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 2022
2022.03.15
[61] 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
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는 그 악몽 잊지않는다

▲얼어붙은 감자 캐는 어린이들 - 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약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소련이 집단 농장, 국영 농장에 농민들을 강제 편입시킨 데 이어 대량 공출로 곡물을 수탈하면서 굶주림이 심해졌다. 스탈린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1933년에는 굶어 죽는 이가 하루 평균 1만5000명 규모로 늘어날 정도였다. 사진은 1933년 도네츠크의 한 집단 농장에서 어린이들이 얼어붙은 감자를 캐는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1930년대 초반 소련은 극심한 기근으로 대량 아사(餓死) 사태가 벌어졌다. 현재 학계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350만 명, 카자흐스탄에서 150만 명, 그리고 볼가강 유역, 서부 시베리아 지역, 우랄 남부 지역 등지에서 100만 명, 도합 약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본다. 그동안 소련에서는 이 사실을 감추고 ‘심각한 식량 문제’ 정도로만 표현할 뿐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고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해 기존과 다른 학설이 나온 것은 소련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다. 이에 따르면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농촌 사회를 공격하고 곡물을 빼앗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사태의 발단은 농업의 강제 집단화다.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한 소련 당국은 낙후한 농촌 지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며 1929년부터 집단농장(콜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콜호스프) 혹은 국영농장(솝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라도호스프) 속에 대다수 농민들을 강제로 편입시켰다.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은 생산 수단의 ‘공유’냐 ‘국유’냐의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같은 성격이다. 농민들은 이 체제를 ‘새로운 농노제’라고 부르며 저항했다. 이전의 지주 자리를 국가가 꿰차고 농민을 착취한다는 의미다.
스탈린은 대다수 농민들의 저항을 힘으로 눌러버리고 2년 내에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화했다. 그는 ‘봉건적인’ 농촌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진보’시키면 생산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곡물 생산이 15~20% 감소했고, 가축 수도 40% 감소했다. 애초에 집단농장 방식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것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법, 농민들은 논밭에서 설렁설렁 일했고,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닌 가축들을 애써 돌보려 하지 않았으며, 처음 사용해 보는 트랙터들은 대개 고장 나기 마련이었다.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자 당연히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크게 줄었다. 집단화 이전에는 일 년에 1인당 평균 300㎏을 수확했었는데, 이제는 많은 가구가 100㎏이 안 되는 배급을 받았다.

▲1933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한 거리에 굶주린 농민들이 쓰러져 있다. /위키피디아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량 공출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도시와 산업 부문, 군대를 먹여 살리고 수출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단화 이전인 1920년대만 해도 정부는 시장가격으로 곡물을 수매하여 1000만 톤 정도를 조달했으나, 1931년에는 거의 무상으로 2300만 톤을 공출했고, 그중 500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다. 1932년의 경우 정부는 수확량을 9000만 톤으로 예상하고 2900만 톤을 공출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수확량이 6700만 톤에 불과했지만 공출은 크게 줄지 않은 2200만 톤으로, 수확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특히 수확의 43%를 빼앗긴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극심하여 농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수도 하르키우(러시아 명 하르코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들은 정부 정책이 비현실적이며 이 상태라면 대기근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수탈에 저항했다. 때로 콜호스 관리들의 공모하에 수확한 곡물을 구덩이에 묻거나 마을 밖 비밀 창고에 숨기고, 공출을 피하기 위해 급히 맷돌로 밀을 빻았다. 잡히더라도 당국이 비교적 관대하게 대하리라 기대하고 아이, 노인, 여성들이 야밤에 몰래 들판에 나가 밀을 거두어왔다.
스탈린은 보고를 통해 이런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1932년 10월, 측근인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했다. 이들이 스탈린 및 공산당 고위 관리들과 주고받은 기록들을 보면 당시 우크라이나 상황이 어떻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수색과 심문, 압수 조치가 이어졌다. 식량을 숨긴 것이 발각되면 원래 내야 하는 양의 15배에 해당하는 감자와 육류를 물어야 했다. 이 경우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식량과 가축을 빼앗겨서 죽음으로 내몰렸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콜호스는 5일의 시간 여유를 주고 이 기간이 지나면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남겨 놓은 종자까지 압수했다. 압수 조치를 수행하는 말단 관리들은 닭, 토끼, 밀가루, 메밀, 심지어 절인 배추까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공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32년 11월에 5만 명이 체포되고 이 중 500명이 처형되었다. 저항하는 마을 주민 전체를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기도 했다.
스탈린은 1933년 1월 1일 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수색을 더 빠르게 진행하고, 만일 곡물을 숨겨놓은 농민들을 찾아내면 사회주의 재산을 훔친 절도범으로 강력 처벌하라는 전신을 보냈다. 법령에 따르면 10년 강제노동과 사형이 가능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탈출하려 했다. 당국은 이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기차역에 특수부대원을 배치하여 체포했다. 고향 마을로 돌려보내는 정도면 다행이지만 잘못 걸리면 쿨라크(원래 부농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당국의 방침에 저항하는 모든 농민들을 그렇게 불렀다), 반혁명 반동분자로 몰려 강제 노역을 하는 특수 지역으로 끌려갔다.

▲홀로도모르 추모광장의 소녀상 -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홀로도모르 추모 광장. 우크라이나는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추모일로 정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본격적으로 기근과 아사가 시작되었다. 죽은 말 사체를 놓고 마을 사람들이 싸워서 힘센 사람이 고기를 얻어 집으로 갔다. 개를 잡아먹은 다음에는 쥐 고기를 먹었다. 당대의 한 기록에 의하면 자그라도브카라는 지역에서 니콜라스라는 12세 소년이 죽었는데, 어머니가 이웃 주민과 함께 시체를 먹은 후 “머리, 발, 어깨, 척추골, 갈비뼈 일부만 남았다.” 당국은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들에게 노동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고 가서 총살에 처하거나 굶어 죽게 만들었다. 하루 평균 1만5000명씩 아사자가 나오는 현상이 8개월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 중 우크라이나 인구의 12%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다. 카자흐스탄 또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목축을 하며 살아갔는데, 스탈린은 이 지역을 혁신한다며 생활 방식을 강제로 바꾸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주민들을 정주하도록 하고, 목축 경제를 집단화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1931~1933년 기간에 가축 수가 90%나 줄었다. 정부 정책에 격렬히 저항한 카자흐 주민들은 가축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도살한 후 시베리아나 중국의 신장 지역으로 도주하려 했다.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자 심각한 기근 사태가 일어났다. 3년 동안 국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럼에도 소련 당국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책이 사회주의적 진보라고 강변했다. 비슷한 사례로, 수십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대의 상황은 남이나 북이나 언급 자체를 피하지만 이 역시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들에 둘러싸여 오랜 기간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다. 처음 제대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소련 몰락 이후인 1991년 이후다. 이제 독립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해 본 이상 또다시 타 민족의 지배하에 깔려 사는 것은 감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과거 민족 말살에 가까운 착취를 했던 러시아가 아닌가. 러시아에 주권을 빼앗기느니 목숨 바쳐 싸우고자 하는 데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아픈 역사 경험이 깔려 있다.
[홀로도모르]
우크라 민족주의 말살하려 고의로 대기근 유발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단어를 만든 폴란드 법학자 렘킨(Rafał Lemkin·1900~1959)은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기근 사태 또한 제노사이드에 속한다고 보았다. 스탈린 당국은 생존이 위협받으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식량을 유출하여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이 말은 굶주림을 뜻하는 ‘골로드(golod)’와 탈진시켜 죽인다는 뜻의 ‘모르(mor)’를 더해 만든 단어다. 이 단어를 사용하면 가혹한 수탈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농촌은 장구한 세월 이어져온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강압적 러시아화와 사회주의 경제 조치에 저항했다. 그 때문에 소비에트 당국은 기근을 유발하여 이 세계를 몰락시키려 한 것이다. 1930년 ‘프라우다’지는 “집단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반을 파괴하는 특별 임무를 맡는다”고 명백하게 표명했다. 당시 곡물 징발만 없었다면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모든 사람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확립에 홀로도모르는 핵심 요소다.
이 사태를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 20세기 초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사건과 같은 성격의 제노사이드라고 공식 인정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폴란드, 바티칸, 브라질 등 24국에 달한다. 다만 유엔이나 유럽의회는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는 아니되 ‘비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결정했다. 물론 러시아 학계는 우크라이나 기근 사태는 그 당시 소련 여러 지역을 덮친 식량 위기의 지역적 사례일 뿐이라며 제노사이드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62]악을 악으로 갚은 2차대전
베를린 입성한 소련군, 광란의 복수극… 유럽 전체가 등돌렸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2년 전에 스탈린과 체결했던 독·소불가침조약을 위반하고 180만 대군을 투입하여 소련을 기습했다. 그렇지만 두 달 안에 승리를 거둔다는 원래의 계획은 소련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좌초했다. 1942년 11월 이후 소련군이 대반격을 가했다. 소련 영토를 완전히 회복한 후 동유럽 지역을 넘어 1945년 4월 베를린으로 진격하였고 5월 8일 나치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이라 부르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과정에서 소련군은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무기와 보급 면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인명 손실을 개의치 않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독일로 진입한 소련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병사들은 제때 보급이 이뤄지지 않아 주변 농가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며 진군했다. 이들은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소련군을 만날까 봐 공포에 떨었다. 사진은 1945년 폐허가 된 베를린 의사당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소련군이 적기(赤旗)를 들고 있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독일군에 비해 무기와 보급 면에서 절대 열세인 소련군이 승리를 거둔 것은 인명 손실을 철저히 무시한 결과다. 소련군과 처음 조우한 미군은 소련군의 ‘원시적인’ 상태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넝마와 같은 군복을 입었으며, 몇몇은 사복 차림에 군복을 반쯤 섞어 입었다. 철모를 쓴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은 짚 더미가 깔린 마차에서 잤으며, 몇몇은 말을 타고 졸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때까지도 보급과 정찰을 말에 의존했고, 야포도 말이 견인하고 있었다. 보급 행렬은 살아있는 돼지와 닭이 가득 찬 수레로 이루어졌다. 그나마 제때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흔히 주변 농가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며 진군했다. 한 미군은 소련군이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야만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상태로 독일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며 2000㎞ 이상 걸어서 베를린까지 이동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연대는 몇 차례나 ‘갈아엎었다.’ 즉, 많은 병사가 죽으면 신병으로 재편성하고 다시 와해되면 또 재편성하기를 거듭한 것이다.
소련군이 지뢰밭을 통과하는 방식을 주코프 원수가 설명해 주자 아이젠하워 장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련군 병사들은 “마치 지뢰가 없는 것처럼 전진”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인지뢰에 의한 희생이나 포격 혹은 기관총 사격에 의한 희생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미군에 비해 적어도 다섯 배 이상이었다. 소련군 장성들은 미군이나 영국군 장성들이 그들이 거둔 전과를 자랑할 때 코웃음을 쳤다. 몽고메리 원수 휘하 영국군 부대가 롬멜 장군의 독일군 부대와 엘알라메인 전투를 벌였을 때 양측은 병력 40만 명과 전차 1500대를 동원했고 사상자 4만 5000명이 발생했다. 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양측 병력 210만 명, 전차 2000대가 동원되어 190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런 피해를 당하며 독일로 진격해 왔을 때 소련군의 복수심은 하늘을 찔렀다. 독일인의 집 안을 들여다보니 환상적으로 잘살았다. 식량 창고에는 훈제 고기, 말린 과일, 딸기잼 같은 게 가득했다. 이렇게 잘사는 민족이 왜 가난한 소련에 쳐들어와서 집과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단 말인가. 부러움은 곧 분노로 변했다. 소련군은 독일 마을에 들어오면 일단 집 안의 가구나 식기 같은 것들을 마당에 던져서 부수는 일부터 했다. 이어서 남은 물건들을 철저히 약탈했다. 1944년 12월 스탈린의 지시는 사실상 약탈 권유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일반 병사들은 매월 5㎏까지, 장교들은 10㎏까지, 장성들은 16㎏까지 가족들에게 짐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소련군 선전 전문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디에서든 약탈이 자행됐다. 스튜드베이커(studebaker·미국이 소련군에 제공한 트럭)에는 지붕까지 약탈품이 가득 찼다. 여자들은 겁탈당했다. 원시적 폭력이 규율의 모든 제약을 찢어버렸다.

▲소련군은 보급과 정찰 수단으로 말을 주로 사용했다. 사진은 1945년 5월 마차와 트럭을 탄 소련군이 베를린 도심에 진입한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모든 건물이 불타오르고 연기와 재로 어두워졌다. 벽이 무너지며 사람들을 깔아뭉개도 병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종군기자로 소련군 신문에 많은 칼럼을 게재한 문필가 일리야 예렌부르크는 병사들을 충동하는 글을 썼다. “날짜를 세지도 말고, 거리를 헤아리지도 말라. 그저 네가 죽인 독일인의 수만 세라. 어떤 자비도 베풀지 마라.” 많은 병사가 그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청교도적 인물로 알려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밀로반 질라스는 스탈린을 만났을 때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항의했다. 스탈린은 뜬금없이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했다. “도스토옙스키 읽어보셨죠?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한 남자가 전우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체를 넘으며 스탈린그라드부터 베오그라드까지 수천㎞를 계속 싸우면서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행동하겠소?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여자와 재미 좀 보는 게 뭐가 그리 끔찍하겠소? 소련군이 이상적인 건 아니오. 가장 중요한 건 독일군과 잘 싸우는 일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소.”
지도자의 정신 자세부터 이 모양이니 병사들이 무도한 행위를 일삼는 게 당연했다. 술에 취한 병사들의 야만적 행태를 장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후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독일 여성 200만명이 성폭행당했고, 수십만명이 자살했다. 동프로이센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1945년에 칼리닌그라드로 개칭)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의 증언에 의하면 1945년 4월 소련군이 인근 주류 공장을 습격한 후 완전히 취한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병원에 들어와서 의사, 간호사, 환자 할 것 없이 모든 여성을 성폭행했다. 일부 여성은 의식을 잃을 정도로 폭행당했고, 차라리 총으로 쏴달라고 애원했다. 베를린에 진군한 이후 시기는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소련군이 ‘프라우, 콤(Frau, komm. 아가씨, 이리 와)’ 하는 끔찍한 명령을 하면 지옥문이 열렸다.
독일군의 피해도 서부전선보다는 동부전선에서 훨씬 컸다. 1945년 1~5월 독일 본토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죽은 독일군 병사 120만명 중 적어도 80만명이 소련군에게 죽었다. 소련 측 분석에 의하면 독일 병사들은 미군 앞에서는 기를 쓰고 투항하려 하고 소련군 앞에서는 기를 쓰고 저항했다. 병사나 민간인이나 소련군을 만날까 봐 공포에 떨었다. 미군이 독일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 주민들은 “소련군이 오나요?” 하고 두려움에 떨며 물었고, 여자들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련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모두 안간힘을 썼다. 독일에 진군한 연합군 중 최전선에서 정찰 임무를 하던 미군 중위 코체뷰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어떻게든 소련군에게 잡히지 않고 미군에게 항복하려는 독일군들이 계속 달려들어 임무 수행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소대 36명이 독일군 355명을 무장해제했는데, 다른 독일 부상병 100명을 또 넘겨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란민들은 압도적으로 한 방향으로 향했다.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 갔다.
소련군이 왜 그런 악행을 저질렀는지 짐작 못 하는 바가 아니다. 소련군 800만명 이상이 전사했고, 민간인 희생자도 1600만명에 달한다. 이런 가공할 피해를 입힌 적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왜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적군을 죽인 숫자로 보면 소련군이 서방 측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렇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볼 때 전쟁은 살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전후에 독일, 더 나아가서 유럽 전체의 신뢰를 얻는 데에 소련은 실패했다. 2차대전 이후 거의 80년 만에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리야 예렌부르크

일리야 예렌부르크(1891~1967)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 유대인 문필가다. 파리로 망명하여 몇 권의 시집과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을 쓰던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 신문 ‘적군(赤軍)’의 종군기자로서 2000편이 넘는 기사와 에세이를 썼다. 독일에 대한 복수를 외치는 그의 글은 병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쓴 소책자 ‘죽여라’에서는 이렇게 썼다. “독일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말하지 않겠다. 대신 죽이겠다. 하루에 독일 놈 하나도 못 죽이면 그날을 허비한 것이다. 한 놈을 죽였으면 또 죽여라. 독일 놈 시체 더미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 소련군이 독일로 진격해 들어간 이후 그의 글은 더 독해졌다. “독일 도시가 불타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독일, 너는 이제 포위되어 불타며 죽음의 고통 속에 신음한다. 복수의 시간이 왔다.” 후일 그는 민간인들에 대한 살상을 부추긴 게 아니라 오직 나치들을 처치하라는 의미였다고 변명했으나, 병사들은 민간인 학살을 허락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글이 나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정당해 보인다.
[63] 체코 일부 떼어주면 만족?… 히틀러, 평화협정 깨고 2차대전 도발
나약한 평화주의 ‘뮌헨 회담’
1938년 9월 30일,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를 태운 비행기가 뮌헨을 떠나 파리 인근 부르제 공항으로 향했다. 총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전날 뮌헨회담에서 영국 총리 체임벌린과 함께 히틀러의 야심을 일시적으로 무마하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라는 나치 독일 측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즈음, 공항에 수만 군중이 운집한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불명예스러운 양보를 한 데 대해 시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려고 모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본 군중은 박수를 보내며 평화를 지켜주어 감사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현장에 있던 증인들 말로는 달라디에 총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멍청한 놈들(Les imbéciles).” 사르트르는 그의 작품 ‘유예(Sursis)’에서 달라디에가 조금 더 심한 말을 한 것으로 각색했다. “천치 같은 놈들(Les cons).”

▲뮌헨회담 참석한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 - 1938년 9월 30일 뮌헨 회담에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분리해 독일에 합병하기로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인들은 이 회담으로 평화가 보장된다고 여겼지만, 이듬해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사진은 뮌헨회담에 참석한 영국 체임벌린(앞줄 맨 왼쪽부터) 총리, 프랑스 달라디에 총리, 독일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 무솔리니 총리. /게티이미지코리아
다음 날인 10월 1일, 드골은 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프랑스인들이 경솔하게 환희에 차 있는 동안, 기고만장한 독일군은 우리의 동맹이며 우리가 국경을 지켜주기로 한 나라의 영토로 행진해 들어갈 참이오. 우리는 갈수록 더 후퇴와 굴욕에 길들여져서 제2의 천성(天性)이 될 거요. 결국은 고배를 들 게 틀림없소.” 그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었다.
뮌헨회담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1938년 3월 12일 히틀러가 무력으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1차대전 패전으로 자부심에 큰 손상을 입었던 독일 국민들이 열광하였다. 그들은 위대한 독일 제국 건설 꿈에 젖었다. 히틀러는 곧 체코슬로바키아에 눈독을 들였다. 이 나라에는 약 350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수데텐란트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어서 독일의 팽창 정책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큰 부담이 되었다. ‘주데텐(Sudeten) 독일당’의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은 이 지역의 자치권을 주장해 오다가 1938년 3월 이후 히틀러와 밀통하여 아예 독일과 합병하기를 획책했다.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무리한 요구를 했고, 히틀러는 독일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 침공을 할 것처럼 위협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독일을 견제하려 했으나 히틀러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평화를 갈구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국내 여론이 너무 거셌다. 양국 언론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점차 히틀러에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독일계 주민들에게 양보하는 게 옳다는 식의 기사들이 등장했다.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뮌헨회담을 마치고 귀국 당일 공항에서 협정서를 높이 들어 보였다. /위키피디아
여론에 밀린 두 나라 정부는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양보를 종용했다. 수데텐란트에 자치권을 부여하라고 권고하고, 9월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직접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였다. 양국 언론은 체임벌린이 평화의 사도라며 찬미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히틀러는 과연 이런 제안에 만족하고 침공을 멈추려 했을까? 그런 기대는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더 센 요구를 들고나왔다. 수데텐란트의 즉각 합병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영토를 할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분명 지나친 요구였다. 9월 23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맞서 히틀러는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선동적 연설을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수준의 무장을 이루었소. 독일 국민들이여, 무기를 드시오!” 위험 상황을 감지한 프랑스도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 위험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4국 정상회담을 제안하여 뮌헨회담이 성사되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달라디에와 체임벌린이 돌파구를 찾기로 한 것이다. 각국 여론은 한숨 돌리는 분위기였다. 최악 상황에 몰렸다가 막판에 합의를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9월 29일과 30일 양일간 열린 뮌헨회담은 실상 히틀러의 요구 사항을 거의 전부 수용한 셈이다. 수데텐란트를 분리하여 독일에 합병하고, 그 대가로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 사이의 불가침조약을 제안하였다. 어쨌든 전쟁은 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체임벌린은 뮌헨회담 협정서를 높이 들어 보이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런던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다우닝가의 외무부 건물 발코니에서 군중에게 “여러분, 이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편히 주무셔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서 레옹 블룸은 사회당 기관지 ‘민중(Le populaire)’에 이런 글을 썼다. “달라디에와 체임벌린의 공헌을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프랑스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전쟁을 피하게 되었다. 파괴 위험도 사라졌다. 우리 모두 일과 단잠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을 햇볕을 즐길 수 있으리라.”

▲1938년 뮌헨회담이 열렸던 히틀러 집무실의 현재 모습. 당시 벽난로와 천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위키피디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열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는 병사 130만명이 전사했고, 110만명이 평생 불구로 남았다. 경제적 피해 또한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1차대전 참전 용사 대부분 그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전쟁이 ‘마지막의 마지막 전쟁(la der des ders)’이어야 하며,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뮌헨 정신’을 찬미했다. 온통 평화주의가 대세였다. 뮌헨회담 협상안은 프랑스 의회에서 찬성 535표 대 반대 75표로 가결되었다(반대표 75표 중 73표는 모스크바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공산당 의원들 표였다).
사실 평화를 찬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평화주의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반대로 조그마한 갈등이라도 모두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위험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사탕 발린 평화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한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되고, 적의 위협적 언사에 바로 굴복하고 양보만 하는 천치 같은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된다. 불행히도 뮌헨회담 전후한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보인 외교 행태에서 그런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두 나라 국민은 당장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파시즘 독재에 양보하는 것이 과연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숙고하지 못했다. 1938년 8월, 히틀러가 무장을 계속 강화하는 데 놀란 달라디에가 주 40시간 노동법을 완화해서 군수 공장의 생산을 늘리자고 제안했으나 공산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0시간 준수’는 평화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반면 우파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나치 독일보다도 소련 공산주의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두 나라가 모두 약해졌을 때 소련이 쳐들어올 거라고 믿었다. 즉 좌파의 안이한 평화주의와 우파의 근시안적 정략이 뮌헨 조약을 낳은 것이다.
뮌헨 조약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조약 체결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결과적으로 뮌헨 조약은 침략의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뮌헨이라는 말은 치명적 전쟁을 불러온 나약한 평화주의, 적의 속임수에 멍청하게 넘어가는 전략적 실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평화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되, 그러기 위해서도 최후에는 적을 분쇄할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게 뮌헨회담의 교훈이다.
지식인들의 반응
뮌헨회담 전후한 미묘하고도 어려운 상황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태도도 둘로 나뉘었다. 로맹 롤랑, 폴 랑주뱅 같은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전신을 달라디에 총리에게 보냈다. 그러자 철학자 알랭과 소설가 장 지오노는 이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프랑스 대다수 국민은 전쟁의 가공할 위험을 우려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모든 창의적 방법을 동원하여 체코의 중립을 달성하고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전신을 보냈다.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는 앙드레 지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보다는 ‘집단적 불명예’가 차라리 낫다고 솔직히 썼다. 이에 대해서는 처칠 총리가 한 말이 대답이 될 것 같다. 체임벌린이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결정한 직후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전쟁과 불명예 중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신은 불명예를 선택했고, 그래서 전쟁도 치르게 될 것이다.” 뮌헨회담 직전 로망 롤랑이 한 말도 참고가 될 것 같다. “평화는 그것을 원하고 지키려는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64] 괴벨스, 프로파간다의 천재
교묘한 선동으로 권력잡은 나치 괴벨스… 언론사부터 통폐합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가 연설하기 전에 등장해 분위기를 돋우며 군중을 좌지우지했다. 선전 선동의 전문가인 그는 나치 체제 유지를 위해 독일 미디어를 완전히 통제했다. 괴벨스의 목표는 독일인들의 사고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괴벨스가 없었다면 베를린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진은 괴벨스(왼쪽)가 히틀러(가운데)와 함께 선거 유세를 위해 베를린의 슈포르트팔라스트에 도착한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1897~1945)는 역사상 최고의 프로파간다(선전·선동) 전문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히틀러가 1차 대전 패배의 굴욕으로부터 독일을 구해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줄 구세주라며 교묘하게 선전했다. ‘히틀러 무오류설’ 신화를 만들어낸 괴벨스는 나치 체제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치즘은 분명 다른 방식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남을 속이려는 자는 우선 자신에 대한 거짓말부터 하는 법. 괴벨스는 다리를 절었다. 아마도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렸던지 혹은 선천적 내반족 증상(다리가 안으로 굽는 증상)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1차 대전 때 부상 당한 결과라고 강변했다. 나치는 흔히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히틀러의 많은 수하는 그들이 주장하는 아리안족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게 허약한 모습이었다.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TV와 SNS 시대라면 괴벨스의 왜소한 모습이 약점이었을 테지만, 대중연설과 라디오의 시대였기에 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큰 보탬이 되었다.
히틀러를 만나자마자 괴벨스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일기에 히틀러를 정치 천재라고 칭했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운명의 징조인가? 아돌프 히틀러여,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이렇게 오글거리는 내용을 일기에 쓸 정도면 진정 히틀러에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1924년 혹은 1925년 나치당에 가입한 그는 당 기관지 ‘공격(Der Angriff)’을 창간하고, 바이마르 체제를 그야말로 끊임없이 공격했다. 포스터 제작, 슬로건과 이미지 창안, 가두 행진 조직 등 정열적으로 프로파간다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말로만 싸운 게 아니라 폭력 투쟁도 불사했다. 나치당은 1930년대를 경과하면서 세를 크게 불려갔는데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6000회에 이르는 집회를 조직하고, 수백만 부의 소책자와 포스터를 뿌려대는 동시에 군화, 경찰봉, 손가락 마디에 끼우는 쇳조각으로 무장한 시위꾼들을 동원하여 정적들을 힘으로 눌렀다.

▲괴벨스가 만든 당 기관지 '공격' - 괴벨스는 나치 기관지‘공격(Der Angriff)’을 창간했다. 그는 말로만 싸운 게 아니라 폭력 투쟁도 불사하며 선전 선동에 나섰다. /위키피디아
한 달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나치는 드디어 최대 정당으로 올라섰다. 후일 히틀러는 괴벨스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면서 만일 그가 없었다면 베를린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괴벨스는 집회에서 히틀러가 연설하기 전에 먼저 등장하여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했는데,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힘 있는 바리톤 목소리로 군중을 좌지우지했다. 감정적이지만 내용이 뒤죽박죽인 히틀러의 연설은 듣는 사람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으로 남지만, 논리정연하면서 강력한 괴벨스의 연설 내용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게 당대의 평이었다.
1933년 그는 프로파간다 담당 장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이 부서의 인원을 1000명 넘게 늘리면서 미디어를 완전히 통제했다. 그의 목표는 국민들의 사고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여러 언론사를 통합하여 ‘독일뉴스국’으로 만들었고, 법을 바꾸어 기자들이 자기가 쓴 내용에 대해 책임지도록 만들었다. 괴벨스는 언론 관련 콘퍼런스를 자주 개최하여 특정 사안마다 어떤 방향으로 기사를 쓸지 지시했다.
분명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매체 중 하나는 라디오였다. 싼 가격으로 ‘국민라디오(Volksempfänger)’를 각 가정에 보급하여 나치가 원하는 내용을 무차별 주입했다. 또 영화에도 관심이 커서 자신이 통제하는 영화 스튜디오에서 1933~1945년 동안 1361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악랄한 반유대인 인종주의 작품인 ‘유대인 쥐스(Jud Suess)’가 대표작이다. 사실 괴벨스 자신은 스토리 안에 이데올로기를 숨겨 은근히 전파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히틀러의 취향에 맞추어 노골적인 선전 영화도 만들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체제를 선전하는 좋은 프로파간다 기회였다. 이때 히틀러와 친분이 있는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하여 유명한 선전 영화를 제작했다. 효율적인 선전을 하려면 새빨간 거짓말보다는 차라리 왜곡된 절반의 진실을 기술적으로 제시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사람들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믿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내용이야 어쨌든 간에 무엇인가를 믿게 만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괴벨스는 히틀러의 이너 서클에서 밀려났다. 사실 그는 전쟁 개전에 반대했고, 스탈린과 충돌하기보다는 타협하는 방향을 선호했다. 이처럼 히틀러의 뜻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권력의 정점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그가 다시 힘을 발휘한 것은 독일군이 패전을 맞이한 이후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히틀러는 다시 그를 불러들였다. 괴벨스는 베를린의 스포츠팔라스트 스타디움에서 ‘아시아의 약탈민에 맞서는 총력전(Totaler Krieg)’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했다.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 그의 연설에 군중은 열광적으로 달아올랐다. 러시아 야만인들의 볼셰비즘 체제에 맞서 유럽 문명을 지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현재 우리가 보기에는 유치한 연설들이 위기에 빠진 독일 군중을 분기시켰다. 1944년 히틀러 제거 음모를 미연에 방지한 공로까지 인정받아 그는 나치체제 마지막 시기에 요직을 차지했다. 이제 그는 노골적인 히틀러 신성화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 안에 총통이 있고 총통 안에 우리가 있다’면서, 몸과 영혼을 바쳐 광신적으로 싸우자고 독려했다.

▲괴벨스는 독일 전역에 보급한 라디오를 통해 나치가 원하는 내용을 무차별 주입했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선전했다.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 지크프리트선 지하 요새에서 독일군이 라디오를 듣는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렇지만 현실은 이 비정상적 제국의 몰락으로 치달아갔다. 말기적 상황에서 남을 속이기 전에 그들 스스로 속이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졌다. 전쟁 말기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병사했는데, 이 사건을 두고 괴벨스는 독일사의 기적이 재연될 것으로 믿었다. 과거 7년전쟁(1757~1763) 말기에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패망 일보 직전에 몰렸을 때 러시아의 여제 엘리자베타가 사망하고 새로운 차르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열렬한 찬미자를 자처하는 새 차르는 곧바로 전선에서 철군했고,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자살할 기회를 찾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기사회생하였다. 이를 ‘브란덴부르크의 기적’이라고 칭하는데, 괴벨스는 루스벨트의 죽음을 계기로 미국 내에 반전 분위기가 달아올라 미군이 철수하는 똑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헛된 희망을 품었지만 물론 사태는 그들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종말이 다가왔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괴벨스가 수상 직을 차지했으나 이미 나치 체제는 회복 불가능한 단계였다.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는 여섯 아이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고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괴벨스는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부하들에게 온 가족의 시신을 석유로 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그다는 괴벨스 이전에 결혼했던 전 남편에게서 얻은 아들 하랄트(그는 이탈리아에서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상태였다)에게 남긴 편지에 히틀러가 없는 세상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하였으며, 남은 길은 총통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썼다. 괴벨스 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히틀러에게 진정으로 충성스러웠던 것 같다. 히틀러는 생전에 괴벨스-마그다 부부가 전형적인 아리안족 커플이라고 치켜세우곤 했지만, 마그다가 어릴 때 유대인 회당에 열심히 다녔다는 사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프로파간다를 주요 축으로 삼아 지탱하던 나치 체제는 실상 모순과 거짓의 제국이었다.
[괴벨스의 어록]
“거리를 지배하는 자가 대중을 지배한다. 대중을 지배하는 자는 국가를 지배한다.”
“물고기가 물을 원하듯 베를린은 센세이션을 원한다.”
“우리가 일단 권력을 잡으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시체가 되어 끌려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최고의 정치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아니면 최악의 범죄자로 기록될 수도 있겠지만.”
“거대한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면 대중은 결국 그것을 믿게 된다.”
“19세기에 신문이 한 역할을 20세기에는 라디오가 한다.”
“대중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다. 멍청하고, 욕심 많고, 잘 잊어먹는다.”
괴벨스가 남긴 명언들을 곱씹어보면 묘하게 낯익은 느낌을 받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길거리 투쟁이 권력 쟁취의 지름길로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잡은 권력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으려 한다. 아침저녁으로 저질 오염된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거짓말이 진실로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믿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혹시 그들은 우리 국민이 여전히 ‘멍청하고 욕심 많고 잘 잊어먹는’ 부류라고 생각하는 걸까….
[65] 좌파 프로파간다의 선구자, 빌리 뮌첸베르크(1889~1940)
미디어로 정치 선동… 지식인들이 좌파 권력에 순종하게 만들다

▲사회주의 선전영화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 - 독일의 좌파 선동가 빌리 뮌첸베르크는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신문, 잡지, 영화, 연극 등 각종 미디어를 종합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선동에 넘어간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다. 뮌첸베르크의 선전 운동으로 소련은 평화, 사회 정의, 약자 보호 등 인도주의적 가치를 지켜내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사진은 뮌첸베르크가 독일에 들여와 성공시킨 영화 ‘전함 포템킨’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독일의 빌리 뮌첸베르크(Willi Münzenberg·1889~1940)는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인물이지만 전간기(戰間期·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거대한 좌파 미디어 조직가였고 프로파간다(선전·선동)의 귀재였다. 최근 한 역사가는 그에게 ‘마르크시스트 루퍼트 머독’이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그는 정치 프로파간다를 위해 신문, 잡지, 영화, 연극 등 각종 미디어를 종합적으로 사용한 최초 인물이며,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도록 유도했다. 그가 나치의 프로파간다 전문가 괴벨스보다 한 수 위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뮌첸베르크가 처음 능력을 발휘한 계기는 러시아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발생한 극심한 기근 사태였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와 기독교 자선 단체가 주도하는 국제 원조 운동이 전개되자, 이것이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염려한 레닌은 독일에서 활동하던 동료 뮌첸베르크에게 독자적 기근 구호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국제노동자구호조직(Internationale Arbeiterhilfe·IAH)을 만들어 각국의 노동자 단체와 사회주의 조직을 동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와 사진의 힘, 최초로 인식
탁월한 조직 능력을 확인한 뮌첸베르크는 다음 단계로 신문, 잡지, 영화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마 안 지나 그는 자본주의 미디어 그룹을 능가할 정도로 큰 조직을 만들어냈고, 참신한 사업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예컨대 소련 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영화 ‘전함 포템킨’을 독일에 들여와 공전의 히트작으로 만들었고, ‘쿨레 밤페(Kuhle Wampe)’ 등 수작 영화들을 자체 제작했다. 오늘날에는 영화나 사진 같은 이미지가 대중에게 지극히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상식이 되었지만, 뮌첸베르크야말로 이런 사실을 제일 먼저 인식한 인물이었다. 예컨대 ‘노동자 화보 신문(Arbeiter-Illustrierte-Zeitung)’은 원래 저급한 수준의 선전물이었는데, 그는 고급 종이를 사용하고 세련된 문장과 고품질 사진 작품을 배치하여 차원이 다른 선전 매체로 격상했다. 동시에 일반 노동자들의 사진 활동도 후원했다.

▲뮌첸베르크가 1932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 구호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다음으로 뮌첸베르크는 자신이 일구어낸 조직들을 통해 지식인들을 ‘동조자(fellow-travellers·같은 길을 가는 길동무라는 의미)’로 끌어들이는 국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조자’란 공산당에 가담하지는 않으나 적극 공감하고 후원하는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좌파 성향이든지 적어도 중립적인 지식인 중에 평화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한 인사가 많이 있었다. 뮌첸베르크는 이런 인사들을 코민테른(Comintern·소련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던 통일적 조직·1919~1943) 활동에 이용했다. 관대하고 순진한 지식인 다수가 반(反)제국주의 위원회, 노동 계급 지원 조직, 중국 노동자 후원 운동, 소련우호협회 같은 단체에 참여했다. 그들은 순수한 의도로 활동했을 터이지만, 뮌첸베르크가 조직해낸 그런 단체들이 실상 코민테른과 독일 공산당의 자금·정보 지원을 통해 운영되는 일종의 위장 조직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소련에 초빙받은 일부 지식인은 ‘나는 미래를 보았다’ 같은 글을 썼다. 뮌첸베르크가 창안한 이런 운동에 힘입어 소련은 평화, 사회 정의, 약자 보호 같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지켜내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나치가 권력을 잡자 뮌첸베르크는 1933년 프랑스로 피신했다. 이 시기가 뮌첸베르크의 경력에서 절정을 이룬 때다. 당시는 스페인 내전과 인민전선(1930년대 후반 파시즘과 전쟁의 위기에 처하여 결성된 광범한 반파시즘 통일전선)의 시기였다. 소련 역시 모든 진보 세력과 동맹을 맺어 문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투쟁을 강화해 나간다는 전략을 취했다. 뮌첸베르크는 코민테른과 소련 정보국의 도움을 받으며 각종 청원, 항의 시위, 평화 운동 집회 등을 지휘하며 마음껏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 보여준 사례가 불가리아 출신 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재판이다. 1933년 2월 27일 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이 방화로 전소(全燒)했는데, 나치는 이 사건이 독일 공산당의 계획적 범행이라고 공표하고 대통령 긴급 명령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디미트로프와 나치는 서로 상대방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때 파리에서 뮌첸베르크는 나치의 주장이 허구라는 반대 증거를 모아 발표함으로써 재판에 큰 영향을 미쳤고, 결국 디미트로프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괴벨스와 벌인 프로파간다 전투에서 뮌첸베르크가 승리를 거둔 셈이다. 이후 나치는 공개 재판 방식의 위험성을 깨닫고 다른 탄압 방법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프로파간다의 중요성을 더욱 확실하게 인식했다. 뮌첸베르크에 따르면, 이제 나치는 그의 영화 정책, 대중 선전 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독·소 불가침조약 놓고 스탈린과 불화
그로부터 얼마 후 뮌첸베르크는 스탈린과 불화를 겪게 된다. 소련은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가장 강력하고 확고한 방벽은 오직 공산주의이며, 다른 어느 세력도 여기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비(非)공산당계 좌익, 즉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와 다를 바 없는 사악한 집단이라고 매도했으며, 극도의 의심증에 사로잡혀 1937년부터 2년간 500만~700만명을 숙청하여 제거했다. 이때부터 뮌첸베르크는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소련에서 벌어지던 여론 조작용 재판을 비난했고, 특히 1939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에 반대했다. 스탈린이 보기에 뮌첸베르크처럼 자기 양심을 지키려 하고 권력 당국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결정적 시기에 배반할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뮌첸베르크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으며 트로츠키주의자, 다시 말해 제거해야 마땅한 최악의 분파주의자 취급을 당했다.
이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자료가 앞서 언급한 디미트로프의 일기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그는 코민테른 의장으로 승격했고, 스탈린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일했다. 1933년부터 1949년까지 디미트로프가 쓴 일기가 최근 출판되어 이 시기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내밀한 측면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디미트로프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뮌첸베르크는 트로츠키주의자야. 그가 소련에 오면 주저 없이 체포해야겠어. 그 자를 잘 유인해 보게.” 그렇지만 뮌첸베르크는 스탈린의 ‘초빙’에 응하지 않았다. 사실 소련으로 불러들여 처치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
1940년 가을, 뮌첸베르크는 스위스 가까운 산골 마을에서 나무에 목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그가 살해당했다면 그를 죽인 자들은 히틀러 세력일까, 스탈린 세력일까? 사실 소련의 비밀 경찰과 나치 게슈타포 모두 그를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어느 하나 분명치는 않으나 스탈린의 사주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뮌첸베르크 본인도 소련 비밀 경찰이 자기를 살해할지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독일 공산당 당원이었다가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껴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 케스틀러(Arthur Koestler) 또한 뮌첸베르크의 죽음에 대해 이런 평을 쓴 적이 있다. “1940년 여름, 그는 끔찍하고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살해당했다. 이런 경우 늘 그러하듯 살인자들은 밝혀지지 않고 간접적인 실마리만 있는데, 그것들은 자침이 극점(極點)을 향하듯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이 또한 추측에 불과할 뿐 명확한 사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진보 지식인들]
피카소·네루다… 1948년 소련이 주도한 지식인대회에 대거 참석
뮌첸베르크는 오토 카츠(Otto Katz) 같은 수하들을 시켜서 전 세계로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하고 각종 국제 대회에 명사들(아인슈타인, 네루, 앙드레 지드, 말로, 발터 그로피우스, 파울 클레, 업턴 싱클레어, 토마스 만, 버트런드 러셀 등)이 참석하도록 만들었다. 뮌첸베르크는 내심 지식인들을 경멸했으나 이들의 순진함과 자만심에 아부하면서 그들을 이용했다.

▲지식인대회 참석한 피카소 - 1948년에 열린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세계 지식인대회’에 참석한 파블로 피카소(맨 왼쪽). 앞서 지식인들을 우군으로 만든 뮌첸베르크 전략의 효과가 이어져 세계 명사들이 소련 주도 행사 초대에 응했다. /위키피디아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전후하여 소련 당국은 뮌첸베르크 같은 인물보다는 명령에 순종하는 관료를 선호했다. 관료들은 지식인들에게 아부할 것이 아니라 거칠게 다루면 오히려 좋아하고 따라온다고 판단했다. 1948년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개최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세계 지식인 대회’에 폴 엘뤼아르, 피카소, 네루다, 헉슬리 같은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이 회의에서 소련작가동맹 지도자 파데예프는 ‘서구의 데카당스 문화’를 강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펜을 쥔 자칼’이라고 불렀다.
당대 한 증인에 따르면 피카소는 번역 수화기를 뽑아버렸고 폴 엘뤼아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프랑스 작가 베르코르는 소련 당국에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지식인들이 좌파 권력에 순종하도록 유도한 것이야말로 뮌첸베르크의 업적이었다. 그 자신은 사라졌어도 그가 만들어낸 방식은 오래 지속되었다.
[66] 핵전쟁 직전까지 내달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쿠바 폭격 검토한 케네디에… 흐루쇼프의 협상 메시지가 왔다

▲1961년 친(親)소련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미국이 주도한 쿠바 피그스만 공격이 실패로 끝난 뒤, 이듬해 쿠바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미소 갈등이 고조되며 무력 충돌 가능성도 커졌다. 협상 끝에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기로 하고, 소련은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거하기로 합의해 전쟁 위험을 피했다. 사진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인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케네디(오른쪽) 미 대통령이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전쟁에 가장 근접한 때는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다. 대부분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지 모르나, 자칫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주변 국가들 간 핵미사일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 러시아가 공공연히 3차 세계대전과 핵 공격을 거론하며 위협하고, 북한에서 거침없이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을 진행하는 엄중한 시기에,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핵 위기가 어떻게 심화되었고 또 어떻게 파국을 피할 수 있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60년대 초,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은 극단적 대결 양상을 보였다. 1961년 미국은 눈엣가시 같은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쿠바 침략을 감행했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카스트로가 쿠바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자 이에 반대하는 망명자 수십만 명이 미국으로 탈주했는데, 미국은 이들 중 일부 인사를 지원하여 쿠바의 코치노스만(Bahía de los Cochinos·흔히 영어식으로 피그스만이라고도 함)에 상륙시킨 것이다. 군사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침공에 참여한 대원은 대개 붙잡혀 처형되었고, 양국 관계는 최악 상황으로 내몰렸다.
카스트로는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쿠바 방어를 요청했다. 다른 한편, 이즈음 미국이 이탈리아와 터키에 주피터 탄도미사일을 배치하여 소련을 위협했다. 이에 대응해 1962년 여름 흐루쇼프는 비밀리에 쿠바에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했고, 핵탄두와 미사일 부품들을 위장 반입하여 현지에서 조립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던 터라 초기에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으나 곧 끔찍한 진실이 밝혀졌다. U-2 정찰기가 찍은 항공사진에 미사일 발사대가 확실하게 포착되었다. 플로리다에서 겨우 90마일(140㎞) 떨어진 곳에 핵미사일이 배치되어 미국 주요 지역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사일 사태 직후의 카스트로 - 쿠바에 공산 정권을 세운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과 맞서며 소련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인 1963년에도 소련을 방문해 주요 도시에서 연설했다. /AFP 연합뉴스
보고를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실행위원회(EXCOMM)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국방장관 로버트 맥너마라(Robert McNamara·1916~2009)의 회고록은 이 위원회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내밀한 사정을 말해 준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 같은 극단적 강경파는 당장 쿠바를 공격하여 ‘싹 쓸어버리자(totally destroy)’고 주장한 반면, 온건파는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체로 온건파의 의견으로 기울었으나, 전쟁 가능성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무기들이 더 이상 쿠바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상 봉쇄 작전을 폈다. 사실상 ‘봉쇄(blockade)’지만 전쟁 상황을 피하기 위해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당시 사용했다. 이때 미국은 18만 병력을 동원했고, 쿠바를 하루 1000번 이상 폭격하는 작전을 짜고 있었다.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인 10월 26일 흐루쇼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맥너마라의 증언에 따르면 이 메시지는 만일 미국이 쿠바 공격을 중단한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온건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미처 답하기도 전에 두 번째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분명 소련 내 강경파 입장이 반영된 이번 문건에서는 만일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소련도 바로 군사 보복을 하겠다는 강력한 위협을 담고 있었다. 온건 메시지와 강경 메시지, 이 둘 중 어느 것이 크렘린의 본심에 가깝단 말인가?

▲미국은 소련 무기들이 더 이상 쿠바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상 봉쇄 작전을 폈다. 사진은 1962년 쿠바에서 출항한 소련 선박 위로 미 해군기가 운항 중인 장면. /위키피디아
케네디 대통령은 오랜 기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내는 동안 흐루쇼프 가족과도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토미 톰프슨에게 의견을 구했다. 톰프슨은 온건 메시지에 응하라고 조언했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흐루쇼프로서는 소련 국민에게 자신의 행동 덕분에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쿠바를 구했다고 이야기할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았다. 당시 미국 여론 동향도 힘으로 밀어붙이자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케네디는 온건한 방향을 잡았다.
미국과 소련은 물밑 협상에 들어갔고 가까스로 합의에 도달했다. 흐루쇼프는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철거해서 소련으로 가져가고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유엔의 검증을 받겠다고 공표했다. 미국은 다시는 쿠바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러한 표면적 내용 외에 비밀 협상 내용은 따로 있었으니, 미국이 터키에 배치했던 주피터 미사일을 철거한다는 것이었다(이탈리아에 배치한 미사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쿠바에 남아 있던 소련 폭격기들도 떠나고 미국이 ‘격리’를 완전히 해제한 11월에 가서야 모든 사태가 종결되었다.
그런데 당시 쿠바에는 핵무기가 어느 정도 배치되었을까? 그리고 쿠바는 정말로 미국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려고 했을까? 1992년 1월 쿠바에 가서 카스트로를 만나 미사일 위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된 맥너마라는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悚然)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쿠바에는 미사일 162기와 핵탄두 90기가 있었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민 9000만명이 희생될 가능성이 있었다. 맥너마라는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통역이 제대로 옮긴 것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다음 대화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만일 미국이 쿠바를 공격했다면 카스트로는 흐루쇼프에게 핵미사일을 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는가? 이에 대해 카스트로는 당시 이미 흐루쇼프와 핵미사일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답변해 주었다. 그야말로 핵전쟁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고, 파국을 피한 것은 전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맥너마라의 판단이다.
당시 미국 군부의 태도도 호전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종결된 후 케네디 대통령이 군 장성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 미사일을 제거했으니 우리가 이긴 것”이라고 말하자, 르메이 장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진 겁니다. 오늘이라도 쿠바를 공격해서 완전히 파괴해 버립시다!” 아직 미국의 핵 전력이 소련보다 훨씬 우세할 때 공격해서 끝내버리자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이후 소련은 케네디 행정부 기간 중 100메가톤급 핵폭탄을 만들었고, 대기권에서 핵실험을 시도했다. 양대 강국 간 갈등은 격화되었다. 맥너마라는 자신이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던 7년 동안 소련과 전쟁 직전까지 간 경우가 세 차례나 되었다고 실토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이 핵미사일을 7500기 동원할 수 있고, 그 가운데 2500기는 15분 내에 발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시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정학자들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남중국해와 동중국 해역을 들곤 한다. 북한은 이동 발사대와 잠수함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분명 한반도는 핵전쟁 고위험 지역 중 한 곳이다. 오히려 놀라운 일은 이런 극도의 위험 상황에서 우리가 그토록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활화산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게 아닐까?

[세계를 구한 페트로프]
1983년 9월 26일,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세르푸코프15라고 하는 소련 조기 경보 시스템의 부소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자정 무렵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전광판에 빨간불이 번쩍였다. 미국 몬태나에서 미사일이 발사됐다는 신호였다. 컴퓨터 화면에 ‘발사-신뢰도 높음’이라는 신호가 떠올랐다. 이것은 미국이 핵미사일 공격을 시작했다는 의미인가?
그러나 페트로프는 다르게 판단했다.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적어도 한 번에 1000발 이상 미사일을 발사하지 한 발만 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당장 반격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급박한 순간에 페트로프는 당직 사령에게 지금 울린 경보는 오작동이라고 말했다. 같은 일이 한 번 더 벌어졌고, 페트로프는 두 번째 경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나중에 경보는 실제로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원칙대로라면 소련은 미국에 핵미사일 반격을 해야만 했다.
페트로프의 직관 덕분에 소련 미사일 1만2000기는 발사되지 않았고 사망자 최다 10억명 발생도 막았다. 결과적으로 페트로프는 세계를 구했지만 그는 조기 예편당했고 연금도 못 받는 가난한 노후를 보내야 했다. 미국과 독일 시민들이 상당한 금액을 모아서 전달한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67]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숨은 영웅 ‘후안 푸홀 가르시아’
독일 허찌른 노르망디 상륙작전… 일등공신은 양계장 출신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무선을 독일군에 보냈다. 정확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역정보를 제공해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의도였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후 독일군에“현재 진행 중인 연합군 공격은 대규모 교란 작전이니 함정에 빠지지 말고 다른 지역(파드칼레)으로 방어군을 집중 배치해야 한다”는 거짓 정보를 전했고, 이를 믿은 독일은 롬멜 전차 부대를 파드칼레로 보냈다. 사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첫날 해변을 향해가는 미군 부대. /위키피디아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을 계기로 연합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과정에서 강력한 독일군의 저항에 부딪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배후에서 활약한 유능한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Juan Pujol García·1912~1988)의 공이 컸다.
1912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푸홀은 젊은 시절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졌을 때 그는 시골에서 닭을 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주의 정부군이든 프랑코 장군이 지휘하는 반군이든 관심이 없었으나 양쪽 군대에 차례로 징집되었고, 이때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도당 모두 극악한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후 그는 독재 체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스페인은 중립을 표방했고, 그 결과 이 나라는 영국과 독일 스파이들이 상대방의 정보를 얻기 위해 활동하는 무대가 되었다. 나치즘에 저항하는 스파이로 활동하고 싶었던 푸홀은 영국 대사관을 찾아갔으나 전직 닭치기를 스파이로 쓸 의도가 없던 영국 측은 그를 거절했다. 실망한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로 마음먹고는 나치 독일 정보 요원에 접근했다. 위험한 이중간첩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자신이 프랑코 정부에서 외교 정보를 접하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나치즘과 히틀러의 대의에 전적으로 공감하므로 독일을 위해 일하려 한다는 그의 말에 독일 정보 요원이 속아 넘어갔다. 그들은 푸홀에게 알라릭(Alaric)이라는 암호명을 주고 영국으로 건너가서 정보원들을 포섭하고 적 동향을 관찰하라고 지시했다.

▲78년전 그날의 영웅들 추모 - 6일(현지 시각) 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서 시민들이 78년 전 이날 개시된‘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푸홀은 영국으로 건너가는 대신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서 공작금으로 작은 방을 얻은 다음 영국 지도, 관광 가이드 책자 등을 이용해 런던에서 활동하는 척 위장했다. 그러고는 뉴포트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 상인, 베네수엘라 출신 대학생, 리버풀에 살며 영국 해군 동향을 잘 알고 있는 독일계 영국인 등 가상의 첩보원들을 조작해 냈다. 독일 첩보 본부에서는 그가 보낸 가짜 정보들을 그대로 믿었다. 사실 독일군이 약간만 정신 차리면 그가 가짜임을 알 수도 있었다. 영국에서 안 쓰는 미터법을 언급하는가 하면, 글래스고에 사는 자신의 첩보원은 포도주(맥주가 아니고) 1L만 주면 무엇이든 한다는 식의 헛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푸홀은 가짜 정보로 독일군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1942년 2월, 자신의 정보원 막시밀리언에게서 영국 해군의 보급함 5척이 몰타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알렸다. 지중해의 몰타섬은 영국군이 통제하고 있는 전략 요충지로서 독일군이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던 터라, 영국군이 몰타 방어를 위해 보급함을 보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군은 이 배들을 중간에 막기 위해 잠수함과 어뢰정 여러 척을 보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영국 선박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짓 정보 하나로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헛된 곳에 낭비한 것이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정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이 내심 깔보고 있던 이탈리아군이 실수해서 배들을 놓쳤다고 판단했다.
조만간 나치에게 발각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든 푸홀은 리스본 주재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중간첩의 효용성을 알아본 미국 측은 그를 런던에서 활동하도록 주선했다. 1942년 4월에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정보부(MI5·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5)의 공식 직원이 되었다. 그는 이 부서에서 가르보(Garbo·당시 최고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에서 나온 이름이다)로 불리며 그곳 동료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새로운 정보원들을 구했다고 독일군에 보고했다. 이제 그가 만든 가상의 정보원 네트워크는 영국을 넘어 미국과 캐나다까지 확장했다. 그는 자기가 만든 가짜 인물들의 성격과 직업, 협조 이유, 이들 간 관계 등을 잘 꾸며나가면서 역정보 활동을 수행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보내는 정보를 독일군이 계속 믿게 만드는 것이다. 1942년 11월, 연합군이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상륙하는 횃불 작전(Operation Torch)을 펴던 당시 그는 연합군 해군의 이동 상황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독일군 측에 넘겼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정보를 넘겨서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독일군은 그에게 ‘정말로 소중한 정보지만 아쉽게도 너무 늦게 도착했다’며 위로했다. 이제 그는 완전히 독일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그는 독일군과 수백 번 교신을 이어갔다. 이것이 독일군 암호 해독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는 부수적 효과도 있었다.
푸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결정적 기여를 했다. 연합군에게 최대 위험 요소는 노르웨이에서 프랑스까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독일군이 설치한 ‘대서양 방벽’이었다. 방공포, 지뢰, 기관총 부대 등을 배치하여 해안선을 방어했고, 강력한 전차 부대도 주둔해 있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편다면 그 지점은 파드칼레(Pas-de-Calais) 지역이 될 것이라고 보았고, 전차 부대도 이곳 중심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실제로는 노르망디 해안으로 상륙하면서 적에게는 파드칼레로 상륙하는 것처럼 믿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연합군은 FUSAG(First United States Army Group)이라는 가상의 부대를 만들었다. 고무로 만든 전차, 나무로 만든 대포, 직물과 판자 등으로 만든 가짜 군 기지 등을 영국 남동부 켄트 지역에 설치했고, 독일군 정찰 비행기가 이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가짜 부대가 파드칼레로 향하는 척하고, 인근 지역을 폭격하기도 했다.
푸홀은 담대한 작전을 구상했다. 일단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그것은 가짜 작전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대규모 상륙 군대가 파드칼레로 갈 것이라는 최후의 역정보를 주어서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하자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고심 끝에 상륙작전 초기 단계인 낙하산 부대 강습 이후에 독일군에게 정보를 보낸다는 데에 찬성했다. 디데이(D-Day)인 6월 6일 오전 3시, 푸홀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무선을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군은 밤에 무전기를 닫아둔 상태였다. 몇 시간이 지나 상륙작전이 한참 진행 중일 때 가서야 독일군은 그의 무선을 확인했다. 푸홀은 극도로 분개한 어조로 이런 상태라면 자신의 업무를 중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자신들의 실수로 결정적 정보를 놓친 것으로 판단한 독일군은 그에게 제발 일을 계속해 달라고 읍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6월 8일 자정 무렵, 그는 최후의 거짓 정보를 독일로 송출했다. “내가 파악한 바로는 현재 진행 중인 연합군 공격은 대규모의 교란 작전이다. 이것은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적의 함정이다.” 당시 노르망디 해안에 들이닥친 상륙군은 미끼이고 곧 더 큰 규모의 대군이 파드칼레로 상륙할 터이니 그곳에 방어군을 집중 배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푸홀이 보낸 ‘첩보’는 히틀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작전이 성공했다. 롬멜 장군이 이끄는 전차부대는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하다가 길을 돌려 파드칼레로 향했다. 상륙작전에 대한 대규모 반격이 불가능해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6월 말에 이르자 그는 더 이상 거짓 정보를 제공할 이유가 없어졌다. ‘알라릭 요원’은 영국 정보 당국에 체포된 것으로 처리했고, 가까스로 석방된 다음 급히 런던을 떠나게 되었다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그는 종적을 감췄다. 탁월한 스페인 거짓말쟁이 한 명이 승전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양측 훈장을 받다]

▲스페인 태생인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사망한 것으로 위장한 뒤 베네수엘라에 정착했다. /위키피디아
1944년 독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히틀러는 ‘알라릭 요원’에게 철십자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몇 달 후에는 영국 정부가 연합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가르보 요원’에게 영제국 기사훈장을 수여했다.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나치와 연합군 양측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극소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종전 이후 나치 잔당의 보복으로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했다. 영국 정보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앙골라로 보냈다. 공식적으로 그는 1949년 이 나라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위장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영국의 국회의원 출신이며 나이절 웨스트(Nigel West)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던 루퍼트 앨러슨(Rupert William Allason)이 관심을 가지고 그의 행방을 추적했다. 10년 넘게 고생한 끝에 1984년에 가서야 가르보 요원의 정확한 본명을 알아냈다. 이후 바르셀로나의 시민 중 가르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이는 ‘서울 사는 박 서방’에게 모두 전화 건 거나 다름없다. 마침내 푸홀의 조카를 찾아냈고, 이해 5월에 드디어 주인공을 만났다.
가르시아는 앙골라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것으로 위장한 후 베네수엘라에 가서 서점과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40주년 기념 행사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노르망디 해안을 방문한 그는 상륙작전 당시 숨진 병사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자신이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하는 데 일조하여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68]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
남미로 숨은 나치 고문기술자… 언론의 끈질긴 추적에 꼬리잡혔다

▲1987년 프랑스 법정서 종신형 선고받은 바르비 -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체포해 잔혹하게 고문한 클라우스 바르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처벌을 피해 볼리비아에 알트만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볼리비아 군부 독재 체제를 도우며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한 그는 정체가 드러난 후에도 죄를 반성하지 않았다 . 1982년 볼리비아 군부 독재가 무너진 뒤에야 바르비는 프랑스로 압송됐고, 1987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바르비가 1987년 프랑스 법정에 들어서는 장면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72년 2월 3일, 프랑스의 유명한 TV 앵커 라디슬라 드 오요(Ladislas de Hoyos)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클라우스 알트만(Klaus Altmann)이라는 사업가를 인터뷰했다. 알트만이 실제로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압송하고 많은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체포하여 잔혹하게 고문한 리옹의 게슈타포 수장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던 터였다.
자신들이 나치 전범을 보호하고 있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킨다며 볼리비아 정부는 프랑스 방송사가 문제의 인물 알트만을 직접 취재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다만 짧은 시간 안에 미리 약속한 질문만 스페인어로 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알트만은 자신이 베를린에서 태어난 독일계 인물이며 클라우스 바르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터뷰 도중 드 오요는 불쑥 프랑스어로 ‘당신은 리옹에 간 적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고, 그는 즉각 독일어로 그런 적 없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 알트만이 프랑스어를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르비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게 당신이 아니냐고 캐묻자 알트만은 사진 속 인물이 자신과 닮은 데가 없다며 부인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중 고문 끝에 살해당한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의 사진을 던져주며 이 인물을 만난 적이 없느냐고 질문했다. 알트만은 사진을 손에 쥐고 무심히 들여다본 다음 만난 적 없다고 말하고는 사진을 돌려주었다. 드 오요는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거기에는 과연 알트만이 바르비와 동일인인지 아닌지 판가름해 줄 결정적 증거인 지문이 묻었기 때문이다.

▲바르비 정체 밝혀낸 프랑스 언론인 드 오요 - 프랑스 언론인 라디슬라 드 오요는 클라우스 바르비를 인터뷰해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물증을 확보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사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볼리비아 경찰이 방으로 들어와 필름 롤을 압수했다. 그렇지만 드 오요의 수완 좋은 동료는 이미 인터뷰 장면이 찍힌 필름 롤을 동석한 프랑스 대사관 직원에게 빼돌렸고, 태연하게 경찰에게는 공필름을 넘겨주었다. 인터뷰 필름과 사진에 묻은 지문을 통해 알트만이 20여 년 전 남아메리카로 도주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던 악랄한 게슈타포 수장 클라우스 바르비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30년 전인 1942년, 열렬한 나치 친위대 대원이었던 바르비는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다가 프랑스 리옹으로 전출된 후 이 지역 게슈타포를 지휘하는 수장이 되었다. 그는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잔인한 짓들을 벌였다. 19세기 이래 감옥으로 사용하던 몽뤼크(Montluc) 요새에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수감한 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장시간 악랄한 고문을 가하며 사디스트적인 희열을 느끼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남의 얼굴을 부수면서도 자기 옷소매에 희생자의 피가 묻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인물이었다.
1943년, 그의 앞에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이 끌려왔다. 드골 장군으로부터 전국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합하라는 임무를 받고 활동하던 터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바르비는 장 물랭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했다. 그렇지만 그는 영웅적으로 고문을 이겨내며 끝내 발설하지 않다가 온몸이 거의 넝마가 된 상태로 사망했다. 1944년에는 이지외(Izieu)의 난민 수용소에서 유대인 아동 44명을 체포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이해 8월 11일, 연합군이 리옹 가까이 진격한 최후의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650명의 희생자들을 기차에 태워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게 만들고는 그 직후 혼란을 틈타 독일로 피신했다.

▲종전 73주년에 몽뤼크 감옥 찾은 레지스탕스 대원들 - 매년 프랑스 몽뤼크 교도소에선 나치에 희생당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던 클라우스 바르비는 프랑스로 압송된 직후 몽뤼크 교도소에 투옥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뮌헨 남쪽 약 100㎞ 떨어진 멤밍엔으로 도주한 바르비는 이곳에서 수십 명의 인원을 규합하여 나치 전범들의 도주를 돕는 조직을 운영했다. 이들의 활동은 곧 미국의 방첩부대(Counterintelligence Corps·CIA의 전신)에 꼬리를 잡혔다. 그렇지만 미국 군 당국은 이 악당을 체포하는 대신 오히려 잘 활용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냉전 초기인 이 시기에 전직 게슈타포는 소련과의 정보전에서 실로 유용한 자원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썩히기에는 정보원으로서 너무나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은 바르비는 미국 방첩대 정식 직원이 되어 활동했다. 독일 내 소련 비밀 조직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내고 프랑스 점령 당국 활동도 염탐했다.
악랄한 나치 전범이 버젓이 미국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프랑스 당국이 항의하며 바르비의 신원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그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급기야 미국 측은 비밀리에 그를 국외로 빼돌렸다. 1951년 바르비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거쳐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간 다음 적십자 임시 여권을 발부받아 남아메리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바르비는 이제 알트만이라는 이름으로 볼리비아에 정착한 후 아마존 지역의 임산물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 파트너로는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알트만은 자신이 판매하는 판자에 백묵으로 나치 십자가 표시를 하여 유대인 상인들의 분노를 사곤 했다. 바르비의 행방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 사법 당국은 궐석 재판으로 두 번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정작 바르비는 1957년 볼리비아 국적을 얻었다. 그의 사악한 성향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는 볼리비아 군부 독재 체제를 도와 반정부 인사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알트만은 첩보와 조사 방법을 전수해 주었고,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볼리비아의 고위층 인사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사업상의 특권도 누릴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사업은 역시나 사악한 종류의 일들뿐이었다. 예컨대 마약 밀수 카르텔에 무기 판매를 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콜롬비아의 악명 높은 코카인 밀매업자로서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와도 거래했다. 심지어 전직 나치 당원들을 모아 ‘죽음의 약혼자(los novios de la muerte)’라는 이름의 유사 군 조직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무기 구매를 중개하기도 했다.
영원히 지속할 것 같던 그의 위세에 마침내 암운이 드리워졌다. 오랫동안 나치 잔당들을 추적해 오던 독일의 활동가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가 여러 증거로 볼 때 볼리비아의 알트만이 다름 아닌 바르비라고 주장했고, 앞서 본 대로 프랑스 앵커 드 오요의 인터뷰로 인해 그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바르비를 송환하라는 친필 서한을 보내기도 했으나 볼리비아의 독재자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Hugo Banzer Suarez)는 거절했다. 바르비는 이제 자신의 신원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과거에도 나치였고 지금도 나치요. 나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독일을 위해 싸웠고, 독일인으로 죽을 거요.” 볼리비아 당국이 그를 철통같이 보호해 주는 한에서는 그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2년에 가서 상황이 바뀌었다. 군부 독재가 무너진 후 권좌에 오른 새 대통령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는 이 골칫덩이를 처치하고 싶어했고, 오랜 밀담 끝에 그를 프랑스로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로 압송된 바르비는 상징적인 의미로 과거 자신이 게슈타포 수장으로 복무했던 몽뤼크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이어진 재판에는 100명 이상의 나이 든 증인들이 출석하여 바르비의 잔악한 범죄 행위들에 대해 증언했다. 1987년 7월 4일, 클라우스 바르비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반인륜 범죄’ 관련 재판이었다. 재판 기간 내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표하지 않던 그는 1991년 7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악마 같은 한 인간의 삶이 마침내 종말을 맞았다.
[나치 전범들의 도주]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나치 전범들의 도주가 이어졌는데, 이때 파시스트 성향의 종교인들이 도움을 주곤 했다. 최초의 사례는 나치에 호의적인 오스트리아 주교 알로이스 후달(Alois Hudal)이었다. 1944년 그는 주교의 권위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의 전범 수용소를 찾아가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주며 독일인 나치 전범들의 도주를 도왔다. 종전 후에도 티롤 산지로부터 제노바까지 이어지는 도주로(Ratline·‘쥐 통로’)를 통해 전범들과 부역자들을 남아메리카로 빼돌렸다. 수도원들은 숙식을 제공하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크루노슬라브 드라가노비치(Krunoslav Draganović) 사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반(反)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자 파시스트 조직으로서 2차대전 중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 정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한 우스타샤(Ustaša)의 일원이었다. 학살 수용소의 사제였던 그는 종전 이후 탈주 동조자로 변신하여, 독일인 나치들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들의 해외 도피를 적극 도왔다. 바르비 또한 이 신부의 도움으로 탈주에 성공했다.
[69] 1548년 로렌치노 암살… 뒤바뀐 진실과 배후
메디치家 청부살인… 470년뒤 밝혀진 주범은 놀랍게도 황제였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로렌치노는 1537년 사촌 알렉산드로 공작을 자기 집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11년 후 그는 베네치아에서 괴한들 습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 로렌치노 암살 사건은 알렉산드로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코시모 1세가 복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 470년이 지난 후에야 새로운 증거들을 통해 암살 주범이 알렉산드로의 장인 카를 5세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림은 로렌치노 암살 사건을 묘사한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베추올리(Giuseppe Bezzuoli)의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548년 2월 26일 아침,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피렌체 귀족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 일명 로렌치노(Lorenzino)가 삼촌과 함께 산 폴로(San Polo) 교회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무심히 길을 가던 중 갑자기 괴한 둘이 습격해 왔다. 삼촌은 재빨리 도주하여 겨우 화를 면했으나, 단도로 머리를 가격당한 로렌치노는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4세에 과부가 된 딸이 복수 요청
로렌치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 자신이 과거 피렌체에서 있었던 암살 사건의 범인이었다. 11년 전인 1537년, 같은 메디치 가문 내 사촌 형제이며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알레산드로(Alessandro) 공작을 자기 집으로 유인한 후 하인과 함께 칼로 공격하여 살해한 것이다. 두 사촌 형제는 매우 친한 사이인 척했으나 사실 재산 상속 문제로 다투던 중이어서 이것이 살해 원인이 아닐까 추론한다. 그렇지만 로렌치노는 자신이 암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독재자로부터 피렌체를 구하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했다. 중세 피렌체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가운데 르네상스 문화를 활짝 꽃피운 공화국이었으나 16세기에 들어와서 메디치가의 세습 체제가 확립되어 공화정은 종말을 맞았다. 로렌치노는 마치 로마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독재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라도 된 양 정의로운 척했으나 실제 의도가 그렇게 고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암살 후 그는 피렌체 출신 망명객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베네치아로 도피했다.
알레산드로의 죽음으로 메디치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가문의 방계로서 당시 17세였던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였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도주한 암살범 로렌치노를 붙잡아 처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렇다면 1548년에 베네치아에서 벌어졌던 로렌치노 암살 사건은 10년 이상 기다린 끝에 코시모가 복수를 행한 것일까? 여러 증거로 보건대 그렇게 추론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게 아니었다. 우선 코시모는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두 킬러들을 직접 면담했고, 사건 완수 후에 다시 그들을 만나 거액의 보수를 주었다. 게다가 그 시기에 코시모의 측근 인사들이 베네치아에 가 있었는데, 이들이 모종의 암살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는 정황이 뚜렷하다. 이 이상 어떤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역사책들과 이 사건을 다룬 예술 작품들은 모두 로렌치노 암살은 코시모의 복수였다고 판단해 왔다.
그런데 약 470년 세월이 흐른 후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면서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우선 메디치 궁에서 오간 암호화된 편지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피렌체 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이 서한들을 분석해 보면 코시모는 암살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그가 직접 암살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다. 베네치아에 가 있던 그의 수하 로티니라는 인물은 여태 역사가들이 믿던 바와는 달리 로렌치노 암살을 준비하던 게 아니라 다른 정적을 노리고 있었다. 실제 로렌치노를 목표로 하던 조직이 있었으나 복잡한 사유로 인해 전혀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코시모는 로렌치노 암살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

▲카를 5세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초상화. 그의 사위인 알렉산드로 공작은 로렌치노에 의해 살해당했다. /네덜란드 미술사 연구소
그렇다면 암살을 지시한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놀랍게도 황제 카를 5세임이 밝혀졌다(황제는 명목상 유럽의 최고 지배자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독일과 동부 유럽 지역, 에스파냐를 통치하고 있었다). 살해 동기는 쉽게 추론 가능하다. 1537년에 암살당한 알레산드로가 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사생아 딸 파르마의 마가레트는 그 전 해에 알레산드로와 결혼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14세의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편지를 쓸 때마다 ‘슬픈 마가레트’라고 서명했고, 남편을 죽인 살인범 로렌치노에 대한 복수를 갈구하여 그의 머리에 상금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인 황제에게도 복수를 요청했다.
황제는 사위의 죽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원했으나 그렇다고 이탈리아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황제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하게 패권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다른 한편 가톨릭 군주로서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들불같이 번져나가던 개신교의 확산을 막는 문제에 완전히 붙들려 있었다. 그래서 외교 경로를 통해 코시모 공작에게 로렌치노를 붙잡아 처형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닿자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렇지만 심증만으로는 안 되고 황제가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스모킹 건(smoking gun·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의 시망카스(Simancas) 문서보관소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메디치 가문 내 살인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겠다며 이탈리아 문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은 훨씬 더 큰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증거 자료도 국제적으로 살펴보았어야 한다.

▲시망카스 문서보관소 - 카를 5세가 로렌치노 암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발견된 스페인 시망카스(Simancas) 문서보관소. 앞서 메디치 가문 살인 사건의 내막을 찾던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문서에 집중하느라 이곳의 문서를 간과했다. /위키피디아
시망카스에는 카를 5세 궁정에서 주고받은 암호화된 문서들이 있다. 이 문서들을 보면 실제 암살 사건의 집행인은 놀랍게도 밀라노 공작 페란테 곤자가(Ferrante Gonzaga)였다. 황제의 충직한 수하 인물인 그는 피렌체 공작 코시모 측과 접촉하여 로렌치노의 머리에 걸린 상금을 실제 지불할 수 있는지 물어 확약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진범이라고 생각했던 코시모 공작은 이전에 약속했던 돈을 지불한 정도로만 사건에 간여했다.
이제 밀라노 공작 곤자가는 킬러 두 명을 고용하여 암살을 지시했고, 이런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킬러들은 피렌체를 거쳐 베네치아로 가서 작업을 준비했다. 베네치아에서는 황제 대사인 멘도사라는 인물이 이들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줄곧 로렌치노의 행적을 추적해 오고 있었다. 황제는 멘도사에게 로렌치노를 비밀리에 살해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멘도사는 에스파냐인 암살범을 고용하면 쉽게 눈에 띄므로 이탈리아인들을 써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최종적으로 1548년 1월 11일, 황제는 로렌치노 살해를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 킬러들이 행동에 돌입하여 2월 26일 암살에 성공했다. 그 후 베네치아 주재 제국 대사관에서 킬러들을 비밀리에 보호했고, 그 후 안전하게 피렌체 인근의 피사까지 데리고 와서 약속한 보수를 받도록 조치했다.
에스파냐 문서보관소의 새 증거들
황제는 왜 10년 이상 지난 이 시기에 암살을 거행했을까? 암살 계획을 본격화한 1547년 시점을 주목해 보자. 이 해에 황제의 평생 라이벌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사망했고, 황제군이 독일 내 개신교 영주들을 군사적으로 눌렀다.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판단한 황제는 이탈리아 문제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1547~1548년 동안 피에르루자 파르네세, 프란체스코 부를라마키, 줄리오 치보 말라스피나 등 황제의 정적들이 살해당하거나 처형당했다. 로렌치노의 암살 또한 이 같은 정치 공작의 큰 틀 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로렌치노 암살은 메디치 가문 내에서 벌어진 복수 사건으로만 생각했고, 당연히 이탈리아 내부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실제로는 훨씬 더 큰 국제적 맥락에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실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진실을 감추려 해도 끝내 숨길 수는 없는 법. 깊은 어둠에 묻힌 사건도 심지어 500년 세월이 흐른 후에 밝혀지기도 한다.
[1582년 메디치家 또다른 죽음]
연회뒤 쓰러진 공작 부부… 동생에 의한 독살인가, 말라리아 감염사인가
1582년 10월, 메디치 공작 프란체스코 1세와 동생 페르디난도는 형제 간 다툼을 멈추고 화해하는 뜻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연회를 마치고 나오는 중에 프란체스코와 부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부부는 열흘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같은 날 사망했다. 동생 페르디난도가 부검을 지시하고 서둘러 발표를 했는데, 마치 미리 짜 맞춘 결론을 내리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부부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공식 발표 내용에 의심을 가졌다. 아무래도 동생이 형을 독살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으나 그 점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장례 관습대로 사체의 장기를 4개의 단지에 넣어 산타마리아 성당 지하에 두었다. 이 사체 조각들을 분석하여 미스터리를 풀겠다는 시도가 여러 차례 행해졌다. 2004년 도나텔라 리피라는 의학사 연구팀은 사체에 대한 과학적 조사 끝에 비소를 검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형을 질투한 동생이 독살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런데 이 결과는 다시 뒤집어졌다. 2010년 다시 조사했을 때에는 말라리아를 감염시키는 기생충(Plasmodium falciparum)을 발견했다. 결국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원래의 공식 발표가 맞을 수도 있게 되었다. 독살인가, 병사인가. 어느 편이 진실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우아하면서도 잔혹한 메디치 가문에 관해서는 아직 밝혀야 할 미스터리가 많이 남아 있다.
[70] 르네상스 꽃피운 피렌체… 어떻게 그 많은 인재를 길러냈을까
피렌체의 힘

▲13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회화, 조각, 건축, 문학, 과학, 정치학 등 광범위한 부문에서 창의적 인재들이 연이어 등장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세대마다 위대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계속 등장한 배경으로 오랜 숙성 끝에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시·국가의 문화 환경을 꼽을 수 있다. 혁신 인재들이 새로운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켜 인류의 자산을 확대한 것이다. 그림은 1493년에 출간된 책에 담긴 피렌체 전경으로 하르트만 셰델의 목판 작품이다. 강 왼편의 커다란 돔 건물이 두오모 성당이다. /위키피디아
인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의 한 도시에 최고의 창의적 천재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그렇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자,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같은 문인, 피디아스와 폴리클레이토스 같은 조각가 등 역사상 두 번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거장들이 활약하며 그야말로 서구 문명의 기초를 만들어냈다.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또한 유사한 사례다. 칼리파 알만수르(754~775년 재위)는 ‘지혜의 전당’이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고전 문명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아랍어로 번역하였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알마게스트’, 유클리드의 수학서 ‘원론’, 플라톤의 철학서 ‘티마이오스’, 인도학자 브라마굽타의 천문학·수학서 ‘브라마시단타’ 같은 고전을 번역한 다음 일급 학자들이 주해(注解)와 심층 연구를 했다. 아랍 문명의 이런 성과를 물려받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이후 근대 서구 문명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3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대략 3세기 동안의 피렌체 또한 유사한 사례다. 보카치오부터 브루넬레스키까지, 토리첼리부터 갈릴레이까지,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단테부터 마키아벨리까지 회화, 조각, 건축, 문학, 과학, 정치학 등 광범위한 부문에서 천재들이 나타나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신기원을 이루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천재들의 활동 무대는 실로 좁은 공간에 불과하다. 서쪽의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부터 동쪽의 산타크로체 교회까지, 그리고 북쪽의 산마르코 수도원부터 남쪽의 로마나 성문까지 피렌체 구도심은 동서 간 1.5㎞, 남북 간 1.5㎞에 불과하다. 이 협소한 공간에서 그처럼 위대한 인재들이 북적거리며 살았다는 게 흥미롭다. 성격 까칠한 젊은 미켈란젤로가 골목길에서 나이 지긋한 다빈치를 만나 시비를 걸면 점잖은 선배 예술가가 무심히 웃고 지나가는 식의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왼쪽부터)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니콜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갈릴레이
세대마다 위대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계속 등장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물론 한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 막연한 말이지만, 오랜 숙성 끝에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도시·국가의 문화 환경이 계속 인재를 키워내는 흐름을 이어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배경에서 그런 선순환의 흐름이 만들어졌을까?
피렌체는 여러 장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밀, 올리브, 포도주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주변 농촌을 들 수 있다. 우선 먹고살 만한 안정적 물질적 기반을 갖추어야 다음 단계의 문화 역량 발전을 꾀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이야 널려 있으니 이것이 결정적 요인은 분명 아니다. 그보다는 상업과 공업, 은행업이 더 중요한 요소다. 직물업을 통해 점차 큰돈을 벌고, 유럽 전역의 대상인들과 군주 및 귀족들을 대상으로 금융거래를 하여 더욱 큰 부를 쌓아갔다. 14세기에 이르면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 가장 활력 있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부유한 대가문들이 성장했고, 일부 가문이 쇠락하면 다른 대가문이 치고 나오곤 했다. 스피니, 프레스코발디 같은 1세대 가문에 이어 바르디, 페루치 같은 2세대 가문들이 성장하고, 다시 이들이 쇠락하면 메디치, 스트로치 같은 3세대 가문들이 성장했다. 이 도시 귀족 가문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예술적으로 피렌체를 빛낸 주역들이다.
다만 특정 가문들의 권력 독점 사태를 막기 위해 제도적 정비를 했다. 예컨대 강력한 행정장관에게 사법 행정을 맡기되 의도적으로 피렌체 외부 가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겼다. 또 유럽 국제 정치 무대에서 피렌체가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했다. 로마, 밀라노, 신성로마제국 등 주변의 강력한 정치 세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균형을 추구하는 데 외교의 주안점을 두었고, 강력한 군사 집단의 권력 농단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다(다만 후일 이것이 피렌체의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사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황당과 황제당이라는 파당들 간 싸움, ‘치옴피의 난’(1378)이라 일컫는 노동자 봉기로 이어지는 극심한 계급 갈등 등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국가가 붕괴에 이를 정도로 방치하지는 않았다. 페스트 위기 또한 잘 극복해냈다. 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피렌체 시민의 정체성이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고 독특한 문화가 발전해 나왔다. 예컨대 1430년대에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돈이 모든 것의 뿌리”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브로델은 이를 두고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 곧 절약이나 시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근대 부르주아 문화 요소가 생성되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힘과 능력(virtù)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가 발전한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복합적 분위기에서 피어났다. 이제 시민들의 삶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해 갔다. 무엇보다 피렌체는 모뉴먼트, 궁정, 교회, 수도원 건물 등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스스로를 장식했다. 예컨대 1489년에 피렌체시는 대가문들이 5년 내에 웅장한 저택을 지으면 40년 동안 조세 특혜를 준다고 결정하여 이런 흐름을 장려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다름 아닌 두오모(Duomo) 성당 재건축이다. 원래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라고 하는 작은 규모의 성당이 시내 한복판에 있었는데, 1294년에 크게 재건축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시 조례를 보면 “다른 그 누구도 더 이상 장대하고 화려하게 지을 수 없도록 최대한 웅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인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00년 이상 끈질기게 수작업 방식으로 돌을 다듬어 거대한 성당을 지어나갔고, 한 세기 반이 지나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거대한 이중 구조의 돔을 올리는 난공사를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1469년 베로키오와 그의 제자 다빈치가 돔 위에 거대한 황금색 구(球)와 십자가를 얹음으로써 마침내 ‘꽃의 성모’라고도 부르는 성당을 완공했다.
▲두오모(Duomo) 성당은 피렌체 시내 한복판에 있던 작은 성당을 1294년에 재건축하기로 결정한 뒤 100년 이상 끈질기게 거대한 성당을 지어나가 1469년에 완공했다. /Gary Campbell-Hall
이 시기에 이르면 이제 피렌체는 예술과 과학, 철학에서 정점을 찍는 단계로 들어갔다. 부호들은 예술가들의 메세나가 되어 자신의 가문을 찬미하는 작품을 만들도록 했고, 길드는 능력 있는 예술가를 고용하여 자기 단체의 수호성인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사들이 거주하는 방마다 성스러운 그림들을 그려주었고, 보티첼리는 신비로운 이교 신들의 축제를 표현했으며, 도나텔로는 걸작 다비드상을 완성했다.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고대 철학을 연구하고 기독교와 고대 이교 문명의 융합이라는 고난도 이상을 추구했다.
현대에 이런 놀라운 일이 재현되는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혁신적 인재들이 새로운 예술과 학문을 발전시켜 인류의 자산을 확대해 주는 현대의 피렌체는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일까? 희망컨대 서울이나 대구, 광주 같은 우리 도시들이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수십 년 전이면 꿈도 꾸지 못했던 기적 같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제 다음 단계로 엄청난 문화적 비약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보자. BTS, 임윤찬, 조성진 같은 탁월한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허준이 교수 같은 수학과 공학의 천재들이 빛을 발하는 현상이 어쩌면 그런 조짐이 아닐까.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잉어가 뛰어오르듯 이 땅에 새로운 기운이 약동하면 좋겠다.
[피렌체에서 활동해야 하는 이유]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가 어디에서 활동해야 탁월한 화가가 될 수 있냐고 묻자 그의 스승은 다름 아닌 피렌체라고 답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비판 정신이다. 이 도시의 공기는 사람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어서 결코 평범한 작품에 만족하지 않으며, 작가의 이름에 대한 존경보다는 선(善)과 미(美)에 따라 판단한다. 둘째, 이 도시에서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늘 자신의 지성과 판단력을 발휘하고, 자기 일을 하는 데 잘 준비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며, 돈 버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 나라는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잘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영광과 명예에 대한 갈망이다. 이곳 분위기는 주변 사람들과 동등한 정도, 심지어 열등한 수준에 있어도 만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곧 뒤처지고 만다. 이런 충고에 따라 페루지노는 피렌체에 와서 안드레아 베로키오의 지도를 받았고, 몇 년 후 큰 명성을 얻어 이탈리아 전역에 그의 작품이 넘쳐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