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2019-2/ 조선일보
07.03 "자유로 가는 문 열자"며 열쇠 흔든 50만명, 민주주의 쟁취
[체코슬로바키아 '벨벳 혁명']
1989년 6주간에 걸친 전국적 시위, 사망자 없이 공산정권 무너뜨려
지난달 23일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광장에 25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모여 안드레이 바비스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어요. 바비스 총리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휘말린 상태입니다.
이번 시위를 두고 많은 언론이 '1989년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 이후 최대 규모 평화 시위'라고 보도했어요. 벨벳은 깃털처럼 부드러운 비단의 한 종류예요. 혁명에 왜 '벨벳'이란 이름이 붙은 걸까요?
◇벨벳처럼 부드러운 혁명
"이것은 벨벳 혁명이다." 체코 민주화 운동가 바츨라프 하벨(1936~2011)이 공산 독재를 무너뜨린 직후에 한 연설이에요. 마치 벨벳처럼 부드럽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뜻이었어요.
▲ 1989년 11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50만명이 넘는 시민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어요. 이들은 약 6주에 걸친 시위를 통해 한 명의 목숨도 잃지 않고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생긴 다민족국가예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기타 소수민족이 섞여 살았죠. 2차 세계대전 후 1948년부터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일당 독재를 시작했어요. 정부가 책과 신문을 검열하고, 비밀경찰이 삼엄하게 국민을 감시했죠.
◇'프라하의 봄'은 오지 않고
1960년대가 되자 경제가 갈수록 나빠졌어요. 공산당에 대한 불만도 점점 더 커졌죠. 지식인들이 민주화를 주장했어요.
처음엔 공산당 내에서도 변화가 시작됩니다. 1968년 1월 공산당 내 개혁파인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지도자가 되자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내세웠어요. 의회제도를 확립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보장했지요. 개혁을 향한 열망이 충만했던 이 8개월간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공산 진영의 리더인 소련은 이런 움직임이 다른 동유럽 국가로 번질까 두려웠어요. 같은 해 8월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어요. 둡체크는 해임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내 개혁파는 숙청됐어요.
9년 뒤인 1977년 민주화 운동가이자 극작가인 하벨이 주도해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77헌장'을 작성했어요. 공산당은 헌장을 압수하고 하벨을 구속했어요. 민주화 운동은 끝장난 듯 보였어요.
◇하벨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
1980년대 중반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하며 동유럽은 변화의 물결에 휩싸입니다. 동유럽에서 연쇄적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졌어요.
이때만 해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꿈쩍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학생들이 나섭니다. 1989년 11월 17일 프라하에서 학생 수천 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국립묘지에서 바츨라프 광장으로 행진하자, 경찰이 야경봉으로 진압했어요.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민주화 시위와 총파업이 전국으로 번졌어요. 6주일에 걸친 '벨벳 혁명'이 시작된 거죠.
교도소에서 풀려나 있던 하벨은 '시민포럼'을 결성했어요. 자유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프라하에서만 5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이들은 열쇠고리를 흔들었어요. 자유로 가는 문을 열쇠로 열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행동이었죠. 결국 공산당 정권은 무너지고,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하던 소련군 7만여 명도 철수했어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벨벳 이혼']
'벨벳 혁명'으로부터 약 3년이 지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독립한 것을 '벨벳 이혼'이라고 부릅니다. 평화 혁명처럼 평화로운 분리·독립이었거든요.
벨벳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탄생했지만,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언어와 문화가 조금씩 달랐어요. 슬로바키아 입장에선 인구가 두 배 많은 체코가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것도 못마땅했고요. 결국 두 나라로 나뉘었지만 지금도 우호적인 사이라고 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7.10 유럽에 명성 떨친 日 도자기 가문, 조선 도공의 후손들이죠
[심수관家]
정유재란 때 日 끌려간 도공 심당길, 백자 생산해 일본 도자기 발전에 기여
후손 12대 심수관의 '대화병'이 유명
그 이후로 대대로 가문의 당주가 '심수관'이라는 이름 물려받아 써
조선 도공의 후예인 일본의 도자기 명가 심수관(沈壽官)가의 제14대 심수관(일본명 오사코 게이키치)이 지난 16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심수관가는 16세기 말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도공 심당길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 말로, 12대 심수관(1835~1906)씨 이후 가문 당주(堂主)가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아 쓰고 있어요.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수많은 도공을 포로로 끌고 돌아갔죠. 왜 그랬을까요?
◇조선의 명품 도자기를 탐낸 일본
15~16세기 일본 상인 사이에 다도(茶道)가 유행하기 시작해, 유력 다이묘와 승려에게 퍼져 나갔어요. 그 과정에서 질 좋은 찻그릇을 찾는 권력자들이 늘었죠.
▲ 12대 심수관이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높이 77㎝의 도자기. 그는 1873년 빈 엑스포에 높이 1.55m의 대화병 한 쌍을 내놓으면서 사쓰마 도자기를 널리 알립니다. 12대 심수관은 조선식 옹기 제조법을 도자기에 접목해 크기를 키웠다고 합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그러나 당시 일본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명나라와 조선에 못 미쳤어요. 일본은 도기는 생산이 가능했지만 자기는 만들지 못했어요. 자기는 1300도에 가까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 도기보다 더 단단하죠. 또 손으로 쳤을 때 맑은 소리가 난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렇지만 일본에는 이런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는 흙도, 가마도 없었어요. 그래서 높은 온도를 견디며 만들어진 조선의 백색 자기가 명품으로 꼽혔어요. 특히 사발 모양의 백색 자기가 인기였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뒤 임진왜란을 일으켰죠. 그는 '많은 조선 장인들을 잡아오고 그들 중 우수한 자들을 각별히 뽑아 관리하라'고 명령했어요. 도공도 여기 포함됐죠. 그래서 무수한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갑니다. 특히 일본 지역 영주들은 도자기를 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해 더더욱 조선 도공을 데려가려 했죠.
◇서양을 사로잡은 일본 도자기
포로로 끌려온 이삼평과 심당길 같은 조선 도공 덕분에 일본 도자기는 크게 발달합니다. 이들은 백자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내고, 조선식 도자기 가마도 일본에 도입했어요.
이렇게 도자기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본은 세계 도자기 시장에도 진출합니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에스파냐 같은 유럽 국가들은 명나라 도자기를 앞다퉈 사갔죠. 영어로 자기를 차이나(china)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런데 마침 일본 도자기가 발달하던 시기 명나라가 멸망합니다.
서양은 일본 도자기로 눈을 돌렸어요. 일본은 처음에는 서양인들 주문대로 중국풍 청화백자를 만들었죠. 그렇지만 중국 도자기를 흉내만 내서는 서양인들을 사로잡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붉은색, 노란색, 녹색 등의 물감을 써서 다채로운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죠. 화려한 일본 도자기에 서양은 푹 빠집니다. 17세기 이후 일본은 중국에 버금가는 도자기 수출국이 됩니다. 조선과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에서 통하는 상품을 만들어낸 거예요.
◇빈 만국박람회에서 명성 떨친 심수관
이렇게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일본의 대표 도자기 중 하나가 바로 심수관가의 '사쓰마 도자기'입니다. 심당길과 그 후손이 일본 사쓰마 지역 가고시마 인근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이런 이름이 붙었어요.
특히 12대 심수관이 유명해요. 그는 파리 만국박람회(1867년)와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1873년 ),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년)에 작품을 냈어요. 특히 빈 박람회에 낸 1m55㎝ 높이의 대화병 한 쌍이 유명해요. 금가루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사계절 그림을 그려넣은 작품이었죠.
지금은 14대 심수관에 이어 그의 아들이 15대 심수관(일본명 오사코 가즈테루)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이렇게 선대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은 선대의 문화적 업적이 엄청나다는 뜻이랍니다.
[백자 생산법 알려준 이삼평]
심수관만큼 유명한 또 다른 조선인 도공이 바로 이삼평(?∼1656)이에요. 아리타(有田) 지역에 포로로 끌려온 이삼평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순백의 조선식 자기를 생산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현재에도 아리타 지역에서는 그를 '도조(陶祖·도자기의 시조)'로 받듭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자기를 '아리타 자기'라고 부릅니다. 흰색 자기를 바탕으로 여러 색을 칠해서 만든 것이 특징인데요, 그중에서도 남색 한 가지만 사용해 만드는 자기가 서양에서 큰 인기를 얻었어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서 1650년부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7.17 2600년 전, 왕비 위해 지어… 겉은 정원, 속엔 100개의 방
[바로니아의 공중정원]
기록으로 남은 25m 계단형 고대 건축… 멀리서 보면 공중에 뜬 정원처럼 보여
꼭대기서 떨어지는 폭포도 있었죠
지난 5일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바빌론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어요.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신바빌로니아의 수도로 현재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5㎞ 떨어진 곳에 있어요. 이라크는 1983년부터 36년간 노력한 끝에 바빌론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꿈을 이뤘습니다.
바빌론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게 늦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우선 수많은 전쟁으로 유적이 많이 파괴됐어요. 발굴 작업도 더뎠고요.
바빌론을 대표하는 유적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혔던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도 더 전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 향수병에 걸린 왕비를 위해 지어준 초대형 건물이죠.
◇높이 25m 빌딩에 층층이 꾸민 정원
그리스 역사학자 디오도로스는 "향기를 뿜어내는 꽃,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석류, 세차게 하강하는 폭포수에서 튀는 물방울 모두가 '인간 영역 밖의 아름다움'"이라고 공중정원을 묘사했어요.
▲ ①2600년 전 바빌로니아 수도 바빌론에 있었다고 알려진 공중정원의 상상도. ②일부만 복원된 바빌론 남궁(南宮)과 그 터. ③기원전 300년 전에 지어진 그리스식 극장을 복원한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유네스코
이 거대한 정원은 계단형 빌딩을 짓고 그 테라스와 옥상을 정원으로 꾸민 구조였어요. 맨 아래층은 가로·세로 각각 400m에 높이는 25m였어요. 멀리서 보면 하늘에 정원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공중정원'이란 이름이 붙었지요. 특히 정원 꼭대기에서부터 폭포수 같은 물이 떨어져 내렸다고 해요. 당시 기술로 어떻게 이 높이까지 물을 끌어올렸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불가사의'로 꼽힌 것도 그 때문이에요.
기원전 1세기 그리스 학자 스트라본은 공중정원이 각 층에 아치형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로 천장을 만든 구조였다고 기록했어요. 층마다 테라스가 있어서 이곳에 흙을 덮은 다음 온갖 나무, 풀, 꽃을 심었죠.
공중정원 내부에는 크고 작은 방이 100개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수로의 배치, 풀과 나무의 운반, 방수 문제, 물을 끌어올리는 방법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적 역량이 총 집결된 걸작 건축물이었다고 해요.
◇향수병 걸린 아내에게 바친 선물
공중정원은 신바빌로니아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기원전 634년~기원전 562년)가 아내를 위해 지었다고 알려졌어요.
당시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로니아를 위협하는 아시리아 왕국을 물리치기 위해 동북쪽 메디아 왕국의 공주 아미티스와 정략 결혼을 합니다. 그렇지만 먼 타국으로 시집온 아미티스는 심한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어요. 왕은 그녀에게 보석과 비단옷, 희귀한 동물을 선물하고 매일 아름다운 꽃으로 방을 장식해 줬어요. 그래도 아미티스는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나무들이 무성한 고향의 풍경을 그리워했어요.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내의 고향에서 나무와 풀, 꽃들을 가져다 공중정원을 만들어 선물했죠. 비록 정략 결혼이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였고, 동맹을 통해 왕국의 번영을 가져다준 은인이기도 했어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숨진 뒤 신바빌로니아는 내분에 시달리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멸망합니다. 2500여년 뒤인 1899년, 독일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바그다드 인근에서 지금의 바빌론 유적을 찾아냈죠. 공중정원을 찾는 게 콜데바이의 꿈이었지만 지금도 공중정원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어요. 아직 바빌론은 전체 유적의 5분의 1 정도만 발굴된 상태이니 언젠가 '공중정원 발견'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네요.
[또 다른 유적 '마르두크의 지구라트', 성경 속 바벨탑의 모델이죠]
다른 대표적인 바빌론 유적은 성경에도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진 '마르두크의 지구라트'입니다. '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이라는 뜻으로 '에테메난키'라고도 불렸어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완성한 건물로 높이가 90m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을 짓는 데 가로·세로 각각 30㎝에 높이 8㎝짜리 구운 흙벽돌이 최대 7500만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맨 꼭대기에는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의 신전이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보석이었던 라피스라줄리로 둘렀고, 푸른색 자기 벽돌로 장식했어요. 하지만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무너뜨릴 때 파괴되고 말았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7.24 50파운드 지폐 속 그는… 증기기관의 미래 내다본 사업가
[매슈 볼턴]
과학에 관심 많던 재력가 매슈 볼턴
작은 금속 제품 공장을 운영하던 중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에 관심 가져 연구지원·동업하며 산업혁명 앞당겨
지난 15일 천재 수학자이자 컴퓨터 공학과 인공지능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1912 ~1954)이 새 영국 50파운드 지폐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2021년에 발행될 새 지폐에는 튜링의 업적과 관련된 그림과 글귀가 새겨질 예정이에요.
그럼 지금까지는 누가 50파운드 지폐에 새겨져 있었을까요? 바로 증기기관으로 산업혁명의 문을 연 제임스 와트(1736~1819)와 그의 동업자 매슈 볼턴(1728~1809)이었습니다. 와트는 널리 알려져있지만, 볼턴은 조금 낯선 인물입니다. 하지만 볼턴이 없었다면 증기기관이 널리 쓰이기까지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거예요.
◇미래를 내다본 사업가
볼턴은 재력가이자 기업가이며 과학과 발명에 대한 관심도 엄청난 지식인이었어요. 볼턴은 1762년 산업혁명의 요람인 영국 버밍엄에서 소규모 금속 제품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금속 버튼과 버클, 은 도금한 물건 등을 만드는 곳이었죠.
▲ 증기기관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오른쪽)와 매슈 볼턴을 담은 19세기 그림. 와트는 증기기관을 혁신적으로 개량했고, 그 잠재력을 알아본 볼턴은 와트의 사업 파트너가 돼 증기기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볼턴의 공장은 수력발전으로 기계를 작동시켰어요. 그런데 인근 강의 물이 줄어들면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졌어요. 볼턴은 증기기관으로 눈을 돌려 와트에게 다가갑니다.
증기기관은 와트가 처음 만들어낸 게 아니었어요. 그보다 100여년 전인 1663년에 이미 에드워드 서머셋 우스터라는 사람이 최초로 발명했지요. 와트는 이를 혁신적으로 개량해 기존 증기기관보다 석탄이 4분의 1밖에 안 들어가는 효율 좋은 증기기관을 만들어냈고, 1769년에 특허를 등록했어요.
하지만 와트는 볼턴을 만날 때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증기기관의 잠재력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어요. 오히려 다른 제품을 발명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는데, 이때 볼턴이 나타난 거죠.
와트가 만든 증기기관 특허권의 3분의 2는 그때까지 와트를 밀어준 후원자 존 로벅이 갖고 있었는데, 로벅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볼턴이 로벅이 갖고 있던 특허권을 사들입니다. 그리고 1775년 와트와 '볼턴 와트 상회'를 설립하고 공동 사업을 시작하지요.
볼턴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와트는 증기기관을 꾸준히 개선했어요. 이후 와트 엔진은 영국의 제지, 제분, 면화, 제철 공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증기기관차 개발로까지 연결되면서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어요.
▲ 2011년부터 쓰인 영국 50파운드 지폐 견본. 매슈 볼턴(왼쪽)과 제임스 와트가 함께 새겨져 있어요. 볼턴 얼굴 아래에 그가 남긴 말이 적혀 있어요. "온 세상이 갖고자 하는 '힘', 저는 그걸 팝니다." /영국중앙은행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권이 만료된 1800년, 볼턴과 와트의 동업 계약 기간도 끝납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아들은 공동 사업을 계속해나갔어요. 볼턴은 영국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이 됐죠. 50파운드 지폐에는 볼턴이 남긴 명언이 적혀있습니다. "온 세상이 갖고자 하는 '힘', 저는 그걸 팝니다(I sell here, sir, what all the world desires to have―POWER)."
◇화폐 위조 막는 기술도 개발
볼턴은 증기기관에서 와트의 조연이었지만, 동전 제조 분야에서는 주연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시중에 쓰이는 동전 3분의 2가 가짜라는 추정이 나올 만큼 위조화폐로 골치를 썩였어요.
볼턴은 증기기관을 금속 가공 기계에 적용해 1790년 특허를 얻어요. 볼턴이 동전을 제조하기 전까지는 동전의 모양이 균일하지 않아서 위조하기가 쉬웠어요. 하지만 증기기관을 도입한 볼턴의 조폐 기계는 지름과 모양이 완벽하게 똑같은 동전을 생산해냈어요. 나아가 가장자리를 더 두껍게 찍어내 위조하기 어려운 '카트휠(cartwheel·수레바퀴)' 동전도 개발해냅니다. 볼턴이 만든 조폐 기계는 영국 조폐국은 물론 덴마크와 러시아에도 팔려나갔답니다.
[동력의 측정 단위 '마력'… 와트가 만든 단위랍니다]
제임스 와트는 생전에 증기기관의 일률(단위 시간당 하는 일)을 측정하기 위해서 짐마차 말 한 마리가 일정 시간(1분) 동안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측정해 '마력(馬力)'이라는 단위를 만들었어요. 이는 대략 75㎏짜리 짐을 1분 동안 60m 옮기는 데 들어가는 힘의 크기를 말합니다.
마력 말고도 동력(動力)이나 일률을 표현하는 단위가 또 있죠. '와트(Watt)'입니다. 제임스 와트에게서 따온 도량형이죠. 1마력은 735.5W입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7.31 영원한 생명 찾아나선 4500년전 半神半人의 모험
[길가메시 서사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영웅 이야기… 역사 속 우루크 왕 길가메시가 주인공
친구가 세상 떠나자 죽음의 공포 느껴 영생 찾지만 결국 죽음 받아들여
영화배우 마동석씨가 2020년 개봉 예정인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서 '길가메시' 역을 맡아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됐어요. 이 캐릭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대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어요.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과연 어떤 작품일까요?
◇일리아스보다 1800년 먼저 나온 서사시
서양 서사시 중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에 나왔어요.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보다 한참 앞선 약 4500년 전의 작품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꼽히죠. 현대 이라크 지역에 뿌리내렸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산이에요.
▲ 길가메시(왼쪽)가 신들이 내려 보낸 재앙이었던 '하늘의 황소'를 제압하는 모습을 담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테라코타 조각입니다. 벨기에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던 도시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인간 아버지와 여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이에요. 오만하고 난폭한 왕이었던 그는 인간의 손길 없이 야생에서 자란 사나이 엔키두를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두 영웅은 입으로 불을 내뿜는 숲속의 괴물 훔바바를 물리치며 함께 성장해나가죠.
여신 이슈타르가 길가메시에게 청혼하면서 비극이 벌어집니다. 길가메시는 청혼을 거부하고 이슈타르를 모욕합니다. 신들은 거대한 황소를 보내 길가메시를 응징하려 하죠.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황소를 물리치지만, 그 과정에서 신들의 분노를 사 엔키두가 죽고 맙니다.
충격을 받은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결을 찾겠다고 결심합니다. 불사가 불가능하다면 늙지 않는 법이라도 찾겠다며 바다에서 불로초를 캐지만, 길가메시가 잠든 사이 뱀이 불로초를 먹어버리고 말지요. 마지막에 길가메시는 젊은 여인 시두리를 만납니다. 길가메시에게 그녀는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현실의 평범한 행복을 즐기라'고 충고하죠. 길가메시는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영웅
독일 시인 릴케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죽음의 공포에 대한 위대한 서사시'라고 말했어요.
처음에 길가메시는 자신을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하지만 엔키두가 죽은 뒤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깨닫고 공포에 빠지죠. 그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역설적으로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필멸의 존재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세보다 현실의 삶을 더 중시했던 수메르인들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믿어온 종교와 신화에 큰 영향을 줬기에 더 중요합니다.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 이 서사시 안에 담겨 있어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도 길가메시 서사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오디세이아는 세상 곳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점, 주인공의 핵심 조언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닮아있어요.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모험 이야기에도 영향을 줬을 거란 시각이 있어요. 길가메시가 엔키두와 함께 모험을 떠나 황소를 격퇴하고 사자를 잡는 장면 등이 헤라클레스의 열두 고난과 겹친다는 겁니다.
수메르 역사와 신화를 연구해온 저술가 김산해씨는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책에서 "오디세이아뿐만 아니라 게르만 민족 서사시 '베오울프',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모두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출발했다"고 평가했어요.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등장]
길가메시 서사시를 기록한 점토판 12개는 영국 고고학자였던 호르무즈드 라삼이 1853년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에 있는 유적에서 발굴했어요. 다만 큰 화제는 되지 않았어요. 쐐기문자 기록이라 정확한 내용도 알려지지 않았죠.
1872년 영국 고고학자 조지 스미스가 서사시의 11번째 점토판을 해석해 영어로 발표하면서 서양에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바로 '대홍수'가 닥쳤을 때 '우트나피시팀'이 방주를 건설해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됐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성경 속 '노아의 방주'와 비슷해 크게 주목받았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8.07 275년 지속되어 온 '칼 가진 자'와 '코란 든 자'의 연합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18세기 이슬람 근본주의자 '와합' 우상 숭배·여성 사회활동 금지 주장
"신도들 타락… 코란 그대로 해석해야"
지난 2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성들의 해외여행 제한을 해제하기로 했어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은 그동안 마흐람(남성 가족 후견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결혼과 취업은 물론 해외여행도 떠나지 못했는데, 이 중에서 해외여행만큼은 풀어주기로 한 거예요.
사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여성 인권이 낮은 편이에요.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의 뿌리가 된 '사우디 제1왕국'이 와하비즘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이념과 뿌리 깊이 얽혀 있어서예요.
◇이슬람 근본주의 외친 '와합'
사우디아라비아는 와하비즘 국가입니다. 와하비즘은 쉽게 말해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적힌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이념입니다.
▲ 사우디아라비아는 작년에 처음으로 여성도 운전할 수 있게 했어요. 지난 2일에야 성인 여성 혼자 외국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했을 정도로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나라입니다. /EPA 연합뉴스
와하비즘은 18세기 이슬람교 학자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1703~1792)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에요. 와합은 지금 사우디아라비아 수도인 리야드에서 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당대의 이슬람교 신자 대다수가 타락했다고 생각했어요.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내세우는데도 많은 사람이 알라신이 아닌 이슬람교 성인을 숭배하거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어요.
그래서 그는 초기 이슬람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을 펼쳤어요. 무함마드가 처음 이슬람교를 창시했던 7세기 이슬람 교리가 정통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친구로 토착민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던 이의 무덤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나무도 우상 숭배라며 잘라버렸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도 금지했죠.
와하비즘에 찬동하지 않던 사람들은 이런 극단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죠. 와합은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와합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후원해줄 현실 권력자를 찾아나서죠.
◇칼 가진 자와 코란을 든 자의 연합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명목상으로 오스만제국 땅이었어요.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국력이 떨어져 혼란스러운 상태였죠.
당시 아라비아반도 중부 디리야(현재의 리야드)를 지배하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1765)는 와하비즘에 매력을 느낍니다. 사우드와 와합은 1744년 군사력은 사우드가, 종교적 통치 이념은 와합이 맡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칩니다. 사우디 제1왕국의 탄생이죠.
이후 사우드는 아라비아반도를 '진짜 이슬람'의 깃발 아래 통일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1780년대부터 빠른 속도로 영토를 넓힙니다. 1805년에는 이슬람교의 양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모두 정복하고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손에 넣었죠.
하지만 오스만제국도 호락호락하진 않았어요.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반격에 나서면서 사우드 가문은 메카를 비롯한 영토 대부분을 잃고 재기를 노리게 됩니다.
사우드 가문은 20세기 초 다시 와하비즘을 주창하며 아라비아반도를 차지합니다. 무함마드 빈 사우드의 5대 손인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1876~1953)가 아라비아반도를 다시 통일하고 1932년 건국을 선포합니다. 사우디 제3왕국, 우리가 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가 시작된 겁니다.
◇율법으로 다스리는 나라
사우드 가문과 와합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혼인에 혼인을 거듭했어요. 나라는 사우드 가문에서 다스리지만, 종교 지도자는 와합의 후손이 맡는다는 원칙도 지켜지고 있고요. 이런 가운데 와하비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사회·교육·법의 기준이 됐습니다. 코란과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근거한 관습법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배하게 됐고요.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마흐람 제도도 샤리아에 따른 것입니다.
책 '와하비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쓴 데이비드 코민스 미국 디킨슨대 교수는 "종교적 사명과 정치적 힘이 결합한 1744년 협약은 2세기 반이 지나도록 지속됐다"고 했어요. 2019년 지금까지 275년 동안 현재진행형입니다.
[사우디 국기 속 글씨, 무슨 뜻?]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는 초록색 바탕에 '알라 외에 신(神)은 없고, 무함마드는 예언자다'라는 코란의 한 구절이 적혀 있어요. 초록색은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가장 선호한 색이에요. 이 국기는 압둘 와합이 주도했던 '와하비 운동'에서 사용했던 깃발이기도 하죠.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8.14 총이 자유 지켜준다고 믿어… 헌법서 '무장할 권리' 보장
미국의 '총기 보유'
'이곳 사람들은 옷 속에 총을 감추고 다녔다. 아주 사소한 싸움에서도 총을 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반(半)야만적인 사회나 다름없었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1년 미국 앨라배마를 여행하면서 남긴 글입니다.
그 뒤 두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미국은 한 해 4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도 미국 텍사스주와 오하이오주에서 대형 총기 참사가 벌어졌지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1917~1963)과 마틴 루서 킹(1929~1968) 목사가 총탄에 쓰러진 지 5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총기 규제가 요원한 이유가 뭘까요
◇'원조'는 영국 권리장전
총기 보유 지지자들은 미국 수정헌법 2조를 내세웁니다.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국가)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는 조항으로 1791년에 제정됐지요.
▲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공식 트위터에 공개한 최신호 표지입니다. 올해 미국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진 253개 도시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가운데 적힌 대문자 ‘이너프’(ENOUGH)는 ‘충분하다’는 뜻으로 더는 총격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트위터
왜 이런 조항이 헌법에 들어간 걸까요? 이건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영국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영국은 16세기 가톨릭 국가에서 신교 국가로 돌아섰지만 그 뒤로도 종교 갈등이 심했어요. 17세기 영국왕 제임스 2세는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겠다며 의회 승인 없이 상비군을 모집하고, 신교도를 탄압했지요.
결국 1688년 영국 의회는 '명예혁명'을 일으켜 제임스 2세를 왕좌에서 쫓아냅니다. 이듬해에는 절대군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권리장전'을 제정했고요. 여기엔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신교도는 자기 방어를 위해 무장할 수 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죠. 권리장전은 바다 건너 거친 신대륙에 정착한 이주민에게도 적용됐어요.
◇무장할 권리
식민지 미국은 1775~1783년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어요. 전쟁 중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연방정부를 꾸린 데 이어 독립 후엔 독자적인 헌법을 비준했지요. 1789년의 일입니다.
미국 지도자들은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자신들이 만든 연방정부가 과거 영국왕 제임스 2세가 그랬듯 상비군을 만들어 국민을 억압하면 어떻게 할지 우려한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게 1791년 비준된 수정헌법 10개 조입니다.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제1조가 '종교 및 언론·표현의 자유', 제2조가 '무장할 권리'였어요. 당시 미국 사람들은 자기네가 민병대의 힘으로 영국을 몰아냈다고 믿었거든요.
◇"민병대는 신화일 뿐"
다만 이런 믿음은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보는 역사학자가 적지 않습니다. 독립전쟁을 이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민병대는 기습 교전에는 쓸모가 있었지만, 정규전에서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인들은 '독재에 맞서는 힘은 총이고, 그 총으로 자유로운 나라 미합중국을 만들었으니, 총이 곧 자유'라고 믿었어요. 이게 오늘날 총기 소유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됐죠. 리처드 호프스테터(1916~1970)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를 '국가(왕)의 상비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자유민 민병대에 대한 신뢰'로 설명합니다.
수정헌법 2조에 나오는 '인민(people)'이 민병대를 뜻하는지, '모든 개인'을 말하는지도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는데, 1970년대부터 '모든 개인'으로 해석이 확대됐습니다. 2008년에는 전과자의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게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고요. 총기 규제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배경엔 이런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답니다.
[총기 규제 또 하나의 장벽 NRA]
미국 총기 규제를 가로막는 장벽 중 하나로 전미총기협회(NRA)가 꼽힙니다. “총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고 주장하는 이익단체지요. 전직 대통령, 법관 등 여론 주도층 500만명을 회원으로 두고 매년 로비와 홍보에 연 2억~3억달러를 지출하며 총기 관련 사업자의 권익을 도모합니다.
NRA의 막강한 로비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자 시(市) 경찰은 사고 예방을 위해 주민들의 총기를 압수합니다. NRA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어 ‘비상사태에서도 총기를 압수할 수 없다’는 주법·연방법이 제정되도록 합니다.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8.21 페론 부부가 시작한 포퓰리즘, 아르헨은 아직도 중독
[페론주의]
1946년 집권한 페론 대통령과 아내, 임금 20% 인상하는 등 복지 확대
나랏돈 퍼부으며 대중의 인기 끌어
지난 11일(현지 시각)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선 예비선거에서 좌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페론주의'를 내세운 후보가 득표율 47%로 마크리 현 대통령(33%)을 크게 앞서면서 아르헨티나 경제가 요동치고 있어요. 국제 신용평가 업체들이 아르헨티나 신용등급을 일제히 떨어뜨리고, 아르헨티나 주가지수도 급락했어요. 페소화 가치도 일주일 새 약 22%나 떨어졌고요. '페론주의'가 뭐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페론 대통령 부부 이름에서 따와
페론주의(Peronism)는 후안 페론(Peron·1895~1974) 전 대통령과 그의 아내 에바 페론(1919~1952)의 이름에서 나온 말입니다. 페론 대통령 부부가 추진한 정책과 그 이념을 뜻하죠.
▲ 후안 페론(맨 오른쪽)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아내 에바 페론(오른쪽에서 둘째)이 1950년 발코니에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어요. 페론 부부는 노동자와 중산층을 상대로 임금 인상과 복지 확대 정책을 펴 인기를 얻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후안 페론은 1946~1955년과 1973~1974년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을 지냈어요. 원래는 군인 출신이었는데, 육군 대령이던 1943년 군부 쿠데타에 가담합니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는 노동부 장관과 복지부 장관을 지내면서 노동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폈어요. 임금 인상, 노동자 복지 확대 정책으로 인기를 얻어 1946년 대선에 승리했어요.
그는 집권 후 '외국 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복지 확대와 임금 인상을 통한 노동자 수입 증대'를 강조했어요. 한 해에 많게는 20%씩 노동자 임금을 올렸지요. 1947년에는 '경제 독립'을 내세워 철도, 전화, 가스, 전기, 항공사 등을 국유화하고 외국 자본을 배제했어요.
◇현금으로 얻은 민심, 독재로 잃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현금을 살포하면서 한때 아르헨티나 빈곤율이 크게 줄어들었어요. 하지만 이런 반짝 성공의 이면엔 어두운 면이 있었어요.
모든 의사 결정은 대통령인 페론을 통해야 했어요. 그래서 정당이나 의회 정치가 발전하지 않았어요. 부정부패 추문도 끊이지 않았어요. 페론 자신도 집권 기간 동안 금괴 1200개, 비행기 1대, 요트 2대, 자동차 19대, 아파트 17채, 귀금속 1500점이라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죠. 겉으론 민중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엘리트주의자였다고 해요. 사석에서 "대중은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은 느낌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고 말한 적도 있죠.
그는 빈부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탄탄한 산업 기반을 닦거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어요. 결국 아르헨티나 경제는 서서히 침체에 빠집니다. 페론은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무제한 재선 허용'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추진해 국민의 지지를 잃었어요. 페론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아르헨티나에서 쫓겨납니다.
◇페론주의 부활은 '에비타' 덕분
많은 학자가 한때 경제 대국이던 아르헨티나가 국력이 기운 결정적인 원인으로 페론주의를 꼽아요. 실제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1970년대 이후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르헨티나에서는 매번 선거철이면 '페론주의'가 고개를 들어요. "에비타 효과 때문"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에비타'는 후안 페론의 아내 에바 페론의 별명이에요. '작은 에바'라는 뜻이죠.
그녀는 후안 페론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어요.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15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올라와 배우가 됐죠. 1944년 자선 행사에 참석했다가 떠오르는 정치인 후안 페론과 만나 이듬해 결혼했어요. 대통령 부인이 된 뒤 자선 사업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펼쳤죠.
그런 그녀가 1952년 33세로 요절하면서 페론은 큰 타격을 받았어요. 결국 아내가 죽은 지 3년 만에 권력을 잃었죠.
[여전히 성모로 숭앙받는 에비타]
아르헨티나 언론인 토마스 마르티네스는 1996년 "라틴아메리카에선 '정치적 신화'가 다른 지역보다 유독 오래간다"며 에바 페론의 문화적 영향력이 쿠바혁명을 일으킨 체 게바라에 버금간다고 평가했어요.
쿠바혁명은 당초의 이상과 달리 빈곤과 독재를 불렀어요. 그런데도 쿠바혁명을 주도한 체 게바라는 지금껏 청춘과 정의의 상징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페론주의 때문에 엉망이 됐건만, 후안 페론 대통령의 아내인 에바 페론은 여전히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으로 통하고 있어요. 각각 '예수'(체 게바라)와 '성모 마리아'(에바 페론)의 이미지로 숭앙받고 있는 거죠.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8.28 미국은 부동산 투자 귀재… 영토 40%가 돈 주고 산 땅
[미국의 영토 구매]
1803년 전쟁 자금 필요했던 프랑스에 루이지애나 땅 사서 영토 두배로 불려
1㎢당 단돈 5달러에 알래스카 매입… 국민들 '냉장고 샀다'며 비웃었지만 이후 천연자원 매립 사실 밝혀졌어요
최근 트럼프가 그린란드 매입에 관심… 땅 주인 덴마크는 팔 수 없다며 일축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 땅인 그린란드(약 217만㎢)를 사들여 미국 영토로 삼겠다는 뜻을 내비쳤어요. 그러자 지난 18일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그린란드는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죠.
그린란드는 북극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에요. 석유, 천연가스,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어요. 유럽과 북미 대륙 중간에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기도 하죠.
사실 미국이 그린란드에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1946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덴마크에 1억달러를 내고 그린란드를 사들이려 했었거든요.
◇미국 영토 약 40%가 돈 주고 산 땅
미국은 세계에서 셋째로 넓은 국토(약 983만㎢)를 가진 국가입니다. 하지만 처음 영국에서 독립했을 땐 고작 동부 13개 주에 불과했어요. 이후 무수한 전쟁과 영토 구입으로 지금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지요. 지금 미국 영토의 약 38%(374만㎢)가 돈으로 사들인 땅이랍니다.
미국은 19세기 들어 서부 개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부동산 구매'에 나섭니다. 먼저 1803년 나폴레옹에게 1500만달러를 주고 프랑스령 루이지애나(214만㎢)를 사들였어요.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한 푼이 아쉬울 때였거든요.
루이지애나는 '루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 14세를 기리는 이름입니다. 지금 미국 남부에 있는 루이지애나주(약 13.5만㎢)뿐만 아니라, 미네소타·미주리·아칸소·캔자스·오클라호마·네브래스카·몬태나주 등이 포함된 거대한 땅덩어리였죠. 이때 미국 영토는 당시 기준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불어났어요.
미국은 계속해서 서쪽과 남쪽으로 팽창했습니다. 무력으로 멕시코를 제압하고 텍사스를 합병하고,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도 집어삼켰어요. 이 과정에서 1853년 지금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주 남부를 멕시코에 1000만달러를 주고 사들입니다. 남한 크기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면적(8만㎢)이었죠. 당시 주멕시코 미국 대사의 이름을 따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이라고 부릅니다.
◇'1㎢당 단돈 5달러'에 알래스카 매입
미국은 1867년 러시아로부터 북아메리카 북서쪽 끝에 붙어 있는 알래스카(152만㎢)를 단돈 720만달러에 사들입니다. 1㎢당 5달러도 안 되는 헐값이었죠. 알래스카는 러시아가 18세기에 정복했던 땅이었는데, 크림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 미국에 팔아넘긴 겁니다.
윌리엄 수어드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선견지명을 갖고 알래스카 매입을 주도했어요. 동시대 미국인들이 알래스카를 가리켜 '수어드가 사들인 냉장고'라고 비웃어도, 그는 "알래스카의 가치를 발견하려면 한 세대가 지나야 한다"고 버텼습니다. 이후 알래스카에 금,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이 엄청나게 묻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이미 덴마크에서 땅 사들였던 미국
미국은 덴마크에서도 땅을 사들인 전례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죠. 미국은 1917년 2500만달러를 들여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에 있던 50여개 섬(346㎢)을 사들입니다. 혹시라도 유럽 국가가 북미 대륙을 급습할 경우 이곳이 근거지가 될 거라 생각해 1867년부터 꾸준히 덴마크를 설득한 결과였어요.
하지만 덴마크가 그린란드도 팔겠다고 나설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덴마크 총리가 트럼프의 제안을 거절한 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달로 예정됐던 덴마크 방문을 연기해버렸어요.
[땅 85%가 얼음인데 그린란드? 이주민 불러 모으려고 지은 이름]
그린란드(Greenland)는 전체 면적 85% 이상이 얼음으로 덮여 있어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2%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름은 '녹색의 땅'이죠. 이 이름은 10세기 그린란드로 이주한 바이킹족 '붉은 털 에이리크'가 붙였습니다. 그는 그린란드섬 남쪽에 정착한 뒤 새로운 이주민들을 불러 모으겠다면서 이곳이 '농사짓기 좋고 살기 좋다'고 홍보하려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이 섬을 '칼라알릿 누낫(Kalaallit Nunaat)'이라고 부릅니다. '칼라알릿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죠. 이들은 그린란드 서부를 근거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9.04 '반값 라디오'로 집집마다 히틀러의 메시지 퍼뜨렸죠
[파울 요제프 괴벨스]
언론사 낙방 거듭하던 청년 괴벨스, 히틀러 연설에 매료돼 참모진 합류
선전·선동 맡아 나치 지명도 올려… 나치에 도움 되면 '가짜 뉴스'도 유포… 폭력적인 집회도 숱하게 열었어요
나치 패망하자 가족과 함께 목숨 끊어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목록)에서 제외하는 작업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가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입니다.
세코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시절(2005년) 자민당 공보본부장대리를 지냈어요. 자민당의 선거 전략과 홍보를 맡는 자리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처음 집권했을 때(2006년)는 총리보좌관을 지냈고요. 자기 세력을 위해선 어떤 논리든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자민당의 괴벨스'란 별명을 붙였어요. 세코 자신은 이 별명을 질색한다고 합니다. 괴벨스가 누구길래 그럴까요?
◇히틀러의 입, 괴벨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을 총괄했던 히틀러의 오른팔이에요. 그는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한평생 다리가 불편했고, 신체적 열등감이 심했어요.
▲ 파울 요제프 괴벨스(오른쪽 끝)는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을 총괄했던 히틀러의 오른팔입니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왼쪽 둘째) 역시 열렬한 히틀러 신봉자였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적 우월감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어요. 학교에서 누군가 자신보다 더 아는 걸 견디지 못했다고 해요.
괴벨스는 23세 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취업난에 시달렸어요. 당시 독일은 1차대전 패전의 충격으로 경제난이 심각했어요.
괴벨스는 언론사 취업은 물론 작가가 되는 데도 실패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반유대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유대인이야말로 물질주의의 화신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덕에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위험천만하고 편협한 사상이었어요.
◇괴벨스, 히틀러에 매료되다
이 무렵 괴벨스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그는 1925년 나치에 입당해 히틀러와 가까워집니다. 당시 일기를 보면 괴벨스가 얼마나 히틀러에게 매료됐는지 드러납니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독일의 부흥을 이끌 인물이라 믿었어요. 히틀러도 괴벨스의 출중한 글솜씨와 연설 실력을 알아보고 그를 핵심 참모로 삼았죠.
1928년 5월 선거에서 득표율 3%였던 나치당은 1932년 7월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37%로 크게 오르며 원내 1당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선전·선동을 맡아 나치의 지명도를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는 나치에 도움이 된다면 '가짜 뉴스'도 서슴지 않고 유포했어요. 나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멸종시켜야 할 존재'이자 '도살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고, 폭력적인 집회를 숱하게 조직했어요.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되자마자 그런 괴벨스를 선전부 장관에 임명합니다.
◇'괴벨스의 주둥이'라 불린 보급형 라디오
선전장관이 된 뒤 괴벨스는 우선 신문을 통제했어요. 그는 "언론은 국가가 원하는 곡을 연주하는 피아노"라고 믿었지요.
괴벨스는 또 라디오에 주목했어요. 그땐 라디오가 요즘 유튜브처럼 '새로 뜨는 인기 미디어'였거든요. 그는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는 구세주이자 천재이고 구국의 영웅'이란 메시지를 퍼뜨렸어요.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는 아예 '국민수신기'라는 76마르크짜리 라디오를 대량생산하게 했어요. 당시 일반 라디오의 반값이었어요. 일반 노동자 2주치 급료 수준이었죠. 독일 인구가 8000만명이던 시절, 이 라디오는 5년 만에 무려 1000만 대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독일 국민은 이 라디오를 '괴벨스의 주둥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하지만 2차대전이 길어지면서 독일 국민은 회의에 젖게 됩니다. 괴벨스는 날마다 '독일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하루하루 패색이 짙어졌으니까요.
마침내 나치가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히틀러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다른 측근들이 도망가는 와중에도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 곁에 남아 아내와 여섯 아이와 함께 집단자살 했답니다.
[그 자신도 다리 불편했으면서 장애인 학살 정책 지지했어요]
나치는 1933년부터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이라면서 유전 질환을 앓는 40만명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시술을 했어요. 이후 1939년에는 'T4 작전(Aktion T4)'이란 이름으로 장애인과 정신 질환자를 학살했어요. 괴벨스는 이 정책을 지지한 핵심 인사 중 하나였어요. 그 자신이 장애인이었는데도요.
참고로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습니다. 마그다는 나치 패망 후 아이들과 집단 자살하면서 '총통과 나치즘 이후에 오는 세계는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편지를 남겼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9.11 대혁명 43년 후 이틀간의 봉기, '레미제라블' 배경이죠
[프랑스 6월봉기]
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 후에도 정치는 여전히 왕정, 민중 삶은 피폐
1832년 참정권 요구하며 들고일어나 정부군과 시가전 벌여 800여명 사상
결국 1848년 '2월혁명'서 투표권 쟁취
지난 3월부터 범죄인인도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가 이어지고 있죠. 홍콩 시위대는 평화 시위의 한 방식으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민중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불렀어요.
'레미제라블'은 원작 소설과 뮤지컬 모두 유명합니다. 이 작품이 1789년 시작된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주인공 장 발장은 1815년 출소해 1832년 6월 봉기의 현장을 누빈답니다.
◇대혁명 전으로 돌아가자는 '빈 체제'
'자유·평등·박애'를 기치로 했던 프랑스혁명이 곧바로 프랑스인에게 자유를 주진 못했어요. 오히려 혁명의 혼란 속에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죽고, 권력 공백 속에 전쟁 영웅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했지요.
▲ 영화 '레미제라블'(2012)에서 1832년 6월 봉기를 묘사한 장면입니다. 파리 시민들이 붉은 깃발을 흔들며 '민중의 노래'를 합창하죠. 6월 봉기는 단 이틀 만에 진압됐지만 빅토르 위고가 이를 소설 '레미제라블'로 남기며 다시 알려집니다. /UPI코리아
그렇지만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다시 한 번 프랑스의 정치 체제가 혼란에 빠집니다. 패전국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 대표들은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회의를 열고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합니다. 이를 빈 체제라고 하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 때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으로 즉위했어요.
◇또다시 혁명을 부른 왕정복고
그렇지만 프랑스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어요. 1830년 하원 선거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인사가 많이 당선됐습니다. 당시 국왕은 루이 16세의 막냇동생 샤를 10세였어요.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왕정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조치는 파리 시민의 분노를 일으켰어요. 시민들은 파리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정부군과 시가전을 벌였어요. 샤를 10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 대신 왕족임에도 프랑스혁명을 지지했던 루이 필리프(1773~1850)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됩니다. 의회 해산부터 루이 필리프 즉위까지 모두 7월에 이뤄졌어요. 그래서 샤를 10세를 몰아낸 사건을 '7월혁명'이라고 불러요.
◇민중이 다시 한 번 일어나다
하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자 루이 필리프는 왕정이 계속됐으면 했어요. 프랑스는 왕정을 지지하는 귀족, 입헌군주정을 바라는 부르주아지, 공화정을 원하는 노동자와 하층민의 내부 대립이 계속 깊어졌어요.
당시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 여파로 빈부 격차가 심해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작, 식량 부족, 물가 상승으로 경기가 극도로 나빠졌고요. 1832년에는 콜레라까지 창궐해 많은 사람이 숨졌어요.
민중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의회 선거권은 거액의 세금을 내는 지주와 자본가에게만 있었죠. 민중은 더 분노했어요.
1832년 6월 1일 대표적인 공화주의 정치인이었던 장 막시밀리안 라마르크 장군이 콜레라로 사망합니다. 공화주의자들은 6월 5일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일명 '6월 봉기'예요. 뮤지컬과 영화에서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대목이 바로 이 장면이죠.
파리 시민은 라마르크 장군의 관 곁으로 모여들어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외쳤어요. 시민과 정부군 사이에서는 총격이 오갔어요. 이틀 동안 이어진 봉기에서 정부군과 시민 측을 합쳐 사상자 800여명이 나왔습니다.
루이 필리프 왕정은 6월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시민들은 1848년 다시 힘을 합쳐 '2월혁명'을 일으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노동자와 하층민도 마침내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지요.
[실패로 끝나 거의 잊힌 사건…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 알렸죠]
1832년의 6월 봉기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어요. 이 봉기는 단 이틀 동안 벌어졌고, 철저한 실패로 끝나 거의 잊힌 사건이었거든요.
위고는 봉기 첫날이던 그해 6월 5일 튈르리 정원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갑작스러운 총소리를 듣고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걸었어요. 그의 눈앞에 정부군과 시민군이 벌이는 시가전이 펼쳐졌지요.
위고는 30년 뒤인 1862년 '레미제라블'을 펴냅니다. 19세기 초반 비참했던 프랑스 민중의 삶과 6월 봉기를 세밀하게 묘사했어요. 30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죠.
윤서원·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9.18 19세기 반출된 파르테논 신전 조각, 영국이 단돈 6억에 샀죠
[엘긴 마블]
그리스가 오스만제국 지배하에 있을 때 英 엘긴 백작이 오스만제국 허락 구하고
파르테논 신전 조각 40% 뜯어내 반출… 그리스 "불법 반출이니 환수하라" 주장
英 "오스만이 허가해 적법하다"며 거부, 최근 그리스 정부가 장기 대여 방식 제안
지난 6일 그리스 정부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을 빌려와 2021년 아테네에 전시하고 싶다고 공식 요청했어요. 이에 앞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영국이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장기 대여 방식으로 그리스에 돌려주면, 그리스 밖으로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값진 예술품을 대영박물관이 전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밝혔어요.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되찾는 건 미초타키스 총리 혼자만의 꿈이 아닙니다. 지난 4월 프로코피스 파블로풀로스 그리스 대통령도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은 런던이 아닌 아테네에 있어야 한다면서, 그리스는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을 돌려받기 위해 "성전(聖戰)을 치르고 있다"고 했어요. 무슨 사연일까요?
◇오스만제국 지배 당시 반출된 대리석상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고, 신전 외벽 처마 밑에163m 길이의 대리석 조각을 둘렀어요. 사실적 묘사와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특징적인 2500년 전의 서양 미술 걸작입니다. 또 신전에 무수히 많은 조각상을 세웠죠. 그런데 이곳에 있던 대리석 조각 대부분은 대영박물관에 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1799년 영국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1766~1841)가 오스만제국에 영국 대사로 부임합니다. 엘긴 백작은 엘긴 지방의 영주를 뜻해요.
▲ 술의 신 디오니소스(왼쪽 끝) 조각 등이 있는 ‘엘긴 마블’입니다.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죠. 영국 엘긴 백작은 1800년대 초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던 대리석 조각 약 40%를 영국으로 반출합니다. 영국과 그리스는 이 ‘엘긴 마블’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자신의 저택을 그리스 신전처럼 꾸미고 싶어 했어요. 그는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에 접근해 파르테논 신전 접근권을 따냈습니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허가를 받아 1801~1812년 사이 전체 파르테논 신전 조각의 40%를 뜯어내 영국으로 가져갑니다. 이 조각들은 엘긴 백작이 가져온 대리석상이라는 뜻에서 훗날 '엘긴 마블'이라 불리게 되죠.
이후 엘긴 백작은 이혼 위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가져온 조각을 영국 정부에3만5000파운드(현재 가치 약 6억원)를 받고 팔았어요. 엘긴 마블이 대영박물관에 전시되게 된 사연입니다.
◇적법한 반출이라는 영국
그리스는 1821년부터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여 1832년 독립합니다. 1970년대 들어서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기 시작하죠.
'엘긴 마블' 논란도 이때부터 본격화됩니다. 1983년 멜리나 메르쿠리 그리스 문화부 장관은 "식민지 시대에 그리스의 뜻과 상관없이 빼앗겼다"며 공식적으로 환수 요청을 합니다.
▲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엘긴 마블’은 신전 석조 처마 아래 등에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영국은 '합법적으로 얻은 유물'이라며 그리스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하죠. 엘긴 백작은 영국 정부에 엘긴 마블을 넘기면서 오스만제국이 발급한 허가장을 제출했어요.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을 일부 떼어 영국으로 가져가도 좋다'는 내용이죠. 영국 의회는 이 허가장을 근거로 엘긴 마블을 사들였어요. 그러니 영국 소유라는 게 영국의 주장입니다.
◇불법 반출이라는 그리스
그리스는 이 허가장 자체를 문제 삼고 있어요. 오스만제국이 발급했다는 원본이 없고, 영어로 번역한 사본만 남아 있어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죠. 그리스는 이를 근거로 '영국은 조각의 원주인 그리스인과 그리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조각상을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미초타키스 현 그리스 총리는 무조건적 반환을 요구하던 과거 정부와 달리 장기 대여 형식이라는 타협안을 내놨죠. 그렇지만 지금도 대영박물관은 '엘긴 마블이 영국 소유라고 먼저 인정해야만, 대여도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양국이 시각 차이를 줄일 수 있을까요?
[유네스코 '문화재 불법반출 방지법', 엘긴 마블·직지에 효력 발휘 못해]
유네스코는 문화재 불법 거래를 막고 환수를 촉진하기 위해 1970년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을 맺습니다. 줄여서 ‘1970년 협약’이라고 부르죠. 타국에서 불법적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취득을 금지하는 내용이에요. 134개국이 이 협약에 가입하고 준수하고 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엘긴 마블’이나 우리나라 ‘직지심체요절’ 같은 문화재에 이 협약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970년 맺은 협약이기 때문에 이보다 앞서 불법 반출된 문화재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습니다.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9.25 '태양왕' 루이 14세가 화날만큼 화려했던 신하의 저택
[보르비콩트 저택]
왕권 강화에 힘쓰던 루이 14세에게 재무장관 푸케의 대저택은 눈엣가시
공금 횡령으로 체포해 종신형 내려
저택을 지었던 건축가·예술가 불러 더 크고 화려하게 베르사유궁 개조
지난 18일 파리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보르비콩트(Vaux-le-Vicomte)' 저택에 강도가 들어 약 26억원어치의 귀금속을 훔쳐 갔다고 합니다. 궁전만큼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저택은 루이 14세(1638~1715) 집권기에 재무장관을 지낸 니콜라 푸케(Fouquet·1615~1680)가 지었습니다. 그런데 푸케는 이 저택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는데,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실권자의 오른팔이었던 푸케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절대군주였습니다. 그렇지만 1643년 5세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실권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모후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재상 마자랭이 실권을 잡고 있었죠.
▲ 프랑스 파리 인근에 있는 보르비콩트 저택 전경입니다. 루이 14세 시기 재무장관을 지낸 니콜라 푸케가 지었습니다. 그러나 푸케는 공금 횡령 혐의로 저택을 빼앗기고 감옥에서 생을 마칩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 저택을 지은 장인들을 불러 베르사유 궁전을 이보다 더 화려하게 증·개축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푸케는 그 마자랭의 오른팔이었습니다. 푸케는 1653년부터 재무장관직을 맡았는데, 나랏돈을 관리하는 요직이었어요. 마자랭이 1661년 숨졌을 때 푸케는 재상직을 물려받을 가장 유력한 후보였어요.
그러나 23세로 어엿한 성인이 된 루이 14세는 더는 신하들이 국정을 좌우하게 둘 생각이 없었어요. 루이 14세는 마자랭 같은 재상 없이 혼자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리고 '왕권신수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절대주의 왕정 수립에 나섭니다. 루이 14세에게 푸케는 눈엣가시였죠.
◇운명의 '집들이'
마자랭이 숨지기 3년 전인 1658년부터 푸케는 자기 권세에 어울리는 대저택을 짓기 시작합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화가, 조경사를 불러 3개의 부락을 없앤 뒤 저택을 세우고 33㏊(약 10만평)에 달하는 정원을 꾸몄죠.
저택이 완성된 시점은 공교롭게도 마자랭이 숨진 뒤였습니다. 1661년 8월 푸케는 루이 14세를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어요. 일종의 '집들이'였습니다. 왕은 화려한 정원을 구경하고 불꽃놀이도 봤어요.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던 몰리에르는 이날 보르비콩트에서 새 희극 '귀찮은 사람들'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립니다.
루이 14세는 자신이 사는 퐁텐블로궁보다 더 화려한 저택을 꾸며놓은 푸케의 재력에 기분이 언짢았다고 전해집니다. 루이 14세는 하룻밤 머물라는 청도 뿌리치고 이날 밤 퐁텐블로궁으로 돌아갑니다.
운명의 집들이로부터 3주 뒤, 푸케는 왕실 경호원 달타냥에 의해 체포됩니다. 재무장관으로 있으면서 공금 횡령을 통해 재산을 불렸다는 혐의였죠. 푸케는 횡령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어요. 판사는 푸케에게 국외추방령을 내렸어요. 그러나 루이 14세는 이 판결을 뒤집고 종신형을 내립니다. 법 위에 국왕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푸케는 15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숨집니다.
◇"더 화려하고 더 큰 궁전을 만들라"
루이 14세는 보르비콩트를 설계한 건축가 루이 드 보, 실내장식을 맡았던 예술가 샤를 르 브룅, 정원 조경을 맡았던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를 불러 베르사유궁 확장 공사를 맡깁니다. 1624년 처음 지어진 베르사유궁을 대대적으로 증·개축한 것이죠. 당대 최고의 장인을 모아 보르비콩트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가 큰 궁을 만든 겁니다. 루이 14세는 1682년 베르사유궁으로 거처를 옮기죠.
루이 14세는 시간이 흐른 뒤 보르비콩트를 푸케 부인에게 돌려줍니다. 이후 여러 주인을 거쳐 지금은 보귀에(Vogüé) 가문이 소유하고 있어요. 보르비콩트는 1968년부터 일반에 공개되면서 매년 30만명 가까이 찾는 명소가 됐습니다.
['삼총사'의 달타냥은 실존 인물… 루이 14세 왕실 경호원이었죠]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와 '철가면'에 등장하는 달타냥은 실존 인물 샤를 달타냥(1611~1673)을 모델로 했습니다. '삼총사'에서 달타냥은 당시 프랑스 정예부대였던 총사대 소속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도 총사대에서 활약했습니다.
달타냥을 신뢰했던 루이 14세는 푸케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달타냥에게 푸케를 감시하도록 합니다. 푸케가 간수에게 돈을 쥐여주고 도망칠까 걱정했거든요.
달타냥은 1667년 릴의 영주가 됐지만, 전장에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1673년 네덜란드와 벌어진 마스트리흐트 공성전에 참전했다가 총탄에 목숨을 잃습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0.02 1911년 쑨원 지지하던 군인들 봉기… 신해혁명 물꼬 텄죠
[우창(武昌) 봉기]
대만이 건국일로 기념하는 쌍십절… 우창 봉기 일어난 10월 10일이죠
우창 접수해 청나라로부터 독립선언… 다른 지역서도 봉기하며 혁명 본격화
이듬해 중국 최초 근대 공화정 수립
올해 건국 70주년을 맞는 중국이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열병식을 개최한다고 밝혔어요.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죠. 2차 대전이 끝나고 마오쩌둥과 공산당, 장제스와 국민당은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위한 내전에 돌입했어요. 마오쩌둥은 1949년 승리가 확실해지자 건국을 선포한 건데요,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경일입니다.
대만으로 후퇴한 장제스와 국민당에 이날은 뼈아픈 날이죠. 대신 대만은 '쌍십절'을 중화민국의 건국일로 기념하고 있어요. 중국 청나라를 무너트린 신해혁명이 1911년 10월 10일 시작됐거든요. 바로 '우창(武昌) 봉기'입니다.
◇망해가는 청나라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거치며 나라가 엉망이었어요. 1901년부터 정치·군사·교육·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지만 부정부패 등으로 실패로 돌아갑니다.
▲ 작년 대만 총통 관저 앞에서 열린 '쌍십절' 기념행사입니다. 대만은 신해혁명이 시작된 10월 10일을 건국일로 기념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러던 중 1911년(신해년) 5월 청 정부는 민영으로 운영하던 철도를 국유화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합니다. 중국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돈을 빌려 재정적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죠. 이전부터 민영 철도에 민족자본을 쏟아왔던 중국인들은 반발합니다. 특히 9월 쓰촨성에서 10만명 규모의 대규모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이 일어났어요. 청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합니다. 이때 후베이성 우창에서는 쑨원의 혁명 이념을 받아들인 군인들이 틈을 노려 무기를 들고 일어섭니다. 이를 '우창 봉기'라고 부릅니다.
◇10월 16일이 될 수도 있었던 '쌍십절'
우창에는 신식 무기 사용법을 훈련받은 정예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대다수 장교와 병사가 쑨원의 혁명 이념에 공감하고 있었어요. 1만5000명의 병사 중 3분의 1에 달하는 5000명이 '문학사' '공진회' 등 쑨원을 지지하는 혁명 조직에 가입해 있었다고 해요.
이들은 이전부터 '새로운 중국'을 꿈꾸며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원래 거사일은 10월 6일로 정해져 있었는데 정보가 새어나가며 이를 16일로 미뤘습니다. 그런데 9일 우창 인근 한커우에서 봉기에 가담하기로 한 주요 병사 명단이 유출되고 말아요. 한커우에서 20명이 체포됐고, 10일에는 우창에서도 73명이 붙잡힙니다. 적발된 장교 3명은 처형당했어요.
예정대로 16일에 거사를 일으켰다가는 그전에 모두 목이 달아날 판이었습니다. 우창에 있는 혁명 지도부는 10일 저녁 500명의 공병대를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킵니다. 혁명군은 우창 무기고를 탈취하고 도시 접수에 나섰어요. 호광총독(현재의 후베이성·후난성을 합친 지방 장관)이 봉기 소식을 듣고 관리들과 곧바로 도망치면서 혁명군은 우창을 점령했어요.
◇중화민국 수립은 1912년 1월 1일
혁명군은 12일에 우창과 함께 '우한 3진'이라 불리는 한커우와 한양도 점거합니다. 그리고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여기 호응한 혁명 세력이 중국의 24개 성 중 17개 성에서 각기 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신해혁명이 본격화합니다.
당시 미국에 머무르던 쑨원은 소식을 듣고 귀국합니다. 혁명 세력은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중화민국 수립을 선언해요. 그렇지만 건국 기념일로는 '쌍십절'을 기념해요. 중국 최초 근대 민주 공화정을 수립하게 한 신해혁명의 상징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중국 건국일 국경절은 10월 1일… 쌍십절에도 기념행사 열어요]
중국 공산당도 신해혁명을 중국 현대사의 시작으로 봅니다. 쑨원은 혁명의 선구자로 존경하죠. 그래서 중국 본토에서도 쌍십절을 '신해혁명기념일'이라고 부르면서 정부 주도로 기념행사를 엽니다.
그렇지만 10월 1일 국경절 같은 중요한 날로 여기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공산당의 공산혁명이 더 중요할 수밖에요. 신해혁명이 기념일이지만 '빨간 날'은 아닌 걸 봐도 알 수 있죠.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0.09 '해방자'라 불린 사나이… 독립 이끌어 남미합중국 세웠죠
[시몬 볼리바르]
스페인 식민지 베네수엘라서 태어나 미국을 보며 독립과 합중국 꿈꿨죠
스페인 정규군과의 전쟁 이끌어 지금의 콜롬비아·페루 일대서 승리
1819년 합중국 '그란 콜롬비아' 세워… 볼리바르 사후에 내분으로 쪼개졌죠
지 난달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던 베네수엘라 외교관이 화제가 됐어요.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하는 동안 내가 읽던 책"이라며 소셜미디어에 '볼리바르, 영웅, 천재 그리고 보편적 사고'의 표지를 올렸어요. 시몬 볼리바르(Bolivar·1783~1830)는 어떤 사람이기에 베네수엘라 외교관이 트럼프의 연설을 듣는 대신 그에 대한 책을 읽었던 걸까요?
◇'남아메리카 합중국' 꿈꿨던 독립운동가
시몬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나마를 스페인 식민 통치에서 해방한 남아메리카의 독립 영웅입니다. 오늘날에도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해방자'이자 '국부'로 추앙받고 있어요. '볼리비아'라는 나라 이름, 베네수엘라 화폐 단위 '볼리바르'는 모두 그의 이름을 딴 겁니다.
▲ 남아메리카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입니다. 그는 미합중국을 꿈꾸며 ‘그란 콜롬비아’를 세웠지만 연방국가는 볼리바르 사후 쪼개지고 맙니다. /위키피디아
볼리바르는 18세기 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남아메리카는 약 300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죠.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에서 대농장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스페인 상류층 출신이었어요. 그는 가정교사를 통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가 역설한 자유, 평등, 해방의 가치를 배웠어요. 스페인에서 유학한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803년부터 프랑스와 미국에 머무르면서 남아메리카 독립을 꿈꾸게 됩니다. 특히 미국이 독립 후 연방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죠. 그는 남아메리카 국가들도 독립 후 미국처럼 합중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1807년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볼리바르가 흑인 노예를 위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해서, 메스티소(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를 위해서 독립을 꿈꿨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볼리바르의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은 '남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스페인 식민 세력에 차별받던 크리오요(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크리오요는 유럽인과 같은 피가 흘렀지만, 식민지 정부 요직을 차지하기 어려웠어요. 남아메리카 출신 크리오요가 남아메리카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볼리바르의 생각이었습니다.
◇"혁명은 바다에서 한 쟁기질"
볼리바르는 1810년부터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군과 전쟁을 벌입니다. 정규군과 전투는 어려웠어요. 볼리바르는 잇달아 전투에서 패배하며 1814년 아이티로 망명을 떠납니다. 그렇지만 볼리바르는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는 1819년 2월에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해 의회를 구성하고 '그란 콜롬비아' 혁명정부 수립을 공표합니다. 그 뒤로 1824년까지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와 파나마), 키토(에콰도르),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 일대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볼리바르는 지금의 남미 6개국(베네수엘라·콜롬비아·파나마·에콰도르·볼리비아·페루)을 독립시켰고, '해방자(El Libertator)'라는 별명을 얻어요.
미국 같은 연방제 국가를 꿈꿨던 볼리바르는 그란 콜롬비아 대통령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국가 통합에 힘썼어요. 그는 해방된 남미가 유럽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면 남미의 여러 국가가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란 콜롬비아는 독립 직후부터 삐걱거립니다. 연방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어요. 유럽과 미국도 남미 대륙에 강력한 국가가 탄생하는 걸 원치 않았죠. 결국 시몬 볼리바르는 분열로 치닫는 나라를 어찌하지 못하고 1830년 대통령직을 내려놓습니다. 그는 마지막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연방으로 남아 있기를 간청합니다. 분열된다면 여러분은 조국을 암살한 사람이 되고, 여러분 자신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꼴이 될 겁니다." 볼리바르는 은둔에 들어갔다가 그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47세의 젊은 나이였죠.
그의 마지막 연설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1831년 그란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다나, 에콰도르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볼리바르는 생전에 그란 콜롬비아의 분열을 예견하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혁명을 위해 싸운 인간은 결국 바다에서 쟁기질했을 뿐입니다." 스페인과 싸워 쟁취한 독립이 무의미한 노력이었다는 회한이었죠. "세계사에서 3대 바보는 예수 그리스도, 돈키호테, 그리고 나다." 볼리바르가 사망 며칠 전 의사에게 남긴 말로 전해집니다.
남미합중국이란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됐지만, 볼리바르는 남미의 영원한 '영웅'입니다. 외세에 맞서 독립을 이뤄내고, 강한 남미를 꿈꿨던 남미인이니까요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0.18 신부가 자녀에 교회 물려주자 1139년 '결혼 금지' 못 박아
[사제독신제]
교황이 주관한 천주교 성직자 회의 '1·2차 라테라노 공의회' 거쳐 합의
과거엔 사제도 결혼해 가정 꾸렸지만 교회 권력 커지면서 세속적으로 변질
올해 성직자 회의서 독신제 재논의
천주교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가 지난 6일부터 오는 27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립니다. 이번 시노드에선 남미 9개 나라 주교를 중심으로 천주교 성직자 260여 명이 아마존 지역에서의 신앙 확산, 환경 보호 등의 주제에 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 그중에서 주목받는 논의 사항이 '기혼 남성에게 사제 서품을 주는 문제'입니다. 아마존 지역에서 성직자 부족으로 고민하던 천주교가 '사제독신제'를 일부 지역에서 유연하게 적용하는 걸 논의해 보겠다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도 '신부(神父)'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건데요. 사실 천주교도 처음에는 사제가 결혼할 수 있었어요. 그럼 '사제독신제'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천주교 신부도 결혼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개신교, 성공회, 동방 정교회 등 대부분 기독교 종파의 사제는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12사도 중 결혼한 사람이 있는 걸 봐도 사제가 되는 것과 결혼 여부는 별개라는 인식이 있었죠. 천주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천주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합니다. 이에 앞서 열린 엘비라(현 스페인 그라나다) 공의회에서 '성직자들은 아내와 금욕생활을 지켜야 하며,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만일 이를 어길 경우 성직의 명예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합의였어요. 교회법으로 정한 내용이 아니라 강제력이 없었고, 이미 결혼을 한 사제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적용하기도 어려웠죠.
▲ 1139년 열린 2차 라테라노 공의회 모습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입니다. 천주교는 공의회에서 주교와 신부 등 천주교 사제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교회법으로 강제합니다. /위키피디아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천주교는 계속해서 '금욕적 생활'을 강조합니다. 4세기 말 시리치오 교황은 '미사를 치르기 하루 전에 사제는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노켄티우스 1세 교황은 "결혼한 사제는 아내와 별거하지 않으면 면직시키겠다"고 했어요. 가정을 꾸리면 아내나 자식에게 집중하거나 욕심을 내면서 '오롯이 하느님에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죠.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며 천주교 교회가 점차 세속적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는 일부 사제가 자녀에게 교회나 교구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현상을 우려했습니다. 당시 교회의 힘은 영주나 국왕보다도 강했거든요. 사제는 그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어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이런 유혹이 없어지겠죠. 수많은 교황이 사제들의 결혼을 막기 위한 정책을 내놓습니다. 우르바노 2세는 "여자와 결별하든지 성직자 신분을 포기하든지 하라"고 말하기도 했죠.
◇1139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독신제 공인
산발적으로 나왔던 천주교의 '사제가 결혼하면 처벌한다'는 외침은 1·2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 공식화됩니다. 로마 라테라노 성당에서 열려서 '라테라노 공의회'라고 부르는데요. 1123년 열린 1차 공의회에서 먼저 사제독신제를 도입하기로 합의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1139년 열린 2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 해당 내용이 교회법에 명시됩니다. 사제는 결혼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런 결혼은 불법이자 무효가 됐습니다. 지금 같은 사제독신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그렇지만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는 성직에 있으면서 자식 8명을 뒀고, 자기 아들을 교황 다음 가는 높은 직위인 추기경에 앉히기도 했습니다. 그 아들이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모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체사레 보르자'입니다. 사제독신제를 도입하면서 막으려고 했던 폐단을 후대 교황이 저지른 것이지요.
[주교 임명권 두고 교황·왕 대립… 라테라노 공의회서 교황에 보장]
사제독신제를 공식화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렸던 주요 목적은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였어요. 중세시대 천주교 성직자는 교황 아래에 있으면서, 동시에 국왕의 가신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교황과 국왕은 서로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죠.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하다 1122년 칼릭스투스 2세 교황과 하인리히 5세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보름스 협약을 맺습니다. 황제는 교황이 주교를 뽑을 수 있도록 보장했어요. 1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천주교는 이 협약 내용을 공식 승인했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0.23 발칸의 학살자… '大세르비아' 외치며 인종 청소 자행했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연방 유지 원해 독립 주장한 크로아티아·코소보 공격
2000년 민중 봉기로 대통령직 사임… 전범으로 기소됐지만 재판 도중 사망
최근 밀로셰비치 옹호하던 한트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논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Handke·76)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발칸의 도살자'로 불렸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Milosevic·1941~2006) 전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을 옹호해왔기 때문입니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1990년대 유고 내전 때 크로아티아·보스니아·코소보 등 발칸반도 곳곳에서 인종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런 밀로셰비치가 2006년 사망했을 때 한트케는 직접 쓴 추모사를 읽으면서 그를 두둔했습니다. 한트케는 "밀로셰비치는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해 희생자들의 분노를 샀죠. 한트케는 세르비아계 슬로베니아인인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탄생
유고슬라비아는 '남(南)슬라브인들의 땅'이라는 뜻이에요. 6세기쯤 남슬라브인들이 발칸반도에 정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죠. 오늘날의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 발칸반도 서부지역을 이릅니다. 이전부터 천주교·동방정교회·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있어 분란이 끊이지 않았죠.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인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곳인데, '유럽의 화약고'라 불렸어요.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이 ‘인종청소’ 혐의로 기소돼 2001년 국제형사재판소에 출두하는 모습. 그는 수감 중이던 2006년 숨졌는데,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가 장례식에서 추도문을 읽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2차 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6개 나라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이룹니다. 훗날 유고 내전으로 해체된 유고연방(1945~1992)의 탄생입니다. 그렇지만 통합은 어려웠어요. 연방국가는 1개인데, 종교는 3개(천주교·동방정교회·이슬람교), 민족은 5개(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마케도니아인·알바니아인), 소속 국가는 6개였죠.
◇세르비아 민족주의 내세우며 '인종 청소'
1980년 독재자 티토가 사망하면서 유고연방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티토는 연방 내 여섯 국가의 자치권을 인정하며 민족 간의 갈등을 무마하고 있었는데요, 그가 죽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방 내 최다 인구를 차지했던 세르비아인과 나머지 민족 사이 대립이 커집니다. 1990년부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차례로 연방에서 탈퇴합니다. 세르비아인 중심으로 유고연방을 유지하기를 원했던 밀로셰비치는 '대(大)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우며 독립을 원하는 국가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합니다. 세르비아 영토를 확장해 세르비아인을 위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어요. 밀로셰비치는 1990년대 초반부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침공하고, 각지의 세르비아 반군들을 지원해 내전을 부추겼어요.
이 과정에서 밀로셰비치는 '인종 청소'를 자행합니다. 세르비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군인과 민간인 가릴 것 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죠. 1998년에는 알바니아인이 많은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자 '코소보 전쟁'이 벌어집니다. 밀로셰비치는 다시 한 번 인종 청소를 단행하며 알바니아인을 학살했어요. 밀로셰비치는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이 돼 권력을 잡은 뒤 2000년 민중 봉기로 물러나기까지 20만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300만명을 난민으로 만들었어요.
그는 2001년 유엔의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반인륜적 전범(戰犯)으로 기소됩니다. 교도소에 갇혀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지병으로 사망했죠. 영국 가디언은 "(한트케에게 상을 준 것은) 충격적인 윤리적 실명(失明)"이라고 비판했어요.
[맥도널드 있는 나라끼리 전쟁없다? NATO의 세르비아 폭격은 예외]
미국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1999년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맥도널드가 있는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어요.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시장경제를 통한 평화 이론입니다.
그런데 책이 나온 직후 맥도널드가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이 코소보 전쟁을 멈추기 위해 역시 맥도널드가 진출해 있던 세르비아를 폭격하면서 이 이론에 '예외'가 생깁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0.30 링컨 암살 뒤 대통령 승계… 3년 후 1표 차이로 탄핵 모면
[앤드루 존슨]
당시 부통령 존슨, 17대 대통령 올라… 노예제 해결과 남북부 통합이 숙제
남부의 여전한 흑인차별 묵인하며 민심 달랬지만 남북부 모두에 미움 사
의회 동의 없이 국방부 장관 해임해… 하원서 탄핵안 통과, 상원 투표서 모면
미국 하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조사에 속도를 내고 있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직권을 남용해 2020년 대선에 우크라이나를 개입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핵심입니다.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탄핵으로 자리에서 쫓겨난 일은 없지만, 그 직전까지 간 대통령이 있습니다. 17대 앤드루 존슨(1808~1875) 대통령이었죠.
◇링컨 사망하며 대통령이 된 남자
1865년 4월 14일 밤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총탄에 목숨을 잃습니다. 재선에 성공한 링컨 대통령의 새 임기가 시작된 지 불과 40여일 뒤였습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됩니다.
▲ 에이브러햄 링컨(왼쪽)과 앤드루 존슨이 각각 대통령·부통령 후보로 나온 1864년 미국 대선 홍보물. 앤드루 존슨은 링컨이 1865년 암살당한 뒤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위키피디아
앤드루 존슨은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양복 재단사 견습공으로 일해야 했어요. 18세에는 테네시주 그린빌에 자기 양복점을 열고 이웃 구둣방 딸과 결혼합니다.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해 아내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어요. 존슨은 20세에 그린빌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22세에 그린빌 시장이 됩니다. 이어 테네시주 하원 의원, 테네시주 주지사, 테네시주 상원 의원을 차례로 맡아요.
존슨은 가방끈은 짧았지만 타고난 연설가였어요. 그는 즉흥 연설을 통해 청중 분위기를 띄우는 재주가 있었어요. 그는 양복 재단사 출신이라는 것도 연설에서 활용했어요. "저는 옷을 만들 때도 손님과의 약속을 꼭 지켰고, 제 옷은 언제나 최고였습니다."
1861년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미국 남부 주들은 잇달아 미 연방에서 탈퇴했어요. 당시 존슨이 상원 의원으로 있던 테네시도 연방 탈퇴를 선언합니다. 그렇지만 존슨은 남부 출신 상원 의원 중 유일하게 링컨을 지지합니다. 링컨은 남북전쟁 중이던 1864년 재선에 도전하는데, 줄곧 자신을 지지해준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발탁해 선거에서 승리합니다.
◇남북 양쪽 모두가 싫어한 대통령
존슨은 해묵은 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고, 남북전쟁으로 분열된 미국을 통합해야 했어요. 문제는 그의 정책은 북부도 남부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존슨은 미국 정계의 '왕따'가 됩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은 남부 주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등 남부를 달래며 갈등을 봉합하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노예 해방 이후에도 해방된 노예를 차별하던 남부의 행태를 어느 정도 눈감아줍니다. 북부 공화당 급진파는 존슨이 흑인 노예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가졌어요. 남부 주들이 해방 노예의 권리를 제한하는 주(州) 법안을 만들어도 존슨은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남부가 존슨을 지지하지도 않았어요. 남부 입장에서 존슨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를 배신하고 북부와 링컨에게 붙은 정치인이었으니까요.
존슨과 의회의 마찰이 계속되던 와중에 당시 에드윈 스탠턴 미 전쟁부(현 국방부) 장관이 '군 지휘관이 충성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라고 선언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존슨은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한 스탠턴을 해임합니다. 그런데 당시 법에 따르면 장관을 해임하려면 상원이 '해임 동의'를 해야 했어요. 존슨은 상원의 반대에도 해임을 강행했고요. 미국 정계는 이를 이유로 탄핵안을 발의합니다.
미국은 하원에서 '50% 이상 찬성'으로 탄핵안을 가결하고,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유죄라고 판단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돼 있어요. 하원은 1868년 2월 126대47로 탄핵안을 가결합니다. 그렇지만 이어진 상원 표결에서 상원 의원 3분의 2(당시 전체 54명 중 36명 이상)에서 1명이 부족한 35명만 유죄라고 하면서 대통령직을 지키게 됩니다.
그렇지만 존슨의 위엄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죠. 그는 같은 해 재선에 도전하려고 하지만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합니다. 정계를 떠났던 존슨은 1875년 테네시주 상원 의원으로 복귀합니다. 임기를 마친 미 대통령이 상원에서 일한 유일한 사례입니다.
[알래스카 매입, 존슨이 했죠]
존슨의 가장 큰 치적은 '알래스카 매입'입니다. 1867년 러시아에서 북아메리카 북서쪽 끝에 붙어 있는 알래스카(152만㎢)를 단돈 720만달러에 사들입니다. 당시 미 의회가 '쓸모없는 냉장고 같은 땅을 산다'며 비웃었지만, 지금은 석유, 금 등 지하자원의 보고(寶庫)로 평가받지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1.06 고대 페르시아 국교… 유일신 사상은 기독교 등에도 영향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가 지금의 이란 땅에서 기원전 7세기 경 창시했다고 추정
사산 왕조 페르시아 國敎 지정됐지만 7세기 등장한 이슬람교에 밀려났죠
현재 인도·이란 등서 15만명이 믿어
세계 최대 유랑 민족인 쿠르드족은 이란·이라크·터키·시리아 등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어요. 이들 대다수는 이슬람교를 믿었는데, 최근 쿠르드족 일부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IS(이슬람국가)의 잔혹성에 끔찍함을 느끼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고 있다고 합니다. AFP는 "쿠르드족 사이에서 종교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한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쿠르드족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보도했죠.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는 조로아스터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유일신 사상과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
조로아스터교는 이란 북동부에서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종교입니다. 조로아스터가 이 종교를 만든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추정되는데, 일부 학자는 기원전 2000년이라고 보는 등 확실한 시기는 불분명합니다. 조로아스터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고 이 종교의 핵심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는 오랫동안 구전을 통해 전해지면서 대부분 내용이 사라져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찾기 어렵거든요.
▲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왼쪽에서 셋째)가 페르시아 왕과 대화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조로아스터교는 한때 페르시아의 국교였지만 이슬람교의 박해를 받으면서 현재는 15만명 정도가 믿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조로아스터는 현재의 이란 지역에서 태어나 30세 때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로부터 계시를 받아 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의 신이자 유일신으로 모시죠.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롭고, 풍요를 가져다주고, 정의를 지키는 창조주입니다. '마즈다'는 '지혜'를 뜻해서 훗날 조로아스터교는 '마즈다교'라고 불리기도 해요.
조로아스터는 인간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고 했어요.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가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날이 오면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니, 사람들이 선을 선택하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했죠. 즉 조로아스터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같은 양극단의 가치가 대립하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악을 배척하고 선을 행하도록 촉구한 것이죠. 조로아스터교가 내세웠던 유일신 사상,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 등은 유대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어요.
◇조로아스터교의 흥망
기원전 6세기 서아시아 지역을 통일했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때 조로아스터교는 널리 퍼져 나갑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0~기원전 486)는 왕권 강화를 위해 조로아스터교를 이용했어요. 그는 자신은 아후라 마즈다의 선택을 받은 정당한 왕이라며 "아후라 마즈다가 자신에게 왕국을 주었다"고 알렸죠. 고대 페르시아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인 베히스툰 비문에도 '다리우스 1세가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황제로 간택받았다'고 새겨져 있어요.
사산 왕조 페르시아(224~651)는 더 나아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경전 '아베스타'를 집대성합니다.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불교, 마니교 등 다른 종교 신자는 박해했죠.
조로아스터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는 북위(386~534) 시기에 전파됩니다. 불을 숭배하기 때문에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렸어요. 페르시아계 서역인이 자주 왕래하던 당나라 때는 수도 장안에 배화교 사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조로아스터교는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등장한 이슬람교에 밀려 교세가 꺾입니다. 이슬람교도는 과거 페르시아 땅을 정복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박해합니다. 오늘날에는 인도, 이란, 아제르바이잔 일부에서 약 15만명이 믿는 종교가 됐어요. 인도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신자를 '파르시(Parsi)'라고 부르는데, 유명 록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부모님이 파르시였습니다.
[니체 저서 '자라투스트라 …' 조로아스터를 모델로 썼죠]
독일 철학자 니체(1844~1900)는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를 모델로 철학 소설을 썼습니다. 바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입니다.
조로아스터가 살았을 때 썼던 아베스타어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자라투스트라'에 가깝게 발음됐을 거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어를 거쳐 영어로 옮겨지면서 흔히 쓰는 '조로아스터(Zoroaster)'가 됐어요.
니체는 소설에서 자라투스트라의 언행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어요. 이 책은 니체 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1.13 '국왕 살해 기도' 17세기 영국인, 지금 홍콩서 저항의 상징
[가이 포크스]
독실한 천주교도로 영국 국교에 불만
제임스 1세 즉위하면 국교도 바뀌어 다시 천주교 될거라 기대했지만 무산
왕·귀족 몰살 계획 세웠다 발각됐죠
시간 지나 왕실에 저항한 인물로 평가… 영화 '브이 포 벤데타'로 굳어졌어요
지난 6월 송환법으로 촉발된 홍콩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7일 홍콩중문대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학생들이 졸업식에 앞서 시위를 했습니다. 홍콩 당국은 '복면금지법'을 시행하면서 시위대가 가면을 쓰지 못하게 했지만 홍콩 시민들은 이에 불복하고 항의의 의미로 계속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툭 튀어나온 광대와 붉게 물든 볼, 긴 콧수염과 대비되는 단정한 턱수염, 입이 귀에 걸릴 듯 웃고 있는 표정의 가이 포크스 가면은 홍콩 시위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시위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실제 이 가면의 주인공인 가이 포크스(Fawkes·1570~1606·작은 사진)는 사실 자유를 탄압하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거, 아셨나요?
◇개신교 탄압 원했던 독실한 천주교도
가이 포크스는 1570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납니다. 포크스 역시 독실한 천주교도였는데, '천주교의 승리를 위해서'라며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해 1595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참전합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 지배에서 독립하겠다면서 전쟁을 일으켰어요. 당시 독립전쟁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가 네덜란드(개신교)와 스페인(천주교)의 종교 갈등이었습니다. 포크스는 천주교를 위해서 스물다섯 나이에 스페인 편을 들며 전장에 나선 것이죠. 포크스는 네덜란드가 원하던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러 간 인물인 셈입니다.
천주교에서 벗어나 '국교회(성공회)'가 국교였던 잉글랜드는 불과 몇 년 전인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등 스페인과 사이가 나빴어요. 영국과 스페인은 이 시기에도 적대하고 있었는데 포크스의 종교적 신념은 국적을 뛰어넘을 정도였던 것이죠.
1603년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숨지면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합니다. 잉글랜드 내 천주교도는 제임스 1세가 국교를 다시 천주교로 바꿔주기를 기대했어요. 그렇지만 그는 엘리자베스 1세처럼 '법령을 위반하지 않는 한 (천주교도에게) 어떠한 박해도 없을 것'이라는 정도의 입장이었죠.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이지만, '천주교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 포크스는 이런 입장이 실망스러웠습니다.
▲ 지난 5일 홍콩에서 시위대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독재자와 싸우는 혁명가가 쓰고 다니면서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가면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 가이 포크스는 17세기 영국 '제임스 1세' 국왕을 시해하려다가 실패해 처형당한 인물입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래서 포크스는 같은 해 스페인으로 건너가 펠리페 3세를 만납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개신교 세력을 몰아내고 천주교를 국교로 만들 혁명을 일으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렇지만 펠리페 3세는 이 요구를 거절하죠.
◇테러 일으켜 제임스 1세 살해 기도
스페인의 지원은 없었지만, 영국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귀족들 주도로 제임스 1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이뤄집니다. 가이 포크스도 여기 가담했죠. 이들은 1604년 제임스 1세가 영국 의회 개원에 맞춰 연설하기로 한 11월 5일 거사를 일으키기로 합니다. 이들은 의회가 열리는 웨스트민스터궁 지하실에서 화약을 터뜨려 왕과 개신교 귀족을 몰살하기로 합니다.
이 계획은 거사 계획이 미리 알려지면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천주교 성향 의원이었던 윌리엄 파커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됐는데, '의회 개원에 맞춰 화약을 터뜨릴 테니 그날은 집에 있으라'는 내용이었어요. 파커는 천주교를 믿었지만 테러는 나쁘다고 생각했고, 제임스 1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어요.
포크스는 거사 전날인 11월 4일 저녁, 의사당 지하에서 화약 더미와 함께 발각돼 붙잡힙니다. 그는 체포돼 고문을 받으며 '동지들'의 이름을 모두 불었습니다. 포크스와 일당은 대부분 사형장에서 처형됐죠.
◇영화 통해 자유·저항 상징으로 알려져
포크스는 자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은 억압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자유'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이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왕실에 저항한 혁명가' 이미지가 더 강해집니다. 그러다 2006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브이 포 벤데타(피의 복수)'가 나오면서 가이 포크스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2040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브이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다닙니다. 브이는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독재자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혁명가로 묘사되죠. 이 영화 이후로 수많은 시위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이 등장하고 있지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1.20 16세기 스페인, '사람 잡아먹는 산'서 銀 캐내 전쟁 치러
[포토시 은광]
스페인, 남미 볼리비아 지역 정복… 남부의 포토시 산에서 은광 발견
250년간 원주민 강제 노역 시켜… 하루 45㎏포대 25개를 옮겨야 했죠
유럽은 이 銀으로 중국 茶 대량구매… 銀 부족해지자 아편전쟁으로 이어져
볼리비아에서 첫 원주민 출신 대통령으로 14년간 장기 집권했던 에보 모랄레스(Morales·60)가 지난 10일 부정선거 논란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망명했어요. 볼리비아는 남미 12국 중 1인당 소득이 11위일 정도로 경제가 어려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볼리비아에 한때 세계사를 바꾼 거대한 은광이 있었습니다. 행정수도 라파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400㎞ 거리에 있는 포토시(Potosi) 은광입니다.
◇"이 고귀한 산이 세상을 정복하게 할 것"
1535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지금 볼리비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습니다. 당시에 볼리비아라는 나라는 없었고,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높은 페루(Alto Peru)'라 불리는 땅이었지요. 10년 뒤 볼리비아 남부 포토시에 있는 포토시 산에 은이 어마어마하게 묻혀 있다는 게 확인됩니다. 은광이 개발됐고, 소규모 원주민 촌락에 불과했던 포토시의 운명은 수십년 만에 딴판이 됩니다. 포토시는 스페인의 식민통치 시기 대표적 은 공급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포토시 은광에서는 당시 한 해 세계 은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수준의 은이 나왔어요.
▲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을 묘사한 1585년경의 수채화입니다. 산에 있는 은광 아래쪽으로 광부들이 사는 마을이 있어요. 원주민들이 은광석에서 은을 추출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17세기 포토시는 16만명이 살면서 유럽과 유럽 식민지를 통틀어 넷째로 큰 도시였다고 합니다. /ⓒHispanic Society of America
은광 산업이 발달하면서 포토시는 1600년대 초반 16만명 규모의 거대 도시로 성장합니다. 당시 동양과 이슬람권을 제외한 '기독교 세계'에서 넷째로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 스페인 세비야보다 인구가 많았습니다.
포토시 은광이 있는 적갈색 포토시 산(山)에는 은광석 분쇄시설 140곳이 자리 잡았어요. 광산에서 나온 은은 이곳에서 가루가 됐고, 포토시에 있던 스페인 조폐국으로 들어가 은화로 바뀌었어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이 고귀한 은의 산은 제왕이 세상을 정복하게 할 것"이라고 1561년 찬사를 보냅니다.
◇사람 잡아먹는 산
스페인 왕가 입장에서 포토시는 '부유한 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원주민 입장에서는 '사람 잡아먹는 산'이었죠. 은을 캐다가 무수한 인명이 희생됐거든요
포토시에서는 값싼 비용으로 정기적으로 은을 생산하고자 강제 노동 부역 제도인 미타(Mita)를 실시하였어요. 미타는 1812년까지 약 250년간 지속됐습니다. 수백㎞ 떨어진 곳에 살던 원주민이 은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러 끌려왔어요. 이들은 하루에 많게는 45㎏짜리 은광석 포대를 25개씩 옮겨야 했다고 합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월요일에 건강한 원주민 20명이 새로 들어오면 토요일에는 절반이 몸을 다쳐 일하지 못할 지경이었다"라고 합니다. 새로운 노동력을 확보하려고 노예무역으로 노예를 끌어 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채굴하면서 포토시 은광은 1620년대부터 은 생산량이 크게 줄어듭니다. 그 후 도시는 쇠락하게 되지요.
◇은이 바꾼 세계사
하지만 포토시 은광은 세계사에 거대한 흔적을 남깁니다. 우선 이 시기 생산된 은으로 유럽에서는 100년 만에 물가가 2배 이상 뛰는 물가 폭등이 일어납니다. 스페인이 채굴한 은으로 전쟁을 치르고 온갖 무역 대금을 내는 과정에서 은이 서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또 유럽인은 중국 차(茶)와 같은 유럽인이 좋아하는 아시아 물건을 사는 데 늘어난 은을 쓸 수 있게 됐어요. 그렇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이 무한정 있는 게 아니니까요. 매년 은 수백t이 중국으로 들어가자 유럽은 은이 부족해졌어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영국이 찾아냅니다. 마약 '아편'을 팔고 은을 받아간 겁니다. 중국이 아편 거래를 막으려고 하자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터집니다.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포토시 은광에서 나왔던 은이 19세기 아편전쟁까지 이어진 겁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1.27 자금성 5배 淸 황실별궁, 아편전쟁 때 英·佛 연합군이 파괴
[원명원(圓明園)]
18세기 淸 황제 강희제가 건축… 베르사유 궁전에 비견될 만큼 화려
2차 아편전쟁 중 淸이 영국인 억류… 보복으로 사흘간 불태우고 파괴했죠
서구열강 약탈에 유물 150만점 반출… 현재 부서진채 보존돼 역사 상기시켜
지난 14일 청나라 황실 별궁이었던 원명원(圓明園)에 있던 말머리 동상이 150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동상은 청나라 때 원명원의 장춘원 서양루 해안당 밖의 십이지(十二支) 동물 머리로 만들어진 분수를 구성하는 중요 구조물이었는데 1860년 원명원이 약탈·파괴될 때 외국으로 유출됐어요. 말머리 동상은 지난 2007년 홍콩 소더비 경매를 앞두고 있었는데 마카오 카지노 재벌 스탠리 호(98)가 협상 끝에 경매 전에 약 82억원에 사들였다가 이번에 중국에 기증했습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처럼 호화스럽고 면적이 자금성의 5배가 넘었다는 원명원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파괴되었을까요?
◇'정원 중의 정원'으로 불린 청나라 별궁
원명원은 베이징 서북쪽으로 8㎞쯤 떨어져 있던 별궁입니다. 1709년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훗날 옹정제가 되는 넷째 아들 윤진에게 선물로 하사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원명'은 '원만하게 널리 비추다'라는 뜻으로, 강희제가 직접 이름을 지었고 친필로 현판을 써 주기도 했어요. 이후 황위에 오른 옹정제와 그의 아들 건륭제는 원명원을 확장해 가꿔나갑니다. 특히 건륭제는 원명원의 동쪽에 장춘원, 동남쪽에 기춘원을 만들며 원명원을 대대적으로 넓혔어요. 원명원은 동서로 약 2.4㎞, 남북으로 약 1.9㎞ 펼쳐진 드넓은 공간이 됐어요. 인공호수, 정원,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건물과 서양식 건축물 등이 한데 어우러졌죠. 곳곳에 청 황실이 소장한 진귀한 보물, 도자기, 공예품이 전시됐고요.
▲ 청나라 황제의 별궁 원명원이 폐허가 된 모습(위)입니다. 최근 중국 정부가 기증받은 말머리 동상이 있던 원명원 서양루 해안당의 분수 그림(아래)을 보면 '정원중의정원'이라 불렸던 원명원의 화려함을 상상할 수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위키피디아
특히 원명원의 장춘원 안에는 서양 양식의 건물과 정원을 꾸며놓은 '서양루'가 있었습니다. 서양루 해안당에는 자시(子時)에는 쥐머리 동상이 물을 뿜고, 오시(午時)에는 말머리 동상이 물을 뿜는 분수가 있었죠. 이번에 돌아온 말머리 동상은 바로 이 분수에 있던 겁니다. 서양루의 유럽식 건축과 조경은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화가 등이 담당해 설계했죠.
이 호화스러운 궁전과 정원이 결합된 별궁에서 황제들은 나라를 다스리고, 쉬고, 외국 사절단을 맞이했어요. 원명원의 별명은 만원지원(萬園之園), 즉 '정원 중의 정원'이라는 뜻이었죠. 18세기 말 원명원에 방문한 영국 사절 조지 매카트니는 "지상 최고의 경관에 완전히 매료돼 그 감동을 뭐라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제2차 아편전쟁 중에 약탈
그렇지만 청나라가 서구 열강 앞에 무릎 꿇으면서 원명원은 졸지에 폐허로 변합니다. 1차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한 청나라는 종이호랑이 신세가 됐어요. 영국과 프랑스 등은 청나라에 더 많은 이권을 요구하며 2차 아편전쟁(1856~1860)을 일으키죠.
1860년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까지 병력을 진출시키고 조약 체결을 요구합니다. 조약 체결을 위해 영국 대표가 협상에 나섰고 영국인 기자도 취재하러 따라갔어요. 그런데 청나라 보수파가 이들을 억류하고 고문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이 소식을 듣고 보복에 나섭니다. 바로 당시 청나라 황제 함풍제가 아끼던 원명원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것이었죠. 영국과 프랑스군이 사흘에 걸쳐 원명원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서양루 해안당에 있던 분수의 십이지상도 이때 모두 사라졌고요. 원명원은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열강 8개국 연합군이 의화단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약탈당하고 훼손됩니다. 중국은 150만점에 달하는 유물이 약탈당했다고 보고 있어요.
원명원을 찾으면 지금도 산산조각 난 건축물을 볼 수 있어요. 부서진 채로 보존되는 한때 '정원 중의 정원'은 중국인들에게 서구 열강에 침탈당하며 겪었던 수모를 상기시켜주는 역사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지요.
[英·佛 강도라 비판한 빅토르 위고… 중국이 원명원에 흉상 세워 칭송]
서구 열강에 의해 약탈당한 원명원에 2010년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흉상이 세워졌습니다. 어떤 사연일까요?
위고는 원명원 파괴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두 강도가 박물관을 부수고 물건을 약탈하고 그곳에 불을 지른 뒤 가방에 한가득 보물을 담아 손을 잡고 낄낄대며 나왔다. 한 강도의 이름은 영국이고, 다른 강도는 프랑스'라고 비판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는 '언젠가 프랑스가 약탈한 것을 돌려주길 바란다'고 적기도 했어요. 중국 정부는 빅토르 위고를 '서양의 양심'이라고 생각해 흉상을 세웠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04 괴력 뽐냈던 폴란드왕… 보석·예술품 수집광이었죠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
최근 도난당한 드레스덴 보물 모았던 폴란드 국왕 겸 독일 작센의 통치자
예술품 모으고 예술가들 초청해… 드레스덴을 문화도시로 재탄생시켜
중국산 도자기 사들이기 어렵자 '마이센 자기' 공장 세워 직접 생산
지난 25일(현지 시각)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그뤼네스 게뵐베(둥근 천장이 있는 녹색 금고란 뜻)' 박물관에서 전시품 90여점이 도난당하면서 1조3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피해가 생겼습니다. 이 박물관은 폴란드 국왕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1670~1733)가 자신의 수집품과 보물을 전시하기 위해 1723년 건립했습니다. 금, 은, 호박, 상아 등의 보석으로 치장된 예술작품 4000여 점을 전시·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을 모았던 그는 어떤 왕이었을까요?
◇힘 어마어마했던 '작센의 헤라클레스'
아우구스트 2세의 별명은 '강건왕'입니다. 맨손으로 말 편자를 구부린 일화가 유명한데요, 작센의 헤라클레스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그는 폴란드의 국왕과 작센의 선제후를 겸했어요. 선제후(選帝侯)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귀족을 이르는 말이에요. 오늘날 독일 동부에 있는 작센은 이 당시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제후국이었어요. 그는 1694년 천연두로 형이 숨지면서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트 1세'가 됩니다.
▲ ①폴란드 국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였던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의 초상화. ②지난 25일 도난당한 '다이아몬드 779개로 장식한 검'. ③지난 25일 도난당한 보석으로 장식한 폴란드의 백독수리 훈장. ④'자기로 만든 꽃과 꽃병'(마이센 자기·18세기). ⑤'자기 술병'(마이센 자기·1725). /위키피디아·AP 연합뉴스·게티이미지코리아
아우구스트 1세는 후계자가 마땅히 없던 폴란드 국왕 자리도 노립니다. 당시 폴란드는 1696년 얀3세가 사망하면서 귀족들의 투표로 선왕의 아들을 포함한 후보 18명 중 다음 국왕을 뽑기로 했습니다. 아우구스트 1세는 상업이 발달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작센의 힘을 발휘해 폴란드 귀족을 매수하고 종교도 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해가면서 폴란드 국왕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는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2세'로 1697년 즉위합니다.
◇'엘베강의 피렌체' 드레스덴
아우구스트 2세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과 후원은 유별났습니다. 그는 작센의 선제후가 되기 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작센의 주도인 드레스덴을 아름다운 문화 도시로 거듭나게 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그림, 도자기, 보석을 수집했고,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을 초대했어요.
그는 자신이 살던 드레스덴궁이 1701년 화재 피해를 보자 바로크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재건합니다. 또 그뤼네스 게뵐베가 있는 츠빙거 궁전 역시 아우구스트 2세가 세웠는데요,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바로크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츠빙거 궁전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크게 손상을 입었는데, 다행히도 그뤼네스 게뵐베 안에 있던 소장품들은 대피시켜 둬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츠빙거 궁전은 1963년 폭격 전의 모습으로 재건됩니다.
◇"중국 수준의 자기를 만들라"
아우구스트 2세는 도자기 수집가로도 유명했어요. 그는 무려 3만5000점이 넘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의 도자기를 소장했어요. 도자기는 당시 유럽에서 워낙 귀했기 때문에 '하얀 금'이라고 불렸어요.
지금 작센 지방의 명물인 '마이센 자기'도 아우구스트 2세 작품입니다. 중국이 유럽에서 온 사절단을 홀대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그렇다면 중국 도자기와 똑같은 백자를 만들어내라"라고 장인들에게 명령했다고 해요. 그는 1710년 드레스덴 근교 마이센에 국영 도자기 공장을 세웁니다. 그는 자신의 수집품과 마이센 자기로 장식한 '도자기 궁전'을 직접 설계해 건설하려 했지만 그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현재는 1786년 설립된 드레스덴 자기 미술관에 그의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마이센 자기는 작센의 효자 제품이 되어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오늘날 명품 도자기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힘 셌지만 전쟁에선 맥 못춰 폴란드 왕위 3년간 뺏기기도]
'강건왕'은 힘이 셌을지는 몰라도 유능한 군 지휘관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는 1700년 원래 폴란드 땅이었던 리보니아를 수복하겠다며 스웨덴을 침공합니다. 그렇지만 1702년 스웨덴의 카를 12세에 크게 패하고 작센으로 도망치는 수모를 겪어요. 카를 12세는 1706년 작센까지 침공해 아우구스트 2세에게 폴란드 왕위를 내놓게 합니다.
아우구스트 2세는 1709년 다시 폴란드 왕위에 오릅니다. 동맹 러시아가 스웨덴을 물리치면서였죠. 하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는 폴란드에 이래저래 간섭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11 日, 공습 1시간 뒤 최후통첩… 선전포고냐 아니냐 논란
[진주만 공습]
1941년 日 해군, 하와이 기습공격… 군함 6척 침몰, 미국인 2403명 사망
美, 일본대사관이 최후통첩 보내기 전 감청으로 공문 내용 미리 파악했지만
'전쟁 개시' 언급 없는 모호한 내용에 선전포고라고 생각 못해 대응 실패
지난 7일은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지 78년이 된 날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하와이 시각),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기습 공격을 단행했습니다. 미국 기록에 따르면 전사자 2403명, 부상자는 1143명이었습니다. 공습으로 전함 네 척 등 배 여섯 척이 침몰했고, 항공기 188대가 파괴됐죠. 당시 일본의 80배에 가까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일본이 기습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특히 일본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공격했다는 데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 걸까요, 못 했던 걸까요?
◇공습 1시간 뒤에 전달한 '최후통첩'
당시 일본은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4국의 전략물자 수출 금지 조치로 석유 수입이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등은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 침략을 계속하자 수출 금지 조처를 해 일본을 압박하고 있었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일본은 미국과 협상하는 동시에 군사 행동에 나서는 것도 저울질하고 있었습니다.
워싱턴 DC 시각 기준으로 진주만 공습이 이뤄지기 약 11시간 전인 12월 7일 오전 2시 38분 주미 일본 대사관에 암호 전문이 도착합니다. 공습 20분 전인 오후 1시(하와이 시각 오전 7시 30분)까지 코델 헐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전달하라는 지침도 붙어 있었어요. 이 전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더는 미국과 협상하지 않겠다.' 일본이 미국에 보내는 최후통첩이었습니다.
▲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오하우섬 진주만에서 미국 군함이 일본군의 기습 공습을 받아 연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미 군함 웨스트 버지니아호와 테네시호.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타격했고, 미국은 이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런데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일본 대사관에서 암호 전문을 번역하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오후 1시'에 맞출 수 없게 됐습니다. 주미 일본 대사가 미 국무장관을 찾아가 전문을 읽기 시작한 것은 7일 오후 2시 20분경이었습니다. 이미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고도 1시간이 지난 뒤였죠. 헐 국무장관은 이미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였습니다. 그는 모르는 척 전문 내용을 들은 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문서는 공직 생활 50년 동안 처음"이라며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이게 선전포고?' 갸우뚱했던 미국
그런데 여기 반전이 있습니다. 미 정보기관이 일본의 암호 전문을 감청해 해독했던 겁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7일 오전 10시쯤에 일본 정부가 보내려는 해당 문건을 백악관에서 받아봤습니다. 진주만 공습 3시간 20분 전이었죠. 일본 공습에 대비할 시간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미국은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라' 정도의 지시만을 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일본이 보낸 최후통첩이 제대로 된 선전포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907년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는 전쟁을 하려면 '사전에 명백하게 선전포고를 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한다는 조건부 최후통첩을 보내야 한다'고 협약을 맺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이 대사관에 보낸 최후통첩은 영어로 번역했을 때 약 5000단어 분량이었지만 '개전(開戰)' '전시 상태' '무력 사용' 같은 표현은 없었습니다.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가 아니라 각서(memorandum) 형식이기도 했고요.
이 문서의 핵심은 각서 뒷부분에 담겨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합중국 정부의 태도로 미루어 앞으로 교섭을 계속할지라도 타결에 이를 수 없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음에 관하여 이렇게 미합중국 정부에 통보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를 읽은 루스벨트 대통령 등 수뇌부는 일본이 외교 관계를 끝내겠다고 선언한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선전포고라고 생각하기는 모호한 내용이었죠.
그래서 일본이 제대로 된 선전포고를 할 생각은 없었고, 진주만 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는 '시늉'을 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일본 군부에서 '비밀리에 공격이 이뤄져야 하니 평화회담을 공격 시점까지 질질 끌어라'라는 지시를 했다는 연구도 있거든요.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합니다. 전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는 1948년 열린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됩니다. 죄목에는 선전포고가 없었던 진주만 불법 공격도 포함돼 있었죠.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18 대서양 첫 단독 횡단비행, 타임 '올해의 인물' 1호 선정
[찰스 린드버그]
25세에 선정돼 92년 동안 최연소… 올해 16세 툰베리 선정돼 기록 깨져
비행기로 항공 우편 배달하던 청년… 연료 더 싣기 위해 낙하산도 포기
물 1L, 샌드위치, 나침반만 싣고 33시간 동안 쉬지않고 6000㎞ 비행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지난 11일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로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를 선정했습니다. 타임이 1927년 '올해의 인물' 선정을 시작한 이래 최연소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럼 그전까지 최연소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타임이 1927년 최초로 '올해의 인물'을 선정한 해에 '대서양 무착륙 단독 횡단'에 성공했던 미국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Lindbergh·1902~1974)입니다〈사진〉. 선정 당시 그는 25세였습니다.
◇"대서양 횡단한 사람에게 2만5000달러"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이런 공고가 뜹니다. 미국 부호 레이먼드 오티그의 제안이었습니다. "뉴욕부터 파리까지 무착륙 비행을 성공한 첫 사람에게 2만5000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들으면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 도전이지만 당시 장거리 비행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어요. 약 6000㎞에 달하는 거리를 수십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비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도전자 르네 퐁크는 1차 대전에서 적기를 75대 격추한 프랑스 전쟁 영웅이었지만 침대까지 싣고 4명이 탑승했던 그의 비행기는 이륙조차 실패했습니다.
◇낙하산까지 포기하며 '가볍게 더 가볍게'
1927년 비행기로 미국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를 오가며 항공 우편을 배달하던 20대 청년 린드버그가 도전장을 내밉니다. 그는 1925년 미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한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돈이 없던 그는 세인트루이스 사업가들에게 1만5000달러를 지원받고, 비행기 이름을 '세인트루이스의 정신(Spirit of St. Louis)'이라고 붙입니다. 이후 그는 날개 14m, 동체 길이 8.4m인 단엽기(單葉機)를 개조합니다. 개조 방향은 '가볍게 더 가볍게'. 6000㎞에 달하는 거리를 날아가려면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 비행기 무게를 최대한 줄이고, 기름을 최대한 많이 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도중에 착륙할 일 없이 오래 날기 위해서였죠.
5명이 탈 수 있는 비행기를 운전석 1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연료통을 넣을 공간으로 썼습니다. 린드버그는 방향을 잡을 때 필요한 육분의도 포기했어요. 라디오 수신기, 구조 신호용 조명탄, 낙하산도 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연료 탱크에는 기름이 1700L 들어갔습니다. 약 6600~7200㎞를 날 수 있는 연료를 확보한 겁니다.
◇홀로 33시간을 비행하다
린드버그는 1927년 5월 20일 아침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을 몰고 이륙합니다. 파리까지 거리는 5815㎞. 그는 물 1L가량, 샌드위치 몇 조각, 나침반, 선회계만 들고 떠났습니다.
▲ 1927년 처음으로 대서양을 '무수면' '단독'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가 그의 비행기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출발한 지 33시간 30분 만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대서양 위에서 그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틀 뒤 15만 인파 앞에서 파리 르부르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합니다. 비행시간 33시간 30분 29.98초. 예비 파일럿도, 요즘 같은 자동화된 첨단 비행 기술의 도움도 없었습니다. 눈 한번 잘못 감으면 대서양으로 곤두박질할 상황을 정신력으로 이겨낸 것이죠.
그는 하루아침에 영웅이 됩니다. '뉴욕타임스'는 처음 5면을 린드버그의 횡단 성공 기사로 도배했습니다. 캘빈 쿨리지 당시 미국 대통령은 린드버그와 그의 비행기를 프랑스에서 수송해오기 위해 해군 순양함 멤피스호를 파견합니다. 6월 13일 뉴욕에서 벌어진 환영식에는 오색 색종이가 빌딩에서 꽃잎처럼 쏟아졌습니다. 당시 뉴욕시 청소국은 색종이 쓰레기 1800t을 수거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열광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런 평가도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대서양을 날아서 건넌 것이 아니라 물 위를 걸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치 동조해 美 육군서 해임… 태평양전쟁 민간인으로 참전]
린드버그는 대서양 횡단 공적을 인정받아 미 육군 항공대 대령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히틀러와 나치에 동조하는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기술력을 칭찬했고, 인종차별적 발언도 했습니다. 미국이 나치 독일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했고요. 이런 행보를 이어가다 미국 육군에서 쫓겨나기까지 합니다.
다만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민간인 신분으로 태평양 전장(戰場)에서 전투기, 폭격기를 조종하며 50여 차례 임무를 수행했고, 이미지 회복에 성공합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25 태국 現왕조 창시자… 베트남·라오스까지 세력 넓혔죠
[라마 1세]
1782년, 민심 잃은 딱신 왕 폐위 후 백성 지지 받으며 왕으로 추대돼
방콕으로 수도 옮긴 후 사원 짓고 불교 개혁하며 왕권 안정화시켜
전성기 때 세력은 지금 영토의 두배
지난 12일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태국 국왕의 대관식이 방콕을 가로지르는 짜오프라야강에서 벌어진 왕실 선박의 행진을 끝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왕실 선박 52척을 2200명이 노를 저어 약 3.4㎞ 이동했는데, 5월부터 시작한 대관식의 마지막 행사였습니다. 라마 10세는 1782년 '짜끄리 왕조'를 연 라마 1세(1736~1809·작은 사진)의 후손입니다. 태국에서는 짜끄리 왕조가 세워진 날을 기념일로 삼고 있는데요, 라마 1세는 어떤 왕이었을까요?
◇왕의 오른팔에서 새 국왕으로
라마 1세는 1736년 태국(당시 나라 이름은 시암) 아유타야 왕조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적 이름은 '통 두엉'이었어요. 당시는 약 400년에 걸쳐 동남아 지역 최고 강국이던 태국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하던 시기입니다. 1767년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현재 미얀마)의 침략으로 수도 아유타야가 점령당하며 멸망합니다.
왕조는 멸망했지만, 태국 사람들은 버마에 맞서 계속 싸웠습니다. 결국 아유타야 왕조의 장군이던 딱신이 1767년 버마를 물리치고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통 두엉은 이 시기 딱신의 오른팔 역할을 했어요. 함께 버마에 맞서 싸웠고, 딱신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15년 동안 정복 전쟁 11차례에 참여해 군사적 재능을 뽐냈어요.
그러나 딱신은 왕위에 오른 뒤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잔혹한 정치를 펴게 됩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채찍질했다는 기록까지 있어요. 왕비와 왕자가 그런 취급을 받았을 정도이니,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결국 통 두엉이 태국 백성의 지지를 받아 1782년 새로운 왕에 추대됩니다.
과거 통 두엉은 1770년 캄보디아 원정을 떠나면서 딱신 왕에게서 '짜오프라야 짜끄리'라는 높은 관직을 받아요. 이후 이 관직 이름은 통 두엉의 이름처럼 쓰였고, 왕위에 오르면서 관직명의 일부인 '짜끄리'를 왕조 이름으로 삼고 자신은 라마 1세가 돼 나라를 다스립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부까지 정복
라마 1세는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치르며 영토를 확장했어요. 우선 그는 수도를 짜오프라야강 동쪽으로 옮겨 지금의 방콕을 수도로 삼습니다. 기존 수도였던 톤부리는 짜오프라야강 서쪽에 있어 서쪽에 있는 버마의 공격에 취약했거든요. 이때 아유타야의 폐허에서 꺼낸 자재로 도시를 건설해 방콕이 아유타야를 계승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 태국 방콕의 불교 사원 '왓 프라깨우'에 있는 에메랄드 불상 모습. 태국 짜끄리 왕조를 시작한 라마 1세가 라오스와 싸워 이긴 뒤 되찾았습니다. 라마 1세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불교를 개혁해 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위키피디아
라마 1세는 이후 치앙마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버마군을 모두 내쫓아버립니다.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에 군사 원정을 떠나 현재 말레이시아 영토인 크다와 클란탄, 트렝가누까지 세력을 팽창했어요. 라마 1세 시기 태국은 현재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을 속국으로 삼아 지배했고, 베트남 일부까지도 정복해 영토를 넓혔어요. 이 시기 태국의 영토는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컸습니다.
◇불교 개혁으로 민심 달래
라마 1세는 백성을 달래기 위해 불교 개혁에도 착수합니다. 태국은 예로부터 불심이 깊은 나라로 유명한데요, 아유타야 왕조 말기부터 불교 승려들이 계율을 어기는 등 백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는 계율을 어긴 승려를 강력하게 처벌하게 하고 경건한 승려를 불교 지도자로 임명합니다. 또 승려 218명과 불교학자 32명을 불러 모아 불경을 개정합니다. 왕궁에는 '왓 프라깨우' 불교 사원을 새로 짓습니다. 라마 1세는 딱신 왕 시절에 라오스와 전쟁을 하면서 14세기 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에메랄드 불상을 되찾아왔었는데 그 불상을 이 사원에 모셨습니다.
[19세기 라마 5세 '대나무 외교'… 영토 일부 내줬지만 주권 지켜]
지금 태국 영토는 라마 1세 시절의 절반 수준입니다. 하지만 태국에서는 이를 라마 5세(1868~1910)의 '대나무 외교'의 성과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태국은 동남아에서 영국·프랑스 등 세계열강에 맞서 끝까지 독립을 지켰던 얼마 안 되는 나라거든요.
대나무는 강한 바람이 불어도 크게 휘청거릴 뿐 땅에 굳건히 박은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태국은 19세기 말 서쪽의 영국령 인도제국과 동쪽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양쪽에서 공격받았습니다. 당시 태국 국왕 라마 5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이 국가들에 영토를 계속 떼어주면서도 주권을 지키고 근대화를 이룹니다. 살은 내주고 뼈는 지켰던 것이죠.◎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