란?

중국 역사상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옥환(楊玉環)이란 4대 미녀가 있다는 건 동양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들의 영광과 굴욕은 다분히 당시 국가의 운명과 백성들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었다. 4대 미녀는 수천 년에 이어져 온 동양적 아름다움의 극치로 오늘날까지도 세인들에게 가끔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미녀는 비록 경국경성(傾國傾城), 즉 나라도 성도 무너뜨리는 미모를 가졌지만 최후의 운명은 대부분 끔찍할 정도로 비참했다. 오죽했으면 미녀를 두고 홍안박명(紅顔薄命, 여자의 용모가 너무 아름다우면 명이 짧다), 천투가인(天妬佳人, 미인은 하늘도 질투한다)이라고 표현했을까? 4대 미녀에 얽힌 전설을 보면 그 당시의 시대상과 이들의 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중국의 4대 미인도. 왼쪽부터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 ‘침어(浸魚)’의 화용(花容), 서시

춘추시대 말기에 월()나라에 도화(桃花)처럼 예쁜 얼굴을 타고난 서시라는 여자가 있었다. 어느 날 서시가 냇가에서 수건을 씻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물고기가 그의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헤엄치는 걸 까먹었으니 물고기가 물 아래로 가라앉는 건 당연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서시의 미모를 두고 ‘침어(浸魚)’라 했다.

 

그때 서시의 조국인 월나라는 오()나라에 패망한 상태였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 서시는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빠져 자살하는 숙명을 면하지 못했다.

 

▲중국의 4대 미인. 왼쪽부터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 낙안(落雁)의 전설, 왕소군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절세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추하게 그려진 왕소군은 끝내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보내졌다. 흉노와의 화친(和親)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다.

 

어느 가을의 화창한 날, 변경을 나서 흉노 땅으로 떠나는 왕소군은 비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해 비파를 연주했다. 이 비장한 이별의 곡에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졌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를 두고 ‘낙안(落雁)’이라 했다.

 

▲중국의 4대 미인도 . 왼쪽부터 서시, 왕소군, 양귀비, 초선

 

◆ 폐월(閉月)의 미모, 초선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초선은 왕윤 부중(府中)의 가기(家妓·궁중 또는 관청이 아닌 개인 사가의 기녀)였는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고 한다. 동탁이 포악하여 한나라 황실이 위태로워지자 왕윤(王允)이 초선에게 연환계(連環計)를 사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했다. 여포가 동탁을 죽인 뒤 초선을 첩으로 삼았지만, 조조(曹操)가 여포를 사로잡아 죽이고 초선을 허도(許都)로 보냈다고 한다. 야사(野史)에는 조조가 관우(關羽)에게 준 후 관우는 홍안화수(紅顔禍水, 예쁜 여자는 화를 초래한다)란 이유로 초선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초선은 뒤뜰 화원에서 달을 쳐다보니 달이 그 미모에 움츠려져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폐월(閉月)’이란 표현으로 그녀의 미모를 형언했다.


◆ 수화(羞花)의 주인공, 양옥환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 절세미인에 총명하여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귀비로 책봉되었지만 황후 이상의 권세를 누렸다.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양옥환이 금방 궁중에 들어갔을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원에서 꽃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만발하는 꽃들에게 신세 한탄을 하면서 손으로 꽃을 만지니 갑자기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고 하여 ‘수화(羞花)’의 미모를 갖췄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정사(正史)도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
艷)’이라 적었으며, 말하자면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이란 얘기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양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인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중국의 4대 추녀 중 한 사람인 황제 헌원씨의 4째 부인 모모

 

◆ 고대 중국, 미인 박대(薄待)?

이처럼 중국의 4대 절세미인은 ‘침어낙안, 폐월수화’란 상상력 넘치는 문학적 표현의 탄생에 기여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하나같이 기구하고 비극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미녀는 대개 화를 초래하는 존재’란 편견에서 찾을 수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미녀는 왕조의 말기에 등장하면서 왕을 미색으로 현혹시켜 왕조의 종지부를 찍는 데 일조하기는 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여 중국 최초의 왕조 하()나라를 멸망케 한 말희(), ‘꼬리 아홉 개를 가진 여우’의 화신으로 상()나라를 무너뜨린 달기(妲己), ‘봉화(烽火)를 태워 제후(諸侯)를 희롱’하여 서주(西周) 시대를 끝내고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를 앞당긴 포사(褒姒) 등이 수천 년 동안 미녀에 대한 중국인들의 편견을 강화해 왔다. 물론 이들 왕조가 멸망한 데는 왕들의 무도함과 나라가 직면해 있었던 외우내환(外憂內患)이 더 큰 이유였겠지만 말이다.

 

▲전국 시대 제나라의 무염군에 봉해졌던 4대 추녀 중 한 사람인 종리춘

 

◆ 덕행 높은 4대 추녀(醜女) 높이 평가

어쨌거나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미인을 좋아하면서도 항상 경계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미인과 바보는 형제간’이란 영국 속담과 ‘미인이란 보는 것이지 결혼할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유태인의 사고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고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을 얕잡아 보거나 멀리 하려는 경향이 두루 있는 것 같다.

 

반면에 중국문화에서 추녀에 대해서는 의외로 관용적인 나머지 선호까지 부추기는 경향이 예로부터 있었다. ‘추한 아내와 가까이 있는 밭은 집안의 보배다(丑妻近地家中宝)’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또 ‘전설시대의 모모(嫫母·추녀였으나 현명했던 황제(黃帝) 헌원(軒轅)씨의 넷째 부인), 전국시대의 종리춘(鐘離春·전국시대 제나라의 무염(無鹽)지방에 살았던 추녀. 얼굴은 못생겼지만 왕에게 제나라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자주 제시해 능력을 인정받아 무염군에 봉해졌고 나중에 황후가 됨), 동한시대의 맹광(孟光·후한 양홍(梁鴻)의 아내로 몸집이 크고 얼굴이 검은 추녀였으나 덕행이 높았다. 남편에게 음식을 올릴 때마다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올려 바쳤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사자성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이다), 동진(東晋)시대의 완씨(阮氏·동진의 명사 허윤(許允)의 아내. 허윤은 완덕위(阮德慰)의 딸에게 장가를 간 첫날 밤 완씨의 용모에 놀라 신방을 뛰쳐나왔지만 뒤에 그의 덕행을 알고 백년해로했다)’라는 ‘4대 추녀’의 이야기를 널리 보급하여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내면의 재능과 훌륭한 품행을 훨씬 더 강조해왔다.

 

▲동한 시대의 추녀 맹광. 양홍의 아내였던 그는 거안제미 사자성어가 나오게 한 장본인이다.

 

◆ 사회적 성공을 꿈꾸는 중국여성, 최대한 중성화 추구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고 소박하게 입고 다니는 것을 좋게 보는 풍토가 있는 이유도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관료사회나 공기업 등 제도권 내에서 여자가 승진이나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면 자신의 외모, 복장, 언행 등을 여성이란 특징을 부각하지 않고 최대한 중성화해야 가능하다는 사회인식이 보편적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진시대 명사 허윤의 아내 완씨. 신혼 첫날 밤 남편이 도주할 정도로 추녀였으나 나중에 그의 덕행을 알아본 남편과 백년해로했다.

 

◆ 미인 더 대우받는 한국에서 4대 미인이 태어났더라면?

중국에 비해 한국은 미인이 훨씬 대우를 받는 나라인 것 같다. 현실적으로 미인이라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사회적 인식도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미인을 선호하고 외모의 미를 추구하는 사회적 풍토가 한국을 성형대국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국의 성형인구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인구대비 성형수술 인구도 이미 세계 정상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예뻐지면 그로 인해 받는 사회적 인정과 혜택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제미용성형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11년 인구 1000명 당 성형수술을 한 사람이 13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그리스, 3위는 이탈리아, 4위는 미국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중국의 4대 미녀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저우위보(周玉波) 중국 인민일보 인민망 한국대표

 

◆후궁에서 천하를 지배하는 황후까지 / 西太后

중국을 지배했던 최후의 여인 서태후는 팔기군의 기인(旗人, 중국 청나라 때 만주 사람을 일컬음) 에호하라(葉赫那拉)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에호하라가 여러 곳의 지방 관리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자연스럽게 권모술수를 익힐 수 있었다. 마침내 궁으로 들어가 청 제국의 9대 황제인 함풍황제의 눈에 들어 그의 비가 되었고, 황태자 재순(載淳)을 낳아 귀비의 지위까지 올랐다.

 

함풍제가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열하에서 요절하자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황태자 재순이 황제로 등극하여 동치제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정권은 서태후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서태후

 

함풍제가 세상을 뜰 때 서태후의 나이는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과 제2차 아편전쟁을 겪으며 함풍제의 곁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었던 그녀는 순식간에 황제의 인장을 차지하고 함풍제의 이복동생 공친왕과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또한 동태후를 끌어들여 함께 수렴청정을 하자고 꾀었다.

 

함풍황제의 정실황후였던 자안황태후는 동쪽의 종수궁에 기거했고, 자희태후라 불리던 서태후는 서쪽의 저수궁에 기거했다. 이리하여 동태후, 서태후라고 불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서태후보다 두 살 어린 동태후는 온순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는 인물이라 서태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히기 위해 서태후는 함풍제 시절부터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조정 대신들을 축출하고자 했다. 그녀는 함풍제의 운구가 북경으로 돌아오는 때를 기다렸다가 궁에 먼저 들어와 대신들을 모았다. 그리고 운구를 모시고 오던 재원, 단화, 숙순 등을 파직한 후 체포하여 참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렇게 서태후는 권력을 잡았고, 이 일을 신유(辛酉)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유정변이라고 부른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손아귀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채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권력을 탐하기 위해 아들의 죽음마저 슬퍼하지 않았던 서태후는 서둘러 동치제의 뒤를 이을 인물을 고민했다.

만일 동치제의 자식이 후사를 잇는다면 태황태후가 되는 서태후의 정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태후는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종제從第 광서제를 보위에 오르게 하니, 그의 나이 겨우 네 살 때의 일이다.

 

▲함풍제

 

나이 어린 황제를 보필한다는 명분하에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다시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서태후에게 성격이 참하고 야심이 없는 동태후는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녀가 자신의 정책에 종종 반대하고 나서자 갈등이 고조되었고, 얼마 후 동태후는 갑자기 서거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궁 내에서는 서태후가 동태후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서태후는 함께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킨 공친왕 혁흔 역시 1884년에 파면하고 그 자리에 광서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을 앉혔다. 백성 및 서양 대표들과도 친분이 있고, 자신의 군대를 갖고 있던 공친왕보다는 성격도 심약하고 아들이 볼모나 다름없는 상태로 황위에 있는 순친왕 쪽이 다루기 쉽다는 계산에서였다.

 

이제 서태후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서태후는 모든 정치 문제를 논함에 있어 자신이 모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황제인 광서제는 아침저녁으로 서태후에게 문후를 드리며 그날의 일을 의논하고 그녀의 하교를 받아야 했다. 나라의 황제는 비록 광서제였으나 실질적인 지배권은 서태후의 치마폭 안에 있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배필도 직접 골랐다. 자신의 친인척의 딸을 광서제의 황후로 맞아들인 것이다. 15세가 된 광서제는 서태후의 뜻에 따라 혼례를 올렸다.

 

서태후는 정권을 잡고 자신의 안위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서구 열강들이 몰려오는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884년 중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그녀는 군대에 대기 명령만을 내려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전쟁터의 군사와 백성들이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정작 협상 자리에서는 중국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을 맺어 중국의 이권을 프랑스에 내주었다. 나라의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내팽개친 것이다.

 

1889, 광서제가 열아홉 살이 되자 더 이상 서태후의 수렴청정은 그 명분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서태후는 모든 정권을 광서제에게 양위한다는 발표와 함께 공식적으로 정권에서 물러났다.

 

▲청일전쟁을 그린 풍속화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난 광서제는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895년 발발한 청일전쟁을 계기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위세를 과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광서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는 갖은 술책으로 전쟁 준비를 방해하고 기어이 청일전쟁에서 패배를 이끌어냈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대만 땅과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게 양도하는 선에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광서제에겐 치욕적인 조약의 체결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 아래 광서제는 내정을 개혁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일대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같은 인물들이 광서제의 개혁에 가담했다. 그들은 시험제도를 개량하고 신문 보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의 유신변법(維新變法)을 시행했다. 이를 두고 '백일개혁(百日改革)'이라 부른다.

 

그러나 광서제의 개혁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 세력들이었다. 개혁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권이 사라질까 두려워한 그들은 서태후를 독려해 그녀의 정권 재탈환을 부추겼다. 그들의 부추김에 고무된 서태후는 광서제를 궁중에 유폐시킨 후 다시 정권을 잡았다.

 

당시 청나라 일각에서는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비밀결사집단이 그 세력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청조를 도와 양놈을 멸하자(扶淸滅洋)"라는 구호를 외치며 북경으로 진출했는데,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파들은 이들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비호했다. 청조의 공식 인정을 받은 의화단은 독일의 북경 주재 외교관을 살해하기에 이르렀고, 영국·미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 8개국의 연합군이 자국의 공관원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북경까지 밀려들어왔다. 이에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서둘러 서안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다(1900).

 

이들의 피난살이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들은 서구 열강들의 군대 주둔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4 5,000만 냥에 달하는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구 열강들이 중국 본토를 다스리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서태후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일 것이다.

 

▲척화를 장려하는 인쇄물(1891)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그동안 쇄국으로 일관해오던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만주족과 한족의 혼가(混嫁)를 허용하였고, 여인들의 전족(纏足)을 금지시켰다. 남자들의 단발이 허락되었고, 인신매매와 아편을 금지한다는 등의 각종 개혁 내용이 속속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1908, 광서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마자 서태후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와 40여 년 동안 정권을 휘둘렀던 여인 서태후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이질'이라는 병 아래 접힌 것이었다.

 

김상엽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