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상목의 일본 物語/ <1>원폭 문제를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 - 〈10〉 시대를 앞선 지도의 걸작 이노즈(伊能圖)

상림은내고향 2022. 6. 19. 19:06

■일본 物語/  <1>원폭 문제를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 - 〈10〉 시대를 앞선 지도의 걸작 이노즈(伊能圖)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의 일본이야기

 신상목  월간조선  2016-10-31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 일본은 악어다

<1>원폭 문제를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기념관을 둘러보는 일본 초등학생들. 일본인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역사적’이라며 환영하고 있다. 사진=배진영

 

5 27일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 참석차 방일(訪日)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시(廣島市)를 방문하기로 했다. 미·일 양국 언론과 여론 일반은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역사적 방문(historic visit)’으로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지만 일본 내에서는 원폭(原爆) 투하의 비인도성 및 그에 대한 미국의 정식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핵무기 없는 세상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일 뿐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일부 미국 보수층 사이에는 굴욕적 ‘사과 외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일부 한국 언론은 “일본의 총리도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 사죄하는 진심 어린 ‘참회(懺悔) 외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며 금번 방문의 의의를 일본 비판론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식민지 피지배 경험이 있는 한국은 일본에 대해 원한(怨恨)이 있지만,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미국에 대해 통한(痛恨)이 있다. 바로 원폭투하 문제이다. 한국이 위안부 문제로 일본에 대해 ‘뚜껑이 열린다’면 일본은 원폭 문제로 미국에 대해 ‘속앓이’를 한다.


시모다 재판

195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被爆者)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위 ‘시모다(下田) 재판’이다.

 

원폭 피해자인 원고(原告)들은 “미국의 원폭투하가 국제법(육전규칙에 관한 헤이그협정-전쟁무기는 원칙적으로 비전투원, 비전투시설에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필요 최소한의 고통만 가해야 한다)을 위반한 불법행위로서 피해자들은 미국에 대하여 배상청구권이 있으나, 일본 정부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청구권을 포기함에 따라 피해자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는바,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게 배()상을 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국가를 상대로 한 소()를 제기하였다.


1.
미군의 원폭투하는 국제법 위반인가, 2. 위법이라면 피해자 개인이 미국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가, 3. 그러한 청구가 미국 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는가, 4. 청구권이 있다 하여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포기된 것인가, 5. 일본 정부가 그것을 포기하였다면 그것은 위법인가, 6. 포기한 것이 위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포기하였다면 국가는 손실보상이라도 하여야 하는 것인가 등이 재판부가 논파(論破)해야 할 쟁점 영역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재판소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단하되, 원고의 청구는 기각하였다. 재판부는 “국제법의 주체성은 국가에만 인정된다. 미국은 전시 군()의 행위에 대해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의 재판소는 미국 정부를 재판할 권한이 없으므로 원고의 청구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상실된 원고의 청구권은 존재한다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시(判示)했다. 재판부는 “피폭자에 대해 충분한 구제책이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인바, 이는 재판부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나 일본 정부의 정책 빈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원고의 청구권은 기각되었지만, 이 재판을 통해 원폭의 참상과 살아남은 피해자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사회적 관심과 주의가 환기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피폭자의 의료지원과 인도적 생활지원을 위한 일련의 국내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이 재판은 이후 성립된 국제 인도법(人道法) 및 ‘핵무기의 사용 또는 그 위협’의 국제법상 불법행위 규범을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일본, 원폭투하 직후엔 “인류문화에 반하는 범죄”

▲1945 8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후, 일본 정부는 인류문화에 반하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고 규탄했다.
 

재판부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국제법 위반으로 판단하였지만,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속내는 복잡하였다. 일본 정부가 대외적으로 표명한 입장은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1945
8월 원폭투하 직후 일본 외무성은 다음과 같은 외교적 항의서한을 미국에 발송하였다.


“교전자는 적을 타격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에 있어 무제한의 권리를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국제법의 확고한 원칙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하는 무기, 발사체, 물질을 도입해서는 안 된다. 이는 〈육전규칙에 관한 헤이그협약〉의 부속서에 명시되어 있다. (중략) 미국이 이번에 사용한 폭탄의 무차별성과 잔인성은 독가스나 동종 무기를 훨씬 능가하며, 이러한 무기의 사용은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금지된다. 미국은 국제법과 인도(人道)의 근본적 원칙을 무시하였으며 제국의 도시에 대해 무차별적 폭격을 가하였고 이는 수많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의 살상과 수많은 사원, 학교, 병원, 민간 거주지의 파괴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무차별성과 잔인성에 있어 기존의 어떤 무기도 월등히 능가하는 새로운 폭탄을 사용하였다. 그러한 무기의 사용은 인류문화에 반()하는 새로운 유형의 범죄이다.  


히로히토 천황도 항복담화에서 “적은 그 힘을 알 수 없는 새롭고 잔인한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싸움을 계속한다면 일본의 완전한 멸망에 봉착하게 될 것이며 이는 동시에 인류 문명의 종말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원폭이 ‘인류 문명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는 반인륜적 무기라고 주장하였다.


요시다 정부, “원폭투하, 위법행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시모다 재판 이후 180도 바뀌게 된다. 피폭 피해자로부터 국가배상의 청구를 받은 일본 정부는 피고의 입장에서 재판 당시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이 국제법을 위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더구나 핵무기 사용 금지에 관한 국제적 합의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음에 비추어 볼 때, 원폭투하를 섣불리 위법행위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중략) 국제법의 관점에서 전쟁은 근본적으로 적을 항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중세 이래 국제법에 따르면, 해당 시점에 채택된 관습법과 조약이 부과한 조건을 준수한다는 전제하에, 전투원은 전쟁의 특별한 목적 달성을 위해 적을 타격하기 위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

 

 일본의 이러한 입장 변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요시다(吉田) 총리를 비롯한 전후 수습 내각의 ‘어차피 진 전쟁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 일본의 정신’이라는 무사도(武士道)적 가치관, 둘째 전후 일본 복구 및 미·일 동맹체제 강화가 최우선의 당면과제인 만큼 미국과의 전쟁행위 관련 쟁송으로 미·일관계에 부담이 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한 체제적 필요성, 셋째 미국의 전쟁범죄 추궁을 위하여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국제규범 위반을 들먹일 경우 그러한 추궁이 고스란히 일본에 돌아올 수 있다는 쌍방행위자로서의 고려 등이 그것이다.

 

 일본의 강경 좌파들은 일본 정부의 ‘원폭 범죄 규정 회의론’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원폭투하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반인도적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원죄 때문에 미국도 일본도 그 참상과 피해에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분개한다. 그들은 나아가 반국가주의의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서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는 한편, 원폭투하의 동기를 제공한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수행 책임을 묻는 것을 가장 중요한 활동의 기둥으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반대편에 서 있는 일본 정부는 대미 관계에서 일본 정부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부담이 되지 않도록 원폭 문제에 대해 자중(自重)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당시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이에 따라 원폭 문제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정치성향이나 역사인식을 가르는 가장 두드러지는 척도의 하나가 되고 있다.


원폭 문제와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한국에서는 공감을 얻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원폭투하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원폭 문제에 대한 일본 내 피해 인식에 대해 가증스런 ‘피해자 코스프레’로 여기고 분개하는 한국인들에게는 공감의 여지가 적겠지만, 일본 정부와 다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상당수 일본인들은 전쟁 시기에 벌어진 참화를 원폭 문제에 적용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바라보고 해석한다.

 

 , “원폭과 같은 잔혹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전시에 벌어진 일을 평화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 스스로가 약하여 지고도 승자의 책임을 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법적으로 당시 존재하지 않은 법을 기준으로 소급해서 책임을 묻는 것은 국제법의 원칙에 맞지도 않는 것이다. 비참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수많은 희생자가 있는 아픈 역사이지만,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피해자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그리고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는 것으로써 작금의 아픈 역사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큰 틀에서 바라본 일본 주류(主流)의 전쟁 또는 역사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일본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저변에도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국제안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점 보수화하고 있는 일본 사회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원폭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 변화를 가져온 냉철한 현실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다. , “국익을 위해 사력을 다해 힘을 겨룬 후 그 승패에 승복하는가? 전쟁을 치를 정도로 적대하던 관계라 할지라도 미래를 위해 과거를 넘어서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가?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을 함부로 휘두르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은 과연 어떠한 나라인가? 반대로 한국은 어떠한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가? 광복 70년을 맞아도 여전히 얽혀 있는 한일관계의 꼬인 실타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그 원인과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物語 〈2〉 오바마의 일본식 사과

▲지난 5 27일 히로시마를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원폭 피해자인 모리 시게아키 씨를 따뜻하게 포옹, 우회적으로 사과했다. 사진=AP/뉴시스

 

2000년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다. 한국에 반감을 가진 보수 성향의 T군이 있었다. 반한(反韓) 성향의 일본인이 그렇듯 본인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데 한국인은 감정적이고 다혈질이라 믿는 친구였다. 한국에 1년간 체류하면서 구석구석을 누벼, 한국의 장단점을 나름대로 집요하게 파악한 친구였다.

 

당시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음식 붐 등 우호적 기운이 싹트는 반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민족주의적 캠페인이 먹혀들어 묘한 긴장이 감돌 때였다. 우익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오만주의 선언》이라는 만화책이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꽤 반향을 불러일으키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아시아국제관계론’ 수업시간에 결국 T군과 한판 붙게 됐다.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원인과 해결책을 주제로 토의하다 일본이 과거사를 사과할 필요가 있느냐의 문제로 번졌는데, 이 친구가 《오만주의 선언》에서나 나올 법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즉 “전쟁이란 것은 애초 선악(善惡)이 없으며, 승자가 패자를 단죄하여 악()이라 규정할 뿐, 선악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단하고 전쟁 수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일을 사과한다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방약무인(傍若無人)도 유분수라는 생각에 조목조목 그 주장의 논리적·윤리적 오류를 지적했지만, T군은 굽히기는커녕 더 강하게 “한국에 수차례 사과했지만 그때마다 사과 요구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경험했으니 한국에 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켜보던 일본인 학생들이 이 논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기에 갖는 울분과 처연함

웬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손 좀 봐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마디 던졌다. “미국도 원폭(原爆) 투하에 대해 일본에 사과할 필요가 없겠네요? T군의 눈빛에 강렬한 적의가 떠오르다가 이내 낭패의 기운이 감돌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표정의 변화를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T군의 입 주위가 씰룩거리더니 이윽고 힘없이 내뱉었다. “원폭 문제 얘기입니까?” 이후 T군은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원폭 문제는 일본인들에게 민감하고 아프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교차하고 아무리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원죄가 있다고는 하지만 14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꼭 그래야만 했나’ 하는 미국에 대한 원망을 지울 수 없는 기억의 상징이다. 좌우익 이념이 무의미한, 울분과 처연(悽然)함의 복합적인 심정이 있다.

 

다음날 A4 한 장 분량의 페이퍼를 써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역사인식의 문제는 처한 입장에 따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민족자결, 주권평등의 원칙이 지도적 이념이 된 현재의 국제관계 속에서 전쟁의 비인도성,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굳이 당시의 시제법(時際法)을 들먹이며 정당하고 합법적이었음을 강변하는 것이 미래를 향한 인식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인해 가장 혹독하게 인권이 침해당하고 비참한 삶을 강요당한 것은 일본인 자신들이다. 그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깊이 자각하고 굳은 결의를 해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 일본인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가. 그 과정에서 일본이 과거 피해를 입은 주변국에 대해 가해자의 입장에서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조금은 더 배려하고 양보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를 완화하고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일본이 감내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아닌가”라는 요지였다.

 

그 페이퍼를 돌린 후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일본인 학생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평소 T군이 자기중심적인 역사인식을 강변하는 것에 반감이 있었으나, 대놓고 뭐라 하기도 뭐한 분위기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나서서 그 친구 기를 꺾어주어서 통쾌했다는 것이었다.

 

서양 학생들은 일본이 좋아 일부러 유학 온 친구들이어서 그런지 이 논의에 개입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다만, 원폭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대다수의 서양 학생이 일본에 동정적이었다. 중국 저장성(浙江省)에서 온 Y군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부분에서는 내게 동조했지만 서양과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자기중심적 민족주의 성향은 T군보다 더 강렬했다.

 

루스 전 주일미국대사의 히로시마 위령제 참석

▲2010 8월 히로시마 위령제에 참석했던 존 루스 전 주일미국대사

 
5 27일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한국에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간단치 않다. 그저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아베 정권에 선물을 안기고 중국을 견제하는 정략적 제스처로 폄하하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미일 간의 해묵은 감정의 골이 메워졌고, 동맹은 더 견고해졌다. 한 편의 잘 연출된 드라마가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듯 두 나라 국민은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됐다. 역사의 아픔을 초극(超克)하여 미래를 향해 더 단단히 결합시킨 역사적 이벤트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라는 전략적 독해가 여기서 필요해진다.

 

오바마의 발걸음을 히로시마로 이끈 것은 누구 또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아베 정권의 외교적 승리라고 평한다. 아베 정권의 적극적 노력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하여, 2009~2013년 주일미국대사로 재임한 존 루스(John Roos) 전 대사는 방문 추진의 경위에 대해 신뢰성 높은 견해를 제시한다.

 

루스 전 대사는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는 취임 당시부터 히로시마 방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를 공개적으로 언명해 왔다”고 증언한다. 루스 전 대사는 2010년 현직 미국대사로는 최초로 매년 8 6일 열리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위령제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여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루스 전 대사는 “당시 미국대사의 원폭 위령제 참석이 민감하게 다뤄질 수 있음을 감안하여 워싱턴과 긴밀히 협의했는데 국무부나 백악관의 반대는커녕 전폭적인 지지(tremendous support)를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최종 재가권자가 오바마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위령제 참석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일본대사도 “오바마 정권 초기부터 미국 정부로부터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언질을 받아왔다”고 CNN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베가 아니라 오바마의 승리

오바마는 ‘핵무기 없는 세상’과 함께 미국의 도덕성이 논란을 빚은 국가와의 관계를 전향적으로 진전시키는 것을 최우선적 외교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특히 후자와 관련, 오바마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과거의 ‘포로(imprisoned)’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재임 기간 내내 미국의 부()의 유산(negative legacy)을 치유하는 데 역점을 기울였다.

 

‘과거의 응어리를 넘은 여정(Trips beyond old grudges)’으로 표현되는 쿠바·미얀마·베트남 방문 외교는 미국의 국익과 함께 오바마의 신념과 소신이 담긴 업적이다. 오바마의 외교정책과 개인적 신념에 비춰볼 때, 히로시마가 ‘과거의 응어리를 넘은 여정’의 종착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수순이다. 일본 외교의 승리가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의 소신과 용기의 승리인 것이다.

 

두 번째로, 오바마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간 대사건 대통령이건 미국 고위 인사의 히로시마 방문은 ‘사과(Apology)’라는 민감한 문제가 걸림돌이 돼 왔다. 오바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사과 문제로 접근하면 정치, 외교적 부담이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이 된다. 좋은 의도가 논란만 낳을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이번 방문의 성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루스의 2010년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위령제 참가였다. 루스 전 대사는 같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위령제에 참석한 것과 관련) 여태까지 단 한 사람도 나의 방문에 시비를 걸거나 사과를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가는 것(just going)’ 그 자체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위령제 참가 과정에서 개인이건 일본 정부건 누구도 나의 방문을 사과로 여기지 않았고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일관계를 위해 그저 미국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는 것(presence), 말 한마디(A word), 그리고 상징성(symbolism)이었다.


“사과를 요구할 수만 있다면…”

루스는 특히 위령제 당시 피폭 생존자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자신을 향해 큰 박수로 환호(Applaud)하는 것을 보고 확신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위령제 방문과 관련된 경험이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가져올 여러 가지 반향(implications)을 검토하는 토대가 되었고, 자신이 확신을 갖고 이제는 미국의 정상이 히로시마를 방문할 때(right time to go)라고 오바마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발표하며 사죄 성격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일본 정부는 국내적 비판 여론 우려에도 불구하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그러한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강한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라는 미국의 입장을 그대로 인용(認容)하고 어떠한 이의도 조건도 제기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방문 직전인 5 22일 교도통신이 원폭 투하로 직접 피해를 입은 피폭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에 사죄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8.3%가 “원치 않는다”고 답했으며, 방문 직후 실시한 일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98%가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응답자의 74.7%는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투하에 대해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미국에 대한 사과 요구의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한 피폭자는 자신은 끔찍한 무기를 사용한 미국을 용서할 수 없으며, 분명히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언론에 말했고, 평생 후유증을 걱정하며 사는 피폭자 3세는 “사과를 요구할 수만 있으면 요구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다수의 일본인은 원치 않는 사과를 강요해서 제자리에 머무는 것보다 미래로 향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오바마를 환영했다. 오바마가 ‘과거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내린 결단에 일본인들도 ‘사과는 사과하는 쪽의 몫이며 강요받아 하는 사과는 의미가 없다’는 일본적 사죄관(謝罪觀)으로 화답한 것이다.


오바마의 일본식 사과

많은 한국인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인이 무슨 권리로 미국에 사과를 요구하는가? 미국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을 보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우리 입장이고 보편적인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인식이 반드시 자가당착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사과해야 하는가 아닌가’는 방문이 끝나고 보니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미국에 사과를 바라는 것은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청난 파괴력의 비인도적 무기를 사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것을 인정하고 그 희생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해 달라’는 의미이다. 히로시마 방문이 사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누차에 걸쳐 강조한 오바마는 매우 완곡한 표현이지만, ‘과학이 만들어낸 끔찍한 파괴력에 상응하는 윤리의 필요성, 원폭 투하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에 대한 애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인도(人道)의 정신에 바탕한 엄중한 책임’을 역설했다.

 

사과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있건 없건 일본인들이 바랐던 반성과 애도와 위로의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사과는 사과하는 쪽의 몫’이라는 일본인의 사죄관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오바마는 ‘사과라는 말이 들어가야만 사과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화법으로 호응한 것이다. 오바마는 사과하지 않았지만 사과했고 일본인들은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사과받았다.


오바마의 포옹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한국에 던지는 의미의 독해는, 왜 오바마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탑에 참배하도록 하지 못했는가를 외교 당국에 따지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 전몰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은 장면이 유럽의 역사 화해를 이끌어내었다면,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동아시아에서 역사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모델이자 모멘텀(momentum)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일 지도자와 국민이 영감을 얻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가해국 정치지도자의 소신과 행동이 역동성(dynamics)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시 일본인들은 한 장의 사진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오바마가 원폭 생존자인 모리 시게아키 씨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이다. 어떤 수사(修辭)와 웅변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진한 인간애가 거기 담겨 있다. 같은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 사이에 역사의 화해라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3- 日 아베 총리의 우경화 견제하는 아키히토 천황

 아키히토(화환에서 제일 앞줄 왼쪽) 천황 부부는 2015 4 9일 팔라우 남쪽 페릴류섬의 미군 전사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사진=뉴시스/AP

 

아키히토(明仁) 일본 천황은 일본 평화주의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다. 그는 세 살 때 중일전쟁, 여덟 살 때 태평양전쟁을 경험하고,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던 12세 때부터 방공호 생활을 하다가 전쟁 막바지에 옮겨간 닛코(日光)에서 종전을 맞았다. 패전 이듬해 새해 첫날 13세의 소년 황태자가 ‘가키하지메(書始め: 새해 첫날 그해의 다짐을 적은 붓글씨)’로 적은 문구는 ‘평화국가건설(平和國家建設)’이었다.

 

 1989 1월 쇼와(昭和) 천황에 이어 일본의 125대 천황에 즉위하면서 발표한 담화에서는 “일본국 헌법을 지키고(守り) 그에 따라 책무를 다할 것”임을 제일성(第一聲)으로 천명한다. 일본어의 守る(마모루)는 ‘준수하다(Obey)’와 ‘보호하다(Protect)’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거세지자 천황의 발언도 수위를 높여간다. 2009 11월 즉위 20주년을 맞아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형언할 수 없는 고생과 희생의 바탕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안보법제 개편과 맞물려 헌법 개정 논의가 고개를 쳐들던 2013 12월에는 팔순 생일을 맞아 “전후(戰後)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면서 평화헌법에 대한 강한 신념을 재차 피력했다.

 

 천황은 총리가 바뀌면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황궁에 불러 환영 만찬을 여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천황의 아베 푸대접은 아베의 정책 노선에 대한 반대 의사와 사적인 영역에서 아베 총리와 교류하고 싶지 않다는 반감을 피력한 것으로 세간에서는 해석한다.

 

총리와 대립각 세운 천황

2013 8 15일 도쿄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베 일본 총리가 아키히토 천황 부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AP

 

2015년 정월 각료와의 신년 인사회에서 천황은 아베에게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덕담을 건네었다. 헌법 개정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아베 총리에게 던지는 훈계였다.

 

아키히토 천황의 경우 성장기에 특이한 경험을 한다. 13~17세까지의 청소년기에 미국인 가정교사로부터 미국식 교육을 받은 것인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내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의 평화주의 신념을 이야기할 때 이 시기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아키히토 천황의 가정교사였던 엘리자베스 바이닝(Elizabeth Vining) 부인은 필라델피아 출신의 아동문학가다. 아이가 없이 남편과 사별한 후 부인은 황태자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는 황실의 요청을 받고 1946년 도일(渡日)한다. 바이닝 부인은 황태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오 가여운 아이(Oh poor little boy)”로 표현한다. 당시 황태자는 황실전범(典範)에 따라 세 살 때부터 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동궁(東宮)에서 별도로 기거하였는데 일주일에 한 번 식사를 할 때가 유일하게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미국인 가정교사와 황태자의 만남은 처음엔 서먹했으나 곧 둘은 사제(師弟) 간을 넘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관 속에서 나고 자라 어린이의 자아 발달을 위한 책을 저술하던 이 미국인에게는 황태자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다양한 세상과 삶’이 있었다.


‘지미’라 불린 황태자

 바이닝 부인은 그룹 영어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궁내로 네 명의 또래 외국인 소년들을 불렀다. 황태자는 외국의 소년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테니스를 함께 치고 때로는 그들의 가족을 궁으로 초청해 이국의 삶의 방식을 체험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바이닝 부인은 황태자가 다니던 학습원 고등부 영어 수업에도 출강했는데 수업 첫날 학생 모두에게 영어 닉네임을 지어주면서 황태자를 ‘지미(Jimmy)’라고 불렀다. 부인이 “이 수업시간에는 당신은 ‘황태자’가 아니라 ‘지미’예요”라고 하자, 황태자는 “아니다. 나는 황태자다!(No, Im prince!)”라고 뾰로통하게 답했다고 한다.

 

부인이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 친밀하게 부를 수 있어야 해요. 당신을 황태자로 부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하기가 어렵지 않겠어요?”라고 달랬더니 황태자가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바이닝 부인은 수업시간만큼이라도 황태자가 신분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또래들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부인은 처음 황태자와 만났을 때 무슨 질문을 해도 주위의 시종들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하고 확인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Think for yourself)’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일본의 천황은 ‘실수’를 하면 안 되는 존재다.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의지하는 심리상태로 이어진다. 바이닝 부인은 이러한 의타본연(依他本然)의 심리에 빠지게 되는 환경을 안타까워하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체험하도록 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즉위 후 바이닝 부인과의 추억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부인과 가루이자와(輕井澤)의 별장에서 머문 기억을 떠올렸다고 한다. 부인의 요청으로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3일 동안 별장에서 부인과 지냈는데 그때 처음으로 스스로 목욕물을 받았다. 천황이 혼자 목욕 준비를 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퀘이커교의 평화주의를 닮은 평화헌법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에게 미친 영향은 미국적 사고방식을 접할 기회가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부인이 퀘이커교도였기 때문이다. 퀘이커교는 평화(Peace), 평등(Equality), 소박(검소)(Simplicity), 진실(Truth and Integrity)을 주요 신조로 삼는 기독교의 분파다. ‘내면의 빛’과 ‘내면의 소리’를 통해 모두의 안에 내재한 신성(神聖)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고 체험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무엇보다 스스로를 ‘친우(Friends)’로 부르고 어떠한 폭력과 무력에도 반대하는 평화주의에 대한 신념이 매우 강하다.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안에 신성(神性)이 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전쟁에 전투병으로 참가하는 것에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장려한다.

 

바이닝 부인이 의식적으로 퀘이커교의 교리를 황태자에게 전파하려 하지는 않았겠지만 독실한 퀘이커교도로서 그의 신념이 황태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특히 바이닝 부인이 일본에 온 1946년은 일본의 나아갈 방향과 새 헌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다. 퀘이커교도로서 평화주의의 신념이 강한 바이닝 부인은 전쟁의 금지와 전력(戰力) 보유 포기를 선언한 일본의 평화헌법을 그가 꿈꿔온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진보이자 일본의 자랑으로 여겼다.

 

자연스럽게 변화 실천해 온 아키히토 천황

퀘이커교도인 바이닝(오른쪽)은 아키히토(왼쪽)에게 평화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바이닝 부인의 평화주의 신념과 평화헌법에 대한 애정이 아키히토 천황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천황이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없지만 성인이 된 아키히토는 여타 황족과 보수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황가 최초로 평민인 미치코(美智子) 황후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2 1녀의 자녀들은 천황 부부의 의지에 따라 천황 부부와 같이 생활하며 부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2 1녀 모두 평민과 결혼해 보통의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천황가가 평민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이 새로운 전통이 됐다. 이러한 아키히토 천황의 삶의 궤적에 비추어볼 때 평화헌법에 대한 바이닝 부인의 신념과 애정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바이닝 부인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의 결혼식에 귀빈으로 초대됐다.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부인이 고령으로 요양원에 입원했을 당시 매년 그의 생일날, 주미 일본대사관의 의전차량이 찾아와 카드가 꽂힌 꽃바구니를 전달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한국인은 ‘(일본)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 과거 천황의 책임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한일 간 역사 화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천황에 대해 잠시 감정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사실관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재 아키히토 천황이 일본 내에서 누리는 존경과 인기는 과거 인위적으로 조작된 반신적(半神的) 존재로서의 맹목적 숭배와는 맥이 다르다. 히로히토(裕仁) 전 천황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전범(戰犯)으로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제법 있다. 아키히토 천황은 최소한 전쟁의 책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다. 극렬 좌파도 천황제를 비판할지언정 아키히토 개인을 비판하진 않는다.

 

모두에서 언급한 아키히토 천황의 2013년 팔순 생일 기념 담화(“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는 일견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의 우파 역사수정주의는 현행 헌법이 점령 시절에 미국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져 일본의 고유한 가치를 담고 있지 못하므로 개정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아키히토 천황의 담화에는 이러한 역사수정주의를 부정하고 아베 총리의 개헌 논의 세몰이에 찬물을 끼얹는 엄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이판 한국인 위령비 참배

 아키히토 천황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각은 어떠한가? 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2005 6월 아키히토 천황 부부는 전후 최초로 사이판을 방문하여 한국인 위령탑에 참배했다. 당초 예정에 없던 깜짝 방문이라고 언론은 보도했으나 만약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공표하지 않았을 뿐, 천황 자신의 희망에 따라 계획된 참배였다. 당시 참배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 논조는 이러했다.

 

“전범 재판을 부정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우익 인사들의 망언이 부쩍 늘어난 현실과 맞물려 일왕의 사이판 방문이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다시 자극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M방송)

 

“침략전쟁에 대한 진솔한 반성 없는 천황의 이번 사이판 방문을 두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국제사회에 오히려 전쟁 피해국인 것처럼 보이려는 속셈도 있지 않나 하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Y뉴스)

 

아키히토 천황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 비추어볼 때, 사정을 아는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논조다. 누구보다 평화국가 일본을 지키려 하는 인물이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담아 한국인 위령비에 참배를 했는데 우리 언론은 ‘군국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전쟁 피해국처럼 보이려는 속셈’이고 ‘주변국의 존경을 받기 위한 왕다운 처신이 아쉽다’고 논평한다. 이 이상한 괴리가 한일간의 심리적 거리다.

 

과거로의 순례여행

지난 2008 4 21일 일본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일본 황거(皇居)를 방문, 아키히토 천황 부부와 만났다.

 

일본의 천황은 모든 세속적 권능에서 배제돼 있고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발언과 행동도 삼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다. 누구보다 헌법 수호 의지가 강한 천황이지만, 역사와 평화에 대한 본인의 신념은 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밝혀왔다. 우파 정치인들의 집요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적이 없다.

 

 아키히토 천황은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완전한 일본의 과오이며, 그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자신의 천황으로서의 사명이라는 신념하에 1989년 즉위 이후 과거로의 ‘순례여행’을 시작했다.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것을 시초로,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했고 2005년에는 사이판, 2006년에는 싱가포르, 태국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하와이,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팔라우 방문은 지병과 고령을 이유로 주위가 만류했으나,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주어진 사명을 다하겠다는 천황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방문지에서 천황 부부는 “일본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라는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와 함께 반드시 상대국의 위령비도 참배한다.

 

 아키히토 천황을 군국주의의 향수를 자극하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의식이 없는 인물로 그리는 언론은 한국밖에 없다. 심지어 중국 언론도 아키히토 천황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천황을 한국의 친구로 만들어야

 아키히토 천황의 한국 방문은 전후(戰後)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천황 자신은 한국을 방문할 의향이 있으며 필요하면 직접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하나, 양국 지도자들은 천황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정략과 이해관계에 따라 천황을 견제하거나 이용하려 할 뿐 한일 간의 역사 화해를 위한 천황의 염원과 역할에 진지한 고민이 없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야말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우경화를 견제하고 한일 간 역사 화해의 새 장을 열 수 있는 평화의 전령사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정확하지 못한 사실관계와 감정에 휘말려 우리의 친구를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4〉일본 근대화를 견인한 ‘신()의 한 수’, 참근교대(參勤交代)

▲도쿠가와 막부 시절 에도에는 상경한 다이묘들의 저택을 비롯해 수많은 건물이 들어섰다.

 

도쿄(東京)에서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을 가기 위해 “강코쿠다이시칸 오네가이시마스(한국대사관 부탁합니다)”라고 행선지를 말하면 간혹 모르는 택시기사가 있다. 그럴 때는 “센다이자카(仙台坂)로 가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센다이자카는 대사관 정문 앞을 지나는 호젓한 왕복 2차선 도로의 이름이다.


 
대사관에 처음 부임했을 때 왜 도쿄에 센다이라는 지명이 있는지 궁금했다. 알아보니, 도로 남단에 과거 에도(江戶)시대에 센다이번()의 영주인 다테(伊達) 가문의 저택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도쿄에는 에도시대 다이묘(大名) 저택 소재지에서 유래한 지명이 꽤 남아 있다. 일례로 고급 패션 거리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아오야마(靑山)는 전국(戰國)시대 전략 요충인 기후현 구조(郡上)시 소재 ‘구조하치만조(郡上八幡城)’의 마지막 성주(城主)인 아오야마 가문의 거처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도시대 모든 다이묘는 에도에 거처가 있었다. 참근교대(參勤交代)제에 의해 에도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참근교대란 1년을 단위로 각 번()의 번주를 정기적으로 에도에 출사(出仕)시켜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제도이다. ‘참근’이란 에도에 상경(上京)하여 머무는 것, ‘교대’는 영지(領地)로 하향(下鄕)하는 것을 의미한다.

 

1년을 에도에서 지내고 이듬해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인데 말이 쉽지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할 때 1년마다 수백 리에서 수천 리를 이동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유사한 제도는 예전부터 존재했으나, 1635년 에도막부의 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로 법제화하여 시행했다.

 

고려에도 기인(其人)제도라는 유사한 제도가 있어 일견 특별해 보일 것도 없는 정권 안정화 정책이지만, 일본에서는 참근교대제를 일본 근대화 성공의 원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에도시대 일본

19세기 말 한국과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반면, 일본은 성공한 이유는 어디 있을까? 일본의 국수주의적 역사관은 일본이 이미 근대화 이전부터 서구와 맞먹는 수준의 자체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봉건사회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도시화와 화폐경제가 진전된 사회였으나 상업과 일부 수공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 경제구조의 한계가 명확했다.

 

체제의 지배이념으로서도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고착화하는 유학(儒學)이 중심이었고 난학(蘭學) 등 서구에 대한 탐구욕도 기성 질서와 양립하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용인됐다. 상인의 덕목 등 직업적 소양이 일부 강조되기는 했으나 서구적 자본주의와 산업화 속의 직능주의(職能主義) 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즉 서구와의 조우가 없었다면 일본이 근대화(근세 유럽을 중심으로 사유재산의 보장과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를 기반으로 발생한 경제사회 체제의 전환)를 이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선포하고 유신주도 세력이 국가 체제의 일신을 위해 ‘부국강병(富國强兵)’ ‘식산흥업(殖産興業)’의 정책을 추진하였을 때, 일본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소화하고 약진했다. 반면 갑오경장(甲午更張)과 양무(洋務)운동으로 대변되는 조선과 청나라의 근대화 시도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근세’라는 역사적 시공(時空)을 설정하고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에 전근대와 근대를 잇는 경제사회적 ‘풍경(landscape)’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용이하게 한 경제, 사회, 문화 제반 측면에서의 근대화 순응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찾은 일종의 비()제도권, B급 해답이 참근교대제이다. 일본의 근대화 우등생 비결은 참근교대제로 근대화를 예습한 데 있다는 것이다.

 

에도의 막번 체제

참근교대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도시대의 통치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에도막부의 통치는 쇼군과 다이묘 간의 주종(主從)관계를 기초로 한다. 다이묘는 쇼군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그 토지와 부속된 인민에 대한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망라하는 통치권을 행사한다. 쇼군은 이러한 다이묘들로부터 충성과 군역(軍役), 그리고 막부가 시행하는 공공사업의 분담 의무(이를 ‘천하보청(天下普請)’이라 한다)를 부과하고 필요시 다이묘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함으로써 일본 전역을 통치한다. 이러한 지방분권적 요소와 중앙집권적 요소가 혼재하는 이중구조의 통치 체제를 막번(幕藩) 체제라 한다.

 

막번 체제의 특징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중앙의 막부가 기본적으로 각 번에 대해 조세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번주는 관할 지역에서 징수한 세금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것이 각 다이묘들이 누리는 자치권의 핵심이었다. 중앙의 권위가 밑바닥으로 추락한 전국시대에 형성된 기득권의 형태로 인정되기는 하였으나, 감시의 눈에 한계가 있는 원격지에서 독립된 재정권을 행사하며 부()를 축적하는 다이묘는 쇼군에게는 잠재적 위협이었다.

 

이러한 다이묘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에도의 쇼군이 내민 회심의 카드가 참근교대이다. 참근교대로 인해 전국의 모든 다이묘는 원칙적으로 처자를 에도에 남겨둔 채 1년을 단위로 에도와 번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다. 참근교대에 저항하면 바로 다이묘의 지위가 박탈(이를 ‘お家取り潰し-오이에토리쓰부시’라 한다)된다.

 

본래 정치적 성질의 다이묘 견제책이었고, 따라서 에도막부의 250년 안정적 통치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참근교대가 어떻게 일본 근대화의 전초 단계로서 사회경제적 ‘풍경’을 바꿔놓았다는 것일까?

 

폭포수와 같은 낙수효과를 낳은 공공정책

참근교대 행렬을 그린 에도시대의 그림. 다이묘의 편도 여행 경비로만 오늘날 화폐 가치로 3~4억 엔의 비용이 들었다.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리에서 수천 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한다. 현대 화폐로 환산할 경우 수행원 1인당 하루 경비가 대략 6000엔 정도로 추산되며 각 다이묘당 평균 3~4억 엔 정도의 경비가 편도 이동에 소요되었다. 이러한 다이묘가 전국에 270여 가문이 산재해 있었으니 지금 돈으로 매년 수조 원이 길거리에 뿌려진 셈이다. 여기에 다이묘와 가족, 수행원들의 에도 체재비가 더해지면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다이묘 세수의 절반을 넘어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1720년의 기록을 보면, 3대 번 중의 하나인 사쓰마번(薩摩藩)은 총 588인의 참근단이 1644km 73일에 걸쳐 이동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68000만 엔, 에도 체재비 등을 포함하면 총 21억 엔의 비용이 당해연도의 참근교대에 소요됐다. 이 외에도 쇼군에게 바치는 헌상금, 막부의 고위관료인 로주(老中) 등에 대한 선물비용 등으로 수억 엔이 추가로 지출됐다.

 

경제적으로 볼 때, 다이묘의 지출은 누군가의 수입을 의미한다.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교통, 숙박의 요지와 엄청난 소비시장이 형성된 에도, 오사카 등의 대도시의 상인과 노동자였다.

 

에도로 출입하는 교통의 요지에는 다이묘 일행의 숙박을 위한 여관 등의 시설을 갖춘 슈쿠바마치(宿場町)가 조성되고, 물자 수송을 위한 물류업자 등 각종 주변 산업이 태동했다.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에도막부가 시행하는 공공역무(公共役務)로서 고카이도(五街道)로 불리는 간선도로가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에도성()을 비롯한 각종 기간시설의 건설에 동원되는 자재의 운송을 위하여 해로와 수로를 활용한 기간해운망이 조성됐다. 18세기 초엽에 미곡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집산지인 오사카로부터 에도를 연결하는 복수의 민영 정기항로가 개설됐다. 18세기 말엽에는 에도-홋카이도(北海道), 에도-오사카, 오사카-규슈(九州)/시코쿠(四國)를 연결하는 전국적 정기 상업해운망이 구축됐다. 해운망의 발달은 미곡, , 간장, 각종 저장식품을 비롯한 지역 특산물이 오사카와 에도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데 기여했고 이러한 유통망의 발달은 다시 지역경제를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는 선()순환의 경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이묘라는 재향(在鄕) 지배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증가가 상인 및 도시노동자 계층의 소득으로 흡수되는 현상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의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켜 소비·지출 증가를 유도하는 논리인 것에 반해 참근교대는 부유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확대를 통해 부의 환류 및 경제 활성화를 촉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이 돌고 도시가 발달하다

참근교대는 교량·도로 등 인프라 확충으로 이어졌다. 도쿄 니혼바시 인근을 그린 그림.

 

장거리 이동과 원거리 유통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이 화폐경제이다. 지역경제에서는 역내 물물교환 원리에 의해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화폐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원거리 이동 시 기존에 화폐 역할을 한 미곡은 지불수단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다이묘들은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언제고 필요할 때 지출을 할 수 있도록 미곡을 팔아 화폐를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화폐 수요의 증대로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전국적인 거래의 편의성이 크게 제고되어 각종 상업경제 활동이 더욱 활성화됐다. 나아가 화폐를 이용한 비즈니스, 즉 금융업이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일본 자생적으로 태동하고 발전한다. 영주들이 가을 수확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곡을 담보로 하여 미곡업자에게 현금을 대출받는 대부업을 시작으로, 원격지 간 금융 거래를 위한 일종의 신용 예금 인출 서비스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가 차례차례 등장하고 확산됐다.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각 다이묘와 최고 엘리트 집단이 에도라는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 등 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이키()’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활발한 상업 활동이 전개된다.

 

참근교대로 형성된 에도 권역의 대중 소비시장은 도시 기능에 필요한 엄청난 인구의 에도 유입을 유발했고 전국적으로 조달된 각종 물산이 유통되고 대중 소비용 서비스가 제공, 에도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왕성한 상업 활동과 도시기반 시설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신분제도의 붕괴

참근교대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경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지목할 수 있는 것은 신분제도에의 영향이다. 기존의 지배층인 무사 계급의 지위가 흔들리고 초닌(町人)이라 불리는 상인 계급이 사회의 실세로 등장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어 다이묘 재정에 큰 압박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지출은 곧 상인 계급의 부의 축적으로 이어져 신분제도를 흔드는 요인이 된다. 많은 다이묘가 참근교대 비용 마련을 위해 오사카 등지의 상인들에게 쌀을 담보로 부채를 지며 화폐를 융통할 수밖에 없었는데 워낙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다 보니 부채가 변제 불가능 수준으로 늘어났고 사정이 어려운 다이묘들은 영지의 이권을 상인들에게 제공하고 정경유착을 통해 근근이 통치권을 유지하는 형편에 처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의무적 경비는 각 다이묘 재정의 경직화와 만성적 적자 체질을 초래하였고, 다이묘가 재정압박에 힘들어하는 만큼 에도에서의 소비는 확대되었고 화폐는 상인층에 흡수되었다.

 

대상인들은 축적한 부를 가일층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에 투자하여 정부를 뛰어넘는 자체적인 인력과 조직을 갖춘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권위와 전통에 의지해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던 막부의 지배층과 달리 이들은 명분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적인 사고방식과 실행력을 갖춘 변혁의 전위대로서, 훗날 근대화의 파도가 밀려왔을 때 일본이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의 토대가 된다.


‘일본’이라는 의식이 형성되다

마지막으로, 참근교대는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일본(全日本) 네트워크의 구축을 가능케 하였다. 에도가 일종의 네트워크 허브로 기능하면서 전국 단위의 지식, 정보 환류(還流) 시스템이 구축된 것인데, 이는 현대 인터넷의 등장에 버금가는,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소프트웨어의 변화에 해당하는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에도에 집중된 인원, 물자, 정보가 혼합, 재가공되어 지방으로 환류되고 지방의 독자성과 결합한 고유의 정보로 진화하여 다시 에도로 유입되는 피드백이 활발해지면서 에도시대 일본은 이미 전근대를 벗어나는 수준의 자본과 시장 원리의 작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국을 묶어내는 네트워크의 구축으로 아울러 자극받은 것은 국가통합 의식의 형성이다. 기존에는 번에 기반한 지역국가 의식이 강했으나 참근교대를 통해 ‘지역성’에서 탈피하여 ‘전국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회화문화가 일본 전역에 퍼져 유행하였는데, 이는 에도에서 유행한 우키요에가 에도에 모인 지방 엘리트들에 의해 빠르고 광범위하게 지방으로 이식되고 전파됨으로써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본적’인 것을 동질성으로 공유하는 중앙-지방 연대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동질감은 근대 국민국가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식과 통합의식의 맹아가 되었고, 이는 메이지유신 직후 폐번치현(廢藩置縣) 등의 국가개조 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토대가 되었다.

 

참근교대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그러한 효과를 전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부 정부는 애당초 더 많은 조세를 징수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막부가 눈앞의 세금을 위해 시장에 방임적 태도를 취한 것이 일본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참근교대로 인한 지출·소비는 필연적으로 자본과 시장의 확대를 지향하는데, 만약 막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였다면 일본의 모습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5- ‘된장(미소)’으로 본 근대 일본의 정치경제학

⊙ 전국戰國시대 병사들의 전투식량으로 발달…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두 콩 재배와 미소 제조가 활발했던 지역 출신
⊙ 센다이미소, 에도시대에 품질과 신뢰로 시장 석권
⊙ ‘미소의 정치경제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쟁과 자율성’

▲도쿠가와 막부 시절 에도에 있던 센다이번저. 번저에 머물던 센다이 사람들이 자기 고향의 미소를 에도에 퍼뜨렸다.

 
일본에서 미소(·일본 된장)가 제조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과 한반도를 경유해 누룩 사용법이 전래된 8세기 나라(奈良)시대부터다. 이후 미소는 가마쿠라(鎌倉)와 무로마치(室町)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제법과 물량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16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다.

 

전쟁이 일상화된 시대를 맞아 다이묘(大名)들은 상시 전투태세와 원정(遠征)에 대비한 병량(兵糧) 정비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주식인 쌀은 생쌀을 휴대하다가 후에는 생쌀을 쪄서 말린 ‘호시이이(干し飯)’가 개발되어 보급되었다. 수개월 이상 상온 보존이 가능하고 끓는 물만 부으면 바로 밥처럼 먹을 수 있는 즉석밥이었다. 밥만 먹고 싸울 수는 없다. 나트륨 등 필수 미네랄과 ‘맛’을 제공하는 반찬거리도 필요하다. 이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미소다. 다량의 소금을 사용해 콩 또는 쌀을 원료로 발효시킨 미소는 ‘호시이이’와 짝을 이뤄 ‘맛’과 ‘영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최고의 전투식량으로 각광받게 된다.

 

전투식량의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미소는 점차 전국의 다이묘들이 가장 공을 들여 제조와 비축에 힘을 기울이는 전략물자가 됐다. 전국시대 패권을 놓고 경쟁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3인 모두 콩 재배와 미소 제조가 활발하였던 지역의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현대 일본인이 가장 선호하는 ‘신슈미소(信州味噌)’도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이 시기에 기반을 다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부국강병의 꿈이 담긴 ‘센다이미소’

▲센다이번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

 

국가안보 차원에서 미소가 취급되던 이 시기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미소는 ‘센다이미소(仙台味噌)’다. 센다이번(仙台藩)의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1567~1636)는 센다이를 전국 최강 번의 하나로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번 내의 운하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조카마치(城下町·성 주위의 상업지구)에 전국 각지에서 능력 있는 상인, 기술자, 학자를 불러 모아 거주시킴으로써 경제와 문화의 융성을 도모한다. 부국강병책을 가장 성공적으로 추진한 다이묘 중의 하나인데, 그의 일화 중에서 센다이미소와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미소의 중요성에 일찍이 눈뜬 마사무네는 품질, 영양, 보관성이 우수한 미소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마사무네의 목표는 성이 포위되어도 1~2년을 외부의 보급 없이 성내에서 자급자족하며 농성(籠城)하는 방어력의 획득이었다. 마사무네는 이를 위해 조슈마카베군(常州壁郡·현재의 이바라키현) 출신의 미소 제조 쇼쿠닌(職人·전문기술자) 마카베야이치베(壁屋市兵衛)를 연공(年貢) 현미 백석(百石)에 초빙하여 미소 제조를 의뢰한다. 작은 번의 오모테다카(表高·영지의 표준 미곡 산출량) 1만 석부터 시작하는 점을 감안할 때, 100석의 연공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마사무네는 마카베야이치베의 스카우트와 함께 성() 아래에 ‘오엔소구라(御塩)’를 건립하도록 지시한다. 오엔소구라는 미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공방(工房)으로 일본 최초의 공업적 미소 생산시설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마카베야이치베는 고메미소(米味噌) 양조법에 능한 기술자였다. 쌀과 콩을 함께 사용하는 고메미소는 콩의 단백질과 쌀의 탄수화물을 동시에 섭취할 수 있어 전투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마카베야이치베는 쌀누룩을 활용해 염도를 높이면서도 발효가 진행되는 양조법(釀造法)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소의 보존기간을 크게 연장시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전략물자를 개발하고 대량으로 생산한 것이다(일본의 미소는 한국의 된장과 달리 자연발효 메주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배양된 누룩균을 사용하여 발효시킨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된장 제조 공정을 술과 마찬가지로 ‘釀造’라고 표기한다).

 

센다이미소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임진왜란 때라는 말이 있다. 조선에 출병한 각 번의 군대가 가져온 미소가 여름철 고온다습한 환경에 부패하여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마사무네 휘하의 군대가 소지한 미소만은 멀쩡하게 맛과 영양이 살아 있어 이를 타 지역의 군대에도 나눠준 것이 계기가 되어 센다이미소가 일약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오엔소구라의 건립시기와 시기적 불일치가 있어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센다이미소의 전투식량으로서의 우수성이 당시부터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에도시대의 개막과 미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하여 에도(江戶)막부의 평화시기가 도래하자 센다이미소는 새롭게 도약한다. 일본인들의 식생활은 가마쿠라시대부터 ‘일즙일채(一汁一菜·한 가지 국에 한 가지 반찬)’가 보편화되었는데 국은 대개 미소시루(みそ汁·된장국)를 의미하였다.

 

에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본거지를 두기로 정하기 전까지 한적한 바닷가의 깡촌이었다. 어느 날 수많은 무사와 상인과 노동자가 물밀듯 밀려들어 오면서 에도인들의 소비 물자의 상당 부분은 외부에서 조달되는 의존형 경제가 된다. 술과 간장 등 역사와 전통을 요하는 생필품과 기호품은 주로 긴키(近畿·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쪽에서 유입되었지만, 미소만큼은 도쿠가와의 출신지인 미카와노쿠니(三河·현 아이치현 동부) 지역에서 생산된 ‘산슈미소(三州味噌)’가 주로 반입되었다. 에도막부 수립으로 대량 이주해 온 미카와노쿠니 출신자들이 많은 탓에 그들의 ‘고향의 맛’인 산슈미소가 에도 미소시장의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참고로 산슈미소는 현재 나고야(名古屋) 명물로 알려진 핫초미소(八丁味噌)의 원형이다.

 

18세기 들어 에도가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미소의 수요가 더욱 늘어난다. 당시 에도에는 도시 형성 과정의 특성상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으며, 서민 가옥인 나가야(長屋)는 취사가 금지되어 매식(買食)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인구가 많았다. 미소시루는 간편한 한 끼 해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조미료이자 영양 공급원이었다. 무가(武家)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즐겼다는 ‘오채삼근(五菜三根) 미소시루’와 장어에 미소를 발라 구워 먹는 ‘우나기 미소카바야키’ 등 미소를 활용한 고급요리가 유행했다. 바닷길에서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선착장 인근에는 미소 도매점이 성업했고 에도 거리 어디를 가도 미소를 판매하는 소매점과 행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

 

품질과 신뢰로 에도시장을 뚫다

센다이미소의 인기몰이는 이러한 도시화와 물자 유통망의 발달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로서 3대 웅번(雄藩)의 하나였던 센다이번은 에도에 총 7개소의 ‘에도한테이(江戶藩邸·에도에서의 거처)’를 두고 3000명에 이르는 근번(勤番) 인력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에도에서 유행하던 산슈미소나 아마미소(甘味·단맛이 나는 된장)에 만족하지 못하던 센다이 번사(藩仕)들은 해로가 뚫리자 고향의 미소를 날라다 먹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내부용으로 소비하다가 점차 인원이 늘자 아예 에도에 생산공장을 차린다. 현재의 시나가와(品川)구 히가시오오이(東大井)에 센다이번의 시모야시키(下屋敷·실무직원들의 거처)가 있었는데 센다이번은 이곳에 에도판 ‘오엔소구라’를 짓고 센다이에서 수송해 온 콩과 쌀로 미소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가시오오이는 도쿄만 입구에 가까운 강변 지역으로 원료를 센다이로부터 해로로 운반하여 집하(集荷), 처리하기 좋은 입지이다. 센다이번의 에도 미소 공장 건립은 해운망의 발달에 힘입어 재료 산지와 소비시장 인근의 제조공장을 연결하는 초기 형태의 원격지 생산체제를 구축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직도 그 자리에는 센다이미소양조소(仙台味釀造所)라는 이름의 회사가 400년 전통의 센다이미소 제조, 판매처로서 영업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체 소비 후 남는 물량을 일부 도매업자들에게 부정기적으로 출하하던 수준이었으나 뛰어난 품질과 번주(藩主) 직영 시설에서 출하된다는 프리미엄과 신뢰성이 더해져 수요가 점점 늘자 번 정부도 직영 사업으로서의 상업적 관점에 주목하고 판매 증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당시 에도에서는 ‘미소’ 그러면 십중팔구 ‘센다이미소’를 지칭할 정도로 센다이미소는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는 미소의 대명사가 된다.

 

센다이미소가 에도의 미소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 단맛이 적은 담백함이 당시 에도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간토(關東)나 도호쿠(東北) 지방 출신자들의 입맛에 잘 맞았다는 점, 둘째 ‘오엔소구라’ 건립 이래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고품질의 미소를 안정적으로 출하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에도와 비교적 가까운 동북(東北) 지역의 원료를 해로를 이용하여 단기간 내에 운송함으로써 재료의 확보와 가격 경쟁력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현대의 경제 논리에 비추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성공 요인이다.


신시대, 신기술로 승부하다

▲센다이미소는 시장점유율은 많이 떨어졌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 번이 폐지됨에 따라 히가시오오이의 미소 공장은 센다이 번주로부터 센다이의 호상(豪商)인 야기(八木) 가문에 인수되어 민영화된다. 비슷한 시기 사사쥬()의 창업(1854)을 비롯 여타 민간업자도 미야기(宮城)현과 도쿄 일대에 설립되어 미소시장에 뛰어든다. 본격적인 근대화 추진에 따라 산업화가 진행되고 신기술이 속속 도입되는 시대였다. 누가 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고 깨어 있느냐가 생존과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소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5년 일본육군양말창(日本陸軍糧秣廠) 소속의 가와무라 고로(河村五郞)가 속양법(速釀法)을 개발한다. 가열과 냉각 등 과학적 온도 조절로 누룩균의 활성화를 컨트롤해 미소의 양조기간을 1년 이상에서 수개월로 단축시키고, 물량과 코스트 면에서 비약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신기술이었다. 이 기술은 센다이미소의 양조법과 유사한 면이 있어 센다이미소 제조업체들에 의해 적극 채용된다. ‘속성으로 만든 센다이미소(早づくりの仙台みそ)’라는 의미에서 ‘하야센(早仙)’으로 불린 염가형 센다이미소가 대량으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하자 센다이미소는 간토, 도호쿠의 시장을 석권하며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한발 앞선 신기술의 채용이 달리는 말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영원할 것 같던 센다이미소의 독주(獨走)도 한순간에 위기를 맞게 된다. 1944년 나가노현(長野県) 출신의 미소 제조업자인 다나카 에이조(中田)가 보온법(保溫法)을 가일층 발전시켜 불과 한 달 만에 공장 출하가 가능한 신기술을 개발한 것이 계기였다. 이 공법은 예전부터 향토 미소로 독자적 수요를 확보하고 있던 나가노 지방의 신슈(信州)미소 생산에 적용되었고 종전 후 극심한 물자난에 시달리던 일본 시장에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미소를 공급할 수 있었던 신슈미소는 순식간에 전국 시장점유율을 30%로 끌어올리며 급속히 시장을 파고들었다.

 

가격경쟁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센다이미소는 속수무책으로 점유율이 하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물자난이 해소되고 경제 부흥의 시기가 찾아왔지만 한번 신슈미소에 길든 일본인들의 입맛은 돌아올 줄 몰랐고 신슈미소는 전국 점유율 40%를 차지하는 넘버원 미소의 자리에 등극한다. 신기술에 허를 찔린 센다이미소는 여전히 3대 미소의 하나로 꼽히며 옛 명성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나고야의 핫초미소에 2위 자리를 내주는 등 미소의 대명사로서 에도시절에 누리던 절대적 지명도와 인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경쟁과 자율성이 꽃피운 미소 문화

‘미소의 정치경제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경쟁과 자율성’이다. 번과 번이 서로 경쟁했고 각 번은 막부에 대해 일정한 의무만 이행하면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속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이중적 구조하에서 각 지방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성장한 것이 일본의 미소 문화다.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원리로 설명한 바 있다. 미소의 예처럼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에 ‘영토’와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쟁본위의 환경 속에서 도전과 응전의 반복을 통해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역동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배양되고 체화된 ‘경쟁원리에 대한 이해, 실용주의적 현실감각, 변화에 대한 감수성, 신기술에 대한 수용성’ 등은 지금도 일본 사회에 면면히 이어져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사회심리적 토대가 되고 있다. 강력한 유교적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이 갖지 못했던 사회적 역동성이기에 그 시대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의 한국이 진지하게 곱씹어봐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6〉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세 일본의 정치경제학

▲이세신궁 참배 행렬을 그린 도쿠가와 시대의 그림. 이세신궁 참배는 일본 관광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근세 초엽부터 독특한 종교·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여행 생태계를 구축해 왔다. 서구와 비교해 무려 200년이나 앞선다. 유럽에서 서민 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다. 철도교통망이 정비되면서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타()지역을 여행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훨씬 전인 에도(江戶)시대부터 일반 서민층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여행 대중화가 진전됐다.


 
여행이 대중화되려면 이동에 필요한 교통망,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시설, 치안(治安)과 희구(希求)의 대상이 되는 명소, 명물 또는 유희(遊戱)와 도락(道樂)거리가 존재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이동의 자유와 노동의 속박에서 벗어난 여가의 시간이 허락되어야 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봉건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고 제약이 제거됐다.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

▲도쿠가와 시대 일본 국내 여권인 쓰코테가타’.
 

일본에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종교였다.

 

일본인들의 여행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은 신사(神社)와 불사(佛寺)에 대한 참배, 소위 사사참예(社寺參詣)가 그 동기이다. 서양의 순례(pilgrimage)와 유사하다. 특히 일본 건국신화의 상징인 이세신궁(伊勢神宮) 참배(‘伊勢參り·이세마이리’라고 한다)가 그 중심에 있었다. 중세 이전에는 황족 또는 귀족들만이 신도 신앙의 본산인 이세신궁 참배 순례를 할 수 있었으나, 에도막부 성립 이후 평화, 번영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러한 욕구가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물결처럼 확산되었다. 서민들 사이에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이세신궁 참배는 평생의 목표이자 삶의 의미가 되었다.

 

에도시대 이전에 일본 서민은 이동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원칙적으로 이동의 자유는 제한되었지만, ‘쓰코테가타(通行手形)’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이동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게 된다. ‘쓰코테가타’란 주요 경계인 세키쇼(關所)나 반쇼(番所)를 통과할 때 필요한 통행증으로 현대의 ‘여권’에 해당하는 신분증명서이다.

 

무가(武家)의 경우는 소속 번()의 영주가 발행하고, 평민의 경우에는 발행권을 위임받는 소속 마을의 촌장이나 사찰의 주지, 신사의 궁사(宮司) 등이 발행하였다. 에도 초기에는 발행이 엄격히 제한되었지만, 일본의 조상신을 모시는 이세신궁 참배라는 목적은 이러한 증서를 발급받는 데 매우 유효한 명분이 됐다. 민간의 이세참배에 대한 욕구가 워낙 간절하다 보니 막부와 번정부도 민심을 무시할 수 없어 여행에 관대한 정책을 취하게 됐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웬만한 서민도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면 쓰코테가타를 큰 어려움 없이 발급받아 합법적이고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여행 확산에 기여한 참근교대

▲다이묘의 상경을 강제했던 참근교대제는 도로·숙박시설 등 관광 인프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에도시대 여행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참근교대제이다. 17세기 이후 막부는 다이묘(大名) 참근단의 에도 출사(出仕)를 위해 대대적으로 도로망을 정비하였는데, 일반 서민들의 발걸음이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에도와 주요 지방을 연결하는 고카이도(五街道)가 간선도로로 정비되어 교통의 혈맥 역할을 하였고, 가도(街道)를 따라 조성된 슈쿠바마치(宿場町·숙박시설 밀집 지역)는 여행객의 이동 편의를 크게 제고하였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이동을 하였기에 일본 근세를 ‘여행천국’이라 부르는 것일까? 1690년부터 2년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의사로서 나가사키의 데지마상관(出島商館)에 주재하던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Englebert Kaempfer)가 자신의 에도 상경 경험을 기록한 《에도참부여행일기(江戶參府旅行日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나라의 가도에는 매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있어, 여행객이 몰리는 계절에는 인구가 많은 유럽 도시의 시내와 비슷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에 넘쳐난다. 나는 일곱 개의 주요 가도 중 가장 큰 도카이도(東海道)를 네 번이나 왕래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이유의 하나는 이 나라의 인구가 많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 국민들과 달리 이들이 상당히 자주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중략) ‘이세참배’에 나선 사람들은 정해진 가도의 일정 구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 참배여행은 특히 봄에 많이 집중되며, 그때가 되면 가도는 참배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나이, 신분, 성별에 관계없이 신앙과 여타 동기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이 여행에 나선다.

 

▲네덜란드 상인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작성한 일본 지도.

 

일본의 한 학자가 카엠프페르가 도카이도의 모습을 기록한 18세기 초반 겐로쿠(元祿) 시기에 도카이도를 통행한 인원의 규모를 추산해 본 적이 있는데, 그 숫자가 놀랍다. 도카이도 주요 길목에 위치한 하마나(浜名) 호수에는 당시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통행인은 배를 이용해야 했다. 1702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운행한 도하선(渡河船)의 운행일지를 보면 44700여 회 왕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회당 20명 정도의 탑승인원을 가정하고, 우회 육로를 이용한 인원이나, 별도의 전용 선박을 이용한 다이묘 참근단의 인원을 더할 경우 연간 100만이 넘는 인원이 도카이도를 이용한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000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인원이 도카이도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세신궁의 방문 기록도 이러한 숫자를 뒷받침한다. 1718년 이세신궁 측에서 막부에 올린 상계에는 그해 정월에서 4월 중순까지 427000명이 이세신궁을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개 농민으로서 농한기에 여행을 떠나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매년 최소한 50만 이상의 참배객이 이세신궁을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다. 오늘날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이 연간 250만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300년 전 50만의 이세신궁 방문객 수는 실로 경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투어와 ‘고()

이세참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의미가 퇴색하고 유희와 유람의 목적으로 변질된다. 한 번 다녀보기 시작하니 유희의 인간(homo ludens)으로서의 본능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질은 서민들의 이세참배 여행 일정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초기에 이세신궁만을 다녀오던 ‘이세왕복형’ 일정이 점차 ‘명소주유(周遊)형’ 일정으로 바뀐 것이다. 이세신궁 이외의 유명 온천이나 유적, 명승지, 에도,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등지의 대도시를 일정에 포함시키고, 일정도 50~70일을 넘나드는 장기투어가 성행하였다.

 

당시 도호쿠(東北) 지방 사람의 참배여행 기록을 보면 이세신궁에 들러 참배를 한 후, 나라(奈良), 아스카(飛鳥), 교토, 오사카 등 긴키(近畿) 일대의 명소를 돌아보고, 오는 길에 에도에 들러 수도(首都)의 위용과 첨단 도시문명을 체험하고 나서야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장장 3~6개월의 대여정이 드물지 않다. 현대인들도 대개 꿈으로 끝나는 장기여행을 에도 서민들은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여행 대중화가 가져온 몇 가지 변화를 소개하면, 먼저 여행경비 마련을 위한 ‘고()’의 유행이다. ‘고’란 본래 종교적 교리나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기도회, 강독회 등을 하면서 일정 금액을 상호부조의 목적으로 적립하는 모임이다. 이세참배가 유행하면서 많은 ‘이세코’가 지역 공동체 단위로 생겨나 적립금을 모으고 추첨이나 투표를 통해 이세참배자를 선발하여 비용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여행에서 얻어진 결과를 기록하고 공유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여행에 대한 인식은 명맥이 이어져 지금도 다양한 공부회, 취미회, 동호회가 생겨나 기금을 적립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단체여행을 즐기고 있다.


료칸의 등장

료칸(旅館) 문화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초기 형태는 ‘기센(木錢)’이라는 자취(自炊)형 숙박시설이다. 잠자리와 함께 땔감이 제공되는 원시 형태의 숙박시설로, 여행객들은 음식재료를 휴대하고 다니다가 기센에 들러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하였다.

 

여행객들이 항상 식재료를 휴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고메다이(米代)’를 겸하는 기센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고메다이는 ‘쌀값’이라는 뜻으로 쌀과 간단한 음식을 함께 판매하는 형태의 숙박시설이다. 18세기 초엽이 되면 기센·고메다이는 ‘하타고(旅籠)’로 진화한다. 하타고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는 본격적인 숙박시설이다. 점차 하타고 사이에 경쟁이 생기면서 보다 고급화하고 특색 있는 로케이션, 음식, 시설, 서비스 등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료칸이 등장한다.

 

유명 사찰이나 신사는 자체적으로 ‘슈쿠보(宿坊)’라 불리는 숙박시설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세신궁의 경우는 외궁(外宮) 인근에 무려 600채가 넘는 슈쿠보마치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슈쿠보에서의 숙박을 비롯하여 참배, 기념품 구입, 주변명소, 여흥거리 등을 안내하고 주선하는 사람을 ‘오시(御師)’라고 한다. 이세신궁 소속 오시는 차별을 두기 위해 특별히 ‘온시’라고 불렀다. 이들은 해당 사찰이나 신사의 안내서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참배객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현대적 의미의 패키지투어 기획자이자 여행가이드인 셈이다.


유곽과 야쿠자

유명 신사나 사찰의 주변에는 몬젠마치(門前町)라고 하는 유흥가가 생겨났다. 몬젠마치는 사설 숙박시설과 함께 연극, 가극, 기예 등을 공연하는 극장, 기념품 판매점, 음식점, 유곽 등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현대의 라스베이거스를 연상하면 되는 유흥 지역이다.

 

몬젠마치는 번성 일로를 달린다. 여성의 이동 제약으로 주로 남성들로 구성된 참배여행객들은 참배 전까지는 나름 경건함을 유지하다가 참배가 끝나면 소위 ‘쇼진오토시(精進落とし)’라 하여 몬젠마치에 들러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였다. 특히 유곽이 성업하여 이세신궁 주변에 조성된 몬젠마치인 ‘후루이치(古市)’는 에도의 요시와라(吉原), 교토의 시마바라(島原)와 함께 3대 유곽 밀집 지역으로 불릴 정도였다. 후루이치의 전성기에는 유곽이 70여 곳, 여 종사자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념품 판매점은 커다란 수익을 올리며 상업자본화하였고, 토산품 시장의 형성으로 공예, 식품 등 지역산업 발전이 촉진되었다. 환락가의 번성은 자연스럽게 검은돈의 유통과 자체 치안의 필요성을 유발하였다. 도박 등의 불법 유기(遊技), 유곽 경영, 고리대금업, 자경단(自警團) 역할 자임 등을 통해 이권을 챙기는 불량배 무리가 생겨났다. 야쿠자로 불리는 현대 폭력조직은 이 시기의 이러한 도당(徒黨)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참배여행이 대중화되면서 여행의 백미로 여겨지게 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도시 방문이었다. 시골 거주자가 대부분인 서민들에게는 에도, 오사카, 교토 등지의 도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꿈에 그리던 평생 소원이었다.


‘관광’의 탄생

엄밀히 말해서 여행과 관광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역경(易經·周易)》에 나오는 ‘관국지광(觀國之光)’에서 비롯된 말이다. 주역의 관궤(觀卦) 효사(爻辭) 중에 ‘관국지광 이용보우왕(觀國之光 利用賓于王)’이란 구절이 있는데, ‘나라의 빛을 살피고 그로써 왕을 섬기고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에도시기에 들어 통치철학으로서 주자학이 중시되면서 ‘각지의 빛나는 문물, 명소, 전통 등을 찾아 살피는 것’이라는 의미로 ‘관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정착된다.

 

‘관광’은 유희활동으로서의 여행(tour)이나 구경(sightseeing)이 아니다. 일본은 이러한 관광의 속성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발현되었고, 그것이 다시 근대시기 통치기반 강화와 통합의식 함양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여행천국이 아니라 관광을 통해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관광입국(觀光立國)’의 나라라 할 수 있다.

 

‘여행(旅行)’이라는 말은 근대화 시기에 도입된 일본 유래의 단어이다. 한국어사전은 여행에 해당하는 고유어를 ‘나그넷길’로 제시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처없는 유랑(流浪)의 의미만 느껴질 뿐 경험, 발견, 유희, 휴식, 재충전이라는 목적 지향의 행위인 ‘여행’과는 거리가 있다. ‘관광’이라는 말은 일본이 근세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재생산된 단어이니 한국 전래의 전통에서 그 연원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7  에도시대 출판문화 융성의 키워드 - 포르노, 카피라이트, 렌털

1682년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오락소설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하면서 출판시장 활성화
100만부 이상의 초베스트셀러 등장, 전업작가도 나타나
⊙ 목판인쇄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의 규범으로서 ‘판권’이란 개념 형성

▲짓펜샤 잇규(十返舍一九)의 〈동해도중슬률모(東海道中膝栗毛)(1802~09)는 에도시대 여행·관광 붐의 기폭제가 되는 작품이었다

 

 일본의 높은 독서열과 출판문화의 뿌리는 3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는 책의 ‘융성’시대였다. 하시구치 고노스케(橋口侯之介)에 따르면 16세기 말 게이초(慶長)에서 19세기 중반 게이오()에 이르는 250년 남짓한 에도시대에 적어도 10만종 이상의 신간 서적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문화는 유럽,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뒤처져 있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상황이 반전된다. 17세기 중반 일본의 출판문화는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에는 연간 1000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며 19세기에는 모든 국민이 책을 생활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대국’이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을까? 포르노, 판권(copyright), 대여업(rental business)이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출판 혁명의 시작은 포르노

16세기 말 한반도와 유럽의 선교사를 통해 도입된 활판(活版)인쇄술도 일본인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였다. 활판인쇄는 기술적으로 상용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에도인들은 목판인쇄에 다시 주목하고 기술을 가다듬어 책의 대량생산, 보급 체계를 갖춘다. 18세기 전까지 출판 중심지는 교토(京都)였다. 혼야(本屋) 또는 서림(書林)이라 불리는 교토의 출판업자들이 관()이나 사원에 연계되어 불서(佛書), 한서(漢書), 역사서, 의서(醫書) 등의 고전(古典) 또는 정통서(이를 ‘모노노혼·物之本’이라 한다)들을 간행했다

 

  17세기 말엽에 일본은 일대 혁명적 전환의 순간을 맞이한다. 1682년 오사카와 에도에서 발간된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오락소설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친 것이다
  

  호색일대남은 ‘요노스케(世之介)’라는 남자주인공의 7세부터 60세에 이르는 54년간에 걸친 파란만장한 ‘섹스 라이프’를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인 요노스케는 7세 때 첫경험을 한 이후 전국을 방랑하며 육체적 로맨스에 탐닉하는데 친척 여동생, 유곽의 여인, 남의 아내, 미소년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단편을 이루어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8 8책에는 한 호색남의 일생에 걸친 ‘섹스 판타지 어드벤처 로망’이 담겨 있다. 요노스케가 관계를 맺은 상대는 여성 3742, 남성 725명이라 한다. (에도 중기까지는 남색(男色)이 드물지 않았다
  

  《호색일대남》은 관음증을 자극하는 에피소드지만 현대 학자들이 극찬할 정도로 고품격 포르노그래피로서의 관능미와 묘사, 은유가 절묘하게 당시 각 지역의 풍정(風情)과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생활상이 당대 언어로 생생하게 담겨 있어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한다. 이하라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삽화는 텍스트에 독자의 이해를 돕고 흥미를 유발하였고 에도시대 ‘재미있는 읽을거리’의 전형으로서 후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일본 전역에 《호색일대남》 열풍이 불어 판매부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인쇄의 기본이 되는 판목이 오리지널 외에 5종이나 더 제작된 것은 높은 인기와 판매량을 뒷받침한다. 《호색일대남》의 히트를 계기로 일본 사회는 책의 대중소비 시장 가능성에 눈을 뜬다. 이후 ‘재미’를 표방하는 오락서적(이를 ‘草紙·소우시’라 한다) 붐이 일면서 기존의 ‘모노노혼’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대중출판물 시장이 형성된다.   

 

  시대를 풍미한 초베스트셀러의 등장

포르노그래피 소설 〈호색일대남〉은 에도 시대 출판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호색일대남》 이후 ‘구사조시()’라는 장르가 유행한다. 구사조시는 에도 중기인 18세기 중반부터 에도 말기인 19세기 초반까지 에도를 중심으로 출간된 대중오락 서적의 통칭으로, 그림과 텍스트를 같은 판목에 새겨 인쇄함으로써 시각적 효과가 가미된 ‘가벼운 읽을거리’로 만화의 원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에도에 출판붐이 일면서 현재로 치면 100만부 이상의 판매량에 해당하는 초베스트셀러가 속속 등장한다. 먼저 《남총리견팔견전(里見八犬(1814~1842)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저자인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28년 동안 총 106()에 걸쳐 집필한 집념의 ‘생애작(lifetime work)’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주제로 한 창작 판타지물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한 만화나 영화가 현대에도 재생산될 정도로 대중문학의 틀을 바꾼 근세 요미혼(讀本)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이다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인 〈남총리견팔견전(里見八犬.

 

  펜샤 잇규(十返舍一九)가 쓴 《동해도중슬률모(東海道中膝栗毛)(1802~09)는 에도시대 여행, 관광 붐의 기폭제가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에도에 사는 평범한 중년남성과 청년이 콤비를 이루어 이세(伊勢)참배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를 코믹하게 서술한 이 작품은 당초 초편과 속편의 2편으로 종료 예정이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대히트 덕분에 이세를 넘어 오사카까지 여행을 계속하는 8편까지 연장됐다. 그후 독자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도카이도(東海道)를 벗어나 일본 각지를 돌며 여행하는 스토리를 추가하는 《속슬률모(膝栗毛)(1810~1822)가 출간됐다. 도중에 작가가 소재 고갈로 집필을 몇 번이나 그만두려 하였으나 제발 연재를 계속해 달라는 독자들의 간청으로 집필을 이어 갔다고 할 정도이다. 일본 각지의 명물과 풍속, 인정(人情)을 코믹한 터치로 풀어낸 에도 기행(紀行)문학의 걸작은 독자들과 같이 호흡하며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더 이상 인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원()판목이 닳아 판목을 다시 제작해야 했으며 패러디나 복제판이 다수 제작되며 3만권 이상이라는 당시로선 경이로운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개념 전환이 이루어지자 발달된 상업자본과 유통망에 힘입어 상업출판 시장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 에도시대 말인 18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 100만의 에도에 출판업자들이 모여들어 연간 수백 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출판 시대가 꽃을 피운다. 구사조시 서적과 우키요에 등의 화첩류, 그리고 본격 모노가타리인 ‘요미혼’ 등이 큰 인기를 모음에 따라 교토를 제치고 에도가 제1의 출판시장으로 도약한다. 에도의 출판시장에서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백과사전, 여행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가 개척되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으로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가 등장하는 등 비즈니스 생태계가 구축된다.  
  

유교의 이상(理想)을 완성한 《경전여사(經典余師)

‘다니 햐쿠넨(百年)’이라는 떠돌이 유학자가 쓴 초급 유교경전 해설서 〈경전여사〉

 

  읽을거리가 많아지자 글을 배우려는 의욕이 높아진다. 사설 교육기관 ‘데라코야(寺子屋)’는 글을 배우고자 하는 서민들로 넘쳐나고, 데라코야 교습으로 생계를 잇는 평민 지식인층이 대두한다. 데라코야는 공적 교육기관인 번교(藩校)와 달리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읽기, 쓰기 등의 기초부터 산수, 주판 등의 실용기술 그리고 사서오경 등의 간단한 유교경전 등에 대한 지식이 데라코야를 통해 서민 사회에 폭넓게 보급된다
  

  어느 서양 선교사가 ‘이 나라는 시골의 어린 계집아이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놀라움을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전국민의 문자해독률이 높아진 19세기 초엽, 당대 굴지(屈指)의 넘버원 베스트셀러는 《경전여사(經典余師)》라는 유교경전 풀이집이다. ‘다니 햐쿠넨(百年)’이라는 떠돌이 유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사서오경 등의 유교경전에 히라가나로 음을 달고 저자의 주해를 붙인 일종의 초급 유교경전 해설서이다
  

  일본은 무가(武家) 중심의 신분사회였으나, 각 번이 서로 경쟁하면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평민 계층에게도 관직의 문호를 개방하는 신분 완화의 시기를 맞이한다. 18세기 말이 되면 조닌 계층에서도 관직 등용의 꿈을 안고 통치이념인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19세기에 들어서면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은 필수 교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상하에서 홀로 유교경전을 익힐 수 있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 《경전여사》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것이다.  
  

  일본판 지적재산권의 시초, ‘판권’의 탄생

어떤 학자는 18세기 초 앤 여왕 시대에 영국이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의 개념을 법제화한 것이 영국이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선도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지적재산권은 영어로 copyright라고 한다. 저작권과 판권(板權)으로 구성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권리의 중심이 되는 것은 판권이다. 일본의 경우 서구의 근대법제가 도입되기 전임에도 출판물에 대한 권리로서의 판권에 대한 자생적인 규범이 형성되었다

 

  에도시대 출판업의 중심이 된 것은 ‘한모토(版元)’였다. 한모토는 판()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목판(木版)은 제작하는 데 숙련 기술자들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불편이 있는 반면, 한 번 만들면 닳아 못쓰게 될 때까지 몇 백 년이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에도시대의 출판업자들은 상품성 높은 책의 판목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사업의 경제성과 지속성에 대단히 중요하였다. 당시 출판은 고료를 제외하고도 판목 제작에만 지금 돈으로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자본이 투하되어야 하는 리스크가 큰 투자였다.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1000부 이상이 판매되어야 하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센부부루마이·千部振舞’라고 하여 1000부가 팔리면 축하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당시 서민의 소득에 비추어 책은 상당히 고가여서 웬만한 책은 현재 가치로 10만원이 넘었다고 하니 1000부는 결코 적은 판매부수가 아니다.) 업자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동업자인 ‘나카마(仲間)’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출자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판목이 출판업자의 생명줄과도 같은 중요 재산이 되자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의 규범으로서 ‘판권’이란 개념이 형성된다. 판권은 출판업자 사이에 소유, 양도가 가능한 재산으로 인정되었으며 주식처럼 소유권을 분할하는 것도 가능했다. 당시 출판업자들은 대관(對官)업무, 자율규제, 권익보호를 위해 자체적인 조합을 만들었는데, 소속 조합원들이 신규 판목 제작 시 조합에 원부(原簿)를 만들어 판권 관련 사항을 등록하면 배타적인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원부를 기초로 소유권 이전, 분할 등 변동 사항을 경정(更訂)함으로써 판권이 재산으로서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법적 안전 장치가 마련된다
  

  유사한 내용의 판목이 판권 소유자의 허락 없이 제작되거나 해적판이 나돈다면 판권을 소유하는 의미가 없다. 에도의 출판 조합은 이를 위해 중판(重版) 또는 유판(類版) 등의 복제판 제작과 출판을 규제하였다. 자체적으로 등록 신청 단계에서 내용을 검수하여 중판 또는 유판에 해당하면 등록을 거부하였고, 시장에 나도는 해적판은 자체 회수하거나 관청에 신고하여 단속을 의뢰했다


  
‘대본업’의 등장과 공유경제

  출판시장에서는 모노노혼을 취급하는 혼야, 오락물 등을 취급하는 소우시야(草紙屋)가 공급자다. 교토, 에도, 오사카, 나고야에 거점을 둔 이들 메이저 출판업자들은 본사 격의 책방을 차려 놓고 도소매로 서적을 판매한다. 혼야는 ‘쇼시(書肆)’라고 하여 출판사, 인쇄소, 서점의 일관 공급 체계를 갖춘 출판 프로듀서로서 출판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대 거점 이외의 지방도시에서는 메이저 출판업자들과 ‘나카마’ 관계에 있는 지역 서점들이 일종의 총판대리점으로서 도매로 책을 떼어와 판매했다
  

  당시 출판은 작가가 ‘기요즈리(淸刷り)’라는 원고를 작성하면 판각 전문가인 ‘호리시(彫師), 인쇄 전문가인 ‘스리시(刷師)’ 등의 직인(職人)들이 ‘분화와 전문화’의 원리에 따라 제판, 인쇄, 제본 등에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에는 상당한 초기투자가 필요하다
  

  문제는 당시 책이 서민들이 구입하기에는 상당히 고가여서 아무리 인기 있는 책이라도 판매량을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공급자 측인 출판업자들이 리스크 경감을 위해 고안한 방식이 ‘공동출자와 판권의 분할’이라면, 수요 측면에서 안정적 판로 확보를 위해 고안된 방식이 ‘대본업(貸本業)이다
  

  에도시대의 대본업은 현재의 책 또는 비디오 대여점과 거의 유사하다. 대본소 덕분에 서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고 출판업자들은 판로가 안정됨에 따라 안심하고 좋은 콘텐츠의 기획, 출시에 힘쓸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미 에도에만 200개가 넘는 대본소가 성업하고 있었는데 각 대본소는 평균 200군데 이상의 단골 거래처를 두고 영업했다고 한다. 책을 온 가족이 돌려보는 것이 당시 시대상이었으니 책 한 권이 출간되면 에도에서만 대본소를 통해 최소한 10만에서 20만명의 독자가 확보되는 것이다. 시골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대본소 직원들이 책을 짊어지고 직접 시골로 찾아가 영업을 했다.   

  
  
출판문화 융성은 출판시장 활성화의 동의어

  에도시대 출판문화의 특징은 진화 과정에서 ‘시장(市場) 원리’가 주효하였다는 것이다. 현대와 유사한 출판사(publisher), 저자(author), 보급자(distributor) 사이의 기능적 ‘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판권’이라는 저작권(copyright)과 유사한 지식재산권이나 ‘대본업’이라는 공유경제의 맹아가 싹튼 것은 주목할 만하다. 비단 출판업뿐 아니라 사회경제 각 방면에서 유통 생태계가 구축되고 창의적 비즈니스 기법이 끊임없는 모색된 것은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일본 근세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가 종교, 윤리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지배층도 반역적이거나 지나친 풍속문란이 아니면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면)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출판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8〉 에도시대 교육

에도시대의 교육, 나라가 안 가르쳐도 스스로 배운다

▲사설학당인 데라코야는 에도시대 교육의 꽃이었다.

                                 

에도시대 일본은 문맹률이 동()시대 서유럽 여러 나라에 비추어도 낮은 사회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엄정히 조사하고 통계를 낸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19세기 초반 일본인의 70~8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대국가에서도 유엔의 인간개발보고서(Human Development Report)가 문해율 70~80%를 ‘보통’ 수준으로 분류할 정도이니 80%의 문해율(文解率)은 전()근대사회로서는 대단히 높은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의 문해율에 대해서는 19세기 초반 일본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848년 일본에 입국하여 일본 최초의 원어민 영어교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래널드 맥도널드(Ranald MacDonald)는 그의 《일본회상기》에서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 모든 계급의 남녀, 아이들이 종이와 붓과 묵을 휴대하고 다니며 곁에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읽기와 쓰기 교육을 받고 있다”며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영국의 외교관이자 여행가, 작가로 인도, 중국 등을 두루 경험한 로렌스 올리판트(Laurence Oliphant) 1858년 및 1861년 두 차례에 걸친 방일 시 일본 사회를 관찰한 후 “편지로 서로 의사를 전달하는 습관은 영국보다도 더 폭넓게 퍼져 있다. 일본인들은 우편(郵便)의 재미에 푹 빠져 있기라도 하듯 서로 짧은 편지를 주고받기를 좋아한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공교육의 핵심 번교(藩校)

  사회 구성원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사회화 과정이 필요하다. 에도시대의 교육은 크게 보아 무가(武家)교육(공교육)과 서민교육(사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무가교육의 핵심적인 기관은 각 번정부가 설치한 번교(藩校)이다. 1669년 오카야마(岡山)번에 오카야마학교(岡山學校)가 설립된 것을 필두로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250여 개에 이르는 거의 모든 번에 자체적인 번교가 설립된다. 번교는 각 번의 무사 계급인 번사(藩士)의 자제들을 위한 지배층의 핵심 교육기관이었다. 각 번주의 방침, 지원에 따라 교육의 수준과 내용이 다양하였으며, 실질적으로 번주가 휘하의 가신과 관료들을 육성하고 통치권을 강화하는 사관학교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번사의 자제들은 대개 7~8세의 시기에 번교에 입학하여 기초적인 읽기 및 쓰기와 함께 소학(小學), 효경(孝經),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유교 경전과 학습서를 교과서로 문과(文科)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13~14세가 되면 검술 등의 무예와 병법 등 무과(武科)를 교습하여 문무를 겸비한 사관(士官) 또는 관료로서의 소양을 배양한 후 17~19세 정도에 졸업을 한다
  

  번교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번의 사정과 처지에 맞는 인재 육성 교육이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이후 각 번이 처한 환경과 필요에 따라 의학, 양학 등 신학문을 교과과정에 편입하는 번교가 늘어난다. 평민의 자제들에게 입학의 문호를 개방하는 번교도 확대된다.  
  

  사쓰마의 개성소

  이러한 번교 개혁의 대표적 사례가 사쓰마번의 조시칸(造士館)이다. 사쓰마번은 지정학적 요인으로 대륙 정세에 대한 정보의 입수가 빠르고 서양 세력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곳이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간파한 사쓰마번은 기존의 유교와 무예 중심의 전통교육에서 탈피하여 신시대에 걸맞은 인재 육성을 위해 번교의 커리큘럼과 입학자격을 일신한다.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11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였다. 1857년 번 개혁의 뜻을 담은 번주의 고유(告諭·관청의 告示)가 발표된 이래, 사쿠라지마(櫻島)에 서양식 선박 건조를 위한 조선소, 서양과학기술 연구를 위한 슈세이칸(集成館), 중국어 연구를 위한 다쓰시칸(達士館), 서양식 병기와 군학(軍學) 연구를 위한 가이세이쇼(開成所)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1865년 사쓰마번은 영국에 3명의 사절과 15명의 유학생으로 구성된 견영사절단(遣英使節團)을 파견한다. 사절단은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네덜란드, 벨기에 등 구주를 순방하고 일부는 미국까지 건너가 유럽의 정세와 과학기술을 체험하고 일본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유럽의 지도자들과 의견을 교환하였다. 알다시피 사쓰마번은 삿초동맹(薩長同盟·사쓰마번과 조슈번 간의 동맹)의 일원으로 메이지 정부 수립의 주역이다. 중앙정부보다 한발 앞서 행동하고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춘 지방정부가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도쿄대학 설립으로 이어진 막부의 3대 직할 교육기관

▲유시마성당을 세운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중앙정부인 막부가 설립한 일종의 국립 중앙교육기관도 에도시대 공교육의 중추를 이룬다. 1690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우에노(上野)에 건립한 공자묘(孔子廟)를 간다(神田)의 유시마(湯島)로 이전시키고 강당, 기숙사 등의 교육시설을 부설하여 ‘유시마성당(湯島聖堂)’으로 명명한다. 유시마성당은 막부의 지키산(直參·직할 가신단) 자제, 각 번으로부터의 파견 유학생이 입학하는 반공반사(半公半私)의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1797년 막부의 직할 교육기관으로 편입하면서 명칭을 ‘쇼헤이자카학문소(昌平坂學問所)’로 개칭하였다. 쇼헤이(昌平)란 이름은 공자의 출생지인 노()나라의 창평향(昌平鄕)에서 따온 것이다.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쇼헤이자카학문소는 막부에 의해 막부의 통치철학의 기반인 주자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최상위 관학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막부는 유교 교육 이외의 실용 학문을 위한 연구교육기관도 별도로 설립하였다.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 또는 蠻書調所) 1856년에 발족한 막부 직할의 양학(洋學) 연구기관이다. 막부 직할 개항지인 나가사키 등지로부터 서양 소식이 전해지고 난학(蘭學)의 중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서양 학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1863년 ‘가이세이쇼’로 개칭(改稱)되었다. 주요 연구 과목으로 네덜란드어를 중심으로 하는 어학, 현대의 금속공학에 해당하는 정동학(精錬學), 기계학, 물산학(物産學), 수학 등이 채택되었다. 한편, 종두 예방 접종 성과 등이 널리 알려지면서 난방(蘭方)의학의 입지가 강화돼 1861년 서양의학 전문기관으로 막부 직할의 의학소(醫學所)가 설치되었다. 서양의학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난방의사들은 막부에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권유, 일본 사회의 지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막부의 실권(失權)에 따라 유신 정부에 접수된 의학소는 1868년 의학교로 개칭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대 격변을 맞아 쇼헤이자카학문소, 개성소, 의학소는 유신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따라 각각 쇼헤이학교, 도쿄개성학교, 도쿄의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변신을 모색한다. 이들 막부 직할 3대 교육기관은 1877년 통합,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인 도쿄대학(東京大學)이 출범한다.   
  

  에도시대 교육의 꽃 ‘데라코야(寺子屋)

▲오늘날 도쿄대학의 모태가 된 쇼헤이자카학문소  

 

에도시대의 교육 체계와 관련하여 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이다.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서민 교육의 특징은 서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유지, 발전을 위해 익혀야 할 지식과 교양이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이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교육, 직업생활에 필요한 봉공(奉公)교육, 공동생활에 필요한 도덕교육 등이 서민 교육의 중심 내용으로 강조되었다. 신분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기초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전근대사회로서는 대단히 발전된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서민 교육의 중심이 된 것은 ‘데라코야(寺子屋)’라는 사설교육기관이다. 데라코야라는 명칭은 에도시대 이전의 중세에 주로 사원(寺院)이 교육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도들을 ‘데라코’라고 부른 데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에도시대 초기 교토 등 사원의 영향력이 강한 일부 지역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데라코야는 에도 중기 이후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해 에도 말기에 이르러 에도, 오사카, 교토의 삼도(三都)는 물론 지방도시, 농어촌 등의 낙후지역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일본의 교육학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식 학제 개혁으로 소학교령이 내려졌을 때 전국적으로 취학 대상 아동들의 입학 수속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데라코야의 광범위한 보급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분석한다
  

  데라코야 교육은 실용적이었고 수요자 중심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오히려 현대에 와서 획일화된 기초교육이 비판받으면서 그 장점이 새롭게 부각될 정도이다. 우선 데라코야의 교육 방침은 ‘요미가키소로방(讀み書きそろばん)’의 교습이다. 글을 읽고 쓰고 소로방(주판)을 할 줄 알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다. 그 방법론으로 채택된 것이 ‘데나라이(手習)’이다. ‘시쇼(師匠)’라 불리는 교사가 직접 손으로 쓰고 읽어주면 학생들은 종이, , 벼루, 먹을 필수품으로 지참하여 교사의 지시에 따라 익숙해질 때까지 글을 쓰고 읽기를 반복하였다. 학년제, 표준 교과과정이 없기에 모든 학생은 한 교실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고 총명한 학생들은 진도를 빨리하여 또래보다 더 수준 높은 내용을 교습받을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습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교과서로 주로 사용된 것은 ‘오라이모노(往來物)’였다. 오라이모노는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다방면의 주제에 대해 평이한 문체로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기술된 문집이다. 거의 모든 방면의 오라이모노가 존재하여 교사들은 각 지역의 특성과 교육 수요 등에 맞추어 교과목을 선정하여 교습하였다. 또한 일본 사회의 역사, 풍습, 제도 등 기초상식을 연중행사 소개 형식으로 폭넓게 다룬 ‘데이킨오라이(庭訓往來)’가 기초 교과서 형태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직업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지리, 상업, 기술, 산수 관련 과목이 다양하게 교습되었다.   

  
  
실용교육의 산실

  한편 실용적 지식과 아울러 (전근대 신분제 사회의 한계가 전제되기는 하였지만) 서민들 각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배양해야 할 심성과 덕목이 주요 교육 목표로 강조되었다. 이를 위해 교과서 역할을 한 대표적인 것이 ‘지쓰고쿄(實語敎)’와 ‘도지쿄(童子敎)’라는 수신서(修身書)이다. 지쓰고쿄는 조선시대의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처럼 거의 모든 데라코야에서 교본(敎本)으로 채택되어 학생들에게 가르쳐졌다. 지쓰고쿄에는 유불도신(儒彿道神)을 망라한 일본적인 도덕관과 교훈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산은 높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많이 품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부가 있어야 훌륭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것이다’ ‘노인을 자신의 부모처럼 공경하고,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등등이 그 가르침의 내용인데, 이러한 관념과 전통은 현대 일본 사회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데라코야는 일반인을 위한 특별 야간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일본 전래의 고급수학인 ‘와산(和算), 고급 상업회계인 ‘부기(簿記)’ 등의 강좌를 개최하는 경우도 있었고, 고급 유교경전에 대한 심도 있는 학습을 위해 당시 유행하던 ‘가이도쿠(會讀)’와 연계하여 고급 경전반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명한 인기 강사는 전국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순회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9〉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에도시대 정보 유통의 총아,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1855년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 소식을 전하는 가와라반.

 

  에도(江戶)시대 말기인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출판시장이 활성화되고 서민 교육의 보급으로 문자해독 인구가 크게 늘어난다. 출판·인쇄 문화가 발달하고 문해율(文解率)이 높아지면 가장 왕성하게 소비되는 읽을거리는 무엇일까? 현대인의 경우는 신문일 것이다. 단행본이야 한 달에 한 권 읽을까 말까이지만, 신문의 경우 매일매일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발달해서 종이신문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인쇄물은 신문이다
  

  신문은 활자화된 정보전달 매체의 총아로서 근대화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까지 신문의 정보전달 매체로서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일본은 국민이 종이신문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신문대국이다. 2011년 세계신문발행부수 조사에 의하면 상위 10위권에 일본 신문사가 5개나 포진해 있다. 1위 《요미우리신문》(1000만 부), 2위 《아사히신문》(750만 부), 4위 《마이니치신문》(350만 부), 6위 《니혼게이자이신문》(300만 부), 9위 《주니치신문》(280만 부) 등이다.

  
  
에도시대의 신문, 《요미우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요리우리로 알려진 〈大阪安部之合戰地圖〉

 

  단일 신문으로는 세계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사의 사명(社名)인 ‘요미우리(讀賣)’의 유래는 에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는 17세기 초반부터 화재나 자연재해, 치정(癡情)사건 등 오늘날 사회면 뉴스에 해당하는 소식을 낱장 또는 몇 장의 지면에 담아 거리에서 파는 소식지가 있었는데 이를 ‘요미우리’라고 불렀다. 독매(讀賣)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판매자가 큰소리로 내용을 읽으면서 가두(街頭)판매를 한 것에서 유래했다. 요미우리는 ‘가와라반(瓦版)’이라고도 한다. 기왓장()같이 생긴 점토판에 판각하여 인쇄하였다 하여 가와라반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실제 현존하는 요미우리는 거의 목판으로 인쇄된 것이어서 가와라반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요미우리는 1615년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진영과 도요토미 진영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오사카 하계진(大阪夏の陣)의 모습을 담은 〈대판안부지합전지도(大阪安部之合戰地圖)〉로 알려져 있다. 천하통일의 대단원을 향해 벌어지는 두 진영 간의 전쟁은 당대 최고의 관심사였다
  

  요미우리는 이렇듯 세상 돌아가는 일, 대중의 관심사에 관한 정보를 빠르게 전할 목적으로 유통된 상업 인쇄물이다. 내용과 형식 면에서는 현대의 신문과 많은 차이가 있지만, 독자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자 하는 수요에 대응하여 화젯거리, 즉 뉴스를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보도 기능을 수행하는 언론매체의 원형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의 역사학자나 언론학자들의 주장이다.

  
  치정사건 등 뉴스거리 다뤄

▲가와라반은 괴담을 전하기도 했다. 인어가 잡혔다는 소식을 보도한 1805년의 가와라반  

 

  에도시대의 서민생활을 담은 풍속집 등에는 에도 중기(18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요미우리가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필수품이 될 정도로 활발히 제작되고 판매되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다만 1회성 소비를 목적으로 비공식적인 언더그라운드 인쇄물로 출간되는 속성상 그 실체와 전모에 대해서는 실증적 자료와 연구가 미흡한 측면이 있다. 특히 다수의 사료(史料)가 현존함에도 사료만으로는 작성 주체나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연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요미우리를 간행하는 업자를 ‘요리우리야(讀賣屋)’ 또는 ‘가와라반야(瓦版屋)’라고 한다. 대개 대중오락물을 출간하는 소우시야(紙屋) 계통의 출판업자들이 관여했으나, 인쇄 작업은 소우시야와 제휴하되 요미우리에 전념하는 전문업자도 있었다고 한다

 

  요미우리의 주요 소재는 대화재나 지진, 홍수 등의 자연재해, 살인사건이나 치정사건 또는 기담괴담(奇談怪談) 등 저잣거리의 대중적 화제가 될 만한 일들이었다. 그러한 뉴스거리가 있을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제작되고 통속적 흥미 본위의 내용을 주요 소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신문과 타블로이드판의 중간 정도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 과정은 현대의 신문 제작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뉴스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일이 발생하면 신속한 이동이 가능한 취재원이 현장에 파견되어 동향을 파악하고, 현장에서의 취재를 바탕으로 필력이 좋은 본사의 기자(물론 당시에는 ‘기자’라는 말은 없었다)가 기사를 작성해서 원고를 인쇄소로 넘기면, 인쇄업자가 재빨리 목판을 제작, 인쇄하고, 이를 전문 판매원들이 가두판매에 나서 유통시키는 것이 일반적 형태였다. 속보성(速報性)이 중시되는 인쇄물이었기에 전문 우키요에나 단행본에 비해 판각의 치밀함이나 섬세함은 덜했으나, 필사본이 아닌 목판 인쇄를 하였기에 한 번에 수백 장씩 인쇄하여 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니시키에 신문’의 등장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왼쪽)이 흑선(오른쪽)을 이끌고 와서 일본의 개국을 요구하자, 가와라반은 이 사실을 보도했다.  

 

  요미우리는 막부로부터 공인받은 인쇄물이 아니었고, 따라서 원칙적으로 단속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단속을 피하기 위해 요미우리 판매상들은 2 1조로 꾸려 한 명이 큰소리로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호객을 하고, 다른 한 명은 관원들이 오는지 감시하면서 판매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간행업자들 스스로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기를 꺼려 단속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고, 단속도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치정살인 등의 내용 등을 걸러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들어서 서양의 흑선(黑船) 내항 등으로 일대 정치적 격변 상황이 발생하자 요미우리의 콘텐츠도 현실을 반영하여 변화한다. 막부의 통제력 약화와 맞물려 국내외 정세를 소개하고 심지어 정치적 주장까지 담은 요미우리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의 요미우리는 근대적 신문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정치 관련 뉴스와 오피니언의 시중 전달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엽기적 살인사건을 다룬 《동경일일신문》 기사

니시키에 인쇄술을 사용했다.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키요에 판화의 최후 형태인 ‘니시키에(錦畵)’ 인쇄술을 도입하여 더욱 정교해지고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니시키에 신문’이 등장한다. 니시키에 신문은 19세기 말 서양식 윤전기를 사용하는 근대적 신문의 도입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지만, 정식 등록된 언론사가 간행한 신문으로서 비주얼 그래픽을 강조한 독특한 구성 등은 훗날 텍스트보다 시각적 자료가 강조되는 사진 주간지 같은 장르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고지의 효시 ‘히키후다(引札)

 에치고야에서 발행한 광고물 히키후다

 

  신문이 대중의 뉴스 수요 충족을 위해 고안된 인쇄물이라면, 정보를 대중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수요에 대응하여 고안된 인쇄물은 광고지라고 할 수 있다. 속칭 ‘지라시’라고 불리는 광고 전단은 현대인들도 일상적으로 접하는 매우 친숙한 인쇄물이다.   


 
에도시대의 인쇄물 유통 발달은 상업자본의 발달과 맞물려 광고지라는 새로운 종류의 인쇄물을 탄생시키는데, 에도시대에 유통된 상업 목적의 광고지를 ‘히키후다(引札)’라고 한다. 보통은 상점이 발행하였지만, 가부키 극장이나 신사(神社), 사찰 등에서 행사 소개나 관객 안내를 위해 발행하는 (일종의 팸플릿 같은) 인쇄물도 히키후다에 포함된다.   


 
히키후다는 개업, 이전 등 업체를 소개하는 단순한 내용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판촉 마케팅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기업 전략의 산물인 경우도 있었다.   


 
히키후다의 시초로 알려진 것이 1683년 에치고야(越後屋·미쓰코시백화점의 전신)라는 포목점이 발행한 히키후다이다. 당시 포목점들은 다이묘(大名)나 유력 무가(武家) 등 큰손 고객이 1년에 한두 차례 대규모로 옷감을 구입해 가면서 대금을 외상으로 지불하고 가격도 후려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에치고야는 수요자군이 한정되고 현금 융통에 제약이 가해지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현금 거래 시 할인, 정가 판매, 작은 단위로도 옷감 판매”라는 판매 전략을 수립하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히키후다를 제작하여 시중에 배포했다. 이러한 전략이 적중하여 에치고야가 일약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포목업의 기린아가 되자 매출 증대를 위한 전략을 고안하고 히키후다를 발행하여 광고 활동에 나서는 상점들이 뒤를 이었다.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면 술 등의 경품을 지급한다거나, 대용량 덕용 상품을 구비한다거나 하는 새로운 판촉 기법이 활발히 고안되고 히키후다를 통해 선전됐다.


    기사와 광고의 결합

‘일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히라가 겐나이.

 

  히키후다는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도안(圖案), 구성 등의 디자인적 요소와 문안(文案) 등 카피 라이팅에 공을 들였다. 개중에는 예술성 높은 히키후다도 꽤 있어 컬렉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에 더하여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당대 유명 작가 등을 고용하여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도시대의 천재’ ‘일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괴짜 발명가 겸 작가인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는 당시 에도 장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였는데, 그가 지인(知人)의 부탁으로 써준 ‘소세키코(嗽石香)’라는 치약 상품의 광고문은 장안의 화제가 되어 거리의 아이들이 광고문을 가사로 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유명 연예인이 CF에 출연하거나 대중이 CM송을 흥얼대는 현대의 광고 기법이 연상되는 일화다


 
앞서 소개한 니시키에 신문의 개척자인 《동경일일신문》은 기사가 실린 본지(本紙) 외에 광고주의 의뢰를 받아 히키후다를 부록으로 곁들여 배포하였다. 신문업자는 광고주로부터 수익을 얻고 광고주는 신문업자를 통해 보다 광범위한 광고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상부상조의 비즈니스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양자 간의 협업(協業)은 신문(또는 잡지)의 정보 발신력과 전달력에 기초하여 신문의 불가결한 요소로 광고 게재가 자리 잡는 신문·광고지 통합으로 이어지는 한편, 배포 단계에서 광고지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도 진화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민간 주도 정보 유통 시장의 형성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시대의 ‘조보(朝報)’라는 승정원 발행의 문서를 조선시대의 신문으로 평가한다. ‘조보’는 매일 아침 그 전날 조정에서 결정된 사항이나 제례(祭禮)와 관련된 사항 등을 승정원이 정리하여 발간하면 그를 필사하여 지방의 관아나 주요 사대부가에 배포하는 일종의 관보(官報)라고 한다. ()을 숭상하고 인쇄술이 발달된 조선에서 조정의 소식을 문서로서 신속하게 유통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또 평가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일본의 ‘요미우리’를 ‘조보’와 비교할 때, 양자 간에는 정보 유통의 주체 및 메커니즘 측면에서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정부 간행물인 ‘조보’와 달리 ‘요미우리’는 철저한 민간 주도의 정보 유통 매체이다.


 
비록 다루는 내용에 제약은 있었지만 민간 주도의 정보 유통이 가능했다는 것은 사회 발전 단계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 정보 통제 속성의 억압적 체제하에서도 정보 유통 서비스 시장이 자생적으로 형성되고 상업적 활력을 갖고 성장, 발전한 에도시대는 전()근대사회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회였다.

 

10〉 시대를 앞선 지도의 걸작 이노즈(伊能圖)

⊙ 이노 다다타카, 50세에 사업에서 은퇴한 후 천문에 관심 갖다가 지도 제작 나서
17년간 10차례에 걸쳐 일본 전역을 답사, 현대의 측정치와 오차가 1/1000에 불과
⊙ 메이지 시대에 과학적 사고, 근면, 끈기의 스토리로 초급학교 교과서에 수록,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

▲〈대일본연해여지전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가 측량 여행에 나설 때 참배하던 도미오카하치만구(富岡八幡宮) 신사 경내에 있는 이노의 동상.

 

  예로부터 지도는 권력의 상징, 부의 원천, 문명의 척도였다. 서구는 ‘cartographer(지도제작자)라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지도 제작에 의미를 부여한 문명이었다. 대항해시대 탐험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새로운 루트를 발견하고 그 정보를 그래픽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발견의 시대(age of discovery) 또는 탐험의 시대(age of exploration)로 일컬어지는 15~17세기, 서구 문명의 지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나침반, 망원경, 육분의(六分儀 ; sextant)의 등장으로 관념과 추정을 배제한 실측에 의한 정교한 작도가 가능해졌고, 지동설에 기반한 지구(地球) 개념 확립으로 경도, 위도의 좌표(coordinates) 시스템과 삼차원 정보를 이차원 평면에 옮기는 투영법(投影法)이 발전하였다. 이는 지구의 지리공간 정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지도가 정교해질수록 서구 문명은 세계로 뻗어 나갔고, 세계로 뻗어 나갈수록 서구 문명의 지도는 더욱 정교해졌다. 근대 지도의 발전은 서구 문명의 전세계적 확산의 원동력인 동시에 결과물이다

  
 
지도는 천문, 지리를 포괄하는 과학적 사고의 집약체이다. 어떠한 나라의 각 시대별 지도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지도는 단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19세기말에 근대 작도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상당한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을 제외하면)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당시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 손색이 없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에 〈대동여지도〉가 있다면, 에도시대의 일본에는 〈이노즈(伊能圖)〉가 있다. 〈이노즈〉란 에도 후기 측량가인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가 제작한 일본 최초의 실측 지도이다. 정식 명칭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이다
   

  은퇴 후 시작한 천문학 공부

  제작자인 이노는 본래 지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상인이었다. 1745년 출생 당시 본래 이름은 진보 산지로(神保三治郞)였다. 양친의 사망으로 17세 때인 1762년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이노(伊能) 집안에 서양자(壻養子)로 입적되어 이노라는 성을 얻는다. 이노는 영민하고 수완이 좋은 사업가였다. 망해 가는 조그만 양조장을 궤도에 올려놓고 땔감(장작) 도매상, 미곡 중개상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하여 거부(巨富)를 쌓는다.   


 
이노는 50세가 되는 해에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한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에도(江戶)로 거처를 옮긴다. 에도로 간 그는 당시 천문학의 1인자이자 천문방(天文方·막부의 공기관으로 천문 관측 및 역() 제작을 담당)을 맡고 있던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의 문하생이 된다. 30대 초반의 다카하시는 50대 이노의 청을 듣고 노인의 도락(道樂)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입문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형설지공으로 천문학을 공부하는 이노에게 크게 감복한 다카하시는 이노를 ‘스이호센세이(推步先生·推步는 별의 움직임을 관측한다는 말)’라 부르며 연령을 초월한 돈독한 사제 관계를 맺는다. 천문학에 심취한 이노는 거액을 들여 관측 도구를 구입, 에도의 자택을 아예 천문관측소로 개조하였다. 그의 천문 관측은 취미 생활을 넘어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일본 최초로 금성이 일본의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측하여 기록하는 개가(凱歌)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천문방은 기존의 역()을 개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책임자인 다카하시는 새로운 역인 ‘간세이레키(寬政曆)’를 완성하였으나 스스로 불만이 있었다. 당시 지식으로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역을 계산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과학자들은 네덜란드로부터의 전래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으나 자오선(子午線 ; 북극과 남극을 지나는 가상의 선) 1도의 거리를 확정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보다 정확한 역 제작을 위해서는 지구의 크기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천문연구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이노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평소 측량이 제일 관심사이자 취미였던 이노는 거리를 알고 싶다면 측량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구상 두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북극성이 관찰되는 각도를 측정한다. 두 각도의 차를 비교하면 위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측정 지점 간의 거리를 정확히 알면 위도의 차이를 대입하여 지구의 외주(外周)를 계산할 수 있다.
  

  이노의 발상에 당대의 최고 과학자 다카하시도 동의했다. 다만, 이 구상은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북극점 관측 지점 간 거리가 관측의 오차를 줄일 수 있도록 상당히 멀어야 하며, 또한 그 거리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리는 주어졌지만 실행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로 끝나 버릴 탁상공론이지만, 이노는 생각이 달랐다. 측량 마니아 이노는 직접 에도에서 일본의 북쪽 끝단인 에조치(蝦夷地·홋카이도의 옛 명칭)까지 걸어서 그 거리를 실측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결심이 인류 문명사에 남을 위대한 지도의 탄생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이노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17년에 걸친 10차례의 측량 여행

▲이노즈의 대지도 214장을 합친 모습. 이노즈 원본은 1873년 황거(皇居)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미국 의회도서관 등에서 발견된 사본이다.
  

  당시 홋카이도는 금단(禁斷)의 땅이었다. 막부의 허가 없이는 발을 들일 수 없다. 다카하시, 이노 사제(師弟)는 지도 제작을 명분으로 떠올린다. 18세기 말 이래 홋카이도 지역은 러시아의 접근으로 막부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홋카이도 동단에 위치한 네무로(根室)에 러시아 특사가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고, 북쪽 연안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무단 상륙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방의 관점에서 홋카이도 일대의 정확한 지도 제작 필요를 느끼던 막부는 다카하시와 이노에게 홋카이도 측량을 허락한다


  1800
, 이노는 에도에서 홋카이도를 목표로 측량 여행에 나선다. 이노가 55세 되던 해였다. 9인으로 구성된 측량대가 4월 에도를 출발하였다. 5월에 홋카이도에 도착하여 8월까지 해안 일대의 측량을 마치고 10월 에도로 복귀하는 총 6개월의 여정이었다. 측량 기간 동안 낮에는 하루 평균 40km씩 이동하며 측량을 하고 밤에는 천문 관측 기록을 남기는 강행군이었다. 이노는 측량 여행 중 매일같이 일기 형식의 기록을 남겼다. 귀경 후 3주에 걸쳐 측량 데이터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 12월에 막부에 제출하였다
  

  이노 지도의 정확성과 치밀함에 감탄한 막부는 이노의 공을 치하하고 동()일본 전체에 대한 지도 제작을 이노에게 의뢰한다. 지구의 크기 계산을 위해 나섰던 실측 여행이 이노도 알지 못하였던 천부적 지도 제작 능력을 끌어낸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노는 본격적인 전일본 해안선 측량 여행에 나선다. 1800년 제1차 측량부터 1816년 제10차 측량에 이르기까지 총 17년에 걸친 집념의 대여정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여행인 10차 실측에서 돌아왔을 때 이노의 나이는 고희(古稀)를 훌쩍 넘은 71세였다


  
봉인된 지도

▲에도 막부는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을 기려 이노 부자(父子)를 칼을 차는 무사로 신분을 높여 주었다.

 

  1817, 이노가 1차 측량에서 수집하지 못한 홋카이도 해안의 측량 데이터를 제자의 도움으로 마저 확보한 이노는 그동안 모은 데이터를 기초로 전일본지도 제작에 착수한다. 각 데이터에 기초하여 지역별 지도를 제작하고 이를 하나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노의 관심사는 일본열도의 해안선을 최대한 정확히 지면(紙面)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해안선은 정확한 일본의 모습과 크기의 구현을 의미한다. 이노는 이를 위해 곡면의 위치 정보를 평면으로 옮기는 오차 보정 계산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근대 유럽 지도의 투영법에 필적하는 발상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노는 일본 전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18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나머지 작업은 이노와 함께 호흡을 맞추던 제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노 사거(死去) 3년 뒤 대망의 〈대일본연해여지전도〉가 완성되었다
  

  1821 7월 에도성에서 막부의 고위 관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도의 공개식이 거행되었다. 이노가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한발 한발 걸어 측량한 일본의 해안선이 살아 꿈틀거리듯 담긴 지도가 펼쳐지자 보는 이들은 눈을 의심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1/36000 축척 대지도 214, 1/216000 축척 중지도 8, 1/432000 소지도 3장으로 구성된 지도는 규모와 정확성에 있어서 당대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너무나 정확한 지도의 제작에 놀란 막부는 이노 지도를 막부의 공식 문서보관서인 모미지야마문고(紅葉山文庫)에 비장(秘藏)하고 외부 유출을 금지하였다. 지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막부로서는 이러한 상세한 지리 정보가 일반에 유통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이노의 지도는 서양 세력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 거세지는 1860년대까지 막부 외의 일반 사용이 봉인되었다.   


 
지도의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막부는 이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였다. 막부는 1차 에조치 측량 이듬해 이노 다다타카(忠敬), 가게타카(景敬) 두 부자(父子)에게 ‘묘지타이토’(苗字帶刀·무사계급 신분의 상징으로서 성()을 사용하고 칼을 휴대할 수 있는 권리)를 허가, 신분 상승을 공인하였다. 이노가 측량 여행을 떠날 때마다 막부는 공무여행 통행증을 발급하고 소정의 여비를 지급하였다. 지도가 완성된 후에는 그 손자인 다다노리(忠誨)에게 봉록이 지급되고 에도에 사택이 제공되었다. 이노의 공적에 대해 막부는 대를 잇는 영예와 포상으로 보답하였다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지도 제작

  이노 지도의 정확성은 놀랍다. 그 정확성에는 비결이 있다. 첫째, 이노의 천문학 지식이다. 이노 지도가 동시대 여타 동양 지도와 가장 비교되는 점은 정확성이 아니라 기저에 깔려 있는 지도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사방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지리 정보를 표시하는 방격법(方格法)에 기초하였다. 지리는 철학, 사상, 관념과 분리되지 못하였다. 근대 지도의 요체인 위경도(緯經度) 좌표 개념도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이노의 지도는 동양의 관념적 지도를 배제한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최초 측량 여행의 동기가 자오선호() 길이의 계산에 있었던 만큼 이노는 구체(球體)로서의 지구와 위경도 좌표 개념 등 근대 천문·지리학에 입각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군대에서 독도법(讀圖法)을 배운 사람은 알겠지만, 현대 지도 사용의 첫 번째 단계는 현 위치 파악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지도 제작자가 각 지점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노는 지표면에서 실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측량 결과가 정확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노는 이를 위해 천문학 지식을 동원하였다. 태양과 주요 천체의 고도 및 운행을 관측하고 지표면의 주요 지형지물(주로 높은 산봉우리)을 통해 현 위치를 확인하는 삼각측량 방식을 고안하여 측량 결과를 지속적으로 검증하고 보정하는 한편, 이를 위도와 경도의 좌표로 설정하여 지도에 반영하였다.   


 
이노의 일기에는 총 3754일간의 측량 기간 중 1404일에 걸쳐 하루 수회에서 수십 회에 이르는 천문관측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측량의 결과, 이노가 실측을 통해 계산한 위도 1도의 거리는 현대의 측정치와 오차가 1/1000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노가 고안한 천체관측을 통한 지도 제작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읽었지만, 사실 문과 출신인 나로서는 전부 소화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이노의 천문학에 대한 지식과 지도 제작에 대한 이해는 현대의 일반인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발달된 측량기술이 뒷받침돼

▲이노 다다타카가 사용했던 양정거(量程車: 거리측정기·왼쪽)과 반원방위반(半圓方位盤·오른쪽).  

 

  둘째 비결은 일종의 사회적 공공재로서 일본 사회에 발전된 측량 기술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에도시대 들어 경제가 번성하면서 일본에는 각종 도로, 운하, , 수도 건설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하였고, 이러한 사정은 각종 지형지물의 거리, 각도, 높이 등을 측정하는 고급 측량 기술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노는 전문 지도제작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이노가 상인 시절부터 마을의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공공 토목사업에 참여하면서 측량의 기초를 접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노는 도선법(導線法)이라는 측량법을 사용하였다. 도선법이란 측량 지점에 폴(pole)을 꽂아 두고 다음 지점에 폴을 꽂아 양자 간의 거리와 각도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측정 지점 간의 거리, 각도, 방위, 경사도 등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용도의 계측 기구의 실용화, 상용화가 진전되어 있었다. 이노는 이러한 기구들을 구입하거나 필요에 따라 일부 개량하여 사용하였다. 에도 장안의 유능한 전문 기술자들과 협업하여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거나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노 지도 제작을 가능케 한 도구적 기초가 되었다

  

  33889km를 답사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부분도.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놀랍도록 정밀하게 일본 국토를 그려냈다  

 

  셋째 비결은 이노 자신의 집념이다. 아무리 천문학 지식이 풍부하고 뛰어난 측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직접 현장에 가서 측량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일본은 큰 나라는 아니지만, 해안선이 엄청나게 길고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현대 기술로 측정한 일본 해안의 총연장은 33889km로 이는 지구 외경( 4km) 85%에 이르는 거리이다. 이러한 해안선의 전모를 한 사람이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서 현장에서 실측을 하여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평균 수명이 40세이던 시대에, 이노는 쉰이 넘은 나이에 전일본 해안선 실측이라는 도전에 나섰고, 누구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그 도전에 성공했을 때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나이는 숫자일 뿐임을 증명한 이노의 집념과 생애는 어찌 보면 100년 인생이 주어지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와 관계없이 끊임없이 배움에 정진하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으로 위업을 이룬 이노의 생애는 메이지 시대에 과학적 사고, 근면, 끈기의 스토리로 초급 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이노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하나이자 본받고 싶어 하는 삶의 귀감으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노즈는 〈대동여지도〉보다 수준이 낮은 지도?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한국의 서적이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는 이노 지도와 〈대동여지도〉를 비교하는 글들이 종종 보인다. 상당히 많은 글이 〈대동여지도〉와 이노 지도를 우열의 관점에서 비교하고 있다. 일례로 어떤 지리공간 계측 전문가의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노 지도는 당시의 측량술인 거리와 방위에 의한 도선법으로 해안선과 도로를 따라 계측해서 작성한 지도이기 때문에 지도에 표기된 성과(成果)는 해안선과 도로, 전답, 호소, 섬 등에 그친 데 비해 대동여지도는 한반도 전역의 지형과 도로를 비롯하여 22종에 달하는 지형지물을 표기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지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 혼자의 힘으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 3대 지도를 만들고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등 3대 지지를 편찬한 김정호와 단지 측량에만 전념한 이노를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겠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낀다.

월간조선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