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58/ 중국6/ 볼거리3/ 사막 - 다락논 - 만리장성 - 진시황릉(秦始皇陵)과 병마용(兵馬俑)
■ 사막
사막은 해가 떠 있는 위치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모양을 바꾼다.
사막의 모래언덕에 홀로 서서 현실(reality)과 상상력(vision)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현실세계를 떠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막은 신기루가 아니다. 엄연히 눈에 보이는,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모양을 바꾸는 곳이 곧 사막이다. 그 힘은 자연이 선물하는 바람이다.
바단지린 사막(巴丹吉林沙漠)은 세계에서 4번째, 중국에서 3번째로 큰 사막이다. 전체 면적이 4만4300km²로 남한 면적의 절반 정도 규모다. 해발 200m가 넘는 모래언덕 위로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에는 100여 개의 오아시스 주변으로 백양나무, 낙타나무, 위성류 등 사막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아라산멍(阿拉善盟)의 서쪽에 있으면서 텅거리 사막 및 우란부허 사막과 함께 고비 사막을 형성하는 곳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제치고 중국 국가지리가 선정한 제일 아름다운 사막에 뽑히기도 했다.
▲간쑤성 사막과 낙타
▲텅그리 사막
▲텅그리 사막
▲바단지린 - 내몽고
▲내몽고 상사완 사막
▲밍사산과 사막
▲사막이 눈코팅된 타클라마칸 사막
◆다락논
▲게단식 논 - 세계문화유산 등재
◇운남성 홍토지의 신비
중국 남부지방인 운남성의 동천(東川)은 아름다운 홍토지(紅土地)로 유명하다. 이곳의 흙이 이렇게 붉은 까닭은 흙속에 함유된 철분이 산화를 거쳐서 오랜세월동안 침착되어서 이렇게 붉은 색채를 띄게 되었다.
지구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흙이 있는 곳은 "유우니 소금사막"으로 유명한 볼리비아의 붉은해안(Red coast)이 있다.
볼리비아의 붉은해안 역시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동천 홍토지처럼 밭으로 경작하지 못하는 바닷가여서 동천 홍토지처럼 다양한 아름다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동천 홍토지는 운남의 수도 쿤밍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있는 신전향(新田鄕)에 있다.이곳은 화석두(花石頭)라고도 불리는데 오몽산 지구에 속하는 고원지대여서 크고 작은 구릉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강우량이 많고 따뜻하여 농작물이 잘 자라 경사가 진 산비탈도 모두 개간하여 밭농사를 짓는다. 그러므로 붉은흙이 드러난 곳과 다양한 작물이 자라는 곳의 색채대비가 뛰어나고 강열한 태양 아래서의 변화가 무궁하므로 사진작가들이 일년내내 찾아든다
▲운남성
▲원양제천 - 운남성에 위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계단식 논
▲원난(雲南)성 위안양에 위치한 함니족 계단식 밭
▲구이저우성 마오족 자치주 첸동난의 가을 풍경
▲구름 위에서 사는 사람들
▲구이저우(貴州)성 묘족 동족 자치주
▲장시성 계단식 논 - 쑤이촨
▲장시성 간저우의 농촌 풍경 13. 5. 30.
◇광시 룽성 다랭이논
[인민망 한국어판 5월 31일] 비가 내린 후 광시(廣西, 광서) 룽성(龍勝) 각족(各族)자치현 진제(金結)촌에 운무(雲霧)가 피어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멀리 바라보니, 다랭이논과 마을이 운무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마치 선경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선보였다. (번역: 김미연)
◆만리장성 [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
중국 본토의 북변, 몽골 지역과의 사이에 축조된 성벽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km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km에 이른다.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 자위관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보통 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770~ BC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 왕국인 진이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 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2천여 년 역사, 시대에 따른 변화
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다. 처음 건축될 무렵에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 보하이 만까지 약 1,500km 길이였다. 이후 명(明) 나라 때 총 길이 2,700km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 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북방에 있던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리장성 2,700km가 똑 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 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 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 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사적 방어선이자 문화적 경계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을 쌓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왕조의 성격에 따라 만리장성의 중요성이나 만리장성에 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공격적이었던 시기보다는 방어적이었던 시대에 만리장성은 더욱 중시되었다. 북방 경영에 열심이었던 당나라 때나 전 세계를 무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던 몽고제국과 뒤이은 원나라, 만주에서 일어나서 만리장성 너머까지 다스렸던 청나라 때는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고, 따라서 개보수 작업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인 역할 이외에 문화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어벽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관계없이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 만리장성의 끝.jpg>
요즘 이 사진이 '만리장성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돌고 있습니다. 성벽이라는 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육지를 기준으로 볼 때 바다에 닿은 부분을 '끝'으로 보기 쉽습니다.
만리장성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쪽을 '끝'이라고 하면 서쪽을 '시작'이라고 불러야하겠지요. 뭐 그냥 동쪽 끝, 서쪽 끝이라고 해도 되겠고요.
▲< 천하제일관 >
보통 산해관이라고 하면 보통 이 곳을 일컫습니다. 산해관은 명나라시대의 매우 중요한 동북방어기점으로, 후금(청)의 공격을 막아낸 거점으로 유명합니다. 산해관이라는 것은 이 '문'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이 문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요.좁게 보면 이 관문.넓게 보면 이 관문을 중심으로 한 주변일대의 모든 장벽과 요새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표지에도 '산해관경구- 노룡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해관의 일부인 셈이니까요. 그래도 산해관을 대표한 관문은 아니므로 '산해관'을 포함하여 말하거나 따로 '노룡두'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 노룡두
2. 산해관 노룡두 이 정도로요.
노룡두라는 설명없이 해당장소를 두고 '산해관'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지칭이 아닙니다.
▲< 가욕관 >
산해관이 만리장성 동쪽의 끝이라면 이 쪽이 서쪽의 끝입니다. 사막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산해관처럼 바다같은 곳에서 끊기지는 않습니다
▲저기서 끝납니다. 꼭대기가 돈대가 하나 있는데, 저기가 끝입니다. 왼쪽에 계곡따라 내려오는 길이 나있죠. 저 꼭대기가 만리장성의 서쪽(좌표상) 끝 입니다. 해당 돈대를 끝으로 성벽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습니다.
▲여기는 가욕관의 남쪽 끝 그런데 정작 이쪽을 만리장성의 서쪽 끝(시작)이라고 한다네요. 사진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벽과 돈대가 절벽을 맞이해 끝난다는 것이죠. 그 돈대를 두고 '장성 제일돈(제1돈)'이라고 이름붙여 놓았습니다.
▲< 옥문관 >
영문자료에서는 jade gate 라고 합니다. 요 옥문관은 한대의 것으로
▲성벽이 돌이나 벽돌이 아닌 흙으로된 토축성입니다.
▲2009년에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새로이 발표했다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
▲< 천하제일관 >
산해관 본성의 동문(진동문) 성루에는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이 것은 만리장성의 '1st Gate'라는 의미와 '천하에서 제일가는 힘을 갖춘 관문'이라는 의미가 혼재된 것일겁니다.
옛부터 중국인들의 인식에서도 '제1관'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산해관의 동쪽을 가리켜 '관동', '관외' 라 인식하는 등 굉장히중요한 랜드마크였던 것이죠. 이를 똑같이 산해관을 장성의 시작점으로 인식한게 명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고 봐도...호산성이 1469년에 지은거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그 때 자기들이 지어놓고도 정작 '장성'이라고는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_-; 그러고나서 수백년이 지난 이제와서 '시작점이 아니었다'......이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계유산을 등재한 유네스코에서는 아직(?) 만리장성의 시작을 '산해관' 으로 보고 있습니다. (끝은 가욕관)
↕만리장성 위에서 펼쳐진 '장관 - 패션 쇼
조선일보 2018.09.20
◆진시황릉(秦始皇陵)과 병마용(兵馬俑)
中國 西安
世界文化遺産 (1987年 指定)
심한 가뭄으로 우물을 파던 농부에게 발견된 진시황릉 병마용 갱은1974년 이래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총면적 25,380m2에 달하는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4호갱은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빈 갱도였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며, 도용의 크기는 1.75~1.8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대이며,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의 엄격한 표정이 모두 상이하다.
완전 발굴된 520m2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출토되었다. 또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나라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병사 용은 하나같이 표정이 다르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은 세계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로서 서안에서 37km 떨어진 臨潼縣 동쪽 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驪山, 북쪽으로 渭水와 접해있다.
왜 이렇게 어마한 병마용을 만들었을까 하는 문제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대게가 순장의 대체라고 본다.
▲兵馬俑 1호坑
▲兵馬俑 3호坑
▲놀랍게도 얼굴 모습도 전부 각각 (士官俑)
▲사진 좌하 부분은 나무 지붕이 내려 앉은 상태,그 밑에는 아직도 발굴 안된 토용들이 그대로 깔려있다
(兵馬俑 2호坑)
▲銅馬車 1號
▲銅馬車 2號
▲戰車馬俑
▲將軍俑
▲將軍頭像
▲下級 軍吏俑
▲陶手俑
▲武士頭上
▲發堀시의 모습
▲兵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