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일본 物語/ 〈21〉 16세기, 일본이 ‘동방의 로마’였던 시절 - 〈29〉 일본, 유럽 무역전쟁의 중심에 서다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이야기
월간조선 06월 호
〈21〉 16세기, 일본이 ‘동방의 로마’였던 시절
⊙ 규슈 지역 다이묘들이 파견한 4인의 소년사절단, 로마까지 유럽 순방 후 8년 만에 귀국
⊙ 나가사키 등에 신학교 설립되고 전성기 신자가 30여만 명에 이를 정도로 기독교 흥성
⊙ 오토모 요시시게, 마쓰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등 규슈 지역 다이묘들, 포르투갈 등과의 무역 확대 노려 기독교 적극 수용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를 알현하는 덴쇼견구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 ‘덴쇼’는 당시 일본의 연호이다.
일본과 유럽의 만남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전파이다. 지금은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는 기독교도 소수국(少數國) 일본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놀라울 정도로 기독교 전도가 활발했던 나라가 일본이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의 초기 기독교 전래사와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1582년 2월 예수회 신부 발리냐노의 인솔하에 일본인 소년 4명이 나가사키항(港)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포르투갈의 카락선(船)에 몸을 싣는다. 이토 만쇼, 치지와 미구엘, 나카우라 쥴리앙, 하라 마르티노 4명의 소년은 로마의 교황과 스페인·포르투갈왕을 알현하고 일본 선교를 위한 정신적·경제적 지원을 요망하는 사절단으로서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발리냐노 신부의 발안(發案)과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등 규슈(九州) 지역의 유력 기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식 표현) 다이묘(大名·영주)의 후원으로 파견되는 유럽 방문 사절단이었다.
8년 만의 귀국
이들은 인도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두르는 2년 반의 여정 끝에 1584년 8월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 본격적인 유럽에서의 활동에 나선다. 그해 11월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필리페 2세를 알현한 후 지중해 동쪽 로마로의 여정을 계속한다.
이듬해 3월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토스카나 대공국(大公國)의 군주이자 메디치가(家)의 후예인 프란체스코 1세를 알현한다. 그해 3월 말 이들은 꿈에 그리던 로마에 입성한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일본 땅에서의 복음(福音) 전파를 축원(祝願)한다. 교황의 옥음(玉音)은 소년들에게 신(神)의 목소리나 다름없었다.
공교롭게도 소년사절단을 접견한 지 3주 후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선종(善終)한다. 후임으로 식스투스 5세가 새로이 교황에 선출되자, 마침 로마에 머물던 소년사절단도 새 교황의 대관식에 초청되어 참석하는 영광을 누린다. 지구상 가장 동쪽 끝에서 꼬박 3년이나 걸려 천신만고 끝에 로마를 방문한 소년들이 겪은 일들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기록상으로 이들이 유럽을 최초로 방문한 일본인은 아니다. 일본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로부터 일본 땅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사쓰마(薩摩·지금의 가고시마) 출신의 베르나르도(일본명 불명)라는 청년이 1552년 사비에르를 따라 인도의 고아로 이주한 뒤, 1553년 리스본에 도착하여 예수회 수도사로서 현지에 정착했다. 그가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일본 땅을 밟은 지 꼭 10년 만에 일본인이 그 길을 반대로 거슬러 유럽 땅을 밟았으니 꽤나 빠른 속도로 양방향의 교류가 이루어진 셈이다.
베르나르도는 유럽에서 생을 마쳤지만, 소년사절단은 1590년 왔던 길을 거슬러 일본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를 떠날 때 13~14세였던 소년들이 다시 일본 땅을 밟았을 때에는 20세를 훌쩍 넘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소년사절단은 유럽과 일본을 왕복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낀 후 다시 고국의 땅을 밟는 이들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로마’ 나가사키
‘기리시탄’이란 기독교도(Christian)를 의미하는 일본의 역사적 용어이다. 한자로는 ‘吉利支丹’ 또는 ‘切支丹’으로 표기하며 현대에는 가타가나 ‘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인들은 20세기 이전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기리시탄시(史)’라고 부른다. 기리시탄시는 크게 보아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1549년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에 의해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제(司祭) 추방령을 내리기까지의 초기 도입기를 제1기, 도요토미 정권과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금교령(禁敎令) 발령 이후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으로 기독교 전파가 엄격히 통제된 시기를 제2기, 메이지(明治) 정부의 등장으로 1873년 금교령이 폐지되고 기독교가 근대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수용되고 재정립되는 시기를 제3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서구 역사가들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시기가 제1기에 해당하는 초기 기독교 도입기이다. 이 시기의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이 동방 항로 개척 과정에서 진출한 그 어떤 지역보다도 기독교 전파를 위한 현지 세력과의 소통과 조력 확보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금교(禁敎)에 대비되는 의미로 ‘허교(許敎)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의 일본은 포교의 문이 열려 있었다.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한 규슈 일대는 포교의 천국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소위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선교사가 주재하던 거점 포교지는 기독교도와 예배당으로 넘쳐났다.
선교사들이 일본 사역 활동을 기록하여 교황청에 보고하던 연보(年譜)에는 16세기 후반 기독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의 하나인 아리마(有馬·지금의 나가사키현)의 모습에 대해 “성(城)밖 마을 일대에는 교회와 세미나리오(초급신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교회의 존재를 알리는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는 거리에는 세미나리오의 학생들이 오르간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다른 선교 중심지였던 아마쿠사(天草·지금의 구마모토현)의 경우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만3000명이 기독교 신자였고, 60명이 넘는 신부가 30곳이 넘는 교회를 배경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1570년대에는 정치·경제의 중심 긴키(近畿·교토와 오사카 일대) 지역까지 기독교 세력이 널리 퍼진다. 실권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비호하에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에 난반지(南蠻寺)라고 불리는 3층 건물의 대형 교회당이 건립되고 선교사들이 공공연히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일본의 로마’로 불리던 나가사키에서는 수십 개의 교회에 주일과 축일마다 신자들이 넘쳐나 사제들이 하루에 여러 곳을 방문하여 쉴 새 없이 미사를 집전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
1580년대에는 체계적 기독교 포교를 위해 아리마에 세미나리오(기초신학교)가 설립됐다. 이어 후나이(府內·지금의 오이타현)에 콜레지오(고등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신학교는 기독교 문화의 정수(精髓)라 불린다. 체계적으로 이론화된 신학 교육과 유능한 사제 양성을 위한 제도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유럽 방문 소년사절단의 단원들도 세미나리오의 학생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들 신학교에서는 유럽 문명의 기초인 자연과학 교육과 기술 교육이 시행되고, 유럽의 인쇄술로 제작된 ‘기리시탄판’(版)으로 불린 각종 일본어 번역 성서와 교육 서적이 간행되었다. 세미나리오와 콜레지오는 일본인들이 신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을 받아들이는 통로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4만~5만명 순교
▲나가사키에 있는26성인 순교기념비.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의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흥했다. 사진=배진영
일본의 기리시탄시 연구자들은 기독교가 전파된 지 30년 만에 기독교 신자가 20만명에 육박했고, 막부의 본격적 탄압과 박해로 신자들이 수면 밑으로 숨어들기 전인 17세기 초반 시점에 규슈와 서(西)일본 일대에 최소 30만명 이상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일본이 포교의 천국이었다는 것은, 반대로 포교가 금지된 이후 박해를 받아 순교한 사제와 신자들의 수에 의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연구자들은 1597년 최초의 공식 박해로 기록된 소위 나가사키 ‘26성인(聖人) 순교사건’ 이후 250년간 지속된 막부의 가혹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유명·무명의 희생자를 모두 합하면 순교자가 4만~5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 규모의 순교자가 있는 나라는 드물다. 일본은 ‘순교자의 나라’로 유럽 각국에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에도(江戶)시대 전반에 걸친 집요한 탄압으로 많은 관련 기록이 소실되기는 하였으나, 기독교가 당시 일본 사회에 단기간 내에 깊숙이 침투했었다는 데에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인도·동남아·중국 등 여타 아시아 지역과 비교하면 일본의 기독교 수용 양상은 예외성(또는 의외성)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외적 현상은 일본인들이 특별히 기독교 교리에 감화되기 쉬운 민족성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현대 일본에서 기독교 인구의 비중이 고작 1%대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급격한 기독교 확산은 신앙의 내면적 수용이라는 종교적 측면을 넘어서는 정치경제적 동인(動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사비에르의 渡日과 초기 기독교 전래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후일 성인(聖人)이 됐다.
일본의 기독교 전파는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사쓰마 상륙을 기점으로 한다. 당시 인도의 고아를 거점으로 선교 활동에 종사하던 사비에르는 인도 포교에 큰 절망감을 느끼고 중국으로 시야를 돌리던 차였다. 믈라카에 머무르며 중국 진출 기회를 엿보던 사비에르는 그곳에서 사쓰마 출신의 안지로와 조우한다. 안지로는 일본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하였다가 포르투갈 선교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안지로로부터 일본의 사정을 전해 들은 사비에르는 계획을 수정하여 일본으로 행선지를 돌린다.
안지로를 비롯한 동료 수사(修士) 일행과 사쓰마에 도착한 사비에르는 히라도(平戶), 야마구치(山口)를 거쳐 1551년 교토로 향한다. 해당 지역의 지배자를 기독교 우호 세력으로 포섭하여 포교 활동을 우선적으로 허가받는 것이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이었다. 사비에르가 석 달간의 여행 끝에 어렵사리 도착한 교토는 응인의 난(應仁の亂) 이래의 혼란으로 수도로서의 위용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도성 곳곳에 전란의 상처가 남아 있고, 천황이나 쇼군은 흉물스런 폐허로 변한 궁성이나 거소 하나 제대로 수리할 여력이 없었다. 중앙의 천황이나 쇼군의 무력(無力)함을 파악한 사비에르는 지방 유력 다이묘를 지지 세력으로 포섭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히라도로 복귀한다.
교토 방문이 완전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비에르는 교토 방문길에 사카이(堺)의 대상인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히비야 료케이(日比屋了珪),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숙식을 제공하고 도성 안의 유력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사비에르 일행을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막강한 금력(金力)을 보유한 대상인이라도 신분제하에서 사회적 지위는 높지 못하였다. 무가(武家)나 불가(佛家)가 전제적(專制的) 권력을 행사하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과 서양과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내다보는 비즈니스 감각이 상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호의의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상인 계층은 선교사들의 조력자로 기독교 포교의 지지 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이 컸다.
여담이지만, 고니시 류사는 교토 최초의 기독교 신자라 불리며 긴키 일대의 초기 기독교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임진란 당시 조선 침공의 선봉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의 차남이다
기리시탄 다이묘의 등장
▲3대 기독교 다이묘의 한 사람인 오토모 요시시게.
교토에서 히라도로 일단 복귀한 사비에르는 지방 유력(有力) 다이묘의 포섭 기회를 엿본다. 그때 사비에르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 기타(北)규슈 동부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분고(豊後)의 오토모(大友) 가문이었다.
분고의 오토모 일족은 15세기 후반 이래 대외(對外)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하며 규슈 패자(覇者)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분고는 고(高)품질 유황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유황은 흑색 화약 제조의 필수 재료이다.
오토모 가문은 15세기 말 이래 중국 조공용 유황을 막부에 헌상하고 있었다. 16세기 초반 밀무역이 성행하자 오토모 가문으로서는 중국 동남해안 일대의 화약 생산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컸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들의 동중국해 진출과 그에 따른 뎃포(鐵砲·조총) 전래는 유황의 가치를 크게 높였고, 이는 오토모 가문에 있어 일대 전략적 환경의 변화였다.
경쟁 다이묘들과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오토모 가문은 대외무역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중국 왜구(倭寇)나 포르투갈 상인 등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51년 9월 사비에르는 포르투갈 상선이 분고에 입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인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오토모 소린(宗麟)으로도 알려짐]를 찾는다. 불과 1년 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영주의 자리에 오른 요시시게는 부국강병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사비에르에게 경의를 표하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의 이용 가치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한다.
요시시게는 사비에르에게 오토모 영내에서의 포교를 허락하는 한편, 사비에르를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희망하였으나, 사비에르가 두 달 후인 11월 일본을 떠남에 따라 요시시게의 구상은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요시시게의 선교사관(觀)은 이후 여타 규슈 다이묘들 사이에 공유된다. 부국강병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수용(또는 이용)하고 종국에는 스스로 기독교 신자가 된 오토모 요시시게, 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3인은 규슈 3대 기리시탄 다이묘로 알려져 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냉엄한 생존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규슈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세력과의 통교를 부국강병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고, 선교사들을 그 실현을 위한 열쇠로 보았다. 이들은 종교 자체보다도 ‘남만무역’, 즉 포르투갈과의 (중국과의 중계무역을 포함하는) 교역 관계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선교사의 이용 가치에 주목하였다.
가장 먼저 남만무역의 기회를 잡은 것은 히라도였다. 히라도는 일찍부터 중국의 상인과 왜구들이 드나들던 일본 무역 거점이었다. 1550년 사비에르는 포교를 불허한 사쓰마를 떠나 히라도로 거처를 옮긴다. 다국적(多國籍) 상인과 해적들이 발을 들이던 히라도에서 새로운 종교 유입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는 종가(宗家)에 해당하는 오토모 가문에 상신하여 사비에르의 포교를 허용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553년부터 1561년까지 매해 포르투갈 상선은 히라도를 방문한다. 히라도는 포르투갈과의 교역으로 흥성하였고, 이는 곧 주위의 경쟁 다이묘들을 자극하였다.
히라도에서 나가사키로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성당. 일본의 국보다. 사진=배진영
독실한 불교신자인 마쓰라는 현실적 이유로 기독교 포교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히라도 주민들의 민심도 편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불상(佛像), 묘비 훼손 등이 잇따르고 이에 대한 불교도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종교 갈등이 심화되자 마쓰라는 1558년 히라도에 주재하던 예수회 사제 가스파 빌렐라를 추방한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선교사가 주재하지 못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1561년 포목품 거래를 둘러싼 분쟁으로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인 상인 간에 살상사건이 발생한다. 미야노마에(宮ノ前) 사건으로 알려진 포르투갈-일본인 간 최초의 유혈 충돌 사건이다. 문제를 일으킨 일본인들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교구장 코스메 데 토레스 신부와 상의하여 무역 포스트를 히라도에서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때 새로운 장소 물색 임무를 맡은 루이스 데 알메이다 신부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나선 것이 나가사키 일대를 영지로 하던 오무라 스미타다이다. 오무라는 기독교 포교 허용과 선교사의 안전을 확약함으로써 포르투갈 상선의 영지 내 입항(入港)을 유치한다. 오무라는 토레스 신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이듬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세례명 바르톨로메오)가 된다. 기리시탄 탄생의 배경에는 이처럼 물고 물리는 다이묘 간의 긴박한 생존 경쟁이 있었다. 세속적 이익을 매개로 정치 권력자의 후원을 얻자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기층민 사이에 퍼져 나갈 수 있었다.⊙
07월 호
〈22〉 항구를 지배하는 자가 일본을 지배한다
⊙ 나니와(오사카), 古代의 對한반도 교역항… 닌토쿠·고토쿠 천황이 도읍으로 삼아
⊙ 對宋 무역의 중심지 하카타, 상인들이 자치권 행사한 일본 최초의 자치도시
⊙ 사카이, 포르투갈·일본·중국 三角무역 체제에 발빠르게 적응… 뎃포(鐵砲) 등 전략물자 공급지로 급성장
▲오사카의 사카이항은 16세기 서일본 최대의 무역항이자 상공업 중심지였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은 하늘길이 열리기 전까지 외부 문명과의 접촉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필연적으로 바닷길 출입구에 해당하는 항구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은 ‘항구의 나라’이기도 하다. 항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일본의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각 역사 발전 단계에서 어떠한 문명이 어떻게 유입되고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일본의 항구들은 그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경제, 기술, 문화 제반 측면에서 여타 지역의 우위에 서게 되는 항구 지역은 권력자들에게는 최중요 전략 요충지로서의 의미가 있다. 발달된 외부 문명과의 연계를 확보할 수 있는 항구를 지배하는 자는 일본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구는 일본 역사의 수레를 굴리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고대 한반도 교류 창구 ‘나니와’
▲오사카 나니와는 견당사나 견수사의 출발지였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오사카(大板)이다. 오사카의 옛 이름은 ‘나니와’(難波, 浪速, 奈波 등 다양한 한자 표기가 있다)다. 나니와는 일본의 고대사(古代史)에서 대(對)한반도 교류 창구로서의 의미가 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의 문물 전수에 국가 발전을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도래인(渡來人)들은 야마토(大和) 정권의 국가 체계 확립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한반도인들이 야마토 정권의 핵심부인 나라(奈良) 일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규슈를 거쳐 세토 내해(內海)에 진입하여 나니와에 상륙한 후,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시간과 불편을 줄일 수 있었다. 이 길은 조선통신사들이 이용한 길이기도 하다.
7세기 이후 선진 문물 도입을 위해 중국에 파견된 견수사(遣隋使)나 견당사(遣唐使)가 출발지로 삼은 곳도 나니와 인근 스미요시(住吉)였다. 세토 내해의 동단(東端)이자 남태평양 연안에 위치하여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할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뱃길이 가장 효율적인 교통로였다는 점과 나라와의 지리적 접근성 등을 감안할 때, 나니와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야마토 정권이 나라분지 일대에 도읍을 잡고 그 주위를 맴돈 사정도 대외교류 창구인 나니와 일대와의 연계를 의식하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특이하게 몇몇 시기에는 아예 나니와로 수도를 이전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제16대 닌토쿠(仁德) 천황이 나니와에 다카쓰궁(高津宮)을 조성하여 도읍으로 삼는 한편, 일대의 하천과 제방을 정비하고 농경지를 넓히며 선정(善政)을 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왕조 연대를 기계적으로 서력(西曆) 환산하면 4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어지럽게 흘러내리는 하천이 뒤엉켜 사구(砂丘)와 갯벌로 이어지던 하구(河口) 지형의 나니와를 바다 진출입과 인간 거주에 용이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위적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36대 고토쿠(孝德) 천황 재위기(645~654년)에 나니와는 다시 한 번 도읍이 된다. 고토쿠 천황은 일본 율령제의 기틀을 다진 다이카(大化) 개신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천도의 상징인 나니와궁의 유적이 현재 오사카성(城) 공원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에 남아 있다.
한반도 관련 지명 많이 남아 있어
나니와로의 천도가 이루어진 시기는 일본과 한반도(및 대륙)의 관계가 큰 분기점을 이루는 시기들과 겹친다. 4세기 초반은 일본과 한반도 간의 교류가 본격화되는 시기로, 이후 일본 정세는 한반도 정세에 의해 직·간접적 영향을 받게 된다.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의 남진(南進)정책으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자, 일본의 한반도 개입도 정도와 규모를 더해 간다. 야마토 조정은 백제와 밀착된 동맹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에 따른 인적·물적 교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활발해져, 당시 야마토 정권은 남북조시대의 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 등에 총 12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 국교 수립에 나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세기에 접어들어 동아시아 정세는 큰 변혁기를 맞는다. 중국 대륙에서는 당(唐)이 건국(618)되었고, 한반도에서는 백제 멸망(660), 고구려 멸망(668), 신라의 당 축출과 삼국통일(676), 발해 건국(698) 등 일본의 대외관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환경 변화가 있었다.
당시 야마토 조정으로서는 동맹관계·적대관계, 그리고 내부 권력관계에 유의하며 인원·물자의 대외 유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었다. 야마토 조정은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체재하던 백제 왕자 부여풍에게 5000명의 호위병을 제공하여 귀국을 지원하고, 663년에는 2만이 넘는 병력을 출병시켜 백제·왜 연합군을 구성하여 나당 연합군에 맞선다. 소위 ‘백촌강 전투’로 알려진 국제전이다. 기타(北)규슈 지역이 도해(渡海)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나, 조정이 국가적 군사 자원 동원에 나설 때 기점으로 활용된 곳이 나니와였고, 고구려, 백제 멸망 후 대량의 유민(주로 백제계)이 유입된 곳도 나니와였다.
나니와는 고대 시기 부도(副都) 또는 수도로 기능한 정치 중심지였고, 이러한 지위는 외부 교류, 특히 대한반도 교류 창구라는 입지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이러한 영향으로 구다라다이지(百濟大寺), 구다라오진자(百濟王神社), 구다라가와(百濟川), 구다라바시(百濟橋), 고라이초(高麗町), 고라이바시(高麗橋) 등 많은 한반도 유래 유적지나 지명이 남아 있다. 나니와는 9세기 이후 한반도와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정치 중심지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나니와의 위상을 바탕으로 인근 와타나베쓰(渡津, 오사카의 중심지 요도가와·淀川의 하구에 위치한 항만)에 항구 인프라가 형성되면서 오사카만(灣) 일대가 서일본의 물산 집산지로 기능하는 토대가 마련된다.
對中 무역 관문 하카타
▲하카타는 몽골 침략 당시 몽골-고려 연합군의 상륙지점이었다.
지금의 후쿠오카(福岡)시에 해당하는 하카타(博多)는 고래(古來)로 외교·국방상의 요충지이자 한반도 및 중국과의 교류 관문으로 중시된 해상 교통 요지이다. 견당사 폐지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일본의 대중(對中)관계는 11세기 이후 송(宋)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하카타는 대송(對宋) 교역의 중심지였다. 하카타에는 수많은 송상인들이 무역선단을 꾸려 왕래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인 거리가 조성되고 중국식 사찰과 건물이 건축되는 이국적 풍경의 국제화된 도시로 변모한다. ‘강수’(綱首)라 불린 송상인들은 당방(唐房)이라 불리는 거주지에 체류하며 하카타의 유력 상인·호족·승려 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송의 문물이 일본으로 대거 유입된다. 만두·우동·소바 등 오늘날 일본인들이 즐기는 먹거리도 이 시기에 하카타를 통해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세기 이후 원(元)·고려 연합군 침공, 왜구 발흥 등으로 침체하던 하카타의 대외무역은 14세기 후반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다이묘(大名) 세력을 제압하고, 1401년 명(明)에 조공(租貢)무역을 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한다.
고이토미(肥富)라는 하카다의 상인이 대명무역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과의 사무역(또는 밀무역)에 종사하던 하카타 상인들은 중국에서 생사(生絲)를 들여오면 20배의 이문을 남길 수 있으며, 일본의 동(銅)을 중국에 가져가면 4~5배의 가격에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이토미는 대명무역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익을 쇼군에게 진언했고, 막부의 권력 강화에 골몰하던 요시미쓰로서는 명과의 무역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고이토미는 1401년 최초의 견명선(遣明船)에 부사(副使)로 승선하여 중국으로부터 조공무역 허가를 얻어내는 데도 직접 참여하였다고 한다. 상인들은 성사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대명무역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이때의 대명무역을 명 조정의 공인을 상징하는 감합부(勘合符)를 사용하였다는 의미에서 ‘감합무역’이라고 한다. 일본의 감합무역은 조선의 대명무역과 성격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의 대명무역이 사대(事大)관계 수립이라는 외교적 고려에 1차적 목적이 있었다면, 일본의 감합무역은 권력 유지에 부심하던 막부의 무역 권익 확보와 그를 통한 권력 기반 강화라는 국내 정치·경제적 동기가 컸다. 무역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익을 목도한 막부로서는 다이묘·상인·왜구 등 사적 행위자들의 사무역을 규제하고 무역 이익을 최대한 점유하기 위해 대중국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방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일본 최초의 자치도시
하카타의 상인들이 중국·조선·류큐 등지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면서 하카타의 위상도 변화한다. 하카타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자치(自治)도시로 알려져 있다. 중세 유럽의 자치도시처럼 자체 방어력과 주변 영주와의 계약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강력한 자치권은 아니었으나, 소정의 세금을 납부하면 상인 협의체가 자체 규약에 따라 민생·치안·분쟁해결 등 행정·사법에 해당하는 일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대외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정치적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상업 세력과 권력 강화를 위해 그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던 정치 세력 사이에 긴장과 협력의 이중관계 형성을 의미한다. 오우치(大內)·오토모(大友)·모리(毛利)·류조지(龍造寺)·시마즈(島津) 가문 등 유력 다이묘들이 규슈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카타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하카타를 접수한 다이묘들은 상인들의 자치를 용인하고 부국강병 관점의 협업(協業) 관계를 구축하는 실리를 취하였다.
사카이의 등장
▲16세기 사카이는 대상인들의 회의체가 다스리는 자치도시였다.
하카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감합무역은 또 다른 무역항인 사카이(堺)의 성장을 불러온다. 사카이는 지금의 오사카부(府) 중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사카이는 세토 내해의 항로를 따라 도달할 수 있는 동쪽 끝이다. 그 이상 배가 동쪽 태평양 연안으로 항해하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 출발한 배는 자연스럽게 사카이에서 항해를 마감한다. 많은 도래인들의 상륙지였던 탓에 사카이에는 도래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스에키(須器)라 불리는 한반도(특히 가야) 유래의 도질토기(陶質土器) 등이 대표적 예이다.
사카이에는 일찍부터 가와치이모지(河內物師)라 불린 철장(鐵匠)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또한 도래인들이 남긴 유산으로 추정된다. 규슈와 서일본 일대에서 채취된 철이 뱃길을 타고 사카이로 운송되어 오면 사카이의 철장들이 발달된 야금술(冶金術)로 각종 철제 도구를 제작하여 일본 전역에 유통시켰다. 대형 범종 등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물품이 사카이에서 전문적으로 제작되었고, 사카이에서 제작된 도검(刀劍)류는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그 우수함으로 무가 사이에 정평이 나있었다.
15세기 이전까지 사카이는 상업항구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14세기까지는 물동량이 크지 않은 포구에 불과했으나, 15세기 들어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면서 16세기에는 서(西)일본 최대의 무역항이자 상공업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사카이는 간사이(關西) 일대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육로가 지나는 교통요지이다. 해로와 육로가 만나는 물류 허브로서의 잠재력이 큰 곳이었고, 감합무역은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감합무역은 견명선(遣明船)이라 불린 무역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척당 100~150명이 탑승하는 대형선박 7~8척이 선단을 구성하여 파견되는 대규모 무역사절단이다. 견명선은 당초 막부가 직접 경영하였으나, 응인(應仁)의 난(1467~1477년) 이후 막부의 약체화와 재정난으로 인해 유력 다이묘, 사찰 등이 점차 운영 주체로 나서게 된다. 사카이를 비호하는 호소카와(細川) 가문과 하카타를 비호하는 오우치(大內) 가문은 견명선 운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대표적 다이묘들이다. 견명선에는 하카타 또는 사카이의 상인들이 동승하여 공무역에 수반된 공인(公認) 사무역을 수행했다. 막부는 이들에게 수입물품 가액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추분전(抽分錢)이라는 명목으로 징수하였고, 이는 재정난으로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막부에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응인의 난 이후 사카이는 기존의 효고(兵庫)를 대체하여 견명선의 모항(母港)이 된다. 견명선이 발착(發着)하는 거점이 되면서 사카이는 대명무역의 수혜를 독식하다시피 하며 상업 중심지로 급성장한다. 이즈음 막부는 추분전을 견명선 출항 전에 정해진 액수를 미리 내도록 하는 선납제로 변경하고, 그 징수 사무를 사카이 상인들에게 위임한다. 이로 인해 사카이 상인들이 실질적으로 견당선의 승선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고, 대명 무역항으로서의 사카이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진다.
16세기에 들어 최대 무역항으로 번성하게 된 사카이는 하카타와 마찬가지로 자치도시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명목상의 지배자는 있지만, 에고슈(會合衆)라는 대상인 회의체가 도시의 주요 사항을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체제였다.
사카이의 상인들은 외부 침입 방어를 위해 도시 주변에 해자(垓字)를 조성할 정도로 자치에 대한 의식이 높았다. 무가(武家)나 대사찰 등 특권 계급이 아닌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호(濠)를 파고 외침 방비(防備)에 나선 것은 일본 역사에서도 희소한 사례이다. 일본에서는 사카이를 호가 둘러싼 도시라는 의미에서 환호도시(環濠都市)라고 부르기도 한다.
16세기 중반 사카이를 방문한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 빌렐라는 〈야소회사일본통신〉에서 “사카이는 거리가 매우 광대하며 많은 대상인들이 있다. 이곳은 베니스처럼 집정관(執政官)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기술한 바 있다. 사카이가 ‘동양의 베니스’가 된 셈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탐낸 도시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기 손에 넣었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 세력의 일본 진출 이후 사카이의 전략적 중요성은 한층 높아진다. 이 시기에는 감합무역이 폐지되고 포르투갈-일본-중국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이 동중국해 일대에서 전개되는데, 사카이 상인들은 누구보다 재빠르게 이러한 환경 변화에 적응한다. 사카이 상인들은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반입된 핵심 전략물자인 뎃포(鐵砲)를 남들보다 앞서 국산화하여 생산하는 한편, 히라도(平戶), 나가사키(長崎) 등 남만무역항에 자체 유통망을 구축하여 남만철·화약·탄환·면포 등 뎃포 운용에 필요한 전략물자를 서일본 일대에 공급한다. 전국시대 다이묘들 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사카이의 뎃포와 전략물자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사카이는 일본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무역항으로 번성 가도를 달린다.
사카이의 운명은, 사카이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사카이에 눈독을 들이면서 일변한다. 뎃포·도검류 최대 생산지인 사카이는 단순한 상업도시 또는 무역항을 넘어 군수(軍需)도시이기도 했다. 사카이를 손에 넣는 것은 무기고와 금고를 동시에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쇼군 옹립에 공을 세운 대가로 교토 일대를 관할하는 간레이(管領) 취임을 제안받는다. 노부나가는 이를 사양하고, 대신 구사쓰(草津)·오쓰(大津)와 함께 사카이를 자신의 관할지로 양허해 달라고 요구해 이를 관철시킨다. 다른 다이묘들이 높은 관직을 탐할 때 부국강병 관점에서 실리를 취한 노부나가의 전략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카이를 관할지로 삼은 노부나가가 2만관(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에 상당)의 군자금을 사카이에 부과하자, 사카이의 상인들은 납부를 거부한다. 상인들이 오히려 해자를 깊게 파고 야구라(櫓·방어용 건물)를 세우는 등 항전의 뜻을 내비치자, 노부나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1만의 군사를 보내 무력으로 사카이를 제압한 후, 고율의 세금 징수와 자치권 박탈로 명령 불복을 응징한다. 기존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기득권을 양해 받을 여지가 있었을 것이나, 쇼군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보유한 노부나가가 마음을 먹은 이상 사카이가 자치를 유지할 방도는 없었다. 사카이가 가져다주는 금력과 무력을 손에 넣은 노부나가는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듯 천하통일을 향해 본격적으로 질주할 수 있었다.⊙
〈23〉 대외무역과 殉敎의 고장 나가사키
⊙ 도쿠가와 막부 시절 鎖國정책은 조선과 같은 고립정책이 아니라 막부의 대외창구 독점정책
⊙ 나가사키, 포르투갈 상선 입항하면서 항구도시로 성장…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증해 ‘敎會領’이 됨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97년 스페인인 4명 등 26명의 가톨릭 신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처형
▲17세기 초 일본에 들어온 남만선(포르투갈선박)을 그린 그림. 왼쪽에는 포르투갈 범선과 선원, 상인들이, 오른쪽에는 선교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열린 후 일본은 전국(戰國)시대의 무력(武力)투쟁과 혼란의 시대를 넘어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하극상(下剋上)이 난무하던 난세(亂世)를 뚫고 천하를 차지한 도쿠가와 막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치력 공고화를 위한 일대 국가 개조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한 작업의 핵심에는 막부의 대외통교(對外通交) 독점정책이 있었다.
16세기 일본의 통일 과정은 누가 외부와의 통교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보다 유효하게 활용하느냐의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유럽 세력의 등장은 대외통교의 전략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들의 신문물과 신무기(뎃포·조총)를 가장 먼저 입수할 수 있는 규슈(九州) 지방의 전략적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시대의 변화를 꿰뚫어 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신무기를 전력화(戰力化)하여 가장 먼저 천하통일에 근접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규슈의 핵심 지역을 장악, 권력 유지 기반이자 대외 팽창 야망 투사(投射)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며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계 쇼군(將軍)들이 다이묘(大名·영주)들의 독자적 대외통교 억제에 나선 것은 필연적 수순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환경 변화에 따라 일본에서 가장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곳이 나가사키(長崎)이다.
鎖國정책의 의미
▲쇄국정책을 시행한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집권 초기에 대외통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주인선(朱印船) 무역의 형태로 일정한 조건하에 허가를 받은 다이묘나 상인들의 대외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는 서양인을 추방하고 모든 번의 외부와의 통교를 일절 금지한다. 이른바 ‘쇄국(鎖國)정책’이다.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쇄국정책은 단순한 고립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쇄국’이라는 말은 1801년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의 《쇄국론(鎖國論)》이라는 책자 제목에서 유래하였다. 시즈키는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저술한 《일본지(日本誌)》의 네덜란드어판을 번역한 인물이다. 《일본지》에는 본편의 부록으로 〈일본에서는 자국인의 출국, 외국인의 입국을 금하고, 일본과 세계 제국(諸國)과의 교통을 금지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소논문이 첨부되어 있었다. 시즈키는 본문 중에 ‘쇄국’이라는 표현이 있음에 착안하여 동 논문의 제목을 ‘쇄국론’이라 번역하였다. ‘쇄국론’이라는 말은 사실 에도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쇄국론’이 역사용어로 등장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 이후로, 주로 막부의 교역 독점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담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쇄(鎖), 즉 쇠사슬로 결박(結縛)하는 대상은 번이지 막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부의 쇄국정책은 ‘폐문(閉門)정책’이 아니라 막부가 사람·물자·정보의 대외 교류를 통제하는 ‘창구독점정책’으로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은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조선의 위정척사(衛正斥邪)류의 이념형 고립정책과 같지 않다.
막부는 쇄국정책에 따라 역사적 경위와 전략적 관점을 고려하여 네 개의 대외 통교 창구만을 열어두었다. 사쓰마(薩摩)번과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 마쓰마에(松前)번과 에조치(蝦夷地·지금의 홋카이도), 쓰시마(對馬)번과 조선 간의 통교를 허용하는 한편, 가장 중요한 유럽·중국과의 교류는 막부의 직할령(直轄領)인 나가사키로 한정하였다. 섬나라인 일본은 모든 해안선이 외부 교류의 창구가 될 수 있다. 막부는 다이묘들에게 일정 크기 이상의 선박 건조를 금지하는 등 이중 삼중의 통제를 가하면서 철두철미하게 대외관계를 틀어쥐고 교역을 관리하려 하였다. 그 통제의 중심에 있던 막부 권력 유지의 핵심 지역이 나가사키였다.
‘교회령’이 된 나가사키
나가사키는 본래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1570년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에 의해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지가 되면서 일본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다채로운 역사의 고장이 된다. 나가사키는 근세 시기 일본의 대유럽 교류 창구이자 대중국 무역 중심지로서, 에도시대 260년의 발전 과정을 축약하고 있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사키는 초기 기독교 전래기에 일본에서 가장 기독교가 융성했던 곳이다. 스미타다는 1563년 그의 사위와 함께 세례를 받고 일본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된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적극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 포르투갈인들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에 주목하였다.
1567년 예수회 수도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기독교 포교가 시작된다. 알메이다는 히라도(平戶)에 일본 최초의 서양 의술 병원을 세운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569년에는 빌렐라 신부에 의해 수백 명에 달하는 신자에게 세례가 행해지고 교회당이 세워지는 등 교세 확장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 상선이 입항하는 1571년 시점에 나가사키에는 이미 1500명을 헤아리는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포르투갈 상선의 입항으로 예수회의 입지가 강화되고 교세(敎勢)가 공고해지자, 1580년 오무라 가문은 나가사키의 관할권을 아예 예수회에 기증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가(佐賀)의 류조지(龍造寺) 가문과 사쓰마(薩摩)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규슈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오무라 가문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예수회를 활용코자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스미타다가 선교사들에게 빌린 채무를 갚지 못해 관할권을 넘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포르투갈 상선에 대한 입항세(入港稅) 징수권과 재판권을 유보하는 조건으로 나가사키 및 인접 모기(茂木)에 대한 관할권이 예수회로 이관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로마의 예수회 고문서관에 보관된 스페인어 문서에 기증 기록이 있으며 일본 측 사료에도 그를 뒷받침하는 정황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대의 주권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무리가 있지만, 나가사키는 한때 (이론적으로는)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는 ‘교회령(敎會領)’이었을 정도로 기독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다.
예수회가 관할권을 행사하고 포르투갈 상선이 입항하는 나가사키는 곧 남만(南蠻・포르투갈-스페인)무역의 중심지로 부상(浮上)한다. 포르투갈 상선이 실어오는 뎃포・화약 등의 전략물자와 중국산 생사, 비단 등의 소비재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를 바탕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더욱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이권(利權)의 중심지이자 기독교 포교의 거점이 된 것이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나가사키는 시마즈 가문에 의해 일시 접수되었다가, 자신의 명령에 불복한 시마즈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규슈 정벌에 나선 히데요시에 의해 관백(關白) 직할령이 된다.
‘바테렌 추방령’
▲오다 노부나가(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양과 통교했지만,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서로 달랐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승계자로서 기존의 방침을 대부분 계승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뜻을 달리했다. 노부나가는 부국강병의 관점에서 유럽 세력과의 교역에 도움이 된다면 기독교 포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히데요시는 교역의 실리는 취하고자 했으나 기독교 포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히데요시는 1587년 소위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 - ‘伴天連(바테렌)’은 신부(神父)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padre의 음차어이다]을 내려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한다. 신국(神國)인 일본에서 사법(邪法)의 신봉자들이 신사불각(神社佛閣)을 파괴하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20일 이내에 모든 선교사의 일본 퇴거를 명하였으나 실제 선교사를 강제로 추방하지는 않았다.
이때의 추방령은 개종(改宗) 강요, 노예무역 묵인, 불상 파괴 등 기독교의 만행에 대한 히데요시의 개인적 분노가 반영된 즉흥적・선언적 엄포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교역 활동과 기독교 포교를 분리하는 한편, 기독교의 기존 정치질서 파괴적 성격을 인식하고 경계의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훗날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기독교 금교(禁敎) 및 쇄국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작지 않다.
바테렌 추방령에 의해 포교가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수면하에서의 은밀한 포교는 묵인되었다. 추방령 자체가 사제 추방과 기독교 포교 금지를 규정할 뿐, 기독교 신앙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히데요시가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에 나선 것은 1596년 소위 ‘산 펠리페(San Felipe)호 사건’ 이후이다. 산 펠리페호 사건은 스페인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만이 일본과 통교하고 있었으나, 스페인이 1571년 필리핀을 정복하고 필리핀-멕시코를 연결하는 태평양 횡단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상황이 일변한다. 동(同) 항로상에 위치한 일본에 스페인 선박들이 자연스럽게 출몰하게 된 것이다. 일본과 포루투갈의 식민제국은 새로운 교역 파트너의 등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포르투갈에 비해 스페인과의 관계 설정은 진통을 겪는다.
일본의 골고다 언덕
▲나가사키의 오우라천주당.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을 기리기 위해 1865년 프랑스인 신부들이 세운 목조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사진=배진영
1596년 7월 마닐라를 출발해 멕시코로 향하던 산 펠리페호가 동중국해에서 풍랑을 만나 도사(土佐)의 우라도(浦) 앞바다에 표착한다. 산 펠리페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화물과 소지품을 몰수당하는 등 일본 측의 비우호적 태도로 고초를 겪다가 이듬해 4월 겨우 수리를 마치고 일본을 떠날 수 있었다.
산 펠리페호 사건이 역사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산 펠리페호가 일본에 머무르던 기간 중에 갑작스런 기독교 탄압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산 펠리페호가 도착한 지 석 달 후인 1596년 10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포교 활동에 종사하던 사제와 신도들을 색출하여 처형할 것을 명한다. 대대적인 색출로 24명이 체포되었고, 압송 과정에서 그들을 도운 2명 등 총 26명의 기독교인이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된다.
이것이 소위 ‘나가사키 26성인(聖人) 순교’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스페인인 4명, 멕시코인·포르투갈인 각 1명, 일본인 20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일본의 ‘골고다 언덕’으로 불리게 된 곳이다.
우발적 사건이나 다이묘의 사적 처벌이 아닌 일본 최고 권력자의 공식 명령에 의해 기독교도가 처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3개월에 걸쳐 체포지에서 멀리 떨어진 나가사키로 이동시킨 후 처형한 것은 이동 과정에서 기독교 금지령을 널리 알리고,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인 나가사키에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공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나가사키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 순교지가 된다.
히데요시가 왜 갑자기 강력한 기독교 탄압령을 내렸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산 펠리페호와 관련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나도는 속설이 있다. 먼저 ‘선교사의 식민지 앞잡이설’이다. 산 펠리페호의 선원이 취조 과정에서 ‘스페인이 광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선교사를 보내 기독교도를 양성하고 이후 군대를 보내 기독교도와 합세시켜 내외에서 협공을 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진술을 했고, 이것이 히데요시를 자극하여 강력한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의 대척점에 ‘예수회-프란체스코회 대립설’이 있다. 당시 일본 포교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프란체스코회 중심의 스페인 세력의 일본 접근을 견제하기 위하여 산 펠리페호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을 침략 세력으로 모함한 것이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외에 히데요시가 자신의 포교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력권인 교토와 오사카에서 공공연히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선교사와 그 추종 세력에 격분하여 극단적인 조치에 나선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분분하다.
도요토미, 필리핀 침공도 계획?
스페인어 자료를 포함한 최근의 연구는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이 보다 복합적인 국제 정세가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기독교 위협론에서 비롯된 대(對)필리핀 강경외교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히데요시는 규슈 평정 과정에서 기리시탄 다이묘 간의 강한 결속과 급속한 교세 확대를 목도하고, 기독교 세력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159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이 기독교 세력의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인식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가 마닐라를 오가며 교역에 종사하여 큰 부를 축적한 나가사키 상인 하라다 마고시치로(原田孫七)다.
필리핀 사정에 정통한 마고시치로는 히데요시에게 필리핀의 본국 스페인이 식민지 침략에 기독교를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한편, 필리핀의 방비 상태가 약체에 불과해 일본의 힘으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으나, 만약 이른 시일 내에 필리핀을 공략하지 않으면 종국에는 필리핀이 일본을 침략해 올 것이라고 진언(進言)하였다. 하라다는 1591년 히데요시의 외교 서신을 휴대하고 마닐라를 방문한다. 히데요시는 마닐라 총독 다스마리냐스(Gomez Perez Dasmariñas)에게 일본에 조공(朝貢)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필리핀을 침공하겠다고 통고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두고 터무니없는 공갈외교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당시 조선 침략을 준비하던 히데요시가 양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공갈외교를 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전쟁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대필리핀 전쟁을 먼저 수행할 의향이 정말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히데요시는 당시 망상에 가까운 대외 정복관을 가지고 있었다. 명을 정복하여 베이징(北京)에 천황의 거소를 두고 닝보(寧波)에 태합(太閤)의 본영(本營)을 두어 필리핀, 인도를 아우르는 제국을 지배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그의 심중을 알 길은 없다.
갑작스런 기독교 탄압 이유는?
▲네덜란드 화가 코넬리스 클래츠 반 비링겐이 그린 〈영국 해안에서 궤멸된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한 영향으로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저자세를 취했다
히데요시의 요구에 필리핀 총독부는 뜻밖에도 저자세로 대응한다. 답신사를 파견해 예를 갖추는 한편, 조공 요구에 대해서는 답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고 히데요시를 회유코자 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영국과의 칼레해전(1588) 이후 무적함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어 해상 전력에 큰 공백이 발생한 상태였다. 더욱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에스파냐의 입지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 총독부는 히데요시의 침공 위협을 코웃음으로 넘겨버릴 수만은 없었다. 1592년 조일(朝日)전쟁 발발은 히데요시의 요구가 단순한 협박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점을 들어 히데요시의 대필리핀 조공 요구가 단순한 공갈외교가 아니라 유럽 정세와 필리핀 사정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내려진 계산된 강경외교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있다.
1596년 기독교 탄압령은 특사 파견으로 시간을 벌면서 일본과 필리핀 간에 애매한 평화가 유지되던 와중에 내려진 것이다. 1594년 필리핀에서 파견된 프란체스코회 소속 선교사 4명이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며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체류하게 되는데, 이들은 당초 목적과 달리 제공받은 주거지를 교회로 만들고 포교 활동에 나선다. 기독교에 대한 히데요시의 경계심으로 외교관계 긴장이 촉발되고 기존 선교사들도 운신이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외부에 노출된 이들의 포교 활동은 무모한 것이었다. 민감한 시기에 벌어진 공공연한 포교 활동이 히데요시를 자극하여 26인 처형이라는 초강경 조치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히데요시로서는 이들의 포교 활동을 필리핀 총독부의 일본 침공 음모로 간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다수설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개별국 행위의 동인(動因)을 개인의 캐릭터를 넘어 국제 정세의 변동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규슈 평정 과정에서 기리시탄 다이묘 간의 강한 결속과 급속한 교세 확대를 목격한 히데요시가 기독교 세력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며, 이러한 인식은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24〉 포르투갈 독점 시대의 종언을 고한 리프데호
⊙ 1600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 표착…, 도쿠가와 이에야스,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 중용
⊙ ‘파란 눈의 사무라이’ 애덤스, 도쿠가와의 命으로 서양식 갤리온선 건조
⊙ 도쿠가와 이에야스, 國富 증진하려 스페인·멕시코와의 교역 시도했으나, 스페인의 거부로 무산
▲일본에 온 최초의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
1600년 4월 서양의 배가 규슈의 분고(豊後·지금의 오이타[大分]현)에 표착한다. 이미 포르투갈 상선이 정기적으로 일본을 내왕하고 있었다. 서양 배의 표착이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닌 시대였지만, 이 배의 일본 표착은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다네가시마에 발을 내디딘 것만큼이나 일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의미가 있다.
배의 이름은 ‘리프데’(Liefde). 네덜란드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배는 네덜란드 회사 소속의 무역 개척선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을 내왕한 배들은 포르투갈 선박이었다. 토르데시아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동아시아 진출 및 교역권은 포르투갈만이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프데호의 일본 표착은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 독점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리프데호는 1598년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네덜란드를 떠났다. 출항 당시에는 총 5척으로 구성된 선단(船團)이었다. 이들은 서진(西進) 루트, 즉 남미(南美)의 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코스로 아시아에 도달하고자 했다. 리프데호를 제외한 다른 선박들은 2년이 넘는 항해 과정에서 악천후와 스페인 군함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고, 태평양 횡단에 성공한 것은 리프데호뿐이었다.
후추무역
당시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스페인의 쇠퇴 기미가 뚜렷해졌고,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구교(舊敎)와 신교(新敎)의 갈등이 왕실 간의 이해관계와 얽히면서 유럽 전역을 혼란과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그러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1568년 스페인의 가혹한 통치와 가톨릭 강요에 저항해 무력 항쟁을 개시한 네덜란드의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고 마침내 1581년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70년간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나서고,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스페인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스페인과 전쟁을 감행하여 이권을 챙기는 등 스페인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리며 유럽의 세력 판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조금 특별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상품은 아시아에서 수입되는 향신료, 그중에서도 후추였다. 암스테르담·로테르담 등지에 기반을 둔 네덜란드 상인들은 후추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1580년 스페인 왕실은 동군연합(同君聯合) 형태로 포르투갈을 병합하면서 포르투갈의 대아시아 교역 독점권을 접수하고는, 1585년 아시아 무역선들의 후추 반입지를 기존의 앤트워프에서 리스본으로 변경한다. 이는 스페인과 적대 관계에 있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후추 유통망 접근에 불안 요인이 되었다. 아울러 스페인 왕실은 오래 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의 푸거(Fugger) 가문에게 채무 변제 대신 유럽 내 후추 유통에 관여할 것을 종용한다. 푸거 가문은 후추 유통망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내륙 유통을 위한 집산지로 함부르크를 이용하였다. 함부르크의 부상은 네덜란드의 상인들에게는 더욱 큰 위기였다.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점점 후추 유통망에서 배제되는 현실을 맞아 동아시아 교역에 직접 나섬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이(異)대륙 교역에는 막대한 재원(財源)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기술 수준으로 무역선이 수년이 소요되는 항해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성공하면 ‘대박’을 칠 수 있으나, 실패하면 한 푼의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한 채 ‘쪽박’을 찰 수도 있다.
당시 아시아에 무역선을 보낸다는 것은 ‘하이퍼 리스크, 하이퍼 리턴’의 세계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달리 무역 선단 조직을 후원할 수 있는 절대 왕권이 부재하였던 네덜란드는 상인들이 ‘회사’(compagnia)를 결성하여 리스크를 분산하는 방안을 고안한다. 투자가를 모집하여 재원을 마련한 후, 사업을 수행하고 수익을 분배하는 방식이다. 소수의 다액 투자가들이 이사가 되어 사업을 관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의 소액 투자가를 모아 모자라는 재원을 보충하기도 했다. 회사의 존속은 일회성이었다. 항해를 마치고 수익을 분배하면 회사는 해산된다.
네덜란드의 아시아항로 개척
▲리프데호 선단. 2년여에 걸쳐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한 끝에 리프데호만이 일본에 도착했다.
1595년 ‘원거리회사’(Compagnie van Verre)로 명명된 최초의 네덜란드 동아시아 무역 회사 소속 선단 4척이 암스테르담을 출항한다. 당시 아시아 항로를 독점하고 있던 포르투갈·스페인은 항해 루트를 국가 기밀로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다. 주요 기항지를 확보한 채 허가를 받지 않은 선박을 발견하면 즉시 공격하여 나포하거나 침몰시켰다. 항행 루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도 불리한 환경에서 항로를 개척해야 했던 원거리회사의 선단은 출항한 지 2년 만인 1597년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한다. 도중에 한 척이 손실되고 선원도 3분의 1밖에 생존하지 못하는 악전고투의 항해였으나, 포르투갈의 독점을 뚫고 아시아 항로를 열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인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네덜란드에는 유사한 형태의 동아시아 무역회사 설립 열풍이 분다. 최초의 회사가 결성된 1595년부터 난립하던 회사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로 단일화되는 1602년까지 7년 동안 8개의 회사가 결성되었고 이들에 의해 15개의 선단이 조직되어 아시아로 파견되었다. 이 시기의 회사들을, 제도화된 본격적 회사 출범 이전의 초기 형태 회사라는 의미로 ‘선행회사’(voor compagnie)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프데호는 로테르담에 기반을 둔 상인들이 설립한 회사에 소속된 선박이었다.
리프데호에는 500정의 소총, 19문의 대포, 5000발의 포탄, 2.5톤의 화약 그리고 철제 갑옷 등 막대한 양의 서양 무기가 적재되어 있었다. 리프데호의 표착과 적재 물품은 당시 최고 실력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관심을 끌었다. 오사카성에 머물고 있던 이에야스는 리프데호를 규슈에서 오사카로 옮길 것을 명한다. 이에야스는 리프데호의 무기를 몰수하는 한편, 직접 탑승자 취조에 나선다.
리프데호에는 영국 출신의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가 항해사로 탑승하고 있었다. 후에 파란 눈의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 된 인물로, 일본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임스 클라벨의 베스트셀러 소설 《쇼군》의 모티브로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애덤스를 불러들인 이에야스는 유럽의 정세와 리프데호의 여정 등 자신의 관심사를 물었다. 애덤스는 소년 시절부터 조선소에서 일하고 체계적으로 항해술을 습득한 프로페셔널 항해사였고, 프란시스 드레이크 휘하의 해군에 소속되어 스페인과의 아르마다 해전에 참전하기도 한 베테랑이었다. 애덤스를 취조한 이에야스는 애덤스가 전하는 서양의 정세, 각종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 조선술(造船術)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파란 눈의 사무라이’ 윌리엄 애덤스
▲리프데호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
사실 애덤스가 이에야스를 만나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에야스보다 먼저 리프데호 선원들을 취조한 예수회 신부들은 이들이 네덜란드 회사 소속의 신교도임을 알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신교 탄압에 반발하여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영국은 그러한 네덜란드의 가장 강력한 후원 세력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프데호가 해적선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선원들을 모두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야스는 애덤스와 대화를 나눈 후, 애덤스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님을 확신하고 선교사들의 권고를 무시한다. 이에야스가 모든 서양 정보를 독점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애덤스의 가치를 간파하고 의도적으로 애덤스를 가까이 두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에야스의 진의가 무엇이건, 리프데호의 표착으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갈등과 왕실 간 세력 다툼이 일본에서 축소판으로 재현되었고, 이에야스는 그 구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셈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실리주의와 정세를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은 이에야스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일본에서는 역사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에야스가 리프데호에 실려 있던 무기를 이용해 천하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스토리가 종종 등장한다.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세력과 결전을 벌인 세기가하라 전투(ヶ原合)에서 애덤스를 비롯한 리프데호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신형 대포를 사용했다거나, 뎃포의 탄환을 튕겨내는 서양의 철제 갑옷을 착용한 이에야스가 전선(戰線) 전면에 직접 나와 진두지휘를 함으로써 장기전이 되리란 예상을 깨고 초단기전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들은 세키가하라 전투만 놓고 본다면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가설에 불과하다. 다만 1615년 오사카성 전투에서 서양식 대포가 사용되고 17세기 초반부터 서양식 갑옷과 전통 일본 갑옷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갑옷(이를 남만동구족·南蠻胴具足이라고 한다)이 만들어져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뎃포의 전래 이래로 일본의 병기 체계가 서양의 영향을 흡수하며 발전하는 양상의 연장선상에서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서양식 갤리온선을 만들다
리프데호가 일본 역사에 갖는 의미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이에야스의 외교 구상과 관련이 있다. 이에야스는 전문 항해사 출신의 애덤스를 총애했다. 에도성에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쇼군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고문의 지위에 앉혔다. 이에야스는 첫 만남부터 애덤스의 해박한 해양지식에 반한 터였다.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휘하의 수군 무장(武將)인 무카이쇼겐(向井將監)과 협력하여 남만선, 즉 서양식 선박을 건조할 것을 명한다. 애덤스는 일급 항해사이기는 했지만, 직접 배를 만드는 과정을 다 꿰고 있지는 못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1604년 당시 유럽의 주력 선박인 갤리온(galleon)선을 본뜬 배가 완성된다. 기존의 일본식 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배가 무사히 항해에 성공한 것에 만족한 이에야스는 두 번째 선박 건조를 명한다. 1607년 120톤급의 갤리온선이 완성되었다. 당시 대서양 횡단에 투입되는 유럽의 갤리온선이 150~300톤급이었으니, 유럽 기준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배다.
1609년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가 탑승한 산 프란체스코호가 멕시코로 향하다가 폭풍우에 난파되어 지바에 표착한다. 일본 땅에 발이 묶인 비베로 일행을 막부는 환대한다. 이에야스는 비베로 일행에게 스페인(및 멕시코)과의 교역에 관심이 있음을 전하고 본국 귀환 시 그 성사를 위해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애덤스가 건조한 두 번째 선박을 귀국용으로 대여한다. 스페인인들은 이 배를 ‘산 부에나 벤튜라’(San Buena Ventura)라고 불렀다. 1610년 8월 일본의 우라가를 출발한 벤튜라호는 같은 해 10월 무사히 멕시코에 도착하였고, 이후 벤튜라호는 멕시코에 의해 몰수되어 멕시코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항로에 투입되었다.
서양식 선박 조선술은 중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614년 센다이번의 다테 마사무네는 독자적인 서양선박 건조에 나선다. 일본에서는 다테마루(伊達丸)로 알려진 ‘산 후앙 바티스타’(San Juan Bautista)호이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파견된 스페인 사절 비스카이노()의 협력을 얻어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 바티스타호는 500톤급 스페니시 갤리온선으로 대양 횡단을 너끈히 해내는 수준급 선박이었다.
바티스타호에 대해서는 45일의 단기간에 대형 선박을 건조했다는 기록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들어 손상된 스페인 선박을 수리하여 출항시킨 것인데 스페인인들이 이름을 바꿔 부르는 바람에 이명동선(異名同船)의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대해 건조 주장자들은 설계도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각 부위의 치수와 동원된 인력에 대한 기록이 있어 실제 건조했음이 틀림없다고 반론한다. 현재 일본 미야기(宮城)현의 이시노마키(石) 시에는 바티스타호를 복원한 레플리카가 전시되어 있다.
바티스타호는 1613년, 1616년 총 2회에 걸쳐 태평양을 횡단하여 멕시코와 일본을 오간다. 첫 번째 항해 시에는 막부의 위임을 받은 센다이 번사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가 멕시코와의 통상관계 수립 교섭 임무를 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하세쿠라는 멕시코 서안에 도착, 육로로 동안으로 이동한 다음에 대서양을 횡단하여 1615년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하여 에스파냐 국왕 필리페 3세, 이어 로마로 이동하여 교황 파울루스 5세를 알현하고, 쇼군의 친서를 전한 뒤 로마에서 직접 세례를 받고 멕시코, 필리핀을 거쳐 1620년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일본의 외교사절인 셈이다.
도쿠가와의 通商외교 구상
▲도쿠가와 이에야스.
최근의 연구는 이에야스가 애덤스를 총애하며 서양식 선박 건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배경에 그의 원대한 외교 구상이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강경외교로 인해 주변국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필리핀·태국·캄보디아·베트남 등에 선린관계 수복을 원하는 친서를 발송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이에야스는 특히 필리핀을 비롯한 멕시코 및 스페인 본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를 위한 방편으로 원양 항해가 가능한 첨단 선박 건조 기술과 스페인의 발달된 은(銀) 추출법(아말감법)을 입수하여 자신이 확보한 영토 내 은광(銀鑛)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고 이를 교역에 활용해 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에도와 가까운 우라가(浦賀·지금의 지바[千葉]현)를 스페인 선박의 입항지로 지정하여 나가사키에 버금가는 무역항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구상도 병행되었다.
그는 필리핀 총독의 사절로 일본을 내왕하는 헤수수 신부를 통해 이러한 의향을 반복적으로 전달하였으나, 스페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조선술과 항해술을 국가 기밀로 취급하는 스페인으로서는 이에야스의 요청을 처음부터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다만 일본 인근의 해적으로부터 마닐라 항로의 안전과 자국 선박 난파 시 기항지를 확보하는 한편, 일본에서의 기독교 포교를 보장받고 신교 세력인 네덜란드를 일본에서 축출하기 위해 적당한 통상관계를 제의하는 선에서 이에야스의 요청을 건성으로 대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무성의한 태도에 실망한 이에야스가 애덤스를 활용해 서양식 범선 건조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한편, 스페인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통상관계 수립에 나섬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외교적 협상력을 높이고자 했다는 것이 이러한 해석의 요지이다. 이후 시마바라의 난(亂) 등 기독교 포교(布敎)의 체제 위협 속성이 부각되면서 막부의 쇄국정책이 공고화되고, 그에 따라 대양 항해를 위한 대형 선박의 조선 기술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고 말았다. 하지만 400년 전에 당시 유럽의 정세가 일본의 정세에 투영되고 일본의 권력자가 그 흐름을 읽어내며 교류와 견제를 적절히 배합하는 외교적 방책을 구사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25〉 스페인의 유대인 탄압이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로 이어지다
⊙ 네덜란드, 상업회사인 동인도회사(VOC)가 對日무역 주도… 종교적 색채 없이 200년간 일본과의 교역 독점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출현, 자본주의 발흥
⊙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세계 각국의 유대인 네트워크와 결합해 네덜란드의 해외무역 발전에 기여
▲일본에 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선박.
동인도회사는 철저히 상업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일본과 교역했다.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성립 이후 대(對)일본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종국에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1600년 네덜란드 선적 리프데호가 일본 땅에 표착한 것이 네덜란드와 일본 간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리프데호에 탑승하고 있던 윌리엄 애덤스와 얀 요스텐 등을 총애하였고, 이들의 지원사격을 받은 네덜란드의 일본 접근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네덜란드는 1609년 히라도(平戶)에 상관(商館) 설치를 허가받아 정식으로 일본과의 교역에 돌입하였으며, 1639년 포르투갈인들의 입국 금지령을 계기로 일본과의 교역을 승낙받은 유일한 유럽국이 되었다. 1641년 포르투갈 세력의 추방으로 무주공산이 된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상관이 이전된 이후 네덜란드는 무려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에 상관을 유지하며 대일(對日)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의 대일관계는 기존의 포르투갈 또는 스페인 세력의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일본과 무역 관계를 맺은 것은 정확하게는 국가(또는 왕실)가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였다. 수익 창출이 최우선 목표인 비(非)국가 상업조직으로서 VOC는 기독교 포교에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비종교적 태도가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유럽과의 교역을 원하되 기독교를 배척하고자 하는 막부의 의향에 이보다 더 잘 들어맞는 교역 파트너는 없었다. 이러한 VOC의 속성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여타 지역에서도 우호적인 교역 환경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2세는 종교적 맹목에 사로잡혀 에스파냐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
유럽의 소국(小國) 네덜란드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 최강 해상국가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VOC의 역할이 컸다. VOC의 등장은 조금 색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흔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유대인에 의한 세계 금융 지배’라는 현상은 VOC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박해받는 소수(少數)민족에 불과했던 유대민족이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집단이 될 수 있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나 17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확산이 유대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한 전환점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VOC이다. 그 역사적 경위를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을 떠돌던 유대인들이 일찍이 모여들던 곳이다. 8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세력은 유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다. 이베리아의 이슬람교도들은 가장 큰 적대 세력 기독교도와 일대 투쟁의 와중이었다. 유대인 정도의 소수 이교도와의 평화적 공존을 개의치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들로부터 탈환하려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거의 마무리되는 15세기가 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은 기독교 세력은 유대인들을 이단으로 취급하였고,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다. ‘기독교도가 되거나, 이베리아를 떠나거나’가 그곳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였다.
그러한 박해의 상징적인 조치가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공동 발령(發令)한 ‘유대인 추방령’(Alhambra Decree)이다. 유대인들은 이 추방령에 따라 에스파냐의 영토를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改宗)하여야 했다. 이때 이베리아를 떠난 유대인의 숫자가 20만명에 달한다.
잔류를 선택한 사람들은 ‘콘베르소’(converso・개종인)가 되어 기독교도로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개종인들 중에는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은자(隱者) 유대인’(crypto-Jews)이 많았다. 개종과 관계없이 이베리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감시의 대상이었고 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후에 에스파냐 왕국)이 발한 이 추방령에 의해 쫓겨난 유대인들은 오스만제국・북아프리카・동유럽・영국・저지대 국가(Low Countries・현재의 베네룩스 지역) 등으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포르투갈과 유대인
초기에 가장 많은 인원이 피신한 곳은 인접한 포르투갈이었다. 이때 포르투갈로 몰려든 이베리아 반도 각지의 유대인들을 포르투갈 유대인(Portuguese Jews)이라고 한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레콩키스타의 한 축이었던 포르투갈 역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지 않았고, 1497년 이교도(異敎徒) 추방령을 발한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항해・지도제작・귀금속가공・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대인들의 기술과 네트워크가 필요하였던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달리 실질적으로는 국외 이동을 허용하지 않고 강제 개종을 강요하였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다수가 콘베르소가 되어 포르투갈에 잔류하였으나, 이들은 실상 유대인의 정체성(正體性)을 포기하지 않은 은자 유대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계기로 다시 에스파냐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포르투갈 동방 무역을 지탱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인구 130만 정도의 소국인 포르투갈은 유대인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16세기에 들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여 큰 부(富)를 획득하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달랐다. 에스파냐는 강성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대륙을 오가는 상선에 무장 함대 콘보이(flotas)를 제공하여 물자 유통의 안전을 확보하였으나, 포르투갈은 그러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주요 해상교통 요지에 교두보를 확보하되, 무력(武力) 점령에 의한 영토 확장보다는 현지 세력과의 통교(通交)를 통한 무역 이익 독점에 주력하였다.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달리 아랍・인도・중국 등 유럽에 필적하는 문명권에 진출하여야 했던 사정도 있었다. 이들 구(舊)문명권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재래의 관습·관행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었고, 교역을 성사시킬 중개자(broker)가 필요하였다. 당시 가장 방대한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무어인(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을 적대시하고 추방한 포르투갈로서는 이러한 역할을 (이탈리아 상인들과 함께) 유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이 진출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유대인들이 있었다. 아프리카・고아・믈라카 등 포르투갈의 진출지에는 포르투갈의 콘베르소들이 무역・세관・의료・회계・법률 분야에 종사하며 교역 체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쇠락한 이유
포르투갈의 실용적인 유대인 정책은 1547년 종교검열(Inquisition)이 강화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종교검열이란 신(新)기독교인(주로 유대인)들이 실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인지를 조사하여 허위로 밝혀질 경우 엄중한 처벌(주로 공개 화형)을 가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교황 공인의 반(反)종교혁명 조치이다.
종교검열은 에스파냐의 필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겸하면서 그 극악성을 더해갔고,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더 이상 포르투갈 잔류를 포기하고 국외(國外) 탈출을 감행한다. 당시 동방 무역은 큰 위험이 따르는 도박과도 같은 벤처 비즈니스였고, 그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유력 자산가들의 금융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포르투갈 유대인의 채무 회수 안전성이 크게 저해된 자산가들은 포르투갈로 향하는 돈줄을 틀어막았다.
유대인이 자취를 감추고 돈줄이 마르자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은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한다. 무역의 과실을 따 먹으며 호사를 누리던 왕실과 귀족 세력은 종교 도그마에 빠져 자신들의 부를 지탱해 준 유대인의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챌 능력조차 없었다.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은 17세기에 접어들어 전성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처참한 수준으로 급전직하하였고, 2류 국가로 전락한 포르투갈은 그 후 다시는 열강(列强)의 대열에 오르지 못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교 탄압을 피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각지로 퍼져나간 .유대인들을 ‘세파라디 유대인’(Sephardi Jews)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독일 지역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간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 Jews)이라고 한다.
종교적 탄압이 이주의 이유였기에 세파라디 유대인들이 유대교 탄압이 심하지 않은 곳을 찾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신정착지 중의 하나로 선택된 곳이 저지대 지역이었다. 저지대 지역의 공국(公國)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자치권을 획득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오스만제국의 위협, 황제와 교황 간의 불화로 가톨릭의 교세가 위축되고 신교(新敎)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대두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본사. VOC는 자본주의 발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6세기 초반 이후 세파라디 유대인들은 (현재) 벨기에의 항구도시인 앤트워프(Antwerp)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앤트워프는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와 포르투갈의 동방 항로에서 유입되는 물산이 서유럽권에 유통되는 해상교통 요지였다. 향신료・양모・원면・설탕・귀금속 등의 주요 원자재 집산지가 되자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무역·금융 서비스를 담당할 인적 자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다.
152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칙령에 따라 신교 포교 금지가 해금(解禁)되자, 앤트워프의 영내(領內)에서 종교검열이 폐지되었다. 에스파냐의 악명 높은 종교검열에 신음하며 강제로 고향을 등진 유대인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앤트워프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종교 탄압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강점인 무역과 금융 분야에 종사하며 앤트워프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고, 앤트워프는 16세기 중반 유럽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하며 번성하였다.
앤트워프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1576년 저지대 지역에 주둔하던 합스부르크 용병 부대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앤트워프를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위 ‘앤트워프 약탈’(The sack of Antwerp)로 불리는 사건이다. 네덜란드 7주(州)의 독립 의지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은 보다 안전한 암스테르담으로 정주지를 옮긴다. 암스테르담에는 16세기 중엽부터 세파라디 유대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해상교통 요지인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 약탈 시점에 이미 국제무역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앤트워프로 향하던 물량까지 암스테르담으로 전환되자 암스테르담의 위상은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하루 200여 척의 화물선이 들락거릴 정도로 엄청난 물동량을 자랑하는 무역항이 됨에 따라 자극을 받은 것은 ‘거래소’(exchange, bourse)였다. 여기서의 거래소란 단지 물리적 장소의 의미가 아니라, 주문・결제・인도 등 상품 거래에 수반되는 일련의 법적・금융적 문제들이 관행과 제도화에 의해 처리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앤트워프에서도 초기 단계의 거래소 개념이 형성되었으나, 암스테르담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축적이 일종의 임계점에 다다르며 제도화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로고.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해외 원격지에서 상품을 입수하여 유럽까지 운반하는 데에는 많은 리스크가 수반된다. 그 리스크를 감당하며 상선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즉 그 배가 귀환하였을 경우 수익을 배분하고, 반대로 귀환하지 못하였을 경우 손해를 분담하기 위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를 기획하고 관리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솜씨 좋은 항해사가 있어야 하고, 성능 좋은 배가 있어야 하며, 입수된 상품을 판매하여 높은 수익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유통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위험을 분산시키고 책임을 한정하기 위한 일련의 제도와 기법들이 고안된다. 구체적으로는 수익권을 보장하는 주식(stock), 거래의 안전을 위한 신용장(letter of credit), 선하증권(bill of lading) 등 각종 증권 발행을 통한 신용 기반 금융기법 등이 거래소를 중심으로 태동하고 발전한다.
1602년, 암스테르담에서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증권 기반 상업 프로젝트 기법을 집대성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출범한다. VOC의 성립에 맞춰 암스테르담 거래소(Amsterdam Bourse)가 개장한다. 세계 최초의 공개 증권거래소라 불리는 곳이다. 이제 회사의 소유권은 분할된 증권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증권을 소유한 사람은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전까지 모든 투자는 회사 자체에 대한 것이었고 회사의 실적에 따라 손익이 결정되었지만, 거래소의 성립으로 증권의 소유자는 증권의 거래만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기존에 왕이나 귀족이나 대부호 상인만 소유할 수 있던 생산수단을 약간의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거래소 방식에 의한 부의 창출·분배 메커니즘은 과거 정치적 권위에 의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율적 투자에 따른 수익 향유가 가능하였다.
VOC는 동방으로부터 유입되는 각종 물산을 독점하며 부를 창출하였고, 그 창출된 부는 거래소를 통하여 분배되었다. 유대인들은 거래소의 성립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새로운 축재(蓄財) 기회를 맞이한다. 종교 탄압 신세를 면하였다고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사회적 멸시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예배당(synagogue)을 짓는 것도 어려웠다. 기독교도들과의 교류를 막기 위해 독자적 상점 운영 등 도시 내수(內需) 경제에 편입되는 것도 제한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이러한 제약이 적용되지 않는 국제무역 분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행운의 열쇠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국제무역이 증권 기반 비즈니스로 성격이 전환됨에 따라 누구보다 능수능란하게 리스크 회피와 수익 극대화를 도모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유대인 네트워크의 발흥
종교의 압박에서 벗어난 채 국제무역에 종사하면서 수익권을 증권의 형태로 거래할 수 있게 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은 존재였다. 전술(前述)하였듯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는 많은 콘베르소 유대인이 잔류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영국・오스만제국・인도·신대륙 일대에 세파라디 유대인들이 퍼져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그 이전에는 같은 유대인이라도 서로 사용하는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각 지역에 퍼져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는 세파라디 유대인들은 무역 경쟁력의 면에서 유럽인들에 비해 큰 비교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A가 런던의 향신료 상인 유대인 B로부터 상품 주문 신용장을 접수했다고 치자. A는 향신료 유럽 도착항인 리스본의 유대인 C와 출발지인 고아의 유대인 D에게 현지 시세와 동향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중간 기착지인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E에게 선하증권을 발행하여 상품 일부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투자를 제공받거나, 암스테르담 거래소에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해당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있다.
현대와 같은 금융기관이나 신용평가기관이 없어서 신용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당시 상업 환경하에서 유대인들, 특히 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세파라디 유대인 간의 인적 네트워크는 엄청난 경제적 자산이었다. 세계 각지의 세파라디 유대인 네트워크는 초기 단계의 글로벌 무역·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증권화에 의해 유대인 네트워크의 효용성은 크게 증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점을 배경으로 동인도회사의 지분권을 높여갔고, 나아가 VOC가 촉진한 자본의 증권화 진전에 따라 유럽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역사는 서로 이어지는 것
‘점 잇기 놀이’라는 것이 있다. 종이 위에 번호가 붙은 점들이 찍혀 있고, 각 점을 순서대로 이으면 별·달·동물 등의 형상이 나타난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점들이 규칙에 따라 선으로 이어지면서 식별 가능한 형상이 도출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도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event)들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복잡계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어느 한 곳에서의 사건이 다른 곳에서의 사건을 유발하고, 그 연쇄적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는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가 아시아의 역사로 이어지고, 아시아의 역사가 유럽의 역사에 반영된다. 200여 년간 일본의 대유럽 교역 창구로서 난학(蘭學) 등의 지적 자극을 통해 일본 근세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네덜란드의 일본 진출사는 따지고 보면 유럽 역사를 요동치게 한 15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추방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흥미로운 소재로 주목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11월호
〈26〉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폭침사건
⊙ 1608년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오에서 일본인들과 관헌 충돌, 일본인 40여명 사망
⊙ 1610년, 포르투갈 무역선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아리마 하루노부 수군의 공격 받고 나흘 간 격전 끝에 自沈
⊙ 포르투갈, 신흥 네덜란드·영국이 진출해 오는데도 기존 해양제국으로서의 자존심 앞세우며 정세판단 그르쳐 몰락 자초
16세기 말 오다 노부나가의 계승자로 덴카비토(天下人·전국시대 투쟁을 거쳐 일본을 통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교역의 이익은 취하되 기독교 포교(布敎)는 억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무역·종교 분리’ 기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집권 후에도 이어졌다. 3대 쇼군인 이에미쓰(家光)의 시대에 이르러 막부(幕府)의 대외통교(對外通交) 독점과 강력한 기독교 탄압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쇄국(鎖國)정책’으로 귀결된다.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들은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독자적으로 통교에 나서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외부 접근이 용이한 규슈 일대의 다이묘들은 중앙의 눈을 피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역을 추진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이러한 현상은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히데요시는 곧바로 규슈를 평정한 후, 대명(對明) 감합(勘合)무역 붕괴 이후 방임 상태에 놓여 있던 다이묘 교역 통제에 나선다. 그는 왜구 밀무역을 금압(禁壓)하고, 다이묘들의 허가 없는 대외 통교를 제한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붉은 인장(印章)이 찍혀 있는 허가서를 ‘주인장’(朱印狀)이라 하며, 주인장 발급에 의해 공인된 무역을 ‘주인선(船)무역’이라 한다.
東南亞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 형성
▲도쿠가와 막부 시절 공인 무역선이던 朱印船. 일본인들은 동남아까지 진출, 주인선 무역을 했다.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장악한 이에야스는 주인선 제도를 공식적으로 제도화하였다. 천령(天領·막부 직할령)으로 편입된 나가사키를 주인선의 출·도착항으로 지정하는 한편, 나가사키 부교(奉行·막부의 지방 통치 행정기관)를 두어 수출입 품목·가격·유통 전반을 관리하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당시 동아시아 통치자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교역 확대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실질적 대권을 거머쥔 이듬해인 1601년부터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일대의 왕국과 스페인령(領) 마닐라 등지에 사절을 파견해 국교를 수립하고 교역 관계를 맺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남중국해 이원(以遠)의 동남아 지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일본 상인(또는 왜구)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무역은 사무역(또는 밀무역)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종사자들의 지위도 불안하였다.
1604년 주인선 제도로 동남아 지역 도항(渡航)이 공인되자, 일본인들의 남방 진출이 크게 증가한다. 1604년부터 1635년 사이에 총 355통의 주인장이 막료(幕僚)·다이묘·호상(豪商) 등에게 발급되어 매해 평균 10척 이상의 주인선이 남중국해 일대를 왕래했으며, 1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이 동남아(東南亞) 각지의 교역 중심지에 체류하면서 일본인 집단거류가 형성될 정도로 남방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주인선 무역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일본인들의 동남아 직접 진출은 중계무역을 독점하던 포르투갈의 지위에 영향을 미쳤고, 무엇보다 최대 교역품인 중국산 생사(生絲·염색되지 않은 비단실)의 공급을 둘러싼 환경이 변하면서 포르투갈의 일본 내 입지 자체가 흔들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의 생사 수요가 워낙 큰 탓에 최대 공급자인 포르투갈은 일본과의 교역조건 교섭 시 주도권을 쥐고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이러한 우월적 지위는 명(明)의 대(對)일본 해금(海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어 명의 중앙 통치력 쇠퇴로 해금 정책이 이완되자 상황이 일변한다. 중국 상인들이 직접 일본에 생사를 반입하는 밀무역이 성행하고, 합법적으로 생사를 반출할 수 있는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과 일본의 상인이 접선하여 이루어지는 제3국 우회무역(이를 일본어로 ‘데아이·出い무역’이라고 한다)이 개시되면서 일본의 생사 수입 루트가 다변화(多邊化)된 것이다.
네덜란드·영국 세력의 진출
이보다 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동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입지를 좁히고 있었다. 유럽의 정세 변동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이 포르투갈의 동인도 항로 독점을 깨고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마닐라 갤리온 무역’(필리핀-멕시코를 연결하는 스페인 식민지 간 교역)이 포르투갈의 독점적 지위를 침식(侵蝕)하고 있었다. 1600년 리프데호의 표착을 계기로 일본에 정착한 윌리엄 애덤스와 얀 요스텐 등 스페인·포르투갈 세력의 대척점에 서 있던 영국·네덜란드 출신 이국인들은 최고 권력자 이에야스가 이러한 세계 정세 변화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당시 마카오에 거점을 두고 있던 포르투갈은 일본보다도 이러한 정세 판단에 어두웠다. 유일한 유럽 세력이자 주요 물자 공급처로서의 우월적 지위에서 일본을 대하던 고압적 태도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그러한 시대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와 포르투갈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Nossa Senhora da Graa)호 폭침 사건’이다.
1610년 1월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선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마드레 데 데우스’(Madre de Deus)호라고도 부른다]가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폭침(爆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선장인 안드레 페소아(Andr Pessoa)가 자신의 배가 기리시탄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군대의 공격을 받아 탈취당할 상황에 처하자 스스로 화약고에 불을 질러 800톤급 대형 갤리온선을 자침(自沈)시켜 버린 사건이다. 1571년 이래 40년 동안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우호적 교역관계를 맺어 온 일본과 포르투갈 간에 벌어진 이때의 격렬한 무력(武力) 충돌은 양국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마카오 폭동
사건의 발단은 1608년 11월에 발생한 ‘마카오 일본인 소요사건’이었다. 그해 가을 아리마 하루노부가 파견한 주인선이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길에 바람을 잃고 마카오에 기항(寄港)한다. 당시 마카오에는 통킹(베트남)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조난을 당해 긴급피난한 별단의 일본인 무리(왜구로 추정)가 머물고 있었다.
이듬해 봄 편서풍(偏西風)이 불기를 기다리던 와중에 사달이 벌어진다. 현지 법규를 무시하고 칼을 휴대한 채 마카오 거리를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활보하던 일본인 무리와 현지인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를 제지하던 포르투갈 관헌(官憲)이 일본인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수행원들이 살해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카피탕 모르(Capito-mor·최고 행정책임자) 안드레 페소아가 경비대를 이끌고 출동해 일본인들을 체포하려 하자 일본인들이 건물 안에 피신해 농성을 벌이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분노가 극에 달한 페소아는 건물에 불을 지른 후 도망쳐 나오는 일본인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주동자를 색출해 교수형에 처해 버린다. 일본인 사망자가 40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사실 페소아는 당초 계획대로라면 이미 마카오를 떠났을 사람이다. ‘카피탕 모르’는 포르투갈 왕실이 무역선단 대장에게 부여하는 직위로, 마카오 체재 시 최고 행정책임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는 하나, 일본과의 무역을 마치면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카피탕 모르가 마카오에 체재하는 기간은 보통 연중(年中) 수개월에 불과했다. 더구나 페소아가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607년이었다. 이미 1년 전에 돌아갔어야 할 그가 2년이 지나도록 마카오를 떠나지 못한 것은 당시 포르투갈의 천적(天敵)으로 떠오른 네덜란드의 위협 때문이었다.
160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 선박들이 싱가포르 앞바다를 항행하던 포르투갈 선박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호를 공격하여 선박과 화물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포르투갈은 불법을 이유로 약탈품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네덜란드는 양국(兩國)이 교전(交戰) 상태에 있었음을 들어 거부한다.
산타 카타리나호는 중국·일본으로부터 입수한 고가(高價)의 산물을 가득 선적하고 있었고, VOC는 이때의 나포를 통해 VOC 자본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둔다. 이후 VOC의 선박들은 포르투갈 선박 나포에 혈안이 된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해상 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페소아가 마카오에서 발목이 잡힌 것도 1607~1608년 사이에 마카오 진입 해상로인 광둥 앞바다 해역에서 VOC의 함대가 진을 치고 나포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사정에 기인한다.
페소아와 하세가와
1609년 5월 페소아는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에 2년치 물량을 적재한 채 일본으로 향해 마카오를 출항한다. 이때 페소아의 배를 노리던 VOC의 함선들도 대만 앞바다에 진입하여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록상으로 페소아가 나가사키에 입항한 것이 6월 29일이고, VOC의 배가 히라도에 입항한 것이 7월 1일이니 양측의 일본 도착은 이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페소아가 간발의 차로 VOC의 배를 비켜간 것까지는 운이 좋았으나, 문제는 일본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나가사키 부교 하세가와 후지히로(長谷川藤廣)가 페소아 일행에게 모든 교역품의 신고·검사 및 허가 전 판매 금지 등 기존과는 다른 엄격한 통관절차를 통보해 온 것이다.
하세가와는 이후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어 1606년 나가사키 부교로 부임한 그는 나가사키 일대의 다이묘를 감시하고 대외 무역을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와 함께 쇼군의 대리인으로서 나가사키 무역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쇼군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하세가와는 일방적으로 정한 가격을 포르투갈 측에 제시하고 일반에 대한 물품 판매 이전에 쇼군의 선매권(先買權)을 행사하는 등 기존의 관행을 무시한 거래를 강행하였다. 2년을 기다려 진행되는 황금알을 낳는 교역에서 막부의 간섭이 심해진 것에 대해 포르투갈과 일본 상인들 공히 불만을 품었으나 권력자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시 페소아는 마카오 소요사건에 대한 면책(免責) 확보, 재발 방지를 위한 일본 주인선의 마카오 출입 금지, 네덜란드의 대일본 교역 불허(不許) 등 굵직한 현안을 안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세가와에게 이에야스 알현 주선을 요청하고 있었다.
마카오 소요사건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어느 쪽의 책임이 더 큰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건이다. 더구나 희생된 것은 일본인들이다. 하세가와는 마카오 소요사건을 이에야스에게 진언할 경우 오히려 화를 자초할 수 있음을 들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말도록 페소아를 설득하고, 페소아의 부하인 마테오 레이탄(Mateo Leito)을 대리인 자격으로 이에야스가 머물고 있는 슨푸(駿府)로 올려 보낸다.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 준 이에야스
▲대외 通交에 적극적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레이탄 일행이 슨푸에 도착하여 이에야스 알현을 대기하는 동안 공교롭게도 히라도의 VOC가 파견한 사절도 슨푸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것은 포르투갈이었으나, 이에야스가 먼저 알현을 허락한 것은 VOC였다. 이에야스는 VOC 사절의 방일(訪日)을 환영하고 무역관 설치를 허가하는 주인장을 흔쾌히 발급한다. 기존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포르투갈로서는 당황스러운 사태였다.
사실 이에야스는 1603년 시점에 리프데호의 선장에게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승인하는 허가서를 이미 교부한 상태였다. 얀 요스텐과 윌리엄 애덤스의 조언을 접한 이에야스는 포르투갈의 대일 교역 독점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 스페인·네덜란드 등 여타 유럽국을 끌어들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고자 했다. VOC가 페소아의 뒤를 쫓아 일본을 방문한 것 자체가 이에야스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정보전·상황 판단 모든 면에서 VOC에 대한 포르투갈의 패배였다.
레이탄이 슨푸에서 VOC에게 허를 찔리고 있을 때, 나가사키에서는 페소아와 마카오 상인들이 생사 가격을 후려치는 하세가와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 이들은 카피탕 모르가 왕실의 대리인으로서 직접 이에야스를 만나 마카오 소요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아울러 하세가와가 사익(私益)을 편취하려 비행(非行)을 저지르고 있음을 고(告)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 사정에 정통한 예수회 사제들이 황급히 나서 페소아의 슨푸 방문을 단념시켰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하세가와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을 모함하려는 포르투갈인들의 모의(謀議)에 격노한다. 비록 포르투갈의 이권을 강압적으로 제한하고는 있으나, 하세가와는 나가사키 부교로서 포르투갈과의 교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나름의 지원을 하고 있던 차였다. 페소아 일행에 배신감을 느낀 하세가와는 마카오 소요사건으로 복수의 칼을 갈던 하루노부를 끌어들여 페소아 일행에 대한 복수를 꾸민다.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의 최후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를 공격한 아리마 하루노부.
하세가와와 공모한 하루노부는 이에야스에게 마카오 소요사건을 보고하고 보복 조치 허가를 청원한다. 예전 같으면 포르투갈과의 교역 단절을 염려하여 허가가 내려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마닐라 갤리온, VOC, 주인선이라는 대체 공급 루트를 확보한지라 포르투갈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야스의 허가를 얻어 낸 하루노부와 하세가와는 페소아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1610년 1월 3일 나가사키의 예수회 사교관(司敎館)에 페소아의 출석을 명한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페소아는 사교관에 나타나는 대신 배의 출항(出航)을 서두른다. 하루노부는 30척의 함선에 분승한 12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배를 포위, 항복을 촉구한다.
예수회가 중재에 나서 평화적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페소아의 신병(身柄)을 둘러싼 이견으로 교섭은 결렬된다. 그날 밤 아리마 수군(水軍)의 공격으로 시작된 무력 충돌은 꼬박 나흘간 계속되었다. 전투 내내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는 바람의 부족으로 항구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아리마 수군의 파상공격을 견뎌야 했다. 페소아를 비롯한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분전(奮戰)했으나, 불과 50명의 인원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아리마 수군을 당할 수 없었다. 나흘째 되던 1월 6일, 중과부적(衆寡不敵)을 견디지 못하고 배를 빼앗길 지경에 처한 페소아는 선원을 탈출시킨 뒤 화약고에 불을 질러 배를 자폭시킴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포르투갈의 오판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사건 이후 1년 만에 포르투갈의 사절이 일본을 찾아 손해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였다. 양측 모두 교역 상대로서 서로를 필요로 하였기에 마카오-나가사키 무역이 재개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양국 간 무역은 다시는 이전의 규모와 중요성을 되찾지 못하였다. 이러한 관계 쇠퇴는 일본보다는 포르투갈에 더 뼈아픈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부상(浮上)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제해권이 위협받는 전략적 환경 변화를 맞아, 포르투갈에는 가장 중요한 전통적 교역 상대의 하나인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상황이었다. 기존의 우월적 지위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관점의 대일 접근이 필요하였으나, 한 세기 동안 해양제국으로 군림한 포르투갈의 자존심은 정확한 정세 판단을 방해하였다.
반면, 포르투갈의 대항마로 떠오른 네덜란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신(不信)의 앙금이 남은 일·포 관계의 틈을 파고들었다. 네덜란드의 대일 접근은 포르투갈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국가(또는 왕실)가 아니라 수익 창출이 최우선 목표인 상업조직으로서 동인도회사가 취한 실용적 접근은 일본과의 교역 관계 수립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유럽과의 교역을 원하되 기독교를 배척하고자 하는 막부의 의향에 이보다 더 잘 들어맞는 교역 파트너는 없었다.⊙
2018년 12월 호
〈27〉 풍운아 조앙 로드리게즈 신부
⊙ 17세의 나이로 일본에 들어가 일본어와 문화 습득…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등과 친분 맺고 예수회 확장에 기여
⊙ 《일본어문전》 《일본교회사》 등 남긴 ‘日本學’의 선구자
⊙ 일본에서 추방된 후 중국 선교에 동참… 조선 사신 정두원과 만나 천리경·자명종 등 전파
▲‘일본학’의 선구자가 된 포르투갈 신부 조앙 로드리게즈.
16세기 중반 이래 유럽과 일본 사이의 교류는 예수회에 의한 기독교 전파가 중심에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일본에 기독교를 최초로 전파한 사비에르, 《일본사》를 저술하여 일본의 사정을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린 프로이스, ‘적응주의’를 통해 일본 내 기독교 확산에 크게 기여한 발리냐노 등이 역사적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일본 내 예수회 활동에 있어 가장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인물 중의 하나가 조앙 로드리게즈 신부이다.
로드리게즈 신부는 소년 시절 일본에 건너와 30년 이상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의 언어・생활・문화를 체화하여 가장 현지화된 사제로 일본의 조야(朝野)를 누빈 인물이다. 로드리게즈 신부는 동(同)시대 중국에서 활약한 동명이인 ‘조앙 지랑 로드리게즈’(João Girão Rodrigues) 신부와 구별하기 위해 ‘조앙 츠주 로드리게즈’(João Tçuzu Rodrigues)로 불린다. ‘츠주’(Tçuzu)는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수식어로, 일본어 통사(通事, 일본어 발음 ‘츠지’)에서 온 말이다. 통사는 오늘날로 치면 통역사이다. 통사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그의 일본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고, 그는 뛰어난 일본어 능력을 바탕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체계적 일본어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17살 때 일본에 건너와
1577년(1576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로드리게즈 신부가 일본에 건너왔을 때 그는 17세에 불과한 소년이었다. 포르투갈의 바이라(Beira) 지방 출신인 그가 어떠한 경로로 어린 나이에 일본에 오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당시 15세 전후의 나이에 뱃사람이 되어 무역선을 타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그 역시 돈벌이를 위해 동방 무역선의 선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회 측의 기록에 따르면 로드리게즈는 1574년 포르투갈을 떠나 인도 고아, 마카오를 거쳐 규슈의 분고(豊後, 지금의 오이타·大分현)에 도착하여 일본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분고의 영주인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은 개종(改宗)에 반대하는 아내와 이혼을 불사하면서까지 크리스천으로 개종한 대표적 ‘기리시탄 다이묘’였다. 당시 분고 일대에는 오토모의 후원하에 예수회가 포교 기반 확대를 위해 콜레지오(고등신학교), 노비시아테(예비 수련원) 등의 신학교들을 속속 설립하고 있었다.
로드리게즈는 20세가 되던 1580년, 예수회의 일원이 되어 이들 신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 설치된 신학교는 발리냐노의 발안(發案)으로 ‘적응주의’ 교육방침을 채택하고 있었다. 적응주의란 비(非)기독교 지역 포교 시 현지의 언어・문화・습관을 철저히 익힌 후, 그 바탕 위에 현지인들이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선교에 나선다는 발상이다. 그를 위해서는 현지에서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긴요하였고,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신학·철학·자연과학· 라틴어 등의 기본 과목에 대한 교수(敎授) 외에 현지의 언어·역사·문화 습득을 통한 현지화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분고 일대의 신학교에서는 발리냐노가 스스로 교편을 잡으며 사제들의 현지화를 독려하였고,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의 유식자(有識者)들이 일본의 언어·역사·문화의 길라잡이기 되어 주었다.
유럽인과 일본인이 뒤섞여 체계적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로드리게즈의 학식은 일취월장한다. 특히 로드리게즈의 일본어는 성인이 되어 일본어를 습득하기 시작한 여타 사제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최상급 수준이었다. 일본의 역사·고전·문화 지식을 바탕으로 고사(古事) 인용과 한자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의 일본어 능력은 일본인들도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로드리게즈
▲로드리게즈를 총애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을 떠나 고아에 머무르던 발리냐노는 그곳에서 재회한 견구(遣歐) 소년사절단을 동반하여 1590년 재차 도일(渡日)한다. 1590년의 일본 방문은 긴장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3년 전인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돌연 ‘바텐레 추방령’(기독교 사제 추방령)을 내리고 기독교 탄압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리냐노는 단순한 예수회 사제가 아닌 인도 부왕(副王·총독) 사절의 자격을 얻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알현하고, 그의 의중을 살펴 포교 재개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코자 하였다.
이때 발리냐노의 통역사로 로드리게즈가 발탁된다. 그 전까지는 자타 공인 최고의 일본 전문가 프로이스가 통역을 맡았으나, 노쇠한 프로이스를 대신하여 로드리게즈가 중책을 부여받은 것이다. 발리냐노가 1년을 기다려 성사된 히데요시와의 만남에서 통역을 맡은 로드리게즈는 일본인 뺨치는 유려한 일본어로 히데요시를 매료시킨다. 로드리게즈의 유창한 일본어에 감탄한 히데요시가 로드리게즈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가질 정도였다. 이때 시작된 히데요시와 로드리게즈의 인연은 히데요시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 움직임에 숨을 죽이며 수면하에서 활동해야 했던 예수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인도 부왕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위업을 경하(慶賀)하고 성대한 선물을 봉정(奉呈)하며 히데요시의 환심을 사는 한편, 포르투갈 무역 이권을 협상 레버리지(지렛대)로 삼아 추방령을 철회하고 운신의 폭을 넓히려 했다. 그러한 일련의 교섭 활동에 로드리게즈가 깊숙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만년(晩年)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사제들을 스페인·포르투갈 제국의 일본 침략 도구로 의심하며 경원시하였으나, 로드리게즈만은 예외로 후대하며 가까이 두었다. 그러나 로드리게즈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의심은 누그러질 줄 몰랐고, 오히려 1597년 2월 나가사키의 ‘26 성인(聖人) 순교사건’으로 기독교인에 대해 극형을 불사하는 가혹한 박해가 본격화된다.
1598년 9월 히데요시는 교토의 후시미(伏見)성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히데요시는 숨을 거두기 며칠 전 로드리게즈를 거소로 따로 불러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한다. 로드리게즈는 죽음을 눈앞에 둔 속세의 권력자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으나, 히데요시는 묵묵부답인 채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 대리인 역할
▲로드리게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히데요시 사후(死後) 예수회는 권력의 일대 지각변동을 예의 주시하며, 포교 탄압의 분위기 전환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로드리게즈는 1598년 말 예수회 일본 교구의 차석 고위직에 해당하는 ‘대리 사제’(procurador)에 임명된다. 대리 사제는 교구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재무 담당 사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당시 예수회 일본교구의 재정은 만성적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과 그의 사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포르투갈 무역선의 수익성도 크게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재정난에 고심하던 로드리게즈는 권력 쟁패에 나선 유력자들에게 포르투갈 무역 이권을 연계시키는 중개역을 통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일본 사정에 정통한 로드리게즈는 천하통일에 다가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돈독한 관계를 맺는 데 주력한다.
이에야스와 로드리게즈는 1593년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성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이에야스는 당시 유창한 일본어로 기독교 교리를 불교 교리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국인 신부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은 후, 이에야스의 지우(知遇)를 얻은 로드리게즈는 쇼군의 실질적 무역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가장 중요한 교역품은 생사(生絲)였다. 로드리게즈는 생사 수급 과정에서 가격・물량・판매처 결정 등에 깊숙이 간여하게 되면서 쇼군·다이묘·일본 상인·포르투갈 상인의 이익이 교차하는 4파 구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로마와 고아의 예수회 상부는 상부대로 무역 이권(利權)에 개입하는 것은 성행(聖行)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로드리게즈의 처사에 비판적이었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프란체스코회 사제들은 더욱 직접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로드리게즈로서는 고립무원,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
추방
결국 ‘마드레 데 데우스 사건(《월간조선》 11월호 〈‘노싸 세뇨라 다 그라사’호 폭침사건〉)’이 화근이 되어 로드리게즈의 신변에 큰 변화가 발생한다. 데우스호 사건에 관한 대부분의 정황은 사실 예수회가 남긴 기록으로 파악된 것이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일본 기록에는 있는 데우스호와 관련된 로드리게즈의 기록이 예수회 기록에는 언급이 없다. 이를테면 로드리게즈가 데우스호와 일본측 간의 생사 거래 중개역을 맡은 사정이나, 그가 이에야스 알현을 위해 슨푸(駿府)를 방문한 데우스호 사절을 인솔한 사실 등이 예수회 기록에는 누락된 것이다.
데우스호 사건이 발생한 1610년 로드리게즈는 돌연 마카오로 추방된다. 이에야스의 높은 신뢰를 받고 있던 로드리게즈가 어떠한 이유로 추방을 당했는지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훗날 예수회 사제 비에이라(Francisco Vieira)가 작성한 보고서 중에 “로드리게즈 신부는 일본 권력 중추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의 무역과 내부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었고, 끝내 그 적들의 부당한 박해에 의해 일본을 떠나야만 했다”는 언급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가들의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뉜다. 로드리게즈에 의해 이권을 위협받은 나가사키 부교 하세가와(長谷川) 등이 로드리게즈를 데우스호 사건의 책임자로 무고(誣告)하여 이에야스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는 해석과, 반대로 로드리게즈가 실제 이에야스의 이익보다 포르투갈과 예수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부정직한 중개를 하는 정황이 발각되어 이에야스의 노여움을 샀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당시 이에야스는 주인선(朱印船) 무역과 아울러 스페인·네덜란드·영국 등 생사 대체 공급원 확보에 자신감을 갖고 포르투갈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교역 주도권을 쥐고자 하던 차였다. 안팎이 적으로 둘러싸인 로드리게즈는 언제든지 상황 변화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러잖아도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던 예수회 일본교구는 가장 든든한 현지 권력자와의 연결고리인 로드리게즈를 잃게 됨으로써 급속하게 일본 내에서의 영향력이 쇠퇴한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영국의 윌리엄 애덤스와 네덜란드의 얀 요스텐 등 신교(新敎)국가 출신 유럽인들이었다.
‘日本學’ 연구의 선구자
무역 이권 개입 의혹으로 불운의 추방을 당한 사정과 별개로, 로드리게즈가 일본 활동을 통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그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 돋보이는 ‘일본학’ 연구이다. 그는 뛰어난 일본어 능력을 발판 삼아 《일본어문전(日本語文典·Arte da Lingua de Iapam)》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1604년부터 1608년에 걸쳐 나가사키학림(學林·교회의 부속 학교)에서 출간된 동 책자는 형태론, 품사론, 문장·호칭론의 3부로 나뉘어 라틴어 문법을 기초로 분석한 일본어의 구조, 문법, 발음, 구어와 문어의 차이, 각종 문서의 작성법, 경어법, 방언 등 일본어에 대한 체계적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1620년에는 동 책자의 문법 부분을 축약·정리하는 한편, 신철자(표기)법과 인명(人名)·호칭론 등의 내용이 추가된 《일본어소문전(日本語小文典·Arte Breve da Lingoa Iapoa)》이 마카오에서 출간되었다. 이들은 서양 어학의 관점에서 최초로 일본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념비적인 연구서로 언어학사(史)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로드리게즈는 만년에 예수회 본부의 요청으로 《일본교회사·Historia da Igreja de Iapam)》를 집필한다. 비록 출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남겨진 사본을 통해 밝혀진 그의 일본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이해는 놀라운 것이었다. 로드리게즈 이전에도 프로이스나 발리냐노 등에 의해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기술된 바 있지만, 로드리게즈는 적응주의에 의해 철저한 현지화 교육을 받은 사제답게 일본 포교의 선결 과제로서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언어·역사·문화·자연·지리 등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세밀한 분석을 통해 기존 기술과는 격이 다른 일본론을 전개하고 있다. 한 지역의 총체를 구성하는 각 요소를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다루는 이러한 접근은 근대의 ‘지역연구’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으로, 17세기 초에 이미 근대적 방법론에 필적하는 분류와 접근법이 엿보이는 그의 각종 저술은 그가 서구의 ‘일본학’(Japanology)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활약
▲마테오 리치(왼쪽)와 서광계.
한 편의 대하(大河)드라마와도 같은 로드리게즈의 인생 역정은 일본이 끝이 아니었다. 일본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무대를 바꿔 계속된다. 새로운 무대는 중국이었다. 당시 예수회는 중국 선교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1579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는 중국 땅에 발을 디딘 이후 특유의 적응주의를 통해 착실하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의복을 입고 중국인의 전통과 습관에 따라 생활하며 중국인들이 이방인의 기묘한 사상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였다. 문화적 자존심이 높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그러한 접근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해박한 과학기술 지식을 바탕으로 만력제(萬曆帝)의 신임을 얻어 명(明) 조정에서 활약하기도 하는 등 기독교가 중국 사회에 수용되는 데 큰 기여를 하다가 1610년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카오에 둥지를 튼 로드리게즈는 중국 선교를 위한 일종의 지역 연구 임무를 부여받고 1613년 중국으로 향한다. 남부 해안지역을 거쳐 내륙에 이르는 광대한 중국 땅을 답사한 로드리게즈는 그때까지 중국에서 사용되던 카테키즘(Catechism·기독교 교리서)에 천주(天主)·상제(上帝)·천신(天神) 등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용어의 적절성 문제를 제기한다.
일본 예수회의 카테키즘은 라틴어 ‘데우스’(Deu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로드리게즈는 천주·상제 등의 용어가 유교나 도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들어 번역어가 아닌 원어(原語)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장 존경받는 선현인 마테오 리치의 손길이 닿은 교리서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중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제들이 로드리게즈의 비판에 동조하면서 이 문제는 로마에까지 전해졌고, 기독교계 내부에서 ‘전례(典禮)문제’의 하나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뛰어난 한자 실력을 바탕으로 중국어까지 섭렵한 로드리게즈는 중국에서도 통역사로 활동하게 된다. 마침 중국에서는 후금(後金)의 발흥으로 정세에 일대 격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명은 마카오 조차(租借) 이후 포르투갈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상인들에 의한 비공식 교역이 활발한 가운데 명의 관리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이 홍이포(紅夷炮)라 부르던 서양의 대포였다. 후금의 홍타이지가 장성을 돌파하여 베이징을 위협하는 등 후금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명 조정은 마카오 주둔 포르투갈군에게 포병 원군을 요청한다. 서광계(徐光啓) 등 명 조야에 퍼진 기독교 개종 관료와 학자들의 요청으로 예수회가 파병을 막후에서 교섭하였고, 명과의 관계 강화를 바라던 포르투갈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629년 포대장 테세이라 코레아(Teixeira Corrêa)의 지휘하에 10문의 대포와 각종 화기로 무장한 200명의 포르투갈군이 베이징 방어를 위해 장도에 오른다. 이때 로드리게즈는 7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종군(從軍) 사제 겸 통역사로 동행한다. 1630년 테세이라 포대가 갖은 고생 끝에 베이징 턱밑의 허베이(河北)성 줘저우(涿州)에 도달했을 무렵, 수도(首都)에 무장 기독교도를 들이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조정의 변심으로 산둥성 덩저우(登州, 지금의 옌타이·烟台시 펑라이·蓬莱)로 갑작스럽게 주둔지를 옮기게 된다.
정두원과의 만남
덩저우 순무(巡撫·지역책임자) 손원화(孫元化)는 서광계의 제자이자 기독교도로, 스승과 마찬가지로 만주족 격퇴에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의 소유자였다. 명군에 유럽 대포의 사용법과 전술을 전수하며 출병 명령을 대기하던 1631년 봄,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진위사(陳慰使,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임시로 파견하던 조문사·弔問使) 정두원(鄭斗源)이 덩저우를 방문한다. 조선의 사신들은 여느 때 같으면 베이징에서 회령으로 넘어가는 여로를 택했겠지만, 당시는 후금의 발흥으로 육로가 막혀 뱃길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손원화의 소개로 조선의 사절을 만난 로드리게즈는 그들에게 조선 국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며 천리경(망원경)·자명종(기계식 추시계) 등의 서양 물품과 《직방외기》 《천문략》 《홍이포제본》 등 서양문물을 다룬 서적과 지도를 증정하였다. 《인조실록》에 육약한(陸若漢)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 바로 조앙 로드리게즈이다.
실록에 따르면 인조가 “육약한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정두원이 “도를 터득한 사람(得道之人)인 듯하였습니다”라고 아뢴다. 일본과 중국을 안방처럼 누비며 격동의 역사적 현장에 증인으로 입회하였던 로드리게즈가 드디어 조선과도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28〉 노련한 외교술로 對日교역권 확보한 약스 스벡스
⊙ 네덜란드, 明과 펑후다오(澎湖島) 전쟁 치른 후 타이완 점령, 식민지 건설
⊙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 타이완 무역 利權 놓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와 충돌
⊙ VOC의 타이완 총독 약스 스벡스, 물의 빚은 네덜란드인 身柄 인도… 도쿠가와 막부의 체면 살려주면서 분쟁 해결
▲타이완을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을 해결한 VOC의 바타비아 총독 약스 스벡스.
17세기에 들어서자 대항해 시대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해양진출의 후발 주자인 네덜란드·영국은 포르투갈·스페인의 해양로(sea-lane) 패권(覇權)에 거세게 도전했다. 가톨릭 교권(敎權)이 설정한 전통의 기득권(旣得權)은 의미를 상실했다. 이는 권위가 아니라 기술·자본의 우위가 해외 진출을 좌우하는 경쟁 본위 시대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의미했다.
가장 먼저 도전장을 던진 것은 네덜란드였다.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해양로 구축 사정을 파악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는 향신료 제도(Maluku Islands)를 직접 노렸다. 기존 최대 상품이었던 후추는 독점 붕괴에 따른 공급 증가로 수익성이 폭락하고 있었다. VOC는 수익성이 높은 육두구(nutmeg)·클로브(clove) 확보를 위해 향신료 제도의 암본(Ambon)에 상륙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거점을 확보한다.
암본 사건 이후 VOC와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안의 모잠비크에서 시작하여 동인도·말라카·마카오에 이르기까지 인도 에스타도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동아시아 해양 패권을 건 일진일퇴의 공방전에 돌입한다. 포르투갈은 전략적 거점과 천혜의 요새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오랜 독점의 함정에 빠져 군사 시설은 낙후되고 관리자들의 기강은 해이해져 있었다. VOC는 1619년 자바 섬의 자야카르타(지금의 자카르타)를 점령한 후, 항만과 요새를 건설하여 아시아 공략 거점으로 조성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 바타비아(Batavia)로 명명하였고, 바타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때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Dutch East Indies)의 수도로 식민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중국 진출
VOC에 향신료 제도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중국과의 교역이었다. 네덜란드는 선행회사 시대부터 중국의 문을 두드렸으나, 포르투갈의 견제와 명(明) 조정의 거부감으로 교역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바타비아를 확보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VOC는 중국 진출 교두보 확보에 사활을 건다. VOC가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마카오였다. 마카오를 손에 넣기만 하면 포르투갈 축출과 대(對)중국 교역이라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1622년 6월, 바타비아 총독 쿤(Jan Pieterszoon Coen)의 지시로 13척의 함선에 분승한 1300여 명의 주력 부대가 마카오를 공략한다. 그러나 전력(戰力) 우위를 자만한 VOC 함대는 변변한 장비와 병력도 갖추지 못한 마카오 수비대의 유인 전술에 말려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동아시아 바다에서 유럽 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마카오 확보에 실패한 VOC에는 ‘플랜B’가 있었다. 남은 전력을 추스른 VOC 함대는 7월 푸젠(福建)성과 타이완(臺灣) 사이에 위치한 펑후다오(澎湖島, Pescadores)에 상륙하고는 펑후다오 조차와 통상 개시를 요구한다. 국방 차원에서 일부러 비워 놓은 섬을 무단 점령한 양이(洋夷)의 통상 요구에 응할 명이 아니었다. VOC의 펑후다오 점령을 심각한 위협으로 판단한 푸젠 순무 상주조(商周祚)가 VOC의 요구를 거절하고 즉각 펑후다오에서 퇴거할 것을 명하였지만, VOC는 오히려 요새의 방벽을 강화하고 수십 문의 대포를 설치하는 한편, 바타비아에서 보급품을 실어 나르면서 버티기 채비에 들어간다.
VOC가 틈틈이 샤먼(夏門)을 비롯한 푸젠 해안에 무장선을 보내 중국 선박과 해안 마을을 약탈하면서 압박을 가하자 그 호전성(好戰性)에 놀란 상주조는 일단 대화를 시도한다. 1623년 2월 명은 VOC가 펑후다오를 떠난다면 (중국 영내가 아니라 제3의 장소에서라도) 통상을 허가할 의향이 있음을 전하고, VOC가 머무를 수 있는 대체지로 타이완을 제시하는 등 유화책에 나선다. 그때까지 중국 왕조들은 타이완을 중국의 영토로 인식한 적이 없었고 완전한 외지로 취급하였다.
VOC는 그 전해에 타이완 남부를 답사한 후, 일본·중국 상선이 드나들어 항구를 독차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펑후다오를 우선적으로 점유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다. 협상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가운데 VOC는 명을 약 올리듯 밀수와 약탈에 나서며 명을 압박했다. 주민 피해도 피해지만, VOC의 난동으로 푸젠-마닐라 간 해상 교역로가 막히고 주요 세입품(稅入品)인 스페인 은(銀) 반입에 지장이 초래되자 명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진다. 6월의 태풍으로 요새의 방벽이 허물어지자 VOC는 해안 일대에서 중국 양민을 납치하여 방벽 보수 공사에 동원하고는 이들을 바타비아에 노예로 처분해 버린다.
펑후다오 전쟁
VOC의 만행이 베이징에 알려지면서 명 조정의 경각심이 고조된다. 명의 병부(兵部)는 푸젠 순무에 남거익(南居益)을 임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VOC를 중국 해안에서 몰아낼 것을 지시한다.
11월 통상 교섭을 제의하는 척하면서 VOC 사절을 샤먼으로 불러들인 남거익은 이들의 상륙을 유인한 후, 사절단장 크리스티안 프랑스준(Christian Franszoon)을 포함 50여 명의 인신을 구속한다. 생포된 VOC 인원들은 모두 참수(斬首)되었고, 프랑스준은 베이징으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
보복에 나선 VOC가 이듬해(1624년) 1월부터 해안 약탈을 재개하자 결전을 각오한 남거익은 2월 푸젠 전역에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150여 척의 군선(軍船)을 동원하여 전면적인 펑후다오 봉쇄에 돌입한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명의 군선들은 VOC 포대의 화망(火網)을 뚫지 못했고 함선과 요새에 제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VOC는 명의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된다. 7월 이후 집요한 상륙 작전이 결국 성공하고 이로 인해 요새로 통하는 물길이 차단되는 한편, 8월 이후 명의 군세가 계속 보강되자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몰린 VOC는 패배를 인정하고 강화를 제의한다. VOC는 명이 제시한 조건에 따라 요새를 파괴한 후, 9월 펑후다오를 떠나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7개월 넘게 계속된 무력 대치는 명의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명 입장에서는 승리를 기뻐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명군은 10배가 넘는 양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VOC의 신무기 화력에 큰 희생을 치르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펑후다오 해전은 성채만 한 VOC 함선에 조각배 같은 명 군선 수십 척이 달려들다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 싸움이었고, 세상의 중심을 자부하던 명은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남거익은 조정에 올린 상계에서 “홍모인(紅毛人·서양인)의 배는 대단히 크고 그 함포는 10리 밖에서도 중국 군선을 한 방에 조각내 버리는 가공할 위력”이었다고 놀란 심정을 적고 있다.
그러나 기술 문명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이때의 교훈은 중국의 변화를 촉발하는 데 실패한다. 1840년 아편전쟁을 겪은 이홍장(李鴻章)은 이렇게 기록한다.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홍모 외적(영국)의 침입은 중국 3000년 역사에 전례 없는 일이다. 이토록 강력한 무력(武力)과 화력(火力)을 지닌 외적은 지난 1000년간 중국이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며, 이들은 중국이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펑후다오 전투 이후 200년의 세월이 무색한 뒤늦은 한탄이었다.
열강의 각축장이 된 타이완
▲네덜란드는 대만에 무역거점으로 식민지 포르트 젤란디아를 건설했다.
타이완으로 물러난 VOC는 자의반 타의반 ‘플랜C’로 전환한다. 포르투갈이 포르모사(Formosa)로 부르던 타이완은 사실 VOC가 특별히 마다할 이유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VOC는 즉각 타이완 남부(지금의 타이난[臺南]시)에 제일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를 구축하는 한편, 원주민(原住民)을 교화(敎化)시키고 본토의 한족(漢族)을 입식(入植)시키면서 정력적으로 동아시아 전진기지화 작업을 추진했다.
VOC의 거점 구축은 타이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력의 견제와 반발을 유발한다. 당시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공식 교전국이었고, VOC의 타이완 내 거점 확보는 마닐라-푸젠 무역로의 안전에 큰 위협이었다. 대응조치에 나선 필리핀(스페인령)은 1626년 타이완 북부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1629년에는 요새화된 거점(Spanish Formosa)을 구축한다. 지리적·역사적으로 아무런 연고(緣故)가 없는 두 외부 세력이 원주민의 의향과 관계없이 남과 북에 자리를 잡은 이때부터 타이완은 이미 열강(列强)의 각축장이었다.
타이완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한 것은 일본(보다 정확히는 타이완을 무역 중계지로 활용하던 규슈[九州]의 영주와 상인들)이었다. VOC가 오기 전부터 일본의 밀무역선이나 주인선(朱印船)들은 타이완에서 명 상인들과 비공식 거래를 하거나 원주민들로부터 사슴뿔과 가죽을 구입하고 있었다. 명 상인들로부터 구입하는 생사(生絲)는 일본에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었고, 사슴뿔과 가죽 역시 사무라이 갑옷 제작에 쓰이는 소재로 값진 수입품이었다.
1625년 타이오완 초대 감독관 마르텐 송크(Maarten Sonck)는 타이오완에 기항하는 일본·중국 무역선에 10%의 관세를 부과한다. 일본이 굴러온 돌의 일방적 조치에 반발하면서 사달이 벌어진다.
1626년 타이완을 주무대로 삼고 있던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 휘하의) 주인선 선장 하마다 야효에(浜田彌兵衛)는 쇼군의 무역허가증인 주인장(朱印狀)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를 근거로 VOC의 관세 부과에 극력 저항한다. VOC가 물러서지 않고 야효에가 구입한 생사의 일부를 압수하자 양측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한다.
타이오완 사건
▲하마다 야효에와 네덜란드인들의 충돌을 그린 에도시대의 판화.
스에쓰구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592년 히데요시의 무역선 주인장 발부 당시 교토나 사카이 등지의 상인들에게도 무역선 1척만이 허용될 때 혼자 2척에 대한 주인장을 발급받을 정도로 규슈의 유력 해상(海商)이었다. 그만큼 타이완 무역 이권(利權)은 그에게 사활적(死活的) 이익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스에쓰구가 막부에 VOC의 횡포를 알리고 제재를 건의하자, 아직 국내 통치 기반이 완성되지 않은 막부는 대외(對外)무역 측면에서 VOC의 이용가치를 고려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동아시아 바다에 밀어닥친 유럽 세력의 위협을 재차 실감한다. 1627년 VOC의 타이오완 감독관에 새로이 임명된 피테르 노위츠(Pieter Nuyts)가 외교사절 자격으로 일본을 찾는다. VOC는 무역 이권을 레버리지로 활용하여 스에쓰구 세력을 누르고 쇼군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스에쓰구는 나름대로 복안이 있었다. 그는 이참에 타이완에서 VOC를 몰아내고 타이완을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고자 했다.
스에쓰구는 노위츠가 도착한 지 얼마 뒤 야효에가 타이완에서 데려온 원주민을 사절로 위장해 타이완인들이 통치권을 쇼군에게 헌납하러 왔다는 명목으로 쇼군 알현을 신청한다. 이는 쇼군을 알현해 타이완 도항(渡航) 주인장이 발급되지 않도록 요청코자 하는 노위츠의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스에쓰구의 승리였다. 타이완 원주민들은 쇼군을 알현하고 하사품까지 받았으나, 노위츠는 에도 체재 중 오만한 태도로 일본인들의 반감을 샀고, 쇼군의 눈을 피해 스에쓰구와 결탁하여 주인선 무역 이권에 개입한 막신(幕臣)들의 획책으로 쇼군을 알현하지도 못한 채 굴욕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VOC의 사신이 쇼군을 알현하지 못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빈손으로 귀환한 노이츠는 곧바로 보복에 나선다. 1628년 초여름 타이오완에 입항한 야효에 일행의 상륙을 금지하는 한편, 선박을 억류하고 적재된 무기의 압수를 명한다. 야효에는 수차례에 걸친 출항 요구가 거절되자, 더 이상 대화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 극단적 행동에 나선다. 야효에는 수하들과 함께 노이츠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상대의 방심을 틈타 노이츠와 통역을 인질로 잡고는 VOC 병력과 대치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진행된 협상 결과, 노이츠를 풀어주는 대신 상호 5명씩 인질을 교환해 선박에 승선시킨 후, 나가사키에 입항하면 인질을 석방키로 합의한다. 이때의 인질 사건을 일본에서는 ‘타이오완 사건’이라고 한다. 타이오완(Tayouan)은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타이난시 안핑의 항구를 부르던 명칭이다.
스에쓰구의 음모
1628년 인질을 태운 야효에의 주인선과 란선(蘭船)이 무사히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 타이오완 사건은 큰 탈 없이 종료되는 듯하였으나, 갑자기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야효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방어 차원에서 인질을 잡은 것이고 나가사키에 도착하면 인질을 풀어주기로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이들을 맞은 스에쓰구는 인질을 석방하기는커녕 다른 VOC 선원들까지 잡아 옥에 가두고 그들이 타고 온 배를 억류하는 한편, 히라도(平戶) 번주를 설득하여 히라도에 개설된 VOC 상관(商館)을 폐쇄해 버린다. 네덜란드 자유상인의 개인 무역은 허용하면서도 VOC 선박·인원의 히라도 활동을 금지하는 VOC 제재 조치였다.
사실 야효에의 선단에는 400명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뎃포(鐵砲·조총)가 적재되어 있었다. 기회를 보아 VOC를 공격하는 것이 당초 임무였으나, 그에 실패하고 인질을 잡아 돌아온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스에쓰구가 입항한 VOC 선박을 억류하고 선원을 구금한 것은 어쩌면 계획 변경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나가사키와 히라도의 상황을 보고 받은 바타비아가 대일(對日) 교역 단절의 위기를 맞아 직접 나서면서 타이오완 사건은 전면적인 외교문제로 비화한다. 총독 쿤은 일단 불상사의 책임을 물어 노위츠를 바타비아로 소환하는 한편, 인질 구출 및 무역 재개를 위해 일본에 특사를 파견한다. 쿤은 특사 빌렘 얀센(Willem Janssen)에게 최대한 일본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절대 도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한편, 일본이 타이완의 영유권(領有權)과 무역 독점권을 주장할 경우 총독에게 보고하겠다는 정도로 대응하고 귀환할 것을 지시한다. VOC와 스에쓰구 중 누가 쇼군을 자기편으로 만드느냐의 싸움이었다.
스에쓰구와 주인선 무역 이권에 개입한 막신들은 쇼군 주위에 인(人)의 장막을 쳤고, 이들의 방해로 얀센은 에도에 발을 들이지도 못한다. 기세가 오른 스에쓰구는 얀센에게 바타비아 총독 앞으로 보내는 문서 한 통을 건네면서 출국을 종용한다. 문서에는 타이오완 사태의 책임이 VOC에 있음을 추궁하는 한편, 제일란디아 요새를 일본에 할양(割讓)할 것을 요구하고, 그에 응할 경우 VOC의 일본 무역 독점 양허(讓許)를 고려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630년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바타비아에 귀환한 얀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총독 쿤의 사망 소식이었다.
스벡스, 노위츠 身柄 인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벡스에게 내준 교역허가장.
신임 총독인 약스 스벡스(Jacques Specx)는 1609년 처음 일본에 도착하여 히라도에 VOC 상관을 개설하고 초대 상관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에서 10년 넘게 체류한 일본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스벡스는 얀센이 지참한 서한의 내용이 쇼군의 정책 기조와 다른 것에 주목한다. 그는 쇼군이 다이묘(大名)나 상인의 무역 이권을 위해 외국과의 분쟁을 각오하고 해외 섬의 영유권 문제에 간여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막부의 통치력 강화 방침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스벡스는 자신이 경험한 일본 내 쇼군·막신·다이묘·상인 세력 간 역학(力學)관계에 비추어 그 의미를 간파하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외교전에 나선다.
1630년 초여름, 갈등의 당사자 스에쓰구가 돌연 에도로 압송되어 옥중(獄中)에서 변사(變死)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속설에 의하면 말년에 병환으로 정신이 이상해져 막부 중신들의 무역 이권 연루를 공공연히 떠들다가 입막음을 기도한 자들에 의해 제거된 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의 죽음의 진실이 무엇이건, 막부 중신들의 은밀한 무역 이권 속사정을 꿰뚫고 있는 당사자가 사망하자 에도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스벡스의 명으로 다시 일본을 찾은 얀센도 이번에는 문제없이 에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632년 9월, 스벡스는 노위츠의 신병(身柄)을 일본에 인도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1627년 이래 양측 간에 빚어진 갈등을 VOC가 아니라 노위츠 개인의 불찰과 비행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리하고, 그 책임을 물어 노위츠의 처분을 일본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쇼군이 이에 만족을 표하자, VOC 인질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히라도 VOC 상관 활동도 재개되었다. 나아가 막부는 1634년 모든 일본 선박의 타이완 도항(渡航)을 금지함으로써 타이완 무역을 둘러싼 VOC와의 갈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스벡스의 노련한 외교
이러한 결과는 VOC가 바라던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유일한 양보라고 할 수 있는 노위츠의 신병 인도도 그 속사정을 알고 보면 그다지 양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노위츠는 타이오완 감독관 재직 중 불법 착복과 원주민 학대 등으로 바타비아에 구금되어 본국 송환과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일본에 인도된 그는 가택 연금(軟禁) 형식으로 머물렀으나, VOC가 부담하는 체재비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4년 뒤인 1636년 석방된다. 일본과 모종의 합의가 있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대우였다. VOC는 바타비아로 돌아온 그를 파면하여 본국으로 귀국시켰으나, 노위츠에게 신분상의 불이익이 가해진 것도 없고, 노위츠가 일본 체류로 그다지 잃은 것도 없었다.
이러한 해결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벡스의 외교술이다.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헤이조가 사망함으로써 이 문제가 더 이상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사회 특유의 명예의 문제가 된 것을 꿰뚫어 보았다. 쇼군의 입장에서는 규슈의 상인이건 벽안(碧眼)의 외국인이건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충성하고 이익을 안겨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대신 쇼군도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누구의 체면도 손상시키지 않고 일방적인 승리나 패배로 보이지 않도록 명예로운 퇴로(graceful exit)를 만드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라면 관건이었다. 스벡스의 노위츠 인도 결정은 당사자들의 명예를 지키고 과실은 덮음으로써 쇼군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묘안이었다. 이로써 VOC의 일본에서의 무역 이권은 재보장되었고 타이완 영유권도 평화적으로 확보되었다. 잘 훈련된 외교관 한 명이 1000명의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04월 호
〈29〉 일본, 유럽 무역전쟁의 중심에 서다
⊙ 일본 무역 놓고 경쟁하던 영국과 네덜란드,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1619년 공조체제 구축
⊙ 영국·네덜란드가 나포한 일본 주인선에서 가톨릭 신부 발견한 히라야마호 사건 계기로 일본 내 기독교 탄압 가속화
⊙ 네덜란드 VOC, 인도네시아 암본섬에서 영국 상관원들과 일본인 용병들 처형
▲1623년 3월 암본섬의 네덜란드 세력은 경쟁관계이던 영국 상관원과 일본인 용병들을 학살했다.
1620년 8월, 한 척의 영국 배가 히라도(平戶)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동인도회사(EIC) 소속 무장상선 엘리자베스(Elizabeth)호였다. 히라도에는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1613년 EIC가 각각 상관(商館)을 두고 대(對)일본 교역에 나서고 있었다. 엘리자베스호는 큼지막한 정크선 한 척을 꼬리에 달고 있었다. 같은 날 EIC 선박 한 척과 VOC 선박 한 척이 연달아 히라도에 입항했다.
VOC 선박과 EIC 선박이 사이좋게 일본에 내항(來航)하는 것은 그때까지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VOC와 EIC는 1605년 VOC의 인도네시아 암본 진출 이래 동아시아 일대에서 향신료 무역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며 무력(武力)충돌도 마다하지 않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기 때문이다.
두 회사 간의 알력(軋轢) 다툼은 장소가 일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바로 한 해 전인 1619년에는 VOC 선박이 EIC 선박 두 척을 나포한 채 히라도에 입항하여 큰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서로 번(藩)과 막부를 상대로 호소전(呼訴戰)에 나서 일본인의 골치를 썩였다. 급기야 영국 선원 일부가 감금처인 VOC 상관을 탈출하여 EIC 상관으로 도피하자 VOC가 그 보복으로 EIC 상관을 습격하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했다. 수백 명이 무기를 소지한 채 난동을 벌여 히라도 주민에게 큰 불편과 혼란을 초래했다. 참다못한 영주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가 무력 진압을 위협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될 정도로 VOC와 EIC는 일촉즉발의 대치관계에 놓여 있었다.
영국-네덜란드 공조체제
대(對)스페인 독립전쟁에서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영(英)·란(蘭) 양국은 VOC와 EIC의 무역경쟁을 완화할 정치적 협약이 필요했다. 영국의 제임스1세와 네덜란드 연방의회(Staten-Generaal)는 두 회사를 종용하여 방위협정(Defence Treaty)을 체결토록 했다. 1619년 6월 런던에서 체결된 협정에 따라 VOC와 EIC는 동인도 지역에서 스페인·포르투갈 세력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한편, 획득한 향신료를 정해진 비율로 분배하는 등 진출지에서 경쟁을 자제하고 이권(利權)을 공유(共有)하는 공조(共助)체제를 구축했다.
히라도에 입항한 영·란 선박은 런던협정에 따라 1620년 5월 양측 소속 상선 각 5척인, 총 10척으로 구성되어 바타비아에서 출항한 연합선단의 분견대(分遣隊)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동중국 해역에서 경쟁국 상선을 나포하는 것이었다. 주된 타깃은 교전 상대국 스페인·포르투갈 상선이었고, 중국·일본 등 제3국 선박은 원칙적으로 나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마닐라를 왕래하는 중국 상선은 적국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예외적으로 나포를 허용하는 지침이 내려졌다.
엘리자베스호는 목적지 히라도로 향하는 도중 대만해협에서 마침 마닐라 항로를 운항하던 정크선을 발견하고 이를 나포한다. 중국 배인 줄 알았던 이 정크선은 사카이(堺) 출신 상인 히라야마 조친(平山常陳) 지휘하에 마닐라를 다녀오던 일본의 남방 주인선(朱印船)이었다.
히라야마선(船)은 쇼군의 주인장을 발급받은 공인 무역선으로 바타비아의 지침대로라면 나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호 승조원이 임검(臨檢)할 때 선박 화물칸에서 유럽인들이 발견되자 상황이 일변했다. EIC 측은 이 유럽인들을 가톨릭 선교사로 단정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금교령(禁敎令)에 따라 일본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다. EIC 측은 불법을 저지른 상선은 보호 대상이 아님을 들어 히라야마 주인선을 히라도로 예인(曳引)한 후, 나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기독교 탄압과 무역 규제의 시작
▲기독교 탄압을 감행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당시 일본의 대외무역은 주인선 무역을 경영하는 일본 국내 세력, 구(舊)유럽세인 포르투갈·스페인, 신(新)유럽세인 영·란의 3파전 양상이었다. 오랜 기득권을 구축해온 전자(前者)의 두 세력에 비해 후발주자인 영·란은 고전을 면치 못할 구도였다.
1610년대 이후 쇼군가의 관심은 정권 안정화에 집중됐다. 막부의 권한 강화와 다이묘(大名·영주) 세력 약체화가 동전의 양면으로 제도화 대상이 되었다. 대외무역과 기독교 포교 문제는 그러한 제도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1609년 쇼군 측근 중에 기독교도가 다수 잠복해 있음이 발각된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 사건’ 이래 기독교 포교는 막부에 대한 충성심을 내부로부터 해체하는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1612년 막부는 직할령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교령을 발포(發布)했다. 다이묘들에 대해서는 가이에키(改易·봉토를 박탈함), 감봉(減封·봉토를 축소함), 전봉(轉封·봉토를 변경함) 등의 처분으로 위협하며 기교(棄敎·기독교를 포기함)를 압박했다. 이듬해에는 전국으로 금교령을 확대했다. 1614년에는 선교사 추방령에 따라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비롯한 기리시탄(기독교 신자) 다이묘와 선교사들의 국외 추방을 강행했다.
이러한 기독교 탄압 노선은 교역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스페인의 경우 무역과 선교가 분리되기 어려운 2인3각 관계였기 때문이다. 선교사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스페인 선교사들의 밀입국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뒤를 이은 2대 쇼군 히데타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그에 비례해 커져갔다. 1616년 히데타다는 포르투갈·스페인 선박의 기항지를 나가사키, 영·란 선박의 기항지를 히라도로 한정하는 금령(禁令)을 내린다. 이른바 ‘바테렌금제봉서(伴天連禁制奉書)’ 발령이다.
그전까지는 오사카·에도를 비롯하여 주요 항구에 유럽인들의 출입을 제한적이나마 허용했으나, 이때 금령으로 허가된 기항지 이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됐다. 영내에 흑선(黑船)이 내항하면 모든 다이묘는 반드시 이를 막부에 보고하고, 해당 선박을 나가사키나 히라도로 회항(回航)시켜야 했다. 교역을 허용하되 외부 세력을 물리적으로 격리시키는 쇄국(鎖國)정책의 원형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막부에는 기독교 탄압을 구실로 다이묘들의 교역을 차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었다.
가톨릭 세력의 초조감
1617년 추방당한 것으로 보고된 선교사가 버젓이 일본 국내에 체류함을 알게 된 히데타다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선교사 색출과 처형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4명의 선교사가 오무라(大村) 가문의 영지에서 발각되어 참수(斬首)됐다. 에도 막부 성립 후 최초의 선교사 처형이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유럽 대륙에서 신교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위기 속 해외 포교에 역점을 둔 시기였다. 필리핀이 확보되고, 염원의 중국 선교도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동아시아 최대 포교 거점인 일본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만(南蠻)무역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이 신교국 영·란의 진출로 일본에 대한 레버리지로서의 의미가 점차 상실되자 가톨릭 세력은 초조함이 커져갔다.
1617년 선교사 처형 사건 이후에도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경쟁적으로 선교사가 잠입하자 막부의 불쾌감과 가톨릭 세력의 초조함이 부딪쳐 파열음을 내어 상황은 긴장을 넘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선교에서 자유로운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VOC 상관장 야크 스벡스와 EIC 상관장 리처드 콕스는 1610년대 이래 막부의 정책 기조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이해 구도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히라야마 사건에서 대일본 무역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다. 이들에 의해 히라야마 주인선 사건은 나포의 적법성 여부를 넘어 대일(對日)무역 구도에 큰 파급 효과를 불러오는 일대 사건으로 발전했다.
콕스와 스벡스의 책략
▲영국 선원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이 된 윌리엄 애덤스.
스벡스와 콕스는 히라야마선의 고가(高價) 화물을 몰수했다. 그에 대해 선주 측이 항의하자 그들은 에도로 사절단을 올려보내 막부에 사건의 진상과 화물 몰수의 정당성을 직보(直報)했다. 이들에게는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윌리엄 애덤스의 존재로 인해 막부 최고위층 접근이 용이한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히라야마 주인선의 사례를 들어 “마카오·마닐라를 왕래하는 주인선이 국법을 어기고 포르투갈·스페인과 내통해 몰래 기독교 포교를 돕고 있다. 일본 선박의 마닐라·마카오 도항(渡航)이 계속되는 한 선교사 잠입이 근절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막부의 권위와 안전을 해(害)할 것이다”라고 히데타다에게 진언(進言)한다. 몰수 화물의 소유권 확보보다 주인선의 마카오·마닐라 도항 저지가 이들의 본심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영·란으로서는 포르투갈·스페인 선박은 해상 전력의 우위를 통해 일본의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자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 주인선의 마카오-마닐라 교통만 봉쇄하면 (비유럽 세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대일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스벡스와 콕스가 일본 사정을 꿰뚫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책략이었다.
콕스와 스벡스가 움직이자 나가사키 다이칸(代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를 필두로 마카오·마닐라 주인선 무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내 무역세력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주인선 무역을 직접 경영하는 것 외에 포르투갈의 마카오·나가사키 무역에 ‘토긴(投銀)’으로 불리는 투자를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남만무역의 지속은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스에쓰구는 당사자인 히라야마 조친과 함께 에도로 직접 올라가 “영·란 측이 선교사라고 주장하는 유럽인들은 상인일 뿐이며, 이들이 히라야마선을 나포한 것은 무도한 해적 행위에 해당하므로 이들의 교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히라야마선에 탑승한 유럽인들이 과연 선교사인지를 증명하는 문제가 사안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元和의 大殉敎’
▲1622년 ‘겐나의 대순교’ 당시 55명의 기독교인이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했다.
EIC 측은 나포 후 선상 신문(訊問)에서 이들이 아우구스티노회의 페드로 데 주니카 신부와 도미니코회의 루이스 플로레스 신부임을 자백받은 상태였다. 그 증거로 아우구스티노회 마닐라교구장 명의의 서한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들이 상륙 후 자신들은 상인이라고 진술을 번복함에 따라 영·란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막부 직속 나가사키 부교(奉行) 하세가와 곤로쿠(長谷川權六)가 스에쓰구를 편들어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영·란 측이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압박하고 나섬으로써 영·란 측이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사실 주니카 신부는 일본에 머물다가 퇴거한 후 재입국을 시도하던 인물이었다. 하세가와는 예전에 나가사키에서 주니카 신부를 만난 적이 있고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세가와는 막부의 금령에 따라 나가사키 일대의 기독교도 색출과 탄압에 철저를 기한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신분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증거를 대라’고 다그친 이유는, 그 역시 스에쓰구와 결탁하여 나가사키 남만무역 이권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 입증을 둘러싸고 지루한 진흙탕 싸움이 계속되자 다급해진 콕스는 주니카·플로레스 신부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해 재차 자백을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1622년 8월 막부의 명에 의해 두 신부는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히라야마와 일본인 선원 12명도 기독교도 밀입국 협조의 죄를 물어 함께 참수되었다. 이로써 히라야마 주인선 사건은 영·란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막부는 이를 계기로 더욱 강력한 기독교 탄압에 나섰다. 주니카 신부 등이 처형된 지 불과 한 달 후에는 9월 예수회의 카를로 스피노라, 도미니코회의 요세라 데 산하시트, 프란시스코회의 리카르도 데 산타아 신부 등 종파를 불문한 선교사와 일본인 신도 55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른바 ‘겐나(元和)의 대순교(大殉敎)’ 사건이다. 1622년 한 해에만 전술한 사건을 포함해 120명이 넘는 선교사와 기독교도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듬해인 1623년에는 순교자가 500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기독교도임을 밝히고는 온전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가혹한 ‘금교(禁敎)의 시대’로 돌입했다.
포르투갈 세력의 퇴출
막부의 철저한 기독교 탄압 방침은 즉각 대외교역 통제로 이어졌다. 1623년 막부는 포르투갈인들의 출국을 명하는 한편, 재입국 시 기독교도 가택의 기거를 금했다. 일본인에 대해서는 마닐라 도항 주인장을 폐지하고, 기독교도의 해외 도항, 일본 선박의 포르투갈인 항해사 고용을 금지했다. 마닐라로부터 선교사 잠입이 끊이지 않는 데 충격을 받은 막부는 1624년 필리핀과 통교를 전면 금지했다. 포르투갈에는 모든 선박의 탑승자 명부를 제출토록 하고, 명부에 기재되지 않은 자는 상륙을 금지하는 등 기독교 세력과 일본인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격리정책 제도화를 가속화했다.
1633년에는 주인장 제도에도 손질을 가하여 주인장 외에 로주(老中) 3인이 연서(連署)한 도항면허장을 소지토록 하는 봉서선(奉書船) 제도가 시행됐다. 유력 상인이나 다이묘가 막부 고위층을 매수하여 주인장을 발급받는 기존 폐단을 방지하고 상호 감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인선의 마닐라 도항 금지에 이어 봉서선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1630년대 이후 일본 국내 세력에 의한 대외무역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포르투갈의 마카오·나가사키 무역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히라야마 주인선 사건을 계기로 대일무역의 승기를 잡은 영·란이었지만, 최후의 승자로 남은 것은 VOC였다. VOC와 EIC가 대일무역에 집착한 것은 일본이 여타 지역과 달리 원료공급지를 넘어 소비시장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시장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이 중국산 생사(生絲)였다. 마카오·마닐라라는 중국 교역 거점을 선점한 포르투갈·스페인과 달리 중국과의 교역이 제한된 VOC와 EIC는 일본과의 교역에서 수익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제무역·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한 암스테르담의 풍부한 자금을 배경으로 정부에 필적하는 자율권을 행사하는 VOC에 비해 EIC는 설립 초기부터 회사 운영에 자금 압박이 심했다. 당장 수익이 급한 런던 본부에서는 저조한 대일무역 실적을 이유로 히라도 상관을 철수하려는 분위기가 일찍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상관장 콕스가 가톨릭 신부에 대한 비인도적 고문을 마다하지 않으며 사활을 걸고 대일무역 주도권을 확보하려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암보이나 학살 사건
VOC와의 공조로 한숨 돌리는 듯한 것도 잠시, EIC는 1623년 결국 히라도 상관을 폐쇄했다. 같은 해 3월 암본섬의 VOC 감독관 헤르만 반 스페울트(Herman van Speult)가 EIC 상관장 가브리엘 타워슨(Gabriel Towerson)을 포함한 10인의 상관원과 9인의 일본인 용병을 내란음모 죄목으로 처형한 이른바 ‘암보이나 학살 사건’(Amboyna Massacre)이 발생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VOC 측은 EIC 상관원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발각되어 정당하게 이루어진 사법 처벌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VOC가 자신들을 터무니없는 혐의로 무고(誣告)한 후 가혹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이끌어내어 자행한 부당한 학살이라고 반박했다. 그 후 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험악한 외교·사법 공방전이 벌어졌고, 동인도 지역에서 VOC·EIC의 공조 여지도 사라졌다.
1619년 런던협정은, 동인도 현지 실정을 무시하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당초부터 두 회사 간 치열한 경쟁관계가 한 장의 문건으로 해소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타비아의 VOC 총독 쿤(Jan Pieterszoon Coen)은 런던협정 체결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EIC와의 공조체제에 부정적인 그는 ‘EIC를 하루속히 축출(逐出)해 VOC의 향신료 무역 독점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경론자였다. 암보이나 사건은 쿤이 기획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 그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직을 사임했다가 1627년 다시 총독직에 복귀했다.
암보이나 사건의 진상이 무엇이건, 규모·자금 면에서 열세던 EIC는 이후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일대에서 활동을 포기하고 인도 진출에 주력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전환했다. 1623년 12월 콕스가 바타비아로 소환되면서 EIC 상관이 폐쇄되자, VOC는 일본 무역 독점에 한발 더 다가섰다
에도 시대를 알아야 하는 이유
대일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유럽 열강들의 각축은 오늘날 무역전쟁 못지않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리마도자기 등 도자기를 수출하고, 그 과정에서 인상파(印象派)에 영향을 준 우키요에(浮世繪)가 알려지면서 만만치 않은 문화적 역량을 가진 나라로 인식됐다. 19세기 말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무사도(武士道)》는 서양인들에게 일본이 ‘기사도’ 못지않은 멋진 윤리를 가진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늦게 세계무대에 알려졌다. 일본처럼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도 못했다. 근래에 와서 경제발전과 ‘한류(韓流)’ 등에 힘입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지금까지 에도(江戶) 시대의 역사를 살펴본 것은, 이 시대는 한일(韓日) 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점점 더 벌어져 간 시대였기 때문이다. 메이지(明治)유신이나 조선의 망국(亡國)은 그 결과였다. 감정으로만 일본을 볼 일은 아니다. 일본과 가까이 지내든, 반일(反日)을 하든 극일(克日)을 하든, 우리 자신을 알고 일본을 아는 일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