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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49/ 일본2/ 야스쿠니 신사 - 일본의 극우 - 장상인의 일본 이야기

상림은내고향 2022. 6. 13. 21:10

지구촌 여행/ 국가별49/ 일본2/ 

◆야스쿠니 신사

2015.12.09   ‘이기적 역사인식’의 현장 야스쿠니 신사에 직접 가보니

 

젊은 부부들이 가을볕을 받으며 유모차를 끌고 산책한다. 연인(戀人)들이 벤치에 앉아 장난을 치며 밀어(蜜語)를 속삭인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둘러본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공원 내 조형물 앞 안내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한다. 경내 한가운데 있는 오래된 목조건축물에서는 150년 역사의 무게가, 입구의 무사상(武士像)에서는 자신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총 면적 9 3356m². 1335만명이 사는 거대도시에 이만한 크기의 도심 속 공원이 있다는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난 9 27일 그 공원을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편할 수가 없었다. 그곳은 예사 공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내가 공원이라고 지칭한 곳은 실은 신사(神社), 그것도 야스쿠니(靖國)신사였다.

 

야스쿠니로 가는 길

야스쿠니신사는 1869년 보신(戊辰)전쟁·세이난(西南)전쟁 등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의 내전(內戰)에서 전사(戰死)한 장병(將兵)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출발했다. 1879년 메이지 천황이 ‘야스쿠니’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야스쿠니(靖國)’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 ‘나라를 안정케 한다’는 의미다. 이후 야스쿠니신사는 청일(淸日)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中日)전쟁, 태평양전쟁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침략전쟁에서 죽은 일본군인들을 ‘신()’으로 기리는 곳이 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기리는 것이 뭐 그리 잘못이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기리는 ‘신’들 중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A급 전범(戰犯)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야스쿠니신사를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도, 구미(歐美)에서 야스쿠니신사를 ‘전쟁신사(war shrine)’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늦은 여름휴가 삼아 23일간 도쿄 여행을 하면서 내가 굳이 야스쿠니신사를 찾은 것은 참배하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 총리나 각료(閣僚)들의 참배 문제로 말썽의 단초가 되곤 하는 야스쿠니신사가 도대체 어떤 곳인지 느껴 보고 싶어서였다.

 

도쿄지하철 신주쿠(新宿)선 이치가야(市ケ谷)역에서 내려 야스쿠니거리(靖國通) 5분쯤 걷자 야스쿠니신사의 담장이 보였다. 이치가야는 귀에 익은 거리 이름. 일제시대에는 육군성·육군사관학교 등이 있던 곳이다. 일본의 군인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면서 전쟁터로 갔다. 그들이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하던 이치가야에서 죽어서 만나는 야스쿠니의 거리가 그렇게 가깝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야스쿠니신사의 담장에는 10월 추계례대제(秋季例大祭)를 알리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곧 이어 야스쿠니신사의 남문(南門)이 나타났다

 

메이지신궁의 결혼식 행렬. 일요일이어서인지 여러 쌍의 결혼식이 있었다.


기술(旣述)한 것처럼 야스쿠니신사의 모습은 일견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먼저 불쾌감을 자극한 것은 신사 안에 있는 유물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물 이름은 중국의 고전 《순자(荀子)》에 나오는 ‘군자는 장소를 잘 택해 거처하고, 훌륭한 선비에게 배워야 한다(君子居必擇鄕遊必就士)’는 구절에서 따왔다나.

 

유슈칸에서는 ‘대동아(大東亞)전쟁 70년전()Ⅲ’이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이미 관람시간이 끝나 가고 있어서 유슈칸 내부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몇 년 전 야스쿠니신사에 다녀왔던 친구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슈칸에는 꼭 들어가 보지 그랬어? 거기 들어가 보면, 미친놈들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내 친구들 중에서 가장 냉철하고 지적(知的)인 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할 만했다. 인간을 폭탄으로, 어뢰로 활용할 정도로 전쟁의 광기(狂氣)에 사로잡혔던 자들에 대해 ‘미친놈들’이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戰犯들의 無罪를 주장한 인도인 판사

유슈칸 옆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형상화한 특공대원상이 서 있다. 특공대원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법복(法服)을 입은 인물의 모습을 담은 비()가 있다.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라다비노드 팔 판사. 인도 법조인으로 도쿄전범재판 당시, 재판관들 가운데 유일하게 전범들의 무죄(無罪)를 주장했던 인물. 그는 “정의(正義)의 외피(外皮)를 쓰고 있지만, 패전국 범죄만을 다룬 승자의 보복”이라며 전범들을 두둔했다. 사실 팔 판사는 세법(稅法)전문가로 국제법에는 문외한(門外漢)이었는데, 영미(英美)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주장에 공감했다고 한다. 비석 앞에 있는 함()을 열어보니, 영어와 일본어로 된, 비문의 내용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있다. 200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라다비노드 팔 판사의 이름은 지난 9 1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만찬에서도 나왔다. 모디 총리는 “일본인은 팔 판사를 존경한다. 자랑스러운 일이다”라면서 “팔 판사가 도쿄재판에서 한 역할을 우리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2007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에도 “군사재판에서 기개 높은 용기를 보인 팔 판사는 많은 일본 사람들로부터 지금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있는 모자상(母子像)과 라다비노드 팔 판사 기념비

 

개와 말, 비둘기까지 기리면서 …

팔 판사 기념비 옆에는 ‘모자상(母子像)’이 있다. ‘총후(銃後·전쟁 당시 일본에서 ‘후방’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하던 말)’에서 전쟁을 견뎌내야 했던 민간인들을 기리는 것일까? 모자상 옆에는 전쟁터에서 죽은 한 일본 군인의 철모 등 유품을 전시한 작은 진열장이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전몰마위령상(戰歿馬慰靈像), 군견위령상(軍犬慰靈像)이 서 있다. 가만히 보니 그 옆에는 조그만 탑도 하나 있다. 구혼탑(鳩魂塔), 즉 전쟁터에서 통신용으로 활용한 전서구(傳書鳩)의 혼령을 위로하는 탑이다. 순간 속이 확 뒤집혔다.

 

‘특공대원, 전범들의 무죄를 주장했던 법조인, 후방의 민간인을 기억하고, 거기에 더해 전쟁터에서 죽어간 말, , 비둘기 혼령까지 위로하다니…. 전쟁과 관련해서 이렇게 알뜰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왜 시오노 나나미가 전선의 병사들에게 상냥하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극찬한 ‘종군위안부’들을 기억하는 일에는 그렇게 인색하신가?

 

이렇게 야스쿠니신사 안에 있는 시설물들을 돌아보니, 이건 자기중심적 역사인식을 넘어 이기적(利己的), 너무나도 이기적인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전(拜殿) 앞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딱 딱 소리를 내며 손뼉을 치고 난 후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기원하고 있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받아 주는 신, 이 배전 뒤 본전(本殿)과 영새부봉안전(靈璽簿奉安殿)에 모셔진 신들이 침략자, 살인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일본인들은 왜 반성을 모르나

만일 독일 총리가 나치 전범이나 전사한 무장친위대(SS) 장병들의 묘역을 참배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총리나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관례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들은 때때로 야스쿠니 참배를 자제하는 척하기는 하지만, 그건 한국이나 중국, 혹은 한·미·일 3각 동맹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미국을 의식해서인 경우가 많다.

 

아베 신조 총리의 최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자민당 총재 특별보좌는 지난 9 30일 미국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가 11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추진하는 만큼 중국 방문 전에는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아베 총리가 영원히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베 총리는 집권 1년째였던 작년 12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바 있다. 일본인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과거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일까?

 

도쿄여행을 전후해서 읽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보면,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저자가 일본인의 ‘제자리 찾기’라는 의식과 ‘수치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저자는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취한다’는 일본인들의 전시(戰時)슬로건에 주목한다. 이것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표현하는 계급제도의 소산이지만, 군국주의 일본은 이것을 국가의 전략적 목표로 승격시켰다. 한마디로 열강(列强)들 속에서 더 많은 자신의 몫을 달라, 더 나아가 일본은 이제 열강의 일원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세계의 맹주(盟主)가 되겠다는 요구였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후발(後發)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이 선발(先發) 제국주의 국가에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한편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의 문화를 일러 ‘수치의 문화’라고 했다. 수치심이 주요 기제(機制)가 되는 ‘수치의 문화’는 남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크게 의식하는 문화다. 이는 도덕의 절대적 표준을 역설하며 양심의 계발(啓發)을 크게 기대하는 구미(歐美)의 ‘죄의 문화’와는 다르다. ‘수치의 문화’도 사회 내부에서는 일정하게 윤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선악(善惡)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자신의 죄를 절대자 앞에 고백하고 회개(悔改)한다는 개념은 없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해서 생각해 보자.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취한다’는 사고방식대로라면 일본의 제국주의전쟁은 그들에게는 세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정당한 몫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건 일본인들에게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일본인이 죄의식 때문에 고개 숙여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절대적 선악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일본인들로서는 그게 왜 사과해야 할 문제인지 자체를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루스 베네딕트도 “일본은 패전 후에도 ‘대동아’ 이상을 부정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 포로 중에서도 그나마 맹목적 애국주의의 색채가 옅었던 사람조차도 대륙 및 서남태평양에 대한 일본의 계획을 규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행동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약 사정이 허락한다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그 위치를 찾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기리는 특공대원상. 야스쿠니신사 경내 곳곳에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상징물들이 있다

 

‘晉擊의 大臣’ 아베 신조

물론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된다고 해서 그게 바로 군국주의로의 회귀(回歸)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2중대’ 이상의 역할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20세기 초·중반처럼 혈기왕성한 청년(靑年)국가가 아니라, 노년(老年)국가다. 하지만 직접적인 군사력의 행사가 아니라고 해도, 외교적·전략적 역량을 이용해 일본은 제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그러한 노력이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와 국익(國益)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솔직히 일본 총리나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논란이 있을 때마다,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기리건 말건, 신경 쓰지 말자.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극일(克日)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것이 먼저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야스쿠니신사를 돌아보니, 일본인들의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역사인식에 대한 불쾌감과 역겨움이 밀려 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어서 그런가?

 

신사 입구에 있는 기념품점. 야스쿠니신사의 모습을 담은 패()나 열쇠고리 같은 기념물 외에 히로히토 전 천황, 아키히토 현 천황 부부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특이하다. ()에 아베 신조 총리의 얼굴을 만화처럼 그린 과자들도 있다. 유명 만화 ‘진격의 거인’을 패러디한 ‘진격의 대신(晉擊の 大臣’(‘晉’은 아베 총리의 이름에서 따온 글자임)이라는 과자도 있다. 어찌 됐건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고 굴기하는 중국에 맞서려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아베 총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기대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9 28일에는 시부야(澁谷)에 있는 메이지신궁(神宮)에 가 보았다. 이곳은 메이지 천황과 그의 부인인 쇼켄(昭憲) 황후를 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1920년 만들어진 메이지신궁은 70m²의 넓이를 자랑하는 웅대한 도심 속 공원이다.

 

▲메이지신궁에 있는 메이지천황 일대기 그림에는 ‘日韓合邦’ 그림도. 서울 남대문 인근의 모습을 담았다.

 

메이지신궁의 그림들

마침 일요일이어서인지, 메이지신궁 곳곳에서는 전통 혼례식이 열리고 있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신관(神官)과 신녀(神女)들이 인도하는 결혼식 행렬이 마냥 신기한지, 외국인 관광객들은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신궁 다른 한쪽에서는 기모노 차림의 나이 든 여성이 막 결혼식을 마친 딸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신궁 마당에서는 외국인들을 포함한 관람객들이 나무조각에 소원을 적고 있었다.


신궁 경내에 있는 쉼터에는 메이지 천황의 일생을 담은 80개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메이지신궁 구내에 있는 메이지기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을 작게 복사한 것들이었다. 이 그림들 중에는 당연히 1910년의 ‘일한합방(日韓合邦)’을 담은 것도 있었다. 이 그림에는 합방조약을 체결하는 양국 고관(高官)들의 모습도, 일본군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합방 당시 경성 남대문 주변 모습’이라는 설명 아래, 초라한 서울거리의 모습을 그려 놓았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합방’의 기만성과 강제성을 감추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일본의 군사적 위용과 경제적 번영을 묘사한 다른 그림들과 대조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합방’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림 설명 중에서 ‘조선정부의 동의를 얻어’ 운운하는 부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문득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高宗)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종 이희(李熙)와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睦仁). 고종은 1863 11살의 나이로 즉위, 190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메이지 천황은 1867 15살의 나이로 즉위, 1912년까지 제위(帝位)에 있었다. 비슷한 나이에 왕이 되어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의 치세(治世) 동안 한일 양국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결국 한때 황제를 칭했던 한 사람은 망국(亡國)의 군주, 메이지의 번왕(藩王)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죽어서 신()으로 모셔졌고, 지금도 일본인들로부터 ‘대제(大帝)’로 기림을 받는다.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을까? 어떤 이들은 고종을 대단한 계몽전제군주라도 되는 양 추어올리면서, 우리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짓밟은 일제의 만행을 소리 높여 규탄한다. 일제의 침략만행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나 윤효정(尹孝定)의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 같은 책을 보면, 일제의 침략 이전에 이미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 무책임과 부패와 무능과 분열, 그리고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無知)는 끔찍할 정도다. 청일전쟁 발발 후 일본공사가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강요해 올 무렵, 황현은 이렇게 탄식했다.


“경전에 ‘국가가 필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연후에 남이 치고 들어온다’고 하였으니, 아 슬프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임금과 신하들은 각성하지 못했고, 결국 그로부터 16년 후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희와 무쓰히토의 엇갈린 운명을 생각하며 메이지신궁을 나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지금 우리 위정자(爲政者)들은, 100년 전 나라를 망쳤던 그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자신이 없었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일본의 극우

2017.04.04  일본의 우익, 사회당 당수(黨首)부터 부패한 우익 대부까지 무차별 공격

⊙ 해군 청년장교들, “문답불용問答不用”이라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사살 (1932년)

⊙ 육군 청년장교들은 2·26 쿠데타 일으켜 내대신, 대장대신, 육군교육총감 등 살해 (1936년)
⊙ 17살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회당 위원장을 칼로 찔러 죽여 (1960년)
⊙ 록히드 사건 연루된 우익 대부 고다마 요시오의 집에 가미카제 공격 (1976년)
⊙ 천황의 전쟁책임 언급했던 모토시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 피격 (1990년)

 1960 10 12 17살의 우익소년 야마구치 오토야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회당 위원장을 칼로 찔러 죽였다.

 

  탄핵정국의 와중에서 좌파는 ‘혁명’을 운운했다. 우파도 그에 질세라 ‘아스팔트를 피와 땀으로 물들일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이웃 일본에서도 그랬다. 좌익의 대두는 우익의 폭력을 불렀다. 대개의 경우 우익의 폭력은 좌익의 그것 못지않게 격렬하고 잔인했다.
  
 
일본은 ‘칼의 나라’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과 붓으로 다툴 때, 일본인들은 칼로 문제를 해결했다. 150여 년 전 도쿠가와 막부 말기, 새 세상을 꿈꾸던 사무라이들은 ‘존황양이(尊皇攘夷·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를 만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막부파 요인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막부는 신센구미(新選組) 같은 무사집단을 동원해 이들을 탄압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후, ()막부파 혁명세력의 행위는 ‘지사(志士)’의 행위로 추인(追認)받았다. 신센구미는 한동안 메이지유신을 가로막은 반역의 무리로 치부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무가(武家) 정권의 낙조(落照)를 장엄하게 물들인 마지막 무사집단’으로 재평가되었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 일본에서의 이념투쟁은 살벌한 폭력투쟁으로 이어져 왔다. 일본 좌익들의 투쟁은 급기야 도시 게릴라 투쟁 끝에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적군파(赤軍派)라는 괴물을 낳았다. 우익(右翼)도 만만치 않았다. 우익은 193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피로 물들였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혁신우익’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미카미 다쿠 해군 중위.

 

  ‘보수(保守)우익’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한국에서는 보수=우익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보수우익’ 외에 ‘혁신(革新)우익’이 존재해 왔다. ‘혁신우익’은 부패한 의회정치인, 재벌, 관료, 군벌(軍閥)과 같은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고, 통제경제 체제의 수립 등 사회주의적 개혁을 통해 국가를 혁신해 보려는 생각을 말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반()자본주의·반민주주의적인 사고(思考)방식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우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사상의 중심에 ‘천황’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군민일체(君民一體)’라는 이상화(理想化)한 천황상을 그리면서, 그 천황을 개혁의 주체(主體)로 상정한다. 경제·사회사상에서는 다분히 ‘좌익적’이지만, 이런 점에서는 ‘우익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1930년대에 만연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60여 년간의 분투 끝에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일본은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오랫동안 국정을 농단했던 조슈(현 야마구치)와 사쓰마(현 가고시마) 출신의 번벌(蕃閥) 정치인들이 퇴진했지만,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부패한 정당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의 뒤에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같은 재벌들이 있었다
  
 
미국·영국 등 열강은 태평양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기 위해 워싱턴군축회의·런던군축회의 등을 통해 일본의 해군력을 제한했다. 군부와 언론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면서,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 문민(文民) 정치인들을 ‘국적(國賊)’으로 간주했다.
  
 
만주사변 이후 국제적 고립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등장과 노동운동의 활성화 등은 기득권 세력을 긴장케 했다. 거기에 더해 동북지방에 기근이 닥쳤다. 가난한 농민들이 딸을 유곽에 파는 참담한 일까지 벌어졌다. 농촌 출신의 젊은 장교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기성 체제에 분노했다.
  
  1932
년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를 암살한 미카미 다쿠(三上卓) 해군 중위가 지은 ‘청년일본가’라는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권력자는 오만방자하나 나라를 걱정하는 진심이 없고, 재벌들은 부()를 자랑하나 사직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
  
 
여기에 기타 이키(北一輝)나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 같은 민간 우익 사상가들이 나타나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우익테러가 횡행했다
  

  혈맹단의 일인일살주의(一人一殺主義)

▲재판을 받은 혈맹단 사건 관련자들.  

 

  1930 11 14일 런던군축회의에 조인했던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가 우익단체 애국사(愛國社) 소속 사고야 도메오(佐鄕屋留雄)가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하마구치는 부상 후유증으로 이듬해 8월 세상을 떠났다. 1931 3월에는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육군대좌가 이끄는 사쿠라회(櫻會)가 오가와 슈메이 등 민간 우익과 손을 잡고 정권을 타도한 후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육군대신을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을 세우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있었다(3월 사건).
  
  1932 2 9일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전 대장대신(大藏大臣·재무부 장관)이 암살당했다. 그는 미쓰비시그룹 총수의 동서였다. 같은 해 3 5일에는 일본 양대 재벌의 하나였던 미쓰이합명회사 이사장 단 다쿠마(團琢磨)가 미쓰이은행 현관 앞에서 살해됐다.
  

▲혈맹단을 이끌었던 우익사상가 이노우에 잇쇼.

 

  이들의 뒤에는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가 이끄는 혈맹단(血盟團)이라는 극우단체가 있었다. 이노우에 잇쇼는 1910년 중국으로 건너가 마적단에 몸담은 적도 있고, 일본군의 첩보원이나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른바 ‘대륙낭인(大陸浪人)’이었다.
  
  10여 년 만에 귀국한 그는 ‘사회주의자의 증가, 극좌익의 횡포, 노동대중의 빈곤과 그들의 적화(赤化) 현상, 그리고 지도계급의 흉포(凶暴)와 무자각(無自覺)’에 절망, 국가혁신을 꿈꾸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국민계몽 운동을 통해 국가혁신을 꿈꾸었다.
  
  하지만 후지이 히토시(藤井齊) 소좌 등 해군의 급진적 장교들과 교류하면서 이노우에는 테러로 노선을 바꾸었다. ‘지도계급의 자각을 촉구’하기 위해 이노우에가 내건 방침이 ‘일인일살주의(一人一殺主義)’였다.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단 다쿠마는 그 희생자였다.
  
  혈맹단의 암살대상 중에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전 총리, 와카쓰기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전 총리,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 내대신(內大臣·천황 측근에서 자문역을 하는 원로대신)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이노우에 잇쇼는 그해 3 11일 경찰에 자수했다.


  “문답불용. 발사!

▲5·15사건으로 암살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그의 죽음으로 전전(戰前) 정당정치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노우에 잇쇼와 함께 체제전복 음모를 꾸며 온 극우세력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우익 사상가 오가와 슈메이로부터 지원을 받은 해군장교들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그해 5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했다. 미카미 다쿠(三上卓) 해군 중위,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宏) 육군 소위 등 9명의 장교 및 사관후보생들은 총리 관저 서재에서 이누카이 총리와 대면했다.
  
  자기 눈앞에서 권총을 장전하는 청년장교들을 보면서 노() 정치인은 “이와 같이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고 이야기하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이들을 달래려 했다. 야마기시 히로시 소위는 “문답불용(問答不用·말은 필요 없다). 발사!”라고 외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미카미 다쿠 중위도 함께 총을 쏘았다. 이누카이 총리의 죽음과 함께 의회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를 맞는 정당정치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대신 전직 군 장성이나 관료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들어섰고, 군부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다.
  
  일국의 총리를 암살했음에도 당시 육군대신은 “이처럼 순진한 청년이 행동을 취하게 된 심정을 생각하면 눈물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해군대신도 “무엇이 순수한 청년장교들에게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게 했나를 생각할 때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했다. 군법회의에서 미카미 다쿠는 금고(禁錮) 15, 야마기시 히로시는 금고 10년을 선고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 났다.
  
  청년장교들에 대한 이런 온정적 조치는 군부 내 젊은 군인들의 간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1935 8 12일에는 아이자와 사부로(相澤三郞) 중좌가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永田鐵山) 소장의 집무실에서 군도를 휘둘러 나가타 국장을 살해했다.
  
  당시 일본 육군은 군부가 국가를 통제하면서 전쟁준비에 매진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제파(統制派), 천황을 받들고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는 국가개조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황도파(皇道派)로 갈라져 있었다. 통제파에는 육군대학 출신 엘리트들이, 황도파에는 농촌 출신 야전 장교들이 많았다. 나가타 소장은 통제파의 리더였고, 아이자와 중좌는 황도파였다. 아이자와 중좌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2·26 쿠데타

2·26사건 당시 도쿄 시가를 행진하는 쿠데타군. 그들의 지휘자는 위관급 장교들이었다.

 

  아이자와 중좌의 ‘행동’과 죽음은 황도파 청년장교들을 분격시켰다. 그 결과가 1936년 일어난 2·26사건이다. 주도자는 무라나카 고지(村中孝次) 예비역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磯部) 예비역 대위, 고다 기요사다(香田淸貞) 대위,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대위, 노나가 시로(野中四郞) 대위,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중위, 나카하시 모토아키(中橋基明) 중위, 니우 세이추(丹生誠忠) 중위 등 위관급 장교들이었다. 근위 보병 제3연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3연대, 야전 중포병 제7연대 등에서 동원된 병력은 1483명이었다.
  
  이들은 천황 측근의 간신으로 간주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총리,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郞) 시종장, 사이토 마코토(藤實) 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대장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 전 내대신,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郞) 육군교육총감 등의 집을 습격했다. 오카다 총리 관저를 습격한 쿠데타군은 그와 외모가 흡사한 처남 마쓰오 렌조(松尾傳藏) 대좌를 총리로 오인해 사살했다. 오카다 총리는 집 안에 숨어 있다가 탈출했다.
  
  조선 총독과 총리를 지낸 사이토 내대신은 47발의 총탄을 맞고 10여 군데를 칼에 찔려 죽었다. 쿠데타군의 한 장교는 사이토의 피가 묻은 손을 들어 보이며 “보라! 국적(國賊)의 피를!”이라고 외쳤다. 러일전쟁 당시 전비(戰費) 마련의 1등공신이었던 다카하시 대장대신도 ‘국적’으로 몰려 죽었다. 와타나베 육군교육총감도 총탄을 받고 칼에 찔려 살해됐다. 스즈키 시종장도 총탄에 쓰러졌다. 안도 데루조 대위는 일본도로 시종장의 목을 치려 했으나, 부인이 애원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스즈키 시종장은 중상을 입고도 살아나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총리를 지냈다.
  
  쿠데타군이 닥치는 대로 중신들을 살해한 것은 그들이 ‘파괴는 곧 건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천황 측근의 간신들을 제거하면, 세상은 저절로 바로잡히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쿠데타 성공 후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겠다는 비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육군성, 경시청 등을 장악하고 황궁을 점거한 후, 황도파의 수장인 마자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郞) 대장을 총리로 옹립한 후 천황을 받들면서 쇼와(昭和)유신을 결행한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받들려고 했던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쿠데타에 결연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쿠데타 초기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스즈키 시종장의 부인은 천황의 유모였다. 스즈키 시종장 부부는 천황에게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사이토 내대신은 천황의 최측근 참모였다. 이런 이들이 쿠데타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황은 격노했다. 그는 대원수(大元帥)의 군복을 입고 나와 군부에 쿠데타 진압을 명령했다
  
  육군대신, 1사단장 등 군 상층부는 당초 쿠데타에 동조적이었다. 하지만 천황의 뜻이 워낙 강경했다. 2 27일 무력진압을 재가한 천황은 그날 하루에만 13번이나 시종무관장을 불러 “왜 빨리 진압하지 않느냐?”고 닦달했고, 급기야 “내가 직접 부대를 지휘해서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호령했다.
  
  결국 2 29일 진압군이 쿠데타군 토벌작전에 나섰다. 쿠데타군 지휘부는 저항을 포기하고 부하들을 원대복귀시켰다. 노나카 시로 대위는 자결했고, 나머지 주모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청년장교들이 자신들의 멘토로 생각했던 민간 우익 사상가 기타 이키도 주모자로 몰려 처형됐다.
  
  2·26사건으로 육군 내 황도파는 일소됐다. 육군을 장악한 통제파는 “2·26사건과 같은 쿠데타가 재발할 수도 있다”면서 정부를 협박, 나라를 군국주의로 이끌고 갔다. 2·26쿠데타는 당시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청년 박정희(朴正熙)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후일 박정희는 2·26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만주군관학교에 와 있던 간노 히로시(管野弘)를 만나 훈육을 받게 된다.


  공산당 서기장에게 수류탄 투척  
 

태평양전쟁의 패배는 일본 우익의 패배이기도 했다. 맥아더사령부는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 단체들을 해체하고 그 지도자들을 전범(戰犯)으로 처벌하거나 공직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좌익세력이 발호하고 냉전(冷戰)이 시작되자, 맥아더사령부는 우익세력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
  
  좌익세력이 주도한 2·1파업을 앞둔 1947 1월 신예대중당이라는 극우단체 소속 청년 두 명이 파업 지도자 조도 곳키 산별(産別)노조 위원장을 칼로 찔렀다. 이 사건은 전후(戰後) 최초의 우익테러 사건이었다. 신예대중당은 ‘당’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체는 아사쿠사의 야쿠자 마키 야스히라가 만든 폭력단이었다.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폭력단과의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학자들은 이런 단체들을 ‘의협계(義俠系) 우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48 7월에는 반공연맹 오쓰루 청년부 회원 고가 이치로 등 4명이 사가시 공회당에서 연설 중이던 도쿠다 규이치(田球一) 공산당 서기장에게 수류탄을 투척, 전치 1주의 상처를 입혔다.
  
  1960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정권이 추진하던 미일안보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 정국은 큰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좌익세력이 중심이 되어 반전(反戰)평화를 명분으로 조약에 반대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訪日)을 앞두고 경찰력만으로는 시위대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한 기시 정권은 우익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다마는 야쿠자들과 15000명의 도박꾼, 야바위꾼 등을 동원, 애국신농동지회를 조직했다. 크고 작은 우익단체들이 경찰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해 6 15일 전국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우익단체 유신행동대가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연극인회의와 주부 시위대를 습격, 8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극좌세력이 지도하고 있던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 학생 4000여 명이 이 사건에 자극받아 국회 구내로 진입했다. 경찰이 이들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대 학생 간바 미치코가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7대 언론이 공동사설을 발표해 기시 퇴진을 요구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방일을 취소했고, 얼마 후 기시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17살 소년, 사회당수를 척살

우익단체 대일본애국당 시절의 야마구치 오토야(왼쪽에서 두 번째).

 

  그해 10 12일에는 일본을 전율케 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가 백주에 척살(刺殺)당한 것이다. 그날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는 자유민주당, 사회당, 민주사회당 3당 당수 초청 연설회가 열렸다. 아사누마가 한창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가 단상에 뛰어올라 33cm짜리 칼로 아사누마의 가슴을 두 차례 찔렀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는 당시 17살의 대학 청강생이었다. 육상자위대원인 아버지 밑에서 애국심을 교육받으면서 자란 그는 대일본애국당이라는 극우단체에 몸담기도 했다. 그는 아사누마 사회당 위원장이 평소 친중반미(親中反美) 주장을 일삼는 것을 보고 아사누마 살해를 결심했다. 야마구치는 범행 당시 다음과 같은 문건을 소지하고 있었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의 적화(赤化)를 꿈꾸고 있다. 나는 너 개인에게 원한은 없으나, 일본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 책임과, 방중(訪中) 시의 폭언과 국회난입 등의 직접적 선동자로서 책임을 물어,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나는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야마구치는 조사 과정에서 야마구치는 당차고 이로정연하게 자신의 우익적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제1야당의 당수를 살해했지만, 미성년자여서 도쿄 소년감별소에 수용됐다. 그해 11 2일 밤 야마구치는 ‘칠생보국(七生報國·7번 다시 태어나도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뜻) 천황폐하 만세’라고 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천벌’이니 ‘칠생보국’이니 하는 말들은 메이지유신 시기의 지사(志士)들이 많이 썼던 말로 야마구치의 사고(思考)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열사(烈士)’로 기리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1970 11 25일 육상자위대 동부방면총감부 발코니에서 장병들에게 쿠데타를 선동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1960년대 일본은 격동의 시기였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극좌세력의 저항이 거세졌다. 1969 1월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의 도쿄대학교 야스다강당 점거사건이나, 적군파의 등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천황의 권위에 기대서 국가를 혁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금각사》 등의 소설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1960년대 중반부터 자위대 간부, 정부의 젊은 엘리트들과 어울리면서 자위대 입대체험을 하는 등 군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한국을 방문해 휴전선을 돌아본 적도 있다고 한다.
  
  1970
11 25일 미시마는 자신의 사병(私兵)집단인 방패회 회원 5명을 이끌고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동부방면총감부에 난입했다. 그는 총감을 감금한 후 자위대원 1000명을 불러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천황을 받들어 국가를 개혁하자며 쿠데타를 호소했다.
  
 
“자위대에서의 건군(建軍)의 본의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것이다. 일본을 지키는 것이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것이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일본을 뼈 없이 만드는 헌법에 따라왔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러 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일어설 자가 여기 없는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냉소와 야유였다. 절망한 미시마는 “그러면서도 무사인가?”라고 탄식하다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모리타 핫쇼(森田必勝)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미시마 유키오 사건은 친미반공(親美反共) 일변도의 기존 우익에서 탈피해, YP체제(얄타-포츠담체제·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전후체제) 해체, 반미(反美) 자주화와 천황절대주의,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체제 개혁을 주장하는 신우익(新右翼) 내지 민족파 우익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신우익은 1930년대 국가개조를 주장하던 혁신우익과 맥을 같이한다

 

  ‘천황 전쟁책임’ 언급한 나가사키 시장 저격
  
 
일본 우익의 테러 이유와 대상은 제한이 없었다.

  쇼와청년회라는 극우단체 회원이 북방영토 반환을 요구하며 일본을 방문한 바이바코프 소련 부총리를 저격(1968)하는가 하면, 국방청년대 회원 히로세 스미오가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는 이유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총리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1975).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이라는 극우단체는 오사카의 소련영사관에 화염병을 투척했다(1983).
  
 
미국을 상대로 한 테러도 있었다.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은 고베의 미국영사관에 불을 질렀고, 통일의용군의 이카와 다케시라는 자는 미국대사관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었다(1981).
  
 
천황에 대한 불경(不敬)을 이유로 한 테러도 여러 차례 자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1990 1 18일 발생한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나가사키 시장 암살 미수사건이었다. 모토시마 시장은 쇼와 천황이 사경을 헤매고 있던 1988 12 7일 시의회에서 일본공산당 소속 의원으로부터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
  
 
이로 인해 그는 우익단체들은 물론 소속 정당인 자유민주당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았다. 이듬해 1990 1 18일 극우단체 정기숙(正氣塾) 회원이 그를 저격, 중상을 입혔다. 《문예춘추》 사장 다나카 겐고는 황실 관련 기사에 불만을 품은 우익의 습격을 받았다(1994 11 20).
  
 
우익단체들을 폄하하는 기사를 쓴 언론사들도 우익의 공격을 받았다. 일본민족독립의용군은 우익운동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아사히신문》의 도쿄 본사와 나고야 본사에 방화했다(1983 8 13). 신우익운동가 노무라 슈스케(野村秋介) 1993 10 20일 자신이 이끌던 ‘바람()의 모임’을 ‘이()의 모임’이라고 조롱한 《아사히신문》 사장실에 난입해 사과를 요구하다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자살했다.
   

  가솔린 탱크 실은 트럭으로 총리 관저 돌진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우익은 보수 여당인 자유민주당의 부정부패나 재계(財界)의 지나친 영리추구에 항의하는 테러도 벌였다는 사실이다.
  
  1970
년대 록히드 사건에 우익세력의 대부(代父) 고다마 요시오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간사이애국자단체간담회 등의 우익단체에서는 고다마에게 할복 권고서를 보냈다.
  
 
마에노 미쓰야스(前野光保)라는 우익인사는 경비행기를 몰고 고다마의 집에 가미카제 공격을 감행, 자결했다(1976 3 9). 적보대(赤報隊)라는 극우단체는 리크루트 사건이 발생하자 불법 정치자금을 자유민주당에 제공한 에쓰기 전 사장 집을 습격해 총을 쏘고 도주했다(1988 8 10). 이듬해에는 신우익운동가 노무라 슈스케의 비서 미즈타니 신이치(水谷伸一) 등이 가솔린을 가득 실은 탱크 트럭을 몰고 총리 관저로 돌입하려 했으나 폭발 직전에 저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989 3 15). 1993 3 20일에는 우국성화(憂國誠和)라는 우익단체 회원이 자유민주당의 대표적 금권정치인 가네마루 신(金丸信)을 저격했다.
  
 
노무라 슈스케는 동료 3명과 함께 “재계의 영리지상주의 규탄”을 외치며 1977 3 3일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본부를 점거했다. YP체제타도청년동맹라는 극우단체는 부동산 가격 폭등에 항의해 1987 1 13일 안도 다로 스미토모부동산 회장의 집을 습격했다.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모리 유즈루라는 우익청년은 같은 달 31일 권총을 갖고 스미토모은행을 습격했다. 이런 행동들은 1930년대 일본 우익이 이노우에 준노스케, 단 다쿠마 등을 살해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월간조선 2017 4월호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5-04-15  “日정부, 아베 비판하면 노골적 압박 ‘중국 돈 받고 쓴 기사’ 인격모독까지”

日서 5년 근무 독일신문 특파원 ‘아베정권의 국수주의’ 폭로

▲2012년 독도 방문 2012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독도를 방문한 카르스텐 게르미스 기자. 그는 독도 방문 후 일본 외무성이 자신을 오찬에 초대한 뒤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담은 자료를 수십 장 건넸다고 칼럼에서 털어놨다. 일본외국특파원협회 홈페이지 캡처

 

일본군 위안부는 팩트(fact·사실)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14, 15세 소녀들이 자진해서 군 위안부가 됐다는 주장을 어느 나라가 믿겠나. 국제적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이 일본에서 나오고 있고 이걸 비판하는 해외 언론을 일본 정부는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5년간 일본 도쿄(東京)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한 독일의 대표적인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의 카르스텐 게르미스 기자가 마타도어(matador·흑색선전)를 동원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언론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일본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임기를 끝내고 독일 함부르크로 돌아간 그는 1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듭 거론하며 아베 정권의 고노 담화 검증 등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기소 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판에 대해서도 “한국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특파원들의 언론 자유는 한국이 훨씬 더 많다”고 꼬집었다.

그는 “일본 국민들은 바깥 세계에서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며 “이는 일본 주요 언론이 해외의 시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외국특파원협회 월간 기관지인 ‘넘버원 신문’ 4월호에 기고한 ‘나의 시각(On My Watch)’이라는 장문의 칼럼에서 아베 정권이 역사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해외 언론의 본사 편집국에 직접 압력을 행사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아베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를 공격하자 프랑크푸르트 주재 일본총영사가 FAZ 본사 국제담당 편집장을 찾아가 항의문을 전달하고 기사가 중국의 반일(反日) 선전에 이용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본사 편집장이 기사가 잘못됐다는 증거를 요구하자 총영사는 답변을 하는 대신 ‘돈이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며 “나를 비롯해 편집장과 신문사 전체를 모독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게르미스 기자는 “내가 베이징에서 돈을 받는 스파이라고? 나는 중국에 간 적도 없고 비자를 신청한 적도 없다”며 분노했다.

그는 또 칼럼에서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가 FAZ 편집장을 만나기 2주 전 외무성 관료들과 점심을 했다며 “그 자리에서 그들은 내가 ‘역사 지우기’라는 단어를 쓴 것과 아베 총리의 국수주의적 움직임이 일본을 세계에서 고립시킬 것이라고 한 데 대해 항의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독도를 방문하거나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고 오면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이 자신을 점심에 초대해 일본의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를 잔뜩 내밀었다고도 말했다. 이어 “지난해부터 분위기가 바뀌어 일본 외무성이 대놓고 비판적인 보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 엘리트들의 생각과 해외 미디어 보도 간의 괴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이는 아베 총리의 리더십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백한 방향 전환, 즉 역사를 지우기 위한 우파들의 움직임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아베 정부는 자국 국민들에게도 솔직하지 않다”며 “일본 대중도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 내부의) 화합은 (정부의) 압박이나 (대중의) 무지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일본 해외 공관들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물의를 일으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뉴욕 주재 일본총영사관은 맥그로힐 출판사와 미국 교과서 집필자에게 수정을 요구하다가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2016.09.05   日王과 아베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정부 출범 전만 해도 일본인은 일왕에 열광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왕을 받들게 된 것은 메이지 정부가 권력 유지를 위해 택한 정책 때문이었다. 유신 주역들은 하급 무사들이었기 때문에 번주(藩主)나 자기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무라이들을 누르고 정부의 권위를 세워줄 상징이 필요했다. 메이지 일왕은 1867년 즉위 당시 만 14세의 유약한 소년에 불과했지만 유신 주역들은 자신들조차 숭배하지 않던 어린 왕을 현인신(現人神)이라 치켜세우며 국가 지배를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천황은 신의 나라인 일본을 통치하는 현인신이다. 일본인은 신의 자손이다.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개발됐다.


일본 대중은 메이지 말기를 거쳐 다이쇼(大正)·쇼와(昭和) 시대가 되자 '천황제'가 만든 민족적 나르시시즘에 도취했다. 당시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는 군부와 재벌이었다. 군부는 일왕의 손발이 되어 일하는 충신을 자처하며 왕의 권위에 기대어 국민 위에 군림했다. 재벌은 그런 군부와 손잡고 힘을 키웠다. 가리야 데쓰는 저서 '일본인과 천황'에서 "천황에 대해 불경한 얘기를 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됐으며, 근대 천황제는 이런 공포에 의해 유지됐다"고 비판했다. 군부와 재벌은 일왕의 권위를 내세워 국민을 지배했고 전쟁을 향해 폭주했다.


상징으로서의 일왕의 존재는 전후에 만들어진 일본 평화헌법 1조에도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러한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의한다'는 문장으로 남아 있다. 아베 총리 등 일본 보수 세력은 헌법을 고쳐 이런 '상징 천황제'를 더 강화하려 하고 있다. 국가의 상징에서 국가의 원수로 승격시키려 한다. 일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했던 옛날 메이지 헌법 체제에 가까운 형태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다. 옛날 군부가 그랬듯이 일왕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국민을 지배하겠다는 의도일 수 있다.


아베의 의도대로 되려면 일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존재하고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아키히토 일왕이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아베의 표정이 굳어졌고 일부 우익 세력은 일왕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에 당황했다.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일왕이 헌법 개정에 단호한 반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보기도 한다.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쪽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보도에서 지난달 9~11일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아베 내각 지지율이 직전 조사보다 4%포인트 높은 62%로 나타나 2년 만에 60%대 로 올라섰다고 밝혔다. 아베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총리직을 계속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도 59% '그렇다'고 했다. 이런 지지가 아베의 국정 운영 방향에 백지 위임장을 준 것은 아닐 것이다. 일왕부터가 위임장을 주지 않았다. 그의 생전 퇴위 의사는 평화헌법 개정 이후 있을지 모를 역사의 퇴행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석 국제부 차장

 

◇아베 신조의 뿌리는 조슈벌(閥) -「明治維新의 진원지」시모노세키·하기

「明治維新의 진원지」시모노세키·하기와 安倍晉三(아베 신조) (1)

아베 신조(安倍晉三)의 뿌리는「국권 강탈의 원흉」조슈閥

명치유신의 주체로서 일본 국수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만든 조슈벌(閥). 조슈벌의 후계자이며 한국침략의 원흉인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아베 신조. 아베家 3代가 흠모한 역사인물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요시다 쇼인,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카다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등 조슈(長州) 인맥은 일본사에서 어떻게 평가되든 한국사에서는 국권 강탈의 원흉들이다. 일제(日帝) 패망 이후에도 조슈(야마구치)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등 2人의 총리대신을 이미 배출했고, 이제는 아베 신조 내각의 제2기이다. 조슈 인맥의 사상적 뿌리에 접근, 아베 신조의 정치적 좌표를 탐색해 본다.

 

아베 신조는 A급 전범의 외손자

▲조슈번의 1863년 양이전(攘夷戰)에서 미국 상선에 첫 포격을 가했던 가메야마 포대(砲隊) 터에서 내려다본 시모노세키 해협. 이때의 포격이 근대 일본의 개막을 고()하는 제1탄이 되었다.

 

지난 830일 오전 8, 필자는 부관(釜關)페리 「성희호」로부터 하선해 시모노세키港()에 상륙했다. 시모노세키(下關)는 대마도(對馬島)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이다. 시모노세키港 국제터미널에서 시모노세키驛()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뱃머리와 驛 사이에 위치한 호텔 「도큐(東急)인」에 짐을 맡겨놓고 걸어서 역시 5분 거리인 아베 신조(安倍晉三) 중의원 지역구(시모노세키 제4선거구) 사무실로 직행했다. 시모노세키驛 남쪽 약 700m 「야마구치(山口)신문」 사옥 건너편에 위치한 신조의 지역구 사무실은 아직 출근시간 전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다. 이곳은 재차 방문할 예정이라 위치만 확인해 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시모노세키에서 가장 사랑받는 역사인물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덕천막부)에 결정타를 가해 그 숨통을 사실상 끊어 버린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이다. 아베 신조의 이름 중 「晉」(한글 발음 진)은 「진작(晉作)」에서 한 字()를 따온 것이다. 총리대신이 될 뻔한 시기에 췌장암으로 사망한 晉三의 선친(先親)인 아베 신타로(安倍晉太郞·自民黨 간사장과 외무대신 역임)의 이름에도 역시 「晉」 자가 들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빌려 쓸 수 없다. 조선조 시대의 얘기지만, 할아버지 이름 字 중 한 字가 고을 이름 중 한 字와 같다고 해서 그 고을의 사또 부임(赴任)을 거부한 사례까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관습은 우리와 정반대다. 시모노세키에서는 심지어 「晉作 우동」, 「晉作 모치()」라고 쓰인 간판까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베 신조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의 계보를 보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다카스기 신사쿠-기시 노부스케(岸信介)로 이어지는 조슈(長州) 인맥이다. 조슈는 일본 혼슈 서쪽 끝의 藩(: )으로, 지금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다. 신조의 어머니 요우코(洋子)가 기시의 큰딸이다. 젊은 시절의 기시는 일제(日帝)의 만주국 식민지 경영에 투신해 日帝 패망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3 3개월간 복역하다가 풀려나와 자민당(自民黨) 간사장과 외무대신 등을 거쳐 1957 2월부터 1960 7월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오뚝이처럼 부활한 그는 정적들로부터 「昭和(소화·쇼와)의 요괴(妖怪)」라고 불렸다.

 

아베 신조(오른쪽)와 그의 시모노세키 지구당 당사(黨舍, 왼쪽).

 

 역사 왜곡의 원점인 일본서기의 맹신자들 

총리대신 재임時, 기시는 좌파의 극렬한 반대 데모에도 불구하고 美日 新안보조약의 체결을 소신대로 강행했다. 훗날의 얘기지만, 이것은 일본의 안보와 경제번영의 초석을 놓은 「기시의 결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아베 신조는 「기시의 정치 DNA 상속자」를 자처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은 1964 11월부터 1972 7월까지 총리대신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에이사쿠는 어릴 때 사토家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에이사쿠는 총리대신 재임시, 미국에 점령된 오키나와를 반환받았고, 韓日 국교 정상화에 성공했다.
 


요시다 쇼인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스승이다. 요시다 쇼인은 한일관계사 왜곡의 원점인 일본서기의 맹신자였다. 쇼인이 훈장 노릇을 한 「송하촌숙(松下村塾: 쇼카손주쿠)」의 문하생들의 면면을 보면 신사쿠를 비롯해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토시마로, 이리에 스기조(入江杉藏),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다. 후일 明治정부의 실력자가 되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쇼카손주쿠가 개설되기 전 번교(藩校)인 명륜관(明倫館·메이린간)」에 다니면서 쇼인에게 배운 만큼 쇼카손주쿠의 숙생(塾生)들에게는 사형(師兄)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쇼인은 일본에서 「막말지사(幕末志士)의 스승」이라 불린다. 지금도 야마구치縣 사람들 앞에서 그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으면 대번에 핀잔을 받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쇼인은 잊지 못할 애물일 따름이다. 그는 일찍이 『서양(西洋)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몽(滿蒙)에서 벌충하자』고 부르짖은 정한론(征韓論)」의 원조(元祖). 요시다 쇼인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伊藤博文 初代 1885.12~1888.4 5 1892.8~1896.8 7 1898.1~1898.6 10 1900.10~1901.5
山縣有朋 3 1889.12~1891.5 9 1898.11~1900.10
桂太郞 11 1901.6~1906.1 13 1908.7~1911.8 15 1912.12~1913.2
寺內正毅 18 1916.10~1918.9
田中義一 26 1927.4~1929.7
岸信介 56 1957.2~1958.6 57 1958.6~1960.7
佐藤榮作 61 1964.11~1967.2 62 1967.2~1970.1 63 1970.1~1972.7

 

 『동(動)하면 우레 같고 발(發)하면 풍우(風雨) 같았다』

시모노세키에 찾아온 만큼 우선 이곳 「최고의 영웅」 다카스기 신사쿠의 행적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아베 신조의 지역구 사무소를 뒤로 하고 걸어서 시모노세키 역사(驛舍)로 발길을 돌렸다. 「야마구치신문」 사옥 앞길을 거쳐 시모노세키 최대 할판점인 「씨몰하관(下關)」 옆으로 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바로 기차역이다.

 

역사(驛舍) 안 교통정보센터로 찾아가 하루 동안 시내버스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패스」를 일금 700엔에 구입했다. 기왕에 역사를 찾은 김에 다음날인 831일 조슈번의 중심지로서 명치유신의 스타트라인인 하기()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위해 시모노세키~東하기() 간 왕복 기차표를 미리 구입해 두었다(편도 요금 1890).


시모노세키는 시가(市街) 전체가 역사의 현장이다. 시모노세키 시역 동북쪽 끝 지역 요시다(吉田)에 위치한 동행암(東行庵·도고안)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東行은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호(雅號). 그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지만, 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빛나는 족적(足跡)을 남겼다. 동행암은 신사쿠의 애인 오우노가 삭발하고 「곡매처니(谷梅處尼)」란 법명의 여승이 되어 신사쿠의 명복을 빌었던 암자다.

 

시모노세키 역전에서 동행암까지는 25km 거리다. 중심가를 벗어나 산양도(山陽道·산요도)로 접어들면 버스의 차창 밖으로 간몬해협(關門해협·시모노세키 해협)의 급류가 흐르는 바다가 펼쳐진다. 이곳과 대안(對岸)의 北규슈市 모지(門司)港 사이의 바다 폭은 가장 좁은 곳이 600m이다. 그 위로 간몬대교(大橋)가 걸려 있다. 이 간몬해협이야말로 1864년 조슈번이 영국 등 4국 연합함대의 포격에 굴복한 패전의 현장인 동시에, 1866년 신사쿠가 조슈번을 공격해 온 막부군을 격파한 결전(決戰)의 현장이기도 하다.  


모지港으로 건너가는 유람선의 선착장이 소재한 가라도(唐戶)의 가메야마(龜山) 포대, 간몬대교 바로 동쪽의 단노우라(壇之浦) 포대, 신사쿠가 조슈의 속론파(俗論派)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거병한 공산사(功山寺)가 소재한 조후(長府) 등이 차례로 전개된다. 필자는 가장 먼 거리의 동행암을 먼저 답사한 후 귀로에 이들 일본 근대사의 유적지를 둘러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신사쿠의 짧은 생애를 살피면서 그것과 동행(同行)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전야(前夜)」인 막말사(幕末史)를 간략하게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사쿠는 명치유신을 가능하게 했던 조슈 전쟁의 영웅이다. 신사쿠의 행적에 대해 그의 부하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動()하면 우레 같고 發()하면 풍우 같았다』고 표현했다.

 

 

吉田松陰을 만나 학문에 눈뜬 19세 청년

▲다카스기 신사쿠. 그는 도쿠가와 막부 타도의 영웅이었다.
 

신사쿠는 1839년 다카스기家의 13녀의 외아들로 조슈藩()의 성 밑거리(城下町·조카마치)인 하기의 국옥횡정(菊屋橫丁)에서 태어났다. 당시 다카스기家는 조슈번의 가신단(家臣團) 13등급 중 4등급인 大組(대조·오쿠미)에 속했다. 녹봉은 150石이다. 당시 쌀 1石은 지금의 18ℓ이다. 다소 여유가 있었던 中上級 무사집안이었다. 신사쿠는 12세 무렵부터 검술을 연마해 20세 전후에 유생신음류(柳生新陰流)의 면허(免許)를 개전(皆傳)한 검의 고수(高手)이다.

 

그는 번교(藩校)인 명륜관 등에 다녔지만, 구태의연한 학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19(1857)의 나이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숙(入塾)해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되고 부터는 구국(救國)의 실용(實用)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독특한 교수법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신사쿠의 조부와 부친은 신사쿠가 쇼카손주쿠에 다니는 것에 반대했다. 훈장인 요시다 쇼인의 가격(家格)이 하급(下級) 사무라이인데다 그 정치노선이 과격한 존왕양이(尊王攘夷였기 때문이다. 신사쿠는 집안 어른의 눈을 피해 밤중에 가만히 쇼카손주쿠에 다녔다.

 

1859 10, 쇼인은 막부의 최고위직인 老中(노중)으로서 열강의 위협에 굴복하여 개국(開國)노선을 추진하던 마나베 아키가쓰(間部詮勝)의 암살을 기도한 사실이 드러나 에도의 전마정(傳馬町) 감옥에서 참수당했다.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들은 신사쿠 등 쇼카손주쿠 문하생들은 복수를 맹세했다. 


1860
1, 신사쿠는 양친의 권유로 「하기 城下의 최고 미인」으로 소문난, 번사(藩士) 이노우에 헤이우에몬의 차녀 마사()와 결혼했다. 1861 3, 신사쿠는 번주의 世子 모리 사다히로(毛利定廣)의 소성역(小姓役: 측근 비서직)으로서 번청(藩廳)에 출사했다.
 


엘리트 번사(藩士)로서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한 신사쿠에게 전기(轉機)가 다가왔다. 1862, 24세의 신사쿠는 藩의 추천으로 막부 파견단의 1人이 되어 淸朝 중국의 上海(상해·상하이)에 도항해 중국의 내전(內戰)과 열강의 동향을 3개월간 시찰하게 되었다.


『日本도 위험하다』

▲조슈번 攘夷激派의 리더 구사카 겐즈이. 겐즈이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더불어「松下村塾의 雙璧」으로 일컬어졌으나「禁門의 變」때 敗戰하자 현장에서 자결했다.
 

막부가 이 시찰단을 보낸 이유는 上海에 무역의 거점을 설치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때 조슈번은 신사쿠에게 上海에서 「외국의 사정과 형세, 제도, 기계(器械)」를 견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太平天國의 난(1851~1864)」이 발발해 上海 교외까지 교전지역이 되어 총소리가 들려오던 시기였다. 아편전쟁(1842) , 부패·무력한 淸朝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태평천국의 혁명군에는 많은 농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
 


상해港에 도착하면서 신사쿠 등을 놀라게 한 광경은 정박해 있는 유럽 열강의 상선·군함 수백 척과, 육상에 늘어서 있는 상관(商館)의 성곽과 같은 웅장함이었다. 2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중국은 남경조약을 조인할 수밖에 없었고, 이 조약에 따라 중국 측은上海·廣州(광주)·福州(복주)·廈門(하문)·寧波(영파) 5개 港을 개항했다. 열강은 이들 5개 港에 영사관을 설치해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누리면서 무역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신사쿠는 上海 체재 중의 일기인 「유청오록(遊淸五錄)」에 『중국인은 외국인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 일본도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 일기에서 신사쿠는 『우리 일본도 막부의 虛弱외교로 인해 이미 (중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통탄했다.
 


특히, 신사쿠는 上海 체재중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縣)이 上海 일대에서 세계를 상대로 密무역을 이미 개시했고, 장래에는 사쓰마로부터 구미(歐美)로 건너가는 항로를 개설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신사쿠는 초조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의 최대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슈번은 구식(舊式) 범선 군함을 2척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군비(軍備)로는 만약 구미 열강의 공격을 받는다면 한순간에 깨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上海로부터 규슈의 나가사키港에 도착한 신사쿠는 네덜란드의 무기상이 매도하려 했던 증기선을 매입하기 위한 계약을 독단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조슈번의 수뇌부는 그의 독단 구매계약을 추인하지 않았다. 번내에서 신사쿠의 독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네덜란드 측도 이 상담을 포기했다. 신사쿠는 번주 父子에게 귀국 보고를 한 후 에도(江戶·지금의 東京) 근무를 命() 받았다.


신사쿠의 에도 체재시, 조슈번에서는 「항해원략책(航海遠略策)」을 주장하던 나가이 우다(長井雅樂)가 실각하고, 번론(藩論)이 쇄국으로 방향전환을 해버렸다. 「항해원략책에 조정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고 구사카 겐즈이 등 양이파(攘夷派)가 경도(京都·교토) 조정 관계자와 통해 비난한 결과였다. 항해원략론은 쇄국을 포기하고, 서양열강처럼 해외로 진출해 국위를 떨치자는 구상이었다. 너무 앞서간 나가이는 결국 자기 배를 갈라 자결했다.
 


1862
7, 항해원략책을 파기한 조슈번은 번론(藩論)을 이번에는 코메이(孝明) 천황의 지론이기도 한 양이(攘夷·조이)로 돌아섰다. 조슈번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京都 조정도 「攘夷」 방침을 명확히 했다.
 


에도에서 신사쿠는 조슈번의 동지들에게 上海에서 느낀 「위기감」을 전달했다. 1862 11월 신사쿠 등 10여 명은 가나가와(神奈川)에 있던 외국공사를 암살하려 했지만, 정보가 누설되어 중지했다. 이어 1212, 시나가와(品川)에 건설 중이던 영국공사관에 잠입해 방화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 방화에 참여한 범인은 신사쿠 등 13명이었는데,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방화범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구사카 겐즈이(쇼카손주쿠 수학 시절에 신사쿠와 더불어 「쌍벽(雙璧)」으로 불렸음), 이노우에 가오루(후일 외무대신과 駐조선공사 역임), 이토 히로부미(일본 수상 4회 역임).


게릴라 전법(戰法)의 민병조직「기병대(奇兵隊)」창설

▲가메야마 포대 터. 1863 510일 구사카 겐즈이의 지휘로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가 며칠 후 美 군함 와이오밍號의 보격공격을 받아 궤멸했다.
 

「양이(攘夷)」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조슈번은 1863년 들어 절정기를 맞았다. 그해 34일 칙사로부터 양이(攘夷)를 독촉받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上洛(상락: 천황이 있는 京都로 올라감)했다. 쇼군의 上洛은 3대 이에미쓰(家光) 이래 200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이 기회에 조정의 권위를 확립시켜 막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조슈번의 속셈이 숨어 있었다.  


당시의 유행(流行)사상은 非현실적인 양이(攘夷)였다. 1863 420, 이에모치는 불가능한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世論에 밀려 「510일까지 양이(攘夷)를 단행하겠다」고 코메이 천황(天皇)에게 약속했다. 이미 구미 열강과의 사이에 개국의 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던 만큼 막부로서는 벼랑가로 몰린 꼴이었다.
 


이 무렵 신사쿠는 실력이 없으면서 목소리만 큰 조슈번의 양이(攘夷) 방식에 회의했던 것 같다. 진짜 양이(攘夷)를 하려면 정치게임보다는 우선 군사력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력증강 건의는 조슈번 상층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25세의 신사쿠는 돌연 삭발을 하고, 그 다음날인 315일 번청(藩廳) 10년의 휴가를 신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는 스승 요시다 쇼인의 生家 근처에 은거했다.
 


그러나 시대는 신사쿠에게 독서삼매(讀書三昧매)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 510, 양이(攘夷)의 「급()선봉」이던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양이전(攘夷戰)을 감행했다. 510일은 조슈번이 앞장서 무리하게 막부를 몰아세워 양이기한(攘夷期限)으로 선포된 날이었다.
 


1863
510일 새벽 2, 조슈번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의 지휘로 외국 선박에 대해 무차별 포격을 감행했다. 이날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려고 하다 포격을 받고 혼이 난 선박은 미국 국적의 상선 팬브로그號였다.
 


공격을 받은 미국 측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다음날, 미국 군함 와이오밍號가 보복 공격을 가해 가메야마(龜山)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조슈번의 군함 경신환(庚申丸)과 임술환(壬戌丸)은 침몰하고, 계해환(癸亥丸)은 대파당했다.
 


나흘 후에는 프랑스 군함 2척이 역시 보복을 위해 시모노세키 해협에 진입해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해안 포대들을 점거·파괴하고, 민가(民家)도 방화하고 철수했다.
 


이때 은거 중이던 신사쿠는 번청(藩廳)에 게릴라 전법의 민병(民兵)조직인 「기병대(奇兵隊·키헤이타이)」의 창설을 건의했다. 그가 창설한 奇兵隊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투력 위주로 대원을 선발·편성한 부대였다. 신사쿠는 기병대의 총독에 취임했다. 기병대에 이어 유격대(遊擊隊)·어순대(御盾隊)·집의대(集義隊)·역사대(力士隊) 등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들 제대(諸隊)의 총병력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번청(藩廳)은 농민·상인 등 일반 백성이 무장을 하고 무기(武技)를 배우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만 무기를 소유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던 막부 조종(祖宗)의 방침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조치였다.


「8·18 정변(政變)」으로 추방된 조슈藩

이 무렵 조슈번의 「양이격파(攘夷激派)」는 조정의 급진적 공경(公卿)과 짜고 천황의 양이친정(攘夷親征)과 도막(到幕·막부타도)의 강행을 기도했다. 그러나 코메이 천황은 열렬한 양이론자(攘夷論者)이기는 하되, 양이(攘夷)는 어디까지나 막부를 중심으로 한 공무합체(公武合體)로 결행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공무합체(公武合體)에서 「公」은 조정(朝廷), 「무()」는 막부를 의미한다. 이것은 코메이 천황이 「막부의 타도」라는 현실정치의 변혁까지는 바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조슈의 양이격파(攘夷激派)는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 자파(自派) 공경(公卿)들을 통해 천황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813일 「양이(攘夷)를 위한 천황의 친정(親征)을 결행하겠다」는 조칙(詔勅)이 나왔지만, 역량상(力量上)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조슈번의 라이벌인 사쓰마번과 경도수호직(京都守護職)을 맡고 있던 아이즈(會津)번이 조슈번의 양이격파(攘夷激派)를 경도(京都)로부터 추방하기로 합의해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8
18일 새벽, 아이즈·사쓰마·요도()의 세 藩에 황거수위(皇居守衛)의 명령이 떨어졌다. 3藩의 병력은 완전무장하고, 宮城의 9개 문을 엄중히 폐쇄하고, 召命(소명)이 없는 자는 예컨대 그가 관백(關白: 천황을 대리해 정무를 처리하는 최고위직)이라도 입문시키지 않았다.
 


조의(朝議)에서는 양이파(攘夷派) 공경(公卿)의 참내(參內)·외출·면회의 금지, 조슈번의 사카이마치門 경위 임무 免除 등이 결정되었다. 이 친위 쿠데타가 「8·18의 變()」이다.
 


조슈번 병사들은 사카이마치門까지 달려왔지만, 사쓰마번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사쓰마 번병들은 대포의 포구를 열어 놓고 발사할 태세였다. 양군(兩軍)의 대치상태에서 조슈번에 대해 「퇴거하라」는 칙명이 전해졌다.
 


상황은 조슈번에 절대 불리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조정에서 쫓겨난 공경(公卿) 7명 및 양이파(攘夷派) 사무라이를 포함한 2600명이 京都 북쪽 대불묘법원(大佛妙法院)에 모여 협의한 끝에 일단 조슈로 내려가 재거를 도모하기로 했다.


「금문(禁門)의 변(變)」과 막부(幕府)의「제1차 조슈 정토(征討)」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조슈번은 101일 신사쿠를 오번두(奧番頭)로 삼았다. 오번두는 번주의 측근 중 측근으로 사실상 번을 운영하는 역직(役職)이다. 당시 신사쿠의 나이 25. 


공무합체파(公武合體派)에 의한 8·18정변으로 京都에서 쫓겨난 조슈번의 존양파는 1864년에 들어 상경(上京) 복수전을 감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조슈번 유격대 총독 키지마 마타베(來島又兵衛), 구사카 겐즈이 등이 강경하게 京都 진발을 주장했다. 신사쿠는 『편협한 시야(視野)에 의한 소양이(小攘夷)를 버리고, 진정한 부국강병에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진발파(進發派)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신사쿠는 동문수학(同門修學)한 구사카 겐즈이 등 진발파를 설득하기 위해 번명(藩命)을 받지도 않고 2개월간 上京한 사실이 밝혀져 귀번한 후 즉각 성하(城下)의 야산옥(野山獄)에 수감되었다. 당시 「탈번(脫藩)의 죄」가 가볍지 않기는 했지만, 스피드 출세를 한 신사쿠에 대한 주위의 질투가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평소 신사쿠는 「직언직행 방약무인(直言直行 傍若無人)한 성격」이라는 인물평을 받고 있었다.


조슈 양이격파는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슈번은, 병력 3000여 명은 4隊로 나눠 京都로 진격했다. 1864 719일 未明, 조슈번의 家老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의 부대가 京都 진입을 노리며 伏見(후시미) 가도(街道)를 북상하다 오가키·히코네藩 부대와 조우해 전단이 열렸다.
 


가노(家老) 쿠니시 시나노와 유격대 총독 키지마 부대는 2대로 분진(分進)해 하마구리門을 향해 쇄도했다. 백병전을 벌여 일시는 아이즈 藩兵의 수비선을 뚫고 궁궐 내부로 침입했지만, 새로 투입된 사쓰마·구아나(桑名) 번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구사카 겐즈이의 부대는 사카이마치門에 육박했지만, 포격전 끝에 패주했다. 겐즈이는 패전 현장에서 자결했다. 조슈의 4路軍은 모두 패전했고, 키지마 등은 전사했다. 이로써 조슈번 존양파는 거의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것을 궁궐에 대포를 쏘았다고 해서 「禁門(금문·킨몬)의 變」, 또는 최대 격전지의 이름을 따 「하마구리門의 變」이라고 부른다.
 


코메이 천황은 조슈번 추토(追討)의 칙령을 발했다. 궁궐을 향해 대포를 발사한 조슈번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격노한 것이다. 막부의 조슈정벌軍(총독 德川慶勝)은 히로시마에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조슈번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15만 대군이었다.


그러나 열강 함대와의 「제1차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혼찌검이 나고 군사력도 피폐해진 조슈번은 항전을 포기했다. 조슈번의 속론파(俗論派) 정권은 막부군에 공순(恭順)의 자세로 화평(和平)를 요청했다. 막부군은 「禁門의 變」 현장 책임자인 마쓰다(益田右衛門介) 등 세 가노(家老: 번의 최고위직)의 수급(首級)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삼키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슈번은 세 가노(家老)를 셋부쿠(切腹: 자기 배를 갈라 자결함)시키고, 나카무라(中村九郞) 등 참모 4명은 참수했다. 세 가노(家老)의 수급은 즉각 히로시마의 막부 대본영(大本營)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사죄(謝罪)의 세리머니는 끝나고, 강화 조건을 정하는 실질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막부 측은 조슈 번주 父子를 감시하에 두기 위해 에도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슈번으로서는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부로서도 15만의 정장군(征長軍)을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다이묘들이 유혈 사태를 회피하려 했다. 무엇보다 거액의 파병비용을 더 이상 지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864 2월 막부군과 조슈번 사이에 모리(毛利) 부자가 사죄·근신하는 등 막부의 체면을 세워 주는 선에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1차 조슈정벌戰은 전투를 치러 보지도 못한 채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막부 내부의 강경파는 화평조건에 불만이었다. 이럴 때 조슈번에서는 「토막(討幕)」을 주장하는, 자칭 「정의파(正義派)」가 쿠데타를 일으켜 항복노선의 속론파(俗論派)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토막(討幕)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조슈번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태를 방관하고서는 막부의 위신이 설 수 없었다. 1865 32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는 조슈 정벌을 위한 칙허(勅許)를 얻기 위해 上洛했다.
 


막부의 힘이 강한 때였다면 쇼군이 그런 칙허(勅許) 따위는 애당초 받으려고 생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존왕양이파에 의해 잔뜩 고무된 천황은 종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코메이 천황은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에 딴지를 걸었다. 먼저 조슈번과 협상해 보고 그래도 정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정토하라는 따위의 간섭이었다.
 


이렇게 막부의 정장전(征長戰)이 자꾸 천연되는 상황에서 4개국 연합함대의 조슈번 공격이 더 빠르게 전개되었다. 1863 510일부터 6회에 걸쳐 외국선에 대해 포격을 감행한 조슈번에 대해 4개국이 응징을 결의했던 것이다.


당시 번명(藩命)으로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급거 귀번해 「열국과 강화하라」고 번청(藩廳)을 설득했지만, 헛수고에 그쳤다. 「禁門의 變」이 발발해 궤멸적 타격을 받은 조슈번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회피를 위한 교섭대표를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계속)

 

「明治維新의 진원지」시모노세키·하기(2)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征韓論
아베 신조(安倍 晋三)의 對韓觀

아베 신조의 師表는 조선침탈 선도한 조슈閥의 정신적 스승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征韓論과 天皇至上主義의 세례를 받은 그의 문하생들은 明治정부의 주체세력인 조슈閥을 형성해 한반도 强占을 주도했다. 신임 日本 총리대신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 선생님의 思想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公言한 바 있다. 총리대신 취임 후 韓國을 두 번째 방문국으로 선택한 그의 역사인식과 對韓정책을 탐색해 본다.

 

요시다 쇼인의 征韓論

▲조슈번 藩主 모리氏의 하기城 터가 위치한 指月山(좌측 상단 바다쪽으로 돌출한 부분)과 성밑거리(城下町). 마쓰모토川과 하시모토川이 감싸고 있다. 

 

1853년 미국 東印度(동인도)함대사령장관 페리 제독의 砲艦外交(포함외교)는 일본 지식인에게 국가적 위기를 한층 절박한 것으로 인식시켰다. 특히, 히라다(平田)派 國學 및 後期 미도(水戶)學이란 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 尊王사상에 의해 배양된 攘夷(양이)의 바람이, 西洋 열강에 굴복한 幕府(막부)의 허약외교에 대한 비판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통합의 새로운 基軸(기축)으로서 天皇의 존재가 急부상해 가지만, 그것은 어이없게도 征韓論(정한론)의 대두를 동반하고 있었다.

 

히라다派 國學과 후기 미도學에 대해선 뒤에서 재론하겠지만, 여기서는 먼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無知했던 역사의식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明治維新(명치유신)의 주체세력인 조슈 인맥이 쇼인으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직접 받은 그의 제자들인데다 新任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晉三)조차 『나 자신, 吉田松陰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전파하는「月刊 松下村塾」창간호(2004)에 실린 아베 신조의「應援 메시지」.

페리의 공갈에 굴복해 幕府가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상황에서, 요시다 쇼인이 「敵情(적정)탐사」를 위해 에도(東京)灣 입구의 요충 시모다(下田)로부터 密航(밀항)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罪囚(죄수)가 된 사실은 이미 지난 호에서 살폈다. 그때의 옥중에서 쇼인은 다음 내용의 편지를 그의 동지들에게 보냈다.


 
<(러시아)·墨(미국)과 강화를 했지만, 우리가 이를 결연히 파기함으로써 夷狄(이적)에게 信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만 章程(장정)을 嚴히 하고 信義를 두텁게 하면서, 그 사이에 國力을 배양해 取하기 쉬운 朝鮮·滿洲·支那를 복종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國富와 토지는 鮮·滿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歐美 열강과의 조약은 지키고, 그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조선 및 만주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만회해야 한다』는 쇼인의 아시아 침략 구상은 후일 帝國日本의 국책으로 현실화된다. 다만 쇼인의 征韓論에는 약간의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는 했다.

 

쇼인은 『朝鮮과 滿洲를 손에 넣으려면 艦()이 아니면 不可하다는 것이 나의 本志인데, 이는 天下萬歲(천하만세)를 이어 가야 할 業()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 조선·만주에의 침략구상을 견지하면서도 『지금은 아직 국력이 이에 미치지 못한 즉 巨艦을 보유해야 할 것』이므로 그 실시는 잠시 유보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쇼인은 일본의 사무라이가 페리의 위압에 대해 싸움 한번 벌여 보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 것은 그 마음()이 바르지 않고, ()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情況(정황)에서 긴요한 과제는 대포 및 군함을 만들기에 앞서 志를 단련하고, 氣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쇼인의 논점이었다.

 

▲요시다 쇼인像(京都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그는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을 육성한 國粹主義 사상가였다(사진 왼쪽). 1854 3월 시모다(下田) 감옥에 수감된 쇼인. 6개월 후 그는 하기()의 野山獄으로 이감되었다(사진 오른쪽).

잘못된 역사의식의 출발점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이 육성된 요시다 쇼인의 松下村塾(쇼카손주쿠).
 

그는 특히 「敵을 알기」 이전에 「자기를 아는」 것이야말로 攘夷의 주체로서 자기를 천명·확립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優先(우선)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것은 『우리 國體가 외국과 다른 所以』를 명확히 하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고 했다. 日本이 日本다운 까닭, 國體의 究明(구명)에 쇼인은 자기 나름으로는 골몰했다. 그리고 쇼인은 日本의 독자성을 中國과의 對比로 해명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易姓革命(역성혁명)으로 왕조를 바꿔 온 中國에 대하여 萬歲一系(만세일계)의 천황이 중심이 되는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했다. , 「天下는 天下의 天下」라는 중국에 대하여 「天下는 一人의 天下」인 일본이 비교우위에 있다는 발상이었다. 「人民이 있은 후에 天子가 있다」는 中國에 대하여 일본 本然의 모습은 「神聖(신성)이 있은 연후에 蒼生(창생)이 있다」, 즉 천황이 존재하고 나서 인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中國에 있어서 신하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主君을 구해 거취를 정하는 「품팔이 奴婢(노비)」인 것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譜代(보대)의 家臣이고,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흔쾌히 죽는, 절대적 君臣관계라고 했다. 이것은 앞서 萬歲一系의 천황이 영원불변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쇼인이 野山獄에서 풀려나와 幽閉되었던 그의...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2015.04.08  "아베, 한국뿐 아니라 日국민에도 기만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해야"

위안부 등 실제 벌어진 일, 인정하고 책임지려 안해
日정부는 학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받아쓰기 시켜선 안돼

 

일본 정부가 일본 교과서만 고친 게 아니다. 미국 교과서도 고치려고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에 압력을 넣었다. 거기에 항의하며 집단성명을 낸 역사학자 20명 중 하나가 앤드루 고든(Gordon·63)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다. 교토에 머물고 있는 고든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숫자가 틀렸다'면서 교과서를 고치라고 요구하는데, 정말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정부가 학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받아쓰기(dictate)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나는 바로 그 때문에 서명했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이 역사 수정주의에 빠졌다'는 논란이 일었는데.
"2
차대전 중 일본은 제국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위안소를 세웠다. 많은 경우 위탁했지만 때로는 군이 직접 운영했다. 위탁해도 운영을 감독했다. 병사들에게 납치당해 끌려온 여성도 있고, 속아서 팔려온 여성도 있었다. 일본은 그런 불법행위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근본적으로 강제적이었다. 따라서 위안부 숫자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가가 사안의 핵심이 아니다. 난징대학살도 마찬가지다. 정말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야만적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일본 정부의 문제는.
"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벌어지지 않은 일(what didn't happen)'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역사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실제로 벌어진 일(what did happen)'이다. 그들은 그걸 인정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만약 일본 외무성이 맥그로힐 출판사에 찾아와 '위안부 문제가 있었다는 건 슬픈 일이고, 이런 역사를 당신들이 책에 기록해줘서 우리로서도 고맙다. 다만 숫자가 좀 틀렸으니 이건 정확하게 바로잡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냥 그 사무실에 들어와 '틀렸다. 고쳐라' 했다."

―지금 일본 중학교 교과서 문제로 일본 사회 내부는 물론 한·중·일이 시끄럽다.
"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를 기술하면서 '영토 문제는 없다'고 기술했다고 들었다. 영토 문제가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더라도 '중국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입장은 이렇다'고 적는 것이 정확하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을 속이는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독 역사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근본적 이유가 뭔가.
"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살아있을 땐 오히려 화해가 쉽다. '아니, 겪어보니 실제론 그렇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의 일본인들은 대체로 적국인 미국보다 자국 정부에 더 분노했다. 군부에 속았다고,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주변국에 대해 어느 정도 죄책감도 느꼈다. 문제는 그런 감정과 경험을 가진 세대가 이제는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일본이 느끼는 기묘한 '피해의식'에 대해 여러 번 지적해왔는데.
"
그렇다. 그 뿌리가 바로 전쟁 경험에 있다. 자기 정부에 속아서 잘못된 전쟁을 했다는 배신감. 바로 그 때문에 패전국 일본의 국민은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였으면서도 전쟁 후에 자신들 개개인이 피해자라고 느꼈다. 따져보면 이 배신감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는 한편, 무책임한 것이기도 하다. '상상력 결핍'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쪽 위치에 다 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베 총리가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한국인 등에 사과해야 할 뿐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도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기만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문제는 없을까.
"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을 싸워 이겼다. 인도도 영국을 이기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래서인지 그 두 나라는 프랑스나 미국, 영국을 향해 별로 사과를 요구한 적이 없다. 심리적으로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반면 한국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외부적 요인으로 해방을 맞았다. 일본이 사과와 망언을 반복한 탓도 크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일본 정부가 수없이 사과를 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좀 다르지만, 1990년대 초반 위안부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 일본 정부는 정말 숱하게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제 와서는 일본 정부가 '어떤 사과를 한들, 한국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이 사과한다 치자. 그것이 과연 분쟁의 종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소송의 출발점이 될 것인가' 고민하는 것 같다."

 

☞앤드루 고든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앤드루 고든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 근현대 노동운동을 전공한 경제사학자다. 미국 학계에서 일본의 성취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동시에 일본 사회의 어둠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학자로 꼽힌다.

조선일보  도쿄=김수혜 특파원

 

◇2015.08.06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겠다’, 反아베 구호와 글씨 만든 두 문인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겠다(アベ政治を許さない). 지금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구호다. 지난 7 16일 일본 중의원에서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자위대 해외파견 확대가 포함된 안보관련법 제·개정안 11개를 가결, 참의원으로 보냈다. 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여당 의석이 3분의 2가 넘는 까닭에 다수결에서 밀렸다.

 

매일 35도를 넘나드는 무덥고 습한 일본의 여름, 국회의 강행처리를 지켜본 시민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중의원에서 법안 통과가 강행된 이후 일본 도쿄·나고야·홋카이도·히로시마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데모 행렬이 밤늦도록 계속되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를 하나로 묶는 이 현수막 문구는 논픽션 여류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85)의 작품이다. 붓글씨는 하이쿠(俳句·일본의 전통시) 시인 가네코 도타(金子兜太·96)가 썼다. 두 원로 문인은 일본 전국 각지의 역과 거리, 집의 대문과 유리창에 이 구호가 내걸리길 바란다며 완성된 글을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사와치는 “민의를 거스르며 자기 뜻을 관철하는 아베 정권에 대한 분노를 담아 구호를 만들었다”며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에서 모두가 이 메시지를 내걸면 아베 총리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노문인들이 힘을 합쳐 구호 글씨를 만들게 된 계기가 뭘까. 작가 사와치가 15, 시인 가네코가 26세였던 1945년 일본의 전쟁이 끝났다. 어느덧 70년이 지났지만 두 사람 다 여전히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비참한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두 사람의 확고한 생각이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구호로 이어졌다.
   
   
문구를 고안한 사와치는 1930년 도쿄생이다. 4살 때 가족과 함께 중국 만주 지린(吉林)으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일본의 패전을 맞이했다. 패전 후 만주에서 1년 넘게 난민생활을 하다 16세 때 일본으로 돌아왔다.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던 그녀의 가족을 중국인과 한국인 이웃들이 지켜줬다고 한다.
   
   
사와치는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잡지사 편집장으로 일하며 논픽션 작가가 됐다. 그는 우연히 전쟁 자료를 조사하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의 정확한 전사자 숫자와 명단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신문에 난 서훈 명단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문서, 미·일 전우회, 미국과 일본의 전사자 묘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정확한 전사자 명부를 작성했다.

 

또 유족들을 직접 만나 전사자들의 숨은 이야기를 듣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잔혹한 실상을 조사해 ‘바다여 잠들라’ ‘기록 미드웨이 해전’ 등의 저작을 출간했다. 일본 논픽션계의 명저로 꼽히는 대표작들이다. 그는 문화계에서 창조적인 업적을 쌓은 이에게 수여하는 기쿠치 칸 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다.
   
   
올해 초 교도통신과의 전후 70주년 인터뷰에서 사와치는 만주에서 보고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한 번 증언했다. “남자는 죄다 군대에 끌려가고 여자는 군수공장으로 갔다. 나는 여학교에서 간호사 견습 교육을 받던 중에 패전 소식을 접했다. 그 시절에 대해선 배고픈 기억뿐이다. 패전이 되자마자 살던 집에서 쫓겨나 버려진 창고를 전전하며 난민생활을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소년 행색을 했지만 언제 소련군 장교가 다가와 강간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밤마다 창고 문을 필사적으로 닫으려 애쓰던 어머니의 손을 기억한다. 발진티푸스가 유행하고 시신이 곳곳에 버려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매일 어떻게 살아남을지 그 생각만 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하룻밤 새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이 있다. 전쟁만은 결코 다시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헌법 9조를 토대로 일본은 전후 70년 동안 단 한 명의 자국민과 외국인을 죽이지 않고 평화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전 세계인에게 쌓아온 ‘평화국가 일본’의 신용을 왜 포기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반대 여론이 이렇게 거센데, 아베 총리는 지난 4월 미 의회 연설에서 ‘법안을 여름까지 성사시키겠다’고 멋대로 발표하고 밀어붙이고만 있다. 유권자의 뜻을 받드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구호를 붓글씨로 쓴 가네코 도타는 1919 9월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시인이어서 어렸을 적부터 하이쿠를 접했다. 그는 집안 대대로 해왔던 의사 일을 하기 싫어 도쿄대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1943년 일본은행에 입사했지만 전쟁 중인 나라는 입사 3일 된 그에게 입대를 요구했다.

 

해군 경리 학교를 거쳐 경리부 중위가 된 그는 이듬해 태평양의 섬 사이판을 거쳐 트럭섬에 배치됐다. 트럭섬은 사이판에서 배로 3일 정도 걸리는 미크로네시아의 외딴섬이다. 미군의 연이은 폭격으로 새카만 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부하 200명을 데리고 요새를 새로 짓고, 고구마밭을 일궜다. 폐허가 된 땅에서 먹을거리는 나오지 않았고, 병사들은 굶어죽거나 설사병을 앓다 쓰러졌다. 미군의 공습이 있을 때마다 그의 앞, , 옆 사람들이 줄지어 죽어나갔다.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생 때는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해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치기 어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트럭섬에서 매일같이 누군가가 굶어죽고, 미군 공습으로 50~60명이 순식간에 죽는 걸 봤다. 수류탄을 던지다 온몸이 찢긴 채 즉사한 동료, 공습으로 순식간에 손발이 잘린 동료들 모습이 7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난다. 전쟁엔 참혹한 죽음만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왜 나는 전쟁에 반대하지 못했는지 몹시 후회했다”고 했다.
   
   
그는 트럭섬에서 종전 소식을 들었고, 13개월 동안 미군의 포로생활을 하다 1946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행 구축함 갑판 위에서 하이쿠를 지었다. ‘파도의 끝, 땡볕에 묘비를 두고 떠난다(水脈の果炎天の墓碑を置きて去る). 섬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군 1만여명을 추모하는 시다. 그는 “내 생애를 대표하는 하이쿠”라고 했다.
   
   
전후 복구 작업이 한창이던 1947년 일본은행에 복귀해 만 55세 정년까지 근무했다. 도쿄대를 졸업한 동기들은 임원까지 손쉽게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그는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과장도 계장도 아닌 ‘주사(主査)’에 머물렀다. 출세코스와 거리가 먼 노동조합 일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범상치 않은 하이쿠 실력은 일찌감치 명성을 떨쳤다. 퇴직 후에는 시인으로 전업해 창작활동에 매진하면서 현대적이면서도 전위적인 하이쿠를 창작했다. 숱한 문학상을 탔고, 지금은 현대 하이쿠협회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가네코는 전쟁의 비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는 붓글씨를 언론에 선보이며 “내 하이쿠는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것이다.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을 두고 볼 수 없기에, 전쟁을 향해가는 ‘아베의 정치’를 반대한다는 사와치의 문구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붓을 들었다”고 했다.
   
   
중의원에서 안보법제가 통과된 지난 7 16,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는 시위대 2만여명이 모여 ‘아베 야메로(그만둬)’를 목청껏 외쳤다. 7 17일 이후 실시되는 여론조사에서는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1%를 넘어서고 있다. 2012 12월 아베 내각이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반대 응답이 절반을 넘겼다. 지지율도 역대 최저치인 35%로 추락하며 지난 6월에 비해 10%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출처 | 주간조선 2367   양지혜 조선일보 됴쿄 특파원

 

◇2015.08.31 성난 열도 民心 "아베 물러나라" 12만명 모였다

反정권 시위론 최대규모
"
전쟁하게 만들지 마라" "안보법안 폐지" 외치며 300곳에서 동시다발 집회

 

국회의사당 에워싼 시민들… 경찰은 버스로 바리케이드 - 늦여름 비가 내린 30일 오후 시민 12만명(주최 측 추산)이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주변을 에워쌌다. 국회의사당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몰려나온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이들은‘전쟁하지 마(NO WAR)’‘아베 물러나라’는 피켓을 들고 나와 일본 정부를 향해“안보 관련 법안을 폐기하라”고 외쳤다. 도쿄뿐 아니라 이날 전국 300여곳에서 동시에 안보 법제 반대 시위가 열렸다. 일본에서 이런 대규모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아베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골자로 하는 안보 법제의 국회 통과를 밀어붙이면서 지지율은 30%대까지 하락했다. /AP 뉴시스

 

"전쟁하게 만들지 마! 헌법 9조를 부수지 마!"

하루 종일 비가 내렸던 30일 오후 일본 전국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강행 처리하려는 안보 법안을 폐지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는 12만명이 모였고, 오사카·나고야·후쿠오카 등 주요 도시 300여곳에서 동시에 집회가 열렸다. 2012 7월 도쿄에서 열린 반()원전 시위에서 17만명이 모인 적은 있지만, 정권에 반대해 시민들이 벌인 집회로는 일본 사상 최대 규모였다.

도쿄 집회에선 국회의사당 정문으로 향하는 왕복 10차선 도로가 인파로 가득 찼다. 당황한 경찰은 이례적으로 의사당 앞에 버스로 벽을 만들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아베 산성'을 연출했다. 참가자들은 관공서 밀집 지역인 가스미가세키와 히비야공원까지 에워싸고 "아베 물러나라" "안보 법제 폐안(廢案)"을 함께 외쳤다. 마쓰다 마사노부(73)씨는 "오늘 날씨가 좋았다면 20만명 이상 모였을 것"이라며 "국민의 분노를 정부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참가자들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부터 교복 입은 학생, 백발 성성한 노인까지 전 연령층을 망라했다. 민주당·공산당·사민당·생활당 등 4개 야당 대표도 전부 모였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 등 저명인사들이 연사로 나서 "민주주의를 되찾을 매우 중요한 시기다. 함께 행동하자"고 시위대를 독려했다.

 

▲TV조선 화면 캡처

조선일보  도쿄=양지혜 특파원

 

● 장상인의 일본 이야기  월간조선

JSI 파트너스 대표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의 明暗

(1)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고향을 가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일본인은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일본의 3대 영웅으로 손꼽히는 세 사람 중 우리에게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자()는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다이코(太閤) 통로와 나카무라(中村)

"이 일대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향입니다. 저기를 보세요. 다이코(太閤)의 거리라는 표지판이 있지 않습니까? 나카무라(中村) 공원도 있습니다."

 

필자를 안내하던 나고야(名古屋)의 이토 순이치(伊藤俊一·61)(언론인)가 한 말이다. 건물과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나카무라 거리. 이토(伊藤)씨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번화가 사카에()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

 

다음날 필자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서 나고야(名古屋) 역으로 갔다.

 

'나고야 역 후면에 가면 태합(太閤: 다이코)의 거리가 있으렷다?'

나고야 역의 태합 통로


태합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컫는다.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나고야 역 후면으로 들어가자 '태합의 통로'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문을 나서자 태합의 거리로 이어졌다. 나고야(名古屋) 역을 뒤로하고 나카무라 1죠메(一丁目)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나카무라 공원. 2죠메, 3죠메를 지나 4죠메 쯤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나카무라 공원이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 2km쯤 될 것입니다. 걸어서는 무리입니다. 택시를 타셔야 할 것입니다."

 

순간 택시 한 대가 스르르 다가 왔다. 길을 가르쳐준 사람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내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운전사는 반가워하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공원에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이 '히데요시(秀吉)의 고향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며 고개를 갸웃 둥했다. 필자는 딱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미소로 대신했다.

 

▲나카무라 공원의 입구
 

나카무라 공원 앞에서 내리자 그 안에 뭔가가 있어보였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과 공원 내 건물에서 세월의 두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초등학교 학생들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는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에 빠져 우두커니 서서 어린학생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필자는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리다가 어느 순간 셔터를 멈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지'라는 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히데요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생지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일본은 누구의 손에 들어갔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필자는 표지석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역사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미꾸라지를 잡던 원숭이 상()의 소년

 

관료 출신 작가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79)'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꼭 원숭이를 닮았구나. 원숭이 상()이야!"

1551년 봄날. 오와리(尾張: 현 나고야)의 나카무라코(中村鄕)에서 미꾸라지를 잡던 15살짜리의 촌티 나는 소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컬음이다. 그 소년은 운명처럼 다가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성장했고, 훗날 일본을 통째로 손아귀에 거머쥐는 대업을 이룩했다. 그는 자신의 성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꿨다. 운명을 개척할 이름이라고 했던가.


'
도키치로(藤吉郞)-'

'오와리(尾張) 나카무라 태생인 자가 도토미에서 길운(吉運)을 만난다.'

 

그는 마쓰시타 고헤에(松下 加兵衛, 1537-1598) 밑에서 창고지기를 했다. 때로는 도둑으로 몰리는 누명을 쓰면서 사회의 냉혹함을 몸소 터득하기도 했다. 그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흠모했던 것도 자신이 선택한 길운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님은 세상을 바꾸려고 그러시는 거야. 세상의 관행을 바꿔서 능력 있는 사람은 누구나 출세할 수 있도록 하는 거야."


"
오다 노부나가 님은 신이야."

'사카이야 다이치'는 소설에서 이 부분을 '반함'으로 풀이했다. '사람이 누구에게 반한다'는 것은 '이해관계가 없이 무조건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싶어 하는 심리상태'라고.

이것은 제3자의 눈에서 보면 순전히 미친 짓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인 행위지만, '인간사회에서는 그런 부분으로 움직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도키치로.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이름을 바꿔서 태합(太閤)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이 작은 남자도 그런 광기에 휩싸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남자가 운이 좋았던 것은 '반한' 상대가 오다 노부나가, 개혁을 추진하고 이를 실현 시키는 데에 열중한 천재였다는 점이다.
 

 

무모한 조선 침공과 향도정명

그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 일본 통일의 끝 무렵에 규슈(九州)를 정벌하고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야욕을 내보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對馬島) 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무가내. 히데요시는 1590년 향도정명(嚮導征明)을 외친다.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내라."

▲기념관에 있는 히데요시의 대외정책

 

<1592년부터 히데요시(秀吉)는 명(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두 번에 걸쳐서 조선 출병을 명했다. 이 전쟁으로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국내에서도 큰 부담이 됐다. 전쟁은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끝이 났다. 조선 출병의 실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을 약체화시킨 최대의 원인이 됐다.>

 

나카무라 공원 내 작은 기념관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통일과 대외 정책'에 대한  설명문이다.

 

오늘 이 순간에도 무모한 전쟁을 획책하려는 자들이 많다그 누구에게도 득()이 없는 전쟁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히데요시(秀吉)는 무모한 야욕을 불태우다가 1598 9 18일 눈을 감았고, 그의 사후에 벌어진 일들은 더욱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계속).

 

(2) 2015-02-13 조선 호랑이 사냥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에 이어 제2군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를 모르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아명(兒名)은 호랑이()가 들어있는 '도라노쓰케(虎之助)'였다. 그러한 기요마사(淸正)는 규슈의 구마모토(熊本) 성주까지 올랐다.

 

1607년에 세워진 구마모토 성()은 일본 3대 명성(名城)이기도 하다. 규슈 여행의 필수 코스이기도 한 구마모토 성. 기요마사(淸正)는 당시 축성(築城)의 대가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秀吉)와 같은 출생지인 나고야의 나카무라(: 尾張國 愛知郡 中村)에서 태어났다.

 

가토 기요마사가 태어난 곳...후일 사찰이 세워졌다.


그가 태어난 곳은 후일 묘고지(妙行寺)라는 절이 됐다. 나고야 성을 축성하고 남는 자재를 이용해서 자신의 출생지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성()에서 길러진 아이

필자가 다녀온 나카무라 공원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기념관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는 다이묘(大名)들의 영역이 표시된 그 당시의 일본 지도가 있다. 기념관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잘 정리돼 있다.

 

히데요시 시절 다이묘(大名)들의 분포


이 대목에서 기념관의 안내문과 '시바 료타로(司馬 遙太郞, 1923-1966)'의 역사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성주님! 저는 어머님의 사촌이 되옵니다."

 

남루한 옷차림의 한 시골 여인이 어린아이(加藤淸正)의 손목을 잡고 히데요시(秀吉)에게 한 말이다.

 

"그렇습니까? 아이가 착하게 생겼군요....이리 오너라. 오늘부터 우리 집 주방에서 밥을 먹어라."

 

가토 기요마사의 전기본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성()에서 자랐다. 히데요시의 정실부인 '기타노만 도코로(北政所, 1549-1624)'가 그의 양모(養母)가 됐다.

 

기요마사의 어머니가 히데요시의 모친과 4촌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6촌 관계다. 아무튼, 히데요시의 부인은 그를 친 자식처럼 길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3천 석짜리 신분에서, 일약 25만석의 구마모토의 다이묘로 발탁된 것도 그녀의 입김이 컷을 것이다.

 

호랑이 같은 장수...조선 호랑이 사냥꾼

▲가토 기요마사의 이력 

 

호랑이 같은 성격의 장수인 기요마사는 공명심이 강했다. 그는 조선 천하를 질주하며 호랑이 사냥에 열중했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몸보신을 위해서다.

 

일본의 야생동물 생태연구가인 '엔도 키미오(遠藤公男·83)'씨가 쓴 <조선의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라는 책이 있다. 책 속의 여덟 번째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호랑이 이야기'. 그는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쓴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라는 책을 인용,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분로쿠(文祿) 원년(임진왜란 원년-1592) 일본군의 무장인 '가메이 코래노리(龜井玆矩)'는 부산 근처의 기장성(機張城)을 점령해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한 마리를 보냈다. 드물게 보는 거대한 호랑이였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교토의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에게 자랑했다. 그리고 호랑이를 수레에 싣고 장안을 돌아다녔다."

 

엔도(遠藤) 씨는 히데요시의 부하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에게 보낸 공문서에 있는 또 다른 증거를 찾아냈다. 히데요시의 비서가 보낸 공문서다.

 

"호랑이의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을 목록 그대로 받았습니다. 히데요시님은 기뻐하시며 드셨습니다."

 

예로부터 호랑이가 귀한 약용으로 쓰여 왔음을 익히 알고있던 히데요시는 무장들에게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오도록 명령했다. 그가 '그토록 몸에 좋다'는 호랑이의 고기는 물론, 간과 쓸개까지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엔도(遠藤)씨는 그러한 사실을 이렇게 썼다.

 

"작은 몸집에 원숭이라고 불린 히데요시의 풍모를 떠 올렸다. 무엇인가 홀린 듯 한 눈을 하고, 호랑이의 간()과 장()까지 탐을 내며 먹었던 것이 아닐까?...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그는 61세에 죽었고 임진란은 끝이 났다."

 

보고서에도 장수들의 경쟁 이어져...

▲임진왜란 시 조선 침략루트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느 쪽이 한양에 먼저 갈 것인가?' 하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 상황에 대한보고도 경쟁의 연속이었다. 기요마사가 유키나가보다 앞서서 히데요시에게 보고서를 올렸으나, 길목을 버티고 있는 히데요시의 최 측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에 의해서 묵살됐다. 시쳇말로 '문고리 권력'의 농간이 있었던 것이다.

 

"작전의 실패와 착오는 유키나가에 대한 기요마사의 비협조 때문입니다...적들이 일본군의 내분을 비웃으며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도라노스케(虎之助) ! 자기 무공을 세우는 데만 급급해서 전체의 대의명분을 깨는 놈이다. 그 놈을 당장 불러오라."

 

기요마사는 기가 막혔다. 진주성 공사를 시작하다가 나베시마에게 맡기고, 오사카에 있는 후시미 성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싹트다

▲묘고지에 있는 기요마사의 동상

 

1598년 가을 어느 날. 미쓰나리(三成)는 하카다(: 후쿠오카)에 도착해서 숙소를 정하고, 선단을 보내는 운송 관계를 체크했다. 하카타 만()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조선에 나갔던 장수들이 속속 돌아왔다.

 

"다이코(太閤) 전하가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울음바다....특히, 기요마사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잠시 후 미쓰나리(三成)가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고생들 많이 하셨으니 휴가들을 보내시죠. 한 일 년 정도...상경 하실 때는 성내에서 다도(茶道)의 자리를 마련해 여러분의 노고를 위로할 생각입니다."

 

"말 잘했소. 재미있는 말이군요. 우리는 7년 동안이나 조선에 진을 치고 몸이 가루가 되도록 싸우다보니 이제는 군량미도 한 톨 없고 술 한 방울 없소이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호사스런 차() 같은 것은 더더욱 없소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토 기요마사가 목청을 높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당분간은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시죠. 헤엄치는 대로 놔두다보면 조만간 미쓰나리와 큰 싸움을 벌일 것입니다. 바로 그때,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기요마사에게 유리하게 처리하고, 은혜를 베풀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책사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본명이 사키치인 사나이. 절에서 심부름을 하던 소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최측근 비서실장이 됐으나, 영리한 두뇌에 비해 주변 장수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다.

 

"어르신! 머리가 좋은 사람이란 자신감이 강한 법이오. 자신이 있을수록 독단이 많아지지요. 독단이란 일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미쓰나리가 자신의 책사 시마 사콘(島左近, 15??-1600)의 충언을 들었어야 했다.

 

결국, 이시다 미쓰나리의 독단은 후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가져오고 말았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고가 되는 교훈적인 지난날의 역사다. 그래서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다'는 것이다(계속).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1) 2015-02-28  도쿠가와(德川) 시대를 연 세키가하라 전투

 

필자는 무모한 야욕(野慾)으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을 일으켜 조선 땅을 무참히 짓밟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고향 나카무라(中村: 구 尾張)를 뒤로하고 세키가하라(ヶ原)로 향했다. 필자의 일본 친구 '이토 슌이치(伊藤俊一·61/  TV아이치)'씨는 운전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 가도 특별히 볼거리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역사의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

 

그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15년 전의 일이 아닌가. 그래도 필자가 오래전부터 한 번쯤 가보고 싶었기에 이토(伊藤)씨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세키가 하라' 전투장의 표지석

 

나고야 시내를 벗어난 차는 붉은 색 교각의 긴 다리로 진입했다. 기소강() 대교(大橋)였다. 기소강() 위에 놓인 폭 70m, 길이 858m의 긴 교량이었다. 다리의 중앙에서 승용차의 내비게이션은 "지금부터 기후켄(岐阜県)입니다"고 멘트를 했다. 다리 한 복판에서 아이치켄(愛知県)을 넘어 기후켄(岐阜県)으로 땅을 바꾼 것이다.

 

나고야를 떠난지 1시간 30여 분만에 기후현(岐阜県) 후와군(不破郡) 세키가하라조(ヶ原町)에 도착했다. 멀리 산 위에는 하얀 눈이 구름과 맞닿아 있었다. 415년 전의 광풍(狂風)을 재현하려는 듯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동서로 4km, 남북으로 5km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의 역사를 뒤엎는 대하드라마 같은 큰 전투가 있었으렷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야심

세키가하라(ヶ原)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비서실장(治部少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결전장이었다. 이 싸움에서 정작 도요토미 가()는 팔짱을 끼고 관망 자세로 일관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일단 워 랜드(War Land)를 구경하시죠. 그 당시 상황을 모형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동군·서군은 후세 사람들이 붙인 명칭입니다."

 

워 랜드(War Land) 진입로의 모습


'
워 랜드(War Land)' '세키가하라 전투'의 축소판이었다. 1964년에 세워진 '워 랜드' 1만 여 평의 부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200여 개의 콘크리트 상()이 곳곳에 서 있었다. 이 모두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모형으로 재현한 것이다. '워 랜드(War Land)'의 자료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를 엮어서 정리해 본다.

 

"히데요시(秀吉) 전하가 남긴 아들. 히데요리(秀賴)의 세상이 영원할 것을 사람들이 바라고 있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직후 어느 날. 미쓰나리(三成)가 오사카(大阪) 성 천수각에서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저 번창함을 보라! 돌아가신 다이코(太閤) 전하의 위대함을 알 수 있지 않은가....사람들은 날마다의 생활을 즐거워하고, 내일도 역시 도요토미 가()의 보호 아래 그러하리라고 기원하는 것 같도다."

 

망상과 착각 속에서 미쓰나리(三成)는 부하들에게 간접적인 압력을 넣는다. 과연 그럴까. 그의 책사 '시마 사콘(島左近)' "인간은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것이지 정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면서 주군 미쓰나리의 오판(誤判)을 걱정한다.

 

필연적인 전쟁...폭군의 세상이 끝났으니.

▲후지와라 세이카의 초상(야후재팬)

 

한편, 그 당시 명성을 날리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는 히데요시를 폭군으로 간주하고 전쟁의 필연성을 예견했다. 그는 조선의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姜沆, 1567-1618)과도 교류했던 학자이다.

 

"이 전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오. 폭군(暴君)의 세상이 끝나고 천명이 새로워지려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중국에서도 보통 있었던 일이야."

 

"폭군이라니요?"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가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 군자의 나라를 침략하고...이 나라의 백성들까지 도탄에 빠트렸어. 그러니 폭군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후지와라(藤原)'가 미쓰나리의 여인 '하쓰메'와 나눈 대화다. '후지와라'는 대화의 상대가 미쓰나리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 물론, 이 여인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가공인물이다.

 

자료를 종합하면 미쓰나리는 면도날이었지 도끼는 아니었다. 면도날은 아무리 잘 들어야 수염을 자를 뿐이다. 이에 반해 도끼는 거목을 베어서 어떠한 대공사라도 할 수 있다. "과연 면도날 '미쓰나리'가 도끼 '이에야스'를 이길 수 있을까?" 그 당시 의식 있는 다이묘(大名)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결전! 세키기하라 전투-

동군(이에야스)과 서군(미쓰나리)이 포진을 마친 것은 1600 9 15(음력) 오전 7 30. 일본 역사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앞두고 동군 7 5천명과 서군 8 4천 명이 세키가하라(ヶ原)에 집결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장수들의 조각상


이 대목에서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본다. 오다 노부니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치 어린애 같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애늙은이 같았다. 소설은 그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점잖은 미소를 띠고 있는 정도의 상태이면 이 남자의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파도치고 있을 것이다. 그토록 여유 만만하던  이에야스도 이번의 전쟁에서는 초조했다. 각본은 잘 썼으나 배우가 그대로 연기를 해 줄 것인지는 하늘만이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에야스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더없이 초조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과연 각본대로 갈 것인가."

미쓰나리의 본진, 사사오산(笹尾山)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진지의 모형


"
저기가 바로 사사오산(笹尾山)입니다. 사사오산에 진을 치고 있던 미쓰나리의 서군은 지형적으로 유리했습니다. 지형적인 조건을 이용해서 동군을 끌어들인 후에 이들을 격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필자와 동행한 이토(伊藤)씨의 말이다. 이토씨는 높이 268m의 사사오산(笹尾山)의 이름은 "사사() , 조릿대(작은 대나무 종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했다. 415년 전. 북으로는 사사오산, 남으로는 마쓰오산(松尾山), 남동으로는 난구산(南宮山)이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분지에서 일촉즉발의 대 전쟁이 초읽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의 안개, 어떻게 안 될까?"

 

이에야쓰의 넋두리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는 전투의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었다...이 때 짙은 안개 속으로 적을 향해 나아가는 동군의 보병 부대가 있었다. 300명 정도의 보병을 이끌고 남몰래 앞지른 부대장은 이에야쓰의 넷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松平忠吉, 1580-1607)'였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적의 깃발과 인마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안개 때문에 적진 앞까지 다가간 것이다. 이 때 뒤쫓아온 동군(黑田長政, 1568-1623) 측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1572-1655)' 부대를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이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최초로 울린 총소리였다.

 

"틀림없이 총소리가 났어. 소라 고동을 불어라. 함성을 지르라고 해라."

전투 당시의 총잡이들(), 최초의 총성이 울린 개전지()


히데아키(秀秋)의 배신·무저항·도망...그리고 승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 3만 명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서군이 우세했다. 모모쿠바리 산의 이에야스는 긴장의 강도가 더해져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에야스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1602)'의 배신을 기대했다. 히데아키(秀秋)의 배신은 그의 부장(副將)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어르신은 도요토미 가를 멸망시킬 셈인가. 그것을 아시면서 배신을 한다는 말인가. 나는 무사로서 받아들일 수도 참을 수도 없어."

 

"배신이 패덕(悖德)인 것은 사실이지만, 히데아키 님은 일개 사무라이가 아니올시다. 우두머리올시다. 우두머리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무략(武略)이라오."

 

히데아키(秀秋)의 배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미쓰나리(三成)의 서군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투는 동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사전 교섭의 명수, 밀약의 대가(大家)였던 이에야스의 지모(智謀)는 서군의 배신·무저항·도망을 유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계속).

 

(2) 가톨릭 다이묘(大名)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멀리 사사오산(笹尾山)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무척 거칠었다. 필자는 강풍 속에서 워 랜드(War Land)를 돌아보다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임진왜란 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조각상

"그가 가톨릭 신자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왜장은 왜장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를 치켜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가 조선인과 맺은 특별한 인연과 종교적인 측면을 짚어 보려는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전국(戰國)과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를 살았던 무장이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누스'인 크리스천(천주교) 다이묘(大名)이기도 하다. 한 때 우키타가(宇喜多家)의 록을 먹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발탁됐다. 그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神秀吉) 시절로 돌아가 본다.

 

대대로 가톨릭 신자이자 국제 약재상

그는 1558년 국제무역항 사카이()의 상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차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오카야마 상인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으나, 우키타(宇喜多)의 집을 방문했을 당시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져 무사가 됐다. 히데요시(秀吉)로부터도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신하에 이르렀다.

 

1565 8월 초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부부가 히데요시를 찾았다. 히데요시는 시종이 내민 은()으로 된 십자가와 검은 표시가 되어있는 나무 표찰을 보고 사카이에서 약재상을 하고 있는 고니시(小西) 부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해 그 당시 상황에 돌아가 본다.

 

"그 자는 고니시라고 하는 약재상 부부가 아니더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시절을 떠올리며 고니시 부부를 반갑게 맞았다. 부부 옆에는 열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래 전에 부인이 했던 '오늘의 비겁함이 내일의 명장을 만든다'는 말을 연상하며 마음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규슈의 우토성(宇土城)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사진: 야후재팬)

 

"부인께서는 글씨도 잘 쓰셨지만 조선이나 남만(南蠻: 스페인, 포르투갈)의 말을 잘하신다지요?"

 

". 지금도 이 아이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모님의 소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난 고니시는 후일 그를 지극정성 섬겼다. 히데요시(秀吉)의 신임을 얻어 1588년 히고노쿠니(肥後國) 우토성(宇土城)의 영주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함께 1 8000명의 병력(1)을 이끌고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단숨에 대동강까지 진격했고, 6 15일 평양성을 함락했다. 몇 차례의 밀고 당기는 전투 끝에 1593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과 조선군에게 패해 평양성을 불 지르고 한양으로 퇴각했다.

 

오다 줄리아의 양녀(養女)로 길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포로 중에서 세 살배기 한 여자 아이를 발견했고, 그 아이를 양녀(養女)로 길렀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 아이에게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명이 주어졌다.


'
오다(오타아) 줄리아-'

줄리아는 고니시의 어머니 즉, ()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약재상을 하면서 '오늘의 비겁함이 내일의 명장을 만든다?'는 등 히데요시를 감동시킨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공문서를 대필해주던 여인이다. 줄리아는 할머니가 조선말을 구사 할 수 있었기에 교감이 더욱 잘 됐을 것이다. 실제로 줄리아는 할머니로부터 조선어와 일본어를 배웠고, 춤과 노래를 익혔다. 나라를 잃고 부모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전쟁 고아였으나 양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양 할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다줄리아는 할머니의 유언(遺言)을 가슴 속 깊이 새겼다.

 

"얘야! 천주님의 사랑을 배워라. 항상 기도하면서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삶은 더 어려운 것이다.

 

줄리아는 후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수청을 거부하고 절해고도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됐고,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필자 칼럼 오다 줄리아/ 2014. 11.4 참조).

 

서군과 동군의 진지 배치 모형-고니시 유키나가의 십자가 깃발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관련한 간단한 내용이다. 고니시 역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부대의 깃발에도 항상 십자가를 새겼다. 세키가하라 전투 진영을 모형으로 재현한 조형물에도 고니시 부대에는 십자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아무튼,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에 동조해 7천 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서군의 주력부대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예상보다 빨리 전의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동군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이에야스는 무표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법대로 처리하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고니시 유키나가 진지의 표지석

 

고니시 유키나가는 1600 1116(양력). 교토의 6조 가와하라(六條河原)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할복(割腹)을 거부하다가 번뜩이는 칼날에 의해 목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의 저승길을 동행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1539-1600)'.

 

세키가하라(ヶ原) 전투는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세스페데스(Grogorio de Cespedes, 1551-1611) 신부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그는 1551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1577년 천주교의 불모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종군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그가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 신부 1호다. 그는 왜병들에게 잔학한 행위를 못하게 하고 조선의 고아들을 돌보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에서 끌려간 전쟁포로들 중 노예로 팔려가는 2천여 명을 구출해 가톨릭 신자로 만들기도 했다. 가톨릭 박해가 가장 심했던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시대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스페데스 신부는 목숨을 걸고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1년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월간조선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2015-01-08   조선을 사랑한 일인 아메노모리 호슈 이야기

-성신교린(誠信交隣)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州)
 
 "
나는 이 쇠망의 국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길가에 앉아서 곰방대를 피는 소크라테스 같은 노인이 무엇 때문에 타 국민에게 정복되었나? 하는 연민(憐憫)이다."

 

일본 작가 '다카하미 교시(高濱虛子, 1874-1952)' 1911년에 쓴 소설 <조선>에 들어 있는 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낀다'는 이중적인 생각을 했다.

 

아무튼, 그토록 불쌍하고 고달팠던 일제 강점기로부터 벗어난 8·15 해방이 어느 덧 70주년이 됐다. 해방 70년 후 새로 맞은 2015- 또한 올해는 한일 국교가 수립된 50주년이기도 하다. 그러한 긴 역사 속에서도 양국관계는 아직도 지난날의 앙금을 말끔히 씻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성신교린(誠信交隣)을 주창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州, 1668-1755)'.

 

쓰시마의 중심지 이즈하라(巖原) 전경-오른 편에 보이는 물은 바다이다


성신교린(誠信交隣)이란 무엇인가.

"성신(誠信)이라는 것은 진심이란 뜻으로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진심(眞心)으로 교류하는 것이다....성신의 교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웃 나라의 사정을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고, 말로써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州)' 1668 5 17일 지금의 시카현(滋賀縣)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그는  일찍이 한문을 배웠다. 스승은 자신의 부친이었다. 9살 때 지은 그의 한시(漢詩)가 무척 어른스럽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추위는 닥쳤는데(寒到夜前雪)
  
추위에 떨 사람들 어떻게 근심을 면할 까(凍民安免愁)
  
우리가 그래도 기쁜 것은(我儕猶可喜),
  
떨어진 옷 입고 노는 것 좋아한다네(穿得好衣遊)"

'아메노모리 호슈' 1693 26세의 나이에 쓰시마(對馬島)의 외교 담당 문관으로 부임해서 1755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특히 조선과의 성신교린을 모토로 하는 외교철학으로 조선의 유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

 

그는 항상 시대에 앞서가는 생각을 했고, 이를 몸소 실천을 했다. 그는 쓰시마 출신이 아니면서도 쓰시마에서 일했고, 그곳에 묻혔다.

 

조선을 사랑했던 준() 경상도 사나이(?)

쓰시마 이즈하라의 일출


산으로 둘러싸인 쓰시마의 중심지 이즈하라(巖原)- 숙소 앞 높은 산봉우리 위로 태양이 힘차게 솟아올랐다. 필자는 아침 식사를 서둘러서 마치고서 숙소를 나섰다. 호슈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지도를 펼치자 쓰시마 시청을 중심으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역사의 흔적들이 즐비했다. 큰 길 옆 높은 담벼락을 따라가자 고려문이 나왔고, 쓰시마 역사 민속자료관이 있었다. 민속자료관 앞마당에 들어서자 호슈(芳州) 선생을 기리는 비() 서 있었다.

 

성신지교린: 아메노모리 호슈 선생의 공덕비


아메노모리 호슈 선생 겐쇼비(顯彰碑)-

겐쇼비(顯彰碑)는 우리 식으로 하면 송덕비 내지는 공덕비를 말한다. 호슈(芳州) 선생이 생전에 쓰시마 번을 위해서 일한 공적이 많아 후세 사람들이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를 세운 것이다.

 

필자는 겐쇼비에서 잠시 머무른 후 쓰시마 역사 민속자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왼 편에 조선통신사의 비()가 우뚝 서 있었다. 자료관 내부에는 조선통신사의 발자취, 쓰시마의 역사와 자연 환경 등이 전시돼 있었다. 때마침 한국의 단체 여행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필자는 호슈 선생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마음대로 사진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자료관 직원을 만나 협상을 했다. 장시간의 협상과 신청서 작성 결과 서로 합의한 사진 몇 장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는 글을 찾아 카메라에 담았다.

 

▲아메노 모리 호슈 선생의 초상과 글

 

公雨忘私 國雨忘家

(공적인 일을 할 때는 나를 잊어버리고, 국가의 일을 할 때는 가문을 잊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언(金言)이다.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그렇다. 오늘날 공직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너무나 공감이 가는 말인 것이다. 쓰시마 출신학자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는 저서 <조선을 사랑한 아메노모리 호슈>에서 '公雨忘私 國雨忘家' "정치를 하는 사람은 눈앞의 업무도 중요하지만, 그뿐만이 아닌 먼 장래에 대한 큰 계획으로 희망을 갖고 업무에 정진하도록 훈시한 것이다"로 해석했다.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 이름을 쓰면서 '조선어, 그것도 경상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아메노모리 호슈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양국의 우호'가 우리의 세대에서 다시금 빛을 볼 수 있을까. 한국을 사랑하는 필자의 지인 '이토 슌이치(伊藤 俊一·61)' 씨의 말을 들어본다.

 

민간차원의 교류를 촉진(促進)해야

▲나고야의 언론인 이토 슌이치 씨

 

"호슈(芳州) 선생이 몸소 실천했던 성신교린(誠信交隣)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저도 언론인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지금의 정치는 분명히 잘못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양국이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서로 한발씩 양보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민간 차원의 교류를 촉진시켜야 합니다. 제가 한국 유학생들과 수시로 대화합니다만, 그들에게서 반일(反日) 감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와 제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혐한(嫌韓) 감정이 전혀 없습니다."

 

이토(伊藤) 씨는 양국의 화해 무드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가까운 이웃'으로 자리매김 하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의 해' 을미년(乙未年)이 열렸다. 일본도 우리와 똑같이 '양의 해'. ()의 이미지는 순박하고 양순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의 해'에 많은 기대를 건다. 민속학자 이종철 선생은 저서 <인간의 달력, 신의 축제>에서 "상형문자의 양()은 아름다움(), 상서로움(), 착함()으로 이어지고 옳음을 뜻하는 의()의 파자(破字)이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양처럼 상서롭고 착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5-04-01   쓰시마 지킴이 '소 요시토시(宗義智)' 이야기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죽인 뒤, 다시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시켜 조선으로 가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도록 했다. 소 요시토시는 일본국 국권을 지휘하는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이며, 히데요시(秀吉)의 심복이었다.>

 

<쓰시마(對馬島)의 태수 소 모리나가는 대대로 쓰시마 섬을 지키며 우리나라를 섬겼는데, 이때 히데요시는 소 모리나가도 죽이고, 소 요시토시에게 쓰시마 섬의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우리나라가 바닷길을 잘 모른다며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자, 히데요시(秀吉)는 우리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

 

"소 요시토시는 쓰시마 섬 도주의 아들로 바닷길에 익숙하니, 그와 함께 오면 됩니다."

 

쓰시마의 이즈하라 항구

 

류성룡의 <징비록, 懲毖錄>(오세진·신재훈·박희정 역해) 첫 부분이다. <징비록>에는 '소 요시토시는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용감하였으니, 다른 왜인들도 그를 두려워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으로 기며, 감히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했다'고 쓰여 있다...그 당시 조선은 어떠했을까. 조선 조정은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지 못했다.

 

이 책 외에도 KBS 주말드라마의 영향인지 서점마다 '징비록'의 소설이 즐비하다.

'오늘에 되새기는 임진왜란 통한(痛恨)의 기록!'

'모두가 버린 나라 조선을 일본이 가지려 한다!'

 

시청자들과 독자들의 시전이 집중되는 대목이다. 필자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는 지나간 과거라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발발 전 쓰시마는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고, 소 요시토시는 전쟁을 막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전쟁을 막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쓰시마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주민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 쓰시마가 왜군의 중간 기착지가 되어 온갖 피해를 볼 수 있어서다. 어찌했던 그는, 1592년 음력 4 12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1) 소속으로 쓰시마를 출발해 부산에 상륙, 조선 땅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가 묻힌 반쇼인(萬松院)을 찾다

쓰시마 이즈하라에 있는 반쇼인


필자는 쓰시마에 갔던 길에 소 요시토시가 묻힌 반쇼인(萬松院)을 찾았다 반쇼인은 어떠한 곳일까. 쓰시마 번주(藩主) ()씨 가문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반쇼인은 일본 정부가 지정한 사적(史跡)이기도 하다. 쓰시마의 2대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 1604-1657)'는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조선평화외교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를 위해 가네이시(金石) 성 서편 봉우리에 쇼온지(松音寺)를 창건했다. 7년 후인 1622년 요시토시의 법명에 따라 사찰의 이름을 반쇼인이라고 개칭(改稱)했다. 164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서 소()씨 집안 대대로의 보살사(菩薩寺)가 됐다.

 

반쇼인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에 있는 내용이다. 필자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본당으로 들어갔다. 본당 옆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도란도란. 하늘은 역사의 아픔을 잊어버린 듯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반쇼인의 본당(), 조선국왕으로부터 받은 선물 삼구족()


불상을 모신 본당의 분위기는 근엄했다. 벽에는 쓰시마와 조선통신사에 대한 2013년 행사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조선 국왕으로부터 선물 받은 삼구족(三具足:부처에 공양할 때 쓰는 세 가지 도구)이 전시돼 있었다. 또한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역대 장군들의 위패(복제품)도 보였다.

 

소 요시토시는 익히 알려진 대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사위로서,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서 서군 편에 가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평소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고,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생각과 맞아 떨어져 죄가 사면됨과 동시에 쓰시마의 초대 번주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아 1609년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시켰다. 이러한 공으로 소() 가문은 조선과의 독점 무역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1615 1 3(음력)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그의 뒤를 이었다.

 

기러기 행렬?...햐쿠간기(百雁木)

나무들로 터널을 이룬 햐쿠간기(百雁木)


본당을 나서자 '햐쿠간기(百雁木)-'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이름 또한 운치 있어 보였다. '백 마리의 기러기 행렬처럼 들쑥날쑥한 계단'의 의미란다. 132개의 완만한 돌계단은 쓰시마에서 생산된 명석(名石)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 오랜 세월을 고고하게 지켜온 돌계단의 양 옆에는 석등이 줄을 잇고 있었고, 키 큰 대나무와 스기(:삼나무)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 3대 묘지라고 했던가. 분명 묘지로 가는 길이었으나, 이끼 낀 돌계단을 오르면서도 묘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천연기념물 스기 나무

 

우거진 삼림(森林) 때문이다. 나가사키(長崎) 현에서 지정한 1200년 된 천연기념물 스기() 나무도 우뚝, 세월의 두께를 대변하고 있었다.

 

반쇼인에는 크게 상·중·하로 구분된 묘역(御靈屋)이 있다. () 묘역에는 19대 소 요시토시(1568-1615)로부터 32대 소 요시요이(宗義和, 1422-1494)까지의 역대 번주와 부인의 묘가 있다. () 묘역 상단에는 제10대 소 사다쿠니(宗貞國)의 묘지가 있고, 별도로 측실과 유아(幼兒)들의 묘지가 있다. () 묘역에는 일족들의 묘지가 있다. 역대 영주 14명과 관계자들이 묻혀 있는 것이다.

 

때마침 일본 본토에서 온 나이든 관광객들이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끝까지 오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나같이 '참으로 아름다운 삼림입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 가문과 고니시(小西) 가문의 만남은?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 역시 세례명이 '다리오'인 가톨릭 신자였다.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고 고니시가 처형당하는 시점에서 부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했다. 부부의 운명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비극적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마리아는 어떻게 만났을까. 이번영 선생의 <소설 징비록, 왜란/나남>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제로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소 요시토시의 초상(반쇼인)-사진: 야후재팬

 

<그렇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쪽에 짓밟히고 저쪽에 짓눌려서 다 뭉개져 버릴 형국이었다.>

 

"정말로 전쟁이 터진단 말인가?"

 

일촉즉발의 전쟁 시기가 되고 보니, 절대 권력자 히데요시의 측근에 평소 무역관계로 친근하게 지내고 있는 고니시(小西) 부자(父子)가 있다는 것은 쓰시마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쓰시마 도주는 고니시 일가와 보다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마침 꽃다운 나이의 어여쁜 딸이 있었다. 쓰시마는 간절하게 고니시 집안에 매달렸다. 그런 연유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은 소 요시토시와 결혼했던 것이다.

 

"늘 인도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마리아를 생각해서도 무심할 수가 없지."

 

장인(고니시)과 사위(요시토시)가 나눈 대화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도 힘의 논리에 의해 갈라지고 말았다.

 

비운의 여인 고니시(小西)마리아

고니시 마리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필자는 그 여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쓰시마의 중심지 이즈하라(巖原) 대로(大路)변에 있는 하치만구(八幡宮) 신사로 갔다. 커다란 석조 도리이(鳥居)를 지나 왼쪽 편 돌계단을 올라가자, 이마미야(今宮)라는 작은 신사가 있었다. 신사 앞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고니시 마리아의 신사


<1590
 15세의 나이로 소 요시토시의 부인이 되어 가네이시(金石) 성으로 들어갔다...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 집안이 망하자, 1601 10월 규슈의 나가사키(長崎)로 추방됐다. 그곳에서 5년여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619  와카미야(若宮) 신사를 지었다.>

 

이 작은 신사에서 비운의 여인 '고니시 마리아'의 제사를 지낸다. 제삿날은 8 14(음력)이다. 이유인즉, 악령의 재앙을 두려워해서란다. 인간의 약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필자는 '다리오'라는 세례명까지 있던 소 요시토시가 절()에 안치된데 대해 의문이 생겼다. 쓰시마관광협회의 야마쿠치(49)씨는 "소 요시토시가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을 한 후에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改宗)했다"고 말했다.

 

종교도 시류(時流)를 따라 흘러가는 것인가. 필자는 고니시 마리아의 신사를 나와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령이 머무는 산이다"는 전설적인 시미즈산(淸水山)을 비롯한 이즈하라(巖原)를 둘러싸고 있는 산 위의 구름들도 무리지어 어디론가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던가. 전쟁을 막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2015-04-09  일본 여성전용 지하철 현장을 가다

-여성전용 지하철 현장을 가다

지난 주말 업무적으로 일본 나고야를 다녀왔다. 돌아오자마자 일본의 아베 총리가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해서 다소 나아지려던 한일관계에 불을 질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럴 때마다 일본과 교류하고 있는 기업인들은 냉가슴을 앓는다. 본 칼럼은 순수 민간인의 생각을 피력한 것에 불과하다.

 

"나고야(名古屋)이라고 하는 곳은 도시의 건성(乾性)과 시골의 습성(濕性)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룬 공간이다. 기질적으로도, 풍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더불어 정치적으로도 그렇다."


출판인 이와나카 요시후미(岩中祥史·64)씨는 저서 <나고야학>에서 이 지역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흥미로우면서도 현실과 부합된 나고야의 압축(壓縮) 설명이다. 어찌했던, 인구 약 230만 명의 나고야는 역사와 산업과 교통의 요지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나고야에는 지하철 노선 네 개가 하루 종일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히가시야마(東山), 메이조(名城), 쓰루마이(鶴舞), 사쿠라도오리(櫻通)선이다.  4개의 노선 중 가장 붐비는 지하철이 히가시야마(東山)선이다. 이 외에도 나고야의 근교를 달리는 사철 메이테쓰(名鐵)와 긴테쓰(近鐵)가 있다. 물론, JR 신칸센은 별도다.

 

히가시야마(東山)선 여성전용차량 종일 운영

히가시야마선 여성전용차량의 승객들-


"
그동안 출퇴근 시간만 운영하던 지하철 여성전용차량을 4 1일부터 종일 시행하고 있습니다."


나고야 시청 교통국에 근무하는 요시카와 다카토시(吉川隆敏·52) 계장의 말이다. 나고야 지하철은 모두 시()의 교통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필자는 봄비가 다소곳이 내리는 지난 3일 오전 10. 나고야 시청 서관에 있는 11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홍보 담당 도모사카 히로가즈(友坂博一·38) 주사와 서울에서 수차례의 전화 통화 끝에 잡은 인터뷰 일정이었다. 그들이 내민 명함에는 "감사 선언(宣言)"이라는 고딕체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시민에 대해 감사함을 실천하는 공무원의 자세가 느껴졌다. 요시카와(吉川)씨는 여성전용차량에 대한 서류를 잔뜩 들고 자리했다. 표정도, 목소리도, 사뭇 진지했다.


"
여성전용차량 운영은 도쿄(東京)·오사카(大阪) 등 여러 대도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책입니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종일 시행은 오사카(大阪), 고베(神戶)에 이어 저희 나고야가 3번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포스터 한 장을 내밀었다. 눈에 확 들어오는 포스터는 <히가시야마(東山), 평일의 시발(始發)부터 종발(終發)까지의 여성전용차량 시간대 확대를 2015 4 1일부터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여성전용차량을 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동승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여성차량 승차 남성의 조건

• 여성 승객과 동반하는 초등학생 이하의 남자 아이.
• 여성이 간호자로서 동행하는 장해가 있는 남성
• 장해가 있는 여성의 간호자로서 동행하는 남성

▲여성전용차량 종일 시행을 알리는 포스터

 

조건은 동일하나 종전의 이용시간은 지하철 시발(始發)부터 오전 9시까지와 17시부터 21시까지였으나, 이번의 조치로 인해 종일 시행으로 변경됐다. 물론, 평일에만 해당될 뿐 주말이나 휴일은 관계없다.여성전용차량을 운용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치한(癡漢)의 성추행이나 소매치기 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 대책이다. 나고야는 2002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했다. 올 해로 13년이 된 셈이다. 시행 결과 반응이 좋아서 확대된 것이다.


"
요즈음은 옛날에 비해 여성들의 근로 인력이 늘어난 상황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하철을 이용하는 여성 승객이 무척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여성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요시카와(吉川)씨의 부연 설명이다. 여성 인력들이 사회의 각 전문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기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조치는 우리보다 더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꽤나 의미가 있어 보인다.

 

남녀 공히 80%가 찬성해

과연 이 제도를 시민들이 찬성할까. 필자는 요시카와(吉川)씨에게 이에 대한 데이터 제시를 부탁했다. 그가 제시한 데이터에 따르면 남녀 공히 여성정용차량 운영제도를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과 조사 결과가 전혀 달라서 놀랐다. 먼저 여성의 경우는 50%가 적극 찬성, 30%가 긍정적 찬성, 10%가 무반응, 10%가 반대로 나왔다. 남성들의 경우도 적극 찬성이 30%도에 그쳤으나, 50% '반대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여성과 비슷한 찬성률이었다.


남성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취지는 좋으나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여성 전용차량이 정차하기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지하철을 놓치는 경우가 있어서란다. 또한 칸을 이동할 때 정차 후 차량 밖으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이다. 연인과 같이 지하철을 탈 때 서로 헤어져야 하는 것도 반대 이유에 들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여성이 남자와 같이 일반 차량에 승차하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요시카와 다카토시(吉川隆敏) 계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현장 취재를 하기로 했다 취재에는 홍보 담당 도모사카(友坂)씨가 동행했다. ()구내에서 함부로 사진 촬영을 하다가 말썽이 생길 수 있어서다. 이 또한 필자에 대한 친절한 배려였다. 나고야 시청 청사는 지하철 통로와 연결돼 있었다. 취재의 목적지는 후시미(伏見)역으로 미리 정해져 있었다. 후시미 역은 필자가 탄 메이조(名城)선과 히가시야마(東山)선이 만나는 곳이었다. 도모사카(友坂)씨는 역 사무실에 가서 취재를 위한 완장을 차고 왔다. 프레스(press)- 짙은 보라색 완장이었다.

 

자발적인 시민의식이 중요해

▲역 구내의 기둥에 붙어 있는 여성전용차량 시행 안내문

 

후시미 역의 구내 기둥과 벽에는 "여성전용차량 시간대 확대" 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바닥에도 "여성전용차량을 알리는 것과 4 1일부터 종일 시행한다"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한 눈으로 봐도 여성전용차량 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취재 시각은 출근 시간이 아닌 오전 11- 여성들이 여성전용차량 라인에 한 명, 두 명 줄을 서기 시작했다. 지하철이 다가올 시점에 여성들의 줄이 보다 길어졌다. 아뿔싸! 이 때 4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여성들 사이에 줄을 섰다.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정장 차림의 신사는 여성전용차랑 라인이라는 의식하지 않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 때 필자는 도모사카(友坂)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
이런 경우 감시자가 줄을 서지 못하게 하는 등 특별한 제재가 있습니까? "


"
제재는 없습니다. 자율적인 시민의식에 맡기는 것이지요. 홍보 수단을 높이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현행의 여성전용차량에 철도 영업법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남성 손님의 이해와 협력아래에 철도 사업자가 수송 서비스의 일환으로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적으로 승차를 금하는 법적 근거도 없고, 남성 손님을 배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어 서다. 그래서 이용자의 이해와 협력이 법보다 더 중요하다.

 

그 순간 나이가 지긋한 여성 손님 두 사람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표정으로 봐서 "여기는 여성전 차량 라인입니다. 4 1일부터 종일토록 시행됐습니다."일듯 싶었다. 아니라 다를까. 남성의 얼굴이 붉어짐과 동시에 굽실거리면서 '걸음아! 날 살려라' 옆 라인으로 급히 이동했다. 시간대가 11시라서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심코 줄을 섰던 모양이다. 순간 지하철이 빵- 긴 호흡을 하면서 역구내로 들어 왔다. 이 때 역 구내에서 방송이 나왔다.

 

"4 1일부터 종일토록 여성 전용차량을 운영하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토 마사코 씨

 

지하철이 도착하자 여성전용차량에서 내리고 타는 승객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내리고 타면서 서로 몸을 부딪쳐도 거부감이 없는 표정들이었다. 지하철이 엄청나게 붐비는 시간대는 아니었으나 여성들이 제법 많았다. 필자는 다시 반대편으로 가서 여성 승객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60대·40대·10대의 여성 가족이 여성전용차량 라인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이 제도의 시행에 대해서 묻자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너무나 좋은 제도이며, 이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필자의 지인인 사토 마사코(佐藤昌子·68)씨도 여성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
저희 세대에서는 여성들이 가정주부라는 것 외에 직업을 가지지 않았었으나. 요즈음 대부분의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출퇴근 시간은 물론 낮 시간에도 업무상 이동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여성들을 배려하는 측면에서 대단히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보호 차원의 효과도 있어

▲여성전용차선을 알리는 일본의 표지판

 

서울에서는 지난 3 28 9호선 2단계 구간이 개통됐다. 개통과 동시에 '지옥철' 이라는 불명예 왕관을 쓰고 있는 9호선은 출퇴근 시간이 말 그대로 전쟁이다. 급기야 급행이 서는 주요 역마다 무료 버스를 투입하고, 차량의 도어(door)마다 관리요원이 초록색 깃발을 들고 승객들의 승차를 요란스럽게 돕고 있다. 그러나, 여성전용차량 이야기는 아직 없다. 우리나라는 수 년 전에 일부 구간에서 부분적으로 시행을 하다가 실효성이 없어서 중단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차량이 붐비는 노선을 중심으로 여성전용차량을 운영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요즈음은 지하철 내에서의 신체 접촉, 신체 촬영 등 불미스러운 일들이 범죄로 다뤄지고 있다. 최근 3년간 서울 지하철경찰대에 신고 된 범죄에서 성범죄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104 1,572건의 지하철 범죄 가운데 1,110건이 성범죄다'는 놀라운 통계다. 시간대별로는 출근시간대(8-10)와 퇴근시간대(18-20) 27.4% 25.7%로 나타났다 이를 장소 별로 보면 전동차 내부가 51.8%, 역 구내가 39.2%. 사람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대의 전동차 내부가 문제다.
 
간혹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치한(癡漢)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가장이자 직장인 등이라는 것이다. 여성전용차량 운영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많이 나올 수도 있다. '이 제도가 역() 성차별로 비춰질 수 있으나, 오히려 남성 보호 차원에서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도 해본다.

 

2015-05-22   '이름 없는 황녀(皇女), 덕혜옹주 이야기'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 고귀한 삶을 살지 못했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덕혜옹주/다산북스>를 소설로 엮어낸 작가 권비영(60)씨의 말이다. 소설은 고종황제의 고명딸이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일본 땅에서 겪었던 고뇌와 참담함. 그리고, 나라 잃은 민족의 처절한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그 소설을 감명깊게 읽었던 필자는 쓰시마(對馬島)에 간 김에 덕혜옹주(1912-1989)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앞에서-

가네이시 성터 입구


쓰시마(對馬島) () 청사를 지나서 좌측으로 돌자 가네이시(金石: 宗가문의 성) 성터가 있었다. 입구의 성문은 우리의 기와집 형태와 비슷했다. 안내 푯말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는 비()가 하나 서 있었다. 필자는 그 비문(碑文)의 전문을 읽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비()


<
조선국 제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 5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 ()과 결혼, 동년 11월 쓰시마(對馬島)를 방문했다. 쓰시마(對馬島)주 소가(宗家) 당주가 조선의 왕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래도(來島)하였으므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 비()는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여, 쓰시마 거주 한국인들이 건립했다. 한편, 시미즈(淸水) 산성에는 쓰시마 도민들이  경축하며 섬겼던 기념비와 철쭉이 지금도 남아 있다. 결혼 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하고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하여 두 분은 1955년에 이혼했으며, 다케유키(武志) 공은 1985년에, 덕혜옹주는 1989년에 별세했다. 역사에 묻혀 있던 이 기념비를 재건하여 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며,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문장 구성은 다소 어색했으나 의미는 정확하게 전달됐다. 필자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상념에 잠겼다. "결혼 생활은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딸 정혜(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하고 애정이 깊었다"는 대목에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소설 속 이야기

"고귀한 그대가 일개 쓰시마 번주의 아들에게 시집온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오. 하지만 어찌하겠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

▲1931년 쓰시마 방문 당시 부부의 모습(사진: 야후재팬)

 

"나 역시 황실의 부름을 받았을 뿐이오....그대에겐 부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피해자요."

 

"피해자라고요? 피해자?"

 

"그렇소.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지배국의 백성이고 그대는 속국의 황녀라는 차이뿐이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덕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차마 내뱉지 못할 말들이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차올랐으나 꾹 참았다. 얼마나 서럽고 원통했을까. 비문에 새겨져 있는 그 다음의 문구에도 의미가 있었다.

 

"양국의 갈등이 심해서 이혼했으며...두 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보며,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양국의 관계는 어떠한가. 화해와 평화는 멀리 달아난 듯하고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있지 않은가.

 

순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한 역사는 잠깐 그럴듯해 보일 뿐 진정한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는 일본의 유명작가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68)' 선생의 소설 <세 번 건넌 해협>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가네이시 성터 공원을 거닐다

필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성터 공원의 매표소에 이르렀다. 입장료가 300(3000원 정도)이었다. 필자가 입장권을 구입하자 담당 직원 하라타 하쓰미(原田初見·46)씨가 반가워하면서 말을 건넸다.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 그렇습니까? 한국의 관광객들은 대충 덕혜옹주 비()만 보시고 돌아가시는데...정원을 보시려는 이유가 있으시나요?

"아닙니다. 그냥 한 바퀴 돌아보려고 합니다."

 

가네이시(金石) 성터의 공원


하라타(原田)씨와 주고받는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잠시 후 그가 100(1000)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소위 '할인을 해 준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웃으면서 안 받으려고 하자, 그가 굳이 필자의 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당일 첫 손님에게 주는 특혜(?)라고 했다. 특혜 치고는 미미했으나, 정성스런 마음이 엿보였다. 그는 필자를 따라다니면서 덕혜옹주와 정원에 대해서 설명했다.

 

"정원이 아름답지요? 저 산에는 봄이면 덕혜옹주의 래도(來島) 기념을 위해서 심었던 철쭉이 만발합니다."

 

한적한 정원은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성터를 돌아 본 후 입구로 나오자 하라타(原田)씨는 동백나무 울타리에서 고개를 내밀고서 손을 흔들었다.

 

동백 울타리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손을 흔드는 하라타 씨-


나이에 비해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한일 관계도 이렇게 친밀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도 그에게 손을 흔들면서 작별했다. 성터를 벗어나자 쓰시마의 구름들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네 인생처럼...

 

작가와의 통화

이 책을 쓴 권비영 작가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쓰시마 여행길에서 덕혜옹주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소설을  썼다"면서 그녀의 죄(?)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지나치게 영민한 것, 품어서는 안 될 그리움을 품은 것, 조선의 마지막 황제의 딸로 태어난 것...>

 

필자는 여기에 두 가지의 죄()를 더하고 싶다.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유린한 침략자들의 죄,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한 위정자(爲政者)들의 죄다.

 

고종 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37. 15년간의 정신 병원 생활...하나 뿐인 딸의 자살, 그리고 조국의 외면....

 

덕혜옹주-그녀는 결국 버려진 황녀였다.

 

2015-06-02  비운(悲運)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두 번째 이야기

▲어린시절의 덕혜옹주(1924)

 

"덕혜 옹주의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했습니다. 영혼과 영혼의 부딪침 이랄까. 소설의 영감(靈感)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때 이른 불볕더위를 시키려는 듯 간헐적으로 비가 뿌린 5 30일 오전. 혜화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덕혜옹주>(다산 북스)의 작가 권비영(權丕映·60)씨의 첫 마디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2007년 어느 겨울 날. 꽃바구니를 사들고 경기도 홍유릉(洪裕陵)의 울타리 밖 한적한 비탈길에 묻혀 있는 덕혜옹주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서 얼음판으로 변해버린  묘소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덕혜옹주가 꿈속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순간 권비영 작가는  꿈속에 나타난 덕혜옹주를 떠올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말했다. 소설의 영감(靈感)을 덕혜옹주로부터 얻은 것이다. 작가의 꿈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남양주에있는 덕혜옹주 묘소. 누군가 놓고 간 국화꽃이 시들어 있다.


"
덕혜옹주님! 웬일이십니까. 저의 꿈속에 나타나시다니요."

"그래. 널 도와주려고 왔단다."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옹주님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옹주님께서 도와주시면 글이 잘 써질 것 같습니다."

 

"...."

 

권비영 작가는 꿈속의 상황을 생생하게 필자에게 전했다.

 

"사진에서 보다 더 선명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덕혜 홍주가 전설의 고향처럼 스르르 사라지셨습니다. 2007  일행들과 함께 쓰시마(對馬島)에 문학기행을 가서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와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의 사연을 들은 후 3-4번 더 다녀왔으나,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던 소설이 그 꿈 이후 일사천리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 필자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작가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옹주의 신분이 그러할 진데 민초들은 어떠했을까.

 

"작가님! 일부 독자들께서 '옹주가 일본의 귀족과 결혼 했으면 됐지. 성격 차이의 이혼에 대해서 '버려진 황녀고 지나치게 미화시키지 않느냐?'는 질문이 많습니다. '나라가 망한 황녀가 일본의 백작과 결혼했으면 됐지... 그게 불쌍하다고요?' 이러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권비영 작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덕혜옹주라는 신분을 떠나서, 그 시대를 살았던 대한제국 여성의 삶을 그린 것입니다.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옹주의 삶이 그러할 진데,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소설은 덕혜옹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여성들의 아픔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뜻이 있었군요."

 

복순은 그 시대 여인들이 겪어야 했던 처절한 현실

 

필자는 그 대목에서 복순의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덕혜옹주의 시녀 복순의 아픔을 소설 속에서 찾아본다.

 

"영친왕 저택에 다녀오게."

▲예복을 입은 어린시절 영친왕(1907)

 

'소 다케유키' 백작의 말을 들은 복순은 '영친왕(1897-1970) 저택에 가면 조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일은 잠시 뿐. 집을 나서 얼마간 길을 걷자 건장한 두 명의 사나이가 나타나 그녀를 숲 속으로 끌고 갔다...그들은 복순을 처절하게 짓밟았다. 그녀의 망가진 몸과 마음은 어떠했을까.

 

<삶은 원칙도 없고 배려도 없다. 사납게 휘두르는 운명의 갈퀴를 막을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복순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정지된 세상에 아무 의미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손의 결박은 단단했고 버려진 몸뚱이는 상처투성이였다. 가시에 긁히고 유린당한 몸뚱이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있었다.>

 

물론,  대목은 픽션이다. 작가는 덕혜옹주의 시녀를 했던 실제 인물이 인천의 어딘가에 살고 있었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소설 속 복순은 그 당시 겪어야 했던 여성들의 아픔이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와 오버랩된다'고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

복순의 이야기에서 목소리가 높아진 권비영 작가는 "고종황제에 대해 그릇된 평가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작가는 "고종은 그 당시 청·일·러 등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고뇌하면서 국권보존을 위해 노력했던 선진형 황제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승자(일본)에 의해 쓰인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인정하는 우리의 무지(無知)가 더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권 작가는 한 교수의 논문을 인용했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논문을 보면 '고종황제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유약(柔弱)하고 암우(暗遇)하다고 왜곡(歪曲)되게 평가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교수께서는 고종을 곁에서 지켜본 외국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매우 총명하고 강기 있는 군주다'고 했습니다. 이 점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스트셀러의 비결은?

▲덕혜옹주 소설을 들고 있는 작가 권비영 씨

 

"이 소설이 2009년 초판을 찍은 이후 120쇄가 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아닙니다. 제가 유명 작가도 아니고...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꿈에서 만난 덕혜옹주의 도움이 있었나 봅니다(웃음). 시부모를 모시고 두 아들을 키우면서 열심히 살아온 덕택인지도 모르겠고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소감을 한마디 해주시죠."

 

"저의 책이 나온 후로 대한제국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덕혜옹주에 대한 영화도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구요. 이 자체가 보람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면서도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권비영 씨- 2005년 첫 창작집을 내고 처절한 쓴 맛을 보다가 <덕혜옹주>를 통해 유명세를 타게 됐다.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커피숍을 나서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굵지 않았으나 창덕궁 쪽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갔다. 덕혜옹주의 목소리가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했다. 소설처럼...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일본판 출간으로 이어져

▲일본어판 <덕혜옹주>

 

소설 <덕혜옹주>가 한국에서 유명세를 타자,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간요우 출판사'가 권비영 작가·다산 북스와 협의 끝에 2013 4월 일본어판을 출간됐다. 일본 서점가에 뿌려진 서평(書評)이다.

 

"일한(日韓)의 틈바구니(翻弄)에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휘둘린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필자와 전화 통화를 한 '간요우 출판사' '마쓰야마 켄(松山·59)'사장은 소설 <덕혜옹주>의 출판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지만, 일본인들이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출판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만...."

필자는 전화를 끊기 전 "덕혜옹주를 출간한 출판인으로서 한일 관계의 개선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린다"고 했다. 마쓰야마(松山) 사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민간인들끼리 친구를 만들어 나가야죠. 단 한 사람, 아니 두 사람이라도...민간인들의 교류가 확대되다보면 양국 관계가 좋아지지 않을까요?"

 

지극히 평범한 대답이었으나, 적절한 방안이기도 하다. 일시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민간인들의 교류와 대화를 통해서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바로 잡는 것도 방법일 듯싶다.

 

2015-07-14  갑신정변의 주역 개화파 김옥균의 흔적, 日 도쿄에서 찾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9일의 도쿄(東京). 서둘러서 업무를 마친 필자는 카메라를 들쳐 맸다. 이유는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묘지(墓地)와 묘비(墓碑)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과거부터 '그의 묘지와 비()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동무는 일본 친구 '도미타 가즈나리(富田一成·61)'- 그는 '김옥균이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와 비슷하다'면서 흥미 있어 했다. 교통수단은 지하철. 도미타(富田)씨는 한 장의 티켓으로 목적지를 다 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짜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도쿄의 지하철ㅡ.


나무들의 크기는 곧 역사의 크기던가. 분쿄구(文京區)의 도쿄대(東京大)와 가까운 지하철 혼코마고메(本駒込) 역 계단을 오르자 거목(巨木)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목들의 몸통과 키에서 세월의 무게와 두께가 느껴졌다. 긴 담장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찰들이 나왔다. 지금은 다소 외딴곳이나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는 도심지였던 관계로 유서 깊은 사찰들이 많았다. 10여 분 쯤 걷자 '신죠지(眞淨寺)'라는 사찰이 나왔다.

 

"바로 이곳입니다. 이 사찰에 김옥균의 묘지가 있을 것입니다."

 

신죠지(眞淨寺)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도미타(富田)씨가 지도를 펼치면서 필자에게 설명했다. 1613년 창건된 신죠지(眞淨寺) 1761년 이곳으로 이전돼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필자는 기웃거리며 신죠지(眞淨寺) 안으로 들어갔다. 사찰 경내는 조용했다.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길게 하품을 하고 있을 뿐, 스님들도 보이지 않았다. 1000여기의 묘지들도 '나카무라(中村)' '후지하라(藤原)' 등 각각의 명패를 달고서 침묵하고 있었다. 묘지에서도 일본인들의 공명(共鳴)이 들리는 듯했다.

 

'이토록 많은 묘지들 사이에서 김옥균의 묘지(墓地)를 찾을 수 있을까?'

 

신죠지(眞淨寺)의 법당


김옥균의 묘지를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일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필자는 궁리 끝에 법당 문을 열고 스님을 불렀다. 사찰도 현대화의 물결을 탄 것일까. 이 절에는 교회나 성당처럼 신도들을 위한 의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불공을 드리려면 의례히 바닥에 엎드려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모습이 연상되는데, 신죠지(眞淨寺)는 그러한 전통을 파괴(?)하고 있었다.

 

"스님! 안녕하세요? ...한국의...김옥균의 묘지를 찾으러 왔습니다만..."

 

"! 김옥균 선생의 묘지요? 사찰 뒤편에 있습니다. 건물 뒤로 돌아가 보세요."

 

젊은 스님은 '어디서 왔느냐?'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를 묻지 않고서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필자는 다시 묘지 사이사이를 지나 절의 뒤편으로 갔다. 작은 묘지 숲에 우뚝 선 묘비에는 한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朝鮮國 金玉均 靈墓

▲신죠지 경내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필자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묘비(墓碑)는 비()에 젖어 있었고, 누군가 놓고 간 작은 술잔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꿈꾸던 풍운아 김옥균. '도미타'씨가 내민 일본어 자료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摘示)하고 있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떠돌다가 1894 3 28일 상하이(上海)에서 민비의 자객 홍종우(1850-1913)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유체는 청국군함 '함정호(咸靖號)'에 의해서 본국조선에 운반돼 능지형(凌遲刑: 몸의 일부를 절단하면서 죽이는 청나라의 형벌)에 처해졌다. 몸통은 바다에 던져졌고, 머리는 경기도 죽산(竹山), 손과 발의 일부는 경상도에, 기타 수족은 함경도에 버려졌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가이 군지(甲斐軍治)의 사연은?

<일본의 개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에게 법명(古筠院釋溫香)을 붙이고 당시 신죠지(眞淨寺)의 주지 승(寺田福壽)에게 부탁해서 이 절에 안치했다.> 일본어 자료의 계속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과 각별한 사이였다. 일본의 가와무라 신지(川村眞二·67)는 저서 '1만 엔 지폐 속에 살아 쉼 쉬는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김옥균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김옥균의 묘지와 나란히 있는 '가이 군지'의 묘

 

<1893 3월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조선독립당을 이끌었던 김옥균이 암살됐다. 김옥균은 후쿠자와가 아끼고 보호했던 지사(志士)였다. 그 해 7월 청일 양국은 조선의 독립문제로 충돌했고, 마침내 태안반도 해역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청일전쟁이었다.>

 

그런데, 김옥균의 묘()와 나란히 붙어있는 묘지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가이 군지(甲斐軍治)'-그는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숨겨서 일본으로 유입했던 인물이다. 김옥균을 흠모했던 '가이 군지' "자신이 죽으면 김옥균과 나란히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있어서는 국경이 무슨 소용이랴. 그는 소원대로 김옥균 묘지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사찰의 경내에서 만난 또 다른 스님에게 필자는 몇 가지를 질문했다.

 

"여기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많지는 않으나 가끔씩 오십니다도쿄대(東京大)가 가까운 때문인지 학생들이 옵니다.

 

필자와 도미타(富田)씨는 '한국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일본 대학생들이 김옥균의 묘를 찾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오야마(靑山)의 외국인 묘지를 찾아서

필자와 도미타(富田)씨는 김옥균의 묘지를 뒤로하고 신죠지(眞淨寺)를 나섰다. 아오야마(靑山)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다. 시간 단축을 위해 도쿄대(東京大)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다. 도쿄대의 빨간 정문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도쿄대 교내에도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가득했다

 

제법 먼 거리를 걸어서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김옥균의 비()가 있는 아오야마(靑山)의 외국인 묘지였다. 계단을 오르고, 다시 육교를 건너고, 또 길을 걸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습도가 높은 관계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아오야마(靑山) 공원을 지나 외국인 묘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외국인 묘지는 더없이 넓었다. 묘지가 너무 넓은 탓에 다시 한 번 어려움에 봉착했다. 관리자도 행인들도 없어서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료에 매달려야 했다.

 

아오야마(靑山)공원


'
도미타'씨의 도움이 없었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자료를 뒤져서 알아낸 사실은 '4구역과 5구역의 사이에 김옥균의 비()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심마니가 산삼을 찾은 듯 '도미타'씨가 목청을 높이면서 필자를 불렀다.

 

김옥균의 비()가 세워진 사연은?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비()

 

김옥균의 비()가 세워지기까지의 사연도 특이했다. 이 비()는 일본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의 도움으로 세워졌다. '이누카이(犬養)'는 정치가로써, 일본이 정당정치를 확립하고 보통선거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 다른 일본인 '도야마(頭山)'는 김옥균을 비롯해서 손문, 장개석 등과 두터운 인맥을 쌓은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일본에 망명한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가 '우익단체에게 길을 열어줬다'는 점은 우리에게 거슬리는 대목이다.

 

필자는 김옥균의 비()를 돌면서 전후좌우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잘 보이지 않는 비문(碑文)까지도  촬영했다.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
아아, 비상한 재능으로,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만 있었구나...)

 

이글은 '박영효(1861-1939)가 지었으며 흥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1870-1917)이 썼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유길준(1856-1914)이 새겼다고 한다.

 

공동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비가 내리는 외국인 묘지. 동행한 일본 친구 '도미타'씨의 모습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옥균의 묘비 건너에 무궁화나무 한 그루가 예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필자는 일본에서 무궁화를 본다는 일이 흔하지 않아서 카메라의 렌즈를 꽃에 맞췄다. 그런데, 그 아래 한국인 묘지 하나가 카메라에 잡혔다. 우연한,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嗚呼 朴裕宏의 墓

▲무궁화나무 아래에 있는 박유굉의 묘-뒷면에 '타루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도미타'씨를 붙들었다. 사전의 정보가 없기에 급한 나머지 스마트 폰(네이버)의 지식을 빌었다

 

<박유굉(1867-1888). 1882년 여름 조선 정부에서 임오군란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일본에 박영효(朴泳孝)를 리더로 수신사를 파견할 때 수행원이었다...박유굉은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학업을 계속했다. 1882 12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고, 188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유학생들이 1884년 갑신정변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자, 조선 정부에서 일본 유학을 금지함은 물론, 재일유학생들에 대한 학자금 중단과 귀국령을 내렸다. 동료 유학생들이 귀국한 뒤 처형당한 소식과 부친의 구금소식 등을 들은 박유굉은 1888 5 27일 아침 기숙사에서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1900 4. 그의 후배들이 비석을 세워 '타루비(墮淚碑)'라는 글을 새겼다.>

 

그리고, 2006년의 어느 기사가 덤으로 따라 나왔다. "묘지 관리비(1평방미터당 590)를 내는 사람이 없어서 강제 철거를 당할 상황에서 한국 대사관이 대납함으로써 철거 위기를 면했다"는 기사였다.

 

참으로 슬픈 사연들이다. 문제라면 모두가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안타까운 사연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김옥균의 비() 바로 옆에 묻힌 외국인 '선구자의 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 최초로 온 영국의 Seventh-day Adventist 교회 선교사 '윌리암 그랜저(William C. Grainger, 1844-1899)'의 묘지라고 쓰여 있었다.

 

김옥균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역


'
저 많은 외국인 묘지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통곡의 눈물들이 함께 묻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외국인들의 묘지에 목례를 하고 묘역을 벗어났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토추(伊藤忠) 상사 빌딩 위 높은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무리지어 몰려왔다. 조각난 김옥균의 흔적(痕迹)을 더듬어본 비 내리는 도쿄(東京) 9일 오후, 왠지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2016.04.20  日 대마도에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과 문화유산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오전 8,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탐방객들로 북새통이 된다. 이 시간이 되면 일본 후쿠오카와 대마도로 가는 여객선이 출항하는 시간이다. 대마도로 출항하는 배 안은 언제나 만원이다. 해마다 평균 10만 명이상의 한국인이 방문한다.  2015년에는 15만 명이상이 방문하였다 한다. 2012년 불상절도사건으로 한국 방문객이 홀대받고 현지 분위기가 썰렁하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현지 사정과는 너무 다르다. 불상 절도사건이 발생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수차례 대마도를 방문한 바 있기에 이러한 보도가 의도하는 바가 의심스럽기까지 한다.  

 

부산항에서 대마도까지 거리는 49.5Km이다. 일본이 본토라고 하는 후쿠오카와의 거리는 132km이다. 현재 대마도에 가는 여객선은 두 가지이다. 하대마(下對馬)라 불리는 이즈하라항까지 시간은 2시간정도 걸린다. 상대마(上對馬)인 히타가츠항까지는 1시간10분 소요된다.

 

이렇게 지척인 거리에 있으니 대마도에서도 부산이 보이고 부산 영도에도 대마도 전망대가 있다. 한국인 방문객 중에는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 탐방객도 쾌 많다고 한다. 대마도 숙박시설 부족이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그 만큼 생활권에 가깝다는 것이다. 방문객의 대다수는 동창회, 계모임, 산악회 등 중장년층이 주를 이룬다. 이즈하라 시 한국인 방문 식당에 걸려있는 산악회 리본의 숫자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지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캠핑 관광 상품이 나오면서 젊은 층의 탐방도 증가할 것으로 보여진다. 2016 9월이면 김포공항에서 하늘 길도 열린다고 하니 대마도를 찾는 한국인들의 발걸음은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러나 찾는 사람들은 많아도 대마도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단기 여행 상품으로 오는 이들 중에는 역사유적지나 문화재는 잠시 스쳐지나 갈 뿐 주요 관심사항이 아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중학교 학생 수련회를 인솔, 안내하는 여행가이드가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해 준 경우도 있어 현장에서 바로 잡아 준적도 있다. 찾는 이는 많지만 누구하나 제대로 된 교양과 안내를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어느 보도에 한국을 찾은 중국관광객을 상대로 여행가이드가 심각한 역사왜곡을 한다는 본 적도 있어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즈하라 조선통신사대로 그림, 순박한 표정의 왜인과 심술궂은 표정의 조선관리 모습이 비교된다. 사진 문화재환수국제연대

 

대마시청에 결려있는 조선통신사기록 유네스코 기록 등재 안내 현수막. 사진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이유가 있다. 대마도에 존재하는 문화재의 상당부분이 신사나 사찰의 창고나 개인의 금고에 갇혀 제대로 소개된 바가 없다. 또한 이에 대한 안내 해설서도 없다. 다만 조선통신사가 왕래한 이즈하라시의 조선통신사대로, 통신사가 묵었던 세이잔 지, 최익현 열사 순국비가 있는 슈센지,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와 반쇼인, 고려문 등이 주로 탐방하는 역사유적지이다. 유물전시공간은 대마민속자료관, 도요타마마치향토관, 미네마치역사민속자료관, 가미쓰시마마치 역사민속자료관이 있으나 주로 이즈하라 시에 있는 대마민속자료관을 방문한다.  

 

대마도 항구에 도착하여 세관을 통과하기까지 길게는 1시간30분을 허비하는 시간에 방문객들이 제대로 한국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알고 대마도와의 역사적 관계를 바로 알 수 있다면 항간에서 제기하는 것과 같은 불신과 오해는 줄어들지 않을까 고민한다. 또 지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이해도 높인다면 상호 교류와 협력이 더욱 나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대표적인 역사 유적과 문화유산   

첫째 고대 신사와 유물들  

 

대마도에는 1천년이상의 역사를 지난 고대 신사가 29개 있다. 이 중에 대표적인 곳으로 《다구즈다마 신사》에는 일본 정부가 국보로 지정한 통일신라 금동여래입상, 동조 고려관음보살좌상, 고려 금고가 있다. 또한 조선 여래형 좌상과 십일면솬음좌상도 이곳에 있다

 

《가이진 신사》에는 해인사 판본 고려대장경과 통일신라 금동여래불, 신라 동종, 삼국시대 토기, 세형동검, 고려 매병청자 9, 조선백자 등 약 40여점의 문화재가 있다

 

둘째 선사시대 및 고대 고분 유적 

대마 서북해의 《나타만 일대》는 조몽인의 거주지로 대대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거류지이다. 특히 《아소만 일대》는 3-5세기 이주민들의 중심지로서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한반도계 유물은 한반도와 대마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출토 유물은 지역의 역사문화향토관에서 볼 수 있다

  

셋째 한반도와 관련이 깊은 전적지

 《가네다조》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왜군과 백제유민들이 신라의 대마도 토벌에 대비하여 아소만 일대에 쌓은 성이다. 대마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성으로 7세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그리고 신라와 대마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사유적지이다 

 

 《고모다 해안》은 1274년 여몽연합군이 대마도를 침공할 당시 상륙했던 곳으로 매년 11월 침공일을 기해 바다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의식이 전해지고 있다 

 

 《아소만》은 13, 14세기 왜구들이 발호한 소굴로 이로 인해 1419년 이종무 장군에 의해 정벌된 곳이다. 

 

 《사미즈 산성》은 임진전쟁과 관련있는 유적지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참 본부였던 나고야성에서 부산에 이르는 중간기지ㄹ로 아키의 가쓰모토 산성과 이즈하라에 사미즈 산성을 쌓아 전쟁을 대비하였다. 현재 국가지정 사적이다 

 

 《만세키 운하》는 1905년 러일전쟁을 위해 건설한 운하이다. 아소만 일대에 숨긴 일본의 수뢰정함대가 당시 세계 최강인 러시안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은 급격히 일본군국주의에 통치아래 들어갔다
 

 

넷째 역사 유적과 문화재  

《엔쓰지》는 대마도주의 원찰로 도주 3대의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13세기 고려 동조 여래약사여래좌상과 조선 초기의 범종이 있다 

 

《바이린지》는 538년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과 경전이 가지고 온 일행이 머물던 곳이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금동 탄생불이 있다

 

《고쿠분지》 대마도 관영 사찰로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된 곳이다 

 

《세이잔 지》조선통신사 정사의 숙소로 이용된 곳으로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본존불인 14세기 고려 금동대일여래 좌상과 15세기 목조여래형 좌상, 조선목조 여신상이 있다

 

<세이잔 지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선생 시비, 사진 문화재환수국제연대>

 

《다이해이지》대마도주의 주군인 쇼니의 원찰로 통일신라 동조 불상 4점이 소장되어 있다.

 

《슈센지》 7세기 백제의 범묘스님이 창건하였다 전해지는 이 곳은 1907 1 1일 대마경비대 병영에서 서가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임시 안치되어 있던 곳이다. 신라 불상이 9.5cm 크기의 동조여래형 좌상있다

  

《호세이지》 대마도에 소재하는 한국 불상 중에 가장 오래 된 7세기 백제 동조보살입상을 소장하고 있다. 나가사키 현 지정 문화재이다

 

《게이운지》 우나쓰라에 있는 작은 사찰로 15세기 동조 불상 2구와 조선 석불1구가 있다

  

《반쇼인》 임진전쟁이후 조일수교를 주도한 최조의 대마 번주 소 요시도시의 원찰과 역대 대마도주들의 무덤이 있다. 반쇼인 보리사에는 조선왕실에서 하사한 법구 삼구족이 있으며 11세기 고려 동조 관음보살반가상 1구와 고려판 대반야경 1, 조선 세조 때의 경전 주석서가 있다.

 

《덕혜옹주 관련 유적》대마도 역사자료관 인근에 일제강점기 대마도에 거주하였던 한국인들이 세운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있을 뿐 특별한 유적이 없다. 다만 옹주부부 사이에 태어나서 자살한 경혜의 유해가 반쇼인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추측만 있다.

 

조선인 귀 무덤의 발견과 위령제  

부산외대 명예교수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은 오랜 기간 한일관계를 조사 연구하였다.

 

특히 교토, 오사카 등의 귀 무덤, 코 무덤을 조사, 발표함으로 임진전쟁 당시의 참혹한 사정을 밝히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 소장은 귀 무덤이 대마도에도 있다는 사료를 근거로 오랜 기간 추적하였다. 그러나 현장이라고 여겨진 장소를 알게 된 것은 의외였다. 2015 9월 서산 부석사관음상의 유통경로 등을 추적하기 위해 대마도를 방문한 부석사불상봉안위는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였다. 다름 아닌 현지 조사활동을 위하여 차량을 렌트하였으나 아무도 국제면허증을 승인받아 오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일본 인 렌트 회사 사장은 순순히 우리 일행을 안내하겠다 하였고 한국어 의사소통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우리 일행들의 대화 내용을 듣던 그는 조선인 무덤 장소가 있다며 대대로 마을 사람들의 그 곳에서 천도의식을 지낸다는 말을 하며 우리 일행을 그 곳으로 안내하였다.

 

그 곳은 히타가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카미쓰시마(상대마도)의 히코텐성 남쪽 끝이었다. 도로 변에 차를 세운 그는 밭길을 걸어가 돌로 쌓아 놓은 한 곳을 지목하였다.

 

김문길 소장은 임진전쟁 때 가토 기요마사가 대마도에 조선인 귀 무덤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토대로 자료를 찾아 나서 지역의 역사 문헌인 '카미쓰시마지'에서 왜군이 잘라온 조선인의 귀를 공양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그리고 12 7일 대마도에도 조선인 귀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귀무덤 장소라 지목하는 오야마씨와 김문길 교수, 김경임 전 주)튀니지 대사. 사진 문화재환수국제연대

 

 2015 8 11일 해방 70주년을 맞이하여 문화재환수국제연대 회원, 부석사불상봉안위 관계자 등 50여 명은 대마도 현지에서 “임진공신 조선인 귀무덤 위령제”를 봉행하고 조상들의 원혼을 달랬다. 그리고 서산시의회와 부석면발전협의회는 귀무덤의 고국 봉환을 다짐하고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2015 8 11, 귀무덤 위령제 봉행 모습, 사진 문화재환수국제연대

 

대마도에 한국문화원 설립해야

대마도는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지리적 동일 생활권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마도주민은 한반도에 의지하여 왔다. 해마다 10만 명이상의 한국인이 방문한다. 수많은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이 있다. 이곳에 이주하는 한국인도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다. 대마도 주민들은 현재 3 4천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하나 실제로는 2만 명이 되지 않을 곳이란 현지 부동산업자의 설명이다. 앞으로 관광과 체험, 생활을 위하여 더 많은 한국인이 찾을 것이다.

 

역사 문화적으로는 조선통신사재현향사를 매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기록유산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더욱 가까워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문객들에 대한 편의나 서비스는 잘 갖춰져 있지 않다. 세관에서 통상 1시간 이상을 대기하여야 한다. 혹시 잘못하여 여권이라도 잊어버리면 임시여권을 후쿠오카에서 발급받아야 하고 통상 2,3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참 불편한 경우이다

 

지난해에는 방문객이 객사하는 안전사고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어도 공동실태조사나 교류전시회 등을 해 보지 않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신사와 사찰, 개인 창고에서 방치되어 있어도 어찌 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주 일본대사관 근무경험 등이 있는 김경임 전 주)튀니지대사는 “이곳이야 말로 한국문화원이 필요한 곳이다. 정부가 직접 하기 어려우면 재일민단 등 민관협력으로 진행해도 된다. 60년대 일본의 영사관 등은 주로 그런 방식으로 시작하였다.

유물의 훼손을 방지하고 방문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하루빨리 문화원을 개원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2015 10 23일 국회동북아역사왜곡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이상근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의 발표를 통해서 정부에 제안한 바도 있다. 장기적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대마도에 대한 이해와 방안이 필요하다.

 

2015년 문화재환수국제연대회원 단체 탐방모습, 가이진 신사 앞에서◎

 이상근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