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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세계사] 2020-1/ 01.02 고인물 불결하다 여겨 온탕 없어… 달군 대리석에서 찜질 - 06.24 징용 끌려간 조선인 800여명… 해저 1000m 탄광서 혹사당했죠

상림은내고향 2022. 8. 19. 20:07

[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20-1

01.02 고인물 불결하다 여겨 온탕 없어… 달군 대리석에서 찜질

[터키 목욕탕 '하맘']

터키, 이슬람 신자 많아 목욕탕 발달… 신 앞에서 몸 깨끗해야 한다고 믿어
17세기 이스탄불에만 151곳 있었죠
우리나라 목욕탕보다 찜질방과 비슷… 달군 대리석에서 몸 지지고 때 밀어
19세기 영국서 인기… 600곳 지어져


터키 남동부 바트만주에서는 '하산케이프(Hasankeyf) 프로젝트'가 한창입니다. 하산케이프는 티그리스 강 인근에 있는 도시로 로마와 오스만제국 유적이 여럿 남아 있는데 댐 건설로 수몰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고대 유적을 통째로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내 한 대기업은 "800여 년 전의 터키 목욕탕 '아르투클루 목욕탕(무게 1500t)'을 안전하게 옮겼다"고 지난 26일 밝혔어요. 터키 역사 속에서 목욕은 어떤 의미였기에 목욕탕이 주요 유적이 된 걸까요?


종교적 이유로 늘어난 터키 목욕탕 '하맘'

터키에서는 공중목욕탕을 '하맘(Hamam·아랍어로 '목욕탕'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 발원지인 서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목욕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이슬람 신자는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손발과 귓속 등을 깨끗하게 씻었어요. 신 앞에서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목욕 문화도 함께 발달합니다.

 

 프랑스 화가 장 자크 프랑수아 르 바르비에가 그린 터키식 목욕탕 '하맘'(1785). 터키인들은 그림 가운데 있는 대리석을 달궈 찜질하며 몸에 땀을 내고 나서 물을 끼얹는 방식으로 목욕했습니다. 우리나라나 로마처럼 대형 욕탕은 없었습니다. 터키인들이 고인 물은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5세기 지금 터키 이스탄불까지 세력권을 넓힌 오스만제국은 도시에 모스크, 도서관, 학교, 병원 등의 시설들을 세울 때 하맘을 모스크 옆에 함께 지었다고 합니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했던 오스만제국 술탄 메메트 2세는 이스탄불에 목욕탕을 19곳 지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요. 17세기 이스탄불에만 하맘이 151군데 있었다는 기록도 있답니다. 특히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아내 록산느를 위해 16세기 건축한 '아야 소피아 휘렘 술탄 하맘'은 지금까지 남아 영업을 하고 있지요. 한때 모스크였던 아야 소피아 옆에 지었습니다.

유럽과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도 하맘 유적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는 15세기 지은 하맘이 남아 있고, 이집트 카이로에도 하맘이 한때 최대 300곳까지 있었다고 해요.


'목욕탕'보다는 '찜질방'에 가까워

그런데 하맘은 우리 상식 속 목욕탕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릅니다. 목욕탕의 핵심인 대형 욕조에 뜨거운 물이 담겨 있는 온탕이 없기 때문이죠. '페슈테말'이라는 속옷 역할을 하는 수건을 두르고 하맘에 들어서면 둥근 대리석 판이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 목욕탕 가장자리 개인 세면대에서 샤워를 하고 나면 이 공간에 모이게 됩니다. 욕탕이 있을 자리에 돌판이 있는 것이죠. 달궈진 대리석 위에서 몸을 지지고, 땀을 낸 다음, 때밀이와 마사지를 받고, 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습니다. 오히려 우리 찜질방과 더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찜질방에서 땀을 내고 때를 민 다음, 욕탕에는 안 들어가고 샤워만 하고 나오는 식이죠.

이는 터키인이 고여 있는 물은 청결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천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지역이 아니면 터키식 목욕탕에는 욕조가 없었습니다.

하맘은 터키인들이 친구를 만나고 정치적 의견을 나누는 사교장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슬람 문화권 여성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곳이었죠. 결혼을 앞둔 신부는 결혼 전 '신부의 목욕(겔린 하맘)'이라는 행사도 열었어요. 하맘에서 마을 여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목욕도 하며 결혼 생활의 비법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19세기 영국에도 소개되며 인기

목욕 문화는 로마제국이 유럽 전역으로 퍼트립니다. 그런데 서유럽의 목욕 문화는 중세를 거치며 쇠퇴합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목욕하고 단장하는 행동이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당시 유럽 의학계는 "뜨거운 열과 물이 피부에 입구를 열어 역병이 쉽게 침투하게 한다"고 잘못 진단합니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발견되기 이전이고 청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던 시대라 벌어진 일이죠. 서유럽에서 대중목욕은 19세기까지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유럽에선 19세기 들어 대중목욕 문화가 다시 생겨나는데요, 이 시기 터키의 하맘이 영국에 상륙합니다. 터키에서 활동했던 영국의 외교관 데이비드 우르쿠하르트가 1850년 여행기 '헤라클레스의 기둥'에서 하맘을 소개하면서부터인데요. 영국 빅토리아 시대(1847~1901)에 터키풍 목욕탕은 선풍적 인기를 끌며 한때 600곳 이상이 영국에서 문을 엽니다. 구조는 하맘과 비슷하지만, 찬물에 몸을 풍덩 담그는 냉탕이 있었다고 해요.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1.08 집집마다 8일간 초 밝혀… 2100년前 예루살렘 탈환 기념

[유대교 명절 '하누카']

기원전 165년, 시리아 왕조와 싸워 유대인들이 조상들 땅 되찾은 날
양력으로 11월 말~12월 말 사이… 아홉갈래 촛대 불 밝혀 창가에 둬
하루동안 초 밝힐 양의 기름으로 8일간 타올랐다는 일화에서 유래

지난해 12월 28일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명절인 하누카 행사 중 유대인을 대상으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해 5명이 다쳤어요. 경찰은 반유대주의자의 소행으로 보고 있죠. 하누카는 히브리어로 '봉헌'이라는 뜻으로 키슬레브월(히브리력의 아홉 번째 달)의 25일부터 8일간 치러지는 유대교의 중요 명절이에요. 양력으론 11월 말~12월 말 사이에서 해마다 날짜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화가 루벤스가 그린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 유대인들의 문화를 억압하던 시리아 안티오코스 4세에 맞서 유다 마카베오(붉은 망토를 두른 사람)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순간이 묘사돼 있다. /위키피디아

 

이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이 '하누키아'라 불리는 촛대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전통은 기원전 2세기 하스몬 가문이 시리아 왕조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은 것을 계기로 생겨났어요. 하누카는 어떻게 탄생했으며, 하누카를 만든 하스몬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요?


예루살렘 되찾은 뒤 8일간 촛불 밝혀

기원전 168년 이스라엘 남부인 유다 전역을 통치하고 있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의 문화를 그리스식으로 바꾸고자 했어요. 이를 위해 안식일을 철폐하고 율법서를 압수하는 등 유대교 예법을 금지했죠. 제단에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짐승인 돼지를 제물로 올리기도 했어요.

이에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했고, 예루살렘 북쪽 마을인 모데인에서 전투가 시작됐어요. 주동자는 이 마을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가장 잘 싸웠던 셋째 아들 유다를 '유다 마카베오(히브리어로 '망치'라는 뜻)'라고 부르며 칭송했습니다. 그의 별명을 따서 이를 '마카베오 혁명'이라고도 부르지요.

 

 

기원전 165년 키슬레브월 25일, 유다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유다는 성전을 정화하는 의미로 촛대에 불을 붙여 신에게 봉헌하려고 했어요. 이방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성스러운 기름 한 병을 찾았지만, 겨우 하루 정도 촛대를 밝힐 양이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8일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일을 기려 매년 이맘때 8일 동안 불을 밝히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형제간 세력 다툼에 로마 끌어들여 몰락

유대인들이 시리아에서 완전히 독립한 것은 유다가 죽은 뒤 유다의 형 시몬이 지도자가 됐을 때였어요. 기원전 142년 시리아는 시몬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를 유대인의 독립된 지도자로 인정했어요. 그는 가문의 조상 하스몬의 이름을 따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이후 기원전 63년까지 79년 동안 하스몬 왕조가 이어집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왕조였죠.

하스몬 왕조는 시몬의 증손자 힐카누스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형제가 권력 다툼으로 몰락합니다. 이들은 왕위 다툼 끝에 로마, 즉 외세를 끌어들이는 우를 범했어요. 두 형제의 요청으로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중재하겠다고 나섰지만, 속으로는 이곳을 장악하고자 했어요. 그는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삼두정치를 펼쳤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기원전 63년 로마군은 유대인들이 쉬는 안식일을 택해 성을 부수고 들어갔어요. 로마와 협상을 거부한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로마 포로로 끌려갔고, 로마와 타협했던 힐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 자리를 얻었지만 실질 권한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79년간 유지되었던 하스몬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어요. 로마에 복속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독립국가를 갖지 못합니다.

 

[촛대 '하누키아'에 불 밝히고 감자요리 '라트키' 먹어요]

하누카는 가지가 아홉 개인 촛대 '하누키아〈사진〉'에 불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돼요. '샤마시'라고 불리는 가운데 초에 가장 먼저 불을 붙인 뒤, 나머지 8개 촛대에 8일 동안 매일 밤 한 개씩 새로운 불을 밝히게 되지요. 하누키아는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집 앞쪽 창가에 놓아둡니다.

 

 /AFP 연합뉴스

 

하누카엔 '라트키'라는 감자 요리를 해먹어요. 라트키는 한국의 감자전과 비슷한데, 하누카가 탄생하는 데 기름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되새기는 뜻에서 기름을 많이 쓴 요리를 먹는 것이랍니다. 하누카엔 기름에 튀긴 도넛 '수프가니오트'도 즐겨 먹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1.15 '세상의 절반' 줘도 바꾸지 않겠다던 17세기 페르시아 수도

[이스파한(Isfahan)]

강이 지나가는 '이란의 오아시스'…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 400㎞에 위치
아바스 1세, 이스파한으로 수도 옮겨… 대학 48개, 여관 1802개 생기며 번성
도시 중앙에 지은 화려한 '이맘 광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있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이란 내 공격 목표 52곳을 정해뒀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그는 이란의 문화유적도 포함돼 있다는 뉘앙스의 말도 덧붙였죠. 13일 현재 미국이 이란의 유적을 타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란에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기회가 됐죠. 이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만 24곳이 있거든요.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조로아스터교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 야즈드, 그리고 오늘 소개할 도시 '이스파한' 같은 곳이 즐비합니다.


이란이 품은 오아시스

이스파한(Isfahan)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400㎞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란이 품은 오아시스'로 불리기도 하는데 생명을 주는 강이라는 뜻의 자얀데(Zayandeh)강이 이스파한을 가로지르기 때문입니다. 자얀데강 덕분에 이스파한은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도 푸르른 오아시스 도시가 될 수 있었어요. 자얀데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에는 기원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이스파한은 현재 이란에서 셋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란 도시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 전경. 광장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2층 아케이드가 특징입니다. 이스파한은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 시기 국제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뜻밖에도 과거에 이스파한은 유대인과 인연이 깊은 땅이었습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이 바빌론을 점령하고 그곳에 잡혀 있던 유대인을 풀어줬는데 이들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스파한에 정착했다고 해요. 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야즈데게르드 1세(재위 399~420)는 유대인 부인을 위해 이스파한에 유대인 정착촌 '예후디예'를 조성했고요. 사산 왕조가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에게 쫓겨나서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요.


◇'세상의 절반 줘도 안 바꿀 도시'

이스파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사파비 왕조(1501~1736) 4대 샤(황제) 아바스 1세(재위 1587~1629) 때였습니다. 이슬람교 시아파였던 그는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 교류하며 유연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상업을 발전시켰어요. 그는 아르메니아의 부유한 상인들을 이스파한으로 불러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르메니아 상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면서까지 경제를 살렸습니다.

 

아바스 1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라"고 명령했고, 당시 내로라하는 예술가와 공예가를 데려왔어요. 새 건물들이 착착 지어졌지요. 17세기 페르시아를 다녀와 여행기를 남긴 프랑스인 샤르댕(Chardin)은 이스파한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사원 162개, 대학 48개, 여관 1802개, 공중목욕탕 273개가 있고 인구가 100만에 달한다.'

그 결과 아바스 1세 시절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Nesf-e Jahan·네스페 자한)'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세상의 절반을 줘도 이스파한과 바꾸지 않겠다는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었죠. 이스파한은 여러 민족과 종교를 아우르는 국제도시로 발전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맘 광장'

이스파한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맘 광장'이 있습니다. 이스파한 심장부에 자리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 광장입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왕궁의 문인 '알리 카프(숭고한 문)', 동쪽에는 아바스 1세의 장인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셰이크 로트폴라흐 사원'이 있지요. 그리고 남쪽에는 이맘 사원과 자미아 사원, 북쪽에는 게이사리예 바자르(재래시장)가 있습니다. 광장이 2층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다는 게 특징이죠. 오늘날에도 광장 주위로 늘어선 건물들의 채색 타일과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는 당시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기원전 페르시아서 시작된 '폴로'… 실크로드 따라 동아시아로 전파]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그림〉은 사파비 왕조 시절 '폴로' 경기장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현재 광장에는 분수와 정원이 조성돼 있지만 남북으로 양쪽에 각각 두 개씩 대리석 골 기둥이 남아 있어요.

 /위키피디아

 

폴로는 '말을 타고 하는 하키'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흔히 영국 상류층이 즐기는 스포츠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페르시아에서 시작됐다고 해요. 기원전 페르시아에서 기마병 훈련법으로 도입됐고 이후 인기를 얻으면서 페르시아 여성도 폴로 경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폴로는 서쪽으로는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고, 동쪽으로는 비단길을 따라 동아시아에도 '격구(擊毬)'라는 이름으로 퍼졌어요.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1.23 오키나와, 원래 일본땅 아니었다… 450년간 독립왕국 유지

[류큐 왕국]

15세기, 수도 슈리성 세우며 탄생… 동아시아 무역으로 경제적 발전 이뤄
일본, 메이지 유신 때 영토 강제 흡수… 淸과의 외교 단절, 왕 강제 이주 시켜
1879년 멸망하며 오키나와현에 편입

지난해 10월 31일 일본 오키나와의 유명 관광지인 슈리(首里)성에 불이 나 주요 건물 7채가 소실됐습니다. 슈리성은 오키나와의 옛 독립국인 류큐(琉球) 왕국(1429~1879)의 수도 성으로, 1879년 류큐 왕국이 멸망해 오키나와현에 편입되기 전까지 번성했던 곳입니다. 최근 일본 연구진은 3D 모델링 기술을 활용해 슈리성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어요.

슈리성 화재를 계기로 류큐 왕국의 역사도 재조명되고 있어요. '밝게 빛나는 구슬 같은 섬'이라는 의미의 류큐 제도는 일본과 대만 사이에 동서로 약 1000㎞, 남북으로 약 400㎞를 잇는 160여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류큐 왕국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운명을 겪었을까요?


◇15세기 건국… 동아시아 무역으로 전성기

류큐 군도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국가 형태는 10~11세기 무렵 '아지(按司)'라고 불리던 족장들이 이끌던 부족국가였어요. 섬에 살던 원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점차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각 지역에 부와 권력을 가진 아지가 생겨났죠. 아지들의 세력 다툼 끝에 14세기경 주잔(中山), 호쿠잔(北山), 난잔(南山)이라는 세 왕국이 생겨났어요. 이 중 세력이 가장 강했던 주잔이 다른 두 나라를 차례대로 정복했고, 수도 슈리성을 세우며 류큐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슈리성은 일본 오키나와현의 옛 독립국 류큐 왕국의 수도 성입니다. 193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됐지만 태평양전쟁 때 소실됐고, 1992년 이후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슈리성터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어요. /게티이미지뱅크

 

1430년 명나라의 선덕제는 삼국 통일을 이끈 주잔의 하시(巴志)에게 '쇼(尙)'라는 성씨를 내리고 국왕으로 책봉했어요. 하지만 그의 사후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고, 당시 관리였던 가나마루(金丸)가 새 왕으로 즉위해 자신을 쇼엔(尙円)이라고 칭합니다. 이 시기부터 이전 제1 쇼씨 왕조와 구분해 제2 쇼씨 왕조라고 부릅니다.


류큐 왕국의 황금기는 제2쇼씨 왕조의 3대 왕인 쇼신(尙眞)왕 때였어요. 당시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시행해 해외 무역을 제한하고 있었는데, 류큐 왕국은 명과의 조공 관계를 통해 이 제한에서 벗어났어요. 이를 통해 명나라와 조선·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무역을 통해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흡수

 

류큐 왕국 역시 당시 격변하던 동아시아 정세에서 예외가 될 순 없었습니다. 첫 위기는 1609년 사쓰마번(현재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현) 세력의 침략이었습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등 국내외 전쟁에 참전하면서 겪게 된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류큐 왕국을 노렸어요. 대외 전쟁 경험이 없던 류큐 왕국은 사쓰마 군대 앞에 맥없이 무너졌죠. 사쓰마 군대는 왕과 왕자 등 100여명을 인질로 잡고, 매년 쌀 8000석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요.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류큐 왕국은 독립국의 지위는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868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며 상황이 더욱 악화됩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근대화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1872년 타이완 점령에 나서면서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재편했고, 이어 1875년에는 청나라와 외교 관계를 단절할 것을 강요했죠. 1879년 일본은 류큐의 마지막 왕인 쇼타이(尙泰)왕을 후작에 봉하고 왕세자와 함께 도쿄로 강제 이주시켰어요. 이어 오키나와현을 설치하고 류큐 를 편입시키면서 류큐 왕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유구국'으로 기록]

우리나라와 류큐 왕국의 교류는 고려 시대부터 시작됐어요. '고려사'에는 1389년 류큐국이 왜구에게 붙잡혔던 고려인을 보호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 1955년 오키나와현에서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어요.

조선 시대에는 류큐 왕국과 관련된 기록이 더 많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을 뜻하는 '유구국'이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1416년(태종 16년)에는 류큐에 사신을 파견해 왜구에 잡혀갔던 조선인 44명을 데려왔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두 나라는 꾸준히 사신과 예물을 보내며 교류했지만, 류큐 왕국이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은 이후엔 교류가 거의 끊긴 것으로 보입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1.29  1818년 의회가 추대한 '칼 요한 14세' 즉위… 절대왕정 쇠퇴

[스웨덴의 입헌군주제]

'북방의 사자'로 불리던 구스타브 2세, 군사·정치적 능력으로 절대왕정 수립
칼 13세 이을 왕위 계승자 없자 의회가 직접 칼 요한 14세를 지명
그후 정치적 권한 점차 축소됐죠

스웨덴은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왕실 유지 비용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기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요. 그래서인지 스웨덴 왕실은 왕족 규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최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자 해리 왕손이 왕실로부터 '독립 선언'을 해 화제가 됐지만, 이보다 먼저 지난 2013년 스웨덴 국왕인 칼 구스타브 16세의 막내딸인 마들렌 공주 부부가 스스로 지위를 포기해 왕족에서 제외됐어요. 스웨덴 왕실은 어떤 변화를 거쳐 현재와 같은 입헌군주제로 바뀌게 됐을까요?


◇구스타브 2세가 절대 왕정 수립

17세기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절대왕정이 성립되었어요. '북방의 사자'로 불렸던 구스타브 2세(재위 1611~1632)가 즉위하면서 스웨덴은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죠.

 

 스웨덴 왕실의 지위는 왕과 의회의 힘겨루기에 따라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했습니다. 왼쪽은 스웨덴의 절대 왕권을 수립한 구스타브 2세의 초상화이며, 오른쪽은 의회에 의해 선출된 칼 요한 14세(베르나도트)의 초상화입니다. 베르나도트 왕조는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착하면서 왕권이 대폭 축소됐죠. /위키피디아

 

그는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능력도 뛰어났어요. 효율적인 과세와 부역을 위해 지역별로 인구조사를 벌이고, 귀족들이 중세 시대에 누리던 특권을 회수하는 대신 국가의 요직을 맡기며 근대적 관료제를 도입했어요.

절대왕정기의 절정을 찍은 것은 구스타브 2세의 조카 손자인 칼 11세(재위 1660~1697) 때였습니다. 그는 4세에 왕이 되어 어머니와 스웨덴 귀족들의 내정 간섭을 받았어요. 하지만 계속된 전쟁 패배와 내정 실패로 16세 때 직접 정권을 잡으면서 전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죠. 1680년 의회에서 "국왕은 원하지 않으면 원로원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선언을 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어요.


◇엘레오노라 여왕, 의회와 타협

그러나 스웨덴 왕실은 1700~1721년 대(大)북방전쟁을 기점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1700년 작센-폴란드와 덴마크-노르웨이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맹을 맺고 스웨덴을 침공했어요. 칼 11세에 이어 즉위한 칼 12세는 열심히 싸웠으나 전사했고 스웨덴은 패배했어요.

칼 12세는 아들 없이 사망해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조카 칼 프레드리크가 서로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다투게 됐습니다. 당시 왕위 계승법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왕위를 계승할 권리는 없었어요. 이에 엘레오노라는 절대 권력을 포기하고 의회에 왕위 계승권자 결정권을 넘기는 대신 자신을 여왕으로 선출해 줄 것을 요구했죠.

1718년 선출된 엘레오노라 여왕은 2년 뒤 남편을 왕위에 올려 프레드리크 1세(재위 1720~1751)로 만듭니다. 프레드리크 1세는 즉위하면서 '통치조직법'을 채택해 시행하는데, 이 법에 따르면 의회 내 상임위원회 요구로 왕이 원로원을 구성하고, 중요한 국무는 원로원에서 결정해야 했어요. 즉 의회가 왕권을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통치조직법은 1720년부터 1772년까지 시행되는데, 스웨덴 역사에서 이 시기를 '자유시대'라고 합니다.

이후 스웨덴 왕들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대표적 인물이 덴마크와 러시아를 물리치고 곡물자유무역 등 진보적 경제정책을 펼치며 스웨덴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구스타브 3세(재위 1771~1792)죠. 당시 스웨덴은 귀족 정당과 비(非)귀족 정당 간 대립이 극심했어요. 구스타브 3세는 이를 기회로 친위 쿠데타를 벌여 1772년 원로원 의원들과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새 헌법을 만들면서 절대 왕권으로 회귀합니다.


◇의회 추대로 세워진 베르나도트 왕조

그러나 구스타브 3세를 계승한 동생 칼 13세(재위 1809~1818)가 왕위를 계승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스웨덴 의회가 다시 한 번 후계자를 지명하게 됐습니다. 의회는 나폴레옹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장군이었던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를 왕세자로 선택했죠. 1799년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즉위 이후 유럽 대부분은 나폴레옹이나 그의 형제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측근 베르나도트를 왕위에 앉히면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1818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리는 국왕 칼 요한 14세로 즉위하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의회에 많은 양보를 하게 되죠.

이후 베르나도트 왕조의 왕들은 부단히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20세기 들어 의원내각제가 정착되면서 왕의 정치적 권한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어요. 1974년엔 개헌을 통해 국왕이 갖고 있던 총리와 각료 임명권마저 의회로 넘어갔죠. 그 뒤로 스웨덴 국왕은 의회 개회식 때 새 회기의 시작을 선언하거나 대외적 국가 홍보를 하는 등 비정치적 역할만 맡게 됐습니다.

윤서원·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2.06 1788년 英이주민이 시드니 땅 밟은 날… 호주 역사의 시작

[호주의 날(Australia Day)]

1770년 영국인 제임스 쿡이 탐사… 17년 뒤 영국 죄수들 유배 보내 개척
처음 도착한 곳은 동부 '보타니만'
땅이 척박해 가까운 시드니에 정착… 도착한 1월 26일은 호주 최대 기념일

 

지난 1월 26일은 호주의 최대 기념일 중 하나인 '호주의 날(Australia Day)'이었어요. 호주의 날은 1788년 1월 26일 영국 함대 선원들과 영국계 이주민들이 호주 동부 지역에 최초로 상륙하여 오늘날의 호주 최대 도시인 시드니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개천절과 같은 날이라고 볼 수 있어요. 호주 역사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날은 과연 어떠한 날일까요?


영국인 제임스 쿡, 1770년 호주 대륙 본격 탐사

17~18세기 서양 세력은 영토 확장을 꿈꾸며 대륙 탐사에 나섰어요.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력을 키워가던 영국은 또 다른 새 대륙을 발견해 영국에 편입시킨다면 대영 제국의 위상을 더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어요.

▲ 영국 화가 알제논 탈메이지가 그린 '호주 건국'(The Founding of Australia). 영국 해군 대령 아서 필립과 군인들이 1788년 1월 26일 호주 시드니 지역에 정착해 영국 국기를 올리는 모습입니다. 이후 영국계 이민자의 후손들은 이날을 호주 역사가 시작된 날이라고 여기고 '호주의 날'로 기념하게 됐습니다. /위키피디아

 

그래서 영국은 당시 유능한 군인이자 항해사였던 제임스 쿡 해군 대위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호주 대륙 탐사를 시작하였고, 마침내 1770년 4월 20일 호주 동부 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쿡과 동행했던 인물 중에는 식물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호주 동부에서 채집한 귀중한 식물 표본들을 기념하기 위해 도착한 만(灣)에 보타니(Botany·식물학)만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또 쿡은 보타니만이 있는 대륙의 동쪽 지역을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명명했습니다. 두 지역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죠.


죄수 유배지로 삼아 영국인 이주 시작

호주 대륙에 영국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호주 발견 후 10여 년이 지나서였어요.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하며 사회의 부는 늘어났지만, 계급 차이로 갈등은 심화됐어요. 이는 급격한 범죄율 증가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점차 감옥이 부족해지자 새로운 처벌 방식으로 유배가 논의되었어요.

 

이때 제임스 쿡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호주 대륙을 탐험했던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는 정부에 뉴 사우스 웨일스의 보타니만을 죄수를 유배 보낼 수 있는 지역으로 제안하였어요. 그는 이곳이 원주민들이 공격할 가능성이 작고, 무엇보다 유럽인들이 정착한 다른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당시 명성 높은 군인이었던 아서 필립 해군 대령은 남녀 죄수와 군인, 선원 등 1500여명의 사람과 함께 11척의 배를 나눠 타고 1787년 5월 13일 출항했습니다. 이들은 약 8개월 뒤인 1788년 1월 20일 보타니만에 닻을 내렸어요.


시드니 정착일을 호주 역사 시작으로 여겨

그러나 보타니만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어요.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 많았고, 항구에 함선 정박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1월 21일 아서 필립과 몇몇 군인들은 북쪽으로 약 12㎞ 떨어진 포트 잭슨을 며칠간 살펴본 뒤, 이곳이 살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그의 판단에 따라 함대 본진도 1788년 1월 26일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아서 필립은 이 지역의 이름을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서 영국의 모든 해외 식민지 관리를 맡고 있었던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 시드니로 지었는데, 지금까지도 호주에서 가장 큰 도시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1월 26일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초반부터였어요. 뉴 사우스 웨일스의 주지사가 처음 1818년 이날을 공식적인 날로 기념하였고, 후에는 호주의 모든 지역에서 호주의 날을 기념하였어요.


[호주 원주민들에겐 '침략의 날']

호주의 날은 영국계 이민자 후손들에게는 뜻깊은 날이지만, 호주 원주민들에게는 정반대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호주의 날은 영국인이 75만여 명이나 되는 원주민의 존재를 무시하고 호주 대륙을 차지한 '침략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원주민은 이민자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급격하게 인구가 줄었고, 원주민 아이들은 '문명화 정책'이라며 강제로 백인 가정이나 선교 기관에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원주민 후손들은 낮은 소득과 약물중독 등에 시달리면서 사회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이런 역사를 고려해 호주의 날을 첫 의회 개회일(1901년 5월 9일) 등 다른 날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2.12 공화주의자와 파시스트의 내전… 50개국의 국제전으로 번져

[스페인 내전]

1936년 인민전선에 정권 넘어간 후 프랑코 장군과 군부 등이 반란 일으켜여기에 나치·무솔리니까지 가세했죠시민과 50개국이 인민전선 도왔지만 결국 1939년 프랑코 군대에 항복전쟁 중 시민 학살 소식 들은 피카소… 그 참상 알리려 '게르니카' 그렸대요

지난 1월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작품 '젊은 여인의 두상'(1906)을 몰래 스페인에서 스위스로 반출하려던 금융인 하이메 보틴(83)이 670억원이 넘는 벌금형을 받았어요. 보틴은 1977년 영국 런던에서 이 그림을 사들여 스페인에 들여왔죠. 그런데 스페인 정부는 이 그림이 국가의 중요 문화유산이어서 다시 외국에 가져갈 수 없다며 이런 강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피카소가 스페인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보여준 사건이죠.

피카소 작품은 미학적 가치뿐 아니라, 그가 지녔던 정치적 소신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대표작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1936~1939)의 참상을 통해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아낸 그림입니다. 스페인 내전은 어떤 사건이며,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어떻게 그리게 됐을까요?


◇계급·이념 갈등에서 시작된 내전

스페인은 20세기 초까지도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어요. 교회세력과 귀족, 군부가 부와 토지를 독점하고 있어 빈부 격차가 극심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계급 간 대립이 심화하자 극단적인 무정부주의나 파시즘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 사회는 점점 불안해졌어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 스페인 내전 당시 북부 도시 게르니카가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되면서 고통받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거대한 캔버스 안에 대상을 회색 조의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해 혼란스럽고 비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소피아왕비 예술센터

 

그 와중에 1936년 선거를 통해 보수적인 정권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 공화파, 공산당 등이 힘을 합친 인민전선의 손에 정권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인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인민전선이 기득권층에 불리한 개혁 정책들을 실시했기 때문에 지주, 자본가, 귀족, 군부 등은 프랑코의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면서 쿠데타는 내전으로 확대됩니다.


50여개국 가세한 국제전으로 번져

여기에 이웃 국가까지 가세합니다. 파시스트(전체주의)를 내세운 나치 독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과 포르투갈이 프랑코를 지원했죠. 반대편에선 소비에트 연방과 각국의 반파시즘 인사들이 의용군 집단인 국제 여단을 만들어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했어요. 내전이 국제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겁니다. 1939년 전쟁이 막을 내릴 때까지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자원한 4만여 명이 국제 여단에 참여했어요.

전쟁은 프랑코 반란군의 승리로 금방 막을 내릴 줄 알았으나, 시민들이 정부를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해 싸우면서 장기화했어요. 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 자금과 군대를 적극적으로 지원받은 프랑코에 비해 인민 전선은 물적으로나 인적으로나 열세에 있었습니다.

결국 1939년 프랑코 장군과 우익 정당 연합체인 팔랑헤 군대가 마드리드에 입성하고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항복합니다. 3년 동안 스페인을 둘로 갈라지게 했던 내전이 끝난 것이죠. 전쟁 희생자 수는 40만~60만명에 달하며, 스페인 전 지역이 황폐화됐습니다. 내전이 끝나고서도 인민전선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숙청되는 등 피바람은 계속됐습니다.


세계에 내전의 참상 알린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피카소는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될 작품을 의뢰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도시 게르니카가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15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요. 그는 전쟁의 참상과 나치의 잔혹성을 알리기 위해 '게르니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349×775㎝ 크기의 거대한 벽화에는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상처입은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어요. 구체적인 참상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정형적이지 않은 대상 표현과 회색 조의 색상이 혼란스럽고 괴기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림은 이후 세계 곳곳에서 전시되면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죠.


[내전에서 이긴 프랑코, 36년간 스페인 철권통치]


 

프란시스코 프랑코〈사진〉는 1892년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로코의 게릴라전에서 활약해 명성을 얻었고, 승진을 거듭해 33세에 장군으로 진급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최연소 장군이었죠.

반란군의 승리를 이끈 프랑코는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한 1939년 4월부터 1975년 1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6년간 스페인을 통치합니다. 1938년 자신이 원하는 모든 법률을 공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스스로 부여했고, 반프랑코 세력으로 분류되는 조직과 개인을 탄압했습니다. 프랑코의 철권통치가 끝난 후 그의 권한을 이어받게 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신(新)헌법을 제정하고 의회 개혁을 이룩해 스페인을 민주화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2.19 아즈텍 침략한 스페인, 1520년 원주민 반격에 참패

['슬픈 밤' 전투]

16세기 스페인 귀족 출신 코르테스, 現 멕시코 지역 '아즈텍 제국' 침략
아즈텍인들은 그를 신으로 여겼죠
스페인군이 아즈텍 귀족 살해하자 총·칼에 겁먹었던 아즈텍인들 폭발
스페인군 수백명 죽고 후퇴했죠

수십 년 전 멕시코에서 발견된 금괴가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약탈하려던 아즈텍(Aztec) 제국의 보물인 것으로 최근 확인됐어요. 지난달 10일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는 1981년 멕시코시티 건설 현장에서 발견된 금괴 성분을 분석하고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연구진은 이 금괴가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1485~1547)가 1520년 아즈텍 제국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후퇴할 때 가져가려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어요. 이날 일어난 전투를 스페인에선 '슬픈 밤(스페인어로 La Noche Triste)'이라고도 부르는데요,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진 걸까요?


침략자를 신으로 여긴 아즈텍

16세기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 강자로서 전성기를 누렸어요. 식민지 확대를 통해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죠. 그 중심에 섰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에르난 코르테스였어요. 스페인 귀족 출신인 그는 쿠바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참여하며 입지를 높여갔고, 이후에는 직접 새 식민지를 찾는 원정대를 이끌었습니다. 아즈텍 문명이 존재하던 지금의 멕시코를 새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1520년 아즈텍 원주민과 스페인 침략군 사이에 벌어진 '슬픈 밤' 전투를 묘사한 그림. 전투에서 패배한 스페인군은 수백 명의 병사가 희생됐고, 아즈텍에서 가져오려던 엄청난 보물도 모두 잃게 됐습니다. 이때의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슬픈 밤'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519년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그곳을 침략했을 때, 아즈텍 문명은 화려하게 빛나던 시기였어요. 코르테스는 멕시코 동남부 연안에 상륙한 이후 여러 전투에서 이기면서 내륙까지 진출했고, 마침내 1519년 11월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했어요.

당시 아즈텍 제국의 황제였던 목테수마는 테노치티틀란을 둘러싼 호수를 가로지르는 둑길까지 나와 코르테스 일행을 맞이했어요. 아즈텍 제국에는 먼 옛날에 떠났던 신이 다시 돌아와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져 왔는데, 코르테스를 바로 그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코르테스도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세력을 키워갔어요.


귀족 살해 사건으로 반발 커져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목테수마와 코르테스, 둘의 평화 관계는 깨지게 됐어요. 현지인들이 해안 지역에 남아 있던 스페인 병사들을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코르테스의 군대는 권력과 재물을 탈취했어요. 이어 코르테스는 무력으로 목테수마를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그러다 1520년 4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쿠바 총독이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자신을 견제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코르테스를 잡기 위해 멕시코로 진압군 1400명을 파견하였어요. 코르테스는 이들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목테수마를 감시할 병력 일부만을 남긴 채 나머지를 이끌고 나섰어요. 결국 그는 진압군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코르테스가 잠시 비운 사이 테노치티틀란에 남아 있던 스페인 병력이 축제 기간 중 아즈텍 귀족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스페인군의 총과 말, 칼에 겁먹어 참고 있던 아즈텍인들은 폭발했어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코르테스는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탈출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감행했어요.


신대륙에서 겪은 가장 큰 패배

1520년 6월 30일 자정 무렵, 코르테스의 군대는 금과 은 등을 챙겨 몰래 도시 밖으로 나왔어요. 둑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동하던 중 강에서 물을 긷던 한 아즈텍 여인이 이들을 발견하고 적들이 도주하고 있다고 소리쳤어요. 이 소식을 들은 아즈텍인들은 카누를 타고 이들을 사방에서 에워쌌어요.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을 향해 창을 던졌고, 코르테스 군대는 이에 맞서 총도 쏘았어요. 다음날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많은 희생이 발생했지요. 코르테스 군대 중에는 자신들이 나르던 금의 무게에 못 이겨 물속으로 가라앉은 병사도 많았어요. 일부 병사는 피신 길에 오르지도 못한 채 아즈텍인들의 손에 잡혀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고 말았어요.

코르테스를 포함해 도주에 성공한 일부 스페인인들은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스페인 병사 수백 명과 많은 원주민 동맹군을 잃었어요. 많은 이의 희생뿐만 아니라 가지고 오려던 엄청난 보물들을 잃은 데 대한 슬픔으로 이후 스페인에서는 이 사건을 '슬픈 밤'으로 불렀어요. 슬픈 밤은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진 이래, 유럽인들의 가장 큰 패배이자 원주민들의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2.26   문화대혁명 광기에 휩쓸렸던 '마오쩌둥의 아이들'

[홍위병]

1966~1976년 벌어진 '사회 개조 운동'… 학생 1000만명이 마오쩌둥에 호응
붉은 완장 차고 무리 지어다니며 개혁 주장한 사람들 끌고나와 박해
마오쩌둥, 상황 극단적으로 치닫자 홍위병들 지방 농장으로 보내 수습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발생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붉은 완장을 찬 방역 요원들이 중국 국민을 감시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중 일부가 방역 작업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동영상 등을 통해 퍼지면서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의 홍위병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홍위병은 누구이고 문화대혁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대약진운동 실패로 개혁파 득세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은 1958년 '대약진운동'이라는 경제성장 계획을 야심 차게 시작합니다. 농촌마다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만들어 생산과 소유의 공동화를 꾀하고, 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기업을 국유화했어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공동 생산과 배급제의 여파로 생산력이 떨어지게 됐죠. 여기에 흉작까지 겹치며 3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요.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1959년 국가주석 자리를 내려놓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되지요.

 1966년 중국 베이징에서 홍위병들이 붉은색 표지의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있어요.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고등학교와 대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숫자가 1000만명을 넘었습니다. 이들은 옛 사상과 문화를 파괴해야 할 낡은 관습으로 여겼고, 붉은 완장을 차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교사와 지식인들을 숙청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개혁파는 자본주의 경제를 일부 도입해 급진적 사회주의에서 일부 후퇴합니다. 개인의 토지 소유와 농산물 판매를 인정해주면서 농민들의 의욕과 생산력이 점차 올라가게 됐지요. 개혁이 호평받자 마오쩌둥은 권력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해요.


문화대혁명의 1000만 행동 대원

1966년 마오쩌둥은 국가와 사회의 구조, 개개인의 정신을 개조하는 새로운 작업을 고안합니다. 이를 위해 '옛 사상, 옛 문화, 옛 풍속, 옛 관습'을 자본주의와 봉건주의의 유물로 규정하고 '4구(舊) 타파운동'을 시작하지요.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의 시작입니다.

낡은 것들을 몰아내고, 기존 체제의 권위에 대항하라는 메시지는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칭화대와 베이징대 등 대학을 중심으로 개혁파에 맞서고 마오쩌둥을 떠받들기 위해 '홍색 정권을 보위하는 병사'라는 뜻의 '홍위병(紅衛兵)' 조직이 결성됩니다. 이들은 마오쩌둥과 함께 8차례에 걸쳐 대규모 집회를 열고 점차 전국적으로 학교에 혁명 조직이 결성되지요. 홍위병에 가담한 학생 수는 무려 1000만명이 넘습니다.

홍위병은 붉은 완장을 차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각 지역 당 지도자들과 교사, 지식인들을 길거리에 끌고 나와 마구 돌팔매질을 하거나 몽둥이로 때렸어요. 최고 권력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진 고초를 겪고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지요. 그뿐만 아니라 홍위병은 유명한 식당도 자본주의적이라면서 부수거나 죽과 만터우(중국식 찐빵)만 팔도록 하고, 혁명을 상징하는 빨간색이 신호등에선 정지신호로 쓰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며 이를 전진 신호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아직 정치적 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홍위병의 행태는 점차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홍위병으로 인한 피해가 갈수록 커지자, 기존 당 지도부는 적위대를 내세워 이들에게 맞섰고 각 지역 농민들도 홍위병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은 점차 내란으로 번지게 됩니다. 다시 권력을 잡게 된 마오쩌둥은 1968년 홍위병에 가담했던 청년들을 지방 농장으로 내려 보내는 하향운동을 실시해 사태를 수습합니다. 이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 역시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죠.


'현대판 분서갱유'로 이어져

10년 동안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문화적 피해도 극심했습니다. 건물·서적 등 역사 유산들도 홍위병에겐 파괴해야 할 구시대적 산물이었기 때문이죠. 중국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공자의 묘가 파헤쳐지고 수많은 유교 경전이 소실되었어요. 10년간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전체 손실액이 1949년 중국 건국 뒤 30년 동안 사용한 사회 기반 시설 투자액의 80%에 달하는 5000억위안에 달한다는 추계도 있습니다. 일부 중국 역사가는 문화대혁명을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시황제가 사상 통제를 위해 농서 등을 제외한 각종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 수백명을 생매장한 '분서갱유'에 빗대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묘사합니다.

일부 문화재는 극적으로 피해를 면하기도 했습니다. 17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항저우의 사찰 영은사(靈隱寺)는 저장대학 학생들의 보호를 받아 큰 피해를 피할 수 있었어요. 당시 문화대혁명에서 온건한 입장이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자신의 능력 안에서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했어요. 600여년간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 궁전이었던 자금성은 저우언라이가 배치한 군대 덕에 완전한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3.04 흑인은 시민 아니라는 판결, 남북전쟁 도화선됐죠

[미국 드레드 스콧 판결]

남부는 대농장, 북부는 상공업 발달… 노예제에 대한 경제적 입장 차 뚜렷

남부 노예 스콧, 자유 주장하며 소송
대법원 "흑인은 재판 청구권 없다"
시민들, 대선서 야당 후보 링컨 선택

남부, 연방 탈퇴하고 독립국 세워 1861년 북부 공격하며 전쟁 시작

지난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한국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것을 공격했어요.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선셋 대로'와 같은 훌륭한 미국 영화가 얼마나 많으냐"고 덧붙였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언급한 것은 이 영화가 1940년 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8관왕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이 영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남북전쟁(1861~1865)을 배경으로 합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주원인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는데요, 1857년 연방대법원에서 열린 '드레드 스콧 판결'로 이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죠. 노예제로 인한 갈등은 왜 일어났으며, 드레드 스콧 판결은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경제, 문화적 배경 달랐던 남과 북

우선 노예제도에 대한 남북의 입장 차이가 일어난 원인을 살펴볼게요. 남부에서는 대농장을 바탕으로 한 농업이 발달했는데 식민지 초기에는 담배를,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에는 면화를 주로 재배했어요. 면화 재배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남부 농장주들은 인건비 부담이 큰 노동자보다는 싼 가격이나 공짜로 쓸 수 있는 노예를 선호했죠.

 

 미국 미주리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의 초상화. 그는 노예제가 금지된 일리노이와 위스콘신에 거주할 때 자유민이 되었다며 주인을 상대로 자유 신분을 인정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어요. 그러나 연방대법원이‘흑인은 재판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고, 이로 인해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며 남북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위키피디아

 

반면 북부의 많은 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상공업 중심으로 성장해 자유로운 임금노동자가 노동력의 중심이 되었어요. 북부는 임금노동자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노동자가 산업예비군으로 형성되기를 바랐어요. 종교적 측면에서도 남부는 개인적 경건함에, 북부는 사회 개혁에 중점을 두는 등 남부와 북부 사이 문화와 인식 차이도 존재했죠.


서부 편입 과정에서 남북 갈등 격화

이러한 남부와 북부의 상반된 모습 속에서 서부가 개척되고 그곳이 미연방으로 편입돼 가며 상황은 급변했어요. 서부의 새로운 주를 어디로 편입하는지가 곧 연방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권한을 남부와 북부 중 어느 곳이 주도하느냐와 직결됐죠. 1819년까지 노예주(남부)와 자유주(북부)는 각각 11개로 세력 균형을 유지했으나 인구 6만 이상의 서부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을 신청하자 지역 간 갈등이 시작됐어요.

 

 

그러던 중 1854년 의회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통과되며 대립의 불씨가 타올랐어요. 이는 이주민이 급격하게 증가한 미주리, 아이오와 서부 지역을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두 지방으로 나누고 노예제 허용 여부는 주민 투표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이후 남쪽 캔자스에서 실시된 주민 투표에서 노예주가 되는 것으로 결정이 났는데, 이것이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분노한 자유주 옹호론자들은 투표 결과를 무시하고 자유주로 연방 가입을 추진했어요. 이 과정에서 노예주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서로 공격하는 '피의 캔자스'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드레드 스콧 판결로 연방 분열

이 와중에 드레드 스콧이라는 흑인 노예가 자신의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드레드 스콧은 군의관인 주인을 따라 거주지를 자주 옮겼어요. 주인과 함께 고향인 미주리로 돌아온 후 예전에 잠시 머물렀던 일리노이주와 위스콘신주가 자유주였기 때문에 그때 이미 자유민이 됐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에요. 1857년 대법원은 원고인 드레드 스콧에 대해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흑인은 헌법상 연방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내용의 '독단적이고 보수적인' 판결문으로 여론은 싸늘해졌어요. 이후 이 판결을 위해 당시 대통령이 판사를 회유하였다는 사실마저 드러나자 여론은 정부에 등을 돌렸고 당시 신생 정당이었던 공화당은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어요.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의 대표 격인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의회는 연방 탈퇴를 결의했어요. 이듬해 2월 1일에는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뒤를 따랐어요. 2월 4일 연방을 탈퇴한 주들은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독립국을 세우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어요. 미국은 건국 84년 만에 공식적으로 분열되었고 1861년 4월 남부 연합군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3.11 서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게르만 용병 반란으로 폐위

[로물루스 황제]

로마 장군 아버지의 권력으로 제위 올랐지만 통치 활동 거의 못 해
'소년 황제' 아우구스툴루스로 불려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 반란… 10개월 치세 끝… 서로마제국도 붕괴

지난달 17일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로마인의 광장)' 지하에서 기원전 6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이 발견되었어요. 일부 고고학자는 이 석관이 기원전 8세기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로물루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로물루스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라피스 니제르(검은 석판)'와 가까운 곳에 있었거든요. 로물루스가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로물루스는 우리나라의 단군왕검처럼 로마의 상징적인 인물이죠. '로마'라는 도시명도 로물루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이름도 로물루스였습니다. 고대 로마의 끝과 중세 서유럽의 시작의 분수령이 되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재위 475~476)죠. 그가 다스렸던 서로마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요?


15세에 즉위한 소년 황제 로물루스

서로마제국이 무너졌던 5세기는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였습니다. 서쪽에서 온 훈족에 밀린 게르만계의 서고트족이 4세기 후반부터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제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당시 로마는 대지주에 예속되는 소작농들이 많아지고 자영농 시민군이 줄어들어 로마 군대에서 용병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어요. 게르만의 각 부족은 로마의 용병으로 활약하고 부족국가를 세우며 로마에 스며들어 갔죠. 로물루스의 아버지인 오레스테스의 집안도 게르만족의 피가 흐릅니다. 475년 서로마 군대를 장악한 장군이었던 오레스테스는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재위 474~480)를 쫓아내고 15세였던 자신의 아들 로물루스를 새 황제로 옹립합니다. 로마 창건자의 이름을 계승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제위에 올랐지만 동로마제국은 그를 공식적인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지도자가 된 어린 로물루스를 조롱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아닌 '아우구스툴루스'로 불렀어요. 아우구스툴루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 즉 '소년 황제'라는 뜻입니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초상이 새겨진 장식용 메달. 15세 나이로 황제에 오른 로물루스는 동로마제국에서 정식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고, 백성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의 '아우구스툴루스'로 불렀어요. 결국 로물루스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0개월 만에 게르만족 군대의 반란으로 폐위되지요. /위키피디아

 

402년부터 서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중심으로 오레스테스는 군대의 힘을 이용해 아들 로물루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노력합니다. 아버지의 섭정을 받은 로물루스는 황제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기념비를 세우는 등의 통치 활동은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로마, 밀라노, 라벤나 등지에서 발행됐지요. 그의 치세는 10개월 정도로 짧았기에 기록도 많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럼에도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라고 하면 보통 로물루스를 떠올립니다.


서로마제국의 붕괴와 중세의 시작

476년 로마 내 게르만족 군대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게르만족 용병 대장이었던 오도아케르는 476년 8월 오레스테스를 체포해 처형했어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도 폐위됩니다.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는 죽이기에는 너무 어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으로 보냅니다. 이후 로물루스는 연금을 받으며 생활했다고 하나 정확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아요.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종주권을 인정해 서로마 황실 징표가 되는 물품들을 동로마로 보냈고 동로마제국은 오도아케르를 총독으로 인정했죠. 이로써 기원전 753년부터 천 년 넘게 이어온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막을 내립니다.

사실 로마는 오래전부터 붕괴의 조짐이 있었어요. 황제권이 동요하면서 계승 분쟁과 군대의 개입은 끝없는 내분을 낳았어요. 지배층은 지위를 이용해 면세 특권으로 더 부자가 됐죠. 반면 점점 많은 세금을 내야 했던 자영농들은 몰락해 소작농이 되었어요. 관료의 부패, 악화(惡貨) 주조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로마의 시민들은 지쳐 있었죠. 오도아케르가 이끈 게르만족이 침입했을 때 충성심으로 로마를 지킬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았어요.


[로마 건국 시조 이름도 로물루스]

로마 건국신화에서 로마의 남동쪽 지역 '알바 롱가'의 공주이자 사제였던 레아 실비아가 신(神) 마르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가 바로 로물루스와 레무스입니다. 레아 실비아의 삼촌인 아물리우스 왕은 조카들이 훗날 왕위를 위협할까 봐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 강가에 버립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형제는 훗날 힘을 합쳐 아물리우스를 왕위에서 몰아냅니다. 후에 두 형제는 왕위를 놓고 다투게 돼요. 결국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팔라티움 언덕에 도시국가가 세워집니다. 이것이 로마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레아 실비아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1866년 발견된 소행성에 '소행성 87 실비아'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2000년대 들어오면서 이 소행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 2개나 발견되었어요. 이 위성들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이 붙여졌지요.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3.18 티베트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나라, 763년엔 장안도 점령

[토번 왕국]

티베트 부족들 6세기 토번 왕국 수립… 왕권·군사력 강화한 송짼감뽀 국왕
청혼 거절 빌미로 당과 싸워서 승리… 당 태종의 공주 다섯째 왕비로 맞아
670년엔 기마군단이 10만 당군 격파

 

지난 10일은 중국 정부의 티베트 강점에 항의해 티베트인들이 항쟁을 벌인 지 6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50년 중국 공산당 정부는 군인 수천명을 티베트로 파병해 점령하였고, 티베트인들은 1959년 3월 10일 티베트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어요. 하지만 중국이 병력을 대거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속해 있는 티베트이지만, 그곳에 한때는 중국을 위협했던 토번 왕국이 존재하기도 했어요. 과연 토번은 어떠한 나라였을까요?


티베트 고원의 최강국으로 발전한 토번

토번 왕국 이전 티베트인들은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다양한 부족이 전쟁을 통해 통합되면서 점차 큰 규모의 국가가 만들어졌어요. 그리하여 6세기 즈음에는 서부 티베트 지역의 샹슝, 야루짱부강(江) 북쪽의 숨파와 남쪽의 야루라는 세 큰 나라가 존재하게 됐습니다. 그중 야루는 농업과 수공업, 교역의 발달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근 지역을 병합하면서 인구 20만의 토번 왕국으로 발전했어요.

 토번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33대 짼뽀 송짼감뽀(가운데)의 불상. 왼쪽은 그의 넷째 왕비인 브리쿠티 데비이며, 오른쪽은 다섯째 왕비인 문성공주입니다. 송짼감뽀는 당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것을 빌미로 당군과 결전을 벌여 승리했어요. 그 결과 송짼감뽀의 아내가 된 문성공주는 당의 선진 문물과 불교 문화를 토번국에 전했습니다. /위키피디아

 

6세기 후반 31대 짼뽀(티베트어로 '국왕'을 의미)인 닥리넨세 때 토번은 급격히 성장했어요. 이 시기에 이르면 숯을 이용해 금속을 단련할 수 있게 됐고 농업기술도 크게 발전해 나무 쟁기와 가축을 이용한 경작이 가능해졌어요. 이러한 기술 발전을 바탕으로 토번은 주변 열두 왕국을 정복했죠. 토번의 확장은 32대 짼뽀 남리뢴짼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어요. 600년경 이웃 국가인 숨파를 손에 넣으면서 인구가 늘어나 군사력이 막강해졌고 토번은 티베트 고원의 최대 강국이 됐습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를 하려는 남리뢴짼의 노력은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629년경 남리뢴짼은 귀족 세력에 의해 암살됐습니다.


◇최전성기엔 당의 수도도 일시 점령

남리뢴짼에 이어 짼뽀에 즉위한 것은 토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33대 짼뽀 송짼감뽀였어요. 그는 선대에 이루지 못했던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들을 하나씩 해나갔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그의 개혁 중 하나는 군사제도 개편이었어요. 전군을 군단으로 나누고 전국을 군사 단위로 세분화하며, 평민은 생업에 종사하는 농민과 유목민인 동시에 군인이 됐어요.

 

 

이 군사력은 특히 당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빛을 발했어요. 송짼감뽀는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당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주변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들까지 영향력을 넓히고자 했어요. 당에 외교사절을 보내 당 태종에게 당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고 하였죠. 하지만 송짼감뽀의 요구는 거절당하였고 이는 송짼감뽀가 당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주었어요. 그는 638년 북부 티베트로 진격하여 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토욕혼이라는 독립국가를 굴복시켰어요. 토욕혼의 왕이 당으로 피신하자 자연스럽게 토번군과 당군의 결전이 시작됐는데, 당군은 토번의 강력한 기마 군단을 당해낼 수 없었어요. 결국 당 태종은 송짼감뽀에게 굴복하여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티베트에 당의 선진 문물과 불교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어요. 670년에는 장군 설인귀가 이끄는 10만 당군이 까르 치링짼뽀 장군이 이끄는 40만 토번군에게 크게 패했고, 763년에는 토번군이 당의 수도였던 장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불교 강화로 인한 혼란으로 멸망

이렇게 당을 위협했던 토번은 송짼감뽀 사후, 위기를 겪고 쇠퇴하게 됩니다. 지금은 '티베트' 하면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불교가 티베트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당시 토번에선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았어요. 토착 신앙인 뵌뽀가 매우 강했고 이를 기반으로 했던 귀족들은 불교가 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여러 짼뽀는 불교에 힘을 실어줬고, 38대 짼뽀 치송데짼 때부터 티베트는 불교 국가로 거듭났어요. 지금도 존재하는 삼예사원은 티베트 최초의 절로 바로 이 시기에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41대 짼뽀 렐빠짼이 23년 동안 재위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국력을 낭비했고, 특히 '7호양승제(일곱 가구가 승려 한 사람을 먹여 살리는 제도)'를 실시하면서 불교가 많은 비난을 받게 돼 결국 신하들이 왕을 살해하죠. 42대 짼뽀 랑다르마 때는 불교 탄압으로 이어져 842년에는 많은 승려가 죽거나 환속을 강요당하였고, 불경들이 불태워졌어요. 이 혼란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승려 라룽 베끼도제는 임금을 암살했고, 200여 년간 찬란하게 빛나던 토번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3.25 1929년 미국 증시 붕괴로 시작… 전 세계 5000만 실업자 발생

[대공황]

10월 주가 12.8% 11.7% 두 차례 폭락… 은행은 파산하고 기업들 노동자 해고
1932년까지 세계무역 60% 이상 감소…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도 영향 미쳐
루스벨트, 구제·부흥·개혁 포함한 뉴딜정책 펼치며 대공황 극복 추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전파로 세계경제가 위축되고 있어요. 실직자와 휴직자들이 늘고 경제활동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난 16일엔 미국 대표 주가인 다우지수가 전날보다 12.9%나 떨어지기도 했어요. 1929년 대공황 당시 하루 최고 하락률인 12.8%를 뛰어넘는 수치였죠. 사람들은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경제 위기가 올까 걱정하고 있어요. 1929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인류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에요.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주식시장 붕괴로 대공황 시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경제는 호황기를 누렸어요. 하지만 1920년대 말부터 침체기를 맞이합니다. 이 시기 많은 미국인이 돈을 벌기 위해 대출을 받거나 가진 돈을 털어 과열된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어요. 주식 가격은 계속 뛰어올랐지만 1929년 여름부터는 소비가 둔화하고 상품이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죠. 기업들의 빚이 쌓이자 구조 조정이 진행되고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미국은 완만한 경기 침체에 들어서고 있었어요.

 

 1931년 대공황 당시 미국 시카고의 무료 급식소에 길게 줄지어 서 있는 남성 실업자들의 모습. 1929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로 시작된 대공황은 약 10년간 지속되면서 세계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2년까지 세계무역은 60% 이상 감소했고, 전 세계 실업자 수는 최대 5000만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키피디아

 

1929년 9월이 되면서 주식시장이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침체가 일시적인 현상이길 바랐어요. 하지만 10월 24일 투자자들이 1290만주의 주식을 내다 팔면서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합니다.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로 불리는 날이에요. 4일 뒤인 10월 28일 월요일은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으로 불리는데 주가가 12.8% 폭락했고, 다음 날인 화요일엔 11.7% 폭락하면서 미국 주식시장은 대붕괴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도 영향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대공황 여파로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삭감했고 소비와 투자는 침체됐죠. 은행들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파산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식량 가격 하락이 겹쳐 농업경제도 파탄이 났지요.

대공황은 미국에서 시작해 세계적으로 정치·경제·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어요. 1932년까지 세계무역은 60% 이상 감소했어요. 전 세계 실업자 수는 대략 최대 5000만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경기 침체로 사람들 사이에 퍼진 공포감 때문에 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가 등장하기도 했어요. 특히 독일에서는 민주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안정을 이루어 가던 차에 큰 타격을 입었죠. 독일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경제 위기에 불만을 가지며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극단적인 나치를 지지했어요.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됐어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극복

그렇다면 미국은 대공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1932년에도 미국은 약 1500만명(당시 미국 인구의 20% 이상)이 실직 상태였어요. 이때 민주당 출신 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이 당선됩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기며 적극적인 경제 구호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New deal) 정책을 펼치기 시작해요. 구제(relief)와 부흥(recovery), 개혁(reform)을 포함해 '3R 정책'이라고도 해요. 테네시강 개발 공사로 대형 댐을 건설하면서 고용을 늘리고, 농업조정법을 만들어 정부가 농업 생산과 소비에 개입했죠. 또 산업부흥법을 통해 정부가 생산량과 최저가격을 정하고 사회보장법으로 실업자나 노인 등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연금을 지급했습니다. 미국은 조금씩 경기를 회복해갑니다. 이후 미국은 자유방임주의에서 정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로 노선을 바꾸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차츰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루스벨트의 라디오 연설 '노변담화'… 국민들은 대공황 이길 힘 얻었죠]

노변담화(Fireside chats)는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저녁 시간에 미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 연설을 말합니다. 총 30회나 이루어졌지요. 루스벨트는 경제 위기를 국민과 소통하며 타개하기 위해 뉴딜 정책과 여러 금융 조치, 2차 세계대전 상황 등의 다양한 주제를 미국 국민에게 친근한 화법으로 설명했어요.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을 부를 때 '내 친구들(My friends)'이라 칭했고 많은 사람이 이 담화를 통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Fireside chats'란 말은 라디오 방송 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참모들과 벽난로 앞에 모여서 연습했기 때문에 붙은 칭호입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4.01 '뇌제'로 불린 러시아 최초의 차르… 아내 잃고 폭군으로 돌변

[이반 4세]

1547년 17세에 러시아 '차르' 올라…
국가 통제 강화하고 귀족 세력 약화, 영토 침탈하던 타타르족까지 정복
첫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 죽음 이후 점차 폭력적 성향 조절하지 못해
반대세력 인정사정 없이 숙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르는 앉아서 위로부터 감시하며 명령을 내리고 스스로는 거울이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나는 매일 일하며, 군림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러한 말이 나온 이유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2000년 이후 모두 네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차르'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 모습은 차르로서 처음 왕관을 썼던 이반 4세(1530~1584)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어요.


귀족들에게 홀대받은 어린 대공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였던 옐레나 글린스카야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공 자리를 이을 적장자를 원했던 바실리 3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이반을 보고 기뻐했어요. 하지만 이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이반은 1533년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반 4세에게 '대공'은 이름뿐인 직위였어요. 당시 러시아는 귀족 가문인 슈이스키가와 벨스키가로 양분돼 끊임없는 권력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실 행사가 아닐 땐 이반 4세를 홀대하였어요.

이러한 무질서와 핍박을 경험한 이반 4세는 귀족들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 인간 자체에 대해 깊이 불신하게 되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이반 4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놀이가 높은 테라스에서 개를 떨어뜨리고 개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일이었다고 하니 그의 성격이 얼마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형성됐는지 알 수 있어요.


러시아 최초의 차르로 즉위해 개혁 실시

1547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이반 4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차르'로 즉위합니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는 러시아 최초의 차르입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비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차르로 칭한 적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지위였죠. 이반 4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러시아 차르국을 선포합니다.

 

 

이반 4세가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국내 개혁은 대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1549년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 중앙과 지방의 고위 관리, 사족(士族·소지주), 대상인의 대표로 구성된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새로운 법, 지방 제도 개혁 등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이반 4세는 이를 기반으로 사족층을 육성해 모스크바에 가까운 봉토와 중앙 관청의 공직을 주었고, 영지의 규모를 기준으로 국가가 요청할 때 바쳐야 하는 무사와 말 등의 수를 정하는 개혁도 실시했습니다. 이는 대귀족 등 기존 봉건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교회 제도 개혁, 군사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특히 그의 인기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타타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이었어요. 타타르족은 이전부터 러시아 도시들을 침탈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기도 했어요. 1552년 이반 4세의 군대는 여러 차례의 사투 끝에 카잔한국(汗國)을 정복했고, 4년 후에는 아스트라한 한국(汗國)도 장악하면서 또 하나의 타타르족 근거지를 무력화해나갔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볼가강 전 유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시베리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됐어요. 이반 4세를 흔히 '뇌제('그로즈니'라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말로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섬뜩하고 무섭다는 의미)'라고도 부르는데, 훗날 펼친 공포정치 탓도 있지만 이처럼 강력한 정복 정책을 펼친 것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내 죽음 이후 공포정치 시작

하지만 이반 4세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폭력적인 기질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줬던 그의 아내 아나스타샤가 1560년 30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그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는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고 믿었고, 그녀의 죽음 이후 이반 4세는 대귀족들과의 전쟁을 선포했어요.

우선 이반 4세는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오프리치니나에 편입된 토지를 자신의 오프리치니크에게 나눠주었어요. 오프리치니크는 '지옥의 암흑'이라 불리는 자들로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대 조직이었어요.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빗자루와 개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서 온 나라를 누비며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였어요. 대상은 차르에게 배반을 꾀한 자뿐만 아니라 차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자도 포함되었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였어요.

공포정치로 이반 4세는 막강한 전제 권력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나라는 점점 기울어갔습니다.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틈타 1571년 타타르족이 수도 모스크바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고 10만여 명의 시민이 학살됐어요. 이반 4세는 말년으로 갈수록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자신의 아들마저 죽였고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4.08 사진기, 튜브 물감의 등장… '빛의 회화' 탄생시켰죠

[인상파의 출현]

산업혁명으로 사진기 발달하자
화가들, 사실주의 기법 탈피하고 순간의 색채와 질감·빛에 초점
튜브 물감과 증기 기관차도 발명돼 원하는 장소 가서 자유롭게 작업
모네·마네·고흐 등이 대표적 화가

 

지난달 30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싱어 라렌 박물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작품 한 점이 사라졌습니다. 도둑들은 코로나로 박물관이 휴관 중인 틈을 타 '1884년 봄 뉘넨의 목사관 정원'이란 작품을 훔쳐갔어요. 후기 인상파의 거장이며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반 고흐의 도난당한 작품 가치는 무려 80억원대라고 합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근대 예술운동이에요.


◇사진 발달로 전통 회화의 수요 감소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함께 일어난 사회·경제 등의 구조 변혁을 의미합니다. 산업화는 모든 분야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는데, 예술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1839년 프랑스의 화가 다게르가 발명한 은판사진술이 공개된 이후로 사진술은 꾸준히 발전해갔어요. 1888년에는 기존의 사진 기구보다 훨씬 가벼운 롤필름을 사용한 코닥 카메라가 출시되었어요. 사진기의 발명은 기존과는 다른 느낌의 현대미술이 태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까지 예술은 실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사진기는 그림보다 더 정확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예술가들은 사실적인 묘사를 포함한 전통적인 회화 기법에서 벗어나 색채, 질감, 빛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서 눈에 보이는 장면들을 더 자유롭게 표현했어요.

튜브 물감 덕에 야외 작업 쉬워져

야외에서 자연물을 자유롭게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려면 미술 도구들을 자유롭게 운반할 수 있어야겠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튜브 물감이 19세기 중반에 발명되면서 화가들은 작업실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어요. 튜브 물감은 1841년 미국의 화가 존 랜드가 발명했고, 1850년대부터는 상용화되었어요.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에는 화가들이 직접 돼지 방광에 유화 물감을 넣어서 운반했어요. 그러나 돼지 방광 물감은 부피가 크고 운반이 불편했어요. 주석으로 제작되고 마개로 밀봉된 튜브 물감은 저장 수명이 길고 누출되지도 않으며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어요. 튜브 물감의 발명으로 화가들은 야외 작업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어요. 이는 순간적인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포착해야 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상파 중 한 명인 르누아르는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인상주의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화가들이 자유롭게 마을을 떠나 여행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동 수단의 영향도 있습니다. 영국에서 19세기 초에 증기기관차가 발명된 후 1830년경에는 승객들을 태운 증기기관차가 세계 최초로 운행됐어요. 인상파를 교외로 이끄는 수단이 되었죠.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용어 등장

당시 서양 예술계는 보통 엄격한 형식과 균형, 구도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고전주의와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자연주의로 나누어졌어요. 1874년 봄 당시 미술계의 이단아들인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드가, 르누아르 등의 화가들이 모여 전시회를 열었어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거친 필치로 평범한 풍경을 담아낸 작품들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어요. 신문기자인 루이 르루아가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1872)를 보고 '인상파의 전시'라고 풍자하면서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어요.


[모네의 '인상, 해돋이' 그려진 시각 1872년 11월 13일 아침 7시 35분?]

인상파 화가들은 특히 빛의 변화에 주목했는데, 같은 장소도 그림을 그릴 때의 날씨나 시간대에 따라 색채가 달라진다는 것을 포착하고자 했죠. 이를 기반으로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언제, 어디서 그려졌는지 과학적으로 밝혀낸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침 안개가 깔린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 항구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지난 2014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도널드 올슨 천문학 교수는 그림 속에 떠 있는 태양의 각도 등 천문학적 지식과, 르아브르 항구의 과거 배치도 등 그림과 관련해 알려진 사실 등을 갖고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 그림이 1872년 11월 13일 아침 7시 35분의 항구 모습을 담은 것이며, 모네는 인근 라미라우테 호텔에서 항구를 바라보며 그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4.15 흑인 노예 300명 남부에서 북부로 탈출시킨 '검은 모세'

[해리엇 터브먼]

농장 노예로 태어나 1849년 탈출
남부 흑인 노예를 북부로 가게 돕는 비밀 조직 '지하철도'서 10년간 활동
남북전쟁 중엔 무장군대 지휘하며 700명 구해 '터브먼 장군'으로 불려

지난 2월 미국 내 흑인 소유 은행 중 최대 규모인 원유나이티드 은행은 흑인의 역사와 업적을 기념하는 '블랙 히스토리의 달'을 맞아 한정판 직불카드를 출시했어요. 미국 행정부가 20달러 지폐의 앞면 인물을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에서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인 해리엇 터브먼(1820년경~1913)으로 교체하는 계획을 연기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를 내놓았죠. 하지만 카드에 새겨진 터브먼의 자세가 영화 '블랙팬서'에 등장하는 가상의 왕국 '와칸다' 사람들이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며 손목을 가슴 앞에서 엑스(X)자로 교차하는 모습과 같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어났어요. 그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 무례하다는 것이었죠. 과연 그녀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요?


고달픈 어린 시절 품은 자유에 대한 열망

해리엇 터브먼의 결혼 전 본명은 아라민타 로스입니다. 1820년쯤 미국 동부 메릴랜드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노예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노예 신분일 수밖에 없었어요. 노예로서 그녀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어요. 5~6세 때 아기 돌보미로 일했는데 아기가 잠들 때까지 계속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고 아기가 깨어나서 울면 채찍질을 당했어요. 다른 집 노예 주인이 던진 무거운 금속에 맞아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때 생긴 상처로 평생 병을 앓아야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조금씩 깨달았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자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주인이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팔고자 하였어요. 해리엇 터브먼은 자신이 팔리면 부모와 형제들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고, 1849년 탈출을 감행하였어요.

수백 명의 흑인 노예를 탈출하도록 도와 '검은 모세'라고 불린 해리엇 터브먼의 사진. 그녀는 남북전쟁에선 여성 최초로 무장 군대를 이끌고 공격 작전을 수행하고, 자서전 등을 통해 번 돈을 모아 가난한 흑인을 돕는 등 평생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위키피디아

 

10여년간 300명 넘는 흑인 탈출 도와

도망 노예들은 거의 문맹이었기 때문에 이정표를 읽을 줄 몰라 탈출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해리엇 터브먼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하 철도'라고 불리는 조직이었죠. 1840년부터 1861년까지 수천 명의 흑인 노예들을 남부 노예주에서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비밀 조직입니다. 도망친 흑인 노예를 숨겨주는 사람의 집을 '역', 흑인 노예들을 이끌고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조직원들을 '차장'이라고 부르는 등 자신들만의 은어를 만들어 비밀리에 움직였어요. '차장'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자유민 신분의 흑인, 해방된 노예,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 폐지론을 지지하는 백인 등 다양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이 '지하 철도'의 도움으로 그녀는 남부를 벗어나 북부 필라델피아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자유를 얻은 그녀는 자신의 탈출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고자 뛰어난 '차장'으로 활동하였어요. 1850년 자유주에서도 도망 노예를 추적하고, 잡힌 노예를 송환할 수 있게 하는 도망노예법이 가결되면서 도망 노예의 탈출을 돕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일이 되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활약이 계속되자 남부의 농장주들은 그녀를 잡는 데 4만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주 치밀하고 교묘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녀를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해리엇 터브먼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주로 겨울철을 이용해 이동했고, 노예주들이 월요일 아침까지는 사라진 노예에 대한 신문 광고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토요일 밤에 길을 떠났어요. 그렇게 해리엇 터브먼은 1850년부터 10여 년 동안 300명이 넘는 흑인들의 탈출을 도왔는데, 단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도 없었다고 해요.


남북 전쟁에서 여성 최초로 공격 작전 수행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해리엇 터브먼은 노예 해방을 지지하던 북군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그녀는 요리사, 간호사, 안내원으로 일하며 북부를 도왔는데, 특히 북군의 요리사로 일하면서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스파이로 숨어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어요. 그녀가 빼돌린 남군의 병력, 군사 기지 등에 관한 중요 정보는 북군이 승리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녀는 북군의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을 돕는 군사 고문이 됐고, 그와 함께 습격 작전을 지휘해 700명 이상의 노예를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강을 따라 구출해 내기도 했어요. 남북전쟁 중 무장 군대를 이끌고 공격 작전을 수행한 최초의 여성이었죠. 이런 활약으로 그녀는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먼 장군'으로 불렸고, 흑인들은 자신들의 탈출을 도와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성서 속 인물에 빗대어 그녀를 '검은 모세' '모세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그녀는 미국 땅에 사는 아프리카계 흑인과 여성들을 위해, 특히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베푸는 삶을 살았어요. 88세에 그동안 자서전을 쓰고 노동을 해서 번 돈을 모아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만들어 가난한 흑인들을 도와줬어요. 그녀는 1913년 3월 10일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평등과 인권을 위해 싸우는 여러 세대의 흑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4.22 "고대 그리스 영광 되살립시다" 올림픽 부활 처음 호소한 시인

[파나요티스 수초스]

기원전 776년 시작된 올림피아 제전… 로마제국에 정복당한 후 393년 폐지
19세기 그리스 시인 수초스가 오스만 제국서 그리스 독립하자 최초로 올림피아 제전 부활을 주장
훗날 정식 근대 올림픽 개최에 기여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오는 7월 열릴 예정이었던 도쿄올림픽이 내년으로 미뤄졌습니다. 지난 15일은 올림픽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었어요. 1896년 4월 15일에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 제전이었던 올림피아 제전을 부활시킨 첫 근대 올림픽의 폐막식이 열렸거든요.


◇제우스를 위한 제사였던 올림피아 제전

고대 그리스인들이 열었던 올림피아(Olympia) 제전은 제우스신을 위한 제사이자 운동경기였어요. 기원전 776년부터 393년까지 4년마다 개최돼 총 293회의 제전이 열렸어요. 올림피아 제전에 나갈 선수들은 1년 가까이 체육관에서 신체를 단련했어요. 종목은 달리기, 원반 던지기, 레슬링, 마차 경주 등이 있었지요. 경기 우승자는 올리브 관이 씌워지고 폴리스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어요. 제전의 전후 한 달간은 그리스 전역에서 전쟁이 금지됐어요.

 

 근대 올림픽의 부활을 처음 주장한 그리스 시인 파나요티스 수초스. 1832년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자, 수초스는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올림피아 제전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했어요. 이에 따라 1859년 아테네에서 근대적인 올림픽이 열렸고, 이는 훗날 정식 근대 올림픽이 출범하는 데 기여합니다. /위키피디아

 

기원전 2세기 중엽 그리스 지역이 로마 제국에 정복당하고 나서도 올림피아 제전은 지속됐어요. 하지만 392년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화된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올림픽을 이교도들의 종교 행사로 간주해 폐지하도록 명령했어요. 이후 약 1500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896년 올림픽 경기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근대 올림픽 재건 시도

그리스 시인 중 근대 올림픽의 부활을 처음으로 이야기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파나요티스 수초스(1806~1868)입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1821년에서 1829년까지 독립 전쟁을 치렀어요. 1832년에 국경이 확정되면서 그리스는 오랜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고 공식적인 독립국이 되었죠. 수초스는 역사 속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올림피아 제전을 다시 부활시킬 것을 정부에 제안하고 대중에게 호소했어요. 이 생각에 동조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 독립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던 사업가 에방겔리스 자파스(1800~1865)예요. 그의 기부금 후원과 지지 덕분에 그리스는 1859년 아테네에서 근대적인 올림픽을 개최했어요.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은 자파스 올림픽이라고도 불려요. 하지만 이후 그리스에선 두 번의 경기가 더 열린 후 흐지부지됐어요. 고대 올림피아 제전의 완전한 부활은 이루지 못했죠.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이 열렸다는 소식은 영국 웬록 지역의 교육자인 W.P. 브룩스(1809~1895) 박사의 귀에도 전해졌어요. 평소 학교 교육과정에 체육 활동을 넣고 싶어 했던 그는 자파스 올림픽의 영향을 받아 1860년대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웬록 올림픽을 열었어요. 다만 중단된 자파스 올림픽이나 지역 행사였던 웬록 올림픽은 정식 근대 올림픽으로 여겨지진 않습니다.


1896년 개최된 첫 근대 올림픽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은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1863~1937) 남작입니다. 유년시절인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조국의 패배를 겪으며 그는 프랑스의 발전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자로 성장했어요. 교육학을 공부하며 프랑스 청소년 교육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지식 중심 교육보다 스포츠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어요.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에서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우정을 나누고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면서 세계 평화를 이끌어나가길 바랐어요. 쿠베르탱은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웬록 올림픽을 접하게 되고 브룩스 박사까지 직접 만나게 됩니다.

브룩스 박사의 도움을 받아 쿠베르탱은 세계 각국 스포츠 단체와 권위자에게 올림피아 경기 부활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고 홍보했어요. 1894년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조직하고 파리에서 총회를 열었어요. 그리스 문인이자 교육자였던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가 초대 IOC 위원장으로 추대됐죠. 위원회의 노력과 각국의 협조, 부호 자파스의 후원으로 1896년 근대 아테네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림피아 제전 때 썼던 청동 투구,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해 받았죠]

독일 고고학자이자 역사가인 에른스트 쿠르티우스(1814~1896)는 그리스 고대 문명 연구에 관심이 많았어요. 1875년부터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는 "고대 올림피아의 제전이야말로 그리스 문화의 근원이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그의 발굴은 근대 올림픽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쿠르티우스는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을 기원하고 신에게 바치는 용도로 제작된 청동 투구도 찾아냈어요. 이 투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되기로 했는데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면서 받게 됐어요. 손기정 선수가 국립 중앙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도록 투구를 기증했고 현재는 보물(제90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4.29 짐바브웨의 옛 명칭, 영국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 이름서 유래

[로디지아]

19세기 세실 로즈가 짐바브웨 지역의 광산채굴권 따낸 뒤 백인 대량 이주
지배 강화하며 '로디지아'라 불러… 이후 잠베지강 기준으로 남북 분할
백인 주도로 '로디지아' 세웠지만 흑인 차별 계속돼 1980년에야 독립

 

아프리카 남부의 짐바브웨는 최근 독립 40주년 축제를 치렀어요. 짐바브웨의 옛 지명인 마타벨렐란드에 있던 원주민들인 쇼나족·은데벨레족 등은 각자 작은 왕국을 건립해 아랍, 포르투갈 등과 광범위한 금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15세기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어요. 하지만 19세기 이후 제국주의의 손길이 아프리카까지 뻗치면서 원주민들은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독립했어요. 그런데 짐바브웨는 1965년 '로디지아'라는 나라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 적이 있어요. 로디지아는 어떤 뜻이고 짐바브웨는 어떻게 독립했을까요?


영국 회사에 점령된 마타벨렐란드

19세기 서양의 제국주의가 확대되며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외국으로 눈을 돌렸어요. 값싸게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생산품이 잘 팔릴 수 있는 지역을 찾고자 한 그들의 눈에 띈 것은 아프리카였어요. 유럽 열강 각국에선 아프리카 진출을 통해 제국을 번영시키려는 제국주의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영국의 세실 로즈(1853~1902)는 그중 한 사람이었어요.

187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와 금 채굴을 통해 자산가로 성장한 세실 로즈는 1880년대에 아프리카 지역의 무역을 더욱 확대하고자, 활동 지역에서 사설 군대 등을 보유하면서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하는 회사인 영국남아프리카회사를 설립했어요. 당시 마타벨렐란드를 통치하고 있었던 은데벨레 왕국의 로벤굴라 왕으로부터 광산 채굴권을 받아낸 것을 시작으로 이 지역에 대한 회사의 지배를 확립해갔어요.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를 표현한 그림. 세실 로즈는 1880년대 영국남아프리카회사를 설립해 짐바브웨의 옛 지명인 마타벨렐란드를 지배했고, 회사는 그의 이름을 따 주변 지역에 ‘로디지아’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훗날 북로디지아 지역은 잠비아, 남로디지아 지역은 짐바브웨가 됩니다. /위키피디아

 

이방인의 침략과 지배에 화가 난 원주민들은 백인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이 1893년에 있었던 '1차 마타벨레 전쟁'입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어요. 이후 세실 로즈는 순조롭게 이 지역에 대한 금속, 기타 광물 자원뿐만 아니라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고, 백인들의 대량 이주는 더욱더 늘어났어요. 1895년 영국남아프리카회사는 세실 로즈의 이름을 따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로디지아'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지금의 짐바브웨, 잠비아 등이 속한 지역이죠.


영국서 독립한 '로디지아', 흑백 차별 여전

로디지아는 이후 잠베지강을 기준으로 남·북 로디지아로 분할됐습니다. 남로디지아가 후에 짐바브웨, 북로디지아가 후에 잠비아가 됩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독립이라는 시대적 흐름이 생겼습니다. 영국도 남로디지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죠. 그리하여 1946년부터 아프리카인이 스스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남로디지아에서는 백인 농장주 출신인 이안 스미스(1919~2007)가 1962년 백인 우파 정당인 '로디지아전선(RF)'을 이끌고 22만명의 백인을 결집해 196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로디지아'라는 국명의 나라를 세웁니다. 영국 정부의 정책에 반해 소수 백인이 지배하는 독립을 주장한 것이었죠. 일방적으로 추진된 로디지아의 독립은 영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독립 영웅에서 독재자 된 무가베

백인들의 지배하에 핍박받고 있던 흑인들 역시 로디지아의 독립에 반대했습니다. 흑인들은 치열한 독립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스미스 정부는 혼란을 잠재우고자 1978년 흑인 온건파들과 협정을 맺어 총선거를 실시했어요. 그 결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소속인 아벨 무조레와(1925~2010)를 새 총리로 하는 새로운 국가 '짐바브웨 로디지아'가 탄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 각료의 대부분은 백인이었고 '백인들을 위한 정부'였기 때문에 흑인들의 저항 운동은 멈추지 않았어요.

흑인들의 투쟁에서 구심점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무가베(1924~2019)입니다. 빈곤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머리가 명석했던 무가베는 남아공으로 유학해 포트헤어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합니다. 넬슨 만델라(1918~2013) 전 남아공 대통령과 동창이죠. 이후 만델라는 변호사, 무가베는 교사가 됐지만 둘 다 백인 정권에 맞선 독립투사로 변합니다. 무가베는 38세인 1960년부터 로디지아 백인 정권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64년부터 10년간 감옥에 투옥돼 1974년 풀려났어요.

이후 무가베는 본격적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택합니다. 인접국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주변 공산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백인들에 대한 게릴라 전쟁을 지휘하지요. 이로 인해 로디지아 지역의 혼란이 지속되면서 1980년 영국의 중재로 런던에서 남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고 '랭커스터 협정'이 체결됩니다. 협정에 따라 새 헌법이 만들어졌고, 같은 해 실시된 선거에서 무가베는 63%의 지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신생국 짐바브웨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짐바브웨란 이름은 로디지아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의 언어로 '돌로 된 큰 집'이란 뜻입니다. 무가베는 독립 초기 경제 발전을 이끌어 신생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37년간 독재자로 군림하다 2017년 그에 반발한 군부 쿠데타로 인해 실각하게 됩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5.06 15년간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 단번에 해결한 '감자 대왕'

[프리드리히 2세]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3대 국왕
동유럽 '슐레지엔' 지역 차지하려 오스트리아와 대규모 전쟁치러
1763년 승리했지만 국토는 황폐화
아메리카 대륙 신작물이었던 감자 적극적으로 보급하며 식량난 개선

 

벨기에는 세계 최대 감자 수출국입니다. 그런데 최근 해외 언론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로 감자 소비가 줄고, 수출 판로도 막혀 감자 75만t이 쌓여 있다고 해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벨기에 감자산업조합에서는 '매주 2회 이상 감자튀김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18세기 독일 땅에 있던 프로이센 왕국에서도 기근의 해결책으로 감자 소비를 적극적으로 독려한 적이 있습니다. '감자 대왕'으로 불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 치세에 있었던 일이죠. 당시 프로이센은 어떤 상황이었기에 감자 소비를 장려한 것일까요?


8년간 치러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01년 독일 북부 지역에 세워진 프로이센 왕국은 제2대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대규모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합니다. 그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더욱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영토 확장에 집중합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가 탐냈던 땅이 있는데요, 폴란드와 체코에 걸쳐 있는 '슐레지엔' 지역입니다. 슐레지엔은 석탄·철·납 등 광석이 풍부해 역사상 지배권 분쟁이 잦았던 지역이에요. 당시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어요.

 농민들의 감자 수확을 둘러보는 프리드리히 2세의 모습. 독일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로베르트 바르트뮐러의 그림입니다. 여러 차례의 큰 전쟁과 대흉년을 겪은 뒤 국토가 황폐화되자,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아메리카 대륙의 신작물이었던 감자를 적극적으로 보급했어요. /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했던 174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도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장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유럽 왕가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을 근거로 바이에른, 에스파냐,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이 그녀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며 간섭하기 시작해요. 이 틈을 타 프로이센도 '슐레지엔을 넘겨준다면 왕위 계승을 인정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을 일으켰지요. 8년간의 전쟁 끝에 독일 라인강 하류에 있는 아헨에서 '아헨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어요.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지배권은 인정됐지만,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넘기게 됩니다.


슐레지엔 갈등으로 벌어진'7년 전쟁'

슐레지엔을 포기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는 이를 갈며 군비를 증강해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랑스와 동맹도 불사했고,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포위하려 합니다. 이를 눈치채고 영국과 손잡은 프로이센의 선제공격으로 7년 전쟁(1756~1763)이 시작됐어요. 프로이센군은 군대 규모에서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밀렸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전면전 대신 안개와 지형을 이용한 기습전을 펼치면서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해요. 1757년 11월 프로이센군은 작센 지방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군에 대승을 거뒀고, 12월에는 슐레지엔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합니다. 또 1762년 러시아에서 갑작스럽게 여제 엘리자베타가 서거하고 프리드리히를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합니다. 표트르 3세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끊고 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763년 프로이센과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을 맺으며 완전히 슐레지엔을 포기했어요. 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의 결과, 프로이센은 유럽의 신(新)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어요.


왕이 직접 감자 재배하며 부정적 인식 바꿔

전쟁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프로이센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특히 1774년엔 대흉년까지 겹치며 백성의 삶은 곤궁해졌어요. 프리드리히 2세는 남은 재위 기간 동안 7년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어요. 당시 유럽은 16세기부터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감자·콩·옥수수와 같은 신작물을 들여오고 있었어요. 그는 감자라는 식물이 빵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영양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짧은 기간에 대량 수확이 가능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당시 유럽 사람들은 생김새 때문에 '성경에 나오지 않은 악마의 식물'이라며 신작물 중 유독 감자를 배척했어요. 오늘날의 개량된 감자와는 다르게 거무스름하고 울퉁불퉁한 모양에 자르면 쉽게 변색하였기 때문이에요. 감자를 먹으면 한센병에 걸린다는 괴소문까지 돌아 사람들은 감자를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했어요. 이 때문에 감자는 주로 가축 사료로 사용됐어요.

그래서 프리드리히 2세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방책을 생각해 냅니다. 그는 '감자는 귀족만 먹어야 한다'고 공지했어요. 또한 자신의 정원에서 직접 감자를 재배하고 경비원을 세워 삼엄하게 감시했어요. 처음에 감자 먹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은 곧 '감자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작물'이라고 인식했고, 왕의 정원에 있던 감자를 몰래 훔쳐서 기르는 상황까지 벌어졌지요. 이후 감자는 점차 프로이센과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고, 오늘날까지 독일인의 주요한 식재료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감자 대왕'이란 별명을 얻게 됐어요. 독일 상수시 궁전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의 묘비에는 지금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꽃과 함께 감자를 두고 간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5.13 "신문은 옳고 그른 것 가르치는 교사"… 퓰리처상으로 기억돼요

[조셉 퓰리처]

헝가리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 기자로 일하다 31세에 신문사 첫 인수
'황색 언론'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과감한 제목·비판적 기사로 이목 끌어
저널리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1917년 그의 이름 딴 언론상 만들어져

지난 4일 발표된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미국 알래스카의 성폭력 문제와 홍콩 시위, 뉴욕시의 택시면허 거품 붕괴 등을 다룬 보도와 사진들이 선정됐어요. 본래 퓰리처상 수상작은 매년 4월 발표되지만,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발표가 다소 늦어졌어요.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1847~1911)의 이름을 따서 1917년 만들어졌어요. 퓰리처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의 이름을 딴 상까지 만들어진 걸까요?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된 퓰리처

헝가리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퓰리처는 가정교사들에게 프랑스어·독일어 등을 배우며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가난해졌습니다. 방황하던 그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 군인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일곱 살 나이에 미국으로 떠나 270일간 군 복무를 했어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어요. 그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마부·선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어요. 그 와중에도 틈틈이 도서관에 들러 영어를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었어요. 또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한 덕분에 독일어로 발행되던 신문인 '베스틀리헤포스트'의 기자로 일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정부의 부정부패를 날카로운 펜으로 비판하며 인지도를 높여갔어요.

 ‘언론계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의 사진. 헝가리 출신 퓰리처는 미국에 건너온 뒤 불과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되며 본격적인 언론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진부한 기사 제목에서 탈피하고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갖춘 신문을 만들어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위키피디아

 

그러던 어느 날 퓰리처는 세인트루이스의 석간신문인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가 운영난에 시달리다 파산해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그는 재빠르게 이를 인수하였고 다른 석간신문과 합병하여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앤드 디스패치'를 출범시켰어요. 남다른 열정과 능력 덕분에 불과 31세에 신문사 발행인이 된 것이죠.


시어도어 루스벨트와의 대결에서도 승리

퓰리처는 정치에 대한 야망도 큰 사람이었어요. 잠시 공화당원으로 있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이후 계속 민주당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민주당이 백악관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뉴욕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은 뉴욕의 신문사를 소유하고 싶다는 꿈으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1883년 퓰리처는 금융업자 제이 굴드에게서 34만6000달러에 뉴욕 신문사 '뉴욕 월드'를 인수해 '월드'라고 이름을 바꿔 발행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많은 빚을 지고 시작했지만, 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덕분에 단기간에 경영을 정상화할 수 있었어요.

진부한 1면 머리기사 제목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였고 '자신감 가지고 써라. 일상적 단어를 활용한 짧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써라' 등 일명 퓰리처 공식이라 불리는 기사 작성 원칙을 세워서 독자를 사로잡았죠.

그 덕분에 '월드'는 1880년대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고, 퓰리처는 가장 부유한 미국인 50명 안에 들어가는 거물급 인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쓰는 사설 하나에 정치인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정도였어요. 특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의 대결은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어요. 퓰리처는 평소 루스벨트의 노동계급에 대한 인식, 전쟁관 등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게재하였어요. 특히 대통령 임기 말에 있었던 파나마 운하 건설과 관련한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신문에 싣자 루스벨트는 그를 기소하였어요. 하지만 1911년 1월 3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월드'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는 퓰리처가 평생 원칙으로 삼았던 '언론의 정치적 독립성'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어요.


선정적인 '황색 언론'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붙어

하지만 퓰리처에게는 '황색 언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어요. 이는 1895년 미국의 신문 경영자 윌리엄 허스트가 창간한 '뉴욕 저널'과의 경쟁에서 유래했어요. '월드'에는 노란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 일명 '노란 아이(yellow kid)' 만평이 있었는데, 허스트는 이 만평에 큰 관심을 가졌고 결국 작가를 꼬드겨 '뉴욕 저널'로 데려갔어요. 이를 계기로 '월드'와 '뉴욕 저널'이 진흙탕 싸움을 벌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경쟁에 '황색 언론'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월드'를 비롯한 미국의 신문사들이 미국 정부가 스페인과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선정적인 기사를 내보낸 것은 '황색 언론'의 단면을 잘 보여주지요.

어릴 적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퓰리처는 밤늦게까지 신문을 읽는 습관 때문에 시력이 더욱 안 좋아졌고 결국 40세 때 실명했어요. 하지만 그는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는 신념을 가지고 19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는 언론인은 지식을 다루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변호사나 의사처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널리즘으로 유명한 컬럼비아 대학에 20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어요. 그중 일부는 훌륭한 기사를 써서 언론의 품격을 높인 기자나 저술가를 위한 상을 제정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퓰리처상이 제정되었고, 지금은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 권위의 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05.20 산둥반도 차지하려는 일본의 21개조 요구가 도화선 됐어요

[중국의 5·4 운동]

1919년 베이징대 학생 중심으로 발발
중화민국 수립 후 봉건주의 회귀에 천두슈 등 지식인 '신문화 운동'펼쳐
日 침략 승인하는 베르사유조약과 우리나라의 3·1운동까지 알려지자
학생·노동자 등 전국서 동맹 파업

지난 4일은 중국의 '5·4 운동'이 101주년을 맞는 날이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5·4 운동'을 이끈 청년들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부터 매년 이날을 '5·4 청년절'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는데요.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의 위험을 처음 경고한 의사 리원량(1986~2020)을 포함해 코로나와 싸우다 숨진 청년 33명에게 '제24회 중국 청년 5·4 휘장'을 수여했다고 해요. '중국 청년 5·4 휘장'은 중국 청년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 휘장이지요. 그렇다면 5·4 운동은 무엇이고,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것일까요?


천두슈가 주도한 신문화운동이 발단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反)제국·반봉건주의 운동입니다. 점차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고 두 달 만에 결국 중국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요.

1911년 청 왕조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공화정의 중화민국이 세워집니다. 근대 민주국가가 세워지는 듯했지만, 당시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거꾸로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군주 국가를 세우는 '제제(帝制)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사회적으로는 공자를 숭상하는 복고적인 분위기가 퍼졌지요. 그러자 해외에서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온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중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반봉건적 계몽운동인 '신문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5월 4일 거리시위에 나섰다 구류됐던 베이징사범대 학생들이 7일 학교로 돌아와 찍은 기념사진이에요. 당시 베이징 시내 대학생들이 주도하고 각계각층이 참여한 5·4운동으로 중국 정부는 베르사유조약 조인을 거부했답니다. /위키피디아

 

신문화운동은 근대 사상가인 천두슈(1879~1942)가 계몽 잡지인 '신청년'을 1915년 창간하면서 시작됐는데요. 천두슈는 '신청년' 창간호에서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청년들에게 '자주적이고 진보적이며 과학적인 청년이 되라'고 했어요. 학문의 자유를 중시했던 베이징대 교장 차이위안페이 덕에 신문화운동은 베이징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어요.

신문화운동은 크게 신사상운동과 신문학운동으로 나눌 수 있어요. 신사상운동은 봉건적 유교 윤리를 타파하고 과학과 민주주의 같은 서구 신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어요. 신문학운동은 예전부터 지식인들이 사용했던 어려운 문어체를 지양하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체인 백화문(白話文) 중심으로 문학작품을 쓰자고 주장하는 운동이었습니다. 특히 백화문은 학생들이 자신의 진보적 주장과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빠르게 퍼졌고 지식이 대중화하는 데 널리 기여했어요.

신문화운동은 점점 지식인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했어요. 특히 천두슈, 후스, 루쉰 등 근대적 교육·사상가들이 주도한 신문화운동 덕에 베이징대에는 과학과 민주주의를 탐구하는 청년들이 많이 모였어요. 이러한 계몽운동을 바탕으로 베이징대는 5·4운동의 진원이 되었지요.


◇침략자 일본과 무능한 중국 정부에 저항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8월,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지배 중이던 산둥반도의 칭다오를 점령합니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내용의 21개조 요구를 중국 정부에 제출했지요.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조약 중 일부를 승인했어요. 위안스카이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군벌 세력도 1918년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었어요. 중국 내에서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과 군사기지 설치 등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차관(借款)을 제공받기로 했죠.

1차 대전이 끝나자 중국은 전후(戰後)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승전국(연합국) 자격으로 대표단을 파견했어요. 중국이 1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거든요. 중국 국민은 그동안 열강에 빼앗겼던 이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패전국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승전국들끼리 나눠 가지는 자리가 되고 말았지요. 오히려 전쟁 전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이권은 열강의 승인 아래 일본이 가져갔어요.

이런 결정이 신문에 보도되자 중국인들은 분노했어요. 일본의 요구를 인정해 준 서구 열강과, 외세와 결탁해 주권 침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군벌 세력에 대한 분노였어요.

여기에 우리나라가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인들은 충격을 받았어요. 천두슈는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현실을 비교하며 중국 대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촉구했지요.

그러자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베이징 대학생들이 구국(救國) 시위를 계획합니다. 1919년 5월 4일 3000여 명이 톈안먼에 모여 시위를 시작한 거예요. 그들은 일본과 맺은 21개조 취소, 산둥반도 이권 반환, 매국노 처벌 등을 요구했어요. 중국 정부는 대학생들을 대거 체포하며 강경 진압했지요. 그럴수록 베이징 학생들의 투쟁은 치열해졌고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어요. 6월 3일 베이징에서는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더욱 빈번해지면서 학생 1000명 이상이 체포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학생 시위는 각계각층으로 더욱 확산되었어요. 상해에서는 상인들이 철시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학생들은 휴학으로 뜻을 함께하는 삼파투쟁(三罷鬪爭)이 전개되었어요.

결국 중국 정부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일 행각을 벌인 관리 차오루린 등 3명을 파면했고, 파리에 파견된 중국 대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맺은 베르사유조약에 조인하지 않았죠. 5·4 운동은 학생·상인·노동자 등 각계각층이 참여해 전국적으로 벌인 민주주의 운동이자, 민중의 뜻이 관철된 첫 시위였습니다.

 

[워싱턴회의서 돌려받은 산둥반도]

베르사유조약 조인을 거부했던 중국은 1921~1922년 미국에서 열린 워싱턴회의를 통해 빼앗겼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돌려받습니다. 워싱턴회의는 1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일본 간 군비 경쟁이 심해지면서 미국 측 제의로 열렸는데요.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 9국이 참여해 산둥반도 반환 등을 논의했지요. 이로 인해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이 한동안 제한받게 돼요.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5.27 나치와 싸운 프랑스 저항군 22만명… 장 물랭이 지휘했죠

[레지스탕스]

나치 독일, 1940년 6월 佛 점령하자
드골, 라디오로 대국민 호소문 발표
국민들은 지하운동으로 대항했어요

초기엔 벽보 훼손 등 즉흥적 활동하다 철도 파괴 등 무력 저항으로 조직화
나치에 맞선 6만여 명 훈장 받았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됐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했던 세실 롤탕기 여사가 지난 8일(현지 시각)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프랑스어로 저항(Résistance)이란 뜻을 가진 레지스탕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에 저항해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난 지하운동 단체를 뜻하는데요. 롤탕기 여사는 유모차에 총기와 폭탄, 비밀 지령을 담은 문서를 몰래 싣고 다니며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답니다. 과연 레지스탕스의 출발점이었던 프랑스에서는 당시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요?


◇무기 숨기고 도피 돕던 레지스탕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어요.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 반도 안 돼 프랑스는 6월 22일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었어요.

독일과의 휴전 협정 조인에 앞장섰던 인물은 당시 프랑스 새 총리였던 페탱(Pé-tain·1856~1951)이었어요.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 동쪽에 있는 요새 도시였던 베르됭을 독일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낸 공으로 '전쟁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었죠.

 드골의 밀사이자 전쟁 전 최연소 도지사였던 장 물랭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하나로 통합해 '국민 영웅' 으로 불려요. 오른쪽 사진은 1944년 프랑스 비시정부 군인에게 체포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하지만 휴전 협정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그를 '영웅'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전락시켰습니다. 프랑스 남부 도시 비시에서 페탱은 국가 원수로 군림하며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에 협력했어요. '비시 정부'는 수많은 프랑스 노동자를 독일 공장으로 내보냈고, 7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독일에 넘겼습니다. 비시 정부는 형식상으로는 합법 정부였지만 나치의 '괴뢰 정부'나 다름없었던 것이에요.

페탱이 방송을 통해 독일과의 휴전 의사를 내비치자, 한때 그의 부관이었던 샤를 드골(De Gaulle·1890~1970) 장군은 6월 18일 영국의 BBC 라디오 방송에 등장해 '프랑스 국민은 전투에 졌을 뿐이지 전쟁에 지지 않았다'라고 선언했어요. 그리고 이 드골의 호소문을 계기로 나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이 시작됐습니다.

초기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소수였고 활력도 크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영화관에서 뉴스 상영 때 야유 한다거나 독일 점령 당국의 선전 벽보를 훼손하는 등 즉흥적인 항독(抗獨) 행위를 펼치기도 했지만, 점차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프랑스 군대가 퇴각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들을 숨기거나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 군인과 영국 군인들의 수용소 탈출을 돕기도 했습니다. 또 철도와 전화선 등 주요 설비를 파괴해 독일군 업무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지하신문의 발간은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가장 튼튼하게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어요. 그들은 독일과 비시 정부의 선전 활동에 맞서 다양한 역(逆)선전 활동을 펼쳤고, 점령 당국(독일)의 거짓 정보나 정보 조작, 은폐에 맞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어요.


◇레지스탕스를 통합한 장 물랭

레지스탕스 운동의 규모는 1941년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됐어요.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1939년 체결된 독소불가침 조약(독일·소련 양국이 서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약속한 조약)으로 인해 항독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웠는데요.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먼저 약속을 어기고 소련을 침공하자 프랑스 공산주의자들도 대거 레지스탕스 운동에 합류했습니다. 또 1942년 강제로 전쟁터에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노동제가 도입되자 많은 프랑스 젊은이가 독일의 강제 징발을 피해 산속에 들어가 유격대원이 되었어요. 레지스탕스 규모는 약 22만 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커졌어요. 이는 당시 프랑스 성인 인구의 약 1%에 해당한다고 해요.

프랑스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갈수록 여러 개의 산발적인 조직으로 갈라졌어요. 그래서 조직적이면서도 통합된 항독 활동을 위해서는 이를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있었죠. 이때 단일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드골의 밀사(비밀 명령을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자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인에게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장 물랭(Moulin·1899~1943)입니다.

그는 전쟁 전 최연소 도지사였는데, 1940년 6월 독일군이 자신의 지역(외르에루아르)을 침략했을 때 협력을 거부했어요. 이를 이유로 독일군에 구타당하고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석방 이후 물랭은 본격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국저항평의회라는 거대한 '지하 의회'를 비밀리에 개최해 레지스탕스의 결속력을 확인했고, 이후 프랑스 국내의 모든 레지스탕스 운동은 하나로 통합됐어요. 하지만 자신은 그해 6월 게슈타포(나치 정권의 국가경찰)의 급습으로 결국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어요. 1964년 그의 유해가 프랑스의 국립묘지인 판테온에 안치된 것은 그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평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해줘요.

1944년 8월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반역자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시행되었습니다. 비시 정부의 수반이었던 페탱은 1945년 8월 국가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돼 좁은 독방 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해방 직후 몇 년간에 걸쳐 비시 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포함해 반역자 약 9만 800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1만 명 안팎의 부역 혐의자가 처형되었습니다. 레지스탕스를 포함해 나치에 저항한 프랑스인 6만여 명에겐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03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 754년 피핀이 바친 땅에서 출발했죠

바티칸시국

전 세계적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빗장을 걸어 잠갔던 유럽 국가들이 이달부터 속속 관광객을 받을 예정이라고 해요. 특히 지난 3월부터 폐쇄 중이던 이탈리아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바티칸시국(市國·하나의 시로 이루어진 국가)의 바티칸 박물관도 1일부터 다시 개관한다고 밝혔답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고대 로마·이집트 유물과 르네상스 걸작 미술품을 보유한 세계적 박물관으로, 매년 1억달러(약 1228억원) 안팎의 수입을 올리며 교황청의 재정적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바티칸시국이란 로마 시내에 있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아닌 교황이 지배하는 영세중립국이에요. 면적이 0.44㎢로, 여의도(2.9㎢) 면적의 6분의 1도 안 되는 크기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약 900명에 불과하지요.이렇게 작은 바티칸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까요?


◇754년 교황령 등장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274~337)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었어요. 이후 독실한 그리스도교 귀족들의 기부로 교회 재산은 점점 불어났어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순교한 성인(聖人)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해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후 바티칸은 로마 교황이 거주하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6세기 이후 로마 귀족들이 너도나도 자기 재산을 기증하면서 교회는 더욱 부유해졌어요. 이렇게 해서 쌓인 교회의 토지 재산을 '베드로의 세습령'이라고 불러요. 교황은 점차 영토 안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었지요.

 754년 교황에게 땅을 바치는 프랑크 왕국 피핀 왕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오른쪽 사진은 0.44㎢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교황이 세속적인 지배력을 갖는 지역을 뜻하는 '교황령(敎皇領)'은 754년 프랑크왕국의 초대왕 피핀이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 지역 등을 교황에게 바친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건을 '피핀의 증여'라고 불러요. 당시 교황이었던 스테파노 2세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게르만족의 하나)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어요. 이에 교황은 프랑크왕국의 새 왕조를 연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요. 당시 피핀은 안정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교회와의 결탁이 필요했어요.

피핀은 '피핀의 증여'를 통해 교회의 보호자가 되길 자처합니다. 자신이 정복한 도시들의 성문 열쇠를 베드로의 무덤 위에 놓고 교회에 바친다는 증여식도 거행했어요. 여기에 호응해 교황은 피핀과 그의 두 아들에게 성대한 도유식(몸에 기름을 발라 병을 낫게 하고 악마를 쫓아낸다는 종교적 의식)을 행해주었지요. 이후 교회는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단절하고 서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피핀의 증여'는 '교회 국가'가 탄생하는 시초가 되었고 도유식은 서유럽 왕들이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는 대관식으로 관습화되었습니다.


1870년 이탈리아 통일로 사라진 교황령

그러나 세속적 정치 권력과 교회 권력의 결탁은 새로운 분쟁을 낳기도 했어요. 중세시대 성직자는 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세속 군주로부터 토지를 받은 봉신(封臣·땅을 받은 신하)이기도 했거든요. 특히 962년 교황으로부터 황제 왕관을 받은 독일 국왕 오토 1세는 전략적으로 교회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빌려 지방 제후들을 견제했고 성직자와 수도원장을 직접 임명해 부와 권력을 주고 충성과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어요.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은 서유럽의 세속 군주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어요. 교황령은 교황의 권력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했지요. 14세기엔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긴 적도 있었고(아비뇽 유수·1309~1377), 16세기 초엔 로마 등을 포함한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장악한 적도 있었어요. 1798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해 로마 공화국(1798~1800)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801년 나폴레옹 1세가 교회와의 친선을 위해 '정교(政敎) 협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교황령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어요.

19세기 유럽에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북동부 지역을, 교황은 로마를, 프랑스가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등 분열돼 있었어요.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서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전개돼 1861년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고, 1870년에는 베네치아와 로마 교황령을 모두 합친 '통일 이탈리아'가 완성됐습니다. 당시 교황 피우스 9세는 합의되지 않은 합병에 반발했으나 결국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어요.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 내 성 베드로 성당에서만 지내게 됐고,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지요.


무솔리니와 맺은 '라테란 협정'으로 탄생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 불편한 관계가 해소된 것은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무솔리니(1883~1945) 때입니다. 무솔리니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어요. 학교, 병원 등에 십자가를 걸고 초등학교에서는 가톨릭 교리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지요. 또 신학생들의 병역을 면제해주었습니다.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청 특사 가스파리 추기경 사이에 '라테란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이 협정으로 바티칸시국은 교육, 세금, 주교 임명, 교황 선거 등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인정받았어요.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에 바티칸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교황령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도 받았어요. 이때부터 교황령은 바티칸시국으로 한정되었고, 현재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특별 헌금과 바티칸 박물관 입장료, 관광 수입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10 범죄자에서 흑인 인권 지도자로… "폭력엔 폭력으로" 외쳤죠

맬컴 액스

미국 전역에서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이제 미 50주(州) 전체, 600곳이 훨씬 넘는 도시와 마을에서 열리는 사상 최대 시위로 확대되고 있다고 해요.


그동안 미국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흑인 운동가도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펼쳤던 맬컴 엑스(Malcolm X·1925~1965)입니다. 오늘은 맬컴 엑스의 흑인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알아볼게요.

 

◇백인 교사의 질타에 분노 품게 된 소년

1925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난 맬컴 엑스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도교 목사이자 열렬한 '백투아프리카 운동'(흑인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의 지지자였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맬컴의 아버지는 자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요.

 

 1964년 3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마주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오른쪽)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습이에요. 동시대에 흑인 인권 운동을 펼쳤던 두 사람은 이날 처음으로 서로에게 약 1분간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맬컴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돼 가족들은 보험금도 받지 못했고, 그의 어머니마저 신경쇠약으로 보호시설로 보내져 가족 모두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어요. 맬컴을 포함한 형제들은 여러 위탁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맬컴은 학창 시절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한때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가졌어요. 하지만 그를 가르치던 백인 교사에게서 돌아온 건 '깜둥이들은 그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차가운 말이었죠. 이후 맬컴은 백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보스턴과 뉴욕을 옮겨 다니며 마약 판매, 매춘 알선, 도둑질 등의 범죄로 생계를 이어갔지요. 결국 맬컴은 어느 백인 가정집을 도둑질하다 덜미를 잡혀 절도죄로 체포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 생활은 맬컴의 삶과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어요. 교도소에서 많은 독서를 한 그는 통째로 책 내용을 외우다시피 하며 미국의 역사,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이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으로 불리는 블랙 무슬림(백인과 흑인 분리와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이슬람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요. 맬컴은 흑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백인을 배척하는 이 종교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였던 일라이자 무함마드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자신의 성인 '리틀'을 버리고 맬컴 엑스로 개명했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성은 보통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주인이 붙여줬다는 사실에 반발,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뿌리를 상징하고자 한 것이었어요.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 비판

1952년 가석방된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정식으로 입단했어요.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많은 흑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권유했고, 흑인들의 정신적·경제적 독립을 주장했지요. 블랙 무슬림 신문도 발행해 폭넓은 포교 활동을 했어요. 맬컴 입단 전 4곳에 불과하던 사원은 수년 만에 50여 곳으로 늘었고 신도 또한 500여 명에서 10년 만에 2만5000명으로 늘었어요. 무함마드는 이러한 맬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하는 등 맬컴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2인자로 천명했습니다. 맬컴은 평화적인 흑인 차별 반대 운동을 설파하던 마틴 루서 킹(King·1929~1968) 목사를 '얼간이' '백인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판했고, '만약 누가 나의 발을 밟으면 나도 상대방의 발을 똑같이 밟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비폭력 투쟁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63년 맬컴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자업자득'이라고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이것이 슬픔에 빠진 미국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죠. 파문이 커지자 교단에서도 그의 대변인 활동을 정지했어요.

 

사실 그 당시 맬컴은 교단에 갈수록 큰 실망을 느끼던 상태였습니다. 신도들에게 엄격한 생활을 강조하던 무함마드가 여성 비서들과의 사이에 여러 혼외 자식을 두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또 그는 교단이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너무 나태하다고 보았어요. 맬컴은 교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되었어요.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다

 

결정적으로 맬컴은 이듬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순례에서 자신의 극단적인 태도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메카에서 만난 백인 이슬람교도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이슬람교도를 반기는 것을 보고 '인종과 종족을 초월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정통 수니파 이슬람으로 귀의하고 이름을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바꾸며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결별합니다. 그리고 '무슬림 모스크 인코퍼레이션'이라는 종교단체와 '아프리카계 미국통일기구'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해 반(反)백인주의를 넘어선 흑인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어요. 특히 그는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이라고 연설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표 참여도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교단을 배신한 맬컴을 지속적인 암살 시도로 위협했어요. 결국 1965년 2월 21일 맨해튼의 오두본 볼룸에서 청중 400명에게 연설을 하려던 맬컴은 암살자 3명이 쏜 총에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맬컴이 교단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범인 3명 중 2명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진실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요.

 

짧은 생을 살다 간 맬컴 엑스는 급진적인 행적으로 평가가 엇갈려요. 하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흑인 인권을 높이기 위한 운동을 펼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17 1920년대 파시즘에 반발… 美 흑인 사망 사건으로 다시 주목받죠

안티파(ANTLFA)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촉발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계속되고 있어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지난달 25일 백인 경찰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과잉 진압해 숨지게 한 사건이지요. 그런데 일부 시위대가 공공 기물을 파손하고 가게를 약탈하는 과격한 시위를 벌이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위대를 비난하며 "정부는 안티파(ANTIFA)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겠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번 시위의 배경에 '안티파'가 있다고 본 거지요. 도대체 안티파는 무엇이고 언제부터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파시즘의 등장

안티파는 반(反·anti)파시스트(fascist)의 줄임말이에요. 네오나치(신나치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등 극우 파시스트가 펼치는 활동에 저항하는 극좌파 사상을 모두 일컫는 말이지요.

 

안티파는 1920년대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혼란에 빠져있었어요. 1차 세계대전(1914~1918)에 뒤늦게 연합군 측으로 참전했지만 낮은 기여도 때문에 전승국인데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원하던 영토를 얻지 못했지요. 종전 후 폐허가 된 국토에는 실업자가 넘쳤고 서민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살인적인 물가에 고통받아야 했어요.

 

 포르투갈에서 흑인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안티파 세력의 모습이에요. 검은 옷과 검은 마스크를 쓴 이들은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우파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와 인종차별 반대 시위 등을 이끌고 있답니다. /EPA 연합뉴스

 

그 틈을 타고 사회주의가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어요. 이탈리아의 자본가와 대지주들은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사회주의 확산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이런 정세 속에 극우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무솔리니(1883~1945)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단체 '파시 디 콤바티멘토(Fasci di Combattimento·전투단)'를 조직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파시스트'라는 말이 바로 무솔리니가 만든 단체명 '파시(단결)'에서 유래한 거예요. 이들은 사회주의 집회나 좌파 신문사 등을 습격하며 폭력 테러를 일삼았어요. 군인, 경찰, 지식인 등 수많은 젊은이가 파시스트에 가담했고 세력은 급속히 커졌어요. 1921년 파시스트 정당을 창설한 무솔리니는 이듬해 로마에 무혈입성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이탈리아는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가 되었지요.


◇나치의 등장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에도 파시즘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엔 민주적인 헌법을 채택한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체제가 수립됐지만 패전 후유증으로 혼란이 극심했어요. 파리강화회의에서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총 1300억마르크(약 80조원)의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아프리카 일대 식민지도 모두 잃게 됐죠. 물가 폭등과 생활용품 부족으로 국민은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독일 경제는 또다시 붕괴했어요.

 

그러는 새 나치당과 히틀러(1889~1945)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베르사유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군비 확장 등을 포함한 25개 강령을 발표한 히틀러에게 독일 국민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지요. 1932년 총선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돼 본격적인 독일 파시즘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히틀러는 해외 침략 전쟁을 위한 군비를 증강하며 공장을 재가동했어요. 실업자가 줄고 경제가 활성화되었지요. 히틀러는 이 과정에서 전쟁 준비와 국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장애인·사회주의자·동성애자·노인 등을 적으로 몰아 탄압했어요. 이처럼 파시즘은 국가와 집단의 이익을 앞세워 인간의 자유와 민주적 규범을 훼손하며 세를 키워갔습니다.


◇안티파의 전개

파시즘이 확산하자 등장한 것이 바로 반파시즘 운동인 '안티파'입니다. 초기 안티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였어요. 1933년 독일 뫼싱엔에서 히틀러 집권에 반대하며 공산당원들이 주도한 노동자 파업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극우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정당이나 단체를 아우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파시스트 정권은 그들을 '반파시스트(Anti-Fascist)'로 지칭하고 탄압했지요.


냉전 시대를 거치며 잠잠해졌던 안티파 운동은 1985년 영국에서 결성된 '안티 파시스트 액션(AFA)'으로 본격화됐는데요. 당시 영국은 자본가와 노동자들 간 갈등이 극심했지요. 이들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인 스킨헤드와 거리에서 물리적인 싸움을 벌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어요.


1990년대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자 안티파 활동이 더 활발해졌어요. 통일의 여파로 독일 경제가 불안해지고 빈부 갈등이 생기면서 '네오나치'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안티파는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 반대 시위와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열린 우파 집회 테러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그해 옥스퍼드 사전은 '안티파'를 '올해의 단어' 후보로 발표했지요.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활동 중인 안티파는 체계적인 조직이 있는 단체가 아니에요. 스스로를 '인종차별 반대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느슨한 형태의 사회 운동이지요. 이 때문에 이번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대해선 사실 "근거가 미약하다"는 반론이 많아요. 또 안티파의 과격한 시위 방식 때문에 이들 역시 네오나치 못지않은 극단적 폭력 조직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어요. 이들은 특히 시위할 때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서 '블랙 블록'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주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24 징용 끌려간 조선인 800여명… 해저 1000m 탄광서 혹사당했죠

군함도

최근 일본 정부가 일제(日帝)강점기 한국인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은 '군함도 탄광'의 진실을 왜곡하는 전시관을 일반에 공개해 논란이 일고 있어요. 이 전시관에는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학대가 없었다"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내용이 강조돼 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일제시대 말기 군함도 탄광을 비롯해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등에 한국인 약 4만명을 강제로 동원했어요. 그런데 군함도를 포함해 메이지 시대 산업 유산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국제사회에 "한국인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전시관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요. 이 약속을 정면으로 어기는 전시관 공개를 강행한 거예요. 우리 정부는 유네스코에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취소를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군함도는 무엇이기에 이런 갈등이 빚어지는 걸까요?


◇탄광 개발로 만들어진 군함도

군함도의 원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입니다.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어요. 동서로 160m, 남북으로 480m, 둘레는 1.2㎞, 면적은 0.063㎢로 야구장 두 개 조금 넘는 크기에 불과한 아주 작은 섬이지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이지만, 한때는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이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軍艦)'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곳이에요. 당시 그렇게 개발됐던 이유는 이 섬에 많은 석탄이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어요.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 '하시마(端島)'의 전경이에요. 면적이 0.063㎢로 야구장 두 개 조금 넘는 크기에 불과한 이 작은 섬은 한때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軍艦)'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위키피디아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되고 채광이 시작된 시점은 대략 18세기 말~19세기 초였습니다. 당시엔 그곳에 살던 어민들이 소규모 석탄을 캐면서 부업으로 일삼은 정도였지요. 이곳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미쓰비시'라는 기업이 섬을 소유하면서부터였어요. 1890년 하시마 탄광의 원래 소유자가 미쓰비시에 10만엔을 받고 섬 전체를 양도했고, 이때부터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는 석탄을 캐내기 시작해요.

미쓰비시에 의해 갱도(광산에 뚫어놓은 굴)가 속속 완성되면서 엄청난 양의 석탄이 나왔어요. 사람들이 이곳에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고 학교가 세워지는 등 기본적인 거주 환경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지요.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가 세워졌고 그 뒤로도 고층 건물들이 속속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근대식 아파트 건설은 일본이 하시마를 '산업화와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어요.


◇일본, '산업화의 상징'이라 주장

하시마 탄광은 미쓰비시를 일약 일본의 거대 재벌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어요. 1941년에는 약 41만t의 석탄이 출탄되면서 개발의 최정점을 찍었고, 1960년쯤엔 이 작디작은 섬에 5267명이 살았다고 해요. 이는 당시 도쿄 특별구 인구 밀집도의 9배를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미쓰비시는 해저 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모든 최신 기술을 이 섬에 쏟아 부었는데, 당시 '도쿄대 우등생들은 모두 하시마로 모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지요.

하지만 1960년 이후 석유가 등장하면서 하시마 탄광은 점점 쇠퇴하였습니다. 1974년 1월엔 완전히 탄광 문을 닫게 되었어요. 같은 해 4월 20일 모든 주민이 섬을 떠나면서 하시마는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2001년 미쓰비시는 이 섬을 다카시마 지방 정부에 무상으로 양도했고, 2005년 다카시마가 나가사키 시에 편입되면서 하시마는 나가사키에 속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섬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일본의 산업화 유산으로서, 다이쇼 시대(1912~1926)에서부터 쇼와 시대(1926~1989)에 이르는 근대 건축의 전시 장소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죠. 2000년대 언론에 황폐해진 섬 내부 모습이 소개됐고, 200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받기 시작했답니다. 지금도 여러 여행사에서 하시마 관광을 진행하고 있는데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해요.


◇한국인 120여명이 강제 노역으로 사망

우리나라 역사에서 하시마 섬의 존재는 매우 아픈 기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하면서 일본 내 탄광과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식민지 조선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한반도의 수많은 청년, 심지어 나이가 어린 학생들까지도 강제로 하시마 섬에 동원돼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지요. 1943~1945년까지 약 800여 명의 조선인이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당시 해저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며 위험한 작업을 해야 했어요. 승강기를 타고 1000m 깊이 해저 갱도로 내려간 후 개미집처럼 퍼진 굴속으로 한 번 더 들어가 채탄 작업을 했죠. 굴의 높이는 50~60㎝밖에 안 되는 아주 비좁은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12시간씩 누운 채로 석탄을 캐야 했어요. 일본인 갱부들이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쉬운,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일했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갱도 안의 가스 냄새와 탄가루에 대거 노출돼 온갖 질병에 시달렸고, 근무 중 매몰돼 질식사하거나 압사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강제 노역 기간 동안 조선인 노동자가 120여 명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지요. 노동에 대한 대가도 가혹했어요. 겉으로는 일본인 임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사 측이 귀국할 때 돌려주겠다며 임금 중 상당수를 강제로 공제해 노동자가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매우 적었다고 해요. 섬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종종 있었지만 붙잡혔다가는 마구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일부는 그냥 바닷가에서 몸을 던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거사를 감추기 위해 교묘한 꼼수를 부렸어요. 오직 '1850~1910년'으로 한정해 군함도의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한 거예요. 결국 유네스코는 2015년 7월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확정했지요. 물론 유네스코가 '군함도의 역사 전체를 알게 하라'는 권고문을 넣었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이를 계속 회피하고 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