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2-07/ 07월 01일(금) 97세대의 正體 - 07월 29일(금) 한국 경찰과 중국 공안
07월 01일(금) 97세대의 正體

이도운 논설위원
‘86세대’를 검색하면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 명확한 답이 나온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세대다. 때로는 의미가 확장돼서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가치를 공유하는 1960년대생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97세대’를 검색하면 체계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97이 들어간 문장들만 나열된다. 97은 86만큼 체계적으로 정의된 집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 대한 연구는 조합과 끼워 맞추기가 필요하다.
1991년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가 소설 ‘X세대’를 발표했는데, 1965년부터 1980년에 태어난 세대를 일컬었다. X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015B의 노래 제목을 딴 ‘신인류’라는 용어도 사용됐다. 1998년 미국 작가 돈 탭스콧은 ‘디지털의 부상: N세대의 등장’이란 책을 발간했는데, 1976∼1979년에 태어나 최초로 인터넷에 익숙해진 세대를 조명했다.
한국의 97세대는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일어났던 국내외 사건들로부터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88 서울올림픽 개최,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창립, 1994·1995년 성수대교·삼풍아파트 붕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및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및 노무현 대통령 당선 등이다. 정치적으로, 97세대는 민주화 이후 성인이 됐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성취에 관심을 집중했다. 해외 유학도 97세대부터 폭발적으로 늘었다. 경제적으로는, 이전 세대에 비해 풍요로운 성장기를 보내며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1991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이후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현재의 K-컬처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선거에서 97세대인 40대는 더불어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97세대가 결속해 정치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86세대를 따라왔다. 민주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이재명 의원에 맞서 강병원·박용진·강훈식·박주민 등 97세대가 잇달아 도전장을 내고 있다. 97세대가 20년간 진보 정치를 독점했던 86세대를 넘어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07월 04일(월) 신설 ‘경찰국’의 진실

박민 논설위원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이 경찰 길들이기라는 야당의 비판은 기본적 사실만 확인하면 정치 공세임을 알 수 있다. 권력이 경찰을 통제하려는 핵심 이유는 수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다. 특히, 오는 9월 10일부터 ‘검수완박’법이 시행되면 경찰 수사권은 대폭 확대된다. 그러나 경찰국이 신설돼도 행안부 장관은 경찰청장을 상대로 수사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다. 더구나 경찰청법 제14조 제6항은 경찰청장도 개별 사건을 지휘·감독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할 수 있는 것은 검찰청법 제8조가 보장하기 때문이다. 경찰 수사를 지휘·감독할 수 있는 것은 국가수사본부장뿐이다. 대규모 폭동이나 테러 발생 시 경찰청장이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행안부가 신설 경찰국을 통해 인사 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 결국 수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있다.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역대 정부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직접 경찰을 통제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민정수석을 없앴다. 이에 따라 법률상 규정돼 있지만 유명무실했던 행안부의 경찰 관리·감독 권한을 복원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론이 경찰국이다. 대통령실의 통제력은 행안부와 비교가 안 된다. 따라서 경찰국 신설은 없던 통제를 신설하는 것이 아니다. 경찰은 권력의 비공식 통제에서 벗어나 정부 조직상의 공식적인 관리·감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수사를 제외한 경찰의 다른 업무도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경찰은 수사 외 국민의 생명·신체·재산 보호, 공공안녕을 위한 정보 수집, 교통 단속과 위해 방지 등 수많은 민생 관련 업무를 수행한다. 경찰인력은 14만 명에 달하고 2022년 예산은 12조2800여 억 원 규모다. 이런 조직을 통제의 공백 상태에 놓아두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자 정부의 직무유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더 강화하려면 행안부에 설치된 국가경찰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인 방송통신위원회나 국무총리 직속인 국민권익위원회와 같은 합의제 중앙행정기관으로 승격시키면 된다. 그전까지는 법적 권한을 가진 행안부 장관이 경찰을 관리·감독해야 한다.
07월 05일 매티스(72) 전 장관의 만혼

이미숙 논설위원
로버트 레드퍼드와 제인 폰다가 주연한 ‘밤에 우리 영혼은(Our Souls at Night)’은 미국 작가 켄트 하루프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2017년 만들어진 영화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배우자와 사별한 뒤 홀로 사는 70대 남녀가 밤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동침을 결정한 뒤 나타나는 일상의 변화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오랜 세월 같은 동네에서 살며 지켜보던 에디가 루이스에게 “언제 우리 집에 와서 잘래요?”라는 도발적 제안을 한 뒤 두 사람은 매일 저녁을 함께하며 침대에서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든다. 영화는 두 사람이 대화하며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해 노년의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을 잘 보여줬다. 촬영 당시 레드퍼드는 81세, 폰다는 80세였는데 70대 연인 역을 잘 소화했다.
미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1916∼2020)는 오래전 허핑턴포스트에 쓴 칼럼에서 “진정한 로맨스는 80세가 돼야 시작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젊은 시절엔 성적 호기심이 압도해 진정한 사랑을 분간하기 어려운데 나이가 들어 그 에너지가 꺾일 때 비로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더글러스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1957)’ ‘스파르타쿠스(1960)’ 등에서 선이 굵은 연기를 선보인 배우다. 평생 두 번 결혼한 그는 75세 때인 1991년 헬기 사고를 당했다. 그 후 삶에 대한 사색이 깊어졌다고 하는데 진정한 로맨스의 의미를 발견한 것은 그 후다. 그는 로맨스 시기 진입 이후 사반세기 가까이 더 살았고 104세에 타계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제임스 매티스(72)가 최근 결혼했다. 그는 지난 1일 열린 서울포럼 2022 콘퍼런스에 신부 크리스티나 로머스니와 함께 참석했다. 두 사람은 ‘밤에 우리 영혼은’의 주인공 에디와 루이스처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 사병 출신으로서 4성 장군까지 오른 매티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 ‘해병대와 결혼한 사나이’로 불렸다. 그는 2017년 1월 국방부 장관 취임 후 한국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대통령 탄핵 후 어려움에 빠진 한국에 동맹이 함께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였다는데, 결혼 후 부부의 첫 방문국도 한국이다. 한국을 사랑하고 동맹을 중시하는 매티스의 70대 로맨스가 더욱 각별해 보이는 이유다.
07월 06일 이준석의 ‘광인 전략’

이현종 논설위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정치 운명을 가를 당 윤리위원회 회의(7일 오후)가 다가오면서 이 대표는 SNS를 중단하고 공식 석상 발언도 줄였다. 지난 주말만 해도 방송과 신문 인터뷰에서 당 대표의 권한을 설명하면서 “윤리위를 해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선 넘는다 생각했으면 이미 그렇게 했을 거다. 저는 다 지켜볼 것”이라고도 했다.
윤리위가 당 대표 자격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통해 당 대표직을 사수하는 방안을 이미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을 건드리면 국민의힘도 시끄러울 것이라는 경고다.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선 “제가 흑화(黑化·곤충이 검게 변하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평범한 사람이 냉혹해지는 것)하지 않도록 만들어 달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선 “제가 역할을 맡으면 20일이면 (지지율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치며 SOS를 치지만 이미 대통령실도 마음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 대표의 전략은 국제정치 이론 중의 하나인 ‘광인(狂人) 전략’을 닮았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미치광이로 인식시킴으로써 이를 무기 삼아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전략이다.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 전쟁 때 핵전쟁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소련을 위협할 때 쓰던 전략이다. 자신을 징계하면 법정 소송으로 물고 늘어질 뿐 아니라 신당 창당 등을 통해 2024년 총선 때 20·30대를 대거 출마시켜 국민의힘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 대표는 한때 ‘오바마의 설득력과 트럼프의 전략적 영민함을 동시에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젠 ‘그저 오바마가 되고 싶은 트럼프일 뿐’이라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자신의 2030 팬덤을 무기로 기성 정치권을 흔들고 자신이 그 수장의 자리에 앉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오바마가 가졌던 ‘설득의 정치’는 사라지고,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고 사과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독선적 인물로 변했다. 트럼프처럼 SNS를 무기로 쉴 틈 없이 상대에게 비수를 날리고 갈라치기를 하며 적을 만든다. 이 시점에 구글 창업자들이 20대 때 했다는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는 말이 떠오른다.
07월 07일 입 싼 홍준표, 일꾼 홍준표

이신우 논설고문
홍준표 신임 대구시장은 특이한 퍼스낼리티의 소유자다. 유권자 입장에서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어려운 정치인이다. 일부 지지자는 불편한 진실을 시원시원하게 내질러 ‘홍카콜라’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 절제력을 찾아볼 수 없어 ‘입방정’이라는 악평을 듣는다. 하긴 “박근혜, 춘향인 줄 알았더니 향단이, 탄핵돼도 싸”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난 탄핵 반대했던 사람… 비박으로 부르지 말라”고 해 고개를 좌우로 젓게 만들기도 한다. 국민의힘 경선 당시 유승민 후보가 “순간순간은 솔직한데, 몇 년 지나면 말이 반대로 바뀐다”고 꼬집은 것이 적절한 평가다.
하지만 행정력 발휘에 있어서만은 보기 드문 일꾼이다. 요즘 홍 시장이 주목받고 있다. 남들이 흘끗흘끗 세상 눈치 보며 침묵하는 데도 혼자서 대형마트 의무휴업규제를 풀어 주말 영업을 허용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대형마트와 전통시장의 대결 프레임은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 온라인 마트가 대형마트를 제친 지 오래인 데다, 대형마트조차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여전히 ‘로빈 후드 코스프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대단한 위선이다. 더욱이 홍 시장은 경남지사 시절 “노조원 대접하려고 지방의료원 만든 것이 아니다”라며 강성노조 해방구라던 진주의료원을 과감히 해체해 버렸다. 지방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경남도의 부채를 제로로 만드는 신기(神奇)를 발휘하기도 했다.
지금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의 재정 상황이 지난 정권 5년 동안의 방만 운영으로 한계에 부닥친 형국이다. 재정자립도는 2018년의 53.4%에서 지난해에는 48.7%로 수직 낙하했고, 순채무 역시 지난해 27조5000억 원, 올해는 31조10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그런 가운데 1일 취임한 홍 시장이 누구보다 앞서 강도 높은 구조개혁을 약속하고 나섰다. “기능 중복, 방만 경영”으로 몸살을 앓는 18개 공공기관을 10개로 통폐합하는 것이 그 신호탄이다. 이로써 연간 1000억 원씩의 예산 절감이 가능하다고 한다. 지난 경남지사 시절의 실적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민선 8기 지자체가 공식 출범했다. 대구가 지자체 행정 개혁의 모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07월 08일(금) 헌재 의결정족수

김세동 논설위원
법무부와 검찰이 국민의힘에 이어 지난달 27일 검수완박 법률에 대한 권한쟁의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종료 직전 더불어민주당이 기상천외한 꼼수와 무리수를 동원해 일방 처리한 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절차와 내용이 모두 위헌이라는 것이다. 권한쟁의심판청구가 인용 결정이 나려면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언론들이 썼는데, 정확히는 참석한 재판관 중 과반수 찬성이 있으면 가능하기에 7명이 참석하는 경우면 4명만 찬성해도 검수완박 법은 무효가 된다. 법안 내용까지 위헌으로 결정 나려면 재판관 6명 이상 동의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법 제23조(심판정족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헌법재판은 재판관 9명 중 7인 이상이 출석해야 열릴 수 있고, 의결은 참여 재판관 과반수 찬성이면 된다. 그런데 법률의 위헌 결정, 탄핵 결정, 정당 해산 결정, 헌법소원의 인용 결정 등 4가지에 대해서는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땐 1명 결원 상태에서 8명 전원 찬성으로 결정됐다.
여권과 지지층에선 검수완박 법안이 당연히 위헌이라 생각하지만, 재판관 9명 중 8명이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됐고 이 중 6명이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 민변 출신 등 진보성향으로 분류돼 청구가 인용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상당하다. 헌법재판관 9명은 대통령 임명, 대법원장 지명, 국회 선출 각 3명씩으로 구성되는데 문 대통령이 ‘코드’가 비슷한 김명수 대법원장을 임명했고 국회 몫 3명이 여당 1명, 야당 1명, 여야 합의 1명이어서 원천적으로 구여권에 절대 유리한 구조다.
반면, 검수완박 법이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침해해 위헌이라고까지 헌재가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법률안 가결이 절차적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 원리를 위반해 무효라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없다는 주장도 많다. 법안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민형배 의원을 갑자기 민주당에서 탈당시켜 무늬만 무소속으로 만든 뒤 야당 몫 안건조정위원으로 욱여넣어 최장 90일간 법률안을 검토하게 돼 있는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해 법 조문 심사와 찬반 토론을 다 건너뛰고 17분 만에 끝내는 등 절차적 하자가 너무나 명백하다는 것이다.
07월 11일(월) 임재범의 ‘위로’

김종호 논설고문
‘제게 있어 그녀는/ 단 하나의 길임을 용서하소서/ 제게 있어 그녀는 아침이며/ 제게 있어 그녀는 생명임을 용서하소서’.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인 시나위의 보컬리스트이던 임재범(60)이 1998년 솔로 제3집에 담은 노래 ‘고해(告解)’ 시작 부분이다. 채정은 작사다. ‘당신이 가르친 그 사랑을 그녀 앞에 놓게 하시고/ 사람의 절망과 허무는 제게 버려/ 그녀 앞엔 아름다움만 있게 하소서’ 하고 끝난다. 하드록 기조인 그 앨범 12곡 작곡에도 참여한 임재범의 데뷔곡은 시나위의 1986년 제1집 수록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강종수 작사, 신대철 작곡)다. 1991년 솔로 독립 첫 앨범의 발라드곡 ‘이 밤이 지나면’(이지영 작사, 신재홍 작곡) 등의 인기가 폭발적인 상황에서, 그는 돌연 가요계에서 사라졌었다. 1년 후에 나타나, 잠적 이유에 대해 “로커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창력이 독보적인 그는 그 뒤로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 ‘비상(飛翔)’ ‘사랑보다 깊은 상처’ ‘너를 위해’ ‘낙인’ ‘독종’ 등 많은 명곡을 남겼다. 풍부한 성량과 묵직한 중저음으로 슬픔을 담아 절규하듯 감정을 폭발시키며 노래하는 그를 두고, 어느 작곡가는 “기능적으로 잘 부르는 가수는 많지만, 감성 표현을 임재범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2015년 데뷔 30주년 앨범을 내놓고 또 활동을 중단했던 그가 7년 만의 신곡인 발라드 ‘위로’(채정은 작사, 한태수 작곡)를 지난 6월 16일 발표했다. ‘숨죽여 울지 마요/ 그 불 꺼진 방 안에서/ 알아요 알아요 얼마나 힘든가요’ 하고 시작해, ‘나 또한 늘 그랬죠/ 가슴속 불덩이가/ 자던 숨을 짓누르면/ 뛰쳐나가 밤새 뛰던 미친 밤/ 그댄 넘치게 잘하고 있어요’ 하고 끝난다. 그는 “코로나19 사태의 상처를 견딘 분들을 위로하는 노래인데, 나도 위로받고 싶었다”고 했다. “삶의 힘든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음악은 내 숙명인 것 같다. 피하려고 해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이라고 했다. 오는 16일 나올 그의 제7집 ‘세븐 콤마(Seven,)’ 제1막 ‘집을 나서며’에 담길 노래 ‘여행자’ ‘홈리스(Homeless)’ ‘그리움’ 등도 ‘위로’의 연장이다.
07월 12일 조문 외교

이도운 논설위원
국가의 전·현직 원수나 세계적 인물이 사망하면 각국에서 조문 사절이 방문해 자연스럽게 조문 외교가 펼쳐진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4일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자 123개국에서 정상급 58명을 비롯한 조문단이 참석했다. ‘인류 정상회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도 나란히 참석, 정상회담을 열었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독자 노선을 취하던 티토가 사라지자 유고를 다시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 직접 참석했으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월터 먼데일 부통령을 보냈다가 외교 실패라는 비난을 받았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하자 200여 국의 지도자와 정부 대표가 교황청 장례식에 모였다.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수교 관계를 유지하던 바티칸이 중국과 손잡으려는 움직임을 막으려 참석했다. 중국은 천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을 항의하며 조문단을 보내지 않았다. 관계가 껄끄러웠던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과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이 장례식장에서 악수했는데, 이란에서 비판 여론이 일자 하타미 대통령은 악수 사실을 부인하기도 했다.
껄끄러운 한·일 관계에서도 의미 있는 조문 외교가 이어져 왔다. 2000년 5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과로로 쓰러진 뒤 사망하자 ‘김-오부치 선언’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6월 8일 거행된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다. 김 대통령 방일을 계기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모리 요시로(森喜朗) 신임 총리 간의 3국 정상회담도 열렸다.
지난 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피격 사망으로 한·일 관계가 중요한 고비에 섰다. 윤석열 대통령은 즉각 애도 메시지를 냈다. 아베 총리 집권 기간 중 ‘카운터 파트’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애도 메시지를 발표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근 사면된 상황을 고려해 개인적으로 아키에(昭惠) 여사에게 애도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한덕수 총리·정진석 국회 부의장을 포함한 조문 사절단도 곧 방일해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조문 외교가 향후 한·일 관계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07월 13일 전기차 전비(電費)

문희수 논설위원
전기차의 강점은 역시 연료비가 적다는 점이다. 특히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엔 휘발유·경유 값이 너무 올라 싼 전기를 쓰는 전기차의 매력이 더욱 두드러진다.
전기차를 살 때 1회 충전 주행거리와는 별도로 1kwh당 주행거리인 전비(電費)를 고려하는 게 좋다고 한다. 내연기관차를 고를 때 1ℓ당 주행거리인 연비(燃費)를 따지는 것처럼 전기차에선 전비가 중요하다. 더구나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균열로 전기차 값이 치솟고, 문재인 전 정부의 탈원전 여파로 전기요금이 이달부터 올라 전비가 더욱 주목받는다. 충전요금 특례 할인(10%)도 지난달로 끝났다. 할인받던 요금이 정상화(1kwh당 313원)된 것이지만 이용자로선 요금 인상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연료비 부담은 전기차가 훨씬 적다. 전비 5㎞인 전기차가 1000㎞ 운행에 필요한 200kwh를 완속 충전할 때 2만6000원 정도 드는 반면, 연비 8㎞인 가솔린차가 같은 거리를 달릴 때 연료비는 1ℓ당 2000원만 잡아도 25만 원이다. 1년에 1만㎞를 운행한다고 해도 연료비 차이가 200만 원 가까이 된다. 전기차가 국가·지자체 보조금을 받아 가솔린차보다 1000만 원 이상 비싼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5년 이상 타면 본전을 뽑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전비 1위는 테슬라 모델3(스탠더드 레인지 플러스)로, 1kwh당 주행거리가 5.8㎞다. 2위는 5.5㎞를 가는 기아 EV6(스탠더드 2WD 19인치), 3위는 5.4㎞인 테슬라 모델3 롱레인지다. 전비가 5㎞ 안팎이면 양호하지만 이보다 많이 처지면 구매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고속도로 주행 때 전비가 오히려 더 낮아진다. 배터리도 전비에 영향을 미친다. 배터리 용량이 클수록 1회 충전 주행거리가 늘지만, 무게가 커져 전비는 내려간다. 고온에 자주 노출되고 급속 충전 횟수가 많을수록 성능이 떨어져 전비가 낮아진다. 배터리 잔량이 20% 이하가 되는 방전은 적을수록 좋다.
전기요금은 오는 10월에도 인상이 예고돼 있다. 유가에 연동된 데다, 탈원전으로 한국전력의 적자가 엄청나게 커져 상당 기간 인상 추세가 불가피하다. 앞으로는 전기를 아껴 써야 한다. 전기차를 이용할 때도 절전이 중요하다.
07월 14일 양날의 칼, 정치인의 말

박민 논설위원
정치인에게 말은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다. 말을 잘하는 정치인에게도 수준 차이는 있다. 로마 공화정을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던 키케로가 연설을 끝내면 청중은 ‘진짜 말을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가 연설을 끝내면 사람들은 ‘우리 함께 행진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비전을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을 넘어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를 만큼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물론 말로만 그쳐선 안 된다. 영국 총리 처칠의 설득력은 그의 탁월한 웅변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탄탄한 논리와 주목할 만한 업적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명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은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한다.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대구에서 가진 청년층과의 인터뷰에서 “60·70대 이상 어르신들은 투표하지 않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분들이 아니니까요”라고 발언했다가 ‘노인 폄하’라는 비난을 받았고, 2007년 대선까지 이 악재에 시달렸다. 잠은 많지만 말수는 적었던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자신의 과묵한 성격과 관련해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기자실 코로나 집단 발병으로 중단했던 출근길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을 하루 만에 재개했다. 몇 차례 말실수에 지지율 하락세가 이어지자 코로나를 핑계로 중단했다는 비난을 일축하기 위해서란 분석까지 나왔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의 대국민 소통 방식과 비교해보면 도어스테핑은 한국 정치 문화에서 혁명적 변화다. 말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이 갖는 무게를 고려해 실수를 줄이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에드워드 노리스는 “누구에게, 누구의 말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말할 것인가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톨스토이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할 틈을 가져라.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말할 가치가 있는지, 무익한 얘기인지, 누군가를 해칠 염려가 없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07월 15일(금) 아베와 블루 리본

이미숙 논설위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충격적인 피격 사망 후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선 일본판 ‘JFK 모멘트’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 나라(奈良)현 나라시에서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중 총을 맞고 절명한 아베는 1963년 텍사스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 중 피격 사망한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케네디가를 ‘미국의 로열패밀리’로, JFK를 ‘케네디가의 황태자’로 생각했던 미국인들이 총리 외할아버지와 외무상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베를 JFK에 비견되는 일본 정계의 황태자로 여기는 셈이다.
아베의 정치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나,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북한 체제의 위험성을 세계에 알린 정치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미국 인권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는 성명에서 아베를 “납북 일본인을 위해 싸운 지도자”라 했고, 휴먼라이츠워치(HRW)도 “납북 일본인 해방을 필생의 업으로 추구한 정치인”이라고 추모했다. 아베는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 때 관방 부장관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는 일·북 회담 직전 북측이 ‘일본인 8명 사망’이란 조사 결과를 내놓자 “당장 돌아가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고 이에 놀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며 사과했다. 납북자 문제 공론화로 아베는 정치적 영웅으로 부상했고 52세 때인 2006년 총리가 됐다.
이후 납북 일본인 구출을 기원하는 ‘블루 리본’ 캠페인이 시작되자 아베는 제일 먼저 가슴에 달았다. 블루 리본의 푸른색은 납치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 일본인들이 일·북 사이의 바다를 바라보며 재회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베는 지난 8일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세 때도 블루 리본 배지를 달았다. 납북 일본인 구출 열망은 숨이 멎는 순간까지 이어진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2일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마련된 분향소 조문 때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고 썼다. 노무현·문재인 정권이 북한에 유화정책을 펼 때 아베는 납북자 문제와 북한의 핵·미사일 위험성을 지적해온 만큼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세계에 알린 분”이라는 표현을 덧붙였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07월 18일(월) USB와 도보 다리 회담

이현종 논설위원
데이터 저장장치인 USB 하나가 정국의 핵으로 등장했다. 지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달한 USB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국가정보원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에도 원전 관련 자료를 넘겼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있었는데 지난달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이 정부를 상대로 USB 안에 담긴 파일과 동영상 자료 전체를 공개해줄 것을 청구했으나 대통령기록관이 ‘기록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보한 바 있다. 그런데 국정원이 이 USB가 내부에 보관됐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당시 판문점 도보 다리에서 열린 두 정상의 회담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보통 정상회담은 통역이나 배석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두 정상은 40분 동안 단독회담을 가졌고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주변의 새소리만 들릴 정도로 내용 파악이 어려웠는데, 각국 정보기관이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후문이다. 결국, 입 모양으로 파악하는 ‘복화술’ 기법까지 도입됐다. 그런데 두 정상이 회담을 마치고 평화의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 위원장이 “발전소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복화술로 포착됐다. 이후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환담을 하는 자리에서 자료를 USB에 담아 전달했다. 당시 청와대는 처음엔 이런 사실을 부인하다 뒤늦게 한반도 신경제 구상을 담은 내용을 전달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원전 관련 내용은 없다고 했다.
이렇게 논란이 끝나는 것 같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한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로 수사 때 산업부 공무원들이 삭제한 문서에 북한 원전 지원을 암시하는 파일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당시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북한에 극비리에 원전을 지어주려 한 것은 정권의 운명을 흔들 수 있는 충격적인 이적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한 바 있다. 촉각을 곤두세운 쪽은 미국이다. 그래서 당시 청와대는 같은 내용을 담은 USB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도 전달했다.
국가 간에는 종이로 된 문서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다. USB 안에 악성 파일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비밀이 아닌 내용을 USB에 담아 줄 이유가 있을까. 국정원이 풀어야 할 의문이다.
07월 19일 러-우 IT전쟁

이신우 논설고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 완전 점령을 앞두고 있다. 서방 세계의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지원에도 불구하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심이 먹혀들어가는 형국이다. 대(對)러 경제제재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소식이다. 국제 유가가 폭등하면서 원유 수입이 증가하고 있으며, 루블화도 전쟁 초기와 달리 강세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예상과 달리 대박을 터뜨린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러시아는 지금 ‘미래’를 팔아 ‘현재’를 즐기고 있다.
경제제재와 서방 기업들의 이탈로 자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가 대거 러시아를 탈출하고 있다. 특히, IT 관련 전문가들의 이탈이 뼈아프다. 러시아전기통신협회에 따르면 러-우 전쟁 발발 이후 약 30만 명의 전문 인력이 빠져나갔다(니혼게이자이신문). 가뜩이나 IT인재 부족으로 고통받는 한국 산업계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 아닐까. 금융계를 비롯, 대학의 다른 산업 분야 연구자들도 상당수 서방 세계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이런 탓인지, 벌써 서방의 첨단 기술에 대한 접근에 심각한 장애를 겪는 중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과학기술의 중심지로 발전해온 역사적 배경이 있거니와 지금도 IT강국으로서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구(舊)소련 시절엔 군수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첨단 무기 개발에 많은 인력이 투입됐다. 1991년 소련 붕괴 후에는 이 엔지니어들이 IT산업으로 대거 옮겨가 소프트웨어 아웃소싱의 본산으로 탈바꿈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 인재 군단은 러시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약 80%가 국내 잔류를 택하고 있다. 폴란드 등 주변국으로 탈출한 인력도 대부분 인터넷 등을 통해 국내와의 연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반면, 러시아는 최근 반도체 부품이나 IT인력 부족으로 첨단 무기 생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심지어 서방 자동차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구소련 시절의 ‘모스코비치’나 ‘라다’ 등 구형 모델을 재생산할 정도다. 러시아는 지금 중동의 돈 많은 산유국과 같은 모노컬처 구조로 퇴행하는 중이다. 러시아 학교에서는 영어 교육 과정에 미래 시제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농담이 흘러다닌다. 어차피 미래가 없다는 자조(自嘲)에서다.
07월 20일 횡단보도 앞 일시정지

김세동 논설위원
지난 12일부터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 의무를 확대하는 등 보행자 안전이 강화된 도로교통법이 시행되고 있다. 계도기간을 거쳐 8월 12일부터 운전자가 이를 위반하면 범칙금 6만 원(승용차 기준)과 벌점 10점이 부과된다. 개정된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통행하고 있을 때는 물론, 통행하려고 하는 때에도 일시 정지해야 한다. 또, 운전자는 어린이보호구역 내 무신호 횡단보도에선 보행자가 있든 없든 무조건 일시 정지해야 한다.
보행자 보호 의무가 강화된 도로교통법 시행 이유는 선진국에 비해 교통사고 보행 사망자가 많기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5년 전인 2017년 교통사고 사망자 4187명 중 보행 사망자가 1675명(40.0%)이었는데, 지난해에는 이 숫자가 각각 2916명, 1018명(34.9%)으로 매년 줄어들고 있긴 하다. 하지만 2017∼2021년 5년간 보행 사망자는 총 6575명(연평균 38%)으로 OECD 회원국 평균(19.3%)의 2배나 된다. 또,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우회전 차량에 치여 사망한 보행자는 212명이다.
개정 도로교통법 시행에 대해 상당수 운전자는 단속 기준이 모호하다고 하소연한다. ‘통행하려고 하는 때’가 구체적이지 않아 지키기도 어렵고, 단속 경찰에 따라 복불복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만이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보행 신호등을 보고 길을 건너던 어린이들이 대형 트럭 등에 치여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수시로 발생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우회전 시 횡단보도 앞에선 반드시 정지한다는 생각으로 운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2008년 미국 연수 중에 버지니아주 작은 마을 이면도로에서 어린이들을 인솔하던 한 백인 아주머니가 필자가 운전한 차 뒤에서 몸짓을 섞어 심하게 항의하는 듯했던 장면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미국 어린이 일행이 도로로부터 꽤 떨어져 있었기에 나중에 주재원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선 보행자가 없어도 반드시 일시 정지해야 한다고 했다. 운전자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보행자인 만큼 ‘(차보다) 사람이 먼저다’는 생각을 하며 횡단보도 앞 일시 정지를 생활화해야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헛구호’와 닮았다고 해서 배척할 일이 아니다.
07월 21일 박다울의 거문고

김종호 논설고문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은 포장하고 덧붙이는 ‘음악 거짓말’ 아닌, 내 안에서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몸의 감각이 최대화한 음악. 그렇게 되려면 연주 전(前) 생각의 감각이 무르익어야 한다. 그건 연주할 때도 창작할 때도 똑같다.” 거문고 대중화에 앞장서며, 연주·작곡·공연기획·연출 등 전방위로 활동하는 박다울(30)의 말이다. “거문고 주법과 솔로 악기로서의 한계를 확장하기 위해 깊고 넓게 고민한다”는 그는 연주도 전통 방식만으로 하지 않는다. 거문고 현을 퉁기지 않고 몸체를 두드려 연주하는가 하면, 첼로처럼 활로 켜기도 한다. 거문고로 전자음악도 연주한다. 한창 연주하다가 목공용 칼로 거문고 현을 모두 끊어버린 뒤, 타악기로만 사용하기도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뭔가 폭발하는 지점을 찾다가, 줄을 끊으면서 해방되는 거다. 거문고 본연의 소리에선 멀어지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거문고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출중한 연주 역량과 다채로운 창작 실험으로 국악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줘온 그를 두고, ‘클래식 작곡가로 출발해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백남준 같은 기질과 재능이 보인다’는 평가도 나온다. 록 밴드 카디(KARDI)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는 그의 연주에 대해, ‘뮤지션들의 뮤지션’으로 불리는 가수 겸 작곡가 윤상은 “접신(接神)을 한 것 같다”고 한 적도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해,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그는 ‘블랙 스완’ ‘칠채 뽀시래기’ ‘호모 파베르’ 등 자작곡으로도 크게 주목받아 왔다. ‘모든 소리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는 ‘미완성곡이 하나 붙은 거문장난감’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엔 ‘박다울류(流) 거문고 산조(散調)’도 발표했다.
“예술이 재미있는 것은 ‘맞고 틀리고’가 없다는 점”이라는 그가 ‘박다울 ㄱㅓㅁㅜㄴㄱㅗ’ 공연을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오는 26∼27일 갖는다. 피아니스트·전자음악가·무용수 등과도 어울리는 무대로, “거문고 해체 과정을 보여주려고 글자를 해체한 공연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 모두 품고 있는,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거문고에 관한 대서사시’라고 하는 만큼, 거문고 예술의 지평을 더 확장해 보일 것이 분명하다.
07월 22일(금) 가봉의 봉고, 봉고의 가봉

이도운 논설위원
아프리카 대륙 서쪽 대서양 연안에 적도기니·카메룬·콩고에 둘러싸인 나라가 있다. 포르투갈·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프랑스·영국·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1960년 8월 17일 독립한 가봉공화국이다. 면적 26만7667㎢로 한반도보다 조금 크고, 인구는 233만 명으로 대한민국의 22분의 1이다. 1472년 상아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처음 바깥세상에 알려졌는데, 지형이 가방(후드가 달린 망토)과 비슷해 그렇게 부른 것이 국명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적도 아래 열대우림지역으로 고릴라·침팬지·코끼리·하마 등 동물의 천국이지만, 금·우라늄·석유가 생산되고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다. 1987년까지는 1인당 소득이 한국보다 높았다. 한국과 가봉은 1962년 수교했는데, 1970년대 남북한이 유엔에서의 주도권 때문에 제3세계를 상대로 외교전을 벌이면서 양국 관계가 본격화했다. 1975년 7월 4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내한 당시 광화문에 박정희 대통령과 봉고 대통령의 초대형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고, 가로변에는 양국 국기 5만여 개가 꽂혔다. 한 해 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 때보다 더 큰 환대였다고 한다.
1982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아프리카 4개국을 순방하면서 가봉을 방문했는데, 당시 환영 행사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애국가 악보를 바꿔치기한 것이다. 난처해진 봉고 대통령은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다”며 북한을 비난했다고 한다.
봉고 대통령은 1967년 초대 대통령 레옹 음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집권했다. 당시 부통령이었는데,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총리까지 겸하며 권력을 틀어쥐어 42년 동안 장기 집권을 했다. 2009년 봉고가 사망한 뒤 대선이 실시됐는데, 그의 아들 알리 봉고 온딤바가 당선됐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경호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 박상철 씨가 계속 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일 알리 봉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자원개발·의료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한때 외교가에 ‘가봉의 봉고냐, 봉고의 가봉이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우방국은 아니었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60년간 이어지고 있다.
07월 25일(월) 中 편중 교역구도 변화

문희수 논설위원
한국 수출은 놀랍다. 세계 경제가 비상이지만 승승장구하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리고 있다. 수입액이 워낙 크게 늘어 무역수지는 3개월 연속 적자지만, 수출액은 줄곧 증가세다. 명실상부한 경제 버팀목이다.
이런 한국 수출의 지형도가 달라지고 있어 관심이다. 특히, 중국 의존도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전체 수출에서 대(對)중국 수출은 여전히 1위지만 비중은 감소세다. 미국과 유럽 비중이 높아지는 것과 대조된다. 올 상반기 중국에 대한 수출 비중은 23.23%, 미국은 15.7%, 유럽은 9.71%다. 미국과 유럽을 합친 비중이 25.4%로 중국보다 높다. 연간으로는 격차가 4% 중반 수준이 될 전망이다. 대중 수출 비중은 지난 2018년이 최고치(26.8%)였다. 미국·유럽 비중이 중국을 웃돈 것은 2019년부터인데, 주목할 것은 그 격차가 2019년 2.2%포인트, 2020년 2.6%포인트, 2021년 4.5%포인트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수출 다변화 효과다.
문제는 원자재·중간재·부품 등의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이다. 2차전지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등 5대 핵심 제조업의 산업 소재 90% 이상을 중국에서 수입한다. 총수입액 중 중간재 비중이 50%를 넘는데, 중국 의존도가 28%나 된다는 조사도 있다. 이런 수입 구조 탓에 대중 무역수지도 지난 5월부터 적자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중국에 편중된 교역 구도의 변화는 피할 수 없다. 자원부족 국가인 한국은 원자재·중간재·부품 등을 수입해 쓸 수밖에 없다. 한국이 살려면 교역 다변화로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이 망가진 지금은 더욱 절실하다. 더구나 한국은 과거 마늘 파동부터 최근 롯데·CJ 등에 대한 이른바 ‘사드 보복’과 요소수 사태까지 중국에 뒤통수를 맞았던 터다. 중국의 핵심자원 독점, 자국산 제품 우대 등은 계속 확산 중이다. 미·중 사이의 양자 선택이란 외형을 띠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중국 특유의 자국 우선주의에 뿌리를 둔 ‘차이나 리스크’다.
한·중이 수교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경제 측면부터 양국 관계를 되돌아봐야 한다. 이미 중국에 대한 국내 여론이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중국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중국은 샹그릴라(이상향)가 아니라는 인식을 토대로 민관이 힘을 합쳐 길을 찾아야 한다.
07월 26일 인권선언과 강제북송
박민 논설위원
인권은 타고난 권리로 양도할 수 없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국가권력의 목적이 인권의 보장이다. 17세기 자연권에서 출발한 인권의 개념은 18세기 시민혁명을 통해 ‘사람의 권리’로서 확립됐고 이후 근대 헌법의 기본 원리로서 제도적으로 보장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뒤 유엔이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함으로써 국제법상 보편적인 권리로 확립됐다.
전문과 30개 조항으로 이뤄진 세계인권선언은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규범이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제2조)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제3조).
“모든 사람은 어디에서나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제6조는 어떤 큰 죄를 지었건 간에 법 앞에선 모두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형사상 혐의의 결정에 있어 독립적이며 공평한 법정에서 완전히 평등하게 공정하고 공개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10조) “모든 형사피의자는 자신의 변호에 필요한 모든 것이 보장된 공개 재판에서 법률에 따라 유죄로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받을 권리를 가진다”(제11조 제1항)는 조항도 같은 맥락이다. 신체와 이동의 자유 조항도 있다.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 또는 추방되지 아니한다”(제9조)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하여 어떠한 나라를 떠날 권리와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지닌다”(제13조 제2항).
세계인권선언 채택으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19년 11월 탈북어민 2명이 문재인 정부에 의해 강제 북송됐다. 헌법과 법률에 따르면 탈북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사에 반해 추방됐다. 무죄 추정 원칙도, 공정하고 공개된 재판도 없었다. 더불어민주당은 2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도 탈북어민들을 ‘엽기 살인마’라고 규정한 뒤 강제 북송에 대한 비판을 ‘신(新) 북풍몰이’를 위한 정치공세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더 이상 진보 진영, 민주화 세력을 자임해선 안 된다.
07월 27일 대통령 휴가 징크스
이현종 논설위원
역대 대통령들은 주로 7월 말∼8월 초 여름휴가를 떠났는데, 제대로 휴가를 보낸 사례는 거의 없다. 그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져 휴가를 중단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휴가복이 정말 없다. 휴가 갈 곳도 마땅치 않다. 1983년 충북 청주시에 준공된 청남대는 미니 골프장도 있고 경호가 잘 돼 있어 대통령들이 가장 선호하는 휴가지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때 청남대 전면개방 공약을 내걸었고 2003년 결국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이후에는 군 휴양지인 경남 거제의 저도가 유일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휴가를 갈 수 없다며 1998년 임기 첫 번째 여름휴가를 취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휴가를 취소했고, 2004년에는 탄핵, 2006년에는 태풍 피해 때문에 교외로 떠나지 못하고 관저에서 휴가를 보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4년에는 세월호 사건, 2015년에는 메르스 여파로 관저에서 시간을 보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9년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2020년 집중호우, 2021년 코로나19로 휴가를 취소하며 3년 연속 휴가를 가지 못했다.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 참모들도 좀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대통령이 휴가 기간에 인사, 국정 구상을 하기 때문이다. YS는 1993년 8월 첫 여름휴가를 청남대에서 보낸 후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1995년 11월 청남대에 나흘간 머문 뒤에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구속시킨 ‘역사바로세우기’ 구상도 발표됐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이던 2013년 8월 휴가를 다녀오자마자 정부 출범 6개월 만에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4명의 수석비서관을 전격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인사였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우조선 사태로 미뤄 왔던 휴가를 내주에 떠날 예정이다.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안 됐는데 지지율이 30%대로 곤두박질치고 참모 교체 목소리가 높다. 국정 운영의 큰 로드맵이 없다는 지적도 많다. ‘권성동 체제’도 ‘문자’ 파문에 흔들린다. 선거 기간 중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을 전격 경질하는 인사를 했는데 이번엔 어떤 안을 들고 올지 대통령실의 참모들은 전전긍긍이다.
07월 28일 문재인판 ‘악의 평범성’
이미숙 논설위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독일 출신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1906∼1975)가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제2차 대전기 유대인 학살의 설계자로 꼽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숨어 살다가 1960년 모사드에 납치돼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렌트는 재판을 지켜본 뒤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에 쓴 글에서 “아이히만은 나치 광신자가 아니라 명령에 따라 과업을 수행한 평범한 인물”이라면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썼다. 600만 명을 살해한 홀로코스트 입안자가 어떠한 양심의 갈등도 없이 무덤덤하게 명령을 집행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을 체화한 인물이라는 게 아렌트의 결론이다.
이스라엘 영화감독 야리브 모제는 신작 다큐멘터리 ‘악마의 고백-아이히만의 잃어버린 녹음테이프’에서 “아이히만은 나치의 인종학살을 총지휘하면서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것이 적을 없애기 위한 행위였다며 정당화했다”고 주장했다. 미 공영라디오 NPR에 따르면 이 다큐멘터리에는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가? 유대인은 우리의 적이다. 그들을 절멸시킨 것은 절대적으로 정당한 일”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 육성이 담겨 있다. 이 녹음은 아이히만이 195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친나치 언론인과 진행한 인터뷰다. 아이히만 재판 때 테이프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이스라엘 재판부는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녹음 때와 정반대 논거를 편 뒤 1962년 사형됐다.
학자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연기’에 속은 측면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악의 평범성’ 개념은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유용한 틀로 본다. 권위주의 사회에 만연한 일상적 악행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선동에 따라 1·6 미 의회 의사당 난입사건을 벌인 백인 우월주의자들,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으로 부르는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세뇌돼 무차별 살상을 저지르는 러시아군이 대표적이다. 특히, 탈북 어민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뻔히 알면서 흉악범 프레임으로 불법 강제 북송을 자행한 문재인 정부의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등 청와대 참모들은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아이히만적 사악성까지 보여준다.
07월 29일(금) 한국 경찰과 중국 공안
이신우 논설고문
저우융캉(周永康). 지금은 중국의 한 교도소에 복역 중이지만 지난 2012년까지만 해도 그는 중국 정치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하이방(上海幇) 출신으로 2007년 공산당 제17차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중국 공산당 서열 9위며 사법권 총수나 다름없는 중앙정치법률위 서기를 겸했다. 그의 별명은 ‘사법·공안의 차르’였다. 하지만 2012년 자신과 정치적 동지 관계였던 거물 정치인으로 충칭(重慶)시 시장이었던 보시라이(薄熙來)가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몰락하면서 동반 추락하고 말았다. 당시 그는 보시라이를 구하기 위해 정법위 산하의 인민무장경찰부대(武警·무경)를 동원하려다 실패하면서 체포됐다.
도대체 정법위가 어떤 존재이기에 중국 공산당이 직접 지배하는 인민해방군 앞에서 사실상의 쿠데타를 꿈꿀 수 있었을까. 중국의 정법위 산하 공안(公安)조직은 한국 경찰과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체포영장은 물론이고 구속영장까지 다룬다. 공무집행을 방해할 경우 즉결 처분권까지 소유한 막강한 존재다. 당시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조차 조심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진타오 지휘의 인민해방군은 230만 명이었으나, 저우융캉의 정법위 조직은 공안을 비롯해 무경, 특경(特警), 특무, 교통, 성관(城管·민간 치안유지 기구) 그리고 민간 스파이 조직까지 무려 1000만 명에 이르는 무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저우융캉의 정확한 몰락 과정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12년 3월 19일 후진타오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베이징(北京) 정법위 건물을 포위, 공격했다는 설명(중앙일보 7월 27일자)이 있으나 일본에서 발간된 ‘붉은 중국의 검은 권력자들’에서는 소문으로 규정한다. 어쨌든 저우융캉이 실각한 이후 정법위 산하의 무경은 2016년 당중앙군사위로 통수권이 이관됐다. 윤석열 정부 아래에서 한국 경찰이 행정안전부의 경찰국 설립에 집단 반발하고 있다. 수사 독립을 명분으로 경찰 독립을 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경찰은 무장을 갖추고 있다. 13만 명이 넘는 무장 세력이 정부 통제를 벗어난다면 더 이상 국민의 경찰이 아니다. 중국 정법위 산하 조직의 ‘3·19 경란(警亂)’을 되돌아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