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7 - 2
2017.07.06 800년 지배한 이슬람 세력, '공존의 문명' 꽃피우다
[스페인의 이슬람 문명]
타 종교·민족 포용하는 관용 정책
전성기엔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3대 종교가 공존하며 문화 융성
메스키타·알람브라 등 유산 남기고 1492년 가톨릭 연합군에 멸망했어요
국제 테러 조직 이슬람국가(IS)가 지난달 말 이라크 모술에서 이라크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알누리 모스크'를 파괴해버렸다고 해요. 알누리 모스크는 1170년 건설된 이라크의 대표적 문화유산이에요. IS를 위시한 극단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문화유산을 마구 파괴해 지탄을 받았는데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쿠란의 가르침을 과도하게 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고 알려졌어요.
이슬람 문명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은 다행히 세계 각지에 여럿 남아 있어요. 특히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이나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졌죠. 그런데 이상하죠. 분명 스페인은 유럽 가톨릭 국가인데 왜 여기 이슬람교의 유적이 있는 걸까요?
◇관용으로 통치한 스페인의 이슬람 왕국
7세기 무함마드가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한 뒤, 이슬람 세력은 '우마이야 왕조'의 지휘 아래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아라비아반도를 제패한 뒤 중동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8세기 유럽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죠.
이베리아반도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곳이에요.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기병대장 아브드 알라흐만은 756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중심 도시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자신의 왕조를 세워 알라흐만 1세로 즉위했죠. 이를 아라비아반도의 우마이야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후기 우마이야 왕조'라고 부릅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알람브라 궁전은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남부를 지배하던 13세기 그라나다에 지어졌어요. 알람브라 궁전은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건축양식을 지칭하는 ‘무어 양식’ 건축물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힙니다. /위키피디아
알라흐만 1세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종교가 다른 주민들을 억압하기보다 관용으로 통치했어요. 관용은 넓은 아량으로 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자신들이 소수 세력이란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종교·민족·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하면 결국 발전할 수 없다는 철학이 밑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알라흐만 1세는 종교와 부족의 경계를 넘어 인재를 채용했어요.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많이 거주했던 유대인을 경제, 행정, 학문 분야에 널리 발탁했어요. 1200년 전이란 점을 상기하면 더욱 놀랍죠. 알라흐만 1세의 통치 철학은 관용과 공존을 뜻하는 '콘비벤시아(Convivencia)'로 불려요.
▲ 스페인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모스크)는 원래 후기 우마이야 왕조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졌으나, 가톨릭 왕국에 정복된 후 성당으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안에는 두 종교의 건축양식이 공존하고 있어요. /코르도바=박승혁 기자
콘비벤시아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공존의 문명'을 꽃피웠어요. 수도 코르도바는 기존 이슬람권의 중심 도시 바그다드나 다마스쿠스와 맞먹을 정도로 번성했어요. 유럽 각지에서 학자와 학생들은 찬란한 이슬람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코르도바로 몰려들었어요. 당시 코르도바는 인구가 수십만에 달하는 거대 도시였으며, 농업·상업·수공업이 발달해 그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강성한 도시였습니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서기 1000년쯤 최전성기를 구가했어요.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프랑스 바로 아래 피레네산맥까지 세력을 떨쳤어요. 코르도바 메스키타(스페인어로 이슬람 사원이란 뜻) 등 화려한 이슬람 유적도 이때 세워진 것이죠.
◇찬란한 유산 남기고 소멸하다
이처럼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며 오랜 세월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받아 쇠락했어요. 북쪽 변방으로 밀려났던 스페인 제후들이 힘을 합쳐,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국가를 몰아내고 다시 가톨릭 국가를 세우려 전쟁을 벌였죠. 이를 재정복 운동(Reconquista)이라고 해요.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내부 분열로 1031년 멸망하고 수많은 이슬람 제후의 공국으로 분열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북쪽에서부터 하나둘씩 가톨릭 세력의 재정복 운동에 의해 멸망했어요.
1230년쯤엔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만이 이베리아반도 최남단에 남아 버티고 있었어요. 나스르 왕조는 재정복 운동을 주도하던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디난드 3세에게 복속할 것을 약속하고 속국으로 살아남았죠. 카스티야로서는 그라나다를 멸망시키는 것보다는 이슬람 국가들과의 연결 통로로 삼아 무역을 하는 것이 더 큰 이득일 거라 생각해서 그라나다를 남겨뒀어요.
하지만 15세기에 포르투갈이 바다를 통해 서아프리카와의 교역로를 개척하면서 카스티야 왕국 입장에서는 그라나다의 중요성이 떨어졌어요. 결국 1492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연합군에 의해 그라나다가 함락됐어요. 800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이슬람 문명은 소멸됐습니다.
화려하기로 이름난 알람브라 궁전은 바로 이 그라나다의 왕족이 거주하던 궁전이었어요. 이 궁전을 두고 19세기 미국 작가인 워싱턴 어빙은 "사실과 허구에 근거한 수많은 전설 아라비아와 스페인의 사랑·전쟁·기사도를 그린 수많은 노래와 발라드가 모두 동방의 이 궁전과 관련되어 있다!"고 노래했죠. 알람브라 궁전에 갈 일이 있다면, 이베리아반도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이슬람 문명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윤형덕 공주 한일고 교사·박승혁 기자
07.15 13억 vs 13억… 두 大國의 55년 묵은 갈등
[중국-인도 국경 분쟁]
과거 큰 충돌 없었던 중국과 인도
中이 무력으로 티베트 점령하고 인도, 달라이라마 받아주며 대립
1962년 결국 중-인 전쟁 발발… 중국 얕잡아봤던 인도군 크게 패해
최근 국경에서 또 긴장감 높아요
인구가 각각 13억7000만명, 13억3000만명에 달하는 중국과 인도가 국경 분쟁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두 대국(大國)의 규모에 비하면 너무나 조그마한 땅 때문인데요. 중국·인도·부탄 등 세 나라가 만나는 도카라(중국명 둥랑) 지역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도로를 부설하면서 갈등이 시작됐어요. 인도와 부탄은 중국이 도로를 부설하고 있는 이 지역이 부탄 영토라며 중국에 공사 중단을 요구했어요. 반면 중국은 자국 영토에 정당하게 도로를 놓았을 뿐이라며 오히려 인도군이 중국 영토를 침범하고 있다고 주장했죠. 양국은 국경 문제로 55년 전 이미 한 번 중-인 전쟁을 벌인 적이 있어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두 나라는 왜 서로 으르렁대는 것일까요?
◇국경 분쟁의 씨앗을 뿌린 영국
역사적으로 중국과 인도는 충돌했던 적이 거의 없었어요. 두 나라 사이 티베트가 있어서 양국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던 덕분이죠.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중국과 인도가 직접 서로를 마주하게 됐어요.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죠. 과거 제국주의 열강이 제멋대로 그려놓은 국경이 혼란을 초래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두 나라 사이 국경 문제는 제국주의 시절 영국에 의해 씨가 뿌려졌습니다.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들 멋대로 중국의 변경을 점령했었어요. 그 영토가 그대로 인도령으로 남아 1950년대까지 중국과 인도는 국경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있었죠. 냉전 초기엔 인도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비동맹'이라는 중립 노선을 택하고, 중국 역시 소련과 갈등이 발생하면서 비동맹 노선에 발을 걸치면서 양국은 겉보기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어요.
▲ 인도와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인도 시킴주(州)의 ‘나투 라’ 국경 검문소에서 양국 군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해발 4500m의 고산에 있는 나투 라 고개는 과거에도 인도와 중국을 잇는 주요 통로였으나 1962년 중-인 전쟁 이후 국경이 폐쇄되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닐 수 없었죠. 양국은 2006년 관계 개선의 제스처로 나투 라 검문소를 열고 통행을 재개한 바 있는데, 최근 또 국경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고 있어요. /AFP
그나마 유지되던 우호 관계가 틀어진 것은 1950년대 말이었어요.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티베트로 이어지는 도로 '신장공로'를 놓았어요. 이 도로는 중국과 인도 양쪽이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는 '악사이친'이란 지역을 지나갔어요. 중국이 인도와 상의도 없이 도로를 부설하자 인도인들은 분노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의 티베트 탄압이 극에 달한 1959년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로 망명했어요. 그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임시정부를 선포했죠. 인도의 네루 총리가 달라이라마의 인도 망명을 받아들이자 이번엔 중국인들이 격분했어요. 중국과 인도 국경에서 소규모 충돌이 잦아진 건 이때부터예요.
◇중국에 완패한 인도
당시 인도에선 현실적으로 인도가 중국에 무력으로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며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나 네루 총리는 인도가 중국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 주석의 권력이 약화했고, 소련과의 갈등으로 인해 인도 국경 분쟁에까지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이에 네루는 대중국 강경책을 이어나갔어요.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어요. 1962년 10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지도부를 소집해 인도와의 전쟁을 결정했어요. 1930년대의 중일전쟁과 40년대의 국공내전, 50년대의 6·25전쟁을 거치며 실전을 경험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힘에 자신이 있었던 거죠.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해방되긴 했지만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었고 무기도 중국에 비해 열악했어요. 인도군은 개전 초부터 중국군에 밀려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어요. 인도 북부는 줄줄이 중국군에 의해 점령됐죠. 혼비백산한 네루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과 영국이 무기와 병력을 공급했어요. 당시 지구 반대편에서는 쿠바 미사일 사태로 미국과 소련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던지라 자칫하다가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세계를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중국이 모든 전투를 중지하고 점령한 영토와 노획한 무기, 포로들을 조건 없이 돌려주겠다고 선포하고는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애초에 중국의 목적은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인도에 경고하는 것이었고, 중국 정부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판단한 것이죠.
인도군의 사상자는 1만여 명에 달한 반면 중국군은 2300명에 불과했다고 해요. 인도로서는 치욕스러운 결과였죠. 악사이친 지방을 점령하고 있는 중국군에게 물러나라고 큰소리만 쳤을 뿐 현실적으로 중국군을 물러나게 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준 꼴이 됐죠. 티베트 문제에도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도 크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제사회로부터 침략자라는 비난을 듣게 됐어요. 악사이친 지방을 실질적으로 점유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그 이외의 국경 문제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두 나라가 오랜 기간 다져왔던 우호 관계가 깨지고 서로를 향한 증오가 커졌어요. 최근 발생한 국경 분쟁도 바로 해묵은 양국 간의 갈등 때문인 셈이에요. 아무쪼록 이번에는 큰 충돌 없이 두 나라가 현명하게 문제를 매듭짓기 바라봅니다.
07.20 천년 번성한 마야문명도 가뭄에 무너졌어요
가뭄으로 몰락한 문명
메소포타미아 제패한 아카드 제국, 수학·천문학 발달한 마야문명
피라미드 건설한 이집트 고왕국 등 극심한 가뭄으로 멸망했어요
우리나라는 최근 들어 일찍 찾아오는 폭염과 지각 장마 등의 영향으로 가뭄 피해가 심해지고 있어요.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정도가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기후변화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에요. 날씨와 기후를 예측하는 기술이 지금보다 뒤처졌던 과거에는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멸망의 길을 걷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가뭄으로 몰락한 고대 문명에 대해 알아볼게요.
◇평균기온 하락으로 쇠락한 아카드
▲ 최초의 제국으로 알려진 아카드 문명의 석판. /위키피디아
기원전 2350년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비옥한 땅에 '아카드'라는 도시국가가 세워졌어요.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했고 150여 년 동안 번영했죠. 그런데 기원전 2150년경 갑자기 멸망했어요.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을 것이라 추측만 했죠.
1993년 미국과 프랑스 공동 연구팀이 폐허가 된 아카드 제국의 도시를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기원전 2200년경부터 300여 년간 이 지역의 기후가 건조해져 극심한 가뭄이 지속됐고, 지구의 평균기온이 2도나 낮아져 농사를 짓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렸던 곡창지역은 제국의 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가뭄으로 인해 점차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으로 변했어요. 그러자 남쪽으로 인구의 대이동이 이루어졌고, 기존의 도시는 텅텅 비게 되었죠. 인구가 급증한 남부지방에서는 농업이 확장되고 관개시설이 늘어났어요. 그로 인해 나무를 대량으로 소비하면서 삼림이 감소해 사막화가 진행됐어요.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다른 땅을 찾아 또다시 떠나게 돼요. 인구가 곧 국력이었던 시대에 인구가 감소하게 된 아카드 제국은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결국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죠.
◇어느 날 사라져버린 마야 문명
세계의 모든 문명이 큰 강과 평야에 위치한 것과 달리 고(古) 마야 문명은 열대 밀림에 자리 잡았지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어요. 마야인들은 기원전 500년경부터 석판에 글을 썼고, 수백만 명이 관개시설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어요. 그들의 거주지 유적을 보면 인구밀도 1㎢당 500명 이상으로 굉장히 높았어요. 도시에는 신전과 궁전 등 3000개가 넘는 석조 건축물이 있었고, 1년을 365.2420일로 계산하여 개기월식을 정확하게 예측할 만큼 수학과 천문학도 발달했었죠.
▲ 멕시코 캄페체주의 고대 마야 도시는 정글 깊숙한 곳에 있어요. 고(古) 마야 문명 역시 가뭄 때문에 급격히 몰락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위키피디아
그랬던 마야인들이 기원후 900년경 갑자기 사라져버렸어요. 16세기에 스페인이 침공해왔을 때 마야의 도시들은 이미 몇백 년 동안 버려져 있던 상태였죠. 마야 문명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반란이나 전염병 등을 추측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었어요.
2003년 스위스의 하우크 박사 연구팀이 마야 문명 유적지가 있는 유카탄반도 근처의 바닷속 퇴적물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어요. 하우크 박사는 마야 문명 유적지에는 티타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비가 많이 온 해에는 퇴적물에 티타늄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가뭄이 든 해에는 티타늄의 양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 사실을 바탕으로 810~910년 사이의 강수량이 다른 시기보다 적었고, 중간중간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 마야 문명을 붕괴시켰다고 결론지었죠.
◇'죽음의 신'도 무릎 꿇린 기후변화
이집트가 사막지대임에도 기원전 3200년경 문명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나일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매년 6~10월 나일강은 홍수로 범람해, 상류에서 하류로 비옥한 흙이 운반돼요. 홍수를 겪고 난 땅은 농작물을 키우기에 좋은 토지로 바뀌었죠. 따라서 가뭄은 농사와 직결된 문제였어요. 이집트인들은 건기에 발생하는 나일강의 가뭄을 죽음으로, 우기의 범람을 부활로 인식했어요. 이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그들은 죽음과 부활을 주관하는 '오시리스' 신이 나일 강의 범람을 책임진다고 생각해 태양신 다음으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내며 풍년을 빌었죠.
▲ 기원전 27세기~기원전 21세기에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을 정도로 번성했던 이집트 고왕국은 나일강 상류의 가뭄으로 농경지가 줄어들면서 몰락하고 말았어요. /카이로=노석조 기자
죽음의 신도 기원전 2200년 무렵부터 시작한 기후변화 앞에서는 무기력했어요. 나일강 상류에서 수분 증발이 심해지면서 강의 수량이 크게 줄었죠. 강의 폭은 좁아졌고, 삼림이 점차 사라졌어요. 나무가 사라질수록 사막화도 빠르게 진행돼 농사짓기가 힘들어졌어요. 식량이 부족해진 이집트인들은 남쪽으로 이동해 아프리카 대륙 중앙부의 원주민들과 섞이거나, 북쪽으로 이동해 지중해 연안에 정착했어요.
당시 이집트는 고왕국 시대(기원전 2686년~기원전 2181년)였어요. 기후변화로 인한 인구 이동과, 지방의 귀족들과 승려들이 파라오의 권력에 도전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해져 결국 이집트 고왕국은 쇠락했고 동쪽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어요.
물론 이 제국들의 멸망 원인을 단순히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 하나로만 볼 수는 없지만 가뭄이 몰락에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반복되는 가뭄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국운이 쇠한다는 사실 -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 할 교훈 아닐까요?
07.27 모피·고래·사탕수수… 무역품 따라 다양한 인종 이주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왕국에서 태평양 무역의 거점으로 발돋움
미국에서 가장 인종 구성 다양한 州… 트럼프 反이민 정책에 강하게 반발
오바마 전 대통령 고향이기도 해요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권 6국 출신의 입국을 제한하려 하자, 하와이주(州) 연방 지방법원의 데릭 왓슨 판사가 제동을 걸었어요. 결국 대법원이 6월 트럼프 대통령 손을 들어줬지만 왓슨 판사는 지난 13일 "행정명령에서 비자 발급이 가능한 범위를 현행보다 넓혀야 한다"며 정부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에 계속 반발하고 있죠. 하와이 주민들도 왓슨 판사를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와이는 미국 주 가운데 인종 구성이 가장 다양한 곳이에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오늘은 '이주민들의 섬' 하와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태평양 무역의 중심이 되다
화산섬 하와이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약 1000년 전 태평양을 건너온 폴리네시아인들이에요. 약 500~600년 전에도 폴리네시아인들이 많이 건너왔다고 해요. 이때까지 하와이는 자급자족 경제와 족장 중심 전통사회 모습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1778년 1월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도착하면서 이 섬이 서구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 무역 시스템에 편입됐어요.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호주 사이에 있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하와이는 태평양 모피 무역의 거점으로 떠올랐죠. 이내 하와이에는 총, 술, 비단, 후추와 같은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동시에 홍역, 폐렴, 성병 등 각종 신종 전염병도 퍼져 주민들이 대거 목숨을 잃기도 했죠.
이렇게 서양 세력과 접촉하면서 하와이 사회도 변하기 시작해요. 그동안 개별 족장의 통치를 받았던 하와이인들은 강력한 '우두머리' 한 명이 필요했어요. 군사적으로 유능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던 카메하메하 1세가 1782년부터 1810년까지 무력으로 모든 섬을 병합해 통합 하와이 왕국이 출범했습니다.
▲ 태평양의 화산섬 하와이는 지난 300여 년간 폴리네시아인, 유럽인, 아시아인 등이 꾸준히 이주해 미국에서 가장 인종 구성이 다양한 주(州)가 됐어요. 미국 최초로 흑인이자 다문화가정 출신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도 1961년 하와이에서 태어났어요. /위키피디아
1820년에서 1860년 사이 고래를 잡는 포경업이 번성하면서 하와이에는 미국과 유럽 이주민이 엄청나게 증가했어요. 선교사도 잔뜩 들어와 하와이 사회의 변화를 촉진했죠. 외국 출신 이주민들은 하와이 왕국에서 사유재산과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어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이주민들이 하와이 왕국에 집단 저항할 기미도 보였죠. 카메하메하 3세는 결국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1840년 영국과 미국의 제도를 본떠 입헌제 형태로 정부를 개편했어요. 그는 외국인을 귀화시켜 정부 요직에 기용하고, 전통적 시스템을 폐지하고 개혁을 시도했죠. 이런 정치적 대전환은 1850년까지 계속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약 15년간 하와이 토지 대부분이 미국과 유럽인 소유로 넘어갔어요. 외국인의 사유재산과 권리가 보장됨으로써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하와이 사람들은 주요한 생산 수단이었던 토지를 잃고 말았죠. 이제 봉급을 받고 일하는 일반 노동자가 된 거예요.
◇아시아계가 다수인 미국 州
19세기 중반부터는 사탕수수가 하와이의 주된 무역 상품으로 떠올랐어요.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설탕 값이 크게 오르자 하와이 농장에서 사탕수수 붐이 일어났죠. 농장주들은 40만명에 가까운 노동력을 대려고 아시아에서 사람들을 데려왔어요. 1880년대에만 중국인이 약 1만8000명, 일본인과 포르투갈인이 약 1만명 하와이로 이주해왔어요. 1900년에는 일본인이 하와이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또 필리핀에서 1910년부터 20년간 약 12만명이 이주했어요. 조선에서도 1903년부터 1905년까지 노동자 7291명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파견했는데, 이것이 한국 역사상 첫 하와이 이주로 기록됐어요. 지금도 하와이 인구의 37%가 아시아계죠. 반면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은 소수(약 10%)로 전락했어요.
사탕수수 산업으로 얻는 이윤이 나라 경제의 중요한 축을 맡은 상황에서 1890년 미국이 관세법을 개정해 하와이산 사탕수수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어요. 큰 타격을 입게 된 하와이 사탕수수 업자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차라리 미국과 합병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죠. 하와이의 통치자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1893년 합병론자들이 결국 정부를 타도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합병론자들의 바람에 따라 하와이는 1898년 미국 합병이 최종 결정됐어요. 미국령(領)이 된 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재배가 한층 활기를 띠었고 인구가 더욱 증가했죠. 2차 세계대전 후 주(州) 승격 운동이 활발해져 하와이는 1959년 8월 21일 미국의 50번째 주가 됐어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도 이때쯤 하와이로 이주해 1961년 오바마를 낳았죠. 오바마는 훗날 최초의 흑인이자 하와이 출신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하와이를 '어느 한 민족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 다문화 지역이라는 점과, 역사적 경험, 독특한 인구 구성을 가진 곳'으로 표현했어요.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하와이 사람들이 앞장서서 반기를 드는 배경엔 이렇듯 다양성을 품은 이주민들의 역사가 있죠. 앞으로도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을 계속 추진한다면 하와이의 반발을 넘어야 할 것입니다.
08.03 요트와 어선 띄워 34만 명 구출… '기적'이라 불려요
[덩케르크 철수 작전]
"佛 북부에 고립된 병사들 구하자" 英 정부 호소에 13세 어린이까지 나서
돛단배와 유람선 등 선박 861척… 포격과 기뢰 위험 뚫고 9일간 구출
절체절명 위기에서 희망 상징해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가 국내에서 2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어요. 이 영화는 '덩케르크 철수'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영국이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북부의 덩케르크(프랑스어 표기법으로는 됭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연합군 33만8000여 명을 영국 본토로 철수시킨 작전이에요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연합군
1939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은 이듬해 파죽지세로 프랑스 서북부 지역의 연합군을 포위했어요. 독일군에 밀려 해안 지대로 내몰린 연합군에게 탈출구는 이제 덩케르크밖에 남지 않았죠. 여기서도 안전이 보장된 건 아니었어요. 피란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독일 공군이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죠. 독일 비행기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제히 길 옆 도랑으로 뛰어드는 상황이 반복됐어요. 설상가상으로 덩케르크로부터 불과 15㎞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독일의 전차 부대가 진격해왔어요. 그런데 1940년 5월 24일부터 3일간 독일의 전차 부대가 갑자기 진격을 멈췄어요. 주력 부대가 본토에서 너무 멀어진 것에 불안감을 느낀 히틀러가 잠시 진격 중단을 명령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찌됐건 이는 연합군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어요.
▲ 1940년 5월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덩케르크의 잔교 위에서 영국군 병사들이 구조선을 기다리는 모습을 영화에서 재현한 장면이에요(위 사진). 실제 당시 구조된 병사들이 영국에 도착한 뒤 따듯한 차와 빵을 공급받고 있어요(아래 사진). 덩케르크 철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힘을 보태 일궈낸 기적 같은 작전이었어요.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국 전쟁박물관
영국은 민간 선박을 모두 동원해 덩케르크에서 아군을 구출하기로 결정했어요. 5월 26일, 프랑스와 마주 보고 있는 영국의 도버 해안에 거룻배, 화물선, 유람선 등 온갖 배들이 모여들었어요. 그중에는 13~14세의 어린 소년들로 구성된 해양 소년단의 연습용 돛단배와 경기용 요트도 있었어요. 선두에 선 구축함에서 "아이들은 돌아가라"는 방송을 내보냈는데도 소년들은 "우리도 군인 아저씨 다섯 명쯤은 태울 수 있어요"라며 돌아가지 않았죠.
이렇게 민간 선박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덩케르크에 고립된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필요한 군함이 41척으로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민간 선박을 징발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징발되지 않은 시민들까지 서로 참여하겠다고 각지에서 찾아왔죠. 군함에 민간 선박을 합쳐 총 861척의 함대가 구성됐어요.
오후 6시 57분. 암호명 '발전기(Dynamo)'로 알려진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개시됐어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등대와 선박의 불을 모두 껐기 때문에 선단은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가야 했어요. 게다가 바다 곳곳에는 독일 해군을 막기 위해 영국이 설치한 기뢰가 도사리고 있어 항해 장치가 열악한 민간 선박들은 선두에 선 구축함만 믿고 따라갔어요. 도버에서 덩케르크까지는 약 72㎞지만 선박들은 기뢰를 피해 100㎞ 넘게 돌아가기도 했어요.
◇하늘이 도운 기적의 탈출 작전
위험을 무릅쓰고 덩케르크 해안에 진입한 선박들 앞에 펼쳐진 모습은 처참했어요. 해안의 유류저장 탱크가 폭격을 받아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파괴된 부두를 가득 메우고 서있는 병사들 위로는 독일 전투기들이 기관총을 퍼부어대고 있었죠. 선박이 병사들을 싣기 시작하자 독일 전투기들은 일제히 배를 공격했어요. 600여 명을 태운 선박이 폭격을 당하자 당황한 민간인 항해사들이 우왕좌왕하다 서로 충돌해 침몰하는 사태도 벌어졌어요. 또 거칠고 높은 파도가 몰아쳐 작은 모터보트들은 방파제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기도 했죠.
오후에 썰물 때가 되자 상황은 더 나빠졌어요. 수심이 얕아져서 작은 배조차도 해안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죠. 그러자 많은 병사가 장비를 벗어던지고 배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어요. 영국 해군의 한 대위는 일부러 자신의 배를 수심이 낮은 곳에 좌초시켜 해안에서 헤엄쳐 온 병사들이 이 배를 발판으로 삼아 다른 수송선으로 옮겨 탈 수 있게 했어요. 한 명의 병사라도 더 태우기 위해 대형 선박들은 싣고 있던 구명보트를 모두 바다 위에 내려놓았고, 보트에 올라탄 병사들은 철모로 물을 퍼내며 소총으로 노를 저었죠. 승선 작업이 이뤄지는 가운데 독일 전투기들의 '사냥'은 계속됐어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도버해협을 넘나들며 분투했고, 지상에서 프랑스군이 사력을 다해 독일 전차를 막았어요.
작전이 시작된 날부터 이틀간 비가 내리고, 작전이 끝날 때까지 안개와 먹구름이 자주 껴서 독일의 폭격기와 전투기의 출격이 취소되곤 했어요. 이내 파도도 잔잔해져 작은 선박들이 도버해협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죠. 평균적으로 5월 말에서 6월 초 덩케르크에서 이와 같은 날씨가 나타날 확률은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하늘이 연합군을 도와준 셈이에요.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간 실시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연합군의 피해는 매우 컸어요. 총 861척의 선박 중 272척이 침몰했고, 177대의 항공기를 잃었죠. 또 연합군의 차량, 전차, 야포 등 최신 무기들이 고스란히 독일군에게 넘어갔어요. 해안가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수만 명은 포로가 됐고, 영국군은 정예부대가 참패해 자존심의 상처도 입었죠. 철수 작전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집계조차 할 수 없었고요.
그럼에도 33만8000여 명의 연합군 병력을 구출해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덩케르크 철수를 계기로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결국 독일을 무너뜨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게 되죠.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덩케르크는 일대 혼란 속의 비참한 패배를 뜻하는 동시에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행운을 상징하고 있어요.
08.10 귀족 위한 '곡물법' 폐지 등 고비마다 변화의 길 찾았어요
영국의 보수 정당
토리당에서 출발한 영국 보수 정당… 원래는 기득권층 이익 대변했지만
19세기 중간계급으로 선거권 확대, 20세기 복지 제도 정착에 앞장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 마련… 300년 정당 지속해온 원동력이죠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이번 여름휴가 기간 동안 영국 보수당의 혁신에 관한 책을 읽었다고 해요. 영국 보수당의 재건 과정에 대해 공부해 한국당의 혁신에 접목시키겠다는 취지로 전해졌어요. 현재 영국의 대표적인 보수 정당으로는 '보수당(Conserva tive)'과 그의 옛 동지이자 적이었던 '자유민주당(약칭 자유당·Liberal Democrats)'이 있습니다. 300년 이상 그 존재를 인정받아온 영국 보수 정당들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보수
17세기 무렵부터 영국의 양대 정당으로 자리매김한 토리당과 휘그당은 원래 왕에 맞서 귀족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했어요. 산업혁명 이후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뀝니다. 새로 성장한 자본가, 도시 중간계급이 중요한 정치 주체로 등장한 것이죠. 토리당의 총수 로버트 필(1788~1850)은 새 계급의 중요성을 간파했어요. 그는 이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를 매기던 '곡물법'의 폐지를 주장했죠. 이는 토지 소유 귀족(지주)들의 반발을 샀고, 보수당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어요. 이때 갈라져 나온 정파가 1859년 휘그당과 연대해 '자유당'을 탄생시켰죠. 고통은 있었지만, 곡물법 파동은 귀족들 편에만 서던 토리당이 산업 자본가와 시민계급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가 돼요.
위험을 무릅쓰고 덩케르크 해안에 진입한 선박들 앞에 펼쳐진 모습은 처참했어요. 해안의 유류저장 탱크가 폭격을 받아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파괴된 부두를 가득 메우고 서있는 병사들 위로는 독일 전투기들이 기관총을 퍼부어대고 있었죠. 선박이 병사들을 싣기 시작하자 독일 전투기들은 일제히 배를 공격했어요. 600여 명을 태운 선박이 폭격을 당하자 당황한 민간인 항해사들이 우왕좌왕하다 서로 충돌해 침몰하는 사태도 벌어졌어요. 또 거칠고 높은 파도가 몰아쳐 작은 모터보트들은 방파제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기도 했죠.
오후에 썰물 때가 되자 상황은 더 나빠졌어요. 수심이 얕아져서 작은 배조차도 해안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죠. 그러자 많은 병사가 장비를 벗어던지고 배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어요. 영국 해군의 한 대위는 일부러 자신의 배를 수심이 낮은 곳에 좌초시켜 해안에서 헤엄쳐 온 병사들이 이 배를 발판으로 삼아 다른 수송선으로 옮겨 탈 수 있게 했어요. 한 명의 병사라도 더 태우기 위해 대형 선박들은 싣고 있던 구명보트를 모두 바다 위에 내려놓았고, 보트에 올라탄 병사들은 철모로 물을 퍼내며 소총으로 노를 저었죠. 승선 작업이 이뤄지는 가운데 독일 전투기들의 '사냥'은 계속됐어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도버해협을 넘나들며 분투했고, 지상에서 프랑스군이 사력을 다해 독일 전차를 막았어요.
작전이 시작된 날부터 이틀간 비가 내리고, 작전이 끝날 때까지 안개와 먹구름이 자주 껴서 독일의 폭격기와 전투기의 출격이 취소되곤 했어요. 이내 파도도 잔잔해져 작은 선박들이 도버해협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죠. 평균적으로 5월 말에서 6월 초 덩케르크에서 이와 같은 날씨가 나타날 확률은 2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하늘이 연합군을 도와준 셈이에요.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간 실시된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연합군의 피해는 매우 컸어요. 총 861척의 선박 중 272척이 침몰했고, 177대의 항공기를 잃었죠. 또 연합군의 차량, 전차, 야포 등 최신 무기들이 고스란히 독일군에게 넘어갔어요. 해안가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수만 명은 포로가 됐고, 영국군은 정예부대가 참패해 자존심의 상처도 입었죠. 철수 작전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집계조차 할 수 없었고요.
그럼에도 33만8000여 명의 연합군 병력을 구출해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덩케르크 철수를 계기로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결국 독일을 무너뜨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게 되죠.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덩케르크는 일대 혼란 속의 비참한 패배를 뜻하는 동시에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행운을 상징하고 있어요.
08.10 귀족 위한 '곡물법' 폐지 등 고비마다 변화의 길 찾았어요
영국의 보수 정당
토리당에서 출발한 영국 보수 정당… 원래는 기득권층 이익 대변했지만
19세기 중간계급으로 선거권 확대, 20세기 복지 제도 정착에 앞장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 마련… 300년 정당 지속해온 원동력이죠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이번 여름휴가 기간 동안 영국 보수당의 혁신에 관한 책을 읽었다고 해요. 영국 보수당의 재건 과정에 대해 공부해 한국당의 혁신에 접목시키겠다는 취지로 전해졌어요. 현재 영국의 대표적인 보수 정당으로는 '보수당(Conserva tive)'과 그의 옛 동지이자 적이었던 '자유민주당(약칭 자유당·Liberal Democrats)'이 있습니다. 300년 이상 그 존재를 인정받아온 영국 보수 정당들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보수
17세기 무렵부터 영국의 양대 정당으로 자리매김한 토리당과 휘그당은 원래 왕에 맞서 귀족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했어요. 산업혁명 이후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뀝니다. 새로 성장한 자본가, 도시 중간계급이 중요한 정치 주체로 등장한 것이죠. 토리당의 총수 로버트 필(1788~1850)은 새 계급의 중요성을 간파했어요. 그는 이들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를 매기던 '곡물법'의 폐지를 주장했죠. 이는 토지 소유 귀족(지주)들의 반발을 샀고, 보수당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어요. 이때 갈라져 나온 정파가 1859년 휘그당과 연대해 '자유당'을 탄생시켰죠. 고통은 있었지만, 곡물법 파동은 귀족들 편에만 서던 토리당이 산업 자본가와 시민계급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가 돼요.
▲ 1808년경 영국 하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영국 의회에는 이보다 훨씬 전인 17세기 무렵부터 정당들이 등장해 의회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어요. /위키미디어
보수당은 진보적 경제학자 윌리엄 비버리지가 작성한 '비버리지 보고서'에 기반해 사회보장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앞장섰어요. 야당 시절인 1947년 '산업헌장'을 발표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 노사 협력, 국민의료보험(NHS) 설립 등 복지에 대한 국가 책임 등을 받아들였죠. 이런 개념들은 당시 보수당으로선 혁명적이었어요. 윈스턴 처칠은 '산업헌장'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고 해요.
1951년 다시 집권한 후에도 보수당은 노동당이 추진한 사회보장 및 복지 제도 도입 노력을 이어갔어요. 이렇듯 보수당은 영국이 현대적인 복지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노동당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다시금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죠. 이후 현재까지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양당 체제를 형성하고 있어요. 참고로 자유당은 선거에서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지지율 한 자리 숫자대를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수당과 자유당은 둘 다 19세기까지 사회적 약자보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당이었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영국 보수 정당들이 라이벌 정당과의 경쟁 속에서도 시대적 변화를 읽고,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궁극적으론 영국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개혁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토리당과 휘그당]
영국 보수 정당의 기원은 17세기 토리당(Tory Party)과 휘그당(Whig Party)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어요. 1670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들은 국왕 쪽 의견을 옹호하는 파와 의회 쪽 의견을 옹호하는 파가 서로 대립했는데요. 서로를 '도둑'이나 '악당'에 빗대다가 국왕파는 '토리', 의회파는 '휘그'라 불리게 돼요. 토리(Tory)는 아일랜드어로 '산적'을 지칭하고, 휘그(Whig)는 스코틀랜드어로 '말 도둑'을 의미해요. 서로를 비방하기 위해 쓰던 말이 점차 파벌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지게 된 것이죠. 두 정당은 서로 경쟁하는 와중에도 힘을 합쳐 명예혁명(1689년)을 성공시키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1707년)을 이루는 등 영국 입헌군주제의 토대를 마련해갔어요.
08.19 '삼색기'는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 주변국도 차용했죠
[에티오피아]
솔로몬 후예' 자부하는 에티오피아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침략 이겨내 아프리카 독립국 희망으로 떠올라
2차대전 후 국제사회 협력 다짐… 어려운 나라 돕는 일 의무로 여겨
6·25전쟁땐 군사 6000명 보내기도
에티오피아가 지난 4일 북한 대사관의 은행 계좌 수를 제한하겠다고 밝혔어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내린 제재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이에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티오피아는 세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나라예요. 아프리카에서 최대 규모이면서 세계에서 다섯째로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죠. 1950년 6·25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선 유일하게 한국에 지상군을 보내준 나라이기도 하죠.
◇솔로몬의 후예,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구약성서에 의하면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예멘 지역을 통치하던 '시바'라는 왕국의 여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 왕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요. 그의 이름이 메넬리크 1세고 '악숨' 왕국을 건설했다고 전해져요. 악숨 왕국은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는 7세기 무렵까지 지중해와 인도 사이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과 아라비아반도 남부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죠.
▲ 에티오피아 남부 이르가체페에서 농부들이 커피콩을 말리고 있어요. 커피의 원산지답게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최대 커피 생산국이에요. 국민 4명 중 1명이 커피 산업에 종사하고 있답니다. /블룸버그
역사학자들은 메넬리크 1세가 진짜 솔로몬의 후예인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해요. 게다가 악숨 왕국은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형성됐다고 보고 있죠. 그럼에도 오늘날
까지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이 솔로몬의 후예임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아요. 1996년 제정한 국기 정중앙의 파란색 원 안에 솔로몬을 상징하는 노란색 별 모양을 새겨 넣은 것을 보면 말이죠.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이 된 삼색기
에티오피아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솔로몬의 후예라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있어요. 외세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독립국 지위를 오랫동안 이어왔다는 것이에요. 이는 에티오피아의 산악 지형이 큰 몫을 했어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비롯한 대부분 지역이 평균 해발고도 1500m 이상이고, 가장 높은 곳은 4620m나 돼요. 덕분에 이슬람 세력이 빠른 속도로 확장하던 시기에도 기독교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집어삼키던 19세기 후반에도 에티오피아는 유일하게 독립국으로 남은 나라예요. 물론 위기는 있었죠. 1889년 이탈리아가 북부 지역을 침공해 에티오피아를 보호국으로 만들려 했어요. 에티오피아의 왕 메넬리크 2세는 수년간 군대를 키우면서 이탈리아와의 전면전을 준비했죠. 1896년 이탈리아가 약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메넬리크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해 반격에 나섰어요.
3월 1일 에티오피아 북부 아두와에 도착한 이탈리아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꾸준히 전쟁을 준비해온 에티오피아의 병력이 8만에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이탈리아군은 1만5000여 명이 전사하면서 참패를 당했어요. 이탈리아는 결국 에티오피아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는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했고, 동아프리카 지역의 일부 영토를 상실했어요. 용맹하게 싸워 승리한 메넬리크 2세는 '아프리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됐죠.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독립국가의 상징이 됐어요. 훗날 20세기에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가나, 말리, 세네갈, 카메룬, 토고 등은 자국 국기에 에티오피아 국기 색깔(빨강, 노랑, 초록)을 차용해 오랜 독립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어요.
◇6·25에 참전한 '강뉴' 부대
1935년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이탈리아는 아두와 전투의 복수를 들먹이며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략해요. 에티오피아군은 분전했으나 독가스를 사용하는 이탈리아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연전연패했죠. 국왕 셀라시에 1세는 영국으로 망명했어요. 셀라시에 1세는 국제연맹에서 "오늘은 우리 차례지만, 내일은 당신들 차례일 것"이라며 유럽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위험이 있음을 알렸어요. 또 이탈리아에 대항해 싸우는 자국민들을 위해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죠.
▲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에티오피아‘강뉴 부대’병사들이 지휘관의 설명을 듣고 있어요. /미 국무부
국제사회는 그의 외침을 무시했어요.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지배했어요. 1941년 영국이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낸 뒤 셀라시에 1세를 복위시켰어요. 침략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방관과 집단 안보 정신 결여로 인해 뼈아픈 경험을 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유엔(국제연합)에 가입했어요.
셀라시에 1세는 1950년 발발한 6·25전쟁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친위대를 파병했어요. 반드시 승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병 부대의 이름은 에티오피아어로 '격파한다'는 뜻을 가진 '강뉴'로 지었죠. 강뉴 부대는 무패 신화를 자랑하며 이역만리 타국에서 분투했고, 한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죠.
에티오피아는 한반도에 연인원 6000여 병력을 파병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어요. 한국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그런 피해를 감수한 이유는, 이탈리아에 침략당했을 때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어요.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가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겼죠. 오늘날도 에티오피아는 정치·경제적 어려움에도 어려운 나라를 돕는 일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여기고 있어요.
국제사회는 그의 외침을 무시했어요.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지배했어요. 1941년 영국이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낸 뒤 셀라시에 1세를 복위시켰어요. 침략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방관과 집단 안보 정신 결여로 인해 뼈아픈 경험을 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유엔(국제연합)에 가입했어요.
셀라시에 1세는 1950년 발발한 6·25전쟁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친위대를 파병했어요. 반드시 승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병 부대의 이름은 에티오피아어로 '격파한다'는 뜻을 가진 '강뉴'로 지었죠. 강뉴 부대는 무패 신화를 자랑하며 이역만리 타국에서 분투했고, 한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죠.
에티오피아는 한반도에 연인원 6000여 병력을 파병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어요. 한국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그런 피해를 감수한 이유는, 이탈리아에 침략당했을 때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어요.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가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겼죠. 오늘날도 에티오피아는 정치·경제적 어려움에도 어려운 나라를 돕는 일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여기고 있어요.
08.24 내전이 남긴 상처 파고든 '백인우월주의'
건국이래 갈등 빚은 美 북부·남부, 노예제 문제로 4년간 '남북전쟁'
패한 남부, 인종주의로 분노 표출… KKK 등 백인우월주의 단체 힘 커져
20세기 후반에 잦아드는 듯했으나 트럼프 취임 후 활개치고 있어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지난 12일 인종주의 단체들이 폭력 시위를 일으켰어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들의 폭력적 행동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아 소속 정당에서조차 비평을 받았죠. 다인종국가이며 흑인 노예제도를 운영했던 미국에서 인종주의란 넘어선 안 되는 선으로 여기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정서를 무시했다는 관측이 나왔어요. 샬러츠빌 시위 이후 미국 각지에서는 옛 남부연맹을 상징했던 동상과 기념비 등이 빠른 속도로 철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국의 '아킬레스건' 인종주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게요.
◇KKK, 내전으로 폐허 된 남부에서 득세
미국은 17세기 초 영국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들여왔어요. 노예는 목화밭 등 큰 농장이 있는 남부에 주로 많았죠. '남북전쟁'이라 불리는 미국 내전 직전인 1860년경 노예 인구는 약 400만으로 추정돼요. 북부의 산업자본가들은 노예제에 묶인 노동력을 원했고, 공화당 대선 후보 링컨은 이런 표심을 의식해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어요. 마침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11개 주(州)는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을 구성해 미합중국에서 탈퇴를 선언합니다. 사실 북부와 남부는 건국 이래 노예제뿐 아니라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연방주의와 분권주의 등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을 빚어왔어요. 링컨의 당선은 오랜 갈등에 불을 붙인 셈이었어요.
1861년 4월 남부 연합군의 섬터 요새 공격으로 시작된 내전은 1865년 봄 애포머톡스 전투로 끝났어요. 종전 직전 링컨은 노예제를 폐지하고(수정헌법 13조) 해방된 노예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어요(수정헌법 14조). 내전 후 해방된 흑인 표심에 힘입어 북부는 정치권력을 독점했어요. 또 성장하는 북부의 자본가 계급은 남부 경제가 어려운 틈을 타 땅을 투기하고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막대한 이익을 누렸어요. 내전 패배로 남부는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부의 백인들, 특히 전쟁 후 '패배자'로 낙인찍혔던 퇴역 군인들 주도로 1866년 테네시주에서 KKK가 창설됐어요. KKK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원 또는 집단을 뜻하는 키클로스(kyklos)에 씨족·가족을 뜻하는 클랜(clan)을 조합한 'Ku Klux Klan'을 뜻해요. KKK를 비롯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은 내전 후 패배감과 열등감을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격으로 표출했어요. 그리고 내전 당시 남부군의 영웅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이나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연합 대통령의 동상·기념비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21세기에 다시 고개 드는 백인우월주의
남부 여러 주 의회는 일명 '짐 크로 법'이라 불리는 인종차별 법을 제정해 흑·백인 사이의 결혼은 물론 공공장소에서 흑인이 백인과 어울리는 것을 금지했어요. 짐 크로(까마귀)는 흑인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에요. KKK는 남부 각 주로 급속히 세력을 넓히고 흑인 및 흑인 해방에 동조하는 백인들까지도 구타하거나 집을 불태우는 등 테러 활동을 벌였어요. 1차 세계대전에 승리하고 애국적 보수주의가 전국을 휩쓸면서 KKK 회원 수는 한때 450만명을 넘어섭니다. 1925년에는 5만명 이상의 KKK 단원들이 워싱턴 중심가를 행진하며 위세를 부리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미국에는 인종의 평등과 자유, 진보의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았어요. 2차 세계대전 후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에서 흑백 차별을 금지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위헌으로 공식 규정하면서 KKK의 활동도 제약을 받았죠.
1960년대 들어 마틴 루서 킹으로 대표되는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미국 내에서 흑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차별 철폐를 규정한 시민권법이 의회를 통과했어요. 비폭력 저항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킹은 결국 남부 테네시주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이후 KKK를 비롯한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이 산발적으로 활동은 했지만 그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최근 극단적 자국 중심주의를 옹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자 옛날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부 극우 백인층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요.
▲ 미국 버지니아주(州) 샬러츠빌 해방공원에 세워진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앞에서 백인우월주의 단체 회원들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이 중 일부는 옛 남부연합기와 심지어 나치 상징물을 휘날리기도 했어요. 결국 시위가 폭력적으로 번져 1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다쳤어요. /AFP 연합뉴스
이번에 폭력 시위가 발생한 샬러츠빌은 3년 전 전미경제연구소(NBER) 조사에서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뽑혔어요.
또 버지니아는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1776년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삶과 자유에 대한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썼죠. 그런 곳에서 백인우월주의 극우단체들은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와 '지크 하일(승리 만세)'을 연상케 하는 '하일 트럼프' '하일 빅토리'를 외쳤어요. 과거 악명을 떨쳤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고 발버둥치는 듯합니다.
08.31 반짝이던 다이아몬드, 핏빛으로 물들다
[시에라리온 내전]
세계 3대 다이아 매장국이자 최빈국
1991년 내전 일으킨 '혁명연합전선'
주민 강제 노동시켜 얻은 보석 팔아 무기 사고 소년병 키워 참전시키기도
실상 공개 후 다이아몬드 반감 커져… '클린 운동' 펼쳤지만 한계 드러났죠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에 내린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현재까지 사상자 1000여 명과 이재민 수천 명이 발생했어요. 우리 정부는 지난 21일 시에라리온에 30만달러(약 3억4000만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어요. 시에라리온에는 3년 전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퍼져 수천 명이 사망하기도 했는데요. 가난한 나라여서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조치가 거의 없어 더욱 피해가 컸다고 해요. 아프리카에서도 최빈국에 속하는 이 나라에는 사실 자원이 풍부해요. 특히 다이아몬드는 세계 3대 매장량을 자랑할 만큼 많아요. 이런 엄청난 자원을 보유하고도 왜 가난한 걸까요?
◇풍부한 다이아몬드, 재앙이 되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여러 번의 쿠데타가 발생해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어요. 고위 관료들이 다이아몬드, 보크사이트, 철광석 등 값비싼 자원들을 독점하는 등 부정부패도 심각했어요. 이런 와중에 1991년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이 내전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죠. 다이아몬드 광산을 점령한 반군은 주민들에게 제대로 임금도 주지 않고 장시간 노동을 시켰어요. 그렇게 다이아몬드를 판 돈으로 세력을 키워 1999년 1월 프리타운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RUF는 교전 과정에서 정부 진영 주민들의 손목을 도끼로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어요. 그 손으로 현 정부에 투표했다는 것이 이유였죠. 손목이 잘린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다른 일도 할 수 없게 됐어요. 누군가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복수는 꿈도 꿀 수 없었고요. 소년병 징집도 일상화됐어요. RUF는 열 살을 갓 넘긴 아이들을 납치해 잔인한 전쟁영화를 보여주거나 마약을 먹였어요. 잡아온 포로의 손목을 자르게 하거나 죽이도록 명령하기도 했죠.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자기 마을을 공격해 부모와 형제, 이웃들을 죽였어요. 이후 돌아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은 반군의 전사로 성장해나갔죠. 죄 없는 아이들의 일상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모두 파괴됐어요
▲ 1990년대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소년병들이 기관총과 각종 무기를 들고 있어요. 반군인 ‘혁명연합전선’은 열 살 남짓한 소년들을 납치해 잔인한 전쟁영화를 보여주거나 마약을 먹여, 살상을 일삼는 소년병으로 만들었어요. /Getty Images 코리아
전문가들은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무기를 생산할 능력이 부족해 내전이 장기화하기 힘들다고 봤어요. 그런데 시에라리온을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의 내전들은 대부분 장기화했어요. 왜냐하면 이웃 나라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반군을 지원해줬기 때문이에요. 특히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지원으로 훗날 내전을 일으킬 인물들이 서로 교류하며 성장했어요. RUF를 조직한 포다이 상코와 라이베리아 독재자 찰스 테일러가 그랬어요. 그들은 리비아의 게릴라 훈련 캠프인 '타주라 군사학교'에서 함께 공부했어요. 테일러는 1989년 '라이베리아민족애국전선'을 조직해 무장 게릴라 활동을 벌였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1997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됐어요. 권좌에 오른 그는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를 받는 대가로 내전 기간 RUF에 무기를 지원해줬어요.
◇'클린 다이아몬드' 운동의 한계
▲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인부들이 진흙을 퍼내며 다이아몬드를 채굴하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국제사회가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유엔은 시에라리온의 반군에 무기를 팔지 못하도록 제재했지만 냉전 체제가 붕괴되며 쓸모없어진 동유럽 지역의 무기들이 라이베리아를 통해 RUF에 넘어갔어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유엔이 추가로 제재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후였죠.
당시 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80%가량을 독점했던 다국적 기업 드비어스는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의 저렴한 다이아몬드를 사줬어요. 분쟁 지역에서 판매된 자원이 전쟁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도 이익에 눈이 멀었던 것이죠. 이렇게 시에라리온 내전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람들과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연결돼 장기화했던 거예요.
시에라리온 내전은 1999년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됐어요. 그러나 기나긴 전쟁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어요. 10여 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20만명이 사망하고, 여성 25만명이 유린당했으며, 소년병 7000명이 양성됐고, 4000명이 사지가 절단됐어요. 그리고 인구 3분의 1인 20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해버렸죠. 2001년 영국의 국제 인권 단체 '글로벌 위트니스'가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시에라리온 내전의 실상을 폭로하자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어요. 이를 소재로 '로드 오브 워' '블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영화도 제작돼 다이아몬드 소비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죠.
위기에 처한 다이아몬드 다국적 기업들은 '클린 다이아몬드 운동'을 전개했어요. 그리고 2003년에 분쟁 지역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가 국제시장에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산지 추적 제도인 '킴벌리 프로세스'를 도입했어요. 킴벌리 프로세스에는 현재 한국을 비롯한 75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인권에 반하는 수단으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 거래를 규제하고 있어요.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킴벌리 프로세스의 실효성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가 나와요. 아직도 짐바브웨 같은 곳에서 광산 노동자들이 하루 500원도 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다이아몬드를 캐고 있기 때문이죠. 일부 인간의 욕망이 타인의 삶을 파괴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09.07 반환 20년 지났지만… '한 나라 두 체제' 끊임없는 마찰
아편전쟁 후 영국에 할양된 홍콩, 155년간 서구 자본주의와 문화 정착
1997년 中 반환 때 자치 보장했지만 3년 전 홍콩 행정장관 선출 과정서
중국 정부 노골적 개입 의지 드러내… 시민들 '우산혁명'으로 반발했어요
"웡치펑(조슈아 웡)을 석방하라!"
지난 8월 20일, 홍콩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조슈아 웡을 비롯한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 지도부 3명이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자 수많은 시민이 반발한 것이지요. '우산혁명'이란 2014년 9월 말 시작된 홍콩의 직선제 요구 시위인데, 중국 정부가 홍콩특별행정구 최고 지도자인 홍콩 행정장관 입후보자 자격을 친(親)중국계 후보추천위원회의 과반 지지를 얻은 인사 2~3명으로 제한하면서 촉발된 거예요. 홍콩 시민들은 행정장관 선출 방식을 직접선거로 바꿀 것을 주장했는데, 당시 당국의 최루탄 세례를 우산으로 막아내던 시위대 모습에서 '우산혁명'이란 이름이 붙었죠.
▲ 지난 2014년 12월 홍콩 ‘우산혁명’ 당시 반(反)중국 시위대가 최루탄을 막기 위해 우산을 들고 홍콩 정부청사 앞에 모여 있어요. 중국 영토지만 1997년까지 155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홍콩은 중국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어요. /Getty Images 코리아
이처럼 올해로 중국 반환 20주년을 맞은 홍콩은 아직까지 끊임없이 중국 정부와 마찰을 겪고 있어요. 최근 홍콩에 태풍 피해가 막심하자 중국 정부가 구호 차원에서 인민해방군을 파병하겠다고 했는데도 홍콩 시민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정도죠. 사실 홍콩은 1997년 중국 반환 후 '일국양제(一國兩制·1국가 2체제)' 약속에 따라 오는 2047년까지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은 중국이, 행정·입법·사법권은 홍콩이 갖는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어요. 그런데 대체 홍콩과 중국은 왜 이렇게 다른 체제로 갈라지게 된 걸까요?
◇아편 때문에… 중국, 홍콩을 잃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9세기, 중국 청나라 왕조는 안정과 번영을 자랑하던 이전과 달리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들의 부패로 백성의 원성이 높아졌고, 빈부 격차 같은 사회적 불균형도 커졌지요. 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민란도 속출했어요.
이 시기는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 세력들이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여러 나라를 경제적으로 침탈하고 있었어요.
특히 영국은 청나라의 차(茶), 도자기, 비단, 면직물 등을 자국에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이나 면화를 청나라에 수출해 이득을 보려 했죠. 하지만 영국에서 중국산 차 소비가 빠르게 늘면서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생각보다 큰 적자를 보게 됐고, 영국은 자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생산한 마약인 아편을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어요.
아편은 중국 하층민부터 군인, 고위 관리들 사이로 빠르게 확산했어요. 아편 때문에 중국의 정치, 군대가 마비됐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죠. 청나라 황제가 결국 아편 수입·판매 금지령을 내렸지만 아편을 몰래 사고파는 사람이 꾸준히 늘어 아편 구입의 대가로 지급되던 은(銀)도 나라 밖으로 점점 많이 유출됐어요. 결국 1838년 청나라 도광제는 전국의 아편을 몰수하는 강경책을 취합니다. 당시 황제의 명을 받은 관리 임칙서는 2만여 상자에 담긴 아편을 전부 불태워 없애버리기도 했어요.
영국 자본가들은 크게 반발했어요. 청나라가 자유무역과 사유재산을 침해했다며 영국 정부를 압박했고, 이에 영국 정부가 군대를 파견해 중국 광저우를 점령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아편전쟁', 제1차 중영(中英) 전쟁이죠.
◇'불편한 동거'는 현재 진행 중
영국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밀린 청나라는 1842년 영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난징조약'을 체결합니다. 광저우 등 5개 항구를 영국에 개방하고 600만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었지요. 바로 이때 중국 남동쪽에 있는 홍콩 섬이 영국에 귀속되게 됩니다.
영국은 난징조약 체결로 무역 적자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어요. 하지만 영국 상품의 수출이 생각보다 크게 늘지 않자 또다시 조약 개정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1856년 10월, 광저우에 정박해 있던 애로호(Arrow號)에 청나라 관리가 올라가 해적 혐의로 중국인 승무원을 체포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애로호 사건'이죠.
영국은 당시 애로호 선장이 영국인이고 선적(船籍)이 홍콩에 있었으므로 중국이 허락 없이 영국 소유의 배에 올라가 주권을 침해했다며 중국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제2차 중영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1860년 개항장 수를 16개로 늘리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제1차 베이징조약을 체결했어요. 이때 현재 홍콩의 주룽반도가 영국에 할양됐습니다.
이후 1898년 체결된 제2차 베이징조약에 따라 영국은 홍콩을 1898년 7월 1일부터 1997년 6월 30일까지 99년간 조차(租借·조약에 따라 타국의 영토를 유·무상으로 빌리는 행위)하기로 합니다.
90여 년이 흐른 1984년, 영국과 중국은 홍콩 반환협정을 체결하고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55년에 걸친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중국으로 반환됐어요.
그러나 15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영국식 법치제도와 시장경제 체제, 언어(영어) 등으로 인해 홍콩 시민들은 중국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고 있어요.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우산혁명'인 셈이고요. '홍콩은 홍콩 사람이 다스린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의 진정한 의미를 홍콩 시민들은 지금도 스스로 찾아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산혁명
2014년 9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이어진 홍콩의 직선제 요구 시위. 당시 중국 정부가 홍콩 행정장관 입후보자 자격을 친(親)중국계 후보추천위원회의 과반 지지를 얻은 인사들로 제한하면서 홍콩 시민들이 반발해 일으켰어요. 당국의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아낸 시위대의 행동에서 본떠 '우산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는 이름이 나왔지요.
09.14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 英 식민 지배가 낳은 비극
영국, 1885년 미얀마 분할통치 시작
다수 차지하던 버마족은 탄압하고 로힝야족 데려와 지배층으로 등용
종교·경제 갈등 생기며 적대감 커져
독립 후엔 미얀마의 '보복' 탄압 시작… 아웅산 수지 집권 후 더 악화됐어요
미얀마 라카인주(州)에서 벌어진 미얀마 정부군과 소수민족 로힝야족 간 유혈 충돌을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우려가 점점 깊어지고 있어요. 이번 유혈 충돌은 지난해 10월 미얀마 정부에 반대하는 로힝야족 반군(叛軍)이 미얀마 국경지대 초소를 습격하고, 지난달 25일 또다시 반군이 라카인주 경찰서 30곳을 공격하면서 불거진 건데요. 정부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현재까지 로힝야족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만명이 이웃 나라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고 해요. 반군이 다음 달 10일까지 일시 휴전(休戰)을 선언했지만 정부군은 이를 거부한 상태예요. 유엔(UN)은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은 인종 청소의 교과서적 사례"라며 13일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 예정이죠.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족은 왜 이런 유혈 충돌을 빚고 있는 걸까요?
◇영국이 뿌린 분쟁의 씨앗
미얀마는 대표적인 소승불교 국가로 미얀마 국민의 90%가 불교를 믿어요. 버마족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샨족, 카렌족, 라카인족 등 130개 넘는 소수민족들로 구성돼 있어요. 분쟁이 일어난 라카인 지역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라카인족의 이름을 딴 것으로, 예전에는 아라칸이란 이름으로 불렸어요.
라카인 지역은 17세기까지 인도와 포르투갈에 잇따라 점령을 당하다 18세기 후반 버마족이 세운 꼰바웅 왕조에 의해 미얀마 땅으로 편입됐어요.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의 결과, 1886년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합병됩니다. 라카인 지역은 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6년)에서 패배한 미얀마가 영국에 할양한 땅으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들어가게 돼요.
▲ 미얀마 라카인주의 로힝야족 난민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피란 가고 있어요. 미얀마 정부군과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무장 세력 간의 유혈 충돌로 수백명이 사망하자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어요. /연합뉴스
영국은 미얀마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divide and rule)'이란 걸 펼쳤어요. 분할통치 정책이란 피지배층의 민족 감정이나 종교·사회·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이용해 피지배 계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시켜 통일된 반대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 정책이에요. 영국은 미얀마가 수많은 소수민족들로 이뤄진 나라라는 점을 이용,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탄압하고 소수민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했죠. 소수민족에게 식민지 정부의 중간 지배층 역할을 맡겨 내부 갈등을 유도하고 통합된 반(反)영국 세력이 생겨나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1885년 영국은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의도적으로 이주시킵니다. 로힝야족은 원래 방글라데시 등 벵골만 인근에 살던 소수민족이었죠. 영국은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수탈한 뒤 로힝야족 사람들을 적극 농사에 활용하고 이들을 중간 지배 계층으로 등용하는 등 많은 혜택을 줬어요. 미얀마인으로선 로힝야족이 자기 일자리를 빼앗은 '이교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1942년 영국이 무장한 로힝야족을 시켜 2만5000여 명의 미얀마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얀마인과 로힝야족 간 뿌리 깊은 적대감이 싹트기 시작한 거죠.
◇핍박이 핍박을 낳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 정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2년 세워진 군부 정권은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을 제도화했죠. 학교에선 로힝야어로 수업을 할 수 없었고, 로힝야족은 결혼이나 이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또 불교 개종(改宗) 등을 조건으로 한 시민권법을 만들어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했죠. 로힝야족을 '무국적 불법 이민자'로 규정한 거예요.
로힝야족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한 탄압도 이어졌어요. 로힝야족 여성은 자녀를 2명 이상 출산하지 못하고 이를 어기면 징역형에 처하는 내용의 산아제한 정책이 대표적이에요. 이 때문에 셋째를 가진 로힝야족 여성들은 비위생적인 불법 낙태 시술을 받아야만 했어요. 최근엔 여성이 한 번 출산하면 3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고 불교도와 무슬림 간 결혼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했답니다.
핍박이 이어지자 로힝야족은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저항하고 있어요. 피란 행렬도 이어져 1970년대에는 약 2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25만명이 미얀마를 떠났죠. 2012년엔 로힝야족과 미얀마인 간 심각한 유혈 충돌이 발생해 로힝야족 200여 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미얀마를 떠나는 비상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이제 미얀마-로힝야족 갈등은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됐어요. 하지만 아직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을 당장 중단할 생각이 없어 보여요. 미얀마 정부의 실권자인 아웅산 수지(72)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이 최근 "우리 정부는 라카인 지역 주민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미얀마 독립운동가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 민주화에 앞장서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이에요. 이 때문에 일부에선 "아웅산 수지가 어렵게 잡은 정권을 놓칠까봐 로힝야족 사태를 방관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해요.
미얀마-로힝야족 유혈사태 이면엔 이처럼 19세기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 정책, 20세기 미얀마 군부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아픔이 있어요.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핍박받던 미얀마인, 그런 미얀마인에게 탄압받는 로힝야족 모두 역사의 피해자들일지 몰라요.
09.21 500년 전 혼인이 이룬 통합… 언어·문화 달라 갈등 쌓여
[카탈루냐 독립운동]
15세기 왕가 혼인으로 스페인 통일
카탈루냐, 고유 언어·제도 지켰지만 1714년 자치권 빼앗기고 불만 쌓여
내전 등 거치며 자치정부 다시 찾죠
GDP 20% 차지… 독립 욕구 더 커져… 중앙정부 "경제적 타격" 반대해요
지난 11일(현지 시각)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주장하는 카탈루냐주(州) 주민들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어요. 카탈루냐주는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가운데 하나로, 스페인 최대 산업도시인 바르셀로나가 있는 지역이기도 해요. 카탈루냐주 자치정부는 다음 달 1일 분리 독립을 위한 주민 투표를 시행하고 주민 과반수가 독립에 찬성할 경우 48시간 내에 독립을 선언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에 대해 스페인 중앙정부는 "법적·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투표를 막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스페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결혼으로 시작된 통일, 그러나…
15세기 중반 지금의 스페인은 크게 세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이었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로마 가톨릭 국가였지만 그라나다 왕국은 이슬람을 믿었어요.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은 모두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했어요. 그러던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가 결혼하면서 '통일 스페인'의 기초가 만들어집니다. 1479년 페르난도 왕자가 아라곤 왕(페르난도 2세)으로 즉위하면서 두 왕국은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이 되죠. 페르난도 2세 ·이사벨 1세 부부는 1492년 무슬림 국가였던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로마 가톨릭 왕국으로 통일합니다. 이것을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Reconquista)'의 완성이라고 불러요.
▲ 내달 1일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분리 독립 주민투표를 앞두고 11일 바르셀로나에서 시민들이 카탈루냐 독립기 ‘에스텔라다’를 흔들며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연합뉴스
1516년 페르난도·이사벨의 손자 카를로스 1세가 첫 통일 스페인 국왕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정중앙에 있는 카스티야의 마드리드가 새 왕국의 정치적 중심지로 떠올랐고, 상대적으로 반도 변방에 위치한 아라곤의 카탈루냐 지역은 소외돼갔죠. 여기에 16세기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대서양과 접하고 있던 카스티야 지역 사람들이 신대륙 무역에서 오는 막강한 부(富)를 독점하기 시작했어요. 반면 아라곤 시절부터 오랫동안 독자적인 의회·법률·언어를 가지고 있던 카탈루냐 사람들은 신대륙 건설로 인한 과도한 세금까지 떠안으면서도 아무런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해 불만이 커져갔죠.
1701~1714년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스페인과 카탈루냐 간 갈등에 불을 지핍니다. 1700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아들 없이 죽자, 사돈 가문인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주 백작(펠리페 5세)이 왕 자리를 차지했어요.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영국·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어 스페인·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왕위 계승 전쟁은 1714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스페인과 프랑스를 결코 합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끝이 납니다. 오스트리아가 카탈루냐에 주둔시킨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카탈루냐는 스페인에 완전히 함락되죠.
◇산업의 중심지로 우뚝 선 카탈루냐
펠리페 5세는 13년에 걸친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며 카탈루냐 문제에 아주 예민해졌답니다. 그래서 카탈루냐 문제를 뿌리뽑기 위해 칙령을 선포하고 마드리드를 수도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합니다. 카탈루냐주 자치정부를 해체해 중앙정부에 귀속시키고 바르셀로나 의회 요인들을 전부 마드리드 인사들로 바꾸죠.
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에 카스티야 언어와 관습을 강요했고, 기존 토착 유지들의 재산도 몰수해버렸어요. 여기에 전쟁 책임 배상금까지 떠안으면서 카탈루냐는 재정난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18~19세기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면서 전세가 뒤바뀌게 됩니다. 바르셀로나가 면직 공업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며 스페인 산업의 중심지로 우뚝 선 거죠. 1931년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이 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카탈루냐도 잠시 자치권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때 카탈루냐 주정부에서 카탈루냐 공화국을 정식 선포하고 헌법을 제정하려다 중앙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기도 했죠.
그러던 중 파시스트(전체주의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벌어집니다. 프랑코 군대는 1939년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카탈루냐의 자치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이때부터 공공장소에서 카탈루냐어 사용이 금지되고 정치·사회·군사 통제권까지 전부 박탈됩니다. 1975년 프랑코 정권이 붕괴하면서 카탈루냐주 자치정부가 복원됐지만, 현재 카탈루냐 주민들은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분리 독립을 원하고 있는 상태랍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스페인 총생산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카탈루냐 지역이 독립하면 스페인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 분리 독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인 셈이죠. 카탈루냐의 숙원은 이뤄질 수 있을까요? 전 세계인의 눈과 귀는 이제 엘 클라시코(FC바르셀로나와 FC레알마드리드 간 축구 경기)처럼 스페인과 카탈루냐에 집중되고 있답니다.
☞유럽 내 분리 독립 운동
유럽에는 스페인 카탈루냐처럼 분리 독립을 원하는 지역이 많아요. 2014년 주민투표가 부결된 영국 스코틀랜드를 비롯해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스페인 북부 바스크,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덴마크 그린란드 등이 경제·문화적인 이유로 중앙정부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어요.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이 실제 이뤄질 경우 독립을 원하는 이들의 움직임도 거세질 것으로 보여요.
09.29 '세계 최대 유랑 민족' 수천년 중동 셋방살이 끝날까
[쿠르드족의 독립]
중동 곳곳 흩어져 살아온 쿠르드족, 14년 전 이라크에 자치정부 세웠죠
최근 완전 분리·독립 묻는 주민투표… 주변국, 정세 급변 우려로 반대해요
여러분은 '세계 최대 유랑(流浪·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님) 민족'이 누군지 알고 있나요? 바로 쿠르드족이에요. 쿠르드족은 인구가 무려 3500만명에 이르지만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하고 터키·이란·이라크 등 중동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아왔어요. 그래서 '중동의 집시(유럽의 대표적인 유랑 민족)'라고도 불린답니다.
그런 쿠르드족이 지난 25일(현지 시각) 이라크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어요. 쿠르드족은 2003년 이라크 북부 지역에 쿠르드자치정부(KRG)를 세웠는데, 이제는 아예 이라크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이라크는 물론 미국·이란 등 많은 나라의 반대 속에 치러진 이번 투표의 참가율은 78%로 독립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으로 예상된답니다.
◇침략으로 얼룩진 쿠르드 민족사
쿠르드족은 터키 동남부와 아르메니아 남부, 이란 고원의 중앙부, 이라크 북부 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산악지대에 거주해 온 유목 민족(가축을 키우며 이동 생활을 하는 민족)이에요. 이 지역을 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쿠르디스탄'이라 불러요. 평균 해발고도 3000m인 이 고원지대에서 쿠르드족은 약 4000년 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추정돼요. 쿠르드족은 이란어파에 속하는 독자적인 언어인 쿠르드어를 사용하고, 고유의 생활 풍습도 가지고 있답니다.
기원전 2200년쯤 이 지역에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영향을 받은 도시국가 쿠틸 등이 세워져요. 쿠르드족이 세운 나라들이죠. 기원전 8세기쯤엔 쿠르드족이 메데(Medes) 왕국을 세우는데 성경에 나오는 '메데인(용감한 전사라는 뜻)'이 바로 쿠르드족을 가리킨답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아디아베네 공국, 폰투스 공국 등 여러 쿠르드 공국(왕이 아닌 귀족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이 여기저기 생깁니다.
▲ 지난 17일 레바논 베이루트 도심에서 시위대가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KRG)의 분리·독립 투표를 지지하는 집회를 갖고 쿠르드족 깃발을 흔들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이후 쿠르드 지역은 고대 이란 왕국인 파르티아 왕국,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잇달아 받습니다. 피지배(지배를 받음)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7세기 이후부터 우마이야·아바스 왕조 같은 이슬람 왕국의 침략을 받으며 쿠르드족은 아랍인이 아니면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첫 번째 이민족이 돼요. 16세기부터는 오스만튀르크제국(오늘날 주로 터키)의 일부로 전락합니다. 17세기 이란 사파비 왕조가 쿠르드 지역 일부를 차지하면서 쿠르드족은 오스만·사파비 왕국 두 나라에 나뉘어 살게 되죠.
20세기 초 쿠르드족에 첫 번째 독립의 기회가 옵니다. 1920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이 전쟁에서 진 오스만튀르크제국과 '세브르 조약'을 맺은 거예요. 오스만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시리아·이라크·쿠르디스탄 등을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오스만제국을 해체하라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민족주의자인 케말 파샤가 이에 반발해 터키공화국을 수립하고 연합군과 새 조약을 체결하면서 세브르 조약은 무효가 됩니다. 쿠르디스탄 독립의 꿈은 좌절됐고, 쿠르드 지역은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아르메니아 등으로 찢어지게 되죠.
◇자치정부 세웠지만… 먼 독립의 길
현재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예요. 특히 동남부 지역에 전체 쿠르드 인구의 40% 정도인 약 1500만명이 살고 있죠.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을 '산악 터키인'으로 부르며 쿠르드어 사용과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등 탄압을 해왔어요.
이라크에는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쿠르드족 550만명이 살고 있어요. 지난 수십년간 쿠르드족은 이라크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여 왔죠. 이라크 정부의 탄압도 지속돼 1980년대에는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1990년 미국과 이라크 간 전쟁인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쿠르드인들에게 다시 독립의 희망이 생겨요.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 지역을 미군이 주권을 가진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한 거죠. 쿠르드족을 이라크군으로부터 보호한 거예요.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자 쿠르드족은 자신들만의 자치정부(KRG)를 수립합니다. 이후 자치정부 대선, 총선 등을 치르며 독립을 향한 준비를 해나가죠.
쿠르드족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족을 모아 하나의 독립된 나라 '쿠르디스탄'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이번 주민투표는 그 열망의 상징이죠. 그러나 실제 독립국가 수립이 가능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너무 오랜 세월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민족적 동질성이 약해져 있고,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도 없기 때문이에요.
이라크는 쿠르드 자치정부 내 도시인 키르쿠크에 이라크 전체 석유 매장량의 30~40%를 차지하는 유전(油田·석유가 있는 지역)이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을 반대하고 있고, 터키 등 이웃 나라들도 자기네 나라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까지 독립하겠다고 나설까 봐 반대하고 있죠. 미국 역시 중동 정세가 급변할까 봐 우려하고 있어요. 이번 주민투표로 수천년간 남의 나라에서 셋방살이를 해온 쿠르드족은 과연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까요?
☞나라 없는 유랑 민족
‘집시’로 불리는 로마족은 대표적인 유랑 민족이에요. 북부 인도에서 살다 중세시대를 거치며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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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대 이스라엘 왕국에서 살다 기원전 8세기 무렵 나라가 멸망하면서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죠. 이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다시 세웁니다. 오랜 기간 러시아 등 강대국들 침략에 시달리며 흩어져 살던 아르메니아인들도 유랑 민족 중 하나였답니다.
10.12 이슬람 최초의 쿠데타는 여성이 주도했어
[이슬람 여성 인권]
7세기 무함마드, 女 베일 착용 요구… 성차별 관습 천년 넘게 이어졌지만
사우디 "여성운전 허용" 발표하는 등 최근 들어 여성 인권 개선되고 있죠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동안 사실상 금지했던 여성의 자동차 운전을 허용하기로 했어요.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최근 칙령을 발표하고 내년 6월부터 여성들에게도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발급하도록 한 거예요.
사우디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자동차 운전을 하지 못하는 나라였어요. 여성 운전을 금지하는 법은 없지만, 여성에게 운전면허증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여성 운전을 막아왔죠. 이는 남성과 여성을 격리해 궁극적으로는 여성의 정치·사회 진출을 제한하려는 성(性)차별적 이슬람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에서는 어떻게 여성 활동을 제약하게 된 걸까요?
◇'여장부'의 남편이던 무함마드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압둘 와하브 무함마드(570~632)에게는 여러 배우자가 있었어요. 그중 첫째인 하디자는 부유한 상인의 딸로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40대 과부(寡婦·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 사업가였답니다. 하디자는 자신의 종업원이었던 스물다섯 살 청년 무함마드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뒷조사까지 한 다음 먼저 청혼해서 결혼한 과감한 여인으로 평가받습니다.
무함마드는 아내의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아무런 생계 걱정 없이 히라산(山) 동굴에 들어가 명상 생활을 시작합니다. 무함마드는 오랜 수련 끝에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됐다고 해요. 무함마드는 이 계시를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기 시작했고,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굳게 믿게 됩니다. 이런 무함마드의 말을 적은 게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이죠.
▲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자동차 운전을 금지해왔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내년부터 여성의 자동차 운전을 허용하기로 했어요. 사진은 2014년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한 고속도로에서 여성의 운전할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 운동가들이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이에요. /AP 연합뉴스
무함마드는 약 20년간 하디자와 살면서 둘째 아내를 들이지 않았어요. 하디자가 죽은 후에야 새로운 아내들과 가정을 꾸렸죠. 이렇듯 초기 이슬람 사회는 우리가 지금 아는 것처럼 가부장적 관습이 깊게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점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무슬림(이슬람교 신자) 여성들이 자기 얼굴과 신체를 가리는 베일을 쓰기 시작한 거죠. 사실 베일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볼 수 있었던 풍습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가 베일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런데 이를 여성의 정조를 상징하는 도구로 활용한 건 이슬람 시대부터랍니다.
628년 무함마드는 아내들에게 모두 베일을 쓰라고 요구합니다. 베일을 착용함으로써 다른 남성들을 향한 신체 노출을 최소화하고, 그 여성이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또 는 어느 집안 여성인지 보여줘 남성들이 함부로 그 여성을 대할 수 없도록 한 것이죠. 또 무함마드 스스로 여러 배우자를 뒀듯, 한 남성이 아내를 많게는 넷을 둘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코란'에 명시합니다.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한 남성이 아내를 동시에 둘 이상 갖는 혼인 형태)가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적 결혼 형태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에요.
◇'낙타 전투'의 주인공은 여성
재미있는 건 무함마드의 셋째 아내였던 아이샤가 아주 주체적인 성격의 여장부였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샤는 평소 남편 무함마드와 수많은 전투에 동행했고, 심지어 낙타를 하도 험하게 몰아 무함마드에게 자주 핀잔을 들었다고 전해져요. 나아가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난 다음인 656년 벌어진 '낙타 전투(이슬람 최고 지도자 알리와 그 반대 세력인 아이샤 간 전쟁)'에도 직접 참여해 이슬람 최초의 '정변(政變·혁명이나 쿠데타 등으로 발생한 정치적 큰 변화)'을 주도하기도 했답니다. '낙타 전투'라는 이름 역시 아이샤가 낙타를 몰고 전장에 나가 군사들을 독려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에요.
하지만 반(反)알리 세력이 낙타 전투에서 패배하자 남자들은 아이샤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아이샤의 정치적 무능과 미숙한 행동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주장이었죠. 이 때문에 무슬림 사이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확산됩니다. 실제 낙타 전투 이후 무슬림 여성의 정치적 참여나 사회적 활동이 엄격히 제한되죠.
물론 이런 몇 가지 사례가 이슬람 사회에 성차별적 관습이 뿌리내리게 된 배경을 모두 설명할 순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당시 이슬람 정치·경제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가부장적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랍니다. 여성을 정치·사회에서 격리하는 관습은 거대 이슬람 제국이던 오스만 제국 말기인 20세기 초까지 이어지죠.
약 1200년 넘게 이어져 온 가부장적 문화에 균열을 낸 건 터키의 국부(國父·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1881~1938)이랍니다. 무스타파 케말은 20세기 초 기울어가던 오스만 제국의 개혁을 이끌어 지금의 터키 공화국을 출범시킨 터키 초대 대통령이에요. 그는 1935년 여성의 베일 착용을 금지하고 여성에게 불리했던 이혼법과 상속법 등을 개정해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일부 전통주의자는 이런 개혁이 '서구 문화=진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추진됐다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착용한 건 이슬람 공동체 안에서 그 나름대로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는 주장이죠. 그래서 여전히 터키·유럽 등에서는 이슬람식 베일을 고수하는 무슬림 여학생과 베일을 쓰지 못하게 하는 정부 간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답니다.
이번에 사우디 정부가 여성의 운전을 허용한 것은 모하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개혁안에 따른 것입니다. 이 개혁안은 탈(脫)석유 시대를 대비해 여성의 사회 활동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변화하는 시대에 사우디도 여성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슬람 여성들이 착용하는 베일
부르카(Burka)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리고 눈 부위도 망사로 덮는 복장이에요. 니캅(Niqab)은 눈은 내놓고 나머지 신체를 가리는 옷이고, 차도르(Chador)는 얼굴은 드러내되 나머지를 가리는 옷이에요. 히잡(Hijab)은 가장 대중적인 이슬람 전통 의상으로 머리카락과 목 등을 감싸는 일종의 헤어 스카프랍니다.
이정하 천안 계광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10.21 중세유럽, 근거 없는 죄 씌워 처단… 수십만 명 희생당해
[미녀 사냥]
가톨릭 외 '이단' 심판하던 종교재판… 수백년 동안 무차별 탄압으로 변질
무고한 여성, 마녀로 몰아 사형했죠
덮어놓고 비난하는 '마녀사냥' 유래
얼마 전 "아이가 혼자 내렸으니 세워 달라"고 호소하는 엄마의 말을 버스 운전기사가 무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는 목격담이 인터넷상에 퍼져 논란이 일었어요. 조사 결과 버스 운전기사는 원칙대로 행동한 것이고 욕도 하지 않은 걸로 밝혀졌는데요. 이미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은 버스 운전기사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며칠간 운전대도 잡지 못했다고 해요. 사람들은 "버스 운전기사에게 덮어놓고 '마녀사냥'을 했다"고 말했죠.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별다른 근거 없이 특정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무차별한 공격을 하는 현상들이 적지 않아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해요.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 잘잘못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덮어놓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늘은 실제 역사 속에서 '마녀사냥'이 어떻게 일어났었는지 알아볼게요.
◇이단 심판 위해 만든 종교재판
11~12세기 유럽에서는 이단(異端), 즉 정통학설에서 벗어나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종교 집단을 심판하기 위한 '종교재판'이 만들어졌어요. 당시 이단은 로마 가톨릭 이외의 다른 기독교 분파였죠. 초기에는 이단을 심판하는 절차가 까다로워 종교재판이 잘 열리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13세기 무렵 교황이 직접 종교재판관을 임명하고 증거 없이 의심만으로 이단자를 고발해 처벌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졌어요.
▲ 영국 화가 윌리엄 포웰 프리스(William Powell Frith)의 1848년 작품‘마녀 재판(The Witch Trial)’. /위키피디아
십자군전쟁이 실패하고 가톨릭 교회의 부패가 심해지자 14세기 유럽에선 교회의 권위가 점점 떨어집니다. 이에 따라 기존 가톨릭 교리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러자 교회는 종교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이단을 탄압하는 종교재판을 활용했어요. 재판관들은 이단을 뿌리 뽑겠다며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몰아 화형하는 등 과격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일부 정치 세력은 종교재판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기도 했어요.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십자군전쟁 때 많은 공을 세운 템플 기사단(예루살렘·팔레스타인 등에서 활약한 기사들의 모임)을 이단으로 몰아 종교재판에 세우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했죠.
사실 마녀라 불리는 사람들은 중세 이전부터 있었어요. 대부분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거나 여성의 출산 등을 도와주는 '주술사' 같은 존재였죠. 그러나 출산 중 태아와 산모가 죽거나 치료하던 환자가 죽는 일이 생기면 불길한 존재로 낙인 찍혀 손가락질 받기도 했어요.
15세기 후반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마녀가 실제 존재하며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선언했어요. 그즈음 신학자이자 종교재판관이었던 하인리히 크라머와 야콥 슈프랭거가 마녀에 대한 학설을 총망라해 쓴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책도 출간했죠. 마녀사냥의 필요성과 방법을 소개한 이 책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전 유럽으로 확산했고, 18세기까지 무려 29판이나 찍으면서 큰 인기를 얻었어요.
이후 유럽인들은 마녀가 실제로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마녀를 색출해 죽이는 것이 그들의 신앙과 가족, 마을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죠. 그 결과 16~17세기 유럽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답니다. 종교재판은 마녀 재판과 동일시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마녀사냥도 이때 집중적으로 벌어졌어요.
◇광기로 물든 마녀 재판
유럽의 광기 어린 마녀사냥 뒤에는 비(非)이성적인 사법 절차가 있었어요. '누가 마녀라더라'하는 소문만 돌아도 체포가 가능했죠. 재판관은 어떤 지역에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교회 십자가가 망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어요. 마녀로 지목받은 사람이 심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마녀라고 주장하면, 그 사람도 마녀로 체포했고, 마녀의 자식들은 당연히 마녀로 생각했어요.
마녀로 의심받는 사람이 진짜 마녀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방법도 비합리적이었어요. 모진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무거운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방법을 가장 많이 썼지요. 물 위로 떠오르면 사람이 아닌 마녀인 것이 맞으니 화형에 처했고, 물에 빠져 죽으면 마녀가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식이었어요. 어떻게 되든 의심받는 사람은 죽는 거예요.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신분이 낮은 여성이었지만, 마녀사냥이 확산되면서 남성들도 마법사로 몰려 죽었어요. 그 중의 한명이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작은 도시인 밤베르크시 시장을 지냈던 유니우스예요. 유니우스는 1628년 마법을 썼다는 혐의로 고소당해 재판정에 섰어요. 여러 사람이 그가 마법을 썼다고 증언했지만 유니우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죠. 재판관들은 유니우스의 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은 징표를 찾는다면서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결국 유니우스는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시인합니다.
"돈 문제로 고민하다가 악마의 꾐에 빠졌습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악마의 일원으로 '크릭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악마 중 한 명과 연애를 했고 그녀를 만날 때는 검은 개로 변신을 했습니다."
이처럼 유니우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고, 재판관들은 이 말에 크게 만족하며 유니우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답니다. 결국 그는 화형에 처해졌어요.
18세기 후반 이성주의가 확산하고 근대 사법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마녀 재판은 점차 사라졌어요. 그러나 분명한 건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중세가 아니라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가 꽃피우기 시작했던 16~17세기였다는 사실이에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우리 안의 비(非)이성을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 마녀사냥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으니까요.
[잔 다르크와 마녀사냥]
백년전쟁은 1337~1453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을 말해요. 영국에 유리했던 전쟁 분위기는 프랑스의 10대 소녀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 바뀌어요. 잔 다르크는 "프랑스 왕을 도우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전쟁에 뛰어들어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1431년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포로로 잡고 '마법을 썼다'며 그를 마녀로 몰아 화형했답니다.
10.26 스페인 식민시절 행정구역이 현재 남미 국경선으로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후 교황 중재로 스페인,브라질 제외 남미 지역 지배
영토 경계 불분명해 분쟁 이어지다 전쟁 통해 지금의죠 국경선 정해졌어요
최근 남미 국가 중 하나인 볼리비아가 "칠레가 국경에 묻어놓은 지뢰(땅속에 묻어 압력 등 자극을 받으면 폭발하는 무기)를 다 제거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어요. 칠레는 1970년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페루·볼리비아와 영토 분쟁을 겪으며 1000㎞에 달하는 일부 국경 지대에 지뢰를 묻은 것으로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는데요. 1997년 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오타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칠레 역시 지금까지 묻어놨던 모든 지뢰를 제거하기로 약속했지요.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뢰를 전부 없애지 않아 마을을 지나던 사람이나 트럭이 지뢰를 밟고 폭발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답니다. 이처럼 남미 국가 상당수가 아직도 국경을 둘러싸고 영토 분쟁을 겪고 있어요. 왜 그런 걸까요?
◇남미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제국주의 손길이 뻗치기 전까지 남미 원주민들은 오랜 세월 다양한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어요. 이때는 나라와 나라 간에 근대적인 의미의 '국경(national border)'이라 할 만한 명확한 경계선이 없던 때였지요. 그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 '경계'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1492년, 스페인 여왕의 원조를 받고 항해에 나선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해요.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 지역을 중심으로 신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두 나라가 남미 지역을 포함한 전 세계 식민지 건설을 둘러싸고 분쟁을 거듭하자, 1493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중재에 나섰어요.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을 체결한 거예요. 아프리카 서쪽 카보베데르 섬으로부터 약 1500㎞ 떨어진 지점에 일직선을 긋고, 기준선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고 기준선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하는 걸로 결론을 낸 거예요. 기준선 동쪽은 현재 브라질에 해당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브라질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제외한 나머지 남미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는 모양새가 됐답니다. 이런 영향으로 지금도 남미 국가 중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스페인어를 쓰고 있어요
▲ 1823년 에콰도르 이바라 전투에서 시몬 볼리바르가 스페인군에 대항해 싸우는 모습. 시몬 볼리바르는 콜롬비아·베네수엘라·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 등 남미 5개 국가를 스페인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킨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얼마 후 포르투갈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스페인 왕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넘겨받습니다. 스페인 땅과 포르투갈 땅을 구분해놨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유명무실해진 거지요. 또 뒤늦게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겠다고 달려들면서 중남미 전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오랜 식민 통치를 받던 남미에서 독립의 물결이 인 건 19세기 들어서부터입니다. 남미 독립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계층이 바로 '크리오요(Criollo)'였는데요. '크리오요'는 신대륙에서 태어난 유럽 백인을 뜻하는 말이랍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계층으로 유럽에 유학을 많이 다녀왔고, 19세기 유럽에 번진 자유주의·계몽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그 결과 자신의 뿌리가 있는 식민지 본국에 반기(反旗)를 들고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식민지 주민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한 거랍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시몬 볼리바르(1783~1830) 입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현재 베네수엘라에 속한 지역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크리오요였어요. 대지주의 아들로 풍족하게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장 자크 루소의 자유·정의·평등 사상을 접하고 인간의 기본권에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볼리바르는 1810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첫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처음엔 실패를 겪었지만, 영국군 등 지원에 힘입어 1819년 누에바그라나다(현재 콜롬비아) 독립을 쟁취하고 1821년 카라카스(현재 베네수엘라)와 키토(현재 에콰도르)를 잇따라 해방시켰답니다.
볼리바르는 지금까지 남미의 '해방자'라고 불려요. 그가 해방시킨 알토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나라 이름을 '볼리비아'라고 지었지요.
◇뺏고 뺏기는 영토 분쟁
또 다른 남미 독립의 영웅은 호세 데 산 마르틴(1778~1850)이에요. 역시 '크리오요' 출신이었답니다. 마르틴은 라플라타(현재 아르헨티나)와 산티아고(현재 칠레)를 잇따라 독립시켰고,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 볼리바르와 손잡고 에콰도르와 페루를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시켰답니다. 이렇게 남미 식민지 대부분이 1810년부터 1825년 사이에 독립합니다.
그런데 독립 당시 만들어진 국경은 현재 남미 국경과 약간 다르답니다. 스페인이 식민지 시절 만들었던 행정단위가 독립과 함께 '국가'로 변했기 때문에 영토 경계가 애매한 지역이 많았어요. 특히 남미 내륙 지역처럼 인구가 희박한 경우엔 식민지 시절에도 행정단위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훗날 영토 분쟁의 씨앗이 되었지요.
독립국가들이 국경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남미는 수차례 전쟁에 휩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에 벌어졌던 '남미 태평양 전쟁(1879~1882)'이에요. 이 전쟁의 결과로 칠레는 광물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 아타카마 사막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영토를 길게 확장한 반면, 볼리비아는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빼앗겨 완전히 내륙에 갇힌 국가가 되어 버렸어요.
1864~1870년에는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가 동맹을 맺고 파라과이와 전쟁을 벌여 파라나강 상류를 빼앗아오기도 했고(파라과이 전쟁), 1995년에는 페루와 에콰도르가 천연자원이 풍부한 아마존강 밀림 지역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둘러싸고 '세네파 전쟁'을 치르기도 했답니다. 갈등은 지금까지 이어져 지난 7월 에콰도르 정부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페루 정부와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높이 4m짜리 국경 장벽을 쌓아 양측간 긴장이 조성됐어요.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미국처럼 하나의 연방국가로 성장하길 소망했다고 해요. 하지만 현재 남미를 '한 국가'라는 틀에 묶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여요. 식민지 시대가 낳은 갈등의 씨앗이 남미를 더 이상의 분쟁으로 몰아넣지 않기를 바랍니다.
11.01.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중국에 시장경제 도입했죠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
건국 이끈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 주도했죠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 추진하고 차기 후계자 지명 전통 만들었어요
중국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집권 2기'의 문을 열었어요. 최근 폐막한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당헌(정당의 기본 방향)에 자신의 이름을 달아 '시진핑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넣은 거에요. 많은 언론이 "시진핑이 마오쩌둥만큼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는 분석을 내놨답니다.
오늘은 마오쩌둥에서부터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이끌어온 최고 지도자들 이야기를 해볼게요.
◇두 얼굴의 마오쩌둥
▲ 마오쩌둥
중국 최초의 최고 지도자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에요. 그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공산주의 독재자'라는 두 얼굴을 가진 혁명가랍니다. 중국 후난성의 한 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매혹돼 중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어요.
그러던 중 공산당이 장제스(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의 국민당 군대에 궤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1년여간 무려 1만2500㎞를 이동하는 '대장정'에 올랐지요. 마오쩌둥과 당원들은 하루 40㎞ 이상 행군해 국민당의 추격을 따돌렸답니다. 이를 통해 공산당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은 1945년 국민당과 치열한 내전을 벌여 승리합니다. 그는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중국의 최고 권좌인 '주석'에 올랐어요.
마오쩌둥은 중국을 산업화한 강대국으로 발전시키겠다며 1958년 '대약진 운동'을 펼쳤어요. 하지만 노동 착취와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으며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납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주석에서 물러났지요.
제2대 주석으로 공산당 내 서열 2위였던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가 오릅니다. 류사오치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능력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인민이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마오쩌둥과 반대되는 사상이었지요. 마오쩌둥은 1966년 류사오치 등을 향해 '농민을 착취하고 자본주의를 끌어들이고 있다'며 공격했답니다. 많은 학생과 청년층이 마오쩌둥 주장에 동조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1966~1976)'이 벌어졌지요.
'문화대혁명'은 지주·자본가 계급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극단적 공산주의 운동이었어요. 마오쩌둥은 이를 통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몰아냈지요. 그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다니며 중국 고유 전통을 부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반(反)공산주의 세력으로 몰아 제거했어요. 이 과정에서 류사오치도 숙청당한 뒤 외딴 곳에서 홀로 죽었지요. 그러나 류사오치의 생각은 이후 중국을 이끌어 나가는 실용주의 사상의 뿌리가 됐답니다.
◇'시장경제 사회주의' 이끈 지도자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이 권력을 장악했어요. 덩샤오핑은 폐쇄적 공산 국가였던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끈 설계자랍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를 따르는 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받고 농기구 만드는 공장으로 쫓겨났던 그는 최고 실권자가 된 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어요.
덩샤오핑이 남긴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이 바로 '흑묘백묘(黑猫白猫)'예요. 직접 미국·일본 등 강대국을 방문해 자본주의를 살펴본 그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중국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다"고 주장했지요.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따르는 독특한 나라가 됩니다. 덩샤오핑은 광둥성 등 네 지역을 경제 특구로 지정하고 상하이·광저우 등 열네 도시를 외국에 전면 개방했어요. 서구 자본이 본격 유입되면서 중국 경제는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빈부 격차가 커지고 지도층의 부패 사건이 잇따르자,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1989년 6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어요.
이 집회는 공산당 총서기였던 호요방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위에서 출발했지만, 사실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오랜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죠.
시위는 지방 도시까지 번졌고, 덩샤오핑은 군대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했지요.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오래도록 많은 비판을 받았답니다.
▲ 최근 열린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최고 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이 당대회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많은 중국인이 덩샤오핑을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이끈 위인'으로 평가해요.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1997년 공산당 당헌에 명기됐지요. 또 그는 다음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차차기 지도자까지 미리 정해 권력 구도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전통도 만들었답니다.
덩샤오핑 뒤를 이어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은 장쩌민(江澤民·91)이에요. 1926년 장쑤성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기 기술자, 식품 공장 총책임자 등으로 일한 전문가였어요. 옛 소련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만주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세운 사업가이기도 했답니다.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 시기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부르주아'로 몰려 농장으로 쫓겨나기도 했지요.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이어 나갔어요. 중국은 연평균 9.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했지요. 장쩌민은 국가주석 임기를 10년으로 제도화하고 집권 2기 당대회에서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권력 승계 시스템을 안착시켰답니다.
이후 중국 최고 지도자는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어 시진핑 현 주석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시진핑은 집권 2기를 알리는 이번 당대회에서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아 논란이 됐답니다. 후계자 지명을 천천히 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궁극적으로 10년 이상 '장기 집권'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요. 시진핑 이후 중국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요?
11.09 구텐베르크 '인쇄술', 500년 전 종교개혁에 큰 역할 했죠
[인쇄술의 발명]
인류 4대 발명으로 꼽히는 '인쇄술', 우리나라에 현존 最古 인쇄물 있죠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기 발명… 중세서 근대로 가는 계기 됐답니다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마르틴 루터)
올해는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예요. 1517년 10월 31일,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Luther·1483~1546)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됐어요.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때마침 발달하던 인쇄술이 성경책 보급에 날개를 달아줬지요.
이처럼 인쇄술은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식을 얻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됐지요. 오늘은 화약, 나침반, 종이와 함께 인류 4대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인쇄술에 대해 알아볼게요.
◇동양에서 출발한 인쇄술
인쇄술이란 일정한 판면(版面·글자 면)에 잉크를 묻힌 뒤 종이 등의 재료에 찍어 문자나 그림을 반복적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말해요. 인쇄술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글자를 베껴 쓰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지요.
역사적으로 인쇄술은 크게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로 나눌 수 있는데요. 목판 인쇄술은 나무판에 글자를 음각(오목하게 파는 것)이나 양각(볼록하게 깎는 것)으로 새긴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기술이고, 활판 인쇄술은 활자(인쇄를 위해 만든 글자)를 하나하나 따로 만든 뒤 그 활자들을 조합해 문서를 찍어내는 기술이지요.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은 모두 동양에서 시작됐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자 현재 남아있는 목판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우리나라에 있어요. 8세기 통일신라에서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지요.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형태의 불경(佛經) 인쇄물이랍니다.
▲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심체요절’.
활판 인쇄술은 11세기 중국의 '필승'이라는 사람이 흙을 구워서 활자를 만들면서 시작했어요. 하지만 활자 형태를 유지하고 보관이 쉬운 것으로 금속만 한 것이 없었지요. 나무나 점토로 만든 활자는 쉽게 부서지거나 깨졌기 때문이에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 역시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는데요. 고려시대인 1377년 충청북도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에요. 부처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으로 당시 50~100부 정도 인쇄한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이렇게 초기 인쇄술은 대부분 동양에서 시작됐어요. 하지만 한자 문화권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활판 인쇄술은 크게 발달하지 않았지요. 수천 자나 되는 한자를 일일이 활판으로 만들어 찍는 것보다 차라리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는 편이 더 수월했던 거예요.
◇지식의 범람을 낳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서양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1445년 독일의 인쇄업자인 구텐베르크(Gutenberg·1397~1468)가 납으로 활자를 만들었어요. 납에다 주석, 안티몬(금속 원소 중 하나)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녹인 다음, 글자를 새긴 틀에 부어 활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지요. 그리고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들 때 사용하던 압착기(프레스)를 응용해 힘이 고루 가해지는 압착 인쇄기를 발명했답니다. 이어 그을음과 아마씨 기름을 혼합한 새로운 잉크를 만들고, 압착 인쇄기의 압력에 잘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이탈리아산 종이도 찾아냈지요
▲ 구텐베르크의 인쇄소 풍경을 그린 19세기 그림. 구텐베르크는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전 유럽에 인쇄술을 퍼뜨렸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활자, 인쇄기, 잉크, 종이 등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인쇄에 관한 모든 기술이 집약돼 있었어요. 활자의 배열, 행과 행 간격, 잉크 농도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기울이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최고 작품을 만들었지요. 바로 1282쪽에 이르는 '42행 성경(구텐베르크 성경·1450년)'입니다.
각 쪽마다 42줄씩 인쇄돼 있어 '42행 성경'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를 만들려고 구텐베르크는 서로 다르게 생긴 알파벳과 기호 등 활자 290개를 만들었어요. 당시 180여 권을 찍어냈지요. 이렇게 15세기 후반 발달한 인쇄술로 성경이 대중에 널리 보급되며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정작 구텐베르크는 인쇄술로 떼돈을 벌거나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42행 성경'을 찍고 파산하는 바람에 인쇄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지요. 1460년 이후에는 지병으로 시력까지 잃어 인쇄업을 그만뒀답니다. 결국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와 대주교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468년 2월 3일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어요.
구텐베르크 이후 독일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 인쇄소가 속속 설립됐습니다. 1500년쯤 독일에만 300곳 가량 인쇄소가 있었지요. 대량으로 쏟아지는 인쇄물 덕분에 유럽 사회는 정보와 지식의 홍수를 경험합니다. 이전에는 책 한 권을 필사하는 데 대략 2개월이 걸렸다면, 이제는 1주일 만에 500권 넘는 책을 인쇄할 수 있었어요. 인쇄술을 통해 사람들은 더 이상 정보를 얻을 때 소수의 통치자나 교회 성직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됐고,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거나 기존 견해에 도전할 수 있게 됐죠. 중세에서 근대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에요.
인쇄술의 발달은 계속됐어요. 19세기 초 신문 발행이 크게 늘면서 대량 인쇄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자 유럽에서 원압기(원통을 돌려 찍는 것)와 윤전기(두루마리 종이에 원통을 돌려 찍는 것)를 잇따라 개발해요. 20세기에는 컴퓨터에 입력한 글자를 활자 없이 곧장 뽑아내는 잉크젯 프린터(가느다란 잉크 줄기를 종이에 뿌리는 것), 레이저 프린터(잉크 가루를 레이저로 쏘는 것) 등을 사용했답니다. 현재는 가루를 뿌려 굳혀가며 모양을 쌓아올리는 방식의 3D 프린터까지 나왔답니다.
11.17. 美·中은 탁구, 인도·파키스탄은 크리켓으로 화해했죠
[스포츠 외교]
자본·공산주의 대치하던 냉전시대… '핑퐁 외교' 통해 평화 분위기 만들어
스포츠, 갈등 해결에 큰 역할하지만 우호적 정치 환경 없인 성공 못해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골프 회동'을 가져 화제가 됐어요. '골프광'인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자마자 아베 총리와 5시간 동안 골프를 했다고 해요. 앞서 올 2월 미국에서 열렸던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골프를 하며 긴밀하게 대화했지요. 이를 두고 많은 언론이 "미국과 일본이 골프 외교를 펼쳤다"고 표현했답니다.
이처럼 스포츠는 종종 국제 정치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쓰여요. 오늘은 세계 정치·외교에서 스포츠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야기를 살펴볼게요.
◇미·중 간 냉기류를 녹였던 '핑퐁 외교'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선수단 15명이 중국 베이징 공항에 발을 내디뎠어요. 그들의 발걸음엔 전 세계 이목이 쏠렸지요. 왜냐하면 공산주의 중국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미국·중국 관계는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었어요. 중국은 1950년 한반도에서 터진 6·25전쟁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북한을 도왔지요. 그러자 우리나라를 돕던 미국이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펼쳤어요.
1960년대 후반 대표적 공산국가이던 중국과 소련 사이가 나빠졌어요. 우수리강을 둘러싼 영토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가면서 중국은 소련을 위협적인 나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은 소련을 견제하려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 역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대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오랜 기간 국교(國交·나라 사이 외교 관계)가 끊어져 있어 어떻게 물꼬를 터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어요.
중국이 먼저 미국에 손을 내밀었어요. 197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미국 탁구 대표팀을 중국에 초대하겠다고 한 거예요.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미국 선수단은 일본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중국으로 넘어갔죠
▲ ‘핑퐁 외교’를 위해 중국에 간 미국 탁구 선수단은 중국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들이었어요. 1971년 4월 미·중 친선 탁구 대회를 치르고 난 후 대표단 회담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계자들 모습. /AP 연합뉴스
미국 선수단은 베이징을 시작으로 상하이, 광저우 등을 일주일간 돌며 중국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치렀답니다. 미국도 중국 탁구단을 초대해 친선 대회를 열었고, 이런 화해 분위기에 힘입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어요. 이처럼 두 나라가 탁구공을 매개로 화해하는 외교를 했다고 해서 '핑퐁(탁구공 소리를 빗댄 탁구 별명) 외교'라고 말해요.
미국이 중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면 대만과 단교(斷交)해야 했답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 '대만과 단교해야 정식 교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거지요. 결국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은 대만과 단교하기로 결정하고 중국과 정식 수교(修交·나라끼리 교제를 맺음)했답니다.
◇인도·파키스탄의 '크리켓 외교'
이처럼 스포츠가 국가 간 정치·외교에 이용되는 건 정치적으로 앙숙인 국가들이 비교적 정치색이 옅은 스포츠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또 다른 대표적 사례가 인도와 파키스탄 간 불화를 누그러뜨리는 데 활용된 '크리켓 외교'랍니다.
두 나라는 영국 식민지 시절 한 나라였어요. 1947년 분리 독립하면서 두 나라는 갈등을 겪기 시작했지요.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종교(인도는 힌두교, 파키스탄은 이슬람교), 국경 지대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분쟁, 동파키스탄(훗날 방글라데시) 독립 문제 등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갈등하며 1970년대까지 세 차례나 전쟁을 치렀어요.
그런데 틈만 나면 으르렁대던 두 나라에도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국민이 크리켓 경기를 아주 좋아했다는 거예요. 크리켓은 공을 방망이로 치고 달린다는 점에서 야구와 비슷한데, 영국에서 시작해 영연방 국가(영국의 옛 식민지 나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스포츠이지요.
1986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또 한 차례 겪었어요. 인도가 대규모 군사훈련을 핑계로 파키스탄 국경 근처로 군대를 이동시켰는데, 파키스탄이 핵무기로 대응하겠다고 위협한 거예요. 두 나라가 극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하면서 최악으로 치닫던 갈등을 겨우 풀었지요.
그러자 파키스탄 대통령이 인도에 '친선 크리켓 경기를 하자'고 제안했답니다. 그동안 얼어붙었던 관계를 스포츠로 녹여보자는 아이디어였죠. 파키스탄 선수들이 먼저 인도를 방문해 친선 경기를 벌였고, 1987년엔 두 나라가 크리켓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어요. 2005년에는 인도 총리와 파키스탄 총리가 나란히 앉아 크리켓 경기를 구경하기도 했지요. 2008년 인도 뭄바이에서 파키스탄 테러리스트들이 테러 공격을 하면서 양국 사이가 급속히 나빠져 모든 친선 크리켓 경기가 중단됐지만, 2012년부터 또다시 친선 경기를 진행하는 등 스포츠 외교 활동이 이뤄지고 있답니다.
▲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한 남북 단일 탁구팀 모습. 북한 이분희(맨 오른쪽) 선수와 우리나라 현정화(오른쪽에서 둘째) 선수.
우리나라와 북한도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처음으로 '남북 단일 탁구팀'을 이룬 적이 있어요. 그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도 남북 단일 축구팀이 참가했지요. 이후 북한과 수차례 단일팀 구성을 추진했지만 아직 성사되지 못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스포츠를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스포츠 외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정치·외교적 결정이랍니다.
☞축구 전쟁
스포츠 때문에 나라 간 관계가 더 악화된 경우도 있었어요. 바로 중남미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예요. 당시 두 나라는 국경 분쟁과 불법 이민자 문제 때문에 갈등을 빚고 있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가 제9회 멕시코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지역 예선전에서 맞붙었어요. 1·2차전에서 각각 1승씩 거뒀는데, 당시 월드컵에는 골 득실 차로 승부를 가리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3차전을 치러야 했지요.
1969년 6월 27일 멕시코에서 열린 3차전은 혹시 모를 유혈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경찰 병력이 관중보다 경기장에 더 많이 들어왔답니다. 연장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3대2로 이겼는데, 이를 계기로 온두라스 정부가 엘살바도르에 외교 단절을 선언했지요.
약 2주가 지난 7월 14일, 엘살바도르 군대가 온두라스를 침공했어요.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기구에서 중재에 나섰고, 전쟁은 100여 시간 만에 끝났답니다. 이 전쟁으로 4000여 명이 사망하고 15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어요.
11.23 잇따른 전쟁·식량난으로… 첫 사회주의 국가 탄생했죠
[러시아 혁명 100주년]
20세기 초 황제가 다스리던 러시아, 농민·군인 혁명으로 임시정부 수립
레닌, 전쟁·가난 지속되자 봉기 주도… 소련 세웠지만 74년 만에 붕괴했죠
"레닌은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사라져라!"
지난 7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 광장에 모인 시위대가 외친 구호입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탄생시킨 '러시아 혁명'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아 집회가 열린 것이지요. 하지만 광장엔 200여명만 모였을 뿐이고 정부도 따로 공식 행사를 열지 않았을 정도로 분위기는 썰렁했다고 해요.
1917년 11월 7일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10월 혁명' 또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불린답니다. 당시 사용했던 러시아 달력(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 발발해 '10월 혁명'이라고 부르고, 러시아 급진 공산당의 별칭이었던 '볼셰비키' 이름을 따서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말하지요. '러시아 혁명'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어요. 100년 전,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혁명은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빵을 달라!" "전쟁을 멈춰라!"
20세기 초 제정(帝政·황제가 다스리는 제도) 러시아는 나라 안팎으로 큰 위기에 빠져있었어요. 주변 나라들과 잇따른 전쟁으로 나라 살림은 궁핍해져가고 있었는데, 황제(차르)와 봉건 귀족들은 이를 극복할 의지가 없었지요. 영국·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을 때,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와 봉건 영주가 절대 권력을 누리며 농민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어요.
이런 와중에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참전을 결정합니다. 황제는 농사짓고 물건 만들던 젊은 사람들을 계속 전쟁터로 끌고 갔지요. 계속된 전쟁과 가난으로 농업과 공업 모두 황폐화되면서 대중의 삶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어요.
1917년 3월 8일(러시아 달력 기준 2월 23일),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던 농민들이 '더 이상 식량이 없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시위를 벌입니다. 영하 20도 가까운 강추위에 그들이 외쳤던 건 "빵을 달라!" "전쟁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지요.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잇따른 전쟁에 지친 군부는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오히려 농민 시위대에 합세했어요. 농민과 노동자, 군인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한 '소비에트(대표자 회의)'를 결성합니다. 위협을 느낀 황제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고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지요. 이를 '2월 혁명'이라고 해요.
황제가 퇴위하자 공화국 임시정부가 구성됐는데요. 대중의 바람과 달리 임시정부는 '전쟁 계속'을 선언했답니다. 임시정부의 지지 세력 중 상당수가 부르주아(자본가)였는데, 이들이 전쟁을 계속 원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던 중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해오던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10여년 만에 고국 러시아로 귀국합니다. 앞서 레닌은 황제에 반대하는 혁명 운동을 벌이다 발각돼 외국을 떠돌며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 1917년 10월 소비에트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레닌의 모습을 그린 그림. 러시아 혁명으로 건설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91년 붕괴했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레닌은 곧바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는데요. 여기엔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토지 몰수와 국유화, 소비에트의 생산·분배 통제 등 사회주의 강령을 담고 있었어요. 여기서 레닌은 "조국에게 패배를"이라는 충격적인 반전(反戰) 구호를 외쳤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터진 것인데, 이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이 피를 흘리고 있으니 차라리 조국이 빨리 패배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요.
◇민주주의 무시하고 독재로 나가다
레닌을 필두로 하는 볼셰비키는 '무능한 임시정부에 봉기를 하자'고 결의합니다. 무기를 든 볼셰비키는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 1917년 11월 7일(러시아 달력 기준 10월 25일) 거의 무혈(無血)로 군사 작전을 완료합니다. 중앙은행·전화국·우체국·중앙역·발전소·재무성을 차례로 접수했어요. 임시정부가 있던 황궁으로 쳐들어갔는데 이미 각료들은 도망간 뒤였지요. 이렇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공화국(소련)'이 세워집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것이지요.
레닌의 볼셰비키는 전쟁 중단, 토지 무상몰수, 8시간 노동법, 신분제 차별 폐지 등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내놓았어요. 하지만 정작 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온건파인 사회혁명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면서 강경파인 볼셰비키는 어려움에 처했지요.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소수 급진세력에 머물 것인지, 의회를 무시하고 독재 정권으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결국 다음해 1월, 볼셰비키는 사실상 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독재 정권의 길을 걷습니다.
권력을 잡은 레닌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해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전쟁 종료·평화 회복을 선언하는 조약)을 맺었어요. 하지만 상당한 배상금과 영토를 주고 맺은 조약이었기에 전쟁 중단을 반대하던 정치 세력들로부터 큰 불만을 사게 됐지요. 러시아의 전쟁 참여를 계속 원했던 영국·프랑스 등과의 사이도 나빠졌어요.
이렇듯 새로 출발한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데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출발합니다. 레닌은 이런 문제들을 생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1924년 세상을 떠났고, 이후 소련은 스탈린 독재 체제로 이어졌지요.
20세기 역사는 자본주의와 한 축을 이뤘던 사회주의를 빼놓고는 논하기 어려워요. 노동자 계급 정당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세운 최초의 사건이었다는 점, 혁명을 통해 노동자·농민·여성들의 지위가 그전보다 올라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랍니다.
하지만 대중의 자발적인 뜻과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소수 급진파 엘리트들이 독재를 했다는 점, 대중의 궁핍한 상황을 정치에 이용하고 적절한 대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점 등은 치명적인 한계로 지적되고 있어요.
☞마지막 황제의 최후
‘2월 혁명’으로 퇴위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수도 근교 왕궁에 유폐·감금됐어요. 하지만 임시정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황제 일가를 시베리아로 이주시키기로 하지요.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어요. 우랄 지방에 머물고 있던 황제 일가는 1918년 7월 볼셰비키 당원들에 의해 살해됩니다. 황제 일가가 처형됐던 집터엔 현재 ‘피의 사원’이 세워져 비극적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요. 한때 니콜라이 2세 막내딸 아나스타샤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어요
11.30 끔찍한 '킬링필드' 끝냈지만… 32년째 反美 독재 오명
[훈센 총리와 킬링필드]
극단적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 루주'… 수용소 만들어 200만명 학살했죠
캄보디아 최장 독재자 훈센 총리… 내년 총선 앞두고 야당 해산 강행
얼마 전 캄보디아 대법원이 제1야당에 대해 '미국과 결탁해 쿠데타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해산을 명령했어요. 국제사회는 캄보디아를 32년째 통치하고 있는 독재자 훈센 총리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을 해산해 장기 집권하려는 속셈을 드러냈다며 비난했지요.
미국도 야당 해산에 반대하며 앞으로 경제 원조를 끊겠다고 위협을 했는데요. 이에 대해 훈센 총리는 "미국의 원조 중단을 환영한다. 외국 원조를 받겠다고 독립성과 주권을 잃을 수 없다"고 했답니다. 이 같은 훈센 총리의 거침없는 독재는 그가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인 '킬링필드(Killing Fields)'를 끝낸 주인공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얘기가 많아요.
◇베트남전으로 파괴된 캄보디아
수세기 동안 크메르 왕국(앙코르 왕국)으로 눈부신 문명을 이루었던 캄보디아는 15세기 이후 왕조가 쇠퇴하면서 태국·베트남의 침략을 번갈아 받았어요. 19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가 된 캄보디아는 1953년에야 독립했지요. 당시 국왕이었던 시아누크는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선거에 나가 총리가 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어요.
▲ 캄보디아 훈센 총리가 장기 독재를 시도하고 있어요. 훈센 총리의 독재 이면에는 킬링필드의 끔찍한 역사에 대한 기억이 도사리고 있답니다. 사진은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학살당한 킬링필드 피해자들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탑. /게티이미지코리아
그즈음 캄보디아의 이웃나라이자 오랜 앙숙이었던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어요. 북베트남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쪽으로도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하고 있었죠. 동남아시아 지역에 공산주의가 번지는 것을 막고 싶었던 미국은 1964년 북베트남을 공격합니다. '베트남전(1964~1975)'이 발발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계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미국이 베트남전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지역 울창한 밀림 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기 때문이에요. 미군은 캄보디아 내 북베트남군 근거지에 폭탄을 퍼부었고, 이 공격으로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했어요. 이 사건으로 살아남은 캄보디아인들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됐지요.
이런 상황에서 1970년 친미 성향 군인인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켜요. 하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친미 정권보다 급진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Khmer Rouge·붉은 크메르라는 뜻)'를 더 많이 지지했어요. 수백 명에 불과했던 크메르 루주 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중국 등 주변 공산국의 지원을 받으며 더 강력한 무장단체가 됐어요. 주요 도시들을 장악해나간 크메르 루주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론 놀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광기로 가득 찬 대학살, 킬링필드
당시 크메르 루주를 이끌던 지도자는 폴 포트(1928~1998)였어요. 부농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공산주의에 빠졌지요. 프놈펜을 점령한 폴 포트는 "지금부터가 서기 0년"이라며 나라 이름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온갖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펼쳤어요.
우선 국민들 삶을 기계처럼 획일화했어요. 폴 포트 정권 아래 캄보디아인은 결혼 상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같은 호칭도 나쁜 관습이라고 못쓰게 했고 상대방을 오직 '동무'라고만 불러야 했지요. 모든 종교 행위가 금지돼 전국의 불교 사찰이 문을 닫았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도 일절 할 수 없었어요.
폴 포트는 모든 인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사회를 이상적이라 생각했어요. 도시는 자본주의에 물든 부패한 곳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집단농장에 배치했지요. 사람들은 새벽 5시부터 늦은 밤까지 일만 해야 했고, 실수할 때마다 감시자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았어요.
크메르 루주는 도시마다 수용소를 만들어 자본가나 의사, 교수, 법조인, 과학자 같은 지식인들을 가뒀어요. 나중에는 손이 매끄럽거나 안경 쓴 사람, 집에 책이 많은 사람, 승려나 예술가처럼 노동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수용소로 끌고 갔어요. 이들은 노예처럼 쇠사슬에 묶인 채 일을 했고, 먹을 것이 없어 뱀이나 쥐, 귀뚜라미를 잡아먹었어요. 잔인한 고문과 처형도 끊이지 않았지요.
가장 악명 높던 수용소는 프놈펜에 있는 'S-21'이었는데요. 이곳에 수용된 2만여 명 가운데 살아나간 사람은 10여 명뿐이라고 해요.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던 1975~1979년 무려 200여만명이 학살당했는데, 말 그대로 '죽음의 땅(킬링필드)'이었던 거지요.
◇반미(反美) 독재자 vs 킬링필드 종식 영웅
훈센 총리는 원래 크메르 루주 간부 출신이었지만 1977년 폴 포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베트남으로 망명했어요. 그는 미국이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에 폭탄을 퍼부었고, 베트남·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 정권을 지원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큰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1979년 훈센 총리를 비롯한 반(反) 크메르 루주파가 베트남군을 앞세워 캄보디아를 공격합니다.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했어요. 1985년 34세 나이로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오른 훈센 총리는 지금까지 공동·단독 총리를 오가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지요.
훈센 총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영악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인 친(親) 중국·베트남 지도자이면서 미국 등 서구 국가들로부터 각종 경제적 지원을 적절하게 받아내 왔고, 1998년 총선 승리를 위해 크메르 루주 세력과 연합하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그는 "땅을 파서 과거를 묻고 오점(汚點) 없는 21세기를 향해 나아가자"고 했답니다.
훈센 총리는 노회한 반미(反美) 독재자, 킬링필드를 끝낸 위대한 지도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아요. 훈센 총리가 장기 독재의 길을 택한 캄보디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12.07 대서양·태평양 잇는 뱃길… 美, 파나마 독립시켜 완성 했죠
[파나마 운하]
19세기 프랑스가 짓다 미국이 완공, 물 채운 후 배 이동하는 계단식 운영
총 항해 거리 1만5000㎞ 줄었어요… 中, 파나마운하 대체할 철도 추진
최근 중국이 브라질을 동서(東西)로 가로지르는 남미 횡단 철도 건설을 추진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어요. 중국은 브라질의 철광석·곡물을 많이 수입하는 나라인데, 미국 영향력이 강한 파나마운하 대신 이 같은 철도를 만들어 새로운 물류 경로를 확보하겠다는 거예요.
중국은 2014년부터 파나마운하를 대체하기 위한 새 운하 건설 사업도 추진 중이에요. 운하란 배 운항이나 물류 등을 위해 땅을 파내고 그 자리에 인공적으로 뱃길·물길(수로)을 놓은 것을 말하죠. 하지만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진행이 지지부진하자 대안으로 남미 횡단 철도를 짓고자 한 거예요. 그렇다면 파나마운하는 뭐기에 중국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가며 그를 대신할 운송 수단을 만들고 싶어하는 걸까요?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준 운하
파나마운하(Panama Canal)는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지협(地峽·두 육지를 잇는 좁고 잘록한 땅)을 파서 물길을 낸 길이 80㎞짜리 운하예요.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메리카 대륙 중간에서 이어주는 관문으로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이집트 수에즈운하와 함께 세계 양대(兩大) 운하로 손꼽히지요.
파나마운하가 생기기 전 미국 동서 해안을 오가는 배는 매번 남아메리카 최남단인 칠레 마젤란해협까지 돌아가야 했지만, 이 운하가 생기면서 항해 거리가 약 1만5000㎞나 줄었답니다.
▲ 1927년 파나마운하 모습을 그린 그림. 파나마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전략적 물길이에요. 갑문을 통과할 때는 수로 양옆 전동차나 다른 배에 끌려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처음 파나마운하 건설에 욕심을 냈던 사람은 16세기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였어요. 탐험가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국왕에게 파나마 지협에 운하를 내자는 제안을 했고, 카를로스 5세가 이를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실제 공사로 이어지진 못했지요.
본격적으로 파나마운하 건설이 논의된 건 19세기 들어서였어요. 당시 파나마 지협은 콜롬비아의 한 주(州)였어요. 프랑스 외교관 출신 레셉스(Lesseps)는 수에즈운하를 완성한 경력을 앞세워 두 바다를 잇는 운하 건설을 추진하려고 했어요. 양대양(兩大洋) 주식회사를 세운 그는 꾸준히 콜롬비아 정부를 설득해 건설 계약을 따냈지요. 1881년 역사적인 파나마운하 공사가 시작됐어요.
많은 노동자가 파나마운하 건설에 뛰어들었어요. 그중엔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폴 고갱도 있었지요. 당시 고갱이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면 파나마운하 건설 현장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악몽처럼 묘사돼 있어요.
'나는 아침 5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열대의 태양 아래 또는 빗속에서 땅을 파야 했소. 밤이면 모기들한테 뜯어 먹혔지.'
황열병(모기가 옮기는 풍토병의 일종)과 말라리아가 돌면서 파나마운하의 미래는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어요. 예상보다 복잡한 지형과 이에 따른 엄청난 공사비도 문제였지요.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돈을 가지고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결국 착공 9년 만에 모든 공사가 중단됐어요.
◇미국, 파나마 독립운동 지원하다
파나마운하 건설을 이어받은 것은 미국이었어요.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아메리카 대륙 사이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파나마운하의 군사·경제적 이득을 매우 높게 평가했어요. 1898년 미·스페인 전쟁 당시 미국 서부에서 출발한 전함이 마젤란해협을 돌아 쿠바에 도착하는 데 두 달 넘게 걸렸다는 사실만 봐도 파나마운하는 미국에 아주 절실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새롭게 삽을 뜨려면 콜롬비아 정부 허가가 필요했어요. 당시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이 파나마운하 건설로 가져갈 이익이 크다는 걸 알고 운하 건설 허가를 내주길 거부했어요. 그러자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에 대한 파나마 지역 사람들의 불만을 이용해 파나마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기 시작했지요. 1903년 11월 파나마 지협에서 독립운동이 일자 미국은 이 지역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전함을 보내고 군대까지 파견했어요. 미국 지원에 힘입어 파나마는 독립에 성공합니다.
미국은 파나마 독립 직후 파나마 지협을 미국이 영구적으로 임대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어요. 안정적인 운하 건설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미국은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총 7만여 명의 노동력을 투입해 파나마운하를 완성합니다. 이후 85년간 파나마운하를 독점 관리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거뒀지요. 파나마운하 소유권은 2000년에야 파나마 정부로 넘어왔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랍니다.
파나마운하는 대표적인 갑문(閘門)식 운하예요. 지형적 특성으로 평평한 운하를 파기 힘들었기 때문에 물길 중간에 여러 갑문을 설치해 물을 채우고 빼가면서 배를 계단식으로 통과시키는 방식이지요. 운하를 모두 통과하는 데 8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기 시간 등을 합치면 24~30시간 소요된다고 해요. 갑문을 통과할 때는 수로 양옆 전동차나 다른 배에 끌려가요.
파나마운하가 해상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많은 배가 여기에 맞춰 만들어졌어요. 길이 295m, 너비 32m 등 파나마 갑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최대 크기 배를 '파나맥스(Panamax)'라 해요. 통행료는 선박 종류 등에 따라 다르지만 파나맥스급 선박의 경우 약 20만달러랍니다.
중국의 남미 횡단 철도가 파나마운하만큼이나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수에즈운하(Suez Canal)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인 이집트 시나이반도 서쪽에 건설된 세계 최대 운하로, 지중해와 홍해·인도양을 잇는 수로(水路)예요. 프랑스 외교관 레셉스가 1854년 이집트에서 건설권을 따내 1869년 완공했지요. 아프리카 대륙을 돌지 않고도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이집트가 소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면서 1956년 수에즈전쟁까지 벌어졌답니다.
12.14 디즈니 '포카혼타스', 英에 동화된 최초 원주민이었어요
[영국의 신대륙 개쳑]
英, 1607년 신대륙에 정착지 건설
굶주림·질병에 고통받던 이주민들, 포카혼타스 등 원주민 도움 받았죠
오늘날 미국인들은 포카혼타스를 원주민·이주민 잇는 가교라 생각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미국 원주민 출신 참전 용사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어요.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원주민 혼혈 출신인 한 야당 상원의원을 '포카혼타스'라고 불러 논란이 일었어요. 해당 의원은 '인종차별'이라며 반발했고, 원주민 용사들도 이 발언이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답니다.
'포카혼타스'는 1995년 월트 디즈니가 제작한 만화영화 주인공이자 17세기 초반 실제 있었던 원주민 여성이에요. 오늘은 포카혼타스가 살았던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요.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개척
1492년 10월,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어요. 카리브해의 한 섬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지요. 5년 후 신대륙에 도착한 또 다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세계'임을 밝혀내면서, 그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가 됐다고 해요. 이후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가톨릭을 전파하거나 금은보화를 얻겠다는 꿈을 품고 새로운 땅에 몰려들었죠.
영국도 신대륙에 탐험대를 파견했어요. 하지만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요. 157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험프리 길버트가 첫 항해에 나섰지만 배가 폭풍우에 휩쓸려 모두 실종되고 말아요. 1585년 길버트의 친척인 월터 랠리가 지금의 미국 동부 해안에 도착했어요. 그는 도착한 땅을 엘리자베스 여왕의 별명(처녀 여왕)을 따서 '버지니아'라고 이름 붙였지요.
스페인이 군대와 관료를 보내 남아메리카에 거대한 식민지를 개척한 반면, 영국은 특정 회사나 개인에게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는 특허장을 주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건설했어요. 특허장을 받은 회사·개인은 식민지에서 얻은 이익 중 일부를 왕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졌지요.
▲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미국 버지니아에 도착해 ‘제임스타운’을 건설하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삽화. 이들은 질병과 굶주림, 원주민 공격에 시달려야 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607년, 제임스 1세 왕의 특허장을 받은 '런던 회사'가 모험심 가득한 남성 104명을 배 세 척에 나눠 태우고 버지니아에 도착했어요. 직업이 다양한 이들은 열심히 마을을 만들고 왕 이름을 따 '제임스타운'이라 불렀지요. 처음에 이주민들은 보물을 발견해서 영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굶주림과 전염병, 원주민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정착 첫해 겨울에만 절반 이상이 죽었지요.
살아남을 방법은 원주민에게 생존 방식을 배우는 것뿐이었어요. 이주민들의 선장이었던 존 스미스는 주변 원주민과 물물교환을 통해 식량을 얻어 나갔어요. 콩과 호박, 옥수수, 고구마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방법도 배웠지요. 원주민은 이주민에게 샛강을 따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카누(길쭉한 나무배) 제작법도 가르쳐줬어요. 이주민은 서서히 새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답니다.
◇영국인에게 동화된 포카혼타스
▲ 1616년 영국식 복장을 한 포카혼타스의 초상화.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 인근 지역 추장 포우하탄의 딸이었어요. 명랑한 포카혼타스는 이주민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포우하탄 지역에 침범해 식량을 빼앗아 가려다 붙잡힌 존 스미스를 살려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지요. 하지만 포우하탄과 이주민들 간 전투가 벌어지자, 이주민들은 자기들 마을을 보호하려고 포카혼타스를 납치해 인질로 삼았어요.
1년 넘게 제임스타운에 갇힌 포카혼타스는 돌아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이주민 생활 방식에 동화됐어요. 영어를 배웠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이름도 영어식인 레베카로 바꿨죠. 그리고 담배 농장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던 이주민 존 롤프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어요. 한동안 이주민과 포우하탄 사이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됐지요.
1616년, 포카혼타스는 남편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어요. 런던 회사는 이주민들이 제임스타운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포카혼타스를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지요. 포카혼타스는 제임스 1세도 만나고 사교 모임에도 참여하며 크게 환대 받았어요.
하지만 이듬해 버지니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포카혼타스는 병에 걸려 22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결핵, 천연두 등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던 원주민 소녀에겐 치명적이었던 것이에요.
17세기 들어 신대륙에는 경제적 부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온 이주민이 급격히 늘었어요. 1620년 11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청교도(영국 국교회에 저항한 기독교의 한 교파) 신자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현재 매사추세츠 지역에 도착했어요. 이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 새로운 땅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서약을 했는데, 이를 '메이플라워 서약'이라고 불러요.
영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이주민들은 매사추세츠, 뉴욕,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등 동부 해안가에 식민지 13곳을 건설했지요. 이 열세 개 식민지가 훗날 영국과 독립 전쟁(1775년)을 벌이는 정치 세력이 돼요.
이주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땅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무력을 써서 원주민을 학살하고 내쫓았어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이 죽었고, 살아남은 원주민 후손은 현재 미국 중·서부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요.
오늘날 미국은 포카혼타스를 이주민과 원주민 간 가교(架橋·다리) 역할을 한 친근한 소녀로 생각하고 있어요. 처절하게 저항하다 죽거나 노예가 된 다른 원주민과 달리 스스로 영국인의 생활 방식에 동화된 '길들여진 원주민 1호'이기 때문일 거예요.
☞추수감사절의 유래
초기 청교도는 원주민과 대체로 평화롭게 지냈어요. 농사짓는 법과 물고기 잡는 법, 칠면조 기르는 법을 배웠지요. 정착 후 첫 수확에 성공한 이들은 칠면조를 잡고 옥수수와 호박 등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감사 기도를 올렸어요. 이것이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로 잡은 '추수 감사절'의 기원이랍니다.
12.21 세계 3개 종교 성지… 국제법상 어느 나라 땅도 아니죠
[예루살렘]
유대 왕국서 기독교 성지로 바뀌고 이후 무슬림들 삶의 터전이었어요
3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오다 영국의 상반된 약속으로 분쟁 시작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선언하면서 중동 지역에 또다시 긴장이 감돌고 있어요. 현재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지만, 사실 국제법상 어느 나라 영토에도 속하지 않은 땅이에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끊임없는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동의 화약고'이기 때문이지요.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대적 반미(反美)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도 '예루살렘 선언'을 거부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결의안 채택이 무산돼 버렸지요. 도대체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기에 국제적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걸까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가 모두 신성시하는 도시예요. 그래서 서구·중동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지요.
▲ 터키·이스탄불의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에 항의하고 있는 무슬림 시민들의 모습. /AFP 연합뉴스
기원전 3000년, 예루살렘 지역에는 가나안 부족들이 살고 있었어요. 이때 예루살렘을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었지요. 산악 고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은 적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요새 같은 도시였어요. 기원전 1200년쯤 이집트에서 핍박받으며 살던 유대인들이 대거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면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합니다. 이후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면서 유대교의 중심지가 됐지요. 성경은 가나안 땅을 하느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땅' 또는 '아름답고 광대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등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하면서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어요. 이후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요.
서기 30년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聖地)가 됩니다. 예루살렘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성묘(聖墓) 교회,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언덕길, 예수가 로마군에 체포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만국 교회 등 다양한 기독교 순례지가 있어요.
이슬람교에도 예루살렘은 특별한 성지예요.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하늘에 올라가 알라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는 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의 바위 사원이라고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으로는 638년 이슬람교도들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본격적으로 정착을 시작한 지역이기도 해요.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렀어요. 이후 예루살렘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오늘날 터키)의 지배를 받는 등 대부분 이슬람교의 영향력 아래 놓였답니다.
◇어느 나라 땅도 아닌 예루살렘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유대교 관습 중 일부를 이슬람교 관습으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시키기도 했어요. 평화로운 공동체 생활을 위한 '메디나 헌장'도 선포했지요. 헌장에는 '유대인은 사회·법률·경제적으로 이슬람교 신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답니다.
638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칼리프(이슬람교 최고 지도자) 우마르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예루살렘의 기독교 총대주교였던 소프로니우스와 협정을 맺고 "기독교인의 교회는 점령되지 않을 것이며, 조금도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십자가와 재산은 보호될 것이다" 같은 보호를 약속했답니다.
평화 상태에 균열이 간 건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지역에 개입하면서부터예요.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영국이 유대인과 무슬림을 상대로 상반된 약속을 한 것이지요.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유대인들로부터 전쟁 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유대 국가'를 건설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끝내고 '아랍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했지요. 전쟁이 끝나자 흩어져 살던 수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이 시작됐어요.
분쟁이 커질 조짐이 보이자, 유엔은 1947년 예루살렘을 국제법상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으로 선포했어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됐지만 예루살렘은 동예루살렘(요르단령)과 서예루살렘(이스라엘령)으로 나뉘었지요.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마저 점령하고 예루살렘 전체를 국가 수도로 선언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런 이스라엘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은 미국 내 강력한 유대인 세력의 지지를 끌어내고,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이라는 평가가 나와요. 이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을 둘러싼 분쟁을 종교 갈등만으로 설명하는 건 중동문제의 본질을 가릴 수 있다는 지적이 많지요. 예루살렘은 언제쯤 그 이름처럼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요?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의 반(反)이스라엘 민중 봉기를 뜻하는 말이에요. 1차 인티파다는 1987년 이스라엘군 차량이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4명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를 계기로 이스라엘에 항의 시위를 벌인 것을 말해요.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문제는 전 세계적 쟁점이 됐어요.
2차 인티파다는 2000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의 이슬람교 사원 방문에 항의하면서 시작됐어요. 이스라엘의 강경 진압과 팔레스타인의 보복 테러 등으로 사상자가 많이 났지요.
12.28 6주간 수십만 명 학살… 日 정부, 책임 회피하고 있죠
[난징 대학살]
식민지 확대 위해 중국 노리던 일제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전쟁 일으켜 난징 점령하고 수십만 명 학살·강간
中, 日의 사과·배상 요구하고 있죠
지난 13일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난징 대학살 80주년'을 맞은 중국 정부에 "동병상련(同病相憐·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김)의 마음으로 애도한다"고 말했어요.
같은 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난징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80년 전 있었던 중국인들의 희생을 애도했답니다. 그렇다면 80년 전 중국 난징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일제의 침략 야욕과 중일전쟁
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1920년대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자원과 물건을 더 많이 내다 팔 시장이 필요했어요. 일본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 1937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중국인 시신들이 친화이강 주변에 쌓인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무라세 모리야스)
때마침 중국에서 장제스(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의 국민당과 마오쩌둥(훗날 중국 국가주석)의 공산당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어요. 이를 '국공 내전'(1927~1936년)이라고 불러요. 중국이 정치적 대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 지역을 침공하고 그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 나라인 '만주국'을 세웠어요.
일본은 중국 영토를 더 많이 장악하고자 호시탐탐 전쟁을 일으킬 기회만 노렸어요. 그러던 중 1937년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어요. 7월 7일 밤,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蘆溝橋·마르코폴로 다리) 근처를 정찰하던 일본군이 어디선가 들려온 총성을 듣고 긴급히 인원을 점검했는데 병사 한 명이 안 보인 거예요.
사실 그 병사는 용변을 보는 중이었고 20여 분 후 부대로 복귀했죠. 하지만 일본은 이를 꼬투리 잡아 '중국이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보내 루거우차오를 점령하고 중국에 전면전을 선포했어요. 8년에 걸친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일본은 속전속결로 중국 주요 도시를 장악해 나갔어요.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고 일본에 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어요. 상하이에 모든 역량을 모은 중국군은 3개월간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지고 말았죠. 일본군은 도망치는 중국군을 파죽지세(대나무를 쪼개듯 맹렬한 기세)로 추격했고, 그해 12월 9일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을 포위했어요.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관리들은 대피했고, 수도를 충칭으로 옮긴다고 발표했어요.
◇대규모 학살과 강간
일본군에게 포위된 난징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어요. 그동안 일본군이 중국인의 항전(抗戰) 의지를 꺾겠다며 점령하는 도시마다 민간인 폭격·살상·강간·약탈을 무차별로 자행했기 때문이에요. 일본군 만행을 취재하던 한 영국인 기자가 '시체를 파먹고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진 개들이 그곳에 남은 유일한 생명체다. 한때 10만명이 넘는 인구가 빽빽하게 모여 살던 지역에는 고작 다섯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죠.
▲ 중국 난징 대학살 80주년 촛불 추모제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무차별 폭격으로 난징을 파괴한 일본은 1937년 12월 13일 난징 함락에 성공했어요. 일본군은 포로로 잡은 중국 군인들을 강변이나 농경지, 도시 주변 도랑으로 데려가 마구 죽였고, 무고한 민간인들도 붙잡아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했어요. 일본군끼리 '누가 100명을 먼저 죽이나' 시합을 벌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난징에서 20만~30만명이나 되는 중국인이 비참하게 죽어갔어요. 많게는 8만명에 이르는 중국 여성도 강간 피해를 봤는데, 이조차도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고 해요. 많은 여성이 피해를 본 다음 살해당하거나 자살했기 때문이지요.
◇일본의 책임 회피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중일전쟁도 끝났어요. 이후 난징 대학살이 국제사회에 조금씩 알려졌지만, 사실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세계적으로 더 많이 주목받았지요. 전쟁이 끝나고 난징 대학살 주동자에 대한 공식 처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 피해에 비해 아주 미약한 수준이었어요.
1946년 일본 도쿄에서 국제 군사재판이 열리자 많은 서양인 기자 등이 난징 대학살의 참혹함에 대해 증언했어요. 그 결과 난징에 주둔했던 일본군 수장 마쓰이 이와네가 사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러나 중국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학살을 주도한 일본인 장교 4명만이 처형됐고 대다수 학살자는 법정에 오르지도 않았어요.
난징 대학살이 국제사회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데는 당시 국제 정세가 급변했던 요인이 커요. 전범국 일본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 재건에 성공했고, 중국이 공산주의 길을 가면서 서구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을 벌이게 됐죠. 이에 따라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난징 대학살을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더 이상 중국에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난징 대학살 70주년인 지난 2007년 일본 집권당의 한 국회의원은 "난징에서 발생한 사망자 규모는 일반적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발언을 했지요. 심지어 일본 극우 세력은 난징 대학살이 중국이 일방적으로 날조한 사건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지금도 중국은 일본에 난징 대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본은 '학살이 있었다 할지라도 정부에서 개입하지 않은 개인의 일탈 행위였다'며 공식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이 없는 한 동아시아 국제 관계는 언제든 어긋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될 거예요.
[난징서 중국인 보호한 외국인들]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에게서 중국인을 보호해줬던 외국인들이 있었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난징 안전지대 국제위원회'를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숨을 장소와 음식을 제공한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였지요.
그는 난징 서쪽 지역에 여러 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중국인 수백 명을 보호했어요. 당시 독일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일본의 만행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지요.
미국인 선교사 윌헬미나 보트린도 여성 수천 명을 살해·강간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그는 당시 진링 여자예술과학대 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대학살이 시작되자 학교 정문에서 수많은 여성 피란민을 받았어요. 중국 여성들을 납치하려던 일본군으로부터 맞아가면서도 여성들을 보호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