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2-06 동아일보
06-01(수) ‘선밸리’의 억만장자들

2013년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워싱턴포스트 인수가 결정된 자리는 ‘선밸리콘퍼런스’였다. 당시 베이조스 창업자는 이 모임에서 도널드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 회장을 만나 3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존 플랫폼 강화를 위한 콘텐츠 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레이엄 회장은 그 자리에서 2억5000만 달러를 인수가격으로 제시했다. 베이조스 창업자는 별도의 협상 없이 그 자리에서 “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해마다 7월이면 미국 아이다호주의 휴양지 선밸리에서는 성대한 콘퍼런스가 열린다. 미국 투자회사인 ‘앨런앤드컴퍼니’가 1983년부터 매년 주최하는 행사다. 행사 기간은 일주일. 구글, 애플, 뉴스코퍼레이션, 타임워너 등 글로벌 미디어와 빅테크 거물 300명이 참석한다. 초청장을 받지 않은 인사는 참석할 수 없다. 새로 초청 대상이 되면 미국에선 주요 뉴스로 다뤄질 정도다.
▷코로나19 여파로 2년 만에 열린 작년 행사에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거물들이 집결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을 비롯해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팀 쿡 애플 CEO 등이 참석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행사 참석자들의 자산 총액이 7000억 달러(약 870조 원)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내총생산(GDP)을 웃돈다고 보도했다. 이 모임이 ‘억만장자 사교클럽’으로 불리는 이유다.
▷참석자들은 강연을 함께 듣거나 식사모임 등 사교 활동으로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최신 흐름을 반영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인수합병 등 굵직한 비즈니스 거래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디즈니의 ABC방송국 인수, 버라이즌의 AOL 인수, 컴캐스트의 NBC유니버설 인수 등이 모두 이 모임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초대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4년 팀 쿡 CEO와 만난 일도 유명하다. 둘이 깊은 대화를 나눈 이후 양 사는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스마트폰 특허 소송을 철회했다.
▷이 부회장은 2002년부터 한 차례를 빼곤 매년 이 행사에 참석했다. 201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갤럭시S7 언팩행사에 나타난 저커버그와도 이 모임에서 친분을 쌓아 왔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사법 리스크로 2017년 이후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공교롭게 그동안 삼성전자는 미래 먹거리를 위한 이렇다 할 인수합병 실적을 내놓지 못했다.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선밸리의 인적 네트워크는 개별 기업만의 자산은 아닐 것이다. 이 부회장의 올해 참석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6-02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분통

“노후 준비를 위해 매달 꼬박꼬박 국민연금을 냈는데 공짜로 받는 기초연금보다 못하다니 어이가 없다.” 정부의 기초연금 40만 원 인상 공약에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분노하고 있다. 팍팍한 살림살이에도 의무가입 기간 10년을 채우며 보험료를 내왔는데 역차별을 당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공약이 실현되면 노인 단독가구는 월 40만 원, 부부가구는 월 64만 원의 기초연금을 받게 된다. 올해 국민연금 월평균 수령액이 57만 원이니 기초연금보다 나을 게 없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 노인이면 누구에게나 지급된다. 재원도 국민 세금이다. 매달 보험료를 내야 받는 국민연금과 달리 공짜로 불리는 이유다. 2008년 9만4000원으로 시작해 박근혜 정부 20만 원, 문재인 정부 30만 원으로 대선을 치를 때마다 금액이 늘었다. 올해 지급액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월 30만7500원이다. 이번 정부는 이를 40만 원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허탈해하는 것은 기초연금 증액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은 기초연금 수령 때도 불이익을 당한다. 국민연금 수령액에 연계해 기초연금을 깎는 제도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령액이 기초연금 기준금액의 1.5배 이상이면 최대 50%까지 깎인다. 올해 기준금액은 월 46만 원이다.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늘어도 기초연금액은 깎인다. 국민연금 가입기간 12년이 넘으면 1년씩 늘어날수록 약 1만 원씩 줄어드는 구조다. 노후 보장을 위해 생활비를 쪼개 보험료를 납부해온 사람들에게 오히려 페널티가 주어지는 것이다.
▷현행 제도에서는 국민연금 수급액을 늘리려고 추납을 하거나, 60세 이후에도 계속 보험료를 내는 사람들에게 불이익만 돌아갈 수 있다. 돈은 돈대로 내고 기초연금이 깎여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장기 체납을 반복해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짧은 사람은 기초연금을 다 받게 된다. 이런 역설하에서 기초연금을 올리면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사람부터 국민연금을 이탈해 공적연금제도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본에서는 65세부터 지급하는 노령기초연금을 받기 위해 20세 이상 모든 국민이 국민연금에 의무적으로 가입해 10년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한다. 저소득층을 위한 납부 면제 제도가 있으나 그만큼 연금액도 줄어든다. 모두가 보험료를 내니 역차별 논란이 나올 수 없다. 그 대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생활보호급부가 지급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이 기초연금 지급 대상을 줄이고, 지급액을 높이라고 권고했다. ‘선별적 복지’를 강화하라는 얘기다. 기초연금 인상에 앞서 역차별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제도 전반을 손봐야 한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6-03 日언론의 수출규제 비판

2019년 7월 일본 도쿄 경제산업성 1031호실에는 화이트보드 1개, 테이블 2개, 의자 4개뿐이었다. 바닥에는 부서진 의자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이 창고 같은 회의실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를 둘러싼 한일 실무자 회의가 열렸다. 반도체 제조에 쓰는 소재 부품 장비(소부장)를 한국에 수출하기 힘들게 하는 규제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 직후 나온 경제 보복이었다. 그때 ‘창고 회의실’에는 일본 정부의 적대감이 가득했다.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시적인 적대감에 사로잡힌 제재가 역효과를 초래한다”며 일본의 수출 규제를 실패 사례로 들었다. 2019년 수출 규제 당시 일본 정부는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등을 한국에 수출할 때마다 일일이 허가를 받도록 했다. 5000억 원이 채 안 되는 일본 기업의 수출을 규제해 145조 원이 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을 타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2019년 이후 2년 만에 수출 규제 품목 중 한국의 불화수소 수입액은 66% 줄었고, 주요 100대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30.9%에서 24.9%로 감소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 수출 규제를 “일본 통상정책의 흑역사”라고 비판했다. 원래 일본은 경제적 수단으로 다른 나라를 압박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데 그 불문율을 깨면서 한국이 통상무대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정치적 이유로 경제 보복을 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한국의 수출관리 체계 탓으로 돌렸다. 글로벌 경제 파트너로서 신뢰를 스스로 저버렸다.
▷경제 보복 이후 한국 기업들이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에 나섰지만 소부장 분야에서 완전한 기술 독립을 이뤘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부장 품목인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벨기에산 수입이 늘었지만 알고 보면 일본 기업의 벨기에 자회사로부터 구매한 물량들이다. 반도체용 레이저 절단기는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고, 반도체 웨이퍼 식각 등을 위한 분사기 등은 일본산 수입 비중이 90%를 넘는다. 일본의 수출 규제 실패는 자업자득이지만 한국도 ‘가치 사슬’로 연결된 세상에서 일본을 빼고 기업 하기는 어렵다.
▷수출 규제 이후 일본의 소부장 기업들 중에는 아예 한국에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본 TOK는 인천 송도에 있던 기존 공장을 증설해 포토레지스트 생산 능력을 대폭 늘렸다. 일본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면서 자국 대신 한국에서 고용을 늘리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중에는 웨이퍼 재료, 포토레지스트 등 주요 품목과 관련해 탈(脫)일본화 움직임을 보이는 곳이 늘고 있다. 모든 보복과 규제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6-04(토) “우리는 칠면조가 아니다”

알록달록한 열기구가 가득한 카파도키아의 하늘, 하얀 치마가 활짝 펼쳐지도록 빙글빙글 돌면서 추는 세마춤, 고대 하드리아누스 신전…. 터키 유적지와 문화가 소개될 때마다 관광객들은 “헬로 튀르키예”를 외친다. 터키 공영방송에서 방영 중인 이 1분짜리 동영상의 홍보 대상은 관광지가 아니라 ‘튀르키예’라는 이름이다. 터키의 영문 국명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정부 캠페인이다.
▷터키 정부가 최근 영문 국호를 ‘T¨urkiye(튀르키예)’로 변경해 달라고 유엔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 등에서는 앞으로 터키의 정식 국호를 튀르키예로 쓰게 된다. ‘터키인의 땅’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터키가 1923년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을 때부터 써온 국호다. 문제는 영어식 국명인 ‘터키(Turkey)’가 칠면조와 스펠링이 같다는 것. 일반명사로 멍청이, 패배자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터키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국가가 개명하려는 목적은 다양하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통용되던 ‘홀란트(Holland)’라는 이름을 폐기했다. 마리화나와 성매매가 합법화된 북홀란트 지역의 퇴폐적인 이미지가 국가 전체로 확대된다는 이유였다. 체코는 형용사 ‘Czech’에 ‘공화국’을 붙여 사용하는 국호가 너무 길다며 ‘Chechia’라는 이름을 만들어 병용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식민지 시대에 사용됐다는 이유로 ‘실론’이라는 기존 국호를 버렸고, 스와질란드(Swaziland)는 ‘Switzerland(스위스)’와 헷갈리지 않겠다며 독립 50주년이 되던 2018년 ‘에스와티니’로 새 국호를 달았다. 이미지를 바꾸는 리브랜딩 작업이다.
▷터키의 대외 이미지 개선 시도는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마주보는 터키는 러시아-우크라 간 평화협상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나토(NATO) 회원국으로 목소리도 키워가는 중이다. 그런 터키로서는 추수감사절의 칠면조 요리를 연상시키는 국명이 달가울 리가 없다. 터키 정부는 영문 국호 변경으로 무역 경쟁력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업들은 수출품에 ‘메이드 인 튀르키예’ 표기를 시작했다.
▷터키 일각에서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못마땅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내년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불만을 대외 캠페인으로 돌리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2003년부터 19년째 장기 집권 중인 그는 최근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환율 하락으로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호를 바꾸면서 “문화와 문명, 국가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했다. 나라의 가치는 이름뿐 아니라 실제 국력과 국격이 뒷받침될 때 올라간다는 점도 함께 되새기면 좋겠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06(월) “시청역 강남역 팝니다”

“을지로3가, 신한카드역입니다.” 올해 1월 서울지하철 을지로3가역 이름이 신한카드에 팔렸다. 낙찰가는 역대 최대인 8억7000만 원. 을지로3가역은 승하차 인원만 월 160만 명이다. 신한카드는 역내와 열차 내 안내방송을 통해 신한카드역 이름을 듣는 사람이 월 300만 명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확실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서울교통공사가 전국 지하철역 수송 인원 1위인 강남역과 시청역, 을지로입구역, 여의도역 등 주요 역 이름을 판매한다. 서울지하철 1∼8호선 50개 역이 대상이다. 입찰 대상은 역에서 1km 이내의 기관과 기업이다. 낙찰되면 3년간 기관 이름을 부(副)역명으로 표기한다. 여러 기관이 같은 가격을 제시하면 공익기관 학교 의료기관 기업 다중이용시설 순으로 낙찰된다.
▷역명 병기는 지역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만큼 주민들의 관심이 높다. 교육기업 에듀윌은 2020년 노량진역을 사들이려 했으나 학원이 노량진 대표 시설이 아니며 홍보 성격이 너무 짙다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비싼 금액에 낙찰되는 역명은 대부분 기업들 차지다. 을지로3가역 다음으로 비싼 역은 역삼역(센터필드·7억5000만 원) 을지로4가역(BC카드·7억 원) 을지로입구역(IBK기업은행·3억8100만 원) 신용산역(아모레퍼시픽·3억8000만 원) 순이다.
▷역명 병기 사업은 2016년 처음 시작했다. 당시 12개 역명 판매에 나섰는데 첫 입찰에서는 홍제역 한 곳만 팔렸다. 하지만 홍보 효과가 입증되면서 해마다 판매가 늘어 지금은 33개 역이 부역명을 갖고 있다. 일본과 미국 영국 등 다른 나라들도 같은 사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참고한 스페인 마드리드 도심의 ‘솔 광장 역’은 2012년 삼성전자 후원을 받아 ‘솔 갤럭시 노트 역’으로 불리다 이듬해 다국적 통신사 보다폰에 3년간 300만 유로에 팔리면서 ‘보다폰-솔 역’으로 개명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대목 중 하나는 서울 대중교통이다. 청결하고 정확한 데다 요금까지 저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면에서 운영 기관의 부채가 쌓이면 결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적자를 메울 수밖에 없게 된다. 서울교통공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승객 수가 크게 줄면서 올해 적자가 1조 원 안팎으로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공사가 한동안 중단했던 역 이름 판매 사업을 지난해 다시 시작한 이유다. 서울시는 버스업계 만성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올해 하반기 버스정류소 이름도 판매한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시민 부담을 줄이면서도 서울 대중교통의 명성을 지켜내는 도우미 역할을 해내길 기대한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6-07 ‘1호 검증’은 검경 총수?

‘최근 5년간 근무지에서의 업무 능력과 동료 관계 등 세평(世評)을 수집해 1, 2일 안으로 보고하라.’ 문재인 정부에서 고위공직자 후보군에 대한 인사검증을 하기 위해 청와대는 경찰에 이런 협조 공문을 보냈다. 경찰은 시도경찰청에 사발통문을 보내 보고서를 받았고, 남녀 관계와 같은 사생활 관련 의혹은 구두로 전달받았다고 한다. 검사장 승진 인사를 앞두고 한꺼번에 180명 이상의 검증 지시가 내려가 경찰에 비상이 걸린 적도 있다. 검찰은 경찰이 중심이 된 인사검증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자의 인사검증을 담당할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이 7일 출범한다. 민정수석실에서 법무부로 관할이 바뀐 인사검증 시스템의 첫 적용 대상자는 검찰과 경찰의 총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검찰총장은 한 달 전부터 공석이고, 김창룡 경찰청장의 임기는 다음 달 23일까지여서 곧 후임이 지명될 예정이다. 검경 총수는 외부인사로 구성된 추천위원회 1차 관문이 있어 개인적 흠결 못지않게 편향 시비에 오르지 않을 후보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인사검증단에는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직원이 파견된다. 인사검증단은 5급 이상 각 부처와 공공기관 공무원에 대한 정보수집 권한이 있는데, 권력기관의 중간간부 이상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법무부에 축적되는 것이다. 다른 권력기관이 이를 반길 리가 없고,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권력기관 간 알력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 인사검증 사령탑을 맡게 될 비권력기관 출신의 국장급 공무원이 이처럼 복잡한 이해관계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을까.
▷과거 청와대에서는 국정원 존안 및 신원조회 자료, 경찰의 세평, 법무부의 범죄 수사 및 첩보 등이 도착하면 이를 비교 분석하는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음해성 정보나 과장된 내용을 걸러내기 위한 자리다. 따로 동시에 진행해서 수집한 모든 정보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한 절차다. 대통령실로 보고하는 통로가 법무부로만 제한되면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무너질 수 있다.
▷법무부는 새 검증시스템이 미국 연방수사국(FBI)처럼 인사검증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제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FBI 국장은 임기가 10년으로 미국 내 어떤 기관장보다 독립된 지위를 보장받는다. 정치적인 이유로 언제든지 경질될 수 있는 법무장관과는 다르다. 출발 전부터 법무부 산하에 두는 것이 적절한지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된 데다 구성원들 간에 미묘한 갈등 요인까지 안고 있는 인사검증단이 순항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FBI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6-08 안갯속 안전운임제

2017년 11월 경남 창원의 한 터널. 적재중량 5t짜리 화물차가 인화물질 8t을 싣고 질주하고 있었다. 이 차는 시속 118km로 달리다가 브레이크가 터지는 바람에 터널 출구 근처의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폭발했다. 3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화물차의 고질적인 과속·과적의 이면에는 낮은 운임이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결과 컨테이너와 시멘트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 차주에 한해 2020년부터 3년간 최저 운임을 고시하는 ‘안전운임제’가 도입됐다.
▷안전운임제 시행 이후 수출용 컨테이너를 왕복 200km 운반하는 차주가 받는 운임은 2020년 말 29만9096원에서 올 4월 38만6300원으로 올랐다. 보험료, 지입료, 유가 상승분이 원가에 그때그때 반영된 덕분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산하 화물연대가 올해 말 일몰이 도래하는 안전운임제 상설화를 주장하며 어제 총파업에 돌입했다. 유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화물업계의 최저임금인 안전운임이 폐지되면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화주인 기업은 안전운임제를 상시 운영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시멘트 화물 차주의 순수입은 424만 원으로 2년 전의 2배로 뛰었고 일하는 시간은 11%가량 감소했다. 반면 2020년의 과속 단속 건수는 전년에 비해 소폭 증가했다. 일하는 사람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나아진 반면 화물차의 안전도가 개선됐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안전운임제를 3년 일몰제로 도입한 것은 물류업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만큼 일단 한번 제도를 운영해보자는 취지였다. 화물 차주만 생각한다면 운임을 많이 올릴수록 좋겠지만 기업은 물류비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 비용 급증으로 외부와 운송계약을 하느니 기업이 직접 화물차를 구입해야 할 판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안전운임제가 임금 인상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택배, 전세버스 업계까지 같은 제도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안전운임제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채 소비자 부담만 키울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화물연대 파업은 안전운임제 논란의 해법이 될 수 없다. 고물가에 갇힌 한국 경제에 철강 대란, 시멘트 대란으로 고통을 더할 뿐이다. 노사정은 안전운임제 실험의 결과를 테이블에 올린 뒤 차주와 기업, 소비자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떼쓰기’ 식으로 제도가 결정돼선 안 된다. 호주는 과거 도로안전운임제를 중단하면서 “안전을, 운임 법제화로 해결하려 들지 말라”며 운전 자격을 강화하고 운전자의 연령대를 낮추는 것을 대안으로 들었다. 우리 논의 과정에서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6-09 영원한 국민 MC 송해

“전구우우욱∼ 노래자랑!” 경쾌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MC 송해의 오프닝 멘트는 매주 일요일 아침을 깨우는 일성이었다. 진행 횟수 1700여 회. 무대 출연자 3만 명. 관객 1000만 명. ‘국민 MC’ 송해가 향년 95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세운 기록들이다. 스스로를 ‘딴따라’로 불렀던 그는 “어원인 프랑스어 ‘팡파르(fanfare)’는 스타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송해가 이끄는 전국노래자랑 무대가 열리면 온 마을이 들썩였다.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꼬마부터 랩송을 부르는 어르신까지 모두가 참여하는 잔치였다. 송해는 ‘땡’ 소리에 탈락한 출연자들을 정겨운 입담으로 격려하고, 흥겨운 공연에는 어깨춤 장단을 맞췄다. 맛깔스러운 만담을 통해 출연자들의 인생 스토리에 색을 입혔다. 때로 구수한 사투리, 때로 망가지는 몸 개그를 섞은 능청스러운 진행에 객석에서는 수시로 폭소가 터졌다. 한껏 무르익은 무대 위에서 숨겨져 있던 스타들의 끼는 아낌없이 폭발하며 ‘딩동댕동’을 이끌어냈다.
▷송해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34년간 한결같았다고 주변인들은 전한다. 녹화를 갈 때면 꼭 하루 전에 그 마을에 도착해 1박을 했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녹화 당일에도 3시간 전에는 행사장에 도착해 출연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 지나가는 소달구지를 보고 동네 아낙을 보고 하늘도 올려다본다”고 했다. 현지 분위기에 푹 빠져들 때까지 공감과 소통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 팔도를 웃기고 울린 진행 솜씨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70년 가까이 현역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최장수, 최고령 MC로 남은 송해의 기록은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권태는 절대로 느끼지 말라. 여러분이 하는 일에서 도태되지 말라”는 조언을 자주 했다. 고령임에도 “나는 BMW(Bus, Metro, Walking)만 탄다”며 검소하게 몸을 움직였다. 코로나19로 인한 활동 중단과 건강 악화만 아니었으면 100세 MC 기록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연예계 후배들은 안타까워한다.
▷6·25전쟁 당시 혈혈단신 월남한 뒤 생계에 몸부림쳤던 삶의 역정 때문이었을까. 어려운 이들에게 장학금을 쥐여주고, 늘그막의 동료들을 살뜰히 챙긴 그의 향기는 무대 뒤에서 더 짙다. 지인들은 그의 단골집이었던 종로 낙원상가 앞의 2000원짜리 국밥집을 찾고 인근 ‘송해길’을 거닐며 그를 회고한다.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꼭 진행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라면 하늘에서라도 고향 사람들과 흥겨운 한마당을 풀어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10 시범 개방되는 용산공원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남쪽에 조성되는 용산공원은 미국 백악관 남쪽 경계 밖에 있는 ‘내셔널몰’ 잔디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내셔널몰에서 시민들은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을 바라볼 수 있다. 대통령 전용 헬기인 ‘마린원’이 뜨고 내리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용산공원에서 시민들이 대통령실과 대통령을 보는 것만으로도 국민과의 거리를 줄일 수 있다고 정부는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대통령실이 보이는 ‘10군단로’에 휴식공간을 만들고 푸드트럭도 배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10일부터 열흘간 서울 용산공원 부지 일부가 시범 개방된다. 공원 부지를 따라가다 보면 1950년대식 미군 장군 숙소, 미국식 스포츠필드, 일제강점기의 석축 담벼락 등이 이어진다. 관람객들은 미국이나 일본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곳은 1904년부터 일본이 병영기지로 쓰다가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미군이 군사기지로 활용하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금단의 땅’이 118년 만에 열리는 것이다.
▷용산공원 개방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이 지역 오염에 따른 불안감도 크다. 지난해 환경부 조사에서는 용산 미군 숙소 부지에서 기름 오염 물질인 TPH가 기준치의 29배 넘게 검출됐다. 다른 부지에서는 중금속인 구리와 납, 발암 물질인 다이옥신 검출량이 기준치를 넘었다. 미군 주둔 기간 수많은 기름 유출 사고 등이 발생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토부는 관람 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했고 흙으로 땅 표면을 덮어 비산먼지가 날리지 않게 한 만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오염된 흙은 덮을 게 아니라 걷어내는 게 정상이다. 그렇다 보니 시범 개방을 위해 임시방편까지 동원하는 정부의 태도가 미덥지 않다는 우려가 나온다. 과거 먼저 반환된 미군기지 인근 유엔군사령부 부지 정화를 위해 LH는 100억 원을 들였다. 미군기지는 유엔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다.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가 개방 시기를 앞당기는 데 집착할 경우 미국과의 정화 비용 협상에서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한미 양국이 용산기지 이전협정에 합의한 것은 2004년이었지만 실제 반환은 계속 미뤄져 왔다. 현재 돌려받은 부지는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용산 미군기지 개발은 단지 공원 하나 만드는 개발사업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 국내 정치권, 환경단체, 지방자치단체의 입장이 민감하게 걸린 국가적 과제다. 어떤 사안보다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오늘 시범 개방되는 용산공원 내에는 여론을 듣는 ‘경청 우체통’이 마련된다고 한다. 공원 밖의 여론도 심도 있게 들어야 한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6-11(토) 60년 치 국정원 X파일

“60년간의 X파일이 모두 서버에 있다. 전체가 다 있다. 정치인, 언론인, 기업인이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10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그는 2020년 7월부터 올 5월까지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국정원장을 지냈다. 그는 “국회에서 의원들에게 ‘이것을 공개하면 의원님들 이혼당한다’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특정인의 자료를 공개했을 때 얼마나 큰 파장이 오겠느냐”고도 했다.
▷박 전 원장이 언급한 X파일은 존안(存案) 파일이다. 존안은 ‘없애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다. 1961년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이후 60년 넘게 중정과 국가안전기획부, 국정원은 주요 인사를 A, B, C 등급별로 분류해서 파일을 축적했다. 개인정보에 정보담당관(IO·Intelligence Officer)이 주요 인사와 나눈 대화 등도 시간대별로 보관했다. A급 정치인은 수백 쪽으로 금세 자료가 쌓였다. 사생활 등 취약 정보를 보고하면 고과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데, 이런 정보를 검찰이 수사 자료로 쓴 적도 있다.
▷정보기관은 처음엔 존안 파일을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문서 창고에 보관했다. 지금은 전산화돼서 서버에 저장되어 있다. 검색을 통해 누가, 언제 작성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국정원 서버와 분리된 이른바 ‘멍텅컴(멍텅구리컴퓨터)’에 보관된 자료도 있다고 한다. 주로 불법적으로 생산한 것인데, 이런 자료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국정원이 갖고 있지만 공식적으론 없는, 유령 같은 자료인 셈이다.
▷X파일의 원조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창설 때 미국 정보기관 중앙정보국(CIA)을 지향해 중정의 영문명이 KCIA였다. 하지만 해외나 대북정보 수집보다 FBI처럼 국내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했다. 1924년부터 72년까지 48년 동안 FBI 국장을 지내며, 8명의 대통령을 막후조종한 존 에드거 후버는 도청으로 정치인의 약점을 모았다. 한국 정보기관도 도청 등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정치 공작을 기획하기도 했다. 지금은 국내 정치 개입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박 전 원장은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X파일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기록물인 국정원 파일을 함부로 폐기할 수 없어 입법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하지만 국정원 재직 때 얻은 정보는 누설해선 안 되는데, 전직 국정원장이 X파일을 본 것처럼 퇴임 뒤 말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국회가 X파일 폐기법을 만들면 국정원 서버를 열어 젖혀 부적절한 파일 분류 작업부터 해야 하는데, 그게 논란이 될 수 있다. X파일을 누구도 악용할 수 없도록 봉쇄하는 게 먼저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06-13(월) 맥도널드 건강메뉴 퇴출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널드가 미국 맥도널드 1만4000개 매장에서 샐러드와 구운 치킨버거, 과일 요거트 등 건강메뉴 판매를 중단한다고 한다. 대신 햄버거와 프라이드치킨 등 전통적인 인기메뉴 판매에 집중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일손 부족과 수익성 악화 때문이다. 미국 맥도널드는 수익성을 이유로 한국 맥도날드 매각도 추진 중이다.
▷맥도널드는 값싸고 빠르게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는 햄버거로 인기를 모았다. 맥도널드 형제가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 1호점을 개설한 이후 세계 최대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정크푸드’의 대명사로도 공격받아 왔다. 정크푸드는 지방 나트륨 성분이 많아 고열량인데도 사람 몸에 필수적인 비타민 미네랄 등 함량이 적어 비만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정크푸드를 자주 먹으면 정상 식단으로 바꾼 뒤에도 당뇨와 동맥경화 등 각종 질병을 앓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에서의 광고를 제한하고 있다.
▷맥도널드가 건강식 메뉴 도입에 나섰던 것은 비만의 주범이라는 불명예를 씻어내려는 시도였다. 맥도널드는 2013년 세트메뉴에 포함되는 감자튀김과 탄산음료 대신 샐러드와 건강음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어린이세트 박스에는 과일과 야채, 저지방 우유, 물 등을 추가했다. 쇠고기보다 건강에 좋다고 인식되는 닭고기 메뉴도 확대했다. 2015년에는 햄버거 조리 방식을 바꾸는 등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도 안전성에 대한 논란은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2017년 고기 패티가 덜 익은 햄버거를 먹은 4세 어린이가 이른바 ‘햄버거병’(용혈성요독증후군) 진단을 받아 논란이 됐다. 신장이 90% 가까이 손상된 이 아이는 평생 장애를 안았다. 다만 검찰의 재수사에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아 지난해 무혐의 결론이 났는데 서양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 1993년 미국에서는 732명이 햄버거를 먹고 집단 대장균 식중독에 걸렸고 일부는 햄버거병으로 발전해 4명이 사망했다. 당시에도 이 사건은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해 합의로 끝났다.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가 건강에 해롭고 위험하다면 안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급하게 한 끼를 때워야 하는 사람들이나 아이 식습관을 챙기기 어려운 맞벌이 부부 자녀들에게 패스트푸드는 손쉬운 선택지가 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맥도널드의 건강식 메뉴 판매 중단은 아쉬운 점이 크다. 단기 수익성을 좇는 의사결정이 결국 더 큰 손실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6-14 개미 가죽 벗기는 스캘핑

주식 전문가 A 씨는 2011년 10월 4일 한 증권전문방송에서 안랩(당시 안철수연구소) 주식을 추천했다. 지수가 출렁거리는 변동성 장세인 만큼 사려는 사람이 많고 테마가 있는 종목이 좋다는 그럴듯한 근거를 댔다. 많은 개미 투자자가 그 말을 믿었지만 사실 A 씨는 방송 전 안랩 주식 31억 원어치를 사둔 상태였다. 이후 주가가 급등하면서 약 보름 만에 23억 원이 넘는 차익을 챙겼다.
▷이처럼 전문가가 특정 주식을 일반인에게 추천하기 직전 산 다음 주가가 오를 때 빠르게 팔아 이익을 챙기는 것을 ‘스캘핑(scalping·가죽 벗기기)’이라고 한다. 이 말은 미국 원주민들이 전쟁 중 적의 시체에서 머리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긴 데서 유래했다. 증시에서는 사람 피부 중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머리 쪽 피부를 벗겨내듯 단타 매매로 ‘작은 이익’을 얻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다만 A 씨는 작은 이익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증시 김선달’로 불리던 A 씨는 2017년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의 판결을 받은 뒤 서울고법 파기 환송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방송 중 A 씨의 행동을 매수 추천으로 볼 수 없는 만큼 스캘핑 범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달 12일 A 씨에 대해 다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특정 증권이 매수하기에 적합하다고 소개하는 행동 자체가 매수 추천이라고 봤다. 방송 전 미리 산 주식을 방송 후 팔 가능성을 알리지 않은 것이 법에서 금지한 ‘부정한 계획과 기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 되는 스캘핑은 아니지만 주주가치를 보호해야 할 경영진이 대형 호재에 맞춰 주식을 팔아 신뢰를 저버리는 일도 생기고 있다. 카카오페이 임원들이 작년 말 코스피200 편입 직전 스톡옵션을 행사해 얻은 주식을 시간 외 매매로 팔아치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국민주를 표방하면서 개미 투자자를 끌어들여 임원은 대박을 터뜨렸지만 주가가 공모가 아래로 떨어지며 정작 개미는 쪽박을 찬 경우가 적지 않다.
▷경제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10년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면 단 10분도 투자하지 말라’는 워런 버핏의 장기 투자 원칙에서 멀어진다. 그 대신 기업 가치와는 무관한 ‘차익 따먹기’ 같은 도박성 투자에 몰두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전문가들의 스캘핑은 사람들의 조급증을 키워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기만행위다. 11년 전 ‘증시 김선달’ 문제는 개인들의 지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 얼마나 많은 증권방송과 인터넷 유료 서비스에서 불법적 스캘핑이 진행 중인지 모를 일이다. 가짜 전문가를 솎아내지 않고는 자본시장에 드리운 불신도 걷어낼 수 없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06-15 재산 빼앗기는 노인들

미국에서는 60대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가족이나 지인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경제적 거래, 계약 시 명의를 도용당한 경험이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매년 피해 규모가 365억 달러에 이른다. 캐나다의 경우 이런 피해를 당한 사례가 25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자식에게 주택 명의를 넘겨준 뒤 쫓겨나 쉼터나 친척집을 전전하는 노부부들의 사연도 있었다. 노인들을 상대로 한 ‘경제적 학대’의 사례들이다.
▷1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다. 이런 날을 제정할 필요가 있을 만큼 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는 물론이고 경제적 학대, 유기, 방임도 노인학대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도 매년 증가 추세로, 2020년 한 해에만 6259건의 학대 사례가 발생했다. 이 중 경제적 학대 피해는 연평균 400건을 넘는다. 노인 연금과 복지 지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와 관련된 사기, 절도 피해가 늘어났다.
▷자식이 부모의 연금이나 임대료를 무단으로 사용할 경우 처벌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이는 벌금 혹은 징역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는 ‘경제적 학대’ 행위다. 부모의 동의 없이 재산을 처분하거나 유언장을 허위로 작성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올해 4월 경기 수원에서는 치매를 앓는 80대 노모의 연금보험료를 1억 원 가까이 가로채 생활비, 유흥비 등으로 쓴 50대 딸과 20대 손녀들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경제적 학대의 징후들은 다양하다. 노인들이 갑자기 평소보다 큰 씀씀이를 보이거나 거액을 인출하는 경우, 강요당하듯 귀중품을 파는 경우, 재산 명의나 유언장을 변경하는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해외 노인 복지 기관들은 “주의를 기울이라”며 이런 징후들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다. 미국의 로펌과 금융회사들은 방지, 대응책을 홍보하고 세미나도 연다. 치매나 기억 감퇴 등을 겪지 않은 경우에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족뿐 아니라 친구, 간병인 등도 경제적 학대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되는 한국에서 노인학대의 문제는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노인 부양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도 무너지고 있다. 받기는커녕 남은 돈마저 억지로 내줘야 하는 부모들의 사례도 늘어날 것이다. 60대 이상 베이비부머 세대가 “자식에게 재산을 미리 상속해 주지 말라”는 말을 자못 진지한 조언처럼 주고받는 세태에는 이런 불안이 깔려 있다. 관리할 노후 자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기초생활연금조차 빼앗기는 노인들의 삶은 처연하다. 한 세대를 살아낸 어르신들의 말년이 경제적 학대의 피멍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16 김건희 여사 행보 논란

‘조용한 내조’가 이렇게 소란스러워도 될까. 김건희 여사의 내조 행보가 연일 논란거리다. 대통령 부부의 사진을 사적인 팬클럽을 통해 공개하면서 ‘비선 공개’ 물의를 빚은 데 이어 공식 일정에 지인을 동반해 ‘비선 동행’ 비판을 자초했다. 김 여사 사진을 독점 게재해온 팬클럽 운영자의 ‘호가호위’ 의혹까지 불거졌다.
▷강신업 변호사가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 ‘건희사랑’은 네이버의 ‘건사랑’과 함께 김 여사의 양대 공식 팬클럽이다. ‘건희사랑’이 김 여사가 후드티를 입고 경호견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자 ‘대통령 부인 사진을 왜 팬클럽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지난달 29일 대통령 내외가 ‘보안구역’인 대통령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까지 먼저 올라오자 ‘비선 공개’ 논란이 본격화했다. 지난 주말 대통령 내외의 영화관 나들이 사진 5장을 ‘최초 공개’라는 문구로 게재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여기에 강 변호사가 최근 별도의 단체를 결성해 유료 회원 가입 안내문을 공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팬클럽 결성 전부터 대통령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고 공언해온 인물이다. 한 시사평론가가 “김 여사 팬클럽 회장이 단체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하는 건 부적절한 일”이라며 “언젠가는 터질 윤석열 정부의 지뢰”라고 지적했고, 강 변호사는 “듣보잡” “헛소리” “이새○야!” 등 욕설과 막말로 응수했다. 팬클럽 내에서조차 ‘대통령 주변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해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13일 김 여사의 첫 단독 일정이었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 방문 때는 김 여사가 운영하던 회사에서 근무한 3명이 동행했다. 이 중 2명은 ‘비선 동행’ 논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 직원으로 채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나머지 한 명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저도 잘 아는 제 처의 오래된 부산 친구”라고 했다. 공식 수행원도 아니고 행사와도 무관한 사람이지만 이런 인연으로 대통령 부인과 함께 봉하마을 일정에서 의전을 받았다.
▷강 변호사는 요즘 “김 여사 활동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건 지구가 도는 것만큼 확실한데 내조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글을 집중적으로 올리고 있다. 김 여사가 유일한 소통 창구로 활용해온 사람을 통해 ‘적극적 내조’의 속내를 드러낸 걸까. 이럴 바에야 대선 공약으로 폐지했던 제2부속실을 부활시켜 제대로 보좌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김 여사가 학력 위조 논란 등을 사과하며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고개 숙이던 모습을 기억한다. ‘조용한 내조’ 약속을 깨려면 그 이유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국정에 짐만 될 뿐인 요란한 팬덤과 거리를 두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17 조력존엄사

말기 암 환자인 40대 공무원 A 씨. ‘온몸이 부서지는 통증’에 시달리던 그는 평화롭게 생을 끝내기로 하고 스위스로 간다. 외국인에게도 조력존엄사, 즉 의사조력사(physician-assisted suicide)를 허용하는 유일한 나라다. A 씨는 2019년 국내 언론의 탐사보도에서 한국인 최초로 조력사한 인물로 소개됐다. 최근 국내에서도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첫 법안이 나왔다.
▷조력사는 안락사와 함께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하는 방법이다. 안락사는 타인에 의한 생명 중단을 말한다. 의사가 약물을 투여해 죽게 하면 적극적 안락사,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소극적 안락사다. 2018년 연명의료법 시행 이후 소극적 안락사는 합법이 됐다. 조력사는 의사의 도움을 받되 스스로 치사량의 약을 먹거나 주사하는 일종의 자살행위다. 자살은 범죄가 아니지만 자살을 도운 의사는 자살방조죄로 처벌받는다. 15일 발의된 조력존엄사법(연명의료법 개정안)은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불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조력사를 허용한다.
▷우리에게 죽을 권리가 있을까. 조력존엄사 입법은 이에 답하는 과정이다. 조력사 반대론자들은 생명권은 기본적 인권으로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주장한다. 설사 죽을 권리를 인정해도 타인에게 도움을 요구할 권리까지 인정하긴 어렵다고 본다. 찬성론자들은 행복을 추구할 헌법상 권리에 따라 죽음의 방식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죽을 권리를 프라이버시권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스위스는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이지만 1942년부터 내외국인 모두에게 조력사를 허용하고 있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호주의 빅토리아주 등도 조력사가 가능하다.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저지, 워싱턴주 등 일부 주에서만 조력사를 허용한다. 조력사가 불법인 주에 사는 말기 환자가 허용되는 주에 가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유튜브 영상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지난해 성인 1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안락사 또는 조력사법 찬성비율이 76.3%로 나왔다. 5년 전 같은 조사에서는 50%였다. 찬성 이유로는 ‘남은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좋은 죽음에 대한 권리여서’ ‘고통의 경감’을 꼽은 이가 많았다. 또 다른 존엄사인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한 사람이 4년간 20만 명이 넘고,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써둔 사람도 123만6000명이다. 존엄한 죽음 없이 품위 있는 삶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18(토) 경로우대 기준 상향 논란

조계종이 전국의 사찰 관람료 경로우대 기준을 올해 1월부터 ‘만 65세 이상’에서 ‘만 70세 이상’으로 올렸다. 이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이후 사찰을 찾은 고령자들이 당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경로우대 기준을 둘러싼 논란의 서막일지 모른다. 정부 조사에서 노인 10명 중 8명은 ‘70세 이상’이어야 노인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의 경로우대 기준은 만 65세다. 신분증만 있으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운송시설과 공공시설을 무료나 할인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서울 부산 등 전국 7개 도시의 지하철은 무료로, KTX 등 열차는 30% 할인 가격으로 탑승할 수 있다. 경로우대 65세는 고령자 대상 각종 복지 혜택의 기준이기도 하다.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 수급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등 각종 사회보장 혜택도 65세부터 시작된다.
▷고령화에 따라 경로우대 수혜자가 늘면서 사회 곳곳에 부담이 늘고 있다. 고령자 무임승차제만 해도 전국 지하철 누적 적자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980년 어버이날에 70세 이상에 50% 할인 제도로 시작됐으나 1984년 65세 이상 100% 무임승차제로 혜택이 확대됐다. 이때만 해도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3.9%에 불과해 큰 부담이 안 됐는데 지난해 이 비율이 16.5%로 높아졌다.
▷정부는 지난해 8월 경로우대 기준을 70세 전후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급속한 고령화 추세를 고려할 때 65세로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말에는 ‘일하는 인구’인 생산연령인구 기준을 현행 15∼64세에서 15∼69세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나섰다. 산업 현장을 떠나는 나이를 5년 늦춰 노인부양비 급증에 대응할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이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의 30%에 육박한 초고령사회 일본은 우리보다 빨리 움직였다. 2018년 정부 고령화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문서에 ‘65세 이상을 일률적으로 고령자로 보는 경향은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지난해 권고사항이긴 하지만 70세 정년 시대를 열었다. 일본 노년학회는 한술 더 떠 고령자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하고 있다. 최근 20년간 노인들의 노화 속도가 늦춰져 생물학적으로 5∼10년 젊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하는 기간은 늘고 혜택을 받는 기간은 줄어들 것이다. 안타깝지만 미래세대를 생각하면 불평도 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06-20(월) “불타는 지구”

3월 초 러시아의 보스토크 남극 기지에서 잰 기온이 평년보다 15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을 때만 해도 과학자들은 “측정이 잘못됐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북극의 기온도 평년에 비해 3도가량 올라갔다는 조사결과가 나오더니 5월에는 인도 델리의 최고기온이 49도, 파키스탄 자코바바드는 51도를 찍었다. 이제 불볕더위는 서유럽과 북미 등으로 번졌다. “불타는 지구”(영국 가디언)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지구촌이 펄펄 끓고 있다.
▷록 음악 축제 ‘헬페스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프랑스 서부 낭트의 광장에선 18일 곳곳에서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줄이 아니라 몇 개밖에 없는 그늘 지대를 차지하려는 인파였다. 이날 낭트의 최고기온이 40도를 넘었고, 프랑스 남서부에선 최고 43.4도까지 올라갔다. 1947년 이후 가장 일찍 찾아온 폭염이었다. 40도가 넘는 더위가 덮친 스페인에서는 대형 산불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고, 독일과 스위스 등지에서도 연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국 기상당국은 지난주 미국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하는 광범위한 지역이 폭염 영향권에 있다고 밝혔다. 고기압이 한 지역에 정체돼 뜨거운 공기가 갇히면서 기온이 급상승하는 열돔(heat dome) 현상 때문이다. 열돔 주변의 대기가 불안정해지면서 폭우, 토네이도 등 기상이변이 겹치고 있어 주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번 주에는 더위가 더 심해진다. 북부 평원 지역에 머물던 열돔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중부와 동부 일부 지역의 기온이 40도 가까이 오르는 가마솥더위가 예고됐다.
▷폭염은 동물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뉴질랜드에서는 영양실조로 숨진 펭귄 수백 마리의 사체가 떠밀려 왔다. 주변 해역의 수온이 올라감에 따라 펭귄의 먹이인 크릴, 멸치 등이 자취를 감추면서 벌어진 일이다. 스페인 남부에서는 칼새가 둥지를 튼 고층 건물 틈이나 지붕이 너무 뜨거워져 어린 칼새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미국 캔자스주에서는 2000여 마리의 소가 고온으로 폐사했다.
▷더 큰 문제는 폭염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영국 임피리얼칼리지런던의 기후전문가 프리데리케 오토가 “기후 변화는 폭염의 게임체인저”라고 지적한 것처럼 기온 상승을 막으려면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하는데, 2019년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 대비 54%나 늘었다. “지금의 더위는 미래를 미리 맛보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세계기상기구(WMO)의 암울한 경고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21 담배꽁초 채운 젖병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려는 청소년이 돈을 내려다 “(값이) 충분치 않다”는 주인의 말에 멈칫한다. 그는 펜치를 꺼내 스스로 치아를 뽑은 뒤 이를 비용으로 치르고 담뱃갑을 받아 든다. 같은 상황에서 또 다른 10대는 얼굴 피부를 쭉 벗겨내 카운터에 올려놓는다. 2014년 미국에서 방영된 금연광고 시리즈 장면들이다. 제목은 ‘진짜로 치러야 할 대가’. 흡연이 치아와 잇몸, 피부를 손상시킨다는 경고를 담았다.
▷흡연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의 금연 캠페인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주기적으로 진행 중이다. 주요 국가들이 내놓는 금연 동영상 광고와 담뱃갑 위의 경고 그림 및 문구는 상당수가 섬찟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보건복지부가 어제 발표한 새 경고 그림도 일부 수위가 더 높아졌다. 그림 속 변색 치아는 더 시커멓고 누렇게 바뀌었고, 흡연으로 망가진 폐와 뇌는 상태가 심각하다. 새로 바뀐 11종의 사진 중에는 담배꽁초가 가득 찬 젖병을 빨고 있는 아기의 그림도 있다.
▷금연광고 중에는 간접흡연의 피해를 경고하는 내용도 많다. 연간 800만 명에 이르는 전 세계 흡연 사망자 중 간접흡연 피해자는 100만 명. 특히 임신부 흡연과 어린이 간접흡연은 심각한 피해로 꼽힌다. 칠레의 한 금연 캠페인은 ‘흡연은 살인’이라는 문구와 함께 어린 소년이 얼굴에 씌어진 투명 비닐봉지 속에서 숨막혀하며 울부짖는 그림을 담았다. 자세히 보면 비닐이 아닌 하얀색 연기다. 임신부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배 속 태아에게 옮겨가는 경고 그림의 제목은 ‘이동식 (살인)가스실’이었다.
▷금연 캠페인의 충격요법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목에 구멍이 뚫리고 발성 보조 장치에 의존해 로봇 같은 기계음을 내는 흡연 피해자들의 모습이 보는 이를 경악시켰다. 호주에서는 구강암 환자의 썩은 잇몸과 입이 TV 광고에서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영상에 불편한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안내문이 붙는 경우도 적잖다. 한국에서 “폐암 하나 주세요” 멘트와 함께 ‘흡연은 질병’이라는 문구가 공개됐을 때는 “흡연자를 환자로 매도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각종 금연 캠페인 속에 한국의 흡연율은 꾸준히 감소하는 그래프를 그려 왔다. 그러나 가향(加香) 전자담배가 인기를 끄는 추세로 볼 때 흡연자가 줄어드는 추세가 유지될 것이라고 예단하기는 어렵다. 10여 년 전만 해도 3억 갑 미만이었던 국내 가향담배의 판매량은 2020년 14억 갑에 육박한다. 흡연자들은 자신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자신의 건강은 물론 남의 건강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소 섬뜩하더라도 금연 캠페인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22 이순신 유적 지킨 민초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가 중건된 시기는 일제의 민족말살 통치기였던 1932년이다. 1706년(숙종 32년) 처음 건립됐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1868년 철거됐다가 64년 만에 충남 아산시 백암리 충무공의 고택 옆에 고쳐 지은 것이다. 현충사 중건은 범민족적 유적 보존 운동의 일환이었다. 문화재청이 ‘겨레가 세운 현충사’라 하는 이유다.
▷1931년 5월 13일 동아일보 특종 보도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가 발단이 됐다. 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충남 아산의 충무공 묘소와 위토(位土·묘소 관리비 조달을 위한 토지)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라는 내용이었다. 논설위원이던 위당 정인보는 사설에서 “(이는)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는 민족적 범죄”라며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책임”이라고 호소했다. 각지에서 편지와 성금이 동아일보로 답지하기 시작했다.
▷일곱 식솔을 거느린 참기름 행상부터 경북 칠곡의 대부호까지 동참했다. 평양 기독병원 간호부 40명은 점심 한 끼를 굶고 모은 성금을, 일본 고베 증전제분소 조선인들은 5일간 동맹 금연으로 모은 돈을 보탰다. ‘벙어리궤(저금통)’를 통째 보내온 어린이도 있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던 도산 안창호 등 흥사단원 30명과 미주 멕시코 지역 한인들도 참여했다. 1년간 2만 명 400여 단체가 총 1만6021원30전(현재 가치 10억 원)을 모았다. 충무공 묘소와 위토에 걸린 빚을 갚고도 남아 현충사를 중건했다.
▷충무공 유적 보존이 대중운동으로 확대된 배경엔 국난 극복의 상징인 충무공을 숭상하던 시대상이 있다. 당시 언론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 차원에서 영웅들의 업적을 재조명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충무공이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4회 분량의 ‘이조인물약전 리순신’을 소개한 데 이어 1930년엔 사학자인 환산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을, 1932년에는 당시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우회적인 항일운동이었던 셈이다.
▷문화재청은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충무공 유적 보존 참가자들의 편지와 성금대장 등 4254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 또 성금 기탁자들의 이름과 단체명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후손을 찾아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기탁자 명단을 다시 본다. 경남 동양제철소, 전남 나주협동상회, 간도 용정촌 송원전당포, 마산 남선권번 방취란, 경기 조선소년군 제6호대 대원 일동…. 유적 지키기를 통한 독립운동의 기록이자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 말자는 징비록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3 또 바뀌는 국정원 원훈

1961년 출범한 중앙정보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 당시 국민들은 중정을 ‘씨에(CIA)’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지은 중정의 모토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정보부원은 정부를 뒷받침하는 숨은 일꾼이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중정은 정권의 정치공작 사령부나 다름없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새 출발 하면서 원훈(院訓)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김대중 국정원도 도청 활동 등으로 얼룩졌다. 원훈이 정보기관의 일탈을 막지는 못했다.
▷국정원 원훈은 정권의 운명과 함께했다. 진보에서 보수 정권으로 교체된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8년 뒤 박근혜 정부 때 다시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같은 보수 정권이었지만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가 원훈 교체의 한 원인이었을 거라는 관측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도 지난해 6월 국정원 원훈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꿨다. 이번엔 원훈석에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 글씨를 본떠 만든 ‘신영복체(어깨동무체)’를 쓴 것이 문제가 됐다. 신 전 교수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뒤 1988년 특별 가석방됐다. 전직 국정원 직원들은 “대북 정보활동을 벌이는 국정원에 ‘간첩글씨체’가 웬 말이냐”며 릴레이 시위를 벌여왔다. 정권교체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가 1년 만에 국정원 원훈석을 바꾸겠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평소 신 전 교수에 대해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라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도 신영복체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인지 문재인 정부 경찰도 경찰청장 이·취임식 등 각종 행사 펼침막에 논란이 된 신영복체를 5차례나 사용했다고 한다. 경찰 내부에서도 “신영복체는 대공수사를 하는 경찰에 맞지 않다”는 반발이 나왔다.
▷1947년 창설된 미국 CIA의 모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1909년 만들어진 영국 비밀정보국(MI6)의 모토 ‘언제나 비밀’도 바뀐 적이 없다. 정파를 뛰어넘는 국가 정보기관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이제 환갑을 갓 넘긴 국정원 원훈이 이번에 또 바뀐다면 여섯 번째 원훈이다. 잦은 원훈 교체는 정권의 외풍에 휘둘린 정보기관의 흑역사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원훈 바꾸는 것보다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06-24 ‘주 52시간 근로’ 숨통 트기

‘판교 등대’ ‘구로 등대’ ‘오징어잡이 배’. 경기 성남시 분당구나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게임업체 빌딩들은 한때 이렇게 불렸다. 촉박한 게임 출시 일정을 맞추려면 밤샘근무가 예사여서 늘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단축된 뒤 오후 7시면 건물에 불이 꺼진다. 한국 게임업체들이 한 해 내놓는 신작 게임의 수와 출시 속도도 급감했다.
▷어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이란 제목으로 브리핑을 하면서 “주(週) 최대 52시간제의 기본 틀 속에서 운영 방법, 이행 수단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주 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시동을 걸겠다는 신호다. 지금은 주 단위인 근로시간 규제가 노사 합의를 통해 월 단위로 바뀌고, 1∼3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도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주 52시간제 운영이 유연해지면 기업들은 인력 운용에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된다.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핵심 인력의 업무가 급증하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이나 게임 분야의 기업, 에어컨 생산·설치 등 계절성이 강한 기업들이 특히 반길 만한 변화다. 반면 소규모 게임업체 근로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내놓을 때마다 회사에서 숙박하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가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다.
▷정보기술(IT), 금융 등 연봉이 높은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개혁안 중 ‘화이트칼라 이그젬프션(White-collar Exemption)’ 도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정 연봉 이상 전문직에게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제도로, 미국에선 연봉 13만4004달러(약 1억7400만 원) 이상 근로자는 연장근로 시간에 제한이 없다. 네이버 직원 평균연봉은 작년 1억2915만 원에서 올해 10% 인상됐고, 카카오는 작년 1억7200만 원에서 올해 15%가 올랐다. 미국 기준으로 봐도 상당수 직원이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선진국 중 연간 근로시간이 제일 길어 줄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 등 후발국과 경쟁도 포기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 노동법상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4시간이지만 많은 중국 기업들이 ‘996(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과 경합하려면 일이 몰릴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중에 그만큼 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1년 단위 총 근로시간 안에서 기업과 근로자가 협의해 근무 형태를 조정하는 일본, 프랑스의 제도를 참고할 만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6-25(토) 무서운 식중독

덥고 습한 여름은 식중독균이 번식하기 좋은 계절이다. 경남 김해의 유명 냉면집 음식을 먹은 34명이 식중독에 걸려 이 중 한 명이 사망한 데 이어 어제는 경남도가 운영하는 대학생 기숙사 식당을 이용한 학생 여럿이 식중독 의심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식중독 경보 4단계 중 3단계 수위인 ‘경고’를 발령했다.
▷국내에서 식중독을 일으키는 3대 원인물질은 병원성대장균, 노로 바이러스, 살모넬라균이다. 노로 바이러스 감염 환자는 겨울, 나머지 둘은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김해 식당의 냉면을 배달 주문해 먹은 뒤 장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한 60대 남성도 살모넬라균이 혈관에 침투해 염증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당국의 조사 결과 냉면에 올리는 계란 고명에서 살모넬라균이 검출됐다. 계란을 냉장 보관하지 않고 상온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살모넬라균은 닭 오리 돼지 등의 장내에 주로 서식하는데 1등 감염 매개 식품은 계란이다. 최근 5년간 살모넬라 식중독 환자 6800여 명 가운데 77%가 계란을 먹고 탈이 났다. 지난해 여름 경기도 김밥집과 부산 밀면집에서 발생한 집단 식중독도 김밥에 들어간 계란과 밀면의 계란 고명 속 살모넬라균이 원인이었다. 우유나 유제품에서도 검출되곤 한다. 올 4월 벨기에 공장에서 만든 킨더 초콜릿을 먹은 해외 어린이들이 살모넬라균 식중독에 걸려 공장이 일시 폐쇄되고 제품을 리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내 유통 제품 중 벨기에산은 없었다.
▷식중독균은 섭씨 4∼60도에서 증식하고 체온과 비슷한 35∼37도에서 가장 빨리 번식한다. 익혀서 먹고, 남은 음식은 냉장 보관하며, 한번 조리한 식품은 재가열해 먹어야 하는 이유다. 특히 계란이나 닭 요리를 할 땐 주의가 필요하다. 재료 자체는 가열하면 안전하지만 재료를 만진 손으로 다른 식재료나 조리 도구를 만지면 ‘교차 오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손과 조리 도구를 세정제로 씻어낸 후 조리해야 한다. 식중독에 걸리면 대부분 복통 설사 발열에 시달리다 일주일 후면 낫는다. 세균이 소화기관을 뚫고 나와 다른 기관에 퍼지면 신경마비나 의식 장애를 겪다 드물게는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매년 5000명 안팎의 식중독 환자가 발생하며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 비용이 1조8000억 원이다. 평균 기온이 1도 올라가면 식중독 환자 수는 6.2% 증가한다. 올여름도 폭염이 예고된 만큼 식중독 사고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식중독 환자의 70% 이상이 음식점과 어린이집 같은 집단급식소에서 나온다. 이를 대상으로 한 정부의 위생 점검이 더욱 깐깐해져야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6-27(월) 세베로도네츠크 함락

러시아 서부에는 돈강이 흐른다. 돈(Don)은 슬라브어로 강이란 뜻이다. 돈의 작은 말이 도네츠(Donets)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도네츠강이 흐른다. 도네츠강은 돈강에 합류해 아조프해로 흘러 들어가고 아조프해는 다시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도네츠강이 우크라이나 루한스크 지방을 관통하는 한 지점에 동쪽으로 세베로도네츠크, 서쪽으로 리시찬스크라는 도시가 마주 보고 있다. 세베로도네츠크가 25일 러시아군에 함락됐다. 우크라이나군은 강 서쪽으로 철수하고 있지만 리시찬스크가 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외신은 세베로도네츠크의 함락으로 루한스크 전역이 러시아에 넘어갔다고 본다.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방을 합쳐 도네츠 유역이란 뜻의 돈바스(Donbas)라고 부른다. 돈바스는 2014년 러시아계 주민이 부대 기장을 가린 러시아군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후 양측에서 그동안 약 1만 명이 사망한 내전 상태에 있었다. 러시아는 올 2월 24일 돈바스의 러시아계 주민을 우크라이나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빌미로 이번에는 ‘Z’라는 기장을 달고 노골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크림반도로 가는 도네츠크 지방 남단 도시이자 아조프해 항구 도시인 마리우폴을 함락시킨 데 이어 이번에 루한스크 지방의 거점 도시 세베로도네츠크를 함락시킴으로써 돈바스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다.
▷러시아는 처음에는 수도 키이우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요 도시를 상대로 전면전을 강행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22일부터는 키이우 외곽 등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해 돈바스에 집중했다. 부차 등에서는 러시아가 철수한 이후 민간인 학살 만행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러시아는 키이우 등에 대한 공격은 돈바스 전투에 앞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원 군사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 것인지, 당초 목표에서 후퇴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돈바스 점령이 침공의 목적이었다면 러시아는 목적 달성에 근접한 셈이다.
▷러시아가 돈바스에서 침공을 멈춘다면 우크라이나는 종전 없이 사실상 휴전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미국 등 서방국은 러시아에 대해 강력한 경제적 외교적 제재를 가하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만은 신중히 해 러시아와의 협상 여지를 열어뒀다. 러시아가 돈바스 경계를 넘어오면 가만있지 않겠지만 돈바스 점령까지는 일단 두고 본다는 양면 신호를 보낸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처지가 옛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침략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한반도 북쪽을 내주고 휴전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처지와 비슷해 안타깝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6-28 美제2의 낙태 전쟁

불과 6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피임이 금지돼 있었다. 부부가 피임기구를 쓰거나 피임약을 먹어도 처벌받았다. “침실 생활은 프라이버시”라고 인정한 1965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법의 족쇄가 풀렸다. 법에 반대하던 산부인과 전문가가 일부러 피임약 처방을 해주고 체포된 뒤 소송을 통해 얻은 결과였다. 몸과 성(性)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치열한 법정 투쟁을 거쳐 얻어진 것들이 적지 않다.
▷미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다. 여성들이 지난한 법정 싸움을 거쳐 얻어낸 낙태권이 49년 만에 다시 법정에서 뒤집힌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성 활동가들은 “되돌리는 데 평생이 걸릴지라도 포기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 태세다. 분노와 눈물, 한탄으로 범벅된 연방대법원 앞 반발 시위 현장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라는 결기 어린 목소리가 쏟아진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지키려는 싸움은 결국 여성의 낙태권을 넘어 몸의 자유, 선택할 권리를 지키겠다는 이들의 몸부림이다. 낙태가 수정헌법 14조에 규정된 ‘사생활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연방대법원의 논리도 이들의 반발을 키웠다. 보수화된 대법원이 수십 년간 유지돼온 헌법의 해석을 흔들어 19세기로 돌리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다. 이번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3명 중 2명이 이번 판결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제2의 낙태 전쟁’은 정치와 사법, 민간단체, 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총력전으로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낙태권리 옹호단체들은 11월 중간선거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캠페인에 돌입했다. 최소 1억5000만 달러를 쏟아부을 계획이다. 이에 앞장서는 민주당에도 벌써부터 후원금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번 판결을 “신의 결정”이라고 반기는 종교계와 보수 공화당 인사들은 낙태가 금지되는 26개 주뿐 아니라 50개 주 전체의 낙태 시술을 막아버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가는 미국의 판결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제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낙태를 허용해온 유럽 국가들은 낙태 조건을 완화해달라는 목소리를 되레 높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후속 입법이 공백 상태다. 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 임신 주수 등에 대한 종교계와 여성계, 정치권의 입장이 모두 다르다. 국회가 논의조차 밀쳐놓은 사이 음지의 불법 시술과 부작용 사례만 쌓여 간다. 여성들의 외침을 외면하는 직무유기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06-29 홍콩 반환 25년

“마음만 먹으면 즉시 홍콩으로 진격해 하루 만에 점령할 수 있다.”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만난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런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홍콩 반환을 꺼렸지만 덩샤오핑은 군사력 동원까지 언급하며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2년 뒤 양국은 홍콩반환협정을 체결했다. 1997년 7월 반환 이후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하지만 25년이 흐른 지금 홍콩은 반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도시로 변했다.
▷7월 1일 홍콩 반환 25주년을 앞두고 중국과 홍콩 정부는 축하 분위기 띄우기에 한창이다. 홍콩 시내 곳곳에는 중국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깃발이 내걸렸고, 도심 공원들에서는 꽃 축제가 열리고 있다. TV에서는 중국과 홍콩 정부가 힘을 합쳐 사스(SARS) 등 위기를 이겨냈다는 애국주의 드라마가 연일 방영되고 있다. 25주년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이 될 것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반환 이전의 홍콩은 아시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제 금융 허브이자 쇼핑과 관광의 중심지였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자유로운 도시였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가 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중국식 권위주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위축돼 갔다. ‘우산혁명’을 비롯한 시민들의 저항에 힘입어 제한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유지됐지만, 2020년 홍콩보안법 제정 이후 남아 있던 빛마저 사라졌다.
▷현재 홍콩 입법회에는 반중파 의원이 한 명도 없다. 당국의 심사를 거치고 충성맹세를 해야 출마가 가능하도록 선거법이 바뀌면서 민주 진영 출신은 씨가 마른 것이다. 지난달 90세의 조지프 젠 추기경을 외세결탁 혐의로 체포하는 등 홍콩보안법을 적용해 야권 인사들이 줄줄이 갇혔고, 핑궈일보 등 반중 성향 언론은 문을 닫았다. 지난해 1월 이후 12만 명이 넘는 홍콩인들이 영국으로 출국하는 등 탈출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시 주석과 중국 지도부가 홍콩이 상징하는 바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의 평가다. 시 주석은 장기 집권을 결정할 10월 당 대회를 앞두고 부패 척결을 외치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이런 시점에 시 주석으로서는 민주화의 불씨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홍콩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홍콩의 명물이던 해상 식당 ‘점보’가 최근 침몰한 것을 놓고도 “홍콩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암울한 시기를 겪고 있는 홍콩인들에게 더 많은 응원이 필요해 보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6-30(목) 유나 양 가족의 죽음

어제 전남 완도군 신지도 송곡선착장 인근 바다에서 인양된 아우디 승용차 안에 결국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조유나 양(11) 가족 소유의 아우디 승용차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세 식구가 몰래 차를 버리고서라도 어디론가 도망가 숨어 있길 바랐다. 설혹 시신이 발견돼도 3구는 아니길 바랐으나 불안한 추측은 현실이 됐다.
▷유나 양 가족은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신지도의 한 숙소를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가 추적할 수 있는 모든 기록으로부터 자취를 감췄다. 숙소 앞 CCTV 영상에는 유나 양 어머니 이모 씨(35)가 축 늘어진 유나 양을 업은 모습이 보였다. 밤이 늦어서 숙면에 빠진 것인지 수면제라도 먹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왜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있었을까. 마지막으로라도 엄마가 직접 업고 가고 싶었던 것일까.
▷유나 양 어머니는 퇴실 전 여행용 가방에 쇼핑백까지 챙겨 차에 실었다. 이어 숙소로 들어갔다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꼼꼼히 분리 배출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업고 나와 남편 조모 씨(36)와 함께 차를 타고 숙소를 떠났다. 죽으러 가는 사람이 짐을 다 챙기고 쓰레기까지 꼼꼼히 버리나. 아무튼 경찰 조사에 따르면 차는 9분 뒤 송곡선착장 방파제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사진 속의 유나 양은 귀엽게 웃고 있다. 광주에 살던 부모는 유나 양 학교에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15일까지 제주도로 체험 학습을 떠난다는 신청서를 이틀 전인 지난달 17일에 급히 냈다. 유나 양은 그날부터 결석했다. 그로부터 지난달 30일까지 이 가족의 마지막 여행은 어땠을까.
▷학교 측은 체험 학습이 끝나도 유나 양이 등교하지 않고 유나 양 부모와도 연락이 닿지 않아 집을 방문했다. 집 앞에 우편물만 가득 쌓인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우편물 중에는 신용카드사에 2000여만 원을 변제하라는 법원의 통지서도 있었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아버지 조 씨는 광주의 한 전자상가에서 조립 컴퓨터 판매를 했으나 지난해 7월 폐업했다. 주변 사람들은 조 씨가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빚을 졌다고 전했다.
▷안정된 직장이 없는 30대 부부에게 2억 원이란 빚의 무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빚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젊은 사람이 죽을 생각을 하는가. 그가 완도로 가기 전 인터넷에서 ‘수면제’ ‘방파제 추락 충격’ 같은 단어를 검색하는 대신 죽도록 힘들다고 주변에 소리라도 질렀다면 세 가족을 살릴 수 있었을까. 엄마 아빠와 여행을 떠난다며 좋아했을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