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조선일보 2015
2015.01.09 숫자, 인도서 만들었는데 왜 이름은 아라비아일까
지금쯤이면 새 달력을 보면서 올해 계획을 세운 어린이가 많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혹시 다른 나라의 달력을 본 적이 있나요? 신기하게도 달력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답니다. 왜냐하면 세계 공용어에 가까운 아라비아 숫자로 적혔기 때문이에요. 전 세계인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쓰면서도, 숫자만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요. 아라비아 숫자는 '0, 1, 2,…, 9'의 10개 숫자만 있으면, 그 어떤 큰 수도 편리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위대한 발명품이랍니다. 그런데 사실 아라비아 숫자는 아라비아인이 만든 게 아니에요. 인도 사람들이 만들었지요. 왜 인도인이 만든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궁금하지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아주 먼 옛날 숫자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수를 셌을까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손가락·발가락 등 몸을 이용해서 세었어요. 양 한 마리에 돌멩이를 하나씩 일대일로 대응하는 방법도 있었고요. 벽이나 찰흙판에 필요한 만큼 줄을 그어서 표시하기도 했어요. 중국 한자에서 수를 나타내는 '일(一), 이(二), 삼(三)'은 이런 원리로 만들어졌지요. 고대 로마와 그리스 같은 곳에서는 나무에 세로로 줄을 긋기도 했답니다. 'Ⅰ, Ⅱ, Ⅲ'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큰 수를 나타내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잉카 문명에서는 양털이나 솜을 이용해서 화려한 목걸이를 만들 듯이 여러 가닥의 끈을 달고 거기에 '퀴푸(quipu)'라는 매듭을 묶어서 수를 세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 방법은 세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오늘날 우리가 편리하게 쓰는 숫자는 인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인더스문명이라는 청동기문명이 발달하였어요. 상업이 발달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숫자가 매우 중요해졌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때 사용하였던 문자는 아직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았다고 해요. 이후 철기를 사용한 아리아인이 들어오면서 인도 문명은 본격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숫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하였어요.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문자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아라비아 숫자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인도 지역에서는 마우리아 왕조, 쿠샨 왕조를 거쳐 4세기경 굽타 왕조가 들어서요.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릴 만큼 융성하였어요.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힌두교 문화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지요. 모든 숫자가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0'의 개념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습니다. 인도 산스크리트어에는 '슈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없음'을 뜻하는 철학적 용어였어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작은 점을 찍거나 동그라미 기호를 붙였는데, 이 기호가 0의 시작이 되었답니다. 굽타 시대의 인도 수학자들은 이러한 숫자들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계산을 하였지요.
▲ (왼쪽)고대 로마인이 썼던‘로마 숫자’는 오늘날에도 벽시계 등에서 자주 볼 수 있어요. (오른쪽 위)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에는 고대 이집트인이 썼던 숫자가 적혀 있어요. (오른쪽 아래)아라비아 숫자는 11~13세기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에 널리 퍼졌어요. /위키피디아·셔터스톡·위키피디아
편리한 인도 수학을 빠르게 받아들인 이들이 바로 아라비아 상인이었어요. 동서양을 누비며 상업을 발달시키고 이슬람교를 전파하던 이들은 인도 숫자의 편리함과 실용성에 감탄하며 이를 사용하였지요. 아라비아인은 지적 호기심이 강해서 무엇이든 받아들여 연구하곤 하였거든요. 유명한 이슬람 수학자 알 콰리즈미(al-Khwarizmi·780~850)가 쓴 책에도 인도 수학의 원리가 자세히 나와 있어요. 인도 숫자는 아라비아인에 의해 널리 쓰이면서 점차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양과 비슷해졌습니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숫자는 아라비아를 거쳐 10세기경 유럽 서쪽의 스페인에 전해졌어요. 당시 스페인 지역을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로마 숫자를 사용하던 유럽 사람들은 새로운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랍인이 사용하는 악마의 기호'라고 부르며 반발했다고 하지요. 이 숫자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11세기 말부터 13세기에 걸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이었어요. 십자군 원정은 그리스도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상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아라비아 사람들이 쓰는 편리한 숫자와 계산법을 배우는 유럽인이 점점 늘었지요. 19세기에 들어서자 중국, 일본 등 동양에서도 이 숫자가 널리 쓰였고요. 이렇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이 숫자는 '아라비아인이 쓰는 숫자'라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인도-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지요?
어린아이도 쓸 만큼 쉬운 인도-아라비아 숫자 덕분에 사람들은 큰 수를 마음껏 표시하고, 더하기·빼기·곱하기·나누기 같은 연산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수학, 과학, 금융, 건축, 천문 등 모든 분야가 빠르게 발달하며 인류 생활이 변하기 시작하였지요. 지금 우리 생활은 숫자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렇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숫자에도 인류의 역사가 담겼답니다.
공미라
01.23 편지 한 통서 시작된 사랑… 이베리아 반도 통일하다
▲ 이사벨·페르난도 부부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가톨릭의 나라로 통일해야겠다는 목표 아래 그라나다 정벌에 나섰고, 1492년에 항복을 이끌어냈지요. 가운데 흰 말을 탄 사람이 이사벨 여왕이에요. /위키피디아
1451년 카스티야 왕국의 새 왕비가 예쁜 딸을 낳았어요. 아이는 어머니 이름을 따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요.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오빠인 엔리케 왕자가 왕위에 올라 엔리케 4세가 되었어요. 엔리케 4세는 왕위를 지킬 욕심에 새어머니인 왕비와 이사벨 공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알폰소 왕자를 아레발로라는 시골로 쫓아 보냈답니다. 아레발로의 생활은 비참하였어요. 어린 이사벨은 밥 짓고, 빨래하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며 성장하였지요. 그녀를 견디게 해준 힘이 있었다면 그것은 가톨릭 신앙이었을 거예요.
이사벨은 엔리케 4세에게 충성을 다했어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무능한 왕이었어요. 카스티야는 혼란에 빠졌고, 후계자를 둘러싼 논쟁도 끊이지 않았지요.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동생 알폰소 왕자마저 병으로 죽고, 이사벨과 포르투갈 왕 사이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어요. 15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는 가톨릭을 믿는 포르투갈, 카스티야, 아라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그라나다 왕국으로 나뉘어 영역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이사벨의 결혼으로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싶었던 거예요.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이사벨은 각국의 왕과 왕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왕은 나약하고, 포르투갈 왕은 나이가 많았기에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때 아라곤으로 보낸 사람에게서 멋진 외모와 좋은 성품을 타고났다는 페르난도 왕자의 소식을 들었지요. 당시 열여덟 살이던 이사벨은 열일곱 살인 페르난도에게 편지를 써서 먼저 청혼하였답니다.
▲ 가난한 공주였지만, 현명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스페인 제국의 길을 연 이사벨 1세 여왕. /위키피디아
페르난도 역시 소문을 듣고 이사벨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그는 그녀와 몰래 결혼하려고 장사꾼으로 변장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이사벨이 있는 바야돌리드에 도착했지요. 1469년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합니다. 1474년 엔리케 4세가 죽자, 이사벨은 내란을 이겨내고 이사벨 1세 여왕으로 즉위하지요. 그리고 1479년 남편인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만들어졌어요. 이사벨은 왕비 역할에 그치지 않고, 여왕으로서 나라를 통치했어요. 페르난도는 그런 아내를 존중했고, 두 사람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통치자로서 평등을 유지했지요.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두 나라의 법률이나 화폐가 모두 다르고, 조세 제도도 달랐기 때문에 통일국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이 두 사람의 결혼이 스페인 통일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토가 넓어지고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졌기 때문이에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페르난도 부부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가톨릭의 나라로 통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어요. 강해진 왕권을 기반으로 군대를 만들고 그라나다를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지요.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제국 이후로 가톨릭을 믿던 지역이었는데, 711년 이슬람교를 믿는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어요. 가톨릭 왕국이 조금씩 세력을 키워 영토를 확장하면서 그라나다를 제외한 모든 지역은 회복한 상황이었지요. 전쟁이 시작되자 페르난도는 전쟁터에서 군대를 이끌었고, 이사벨은 병사를 치료하며 후원하였어요.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압딜은 스스로 알함브라 궁전의 열쇠를 넘겨주며 항복했어요. 궁전 꼭대기에 십자가 깃발이 나부끼고,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무려 800여 년에 걸친 가톨릭과 이슬람 세력의 싸움에서 가톨릭이 승리한 거예요.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부르며, 이들에게 '가톨릭 왕들'이라는 칭호를 내렸지요. 카스티야·아라곤·그라나다는 한 나라가 되었고요. 이 사건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재정복 운동)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손자인 카를 5세 때 완전한 한 국가로 합쳐져 오늘날의 스페인이 되었어요. 유럽에서 셋째로 영토가 넓은 나라, 스페인의 역사 속에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1세의 사랑이 담겨 있답니다.
공미라
02.06 이방인에게 노출 않도록… 여자 얼굴 가렸답니다
포로 될까봐 황후 없던 오스만제국… 후궁이 살 비밀 공간 '하렘' 만들어
최근 우리나라 돈으로 재산이 18조원이 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는 얇은 수의만 간단히 걸친 채 관도 없이 공동묘지에 묻혔지요. 게다가 묘비에는 이름도 새겨 넣지 않았다고 해요. 참 의아한 일이지요? 지난달 23일 사망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국왕 이야기입니다. 장례식에 전 세계인의 조문이 이어졌는데요. 미국 오바마 대통령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가 구설에 올랐어요. 이슬람교를 믿는 여성들이 외출할 때 머리를 가리는 히잡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죠.
▲ (왼쪽 사진)최근 사망한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조문을 위해 사우디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과 미셸 오바마의 모습이에요. 미셸 오바마는 머릿수건인 히잡을 쓰지 않아 논란이 됐죠. (오른쪽 사진)머리에 다양한 히잡을 쓴 여성들 모습이에요. /뉴시스·이태훈 기자
▲ 16세기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전쟁으로 인해 황후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렘’이라는 비밀 공간을 만들어 후궁들을 생활하게 했어요. /위키피디아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 이븐사우드가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고 세운 나라예요. 이제, 나라 이름이 왜 사우디아라비아인지 짐작이 가나요? 통일할 당시 1차 대전으로 세계가 어지러웠어요. 그때 이슬람교의 율법을 잘 지키는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무함마드의 계시를 기록한 코란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지요. 코란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행여나 화려한 무덤을 만들면 사람들이 국왕을 신처럼 숭배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이름 없는 무덤을 만든 것이죠.
코란에는 여자들이 머리와 가슴을 가리는 머릿수건을 쓰도록 나와 있어요.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자들은 외출할 때 히잡을 쓰도록 법으로 정해졌죠. 그런데 사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리는지에 대한 기준은 없어요. 머리와 목을 가리는 히잡부터,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가리는 니캅까지. 이슬람 국가 간에도 형태는 달라요. 아마도 코란을 해석하는 문화 차이 때문이겠지요.
히잡이 처음 생긴 건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 고대의 일이랍니다. 사막으로 이뤄진 이 지역에서는 주로 유목생활을 했대요. 필요한 물건을 약탈하는 경우도 많았죠. 물론 전쟁도 잦아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대요.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여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부다처제가 만들어졌죠. 그리고 전쟁이 날 경우 이방인에게 여자들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아 노출되지 않도록 얼굴을 가리는 전통이 생겨났다고 해요. 또한 햇빛을 가리는 기능도 있죠.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화에 따라서는 여성을 존중하는 종교적 표현일 수도 있어요.
▲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와 결혼한 록셀란 황후. 그는 황후가 되기 위해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답니다. /위키피디아
얼굴을 가리는 걸로도 부족해 여자들을 꼭꼭 숨겨놓았던 사례도 있어요. 오스만 제국(1299~1922)의 하렘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란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다스렸어요. 전쟁이 빈번하게 이뤄지면서 황제는 황후를 혹시나 빼앗길까 걱정이 됐죠. 황후가 다른 나라에 끌려가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황제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미로처럼 생긴 공간에 후궁 수백명을 둬 생활했어요. 금지된 곳이라는 뜻으로 '하렘(harem)'이라고 불렀죠. 각 나라에서 온 후궁들과 그 자녀가 생활하는 곳이죠. 한번 하렘에 들어가면 이곳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만 했대요. 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은 황제의 어머니였어요. 당시에는 황제가 되지 못한 아들은 모두 죽여버리기도 했는데,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막아 권력을 강화하는 방법이지요. 아마도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한 후궁들 간의 암투가 살벌했을 거예요. 흑인 노예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다가 오로지 '하맘'이라는 목욕탕 외출만 허락됐죠. 지금도 이슬람 문화를 간직한 지역에는 하맘이 남아있어서 목욕 문화를 체험해볼 수가 있어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었던 전성기는 16세기 술레이만 1세 때였어요. 이때 하렘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는 록셀란이었죠. 록셀란이라는 이름은 러시아 여자라는 뜻인데요. 노예로 팔려 이곳까지 끌려왔어요. 온갖 노력으로 황제 눈에 들어 넷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답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에 가득 차 있었어요. 록셀란은 술레이만 1세를 설득해서 첫 번째 후궁이 낳은 장남을 죽였지요. 그리고는 황제에게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해서 결국 오스만 제국 최초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답니다. 록셀란이 정치에 등장한 이후 오스만 제국의 명성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지요. 세월이 흘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답니다.
오스만 제국에서 있었던 왕자의 난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운 이븐사우드는 왕위를 형제에게 계승하도록 했죠. 그래서 두 번째 사우드 국왕부터 최근 새롭게 왕위를 계승한 일곱 번째 살만 국왕(79세)까지 모두 이븐사우드의 아들이랍니다.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 이하 공미라
02.27 영화 시상식에선 왜 레드카펫을 깔까
붉은 카펫은 '신의 길'이라 불리며 나폴레옹 대관식·귀빈 접대에 쓰여
설 연휴 동안 영화 한 편쯤은 보게 마련이지요. 요즘은 극장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많아졌어요. 그만큼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영화제나 시상식도 많아졌지요. 그래서인지 행사가 열린 날, 어느 여배우가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기도 해요. 배우들이 걸어가는 길에는 레드카펫이 길게 놓여 있죠. 최근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귀한 손님이나 유명인을 맞이할 때는 레드카펫을 이용하는 걸까요?
▲ 현지 시각으로 지난 22일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 여배우가 레드카펫 위에서 한껏 자신을 뽐내고 있습니다. /AP 뉴시스
염색 기술이 부족했던 고대 서양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염색하지 않은 옷을 그냥 입었어요. 물론 풀이나 꽃을 이용해서 물을 들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빨래를 하면 색이 빠지고, 햇볕을 쬐면 바래기 일쑤였어요. 식물성 원료를 이용한 염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질 좋은 동물성 원료를 사용한 사람들이 바로 페니키아인이에요. 알파벳을 처음으로 만들고, 지중해를 누비며 상업 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이들을 '자주색 사람'이라는 뜻으로 '포에니(poeni)'라고 불렀지요. 그리스어로 자주색을 뜻하는 포이닉스(phoinix)에서 나온 것이죠. 페니키아인이 지중해의 해상권을 두고 로마인과 다툰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페니키아인들은 염색에 관심이 많았어요. 지중해에 사는 '푸르푸라(purpura)'라는 소라의 내장을 항아리에 넣고 끓이면 고약한 냄새와 함께 자주색 물감을 얻을 수 있었지요. 푸르푸라에서 영어로 보라색을 뜻하는 퍼플(purple)이라는 말이 나왔답니다. 그런데 만드는 방법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적은 양의 염색 물감만 나왔지요. 1g의 자주색 물감을 얻기 위해서는 1만개나 되는 소라가 필요했어요. 더 많은 물감을 얻기 위해 인근에 있는 바닷가의 바위를 파서 소라 양식장을 만들었죠. 부서진 소라 껍데기들은 언덕을 이룰 만큼 쌓여갔어요. 당연히 이렇게 염색한 옷감은 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싼 가격에 거래됐죠. 그리고 물감을 만드는 방법은 극비리에 유지됐어요. 자주색 옷을 입는다는 것은 부와 권력, 사치와 향락의 상징이 됐지요.
자주색 물감을 만드는 방법은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어요. 성경에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혀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주색이 왕의 복장이었기 때문이지요. 로마제국이 분열되고 나서 비잔틴 제국에서는 직접 염색 물감을 생산하고 판매를 관리했어요.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 고귀한 황제와 추기경을 상징하는 색으로 삼았어요. 532년 성소피아 성당을 짓느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이 니카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망가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테오도라 황후가 "폐하가 입고 계신 자주색 옷은 가장 큰 권위를 상징합니다. 이 자주색 옷을 수의(壽衣)로 삼아 당당히 맞서세요"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 (왼쪽)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바실리우스 2세의 모습이에요. 자주색 옷에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네요. 당시 왕의 복장에는 자주색이 빠지지 않았다고 해요. (오른쪽)라파엘로가 그린 레오 10세 교황의 초상화예요. 레오 10세를 비롯해 추기경들이 붉은색 망토를 입고 있네요. 이때 붉은색은 고귀한 신분을 상징합니다. /위키피디아
지나치게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일까요?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 이후 자주색 물감을 만드는 비법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붉은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이후의 황제와 추기경들의 색은 자주색 대신에 붉은색으로 바뀌게 됐죠. 붉은색 염료는 선인장을 먹고 사는 암컷 연지벌레에서 얻었어요. 연지벌레를 모아서 말리고 물에 넣고 끓여서 여러 물질과 반응하도록 하면 붉은 색소가 만들어졌죠. 10㎏의 옷감을 염색하려면 자그마치 연지벌레 10만 마리 이상이 필요했어요. 이후 붉은색은 가장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색이 됐죠. 황제와 귀족은 붉은 옷을 입으면서 평민은 그것을 못 입게 했으며, 심지어 집 안을 붉은색으로 장식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버렸어요.
중세 서양에서는 붉은색 옷 한번 입어보는 게 소원인 사람도 생겨났어요. 실제로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1524년 독일에서 대규모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였어요. 이후 농민들은 '메밍겐의 12개 조항'을 요구했는데, 그중 하나는 빨간 망토를 입게 해달라는 것이었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붉은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농민의 지위가 올라가고 평등해진다는 의미였거든요. 전쟁에 가담한 30만 명의 농민 중 10만 명이 잔인하게 학살되면서 이 소원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어요.
이렇게 고귀한 붉은색 천이 바닥에 깔리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 아가멤논 편'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붉은 길은 오직 신의 길'이라고 표현했죠. 나폴레옹 1세도 황제가 돼 대관식을 할 때 붉은 카펫을 깔았죠. 나폴레옹의 권위를 신처럼 나타내기 위해서였겠지요. 이후 유럽 왕실에서 외국의 귀빈에 대한 극진한 환영의 의미로 지나가는 길에 레드카펫을 사용해 왔답니다. 헌신과 열정, 사랑, 피, 성령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이면에는 권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03.13 콜라, 2차대전 미군 보급품이었대요
톡 쏘는 짜릿함과 혀끝에 맴도는 청량감으로 즐거움을 주는 검은 음료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이 콜라를 생각하실 거예요. 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콜라는 소비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꼽히지요. 콜라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라는 다국적기업을 주축으로 생산되고 있어요. 올해는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코카콜라 병이 만들어진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예요. 지난 2월 말부터 미국의 애틀랜타에 있는 코카콜라 본사에서는 그간 콜라병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여주는 전시회를 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코카콜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약국에서 팔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게다가 세계적인 음료가 된 계기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전투식량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랍니다
▲ (위 사진)약용으로 만들어졌던 코카콜라가 음료로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콜라 모조품이 시장에 나왔어요. 코카콜라는 다른 회사 제품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병 디자인을 고민하다, 왼쪽 사진처럼 볼록하게 내려오다 허리가 쏙 들어간 모양을 생각해냅니다. 올해는 이 병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예요. (아래 사진)2차 세계대전 당시 콜라는 전투식량으로 미군들에게 큰 인기였다고 해요.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마시는 콜라 한 모금은 어떠했을지 궁금해지네요. /코카콜라컴퍼니 제공·Corbis 토픽이미지
1886년. 미국 조지아 주(州) 애틀랜타의 약사 존 S. 펨버튼은 큰 솥에 설탕, 캐러멜과 이것저것을 넣어 약을 만들고 있었어요. 코카 나뭇잎과 콜라나무 열매를 넣고 탄산수를 첨가한 순간 코카콜라가 만들어졌죠. 만병통치약이라고 이름 붙은 약들이 신문 광고의 절반을 차지하던 그 시절, 코카콜라는 두통과 위장병, 피로 해소에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났죠. 때마침 금주법의 시행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술 대신 마시기 시작하면서 크게 인기를 끌었어요. 펩시콜라 역시 약사였던 C. 브래드햄이 처음에는 소화제로 만들었어요. 펩시라는 이름도 소화불량(dyspepsia)에서 온 말이에요. 콜라의 인기는 광고와 시음 행사를 통해서 미국 전역으로 확대돼 갔습니다.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어요. 전쟁의 피로감을 이기기 위해 껌, 초콜릿과 함께 미군이 가는 곳이면 세계 어디에나 보급됐죠. 포탄에 휩싸인 전쟁 현장 속에서 미군들은 병 밑바닥에 새겨진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유의 상징으로 여겼다고 해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연합국의 군인들은 콜라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콜라는 세계인의 음료가 됐죠.
이렇게 전쟁을 통해서 세계인의 음식이 된 전투식량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요. 전투식량은 조리와 운반이 쉽고 영양가가 높아야 해요. 특히 전쟁이 길어지거나 멀리 원정할 경우 더욱 그렇지요. 그 옛날 유목민족은 말 안장 옆 주머니에 말린 육포를 지니고 다니며 농경민족을 공격했어요. 카이사르가 이끌던 로마 군대는 돼지고기를 훈제한 햄과 소시지를 먹었어요. 영국군은 소금에 절인 청어를 먹었지요. 스페인의 대표 음식인 하몽, 우리나라의 미숫가루와 일본의 주먹밥 역시 전쟁터에서 유용했어요.
본격적인 전투식량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00년대예요. 유럽 전체를 종횡무진 누비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산업 장려협회'를 만들어 1만2000프랑의 상금을 내걸었어요. 뛰어난 프랑스의 인재들을 모아 전쟁에 필요한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죠. 이때 N. 아페르는 샴페인 병에 양배추·브로콜리·양파·당근을 넣어서 코르크 마개로 막은 후 끓는 물에 살균하는 병조림을 개발해 1809년 상금을 거머쥐었어요. 병조림을 사용하고 나서 음식을 따로 조리하지 않아도 되니 식사 시간이 짧아졌죠. 물론 병사들이 운반해야 하는 보급품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죠. 그 덕분에 나폴레옹 부대의 이동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고 해요. 총이나 대포 못지않은 새로운 무기 역할을 톡톡히 해냈죠
▲ (왼쪽 사진)사진 속 병조림은 나폴레옹이 전쟁 중 장기간 보관할 수 있고 휴대가 편리한 식품 보존 방법을 찾기 위해 현상금을 걸자 아페르가 만든 것이에요. (오른쪽 그림)전쟁을 통해 통조림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됐고,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통조림을 만드는 식료품 공장이 생겨났답니다. /위키피디아
전쟁에 지던 영국은 병조림을 능가하는 새로운 전투식량이 필요했어요. 병조림보다 가볍고 튼튼한 그 무엇. 바로 통조림의 개발이었어요. 주석을 이용해 녹슬지 않는 통조림을 처음 만든 사람은 P. 듀랜드예요. 병조림보다 훨씬 오래 음식을 보관할 수 있었고, 깨지지도 않았죠. 통조림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미국의 남북전쟁인데요, 지금은 비싼 해산물인 바닷가재, 연어 등이 활용됐어요. 당시에는 가장 저렴하고 흔한 재료였다고 하니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희소성이 참 놀랍죠.
통조림을 기반으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군인들은 개별 포장된 전투용 개인 식량을 배급받았고, 훨씬 균형 잡힌 식사를 하게 됐어요. 하지만 이제는 통조림이 무겁고 제작 단가가 너무 비싸다는 게 흠이 됐죠. 1960년대부터 본격 연구에 들어가서 이후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레토르트 식품이에요. 우리가 아는 전자레인지용 음식과 3분 요리들이 그것이죠. 발열 팩을 넣어 순식간에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도 개발됐죠. 간편하게 식사할 때, 등산을 갈 때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식품 속에는 전쟁의 역사가 숨어 있답니다.
04.10 로마는 왜 크리스트교를 박해했을까
크리스트교는 세계 3대 종교라고 할 만큼 신도가 많아요. 크리스트교에서 분리된 가톨릭, 개신교, 그리스 정교 등의 신도를 모두 포함하면 대략 20억 명 이상이 되죠. 지난 4월 5일은 크리스트교의 큰 축제 중 하나인 부활절이었어요. 부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로마 교황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가졌죠. 그런데 예수는 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을까요? 왜 예수와 같은 민족인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차별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고대 로마 제국에는 다양한 신이 존재했어요. 신들의 왕 유피테르, 지혜의 신 미네르바, 전쟁의 신 마르스, 사랑의 여신 비너스 외에 죽은 황제까지도 신으로 받아들여졌죠. 넓은 영토만큼이나 많은 신이 존재한 셈이죠. 신에게 제사 지내는 날을 정확히 표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달력이에요. 예를 들어 1월(January)은 야누스 신에게 바친 달이었고, 3월(March)은 전쟁의 신 마르스를 위한 달이었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신 이외에도 각 가정에는 수호신이 있었어요. 제사를 소홀히 지내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해서 온갖 정성을 다했답니다. 그러니 오랜 옛날, 유대인이 섬기는 신 하나쯤 더 받아들이는 건 대수롭지 않았을 거예요.
▲ 로마 제국 제5대 황제였던 네로 황제는 로마에 큰불이 나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소수 종교인 크리스트교에 책임을 뒤집어씌워 대학살을 벌였어요. 이때 많은 크리스트교인이 사나운 개나 사자의 먹잇감이 됐어요. /위키피디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어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은 이 지역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자치를 허용했죠. 유대교는 유일신인 여호와에게 유대 민족만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종교예요. 그들은 언젠가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나리라 믿고 있었죠. 그때 예수가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강조하며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켰어요. 차별 없는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세례를 줬죠. 예수 곁에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힘없고 약한 사람이 넘쳐났죠.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존 형식을 벗어난 행보를 보이는 예수 때문에 자신들의 정치적인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웠어요.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고, 재판을 통해 예수를 사형에 처하기로 했답니다. 그러고는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을 요구했죠.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정치범이라는 이유에서였어요.
예수의 죄를 찾지 못한 빌라도는 난처했지만, 결국 예수에게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는 형벌을 내렸어요.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는 오늘날 적십자의 붉은 십자가가 돼 사랑과 희생의 상징이 됐죠.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유대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오랫동안 크리스트교 중심의 유럽 세계에서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 돼 고난의 역사를 갖게 됐죠.
예수가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했음을 믿는 제자들이 크리스트교를 놀라운 속도로 퍼뜨리기 시작했어요. 유대인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겼던 유대교에 비해 크리스트교는 모든 민족에게 평등하게 퍼져 나갔죠.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와 바울의 전도 여행은 교회의 씨앗이 됐어요.
64년 여름, 폭염을 피해 휴가를 떠났던 네로 황제에게 기분 나쁜 소식이 들려왔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로마가 불타고 있습니다." 이 때의 화재로 로마시 대부분은 잿더미가 됐어요. 네로 황제는 이재민에게 자기 정원을 내주고, 음식을 주며 상황을 수습했지만 허사였죠. 결국 네로 황제는 크리스트교도를 방화범으로 지목해서 책임을 덮어씌웠어요. 그들이 유일신을 섬긴다며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노여움을 탔다고 생각했지요
▲ (왼쪽)과거 로마인들은 정치적 선동가, 해적, 노예 등 사형에 처할 중죄인을 다스릴 때 십자가를 많이 사용했어요. 크리스트교인들이 예수를 따르자, 그들의 결속력에 위협을 느낀 로마의 지배층에 의해 예수 역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처형됐죠. (오른쪽)네로 황제의 모습. /위키피디아·Corbis 토픽이미지
기름을 바른 나무 기둥에 묶어 놓고 불태워 죽이거나, 짐승 가죽을 뒤집어씌우고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되도록 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기 시작했어요. 베드로와 바울도 그때 순교했지요. 전염병이 돌거나 불이 날 때마다 크리스트교도들의 수난은 계속됐어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에 와서는 그에 맞서 우상 숭배를 거부한 크리스트교도가 떼죽음했어요.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로마 군대 입대를 거부한 것이 큰 분노를 샀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관광지가 된 이탈리아의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 터키의 데린쿠유 유적은 땅속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초기 크리스트교 신앙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후 순교자의 피는 더 큰 열매를 맺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는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는 로마의 국교가 됐답니다. 크리스트교를 믿는 것으로 더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세상이 온 것이죠. 이후 크리스트교는 유럽 전체 지역으로 퍼졌어요. 서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이슬람교와 대립하며 유럽 세계를 지켜왔지요. 그리고 신항로 개척 이후에는 아시아와 신대륙으로 퍼져 오늘날 세계적 종교가 됐답니다.
06.05 언제부터 로또 사며 '행운' 바랐을까
학생들에게 유난히 가슴이 설레고 두근두근 거리는 날이 있어요. 성적표 받는 날도 그렇지만, 교실에서 자리를 바꾸는 날의 설렘에 비길 수 없죠. 교탁 바로 앞자리에 앉기를 희망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뒷문 옆에 앉고 싶어 하지요. 어떤 친구와 짝이 되어 앉는지에 대한 기대감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작은 교실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원하는 자리에 앉도록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저마다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중 하나가 추첨이에요. 제비를 뽑거나 아니면 최신 유행하는 컴퓨터 자리 바꾸기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추첨을 통해서 자원을 나누는 방식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있었어요. 오늘은 인생을 역전시키는 추첨인 복권에 대한 살펴볼게요.
구약성서의 민수기에는 추첨에 대한 오래된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맛보며 이집트를 탈출한 내용이 나와요. 하지만 그들은 농사지을 땅이 없으니 생활이 어려웠어요. 이때 모세는 인구를 조사하고 나서 추첨을 통해 요르단 강 근처의 땅을 나누어주었어요. 아마 그 당시 남들보다 더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된 사람에게는 대박의 행운이었을 거예요.
▲ 복권의 시작은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요. 오랜 기간 제비를 뽑거나 추첨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왔어요. 그러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재정 마련을 위해 발행한 복권인‘lotto’에서 유래해 지금은‘로또’라고 불리고 있어요. /Getty Images 멀티비츠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선물 추첨을 통해 제국을 유지하고, 황제로서 존경받기를 시도했어요. 로마의 첫째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농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축제일이면 많은 손님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었어요. 초대받은 사람들은 식사비를 내고 영수증을 받았는데, 영수증이 바로 선물을 추첨하는 행운권이었어요. 큰 경품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소소한 경품에 당첨되었기 때문에 행운권 아이디어는 재정적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어요.
황제의 입장에서는 귀족들과 오락을 즐기고, 수익금으로 부족한 세금도 채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지요. 네로 황제 역시 이런 방식을 아주 좋아했어요. 로마에 큰 화재가 나서 재정의 어려움을 겪을 때, 파티를 하며 수천 장의 행운권 이벤트를 개최했어요. 작게는 귀뚜라미 한 마리부터 노예, 부동산, 선박에 이르는 큰 경품이 100% 주어졌어요. 남은 돈은 로마를 재건하는 데 사용되었어요.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복권은 다양하게 이어졌어요. 특히 중세 유럽에서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면서 화폐 경제의 성장과 함께 복권도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지요. 15세기 벨기에의 플랑드르에서는 항구 개발과 성당 건설, 가난한 사람 구제를 위해 복권을 발행했어요.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하수도를 정비하기 위해 발행한 복권 이름은 '로또(lotto)'였어요. 이탈리아어로 '행운'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에서 유명한 로또복권의 명칭이 유래했어요. 그리고 영어로 복권을 'lottery'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당첨자에게 선물이 아닌 현금을 주기 시작했대요. 당시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화국에서는 매년 90명의 정치인 중에서 5명을 추첨해서 지도자를 선출했는데요, 우리가 아는 로또 복권의 방식은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해요. 우리나라의 로또 복권은 45개의 숫자 중 6개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지요. 중세 유럽에서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만들어진 복권들 덕분에 많은 공공건물과 성당이 지어졌어요. 고딕 양식으로 유명한 독일의 쾰른 대성당 역시 이렇게 만들어졌지요.
▲ (왼쪽 위)독일의 유명한 쾰른 대성당은 화재로 건물이 파손됐을 때,‘ 대성당 복권’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복구될 수 있었어요. (왼쪽 아래)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공식 복권인‘런던 올림픽 후원권’. (오른쪽)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연회에서 선물을 추첨하는 행운권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나눠줬죠. /조선일보 DB·위키피디아
복권 열풍은 전 세계로 확산했어요. 프랑스의 루이 15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했죠. 미국 건국 과정에서도 복권은 큰 역할을 했어요. 벤저민 프랭클린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대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대포를 사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복권을 발행했어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서부 개척시대에 복권 수익금으로 산맥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했어요. 미국을 대표하는 하버드·예일·컬럼비아·프린스턴·브라운 대학 등 유명한 대학들도 같은 방법으로 지원을 받아서 설립되었어요.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공식적 복권은 1947년에 만들어진 '런던 올림픽 후원권'이었어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나서 당당하게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서 올림픽에 도전했지만, 선수단의 식비나 교통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복권 1장의 가격은 100원. 1등 당첨금은 당시 집 한 채 가격이었던 100만원이었어요. 100원짜리 복권 한 장에 담긴 국민의 마음을 모아 67명의 선수단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어요.
물론 복권을 발행하는 기관이나 사는 사람이 모두 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나눔의 마음을 지닌 것은 아니에요. 이탈리아에서 복권은 도시 전체를 1등 당첨금으로 내 걸 만큼 사행성 도박으로 흐르기도 했고, 지나치게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했어요. 그 때문에 시대를 달리하며 종종 발행이 금지되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유행하는 건 적은 금액으로 당첨을 기다리며 그려보는 미래의 소망 때문이 아닐까요?
06.19 아스텍 왕국, 천연두로 무너지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어요.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열이 나고 기침을 하며 호흡이 곤란해지는 증세를 보이는데, 명확한 감염 경로를 모르기 때문에 예방을 위해 무엇보다도 개인 위생이 강조되고 있지요. 일부 학교는 휴교하거나,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을 지도하기도 해요. 메르스 이전에도 조류인플루엔자나 신종 플루의 유행으로 수학여행, 체육대회 등 대규모 학교 행사가 취소된 경험이 있을 거예요. 뭐 이렇게 짧은 기간에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나 싶겠지만, 사실 인간의 역사는 전염병과 벌인 끝없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 결핵, 말라리아, 에이즈, 인플루엔자 등 잊을 만하면 새로운 질병이 등장해왔어요. 이 중 '두창'이나 '마마' 또는 '손님'이라고도 부르는 천연두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대표적 전염병이에요
▲ 고대 아스텍 문명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모습으로 이후 이 일대는 멕시코시티가 됐어요. 에르난 코르테스의 침략 땐, 철저히 약탈당한 곳이죠. /Corbis/토픽이미지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곳은 멕시코 고원에 있는 아스텍이었어요. 아스텍의 전설에 따르면, 지혜의 신 '케찰코아틀'이 사람을 창조했다고 해요. 케찰코아틀은 뱀 몸통에 노란 머리를 하고, 흰 얼굴에는 수염을 기른 야릇한 모습을 했어요. 다른 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그는, 큰 새를 타고 돌아오겠다는 예언을 남기고 동쪽 바다로 떠나버렸대요. 하지만 농사짓고, 쇠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큰 어려움 없이 먹고살 수 있었어요. 이웃 부족과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거나 연합하면서 큰 제국을 만들어나갔어요. 마야 문명을 계승해서 달력과 문자를 만들고, 피라미드 모양 신전에서 지혜의 신을 기다리며 제사를 지냈어요.
바로 그 무렵, 대서양을 건너 동쪽 에스파냐는 모험의 열기로 들썩거리고 있었지요. 콜럼버스의 신항로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가면 황금을 얻을 수 있다는 야심가들 때문이었어요. 에스파냐의 귀족 출신인 에르난 코르테스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쿠바 총독의 일을 돕던 그는 500여 병사와 말 16필을 이끌고 야심 차게 멕시코 원정길에 올랐어요. 드디어 1519년 수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한 아스텍 왕국에 도착했어요.
▲ 16세기 초 에스파냐 병사들이 아스텍 왕국의 테노치티틀란을 침입했을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위). 천연두로 인해 죽은 아스텍인의 모습이에요(아래 왼쪽). 아스텍 왕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아래 오른쪽). /위키피디아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섬들을 연결해서 만든 테노치티틀란에서 바라보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깜짝 놀랐어요. 돛을 높이 단 코르테스의 배가 날개를 활짝 편 새처럼 보였거든요. 하얀 얼굴에 금발을 휘날리는 코르테스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케찰코아틀 같았죠. 황제는 성문을 열고 환영 인사를 보냈어요. 정말로 착각을 한 건지, 아니면 에스파냐 사람들의 위용에 놀라서 두려웠던 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르테스의 속셈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코르테스가 황제를 인질로 잡고, 복종과 황금을 요구했기 때문이에요. 도시 가운데에는 신전 대신 성당을 짓도록 했죠.
코르테스의 행동에 화가 난 사람은 쿠바 총독이었어요. 명령을 어기고 주어진 임무를 벗어나 아스텍까지 가버린 그를 용서할 수 없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코르테스는 부하들에게 테노치티틀란을 맡기고, 싸움터를 향해 갑니다. 그러고는 쿠바 총독이 보낸 원정대까지 자기편으로 만들어 의기양양하게 아스텍에 돌아왔어요. 그러나 뜻밖에도 아스텍 사람들의 반란으로 오히려 자신의 부하들이 내쫓겨 있는 상황이었어요.
적은 군사로 30배나 많은 아스텍 군대를 어떻게 이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반전이 일어났어요. 원정대에 속해 있던 노예 중 천연두 환자가 섞여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아스텍 사람들에게 천연두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어요. 열이 나고, 특히 얼굴과 온몸에 물집이 잡히더니 순식간에 고름이 차올랐어요. 시름시름 앓던 아스텍 사람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사망하는 재앙이 벌어졌어요.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고름이 있던 얼굴에 움푹 파인 흉터를 남겼어요.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미 기원전부터 겪어왔던 전염병이라 면역이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아스텍 사람들은 처음 겪는 바이러스의 침공이었거든요. 결국 1521년 아스텍 문명은 정복당하고 폐허가 되었어요. 자신을 '멕시카(Maxica)'라고 부르던 아스텍 왕국은 오늘날의 멕시코가 되었고, 테노치티틀란이 있던 호수는 흙으로 메워져 멕시코시티가 되었답니다.
오늘날 페루에 있는 잉카문명 역시 168명밖에 되지 않는 피사로의 군대에 맥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아스텍과 잉카 문명이 몰락한 까닭은 기마 부대의 기동성, 총이나 창과 같은 강력한 무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천연두 바이러스의 무서운 전염성이 더해졌기 때문이에요. 이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까지 치명적 피해를 남겼지요.
1796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종두법이 보편화하면서, 1980년 5월에 '천연두는 지구에서 사라졌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가 있었어요. 문명을 파괴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의 땅으로 만들 만큼 위력을 지닌 천연두 바이러스도 결국은 인간에게 정복당한 셈이지요.
07.03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미국, 새롭게 태어나다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12월 31일 자정 무렵이면 서울 종로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보신각에서 울리는 33번의 종소리에 새해의 소망을 담기 위해서지요. 종로(鐘路)는 이름 그대로 '종이 있는 거리'를 뜻하는데요, 조선시대에는 보신각에 있던 동종 소리가 한양 성문을 여닫는 신호로 사용되었어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고요. 그렇다면 지금 있는 종은 무엇일까요? 에밀레종으로 더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의 복제품이에요. 크기도 매우 크지만, 울리는 소리가 깊고 아름다워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지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종으로 알려진 '자유의 종'은 미국 독립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해요.
▲ 식민지 대표들이 주축이 된 대륙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기초위원이 독립선언문을 의장에게 제출하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미국은 정치적인 자유, 종교적인 자유, 경제적인 성공을 꿈꾸는 이민자들의 땅이었죠. 이 사람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긴 건 조지 3세가 영국의 왕이 되면서부터였어요. 조지 3세는 어린 시절부터 읽고 쓰기가 느린 데다가 정신 질환이 있었다고 해요. 1763년, 7년 동안 계속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었어요. 그는 조지 그렌빌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했어요. 중상주의는 식민지를 최대한 이용해서 본국이 최대한 이익을 얻도록 하는 정책이에요. 아메리카 식민지 입장에서 봤을 때, '참을 수 없는 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설탕법으로 영국에서 수입하는 설탕 이외의 다른 설탕은 거래가 금지되었어요. 아메리카에서는 화폐를 발행할 수 없다는 화폐법도 생겼지요. 1765년에 만든 인지법은 신문, 달력, 팸플릿, 면허장, 증서, 유언장 등 다양한 종류의 인쇄 문서에 세금을 내도록 했어요. 영국이 가져가는 세금은 이전과 비교하면 10배나 증가했어요. 식민지인들은 분노했고, '식민지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탄원서를 영국 왕에게 보냈어요. 결국 그렌빌 수상이 물러났지만, 중상주의 정책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법은 얼마든지 만들면 그만이었죠. 바로 차(茶)에 대한 관세가 문제였어요.
식민지인들은 영국처럼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해 있었어요. 물론 차를 수입하고 판매하는 상인도 많았고요. 그런데 영국에서 새로운 법을 발표한 거예요. 일명 차세법(Tea Act).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차를 수입하는 상인은 관세를 내야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는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법이죠. 당연히 동인도회사의 제품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면서 상인들의 불만은 폭발했어요. 1773년 12월 인디언으로 변신한 50여명의 사람이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회사의 배에 올라탔어요. 그리고는 300여 상자의 차를 바다를 향해 던졌어요. 비릿한 바다 냄새는 씁쓸한 홍차의 향으로 뒤덮였을 거예요. 이것이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랍니다. 보스턴 차 사건에서 사람들이 요구했던 것은 독립은 아니었어요. 그들은 어디까지나 식민지에 사는 이민 2세 혹은 3세였으니까요. 하지만 이후에 일어난 여러 사건을 연결해주는 첫 번째 고리가 되었지요.
▲ 미국의 독립 선언을 알린 ‘자유의 종’의 모습(아래 오른쪽). 영국의 식민지 조세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미국인들이 일으킨 ‘보스턴 차 사건’을 표현한 그림(위). 그가 펼쳤던 식민지에 대한 과세를 계기로 미국의 독립을 불러온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아래 왼쪽). /위키피디아
1774년 13개 지역의 식민지 대표들은 대륙회의를 열어 만약에 있을 영국의 공격에 대비해 민병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어요. 이 무렵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기기도 했어요. 1775년에는 실제로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민병대의 충돌이 일어나 사망자가 발생했어요. 영국은 독일 용병을 끌어들였고, 식민지인들은 분노와 두려움이 교차했어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사람,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져 분열되었어요. 토머스 페인은 '상식'에서 영국의 왕을 비난하면서 공화국으로 독립하자고 주장해서 큰 호응을 얻었어요. 점점 식민지인들의 마음이 독립으로 기울기 시작한 거예요.
1776년 7월 2일 독립을 결의하고,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어요. 미국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지키고 있어요. 이어서 7월 8일에는 필라델피아 광장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어요. 바로 그때 '자유의 종'을 울려서 독립의 시작을 시민에게 알렸다고 전해져요. 뉴욕 시민은 조지 3세의 동상을 녹여서 만든 총알로 전투에 참가했어요.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어요. 요크타운 전투에서 거둔 큰 승리를 계기로 1783년 독립을 이루었어요.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어버린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를 개척하게 되었죠.
실제로 역사 속의 바로 그날 종이 울렸다는 기록은 없어요. 하지만 미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종을 울려 기념했어요. 1837년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자유의 종'이라 이름 붙이고 나서 미국 독립과 차별 없는 세상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지요. 1846년 조지 워싱턴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치다가 심하게 금이 가서 지금은 비록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말이죠.
07.31 케플러의 우주 망원경… 가려져 있던 천체의 비밀 밝히다
"지구로부터 1400광년 떨어진 백조자리에서 지구와 거의 흡사한 행성 '케플러-452b'를 발견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대사와 같은 이 말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지난 7월 23일(현지 시각) 발표한 내용이에요. 지난해 인기 있었던 영화 인터스텔라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지요. 1400광년은 자그마치 1경3254조㎞나 되는 먼 거리인데요. 이렇게 먼 거리에 있는 행성을 관측할 수 있는 것은 과학자이자 점성술사였던 케플러(1571~1630)의 이름을 딴 케플러 우주망원경 덕분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은 지금 내가 사는 현실 세계와 밤하늘에 관심이 많았어요. 날마다 모양이 달라지는 달, 계절마다 위치가 바뀌는 별…. 밤이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했죠. 이집트 역시 나일 강의 범람 시기를 알아내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며 천문학을 발달시켰어요. 이러한 오리엔트 문명을 이어받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들도 자연현상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지요.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거나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기도 했어요.
▲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나머지 행성들이 그 주위를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표현한 그림이에요. /Corbis/토픽이미지
천문과학의 발달에 제동이 걸린 것은 기독교 중심의 중세가 시작되면서부터예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우주관이 되었고, 천문학은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이후로 1000년 동안 서유럽의 모든 문화는 인간보다는 신, 철학이나 과학보다는 신학이 중심이 되었지요. 신의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은 점점 작아졌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중세를 암흑시대로만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수도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고대의 문화유산이 면면히 이어져 보존되었으니까요. 다시 말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씨앗을 품고 있었던 거죠.
14세기 무렵 변화의 중심에 선 나라는 바로 이탈리아였어요. 이곳은 고대 로마제국의 중심지로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요. 봉건제도에 얽매인 농촌의 장원과 달리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는 활기찼어요.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었죠. 중세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어요. 특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아름답게 표현했지요.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메디치 가문에서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피렌체는 꽃이라는 도시 이름 그대로 문화의 꽃이 되었고요. 새로운 열풍은 알프스를 넘어 서서히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갔어요. 마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다시 살아난 듯했어요. 게다가 교회와 교황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어요.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교황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거침없이 비난했어요.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중세 기사들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했죠. 이렇게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일어난 인간 중심적인 문화 운동을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불러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 독일의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의 모습(왼쪽). 그가 만든 망원경의 원리는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지요. 초기의 천문학은 별과 달을 보며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의 형태였어요. 오른쪽은 점성술을 표현한 것이에요. /위키피디아
예술과 문학에서만 새바람이 분 것은 아니었어요.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동양의 새로운 발명품이 전해졌어요. 화약이 전해지면서 봉건제도를 이끌던 기사 계급은 몰락하게 되었어요. 나침반은 새로운 항로 개척을 통해 사람들을 낯선 세계로 이끌었죠.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 활판 인쇄술로 책이 보급되면서 지식의 확대를 가져왔답니다.
중세 사회를 이끌어오던 질서가 무너지면서 르네상스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사는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돌고 있다는 천동설에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였어요. 사실 그는 한 번도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바라본 적이 없어요. 다만 시력은 좋았다고 알려졌죠. 그는 그동안의 연구를 토대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고 있다는 지동설을 알아냈어요. 하지만 그 주장을 죽을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해요. 중세의 우주관을 뒤엎는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으니까요. 대신 '천체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그의 책이 출판되던 날, 공교롭게도 사망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책 제목의 revolutionibus에서 혁명을 뜻하는 revolution이 생겨났다고 해요. 망원경을 통한 우주 관측으로 지동설을 증명해낸 과학자가 갈릴레이예요. 갈릴레이가 접안렌즈에 오목렌즈를 사용해 망원경을 만들었다면, 케플러는 볼록렌즈 두 개를 사용해서 더 높은 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었지요.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제작되었어요. 이런 방식의 망원경을 케플러식 망원경이라고 부르는데요. 현재 미국의 나사는 케플러우주망원경으로 우주를 탐사하고 있지요. 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구한 뉴턴은 이 망원경을 더욱 발전시켜 반사망원경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17세기 과학 혁명의 시대를 열었어요.
점성술에서 시작된 천문학은 이제 1400광년 밖의 우주에서 또 하나의 지구를 찾을 정도에 이르렀어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08.28 116년… 그들은 무엇을 위해 오랜 시간 싸웠을까
바다를 사이에 놓고 마주 선 영국과 프랑스가 난민 문제로 요즘 떠들썩해요. 세계 각국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영국행을 택한 난민들이 브리티시 드림(British Dream)의 꿈을 안고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로 모여들고 있어요. 칼레는 영국의 포크스톤까지 해저로 연결된 유로터널이 시작되는 곳이고, 도버까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에서 영국에 밀입국하려는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터널로 진입하거나 화물차에 몸을 숨기고, 혹은 밀항을 하고 있어요. 칼레가 난민촌이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유로터널 관리를 두고 날 선 공방도 계속되고 있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영불해협은 직선거리 약 34㎞로 그 거리가 좁기 때문에 숙명처럼 많은 전쟁에 휘말려야만 했어요. 오늘은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백년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해요.
▲ 중세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담은 그림. /위키피디아
봉건제도가 한창이던 중세 유럽에서 왕은 충성을 맹세한 봉신(귀족)에게 봉토(땅)를 주어 다스렸지요. 여러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여러 지역의 땅을 봉토로 받을 수도 있었죠. 당연히 왕권은 약했고, 오늘날과 같은 국가나 국민의 개념은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다스리던 귀족이 바다 건너 잉글랜드(오늘날의 영국)를 점령하고는 영국의 왕이 되는 역사적인 일이 발생했어요. 노르만 정복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윌리엄 1세는 영국의 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귀족이라는 이중 신분을 갖게 되었죠.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 갈등의 씨앗이 되었어요.
▲ 백년전쟁에서 있었던 역사적 일화를 바탕으로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들' 조각상. /위키피디아
세월이 흐르면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 왕의 땅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자신이 귀족의 위치에 있으니 권력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반대로 프랑스 왕은 영국 왕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것이 숙원 사업이 되었고요. 결국 이 갈등은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전쟁으로 폭발했어요. 프랑스의 왕위가 4촌 형제였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가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반박하고 나선 거예요. "내 어머니는 샤를 4세의 누이였다. 당연히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 후보자는 조카인 나다." 게다가 영국과 손잡고 모직물 공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플랑드르 지역의 상인들이 앞장서서 영국을 지원했죠. 프랑스 땅이지만 영국을 응원할 만큼 당시에는 국가나 영토의 개념이 부족했던 거예요. 1337년 시작된 전쟁은 자그마치 116년간 지속하다가 1453년에야 끝났어요. 사람들은 긴 전쟁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이라 부른답니다. 겉보기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일어난 전쟁처럼 보이지만, 실은 플랑드르를 비롯한 땅을 차지하려는 전쟁이었죠.
▲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랭스 대성당(사진 왼쪽), 프랑스 카페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한 샤를 4세(사진 오른쪽). /위키피디아
전쟁은 처음에 영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했어요. 영국군은 갑옷을 뚫을 만큼 놀라운 위력을 지닌 석궁으로 무장했죠. 영불해협 건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칼레를 포위하고 공격했어요. 칼레의 시민은 1년 동안 결사적으로 버텼지만, 결국 1347년 항복하고 말았어요. 이때 에드워드 3세는 시민을 살려주는 대신 그동안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6명의 대표를 처형하겠다고 했어요. 누가 감히 죽음 앞에 선뜻 나설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내가 시민의 대표로 죽음을 택하겠소!" 하며 용기 있게 외친 사람이 있었어요. 칼레에서 가장 큰 부자였던 생 피에르였죠. 그의 뒤를 따라 시장, 상인, 법률가, 귀족 등이 나섰다고 해요. 놀라운 희생정신이죠. 다행히 임신한 에드워드 3세 왕비의 간청으로 사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로댕의 조각으로 다시 살아난 이들의 이야기는 칼레 시청 앞 광장에서 이기적인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리고 있죠. 이렇게 사회적으로 고귀한 위치에 있는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요.
칼레가 함락되고 나서도 영국의 승리가 이어졌어요. 1356년에는 프랑스 왕이었던 장 2세가 포로로 잡혀 치욕을 당했죠. 결국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이 맺어지면서 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영국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대신에 이때부터 칼레를 새로운 영토로 얻었죠. 이후에 전쟁은 페스트, 농민반란 등을 겪으면서 휴전했다가 다시 싸우기를 반복해요. 이 전쟁이 만약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전쟁 말미에 신의 부르심을 받고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의 활약 덕분에 프랑스는 승리할 수 있었어요.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영토를 회복했어요. 다른 나라와 영토의 경계가 확실해지고 국가의 개념도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단 한 곳, 칼레만이 예외였지요. 이후에도 칼레는 영국의 영토로 남아 200년 동안 지배를 받았답니다. 영국은 대륙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섬나라로서의 인식을 강화했죠. 뜻밖에도 서로 다투고 미워하다가 영국인, 프랑스인이라는 국민의식이 생겨났어요. 전쟁 중 많은 귀족이 사망하면서 왕권이 강해져서 근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전쟁 중 세금을 걷는 권리를 얻은 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하며 강력한 권력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어요. 백년전쟁은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와 국민을 만들어준 전쟁이 되었죠.
09.11 영국의 여왕, 그녀는 왜 '검은 드레스' 고집했을까
최근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이 손꼽은 역대 최고의 여왕은 엘리자베스 2세라고 해요. 이렇게 큰 인기를 누리는 엘리자베스 2세는 지난 9일 오후 5시 30분(현지 시각)을 기준으로 영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군림한 왕으로 등극했죠.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왕관과 함께했던 2만3226일 16시간의 세월을 넘어선 거예요. 두 여왕은 시기는 달라도 세계사의 굴곡을 겪으며 영국인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지요. 푸른색 옷을 즐겨 입는 엘리자베스 2세와 달리 빅토리아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걸로 유명해요. 당시 귀족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던 것과도 대조되죠.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은 왜 검은색 드레스를 고집한 걸까요?
▲ 검은 드레스를 입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Corbis / 토픽이미지
1837년, 열여덟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된 빅토리아에게 정치는 낯설기만 했어요. 의회를 구성하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다툼에 끼어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지는 위기를 겪고 있었어요. 때마침 독일계 왕족인 동갑내기 외사촌 앨버트가 영국을 방문했어요. 누가 봐도 훤칠하고 준수한 용모에 지성을 갖춘 신랑감이었지요. 빅토리아는 점차 그에게 마음을 열었죠.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 빅토리아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어요. 새하얀 옷감은 구하기 어려운 데다가 세탁도 어려워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죠. 눈처럼 하얀 드레스는 여왕의 결혼식을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했고, 웨딩드레스의 원조가 되었어요.
▲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의 결혼식. /위키피디아
영국 여왕을 아내로 둔 앨버트는 남편으로서 어떻게 조력했을까요? 지금까지 여왕의 남편들은 별다른 호칭이나 역할이 없었어요.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는 그냥 에스파냐 왕이었어요.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독신이었고, 명예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메리 2세와 남편 윌리엄 3세는 공동으로 왕이 되어 통치했지요.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죽은 여왕의 남편도 있어고요. 그들과 달리 앨버트는 여왕의 그늘에 가린 존재가 아니라 여왕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되었어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답게 신실한 사랑을 보여주었어요. 빅토리아에게는 남편이자 선생님이었고, 부모님이었으며, 개인 비서였지요. 그녀가 편두통과 신경질 증세로 불같이 화를 낼 때도 참을성 있게 받아주었어요. 자녀 9명을 낳아 기르는 동안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점점 덩치가 커져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잊지 않았어요. 그는 복잡한 런던을 떠나서 아이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즐기기를 좋아했어요. 빅토리아는 앨버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요. 런던과 멀어질수록 정치 개입이 줄어들어 다수당의 수상이 책임지고 정치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고요.
▲ 1837년 즉위식 당시 빅토리아 여왕(위).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그들의 자녀들(아래). /위키피디아
앨버트가 특히 정성을 기울여 주도했던 것은 1851년의 런던 만국박람회였어요.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기계들을 선보이면서 영국의 위상을 세계에 떨친 최초의 엑스포(EXPO)였지요. 온통 유리로 만들어진 수정궁은 보는 사람을 감탄하게 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영국의 전성기를 상징했어요. 1857년 드디어 영국 의회에서 앨버트에게 '여왕의 부군(The Prince Con sort)'이라는 호칭을 결의합니다. 지금까지 영국에서 이 호칭을 받은 사람은 앨버트 한 사람뿐이에요.
어쩌면 실질적인 영국 왕이었을 앨버트는 마흔두 살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고 말아요. 빅토리아는 깊은 실의에 빠졌고, 검은 상복으로 남편을 애도했죠. 유난히 검은 드레스의 이미지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에요. 그녀의 검은 옷은 죽을 때까지 40여년간 계속됐어요.
빅토리아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무려 63년이 넘는 시간을 여왕으로 군림했어요. 이를 흔히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영국인에게는 좋은 시절을 뜻해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만큼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죠. 그 나라에 아직도 남아 있는 빅토리아의 이름을 딴 지명과 건물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실상은 말 그대로 격동기였어요.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인 풍요가 이루어졌지만,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는 교통, 주택, 환경, 실업, 전염병 등 사회문제를 가져왔어요.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표현된 영국 사회의 뒷골목은 바로 이 시기의 모습이지요. 의식이 성장한 노동자들이 정치 참여를 요구하며 선거권 확대 운동이 일어났지요. 주변 국가에서는 왕을 없애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열풍이 불고 있었어요.
이 어수선한 시기에 입헌군주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왕으로서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모범적인 영국 가정을 이뤘다는 칭송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어요.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수상이나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수상과도 정치적 균형을 유지했어요. 실질적인 통치는 다수당의 대표인 수상이 하지만, 상징적 존재로서 국왕의 위상을 유지했죠. 조지 1세 때 시작된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식 입헌군주제의 원칙은 빅토리아 여왕 때에 자리를 잡았답니다.
09.25 고대 이집트 미녀 왕비像… 언제쯤 고향 갈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역사에서 고향과 가족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한 나라의 역사에서 문화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제사회에서 문화재는 국가의 정체성이며 자존심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피라미드 하면 누구나 이집트를 떠올리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이집트는 수없이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인데요. 가장 돌려받고 싶어 하는 문화재 목록에는 영국에 있는 로제타석(고대 이집트의 석조 유물)과 함께 독일에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이 있어요.
독일 베를린의 박물관에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은 '베를린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을 지녔어요. 높게 추어올린 머리 아래로 길고 매끈하게 뻗어 내린 목선, 짙은 눈썹과 흔들림 없는 시선, 날렵한 턱 선은 보는 순간 우아한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죠. 붉은 입술과 조화를 이루는 목걸이 장식에서 화려한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어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손꼽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어쩌다가 독일로 왔을까요?
▲ ①독일 베를린 노이에스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손꼽히는 네페르티티의 흉상. ②고대 이집트 제 18왕조인 이크나톤과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를 담은 예술품. ③태양의 신을 섬기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 /Corbis / 토픽이미지
지금으로부터 약 3300여년 전, 이집트는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가 통치하고 있었어요. 그는 왕보다 권력이 더 강해진 신관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지요. 특히 아몬(아멘)·라 신을 섬기는 신관들이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거든요. 나일 강 근처에는 외국인들까지 들어와서 살면서 온갖 신들이 난무하고 있었죠. 아멘호테프 4세는 이 모든 신을 아우르고 왕권을 강화할 개혁이 필요했어요. 지금까지의 다신교와 달리 새로운 유일신을 섬기도록 알렸어요. 바로 태양신 아톤(아텐).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원반 모양의 햇살이 신의 모습이었어요. 아톤을 위해 아마르나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어요. 자신의 이름도 '아톤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의 '이크나톤(아케나텐)'으로 바꿨지요. 신전에서 신들의 이름을 모두 지우고, 오직 유일신인 아톤만 섬기도록 명령했어요. 아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이크나톤과 그의 가족뿐이었어요. 백성은 아톤과 교류하는 이크나톤을 섬기도록 했죠. 덕분에 왕은 신이 될 수 있었어요.
이 모든 종교 개혁에 함께했던 사람이 바로 왕비인 네페르티티였어요. 이름에서 새소리 같은 울림이 느껴지지요? '미인이 온다'는 뜻이래요. 부부가 동등하게 표현된 부부 조각상이 많이 제작된 당시 분위기로 보아 왕과 왕비는 공동통치를 하며 아톤을 섬겼을 거예요. 아마르나의 도시 설계도 함께했겠죠. 아마르나 중앙에는 왕궁과 신전이, 그 아래에는 귀족의 주택 그리고 남쪽 끝에는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만들어졌어요. 아몬 신전의 재산을 평민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귀족에게는 오히려 세금을 내도록 했죠. 이전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왕실의 조각을 담당하는 투트모세의 공방에서는 쉴 새 없이 뚝딱거리며 아톤과 이크나톤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냈죠. 아름다운 네페르티티의 흉상도 이곳에서 만들어졌어요. 딱딱하고 경직된 모습의 방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냈죠. 이크나톤의 조각상도 만들어졌어요. 생생하게 만들어서였을까요? 네페르티티의 왼쪽 눈은 눈동자가 없는 형태로 미완성되었어요. 심하게 길쭉한 얼굴, 툭 튀어나온 입술, 홀쭉하게 들어간 볼, 손으로 만져질 것처럼 돌출한 턱, 게다가 볼록한 배. 이건 이크나톤의 모습이었답니다. 아마르나 시대의 이집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유로운 감각의 시대였어요.
하지만 지나치게 성급했을까요? 종교 개혁에 매진하는 사이 외적의 침입은 계속되었어요. 귀족과 신관들의 불만은 하늘 높은 줄 몰랐죠. 결국 이크나톤의 불행한 죽음 후에 왕위는 투탕카텐에게 이어졌어요.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다시 '아몬(아멘)에게 돌아간다'는 의미의 '투탕카멘'으로 이름을 고쳤어요. 동시에 이크나톤의 모든 개혁은 내팽개쳐졌어요. 아마르나는 빠른 속도로 황량한 사막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어요.
19세기 초 샹폴리옹이 로제타석을 해독하고 나서 이집트는 유럽 문화의 뿌리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많은 제국주의 열강이 찾아와 유물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1912년 독일의 고고학자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아마르나의 투트모세 공방 유적에서 네페르티티의 흉상을 발굴해냈어요. 당시의 관행은 유물을 발굴한 나라와 소유한 나라가 반반씩 나누는 것이었죠. 엄격한 기준에 따라 문화재 반출 허가증을 주는 시절이 아니었죠. 만약 이집트에서 이 유물의 가치를 알아봤다면 독일에 줄 리가 만무했을 거예요. 어쨌든 독일은 흉상을 가져가는 데 성공했어요. 이집트의 반환 요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요. 네페르티티의 아름다움에 반한 히틀러가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거든요. 제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나치가 숨겨둔 소금 광산 속에서 발견된 흉상은 아직도 독일의 박물관에서 버젓이 전시되고 있어요.
직지심체요절, 왕오천축국전, 몽유도원도를 비롯해 우리에게도 해외를 떠도는 문화재가 7만점이 넘어요. 불법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의 제자리 찾기에 다 함께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10.09 거북 등딱지에 새겨진 고대 중국의 역사
오늘(9일)은 한글날이에요. 조선시대의 학자 정인지는 "한글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반나절이면 배울 수 있고, 미련한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만큼 배우기 쉽고, 어떤 소리든 표현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대표 문화유산이죠. 특히 한자를 배우다 보면 한글의 우수성을 새삼 느끼게 되지요. 세상 만물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한자를 배우는 건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한글이 소리를 표기한다면, 한자는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이지요. 한번 익히고 나면 어려운 단어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도 있어요. 그래서 최근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했어요.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한자어가 어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요, 한자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요?
▲ 한자의 기원으로 알려진 갑골문자. /뉴시스
19세기 말, 중국은 종이호랑이 신세였어요. 아편전쟁에 패배하고 나서 끊임없이 제국주의 국가의 간섭이 이어졌기 때문이에요. 전쟁에 질 때마다 배상금을 지불하고, 새로운 개혁을 할 때마다 예산이 필요하니 날마다 늘어나는 것은 세금이었어요. 백성의 생활은 고단했죠. 새로운 변화를 꿈꾸던 사람 중에는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문맹이 많은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세상의 중심이라고 외치던 자존심은 허울만 남고 기울어 가고 있었죠.
▲ 은나라가 남긴 유적에서 출토된 갑골문자(위).갑골문자로 전설로만 알려졌던 중국 고대 은나라(상나라)의 존재가 드러났어요.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주왕과 그가 사랑한 달기의 모습(아래). /위키피디아
1899년, 지금으로 치면 청나라의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국자감에는 많은 학자가 모여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었어요. 그중 가장 우두머리 격인 왕의영은 옛 글자를 연구하는 사람이었어요. 그의 집에는 뜻을 같이하는 몇몇 친구가 함께 살면서 연구를 했다고 해요. 당시 왕의영은 말라리아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특효약이라고 알려진 용골(용의 뼈)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지요. 따지고 보면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인데, 뼈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운명이었는지 멀리 북경의 한약방에서 어렵게 용골을 구할 수 있었어요.
하남성의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뼛조각들을 용골이라는 이름으로 한약방에 판 것이었죠. 귀한 용골을 가루로 만들려는 순간, 왕의영과 친구 유악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뼛조각의 편편한 면에서 오래된 글자가 보이는 거예요. 칼로 새겨서 각지고 얇긴 했지만, 분명히 글자였어요. 그 후 이들은 용골을 수집하고 연구했어요. 용이라고 알려졌었지만, 거북의 등딱지나 배딱지(갑·甲) 혹은 소, 말, 사슴의 뼈(골·骨)였어요. 여기에 얇게 새겨진 칼자국은 오래된 글자인 것으로 밝혀졌어요. 한자의 기원이 된 갑골문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지요.
갑골문자의 연구를 통해 전설로만 알려졌던 상(商) 또는 은(殷)나라의 존재가 드러났어요. 연못을 술로 가득 채우고 주변의 나무에는 온통 고기 안주를 걸어놓았다는 '酒池肉林(주지육림)'이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전설 속 주왕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달기라는 미인을 즐겁게 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은은 주왕의 폭정을 못 견디고 결국 주(周)나라에 멸망하는데요, 문제는 유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거죠. 그래서 전설 속의 나라로 남게 된 거예요. 수도를 여러 번 옮겨다니던 때를 상나라, 수도를 은으로 옮긴 다음 통치하던 때를 은나라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런데 갑골문자를 연구하던 중 처음 용골을 발견한 그곳이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였던 은이었음이 밝혀졌어요. 이곳을 은나라가 남긴 유적이라는 의미로 은허라고 부르고 있죠. 은허에서는 세련된 청동기와 갑골문자, 왕궁 터 등이 발견되었어요. 유물, 유적과 갑골문자 기록을 통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의 실체가 새롭게 알려졌어요.
왕의 무덤 옆에서는 많은 사람의 시신도 한꺼번에 발굴되었어요. 왕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산 사람을 순장하는 풍습을 보여주는 거죠. 당시 사람들은 왕은 하늘에서 내려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왕이 주관하여 점을 치곤 했죠. 왕이 사냥을 나갈 때, 병에 걸렸을 때, 전쟁을 할 때, 아기를 출산할 때, 농사의 풍흉이 궁금할 때, 소풍을 갈 때, 사람을 만날 때도 점을 쳤어요. 제사를 지내며 점을 칠 내용을 말하고, 거북이 배딱지나 등딱지, 소 어깨뼈에 작은 구멍을 뚫어 불로 지졌어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구멍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면 그 방향과 모양, 색깔을 보고 하늘의 뜻을 읽는 거예요. 그러고는 점친 내용을 칼로 새기는 거죠. 그 때문에 갑골문자의 대부분은 제사를 담고 있어요. 뼛조각을 종이 삼아 기록한 중국 최초의 역사 기록이 되었어요.
▲ 세종대왕 동상에 새겨진 훈민정음. 표의문자인 한자와 달리 훈민정음은 표음문자로 꼽혀요. /Getty Images Bank
갑골문자와 은허의 발견으로 중국인들은 문화적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히면서도 그 어려운 한자를 지켜낸 것은 그 때문이었죠. 우리나라 역시 한글의 우수한 과학성을 알리고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날을 처음 제정한 건 일제강점기였어요. 문자는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문화유산이에요. 물론 한글은 세계 어떤 문자에 견주어도 한 수 위이지요.
10.29 일본군에 희생된 30만명… 그 아픈 기록 알고 있나요
중국의 난징대학살 관련 기록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난징대학살이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중국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사건을 말해요.
일본 정부는 난징대학살 관련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유네스코에 유감이라고 밝혔어요.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에 지원해온 돈을 더 이상 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압박하고 있지요.
반면 중국은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일로 정하고, 대학살 장소엔 세계기록유산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어요. 역사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이 커지고 있는데요. 1937년 난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1937년 중국 난징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된 중국인 시신들을 한 일본군이 바라보고 있어요. /바이두
난징대학살을 설명하기 위해 중일전쟁(1937~1945)이 왜 일어났는지부터 살펴볼게요.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루거우차오 다리 부근에는 마쓰이 이와네가 이끄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어요. 당시 중국의 반(反)제국주의 농민 투쟁인 '의화단 사건'이 실패한 후 각국의 군대가 중국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1937년 7월 7일, 여름밤의 정적을 깨고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렸어요. 지금까지도 누가 어떤 이유로 총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에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루거우차오 다리를 점령해 버렸어요.
이후 일본군은 베이징과 톈진에 이어 상하이까지 공격했어요. 중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답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다투던 때였어요. 일본에 맞서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힘을 합해 일본군에 저항했어요. 처음에 일본은 3개월이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중국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해 전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었지요.
난징의 운명은 국민당이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면서 달라졌어요.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부터 이듬해 1월까지 40여 일간 일본군의 잔혹한 살상이 이어졌지요. 도시는 연기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무차별 학살됐어요. 생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여자와 아기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목 베기 시합을 하는 일본 군인들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어요. 이번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유산 중에는 무릎 꿇은 중국인의 목을 단칼에 베는 사진도 있어요.
아비규환의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한 줄기 빛은 독일 기업인 욘 라베, 미국인 선교사 미니 보트린 등 외국인이었어요. 이들은 외국대사관과 난징대학교를 중심으로 안전구역을 만들고 중국인들에게 숨을 장소와 음식을 제공했어요. 욘 라베는 자기 재산을 털어 650명이 넘는 중국인을 보호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 오스카 쉰들러가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했던 것처럼 욘 라베는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구해낸 거예요.
중국이 공개한 1947년 난징시 군사법정 판결문에 따르면, 난징대학살 당시 30만명 이상이 살해됐다고 해요. 12초에 한 명 꼴로 억울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셈인데요. 일본은 이 자료의 사실 여부를 따지며 중국과 대립하고 있어요.
얼마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경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어요.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준비라고 해요.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기록과 일본군위안부 관련 기록의 유네스코 등재를 놓고 갈등 중이에요. 난징대학살 관련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이유랍니다. 중국과 일본이 양국의 역사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는지도 눈여겨봐야겠지요?
12.10 진흙 판에 쐐기 문자로 기록한 '종교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등을 아우르는 인권(Human Rights)은 근대 시민혁명 이후 인류가 추구한 가장 소중한 가치였어요. 1948년 12월 10일 UN에서 온 인류에게 세계 인권 선언을 선포했지만, 67년이 지난 지금도 인권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요. 그런데 인권이라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 고대국가에서도 인권이 존재했을까요?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출발한 서아시아 지역은 약육강식의 무대였어요. 크고 작은 민족의 흥망성쇠가 반복되었지요. 기원전 7세기 무렵 철제 무기를 앞세워 통일 국가를 이룬 아시리아는 잔혹한 군사 통치로 사람들의 원성을 샀어요. 이민족을 강제 이주시켜 노예로 삼고, 지나치게 엄격한 형벌로 다스렸거든요. 강압적인 지배는 결국 반란의 씨앗이 되었고, 아시리아는 통일 100년을 못 넘기고 멸망하고 말았어요.
▲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오른쪽)는 종교의 자유와 이민족에 대한 관용을 키루스 실린더(왼쪽)에 기록하게 했어요. /위키피디아
그 후 기원전 6세기 이란의 파르스고원에 키루스 2세가 등장해요. 그가 거느린 부족을 '파르스고원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페르시안'이라고 불렀죠. 키루스 2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어요. 강대국 리디아와 싸울 때는 낙타를 이용해 리디아 병사들이 탄 말들이 놀라 도망하게 만들었고, 필요하다면 이웃 나라와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가 빈부 격차와 종교 분열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진 틈을 타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터키·이스라엘·시리아·이란 지역을 차지한 키루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열었답니다.
키루스 2세의 위대함은 인간적인 통치 방법에 있었어요. 성경의 에스라서에 따르면 그는 칙령을 내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고 해요. 그는 언어와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각 민족의 제도와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을 폈어요.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200여 년간 번영을 누렸지요.
키루스 2세의 업적이 재조명된 것은 1879년 이라크의 바빌론 고대 신전 벽 속에서 길이 23㎝, 지름 10㎝의 원통형 고대 문서가 출토된 덕분이에요. 진흙 판 겉면에 뾰족한 갈대로 쐐기 문자를 찍어서 만든 '키루스 실린더'였지요. 쐐기 문자를 해독했더니 '바빌로니아 주민의 생계를 향상시킨다. 제국 내 여러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 포로로 끌려온 여러 민족과 그들의 신상(神像·신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은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정복당한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내용이 증명된 거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키루스 실린더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고 평가해요. 반면 우여곡절 끝에 오스만제국으로부터 키루스 실린더를 획득해 소장한 영국에서는 '왕으로 즉위하면 관용을 베푸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해요. 영국은 이란의 끊임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키루스 실린더의 반환을 거부하고 있지요. 이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키루스 2세의 관용 정신은 2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현대에도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에요. 키루스 실린더에 담긴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바로 인권 실현의 시작이니까요.
12.24 서유럽 통합 '유럽의 아버지'… 크리스마스에 서로마제국 황제 되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입니다. 서기 800년 12월 25일은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크리스마스 날이었답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게 보석이 가득 박힌 왕관을 씌우며 '서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롤루스'라고 선포한 대관식이 있었거든요.
'카롤루스'는 그를 생전에 부르던 라틴어 이름으로 프랑스에서는 같은 사람을 샤를마뉴 대제로,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라고도 부르지요. 그런데 카롤루스 대제는 게르만족이랍니다. 395년 고대 로마제국은 동서로 쪼개졌는데,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게 시달리다 476년 멸망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300여 년 후, 게르만족 출신 왕이 새로 세워진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거예요. 교황 레오 3세와 카롤루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뚜렷한 이목구비·큰 키 등 게르만족의 특징을 보이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교황 레오 3세가 서로마제국 황제 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렸어요. /Corbis 토픽이미지
7세기 무렵 강대국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은 190㎝의 큰 키, 뚜렷한 이목구비, 짧지만 다부진 목을 지닌 게르만 전사 모습 그대로였죠. 그는 평생 말 위에 앉아 반란을 진압했고, 재위 기간 영토를 2배로 넓혔어요. 전투를 많이 벌인 그는 수많은 군사와 전쟁 비용이 필요했는데, 게르만족 전통대로 유력한 세력을 기사로 임명해서 정복한 지역 땅을 나누어줬어요. 땅을 받은 기사는 전쟁이 났을 때 말과 시종을 거느리고 카롤루스와 함께 싸우며 충성을 바쳤지요. 이 제도는 후에 중세 유럽의 상징인 봉건제도로 자리 잡기도 하지요.
열정적 크리스트교 신자였던 카롤루스는 정복한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고, 크리스트교 개종을 강요했어요. 그래서 서유럽에 살던 게르만족 대부분은 크리스트교를 믿게 되었지요.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에는 궁정 학교가 세워지고, 로마 문화의 부활을 알리는 고전이 수집·연구되었어요. 덕분에 게르만의 전통과 크리스트교 문화, 로마 문화가 섞여 하나로 융합되었어요. 하지만 부족함을 느낀 카롤루스 대제는 제국 통합을 위해 더 차원 높은 권위가 필요했어요.
이때 카롤루스의 세력이 점점 막강해지는 것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교황 레오 3세였어요. 그는 비잔티움(동로마제국) 황제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지요. 카롤루스 같은 왕도 문자를 모를 정도로 문맹이 흔한 게르만족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성경 인물을 조각으로 만들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해야 하는데, 비잔티움 황제는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교황 레오 3세는 서유럽 교회를 보호해줄 강력한 힘이 필요했어요. 로마 인근에 있는 롬바르디아 왕국으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고 있었고, 이미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한 이슬람 세력 역시 고민거리였죠.
서로마제국 황제 카롤루스의 대관식은 레오 3세와 카롤루스의 필요가 만나 이루어졌어요. 교황은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얻었고, 카롤루스는 옛 로마제국의 전통과 권위를 얻었어요. 이럴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아마도 '누이 좋고 매부 좋고'겠죠! 그날 이후로 서유럽 여러 나라 문화는 서로마제국의 전통을 공유하며 서로 다른 듯 닮아 이어져 오고 있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서유럽을 통합한 카롤루스 대제를 최초의 유럽인, 유럽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어요. 카롤루스 대제의 칼은 게르만 전통을, 십자가는 크리스트교를, 왕관은 로마 문화를 상징해요. 이것이 서유럽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죠.◎
공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