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8-2/
07.06 조공 무역 위해 대규모 항해… 아프리카 해안까지 갔죠
[명나라 정화(鄭和)의 해외 원정]
약 30년간 일곱 차례 해외 원정 떠나… 서양보다 90년 빨리 인도양 발견
얼마 전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가졌지요. 사실 미국과 중국은 최근까지도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어요. 매티스 장관은 방중 전인 지난달 15일 "중국은 명나라가 그들의 모델인 것 같다. 다른 나라들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어 굽신거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중국사에 조예가 깊은 매티스 장관이 중국의 대외 팽창을 명나라에 빗댄 이유는 조공 무역이 상하 관계를 기반으로 이뤄진 외교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조공 무역 체제가 억압적인 상하 관계에서만 이뤄지지는 않았어요. 여러 조공 국가를 거느렸던 명나라와 그 세력을 확장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정화(鄭和, 1371~1433년 무렵)의 해외 원정에 대해 알아볼까요?
◇황제의 신임 받은 정화
조공 무역은 속국(屬國)이 종주국에 바치는 공물과 종주국이 속국에 하사하는 답례물이 오가면서 이뤄지는 공무역 형태를 말해요. 역사상 거의 늘 강대국의 위치에 있었던 중국 왕조가 약소국에 주로 행했던 무역 방식이지요. 명나라 때는 속국을 늘리기 위해 대형 함선들을 주변 국가에 보내기도 했는데요, 대표적으로 1405년부터 약 30년간 진행된 환관 정화의 해외 원정이 있습니다.
▲ 말레이시아 믈라카에 있는 정화의 동상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중국의 위세를 주변 국가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왜 환관인 정화가 맡게 되었을까요? 정화는 1371년 윈난성 곤양(昆陽)의 마씨 집안에서 태어나 본명은 마화(馬和)였어요. 조상은 원나라 때 중국에 귀화한 색목인(色目人·서역의 이방인) 이슬람교도였지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윈난성을 정복하면서 포로가 된 그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훗날 영락제)의 환관이 되었지요. 후에 정씨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당시 주체는 북경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였어요. 1392년 황위 계승자였던 형이 죽고 열여섯 살의 어린 조카가 건문제로 즉위하자 주체는 반란을 일으켰어요. 어리숙한 황제를 간신배들로부터 구한다는 명분이었죠. 주체는 당시 명의 수도였던 난징에 입성해 궁궐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건문제를 찾지 못했어요. 그는 조카인 건문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1402년 명의 3대 황제, 영락제로 즉위해요. 이 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정화는 영락제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선원 2만8000명 데리고 대원정
영락제는 즉위 후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세계 최대 규모의 궁성인 자금성을 지었어요. 그는 북경을 거점으로 삼아 상업과 교역을 장려했지요.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해외 원정을 떠납니다.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의 일환이었죠.
영락제가 대규모 해외 원정단을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요. 통치 안정을 이룬 명나라가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무역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어요. 혹시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건문제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요.
1405년 6월 1차 원정 당시 원정단의 규모를 살펴볼게요. 함선 62척에 선원 2만8000여 명이 탔습니다. 2500t까지 적재할 수 있는, 길이 137m에 너비가 56m에 달하는 대형 선박도 포함돼 있었다고 해요. 선박에는 속국에 하사할 도자기, 비단, 금 같은 화물도 대량으로 싣고 있었지요. 이는 80여 년 후 태평양을 항해했던 콜럼버스의 함대가 250t을 적재할 수 있는 배 3척과 선원 90여 명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이죠.
남중국해에서 인도양으로 나아가서 아프리카의 동해안까지 이르는 먼 항해였지요. 정화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을 발견한 것보다 90여 년 더 빨리 인도양을 발견했어요. 이는 당시 중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항해 기술과 선박 제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였고 당시 선단에는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있었어요.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동아프리카의 이슬람 왕조들과 교류했을 때 그들의 정치·제도·종교·문화 등을 유연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영락제가 정화를 해외 원정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요.
◇상대국 존중하는 선린외교 측면도
정화가 방문한 국가들은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어요. 각 국가의 사신들은 영락제를 알현하기 위해 정화의 함대를 따라갔는데요, 명나라는 외국의 사신단이 갖고 온 조공품보다 더 큰 답례품을 내리는 게 보통이었지요. 한쪽이 강제로 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평화와 공생의 관계였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2차 항해에서 정화의 함대가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불교 의식에 참여하고 보시(布施)했다는 걸 보면 정화와 사신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켰음을 알 수 있지요.
1424년 영락제가 죽은 후 즉위한 홍희제는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는 해외 원정을 반대했어요. 홍희제는 정화의 원정단을 해산하고 원정 기록도 폐기했지요. 그다음 황제인 선덕제는 1433년 7차 원정단을 파견했지만 정화가 죽으면서 명나라의 대항해도 끝나게 됩니다.
정화의 항해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 왕래와 무역이 활발해졌고 중국인들의 세계 인식도 넓어졌어요. 또 화교도 점차 증가해 16세기에는 동남아시아 화교 인구가 10만 명에 달했다고 해요. 자바 섬, 수마트라 섬, 태국 등에 있는 화교들은 정화를 신처럼 모시며 사당을 지었고 지금까지도 정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화의 해외 원정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면서 내부적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상대 국가를 존중하며 종주국이 더 큰 책임감을 가졌던 선린(善隣)외교의 측면도 있었답니다.
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7.13 동·서 데탕트 물꼬 튼 선언, 美·中 수교로 이어졌죠
닉슨독트린(1969)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났지요. 북한과 미국 정상이 한자리에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미국과 북한 사이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불안했던 사람들은 회담을 반기기도 했죠. 트럼프 대통령을 두고 예전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닉슨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기 전후로 세계정세는 어땠는지 살펴볼까요?
◇트루먼 독트린과 냉전의 시작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사회주의 진영의 위협이 있는 나라에 미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를 '트루먼 독트린'이라고 부르는데 독트린(doctrine)은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정책상의 원칙을 말해요.
그 후 미국과 소련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서로의 진영을 지원해주며 대치하게 되었지요. 양 진영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당시의 상황을 냉전(cold war)이라고 해요. 진영 간 갈등은 계속됐고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버릴 상황에 처하자 미국은 베트남에 많은 군대를 보내 긴 전쟁을 치르게 돼요.
▲ 1972년 중국을 찾은 리처드 닉슨(왼쪽) 미국 대통령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태평양전쟁부터 6·25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전쟁을 겪게 되자 대다수의 미국인은 보다 평화로운 사회 질서를 바라게 되었지요. 닉슨은 그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그때의 미국은 전쟁을 지속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베트남전쟁 전,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0% 정도를 보유할 정도로 막대한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규모 복지정책과 베트남전쟁은 미국 경제를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어요. 다른 나라에 대한 지원으로 엄청난 비용이 쓰이는 걸 싫어하는 여론도 있었지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9년 여름 닉슨은 아시아에서 미국이 어떠한 역할을 맡을지를 새로 정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게 됩니다. 괌에서 발표해 '괌 독트린'이라고도 불리는 이 원칙엔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시아 국가들이 스스로 내란이나 침략에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어요. 미국이 중요한 역할은 하겠지만 다른 국가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피하자는 것이었지요.
◇탁구 경기로 시작한 '핑퐁 외교'
이전까지 미국은 중국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국가처럼 취급했어요. 하지만 닉슨 독트린 이후 중국이 미국 탁구 대표단을 초청해 친선 경기를 벌이는 일도 생겨요. 미국이 중국에 대한 무역 제한 조치를 해제하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갔죠. 대통령이 직접 중국을 공식 방문하기도 하면서 초보적인 단계의 외교 관계를 시작해요. 탁구팀 간 교류가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핑퐁 외교'라고 하지요. 결국 1979년 새해에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인정하고 수교를 하게 됩니다.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던 소련과의 관계도 부드러워지게 돼요. '전략 무기 제한 협정'이라는 조약을 맺어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 수를 더 이상 늘리지 않기로 합의하지요. 비록 냉전이 완전히 끝나진 않았지만 그 전보다 전쟁의 위협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이렇게 닉슨 독트린 이후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 긴장이 완화되는 분위기를 데탕트(Détente)라고 부른답니다. 프랑스어로 긴장의 완화 혹은 휴식을 뜻해요.
베트남에서는 미국이 군대를 철수합니다.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이 베트남전쟁을 끝내기로 하는 평화협정을 맺어요. 그 후 단계적으로 베트남에 주둔한 군대를 미국 본토로 옮겨옵니다. 미국 군대가 철수한 이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사이 전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결국 사회주의 정권이던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다시 통일하는 데 성공해 오늘날 베트남이 되었어요.
◇닉슨 독트린이 일으킨 나비효과, 킬링필드
▲ 킬링필드 때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공동취재단
미국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자 캄보디아에서는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무너지고 크메르 루주(Khmer Rouge)라는 사회주의 정권이 만들어져요. 이 정권은 캄보디아 곳곳에서 수 백만명 되는 국민을 탄압하고 학살했어요. 특히 지식인이나 부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는데 그저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애꿎은 사람을 잡아간 적도 있다고 해요. 당시의 통계 자료가 없어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료에 따라서는 자국민의 3분의 1 이상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아직까지도 캄보디아에 남아 있는 고문 도구들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끔찍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요.
결국 크메르 루주의 잔인한 학살은 이웃 국가인 베트남의 침공을 불러와요. 캄보디아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에요. 베트남은 자신의 공격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크메르 루주가 했던 학살을 국제사회에 알립니다. 많은 기자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들을 돌아보며 취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주의 만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어요.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의 사임
1972년 6월 미국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노린 비밀 공작반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체포됐어요.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닉슨 정권의 여러 비리가 드러나 결국 1974년 닉슨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7.20 '왕 있어도 의회가 통치'… 英, 무혈혁명 통해 이뤄냈어요
[영국 의원내각제의 역사]
존왕의 실정을 비판했던 귀족들, 시민의 자유 위한 '대헌장'요구했죠
세계적으로 젊은 리더십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43세에,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는 37세에, 오스트리아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는 31세에 취임하는 등 각국 정상들의 평균 나이가 낮아지고 있어요. 스페인·아이슬란드·프랑스·아일랜드·벨기에·폴란드 같은 나라도 30~40대 지도자를 두고 있죠.
지도자가 젊은 유럽 국가 상당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요. 간접선거로 총리를 선출하는 제도 안에서 젊은 지도자가 뽑힐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지요. 의원내각제에서는 다수 의석을 차지한 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당에서 밀어주는 젊은 인사들이 정권을 주도할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소통을 중시하는 젊은 지도자 인기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가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요. 의원내각제가 어떤 제도인지, 또 의원내각제 종주국인 영국의 의회 제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봅시다.
◇영국 헌법 정신 대표하는 '대헌장'
의원내각제는 영국 의회가 군주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18세기쯤 완성됐어요. 보통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국가는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데요, 대통령제처럼 행정권을 장악하는 지도자가 직선제로 선출되면 군주의 권위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가 결합된 국가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명목상 지도자인 왕이 존재하지만 정치적 주도권은 의회와 의회에서 구성한 내각에 있지요.
▲ 17세기에 메리 2세(왼쪽)는 아버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남편인 윌리엄 3세(오른쪽)와 함께 공동 왕이 돼요. 이로써 영국은 국왕이 있어도 국가 통치는 법과 의회에 따르는 입헌군주제를 수립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에서 의회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13세기 초 영국 국왕이던 존왕은 계속된 실정으로 귀족들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당시 영국은 프랑스 영토의 반 이상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는데요, 존왕 때 계속된 패배로 프랑스령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아요. 존왕은 프랑스와 소모적인 전쟁을 위해 사람들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고 징병을 했지요. 1215년 영국이 또 전쟁에서 지자,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요. 이때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한 존왕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어요.
'어느 자유민도 그 동료의 합법적 재판에 의하거나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감금·압류, 법외 방치 또는 추방되거나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않는다. 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도록 시키지도 않는다' 같은 내용이 포함됐지요. 즉 왕이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군주권에 제한을 둔 것이에요. 대헌장은 이후 영국 헌법 기본 정신을 대표하게 돼요.
존왕의 아들 헨리 3세가 대헌장을 지키지 않자 당시 세력이 강했던 귀족 시몽 드 몽포르가 반란을 일으키고 귀족 대표들과 시민 대표들을 소집해요. 이게 바로 영국 의회의 시초예요. 14세기에는 고급 귀족, 고위 성직자들과 하급 귀족, 시민 대표들이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 모이는데 이것이 두 의회가 공존하는 양원제로 발전했어요.
◇중국 내각제 따 온 신(新)추밀원
그 후 17세기 영국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며 부당한 세금을 걷고 의회의 청교도 신자들을 박해했어요. 의원들이 국왕의 명령보다 의회의 동의와 법이 앞선다는 내용을 담은 '권리청원'을 냈으나 지켜지지 않았죠. 찰스 1세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의회를 해산하자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이 일어나요. 의회파는 청교도인들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를 '청교도혁명'(1640~1660)이라고 합니다. 의회파가 승리해 찰스 1세는 처형당하고 의회파를 이끌었던 크롬웰을 중심으로 공화 정부가 세워져요. 하지만 크롬웰이 금욕주의적 청교도 정치와 군사 독재를 벌이자 영국 국민은 오히려 왕정을 그리워하게 돼요. 결국 크롬웰이 죽고 1660년에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2세가 즉위합니다.
찰스 2세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의회와 큰 충돌은 피하려 했어요. 이때 중국사에 조예가 깊었던 정치가 윌리엄 템플이 찰스 2세를 도와 헌정을 개혁합니다. 템플은 명·청대에 황제 자문 기관 역할을 했던 내각제를 본받아 국왕과 하원을 타협시키려 했어요. 1679년 중국의 내각제를 응용해 '신(新)추밀원'을 설치하지요. 신추밀원의 정원은 대략 30명으로 절반은 상하 양원의 영향력 있는 귀족이, 절반은 국왕이 임명한 왕실 고위 관료가 참여하는 게 원칙이었어요. 왕에게 조언해주는 기관에 의회 출신 인사들도 들어갔으니 오늘날 내각처럼 행정권과 입법권이 융합했음을 볼 수 있어요.
◇왕 있어도 통치는 법과 의회가
그 후 1685년 즉위한 제임스 2세는 친가톨릭적 전제 정치를 노골적으로 강화해 국민의 불만이 커져 갔어요. 의회는 제임스 2세가 후사 없이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임스 2세가 오십 넘은 나이에 아들을 얻자 신교도(개신교) 의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요.
신교도 의원들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녀의 남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에게 편지를 보내 군대를 보내달라고 부탁해요. 둘은 신교도였기 때문에 아버지이자 장인이던 제임스 2세에게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윌리엄의 군대가 영국에 도착하자 제임스 2세의 세력은 와해되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해요. 유혈(流血) 사태 없이 성공한 이 혁명을 '명예혁명'(1688)이라고 불러요.
1689년 의회에서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하고 '권리장전'을 승인하도록 해요. 의회의 동의 없이는 왕 마음대로 법률이나 법률 집행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지요. 왕이 이를 승인하면서 영국은 국왕이 있으나 법과 의회가 국가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가 수립됩니다.
이후 왕이 의회와 마찰을 피하고 내각이 국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회 과반수 정당의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했고, 이것은 이후 제도화되었어요. 하원 다수파가 총리와 내각 의원, 그리고 장관을 선출했지요. 이렇듯 17세기 의회와 국왕의 대립이 거듭되면서 오늘날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의 원형이 만들어진 거예요. 이후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도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어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7.27 튀니지서 시작한 민주화 혁명… 이집트·리비아로 퍼졌죠
[아랍의 봄]
시위 확산에 소셜미디어 큰 역할… 예멘 포함 아랍 문화권 뒤흔들었죠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최근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국민에게 특별세금을 걷기로 하는 법안이 통과됐다고 해요. 하루에 200우간다 실링(약 50원) 정도 세금이 붙는다고 합니다. 이 정책은 30년 넘게 집권 중인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이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법안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랍의 봄'을 들여다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어요.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돼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 아랍 문화권 국가들을 휩쓴 반정부 시위를 의미해요. 아랍 혁명이라고도 하지요. 그 중 튀니지, 이집트, 예멘에서의 시위는 정권을 바꾸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이 과정에서 국민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목소리를 냈어요. 단체를 만들고 정보를 공유하는 데 소셜미디어가 큰 역할을 했지요.
◇튀니지에서 시작한 재스민 혁명
튀니지에서는 왜 이러한 시위가 시작됐을까요? 튀니지는 아프리카나 아랍 문화권 국가 중에서는 높은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어요. 고대 로마 시대에도 '빵 바구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식량 생산이 풍부했답니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번갈아 경험했던 튀니지는 2010년 벤 알리 대통령이 있었어요. 그전의 종신 대통령이었던 부르기바가 쇠약해지자 총리였던 벤 알리가 '대통령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총리가 대신한다'는 규정을 들어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바뀐 정권에 기대를 품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벤 알리 자신도 죽을 때까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법을 바꾸고 정부가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자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 2011년 2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자 이집트 국민 수천 명이 광장에 모였어요. 이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휴대폰으로 찍어 소셜 미디어에 공유했답니다. /AFP 연합뉴스
평범한 26세 청년이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부패한 경찰이 노점상을 단속하는 데 저항하며 분신을 하게 돼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서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는 모습이 충격적이었죠. 이를 그의 사촌 동생이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전 세계가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생기기도 했어요. 결국 벤 알리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국민의 봉기로 정권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어요. 이 사건을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인 재스민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는 모두 칼리드 사이드입니다
재스민 혁명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시시각각 다른 나라에 전해졌어요.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던 가까운 국가들에서도 국민이 뜻을 모으면 정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전쟁 영웅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30년 가까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지요. 무바라크 정부는 비상사태법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있었어요. 경찰의 고문, 언론 검열 등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는 많은 국민이 탄압받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한 소셜미디어에 '우리는 모두 칼리드 사이드입니다(We Are All Khaled Said)'라는 페이지가 만들어졌어요. 청년 사업가였던 칼리드 사이드는 마약 담당 경찰관이 마약 밀매를 하고 있음을 소셜미디어에 알리다 경찰의 폭행으로 사망했지요. 분노의 금요일이라 불리는 날, 이집트 사람 수천 명이 거리를 에워쌌고 그 수는 금세 수백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무바라크 정부는 인터넷과 이동 통신 서비스를 중단시켜 버렸어요.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이 모이는 걸 막으려 한 거예요. 하지만 분노한 국민은 계속 저항했지요.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42년 독재의 종말, 리비아의 카다피
리비아도 혁명의 물결을 피해갈 수는 없었죠. 당시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는 무아마르 카다피였는데요, 28세에 쿠데타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되었어요. 초기에는 유전을 국유화하고 이익을 국민에게 돌려주거나 유가를 인상해 리비아 경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의 사진이 불타고 있어요. /AFP 연합뉴스
카다피의 독재는 42년이나 이어져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지요. 재스민 혁명 소식이 퍼지자 리비아 사람들은 긴 독재를 끝내기 위한 시위를 시작했어요. 시위대가 리비아 주요 도시를 장악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카다피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카다피는 내전을 선포하고 군대를 이용해 시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국가가 시위대를 지원했지요. 결국 카다피는 수도를 빼앗기고 고향 땅 근처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 시민군에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아직 아랍에 봄은 오지 않아
혁명에 성공한 국가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요? 한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던 리비아는 혁명을 겪으며 많은 사람이 희생됐어요. 혁명 이후에도 이슬람주의파와 세속주의파로 나뉘어 다시 내전을 겪습니다. 아직도 리비아는 대한민국 정부가 지정한 여행 금지 국가입니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 권력을 잡은 군대와 시위대 간 충돌이 이어졌어요. 간신히 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지요. 지난 16일 이집트에선 팔로어 5000명 이상인 소셜미디어 계정은 언론으로 간주해 정부가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됐어요. 이미 수많은 언론인이 수감돼 있고 주요 언론은 정부를 옹호하고 있는 이집트에서 소셜미디어까지 정부가 규제하면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당할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어요.
튀니지에서는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어요.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된 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아 기대가 컸지요.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 기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튀니지는 높은 실업률 등으로 아직도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어요. 특히 정부를 비판하며 분신하는 경우가 가끔 생겨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8.03 원조 끊기자 화폐 마구 찍어내… 물가상승 한 해 2백만배
[잠바브웨의 초(超)인플래션]
풍부한 자원·친서방정책 기반으로 아프리카 경제성장 이끌었지만
재정난에 화폐 마구 찍어 물가상승… 베네수엘라도 같은 위기 처했어요
얼마 전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가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이 올해 말까지 100만%로 치솟을 것이라고 관측했어요. 베네수엘라 정부가 예산 적자를 무마하기 위해 계속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이지요. 베네수엘라는 2014년부터 유가 폭락으로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초인플레이션 위기에 빠진 베네수엘라의 상황에 대해 IMF 서반구 국장인 알레한드로 베르너는 "1923년 독일이나 2000년대 후반 짐바브웨의 상황과 비슷하다"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2000년대의 짐바브웨는 얼마나 물가가 올랐기에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에 비유되는 걸까요?
◇독립영웅에서 독재자가 된 무가베 대통령
짐바브웨는 아프리카 중남부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작년 11월 쿠데타로 40년가량 집권했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퇴진하고 지난달 30일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어요. 2000년대 짐바브웨의 경제사를 논하려면 무가베 전 대통령의 얘기를 안 할 수 없겠지요?
▲ 지난해 11월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시민들이 무가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짐바브웨는 원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지배를 받았어요. 1965년부터는 소수의 백인이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해 로데지아 공화국을 세워 짐바브웨 지역을 장악했어요. 로데지아 공화국은 인구의 95% 이상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흑인들의 무장독립 투쟁이 끊이지 않았지요. 이때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에서 게릴라 투쟁을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가 무가베입니다. 결국 1980년 총선에서 ZANU 세력이 압승을 거두고 무가베가 초대 수상이 되면서 짐바브웨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독립투사이자 영웅으로 존경받던 무가베는 의원내각제에서 1당 독재의 대통령제로 바꾸면서 독재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요. 바뀐 체제에 따라 무가베는 1988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재선에 거듭 성공하면서 장기 집권에 돌입합니다.
짐바브웨는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해서 독립 후 장밋빛 경제 발전이 기대되는 국가였어요. 무가베도 국가 발전을 위해 친(親)서방 정책을 펼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 냈지요. 짐바브웨는 1990년대 중반까지 '아프리카의 곡창지대'로 불리며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들에 옥수수, 담배, 면화 등을 수출하면서 발전합니다. 아프리카에서 경제 규모로는 남아공 다음이었고, GDP는 3위였을 정도로 아프리카의 경제성장을 이끌었지요.
◇100조 짐바브웨 달러까지 등장
그러나 1992년 심각한 가뭄에 시달리면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해요. 또 야당의 세력 확장으로 여당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조급해진 무가베가 급진적인 토지 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1997년 양극화된 토지 소유 구조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백인 소유 상업 농장의 반 이상을 환수하기로 해요. 급진적이고 독단적인 토지 개혁으로 식량 생산이 급감하고 서방국가들은 공개적으로 무가베 정권을 비난하지요.
▲ 짐바브웨에서 발행했던 100조(兆)짐바브웨달러 지폐예요. 한 장으로 달걀 몇 개밖에 사지 못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더욱이 2000년 들어서는 재향군인, 여당 세력 등 흑인들이 백인 소유 농장을 무단으로 점거하거나 폭력 사태를 일으켜 사회가 더욱 혼란해져요.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 간섭해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지요.
무가베 정부가 2000년 총선, 2002년 대선에서 투표용지 바꿔치기 등 비민주적인 부정행위를 일삼자 서방국가들은 경제 원조를 중단합니다. 아울러 IMF 및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도 끊기면서 짐바브웨의 경제 위기가 본격화했어요. 짐바브웨의 중앙은행은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계속 화폐를 찍어냈고 매달 기록을 갈아치우는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죠.
2000년대 후반에는 식료품과 연료 가격이 폭등하고 수도와 전기도 거의 끊겼어요. 짐바브웨 국민 한 달 월급으로 하루를 살기도 어려워졌지요. 2008년 짐바브웨 물가상승률은 2억%에 육박했다고 해요. 당시 짐바브웨에서는 100조 짐바브웨달러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시장에서 이 돈으로 달걀 3개 정도밖에 사지 못했던 때도 있었대요.
◇생필품 구하려고 불법 체류자 된 국민
하지만 무가베는 계속 짐바브웨의 경제난이 서방국가들의 경제적 제재 때문이라며 유럽 국가들에 책임을 전가했어요. 짐바브웨 국민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국경으로 넘어 인접 국가에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기도 했지요. 2015년에는 휴지 조각인 짐바브웨의 화폐가 폐지되고 미국 달러화로 교체되었습니다.
결국 지난해 11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무가베의 37년 독재가 막을 내려요.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무가베의 퇴진을 축하했어요.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이었던 짐바브웨의 2000년대 경제 상황은 현재도 짐바브웨의 경제를 옥죄고 있어요.
짐바브웨처럼 한때 중남미의 부유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도 정부의 실정과 부정부패로 야기됐어요.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도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오는 4일 베네수엘라 화폐인 볼리바르화를 1000대1로 액면 절하할 계획이에요. 1억원이 10만원이 되는 거죠. 베네수엘라가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초인플레이션은 전쟁이나 혁명 등 사회가 크게 혼란한 상황 혹은 정부가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해 통화량을 대규모로 공급할 때 일어나요.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기 위해 정부가 화폐 발행을 남발했어요. 1922년 5월 1마르크였던 신문 한 부 가격이 1년 4개월 만에 1000마르크로 뛰었어요. 이어 신문 값이 100만마르크로 다시 1000배가 뛰는 데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죠. 당시 화폐 가치가 곤두박질치면서 액면가 100조(兆)마르크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어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8.10 무역 패권 놓고 20년새 3번 전쟁… 영국이 해상 강국 됐죠
영란(英蘭)전쟁
지난 7일 미국무역대표부가 160억달러(약 17조9360억원)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해 오는 23일부터 관세 25%를 물리겠다고 했어요. 앞서 미국이 중국산 제품 340억달러(약 38조5900억원)어치에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이 미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며 대응한 데 이어 나온 조치예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나라 간 총성 없는 전쟁이 더욱 심해질 거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17세기 후반 영국과 네덜란드도 향신료 무역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당시 갈등은 함선과 군대를 동원한, 말 그대로 '무역 전쟁'으로 이어졌어요.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은 아시아에서 무역을 누가 주도할지 결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시아로 진출한 유럽 열강들
유럽 세력이 아시아로 통하는 항로를 열고 진출할 때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이들은 16세기에 동남아시아에 자리를 잡고 중국과 일본까지도 진출하지요. 하지만 포르투갈은 곧 강력한 해상 국가였던 네덜란드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에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를 독점해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 무렵 영국 동인도회사도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려 했어요. 영국은 이미 인도네시아 자바섬 등에서 많은 후추를 확보했지만 후추로는 기대한 만큼 수익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는 향신료는 정향이나 육두구였고, 이런 고급 향신료가 재배되는 곳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미 진출한 상황이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 지역에서 극단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 경쟁으로 향신료 가격이 크게 오르자 두 국가는 협정을 맺어 향신료 가격과 구입 비율을 조율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미 향신료를 독점하고 있던 네덜란드로서는 이러한 협정이 불만이었어요.
결국 네덜란드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합니다. 네덜란드가 개발한 향신료 재배지였던 암보이나섬(현재 인도네시아 암본섬)에 있던 영국 상관 주재원 18명을 불법 침입 명목으로 체포하고 9명을 사형해요. 영국으로선 해상 강국이던 네덜란드에 저항하기 힘들어 당분간 인도 쪽으로 진출에 집중하게 됩니다.
◇"영국이 점령한 항구에는 영국 화물선만"
한편 영국에서는 1651년 '항해 조례'를 발표했어요. 영국이 점령한 항구에 들어오는 모든 화물선은 영국 소유라고 밝힌 거죠. 네덜란드 선박이 영국 해협을 건너지 못하게 해 해상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뚜렷했습니다. 이렇게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이듬해 제1차 영란전쟁이 벌어져요. 네덜란드가 한자어로는 화란인데 여기서 '란(蘭)'을 따온 거예요.
네덜란드 해군은 초반에 승리를 거듭하며 영국을 위협했지만 영국은 장비를 잘 갖춘 대형 군함을 이용해 네덜란드에 큰 타격을 입혔어요. 생각보다 큰 손해를 입은 네덜란드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화해 조약을 맺습니다. 영국의 항해 조례를 인정하고 암보이나섬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했지요.
▲ 제2차 영란전쟁 때 네덜란드 로이테르 제독이 영국 전함 13척을 불태운 ‘메드웨이 기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그 후 양국은 화해 조약을 맺지만 몇 년 뒤 3차 전쟁이 벌어집니다. /위키피디아
그 후 영국에선 찰스 2세가 국왕에 올라 계속 네덜란드를 견제하고자 했어요. 또 네덜란드가 경영하던 뉴암스테르담(현재 뉴욕)을 공격해 차지했죠. 영국은 다시 한 번 선전포고를 해 제2차 전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또한 1차 전쟁 이후 많은 준비를 해온 상태였어요. 게다가 영국은 전쟁 중이던 1666년 집 1만3000채가 불타 버린 '런던 대화재'도 겪었어요.
특히 네덜란드 미힐 데 로이테르 지휘관은 런던 코앞의 템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국의 주력 전함을 불태우고 유유히 돌아와 영국에 큰 굴욕을 안겼습니다. 전쟁을 이어갈 수 없었던 영국은 1667년 네덜란드 브레다에서 화해합니다. 이 '브레다 조약'에서 영국은 일부 지방에 항해 조례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영국이 경영하던 동남아시아 주요 항구를 네덜란드에 내줍니다. 그 대가로 영국이 받은 곳이 바로 지금의 뉴욕이에요. 향신료 무역을 위한 항구가 신대륙 정착지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기였어요.
◇해상 강국으로 부상한 대영제국
영국이 복수를 준비하던 중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이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프랑스의 중죄인이 네덜란드로 도망가고 네덜란드가 그 죄인들을 보호해주기로 한 것이죠. 프랑스 국왕 '태양왕' 루이 14세는 영국 찰스 2세와 함께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자는 비밀 조약을 맺었어요.
이렇게 1672년 제3차 영란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영국이 우세한 적도 있었지만 뉴욕을 네덜란드에 다시 빼앗기는 등 밀리기도 했지요.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돈이었어요. 전쟁 때문에 영국 국고가 바닥나 버렸지요. 네덜란드도 프랑스까지 뛰어든 전쟁을 지속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 두 나라는 다시 화해합니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남아메리카 수리남을 확실하게 차지하는 대신 영국은 뉴욕을 돌려받았어요.
3차 전쟁 후 두 나라는 큰 변화를 겪었어요. 네덜란드는 한때 해상 열강이었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어요. 영국은 전쟁 후 명예 혁명을 겪어 왕조가 바뀌었지요.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이 돼 가톨릭 부흥 정책을 펴자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영국 의회가 반발했습니다. 의회는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새로운 왕을 세웠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때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영국 왕이 된 사람이 네덜란드의 실질적 통치자, 오렌지 공(公) 윌리엄 3세였다는 사실입니다. 윌리엄 3세는 제3차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 총사령관으로 활약하기도 했죠. 영국 국민은 한때 적국의 총사령관을 국왕으로 맞이한 거예요.
3차 전쟁 후 양국은 약 100년간 동맹 관계를 유지했지만 1780년 영국이 전쟁을 선포한 후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합니다. 그 후 3년여 동안 이어진 전쟁은 네덜란드가 항복하면서 끝나죠. 이로써 영국은 해상 강국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합니다.
☞식민 지배를 위한 동인도회사
대항해 시대 유럽 각국에서 세운 아시아 무역회사예요. 회사 우두머리가 식민지 총독을 겸하기도 했죠. 영국 동인도회사가 잘 알려져 있지만 규모는 네덜란드의 것이 더 컸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해요. 포르투갈, 프랑스, 스웨덴도 비슷한 성격이나 이름을 가진 동인도회사를 만들었어요. 일본이 우리나라에 세웠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를 따라 한 거예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8.17 종족 분쟁으로 국민 25% 떠나… 평화협정 결실 맺을까요
남수단 독립과 내전
지난 5일 남수단 대통령 살파 키르와 전 부통령이자 반군 지도자인 리에크 마차르가 평화협정을 맺었어요. 이에 따라 오랫동안 지속됐던 남수단 내전이 종지부를 찍을지 세계 언론이 집중하고 있어요. 한국도 남수단 평화를 위해 한빛부대를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파견하기도 했었지요.
남수단은 나일강 한 지류인 백(白)나일강 연안의 비옥한 토지와 열대우림을 끼고 있고 원유와 석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해 발전 가능성이 큰 국가였어요. 하지만 2011년부터 내전에 휩쓸리면서 국민이 전쟁터로 내몰리고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려왔지요. 남수단은 생긴 지 10년이 채 안 된 신생 국가인데요, 이곳의 독립과 내전 과정은 어땠는지 알아봅시다.
◇두 차례 내전으로 난민 400만명 발생
수단은 아프리카 동북부에 있는 이집트 아래에 있는 국가예요. 18세기 영국과 이집트가 공동 통치한다는 명분 아래 식민지가 됐고 1956년 독립했지요. 영국은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수단을 북부와 남부로 분리해 통치했어요. 북부에서는 기존 이슬람교와 아랍 문화를 존중했고 민족 구성이 다양했던 남부에서는 기독교와 영어를 전파했습니다.
독립 후에도 북부 지역은 아랍계 민족이 살며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고 남부 지역은 딩카, 누에르족 등 다양한 아프리카 원주민이 살며 기독교와 토착 신앙을 믿고 있었어요. 경제 여건과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북부가 전(全) 수단의 이슬람화를 추진하자 남부에서는 수단인민해방운동이 결성되고 수단 지역은 50년간 두 차례의 내전(1955~1972년, 1983~2005년)을 겪게 됩니다. 난민 약 400만 명과 사망자 약 200만 명이 발생한 비극이었지요.
결국 2011년 남수단 분리·독립 국민투표에서 국민 90% 이상이 분리·독립에 찬성해 아프리카의 54번째 독립국인 남수단공화국이 탄생합니다. 수단인민해방운동을 이끌었던 존 가랑 장군의 후계자였던 살파 키르가 남수단 초대 대통령이 됐어요. 수단인민해방운동은 초대 국회 의석수 중 90% 이상을 획득하면서 여당 세력이 되었지요.
◇독립했지만 이번엔 정부·반군 갈등
그러나 남수단이 독립했다고 갈등이 끝난 건 아니었어요. 수단과 남수단 사이 해묵은 갈등은 원유 배분 문제로 이어졌지요. 원유의 약 70%가 남수단에 매장돼 있었지만 정유 공장, 송유관 등 시설은 북부 수단이 장악하고 있어 타협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이로 인한 갈등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기가 높아졌는데 2012년 남수단이 수단에 송유관 사용료를 내기로 하는 비밀 협상을 맺으면서 일단락되었지요.
▲ 지난 5일 남수단 정부와 반군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 수도 주바에서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기뻐하고 있어요. /로이터 연합뉴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남수단 내에서 지도층 간 분란이 일어나요. 바로 얼마 전까지 이어졌던 남수단 분쟁이지요. 2013년 7월 살파 키르 대통령은 쿠데타 전력이 있던 2인자 리에크 마차르 부통령을 파면하고 내각을 해체했어요.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에 리에크 마차르 세력의 불만은 높아졌지요. 그해 12월 남수단 수도 주바에서 민족해방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는데요. 이때 살파 키르 대통령 세력과 독립 후 권력에서 밀려났던 리에크 마차르 부통령 세력 사이 무력 충돌이 발생합니다.
내전 초기 살파 키르 대통령은 리에크 마차르 부통령의 군사 쿠데타가 진압됐다고 발표했었지만 내전 지역은 수도를 넘어 북부로 확장되어가고 사상자 수는 늘어갔어요. 리에크 마차르 전 부통령을 지지하는 누에르족 출신 군인들은 종글레이주(州) 보르 지역을 장악하고 내전은 길어집니다. 살파 키르 대통령은 리에크 마차르 측의 일방적인 쿠데타라고 발표했지만 리에크 마차르 세력은 이를 부인하고 살파 키르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고 비난했어요.
◇종족 간 분쟁으로 번지면서 학살로 이어져
정부군과 반란군의 권력 갈등은 종족 간 분쟁으로 번지면서 전국적인 내분과 학살로 이어져요. 앞서 언급했듯이 남수단에는 다양한 아프리카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요. 살파 키르 대통령은 남수단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딩카족 출신이고, 리에크 마차르 전 부통령은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누에르족 출신이었어요.
두 종족은 남수단 독립을 위해 2006년 '주바 선언'으로 부족 간의 화해와 협력의 길을 모색하고 수단에 함께 대항했었지요. 그러나 독립 후 권력 쟁탈 과정에서 다시 종족 간 분쟁으로 확장된 것이에요. 상대 종족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으로 죄 없는 민간인들이 성폭력과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지요. 양측 모두 가택수색을 일삼으며 상대 종족을 살인하고 성폭행했다는 증언이 주민들을 통해 나왔어요.
또 반란군과 정부군이 전쟁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벤티우, 보르 등 유전 지대 쟁탈전을 벌이면서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내전을 피해 남수단의 국민 300만 명이 해외로 떠났어요. 남수단 인구의 4분의 1 정도 되는 숫자입니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국내를 떠도는 난민이 되었지요.
인권 침해 문제가 심각해지자 남아공, 나이지리아 등 주변 국가들은 남수단의 평화협정 체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수단은 이번 평화협정 체결을 중재하기도 했어요. 유엔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사태 해결에 적극 개입하고 있지요.
사실 이전에도 평화 협상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곧 내전이 일어나 협상이 파탄 났던 적이 많았어요. 작년 12월에 맺었던 휴전 협상은 몇 시간 만에 결렬됐지요. 이번 평화협정을 통해 정부군과 반란군은 군대를 합치고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는데요. 두 세력이 평화협정을 이행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보이고 있는 만큼 비인도적인 내란이 완전히 끝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남수단 재건 돕는 한빛부대
유엔은 신생 독립국인 남수단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2011년 ‘유엔 남수단 임무단’을 만들고 회원국에 파병을 요청했어요. 우리 정부도 2013년 1월 280여 명 규모의 ‘한빛부대(대한민국 남수단 재건지원단)’를 창설해 그해 3월 남수단에 파병했지요. 공병과 의료부대원, 경비 병력 등으로 구성된 한빛부대는 남수단 보르 지역에서 도로나 비행장·교량 등을 건설하거나 난민들에게 의료 지원 활동을 하는 등 황폐화한 남수단을 다시 일으키고 있어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8.24 의심받는 핵 포기 약속… 미·이란 갈등 다시 고조됐어요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이란과 맺은 핵 협정을 공식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이란 핵 협정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인 2015년 7월 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 등 6개국과 이란 사이에 체결된 것이에요. 이란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나라들은 이란이 받고 있던 각종 경제·금융 제재를 해제해주는 것이었지요. 미국이 핵 협정을 탈퇴한다는 것은 이란에 다시 경제·금융 제재를 가한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란은 왜 핵 개발을 하려 했을까요? 미국은 왜 경제·금융 제재를 했을까요? 이를 풀기 위해선 현재의 이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절친한 친구, 팔라비 왕조
과거 페르시아라고 불린 이란은 고대 로마에 맞설 만큼 강성한 나라였어요. 아시아에서 최초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됐지요. 널리 알려진 '페르시아'라는 이름을 이란으로 바꾼 것은 팔라비 왕조(1925~1979년) 때였어요. 팔라비 왕조 시기 이란에선 한때 쿠데타를 통한 민주화가 시도되었지만, 이란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지원으로 다시 강력한 국왕이 등장했습니다. 이후 팔라비 왕조는 미국에 우호적이었고, 중동에서 가장 서구화된 국가가 됐지요. 중동 지역 여성들은 보통 온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다녔는데, 팔라비 왕조 이란에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해요.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로 1974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기도 했어요. 서울에 '테헤란로'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예요. 이란 수도 테헤란의 시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각자 이름을 본뜬 도로를 건설하기로 약속했고, 그 결과 이란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 서울엔 '테헤란로'가 생겼죠.
▲ 지난 5월 9일(현지 시각) 이란 테헤란의 의사당에서 국회의원들이 미국의 이란 핵 협정 탈퇴 발표를 비난하며 종이로 만든 성조기와 핵 협정안 등을 불태우고 있는 모습. /AP 연합뉴스
하지만 팔라비 왕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강하게 통제했어요. 경제 수준은 높았지만 빈부 격차가 심했고, 노골적인 친미 정책을 추진해 저항 운동이 나타났어요. 결국 1979년 호메이니라는 시아파 이슬람 사제를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인 팔라비 왕조는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갖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만들어집니다. 이후 이란은 팔라비 왕조 때 서구화된 모습은 사라지고, 이슬람 율법에 충실히 따르는 사회가 됐죠. 이슬람 율법을 지나치게 강요하다 보니 인권 탄압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스웨덴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란 시민들이 다른 참가자들과 악수했다는 이유만으로 99대 채찍질을 선고받았어요. 이란에선 친족 이외 이성과 악수하는 것은 부적절한 성적 행위로 간주된다고 해요.
이란 혁명으로 이란의 군사력이 쇠퇴하자,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해 전쟁을 벌였어요. 이 전쟁으로 이란은 큰 피해를 입었죠. 미국은 'USS 빈센스' 함선을 바다에 파견했는데, 이란 민간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격추했어요. 이 사건으로 많은 민간인이 죽어 이란 내 반미(反美) 감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란의 핵 개발과 국제사회 제재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은 수니파 이슬람 국가를 비롯한 주변 국가와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을 개발하기 시작했어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이란의 핵 개발이 국제사회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이란에 대해 경제적·금융적 제재를 가하기로 해요. 다른 국가들에 이란과의 모든 거래를 중단하도록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또한 2002년 미국 부시 대통령은 이란·이라크·북한을 '악(惡)의 축'으로 선포하고, 이 국가들의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렇게 안 좋던 미국·이란 관계는 2015년 7월 미국 등 6개국이 이란과 핵 협정을 맺으며 호전됐어요. 이란 핵 협정 핵심은 '이란은 농축우라늄·플루토늄 생산을 중단하고, 유엔은 이란 제재를 푼다'는 것이었어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이 의심되는 모든 시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죠. 핵을 평화적 이유로 개발하는지, 무기로 개발하는지 국제사회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한 겁니다. 대신 이란은 사찰에서 핵 협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확인되면 경제·금융 제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요. 이행하지 않을 땐 경제 제재를 다시 받는다는 내용도 포함됐어요.
하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핵 협정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해왔어요. 그가 가장 문제 삼은 것은 우라늄 농축 시설 등에 대한 제한을 10~15년 뒤에 풀어주는 조항이었어요. 트럼프 대통령은 이 조항에 대해 "사실상 이 합의는 이란이 계속 우라늄을 농축해서 시간이 흐르면 핵무기를 만들 수준까지 도달하도록 허락해주는 것"이라고 비판했어요. 전문가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이런 협정을 체결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진보적 관점에서 이란이 15년에 걸쳐 태도가 서서히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어요.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이란 핵 협정에 대해 "많은 돈을 주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파기할 수도 있다고 했죠. 지난 5월 초엔 이란과 사이가 안 좋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가 "이란이 핵 협정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자국 정보기관 모사드가 입수한 증거를 공개하기도 했죠. 이렇게 국제사회 일부에서 이란에 대한 의심이 커지자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주장하던 대로 핵 협정을 탈퇴해버린 것입니다. 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이런 결정이 세계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어요.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1979년 11월 사형선고 받은 팔라비 왕조 국왕을 미국이 보호해주자 이란이 미 대사관을 습격해 직원 50여 명을 인질로 삼은 사건이에요. 갈등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무렵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에 정신이 없던 이란이 미국에 완화된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인질 사건은 희생자 없이 해결됐어요. 하지만 인질들은 444일간 갇혀 고통을 받았죠. 당시 잡히지 않고 도망친 대사관 직원 6명에 대한 이야기는 벤 애플렉 감독 영화 ‘아르고’로 만들어졌어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8.31 오스만제국의 최고 지도자… 군·정치 절대권력 가졌죠
술탄
▲ 셀림 1세. /위키피디아
최근 터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국내 소비자들이 터키에서 고급 브랜드 제품을 사들이는 일이 벌어졌죠. 미국의 관세 제재에도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이 반미 정책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아 터키발(發) 금융 위기를 우려하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터키 정치체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고 2033년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하도록 개헌을 진행했어요. 개헌 후 지난 6월 대통령에 당선돼 '21세기 술탄'이라고 불리기도 했지요. 터키의 전신 국가인 오스만제국과 그 지도자 술탄의 유래에 대해 알아볼까요?
◇술탄, 정치적·군사적 권위를 갖다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를 뜻하는 말은 원래 '칼리프(무함마드의 대리인)'였어요. 이슬람교를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무함마드를 대신할 정치, 군사, 종교적 통치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한 것이지요. 4대 칼리프 이후 우마이야왕조(661~750)가 칼리프직을 세습했어요. 이후 아바스왕조(750~1258)가 우마이야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직을 가져오지요. 아바스왕조의 번영기는 길지 않았어요. 곧 주변에 파티마왕조, 부와이왕조 등 강력한 이슬람 국가들이 세워지면서 이슬람 세계에 미치는 칼리프의 권력도 약해집니다.
10세기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여러 왕조에서 맘루크(백인 노예 용병) 역할을 하며 이슬람교로 개종해온 셀주크튀르크는 1038년 이란 동부를 차지하게 돼요. 1055년 셀주크튀르크의 지도자였던 토그릴 베그는 아바스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에 입성합니다. 셀주크튀르크는 당시 아바스왕조에 내정 간섭을 하고 있던 부와이왕조를 타도하고 칼리프로부터 '술탄(Sultan)'이라는 칭호를 받아요. '술탄'이라는 말은 원래 쿠란에 '도덕적 책임과 권위를 수행하는 통치자의 역할'을 뜻하고, 아랍어 어원으로는 '권위'를 뜻해요. 즉, 칼리프로부터 이슬람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나누어 받은 것이지요. 이때부터 이슬람 세계에서 칼리프는 종교적 권위만 갖는 지배자, 술탄은 정치적·군사적 권위를 갖는 지배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토그릴 베그 이후 다른 술탄들은 터키, 이란, 아라비아반도 지역을 다스리면서 이슬람 세계 지배자의 칭호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인도에서는 13세기에 이슬람 왕국이었던 델리술탄 왕조(1206~1526)가 술탄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집트 지역의 아이유브왕조(1169∼1250)와 그 뒤를 이은 맘루크왕조(1250~1517)도 술탄이 최고 지도자였어요.
◇오스만제국의 '술탄 칼리프'
술탄 칭호를 받은 후 셀주크튀르크는 국경을 접했던 비잔티움 제국과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어요. 셀주크튀르크는 소아시아 지역과 동부 지중해 쪽으로 나아가며 1071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해요. 이에 중세 유럽 세계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는데요, 길고 긴 200여 년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셀주크튀르크는 세력이 매우 약해져요. 13세기에 몽골인들의 원정으로 아바스왕조와 셀주크튀르크가 무너지고 이란, 이라크 지역에는 몽골 칸이 다스리는 일한국(1259~1336)이 세워집니다. 아바스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유명무실했던 칼리프는 맥이 끊기는 듯하였으나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이어가요. 당시 이집트 지역의 맘루크왕조가 이슬람 왕조로서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마지막 칼리프의 숙부인 아부 아바스를 칼리프로 추대한 것이지요. 이후 250여 년간 카이로에서 13명의 칼리프가 지위를 이어갑니다.
▲ 30년 장기 집권 토대를 마련한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21세기 술탄’이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16세기 초 셀림 1세 때부터 종교적 권위를 갖는 칼리프를 동시에 수행했어요. /EPA 연합뉴스
한편 셀주크튀르크 멸망 후 튀르크인들은 1299년 소아시아에 국가를 세우는데 이 국가가 바로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입니다. 16세기 초 군림했던 술탄 셀림 1세는 영토 확장 과정에서 맘루크왕조를 멸망시켜요. 이때 맘루크왕조 안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칼리프는 칼리프직을 오스만제국의 셀림 1세에게 양도하게 됩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셀림 1세부터 술탄과 칼리프를 동시에 수행했으며 사실 이전부터 오스만제국 안에서 칼리프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술탄 칭호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18세기부터는 오스만제국의 국력이 쇠퇴하자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지지를 얻기 위해 술탄 칼리프라는 명칭을 외교 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터키인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1920년 군사령관이었던 무스타파 케말은 술탄 전제 왕정을 없애기 위해 선거를 통한 새로운 터키 의회를 수립하기로 해요. 바로 대국민회의(Grand National Assembly·GNA)가 개설되고 무스타파 케말은 대국민회의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1922년 11월에 술탄 제도를 폐지하고, 1923년 7월에는 대국민회의를 유일한 터키의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로잔 조약을 연합국과 체결해요. 드디어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것이지요. 술탄 정부를 없애고 터키에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타튀르크'라는 칭호까지 받았어요.
현재 터키에는 법적으로 술탄도 칼리프도 존재하지 않지만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술탄과 같은 제왕적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것 같아요. 공식적으로 터키에서 술탄은 더 이상 정치적 수장이 아니지만 현재에도 술탄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있는데요, 바로 아라비아반도의 오만 왕국, 보르네오섬의 브루나이 왕국, 말레이시아 등이랍니다.
☞술탄이 통치하는 국가 브루나이
브루나이는 보르네오섬 북서쪽에 위치한 이슬람 국가예요. 예전에는 힌두교의 마자파힛 왕조 지배 아래 있다가 15세기에 브루나이 이슬람 왕국으로 독립했어요. 지금도 절대적인 권력의 국왕, 즉 술탄이 다스리고 있답니다. 브루나이의 술탄은 헌법에 따라 총리·국방장관·재무장관을 겸임하며, 입법부와 의회, 사법부도 장악하고 있어요. 정치 참여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국민의 25%를 공무원으로 채용하고 이들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유한 생활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9.07 노벨상 받은 '민주화의 상징'… 소수민족 탄압에는 침묵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얼마 전 국제사회에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취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어요. 최근 유엔이 "미얀마군이 인종 청소를 위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대량 학살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에요. 난처해진 노벨위원회 측은 "노벨위원회 임무는 상을 받은 후 수상자의 일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다. 수상자는 스스로 명성을 지켜야 한다"며 노벨상을 박탈하지 않겠다고 밝혔어요. 애초에 아웅산 수지는 왜 유명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됐을까요? 그 과정을 알려면 미얀마의 독립부터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알아야 해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독재자
미얀마는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어요. 하지만 인도와 국경 침범 문제로 영국과 전쟁을 벌인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지요. 이때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던 사람이 아웅산 장군이에요. 그는 버마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과 손잡고 영국군과 싸워 영국군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어요. 일본이 철수하고 영국군이 다시 들어오자 독립 협상을 위해 직접 영국 정부와 담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가 민주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암살을 당해요. 독립 영웅의 죽음 앞에 온 미얀마가 슬픔과 혼란에 빠졌어요. 다수인 버마족과 소수민족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정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시간이 계속됐지요.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던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에야 혼란이 가라앉았습니다.
네 윈은 나라 이름을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고치고 새 정부를 수립해요. 극도로 폐쇄적인 외교를 펼쳐 냉전 시기에도 국제 분쟁을 겪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국내 혼란은 더 심해졌습니다. 소수민족들을 억압하고, 불교를 강요하며 다른 종교를 탄압했어요.
네 윈은 미신에 관심이 많아 기이한 화폐 정책을 펼친 것으로도 악명 높아요. 미얀마 화폐 단위는 '차트'인데 그의 75번째 생일을 기념해 '75차트'라는 화폐를 발행하는가 하면, '9'가 행운의 숫자라는 소리를 듣고는 '90차트' 화폐를 만들기도 했어요. 이런 화폐 정책은 미얀마 경제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어요.
◇8888항쟁이 바꾼 아웅산 수지의 삶
이 시기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찻집에선 큰 패싸움이 벌어집니다. 주도자 중 한 명은 처벌 없이 풀려났어요. 아버지가 정부 고위 관리였기 때문이었죠. 미얀마 학생들은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40명 넘는 학생을 붙잡았어요. 그 과정에서 한 학생이 질식사하자 전국적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네 윈은 "국민이 시위에 나선다면 군인들의 총구는 국민을 향할 것이다"라며 위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8일 학생과 스님들이 앞장서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8888항쟁'입니다. 시민들은 물론, 공무원과 군인들까지도 참가했어요. 정부는 네 윈 말대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상자 3000명이 발생합니다. 시위대 또한 돌과 자전거 바큇살까지 동원해 군대에 맞섰다고 해요. 이 격렬한 시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아웅산 수지'도 참여했습니다.
▲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방관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맞닥뜨리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명예가 떨어지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아웅산 수지는 아웅산 장군의 딸입니다. 15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고 정치학을 공부했지요. 거기서 만난 영국인과 결혼까지 해 일본 교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어요.
아웅산 수지의 인생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8888항쟁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아닌 미얀마 연방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나갔어요. 미얀마 국민은 8888항쟁 이후 있었던 총선에서 독립 영웅의 딸이자, 행복한 가정을 뒤로한 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아웅산 수지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요. NLD는 80% 넘는 의석을 가져갔지요.
그러나 군부 세력은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아웅산 수지를 가택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때부터 아웅산 수지는 2010년까지 22년간 세 차례(전체 15년) 집에 갇혀 살았어요. 그러다 1991년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당시에도 집에 갇혀 있었기에 남편과 아들이 대신 상을 받았지요.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식에 가지 못했어요. 사실 군부 세력은 아웅산 수지에게 장례식에 가라고 설득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 번 출국하면 다시는 미얀마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아웅산 수지가 눈물을 머금고 거부한 것이지요.
◇스님들의 샤프론 혁명과 미얀마 정권교체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한 미얀마 정부는 오랫동안 반정부 시위에 시달려야 했어요. 또 서방 국가들의 제재로 경제난을 겪었죠.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인상돼 국민 생활은 어려워졌지요. 2007년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미얀마의 스님들이 국민 수만 명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합니다. 이 시위를 미얀마 스님들이 입는 옷 색깔을 따서 '샤프론 혁명'이라고 불러요. 군부 정권은 또다시 폭력을 사용합니다. 역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미얀마를 여행 중이던 외국인이 다치기도 했죠. 군부는 시위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인터넷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결국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얀마 정부에 특사를 파견해요. 폭력적인 진압은 금지됐고 아웅산 수지의 가택 연금도 풀렸습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은 그녀가 권력을 잡을 수 없도록 헌법을 고칩니다. 직계가족이나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도록 한 것이에요. 그럼에도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NLD는 대부분의 의석을 가져가고 대통령을 배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아웅산 수지가 오랜 기간의 가택 연금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같은 미얀마 국민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지켜보고만 있던 것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의 아웅산 수지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1983년 북한 인민무력부가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노리고 아웅산 묘소에 폭탄을 설치, 폭파한 사건이에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늦게 도착해 화를 피했지만 장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어요. 자국의 독립 영웅 아웅산의 묘소를 폭파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미얀마는 북한과 국교를 끊었습니다.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9.14 이스라엘에서는 왜 바그너 음악을 안 들을까요?
오페라 걸작 남긴 당대 최고 작곡가… 유대인 혐오하는 글 쓰기도 했어요
바그너에 심취한 독재자 히틀러, 나치 선전하는 데 그의 작품 이용했죠
▲ 바그너
얼마 전 이스라엘 공영 라디오 방송에서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 음악을 틀었다가 청취자들 항의가 빗발쳤어요. 결국 방송사는 바그너 곡을 틀지 않겠다며 사과까지 했지요. 이스라엘에선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는 건 금기에 가깝거든요.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는 바그너 음악을 아주 좋아해, 나치를 선전하는 데 이용하곤 했어요. 하지만 바그너는 히틀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서 그와 만난 적도 없어요. 대체 바그너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당대 최고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는 18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어요. 바그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새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새아버지 루트비히 가이어는 연극배우이자 시인, 가수였어요. 가족들 모두 연극을 좋아했어서 바그너도 어린 시절부터 극작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는 열여덟 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음악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어요. 특히 바그너는 오페라 작곡에 빠졌는데요, 작곡뿐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 오페라 대사들을 직접 쓰곤 했어요. 또 정치와 철학 에세이도 많이 남겼지요.
바그너는 당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할 정도로 당대 최고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어요. 바그너가 음악사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한데요,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은 지금도 걸작으로 평가받는답니다.
바그너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지만, 그가 쓴 글이나 오페라에는 유대인을 미워하는 감정이 묻어나요. 1850년 바그너가 발표한 글에는 "유대인은 예술적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문장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에세이에서는 "항상 유대인과 만나면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낀다"고도 했어요.
바그너 오페라 중 하나인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는 이러한 생각이 반영돼 있어요. 극 중 인물 한스 작스는 "신성로마제국이 사라져도 신성한 독일 예술은 살아남을 것이니 진정한 독일 정신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해요. 독일인이 하나로 뭉치는 걸 뜻하는 '독일 정신'은 훗날 히틀러가 강조했던 사상이에요. 또 다른 등장인물 베크메서는 극 중에서 유대인을 풍자하고 유대교 성가를 웃음거리로 삼아 바그너가 유대인을 싫어한다는 의심이 더 짙어졌지요.
◇바그너를 사랑했던 히틀러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바그너에게 친근함을 느꼈을까요? 히틀러는 바그너 오페라의 '광팬'이 됐어요. 바그너가 쓴 글도 열심히 읽었지요. 히틀러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를 보고 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리엔치'는 14세기 로마 귀족에 맞서 싸우는 시민 영웅 리엔치에 관한 이야기예요. 과거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는 리엔치 모습에 히틀러가 깊이 공감했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와요. 히틀러는 게르만족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게르만족을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 유대인을 학살했던 독재자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히틀러는 1923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 즉 나치당 집회에서 바그너를 본받아야 할 인물로 꼽고 다음과 같이 말해요. "바그너라는 예술가를 우리가 위대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가 모든 작품에서 영웅적인 민중, 독일 정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바그너 오페라에서 드러나는 독일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독일 민족을 똘똘 뭉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거죠. 뉘른베르크에서 매년 나치 정당대회가 열릴 때마다 바그너 오페라가 상연됐고, 개막식에서는 '리엔치' 서곡이 항상 연주됐어요.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을 통해 독일 민족이 우수하다고 알리고 이를 과시하려 했어요.
독일 바이에른주 소도시 바이로이트에서는 1876년부터 매년 여름 바그너 오페라를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열고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 축제지요. 바그너가 바이에른 왕국 루트비히 2세 지원을 받아 오페라 극장을 세우고 '니벨룽의 반지'를 연주한 게 시초예요. 현재까지도 바그너 작품만을 선보이는 원칙을 지키고 있어요.
바그너가 죽고 난 후엔 그의 가족들이 페스티벌을 이끌었어요. 바그너의 아내, 아들에 이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맡게 된 며느리 위니프레드는 히틀러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해요.
히틀러는 매년 여름이 되면 바그너 음악을 듣기 위해 나치 고위 당원들과 함께 바이로이트를 찾았어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엔 군인들을 위로한다며 그들을 바이로이트 축제에 보내주기도 했지요. 음악 축제가 나치의 전쟁을 돕는 역할을 한 셈이에요.
일부에선 히틀러가 바그너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건 취향일 뿐, 바그너 작품을 유대인 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긴 힘들다고 말해요. 이미 1883년에 세상을 떠난 바그너가 나치의 만행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이스라엘에선 히틀러는 물론이고 바그너에 대해서도 반감이 심했죠. 몇몇 음악인들이 바그너 곡을 연주하려 할 때마다 청중이 항의하며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어요. 2011년 이스라엘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국민적 비난을 무릅쓰고 독일에서 바그너 곡을 연주한 적이 있어요. 당시 지휘자 로베르토 파테르노스트로는 "바그너 사상과 반유대주의(유대인에 적대적인 이념이나 행위)는 끔찍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그너는 위대한 작곡가였다"면서 바그너라는 인물과 그의 음악 사이에 명백한 선을 그었습니다.
히틀러가 바그너 음악에 빠져들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을 개인의 취향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은 끝까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까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09.21 13세기 여몽 연합군 일본 정벌, 태풍 때문에 실패했어요
원에 항복한 고려도 전쟁에 참가, 두 번 원정 모두 풍랑에 배 침몰
전세 역전한 日, 가슴 쓸어내렸어요… 이 태풍을 후에 '가미카제'라 불렀어요
지난 15일 수퍼 태풍 '망쿳'이 필리핀과 홍콩, 중국 남부를 휩쓸고 지나갔어요. 필리핀이 가장 피해가 컸어요. 필리핀에서만 최소 64명이 목숨을 잃고 45명이 행방불명됐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남동부를 강타해 사람들이 10명 넘게 숨졌어요. 미국 정부가 허리케인이 지나는 길목에 사는 사람들 150만명에게 대피하라고 경고했지만, 자연의 위력을 이기진 못했죠.
때로는 인간이 손쓸 수 없는 자연재해가 세계사 흐름을 통째로 바꿔버리기도 한답니다. 일본을 전쟁 위기에서 구해준 태풍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
13세기 후반 쿠빌라이 칸이 몽골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바꾸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어요. 몽골 제국의 전성기였죠.
몽골 제국이 힘을 얻기 전, 중국 대륙의 주인이었던 송나라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 제국에 중국 대륙 남쪽으로 밀려난 상태였어요. '남송'이라고 해요. 쿠빌라이는 남송을 마저 정복하고 싶어 했어요. 그는 우선 남송과 가깝게 지내던 일본을 몽골 제국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몽골 제국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쿠빌라이는 일본을 괘씸하게 여겨, 몽골 제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는 고려에 "길을 안내하라"고 했어요.
고려는 고민에 빠졌어요. 고려는 몽골 제국 침략에 맞서 30년 동안 싸우다가 항복한 터라, 몽골 제국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고려 정부는 몽골 제국 사신들에게 잔뜩 겁을 줬어요. 바다가 험하고 풍랑이 심해 군대가 일본까지 무사히 가기 힘들다고요. 그래도 쿠빌라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고려는 하는 수 없이 일본 남부 규슈까지 가는 바닷길을 몽골 제국에 알려줬어요.
◇여몽 연합군 덮친 태풍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벼르는 중에도, 일본은 쿠빌라이가 보낸 외교 문서와 사신을 모두 무시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나라 군대가 정말로 쳐들어올까 봐 신에게 계속 기도를 올렸어요.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도 일본이 제대로 답하지 않자, 마침내 쿠빌라이는 전쟁을 결심했어요. 고려에 전쟁 물자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지요. 고려는 몽골의 독촉에 쫓겨 4개월간 일본 원정에 쓸 군함 900척을 만들었어요. 몽골군 2만5000명, 고려군 1만5000명이 모인 '여몽 연합군'이 생겼죠
▲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군함을 이끌고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어요. 그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쳐 연합군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일본에선 이 바람을 신이 보냈다고 믿었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274년 여몽 연합군이 중국 남부 광저우를 출발해 일본 쓰시마섬으로 향했어요. 1차 원정이 시작된 거죠. 연합군이 섬을 점령하는 데 두 시간도 채 안 걸렸다고 해요. 연합군은 쓰시마섬을 점령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일본 남부 규슈에 상륙했어요. 일본이 저항했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여몽 연합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어요. 일본은 충격에 빠졌어요.
승리를 이어가던 연합군은 병사들을 쉬게 해주려고 바다에 정박한 함대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연합군 함대가 닻을 내리고 있던 하카타 만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쳤어요. 하룻밤 새 군함 200척이 침몰하고 수없이 많은 병사가 바닷속으로 사라졌어요. 여몽 연합군은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요.
◇신이 보낸 바람일까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가 연합군을 물리치도록 신이 태풍을 보내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몽 연합군을 덮친 태풍에 '가미카제(神風·신풍)'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신이 보낸 바람'이라는 뜻이죠.
1차 원정에 실패한 쿠빌라이는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어요. 이번엔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일본은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 30여 명을 모조리 처형했어요. 몽골은 그런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번 사신단을 보냈어요. 일본은 두 번째 사신단도 모조리 죽였어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가 격분해 2차 원정을 준비했어요. 고려가 "1차 원정에서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1281년 2차 원정에 나선 여몽 연합군은 모두 15만명으로 1차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컸어요. 하지만 일본은 지난번의 패배를 교훈 삼아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어요. 일본 정부가 전국에서 불러 모은 무사들이 여몽 연합군에 맞섰어요.
이때 연합군이 머무르던 규슈 북서쪽 다카시마(鷹島) 섬에 다시 한 번 태풍이 불어왔어요. 2000척이나 되는 군함이 이리저리 부딪쳐 아비규환이 벌어졌어요. 병사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가까스로 육지에 도달해 산속에 숨었어요. 살아남은 자들에게 닥친 운명은 가혹했어요. 일본에 붙잡힌 여몽 연합군 병사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됐어요.
◇모두에게 큰 상처 남긴 정벌
전쟁을 두 번이나 겪으며 몽골도, 고려도, 일본도 모두가 상처를 입었어요. 몽골은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해 나라가 휘청했어요. 고려는 억지로 전쟁에 나가느라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 고생했어요. 연합군을 막아낸 일본도 자기 땅을 지켰을 뿐 전리품은 없었어요. 전쟁에 참가한 무사들이 갈수록 가난해져 몰락하고, 무사들을 지휘하던 막부(일본 특유의 무사 정부)도 무너졌어요.
일본은 이후 '가미카제'라는 말을 한 번 더 역사 속에서 불러냈어요. 몽골 침략으로부터 650년 정도 흐른 1930~40년대, 이번엔 일본이 군대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침공했어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일본군을 반격해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어지자, 일본은 자기네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연합군 항공모함에 비행기를 몰고 가서 부딪쳐 '인간 폭탄'이 되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면서 이 자살 특공대에게 옛날 여몽 연합군을 물리쳤던 '가미카제'란 이름을 붙였지요.
하지만 전세를 뒤집진 못했어요. 신도 일본의 무리한 침략 전쟁까진 도와주진 않았어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0.04 동방정책으로 물꼬 터… 20년후 소련 설득해 통일 이뤘죠
[독일 통일을 이끈 지도자들]
1969년 공산권과 교류한 브란트 총리
동·서독 UN 동시 가입해 화해 분위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특별수행단 200여 명이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았지요.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9월 평양 공동선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한때 분단국가였던 독일도 통일 전에는 양국 정상 간 교류가 있었답니다. 1989년 12월 동독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동독과 서독의 정상회담은 통일 물꼬를 튼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Brandt·1913~1992)와 헬무트 콜(Kohl·1930~2017)의 역할도 컸습니다. 독일은 어떻게 분단됐고 통일을 이끌어내기까지 서독 정상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동서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 독일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했어요. 서북부는 프랑스, 중앙부는 영국, 남부는 미국, 동부는 소련이 점령했지요. 소련은 점령하고 있던 동독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 했고 이듬해부터 미국과 소련이 대립해 냉전이 시작됐지요. 미국은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서독을 포함해 서부 유럽을 하나의 세력으로 합치려 했어요.
▲ 서독 총리 헬무트 콜 모습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현재 독일 수도 베를린은 소련이 점령했던 동독 중심부에 있었는데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과 서방 3국(미국·영국·프랑스)이 관할하는 서베를린으로 나뉘었어요. 1948년 소련과 서방 3국 사이가 나빠지면서 소련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이어주는 모든 교통로를 막아버렸어요. 서베를린을 동독 관할로 흡수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지요. 이를 '베를린 봉쇄'라고 합니다. 이때 서방 3국은 서베를린에 있는 시민 약 250만명에게 비행기로 생필품을 전달하며 대항했어요.
그 후 봉쇄는 풀렸으나 베를린은 동서로 완전히 분열됐고 서베를린은 마치 동독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되었지요. 1949년 미국·영국·프랑스가 점령한 곳에는 민주주의 국가인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소련이 점령한 곳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세워지며 독일이 분단국가가 되었어요.
이후 동독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더 나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고 했어요. 젊은 노동자가 자꾸 빠져나가자 동독 정부도 고민이 많았지요. 동독에서는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나 되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기로 합니다. 장벽을 쌓은 후엔 허가받은 사람만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이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동독 주민들의 시위와 무너진 장벽
동독과 서독 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때는 1969년이었어요. 당시 서독 총리 브란트가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외교 정책인 '동방 정책'을 발표했어요. 브란트 총리는 동독이나 소련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맺었어요. 또 '동·서독 기본조약'을 맺어 방송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동·서독 주민들이 벽 위에 올라가 이를 기념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973년 9월엔 국제연합(UN)에 동·서독이 동시에 가입해 서로 존재를 인정했어요. 1985년 소련에서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돼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유럽에 민주화 바람이 불게 되지요. 그 바람이 동독에도 불어오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점점 더 많이 넘어갔어요. 동독 정부가 국제연합 회원국이 되면서 시민들의 거주 이전 자유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서독으로의 이주 신청도 허용해야 했죠. 또 소련 고르바초프와 달리 동독 에리히 호네커 정권은 개혁을 거부해 이에 실망해 떠나는 동독 주민이 더욱 많아졌어요.
1989년 상반기에만 이주 신청이 12만5000건을 넘겼다고 해요. 결국 동독 주민들은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시위로 나타냅니다. 1989년 9월 4일 공업 도시 라이프치히에서는 '월요 시위'가 시작돼 시민 1200명이 모였어요. 이후 시위는 매주 월요일마다 이어져 전국으로 번졌지요. 이 시위로 동독 호네커 서기장은 쫓겨났어요. 하지만 시위 열기는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11월엔 시위대가 100만명대로 늘어났어요.
마침내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됐어요. 분단의 상징이었던 이 거대한 장벽은 동시에 독일 통일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통일 논의에 속도가 붙었거든요.
◇통일 향한 동독의 변화 도운 서독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 연방식 통일국가(동독·서독 각각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하나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10단계 통일 방안'을 내놓았어요. 같은 해 12월 18일 콜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 드레스덴을 찾았을 때 동독 주민들이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콜 총리를 환영했어요. 콜 총리는 다음 날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연설을 했고 동독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동·서독 정상회담 이후 통일로 향하는 여정은 더욱 빨라졌어요.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시민들의 여행·언론·정보·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지하라고 요구했어요. 동독 한스 모드로(Modrow·1928~) 총리는 자유·평등·비밀·보통선거의 4대 원칙을 바탕으로 한 선거법을 만들었지요. 또 시장경제에 따른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헌법과 형법도 민주적으로 개정했어요. 물론 서독 정부는 동독의 개혁을 돕기 위해 물적·인적 지원을 했고요.
콜은 독일 통일을 위해 통일에 반대하는 주변 국가들도 설득해야 했어요. 특히 소련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콜 정부는 소련에 2억200만마르크어치 식료품과 생필품을 보내는 등 경제적으로 지원했죠. 또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소련군 35만명이 복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서독에서 부담했지요.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 1990년 8월 31일 동독과 서독 사이에 통일 조약이 맺어집니다. 그해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선포되지요. 총성 없는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은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0.05 헤어진 지 69년… 양안, 정통성 놓고 여전히 대립중이죠
중화인민공화국 탄생(1949)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날로 거세지고 있어요. 무역을 둘러싼 갈등에서 시작해 이제는 군사 분야에서도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요. 특히 최근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기로 결정하자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어요. 중국은 왜 대만에 무기를 파는 데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을까요? 답은 역사 속에 있어요.
◇중국 국민당·공산당의 1차 합작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중국에서는 아시아 최초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등장해요. 3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청나라가 멸망하고 국민이 주권을 가진 근대국가가 들어선 것이지요. 이 사건을 신해혁명(1911)이라고 합니다. 혁명 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화민국을 지키려 노력한 정당이 중국 국민당입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등장한 뒤에도, '군벌'이라고 하는 독립 무장 세력이 중국 곳곳에서 청나라 땅을 나누어 다스리며 활개를 쳤어요. 혼란스러운 시대였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혁명가들이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도시 노동자들이 호응했지요. 중국 국민당이 중화민국을 세운 지 9년 뒤, 혁명가들이 상하이에 모여 중국 공산당을 창당합니다.
처음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군벌들이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고, 힘을 합쳐 군벌을 물리치려 했어요. 이를 제1차 국·공 합작이라고 합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남쪽 군벌들을 차례로 제압하는 데 성공했어요.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 격인 소련이 이들을 밀어줬지요.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조금씩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국민당이 공산당보다 컸지만, 공산당이 점점 세력을 키워 국민당을 이끄는 장제스(蔣介石)를 위협할 정도가 됐어요. 그러자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을 공격합니다. 공산당은 큰 피해를 보지요. 이어 장제스는 베이징을 점령해 중국 본토를 통일해요.
◇대장정 나선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의 공격으로 피해를 본 공산당은 마오쩌둥(毛澤東)을 중심으로 중국 곳곳에 자기들이 통치하는 지역을 세우고, 넓혀갔어요. 이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지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기 위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했어요.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분열도 일어났어요. 중국 국민당도 공산당을 계속 공격했고요.
하지만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맞서 공산당을 지켜냅니다. 살아남은 공산당을 이끌고, 추격해오는 국민당에 쫓기면서, 중국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1만 5000㎞를 이동하는 데 성공한 거예요. 이 행군을 대장정이라고 부르는데요, 산 18곳을 넘고 강 24곳을 건너는 행군에 많은 중국 청년이 감명받아 공산당에 들어갔어요.
▲ 1945년 9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왼쪽)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이 나란히 서 있어요. /게티이 미지코리아
국민당과 공산당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던 이 시기는 일본이 침략 전쟁을 확대하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고 본토를 넘봤어요. 중국 국민은 중국 정부와 국민당이 일본에 대항해 싸우길 바랐지만,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일본보다 공산당이 중국에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군벌 출신 부하 장쉐량이 이 점에 불만을 품고 장제스를 감금합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일본과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요구했고 결국 장제스는 다시 한 번 공산당과 손잡고 일본에 대항해 싸웠지요. 이 사건이 제2차 국·공 합작입니다.
◇중일전쟁 승리와 국공 내전
1937년 일본이 본격적으로 본토 침략을 시작해 중일전쟁이 일어났어요. 중국은 큰 피해를 보았지요. 전쟁이 끝난 뒤 국민당 정부가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도 계속됐고요. 결국 미국의 중재에도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시작됐어요.
내전 초기엔 국민당이 우세했어요. 국민당은 미국 지원을 받아 병력도 장비도 월등했거든요. 하지만 예전처럼 공산당을 압도하지는 못했어요. 공산당이 그동안 세력을 키워왔기 때문이었어요. 국민당 내부의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 국민의 불신도 심각했어요. 미국이 공산당과 싸우라고 국민당에 물자를 대줬는데, 그게 공산당에 흘러들 정도였어요.
국민당은 공산당에 밀리기 시작합니다. 중국 본토 전체를 공산당이 차지하자, 장제스와 국민당은 대만으로 옮겨갔어요. 중국 본토를 통일한 공산당은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고요. 이게 바로 지금의 중국이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양안 문제
사실 대만의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이에요. 대만은 중화민국을 이루는 가장 큰 섬 이름이죠.
중국 본토를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는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민당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어요. 하지만 커다란 본토를 되찾기는 점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 정세도 바뀌었어요. 1970년대가 되자,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미국과 중국이 수교했어요. 국제연합(UN) 상임이사국 지위도 대만이 아닌 중국으로 넘어갔지요. 뒤이어 일본과 한국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했어요.
중국이 거대해진 지금도, 중국과 대만 사이엔 어느 쪽이 정통성을 가진 정부인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어요. 서로 자기들이 정통이라 주장하고 있지요.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팔자 중국이 발끈한 것도 그래서예요. 중국과 대만의 이런 복잡한 관계를 '양안 문제'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외교 원칙이 '하나의 중국'이에요. 중국 본토, 대만, 홍콩, 마카오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통 정부는 하나여야 한다는 사상이죠.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대만)과 수교하고자 하는 나라는 둘 중 한 정부하고만 할 수 있으며 다른 정부는 중국 정식 정부로 볼 수 없단 거예요.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자신과 외교 관계를 맺는 나라들에 대만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해왔어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0.12 해양 제국의 두 얼굴… 엄청난 富 뒤에 노예 무역 있었죠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
최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15세기 '대항해 시대' 역사를 다룬 '발견의 박물관'을 세우는 일을 두고 논란이 일었어요. 포르투갈은 15세기에 적극적으로 해상 진출에 뛰어들어 여러 식민지를 세웠는데요, 덕분에 일찍이 노예무역과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큰 경제 성장을 이뤘어요.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길이길이 기억하고 싶은 황금기겠지요.
하지만 한쪽에선 해당 박물관이 식민지 약탈 시대에 포르투갈이 저지른 대량 학살이나 노예제를 미화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어요. 또 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를 '발견'했다고 보는 시각 자체가 유럽 중심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나왔지요.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어떻게 해양 대국으로 발전했을까요?
◇항해의 왕자, 엔히크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포르투갈은 8세기 초부터 13세기까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어요. 그래서 포르투갈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고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았어요. 14세기가 되자 중부 유럽에선 십자군 운동이 끝났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십자군 원정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성지를 되찾으려는 크리스트교 연합군이에요.
15세기 초 포르투갈 국왕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 엔히크가 포르투갈 십자군을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떠났어요. 그는 1415년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세우타를 점령했지요. 세우타는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 중심지였어요. 엔히크 왕자는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 비단, 보석을 보며 교역에 눈을 떴어요. 당시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수입하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뛰는 귀한 상품이었어요.
포르투갈 십자군이 점령한 세우타엔 더 이상 이슬람 상인들이 오지 않았고 동방의 산물도 구하기 어려워졌어요. 향신료를 얻기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 서아시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을 지나가거나 새 항로를 찾아 동방과 직접 교역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엔히크 왕자는 동방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기로 했어요. 그리고 포르투갈 남부 사그레스에 천문학자, 조선 기술사, 지도 제작자 같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해양 학교, 조선소, 지도 제작소를 지었어요.
엔히크 왕자는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탐험대를 바다로 보냈어요. 하지만 아프리카 북서부는 파도가 거세 항해가 쉽지 않았어요. 큰 성과가 없던 탐험대는 15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싣고 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노예무역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렇게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이 시작됐어요. 엔히크 왕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서아프리카 항로 개척에만 집중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엔히크 왕자를 '항해의 왕자'라고 부르지요.
◇인도양 통해 향신료 무역 독점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열어준 항해의 왕자 덕에 이후에도 포르투갈 왕실은 해양 탐험대를 계속 후원해요.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인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고 1498년엔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드디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어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 인도 고아와 동남아시아 믈라카, 마카오에 무역 거점을 만들고 중국, 일본과도 교역을 트며 거대한 해양 제국을 만들었어요.
▲ 1497년 바스쿠 다가마가 항해를 떠나기 전,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인도양 무역을 통해 대량의 향신료가 유럽에 수출되었고,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이 인도 고아를 거쳐 아시아로 퍼져 나갔어요. 이후 유럽 열강들이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 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포르투갈의 가장 큰 경쟁 상대였던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를 지원했어요. 그는 1492년 남·북 아메리카 사이 섬 집단인 서인도 제도를 발견했죠. 콜럼버스는 이곳을 인도라고 믿었어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영토 분쟁을 피하기 위해 경계선을 정해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 아래 두 국가가 협상해 세네갈의 베르데 제도에서 약 2000㎞ 떨어진 곳의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결정합니다. 이 조약이 바로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이에요. 막연하게 정했던 이 경계선은 아메리카 대륙을 갈랐고, 그 덕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얻게 되었지요.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과 노예무역
포르투갈 왕실은 고온다습한 브라질에 사탕수수를 심기 시작했어요. 브라질의 사탕수수 산업은 급성장했고 설탕으로 포르투갈은 큰 이익을 얻었어요. 16세기에는 브라질이 최대 설탕 생산국이 됐을 정도예요.
하지만 사탕수수 산업은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어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유럽인들이 전파한 전염병에 걸려 인구가 급속히 줄기 시작했지요. 줄어든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어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중서부 기니만과 동부 해안 지대에 해상 수송 중계지를 건설하고 노예무역을 독점했어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도 노예무역에 뛰어들면서 16세기부터 2세기 동안 아메리카로 팔려 간 흑인은 1000만 명이 넘어요. 노예무역 상인들은 흑인들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했어요. 이 외에도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원정대를 파견해 광산을 개발하고, 파우 브라질이라는 나무를 채벌하는 등 약탈을 이어갔습니다.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브라질, 아프리카 기니비사우와 앙골라, 모잠비크, 중국 마카오, 인도 고아 등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세웠고 새롭게 점령한 지역에 크리스트교를 전파했어요. 또 식민지를 지하자원과 노동력을 공급하는 곳으로 이용해 엄청난 부를 얻었지요. 포르투갈이 기념하고 싶은 역사 이면에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브라질 나라 이름, 나무에서 따왔어요
파우 브라질(pau-brasil)은 '불꽃처럼 빨간 나무'라는 뜻으로 포르투갈 탐험대가 발견했어요. 이 나무로 붉은 염료를 만들 수 있죠. 현재 '브라질'이라는 나라 이름은 이 나무를 채취하는 사람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브라질레이로(Brasileiro·브라질 사람)'에서 따왔어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0.19 중국서 비밀 빼낸 英 식물학자, 세계 茶 시장 바꿨죠
[영국 산업스파이 로버트 포천]
근대 영국 사치품이었던 중국 차 재배 기술 캐내려 스파이 보낸 英
이후 식민지 인도에 대량 경작 성공… 중국 제치고 차 최대 공급국 됐어요
지난 9일 미국에서 간첩 활동을 하던 중국 정부의 스파이가 처음으로 미국 사법 당국 손에 넘겨졌다고 해요. 이 스파이는 항공 우주 기업들에서 기밀을 훔치려 했다고 하지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항공 우주 산업을 가지고 있어요. 오랫동안 투자한 결실이죠. 이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기술을 훔치려 했던 중국에 크게 분노했을 거예요.
세계사에서도 자신이나 조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숨어들어 가 기술을 빼오려 했던 이른바 '산업스파이'들이 간혹 보이는데요. 오늘은 근대 영국에서 산업 스파이로 활동했던 로버트 포천(Fortune·1812~1880) 얘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영국 귀족들이 즐긴 값비싼 기호품
차(茶)는 동아시아에서는 일상적인 기호품이었어요. 하지만 유럽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물건이었을 뿐이었지요. 유럽에서 차를 어떻게 마시는지 알게 된 이후에도 차는 모든 사람이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부유한 엘리트 계층만의 사치품이었어요.
▲ 아편전쟁은 최신식 증기선을 가진 영국 함대가 일방적으로 승리했어요. 이 전쟁에 앞서 영국은 중국에서 차를 들여오면서 무역 적자에 시달렸어요. 19세기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차를 마시고 있어요(오른쪽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특히 영국 귀족들이 차를 좋아했어요.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늦은 1664년에 처음으로 차 2파운드 2온스(약 950g)를 공식 수입했어요. 하지만 불과 60년 만에 연간 차 수입량이 100만파운드(약 455.6t)로 50만배 늘고, 1790년에는 거의 2000만파운드(약 9000t)로 1000만배 늘어났어요.
영국은 엄청나게 늘어난 차 수요를 따라가기 위해 조지 매카트니(Macartney) 백작과 윌리엄 애머스트(Amherst) 백작을 잇달아 국왕의 대사로 청나라에 보내 영국과의 교역을 확대해 달라고 청원해요.
하지만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매카트니 백작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죠.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짐은 괴이하거나 기이한 물건은 가치가 없다고 믿으므로 귀하의 나라의 생산품은 필요가 없다."
23년 뒤 애머스트 백작이 청나라에 갔지만 가경제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차 수입량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수출할 물건이 없었던 영국은 청에 대해 천문학적인 수치의 무역 적자를 떠안아야만 했어요.
◇차를 수입하기 위한 추악한 전쟁
무역 적자 때문에 고민하던 영국은 나쁜 꾀를 냈어요.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서 아편을 생산해 중국에 팔기로 한 거에요. 아편은 강력한 마약이에요. 영국의 행동은 서구 역사에서 가장 추악한 대목 중 하나지요. 자국에 차를 공급하기 위해 남의 나라에 마약을 퍼뜨린 셈이니까요. 이뿐만 아니라 중국에 아편을 팔기 위해 청나라 관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렸어요. 이때 주었던 뇌물을 '차값(Tea money)'이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도 대가를 기대하고 뇌물을 주는 행위를 뜻하는 관용구로 쓰여요.
청나라에선 빠르게 아편 중독자가 늘어났어요. 청나라 황제 도광제의 아들도 아편 때문에 목숨을 잃을 정도였어요.
임칙서(林則徐)라는 청렴한 청나라 관리가 아편 유통을 막기 위해 애썼어요. 1839년 광둥 항구에서 아편 25만파운드(약 113t)를 압수해 모두 폐기해버린 거죠.
화가 난 영국은 전쟁을 선포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일명 '아편전쟁'이지요. 영국 국회의원조차 "이보다 더 비윤리적인 전쟁은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고 분개했어요.
◇영국, 산업스파이를 보내다
영국은 아편전쟁 후에도 무역 적자를 해소하지 못했어요. 몇 번인가 영국 스스로 재배하려고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어요. 당시 중국이 차를 재배하고 생산하는 기술을 비밀 중 비밀로 다뤘기 때문이에요.
궁리 끝에 영국은 왕립원예학회 회원인 로버트 포천(Fortune)이라는 식물학자를 중국에 보내 차 종자와 묘목을 확보하고 이를 생산할 기술을 가져오게 합니다. 포천은 그 전에 이미 중국을 여행하면서 서양 식물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종들을 가지고 돌아와 유명해진 학자였어요.
중국에 간 포천은 어떻게 됐을까요? 중국은 생김새가 다른 외국인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걸 금지하고 있었어요. 산간 지역 차 농장까지 가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죠.
포천은 중국 옷에 중국 가마를 타고 중국인 관리 행세를 하며 내륙까지 들어갔다고 해요. 중국 변발을 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초보 이발사가 비누칠도 하지 않은 채 포천의 머리를 밀어 두피가 벗겨지다시피 했다고 해요. 오죽하면 포천이 자신의 일기에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고통으로 울부짖었다'라고 써놓았을까요. 멧돼지 덫에 걸려 죽어가다가 간신히 나뭇가지를 타고 기어 나오기도 하고 강도에게 배를 약탈당하기도 했어요.
포천은 3년 동안 중국 차 재배지를 돌며 고생한 끝에, 1851년 봄 묘목 2000개와 종자 1만7000개, 숙련된 차 일꾼 한 팀을 데리고 홍콩에서 인도로 출발합니다.
이후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 대신 차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19세기 말에는 인도 아삼 지방의 차 경작지가 1376㎢까지 늘어났지요. 인도 북서부 다즐링과 남부 실론 섬에도 차 경작지가 퍼져 갔어요.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영국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차 시장의 최대 공급국이 됐어요. 한때 중국이 전 세계 차 시장을 독점했지만 이 무렵엔 점유율이 10%로 떨어졌다고 해요.
오늘날은 기술 발전 속도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빨라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들이 못 따라오는 첨단 기술들이 많이 있지요. 우리나라가 핵심 기술을 잘 지키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우리 기술을 훔쳐서 앞질러 가버릴지도 몰라요.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0.26 일본계 이민 2세에서 대통령 됐지만 부패로 끝내 옥살이
후지모리 前 페루 대통령
반인권·부패 등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2년간 복역하다 지난해 말 사면된 알베르토 후지모리(Fujimori·80) 전 페루 대통령에 대해 페루 대법원이 최근 사면을 취소했어요. 애초에 후지모리 전 대통령을 사면한 게 불법이었다는 이유였어요
후지모리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집권한 페루 역사상 첫 일본계 대통령이에요. 재임 시절 학살, 납치 같은 반인륜 범죄와 횡령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2010년 페루 대법원이 징역 25년형을 확정했죠. 아메리카 원주민과 혼혈인이 다수인 페루에서 어떻게 아시아계 대통령이 나왔던 걸까요?
◇에스파냐 식민지 된 잉카 제국
페루의 인종 간 대립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이 있던 16세기로 거슬러 가야 해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기도 하는 안데스 산맥의 요새 도시 마추픽추를 아시나요? 1911년 미국인이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해발고도 약 2400m에 세운 공중도시예요. '안데스의 신비'라고 불리지요. 마추픽추를 세운 잉카 제국은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며 번영했어요. 그러다 16세기 에스파냐(현재의 스페인) 탐험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지금의 페루 수도인 라마를 세웠어요. 에스파냐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와 남아메리카를 식민 개발했어요. 포토시 은광, 우앙카벨리카 수은광을 개발해 남아메리카의 광물을 에스파냐로 실어 갔죠. 사탕수수나 커피를 경작하려고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했어요.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는 남아메리카를 뼛속까지 바꿔놨어요. 우선 페루 지역의 인종이 다양해졌어요. 에스파냐 사람과 잉카 사람이 결혼해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가 태어났지요. 또 천연두 같은 전염병 때문에 원주민 수가 줄자, 에스파냐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사오기 시작했어요.
에스파냐가 지배한 식민 시대를 지나면서 백인과 원주민, 또는 백인과 메스티소 사이에 갈등도 늘고 경제적 격차도 심해졌어요.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과 신생국 페루
백인들의 착취와 학대,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던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19세기 초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어요. 남아메리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에스파냐계 백인 크리오요(Criollo)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었어요.
아르헨티나에서 에스파냐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산 마르틴은 1812년부터 남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혁명군을 지휘했어요. 그가 이끄는 혁명군은 에스파냐 정부군을 격파하고 1821년 페루 독립을 선언했어요. 산 마르틴은 '페루의 보호자'라 불리며 페루 군사·정치의 최고 지도자가 됐지요. 그는 원주민의 광산 노동을 금지하고 금·은 수출을 중단시켰어요. 하지만 식민지 시대 기득권층과 마찰이 생기면서, 산 마르틴은 페루를 떠나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독립 후 페루에 바로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어요. 인종 간 대립이 아직 남아 있었죠. 특히 안데스 산간지역과 아마존 밀림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해안 지역에 살고 있던 백인 지배 계층 사이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했어요
20세기 들어서도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어요. 지도자가 강력한 지배권을 갖는 권위주의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두 체제가 5~12년마다 번갈아 가며 나타났어요.
◇일본계 이민 2세, 페루 대통령이 되다
이렇듯 계층과 인종의 대립이 심한 페루에서 1990년 일본계 페루인이 대통령으로 뽑혔어요. 바로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죠. 부유하게 살아가는 백인들 후손과 어렵게 사는 원주민들 후손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아시아계인 후지모리가 제3자라는 입장을 잘 이용했다는 분석이 있어요.
▲ 지난해 말 사면된 후지모리(왼쪽 사진) 전 페루 대통령이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오고 있어요. 그의 사면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지난 1월 페루 리마에서 시위하고 있어요(오른쪽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일본인의 이민 2세대인 후지모리는 다인종 국가 페루에서도 소수자에 속했어요. 후지모리는 오히려 이 점을 선거에서 이용해 원주민과 메스티소들의 지지를 받았죠. 그는 "가난한 자의 혁명"을 외치며 민중 편에 섰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원주민과 다르다는 점을 열심히 드러냈어요. 사무라이 복장을 한 채 찍은 사진을 선거 운동에 쓰는 식이죠. 기득권층인 백인들에겐 자신은 원주민이나 메스티소와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해요.
국민은 대통령이 된 후지모리가 사회를 개혁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길 기대했죠. 그러나 후지모리는 독재를 하며 정반대 길을 걸었어요. 후지모리는 경제를 회복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어요.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가 커져서 후지모리에 반대하는 세력이 힘을 얻었지요.
그러자 후지모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을 정지시켰어요. 1996년엔 자신이 2000년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도록 장기 집권을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어요. 이후에도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면서 정권을 유지하려 했고요. 결국 후지모리는 2000년 3선에 성공했어요. 하지만 취임식 당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요. 후지모리는 일본으로 도피한 뒤 사임했어요. 2005년 페루로 돌아왔다가 체포됐고, 2010년 비리와 민간인 학살, 인권침해 등의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았어요.
지난해 12월 파블로 쿠친스키 전 페루 대통령이 후지모리를 사면했어요. 하지만 후지모리를 사면한 쿠친스키도 넉 달 뒤 부정부패로 탄핵을 당했어요. 당시 부통령이던 마르틴 비스카라가 지금 페루 대통령이죠. 페루가 양극화를 극복하고 사회 안정을 이루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요? 아직도 페루 민주주의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1.02 중국, 암초에 거대한 인공섬 지어 영유권 주장하고 있죠
남중국해 갈등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 간 군사 갈등이 날로 심해지고 있어요. 남중국해는 중국·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가 서로 자기네 영해라고 분쟁 중인 곳이에요.
얼마 전에는 남중국해에서 중국 함정이 미국 이지스 구축함에 41m까지 접근하는 사건도 있었어요. 해상에서 선박 간 안전거리는 약 450m인데 41m까지 가까이 다가갔다는 건 '충돌 직전'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어요. 미국과 중국 함정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건 처음이라고 해요.
중국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함정에 가까이 갔을까요? 그리고 미국은 왜 미국과 한참 떨어진 동남아시아의 남중국해에 함정을 보냈을까요?
◇각국의 영토 분쟁
지도를 한번 펴 볼까요? 중국은 서쪽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반도로 이어져요. 그 앞으로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여러 섬나라가 펼쳐져 있고요. 남중국해는 그들 한복판에 자리 잡은 바다예요.
▲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의 암초 ‘피어리크로스’에 중국이 인공 섬을 세웠어요. /아시아해양투명성이니셔티브
이렇게 많은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니, 자연히 영토 분쟁 지역이 많아요. 프라타스 군도는 중국과 대만 두 나라가, 파라셀 군도는 중국·대만·베트남 세 나라가, 스프래틀리 군도는 중국·대만·말레이시아·필리핀·베트남·브루나이 여섯 나라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요. 분쟁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남중국해 해저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많이 묻혀 있기 때문이에요. 또 남중국해가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목에 있는 교통·군사 요충지라는 점도 여러 나라가 이 바다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를 설명해주죠.
◇아주 옛날엔 평화로웠다는데
영토 분쟁이 불거지기 전까지 원래 남중국해는 여러 나라 어민들이 오랜 세월 고기잡이를 해온 평화로운 바다였어요. 베트남처럼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나라도 여기서 고기를 잡고, 중국 어민들도 배를 띄웠어요.
중국 원나라가 남중국해에 흩어진 여러 섬을 자기네 영토로 삼았지만, 대부분 암초와 작은 섬으로 이뤄진 바다라 지속적으로 관리하진 않았어요. 원나라에 이어 중국 대륙을 차지한 명나라가 황제 명령으로 정화(鄭和·1371~1433) 장군이 이끄는 대함대를 내보낸 적이 있어요. 정화 장군의 원정대는 남중국해를 지나며 수많은 나라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어요. 원정대가 다녀간 나라는 아프리카 케냐까지 30여 국가나 된답니다.
무역도 번성했어요. 여러 나라 배가 지나는 길목에 있어 '아시아의 지중해'로 통했거든요. 특히 17세기엔 향료 무역의 중심지가 됐어요.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선원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이 바다를 건넜어요. 이곳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간 향료와 차, 도자기가 유럽 사람들 일상을 바꿔 놓았지요.
◇열강이 눈독 들인 '아시아의 지중해'
무역 중심지가 된 남중국해는 곧 유럽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했어요.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들어온 걸 시작으로, 이후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등이 무역 주도권을 둘러싸고 충돌했습니다. 19세기가 되자 인도를 식민지 삼은 영국, 베트남을 식민지 삼은 프랑스가 세력을 뻗었지요. 미국도 필리핀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진출했고요.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은 동남아시아 판세를 다시 한 번 바꿨어요. 유럽 열강이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일본이 동남아시아로 진격했기 때문이지요.
동남아 주민들은 유럽 열강의 착취에 시달렸기 때문에, 처음엔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을 해방자로 여겼다고 해요.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아시아 사람들끼리 일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대동아 공영권(아시아 공동체)'을 이루자"는 명분을 내세웠거든요.
하지만 일본도 '또 다른 침략자'에 불과하다는 게 곧 드러났어요. 곧 연합군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과거의 유럽 열강보다 한층 혹독하게 아시아 사람들을 착취하고 학살했기 때문이에요.
◇암초에 인공 섬 세우는 중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서구 열강이 물러간 뒤에도 남중국해를 둘러싼 분쟁은 되레 심해졌어요. 스프래틀리 군도가 대표적이에요. 스프래틀리 군도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섬이 거의 없고 암초만 70여 개 있어요. 그런데도 여섯 나라가 갈등 중이죠.
얼핏 보기엔 영토로서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바다 밑 천연자원을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지거든요. 중국은 이곳을 자기 영토로 인정받기 위해 2013년부터 일부 암초 위에 인공 섬을 만들고 있어요. 이렇게 만든 인공 섬 면적은 스프래틀리 군도 전체 자연 면적의 약 7배나 돼요.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환경오염으로 망가지고 있는 산호초 군집 지대까지 파괴돼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어요.
남중국해는 세계 연간 교역량의 3분의 1이 거쳐 가는 바다인데, 중국이 자기네 주장을 끝내 관철하게 된다면 남중국해 전체 해역의 약 90%가 중국에 속하게 됩니다. 남중국해는 한국·일본 같은 동북아 국가들이 에너지를 수입하고 물건을 수출하는 핵심 통로인데, 이 바다를 중국이 장악하면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공해에서는 평상시에 어느 나라 선박이든지 안전하고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항행(航行) 자유를 외치고 있어요. 미국이 남중국해에 함정을 보낸 이유, 중국이 이를 못마땅해하며 충돌 직전까지 자기네 함정을 따라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1.09 드골 연관된 십자가, 엘리제궁 로고에 들어간 이유는?
프랑스 國父, 샤를 드골 前 대통령, 2차 대전 때 英에 임시 정부 세웠죠
당시 임정 국기에 쓰였던 십자가… 최근 마크롱이 궁 로고에 넣어
에마뉘엘 마크롱(Macron·41) 프랑스 대통령이 얼마 전부터 엘리제궁 로고에 '로렌 십자가' 문양을 넣어 쓰기 시작했어요. 보통 십자가는 가로·세로가 하나씩인데, 로렌 십자가는 가로 두 개, 세로 하나예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중세 시대부터 써왔지요.
이 십자가는 샤를 드골(De Gaulle·1890~1970) 전 대통령과 연관이 깊어요. 드골 전 대통령은 이 십자가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영국에 세운 임시 정부 '자유 프랑스'의 상징으로 삼았어요.
마크롱 대통령이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그걸 회복하려고 드골 전 대통령의 후광을 빌리려 한다는 평도 나와요. 드골 전 대통령은 프랑스의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인물이거든요. 어떤 업적을 세운 사람이었을까요?
◇드골, 영국에 '자유 프랑스'를 세우다
파리의 대표 거리인 샹젤리제에는 드골 전 대통령 동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것처럼요. 프랑스 국민이 드골 전 대통령을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와닿지요?
▲ 1944년 샤를 드골(가운데 모자 쓴 사람)이 시민들과 함께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드골은 1912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페탱(Pétain·1856~1951) 대령이 지휘하는 보병연대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대위로 참전했습니다. 전쟁 중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독일에서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전쟁 후 1921년부터 1년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냈지요.
드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공격했던 베르됭 지역을 끝까지 지켜낸 페탱을 존경했어요. 페탱도 드골의 재능을 인정해 전후에 드골이 교편을 잡을 수 있게 도왔지요.
하지만 군대를 어떻게 개편할지 입장이 갈리면서 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드골은 독일이 다시 프랑스를 공격하는 걸 막으려면 기동력을 갖춘 소수의 첨단 기계화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페탱이 그 의견에 반대했고요.
그때 독일에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해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어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답니다. 이때부터 드골과 페탱은 완전히 갈라섭니다.
1940년 5월 독일이 프랑스로 쳐들어오자, 국방부 차관이던 드골은 계속 항전하며 독일과의 강화 조약을 거부했어요. 하지만 페탱은 전세가 불리하니 한발 물러서서 휴전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알베르 르브룅(Lebrun·1871~1950)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페탱의 손을 들어줬어요. 페탱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수도를 보르도로 옮겼지요. 그해 6월 중순 독일에 저항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낀 페탱은 휴전을 선언하고 독일군에 프랑스를 넘겨줬어요.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가 독일군 손아귀에 넘어갔어요.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가 독일의 감시 아래 나머지 3분의 1일 다스렸고요. 비시는 프랑스 중부에 있는 도시 이름이에요. 기존 프랑스 헌법은 폐지됐고 그해 7월 신헌법이 발표됐어요. 국가 원수인 페탱이 입법·행정권을 장악했고 의회 기능은 정지됐어요.
비시 정부 아래 프랑스는 독일 눈치를 보아야 했죠. 유대인 박해 정책이 프랑스에서도 실시돼,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로 끌려갔어요. 프랑스 경찰들은 독일에 저항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저항군) 대원들을 체포해 독일로 보냈죠.
페탱이 친독일 성향의 비시 정부를 세울 때 드골은 런던으로 갔어요. 그해 6월 18일 드골은 영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조국을 구하기 위해 런던에 모여 힘을 합쳐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요. 곧 드골 곁에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군인·공직자·기업가·학자들이 모였죠.
드골은 프랑스 군인들과 피란민들을 모아 임시 정부 '자유 프랑스'를 만들고, 프랑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어요. 프랑스 내에서도 비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레지스탕스를 결성해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웠지요. '6월 18일의 호소'가 있은 지 열흘 뒤 영국 정부는 드골을 자유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했어요. 비시 정부는 드골을 '영국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했어요.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다
1944년 6월 영국·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북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기습 상륙했어요. 일명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고 합니다. 허를 찔린 독일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파리에 있던 레지스탕스 대원들도 독일군에 맞서 싸웠어요. 일주일 전투 끝에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지요. 그해 8월 드골이 드디어 파리에 입성했어요. 시민 100만 명과 샹젤리제 거리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행진을 했어요.
비시 정부도 무너졌어요.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 임시 정부로 정한 후 임시 대통령이 됐어요. 드골이 이끄는 임시 정부는 페탱을 비롯해 비시 정부를 구성했던 관료들을 민족 반역자로 보고 간첩 혐의로 체포했어요. 드골은 프랑스를 회복한 후 영·미 연합군과 함께 독일을 추격해 전승국이 됐어요. 프랑스는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독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냈어요.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소에도 전승국의 일원으로서 전범들을 심판할 판검사와 조사관들을 파견했죠.
드골은 총리와 국방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를 안정시켰어요. 195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가 1958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정계에 복귀했어요.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강력한 권력을 갖는 제5공화국을 만들어 초대 대통령이 됐어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1.16 1903년 하와이로 떠난 102명… 美 동포들 성공 씨앗 됐죠
[한국인 미국 이민의 역사]
1905년까지 7000명 넘게 이주
사탕수수 농장서 하루 10시간 노동… 사진만 보고 이민 남성과 결혼하기도
지난 6일 미국에서 상·하원 의원 선거가 열렸어요. 한국계 미국인 영 김(56·공화당)씨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앤디 김(36·민주당)씨가 뉴저지주에서 연방 하원 의원으로 출마했어요. 아직 개표가 덜 끝나 속단하긴 이르지만 두 사람 모두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만약 두 사람의 당선이 확정되면, 1992년 김창준(79) 전 하원 의원이 처음으로 연방 의회에 진출한 지 26년 만에 새로운 한국계 의원이 탄생하는 거랍니다.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영 김씨는 미국 정치계에 독도 문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린 주역이에요. 앤디 김씨는 오바마 정권에서 중동 전문가로 활약했고요. 아시아계인 두 사람이 지금 위치에 오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았을 거예요. 미국에 처음 발 디딘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들은 이들보다 더욱 심한 차별을 겪었을 테고요.
미국에 건너간 첫 조선 사람은 1883년 고종의 외교사절단으로 워싱턴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예요. 그 뒤 조선 근로자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가면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이 시작됩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드림
19세기 말 하와이에선 사탕수수 재배가 활발했어요. 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해 애먹었지요. 농장주들은 궁리 끝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Allen·1858~1932)에게 노동자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알렌이 고종을 설득해 여권을 담당하는 '유민국'을 설치하고 이민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지요.
▲ 1913년쯤 하와이에 도착한‘사진 신부’들이에요.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 소리’
▲ 먼저 도착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있어요. /‘사진으로 보는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
1903년 1월 13일,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습니다. 이들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7000명 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거의 모두 남자였어요.
요즘은 해외에 대한 정보가 넘치지만, 그때는 하와이가 어딘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간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런데도 이민을 결심한 건 하와이가 '풍요의 땅'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죠. 쇠락해가는 조선에서 고생스럽게 살던 백성들에게 하와이는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의 땅'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답니다. 조선인 근로자들은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어요. 그렇게 일해봤자 임금은 하루 70센트에 불과했지요. 문화적 차이도 고통을 더했다고 합니다. 남녀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푸에르토리코 노동자들의 파티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겁했다고 하네요. 미국 역사학자 웨인 패터슨이 쓴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라는 책 속에 "조선에서 여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 기생이나 무당만 하는 일이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조선인의 회고담이 나올 정도랍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기 때문에 식료품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어떤 조선인은 달걀을 사려고 자기 주먹에 흰 손수건을 둘러씌운 뒤 엉덩이에 가져다 대고 닭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 내 달걀을 샀다고 해요. 보는 이들에겐 재밌는 광경이었을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식료품점에서 암탉 흉내를 내는 심정은 썩 좋지 않았을 거예요.
◇사진만 보고 바다를 건넌 새 신부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조선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딛고 정착하는 데 성공했어요. 많지 않은 액수나마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기도 하고, 고생 끝에 약간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하와이에 온 이민자들은 노총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사진결혼'이 등장했어요. 조선에 있는 처녀와 하와이에 있는 노총각이 사진으로 선을 보고 결혼을 약속하는 거예요.
이때 하와이로 건너간 여자들을 '사진 신부'라고 불렀어요. 중매쟁이들은 조선 처녀들에게 "하와이로 시집가면 끼니도 땔감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득했다고 해요.
결혼을 결심한 처녀들은 우선 남자 호적에 등록한 뒤, 긴 여행을 준비했어요. 서울에 가서 비자를 얻고 미국 영사관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게 시작이었죠. 출발하는 날까지 영어 공부도 해야 했고요. 그리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그리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다시 한 번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기생충 검사를 주로 했는데, 이때 검사에 걸리지 않으려고 건강한 사람 대변을 자기 것으로 바꿔 통과하기도 했대요. 이어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9일 동안 배를 타고 갔어요. 거기서 마지막 신체검사와 간단한 영어 시험을 봤지요. 이 힘든 절차를 거쳐야 신랑을 만날 수 있었어요.
◇현실과 이상의 차이
이상형을 만났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겠지요. 하와이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어요.
아열대기후에서 고된 노동을 하느라 그을린 얼굴이었죠. 비싼 양복을 빌려 입고 좋은 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실제론 집도 돈도 없는 경우조차 있었어요. 하지만 사진 신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갈 돈이 없는 데다, 결혼을 취소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여겨졌어요.
하와이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나중에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미국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미국 서부에 한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부터 한인들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에요.
1924년 미국이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면서 미국으로 가는 조선인 사진 신부들도 사라졌어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됐기 때문에, 새 이민법을 적용받았던 거죠.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오늘날 미국 동포들의 성공 뒤에는 이민 초창기 세대들의 고생이 있었답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1.23 러시아·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분쟁에 종교도 분열 위기
동방정교회
러시아 정교회가 지난 15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과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콘스탄티노플은 터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에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는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를 대표하는 교구이지요. 로마 교구가 가톨릭 전체를 대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정확히 어떤 종교일까요? 또 러시아 정교회는 왜 동방정교회에서 갈라져 나오겠다고 선언한 걸까요?
◇기독교의 동서 분열
기독교는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회가 3대 종파로 꼽힌답니다. 신도 수를 살펴보면 가톨릭은 12억명, 개신교는 9억명, 동방정교회는 2억명 이상이 믿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11세기까지는 이들 모두가 하나의 종교였어요. 4세기 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첫 번째 대분열이 시작됐지요.
당시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돌아갔어요. 두 도시는 각각 두 제국의 중심일 뿐 아니라 종교의 중심이기도 했어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둘 다 기독교 5대 교구에 들어가는 중요한 곳이었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두 도시 사이에는 언어적·문화적 차이가 점점 벌어졌어요.
▲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왼쪽) 총대주교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란히 서 있어요. 현재 러시아 국민 대다수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예요. 4세기 말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돼 각각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으로 돌아갔어요. 지도에 표시된 두 도시는 기독교 5대 교구에 들어가는 중요한 곳이었죠. /게티이미지코리아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국가는 비잔티움 제국 하나만 남게 됐어요. 그래서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 교구보다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로마 교황의 생각은 달랐어요. 로마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순교했던 의미 깊은 교구니까, 역시 로마가 위라고 여겼어요.
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서기 726년 '성상 파괴령'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는 우상 숭배"라면서 제국 안의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로마 교황은 반발했어요. 로마 교구는 게르만족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성상(조각)을 사용하는 걸 공식 인정하고 있었거든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대립을 계속하다 서기 1054년에 정식으로 갈라섰어요. 지중해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에는 로마 가톨릭이, 동쪽에는 동방정교회가 들어섰지요. 이처럼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나뉜 데 이어, 1517년에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온답니다.
◇키예프 공국의 개종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한참 갈등을 키울 때, 유럽의 정세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8~11세기 사이, 북유럽에 살고 있던 바이킹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유럽 곳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거든요. 9세기에 노르만족 올레그가 드네프르 강변에 세운 키예프 공국도 그중 하나였어요.
서기 980년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 공국의 최고 지도자가 됐어요. 그는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교를 통일 하기로 마음먹었죠. 키예프 공국에서 국교를 어떻게 정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때마침 남쪽 비잔티움 제국에서 반역이 일어났어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북쪽 키예프 공국에 "반란을 다스릴 수 있게 군사를 빌려주면, 황제의 여동생 안나를 키예프 공국으로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어요. 블라디미르 1세에겐 권력을 강화시킬 좋은 기회였어요. 블라디미르 1세는 군사 약 6000명을 비잔티움 제국에 보내 반란군을 진압했어요.
바실리우스 2세는 위기에서 벗어나자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어요. 블라디미르 1세는 화가 나서 "약속대로 동생 안나를 아내로 주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했어요. 바실리우스 2세는 "안나는 동방정교회 신자라, 이교도와 결혼할 수 없다"고 맞섰지요. 결국 블라디미르 1세는 동방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뒤 동방정교회를 키예프 공국의 국교로 정했어요.
이후 키예프 공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아 문화를 발전시켜요. 키릴 문자로 쓰인 성서와 종교 관련 서적들도 들어왔어요. 키릴 문자는 동방정교회가 선교를 위해 만든 '그라고르 문자'를 발전시킨 것인데, 현재 러시아에서 쓰는 문자가 바로 이 키릴 문자의 영향을 받았어요. 동방정교회는 러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갔어요.
13세기에 몽골이 침략하면서 240년간 러시아 지역의 정교회 신앙은 잠시 쇠퇴했어요. 그래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정교회 신앙을 간직했어요. 몽골이 물러가고 비잔티움 제국이 쇠락한 뒤,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정교회의 기둥으로 우뚝 섰어요.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정권이 러시아 정교회를 박해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많은 러시아 국민이 신앙심을 갖고 있어요.
◇국제정치가 몰고 온 갈등
하지만 지금도 종교가 정치의 영향에서 아주 자유로울 순 없는가 봐요. 특히 최근의 국제 정세가 동방정교회 내부에 파란을 몰고 왔어요.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했어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독립하겠다고 했어요.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가 이를 인정했지요. 그러자 이번엔 러시아 정교회가 반발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와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정교회와 갈라선다는 건 동방정교회가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죠.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온 거랍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1.30 총보다 무서운 '전염병' 몰고 온 스페인 정복자들
아즈텍의 멸망
지난 17일 존 앨런 차우(Chau)라는 26세 미국인 청년이 인도양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에 있는 노스센티넬섬에 상륙했다가, 이 섬에서 6만년 가까이 고립 생활을 해온 부족민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했어요. 이 사건을 두고 세계적으로 논란이 뜨겁답니다.
이 섬 주민들은 지구상에서 문명세계와 연을 끊고 살아가는 몇 안 되는 부족 중 하나예요. 18세기부터 수많은 외부인이 노스센티넬섬에 가서 주민들과 접촉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주민들이 화살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어요.
인도 정부는 1956년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문화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외부인이 이 섬 반경 5해리 안에 들어가는 걸 법으로 금지했어요. 따라서 차우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그가 섬에 들어간 행위 그 자체는 명백한 불법이에요. 차우가 단순히 모험을 찾아 노스센티넬섬에 간 게 아니라, 부족민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려고 갔다는 증언도 논란을 부채질했어요.
▲ 6만년 가까이 문명세계와 고립된 채 살고 있는 인도양 노스센티넬섬 주민들. /서바이벌인터내셔널 홈페이지
인도 정부는 '차우의 시신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인권단체들이 "부족민 동의 없이 외부인이 시신을 수색하러 노스센티넬섬에 가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이 부족민은 50~15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제껏 외부와 교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라 섣불리 외부인이 다가갔다간 외부인이 갖고 있는 바이러스가 번져 부족민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유랍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 그런 사례가 있었거든요.
◇'신이 머무는 곳'에서 퍼져 나간 황금의 제국
15~16세기 지금의 멕시코 영토에는 '아즈텍', 혹은 '아스테카'라는 이름의 국가가 있었어요. 아즈텍 사람들은 스스로를 '멕시카'라고 부르면서, 멕시코 중부의 텍스코코 호수 가운데 섬들을 연결한 수상도시를 건설했어요.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대도시가 바로 그곳인데요, '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랍니다.
테노치티틀란은 당시 유럽 어느 도시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 규모를 자랑했어요. 비록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돌과 나무를 주로 사용했지만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현재의 달력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달력을 사용한 게 그 증거예요.
이들은 태양신에게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치곤 했어요. 태양신이 인간의 심장과 피를 먹고 산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아즈텍에 저항하는 수많은 사람을 제물로 바쳤어요. 제물로 쓸 포로와 공물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을 일삼기도 했지요.
◇신의 얼굴을 한 스페인 정복자
한편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는 신대륙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한창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스페인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쿠바를 포함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세웠어요. 신대륙 탐험에 나선 정복자 중 하나가 에르난 코르테스(Cortés·1485~1547)였어요. 그는 "남미 원주민들이 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배 10여 척에 총과 대포로 무장한 병사 수백 명을 태우고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나섭니다.
▲ 1519년 아즈텍 제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촐룰라에서 스페인 원정대와 원주민들의 전쟁이 벌어졌어요. 스페인 원정대가 아즈텍 제국에 몰고 온 전염병으로 이후 100년간 이 지역 인구가 2000만명에서 160만명으로 급감했지요. /위키피디아
원정대는 테노치티틀란까지 가는 동안 많은 원주민 마을을 거쳤어요. 원주민들은 낯선 원정대를 공격하기도 하고, 반대로 평화롭게 길을 내주기도 했어요. 일부 부족은 그때껏 아즈텍 제국에 인신 공양을 위한 제물을 바쳐오던 터라, 아즈텍을 무찌르는 코르테스의 원정대를 지원했어요. 지금 멕시코의 대도시가 된 베라크루스는 이때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원정대가 세운 도시랍니다.
원정대는 아즈텍 제국의 군대를 무찌르며 수도에 도착한 뒤,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 2세(Moctezuma·1466~1520)를 인질로 잡고 금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아즈텍 전사들이 반격해 코르테스는 소수의 부하들과 겨우 탈출합니다.
◇신대륙에 들이닥친 죽음의 전염병
탈출에 성공한 코르테스는 스페인의 증원군을 얻어 다시 아즈텍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이 시기 아즈텍 제국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합니다. 천연두 등으로 추정되는 병이었어요. 유럽과 같은 구대륙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돌았던 전염병이라 원정대 사람들은 큰 타격이 없었어요. 하지만 천연두를 처음 겪는 신대륙 사람들은 면역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습니다. 몬테수마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쿠이틀라우악(Cuitlāhuac·1476~1520) 황제도 그중 하나였어요.
코르테스의 원정대가 오기 전, 아즈텍 제국과 주변 부족들의 인구는 2000만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쿠이틀라우악 황제가 숨진 뒤 약 100년이 지난 1618년이 되면 원주민 인구가 160만명까지 곤두박질 치고 말아요.
전염병이 돌아도 원정대 사람들은 멀쩡한데 아즈텍 사람들만 쓰러지니까 아즈텍 사람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어요. 결국 쿠이틀라우악 황제가 숨진 이듬해(1521년),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이 원정대에 함락당하고, 마지막 황제인 쿠아우테목(Cuauhtémoc·1495~1521)은 원정대 손에 사로잡혀요. 원정대는 숨겨놓은 보물을 내놓으라며 마지막 황제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다고 해요. 젊은 황제는 끝까지 보물의 위치를 함구한 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아즈텍 제국은 인구도 많고 물자도 풍부해 제아무리 총포를 가진 서양 원정대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끝내 붕괴하고 만 데는 전염병의 영향이 컸죠. 이후 구세계와 신세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신세계도 차츰 전염병에 면역이 생기게 되었답니다.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12.07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찾아낸 그리스 서사시의 진실
트로이 발굴(1871~)
최근 그리스 정부 소속 과학자들이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테네아'라는 고대 도시 유적을 발굴했어요. 테네아는 트로이전쟁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뒤 생존자들이 도망가서 세운 도시라고 해요.
트로이전쟁은 서양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의 소재입니다. 10년에 걸친 트로이전쟁 중 마지막 해에 약 50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파리스 등 쟁쟁한 영웅들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전쟁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전쟁은 신화냐 역사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지금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지요. 테네아가 발굴되면서 트로이전쟁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증거가 하나 더 늘어난 거예요.
트로이의 존재가 증명된 건 19세기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Schliemann· 1822~1890·작은 사진) 덕분이에요. 그는 유년 시절 읽은 '일리아스'를 그대로 믿고, 직접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어요.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슐리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먼저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 '일리아스'에 대해 알아볼게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Odysseia)'의 작가 호메로스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입니다. 기원전 8세기 말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언제 태어나 언제 숨졌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가 정말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썼는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정리한 건지도 확실치 않죠. 호메로스가 여러 명이라는 주장도 있어요.
트로이전쟁은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보다 수백년 앞선 기원전 1300~1200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해요.
하지만 호메로스 이전에 이 전쟁에 대해 기록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아요. 짐작하건대 트로이전쟁은 여러 음유시인의 기억과 노래를 통해 구전된 것 같아요. '일리아스'라는 제목은 '일리온(Ilion)의 노래'라는 뜻이에요. 일리온은 트로이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 터키 동부에 남아있는 트로이 유적.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진짜라고 믿고 19세기 이곳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내요. 허구인 줄 알았던 트로이가 역사였다는 게 확인된 거죠. 트로이 문명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어요. /터키문화관광부
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일리아스'에 나오지 않아요. 트로이전쟁을 다룬 여덟 편의 그리스 서사시를 '에피코스 키클로스'라고 부르는데요, 그중 두 번째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랍니다. '일리아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그리고 있지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다섯 번째 서사시인 '일리오스의 함락'에 나옵니다. 이건 호메로스가 아니라 아크르티노스라는 시인이 썼다고 알려져 있어요.
'일리아스'와 함께 호메로스가 남긴 또 다른 작품이 일곱 번째 서사시 '오디세이아'랍니다.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역경을 딛고 10년 걸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사실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하기 전까지 대다수 사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학적 허구라고 생각했어요. 슐리만의 발굴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지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슐리만은 1822년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태어나,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자랐어요.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가 어린 슐리만에게 그리스·로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요. 어린 슐리만은 어딘가에 트로이 유적이 묻혀 있을 테니, 발굴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는 14세에 식품점 직원으로 일하게 돼요. 어느 날 가게에 술 취한 손님이 들어와 '일리아스'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낭송하는 걸 듣고, 잠시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렸지요. 이후 슐리만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일이 잘 풀려서 1845년 러시아에 무역회사를 세웠어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크림전쟁(1853~1856)을 벌일 때 군수물자를 팔아 큰돈을 벌었죠. 돈을 충분히 모았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고고학 발굴에 뛰어들었어요.
그때까지 많은 사람은 터키의 부나르바시 마을이 트로이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슐리만은 그보다 북쪽에 있는 히사를리크일 거라고 봤어요. 그쪽이 호메로스가 묘사한 지형에 더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했죠. 히사를리크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 서쪽 끝에 있어요.
슐리만은 1871년 히사를리크 발굴에 착수했어요. 놀랍게도 이 지역은 한 시대의 유적 위에 다음 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는 곳이었어요. 무려 아홉 층이 쌓여 있었지요. 그는 그중 두 번째로 오래된 층(기원전 2500~2200년 추정)에서 성벽과 성문 유적을 발견했고, 트로이 유적이라고 확신했어요.
지금까지 나온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진짜 트로이 유적이 묻힌 층은 슐리만의 생각과 달리 그보다 1000년 뒤에 형성된 일곱 번째 층(기원전 1275~1100년 추정)이었어요. 슐리만은 커다란 업적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고고학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오로지 트로이 발굴에 몰두했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써가며 성급하게 땅을 파헤쳤어요. 그 바람에 일곱 번째 층에 있던 진짜 트로이 유적 상당 부분이 파괴되어 버렸지요.
그런 이유로 "슐리만은 아마추어였을 뿐"이라는 비판이 나와요. 발굴한 유물 일부를 빼돌린 탓에 '도굴꾼'이라는 욕도 먹지요. 하지만 그의 열정으로 수천년 잠들어 있던 유적이 빛을 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요. 지금도 고고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14 브렉시트 혼란에 빠진 英, 아일랜드 때문에 머리 아프대요
둘로 나뉜 아일랜드섬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을 탈퇴하기로 한 영국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어요. 영국 옆에는 또 다른 섬나라 아일랜드가 있어요. 아일랜드는 독립국이지만, 아일랜드 북쪽에 있는 '북아일랜드'(1만4130㎢)는 영국 땅이에요. 하나의 섬에 아일랜드와 영국(북아일랜드)이 공존하는 것이죠.
아일랜드는 영국과 달리 유럽연합에 남을 계획이에요. 하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이라 유럽연합에서 빠지게 돼요. 이제까지는 다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이라 왕래가 자유로웠지만 앞으로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할지 몰라요.
아일랜드 섬 전체는 우리나라 남한보다 조금 작아요. 그중 북아일랜드는 강원도보다 조금 작고요. 아일랜드는 어쩌다가 둘로 나뉘게 된 걸까요.
◇잉글랜드, 아일랜드를 침략하다
아일랜드는 12세기 후반부터 이웃 나라 영국(당시 잉글랜드)의 침략을 받았어요. 1542년에는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완전히 정복했고요. 이후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됐어요. 그때 영국 사람들이 건너가 정착한 땅이 현재의 북아일랜드 지역이에요.
▲ 북아일랜드의 킬린 지역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우는 데 반대한다’는 내용의 대형 포스터가 서 있어요.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영국의 일부인 북아일랜드도 따라서 EU에서 빠지게 됐는데, 아일랜드는 EU에 그대로 남죠.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할지 모를 상황이 된 것이에요. /블룸버그
두 나라는 민족도 종교도 달라요. 영국은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색슨족이 주축이고, 아일랜드는 가톨릭을 믿는 켈트족이 주축이에요. 영국은 아일랜드를 점령한 뒤 토착민의 땅을 빼앗아 새롭게 아일랜드에 건너온 영국인들에게 나눠줬어요. 아일랜드 사람 대다수가 영국인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이 됐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일랜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감자에 기댔어요. 당시 유럽에서 감자는 생김새가 괴상한 데다 땅 위가 아닌 땅속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악마의 작물'이라 불렸어요. 그래도 영양가가 높은 데다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 19세기 초엽에는 아일랜드 사람 40%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어요. 바로 이때 '감자 기근'이 닥쳤어요. 1840년대 '감자마름병'이 돌아, 멀쩡하던 감자가 죄 썩어버린 거예요.
◇100만명이 굶어 죽은 '감자 기근'
엎친 데 덮쳐 폭설과 한파까지 닥쳤어요. 끼니도 잇기 힘들었던 아일랜드 사람은 겨울을 나기 어려웠어요. 아일랜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영국 정부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어요. 1845~1849년까지 4년간 아일랜드에서 100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 125만명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도 비슷한 수가 해외로 이민을 떠났지요. 아일랜드 전체로 보면 대략 인구의 20~25%가 이 시기에 숨지거나 고향을 등졌다고 해요. 오늘날 미국에 사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상당수가 이때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지요.
기근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국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됐어요. 이후 독립운동이 격하게 일어납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대대적인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아일랜드는 1차 대전이 끝난 뒤 독립했지만, '절반의 독립'에 불과했어요. 아일랜드 섬(8만4421㎢) 중 83%에 해당하는 지역만 독립국이 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으로 남았거든요.
◇비무장 시민에게 총을 쏜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에서는 이후 20세기 내내 수많은 유혈 사태가 일어났어요. 북아일랜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을 믿는 토착민들은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에 통합되고 싶어했어요. 개신교를 믿는 영국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았고요. 1960년대 말 대대적인 저항 운동에 불이 붙었어요. 이후 약 30년 동안 총격 사건이 3만6900건, 폭탄 테러가 1만6200건 났다고 해요. 그에 휘말려 3254명이 죽고 5만명이 다쳤어요.
대표적인 유혈 사태가 '피의 일요일' 사건이에요. 1972년 북아일랜드 포일 강변에 있는 런던데리라는 도시에서 아일랜드 토착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어요. 무장을 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했어요. 그해 1월 30일, 공수부대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해 14명이 죽었어요. 영국 정부는 "시위대 중에 무장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집에서 폭발물이 나왔다"며 공수부대를 감쌌어요. 이 일로 전 세계가 영국 정부를 비판했어요.
2010년 영국 정부는 12년에 걸친 조사 끝에 "피의 일요일 사건은 잘못"이라고 인정했어요.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의회에 조사 결과를 보고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일은 정당하지 않았고,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북아일랜드 여러 정파는 1998년 벨파스트에 모여 분쟁을 종식하자는 데 합의했어요.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포기하고, 영국도 '북아일랜드가 일단은 영국 땅으로 남아 있되, 투표를 해서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에 통합되기로 결정하면 막지 않겠다'고 양보했어요. 그 뒤 분쟁이 소강상태였는데,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문제가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안영우·명덕고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21 도청 관련 보도가 '가짜 뉴스'라던 닉슨, 결국 물러났죠
워터게이트 사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이 여전히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어요. 또 성(性) 스캔들을 막기 위해 불법 자금을 사용했다는 폭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을 밝히기 위한 '뮬러 특검'을 꾸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들을 조사하고 있어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Nixon·1913~1994) 전 대통령과 트럼프를 견주며, 대통령 '탄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늘고 있어요. '워터게이트'는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베트남전 끝내고 화해 무드 조성한 닉슨
변호사였던 닉슨은 공화당에 들어간 후 1946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됐어요. 1952년 아이젠하워가 닉슨을 러닝메이트(running mate·부통령 후보자)로 지명했고 두 사람은 선거에서 승리했어요. 부통령이 된 닉슨은 성공 가도를 걸으며 정치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아요. 196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험프리 후보를 누르고 미국 제37대 대통령이 되었지요
▲ 1974년 8월 대통령직을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기에 앞서 전용 헬리콥터에 올라 활짝 웃고 있어요.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다 탄핵당하게 되자 스스로 자리를 떠났어요. /미국대통령실
그는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긴장을 완화시켰어요. 그는 부통령 시절 소련을 방문해 소련 지도자였던 흐루쇼프와 만났어요. 대통령에 당선된 이듬해에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을 밝혔어요.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직접적이거나 군사적인 간섭을 피하고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했지요. 1972년 중국을 방문해 화해의 분위기를 이끌었어요. 미국 국내외로 비판이 거셌던 베트남전쟁도 끝냈어요. 1973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 평화협정을 맺고, 10년 넘게 끈 베트남전쟁에서 철수합니다. 닉슨은 1972년 대통령 재선에 나섰는데 당시 닉슨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워터게이트'에 있는 야당 본부 도청 사건
대통령 선거가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1972년 6월, 괴한 5명이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본부 사무실에 침입했다가 체포됐어요. 괴한들은 물건을 훔치려고 왔다고 주장했지만 수상한 면이 있었어요. 카메라, 도청 장치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대선 기간,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 장치 갖고 들어간 괴한.' 몇 가지 키워드만 봐도 정치 음모 냄새가 모락모락 났어요. 닉슨의 재선 가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실제 선거에선 큰 파괴력이 없었어요. 닉슨은 득표율 60%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며 재선에 성공했어요. 그는 대선 과정에서 워터게이트 문제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은 일부 매체를 향해 '가짜 뉴스'를 내보내는 것 아니냐고 되레 역공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워터게이트 빌딩의 괴한들을 수상히 여긴 기자 두 사람이 닉슨의 거짓말을 밝혀냈어요.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와 칼 번스틴 기자가 이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어요. 워싱턴포스트 취재팀은 결국 침입자 다섯 명 중 한 명이 전직 중앙정보부(CIA) 요원이며 닉슨 재선 위원회의 경호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또 괴한들을 지휘한 사람이 역시 CIA 출신이자 닉슨 재선 위원회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또 다른 인사라는 정황 증거도 확보했어요.
이 사실들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워싱턴포스트는 닉슨 행정부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았어요. 백악관에서는 기사 내용을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기자들의 백악관 출입을 금지했어요. 워싱턴포스트에 실리는 광고도 끊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1917~2001)은 오히려 두 기자를 응원했어요.
◇탄핵 앞두자 대통령직 스스로 포기
1973년 워터게이트의 괴한들이 재판을 받던 도중에 '백악관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백악관이 이들에게 민주당 사무실을 도청하라고 지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CIA를 동원해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움직였다는 건 분명했어요. 떳떳했다면 숨길 게 없었겠죠. 의혹이 점점 더 커졌어요. 같은 해 5월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출신인 아치볼드 콕스가 진상을 밝히기 위해 특별검사로 임명됐어요.
특검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새로운 핵심 증거가 등장합니다. 알렉산더 버터필드 전 대통령 부보좌관이 상원 청문회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를 지시하는 대통령의 발언이 녹음된 테이프가 존재한다"고 폭로한 겁니다.
콕스 검사는 백악관에 이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어요. 닉슨은 거부했지요. 닉슨은 되레 콕스 특검을 해임하겠다고 나섰어요. 그러자 특검 임면권자인 법무장관이 이에 반발해 사임했어요. 법무장관 권한 대행인 법무부 부장관도 그를 해임할 수 없다고 뒤따라 사임했고요. 결국 법무부 송무차관이 콕스 특검을 해임하는 촌극이 벌어져요. 이 모든 일이 토요일 하루에 벌어졌지요. 한꺼번에 세 명이 물러나 언론에서 이 사건을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불렀어요.
눈엣가시였던 콕스 특검은 물러났지만 비판 여론은 더 심해졌어요. 결국 1974년 7월 미국 하원은 닉슨 탄핵을 결의했어요. 닉슨은 그제야 탄핵당하기 전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길을 선택했어요.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임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12.26 中 황제 스승이었던 달라이 라마… 독립운동 나선 이유는?
티베트
▲ 달라이 라마 14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9일 '티베트 상호여행법'에 서명했어요. 중국은 그동안 외국 관리와 언론인이 티베트에 방문하는 것을 막아왔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법은 '미국 기자·외교관·관광객이 티베트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중국에 촉구하는 내용이에요. 중국은 당장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어요. 티베트가 어떤 나라길래, 달라이 라마가 어떤 분이길래 이런 큰 갈등이 벌어지는 걸까요?
◇제국을 위협한 토번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침공해 점령하고 자국의 자치구로 삼았어요. 그로부터 9년 뒤 티베트에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지요.
하지만 두 나라의 인연이 시작된 건 그보다 1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과거 티베트고원에는 토번(吐蕃)이라는 왕국이 있었어요. 서기 8세기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한 당나라를 위협하는 군사 강국이었죠. 763년 토번군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해 보름간 약탈하고 철수했어요.
하지만 이후 토번도 당나라와의 전쟁이 부담스러워졌어요. 서쪽의 이슬람 세력과 싸워야 했거든요. 결국 두 나라는 9세기에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라는 비석을 만들었어요. '토번인은 토번의 땅에서, 한족은 한족의 땅에서 평안히 살지어다'라는 글귀를 새겨 토번의 수도인 라싸, 당의 수도인 장안, 토번과 당의 국경에 하나씩 세웠지요. 이후 티베트는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티베트 불교를 키워나갔어요.
◇몽골의 정신적 지주가 된 티베트 불교
시간이 흘러 토번도, 당도 멸망했어요. 13세기 중국 대륙에 몽골제국이 일어났어요. 티베트는 몽골의 강성함을 알고 오래 버티지 않고 항복했어요. 몽골은 티베트를 짓밟거나 군대를 주둔시키는 대신 티베트 불교 지도자에게 예를 갖췄어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1260년 티베트 종교 지도자 팍빠에게 몽골 영토의 모든 불교를 다스릴 권력과 티베트를 다스릴 권력을 줬어요. 이후로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는 몽골 황제를 보필하면서 동시에 티베트를 다스리게 됐어요.
쿠빌라이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몽골이 수많은 민족을 다스리고 아울러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몽골은 유목민족들 사이엔 티베트 불교가 멀리 퍼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자처했어요.
▲ 티베트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은 티베트 불교 총본산이에요. 한때 중국 황제들의 ‘스승’ 대접을 받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의 권위가 느껴지죠. /게티이미지뱅크
이 관계를 티베트 말로 '최왼(chöyön·檀越)' 관계라고 불러요. 동아시아를 제패한 몽골 지도자는 '종교의 보호자' 역할을,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는 '제국과 칸을 위해 기도하는 승려' 역할을 하며 서로를 존중한다는 뜻이에요.
이런 관계는 청나라로도 이어져요. 17세기 청나라 순치제는 당시 티베트 불교 지도자였던 5대 달라이 라마를 베이징 자금성으로 초대해요. 이후 청의 황제는 달라이 라마를 '황제의 스승(國師)'으로 대했어요.
◇당번회맹비와 함께 화평도 끝나
여기서 잠깐 달라이 라마에 대해 알아볼까요? 달라이 라마는 '큰 바다처럼 깊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뜻이에요. 달라이 라마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죽었다가 다시 환생한다고 해요. 지금 달라이 라마는 13번째 환생이라고 합니다.
1912년 청이 멸망한 뒤 중국 민족주의자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을 세웠어요.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과 새로 생긴 중화민국은 서로의 국경에 있는 티베트에 주목했어요. 티베트·영국·중화민국 3국 대표가 '티베트 중부·남부·서부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종교적·세속적 통치권을 모두 갖고, 티베트 북부·동부에선 중국이 세속적 통치권을, 달라이 라마가 종교적 권한을 갖는다'고 합의했어요.
이 조약은 한 세대 만에 무너졌어요. 1949년 중국 국민당이 긴 내전 끝에 중국 공산당에 대륙을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갔어요. '중화인민공화국', 즉 지금의 중국이 대륙의 주인이 됐죠. 중국은 이듬해 티베트를 점령했어요. 공교롭게도 중국과 티베트 국경에 있던 당번회맹비가 지진으로 파괴된 직후였어요.
티베트는 이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했지만, 세계의 관심은 그해 한국에서 터진 6·25전쟁에 쏠려 있었어요. 결국 14대 달라이 라마가 중국 정부와 '17조 협약'을 맺습니다. 중국이 티베트의 군사권과 외교권을 가져가는 대신 티베트 자치를 인정해주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이후 중국은 불교 승려를 탄압하는 등 티베트의 자치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어요. 티베트인은 1959년 3월 10일 대규모 독립운동을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해 망명 정부를 세웠어요.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공로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중국은 그때도 격분했어요.◎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