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71/ 타이(태국) - 타이완(대만) - 탄자니아
■타이 Thailand
타이 왕국, Kingdom of Thailand, 태국, 泰國
▲국기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서부 지역에 있는 국가로 수도는 방콕이다. 옛 이름은 시암(Siam,1856∼1939). 국민의 75%가 타이인이며 14%는 중국인이다. 종교는 불교이다. 국민총생산(GNP)가 인구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위생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평균수명은 약 66세이다.
타이는 1932년 이래 대체로 군부가 지배해온 의원내각제 형태의 입헌군주국가이다. 세습 왕이 국가 수반이자 군 총사령관이다.
입법권은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의회에 있다. 상원은 270명의 의원으로, 하원은 3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임기 6년의 상원의원은 현직 총리의 추천으로 임명되며 4년 임기의 하원의원은 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된다.

▲타이 국회의사당
정부 수반은 총리이며, 1992년 개정헌법에 따라 하원의원 중에서 선출된다. 총리는 왕의 임명에 앞서 각료를 지명한다. 다당제 국가이지만 군부가 지배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미약하나마 아동·가족·노령자·극빈자·재난 구호에 힘쓰고 있으며, 위생 상태 또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양호한 편이다. 말라리아와 위장 및 호흡기 질환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질병이다. 평균수명은 비교적 높은 편으로 약 66세에 이른다.
7∼15세의 청소년에게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일부 도시지역은 학교가 부족한 형편이다. 교육은 6년제 초등학교, 5·6년제 중등학교와 대학교·사관학교·교사양성소 등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방송은 정부에서 통제하며 군부에서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과 여러 개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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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임금의 나라
◇200년된 황금왕관쓰고 초호화 대관식한 태국 국왕
▲태국 국왕 = 푸미폰 아둔아뎃 65년간 왕좌 최장수 국왕
▲국왕 생일잔치
▲국왕 생일잔치에 모인 국민
▲국왕 84회 생일 준비하는 근위병
▲국왕 84번째 셍일 축하 행사 11.12.5.방콕
▲국왕 푸미콘 85세 생일을 맞아 국왕의 연설을 듣기위해 사마콩 궁전에 운집 - 12. 12. 5.
▲왕궁
▲왕궁의 야경
▲근위병
▲국왕 푸미폰 아둔야댓 13. 12. 5. 크라이 캉원 궁전에서 자신의 86세 생일을 맞아 기념 연설
▲푸미폰국왕 1946년 6월9일 취임 70년 120일간 재임하다 16.10.13 서거
▲푸미콘왕 장례식
▲태국 새 국왕 16.11.29 각료회의에서 마하 와치랄릉꼰 왕세자를 국왕으로 승인 의회에 통보
▲태국 국왕 즉위 12.1
◆2015.10.22 태국 쿠데타 1년 반… 총리 욕했다간 25년刑
군사정권, 왕실 수호자 자처 공포정치로 국민·언론 통제… 야당엔 "다음 총선 기다려라"
저소득층 중심 '레드셔츠'는 탁신 前총리 지지하며 반발
美대사, 민주주의 회복 요구
태국 깐짜나부리시의 여행 가이드 뻥삭 스리분펭(48)은 지난 2013년부터 작년 말까지 페이스북에 왕실에 대한 글을 6차례 올렸다. 국왕을 풍자하는 몽타주를 올렸고, 그를 비판하는 글도 썼다. 작년 12월 버스 정류장에 있던 그는 갑작스럽게 체포됐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왕실 모독죄. 지난 8월 군사법원은 그에게 게시물 한 건당 10년씩 총 징역 60년을 선고했다. 이후 감형을 받았지만 그래도 30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됐다. AFP통신은 "태국 군사 정권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왕실의 수호자 행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태국의 인권단체 '아이로(iLaw)'가 지난 17일(현지 시각) 발표한 인권 보고서에 따르면, 군부 쿠데타 이후 왕실을 모독한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총 54명에 달한다. 평화적 시위를 벌이다 잡힌 사람도 212명이나 됐다. 인터넷에 쁘라윳 짠오차 총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던 남성은 25년형을 받았다. 지난달 22일에는 왕실에 대한 예민한 기사가 실려있다는 이유로 뉴욕타임스 국제판이 태국에서 발행되지 않았다.
태국은 지난해 5월 22일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집권하고 있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반정부 시위를 중단시키고, 국민 분열을 치유하겠다"는 명분이었다. 군부는 "갈등이 극복되면 늦어도 2015년 10월까지 민간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1년 반이 지나 당초 민정으로 이양하겠다고 약속한 시점이 된 지금도 정권은 여전히 군부가 쥐고 있다. 정치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잠복해있다는 게 지배적 관측이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계속되고 있다.
태국의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가장 큰 원인은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 셔츠'와 반탁신 진영인 '옐로 셔츠'파 간의 갈등 때문이다. 지난 2001년 탁신은 친서민 공약을 내걸어 당선됐다. 그에게 저소득층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탁신이 탈세 등 비리를 저지른 사실도 드러났다. 탁신은 2006년 군사 쿠데타로 쫓겨났지만, 2007년 총선에선 탁신을 지지하는 '국민의 힘'이 다수를 차지해 집권했다. 2008년에는 법원이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며 '국민의 힘'을 해산하는 바람에 반(反)탁신 진영인 민주당이 집권했다. 하지만 저소득층의 지지는 계속 이어져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2009년 총리로 선출됐다. 이에 반발한 '옐로 셔츠'의 시위가 잇따르자, 다시 군부가 등장했다.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는 잉락 전 총리가 비리를 저질렀다며 개인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했고, 탁신의 아들을 돈세탁 혐의로 조사하기도 했다. 쁘라윗 웡수완 부총리는 지난달 22일 "탁신파는 새 헌법이 마련되고, 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잉락 전 총리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검찰을 고소하고, 군부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등 탁신 측도 반격하고 있다.
민정(民政) 수립 시기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쁘라윳 총리는 집권 후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을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군부가 마련한 개헌안에는 선출된 의원이 아닌 명망가 중에서 총리를 뽑을 수 있게 규정하고, 상원 의원들을 모두 임명직으로 전환하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 위기 시 군부가 참여하는 국가전략개혁화해위원회(NSRRC)를 설치해 행정부·의회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사실상 군부 쿠데타를 제도화하는 셈'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탁신 전 총리도 "최악의 헌법 개정안"이라고 했다. 이 개헌안은 지난 6월 부결됐다. 다시 개헌안을 마련 중인 군부는 19일 "20개월 이내에 정치·경제를 개혁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민정으로 이행하는 총선은 일러도 2017년 중반이 돼야 시행된다.
국제사회는 태국의 정치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글린 데이비스 주태국 미국 대사는 16일 "태국이 신속하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민간 정부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태국의 정치적 갈등이 단시간에 해결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이기훈 기자
▲전톱 복장 차림으로 시위 자제를 호소하는 태국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13.12.5
▲태국 잉락 친나왓 총리 태국 헌법재판소가 해임 14.5.7
▲군부 쿠테타 선언 - 14.5.22 프라윳 찬 오차 육균참모총장
▲쿠테타를 공식 승인받았다고 발표하는 태국 육군 참모총장 프라윳 찬오차 14.5.26
◆볼거리
◇철로시장
▲기찻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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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과 사원
▲크렛사원의 대형 와불상
▲스님에게 공양 - 12.12.31. 태국 방콕
▲왓자차부라타 사원 = 1767년 버마 침략 전까지 417년 번성했던 아유타오야 7대왕과 그 동생의 화장터위에 만들어진 사원
▲사원의 야경
▲승려들의 새해 기도 - 13.1.9.
▲승려들 새해 풍등 날리기
▲웨삭 데이 - vesak day. 부처의 탄생과 깨달음 및 열반을 기리는 행사 - 13. 5. 24.
▲지옥 놀이 동산 - 방콕
◇푸켓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teyecFVuBa8 - 시원한 바다 푸켓
◆풍경
▲ 라마8세 다리의 야경
▲치망라이주 힐스 리조트 꽃밭
▲코사무이 섬 - 코,는 태국어로 섬
▲끄라비 바닷가
◆일상
▲반정부 시위 - 13. 12. 1. 시위 과정에서 11.30. 4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
▲시위대와 임시 휴전 합의 - 13. 12. 4. 국왕 생일 12.5 앞두고 임시 휴전 방콕 시내를 청소하는 시위대
▲시위 현장
▲별난 결혼식
▲태국.물에 잠긴 사원 방콕 11.9.1.
▲물에 잠긴 돈 무앙 공항
▲물 넘치는 거리에서 생선장수
▲물에 잠긴 혼다 자동차
▲물넘치는 거리에서 수영하는 어린이
▲아유타아주 홍수 피해현장( 2011.7월부터 폭우 홍수로 112명 사망)
▲ 물 위의 부처님
▲반영
▲홍수난 도로에서 교통정리
▲홍수로 불교사원이 물바다 11.10.7.
▲남부 폭우 홍수로 18명 숨지고 대규모 피해 발생 17.1.8
▲30년 만의 물폭탄 - 17.1. 몬순 영향권에 접어든 지난달 부터 팟타룽, 나라티왓, 알라, 송클라, 팟타니, 등 12개 주가 홍수 피해. 10일 현재 사망자 25명 실종2 가옥 37만 여채 이재민 110만 명 발생
■타이완 Taiwan 臺灣
Formosa 대만, 臺灣, 중화민국, 中華民國
▲국기
중국의 남동 해안에서 161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 수도는 타이베이다.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국민의 98%는 한족으로 문맹률이 낮고 전체적으로 중국 문화가 우세하다. 토지의 약 2/3이 산지와 구릉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타이완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Republic fo China) 또는 타이완 국민정부가 통치하고 있는데, 그들은 중국 본토 전체에 대한 관할권도 주장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섬은 타이완 지역 혹은 타이완 지구가 된다. 반면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역시 타이완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다. 두 정부 모두 타이완이 중국의 1개 성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타이완 섬은 태평양상의 북회귀선에 걸쳐 있다. 1949년 이래 타이베이[臺北]는 국민정부에 의해 임시수도로 지정되었다. 성도는 중싱신춘[中興新村]이다. 남북길이 약 395km, 동서길이 약 145km에 이르며, 북쪽은 동중국해, 동쪽은 태평양, 남쪽은 바시 해협, 서쪽은 타이완(포르모사) 해협과 맞닿아 있다.
타이완 역사
이미 7세기에 중국인들은 타이완과 말레이폴리네시아인의 후손인 원주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이 이 섬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해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하 포르모사(Ilha Formosa)라고 이름지었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1626년 이전에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이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요새화된 상업지구를 세웠다. 1646년 네덜란드가 스페인 정착촌을 장악하고는 이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뒤 1616년 네덜란드인들은 멸망한 명나라(1368∼1644)의 관리들이 대규모로 이 섬에 들어옴에 따라 쫓겨났다. 이들 중국인의 대거 유입으로 인해 섬의 주민은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683년 청나라(1644∼1911/12)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타이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고는 타이완을 푸젠 성에 병합시켰다. 1796년 만주족들이 섬의 동쪽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42년까지 주민은 약 25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중국으로 설탕과 쌀을 주로 수출했다. 1875년 타이베이가 타이완 북부의 수도가 되었으며, 1886년에는 타이완이 중국의 1개 성이 되었다.
1894년 타이베이는 성도가 되었다. 다음해에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할양되었다. 일본 치하에서 타이완은 일본에 쌀과 설탕을 공급하는 주요공급처였다. 1930년대에 일본의 타이완 정책은 값싼 수력전기 에너지에 바탕을 둔 공업 발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940년 섬의 인구는 587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타이완은 중국에 되돌려졌다. 1945년 당시에는 국민당이 이곳을 통치했다. 1949년 본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타이완으로 피해왔다.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으며, 타이완은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타이완은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미국의 원조와 자유시장정책을 활용했다.

▲장제스(Chiang Kaishek) 중국의 정치가, 군사지도자ⓒ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20년간 미국과 많은 비공산주의 국가들은 타이완을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대했으나, 1971년 미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를 타이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대체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중국 본토를 방문했다. 이 사건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그러나 타이완은 국제적 위상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20세기말 환태평양지역의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직에 올라 민주정치개혁의 기초를 다졌다. 1988년 장징궈의 뒤를 이어 타이완 본토박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통직에 오른 리덩후이[李登輝]가 개혁을 도해 나갔다. 1980년대말 타이완은 비공식적으로 중국 본토와의 무역과 여행을 허용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양국 사이에 제한된 무역 중계망이 설치되었다. 이무렵 타이완은 양당 정치제제와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며, 중국 본토와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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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01월 15일 대만 선거… 첫 ‘여성총통 시대’ 눈앞
대만판‘88만원 세대’가 정권교체 불러
中 영향력 반감 커져… 兩岸관계 ‘기로’
16일 치러지는 대만 총통선거에서 제1야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59) 후보가 집권 여당인 국민당 주리룬(朱立倫·54) 후보를 누르고 사상 첫 여성 총통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화권에서 여성이 최고지도자에 오른 사례는 당나라 고종의 황후 출신으로 15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던 측천무후 이후 처음이다. 첫 여성 총통이라는 점 외에도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국민당이 아닌 민진당 후보라는 점에서 이후 양안관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총통선거에서 차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주 후보보다 상당한 격차로 높은 것만큼이나 당 지지율도 국민당과 차이가 있어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격인 입법위원선거에서 민진당이 처음 여당으로 등극하며 대만 정치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여야 교체도 이뤄질 전망이다.
◇양안 관계 개선으로 기대했던 경제 효과 없고 종속 우려 높아져 집권 국민당에 반감
이번 선거에서 민진당의 승리는 차이 후보의 결단력과 리더십 덕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국민당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민진당이 본 측면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첫 민진당 총통으로 재임 시 ‘대만 독립’을 거론하며 양안관계의 불안을 야기한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에 대한 반감을 업고 8년 전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당선됐지만 그가 집권 내 추진한 친중 정책이 부메랑으로 다가왔다. 특히 친중 정책으로 중국과 각종 협약을 맺고 교류가 늘었으나 이에 따라 대만 국민이 기대하는 만큼의 경제적 실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실망감이 크게 작용했다.
대만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다 2011년부터 2∼4%대로 급감했다. 마 총통은 2010년 중국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하는 등 각종 협약을 통해 중국과 관계를 개선했고 지난해 11월에는 분단 66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회담까지 했다. 이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중국에 의존하는 등 의존도가 극심해졌지만 실제 성장률은 높아지지 못했다. 마 총통 집권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급격히 늘어난 반면 중국으로의 수출은 2010년 이후 정체 상태다. 지난해는 내수와 수출 부진으로 1% 이하라는 최악의 경제성적표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때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GDP 규모도 한국의 37%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기면서 산업이 공동화되고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청년실업이 심각해졌다. 취업을 한다 하더라도 10년째 실질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아 대만판 ‘88만원 세대’에 해당하는 ‘22K세대(초임 2만2000대만달러, 약 75만 원)’라는 자조적인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반면 중국 자본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대만의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런 가운데 국민당 정부가 ECFA 후속 협상으로 진행하던 서비스무역협정 비준이 젊은 세대의 일자리를 축소하고 대만의 홍콩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에 2014년 3월 서비스협정 철회를 요구하는 ‘해바라기 시위’가 벌어졌다. 그해 가을 홍콩 시위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대만에 실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대만의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해 중국에 종속시킬 뿐”이라는 우려는 더욱 커졌다.
◇차이잉원, 양안관계 ‘현상 유지’ 입장, ‘대만 독립’ 주장하지 않지만 양안관계 냉각될 듯
대만 국민의 민진당에 대한 지지율은 이 같은 양안관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차이 후보는 과거 천 전 총통처럼 대만의 독립을 거론하고 있지 않다. 양안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은 ‘현상 유지’다. 과거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을 역임하며 대륙과의 교류를 추진한 바 있는 데다 천 전 총통이 무리하게 대만 독립을 주장하다 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미국과의 관계 등 국제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결국 정권이 교체된 데 대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국민당에서 수용하고 있는 ‘92공식(컨센서스)’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92공식이란 지난 1992년 중국과 대만 정부가 타결한 양국 관계에 대한 원칙으로,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양측이 각자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차이 후보는 TV 토론에서 “92공식은 하나의 선택권일 뿐 유일한 것이 아니다”고 언급했다. 다만 대륙과 소통하고(有溝通), 도발하지 않으며(不挑흔), 의외의 이벤트를 만들지 않겠다(沒意外)고 밝혔다. 즉, 중국과의 대화는 지속하고, 무력충돌은 없으며, 정상회담과 같은 의외의 이벤트 없이 예측 가능한 양안관계를 이끌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그럼에도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92공식을 부정하면 양안관계는 무너질 수 있다며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양안관계가 천 전 총통 당시처럼 불안 상황으로 치닫는 데는 우려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중국에 종속되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역사적 양안 정상회담으로, 미국은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로 각각 간접적으로 선거를 지원하고 나섰다. 차이 후보는 기존 중국과의 관계는 훼손하지 않는 차원으로 관리하면서 미국과의 관계에 더욱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北京)의 한 양안관계 전문가는 “양안관계는 이미 많은 조약과 협정으로 앞으로 나간 상태로 차이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서 역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사사건건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이번 선거는 총통과 부총통, 입법위원을 한꺼번에 뽑는다. 이 같은 대만의 대선·총선 동시선거는 2012년 이후 두 번째다. 차이 후보는 천젠런(陳建仁·64) 중앙연구원 부원장을 부총통 후보 러닝메이트로 삼고 있으며 주 후보는 왕루쉬안(王如玄·여·54) 전 대만 노동공업위원장을 러닝 메이트로 삼고 있다. 오는 16일 투표는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대만 전역의 1만5582개 투표소에서 진행되며 유권자 수는 모두 1878만2991명으로 집계됐다.
베이징=박세영 특파원 go@munhwa.com
◆ 2016.01.18 “이름과 달리 영어 못해” 놀림 … 리덩후이 만나 정계 입문
“나는 길을 갈 때에도 남들 눈에 안 띄려고 벽에 바싹 붙어 다니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사람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고 있으니 내 인생은 의외의 연속인 셈이다.”
부친 납세 10위 들던 부유한 집안
여고 1년 땐 57명 중 51등 ‘평범’
“눈에 안 띄려 걸을 때도 벽에 바싹
내향적인 내가 정치 한 건 의외”
박 대통령 당선 때 “격려받는 느낌”
마잉주에게 패배 4년 만에 설욕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 당선인이 한 강연회에서 한 말이다. 강연회 제목 자체가 ‘의외의 인생’이었다. 차이 당선인은 “인생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평범한 걸 좋아하며 내향적인 성격인 내가 정치를 한 게 좋은 예”라고 말하기도 했다.
차이 당선인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대만을 통치하던 1956년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남부 핑둥현의 어촌 출신인 부친은 젊은 시절 대만을 통치하던 일제의 징병을 피해 중국 동북지방의 일본 군수공장에서 비행기 정비 기술을 배웠다.
종전과 함께 타이베이에 정착한 부친은 대만에 주둔하던 미군 차량 정비소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매매업과 부동산·건설업까지 사업을 확장해 한때 납세액 순위 10위권에 들기도 했다.
▲대만 첫 여성 총통으로 당선된 차이잉원은 객가인(客家人·중국 본토에서 남방이나 해외로 이주한 한족)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로 자란 학창시절은 유복했다. 당시엔 드물던 피아노 가정교사까지 뒀고 외국어 교육도 일찍부터 받았다. 하지만 학교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여고 1학년 때 첫 시험에선 “학급 57명 가운데 51등이었다”고 그는 자서전에 적었다. 또 “영문(英文)이란 이름과 달리 영어를 잘 못해 학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아 아버지가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썼다.
하지만 차츰 성적이 올라가 대만대 법학부에 들어갔고, 미국 코넬대를 거쳐 1984년 영국 런던경제대(LSE)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정치대 교수가 되면서 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까지는 자신의 성격이나 성장 환경, 소양 등에 맞는 인생이었다.
그는 “학위를 받은 뒤 세 차례의 전기를 겪으며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술회했다. 첫 번째 전기는 1985년 찾아왔다. 27세의 젊은 교수 차이를 대만 정부가 통상협상 대표단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차이는 대만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에 참여했다. 그가 능력을 발휘하자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자문위원으로 중용했다.
리 총통은 코넬대 선배이자 같은 객가(客家)인 혈통이란 인연이 있다. 1999년 리 총통이 주장해 양안 관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양국론(兩國論)도 실은 차이가 기초를 다졌다는 게 정설이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보는 양국론은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배치되는 것으로 대만 독립론의 기초가 됐다.
두 번째 전기는 2000년 첫 민진당 정권인 천수이볜(陳水扁) 정부 출범과 함께 왔다. 통상법 전문가에서 어느덧 양안 전문가가 된 그를 각료급인 대륙위원회 주임으로 발탁한 것이다. 꽁꽁 막혀있던 양안 간 문호를 일부 개방하는 소삼통(小三通)의 실현에 차이는 관여했다. 행정가로 변신한 그는 행정원 부원장(부총리)까지 올라갔다.
가장 중요한 전기는 2008년 민진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였다. 천 총통의 부패 스캔들로 총통 선거에서 대패한 민진당 지지자들이 참신하고 때묻지 않았으며 능력을 인정받은 차이를 민진당 지도자로 영입한 것이다.
“다시는 정·관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며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차이는 “튼튼한 야당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신념에 따라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민진당을 다시 일으킨 그는 2012년 선거에선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총통에 6%포인트 차이로 패하는 시련을 극복하고 4년 만의 설욕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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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박근혜 대통령에 자주 비견된다. 미혼 여성으로 선거를 통해 최고 통치자에 오른 점이 공통점이다. 2012년 1월 총통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그 해 12월 박 대통령이 당선하자 “나에게도 일종의 격려와 같은 느낌을 준다”고 발언했다.
또 박대통령 자서전 번역판에 추천문을 쓰기도 했다. 대만 언론은 “차이에 앞선 아시아의 여성 지도자로 박 대통령과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있다”며 “차이 당선인은 부친의 후광 없이 자수성가했다는 점이 두 사람과 다르다”고 보도했다.
유세 기간 중 만난 차이 당선인은 “10여 년 전 한국에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민진당 간부는 “서울·타이베이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이후 딱히 한국과의 교류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과 대만은 단교(斷交)상태여서 차이 총통의 한국 방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같은 다자회의에서 자연스레 박 대통령과의 만남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타이베이=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2016.01.29 중국판 유대인 객가족(客家族), 대만의 본성인과 외성인이란?
대만(臺灣)’에는 3만년 전부터 신석기 인류가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역사 이전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산해경(山海經)에는 ‘바다 신선이 사는 섬 봉래(蓬萊), 영주(瀛洲)’ 등으로 기록돼 있다. BC 221년 진(秦)나라를 세운 시황제(始皇帝)는 불로장생 약재를 찾아 신하를 이 섬에 파견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1544년 부근을 통과하던 포르투갈 선원들이 초록색의 이 섬을 발견해서 ‘아름답다’는 뜻의 ‘포모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때부터 국제적 통칭은 ‘포모사 아일랜드(Formosa Island)’가 됐다.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주진보당(민진당) 사람들은 고구마 모양의 녹색 섬 ‘미려도(美麗島)’를 그려넣은 깃발을 국기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582년 7월 2명의 스페인 신부와 1명의 예수(耶蘇)회 신부가 이 부근에서 난파해서 75일간 머물렀다.
1624년부터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주해서 살기 시작했고, 대만 남부 원주민들 언어로 ‘외래자(外來者)’를 뜻하는 ‘Taian(타이완)’을 지역명으로 사용했다. 이 지역명이 한자로 음역되어 ‘대원(臺員)’ ‘대만(大灣)’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1661년 명조(明朝)의 정성공(鄭成功)이 이끄는 점령군이 네덜란드인 정권을 무너뜨렸고, 1683년 청조(淸朝)에 복속됐다. 이때 대만 건너편 푸젠(福建)성에서 한족(漢族)의 집단 이주가 이뤄졌다.
현재 대만에는 대륙에서 건너온 98%의 한족(漢族)과 이른바 ‘고산족(高山族)’이라고 불리는 2%의 소수민족 원주민이 살고 있다. 98%의 한족 가운데에는 명말청초(明末淸初)에 푸젠성에서 이주한 사람들(70%)과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객가인(客家人·15%)’들을 주축으로 하는 ‘본성인(本省人)’, 1949년 중국공산당에 패해서 섬으로 건너온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지지 세력인 ‘외성인(外省人·13%)들이 살고 있다.
본성인들은 대체로 푸젠 방언인 ‘민남어(閩南語)’와 객가인 전통 언어인 객가어(客家語)를 사용하며, 외성인들은 이른바 ‘국어(國語)’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의 발음 표기는 중국 대륙의 병음(倂音·Pinyin)을 사용하지 않고, 서양 제국주의의 중국 침공 때 영국 외교관들이 만든 웨이드 자일(Wade Gyle)식 표기를 고수하고 있다.
대만은 우리보다 15년이나 더 긴 51년간의 일본 식민통치를 겪었다. 1894년에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결과 1895년 4월에 대청제국과 일본 간에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중국명 마관조약) 제2조 ‘대만섬과 펑후(彭湖)제도 등 부속도서와 위도 41도 이하의 랴오둥(遼東)반도를 영구 할양한다’는 조항에 따라 일본 군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감정은 우리와 대만 사람들이 다소 다르다. 우리는 “한반도의 한겨레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공에 무릎을 꿇고 식민지가 됐다”고 생각하는 반면, 대만 사람들, 즉 본성인들은 “우리의 의사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청일전쟁에서 패해 대만을 일본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 라디오 방송은 대만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들었다. 이후 우리는 남쪽은 미국의 영향권 아래 북쪽은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지만 대만은 장제스의 국민당 통치를 받았다. 1947년 2월 대만 수도 타이베이(臺北·대만에서는 Taipei로, 대륙에서는 Taibei로 표기)에서는 ‘2·28사건’이 발생했다. 대륙에서 건너오기 시작한 외성인들과 이전부터 거주하던 본성인들 사이의 감정싸움이 서로 죽고 죽이며 파업과 거리 시위가 이어지는 사태로 발전한 것이다.
일본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대륙 사람들보다 더 빨리 근대화됐다고 자부하는 본성인들과 새로운 주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는 외성인들 간의 갈등이 폭발하자 장제스의 국민당 군부는 본성인들에게 발포하고 검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2·28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본성인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그린 영화가 1989년에 만들어진 ‘비정성시(非情城市·A City of Sadness)’다.
‘비정성시’는 타이베이 북쪽 기륭(基隆)에서 ‘소상해(小上海)’라는 큰 식당을 경영하는 임씨(林氏) 일가 4형제 이야기다. 큰형 문웅(文雄)은 장남이라 경영권을 물려받고, 둘째 문삼(文森)은 의사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필리핀에서 실종되고, 셋째 문량(文良)은 일본 식민통치 말기에 상하이에서 일본군의 통역을 했다고 해서 국민당에 스파이로 낙인찍혀 미치고, 넷째 문청(文淸)은 사진관을 경영한다. 이들에게는 국민당 장제스의 강압통치가 일본 식민통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나은 것이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4형제의 여러 친구들이 국민당 조직에 사살당하고 체포당했기 때문이다.
2·28사건으로 대만 전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고, 국민당의 계엄통치는 40년이나 지속된 끝에 1987년 대만섬 출신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때 해제됐다. 외성인들이 지지하는 국민당에 맞서 본성인들이 민주진보당을 발족시킨 것은 1986년이었다. 본성인 지식인들을 주력으로 하는 민진당은 2000년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을 당선시킴으로써 국민당의 50년 통치에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천 총통과 부인의 부패사건 폭로로 민진당은 2008년 정권을 내주었고, 이번에 천수이볜이 발탁한 차이잉원(蔡英文)이 총통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정권을 되찾았다.
차이잉원의 아버지 차이제(蔡潔)는 중국의 유대인이란 말을 들은 객가족(客家族)으로 일본군의 징집을 피해 지린(吉林)성 기계학교 비행기과를 다녔다. 일본 패전 후에 대만으로 돌아와 운수업과 부동산업을 해서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법학박사 출신인 차이잉원은 차이제가 5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11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아버지가 물려준 토지 4필지와 건물 2채, 현금 1800만대만달러(약 8억원)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잉원의 의식구조는 철저한 본성인 출신 지식인으로 사실상 대만 분리독립인 ‘Republic of Taiwan’ 추구주의자이며, 중국공산당 시진핑(習近平) 총서기에게 앞으로 많은 고민을 안겨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조선일보 박승준
▲대만의 첫 여성 총통 차이잉원16.4.20
◆볼거리
◇흑성 예류
▲예류는 타이베이에서 북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약 550미터의 해안가가 천만년 이상의 오랜기간 동안 침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
▲맑은 바다와 깎아지른 절벽이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연상시키게 만드는 곳도 있다.
▲버섯모양의 바위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자랄것도 같다.
▲가장 인기 있어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인 곳은 여왕바위이다.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티의 옆모습을 닮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하여 자연이 만들어 놓은 예술품에 감탄사가 터진다. 여왕바위는 다른 바위에 비해 가늘고 길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빨리 봐야 한다고 충고하는 곳이다
▲여왕바위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용머리바위.
▲촛대바위... 인간은 그럴싸하게 바위에게 이름을 붙여 놓았다.
▲자연의 힘을 이기지 못해 깨지고 무너진 바위들도 보인다.
▲길게 이어진 징검다리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갔다놓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것도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실제 이름은 ‘두부바위’이다.
▲언덕에서 내려오던 도중에 도마뱀과 마주쳤다. 반갑기 보다는 서로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해프닝이..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바위. 발가락이 세 개니 분명 인간은 아닌듯.
‘외계인이 만들었나?’
▲흑백의 산수화
▲새파란 하늘과 해후안 산
▲태로협곡
▲타이베이 양명산 - 분화구
◆일상
▲티이베이
▲핑시에서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13.2.17. 풍등을 날리고 있다. 청나라 때부터 풍등을 날려 복을 기원하는 풍습이 생겼다
▲판다투어 - 14.2.24. 타이베이 국립극장 종이로 만든 청개구리1600개가 좌석을 메우고 있다
▲용산사- 불교 도교가 공존
▲부처님 오신날 - 12. 5. 13 타이베이에서 승려들의 기도
▲장제스기념관 앞에서 대만 병사들이 공연 연습
▲타이베이101층 건물과 트리
▲푸롱해변
▲풍력 발전기
▲해양지질공원
▲ 태풍 11.8.30.
▲태풍 덴빈 12.8.23. 대만에 접근중
▲태풍 솔릭 대비해 대피한 대만 어선들 13. 7. 12.
▲서협궤열차 전복 두동강 11.4.27.
▲대만 항공기 추락 장면 - 15.2.4 푸싱항공 소속 여객기가 쑹산공항 이륙한지 5분여 만에 하천으로 추락 - 지나던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장면
▲대만 태풍 네파탁 강타 16.7.9
▲ 태풍 므란티 대만 상륙 16.9.14
■ 탄자니아 Tanzania
탄자니아 합중국, United Republic of Tanzania
▲국기
동아프리카의 적도 바로 남쪽에 있는 나라. 수도의 도도마이며 화폐는 탄자니아 실링이다. 출생률이 매우 높아 국민의 약 1/2가 15세 미만이다.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중앙계획 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나 식량부족상태이다. 환금작물 생산을 위축하면서까지 정책적으로 식량작물 재배를 장려하나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탄자니아는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중앙계획 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1970년대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경제발전이 이루어졌지만, 그후 우간다에 대한 군사개입(1979∼81)으로 경제력이 손실된데다가 수출의 감소와 석유가격의 앙등이 겹쳐 경제상황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에 약 43억 5,00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1인당 GNP는 280달러로 매우 낮았다.
경작지가 극히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부문이 GN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4/5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생산고는 변동폭이 상당히 크며, 가뭄과 연료·기계류의 부족 때문에 심각한 부족사태도 종종 발생한다. 정부는 커피, 잔지바르 섬에서 생산되는 정향, 목화, 사이잘삼, 캐슈나무 열매, 차, 담배 등 환금작물 생산의 위축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책적으로 옥수수·카사바·수수·기장·벼·플랜틴 등의 식량작물 재배를 장려하지만, 심각한 식량부족상태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다이아몬드 생산은 최근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으며, 대신 금·소금·귀석류·석고·고령토 등이 생산된다. 석탄은 남서부 지방에서 채굴되며, 중국의 원조를 받아 석탄생산을 늘리고 철광산을 개발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송고송고 섬에서 석유와 천연 가스가 발견되었으며, 세계은행(IBRD)과 알제리의 협력으로 정밀시추가 진행되고 있다. 공업은 GNP의 약 1/8을 차지할 뿐이며 노동인구 중 공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은 그보다 더 낮다.
제조업은 주로 토산물의 가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국영기업들이 주도한다. 식품가공업이 최대공업이며 그밖에 직물·양조·담배 제조 분야가 발달해 있다. 연간 전력생산량은 1980년대초에 시간당 7억 1,000만kW를 기록했으며, 주로 수력발전으로 충당된다. 서비스업은 GNP의 1/3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10% 이상이 종사하고 있다. 상업부문은 사실상 전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1977년 동아프리카 공동체(EAC)가 와해됨으로써 탄자니아는 국내의 항구·철도·항공 수송망을 운영하고 정비하는 데 막대한 재원을 전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AC의 와해는 관광여행 코스가 되어온 탄자니아-케냐 국경의 폐쇄와 그에 따른 탄자니아 관광산업의 쇠퇴를 야기하기도 했다. 국영 탄자니아 관광공사는 자체 관광산업의 부흥을 위해 독자적인 계획 수립을 모색하고 있다.
식료품·연료·기계류 등의 수입총액이 커피·면화·사이잘삼·정향 등을 주종으로 하는 수출총액의 2배가 넘어 심각한 외화부족을 초래하고 있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영국·독일·네덜란드·일본·이탈리아 등이다. 경제개발의 2/3 이상이 쌍무계약을 맺은 광범위한 기증단체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백과
◆볼거리
◇세렝게티
▲타랑기레 국립공원 코끼리 - 탄자니아
▲넓고 넓은 탄자니아 세렝게티 평원
▲잔지바 동해안에 있는 절벽 위의 음식점
▲나르톤 호수 - 소금을 먹고 사는 붉은 미생물에 의해 붉은 빛이 강렬해짐
▲투명하고 맑은 인도양 바다
◇킬리만자로
설산(雪山)과 표범과 대한민국
1926년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해발 5895m)에 오른 영국 탐사팀은 정상 근처에서 표범 시체를 발견했다. 일행은 증거로 표범 귀를 잘라왔다. 1936년 미국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잡지 ‘에스콰이어’에 발표한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쪽 정상은 마사이족 말로 응가예 응가이, ‘신의 집’이라 한다. 그 근처에 표범 한 마리가 말라 죽어 있다. 표범이 왜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킬리만자로의 운해. 첫 대면 때 받는 위압감과 숭고미는 어디 비길 데가 없다.
1985년 대한민국 가수 조용필이 발표한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이 표범이 재등장했다. 그리하여 킬리만자로에서 한국인은 늘 묻는다. 표범은 어디 있는가. 그러면 가이드들은 늘 대답한다. 너희 한국인들은 오기만 하면 표범 타령이냐. 정답은 ‘첫 목격 이래 아무도 표범을 본 적이 없다’다.
1889년 이 산을 처음 오른 유럽인 한스 마이어는 이 산 정상에 카이저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독일 황제 이름이다. 1961년까지 정상은 빌헬름 황제봉이라 불렸다. 1961년 독립 탄자니아는 이름을 우후루(Uhuru)로 바꿨다. 동아프리카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해마다 3만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른다.
▲킬리만자로 - 아프리카 최고봉 5895m 흰 눈의 산, 새도 못 갈 산
▲킬리만자로의 정상 - 탄자니아를 지나는 비행기에서 촬영
▲테이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