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소식 16-2022-1/
01.05 3년째 신년사 생략한 김정은의 속마음 들여다본다면…
평양의 새해 국정은 김정은 위원장과 고위 간부들이 총출동한 연말 전원회의로 시작되었다. 3년째 육성 신년사를 생략하고 미니 당대회 수준의 대면 회의를 개최했다. 1만8400여 자에 달하는 노동신문 보도문은 사실 뜬구름 잡는 식이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김 위원장의 복심과 복안을 추정해보는 것이 역설적으로 임인년(壬寅年) 한반도 정세 파악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래는 김정은의 생각을 추정해 적은 ‘김정은의 신년 독백’이다. 가상이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에 김정은과 북한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21년은 집권 만 10년 되는 해였지만 10년 통치의 기념비적 업적이나 성과를 내세우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코로나 방역으로 외교는 올스톱이었다. 코로나로 6월까지 공식 석상에 잘 나가지 않다가 7월에 의사들의 강권으로 몸무게를 20㎏ 줄이고 나오니 팔뚝에 찬 스위스제 고급 시곗줄을 세 칸이나 줄였다는 등 억측이 만발하였다. 내가 9월 9일 정권 수립 기념일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5월에 쿠데타가 일어나 김여정에게 살해당했다는 등 별별 소리가 나왔다. 가을 들어 최장 35일 만에 모습을 보이니 그럴듯한 대역(代役)설까지 등장하였다. 12월 아버지 사망 추모 대회에 나타난 내 얼굴의 노화를 보고는 건강 이상설이 또 제기되었다. 독일의 한 통계 기관은 지난해 내 이름이 구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에 이어 셋째로 많이 검색되었다고 발표했다. 한 달 평균 190만회 정도다. 건강 이상설이 나돈 6월과 대역 의혹이 제기된 9월에 집중 검색되었다니 내가 국제적인 인물이기는 한 모양이다.
코로나 위기에다 대북 제재로 공화국의 삶이 녹록지 않다. 사실 사면초가다.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 이런 때는 체제 결속이 특효약이다. 나에 대한 인민들의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간부들과 인민들을 질책하고 공포정치를 전개하기보다는 구슬리고 달래는 통치술이 필요하다. 전원회의에서 ‘2021년은 승리의 해다. 농업·건설 부문의 큰 성과를 비롯해 정치·경제·문화·국방 부문 등 국가 사업 전반적 분야에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지난해를 승리의 해라고 선언했지만 실제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농업과 건설 부문에서 큰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했지만 그저 평년작이다. 집계된 작물 생산량은 대략 470만톤 정도다. 부족량이 100만톤에 달해 수입이나 지원에 의존해야 한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솔직히 여의치 않다. 건설 분야에서 발전소와 살림집(아파트) 건설도 겨우 예년 수준이다. 올해는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답답한 마음에 전원회의에서 책상을 치고 열을 냈지만 비료와 농약이 없는 악전고투 상황이라 당 간부들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항상 통제하고 감시하지 않으면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당 간부들은 금방 기강이 해이해져 바닥으로 추락한다.
지난해는 만감이 교차하는 해였다. 내가 2011년 12월 말 제왕학을 충분히 습득하지도 못하고 군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된 지 만 10년이 된 해였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3대 세습 통치’를 하는 것은 호사가들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직함을 6개나 달며 할아버지 김일성급의 수령으로 셀프 등극했고 ‘김정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홀로서기에 성공하였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3년 고모부 장성택 처형과 2017년 이복형 김정남 암살 등 두 차례 골육상쟁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그들의 경거망동에도 원인이 크다.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것은 유일 수령 사상 체제에서 수명을 재촉하는 일이다. 그들은 조선 왕조의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이 집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외척 민씨 일가를 단칼에 제거한 역사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단 말인가?
2월 베이징올림픽 참석은 실익이 없다. 최룡해나 김여정 등을 보내야겠다. 청와대에서 남측 대선 때문에 지속적으로 베이징이나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한 화상 정상회담이라도 하자고 압박하는데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지난 12월에는 청와대 안보실 관계자들이 미국과 합의했다는 종전 선언 초안을 들고 베이징에 와서 우리를 유혹하였다.
문재인 정부와 3차례 정상회담에서 대규모 지원을 약속한 판문점 선언과 9·19 공동선언에 합의했지만 손익을 따져봐야 한다. 남측 비무장지대 초소를 철거한 것은 유사시 대남 침투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성과다. 가장 큰 선물은 김여정 하명법이라고 하는 대북전단방지법을 제정하여 더 이상 나를 비난하는 전단이 날아오지 않는 것이다. 남측의 BTS니 오징어 게임이니 하는 한류가 몰려오지 않게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다.
남측의 정권 교체 여론이 정권 재창출 여론보다 높으니 문 정부와 마지막까지 거래하는 것은 다소 리스크가 있다. 지금 청와대를 도와주지 않아 정권이 야당으로 교체되면 대북전단방지법이니 9·19 합의니 모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라 고민은 있다.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남북 관계에 관한 다양한 대응책을 준비하라고 간부들에게 지시했다. 2012년 집권 이후 벌써 남한 대선을 3번째 경험하는데 선거 때마다 남측의 평양 줄 대기가 만만치 않다. 역시 선거는 평양이 100% 투표에 100% 찬성으로 서울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남한의 민주주의라는 선거 제도는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10년 전 다시는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실패하였다. 돌이켜 보니 10년 동안 한·중·미 정상회담을 제외하고 성과는 역시 핵실험 네 번과 미사일 발사 62차례다. 핵심 치적이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카드다. 호랑이해에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 변칙적인 상황에 탄력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우리와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하반기에는 군사 도발이라는 패를 검토해야겠다.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어야 하는데 앞이 안 보이니 걱정이다. 스위스에서 아무 걱정 없이 스키 타고 승마하던 조기 유학 시절이 그립다. 올해는 건강을 생각해서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과 스위스산 에멘탈 치즈를 좀 줄여야 할 것 같다.”
01.07 北, 베이징올림픽 불참 공식화…“참가 못하지만 중국 지지”
북한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불참을 공식화했다. ‘적대 세력들의 책동’과 코로나19 확산 우려 때문이란 설명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와 체육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와 베이징 2022년 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 및 겨울철장애자올림픽경기대회조직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체육총국에 편지를 보내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편지는 적대 세력들의 책동과 세계적인 대류행전염병 상황으로 하여 경기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우리는 성대하고 훌륭한 올림픽 축제를 마련하려는 중국 동지들의 모든 사업을 전적으로 지지, 응원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앞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해 말까지 북한 올림픽위원회(NOC)의 자격을 정지하는 징계를 내린 바 있다. 북한이 지난해 도쿄 하계올림픽에 코로나19로부터의 선수단 보호를 이유로 불참했기 때문이다. ‘개인 자격’으로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번 편지를 통해 북한은 올림픽에 어떤 선수도 파견하지 않을 방침을 밝힌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TV가 2022년 1월 6일 보도한 평양시 궐기대회 모습. 조선중앙TV는 북한이 전날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 결정을 관철하기 위해 이 대회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중앙TV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편지에서 베이징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국가들을 비판하고 중국을 지지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북한은 “올림픽의 성과적 개최를 막아보려는 미국과 추종세력들의 반중국 음모 책동이 더욱 악랄해지고 있다”며 “우리는 이를 국제올림픽헌장의 정신에 대한 모독으로, 중국의 국제적 영상에 먹칠하려는 비열한 행위로 낙인하고 단호히 반대, 배격한다”고 했다.
이를 두고 조선중앙통신은 “(편지는) 형제적인 중국 인민과 체육인들이 습근평(시진핑) 총서기동지와 중국공산당의 두리에 일치단결하여 온갖 방해 책동과 난관을 물리치고 베이징 겨울철 올림픽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 조선비즈 = 박수현 기자
월간조선 01월 호
北 주민들, 〈오징어게임〉 보며 북한의 현실 생각
⊙ 北 매체, “〈오징어게임〉은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끔찍한 민낯을 보여준다”
⊙ 북한 돈주들은 〈오징어게임〉이 평양 간부층이나 자신들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
⊙ 〈공동경비구역 JSA〉 〈진달래꽃 필 때까지〉 〈정도전〉 보다 걸리면 절대 풀려나지 못해

▲북한은 〈오징어게임〉이 남한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고 하면서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북한의 한 중학생이 한국 영화 〈아저씨〉를 봤다는 이유로 징역 1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난달 30일(2021년 11월 30일) 북한 전문 매체인 데일리NK는 양강도 소식통의 말을 빌려 ‘지난 7일 혜산시의 중학생 한모(14)군이 영화 〈아저씨〉를 시청하다 체포됐다’며 ‘한군은 영화 시청 5분 만에 단속됐는데, 14년의 노동교화형(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지난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에 따르면 한국 영상물을 유포할 경우 최대 사형, 시청만 하더라도 최대 15년의 노동교화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 매체는 단 5분 시청만으로 중형이 선고된 점도 주목했다. 그동안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적잖이 유행을 끌었다는 점을 인지한 당국이 엄격한 법 적용을 통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지에서는 (한군의 부모 역시) 단순 벌금형이 아닌 추방을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북한에서는 아이가 중형을 선고받으면 혈통이 문제라는 판단으로 부모까지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2일 《조선일보》의 보도다. 5분 시청에 14년 형? 과(過)하다. 북한 당국이 그만큼 바짝 긴장했다는 방증(傍證)이다. 바짝 긴장한 이유가 있다. 2021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콘텐츠 〈오징어게임〉의 북한 내 유통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과거에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와 관련, 공개처형 등 극단적 광기(狂氣)를 보인 사례가 없지 않았다. 대량으로 콘텐츠를 유통한 경우다. 북한 ‘난돌이’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PC방에서 공 CD에 한국 콘텐츠를 복사해 북한 전역에 유통시켰다. 가장 이문이 짭짤한 밀수였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많았다. 포르노를 판매한 소매상이나 고객도 중형(重刑) 대상자였다.
“현실에서는 더한 일도 벌어지는데, 왜 이것이 범죄가 되느냐”는 항변도 해보지만, 당국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것과 자본주의 황색 바람이 퍼지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단속을 당하면 “누구누구 동지 아시냐? 여기 오셨었다”라는 은근한 친분 과시 및 압박, 물귀신 작전을 쓰며 달러 현찰과 “누구누구 동지도 사 가신 CD”를 여러 장 찔러주면 어찌어찌 풀려날 수도 있었다. 절대 석방 불가(不可) 프로그램은 세 편이다.
3大 절대 석방 不可 프로그램
하나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 남북 군인들이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친하게 지내는 부분, 북한군으로 출연한 송강호가 초코파이를 먹으며 “왜 우리 공화국에선 이런 걸 못 만드나 몰라”라고 말하는 대사,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에 피가 튀는 장면은 북한 주민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절대금기(絶對禁忌)다.
아예 시청 자체가 삼대멸족(三代滅族)의 참화(慘禍)로 이어지는 작품도 있다. 1998년 1월 5일부터 1998년 1월 27일까지 KBS 2TV에서 방송한 월화 드라마 〈진달래꽃 필 때까지〉다. 1995년 런던에서 생활하다 귀순한 전 만수대 무용단원 신영희의 동명 수필집(1996년 출간)이 원작인 8부작 드라마다. 북한 기쁨조의 일상과 같은 북한 사회 내부를 묘사했고, 김정일의 애첩으로 1980년 2월 강건군관학교 전술훈련장에서 공개 처형된 여배우 우인희의 이야기도 나온다. 북한 고위층의 행태는 이한영(1960~1997년)이 1996년 6월에 낸 《김정일 로열 패밀리: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를 참조했다는 일설도 있다. 북한 당국이 보기에도, 이 드라마에서 묘사한 북 고위층의 실상이 ‘사실적’이라고 판단한 배경이다. 북에서는 김씨왕조(金氏王朝)의 사생활 자체가 극비(極祕) 보안 사항이다. 여기에 관한 어떤 정보가 퍼지는 것도 용납 불가다. 게다가, 드라마의 내용을 주변에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2014년 KBS가 방송한 〈정도전(鄭道傳)〉도 집중단속 대상이다. “역사적 고증에 허위가 많다”는 것이 표면적인 단속 이유지만, 드라마의 주제인 ‘역성혁명(易姓革命)’이 북한의 삼대세습(三代世襲)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韓流 전도사’ 노무현

▲2007년 10월 방북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한국 영화·드라마 DVD를 선물했다. 사진=조선DB
역사의 아이러니는, 누군가의 행동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북한 내 한류(韓流) 열풍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2007년 방북(訪北) 때 ‘문화예술교류 가교 역할을 기대’하며 한류 열풍을 몰고 온 영화와 드라마, DVD 플레이어를 북측에 선물했다. 선물 목록은 〈주몽〉 〈대장금〉 〈황진이〉 〈다모〉 〈파리의 연인〉 〈내 이름은 김삼순〉 〈겨울연가〉 〈올인〉 등의 드라마, 〈취화선〉 〈오아시스〉 〈올드보이〉 〈마리 이야기〉 〈봄날은 간다〉 〈YMCA 야구단〉 〈지구를 지켜라〉 〈혈의 누〉 〈말아톤〉 〈천하장사 마돈나〉 〈라디오 스타〉 등 영화와 다큐멘터리 여러 편이었다. 이들 작품을 잘 감상하라는 뜻으로 모든 콘텐츠와 TV, 그리고 DVD 플레이어를 평양 인민대학습당 시청각실에 제공하기도 했다.
김정일이 이들 작품을 애청한다는 소문이 나자 평양 고위층 사이에서 ‘한류 학습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DVD를 구해 작품을 감상했다. 중년(中年) 남자들은 사극에 열광했고, 여성들은 멜로드라마에 흠뻑 취했다. ‘남조선 드라마를 보느라 일상생활에 지장이 왔다’는 이야기가 돌고, 작품 내용과 주인공이 직장과 가정에서 주요 화제(話題)로 떠올랐다.
한류 콘텐츠의 작품성을 인정한 김정일은 ‘남조선 드라마를 뛰어넘으라’며 사극 〈계월향(桂月香)〉(2011)의 제작을 지시했다. 막대한 제작비를 쓰며 파격적인 지원도 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북한 주민 사이에서 별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눈높이가 한국 드라마에 이미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없다. 싹 걷어치우라”며 격분한 김정일 탓에 조선중앙텔레비전은 50부작 예정을 23부에서 끊었다.
〈계월향〉의 실패 이후 한류는 북한에서 ‘비교불가의 경쟁력을 지닌 콘텐츠’라는 지위를 굳혔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으로 북 당국이 뒤늦게 단속을 시작했지만, 검열에 걸린 일반인이 “장군님 보시는 걸 따라 배우고 있다”라고 하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음지에서 은밀하게 유통되던 한류 콘텐츠가 제한적이나마 공개석상으로 나온 역사적 사건이다.
〈오징어게임〉 보며 北 현실 떠올려
북한 대외 선전매체 ‘메아리’는 2021년 10월 “최근 약육강식과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패륜이 일상화된 남한에서 사회 실상을 폭로하는 TV극 〈오징어게임〉이 방영돼 인기를 끌고 있다”며 “극단적인 경쟁으로 인간성이 말살된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끔찍한 민낯을 보여준다.…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불공평한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극단적 경쟁으로 내몰고 그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돼가는 야수화된 남조선 사회”라는 비난도 잊지 않았다.
북한 주민의 반응은 달랐다. ‘붉은 자본가’로 불리는 평양의 돈주들은 드라마 내용이 “외화벌이 시장에서 암투를 벌이며 생사를 다투는 평양 간부층의 생활과 흡사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며 목숨을 걸고 게임에 참여하고 죽어가는 것이 자신들의 처지와 닮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으면 언제든지 처형당할 수 있는 북한의 현실이 드라마 속 내용과 겹치는 것이다.
일반인 입장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어딘가에 갇혀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곧 자기 자신들이라 여기는 것이다. ‘저기서는 그래도 죽기 전까지 밥은 준다, 사람들끼리 으르렁대지만 친분이 쌓이기도 하는구나’라는 생각은 ‘북한 전역이 감옥’이라는 지점까지 도약한다. 세계인들에게 〈오징어게임〉은 드라마적 은유(隱喩)지만, 북 주민들에게는 뼈를 때리는 직유(直喩)인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한군은 〈아저씨〉를 보다 잡혀갔지만, 북한 당국이 진심으로 막고 싶은 건 〈오징어게임〉이다. 〈오징어게임〉을 봐서 잡아갔다고 하면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기에 사실대로 발표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 논객 벤 샤피로는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오징어게임〉 전반에 짙게 스며든 반(反)기독교·반서구문명 코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도를 넘어 거의 병적(病的)인 수준에 이르렀다 볼 정도로 악의적(惡意的)”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을 받은 작품이 전체주의(全體主義) 북한을 허무는 가장 위험한 불온(不穩) 콘텐츠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월간조선 02월 호
‘세계 最惡의 건축물 1위’ 류경호텔 잔혹사
⊙ 1989년의 세계청년학생축전 앞둔 1987년 기공, 공사대금 체불로 1990년부터 중단
⊙ 이집트 통신회사 오라스콤 텔레콤, 김일성 탄생 100주년인 2012년 4월 개관 목표로 공사 재개했다가 철수
⊙ 체제 선전하려던 최고의 건축물이 체제 모순 증명하는 확실한 유물 되어버려

▲‘세계 최악의 건물’ 1위로 꼽힌 평양 류경호텔. 사진=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제공
평양 류경(柳京)호텔을 아시는지? 작년 12월 25일, 영국 《데일리메일》이 꼽은 세계 6대 애물단지 건축물 중 하나다. 선정 기준은 높은 건축비용, 낮은 실용성, 터무니없는 유지비용 등이다. 류경호텔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회의사당, 스페인 베니돔의 인템포 아파트, 캐나다 몬트리올의 올림픽 경기장,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루스키섬 다리, 중국 둥관의 뉴 사우스 차이나 몰 등을 제치고 당당 ‘세계 최악의 건축물’ 1위에 올랐다.
105층 층고(層高)를 자랑하는 이 마천루는 1987년 착공 당시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 지어진 건축물 중 최초로 100층을 돌파’한 북한 건축사의 기념비였다. 하지만 공사 시작 34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미완공이며, 내부도 비어 있다. 외신에 따르면, 류경호텔을 완공하려면 최소 20억 달러(약 2조3750억원)가 필요하다.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건물 안전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 철거가 답이지만 그럴 수도 없다. 철거비용 문제가 아니라 북한 김씨왕조(金氏王朝)의 정통성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청년학생축전 거점으로 건립
88서울올림픽에 맞대응하기 위해 북한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89년 7월 1~8일)이라는 행사를 유치했다. 류경호텔은 이 행사의 거점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착공일은 1987년 8월 28일. 프랑스 시공회사가 설계, 기술 및 일부 자본을 제공했다. 하지만 공사는 1989년 5월 중단되었다. 돈 때문이다. 인력(人力)이야 무보수(無報酬) 돌격대로 메운다고 해도, 외화(外貨)로 지불해야 하는 건설비가 매년 4억 달러 이상이었다. 북한이 공사대금을 체불(滯拂)하자 프랑스 회사도 1990년 12월 완전히 손을 뗐다.
‘분단 후 공식행사 참가를 위해 방북한 첫 대학생’ 임수경이 북한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덕분에, 학생축전은 북한 당국의 당초 기대를 넘어선 선전효과를 냈다. 그사이 류경호텔 문제는 슬그머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나온 발표가 ‘1992년 4월 15일 김일성의 80세 생일’에 완공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 8월 북한 당국은 기자회견을 통해 마카오의 홍콩계 카지노 회사인 화재투자유한공사의 투자로 류경호텔 공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류경호텔의 카지노 사업권이 쟁점이었는데, 북한과 건설사 측의 이견(異見)이 있었다는 소문, 동북삼성(東北三省)의 이러저러한 자금이 류경호텔 카지노를 거쳐 돈세탁 되는 것에 대해 중국 정부가 북한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소문 등이 돌았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대우에 공사 참여 요청
1996년 9월 15일 몇 년 만에 류경호텔 관련 뉴스가 나왔다. 연합뉴스는 “지난 92년부터 건축 공사가 완전중단 돼 붕괴위험설이 나돌고 있는 북한 최대의 평양 류경호텔 건설사업에 참여해줄 것을 대우그룹 측에 제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북한 당국이 최근 남포에서 최초의 남북합작공장을 설립, 가동 중인 대우그룹 측에 평양 류경호텔 건설사업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해왔다”고 알렸다.
대우의 대답은 ‘노(No)’였다. 건물의 붕괴 위험도 위험이지만, 불투명한 사업성이 문제였다. 핵심은 ‘재산권(財産權)’이다. 북한 당국은 ‘내 돈은 내 돈, 남의 돈도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정권이다. 위 기사에 나온 ‘최초의 남포 남북합작공장’의 북한 측 파트너는 재일동포 회사 사쿠라기업이 1987년에 설립한 모란봉합영회사다. 마카오에서 원단을 수입, 남포에서 가공 후 일본으로 수출해 중저가(中低價) 양복시장을 공략하는 프로젝트였다. 초반에는 괜찮았으나, 어느 날부터 일본으로 완제품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쿠라기업 회장이 평양으로 갔다. 거기서 북한 측 파트너인 조선은하무역총회사로부터 들었다는 대답이 기가 막혔다. “마카오 쪽에서 더 높은 가격으로 사줘서 그리로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왜 사전에 상의가 없었느냐, 그렇다면 수출하고 받은 돈은 어디로 갔느냐, 왜 내 돈을 가지고 마음대로 썼느냐”고 물으니 “혁명 사업에 기부한 것으로 생각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대우의 남포공장이 사실은 사쿠라기업 소유의 공장이었던 것이다. 류경호텔 완공까지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이후에 어떤 일을 당할지 도무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우 수뇌부의 고민이 아니었을까?
흉물로 방치되어 있던 류경호텔의 외관이 달라진 시기는 2008년 겨울이다. 이집트의 오라스콤 텔레콤이 유리창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재개 후 한 달 정도 지난 2008년 12월 중순, 오라스콤 텔레콤은 북한 최초로 휴대폰 사업을 시작했고, ‘오라은행’도 창립했다. 2009년 10월 오라스콤 텔레콤 회장이 북한으로부터 ‘친선훈장 제1급’을 받았을 정도로 둘 사이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훈장을 수여할 때 나온 얘기가 ‘2012년 4월 김일성 탄생 100주년’에 맞춰 호텔 완공 및 영업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 초반에 유리 설치 공사가 완료되어 콘크리트 골조를 일단은 가렸고, 2011년 2월 17일에는 외장(外裝) 공사가 거의 끝났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역시 북한 당국의 사기성(詐欺性)이 문제였다. 이동통신 독점권 보장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어느 시점부터는 외화 환전을 가지고도 장난을 쳤다. 외화를 북한 돈으로는 바꿔주지만, 북한 돈을 외화로는 바꿔주지 않았다. 외화가 없다며 늑장을 부리기도 하고, 차일피일 각종 핑계를 대며 약속을 어겼다. 북한에도 암달러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활용 불가능이다. 공식 환율은 1달러 대(對) 100원이지만, 암시장 환율은 1달러 대 8000원이다. 설령 암시장에서 달러를 확보한다고 해도 오라스콤으로서는 영업이익 가운데 80분의 79를 앉아서 날려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한 당국이 내부적으로 이렇게 외국 기업을 등친 사람들을 ‘잘했다’며 격려한다는 사실이다. 사기로 번 돈을 ‘이익’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장기적 신용은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듯하다. 당장 돈을 만들면 그것으로 칭찬을 받는 것이다. ‘책임 완공 후 호텔영업권 50년 독점’을 조건으로 투자했던 오라스콤도 결국은 2012년 7월 류경호텔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애물단지가 된 ‘수령님 필생의 업적’
이후로는 투자 의향을 밝힌 곳도 거의 없다. 류경호텔은 2018년 이후에 건물 외벽에 LED 등을 달아 ‘겉보기에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쓰임새가 전무(全無)한 실정이다. 북한 당국에 건설 재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고, 그래서 완공이 언제일지도 알 수 없다. ‘수령님의 필생의 업적’이 평양 한복판에 흉물로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데 이것을 누구나 오며 가며 볼 수 있다. 은폐하려고 해도 은폐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류경호텔은 북한 당국의 ‘해결 불가능한 골칫덩어리’다. 체제를 선전하려던 최고의 건축물이 체제의 모순을 증명하는 확실한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유경(柳京)’은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평양(平壤)의 별명이다. 어쩌면 평양 자체가 겉보기는 그럴듯해도 속은 텅텅 비어 있는 ‘류경호텔’인지도 모른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北 조직지도부의 주민 조사 자료
코로나19 이후 주민들 동향 파악 일환
⊙ 北, 코로나19 이후 강도·도적 행위 급증
⊙ “길거리 지나가는 여성의 머리 둔기로 까고 돈 가방 빼앗아”
⊙ “도둑이 무서워 온 가족이 출근을 못 하고 있다”
⊙ 北, 코로나19로 전국 학교 무기한 개학 연기
⊙ 北, 전국 여러 곳에서 코로나19 환자 발생했다는 소식

▲북한 김정은이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북한은 코로나19가 시작되자 북·중 국경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로 인해 북한 경제는 더 악화했다. 북·중 국경 봉쇄 이후 북한 내 쌀 가격 등 물가는 계속 상승했고, 주민들의 원성은 높아갔다. 또 북한 전역에서 강도와 도적 등 범죄가 성행했고, 학교는 개학도 미뤘다.
북한 당국은 전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과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월간조선》은 최근 <신형코로나비루스방역사업과 관련하여 최근 군중 속에서 제기된 동향, 류언비어와 대책보고>라는 제목의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작성한 코로나19 이후 주민들의 동향을 분석한 자료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해당 자료에는 2020년 3월 27일 김정은의 지시로 조직지도부가 전국 각지의 조직망을 동원해 주민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파악해 정리한 내용이 들어 있다.
북한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는 물론 평소에도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해 김정은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북한 조직지도부와 국가보위성, 사회안전성이 동향 파악을 하고 있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북한은 평소에도 주민들의 동향 파악을 한다. 여러 기관에서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서를 김정은에게 올린다”며 “하지만 정확도는 조직지도부에서 하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고 말했다.
북·중 국경 봉쇄 후 치솟는 물가

▲북한 주민이 코로나19 방역소에서 체열을 재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자료 앞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최근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을 막기 위한 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군중 속에서 상품가격이 올라 생활에서 애로를 느끼고 있다는 동향, 강도와 도적 행위들이 성행하고 있다는 동향들이 제기됐다. 그리고 신형코로나비루스 전파를 막기 위한 방역기간과 학생들의 방학이 연기될 것 같다는 류언비어, 인민군대 초모와 제대를 미룬다는 류언비어, 우리나라에서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자가 발생했다는 류언비어, 중국에서 상품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와 물건값이 떨어질 것 같다는 류언비어들도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북한 경제가 난관에 봉착했다. 북한은 코로나19가 발생하자 2020년 초 북·중 국경을 봉쇄했다. 이후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던 상품들의 유입이 중단됐다. 북한 주민들 속에서 국경이 봉쇄돼 상품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누군가 듣고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관련 내용이다.
“시장에 갔다가 판매원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국경이 봉쇄되어 상품이 들어오지 않아 상품가격이 계속 오른다는 것이다.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더 어려워질 것 같다.”
그러면서 시장에서 오른 상품과 그 가격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지금 시장과 상점들에서 상품가격을 망탕(마구) 올리고 있다. 그전에는 먹는 기름 한 통에 4만5000원 하던 것이 3월 중순부터(2020년 3월로 추정)는 7만원을 하고 있으며 사과도 1kg에 4500원에서 9000원으로 뛰어올랐다. 상품가격이 엄청나게 오르니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자료에는 이 밖에도 여러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그중 몇 가지다.
▲“며칠 전에 세대주가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니 2000원 하던 5% 포도당은 3500원을 하고 800원 하던 점적체계는 3000원을 하더라. 일부 약품들은 현물이 없어 사지 못했다. 그래서 약장사군들을 찾아가니 비싼 가격으로 팔려고 그러는지 문도 열어주지 않아 끝내 약을 사진 못했다. 병이 나도 약이 없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마늘이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을 방지한다고 하면서 그전에는 1kg에 1만원 정도 하던 것이 지금 2만800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정말 마늘이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을 방지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분명히 장사꾼들이 돈벌이를 위해 제 나름대로 가격을 올려놓은 것 같은데 단단히 대책 하여야 할 것 같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중 국경을 봉쇄하자 생계와 직결된 품목들이 최소 60% 상승했다. 함경도 지역에선 4000원 정도 하던 쌀이 갑자기 6000원으로 오르고 4200원대였던 밀가루도 6000원대로 상승했다”며 “사람들이 이러다 다 굶어 죽는 거 아니냐며 아우성을 쳤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국경이 막히면서 중국에서 들여오던 원자재 수입도 어려워지는 한편 북한 공장에서 상품 생산도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 대표는 “코로나19 이후 북한 경제가 확실히 힘들어진 것은 부정 못 할 사실”이라며 “최근 봉쇄된 국경을 조금씩 개방한다는 정보가 있긴 하지만 정확히 언제 열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도둑이 들어와 밥 짓는 가마솥까지 가져가”
어려운 경제 상황과 맞물려 강도와 도둑 등 강력범죄 또한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고통은 더 심해지고 당에 대한 불만은 계속 쌓여가고 있다.
자료에 적힌 관련 내용이다. “2020년 3월 15일 저녁에 범죄자들이 시내에서 지나가던 녀성의 머리를 나무 몽둥이로 까고 돈 가방을 빼앗아갔다. 그것을 목격한 주민들이 비상방역사업으로 모든 것이 차단되어 물품값이 오르니 강도 행위가 성행한다고 하면서 정말 야단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국경 봉쇄 이후 임가공자재들이 들어오지 않아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도적이 늘어나고 있다는 동향이 보고됐다. 해당 지역의 사례를 살펴보자.
“며칠 전 밤에 도적놈이 우리 옆집 출입문을 뜯고 들어가 밥 짓는 가마를 가져가다가 집주인이 소리치자 도주하였는데 지금 도적놈들이 판을 친다. 모든 것이 어려워지고 먹고살기가 어려우니 도적들과 강도들이 많이 생겨난 것 같다.”
북한 개성특별시 판문지구에서는 매일 도적들이 나타나는데 대낮에도 도적이 들어 사람들이 불안해 온 가족이 출근도 못 하고 집을 지키는 형편이라는 내용도 보고서에 담겨 있다. 그러면서 “안 그래도 가정형편이 말이 아닌데 도적까지 살판 치고 있어 더는 살 수가 없다”며 “법기관들에서 시급히 대책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같은 강도·도적 사건들은 현재도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프레스》는 “저녁에 규찰대 완장을 찬 남성 2인조가 마스크를 쓴 방식을 트집 잡아 짐 검사를 한다며 골목으로 데려가 때리고, 자전거와 시계, 쌀을 훔쳐 달아났다”고 했다.
또 “해산물 도매업을 하는 여성이 송평항에서 귀가하던 도중 여러 명의 남성에게 습격당해, 자전거와 돈, 시계를 빼앗겼다. 만일에 대비해 동행한 남편은 팔이 부러졌다. 범인들은 제대군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안전국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범죄는 전혀 줄지 않는다. 그래서 사면으로 교화(징역)형을 단축 받은 자, 범죄 전과가 있는 자를 안전국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담당보안원이 그들에게 출근과 이동할 때 일일이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전과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생활고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먹고살기 위해 범죄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아시아프레스》 조력자들은 말한다.
코로나19로 연기된 학교 개학·군 초모

▲북한 평양 대동강구역 옥류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뉴시스
코로나19는 한국의 일상에도 많은 변화를 안겼다. 그중 학생들의 경우, 등교가 연기되고 집에서 화상수업이 진행됐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방학이 늘어났다. 불만이 뒤따랐다. 이유는 학교에 가지 않을 경우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적힌 관련 내용이다.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을 막기 위한 사업을 래년 4월까지 연기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신형코로나비루스가 인차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4월 말이면 신형코로나비루스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해 말까지 장기성을 띤다는 말이 돌고 있다.”
“버스에서 손님들이 하는 말이 학생들의 방학을 8월까지 더 연장하며 공부를 9월 1일부터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증을 막기 위한 사업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하였다.”
“학생들의 방학이 7월까지 연장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다가 학생들이 학교를 한 해 더 다닌다는 말이 나오겠다.”
실제 북한은 2020년 9월까지 개학을 하지 못했고, 해당 학년 진도는 계속 미뤄지게 됐다. 또한 북한 주민들은 코로나19가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다는 얘기도 종종 한다고 한다.
코로나19는 북한 인민군 초모(招募)에도 지장을 줬다.
해당 내용을 보고서에 올린 인물에 의하면 “지금 진행되는 비상방역사업이 앞으로 계속된다고 한다. 사람들 속에서 신형코로나비루스 전염병이 없어지지 않으면 인민군대 초모를 8월까지 진행한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고 했다.
또 “신형코로나비루스 전파와 관련하여 인민군대 초모를 올해에는 하지 않고, 군인들도 래년에 제대시킨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했다.
北, 코로나19 감염자 쉬쉬… “다수 지역서 감염 환자 발생”
북한은 지금까지 코로나19 감염자가 1명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얘기가 도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자료를 살펴보면 다수의 북한 주민도 감염자에 관한 소문을 아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인민반 주민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신의주에서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격리되고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격리기간을 7월까지 연장한다고 한다.”
또 “판문점 경무대(군사경찰-편집자 주) 군관이 신형코로나비루스 감염자로 확진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분계연선에서 경계근무를 수행하면서 괴뢰들로부터 비루스에 감염되었다고 한다”고 했다.
이 밖에도 중국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를 서해에 버려 물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 중국 사람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는 얘기 등 다양한 소문들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
중국에 있는 한 대북소식통은 “북한 다수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 환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이 같은 사건·사고들과 다양한 소문들에 대한 대책으로 조직지도부는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당 조직들과 행정경제기관들, 법기관들에서 가정생활이 어려운 세대들을 빠짐없이 장악하고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우며 국가적인 방역 조치를 돈벌이 공간으로 리용하는 자들과 강력범죄자, 절도범들을 모조리 적발하여 법적으로 엄하게 처벌하도록 하려고 한다. 또 주민들 속에서 류언비어를 각성 있게 대하고 퍼뜨리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교양사업을 더욱 강화하며 류언비어 퍼뜨리는 자들과의 조직적, 법적 투쟁을 더욱 강도 높이 벌리도록 하려고 한다.”
강철환 대표는 “북한은 코로나19를 구실로 주민들에 대한 단속을 더 활발히 벌이려고 하고 있다”며 “최근 북·중 국경을 봉쇄한 것도 모자라 탈북자들을 막기 위해 두만강 기슭에 지뢰를 매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02.23 코로나 봉쇄 2년, 북한 경제 실상을 알아내는 또다른 방법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지난 1년동안 서해5도 해안에서 수집한 북한 상품 포장지 등 생활쓰레기를 펼쳐 놓고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북한이 국경을 꽁꽁 걸어 잠근 지 만 2년이 지나고 있다. 단 하루도 외부 세계와의 교류나 교역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기 힘든 글로벌화의 시대에 2600만 인구의 국가가 2년 동안 완벽한 ‘셀프격리’를 하고 있다는 현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방역은 성공했을지 모르나 북한 경제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리적 추론일 뿐, 정확한 실상은 알 길이 없다. 국경 폐쇄와 함께 북한의 내부 정보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도 뚝 끊겼기 때문이다.
우선 탈북 행렬이 사라졌다. 코로나 이전 한 해 1000명 수준이던 탈북민 입국자는 지난해 60명으로 격감했다.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북중 접경지역에 가서 국경을 넘나드는 인원과 물자를 통해 북한 내부 정보를 파악하거나 국경 너머를 관찰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북중 접경지역 답사 등의 방법론으로 북한 사회상을 연구하는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대신 찾아낸 현장은 백령도ㆍ연평도 등 서해 5도다. 북한 땅에서 4㎞가량 떨어진 해안에 떠내려온 북한 주민들의 생활쓰레기들을 찾아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 1년간 정기적으로 서해 5도를 찾아 해안선을 누빈 끝에 1400여점의 북한 상품 포장지나 페트병 라벨지 등을 수거했다. 쓰레기에 무슨 대단한 정보가 들어있을까 싶지만 막상 연구를 시작해보니 북한 경제와 주민 생활상에 관해 의외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고 이를 책으로 엮었다. 필자도 처음에는 독특한 수집벽(癖)의 소유자이겠거니 했는데 만나 대화를 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노동신문의 행간을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쓰레기로부터 찾아내는 그의 작업은 진지했다.
쓰레기를 모아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
강 교수가 채집한 수집품을 보면 우선 북한 제품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북한은 단물이라 부르는 과일향 음료, 혹은 탄산단물이라 부르는 탄산음료를 만들어 내는데 강 교수가 수집한 것만 78종이고 브랜드도 제각각이다. 여기에 첨가되는 과일향의 종류도 국내 마트에서 보는 것보다 다양하다. 이는 김정은 집권 이후 10년간 ‘인민생활 향상’을 내걸고 지속적으로 경공업·소비재 제품 개발을 강조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강 교수의 분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쓰레기에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나.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는 기업소 이름, 공장 주소, 제품명, 디자인, 성분표시 하나하나가 모두 다 정보다. 단물 라벨지의 성분 표시에서 ‘팔월풀당’이란 생소한 이름의 재료가 모든 제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고보니 국화과에 속하는 팔월초란 풀에서 당 성분을 추출해 낸 것이었다. 북한은 설탕을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다. 기술이야 배워온다고 쳐도 원료인 사탕수수를 수입해야 하는데 북한의 경제구조가 그럴 형편이 안된다. 그래서 대용품으로 개발해 낸 것이 자생하는 풀에서 추출한 팔월풀당이다. 평양에 가공공장이 있다. 품질은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북한이 요즘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원료 국산화’의 딱한 현실이고 북한이 내세우는 자립경제의 단면이다. ”
그는 다른 제품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북한 의약품 포장지도 수거해서 성분을 조사해보니 국내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제품은 정성제약공장이 만든 식염수나 포도당 링거액 정도였다. 실은 이 제품은 한국의 대북지원단체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복용하는 위장약, 구충약, 간염알약,기침약 등은 예외없이 야생 식물을 말리고 빻아 환으로 만든 수준이었다. 북한은 이를 고려의약이라 부르지만 현대 의학의 견지에서는 효능이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다. ”
-품질은 미흡하다 해도 제품이 다양해지고 상표 디자인이 세련된 듯한데 긍정적 현상 아닌가.
“상품이 다양해진 것은 북한 주민에게 ‘취향’이란 것이 생겨났다는 의미다. 원래 사회주의는 국가가 주는대로 받아 소비하는 것이니 취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이 이제는 더 맛있고 이왕이면 더 예쁜 것을 찾고 있다는 의미다. 사적 욕망의 출현이다. 북한의 기업들도 주민의 취향에 맞춰 제품을 만들고 장마당을 통해 유통시켜야지 먹고 살 수 있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즉 집단주의 체제에 뭔가 균열의 틈새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북한이 제품 디자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강 교수의 수집품을 훑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제품 이름만 덜렁 쓰지 않고 특화된 캐릭터와 로고를 새겨넣은 도안들은 이미 보편화됐다. 얼핏봐도 한국 제품을 모방한 것이라 짐작되는 것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즉석라면이나 새우튀기 등의 포장 도안은 한국의 유명 상품 도안과 흡사했다.

▲북한산 즉석 라면의 포장지. 디자인과 색상 배합, 포장지 하단의 검은 색 무늬까지 한국산 라면의 것과 비슷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류 확산을 엄단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런 상품들은 예외인가.
“코로나로 인한 국경 통제 이전에 중국을 통해 한국 상품이 흘러 들어가 장마당에서 많이 유통됐고, 이에 익숙해진 북한 주민들의 수요에 맞춰 북한 기업들이 제품들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다. 한때 개성공단 입주 기업이 종업원들에게 나눠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초코파이도 이제는 모방 상품을 여러 기업소에서 경쟁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초코레트 단설기라 부른다. ”
진정한 인민생활 향상의 지름길은?
이 밖에도 쓰레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산 대추우유 페트병에 인쇄된 QR코드를 휴대폰 앱으로 촬영하자 제품 정보가 화면에 나타났다. 제품 웹사이트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송봉근 기자
◇실제 작동하는 QR코드=제품 포장지 가운데 상당수에는 QR코드나 바코드가 인쇄돼 있다. 그중 와플 포장지의 큐알코드를 휴대폰 앱으로 촬영해보니 ‘련계할 전화번호 02-973-1XXX’란 안내문이 떴다. 련계는 연락의 북한식 표현이다. 일부 제품의 QR코드에선 성분과 용량 등의 상품 정보가 나오기도 했다. 국제적 추세에 맞게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한 상품 관리나 유통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으며, 휴대폰 보급이 상당히 이뤄진 결과로도 풀이된다. 다만 해당 제품이나 기업의 홈페이지로 직접 연결되는 QR코드는 발견하지 못했다. 또 제품 생산일자 표기에서 '주체' 연호가 사라졌는데 이 역시 국제적 추세를 따르려는 변화의 일환으로 보인다.
◇병과 캔은 레어템=액체류 제품은 음료수든 술이든 모두 페트병에 담긴다. 강 교수의 수집품 가운데 병이나 알루미늄 캔은 전무했다. “북한 연안에 가라앉고 안 떠내려온 것 아니냐”는 질문에 “중국산 병과 캔도 백령도에 대량 떠내려오는데 북한산은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특히 알루미늄 캔은 평양의 고급 상점 화보에서도 보기 힘들다. 강 교수는 오랜 제재로 인한 원자재 품귀현상으로 설명했다. 북한이 확보한 소량의 알루미늄은 군수품 등 제한된 용도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광산에서 만드는 아이스크림= 에스키모라 불리는 빙과류의 생산업체 가운데엔 탄광업체가 들어있다. 원래는 석탄을 캐야 하는데 제재로 인해 판로가 막히니까 유휴 인력을 활용해 부업에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려항공이 생산한 고춧가루 포장지, 심지어는 기업이 아닌 함경남도 위생방역소 명의로 생산된 초콜릿 봉지도 발견됐다.
겉으로는 북한 소비재 상품이 다양해지고 포장이 세련되어졌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한계가 보인다는 것이 강 교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사적 욕구나 취향이 생겨난 것은 북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인가.
“변화의 작은 동인이라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장마당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한때 중국으로 수출된 북한산 화장품의 질이 아주 높은 것을 보고 북한 경제가 좋아지고 있구나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그런 고급 제품은 소수 특권층을 제외한 북한 주민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쓰레기로 떠내려온 것을 봐도 그렇고 탈북민에게 물어봐도 그렇다. 인민생활 향상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자립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인민생활 향상의 손쉽고 빠른 길은 개혁개방으로 국제 무역체제에 편입하는 길이다. 북한 지도자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03-03 평양 화성지구의 한겨울 삽질 악몽
▲지난달 13일 평양 화성지구에서 열린 주택 1만 채 착공식에 참석한 주민 수만 명이 각종 구호판을 들고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지난달 김정은은 평양 화성지구 1만 가구 주택 건설 착공식에 참석했다. 작년에 완공하겠다던 송신·송화지구 1만 가구 건설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또 새로운 공사판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화성지구는 평양에서 살았던 내게도 생소한 지명이다. 행사장 사진과 건설 조감도 등을 토대로 구글어스로 찾아보다가 소스라치게 과거의 악몽과 맞닥뜨리게 됐다. 김정은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저 장소, 순안공항으로 연결된 도로가 합장강과 만나는 저 지점은 26년 전 내가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뼈저리게 느낀 곳이다.
내가 김일성대 외국어문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5년 12월. 대학에 금수산기념궁전 건설 일환으로 합장강 정리 과제가 떨어졌다. 학년별로 3개월씩 나가 강바닥을 파내라는 것인데, 우리 학년 100여 명은 하필 제일 추운 겨울에 차출됐다. 대학 기숙사에서 공사 현장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했다. 우리가 가진 작업 도구는 정, 해머, 삽, 곡괭이 따위가 전부였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 먼저 휴식 공간으로 쓸 움막부터 만들었다. 언 땅에 정을 박고 교대로 해머를 휘둘러 봐야 흙이 겨우 밤톨만큼만 떨어져 나왔다. 작업 솜씨가 서툴러 정대를 잡았던 학생들이 해머에 손을 다치는 일도 잦았다. 갖은 고생 끝에 열흘 만에 겨우 기둥 몇 개를 세우고 수십 명이 빼곡히 들어갈 수 있는 움막을 만들었다.
다음 과제는 강바닥을 파내는 것인데, 이건 얼음을 깨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마대 하나에 흙을 채우는데, 네댓 명이 달라붙어 한나절씩 걸렸다. 100여 명이 동원됐지만 학생 간부라고 빠지고, 뇌물 주고 빠지고, 여자라고 봐주고 하다 보니 실제 일하는 사람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강을 따라 부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삐쩍 말라 허기진 젊은이들이 해머를 휘두르는 모습을 봤다면 누구나 시베리아 수용소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겨우 강에 가로세로 5m 정도에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웅덩이를 하나 파놓았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도중에 최태복 노동당 교육비서가 벤츠를 타고 와서 직접 격려까지 했다. 동원 기간이 끝나가는데 과제 수행 목표치에 턱없이 미달하자 책임지고 나왔던 교수가 사색이 돼 뛰어다니더니, 몇 km 떨어진 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 공병국에서 굴착기(포클레인) 1대를 한나절 빌려오기로 했다. 군인들은 대가로 디젤유 100L, 굴착기 바가지에 외제 담배와 밀주가 아닌 공장에서 제조한 술을 가득 채워줄 것을 요구했다. 교수는 학급 인원에 비례해 술, 담배를 분담시켰다.
철수하기 사흘 전쯤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굴착기를 몰고 나타났다. 그날 우리는 제방에 앉아 굴착기의 작업 모습을 지켜봤다.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우리가 석 달 동안 파놓은 웅덩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웅덩이가 생겨났다. 술, 담배를 가득 실은 바가지를 마대로 덮고 돌아가는 굴착기를 보며 우리 모두는 극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대학생 100명이 강추위에 벌벌 떨며 3개월 동안 한 일이 굴착기 반나절 작업량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목도한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무지한 사회는 망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다음 날 갑자기 조선중앙TV 기자들이 왔다. 책임자의 요구대로 우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옷을 입은 채 가슴까지 차오르는 얼음물에 들어가 흙을 파내는 연기를 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어 모닥불로 얼어붙은 옷을 말렸다. 그날 저녁 중앙방송에 “김일성대 학생들이 충성의 마음을 안고 얼음물에 뛰어들어 강을 파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땐 평양도 늘 정전이라 대다수가 그걸 보진 못했다. 전기가 오는 중앙당 아파트에 사는 몇 명이 다음 날 어제 TV에 그럴듯하게 나왔다고 전해줬다. 그 후부터 TV에서 물에 뛰어들었다는 영웅적 뉴스가 나오면 하나도 믿지 않게 됐다.
우리가 얼음물에 뛰어들었던 그 합장강변에 지난달 수만 명의 청년이 다시 모였다. 내가 3개월 동안 언 땅에 삽질을 하던 그때쯤 태어난 청년들이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통치자가 바뀌었지만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삽질하는 민초들의 삶은 한 세대가 지나도 변한 것이 없다. 화성지구 주택 건설 착공식 사진을 보며 26년 전 저 장소에서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고, 또 망해야 돼”라고 분노했던 젊은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북한은 아직도 망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언제까지 북한 청년들이 이런 삽질에 동원돼야 할까. 나의 분노도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월간조선 03월 호
‘막강한 권력자’ 인민반장
⊙ 20~40가구의 인민반 ‘지도’ 명목으로 주민 감시
⊙ 숙박검열, 장사, 사회동원 등과 관련해 막강한 권한 행사
⊙ 농촌 지원 시, 일하기가 편한 지역, 밭고랑 길이가 짧은 지역을 받아오는 사람이 능력 있는 인민반장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북한의 선전 구호. 인민반장들은 ‘당의 결심’을 전파하고 실행하는 첨병이다. 사진=조선DB
북한에는 자유(自由)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시간이 없다. 잠시도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청소, 노동, 퇴비 생산 등에 나오라, 가라 한다. ‘사회동원(社會動員)’이다. 새벽마다 ‘빨리 동원 나오라’고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 ‘인민반장(人民班長)’이다.
인민반장은 1970~80년대 대한민국의 통장, 반장과 비슷한 존재다. 하지만 그 기능과 역할은 완전히 다르다.
각 반은 반장에 의해 지도된다. 반장은 소속 주민들의 추천 형식을 거쳐 시·군(구역) 인민위원회 동사무소에서 지명한다. 대체로 충성심과 신분이 좋은 집안의 여성 중에서 선택된다. 이 외 구성원으로는 세대주 반장, 위생반장, 선동원 등이 있다. 원래 20~30가구로 구성했으나 아파트 건설 등 도시의 인구 밀집화 현상이 두드러짐에 따라 1994년 이후에는 20~40가구로 10가구 늘려 조직하고 있다.
북한은 인민반에 대해 ‘당과 국가의 정책을 관철하며 국가사회사업을 집행하고 생활을 알뜰히 꾸리기 위하여 일정한 수의 가구를 묶어 조직한 국가 사회생활의 기층조직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인민반은 생활총화 등을 거치면서 양육문제, 청소 노력동원, 공공질서 유지 등 해당 거주 지역 내의 현안들을 처리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인민반의 기본 기능은 ‘주민 감시’다.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감시망이 더 촘촘해졌다. 인민반 안에 인민반장 외에 세대주 반장도 만든 것이다. 인민반장은 인민반의 전체 주민의 동태 감시를 맡고, 세대주 반장은 남편들만 별도로 관리하는 역할이다.
세대주 반장이 새로운 제도는 아니다. 평양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세대주 반장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지방보다는 평양에서 남자들의 행태를 감시할 필요가 더했다는 뜻이다. 고난의 행군 이후 세대주 반장 제도를 전역(全域)으로 확대한 것이다. 인민반장과 세대주 반장은 인민반 회의, 인원동원, 강연 등을 주최하기도 하고, 특히 거주민들의 퇴근 후 동태까지 파악,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주민들 사이에서 막강한 권력자로 통하는 이유다.
인민반장은 누가 누구와 어디서 만났는지, 명절에 다녀간 사람은 누구인지, 부부싸움을 했는지, 자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일일이 감시하고 위에다 보고한다. 반원 중 누가 장마당에 나가 어떤 물건을 파는지, 추정 수입이 얼마인지도 안다. 인민반장의 보고는 어쩌면 ‘상납금(上納金)’의 액수를 정하는 기본 자료인지도 모른다. 먹고살 만큼은 남겨줘야 장사를 계속하고, 뇌물도 장기적으로 뜯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갑자기 씀씀이가 달라진 집도 인민반장의 감시 대상이다. 탈북(脫北) 가족의 송금 혹은 골동품(骨董品) 거래나 금속 밀수 등, 문제가 있는 행위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민반장의 힘
그렇다고 주민들이 인민반장을 적대시할 수도 없다. 인민반장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북한의 일상(日常) 중에 숙박검열이 있다. 불시에 단속반이 들이닥쳐 가족 이외의 누군가가 머물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제도다. 이때 인민반장이 안전원을 따라서 마을을 돈다. 단속에 나선 안전원들은 각 가정의 정확한 사정을 모른다. 그래서 현장에서 바로 판단을 내려줄 ‘전문가’가 필요하다. 예컨대 가족 명부에 다섯 명이 등록되어 있다고 하자. 새벽에 들이닥쳐 머릿수를 셀 때 등록 숫자와 잠을 자는 사람의 머릿수가 같아야 한다. 숫자가 많아도 문제가 되고, 적으면 더 큰 문제가 된다. 머릿수가 모자란다는 것은 누군가가 통제선(統制線)을 벗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탈북 시도라면 정치적인 문제인 것이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도 ‘숙박검열’이 나온다. 바람을 피우다 걸린 ‘돌이 아바지’에게 인민반장이 “돌이 오마니는 식구들 먹여 살리갔다고 장마당 나가 애를 쓰는데 이거 뭐 하는 짓거리냐”고 훈계를 한다. 식구들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훈계조(訓戒調) 말투가 거슬리더라도 대거리를 할 수 없다. 인민반장의 한마디에 따라 노동교화소에 갈 수도 있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을 때는 인민반장이 “동네 사람이다” “큰딸 동무가 맞다”고 하면 어찌어찌 넘어간다. 바람을 피우다 걸려도, “저 동무가 평소 사회동원도 열심히 나오고 당 사업에도 열심히 참여했다”라고 보증을 서면 처벌이 가볍다.
주민들 쪽에서 인민반장에게 뇌물을 고이고 미리 사정을 알려야 할 때도 있다. 밀수(密輸)에 나서거나 장사 물건을 떼기 위해 장기간 집을 비워야 하는 경우다. 어차피 요즘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밀수고 장사고 꽁꽁 얼어붙었지만.
사회동원 때도 인민반장에게 뇌물을 고이면 적당히 빠질 수도 있다. 아프다는 핑계를 들어줄 수도 있고, 쉬운 일을 배당할 수도 있다.
인민반장의 고충
인민반장도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윗선에 뇌물을 고여야 하고, 시시때때로 교제(交際)도 해야 한다. ‘고생 많으시다’라며 간부들에게 담배 막대기(보루)를 건네는데, 받는 사람의 직급과 권한을 헤아려 상납 담배의 품질을 정해야 하는 정밀한 작업이다. 잘못하면 뇌물을 주고도 욕을 먹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교제를 안 할 수도 없다. 뇌물 액수와 교섭력에 따라 인민반이 받는 작업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농촌 지원을 나가더라도, 일하기가 편한 지역, 밭고랑 길이가 짧은 지역을 받아오는 사람이 능력 있는 인민반장이다. 시작할 땐 열 고랑인데, 중간에서 갈라져 고랑의 수가 한둘 더 늘어나는 밭이 있다. 이런 곳을 받아오면 인민반원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인민반장이 무능하다며 성토(聲討)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성토는 ‘사회동원’ 자체를 ‘당연히 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변화의 조짐은 일반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기관아파트를 줘도 다른 곳에서 살려고 한다. 기관아파트의 인민반이라면 아무래도 감시와 통제가 더하기 때문이다. 배급이 사라지고 장마당이 열리면서, 노년층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당(黨)이 아니라 장마당’이라는 인식이 퍼지는 것도 심각하다. ‘조직 연대감’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윗선의 지시’를 인민반을 통해 구현하기가 점점 더 어렵고 힘들다. 당 간부들이 ‘못해 먹갔다’고 푸념하는 배경이다.
가족 탈북하면 인민반장 그만둬야
예술단이든 구호단체든, 대한민국 사람이 북한에 가면 바로 듣는 말이 있다. ‘개인주의를 버리고 집단주의를 하라’는 것이다.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버스를 탈 때도 단체로 움직이라는 주문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도원의 허락을 받고 하라는 지시다.
북한에 ‘개인’은 없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물론, 개성이나 취향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가 북한에서는 악(惡)이다. 혁명과업에 반대하는 비사회주의(非社會主義)다. 그런 북한식 사회악을 일선 현장에서 걸러내는 전문 인력이 바로 인민반장인 셈이다. 그래서 인민반장은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충성심이 투철하고 성분도 훌륭하며 가족 배경에도 하자가 없는 사람을 찾아 임명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원칙이다.
그런데 이 그물망에 구멍이 나고 있다. 인민반장 가족 중에 ‘탈북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탈북했다면, 그날로 인민반장직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규정이다. 예외가 없는 강력한 규정이다. 가장 충성스럽고 쓰임새가 많은 전문 인력을 마음먹은 만큼 부릴 수 없게 된다는 것. 북한 윗선의 고민이 적지 않을 부분이다.
하기야 김정은에게 정확한 보고가 올라갔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인민반장 가운데 상당수의 자격 미달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김정은이 받아들일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오늘도 ‘인민반장들의 노고에 힘입어 물샐 틈 없는 체제보위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김정은이 속한 인민반은 없다. 김정은을 통제하는 인민반장도 없다. ‘인민’이 아닌가 보다. 김정은이 탈북해도 ‘자리에서 떨어질’ 인민반장은 없다는 뜻이다.⊙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03.27 김정은 따라 눈 덮힌 백두산 행군하는 북한 주민들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7일 ″백두의 혁명정신, 백두의 칼바람 정신으로 새로운 주체 100년대를 기적의 연대, 승리와 영광의 연대로 빛내어가는 (김정은) 총비서 동지가 있어 우리 조국의 앞날은 끝없이 밝고 창창하다″며 '백두정신'을 내세워 김 총비서에 대한 충성을 독려했다.

▲노동신문=뉴스1
월간조선 04월 호
북한 벌목공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의 外換시장 퇴출로 충성자금용 달러 조달 길 막혀
⊙ ‘달아난 사람’의 돈은 지배인과 보위지도원, 부기장(서기)이 나눠 먹어
⊙ 벌목공들, 아르바이트하다가 러시아 여성과 살림 차리기도
⊙ 간부들, 벌목공 시신 운반 열차에 피아노·전자제품 등 챙겨 보내

▲북한-러시아 접경 핫산의 북한 벌목공들. 사진=조선DB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불똥이 엉뚱한 곳까지 튀었다.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베리아의 벌목(伐木) 현장이다. 2021년 6월, 데일리NK는 “러시아 파견 신규 북한 노동자, ‘50% 폭등’ 충성자금에 아연실색”이라는 기사를 냈다. ‘건설의 경우 기존 할당액이 1년 72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 4500달러에서 7000달러로 인상됐다’고 보도했다. 이 정도라면, 거의 매일 12시간 노동하고 가외로 상당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8개월 전의 느닷없는 인상도 문제지만, 최근 들어 더 큰 문제가 터졌다. 미국과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가 외환(外換)시장에서 쫓겨나면서, 벌목공들이 ‘달러를 조달’할 길이 막힌 것이다. 러시아에도 암달러 시장이 없지는 않지만, 공식 환율과는 차이가 크다. 그나마 최근 시장의 추세는 ‘달러화 초강세’다.
평양의 ‘윗선’들은 아래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정해도 들어주지 않고, 오직 달러로만 상납금을 받는다. 오히려 평양의 달러 사정이 더 다급해졌다는 속사정도 있다. 자칫하면, 노예노동에 가까운 노동일을 몇 년 하고도, 돈을 벌어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2~3년 생활비를 빚으로 떠안을 판이다.
시베리아 伐木 사업
2017년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2397호는 아직도 유효하다. 원칙대로라면, 러시아는 북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 노동자가 없다면, 모든 제재소가 가동을 멈춰야 한다. 러시아가 유엔결의안 위반인 줄 알면서도 암암리에 북한 노동자를 계속 받는 이유다.
‘시베리아 벌목’은 러시아와 북한이 의기투합한 사업이다. 출생률 저하, 사망률 증가, 경제성장률 둔화라는 3대 악재가 겹쳐 러시아 인구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1994년부터는 절대 인구가 줄기 시작했고, 1997년 인구는 1989년 인구와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했다. 전체 인구의 73%가 도시에 거주한다는 사정도 있다. 시베리아의 나무를 베고 가공할 인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舊)소련 시절, 소련이 설비와 자재를 대고 북한이 인력을 공급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익금의 60%가 소련에, 40%가 북한으로 가는 계약이었다. 5년에 한 번 협정을 다시 체결했는데, 그때마다 북한의 이익률이 낮아졌다. 3년 내구(耐久) 연한인 트랙터나 벌목 장비를 북한 미숙련 노동자들이 1~2년 사이에 망가뜨리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유지 보수’의 개념이 희박했던 탓이다.
나중에는 북한의 이익률이 31%까지 떨어졌지만, 북한에서는 큰 불만이 없었다. ‘연간 700만 달러’가 소련-북한 협정에 의한 공식 수입이었지만, 북한 김씨 왕조는 노동자 임금의 93%를 떼어갔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던 탓이다. 북한 전역의 전기 사정이 나빠지면서 더 이상 북한 내부에서 목재 가공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북한의 사정을 봐줬다. 북한으로 나무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에서 목재를 팔아 별도의 현금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벌목공, 하층민에서 엘리트로
1980년대만 해도 시베리아는 ‘토대가 나쁜 사람’들을 찍어 보내는 곳이었다. ‘목숨을 산판에 내던진 것과 같다’는 말이 돌 만큼 안전사고, 산업재해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토대가 나쁜 하층민들은 그래도 목돈을 벌 희망에 목숨을 걸고 동토(凍土)로 갔다. ‘뛰다가 걸린’ 사람들의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해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고, 환자로 위장해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압송했다는 것도 이 시절의 이야기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성분 나쁜 자들이 외화를 벌어와 성분 좋은 자들보다 잘사는 꼴을 북한 당국은 더 두고 보지 못했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엘리트층이 자진해서 시베리아행을 원했다는 사정도 겹쳤다. 당원들을 보내면, 연좌제 때문이라도 ‘뛰는 사람’이 적고, 충성자금도 또박또박 들어온다는 장점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상황이 또 바뀌었다.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세포비서(細胞祕書)조차도 러시아에서 ‘뛰려고’ 마음먹는 경우가 급증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엄하게 단속하는 것이 러시아어 사전과 단어장이다. 러시아어를 공부한 흔적은 곧 ‘탈출 모의’로 간주, 엄하게 처벌한다. 식당 입구에는 “92명의 적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라는 글귀와 함께 사진들을 붙여놓았다.
그런데 누가 뛴 사람인지, 누가 남은 사람인지를 헤아리는 일이 또 간단치가 않다. 서두의 데일리NK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북한 스스로가 ‘건설의 경우’와 ‘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벌목공이다. ‘건설의 경우’는 구분이 복잡하다. 나무 작업은 동절기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름에는 산판으로 가는 길을 닦거나 잔업이 있기는 하지만, 작업량이 많지 않다.
‘가외 아르바이트’는 여름에 한다. 야생 들쭉 채취 같은 합법적인(?) 것도 있지만, 밀주 담그기, 곰쓸개 판매 등 이익이 큰 불법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건설’은 러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인테리어 공사, 집짓기 등을 말한다. 하절기에만 하는 일이지만, 솜씨가 좋아 평판이 쌓이면 작업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전업(專業) 아르바이트’를 한다. 고객들과 친교가 쌓이면, 여초(女超·53%) 사회인 러시아의 특성상 현지 여성과 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있다.
벌목공을 감시하는 보위부원에게 별도의 뇌물을 고이면, ‘작업장 이탈’을 신고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 북한에서 직급 높은 ‘보위부원’이 오면, 단속 정보를 주고 피신을 시키기도 한다. 이유가 있다. 서류상 ‘합법적 체류자’ 숫자가 한 명이라도 더 많아야 그만큼 많은 인건비를 러시아 측에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아난 사람’의 돈은 지배인과 보위지도원, 부기장(서기)이 나눠 먹는다. ‘러시아 돈’을 빼먹는 일이기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해치울 수 있는 과업이다. 탈북 벌목공 중에 ‘내가 뛴 지 2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내 이름으로 러시아에다 돈 청구하는 놈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다. 부족한 인원을 메우기 위해 러시아 측 예상보다 잦은 빈도로 신규인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벌목공 가운데 ‘결핵’에 걸린 사람들을 후송했다”고 하면 만사 오케이다. 러시아에서도 결핵은 두려운 감염병이기 때문이다.
棺을 세워서 싣는 이유
노예나 다름없는 벌목공 생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다만 사망사고의 참상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을 취합한다. 25~30m 길이의 나무를 운반하거나, 나무를 벨 때 생각보다 사망자가 많이 나온다. 압사(壓死)다. 1980년대 초반에는 현지에서 시신을 처리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래도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줬다. 노동 강도가 덜하다고, 시신 관리자를 꿀보직이라 부른다. 관(棺)에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냉동 상태로 놓아둔 관은 4월 귀국열차가 출발할 때 러시아 경찰의 검시(檢屍)를 받는다. 관을 열고, 산업 도면을 빼가지는 않는지, 현금 밀반출은 없는지를 시신의 등을 훑으며 하는 검사다. 검시가 끝나면 아연판 관을 나무관에 덧씌우고 납땜을 한다. 시신에서 녹아내린 무언가가 관 밖으로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관이 아니라 통조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 위에 나무를 덧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한다.
동료 벌목공들의 눈이 뒤집히는 건 관을 기차에 실을 때다. 관을 눕히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때문이다. 관을 세워서 생긴 ‘남는 공간’은 간부들 차지다. 평양의 자기 집으로 피아노며 전자제품 등을 챙겨 보내는 것이다. 운임을 아낀다며 ‘시신운송열차’에 실려가는 관을 정말로 통조림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러시아에는 지금 적어도 1000명 이상의 ‘이탈 벌목공’이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상납금을 올리고 ‘건설의 경우’를 따로 떼어 더 많은 충성자금을 받는다는 건, ‘눈감아주는 폭과 깊이’가 그만큼 깊고 넓어졌다는 뜻이리라. 자유를 맛본 사람은, 그것이 제한적인 자유라 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000명은 은둔자인가, 의병인가, 북한의 변화를 알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인가. 지금 달러가 부족한 곳은 모스크바나 평양만이 아니다. 부족한 달러가 만들어낼 연쇄효과가 어디까지 미칠지 그것이 궁금하다.⊙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월간조선 04월 호
北, 주민 압박하며 김정은 비자금 조성 중
김정은 선대들 앞세워 바닥난 통치자금 채우기 나서
⊙ 北, 기부증서까지 만들어 공장·기업소에 기부금 바치라고 압박
⊙ 해외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金 비자금 모으기 바빠
⊙ 과거엔 없었던 협동농장까지 충성자금 바치라 지시
⊙ “충성자금 때문에 해외 근로자들 아우성”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북한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악화하고 있다. 북한 정권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자 모든 국경을 걸어 잠그고 주민 통제에 나섰다. 대부분의 생필품을 중국에 의존하는 북한 주민들 입장에선 앞날이 막막한 상황이다. 현지 소식통들은 하나같이 경제가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 때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의 통치자금도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김정은은 마약밀매, 해외파견 노동자, 무기판매 등으로 통치자금 대부분을 충당해왔다. 하지만 유엔의 강도 높은 대북제재와 코로나19가 겹치면서 북한으로 흘러들어 가던 김정은의 통치자금 줄이 막혔다는 것이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의 견해다.
실제 북한 정권은 해외로부터 들어오던 자금이 막히자 북한 주민들에게 충성자금 명목으로 김정은 통치자금 계좌를 채우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북한은 조선기금총회사까지 만들어 외국인에게까지 충성자금을 요구하고 있다.
《월간조선》은 최근 북한 선전선동부가 2020년 각급 인민보안국에 내려보낸 자료를 입수해 분석했다. 자료는 ‘김일성·김정일 기금사업과 관련한 포치안’이라는 제목이다. 해당 자료에는 북한 기관,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에 대한 ‘김일성·김정일 기금’ 수취 형식과 방법, 기부액수에 따른 증서 수여 기준까지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김일성·김정일 기금’은 2013년 11월에 김정은이 처음 만든 것이다. 기금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두고 있지만 사실상 강제성이 다분해 보인다.
북한 소식통은 “2013년 김정은의 지시로 해당 기금 사업이 만들어졌는데 크게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서 “그동안은 강제성 없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바치게 했었는데 코로나19 상황이 악화하면서 금액까지 지정하는 등 강제성을 띠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금, 北 화폐 최대 5억원… 외화 5만 달러 명시

▲김정은 사치품. 사진=NKCHOSUN
자료에는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 기금’에 단체의 이름으로 기부한 기관, 기업소들에 기부증서를 수여하며, 단체들에 대한 증서 수여 기준은 기관, 기업소들의 급수와 규모에 따라 내화는 5000만~5억원, 외화(미국 달러)는 5000~5만 달러를 비준과업으로 정했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자료는 상급 당의 포치로 인민보안기관 안의 각급 당 조직들에 하달됐으며 ‘김일성·김정일 기금’의 단체기부형식, 단체기부등록방법, 단체기부증서수여기준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았다.
단체기부형식을 보면 기관, 기업소, 협동농장(농목장) 등의 이름으로 하며 합영, 합작회사들과 외화벌이 기관들도 기부에 참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부등록방법에 관해서는 기부자등록프로그람(프로그램) ‘백옥3.0’을 이용하여 단체기부등록을 진행하되 ‘이름’란에는 단체 명의를 ‘생년월일’에는 기관 창립일을, ‘어머니 이름’에는 기관책임자 이름을 쓰라고 했다.
‘비고’란에는 기관 명칭을 등록하는데 인민보안기관 단체인 경우, 해당 단위 군부대 대호만 밝히고 종업원 단체인 경우에는 해당 단위 군부대 대호와 기업소 급수, 인원수를 밝혀 인민보안성 재정국2과 콤퓨터(컴퓨터)로 전송하라고 지시했다.
자료에 명시된 작성방법 예시를 보면 인민보안기관단체인 경우 (부대부문 포함) ‘단체명의, 1945-11-19, 리○○. 조선인민내무군 제○○○○군부대’로 밝히고 종업원단체인 경우, ‘단체명의, 2000-9-27, 차○○. 조선인민내무군 제2037군부대(특급) ○○○명’으로 밝히라고 제시했다. 위에서 말하는 1945-11-19(1945.11.19)는 북한 인민보안기관 창립일이다.
증서수여기준에서는 인민보안기관(부대부문 포함) 단체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경우, 단위 군관기구정원수에 따라 규정한 기부액수에 따라 증서를 수여하라고 밝혔는데 그 기준을 보면 기구정원수에 따라서 수여 기준이 다르다.
자료에 따르면 기구정원수가 100명 이상인 경우는 내화 2억원, 외화 2만 달러 이상이고 50~100명인 경우는 내화 7000만원, 외화 7000달러다. 이 밖에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농목장) 명의로 하는 경우 급수에 따라 규정한 기부액수에 따라 기부증서를 수여한다고 밝혔다.
북한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서 일하다 탈북한 김성수(가명)씨는 “과거에도 군부대에 속해 있는 외화벌이 사업소 같은 곳에서 충성자금 명목으로 50만~100만 달러를 당에 바쳤다”면서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바쳐도 보상이나 어떠한 특혜도 없었다. 기부증서까지 만들어 진행하는 것을 보면 북한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들어 북한 정권이 기부증서까지 만들어가면서 돈을 강요하는 것은 그만큼 김정은의 통치자금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라며 “코로나19로 현재 경제가 어려워 살기 어려운 북한 주민들이 이로 인해 더욱 어려움에 부닥쳤다”고 덧붙였다.
北, 인원수에 따라 특급, 1~6급 기업소로 분류
북한은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들의 급수에 따라 기부금 액수를 규정, 돈을 거둬들이고 있다. 해당 급수는 공장 규모와 인원에 따라 특급에서 6급까지 나누어진다. 자료에 있는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농목장) 명의로 하는 경우 급수에 따라 규정한 기부액수에 따라 기부증서를 수여한다”고 했다.
〈▲특급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농목장)은 내화 5억원, 외화 5만 달러 ▲1급 내화 2억원, 외화 2만 달러 ▲2급 내화 1억원, 외화 1만 달러 ▲3급 내화 8000만원, 외화 8000달러 ▲4급은 내화 7000만원, 외화 7000달러 ▲5급 내화 6000만원, 외화 6000달러 ▲6급 내화 5000만원, 외화 5000달러.〉
무역회사와 합영회사 등 해외와 거래하는 기업소들은 금액이 더 많았다. 제일 적은 금액이 북한 화폐로 1억원이다. 해당 내용이다.
〈무역회사, 대외 운수회사, 합영, 합작회사의 명의로 기부하는 경우 급수에 따라 규정한 기부액수에 따라 기부증서를 수여한다.
▲합영, 합작회사 전체와 특급, 1급 무역회사, 1급 대외 운수회사는 내화 5억원, 외화 5만 달러 ▲2급 무역회사 내화 4억원, 외화 4만 달러 ▲3급 무역회사와 2급 대외 운수회사 내화 3억원, 외화 3만 달러 ▲4급 무역회사와 3급 대외 운수회사 내화 2억원, 외화 2만 달러 ▲5급 무역회사와 4급 대외 운수회사 내화 1억원, 외화 1만 달러.〉
자료에 보면 해당 금액을 기부했을 때 기부증서를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지만 실제로 해당 금액은 북한 정권이 정해놓은 기부액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 밖에도 재외에 거주하는 기관, 기업소는 등급이 아니라 무조건 내화 5억원, 외화 5만 달러를 바쳐야 한다.
북한은 또한 단체기부는 현금(내화, 외화) 또는 외화행표(한도 내에서 쓸 수 있는 백지수표 개념)로만 할 수 있다고 지정했다.
장성택의 측근으로 오랫동안 북한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던 탈북민 이정식(가명)씨는 “과거에는 이처럼 노골적으로 돈을 내놓으라고는 안 했다”며 “코로나19로 김정은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 지금처럼 기부금 증서를 만들어 서로 경쟁을 시키는 식으로 돈을 거둬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북제재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들도 돈 모으기 어려워진 건 마찬가지지만, 마약을 팔아서라도 기부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북한 내에 있는 공장, 기업소들이 해당 금액을 모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증언했다.
“협동농장까지 기부금 바치라는 건 죽으라는 것”
자료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협동농장이다. 북한의 협동농장은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 아니다. 북한 농민들은 1년 내내 농사를 지어 모두 국가에 바친다. 북한 정권은 각 농장에서 거둬들인 식량으로 군량미와 주민들 배급을 충당했었다. 하지만 배급제가 폐지된 지금은 모두 군량미로만 들어가고 있다.
물론 농민들도 가을이 되면 협동농장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식량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1년 식량을 충당하기는 역부족이다. 1990년 후반부터 비료 등 농사에 필요한 품목들이 부족한 형편이다. 그렇다 보니 1년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럴 경우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거의 없다.
1년에 국가에 바쳐야 하는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국가에서 정해준 과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개인의 식량 창고를 털어서라도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고난의 행군’ 이후 농민들은 협동농장 일은 뒷전이고 자신이 몰래 일궈낸 토지에서 개인 농사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의 농사는 당연히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또 최근 농장을 떠나 시내로 나가는 인구도 늘고 있다고 한다. 시내에 나가 장사라도 해서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농촌에까지 ‘김일성·김정일 기금’을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성수씨는 “김정은이 얼마나 급했으면 농민들에게까지 충성자금을 내라고 하겠느냐”며 “과거 김정일도 농민들에게는 돈 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탈북해 남한으로 온 김정림(가명)씨는 “지금 협동농장이 문제가 아니다. 조금 있으면 학생들에게도 충성자금을 내라고 할 판이다”면서 “협동농장들은 돈 날 구멍이 없다. 그런데 하도 당에서 내라고 하니 꼼수를 쓰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농장 관리위원장들은 1년 생산된 식량의 수량을 일부러 속여 보고한다”면서 “생산량이 100톤이면 70~80톤으로 보고한다. 그 나머지를 팔아 충성자금으로 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정식씨는 “협동농장에 그 많은 돈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며 “아무리 식량을 팔아도 당에서 요구하는 돈을 충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루블 가치 사상 최저, 北 근로자 충성자금 채우지 못해”
김정은 통치자금 모으기 작업은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에게도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에 파견된 근로자들은 충성자금 압박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근로자들과 무역업 종사자들의 경우 기부금 모금 때문에 당으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중국의 한 소식통은 전했다. 북한이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폐쇄했던 북·중 국경을 개방했지만, 정작 물품을 사들일 자금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은 중국에 파견한 외화벌이 근로자들에게 ‘상품이라도 좋으니 기부받아 조국으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조선족 사업가 A씨는 “최근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위의 지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서 “나에게 외상으로라도 물건을 먼저 받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해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현재 북한이 막았던 국경 문을 열어놓긴 했지만, 정작 운영되는 곳은 단둥밖에 없다”며 “단둥도 예전만큼 물건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북한 내부 자금 사정이 어려운 것으로 안다”고 했다.
러시아에 파견된 근로자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루블 가치가 사상 최저로 하락하면서 북한 근로자들이 당에 바치는 충성자금에도 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북한 근로자들이 일하고 월급 또는 시급으로 받는 화폐는 루블이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충성자금을 루블이 아닌 달러로 환산해 받는다. 루블의 가치가 사상 최저로 떨어진 지금 같은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월급이 높은 곳으로 가려면 현장 책임자에게 뇌물을 바쳐야 한다. 현장 책임자들도 노동자들에게서 받은 돈을 대부분 북한에 있는 간부들에게 다시 바쳐야 한다. 이유는 뇌물을 바쳐야 그곳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지금 러시아 현지 근로자들은 충성자금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지난해 충성자금이 인상된데다 올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루블의 가치는 사상 최하로 떨어져 목표 금액 채우기 바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파견 근로자들은 3개월 연속으로 충성자금을 채우지 못하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며 “지금 그런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서도 김일성·김정일 기금 보낸 흔적 발견”

▲북한이 운영하는 조선기금총회사에서 지급되는 김일성·김정일 기금 증서. 사진=조선기금총회사
북한 정권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김일성·김정일 기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조선기금총회사를 만들어 이곳을 통해 외국인들에게서 돈을 기부받고 있다. 조선기금총회사는 중국에 거점을 두고 여러 나라에 지부를 운영하는 형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에 사무실을 꾸려 중국인 직원까지 고용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해당 회사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는 김일성·김정일 기금이 어떻게 쓰이게 되는지, 기금을 낼 경우 어떤 우대가 주어지는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국내의 친북 인사들과 북한을 찬양하는 단체나 개인들도 단둥지부를 통해 기금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를 통해 조선기금총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지정해주는 계좌로 돈을 보내거나 직접 중국을 방문해 기금을 전달한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최근 들어 북한이 국내 친북 인사들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활발히 벌이는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국내에서도 조선기금회사에 김일성·김정일 기금을 보낸 흔적이 발견돼 수사 중에 있다”고 말했다.
단둥지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2016년에 처음 만들어졌지만 그동안 활동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2019년부터 김일성·김정일을 찬양하는 게시물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2020년엔 본격적으로 모금활동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A씨는 “북한이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경제가 악화되면서 김정은의 비자금 모금이 많이 어려워진 것 같다”면서 “가끔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에서 돈을 바치라는 압박이 엄청나 힘들다며 우는소리를 한다”고 전했다.⊙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04월 15일 北 태양절 쇼와 파탄 향하는 ‘金 왕조’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태양신과 핵무기의 결합, 북한의 통치자 김정은은 오늘도 이런 강성국가의 공상을 꿈꾸며 북한을 태양절의 축제로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 속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10일 진행된 김정은 통치 10주년 중앙보고대회 주석단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는 내려졌다. 대신 올라간 건 태양 근처에도 못 가는 김정은 자신이었다. 지난해 혁명에 해롭다며 개인숭배 중단을 실토한 김정은 스스로 자신만의 개인 숭배사를 다시 쓰고 있다. 북한 77년사에 김일성 개인숭배 기간은 세대교체를 서서히 시작하는바 이번 김일성 탄생 110주년이 그 고비가 될 것 같다.
북한은 1974년 4월 중앙인민위원회(현재의 국무위원회) 정령을 통해 김일성 생일을 북한 최대의 명절로 지정했고, 1997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3주기에 맞춰 이날을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5개 기관이 주체연호 사용과 함께 태양절로 격상시키기로 공동결의했다. 태양절에는 각종 전시회와 체육대회, 노래 모임, 주체사상 연구토론회, 사적지 참관, 결의대회 등의 행사가 열리며 보통 이틀 연휴다.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을 비롯해 평양미술축전, 김일성화 전시회, 우표 전시회, 만경대상 체육축전 등이 열린다.
김일성을 보통 인간에서 태양신으로 끌어 올린 장본인은 그의 장남 김정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세습통치를 합리화하고 북한을 ‘김씨 조선’으로 만들어 1000년 집권의 꿈을 이루려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김정일의 후계자 김정은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태양신에서 서서히 끌어내리고 있다. 문제는, 청소한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려 하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반추해 보면 1960년대 북한 사회주의 경제 기적을 몸소 체험한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의 개인숭배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문제였다. 노동당은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천재들을 총동원해 김일성 개인숭배 작업의 총력전을 펼쳤고, 김정일은 5대 혁명가극과 김일성 회고록 등을 창작해 그 감성적 방법론들을 양산해 냈다. 태양신의 창조는 곧 사회주의 체제 몰락으로 이어졌다.
김정은은 선대의 명성은 이용하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으로 개인숭배의 새 시대를 열고자 몸부림치고 있다. 신화가 지배하는 나라에 절대빈곤이 엄습해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린 북한 주민들은 젊은 지도자가 만들어내는 대량파괴무기를 바라보며 “이것이 정상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서 25년째 허덕이고 있는 북한 경제의 악조건에서도 평양에는 80층짜리 아파트를 지어 젊은 지도자의 전지전능함을 과시하고 있는 북한을 바라보는 세계 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북한에서 101층 건물을 짓는 데 24년이 걸린 전례로 볼 때 1년 만에 80층 건물을 완공했다는 것은 반신반의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북한은 정상국가로 가느냐, 아니면 비정상국가로 몰락하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먼저 태양절과 작별하는 것이 첫 순서인 것 같다. 태양신의 숭배는 올해 110주년으로 종식을 고하고 자유, 민주, 시장경제의 정상국가로 가는 새로운 출발만이 북한 체제를 구해줄 것이다.
문화일보
월간조선 05월 호
‘아다무끼 인민반장’
‘권세·입김이 중앙당 부부장보다 세다’
⊙ 고지식한 인민반장을 ‘아다무끼’ ‘국제 아다무끼’라고 지칭
⊙ 당원들에게도 원칙대로 할 때는 ‘아다무끼 인민반장’도 박수받아
⊙ 인민들의 생활 세세히 파악해 ‘식구가 다섯이라면, 반장까지 여섯 식구’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할로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2018년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환영하는 평양시민들. 이럴 때 주민들의 동원을 책임지는 사람이 인민반장이다. 사진=공동취재단
경제 제재가 풀리지 않으니 북한 곳곳이 아우성이다. 첨예한 전선(前線) 중 하나가 인민반장이다. ‘주민들의 바람’과 ‘윗선이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민반장은 북한 당국의 북 주민들의 사생활을 말단까지 감시·통제하는 현장 인력이다. 당국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를 선호하고, 인민들은 융통성 있는 사람을 원한다.
인민반장의 별칭은 ‘거두매 반장’이다. 위에서 지시한 ‘돈과 물자를 걷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유와 구실이 없어 못 걷는 경우가 없는 곳이 북한이다. 동네일은 물론, 백두산 지원, 원산 무슨 지구 지원 등, 각종 공사에 물자가 필요할 때마다 인민을 쥐어짠다. 그때마다 위에서 내려보낸 할당량을 채우는 책임자가 바로 인민반장이다. “이번에 이런 일이 제기되었는데…”라며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못 사는 사람이 많으니, 같은 집을 10~20번은 방문해야 겨우 뭔가를 걷을 수 있다.
‘깜뿌라치’ 퇴비
예를 들어보자. 북한에서는 매년 모든 세대가 1t의 퇴비를 바쳐야 한다. “먹은 것이 없는데 무슨 수로 ×을 1t이나 만드냐”는 항변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융통성 있는 반장은 ‘깜뿌라치’ 퇴비를 받는다. 석탄재, 얼음, 기타 여러 재료(?)를 섞어 양을 채운, 순도(純度)가 많이 떨어지는 가품(假品)이다. 고지식한 인민반장은 품질을 꼼꼼하게 검사한다. 가품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 주민들이 돌아서서 ‘아다무끼’라고 욕하는 이유다. ‘아다무끼’는 ‘미숙련공’을 뜻하는 일본의 공사판 용어다. 고지식한 정도가 심한 인민반장은 ‘국제 아다무끼’라고 부른다. 그만큼 인민들의 생활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다.
‘깜뿌라치’ 퇴비는 걷으면 끝나는가. 아니다. 불량이라는 것을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가 안다. 그래서 사업이 필요하다. 사무장, 동 당비서, 지도원 등의 사무일꾼들을 푹 삶아놓아야 뒤탈이 없다. 집으로 초대해 술이며 안주를 먹이고, 배웅하며 여과 담배를 들려 보낸다. ‘겉보기에 속을 안다’는 말처럼, 각자의 취향 그리고 어느 선까지 눈감아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미리미리 손을 써두는 작업이다. 간부들을 삶아놓으면, 농촌 분조장을 삶고 퇴비확인서를 받기가 수월하다. 윗선이 알아서 말을 해놓기 때문이다.
지원물자 말고도 내야 하는 것은 많다. 줄단콩(붉은콩)은 북한에서 외화(外貨)콩이라고 부른다. 중국에 수출해 상품(商品)과 바꿔오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씨도 계획대로 바쳐야 하는 물건이다. 기름을 짜서 세탁비누 등을 만드는 재료다.
주는 것 없이 내라는 것만 많으니 현장에서는 불만 폭발이다. 물건을 걷으러 가면 ‘때려죽일 놈들’ 같은 저강도(低强度) 푸념부터 ‘김정은이가~’로 시작하는 신성모독형(?) 욕설, ‘백성들 다 굶겨 죽이려고…’로 이어지는 비분강개(悲憤慷慨)형 정치적 발언 등 별난 소리가 난무한다. 온갖 하소연을 같이 들어주고, 때로는 맞장구도 치며 같이 욕해줘야 좋은 반장이다. 융통성 있는 반장들은 미리 사업을 해서 배정 할당량 자체를 줄이고, 계획을 못 채워도 채운 것처럼 보고서를 만든다.
반장 집은 검열 안전지대
하지만 ‘국제 아다무끼’들은 예외를 봐주지 않는다. 사회동원 때도 마찬가지다. 고지식한 성격대로, 마대, 삽, 곡괭이를 할당량대로 다 거둔다. 구멍 난 마대를 받아서라도 동네 할당량 40매를 다 채워서 위에다 바치는 식이다. 그래서 고지식한 반장이 아프면 모두 좋아라 한다. 사회동원에 슬쩍 빠질 수도 있고, 동원에 나가서도 일을 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영리한 반장들은 위에다 이 구실 저 구실을 대며 반원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놓는다. 숙박검열이나 전기검열이 잡히면 “○○ 애미야, 날치지 마라. 요즘 보위부 눈치가 이상하다”라며 미리 힌트를 주고, 시간이 없으면 전화를 걸어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수화기를 세 번 두드린다. 반원들이 밥가마나 녹화기를 숨길 시간을 주는 것이다.
숙박검열에 걸릴 만한 일이 있어도 같이 돌아다니는 안전원에게 ‘이 집 식구 다섯 명이 맞다’라며 넘어가게 해준다. 물론 나중에 그 집을 찾아 “반장을 뭘로 보고…. 도와주는 것도 어느 정도지”라며 주의는 주지만.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반장의 집은 검열의 안전지대다. 평양 아파트 거주자들은 그래서 ‘반장 옆집’을 명당으로 친다. 걸릴 만한 물품이 있으면 미리 반장 집에 숨겨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베란다를 터서 문을 만들고, 밀수 이익금으로 구입한 1년 치 쌀을 그쪽에 쌓아놓고 가져다 먹기도 한다. 반장의 아들, 딸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각종 단속 소식도 유용한 정보다.
인민반장은 월(月) 4회 시당회의에 참석한다. 당 방침을 교육받고, 인민반의 불량성을 타파하라, ‘도강자(渡江者)가 없도록 하라’ 등의 강연제강을 받는 자리다. 인민반장이 파란 책을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서는 날이 시당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제기된 사실을 꼼꼼하게 적어 반원들에게 과업을 알려 말씀을 관철시키는 것이 인민반장의 의무다.
인민반 회의는 인민반장 집에서 한다. 7시에 모이라고 하면 9시나 되어서 겨우 사람들이 모인다. 지루한 이야기를 전하는 자리니 반원들은 반원들대로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다. 반장 말을 듣지 않고, “돈대(환율) 얼마냐, 쌀값은?” 등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반장은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할당량 채우는 일을 눈물로 호소하기도 한다.
반장이 고지식할수록 현장은 아수라장이다. 융통성이 있는 반장은 ‘머리말과 끝말’만 하고, ‘집집마다 얼마 내라’는 결론만 이야기한다. 회의 시간은 채워야 하니, 돈대와 쌀값 추세 등 화제에 참여해 말을 섞기도 한다.
고지식한 인민반장이 박수를 받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인구의 약 10% 전후인 당원(黨員)은 인민반 생활을 하지 않는다. 다른 집은 “아무개야!”라고 사람 이름을 부르며 문을 탕탕 치지만, 당원 집은 방문을 망설이고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른다. 당원인 여자들은 ‘나는 인민반원들과 급이 다르다’라는 우월의식이 있다.
‘국제 아다무끼’들은 이 점을 봐주지 않는다. 새벽 4시 조기(早起) 작업, 식전동원에 100% 참가하라며 다그친다. 당원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이다. 경제림 보위지도원 아들 등, ‘아버지 등 대고서’ 동원에 빠지는 자들을 징치(懲治)하기도 한다. “곱게 놀고 생활 똑바로 하라”고 일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윗선에다 고자질을 한다. 간부들은 “이거 반장이 불었지?”라며 불만이지만, 특권층을 인민반원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을 보고 이때만은 반원들도 ‘국제 아다무끼’들을 지지한다.
평양·회령에서는 노임도 지불
인민반장은 업무가 적지 않다. 그래서 밀수 등 자기 일(?)이 바쁜 사람은 반장 자리를 마다한다. 그래도 하려는 사람은 많다. 혜택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민반장의 가족이 저지르는 비법(非法)은 어지간하면 다 봐준다. 중범죄만 아니라면 죄를 묻지 않는 것이다.
평양과 회령 등에서는 반장에게 노임도 준다. 외화콩으로 바꿔온 중국제 양복지, 비누 등 물품이 차례지기도 하고, 국정가격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표, 돼지고기 등을 싼값에 살 수 있는 국정가격표를 주기도 한다. 원래는 ‘뜨물표’ ‘마당 쓴 표’ 등 사회동원에 나온 증거를 제시하는 반원들에게 가야 할 구입표지만, 이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나눠주는지는 전적으로 인민반장이 결정하는 문제다.
간부 사업을 하려는 반원들을 도와주고 받는 사례도 생계를 해결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북한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맨 마지막에 인민반장의 사인이 있어야 착수가 가능한 탓이다. 비법 집이 걸리면, 인민반장의 한마디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반장이 도와주느냐, “저 집 아이들… 말도 마라, 사회동원도 안 나오고, 반장 알기를…”이라고 고자질하느냐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라진다. 그래서 미리 알아서 무언가를 고이는 사람도 여럿이다.
반장끼리 모이면 “못해 먹갔다”고 푸념하지만, 잘하면 뇌물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으니 그 자체가 사실 이권이다. 자기 집에서 비법을 하는 사람들에겐 반장 자리가 훌륭한 안전판이자 보험이기도 하다.
상부에서는 ‘아다무끼’ 선호
북한에서 인민반장은 피하자고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당 비서와 대외사업을 잘하더라도, 집안이 무너지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어떤 음식 냄새가 나는지, 누가 들락거리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인민반장이다. 식구가 다섯이라면, 반장까지 여섯 식구다, 라는 말은 북한에서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 집에서 요즘 불량생들이 모여 뭘 하는 것 같았다”는 인민반장의 증언은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민반장을 보는 반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권세와 입김이 중앙당 부부장보다 더 센 사람이다’고 여기는 이유다. 반장이 이렇듯 막강한 자리이다 보니, 윗선에서는 말을 잘 듣고 지시가 잘 먹히는 고지식한 ‘아다무끼’를 선호한다. 주민들이 선호하는 융통성 있는 반장들은 자르거나 교체 대상이다. 걷어오는 할당량의 품질과 수량이 기대치에 영 못 미치는 까닭이다.
이것이 글 맨 앞에서 ‘인민반장은 당국과 북한 주민들이 부딪히는 최전선’이라고 한 배경이다. 당국과 주민 사이의 끝없는 신경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북한 내부의 사정이 나쁘면 나쁜 만큼 전선은 끊임없이 늘어날 것이다.⊙
05월 12일 北 ‘코로나 뚫렸다’ 첫 인정… “최중대 사건”

▲ 김정은, 정치국회의 소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코로나19 확진자 발생과 관련해 개최된 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 발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국경 폐쇄와 국내 이동 봉쇄, 사업체별 격리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스텔스 오미크론 감염자 확인
“방역 파공… 최중대 비상사건”
김정은, 모든 시·군 봉쇄 지시
국제사회 지원요청 의도인 듯
북한에서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가 발생했다. 북한은 최대 비상방역 체계를 선포하고 국경·지역 봉쇄 등에 들어가 최근 잇따른 탄도미사일 도발과 7차 핵실험 징후 발견 국면에서 한반도 정세에 중대변수가 되고 있다. 북한이 코로나19 확진 사실을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2일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참석하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열린 당 중앙위 제8기 제8차 정치국회의를 통해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사실을 공개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정치국은 “2020년 2월부터 오늘에 이르는 2년 3개월에 걸쳐 굳건히 지켜온 비상방역 전선에 파공이 생기는 국가 최중대 비상사건이 발생했다”며 “5월 8일 수도의 어느 한 단체 유열자들에게서 채집한 검체 유전자 배열 분석 결과, 최근 세계적으로 급속히 전파되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BA.2(스텔스 오미크론)와 일치한다고 결론하였다”고 밝혔다. 북한은 확진자 규모를 밝히지 않았지만 “발열자들”이라고 언급해 집단 발생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전국의 모든 시·군들에서 자기 지역을 철저히 봉쇄하고 사업단위·생산단위·생활단위별로 격폐한 상태에서 사업과 생산활동을 조직하여 악성 바이러스의 전파 공간을 완벽하게 차단하라”며 “전선과 국경, 해상, 공중에서 경계근무를 더욱 강화하며 국방에서 안전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강조했다. 이어 “비축해 놓은 의료품 예비를 동원하기 위한 조치를 가동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북한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에 따른 지원 여부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인도주의적 차원의 지원은 (대북 제재) 예외로 생각하는 것으로 안다”며 지원 가능성을 열어뒀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이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이 어려움에 처한 부분에 있어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울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김유진·김윤희 기자
05.13 北 코로나 35만명 확진, 6명 사망… 김정은 “방역 허점” 질책
하루 1만8000여명씩 발생, 18만7800명 격리

▲/노동신문 연합뉴스
북한이 코로나 확진자 발생을 처음으로 인정한 가운데 지난 12일 하루 전국에서 1만8000여명의 발열자가 새로 발생했고, 코로나 확진자를 포함한 6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1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날 국가비상방역사령부를 방문해 이 같은 내용을 보고 받았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4월 말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이 전국적 범위에서 폭발적으로 전파 확대돼 짧은 기간에 35만여명의 유열자(발열자)가 나왔으며 그중 16만2200여명이 완치됐다”고 보고 받았다.
보고엔 “5월12일 하루 동안 전국적 범위에서 1만8000여명의 유열자가 새로 발생하였고 현재까지 18만7800여명이 격리 및 치료를 받고 있으며 6명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사망자 중엔 BA.2(스텔스 오미크론) 확진자 1명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열병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해 동시다발적으로 전파확산됐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세워 놓은 방역체계에도 허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심각히 지적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북한은 전날 김 위원장 주재로 열린 당 정치국 회의에서 2019년 말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공식 인정했다. 또 국가방역체계를 ‘최대 비상방역체계’로 이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일보 김자아 기자
05.13 北코로나 대란, 김정은 탓?… 수만명 불러 기념사진 57번 찍었다
북한 매체가 13일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이 지난 4월 말부터 퍼지고 있다면서 35만명에 이르는 유열(발열)자가 나왔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가운데, 매체가 언급한 시기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열병식 노고를 치하한다면서 수만 명을 불러 모아 57차례나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돌 경축 열병식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데 기여한 평양시 안의 대학생, 근로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북한 조선중앙TV가 3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지난 7일 방송된 MBC 통일전망대 영상에 따르면, 김정은은 지난달 25일 북한이 조선인민혁명군 창설 90주년을 맞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행사를 한 뒤, 후속 행사로 자신과 사진을 찍는 이른바 ‘1호 사진’ 촬영 행사에 수만 명 인파를 동원했다. 김정은은 일주일에 걸쳐 유공 주민들과 조(組)를 나눠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공개된 사진만 57장에 달한다.
실제로 조선중앙TV 영상을 보면, 김정은은 열병식 이틀 뒤인 지난달 27일, 평양 미림비행장에서 열병식에 참가한 장병들과 사진 촬영을 했다. 비행장 부지에 설치 철제 계단 구조물에 적게는 300명, 많게는 800명 가량이 조를 이뤄 줄지어 도열해 있으면, 김정은이 자리를 옮기면서 이들과 사진을 찍는 식으로 기념사진 촬영 행사는 진행됐다. 이렇게 찍힌 사진은 29장. 김정은은 대략 1만명에 육박하는 인원과 ‘노마스크’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외에도 김정은은 행사를 방송한 조선중앙TV 직원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었고, 28일에도 재차 열병식 참가 군인들과 평양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같은 달 28일에는 평양 시민들과 1호 사진을 찍었다. 30일엔 군 최고위 간부들과 촬영한 사진이 공개됐고, 5월 1일에는 열병식 카드 섹션에 동원된 평양시 내 대학생, 청년들과 사진을 찍었다. 특히 이 땐 20장의 사진이 찍혔는데, 각 사진마다 1500~2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됐다. 열병식 이후, 김정은이 북한 각계 주민들과 약 일주일 동안 찍은 1호 사진은 총 57장에 달한다.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지도자와 함께 찍은 이른바 ‘1호 사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최고지도자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 자체가 신분보장이 되는 터라, 노동당 입당이나 상급학교 입학, 진급 등에서 가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집권 이래 주민들과의 기념사진 촬영을 통해 내부 결속과 충성심을 유도하는 통치술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최근 직접 밝힌 바대로 북한에서 코로나가 속수무책으로 확산하고 있는 것은, 지난달 열병식 이후 진행된 이 같은 ‘사진 정치’ 행사가 바이러스 확산의 출발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지난 12일 처음 코로나 확진 사례를 발표했다. 13일에는 조선중앙통신이 “12일 하루 동안 전국적 범위에서 1만8000여 명의 유열자가 새로 발생했고 현재까지 18만7800여 명이 격리 및 치료를 받고 있다”며 “열병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전파 확산됐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세워놓은 방역체계에도 허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김명진 기자
05.14 김정은 “건국이래 대동란”…北, 어제 코로나로 21명 사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2일 국가비상방역사령부를 방문해 코로나 방역실태를 점검했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4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놓고 “건국 이래의 대동란”이라고 했다. 코로나 유입과 확산의 책임은 당 조직에 전가하면서 “중국의 경험을 따라 배우라”고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3일 하루 동안 전국적으로 17만4400여명의 발열자가 발생했고, 21명이 사망했다고 14일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국가비상방역사령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재한 정치국 협의회에서 이같은 상황을 보고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세계적으로 신형 코로나 비루스(바이러스) 전파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악성 전염병의 전파가 건국 이래의 대동란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방역 정책 실행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당과 인민의 일심 단결에 기초한 강한 조직력과 통제력을 유지하고 방역 투쟁을 강화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외부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자력으로 코로나에 대응해야 한다는 기조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은 “현 상황이 지역 간 통제 불능한 전파가 아니라 봉쇄 지역과 해당 단위 내에서의 전파 상황이며 대부분의 병 경과 과정이 순조로운 데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악성 전염병을 능히 최단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코로나 유입과 확산의 책임을 당 조직에 전가했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보건 위기는 방역사업에서의 당 조직들의 무능과 무책임, 무역할에도 기인된다”고 하면서 각급 당 조직 실무자들을 향해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 돕고 위해 주는 우리 사회의 덕과 정은 그 어떤 최신 의학 과학 기술보다도 더 위력한 방역 대승의 비결, 담보로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 선진국들의 방역정책과 성과 경험을 잘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중국 당과 인민이 거둔 선진적이며 풍부한 방역성과와 경험을 적극 따라 배우라”고 했다. 중국처럼 강력한 봉쇄를 바탕으로 한 방역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며 강한 조직력과 통제력을 유지하고 방역투쟁을 강화해 나간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오경묵 기자
05.15 北 ‘발열자’ 하루 30만명 폭증… 진단장비 없어 확진자 숫자 깜깜이
사망 15명 늘어... “치료법 몰라 약 잘못써 숨지기도”
누적 확진자 82만620명, 사망자 42명...
장비 없어 감염 규모 파악 못해
확진자 대신 발열자로 불러
북한에서 ‘코로나19′의 전국적 확산세가 빨라지는 가운데 14일 신규 발열자가 30만명에 육박했다. 사망자도 15명이 발생해 현재까지 42명으로 늘었고. 이 가운데 치료법을 몰라 약물사용 부주의로 숨진 사례도 다수 나타났다.
북한 국가비상방역사령부는 지난 13일 저녁부터 14일 오후 6시까지 전국적으로 29만6180여명의 유열자(발열자)가 새로 발생했으며 15명이 사망했다고 1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밝혔다.
지난달 말부터 14일 오후 6시 기준 북한 전역의 발열자는 82만620여명이며 이 가운데 49만6030여명이 완쾌됐고, 32만4550여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앞서 북한은 12일 1만8000여명의 발열 환자가 발생했고 13일 17만4400여명의 발열자가 신규로 발생했다고 보도했던 점을 고려하면 확산세가 가파르다.
특히 북한 관영매체는 여전히 ‘확진자’가 아닌 ‘유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자가검사 키트와 유전자증폭(PCR) 검사 물자가 없어 몇 명이나 확진됐는지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통신은 “현 방역위기가 발생한 때로부터 사람들이 스텔스 오미크론변이 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부족하고 치료 방법을 잘 알지 못한데로부터 약물 사용 부주의로 인한 사망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전국의 모든 도, 시, 군들이 지난 5월 12일 오전부터 지역별로 완전히 봉쇄되고 사업단위, 생산단위, 거주단위별로 격폐 된데 이어 엄격한 전 주민 집중 검병검진이 진행되고 있다”며 현재까지 134만9000여명이 위생선전과 검병검진, 치료사업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전국의 치료예방기관에는 의약품이 긴급 공수되고 있다.당 중앙위원회 부서 일군(간부)들과 성·중앙기관 정무원 등 지도층이 개인적으로 구비한 여유약품 기부에 나섰다.앞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가정에서 준비한 상비약품들을 본부 당위원회에 바친다”며 솔선수범에 나서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북한은 아울러 주민들에게 올바른 치료방법과 위생상식을 알리기 위한 선전을 펴고 있으며, 격리·봉쇄로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물자보장 사업을 강화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
05.16 코로나에 “버드나무 잎 우려먹으라”는 북한
북한에서 지난 14일 하루에만 30만명의 코로나 ‘유열자(발열자)’가 새로 발생했고 15명이 사망했다고 북 선전 기관이 밝혔다. 북은 코로나 발병을 처음 인정한 12일 발열자가 1만8000여 명이라고 했는데, 이틀 만에 16배 늘어날 만큼 폭증세다. 김정은은 “건국 이래 대동란”이라고 했다. 마스크를 쓰고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도 처음 공개했다. 그만큼 코로나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북한의 의료·방역 수준이다. 북이 ‘확진자’ 대신 ‘발열자’라는 표현을 쓰는 건 진단 장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감염 규모도 모를 것이다. 북한 주민의 백신 접종률은 ‘제로(0)’다. 만성적 식량난으로 면역력까지 약한 데 코로나에 걸리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데 북한 병원엔 코로나 치료제는커녕 기초 해열제도 없다.
노동신문은 “버드나무잎을 우려서 하루에 3번 먹으라”고 주민들에게 권했다. 코로나 치료법으로 ‘버드나무’를 들고 나온 집단은 북한이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기침 나면 꿀” “숨차면 창문 열기”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도 했다. 이렇게 4주가 지나도 “피를 토하거나 기절, 출혈 등이 있으면 병원을 찾으라”고 했다. 중세식 민간요법으로 죽을 때까지 버텨보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중국 방역 성과를 따라 배우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주민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거주지를 봉쇄했지만 북한은 그럴 식량조차 없다. 예상치 못한 인도적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북한은 코로나 확산을 공식 발표한 직후에도 초대형 방사포 3발을 쐈다. 7차 핵실험도 준비 중이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한국 새 정부와 미국을 겨냥한 도발은 계속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코로나 방역 지원을 제안해도 북 정권이 수용할지 미지수다. 핵 폭주와 비상식적 방역에 죽어나는 건 북한 주민뿐이다. 백신과 치료제가 아니라 ‘버드나무’로 코로나와 맞선다며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김정은의 시대착오적 폭정이 개탄스럽다.
조선일보 사설
05.16 北, 전주민 외출 막고 발열자 색출… 확진 수백만, 사망 10만명 가능성
북한 내 코로나19 의심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15일 북한 국가비상방역사령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2일 1만8000여 명이던 하루 발생 ‘유열자’(발열 환자)는 13일 17만4440여 명, 14일 29만6180여 명으로 폭증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곧 1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다.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북한 사정을 감안하면 누적 사망자가 적어도 10만명에 달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봉쇄 지역에 보낼 양곡 준비 - 북한 함경북도의 한 양곡 판매소에서 코로나로 봉쇄된 지역 주민들에게 보낼 물자를 준비 중인 모습.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15일“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되는 각지 시·군 당 위원들의 정치 사업은 날이 갈수록 적극화되고 있다”고 했다. /노동신문 뉴스1
14일 노동당 정치국 협의회에서 코로나 전파 상황을 보고받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건국 이래의 대동란(大動亂·큰 난리)”이라면서도 “얼마든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최단 기간 내에 극복할 수 있다”며 외부 의존보다는 자체 해결 의지를 강조했다. 정부가 이번 주 초 북한에 전통문을 보내 코로나 방역 지원 논의를 위한 실무 접촉을 제안할 방침인 가운데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북한 국가비상방역사령부는 “5월 13일 저녁부터 14일 18시까지 전국적으로 29만6180여 명의 유열자가 새로 발생하고 25만400여 명이 완쾌됐으며 1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어 “4월 말부터 5월 14일 14시 현재까지 발생한 유열자 총수는 82만620여 명이며 그중 49만6030여 명이 완쾌되고 32만4550여 명이 치료를 받고있다. 현재까지의 사망자 총수는 42명”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북한 내 코로나 의심 환자의 가파른 증가세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14일 집계된 29만6180여 명은 남북한 인구 차를 감안하면 국내 하루 최대 확진자 기록인 62만명(3월 16일)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북의) 확진자 규모는 100만명 이상, 몇 백만 명까지도 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 자료들이 (해외에서) 나오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되면 사망자 폭증은 시간문제다. 현재 북한의 누적 발열 환자(82만620여 명) 대비 사망률은 0.005%다. 세계적으로 치명률이 낮은 한국(0.13%)보다도 훨씬 낮지만, 이는 코로나 확산 초기의 ‘착시 효과’란 지적이다. 아직까진 정상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사회주의 보건·의료 시스템이 코로나 의심 환자 수백만 명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제 기능을 발휘할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오미크론의 중증화율이 떨어진 이유는 백신 접종, 감염으로 인한 면역 획득, 치료제, 중환자 치료 기술의 향상 등 4가지인데 북한엔 이 모든 게 없다”고 했다. 이재갑 교수는 “사망률이 낮아도 2~3%, 의료 체계가 갖춰진 게 없으니까 높게는 10%까지 올라갈 수 있다”며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현재 북한의 코로나 대응은 ▲전국 200여 시군의 완전 봉쇄 ▲사업·생산·거주 단위별 격폐 ▲전(全) 주민 집중 검진으로 요약된다. 북한은 “134만9000여 명이 위생 선전, 검병 검진, 치료 사업에 진입했으며 유열자들과 이상 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 철저히 격리시키고 치료·대책하고 있다”고도 했다. 2600만 전 주민의 외출을 막은 상태에서 방역 요원들이 가가호호 방문으로 발열자를 색출해 강제 격리하는 방식이다. 확진자가 급증한 지린성·상하이 등에 한해 1~2개월 봉쇄 정책을 쓰는 중국의 극단적 ‘제로 코로나’보다 엄격한 대책이다.
하지만 북한은 정작 격리된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의료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관영 매체들이 “(14일 소집된) 정치국 협의회에서 예비 의약품을 신속히 보급하기 위한 문제가 집중 토의됐다”고 밝힌 것도 의약품 부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노동신문이 “커피를 마시지 말라” “금은화(꽃의 일종)를 3~4g씩 또는 버드나무잎을 4~5g씩 더운물에 우려서 하루 3번 먹는다”며 민간요법을 안내하는 실정이다. 특히 김정은은 몸소 “하루빨리 온 나라 가정에 평온과 웃음이 다시 찾아들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가정에서 준비한 상비 약품들을 본부당위원회에 바친다”며 수령의 상비약인 ‘1호 약품’을 내놓았다. 당·정·군 간부들의 의약품 기부를 독려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됐다.
북한은 중국에도 방역물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도 지원을 검토 중이다. 정부 당국자는 “되도록 주초에 남북 연락사무소 통신선을 통해 북에 ‘방역 지원을 논의할 실무 접촉을 갖자’는 취지의 전통문을 보내려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백신, 치료제, 코로나 검사 장비 등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재훈 교수는 유통·보관상 제약이 덜한 SK바이오사이언스의 ‘GBP510′이나 영상 2~8도에서 냉장 보관이 가능한 노바백스의 백신을 지원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자체 해결’을 강조하는 북한이 당장 윤석열 정부의 지원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김정은은 14일 정치국 협의회에서도 “선진국들의 방역 정책과 방역 성과와 경험들을 잘 연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며 “중국 당과 인민이 악성 전염병과의 투쟁에서 이미 거둔 선진적이며 풍부한 방역 성과와 경험을 적극 따라 배우는 것이 좋다”고만 했다. 외부 도움 없이 중국식 ‘제로 코로나’ 노선을 계속 걷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됐다.
06.06 北 무기밀매 다큐 배우 “스커드 5발 1400만달러… 北이 무기 메뉴판 보여줬다”
다큐 ‘잠입’의 배우 울리히 라르센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잠입’은 독재정권 북한으로 잠입해 10년간 스파이 임무를 수행한 남자의 다큐멘터리다. 울리히 라르센은 북한친선협회(KFA)에 가입해 신뢰를 얻고 북한 당국의 무기밀매 실태를 카메라에 담았다. 최근 내한한 그는 “가짜 인생을 살았지만 북한의 범죄를 알릴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3년에 걸쳐 촬영했지만 북한 당국을 속이기 위해 신분을 위장한 것은 10년 전부터다. 그 10년이 두 시간짜리 다큐멘터리가 된 셈이다. 이 영화가 공개돼 내 정체가 노출됐지만 두렵지는 않다.”
북한의 무기 밀매 실태를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잠입(The Mole)’의 배우 울리히 라르센(46·덴마크)은 평범한 남자처럼 보였다. 서울락스퍼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잠입’은 그가 스페인에 본부를 둔 북한친선협회(KFA)에 가입해 신뢰를 얻고 임원이 된 뒤 북한과 우간다, 요르단 등지에서 무기 밀매를 협의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라르센은 “두 번 방북해 훈장까지 받았다. 3~4m 거리에서 본 김정은은 중세 시대의 왕 같았다”고 술회했다. 용기와 근성 없이는 만들 수 없는 다큐다.

▲다큐멘터리 '잠입' 에서 북한이 몰래 수출하는 무기 메뉴판을 보여주는 장면.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2011년 ‘잔혹한 독재국가를 어떻게 찬양할 수 있는가’ 하는 호기심에 KFA에 들어갔다. 이 조직에서 내 지위가 올라 스칸디나비아 지부 대표를 맡게 되자 ‘북한의 무기·마약을 팔아줄 사업가를 찾아달라’는 은밀한 요구를 받았다. 이 다큐를 연출한 마스 브뤼거 감독에게 연락해 ‘석유 재벌 제임스’라는 배우를 고용했다. 그도 스파이 역할을 감당할 담력이 있었다.”
평양의 한 식당에서 북한 당국은 미사일과 탱크 등 ‘무기 메뉴판’을 보여줬다. 스커드 미사일 5발은 1400만달러였다. 2018년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열린 회의에선 “북한 무기를 시리아로 배달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라르센과 제임스는 북한 관료들과 함께 우간다로 가서 섬 구입을 논의한다. 라르센은 “우간다 측엔 호화 리조트를 짓겠다고 말했지만, 지하에는 무기와 마약 공장을 넣으려 했다”며 “북한은 불법을 숨기려고 ‘삼각 거래’ 수법도 쓴다”고 전했다.

▲울리히 라르센은 북한에서 위험한 스파이 역할을 감쪽같이 해냈다. 그와 가족은 덴마크 정보 당국의 신변 보호를 받고 있다. /장련성 기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잠입’은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잔혹한 독재 정권으로 잠입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두 명의 평범한 남자에 관한 실제 잠복 스릴러다. 덴마크 독립 영화 제작자 마스 브뤼거가 연출한 ‘잠입’은 함정 수사 기법을 사용했다.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는데 목숨을 걸 만한 일이었을까. 라르센은 “북한은 유엔 제재를 받으면서도 무기를 팔아 외화를 벌어야만 했고 우리는 그 절박함을 역이용했다”며 “2500만 북한 주민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거룩한 북한을 위한 투쟁을 촬영해 유튜브에 올리겠다”며 거의 모든 것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몰래카메라로 찍은 장면들도 있다.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대사관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 2020년 말 이 다큐가 공개되자 북한은 가짜라고 잡아뗐지만, 영국 BBC는 “김정은 위원장이 꽤 당혹스러울 것”이라고 평했다.

▲평양에서 북한 당국자들과 무기 수출 계약을 맺고 건배를 하는 장면.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제임스. 울리히 라르센은 이 순간을 촬영 중이다.

▲다큐멘터리 '잠입'
라르센은 은퇴한 요리사로 현재는 정부 지원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잠입’을 준비하고 촬영하는 10년 동안은 아내와 두 딸까지 속였다. 전직 CIA 요원에게 미행을 간파하는 법 등 스파이 기술을 익혔다는 그는 “일상의 95%는 나 자신으로, 5%는 스파이로 살아야 한다는 지침에 충실했다”며 “촬영을 마치고 아내에게 일종의 고해성사를 하며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북한이 보복하거나 협박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이 다큐멘터리 내용이 진짜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라르센과 가족은 덴마크 정보 당국의 신변 보호를 받고 있다.

▲배우 울리히 라르센의 명함. "특별한 이야기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원제 ‘The Mole’은 ‘두더지(스파이)’라는 뜻. 이날 그가 건넨 명함에는 “특별한 이야기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라르센은 “내 특별한 경험에 대해 강연하고 자서전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내 개봉을 추진 중이다.
“10년 동안 가짜 인생을 살았지만 북한의 범죄를 알릴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덴마크에는 ‘바보의 행운(fool’s luck)’이라는 표현이 있다. 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사람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위험할 만큼 모든 걸 걸어야 현실이 어떤 보상을 해준다는 뜻이다. 나는 외로웠지만 보답을 받았다. 이 다큐 속 북한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다큐멘터리 '잠입' 포스터. /서울락스퍼영화제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06.10 北 주민 전체에 백신·식량 줄 돈으로 미사일 쏜 김정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 관계자들과 함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앞을 지나고 있다. /노동신문
북한이 올 들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중·단거리 미사일 33발을 쏘는 데 8000억원 이상을 썼다고 한다. 이 돈이면 북한 주민 전체에게 화이자 백신을 맞힐 수 있다. 올해 식량 부족분을 살 수도 있다. 그런 막대한 돈을 미사일 폭주에 써버린 것이다. ‘애민 군주’라고 선전해 온 김정은의 본색이다.
김정은은 ‘핵 강국을 이뤄냈고 경제 강국도 시간문제’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방울 기름과 한 톨의 쌀, 시멘트 한 그램, 나무 한 토막도 소중히 하라”며 주민들에게 허리띠 졸라매기를 요구했다. 경제 상황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버금갈 만큼 어렵다고 한다. 그 책임은 늘 아랫사람에게만 묻는다.
코로나가 창궐하자 “버드나무 잎을 우려 먹으라”고 했다. 또 “기침 나면 꿀” “숨차면 창문 열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다. 중세 시대와 같은 민간 요법으로 주민들이 알아서 생존하라는 것이었다. 2020년 미국과 유럽 등 국제사회가 코로나 지원 손길을 내밀었을 때 김정은이 한 일은 한 달간 신형 미사일 9발을 연달아 쏘아 올린 것이었다. 북한 주민의 생명과 건강은 뒷전인 채 오로지 정권 보위를 위한 핵·미사일 개발에만 열을 올린 것이다.
이런 김정은에 대해 문재인 정권 인사들은 “백성의 생활을 중시하는 지도자” “계몽 군주”라고 칭송했다. 김정은과 정상회담 하는 이벤트를 위해 그의 비위만 맞췄다. 김정은 요구대로 한미 훈련을 축소하고 대북 전단 금지법까지 만들어줬다. 김일성 부자가 미사일을 발사하는 그림을 해외 전시하는 데 국민 세금까지 지원했다.
김정은의 관심은 오로지 김씨 왕조 유지에 있다. 북 주민은 노동력 도구일 뿐이다. 북은 김정은 통치 자금과 핵·미사일 개발비를 마련하기 위해 밀무역과 가상화폐 해킹 등 온갖 수단을 쓰고 있다. 그 자금줄부터 막아야 한다. 북 주민을 위한 인도적 지원 방안을 찾되, 더 강력한 제재로 김정은이 백신과 식량 살 돈으로 미사일을 쏘지는 못하게 막아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월간조선 06월 호
북한의 占卜
김정은 말은 흘려들어도 점쟁이의 말은 새겨듣는다
⊙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사실은 작두를 타는 무당이었다’는 전설도 회자돼
⊙ 간부집 부인들도 점집 많이 찾아… ‘중앙당 권력자들이 다니는 집’ ‘김정일 개인 점사’ 등
⊙ 한국에서 흘러들어 간 《토정비결》은 필사본 나돌 정도로 인기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할로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점집 풍경.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도 점쟁이는 살아남았다. 사진=조선DB
사회가 불안하면 번성하는 업종이 있다. 미래 예측업(?)이다. 큰일을 앞두고 사람들이 다투어 점쟁이를 찾는다. 길흉(吉凶)이 아니라 생사(生死)가 걸린 일이니,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과도하게 진지하다. 남쪽 얘기가 아니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사회에 만연한 풍경이다.
점복(占卜)은 북한 당국이 엄격하게 금지하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반사회주의(反社會主義)의 대표가 미신(迷信)’이라며 엄격하게 단속했다. 하지만 앞날이 궁금한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사회의 공통 관심사가 아닌가. 언제 식량이 떨어질지, 일가족이 잡혀갈지, 고문(拷問)당하고 죽을지 모르는 사회가 북한이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들의 불안지수가 항상 최고점을 찍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모든 환란(患亂)은 개인의 능력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북한에서 단속 때문에 점집은 사라졌어도 점쟁이는 살아남아 번성하는 이유다.
“먼 길 가시는 분이네”
장마당이나 역전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먼 길 가시는 분이네.”
탈북(脫北)을 꿈꾸는 사람들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다음 한마디가 들어온다.
“내일 닭 한 마리 잡아서 어디로 오라.”
닭은 점쟁이 집 부엌으로 가고, 점쟁이는 정안수에 종이 태운 재를 뿌리고 “무슨 모양 같으냐?”고 묻는다. 대답이 없으면 “신령님이 노하신다”는 협박이 들어온다. 한국으로 가는 탈북 기도나 방조는 일가족이 잡혀가는 정치 문제이니 “따뜻한 곳에 가서 살아라” “정월에는 길 떠날 수 있겠다”라는 정도의 선문답(禪問答)을 들려준다.
거사일 전, 용한 곳을 방문하여 마지막 방비를 한다. 출발일을 택일(擇日)하고, 잘 굴러가라고 생계란을 굴리는 의식까지 마치면 출발 임박이다. 그렇게라도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 혹시 이런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끊이지 않는 수요와 공급의 원천이다.
결혼식도 점쟁이의 주요 수익원의 하나다. “그 남자 만나라, 만나지 마라”는 충고부터 결혼식 택일 등이 점쟁이의 손을 거친다. 평양에서 특정일에 결혼식이 몰리는 건 이른바 ‘손 없는 날’로 모두가 날을 잡기 때문이다.
인민들만 점쟁이를 찾는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점쟁이는 간부집 마누라들도 물어물어 찾아간다. 자기들끼리만 간다. 어느 지역에 갓 신내림을 받은 아기 무당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지방 방문도 불사한다. 남편의 승진, 가족의 안위, 어느 선에 줄을 대고 충성해야 하는지 등, 출세와 목숨이 걸린 중대사를 상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청 12살 애기 무당’ ‘함흥 동자’ 등이 한때 북한 전역에서 이름을 날렸던 용한 무당이다. ‘북청 12살 애기 무당’이 무슨 연유에선지 혜산으로 거주지를 옮겼을 때 북중(北中) 접경지대 전역에서 손님이 몰렸던 적도 있다.
‘묘향산 구렁이’
복채는 쌀, 빨랫비누, 술, 참기름 등 현물을 받기도 하지만 주로 외화를 받는다. 고객의 취향(?)에 따라 성명 철학, 동전 점, 손금, 사주팔자 등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수많은 인력이 성업 중이다.
‘중앙당 권력자들이 다니는 집’ ‘김정일 개인 점사’ 등 자칭 타칭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들도 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김씨 일가가 관상쟁이 등 점술인을 측근에 두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대표적인 전설은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묘향산 구렁이’다.
“1994년 8월, 김일성의 개인 점쟁이가 독대(獨對)를 청했다. ‘묘향산에 가실 일이 생길 텐데, 구렁이가 보이거든 길을 되돌려 나오시라, 안 그러면 큰일이 난다’고 했는데, 구렁이를 보고도 무시해서 수령님이 돌아가셨다”는 설화(說話)다. 전설(傳說)은 ‘김일성 고모 중에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사실은 작두를 타는 무당이었다’는 지점까지 비화한다.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이라 더 생명력이 길고 널리 퍼진다.
진짜(?)가 있으면 가짜(?)도 나오는 법. 군(軍) 입대 전 주워들은 몇 마디 말로 군 생활을 편하게 하는 ‘난돌이’들이 있다. “이번에 뭐 좀 보는 사람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나면 상담자가 몰리고, ‘제대 언제 하느냐?’ ‘올해 제대 날짜는 언제냐?’ ‘언제 결혼하는가?’ ‘어떤 여자 어디서 만나는가?’ 등의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단속을 해야 하는 정치지도원도 자기 관심사를 묻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면 군 생활이 말할 수 없이 편해지는 것이다. ‘가짜 점쟁이’의 생존술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첫째,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할 것. 둘째, 모든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답할 것. ‘앞으로 큰 걸음 걷겠다’ ‘주변 사람 조심하라’ ‘길 가다 개가 보이면 일단 걸음을 멈춰라’ ‘몇 년 안에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긴다’ 등이 그들의 모범답안이다.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다. “액운(厄運)이 들었다”며 고객들을 겁주고, “굴뚝에 모다구(못)가 박혔으면 다시 찾아오라”며 일단 내담자를 돌려보낸다.
아침에 나가보면 정말 굴뚝에 녹슨 못이 박혀 있다. 다시 점쟁이를 찾아가면 “비 온 뒤 마당 근처에 부처님이 보일 거다. 그러면 정말로 크게 부정이 탄 것”이라며 “그때 다시 오라”고 또 돌려보낸다. 비 온 뒤 마당 어귀에 정말로 진흙 속에서 솟아오른 불상(佛像)이 보인다. 놀란 마음에 허겁지겁 점쟁이를 찾아가면 “그럴 줄 알았다”며 액막이를 하자고 한다. 요구하는 금전의 단위가 다르지만, 두 번이나 미래를 족집게처럼 맞힌 용한 무당이니 앞뒤를 재고 따지고 할 겨를이 없다.
최고위층에서 피해자가 다수 나온 일이라 엄중한 수사가 이어졌고, 못은 점쟁이가 직접 박은 것, 불상은 콩을 담은 그릇에 물을 부어 함께 묻어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콩이 자라면서 불상을 밀어 올려 ‘안 보이던 불상이 갑자기 흙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게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남한산 《토정비결》
뭐든지 아랫동네 물건은 최상으로 치니, 서울에서 나온 《토정비결》 책은 더없이 귀한 물건이다. 표지를 뜯어내고, 서지(書誌) 정보가 나와 있는 막장을 뜯어냈어도 이 책이 남쪽에서 온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지질(紙質)과 인쇄 상태가 평양산과는 비교불가이기 때문이다.
‘금년 신수는?’ ‘몇 년 후에 대운이 오나’ ‘자식들 운세는 어떤가’ 같은 인생 설계부터 ‘이번에 장사를 떠나기 전 운은 어떤가’ ‘어떤 물건을 어디서 사서 어디로 팔면 좋은가’ ‘걸리지는 않을까?’ 등 당장의 현안까지, 독자들은 간절하게 바라는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 밤새 부지런히 책장을 넘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권력(小勸力)이다. 돈 주고 빌리는 수요가 많아 아예 분책(分冊)해서 대여를 하고, 북한 전역에 ‘빌려간 사람이 밤새 베껴 쓴’ 필사본이 나돌 정도다. 복사기가 거의 없고, 있어도 일반인이 이용하기는 그림의 떡이니 아예 베껴 쓰는 편이 빠른 것이다.
그래서 탈북 후 지하철 역 앞 좌판에서 파는 《토정비결》은 탈북민이 겪는 문화충격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귀한 책을 여기서?’라는 의문,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한때 그렇게 절실했던 서적이 여기서는 ‘재미 삼아’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 없는 것이다.
미래 예측에 관한 한 김씨 일가는 백전백패(百戰百敗)다. 과학적 미래 예측인 일기예보 등은 적중률이 바닥이다. 비무장지대 북한 병사들도 남쪽 일기예보를 듣고 일과를 준비한다. 북한 당국이 가장 아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증언도 있다. 주체사상의 역사적 미래 예측도 신뢰도가 바닥이다.
얼마 안 있어 자본가가 몰락하고 노동자·농민의 세상이 오며, 그때는 모두가 ‘이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70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없으리라는 것이 북 주민들의 생각이다.
사회가 불안하면 점복은 번성한다. 5년 후, 10년 후가 아니라 당장 내일, 다음 달의 삶이 불안한 곳이 북한이다. 점복을 단속하는 북한 당국의 싸움은 그래서 부질없어 보인다. 인민들은 김정은 말은 흘려들어도 점쟁이의 말은 새겨듣는다.
김정은이 하는 말은 ‘구름잡는 말’이고, 점쟁이의 말은 ‘내 걱정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김정은은 오늘도 내일도 ‘개인 점사’의 방문을 두드릴지 모른다. 어쩌면 은밀하게 탈북 날짜를 물어볼 수도 있겠다.⊙
06-16 김정은이 삼재를 만났다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2012년 4월 김일성광장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첫 연설이자 인민을 향한 첫 약속이었다. 10년이 지나 돌아보니 북에선 김정은만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연설 당시 90kg으로 추정되던 몸무게는 140kg으로까지 늘었다. 작년에 20∼30kg 정도 뺀 것으로 보였지만 최근 요요 현상이 온 듯 다시 살이 부쩍 쪘다.
북한 인민들은 김정은과 정반대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2017년 이후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로 북한 외화소득의 90% 이상이 줄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자발적 셀프 봉쇄로 남았던 10%도 벌지 못하게 됐다. 북한은 농경 왕조 사회로 회귀했다. 시간이 갈수록 외화와 예비물자 창고는 고갈되고 인민의 영양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4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대량 확산은 북한에 또다시 결정타를 안겼다.
격리 조치로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약이 가득 진열된 북한 선전매체들의 평양 약국 사진과 달리 지방 사람들은 약이 없어 고열을 그대로 견뎌야 한다. 장마당에서 그나마 팔리던 해열제는 코로나가 퍼지자마자 씨가 말랐다. 나라 곳곳에서 죽어간다는 아우성밖에 없다.
올해 김정은은 삼재(三災)를 만났다. 코로나가 갑자기 휩쓸면서 민심이 흔들리고, 나라 곳간이 텅텅 비었다. 방역에 실패한 김에 무역을 재개하려니 이번엔 중국이 문을 닫았다. 중국이 단둥 주민들에게 “남풍이 불면 창문을 닫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외신 보도가 현재 북-중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교역이 막히면 농사라도 잘돼야 하는데 올봄 심각한 가뭄과 고온이 북한을 덮쳤다. 비료 생산과 수입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작황이 좋을 수가 없다.
여기에 또 다른 무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6월 발행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을 2.9%로 대폭 하향 수정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 만에 최악의 경제 침체가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북한과 어떻게 연관이 될까. 에너지 시장의 가격 급등 및 불안정성 심화,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이뤄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쪽이 가난한 나라들이다. 이미 ‘인도양의 진주’로 불리던 스리랑카는 지난달 19일 부채 510억 달러를 갚지 못해 국가부도를 선언했다. 스리랑카의 인구는 2157만 명으로 북한과 비슷하다.
이렇게 국가가 부도날 정도가 되면 부패한 지도층을 향한 대중의 분노가 커지게 된다. 스리랑카에서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오랜 기간 족벌정치를 해온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의 관저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결국 라자팍사 총리는 지난달 사임을 발표한 뒤 헬기를 타고 가족과 함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해군기지로 도피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2010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 혁명도 경제난과 물가 인상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폭발한 것이다. 철옹성 같던 장기집권 독재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2003년부터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휩쓸어 독재 정권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색깔혁명’도 같은 이유로 촉발됐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가난한 독재 국가들엔 독약이다.
북한은 가난한 독재국가 순위에선 선두를 달린다. 스스로 세계 왕따를 자처하며 자력갱생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원유와 부족한 식량까지 자체 해결할 순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얼마나 도와줄지는 몰라도 세계적인 물가 상승은 북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은 정보 유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연좌제라는 21세기 유일무이한 극악한 반(反)인륜적 공포 독재를 펴고 있기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어도 시위가 벌어질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치솟는 물가와 대량 아사자는 북한의 내구성에 심각한 균열을 만들어내고 수십 년의 상처를 만들 수 있다. 화려한 쇼에 집착하고 인민의 주머니를 털어 대규모 공사판을 벌여 놓고 있는 김정은이 올해의 삼재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