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베트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중국은 194014대 달라이 라마의 즉위식에 '행정원 몽장위원회'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14대 달라이 라마 즉위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싸에 계속 머물러, 1948년에 강제퇴거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 집니다. 이때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1) 195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티베트 역사의 전환점은 1949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50106일 새벽, 중국은 40만 대군(인민해방군, 혹은 홍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하였습니다. 5,000여명의 소규모 티베트군대를 패배시킨 중국군은 티베트의 반을 점령했고, 2주 만에 티베트 군대는 항복합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대해 언급한 서양 군사 전문가는 중국군도 1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아래는 당시 티베트 군인들의 모습 사진입니다. (출처 : 구글 www.google.com)

 

하지만 중국은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티베트 정부에게 소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항 협정을 강요했습니다. 40만 중국군의 티베트 점령, 라싸를 침공하겠다는 위협, 티베트 전체의 파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티베트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1523일 베이징 시에서 티베트와 중화인민 공화국 양측이 십칠조 협의를 체결하며, 티베트는 최초로 중 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포탈라 궁 앞 (뉴욕타임스)-평화로운 티베트를 총칼로 짓밟은 중공군의 모습 

 

십칠조 협의는 중국의 중앙 인민정부와 티베트 지방 정부의 평화적인 티베트 해방에 관한 협의이며,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양측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협의는, 한국의 일제강점기 때 을사조약과 같이, 강제적으로 서명되었기 때문에 국제 법에 따라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19511024, 14대 달라이 라마께서는 마오쩌둥과 중앙 인민 정부 당국에 십칠조 협의를 준수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십칠조 협의를 무시하고,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로 티베트를 지배하였습니다. 1960~1970년대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6,200여개 의 사찰 가운데 6,000개 이상의 사찰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티베트의 문화적, 민족적 특성(제정일치국 : 종교와 정치가 일치함)을 파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1979년에는 13개의 사찰만이 티베트에 남았고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결국, 1959년에 14대 달라이라마께서는 인도로 망명했고,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강제조약인 십칠조협의 파기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은 1949~1950년 군사적 정복과 점령의 결과로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가졌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국은 그 같은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군사적 정복, 점령 또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법적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중국은 700년 전 즉, 원나라시대 때부터 티베트가 중국 일부가 되었다는 이론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후 중국은 티베트의 원래 영토를 행정적으로 분리하여 서장자치구(시짱)에 대한 티베트 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제로는 현재까지도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2) 1959년 티베트 민중봉기

19593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봉기가 일어난 날인 310일은 매년 티베트 망명 정부 등 세계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인들이 "티베트 민중봉기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1956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시작된 티베트인에 의한 대규모 민중봉기는 1959년까지 계속되었고, 티베트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티베트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증파되었습니다. 중국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공격을 강화하고, 중국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는 위협도 가했습니다.

 

31일 라싸 교외에 있는 중국 인민해 방군 사령부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연극 관람을 제안을 하였고, 14대 달라이 라마 께서는 그 제안을 미뤘지만, 최종적으로 는 310일에 연극을 관람하기로 합의 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 하루 전인 39, 중국군 장교들이 "전통에 어긋나지만 14대 달라이 라마가 연극관람 때에 무장 경비대를 동행 시키지 않는 다는 조건과, 포탈라 궁에서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이동할 때 어떠한 공식적인 의식을 실시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라싸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도 퍼져, 중국군이 14대 달라이 라마의 납치를 꾀하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인 310, 14대 달라이 라마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약 30만 명의 티베트 민중들이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인 노블링카 앞에 운집했고, 중국 인민해방군 측이 달라이 라마를 포탈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궁전을 둘러쌌습니다 

 

312, 라싸에 모인 티베트인 항의자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자 중국군은 라싸의 큰 길에 바리게이트를 만들고, 충돌에 대비해 라싸 내외에 거점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독립요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315일 상황이 악화되자 티베트 정부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피난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럴 수 없다며 남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3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떨어졌습니다.

 

아래사진은 당시 포격된 모습과 희생된 분들의 모습 일부가 담긴 사진입니다.

(출처 : www.google.com)

 

이 사건을 계기로 대부분의 티베트인들14대 달라이 라마가 훗날의 티베트인과 티베트를 위해 피신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317일 새벽, 달라이 라마와 그를 보호하기 위한 수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319일 라싸의 주요 사원에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티베트군 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전투는 이틀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공군에 의해서 약탈과 심한 손상을 입었고, 폭격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싸에 남아있던 14대 달라이 라마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장 해제 되어 공개처형 되었습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식적인 집계로만 중국군에 의해 19593~196010월까지 87,000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고,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합한다면 1959년 봉기에만 약 43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죽음을 뒤로한 채, 민중봉기는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국제공동체가 티베트에서 발생한 사건에 충격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티베트의 문제는 1959년과 1965년 사이 수차례에 걸쳐 유엔총회에서 논의되었습니다. 유엔총회는 3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티베트에서 자행되는 중국의 인권침해를 비난하고 중국이 티베트의 자결권을 포함하여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티베트인의 계속되던 게릴라 작전도 1974년에 가서야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고문과 학살, 잔인한 억압을 통한 티베트 강점시도가 계속되었습니다. 티베트 여성들에게 강제적인 낙태와 불임수술을 자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티베트 승려와 비구니, 티베트인들이 중국 강제노동수용소와 감옥에서 신음하였습니다. 티베트 승려들이 중국군에게 끌려나와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환속 할 것을 강요당하고 강제로 노역하다 죽는 등 티베트인 의식의 중심에 있던 티베트불교를 상상도 못할 박해에 시달리게 했다고 티베트를 여행했던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지금까지도 이런 내용들은 사실과 다르다며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중국의 탄압과 점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당국이 티베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여 제대로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난 3월 10일 민중봉기를 기억하며, 티베트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위해 또 2명의 티베트인이 분신으로 세상에 티베트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불과 16세, 18세 소년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티베트인들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140여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이 이렇게 분신으로 자신의 몸을 불꽃 삼아, 세상에 티베트의 평화를 위한 목소리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티베트의 목소리와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주시기를 다시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