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9-1
01.04 '흑묘백묘론'으로 성장 이끈 中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
공산주의 이념보다 경제 성장 중시… 직접 美·日 방문해 시장경제 도입
최근 개혁·개방 연표에 鄧 언급 줄고 시진핑 강조해 공을 돌리고 있대요
지난달 18일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이해 시진핑(習近平·66) 주석이 기념 연설을 했어요.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개혁·개방 40년 연표'를 보도했어요.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개혁·개방 정책 선포부터 2018년 11월까지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한 것이지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중국에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면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에 시장경제를 도입해 국가를 발전시켰어요. 지금 중국이 미국에 이어 '주요 2국'(G2)이라고 떵떵거릴 수 있는 이유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덕이죠. 지난 40년 동안 중국은 연평균 9.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어요. 40년 전으로 돌아가 개혁·개방 정책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아볼게요.
◇대약진 운동의 대실패
1950년대 말부터 1960년 초까지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을 폈어요.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해 경제·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중공업 우선주의 때문에 생필품을 생산하는 경공업은 쇠퇴했어요. 함께 밭을 일궈 결과물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의 공산주의식 농업 때문에 농민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어요. 대약진 운동 기간 중국은 식량도, 생필품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가뭄까지 겹치면서 3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기도 했어요.
▲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서 시민들이 덩샤오핑이 그려진 간판 앞을 지나가고 있어요. 간판 왼쪽 위에“당의 기본 노선을 유지하며 100년 동안 흔들리지 말자”고 적혀 있어요. 개혁·개방 정책을 계속 펼쳐 경제 발전을 이루자는 뜻이지요. 선전은 덩샤오핑이 경제특구로 지정하면서 빠르게 성장했어요. /조선일보 DB
당시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이념을 고집하기보다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일부 도입해야 한다는 실용적 자세를 보였어요. 하지만 마오쩌둥은 반대했어요. 그는 유교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켜 다시 권력을 회복했어요. 이 당시 덩샤오핑은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로 몰려 직무에서 해임됐어요. 그는 73년 정계에 복귀할 때까지 공장에서 노동해야 했답니다.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도 끝나서야 뜻을 펼치게 됩니다.
◇덩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과 '선부론(先富論)'으로 요약돼요. '흑묘백묘론'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뜻이에요. 즉,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국민을 잘살게 하면 된다는 말이에요. 그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해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어요.
'선부론'은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라"는 뜻이에요. 돈을 투자할 대상과 지역에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에요. 모두가 균등하게 부를 나눠 갖는 공산주의식 평등주의를 극복하겠다는 거예요. 능력 있는 일부 엘리트가 먼저 부자가 되고, 이들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된다는 거죠. 지역적으론 무역이 쉬운 동남 연해 도시부터 개발한다는 방침이었고요.
농촌에서도 실패한 공산주의식 공동 생산, 공동 분배 정책을 폐기했어요. 각자 농사를 짓고 의무 할당량을 나라에 낸 뒤 나머지 수확물은 농민이 갖도록 했어요. 농민이 열심히 일할 이유가 생기면서 생산량도 늘기 시작했어요. 도시에서는 경제특구 지역을 개방하고 해외 투자자들을 유치했어요.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중국의 주요 인재를 서유럽 5국으로 보내 자본주의 경제를 연구하고 중국 상황에 맞게 적용했어요. 덩샤오핑이 시장경제를 배우기 위해 직접 자본주의 선진국인 미국·일본 등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이념이나 정치적으론 대립했던 자본주의 국가와 협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거죠. 이후 중국은 눈부시게 성장했어요.
◇새로운 '개혁·개방'이 필요한 중국
현재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어요. GDP(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2위예요. 하지만 최근 미국과의 무역 전쟁, 빈부 격차, 국가 부채, 인터넷 통제 등 경제 성장의 이면인 여러 문제도 드러나고 있어요.
특히 중국은 작년 3월에는 헌법을 개정해 시진핑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을 없애고 헌법에 '시진핑의 신시대'를 명시했어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같은 독단적 지도자를 막기 위해 국가주석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고 개인숭배를 금지했어요. 그는 살아 생전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터도 제작하지 못하게 했죠. 그런데 이게 뒤집힌 거예요.
당장 개혁·개방 40년의 성과가 시진핑의 공으로 돌아갔어요. 앞서 말한 개혁·개방 연표에 시진핑은 125번 나왔는데 덩샤오핑은 60번만 언급됐어요. 그동안 중국이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추앙했던 움직임과 대조적이에요. 현재 지도자인 시진핑의 업적을 더욱 부각하는 것이죠. 중국은 이제 새로운 개혁·개방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1.11 英 에드워드 8세, 유부녀와의 사랑 위해 왕위 포기했대요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
▲ 말레이시아 국왕 무하맛 5세(왼쪽)는 러시아 모델과 결혼하고 최근 왕위를 내려놨어요. /트위터
지난 5일 말레이시아 국왕 무하맛 5세(50)가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물러났다고 말레이시아 왕실이 발표했어요.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9개 주의 최고 통치자들이 5년을 임기로 명예직인 왕위를 계승하는데, 무하맛 5세가 임기를 다 채우기 전에 왕위를 던진 거예요.
무하맛 5세는 지난해 11월 병가를 내고 러시아 출신 모델과 결혼했어요. 국왕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와 물러났다는 추측이 나옵니다. 세기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영국에서도 비슷한 로맨스가 있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8세(1894~1972)와 월리스 심프슨(1896~1986) 부인이 주인공이죠.
◇바람둥이, 임자를 만나다
에드워드 8세는 영국 국왕 조지 5세(1865~1936)의 장남이에요. 잘생긴 외모에 탁월한 패션 센스로 선망의 대상이었죠. 파티를 즐기는 바람둥이로도 유명했어요.
그랬던 에드워드 8세에게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옵니다. 한 파티에서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던 미국인 심프슨 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해요. 당시 심프슨 부인은 이혼 경력이 있는 유부녀였어요. 두 번째 남편과 아직 살고 있었죠.
영국 왕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왕가와 격이 맞아야 할 텐데, 심프슨 부인은 외국인 평민인 데다 아직 결혼 상태라, 에드워드 8세의 신부가 되려면 재혼한 남편과 한 번 더 이혼해야 했어요.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인 메리 왕비는 심프슨 부인을 '그 여자'(That Woman)라고 부르며 못마땅해했대요.
◇"사랑하는 여인 없이는 국정 불가능"
1936년 1월, 조지 5세가 지병으로 눈을 감자, 에드워드 8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새 왕이 본격적으로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추진하자, 대다수 국민과 언론은 거부감을 느꼈어요. 스탠리 볼드윈 당시 영국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거론하며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어요.
▲ 에드워드 8세(오른쪽)와 월리스 심프슨 부인이 1937년 프랑스에서 결혼식 직후 찍은 사진입니다. 영국 왕가에서는 결혼식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결혼을 강행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에드워드 8세는 결국 즉위한 지 11개월째인 1936년 12월, 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라디오 연설을 합니다. "무거운 책임을 맡는 일도, 왕으로서 원하는 바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일도,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그의 연설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어요. '사랑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죠. 에드워드 8세는 퇴위 후 '윈저 공작(Duke of Windsor)'이라는 작위를 받았어요. 그는 이듬해 심프슨 부인과 프랑스에서 결혼했어요. 왕실 사람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심프슨 부인은 어떤 작위도 받지 못했어요. 왕실은 그녀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거예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한 것이 영국과 세계에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어요. 에드워드 8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앨버트 왕자가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랍니다. 형처럼 잘생기지 못한 데다 말도 더듬었지만, 2차대전으로 영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됐을 때 말 더듬을 극복하고 느리고 굳센 말투로 국민을 북돋는 연설을 해서 나라의 힘을 한데 모은 인물이지요.
반면 에드워드 8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독일에 온정적이었고, 히틀러를 높게 평가했어요. 독일이 재무장에 나선 상황에서 '독일과 친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죠. 그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 심프슨 부인과 함께 1937년 독일에 가서 히틀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어요.
영국 왕실은 윈저공이 나치와 가깝게 지내는 걸 불안하게 지켜봤어요. 2차대전이 터지자, 영국 정부는 윈저공을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서인도제도의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윈저공은 전후에 여러 나라를 떠돌다 프랑스에서 별세했어요. 그의 시신은 영국 왕실 묘지에 안치됐어요. 심프슨 부인도 훗날 곁에 묻혔지요. 윈저공은 죽은 이후에야 사랑하는 이와 고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거예요.
☞윈저 패션
에드워드 8세는 미남이지만 키는 비교적 작았어요. 미국 배우 톰 크루즈보다 2㎝ 작은 168㎝였죠. 그는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패션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해요. 그 결과 20세기 남성의 패션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오늘날 격식 있는 정장 스타일을 '윈저 패션'이라고 하거나, 큰 매듭의 좌우대칭을 갖춘 타이 매듭을 '윈저 노트(knot)'라고 부르는 것도 에드워드 8세가 퇴위 후에 받은 작위 '윈저공'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다만 윈저공 자신은 꼭 기쁘지 않았나봐요. 그의 회고록에 윈저 노트를 가리켜 "그 볼품없는 매듭은 내가 고안한게 아니었다"고 쓴 대목이 있답니다.
안영우·명덕고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1.18 1차 대전 후 배상금에 시달린 독일, 빵값 2000억배 뛰었죠
[베르사유조약]
승전국들이 막대한 배상금 물리고 자원 풍부한 알자스·로렌 빼앗아
불만 커진 독일 국민은 히틀러 지지… 결국 20년 뒤 2차 세계대전 일어났죠
오는 18일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 되는 날입니다. 파리강화회의는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국제회의입니다. 독일과 연합국 측은 다섯 달 넘는 협의 끝에 그해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을 맺습니다. 다시는 참혹한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패전국들을 응징하는 게 이 조약의 핵심 목표였지만, 불과 한 세대 만에 2차 대전이라는 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고 말지요. 베르사유조약이 2차 대전을 막긴커녕 2차 대전의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상자 562만명 낸 프랑스의 '뒤끝'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1년간 계속됐어요. 연합국 측 27국 대표들이 참석했는데요, 그중에서도 프랑스·영국·이탈리아·미국 등 '빅 포(Big Four)' 4국이 회의를 주도했어요. 미국의 윌슨 대통령,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 이탈리아의 오를란도 총리죠.
▲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100년 전인 1919년 1월 27국이 파리강화회의를 열었습니다. 연합국과 독일이 다섯 달 뒤 베르사유조약을 맺는 모습을 담은 영국 화가 윌리엄 오르펜의 그림입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왼쪽에서 다섯째부터 윌슨 미국 대통령,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랍니다. /영국 제국 전쟁 박물관
프랑스가 가장 강경한 태도였어요. 1차 대전에서 프랑스 군인 562만명이 숨지거나 다쳤어요. 러시아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죠. 클레망소 총리는 황폐화된 프랑스를 복구하기 위해 독일이 모든 전쟁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독일 때문에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받겠다는 거지요.
프랑스는 독일이 군비를 축소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는 자르, 란다우, 알자스·로렌 지방을 돌려달라고 했어요. 이 중 알자스·로렌 지방은 라인강 서쪽의 비옥한 평원일 뿐 아니라 철광석 같은 자연 자원도 풍부했어요. 독일과 프랑스가 모두 탐내는 땅이라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지요. 중세까지 신성로마제국 영토였다가 근세로 넘어오며 프랑스 영토가 됐어요. 1870년 프로이센(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여 다시 프로이센 땅이 됐는데, 약 50년 만에 그 땅을 다시 돌려달라는 요구였어요. 또 자르는 철광석이 풍부하고, 란다우는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같은 승전국이지만 미국과 영국은 입장이 조금 달랐어요. 1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7년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했어요. 미국과 영국은 사회주의 사상이 소련을 넘어 유럽 전체로 퍼지길 바라지 않았어요.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걸 막으려면, 독일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되는 게 좋다고 판단했지요.
독일이 너무 약해져서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너무 강해지는 것도 미국과 영국은 원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깨지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자르와 란다우는 빼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돌려받는 데 만족해야 했어요. 프랑스 국민은 독일을 너무 봐줬다며 반발했어요. 조약에 서명한 클레망소 총리에게 "뭘 하고 있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지요.
참고로 베르사유조약을 맺은 곳은 베르사유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이에요.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굴복시킨 뒤 바로 이 방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어요. 프랑스는 50년 가까이 잊지 않고 있다가, 같은 방에서 독일을 굴복시키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굴욕을 되갚았어요.
◇독일에 과연 관대한 조약이었을까?
그런데 베르사유조약은 정말로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독일에 관대한 조약이었을까요? 수많은 학자가 "베르사유조약은 가혹하고 징벌적인 강화조약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독일은 1차 대전으로 인구의 10%를 잃었어요. 전후엔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 15%를 다시 잃었죠. 알자스·로렌 지방뿐 아니라 독일 동부의 다른 분쟁 지역과 해외 식민지에 관한 권리도 연합국에 넘겨야 했죠. 징병 제도는 폐지됐고, 병력도 육군 10만, 해군 1만 5000명으로 제한됐어요.
막대한 배상금도 물었어요. 당시 독일의 한 해 세입은 60억~70억마르크로 추정되는데, 1921년 결정된 배상 총액은 1320억마르크에 달했어요. 독일 국민이 낸 세금을 한 푼도 안 쓰고 22년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액수였지요.
결국 독일은 화폐를 마구 찍어댔어요. 이건 극심한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지요. 1918년에는 빵 한 덩이에 0.5마르크였는데 5년 뒤인 1923년에는 1000억마르크가 됐어요. 경제가 피폐해지고 원래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겼다고 생각해 분노한 독일 국민은 "독일의 영광을 되찾자"고 외치는 히틀러를 지지하기 시작했어요.
1차 대전은 그 당시까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hat Will End War)'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이 전쟁 이후로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파리강화회의는 평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합니다. 베르사유조약 체결 20년 만인 1939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고 2차 대전을 시작했으니까요.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은 국제정치에서 정답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평화로 가는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주는 사례예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1.25 가축은 물론 생선·조개도 먹지 말라고 명령한 日 쇼군
[17세기 일본의 살생금지령]
300여년 전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 100여개의 동물권법 만들었어요
도쿄돔 20개 크기의 유기견 시설 세워 개 산책 시켜주는 관리 따로 뽑기도
동물권 단체 '케어'의 박소연 대표가 그동안 200여 마리가 넘는 구조 동물을 안락사시킨 것으로 드러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안락사 없는 동물 보호소'를 표방하며 후원금을 받아 온 단체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배신감이 더욱 컸지요. 이 사건으로 동물들의 안락사 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수백년 전 일본에서 동물들의 생명을 중시하여 개는 물론 조개도 잡아먹지 못하게 막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누쿠보(犬公方·개장군)'이라고 불린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1646~1709)입니다.
◇"살생을 금지해라"
일본은 군주국이지만 일왕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권을 쥔 사람은 전국 영주들의 우두머리인 쇼군(將軍)입니다. 쇼군을 떠받치는 정부를 막부(幕府)라 해요.
▲ 흰 개를 쓰다듬고 있는 사람이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운데)입니다. 그는 개는 물론 날짐승, 생선, 조개까지 먹지 말라는 살생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17세기 일본을 재통일한 도쿠가와 가문의 5대 쇼군입니다. 조선 어부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독도가 조선 영토라고 인정받았을 때 일본을 다스리던 사람이죠. 1680년 다섯 살 위의 형인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가 병으로 사망한 뒤 34세에 쇼군이 됐어요.
쓰나요시는 쇼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유학을 강조했어요. 유시마성당(湯島聖堂)이라는 유교 학교를 세워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 유학을 배울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직접 유학 경전을 강의하기도 했지요. 전국에 조사관을 파견해서 부정부패한 관리와 행실이 좋지 않은 신하들을 처벌하기도 했지요. 덕분에 쇼군의 권위가 강력해지고 정치도 안정됐어요. 경제도 크게 발달했고요.
그러던 쓰나요시가 1684년 쇼군에게 매를 헌상하던 관행을 금지시켰어요. 이듬해인 1685년에는 "쇼군이 지나갈 때 개와 고양이가 돌아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법령을 반포했고요. 원래 쇼군이 지나갈 때에는 백성은 좌우로 비켜서서 엎드리고, 동물들도 쇼군의 행차에 방해되지 않도록 묶어놨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지시였어요.
이 법령들이 뒤에 이어질 100개가 넘는 동물 관련 법의 시작입니다. 쓰나요시는 1687년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법(生類憐れみの令)'을 발표합니다. 개나 가축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금하는 한편 먹기 위해 동물을 잡는 행위도 금지했어요. 처음에는 가축들을 잡아먹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엔 생선·조개·새우 같은 어패류도 먹지 못하게 했지요. 살생을 직접 저지르지 않고 지켜보기만 해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했어요.
쓰나요시는 도쿄돔 20개 크기의 거대한 유기견 보호 시설을 세워 떠돌이 개 수만 마리를 돌봐주기도 합니다. 수용된 개를 산책시켜주는 관리도 따로 뒀어요.
그는 소나 말·고양이·개 등에게 사람처럼 호적대장을 만들어 줬어요. 기르던 개가 죽으면 주인이 직접 좋은 자리에 묻어주게 했고, 동물의 등에 짐을 싣는 행위도 금지했어요.
쓰나요시가 이처럼 동물 보호에 나선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전해옵니다. 서른 넘어 얻은 아들이 다섯 살에 요절한 뒤 충격을 받아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연민을 느끼게 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후계가 없어 고민하는 쓰나요시에게 한 승려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탓이니 동물을 보호해 덕을 쌓으라"고 충고했다는 설도 있고요.
쓰나요시의 살생 금지령이 현대 일본어에까지 흔적을 남겼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날짐승과 들짐승을 모두 '마리'로 세지만 일본에서는 날짐승과 들짐승을 세는 단어가 달라요. 들짐승은 '히키(匹·ひき)'라고 하고, 날짐승은 '와(羽·わ)'라고 셉니다. 그런데 들짐승 중에서 토끼만 유독 날짐승처럼 '와'라는 단위로 셉니다.
쓰나요시 시절 배고픈 백성이 토끼를 잡아먹은 뒤 처벌을 피하려고 마치 토끼가 아니라 새를 잡아먹은 것처럼 속이던 데서 나온 관행이라고 해요. 다만 훗날 쓰나요시가 날짐승도 죽이지 말라고 금지했던 걸 생각하면 허점이 있는 주장입니다.
◇생명 존중 사상 퍼트리려는 뜻?
쓰나요시의 정책은 사람보다 동물을 위했던 법으로 보여요. 지금 당장 우리나라에서 닭과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면 난리가 나겠죠. 많은 백성이 쓰나요시의 법령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법'을 계속 남겨 달라는 쓰나요시의 유언에도 그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은 폐지됩니다.
하지만 일부 현대 학자들은 쓰나요시의 정책이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 유교·불교를 바탕으로 생명 존중 사상을 갖도록 하려는 취지였다고 보기도 해요.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는 무사들이 길을 걷다가 부딪쳤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칼로 베어 죽일 정도로 생명을 가볍게 봤거든요.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에서 불교의 영향으로 사냥을 금지한 적이 있었답니다. 쓰나요시의 동물 보호 정책이 비록 극단적이었다고는 해도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쓰나요시의 생각은 새겨볼 만합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2.01 미국 대통령 집무실 책상, 영국 여왕이 보낸 선물이래요
[백악관 '결단의 책상']
19세기 북극해서 표류한 英 선박, 배 발견자는 제3자에 팔려했지만 미국이 사들여 다시 영국에 보내
英, 선박 목재로 책상 만들어 선사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백악관에 있는 대통령 책상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저를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이라 부르죠. 미국 대통령이 집무실 '오벌오피스'에서 중요한 결정을 발표할 때 제 앞에 앉아요. 가장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일 국경 장벽 예산 57억달러가 필요하다고 외쳤어요. 트럼프에 앞서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존 F 케네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모두가 제 앞에 앉았지요.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제 이름은 '결단의 책상'이 아니라 '결단호(號) 책상'이라고 해야 정확해요. 왜냐고요?
◇난파선 선박으로 만든 미 대통령 책상
영국 정부가 1850년 북극해를 탐사하기 위해 배 한 척을 진수했어요. 배 이름은 'HMS 레졸루트'. HMS는 '빅토리아 여왕 폐하의 배'라는 뜻이고 레졸루트(Resolute)는 '단호하다'는 뜻이에요. 북극해를 흔들리지 말고 개척하라는 뜻이었지요.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작년 10월‘결단의 책상’에 앉아 대통령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어요. 결단의 책상이라는 이름은 영국 배‘레졸루트’호에서 왔어요. 존 F 케네디, 오바마, 트럼프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으로 썼죠. /백악관
그런데 이 배는 1854년 북극해 빙하에 갇혀버립니다. 선장과 선원이 탈출한 뒤 텅 빈 레졸루트호만 남아 있다가 1년 뒤 빙하에서 빠져나와 바다를 표류합니다. 미국 포경선이 그런 레졸루트호를 발견해 미국 항구로 인양하지요.
당시 미국과 영국은 사이가 불편했습니다. 1783년 독립전쟁으로 이미 사이가 한 번 나빠졌는데, 1833년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이 "미국도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압박해 다시 분위기가 나빠진 거죠.
미국 포경선 선주는 레졸루트호를 제3자에게 팔겠다고 나섰어요. 영국은 기분이 나빴지요. 여왕의 배를 미국인이 '주워서' 남에게 팔겠다니요.
이때 미국 버지니아주 상원 의원 제임스 메이슨이 꾀를 냅니다. 미국 나랏돈 4만달러를 들여 레졸루트호를 사들여서 영국 여왕에게 '선물'로 되돌려주자는 거였어요.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자는 거였죠. 이 제안은 성공적이었어요. 영국은 이듬해인 1856년 레졸루트호를 돌려받아요.
이후 레졸루트호는 영국 해군 선박으로 쓰이다가 1879년 해체됩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배를 되찾아준 감사의 표시로 배에서 나온 참나무 목재로 책상을 만들어 보냅니다. 제 이름인 '레졸루트 책상'이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답니다.
책상에는 영국에서 붙여 보낸 명판이 있어요. '우호의 상징으로 레졸루트호를 되찾아준 미국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책상을 드립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9·11 테러와 함께한 결단의 책상
이후 저는 여러 대통령을 모셨어요. 그러다 한동안은 잡동사니와 함께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저를 찾아내 오벌오피스로 가져왔어요.
저는 미국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자주 등장합니다.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9·11 테러로 공포에 빠진 미국인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할 때도,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 해상 봉쇄'를 명령한 것도 제 앞에 앉아서였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6·25전쟁 파병 행정명령을 내린 것도 제 앞이었다는 말이 있고요.
제 몸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을 이끌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흔적도 남아 있어요. 그는 소아마비였는데 사람들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를 원치 않았어요. 지금 제 모습을 보시면 전면부 가운데 미국의 국장(국가를 상징하는 표장)이 양각돼 있습니다. 원래 영국이 저를 처음 만들어 선물할 때는 가운데가 뻥 뚫려 있어 앉아 있는 사람의 다리가 보였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가림판을 덧대기로 한 거죠. 다만 그는 가림판이 완성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해 후임 트루먼 대통령부터 지금 같은 모습의 저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모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저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평소 선호하던 책상을 썼던 대통령도 있었거든요. 지금까지 6개 책상이 쓰였다고 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책상'을 쓴 대통령도 7명이나 있지요.
흥미로운 건 좌우와 관련 없이 책상을 선택하는 미국 대통령 모습입니다. 클린턴, 부시, 오바마, 트럼프 등 최근에 집권한 미국 대통령 4명이 모두 저를 택했습니다. 정책을 뒤집고 상대편에게 날 선 비판을 가해도 나라의 전통은 존중하는 거겠죠.
[美 국가 상징 속 대머리 독수리, 평화땐 올리브가지 쥔 발을… 전쟁땐 화살 쥔 발을 본다는데…]
결단의 책상 정면에는 대머리독수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 국장(國章·국가를 상징하는 표장·왼쪽 사진)이지요. 독수리는 양발에 각각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가지와 무력을 상징하는 화살을 쥐고 있습니다.
▲ 현재(왼쪽), 과거. /위키피디아
항간에 '미국 정부가 전시(戰時)에는 이 독수리가 화살을 쥔 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평화로울 때는 올리브가지를 쥔 발 방향을 보도록 디자인을 바꾼다'는 설이 있습니다. 1916~1945년 미국 국장〈오른쪽 사진〉과 결단의 책상 속 독수리는 화살을, 지금 독수리는 올리브가지를 보고 있지요. 1916~1945년은 1·2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시대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 유명 작가 댄 브라운의 소설 등에 등장해 널리 퍼졌습니다.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사실과는 다릅니다. 국장 디자인은 미국 대통령령으로 정하는데, 1916년에 윌슨 대통령이, 1946년에 트루먼 대통령이 각각 디자인을 고쳐서 우연찮게 독수리 머리 방향이 바뀐 것뿐이라고 하네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2.08 마녀사냥은 옛 역사?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16~17세기 유럽 사회혼란기에 5만명 이상이 마녀로 몰려 희생됐죠
현대에도 매카시즘·문화대혁명 등 잘못된 믿음 이용한 마녀사냥 여전
지난달 말 인도 오디샤주 선디가르 지역에서 문다라는 이름의 미혼모와 네 명의 자녀가 우물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에 저주를 불러온다며 이들을 죽인 겁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마녀사냥'이 2017년 한 해에만 99건 일어났다고 해요.
그런데 과거 16~17세기 유럽에서는 이보다 더 끔찍한 '마녀사냥' 벌어졌어요.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5만~6만명이 이 시기에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럽을 뒤흔든 공포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던 16세기 유럽은 기후변화로 대기근이 이어졌어요. 많은 사람이 굶주렸죠. 유럽 인구 30%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고, 가축도 전염병으로 죽어갔어요. 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며 신교와 구교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악마'와 계약한 '마녀'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옆집 아이가 아프거나 가축이 죽는 것도 마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윽고 유럽 사람들은 주변의 마녀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어요. 모든 불행한 일들이 마녀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을 거예요. 마녀사냥은 유럽과 유럽이 지배했던 식민지까지 퍼져 나갔어요.
▲ 16~17세기 유럽에서는 수만 명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어요. 위 그림은 당시 마녀 판별법 중 하나인 ‘물의 시험’입니다. 악마와 계약한 마녀는 몸이 물 위로 뜬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람 몸은 원래 물에 뜨는데 말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마녀로 몰려 희생당했지요. 마녀로 몰린 사람들은 자신은 마녀가 아니라고 외쳤지만 고문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어요. 고문을 피하기 위해 마녀라고 인정하면 불에 타죽고, 마녀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죠. 마녀로 몰리면 심지어 기침만 해도 '마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대니까요.
유럽에서만 5만~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잔혹한 고문 끝에 숨졌다고 봅니다. 전쟁과 흉년으로 고통을 받았던 독일의 경우는 2만명 정도가 희생됐어요.
◇돈과 권력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
마녀로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힘없는 여자들이었어요. 이 시기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됐으며, 거짓말과 속임수를 잘한다는 편견이 있었어요. 피해자의 재산을 노리고 마녀로 내모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30년 전쟁' 이후 도시의 재정 확보를 위해 마녀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재판비를 청구했어요. 운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재판비로 돈을 탕진했고, 마녀라고 자백하면 전 재산을 권력자가 몰수해갔습니다. '돈 많은 과부'가 마녀가 될 위험이 컸죠.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을 악마와 계약했다고 신고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해요.
인구를 늘리기 위해 40세 이하의 여자는 무조건 풀어준 도시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들여야 한다며 사람들을 부추기던 지배층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명분을 붙여 이들을 풀어주는 일도 벌였던 것이에요. 돈과 권력을 위해 혹은 과도한 믿음으로 엉뚱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마녀사냥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현대의 마녀사냥
'마녀'가 있다고 믿지 않는 현대에는 마녀사냥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냉전 시기 매카시즘같이 사회적 필요에 의해 '악'을 규정하는 일은 반복되고 있거든요.
1950년대 미국의 상원 의원인 조지프 매카시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며 일종의 마녀사냥에 나섰지요. 수많은 미국인이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문을 받았어요. 중국에서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이 본격화하며 '자본주의자'가 중국 대륙의 '마녀'로 탄압당했죠. 문화대혁명이 벌어지는 약 10년 동안 300만명이 자본주의자라는 혐의로 숙청당했죠.
여러분도 자칫하면 마녀사냥에 가담할 수 있어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생긴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실관계도 잘 모른 채 특정 사람을 비난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죠.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공동체의 분노와 갈등을 무섭게 몰아가는 여론에도 마녀사냥의 일면이 있다"고 했어요. 마녀사냥은 교과서 속에만 나오는 옛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녀 판별법·처벌법 적힌 책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대량 제작돼 마녀사냥의 근거 됐죠
▲ /웰컴콜렉션갤러리
15세기에 출간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사진〉은 라틴어로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뜻입니다. 독일 도미니크수도회 사제하인리히 크라머가 1486년 썼습니다. 마녀를 찾아내는 방법과 처벌하는 규정을 담고 있어요.
책의 내용은 지금 관점에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녀 판별법 중 하나를 볼까요. '물에 빠뜨렸는데 떠오르면 마녀다'. 사람 몸은 원래 물에 뜹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모두 마녀라는 얘기죠. '마녀는 사람 시체로 만든 연고를 써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마녀임을 자백하지 않으면 2~3일간 고문하며 심문하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출판 후 30여 년 동안 20쇄를 찍으며 3만권이 팔려나갔고, 그 뒤 마녀사냥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1574년부터 1669년 사이에 2만~3만권이 더 팔렸다고 합니다. 마녀사냥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줬죠. 당시 개발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대량으로 제작돼 널리 퍼졌습니다. 인쇄술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죠.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2.13 "호주를 하얗게"… 1970년대까지도 유색인종 이민 막았죠
[백호주의(白濠主義)]
1788년 처음 영국인 총독 부임하며 식민지로 삼고 죄수 16만명 이민 시켜
영국계 백인 땅이라며 토착민 핍박… 19세기 골드러시 후 중국인 이민 제한
▲ /호주국립박물관
안녕하세요. 저는 1910년에 태어났어요. '호주원주민협회'에서 만든 배지〈작은 사진〉랍니다. 가운데 호주 지도 위에 적힌 'WHITE AUSTRALIA'는 유색인종 이민을 막겠다는 '백호(白濠·하얀 호주)주의' 정책을 상징하는 단어죠. 호주 원주민은 유색인종 아니냐고요? 사실 그렇긴 한데, 호주원주민협회는 모두 백인으로 구성돼 있었어요. 18세기부터 호주에 이민 온 백인들이야말로 호주 '원주민'이라는 논리였죠. 백호주의의 '상징'인 제가 백호주의에 대해 말씀드릴까 해요.
◇ '호주의 날'은 원주민에겐 '침략의 날'
지난달 26일은 호주 최대 국경일 '호주의 날'이었어요. 호주에 파견된 첫 영국인 총독이 시드니를 개척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그런데 이날은 호주에서 5만년 이상 살아온 토착민 애버리지니(Aborigine) 처지에서는 고향 땅을 백인들에게 뺏긴 날이죠. 올해도 '호주의 날'을 기념하는 축제 반대편에서는 '침략의 날'이라고 외치는 호주 토착민 인권 단체 시위가 벌어졌죠.
호주에 백인들이 정착한 건 1770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1728~1779)이 호주를 탐험하면서부터예요. 1788년 1월 26일 총독 아서 필립이 배 11척에 죄수 800여 명을 이끌고 오면서 호주에 본격적 이민이 시작되었어요. 호주를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라 부르며 새로운 식민지로 삼은 거예요. 1788년부터 1867년까지 영국 죄수 약 16만명이 호주로 이송됐어요. 1820년 이후부터는 땅이 드넓은 호주에서 살아보겠다는 일반 이민자도 늘었죠. 대부분 영국계 백인이었어요. 당시 토착민 애버리지니는 30만명 이상이 호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인들이 호주를 정복하면서 옮긴 전염병과 학살로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어요.
◇중국인 오지 마!
19세기 중반 호주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호주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요. 골드러시(gold rush·금광 지역으로 사람이 몰려드는 것)라고 하죠. 1850년에 40만명이던 호주 인구는 1880년에는 223만명으로 늘어나요. 골드러시에 맞춰 1851년부터 20여 년 동안 중국인 노동자 약 5만명이 호주로 이주했어요. 이들은 적은 돈을 받으면서 험한 일을 했어요. 백인 노동자는 임금 하락과 실업률 증가가 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결국 빅토리아주에서는 1855년 '중국인 제한법'을 제정하고 중국인 이주민에게 세금을 물렸습니다. 1901년부터는 호주 전체에서 '이민 제한법'을 만들어 유색인종, 특히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인의 이민을 막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색인종과 혼인을 통제하고 혼혈 인종에 대한 차별도 승인했어요. 백호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지요. 이 법이 제정될 당시 호주 총리는 에드먼드 바튼이었어요. 그는 이 배지를 만든 '호주원주민협회' 회원이었죠.
▲ 1886년 한 호주 언론에 실린‘몽고 문어’라는 풍자화입니다. 변발을 한 중국 이민자가 호주 재정을 파탄 내고 아편을 밀매할 거라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호주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죠. /호주국립박물관
◇1970년대 들어서야 백호주의 폐지
1·2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 이후 인구가 줄어들면서 호주는 위기의식을 느꼈나 봐요. 인종차별적 백호주의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사면서 아시아 국가와 외교 관계를 어렵게 하기도 했고요.
특히 1960년대까지 이뤄졌던 '토착민 문명화 정책'은 호주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린 애버리지니를 백인 가정에서 키워 '문명화'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약 10만명이 부모와 생이별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종차별이 뿌리 깊었던 상황에서 이들이 백인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죠. 공짜로 부릴 수 있는 일손쯤으로 여겨지며 학대당하는 일도 많았다고 해요.
1973년 호주의 노동당 정부는 '미래를 위한 다문화 사회'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인종차별 정책의 철폐를 공식화했어요. 그동안 호주 안에서 차별받아왔던 애버리지니 원주민에게 땅 일부를 돌려주는 '토지권리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어 1978년 백호주의 정책을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그렇지만 호주에서 최하층민인 애버리지니의 빈곤과 차별 문제는 계속되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최근 차기 대선 주자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체로키 부족의 피가 몸에 흐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죠. 애버리지니에게는 참 부러운 모습이에요.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
호주 토착민 애버리지니는 약 5만년 전 호주로 건너가 250개 언어를 쓰는 다양한 부족을 이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계절에 맞춰 호주 본토를 떠돌며 수렵·채집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영국인이 도착하면서 이들은 본토만 762만㎢에 달하는 거대한 땅을 깡그리 빼앗기고 맙니다. 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1770년 호주에 도착한 제임스 쿡은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라는 개념을 적용합니다. '무주지(無主地)'라고도 하는데 국제법상 어느 나라도 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지역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주인 없는 땅'이죠. 쿡은 1770년부터 호주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영토가 됐다고 선포합니다. 국제법도 모르고, 영어도 못 하는 토착민은 하루아침에 영국 식민지에 사는 피지배층이 돼 버렸죠.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2.20 러·일 서로 자기 땅이라는 쿠릴열도, 원주민은 아이누족
[소수민족 '아이누'와 쿠릴열도]
1만년 전 쿠릴열도 정착한 원주민, 러·일 국민과 인종·언어·문화 달라
아이누족 만난 18세기 조선인 이지항 "얼굴 검고 수염 길어… 쌀 모르더라"
최근 미국이 일본에 육상배치형 미사일 요격 시스템 '이지스어쇼어'를 판매하기로 확정했어요. 일본이 수년간 공들여 추진해 온 방위력 증강 계획의 일부랍니다.
그런데 이 계획에 러시아가 발끈하고 있어요. 일본 정부는 "북한 위협에 대비하는 조치"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러시아 코앞에 이지스어쇼어가 설치되는 게 마땅찮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러시아도 지지 않고 일본 북쪽에 있는 러시아 영토 '쿠릴열도'에 레이더 기지를 지었어요. 이번엔 일본이 골을 낼 차례지요. 일본은 안 그래도 쿠릴열도 일부가 자국 영토라며 돌려달라고 러시아를 설득하고 있는데, 러시아가 땅을 내놓긴커녕 그곳에 레이더 기지를 세웠거든요.
◇소수민족 '아이누' 땅이었던 쿠릴열도
지금은 이렇게 일본과 러시아가 쿠릴열도를 놓고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사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일본도 러시아도 아닌 '아이누'라는 소수민족이었어요. '아이누'는 아이누어로 '사람'이라는 뜻이랍니다.
▲ 아이누족은 러시아 사할린, 일본 홋카이도, 쿠릴열도 일대에서 살면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위키피디아
이들에겐 "태양의 아이들(일본인)이 오기 10만년 전부터 우리가 이곳에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와요. 물론 10만년은 '전설'이고, 고고학계에서는 아이누족이 약 1만년 전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요.
아이누족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생활을 했어요. 일본 혼슈의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캄차카반도 등지에 흩어져 살았지요. 이들은 외모가 독특해요. 백인처럼 눈·코·입 윤곽이 뚜렷하고, 동남아 사람들처럼 피부색이 어두운 편이거든요. 남자들은 턱수염을 길게 기르는 전통이 있었고요. 일본인들은 과거에 그런 아이누족을 '에미시(毛人)'라고 낮춰 불렀어요. 일본인에 비해 몸에 털이 많은 아이누족의 특징을 얕잡아보는 말이었지요.
조선 지식인들도 어렴풋이나마 아이누족의 존재를 알았어요. 영조 때인 1756년 선비 이지항이 홋카이도로 표류했다 돌아와 '표주록'이라는 책을 쓰면서, 아이누족에 대해 기록했어요.
"(아이누는)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자) 물고기탕(魚湯)을 작은 그릇에 담아줄 뿐. 배 안에 있던 쌀을 보여줬지만, 이들은 그게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누족이 농사보다는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죠.
◇일본과 러시아에 정복당한 아이누
일본은 군주국이지만 실권은 사무라이들의 우두머리인 '쇼군(將軍)'이 쥐고 있었어요. 쇼군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지요. 아이누 같은 '오랑캐'를 정복하는 게 쇼군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어요.
15세기 이후, 일본 역대 쇼군들이 차근차근 북쪽으로 세력을 넓혔어요. 19세기에는 일본 혼슈 동북부와 홋카이도까지 모두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 아래 들어왔어요. 아이누족도 자연히 '일본인'이 됐죠.
문제는 아이누족이 용모도 언어도 다른 '이민족'이라는 점이었어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일본인은 단일민족'이라고 강조했어요. 아이누족은 그런 주장이 빛바래게 하는 존재였지요.
결국 일제는 1899년 아이누 민족의 고유 풍습을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했어요. 전통적인 수렵 생활을 금지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압박했지요.
전후에 이런 차별 정책을 반성하는 목소리가 일본 사회에 차차 높아졌어요. 아이누족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고요. 아이누족을 억지로 동화시키던 법이 1997년에 정식으로 폐지됩니다.
지난 15일에는 아이누족이 국유림에서 나무를 베고, 강에서 연어 같은 물고기를 잡는 것도 일부 허용한다는 내용의 법안도 나왔습니다.
[19세기 시작된 쿠릴열도 문제]
쿠릴열도는 크고 작은 섬 56개가 늘어선 열도예요. 최북단 아틀라소프섬(일본명 아라이도토·阿頼度島)은 러시아 캄차카반도, 최남단 쿠나시르섬(일본명 구나시리토·国後島)은 일본 홋카이도 코앞에 있지요
18세기까지는 일본도, 러시아도 이곳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19세기 들어 두 나라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며 충돌이 시작됐어요. 남진하는 러시아와 북진하는 일본이 쿠릴열도에서 맞닥뜨린 거죠.
두 나라는 1855년 쿠릴열도에서 가장 큰 섬 이투루프섬(일본명 에토로후토)을 기준으로, 이 섬 남쪽은 일본 땅, 북쪽은 러시아 땅으로 삼기로 했어요. 쿠릴열도 옆에 있는 큼직한 섬 사할린은 양 국민의 공동 거주지가 됐지요.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러시아를 꺾은 뒤, 쿠릴열도는 물론 쿠릴열도 옆에 있는 사할린섬도 절반을 차지했어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이런 판세가 뒤집힙니다. 일본이 미국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소련이 일본을 침공해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한 거예요.
전후에 일본은 소련에 "1855년에 정한 대로 이투루프섬 남쪽에 있는 4개 섬은 돌려달라"고 요구했어요. 소련은 "2개만 돌려주겠다"고 했지요. 긴 협상 끝에 두 나라가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1960년 일본이 미국과 미·일 안보조약을 맺자 소련이 격분해 약속을 취소했어요.
이후 수십 년 동안 일본은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러시아에 약속하며 4개 섬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러시아가 순순히 응할 가능성은 작다고 합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2.27 40년 전 테헤란, 지금과 '딴판'… 차도르 대신 미니스커트
[이란 혁명]
팔라비 왕조, 이슬람 율법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옷 입을 수 있게 했어요
부정부패·빈부격차 커지자 비판 받아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왕조 물러나면서 지금처럼 차도르 의무화, 술·담배 금지
지난달 이란 경찰청장이 '앞으로 공공장소에서 개를 산책시키면 처벌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이슬람 율법에 개는 부정한 동물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란에서는 술 마시는 것도 불법, 미니스커트 입는 것도 불법입니다. 이렇듯 이란은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나라라는 인상이 강하죠. 그런데 40년 전 풍경은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미니스커트 입던 중동의 '파리'
40년 전 2월,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정을 몰아냈어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Paris)'라고 했어요. 이란 여성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학교에서 공부했어요. 요즘 이란 여성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검은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여성이 연상되는 오늘날 풍경과는 딴판이었죠. 프랑스 못지않은 포도주 생산국으로 '시라즈' 와인 원산지였어요.
▲ 1971년 이란 테헤란대 여학생들이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캠퍼스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1979년 이란혁명 이후로 불가능해진 풍경이죠. /위키피디아
1925년부터 이란을 다스린 팔라비 왕조가 서구화를 추진하면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이슬람 율법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옷을 입게 하고, 일부일처제를 도입하는 등 변화를 주도했어요.
초대 국왕 레자 칸의 뒤를 이은 아들 레자 팔라비(1941~1979)가 1963년 '백색 혁명'을 단행하면서 더 구체화합니다. 토지 개혁, 국영기업 민영화, 문맹 퇴치 운동,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이 주요 내용이었죠
◇"친서방 독재 왕조 물러나라"
그러나 백색 혁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어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도시 빈민은 갈수록 늘어났어요. 토지개혁 과정에서 나라에 땅을 빼앗긴 지주와 성직자는 왕조의 개혁에 반대했어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독재 왕정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란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1902~ 1989)는 1963년 팔라비 왕조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섰어요. 그는 이듬해 프랑스로 강제 추방당했어요.
그래도 반발이 이어지자 팔라비 국왕은 비밀 경찰과 군대를 동원했어요. 그렇지만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종교인, 지식인, 청년이 늘어났죠. 이슬람 성직자는 팔라비 왕조가 이슬람 율법을 저버리고 '친서방' 정책을 편다고 공격했어요. 이란 젊은이들은 무능한 부패 정권이라고 비판했죠.
1978년 9월 테헤란 잘레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요. 이란에서는 이날을 '검은 금요일의 학살'이라 불러요. 팔라비 왕조는 피를 흘리지 않는 '백색' 혁명이라고 했는데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왕정은 물러났는데…
시위가 점점 커지자 레자 팔라비 국왕은 1979년 1월 망명합니다. 호메이니가 귀국해 2월 11일 이란 혁명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죠. 선거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이슬람 성직자가 우리나라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국회 역할을 모두 담당하는 '헌법수호위원회'를 통제하면서 이슬람 신정(神政)국가 성격도 생깁니다. 지금 일상생활에서도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이란은 이렇게 탄생했죠.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여성들은 다시 모두 차도르를 입어야 했어요. 마약, 술, 담배는 물론 서양의 음악과 영화도 금지됐죠. 호메이니는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비공개 재판을 통해 팔라비 왕조 관료를 사형하는 등 반대파를 몰아붙입니다. 왕정을 몰아내겠다는 취지로 혁명에 동참했던 이란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는 목숨을 건지고자 이란을 떠나야 했어요.
이코노미스트는 "이란 혁명 40년이 지난 지금, 매년 고등교육을 받은 이란인 15만명이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다"고 했어요.
[호메이니와 인터뷰 중 차도르를 벗어버린 기자]
▲호메이니 앞에서 차도르를 벗어던진 여성이 있어요. 이탈리아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사진)입니다.
그는 1979년 호메이니를 인터뷰하며 "왜 불편한 차도르를 여성에게 강요하느냐"고 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외부인이 이슬람 문화에 왈가왈부하지 마라. 싫으면 벗어도 좋다"고 했어요. 팔라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도르를 벗었습니다. 화가 난 호메이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다음 날 이어진 인터뷰에서 팔라치는 다시 차도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호메이니는 기가 차서 웃어버렸다고 합니다.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3.06 英 여성운동가들은 격투기까지 배우며 투쟁했어요
[여성 참정권 얻기까지…]
1910년, 여성도 투표권 달라며 시위
경찰로부터 자신의 몸 지키기 위해 日 주짓수 배워 '서프러짓수'로 불려
20세기 초 영국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일본 격투기 배우기 붐이 불었다는 사실, 알고 계세요? 영국 여성 참정권자들은 호신술로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서프러짓수(Suffragitsu)'라는 단어까지 나왔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뜻하는 단어 '서프러제트(Suffragette)'에 격투기 '유술'(주짓수·Jiu-jitsu)을 합성한 말이에요. 영국 여성운동가들이 호신술을 익혀야 했던 이유가 뭘까요?
◇참정권 얻으려면 내 몸부터 지켜야
이제 여성 참정권은 당연한 권리가 됐지요. 그렇지만 100년 전만 해도 세계 대다수 여성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영국은 일찍이 여러 여왕이 있었어요.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을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성군이었죠. 하지만 그건 군주들의 이야기일 뿐, 19세기까지도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1900년대 초반 영국 여성들은 단식 투쟁, 집회, 때로는 불까지 지르면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달라(Votes for Women)"이라고 외쳤습니다.
▲ 20세기 초 영국 여성운동가 사이에 격투기 주짓수 붐이 불었어요.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뜻하는 단어 '서프러제트'에 격투기 '주짓수'를 합성한 서프러짓수라는 말까지 나왔죠. 사진은 당시를 만화화한 책 표지입니다. /JET CITY COMICS
여성도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주장이 그때 그 시절엔 '불온 선동'에 해당됐어요. 경찰은 시위 주동자를 수시로 연행해갔어요. 여성운동가들이 평화적으로 구호만 외쳐도 군중 속에 있던 남성들이 여성 시위대를 위협하거나 때렸죠. 1910년 '검은 금요일'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 300여 명이 영국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100명 이상이 구속되고 그 과정에서 2명이 숨졌어요.
당시 서프러제트를 이끌던 에멀라인 팽크허스트(Pankhurst)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지킬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눈길을 끌었던 게 일본 무술 주짓수였습니다.
여성운동가들 사이에는 마침 이디스 개러드(Garrud)라는 주짓수 고수가 있었어요. 당시 영국 경찰은 키 178㎝ 이상만 뽑았어요. 개러드는 키가 150㎝밖에 안 되지만,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큰 경찰들을 주짓수로 제압해 이름을 날렸어요. 상대방 힘을 역이용해 제압하는 게 주짓수의 특징이지요. 남성보다 힘이 약한 여성에게 잘 맞았어요. 개러드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동참하면서 아예 런던에 여성 전용 체육관을 차려 호신술로 주짓수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호신술을 익힌 여성 30명은 자기네 지도자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지키는 호위부대 역할을 합니다. 당시 영국 언론은 이들을 팽크허스트의 '아마존'이라고 불렀어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전사 아마존에 비유한 거지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오세요"
아마존 소리까지 들었으니 엄청나게 우락부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잘 꾸미고 다녔다고 합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딸 실비아는 "엄마와 언니 같은 서프러제트는 무리해서라도 좋은 옷을 사 입었다"고 회상했어요.
이건 여성 참정권자에 대한 편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여러 매체가 툭하면 서프러제트를 깎아내리는 시사만평을 싣던 시대였어요. 만평에 나온 서프러제트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뾰족구두 대신 덧신을 신은 매력 없는 여성들이기 일쑤였어요.
그래서 이들은 보라색, 흰색, 녹색과 같이 눈에 띄는 색깔 드레스를 입고, 배지와 모자 등도 최대한 멋을 내서 입었다고 해요. 특히 언론이 주목하는 집회·시위 현장에서는 예쁘게 보이기 위해 더 신경을 썼어요.
이런 노력은 성과를 거둔 것 같아요.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100년 전 여성운동을 되돌아보는 분석 기사에서 "여성 참정권자들이 옷을 잘 입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서프러제트 수가 늘었다"고 썼어요.
영국은 1918년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1928년부터는 21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줍니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 등 다른 서방 국가에서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기간에 전쟁터로 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후방에서 군수 물품 생산, 보급, 행정 업무 등을 담당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 측면이 있다고 해요.
오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실은 누군가가 얼마나 힘들게 싸워서 얻은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밀, '자유론'아내와 함께 썼죠]
자유론'을 쓴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1867년 영국 하원에서 여성도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죠. 이보다 앞선 1850년 밀은 '여성해방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합니다. 어떻게 밀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참정권자가 됐을까요?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해리엇은 밀의 지적·사상적 동반자로 여성 참정권자이기도 했어요. 앞서 말한 '여성해방에 대하여'는 밀 부부의 공동 작품이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상 남편 존 스튜어트 밀이 혼자 썼다고 알려야 했습니다. 이 글에서 밀 부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금지된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제시돼야 한다."
밀은 해리엇이 '자유론' 같은 대표 저작에도 상당 부분 이바지했다고 회고했어요.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3.13 막 내리는 日 헤이세이 시대… 바뀔 연호는 아직 '극비'죠
일본 연호
12일 '일왕 퇴위식'이 시작됩니다. 무려 한 달 넘게 계속되는 행사랍니다. 다음 달 30일 마지막 퇴위 행사를 끝으로 아키히토(明仁·86) 일왕이 물러나면 5월 1일에 나루히토(德仁·59) 일왕이 즉위할 예정이죠. 그런데 일왕만 바뀌는 게 아니에요. 일왕과 함께 일왕이 다스리는 시대를 가리키는 이름, 즉 '연호(年號)'도 바뀐답니다. 연호란 무엇일까요?
◇일본만 아직 연호를 써요
연호는 햇수를 표시하는 다양한 기년법(紀年法) 중 하나예요. 기년법이란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이후 몇 년이 흘렀는지 햇수를 헤아리는 방법이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건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준 삼은 서력(西曆)이에요. 2019년은 예수가 태어난 지 2019년째 되는 해입니다.
한·중·일, 베트남 같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이와 달리 왕이 정한 연호를 주로 썼어요. 기원전 140년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쓴 게 최초입니다. 20세기 들어 한국, 중국, 베트남은 더 이상 연호를 쓰지 않지만, 일본은 지금도 대출 신청서부터 부동산 계약서까지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연호를 써요. '반드시 서력을 쓰라'고 법으로 정해놓은 건 전 세계 공통의 공업 규격 정도랍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일본도 한 사람의 일왕이 여러 개의 연호를 썼어요. 15세기 고바나소(後花園) 일왕 같은 사람은 36년간 왕위에 머무르며 여덟 번 연호를 바꿨지요. 하지만 근대 이후엔 일왕 한 사람이 한 개의 연호를 쓰는 것으로 굳어졌어요. 일왕이 살아 있을 땐 이름 대신 그냥 '긴죠(今上·지금 일왕)'라고 부르다가 일왕이 숨지면 재위 기간 연호를 따서 '메이지(明治) 일왕' 식으로 부른답니다. 흔히 히로히토(裕仁)라고 알려진 사람이 지금 아키히토 일왕의 아버지인데, 일본에선 쇼와(昭和) 일왕이라고 해요. 히로히토는 개인의 이름이고, 쇼와는 그가 재위한 기간(1926~1989)의 연호였어요. '평화롭게 세계 각국과 공존 공영한다'는 뜻인데, 실제론 군국주의로 치달아 수많은 나라에 엄청난 고통을 안겼죠.
◇지금 일왕은 헤이세이, 다음 일왕은?
지금 일왕은 1989년 1월 53세로 즉위했어요. 어린 시절 전쟁을 겪어 반전 의식이 강하고, 주변국에도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졌어요. 공식 석상에서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밝혀 일본 국수주의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죠.
▲ 1989년 1월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내각 관방장관이 아키히토 일왕 즉위에 맞춰 연호 ‘헤이세이(平成)’를 발표하고 있어요. 아키히토 일왕이 곧 퇴위하기로 하면서 일본 정부는 새로 쓸 연호를 다음 달 1일 발표하기로 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그가 즉위한 날, 일본 정부는 '헤이세이(平成)'라는 새 연호를 발표했어요. 헤이세이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지평천성(地平天成)'에서 따온 말로 국내외가 모두 평화를 이룬다는 뜻이에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일본 내각 관방장관이 '헤이세이'라고 적힌 흰 종이를 들어 보이는 사진이 유명하죠. 이후 오부치 장관은 한동안 일본 초등학생들 사이에 '헤이세이 오지상(헤이세이 아저씨)'이라 불렸답니다. 올해는 헤이세이 31년이에요.
다음 일왕은 어떤 연호를 쓸까요? 아직은 극비랍니다. 일본 정부는 학자들과 국회의장단의 의견을 참고해 지난달 8일 다음 연호를 정했어요. 4월 1일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때부터 새 일왕이 즉위할 때까지 한 달 여유가 있으니, 그 사이 일본은 달력부터 공문서까지 햇수가 들어가는 인쇄물은 전부 새로 찍느라 바쁠 거예요.
아키히토 일왕이 고령을 이유로 '생전 퇴위'를 선택해 새 연호를 준비할 여유가 생긴 거지요. 우리나라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기관이 '내각 관방'인데요, 일본은 비상사태에 대비해 평소에도 늘 그곳 금고에 연호 후보 3개를 보관한다고 해요.
☞고구려에선 영락(永樂), 대한제국에선 광무(光武)
과거 한자문화권에선 연호를 광범위하게 사용했어요. 중국에서 처음 시작돼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로 널리 퍼졌죠. 중국 연호를 가져다 쓴 나라도 있고, 독자적인 연호를 쓴 나라도 있어요.
한국의 경우 광개토대왕 때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우리는 고려 전반기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쓰다가 차차 중국 연호를 쓰게 됐어요. 그러다 대한제국 때 다시 독자적인 연호를 썼어요. 1897년부터 1907년까지 고종이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썼고, 이후 1910년까지 순종이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썼답니다.
윤서원·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3.20 빚내서 깔았던 철도… 청나라 몰락하는 계기 됐어요
[청나라와 철도]
1895년 청일 전쟁 패배한 직후 철도 중요성 깨달은 청나라 조정
철도 국유화 위해 자국민들로부터 헐값에 철도 부설권 빼앗았죠
지난달 '철도'가 세계적 화제가 됐어요.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북 회담이 열렸을 때, 김정은이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4500㎞를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66시간 걸려 이동했거든요. 중국을 가로지르는 경로였지요. 중국 대륙엔 언제 처음 철도가 놓였을까요?
◇19세기 중국을 강타한 '기차'
중국에 처음 상업 철도가 생긴 건 청나라 말기였던 1876년입니다. 영국 상인들이 상하이에 '오송 철도'를 놓았죠. 그렇지만 청나라 조정은 당국 허가를 받지 않았다며 오송 철도를 사들여 철거해버렸어요. 청나라 눈에 영국인들이 들여온 증기기관차는 괴물 같은 소리를 뿜는 서양의 괴이한 물건일 뿐이었어요.
청나라가 철도의 중요성을 깨달은 건 1895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였어요. 철도가 나오기 전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모든 병력이 발로 이동해야 했어요. 기병은 말을 타고, 보병은 자기 발로 가는 것만 달랐죠. 하지만 증기기관차가 나온 뒤, 대규모 병력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됐어요. 유럽 각국이 경쟁적으로 철도를 놓은 것도 이 때문이었지요.
▲ 중국 첫 상업 철도인 상하이 오송철도가 1876년 개통될 당시 모습을 그린 삽화입니다. 청나라는 영국 상인들이 당국 허가 없이 철도를 놓았다면서 이듬해 철거합니다. 그렇지만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약 20년 뒤에 오송철도를 다시 놓게 되죠. /게티이미지코리아
청나라도 뒤늦게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중요한 지점에 철도를 건설하도록 허용했어요. 당시 청나라 최고 권력자 이홍장(李鴻章)이 "철도를 깔면 동서남북으로 교통이 편리해져서 적이 침입해 오더라도 잘 대응할 수 있다"고 했어요.
◇"철도 남에게 맡길 수 없어"
그렇지만 실제 철도를 까는 공사는 지지부진했어요. 지역 갑부들과 서구 열강이 중국 곳곳에 철도를 깔겠다고 나섰지만, 기술력도 부족하고 부정부패도 심해 좀처럼 진전이 없었어요. 뜻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직접 철도를 건설하자는 운동도 있었지만, 자금력이 부족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1911년 성선회라는 기업인이 청나라 우전부 대신으로 임명됩니다. 우전부는 우편과 통신을 맡은 관청이에요.
그는 "철도를 국유화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민영 철도를 전부 국유화한 뒤, 서구 열강에서 돈을 빌려 중국 전역을 잇는 철도망을 완성하겠다는 발상이었죠.
이후 청나라 조정은 자국 철도업자들 손에서 헐값에 철도 부설권을 빼앗았어요. 청나라는 "남은 돈은, 철도망을 완성하고 나서 영업이익이 났을 때 10~15년에 걸쳐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어요.
일반 백성도 분노했어요. 청나라는 중국 땅 북쪽에 살던 만주족이 중국에서 원래 살던 한족을 제압하고 세운 나라였어요. 청나라 조정은 전부터 광산 채굴권, 염전 개발권 같은 이권을 서구 열강에 무수히 내줬어요. 철도 국유화를 결정한 이홍장 내각에서 전체 13명 중 9명이 만주족이었고요. 한족 백성은 '만주족이 서구 열강에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배신감을 느꼈어요.
◇신해혁명 도화선 된 철도 국유화
결국 반발이 커지면서 1911년 5월, 쓰촨성에서 '보로운동회(保路運動會)'라는 조직이 태어납니다. 이들이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죠. 다른 지역 백성도 합세해 규모가 점점 커졌어요.
결국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성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무너집니다. 이게 신해혁명이에요. 이듬해 난징에서 민족주의자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됐지요.
청나라를 지키겠다며 시작한 철도 국유화 사업이 되레 청나라 멸망의 도화선이 된 거죠. 신해혁명 현장인 우창은 지금 우한시가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김정은이 탄 열차가 지나간 도시가 우한이에요.
[서양 문물에 반대해 철도 파괴한 의화단]
철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중국인들이 기겁했어요. 철도를 포함한 서양 근대문명을 빨리 받아들이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은 상당수가 "서양 문물이 들어와선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특히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단체는 철도가 외국인의 문물을 빠르게 퍼뜨리고 있다며 철도 파괴에 앞장섰어요. 이 단체는 의화권이라는 무술을 수련하는 단체였는데, 수련을 통해 칼과 총도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이들이 서양인 목숨까지 빼앗자, 열강은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의화단을 진압했어요. 청나라 조정은 막대한 배상금을 내야했어요.
안영우 세그루패션디자인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3.27 미·소 핵전쟁 위기… 전세계가 공포에 숨죽인 13일
[쿠바 미사일 위기]
지난 달, 미국이 INF 탈퇴 선언 하자
러시아 "쿠바 위기 재현될 수 있어"
미국이 오는 8월 중거리 핵전력 협정(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에서 탈퇴하겠다고 지난달 선언했어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며 반발했어요.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미국과 소련이 13일간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대치했던 사태입니다. 소련이 중남미 쿠바에 미국 대부분 지역을 공격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을 설치한 게 발단이에요. 미국이 "미사일을 빼라"고 요구한 그해 10월 16일부터 소련이 한발 물러선 그달 28일까지 전 세계가 공포에 숨을 죽였죠.
◇미국 코앞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
쿠바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불과 150㎞ 떨어진 섬나라예요. 1959년 쿠바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고 미국과 국교를 끊었지요.
▲ 사거리 3700㎞로 쿠바에서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소련 중거리 미사일 'R-14'를 운반하는 모습입니다. 소련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에 R-14 발사대를 설치하면서 미국을 공포에 빠지게 했죠. /위키피디아
당시 세계는 미국이 이끄는 자유 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공산 진영으로 갈려 살벌하게 대립하고 있었어요. 미국은 자국 코앞에 있는 쿠바가 공산화되는 걸 막으려고 1961년 미국에 망명한 쿠바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해 쿠바 침공 작전을 벌였어요. 하지만 작전이 실패해 망신만 당했죠.
이 일로 쿠바와 소련은 한껏 긴장합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 남쪽에 있는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해 소련 전역을 타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어요.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미국을 겨누면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어요.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에 설치하는 무기는 방어용"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공격용 미사일과 핵탄두를 옮기면서요.
◇수도 워싱턴이 위험하다
1962년 10월 14일 쿠바 상공을 비행하던 미국 정찰기가 중거리 미사일 설치 장면을 촬영합니다. 미국은 발칵 뒤집혔어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면 8분 만에 워싱턴이 쑥밭이 될 판이었어요.
당장 전투기를 띄워 소련 미사일을 제거하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쿠바를 공격했다간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어요. 미국과 소련뿐 아니라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전체가 서로 핵무기를 날리는 상황이죠.
16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미사일 기지 철수'를 요구했어요. 그러면서 항공모함 8척을 포함해 해군 함정 90척을 동원해 쿠바 해상을 봉쇄하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선박을 수색했지요. 러시아 선박이 추가로 미사일 부품이나 핵탄두를 반입하지 못하게 막은 거예요.
◇"둘 다 미사일을 치우자"
다행히 미국과 소련 모두 핵전쟁이 벌어지면 공멸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먼저 타협안을 내놓은 것은 소련이었어요.
흐루쇼프는 10월 28일 라디오 방송으로 "미국이 터키에서 중거리 미사일을 철수시키면 소련도 쿠바에서 미사일을 빼겠다"고 했어요. 케네디가 이를 받아들여 쿠바 미사일 사태가 일단락됐죠.
소련은 왜 양보한 걸까요? 당시 미국은 터키에 핵 미사일 배치를 완료해 언제든 소련 전역을 공격할 수 있었어요. 반면 소련은 미국 동부 지역만 타격할 수 있는 상태였지요. 소련 지도부는 이 상황에서 미국과 충돌하는 건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 무시무시한 군비 경쟁을 벌였어요. 그러다가 냉전 말기인 1987년 미·소가 중거리 핵전력 협정을 맺고 사거리 500~5500㎞의 중거리 핵무기를 폐기합니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하겠다는 게 바로 이 협정이에요. 그는 "중국과 러시아가 협정에 어긋나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어 미국만 협정을 지킬 수 없다"고 했어요. 전 세계가 다시 긴장하는 중입니다.
[쿠바 위기 때, 최초 핫라인 설치… 처음엔 전화가 아닌 팩스였죠]
'핫라인(hotline)'은 양국 정상 사이에 개설된 직통 전화를 뜻해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쇼프 서기장이 서로 직접 연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첫 핫라인을 만들었지요. 당시 미·소 양국이 외교라인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려면 자기 의사를 상대에게 전하는 데 6시간이 걸렸어요.
오히려 라디오 방송으로 자기 뜻을 밝히는 게 더 빨랐어요. 흐루쇼프는 28일 라디오에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할 뜻을 밝히면서 쿠바 미사일 사태가 끝났습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이듬해인 1963년 핫라인을 개설합니다. 다만 전화는 아니고, 초기 형태의 팩시밀리(텔레타이프)였다고 해요.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4.03 인도인 용병에 지급한 영국 화약에서 시작된 독립전
[인도 세포이 항쟁]
세포이, 英이 고용한 인도 용병 뜻해… 20만명 중 대부분 힌두교·이슬람교
종교서 금기시한 소·돼지 기름 먹인 화약 포장지 받자 들고일어났어요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총선 중 최대 규모인 인도 총선이 오는 11일 시작합니다. 유권자가 무려 9억명이에요.
그런데 인도 투표 방법은 기호와 이름을 보고 도장을 찍는 우리와 조금 다릅니다. '연꽃' '손바닥' '망치와 낫' 같은 정당 상징을 보고 투표하지요. 국민 네 명 중 한 명이 글을 읽지 못해서랍니다.
나렌드라 모디(69) 인도 총리가 속한 현 집권당 인도국민당(BJP)의 상징은 연꽃이에요. 연꽃은 인도 국화(國花)이기도 하고,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꽃입니다. 모디 총리는 "1857년 세포이 항쟁에서 빵과 연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연설했어요. 어떤 전쟁이었는지 알아볼까요?
◇인도가 선택한 저항의 상징… 빵과 연꽃
18세기 들어 무굴제국이 쇠퇴합니다. 영국은 이 틈을 타 무굴제국을 힘으로 제압하고 인도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어요. 총독을 직접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 통치하는 방식이었죠. 동인도회사는 광활한 인도를 다스리기 위해 인도 현지인을 용병으로 고용했어요. 이들을 '세포이'라 불렀지요. 무굴 제국의 뿌리가 페르시아라 군인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세포이'가 용병이란 뜻으로 굳어졌다고 해요. 세포이는 19세기 중반 들어 20만명 가까이 늘어납니다.
▲ 1857년 세포이와 영국군이 델리 지배권을 두고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 인도 출신 용병 세포이는 영국 지배에 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당시 인도는 저항의 상징으로 빵과 연꽃을 씁니다. /위키피디아
영국은 값싼 인도의 노동력을 활용해 대규모로 차·면화 등을 재배해 세계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인도 사람들의 불만이 점차 쌓입니다. 세포이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영국인 병사보다 처우도 나쁘고 진급도 느렸거든요.
1857년 인도에서는 마을에서 마을로 빵과 연꽃을 전하는 운동이 일어나 순식간에 인도 북부와 중부로 퍼져 나갔어요. 이웃 마을에서 빵을 받아먹고, 다시 빵을 구워 다른 마을로 날랐죠. 빵과 붉은 연꽃을 나누는 데는 영국에 맞서 함께 싸우자는 다짐이 담겨 있었어요. 세포이 부대도 동참했지요.
영국인들은 행동의 의미를 몰랐지만 그래도 긴장했어요. 당시 영국군 장교였던 리처드 바터는 이렇게 적습니다. "빵과 연꽃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 거리에서 호신용 부적이 불티나게 팔린다. 인도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붉어졌다'는 불길한 말을 속삭이고 있다."
◇머스킷총이 일으킨 독립전쟁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그해 5월 인도 북부에서 세포이들이 들고일어납니다. 영국이 지급한 신형 머스킷총이 반란의 도화선이 됐어요.
▲ 인도국민당 상징 연꽃
이 총은 한 발 쏠 때마다 기름 먹인 종이에 낱개 포장한 화약을 이(齒)로 뜯어 총구멍에 장전해야 했어요. 문제는 영국이 화약을 포장한 기름 종이를 쇠기름과 돼지기름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세포이는 대부분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이거나 돼지를 금기시하는 이슬람교도였어요.
세포이 병사들이 사격 훈련을 거부하자 영국은 군법회의를 열어 주동자를 처형하고, 나머지 병사도 불명예 제대시켰어요. 분노한 세포이 2000여명이 봉기했지요. 이후 전체 세포이 절반인 10만여명이 무기를 들었고 농부와 자영업자, 소규모 상공업자들이 동참했어요. 인도 대륙이 2년간 전쟁에 휩쓸렸죠.
세포이는 무굴제국 황제가 있던 델리를 손에 넣고 무굴제국 부활을 주장합니다. 때마침 영국은 터키와 크림전쟁을 벌인 직후라, 주력 부대를 곧바로 인도에 보내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무굴제국에 탄압받던 시크교도가 영국 편에 서면서 전세가 뒤집힙니다. 3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영국은 델리를 탈환하고 세포이 항쟁을 진압했어요.
이 일로 기겁한 영국 정부는 이후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 통치를 접고, 직접 통치를 시작합니다. 1877년 인도 제국을 만들고, 영국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했어요. 이후 인도는 1947년 독립할 때까지 70년간 더 식민 통치를 견뎌야 했지요.
[무굴제국에 탄압받았던 시크교… 세포이 항쟁 때 영국 편에 섰죠]
영국인들은 1857년 세포이들의 봉기로 촉발된 전쟁을 '세포이 반란'이라 불렀어요. 하지만 인도인들은 '제1차 독립전쟁'이라 부릅니다.
이때 인도인들은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영국에 맞섰어요. 하지만 유독 시크교도들은 영국 편에 섰지요.
시크교는 15세기 인도 북부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결합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이슬람교였던 무굴제국 치하에서 최고 종교 지도자가 처형되고 이슬람교도보다 세금을 더 내는 등 탄압을 받았어요. 또 힌두교와도 교리 차이로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이들은 힌두교와 달리 카스트제도를 부정했거든요.
교리에 따라 머리카락과 수염 등 몸에 난 털을 자르지 않아 알아보기 쉽습니다. 2004~2014년까지 인도 총리를 지낸 만모한 싱이 시크교 출신입니다.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4.10 900년은 성당, 400년은 모스크로… 비잔티움 건축의 걸작
[성 소피아 성당]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국력 과시하려 금 90여t 비용 들여 돔 모양 성당 지어
오스만 제국 술탄은 성당에 매료돼 "도시 약탈해도 성당은 훼손 말라"
"이스탄불 성(聖)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꿀 수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5) 터키 대통령이 지난달 지방선거를 앞두고 TV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터키 기초단체장 1300여명을 선출하는 선거였는데, 이를 앞두고 이슬람주의를 내세워 표를 얻으려 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실제로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정의개발당(AKP)은 결국 이 선거에서 승리했어요.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성 소피아 성당은 어떤 곳일까요?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이스탄불은 지중해에서 동·서양을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남쪽에 있어요. 지중해를 제패했던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이 이곳을 수도로 삼았답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에요. 터키어로 아야소피아, 그리스어로 하기아소피아로 불려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서기 330년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옮긴 뒤, 360년 이 자리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 전경. 6세기 세워진 비잔티움 제국 최고의 건축물로 꼽힙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 당시 성 소피아 성당의 별명은 '위대한 성당'이었어요. 그렇지만 404년 폭동으로 무너졌지요. 두 번째 성당은 415년에 완공됐지만 역시 532년 화재로 타버립니다. 지금 이스탄불에 서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에 5년 걸려 지은 세 번째 건물이에요.
유스티니아누스는 황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보다 더 웅장하게 성당을 지었어요. 금 90t에 달하는 비용을 들였다고 해요. 그는 자신이 지은 성당이 성서 속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한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라고 외치기도 했어요. 이 성당에는 지름이 32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이 기둥 하나 없이 56m 높이에 떠 있답니다. 성당 벽면은 기독교 성화(聖畵)들이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고요. 비잔티움 미술의 걸작입니다.
◇성당→모스크→박물관→다시 모스크?
이후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황제들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즉위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면서 수난을 겪어요. 당시 기독교는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단과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정교회로 갈려 있었어요. 서유럽에서 밀려온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뿐 아니라 동방정교회의 본산인 비잔티움 제국도 적대시했어요. 도시와 성 소피아 성당이 십자군의 약탈로 황폐해졌죠. 이후 60여 년 동안 성 소피아 성당은 동방정교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됐어요.
십자군이 물러간 뒤 성 소피아 성당은 다시 동방정교회 성당이 됩니다. 그렇지만 1453년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이스탄불로 도시 이름을 바꿉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성 소피아 성당의 아름다움에 매혹됐어요. 병사들에게 사흘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해도 좋지만 성당은 절대 훼손하지 말라고 명령했지요.
이후 성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가 됐어요. 오스만 제국은 성당 밖에 4개의 미너렛(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세우고, 내부의 성화 모자이크를 회칠로 가렸지요.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세운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는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합니다. 모스크로 쓰이던 성 소피아 성당을 1935년 박물관으로 바꿨어요. 무슬림만이 출입할 수 있다는 제한을 없애고 종교 행위도 금지했어요.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게 됐지요.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동 문화유산으로 존중받아왔어요. 성 소피아 성당 안에는 복구 중인 성화 모자이크와 코란의 내용을 새긴 서예 원판이 공존하고 있어요. 종교 간의 분쟁과 화합을 모두 보여주는 성 소피아 성당의 운명이 다시 바뀌게 될까요?
[파란 타일로 장식된 블루 모스크]
▲ /게티이미지코리아
성 소피아 성당과 함께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블루 모스크'예요. 술탄 아흐메드 1세는 국력을 드러내겠다면서 1616년 성 소피아 성당과 5분 거리로 마주 보는 곳에 이 거대한 모스크를 세웠답니다. 정식 이름은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지만, 푸른색 타일 2만여 개로 사원 내부를 장식해 '블루 모스크'라 불립니다. 성 소피아 성당과 비슷하게 중앙에는 지름 27.5m의 돔이 있고 주변에 작은 돔들이 겹쳐 있지요.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 양식과 아라베스크 무늬로 유명합니다. 성 소피아 성당과 함께 이스탄불 관광객이 찾는 필수 코스랍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4.17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은퇴 후 사막으로 향한 까닭은?
다비드 벤구리온
9일 실시된 이스라엘 총선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우파 연합이 승리했어요. 네타냐후 총리는 1996년 6월부터 1999년 7월까지 3년 1개월간, 그리고 2009년 3월 31일부터 만 10년간 이스라엘 총리를 맡고 있어요. 올해 7월이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랜 기간 총리직을 수행한 정치인이 됩니다.
지금까지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갖고 있던 사람은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Ben-Gurion·1886 ~1973)이었어요. 그는 13년 5개월 동안 총리로 있었죠. 이스라엘 텔아비브 국제공항은 '벤구리온 공항'이라 불려요. 이스라엘이 시리아 접경에 있는 골란고원을 점령할 때 동원한 탱크도 '벤구리온 탱크'랍니다. 어떤 업적을 세운 인물일까요?
◇"우리 힘으로 유대인이 살 조국 만들어야"
벤구리온은 1886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열네 살 때부터 '시오니즘' 운동에 동참합니다. 유대인들이 조상이 살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운동이에요.
그는 바르샤바 대학에 다니던 1906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합니다. 동료와 함께 물길을 잇고 땅을 개간했지요. 유대인 손으로 유대인이 살아갈 땅을 개척하는 게 그의 꿈이었어요.
▲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1956년 연설하고 있는 모습. 평생을 이스라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그를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는 영국이 1차 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나라를 세워준다는 말을 하자 영국군에 입대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어요. 하지만 영국은 1차 대전이 끝나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좀처럼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건국은 1948년에야 이뤄집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유엔에서 미국과 소련 지지를 얻어낸 덕분이죠. 벤구리온이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고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20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은 결코 빈 땅이 아니었어요. 아랍인들이 뿌리내리고 살았죠.아랍 국가들은 이집트와 요르단을 중심으로 뭉쳐 '팔레스타인은 우리 땅'이라면서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침공합니다. 이것이 '1차 중동 전쟁'이죠. 이스라엘이 건국 선언을 한 이튿날부터 9개월간 이어졌어요.
벤구리온은 무기도 변변찮고 지휘 계통도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대인 민병대를 이스라엘 방위군(IDF)으로 재편합니다. 이들은 똘똘 뭉쳐 아랍 국가를 잇달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지켜냅니다. 영국 BBC는 "벤구리온이 보여준 헌신과 집요함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이렇게 빨리 건국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어요.
◇총리직 던지고 사막으로
건국 후 6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54년 1월, 벤구리온은 돌연 총리직을 내놓습니다. "어떤 국가도 단 한 사람에게만 기대서는 안 된다." 그가 자리를 던진 이유였어요.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으로 향합니다. 네게브 사막은 이스라엘 국토의 50~60%를 차지해요. 그는 사막을 녹화하고 사막에서 농업을 할 방법을 찾았지요.
벤구리온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정계로 복귀했어요. 그리고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를 지냈죠. 1970년 그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을 때 다시 돌아간 곳 역시 네게브 사막이었어요. 1973년 벤구리온이 숨지자, 이스라엘은 국립묘지가 아니라 네게브 사막에 있는 아인 아브닷 협곡에 그를 안장했어요.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막은 우리에게 언제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지. 여기가 이스라엘 르네상스의 터전이라네."
이스라엘 정부는 1969년 이 사막에 네게브 대학을 세웠어요. 벤구리온이 서거한 뒤 그의 이름을 따 '벤구리온대학'으로 이름을 바꿨죠. 이곳에선 지금도 태양광 발전, 환경 및 생태 연구, 수자원 개발 연구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시오니즘이란?
시오니즘(Zionism)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말해요. 시온(Zion)은 예루살렘 또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인의 땅을 뜻합니다.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1860~1904)이 핵심 시오니즘 사상가입니다. 그는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를 겪으면서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어요.
시오니즘에 따라 유대인은 오스만 제국 영토인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오면서 세를 불려나갔어요. 이는 결국 독립으로 연결됩니다.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4.24 가시면류관·십자가 조각, 성당 3개 지을 돈 들여 사왔죠
[火魔 피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유물]
1238년 루이 9세가 파리로 사온 성물… 예루살렘·콘스탄티노플 거쳐 왔어요
18세기 프랑스혁명 때도 살아남았죠
지난 15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어요.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 즉 성모 마리아를 뜻해요. 공식 명칭은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인데 보통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부르죠. 이 성당은 12세기부터 짓기 시작해서 14세기에 완공됐어요. 뾰족한 첨탑,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대표되는 고딕 양식을 갖추고 있죠.
▲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보관해온 가시면류관입니다. 가시면류관을 크리스털 통에 넣고 황금으로 장식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머리에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13세기 예루살렘 왕국에서 성 십자가 등과 함께 사들였어요. /AP 연합뉴스
이번 화재로 성당의 본관 지붕과 첨탑이 무너졌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예수가 못 박혔던 성 십자가 조각,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머리에 썼던 가시면류관 등 성물(聖物)들은 성직자, 소방관, 경찰의 노력으로 구해냈어요. 이 유물들은 일단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진다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에 있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 조각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관돼 있었던 걸까요?
◇성당 3개 건축비보다 비싼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
1238년 프랑스의 루이 9세는 당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제국의 수도)을 점령하고 있던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 등을 13만5000리브르를 주고 사들였어요. 당시 루이 9세가 성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생트 샤펠 성당 건축비가 4만 리브르였다고 하니 성당 3개를 짓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돈인 겁니다. 유물들은 이듬해인 1239년 파리에 도착했어요. 독실한 신자였던 루이 9세는 왕관과 가운을 벗고 맨발로 유물을 뒤따랐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최고는 가시면류관이었죠. 유물들은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셔졌다가 생트 샤펠로 옮겨졌지요.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유물과 건물이 파괴돼 사라졌어요. 생트 샤펠도 크게 손상됐고, 성물들도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다행히도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등에 보관되다가 1806년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돌아옵니다. 가시면류관은 1896년에 만든 크리스털과 금으로 장식된 통에 보관돼 있어요. 원래는 가시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가시들도 달려 있었는데, 프랑스 국왕이 수 세기 동안 여러 나라에 선물로 가시를 나눠줘 지금은 줄기만 남았다고 해요. 이 가시면류관에서 나온 '진짜 가시'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곳이 70여 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파리로 옮겨져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이 정말 예수가 머리에 썼던 것인지,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일부인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어요. 그렇지만 오랜 세월 성물로 여겨져 온 것은 맞아요. 4세기경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 기록을 보면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을 성물로 여기고 숭배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기록에 따르면 성 십자가는 4세기 중반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성지순례 도중에 발견했다고 전해져요. 가시 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팔려온 가시 면류관과 달리 십자가 파편들은 여러 기독교 국가들과 성당으로 흩어졌어요. 노트르담 대성당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묘교회,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 등도 성 십자가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고 해요. 다만 모조품일 가능성도 있어요. 중세 시대가 끝날 때쯤에는 진짜 성 십자가 조각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당과 국가가 너무 많아 종교 개혁가 칼뱅은 "전 세계의 성 십자가 조각을 모으면 배 하나를 채울 수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노트르담에 있는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도 진짜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자체로 역사를 담은 인류의 유산이지요.
[프랑스혁명 후 잊힌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 소설로 복원 시작]
노트르담 대성당은 헨리 6세의 즉위식(1431),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재판(1456)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등 중요한 행사가 열려 '프랑스의 심장'으로 불렸죠.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 때 파손되면서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고 방치돼 왔어요.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는 1831년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어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꼽추와 집시의 사랑, 15세기 다양한 계급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죠. 책에는 노트르담 성당의 건축에 대해서만 묘사하는 내용도 있어요. 그의 작품 덕에 많은 사람이 다시 노트르담 대성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45년부터 프랑스 정부가 노트르담 복원 사업을 시작했어요.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5.01 경제만 바꾸자는 鄧과 달리 '정치도 개혁' 외치다 실각
[후야오방 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과 개혁·개방 주도한 인물… 그가 죽자 시민들 톈안먼 광장서 추모
두 달 동안 胡 재평가·민주화 요구… 무력 탄압으로 톈안문 사태 일어났죠
지난 15일은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작은 사진)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 되는 날이었어요. 그는 한때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후계자로 꼽히며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한 정치 지도자였어요. 하지만 중국도 민주화돼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권력을 잃었지요. 그래서 '비운의 총서기' '중국 공산당의 양심' 같은 별명이 따라다녀요.
그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중국에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어요. 중국 정부가 이를 유혈 진압해 공식적으로만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지요. 이게 바로 '톈안먼(天安門) 사태'랍니다.
이 때문일까요? 중국 현대사를 뒤흔든 인물 중 하나지만 그의 고향 마을에서만 조촐하게 추모 행사가 열렸을 뿐 중국 공산당은 당 차원에서 어떤 행사도 열지 않았어요. 후야오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한 사람
후야오방은 1915년 11월 후난(湖南)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4세에 공산당 운동에 가담해 열한 살 위 덩샤오핑과 인연을 맺었죠
.
2차 세계대전 전후 중국 대륙에서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치열하게 내전을 벌였어요. 이 싸움에서 공산당이 승리해 1949년 중국 난징(南京)에 있던 국민당 정부가 바다 건너 타이베이(臺北)로 옮겨갔어요.
이후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절대 권력자가 됐어요. 그는 1966~1976년 10년간 "자본주의·봉건주의 문화와 사상을 뿌리 뽑겠다"면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감옥에 가두는가 하면, 강제 노동을 시켰어요. 이게 바로 '문화대혁명'이죠. 덩샤오핑과 후야오방도 이때 나란히 숙청당해 고초를 겪었어요.
▲ 1989년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추모하러 모인 중국 대학생과 시민들이 베이징 톈안먼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서 있어요. 기념비 앞에 후야오방 영정이 놓여 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마오쩌둥이 숨진 뒤 이들의 운명은 역전됩니다. 마오쩌둥에 이어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전임자와 전혀 다른 길을 갔어요. 그는 1978년부터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등 4개 분야 현대화를 목표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해외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특구도 만들었어요.
후야오방은 이 작업을 주도했어요. 1982년 후야오방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자 '덩샤오핑의 후계자는 후야오방'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어요.
◇경제만 개혁하자는 鄧, 정치도 바꾸자는 胡
하지만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은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어요. 경제 개혁에만 집중하자는 덩샤오핑과 달리 후야오방은 공산당 1당 독재 체제도 좀 더 민주적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1986년 중국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어요. 개혁·개방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진 탓이 컸지요. 후야오방은 무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다가, 1987년 실각했어요. 중국 공산당은 후야오방이 '자본가 편을 들었다'고 비판했지요.
◇그의 죽음이 촉발한 '톈안먼 사태'
후야오방은 2년 뒤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졌어요. 후야오방이 숨지자, 베이징 대학생과 시민들이 베이징 도심 톈안먼 광장에 모여 그를 추모했어요. 후야오방이 대학생과 지식인을 보호하려다가 권력을 잃고 쫓겨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어요.그가 보기 드물게 청렴한 정치인이었다고 칭송하는 이도 많았고요. 당시 베이징대에는 '죽어야 할 자는 안 죽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해요. 시위가 두 달 가까이 계속되자, 결국 중국 지도부는 잔혹한 유혈 진압을 자행했어요.
후야오방은 태어난 지 100년이 된 2015년 복권됐어요. 그렇지만 중국 당국은 여전히 톈안먼 사태를 '폭동'이라 규정하고 있어요.
[문화대혁명 비판했던 1976년 '1차 톈안먼 사태']
1989년 톈안먼 사태에 앞서 1976년 4월에도 톈안먼광장에서 큰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를 '1차 톈안먼 사태'라고 부르기도 해요.
당시 중국 최고 권력자는 아직 마오쩌둥(毛澤東)이었어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2인자였죠. 독재자 마오쩌둥과 달리 저우언라이 총리는 합리적이고 청렴한 지도자로 존경받았어요.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을 애도하던 인파가 곧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시위대로 변했어요.
당시 부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은 이런 시위가 일어난 데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어요. 하지만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숨지면서 판세가 뒤집혔어요. 마오쩌둥 시대에 권력을 누리던 세력이 쫓겨나면서 그해 4월 톈안먼광장에서 일어난 시위도 '정의로운 시위'였다고 재평가받았고, 중국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실렸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5.08 행사 열고 편지 쓰며… 기념일 제정 노력한 美 애나 자비스
미국 어머니날
▲ 애나 자비스
5월에는 어버이날, 어린이날과 같이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날이 모여 있어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100개가 넘는 국가에서 '어머니날'을 기념합니다. 빨간 카네이션은 어머니에게 드리는 대표적인 선물이고요. 그런데 언제부터 어머니날이 공식적으로 생겼고, 카네이션을 드리는 전통이 생겨난 걸까요?
모성(母性)을 기리는 종교 행사나 축제는 과거부터 있었어요.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여러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여겼죠. 영국과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적 전통으로 사순절(四旬節·부활절 전의 40일) 기간 중 네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일요일'로 기념했어요. 자녀가 꽃과 선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죠. 다만 현재는 대다수 국가에서 정한 '어머니날'을 따르면서 '어머니의 일요일'은 거의 없어졌어요.
현대적 의미의 '어머니날'은 미국에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어머니날이 제정되는 데 큰 영향을 준 '어머니'가 있었어요. 사회운동가 앤 리브스 자비스(Jarvis·1832~1905)입니다. 그녀는 '어머니 날 작업단(Mothers Day Work Club)'을 만들어 지역 여성들에게 올바른 육아법을 가르쳤고, 미국 남북전쟁 중에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부상당한 군인들 치료를 도왔어요. 앤은 1905년 5월 9일 자녀 곁에서 눈을 감았어요.
그런 어머니를 존경한 딸 애나 자비스(1864~1948)가 어머니날을 만듭니다. 그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베푸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노력을 기념하는 날을 만들어주길 기도합니다"라는 어머니 앤의 말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해요. 전국적으로 '어머니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것이 어머니들의 희생과 사랑을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죠.
어머니날 제정 운동에 나선 애나는 1908년 5월 10일 웨스트버지니아주 그래프턴에서 첫 번째 공식적인 어머니날 행사를 여는 데 성공합니다. 교회에서 어머니날 예배를 열고, 교회에 온 어머니들에게는 흰 카네이션을 선물했죠. 물론 이 한 번의 행사로 '어머니날'이 법제화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애나는 '어머니날'을 입법하기 위해 국회의원, 주지사, 시장, 신문사 편집장, 기업가들에게 편지를 쓰며 여론전에 나섭니다. 결국 1914년 우드로 윌슨(Wilson) 대통령이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공식 선포합니다. 오늘날 어머니날이 등장한 겁니다.
▲ 꽃가게는 어버이날이 오면 카네이션을 종류별로 들여놓습니다. 그런데 미국 어머니날 창시자 자비스는 직접 찾아뵙거나 손편지를 드리라고 했어요. /박상훈 기자
애나의 어머니는 흰 카네이션을 좋아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애나는 카네이션을 어머니날 공식 꽃으로 삼고 상징으로 활용했어요. 그래서 당시 미국에서는 어머니날이 되면 어머니들에게 흰 카네이션을 선물했고, 자녀도 카네이션을 가슴팍에 달고 밖으로 나섰다고 해요. 당시 미국에서는 자식들이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면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다는 문화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나는 자신의 뜻과 다르게 어머니날이 점점 상업화되어가는 것에 염증을 느꼈어요. 애나가 어머니날 행사를 처음 시작했던 1908년에는 카네이션 한 송이가 0.5센트였는데, 4년 뒤에는 카네이션 한 송이가 15센트로 가격이 30배로 뛸 정도였다고 해요. 카드 회사도 어머니날에 편승해 '어머니에게 감사 카드를 드리세요'라고 마케팅에 나섰죠. 애나는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사람들에게 어머니날 꽃과 카드를 사지 말라고 했어요. 말년에는 아예 '어머니날 폐지 청원'까지 시작합니다. 어머니를 위하고 감사를 표시하는 날이 누군가의 돈벌이 수단이 됐다는 걸 참지 못했던 겁니다.
애나는 최고의 선물은 '어머니를 찾아뵙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게 힘들다면 정성 들여 쓴 손 편지를 전하라고 했지요. 애나는 특히 기성품 카드를 사서 드리는 걸 싫어했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카드 회사에서 속지에 멋진 문구를 적어 파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기성품 카드를 드리는 것은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헌신해온 여성에게 편지 하나 쓰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다는 뜻이다."
내일은 어버이날입니다. 꽃도 좋지만 편지를 한 통 드리는 건 어떨까요.
☞'아버지날'은 美서 1972년 제정
미국에는 '아버지날'도 있어요. 미국 워싱턴주의 소노라 스마트 도드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 손에 자랐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1녀5남을 홀로 키워 냈는데, 도드는 아버지의 희생을 기리고자 1910년부터 아버지날(Father's Day) 제정 운동을 시작합니다. 결국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6월의 3번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합니다.
한국에서는 1972년 아동문학가 윤석중이 신문 기고를 통해 아버지날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1973년부터 어머니날이 '어버이날'이 되며 양친을 위한 날로 바뀌었지요.
05.15 2차대전 후 헌법 따라 전수방위… 아베 "이제 법 바꾸자"
[일본 평화헌법]
1947년 美 요구로 시행된 헌법… 전쟁 일으키지 못하게 무력행사 금지
지난 1일 아키히토 일왕의 뒤를 이어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했어요. 선왕 아키히토는 1989년 즉위하면서 "전쟁 불가 조항을 담은 현행 헌법을 지켜나가겠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나루히토는 헌법을 지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평화헌법이라 부르는 일본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논란이 계속되는 걸까요?
◇패전이 낳은 '평화헌법'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본은 20세기 초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뒤 중국을 침략했어요. 이어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동남아 각국과 미국 하와이를 공격했죠. 그러다가 미국이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합니다.
▲ 지난 3일 일본 도쿄 한 공원에서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일본인 수만명이 집회를 열었어요. 5월 3일은 1947년 평화헌법이 처음 시행된 날입니다. /교도 연합뉴스
이후 1945년부터 7년간 일본은 미군정의 지배를 받았어요. 미군정은 일본 군부에 전쟁의 책임을 묻는 도쿄 재판을 열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헌법을 바꾸라고 요구했어요.
이에 따라 미군정이 3년째 이어지던 1947년 지금의 일본 헌법이 만들어져 시행됐어요. 특히 제9조가 중요해요. 일본 헌법 9조 1항은 '일본은 국권을 발동하는 전쟁,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는 내용, 2항은 '육·해·공군 기타 전력은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두 조항에는 '다른 나라가 일본을 먼저 침략하지 않는 한 일본이 다른 나라를 먼저 치는 건 포기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군대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도 그 때문이죠. 이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냉전이 만든 '자위대'
하지만 평화헌법이 생기자마자 세계는 뜻밖의 사태에 휘말립니다. 중국과 북한이 잇달아 공산화된 데 이어 1950년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거든요.
미국과 소련은 냉전에 돌입했죠. 미국은 아시아 지역이 전부 공산화되지 않도록 한국과 일본을 지켜야겠다고 판단했어요. 한국을 방어하려면 일본을 미국의 군사기지로 활용해야 했지요.
6·25 전쟁 발발 두 달 뒤 일본 정부는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경찰 예비대를 창설했어요. 이어 남북이 휴전협정을 맺은 지 1년 뒤인 1954년 이를 자위대로 개편합니다. 자위대는 '자기 방어를 위한 병력'이란 뜻이에요. 평화헌법 조항 때문에 공격은 못하고 수비만 할 수 있는 부대를 만든 겁니다. 이를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이라고 하죠.
시간이 흐르면서 자위대는 예산도, 전력도 여느 나라 군대 못지않은 조직으로 성장했어요. 하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군대'라고 하는 순간 위헌이 되는 얄궂은 위치지요.
◇'보통국가'가 되고 싶다는 아베 총리
전쟁에 지친 일본 국민은 처음에 평화헌법을 환영했어요. 하지만 우익 정치인·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일본도 언젠가 평화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어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그중 한 명입니다. 이들은 "일본이 옛날처럼 전쟁을 일삼는 나라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자위대의 존재와 역할을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라고 일본 국민을 설득하고 있어요.
10여년 전만 해도 일본 사회에는 '그런 주장은 과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중국이 군사 강국으로 부상하고, 북한이 수시로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아베 총리의 주장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지요.
일본은 '보통국가화'라는 표현을 씁니다. 일본도 다른 나라처럼 군대를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일본 입장에서는 '독일도 군대가 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느냐'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우려할 수밖에 없지요.
[평화헌법 전엔 일왕이 군 통솔]
일본의 정식 이름은 '일본국'이에요. 1947년 평화헌법이 나오기 전에는 '일본제국'이었죠. 그 시절의 헌법을 '메이지 헌법'이라고 불러요. 메이지 일왕 재위 시절 제정됐기 때문이지요.
이 헌법은 일왕에게 상당한 힘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일왕이 통치한다'(1조) '일왕은 신성하다'(3조) '일왕은 육해군을 통수한다'(11조)는 조항이 대표적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일본이 2차대전에 서 패한 뒤 쇼와 일왕은 난처한 입장이 됩니다. 군 통수권자로서 자칫하면 전쟁 책임을 지고 전범이 될 위기였어요. 미군정은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실권을 빼앗고 상징적인 지위만 갖게 합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5.22 처음엔 '무역기지'로 개척… 17세기 '노예 보급기지'됐죠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
15세기 포르투갈, 인도와의 무역 위해 식민지화하자 영국·프랑스 등도 진출
17~19세기 1500만명 사냥하듯 잡아 브라질·서인도제도 등에 노예로 보내
얼마 전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피랍된 한국인이 구출됐죠. 지난 13일에는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이슬람 무장 테러 집단으로 추정되는 괴한의 총격으로 피살당하기도 했어요. 프랑스 식민지였던 부르키나파소는 국민의 30%는 가톨릭 신자, 60%는 이슬람교 신자입니다.
사실 서부의 라이베리아와 동부의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아프리카의 나머지 국가들은 대부분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어요. 부르키나파소 인근 국가인 말리, 니제르, 알제리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였죠. 앙골라, 모잠비크는 포르투갈 식민지였고요. 콩고민주공화국은 벨기에 땅이었습니다.
▲ 세네갈 식민군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프랑스는 식민지 세네갈 출신 원주민을 군에 입대시켜 아프리카 다호메이 왕국과의 전쟁에 투입합니다. /위키피디아
그래서 아직도 식민 지배 당시 영향이 남아 있죠. 공용어로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을 사용하는 나라가 많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많은 것처럼요.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대로 그어 놓은 국경선 때문에 한 국가 안에서 부족 간의 분쟁이 계속됐어요. 최근에는 정세가 불안한 아프리카에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가 침투해 테러 위협에 떨게 하고 있어요.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를 알아볼까요
◇인도로 가기 위한 '보급기지'
아프리카에 가장 먼저 식민지를 개척한 유럽 국가는 포르투갈이었어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는 데 적극적이었어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1488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에 도착하는 항로를 개척했어요. 무역기지로서 아프리카가 꼭 필요했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부의 적도기니, 앙골라와 동부의 모잠비크 등을 식민지로 삼았어요.
16세기 전반부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도 아프리카에 진출했어요. 다만 이때까지는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내륙까지 진출하지 않고 해안에 머물렀어요.
◇17세기부터 '노예 보급기지' 돼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에 알려집니다. 이 발견은 17세기 후반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이 성행하게 하는 뜻밖의 부작용을 낳았어요. 왜일까요?
당시 스페인 등은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을 동원해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을 대규모로 경작했어요. 그런데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전염병을 옮기면서 원주민 수가 급격히 줄었죠. 일손이 모자라자 열강은 아프리카인을 붙잡아 노예로 삼기 시작합니다.
노예 상인들은 서남아프리카인들을 사냥하듯 붙잡아 불에 달군 낙인을 찍은 뒤 노예선에 태웠어요. 17~19세기 동안 약 1500만명이 붙잡혀 노예가 됐다고 해요. 500만 명이 브라질로, 450만명이 서인도제도로 끌려갔다고 해요.
◇유럽이 정한 '아프리카 분할 원칙'
19세기 제국주의가 유럽을 휩쓸면서 열강은 각종 자원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 국가끼리 갈등을 빚기도 했어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강 유역에서의 소유권을 주장하자 먼저 콩고강 주변에 진출해 있던 프랑스, 포르투갈 등이 반발한 사건이 대표적이죠. 결국 유럽 열강은 베를린 회의(1884~1885)를 열고 '아프리카 분할 원칙'을 정했어요. 아직 점령되지 않은 곳은 먼저 교역로를 확보하거나 원주민과 협약을 맺는 등 '실효적 지배'를 한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원칙이었죠.
이 원칙은 유럽 국가들의 경쟁심을 부추겼고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는 더욱 본격화됐지요. 20세기 초에는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이 식민지화되어요. 아프리카 국가들은 20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독립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어요. 빈곤도 심하고 치안 상태도 좋지 못하죠.
[아프리카에 이슬람교가 많은 이유]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가 창시되고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이집트 지역에 파티마 왕국, 아이유브 왕국 등 이슬람 왕조가 들어섭니다.
이슬람 상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 지중해와 서아프리카를 잇는 교역로를 개척했는데, 아프리카 서부에서 무역과 금광으로 번영했던 아프리카의 말리 왕국, 송하이 왕국 등이 모두 이슬람 문화 영향을 받습니다. 또 인도양과 통하는 동부 아프리카 해안가에는 아랍 상인들이 무역 거점 기지로 삼은 도시들이 번성했어요.
지금도 아프리카에 이슬람교 신자가 많은 이유랍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5.29 아편전쟁 패한 뒤 '치욕적 조약'… 홍콩 뺏기고 무역항 개방
[난징조약]
英, 淸 찻잎 수입해 약 100년 간 적자… 해결 위해 마약 몰래 팔다 몰수 당해
이를 빌미로 아편전쟁 일으켰어요
이달 초만 해도 미·중 무역 분쟁이 합의로 끝날 분위기였는데 하루가 다르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어요. 갑자기 기류가 변한 데 대해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중국 공산당 강경파 중심으로 '합의문 초안은 난징조약(1842년) 같은 불평등 조약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어요. 난징조약은 아편전쟁 후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조약입니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중국 대미 강경파가 이를 언급하며 무역 분쟁 종결을 거부한 걸까요?
◇중국 대륙 멍들게 한 아편 무역
17세기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을 하며 상당한 적자를 보고 있었어요. 영국에서 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청나라에서 엄청난 분량의 찻잎을 수입해야 했거든요. 영국 상인들이 찻잎 값으로 한 해 청나라에 지불하는 은이 한때 2만8000t에 달했어요. 약 100년 가까이 영국 은만 청나라로 계속 흘러들어 가는 형국이었죠.
▲ 1842년 난징(南京) 인근 양쯔강에 정박 중인 영국군 콘월리스호(위 그림 가운데)에서 청나라와 영국은 난징조약을 맺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약 조인 당시 콘월리스호 선실을 그린 모습입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청나라는 통상을 거부하고 영국 상품을 수입하지 않았어요.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청에 수출합니다. 중국은 아편 수입을 금지했지만 부패한 관료 조직 때문에 밀무역이 계속됐어요.
강경 대응에 나선 청은 1839년 임칙서(林則徐) 주도로 광저우항에서 영국 상선에 실린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합니다. 영국은 이를 문제 삼아 군대를 일으킵니다. 1차 아편전쟁(1840~1842)의 시작이죠. 영국군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1842년 8월 난징 함락 직전까지 갑니다. 청나라가 패배를 인정하고 영국과 맺은 게 난징조약이에요.
◇세계의 중심에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난징조약으로 청나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어요.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했고요.
이 항구에서는 영국과 청이 협의한 관세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도록 했어요. 원래대로라면 청나라가 영국 물건을 수입할 때 세금을 얼마나 물릴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못하게 하면서 실질적으로 영국이 관세를 정하게 되죠. 어려운 말로 '관세 자주권'을 잃어버린 겁니다.
홍콩 섬은 난징조약으로 영국 땅이 됩니다. 이때 넘어가서 1997년까지 영국이 지배하지요.
난징조약에 이어 부속 조약을 맺는데 청나라는 여기서 영사재판권,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게 됩니다. 영사재판권은 영국인이 청나라 땅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청나라 사법기관이 아니라 영국 영사가 재판을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최혜국 대우는 청 왕조가 다른 나라에 해주는 가장 유리한 대우를 영국에도 무조건 똑같이 해주는 거예요.
◇이기고도 부끄러워한 영국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이 가속화됐어요.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중국 교과서는 아편전쟁이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라고 가르친다고 해요.
사실 아편전쟁은 영국 안에서도 비판이 나왔던 전쟁이에요. 하원 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 승전으로 얻을 이득은 확실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로 인해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와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남의 나라에 마약을 퍼뜨린 뒤, 그 나라 정부가 마약을 몰수했다고 전쟁을 일으켜 이권을 챙겼으니까요. 그렇지만 '힘의 정치'가 세계를 휩쓸 때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청나라도 책임이 있죠.
일본은 청의 굴욕을 지켜보고서는 서구와 무작정 충돌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1842년까지만 해도 외국 배는 '무조건 격파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물과 장작을 주고 돌려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죠. 일본은 12년 뒤 미국과 수교하고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감)'를 추진합니다.
[淸, 전쟁 져도 英 오랑캐라 불러]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1840~ 1842)에서 패배했지만 '중화사상'은 버리지 못했어요. 중화사상은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고 다른 문명은 오랑캐[夷]이자 야만인'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난징조약 11조를 보면 '영국과 청의 고위 관료들은 직급에 맞춰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나 청은 이들을 계속 오랑캐라고 불렀어요.
이후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6 ~1860)에서 다시 패배해, 1858년 영국과 톈진조약을 맺습니다. 영국은 이때 톈진조약 제51조를 통해 "앞으로 중국 당국이 발행하는 공식 문서에서 영국 관리나 영국 민간인을 '오랑캐[夷]'라고 부를 수 없다"고 못 박았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6.05 합스부르크 첫 여성지도자… 주변국 "인정 못한다"며 전쟁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아들 없어 법 바꿔가며 큰딸에게 영토·왕위 상속했어요
주변국서 이를 빌미로 전쟁 일으키자… 마리아, 영국과 손잡고 왕위 지켜내
지난달 27일 오스트리아에서는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33)가 물러났어요. 사흘 뒤인 지난달 30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은 임시 총리로 브리기테 비어라인(69) 헌법재판소장을 지명합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죠. 비어라인은 오는 9월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까지 임시 내각을 이끌게 됐어요.
오스트리아 역사 속 '첫 여성 지도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입니다. 황제는 아니었지만 '여제(女帝)'라고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죠. 공식 직함은 신성로마제국 황후, 오스트리아 대공비, 헝가리·크로아티아 여왕, 보헤미아 여왕입니다. 비어라인 총리와는 달리 그 자리에 앉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어요.
◇"딸도 상속받게 해주세요"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합스부르크 가문은 15~16세기에 유럽의 제후들과 정략결혼을 하며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프랑스의 부르고뉴, 네덜란드, 헝가리 등에 넓은 땅을 가졌어요. 독일 지역 제후국이 선거로 뽑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하게 됩니다.
▲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 전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어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는데, 아들 5명, 딸 11명을 낳습니다. 48세에 남편과 사별하면서 쓸쓸함을 음식으로 달래다가 풍만한 몸집이 됐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그런데 18세기 들어 문제가 터집니다.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사라진 겁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6세(1685~1740년)는 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딸만 셋이 있었거든요. 게르만족의 전통법인 살리카 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 계승은 물론, 영토도 물려받지 못했어요. 땅을 넓혀나가는 데 도움을 줬던 정략결혼은 족쇄가 됩니다. 합스부르크와 결혼으로 얽힌 수많은 유럽 왕실도 합스부르크가(家) 영토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차지할 근거가 생긴 것이거든요.
카를 6세는 나라가 분할되는 것은 원치 않았어요. 딸도 왕위와 영토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국사조칙(國事詔勅)'을 1720년 발표합니다. 게르만족 전통이 남은 왕국에서는 여왕 탄생이 불가능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겁니다.
카를 6세는 큰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 등을 무사히 상속하도록 프랑스와 스페인 등 주변국의 동의를 받는 데 여생을 바칩니다.
◇9년 동안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장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왕위와 영토를 물려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카를 6세가 살아 있을 때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인정했던 이웃 나라들은 입장을 바꿔서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여자라서 인정하기 어렵다는 거죠. 이렇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이 시작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프로이센, 프랑스, 바이에른, 스페인, 나폴리 등과 싸워야 했어요.
특히 프로이센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인정받으려면 슐레지엔을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슐레지엔은 전체 영토에서 큰 부분은 아니었지만 상공업이 발달한 요충지였어요. 이를 거부하자, 프로이센은 무력으로 슐레지엔을 빼앗으며 전쟁을 일으키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전세를 역전시켜요. 1748년 아헨조약을 맺고 슐레지엔 등 일부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왕위와 상속권을 모두 인정받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신 남편 프란츠 슈테판(프란츠 1세)이 가져가게 됩니다. 카를 6세가 내놓은 국사조칙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왕위에 대한 상속법만 바꾸는 것이거든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 방식은 형식적으로 제후국의 투표에 의한 것인데 여성은 피선거권이 없었어요. 그리고 선거로 황제자리를 지켜오는 합스부르크가도 이것까지 바꿀 수는 없었거든요.
◇의무 교육·징병제 도입
남편을 황제로 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아들 요제프 2세와 권력을 나눠 가졌고요.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국에 초등학교를 만들고 의무 교육을 실시했어요. 또 징병제를 도입해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군사력을 강화했지요. 또한 조세제도를 개편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걷어 재정을 강화했어요.
다만 끝내 슐레지엔을 되찾는 데는 성공하지 못해요. 프로이센과 7년 전쟁(1756∼1763)을 벌이지만 다시 패배하죠. 여성 통치자로 있으면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도 낳아요.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6.12 승전국 수장이 겪은 2차대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았죠
[윈스턴 처칠이 쓴 '제2차 세계대전']
1953년 노벨문학상 받은 처칠 대표작
英 승리로 이끌었지만 전후 총선 패배… 종군기자 경력 살려 전쟁 회고록 작성
지난 3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영국을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윈스턴 처칠(1874~1965) 전 영국 총리가 쓴 '제2차 세계대전' 축약본을 선물했어요. 평소 트럼프 대통령은 존경하는 인물로 처칠을 꼽아왔죠. 지난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을 맞아 영국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영 동맹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선물이었다는 해석이 나오죠.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떤 책인지 알아볼까요?
◇총리에서 잠시 물러나 다시 펜을 잡다
처칠은 1940년 총리에 취임하며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했어요. 이후 5년간 그는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었지요.
▲ 윈스턴 처칠이 1940년 총리 관저에 있는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성공한 정치인이자 정력적인 작가이기도 했어요. /제국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처칠 개인의 정치적 인생은 다시 요동치게 됩니다. 1945년 2차 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에서 포츠담회담이 열립니다. 그런데 처칠은 같은 기간 영국에서 진행된 총선에서 복지정책 확대를 내세운 노동당에 패배했어요.
처칠은 1951년 다시 총리가 됩니다. 그는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이 기간에 2차 대전을 회고하는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1946년부터 집필한 '제2차 세계대전'이에요.
전쟁을 지휘한 승전국의 수장이 썼기 때문에 생생한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죠. 당대의 공식 자료들과 개인적인 서한, 메모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이 보고 경험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어요. 영국 런던이 공습당할 때 느낀 두려움도 생생히 기록했죠.
처칠은 사실 정치가로 뜨기 전에 기자·작가로 먼저 유명해진 사람이에요. 쿠바 독립전쟁(1895~1898)과 2차 보어전쟁(1899~ 1902)에 종군기자로 참여했거든요. 제1차 세계대전 회고록 '세계의 위기', 자서전 '나의 전반생' 같은 논픽션 외에, 조상인 제1대 말버러 공작의 전기와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의 전기도 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53년 총 6권으로 완결됩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같은 해 처칠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역사적이고 전기(傳記)적인 글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묘사와, 고양된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빼어난 웅변에 이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어요.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그렇다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요? 처칠은 책 앞부분에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밝힙니다.
그는 2차 대전의 가장 큰 원인은 나치 독일의 팽창정책이지만, 영국·프랑스 정치인들도 문제였다고 지적했어요. 전쟁 전 영국·프랑스 정치인들이 독일이 전쟁 준비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평화'를 내세워 국민을 안심시키고 표를 받는 데에만 몰두했다는 거예요. 전쟁을 일으킨 건 나치 독일이지만, 전쟁을 막지 못한 건 독일만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분석입니다.
또 그는 전후 유럽의 평화 질서에 대한 구상도 책에 담았어요. 그는 '유럽이 끝없는 참상으로 빠져드는 걸 막기 위해선 유럽 가족 상호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썼어요. 실제로 유럽연합(EU)이 창설됐고, 이후 회원국 사이에 전쟁이 없었어요. 그의 혜안이 들어맞았다고 볼 수 있지요.
물론 처칠이 회고록을 내면서 자신의 정치적 결단과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그의 글들에 무슨 문학적 가치가 있느냐'는 지적도 나왔어요. 그렇지만 그가 깊은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답니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에 쓴 말입니다.
"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투혼. 승리에는 아량. 평화에는 선의가 필요하다."
[처칠, 美 소설가와 동명이인]
"윈스턴 처칠이 윈스턴 처칠에게, 혼란을 막기 위해 앞으로 저는 필명을 '윈스턴 S 처칠'이라고 하겠습니다."
윈스턴 처칠과 같은 시기에 미국에는 동명이인 베스트셀러 소설가 윈스턴 처칠(1871~1947)이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리처드 카블(Richard Carv-el)'이 대표작인데 200만부 넘게 팔렸어요. 당시 미국에서는 '윈스턴 처칠' 하면 이 소설가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영국에 있던 처칠에게 미국 소설가에게 가야 할 팬레터가 날아들기도 했죠. 마침 소설 '사브롤라'를 연재 중이었던 처칠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중간 이름 스펜서(Spencer)에서 따온 S를 필명에 넣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6.19 강대국·신흥강국 충돌위기 500년간 16번… 4번만 전쟁 피해가
투키디데스의 함정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이 격화되면서 자주 나오는 말이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입니다. 새로운 강대국이 기존의 강대국에 도전하면서 두 국가가 결국 전쟁으로 치닫는 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 표현은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가 책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2017)'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주목받고 있어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기원전 5세기로 안내할게요.
◇둘로 나뉘어 치고받은 그리스
기원전 5세기 그리스는 도시국가(폴리스)들이 똘똘 뭉쳐 페르시아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바다에서는 아테네, 땅에서는 스파르타 주도로 페르시아군을 제압하죠.
그렇지만 황금기는 짧았어요.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나날이 발전하는 아테네에 스파르타가 위협을 느낀 것이죠.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수장으로 그리스 최고의 육상 전력을 자랑했어요.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인 메가라, 코린토스가 아테네로부터 위협을 받자 아테네의 팽창을 막기 위해 전쟁을 결심합니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맞붙으며 일어납니다. 전쟁은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그림)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제압하며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새로운 강대국이 기존의 강대국에 도전하면서 결국 전쟁이 벌어졌다고 봤어요. 이를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아테네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아테네 역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인 '델로스 동맹'의 수장이었어요.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강력한 해군력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죠. 스파르타를 바다에서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30년 가까이 혈전을 벌였어요. 이게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긴 전쟁이 끝났어요.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의 군사 지휘관이었어요.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24년에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전쟁 원인은 스파르타의 '공포'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아테네의 성장에 대한 스파르타의 공포 때문'이라고 해석했어요.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아테네를 제거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두 국가는 결국 전쟁이라는 '함정'에 빠졌어요. 승전국 스파르타도 국력 소모가 컸어요. 그리스 곳곳에서 스파르타의 지배에 반발하는 반란도 일어났고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제 살 깎아 먹는 소모적인 내분에 지쳐갈 때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신흥 강국 마케도니아가 일어나 패권을 잡았어요.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앨리슨 교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처럼 신흥 강국이 기존 패권국을 위협하며 성장할 때 양쪽이 무력 충돌하는 경향을 가리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표현을 썼어요.
그는 지난 500년 동안 '투키디데스의 함정' 상황이 16번 있었는데 그중 12번은 전쟁이 일어났지만 4번은 평화적으로 대립이 해결됐다고 지적합니다.
15세기 말 세계 제국과 무역을 두고 경쟁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이라는 중재자를 찾아 대결을 피했어요.
20세기 초 신흥 강국 미국과 기존 패권국 영국은 서로가 상대를 인정할 때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현명하게 판단했어요.
1940∼1980년대 세계 패권을 놓고 대립했던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가진 '핵무기'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전쟁을 삼갔어요. 2차 대전 후 영국·프랑스와 독일은 유럽연합(EU)이라는 틀을 만들어 충돌을 피했고요.
이런 사례를 보면 신흥 강국이 등장한다고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앨리슨은 책에서 '미국과 중국 지도자가 과거의 성패로부터 제대로 배우기만 한다면 전쟁을 치르지 않고 양측의 핵심 이익을 충족시킬 실마리를 충분히 찾아낼 것'이라고 썼어요. 과연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요?
윤서원·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06.26 돛단배로 시작해 뱃길·기찻길 장악… 美 역사상 자산 2위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지난 17일 패션 디자이너·작가·화가 등으로 활동했던 글로리아 밴더빌트(95)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미국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Vanderbilt·1794~1877·작은 사진)의 고손녀(4대손)입니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왕' 존 D 록펠러와 어깨를 견주는 미국 최대 부호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14년 CNN머니는 '사망할 때 남긴 자산이 당시 미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들을 정했습니다. 록펠러(GDP의 1.5%)가 1위, 밴더빌트(1.2%)가 2위, 카네기(0.6%)는 6위를 차지했습니다. 밴더빌트는 자산 1억달러를 남겼는데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 약 2050억달러(약 237조원)에 달합니다. 록펠러는 지금 돈으로 2530억달러, 카네기는 1010억달러를 남겼죠.
◇'제독'이라 불린 선박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열여섯 살이던 1810년 빌린 100달러로 돛단배를 사들여 뉴욕 스태튼섬과 맨해튼을 오가는 여객선을 운영합니다. 남들보다 싼 요금을 받고 정시 운행을 강조하자 사업은 번창했어요. 1817년에는 증기선 선장이 돼 배를 몰면서 신기술인 증기선 운송법을 익힙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밴더빌트는 증기선 운송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미국 동부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을 확장하면서 1840년대에는 100척에 달하는 증기선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함대 사령관을 뜻하는'제독(commodor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죠. 명실상부한 '선박왕'이 된 겁니다.
◇나이 일흔에 철도에 '올인'
'선박왕' 밴더빌트는 일흔 가까이 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죠. 남북전쟁 중에 철도의 가능성을 본 그는 선박업을 정리하고 철도 운송업에 진출합니다. 일흔이 된 1864년에는 아예 배를 한 척도 남김없이 팔아치우고 철도에 '올인'합니다. 당시 미국은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동부에 수많은 섬유공장이 들어섰지요. 증기선만으로는 물건을 옮기는 데 한계가 왔습니다. 배에서 철도로 물류의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순간이었죠.
밴더빌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선박업으로 벌어들인 자본을 활용해 여러 개의 단거리 철도 노선을 사들여 그것을 하나로 연결했습니다.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19세기 미국 철도망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아들 빌리 밴더빌트(맨 왼쪽) 등 미국 기업가들이 철도망을 나눠 가지는 모습을 풍자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가 철도왕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전략적 포인트인 '뉴욕항'을 오가는 철로를 철저하게 확보한 데서 왔습니다. 당시는 미국 동부로 들어오는 물건도, 미국 동부에서 나가는 물건도 뉴욕항을 거쳐야 했던 시절이었거든요. 밴더빌트는 뉴욕항과 미국 대륙을 연결하는 허드슨강 철교 노선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경쟁 기업 열차는 이 철교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경쟁 철도업체 주가를 떨어뜨렸고, 주가가 떨어진 경쟁 업체를 인수·합병하면서 철도 운송업을 장악했죠. 나중에 '석유왕'이 되는 록펠러도 초창기에는 밴더빌트의 고객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당시 대표적인 석유 생산지 클리블랜드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의 석유를 밴더빌트가 실어날랐죠.
밴더빌트는 결국 미국 동부 알짜 철도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뉴욕에서 시카고, 피츠버그, 클리블랜드로 가는 노선 등이죠. 미국 철도 노선의 40%가 밴더빌트 소유였다고 합니다. 밴더빌트는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빌리 밴더빌트에게 사업을 넘깁니다. 그는 아들에게 "어떤 바보든 떼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머리 없이는 그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했죠. 빌리는 아버지의 유산을 2배로 불리는 데 성공했지만, 밴더빌트 가문의 부(富)는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졸부 딱지 떼려 흥청망청… 밴더빌트家, 3대부터 내리막]
2대째까지 엄청난 부를 모았지만 밴더빌트 가문은 더는 부자로 꼽히지 않습니다. 자동차와 송유관이 등장하면서 철도운송업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막대한 재산을 흥청망청 썼기 때문입니다. ‘졸부’ 딱지를 떼고 뉴욕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하룻밤 파티에 지금 돈으로 600만달러(약 72억원)를 쓰기도 했답니다. 뉴욕 맨해튼 5번가에 거대한 맨션을 여러 채 짓기도 했죠. 밴더빌트의 유산은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대학으로 남았습니다. 코닐리어스가 100만달러를 기부해 1873년 세워졌는데 아이비리그 대학 버금가는 명문입니다.◎
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