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조선일보) 2022-07/ 07.01(금) 연애도 정치화 - 07.30(토) 여군 잠수함 승조
07.01(금) 연애도 정치화
1990년 TV 드라마 ‘머슴아와 가이내’는 경상도 청년과 전라도 처녀가 만나 결혼하는 과정을 그렸다. 두 사람은 지역 차를 극복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선거 때 지지 후보 차이로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화해했다. 선거 때마다 부부 싸움을 했다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사이좋게 사는 집도 많았다.

▶‘당신은 진보(보수)의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다. 미국 정치학 저널은 ‘정치 성향이 같으면 상대 체취도 좋아한다’는 실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진보 성향 여성은 극좌 남성의 체취를 맡고 “가장 좋은 향수”라고 했고 극우 남성 체취엔 “썩은 냄새”라고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보수 여성은 극우 남성 체취에 강하게 반응했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이런 연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대 심리학과 비렌 스와미 교수는 “사람은 나이·인종·종교·계층 등이 비슷한 이성에게 끌리는데 그중 가장 큰 건 정치 성향”이라고 했다.
▶수년 전 한 결혼정보업체 조사에서 미혼 남녀의 57%가 ‘정치 성향이 다르면 소개팅으로 만나기 싫다’고 답했다고 한다. ‘사고방식이 달라 다툼의 소지가 많고 상대 성향을 강요받기 싫어서’라고 했다. 10명 중 7명이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고 답한 설문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 정치 성향의 이성과 결혼할 수 있다’는 응답도 60%를 넘었다. 정치 성향이 달라도 만나서 사람 괜찮으면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남녀를 연결해 주는 데이팅 앱들은 가입자에게 ‘정치 성향’을 묻는다고 한다. 보수·진보·중도·무관심으로 나눠 묻는다. 가입자들이 반대 정치 성향은 피하고 같은 사람끼리 만나려 하기 때문이다. 만날 상대의 소셜미디어에서 정치 성향을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연애 상담 사이트엔 ‘남자 친구와 선거 얘기하다 자주 싸운다’ ‘박원순 문제로 다투다 헤어졌다’ ‘정치 성향이 너무 다른데 결혼해야 하느냐’는 고민 글이 많다. ‘종교는 달라도 살지만 정치 성향이 다르면 못 산다’ ‘사랑은 포기해도 정치적 신념은 포기 못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시대 이후 정치적 양극화로 보수는 보수끼리, 진보는 진보끼리 연애가 늘고 있다’고 했다. 데이팅 앱에서도 ‘네버 트럼프 데이팅(Never Trump Dating)’과 ‘공화당 싱글즈(Republica Singles)’ 사이트가 경쟁했다. 한국도 대선 과정서 불거진 ‘이대남 이대녀’ 갈등이 데이트 풍속도를 바꾸고 있다. 씁쓸한 얘기다.
07.02(토) 3나노의 세계
리처드 파인만은 1959년 미국 물리학회 강연에서 원자 규모로 물질을 다루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나노 세계’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4권을 2만5000분의 1 크기로 줄여 직경 1.6㎜ 머리 핀 굵기에 담는 사람에게 100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청중은 모두 농담으로 여겼다. 1985년 스탠퍼드대 학생 톰 뉴먼이 이 상금을 가져갔다.

▶10억분의 1을 의미하는 나노(nano)는 난쟁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했다. 1나노 미터는 원자 3~4개를 늘어놓은 정도 길이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파장은 수백 나노미터 수준이다. 나노 기술은 가시광선 파장보다 작은 물질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이 1981년 개발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원자와 분자를 볼 수 있게 되자 깎고 다듬고 재배열도 할 수 있게 됐다. 이 현미경을 발명한 IBM 과학자들은 5년 뒤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나노 기술은 과학과 산업은 물론 인류의 삶을 바꾸고 있다. 휘거나 말 수 있는 디스플레이, 깃털보다 가볍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 같은 첨단 분야는 물론 자외선 차단제와 골프공도 나노 기술로 만든다. 사람의 혈관 속을 누비며 약물을 정확히 전달하는 나노 로봇을 개발하는 과학자도 있다. 공상과학영화 이너스페이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나노 기술 특허를 가장 많이 출원한 회사는 IBM, 그 다음은 삼성전자와 도시바이다. 캐논, TSMC, 인텔도 10위 안에 있다. 모두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거나 생산하는 곳들이다. 반도체는 시장에서 가장 앞선 기술, 이른바 ‘선단 기술’을 가진 회사가 시장을 독식한다. 먼저 제품을 출시해서 비싸게 판매한 뒤, 경쟁사가 따라오면 가격을 낮춘다. 지난 수십년간 수많은 기업들이 이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도태됐다.
▶삼성전자가 그제 세계 최초로 3나노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3나노 반도체는 반도체의 회로 선폭이 10억분의 3m라는 얘기이다. 20년 전만 해도 100나노가 반도체의 한계라고 여겼고, 10년 전엔 10나노의 벽을 넘기 힘들다고 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매번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반도체 회사와 과학자들은 이미 1나노 이후를 연구하고 있다. 나노의 1000분의 1인 피코(pico), 100만분의 1인 펨토(femto) 기술 시대가 열리면 우리는 또 어떤 세상에 살게 될지 궁금해진다.
07.04(월) 두 개의 미국
미국 연방대법원은 자주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권위가 강하지만 문제적인 법원으로 꼽힌다. 유명한 흑역사가 남북전쟁 직전 ‘드레드 스콧 대 샌더퍼드’ 판결이다. 흑인을 노새와 말과 같은 사유재산으로 규정하고 노예해방 조치를 위헌 판결했다. 노예제에 대한 반세기 이상의 정치적 타협을 무너뜨리고 미국 사회의 갈등에 불을 질렀다.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된 판결이다.

▶이 판결이 요즘 논의되는 것은 연방대법원이 또다시 나라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낙태의 헌법적 권리를 부정한 데 이어 정부의 온실가스 규제와 총기 휴대 규제에 제동을 걸었다. 1970년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반세기 동안 여성 낙태권에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인식이 미국 일부에 있었다. 이 때문에 낙태 판결을 둘러싼 파문이 특히 크다고 한다. 역사를 거꾸로 돌렸다는 것이다. 낙태 반대론 쪽에선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52년 전 판결이야말로 노예의 인격을 부정한 165년 전 판결처럼 미국 역사를 거꾸로 돌린 과오라고 말한다. 이래서 연방대법원 판결이 다시 미국을 두 쪽 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판결 직후 미국 주 정부의 절반이 서둘러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반면 절반은 반대로 낙태의 권리를 강화하고 있다. 남동부와 중부는 판결을 옹호하고 북동부와 서부 해안은 판결에 반발한다고 한다. 낙태를 금지한 지역에 가까운 주들이 낙태를 원하는 여성의 ‘피난처’를 자처하는 것도 옛날과 비슷하다. 남북전쟁 직전 노예제에 반대한 미 북부 주들은 노예의 피난처를 자처했고 이 때문에 노동력을 북부에 잃은 남부 주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뉴욕타임스는 판결 후 미국의 이런 현상을 두고 ‘미 합중국(the United States)’이 아닌 ‘미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이라고 했다. “미국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미국이 두 쪽 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민자에 의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의 ‘앵그리 화이트’ 현상이 백만장자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인종 갈등, 빈부 갈등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해묵은 보혁(保革) 갈등까지 격렬한 양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뉴욕 맨해튼에 한때 18개 언어가 난무했다고 한다. 국가 형성 과정을 보면 언제든 분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미국이다. 하지만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분열 위기를 반복해 겪으면서도 결국은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단합해 세계 최강이 됐다. 그만큼 축적된 통합 노하우가 많은 나라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팬덤 정치를 생각하면 사실 한국 입장에서 미국 걱정은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07.05 벌레의 습격

▲4일 서대문구에서 보건소 관계자들이 '러브버그' 방역 작업을 하고 있다. 러브 버그의 정식 명칭은 '플리시아 니악티카'다. 한국에서는 털파리로 불린다. 러브 버그는 건조한 날씨에 약하지만, 최근 수도권에 장마가 이어지면서 개체 수가 줄어들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연합뉴스
2020년 여름은 우리나라가 벌레의 습격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시기였다. 그해 여름 전국은 갑자기 도시를 뒤덮은 매미나방 떼에 시달렸다. 날개에서 떨어지는 가루는 두드러기를 일으켰고 나방이 소복하게 앉은 나무들은 고사했다. 지자체마다 매미나방을 방제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매미나방뿐만이 아니라 나뭇가지처럼 생긴 대벌레, 절지동물인 노래기가 뒤덮인 동네는 악취에 시달렸다.
▶유례없는 벌레들의 습격은 직전 겨울 이상고온 현상 때문으로 밝혀졌다. 곤충의 알은 월동 기간에 많게는 90% 이상 죽는다. 그러나 2019년 겨울은 눈이 오지 않은 데다 평균기온이 3~4도에 이를 정도로 따뜻했다. 이 때문에 해충 알이 죽지 않고 잘 부화해 이상 증식이 발생했다. 이런 조건에서 그해 여름에도 높은 기온을 보이자 알에서 성충에 이르는 기간이 짧아지고 유충의 초기 생존율까지 급격히 높아져 벌레 개체수가 급증한 것이다.

▶골치를 썩이는 곤충은 이뿐이 아니다. 꽃매미는 포도나무, 복숭아나무 등 진액이 많은 나무의 가지에 달라붙어 즙을 빨아먹는다. 강원도 등에서는 미국산 선녀벌레가 크게 늘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선녀벌레로 인한 사과나 옥수수 등 농작물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야생화 꽃대 등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흉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대개 선녀벌레 약충(어린 벌레)이다.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벌레의 습격은 아직 애교 수준이다. 2015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는 하루살이 떼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벌레가 집도 뒤덮고 차와 보트 등 물 근처에 있는 거라면 뭐든지 뒤덮어 교통사고가 속출했다. 하루살이 수가 너무 많아 컴퓨터의 기상 레이더가 비구름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중국 등에서는 메뚜기 떼 습격을 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
▶서울 은평구·마포구, 경기 고양시 등 수도권 서북부 일대에 이른바 ‘러브버그’로 불리는 털파리 떼가 대거 등장해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러브버그는 인체에 무해한 데다 진드기 같은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益蟲)으로 알려졌지만 날파리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온도와 습도가 높으면 애벌레가 빨리 자라는데 얼마 전 장마로 습도가 높아지면서 유충 발달 속도가 빨라져 발생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곤충들 생태계도 변화하면서 우리나라도 앞으로 벌레들의 습격이 잦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러브버그의 습격은 그 예행연습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07.06 합참의장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10일 0시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지하에 마련된 국가위기관리센터 상황실에서 합동참모본부(합참) 지휘통제실로부터 군 통수권 이양에 따른 전화 보고를 받는 것으로 대통령으로서의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원인철 합참의장이 윤 대통령에게 북한 군사 동향 및 군 대비태세를 보고했다. 합참이 군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군의 합동참모 시스템은 독일의 ‘제너럴 스태프’(Generalstab·장군참모)를 효시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너럴 스태프는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정예 육군 참모 조직이었다. 1차 대전 때 독일군 참모 조직의 뛰어난 작전에 큰 피해를 입은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은 패전 독일군에 참모 조직을 두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미국은 2차 대전 발발 이후인 1942년에야 지금의 합참과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합참은 미 합참을 모델로 1963년 본격 창설됐지만 한동안 힘이 없는 ‘얼굴 마담’ 비슷한 존재였다. 1990년 합동군제가 시행되면서 현재의 군령권을 가진 합참이 됐고 합참의장 권한도 커졌다. 하지만 예산 등에선 참모총장에게 밀려 1990년대 중후반 한 육군참모총장은 합참의장이 된 뒤 사석에서 “육군총장 때보다 못하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전은 육해공 합동전투이고 군 작전은 합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국군 합참의장도 군 서열 1위이자 군 전체의 좌장과 같다. 현역 대장으로 장관급 예우를 받는다. 합참의장은 육·해·공군 작전사령관, 해병대사령관 등을 지휘한다. 유사시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는 통합방위본부장을 겸하고 있고 계엄령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도 된다.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옆 10층짜리 건물에 국방부 핵심부서와 함께 합참 주요 부서가 자리 잡고 있다. 900여 명의 직원 중 인사군수·정보·작전·전략기획 본부장과 합참차장 등 중장 5명을 비롯, 장성만 30여 명에 달한다. 이곳이 바로 우리 군 전체를 움직이는 총사령부다.
▶지난 2019년 7월 심야에 동해 NLL을 넘어온 북한 선박을 나포하지 말고 돌려보내라는 청와대 안보실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당시 박한기 합참의장이 소환 조사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박 의장은 청와대 행정관으로부터 4시간여 동안 취조 수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군(軍) 수장의 권위와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미군 합참의장이 백악관 행정관에게 취조받는 모습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07.07 수학자와 분필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대학 은사인 조순 전 부총리와의 인연을 기록한 책 ‘나의 스승, 나의 인생’에 조순 ‘교수’의 판서 에피소드가 나온다. 칠판 왼쪽 꼭대기에서 오른쪽 하단까지 분필로 쓰는데 한국어, 영어, 일어에 한시까지 동원하며 빼곡히 채웠다. 정 전 총리는 조순 교수의 판서를 ‘가장 지적인 예술 작품’이라고 했다. 1960~70년대 얘기다. 요즘 강의실에선 전자칠판에 전자펜으로 쓴다.
▶그런데 유독 수학자들이 여전히 분필을 고집한다. 몇 해 전 미국 CNN의 유튜브 전문 자회사가 수학자들의 유별난 분필 사랑을 취재했다. 거기 나온 미국 수학회장은 “생각의 예술을 하는 이들의 표현 도구”라는 말로 분필 사랑을 고백했다. 엊그제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도 분필 애호가다. 허 교수는 “수학자는 분필과 칠판을 사랑하는 최후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최첨단 필기도구인 전자펜은 수학자들에게 찬밥 취급을 당한다. 삼성전자가 2020년 내놓은 갤럭시 20 전자펜의 반응속도는 26ms(ms는 1000분의 1초)다. 펜이나 분필로 쓸 때보다 1000분의 26초 느리다는 뜻이다. 올 초 선보인 S22는 2.2ms로 사실상 일반 펜과 비슷해졌다. 그래도 머리에서 폭포처럼 쏟아져나오는 수식을 써내려가는 수학자에겐 여전히 분필을 손에 쥐고 싶어지는 속도일지 모른다.
▶세계 수학자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분필은 일본의 하고로모(羽衣)다. 재질이 단단해 가루가 날리지 않으면서 필기감이 부드럽다고 한다. 몇 해 전 이 분필 회사의 일본인 대표가 병마로 사업을 접게 되자 수학자들 사이에 사재기 소동이 빚어졌다. 하루 사용량을 계산해 15년치를 사서 쟁여둔 이도 있다. 다행히 하고로모를 인수해 수학자들을 안심시킨 이가 나타났는데, 평소 이 분필을 애용하던 한국의 수학 일타 강사였다.
▶고대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수에서 자연의 숨은 질서를 찾으려 했다. 수학 연구를 ‘편견과 한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 설명하는 허준이 교수도 철학자라 할 수 있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수학 박사와 그에게 고용된 가사도우미가 나온다. 둘은 서로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지만 연인 사이는 아니다. 박사는 그런 둘의 관계를 수학의 우애수(友愛數)와 같다고 믿는다. 요즘 말로 ‘썸’을 타는 듯한 둘의 묘한 관계조차 박사는 칠판에 분필로 수식을 써가며 설명한다. 수학자 손에는 역시 분필이 제격인 모양이다.
07.08 독일의 31년 만 무역적자
1987년 10월 19일 뉴욕 증시가 하루 새 22.6% 폭락했다. ‘블랙 먼데이’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 금리 인상 불안감 등에 주식 프로그램 매도 물량이 겹쳐 난리가 났다. 제임스 베이커 미국 재무장관이 급히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연방은행 본부로 날아갔다. 독일연방은행이 달러 지지를 위해 자본을 투입하겠다고 짧게 성명을 냈다. 수출 대국 독일이 엄청난 무역 흑자로 달러를 벌어들여 마르크화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때 저(低)성장, 고(高)실업으로 ‘유럽의 병자’라 불렸던 독일이 2000년대 중반 되살아난 비결을 취재하러 간 적 있다. 독일의 유력 경제연구소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었다. “독일 대기업들이 노조 대표들을 헝가리 등 인근 동유럽으로 데려가 공장을 보여줬더니 노조가 터무니없이 임금 인상만 요구하던 태도를 누그러뜨렸지요.” 슈뢰더 전 총리가 노동개혁을 추진하고, 독일 기업은 노조와 타협해 단위당 노동비용을 낮추면서 제조업 경쟁력을 되살린 덕에 경제를 회생시켰다는 설명이었다. 이 무렵 세계 3위 독일 경제가 세계 1위 미국을 제치고 수출 1위, 무역흑자 1위로 올라섰다.
▶2002년 총선 유세에서 슈뢰더 총리는 ‘독일의 길’을 천명했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을 우리 경제의 모델로 삼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미국과 거리 두기를 하는 대외 정책을 표방하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듬해 슈뢰더 총리,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이라크전에 반전(反戰) 연대를 형성해 부쩍 가까워졌다.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2005년 슈뢰더 총리는 러시아와 가스관 연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011년 중국 원자바오 총리가 13명의 각료를 이끌고 베를린을 방문했다. 독일 메르켈 총리가 그리스 재정위기 등을 수습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미국과는 의견이 대립되고 중국과 부쩍 가까워졌다. 원자바오 총리는 “필요하면 유럽국가의 국채를 매입하겠다”고 지원 사격을 했고 에어버스 여객기를 88대 주문하는 통 큰 선물도 안겼다. 슈뢰더 전 총리도, 메르켈 전 총리도 거의 매년 중국을 방문하며 중국과 교역에 공을 들였다.
▶러시아, 중국과 관계에서 경제 실리를 챙기면서 독일의 무역수지 흑자도 몇 곱절 뛰었다. 그러던 독일이 지난 5월 통일 이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수입액은 급증하고, 중국의 코로나 봉쇄 등으로 수출은 줄었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철옹성 독일이 적자를 낼 정도이니 지금 경제 상황이 보통 심각하지 않다. 제조업 수출 의존도가 큰 우리로선 남의 일이 아니다.
07.09(토) 아베 신조

▲참의원 지원 유세 도중 총격에 쓰러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몇 년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난 적이 있다. 도쿄 도심에 있는 총리 관저의 집무실을 방문했는데 가방만 검색기에 통과시키고 들여보냈다. 명목상 국왕 다음 서열이라고 해도, 일본 정부 수반인데 의외였다. 당시 아베 총리는 한국과 가까워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한국 기자를 대우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경비가 손을 저었다. 함께 간 일본 지인은 “일본의 총리 경호는 대개 이렇다”고 했다.
▶아베 전 총리는 결국 ‘혐한(嫌韓)’ 정치인이 됐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 막연히 낙관하고 있었다. 2006년 그가 낸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에서 한국 언급은 232쪽 중 한 쪽도 못 되는 아홉 줄에 불과하다. “한일 관계는 낙관주의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법의 지배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와 아버지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은 유명한 친한 인사였고 아내는 한류 스타 박용하의 광팬이었다. 역사의 거리를 정치, 경제, 문화의 접근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착각이었다.

▶그에겐 한국과 관련한 몇 가지 소문이 따라다녔다. 아베 전 총리는 할머니를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를 낳고 아베 가문에서 바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 명문가에서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차별을 받던 한국인이란 소문이 돌았다. 아베 일가의 본거지가 한국인이 많이 오가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란 점도 작용했다. 집권 초 일본 주간지 기자들이 소문을 확인한다고 달려들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그의 우경화 이후 조용해졌다.
▶아베 전 총리는 정치를 거부한 형 대신 일본 보수 정계의 황태자로 커 사상 최연소 집권당 대표, 사상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68세였지만 세 번째 총리에 오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유지했다. 총리 임기 동안 무기력해진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중국과 거리를 유지하고 미·일 동맹을 복원해 세계 자유 진영의 안보 중심축으로 만들었다.
▶아베 전 총리가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중 괴한 총을 맞고 숨졌다. 사무라이 같은 최후였다. 가까운 나라에서 되살아난 정치 테러가 섬뜩하다. 그의 모든 신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이 업적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북한에 납치된 자국 국민을 구했고 남아있는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려고 죽을 때까지 힘썼다. 납치 범죄에 대해 김정일의 시인과 사과를 받아낸 정치인도 그였다. 일본에서도 이런 정치인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07.11(월) 자동차 판매왕
“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꼽히는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가 남긴 말이다. 지라드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4년간 총 1만3001대의 신차를 팔았다. 12년 연속 판매왕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 해에 1425대를 팔기도 했다. 35세까지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낙오 인생에서 세계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거듭난 비결이 ‘250의 법칙’에 있었다. 친구 어머니 장례식장과 지인 결혼식장에 갔다가 한 사람의 평생 교류 범위가 대략 250명임을 간파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250명의 잠재 고객을 얻고, 한 사람의 불만을 사면 250명에게 나쁜 평판을 얻게 된다고 여기고 남다른 고객 관리를 한 것이 판매왕의 비결이었다.

▶기아차 박광주 영업이사는 작년에 630대를 팔아 27년간 누적 자동차 판매 대수가 1만3507대에 달한다. 누적 판매로는 미국의 전설 조 지라드보다도 많다. 그는 10억원 넘는 연봉으로 부장 시절 사장보다 월급이 많았던 적도 있다. “첫 계약 때 오후 6시에 만나기로 한 고객이 오질 않아 새벽 4시까지 그분 집 앞에서 기다렸어요.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해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는데 무작정 기다린 저를 보고 미안해하며 선뜻 차를 계약해 주셨지요.”
▶분야는 달라도 판매왕의 업무 태도, 고객 관리에는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 한 보험여왕은 “300명쯤 되는 고정 고객의 주민등록번호와 계좌번호, 가족관계를 몽땅 외워서 한 분 한 분 챙겼다”고 했다. 전화 건 상대방 이름이 휴대폰 액정 화면에 뜨지 않던 시절에도 고객 목소리 특성을 외워두고 전화 응대를 했다는 자동차 판매왕도 있었다.
▶달변에,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외향적 성격이어야 판매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보험왕 폴 마이어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적성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그의 상사도 “보험 판매 일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보험 파는 데만 몰두하는 다른 영업맨들과 달리, 내성적인 성격을 강점으로 살려 고객 얘기를 경청하고 고객 성격까지 꼼꼼히 파악해서 차별화 전략으로 삼았다.
▶현대차에서 누적 7000대의 자동차 판매왕이 처음 나왔다. 현대차 판매왕이 밝힌 비결도 ‘간절함’이었다. 조 지라드는 “훌륭한 세일즈란 사시사철 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연중 계속해서 땅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과 같다”고 했다. 판매왕이란 물건 잘 파는 사람이 아니라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고객에게 신뢰를 파는 일인 듯싶다.
07.12 15대까지 이어진 심수관
베를린에서 일어난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초라한 변방국가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공이 집권하며 전기가 마련됐다. 부국강병을 꿈꾼 그가 추진한 정책이 외국 인재 영입이었다. 마침 가톨릭 국가 프랑스가 신교도인 위그노를 탄압하자 위그노 수공업자들의 염색과 섬유 기술을 탐냈던 대공은 특혜를 주며 그들을 독일로 모셨다. 기술자의 도시가 된 베를린은 황무지 도시에서 섬유 산업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이후 프로이센 왕국으로 성장해 독일 통일 위업을 달성했다.

▶이 역사의 동양판이 도쿠가와 막부(幕府) 시기 일본 규슈의 사쓰마번(오늘날 가고시마현)이다. 사쓰마 번주(藩主)로 임진왜란에 참가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명과 조선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명나라에선 의술을 직접 배웠고 조선에선 도공을 데려갔다.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포로로 잡은 심당길 등 도공 수백명을 사쓰마로 데려가 사무라이로 후하게 대접했다. 조선 옷을 입도록 배려하며 도자기를 만들게 했다.
▶당시만 해도 1000도 넘는 고열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은 중국과 조선만 보유했다. 그 첨단 기술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야키모노센소(燒物戰爭·도자기전쟁)라 부르는 이유다. 그 후엔 스스로 혁신을 거듭했다. 조선 도공의 기술력에 명나라의 세련된 디자인, 일본의 전통 회화를 접목했다. 그 중심에 심당길 가문이 있었다. 심당길의 12대손 심수관(1835~1906)은 도자기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투조(透彫)기법을 창안했다. 그 기술로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190㎝ 넘는 커다란 화병 한 쌍을 출품해 도자기 사랑에 빠져 있던 유럽인들을 매료시켰다.
▶심수관은 이렇게 일본 도자기를 완성했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13대 자손부터 그의 이름을 계승해 15대에 이르고 있다. 심당길의 아버지 묘가 경기도 김포에 있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된 15대 심수관 심일휘씨가 엊그제 김포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묘의 흙을 일본에 가져가 심당길 묘에도 뿌린다고 한다.
▶사쓰마는 도자기를 팔아 부유해졌다. 도쿄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군함의 위용에 감명받아 이번에는 도자기가 아닌 군함 확보에 나섰다. 결국 메이지 유신의 주력이 돼 일본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 사이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되고 이른바 ‘왜(倭)자기’가 역수입되며 도자기 종주국 위상마저 잃었다.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만든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15대까지 이어진 심수관 가문의 역사다.
07.13 제임스 웹
1610년 한 이탈리아 과학자가 지름 4.5cm짜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원시적인 망원경으로 그는 달이 빛나는 것은 태양 빛 반사 때문이라는 것, 은하수가 사실은 별의 집단이라는 것, 목성이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금성이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당시의 상식을 깬 그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의 발명자는 아니었지만, 망원경이 얼마나 위대한 도구인지를 일깨워줬다.

▶1946년 천문학자 라이먼 스피처는 우주에 망원경을 보내면 대기 현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더 멀리 또렷하게 볼 수 있다고 했다. 인류는 1990년 허블 우주 망원경을 발사했다. 새로운 우주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큰 업적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우주 망원경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보여준다. 빛이 1년간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10광년 떨어진 별을 관측한다는 것은 그 별의 10년 전 모습을 보는 것이다. 허블 망원경은 10억광년, 즉 10억년 전의 우주를 볼 수 있다.
▶우주에는 별이 얼마나 있을까. 천문학자들은 우주 사진 3200만장을 모은 뒤 그 안에 있는 은하의 숫자를 셌다. 은하란 최소 100만개에서 최대 100조개의 별 무리다. 사진 한 장에 이런 은하가 5500개 들어 있었다. 관측 가능한 우주에만 총 1700억개가 넘는 은하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포함하면 은하 숫자가 2조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별의 숫자는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태양은 그 무한대에 가까운 별 중 하나일 뿐이다. 우주를 알면 알수록 겸손해진다.
▶어제 나사가 지난해 성탄절에 발사한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첫 사진들을 공개했다. 제임스 웹 망원경은 130억광년을 볼 수 있다. 칼 세이건은 우주가 거대한 바다라면 인류는 아직 발가락만 조금 적셨을 뿐이라고 했다. 세이건이 제임스 웹 망원경이 보낸 사진을 봤다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궁금하다.

▲제2대 NASA국장 이었던 제임스 E. 웹(가운데)이 1963년 10월 10일 백악관에서 열린 콜리어 트로피 시상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왼쪽은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로이터
▶나사 2대 국장이었던 제임스 웹은 과학자가 아니라 국무부 차관 출신 공무원이다. 그는 우주 탐사가 예산 낭비라는 정치권의 공세를 막아내며 230조원에 이르는 아폴로 계획을 탄생시켰다. 그의 헌신 덕분에 인류는 달을 밟았고, 이제 그의 이름을 딴 망원경이 우리에게 우주를 보여주고 있다. 웹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우주 탐사가 인간 사회를 통합하고 발전시키는 길이라 믿었다. 공무원 한 사람이 얼마나 큰 공헌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박건형 논설위원
07.14 킹 달러
미국 달러의 뿌리는 17세기 독일 은광(銀鑛) 마을 요아힘스탈이다. 이곳에서 만든 은화를 ‘탈러’(Taler)라고 불렀다. 탈러 은화가 인기를 끌자 스페인에서도 짝퉁 탈러를 주조해 중남미 식민지에서 유통시켰다. 이 돈이 미국에도 흘러 들어갔다. 미국은 독립전쟁 후 자체 주화를 만들면서 탈러의 영국식 발음 ‘달러’를 화폐 명칭으로 채택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혁신을 하나 더 보탰다. 화폐 단위에 ‘1달러=10다임, 1다임=10센트’ 같은 10진법 체계를 도입, 계산하기 편한 새 화폐를 만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격상시켰다.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창설과 더불어 달러 중심 ‘브레턴우즈 체제’를 구축하려 하자 영국이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급파해 파운드화 방어에 나섰다. 케인스는 ‘세계 통화 방코(Bancor)’라는 대안까지 제시했는데 미국으로부터 ‘주제넘은 빚쟁이’라고 면박만 당했다. 케인스는 “대영 제국의 눈을 뽑혔다”고 했다.
▶미국은 달러 헤게모니 방어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금 보유량보다 훨씬 많은 달러를 찍어 내 ‘통화 사기’ 논란이 일자, 달러 지폐에서 “소지인이 요구하면 금을 지급한다”는 문구를 지우고, “우리는 신(神)을 믿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달러를 신처럼 믿으라는 통지였다. 1970년대 오일 쇼크 때 미국은 중동 산유국과 ‘원유는 달러로만 거래한다’는 표준 계약을 만들어 선수를 쳤다. 석유 수입국들은 무조건 달러부터 확보해야 했다. 1980년 미국의 거대 무역적자는 엔과 마르크 환율을 강제로 바꾸는 플라자 합의로 돌파했다.
▶미국이 달러 덕에 누리는 초특권은 언제나 시기의 대상이 돼 왔다.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미국이 얼토당토 않은 특권을 누린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국은 “달러는 우리 돈이고, 문제는 당신들 것”이라면서 무시해버렸다. 세계 무역의 85%가 달러로 결제되고, 전 세계 외환보유액 60% 이상이 달러로 채워져 있다. 세계 달러 거래 시스템에서 퇴출되는 나라는 국난을 맞는다. 미국 최고의 힘은 항공모함이나 스텔스기, 핵잠수함이 아니라 달러다.
▶미국이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급격히 올리자 달러 가치가 연일 급등하고 있다. 엔화 대비 달러 가치는 24년 만에, 유로화 대비 가치는 20년 만에 최고로 치솟았다. 기축통화를 넘어 이제 ‘킹 달러’(king dollar)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위기일수록 ‘모두가 원하는 돈’의 위력은 더 커진다.
07.15 첫 문장
이순신의 생애를 다룬 김훈 장편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작가는 ‘꽃이’로 할지 ‘꽃은’으로 할지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조사의 미묘한 차이를 심사숙고할 만큼 첫 문장에 정성을 들였다는 뜻이다. 많은 작가가 첫 문장 쓰기의 부담을 토로한다.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라는 벨기에 소설에 나오는 작가는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자 괄호 처리하고 두 번째 문장부터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 똑같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 모든 문장을 괄호 처리한다. 첫 문장 빼고 시작하려다가 아무 내용 없는 소설을 쓰고 만 것이다.

▶소설 첫 문장은 작품의 주제와 분위기를 암시한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이방인’ 첫 문장은 세상과 단절된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 선언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주의를 집중시켜 독자를 붙잡아 두는 것도 첫 문장의 임무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신경숙 ‘엄마를 부탁해’)가 그런 경우다.
▶번역자도 첫 문장 번역에 소설가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인다. 톨스토이 장편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엔 번역자마다 차별화하려는 고심이 담겨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민음사),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열린책들) 등으로 표현했다. 시중에 10여 종이 나와 있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엔 김석희·김욱동 등 유명 번역가에 인기 소설가 김영하도 가세했다. 소설 첫 문장 번역만 뽑아 독자 시각으로 품평한 사이트도 있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 ‘파친코’ 첫 문장 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이다. 2018년 나온 첫 번역본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였다. 판권이 바뀌며 이달 말 새로 번역돼 나오는데,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첫 문장이 바뀌었다. 이민진은 “두 번역 모두 존중한다”고 했다.
▶소설 ‘파친코’는 식민과 전쟁의 고통을 겪고 일본에 건너간 한인 4대의 삶을 다룬다. 냉대와 차별,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을 연이어 겪지만 눈물을 흘린 뒤 그 눈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첫 문장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망국, 분단, 전쟁, 한강의 기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근대사 자체가 ‘역사는 한국을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닌가.
07.16(토) 켄타우로스 변이

▲스페인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가 신화 속 존재인 켄타우로스의 출산 장면을 담아낸 '켄타우로스 가족'(1940). 정교한 테크닉과 안정적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달리 스스로 고전주의 양식으로의 회귀를 드러낸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론 머스크는 지난 3월 신종 코로나에 걸렸다. 2020년 11월에 이어 두 번째 확진이었다. 두 번째 걸렸을 때 머스크는 트위터에서 “코로나는 테세우스의 바이러스”라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배’에 비유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영웅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배를 항구에 영구 정박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부식이 심해지면 널빤지·돛대 등을 새것으로 갈아야 했다. 부품을 계속 교체해도 그 배를 여전히 같은 배로 볼 수 있을까. 머스크는 코로나 변이가 계속 출현하는데 언제까지 같은 코로나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진 것이다.
▶질병 등 의학 용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이 많다. 서양 의학이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영향일 것이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고대 그리스 의사였다. 전 세계 의사협회 로고엔 어김없이 뱀이 등장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감긴 뱀이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만났던 뱀이 물어온 풀이 죽은 뱀을 살렸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했다.

▶코로나는 불안정한 RNA 바이러스여서 복제 과정에서 변이가 많이 생긴다. 지난 6일까지 WHO가 집계한 오미크론 세부 변이만 194개에 달한다. 이 변이 바이러스들을 유전형에 따라 그리스 알파벳 알파, 델타, 오미크론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 하위 변이가 생기면 오미크론형 AA로, 이 변이에서 다시 파생 변이가 생기면 AA.1 식으로 분류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오미크론 BA.5 확산으로 하루 4만명 안팎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오미크론 변이 중 BA.2.75를 ‘켄타우로스’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BA.2의 파생 변이다. 확산 속도가 빠른 데다 면역 회피 능력도 뛰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半人半馬)에 비유했다고 한다. 평범한 트위터 이용자가 붙인 이름이라고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인지 널리 쓰이고 있지만 너무 공포를 조장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BA.5와의 싸움도 힘겨운데 켄타우로스까지 가세하니 긴장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두 변이가 차례로 쌍봉을 나타낼 수도 있고 전파력이 좋은 켄타우로스가 빠르게 우세종화할 가능성도 있다. 다행히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할수록 전파 속도는 빨라지는 반면 치명률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기존 백신이 변이 바이러스 감염을 막는 효과는 떨어져도 중증화 예방 효과는 있다고 하니 고령층은 일단 4차 접종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07.18(월) 캠퍼스 범죄
건물 구내 전역에 방범용 CCTV 1500여 개를 설치한다. 화장실과 건물의 후미진 외곽에 비상벨을 달고 야간 전용 출입문을 둔다. 모든 건물에 몰래카메라가 있는지 전수조사하고 몰카 탐지기도 도입한다. 실시간 범죄 대응을 위해 종합상황실을 24시간 운영한다.... 각종 방범 조치가 취해진 이곳은 우범지대가 아니다. 한 사립대학이 교내에서 벌어지는 범죄, 특히 여학생 대상 성범죄를 막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 대학만이 아니다. ‘캠퍼스 폴리스’ ‘캠퍼스 순찰대’ 등 캠퍼스 내 범죄를 막기 위한 조직을 운영하는 대학들도 많다.

▶과잉 대응이 아니다. 한국성폭력 상담소가 조사했더니 성폭력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직장이지만 학교·학원도 3위에 올랐다. 캠퍼스 성폭력 가해자는 대학 선배와 동급생이 각각 39%로, 전체 성범죄의 약 80%가 학생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캠퍼스 성범죄 318건을 분석했더니 유흥 공간(43건) 다음으로 학교(37건)가 많았다는 조사도 있다. 캠퍼스는 결코 범죄 청정 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밤에 인적이 드물고 학교 주변에 야산이나 공터가 많아 범죄에 취약하다.
▶미국 국립 알코올 남용 중독 연구소(NIAAA)는 대학 내 각종 사고의 주범으로 술을 꼽는다. 미국 내 음주로 인한 사고와 범죄로 사망하는 대학생이 연간 180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음주 범죄와 사고가 끊이지 않자 아이비리그의 명문 펜실베이니아대학은 캠퍼스 안에서 알코올 도수 15도 이상의 주류 섭취를 금했다. 다트머스대·브라운대·버지니아대 등도 비슷한 음주 제한 규정을 뒀다.
▶엊그제 인천의 한 대학에서 1학년 여학생이 성폭행당하고 목숨마저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같은 학교 1학년 남학생이었다. 이 사건 배경도 술이었다. 꿈에 부풀어 캠퍼스 생활을 시작한 여대생이 반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남학생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테베의 왕 펜테우스는 음주 범죄에 희생당해 죽는다. 펜테우스가 술로 인한 일탈을 막기 위해 주신(酒神) 디오니소스 경배를 금하자 분노한 디오니소스는 펜테우스의 어머니와 이모를 취하게 한 뒤 그들 앞에 펜테우스를 내던진다. 만취한 어머니와 이모들은 아들과 조카를 몰라본다. “저건 수퇘지다”라고 외치며 달려들어 피붙이의 사지를 찢는다. 술에서 깨어나 땅을 친들 뒤늦은 후회일 뿐이다. 캠퍼스 범죄를 막으려면 학생들을 과도한 음주로부터 떼어 놓을 대책부터 필요할 것 같다.
07.19 ‘원화 채굴’
10년 전 일본 소설을 영화로 만든 화차(火車). 이야기의 발단은 ‘빚’이다. 부모에게 약혼녀를 소개하러 가던 길에 약혼녀가 사라진다. 수소문 끝에 약혼녀의 인생 전체가 가짜인 게 드러난다. 아버지가 빚을 진 채 사라지고 딸이 빚을 대신 떠안았다. 사채업자의 매춘 강요에 시달리던 그녀는 빚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 신분을 도용해 가짜 인생을 살았다. 화차는 지옥행 수레를 뜻하는 불교 용어인데, 일본에선 ‘빚에 시달리는 괴로운 현실’이란 의미로 쓴다.

▲서울 세종대로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출근길 시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뉴스1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구시 재정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빚의 무서움을 회상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7살 때 고리대금업자가 고리채 신고를 했다고 엄마 머리채를 잡고 고향 길거리를 끌고 다니며 구타했다.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알았다.”
▶투자업계에선 빚을 내 수익률을 더 높이는 레버리지 투자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투자 고수 워런 버핏은 빚을 극도로 싫어한다. 버핏은 청년들에게 “돈이 생기면 카드 빚부터 갚으라”고 충고한다. 그는 “18% 수익(카드 대출 이자율)은 나도 못 낸다. ‘빚 갚기’는 그 어떤 투자보다 훨씬 나은 투자”라고 했다. 버핏은 자서전에서 사업 초창기 보험사 인수를 제1 성공 비결로 꼽았다. 보험금 지급 요인이 생길 때까지 보험사가 이자 한 푼 안 내고 활용할 수 있는 고객 보험료가 무이자 투자 재원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은 “돈을 빌리는 것은 자유를 파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돈은 없고 소비 욕구는 큰 청년들은 빚 유혹에 취약하다. 2002년 카드사들이 길거리 모집으로 신용카드 1억장을 발급하면서 신용불량자 400만명을 낳는 카드 대란이 벌어졌다. 20년 만에 그 악몽이 재현될 참이다. ‘미친 집값’에 놀란 청년들이 영끌 빚투(영혼까지 끌어모아 빚내 투자)로 집·주식·코인에 투자했다가 금리 급등 탓에 파산 위기에 놓였다. 대출금리가 3%포인트 더 오르면 120만명이 소득 90% 이상을 빚 갚는 데 써야 한다. 그 빚이 336조원에 이른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 ‘원화 채굴’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월급 받는 것을 의미한다. 땀 흘려 번 월급 300만원이 ‘예금 12억원’ ‘10억원짜리 상가’와 맞먹는 수익률이라는 각성이 담긴 신조어이다. 2000년 전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근검절약만이 부자가 되는 바른 길”이라고 했다. 근검절약과 저축이 자산 형성의 첫걸음인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07.20 코로나에 안 걸린 사람들
한 의료인이 확진자를 여러 번 접촉했는데도 그때마다 코로나 음성으로 나왔다며, 자신은 코로나에 안 걸리는 체질이라고 했다. 정말 그런지 혈액검사를 해봤다. 백신으로 생성된 항체, 감염으로 생긴 항체, 둘 다 있었다. 즉 코로나에 걸렸는데 모르고 지나간 것이다. 젊은 사람이 지금까지 코로나에 안 걸렸다고 하면, 이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외국 조사로, 40세 이하 절반이 무증상 감염자였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대 연구팀이 건장한 남녀 34명 자원자에게 낮은 용량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직접 주입한 뒤,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16명이 끝내 감염되지 않았다. 면역 체계는 항체를 만들어서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돌기가 몸에 침입하는 것을 막는 초병 역할의 B세포, 감염된 세포를 물리치는 주력군 T세포로 이뤄져 있다. 안 걸린 16명은 특정 감기에 걸렸을 때 면역성을 띠는 T세포 수치가 높게 나왔다.
▶코로나에 한 번도 안 걸린 사람을 네버 코비드(Never Covid)라고 한다. 확진자 가족 중 네버 코비드인 사람의 혈액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감기 계열 바이러스 T세포 활성이 높게 나왔다. 감기도 코로나 계열 바이러스여서, 교차 면역이 일어나 코로나19에 안 걸릴 수 있다는 얘기다. 같은 음식을 나눠 먹었는데, 누구는 설사하고, 어떤 이는 괜찮은 것처럼, 감염은 개인 면역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에이즈(AIDS)에 안 걸린 사람의 유전자를 분석했더니, 특정 면역 세포 표면에 특이한 수용체가 있는 사람은 에이즈 바이러스가 세포 내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 이를 활용해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 나선다. 코로나19 치료제도 안 걸린 사람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 연구 국제 기관에 네버 코비드족 5000여 명이 자기 침을 보내서 유전자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네버 코비드족은 3300만명으로, 감염 경험자 1900만명보다 많다. 감염내과 전문의들은 이들 대다수가 면역 체질 덕보다는 확진자 접촉이 적었고, 체력이 좋았고, 백신을 적절히 맞아서 안 걸렸다고 본다. 상당수 무증상 감염자도 있을 것이다. 최근 오미크론 변이는 목에 달라붙는 스파이크 단백질 모양이 크게 바뀌어, 백신이 감염 자체를 막긴 어렵다. 그래도 백신은 면역 주력군 T세포 활성을 올려 중증화를 막는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는 혈관에 스파이크 단백질 수용체가 늘어나 감염 시 중병이 될 수 있다. 코로나19에 대항할 무기는 여전히 백신, 마스크, 손 씻기, 환기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07.21 전투기의 세대
2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프로펠러 전투기가 대세였다. 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뒤엉켜 공중전을 벌이는 도그파이트(dog-fight)는 2차 대전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이다. 2차 대전 끝 무렵 속도와 고도, 성능이 크게 향상된 제트 전투기가 처음 등장했다. 이를 1세대(제트) 전투기라고 한다. 미국과 소련의 1세대 전투기가 첫 공중전을 벌인 것이 6·25 때다. 미국이 다소 우세했다. 1950년대 중반 초음속에 레이더를 갖춘 2세대 전투기가 나왔다. 10여 년 후엔 미사일과 항공전자장비를 갖춘 3세대 전투기가 개발됐다. 육안과 기관총이 아닌 미사일과 레이더로 싸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70년대에 F-15, F-16 시리즈로 대표되는 4세대 전투기가 나왔다. 레이더·미사일의 정확도는 한층 높아지고 전투에 폭격 기능까지 갖춘 멀티 플레이어였다. F-15는 한때 ‘하늘의 제왕’으로 불렸다. 1980년대 들어 여러 목표물을 동시에 탐지하는 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적외선 감시·추적 장치, 낮은 수준의 스텔스 기능을 갖춘 4.5세대 전투기 기술이 개발됐다. 우리가 19일 첫 시행 비행에 성공한 KF-21 보라매도 4.5세대다.
▶2000년대 들어 완벽한 스텔스 기능과 고도의 레이더 탐지 능력을 갖춘 5세대 F-22가 등장했다. 뒤이어 F-35와 러시아의 SU-57, 중국의 J-20도 5세대라며 선을 보였다. 최근 개봉한 영화 ‘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는 4세대인 FA-18 수퍼 호넷을 몰고 적진을 타격하고, 구형 F-14를 탈취해 상대 5세대 전투기와 싸워 2대를 격추한다. 현실에선 있기 힘든 일이다.
▶5세대 F-22는 2007년 F-15 등 4세대 전투기와 벌인 모의 공중전에서 144대0의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4.5세대 유로파이터 타이푼이 F-22와 가상 대결에서 딱 한 번 이긴 적이 있다지만 F-22가 스텔스 기능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했으면 질 리가 없었다. 전투기의 세대 차이는 체급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차원이 다른 것으로 극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과 러시아·중국·영국·일본 등은 이제 6세대 전투기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공지능(AI)을 갖춰 여러 대의 무인기를 거느릴 수 있고 최첨단 레이저 무기도 탑재된다. 활동 범위가 우주와 가까운 지상 100㎞까지 확대될 거란 전망도 있다. 스타워즈에서나 볼 법한 전투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우리가 갈 길은 아직 멀다.
07.22 코로나 또 걸리는 사람들

▲(워싱턴 AP=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한 어린이 병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마친 4세 아이들이 접종 부위에 붙인 밴드를 내보이며 자랑하고 있다. 이날부터 미국 전역에서는 생후 6개월부터 5세 미만 영유아에 대한 화이자와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더 타임스 피카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2.6.22
인류는 2020년 8월 코로나 집단면역이라는 희망을 잃어버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집단의 일정 비율이 백신을 맞거나 자연감염으로 항체를 가지면 더 이상 코로나가 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홍콩대 연구진은 “젊고 건강한 30대 남성이 첫 감염 후 4개월 반 만에 다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논문을 국제 학술지 ‘임상감염병’에 게재했다. 세계 최초로 코로나 재감염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사례였다.
▶이후 코로나 변이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코로나도 감기나 독감처럼 재감염이 뉴노멀(New normal)인 시대로 진입했다. 영국의 20세 여성은 2020년 9월, 2021년 1월 등에 이어 지난 1월에 네 번째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영국에서만 이 여성처럼 네 차례 걸린 사람이 지난 3월까지 74명이다. 세 차례 걸린 사람도 8717명, 두 차례 걸린 사람은 80만4463명이다. 미국에선 5차례 재감염된 사례도 보고됐다. 미국·영국 등은 지역에 따라 신규 확진자 중 10~20%가 재감염자다.

▶우리 경우 7월 첫째 주 코로나 확진자 중 2.88%가 재감염자였다. 약 97%는 첫 감염인 셈이다. 한 번도 걸리지 않은 ‘네버 코비드(Never Covid)족’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국내 재감염 비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안심할 수 없다. 재감염 사례가 지난 5월 첫 주 0.59%에서 6월 셋째 주 2.63%, 6월 다섯째 주 2.86% 등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내 감염자 중 70% 이상인 1400만명이 지난 3~4월 걸렸는데 이들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8월이면 재감염자가 큰 폭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까지 국내 재감염자 7만7200명 중 청소년·어린이(0~17세)가 33.2%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18~29세가 19.2%, 30~39세 14.0% 등이다. 30대 이하 젊은 층이 66.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활동성도 높지만 11세 이하는 백신을 맞지 않는 등 접종률이 낮은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바이러스가 ‘귀신같이’ 항체가 없거나 약한 사람을 찾아간다.
▶백신이나 자연감염으로 생긴 항체의 감염 예방 효과는 이분법적으로 있거나 없거나가 아니다. 접종이나 확진 후 서서히 떨어져 3~4개월이면 절반쯤으로 줄어들고 이후에도 서서히 떨어진다고 한다. 재감염자 다수가 젊은 층이라는 것은 백신을 맞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피하는 것 외엔 별다른 예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07.23(토) 자폐인 골퍼 이승민
자폐를 소재로 다룬 영화 중에 더스틴 호프먼과 톰 크루즈가 주연한 ‘레인맨’은 단연 수작이다. 자기 머리를 치며 괴성을 지르는 호프먼의 자폐 연기는 자폐인들이 겪는 고통을 실감 나게 보여줬다. 이 작품에 나오는 자폐의 또 다른 특징이 초능력에 가까운 암기력을 발휘하는 ‘서번트 증후군’이다. 어린아이 지능인 자폐인이 게임에선 카드 배열 순서를 완벽하게 암기해 돈을 딴다. 영화 밖에서도 실제 있는 일이다. 3살 때 자폐 판정을 받은 영국 화가 스티븐 윌트셔는 어느 도시를 가든 비행기에서 슬쩍 바라본 풍경을 세밀화로 복원한다. 별명이 ‘인간 카메라’다.

▶서번트 증후군은 영화나 드라마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즐겨 선택하는 소재다.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주인공은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자폐 변호사다. 법전을 달달 외우고 조서 몇 쪽 몇째 줄에 무슨 문장이 있는지 훤히 꿴다.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의학 드라마 ‘굿닥터’에 나오는 자폐 의사도 평소 눈치 없이 굴다가 환자만 보면 엄청난 의학 지식으로 질병을 치료한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식 판타지일 뿐이다. 자폐 장애인 중 서번트 증후군을 보이는 사례는 100만분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부분 저(低)지능이다. 특수한 능력을 보인다 해도 암기나 계산 같은 단순 기능에 국한된다. 종합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의사·법조인·학자가 되는 사례는 찾기 어렵다.
▶발달장애 3급인 프로골퍼 이승민이 그제 미국에서 열린 장애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장애를 딛고 이룬 대단한 성취다. 이승민은 어릴 적부터 골프공에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골프도 타인과 겨루는 경기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자신과 싸우는 종목이다. 정지된 공에 강한 집중을 해야 한다. 스윙 동작은 한결같다. 골프는 자폐의 행동 특성에 맞는 종목일 수 있다. 전문의에게 물어보니 자폐인들은 타인과 직접 부딪치는 종목보다는 골프나 마라톤처럼 자기 경기에 집중하고 인내심을 발휘하는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 영화 ‘말아톤’이나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자폐인도 삶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으며 성취의 기쁨을 갈망한다.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계속 도전한다”는 이승민의 우승 소감은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 더해 더욱 값지다. 자폐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깨는 말이기도 하다. 이승민의 성과는 지적 분야까지 이르지 못하다고 해서 퇴색하지 않는다. 몸이 흘린 정직한 땀의 가치를 입증한 그에게 축하 박수를 보낸다.
07.25(월) 검찰 티타임
대형 수사가 시작되면 검찰은 철통 보안에 나선다. 과거 대검 중수부의 수사가 특히 그랬다. 중수부로 통하는 철문은 굳게 닫히고 검사들은 기자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기자들은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철문에 귀를 댔고, 조사실에서 눈가루처럼 부서져 나오는 쓰레기 행방을 쫓기도 했다. 그런 검찰 수사 상황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이른바 ‘검찰 티타임’이었다. 주로 수사 책임자가 정해진 시각에 기자들에게 수사 진행 과정을 설명하는 브리핑이다.

▶이 티타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5년 대검 중수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할 때였다. 수사에 큰 관심이 쏠리자 당시 안강민 중수부장이 정례화했다. 피의 사실 공표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와 최대한 수사 상황을 끌어내야 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선문답이 오가고 스무고개가 펼쳐졌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이 화제가 되면서 일문일답이 그대로 신문 지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예민한 질문을 받으면 눈만 껌뻑거리는 그를 검찰 기자들은 ‘두꺼비’라 불렀다.
▶기자들은 그의 ‘화법(話法) 연구’에 들어갔다. “아직 보고받지 않았다” “글쎄”라는 답을 하면 맞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가 어느 날 오전 기자실에 내려와 커피를 절반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아닌데 노태우씨가 오늘 오후 3시 출두합니다.” 기자실에선 난리가 났고, 며칠 뒤 노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전직 검찰 간부는 “그건 준비한 깜짝 이벤트였다”고 했다.
▶티타임에선 그 나름대로 멋을 부린 은유적 표현도 등장했다. 기자들은 수사 진척도를 묻느라고 “수사가 몇 부 능선에 왔느냐”는 질문을 자주 한다. 1999년 ‘파업 유도 사건’ 수사 책임자는 그 질문에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고 했다.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는 “지금 비행을 끝내고 랜딩 기어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티타임을 없앤 건 조국 전 법무장관이었다. 2019년 10월 검찰의 언론 접촉을 대폭 제한하는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을 만들면서다. 당시 자녀 입시 비리 등으로 수사받던 그가 자신의 사건 보도를 막기 위해 만든 ‘셀프 방탄 규정’이란 비판이 나왔다. 법무부가 새 규정을 만들어 25일부터 티타임을 재개하기로 했다. 국민 알 권리 보장과 오보 방지를 위해선 긍정적이다. 다만 검찰과 기자들의 ‘정보 비대칭’ 탓에 티타임이 종종 언론 플레이의 장으로 변질하기도 했던 부작용은 막아야 한다.
최원규 논설위원
07.26 MBTI 성격검사

▲CNN은 한국 MZ세대의 MBTI 성격유형 검사 의존 현상을 집중보도했다. /일러스트=박상훈
유튜브 인기 영상 중에 국내 톱 프로게이머 페이커가 “MBTI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는 영상이 있다. 그의 얼굴엔 또 그 질문이냐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좀 망설이다 “MBTI는 성격 유형 테스트 검사입니다”라고 답하고 살짝 웃는다. 얼마나 많이 그 질문을 받았으면 그랬을까 싶다.
▶MBTI 검사가 큰 인기를 끈 것은 2020년 한 예능 프로에서 유명 출연진이 이 검사를 받는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부터였다. 지난해 말 한 조사에서 18~29세 젊은 층 90% 이상이 MBTI 검사를 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30대도 75%, 40대는 53%, 50대도 40% 가까운 국민이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요즘 MBTI를 모르고 젊은 사람과 대화하려면 말이 안 통하는 이유다. 국민 중 반 이상이 검사해본 경험이 있다니 혈액형을 통한 성격 유형화를 넘는 열풍이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외향·내향, 감각·직관, 사고·감정, 판단·인식 등 지표에 따라 성격을 16개 유형으로 분류하고 이를 INTJ 등과 같이 영어 알파벳 4개로 표현한 것이다. 브릭스와 마이어스 모녀가 1940년대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의 이론에 기반해 당시 여성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80년 전 만들기 시작한 성격 테스트가 뒤늦게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미국 CNN은 한국의 MZ세대가 데이트 상대를 찾는 데 MBTI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많은 한국 젊은이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알아가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는 MBTI 유형을 보고 잘 맞는 사람을 골라 만난다는 것이다. 데이트에서만 아니라 각종 상품 마케팅, 채용·취업 시장에서도 MBTI가 쓰일 정도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3% 정도가 이미 MBTI를 채용에 활용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MBTI는 전문적인 심리 검사에 비해 전문성이 낮고 일반화하기에는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이 검사를 만든 브릭스와 마이어스 모녀는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다. 연속 테스트할 경우 다른 결과가 나오는 사례가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기업이 채용에 이 검사를 활용하면 구직자들은 기업이 원하는 유형이 나오도록 반응할 것이다. 연애 상대끼리도 비슷할 가능성이 있다. MBTI 열풍이든 다른 무엇이든 모든 것은 지나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다. 재미 수준을 넘어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을 정도로 과신하면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07.27 핵 어뢰
1961년 10월 30일 구소련 북극해에 있는 노바야제믈랴 제도 4.2㎞ 상공에서 강력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덩이가 생겼다. 직경이 무려 8㎞에 달했던 불덩이는 이내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냈다. 버섯구름은 높이 60㎞, 폭 30~40㎞까지 커졌다. 100㎞ 바깥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열이 발생했고, 후폭풍은 1000㎞ 떨어져 있는 핀란드 쪽 건물의 유리창을 깰 정도였다. 폭발에 의한 지진파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다.

▶이 거대한 폭발의 원인은 역사상 가장 위력이 강한 핵폭탄이었던 소련의 ‘차르 폭탄(봄바)’이었다. 말 그대로 ‘황제(차르) 폭탄’이었다. 차르 폭탄의 폭발력은 TNT 폭약 기준으로 5800만t에 달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의 3800배 이상 위력으로 추정됐다. 미국이 만든 가장 강력한 핵폭탄에 비해서도 2배 이상의 위력을 가졌다.
▶러시아가 이달 초 배치한 최신형 핵 추진 잠수함의 가공할 파괴력이 미 CNN 등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벨고로드함은 길이 184m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벨고로드함이 위협적인 것은 크기 때문이 아니다. 핵 어뢰 ‘포세이돈’을 8발이나 탑재하기 때문이다. 포세이돈은 직경 2.5m, 길이 20m로 어뢰가 아니라 무인 잠수정에 가깝다. 게다가 핵 추진이다.
▶포세이돈의 존재는 지난 2015년 러시아 방송의 실수로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성능은 사거리(항속거리) 1만㎞, 위력 100메가톤으로, 수심 1000m에서 장기간 항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르 폭탄’보다 큰 위력이어서 전문가들은 반신반의했는데 이제 이 ‘둠스데이(지구 최후의 날) 핵 어뢰’를 발사할 핵 추진 잠수함까지 실전 배치된 것이다. 영국 BBC는 “100메가톤급 핵탄두가 폭발하면 500m 높이의 쓰나미와 방사능 파동을 일으켜 반경 1500㎞ 이내의 모든 생물을 절멸시킬 수 있다”고 했다. 미 국무부는 “포세이돈 핵 어뢰가 미 해안 도시를 쓰나미로 덮어버릴 목적으로 설계되고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포세이돈의 실제 위력은 2메가톤급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해도 엄청난 쓰나미를 발생시킬 것이다. 이미 지구 상의 핵무기도 인류를 몇 번이나 몰살시킬 수 있는 양이다. 그것도 모자라 핵 어뢰까지 나왔다. 우크라이나 영토를 빼앗으려 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러시아는 핵무기 욕심도 끝이 없는 모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듯 러시아 핵 어뢰도 엉터리 성능이길 바랄 뿐이다.
유용원 논설위원·군사전문기자
07.28 폴란드의 러시아 포비아
냉전 시기 서방의 나토(NATO)에 맞선 공산권 군사동맹이 1955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결성됐다. 그 후 소련이 해제될 때까지 폴란드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토의 창끝’으로 불린다. 러시아에 맞선 서방의 최전방 군사 거점이란 뜻이다. 이런 극단적 방향 전환이 냉전의 종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 수백 년 피의 분쟁사가 있었다.

▶러시아는 1795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며 이 나라를 지도에서 지웠다. 학교에선 러시아어를 배우게 했다. 이후 1918년 폴란드가 독립할 때까지 피로 얼룩진 독립 투쟁이 전개됐다. 2차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다시 분할 점령한 소련은 장교·경찰·지식인 2만2000명을 끌고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숲에서 학살했다. 훗날 스탈린이 “폴란드가 다시는 독립할 수 없게 엘리트들 씨를 말리라”고 지시한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2010년 4월 레흐 카친스키 당시 폴란드 대통령과 정부 각료, 군 최고위 장성 등이 카틴숲 학살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전원 사망하며 옛 상처가 다시 덧났다. 추락의 배후로 러시아 테러를 의심하는 영화가 제작됐고 폴란드 전역은 반(反)러시아 감정으로 들끓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올해 우크라이나 침공은 반러시아 감정이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러시아 붉은광장에는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1812년 폴란드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해 세운 동상이 지금도 있다. 폴란드는 이를 모욕으로 여긴다. 폴란드인을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러시아가 최고의 적’이라고 한 응답이 94%나 됐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다음 목표는 우리”라며 나토와의 연대 강화에 나섰다.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를 도입했고 동부전선에 패트리엇 미사일을 배치했다. 미군과 합동방어 훈련도 했다.
▶폴란드 무기의 주력은 여전히 러시아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전에서 처참한 수준이 드러나자 무기 선진화에 나서고 있다. 그 대상으로 한국을 선택해 어제 무기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도입 규모가 엄청나다. FA-50경공격기 48대, K2전차는 980대, K9자주포 648대 등 25조원대에 이른다. 무기 도입을 주도하는 이는 카친스키 전 대통령의 형이자 폴란드 집권당 대표인 야로스와프 카친스키다. 그는 “동맹이 우리를 돕겠지만 우리가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러시아의 공격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한미 동맹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말라는 충고로 들린다.
07.29 재판 지연
2016년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이 법조계였다. AI가 가장 먼저 침투할 분야가 법조계라는 위기감이 퍼졌다. 많은 법조인은 “양심과 상식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다”고 했지만 AI는 침투 영역을 넓히고 있다.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변호사 로스(Ross)는 2018년 미국 대형 로펌에 채용돼 초당 10억건이 넘는 법률 문서를 분석했다. 미국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2017년 AI 알고리즘 자료를 근거로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한 지방법원 판결이 타당하다고 인정했다. AI가 인간 판사를 대체하는 것은 어쩌면 판사들의 재판 지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 정을병이 1974년에 쓴 단편소설 ‘육조지’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형사는 패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 경찰은 구타, 검사는 잦은 소환, 판사는 재판 지연으로 국민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다. 재판 지연이 경찰의 구타만큼 고통스럽다는 풍자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지금, 경찰의 구타는 사라졌지만 재판 지연은 여전하다는 사람이 많다.
▶어느 60대 여성이 작년 8월 폭력 남편을 상대로 이혼 및 재산 분할을 청구했는데 첫 재판이 올 6월에야 열렸다고 한다. 열 달 만에 판사 얼굴을 처음 본 것이다. 재판이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재산 분할은 판결이 확정돼야 돈이 지급된다. 전업주부였던 이 여성은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게으른 판사가 만든 고난이다.
▶이 여성만이 아니다. 전국 법원에서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최근 5년간 민사소송은 3배로, 형사소송은 2배로 늘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법에서 5년 넘게 판결을 내리지 않은 ‘초장기 미제 사건’도 5배가량 폭증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법원장 후보 추천제 도입 등으로 판사들이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탓이 크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이 있다. 우리 헌법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규정해 놓고 있다. 판사의 재량이 아니라 책무다. 충실한 재판도 중요하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재판을 미루는 건 직무유기다. 세계 여러 나라 법원에는 칼과 저울을 든 동상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우리 대법원 청사에 있는 디케상은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공평하게 심판한다는 의미다. 여기에 이젠 시계나 달력을 하나 더 들려야 할 판이다.
07.30(토) 여군 잠수함 승조원

▲해군이 28일 여군의 잠수함 승조를 허용키로 결정했다. 사진은 여군 승조원이 탑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3000톤급 도산 안창호함이 지난해 8월 취역식을 갖는 모습
대양을 항해하는 배는 적도를 통과할 때 기념 행사를 갖는다. 범선 시대에 무풍지대 무사 통과를 비는 의식에서 비롯됐는데, 지금도 상선은 물론 최첨단 군함까지 ‘적도제’를 치른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호의 2008~2009년 항해 기록에는 각종 임무 수행 통계와 함께 ‘적도제를 통해 3000여 명의 새로운 셸백(shellback·배로 적도를 통과한 사람)이 탄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 해군사관학교 생도의 세계 순항 훈련도 적도를 지날 때 용왕제를 거르지 않는다.
▶해군만큼 미신에 민감한 곳도 없다. 해군이 발행한 홍보 책자에 ‘함정 금기 사항’이 소개돼 있다. 우선 함정 번호에 숫자 ‘4′를 쓰지 않는다. 6·25전쟁 당시 4 자가 들어간 배가 작전 중 침몰한 데다 우리 전통의 4 자 기피 현상이 맞물렸다고 설명했다. 항해 중 휘파람도 금기다. 배에서 휘파람을 불면 바다의 신을 노하게 해 폭풍우가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한 관습을 따른다고 했다.

▶배에 관한 미신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여성이 타면 부정 탄다는 것이다. 여성이 타면 뱃사람이 다치거나 배가 난파된다는 믿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어졌다. 미국이 해군사관학교에 여성 입학을 허용한 것이 1976년이고, 500년 역사의 영국 해군도 2012년에야 첫 여성 함장을 배출했다. 1999년 여성의 해사 입사를 허용한 우리는 2020년 첫 전투함장을 배출했다. 지금은 미 항공모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호 함장도 여성이다.
▶마지막 금녀(禁女)의 벽은 잠수함이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 남녀가 부대끼는 근무 환경 때문이다. 여군의 잠수함 근무를 처음 허용한 나라는 1985년 노르웨이다. 미국은 2010년이 돼서야 허용했다. 현재는 전략핵잠 1척당 6명의 여군이 근무한다. 잠수함은 공간상 이유로 침대 수가 승조원 수의 70% 수준이다. 다른 사람이 근무할 때 공유 침대에서 자야 한다. 화장실·샤워실도 남녀가 같이 쓰되 시간대만 달리한다. 처음에는 남성 승조원 아내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미 해군은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설명회를 열었다고 한다.
▶우리 해군도 28일 여군의 잠수함 승조를 결정했다. 세계 14번째다. 3000톤급 중형 잠수함을 도입해 함내 공간에 여유가 생겼고, 여군의 역할 증대 요구도 수용하기 위해서다. 인력 부족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육군엔 이미 여성만으로 구성된 대테러 특수부대 ‘독거미 부대’가 있다. 더 이상 여성이 진출하지 못할 영역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