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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세계사] 2018-1/ 01.04 100년 전 '민족자결주의' - 06.29 '로마 안에서 평화'…

상림은내고향 2022. 8. 18. 13:53

[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8-1

2018.01.04 100년 전 '민족자결주의', 수많은 약소국에 희망 주었죠

[윌슨의 14개 평화 원칙]

美, 1차 세계대전 말인 1918년 발표
'각 민족 운명은 스스로 결정' 선언… 우리나라 3·1운동에도 영향 줬어요
사회주의 확산 견제할 목적도 있어


올해는 20세기 초 전 인류에게 큰 아픔을 남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지요. 이 전쟁은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 전쟁으로, 100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아픈 상처를 남겼지요.

세계대전 종전을 수개월 앞둔 1918년 1월 8일,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우리에게 '민족자결주의'로도 유명한 '14개 평화 원칙'을 발표했답니다. 윌슨의 평화 원칙은 강대국들에 식민 지배를 당하던 수많은 약소국 민족들에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주었지요. 우리나라의 3·1운동도 이에 힘입은 민족운동 중 하나였어요.

오늘은 1차 세계대전 종전과 윌슨의 평화 원칙에 대해 알아볼게요
.


◇100년 전 윌슨, 14개 평화 원칙 발표

1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식민지 경쟁을 벌이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 싸움에서 비롯된 커다란 전쟁이었어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지요. 19세기 말 프랑스를 견제하던 독일이 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손잡고(삼국 동맹), 독일을 견제하던 프랑스가 영국·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면서(삼국 협상) 유럽 대륙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전쟁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 1차 세계대전 연합국 정상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모인 모습. 왼쪽부터 데이비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아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독일이 대립했고, 이어서 러시아와 동맹이던 영국·프랑스가 참전하면서 총 40여 국가가 전쟁에 뛰어드는 이른바 '세계대전'으로 확대됐지요.

전쟁이 3년 차에 접어들 무렵,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가합니다. 미국은 그동안 '먼로주의'에 따라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 싸움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요. 오히려 한창 전쟁 중이던 영국·프랑스 등 유럽 주요 산업국가들을 대신해 각종 물자를 생산하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구고 있었어요.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이 잠수함 작전을 펼치면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이 불리해지자 결국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했지요.

러시아의 레닌이 10월 혁명까지 성공시키고 공산국가를 수립하자,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러시아에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실제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강화조약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여기에 레닌이 '우리는 약소민족을 지원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세계 곳곳에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분위기가 나타났어요. 이를 견제하고 미국의 국익을 도모하고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은 1918년 1월 '14개 평화 원칙'을 발표합니다.


◇2차 세계대전 씨앗 품은 파리강화조약

윌슨의 '14개 평화 원칙'은 제1조부터 철저하게 '비밀 외교'를 비판하고 공개적인 국제 협약을 체결하자고 강조합니다. 러시아와 독일이 비밀리에 접촉해 강화조약을 맺으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는 조항이었지요. 이뿐만 아니라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의 뜻을 담아냄으로써 약소국 민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습니다.

▲ '14개 평화 원칙'을 보도한 신문(왼쪽).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 모습(오른쪽).

 

윌슨의 이 같은 주장은 러시아·독일 간 강화조약 체결(1918년 3월)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이상적인 평화를 위한 원칙으로 연합국 사이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답니다. 또 연합국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인정되었지요. 경제 장벽의 제거와 평등한 무역, 불필요한 군비 축소,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조정, 국제 평화를 위한 연합체(훗날 국제연맹) 구성 등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미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윌슨의 이상주의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 '땅따먹기' 자리였던 '파리 강화 회의'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대표들은 1919년 1월 18일부터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 강화 회의를 열었는데요. 처음에는 윌슨의 평화 원칙에 집중하면서 세계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조약에 반영된 것은 국제연맹의 창설과 민족자결주의뿐이었고, 나머지는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의 책임을 묻고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리는 데 혈안이 돼 있는 조항들뿐이었지요.

독일 국민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이 '독일 국민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생각했고, 연합국에 대한 원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던 거랍니다.

그럼에도 윌슨 대통령은 평화 원칙의 일부가 반영된 베르사유조약만이 세계대전 같은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끊임없이 대규모 연설을 다니며 미국 내 여론을 설득하고 다녔지요. 하지만 1918년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민주당 소속이던 윌슨의 목소리는 힘을 잃게 되었고, 결국 베르사유조약은 미국 상원에서 끝내 비준되지 못했답니다.

미국이 불참한 상태에서 출범한 국제연맹은 실질적인 군사·경제적 권한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어요. 역사학자들은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오직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됐을 뿐이고, 사실 그가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를 완성하려고 한 것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답니다.

윌슨은 "서로 편을 가르고 맞설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편이 되어 공동의 평화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는 2018년 오늘날 지구촌은 한 세기 전보다 얼마만큼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나요?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는 어떤 평화 원칙이 필요할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먼로주의 (Monroe Doctrine)

1823년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밝힌 외교 방침. 한마디로 미국은 유럽 일에 간섭하지 않겠으니 유럽도 아메리카 대륙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후 약 100년간 미국의 주요 외교 방침이 되었지요.

이정하 천안 계광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1.11  60만 중 수만 명만 살아남아… 나폴레옹, 러시아 혹한에 무너졌죠

[맹추위와 러시아 원정]

대혁명 이후 권력 잡은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 어긴 러에 전쟁 선포
어렵사리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맹추위 등 대비 못해 참패했어요 

지구촌 곳곳에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있어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는 폭설과 강풍이 불어닥쳐 도시가 마비되고 비행기가 무더기 결항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어요. 중국의 중·동부 지역 등에는 기록적 폭설이 쏟아졌고, 프랑스에는 태풍이 불어와 강이 범람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기상 상황은 인간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전쟁할 때에도 날씨로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는데요. 오늘은 유럽을 제패하고 러시아를 무릎 꿇리려던 나폴레옹의 꿈이 자연의 위력 앞에 무너졌던 역사 속 장면으로 들어가 봐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다 

17세기 프랑스 왕궁은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어요.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부르며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프랑스의 힘을 과시했죠. 하지만 루이 14세가 죽자 곳곳에서 비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1774년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는 사치를 일삼았고, 영국을 견제하겠다며 무리하게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지원하다 나라 재정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지요.

▲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모습을 그린 19세기 그림. /위키피디아

 

1789년 루이 16세는 바닥난 국고를 채워보겠다며 귀족과 성직자, 평민 대표로 꾸린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해 국민에게 세금을 더 걷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삼부회 투표 방식에 불만 있는 평민 대표들이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독자적 의회를 결성했지요. 루이 16세가 이를 해산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무기고(武器庫)를 습격하고 총과 대포로 무장한 뒤 전제 정치(지배자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아무 제한 없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체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어요.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거예요.


파리 시민들은 자유·평등·박애를 외치며 과거 체제를 바꿔나갔어요. 교회와 귀족의 재산을 몰수했고, 영주의 성을 습격해 토지 문서를 불태웠죠. 혁명의 불길은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이웃 나라 왕들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서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했지요. 자신들도 언젠가 루이 16세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프랑스는 외국과 전쟁까지 치르게 되자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졌어요. 그 틈을 노려 일부 귀족은 혁명을 뒤집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때 귀족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외국과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두각을 보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였어요. 그는 혼란을 틈타 발 빠르게 권력을 장악했어요.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라 독재자가 되었죠.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을 열렬히 지지했어요. 혁명 이후 주변국과 치른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내며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워줬기 때문이에요.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반영한 '나폴레옹 법전'도 편찬했어요.

국민 지지를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로 프랑스 황제가 됐어요.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린 국민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제정(황제가 통치하는 체제)을 받아들인 거예요.


◇러시아 원정 대참패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러시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1806년 베를린에 입성해 전 유럽에 베를린 칙령을 선포했어요. 이 칙령에는 "유럽 어느 나라도 영국과 물건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는 '대륙 봉쇄령'이 포함됐는데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쇠약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죠.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영국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어요.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은 굳이 유럽과 교류하지 않아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었죠. 오히려 영국과 교류하지 못하게 된 유럽 다른 나라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중 러시아가 영국과 다시 무역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며 러시아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전투병 45만 명과 지원병 15만 명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했어요. 러시아도 군대를 모집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드넓은 국토와 혹독한 추위를 무기로 전쟁을 길게 끌기로 결심했어요.

프랑스군은 출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수시로 비가 내려 마차가 진흙에 빠지면서 사용할 수 없는 보급품이 늘어났죠. 습하고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전염병이 돌았고, 일교차가 너무 커 나폴레옹도 열사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어요. 아직 러시아군과 싸움도 못 했는데 전투 병력 45만 명 중 23만 명밖에 남지 않았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서쪽 접경에 도착했을 때는 말들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같은 해 9월, 나폴레옹이 어렵사리 모스크바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도시는 텅 비어 있었고, 모스크바 교외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러시아가 프랑스 군대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주변 시설과 자원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린 것이었어요.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5주 동안 머물며 러시아 황제의 항복을 요구했지요.

당시 프랑스군은 식량이 부족해 온종일 시내의 고양이를 잡아먹기 위해 돌아다닐 만큼 굶주렸어요. 모스크바의 날씨는 영하 20도에 육박했는데, 속전속결로 러시아를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프랑스군은 추위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아 피해가 더 컸어요.

러시아가 항복하지 않자, 결국 나폴레옹은 철수 명령을 내렸어요.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러시아 기병대의 추격이 시작됐어요.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후퇴했지만 기병대의 거침없는 공격과 오랜 굶주림, 혹한 속에서 수많은 군사가 죽어나갔어요. 12월 6일부터 4일간은 영하 38도까지 떨어졌고 군사 4만 명이 죽었지요. 60만 병력 중 55만여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세계 전쟁 역사상 보기 드문 대참패였죠. 이후 유럽 전역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됐고, 프랑스 제국의 힘도 쇠퇴하기 시작했어요.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혹한에 철저히 대비했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나폴레옹의 최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 이듬해인 1813년 유럽 연합군에 패배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지중해의 엘바섬에 유배당했던 그는 탈출에 성공해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황제 자리에 올랐지요. 하지만 벨기에 남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워털루전투(1815년)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등 연합군에 참패를 당하면서 세인트헬레나섬에 또다시 유배당했고 1821년 그곳에서 숨을 거뒀어요.

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1.18  英 산업혁명 여파… 124년 전 뉴질랜드, 첫 최저임금 실시했죠

[최저임금 제도]

중세 영국서 시작된 '인클로저 운동' 땅 잃은 농민들 도시로 떠나게 해
생계 위협받는 저임금 근로자 늘자 각 나라 정부, 최저임금 도입했어요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지난해보다 16.4% 오르면서 역대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어요. 최저임금이란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반드시 줘야 하는 최소한의 임금 수준을 말하는데, 정부가 근로자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한 제도예요. 사업주는 반드시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근로자에게 줘야 하고 어기면 처벌을 받도록 돼 있지요.

정부는 최저임금을 올려서 근로자의 소득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반면 최저임금 제도로 인해 영세 자영업자들 부담이 커지고 근로자가 해고되거나 근로시간이 줄어들어 오히려 삶의 질이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요. 오늘은 세계 역사 속에서 최저임금 제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아볼게요.


◇'인클로저 운동' 시작하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잘 알려진 나라예요. 산업혁명이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사회·경제적 대변화로, 통상적으로 농업 중심 사회에서 기계 공업 중심 사회로 옮아간 과정을 일컬어요. 이 때문에 근현대의 수많은 노동운동도 영국에서 시작됐지요.

▲ 1860년 영국의 한 양말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모습을 그린 그림. 당시 낮은 임금을 받고 오랜 시간 일하는 근로자들이 많았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영국의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건 16세기부터 펼쳐진 '인클로저 운동(enclosure)'이었어요. 인클로저 운동이란 우리 말로 하면 '토지를 울타리로 둘러싸기' 정도인데, 중세 유럽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경작하던 토지(공유지)나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던 땅(미개간지)에 울타리를 쳐서 '여기가 내 땅이다'라는 걸 알린 운동이에요.

1차 인클로저 운동은 15세기 말~17세기 중반 있었는데, 영주가 양을 대규모로 방목하고 모(毛)를 팔아 큰돈을 벌기 위해 농민들을 땅에서 내쫓으면서 시작됐죠. 2차 인클로저(18세기 초~19세기 중반) 때는 대지주가 빈 땅에 울타리를 칠 수 있도록 정부가 법으로 권장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땅이 개인 소유가 됐어요.

반강제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어요.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노동력)밖에 없는 '저임금 근로자' 계층이 등장한 것이에요. 마침 도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특정한 영주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신분의 '근로자(노동자)'가 필요했어요. 이때 자본가(많은 돈을 가지고 근로자를 고용해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가 근로자에게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한 것을 가리켜 '임금(wage)'이라고 해요. 과거 중세 봉건제도에서 땅을 중심으로 농민이 영주에게 내던 '지대(地代·땅의 사용료)'와 완전히 다른 개념이 탄생한 것이죠.

그런데 산업혁명이 계속될수록 근로자의 임금은 최소한의 일상생활마저 위협하는 낮은 수준에 머물렀어요. 19세기 중반 영국 신(新)구빈법(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법)을 시행하던 한 감독관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요.

"근로자들이 극도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겨우 그들과 그 가족의 식비·주거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옷을 사 입기 위해선 그 이상의 수입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 등으로 이 계층은 티푸스(전염병의 일종)와 폐병에 걸릴 우려가 극히 높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임금을 올리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어요. 1849년 영국 남부 윌트셔에서는 주급(1주일에 받는 임금)이 7실링에서 8실링으로, 도싯셔에서는 9실링으로 인상됐지요. 그런데 임금이 애당초 너무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얼핏 엄청난 상승인 것처럼 보였어요. 도싯셔의 경우 주급이 한꺼번에 약 28%나 오른 셈이었기 때문이지요. 상당수 근로자가 굶주림을 겨우 면할 수준의 임금을 받았음에도 당시 런던에서 발행되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진지하게 "실질적인 향상을 이뤘다"고 전했어요.


◇뉴질랜드에서 시작된 최저임금제 

당시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은 매우 길었어요. 큰돈을 들여 기계를 사들인 자본가들 입장에선 기계를 놀려 두면 손해였지요. 발빠르게 과학기술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사들인 기계가 고물로 전락하기 전에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은 최대한 많이 만들어내야 했어요. 그러려면 기계가 끊임없이 돌아가야 했고, 이 시기 근로자들은 하루 16시간 넘는 시간을 공장에서 보내야 했지요.

일례로 영국 맨체스터 부근의 한 공장 방적공(면공업 근로자)들은 물 마시러 가는 것조차 금지됐고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운 공장 안에 갇혀 하루 14시간씩 꼬박 일을 해야 했어요. 1890년대 이후에야 12시간 2교대제(낮에 일하는 근로자와 밤에 일하는 근로자를 나눠 교대하는 제도)가 실시됐는데, 당시 근로자들은 이런 변화를 '신의 은총'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어요.

이렇게 열악한 근로 환경 속에서 근로자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가 설정한 임금이 바로 '최저임금'이랍니다. 최저임금이 제도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는데요. 1894년 세계 최초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최저임금 제도를 법으로 정한 것이지요.

당시 뉴질랜드 해운 근로자들은 열악한 근로 환경과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어요. 그러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가 '산업조정 중재법'을 만들고 최저임금 제도를 실시한 거예요. 이어 영국이 지배하던 호주에서도 '공장 상점법'을 만들어 최저임금 제도를 시행했어요. 1909년 영국에서는 봉제업을 포함한 네 가지 업종에서 최저임금 제도를 시작했답니다.

이후 최저임금 제도는 빠르게 확산했어요. 1915년 프랑스 정부가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했고, 미국은 1938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중 하나로 최저임금 제도를 시행했지요.

오늘날 최저임금 논란은 비정규직 문제나 하도급 업체 문제 등과 얽혀 더 복잡하고 다양해요.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당장 근로자의 삶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지요. 그럼에도 장기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면 아주 신중한 검토와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할 거예요.


[신(新)구빈법(Poor Law)]

1834년 영국 정부가 만든 법으로, 17세기 초 엘리자베스 1세가 도입한 '구빈법'을 보완한 것이에요. 노동력이 있는 빈민들을 열악한 '강제노동소'에 수용하고 낮은 수준의 임금을 주면서 일을 하도록 하는 제도이지요. 이를 통해 정부의 빈민 구제 비용을 아끼고 근로자가 정부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외부로 취업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가 노동 착취를 당하는 문제가 생겼지요.

이정하 천안 계광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1.25  '검은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노예 해방… 최초 흑인 공화국 만들었죠

[아이티 혁명]

17세기 프랑스가 통치한 생도맹그… 아프리카 흑인 노예 대거 들어왔죠
독립 운동가 투생, 노예 해방 주도해 1804년 아이티 건국 이끌었어요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민법 개혁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왜 아이티와 아프리카 같은 '똥통(shithole)'에서 온 사람들을 모두 받아줘야 하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에 휩싸였어요. 이에 국제사회는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인종차별이라고 규탄했답니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으로 화제가 된 '아이티 공화국'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은 가난한 나라가 됐지만, 한때 유럽과 신대륙을 오가는 화물선이 가장 많이 드나들며 번성했던 지역이기도 했어요. 남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유일하게 식민지로 통치한 나라이면서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공화국을 세운 '아이티 혁명'이 일어난 곳이기도 해요. 오늘은 아이티의 역사를 알아볼게요.


◇프랑스 지배를 받다 

1492년 10월 에스파냐(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한 섬에 도착했어요. 콜럼버스는 그곳을 '작은 스페인'이라는 뜻을 지닌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라고 이름 붙였지요. 에스파냐는 이 섬에 식민 도시 '산토도밍고'를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어요.

▲ (왼쪽)프랑스군에 맞서 노예 해방 투쟁을 벌이는 투생 루베르튀르와 흑인 노예들 모습. (오른쪽)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 /게티이미지코리아·위키피디아


17세기가 되자 프랑스도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곳을 '생도맹그'(산토도밍고의 프랑스어 표현)라 불렀어요.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간 프랑스는 1697년 에스파냐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 지역을 넘겨 받았지요.

생도맹그에서 프랑스는 커피·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하며 부를 축적했어요. 18세기 후반 생도맹그에서 나는 설탕이 자메이카·쿠바·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설탕보다 많고, 커피 생산량은 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지요. 당시 생도맹그에는 유럽의 어떤 항구보다 많은 선박이 드나들었을 만큼 번영을 누렸답니다.

초기 식민지 시절 히스파니올라에서 소수의 백인은 다수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해 농장을 운영했어요. 그런데 원주민들은 유럽의 정복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천연두 등 각종 감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어요. 원주민이 대거 사망하면서 1492년 50만명 정도이던 원주민 인구가 20여 년 후 고작 2만90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요. 농장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규모로 데려와 부리기 시작했어요.


◇독립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

시간이 지나면서 히스파니올라에는 유럽인과 흑인 노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물라토'가 증가했어요. 그들은 백인 다음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보유해 중간 계층을 형성했지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일부 물라토 세력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혁명 정신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장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어요.

이 무렵 등장한 지도자가 바로 흑인 노예 출신의 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1743~1803)예요. '검은 스파르타쿠스(고대 로마의 노예 검투사)' '흑인 자코뱅(급진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요.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붙잡혀온 흑인 노예였지만 특유의 총명함을 인정받아 농장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어요. 덕분에 다른 흑인 노예들에 비해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란 투생은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주인의 집사 노릇을 하며 신뢰를 얻었지요. 그리고 흑인 노예들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1791년부터 흑인 노예 해방 전쟁을 진두 지휘했어요.

프랑스가 혁명으로 혼란에 휩싸이자 영국과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었어요. 투생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활용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어요. 프랑스가 흑인 노예 해방에 미온적일 때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우고, 프랑스가 노예 제도 철폐를 선언하자 프랑스편으로 돌아서 에스파냐와 싸우는 식이었지요. 또 협상을 벌인 끝에 영국군을 철수시켜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되찾았어요.

이 과정에서 투생의 영향력은 막강해졌어요. 나중엔 혁명 정부 최고 지도자가 됐고 에스파냐령 산토도밍고를 공격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통일했지요. 하지만 투생이 식민지 자치 헌법을 만들자 프랑스의 새 통치자 나폴레옹이 2만여 명의 군사를 보내 이를 탄압했고, 투생도 결국 체포되고 말았어요. 프랑스 동부 지역의 한 성에 감금된 투생은 건강 악화로 1803년 세상을 떠났지요.

생도맹그 흑인들은 프랑스군과 전투를 계속 벌였어요. 총 8만 명의 병력을 보냈던 나폴레옹은 전쟁이 길어지자 1803년 말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1804년 1월 1일 생도맹그 사람들은 나라 이름을 '아이티'(높은 산의 나라라는 뜻)로 정하고 독립을 선언했답니다. 투생이 죽은 지 7개월 만의 일이었지요. 아메리카 대륙에선 미국(1783년)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였고, 남아메리카에선 최초로 독립을 일궈낸 나라가 됐어요. 게다가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세운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어요.


[아이티의 현재]

독립 후 아이티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물라토와 흑인들이 나뉘어 14년간 내전을 벌이면서 국토가 황폐화됐고, 1844년엔 산토도밍고 지역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바람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었어요. 다른 남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커피·설탕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과거와 같은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없었어요.

20세기에는 잠시 미국 지배를 받기도 했고, 수십 년간 독재를 경험한 뒤 1990년 처음으로 민주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답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쿠데타 등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고 있어요. 2010년엔 대지진 피해를 크게 입어 유엔 등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2.01 프랑스가 英에 빌려줄 유물… 노르망디公 '왕위 계승 전쟁' 승리 담았죠

[바이외 태피스트리]

영국 왕위 노린 노르망디公 윌리엄, 1066년 英 해럴드 왕과 전투서 승리… 직물 벽걸이에 이 전쟁 묘사했어요
노르만 왕조 열리며 유럽 문화 이식 

▲ 윌리엄 1세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회담에서 프랑스가 보관 중인 11세기 유물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를 영국에 빌려주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어요. 영국 측은 "프랑스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빌려준 유물 가운데 최고"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고 해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1세기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바이외 지역에서 만든 직물(織物·실로 짠 물건) 벽걸이로, '정복왕 윌리엄'의 업적이 50여 개 장면으로 묘사돼 있는 중요한 문화재예요. 중세 영국의 역사적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오늘은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담긴 정복왕 윌리엄의 이야기를 알아볼게요.


◇노르망디의 윌리엄, 영국 왕위를 노리다

7~11세기 중세 영국은 귀족 회의인 '위테나게모트(Witenagemot)'에서 왕을 선출하고 있었어요. 왕은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나왔지만 귀족 회의에서 뽑았기 때문에 권한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지요. 당시 영국 왕실을 '앵글로 색슨' 왕조라고 불러요. 

 

1042년 위테나게모트에서 웨섹스 가문의 에드워드(1042~1066)를 새 영국 왕으로 선출했어요.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2세의 여동생이었지요. 어릴 적 에드워드는 외가인 노르망디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노르망디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어요.

 

당시 왕 못지않게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에드워드의 장인인 고드윈 백작이었어요. 고드윈은 자기 자식들 중 하나가 에드워드 다음으로 영국 왕이 되길 바랐지요.

 

1066년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 없이 죽자, 다음 영국 왕이 누가 되느냐를 두고 여러 사람이 경쟁을 벌였어요. 고드윈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처남인 해럴드와 토스티그가 먼저 나섰고, 에드워드의 외가 친척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도 영국 왕 자리를 노렸지요. 하지만 위테나게모트는 고드윈의 아들인 해럴드를 새 영국 왕으로 뽑았답니다. 그가 앵글로 색슨 시대 마지막 왕인 '해럴드 2세'(1022~1066)예요.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영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갖고 자신이 영국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이에 대한 로마 교황의 지지까지 얻어낸 윌리엄은 해럴드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직접 영국 출정에 나섭니다.

 

▲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해럴드 왕(왼쪽에서 둘째)의 모습을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 /위키피디아

 

시작은 순탄치 않았어요. 노르망디의 여러 제후가 굳이 바다 건너 영국까지 가서 전투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거예요. 이에 윌리엄은 전리품과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험가를 공모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플랑드르와 브르타뉴·앙주·메인 등 프랑스 주요 지역에서 전투 자원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약 8000명에 달하는 당시로선 대규모 군대를 결성한 윌리엄은 때를 기다립니다.

 

당시 영국은 정치·군사적인 위기에 휩싸여 있었는데요. 해럴드는 말만 영국 왕이지 사실상 본래 근거지였던 웨섹스 지역에서만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해럴드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동생 토스티그와 노르웨이 왕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어요. 해럴드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며칠 후 영국 남쪽 해안가에 윌리엄의 군대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알게 됐답니다.


◇영국을 유럽으로 만든 전투 

동생과의 전투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해럴드 군대는 1066년 10월 14일, 영국 남부의 헤이스팅스 근처에서 윌리엄의 군대와 맞붙습니다.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윌리엄 군대는 해럴드 군대를 '거짓 퇴각'과 '기습 공격' 전략으로 크게 무찔렀지요.

 

전투 초반 윌리엄 기병대(말을 탄 병사들 군대)는 해럴드 보병대(걸어서 싸우는 군대)를 공격하지 않고 마치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처럼 꾸몄어요. 승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해럴드 보병대가 윌리엄 군대를 뒤쫓자 기병대는 갑자기 뒤돌아서 반격을 했고, 이런 기습 공격을 몇 차례 반복하며 해럴드 군대를 와해시켰지요.

 

전투 마지막, 윌리엄이 궁병대에 하늘 높이 화살을 쏘라고 지시하자, 해럴드의 군사들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맞으며 쓰러졌답니다. 해럴드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요. 이를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라고 해요.

 

이 전투가 바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자수로 새겨져 있어요. 태피스트리에는 해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아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요. 여러 사료에 따르면 해럴드 왕은 윌리엄 등에게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죽었다고 해요. 윌리엄의 이복동생이 제작을 주도한 태피스트리이기에 해럴드가 '신(神)이 쏜 화살', 즉 신이 정해준 운명 때문에 죽은 것으로 꾸며낸 것이지요.

전투 직후 윌리엄은 그해 성탄절에 영국 왕위(윌리엄 1세·1027~1087)에 올랐어요. 이렇게 해서 영국에는 약 600년 앵글로 색슨 왕조가 문을 닫고 유럽 대륙 세력인 '노르만 왕조'(1066~1154)가 들어섰답니다.

 

윌리엄은 에드워드 왕의 정당한 계승자를 자처했어요. 기존 앵글로 색슨 시대의 법과 제도, 풍습 등을 이어갔고 색슨족이든 노르만족이든 구분하지 않고 기사의 권리와 의무를 부과하기도 했어요. 물론 대륙식 풍습을 심어놓기도 해서, 주(州) 장관으로 노르만인만 임명했고 프랑스처럼 주 재판권과 교회 재판권을 분리했지요. 또 왕을 뽑는 귀족 회의 대신, 왕을 섬기는 봉건 귀족들로 구성된 프랑스식 왕실 회의를 도입했어요.

 

윌리엄의 정책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솔즈베리 서약'과 '둠즈데이 북' 편찬인데요. 윌리엄은 전국의 귀족들을 소집해 국왕에게 충성하는 솔즈베리 서약을 하도록 하고, 왕의 명령을 받은 위원들을 보내 사상 최초의 토지 대장(둠즈데이 북)을 만들도록 했어요. 영국의 모든 토지와 농민들이 어떤 주, 어떤 영주에게 얼마만큼 소속돼 있는지 분명히 해 세금을 정확하게 징수하도록 한 행정 자료였지요. 앵글로 색슨 시대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던 자유민들은 이렇게 점차 중앙집권식 봉건 제도로 포섭돼 갔답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1066년 윌리엄의 승리를 '영국이 진정한 유럽 국가가 된 결정적 계기'라고 평가했어요. 그만큼 1066년은 영국이 유럽 대륙의 문화를 흡수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였다는 것이지요. 현재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절차를 밟고 있는 영국에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왕들의 별명]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의 별명은 '정복왕'이었어요. 이처럼 중세 유럽의 왕들은 대개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칭송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붙였지요. 에드워드 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을 만큼 신앙심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참회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12세기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전쟁터에서 용맹함을 자주 발휘해 '사자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답니다.

이정하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2.08 10년 원정으로 유럽·아시아 걸친 대제국 건설… '헬레니즘' 시대 열어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시아 등 정복하고 33세로 사망… 두 나라서 모두 자랑하는 위인이죠
'마케도니아' 국명 사용 놓고 분쟁 중

 

얼마 전 그리스인 수만 명이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주(州)의 한 도시에서 '마케도니아를 나라 이름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시위를 벌여 화제가 됐어요. 그리스 국경 북쪽에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인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있는데, 그리스인들이 이 국명(國名)에 대해 '그리스 역사의 상징인 마케도니아란 이름을 도용했다'며 반발해왔거든요.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년)이 통치했던 왕국 이름이에요. 그리스 북부에도 이 이름을 딴 마케도니아주가 있을 만큼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모두 자랑스러워 하는 이름이지요. 오늘은 한때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세 대륙에 걸쳐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마케도니아, 그리스 중심으로 떠오르다 

현재 그리스 북부 지역과 마케도니아 공화국 일대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케도니아인들이 살고 있었어요. 오랜 기간 그리스인에게 '변방의 야만인'이라고 무시당했던 이들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고대 이란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속절없이 굴복했을 만큼 세력이 미약했지요.

 

기원전 4세기 중반,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이 되면서 변화가 일었어요. 필리포스는 정치·군사 개혁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중무장한 보병 부대와 기병대를 키워 그리스 북부 지역 일대를 통일했지요. 그는 더 나아가 그리스 전체를 통합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어요.

  

 이수스 전투에서 활약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검은 말의 모습을 묘사한 기원전 1세기 모자이크 작품(폼페이 발굴)이에요. /위키피디아

 

당시 그리스 패권은 도시국가(폴리스) 테베가 장악하고 있었어요. 테베는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과 함께 반(反)마케도니아 전선을 형성했고,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현재 그리스 중부 지역)에서 마케도니아군과 격돌했지요. 양쪽 병력은 3만여 명으로 비슷했는데 이날 전투에서 한 패기 넘치는 젊은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마케도니아가 대승을 거두었답니다. 이 장군이 바로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이하 알렉산드로스)예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한 필리포스는 여러 도시국가와 동맹을 맺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를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출정을 준비하던 중 필리포스가 갑자기 암살당하면서 스무 살에 불과했던 젊은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이 됐지요.

 

어렸을 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아주 영리했는데, 그와 관련된 일화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기록돼 있어요. 한 상인이 필리포스에게 성질이 매우 거친 검은 말 한 마리를 끌고 왔어요. 그 말은 당대의 이름난 장군도 길들이기 힘들 만큼 사나워서 필리포스도 말을 돌려보내라 했죠. 이때 열두 살 난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조련해보겠다며 나섰어요.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그는 말 옆으로 다가가 고삐를 움켜쥐고 말머리를 거칠게 태양 쪽으로 돌렸어요. 말이 자기 그림자를 보고 흥분해 날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렇게 한 것이지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본 말은 갑자기 얌전해졌고, 이를 본 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아들아, 너는 네 능력에 맞는 왕국을 찾아라. 마케도니아는 너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나 작구나" 하며 능력을 인정해줬다고 해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필리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테베와 아테네 등 여러 도시국가가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들었어요. 알렉산드로스는 재빨리 왕권을 안정시키고 그들이 다시는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테베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지요. 살아남은 시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 버렸다고 해요.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군과 헬라스 연맹군(폴리스 연합군) 등 6만 대군을 이끌고 아버지가 꿈꾸던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어요. 그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오늘날 터키) 지역을 모두 장악하자,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지요.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는 이수스 강가에서 만나 대대적 전투를 벌였어요. 당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4만여 명으로 페르시아군보다 훨씬 열세였지요.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기죽지 않았어요. 그는 왼쪽 진영의 보병대가 밀집 대형을 이뤄 버티는 동안 오른쪽 진영의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에 직접 뛰어들어 전열을 무너뜨렸어요. 그리고 남은 적들을 포위해 섬멸해 버렸지요. 전투에서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지만,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진격을 멈추지 않았어요.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 북부 지역까지 진출했지요.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원정 생활을 이어온 군인들이 전염병 등으로 고통받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회군(回軍)하던 중 열병에 걸려 기원전 323년 서른세 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10여 년 원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사이 지중해),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다뉴브강에 이르기까지 세 대륙에 걸친 광대한 제국을 이룩했어요. 당대 최고 문명국가들을 짧은 시간에 정복한 그의 업적을 기려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이라 부르지요.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알렉산드로스주 출신임을 앞세워 마케도니아에 '나라 이름을 고치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마케도니아는 '우리 땅 대부분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였다'며 반발하고 있지요. 조만간 두 나라 정상이 나라 이름을 둘러싼 분쟁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만큼 이번에는 지혜로운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헬레니즘(Hellenism) 문화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뒤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페르시아 등 동양(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했어요.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정복지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하고, 현지 제도나 관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2.15 달이 갑자기 사라지는 월식… '천동설' 시대엔 불길한 징조였죠

[중세 유럽의 개기월식]

개기월식, 원인 몰라 모두 두려워해… 동로마제국 함락 전에도 관찰됐죠
코페르니쿠스·갈릴레이 '지동설'로 명백한 천문 현상으로 밝혀졌어요

지난 1월 31일, 전국 밤하늘에 개기월식(皆旣月蝕)이 펼쳐졌어요. 개기월식은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에 놓여 달이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이에요. 부분월식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일부만 가려지는 것을 말하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개기월식을 신기한 우주 쇼로 받아들이지만, 천문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달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해 두려워했답니다.


◇개기월식을 두려워한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인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서 월식을 관측하다가 달을 가리는 그림자가 지구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월식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식하지 않았어요. 아주 기이하고 주술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지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붉은 달'이 뜨면 마법과 주술의 여신 헤카테가 저승의 개를 몰고 지상을 돌아다니면서 저주를 퍼뜨린다고 믿었어요. 여기서 말하는 '붉은 달'은 개기월식 때 나타나는 '블러드문(Blood moon·지구에서 달의 색깔이 붉게 보이는 것)' 현상을 말하는 것이에요. 블러드문이 뜨는 날엔 집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해 농사를 망치는 불길한 징조로 여겼지요.

 

4세기 후반부터 1000년 넘게 이어진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이었어요. 이 도시의 상징은 '달'이었기 때문에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해요. 그런데 1453년 어느 날, 개기월식이 일어나면서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사라지는 일이 생겼어요. 그로부터 5일 후, 콘스탄티노플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했답니다. 결과적으로 개기월식의 전설이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된 것이지요. 이에 대해 당시 천문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던 오스만 제국에서 동로마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블러드문이 뜨는 시기에 맞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기까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답니다. 많은 자연 현상을 '신의 뜻'으로 설명하던 중세 유럽에 과학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었어요.


◇지동설을 주장한 두 과학자 

폴란드 상인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며 천문학을 공부했어요. 그는 오랜 연구 끝에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요. 여기서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에 태양을 놓고, 그 주위에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을 차례차례 배열한 모형을 제시했답니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고 있다는 주장(지동설·地動說)을 펼쳤지요.

 

당시에는 하느님이 창조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별 중의 하나라는 생각(천동설·天動說)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성경에 반하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지요. 코페르니쿠스는 이 책의 초판본을 받아본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로마 교황청은 그의 책이 기존 우주 질서를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금서(禁書)로 지정했어요. 독일의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조차도 코페르니쿠스를 '점성술사'라고 깎아내렸지요.

 

▲ 갈릴레이가 관찰해 그린 달의 표면. /위키피디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어간 것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였어요. 피사 지역의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갈릴레이는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피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수학과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어요. 그는 1609년 확대율을 기존 것보다 30배나 높인 망원경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열심히 우주를 관측하면서 달의 표면을 최초로 자세하게 기록했답니다.

 

'달 표면은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광경 중 하나다. … 표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지구 표면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광대한 돌출부, 깊은 계곡과 만곡부(활처럼 심하게 굽은 부분)가 가득하다.' 1610년 그가 쓴 '별세계의 보고'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에요.

 

갈릴레이는 당시 완전히 매끄러운 구(球)라고 믿었던 달에도 지구처럼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어요. 그리고 이후 목성의 위성들, 토성의 띠, 태양의 흑점 등을 잇따라 관찰하면서 60여 년 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갈릴레이의 이 같은 활동이 알려지자 로마 교황청은 그에게 경고했어요. 그러나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지지하는 활동을 이어가자, 결국 로마 교회는 그에게 이단(異端) 혐의를 씌워 종교 재판정에 세웠지요. 갈릴레이는 1616년 2월 26일,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다시는 지동설을 논하거나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어요.

 

▲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 이단 심문소에 불려온 갈릴레이(오른쪽)를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이때 갈릴레이가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요. 나중에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판명났지만 그만큼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예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살던 시대에는 눈으로 명백하게 관찰할 수 있는 천문 현상이라도 주류의 지식과 신념에 맞지 않으면 배제당해야 했던 거예요.

우리는 더 이상 개기월식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과거 두려움의 대상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과학으로 발전하면서 인류 역사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 것이랍니다.

 

☞금성(金星)과 지동설

1610년 갈릴레이는 금성의 모양을 망원경으로 관찰했어요. 금성은 마치 달처럼 초승달 모양이 됐다가 반달 모양이 됐다가 보름달 모양이 되는 변화를 계속 보여주었지요. 이는 금성과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기존 ‘천동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적용하면 금성의 모양 변화가 잘 설명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는 훗날 지동설을 뒷받침해주는 강력한 근거가 됐답니다.

이정하·천안 계광중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2.22 재빠른 핀란드 스키부대 맹활약… 3배 많은 소련軍 쩔쩔맸죠

[소련 핀란드의 '겨울 전쟁']

영토 요구 거절에… 소련 1939년 침공
대규모 병력·전차 등 우세했지만 게릴라식 공격에 소련군 허둥지둥
스키·사격 결합한 '바이애슬론' 원형

 

평창 동계올림픽 정식 종목 가운데 '바이애슬론'이란 스포츠가 있어요. 사격총을 등에 메고 눈 덮인 지형을 스키와 폴을 이용해 이동한 뒤 지정된 장소에서 사격 시합을 하는 경기예요. 출발선부터 결승 지점까지 걸린 시간과 사격의 정확성 등을 가려 최종 순위를 결정하지요.

바이애슬론은 과거 북유럽 군인들이 '군사 정찰(Military patrol)'을 위해 실시하던 운동 경기 중 하나였답니다. 겨울이 길고 혹독하며 눈이 많이 내리는 북유럽 지역에선 스키를 타면서 사격을 하는 전투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이 같은 '바이애슬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게 바로 핀란드와 소련의 '겨울 전쟁'이었지요.


◇소련의 핀란드 침공

12세기 초부터 스웨덴 왕국의 지배를 받아오던 핀란드는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09년 제정(황제가 통치하는 나라) 러시아에 편입됐어요.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벌어지고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자 혼란기를 틈타 독립을 선언했지요.

  

▲ 핀란드로 향하는 소련군의 모습. 스키 장비를 착용한 모습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독립 후 핀란드에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적(赤)군과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루려는 백(白)군이 충돌하면서 잠시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백군이 승리한 후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던 핀란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답니다.

 당시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동유럽과 북유럽 여러 나라를 침공하며 영토를 넓혀나가고 있었어요. 폴란드 동부 지역과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빠른 속도로 장악한 소련은 핀란드로 눈길을 돌렸지요. 소련은 핀란드에 외무장관 몰로토프를 보내 국경지대 일부 영토를 할양(자기 나라 영토 일부를 다른 나라에 빌려주는 것)해달라고 요구했어요.

핀란드가 이를 거절하자,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군이 국경지대에서 자국 군대를 먼저 공격했다는 핑계를 대고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어요.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겨울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핀란드의 탁월한 전략

전쟁 초기 소련은 26개 사단(약 46만명) 병력과 전차 2300여 대, 항공기 3000여 대를 동원했어요. 그에 비해 핀란드군에는 10개 사단(약 16만명) 병력에 전차 30여 대, 항공기 100여 대만 있었고 무전기나 포탄 등 전쟁 물자도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었지요.

 

▲ 숨어서 소련군을 노리는 핀란드 군인들 모습. /위키피디아

 

비록 군사적 규모에서 열세였지만 핀란드에는 72세 노장(老將)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이 있었어요. 그는 핀란드 내전 이후 은퇴한 상태였지만 전쟁이 터지자 군으로 복귀했어요. 만네르헤임은 소련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전선(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연결한 선)이 1000㎞로 매우 길고, 대부분의 지형이 눈으로 덮인 산과 숲이라는 점을 이용해 영리한 작전을 세웠어요. 소련군이 한정된 길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한 그는 적군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길에 병력을 집중시켰고, 하얀 눈 위에서 잘 드러나지 않도록 핀란드군에게 모두 흰색 군복을 입혔어요. 그리고 보병들에게 스키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며 싸우도록 하는 게릴라전을 펼치게 했지요.


◇약소국의 처절한 저항

소련은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병력이나 전쟁 물자가 소련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핀란드 내 공산주의자들도 자기들 편에 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소련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소련군은 대규모 군대를 전선에 길게 배치해 화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를 범했어요. 또 무엇보다 겨울 전투에 대한 대비책이 너무나 빈약했어요. 한 달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소련군은 눈밭 위에서 위장할 수 있는 흰색 전투복도 준비하지 않았고, 북유럽의 혹한과 폭설에 대비한 전쟁 물자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지요.

수오무살미(핀란드 동부 지역)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소련은 그제야 자신들의 오만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소련군은 핀란드군보다 4~5배 많은 군대를 이끌고 일렬로 길게 행군하고 있었는데요. 핀란드 보병이 스키를 타고 나타나 화염병을 던진 뒤 재빠르게 사라지는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펼치자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하기만 했어요.


소련은 이 전투로 약 3만명의 군인을 잃었고, 전차와 대포를 비롯한 수많은 전쟁 장비를 핀란드군에 빼앗겼답니다. 그제야 소련은 지휘부를 교체하고 병력을 추가로 투입해 반격에 나섰어요. 그 결과 1940년 2월 핀란드의 방어선을 허물었고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평화 조약을 강제로 맺으면서 겨울 전쟁은 일단락됐습니다.

겨울 전쟁은 결과만 놓고 보면 핀란드의 패배였지만, 소련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어요. 약 105일간 소련군 사상자가 약 20만명, 핀란드군 사상자가 2만5000여 명으로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막판 패배로 강제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던 핀란드의 희생은 상당히 컸답니다. 핀란드는 전체 인구의 12%가 살고 있던 카렐리야 지역을 소련에 빼앗겼고, 핀란드 남부 항코 항구를 소련에 빌려주겠다는 굴욕 협상을 받아들여야 했지요. 하지만 소련의 합병 야욕을 좌절시키고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겨울 전쟁은 핀란드 역사에서 당당한 투쟁으로 남아 있어요.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

겨울 전쟁 당시 핀란드군은 '몰로토프(소련 외무장관) 칵테일'이라는 화염병도 만들었어요. 화염병에 그 같은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개전 초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핀란드 주요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으며 국제사회에 "우리는 핀란드의 좋은 친구다. 우리는 지금 원조용 빵을 투하했을 뿐이다"고 거짓으로 변명한 사실을 비꼬기 위해서였지요. 핀란드군은 몰로토프의 말에 화답하듯 소련군에게 "이 술이나 받아 마셔라"고 외치며 화염병을 던졌다고 해요.

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3.06  처칠, '나치와 타협' 주장에 "스스로 무릎 굽힌 나라는 사라져"

[처칠과  2차 세계대전]

독일 170만 병력으로 폴란드 침공, 파죽지세로 프랑스 등 서유럽 점령 
英 처칠, '전시 내각' 총리에 올라 '獨과 협상' 거부하고 끝내 승리했죠

▲ 1943년 런던 다우닝가에서 대중에게 승리의 ‘V(브이) 사인’을 하고 있는 처칠.

 

지난해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덩케르크'가 인기를 끈 데 이어, 최근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어둠의 시간)'가 개봉해 화제가 됐어요. '덩케르크'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돼 있던 연합군 33만8000여 명을 구출해낸 작전을 다뤘다면,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덩케르크 작전을 결정하기 전까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겪었던 고뇌와 복잡한 국제 정치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요.

윈스턴 처칠(Churchill·1874~1965)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영국 총리에 오른 지도자예요. 과감한 승부수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세계대전을 연합국 승리로 이끌어 '승리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인물 중 한 사람이지요. 오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처했던 상황에서 처칠이 선택한 길을 알아볼게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어요. 1918년 전쟁 후 질서를 위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연합국은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묻겠다며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떠안겼지요. 잿더미가 된 국토에서 독일 사람들은 빵 하나를 사느라 마르크화(당시 독일 화폐)를 수레 한가득 싣고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허덕였어요.

 

독일 국민 사이에선 연합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어요. 그 안에서 자란 어두운 싹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Hitler·1889~1945)'였지요. 1차 세계대전 당시 일개 상병으로 참전했던 히틀러는 1920년대 나치당 지도자가 되면서 독일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합니다.

 

독일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탓으로 돌린 히틀러는 1932년 7월 치른 총선거에 승리하며 이듬해 총리가 됐어요. 이때부터 그는 극단적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를 통해 독일 민족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그 힘을 이용해 세계 제패를 꿈꾸기 시작했지요.

 

당시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이런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일부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 협정'을 체결하는 등 '유화 정책(appeasement)'을 폈어요. 경제 대공황 여파로 군비를 크게 줄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독일과 맞서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런 양보에도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었어요.

 

170만 명을 헤아리는 독일군 병력에 폴란드군은 속수무책이었어요. 슈투카(Stuka) 폭격기를 활용한 공습, 육·공군의 체계적인 전투 수행으로 무장한 독일군은 매우 강력했어요. 여기에 소련이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등에 업고 폴란드 동쪽 지역을 침공하면서 폴란드는 함락되고 맙니다.

 

▲ 1940년 11월 14일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고 폐허가 된 코벤트리 대성당을 둘러보고 있는 윈스턴 처칠(맨 앞)과 정부 관계자들 모습. /위키피디아(영국 제국전쟁박물관)

 

1940년 4월 독일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했어요. 이는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는 신호였지요. 결국 체임벌린 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거국 내각(여야 정치인을 주요 자리에 임명하는 것)의 수반으로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오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그가 취임식 때 한 연설은 전쟁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여줬어요.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입니다. (중략)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극악무도한 폭정(暴政)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승리(victory)입니다!"


◇처칠 "나치와 타협하지 않겠다"

당시 독일은 아주 치밀하고 체계적인 서유럽 침공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에 반해 영국과 프랑스는 방어 중심적인 작전만 갖고 있었지요. 독일 낙하산부대와 전차부대는 프랑스 북서부 지역까지 밀고 들어왔고,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고립 상태가 됐어요. 탈출구는 이제 덩케르크밖에 남지 않았어요.

1940년 5월 26일, 처칠은 불가능에 가까운 시나리오처럼 보였던 '덩케르크 작전'을 개시합니다. 민간 선박을 총동원해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구출해낸 이 작전은 날씨가 도와주는 천운(天運)을 타고 대성공을 거두었답니다. 덩케르크 작전을 계기로 연합국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지요.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 파리까지 함락하자, 많은 이가 처칠에게 '독일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실제 히틀러도 7월 영국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지요. 영국 전시 내각의 핼리팩스 외무장관도 강하게 타협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처칠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런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어요. "우리에게는 좌절도 패배도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 따라도 우리 국토를 지킬 것입니다." 처칠은 "싸우다가 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스스로 무릎을 굽힌 나라는 없어질 수밖에 없다"며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 힘썼지요. 만약 그때 영국이 독일과 타협했다면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을 거예요.

영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자, 히틀러는 공군을 통한 기습 공격을 명령했어요.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 작전은 실패했고, 본격적인 영국 본토 공격도 연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사이, 처칠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향해 "무기를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우리가 끝장내겠다"고 호소했어요. 한 달 뒤,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키고 영국에 무기를 빌려주기 시작했답니다. 이어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세는 연합군 우세로 돌아섰지요.

처칠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군인으로 쿠바·인도·수단 등 전 세계 영국 식민지를 돌아다니며 복무했어요. 이후 정치에 입문해 하원의원·식민장관·통상장관 등을 거친 처칠의 삶은 어떤 의미에선 영국 그 자체나 다름없었어요.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답니다.

"국가의 안전, 동포의 생명과 자유가 걸린 문제에서 확신이 있을 때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을 피하면 안 된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싸워야 한다."

 

☞뮌헨 협정

1938년 9월 독일 뮌헨에서 독일 나치스와 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맺은 평화 협정. 히틀러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란트 영토를 달라고 요구하자, 또 다른 세계대전이 터질 것을 우려한 영국·프랑스 등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설득해 이를 받아들이는 협정을 맺었어요. 히틀러의 야욕을 간파하지 못한 이 협정은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낳았어요.

박세미 기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3.08 "드레퓌스 진실 덮는다" 폭로… 19세기 프랑스 뒤흔들었죠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反독일·反유대주의 판치던 프랑스… '유대인' 드레퓌스 간첩으로 몰았죠
에밀 졸라, 국가 권력의 횡포 고발… 개인 권리 지키려고 용기있게 고백

 

지난해 미국의 영화 제작자 와인스틴의 성폭력 사건을 폭로하면서 시작된 '미투 운동'(소셜 미디어에 '#Me too'를 다는 캠페인)의 불길이 거세게 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정치권과 법조계, 문화계, 학계 등을 중심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요.

미투 운동은 여성이 자기보다 사회적 권력이 높은 남성으로부터 당한 폭력을 용기 있게 폭로하는 운동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도 있었는데, 국가 권력으로부터 개인이 받았던 억압과 피해를 고발했던 사건이었지요. 소셜 미디어가 없던 그때 어떻게 이런 고발을 할 수 있었는지 120여 년 전 프랑스로 떠나볼게요.


◇만들어진 반역자, 드레퓌스

1870년 여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의 조카)가 프로이센(훗날의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전쟁 시작 두 달 만에 프랑스 주력군은 전멸당했고, 나폴레옹 3세는 적국의 포로로 붙잡혔지요. 프로이센은 파리를 점령하고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어요.

 

 1898년 앙리 드 그루가 그린 작품‘군중에 둘러싸인 졸라’. /위키피디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알자스·로렌 지방도 프로이센에 넘겨줘야 했어요. 이때 조국의 패배를 지켜보면서 프랑스를 지키겠다는 꿈을 키운 열한 살 소년이 있었는데, 이름이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였어요. 알자스 지방의 유대인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은 프랑스군에 입대해 포병 장교가 됐지요.

그 무렵 프랑스 사회는 유대인이 연루된 거대한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반(反)유대인 정서가 매우 높았어요. 유대인이던 드레퓌스는 많은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해 프랑스군 참모본부에 들어갔지요. 1894년 9월 프랑스군 참모본부는 독일군 정보요원이 수신인(편지를 받는 사람)으로 지정된 문서를 하나 입수합니다. 문서에는 프랑스군의 대포 설계도면, 주요 부대의 배치도 등 각종 군사기밀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었죠. 충격을 받은 참모본부는 중요한 정보를 적에게 빼돌린 반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포병 장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군 당국은 드레퓌스를 유력한 혐의자로 지목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DNA나 지문 감식 같은 과학적 조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용의자를 색출하는 방식은 필적(손수 쓴 글씨체)을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드레퓌스는 기밀문서를 작성한 사람과 글씨체가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독일 땅이 된 알자스 지방 출신이라는 점과 돈을 밝히는 유대인이라는 편견이 덧씌워져 군사재판을 받게 됐어요.

 프랑스 신문에 실린 에밀 졸라의‘나는 고발한다’.

 

반유대주의적 프랑스 언론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임을 강조하며 비난을 퍼부었어요. 한 가톨릭 신문은 드레퓌스의 혐의가 아직 법적으로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도둑질을 하고 공무원을 매수하고 반역 행위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유대인들'이라는 논평까지 냈어요.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의 최종 선고일에 재판정 앞에 몰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겠다"며 섬뜩한 고함을 지르기도 했어요.

재판정에서 검사는 조작된 증거들을 제시했어요. 드레퓌스는 무죄임을 주장했지만 무시당했고, 군에서의 모든 계급을 박탈당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리고 1895년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에 수감되었어요.

드레퓌스가 유배를 간 뒤, 군사기밀을 팔아넘기려 한 진범이 '에스테라지'라는 보병 장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어요. 이를 확인한 군 관계자가 상부에 다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군 당국은 오히려 그 관계자를 식민지로 발령내고 좌천시켰답니다. 그리고 진범 에스테라지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프랑스를 뒤흔든 '나는 고발한다'

1898년 1월 13일, 파리의 일간지 '여명' 1면에 한 지식인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실립니다. 기고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사랑받는 소설가인 '에밀 졸라'(1840~1902)였어요.

그는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진실을 덮으려는 프랑스군을 '범죄 집단'이라고 비난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내가 보낼 밤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 글로 인해 졸라는 국방부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가는 신세가 됐어요.

그러나 '나는 고발한다'의 파장은 엄청났어요. 진보적 언론과 지식인들은 드레퓌스가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의 재심에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고,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어요.

1899년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게 됐지만, 증인으로 출석한 군 수뇌부는 여전히 그가 유죄임을 주장했어요. 전 국방부 장관 메르시에는 "드높은 명예를 지닌 나와, 관용을 베풀어주어 이 자리까지 온 유대인 중 누가 죄인인지 결정하라"며 법정을 압박했지요. 결국 드레퓌스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국내외 여론은 다시 끓어올랐어요.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는 "수치스럽고 비관적이며 구역질 나는 야만적 판결"이라고 보도했고, 에밀 졸라도 다시 펜을 들어 여론을 주도해나갔죠.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이 국가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죄 선고 10일 만에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합니다. 수많은 인사가 '사면을 받아들이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5년간 감옥에 갇혀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정부 제안을 받아들였죠. 사면 후 드레퓌스는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해 1906년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어요. 또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해 싸웠지요.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거예요.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에 대해 "언젠가 프랑스는 나라의 명예를 구해준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처럼 권력에 맞선 용기 있는 고백은 한 사회를 한발 더 나아가고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에요.


[에밀 졸라는 누구? ]

19세기 프랑스의 문학가예요. 출판사 직원으로 일하다 뒤늦게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지요. '목로주점' '나나' '제르미날' '인간 짐승' 등이 잇따라 높은 평가를 받으며 유명 작가가 됐고,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1898년 '나는 고발한다'로 영국에 망명을 가는 신세가 됐고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02년 사망했어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3.15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거대한 '소비에트 연방' 무너뜨렸죠 

[소련의 붕괴]

1922년 러시아 등 15개국 소련 결성, 1980년대에 공산주의 병폐 드러났죠
고르바초프 개혁·개방 정책 이끌자 소련 내 공화국들 독립 선언했어요

 

오는 18일 러시아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러요.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는 블라디미르 푸틴(66·Putin) 현 러시아 대통령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 푸틴 대통령이 공개 자리에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바꾸고 싶은 부분은 소련 붕괴"라고 말해 화제가 됐어요. 이에 외국 언론은 KGB(옛 소련의 정보기관) 출신인 푸틴이 러시아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고자 이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지요.


1991년 12월 25일 당시 소련 대통령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소련은 사실상 해체됩니다.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서로 대립하던 '냉전(冷戰·cold war) 시대'를 끝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1990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요. 오늘은 소련이 어떻게 붕괴했는지 살펴보기로 해요.


◇소련의 탄생과 병폐

소련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줄인 말이에요. 소비에트(Soviet)는 노동자·군인·농민 등으로 구성된 '대표자 회의'라는 뜻이었지만, 1917년 세계 첫 공산주의 정권을 세운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부터는 '공산주의 정권'을 의미하는 말이 됐어요.

 

1922년 12월 러시아를 비롯해 우크라이나·벨라루스·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현재는 조지아) 등 여섯 나라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이들을 한데 합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탄생합니다. 동유럽부터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에 걸친 세계 최초의 거대 공산주의 국가 연합으로, 나라마다 사회·문화·역사가 서로 달랐지만 경제 부흥과 공산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통합한 것이지요. 이후 소련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15개 공화국으로 확대됐어요.

 

▲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가운데)이 동독을 방문한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1980년대 들면서 공산주의 국가들은 여러 가지 병폐를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모든 경제활동을 국가에서 정해준 대로 해야 했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의 자율성은 전혀 존중받지 못했지요. 그러다 보니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었어요. 또 집단적으로 일하는 노동 방식도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욕을 끌어올리지 못했고 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제철·조선·기계 등 중공업 중심 경제 정책을 펴는 바람에 소비재(식품·의류·가구 등) 공업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면서 대중은 항상 생활필수품이 부족한 상황에 시달려야 했어요. 1980년대부터 동유럽 공산국가에서는 산발적 시위와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지요.

 

1982년 소련 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브레즈네프(1906~1982) 서기장이 사망하자 과도기를 거쳐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 자리에 오릅니다. 이제 막 취임한 고르바초프 앞에 펼쳐진 소련의 현실은 참담했어요. 저조한 경제성장률, 근로 의욕이 없는 노동자들, 부족한 소비재로 인한 대중의 불만, 기술 혁신의 부재(不在) 등 개혁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요.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사회·경제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 체제뿐 아니라 사회 체제의 대대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고르바초프, 개혁·개방 정책 펼치다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의 국내 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선 안 된다."

 

고르바초프가 취임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선언)'을 폐기하며 한 말입니다. 여기엔 소련의 과거 체제와 이념을 바꾸려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의지가 잘 나타나 있지요.

 

가 제시한 개혁 사상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 정책으로 연극·영화·출판에 대한 정부 감시와 검열을 최소화하고, 종교 활동이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었지요. 둘째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로 사회·경제·외교 정책에 대한 공산당 정부의 통제를 풀고 공장의 생산력을 높이려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임금을 획일적으로 국가에서 정하지 않고 개별 노동자가 물건을 얼마나 만들었느냐에 따라 결정하게 했지요.

 

즉, 고르바초프는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줄여서 경제적 효율성과 국가의 이익을 높이려고 한 것이에요. 다만 그는 소련 내 개별 공화국을 존중하되 연방체제는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었는데요. 개혁이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는 '급진파'와 개혁이 너무 빠르다고 비판하는 '보수파'가 대표적이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에 자극받은 소련 내 공화국들이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그루지야,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요구했고, 소련의 여러 공화국에서 독립을 위한 민족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지요.

 

1990년 3월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고르바초프는 군대를 파견해 매우 강경하게 대응하기도 했어요. 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면 다른 국가도 줄줄이 소련을 이탈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들불처럼 번지는 공화국들의 독립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의 자치(自治·스스로 다스림)를 인정하는 새로운 연방안을 만듭니다.

 

▲ 1991년 8월 보수파 쿠데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모스크바 시민들.

 

그런데 1991년 8월, 기존 소련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현지에서 감금되고 말았지요. 보수파는 연방정부까지 장악했지만 당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던 '급진파' 보리스 옐친의 반대, 러시아 국민의 격렬한 시위에 부딪혀 쿠데타는 실패하고 말았어요.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결국 여러 공화국의 자치 요구를 받아들였답니다.

보수파의 쿠데타 실패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치에 반대하던 보수파를 몰락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소련 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답니다. 1991년 8월 25일 마침내 고르바초프는 서기장 자리를 내려놓고 연방 중앙위원회를 해체한 뒤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환호했지요. 이후 공화국 대부분이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11개 나라(현재는 9개)가 '독립국가연합(CIS)'으로 동맹을 유지하기로 합니다.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역사적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브레즈네프 독트린(doctrine)

1968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주장한 외교 방침. 공산주의 진영에 속한 어느 나라가 생존에 위협을 받았을 때 이를 사회주의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는 원칙이에요. 한 나라의 주권과 이익을 사회주의 진영 전체를 위해 일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지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3.22 反독재 시위가 내전으로… 종교 갈등에 미·러 대립까지 얽혔죠

[7년째 접어든 시리아 내전]

2011년 민주화 시위에서 내전 시작… 33만명 사망… '21세기 최악의 전쟁''시아파' 정권에 '수니파' 반정부군, 이란·이스라엘까지 내전 개입했죠

 

지난 15일은 시리아 내전이 일어난 지 7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국제연합(UN)에 따르면 2011년 3월 이후 현재까지 시리아에서 최소 33만명이 내전으로 사망하고, 난민 558만명이 발생했다고 해요. 정식 보고되지 않아 집계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사상자의 규모는 더 클 거예요.


시리아 내전을 끝내기 위해 국제사회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답니다. 인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화학무기가 무차별 사용되면서 시리아 내전은 21세기 최악의 전쟁으로 꼽혀요. 이처럼 끔찍한 전쟁이 왜 좀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걸까요?


◇프랑스 통치, 내전의 씨앗을 심다

시리아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해 있어요. 이곳은 일찍이 농경문화가 자리 잡았고,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3000여 년 전부터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죠. 7세기 이슬람 세력이 들어온 시리아는 16세기 초 튀르크족이 세운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했어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벌어지자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은 적군인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랍인들에게 '오스만제국을 몰아내면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아랍인들은 이를 믿고 오스만제국을 무너뜨리고 현재의 레바논·팔레스타인·요르단 일대를 포함하는 '시리아 왕국'을 세웠지요. 하지만 연합국인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시리아 왕국을 위임통치하기 시작했어요.


프랑스는 시리아를 통치하면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어요. 시리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아닌, 소수파인 시아파를 지배 세력으로 키운 것이에요. 그러자 오랜 세월 이단으로 몰려 탄압받던 알라위파(시아파의 한 종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어요. 오늘날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아사드(Assad) 가문'이 바로 이 알라위파 출신이에요.


◇아사드 가문 집권과 '아랍의 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끝나자 1946년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정식 독립했어요. 하지만 1960년대까지 10여 차례 군인들이 쿠데타를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됐지요. 혼란은 1970년 아사드 가문 출신의 '하페즈'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끝났어요. 1971년 시리아 대통령에 오른 그는 2000년까지 독재를 했어요.

하페즈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둘째 아들 '바샤르'였어요. 바샤르는 의대를 나와 안과 의사로 일하는 등 정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막상 권력을 잡자 자신에게 반대하는 언론인과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탄압하는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시리아 인구 153명당 1명꼴로 비밀경찰을 붙일 정도로 국민을 철저하게 감시했어요.
 

▲ 건물이 부서지면서 하얀 콘크리트 가루에 뒤덮인 시리아 소년의 모습.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반(反)정부 시위인 '아랍의 봄'이 시작됩니다. 민주화를 위한 아랍 민중의 열망을 담은 이 운동은 이집트를 넘어 바레인·예멘·리비아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죠. 시리아 국민도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어요. 1982년 '하페즈'가 반정부 항쟁에 나선 민중 2만여 명을 고립시켜 대대적으로 학살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던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 도시 '데라'에서 몇몇 청소년이 장난삼아 담벼락에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는 구호를 썼다가 비밀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아이들을 석방해 달라는 부모들의 시위가 시작됐고, 여기에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확산됐지요. 그런데 정부군이 시위대를 잔혹하게 유혈 진압하면서 사태는 내전으로 발전합니다.


반정부군(이하 반군) 조직의 중심이 된 것은 정부군에서 이탈한 군인과 수니파 출신 군인들이었어요. 그러자 사우디아라비아·터키 등 주변 수니파 국가들이 반군에 무기와 숨을 곳을 제공해주었어요. 이에 맞서 시아파의 우두머리 격인 이란이 '초승달 벨트(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시아파 동맹)'를 보호하겠다며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해 시리아 내전은 두 이슬람 종파를 대리하는 중동전 성격을 띠게 되었지요.

이스라엘은 바로 옆 나라인 시리아에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란·헤즈볼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내전에 끼어들었어요. 그러자 미국이 '독재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을 지지한다는 명분과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이란·헤즈볼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반군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지요.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비극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같은 미국의 반군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키운 테러 조직이 있었어요. 바로 수니파 급진주의 무장 단체인 'IS(이슬람국가)'였지요.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진출한 그들은 급속히 세력을 키워 2014년 시리아 북부 도시 '락까'를 함락하고 IS 수립까지 선포했답니다. 미국의 공습 등으로 지난해 10월 락까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서구의 지원이 잔혹한 테러 단체를 키우고 이로 인해 시리아 내전이 더 길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죠.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자 아사드 정권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바샤르가 2015년 7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갑자기 전세가 역전됩니다. 러시아는 중동·지중해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 했고, 시리아 정부는 그런 러시아제(製) 무기를 대거 사들이는 단골 고객이었지요. 게다가 러시아 입장에서 시리아 내전은 자국에서 만든 새 첨단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어요. 러시아·이란의 지원에 힘입어 시리아 정부군은 반군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며 현재 전세를 압도하고 있답니다. 안타까운 것은 민간인 사상자 수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지요.


시리아 내전에는 독재 정권과 민주화 세력, 수니파와 시아파, 미국과 러시아, 이스라엘과 이란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어요. 일각에선 "서구 국가들이 사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지요. 전쟁이 길어질수록 어느 한 쪽을 굴복시키려는 움직임만 강해지면서 시리아 사태는 해결이 힘든 비극으로 치닫고 있어요.


[시리아 내전의 화학 무기]

시리아 내전은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사용해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어요. 대표적으로 '사린가스'는 맹독성 신경가스로 조금만 들이마셔도 중추신경계가 손상될 수 있는 무서운 무기예요. '염소가스'는 피부에 닿으면 살이 짓무르고 소량만 흡입해도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무기이지요. 아사드 정권은 민간인 공습에 이 같은 화학무기를 사용했다가 참혹한 피해가 알려지면서 맹비난을 받았어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정부군 공군기지를 공습하는 초강수까지 두었지만, 최근 정부군이 또다시 반정부군 점령 지역을 염소가스로 공격하는 등 처참한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3.30 경제 불안 속에 움튼 극단적 민족주의… 무솔리니 독재 낳았죠

[무쏠리니와 파시즘]

초등 교사 출신 伊 독재자 무솔리니 1922년 쿠데타로 파시즘 정권 수립
2차 대전 후 히틀러와 함께 몰락… 최근 극우정당 득세로 전 세계 불안

 

얼마 전 이탈리아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에서 극단적인 우파 정당들이 승리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이민자 추방을 주장하는 극우 세력이 득세하자 외국 언론은 '파시즘(전체주의·국수주의)'을 내세웠던 무솔리니(Mussolini·1883~1945)가 이탈리아에 다시 등장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답니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20세기 초 유럽을 비정상적인 광기(狂氣)로 몰아넣었던 독재자거든요. 오늘은 무솔리니와 파시즘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선전·선동에 능했던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원래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스위스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어요. 무솔리니는 논리적인 이론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보다는 과격하고 감정적인 연설과 글, 격정적인 몸짓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지요. 대중을 이끄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그는 곧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전진)'의 편집장이 됐어요.

 

▲ 1935년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추종자들의 모습이에요.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로마식 경례를 하고 있어요./위키피디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참전(전쟁 참여)에 반대하는 논조로 글을 썼어요.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자본주의 국가들 간 영토 야욕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봤거든요. 하지만 이탈리아가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기로 하자, 갑자기 입장을 바꿔 참전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그는 사회당에서 제명당하고 편집장도 그만두게 되었지요. 이에 무솔리니는 '포폴로 디탈리아(이탈리아 인민)'란 신문사를 세우고 우파적 주장을 펼치는 글들을 게재하기 시작했어요.

 

원래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어요. 하지만 전쟁이 가열되자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 등) 측과 연합국(영국·프랑스 등) 측은 이탈리아 같은 중립국들을 경쟁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했지요. 19세기 말에야 겨우 통일 국가를 이뤄낸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가담하기로 했어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해외에 거의 식민지를 갖지 못했던 이탈리아는 그 대가로 일정한 영토 보상을 받기로 했어요.

 

전쟁은 연합국 승리로 끝이 났어요. 유럽은 평화를 되찾았지만 전례 없는 대규모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지요. 실업자가 대거 발생하고 물가가 크게 오르는 인플레이션 현상도 심각했어요. 더구나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전쟁 승리에 기여한 점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당초 약속받았던 영토 중 일부만 보상받는 등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어요.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선 사회에 대한 불만과 과격한 민족주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1919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전쟁 후 혼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유주의 정당들이 패배하고, 사회주의 정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사회주의 세력과 정치·경제적 불안 속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운 파시스트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전체 위해 개인 희생하는 파시즘 세우다

1919년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기 위해 이탈리아 내 극우 세력들을 모두 모아 '파시 디 콤바티멘토(전투단)'라는 조직을 만들었어요. 이탈리아어로 '묶음'을 뜻하는 이 '파시(fasci)'에서 바로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탄생했지요. 이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손을 위로 올리는 로마제국식 경례를 하는 등 열렬한 민족주의로 무장했어요.

 

▲ 1936년 연대를 선언하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모습.

 

청년 계층까지 흡수하며 광범위한 대중 정당으로 개편한 국가 파시스트당은 신문사를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삼으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반파시스트 정치인들을 공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무솔리니의 선전·선동 연설이 큰 힘을 발휘했지요. 결국 1921년 총선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138석, 파시스트당이 35석을 얻었어요. 당시 사회주의 정당이 사회당, 공산당, 통일사회당으로 분열돼 있었기에 주도권은 파시스트당에 넘어갔지요.

파시스트당 지도자로서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28일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당시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제안하면서 무솔리니의 쿠데타는 이틀 만에 성공을 거뒀지요. 그리고 10월 30일,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인 '무솔리니 내각'이 탄생했어요.

이후 무솔리니는 언론을 탄압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하며, 파시스트당 외 모든 정당을 폐지하는 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어요. 또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1935), 파시즘 세력을 확대하겠다며 스페인 내전(1936~1939)에 간섭을 했지요. 또 독일과 일본에 이어 1937년 국제연맹까지 탈퇴하며 국제 질서에서 벗어났답니다.

히틀러도 손을 올리는 로마식 경례를 사용하는 등 무솔리니를 많이 모방했어요. 그가 이끈 나치당은 독일 대중의 불안과 공포, 극단적 인종주의를 이용해서 의석수를 늘려 갔지요.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독일 편에 가담했어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는 갈수록 미국·영국 등 연합국 쪽으로 기울었지요. 1945년 4월 28일 무솔리니는 연합국 유격대에 붙잡혀 총살을 당했고, 이틀 후 히틀러는 자신의 거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폭력을 정당화한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놀랍게도 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교훈을 배우며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답니다.

 

☞스페인 내전

1936년 2월 스페인에 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인민 전선 정부’가 세워지자, 군부가 이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어요. 독일·이탈리아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정부군을 지원했고, 소련은 인민 전선 정부군을 지지했지요. 내전은 점차 정부 측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1939년 3월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면서 반정부군이 승리를 거뒀답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4.06  안개와 결합한 석탄 매연, 런던 시민 공격… 12000명 사망했죠

[런던 스모그사건]

영국, 13세기부터 대기오염 심각해… 1952년 최악 스모그 사건 발생했죠 
심장 발작·호흡기 장애 사망 잇따라… '청정 대기법'으로 재난 극복했어요

 

반가운 봄이지만 전국 곳곳이 '미세 먼지' 때문에 말썽이에요. 지난달 말부터는 미세 먼지 '나쁨' 기준이 공기 1㎥당 51(마이크로그램) 이상에서 36㎍ 이상으로 높아지면서 올해 미세 먼지 '나쁨' 일수가 크게 늘어날 전망입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0만명당 미세 먼지로 인한 '조기(早期) 사망자' 2005 276명에서 2015 361명으로 껑충 뛰었어요. 정부에서 미세 먼지를 줄일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66년 전 영국 상황도 우리와 비슷했어요. 아니, 우리보다 더 심각했죠. 오늘은 런던 하늘을 잿빛으로 만들었던 스모그 사건과 더불어 영국이 환경 재난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 알아보도록 할게요.


◇런던을 잿빛 하늘로 만든 스모그

역사적으로 영국의 수도 런던은 짙은 안개와 석탄 사용 때문에 대기오염이 심각한 도시였어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1273,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세계 최초로 대기오염 방지를 위해 석탄 사용량을 줄이는 칙령(왕이 내린 명령)을 발표할 정도였지요. 그리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어요. 이처럼 영국 사람들은 일찍부터 땔감 대신 석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했고, 거기서 생기는 엄청난 매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요.

18세기 석탄을 연료로 쓰는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본격적인 산업혁명 시대가 시작됩니다. 석탄 사용이 늘면서 대기오염이 더욱 심각해지자, 1866년 영국 의회는 매연을 줄이기 위한 '위생법(Sanitary Act)을 제정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큰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수차례 스모그(smog·연기를 뜻하는 'smoke'와 안개를 뜻하는 'fog'의 합성어)가 발생했지요. 1948년에는 스모그에 따른 사망자가 300여 명이나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1952년 발생한 스모그에 비하면 그 정도 수치는 새 발의 피였지요.


1952 12 4일 목요일, 런던의 아침은 상쾌했어요. 그런데 오후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느닷없이 바람이 멈추고 습도가 높아지면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어요. 템스강을 오가던 화물선이 멈추고 도로에서는 교통사고가 잇따라 일어났지요. 추돌 사고 위험 때문에 운전자들은 차량을 길에 방치하고 걸어가야 했어요.

 

 1950년대 스모그가 가득한 영국 런던 전경. 다리 건너 빅벤 시계탑도 흐릿하게 보여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런던 시민들은 태연하기만 했어요. 항상 겪어왔던 '전형적 런던 초겨울 날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런던은 대낮에 경찰이 횃불을 들고 교통 지도를 해야 했을 정도로 스모그가 심각했지만, 시민들은 궂은 날씨 때문에 스포츠 경기나 오페라 공연이 취소됐다고 불평하는 수준이었을 뿐 대기오염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당시 영국은 가정·기업·공장은 물론 대부분 운송 수단이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별다른 공기 정화 장치 없이 대기 중에 곧바로 배출된 석탄 매연은 짙은 안개와 결합해 스모그를 만들었지요. 그렇게 안개 속으로 스며든 아황산가스는 황산으로 변해 런던 시민들의 호흡기를 공격했어요.


심각한 스모그가 발생한 날 저녁, 런던 시민들은 깜짝 놀랐어요. 집 청소를 하다 끈적끈적하고 시커먼 물질이 걸레에 묻어 나온 것을 보고 경악했죠. 식사를 준비하거나 빨래를 널던 사람들은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로 실려갔어요. 병원은 몰려든 응급 환자들로 포화 상태가 됐고, 쓰러진 사람들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갔지요.


◇영국의 대기오염 방지 대책

최악의 스모그는 12월 9일 아침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신기루처럼 사라졌어요. 하지만 스모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2주 동안 호흡기 장애와 질식 등으로 런던 시민 4000여 명이 사망했지요. 이듬해에는 만성 폐 질환으로 8000여 명이 더 사망하면서 1만 2000여 명이 스모그로 생명을 잃었어요. 사망자들은 노인, 어린이, 환자들처럼 면역력과 호흡기가 약한 사람들이었지요.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나서야 영국 정부는 근본적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대기오염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영국은 특별조사위원회인 비버위원회를 만들고, 1956년 청정 대기법(British Clean Air Act)을 제정했어요. 이 법은 런던 스모그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가정용 난방 기구에서 발생하는 연기나 재, 먼지 등을 억제하는 최초 법안이었어요. 또 가정에서 난방용으로 석탄 대신 가스나 석유, 무연탄, 전기 등을 사용하도록 정부가 지원해주는 내용도 포함했지요.


'무연 지구(Smokeless zone)'라고 불리는 오염 물질 규제 지역도 만들었어요. 지정된 지역 내에서 오직 정부가 허가한 연료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이 법은 석탄 사용을 줄이고 런던 대기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어요.


1962년, 런던에서 또다시 스모그 현상이 나타났어요. 이때 기상 상태는 10년 전과 매우 비슷했지만 피해 규모는 훨씬 줄어들었지요. 이는 정부가 대기오염의 위험성을 예보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시민들을 적절히 대피시킨 데다, 가정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사용량을 늘리고 공장·발전소를 도시 외곽으로 이전시켰기 때문이었어요. 매연 농도 역시 1952년과 비교했을 때 90% 이상 줄었어요.


런던 스모그 사건은 전 세계 각국에 대기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어요. 특히 영국인들은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정부에 '깨끗한 공기를 마실 권리'를 끊임없이 요구했죠. 그 결과 오늘날 런던은 세계 대도시 중에서 비교적 깨끗한 공기를 유지하는 도시가 됐답니다. 런던 스모그 사건처럼 우리도 대기오염의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고 장기적이고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나쁜 공기 때문에 시민들이 고통받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로스앤젤레스 스모그 사건

런던 스모그 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스모그 사건으로 꼽히는 것이 1943년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스모그 사건이에요. 런던 스모그가 석탄 연소로 발생하는 아황산가스 때문에 발생했다면, 로스앤젤레스 스모그는 자동차가 배출하는 질소 산화물과 탄화수소 등이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화학 반응을 일으켜 발생했지요. 그래서 이 스모그를 런던 스모그와 구분해 ‘광화학 스모그’라고 불러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4.13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독일 넘나들던 '세기의 이중 스파이'

[마타하리]

스파이 첩보전 치열하던 20세기 초 
네덜란드 무희, 이국적 매력 이용해 고위층 대상으로 간첩 활동 펼쳤죠
최근 英·러 스파이 분쟁으로 재조명

 

얼마 전 영국에서 러시아 출신 스파이(간첩)가 독극물에 중독돼 의식을 잃는 사건이 벌어져 서구 세계가 발칵 뒤집혔어요. 영국·미국 등은 이 끔찍한 사건을 러시아 정부가 저지른 짓이라고 보고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러시아 외교관들을 대거 추방했답니다.

스파이란 다른 국가에 몰래 침입해 자기 신분을 숨기고 은밀하게 그 나라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을 말해요. 특히 20세기 초는 스파이를 통한 나라 간 정보 전쟁이 매우 치열했어요. 그중에는 '세기의 스파이'로 이름을 날린 마타 하리(Mata Hari)도 있었답니다.


◇이국적 미모로 이름을 날린 무희

마타 하리는 말레이어로 '태양'이란 뜻이에요. 그러나 이는 예명(예능인이 본명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이었고 실제 이름은 마르게르타 G 젤러(Zelle)였어요. 1876년 네덜란드의 사업가 딸로 태어난 젤러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정 눈동자,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어요. 1895년 네덜란드 직업 군인 매클라우드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부임지인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이주했지요.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7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두 아이를 낳았어요.

남편과 불화를 겪다 1901년 이혼한 그는 유럽으로 돌아왔어요. 생계를 위해 1905 '벨 에포크(좋은 시절)' 시대의 프랑스 파리 물랭루주(Moulin Rouge·당대 최고 유명 댄스홀)에서 무희(춤을 추는 댄서)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일약 사교계의 톱스타로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용모에 이국적인 매력을 한껏 풍겼던 마타 하리는 매혹적인 아시아풍 춤으로 사교계 인사들을 사로잡았어요. 자신의 신비로운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본명을 버리고 '마타 하리'라는 이국적인 이름도 지었지요. 자신이 자바섬에서 태어났으며 인도네시아 왕족과의 혼혈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어요.

 

 1910년 프랑스 파리에서 무희로 활동하던 마타 하리의 사진. 동남아시아·인도풍 장신구를 찬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대담한 춤으로 유명해지면서 마타 하리는 점차 프랑스 내 고위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프랑스의 군부 고위층, 유력 정치인들, 재계 유명인들뿐 아니라 네덜란드 총리, 프로이센 황태자 등 유럽의 뭇 남성들이 마타 하리에게 홀딱 반해 있었지요. 이처럼 마타 하리가 정·재계 고위층과 가까이 접촉한다는 것은 그가 중요한 정책 결정자들에게 접근해 기밀 정보를 빼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요. 마타 하리는 이때부터 영국과 프랑스, 독일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타 하리가 활동했던 20세기 초 유럽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어요.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을 맺고, 러시아·프랑스·영국이 '삼국 협상'을 맺으면서 양 진영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1914 6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암살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그러자 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였던 독일이 전쟁에 끼어들었지요. 이에 세르비아와 가까운 관계인 러시아가 가담했고,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프랑스가 줄줄이 전쟁에 뛰어들었어요.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 거예요.


◇독일·프랑스서 이중 스파이 활동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마타 하리는 프랑스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서 무희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전쟁이 터지자 마타 하리는 프랑스로 가려고 했지요. 하지만 독일에서도 마타 하리는 독일 고위 관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프랑스 정보 당국은 마타 하리의 프랑스행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독일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것이었지요.

1917
2월 파리에서 마타 하리가 이중(二重) 스파이 혐의로 체포됩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양쪽에 기밀 정보를 건네는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게 프랑스 당국의 판단이었지요.

마타 하리는 "독일 정부로부터 스파이 제안을 받고 프랑스 고위층에 접근해 군사 기밀을 넘겨주는 대가로 2만프랑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어요. 실제 마타 하리가 프랑스의 중요 기밀 정보를 독일에 넘겨주었다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지요. 그는 계속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의 결백함을 증언해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수많은 고위직 연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지요. 조국을 배반한 스파이로 함께 엮여 처형당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마타 하리는 8개월에 걸친 심문과 군사재판 끝에 결국 총살형을 선고받았어요. 그리고 1917 10월 파리 교외 뱅센에서 총살당하면서 마흔한 살 화려하고 굴곡 많았던 삶을 마감했지요.

지난 1999년 공개된 영국 정보기관 MI5 보고서에 따르면 마타 하리는 1914년 독일로부터, 1916년 프랑스로부터 각각 스파이 제안을 받아 이중 스파이로 활동했다고 해요. 하지만 세상의 기대와 달리, 마타 하리가 독일에 넘겨준 정보 중엔 그리 중대한 내용이 거의 없었고 프랑스에 건넨 독일 정보도 하찮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는 세계대전 첩보전의 희생양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늘날 그를 주제로 한 수많은 소설과 뮤지컬, 영화가 나올 정도로 마타 하리는 매혹적인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프랑스어로 ‘좋은 시절’이라는 뜻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 풍요롭고 화려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산업혁명으로 풍족한 자본가가 많아지고 예술과 문화가 꽃피면서 파리는 과거 볼 수 없었던 평화를 누렸지요.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들이 넘쳐났고, 물랭루주에서는 매혹적인 공연이 펼쳐졌으며, 레스토랑 맥심 드 파리에는 예술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어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4.20  "백인에게 자리 양보 안 했다"고 체포… 흑인 인권 운동 촉발했죠

[몽고메리 버스 안타기 운동]

링컨의 '흑인 노예 해방 선언' 불구 100여 년간 美 인종차별 여전했어요
백인 우대 규칙 어긴 로자 파크스, '버스 안 타기 운동' 이끌며 승리

 

최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흑인들이 음료를 주문하지 않고 매장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체포돼 논란이 일고 있어요. 스타벅스 CEO가 직접 사과를 했지만, 이번엔 LA 스타벅스 매장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화장실 사용을 거부 당했다"는 폭로가 나오면서 사태가 커지고 있지요.

이처럼 미국 내 흑인 인권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랍니다. 인종차별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미국의 대표적 흑인 인권 운동에 불을 지핀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Montgomery bus boycott)'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노예 해방 이후 계속된 인종차별

많은 사람이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링컨 대통령의 '흑인 노예 해방 선언'으로 미국 내에서 흑인에 대한 '공식 차별'이 사라졌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흑인들은 그 뒤에도 100여 년간 각종 법과 관습에 따라 차별받아왔답니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짐 크로 법(Jim Crow Law)'을 제정해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등 지속적으로 흑인을 차별했어요.

짐 크로 법에 따르면 흑인은 백인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었어요. 흑인은 백인과 같은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도 없었고, 같은 수돗가에서 물을 마실 수도 없었어요. 수돗가에는 백인 전용(White Only), 유색인 전용(Colored) 팻말이 붙어 있었지요.

흑인들은 때때로 저항했지만 그 움직임은 체계적이지 못했어요. 오히려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단은 저항하는 흑인들 집에 불을 지르고 흑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지요. KKK단은 '신이 자기 모습을 본떠 창조한 것은 오직 백인뿐'이라며 흑인이 다니는 교회에도 테러를 가했어요.


◇흑인들 불만 폭발시킨 인종 분리 버스 

20세기 중반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는 '인종 분리 버스'가 운영되고 있었어요. 버스 규칙은 까다롭고 엄격했어요. 버스 맨 앞줄은 '백인 전용'이었고, 흑인은 뒤쪽 몇 줄에만 앉을 수 있었죠. 흑인들은 백인 전용석이 텅텅 비어있어도 앉을 수 없었어요. 버스 중간 줄은 백인에게 우선권이 있었지만 자리가 비어있으면 흑인도 앉을 수 있었는데, 만약 백인이 오면 흑인은 누가 됐든 자리를 양보해야 했어요. 이를 지키지 않으면 버스 기사는 흑인에게 자리 양보를 명령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듣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 그 흑인을 체포할 수 있었지요.흑인들은 이러한 규정에 불만이 컸는데, 1955년 벌어진 한 사건으로 누적된 분노가 폭발하고 맙니다.

 

 1956 2월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촉발한 로자 파크스가 경찰에 체포된 모습. /위키피디아

 

1955 12 1일 일요일, 로자 파크스(Parks·1913~2005)라는 한 흑인 여성이 인종 분리 버스 중간 줄에 앉아 집에 가고 있었어요. 버스가 극장 앞에 멈춰 서자 백인 승객들이 한꺼번에 올라탔고, 그중 한 명이 자리를 찾지 못해 서 있었죠. 버스 기사는 중간 줄에 앉은 로자에게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지시했어요.

하지만 로자는 기사 말을 따르지 않았어요. 10여 년 전 인종 분리 버스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 강제로 버스에서 하차당했던 로자는 부당한 규칙을 따르고 싶지 않았죠. 게다가 그는 미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서 흑인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끝까지 자리를 양보하지 않자 로자는 경찰에 체포됐고 결국 재판에 넘겨지고 맙니다

NAACP
는 로자 사건을 계기로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부터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버스 승객의 4분의 3이 흑인인데,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다음번에는 당신, 당신 딸, 당신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주장했지요.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35000명이 이 운동에 적극 동참했어요. 흑인 택시 기사들은 버스 차비만 받고 흑인들을 태워주었고, 덕분에 흑인들은 택시를 타거나 걸어다니는 방법으로 버스를 타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백인들이 주로 운영하던 버스 회사들은 큰 손실을 입었지요.


◇인종주의와 끈질긴 싸움

 체포 당시 로자가 앉아 있던 버스 중간 줄에 착석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재판 결과 로자가 벌금형을 선고받자, 흑인들은 분노했어요. NAACP '몽고메리 인권 위원회'라는 조직을 꾸리고, 위원장으로 20대 젊은 목사 마틴 루서 킹 주니어를 선출했어요. 몽고메리 인권 위원회는 흑인들을 불러 모아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고 인종 분리 버스가 위헌이라는 소송도 제기했어요. 버스 안 타기 운동도 계속 이끌고 갔지요

흑인들이 합법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저항하자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격분했어요. KKK단 회원도 빠르게 늘었고, 경찰은 흑인이 사소한 법을 어겨도 트집 잡아 체포해갔어요. 킹 목사의 집을 비롯한 흑인 교회에도 테러 위협이 잇따르자, 킹 목사는 "그들은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내 횃불을 이어받아 이 나라 모든 국민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그날이 올 때까지 싸워야 한다"며 평화롭게 운동을 계속하자고 당부했어요.

1956
12 20. 미국 최고 연방법원은 '버스에서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어요.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이 1 1개월 만에 승리로 끝난 거예요. 몽고메리 흑인들은 다시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더 이상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됐어요. 용기를 얻은 흑인들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한 운동을 계속했고, 1964년엔 인종·민족·국가·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연방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이 제정되었답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인에게 버스 안 타기 운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당당하게 지킬 때 자신의 삶뿐 아니라 이웃의 삶, 공동체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교훈을 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짐 크로 법(Jim Crow Law)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으로 1876년부터 미국 남부 11개 주에서 시행됐어요. ‘짐 크로’는 1830년대 미국 코미디 뮤지컬에서 백인 배우가 연기한 바보 흑인 캐릭터 이름이에요. 그러나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투표권법이 제정되면서 폐지됐지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4.27 부시·고르바초프, 1989년 몰타 유람선서 냉전 종식 알렸죠

[몰타 회담]

총성 없는 전쟁' 이끌던 미·소 지도자, 중립국 몰타서 정상회담 가졌어요
군비 축소·경제협력 등 합의 이뤄
美北회담, '2의 몰타 회담' 주목

 

내일 판문점에서 '2018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요. 이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간 미·북(美·北) 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이지요. 미국과 북한 정상 간 대화는 6·25전쟁 이후 처음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아주 높아요. 일부 전문가들은 '미·북 정상회담이 제2의 몰타 회담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답니다.

 

▲ 1989년 몰타 해역의 유람선에서 미국 부시(오른쪽·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왼쪽) 서기장이 정상회담 만찬을 갖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오늘은 냉전(冷戰·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벌이던 대결) 시대를 종식시킨 미국과 소련 간 정상회담이었던 몰타 회담(미·소 정상회담)을 알아볼게요.


◇총성 없는 전쟁 끝낸 몰타 회담

몰타 회담(Malta summit) 1989 12 2일과 3일 지중해 몰타 해역의 배 위에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가진 정상회담이에요. 두 정상은 이 회담에서 동유럽의 민주화, 미국과 소련의 군비(군사 관련 비용) 축소, 경제협력 체제 만들기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1945년 이후 사사건건 대결을 벌이던 두 나라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 '총성 없는 전쟁'을 끝내자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거예요.

이 역사적 회담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에요. 196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이 몰타 회담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 정치·군사·외교·이념 대결인 냉전 시대에 접어들었어요.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경쟁, 우주 발사체 경쟁 등을 펼쳤지요.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중국 등도 잇따라 핵무기를 보유하면서 미국·소련 간 핵무기 경쟁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또 어느 이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개발도상국(3세계)이 등장하면서 국제사회는 미국·소련의 '양극(兩極) 체제'를 벗어나 '다극(多極) 체제'로 흘러가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더 이상 이념을 위해 엄청난 국력(國力)을 소모할 때가 아니며, 경제 발전과 성장을 우선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요. '데탕트(détente·긴장 완화) 시대'가 시작된 거예요.

이런 상황 속에 국제연합(UN) 1969 '핵 확산 금지 조약(NPT)'을 승인해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어요. 같은 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앞으로 베트남전쟁(1960~1975) 같은 전쟁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아시아 국가의 정치·외교 문제에 깊게 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선언했어요.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공산국가 중국의 UN 가입을 승인하는 등 변화한 모습을 보였어요. 1972년에는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어요.


◇데탕트 시대를 열다

▲ 몰타에 세워진 몰타 회담 기념비.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새로운 외교 철학으로 '노보에 미셀레니에(새로운 사고)'를 제시합니다. 미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핵심으로, 더 이상 미국을 소련의 주적(主敵)으로 생각하지 않고 경제성장과 안보를 함께 꾀하는 협력 국가라고 인식하자는 것이었지요.

그는 경쟁적으로 군비를 늘리는 것보다,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통해 현실적인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1987년 미국과 사정거리(미사일 등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 1000~5500㎞ 미사일을 모두 폐기하는 '중거리 미사일 협정'을 체결하며 다시 화해 분위기에 불을 지핍니다.

이후 몇 차례 미·소 정상회담을 거쳐 두 나라는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기로 합의했어요. 이러한 합의는 냉전 시대의 끝을 알리는 1989 12월 몰타 회담으로 이어졌지요. 자본주의 서독과 사회주의 동독 사이를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한 달 정도 지난 뒤였어요.

정상회담이 몰타에서 이뤄진 이유는 지중해 중앙에 있는 몰타공화국이 지리적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 데다, 19세기 영국 식민 지배를 받은 뒤 '비동맹 노선'을 선언하며 사실상 중립국처럼 남았기 때문이에요.

몰타 회담 후 미국이 주도한 국제기구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반공산주의 군사동맹에서 유럽의 경제적 안정을 돕는 기구로 바뀌었고, 소련이 주도해 만든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 수순을 밟습니다. 1991 7월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양국이 보유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장거리 핵무기를 점점 축소하는 협정도 체결했지요.

몰타 회담은 전 세계에 이념 대립의 시대는 가고 협력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회담이었어요. 조만간 열릴 미·북 정상회담을 몰타 회담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전 세계인들이 진정한 평화 시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이 신()데탕트 시대를 이끄는 행사가 되기를 기대해볼게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5.04  마오쩌둥 말 믿고 비판 했다가… 55만명 우파로 낙인찍혀

[마오쩌둥과 반()우파 투쟁]

1956년 마오 "마음껏 비판하라" 선언
막상 공산당 독재 비난 봇물 터지자 반대 인물들 '우파'로 몰아서 탄압해
中 정부, 비판 여론 경계하는 이유죠

 

최근 중국 정부가 약 3억명의 젊은이가 이용하는 유머 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앱) '네이한돤쯔'를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전격 폐쇄했어요. 이에 반발한 중국인들이 전역에서 기습적인 차량 시위를 벌였다고 해요.

얼마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의 임기 제한을 철폐한 이후 중국 당국은 인터넷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임을 반대하는 각종 단어를 차단하고 있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유머 동영상 폐쇄 사태도 '중국 정부가 비판 여론을 감시하기 위해 사회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토록 비판 여론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일까요?


◇공산당의 자신감 표출, '쌍백운동

1949년 마오쩌둥(1893~1976)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가 이끄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중국 본토를 통일했어요.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해 세계를 놀라게 했죠. 마오쩌둥은 토지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한국전쟁 참전으로 내부 결속을 다져 공산당 지배를 확고히 했어요.

자신감에 취한 마오쩌둥은 1956 '백화제방·백가쟁명'을 표방하며 대중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특히 공산당에 대한 비판까지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했어요. 누구든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기원전 770~기원전 221년 중국에서 활약한 여러 학자와 학파)가 활약했던 춘추전국시대처럼 '문화적 황금기'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선언이었어요. 이를 두고 맨 앞에 '()'자가 두 개 들어갔다고 해서 '쌍백(雙百)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지막 두 글자를 결합해 '명방(鳴放) 운동'이라 부르기도 해요.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해주었지만 지식인들은 선뜻 나서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그러자 마오쩌둥은 '말하는 자는 죄가 없으며, 듣는 자는 반성해야 한다'며 공산당을 적극 비판해달라고 호소했지요. 이에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이 시작되었고, 당에 대한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어요. 이들을 공산당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뜻에서 '민주당파'라고 해요.

 

▲ 쌍백운동 당시 공산당 비판에 앞장섰던 장보쥔이 우파로 몰려 군중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고 있어요. /그린비출판사

 

통렬한 비판 의견으로 대중에게 환호를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저안평과 장보쥔이었어요. 저안평은 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는데 '천하가 중국 공산당의 것인 양 당의 천하가 되고 있다'고 말했고, 교통부장이었던 장보쥔은 '공산당 일당(一黨) 독재를 그만두고 양당제(兩黨制)를 기본으로 하는 정당 정치 체제로 바꾸자'고 주장했어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주당파는 수십만 명 규모의 정치 조직으로 발전했지요.

쌍백운동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어요. 민주당파는 마오쩌둥을 '살인마', 인민 민주주의를 '무뢰한의 독재'로 부르며 길거리 시위를 벌였어요. 그런가 하면 중부 후베이성에서는 1000여 명의 민주당파 학생이 공산당과 지방 정부를 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어요. 쌍백운동을 적극 추진했던 마오쩌둥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요.


◇공산당의 반격, '반우파 투쟁'

1957 6월 공산당은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민주당파는 우파(右派·좌파의 반댓말로 보통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단체 등을 말함) 분자'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어요. 공산당의 반격, '()우파 투쟁'의 신호탄이었죠. 이로 인해 사회주의 문화 정책인 쌍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자본가) 우파로 몰려 공격의 대상이 됐어요.

가장 먼저 공격받은 것은 유명 여류 작가 딩링(1904~1986)이었어요. 딩링은 공산당에서 제명당했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지요. 이후 우파 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도 불가능해졌어요.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동 교육을 강요받았으며, 농촌으로 추방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지요.

 

▲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외치는 행렬 모습. /위키피디아

 

1958 7월까지 1년여에 걸쳐 지속된 반우파 투쟁의 결과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당원 작가, 예술가 등 7000여 명이 우파로 지목돼 당에서 쫓겨났어요. 당원들과 공산주의 청년단은 "우파가 전 인구의 5%쯤 된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따라 모든 조직에서 5%의 인원을 뽑아내 추방하는 일을 벌였죠. 그 결과 55만여 명이 우파로 낙인찍혔어요.

당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공산당 비판에 나섰던 사람들은 반체제(反體制) 인사를 색출해내는 유인책에 걸려들었다며 통탄했어요. 이들은 덩샤오핑(1904~1997)이 집권하는 1970년대 복권(復權·한 번 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음)될 때까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죠.

이후 중국인들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어요. 이는 중국의 정치 발전이 늦어지는 걸림돌이 되었죠. 더불어 권력자들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허용했을 때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역풍이 불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어요.

유머 동영상 앱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폐쇄까지 한 걸 보면 아직 중국의 정치적 자유만큼은 60년 전 마오쩌둥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인류 역사는 모든 대중에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지요. 중국 정부는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역사의 보편적 흐름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춘추전국시대에는 10여 개의 제후국이 저마다 부국강병(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함)을 외치며 널리 인재를 등용했어요. 수많은 사상가와 학자가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고(백화제방), 유가·법가·도가 등 다양한 학파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어요(백가쟁명). 이를 두고 ‘온갖 꽃이 피고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주장을 편다’는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지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5.11 산업혁명의 주역 증기기관, 기차 만나 '교통혁명' 일으켰죠

[증기기관차]

8세기 산업혁명 때 발전한 증기기관, 거대 동력 갖춘 증기기관차 탄생시켜
탄광서 자란 스티븐슨, 기관에 통달… 기관차 주행 대회서 승리 차지했어요

 

▲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

 

우리나라 특급 열차 중 하나였던 '새마을호'가 지난달 30일을 끝으로 49년간의 운행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새마을호는 1969년 '관광호'라는 이름으로 첫 운행을 시작한 이후 2004년 KTX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열차였어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새마을호로 명칭을 바꾸고 1980~90년대 고도성장 시기 전국 곳곳을 내달렸지요.

오늘날 기차는 대부분 전기로 동력(動力·힘)을 얻지만, 철도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발명된 최초의 기차는 증기기관에서 동력을 얻었답니다. 당시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만들고 발전시킨 인물은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Stephenson·1781~1848)이었지요. 오늘은 스티븐슨이 어떻게 철도 시대를 열었는지 알아볼게요.


◇스티븐슨, 철도 시대를 열다

선로(線路)란 물건을 실은 차량이 지나가는 통로로, 차량이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낸 길을 말해요. 고대 이집트·그리스 시대에는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가 지나갈 때 생긴 바퀴 자국에 자갈돌을 채워 넣어 일정한 선로를 만들기도 했지요.

16~17
세기 영국에서는 석탄 수요가 많아지면서 탄광 입구부터 선적지(배에 짐을 싣는 곳)까지 엄청난 양의 석탄을 운반해 줄 짐마차와 선로가 필요했어요. 짐마차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마차 바퀴가 흙바닥에 박혀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지요. 이에 사람들은 나무판이나 돌 대신 내구성 좋은 철제로 만든 선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철도(鐵道)'라고 해요.

18
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증기기관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룹니다. 증기기관이란 열을 가해 발생시킨 증기의 압력으로 실린더 내 피스톤을 움직여 동력을 얻는 기관을 말해요. 1870년대 영국의 기술자 제임스 와트(Watt·1736~1819)가 기존의 증기기관을 효율적으로 개량하면서 거의 모든 기계가 인간·동물이 가진 힘을 뛰어넘는 거대한 동력을 갖추기 시작했지요. '대량생산의 시대'가 개막한 거예요. 이는 곧 교통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석탄·철광석 등 무거운 원료뿐 아니라 대량의 완제품까지 빠르게 목적지에 운반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탄생한 것입니다.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기차의 등장이었지요.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은 증기기관차를 상용화해 교통수단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에요. 스티븐슨은 광부였던 아버지와 함께 어려서부터 탄광촌에서 일하면서 여러 종류의 기관에 통달했어요. 그리고 1814년 석탄을 운반할 수 있는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시험 운행에 성공했지요.

 

▲ 1830년 9월 개통한 영국 리버풀~맨체스터 간 철도를 오가는 증기기관차 모습. /위키피디아

 

1825년 스티븐슨은 스톡턴(Stockton)~달링턴(Darlington) 사이 약 40㎞ 거리 철도를 만드는 데 참여합니다. 당초 이 구간은 마차가 지나가는 선로를 만들려는 목적이었어요. 두 지역은 지형 간 높이 차이가 커서 운하(배가 지나는 물길)를 만드는 것보다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 비용·시간 면에서 더 효율적이었는데요. 철도회사가 증기기관차 제작을 스티븐슨에게 의뢰하면서 최초의 화물용 증기기관차 '로코모션(Locomotion)'가 탄생한 것이에요.이렇게 만들어진 로코모션호는 90t 석탄 열차를 끌고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로를 시속 18㎞로 달리는 기록을 세웠답니다.


◇로코모션호와 로켓호

증기기관차의 성공적인 운행으로 사람들은 철도 산업의 잠재력을 간파하기 시작했어요. 이어 항구도시 리버풀과 공업도시 맨체스터 사이 약 46㎞ 구간에도 철도 건설이 추진됐지요. 두 지역 사이에는 이미 브리지워터 운하가 있었지만, 운하를 이용하는 요금이 너무 비싸고 운하를 건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철도를 놓아달라는 기업가들의 요구가 많은 지역이었어요.

철도회사는 두 지역 사이를 오갈 증기기관차를 선정하는 공모전도 열었는데요. 이 대회 우승자에게 500파운드 상금과 해당 구간 기관차를 독점 공급할 수 있는 계약권을 주겠다는 것이었어요.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공개 입찰'이었던 셈이지요.

1829
10월 난생처음 열리는 증기기관차 경주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1만명 이상 관중이 레인힐(Rainhill) 지역에 모였습니다. 대회에 출전한 기관차들은 기관차 무게의 세 배에 달하는 화물을 싣고 평균 시속 16㎞로 총 100㎞ 가까이 왕복 주행해야 했지요. 대부분의 기관차가 중간에 속력이 떨어지거나 고장이 났지만 스티븐슨이 만든 새로운 증기기관차 '로켓호'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기준 속도를 넘어서며 안정적인 운행을 선보였답니다. 당시 로켓호의 평균 시속은 22.5, 최고 시속은 46㎞에 달했다고 해요. 우승을 차지한 스티븐슨은 1830 9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공식 개통식 때 직접 로켓호를 운전해보이기도 했지요.

이 노선의 성공은 전 세계에 '철도 시대'의 개막을 알렸어요. 각국은 경쟁적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증기기관차를 운행했지요. 철도는 마차와 운하를 대체하는 효율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디젤기관차, 전기기관차로 끊임없이 발전했어요. 역사 속으로 떠나간 새마을호를 생각하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다는 KTX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스티븐슨 궤간(軌間·궤도의 너비)

스티븐슨은 기관차 제작만큼이나 튼튼한 철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 자신이 개발한 최초의 철로를 선보였는데요. 그 폭이 4피트 8 1/2인치(1435)였어요. 이는 곧 전 세계적인 ‘표준 선로 폭’이 되었기 때문에 표준궤(Standard Gauge) 또는 스티븐슨 궤간(Stephenson Gauge)이라고도 불러요. 지금도 우리나라와 중국·유럽 철도는 스티븐슨 궤간을 이용하고 있고 러시아 등 일부 지역에서 광궤(1520)를 사용하고 있답니다.

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5.18  러시아 영광 이끈 절대군주… 왕비 잃자 폭군으로 변했어요

[첫 공식 차르 이반4]

얼마 전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대통령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네 번째 취임식이 열렸어요. 푸틴은 2000~2008년 연달아 두 번 대통령을 지낸 뒤 잠시 총리로 물러났다가, 2012년 대선을 통해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했지요. 그리고 지난 3월 치러진 대선에서 또다시 당선돼 2024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예정이랍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공화국인 러시아에 전제 군주(나라의 모든 권력을 군주가 쥐고 군주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 '차르(tsar)'가 부활했다며 비판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러시아 역사에서 차르는 어떤 의미일까요?


◇밝게 빛났던 이반 4세의 치세 전반

15세기 이전까지 러시아는 여러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어요. 13세기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시기에는 그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죠. 그러나 이반 3(1440~1505)가 모스크바 대공(大公·작은 나라의 군주)이 된 뒤 몽골 지배에서 벗어났고, 러시아 동북부 일대를 통일하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거듭났어요.

 

▲ 한 귀족(오른쪽)을 강제로 차르의 옥좌에 앉힌 뒤 반역죄라며 위협하고 있는 오프리치니크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황제의 조카와 결혼해 로마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어요. 또 스스로를 '차르(황제)'라 부르고 강력해진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크렘린궁을 개축했어요. 이렇게 이반 3세는 러시아가 전제 군주 국가로 나아가는 기반을 닦아 '이반 대제(大帝)'로 불렸지요.

이반 3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바실리 3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30여 년간 통치했어요. 그런데 바실리 3세가 사망하자 고작 세 살이었던 장남 이반 4세(1530~1584·이하 이반)가 왕위를 물려받았지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당시 유력한 두 귀족 가문이 번갈아가며 대신 나라를 다스렸는데요. 이반은 어머니가 귀족들에게 독살당하는 등 귀족들의 치열한 권력 암투를 목격하며 자랐고, 그 과정에서 숱한 수모를 당하며 의심 많고 냉혹한 성격을 갖게 됐어요.

이반은 열일곱 살이 되자 교회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렀어요. 이때 공식적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채택했지요. 이반 3세를 비롯한 이전 통치자들은 공식적으로 여러 작은 나라의 대공일 뿐이었는데,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모든 러시아의 차르'인 황제 자리에 오른 거예요.

이반은 대관식 후 차르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력했어요. 우선 귀족과 성직자, 고위 관료, 대(大)상인 등 각 계층의 대표자로 구성된 '젬스키소보르(전국 회의)'를 소집해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했어요. 이를 통해 귀족의 일방적인 횡포를 막으려 했던 거지요. 대외 원정에도 적극 나서 카스피해 연안과 볼가강(러시아 서쪽 강)을 러시아 영토로 만들었어요. 또 시베리아 지역을 정복해 러시아가 동쪽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죠.


◇아내의 죽음, 폭군으로 돌변하다

치세 초반 탁월한 리더십으로 러시아의 영광을 이끌던 이반은 1560년 사랑하는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돌변해요. 어린 시절 귀족들의 궁중 암투를 경험했던 그는 왕비가 독살당했다고 믿었지요. 이반은 복수심과 분노에 찼고, 이후 자기 측근을 비롯한 주변 귀족 세력들을 숙청해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반은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자신의 땅을 충신들에게 나눠줬어요. 이반에게 영토를 받은 사람들을 '오프리치니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별도의 특별 군대를 조직해 차르의 손과 발이 되어 대규모 테러를 자행했어요.

오프리니치크의 테러 대상은 차르에게 저항하는 세력과 그 가족들이었어요. 하지만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무차별적인 테러를 벌이기도 했지요. 희생된 귀족의 재산은 국가로 몰수되었고, 붙잡힌 사람들은 잔인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어요. 1570년 오프리치니크는 '노브고로드'라는 도시에 몰려와 6주간 3만여 명을 학살하고, 같은 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간첩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100여 명을 처형하기도 했어요.

오프리치니크는 검은 옷에 검은 말을 타고 개 머리와 빗자루를 말 안장에 매단 채 온 나라를 누볐어요. 차르에 반대하는 이들을 개처럼 물어뜯고 빗자루로 쓸어버리겠다는 의미였죠. 이들로 인해 러시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이반의 권력은 더 막강해졌어요. 이를 통해 정적(政敵)이 모두 제거됐다고 생각한 이반은 오프리치니크를 해산한 뒤 모조리 몰살했지요. 이에 당시 유럽 사람들은 그를 'Ivan the Terrible(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이반)'이라고 불렀어요.


◇번개처럼 빛나고 벼락처럼 두려웠던 황제 

▲ 한 귀족(오른쪽)을 강제로 차르의 옥좌에 앉힌 뒤 반역죄라며 위협하고 있는 오프리치니크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황제의 조카와 결혼해 로마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어요. 또 스스로를 '차르(황제)'라 부르고 강력해진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크렘린궁을 개축했어요. 이렇게 이반 3세는 러시아가 전제 군주 국가로 나아가는 기반을 닦아 '이반 대제(大帝)'로 불렸지요.

이반 3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바실리 3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30여 년간 통치했어요. 그런데 바실리 3세가 사망하자 고작 세 살이었던 장남 이반 4세(1530~1584·이하 이반)가 왕위를 물려받았지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당시 유력한 두 귀족 가문이 번갈아가며 대신 나라를 다스렸는데요. 이반은 어머니가 귀족들에게 독살당하는 등 귀족들의 치열한 권력 암투를 목격하며 자랐고, 그 과정에서 숱한 수모를 당하며 의심 많고 냉혹한 성격을 갖게 됐어요.

이반은 열일곱 살이 되자 교회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렀어요. 이때 공식적으로 '차르'라는 칭호를 채택했지요. 이반 3세를 비롯한 이전 통치자들은 공식적으로 여러 작은 나라의 대공일 뿐이었는데,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모든 러시아의 차르'인 황제 자리에 오른 거예요.

이반은 대관식 후 차르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력했어요. 우선 귀족과 성직자, 고위 관료, 대(大)상인 등 각 계층의 대표자로 구성된 '젬스키소보르(전국 회의)'를 소집해 국정의 주요 사안을 논의했어요. 이를 통해 귀족의 일방적인 횡포를 막으려 했던 거지요. 대외 원정에도 적극 나서 카스피해 연안과 볼가강(러시아 서쪽 강)을 러시아 영토로 만들었어요. 또 시베리아 지역을 정복해 러시아가 동쪽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죠.


◇아내의 죽음, 폭군으로 돌변하다

치세 초반 탁월한 리더십으로 러시아의 영광을 이끌던 이반은 1560년 사랑하는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돌변해요. 어린 시절 귀족들의 궁중 암투를 경험했던 그는 왕비가 독살당했다고 믿었지요. 이반은 복수심과 분노에 찼고, 이후 자기 측근을 비롯한 주변 귀족 세력들을 숙청해나가기 시작했어요.

이반은 전 국토를 차르의 직영지인 '오프리치니나'와 귀족들의 영지인 '젬시치나'로 구분하고 자신의 땅을 충신들에게 나눠줬어요. 이반에게 영토를 받은 사람들을 '오프리치니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별도의 특별 군대를 조직해 차르의 손과 발이 되어 대규모 테러를 자행했어요.

오프리니치크의 테러 대상은 차르에게 저항하는 세력과 그 가족들이었어요. 하지만 때로는 별다른 이유 없이 무차별적인 테러를 벌이기도 했지요. 희생된 귀족의 재산은 국가로 몰수되었고, 붙잡힌 사람들은 잔인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어요. 1570년 오프리치니크는 '노브고로드'라는 도시에 몰려와 6주간 3만여 명을 학살하고, 같은 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간첩 노릇을 했다는 혐의로 100여 명을 처형하기도 했어요.

오프리치니크는 검은 옷에 검은 말을 타고 개 머리와 빗자루를 말 안장에 매단 채 온 나라를 누볐어요. 차르에 반대하는 이들을 개처럼 물어뜯고 빗자루로 쓸어버리겠다는 의미였죠. 이들로 인해 러시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이반의 권력은 더 막강해졌어요. 이를 통해 정적(政敵)이 모두 제거됐다고 생각한 이반은 오프리치니크를 해산한 뒤 모조리 몰살했지요. 이에 당시 유럽 사람들은 그를 'Ivan the Terrible(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이반)'이라고 불렀어요.


◇번개처럼 빛나고 벼락처럼 두려웠던 황제 

 1949년 서독 베를린의 한 공사장 모습이에요. 건물 벽면에 ‘마셜 플랜과 함께하는 긴급 프로그램’이라 쓰여 있어요. /위키피디아


 소련은 세력 확장을 위해 지중해 연안 터키와 그리스의 공산주의 게릴라(유격대) 세력을 지원했어요. 그러던 중 1946년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란이 일어났지요. 당시 그리스 정부를 지원하던 영국은 자국 내 경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그리스를 돕는 것을 포기했는데요, 미국이 그 역할을 떠안으면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트루먼주의)'이 탄생합니다.

"
저는 무력(武力)으로 국민을 굴복시키려는 소수의 권력자나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중략) 저는 우리의 지원이 주로 경제적 안정과 질서 있는 정치 과정에 필수적인 경제·재정적 원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트루먼은 1947년 3월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4억달러 지원을 요청하며 이렇게 연설했어요. '무력으로 국민을 굴복시키려는 소수의 권력자'는 소련 또는 동유럽 공산 정권을 말하는 것이었고,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민'은 그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지지자들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이후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이 됩니다. 소련의 팽창 정책에 맞서 서유럽에 미국식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도록 돕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에요.


◇서독, '라인강의 기적' 만들다

▲ 당시 유럽에서 마셜 플랜을 홍보하던 포스터.

 

트루먼 독트린은 1947 '마셜 플랜'으로 구체화됐는데요.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Marshall·1880~1959)이 그해 6월 하버드대 졸업식 강연에서 "미국은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한 나라들이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집행하는 계획에 대해서 대규모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지요. 이 정책의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이었지만 제안자 이름을 따서 '마셜 플랜'이라고 불렸어요. 이 계획은 애당초 반()소련, 반공산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지요.

마셜 플랜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서독·벨기에 등 서유럽 총 16개국에 집행됐는데, 대부분의 원조는 직접 보조금 형태였어요. 마셜 플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48년부터 1952년 중반까지 약 120억달러(오늘날 약 1300억달러 가치·우리 돈 140조원)에 달하는 지원금이 이 국가들에 직접 제공됐지요.

미국이 쏟아부은 자금은 서유럽 산업 분야에 집중 투자돼 경제 발달에 크게 기여했어요. 정유 산업과 상하수도 설비, 철도 부설, 운하 건설 등에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서유럽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전보다 공업 부문은 25%, 농업 부문은 14% 이상 생산량이 증가했지요. 이 기간 동안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은 프랑스 17%, 이탈리아, 25%, 서독 41% 등으로 크게 상승했답니다.

특히 서독은 공산주의 동독과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미국의 집중적인 지원을 많이 받았어요. 그 결과 1950년대 고도 경제성장을 일구며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어요. 서독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면서 자동차 보급이 급속히 늘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폴크스바겐(Volkswagen)' '딱정벌레(Beetle)'차가 인기를 끌었지요. 1945 2차 세계대전 말 고작 630대 정도 생산되던 '딱정벌레'차는 산업 발달과 생활수준 향상에 힘입어 1960년대 400만대로 크게 늘었어요.

마셜 플랜을 계기로 서유럽 국가 간 경제 교류가 활성화됐고, 이는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결성으로 이어졌어요. 이 기구에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18개국이 참여했는데 미국의 원조 자원을 회원국들에 분배하고 유럽 주요 경제정책을 상의하는 역할을 하면서 무역량 제한을 폐지하고 관세를 낮추는 등 자유무역 체제를 위해 힘썼어요. 이는 훗날 비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OECD(경제협력기구) 결성으로 이어졌지요.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은 참혹한 전쟁의 상처를 딛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이룩할 수 있었어요. 이에 마셜은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답니다.

 

☞코메콘(상호경제원조회의·COMECON)

마셜 플랜에 맞서 소련이 1949년 만든 공산권 경제 지원 기구예요. 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루마니아·동독 등 9개국이 참여했는데 경제 발전과 공업화, 국민 복지 확대 등을 목표로 했어요.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고 공산권 경제 통합을 목표로 했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1991년 해체됐지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01 히틀러 핵폭탄 연구 소식에… 美, 극비리 개발 착수했죠

[맨해튼 프로젝트]

1938년 獨 핵분열 실험에 성공하자 美, 20억달러·13만명 투입해 추진
핵개발 처음 제안했던 아인슈타인, 日 원폭 투하에 "이럴 줄 몰라" 통탄

 

얼마 전 북한이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 입구를 폭파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어요. 풍계리 핵실험장은 북한의 1~6차 핵실험이 진행된 장소인데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지속적으로 비핵화를 요구하자, 북한이 결국 핵실험장 입구를 폭파한 것이지요.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핵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은 미국이 세계 최초 핵무기를 개발한 과정을 알아볼게요.


◇비밀리에 추진된 핵무기 개발

원자핵 분열을 이용해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건 1903년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Rutherford·1871~1937)와 프레더릭 소디(Soddy·1877~1956)가 처음 알아냈어요. 원자핵이 분열할 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는데 이를 이용해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그 뒤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발발로 재조명을 받습니다.

첫 실험은 독일에서 먼저 이뤄졌어요. 1938년 독일 과학자들은 방사성물질인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연쇄 핵분열 반응 실험에 성공했어요. 나치 독일은 우라늄을 확보해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지요. 이에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1879~1955)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독일의 히틀러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독일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1933년 나치당을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온 터였지요.

다른 저명한 여러 과학자들도 핵폭탄의 필요성에 대한 편지를 연이어 보내면서 미국 정부는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 검토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독일에 맞서 싸우던 영국과 핵무기 개발을 위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당시 영국은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튜브 앨로이스(Tube Alloys)'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941
년 말 일본이 미국 땅인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하에 본격적인 핵폭탄 개발에 착수했어요. 이 프로그램은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는데, 워낙 극비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몰랐을 정도였어요.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어요. 보어, 페르미, 파인먼, 위그너, 폰 노이만 등 당대 내로라하는 최고의 수학·과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했어요. 당시 20억달러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배정됐고, 13만 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됐으며, 미국 20여 개 지역에 관련 연구소가 운영되었죠. 가장 핵심적인 개발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은 뉴멕시코주(州)의 로스 앨러모스(Los Alamos) 연구소였어요.

1945
년 7월 16일, 최초의 핵실험(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어요. 30m 높이 철탑 위에서 '베이비(Baby)'라는 별명을 가진 플루토늄 폭탄을 폭발시켰는데, 그 결과는 어마어마했어요. 폭발과 동시에 높이 15㎞, 폭 1.5㎞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 모양 구름이 주위를 뒤덮어버렸지요. 폭탄을 터뜨린 철탑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주변 아스팔트는 뜨거운 열기에 녹아 초록색 유리 결정체로 변해버렸어요.

◇수많은 논란을 낳은 원자폭탄 투하

미국이 트리니티 핵실험에 성공했을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이보다 앞선 1945년 4월 30일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지요. 유럽 땅에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이 난 상태였어요. 트리니티 실험 이후 독일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양심의 가책과 회의를 갖기 시작했어요. 핵폭탄이 전 세계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새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어요.

 

▲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원자폭탄 모습. /위키피디아

 

그러나 1945 8 6일과 9, 미국 정부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히로시마에는 우라늄으로 만든 폭탄(일명 '리틀 보이'),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으로 만든 폭탄(일명 '팻 맨')이 투하됐지요. 두 도시에서 10만여 명이 즉각 사망했고, 이후에도 수십만 명이 화상과 방사선 피폭으로 서서히 죽어갔어요. 이에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맨해튼 프로젝트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줄 몰랐다'며 통탄했다고 해요.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했어야만 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려요. 찬성론자들은 핵폭탄 투하가 전쟁을 일찍 종식시켜 수십만 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한 것이라고 주장해요. 그 당시 일본은 전 국민이 다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던 상황이었고, 미군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지요. 반면 반대론자들은 일본의 항복은 시간문제였을 뿐인데 핵폭탄 투하로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키고 인류 역사에 좋지 않은 사례를 남겼다고 주장해요.

현재 세계 각국이 보유한 핵무기 양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라고 해요.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기에 비핵화는 인류가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된 것이랍니다.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은 물리학자 오펜하이머(Oppenheimer·1904~1967)였어요.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려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모든 공직에서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어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08  공직자 선출할 때 군 복무·납세 등 꼼꼼하게 살폈죠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

오는 13일 제7회 전국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치러져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전국 단위 선거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지요.

민주 사회에서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나라 주인으로서 자기 의견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답니다.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는 민주주의의 발원지인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됐어요. 오늘은 고대 아테네의 정치 체제에 대해 알아볼게요.


◇고대 아테네, 참주정에서 민주정으로

기원전 8세기 그리스에는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들이 하나둘 생겨났어요. 이런 도시국가들을 폴리스(polis·성채)라고 해요. 가장 세력이 강했던 폴리스는 아테네였는데,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를 방어하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겼지요. '폴리스'에서 '정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politics'가 유래했다고 하니, 아테네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지금과 다른 점이 많았어요. 오늘날 국가들은 인구나 사회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모든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어요. 이에 따라 나라를 운영할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참정권(參政權)을 행사하는 '간접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국가가 많지요. 하지만 고대 아테네 인구는 20만~30만명 수준이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20세 이상 성인 남성 인구는 불과 3만~6만명 정도였기 때문에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했어요.

기원전 6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테네에서 폴리스 운영에 관여하는 계층은 귀족들이었는데요. 다른 나라와 무역이 늘면서 상공업자들의 영향력이 커졌지요. 또 평민들이 폴리스 방어를 책임지는 군인이 되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이들은 기득권 계층인 귀족들에게 정치권력 확대를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기원전 594년, 아테네 정치가 솔론(Solon)이 최고 집정관인 아르콘(archon) 자리에 오르면서 귀족과 평민들의 참정권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는 아테네의 분열을 조장하는 혈통 중심의 참정권 부여 방식을 폐기하고 재산을 기준으로 시민들을 4등급으로 구분해 참정권을 차등 부여했어요. 가난한 노동자들은 제4계급으로 분류돼 관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지요.

결국 평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페이시스트라토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는 독재 정치 체제의 일종인 '참주정(僭主政)'을 수립하고 참주가 됐어요. 참주란 혈통과 관계없이 무력으로 군주의 자리를 빼앗은 뒤 왕처럼 통치하는 독재자를 말해요. 기원전 527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세상을 떠나고 권력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수년 후 추방되자 아테네는 비로소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책임은 막중했던 직접민주주의

기원전 6세기 초반 아르콘 자리에 오른 클레이스테네스는 신분이나 경제력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고 아테네 전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10개 행정 구역마다 50명씩 추첨해 임기 1년짜리 '500인 평의회'를 구성하고 모든 시민에게 정치 참여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했지요. 500인 평의회는 아테네의 전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民會·아고라)에서 논의할 의제를 결정했고, 민회는 평의회가 제안한 의제에 따라 국가의 중대사를 토의한 뒤 투표로 결정했어요. 클레이스테네스는 '디카스테리아'라 불리는 시민 법정도 설치해 500명 이상의 시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하도록 했지요.

 

▲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를 만든 페리클레스 장군과 시민들 모습. /위키피디아


 아테네 정치의 주도권은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기원전 448년)을 거치면서 귀족 출신 집정관에서 장군들에게 넘어갔는데요.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던 지도자가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를 통치한 페리클레스 장군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로 평가받아요. 먼저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공직 수당'을 주기 시작했어요. 생계에 바쁜 빈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관들도 시민들 가운데서 추첨(제비뽑기)해서 임명했고, 시민 법정의 배심원이나 민회, 500인 평의회 구성원들도 지원자들 가운데 추첨으로 뽑았어요.

이처럼 아테네에선 누구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 책임은 막중했습니다. 주요 공직 후보자로 선출될 때에는 군 복무를 마쳤는지, 세금은 제대로 냈는지와 같은 정밀 조사를 받아야 했고, 고위 행정관이 되려면 두 곳의 위원회로부터 이중으로 꼼꼼하게 자격 심사를 받아야 했지요. 공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이 제안한 법안의 실효성, 평소 행실 등에 따라 재판을 받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기도 했어요. 또 모든 공직자가 임기가 끝난 후 공금(公金)을 정당하게 사용했는지 회계 감사를 받았지요.

 

▲ 도편추방제에 쓰인 도자기 파편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발달로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더욱 용이해졌어요. 정치 참여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도 컸던 아테네 민주주의를 되새기며 우리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기회일 것 같아요.

 

☞도편추방제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독재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을 미리 추방하는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를 만들었어요. 독재자가 될 것 같은 위험인물의 이름을 조개껍데기나 도자기 파편에 적은 뒤 6000표 이상이 나오면 10년간 아테네에서 추방하는 제도였지요.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안전 장치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이념이 다른 인물을 제거할 목적에 활용될 위험성도 있는 제도였어요.

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15  아르헨, 영국령 기습… 英 대처 총리 74일 만에 탈환했죠

포클랜드 전쟁

최근 태평양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국과 중국 간 갈등이 점점 첨예해지고 있다고 해요. 남중국해는 중국 남쪽과 필리핀·인도차이나반도·보르네오섬으로 둘러싸인 바다인데요.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미국 등이 '남중국해는 모든 국가의 공해(公海)'라며 군함을 파견하는 등 강력 대응에 나선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남중국해 문제가 '아시아판 포클랜드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포클랜드전쟁이 과연 어땠기에 오늘날 남중국해 분쟁과 비교되는 걸까요?


◇포클랜드제도 발견과 영토 분쟁

포클랜드제도(Falkland Islands)는 남아메리카 동쪽 남대서양에 있는 여러 섬을 말해요. 16세기 말 영국의 탐험가 존 데이비스가 발견했을 당시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지요. 1690년 영국 탐험가 존 스트롱이 이 섬에 처음 상륙했는데 당시 영국 해군이던 포클랜드 자작의 이름을 따서 '포클랜드섬'이라 이름 붙였어요.

포클랜드제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건 1764년 프랑스인들이 동(東)포클랜드섬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였습니다. 3년 후 이 지역 영유권은 스페인으로 넘어갔는데요. 비슷한 시기 영국이 서(西)포클랜드에 진출하면서 서쪽은 영국 식민지가 됐어요.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발발하자 영국은 전력을 미국에 집중하기 위해 포클랜드에서 철수했고, 1811년 스페인도 남아메리카 독립 운동이 확산하면서 포클랜드에서 철수했지요. 이렇게 포클랜드제도는 다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돌아갔어요.

 

▲ 전쟁에 참여한 영국 군함에서 바라본 포클랜드제도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10여 년간 무인도나 다름없던 포클랜드에 갑자기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건 아르헨티나였어요.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포클랜드에 대한 권리를 인수받았다고 주장하며 1826년 포클랜드제도에 주민 정착지를 건설했지요. 그러던 1831년, 아르헨티나 해군이 포클랜드 인근에서 어로(수산물 채취) 작업을 하던 미국 선박 3척을 억류하는 일이 벌어졌는데요. 이에 미국이 아르헨티나의 정착지를 공격하고 포클랜드제도가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닌 모든 국가의 소유라고 선언하면서 영유권 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에 반발하며 적극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1830년대 초 포클랜드에 군대를 보내 영국 주권을 다시 선언하고,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모두 추방했지요. 그리고 1800명 규모의 영국 이주민 정착지를 형성하고 정식 행정 체계까지 만들었어요. 동포클랜드에 있는 수도 '포트스탠리'는 원거리 항해를 하는 영국 선박들이 이용하는 항구로 발달시켰어요.

◇정권의 운명을 바꾼 포클랜드전쟁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분쟁은 처음엔 그리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에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합니다.

군부 정권이 들어선 후 아르헨티나는 물가가 150%나 뛰어오르고 실업자가 늘면서 경제가 침체돼 국민들의 불만이 매우 컸어요. 외채(외국에 진 빚)가 국민총생산의 20%에 육박할 만큼 경제 사정이 안 좋았고, 민주 세력이 군부 독재에 반발하면서 정권은 큰 위기에 직면했지요. 이에 군부는 국내 문제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비밀리에 포클랜드 공격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 포클랜드전쟁에서 패한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해군 함대와 병력 약 2500명을 동원해 포클랜드를 공격했어요. 영국 수비대 100여 명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주민들의 안전을 우려해 이틀 만에 항복하고 말았지요. 빠르게 포클랜드를 장악한 아르헨티나는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각각 '말비나스'와 '푸에르토아르헨티노'로 바꾸고 포클랜드를 장악해 나갔어요.

영국 정부는 즉각 후속 대응에 나섰어요. 당시 영국도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강력한 개혁 정책으로 사회 곳곳에서 불만이 커지고 있었는데요. 포클랜드 침공 소식은 이런 부정적 국내 여론의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요. 영국은 항공모함 2척을 비롯한 군함 90여 척을 포클랜드에 출동시키고, 아르헨티나에 경제 제재를 가했어요.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경제 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지요. 미국도 영국을 지지하고 나섰어요

 

 

그해 4월 말, 포클랜드제도에서 양국 간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됩니다. 아르헨티나는 전쟁 초반 공군 전력을 활용해 영국 구축함을 격침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에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어요. 험준한 산지 지형을 이용해 강력히 저항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병력·물자 지원 길이 막히면서 섬 안에 고립됐지요. 아르헨티나 병사들은 하나둘 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영국은 전쟁 시작 74일 만에 아르헨티나군 1만40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답니다.

전쟁에서 패하자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완전히 붕괴했어요. 반면 영국의 대처 정부는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1983년 총선에서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지요. 전쟁 직후 영국은 포클랜드의 병력 규모를 2000명으로 늘리고 헌법을 개정해 포클랜드 주민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어요.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전쟁 직후 잠시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가 1990년에야 다시 회복했지요.

포클랜드제도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남방 항로이면서 남극 탐사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요충지예요. 특히 1970년대 포클랜드 일대에 석유 약 2000억 배럴과 다량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잠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제2의 포클랜드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랍니다.

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22 美의 영국령 캐나다 공격… 英, 백악관 불태워 보복했죠

미 영 전쟁(1812-1824)

▲ 미·영 전쟁 당시 매킨리 요새에서 펄럭이던 성조기.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통화하면서 "당신들(캐나다)이 백악관을 불태우지 않았느냐"고 따졌다는 보도가 나와 화제였어요. 앞서 미국이 캐나다산(産) 철강·알루미늄에 아주 높은 관세(수입품에 물리는 세금)를 매기자 트뤼도 총리가 항의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미·영 전쟁'(1812~1814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많은 학자가 미·영 전쟁 당시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였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캐나다는 1867년 영국에서 독립했거든요. 그러나 영국군이 미국 수도에 들어와 백악관을 불태운 것이었기에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지요. 그렇다면 미국과 캐나다가 언쟁을 벌인 '미·영 전쟁'이란 어떤 역사적 사건이었을까요?


◇영·프랑스 갈등으로 불거진 전쟁

17세기 초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미국은 8년간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1783년 영국에서 독립했음을 정식으로 인정받았어요. 그런 미국이 3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영국과 또 다른 전쟁을 벌인 것은 다름 아닌 영국과 프랑스 간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1789~1794년)이 한창이던 1793년 1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유럽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어요.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유럽 전역에 퍼질까 두려웠던 영국·네덜란드·스페인·프로이센 등 다른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파를 응징하고자 대(對)프랑스 동맹을 결성합니다.

프랑스는 1799년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유럽 국가를 하나씩 격파하며 세력을 넓혀갔어요(나폴레옹 전쟁). 끝까지 프랑스에 굴복하지 않았던 강대국은 영국뿐이었지요.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전략을 바꿔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로 합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유럽 국가들과 영국 간 통상·무역을 금지하는 내용의 '베를린 칙령'(대륙 봉쇄령)을 내렸어요. 유럽의 어떠한 나라도 영국 물건을 수입하거나 영국에 물건을 팔지 못하도록 한 거예요. 프랑스와 영국 간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지요.

당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와 통상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어요. 그러자 영국이 프랑스를 오가는 미국 선박을 억류하고 물건을 빼앗고 선원을 납치하는 등 훼방을 놓기 시작했지요. 1807년엔 미국 버지니아주 해안가에 들어오던 미국 무역선 체서피크호를 포격해 여러 선원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가 나기도 했어요. 영국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점점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1809
년 미국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이 영국·프랑스 간 갈등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통상 금지법(Non-Intercourse Act)'을 제정합니다. 미국 상인들이 영국·프랑스와 더 이상 통상하지 못하게 막는 내용이었어요. 그러자 정부의 소극적 정책에 분노한 강경파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남부 농업 종사자나 젊은 의원이 대부분이었지요. 이들은 전쟁에서 이기면 영국이 지배하던 캐나다 지역과 동남부 플로리다 지역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어요. 또 당시 오대호(미국 북동부의 거대한 다섯 호수) 일대에 원주민들이 쳐들어와 공격하는 일이 잦았는데, 영국이 원주민들에게 몰래 무기를 대주고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영국을 응징하려 했지요.


◇미국 국가(國歌)를 탄생시킨 전쟁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1812년 7월 매디슨 대통령은 결국 영국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미·영 전쟁이 발발한 거예요. 하지만 피해를 우려한 상공업자들과 해상 운송업자들이 전쟁에 반대하며 잘 협조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미·영 전쟁이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매디슨씨의 전쟁(Mr. Madison's War)'이라며 비꼬기도 했지요.

전쟁 초기 미국은 영국령 캐나다를 집중 공격했어요. 하지만 여론에 떠밀려 선전포고한 탓에 전쟁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어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던 뉴욕 등 북동부 해안 주들은 아예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어요. 여러 전투가 벌어졌지만 미국은 제대로 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요.

 

▲ 1814년 8월 영국은 미국의 영국령 캐나다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불태웠어요. /위키피디아


 그즈음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1812~1813년) 실패로 몰락하고 1814년 지중해 엘바섬으로 추방됐는데요. 영국으로선 가장 큰 위협이던 프랑스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미·영 전쟁에 전력을 쏟기 시작했어요. 영국은 육·해상에서 펼쳐진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미국의 캐나다 요크(현재 토론토)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1814년 8월 워싱턴 D.C.의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수많은 공공건물을 불태웠지요. 매디슨 대통령은 급기야 버지니아주로 피신하기까지 했어요.

그해 9월, 메릴랜드주의 매킨리 요새도 영국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매킨리 요새는 워싱턴 D.C.로 가는 길목인 체서피크만(灣·바다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는 해역) 북쪽 볼티모어 항구에 있는데요. 당시 요새를 공격했던 영국 함대에는 미국인 포로이자 변호사·시인·작가였던 프랜시스 스콧 키(Key·1779~1843)가 타고 있었어요.

그는 영국과 전쟁하면서 꿋꿋하게 펄럭이는 미국 국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시 한 편을 남겼는데, 이 시가 바로 오늘날 미국 국가(國歌)인 '성조기(Star Spangled Banner)'의 가사입니다. 조국의 전쟁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안타까움과 애국심,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잘 드러나지요.

"Oh say, does that star spangled banner yet wave/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오 외치노라, 반짝이는 별을 품은 저 깃발은 자유의 땅과 용맹의 고향 위에서 영원히 물결치리라)."

1814
년 12월 24일, 양국은 결정적 승리도 없고 별다른 성과도 없던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합니다. 벨기에 겐트(Ghent)에서 종전(終戰) 조약을 맺고 미·영 전쟁이 막을 내린 거지요. 그런데 당시 통신 사정이 나빠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 지역에는 종전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며칠 후 뉴올리언스에서 또다시 전투가 발발했다고 해요. 이 전투로 영국군 200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등 미국이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그래서 비록 종전 후 전투이지만 뉴올리언스 전투는 미국인에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답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06.29 '로마 안에서 평화'… 오현제 때 전성기 200년 이어졌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도시국가서 시작해 지중해 제패… 후계자 미리 선포해 정치적 안정
북아프리카, 영국까지 영토 넓혀… 파리·런던 도심도 이때 생겼어요

얼마 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트럼프 대통령의 무한 독주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몰락하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팍스 아메리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향력이 커진 미국이 세계의 평화 질서를 유지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인데요. 고대 로마제국이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따온 말이에요. 2000여 년 전 세계 질서를 유지하던 로마제국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요?

◇지중해 일대 지배한 로마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는 테베레강 하류의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왕이 다스렸으나 기원전 6세기에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어요. 공화정은 왕 이외의 개인 또는 집단이 통치하는 정치 형태예요.

 

▲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갑자기 암살되면서 19세에 로마제국을 떠안게 됐어요.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했던 때부터 로마제국의 전성기, 팍스 로마나가 200여 년간 지속됩니다. /위키피디아

 

로마는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해갔어요. 기원전 3세기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고 포에니전쟁(기원전 264~146년)에서 승리한 후로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어요. 기원전 1세기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오늘날 프랑스 일대)을 정복하고 세력을 키워 권력을 잡았어요. 하지만 카이사르의 독재를 우려한 반대파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며 그를 살해했지요.

카이사르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가 돼요.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를 다스렸지요.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통치하게 된 시기부터 기원후 180년까지의 200여 년을 로마의 평화 시대, 팍스 로마나라고 불러요.

◇로마제국의 전성기, 오현제 시대

옥타비아누스가 죽자 로마는 황제가 암살당하거나 내전이 벌어지는 등 잠시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원후 96년, 네르바가 67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로마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지요.

네르바는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한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나 로마에 기여한 공은 매우 컸어요. 네르바는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과 내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맞아들인 뒤 일찌감치 후계자로 선포하는 제도를 만들었죠. 네르바 이후 네 명이 이 방식을 통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시기 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어요. 네르바를 포함해 이후 네 황제가 로마를 다스렸던 시기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고 해요. 현명한 다섯 황제라는 뜻이죠.

 

▲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최대 영토 - 트라야누스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늘린 황제였어요. 현재의 영국 남부, 이집트 일부,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까지 통치했죠.

 

네르바 다음 황제는 트라야누스였어요. 군인 출신이었던 그는 정복 전쟁을 활발히 벌였어요. 그 결과 로마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하기도 했어요. 그가 전쟁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나라의 농지를 빌려줘 농민들이 먹고살 방편을 마련해줬어요. 그 대가로 받은 이자로 가난한 어린이들을 국가에서 부양하는 제도를 만드는 등 복지 정책에도 힘을 쏟아 로마인들에게 사랑을 받았지요.

트라야누스가 죽자 조카인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했어요. 그는 영토 확장에 힘썼던 트라야누스와는 달리 정복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집중했어요. 우선 동쪽의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게르만족·켈트족 등 이민족을 상대로 한 소모전을 멈추기 위해 성벽을 쌓아 침략을 막도록 했어요. 이때 브리타니아(오늘날 영국)에 만들어진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훗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지요.

오현제 중 제4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됐어요. 그는 이민족과 전쟁이 많았던 시기에 로마를 통치했죠. 전쟁터 막사에서 틈틈이 글을 써 철학책 '명상록'을 남기기도 했어요. 중국 후한의 수도 뤄양에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지요. 아우렐리우스는 중국의 역사서에 대진국(중국에서 로마를 부르던 말) 왕 안돈(安敦)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팍스 로마나가 남긴 것들

팍스 로마나 시절엔 북부 지역 일부를 제외한 모든 유럽이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어요. 오늘날 유럽 주요 국가의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 도심이 이때 만들어졌지요. 또 영토가 커지면서 제국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를 건설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지요. 군인들이 행군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 길로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유럽은 하나'라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지요.

아우렐리우스가 말년에 욕심을 부려 후계자를 잘못 정하면서 팍스 로마나는 허무하게 끝나게 돼요. 네르바 때 만들어진 황제 계승 방식을 따르지 않고 아들 코모두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던 것이죠. 황제가 된 코모두스는 나랏돈을 제 것인 양 펑펑 쓰고, 그것도 모자라 부자들에게서 강제로 재산을 빼앗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스스로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자기를 신으로 받들라고 했어요. 결국 친위대가 192년 코모두스를 암살했죠.

이후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국경선을 뚫고 쳐들어와 로마를 약탈하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쳐들어와요. 로마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돌기도 했죠. 50여 년간 황제가 26명 바뀌는 등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어요.

결국 로마는 서서히 몰락해 4세기 말에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리됐고, 5세기 중엽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아요. 이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가 잠시 번성하기도 했으나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어린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제1후계자로 지정했어요.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19세에 불과했죠.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공화파 귀족들을 숙청해갔어요. 그렇게 권력을 장악해가며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아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