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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이야기12-2022/ 01월 10일 ‘오징어 게임’ 오영수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 데뷔 60년 임권택 - 06월 13일 패륜 극치 김정은 앞에선 노래할 수 없다는 나훈아 인식

상림은내고향 2022. 9. 13. 15:38

딴따라 이야기12-2022/

01월 10일  ‘오징어 게임’ 오영수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한국인 배우 최초 연기상 수상

“처음으로 내게 ‘괜찮은 놈’ 말해”

 

“수상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나에게 ‘괜찮은 놈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오징어게임’으로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를 품에 안은 배우 오영수(사진)가 이 같은 소감을 밝혔다.

 

오영수는 10일(한국시간) 오전 11시 열린 제79회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직후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 속의 세계’”라며 “우리 문화의 향기를 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안고, 세계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오영수는 ‘오징어게임’에서 오일남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이후 그는 ‘깐부 할아버지’라고 불리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골든글로브는 “오영수는 한국에서 존경받는 연극배우다. 그는 생애 첫 후보 지명에서 수상했다”고 전했다. 백인중심주의가 강한 골든글로브는 한국인에게는 좀처럼 수상의 기회를 열지 않았다. 앞서 ‘오징어게임’은 골든글로브 TV 드라마 섹션에 작품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3개 부문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1944년생인 오영수는 1963년 극단 광장의 단원으로 연기를 시작해 1987년 국립극단 단원, 극단 자유 등을 거쳤다. 1994년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2000년 한국연극협회 연기상을 받았다. 최근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프로이트 박사를 연기하고 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02.01  데뷔 60년 임권택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하는 영화 못 남기고 간다”

[그때 그 사람]
1962년 <두만강에 잘 있거라>로 데뷔 … 총 102편 남겨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1962년 2월 4일 서울 국도극장(國都劇場). 구정(舊正) 대목을 맞아 새 영화가 걸렸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했다. 제목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파괴하고, 온갖 시련 끝에 만주로 건너가 항전(抗戰)을 계속한다는 이야기다. 사랑, 배신, 오해, 고문을 당해 목숨을 잃는 가족, 필사(必死)의 탈출과 일본군의 산중(山中) 추격전 등을 담은 흑백영화다. 마지막 장면은 전설로 남았다. 설원(雪原)을 배경으로 한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독립군은 스키를 타고 총을 쏘며 일본군을 압도한다.

 

 ▲임권택 감독./ 사진=조준우

 

이전의 한국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상상력과 스케일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제작자는 최관두(崔貫斗), 관객 수는 6만 9000명이다. 서울 인구가 250만 명으로, 관객이 5만 명을 넘으면 제작자가 돈방석에 앉는다고 하던 시절이다. 2022년 기준이라면 ‘500만 관객동원’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신인 감독의 이름은 임권택(林權澤‧87). 그래서 2022년 2월 4일은 거장(巨匠)의 감독데뷔 60주년 기념일이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군화장사

18살 때 소년 임권택은 집에서 기차 삯만 훔쳐서 가출했다. 휴전(1953년 7월) 전의 이야기다. 돈을 더 들고 나왔더라면 좋았겠지만, 집안에는 훔치고 싶어도 훔칠 것이 없었다.

 

임권택은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도착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사흘을 굶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노동판에서 지게를 졌다. 힘이 없으니 일이 서툴고, 일이 서투니 일감도 부족했다. 글자 그대로 춥고 배고파서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육체노동과 음주의 후과(後果)는 수전증.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시작한 일이 군화(軍靴) 장사다. 장사를 한 곳은 국제시장이다.

 

전쟁통에서도 예술혼은 피어난다. 자유를 갈망하는 기질은 포화(砲火)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법이다. 군화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 중 일부는 서울로 가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1956년에 개봉한 <장화홍련전>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에 인편으로 임권택에게 연락이 왔다. 촬영 현장에서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떠돌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화 장사가 거의 망한 지경이었죠. 그래서 바로 상경(上京)했습니다. 연출부가 아니라 제작부로 들어간 거죠. 촬영하는 걸 보기는 했지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연출부로 옮긴 건 4~5년 뒤죠. 제작부에서도 연출부에서도, 저는 처음부터 영화판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영화 <장화홍련전>에서 유령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배경 그림이 그려진 대형 원통을 돌리고, 귀신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선풍기를 돌리는 것이 가출청소년 임권택의 임무였다.

 

밤낮없이 묵묵하게 그러나 미친 듯이 소임을 다하는 임권택을 당대의 일류 정창화(鄭昌和‧94) 감독이 주목했다. 정창화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출부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임 감독은 그 시절부터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만 불리면 바로 사무실로 어김없이 나와서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정창화 감독이 임권택을 키워 보겠다고 결심하고 연출부로 발탁한 이유다.

 

“따로 영화 공부를 한 적은 없습니다. 제게는 오로지 정창화 감독님의 촬영장이 교과서이자 학교였죠. 영화 일도 정창화 감독님 아래에서만 배웠어요. 정 감독님은 고지식하시고, 성실하시고, 예술적 고집이 센 분이셨습니다. 정확한 콘티(continuity)를 바탕으로 촬영하셨죠. 콘티만 봐도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 감독데뷔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그때는 예비 감독들에게 영화적 재능이 있는지 부족한지를 가늠할 길이 없었어요. 한번 만들어보라고 하는 것이 재능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죠. 그래서 처음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감격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으로 내 영화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소원이 평생 열 작품만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월간조선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3주 동안 흥행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스키 장면에선 관객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독립군이 스키를 타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도 즐거워했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영화 속에서 스키를 타며 독립군으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스키부대의 현역 장병들이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것이다.

 

‘걸어다니는 영화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정종화 선생은 이 영화를 두고 “2008년 660만을 동원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이어지는 ‘한국산 만주 서부극’의 단초가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 들어 있는 셈”이라고 평가한다.

 

◇“작품만 보고 배우 골라”

임권택의 주량은 소주 2병 정도지만, 거의 매일 약주를 즐긴 애주가(愛酒家)다. 단, 예외는 있다. 일에 들어가면 절대 금주(禁酒)다.

 

“그건 제 양심(良心)에 관한 문제죠. 40~50명의 스태프가 감독 하나만 보고 대기 중인데, 감독이 술을 먹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말이 안 되니까요.”

 

작업에 관한 원칙이라면 하나 더 있다. 캐스팅에 관한 한,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부인 채령 여사의 증언이다.

 

“감독님은 작품만 보고 배우를 고르죠. 박노식 선생이 유일하게 감독님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배우인데 아들 박준규 씨가 TV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러더군요. ‘아빠 찬스를 쓴 적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 임권택 감독님이 저를 한 번도 쓰지 않으신 것이 증거다’라고요.”

 

임권택 감독이 덧붙인다.

 

“캐스팅을 잘못하면 감독도 망하고 배우 본인도 망하고 영화사도 망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다 폐를 끼치는 일이에요.”

 

◇가장 아끼는 작품은 <서편제>

1993년 이청준이 발표한 소설 <남도사람>을 영화화한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에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인 동시에,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넘어서 사회 현상으로 승화(昇華)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국민적 성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조심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죠. 내 영화가 이렇게 많은 관객과 만난다면, 그러니까 국민의 정신적‧정서적 건강에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로 보면,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가 위험한 매체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이 아니다’라고 수시로 다짐했습니다. 인기(人氣)와 명성(名聲)에 놀아나고 자기를 놓치면 곤란하다고 되뇌었어요.”

 

소설가 이청준(1939~2008)과는 이웃사촌이었다. 용인의 한 아파트에 우연히 함께 입주, 수시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영화와 문학을 논했다. 영혼의 동반자라면 두 사람이 더 있다. 제작자 이태원(李泰元‧1938~2021)과 촬영감독 정일성(鄭一成‧93)이다.

 

“두 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 한 사람이죠. 두 분이 없었다면 제 영화 인생도 다르게 흘러갔을 겁니다. 영화 인생을 살면서 참 좋은 분들과 만났었구나, 내 인생이 폐만 끼치는 인생이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 가장 아끼는 작품은 무엇일까요?

“<서편제>입니다. <춘향뎐>(2000)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좋은 감독은 어떤 감독입니까?

“죽어라고 뛰어다니는 감독, 준비를 철저히 하는 감독이죠. 그 가운데서도 헌팅이 중요합니다. 헌팅을 소홀히 하면 영화를 못 만들어요.”

 

이문열(李文烈)의 단편 <익명(匿名)의 섬>을 영화화한 <안개마을>(1983)에 나오는 몽환적(夢幻的) 분위기는 충청북도 단양, <서편제>의 수채화(水彩畵) 같은 풍경은 전라남도 섬마을을 수없이 밟고 답사한 흔적이다.

 

◇허장강‧김지미‧안철수

- 임권택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저는 영화가 좋아서 평생을 더불어 살았을 뿐입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 배우들에게는 무엇을 주문하시는지요?

“원하는 감정이 우러나도록 배우에게 여러 소리를 다했죠. 그걸 못 끌어내면 영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 기억에 남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제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저한테는 다 좋은 인연이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래도 한 사람을 꼽으라면…. 허장강(1925~1975)은 독특한 배우였어요. 감정을 극대화 시켜서 드러내는데, 자연스럽지 않지만 명확하게 느낌을 잡아냈거든요. 딱 그 상황에 걸맞는 연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했던 배우입니다.”

 

말이 난 김에 몇몇 배우들에 대한 평(評)을 더 듣고 싶었다. 필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배우들에 대해 질문했다.

 

“김지미는 좋은 의미에서 독종이고, 안성기는 성실한 사람이죠. 강수연은 허술한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배우입니다.”

 

가장 감사한 일은 위험한 촬영이 많았는데도 단 한 번도 사고(事故)가 없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 70년대, 80년대는 안전의식이나 장비가 지금과는 달랐던 시절이다. 실제로 영화를 찍다 유명(幽明)을 달리한 영화인도 여럿이다.

 

“촬영 중에 제가 실탄을 쏘기도 했으니까요. TNT 폭약을 미리 묻는 과정에서 실수로 터진 적이 몇 번 있지만, 다행히 촬영 중에는 한 번도 사고가 없었습니다. 그 점이 두고두고 감사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

임권택의 필모그라피는 총 102편. 101번째 작품이 <달빛 길어 올리기>(2010), 102번째 영화가 <화장>(2014)이다.

 

“더는 작품을 하기 힘들겠죠. 무엇보다도 체력과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제 모든 작품은 습작(習作)입니다. 저는 평생을 영화를 하며 살았지만,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작품은 만들지 못했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이만하면 잘 만들었구나, 그런 영화를 못 남기고 갑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셨습니까?

“삶을 진솔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이니, ‘그런 인생을 살아간 선배가 있었구나’,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조선일보   장원재 장원재TV대표

 

 

월간조선 02월 호 2022

임권택 감독 영화인생 60년 

■ 격동의 현대사와 同行해 온 巨匠의 필모그래피

▲'신예 임권택 감독’ 문구가 보이는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제작/기획 최관두(崔貫斗)는 임권택 감독을 발탁하고 기회를 준 은인이다.

 

2022년 2월 4일은 임권택 감독의 데뷔 60주년이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10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살아온 생애는 격동의 한국사와 겹친다. 그의 영화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그의 내면에 깃든 한국인들의 정서와 문화가 임권택이라는 예술적 필터를 통해 지구인들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세계인들이 서로를 친근하게 바라보고 다가갈 수 있도록 마음의 징검다리를 놓은 사람이 아닐까? 《월간조선》이 임권택 감독 데뷔 60주년 기념 인터뷰를 진행하고, 임권택 영화 포스터로 화보를 꾸미는 이유다.

 

두 번째 작품 〈전쟁과 노인〉(1962). 김승호, 최무룡, 박노식, 신영균 등 당대의 일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구봉서, 후라이보이(곽규석)도 영화의 한 장면을 장식한다.

 

약 8만 점에 이르는 영화 자료를 수집한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의 도움으로, 그의 소장 자료 가운데서 작품을 고르고 설명을 달았다. 정종화 선생은 “영화는 만질 수 없었지만 포스터는 만질 수 있었다. 함축적인 정보를 한 장에 담은 영화 포스터는 그 자체로 역사이며 기록이다. 그래서 모았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모은 수만 점의 국내외 영화 자료들로 정종화는 지난 35년 동안 120회가 넘는 전시회를 해왔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가보자. 독자들의 청춘(靑春)과 재회하는 시간이다.⊙ 

 

전장과 여교사〉(1966). 주연 김진규, 엄앵란. 6·25 때 인민군을 안심시킨 뒤 홀로 밤길을 달려 아군에게 제보, 첫 승전을 올린 동락전투의 주인공 고(故) 김재옥 교사의 이야기다.

 

 〈증언〉(1973).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부터 전쟁 초기 상황을 주제로 한 작품. 대종상영화제 특별상 감독 부문 수상작이다.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대한민국 육군의 육탄 10용사를 모티프로 삼았다. 부산영화제 임권택 회고전 당시, 임권택이 꼽은 자신의 영화 베스트 10 중 하나다. 1977년에 제13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선우휘 원작의 〈깃발없는 기수〉(1979).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해방 후 좌우익의 혼란한 시기, 아무도 믿지 못하는 현실에서 행동에 나서는 기자의 이야기다. 여주인공은 고두심.

 

 ▲1979년 추석에 개봉한 문제작 〈만다라〉. 본인이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던 소설가 김성동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다. 전무송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주연 안성기.

 

 일본 영화인들이 ‘한국 최고의 전쟁영화’라고 극찬한 〈아벤고 공수군단〉(1982).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원산에 위장 투입된 돌아오지 않는 특공대의 이야기다. 여 주인공은 정윤희.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길소뜸〉(1985). 감정을 절제한 담담한 영상미가 압권이다. 주연 김지미

 

 유인촌, 김영애, 김진아, 권재희 등이 열연한 〈연산일기〉(1987). 연산군이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한승원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강수연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아 국내 언론으로부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받았다.

 

 1987년 9월 강수연에게 제44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씨받이〉(1986). 아시아 배우로서 최초의 수상이었다.

 

 한국형 액션 영화의 새 경지를 개척한 블록버스터 〈장군의 아들〉(1990). 대규모 오디션, 스턴트 배우 기용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를 했고, 단성사 한 곳에서만 67만8946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 영화의 기념비 〈서편제〉(1993). 오정해와 김명곤이 보인다.

 

 ▲신은경이 열연한 〈노는 계집 창(娼)〉(1997). 197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말까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담았다. ‘사창가’를 진지하게 영상으로 옮긴 한국 영화사상 첫 시도이기도 하다.

 

 “〈서편제〉는 이 영화를 위한 준비였다”며 야심차게 제작한 〈춘향뎐〉(2000). ‘판소리와 우리 것에 대한 임권택의 애정 고백’ 같은 작품이다.

 

 ▲제55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취화선〉 (2002). 거장의 98번째 작품이다. 주인공은 최민식.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나! 장승업이오’라는 광고 카피 마지막이 ‘임권택이오!’라고 들리는 건 필자만의 착각일 터이다.

 

 ▲김훈의 소설 〈화장〉을 원작으로 만든 〈화장〉 (2014). 임권택 작품 목록의 맨 끝에 있는 작품이다. ‘화장’은 化粧과 火葬의 뜻을 모두 담고 있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것을 절제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인생’임을 보여주는 영화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02.02  “간암 투병 알리면 민폐 될까…” 허참, 끝까지 주변에 숨겼다

예능프로그램 '가족오락관'을 25년간 진행한 MC 허참이 간암 투병 끝에 1일 별세했다. /연합뉴스

 

국민 MC 허참(73·본명 이상용)1일 별세했다.

 

허참은 이날 간암 투병 끝에 눈을 감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2층 21호에 마련됐다. 허참은 부모의 묘가 있는 경춘공원묘원에 잠들 예정이다.

 

허참의 투병, 별세 소식은 팬들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년 12월까지도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허참 측 관계자에 따르면, 허참은 간암 투병 소식을 주변인들에게 비밀로 부쳤다고 한다. 그러다 급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됐다고. 관계자는 한 매체에 “간암 투병 사실을 주변인에게도 감추면서 극복을 하려고 노력하셨다”며 “주변인이나 가족들에게 민폐가 될 것을 두려워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여행작가 손미나(왼쪽), 허참/손미나 인스타그램

 

허참과 함께 방송을 했던 동료 연예인들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KBS 아나운서 출신 여행 작가 손미나는 인스타그램에 허참과 찍은 사진을 올린 뒤 “당혹스럽고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얼마 전 함께 방송에 출연해 힘찬 목소리로 노래하시는 모습도 봤는데, 손 꼭 잡아주시며 맛있는 거 사줄 테니 얼른 연락해라 하셨는데. 이 사진을 찍은 날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라고 안타까워했다.

 

손미나는 허참과 6년간 ‘가족오락관’에서 호흡을 맞췄다. 손미나는 “선생님은 6년 가까이 매주 방송을 진행하며 호흡을 맞춘 짝꿍이고, 아나운서 1년 차 때부터 방송 진행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제 롤모델이자, 스튜디오 밖에서는 세상 다정하고 재미있는 때로는 삼촌 같고 때로는 친구 같은 분이셨다”고 했다.

 

이어 “제가 아는 최고의 애처가, 의리와 정으로 똘똘 뭉친 분, 25년 이상 매주 같은 방송을 진행하면서도 늘 제일 먼저 도착해 대본 준비를 하는 철저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프로, 후배나 말단 스태프들까지도 깍뜻함과 존중으로 대하시던 인품의 소유자, 나이와 상관없이 청년의 영혼과 순수함을 지니셨던 분, 무엇보다 본인의 일과 시청자를 세상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남에게 웃음 주는 일이 곧 본인의 기쁨이던 타고난 방송인, 욕심 없고 소탈하기 짝이 없는 인간적인 사람, 그리고 저에게는 늘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힘찬 응원을 보내는 영원한 치어리더 같았던 그런 분이셨다”고 기억했다.

MBN ‘엄지의 제왕’과 tvN ‘나이거참’에서 허참과 MC로 호흡을 맞춘 오정연 전 KBS 아나운서도 인스타그램에 “당신이 하는 일에 기쁨과 책임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좋은 영향을 풍기셨다. 연세가 있으셔서 어딜 가나 어른이신데도 무게를 잡지 않고, 오히려 후배들을 배려하셨다”며 “제가 처음 연기를 하게 되자 연기자가 참고하면 좋은 책이라며 선물로 갖다주시고, 혹 힘들더라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즐겁게 하라고 격려해 주신 기억도 생생하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성우 겸 방송인 서유리도 인스타그램에 “같이 프로그램 하면서 느꼈던 선생님의 따스함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곳에선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라고 애도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영남상고, 동아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허참은 1970년 음악다방 ‘쉘부르’ MC로 연예계에 입문해, 1971년 TBC(동양방송) ‘7대 가수쇼’ MC로 정식 데뷔했다. 이후 1974년 MBC 라디오 ‘청춘은 즐거워’ , TBC ‘가요앙코르’ ‘쇼쇼쇼’ ‘가요청백전’ ‘올스타 청백전’ ‘쇼 일요특급’ MBC ‘싱글벙글쇼’ ‘젊음은 가득히’ ‘푸른신호등’ ‘허참과 이밤을’, TBS ‘가요운전석’ KBS 라디오 ‘허참과 즐겁게’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활약했다.

 

허참의 대표작은 1984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한 KBS1 ‘가족오락관’이다. 그는 26년간 “몇 대 몇”을 외치며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가족오락관’이 끝난 후에도 SBS ‘트로트 팔도강산’, KBS ‘도전 주부가요스타’ ‘트로트 팔도 강산’, 경인방송 ‘8도 노래자랑’, 엠넷 ‘골든 힛트송’ 등에 출연하며 건재함을 자랑했다.

 

2003년에는 음반 ‘추억의 여자’를 발매해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다. 2005년 제1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TV진행자상, 2006년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간암 투병 끝에 별세한 방송인 허참의 빈소가 1일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조선일보  김소정 기자

 

02월 21일  원로 성우 오승룡 21일 별세

 

 시사 풍자극 ‘오발탄’의 성우 오승룡 한국성우협회 고문이 21일 별세했다. 87세.

오승룡은 1950∼196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특히 MBC 라디오극 ‘오발탄’에서 MC를 맡아 활약했다. 때로는 만담가처럼 구수한 입담으로, 때로는 시사평론가 못지않은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야기를 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방송가에 따르면 오승룡은 만성신부전을 앓아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이날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1935년 충남 보령 출생인 고인은 1954년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 성우 1기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엔 녹음 기술이 부족해 대부분 생방송으로 목소리 연기를 해야 했던 시절이다.

이후 KBS에서 ‘퀴즈 올림픽’, ‘세월 60년, 노래 60년’, TBS에서 ‘서울 이야기’ 등을 진행했다. ‘조선왕조 500년 뿌리 깊은 나무’ ‘상도’ 등 사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6년 제43회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배우 오정석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4일이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02.20  '사투리 연기 달인' 원로배우 김지영 별세

▲'사투리 연기 달인' 원로배우 김지영

 

원로배우 김지영(79· 본명 김효식)씨가 19일 오전 별세했다. 2년간 폐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최근까지 드라마 출연 등 연기활동을 하다 지난 17일 급성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6·25 당시인 1952년 악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1960년 영화 '상속자'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마파도2' '해운대' '도가니' 등 영화 100여 편과 드라마 40여 편에 출연했다. 2005년 출연한 드라마 '장밋빛 인생'으로 KBS 연기대상 여자 조연상을 받았다. 전국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사투리 연기의 달인'으로 평가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임상호씨, 딸 임금순·임민순·임은순씨 등 1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1일 오전 8시, (02)2258-5940

조선일보

 

03.24  '아빠의 청춘' 부른 60년대 국민가수 오기택 별세…향년 83세

 

노래 ‘아빠의 청춘’, ‘영등포의 밤’ 등으로 1960년대를 풍미한 원로가수 오기택이 23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오기택은 1960년대 산업의 중심지인 영등포에서 살아가던 서민의 애환과 사랑을 담은 노래 ‘영등포의 밤’(1963)을 불러 이름을 알렸다. 이 노래는 산업 현장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당시 서민의 꿈과 애환이 담긴 노래로, 1966년에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3년 뒤 남궁원·엄앵란이 주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에 주제가로 쓰였다. 당시 오기택이 특별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2010년엔 곡의 배경인 서울 영등포구에 이 노래를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는 ‘아빠의 청춘’, ‘고향 무정’, ‘남산 블루스’, ‘충청도 아줌마’, ‘비 내리는 판문점’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960년대 간판 인기 가수로 등극했다. 특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노래를 불러 ‘저음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전남 해남 출신인 고인은 고등학교 때 상경해 성동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가수 등용문이던 동화예술학원에 입학했다.

 

오기택은 동화예술학원 재학 중이던 1961년 12월 제1회 KBS 직장인 콩쿠르에 동화백화점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이듬해인 1962년 4월 20일 계약금 5000원을 받고 당시 메이저 음반사였던 신세기와 전속 가수 계약을 맺으면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오기택은 1963년 4월 해병대 군예대에 입대했지만, 입대 후에도 그의 노래들은 계속해서 TV와 라디오에서 전파를 탔다. 군 복무 중에도 틈틈이 음반을 취입해 결과적으로는 공백기 없이 히트곡을 계속 내놨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오기택은 인기 때문에 빡빡한 공연·방송 일정을 소화했어야 했고, 음반도 한 달 평균 20여 곡 이상씩 취입해야 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오기택은 1979년 한국연예협회(현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힘썼다.

 

고인은 가수 활동 외에도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그는 1981년부터 3년간 전국체전 전남 대표로 골프선수로도 활동해 단체 금메달과 개인 1위 등 3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고인은 1996년 바다낚시를 갔다가 사고로 크게 다쳐 건강이 악화했다. 이후 지병으로 치료를 받다 최근 증세가 악화해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의 고향인 해남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오기택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2018년에는 고향인 전남 해남에 ‘오기택 노래비’도 만들어졌다.

 

전남 해남 오기택 노래비 앞에 선 가수 오기택(왼쪽). [사진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연합뉴스]

 

박 평론가는 “오기택은 ‘해남 땅끝마을 내 고향’을 작사했을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며 “평생 미혼으로 지낸 고인은 생전에 남긴 전 재산을 고향 후배들을 위해 전남 해남고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남겼다”고 말했다.

 

빈소는 26일께 서울 한강성심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1960년대를 풍미한 원로가수 오기택이 23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빈소는 26일께 서울 한강성심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사진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연합뉴스]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03.29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오스카 시상 전 사과한 윤여정, 왜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와 시상을 맡은 배우 윤여정. AP=연합뉴스

 

 윤여정은 28일 오전(한국시간, 미국시간 27일 오후) 미국 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에서 남우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윤여정은 "오늘 할리우드에 다시 오게 돼서 기쁘다"며 "어머니께서 '네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 했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작년에 사실 제 이름이 제대로 발음이 안 되는 것에 대해 한소리를 했는데 시상자가 돼보니 알겠다. 제가 이번에 후보자님들의 이름을 보니까 참 이름 발음이 쉽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며 "발음 실수에 대해 미리 사과드린다"고 말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이날 수상의 영광은 영화 '코다'의 청각장애인 연기자 트로이 코처에게 돌아갔다.

 

이때 윤여정의 배려가 빛을 발했다. 수상자를 발표하며 "'미나리'는 아니다"라며 농담을 건넨 그는 수화로 트로이 코처를 수상자로 호명했고, 그와 깊은 포옹을 나눴다.

 

또 윤여정은 그가 수화로 수상 소감을 전할 수 있도록 트로피를 직접 들어주고 수상 소감을 하는 내내 옆에 서서 진지하게 듣는 모습 등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오스카상'으로도 불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주관하는 미국 최대의 영화상이다. 이날 시상식에는 지난해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 연기상(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이 시상자로 참석해 2년 연속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빛냈다.

 

https://youtu.be/vHhfzP4nn70

현예슬 기자 hyeon.yeseul@joongang.co.kr

 

영화배우 최은희 자전적소설

https://youtu.be/1TfKUTyQyTY - 영화배우 최은희 자전적소설 상

https://youtu.be/VSTSICm9-zo - 영화배우 최은희 자전적소설  하

 

 

05.07  "임권택 감독도 충격"..故강수연 별세, 연상호→이상아 '연예계 애도'

▲[OSEN=박소영 기자] 배우 강수연이 하늘의 별이 됐다.

 

강수연은 지난 5일 오후 5시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CPR(심폐소생술)을 받으며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뇌출혈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수술도 쉽지 않은 상태였는데 7일 결국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향년 55세.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배우 한지일은 7일 자신의 SNS에 “손이 떨리고 힘이 없어요. 믿어지지 않는 비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음이 많이 아파요. 임권택 감독님께서도 충격을 받으셨어요. 외로워 하지마”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상아도 "언니 몇 년 전. 내 입장에 서서 나를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했던 언니. 아역 때부터 활동한 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해 주려 했던 언니. 너무나 멋지고 이쁜 언니..실감이 안 나네…언니..마냥 언니 언니 라는 말밖엔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천국에선 평안하길”이라는 글로 애통한 마음을 내비쳤다.

 

강수연은 최근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새 영화 '정이'로 복귀를 앞두고 있던 상황. 하지만 뜻밖의 비보에 ‘정이’는 고인의 유작이 됐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영화 그 자체였던 분. 선배님 편히 쉬세요. 선배님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라는 메시지로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지난 1969년부터 동양방송 전속 아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은 1983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로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안의 블루', 드라마 '여인천하' 등 수많은 흥행작을 남겼다.

 

'씨받이'(1986)를 통해 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여우주연상,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를 통해 16회 모스크바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일찌감치 ‘월드 스타’로 떠올랐다. 지난 1998년부터 BIFF 집행위원을 맡았고 2015년엔 공동집행위원장에 선출돼 한국 영화 발전에 앞장섰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17호에 마련됐다. 조문은 8일 오전 10시부터 10일 오후 10시까지 받으며 발인은 11일 엄수된다.

/comet568@osen.co.kr

 

 

 

“누나 같았고 따뜻했다” “등대였던 분” 동료들이 기억한 그녀

 

배우 강수연씨. /부산국제영화제 인스타그램

 

7일 배우 강수연(56)씨의 별세 소식에 연예계 동료들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지극한 후배 사랑으로 유명했던 고인과의 이별에 “가장 존경하는 분” “영화계 진정한 리더” “참 따뜻했던 사람”이라는 애도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강씨는 이날 오후 3시쯤 서울 강남구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지난 5일 통증을 호소하다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진 지 사흘 만에 들려온 비보다. 뇌출혈 진단을 받고 치료를 계속해왔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모두의 응원을 뒤로한 채 하늘의 별이 됐다.

 

◇ “칸과 베네치아에서도 안타까워할 것”

영화계는 슬픔에 빠졌다. 고인이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공식 소셜미디어에 글을 써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쓰셨고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헌신하셨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그러면서 “그 노고를 잊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전주국제영화제 측도 “한국 영화의 빛나는 별이었던 강수연 배우의 영면을 추모한다”며 “그가 한국 영화계에 남긴 유산을 잊지 않겠다”고 애도했다. 정동진독립영화제 측 역시 “독립영화계에 보내주신 따뜻한 관심과 애정에 늘 감사했다”며 “한국 영화의 진정한 리더이자 영웅. 배우 강수연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전했다.

 

과거 고인과 함께 작업한 원로 감독들도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1985년 영화 ‘고래사냥2′를 연출한 배창호(69) 감독은 이날 연합뉴스에 “고생스러운 촬영이었지만 잘 참아내며 매사 적극적이고 발랄하게 일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큰 국제영화제에서 본상 연기상을 받은 연기자이기도 하지만 중견 연기자로서의 족적, 부산국제영화제가 흔들릴 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제를 다잡은 공로도 있다”고 했다.

 

영화 ‘블랙잭’(1996)을 함께 한 정지영(76) 감독도 고등학생이던 강씨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당시에는 감독이라면 어려워했는데 자기 할 말을 똑똑히 다 해서 ‘역시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강수연 이전에는 아무에게도 ‘월드스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며 “칸과 베네치아에서도 안타까워할 거다. 한국 영화의 귀중한 자산이었는데 너무 일찍 가 속상하다”고 덧붙였다.

 

◇ “등대 같은 분이었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연예계 선후배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영화 ‘아제 아제바라아제’에서 강씨와 호흡을 맞췄던 원로배우 한지일은 “손이 떨리고 힘이 없다. 믿어지지 않는 비보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며 고인을 떠나보낸 괴로움을 호소했다. 작품을 함께한 임권택 감독을 언급하면서는 “감독님도 충격을 받으셨다”고 전했다. 한지일은 전날에도 페이스북에 “많은 기도 부탁드린다. 뒤에서 ‘선배님’하고 웃으며 달려올 것 같은 기분”이라는 글을 써 안타까움을 드러낸 바 있다.

 

1987년 12월 제26회 대종상 영화제 남녀주연상을 차지한 이영하씨와 강수연씨. /연합뉴스

 

영화감독 겸 배우인 양익준도 인스타그램에 “누나 같았고 따뜻했고 사랑스러웠던 분이 돌아가셨다. 누나라고 한번 불러봤어야 했는데”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배우 봉태규 역시 “선배님 편히 잠드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가수 윤종신과 작곡가 김형석도 각각 “편히 잠드셔요. 오랜 시간 감사했습니다”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길 빌었는데. 그곳에선 편히 쉬길”이라는 글을 올렸다.

한편 영화계는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감독 이우석·임권택·정진영, 배우 김지미·박정자·박중훈·손숙·안성기 등이 고문을 맡았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층 17호에 차려졌다. 조문은 8일부터 가능하고 발인은 11일이다.

조선일보  문지연 기자

 

05.11  “사극서 많이 봤는데”… 故이일웅 별세, 애도 봇물

 

원로배우 이일웅이 암 투병 끝 세상을 떠났다.

 

11일 유족에 따르면 이일웅은 전날 오후 사랑하는 가족들 곁을 떠났다. 지난 1월 담도암 판정을 받고 4개월간 투병해오다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하늘의 별이 됐다.

 

1942년생인 이일웅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1961년 연극 배우로 데뷔했다. 3년 뒤 KBS 4기 탤런트에 합격했고 ‘꽃집 아줌마’, ‘미스터리 흥분하다’, ‘귀로’, ‘북간도’, ‘허생전’, ‘대동강’, ‘풍운’, ‘토함산’ 등에 출연했다.

 

2010년까지는 거의 매년 작품에 출연하며 시청자들에게 친숙함을 알렸다. 특히 ‘한명회’에서 엄자치 역으로 눈길을 끌었고 ‘제4공화국’, ‘조광조’, ‘전설의 고향’, ‘왕과 비’, ‘태조 왕건’, ‘명성황후’, ‘야인시대’, ‘무인시대’, ‘토지’, ‘대조영’, ‘연개소문’ 등 사극에서 두드러진 존재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향년 80세. 고인의 빈소는 서울 동대문구 경희의료원 장례식장 10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13일 오전 6시 엄수된다.

/comet568@osen.co.kr

 

 

https://youtu.be/BAWuoHbD2cg - 당뇨로 고인이 된 연예인들

 

05.24 95세 송해,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기록 등재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 진행… 34년간 전국 돌며 현장 녹화

▲1988년부터‘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해 온 송해가‘TV 음악 프로그램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됐다. 송해는 23일 기네스 인증서를 들고 활짝 웃었다. /KBS

 

34년간 KBS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온 방송인 송해(95)가 ‘최고령 TV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다. 현역 최고령 방송인인 송해는 23일 “긴 세월 전국노래자랑을 아껴 주신 대한민국 시청자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KBS는 “송해의 기네스 세계기록 등재는 지난달 확정됐지만,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기네스협회의 업무 지연 등으로 대외적인 공표가 늦어졌다”고 했다.

 

송해는 1927년생으로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데뷔해 연예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1988년부터 34년간 진행해왔다. 하지만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른 송해가 앞으로도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계속 맡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송해가 지난 17일 전국노래자랑 제작진에게 “이제 나도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며 하차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전국노래자랑은 코로나 유행이 시작한 2020년 3월 이후 현장 녹화를 중단하고 옛 방송 편집분을 내보내 왔다. 오는 6월부터는 전남 영광을 시작으로 코로나 이전처럼 전국 곳곳에서 현장 녹화를 재개할 예정이다. 송해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방송 촬영을 하기에는 건강에 자신이 없다고 제작진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 관계자는 “제작진 입장에선 프로그램의 상징과도 같은 진행자의 거취를 바로 결정할 수는 없고, 실제 하차 의사를 밝힌 것인지 다시 한번 송해 측에서 의사를 밝혀줄 것을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방송가에서는 “그냥 몸이 힘들다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신지, 아니면, 정말로 이제 그만두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상황”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송해는 지난해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전국노래자랑 후임 진행자로 “제 후배 되는 사람, 희극을 한다는 사람은 전부 그 줄에 서 있다”고 후임자 자격을 말하기도 했다.

 

송해가 최근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그의 건강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송해는 최근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가 지난 18일 퇴원했다. 지난 1월에도 한 차례 입원 치료를 받은 바 있으며, 3월에는 코로나에 확진됐다가 회복된 바 있다. 방송계 관계자는 “최근 입원은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검진 차원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양지호 기자

 
 

05월 27일  1980년대 최고 근육질 액션배우 신일룡 별세

 

지난해 간암 발병 투병 중 세상 떠나
1970~80년대 최고 미남 배우로 평가
당시엔 없던 근육질 몸매로 유명해


1970~80년대 당대 최고 미남 배우로 불렸던 신일룡(본명 조수현)씨가 2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

영화계 등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해 간암 발병 이후 투병하다가 이날 오전 별세했다. 1948년생인 고인은 197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조괴담’으로 데뷔해 한 시대를 풍미한 톱스타였다. 신성일과 신영일이 전통적인 미남 배우였다면, 고인은 이들보다 남성적인 외모로 큰 인기를 누렸다. 다만 1986년 영화 ‘황진이’에 출연한 이후엔 사실상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사업을 했다. 활동 기간 중에는 1973년 ‘섬개구리 만세’청룡영화상 신인연기상, 1976년 ‘아라비아의 열풍’으로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빼어난 활약을 했다. 또 한국영화 최초 칸국제영화제 진출작으로 알려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에도 출연했다.

고인은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 스타이기도 했다. 전설의 액션 배우 브루스 리(이소룡)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의 대역으로 홍콩영화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엔 없던 근육질 몸매로 유명했고, 이런 남성미를 앞세워 남성 스킨로션 ‘쾌남’ 광고 모델로 활동했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병행했던 고인은 연기를 완전히 접은 뒤에는 음식점·주점 등 각종 사업을 했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제주도에서 카지노 사업을 시도했다가 외환위기가 터지고 카지노 허가가 불발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말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호두파이 가게를 차려 운영해왔다. 최근엔 피자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수 조정현의 친형이기도 하다.

유족으로 부인 채희종씨와 자녀 여진·인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8일.
<뉴시스>

 
 

06.08  “전국~ 노래자랑!” 그 목소리 못듣는다… 영원한 MC 송해, 95세로 별세

▲국내 최고령 방송인 송해가 지난해 11월 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KBS에서 열린 KBS 1TV '아침마당'을 마치고 방송국을 나서며 정겨운 손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뉴스1

“고향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어머니! 복희가 왔습니다. 전국~노래자랑!”

눈 감기 전에는 반드시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 무대를 열고 싶다고 말했던 최장수 MC 송해(95·본명 송복희). 그가 8일 결국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지난달 14일 건강 문제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한 상태였다.

 

1988년부터 34년간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지휘봉을 잡았다. 지난 4월 말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돼 5월 공식 공표됐으니, 이젠 진정 세계가 인정한 MC다. 그가 마치 전 국민을 호령하듯 “전구우욱~”을 외치고는 “빰 빰빰 빰빰 빰~빰~”하는 악단 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빠라밤 빠라밤 빠라밤빰 빰빰 빰빰~”을 따라 부르게 하던 전국민의 프로그램. ‘일요일의 남자’라는 애칭도 붙었다.

 

서너살 꼬마부터 백살 어르신들까지 송해 앞에서 ‘스타’로 변신했다. 송해가 활짝 웃으면서 마이크를 건네면 기적이라도 일어나는 듯, 큰 무대에 바짝 얼어 입을 열지 못했던 이들에게 청산유수처럼 말이 흘러나왔고 숨은 끼가 나왔다.

 

‘미스터트롯’(2020)의 스타 임영웅, 이찬원, 정동원, 김희재, 김수찬은 물론 ‘미스트롯’(2019)의 송가인, 국악소녀 송소희, 오마이걸 승희와 별도 전국 노래자랑이 낳은 스타들이다. 송해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출연진의 삶을 끝까지 귀를 기울여 새겨듣고는 오래된 친구처럼 풀어냈다. 흥에 겨운 송해도 춤사위와 노래 솜씨를 곁들이며 분위기를 돋웠다.

 

송해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천상 예능인이자, 상대를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그의 친화력을 칭송한다. 깊은 내공 뒤에 따라붙는 찬사다. 과거 신재동 전국노래자랑 악단장은 “딴따라라는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분”이라 했고, 후배 MC 강호동은 송해와의 첫 만남을 회고하면서 “보자마자 씨름을 하자고 했던 송해 선생님”이라고 추억했다.

 

송해에겐 ‘큐카드’(방송대본)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즉흥적으로 교감하기 위해서다. 모두가 즉석이다. 송해는 오히려 배운다고 말했다. “만 세 살부터 백열다섯 살 되시는 분까지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정말 배우는 게 많아요. 직업들도 천태만상이에요. 이 순간에도 제 이야기를 경청하시는 분들이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거예요.”(2021 ‘송해의 인생티비’)

 

요즘 식의 ‘유튜브 먹방’도 송해 앞에서 명함도 못내민다. 전주에선 한정식이 그득하게 차려진 한 상과 함께, 스물 셋 젊은 출연진이 “송해 성님, 나가 엊그제 제대했는디 성님 주려고 한상 차려 왔응께 한번 잡숴봐”라는 이야기에 무대에 털썩 주저앉아 장단을 맞추는 가 하면, 무대 위 펼쳐놓은 휴대용 가스렌지 위에서 즉석에서 구워주는 고기쌈을 한입 크게 베어물고, 경운기를 몰고 오는 도전자를 맞아 수박과 딸기, 인삼 등을 먹기도 했다.

 

임신 8개월 임산부 출연진이 송해에게 턱받이와 젖병을 물리게 하고는 “이런 아들좀 낳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에 덮썩 아이마냥 ‘빈 젖병 먹방’도 해 보였다. 그에겐 언제나 넉살과 편안함이 있었다. 상대의 어떠한 부탁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전국 팔도 안다녀 본 곳이 없는 그였다. 평양도 가고, 금강산도 갔다. 하지만 고향 땅만큼은 밟아보질 못했다. 황해도 재령 태생인 송해는 어릴 때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황해도 해주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해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 인연으로 월남 이후 창극단에서 일하기도 한다.

 

6·25 전쟁 당시엔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송해는 과거 방송에서 “휴전 전보를 내가 쳤다. 그런데 내가 그걸 치고 고향에 못 가게 됐다. 내가 돌아갈 길을 내가 끊은 셈이다”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와 헤어진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틀 뒤에 옵니다.” 평소에 별말씀 없으시던 어머니가 그때는 “이번엔 조심해라”라고 했다. 그 뒤에 어머니 얼굴은 보지 못했다. 송해가 2015년 발표한 노래 ‘유랑청춘’은 그 당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눈물 어린 툇마루에/손 흔들던 어머니/길 떠나는 우리 아들 조심하거라/그 소리 아득하니 벌써 70년/보고 싶고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여/재 넘어 길 떠나는 유랑 청춘아/’

연평도에서 미 군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송해는 바다를 건너며 ‘바다 해(海)’자를 예명으로 썼다. 어린 시절 송복희가 지금의 ‘송해’가 된 것이다. 1955년 유랑극단 ‘창공악극단’으로 가수 활동했다. 또 故 구봉서 故 서영춘 故 배삼룡 故 이순주 등 당대 유명한 재담꾼들과 함께 극장 쇼무대를 누볐다.

 

특히 여성 코미디언이자 MC로 유명했던 故 이순주와 1970년 TBC 동양방송 라디오프로그램 ‘웃음의 파노라마’에서 명콤비로 불리며 MBC ‘웃으면 복이와요’ 등에서도 코미디언으로 활약했다.

 

일상인으로 송해는 소박함 그자체다. 방송인의 필수라는 큐카드가 없었듯, 그에겐 현대인에 필수로 보이는 자동차와 스마트폰이 없다. 누룽지에 김치찌개, 계란후라이로 하루를 시작하고, 자택인 도곡동에서 자주 찾는 종로까지 항상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주당인 송해가 해장을 위해 단골로 다닌 2000원 우거지국밥집은 ‘송해 국밥’으로 유명해졌다.

 

▲송해가 TV 음악 프로그램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다. /KBS

 

 ▲송해/KBS

안경낀 얼굴로 항상 웃음 가득한 모습이지만 그늘을 공개하기도 했다. 영화 ‘송해 1927′(2021)에서다. 1974년부터 KBS 교통전문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를 17년간 진행했던 그가 중도하차한 데엔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 창진씨의 오토바이 사망 사고 때문. 송해는 “사고 직후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아버지, 살려줘’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18년엔 평생을 함께하자던 아내 석옥이씨마저도 그의 곁을 떠났다.

 

그가 일요일마다 출연진에 건넨 “땡”과 “딩동댕”은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일 수 있지만, 스스로를 향한 응어리진 메아리일 수도 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가수가 되고 싶어한 아들을 극구 반대하며 꿈을 풀어주지 못한 회한, 그토록 바랐던 고향을 결국을 밟지 못하는 현실….

 

그는 올초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탈락을 뜻하는) 땡과 (합격을 말하는) 딩동댕 중 뭐가 더 중요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땡을 받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릅니다.”

 

좋아하는 술 한잔에 우거지국을 들이키고, “전국~노래자랑”을 외치던 그는 이제 영원히 깊은 잠에 취하게 됐다. 그는 꿈속에서 지금껏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이들과 만나 못다 나눈 이야기를 하고 거한 밥상을 받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수도 있다.

 

“조심하라”던 어머니에게 “제가 걱정 마시라 했잖아요”라고 웃으며 돌아갈 것이다. 별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듯,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외칠 것이다. “전국~노래자랑”.

조선일보  최보윤 기자 

 

“그곳에선 ‘천국노래자랑’ 외쳐주세요” 송해 별세에 추모 물결

 34년간 국민의 일요일을 책임졌던 ‘현역 최고령 MC’ 송해(95·본명 송복희)가 8일 별세했다. 그의 건강한 복귀를 기원했던 네티즌들은 갑작스러운 비보에 안타까워했고 여러 소셜미디어를 통해 추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송해는 이날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올해 들어 여러 차례 건강 문제로 병원을 오가긴 했으나 위중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불과 이틀 전 KBS1 ‘전국노래자랑’ 제작진과 스튜디오 녹화 참여 등을 놓고 논의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언론 보도와 동시에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추모 물결이 일고 있다. 트위터 등에서는 ‘송해 별세’가 실시간 검색어로 등장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애도했다.

 

한때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가 운영되던 시절, 송해가 키워드에 오르면 ‘심장이 덜컥했다’ ‘설마 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다’ 등의 댓글이 연달아 올라왔었다. 당시에도 이미 최고령 진행자였던 그의 건강을 바라던 사람들이 남긴 글이었다.

 

일부 네티즌은 당시 댓글 분위기를 언급하며 “언젠가 이런 날이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 오고야 말았다. 믿기지 않는다. 가짜뉴스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덕분에 온 가족이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언젠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너무 친근한 분이라 나도 모르게 인사했는데 반갑게 받아주셨다”며 고인에게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또 “일요일마다 만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한 시대가 저물고 역사의 한 페이지가 닫힌 느낌이다” “훌륭한 어르신이 떠나가셨다” “하늘나라에서 ‘천국노래자랑’을 맡아 달라”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 편히 쉬시라” 등의 댓글도 쏟아졌다.

 

◇방송계 후배들 “진정한 큰별이셨다”

비보를 접한 방송계 후배들도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방송인 이용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47년 전 MBC 방송국에서 국내 최초로 코미디언을 뽑던 날, 심사위원으로 앉아계시던 송해 선생님의 스포츠 헤어스타일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며 고인과의 인연을 돌이켰다.

이어 “출연하셨던 수많은 프로그램을 이젠 시청자분들께 선물로 드리고 천국에 가셔서, 그곳에 계신 선후배들과 ‘천국노래자랑’을 힘차게 외쳐 달라”며 “제가 무대에서 이 멘트를 하면 관객들이 좋아하셨다. ‘우리나라는 원래 사면이 바다였다. 동해, 서해, 남해 그리고 송해’ 그 어른은 바다셨다”라고 덧붙였다.

 

 ▲이용식이 공개한 사진. 왼쪽부터 이용식, 임하룡, 송해. /인스타그램

 

방송인 오상진은 “존경하는 송해 선생님.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과 고인의 사진을 올렸다. 가수 겸 배우 하리수도 “언제나 전국의 모든 국민과 함께 하셨던 선배님. 국민들과 오랜 시간 웃고 울며 한마음으로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며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언제나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편히 잠드시고 부디 행복하세요”라는 글을 남겼다.

 

가수 이현우는 KBS 라디오 ‘이현우의 음악앨범’을 진행하던 중 “조금 전 송해 선생님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전 국민 곁에서 68년을 함께 하셨다. 이제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기원하겠다”며 “진정한 큰 별이었고 스승이었던 송해 선생님을 많이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6·25 당시 홀로 월남했다. 1955년 창공악극단에 가수로 입단해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MC와 코미디언 등으로도 활동했다. 지난 4월에는 ‘최고령 TV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다.

조선일보  문지연 기자

 

6·25전쟁 당시 월남 후 희극인으로 활동해 온 젊은 시절의 송해

 

1960년대 초 송해가 딸을 안고 있는 고 석옥이 여사와 활짝 웃고 있다. 달성군청 제공

문화일보

 

 

06.13 “뭐 하는 짓이야!”...송해, 전국노래자랑 중 공무원에게 고함친 사연

지난 8일 별세한 방송인 고(故) 송해(본명 송복희)씨의 삶을 담은 평전 ‘나는 딴따라다’(2015)를 집필한 오민석 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평전을 위해 1년 동안 송씨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추억했다.

 

 오 교수와 송씨는 20~30년 전, 인사동 수도약국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년 뒤, 낙원동의 한 사우나에서 우연히 재회했고, 두 달쯤 지나 낙원동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또 만났다고 한다. 오 교수는 13일 방송된 CBS라디오 ‘한판승부’에서 “제가 그쪽(낙원동)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자주 갔었다. 선생님 사무실이 거기에 있는데 제가 그쪽을 어슬렁거리다 보니까 그렇게 만남의 우연이 반복돼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반가운 나머지 낙원동 사우나 탈의실에서 발가벗은 채로 송씨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고 한다. 오 교수는 “그때 저는 시인이고, 문학평론가였다. 시집이 나왔길래 제가 사인을 해서 전화번호를 적어드리니까 당신도 저한테 사인을 해 주겠다고 그래서 제가 갖고 있던 책에 사인해 주시고 당신 전화번호를 적어주셨다. 저는 시집을 안 읽으실 줄 알았는데, 3일쯤 지났는데 전화가 왔다. 왜냐하면 그 시집 첫 번째 페이지에 전국노래자랑, 송해씨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송씨가 먼저 오 교수에게 ‘소주 한잔 합시다’라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그때부터 절친한 사이가 됐다.

 

평전 ‘나는 딴따라다’는 오 교수가 먼저 송씨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처음엔 송씨가 “나 같은 딴따라 이야기를 무슨 가치가 있다고 쓰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 교수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설득했다.

 

“선생님은 살아 있는 박물관입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1927년(송해씨 출생년도)이면 일제강점기 한복판이지 않습니까. 한국전쟁 이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사건들인데 선생님 얘기를 쓰면 선생님 개인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까지 얘기할 수 있다. 또 유랑극단 시절부터 한류까지 그 중심에 계속 있었기 때문에 한국대중문화사를 이렇게 서베이(조사)하는 것도 되고 그다음에 한국 방송사 라디오, 흑백, 컬러TV 이렇게 이어지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선생님 연예인 후배들을 위해서 기록을 해야 됩니다”

 

송씨는 오 교수 진심에 바로 ‘승낙’을 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1년 간 동행했다. 오 교수는 오전엔 인터뷰, 오후에는 관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또 전국노래자랑 스케줄, 술자리, 광고 미팅, 가요무대 녹화 등 매니저처럼 쫓아다니면서 기록했다.

 

가까이서 본 송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 교수는 “무대 위와 아래가 똑같은 건 다정다감하다는 것. 정이 그렇게 많다. 그리고 사람을 하나하나 디테일까지 배려하신다. 그건 실제로 무대 밖에서 더 깊고 심하시다”라고 기억했다.

 

‘어떻게 배려했냐’는 질문에 오 교수는 “처음에 관계가 서먹서먹할 때 일이다. 같이 백반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제가 밥 먹으려고 숟가락을 뜨면 반찬을 올려주셨다. 당신 입에 댄 젓가락으로 반찬을 떠서 제 숟가락 위에 놔주시는데 저는 그 다정함에 완전히 무장해제돼 어떻게 하지를 못하겠더라”고 했다.

 

송씨는 전국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하면서 안 싸운 PD가 없다고 한다. 오 교수는 “그분이 무대 완결성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하다. 완벽해야 한다. 당신 MC만 잘 보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완벽해야 한다. 가령 녹화를 하다 보면 선생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초대가수가 마음에 안 든다든가 혹은 출연자들 중 선발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있다든가, 하여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냐. 조명이 어떻다든가 그런 걸 하나도 안 넘기신다”라고 했다.

 

오 교수는 “지금은 유명해지셨으니까 마치 송해 선생님이 갑 같지만, 방송 시스템에선 PD들이 갑이고 우리들이 을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을이던 시절에도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고 한다. 무대의 완결성을 위해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무대 위 벌 때문에 울상이 된 참가자를 다독이며 함께 노래를 불러 주는 송해. /KBS

 

송씨는 특별한 녹화 일정이 없으면, 꼭 ‘목욕탕’을 방문했다고 한다. 송씨는 “오후 4시에 무조건 목욕탕을 가셨다. 온탕도 아니고 열탕에 들어가신다. 제가 옆에서 같이 해 봤다. 제가 훨씬 젊은데 저는 못 견디겠더라, 그 이상을 버티시고 나오셨다가 또 냉탕을 들어가셨다”고 했다.

 

또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오르기 전 해당 지역 목욕탕도 꼭 들렀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지역 주민들하고 허심탄회 이야기를 해 봐야 당신이 무대에 섰을 때 더 이렇게 가깝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국노래자랑 악단 단원들과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도 공개했다. 오 교수는 “세월호 때였다. 몇 백 명이 졸지에 물에 수장된 심각한 사태에 전국노래자랑 하면서 웃고 이게 안 되니까 KBS에서 한 두세달 방영 자체를 중단한 적 있다. 이제 녹화를 안 하니 악단 멤버들이 출연료를 못 받지 않냐. 생활이 안 되고. 이분이 올라가서 담판을 지었다. ‘이 사람들 먹고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동안 노래자랑에 이바지한 게 얼마인데 배려 해줘라. 돈 얼마나 된다고 그러냐’고 해서 밀린 출연료를 다 받았다. 그걸 보고 아무나 방송계에서 갑이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신 분이다”라고 했다.

 

송씨가 자주 썼던 말은 ‘공평하게’라고 한다. 오 교수는 “(송씨는)전국노래자랑 녹화할 때 그 지역의 행정가들, 지역 국회의원이라든가 지자체장들에게 절대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자리 없으면 중간에 앉으라고 한다. 이 무대의 주인은 행정가들이 아니라 국민들이고 시민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오 교수는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리허설을 하는데, 공무원들이 관객들 앉는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송해씨가) 뭐라하셨다. 물어보니까 공무원들이 ‘여기 군수님 앉아야 되고, 구의원 앉아야 된다’고 하니까 송씨가 그냥 소리를 지르셨다. ‘당장 치워라’ ‘지금 뭐하는 짓이냐. 당신들이 제일 앞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으면 관객 국민들이 다 긴장한다. 앉고 싶으면 저 뒤에 아무데나 퍼져 앉아라. 특석이라는 건 없다’고 했다. 저는 그 위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게 아주 좋았다”고 했다.

 

송해씨는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1927년생인 송해는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데뷔했으며,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아 34년간 이끌었다. 송씨는 국내 최고령 진행자임과 동시에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부문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또 희극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을 대신해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조선일보 김소정 기자

 

06월 13일  패륜 극치 김정은 앞에선 노래할 수 없다는 나훈아 인식

 ‘트로트 황제’ 나훈아(75)가 사회 일각의 맹목적 친북·좌파(親北左派) 행태와 함께 ‘인간 윤리’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지난 11일 데뷔 55주년 부산 공연 중에, “제 노래는 서정적입니다. 뚱뚱한 저것은 고모부를 고사포로 쏴 죽이고, 이복형을 약으로 죽이고, 당 회의할 때 꾸벅꾸벅 졸았다고 죽이고, 그런 사람 앞에서 (내 노래의)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이게 나옵니까?” 했다. ‘패륜 극치’ 북한 김정은 앞에선 노래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문재인 전 정부의 2018년 평양공연에서 “왜 나훈아는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김정은에게, 도종환 전 장관은 “스케줄이 바빠서”라고 둘러댔었다. 하지만 나훈아는 “때려 죽여도 (노래가) 안 나올 건데 어떻게 하나. (김정은이) 앞에 있으면 귀싸대기를 때리든지 해야지” 하고도 덧붙였다. 당시 문 대통령은 평양 ‘5월1일경기장’ 연설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남쪽 대통령”이라고 했다. 김정은에겐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불굴의 용기” 운운했다.

나훈아는 예전에도 무대에서 가요 외적인 인식을 드러내왔다. 지난해 7월 공연에선 “내 바지가 지 바지보다 비쌀 긴데”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이던 이재명 의원이 ‘여배우 스캔들’을 해명하며 “바지 내릴까요” 했던 말에 대한 비아냥이다. 한국 사회는 그가 직설적 표현으로 드러내는 인식들을 경청해야 할 현실이 여전하다.

문화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