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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68/ 케냐 - 코스타리카 - 코카서스 3국(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상림은내고향 2022. 7. 21. 21:51

지구촌 여행/ 국가별68/ 케냐 - 코스타리카 - 코카서스 3국(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 케냐 Kenya

케냐공화국, The Republic of Kenya

▲국기

 

아프리카의 인도양에 면한 국가. 수도는 나이로비이며 화폐는 케냐 실링이다.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으로 실업이 큰 문제이며, 정부의 지출 확대와 관련하여 인플레이션이 잦다. 국민교육제도는 의무제가 아니나 정부로부터 많은 보조를 받는다. 언론매체는 자유로운 편이다.

 

정치와 사회

케냐는 독립공화국이다. 1963년에 채택되었으며 종종 개정된 케냐의 헌법은 단원제 국회의 구성을 규정하고 있는데, 의원의 정원은 202명이며 대부분이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을 겸해야 하며, 일반투표에 의해 5년 임기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가운데서 부통령과 장관들을 임명하며, 그들이 함께 내각을 구성한다. 사법부는 케냐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며 고등법원, 상설 하급법원, 지방 하급법원을 포함한다. 이슬람 관습법이 법원에서 수용된다.

 

케냐는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enya African National Union/KANU)이 다스리는 합법적인 1당체제 국가이다. 공공의료는 정부 기관들과 사설 개인병원들에서 제공하는데, 말라리아·위장염·성병·설사·이질·트라코마 등의 질병에 걸릴 위험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전국적인 보험 조직은 없지만, 가족과 아동 복지사업의 개발, 생활력 상실자의 보호와 재활, 장애자에 대한 지원 등에 정부가 관여하고 있다.

 

주택 마련은 인구 팽창으로 인해 전국의 대소 도시들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케냐 주택공사는 여러 도시에서 임대 아파트와 단독 주택들을 건설하고 있다. 케냐의 국민교육제도는 의무제가 아니며, 8년제 초등교육, 4년제 중등교육, 대학교육의 3단계로 되어 있다. 사립학교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보조를 받는다. 나이로비대학교는 현재 케냐의 자주적인 대학교이다.

 

신문은 자치적으로 발행되고 대개 검열을 받지 않으며, 일간신문과 주간신문이 각각 발간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시설은 정부 소유이며 프로그램은 스와힐리어와 영어로 방송되는데, 많은 프로그램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수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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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케냐 나쿠루 호수의 플라밍고

 

 

▲킬리만자로로 가는 코끼리 떼 - 암보셀리 국립공원

 

 

 

 

 

▲세상이 온통 오렌지 색깔 해돋이 - 마사이마라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

 

◇경이로운 아프리카

 

 

 

 

 

 

 

 

 

 

 

 

 

 

 

 

 

 

 

 

 

 

 

 

 

 

 

 

 

 

 

 

 

 

 

 

 

 

 

 

 

 

 

 

 

 

 

 

 

 

 

◆일상

▲마사이족

 

 

▲마사이족의 소몰이

 

▲불타는 상아  11.7.20.

 

▲몸바사에서 13.1.15.코끼리 상아 약2톤 싯가 12억 상당 적발

 

▲빈민가 100만명이 거주

 

▲나이로비 - 손님은 언제 오나

 

▲상아105톤 8천 마리분 16.4.30  나이로비 국립공원에서 소각

 

 

 

 

 

▲케냐의 대선 총선 풍경 2017.08.08

 

 

 

 

 

 

 

 

 

 

■코스타리카 Costa Rica

코스타리카 공화국

▲국기

 

수도는 산호세이며 남동쪽으로 파나마, 남서 해안선이 태평양에 면해 있다. 화산지대를 형성하여 인구집중지역인 센트랄 계곡도 활화산 지대로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난다. 코스타리카는 커피와 바나나 수출을 주로 하는 시장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에도 불구하고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1인당 GDP도 중앙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코스타리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는 센트랄 계곡은 생활풍습이나 혈통에 있어서 스페인적인 특성이 두드러진 곳이다.

 

이 계곡에 사는 주민들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다. 코스타리카에서 개신교도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복음주의적 개신교 활동이 활발하다.

 

인구의 약 1/12이 태평양 북서부의 과나카스테 지방에 살고 있다. 이 지방 주민은 스페인인·인디언·흑인 등의 혼혈종족이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만 로마 가톨릭교를 신봉한다. 카리브 해 동부 저지대에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 특히 많다. 이들은 철도를 건설하고 바나나를 재배하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끌려온 흑인들의 후손이다. 대부분 스페인어와 영어의 자메이카식 방언을 사용하며, 종교는 개신교가 가장 우세하다.

 

남쪽 태평양 해안과 북부 저지대의 일부인 산카를로스 평원은 언어 및 종교 분포가 일정하지 않다. 수천 명의 인디언이 국토 남단에 살고 있다. 2022년 추계인구는 520만 명이며, 전체 인구의 79%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고 15세 이하의 인구는 22%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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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라비다(Pura Vida)”와 “빨리빨리”

코스타리카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주민들

 

전영욱 駐코스타리카 대사


한국에서 태평양 너머 저쪽으로 가면 미주대륙의 중간쯤에 코스타리카라는 아름다운 나라가 있다. 코스타리카는 처음부터 공화국으로 태어난 데다가 대토지소유제의 전통 없이 소농으로 역사가 시작되다 보니 봉건주의와 권위주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이다. 이런 덕분에 코스타리카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해왔다.


코스타리카는 최근에 기후변화 대응, 환경보호, 생물 다양성, 녹색성장 등 자연 친화적 가치에 정책적 우선순위를 두어왔다. 좋은 날씨, 아라비카 커피, 축구, 화산과 온천, 단위면적당 세계 2위의 생물 다양성, 국토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국립공원 등으로 유명하고, 그래서 늘 이 나라 사람들은 행복하다. 세계에서 행복한 나라를 꼽을 때는 코스타리카가 늘 언급된다. 이와 같은 코스타리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말이 있다. ‘뿌라비다(pura vida= pure life)’라는 것이다. ‘뿌라비다’는 코스타리카에서 약방에 감초 식으로 언제든 쓸 수 있는 인사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 헤어질 때, 그저 평범한 아침 인사말로, 뭔가 상황이 어려운 친구에게 기운 내라는 의미 등으로 다양하게 쓸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에는 우리나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행동 양태인 ‘빨리빨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그 어떤 종류의 급박함이나 압박감이 없다. 중남미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이 인사말에 대해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다른 중남미 국가 사람들도 어리둥절해 한다. 이 ‘뿌라비다’라는 말은 뭔가 긍정적이고 희망을 갖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기대하는, 어떤 부정적인 또는 갈등적인 요소도 내포하지 않은 인사말이다. 그런데 요즘 이런 여유와 행복의 나라, 코스타리카가 최근 ‘빨리빨리’의 나라,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기술혁신, 산업경쟁력, 빨리빨리 처리하는 업무 효율성 등 한국의 인기가 대단하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해 나와 있는 필자의 기고문이 코스타리카 유력 언론의 독자들에게 쉽게 어필되기도 하고, 코스타리카의 대학, 업체, 협회 등에서 필자에게 강연을 해달라고 여러 번 초청하기도 했다. 산업화와 경제발전, 혁신을 주제로 한 대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글 고전소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강연에까지 큰 흥미를 보이곤 한다. 코스타리카에서 한국의 인기와는 달리,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상당기간 드리워진 성장의 그늘 때문에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염려하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이 행복의 나라 코스타리카는 왜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한국의 교육, 한국의 혁신, 한국의 경제성장 등에 관심을 두고 배워야 한다고 들떠 있을까? 이 행복의 나라 코스타리카의 면면을 보면 행복을 느낄 만한 요소가 많이 있다. 이미 언급한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코스타리카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다. 수도 산호세 시내를 들어서면 40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코스타리카인들은 한국인의 효율성과 혁신, 기율, 준비성, 그리고 그 엄청난 많은 일을 빨리빨리 그것도 훌륭히 잘 수행해내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 같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자국의 단점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자국의 장점과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자랑과 평가도 잊지 않는다. 아니 그들의 장점과 미덕에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군대 없는 평화, 무료 의료와 교육, 사회복지, 그리고 민주주의 전통과 가치를 뿌듯하게 생각한다. 예산이 충분치 않은데도, 지난 연말 이래 코스타리카를 거쳐서 미국으로 향하는 쿠바 아프리카계 불법 이민자들에게 임시거처와 음식, 비상의료를 제공하느라 대통령, 외교장관은 물론 보통 시민들까지 지원에 나서는 모습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한국과 코스타리카는 행복지수와 ‘빨리빨리(성취, 혁신)’ 면에서 서로가 보완이 필요한 나라 같다. 우리는 코스타리카 사람들에게서 행복한 삶을 위한 지혜를 배우고,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한국으로부터

혁신과 경쟁력, ‘빨리빨리’를 배우면 어떨까?


우리나라의 산업화, 경제발전, 민주주의, 의료보험, 교육의 경쟁력 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들이다. 너무 우쭐해 할 것은 없지만, 우리 스스로 지나치게 냉소적일 필요는 없다. 미흡하고 나쁜 것은 고쳐 나가는 반면, 좋은 업적과 미덕, 장점에 대해서는 자긍심을 갖고 계속 보완·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긍정의 힘은 어려운 현실에 처한 우리 시민들과 대한민국을 더욱 강하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 전영욱(55) △제20회 외무고시 △주베네수엘라 참사관 △영사과장 △구주통상과장 △주콜롬비아공사참사관 △중남미국심의관 △주볼리비아 대사 △주코스타리카 대사

문화일보

 

◆풍경

▲코스타리카 투리알바화산(3340m)이 14.10.30 분화

 

 

▲ 망망대해의 거북이와 새

 

■ 코카서스 3국 Caucasus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코카서스(카프카스)는 러시아 남부에 위치,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에 있는 산맥 명칭이며 그 연안에 있는 3개국으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가 있습니다. 대륙은 유럽에 속하지만 아직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국가들이지요.

 

1 아르메니아 Armenia

아르메니아 공화국, Republic of Armenia

▲국기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로 서남아시아에 있는 국가이다. 자카프카지예 지역 남쪽 부분에 위치하며 평균고도가 해발 1,800m에 이르는 산악지대이다. 역사적으로 국경선의 변화가 상당히 심했던 지역으로 고대 아르메니아가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터키 북동부 지방에 걸쳐 있었던 반면,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는 자카프카지예 지역의 3개 국가(조지아·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가운데 가장 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농업이 주요산업이지만 공업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북쪽과 동쪽으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이란과 접해 있다. 자카프카지예 지역 남쪽 부분에 위치하며 평균고도가 해발 1,800m에 이르는 산악지대이다. 북부를 소카프카스 산맥이 가로지르고 중동부에 세반 호가 있다. 고도에 따라 심하게 변하는 건조한 대륙성기후가 나타나는 반사막지대로 향나무·알로에·찔레꽃·인동덩굴 등의 내한성 식물이 자라며 비교적 낮은 지역에는 내한성 풀로 뒤덮인 광대한 스텝 지대가 펼쳐져 있다.

 

국민의 90%는 아르메니아인이고 그밖에 아제르바이잔인·러시아인·쿠르드족·우크라이나인 등도 소수 거주한다. 주변의 다른 공화국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2022년 추계인구는 297만 1,883명이며, 전체 인구의 63%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15세 이하의 유소년 인구의 비율은 20%이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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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는 러시아 남부에 있는 나라로서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이다. 면적은 3만㎢, 인구는 380만 명, 수도는 예레반(Yerevan)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2,147달러이다.

최초의 통일은 아타시드왕조(기원전 191190)때 였으며, 그 뒤 아사시드왕조에게 넘어가 428년까지 존속하였다 301년 아사시드의 트리다테스 3세 때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 뒤 독립을 유지하였을 뿐, 터키·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894년 폭동이 일어나자 터키인들은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3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으다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또 한차례 터키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어 15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항거하여 1918 5 28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후일소련구성공화국이 되었다가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으며 우리 나라와는 1992년 2월 21일 수교하였다

 

2 아제르바이잔 Azerbaijan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Republic of Azerbaijan

        ▲국기

 

자카프카지예 지역 동부에 있는 국가. 수도는 바쿠, 국민의 90%는 아제르바이잔인이다. 화폐는 아제르바이잔 마나트이며 시장경제체계다. 공화제로 대통령 줌심제이며 단원제이다. 보건위생 수준은 매우 양호하며 모든 교육은 무상으로 이루어지고 문맹률이 낮다.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 중 하나이다. 카프카스 산맥의 남동부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은 북쪽으로 러시아, 서쪽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남쪽으로 이란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카스피 해를 끼고 있다.

 

아르메니아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나히체반 자치공화국과 분쟁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가 영토에 포함되며, 수도는 바쿠이다.

 

카프카스 산맥의 남동부에 있는 3개국(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남쪽에는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지역이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고대로부터 자카프카지예 지역에 살았던 이란인 등 기존 정착민들의 혼혈에 11세기 오구주족의 한 분파인 셀주크족이 이주해 오면서 투르크인의 혈통이 혼합되어 형성되었다.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모든 거주자가 아제르바이잔인들인 반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3/4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다. 러시아인이 인구의 6% 정도로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다. 2022년 추계인구는 1,028만 1,944명이며, 전체 인구의 55%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15세 이하의 인구의 비율은 23%이다(2017).

 

역사

아제르바이잔은 이란령 아제르바이잔과 서로 인접해 있으며, 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뿌리는 서로 같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주민은 원래 페르시아(이란)인이었으나 9세기에 투르크화되었다. 그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아랍·투르크·몽골·이란이 싸웠다. 수차례에 걸친 전쟁은 19세기초에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부터 지금의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 지역을 빼앗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후로 아제르바이잔은 현재 국경선을 따라 러시아와 이란 양국으로 분할되었다.

 

인접해 있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가 그리스도교 국가인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주민 대부분이 터키어를 쓰는 이슬람교도라는 점에서 서로 달랐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후 아제르바이잔은 1918년 5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1920년 4월 소비에트 적군(赤軍)의 침공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 1922∼36년 자카지예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부였다가 1936년에 독자적인 소련의 공화국이 되었다. 1989년 10월 5일 주권을 선언했으며 1991년 8월 30일 소련이 붕괴되자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으나 1992년 10월 탈퇴했다.

 

아제르바이잔은 2가지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은 행정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 속하며 아제르바이잔인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지리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의 좁고 긴 땅을 사이에 두고 아제르바이잔과 떨어져 있다. 한편 지리적·행정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 속해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례적 상황을 들어 1980년대말과 1990년대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해 자국으로의 행정적 편입을 주장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인해 1989∼91년 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1992∼93년에는 전면전으로 번졌다. 이 전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정치적 혼란과 함께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아르메니아군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1994년 이루어진 휴전으로 전쟁이 수그러들었으나, 사실상 분쟁의 정치적 해결에는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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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캅카스, 행복과 장수의 고장

김창규 駐아제르바이잔 대사

캅카스(영어명 코카서스)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가 축적된 곳으로 우리 현대인에게는 마음 힐링의 고향이다. 아제르바이잔에 레릭이라는 곳이 있는데 168세까지 장수를 누렸다고 하는 무슬리모프 씨가 살았던 곳이다.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다른 구소련 사람들보다 월등히 오래 사는 것을 보면 캅카스는 장수 지역임에 틀림없다. 캅카스인들이 오래 사는 이유는 대체로 가까운 인간관계, 건강한 식습관, 전통적 가치의 유지, 깨끗하고 아름다운 생활환경 덕이 아닌가 싶다.

캅카스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대화를 많이 한다. ‘손님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이라며 정성껏 모신다. 따뜻한 봄볕 아래서 할아버지와 아이가 두런두런 대화하는 모습이라든가 나무 그늘에서 또래 친구들이 모여 차 마시며 전통 나르드놀이를 즐기는 모습은 캅카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늙어서도 자신이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장수의 비결임은 의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지만 아직도 노인들이 후손들로부터 일정한 존경을 받고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건강한 노후 생활에 활력을 주는, 실로 주요한 요소이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해결할 일상적인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할 일은 줄어들고 써야 할 돈은 늘어난다. 실업을 당하거나 노후가 돼 할 일이 없어지고 돈이 없어지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전통적 생활 방식의 회복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캅카스의 자연은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원천이다. 동서로 1500㎞를 달리는 아름다운 캅카스 산맥은 자연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맑은 공기와 물은 물론 풍부하고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다양한 채소와 최고 품질의 전통 요구르트와 치즈 등 발효 유제품은 이들 건강의 원천이다. 캅카스 지역은 지역에 따라 고도 차이가 커서 아열대 기후부터 한대까지 7개 기후대가 모두 분포한다. 남부 지방으로 가면 바나나, 오렌지, 체리, 살구, 무화과 등 열대과실이 많이 나고 북쪽 산악지역으로 가면 사과, , 복숭아, 호두 등 냉온대 과일이 풍부하다. 8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지역 와인은 싸고 질이 좋은데 그 깊은 맛이 일품이다. 곁에 두고 늘 마실 수 있는 와인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주로 먹는 새끼 양고기와 조지아 사람들의 저염식도 그들을 건강하게 하는 음식인 것 같다.

캅카스인들의 초월적 가치에 순응하는 종교적 태도와 스트레스 없는 생활 방식도 이들의 장수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조지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타마다라는 좌장의 리드 아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나누며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운다. 캅카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모이기만 하면 정치 얘기로 핏대를 올리는 우리네와 달리 문학이나 역사 등 무거운 주제부터 이웃 간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이들의 대화는 끝이 없다. 이들은 오랜 전설과 시 그리고 아름다운 예술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대화는 스트레스를 쌓는 과정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푸는 과정이다. 서로 지혜를 나누는 과정이며 마음을 가꾸는 과정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전통을 지키는 일과 서로를 존중하는 삶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또 이웃과의 소소한 일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과 가족 간의 소통과 어울림의 소중함도 알게 됐다. 매일 주어진 노동을 하고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도 장수의 비결로 보인다. 우리 인류가 합리성을 기반으로 발전시켜 온 현대 문명의 한계에 대해서도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것 같다. 캅카스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겸손한 마음과 남과 어울려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태도를 가르쳐 주는 곳이다.

◇김창규(58) △제18회 외무고시 △주카자흐스탄1등서기관 △주영국1등서기관 △인사제도계장 △구주1과장 △주독일참사관 △주러시아공사참사관 △주벨라루스공사 △대법원 파견 △주키르기스스탄 대사 △주아제르바이잔 대사

문화일보

 

3 조지아 Gruziya

조지아 공화국, Sakartvelos Respublika

▲국기

 

아시아에 있는 국가.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중 하나로 수도는 트빌리시이다. 중세에 강력한 조지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10세기에서 13세기였다. 오랫동안 터키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기에 조지아의 경제는 현대화되고 다양화되었다. 1991년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1990년대는 조지아에 있어 불안정하고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시기였다. 독립 후 최초로 구성된 정부가 전복되었고,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주의 운동들이 등장했다. 면적 69,700.0㎢, 인구 3,977,200(2022 추계).

 

조지아인들은 처음부터 카프카스 산맥 주변에 정착한 민족으로 추측되며,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6세기부터 여러 봉건국가들이 이 지역에 세워졌으나 13세기에 몽골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 침략당하면서 500만 명에 이르던 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대참사를 겪었다.

 

19세기초 러시아에 합병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3세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조지아인(그들 자신은 카르트벨레비라고 함)들은 카르트벨리야어족(남카프카스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이 조지아 정교회의 신자이다. 소수민족으로는 아르메니아인(약 8%),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인구는 감소추세로 이어져오고 있다. 2022년 추계인구는 397만 7,200명이며, 전체 인구의 20%가 15세 이하의 유소년층이다.

 

문화

조지아는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4세기에 문자가 만들어졌고, 5세기부터 조지아 특유의 문학이 나타났다. 조지아인·그리스인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고대의 고등교육 기관이 조지아 중부의 콜치스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인 이칼토·겔라티의 학당들이 12세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다.

 

12세기에는 조지아인의 민족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민족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rsani〉가 나왔다. 그 후 18세기에 작가 술칸-사바 오르벨리아니, 소설가·시인·극작가 일리아 차프차바제 등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극작가 기오르기 에리스타비가 근대 조지아 연극을 확립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서정시인 아카키 체레텔리, 카프카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 자연시인 바자 프샤벨라 등이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소설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시인 티치안 타비제가 처형되고 시인 파올로 이아슈비리는 정부의 비판을 받고 자살했다. 198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텐기즈 아부라제 감독의 영화 〈후회 Repentance〉는 당시의 억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조지아는 연극과 건축 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조지아 연극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왔으며, 아르메니아 건축과 더불어 비잔틴 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조지아의 건축문화는 오늘날 많은 수도원·교회 등의 대형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조지아어로 발행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조지아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조지아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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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자연,종교의 나라 조지아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에서 바라본 산악마을 스태판츠민타 전경.

입력 : 2015.11.19 13:40

 

 코카서스(Caucasus) 산맥은 길이 1,100km, 160km이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룬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러시아의 서부 시스코카서스의 엘브루즈(5,642km)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외 5,000m 급의 산들이 4개가 더 있다

 

 코카서스는 지구에서 가장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있는 지역이다. 오늘날 코카서스는 소비에트연바잉었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의 단일민족국가로 구성된다.

 

▲조지아 아제르바이젠 국경의 데이빗 가레지아 수도원 단지.

 

가레지아산 정상에는 수십개의 동굴 기도처가 있었다. 그중 한 곳의 프레스코화. 주변의 자연물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로 그린 벽화로 색감이 온화하다.

 

▲아바노패스에서의 점심식사.

 

 코카서스에는 세계의 유명한 장수마을 중 하나인 조지아 메스티아(Mestia) 지역의 위시굴리(Ushguli)가 있다. 대부분의 장수마을은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지대에 위치해 맑고 건조한 공기와 청정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장수촌 사람들의 생활상에는 친밀한 가족관계, 좋은 친구와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며 소박한 자연식(현지음식)을 섭취하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세나코에서 다틀로 가는 길.

 

 

다틀로마을. 집집마다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있다.

 

 

 

아순타패스를 넘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들

 

▲마지막 야영지 알도티.

 

 국토의 39%가 산림지역으로 코카서스산맥이 기온의 변화를 막아주어 고산지대를 제외하고는 연중 온화한 날씨이다. 옛날부터 러시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소아시아의 무역로로도 번성했다. 그래서인지 조지아는 기원전8C 전부터 이미 그리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고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왕국, 로마제국, 터키, 몽골 등 끊임없는 외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티무르의 공격은 산속까지 집요하게 침략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더 깊숙이 높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마을마다 높은 곳에 망루를 건설하게 되었다. 잦은 외침으로 고단했던 삶은 종교의 힘에 의지하여 기독교(동방정교)는 조지아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순타패스를 넘는 사람들은 점판암에 칼로 이름을 새겨 돌탑을 쌓은 후 하산한다.

 

아순타패스. 왼쪽부터 루이, 민혁래, 김미리, 레조, 최은주, 지마(가이드).

 

▲스태판츠민타의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즈바리고개(2,379m)에서 바라본 스태판츠민타 가는 길.

 

어머니의 품 같은 코카서스

 코카서스산맥의 극히 일부 지역을 여행하고 그곳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다녔던 다른 산맥들과 비교해 본다면 아름다움과 편리함, 접근성에는 알프스에 뒤질 수도 있고, 장대함이나 규모면에서는 히말라야에 못미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카서스는 가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야생적인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거친 산악의 모습보다는 겹겹이 포개진 능선의 부드러움에서 조지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엄마의 빵(Dedas puri)'같은 훈훈하고 넉넉한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망루들고 이곳만의 특징으로 그때 당시 수시로 감시를 하고 힘겹게 살았을 옛날 사람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지아 사람들과의 만남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고 음식도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특히 농후한 맛의 가지요리와 샤슬릭(장작구이 꼬치요리)의 진한 맛은 지금도 여운이 남아 있다.

 

 가족들은 나를 보더니 고생했을 줄 알았는데 건강해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청정한 코카서스의 자연환경이 나에게 준 선물일 것이다.

글·사진 김미리 화가 

 

◆코카서스 3국 기행

2018.05.29 코카서스 3국 기행  허우범  월간조선 06월 호

허우범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1〉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간직한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蒼天 밑에 아라라트山은 보석처럼 빛나고

⊙ 제1차대전 중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150만 명 학살 등 고난의 역사로 점철
⊙ ‘노아의 방주’ 아라라트산이 보이는 호르비랍수도원,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槍이 발견됐다는 게가르드수도원, 코카서스에서 유일하게 그리스식 列柱가 있는 가르니사원
⊙ 스탈린 때문에 사라질 뻔했던 제주도만 한 면적의 세반호수

 

▲예레반 전망대에서 본 아라라트山. 아라라트산은 노아의 방주가 멈춘 곳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코카서스 3개국은 아르메니아조지아아제르바이잔을 일컫는다. 코카서스 산맥이 이 나라들을 감싸고 있는 데서 이르는 말이다. 이 세 나라는 동서로 카스피해()와 흑해, 남북으로 이란터키 및 러시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옛날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要衝地)로서 중시됐다.

 

점심때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도착하니 현지시각으로 새벽 1. 16시간 만에 코카서스의 첫 나라에 도착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보지만 피곤한 몸과는 다르게 정신은 말똥하다. 5시간이란 시차가 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 6, 이제 일어날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호텔 창밖으로 접하는 예레반의 첫인상은 엽서 속의 풍경이다. 멀리 만년설(萬年雪) 덮인 산맥이 보이고 구릉과 평지에는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조밀하게 늘어섰다. 뉴욕과 상하이(上海)처럼 빌딩 숲이 아닌 것이 오히려 아늑하다. 청명한 하늘과 공기가 아침 햇살을 타고 도시 전체를 감싸고 그 사이로 정겨운 새들의 지저귐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시내를 돌아보며 아르메니아인의 삶과 역사 둘러보기, 그들이 성산(聖山)으로 여기는 아라라트산이 가까운 호르비랍 지역과 와인 생산지, 해발 1900m에 있는 휴양지 세반호수 지역이다. 우리는 시내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  

  
  
國花는 물망초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의 추모비.


1
차대전 말기 오스만튀르크제국에 의해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됐다.
  

 

“아르메니아의 국화(國花)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의 안내를 맡은 아르메니아인은 한국말을 잘했다. 그러하니 더욱 친근감이 간다.
  
  “글쎄요?
  
  “물망초(勿忘草)입니다. 혹시 그 꽃의 꽃말을 아시나요?
  
  “‘나를 잊지 마세요’죠.
  
  “맞아요. 우리는 디아스포라와 대학살이라는 슬픈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물망초를 국화로 정했어요.
  
  아르메니아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강제 이주와 학살을 당했다. 전쟁 당시 이들이 적국(敵國)인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학살로 희생된 인원은 150만명에 이른다. 이 대학살을 피해 많은 난민이 세계 도처로 흩어졌다. 가이드는 “아르메니아 인구는 300만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략 600만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디아스포라의 슬픈 역사는 예레반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도심을 흐르는 라잔강()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대학살 50주년인 1965년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당시 소련 정부에 학살의 인정과 위령탑(慰靈塔) 건설을 요구하는 시위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추모공원 입구에는 이곳을 방문한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심은 수목(樹木)들이 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의 마을이 새겨진 추모의 벽을 지나면 남쪽으로 아라라트산을 바라보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는 12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섰고 오른편에는 40m에 이르는 첨탑이 우뚝하다. 12개의 석판은 오늘날 터키의 영토가 된 소()아르메니아의 12개 지방을 의미한다. 첨탑도 두 개로 이루어졌는데, 작은 것은 소아르메니아를 의미한다.
  
  원형의 석판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주변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조화(弔花)가 가지런하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가 몇 마리 날아든다. 잠시 묵상에 잠기려 할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진다. 다가서도 날지 않는다. 비둘기는 날개도 상했고 눈도 다쳤다. 대학살을 당한 영혼들의 절규인가.
  

  
  국립역사박물관

국립역사박물관.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눈으로만 살펴본다. 전시실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아르메니아는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언제나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었다. 이로 인해 융합의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복속의 역사였다. 특히 참담함과 슬픔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는 이를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기념으로 도록(圖錄)이라도 사려고 했으나 구할 수가 없다. 박물관이 도록 자체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박물관에서의 사진촬영을 허가한다. 아르메니아는 오스만튀르크제국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국제적으로 공인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자면 박물관의 전시물을 누구나 촬영할 수 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리게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박물관 앞에는 멋진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 앞은 공화국 광장으로 불린다. 구소련 시대의 공화국 도시마다 레닌 광장이 있었듯이 이곳도 예전에는 그렇게 불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광장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곳에는 박물관을 비롯하여 정부부처와 미술관, 호텔이 있다. 이곳이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였었다는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유럽풍의 현대적 건물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핑크도시’ 예레반

▲캐스케이드 공원 입구에 있는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의 석상. 타마니안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과 시내의 주요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현대풍의 도시로 설계한 이는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이다. 그는 흑해 연안 출신의 뛰어난 건축가로 45세 때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15년을 살았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도 예레반이다. 아르메니아를 사랑한 그는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가 설계한 예레반 시내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응회암(凝灰巖)으로 지어졌다. 이 석재는 화산이 분출할 때 재와 모래가 엉겨서 굳어진 돌로 연한 분홍색이다. 그래서 예레반을 가리켜 ‘핑크도시’라고 부른다.
  
  공화국 광장에서부터 인공계단폭포가 있는 캐스케이드 공원까지 가는 길은 예레반의 중심가이다. 이 길을 걷노라니 오페라하우스가 근사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건물도 타마니안의 작품이다.

 

▲캐스케이드 공원에 있는 한국인 조각가 지용호의 사자상. 廢타이어로 만들었다.
  

  캐스케이드 공원 입구에는 무언가를 골똘히 내려다보는 모습을 한 타마니안의 석상이 있다. 아마도 예레반의 도시 설계도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석상 뒤로는 넓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정원 사이사이마다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폐타이어 조각으로 만든 힘이 넘치는 사자상이 있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조각가인 지용호의 작품이다. 다른 유명 작품보다도 더 많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원 끝에는 6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스피커 모양의 인공폭포 구조물이 있다. 여름이 아니어선지 폭포는 작동되지 않는다. 계단구조물 내부에도 예술작품들이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관람할 수 있다. 모두가 현대조각품들이다. 사실 이 공원은 타마니안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했다. 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위원장을 역임한 짐 토로스얀이 타마니안의 유작(遺作)에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여 건설한 것이다.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을 장식한 피리 두둑

▲아르메니아의 전통 피리 두둑.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곡은 두둑으로 연주한 것이다.

  

  근처에 벼룩시장이 있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각종 기념품과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악기인 두둑(Duduk)입니다.
  
  “오! 우리나라의 피리와 모양이 똑같네요.
  
  “그렇지요. 두둑은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악기로 살구나무로 만듭니다.
  
  “피리와 소리가 같은가요?
  
  상점 주인이 내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두둑을 물고 연주를 한다. 두둑은 피리처럼 맑고 경쾌한 음색이 아니고 중저음의 소리를 낸다. 잠깐 듣고 있노라니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왠지 모를 우울함과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보셨지요?
  
  “여러 번 보았죠. 로마시대의 검투사 이야기지요.
  
  “네, 마지막 장면의 음악이 바로 이 두둑으로 연주한 거예요.
  
  “주인공의 손끝이 푸른 밀을 스치며 죽어가던 그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이 바로 이 악기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유난히 슬펐는데 바로 이 두둑 연주가 대미를 장식했네요.
 

  
  공화국 광장의 평화시위

▲공화국 광장에서는 부패한 전직 대통령이 새 총리로 취임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향하는데 몇십 명의 청년이 도로를 막고 시위를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국기를 몸에 두른 청년이 ‘자유!’와 ‘총리 교체!’를 외치면 모두가 함께 따라 외친다. 자동차에도 그들의 국기가 걸려 있다. 가이드가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반()폭력 평화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뀌어 첫 총리를 선출하는데,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다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통령 재임기간에 신임을 얻지 못했나요?
  
  “부패가 심했지요. 그러다 보니 경제도 더 어려워지고 실업률도 높아져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아요.
  
  “그렇군요. 그런데 시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네요?
  
  “이제 점점 거리로 나올 거예요. 공화국 광장에서 매일 7시에 집회를 열거든요.
  
  도로 길목마다 모여든 시위대들이 차량을 막고 가두행진을 벌인다. 경찰들도 보이지만 막지는 않는다. 이들은 이를 ‘벨벳혁명’이라고 말한다.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서니 공화국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행진을 벌인다. 모레가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는 날이라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노아의 방주’의 아라라트山

▲아레니의 와인저장창고. 아르메니아인들은 노아 시대부터 이 나라의 포도 재배가 시작됐다고 믿는다.  

 

  다음날,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 아라라트산을 보다 가까이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라라트산은 터키에 속해 있다. 터키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호르비랍수도원이 아라라트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왜 아라라트산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산인가요?
  
  “성경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 아시지요? 그 방주가 걸린 산이 아라라트산이고, 비둘기가 날아오자 노아가 첫 발걸음을 디딘 곳이 이곳 아르메니아 땅입니다.
  
  “아, 그래서 성산이라고 하는군요.
  
  “노아가 그때 포도 씨앗을 심었는데 이후로 이곳에 포도가 번창해졌습니다. 5000년 전의 포도 씨앗과 가죽신발도 발견됐답니다. 아레니 지역의 포도가 특히 유명하여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맛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보다도 12년 먼저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인 나라다. 호르비랍수도원은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했던 성()그레고리가 13년간 감금됐던 곳이다. 그가 공주의 현몽(現夢)으로 왕의 병을 고쳐준 데 감동을 받은 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됐다.
  
  수도원 가까이에 이르자 아라라트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평원을 수놓은 포도밭 너머 나지막한 언덕에는 이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지(聖地)인 호르비랍수도원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푸른 하늘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두 개의 아라라트 봉우리가 기상을 내뿜고 섰다.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인들뿐만 아니라 호르비랍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도 탄성과 경외감을 자아낸다.
  
  예레반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 여기저기에 폐허인 채로 버려진 공장들이 보인다. 옛 소련 시절에 가동되다가 독립 이후 폐쇄된 공장들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시절, 계획경제에 따라 도시마다 세워졌던 공장들이 이제는 흉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어서 예레반 시내에 있는 고문서(古文書)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메스로프 마슈토츠 고문서관이다. 마슈토츠는 405년경, 36글자의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제한 사람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마슈토츠와 그의 제자상이 있고, 벽면에는 그가 창제한 문자로 처음 적었다는 솔로몬의 잠언(箴言)이 새겨져 있다. 아르메니아 문자는 몇 번의 변화를 겪었지만, 마슈토츠 덕분에 소련시대에도 문자 해독률이 90%에 달했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17000여 권의 중세(中世)시대 책과 필사본 등 귀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일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문자에 대한 자긍심을 살펴보려 했는데 못내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했다’

▲가르니사원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유일하게 그리스식 列柱를 가진 사원이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답게 수도원과 교회가 많다. 게가르드수도원도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수도원은 암굴에서 시작됐다. 호르비랍에 감금됐던 그레고리가 맨 처음에 이곳 동굴에서 성스러운 샘물을 발견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발견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게가르드수도원의 성가대. 동굴수도원 안에서 듣는 성가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이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가르니사원이다. 이곳은 코카서스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리스식 열주(列柱)가 있는 사원이다. 몽골 침입 당시에 무너진 것을 소련 시대의 고고학자들이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사원은 강물이 굽이도는 계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계곡의 절벽에 서니 굽이치는 강물이 만든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또 다른 절경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사원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왕의 별장과 목욕탕도 발굴됐다. 사원 건너편에 있는 목욕탕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입구에는 불을 지펴 물을 끓였을 아궁이가 보인다. 칸칸이 만들어진 방은 온돌의 흔적이 보인다. 맨 안쪽에는 다른 곳보다 한결 넓은 방이 있다. 다른 방에서는 볼 수 없는 색색의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 있다. 반 정도 남아 있는 타일 한가운데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우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저런 글을 타일에 새겨놓다니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淡水湖

▲세반호수와 세바나반크수도원. 원래 수도원은 호수 안의 섬에 있었다.  

 

  해발 1900m에 위치한 세반호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휴양지로 이름이 높다. 제주도와 맞먹는 넓이의 호수로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담수호(淡水湖). 호수 안으로 길쭉하게 들어간 끄트머리에 풍경 좋은 세바나반크수도원이 있다. 호수의 북쪽으로는 병풍 같은 설산(雪山)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섰다.
  
  이 수도원은 스탈린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호수 안 섬에 있었다. 수도원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스탈린이 관개용수(灌漑用水) 공급과 수력(水力)발전을 위해 터널을 뚫고 준설(浚渫)을 하면서 호수의 물을 뺐다. 호수의 수위(水位)는 급격히 낮아졌고 수도원은 육지와 연결됐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도 무분별한 관개용수 개발로 풍요롭던 어업이 결딴났다. 사막으로 변한 아랄해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반호수도 아랄해의 전철(前轍)을 밟을 뻔했다. 스탈린이 죽자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수위를 되돌리기 위해 수력발전도 화력발전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세반호수는 살렸지만 수도원은 옛 모습을 찾지 못했다.
  
  조지아로 가기 위해 국경으로 향한다. 국경 근방의 터널을 지나 갑자기 무성한 숲이 펼쳐진다. 멀리 국경마을과 호수도 보인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영토문제 등을 놓고 앙숙관계지만 호수는 공동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생명수(生命水)인 물이 두 나라의 적대(敵對)관계를 씻어주고 있는 셈이다. 두 나라의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며 다음 목적지인 조지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2〉 만년설과 고원 사이를 수놓은 와인과 종교의 순례지 조지아

      코카서스 雪山 아래 초록 마을엔 신성한 와인이 익어가고

⊙ ‘조지아’는 ‘농사짓기 알맞은 땅’이라는 의미… 소련 시절에는 그루지야라고 불려
⊙ 스탈린·셰바르드나제의 고향… 푸시킨·톨스토이·고리키 등이 사랑하고 작품활동 해
⊙ 땅에 묻은 항아리에 포도를 통째로 넣고 숙성시키는 크베브리 와인 제조법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나리칼라 요새에서 본 트빌리시 전경.

 

  조지아는 코카서스 세 나라 중에서도 지정학적으로 핵심적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는 러시아 남하정책의 최단거리에 위치한다.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이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는 데 있어서도 최적의 통로에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조지아는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 몽골과 티무르, 오스만튀르크 제국 등이 조지아를 차지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에서 ‘단층선 분쟁’이라는 말을 썼는데, 조지아의 지정학적 위치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조지아는 코카서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산악국가다. 평균 4000m를 웃도는 봉우리들이 북쪽을 감싸고 있다. 남쪽으로는 아르메니아 고원이 펼쳐진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하여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조지아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70%. 인구는 370만명이며 수도인 트빌리시에 100만명이 산다. 우리의 광역시 인구 정도밖에 안 된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에 인구밀도까지도 낮으니 그야말로 낙원이 아닐 수 없다
.
  

  8000년 전의 포도항아리 발견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야경.

 

  조지아라는 국명(國名)의 기원에 대해서는 토템신앙의 ‘늑대’를 뜻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됐다는 설(),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물, 알맞은 기후 등이 어우러진 땅이기에 조지아인들은 후자(後者)를 선호하는 것 같다. 현지인들은 “조지아는 그리스어로 ‘농사짓기 알맞은 땅’이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조지아는 구() 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그루지야로 불렸다. 조지아가 된 것은 1991년 독립 이후다. 러시아식 표기를 버리고 영어식 표기를 채택함으로써 친()서구 지향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한다. 조지아어로 ‘조지아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인류의 시원(始原)과도 연계되는 자긍심 높은 말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조지아에서 발견된 원시인류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로 불리는 160만년 전의 직립보행원인(直立步行猿人)이 있다. 조지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이는 포도주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이 성산(聖山)으로 여기는 아라라트 산에 노아의 방주가 섰고, 노아가 첫발을 디딘 곳이 아르메니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포도씨를 심어서 오늘날처럼 포도가 풍성한데 그 역사가 5000년이나 됐다고 했다. 조지아에서는 8000년 전에 포도를 숙성시킨 흔적과 포도씨가 있는 항아리가 발굴됐다
. 

  
  
한 손에 와인, 한 손에 칼

 ▲스탈린이 공부했던 신학교. 소련의 가공할 독재자 스탈린은 조지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수도 트빌리시는 여타 국가의 수도가 그러하듯 강을 끼고 있다. 므츠바리 강이다. 므츠바리 강은 쿠라 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코카서스 관광의 중심도시답게 강을 따라 고대의 유적들이 현대의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강은 터키서부터 조지아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로 이어진다. 고대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은 이 강을 통해 조지아를 거쳐 카스피해와 터키를 오갔다.
  
 
조지아의 옛 수도는 므츠헤타였다. 트빌리시가 수도가 된 것은 5세기 말 조지아의 왕인 바흐탕 고르가살리에 의해서다. 그가 어느 날 매를 들고 꿩 사냥을 하러 숲이 우거진 이곳에 들렀다. 그런데 꿩을 잡은 매가 뜨거운 연못에 빠져 죽은 것을 보았다. 온천이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따뜻한 물이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트빌리시라고 했다. 그때부터 이곳은 유황온천이 유명해졌고 지금도 터키식 온천탕은 인기가 높다.
  
 
쿠라 강이 흐르는 절벽 위에는 고르가살리의 동상이 우뚝하다. 그 옆에는 트빌리시 창건신화가 전해져 오는 메테히 교회가 있다. 교회는 장엄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하지만 1500여 년간 겪었던 풍파를 이겨낸 흔적이 건물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나리칼라 요새도 트빌리시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므타츠민다 산에 위치한 이 유적은 4세기 중반에 건설된 것이다. 이 역시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 훼손과 중건을 되풀이해 왔다. 오늘날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트빌리시를 조망하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트빌리시의 상징인 나리칼라 요새. 오른쪽 케이블카 아래 보이는 흰 조각상이 ‘조지아의 어머니’상이다.

 

  요새 옆 가파른 능선에는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있다. 높이가 20m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도 어머니상이 있는데, 이 어머니상은 52m.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은 육중한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이고, 조지아의 어머니상은 왼손에는 와인 잔을, 오른 손에는 칼을 들었다. 친구에게는 와인을 선사하지만 적()에게는 칼을 쓴다는 의미다.
  
 
구도심의 중심은 자유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있는 자유탑 꼭대기에는 건국신화인 말 타고 용을 무찌르는 성() 조지상이 있다. 이 광장은 소련 시절에는 레닌 광장으로 불렸다.
  
 
구소련 시절, 레닌 사후(死後)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다. 그는 무자비한 숙청과 개인숭배, 공포정치로 국민들을 떨게 했다. 연해주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도 스탈린의 지시 때문이었다.
  
 
스탈린의 고향 조지아도 그의 공포정치는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조지아에서도 스탈린의 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고향인 고리의 박물관에만 그의 동상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스탈린에 대한 조지아인의 생각은 나쁘지만은 않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같은 조지아인이기 때문인가
. 


  
셰바르드나제와 사카슈빌리  

  조지아는 독립 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생 독립국으로서 자립하기에는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경제는 붕괴되고 실업난은 고조됐다. 이에 따라 범죄는 늘어나고 정세(政勢) 또한 불안했다. 외국인들이 꺼리는 여행위험국가가 되기도 했다.
  
 
조지아의 경찰서 건물들을 보니 유리로 된 것이 특이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경찰서뿐 아니라 공공건물은 모두 유리로 만들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투명한 행정과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1980
년대 개혁·개방을 외친 고르바초프를 도와 신사고(新思考) 외교정책을 펼쳤던 외무장관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도 조지아 출신이다. 외무장관이 되기 전에 그는 내무관료로 ‘부패와의 전쟁’에서 이름을 떨쳤다. 셰바르드나제는 조지아 독립 초기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통령이 됐다. 그가 집권한 후 측근들은 부정부패를 자행했다. 공산당 시절 부정부패와 싸웠던 셰바르드나제지만 정작 수족들의 부정은 잘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부정선거 시비까지 겹쳐 2003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를 ‘장미혁명’이라고 한다.
  
 
이때 장미혁명을 이끈 인물이 미하엘 사카슈빌리다. 37살의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미국 유학 경험을 살려 서구주의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조지아에 주둔했던 러시아군도 완전 철수시켰다. 그의 정책은 국내외의 지지를 얻었다. 이때부터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고 범죄율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조지아인들은 그가 개혁정책의 토대를 닦아 놓았기에 지금도 여러 방면에서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사카슈빌리는 임기 말년에 권력 남용과 사기,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국민들의 신임을 잃었다. 2012년 실각한 후 조국을 떠난 그는 2015년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지사로 임명됐다
.  

  
  
문호들이 사랑한 땅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은 조지아를 무척 사랑했다. 그는 트빌리시의 유황온천을 체험하고는 ‘최고의 온천’이라고 감탄했다.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도 좋아하여 ‘음식 하나하나가 시()와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조지아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그중에는 〈코카서스의 죄수〉라는 장편시도 있다.
  
 
소설가 톨스토이도 코카서스 주둔군으로 자원하여 4년간 복무했다. 이를 소재로 몇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소설 〈코카서스의 죄수〉도 썼다. 소련의 대문호인 막심 고리키도 트빌리시를 좋아했다. 페인트공 생활을 하며 창작에 열중한 고리키는 이곳에서 처녀작을 발표했다. 고리키는 이때 사용한 필명인데, ‘비통한 자’라는 의미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조지아는 우리나라 작가들과도 인연이 깊다. 일제(日帝) 강점기 소설가인 이태준은 1945년 해방 직후 소련 영토이던 조지아를 방문할 기회를 가
졌다. 그는 이곳을 여행하고 《소련기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예수 관련 전설이 얽힌 스베티츠호벨리 성당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인 스베티츠호벨리 성당. 예수가 입었던 옷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아르메니아처럼 조지아도 기독교와 관계가 깊은 나라다. 예수의 12사도(使徒) 5명의 사도가 조지아에서 포교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지아는 326년에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채택했다. 467년에는 안티오크 정교회(正敎會)로부터 독립교회로 인정받아 조지아 정교회가 탄생했다. 현재 조지아인의 87%가 믿고 있는 조지아 정교회는 조지아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민족의 단결과 저항의 중심점이 되어 왔다. 작은 마을에도 교회나 수도원이 있는 것은 이러한 조지아의 특성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므츠헤타 마을이 있다. 조지아를 대표하는 두 강인 므츠바리 강과 아라그비 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에 위치한 므츠헤타는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정도로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동서의 길과 강이 만나는 요충지였다. 이런 까닭에 트빌리시가 수도로 되기 전까지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다.
  
 
마을 중심에는 조지아 정교회 총본산인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이 있다. ‘생명을 주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이 성당은 예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됐을 때, 어떤 조지아인이 로마의 집행관으로부터 예수가 입고 있던 옷을 사서 귀국했다. 그러자 그의 누이가 예수의 옷을 붙들고 비탄에 잠겼다가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옷을 너무나 단단히 쥐고 있어서 빼낼 수가 없었다. 결국 옷은 그녀와 함께 묻혔다.
  
 
그 후 무덤에서는 삼나무가 자라났다. 왕이 그 나무로 7개의 기둥을 만들어 새 교회의 토대로 쓰게 했다. 그런데 7번째 기둥이 공중에 솟구쳐 올라 내려오지 않았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니노가 밤새 기도하자 내려왔는데 그때부터 이 기둥에서는 어떤 질병도 치료할 수 있는 신비한 액체가 흘렀다. 그래서인가. 오늘도 성당 안은 심신치료를 위하여 저마다 촛불을 밝히고 간절하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므츠헤타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세워진 즈바리 교회는 4세기 초 기독교가 전파된 것을 기념하여 십자형 모습으로 세워졌다. 조지아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온 성녀 니노였다. 즈바리는 조지아어로 ‘포도나무’라는 뜻이다. 이는 그녀가 포도나무로 된 십자가를 가져온 것을 기념한 것이다. 니노의 포도나무 십자가로 기적이 행해지자, 이 교회는 순례자들의 필수코스가 됐다
  
 
풍광 좋은 이 교회가 모두에게 개방된 것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다. 소련 시절에는 군사기지로만 사용됐기 때문이다
.


  
프로메테우스가 고난을 당한 카즈베기山

▲카즈베기 산. 인류에게 불을 전해 준 죄로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묶여 고난을 당했다는 신화가 깃든 산이다.

 

  조지아인들이 정신적 고향이라고 여기는 곳은 카즈베기 산 아래 언덕에 세워진 게르게티 성삼위일체 교회이다. 조지아를 여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곳에 들른다. 코카서스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에 완성된 구불구불한 군사도로를 지나 게르게티 마을에 도착했다. 저 멀리 5000m가 넘는 카즈베기 산이 만년설(萬年雪)과 함께 장엄함을 뽐내고 섰다. 교회를 보기 위해 사륜구동 지프차로 갈아타고 산을 오른다. 2000m의 산 구릉에는 푸른 초원과 봄꽃이 피어 있다. 그 너머로 웅장한 비경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자리 잡은 교회가 보인다.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교회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심(信心)이 절로 돈독해짐을 느낀다. 믿음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절절한 체득에 의한 것임을 카즈베기는 알려주고 있다. 실로 조지아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아닐 수 없다.
  
 
카즈베기 산은 프로메테우스 신화(神話)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죄로 이 산의 바위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없애고 그를 구해 줄 때까지 3000년을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청명한 날임에도 산 정상의 날씨는 수시로 변한다. 천변만화(千變萬化) 그 자체다. 장엄한 대자연의 풍광 속에 신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곳. 조지아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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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년 된 와인 저장소

▲땅에 묻은 항아리에 포도를 통째로 넣고 숙성시키는 조지아 특유의 크베브리 와인 제조법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지아는 포도재배의 역사가 알려주듯 와인으로 유명하다. 조지아의 와인 역사는 조지아 정교회보다도 오래됐다. 와인 제조법도 독특하다. 땅에 묻은 항아리에 포도를 통째로 넣고 숙성시키는 크베브리 와인 제조법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대부분의 기독교 국가가 와인을 신성(神聖)함과 결부시키지만 조지아는 특히 더하다. 조상의 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상의 시신을 포도나무 밑에 묻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조지아에서도 와인으로 유명한 곳은 텔라비이다. 텔라비는 트빌리시에서 북동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알라자니 강이 흐르는 계곡에 위치하는데 동서를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길목이었다. 이런 까닭에 8세기부터 도시로 발전했고,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이 지역을 지배한 카헤티 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다.

 

 ▲조지아의 전통 포도주잔인 깐지를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타마나를 표현한 청동상.

 

  텔라비에 있는 알라베르디 대성당에는 1000년의 역사를 이어 온 와인 저장소가 있다. 50m 높이의 육중한 대성당은 조지아 동부지역의 영적(靈的) 중심지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대성당을 에워싼 성벽은 마치 요새와도 같다. 성문을 열고 들어가니 성당 주변으로 포도나무가 빼곡하다. 각기 다른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언뜻 보아도 100여 종에 이른다.
  
 
대성당 주변에는 무너진 유적들이 널려 있다. 16세기에 왕이 사용한 여름궁전과 목욕탕은 아직도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대성당 내부는 여기저기 회벽 칠에 벗겨진 프레스코화가 햇살을 받아 선명하고 웅장하다. 그중에는 조지아를 건국한 성 조지가 용을 격퇴하는 모습을 표현한 벽화도 있다
.
 

 

 조지아인들은 포도 수확철인 가을이 되면 너나없이 전통적인 제조법으로 와인을 만든다. 그들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라고 믿는다. 그들의 와인 사랑도 대단하다. 성찬식은 물론 축제나 결혼식 등 실생활에서도 와인을 빼놓지 않는다. 이때 잔치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타마나’라는 주관자를 뽑는다. 타마나로 선출되면 축하공연이나 참석자들의 인사말 순서 등을 정한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임무는 ‘건배 제의’다. 와인을 담은 잔을 들어 일치된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축제를 한껏 고조시키는 것이다. 조지아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만든 ‘깐지’라고 부르는 각배(角盃)를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타마나상이 발견됐다. 조지아가 와인의 발원지임을 알려주는 유물인 셈이다.
  
 
조지아는 세계적인 장수(長壽) 국가다. 장수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지방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한다. 조지아인들이 와인을 신성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 조지아인의 삶은 와인 그 자체인 것이다.

 

◆ 일상

▲영어식 = 조지아. 러시아식 =그루지야 국회의사당 앞

 

▲조지아는 흑해 연안 러시아와 터키 사이 카프카즈 산악지대 위치, 스탈린의 고향 1818년 독림을 선언했으나 붉은군대에 점령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 1991년 러시아 손아귀에서 벗어나다 - 조지아 정교

 

▲얼음목욕

 

▲연말 풍경

 

▲카치키에 있는 절벽 수도원 - 수도원에 가려면 낭떠러지에 만든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한다

 

3〉 아제르바이잔

‘바람의 도시’를 ‘불꽃의 도시’로 바꾼 카스피해의 오일머니

⊙ 알렉산더의 부하 장수가 세운 터키계 민족의 나라… 언어의 80%가 터키어와 같아
⊙ 셰키왕의 여름궁전, 베니스 무라노産 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 알렉산더 뒤마도 감탄
⊙ 古代 실크로드의 일부… 카라반들의 숙소였던 카라반 사라이는 호텔이나 카페로 개조되어 성업 중

 

▲카스피해를 둘러싸고 있는 바쿠만과 바쿠 시내의 모습. 오일달러의 힘으로 세워진 현대적인 빌딩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조지아 국경을 통과하여 아제르바이잔에 입국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좋지 않다. 지금도 국경에서는 종종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두 나라 모두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영토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나라를 오갈 때에는 특히 신경이 쓰인다. 자칫 운이라도 사나운 날이면 모든 짐을 샅샅이 조사받아야 한다. 오늘은 입국자들이 밀려 있기 때문인가. 여권을 살펴보던 심사자는 나의 이름만 확인하고는 수월하게 입국을 허가한다.
  
 
미리 마중 나온 안내자와 반갑게 인사하고 셰키(Shaki)로 향한다. 국경에서 셰키까지는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의 거리다.
  
 
“아제르바이잔도 고유의 언어가 있나요?
  
 
“네, 그런데 터키어와 거의 비슷합니다.
  
 
“터키어를 쓰는 것은 아니고요?
  
 
“똑같진 않아요. 그런데 80% 정도가 같습니다.
  
 
“참 신기하네요.
  
 
“그래서 ‘한 민족 두 나라’라고도 합니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터키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할 때에 통역 배석이 없이도 소통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 튀르크어’라고 부른다.
  
 
아제르바이잔은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 나라다. 북으로 코카서스 산맥, 동쪽으로 카스피해(), 남서쪽으로는 초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드넓은 초원 지역은 농업이 발달해 있고, 카스피해 지역은 원유와 가스가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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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도 고대(古代)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8세기 메디아왕국 때부터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메디아왕국의 일부였다. 아제르바이잔이 최초로 독립국가가 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찌르고 이 지역을 차지한 이후다. 알렉산더 대왕의 참모 중 이곳 출신인 아트로파테스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가 코카서스를 다스리는 총독이 됐는데, 그의 이름에서 아제르바이잔이라는 국명(國名)이 유래됐다고 한다.
  
 
이후 부침(浮沈)을 거듭하던 아제르바이잔은 7세기부터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11세기에는 셀주크튀르크, 13세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부터 근 3세기 동안은 페르시아와 오스만튀르크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이슬람이 이 땅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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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초반 제정(帝政)러시아가 이곳으로 진출했다. 19세기 중엽에는 남북으로 분리되어 제정러시아와 페르시아의 보호령(保護領)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카스피해에서 원유(原油)가 발견됐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때부터 세계적인 산유국(産油國)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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隊商들의 숙소 카라반 사라이

 ▲18세기에 건축된 카라반 사라이. 현재도 호텔로 사용 중이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셰키는 18000명이 살고 있는 한적한 시골이다.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한눈에 보아도 살기 좋은 마을임을 알 수 있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마을은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셰키라는 지명은 기원전 4세기에 흑해(黑海)에서 살고 있던 사카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마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곳도 고대 실크로드 대상(隊商·카라반)들의 주요 교역로였다. 이곳에서는 실크 제조와 수공예가 유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실크와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체험하는 공방(工房)들이 운영되고 있다. 18세기에 지어진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는 시설과 크기에 있어서도 여타 도시에 뒤지지 않는다. 이 지역이 산골마을이지만 바쿠에서 조지아로 넘어가는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대상들은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의 낙타를 이끌며 실크로드의 교역품을 실어 날랐다.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최대 40km 정도였다.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는 낙타의 하루 거리에 맞춰 위치했다. 카라반 사라이에는 낙타가 먹고 쉴 수 있는 공간과 인부들의 숙소, 목욕탕과 바자르 등의 부대시설도 필수조건이다. 대상들은 이곳에서 여독을 풀며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카라반 사라이에서는 교역과 정보 교환도 이루어졌다. 지역관리들은 이곳을 세금징수 장소로도 활용했다.
  
 
카라반 사라이의 활성화는 지역경제에도 한몫을 했다. 대상들이 숙소에서 묵어감에 따라 여러 가지 경제적 이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역 영주(領主)들은 앞을 다퉈 카라반 사라이를 짓고 대상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대상들은 자신들이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라반 사라이에 적절한 도움을 주면서 자신들의 사업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호텔로 개조된 셰키의 카라반 사라이는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오가는 여행자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옛날 낙타와 인부들이 쉬었던 장소는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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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스産 색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셰키왕의 여름궁전 전경.

 

  셰키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왕의 여름궁전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에 합병되기 전 76년간 이곳에는 셰키왕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다. 카라반 사라이가 성황을 이룰 때였다. 왕국의 통치자인 후세인 무스타크 왕은 풍광이 좋은 곳에 40개의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한 곳만 남아 있다.
  
 
카라반 사라이와 공방거리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작은 성채가 나타난다. 그 안에는 코카서스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셰키왕의 여름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1797년에 지어졌다. 궁전 앞에는 정원수로 심은 나무가 좌우를 지키고 서 있다. 높이가 42m, 둘레가 14m나 된다. 이 궁전의 역사를 간직한 이 나무는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있다.

 

▲화려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인 ‘세베케’. 베니스 무라노산 유리로 만들었다.
  

  궁전 내부는 관람인원 수가 정해져 있어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밖에서 보는 궁전은 그리 아름다운 축에 들지 못한다. 하나 내부를 보는 순간, 그러한 생각은 번개처럼 사라진다. ‘세베케’라고 부르는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호두나무로 만든 작고 세밀한 5500개의 틀에 박혀 환상적인 정취를 연출한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무라노산() 색유리로 만들었는데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이드가 설명한다.
  
 
“천장과 벽의 그림들은 시인 나짜미의 글을 바탕으로 그린 것입니다.
  
 
“엄청 화려하네요. 당시에 그린 것인가요?
  
 
“네. 템페라 기법이라고 하는데, 안료에 달걀노른자를 섞어서 변하지 않습니다.
  
 
왕의 집무실 천장에는 사자 두 마리가 왕관을 받드는 문양이 선명하다. 벽에는 사냥하는 모습, 몽골과의 전쟁 장면 등이 보인다. 접견실에는 용과 꽃의 그림이 화려하다.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궁전 내부의 천장 벽화.
  

  독특한 그림이 보인다. 왕관을 쓴 사자가 생선을 밟고 있고 뱀이 사자를 물려고 하는 그림이다. 왕 스스로가 항상 자만과 나태를 경계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독서실도 있는데 흰색과 하늘색뿐이다. 잡념을 없애고 독서에 집중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왕비실은 화려한 색상의 꽃과 새들의 그림으로 가득하다.
  
 
물을 끌어들여서 분수대를 만든 것이 특이하다. 가습과 냉방의 효과도 있다고 하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별로 대단할 것 없어 보이던 총 6개 방의 2층짜리 궁전의 내부는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코카서스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프랑스의 문호 알렉산드르 뒤마는 이 궁전을 둘러보고는 “위대한 신이시여!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유적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셰키왕의 여름궁전을 드높이는 홍보문구가 되어 오늘도 이곳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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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도 귀가 있다”

 ▲여름궁전 입구의 대통령 사진. 일함 알리예프는 구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공산당 제1서기 출신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강권통치를 하고 있다.

 

  궁전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길가에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의 사진이 큼지막하다. 그는 부친인 게이다르 알리예프에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부친은 소련 시절 이곳 공산당 제1서기였다. 소련 붕괴 후 독립한 국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그도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됐다. 2003년 부친이 사망하자 아들 일함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 역시 부친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독재정치를 행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 3선’을 금지한 헌법조항을 폐지했다. 올해 2월에는 부인을 부통령에 임명했다. 4월에는 6개월을 앞당겨 대통령 선거를 실시, 90%에 이르는 찬성표를 얻어 4선 대통령이 됐다. 임기는 2025년까지다.
  
 
“아버지와 아들이 근 50년에 걸쳐서 독재를 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나요?
  
 
“경제가 많이 좋아졌어요.
  
 
“정치가 발전해야 진정한 민주국가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우리나라 속담에 ‘땅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민들은 구()소련의 잔재가 배어 있는 독재정치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려 한다. 비밀경찰이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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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든 탑의 전설

 ▲바쿠로 가는 길목의 목가적인 풍경.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로 가는 길목은 몇 개의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 이따금씩 만나는 가판에는 둥글고 알록달록한 모양의 과자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이곳의 전통과자인 ‘할바’다. 할바는 꿀과 호두를 넣어서 만든다. 너무 달아서 홍차와 함께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생김새와 맛이 꼭 우리나라의 반대기 엿과 같다.
  
 
바쿠의 외곽에 접근하자 황량한 땅에 모래바람이 뿌옇다. 바람 사이로 여기저기 낮은 집들이 빼곡하다. 바쿠가 왜 ‘바람의 도시’인지 초입에서부터 실감한다. 하지만 모래바람과 뙤약볕보다 더 끔찍한 것은 도로와 마을, 골목 사이를 무질서하게 질주하는 고압선들이다.

 

▲바쿠성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메이든 탑.
  

  바쿠는 12세기 즈음에 실크로드의 중요한 중개무역 장소였다. 바쿠의 중심부에 위치한 구시가지에는 고대 실크로드의 유적들이 여럿 남아 있다. 11세기 건립된 시그니갈라 미나레트(첨탑)와 성벽,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탑과 목욕탕, 15세기의 시르반샤 궁전 등이 중세도시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메이든 탑 주변의 실크로드 교역터에는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원통형 모양의 독특한 탑인 메이든 탑은 성곽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탑은 페르시아, 아랍, 터키, 러시아 등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바쿠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역사적인 유적에는 전설이 있다. 이곳 메이든 탑에는 어떤 전설이 있을까. 가장 유력한 전설은 이곳을 다스리는 왕이 공주인 메이든을 너무 사랑했다고 한다. 이에 공주가 탑을 세워달라고 하고 탑이 완성되자 꼭대기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광적(狂的)인 사랑이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고대 실크로드의 교역 장소였던 바쿠고성.
  

  탑 주변부터 바쿠고성(古城)까지 이어진 길목에는 옛날 상인들이 물건을 거래하던 장소부터 그들이 숙소로 머물던 카라반 사라이까지 실크로드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카라반 사라이는 지금도 레스토랑으로 성업 중이다. 이곳에서 만찬과 함께 공연을 즐기며 당시 번화했던 거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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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지어진 시르반샤 궁전은 당시 수도였던 셰마키에서 지진이 나자 바쿠로 옮겨와서 다시 지은 것이다. 왕의 집무실과 접견실, 연회장과 거주공간, 사원과 첨탑 등이 조밀하게 들어서 있다. 궁전 건물 벽에는 총탄의 흔적이 선명하다. 18세기에 제정러시아 해군의 공격에 성벽이 파괴됐는데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남겨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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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 바다인가, 호수인가

▲바쿠의 랜드마크인 프레임타워. 밤이면 조명쇼를 한다.

 

  구시가지를 벗어나면 현대 바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프레임타워가 있다. 일명 불꽃타워로 알려진 이곳은 세 개의 건물이 타오르는 불꽃 형상으로 이뤄진 건물이다. 이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성됐다. 건물 외곽은 LED조명으로 만들어 밤마다 조명쇼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물 모양과 조명이 한데 어울려 수도 바쿠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산유국임을 자랑하는 ‘불의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카스피해는 세계 3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보고(寶庫)이다. 카스피해 동쪽 카자흐스탄에서 채취된 원유는 악타우항에서 유조선에 실려 반대편의 아제르바이잔 바쿠항에 도착한다. 바쿠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이 시작되는 곳이다. 바쿠에서 출발하는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세이한 항구에 도착한다.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고 부른다. 내해인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이동하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유전.

 

  구소련 시절에는 카스피해의 에너지를 소련과 이란이 양분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영유권을 주장하자 이들의 권리는 각 20%로 축소됐다. BTC 파이프라인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정치적 영향력 등을 고려한 국가와 기업들이 11년간의 공사를 거쳐 2005년에 완성했다.
  
 
카스피해를 둘러싼 유전 쟁탈전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볼 것이냐, 호수로 볼 것이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바다로 본다면 해양법에 따라 해안선이 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 유리하다. 호수로 본다면 5개의 나라가 각각 똑같이 20%의 지분을 갖게 되어 나머지 3개국에 유리하다. 해당 국가들은 여러 번에 걸쳐 영유권 문제를 협의했지만 아직까지 해결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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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흉내 내기 

프레임타워 옆, 바쿠만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순교자의 길이 있다. 이곳은 우리의 국립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국가를 위해 전사(戰死)한 이들이 묻힌 곳이다. 이곳에 서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바쿠시내와 타워크레인이 즐비한 항구 그리고 카스피해를 오가는 선박들을 볼 수 있다.
  
 
공항으로 가기에 앞서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향한다. 대로변 옆의 작은 길들은 모두가 벽으로 가로막혔다. 10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30분이나 걸린다.
  
 
“도로를 막아놓았는데 무슨 행사가 있나요?
  
 
“지난달에 F1그랑프리 대회가 있었어요.
  
 
“끝난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네요?
  
 
“준비하느라 몇 달, 치우느라 또 몇 달. 우리도 정말 불편해요.
  
 
코카서스 3개국은 모두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했다. 오랫동안 소련의 영향을 받아왔던 까닭에 아직도 그때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는 다르다. 정치체제는 아직도 구소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낡은 건물들은 오일머니의 힘으로 지워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오늘도 수도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불편함은 아랑곳없이 유럽인들이 열광하는 자동차 경주를 유치하며 스스로 유럽 선진국들의 모습을 흉내 내려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