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백과사전 중앙일보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2022. 05.09
박정희가 말타고 달렸다더라...베일 벗는 靑, 인기코스는 '여기'

▲일러스트=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1: 걸어서 한바퀴(시설물과 등산로)
백악산 아래 청와대는 대통령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을 뽑아준 국민들은 접근하기 힘들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청와대의 담장은 높았다. 민주화가 진전되며 한발 한발 문을 열어왔지만 그래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이 많았다. 5월 10일, 이 완고한 철옹성이 나머지 빗장을 연다. 77년 만이다. 새 대통령은 용산으로 출근한다. 윤석열 당선인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로 이전의 의미를 밝혔다. 건축계에서는 익숙한 말이다. 집무실 이전을 놓고 건축가들도 의견이 나뉜다.
유현준 교수(홍대 건축학부)는 3월 17일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의 한 수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국방부에 강연 차 가본 적이 있는데 태어나서 봤던 뷰 중에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는 남대문까지가 경계였어요… 서울도 강남으로 확장되면서 훨씬 넓어졌지요. 중심축이 어떻게 보면 경복궁 쪽에서 용산 쪽으로 넘어오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
김진애 전 의원(MIT 도시계획 박사)은 3월 25일 KBS1라디오 인터뷰에서 말했다.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 있어요.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We shape our buildings and buildings again shape us). 굉장히 유명한 말이라서 우리가 이 말을 많이 써요. 그래서 우리는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다시 우리를 만든다. 그러니까 이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는 거죠. 그렇지만 공간보다 더 먼저인 건 사람입니다. 사람이 항상 더 먼저고 공간은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공간을 장악하는 겁니다.
…… 도시 계획도 그렇고 건축도 그렇고 모든 디자인이 우리가 공간을 잘 활용하는 이런 거를 하는 건데……(지배당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죠.”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문재인… 집무실을 청와대 밖으로 옮기려던 역대 대통령들이다. 국민과 소통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모두 거둬들였다.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했고, 경호가 어렵고 비용 또한 막대했기 때문이다. 집무실 이전은 대통령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좌 인력이 연쇄이동 하니 공간 재배치가 따른다. 주변지역과 연계한 경호체계 변화는 첨예하다. 청와대 인근의 경비는 물샐 틈이 없다. 백악산 쪽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서있다. 출입문은 여전히 기관총을 든 병사가 지키고 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며 광화문 정부청사 집무 공약을 포기했다. 대신 임기 첫 날 출입을 통제하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했다. 2주 뒤에는 궁정동과 삼청동에 있는 안가 12채 철거를 지시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와 과천 제2정부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려다가 포기했다. 대신 광화문청사에서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청와대 관람대상도 단체에서 개인·외국인으로 확대했다.2002년, 노무현 대통령은 충청권 행정수도 공약을 내세워 아예 서울을 뜨려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청와대와 주요 부처 이전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때 신무문이 경복궁 4대문 중 마지막으로 열렸다. 창의문에서 와룡공원에 이르는 북악산 성곽로 구간도 처음으로 개방했다.서울시장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청사 별관으로 집무실 이전을 검토했으나 역시 무산됐다.
'광화문 대통령'을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영빈관·본관·헬기장 같은 집무 공간 이외의 필수 부지를 찾지 못해서였다. 대신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열고 북악산 북측 탐방로를 개방했다. 경내 핵심시설 이외에는 거의 개방을 한 셈이다.
윤석열 정부 윤한홍 청와대이전TF 팀장은 4월25일 인수위 브리핑에서 “청와대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개방하며 2시간씩 6회 예약, 동시간대 약 6494명이 이용할 수 있고, 하루 입장 가능 인원은 3만 8964명”이라고 설명했다. 또 “청와대로 인해 단절된 북악산 등산로도 10일 아침부터 완전 개방한다. 등산로는 청와대 동편이나 서편 어느 곳에서나 출발할 수 있고 사전 신청 없이, 인원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관심이 폭발하며 4월 27일 관람 신청 개시 사흘 만에 예약자가 112만 명을 돌파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예약자들을 취소해 말썽이 일었다. 소란 속에서 약속한 전면개방 시간이 됐고 청와대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알고 가면 그만큼 많이 보인다.
※〈청와대 백과사전〉을 3회로 나눠 싣는다.
▶청와대 백과사전 1- 걸어서 한바퀴(시설물과 등산로)
▶청와대 백과사전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청와대 백과사전 3- 숨어있는 이야기(역사와 지형과 풍수)
1회에서는 청와대 경내 시설물과 주변에 숨은 사연을 살펴본다. (그림 속에 표시한 건물 위치와 대조하며 읽으면 알기 쉽습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청와대라는 이름
1104년, 고려 숙종 때 남경 궁궐이 들어서며 청와대 인근은 백성의 땅에서 권력의 땅이 됐다. 1382년, 우왕이 개경에서 옮겨왔으나 5개월 만에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후원으로 회맹단이 있었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맹세를 하는 장소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탄 뒤로는 관리가 되지 않았다. 1868년 경복궁을 중건하며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경무대(景武臺)란 이름의 후원을 만들었다. 일본 강점기인 1939년에 이곳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조선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지붕은 증산교 계통인 보천교 본당의 푸른색 기와를 가져다 덮었다. 일본이 패망한 뒤 총독관저는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의 관저가 됐다. 이를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가난한 신생국이라 관저를 새로 지을 여력이 없었다. 관저의 이름은 경무대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지명이 건물이름으로 바뀐 셈이다.
4.19혁명 뒤 윤보선 대통령은 이승만 정권과 단절을 노려 이름을 바꾼다. 작명을 부탁 받은 언론인 출신 김영상은 화령대(和寧臺)와 청와대(靑瓦臺) 두 가지를 내밀었다. 청와대(Blue House)는 관저 지붕의 푸른빛 기와에서 착안했다. 미국 백악관(White House)를 염두에 둔 말이다. 화령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며 명나라에 요청한 2가지 국호 중 하나다. 윤보선은 화령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며 청와대를 택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뒤 황와대(黃瓦臺)로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이 있었다. 황금빛은 황제의 색이다. 박정희는 대통령마다 집 이름을 바꿔서 되겠냐며 일축했다.
▲왼쪽 큰 기와집이 본관. 오른쪽 위 기와집이 관저. 아래쪽 건물군이 비서진이 근무하는 여민관이다. [연합뉴스]
대표 얼굴 본관
대통령이 집무를 보고 외국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을 맞는 공간이다. 광화문사거리에서 백악산을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이다. 본관 앞에 서면 고도가 높지 않은데도 사대문안과 남산까지 훤하게 내다보인다. 1991년 9월 4일 완공했다. 구 본관을 대신해 지었지만 청와대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왔다. 도자기처럼 구운 15만 장의 푸른 기와는 1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다. 전면 9칸이다. 귀마루(추녀마루)에 잡상 11개가 앉아있다. 전면 5칸에 잡상 9개의 경복궁 근정전보다 격이 높은 셈이다. 겉보기와 달리 나무가 아니라 콘크리트 건물이다. 2층으로 지은 본채 좌우에 붙은 별채는 같은 모양이다.
본채 1층에는 접견실·무궁화실·인왕실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백악실·집현실이 있다. 대통령 집무실은 100㎡가 넘는다. 입구에서 집무의자까지 15m다. 천장 높이가 3m로 2층 건물 높이이니 실내 체육관 수준이다. 배드민턴을 칠 수도 있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본관과 비서동이 멀어 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 비서동 옆에 집무실을 만들었다. 본관 정면의 좌측 별채에 세종실이, 우측 별채에 충무실이 있다. 국무회의를 여는 세종실 북쪽 벽면에는 일월도(日月圖), 남쪽 벽면에는 훈민정음 (訓民正音)이 장식돼 있다. 전실에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들이 걸려있다. 충무실에서 임명장을 수여하고 만찬을 연다. 내부는 운보 김기창 그림이 걸려있다.
본관 왼쪽 국기 게양대 두 개에는 태극기와 봉황기가 걸린다. 봉황기가 올라가 있으면 대통령이 경내에 있다는 의미다. 외국 VIP가 오면 봉황기 대신 그 나라 국기를 건다.
본관 현관 입구 양쪽에 ‘드므’라는 이름의 대형 항아리가 있다. 궁궐 방화수용이기도 하고 의례용이기도 하다. 불의 신이 불 지르러 와서는 물에 비친 자기모습을 보고 도망갔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문 앞에 있는 큰 바다라는 뜻으로 문해(門海)라고도 부른다.
본관 앞 넓은 잔디마당은 대정원으로 불리는데 국빈환영 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 전통의장대의 사열이 행해진다.
내부 공개 엄격한 관저
본관 오른쪽 뒤 깊숙한 곳에 있다. 1990년 10월 25일 완공했다. 대통령과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대통령 공간의 공사를 구분하려 만들었다. 경내 시설 중 공개를 가장 제한하는 곳이다. 사적 공간인 만큼 공식행사를 열지 않는다. 전속 사진사만이 내부에서 찍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세 번 공개했다.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과 그해 11월,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던 날이다. 이때도 입구인 인수문 앞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직후인 5월 15일 대문을 나와 출근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관저에서 본관과 비서동까지는 걸어서 보통걸음으로 10분 정도다.
대통령들이 청와대를 떠난 날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1998년 2월 24일, 김대중 2003년 2월 24일, 노무현은 임기를 마친 다음날인 2008년 2월 25일 아침에 떠났다. 박근혜 2017년 3월 12일 박근혜, 문재인 2022년 5월9일.
관저는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이루어져있다. 본채는 팔작지붕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 ㄱ자 형태다. 관저 바로 앞에는 위급 상황에 대비한 의무실이 있다.
200살 넘은 소나무 기둥 상춘재
상춘재(常春齋)는 1983년 4월 준공했다. 주 기둥은 200년 넘은 춘양목이다. 1983년까지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한옥이 한 채도 없었다. 외국 손님이 와도 전통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다. 방문객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쓴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던 자리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상춘실(常春室)로 이름을 바꿨다. 1977년 12월에 철거하고 1978년 3월 천연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을 지어 상춘재 이름을 붙였다. 방 2칸, 주방 1칸, 대청마루, 화장실 1칸, 대기실 1칸, 지하실로 구성됐다.
2019년 2월 26일 보수작업을 마친 뒤 맞은 첫 손님은 모하메드 빈 자이드 UAE왕세자였다. 3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이 만찬 회동을 한 장소다.
비서진의 공간, 여민관
여민(與民)은 '여민고락(與民苦樂)'에서 따왔다. 대통령과 비서진들이 국민과 기쁨 슬픔을 함께 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비서진들이 근무하는 공간이다. 여민1관(대통령집무실, 비서실장실, 정무수석실) 2관(민정·경제·일자리수석실 등), 3관(외교안보·국민소통수석실 등) 세 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여민1관은 2004년에 완공했다. 대통령이 본관을 떠나 비서진 가까이로 왔다. 2관은 1969년, 3관은 1972년에 건립해 낡고 허술하다. 여민3관 건물 외벽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해 일부 전력을 자체 공급하고 있다. 여민관 지하에 지하벙커가 있다.
프레스센터, 춘추관
청와대 프레스센터다. 춘추관(春秋館) 이름은 중국 사서오경의 하나인 춘추에서 가져왔다.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역사의 기록을 담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려·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담당하던 기관이 춘추관(예문춘추관)이다. 1990년에 완공했다. 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자료실 겸 간이브리핑룸이 있다. 2층에 대통령 기자회견과 각종 브리핑 등을 하는 브리핑룸이 있다. 300여 명이던 출입기자가 문재인 정부 들어 1000여 명으로 늘었다. 기자들은 주 3회 하루 3시간 이상을 근무해야 출입 자격을 유지한다. 청와대 직접 취재는 쉽지 않다. 춘추관과 청와대 경내는 분리되어 있다. 기자들은 주로 홍보 또는 국민소통수석실을 통해 취재한다. 기자접촉을 제한해 근무자 휴대전화를 언제든 조사할 수 있다는 각서를 받은 정부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 기자회견은 재임 기간 중에 8차례에 그쳤다. 윤석열 당선인은 용산집무실 아래층에 프레스센터를 두고 기자들을 자주 만나겠다고 밝혔다.
‘하나된 충성’ 경호실
청와대 정문에서 본관 들어가는 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는 건물이다. 왼쪽에 2개동. 오른쪽에 1개동이 있다. 비서진들의 공간인 여민관과 함께 본관과 관저를 호위하는 바리케이드다.
경호실장은 차관급과 장관급을 오가다가 현재는 차관급이다. 처장과 차장 외 소속원 500여 명의 신상 정보는 비밀이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12.12사태의 이면에는 경호실장의 월권도 있다. 당시 경호실장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이 김재규다. 이제 경호처 업무는 투명하게 공개된다. 2022년 1분기 경호처장 업무추진비는 총 5건 148만4330원이다. 간담회 2건에 54만원. 회의 3건에 94만 4430원을 썼다.
경호실의 모토는 ‘하나된 충성, 영원한 명예’다. 경호는 'VIP 대신 죽는 훈련'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본능적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VIP가 먹는 음식들도 이들이 사전 검식한다. 대통령은 혼자 라면을 끓여먹지도 못한다. 운영관에게 조리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대통령 내외와 동거중인 자녀는 본인이 거부하지 않으면 퇴임 뒤 10년 간 경호를 받는다. 퇴임 후 경호를 사양하는 경우는 없었다.
말 타고 다니는 산길, 기마로
본관과 관저 뒤쪽에는 2개의 산책로가 있다. 바깥쪽 능선 이름이 성곽로인데 외곽순환로인 셈이다. 청와대의 외부 경계다. 성곽로 끝에 있는 백악정 쉼터에서는 서울 사대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 안쪽에 있는 길이 이름이 기마로, 내부순환로인 셈인데 말을 타고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60년대 후반 일본식 군복 차림으로 경내에서 말을 타는 사진이 남아있다. 기마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경내를 전면 개방하면 인기 있는 코스가 될 테다.
밀실회의 대명사, 서별관
청와대 서쪽 끝에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이곳에서 진행된 '거시정책협의회'를 흔히 '서별관 회의'라고 불렀다.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중요 정책들을 결정하는 회의였지만 법적 근거가 없는 비공식 회의라 남은 기록도 없다. ‘밀실회의'라고 불린 이유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 관련 법개정,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대책, 노무현 정부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이명박 정부의 미국발 금융위기 대응, 박근혜 정부의 대우조선해양 지원 같은 굵직한 정책이 여기서 확정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특히 문제가 됐다. 세월호 참사 때는 특별조사위의 규모와 예산을 줄이는 회의를 여기서 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2019년 리모델링을 거쳐 오픈회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54년간 대통령 집무, 수궁터(구 본관)
1939년부터 1993년까지 54년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던 자리다. 1993년 11월 철거했다. 1989년에 본관과 관저를 분리하면서 구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철거를 지시했다.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守宮)들이 있었다 하여 수궁터라고 부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3년 10월 녹지원에서 열린 '문화융성의 우리 맛,우리 멋-아리랑' 공연. [청와대사진기자단]
매일 바뀌는 풍경, 녹지원(綠芝園)
경내 최고의 숲이다. 사계절 내내 풍경이 바뀐다. 역대 대통령 기념식수를 비롯해 120여 종의 나무가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장애인의날 같은 갖가지 행사가 열리는 장소다. 2019년 서울에 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과 산책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 5월 28일 인근 주민 약 3000여 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음악회가 열렸다. 5월 22일, 새 정부는 27년 만에 청와대 열린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이번에는 녹지원이 아닌 본관 앞 대정원이다.
13m짜리 화강암 기둥, 영빈관
1978년에 세웠다. 외국 국가원수가 방한할 때 민속공연과 만찬을 베푸는 공식 행사장이다. 100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 회의 및 연회 장소다.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다.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쓴다. 18개 돌기둥이 건물을 떠받들고 있다. 앞쪽 돌기둥 4개는 2층까지 뻗어 있다. 높이 13m에 둘레가 3m다. 전북 익산에서 나온 화강암을 통째로 깎아 이음새가 없다. 내부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새 정부는 대통령취임식 만찬을 이곳이 아닌 신라호텔에서 연다.
▲2015년 영빈관에서 열린 한중일정상회의. [청와대사진기자단]
왕비가 되지못한 왕의 어머니, 칠궁 (七宮)
청와대 서별관 뒤쪽 궁정동에 있다. 조선시대 왕을 낳았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위패를 모셨다.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비롯,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추존왕 원종의 생모), 대빈궁( 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경종의 생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 씨.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추존왕 사도세자 장조의 생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순조의 생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 영친와의 생모) 등 7개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8년 이후 출입이 금지되다가 2001년 11월 24일부터 청와대 특별관람객에게 제한 공개하고, 2008년 6월부터는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2018년 6월 일반인에게 시범 개방한 당시의 칠궁. [청와대사진기자단]
마지막에 열린 문, 신무문(神武門)
경복궁 북문이다. 청와대 본관과 일직선 상에 있다. 세종 때 경복궁 4대문 중 마지막으로 건립했다. 1954년 경복궁과 함께 개방했으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부대(당시 30사단)가 경복궁에 주둔하면서 폐쇄했다.
2006년 9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때 집옥재 권역과 함께 다시 문을 열었다. 신무문을 마지막으로 경복궁은 전역이 공개됐다.
▲하늘에서 본 백악산과 청와대 일대 그림. 시민들이 자유롭게 거니는 모습을 담았다. 경복궁 일대는 담장을 걷어내고 신무문만 남겼다. 철펜에 먹물 찍어 그렸다. 그림=안충기
(취재에 도움을 주신 김효형 눌와출판 대표,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회는 〈청와대백과사전 2-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입니다.
2022.05.11
대통령 성격 나오는 靑나무...아예 나무 안심은 두명은 누구?
2- 알고 걷는 재미(자연유산 문화유산)
▲일러스트=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백악산 능선에는 사연 많은 나무가 한그루 있다. 정상과 청운대 사이에 있는 소나무다. 풍경에 정신을 팔고 걷다보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나무 몸통에 난 구멍들을 시멘트로 메우고 그 위에 둥근 모양으로 하얗고 빨갛게 칠했다. 딱 사격 표적 모양이다. 그 옆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센터(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한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침투 간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 결과 침투한 31명 중 28명 사살, 2명 도주, 1명을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 예비군(68.4.1)이 창설되었다.
▲백악산 능선 1.21 사태 소나무. 변선구 기자
나무의 총탄 자국은 공비들이 백악산 능선을 타고 튀었음을 말해준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왔수다.”
생포된 김신조가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은 서늘했다.
1.21 사태는 예비군만이 아니라 육군3사관학교와 전투경찰대를 만들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을 실시하는 계기가 됐다. 북한에 복수를 하려고 만든 684특수부대에서 행해진 가혹한 대우는 실미도 사건을 불렀다. 그 뒤 인왕산과 백악산, 청와대 앞길은 절대 보안공간이 돼 일반인 통행이 막혔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하나는 생태 보존이다.
아이러니1- 청와대 나무들
총 맞은 나무 수령은 100년이 넘어 보인다. 꽤 나이 들어 보이지만 백악산에서 이 정도면 청년이다. 백악산은 길 아닌 곳은 갈 수 없고, 허용된 길이라도 다닐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비무장지대와 다를 바 없다. 백악산 식생이 철조망의 엄호를 받았다면 청와대 풀과 나무들은 정원사의 극진한 보호를 받아왔다. 그래서 청와대는 창덕궁 후원 못잖은 명품 정원이다. 나무마다 사연도 많다.
대통령과 나무
4월 5일이 식목일이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10년 4월 5일에 열린 순종의 친경제(親耕祭)다. 임금이 손수 나무를 심고 밭을 갈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며 청와대는 장충단 공원, 어린이대공원, 국립수목원, 독립기념관, 남산 등과 함께 때마다 대통령이 나무 심는 단골장소가 됐다. 식목일에 심은 나무와 남긴 메시지도 갖가지다.
“나무를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애국을 논할 자격이 없다” (1972년 박정희)
“가구마다 나라꽃 무궁화 1그루를 심자” (1992년 노태우)
“심고 보호하는데 그치지 말고 가꾸고 경영하자” (1994년 김영삼)
“산림녹화와 경제적 활용을 병행하자” (2000년 김대중)
“북악산을 전면 개방하겠다” (2007년 노무현)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63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공동으로 식목행사를 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은 녹지원에 무궁화 15그루를 심었다. 사진을 통해 청와대 나무들의 사연을 알아본다.
정문을 통해 본관으로 가다보면 대정원 양편에 키가 훤칠한 금강송 무리가 있다. 춘양목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강릉~원주간 영동고속도로를 만들 때 10그루를 옮겨다 심었다.
▲대정원 옆 금강송. [눌와]
본관 동쪽에 있는 1960년생 쥐띠 구상나무다. 1988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심었다.
▲노태우 대통령 구상나무. [눌와]
영빈관 동쪽에 있는 가이즈카 향나무. 박정희 대통령이 심었다.
일본 오사카 남부 가이즈카 지방이 고향이다. 1918년생 말띠이니 100살이 넘었다.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대구 달성공원에 가이즈카 향나무가 이땅에서는 1호로 알려져있다. 문화재청은 이 나무를 사적지 부적합 수종으로 결정한 바 있다. 서울현충원에 있던 이 나무들은 대부분 국내 수종으로 바꿨다. 일제의 상징이니 뽑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땅에서 자라면 우리 나무인데 감정적 접근을 경계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가 보는 노란 민들레는 대부분 서양민들레다.
▲박정희 대통령 가이즈카 향나무. [눌와]
영빈관 앞에 있는 무궁화.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김대중 대통령이 심었다.
▲김대중 대통령 무궁화. [눌와]
상춘재 부근에는 나무 120여 종이 자란다. 잔디밭에 있는 반송은 청와대의 상징 같은 나무다. 177세(2022년 기준) 먹었다. 키 12m, 폭 15m가 넘는다. 반송 옆에는 적송 3그루가 있다. 4그루로 보이지만 오른쪽 두 그루는 뿌리를 같이 하는 한그루다.
▲왼쪽이 적송 오른쪽이 반송. [청와대 경호처]
녹지원 뒤 숲에서 자라는 회화나무 고목 중 하나다. 단정하고 늠름하게 생겼다. 청와대 관람 안내인이 설명하는 자리이자 포토존이다.
▲사진 명소 회화나무. [눌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심은 동백나무. 녹지원과 이어진 상춘재 동쪽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 동백나무. [눌와]
상춘재 앞에 있는 백송. 전두환 대통령이 심었다.
▲전두환 대통령 백송. [눌와]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에 심은 독일가문비나무. 1944년생 원숭이띠다. 대통령 전용 헬기장 옆에 있다.
▲최규하 대통령 독일가문비나무. [눌와]
연풍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작은 공원인 버들마당이 있다. 여기에 훤칠한 용버들 한그루가 서있다. 이 땅에서 가장 굵고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감이다. 버들은 물을 좋아한다. 근처에 개울이 흘렀다는 증거다.
▲용버들. [눌와]
대정원 동편 소정원 한가운데 있는 이팝나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심었다.
▲박근혜 대통령 이팝나무. [눌와]
수궁터에 있는 주목. 줄기가 붉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썩어 천 년, 합해 삼천년을 간다’는 청와대에서 최고참 나무다. 743세(2022년기준) 잡수신 왕할아버지다. 그 왼쪽에 구 청와대 본관 터임을 표시한 호리병조각이 있다.
▲수궁터 주목. [눌와]
수궁터에 있는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복자기. 1980년생 원숭이띠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심었다
▲김영삼 대통령 복자기. [눌와]
성곽로 끝, 백악산 정상에서 청와대쪽으로 타고 내려오는 능선 중간에 백악정이 있다. 청와대 담장 밖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본래 정자가 없었는데 2004년 4월에 만들었다. 서울 사대문 안은 물론 아차산, 남산, 관악산까지 보인다. 이 한쪽에 2004년 5월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심은 서어나무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 서어나무. [눌와]
이명박 대통령이 심은 산딸나무도 백악정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 산딸나무. [눌와]
관저 앞, 관저와 침류각 사이에는 거대한 낙우송 무리가 서있다. 조경을 할 때, 광화문 쪽과 삼청동 쪽에서 관저를 가리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나무를 심을 때는 대개 정원의 가장자리에 심는다. 김영삼·박근혜 두 대통령이 심은 나무는 정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대통령의 성격과 나무 심는 위치도 연관이 있을까. 이승만·윤보선 두 대통령 이름이 붙은 나무는 없다. 당시는 경무대 시절이라 지금의 청와대보다 영역이 작았고, 식목이 다른 일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수 있겠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 잘 생긴 반송이 11그루씩 서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조경을 했지만 이름표가 붙어있지는 않다.
아이러니2
아이러니가 하나 더 있다. 백악산 청와대 일대의 문화유산이 알려진 과정이다. 드문드문 밝혀지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밝힌 곳은 학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청와대 경호처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경호실 직원 몇몇이 역사문화유산 관련 연구 동아리를 만들었다. 자료를 수집하고 발품을 팔아 펴낸 책이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다. 2007년의 일이다. 내용이 치밀하고 충실하다. 당시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청와대 내부와 인근의 문화유산을 새롭게 발굴하여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이는 단순히 호사가적인 관심의 충족이 아니라 그간 잊혀져왔던 이 땅의 역사와 내력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소개한 본격적인 문화유산 저술이라는 점에서 놀라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청와대 일대의 문화유산 몇 개만 살펴보자.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각자
1990년대에 대통령 관저 뒤에서 ‘천하제일복지’가 새겨진 바위를 발견했다. 청와대 자리가 예부터 명당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표석 왼편에 연릉오거(延陵吳据)라는 글자로 보아 중국 남송 연릉 지역 출신 오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 아래는 물이 솟는 천하제일복지천이 있다. 관저를 새로 지을 때 지금의 모습으로 주변을 정비했다.
▲천하제일복지각자. [청와대 경호처]
침류각(枕流閣)
오운정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손석희 전 앵커와 퇴임 인터뷰를 한 장소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枕流)는 뜻이다. 본래 관저 자리에 있었다. 1989년에 관저를 지으며 지금 자리로 옮겼다.
▲침류각. [청와대 경호처]
오운정(五雲亭)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며 후원인 경무대 만들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일제가 훼손하기 전인 1910년대 이전까지 이곳은 창덕궁 후원처럼 수려한 계곡과 정원이 있었다. 경무대에는 32개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오운각(五雲閣)은 임금 휴식처, 융문당(隆文堂)은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이고, 융무당(隆武堂)은 군사를 조련하는 장소였다. 오운정은 청와대에서 유일한 정자다.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 글씨다. 관저 자리에 있던 정자를 관저를 신축하며 현재 자리로 옮겼다.
▲오운정. [청와대 경호처]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 제작돼 경주 남산 계곡에 있던 불상이다. 이를 일제 때인 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서울 남산 총독 관사인 왜성대로 가져갔다. 1939년 총독 관사를 현재 청와대 자리에 만들며 함께 옮겼다. 관저를 새로 지을 때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몸체가 온전하고 연꽃문양을 새긴 대좌까지 남아있는 통일신라 석불은 많지 않다. 기독교 장로 대통령 시절에 불상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불상을 치워버렸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이명박 대통령 때는 일부 신도들이 성모상과 예수상을 함께 들여놓으라는 요구도 했다.
▲석조여래좌상. [청와대 경호처]
팔도배미 터
영빈관 앞뜰을 좌우 각각 8개 구역으로 나눈 공간이다. 1893년 고종이 신무문 밖에 경농재를 짓고 그 앞을 팔도를 상징해 8등분했다. 조선 8도, 즉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의미한다. 농사를 체험하며 풍흉을 살필 목적으로 만들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매년 봄 신하들과 전국에서 올라 온 곡식 종자를 심었다고 한다. 친경전(親耕田)이란 이름보다는 ‘팔도배미’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걸으면 보이는 것들
지난 4월 6일 백악산 남측 탐방로를 개방했다. 삼청 안내소~만세동산 약수터~청운대 쉼터~청운대전망대~법흥사 터~삼청 안내소로 돌아오는 코스다. 여유 있게 걸어 2시간 정도 걸린다. 4월 26일, 이 길을 한 바퀴 돌고 청와대앞길을 거쳐 분수대까지 걸었다. 코앞에 있는 청와대는 성곽로 능선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다. 경사가 급한 길을 숨 가쁘게 올라가니 샘터이자 쉼터인 만세동방이 나온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움푹한 홈으로 떨어진다. 마실 수 없으니 손이나 얼굴을 씻으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쉬고 있는데 산불감시원 아저씨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린다. 한 분은 신입으로 보였다.
“여기는 전국 일급지예요. 청와대 뒷산이라 그만큼 신경을 써요. 우리는 서울국유림관리소 소속이고요. 다른 데는 보통 오전 10시에서 7시까지 근무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1시간 빨리 일을 시작해요.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일당 7만3280원인 산불 감시원이 되기는 쉽지 않다. 15kg짜리 등짐 메고 2km걷기 체력을 시험한다. 기계톱질을 얼마나 잘하는지도 본다. 재산이 4억 원을 넘으면 응시를 제한한다. 고등학교 대학교 재학생도 안 된다.)
법흥사 터 한쪽 작은 샘에는 청둥오리 한 쌍이 수시로 물속에 머리를 박았다. 가까이 가보니 물속에는 올챙이가 바글바글했다. 지나가는 등산객이 말했다.
“저놈들 요즈음 신났어요. 이 계곡 곳곳에 있는 물웅덩이를 오르내리며 영양보충을 하느라고 바쁘거든요.”
백악산과 북악산
북악산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악산이 정확한 이름이다. 행정명칭도 백악산이다. 정상에 있는 표지돌에도 ‘백악산 해발 342미터’라고 새겨있다. 정상에는 두 개의 바위가 있다. 그 중 큰 바위에 오목한 홈이 몇 개 있다. 성혈(性穴)이라고 하는데 선사시대 이래 소원을 기원하며 표면을 오래도록 갈고 파낸 흔적이다. 예부터 ‘알바위’, ‘알터’, ‘알홈’ 등으로 부른다. 전국에 이런 이름을 가진 바위가 꽤 있다.
▲백악산 정상.
▲정상에 있는 알바위. 명식, 제정흡, 조민곤 세 명의 이름이 파여져 있다. 한 사람은 돌을 쪼다 말았는지 성만 새겨놓았다.
부아암(負兒岩)
정상에서 남쪽 방향으로 8부 능선에 툭 튀어나와 있다.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데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붙은 이름이다. 광화문 쪽에서는 돌출부위가 드러나지 않지만 동쪽이나 서쪽에서 보면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인다. 정도전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이 바위를 옮겨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정선 그림 속의 부아암. 간송미술관 소장.
법흥사 터(法興寺址)
백악산 동편 중턱에 있다. 신라시대 때 지은 절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자리가 협소하고 계곡물이 적어 스님 한둘이 생활할 수 있는 작은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55년 절집을 지었으나 1.21사태 뒤 폐쇄하고 지금은 건물터, 축대, 주춧돌만 남아있다. 이 길을 개방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주춧돌에 앉아 쉬었다고 작은 소란이 일었다. 부처님이 보셨으면 한바탕 웃었겠다.
▲법흥사 터.
만세동방(萬世東方)
북악산 동쪽 6~7부 능선 계곡 중턱에는 약수터다. 바위에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고 새겨져있다. 왕의 만수무강을 바라는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이 계곡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먹었다고 전해진다.
▲만세동방 약수터.
청계천 발원지
백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2005년 11월 종로구가 최장발원지를 조사했다. 백악산 서쪽 청운동 자하문 고개,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백악산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는 약수터다. 백악산 동쪽 촛대바위 부근의 해발 245m 지점(동경 126°58′41.8″, 북위 37°35′34.4″)을 발원지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촛대바위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 있다. 도성길과 붙어있다. 정남 쪽에 경복궁이 있다. 일제가 바위 정수리에 박은 쇠말뚝을 광복 뒤 빼내고 촛대바위라고 이름 붙였다.
▲촛대바위.
숙정문(肅靖門)
도성 4대문 중 북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조선시대엔 음양오행설에 따라 이 문을 열면 여풍(女風)이 분다고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었다. 북을 음이고, 남을 양으로 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4대문 중 유일하게 사람이 지나다니는 문이 됐다.
▲숙정문.
4ㆍ19 최초 발포 현장
청와대 서쪽 광장, 분수대 옆 바닥에는 동판 하나가 누워있다. 일부러 찾아야 보인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를 향해 처음으로 총을 쏜 현장이다.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추념해 2018년에 서울시가 만들었다.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모양(가로 35cm, 세로 35cm)이다. 서울시가 선정한 인권 현장 62개소 중 한 곳이다.
▲분수대 옆 4.19 첫 발포 지점.
분수대에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면 무궁화동산이 나온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안가를 헐어 내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행정구역상 궁정동이다. 1979년 10월26일, 이곳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을 맞고 숨졌다. 병자호란 때 청에 굴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헌 집터 옆이다. 현장에는 죽음의 자리를 표시한 어떤 활자도 없다. 당시 공원을 조성하던 이가 바위 두 개를 포개놓고, 그 위로 가지를 드리운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놓았다. 이 사정을 아는 사람만 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안가 터.
그림·글=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3-서울 타임캡슐 인근 동네 한바퀴
숨어있는 이야기(역사와 지형과 풍수)
효자동 이발사 억울한 최후...그곳 빼앗은 차지철 '섬뜩한 최후'
(내용이 넘쳐 3편에서는 청와대 인근 동네만 다룹니다. 역사와 풍수 얘기는 4편으로 넘깁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자하문로 큰길가에 있는 ‘토방’은 조그마한 한식당이다. 경복궁역에서 걸어 10분 정도다. 점심에는 식사를 내고 저녁에는 삼합이나 보리굴비 같은 술안주를 낸다. 5월 들어 갑자기 바빠졌다. “주로 단골손님들이 예약하고 오시는데 어느 날부터 지나가던 사람들이 불쑥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요. 처음 보는 분들이라 뭔 일 있나 했지요.” 곧 주인장은 개방한 청와대를 구경하러 온 이들임을 알았다. 일대가 다 그렇다고 했다.
청와대 인근 동네가 북적이고 있다. 이 일대는 주중 저녁에는 직장인들이 회식하러, 주말에는 젊은이들이 놀러 나오는 동네다. 이제는 요일을 가리지 않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밥집이건 찻집이건 손님이 넘친다. 중년여성들이 특히 많아졌다. (청와대는 말이 전면 개방이지 아직 핵심시설물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관람객들이 몰려 시설물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경내는 1시간 30분이면 돌아볼 수 있다. 잔뜩 기대하고 나왔다가 살짝 허탈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2% 갈증을 해소하려면 청와대 주변 동네 산책이 그만이다.
청와대 정문을 나와 동쪽으로 가면 삼청·팔판·소격·화·사간·송현·안국동이 나온다. 서쪽에는 청운·옥인·신교·궁정·효자·창성·통의·체부·적선·누상·통인·누하·필운·무악·사직동이 있다. 땅덩이에 비해 동네가 꽤 많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됐다는 얘기다. 그 구석구석마다 사연이 박혀있다. 일대는 서울 역사를 농축한 타임캡슐이라 할만하다.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는 경복궁과 관청들이 가까워 조선 왕족과 사대부들 집과 별장이 많았다. 풍경 또한 뛰어나 많은 문장가와 화가들이 이를 작품으로 남겼다. 2009년 12월 문화재청은 백악산 일대 360만㎡를 명승 제67호로 지정했다.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자리 잡은 나지막한 동네들 사연을 대충이라도 훑어본다. 작정하면 하루면 돌아볼 수 있다. 다리는 팍팍하겠지만 알고 다니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위의 행정구역도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청와대 서쪽 동네 한바퀴]
▲가운데 길로 따라 올라가면 자하문이다. 왼쪽이 무궁화동산, 오른쪽이 칠궁이다. 사진 가운데 서 있는 키큰 나무는 회화나무인데 연세 사백살이 훨씬 넘었다.
가노라 삼각산아-궁정동(宮井洞)
청와대 서쪽 칠궁 근처다. 육상궁의 ‘궁’과 온정동(溫井洞)의 ‘정’을 더한 이름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신위를 봉안한 궁이다. 온정동은 효자·궁정동 사이인데 겨울에도 더운 김이 나는 우물이 있었단다. 궁정동에는 나이 많은 나무들이 많다. 칠궁 안엔 약 310세 먹은 주목, 약 250세 드신 느티나무가 있다. 일반인이 드나들 수 없던 곳에 있어서인지 보호수로 지정하지 않았다. 칠궁 바깥에는 중국 굴피나무(약 456세) 등 보호수 세 그루가 있다.
영빈관 서쪽에 무궁화동산이 있다. 그 안에 김상헌 집터가 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척화파의 대표다. 인조 때, 청이 명을 치기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하는 상소 올렸다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그가 서울을 떠나며 읊은 시조다.
무궁화동산에 옛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속 건물인 안가가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안가를 모두 부수고 지금의 공원을 만들었다.
▲영화 속의 효자동 이발소는 실제로 있었다. 이야기야 물론 허구가 물씬 들어갔지만. [중앙포토]
차지철이 빼앗아간 집, 효자동(孝子洞)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서울 큰길에는 전차가 다니고 노선도 많았다. 청와대 앞 분수대 근처에 효자역이 있었다. 남대문 서울역을 거쳐 원효로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지호출판사 장인용 전 대표는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효자동과 청운동에서 오래 살았으니 토박이를 넘어 골수 서촌사람이라 할만하다. 어린 시절 이 일대에서 놀던 기억이 또렷하다.
“4.19 때 효자동에 살았는데 유탄 떨어진다고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이불을 씌워줬어요. 그때는 어려서 뭔지도 몰랐어요. 그저 신나서 이불 안에서 활개 치며 놀았지요.
지금 청와대 들어가는 길 입구가 전차 종점이었어요. 어릴 때 못을 납작하게 만들려고 철길 위에 올려놓은 게 반 부대는 될 거예요. 칼 만들어서 놀려고 그랬지요. 버스는 칠궁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자하문 쪽으로 올라갔고요. 자하문 옆에 백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었어요. 백악산과 인왕산을 잇는 스카이웨이는 1.21사태 이후 청와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길이지요. 지금의 무궁화동산 자리에 영화 ‘효자동 이발사’(임찬상 감독. 송강호 문소리 주연)에 나오는 이발소가 있었어요. 조그만 이층 건물인데 저도 거기서 머리를 깎았어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삼표연탄집 주인이 이발소 건물을 사려고 했는데 이발사 아저씨가 죽어도 안 판다고 버텼죠.
그러다가 경호실장 차지철이 강제로 뺏어서 안가를 만들었고 거기서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어요. 연탄가게 주인은 집을 바치고 가스와 철강 사업을 허가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희 외가 식구들도 차지철한테 당했어요. 평창동에 경호원아파트를 짓겠다고 땅을 징발하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거든요.
전차 종점 뒤 청와대 쪽으로 골목길이 있었고(지금의 경호처 자리 일부일 거예요) 거기에도 양옥집 7~8 채가 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 집들도 물론 차지철에게 몽땅 빼앗겼지요.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전에는 5월 5일이면 청와대를 어린이에게 개방했어요. 놀러 가면 연필하고 공책을 나누어줬어요. 그 때까지는 인왕산이나 북악산을 마음대로 다녔고요. 그때 창성동 별관은 국민대학교였어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은 청와대 앞길을 높여서 그랬는지 반 지하로 있었어요. 중국 주나라 성읍을 보면 왕궁의 북문 밖은 저자거리지요. 정도전은 유가이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신무문 밖 터가 협소하고 백악산이 버티고 있어 뜻을 못 이뤘겠지요. 그러니 유가식으로 보면 청와대는 시장터예요.”
▲일제강점기. 서울 전차 노선도. [경성진기주식회사 육십년 연혁사]
이 동네서 자란 조영현 대표(전남 장흥 풀로만목장)의 기억도 같다.
“경복궁 서쪽 담장길 그러니까 효자로를 파면 전차길이 나올 거예요. 당시에 공사를 하면서 철길을 걷어내지 않고 그냥 덮었어요.”
국민대가 서촌에 있었어? 창성동(昌成洞)
청와대사랑채 남쪽, 경복궁 서쪽 담장을 끼고 있는 동네다. 이 동네에 있던 국민대학교는 1971년에 정릉으로 이사 갔다. 인근에 왕궁에 어류·고기·소금·땔감을 대주는 관청인 사재감(司宰監址)이 있었다. 지금의 자하문로 일부는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흐르던 자리다. 냇물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금천(禁川 대궐 안 냇물)이 됐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근처에 서금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금천 서쪽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테다. 창성동에 있던 진명여고는 1989년에 양천구 목동으로 이사갔다.
▲2014년 통인시장을 찾은 존 케리 미 국무장관. [로이터]
선거 때면 정치인들이 눈도장 찍는 곳, 통인동(通仁洞)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관청을 출입하는 이들이 많이 살았다. 동네의 중심은 통인시장이다. 200m 길이의 시장 좌우에 80여개 가게가 늘어서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서촌 주변에 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 공설시장에서 출발했다. 선거 때나 명절 때가 되면 정치인들이 눈도장 찍으러 가는 단골장소다. 2014년에는 미국 국무장관 존 케리와 성 김 주한 미국대사가 다녀갔다. 무한도전 유재석과 광희, 스타킹 강호동이 먹방을 펼치기도 했다. 기름떡볶이집은 시장 명소가 됐다.
체부동 금천교 시장에도 1970년대부터 무쇠뚜껑을 놓고 기름떡볶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6.25가 터지기 전, 주인장 김정연 할머니는 개성에서 잠시 서울에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했다. 북에 두고 온 딸 셋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015년에 돌아가셨다. 전세금 7000만원을 비롯한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났다. 통인시장 입구에 있는 효자아파트는 청와대 직원들과 연예인들이 살던 고급 주택이었단다.
이 동네에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던 사저가 있었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세종도 서촌사람이다.
▲지난 3월 인수위 근처 통의동 김치찌개집에서 점심을 먹는 당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일행. [뉴스1]
천연기념물이 쓰러졌다, 통의동(通義洞)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금융감독원연수원과 금융연수원에 차렸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자는 통의동에 있고 후자는 삼청동에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인수위도 이곳을 사용했다. 청와대와 정부기관들이 주변에 몰려있고 여유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수위 사무실을 나서면 바로 먹자골목이다.
이 동네 있는 대림미술관 뒤에 백송 한 그루가 있었다. 이 땅에서 가장 크고 나이 들어 1962년에 천연기념물 4호가 됐다. 나무 덕분에 일대는 한때 백송동이란 행정동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 태풍에 넘어지면서 둥치만 남긴 채 고사했다. 천연기념물 자격도 해지됐다. 주민들이 주변에 후계목을 심었지만 아는 이만 둘러보는 장소가 됐다. 이 동네 있던 창의궁은 1910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일제가 조선을 수탈하려 만든 회사) 사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사택은 광복 뒤에 귀속재산(적산)으로 접수됐다. 그 뒤 땅을 나눠 주택들이 들어섰다.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 그림을 그린 자리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종로경찰서장 동상이 서있는 이유, 청운동(淸雲洞)
자하문에서 청와대로 내려가는 길, 윤동주 문학관 맞은편에 최규식 동상이 서있다. 최규식은 1968년 1·21일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을 때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숨진 종로경찰서장이다. 당시 함께 숨진 정종수 경사 기념비도 그 곁에 있다.
동네 이름은 청운초등학교 뒤쪽 계곡 청풍계의 ‘청’과 백운동의 ‘운’을 더한 이름이다.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서로 맞닿은 지점이다. ‘흰 구름이 아름답다’고 붙은 이름인데 현재 행정구역상 명칭은 아니다. 청풍계는 인왕산 아래 청운초등학교 후문 일대 계곡을 말하는데 대부분 주택가가 됐다.
조선 후기 제일 화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이 경복고등학교 부근에서 태어났다. 겸재는 그 뒤 인왕산 아래 군인아파트 부근으로 이사해 84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청운초등학교 터에서 송강 정철이 태어났다. 경복고는 본래 화동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옛 경기고.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서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로 세워진 뒤 청운동으로 이전했다. 경기상업고등학교도 동숭동에 있다가 1926년에 이사 왔다.
시위대가 사라졌어요, 신교동新橋洞
국립서울농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가 있는 동네다. 맹학교는 한국 첫 시각장애인 국립특수학교다.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다가 1931년 지금 장소로 옮겨왔다. 1959년에 서울농아학교와 서울맹학교로 나누어졌다. 청와대 앞에서 날이면 날마다 이어지는 시위로 학생들 고통이 컸다. 시각장애인들은 미세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확성기는 이들에게 흉기나 다름없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청운초등학교에는 다리 난간석 지주가 있다. 1970년 자하문를 넓히다가 발견해서 옮겨놓았다. 다리가 있던 곳은 신한은행 효자동 지점 앞 자하문로다. 자하문로는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백운동천이 흐르던 물길을 덮어 만들었다. 백운동천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1956년에 찍은 인왕산 아래 친일파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 아방궁이라 할만하다. [서울육백년] 대학당.
▲수성동계곡. 가운데 보이는 돌다리가 기린교, 오른쪽에 옥인아파트가 있었다. [중앙포토]
일제 부역자들이 탐낸 땅, 옥인동玉仁洞
수성동 계곡에 안평대군 집턱와 그 앞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기린교가 있었다.
교각 없이 긴 돌 2개를 뉘어놓은 소박한 모양새다. 이 다리는 1960년대에 옥인아파트를 지으며 잊혀졌다. 반전이 일어났다. 2009년에 일대 환경을 복원하려 아파트 철거를 추진할 때였다. 아파트 뒤에 가려있던 다리 모양의 돌이 드러났다. 사료들을 맞춰보니 기린교였다. 그 전까지는 엉뚱한 돌다리를 기린교라고 단정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었다. 종로구청은 이 일대에 옹벽을 세우고 허브공원을 만들려고 했다. 기린교의 등장으로 계곡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일대 전체가 서울시 기념물이 됐다.
▲펜으로 그린 체부동 성결교회. 그림=안충기
중국은 왜 서촌 교회를 사려했을까-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付洞)
배화여자중·고등학교 및 배화여자대학교가 있는 동네다. 연산군 때 지은 누각의 윗동네라 해서 누상동, 아랫동네라 해서 누하동이다. 두레엘리시안 아파트 맞은편 건물 공사 때 땅을 파보니 조선시대 배수로 시설과 건물터가 나왔다. 규모로 보아 인경궁으로 추측한다. 누상동에는 청와동(靑瓦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조선시대 각자다. 이 바위에서 인왕산 아래 있던 인경궁 푸른 기와가 보였단다. ‘청와대’ 이름을 여기서 따오지는 않았다.
체부동은 경복궁역에서 자하문 쪽으로 가는 길 초입 왼쪽 동네다.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금천교시장이다. 아기자기한 음식점들이 늘어서있고 철물점도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 중 하나다. 청춘 핫 플레이스가 됐다. 골목 속에 서울미래유산 성결교회가 숨어있다. 1931년에 완공했다. 시대별로 달라지는 벽돌 쌓기 방식을 볼 수 있다. 2014년 중국 자본에 넘어갈 뻔했는데 서울시가 매입해 ‘생활문화지원센터’로 용도를 바꿨다. 외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는 보수해 각종 생활 문화 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교회와 역사를 같이 한 한옥 별채 ‘금오재’도 남게 되었다.
경복궁역 네거리에 금천교가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졌다. 바로 옆 시장의 이름은 이 다리에서 따왔다.
경복궁은 싫어 이 동네가 좋아, 필운동(弼雲洞)
동네 이름은 ‘필운대’에서 따왔다. 이 동네 배화여학교는 본래 미국 선교사 캠벨이 세웠다. 서울지방경찰청 부근에 있다가 1916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일대가 인경궁 자리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뒤 광해군은 경기도 교하로 천도하려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라는 승려의 말을 믿고 인경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누르려 경덕궁(경희궁)을 지었다. 경희궁보다 컸던 인경궁은 결국 완공하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다. 정확한 규모와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경궁의 남쪽 경계가 경덕궁일 것으로 추정한다.
▲사직단.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된 제례 준비 공간 전사청(典祀廳) 권역을 복원해 지난 10일 개관했다. [연합뉴스]
향나무는 본래 담장 안에 있었다, 사직동(社稷洞)
사직단이 있는 동네다. 사직단은 조선 때 토지 신 사(社)와 곡식 신 직(稷)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다.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사직단 주변에는 소나무 또는 잣나무처럼 늘 푸른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정문 앞에 서있는 늙은 향나무는 본래 사직단 안에 있었으나 길을 내며 담 밖이 됐다. 이 동네에는 단군성전도 있다. 본래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가 헐어내 현재 위치에 다시 지었다. 성전 안에는 정부 표준 단군 영정과 단군상이 있다. 경희궁 뒤에는 이름난 활터인 황학정(黃鶴亭)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치마바위를 쪼아 새긴 글자들. 1940년 촬영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치마바위에 몹쓸 짓한 놈들
인왕산은 사대문 안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인다. 주산인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 초에는 서봉·서산 이라고도 불렸다. 1537년 중종 때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서열 1위가 공용경, 2위가 오희맹이었다. 임금은 경회루에서 이들을 접대하며 북쪽 백악산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공용경은 백악산을 공극(拱極), 오희맹은 인왕산을 필운(弼雲) 지었다. 이 이름이 필운대와 필운동으로 남았다.
걷다가 고개를 들면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보인다. 인왕산 남쪽 끝 누상동에서 무악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1968년 인왕산에 길을 내며 폭파해서 없앤단다. 삿갓바위는 인왕산 남쪽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데 있다.
정상 아래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바위가 치마바위다. 인왕산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내용이 비슷한 여러 버전의 전설이 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경회루에서 인왕산 기슭에 있는 폐비 신씨 집을 바라보곤 했단다.
그걸 알게 된 폐비가 이 바위에 치마를 걸어놓고(또는 흔들며) ‘여보 나 여기 있어’라고 했다는 얘기가 그중 하나다. 병풍바위라고도 부른다. 치마바위는 일제강점기에 수모를 당했다. 1940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도성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대형 글자를 새겨 넣었다.
東亞靑年團結 동아청년단결
皇紀二千五百九十九年九月十六日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朝鮮總督 南次郞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大日本靑年團大會 대일본청년단대회
당시 1만 1454원을 들여서 7개월 동안 작업했다. 광복 뒤인 1950년 서울시가 82만원을 들여 이를 삭제했지만 매끈하던 바위에는 역사의 어지러운 흉터가 남았다.
▲인왕산 선바위. 서울시 [서울문화재대관]
정상 못미처 동쪽에는 매부리바위가 있다. 하늘로 향해 뻗은 매의 머리모양인데, 틈에 자라는 소나무가 부리처럼 보인다. 남쪽 능선 정상 부근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아슬바위라고도 한다. 무악동에는 선바위가 있다. 우뚝 선 모양, 또는 승려가 장삼 입은 형상이라고 붙은 이름이다. 기도처로 소문났다. 조선 초 도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도성 성곽 안에 둘 지, 밖에 둘 지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무학은 성내파고 정도전은 성외파였다. “들이면 불교가 흥하고 내보내면 유교가 흥한다”는 정도전의 말을 이성계가 들어줬단다.
[청와대 동쪽 동네 한바퀴]
▲삼청동 총리공관 일대. 저 멀리 인왕산 춘추관과 인왕산이 보인다. [청와대 경호처]
총리공관 자리에 살던 부끄러운 이들, 삼청동(三淸洞) 팔판동(八判洞)
세종문화회관 뒤 당주동이 고향인 이충렬 전기 작가는 어린 시절 삼청동으로 놀러다녔다.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올라가는 길이 그때는 물이 제법 흐르는 개울이었어요. 친구들과 물길을 따라 올라가 삼청공원 숲에서 술래잡기를 했지요. 유치원 때는 소풍가서 나무나 바위 밑에 선생님들이 숨겨놓은 보물찾기도 했고요.”
지금처럼 민가가 들어서기 전 삼청동 계곡은 물이 제법 많았다. 삼청동 이름은 삼청전(三淸殿)에서 왔다는 설,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인심 도 맑다(人淸)는 말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도성 안에서 백악의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산의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남산의 청학동이 그 다음’이라는 기록도 있다.(용재총화).
대한제국 말 고종은 지금의 총리공관 일대 땅을 이윤용(이완용의 배다른 형)에게 하사했다. (그 옆 땅 주인은 친일파 송병준이었다.) 친일파 민규식이 여기서 살았고,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도 쓰였다. 정부 수립 뒤 잠시 국회의장 공관으로 썼다. 1961년 5월 당시 내각수반인 송요찬이 집무하면서부터 총리 공관이 됐다. 삼청동에는 조선초부터 화약고가 있었다. 안전 문제 때문에 민가가 드문 한적한 산 속에 지었을 테다.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안에 있는 기기국 번사창. [대통령 경호처]
금융연수원 안에 번사창이 있다. 조선말 기기국 소속 건물이다. 기기국은 고종 때 지은 한국 최초의 신식 무기 공장이다. 지붕 모양, 벽돌 쌓기, 창문 형태 등에 중국과 서양식이 섞여 있다. 중국 톈진 출신 기술자들의 손을 빌어 지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세균실험실로, 미군정 때는 중앙방역연구소로, 정부 수립 뒤에는 사회복지연수원으로, 1970년 이후에는 한국금융연수원 소유가 됐다.
팔판동은 조선시대 판서 8명의 판서가 살았다는 ‘팔판서골’에서 유래했다.
근대 교육의 중심지, 화동(花洞)
조선시대 왕궁의 꽃을 기르고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 서쪽인데 사육신 중의 하나인 성삼문의 집터이기도 하다. 지금 정독도서관 자리에 한국 첫 정규 중등교육기관인 한성중학교가 있었다. 대한제국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서재필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가산을 몰수했다. 이들의 집터 위에 한성중학교를 세웠다.
이후 박제순 집터도 학교 터로 들어갔다. 한성중학교는 한성고등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갔다. 1938년에 지은 학교 건물은 스팀 난방시설까지 갖춘 당시 최고급 건축물이었다. 광복 뒤 이름을 경기고등학교로 바꾸고, 1976년 강남으로 이전했다.
▲건춘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점선). [대통령 경호처]
사연 많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소격동(昭格洞)
소격동은 화동과 함께 서울 북촌의 중심이다. 북촌이란 종로의 윗동네 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말한다. 풍수지리상 길지로 여겨져 사대부와 왕궁 및 관청 관계자들이 많이 살았다. 도교의 제사인 초제를 주관하던 소격서가 있었다. 지금 소격동의 절반 정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1980년에 전통가옥 보존지구로 지정됐는데 10년 뒤 해제했다.
한때 광화문은 소격동에 있었다. 일제가 1918년 조선총독부(1918년 8월 25일~1929년 10월 1일 완성)를 지을 때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긴 것. 1968년이 돼서야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으로는 종친, 외척, 왕궁 관계자들이 주로 출입했다. 조선시대 종친은 왕의 4대손까지를 말한다. 건춘문 맞은편에 역대 왕실관련 각종 사무를 보던 종친부가 있다. 종친부 옆에 왕의 기록과 친필 등을 보관하던 규장각이 있었다. 창덕궁에 있다가 옮겨왔는데 지금은 서울대학교 안에 있다.
일제는 종친부 건물 일부를 수도육군병원으로 썼다. 이 자리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설병원, 서울대의대 제2부속병원, 제36육군병원, 수도육군병원, 국군수도통합병원, 육군보안사령부, 국군서울지구병원, 테니스장으로 쓰다가 2013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됐다. 종친부 건물도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현재 남아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설병원 건물은 서울대 의학부 건물과 함께 이땅에서 가장 오래된 의료 건물 가운데 하나다.
▲풍문여중, 풍문여고 자리. 왼쪽 3층 건물은 1965년까지 있었다. [종로구청]
송현동(松峴洞) 대부분은 이건희미술관(옛 미 대사관 직원 숙소)이 들어설 자리와 덕성여중이 차지하고 있어 주택은 몇 채 안 된다. 소나무가 많은 고개 ‘솔고개’ 또는 ‘솔재’에서 온 이름이다.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보완하려 보호하던 소나무 숲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출구에서 북촌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이 안국동(安國洞)이다. 덕성여고와 공예박물관(옛 풍문여고)이 있는 동네다. 골목 안쪽에 청국장 잘하는 별궁식당이 있다. 꼬릿한 냄새를 잡아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다.
이 일대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청와대 개방이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님이 많아져 좋지만 가게 세가 뛸까 겁난다. 가로수길, 홍대앞, 경리단길 같은 데서 벌어진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를 봤기 때문이다. 골목길 안쪽에 사는 원주민들은 조용하던 일상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통의동에는 역사 책을 주로 내는 출판사 푸른역사가 있고, 또 역사 전문서점 역사책방이 있다. 동네 분위기와 어울린다. 2006년 이 동네 한옥에 자리 잡은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에게 물어봤다.
-청와대 개방 뒤 사람 많이 늘었지요?
“서촌 일대는 일요일에는 비교적 한가했어요. 그런데 일요일에 점심 식사하러 나왔더니 북적북적해요. 경복궁~청와대~토속촌 삼계탕 코스는 코로나 이전에 중국 단체관광객들의 기본 동선이었어요. 이 코스가 부활할 수 있겠네요.”
-동네를 걸으며 사람들이 무얼 보면 좋을까요.
“상층 양반문화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북촌에 비해 서촌은 열린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시인 이상·윤동주, 화가 이쾌대·이여성 형제 같은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았겠지요. 특정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조선시대 이래 해방공간까지 이곳에 살던 이들을 생각하며 걸으면 색다른 느낌일 거예요. 곳곳에 우리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잖아요.”
-개방한 청와대가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하겠어요.
“어떤 형태로 재탄생할지는 이쪽 동네 사람들 목소리도 들어봐야 해요. 세계 최대 공연장을 짓자는 허황된 얘기도 나오는데 여기만큼은 성장개발의 논리가 미치지 않았으면 해요,”
-실패하지 않을 동네 밥집 몇 개 찍어주세요.
곰탕은 한옥식당 ‘고래’, 오리로스·닭백숙·장어탕은 토속촌 옆 ‘순이네’(옛날 인심이 살아있어요), 이탈리아 음식은 ‘더솔키친’, 메밀국수는 ‘메밀꽃 필 무렵’, ‘꾸스꾸시’에 가면 튀니지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걷기 좋은 코스 하나 꼽는다면….
옥인길~수성동계곡~인왕산 둘레길~더숲초소카페가 좋아요. 카페 앞에서 시내를 보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려요.
(더숲초소카페는 일대를 지키는 군 경비초소가 있던 자리에 만들었다. 주차 공간이 몇 대 안 돼 차 가지고 가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박혜숙 대표가 추천하는 산책 코스
약이 되는 정보 둘
▶청와대 앞길약 500m 차 없는 거리 운영시범 운영: 5월 28일부터 6월26일까지 주말과 공휴일 12회.
▶인왕산로 차 없는 거리를 시범 운영: 호랑이 동상부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약 1.5㎞ 양방향. 5월 22일, 29일 8시~12시 2회.
글·그림=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05.27) 4-전면개방까지83년
벚꽃필때 靑서 태어났다…이승만이 '김경숙' 이름 준 아기 정체
청와대들 둘러본 이들의 반응은 ‘우와’파와 ‘애걔’파로 나뉜다. 전자는 생각보다 크고 호화롭다는 쪽이고, 후자는 소문과 달리 별거 아니라는 쪽이다.
금단의 땅, 구중궁궐, 철옹성…. 쉽게 접근할 수 없던 청와대를 두고 하던 말들이다. 철옹성은 쇠로 만든 항아리처럼 방비가 튼튼한 성을 말한다. 평안북도 영변에 고구려 때부터 실제 있는 성이다. 근처에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익숙한 약산이 있다. 공교롭게도 철옹성 바로 아래 영변 핵시설이 있다.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청와대는 금칠한 아방궁도 철옹성도 아니었다. 신경 써서 관리한 큼지막한 정원이랄까.
청와대 개방은 역대 대통령들의 단골 이벤트였다. 여기에는 패턴이 있다. 국민과 터놓고 소통하겠다 → 소통하겠다 → 하겠다 → (…) → (……).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권력자들은 대중 앞에 나서는 빈도가 줄어든다. 그러면서도 청와대는 조금씩 개방 폭을 넓혀왔다. 지난 정부 때는 핵심시설을 제외하고는 다 둘러볼 수 있었다. 마지막 남았던 공간도 곧 모두 공개한다.
청와대가 그간 어떤 순서로 문을 열어왔는지 살펴본다.
▲1955년. ″어린이 여러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인재가 돼야합니다″ 경무대에서 어린이들을 만나는 이승만 대통령. 탁자 위에 선물이 쌓여있다. [국가기록원 기록물 뷰어]
수학여행 코스, 이승만
경내 개방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있었다. 한국전쟁 뒤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서였다. 1957년부터 날짜를 정해 경무대(景武臺 청와대 옛 이름) 바로 앞까지 공개했다. 이 해에 만삭의 임산부가 벚꽃 구경을 하다가 안뜰에서 아기를 낳았다.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경무대의 첫 글자를 따서 김경숙(金景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경무대동이’라는 별명을 얻은 아이는 이듬해 1월 경무대 초청을 받고 대통령 부부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1988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수소문 끝에 세무공원이 된 경숙 씨를 30년 만에 만났다. 지방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경무대를 구경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시민들을 만나는 윤보선 대통령. 1961년 4월 15일자 경향신문 3면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윤보선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8월에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했다. 12월 30일 경무대는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다음 해 4월 15일 윤보선은 청와대 문을 열고 상춘객들을 만난다. 그때 경향신문 기사 내용이 다음과 같다.
『허허! 요즈음은 내 집이 한결 사람 사는 맛이 나는구료-』 十四일 평민대통령 행위(海葦)선생은 「골덴」복에 「스틱」을 짚은 채 청와대를 찾아든 상춘객들과 환담을 하고 있었다. 지난날 줄지어 질서정연(?)히 경무대를 구경하던 긴장된 시민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환해진 얼굴로 마음껏 대통령 관저일대를 구경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날 하루에도 청와대를 찾는 시민은 무려 四만 여명이나 된다고…
한 달 뒤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광화문 문루 네 곳에 벙커,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도 집권 초반에는 제한적이나마 청와대를 열었다. 어린이날이면 아이들을 만나 공책과 연필을 나눠주고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1966년에는 4월 1일부터 27일까지 개방했다. 첫날 1만여 명이 방문했다. 1967년 4월 22일에는 4만3000여명이 방문했다. 대부분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했다. 이때부터 청와대는 외부에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1974년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 총에 피살된 뒤 통제는 더 심해졌다. 청와대 주변 도로를 전면 차단하고 인왕산과 북악산 등산로도 막았다. 이해 12월 11일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귀퉁이에는 방어시설인 벙커를 설치했다. 인근 주민들은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생활도 제한받았다.
1년도 못 채운 최규하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12쿠데타 뒤부터 1980년 8월까지 청와대에 머물렀다.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해 10개월 정도다. 취임 초에는 관저를 수리하느라 총리 관저에서 79일간 청와대 집무실로 출퇴근했다. 극도로 혼란한 정국이었으니 청와대를 개방할 여유도 없었다.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직후 현장을 조사하는 한국과 버마 합동조사단. [중앙포토]
꽁꽁 걸어 잠근 전두환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식 날 골라 뽑은 시민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취임 초인 1980년 말에는 효자동과 팔판동 일대 통행을 일부 허용했다.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뒤 일대는 다시 전면통제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특별한 날에나 청와대 문을 열었다. 1984년에 경내 첫 전통 한옥인 상춘재를 짓고도 준공식을 하지 않았다.
▲1988년. 청와대를 방문한 시민들.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
야당 총재도 참석한 본관 준공식, 노태우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청와대 개방을 내세웠다. 취임 뒤 1988년 3월 1일 충북 음성에서 온 나환자 300여 명 등 959명을 영빈관으로 초청했다. 다음 해는 2월 24일부터 5일간 전국에서 온 5000여 명이 경내를 관람했다. 노 대통령 때 청와대 본관을 지었다. 준공식에는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도 참석했다. 준공 다음 날 첫 공식행사에는 회사원 택시기가 주부 등 ‘보통사람’을 초청했다. 하지만 상시 개방이 아닌 상징적인 행사였고 개방은 점차 흐지부지됐다.
▲1993년 5월 5일. 청와대는 어버이날을 맞아 어르신 203명을 초청했다. 몸이 불편해 직원의 등에 업혀 입장하는 노인을 맞는 김영삼 대통령 내외. [중앙포토]
화끈하게 풀었다,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정오, 청와대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리케이드가 사라졌다. 낮에는 승용차와 관광버스가 이 길로 다니게 됐다. 효자로는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팔판로는 24시간 내내 화물차를 빼고 모든 차의 통행을 허용했다. 민간인에게 청와대 앞길 개방은 1·21사태 뒤 처음이었다. 개방 초에는 구경꾼이 몰려 주말마다 일대에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인왕산 등산로도 일반인에게 열었다. 주변 환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는 당시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1993년 2월 28일 19면)
청와대일대 땅값 “들먹”/옥인·효자동 등 “도심 최고주거지역” 눈독/「고도제한 완화」 소문도 가세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과거 25년 동안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25일부터 개방됨에 따라 옥인동·누상동·효자동·팔판동 등 서울중심지 10여개 동 일대의 부동산경기가 꿈틀거리고 있다.특히 서울시가 이 지역의 개방에 따라 효자로·삼청동길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경복궁주변 6천필지 35만여평에 대한 고도제한을 현재의 10∼15m에서 12∼20m로 완화할 계획으로 알려져 땅값 부추김을 자극하고 있다.
◇거래문의 급증=26일 이지역 일대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통제조치가 풀린 25일 이후 부동산중개업소 등에는 시세와 매물종류 등을 문의하는 전화가 하루 최고 20통씩 걸려오고 있으며 부동산업소를 직접 찾는 사람들도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이다.특히 풍치지구로 지정된 인왕산 입구지역이 올 상반기 중 해제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아 본격 이사철이 되면 매물 등을 찾는 발길이 잦아질 전망.◇부동산 가격=인왕산 자락을 끼고 있는 청운동 청운아파트(5백76가구) 11평형은 한달 전까지만 해도 5천만 원에 거래됐으나 최근 들어 7천만∼8천만 원을 호가하고 있다.지난해 말까지 1억 원 선에서 거래됐던 옥인동 옥인아파트(3백여 가구) 18평형도 1억2천만원선으로 올랐고 앞으로 값이 더욱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매물은 자취를 감춘 실정이다.
◇개발전망=69년에 건축된 5층 규모의 청운아파트주민들이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청운동 56일대 노후불량주택 50여 가구 주민들도 재개발을 요구하고 있어 고도제한규정이 완화될 경우 도심과 가까운 최적의 주택지로 개발될 전망이다.이밖에도 서울시는 신교동 12일대 2천 평과 누상동 166일대 2만여 평을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이미 지정했으며 옥인동 47일대 3만여 평도 지구지정을 추진 중이어서 주민들은 개발기대에 부풀어 있다.〈정형모·이훈범기자〉
날짜만 바꾸면 2022년 현재 상황과 흡사하다.
▲2001년 11월 22일. 공개한 칠궁을 둘러보는 용인 용마초등학교 학생들. [중앙포토]
한해 관람객 20만 명,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개방구역과 대상이 더 늘어났다. 단체만 가능하던 관람을 취임 첫해인 1998년에 개인과 외국인에게까지 허용했다. 이 해에 관람객이 20만 명을 넘었다. 2001년 11월에는 칠궁도 열었다.
▲2007년 4월5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서울 성곽을 따라 숙정문을 거쳐 와룡공원에 이르는 새 개방구간을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둘러보고 있다. [중앙포토]
백악산과 신무문까지,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때는 본관을 경유해 녹지원까지 둘러볼 수 있게 됐다. 2004년 10월 19일에는 경회루도 개방했다. 이때까지 경회루는 2층에서 청와대가 보인다는 이유로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2006년 9월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열었다. 1·21사태 뒤 38년 만이었다. 다음 해 4월에는 숙정문이 있는 백악산 성곽로를 열었다. 청와대 주변 등산로 개방은 처음이었다. 노 대통령은 “혼자 보기가 좀 미안한 것 같더라"고 소회를 밝혔다.
▲2009년 8월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광복절 행사를 마친 뒤 8000번 버스를 타고 청와대 앞에서 내리는 이명박 대통령. [중앙포토]
비운의 8000번 버스, 이명박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분수대 앞에 관광홍보관인 청와대 사랑채를 열었다. 8000번 버스도 다니기 시작했다. 청와대 앞길을 다니는 시내버스는 처음이었다. 분수대 앞~국립민속박물관~경복궁~안국동~조계사~종각역~을지로 입구~롯데백화점~북창동~숭례문~서울역 순환코스를 운행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만 허용하던 청와대 관람을 매주 토요일로 확대했다. 8000번 버스는 4년 8개월 만에 없어졌다. 20억 원에 달하는 누적 적자 때문이었다. 노선을 두 차례 바꿨지만 늘지 않았다. 당시 시내버스 한 대당 평균 승객은 하루 700여명인데 이 버스는 100명이 안 됐다.
다시 구중궁궐,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대중과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간 진행해온 개방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탄핵 뒤 치러진 대선에서 집무실 이전이 공약이 다시 등장했다.
▲청와대를 방문한 시민들에게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트위터]
백악산을 다 풀었다,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 다음 달인 6월 26일부터 청와대 앞길을 완전히 개방했다. 이때부터 검문 없이 밤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2020년 11월 1일에는 북악산 북측 등산로를, 퇴임 직전에는 남측 면까지 열었다. 이로써 백악산은 54년 만에 막힘없이 다니게 됐다.
▲청와대와 경복궁 일대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을까.
고려시대부터 서울 천도를 꿈꿨다
고려는 수도 개경 바깥에 삼경(三京)과 삼소(三蘇) 두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의 영향이다. 문종 때는(1067년) 지금의 서울 일대인 양주 이름을 남경(南京)으로 바꿨다. 이듬해 신궁(新宮)을 지었는데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추정한다. 그 뒤 여러 왕이 이용하던 왕궁은 인종 때(1128년) 불이 난 뒤 온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1232년 몽골군이 침입하자 고종은 강화로 천도했다. 공민왕은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 남경 천도를 꿈꿨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왕과 공양왕 때도 천도를 추진했지만 고려는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였다.
▲겸재 정선 그림 '경복궁'. 1754년(영조 30)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5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복구를 못한 경복궁 모습이다.
청와대 한옥 두 채가 전남 영광에 간 이유
조선 시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밖에는 회맹단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회맹(會盟)은 왕이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하고 논공행상을 행하는 의식이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다. 고종 때 중건하기까지 270여 년간 폐허로 있었다. 청와대 일대도 마찬가지다. 그때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경복궁은 중건 뒤 1896년까지 34년간 다시 제1궁 역할을 했다. 다시 전각들이 들어차며 궁 안이 비좁아지자 청와대 지역에 후원을 만들며 부속 건물들을 지었다.
융문당과 융무당을 만들고 일대를 경무대(景武臺. 융문당 후문이 경무문)라고 이름을 붙였다. 융문당은 과거 시험장이고 융무당은 군대를 사열하거나 훈련을 참관하는 곳이다. 지금의 상춘재와 녹지원이 일대다. 이들을 포함해 오운각, 옥련정 등 모두 488칸의 건물이 있었단다. 1905년에는 옥련정 가까운 곳에 연회장용으로 침류각을 지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들 건물 상당수가 사라졌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1928년에 해체해 진언종(일본 불교 종파) 사찰인 용광사(한강대교 근처)로 이전했다. 용광사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들 납골당이었다. 광복 뒤 1946년에는 원불교가 이를 인수해 서울교당으로 썼다. 2006년에는 두 채 모두 전남 영광 원불교 영산성지로 옮겼다.
▲융문당과 융무당.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일제강점기 때는 총독관사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은 경운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 뒤 경복궁의 많은 전각을 허물어 경운궁 증축 자재로 썼다. 일제는 경복궁 자리에서 조선물산공진회 열었다. 조선과 일본의 문물을 전시해 선진 일본을 자랑하려는 목적이었다. 행사용 가건물 지을 터를 닦느라 궁내 전각들이 다시 헐려 나갔다. 청와대 일대의 전각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26년 10월 경복궁 안에 새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광복 뒤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다가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했다.
1939년, 일제는 공원으로 남아있던 경복궁 북쪽에 조선 총독관사를 지었다. 관사 이름은 고종 때부터 일대를 부르던 경무대를 가져다 붙였다. 구역의 이름이 건물 이름이 된 셈이다.
광화문 1번지, 세종로 1번지, 청와대
1945년 일제 패망 뒤 경무대는 미군정 책임관 하지 중장의 거처가 됐다. 뒤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실 겸 관저가 됐다. 1960년 4·19혁명 뒤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 이름을 청와대로 바꿨다. 영어 명칭인 ‘Blue House’였으나 현재는 ‘Cheong Wa Dae’다. 청와대 주소는 광복 뒤 세종로 1번지가 됐다.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 1번지였다.
▲12.12 쿠데타 지휘처였던 경복궁 30경비단 본부건물. 지금은 사라졌다. [중앙포토]
여담 하나 : 경복궁 주둔 부대, 30경비단
1961년 5.16쿠데타 때 두 개의 부대가 서울로 진입했다. 30사단과 33사단 병력 일부다. 그 뒤 이들은 복귀하지 않고 청와대 주변에 눌러앉았다. 30대대와 33대대라고 불리다가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 됐다.
특히 30경비단은 경복궁 북쪽(지금의 태원전 자리)에 주둔한 대통령 최근접 경호부대였다. 태원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자리였다. 1915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기 위해 허물었다. 그 뒤로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경호하는 일본군 부대가 주둔했다. 30단 병사들은 새벽마다 웃통을 벗고 경복궁 안을 구보하며 군가를 불렀다. 차지철 경호실장 때는 병력을 연대 규모로 늘려 청와대 3중 경계망을 운영했다. 전차 장갑차 등으로 중무장을 했고 시위 진압이 주요 임무 중의 하나였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나 ‘효자동 이발사’에 등장하는 탱크부대가 30경비단 소속이다.
역대 30경비단장들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손영길·전두환·이종구·장세동·안현태·이현우 등이 거쳐 갔다. 1979년 12·12 쿠데타 때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30단장 장세동, 33단장 김진영 등 신군부 핵심들이 장세동 방에 모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체포를 모의했다.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배반한 하극상이었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두 부대를 제1경비단으로 통합했다. 2006년 30경비단 주둔지에는 다시 태원전이 들어섰다.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5-보이지 않는 물길
도로 위 '사각철판'이 힌트다...靑 둘러싼 '보이지 않는 비밀'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백악산 꼭대기에 내린 비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물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 북쪽 홍제천, 동쪽 삼청동천, 서쪽 백운동천, 남쪽 대은암천으로 흘러든다. 산책로가 있는 홍제천은 낯설지 않은데 나머지 하천 셋은 생소하다. 정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천은 있고 여전히 물이 흐른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들 하천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물길을 찾아 백악산 동·서·남쪽을 훑어봤다.

▲1780년경 만든 도성지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도성 주변의 물길이 생생하다.
묻어 다 묻어
1900년대에 들어서며 일제는 조선 침탈 속도를 높인다. 이를 위해 철도와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적극 확장한다. 1899년에 경인선, 1904년에는 경부선을 개통한다. 500년 넘게 이어져 온 서울의 도시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사대문 안 도로 골격이 이즈음 만들어졌다.

▲1946년. 미군이 작성한 서울 지도 일부. 이때만 해도 청와대 경복궁 일대의 물길이 꽤 많이 살아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다. 개발연대로 들어서며 서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1970년에 550만 명이던 인구는, 올림픽이 있던 1988년에 1000만 명을 돌파한다. 마이카 시대가 열리며 폭증하는 차량은 도시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늘려야 하지만 도심에는 그럴 만한 땅이 없었다. 하천 복개(覆蓋 뚜껑을 덮는 일)가 가장 쉬운 해법이었다. 돈 덜 들고, 민원 줄이고, 공사 빨리 끝내고, 주차장 공간도 생기고, 게다가 하수도 악취까지 묻어버리니 일거오득이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생활하수가 동네 개천으로 흘러 들어갔다. 큰비라도 내리면 온갖 쓰레기는 물론이고 오줌똥까지 섞였다. 지금은 복개를 하더라도 하수관로를 따로 만들지만 그때는 그냥 덮었다. 하천 대부분은 동네와 동네를 가르는 자연 경계이기 때문에 행정상 이해충돌도 적었다.
조선 시대 도성 안에는 청계천으로 들어가던 물길이 스무 개가 넘었다. 1977년에 청계천을 마저 덮으며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불과 70여 년 만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백운동천 대은암천 삼청동천도 땅속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편의를 얻었지만 도랑을 잃고, 가재도 잃었다. 환경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하천을 덮어 만든 길은 조금만 눈여겨 보면 알 수 있다. 길을 따라 수시로 맨홀이 나타나고, 아스팔트 위에 다리 상판처럼 콘크리트 이음매가 있다.

▲1953년 경복궁 백악산 일대 모습. 오른쪽 점선 안 경복궁 담장 옆으로 흐르는 삼청동천이 보인다. [청와대 경호처]
청와대 동쪽-삼청동천
지금의 삼청로, 그러니까 동십자각에서 건춘문(경복궁 동문)을 지나 삼청공원 쪽으로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이 삼청동천이다. 종로 11번 마을버스 종점에서 100m쯤 올라가면 삼청테니스장이 나온다.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여기서 땅속으로 들어간다. 삼청로를 따라 내려가면 수시로 맨홀이 나타난다. 길 아래에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인공수로인 사각형 암거(closed culvert)가 묻혀있다. 길 위 중간마다 철판으로 만든 커다란 사각형 맨홀도 보인다. 수로를 정비할 때 작업자들이 드나드는 입구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멱을 감던 시절 삼청동천에는 북창교, 장원서교, 십자각교, 중학교, 혜정교 같은 다리들이 있었다.

▲1920년 경. 동십자각 옆으로 흐르는 삼청동천. 지금은 길이 나며 동십자각은 섬이 됐지만 당시에는 경복궁의 담장이었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1927년 경 경복궁 동쪽에 있던 광화문.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완공하며 이 자리로 옮겼다. 뒤에 백악산, 앞에 물이 흐르는 삼청동천이 보인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복개공사 중인 삼청동천. [청계천 박물관]
광화문이 삼청동천 옆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 일제는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며 그 앞에 버티고 선 광화문을 헐어버리려 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계획을 바꿔 1927년에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쪽으로 옮겼다. 이전한 광화문은 1929년 열린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쓰였다. 한국전쟁 때는 폭격을 맞고 허물어진 뒤 1968년에 지금 위치로 돌아왔다.

▲종로 11번 마을버스 삼청동 종점에서 왼쪽 주택가로 들어가면 지금도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길은 여기서 땅속으로 들어가 삼청테니스장쪽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만나다.
삼청동천의 하류인 동십자각에서 청계천까지를 따로 중학천이라 불렀다. 조선 사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중부학당 앞을 흘러서 붙은 이름이다. 중학천 옆에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집터가 있었다. 정도전은 1398년 1차 왕자의난 때 이방원에게 죽는다. 그 뒤 정도전 집 마구간 자리에 사복시(司僕寺)가 들어섰단다. 왕실의 말과 마구를 관리하는 관청이다. 일제강점기 사복시 터는 군마대와 수송공립보통학교, 광복 뒤에는 서울지방경찰청 기마대가 됐다. 지금의 이마(利馬)빌딩, 종로구청, 종로소방서 자리다.

▲총리공관 앞 삼청로. 길 위의 사각형 뚜껑은 맨홀이다. 길 아래에 삼청동천 물길이 있다는 증거다.
삼청동천은 1965년에 덮어 길을 냈다. 2009년 서울시는 교보문고 뒤쪽인 청계천에서 종로구청까지 340m를 중학천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했다. 하지만 자연하천과는 거리가 먼 전시용 인공하천일 뿐이다.

▲자하문로 경복궁역 근처. 길 위쪽으로 올라가면 자하문이 나온다. 길 위의 사각 철판은 맨홀. 백운동천 물이 길 아래로 흐른다.
청와대 서쪽-백운동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 능선에 창의문(자하문)이 있다. 이 일대를 조선 시대에는 백운동이라고 불렀다. 청계천의 본류인 백운동천(白雲洞川)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경복궁역으로 내려가는 자하문로 밑이 백운동천 물길이다. 자하문로를 따라 내려온 물길은 경복궁역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흐르다가 동아일보사 앞에서 청계천으로 들어간다. 백운동천은 상류 일부를 빼고 1920년대부터 덮이기 시작했다. 물길이 살아있을 때는 신교, 자수교, 금천교, 종침교 같은 다리들이 있었다.

▲경복궁역 사거리. 사진 위쪽이 자하문 가는 길. 아래쪽이 세종문화회관 뒷길이다. 하수구를 들여다보니 바닥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백운동천에는 청풍계, 옥류동천, 사직동천, 경희궁 내수, 경복궁내수 같은 지류가 있다. 경복궁내수를 빼고는 모두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다. 청운동에 있는 청풍계와 수성동계곡에서 내려오는 옥류동천은 조선 시대 명승으로 이름났다. 옥류동천은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 앞에서 백운동천과 만난다. 사직동천은 사직단을 지나 서울시경 앞으로 흐르고, 경희궁내수는 궁에서 나와 세종대로 사거리 쪽으로 흘렀다. 경복궁내수는 경회루 남쪽에서 나와 정부서울청사 뒤를 지나 백운동천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2021년 10월. 광화문 광장 문화재 발굴 현장. 조선시대 물길이 보인다. [중앙포토]
광화문광장 개선공사를 하며 땅을 파니 옛 문헌과 지도로만 보던 조선 시대 육조거리가 드러났다. 본래의 자연퇴적층 위에, 임진왜란 전후, 경복궁 중건기, 일본강점기, 현대가 시간별로 착착 쌓여 있다. 물길도 드러났는데 위치로 보아 경복궁내수가 아닌 하수를 흘리던 도랑으로 보인다. 백운동천 주변에는 겸재 정선, 송강 정철, 김상헌 집터가 있다. 이중섭 가옥, 박노수 가옥, 신익희 선생 옛집, 이상범 가옥, 김정희 옛집, 홍종문 가옥, 배화여고 캠벨 기념관 같은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다.

▲청와대 관저 정문인 인수문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물이 흘러 녹지원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간다.
청와대 남쪽-대은암천
백악산 남쪽 골짜기에서 청와대를 지나 경복궁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이 대은암천이다. 경복궁의 금천(禁川)이다. 금천은 궁궐이나 왕릉 들어갈 때 건너가는 물길을 말한다. 물을 건너며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다는 의미가 있다. 궁궐마다 금천이 있는데 경희궁내수(경희궁), 정릉동천(덕수궁), 옥류천(창경궁), 북영천(창덕궁)이 그들이다. 금천의 물은 궁궐에 불이 나면 소방수가 된다.

▲청와대 경내 물길. 오른쪽 물길은 드러나 있지만, 왼쪽 물길은 땅속에 묻혀 있어 지형을 살피며 추측했다.
대은암천 물길은 두 개다. 1번 물길은 청와대 관저~녹지원 옆~경호실과 여민관 사이~신무문 오른쪽 담장 아래 수문~향원정~경회루에 이른다. 청와대앞길만 지하로 흐르고 나머지 구간은 온전히 드러나 있다. 물길이 지나는 청와대 녹지원 일대는 숲이 우거져 운치 넘친다.

▲북궐도형에 보이는 경복궁내 물길. 북궐도형은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왼쪽 영추문 위쪽으로 서쪽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보인다.
2번 물길은 영추문 북쪽에서 궁의 담장 아래를 지나 경회루로 들어가는데 발원지가 아리송했다. 청와대 경내를 오르내리며 지형을 꼼꼼히 살펴봤다. 처음에는 본관 뒤쪽 계곡에서 나오는 물길이 1번 물길과 녹지원 앞에서 만난다고 추측했다.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본관 뒤에서 나온 물길은 영빈관을 거쳐 효자동 방향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영빈관 부근이 조선 시대에 팔도배미(임금이 손수 농사짓던 땅) 자리였으니 당연히 개울이 있었겠다. 청와대 본관은 노태우 정부 때 지었다. 토목공사를 할 때 계곡 바닥에 콘크리트관을 묻어 물길을 내고, 그 위에 본관과 대정원을 조성했을 테다.
영빈관 쪽에서 나온 2번 물길은 분수대, 진명여고(목동으로 이전) 터의 옆을 돌아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궁으로 들어가는 자리에 있던 다리가 서금교(西禁橋)다. 금천의 서쪽에 있는 다리라는 뜻이다.
▲앞에 보이는 청와대 본관 뒤쪽 계곡이 대은암천의 발원지 중 하나로 추측한다. 본관과 그 앞의 대정원 아래에는 물길이 묻혀 있다.
▲청와대 녹지원 옆 계곡. 대은암천 물길 중의 하나다. 신무문 옆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1번과 2번 물길은 경회루 옆에서 만나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90도 꺾는다. 이 지점에서 경복궁내수가 갈라져 남쪽으로 나가고, 대은암천(금천)은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흘러 동십자각 남쪽에서 삼청동천과 만난다.
▲옛 진명여고 옆을 돌아 흐르던 대은암천의 흔적으로 보이는 길.
▲진명여고 터 옆으로 구불구불한 골목이 있다. 대은암천이 흐르던 물길 위를 덮어 낸 길로 보인다.
길바닥 아래 숨은 역사
청계천은 다시 햇살 아래로 나왔다. 주변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훌쩍 자란 나무들은 제법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한강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이 지천이고, 돌에는 다슬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물가에는 직장인들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크고 작은 개울들은 여전히 묻혀있다. 물길 다시 살아나면 서울은 자연스레 생태환경 도시가 되지 않을까. 청와대와 경복궁 주변을 걸으며 틈틈이 길바닥을 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발아래에 서울의 과거와 미래가 있다.
글·그림·사진=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6(끝)-청와대에서 용산까지
필연과 우연이 얽혔다…靑과 용산집무실 관통한 이 선의 비밀

북한산과 관악산 꼭대기를 이어보니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니터에 지도를 띄웠다. 북한산 꼭대기인 백운대와 관악산 꼭대기인 연주대를 선으로 연결해보았다.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직선 위에 청와대-경복궁-덕수궁-용산 대통령집무실이 놓여있다. 서울시청, 서울역, 용산역, 동작동 서울현충원도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국역사의 핵심을 압축하는 중심축이라 할 만하다.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역사의 필연일까. 마침 대통령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가면서 풍수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대통령집무실 이전 얘기는 없었다. 가운데 아랫부분 비어있는 땅이 용산 미군기지다. 집무실은 그 안에 있다. [강북전도] 부분. 2021년작. 그림=안충기
수도를 옮기는 뻔한 이유
고려왕조를 전복하고 조선을 연 이성계는 개경(개성)을 뜨기로 결정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의지였다. 수도 이전은 왕조교체기 혼란상을 한방에 잠재우는 이슈 블랙홀이었다. 천도는 기득권 세력의 간섭을 건너뛰며 단숨에 판을 바꿔버렸다. 서슬 퍼런 최고 권력자가 남을 사람은 남아라, 나는 한양으로 간다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권력 중심이 이동하면 주변 시스템이 함께 옮겨간다. 이때부터는 이전 반대가 아니라 어떻게 이전하느냐가 논의의 중심이 된다.
역사 속의 수도 이전은 왕조 교체가 주된 이유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와 안보 이유가 크다. 브라질 수도는 본래 리우데자네이루였다. 5년간의 공사를 통해 1960년에 브라질리아로 옮겼다. 리우에서 900km 떨어진 해발 1100m에 세운 도시다. 국토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아 내륙개발 거점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파키스탄은 1960년 카라치에서 내륙 깊숙한 이슬라마바드로 수도를 옮겼다. 과밀해소를 내세웠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의 권력안보 목적이 컸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러시아는 키이우 함락을 노렸다. 국경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실패로 끝났지만 우크라이나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2019년 인도네시아는 자바섬에 있는 수도 자카르타를 북동쪽으로 1000여km 떨어진 보루네오섬 동칼리만탄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구집중과 과밀개발로 자카르타는 도시 지반침하가 심각하다. 동부 개발로 국토균형발전을 하려는 목적도 있다.
조선의 한양 천도 목적은 신권력의 조기 안착이었다. 그 논리 기반이 풍수도참사상이다. 신라 말에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도참 사상은 고려를 거치며 정교해졌다. 불교나라에서 유교나라로 바뀌었지만 풍수의 힘은 여전히 셌다. 조선의 지리학 시험에 풍수과목도 있었으니 정식 학문 과목이었던 셈이다.
본래 이성계가 정한 도읍지는 지금의 계룡시 자리다. 풍수도참에 밝은 개국공신 하륜이 도읍은 중앙에 있어야 한다고 건의해 공사를 중단했다. 하륜은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를 명당으로 찍었다. 무학대사와 관료들은 산세가 약하고 터가 좁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도읍 자리는 백악산 아래가 됐다. 이번엔 무학과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붙는다. 무학은 인왕산을 배경으로 해서 동향으로 대궐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백악산이 좌청룡 남산이 우백호라는 주장이다.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성공한 중국 황제들은 남쪽을 보고 앉아 사방을 다스렸다며 백악산을 등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인왕산을 우백호, 낙산을 좌청룡으로 하는 서울 골격이 이때 정해졌다. (풍수에서 말하는 좌우는 지도에서 좌우의 반대다. 지도는 남쪽에서 북쪽을 보지만, 풍수에서는 북쪽에서 남쪽을 본다)
이는 조선왕조실록과 야사가 섞여 있는 이야기이니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 수 없다. 개국 초에 유교와 불교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이 풍수논쟁으로 옮겨 붙었을 테다.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기려는 움직임은 고려 중기부터 있었다. 숙종(1095~1105년)은 지금의 서울인 양주목의 한양으로 천도하려했다. 조사단은 노원, 용산, 도봉 땅은 도읍으로 삼기에 부족하고 백악산 아래가 괜찮다고 보고했다. 전성기를 지나며 문벌귀족과 무신세력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몽골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던 시기였다. 분위기를 바꾸고 영광이여 다시 한 번을 노린 계획이었다. 후대 왕들도 남경(한양)을 오갔으나 이미 천도는 동력을 잃어갔다.
천도 뒤에는 풍수 논리
풍수 논리는 서울 곳곳에 숨어있다. 그 하나가 보토소(補土所)다. 지도를 놓고 보면 백악산은 백두산에서 굽이쳐 내려온 수많은 능선의 끝가지 중 하나다. 산맥은 때로는 숨차게 때로는 숨을 고르며 달려온다. 북한산에서 뻗어온 보현봉 가지 하나가 백악산으로 내려올 때 형제봉을 지나며 급하게 떨어진다. 평창동과 정릉을 잇는 북악터널 위쪽이다. 왕실에서는 이곳의 지형이 낮고 잘록해 맥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도성과 궁궐의 지맥을 북돋고자 보토(補土 흙을 채워 메움)를 하고 여기에 총융청 관할 보토소(補土所)를 두었다. 형제봉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심곡암과 영불사 중간쯤에 있는 ‘보토고개’가 그 흔적이다.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는 보현봉과 백악 사이에 ‘보토소’가 나온다.
광화문 해태상과 숭례문 세로 현판은 관악산 화기를 막고자 함이고, 좌청룡의 허약한 산세를 보완하려 흥인문 현판에 지(之)를 더해 흥인지문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익숙하다.
▲북악산 등산로 중간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서울 도심을 바라보는 시민들. 김상선 기자
일제 쇠말뚝 뜨거운 논란
일제의 조선 강점 과정에서 풍수와 얽힌 숱한 논란이 생겼다.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대포에 눌려 강제 개항한 일본은 서구 과학기술을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한자문화권 공통의 풍수관념에서도 먼저 벗어났다. 하지만 한반도를 침탈하며 조선 풍수에 주목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한 무라야마 지준이 쓴 책 『조선의 풍수』에 나온다는 말이다.
“…풍수가 적어도 십 수 세기란 오랜 기간 한국 민속신앙 체계에서 그 지위를 점해 왔고, 고려를 거쳐 이조에서도 반도 어디를 가나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일반에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므로 타문화에 비해 그 지지의 강함과 폭이 넓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전국의 명당자리에 있던 태실(왕손의 태를 묻은 자리)를 파괴하고 고양시 서삼릉에 모아놓았다. 비석 뒤에 일본의 연호를 새겨 넣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왕실의 전통과 맥을 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일제가 풍수침략을 계획했다는 의심은 이어진다.
백악산에서 한양도성성곽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숙정문 못 미쳐 촛대바위가 있다. 여기서 정남쪽에 경복궁이 있다. 바위 꼭대기에는 길쭉한 돌이 박혀있다. 일제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그 자리를 메운 돌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속리산, 추풍령, 북한산…. 한반도 어디나 일제가 혈에 말뚝을 박고, 길을 내며 지맥을 잘라 인재 배출을 막았다는 얘기는 흔하다. 일본에 앞서 임진왜란 때 명군을 끌고 온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았다든 얘기도 감초처럼 전해진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1995년(광복 50주년)에 전국에서 119개의 쇠말뚝을 뽑아냈다. 국정감사장에서는 창경궁 바위에 꽂힌 쇠말뚝을 철저 조사하라는 말도 나왔다. 확증은 없고 추측이 난무했다. 이제야 역사를 바로세우게 됐다는 환호 한쪽에서 의문도 나왔다. 풍수침략용 쇠말뚝이라면 극비로 진행했어도 단서는 남기 마련인데 기록이 없기 때문이었다. 말뚝이 박힌 자리도 혈처라고 보기에는 엉뚱한 곳이 많았다.
2019년 건축가 서현은 기고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민족정기 말살 목적으로 일제가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분노의 증언도 있다. 그러나 주요지점에 물리적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은 기본사안이다. 측량을 모르던 백성들에게 그것이 주술적 만행으로 보였을 수 있다.”
이에 앞서 1999년 역사학자 고 이이화는 저서 『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역사비평)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지도 해도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 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측량 표지인 대삼각점 소삼각점을 일제의 풍수침략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등산로 철제 난간이나 군사지역의 목재 전신주를 일제 말뚝이라고 주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은 책방 서생의 편견이다, 측량 삼각점이 아닌 곳에 박힌 말뚝은 뭔가, 위치표시용 말뚝을 1m 이상 박을 필요가 있나, 측량에 80kg 짜리 쇠말뚝이 왜 필요한가, 표지용으로 쇠말뚝을 쓰지 않는다….
논란의 와중에 독립기념관에 전시하던 쇠말뚝은 사라졌다.
서울 한복판에 대일본(大日本)이라니
옛 조선총독부청사(중앙청-국립박물관)철거 때와 서울시청 신청사 공사 때 일이다. 하늘에서 광화문 일대를 내려다보면 ‘大日本’ 글자가 드러난다는 얘기가 돌았다. 백악산이 大, 조선총독부 건물이 日, 옛 서울시청 건물이 本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를 내세워, 서울시는 2009년 새로 짓는 청사 뒤쪽 태평홀을 헐어내겠다고 발표했다. 本자를 지우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건물 설계에 참여한 사사 게이이치가 1926년 〈조선과 건축〉에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 의장은 중앙 뒤쪽에 따로 설치하였다”
의장은 태평홀을 말한다. 담당자가 本이 아닌 弓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결국 등록문화재 52호인 옛 청사 태평홀은 일부가 뜯겨져 나가고 새청사가 들어섰다.
▲1. 조선시대 하륜이 한양 도읍으로 천거한 무악(연세대 일대). 2. 청와대. 3. 용산 대통령 집무실
백악에서 용산까지
청와대와 용산 대통령집무실은 능선으로 이어져있다. 용산집무실은 백악산~인왕산~사직터널~서울시교육청~경향신문사~서소문~숭례문~남산 백범광장~남산 능선~하얏트호텔~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녹사평역~둔지산 능선이다. 새 집무실은 능선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백악산에서 한양 도성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절반을 돌아서 내려간 자리다. 능선은 서울이 확장하며 깎여 낮아진 곳이 있고 고층 빌딩이 들어선 곳도 있다.
▲북한산에서 용산까지 흐르는 산 능선.
용산은 본래 편안한 땅이 아니었다. 고려 숙종 때 천도를 계획하며 서울 일대를 돌아본 조사단이 용산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코앞에 흐르는 한강 때문이다. 지형상 외적이 강을 거슬러 공격해오면 방어가 마땅치 않다. 본래 한강은 모래사장과 습지가 많았다. 홍수가 나면 자주 물길이 바뀌었다. 만초천을 역류한 물이 삼각지와 서울역을 거쳐 숭례문 근처까지 들어온 기록도 있다. 만초천 지류 하나가 삼각지 전쟁기념관 뒤로 흐르니 용산일대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을 테다. 1940년대 미군이 작성한 지도를 보면 경원선(지금의 경의중앙선) 밖으로는 모래사장 밖에 없다. 한강치수 사업에 따라 1972년에 강변북로가 1986년에 올림픽대로가 뚫리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동부이촌동 신동아 아파트가 1984년에 들어섰으니 그때까지 이렇다 할 시설이 없었다. 남산은 청와대의 백악산처럼 든든한 배경이 되지 않는다. 과거 논리라면 집무실 이전은 생각지도 못할 조건이지만 그간 서울이 발전하며 땅의 모양이 달라졌다.
▲1940년대 미군 지도. 이촌역과 서빙고역 앞쪽으로는 모두 모래사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양옆으로 둔지산에서 나오는 개울이 보이고, 한강의 흐름도 지금과 많이 다르다.
조선의 왕들도 집무실을 옮겨 다녔다. 조선 500년 동안 경복궁이 제1궁 역할을 한 시기는 200년 남짓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뒤 왕들은 창덕궁과 덕수궁(경운궁) 등에 머물렀다. 궁을 복원할 여력이 없어 경복궁은 오랫동안 폐허였다. 정부수립 뒤 77년 동안 역대 대통령들은 청와대 자리에 머물렀다. 역사 속에서 보면 길지 않은 기간이다.
수도 이전 논의가 수차례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번 추진했다. 첫 시도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공주시 장기면(현 세종시 장군면)일대에 임시행정수도 만들려던 계획이었다. 1979년 서거하며 없던 일이 됐다.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만들려던 노무현 대통령의 시도는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려 계획을 축소했다.
물론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수도 이전이 아니다.
땅의 팔자 또는 운명
청와대 이전 얘기가 나오며 풍수가 다시 화제에 올랐다. 청와대가 흉지라는 얘기는 1992년 노태우 정부 때 최장조 전 교수의 기고문에서 비롯했다.
“…청와대 자리가 서울 임자 되는 산의 중턱에 자리 잡음으로서 풍수가 금기시하는 성역을 차지하게 되어 살아있는 사람이 터전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신적 권위를 가진 자리가 되었고 또한 적어도 청와대는 풍수상 죽은 사람 혹은 신 같은 존재만이 살 수 있는 땅이므르 옮겨가야 한다 …”(동아일보 1992년 7월 29일자 칼럼)
2019년 유홍준 교수도 문재인 정부 시절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고 밝혔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최근 청와대를 둘러본 풍수전문가 김두규 교수는 생각이 다르다.
“(논란이 많지만)청와대 일대는 길지라고 보는 것이 맞다.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받은 첫 느낌이 포근함인데, 이는 좋은 땅의 기본 조건이다. 청와대 터를 완전한 길지라고 보기도 어렵겠지만, 1000년 동안 각 시대마다 한 국가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점만 봐도 흉지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지기가 쇠했다는 말도 있지만 땅이 기운을 잃었다면 이렇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겠나. 꾸준히 청와대 터 바위 지형의 단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생각보다 청와대 경내에 흙으로 이뤄진 지형들이 많이 있다. 와서 보니 중출맥을 따라 내려오는 곳은 대부분 흙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는 굽이쳐 내려오는 용맥이 걸림돌(바위) 없이 순탄하게 내려왔다는 의미다” (매경LUXMEN 2022.6 )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다. 당사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정반대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땅의 운명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모래벌판이던 잠실은 아파트 숲이 되고, 쓰레기 산 난지도 일대에 디지털미디어센터가 들어서고, 비만 오면 물이 차던 망원동은 청춘 핫 플레이스가 됐다. 교외 공동묘지 자리에 고급주택단지나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경우도 많다.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이 큰돈을 번 이유가 드라마틱하다. 사업을 위해 중국과 홍콩을 드나들며 동양인들의 풍수 정서에 주목했다. 이를 거꾸로 이용해 부동산 개발에 나섰다. 버려진 강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초고층 아파트로 줄줄이 개발했다. 전망을 확보하려 땅의 지형을 바꾸는 일은 기본이었다.
땅의 팔자는 사람의 의지, 발전하는 기술, 자본의 논리가 결정한다. 일제 쇠말뚝을 박았건 말건, 청와대 터가 어떻건 그동안 한국은 셀 수 없는 인재가 나오고 G10 대열에 진입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으로 청와대는 모두의 공간이 됐고, 용산은 또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청와대 경복궁 일대는 유동인구가 늘어 활기가 넘친다. 용산미군기지 반환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두 동네 모두 손실보다는 이익이 많다.
일직선 위에서 놓이게 된 이유
서울의 핵심 유산과 시설들은 왜 북한산과 관악산 사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을까. 이는 역사가 말해준다. 백악산~관악산 축은 한양 건설 때 중심축이었다. 백악산 남쪽으로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자리를 잡고 그 인근에 부대시설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도시구조가 크게 바뀐다. 한강이남에서 서울중심부로 들어오려면 관악산을 돌아서 들어와야 한다. 일제는 지형이 평탄한 관악산 서쪽으로 대로와 철도를 냈다. 안양~영등포~노량진~용산~서울역 노선이다. 관악산 동쪽 남태령이나 양재 쪽은 크고 작은 산들이 많다. 교통축을 따라 용산역, 서울역, 시청이 들어섰다. 용산은 오랜 기간 일본군과 미군이 주둔지였다. 덕분에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서울 안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갈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서울 현충원 안에 있는 창빈 안씨 묘역.
동작동 서울현충원은 1955년에 생겼지만 조선 때부터 풍수와 연관이 깊다. 현충원 묘역의 원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묘역이다. 현충원이 들어서기 400여 년 전인 1550년에 생겼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경기도 장흥에서 이장을 해왔다. 그 뒤 손자인 선조가 왕위에 올랐다. 후궁의 자손으로는 처음이다. 이후 조선의 임금은 모두 창빈의 후손이다. 이런 자리에 1955년 7월 국군묘지가 들어섰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을 안장하는 자리였다. 일대가 조선 때부터 국가 소유였기에 조성이 쉬웠다. 1965년에는 국립묘지로 승격되며 군인 아닌 국가유공자들도 안장하게 됐다. 명당의 기를 받고자 했을까. 창빈 안씨 묘역 주위에 역대 대통령들이 묻혀있다. 뒤에 박정희, 옆에 김대중, 앞에 이승만, 건너편에 김영삼. 이제는 빈자리가 없다.
역사 속의 필연과 우연이 이들을 일직선 위에 올려놓았다. - 끝
글·그림 안충기 기자·화가=newnew9@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