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64/ 중국12/ 성과 도시6/ 허베이성 - 후난성(호남성, 湖南省) - 대륙의 얼굴
★허베이성 (하북성, 河北省)
◆ 베이징을 위한 베이징에 의한
1 冀 ‘800년 수도권’의 비애
허베이(河北)성은 중원의 젖줄 황하의 북쪽임을 뜻한다. 남부엔 드넓은 기중(冀中)평원이 펼쳐지고 북부의 산과 고원은 내몽골의 고원과 이어진다. 중원과 북방이 만나는 땅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슬픈 운명을 살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청더(承德).
외국인은 우리 숙소에 머물 수 없어요.”
“이름이 ‘국제’인데 외국인이 머물 수 없다니요?”
“개업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정부의 외국인 체류 허용 허가가 안 났어요.”
허베이 산해관 ‘국제’ 숙소의 주인은 ‘국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황당한 소리를 했다. 외국인과 내국인 요금에 차등을 둬 관광수입을 올리려는 꼼수는 아닌 듯했다. 같은 중국인이라도 티베트, 신장, 홍콩, 마카오, 대만 사람 역시 머물 수 없단다. 수도 베이징이 지척이라 베이징에 잠입하려는 불순분자(?)를 막으려는 의도로 읽혔다.
명나라 관료 기순이 산해관에 남긴 글을 보고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산해관은 베이징에서 가까운 동북지역의 중진(重鎭)이며 화이(華夷)를 구분하는 곳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펴 간사하고 포악한 자를 막고 강역을 굳게 하는 곳이다.”
수도 베이징을 지키고 보필하는 수도권 도시답다.
허베이(河北)성의 약자는 바랄 ‘기(冀)’자다. 허베이는 중원의 젖줄 황하의 북쪽임을 뜻한다. 허베이의 남부엔 드넓은 기중(冀中)평원이 펼쳐지고, 북부의 산과 고원은 내몽골의 고원과 이어진다.
허베이는 이렇게 중원과 북방이 만나는 땅이다. 허베이의 약칭인 ‘기(冀)’를 풀어보면 ‘북방 유목민족과 중원 농경민족이 함께(共) 살아가는 북녘(北) 땅(田)’이 된다. 중국어로 기방(冀方)은 중국 북방을 뜻하니, ‘기(冀)’ 자를 이 ‘이민족(異)이 사는 북방(北)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三祖聖地
중원의 농경민과 북방의 유목민이 부딪치는 곳이다 보니, 허베이에는 예부터 전쟁이 많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서 황제는 판천(阪泉)에서 염제를 격파하고, 탁록(涿鹿)에서 치우를 꺾었다. 두 격전의 현장인 탁록현은 중국의 세 시조, 황제·염제·치우의 자취가 깃들었다 해서 삼조성지(三祖聖地)로 불린다.
우임금은 치수 사업을 하며 천하를 아홉 주(九州)로 나눴다. 이때 기주(冀州)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 기주는 주로 산시(山西)성의 영역이라 오늘의 영역과는 크게 달랐고, 한나라 이후 허베이의 비중이 높아졌다.
춘추전국시대 허베이 남부는 북방의 강자 진(晉)나라의 영역이었고, 북부는 연(燕)나라 영역이었다. 진이 셋으로 쪼개졌을 때 조(趙)나라는 허베이의 한단(邯鄲)을 수도로 삼았다. 촌사람이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어설프게 따라 하다 걷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고사성어 ‘한단지보(邯鄲之步)’는 한단이 얼마나 풍요롭고 세련된 문화의 중심지였는지를 짐작게 한다.
진(晉)·조(趙)부터 중원에 비해 이민족의 색채가 짙었으니 그보다 더 북쪽에 있던 연나라는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먼 훗날 연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 조수인 진무양이 겁을 먹고 벌벌 떠는 바람에 산통을 깼다. 형가는 진시황의 의심을 풀기 위해 이렇게 변명했다.
“북방 오랑캐 땅의 천한 사람인지라 천자를 뵌 적이 없어서 떨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연이 전국시대 말기까지 오랑캐 취급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起伏의 역사
연의 역사는 기복이 심했다. 연의 명군 소왕(昭王)이 즉위하기 전 연의 정치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였다. 오죽하면 반전주의자인 맹자마저 제나라 선왕에게 연을 쳐 연의 백성들을 구하라고 했을까. 제나라 선왕은 과연 두 달도 안 되는 사이 연을 정복했지만 연의 피폐한 상황을 구제하지는 않았다. 연의 백성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 제 선왕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는데 왜 반란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하자, 신하 순우곤은 제 선왕의 정치가 실패했음을 일깨워줬다.
“왕께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시나, 사람이란 굶어도 죽고 얼어도 죽으니 굳이 칼날로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록 혼란한 상황에서 즉위한 소왕은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힘을 기른 후 제(齊)를 쳤다. 이때, 연의 명장 악의는 제의 7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동방의 강대국 제는 단 2개의 성만 남긴 채 5년간 사실상 멸망 상태를 유지했다. 연 소왕이 등용한 또 한 명의 명장 진개(秦開)는 동호(東胡)를 공격해 만주의 1000여 리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소왕이 죽자마자 연의 전성기는 거짓말처럼 끝난다. 악의를 시기한 혜왕이 악의를 몰아내자 제는 순식간에 전 영토를 수복하고, 연은 다시 약소국이 됐다. 이후 연의 행보는 한심했다.
진(秦)이 장평대전에서 조(趙)의 40만 대군을 몰살하자 연은 조에 사신을 보내 위로하는 한편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신이 “조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었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니 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연은 이익에 눈이 멀어 조를 침공했다. 조는 이미 장정의 대부분을 잃은 데다 5대 1의 전력으로 위태롭게 싸워야 했지만, 조의 명장 염파는 연을 격파하고 수도 계(薊, 베이징)를 포위했다. 연은 5개 성을 내주고서야 휴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염파가 실각하고 방난이 후임자가 되자, 연의 장수 극신은 “방난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가 방난에게 전사하고 2만 군사를 빼앗겼다. 연은 신의를 잃었고, 이익은커녕 손해만 보며 나라가 기울어갔다.
참새가 죽어도 짹한다던가. 연은 멸망의 위기 앞에서 진시황 암살을 꾀했다. 진(秦)이 본격적으로 사방을 정복하며 천하통일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진이 연을 치는 것은 화로의 숯불이 가벼운 기러기 깃털 하나를 태우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의 태자 단이 호걸 형가에게 진시황 암살을 의뢰하자 형가는 비장하게 노래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바람소리는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사나이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2 협객의 아이콘
형가는 안타깝게도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고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형가는 칼 한 자루로 강포한 권력과 맞서는 ‘협객(俠客)의 아이콘’이 됐고, 그의 노래는 ‘비분강개의 노래’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최약체로서 최강의 심장을 대담하게 노린 허베이는 ‘비분강개하는 장사의 고향’으로 명성을 떨쳤다.
허베이 협객은 후한 말 난세에 빛을 발했다. 일세의 효웅(梟雄)인 유비와 연인(燕人) 장비는 탁현 출신이고, 조운은 상산(常山) 출신이다. 굳센 의리로 똘똘 뭉친 이들은 맨 몸으로 당대의 군웅과 치열히 싸웠고 끝내는 나라를 연다.
다만 ‘흙수저’이던 이들이 명성을 떨치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허베이를 지배한 영웅은 ‘금수저’인 원소였다. 원소는 후한 말 최고의 명문인 원씨 가문의 수장인 데다 자신의 능력도 뛰어나 당대 군웅 중 으뜸이었다. 그런 원소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 허베이다. 청년 원소는 절친한 친구인 조조에게 자신의 야망을 밝혔다.
“나는 허베이를 근거로 하여, 연(燕)과 대(代)로 울타리를 삼고, 북으로 사막에 흩어져 사는 무리까지 아우른 뒤에 다시 남쪽으로 천하를 다툴 작정이네.”
그러자 조조는 당차게 말했다.
“나는 천하의 슬기와 힘을 모아 도리에 맞게 다스려 가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하필 땅의 위치나 넓이겠는가.”
말은 통쾌했지만, 원소는 확실히 당대 최강의 군벌이었다. 기주에서 착실히 힘을 기른 원소는 물량과 보급에서 조조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원소의 참모 허유의 기밀 정보 덕분에 조조는 원소의 보급을 끊고 승리한다. 승전 후 원소 진영에서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건함이 나오자 조조는 문서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태워버리며 말했다.
“원소가 강성할 때에는 나조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마음이 흔들렸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느냐?”
그만큼 조조의 승리는 본인도 믿기 힘든 기적이었다.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인 관도대전에서 이긴 조조는 원소 대신 중국의 최강자로 자리를 굳혔다.
안에서 무너진 산해관
▲산해관 부근의 연새호(燕塞湖). 댐이자 저수지, 관광지 역할을 한다.
중국의 역사는 중원 중심의 역사다. 난세가 끝나자 허베이는 동북 변방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이 강성해지면 중원을 뒤흔들 거라던 곽가의 예측은 5호16국과 요·금·원 등 유목민족의 제국을 통해 실현된다.
북방 이민족들이 패권을 잡자 허베이는 매우 중요해진다. 허베이가 유목민족의 근거지인 북방과 가깝고, 한족문화권으로서 경제와 문화가 발달했으며, 남방 공략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후 현재까지 800년 동안 줄곧 베이징은 천하의 중심이 됐고, 자연스레 허베이는 ‘800년 수도권’이었다.
수도는 나라의 심장이다. 단 한순간도 기능이 멎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도권 허베이는 수도 베이징의 방패가 돼야 했다. 산과 바다를 연결하며 북방 유목민으로부터 베이징을 보호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천하제일관 산해관(天下第一關 山海關)이 단적인 예다. 산해관은 동쪽으로는 태양을 맞이하고(旭迎), 서쪽으로 베이징에 조배를 드리며(京朝), 남쪽으로 바다와 통하며(通海), 북으로 첩첩이 이어진 산을 바라보는(巒觀) 요충지다. 연암 박지원은 산해관을 보며 찬탄했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 크기를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르며, 산해관 밖의 장대(將臺)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모른다.”
한창 떠오르는 태양 같던 기세의 청나라도 자력으로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 산해관이 청의 맹공을 버티는 동안, 산시(陝西)의 풍운아 이자성은 민란을 일으키고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어이없게도 이자성은 베이징을 불 지르고 약탈해 민심을 잃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 청군을 맞아들인 후 이자성에게 패배를 안겼다. 산해관을 넘은 청군은 중국 전역을 석권한다. ‘위엄이 중국과 오랑캐를 누른다(威鎭華夷)’던 산해관은 허무하게도 내부에서 무너졌다.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신하들은 장성을 수리해 베이징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반대했다.
“역대 중국 왕조 모두 백성을 고생시켜가며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결국 내란이 일어나 망했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두가 합심하면 견고한 성과 같이 허물어지지 않는다(衆志成城))는 말처럼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국토 수호라는 주장이었다. 영명한 황제 강희제는 아름다운 대의명분과 실질적인 대안을 조화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겨 우리에게도 친숙한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바로 강희제의 만리장성이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제들이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피서를 즐기던 곳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초기 피서산장은 국제외교와 합동 군사훈련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피서산장을 보며 말했다.
3 다민족 연합국
▲자오산 장성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관광객들.
▲티베트 포탈라궁의 축소판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 청 황실이 여러 종교를 포섭하려고 지은 외팔묘(外八廟) 중 최대 사원이다.
▲열하 피서산장의 독서인.
“지형적으로 험하고 중요한 곳을 차지해 몽골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변방 북쪽의 깊숙한 곳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나서서 오랑캐를 막으려는 속셈이다.”
강희제는 48번이나 몸소 사냥에 참가했다. 이때의 사냥은 유희가 아닌 군사훈련이라 규율을 강조했다.
“1년에 두 차례 사냥을 하는 것은 오로지 무술을 연마하기 위함이니 병력 동원과 다를 바 없으며, 사냥터의 규율 또한 엄정해야 한다.”
비록 황족이라도 규율을 지키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면 처벌을 내렸다. 강희제가 움직이면 수많은 왕공대신이 함께 움직였고,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등 다양한 민족 역시 함께 사냥에 참가했다. 170개 천막은 내성이 되고, 250개 천막은 외성이 되는 장관이 펼쳐졌다. 사냥은 북방 유목민족에게 청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다국적 합동 군사훈련인 동시에 이곳으로 찾아온 북방인들과 교분을 나누는 친선 외교 무대였다.
강희제는 청에 충성하는 한 타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존중했다. 현판에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개 국어를 병기해 청이 다민족 연합국임을 알렸고, 라마교를 존중해 몽골족과 티베트족의 환심을 샀다. 피서산장엔 중국식 별궁·원림(苑林)과 유목민족의 천막이 공존했으며, 산장 주변에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뜬 보타종승지묘 등 외팔묘(外八廟)를 세우고 라마승을 국사(國師)로 대접했다.
이처럼 피서산장은 정치, 군사, 외교, 종교, 문화의 총화였다. 그러나 중국의 화려함 이면에는 항상 민초의 고통이 있다. 열하가 흐르는 청더(承德)는 원래 산골짜기 작은 마을인데 이 곳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피서산장이 차지했다. 황제의 산장행이 잦아지자 산장 주변에는 황제를 모시는 귀족, 관료, 몽골의 왕공 귀족이 살 저택이 들어섰다. 자연스레 현지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서 밀려나 좁고 복작복작한 빈민굴에서 살아야 했다.
直隸의 서글픈 운명
건륭제는 총명하긴 했지만 사치향락을 좋아했고, 강희제만큼 민초의 고통을 헤아리지는 않았다. 더욱이 청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황제라 자만심이 지나쳤다. 산업혁명에 성공하고 세계 최강을 향해 달려가던 영국의 대사 매카트니가 1793년 건륭제를 만난 후 통상교역을 요청하자 건륭제는 “천조(天朝)에는 없는 것이 없어 교역 따위를 할 필요가 없다”며 거절했다.
매카트니는 청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남겼다.
“청 제국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일류 전함에 비유할 수 있다. 과거 150여 년 동안 이 전함이 침몰하지 않은 것은 능력 있고 경각심이 강한 일부 군관들이 지탱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갑판 위에서 지휘를 맡을 인재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기율과 안전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매카트니의 예언은 50년도 안 돼 1840년 아편전쟁으로 실현됐고, 다시 20년도 안 돼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한다. 이때 함풍제는 피서산장으로 도망쳤다. 게다가 외교와 전쟁을 잊고 음악과 연극에 빠져들며 현실도피를 하다가 피서산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1912년 청은 멸망했고, 1933년 3만의 일본군은 열하를 접수해 피서산장을 일본군의 대본영으로 사용했다.
수도는 국가의 중심이다. 따라서 수도권이라는 말은 제법 영예롭게 들린다. 허베이는 명나라 이후 ‘수도 베이징에 직접 예속된다’는 의미로 ‘직예(直隸)’라고 불렸다. 직예. 그 말 속에는 아픔이 배어 있다. 필자가 잘 아는 허베이 친구는 ‘허베이는 가난하다’고 말한다. 나는 허베이 친구의 말에 의아해 질문했다.
“허베이는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2개를 품고 있어. 게다가 그 2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 1인당 GDP가 중국에서 가장 높은 톈진이야. 그런데 왜 허베이는 가난한 거지?”
“허베이는 그 2개의 도시에 너무 많은 걸 줬거든.”
4 대지진의 추악한 진실
▲황해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 라오룽터우(老龍頭).
▲산해관의 자오산에 쌓은 장성.
탕산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도 베이징에 예속된 수도권의 비애는 묻어난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3시 42분, 허베이 탕산(唐山)에서 리히터 규모 7.5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한순간에 160만 인구 중 24만여 명이 죽고, 16만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시 대부분이 파괴됐기 때문에 이 수치조차 축소·은폐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정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고 밝혔지만, 국가지진국의 일부 과학자들은 이미 7월 말에서 8월 초에 탕산 일대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976년 당시 중국에서는 저우언라이, 주더 등 걸출한 인물들이 세상을 떠났고, ‘위대한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곧 꺼질 생명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4인방과 화궈펑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였다.
이런 와중에 탕산 대지진을 예측한 보고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탕산 인근의 칭룽(靑龍)현 현장(懸長)은 주민들에게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알린 뒤 민병대를 조직해 순찰을 돌게 하고 지진 대처방법을 교육했다. 그 결과 7000여 채의 건물이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도 사망자는 1명에 불과했다. 그 1명도 심장마비로 사망해 지진이 직접적 사인은 아니었다. 칭룽현 현장은 인민영웅이 돼야 마땅하지만, 정부는 오히려 이 사실을 오랫동안 은폐했다. 칭룽현의 사례가 밝혀지면 지진 자체는 천재지변이지만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는 인재(人災)임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위정자들이 탕산 대지진의 경고를 무시하고 넘어간 이유는 탕산이 중요하지 않은 도시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이리라. 당시 탕산은 중국 면적의 0.001%, 인구의 0.01%에 불과했지만, GDP의 10%를 생산하는 핵심 공업도시였다. 중국 석탄 생산량의 5%를 차지했고, 전력 생산·철강·자동차·기계·시멘트·방직·도자기 등 수많은 기간산업이 있었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를 지진 때문에 베이징의 공장인 탕산 가동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탕산인들은 비로소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부모형제를 잃고도 꾹꾹 눌러온 통곡을 한 달여 만에 터뜨릴 수 있었다. 10월 6일 화궈펑은 4인방을 체포하며 탕산 대지진을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왕리보(王利波) 감독의 다큐멘터리 ‘얀마이(掩埋, 매장)’는 국가지진국 과학자들이 탕산 대지진의 조짐을 지속적으로 보고했는데도 정부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는 사회, 민초의 고통보다 과시적 성과를 우선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산해관 장성(長城)박물관은 만리장성을 극찬한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정신의 물질적 상징으로 문화교류 ·민족융합의 장이었고, 고대 노동인민의 피와 땀과 지혜의 결정체로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약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찬사가 지나쳐 궤변이 됐다. 만리장성은 한족과 북방 유목민과의 전쟁 때문에 탄생했고, 민초들의 피눈물로 지어진 괴물이다. 민초들은 만리타향에서 만리장성을 짓다 죽고, 싸우다 죽어야 했다. 상건은 애달피 노래하며 허무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위로했다.
“구르는 해골들은 장성의 병졸들인데, 해 저무는 모래밭에 재가 되어 흩날리네.”
민초의 피눈물
맹강녀는 머나먼 산둥성에서 산해관까지 노역으로 끌려온 남편을 찾아왔으나, 남편은 이미 공사 중에 죽었다. 맹강녀가 통곡하자 장성이 돌연 무너지며 엄청난 수의 백골이 쏟아져 나왔다. 공사 중 죽은 인부들이었다. 맹강녀는 백골이 사랑하는 사람의 피를 빨아들인다는 말을 듣고, 손가락을 깨물어 백골에 일일이 피를 떨어뜨려 마침내 남편의 백골을 찾았다. 맹강녀는 고향에 돌아와 남편을 장사 지낸 뒤 남편의 무덤 앞에서 굶어 죽는다.
중국 민초들은 맹강녀 설화를 통해 노역의 고통, 가족이 파괴되는 슬픔, 위정자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했다. 강희제는 민초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만리장성 대신 피서산장을 국방과 외교의 대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정부는 만리장성으로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 장성에 얽힌 대립과 적대의 역사를 무시하고 민족 친목과 융합의 장이라고 주장한다. ‘옛 전쟁들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 내전’이라며 오늘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과거를 재단한다. 장성을 짓느라 희생된 민초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고 위대한 성과만 강조한다. 너희 인민들도 위대한 중화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이나 하라는 소리다.
산해관 장성박물관은 중국 정신세계의 명백한 퇴행을 보여준다. 옛 시인만큼 진실하지도 않고, 맹강녀와 민초의 원혼을 위로하지도 않으며, 강희제의 애민(愛民)정신도 없다. 중국이 이처럼 인민을 외면하고 ‘위대한 성과’에만 집착하는 한 중국은 부강한 나라는 될 수 있어도 아름다운 나라는 될 수 없다.
김 용 한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텐진
톈진(天津)은 ‘천자의 나루터’였다. 명(明)나라 영락제가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톈진은 베이징의 목줄이자 항구였다. 수도를 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서양 열강과 중국이 충돌한 공간이다. 톈진은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그래서 톈진 사람들은 ‘톈진 무인(武人)’ 곽원갑을 그리워한다.
▲하이허 강변에는 유럽식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姐姐講一下.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인과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해졌지만, 아무래도 중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다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톈진 여행 중 발랄한 스무 살 아가씨를 만났다. 내가 인사차 “간마야(干嘛呀)?”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내 표현이 어색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누나가 가르쳐줄게(姐姐講一下). ‘간마야(干嘛呀)?’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하는 거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고, 일반적으로 ‘뭐해?’라고 물어볼 때는 ‘간마너(干嘛呢)?’라고 해.”
내 나이의 반밖에 안 되는 어린 친구가 천연덕스럽게 ‘누나’라고 자칭하자 헛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발랄하고 귀여우니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자부심이 강해 20대 중반 청년도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이 어르신네가 어찌 네 말을 듣겠느냐”고 말하는 곳, 초등학교 꼬마 아가씨에게도 ‘누님(大姐)’이라고 불러줘야 하는 곳, 톈진이다.
영락제의 루비콘
톈진(天津)의 약자는 ‘나루 진(津)’ 자다. 톈진이란 ‘천자의 나루터’라는 뜻으로, 명나라 영락제가 여기서 배를 탄 것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루비콘 강을 건넜듯,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영락제로 등극했다. 즉, 톈진은 영락제의 루비콘이다.
톈진은 아홉 줄기 강물이 황해로 흘러가는 교통의 요지다. 일찍이 수양제가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을 때부터 베이징의 관문도시 톈진은 크게 발달했다. 특히 송대(宋代) 북방 유목민족 국가들이 베이징을 중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톈진의 중요성도 급부상했다. 톈진은 강남의 물자를 베이징에 끌어오기 위한 물류도시였다.
톈진은 영락제와 인연이 깊다. 주원장은 원을 물리치고 명을 건국하며 장쑤성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송대부터 강남은 이미 중국 경제의 중심이었으나, 북방 국가들이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의 중심은 되지 못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우며 난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일치시켰다. 주원장이 죽고 손자 건문제가 황위를 계승하자, 건문제의 삼촌인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체는 톈진에서 수로를 따라 진군해 ‘정난의 변(靖難之變)’에 성공한다.
주체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민심은 싸늘했다. 대의명분도 없이 황제가 되고 싶어 일으킨 정변이었다. 명분 없는 정변이라 당대의 관료·지식인들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황제의 스승이었다. 영락제의 측근들은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글 읽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며 살려주길 청했고, 영락제 역시 그의 재주와 명성을 아껴 방효유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영락제의 제의를 단칼에 자르고 “연적(燕賊)이 위(位)를 찬탈했다”며 돌직구를 날렸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일가 친척에다 지인들까지 873명을 방효유 앞에서 죽이고, 끝으로 방효유도 죽였다. 유배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을 통해 명나라 초기 인재들이 대거 사라졌다. 더욱이 당시 문화의 중심이 강남이기에 처형당한 사람은 대부분 강남의 명사들이었다. 강남의 민심은 더더욱 영락제에게 등을 돌렸다.
조계지 톈진의 비애
영락제의 책사 도연(道衍)은 정난의 변 직후 고향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20년 만의 금의환향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여든 살에 가까운 도연의 누이는 도연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이런 초라한 집에 오실 용무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잘못 아시고 오셨겠지요.”
민심이 이렇게 차가워지자 영락제는 자신의 본거지 베이징을 수도로 삼으며, 강남의 물자를 끌어올리기 위해 대운하를 개수했다. 톈진은 자연스럽게 교역·물류의 중심지가 됐다. 영락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는 출병기지, 황제가 되고 난 후에는 ‘물류센터’가 된 셈이다.
베이징의 목줄로서, 군사·경제적 요지로서 톈진은 매우 중요했다. 베이징을 지키려면 톈진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베이징에 들어오려면 톈진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근대에 톈진을 지키려는 중국과, 톈진에 들어오려는 서양 열강은 첨예하게 맞부딪쳤고, 톈진은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동시에 충돌하는 공간이 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는 걷기 좋은 길이다. 드넓은 강변엔 최첨단 고층건물과 함께 근대 유럽식 건축물들이 늘어서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다. 유럽풍 건축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낸다. 톈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서개천주교당(西開天主敎堂)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천주교인과 놀러온 구경꾼들이 모두 즐겨 찾는다. 오늘날에는 서양적 가치와 중국적 가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 역사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특히 조계지 톈진은 커다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거대한 생산기지이자 탐나는 시장이다. 서양 열강은 중국의 귀한 상품을 얻고 중국 시장에 물건을 팔려 했으나, 당시 세계경제의 으뜸이던 중국은 폐쇄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중국은 서양인을 천박하게 돈만 밝히는 오랑캐 장사꾼으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로 봤다. 상호 경멸은 갈수록 심해져 중국은 서양인을 털북숭이 원숭이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아편 피우는 동양 원숭이로 봤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니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안하무인 정복자
해가 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간단히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안이한 청 조정은 아편전쟁을 베이징에서 머나먼 변방 광둥성에서 일어난 해프닝쯤으로 인식했다. 영국은, 청을 진정으로 굴복시키려면 베이징을 점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억지 트집을 잡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과연 수도권 점령은 청나라에 크나큰 충격을 줬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톈진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함풍제는 바로 베이징을 버리고 열하 피서산장으로 줄행랑쳤다.
1858년 톈진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일단 끝났지만, 청 조정이 침략자들을 비난하며 조약 이행을 거부하자 1860년 영·프 연합군은 다시 톈진에 상륙해 베이징을 점령했다. 새로 베이징 조약을 맺으며, 톈진 조약 때만 해도 개항지가 아니었던 톈진도 개항한다.
톈진항은 열렸지만, 톈진인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톈진인의 눈에 톈진·베이징 조약은 불합리했고, 서양인은 정복자처럼 안하무인이었다. 특히 서양의 위세를 업은 교회는 무척 고까웠다. 중국 민중은 ‘톈주자오(天主敎)’를 ‘주자오(猪叫)’, 즉 ‘돼지 멱따는 소리’로 바꿔 불렀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교회는 고아원 운영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는 자선사업이기도 했지만, 선교 활동이 어려운 중국에서 신도를 확보하기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더욱이 죽어가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엔 중요한 실적이어서, 곧 죽어갈 아이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아를 데려오면 사례금을 주자 불량배들은 민가의 아이들을 유괴해 사례금을 받고 교회에 넘겼다. 중국인의 눈에는 이것부터가 인신매매로 보였는데, 교회에서 죽는 아이가 많자 의혹이 증폭됐다.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심장, 눈 등 장기로 약재를 만든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면서 중국 관청도 수사에 나섰다.
조사 과정에서 중국 관청, 중국인, 서양인들이 충돌했다. 프랑스 외교관이 중국인을 총으로 쏴 죽이자 격분한 중국인들이 서양인과 중국 기독교인 20여 명을 죽이고 교회, 영사관, 고아원을 불태웠다. 1870년의 톈진 종교사건은 청이 프랑스에 46만 냥을 배상하고 톈진 지부·지현을 면직했으며, 20명의 난동자를 처형하는 것으로 끝났다. 총을 먼저 맞았는데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고 여러 명이 처형당하자 중국인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8대 1의 싸움
제아무리 ‘선박은 견고하고 화포의 성능은 우수하다(船堅砲利)’지만 결국 서양인은 ‘하찮은 재주를 가진 교활한 무리’에 불과했다. 왜 찬란한 문명을 가졌고 예의범절을 숭상하는 중화가 인간의 도리 따위에는 관심 없고 돈만 밝히는 오랑캐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됐는가.
답은 간단하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는 군사력을, 백성은 체력을 길러야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전에는 어느 중국인이 조계지의 외국 여자가 공놀이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저 여자는 공을 차면 돈을 얼마나 받기에 매일 저처럼 힘들게 사나?” 그러나 이제 체육은 나라를 구원하는 길이 됐다. 해군사관학교인 톈진수사학당(天津水師學堂)은 생도들에게 검술, 봉술, 권투 등을 가르쳤다. 논객들은 체력을 국력과 동일시했다.
“개인이 약하면 사회 진보에 방해가 된다. (…) 이것은 당연한 자립의 의무, 생존의 원칙이다.”
또한 중화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중국인들은 서양·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중국 고유의 것을 고집했다. 중국 전통문화와 체육을 강조하는 두 흐름이 합쳐져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중국무술이었다.
상무(尙武)의 기풍 속에서 톈진의 ‘무인(武人) 곽원갑’은 높은 명성을 떨쳤고,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단체는 무술을 수련하며 인기를 모았다. 무술을 수련하면 기공으로 칼과 총알도 튕겨낼 수 있다는 과장은 무술로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반외세 감정과 결합했다. 급기야 1899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당대 최강국들이 한데 뭉쳤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8개국 연합군이었다. 이들은 각기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식민지를 지배했고, 두세 나라가 연합해 다른 연합국들에 맞선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1개국만을 상대로 한꺼번에 8개국이 뭉친 적은 없었다. 제국주의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열강은 뭉쳤건만 중국은 오히려 분열했다. 서태후와 의화단원들이 열강에 맞섰지만, 광둥의 리훙장(李鴻章), 산둥의 위안스카이(袁世凱), 후베이의 장즈퉁(張之洞) 등 당대의 실력자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의화단을 민란집단으로 여겼고, 의화단 운동도 가망 없다고 봤다.
이들의 예측대로 무술 실력만 믿은 의화단은 열강의 총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이때에도 8개국 연합군은 톈진에 상륙해 베이징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시안(西安)으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난 후 톈진은 승리한 8개국에 벨기에를 더한 9개국의 조계지가 됐다. 제2차 아편전쟁과 유사하게 진행됐으나 결과는 훨씬 비참했다.
窮則變 變則通
▲톈진의 명물 진흙인형(泥人形)은 도심 곳곳에 보인다.
▲톈진 우다다오(五大道) 거리.
▲이탈리아풍경구의 마르코폴로 광장.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던가(窮則變, 變則通). 가장 중국적인 방식으로 서양을 물리치려 했으나 참패했다. 이제 남은 길은 과감히 전통을 버리고 서양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신문물이 중국을 지배했다. 그림은 사진으로, 그림자극(劇)은 영화로, 청동거울은 유리거울로 변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고방식의 변화였다. 많은 중국인이 전통 관념을 버리고 서구적 가치를 수용했다. 일례로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여행을 두려워했다. 중국은 땅이 너무 넓고 별의별 사람이 워낙 많기에, 중국인은 집 떠나기를 겁냈고 꼭 가야 한다면 길일(吉日)을 택해 움직였다. 그러나 근대식 창가(唱歌)는 이런 관념을 조롱했다.
“세상사 기구해도, 도처에 사람들이 다니네. 가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면, 다시 물러나면 되지 않는가. 만약 미로를 만나면, 입을 열어 물어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힘써야지. 길흉이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 기선은 물로 다니고, 마차는 육지를 다니네. 천리를 오가는데도 참으로 빠르도다. 갖가지 속된 금기(禁忌)들 모두 떨쳐내고, 오로지 서양 사람들의 장점을 따라 배우세.”
서양을 추종하는 분위기는 근대 속담에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학생은 속성 3년 공부면 천하를 다닐 수 있으나, 수재는 3년을 더 공부한다 한들 촌보도 움직일 수 없네.”
이 말은 한나라의 대학자 동중서의 고사를 빗댄 말이다. 동중서가 하도 열심히 공부하느라 ‘3년 동안 집안의 정원도 보지 못했다(三年不窺園)’는 고사는 수천 년간 중국 지식인의 귀감이 됐으나, 이제는 ‘퇴물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서양 문물을 배우고 세계를 두루 다니는 유학생이 돼야 했다.
톈진 조계지는 세계 각국의 은행이 들어차 국제금융 중심지가 됐다. 9개국 조계지답게 다양한 풍격의 건축물이 들어서 ‘만국 건축박물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청말의 실력자 위안스카이는 톈진에 중국 최초의 신식 경찰을 만들었고, 중국 최초의 민주적 지역의회 선거를 감독했다.
근대 톈진은 중국 제2의 공업도시였고, 1949년 이전만 해도 상하이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오늘날에도 톈진은 1546만 명이 사는 대도시다. 인구밀도는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중국 본토(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 3위이고, 1인당 GDP는 1위(2014년 1만6874달러)다. 중국에 4개뿐인 직할시 중 하나임에 부끄럽지 않은 실적이다.
‘베이징의 무엇’
톈진은 중국 정치의 중심 베이징, 경제의 중심 상하이, 내륙 제일의 메트로폴리스 충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톈진이 이만큼 성장한 것은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톈진의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도 베이징과 가깝기 때문이다.
톈진은 베이징과 불과 117km 거리에 있다. 자동차로 한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시속 300km의 고속철을 타면 30분 만에 도착한다. 중국이 폐쇄적이고 교통이 불편할 때 톈진은 베이징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매우 중요했지만, 베이징으로의 접근성이 높아진 지금은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
톈진은 톈진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베이징의 무엇’으로서만 존재한다. 톈진은 베이징이 바다로 오갈 수 있는 베이징의 항구다. 톈진은 베이징에 비해 인구가 적고 생활환경이 쾌적하며 물가가 싸다. 그래서 베이징인은 주말에 톈진에 와서 바람을 쐬거나 쇼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즉, 톈진은 베이징의 휴식처이자 할인 쇼핑센터다.
베이징, 톈진, 허베이를 묶어서 ‘징진지(京津冀)’ 지역이라 한다. 수도권이긴 하되 강남의 경제력에 밀려 체면이 서지 않자 정부는 수도권을 발전시키기 위해 ‘징진지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런데 세 지역이 서로 협력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을 나눠 먹는 제로섬 게임처럼 경쟁하는 탓에 성과가 지지부진한 편이다.
수도 베이징은 돈 되고 폼 나는 3차 산업으로 가려고 ‘3고(高)1저(低)’ 기업(노동력·자본 투입, 에너지 소모, 오염 물질 배출은 많고 효율은 낮은 기업)들을 톈진과 허베이가 가져가길 원한다. 톈진과 허베이는 당연히 부루퉁하다. 베이징이 그간 징진지 일대의 인재, 자원, 우수 기업, 고부가가치 산업들을 몽땅 독차지하고도 이제 와서 힘들고 돈 안 되는 것들만 떠넘기려 한다고 원망한다.
빈하이 대폭발
허베이는 워낙 낙후돼 있기에 협의에 따라 여러 산업을 받아들여 발전을 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톈진은 이미 상당히 발전했고, 베이징과 산업·경제노선도 비슷하며, 시민들의 요구 수준도 높다. 베이징과 허베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격이다. 톈진시의 한 간부는 “베이징과의 합병 이외에 톈진을 발전시킬 방도가 없다”고 탄식했다. 숱한 저발전 지역에 비하면 배부른 엄살이긴 해도, 베이징에 치여 사는 톈진의 고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북아 국제물류·항운의 중심으로 거듭나려는 톈진의 야망은 빈하이 신구(濱海新區)에서 드러난다. 톈진 빈하이 신구는 1980년대 광둥성 경제특구, 1990년대 상하이 푸둥 신구를 잇는 핵심 경제특구로, 환발해경제개발구의 중심이다. 2010년 말 이미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중 285개 회사가 투자하고 사무실을 여는 등 외국인 직접투자(FDI) 성과도 눈부셨다. 미국 보잉사와 함께 세계 항공시장을 양분하는 유럽 에어버스 항공사는 빈하이에 공장을 세웠다.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고급 제조업을 성장시키고 싶어 하던 고향 톈진의 숙원을 풀어준 셈이다.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이던 빈하이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 8월 12일 밤 빈하이에서 발생한 대폭발 사고가 그것이다. 근처 빌딩에서 폭발 동영상을 촬영하던 사람은 잠시 후 두 번째 대폭발이 일어나자 그 충격파로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군 채 천장만 보여주던 휴대전화는 옆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려줬다.
“사람이 쓰러졌어!”
거대한 화염은 불의 신이 강림한 것 같았고, 시커먼 버섯구름은 핵폭탄이 떨어진 듯했다. 다음 날 아침, 톈진항 야적장에 빽빽하게 주차돼 있던 새 차들은 불에 타 잔해만 남았다. 화재 현장의 검은 잿더미는 지구의 심연으로 통하는 구멍처럼 보였다. 여기에 고인 물웅덩이는 시안화나트륨이 기준치의 40배를 초과했고, 일부 지점에서는 800배를 초과했다. 사고 현장에서 1.8km 떨어진 한국 교민 아파트의 창문이 박살 난 장면이 한국 뉴스에 보도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에는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시안화나트륨은 비를 만나 시안화수소가 된다. 시안화수소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맹독성 기체다. 중국발(發) 미세먼지에 시달리던 한국 역시 시안화나트륨이 미세먼지와 함께 바람을 타고 와서 독극물 비가 되어 내릴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중국 규정에 따르면, 주거 지역 반경 1km 내에서는 위험물 창고를 설치할 수 없고, 시안화나트륨은 24t만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하이 물류회사는 이 모든 규정을 어겼다. 애초에 허가도 없이 창고를 운영했고, 아파트 단지가 사고 현장에서 불과 600m 안에 있었으며, 시안화나트륨을 700t이나 쌓아뒀다. 규정을 이렇게까지 어긴 배경에 위험물을 감독·규제하는 공안국의 묵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장멍판(張夢凡)은 당시 사건 현장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는 소방서에서 통신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최근 BBC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밤 10시 53분에 신고 전화가 걸려왔고, 동료들은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첫 폭발 후 동료들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 열폭풍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했는데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고, 소방서의 문, 지붕, 창문이 날아가버렸다.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취해 2명의 운전사와 교신이 됐으나 곧 연락이 끊겼다. 동료들의 휴대전화는 모두 끊겼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통제와 불신
▲톈진 음악정. 톈진의 상업·금융·행정 중심지인 허핑구(和平區)에 있다.
결국 그의 동료 8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중에는 19세 소방관도 있었다. 173명의 사망자 중 104명이 소방관이었다. 그러나 소방관 가족들은 정부가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며 오열했다.
사건이 터지자 루이하이의 즈펑(只峰) 사장은 정신적 충격으로 쓰러져 입원했으며 말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사건 조사 중 교통운수위원회 행정심비처 둥융춘(董永存) 처장이 추락사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톈진 빈하이 대폭발 사건으로 173명이 죽었고(8명은 실종), 797명이 부상을 당했다. 건물 304채, 차량 1만2428대, 컨테이너 7533개가 파괴됐고, 11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이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애초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재(人災)였으며, 주요 관계자들은 규정을 어기고 진상을 은폐했다. 사건 조사는 투명하지 않았고, 처리 방식은 매우 미적지근했다. 언론 보도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철저히 통제됐다. 사건 처리가 속 시원하지 않은데 언로를 막아놓으니 온갖 유언비어와 괴담이 횡행했다. 현지 공영방송 톈진위성TV가 뉴스 보도는 하지 않고 한국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을 방영한 것은 뭇 사람의 공분을 샀다.
여행 중 만난 중국인 친구는 “외국 언론은 톈진 폭발사고 희생자를 몇 명이라고 보도했느냐”고 내게 물었다. 외국 언론도 중국의 공식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고 말하자, 그는 석연치 않다는 듯 말했다.
“현장 근처엔 많은 거주민이 있었고, 세 차례나 투입된 소방수들은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어. 그런데 죽은 사람이 200명도 안 되겠니? 중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사망자 수보다 5배쯤 많을 거라고 생각해. 내 친구 한 명은 소방관으로 2~3년 일했는데, 톈진 폭발사고가 일어난 후 퇴직하고 딴 일자리를 구하더군.”
그의 말은 정확한 정보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해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러나 비단 톈진 폭발사고만이 아닌 다른 사건·사고에 대해서도 정부와 언론이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분위기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속성장의 그림자
▲톈진에는 고층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톈진 빈하이신구 폭발사고는 중국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중국은 외견상 화려하고 힘차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법규를 무시하며, 막대한 피해를 내고서도 진상을 은폐하고 언론을 통제한다. 물론 중국은 아직도 발전 도상에 있고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건·사고들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려면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불합리를 시정하는 한편, 죄지은 자를 엄격하게 벌하고 인민들과 소통·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사건이 계속 재발할 것이다.
중국의 2015년은 대형 인재(人災)의 해였다. 광둥성 선전에서는 산비탈에 위법으로 쌓은 건축·산업 폐기물이 무너져 7명이 죽고 70여 명이 실종됐으며, 상하이 황푸강에서는 새해맞이 레이저쇼를 보려고 31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가 35명이 죽고 43명이 다치는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주장 삼각주의 중심 선전, 장강 삼각주의 중심 상하이, 환발해의 중심 톈진에서 벌어진 인재는 중국 성장의 그림자를 드러냈다.
톈진 폭발사고 1주년이 돼가던 지난 8월 11일 후베이성 당양(當陽)시에서는 화력발전소의 고압 증기관이 폭발해 21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수도의 관문이며 환발해경제권의 중심으로 성장해온 톈진. 그러나 고속성장 이면에 수많은 숙제가 산적한 중국의 현실을 톈진 역시 공유하고 있다.
김 용 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볼거리
▲허베이성 중황학루
▲용진계
▲허베이성의 명소 - 장자구 쉬안화의 광장이 눈으로 덮여져 있다 15.1.14
▲명나라 때 조성된 촌락 - 중국 허베이성 위센현 시구바우 촌락
▲샤오창 현 샤오허 밍칭구제 거리 - 허베이성(호북성), 길이 160m 너비는 5m 양측에는 명,청 당시 벽돌과 나무로 쌓은 누각 300개가 들어서 있다.
▲바상초원 - 허베이성에서 네이멍구 고원으로 넘어가는 지대
↕스핑크스 - 허베이성 한 테마파크에 실물 크기로 제작된 스핑크스 14.5.13
◆일상
▲허베이성 폭우로 주민을 지게차로 구조 11.6.15.
▲홍수 11.6.19
▲폭우 후유증 - 허베이 12. 5. 29.
▲물에 잠긴 공원 -12.7.15.
▲허베이 우한 5년만의 폭우13. 7.7.
★헤이룽장성(흑룡강성, 黑龍江省)
◆볼거리
◇왕청 만천성 유람구
◇1만명이 만든 하얼빈 얼음궁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27일 빙등(氷燈)축제를 꾸밀 얼음 궁전을 완성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얼음 조각을 쌓아올리고 있다./로이터 뉴시스
▲올해 축제 30년을 맞아 얼음 조각가 1만여명이 참여해 18만㎡ 규모의 얼음을 사용했다.
▲매년 1월 5일~2월 5일 사이 여는 하얼빈 빙등축제는 캐나다 퀘벡, 일본 삿포로 축제와 함께 세계 3대 겨울 축제로 꼽힌다
▲하얼빈 빙설제전 개장 17.1.3
◆일상
▲헤이룽장 무단장시의 설경 17.2.24
▲ 하얼빈 관광객 기다리는 마차 11.1.4.
▲겨울 수영 즐기는 사람들 - 13. 5. 6. 헤이허 시 얼음 위의 사람들
▲물에 잠긴 헤이룽장성 자인현 13. 8. 20. 200여명이 사망 실종
★ 후난성(호남성, 湖南省)
◆張家界에 흐르는 유배자의 이야기 - 中原의 바깥세상 후난성
카르스트 바위가 거대한 기둥처럼 줄지어 늘어선 풍경이 ‘장씨의 세계’라 불리는 배경에는 ‘버려진 이들의 땅’ 후난의 역사가 녹아 있다. 중원은 남쪽의 만리장성인 남방장성(南方長城)까지 세우며 후난을 견제했지만, 후난은 신중국을 세운 걸출한 인물 마오쩌둥을 보란 듯 키워냈다.
▲후난의 대표적 관광지 장가계.
▲장가계에서 하트를 그리며 기념 촬영하는 중년 부부.
▲남방장성에서 바라본 마을.
▲먀오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 관광객.
▲펑황고성의 저녁 노을.
▲창사 천심각(天心閣). 창사 시내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요충지다.
입력 2016-07-01 신동아
◆ 볼거리
▲후난성 뤄양 용문석굴, 깎아지른 절벽1.5키로에 새긴 불상 10만점
▲쿤밍의 바위숲
▲후난성 상시 지쇼우에 있는 아이자이 마을
▲펑황 고대도시의 모습15.1.5
▲후난성 봉황고성
▲후난성 창사시 차밭 풍경
▲장가계 바오평후(보봉호)
▲후닌성(호남성) 동장호 - 수묵화 같다
◆ 일상
▲후난성 최악의 스모그 - 자오쮜 안개낀 공원
▲돼지의 육질의 맛을 높이기 위해 3m높이에서 다이빙을 시킨다
▲쏟아지는 물 13. 6. 22.황허강 시아오랑디 댐이 침전물 청소와 수위 조절을 위해 13. 6. 22. 방류 쏟아지는 엄청난 물이 만드는 장관
▲사오랑디 댐 방류 13. 7. 7.
▲후난성 홍수로 수영귀가 = 12. 5. 9.
▲물 위를 달리는 자전거( 홍수로 물에잠긴 다리 위를 가다)
▲후난성 폭우 12. 6. 26
▲태풍 12.10.28
▲후난성 13. 5. 16.
▲상치우 한 중학교의 벽돌 징검다리 13. 5. 27.
▲침수된 집의 식사 시간 - 14.5.25 후난성 리링 거리
★중국인의 살아가는 모습
◆중국인들 결혼, 우리와 크게 달라요
◆ 35년간 1자녀 정책, 형제남매 간 우애 잘 몰라
중국인의 가정은 주로 3인 가족이다. 1980년 시작된 1가구 1자녀 정책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60년대 매년 2300만 명에 증가하던 인구는 최근엔 650만 명대로 줄었다. 1자녀 정책이 실시된 35년간 억제된 신생아만 줄잡아 4억 명. 지난해 1가정 2자녀 정책으로 바뀌었지만 아직은 별다른 출산율 변화가 없다. 양육비 등이 급등해 이제는 각 가정이 두 자녀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산아제한정책으로 중국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도 있다. 자녀가 하나인지라 가정에서 황제처럼 자란 남녀 아이를 이르는 소황제(小皇帝), 소공주(小公主), 혼외자가 아니라 부부 간에 낳았어도 둘째, 셋째여서 호적에 올릴 수 없는 헤이하이쯔(黑孩子) 등이 그것이다.
1자녀로 인해 형제 간 우애를 잘 모르는 게 중국이다. 산아제한정책으로 인한 호적에 올리지 못한 자녀는 학교도 갈 수 없다. 대부분의 서커스 단원은 이런 헤이하이쯔 중에서 충원된다.
◆ 중국의 전통 결혼, 엄격한 육례(六禮) 따라
중국 관련 법률에 따르면 남자는 22세, 여자는 20세가 넘으면 결혼할 수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육례(六礼)라는 엄격하고도 까다로운 절차를 따라 결혼을 했다. 첫째 납채(納採), 중매인을 통해 신랑의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신부 측에 보낸다. 둘째 문명(問名), 중매인을 통해 신부 측의 이름, 출생일을 묻는다. 셋째 납길(納吉), 신부 측의 이름, 출생일 등을 가지고 신랑 집에서 길흉을 알아본다. 넷째 납폐(納幣), 신부 측에 예물을 전달한다. 다섯째 청기(請期), 신랑 측이 결혼식 날짜를 신부 측에 알리고 신부 측의 동의 여부를 구한다. 여섯째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다.
▲전통 사자춤
중국 전통 혼례엔 중국의 상징인 빨간색과 전통 사자춤과 함께 사자탈이 등장한다. 빨간색은 중국인에게 행운과 부를 상징하는 귀한 색으로 ‘사자’ 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다.
▲전통 혼례식
◆ 최근 중국 결혼식 서양화
문화대혁명 등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절엔 독특한 결혼 혼례 절차가 있었다. 먼저 직장에 결혼 의사를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미혼증명서’를 발급 받은 뒤 ‘건강진단서’를 발급 받고 결혼한 뒤 결혼등록 부서에 신고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처럼 자유의사에 따라 결혼하고 신고만 하면 끝난다.
◆ 결혼식 비용만 3000만 원, 한국보다 더 쓰는 셈
중국에서는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집값과 신혼여행 비용을 제외하고 피로연, 예물, 친인척 예물, 예식장 등을 포함한 금액은 한화로 약 3000만 원이 넘는다. 혼례식을 가급적 성대하게 치르고 싶은 중국인들의 생각이 반영된 관례다. 소득에 비해 턱없이 비싼 결혼 비용 때문에 한국의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청년들도 비싼 결혼식 비용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종종 신혼여행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신랑과 신부가 사는 동네가 많이 떨어져 있을 경우 각각 자신의 고향에서 한번씩 결혼식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한 나라에서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라가 크다 보니 이해할 만 하다. 북쪽의 베이징에 사는 여성이 남방의 쑤저우(蘇州)로 시집을 갔다고 하면 베이징과 쑤저우에서 각각 결혼식을 올리고 근무지에서도 작은 피로연을 갖는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친인척들이 몇 천km 떨어진 곳까지 올 수 없기 때문에 신랑, 신부가 각각 현지로 가서 결혼식을 진행한다고 보면 된다
▲현대의 결혼식 모습
중국 결혼식엔 초청된 사람만이 간다. 우리처럼 무더기로 초청하고 오든 말든 상관 안 하는 방식이 아니다. 초청하면 참석 여부를 알려줘야 하고 그에 따라 혼주는 참석할 하객의 테이블을 마련한다. 주로 가족, 친지, 친구, 회사 동료 등 하객 순으로 테이블에 앉는 자리가 지정돼 있다.
중국은 주례자 없이 사회자가 결혼을 진행하며 신랑신부가 함께 팔짱을 끼고 식장으로 입장한다.
◆ 결혼 날짜, 축의금 모두 짝수 선호
중국에서는 보통 결혼식 날짜를 짝수로 정한다. 양력과 음력으로 환산했을 때 2, 4, 6, 8, 10의 숫자가 들어가고 요일은 화요일과 금요일을 선호한다. 중국 사람들은 숫자 8을 좋아한다. 그래서 결혼식 시간도 대부분 ‘8’이 들어가는 시간으로 한다. 중국은 지역에 따라 결혼 시간도 다르다. 북방지역에서는 점심에, 남방지역에서는 저녁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는 남방은 주로 덥기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사료된다.
◆ 축의금 우리보다 훨씬 많이 내
중국에서는 축의금 봉투를 훙바오(红包)라고 하는데 빨간색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봉투 또한 빨간색을 사용한다. 한국처럼 흰 봉투에 축의금을 넣어 주면 절대 안 된다. 흰 봉투는 ‘죽음’을 뜻하며 주로 부의금 봉투로 쓴다. 또 중국인들은 짝수를 좋아하기 때문에 축의금 또한 보통 짝수의 숫자로 낸다. 200위안, 600위안, 800위안이 보통이지만 홀수인 100위안, 1000위안은 괜찮다. 지역에 따라서 300위안, 500위안도 기피하지 않는다. 축의금은 한국과 달리 자신의 월급의 3분의 1, 심지어 2분의 1을 내기도 한다.
▲BMW 결혼식 차량
중국에서는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결혼을 곧 자기 체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하여 결혼식 규모에 민감하다. 그래서 생겨난 문화중 하나는 고급 외제차를 웨딩차로 사용한다. 차는 상대 측을 존경하는 뜻으로 고급차를 대절한다. 주로 남방 쪽에서 많이 대절한다. 자동차 사용 유무는 신랑 신부가 합의 하에 선택할 수 있다. 차는 주로 BMW나 벤츠를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결혼 당일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와 신부 측 하객들을 결혼식장으로 데리고 오는 풍습이 있다. 한국보다 결혼 적령기가 이른 중국은 고향을 찾는 명절 때 맞선 스케줄을 잡고 인연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 하객에게 사탕을 준다. 왜?
중국 결혼식에서는 결혼 답례 선물로 기념품으로 보통 작은 케이크와 설탕, 계란을 준다. 하객 테이블 당 담배, 술, 음료수 등을 올리고 우리와 달리 초콜릿 또는 사탕을 준다. 결혼 축하 사탕은 하객들에게 기쁨과 달콤함을 안겨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단비(李丹飛) 자유여행가
◆대륙의 얼굴
▲고달픈 노동자
▲고속철의 위용
▲남부 물폭탄 14.6.29
▲대륙의 잡페어 행사
↕둥둥 떠다니는 차 - 중국 한 아파트
▲모노레일 열차
▲베이징의 교차로
▲아파트 빨래
▲서하왕릉 - 동방의 피라미드
▲세계 최대 우주 전파망원경 - 중국 구이저우 성 축구장 30개에 해당하는 25만 평방미터
▲쑤저우강의 용선축제
▲야릇하게 생긴 인민일보 빌딩
▲우주선 선저우 9호
▲웃음의 날 - 13. 5. 8. 세계 웃음의 날 기념 닝샤후이 제 20중학교 학생들의 이벤트
▲위장의 달인
▲자전거 트리
↕전통 혼례
▲조폭 결혼?
▲주차의 달인들 = 호텔옥상
▲중국 어선단 일본 센카쿠 열도 포위 작전 12.9.17.
▲ 한 고속도로에서 56대의 차량이 추돌한 사고 17명이 숨지고 37명이 부상 16.11.22 중국중앙방송
▲중국의 100억대 부자들만 사는 부자마을
▲지게차가 웨딩카로
▲진흙탕 축구대회
▲청과물시장 풍경
▲체조선수
▲자전거 크리스마스 트리
▲폭파 철거되는 하이난 공항 본사 건물
▲푸단 대학생들의 망치와 낫
▲혹한 12.12.23.
▲황사의 고통 - 회족자치구 인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