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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세계사] 2020-2/ 07.01 1936년 콜로라도강에 세운 '뉴딜의 상징'… 당대 최대 규모였죠 - 12.31 14억 중국인의 스승… "낡은 관습 서양식으로 바꾸자"

상림은내고향 2022. 8. 19. 20:10

[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20-2

07.01 1936년 콜로라도강에 세운 '뉴딜의 상징'… 당대 최대 규모였죠

후버댐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과 미국 '뉴딜 정책'을 비교하면서 미국 뉴딜의 상징인 '후버댐'을 언급해 화제가 됐어요.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무너졌던 미국 경제를 일으킨 상징과도 같은 후버댐을 언급하면서 우리나라도 '데이터 댐'을 활용해 디지털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말했답니다.

실제 미국은 대공황 시기 뉴딜(New Deal) 정책을 펼치면서 후버댐을 건설해 다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어요. 후버댐은 당시 세계 토목 공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됐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공사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후버댐이 미국 경제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뉴딜 정책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것일까요?


후버, 타협안을 이끌어내다

후버댐은 미국 남서부의 콜로라도강을 개발하기 위해 1931~1936년 지어졌어요. 하지만 댐을 건설하기로 계획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때보다 훨씬 앞선 1922년이었습니다. 당시 척박한 서부 지역을 개척하면서 마을과 도시 등에 물이나 전기 등을 공급할 방법을 찾다가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오기로 한 거죠. 처음 이름도 지역 이름을 딴 '볼더댐(Boulder Dam)'이었어요.

 

 콜로라도강을 막고 세워진 후버댐의 모습이에요. 블랙 협곡을 가로지르는 U자형의 견고한 콘크리트벽으로 이루어진 이 댐은 2만명이 넘는 고용 창출 효과와 라스베이거스 등 인근 도시의 발전을 이끌어내며 미국 뉴딜 정책의 상징이 됐습니다. /위키피디아

 

콜호라도강은 콜로라도주(州) 로키산맥에서 발원해 유타·애리조나·네바다·캘리포니아주를 거쳐 멕시코 북서쪽의 캘리포니아만(灣)으로 흘러드는 길이 약 2330㎞의 강이에요. 강물양이 많고 유속이 빨라서 주기적으로 제방이 무너지거나 홍수가 났고, 강의 급류에 쓸려온 침전물이 농경지에 물을 공급해주는 관개 운하를 막아 물 공급에도 자주 문제를 일으켰지요. 안정적인 물 공급과 수력 발전을 위해 콜로라도강에 다목적 댐을 설치하자는 계획이 1922년에 미국 의회에 제출됐습니다. 이를 '볼더 캐니언 프로젝트(Boulder Canyon project)'라고 불러요.

그러나 콜로라도강이 걸쳐서 흐르는 콜로라도·유타·애리조나·뉴멕시코 등 인근 주들은 걱정이 많았어요. 댐을 건설하면 당시 급성장하던 캘리포니아주가 강물을 많이 끌어가게 될 것으로 우려한 거예요. 1922년 당시 상무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1874~1964)가 댐 건설을 위해 각 주 간 타협안을 이끌어냈고, 주마다 매년 소비해야 하는 강물의 양을 정해 할당 비율을 지키며 가져가도록 했어요.


대공황과 함께 시작한 댐 건설

'후버 타협안'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댐 건설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비용과 안전 문제 때문에 댐 건설은 계속 미뤄졌습니다. 그런데 1929년 3월 허버트 후버가 31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그로부터 몇 달 후 세계 경제가 대공황에 빠집니다. 1929년 10월 24일 주가가 대폭락한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을 시작으로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한 거지요.

후버 대통령은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줄이고 공공사업 지출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어요. 이에 따라 건물 60층 높이에 이르는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습니다. 1931년 '식스 컴퍼니'가 4900만달러에 공사를 따냈는데, 이는 그때까지 미국 정부가 승인한 건설 계약 중 최대 규모 액수였다고 해요.

후버댐은 위에서 봤을 때 아치형의 중력 댐(자체의 무게로 저수지의 물을 지탱하는 댐)으로, 블랙 협곡을 가로지르는 U자형의 견고한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높이는 221m로 63빌딩 높이(약 250m)와 비슷한데 당시 최대 규모 토목공사였다고 합니다. 공사엔 시멘트 약 8억L와 철근 2만t이 필요했고, 콘크리트만 660만t이 들어갔어요.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포장할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해요.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인부들은 댐 건설 예정지인 블랙 협곡에서 다른 곳으로 물줄기를 돌려야 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협곡 벽을 부수는 대규모 폭파가 네 번이나 이루어졌습니다. 인부 수천 명이 그 자리에 콘크리트를 붓기 위해 엄청난 양의 흙과 암석부터 치워야 했어요.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라스베이거스에 내려와 댐 건설에 참여했어요. 공사장 주변 사막엔 노동자들이 머무는 캠프가 차려졌지요. 작업 현장에서 약 10㎞ 떨어져 있는 볼더시티엔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어요. 5년 동안 총 2만1000여 노동자가 댐 건설에 참여했고, 댐은 예정보다 빠르게 완공되었지요.


"나는 왔고 보았고 정복당했다"

볼더댐 프로젝트를 이끈 사람은 후버 대통령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는 점 등으로 다음 대선에서 패배합니다. 이 웅장한 건축물의 완공 기념식은 새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 때 열렸어요. 1935년 9월 완공을 앞두고 댐을 방문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왔고, 보았고, 정복당했습니다(I came, I saw, and I was conquered). 인류가 이루어낸 이 위대함에 말입니다."

후버댐은 고용 창출 외에도 다양한 경제적 효과를 만들었어요. 콜로라도강 하류의 홍수를 방지해 서부 지역 관개 사업의 효율성을 높여주었고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 피닉스 등 인근 주요 도시들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후버댐이 내보내는 물은 미국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 농업용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해요. 후버댐의 저수량은 320억㎥에 달하고 최대 출력 135만㎾를 발전(發電)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 최대 다목적 댐인 충주댐의 최대 출력이 40만㎾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인 걸 알 수 있어요.

볼더댐은 1947년 후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후버댐(Hoover Dam)'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85년에는 국가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지요. 오늘날 후버댐엔 관광객이 연간 약 700만명 방문한다고 해요. 후버댐 상류에 조성된 세계 최대 규모 인공 저수지인 '미드 호수'는 연 1000만 방문객이 찾는 인기 휴양지가 됐습니다.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7.08 50년을 숨겨온 소련의 비밀… 1940년 폴란드인 2만명 대학살

카틴 숲 학살 사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백악관에서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군을 독일에서 폴란드로 이동시킬 것"이라고 밝혔어요. 독일에 주둔 중인 미군 일부를 폴란드로 재배치하겠다는 것인데, 줄곧 미군 추가 유치를 희망해온 폴란드는 이에 크게 환영하는 입장이라고 해요.

폴란드는 왜 미군 유치를 원하는 걸까요? 러시아에 의해 혹독한 고초를 겪었던 뼈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폴란드는 1795년부터 123년간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통치되다 간신히 독립했어요. 하지만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또다시 소련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에 일어났던 가장 잔인한 역사적 사건이 소련에 의한 '카틴 숲 학살 사건'이에요.


2차 세계대전 중 발견된 폴란드인 시신

'카틴 숲 학살 사건'은 1940년 소련 비밀경찰(NKVD)이 카틴 숲(러시아)과 하르키프(현 우크라이나), 메드니(러시아), 트베리(러시아) 등에서 폴란드 지식인 2만여명을 집단으로 살해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카틴 숲에서 4100여명, 하르키프에서 3900여명, 메드니에서 6300여명, 트베리에서 6200여명 등이 학살됐지만, 카틴 숲에서 처음 시신이 발견돼 이렇게 부릅니다.

 

 폴란드 중부 시비엥토크시스키에주에 있는 '카틴 숲의 학살 사건' 추모 기념비예요. 1940년 러시아 카틴 숲과 우크라이나 하르키프, 러시아 메드니에서 자행됐던 폴란드인 학살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위키피디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 서쪽을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어요. 소련은 독일과 한 달 전 맺은 '독소 불가침조약(독일과 소련이 서로 전쟁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조약)'을 앞세워 폴란드 동쪽을 침공해 폴란드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지요. 폴란드는 이후 동서로 분할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저항하던 100만명 넘는 폴란드인이 소련으로 끌려갔습니다. 특히 소련은 장교나 경찰, 의사, 예술가, 성직자, 정치인 등 폴란드 주요 엘리트 지식인을 끌고 가는 데 혈안이 되었어요. 이 중 상당수는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벨스크, 코젤스크 등 소련의 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940년 봄 무렵, 수감됐던 폴란드인들의 소식이 갑자기 끊깁니다. 당시 폴란드 정치인들이 세운 '망명정부'가 소련 측에 수감됐던 폴란드 장교들의 소재를 물었는데, '폴란드인 모두를 석방했고 이후 만주로 갔기 때문에 행방을 모른다'고 답이 돌아왔다고 해요.


소련, "나치 독일이 저지른 짓" 부인

1943년 4월 13일 독일 나치군이 소련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거대한 시체 구덩이를 발견합니다. 조사 결과 대부분 3년 전 행방이 묘연해졌던 폴란드인들인 것으로 드러났어요. 수많은 폴란드인이 집단으로 죽임을 당해 소련 땅에 매장됐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소련이 대학살의 주범이 아니냐는 의심이 확산됐습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이 사건을 소련을 공격하는 소재로 이용했습니다. 그는 폴란드 언론인 등을 현지로 보내 사실을 확인한 뒤, 라디오로 이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독일군이 소련 땅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길이 28m, 폭 16m 구덩이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시신 4100여구가 12겹으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나치가 학살의 주범'이라고 거꾸로 독일을 공격했어요. 1944년에는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알아보는 시늉도 했습니다. 소련의 조사 결과는 '카틴 숲의 학살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것이다'라는 것이었지요.

당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은 이 사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소련이 연합국으로 참전한 데다 나치 독일 편을 들고 싶지 않았던 거죠. 실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는 폴란드 망명정부 수장이던 시코르스키 장군에게 '행방불명자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고 해요. 또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도 '소련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이건 독일의 음모다'라며 소련을 비호했지요.


50년만에 밝혀진 진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련은 줄곧 카틴 숲 학살 혐의를 극구 부인했어요. 사건은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진실이 드러난 것은 1989년 소련 역사학자들이 카틴 숲 학살 사건과 관련된 문서를 찾아내면서부터였습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주요 인물들이 서명한 문건에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여러 수용소에 수감 중인 폴란드인 약 25만명을 처형하라는 내용이 뚜렷하게 담겨 있었어요.

너무 명백한 증거 앞에 1990년 4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카틴 숲 학살 사건은 소련 비밀경찰의 소행이며, 그동안 소련 당국이 이를 은폐하려 했다'며 잘못을 공식 인정합니다. 1년 뒤에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학살과 관련된 정부 공식 문건을 공개했어요. 이 문건에 따르면 1940년 4월 3일부터 노동절인 5월 1일을 제외하고 약 두 달간 소련 비밀경찰에 의한 폴란드인 대학살이 자행됐습니다. 문건에는 소련군이 살해한 폴란드인 2만1768명의 명단이 들어있었는데 장군 등 군인을 비롯해 대학교수, 의사, 작가, 언론인,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등 지식인이 대부분이었지요.

소련은 폴란드 지식인들을 모두 제거해 '폴란드의 미래'를 산산조각 내고자 했던 것이에요.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소련 공산당의 지배 아래 놓이며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계속 침묵할 수밖에 없던 폴란드는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서야 이를 언급할 수 있게 된 것이랍니다.


[추모 70주년 앞두고 추락한 폴란드 대통령 탑승 비행기]

지난 2010년 4월 10일, 카틴 숲 학살 사건 70주년 추모 행사에 참가하려던 폴란드 대통령 내외 등이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비행기 안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안보국장, 육군 참모총장, 육해공군사령관, 중앙은행 총재 등 폴란드 주요 지도층 인사 100여명이 타고 있었지요. 추락 사고의 원인에 대해 여러 의혹이 제기됐지만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고 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7.15 모피 장수 출신의 초대 총독… '알래스카 왕'으로 불렸죠

알렉산드르 바라노프

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알래스카 국립석유보호구역의 대부분 지역에서 석유 시추를 허용하는 계획을 발표했다고 해요. 약 9만3100㎢에 달하는 알래스카 국립석유보호구역은 북극곰뿐 아니라 순록·물새 등 야생동물들이 서식하는 중요한 생태 공간인데요. 미국 지질조사국은 이 구역에 석유 87억배럴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요. 많은 환경단체가 생태계를 해치고 원주민을 위협하는 결정이라며 반발하고 있답니다.

북아메리카 북서쪽 끝에 있는 알래스카주는 18세기 러시아 상인들이 개척했지만, 1867년 미국에 매각되면서 이후 미국 땅이 됐습니다. 알래스카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은 모피 상인 알렉산드르 바라노프(1747~1819)였어요. 그는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처럼 과감하게 알래스카를 정복했지요. 바라노프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모피 무역으로 시작한 식민지 개척

러시아인들이 알래스카에 본격적으로 정착한 건 18세기 중반입니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 대륙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1725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이끄는 탐험대를 파견했어요. 탐험대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해협(육지 사이에 껴 있는 좁고 긴 바다)이 있음을 확인했고 훗날 이곳을 '베링 해협'이라 이름 붙였지요.

 

 1799년 러시아 식민지 알래스카의 첫 번째 총독에 임명된 알렉산드르 바라노프의 초상화(사진 왼쪽)예요. 바라노프는 알래스카 남동쪽 싯카섬에 러시아인 정착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알래스카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였어요. 사진 오른쪽이 1804년 벌어진 싯카 전투를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1733년 두 번째로 파견된 베링 탐험대는 1741년 알래스카를 발견한 뒤 해달의 모피를 싣고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 해달 모피가 아주 부드러우면서 따뜻하다는 호평이 퍼지면서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요.

해달 모피가 풍부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러시아 상인이 알래스카에 모여들었어요. 곧 모피 무역소가 설치됐고 알래스카 남부 코디액섬에는 러시아인들의 정착촌이 건설되었습니다. 러시아 상인들은 알래스카 원주민인 알류트족을 시켜 마구잡이로 해달을 사냥하도록 했어요. 물론 그들에게 모피를 사냥해준 대가는 충분히 지급하지 않았지요.

무리한 포획이 계속되면서 해달의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자, 러시아인들은 원주민들에게 더 깊고 위험한 바다로 사냥을 나가도록 강요했어요. 양측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결국 러시아인들이 원주민을 학살하고 사냥 장비를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여기에 러시아인들에게 유래한 전염병이 더해지면서 알류트족 인구는 18세기 중반 2만5000여 명에서 19세기 말 2000여 명으로 10분의 1 이상으로 급감했지요.


알래스카 첫 총독은 모피 장수 출신

1799년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알래스카를 개척하고 관리하기 위해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어요. 이 회사는 알래스카 모피 무역을 독점하는 특권을 얻는 대신 러시아 정부에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지요. 당시 알래스카에서 성공한 모피 상인이던 알렉산드르 바라노프가 이 회사의 총괄 경영자이자 러시아령 알래스카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됐습니다.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정부의 감독을 받았지만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었어요. 또 당시 러시아가 프랑스 나폴레옹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바라노프는 알래스카에서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노프는 알래스카 남동쪽 싯카섬에 러시아인 정착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알래스카 원주민 틀링깃족과 전쟁을 벌였는데요. 이를 싯카 전투(1802·1804년)라고 해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라노프는 모피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더욱 확실히 장악하고 '알래스카의 왕'처럼 군림했어요.

바라노프는 아메리카 대륙에 또 다른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원주민 탐험대를 파견했어요. 태평양 연안을 따라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진출했지요. 새로 점령한 식민지는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지배를 받았어요. 이 때문에 그는 '러시아의 피사로'라고 불리기도 해요.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탐험가 피사로처럼 알래스카를 정복했다는 뜻이죠. 바라노프는 1819년 총독 임기를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가던 중 세상을 떠났답니다.


러시아, 알래스카를 매각하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러시아 상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알래스카의 해달 개체 수는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모피로 인해 얻는 수익도 점점 감소했지요. 당시 러시아는 영국·프랑스 등과 크림 전쟁(1853~1856)을 치르느라 재정 상태가 크게 악화된 상태였어요. 러시아는 결국 미국에 알래스카를 매각하기로 했습니다.

1867년 3월 30일 러시아와 미국이 알래스카(당시 152만㎢)를 720만달러(현재 가치로 약 1억달러·1203억원)에 사고파는 조약을 체결합니다. 당시 미국 여론은 쓸모 없는 땅을 비싸게 산 것 아니냐며 부정적이었어요. 하지만 1890년대 말 알래스카 북부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1960년대 석유가 발견되면서 재평가되었지요. 알래스카는 1959년 49번째 주가 되어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알래스카 매입 반대했던 미국 여론]

러시아와 미국이 알래스카를 두고 매각 협상을 시작하자 미국 언론은 '얼음이 가득한 궤짝이 우리한테 왜 필요하냐'며 비아냥댔습니다. 특히 협상을 이끌던 윌리엄 수어드 미국 국무장관의 이름을 따 알래스카를 '수어드의 아이스박스''수어드의 바보짓' 등으로 조롱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하지만 미국은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러시아 세력 확대를 막고 캐나다의 영토 확장도 저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를 강행했다고 해요. 이런 반대 여론 때문에 알래스카 매입 법안은 미국 상원에서 단 1표 차로 가까스로 통과했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7.22 "왕을 처형하지 않는 것 자체가 혁명을 비난하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이들의 유해 500여구가 프랑스 파리의 '속죄의 예배당' 벽 뒤쪽에 묻혀 있을 수 있다는 외신 뉴스가 나왔어요. 그간 프랑스 역사학계에서는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들의 유해가 파리 지하묘지에 매장되어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속죄의 예배당'에 프랑스혁명기 유명 정치인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1758~1794·작은 사진)의 유해도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오늘은 프랑스혁명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알아볼게요.


◇프랑스 대혁명에 휩쓸린 청년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혁명 때인 1793년 권력을 잡고 공포정치를 펼치다 1794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어요. '상퀼로트(의식 있는 민중)'라 불리던 평범한 대중의 대변인이었던 그는 원래 가난한 평민이 아니라 부르주아(중산계층)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는 프랑스 북부 아라스 지역에서 일하는 변호사였어요.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집을 나가면서 형제들은 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지요.

로베스피에르는 성실히 공부해서 파리 명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법학 공부를 마친 뒤 고향인 아라스로 돌아가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힘썼어요.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사형선고문에 서명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에 판사직을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이때까지의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1789년 4월, 서른한 살에 아라스가 속해 있는 아르투아 지역의 '제3신분'(평민층) 대표로 선출되고 그해 7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았던 로베스피에르는 처음부터 정치에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고 해요. 하지만 재야에서 정치 토론을 하는 자코뱅 클럽(훗날의 '자코뱅파')에 참여하면서 점점 자신의 지지층을 넓혀갔지요. 그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고,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오직 세비(歲費)로만 생활하면서 마차도 일절 타지 않았고, 마을 축제에도 스스럼없이 참여하는 등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했어요. 자코뱅파의 인기는 갈수록 높아졌고 파리 도처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초상화가 발견될 정도였지요.


◇반대파 무자비하게 숙청한 공포정치

프랑스혁명으로 1791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입법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률이 계속 높아지는 등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펼쳐졌지요. 그러던 1792년 8월, 굶주림에 지친 민중이 분노에 가득 차 국왕과 왕비가 사는 왕궁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입법의회는 왕족을 감금하고 국왕의 권한을 정지했어요.

 

 1794년 7월 27일, 반(反)로베스피에르파가 프랑스혁명기 독재자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면을 그린 그림이에요. 국민공회군에 의해 체포된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오후,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재판도 없이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됐어요. /위키피디아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국민공회'가 구성되었고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왕정이 폐지되면서 '제1공화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국민공회 선거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따르는 무리가 총 749석 중 200석을 차지하는 등 대거 의회에 진출했어요. 로베스피에르는 '왕을 처형하지 않는 것 자체가 혁명을 비난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지요. 그렇게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국왕까지 처형한 국민공회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설치해 본격적인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자코뱅당 당수 로베스피에르가 있었지요. 그는 무상 의무교육을 도입해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 하는 등 자신이 생각해온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어요. 빈곤 문제는 생필품과 임금에 대한 최고가격제(정부가 시장가격을 통제하는 정책)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부추겼지요. 그는 특히 자신에게 반대하는 반(反)혁명 인사들을 계속 처형했는데요. 혁명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집단 학살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2000여 명이 한꺼번에 루아르강에 수장되는 일도 벌어졌어요. 이로 인해 폭력은 사실상 합법화되었고 나라 전체가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단두대 이슬로 사라지다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빈민들에게 나눠준다는 내용의 법령도 공포했습니다. 1794년 7월에는 '프레리알 22일 법'을 통과시켜 아무 증거 없이 오직 혐의만으로 반혁명 분자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했지요. 이 법을 이용해 혁명재판소는 불과 50일도 안 되는 기간에 137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요. 1793년 3월부터 '프레리알 22일 법'이 공포되기 전까지 약 1년 4개월간 혁명재판소가 1251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자비한 수치인지 알 수 있어요. 이처럼 약 1년 동안 1만여 명이 공포정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극에 달하자, 당통이나 데물랭 같은 측근들조차 '혁명이 길을 잃고 있다'며 그를 비판했어요. 하지만 혁명 세력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는 오랜 동지였던 이들마저 단두대로 보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국민공회 의원들과 공안위원회 위원들은 '다음엔 내 목이 날아갈 것'이라며 벌벌 떨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은 이가 그의 공포정치에 지쳐가고 있었지요.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은밀하게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1794년 7월 27일 반(反)로베스피에르파가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사로잡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합니다. 국민공회군에 의해 체포된 로베스피에르는 다음 날 오후,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재판 없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7.29 독립 영웅 네루의 딸… 인도 첫 여성 총리로 핵무장 주도했죠

인디라 간디

얼마 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빙하 속에서 1966년 1월 20일 자 인도 신문이 발견돼 화제가 됐어요. 이 신문 1면에는 최초의 인도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Gandhi·1917~1984)의 총리 당선 소식이 실려 있었다고 해요. 외신들은 이 신문이 1966년 1월 24일 인도 뭄바이에서 영국 런던으로 향하다가 빙하 부근에 추락한 보잉사 여객기에 실려있던 것으로 추정했답니다.

인도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Nehru·1889~1964)의 외동딸이자, 1966~1977년과 1980~1984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던 사람이에요. 인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12살에 독립 지원 단체 만들어

1917년 인도 북부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난 인디라 간디는 대대손손 관료들과 학자들을 배출한 브라만 계급(인도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의 최고 계급) 명문가 출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어요. 인디라의 아버지 네루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변호사였죠.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요. 전형적인 식민지 엘리트로 살던 네루는 민족운동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비폭력 투쟁'에 감화됐고, 1919년 인도 북서부 펀자브 지방의 도시 암리차르에서 벌어진 '잘리안왈라 광장 학살 사건' 이후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인도의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가 인도 델리의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이에요. 인도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인 그는 한편으로는 반대파에 대한 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잘리안왈라 광장 학살 사건은 광장에서 비폭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인도인들을 영국 소총 부대가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 이후 영국의 식민 통치에 협조했던 수많은 인도 온건파 중산층이 민족주의자로 돌아서게 되었어요. 네루의 아버지인 모틸랄과 네루도 독립운동을 하다 1921년 나란히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뜨거운 피를 받은 인디라는 12세 때 또래 청소년들을 모아 '바나 세나(원숭이 여단)'라는 민족 운동 단체를 만들었어요. 이 단체에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시위대에게 물을 주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등 작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했어요. 이 단체는 6만여 명이나 되는 청년이 참여하는 대규모 단체로 성장했지요.


아버지 이어 '부녀(父女)' 총리 탄생

인디라 네루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유학하던 중 페로제 간디와 결혼하면서 '간디' 성(姓)을 갖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마하트마 간디'와는 친척지간이 아닙니다. '간디'는 인도에서 비교적 흔한 성이라고 해요. 1947년 인도가 마침내 영국에서 독립하고 아버지 네루가 초대 총리가 되자 인디라는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어요. 1959년에는 여당인 '인도국민회의'의 당수(黨首)가 되었지요.

아버지 네루는 17년간 총리직에 있으면서 인도 헌법을 제정하고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경제 부문에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식 계획 경제와 민간 주도의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인도식 '혼합경제정책'을 시도해 인도의 경제 발전을 더디게 했다는 평가도 받아요.

인도 독립 투쟁의 상징인 네루에 대한 인도인들의 굳건한 지지는 그 딸인 인디라에게도 이어집니다. 인디라는 인도의 2대 총리였던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1966년 총리가 되었어요. 당시 인도는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지역을 두고 국경 분쟁을 계속하고 있었는데요. 인디라는 1971년 동파키스탄(오늘날 방글라데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파키스탄과 대립했고, 이 때문에 파키스탄과 전쟁(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벌여야 했답니다. 이 전쟁에서 인도가 승리하면서 방글라데시가 완전히 독립하게 됐지요. 또 인디라는 1974년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키며 강력한 인도를 만들어 갔어요. 하지만 경제 부진과 부정부패 등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면서 그는 결국 1977년 총선거에서 패배해 총리직에서 물러났어요.


1984년 시크교도에게 암살당해

인디라는 1980년 다시 총리에 당선됐지만 1984년 독실한 시크교(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결합한 종교) 신자인 경호원 2명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인도 시크교 내 강성 분리주의자들이 펀자브주(州) 독립을 선언하며 암리차르의 황금 사원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인디라가 이들에 대한 강경 진압 명령을 내렸거든요. 군사 작전하듯 펼쳐진 진압 과정에서 시크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 유적지인 황금 사원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그러자 독실한 시크교도이던 경호원들이 인디라에게 반감을 갖고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인디라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 등으로 독재자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며 오늘날 인도의 기초를 마련한 여성 지도자이기도 해요. 그의 큰아들 라지브 간디(1944~1991)도 어머니가 암살당하자 총리에 올랐는데, 총선 패배 후 복귀를 노리던 중 암살당했어요. 인디라의 며느리인 소냐 간디는 현재 제1야당인 인도국민회의당 당수로 있지요. 오늘날 인도 역사는 네루·간디 가문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답니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

독립운동을 펼치며 9번이나 투옥됐던 네루는 딸 인디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1930년부터 3년간 네루는 딸에게 196편에 달하는 세계사 강의 편지를 보내주었는데요. 우리나라의 3·1운동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숭고한 독립운동으로 평가하는 등 당시 서구 제국주의 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한 글들이었지요. 그는 편지에서 "제국주의란 약탈하면서도 친선을 과도하게 내세운다"고 했어요. 이 편지들을 엮은 책이 바로 오늘날까지 세계사 교양서로 널리 읽히고 있는 '세계사 편력'입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8.05 단단하고 이국적인 中 도자기, 유럽에 '시누아즈리' 유행시켰죠

중국 청화백자

 

최근 유럽 중부의 외딴 마을 집에서 꽃병으로 쓰이던 중국 도자기〈사진〉가 소더비 경매에서 908만4486달러(약 109억원)에 낙찰됐다고 CNN 등 외신이 보도했어요. 원래는 1954년 소더비 런던 경매장에서 56달러(현재 가치로 1500달러·약 180만원)에 팔렸던 것인데 66년 만에'보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 화제가 됐지요.

이번에 팔린 도자기는 18세기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절 최대 도자기 제작지였던 저장성 용천요에서 만든 물건이라고 해요. 당시 용천요는 도자기를 엄청나게 많이 구워서 유럽, 아프리카까지 수출했는데요. 17세기 유럽인들은 중국 도자기에 매료돼 많은 물건을 수입하고 모방하기도 했어요. 유럽인들은 왜 중국 도자기에 열광했던 것일까요?


유럽인들이 열광한 중국 도자기

17세기 유럽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던 새로운 농작물들이 유입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초콜릿과 커피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걸 데워서 먹었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을 안전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했어요.

그때까지 유럽에서 생산되는 그릇들은 모두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했어요. 표면에 바른 유약도 뜨거운 물에 닿으면 녹아내려 안전하지 못했지요. 또 흙의 투수성(물을 통과시키는 성질)을 완벽히 차단하지 못해 액체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어려웠어요. 이런 유럽 그릇의 단점을 극복한 것이 바로 중국 도자기였습니다.

중국 도자기는 고온에서 구워져서 손가락으로 탁 치면 청아한 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했어요. 또 표면이 깨끗하게 닦였기 때문에 관리하기 편했지요. 특히 순백의 도자기에 푸른색으로 이국적인 중국풍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무역 주도

이후 유럽에선 중국 도자기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부유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 도자기를 경쟁적으로 수집해 궁전이나 자신의 집을 장식했지요. 고급 중국 도자기를 누가 많이 갖고 있느냐가 최고의 자랑거리였다고 해요. 당시 중국 고급 도자기 가격이 흑인 노예 7명을 사거나 중산층이 사는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중국 도자기를 갖기 원했는지 알 수 있어요. 물론 유럽 수공업자들도 중국처럼 질 좋고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당시 유럽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알맞은 흙(고령토)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중국 도자기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고온에 도자기를 굽는 중국 수공업자들의 작업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17세기 유럽에서 생산된 그릇들은 강도가 약하고 액체를 보관하기 어려웠는데, 중국 도자기는 이런 단점을 극복해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중국 도자기가 해외에 전해진 건 9세기부터였지만 본격적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건 청화백자가 대량으로 만들어진 명나라 때부터였다고 해요. 14세기 명나라는 다른 나라와 무역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을 취했지만 도자기 등 중국에서 나는 물건을 원하는 나라가 많아지면서 밀수가 성행하자 16세기 후반 해금 정책을 완화했습니다.

정책이 바뀌자 유럽 상인들은 너도나도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몰려들었어요. 당시 도자기 무역의 선두 주자는 포르투갈이었는데요. 이들이 개척한 대서양 항로를 통해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유입됐지요. 포르투갈 왕의 별궁인 산토스 궁전에 '청화백자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중국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사고팔았는지 알 수 있어요.

17세기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신흥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도자기 무역의 주도권은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화물을 싣고 돌아오던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호를 대서양 세인트헬레나섬 부근에서 나포해 암스테르담까지 끌고 왔어요. 배에 실려 있던 청화백자들이 유럽 경매장에 나오자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지요. 160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 상선 카타리나호를 또 한 번 믈라카해협 조호르에서 나포했는데, 여기에 약 16t에 달하는 중국 도자기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풍 예술 '시누아즈리' 유행

중국 도자기의 가치가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들은 1년에 10만 점 넘는 중국 도자기를 네덜란드로 실어 날랐어요. 17세기 말에는 영국 상선까지 도자기 무역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도자기 수집 열풍의 영향을 받아 17~18세기 유럽에선 화려한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미술에 중국풍 예술이 결합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미술 사조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어요.

유럽인들은 티포트(차를 우려내는 주전자), 소금 접시, 플레터(받침그릇) 등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용도의 도자기를 구체적으로 중국에 주문하기도 했다고 해요.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여러 귀족·왕실의 지원을 받은 유럽 수공업자들이 중국 도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 높은 도자기 제작에 성공했고 이후 중국 도자기의 인기가 한풀 꺾이게 됐답니다.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했던 징더전]

청화백자 생산지로 오랫동안 이름을 날렸던 곳은 장시성 징더전(景德鎭)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자기 생산 도시로 유명한데, 징더전 교외의 고령산에서 도자기를 만들 때 쓰이는 자토가 대량으로 출토돼 도자기 생산지로 자리 잡았다고 해요.

유럽에서 중국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징더전에선 오늘날 공장처럼 공정마다 기술자를 따로 두어 맡은 부분만 신속하게 반복적으로 작업하는 분업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8.12 '사막의 여우'로 불린 독일의 영웅… 히틀러 지시로 자결했죠

에르빈 롬멜

지난달 독일 남부 하이덴하임시에 있는 '나치 시대 전쟁 영웅' 에르빈 롬멜(1891~1944) 장군의 기념비 앞에 한쪽 다리가 잘린 '지뢰 피해자'를 표현한 높이 140㎝짜리 검은색 금속 조각상(像)이 세워졌어요. 롬멜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공적으로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은 군인으로 손꼽히지만, 동시에 지뢰 매설로 인명 피해를 키워 비판을 받는 인물인데요. 이 때문에 롬멜의 고향인 하이덴하임에선 그의 공(功)과 과(過)를 함께 기억하기 위해 이런 조각상을 세웠답니다. 오늘은 '사막의 여우'라 불렸던 롬멜 장군에 대해 살펴볼게요.


1차 세계대전에서 최고 훈장받아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롬멜 장군은 1910년 독일 보병사단에 사관 후보생으로 들어가면서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12년 장교가 된 그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때 소위로 참전하며 프랑스, 루마니아,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어요. 그는 타고난 리더십과 추진력으로 여러 공을 세웠는데요. 1917년 10월 알프스의 요새 마타주르산에서 고작 1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군 약 1만명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단행해 대승을 거두었어요. 이 전투로 롬멜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푸어 르 메리테(Pour le Mérite)'라는 최고 훈장을 받았습니다. 롬멜은 이 훈장을 평생 간직하고 다녔다고 해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작전을 짜고 있는 롬멜(가운데) 장군의 모습이에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 싸웠던 롬멜 장군은 대담한 기습 공격으로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위키피디아

 

교육자로서도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전쟁이 끝나자 사관학교에서 예비 군인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요. 1937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 경험과 그의 군사 철학을 담은 교본 '보병 전술(Infantry Attacks)'을 출간했어요. 그의 첫 번째 전투 이야기와 부상 경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술 등 생생한 전투 일지(日誌)가 기록되어 있지요. 이 시기 롬멜은 전후 나치스 운동에 흥미를 가지게 됐고, 히틀러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엔 총통 본부 경호부대 사령관, 즉 히틀러의 경호대장으로 임명됐지요.


◇영국군 몰아 세웠던 '사막의 여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롬멜은 폴란드, 체코 등을 침공하는 데 앞장섰어요. 1940년에는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이름을 날립니다.

1941년 롬멜은 북아프리카 리비아 일대에서 영국군에 패배해 수세에 몰리고 있던 이탈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한 아프리카 군단 지휘관으로 파견되었어요. 당시 나치는 같은 편(추축국)이던 이탈리아군이 북아프리카에서 밀릴 경우 이탈리아 지도자 무솔리니의 입지가 흔들리고 독일-이탈리아 연합이 위협을 당할 것이라고 봤다고 해요.

롬멜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대담한 기습 공격으로 영국군의 진군을 막아내며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그는 승리를 위해 다양한 기만전술(상대편을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전술)을 사용해 주목을 끌었어요. 독일 전차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트럭에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위장 전차'를 만들었고, 사막 위에서 '위장 전차'로 먼지바람 일으키며 영국군을 기만했지요. 영국군은 이런 기만전술 때문에 독일의 전차 부대 규모가 매우 거대한 줄 알고 후퇴하기도 했다고 해요.

독일 군대의 수장이었지만 롬멜은 아군과 적군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장군이었습니다. 부하들에게 항상 예의 바르게 대했고, 포로들이나 점령지 주민에게도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해요. 독일에선 그를 '민족 영웅'으로 추앙했고 나치는 '우리의 롬멜'이라는 찬양 군가까지 만들었지요. 적이었던 연합군 측 지도자였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1942년 의회 연설에서 "전쟁의 참상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1942년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이집트 북서부 알알라메인에서 영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병력과 보급품 부족으로 열세에 있던 롬멜은 고군분투했어요. 하지만 결국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에 패배해 튀니지로 후퇴해야 했지요.


◇1944년 히틀러 지시로 자결

1944년 7월 20일 독일에서 반(反)나치스 세력이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운 좋게도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나치는 암살 계획에 가담하거나 동조했던 자들을 모두 처형했어요.

당시 롬멜은 전쟁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요. 조사 결과, 그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주동자들과 접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하지만 히틀러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롬멜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데 큰 부담을 느꼈다고 해요. 그래서 롬멜에게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명령했지요. 실제 롬멜이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가담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롬멜은 히틀러의 자살 명령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롬멜이 죽자 히틀러는 대중에 '롬멜이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돼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그의 장례식은 독일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어요.

이후 롬멜은 '롬멜 신화(Rommel myth)'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구에서 높이 칭송됐어요. 특히 연합국 측은 서독을 부흥시키는 과정에서 롬멜을 '나치에 희생된 천재적인 군인'이라며 찬양했지요. 하지만 일각에선 롬멜의 군인으로서 능력이 다소 과대평가됐다는 비판도 있답니다.

 

[롬멜이 만든 '악마의 정원']

이집트 알알라메인에서 영국군에 패배해 후퇴하던 롬멜 군대는 리비아와 이집트 사이 서부 사막에 대량의 지뢰를 심었는데요. 지뢰밭의 넓이가 무려 2600㎢에 달했고, 매장된 지뢰만도 약 1700만개에 달했다고 해요. 이 지뢰로 3000여명이 숨지고 7500여명이 장애인이 됐다고 합니다. 이곳엔 아직도 터지지 않은 지뢰가 매장돼 있어서 '악마의 정원(Devil’s garden)'이라고 불려요.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8.19 중국 최대 백과사전 편찬… 세계 최대 궁궐 '자금성'도 세웠죠

영락제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 백과사전 '영락대전(永樂大典)' 필사본이 최근 한 경매에서 812만8000유로(약 114억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어요. 필사본이 이처럼 비싼 가격에 낙찰되는 건 드문 일이라 '영락대전'이 그만큼 귀한 유물이란 걸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는 평가가 나왔죠.

1408년 완성된 '영락대전'은 당대 최고의 학자 2000여 명이 엮은 일종의 백과사전이에요. 역사, 지리,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지식을 망라하고 있고, 글자 수만 해도 대략 3억7000만자에 달하죠. 영락대전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1360~1424)가 명령해 만들어졌는데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백과사전의 집필을 명한 영락제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야심만만한 명 태조의 넷째 아들

영락제는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1328~1398)의 스물여섯 아들 중 넷째입니다. 본명은 '주체'였는데, 다른 형제들보다 매사 적극적이고 야심만만해 일찍부터 아버지의 주목을 받았어요.

영락제가 태어났을 당시 중국은 원나라가 통치하고 있었어요. 주원장은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지만 탁월한 지도력으로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을 이끌었지요. 원나라를 물리친 주원장은 중국 땅을 통일하고 1368년 명나라를 세웠답니다. 이후 남경(난징)을 수도로 삼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아들들을 각 지방으로 보내 다스리게 했어요. 주체도 북평(오늘날 베이징)을 다스리는 연왕(燕王·베이징을 다스리는 책임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당시 북평은 몽골족과 여진족이 있는 북쪽과 가까웠기 때문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어요. 주체는 이곳을 다스리며 몽골족의 위협을 물리치고 경제를 안정시켰어요. 북평은 주원장 아들들이 나눠 다스리는 지역 중 가장 부강한 곳이 됐지요.

1392년 태조의 첫째 아들인 황태자 주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태조는 내심 넷째 아들인 주체를 황태자로 삼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둘째·셋째 아들을 제치고 주체를 황태자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요. 어쩔 수 없이 태조는 당시 열 살에 지나지 않았던 주표의 맏아들 주윤문을 후계자로 삼았어요. 조카가 황태자가 됐다는 소식에 주체는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황제로 즉위

139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황태자 주윤문이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습니다. 그가 바로 2대 황제 건문제입니다. 건문제는 황권을 위협하는 숙부들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그들의 신분을 박탈하거나 멀리 추방했어요. 특히 신하들은 주체를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여겼습니다.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고 명나라 3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고, 세계 최대 궁궐인 자금성을 짓도록 하는 등 거침없는 통치 스타일을 보였어요. /위키피디아

 

위기감을 느낀 주체는 '지금 신하들이 황실에 계속 존재하는 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399년 7월 정예군을 이끌고 남경으로 향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거예요. 명분은 '정난(靖難)', 즉 황제를 에워싸고 있는 간신들을 처단하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것이었죠.

3년에 걸친 공방전 끝에 1402년 남경이 함락됐습니다. 주체와 내통한 환관들이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전해져요. 남경에 입성한 주체는 궁궐을 이 잡듯 뒤지며 조카의 행방부터 쫓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답니다.

주체는 자신에게 반대했던 신하들을 잔혹하게 처단한 뒤 3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연호는 '영락'이라 했지요.


◇남경서 북경으로 천도

그는 황제가 된 뒤에도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등 무서운 권력을 휘둘렀어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겠다며 '북평'을 '북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1407년 '북경 천도'를 선포한 뒤 도시 정비를 거쳐 1421년 천도했습니다. 남경에선 자신의 정통성을 제대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영락제는 절대황권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것'에 많은 집착을 보였어요. 대표적인 것이 북경에 세계 최대 궁성인 자금성을 짓도록 명한 것이에요. 전체 면적만 72만㎡(약 22만평)에 이르는 자금성을 짓는 데 약 100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고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영락제는 해외로 세력을 팽창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 했습니다. 몽골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5차례나 직접 전쟁터에 나갔고, 안남(오늘날 베트남)을 무력으로 정복해 명나라로 병합했어요. 다만 영락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홍희제는 몽골 원정이나 해외 원정을 모두 중단하고, 민생을 챙기며 내치(국내 정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답니다.

 

[정화의 남해 원정]

영락제는 자신의 위엄과 명나라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다른 나라와의 무역도 시도했어요. 이를 위해 정화라는 환관을 시켜서 해외 원정을 단행하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건문제가 바다 건너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영락제의 불안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해요. 이것이 '정화의 남해 원정'입니다.

환관 정화는 1405년 병사 2만7800명과 함선 62척을 거느리고 명나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케냐까지 항해했지요. 정화의 선단은 비단, 차, 도자기, 동전, 금은보화 등 명나라의 온갖 진귀한 물건을 외국에 전해주었고, 명나라 황실도 향료, 염료, 후추 등 외국 특산물과 기린, 얼룩말, 타조 등 희귀한 동물들도 들여왔어요. 영락제 시절 30여 국 사절과 상인들이 중국을 오가며 활발한 무역 활동을 펼쳤고, 명나라의 강대함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죠.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8.26 소련이 쏜 세계 첫 인공위성… 하루 7번 미국 상공을 지나갔다

스푸트니크 충격

최근 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등록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 코로나 백신의 이름을 옛 소련 시절 발사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 1호' 이름을 따서 '스푸트니크 V'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스푸트니크 1호는 냉전 시대 '우주 최초' '세계 최초' 타이틀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벌인 경쟁 속에서 1957년 소련이 최초로 성공적으로 발사한 인공위성이랍니다. 오늘은 소련이 개발한 스푸트니크 1호와 그로 인해 충격에 빠졌던 국제 사회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소련,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었어요.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 양편 간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였지요.


그런데 미국의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재임 기간 1953~1961)이 1955년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이른바 '우주 경쟁'이 불붙습니다. 전 세계 전문가들은 미국이 가장 먼저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해요.

 

 1957년 소련이 발사에 성공한 스푸트니크 1호를 실물 크기 그대로 복제한 모형이에요.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으로 서방 세계는 소련의 미사일 개발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시 미·소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을 공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이 경쟁이 인공위성 개발에 큰 역할을 합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핵탄두를 장착해 멀리 보내는 발사체였기 때문에 인공위성을 우주로 보내는 로켓과 구조가 비슷했어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도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사정거리 5000㎞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 했지만 실패했지요. 이런 가운데 소련이 1957년 8월 21일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 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며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서로가 얼마만큼 우주 개발에 성공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지요.


◇서방 세계가 느낀 '스푸트니크 쇼크'

R-7 우주 로켓에 실려 우주로 날아간 스푸트니크는 직경 58㎝, 무게 83.6㎏의 동그란 모양에 네 개의 안테나가 달려 있었어요. 주된 임무는 과학자들에게 지구 상층 대기의 성질 등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푸트니크는 98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씩 공전했어요.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거리는 약 940㎞였고 가장 가까울 때 거리는 약 230㎞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쌍안경으로 스푸트니크가 지구 위를 휙휙 날아가는 것을 관측할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푸트니크는 1958년 1월 4일까지 지구 주위를 돌다가 대기권에 진입해 소멸됐어요.


스푸트니크 1호 발사는 전 세계를, 특히 미국을 큰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우주·과학 기술 면에서 스스로 소련보다 앞서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우주 기술은 국민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어요.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이를 가리켜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으로 서방 세계는 소련의 미사일 개발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는 소련이 언제든지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미국 본토로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더군다나 스푸트니크는 하루에 7번씩 미국 상공을 지나갔기 때문에 더욱 두려움이 컸어요.


◇막 오른 우주 경쟁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미국 정부는 우주 탐사 프로그램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스푸트니크에 맞대응할 수 있는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할 기관을 설립하기로 합의했어요. 1958년 1월 31일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했고, 그해 10월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습니다.


백악관, 중앙정보국, 미 공군은 비밀리에 정찰 위성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찰 위성의 이름(코로나·CORONA)조차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극비 사항이었어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국가안보회의(NSC)는 스파이 위성을 통해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감시하고 미사일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어요.


초기 우주 경쟁에서 소련은 미국을 한 발짝씩 앞서는 듯 보였습니다. 1961년 소련이 최초로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태운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한 거예요. 그는 1시간 29분 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한 뒤 낙하산을 타고 지구에 귀환해 인류 최초 우주 비행에 성공했지요. 이보다 앞선 1959년에는 최초의 달 탐사선인 '루나 1호'를 발사하기도 했어요.


1969년 미국이 닐 암스트롱을 태운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렸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인이 달에 착륙했어요. 하지만 우주 개발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면서 큰 부담을 느낀 미국과 소련은 1972년 불필요한 우주 개발 경쟁을 자제하는 내용의 '미소우주협력협정'을 맺었답니다. 이렇게 15년간의 '우주 경쟁'은 일단락됐죠.


스푸트니크 발사는 미국과 소련 간 우주 경쟁을 부추겼지만 결과적으로 큰 과학 기술 발전을 이끌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스푸트니크가 없었다면 달 착륙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해요. 오늘날 미국과 러시아는 다른 여러 국가의 우주비행사들과 함께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9.02 '매처럼 빠른 사람들'의 나라… 8~9세기 북방 초원 지대 호령

위구르 제국

오늘날 위구르족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 소수민족 탄압의 역사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위구르족은 과거 대제국을 건설하여 주변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기도 했어요. 당시 중국에선 위구르인들을 '매와 같이 빠른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회골(回鶻)'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여기서 '회'는 위구르를 의미하는 한자이고, '골'은 사나운 매라는 뜻입니다. 과거 위구르인들의 위세는 어느 정도였던 걸까요?

 

◇당나라와 견주었던 세력

 8세기 위구르 제국의 황제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위구르는 4세기부터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어요. 남북조시대 기록을 보면 '고차' 혹은 '칙륵'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들의 후예가 위구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구르 제국이 북방 초원 지대를 장악하기 전 이 일대는 돌궐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어요. 위구르는 돌궐의 핍박을 받고 있었죠.


627년 위구르 수령이 돌궐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당나라 등과 연합해 돌궐 제국을 무너뜨립니다. 이후 위구르는 바스밀, 카를룩족과 연합해 742년 바스밀족 수령을 지도자로 추대했죠. 하지만 위구르 수령이 바스밀을 공격하고 744년 스스로를 '카간(유목민 국가에서 사용하는 황제 칭호)'이라 칭한 뒤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어요. 그리고 오르혼강 연안의 '오르두 발리크(현재 카라발가순)'에 수도를 정하고 745년 '위구르 제국'을 세웠습니다.


747년 1대 카간이 사망하자 아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요. 그는 동쪽으로 거란과 타타르를 굴복시켰고 키르기즈와 바스밀, 튀르기시 등을 잇따라 복속시키며 세력을 키워나갔어요. 그러던 중 당나라에서 안녹산 등이 일으킨 '안사의 난'(755~763년)이 발생하자, 당이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위구르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756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위구르는 기병 6000~7000명을 당에 파견했습니다.


위구르는 장안과 낙양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그 대가로 금, 은, 비단 등 재물을 얻었어요. 위구르 황제는 당황실 공주와 혼인까지 했죠. 762년 또다시 반란이 발생하자 당은 위구르에 또 도움을 청하였고, 4000명의 위구르 기병이 당군과 연합하여 낙양을 탈환하였어요.


8년간 지속된 안사의 난이 위구르 지원 덕분에 완전히 진압되면서 위구르인들은 많은 경제적 이익을 챙겼어요. 당의 국고는 거의 바닥을 보였지만 위구르는 당으로부터 수입한 비단을 주변 국가에 수출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어요.


◇위구르 제국의 몰락

안사의 난 이후 위구르 제국은 20년간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어요. 심지어 당나라를 찾은 위구르 사신 일행이 당 황태자에게 위구르 춤을 춰보라고 제안했는데 당 관리가 이를 제지하자 관리를 방망이로 때려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위구르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줘요.


현재 위구르족 대부분은 이슬람 신도이지만, 과거의 국교는 마니교였는데요. 762년 3대 카간이 당나라를 방문하여 낙양에 있던 소그드인(이란계 유목민족)과 접촉한 후 이 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또 위구르 상인들은 당에서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위구르와 당의 교역 관계는 매우 활발했어요. 위구르인들은 위구르 문자도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공예품, 그림, 조각 등 문화유산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잦은 교류는 위구르인들의 '정착화'를 가속화시켰고, 본래 가지고 있던 강한 기질을 사라지게 했어요. 게다가 이후 즉위한 카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일찍 사망하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돌며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혹독한 추위로 많은 가축이 동사하면서 붕괴가 가속화되었죠. 결국 840년, 위구르는 자신들이 한때 복속시켰던 키르기즈 세력의 침략을 받았답니다. 약 100년에 걸쳐 북방 초원 지대를 호령하던 위구르 제국은 무너지게 되었고, 위구르인들은 각지로 뿔뿔이 이주하였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9.09  90세까지 장수한 최강의 파라오… 히타이트 제국과의 16년 전쟁으로 유명해요

람세스 2세

코로나 유행으로 문을 닫았던 런던 영국박물관이 지난달 5개월 만에 재개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영국박물관에는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 약탈하거나 수집한 전 세계의 유물이 800만여 점이나 있는데요. 유명한 전시물 중 하나가 바로 이집트 전성기 시절 파라오(최고 통치자)였던 람세스 2세(재위 기원전 1279~1213년)의 조각상입니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 왕조에서 매우 강력한 왕권을 누린 파라오 가운데 한 명입니다. 90세까지 장수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왼쪽 사진은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 군대와 싸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그는 고대 이집트의 황금기인 제19왕조(기원전 1293~1185년) 초대 왕인 람세스 1세의 손자였습니다. 아버지 세티 1세가 즉위한 후 후계자였던 그의 형이 세상을 떠나자 람세스 2세가 왕세자에 올랐어요. 10대 시절 람세스는 아버지와 함께 군사 작전을 수행하며 일찍부터 전쟁 경험을 쌓고 통치력을 길렀어요.


람세스 2세 시절 가장 유명했던 전쟁은 이집트 히타이트 전쟁이에요.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대규모 전투라고 해요. 당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거쳐 서아시아 지역으로 팽창하려 했는데요. 특히 오늘날 터키와 시리아 국경 쪽에 위치했던 카데시는 동쪽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죠. 람세스 2세가 즉위했을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히타이트 제국은 강력한 철제 무기와 전차 부대를 기반으로 카데시를 포함한 시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어요.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싸우기 위해 보병 약 2만명과 말들이 끄는 전차 2000여 대를 지휘해 북진했습니다. 히타이트는 4만여 보병과 전차 3000여 대로 이집트군에 맞섰어요. 람세스 2세는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병사들을 진두 지휘하며 전투를 이끌었어요. 이를 카데시 전투라 해요.


하지만 전쟁은 승패를 가르지 못하고 16년간 이어졌습니다. 이때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가 즉위한 것을 계기로 기원전 1258년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 평화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은 상호 불가침 원칙을 명시한 평화조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 내용은 각국의 난민을 풀어주고 상대 국가의 영토를 앞으로 침범하지 않으며 군사적 위험에 처했을 때 서로 지원해주는 것이었지요. 또한 친선 관계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왕녀와 결혼도 했어요.


람세스 2세는 서쪽으로는 리비아, 남쪽으로는 누비아(오늘날 수단), 동쪽으로는 팔레스타인까지 정벌하며 영토를 확대했어요. 또 이집트 곳곳에 수많은 기념비와 건축물을 세우며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그가 남긴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라메세움과 아부심벨입니다. 테베 서쪽의 나일강 유역에 세워진 라메세움 신전은'테베의 신'아몬을 모시는 신전이자 람세스의 무덤입니다. 대영박물관에 있는 람세스 2세의 석상도 여기서 가져온 것이죠.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에 있는 아부심벨은 사암층(沙岩層)에 새긴 석굴사원입니다. 람세스 2세를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현재 아부심벨은 원래 위치에서 65m 더 위쪽으로 옮겨져 있는데요. 이집트 정부가 1959년 나일강 범람을 막기 위해 아스완 댐을 건설하기로 했는데, 아부심벨이 침수될 위기에 처해지자 1042조각으로 해체되었다가 1968년 현재 자리로 옮겨진 뒤 조립됐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09.16 몽골 기병에 붙잡힌 명나라 영종… 전쟁터서 포로된 유일한 황제죠

토목보의 변

지금은 중국 북부 국경지대에 있는 몽골족 자치구가 중국의 일부이지만, 한때 몽골족은 중국의 한족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하며 동아시아를 호령했습니다. 특히 몽골족에 중국 황제가 생포된 '토목보의 변(變)' 사건은 주변국에 큰 충격을 주었죠. 중국 역사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간 황제가 적군의 포로로 잡힌 유일한 사건이에요.


◇15세기 북쪽 초원지대 장악한 몽골족

13세기 중반부터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일대를 지배하던 원나라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며 내부적인 위기에 봉착했어요. 그러다 1368년,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군대에 수도 대도(현 베이징)를 빼앗겼지요. 원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혜종은 북쪽 초원 지대로 물러났고 몽골은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유지하였습니다.

 

▲ 명나라 황제 영종(정통제)의 모습이에요. 그는 중국 역사상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유일한 황제입니다. /위키피디아

 

몽골은 경제적 목적을 위해 명나라와 교역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였어요. 15세기가 되자 몽골 초원 지대에 '오이라트'라 불리는 몽골계 부족 세력이 성장하였는데요. 지도자 에센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면서 서쪽으로는 발하슈호(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동쪽으로는 바이칼호(오늘날 시베리아)까지,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어요.


이렇게 북원이 다시 몸집을 키우는 동안 명나라 조정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영종(정통제)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는데, 이를 이용해 환관들이 국정을 장악하였어요.


1449년 7월 북원은 방어가 취약한 명나라 변방에 군사를 보내 네 갈래로 병력을 나누고 만리장성을 넘었습니다. 북원의 침략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 황제는 50만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 뒤에는 당시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환관 왕진이 있었죠.


◇명 황제, 몽골 기병의 포로 돼

 

당시 북원 군대는 2만 명 정도였지만 매우 강력하였고, 반면 명나라 군대는 전쟁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앞서 보낸 명나라 군대가 계속 패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황제는 결국 후퇴를 결정하였어요.


그렇게 군대를 돌리던 중 오늘날 허베이성 화이라이현 부근 토목보에서 황제가 이끌던 군대와 북원 기병 군단 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명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북원은 명나라 황제를 포로로 붙잡았답니다. 황제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었어요. 중국에서는 이를 '토목보의 변'이라 부릅니다. 앞서 1126년 여진족이 송나라를 침략한 뒤 송의 황제를 포로로 삼은 사건(정강의 변)도 있었지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간 전쟁터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어요. 이후 북원은 황제를 인질로 삼고 베이징 근처까지 나아가 명 조정에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어요.


명나라 최고의 정예병들이 이미 토목보에서 전멸해 베이징의 군사력은 공백 상태였어요. 그러자 일부 신하들은 영종의 이복동생을 새 황제로 세우고 영종을 태상황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남쪽에 있던 22만 병력을 베이징으로 불러 북원과 전쟁을 벌였지요.


명에 새 황제(경태제)가 즉위하자 영종은 협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북원 군대는 명의 결사 저항에 눌려 결국 패배하였답니다. 북원은 다음 해 영종을 명으로 돌려보냈지요. 영종은 이후 남궁(南宮)에 유폐되었다가 경태제가 병에 걸리자 8년 만에 다시 복위(천순제)했어요. 이후 7년간 황제로 나라를 다스렸지만 환관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9.23 이탈리아 통일 이끈 의용군… 군복 대신 도살장 노동자 옷 입었죠

붉은 셔츠단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 다음으로 큰 섬이기도 한 사르데냐섬은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인물인 주세페 가리발디(1807~1882)가 이곳을 근거지로 했던 사르데냐 왕국 출신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가리발디 장군에 대해 알아볼게요.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

중세시대 사보이가(家)는 오늘날 프랑스령인 사보이를 중심으로 스위스 일부, 이탈리아 북서부로 세력을 확장하다 1416년에는 신성로마제국(오늘날 독일)으로부터 공작 칭호를 받아 '사보이 공국'이 됐습니다.

 

▲ 가리발디 장군과 ‘붉은 셔츠단’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만평이에요. /가리발디 위블리 닷컴

 

18세기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스파냐 왕실은 조카 손주인 프랑스 부르봉 왕실의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요.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사보이 공국 등은 프랑스·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였어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이 벌어진 거죠. 이 전쟁으로 사보이 공국은 1720년 에스파냐령이었던 사르데냐 지역을 얻고 '사르데냐 왕국'을 수립했답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와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어요.


◇"이탈리아만의 통일 국가를 세우자"

18세기 후반 유럽 세계는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나폴레옹 정복 전쟁으로 사르데냐 왕국 역시 사르데냐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잃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유럽 열강들은 오스트리아에서 빈 회의를 갖고 '나폴레옹 이전의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구(舊)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죠. 사르데냐 왕국도 피에몬테 등 옛 영토를 회복했지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차지하면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하는 북동부, 로마 교황령, 에스파냐 부르봉 왕가가 지배하는 양(兩)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등으로 분열됐지요.


그러나 이탈리아 내에 퍼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이탈리아만의 통일 국가를 세우자는 열망'을 일깨웠습니다. 1831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인 마치니는 공화국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청년당'을 만들어 민족정신을 고취시켰어요.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사르데냐의 정치가인 카보우르가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통일의 기초 마련한 가리발디 장군

 

당시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사르데냐 왕국 출신의 가리발디 장군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 왕국 니스(오늘날 프랑스 영토)에서 태어난 해군 출신으로 우루과이 내전(1839~1851)에서 이탈리아 의용군을 꾸려 활약한 인물이에요. 당시 우루과이에서 결성된 가리발디의 의용군은 붉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요. 도살장 노동자들이 피 얼룩을 감추기 위해 입는 붉은 셔츠를 군복 대신 입기 시작하면서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군을 '붉은 셔츠단'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1860년 가리발디는 1000여명의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의 부르봉 군대를 격파한 뒤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했답니다. 당시 이탈리아 젊은 층에선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가 유행했을 만큼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해요.


원래 가리발디는 마치니의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자였지만 통일을 위해 에마누엘레 2세를 통일 이탈리아의 군주로 인정하고 정복한 지역들을 그에게 바쳤답니다. 가리발디가 남부 이탈리아의 왕이 될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정반대였어요.


1861년 마침내 사르데냐 왕국의 에마누엘레 2세가 '통일 이탈리아' 왕에 즉위했습니다. 이후 가리발디는 카프레라섬으로 사실상 은둔하다시피하며 권력과 거리를 두었고, 말년엔 사회 사업 등을 하며 조용히 살아갔답니다. 1866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 참여해 베네치아를 획득하고 1870년 로마 교황령을 점령해 오늘날의 통일 국가를 완성했습니다.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10.09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정복자들에 죽음을!" 부르짖었죠

미겔 이달고 신부

지난달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153년 만에 처음으로 관중 없는 독립기념일 전야제가 치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멕시코 정부는 그동안 매년 9월 16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고 전날 밤 대규모 행사를 가졌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멕시코의 독립기념일이 멕시코가 실제 독립한 날이 아니란 걸 알고 있나요? 왜 멕시코는 9월 16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리고 있는 걸까요?


◇에스파냐 식민지였던 멕시코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제패하고 있었습니다. 에스파냐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180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를 침략하자, 국왕 페르난도 7세는 어쩔 수 없이 왕위에서 물러났지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 에스파냐 왕으로 세웠어요.


나폴레옹이 에스파냐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에스파냐 식민지에도 전해졌습니다. 그러자'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오늘날 멕시코)에 사는 크리오요(식민지 태생 백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누에바에스파냐의 지배권을 차지하고자 했죠.


크리오요들은 국왕을 대신해 식민지를 통치하는 에스파냐 부왕(副王)에게 자신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원회를 조직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 당국은 크리오요 세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이 같은 제안을 거부했어요.


1810년, 크리오요들이 멕시코 정치와 산업의 중심지였던 케레타로에서 반란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크리오요들은 '독립'보다는 에스파냐 왕 아래서 '자치권'을 얻길 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실 반란에 주도적이지 않았지요. 크리오요 대부분은 지주, 식료품상, 농장 경영자, 교구 사제 등 중산층이었습니다.


돌로레스에 사는 백인 신부 미겔 이달고(Hidalgo·1753~1811)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산 니콜라스대학 총장을 지냈던 그는 프랑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에게서 깊은 영감을 받아 개혁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랬기에 그는 교회가 반란에 참여해 가난한 원주민과 빈곤층을 구제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달고 신부의 절규

1810년 9월 16일 일요일 새벽, 이달고 신부는 교회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에게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을 촉구하였어요. "증오스러운 에스파냐인들이 여러분 선조로부터 빼앗은 땅을 되찾겠습니까?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정복자들에게 죽음을!"


이것이 바로 멕시코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돌로레스의 외침'입니다. 처음엔 6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했고 곧 수만 명의 지지자가 규합되었어요. 수년간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속속 참여하면서 봉기의 확산세는 빨라졌습니다

 

 1810년 9월 16일 횃불을 든 채 에스파냐에 맞서 민중 봉기를 이끌고 있는 이달고 신부(가운데 까만 옷을 입은 인물)와 반란군 모습을 그린 벽화예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달고 신부의 반란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광산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빈민층, 즉 원주민과 메스티소(원주민과 백인 혼혈)였어요. 초반엔 멕시코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성과도 거두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전쟁 경험이 전혀 없었고 제대로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러던 9월 28일 반란군이 과나후아토를 점령하고 불법적인 약탈을 자행한 뒤 수백 명의 에스파냐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반란군의 과격하고 잔인한 모습은 보수적인 크리오요의 반감을 샀어요.


이달고 신부는 평소 자신이 갖고 있던 이상을 펼치기 위해 점령지에서 노예제와 공납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했어요. 비교적 부유한 삶을 살고 있던 크리오요는 이달고 신부의 급진적인 생각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에스파냐 진압군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반란군은 에스파냐군에 패배하였고 이달고 신부는 1811년 3월 체포돼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그해 7월 처형되었죠.


비록 이달고 신부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투쟁은 훗날 멕시코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10년 뒤인 1821년 멕시코는 '코르도바 협정'에 따라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했지요. 그렇기에 사실 이달고 신부가 멕시코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까지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멕시코인들은 '돌로레스의 외침'이 있던 9월 16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는 거랍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10.23 두 세계의 대충돌… 5만 셀주크에 비잔틴 20만이 무너졌죠

만지케르트 전투

오늘날 터키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국가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제주도 넓이 두 배가 넘는 땅(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다투며 교전을 벌이고 있어요.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를 프랑스가 지원하고,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터키가 지원하면서 일각에선 이 교전을 '21세기 십자군 전쟁'에 비유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약 950년 전 이 지역에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튀르크 간 첫 번째 대충돌이 있었답니다. 1071년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이지요.


◇동서로 분열된 로마 제국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였던 로마는 기원전 2세기 포에니전쟁에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대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원래 다신교 국가였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년)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문화가 뿌리내렸지요.

 

▲ 1071년 셀주크튀르크군 5만명과 비잔티움 제국의 20만 대군이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에서 대대적으로 맞붙은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두 아들에게 로마 제국을 절반씩 나누어주면서 로마는 395년 동서로 분열됐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일찌감치 멸망했어요.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재위 527~565년) 때 옛 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되찾으며 전성기를 누렸어요. 오늘날 터키는 물론 그리스, 이탈리아, 예루살렘, 시리아, 북아프리카까지 최대 영토를 확보했지요. 아름다운 모자이크 성화와 거대한 돔으로 '비잔티움 문화의 정수'로 찬사받는 성 소피아 성당도 이때 건립됐어요.


◇비잔티움이 패배한 만지케르트 전투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7세기부터 사산왕조 페르시아(오늘날 이란), 이슬람 세력 등과의 대립으로 점점 세력이 축소됐습니다. 그러던 중 11세기 이슬람교로 개종한 유목 민족 셀주크튀르크가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던 소아시아 일대를 공격했어요. 셀주크튀르크군 5만명과 비잔티움 제국의 20만 대군이 오늘날 터키 동부 말라즈기르트에서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에서 대대적으로 맞붙었지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셀주크튀르크는 큰 승리를 거뒀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는 포로로 잡혀가는 굴욕까지 겪었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셀주크튀르크는 서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됐죠. 그래서 이 전쟁을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로 꼽아요.

 

 

1077년 셀주크튀르크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양 세력 간 갈등이 폭발합니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더 이상 마음대로 예루살렘에 갈 수 없게 됐죠. 위협을 느낀 비잔티움 제국 황제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 길고 긴 '십자군 전쟁'(1096~1272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럽 연합군인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티움 멸망

하지만 셀주크튀르크의 전성기도 오래가지 못했어요. 13세기 몽골에 의해 멸망한 거죠. 이후 소아시아 일대에는 튀르크족 중심의 '오스만 제국'이 수립됐어요.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도 막을 내렸습니다. 기독교를 믿던 비잔티움 제국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성 소피아 성당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죠.


이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대륙을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어요. 오스만 제국은 세금만 잘 내면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했고, 이 지역에는 비잔티움·페르시아·이슬람·튀르크 문화 등이 융합된 국제적인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19세기 이후 이 지역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분쟁 지역이 됐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 역시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가 지난 7월부터 다시 모스크가 되는 등 부침을 겪고 있어요.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11.06 1867년 쇼군이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 막부시대 막 내렸죠

일본 대정봉환

1867년 11월 9일은 일본에서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대정봉환'이란 '큰 정치를 다시 돌려준다'는 뜻으로, 도쿠가와 막부(무사 정권)의 쇼군(將軍)이 천황에게 국가의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을 가리켜요.


일본은 12세기부터 무사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쇼군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갖고 나라를 다스렸어요.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였지요. 이를 '막부 정치'라고 합니다.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 시대로 이어지며 막부 정치는 600년 이상 지속되었지만, 결국 19세기 중반 대정봉환이 이루어지며 막부 정치가 막을 내렸어요. 그렇다면 쇼군은 왜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천황에게 돌려주었던 것일까요?


◇개국 문제로 분열된 막부 시대

19세기 일본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은 군함 4척을 이끌고 들어와 무력 시위를 하면서 일본에 통상을 요구하였어요. 그러자 나라의 문을 열지 말지를 둘러싸고 막부 주요 대신들과 다이묘(봉건 영주)들 사이에서는 의견 대립이 일어났지요. 여기에 쇼군의 후계 문제까지 겹쳐지며 대립은 더욱 심화하였습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실권자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메이지 천황의 허가도 없이 미국과 통상조약에 조인했어요. 고메이 천황은 이 사실에 크게 분노했고, 그동안 막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번(藩·다이묘들의 영역)들이 천황에게 힘을 실어주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 1867년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맨 위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가 무사들 앞에서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하겠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당시 전국에는 270여 개 정도의 번이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서남 지역에 있던 사쓰마번, 조슈번은 세력이 큰 번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들은 1600년 전국의 다이묘들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 때 히데요시가(家) 편을 들면서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 1616)에게 처벌을 받았고, 이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 시대 내내 중앙 정치에 깊숙이 참여할 수 없었죠. 이들은 개국 문제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민중 봉기가 발생하며 막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지자 이를 자신들의 세력 확대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실 조슈번은 소금·종이 등 특산물을 많이 생산하고 있었고, 항구 시모노세키를 끼고 있어서 교역으로 얻는 수입이 컸어요. 그래서 개항을 하려던 막부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 '존황양이(천황을 높이고 오랑캐(서양)를 배척한다)'라는 입장을 세웠지요. 반면 사쓰마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 개국을 지지했어요. 사쓰마번은 막부가 조슈번을 정벌하러 갈 때에도 막부에 협력했어요.


◇메이지 신정부 시대 열어

쇄국 정책을 주장하던 조슈번은 결국 영국 등 서양 연합 함대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눈으로 확인하고 이를 기회로 군비를 정비하는 등 개혁을 실시해 나갔지요. 사쓰마번도 군비 확충을 꾀하는 개혁을 실시했어요.


막부도 프랑스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나름의 개혁을 추진했어요. 그러나 그 방향은 쇼군의 절대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지요.


결국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막부의 독단적인 정책에 반발하며 '막부 타도' '왕정복고' 방침을 내세우고 손을 잡았습니다. 여기에는 도사번 출신이자 오늘날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 사카모토 료마(1835~1867)가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했어요. 그의 도움으로 조슈번은 사쓰마번을 통해 외국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했고, 1866년 양 번은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왕정복고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신의 번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어요. 전 도사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는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같은 의견서를 받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다이묘들이 막부에 적대적인 상황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867년 천황에게 통치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단행했습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 초 무력 정변을 일으켜 천황이 직접 왕정 복고를 발표하게 만들었어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직하게 하고 막부를 폐지하며 천황 조정 내에 총재, 의정, 참여 3직을 설치하는 등의 내용이었지요. 이렇게 일본의 정치 체제는 '메이지 신(新)정부'로 넘어가게 되었고, 683년에 걸친 막부 정치(1185~1868)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대대적인 제도 개혁에 나섰답니다.

 

11.20 "노예 해방" 링컨 당선에 불복한 11州 연방 탈퇴… 4년간 내전

미국 남북전쟁

지난 3일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현재 여러 주에서 대선 불복 소송을 진행하고 있지요. 지난 14일에는 백악관 근처에서 대선 불복을 지지하는 시위자들과 승복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이 충돌하기도 했는데요. 미국에선 양측의 충돌이 커질까 우려하고 있어요. 실제 미국에서 대선 불복이 내전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때입니다. 1860년 링컨 대통령이 당선되자, 남부의 7주(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는 미합중국 연방에서 탈퇴해요. 후에 아칸소 등 4주도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에 합류하죠. 미국이 둘로 갈라진 겁니다.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

미국은 각 주(州)의 주권을 인정하는 연방제 공화국입니다. 중앙정부인 연방정부와 주 내에서 자치권을 가진 주 정부가 공존해요. 미국은 1783년 영국에서 독립하고 공업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북부와 남부 주들 사이의 사회 경제 구조 격차가 커졌어요. 북부는 자본가들이 상공업을 발달시켰지만, 남부의 대농장주들은 담배와 목화를 재배하기 위해 흑인 노예 노동력에 의존했지요. 북부는 공산품의 안정적인 판매를 위해 강력한 연방정부가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하길 바랐어요. 반면에 남부는 영국으로의 목화 수출에 차질이 생길까 봐 연방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자유무역과 지방분권을 주장했죠.

 

▲ 1862년 3월 미국 남북전쟁 때 버지니아의 햄프턴로즈에서 벌어진 북부 모니터호와 남부 메리맥호의 전투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장갑함 해전으로 유명해요. /위키피디아

 

18세기 말 펜실베이니아주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노예 해방법'을 제정했어요. 이후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를 유지하는 남부가 자유주와 노예주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죠. 1820년 미국은 자유주와 노예주가 각각 11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이때 새롭게 주로 편입할 미주리주를 놓고 세력 균형이 깨어질 형편이었어요. 남부와 북부는 '미주리 협정'을 맺어요. 미주리주를 노예주로 정하는 대신 매사추세츠주에서 현재의 메인주를 분리시켜 자유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새로 주가 편입될 때는 북위 36°30′를 기준으로 이남은 노예주, 이북은 자유주로 정하기로 했어요.


◇공화당의 탄생

그런데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남·북부의 대립이 다시 격화됩니다. 인구가 늘어난 미주리, 아이오와 서부 지역을 네브래스카, 캔자스로 분리하는데, 두 주의 노예제 실시는 주민 투표로 결정한다는 법이었어요. 미주리 협정을 무력화하는 내용이었죠. 주민 투표에서 이기기 위해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각각 캔자스로 이주해왔고 1856년 5월엔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해에만 200명 이상 주민이 희생돼 '피 흘리는 캔자스'라고 불립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은 공화당 탄생에 영향을 줬습니다. 이 법에 반대하는 자유토지당과 휘그당의 북부 상공업자, 서부 농민·노동자들이 연합해 노예제 폐지를 전면에 내세운 공화당을 만들었죠. 공화당은 1860년 5월 전당대회에서 변호사이자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출신인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뽑았어요.


링컨은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북부에서 지지율이 높았어요. 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이 지지했던 브레킨리지는 남부에서 표를 많이 얻었지만. 결국 링컨이 선거인단 303표 중 180표를 얻으면서 공화당 출신 첫 번째 대통령이 됐습니다.


◇남북전쟁 발발

링컨이 취임식에 오르기도 전인 1860년 12월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했어요. 링컨이 대통령이 됐으니 노예제 폐지를 위해 본격적으로 연방 권력을 사용할 거라 예상했던 것이죠. 1861년 2월 6주가 추가로 탈퇴하고 남부의 7주는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수립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요. 남부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후 4월에 테네시, 아칸소 등의 4주도 남부에 합류했습니다. 총 11주가 미합중국에서 이탈한 거예요.


북부는 23주에 인구도 남부의 2.5배 정도였고 군수 공업과 해군력에서 남부보다 우위에 있었어요. 또 링컨이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을 선포함으로써 국제 여론과 전세도 북부 쪽으로 기울었지요. 결국 4년 만인 1865년 4월 남부가 항복하면서 남북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노예제 폐지가 미국 전체로 확대되었지만, 항복 직후 남부의 극단주의자 존 윌크스 부스에게 링컨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또한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군인 240만명 중 약 62만명이 사망한 비극으로 남았어요.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최원국 기자

 

12.03 호미와 바구니로 만든 250㎞ 땅굴… 병원·극장도 있었대요

베트남 구찌터널

최근 베트남 호찌민(옛 이름은 사이공)시가 구찌(Cu Chi)터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호찌민시 구찌현에 있는 이곳은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 공산주의 군사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근거지로 삼아 남베트남 정규군 및 미군과 전투를 벌인 지하 터널입니다. 지금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죠. 지금도 구찌터널 내부에 직접 들어가 그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체험해볼 수 있다고 해요. 구찌터널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곳일까요?


◇프랑스군에 대항해 만든 터널

구찌는 호찌민시에서 북서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작은 농촌 마을이에요. 이곳에 터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식민 국가들이 독립을 이뤄냈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결국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베트남 독립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베트남 비정규 군대가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위해 48㎞의 터널을 만들었어요. 1954년 베트남 독립전쟁이 끝나며 통일 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이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베트남 공화국을 세웠어요. 이에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 공산군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어요. 1964년에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참전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됐어요. 이때 베트남 공산군은 남베트남군과 미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전에 있었던 구찌터널을 더 길게 만들어 활용했습니다.


◇게릴라전 위한 지하 공간

늘어난 구찌터널의 총길이는 무려 250㎞에 달했어요. 사이공강에서 캄보디아 국경 지대까지 이어졌지요. 깊은 곳은 지면에서 8~10m 정도였고 얕은 곳은 3~4m였는데, 50t 무게의 탱크가 위로 지나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졌어요. 이 터널을 만들 때 사용한 도구는 호미와 바구니뿐이었답니다. 이 지역 흙이 석회석이 많은 토질이라 비가 오면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굳어 견고한 구조가 될 수 있었죠.

 

▲ 베트남 구찌터널 모형을 찍은 사진입니다. /위키피디아

 

지하 터널은 미로같이 매우 복잡했을 뿐 아니라 통로는 너비 80㎝, 높이 80㎝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어요. 하지만 이 안엔 숙소, 부엌, 침실, 회의실, 무기 창고 등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심지어 병원, 극장까지 갖추어져 있었다고 해요.


베트남 공산군은 이 지하 터널에 군대를 수용하고 통신 및 보급품을 수송했어요. 입구는 외부인의 침입이 까다로운 곳에 여러 개 만들었고, 식물로 위장해 베트남 공산군이 아니면 찾기가 매우 어려웠죠. 터널 주변에는 각종 지뢰가 매설돼 있었고, 주요 지점마다 위장 통로와 함정이 있어 접근하기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미군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터널의 실체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요.


◇베트남전쟁의 상징

미군은 이 지하 터널을 없애려고 했어요. 대표적인 것이 시더 폴스 작전이었습니다. 1967년 1월 약 3만명의 미군이 화력을 총동원했습니다. 헬리콥터가 구찌 터널 위에서 기습적으로 폭격했고 다른 지상군은 포위망을 구축했어요. 며칠간 이어진 공습으로 지하 터널을 제외한 지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자, 공병들은 폭약을 설치해 터널을 폭파해 나갔어요. 이 작전에 약 1만파운드의 폭탄이 사용됐대요. 약 3주 동안 이어진 작전에서 약 10㎞의 터널이 사라지고 60여 개의 지하 벙커가 파괴됐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군은 곧바로 터널을 원상복구해 나갔습니다.


미군은 또 다른 작전을 시행했어요. 직접 지하 터널 안으로 들어갈 몸집이 작은 병사 600여 명을 뽑아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른바 '터널 쥐'로 불렸죠. 그런데 기대와 달리 산소 부족, 극심한 무더위 등으로 '터널 쥐'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고 오히려 베트남 공산군의 반격에 희생됐습니다. 독일에서 공수해 온 탐색견을 이용한 작전도 있었어요. 3000여 마리의 개들이 터널로 들어가는 문이나 통풍구를 찾게끔 한 것인데, 개들은 부비트랩(건드리면 폭발하는 장치)에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베트남 공산군은 곳곳에 고춧가루를 뿌려 개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했죠.


결국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5만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고,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베트남에서 철수했어요. 미군이 열심히 공격했던 터널의 범위는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최원국 기자

 

12.17  17세기엔 '종이 쪽지'… 이젠 스마트폰으로 어디서나 사고팔죠

주식시장

한국 주식시장에서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연일 오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코스피는 한국 증시에 상장된 주식 가격의 움직임을 모아 작성한 지표입니다. 코스피가 오르면 전반적인 주가가 오른다는 뜻이지요. 주식시장 추세는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예측을 반영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선 주식을 사고파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활동으로 자리 잡았죠. 주식 등 재산적 가치를 기재한 증권을 사고팔 수 있는 장소를 주식시장이라고 합니다. 주식시장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투자 공동체의 탄생

초기의 주식 거래 형태는 어음과 채권 같은 부채(負債)를 사고파는 것이었어요. 14세기 중세 유럽에선 대부업자들이 오늘날 은행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선 대부업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고이율·고위험의 약속 어음과 채권을 다른 대부업자에게 팔거나 교환하기도 했어요. 비슷한 시기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약속어음과 채권을 사고파는 증권거래소(Bourse)가 정식으로 개설됐어요. 증시가 열렸던 안트베르펜의 광장 주변에는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 거주했다고 해요.

 

 17세기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중세 시대 베네치아에선 콜레간차(colleganza)란 형태의 회사가 등장했습니다. 콜레간차는 원래 '전우애'라는 뜻으로 투자자와 원거리 무역을 하는 상인이 계약으로 하나의 이익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합자회사였습니다. 투자자는 상인에게 물품을 제공하고 상인은 그 물품을 판매한 대금으로 새 물품을 사서 베네치아로 돌아와 다시 판매했습니다. 상인이 얻은 이익은 미리 합의한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분할됐어요. 덕분에 소자본을 가진 상인도 원거리 무역에 뛰어들 수 있었고 베네치아의 무역량이 증가했죠.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주식거래소

현대적 의미의 주식시장은 1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신항로 개척 후 16~17세기 유럽에는 신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금·은이 유입됐고 면제품·홍차·설탕 등의 소비가 늘어나 무역이 더욱 활발해졌어요. 하지만 무역회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상품 가격이 폭락하고 이익률도 떨어졌어요. 또 주요 시장인 동남아시아까지 가는 바닷길은 순탄치 않았죠.


그래서 1602년 여러 회사의 자본을 하나로 통합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커피 하우스에서 투자자들에게 종이 쪽지를 팔아, 무역 이익의 일부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무역 손실도 함께 책임졌어요. 이것이 최초의 종이 형태 주식이었죠. 1609년엔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사고파는 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 설립됐어요. 또 이런 형태의 무역회사는 유럽 전역에 퍼졌습니다. 주식, 배당금, 투자 이익의 개념이 생겨나고 투자자들은 투자 손익에 대해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시장을 예측하려고 했어요.


영국에는 16세기 이후 합자회사들이 늘어나자 투자자들의 자금을 중개해주는 사람도 많아졌어요. 이들은 런던의 유명한 커피 하우스에 모여 주가를 분석하고 거래를 중개했습니다. 이때 주식 가격을 칠판에 적고는 했는데 오늘날 주가 현황판과 같은 역할을 했어요. 1773년에는 커피 하우스가 있던 곳에 새 건물을 지어 '증권 거래소(stock exchange)'라고 명명했어요.


◇월스트리트 뉴욕증권거래소

오늘날 세계 최대의 주식 거래소인 뉴욕증권거래소가 있는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에는 1711년 건립된 노예 거래소가 있었습니다. 점차 월스트리트의 플라타너스 나무(Buttonwood) 옆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1792년 주식 거래인 24명이 '버튼우드 협정'을 체결해 수수료 비율 등 공정거래 규칙을 만들었어요. 버튼우드 협정은 뉴욕 증권 거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재무 문서 중 하나예요. 1817년에는 뉴욕증권거래위원회가 마련되고 미국 주식시장은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1878년 전신전화가 주식 거래에 사용되면서 거래인과 투자자 간 신속한 거래가 이루어졌고 뉴욕 주식시장은 세계적인 증권 거래소가 됐어요.


1971년엔 미국의 벤처기업 주식을 거래하는 증시인 나스닥이 개설됩니다. 나스닥에는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한 자동 시세 통보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거래 비용이 절감됐어요. 나스닥을 본떠 한국에선 1996년 벤처 주식 등을 거래하는 코스닥 시장을 개설하기도 했어요.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면서 주식시장의 규모도 커지고 이제는 세계 곳곳에 셀 수도 없는 주식 거래소가 있어요. 상품도 주식, 선물, 옵션, 상장지수펀드, 채권 등으로 다양하게 거래되고 있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최원국 기자

 

12.24 대한제국 황제 위한 서양식 궁전… 근대화 의지 엿볼 수 있죠

덕수궁 석조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이 있습니다. 덕수궁 안에는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이 있는데요. 최근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제작한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을 내년 1월까지 홈페이지에 공개한다고 밝혔어요. 석조전은 서울 덕수궁 안에 대한제국 황제와 황후의 생활 공간을 만들어 놓은 서양식 궁전입니다. 비운의 한국 근현대사가 농축된 장소이기도 하죠.


◇한양 한복판에 지은 서양식 건물

1896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년 만에 돌아옵니다. 일본군이 점령한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을 정궁(정식 궁궐)으로 삼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이해인 1897년에 설계를 시작한 덕수궁 안의 전각이 석조전이었습니다. 영국인 재정고문 존 맥리비 브라운이 발의해 13년 동안 건물을 짓게 됩니다. 자신이 살 서양식 궁전을 건설했다는 데서 고종의 근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어요.

 

▲ /그림=김영석

 

설계를 맡은 사람은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널드 하딩이었어요. 하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그리스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석조전을 설계했죠. 여기에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지역의 기후에 맞춰 베란다를 설치했죠.


지층을 포함해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의 장대한 규모였죠. 석조전은 조선의 궁궐이 왕의 침소와 업무 공간으로 분리됐던 것과 달리 두 기능을 통합했습니다. 1층엔 접견실과 홀, 2층엔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었어요.


◇궁궐 완성 석 달 전 나라는 망하고

1910년 12월 1일 석조전이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이곳으로 들어와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석조전이 완공되기 석 달 전인 8월 29일 일본과 강제병합되면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황후도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한제국이 건립된 해에 설계를 시작한 궁궐이 그 대한제국이 멸망한 해에 완공된 것입니다.


1907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 덕수궁을 거처로 삼고 있던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영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어요. 고종 입장에선 자신의 근대화 노력이 좌절된 상징으로 보였을지도 몰라요.


석조전에는 정식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 궁궐의 전각 이름에는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에 '부지런히 정치함',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란 의미가 있죠. 하지만 석조전은 그냥 '돌로 지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던 우리 전통 건축물과 다르다는 의미가 그대로 건물 이름으로 굳어진 셈이죠.


◇좌절된 근대화, 망국, 그리고 분단

이후 석조전은 귀빈 접대나 만찬을 여는 건물로 가끔 사용됐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잠시 고국에 올 때마다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1922년 5월 11일 이곳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영친왕과 일본인 왕비 사이에서 난 장남이자 왕실의 후계자였던 이진이 생후 9개월도 되지 않아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세상을 떠났어요.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석조전 옆에 새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서관(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지어 이왕가미술관을 만들었고, 원래 석조전에는 일본 미술품들을 전시했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석조전에서 열렸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반도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의견 대립을 보인 끝에 1947년 결렬됐습니다. 좌절된 근대화와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장소에 이번엔 분단의 아픔이 더해진 셈이죠.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최원국 기자

 

12.31 14억 중국인의 스승… "낡은 관습 서양식으로 바꾸자"

후스

중국의 철학자이자 교육가, 문학가인 후스(胡適)의 일기가 경매에서 238억원에 낙찰됐습니다. 후스는 '14억 중국인의 스승'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후스가 미국 유학 시절인 1912~1918년에 쓴 18권 분량의 이 일기는 중국 관영 환구시보에 따르면 지금까지 중국인이 쓴 가장 비싼 일기로 기록됐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미국 생활 초기의 활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난 100년간의 중국 혼란기에도 일기가 잘 보관돼 경매가가 높았다고 해요. 과연 그가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기에 일기가 이토록 높게 평가받았을까요?


◇최연소 베이징대학 교수

후스는 1891년 12월 17일 중국 안후이성 지시현에서 태어났어요. 스스로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등 매우 총명했던 그는 1904년 상하이로 가 근대 교육을 받게 됐습니다. 그는 량치차오, 옌푸 등 당시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들 영향을 받으며 서양의 근대적 사상을 깨쳤어요. 특히 옌푸의 '천연론'에 담겨 있던 서양의 진화론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자기 이름에 적자생존의 '적'이라는 글자를 넣어 평생 본명이 아닌 '호적(胡適·후스)'이라는 필명을 사용했어요.

 

▲ 1958년 대만에서 후스와 장제스가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왼쪽 사진). 최근 경매에서 238억원에 낙찰된 후스의 일기입니다. /위키피디아·신경보

 

후스는 그러다 1910년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됐어요. 후스는 미국의 명문 코넬대학에 입학해 농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대요. 이후 컬럼비아대학으로 학교를 바꾸며 전공 또한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던 철학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1915년에는 대학원에 입학해 실용주의 사상의 대가 존 듀이에게 철학을 배웠어요. 자신과 딱 맞는 전공을 만난 이후 글과 강연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어요. 1917년 귀국한 그는 당시 최연소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됐죠.


◇공자·유학 숭배 비판

후스는 중국의 낡은 것을 서양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후스는 중국을 방문한 스승 존 듀이와 함께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비판적 태도와 과학적 방법으로 중국의 근본적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자고 주장했죠. 특히 같은 베이징대학 교수였던 천두슈가 창간한 '신청년'이라는 잡지에 참여하며 신문화 운동에 앞장섰어요. 그는 구시대적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개성과 자유, 민주와 과학을 적극적으로 추구했죠. 공자와 유학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삼강오륜 또한 현 시대에는 맞지 않는 논리라고 주장했고, 여성관에서도 유교의 열녀관을 비판했고 현모양처가 아닌 교육을 통해 독립한 여성이 미래 사회 여성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중국어의 구어체인 백화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사대부들이 즐겨 쓰던 고전 문어체가 아닌 평민들이 쓰는 구어체를 써야 한다고 본 것이죠. 그는 고전 문어체를 '죽은 문자'라고 평가하며 "중국이 살아 있는 문학을 하려면 반드시 백화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20년에는 중국 신문학 사상 최초 백화문 시집인 '상시집'을 출판했습니다. 당시 중국 보수주의자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후스를 천제(天帝·하늘의 황제)로 삼는다'고 우려를 표했어요.


◇사상·교육·문학에 발자취

후스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외교관 역할을 하며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결사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주미 대사를 지내며 미국의 경제 지원과 항일 투쟁 지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인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자 베이징을 탈출해 장제스가 있는 타이완으로 갔어요.


'서구적 법치와 대의제' '전문가에 의한 정치' 등을 내세우며 정치 제도 변화를 주장한 그는 장제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의 독재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6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기까지 그는 타이완에서 지속적으로 자유주의 운동을 펼쳤습니다. 사상, 교육, 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눈에 띄는 발자취를 남겼죠. 후스는 중국인을 계몽하고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적 지식인으로서 지금도 많은 중국인에게 추앙받고 있답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교사 최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