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48/ 일본1/ 역사 속 일본 천황(天皇) 이야기 - 만행 - 민족성
■일본 Japan ,
日本 , にほん
▲국기
동아시아 대륙 동쪽에 있는 국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의 4개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구성된다. 수도는 도쿄이다. 단일 아시아계 민족이 압도적이고 주요 종교는 신도·불교·그리스도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하와이 및 필리핀의 미군기지를 공격했고, 유럽 식민지를 점령했으나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되었고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전후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여 폐허로 변한 산업기반을 재건하여 놀랄 만한 경제 회복이 이어졌다. 활발한 지진 활동대에 놓여 화산 폭발 및 지진을 겪는다.
◆역사 속 일본 천황(天皇) 이야기
⊙ 天皇이라는 호칭은 道敎의 ‘天皇大帝’에서 유래… 日本이라는 국호와 함께 7세기 말부터 사용
⊙ 14세기 고다이고 천황 이후 60년간 南北朝 분열… 現 천황가는 北朝 계통이면서 南朝를 정통으로 삼아
⊙ 무로마치 막부 시절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돈이 없어 즉위식도 못 올려
⊙ 메이지유신 初만 해도 “천황이 쇼군 자리에 앉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가 누구일까?”라고 할 정도로 존재감 없어
⊙ 제2차 세계대전 후 나고야의 잡화상, 고다이고 천황의 후손으로 진짜 천황이라고 주장하며 천황부적격확인소송 제기
2019.05. 월간조선 05월 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지난 3월 12일 고쿄(皇居) 내 규추산덴(宮中三殿)에서 한 달 반 동안 진행되는 퇴위 의식을 시작했다. 규추산덴은 일본 황실의 선조라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셔놓은 곳이다. 사진=뉴시스/AP
지난 4월 1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官房)장관이 5월 1일에 즉위하는 나루히토(德仁) 새 천황(天皇·덴노)의 연호(年號·일본에서는 ‘元號’라고 함)를 발표했다. 새 연호는 ‘레이와(令和)’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오는 12월에 만 86세가 되는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지난 2016년 8월 고령(高齡)을 이유로 퇴위(退位)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에서 천황이 생전에 퇴위하는 것은 202년 전 제119대 고카쿠(光格·재위 1779~1817) 천황 이후 없었던 일이라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고령의 나이에 과중한 일들을 해야 하는[그것이 의례적(儀禮的)인 일이라고 해도] 천황의 호소가 역시 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결국 2017년 6월 일본 참의원(상원)은 ‘천황의 퇴위 등에 대한 황실전범(皇室典範) 특례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2017년 12월 일본 정부는 “아키히토 천황이 2019년 4월 30일 퇴위한다”고 발표했다.
나루히토 새 천황은 제126대 천황이다. 일본인들은 태양신(太陽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예로 기원전 660년 즉위했다고 하는 초대(初代) 진무(神武) 천황 이래 2679년 동안 단 한 번도 왕조 교체 없이 하나의 왕조가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메이지(明治) 헌법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 언론에서는 천황을 ‘일왕(日王)’이라고 표기하는데, 일본인들의 천황제에 대해 품고 있는 이런 특별한 감정을 모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679년 동안 단 한 번의 왕조 교체도 없이 한 핏줄로 임금의 자리가 이어져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일본 학자들도 고대(古代)에 적어도 두세 번의 왕조 교체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大惡천황’ 雄略
사서(史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본 지역의 군주는 중국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 나타나는 야마타이(邪馬台)국의 히미코(卑彌呼)라는 여왕이다. 야마타이국은 규슈(九州) 혹은 기나이[畿內·나라(奈良)]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히미코는 239년 위 명제(明帝)에게 조공(朝貢)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히미코는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조에도 등장한다.
150년 후 《송서(宋書)》 ‘왜국전’에 다시 왜왕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찬(讚)·진(珍)·제(濟)·흥(興)·무(武)가 그들이다. 이들 중 무는 478년 송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사지절·도독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辰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으로 제수(除授)됐다. 이런 칭호는 무가 스스로 요청한 것인데, 마치 왜가 신라·백제·가야 등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왜왕 무는 제21대 유랴쿠(雄略·재위 456~479) 천황으로 추정된다. 유랴쿠 천황의 이름은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記)》 등에 오하쓰세-와카타케루-미코토(大長谷-若建-命/大泊瀬-幼武-尊)로 기록되어 있다. 1873년 구마모토(雄本), 1968년 사이타마(埼玉)에서 ‘와카타케루(獲加多支鹵) 대왕(大王)’이라고 새겨진 철검(鐵劍)이 발견되면서 그가 실존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유랴쿠 천황은 왕권을 강화하고, 한반도에서 백제를 도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南下)정책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대에 야마토 국가는 종래의 부족연맹체에서 벗어나 고대(古代)국가를 향해 전진했다. 임금의 호칭도 ‘왕(王·기미)’에서 ‘대왕(大王·오기미)’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으로 격상됐다. 그의 왕권강화 정책은 다른 지방 세력의 반발을 샀다. 그 때문에 그는 역사에 ‘다이아쿠(大悪) 천황’으로 기록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천황이라는 호칭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사이메이 천황은 의자왕의 여동생?
▲덴지 천황.
《일본서기》에 의하면, 5세기 제25대 부레쓰(武烈·재위 498~506) 천황이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자 신하들이 제15대 오진(應神·재위 200~310. 재위기간이 110년이나 된다!) 천황의 5대손을 천황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가 제26대 게이타이(繼體·재위 507~531) 천황이다. 역사학자들은 게이타이 천황의 즉위를 새로운 왕조의 성립으로 간주한다. 지금의 일본 황실은 게이타이 천황의 후예라는 것이다.
6세기 말 일본은 친(親)백제-친불교 노선을 주장하는 소가(蘇我) 씨와 그에 반대하는 모노노베(物部) 씨가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모노노베 씨를 숙청하고 권력을 잡은 소가 씨는 황실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제34대 조메이(舒明·재위 629~641) 천황의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는 645년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 씨를 멸망시켰다. 나카노오에는 어머니인 고교쿠(皇極·재위 642~645) 천황 면전에서 소가 씨의 핵심 인물인 소가 이루카(蘇我入鹿)를 참살(斬殺)해버렸다. 충격을 받은 고교쿠 천황은 퇴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당연히 나카노오에가 계승해야 했으나, 그는 황위를 사양했다. 결국 고교쿠의 동생 고토쿠(孝德·재위 645~654) 천황이 즉위했다.
실권자인 나카노오에는 다이카(大化)라는 일본 최초의 연호를 제정하고, 관제를 개혁하는 등 중국식 율령(律令)국가체제를 도입했다. 고토쿠 천황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고토쿠 천황은 기성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중국 및 한반도와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아스카(飛鳥)에서 항구도시인 나니와(難波·오사카 중심부)로 수도를 옮겼다.
하지만 천도(遷都)한 지 6년 만에 나카노오에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고토쿠 천황만 남겨놓고 아스카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고토쿠 천황의 황후마저 나카노오에와 눈이 맞아 남편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그녀는 나카노오에의 누이동생이기도 했다. 고토쿠 천황은 화병으로 죽었다.
숙부의 아내이자 누이동생과의 사련(邪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나카노오에는 자기가 즉위하는 대신 어머니인 고교쿠 천황을 다시 한 번 천황으로 앉혔다. 제37대 사이메이(濟明·655~661) 천황이다.
사이메이 천황은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멸망하자,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병(派兵)을 결정했다. 사이메이 천황은 직접 규슈까지 가서 파병 작업을 지휘하다가 661년 사망했다. 국내 일각에서는 사이메이 천황이 원병(援兵) 파병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백제 의자왕의 누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수양대군’ 덴무 천황
▲‘일본의 수양대군’ 덴무 천황.
나카노오에 황자는 어머니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한반도로 출병했으나, 663년 백강(白江)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는 백제 유민(遺民)을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 서부 해안의 요충지에 성곽을 세우는 등 방위태세를 정비했다. 사이메이 천황이 죽은 지 7년이 지나서야 나카노오에 황자는 덴지(天智·668~671·제38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덴지 천황의 사업을 도운 이는 동생 오아마(大海人) 황자였다. 덴지 천황은 오아마를 황태제(皇太弟)로 세우고, 두 딸을 주었다. 누가 봐도 다음 천황은 오아마였다.
그런데 덴지 천황은 말년에 오토모(大友)라는 아들을 얻었다. 병약하지만 영특한 아들이었다. 덴지 천황은 태정대신(太政大臣)이라는 관직을 신설, 어린 오토모를 그 자리에 앉혔다. 후계자 수업이었다. 덴지는 동생 오아마와 중신들에게 오토모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했다. 형의 뜻이 조카에게 있다는 걸 안 오아마는 출가(出家)하겠다고 선언한 후 요시노(吉野·나라)로 가 은둔했다. 덴지 천황은 안심했지만,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호랑이를 풀어준 것”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아마는 형 덴지 천황이 죽기 무섭게 반란을 일으켰다[임신(壬申)의 난]. 패배한 오토모 황자는 672년 자결했다. 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고분(弘文·제39대) 천황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오아마가 등극하니, 그가 제40대 덴무(天武·재위 673~686) 천황이다. 일본 고대판 수양대군과 단종이었다.
덴무 천황은 백제 멸망 후 적대관계던 신라 및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관제를 정비하고, 지방호족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입시켰다. 686년 덴무 천황이 죽은 후, 그의 황후가 지토(持統·690~697) 천황으로 즉위해 덴무의 사업을 계승했다.
日本과 天皇의 등장
덴지-덴무-지토로 이어지는 이 시기가 바로 일본 고대 율령국가의 완성기였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와 천황이라는 칭호가 확립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천황이라는 칭호는 이미 607년 호류지(法隆寺) ‘금동약사불조상기(造像記)’에 등장하지만, 확실히 입증된 것은 668년의 후나노 오고의 묘지(墓誌)라고 한다. 이때가 덴지 천황 때였다. 이때만 해도 궁정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천황이라는 칭호는, 덴무-지토 천황 대에 이르면 확실하게 정착된다. 천황이라는 칭호는 중국 도교(道敎)에서 최고의 신(神)으로 여겼던 ‘천황대제(天皇大帝)’에서 나온 것으로, 당(唐)에 유학한 이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천황을 지금처럼 ‘덴노’라고 하지 않고 ‘스메라미코토(皇尊天皇)’라고 했다.
일본의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680~720)와 《고사기》(712)가 편찬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면서 고대의 황실계보가 1차로 정리됐다. 그러다 보니 제6대 고안(孝安·재위 BC 392~291) 천황이나 제12대 게이코(景行·BC 71~AD 130) 천황처럼 100년 넘게 즉위한 천황들이 있는가 하면 제2대 스이제이(綏靖·재위 BC 581~549)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開化·BC 158~98) 천황처럼 사서에 이름과 재위 연도만 나오고 구체적 행적은 보이지 않는 천황들도 있다.
이번에 레이와라는 연호의 출전(出典)이 된 《만요슈》가 편찬된 것도 이 시기(7세기 후반~8세기 후반)였다. 여기에는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충성을 다짐하는 시가(詩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천황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에 천황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
황권(皇權)이 약화된 것은 후지와라(藤原) 씨의 외척 세도 때문이었다. 제57대 세이와(淸和·재위 858~876) 천황 시절인 866년, 천황의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섭정(攝政·어린 천황을 대신해서 국사를 총괄하는 직책)이 됐다. 이때부터 후지와라 씨는 섭정 또는 관백(關白·성인이 된 천황을 대신해서 국사를 총괄하는 직책)이 되어 국정을 농단했다.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는 이후 11세기 말까지 150년 이상 계속됐다. 조선 말 안동 김씨-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생각하면 된다. 이들의 세도정치 기간은 60여 년에 불과했다.
후지와라 씨는 황실과 겹겹이 혼인하는 한편, 어린 천황을 즉위시켰다가 청년기에 들어서면 퇴위시키고 다른 어린 천황을 즉위시키기도 했다. 후지와라 씨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술수를 쓰기도 했다.
984년 즉위한 가잔(花山) 천황은 15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총명하여 국정에 의욕을 보였다. 후지와라 씨의 입장에서는 성가신 일이었다. 그런데 가잔 천황이 즉위한 지 2년 후 그가 사랑하는 황후가 죽었다. 비탄에 잠긴 천황을 후지와라 씨의 미치가네(道兼)가 함께 출가하자고 유혹했다. 미치가네는 망설이는 천황을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의 가잔지(花山寺)로 데리고 갔다. 천황이 삭발하는 동안, 미치가네는 궁궐로 돌아왔다. 가잔 천황은 뒤늦게 속임수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후지와라 일족은 가잔 천황의 네 살짜리 어린 동생을 천황[제66대 이치조(一條)]으로 즉위시켰다.
후지와라 세도정치의 전성기던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966~ 1028)는 “이 세상을 내 것이라 여기면 그믐달도 기울지 않는 법”이라고 호언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요리미치(賴通) 대에 이르러 이 집안 출신의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는 1067년 끝나버리고 말았다.
퇴위한 천황의 막후통치-上皇과 法皇
▲上皇·法皇으로 물러나 院政을 행한 시라카와 천황.
후지와라 씨의 세도정치가 끝날 무렵 천황은 제71대 고산조(後三條·재위 1068~1072) 천황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후지와라가 출신이 아니었다. 외척 세도에서 벗어난 그는 황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시라카와(白河·재위 1072~1086) 천황(제72대)은 원정(院政)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시라카와 천황은 1086년 갑자기 여덟 살 된 아들 호리카와(堀河·재위 1086~1107) 천황에게 양위(讓位)하고 상황(上皇)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다고 정치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상황의 거처인 시라카와원(院)에 비서기관인 원청(院廳)을 두고 원선(院宣)이라는 명령을 내려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재벌기업 창업주들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에도 아들인 현직 회장을 제쳐두고 그룹을 이끌면서 ‘왕(王)회장’ 소리를 듣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시라카와 상황은 제73대 호리카와 천황부터 제75대 스토쿠(崇德·재위 1123~1141) 천황에 이르기까지 3대 43년 동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후일 출가해 법황(法皇)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권력은 놓지 않았다. 그는 비 때문에 사찰 낙성식이 세 번이나 연기되자 빗물을 그릇에 담아 하옥(下獄)시키기도 했다.
사무라이의 등장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銃口)에서 나온다”고 했다.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라카와 상황은 자신의 원정을 지탱하는 힘으로 무사집단을 끌어들였다.
무사집단은 원래 귀족들의 장원(莊園)을 관리·경비하는 사병(私兵)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천황가의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가들을 지도자로 옹립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간무(桓武) 천황의 후예라는 다이라(平·헤이) 씨와 세이와 천황의 후예라는 미나모토(源·겐) 씨가 특히 유명했다. 9세기 후반 이후 정쟁(政爭)이 치열해지자 교토(京都)의 귀족들은 이들을 불러들여 경호를 맡겼다. 이들을 ‘사무라이(侍)’라고 불렀는데, ‘귀족 주위에 대기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무늬만 은퇴’ 식으로 물러난 후 공식적인 제도정치의 밖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는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물러난 상황·법황과 천황 간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메이지유신 이후 황실전범을 제정하면서 천황의 생전 퇴위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는 이번에만 적용하는 특례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결국 이런 모순은 도바(鳥羽·재위 1107~1123) 법황 사후(死後) ‘호겐(保元)의 난’(1156)으로 폭발했다.
원인은 도바 법황이 아들 스토쿠 천황을 냉대한 데서 비롯됐다. 도바 법황은 장남인 스토쿠 천황을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황후와 아버지 시라카와 법황이 간통해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도바 법황은 스토쿠 천황에게 퇴위를 강요한 후, 스토쿠의 동생인 고시라카와(後白河·재위 1155~1158) 천황 계통으로 황위를 계승하려 했다. 결국 스토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들은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의 무사집단을 경쟁적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이 승리했다.
하지만 ‘호겐의 난’을 통해 자신들의 실력을 확인한 무사들은 이제 더 이상 천황이나 귀족들의 도구로 쓰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
막부 군사정권의 출현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
고시라카와 천황 편에 섰던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義)는 1179년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는 쿠데타를 감행, 정권을 잡았다. 다이라 기요모리는 “다이라 씨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혈연(血緣) 중심의 정치를 펴면서 부귀영화를 독점했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기반이었던 무사집단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은 소홀히 했다.
민심, 아니 무사집단의 마음이 다이라 씨를 떠나기 시작하자, ‘호겐의 난’에서 패한 후 절치부심하던 미나모토 씨가 봉기했다.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벌인 전쟁을 ‘겐페이(源平) 전쟁’이라고 한다.
다이라 씨는 1185년 시모노세키(馬關) 앞 단노우라(壇ノ浦) 해전에서 패해 멸망했다. 다이라 기요모리의 아내인 니이노아마(二位尼)는 외손자인 안토쿠(安德·재위 1180~1185) 천황(제81대)을 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때 천황을 상징하는 3종 신기(神器·청동 거울, 청동 칼, 곡옥)도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3종 신기는 후일 다시 발견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고 하지만, 믿기 어려운 얘기다. 시모노세키 조선통신사상륙기념비 근처에 있는 아카마(赤間) 신궁은 안도쿠 천황을 기리는 신사다.
다이라 씨는 간사이(關西) 지방, 미나모토 씨는 간토(關東) 지방을 대표하는 무사집단이었다.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처럼 일본에서는 간사이 지방과 간토 지방 간 지역감정이 만만치 않다. 후일 오사카를 기반으로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이라 씨의 후예를, 에도 지방을 기반으로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처했다.
1189년까지 일본 열도 내의 반대세력들을 진압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1147~1199)는 1192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세이이타이쇼군·약칭 ‘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바쿠후)를 개설했다. 이후 메이지유신 때까지 676년간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다이고 천황과 南北朝시대
▲막부에 저항하다 南朝를 연 고다이고 천황.
제96대 고다이고(後醍醐·재위 1318~1339) 천황은 즉위 초부터 여러 차례 막부 타도 음모를 꾸몄다. 그는 막부에 체포되어 이키섬·시마네(島根) 등으로 유배됐지만, 틈만 나면 재기를 노렸다. 여기에 호응한 사람이 가와치(河內·오사카)의 악당(惡黨·막부에 복종하지 않는 지방의 신흥 무사세력) 구스노기 마사시게(楠木正成·?~1336)였다.
▲고다이고 천황을 돕다 전사한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에도시대 이후 충신으로 재조명됐다.
1333년 막부의 장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1305~1358)가 고다이고 천황의 밀지(密旨)를 받고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막부 타도의 오랜 꿈을 이룬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겐무(建武)로 바꾸고 친정(親政)에 나섰다. 하지만 고대 천황 중심의 통치체제를 복원하려는 그의 노력은 이미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았다. 그는 무사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이 틈을 타서 야심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구스노기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서서 싸웠지만 전사(戰死)했다. 그는 후일 에도시대 이후 ‘천황을 위해 죽은 충신(忠臣) 중의 충신’으로 추앙받으면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교토를 점령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光明) 천황을 옹립하고,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탈출해 자신이 정통 천황이라고 주장했다. 막부가 옹립한 황실을 북조(北朝), 고다이고 천황 이후 이어진 황실을 남조(南朝)라고 한다. 60년 가까이 이어진 남북조의 대립은 1392년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이 무로마치 막부의 중재 아래 북조의 고코마쓰(後小松) 천황에게 3종 신기를 넘기고 양위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남북조시대라고는 하지만, 남조는 지방에서 근근이 명맥을 잇던 망명정권에 불과했다. 무로마치 막부에 얹혀 지내기는 했지만 수도 교토를 지킨 북조의 천황이 정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황실도 북조의 후예이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정권 시대를 싸잡아 ‘적폐(積弊)’로 몰면서 천황의 계보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1911년 국회에서 제기됐다. 결국 고묘 천황부터 고엔유(後圓融) 천황까지 4명의 북조 천황이 계보에서 퇴출(退出)되고, 대신 고무라카미(後村上) 천황과 조케이(長慶) 천황 등 두 사람의 남조 천황이 계보에 들어오게 됐다. 현재의 천황 계보는 이러한 남조 정통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가난한 천황들
무로마치 막부는 1467~1477년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인 내전인 ‘오닌(應仁)의 난’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이후 일본에서는 100년 가까이 지방 군벌(軍閥)들이 할거하는 전국(戰國)시대가 펼쳐졌다.
막부정권과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천황의 삶은 고달파졌다. 15세기 중엽부터 120여 년 동안은 신상제(新嘗祭·추수감사제)를 올리지 못했다. 원래 천황은 고대부터 농경사회의 제사장(祭司長)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 직무 중 하나였다. 그걸 못 하게 된 것이다. 교황이 돈이 없어서 120년 동안이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미사를 거행하지 못하는 경우에 비견할 만한 일이다.
제104대 고카시와바라(後柏原·재위 1500~1526) 천황은 아예 즉위식도 올리지 못했다. 천황은 막부에 손을 벌렸으나, ‘오닌의 난’ 이후 제 코가 석 자였던 무로마치 막부는 “즉위식 같은 거 올리거나 말거나 마찬가지니, 그냥 넘어가라”고 면박을 줬다.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즉위 22년이 되어서야 한 사찰의 도움으로 뒤늦은 즉위식을 올릴 수 있었다. 휘호나 그림을 내다 팔아 연명한 천황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던 형편은 전국시대 말이 되면서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천하의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기 시작한 다이묘(大名·영주)들이 자신을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천황의 조정으로부터 명목상의 관작(官爵)을 구하게 된 것이다. 천황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다이묘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 1583)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의 옛 영지를 회복시켜주고 거기에 더해 새 영지를 바쳤다. 그 대가로 오다 노부나가는 우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태정대신 등의 벼슬을 받았다.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러 막부는 천황에게 연간 3만 석의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수입이 230만 석, 사쓰마번이 77만 석, 센다이번이 62만 석이었다. 10만 석 이상은 되어야 다이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3만 석이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천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내대신(內大臣)·우대신·태정대신·정이대장군 같은 벼슬을 내렸다.
고코묘 천황, 아버지 문병도 못 해
그렇다고 해서 천황의 정치 권력이 부활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공생(共生)을 도모하던 제107대 고요제이(後陽成·1586~1611) 천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의 패권을 잡은 후 양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요제이 천황은 12년 후에야 퇴위할 수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알량한 원조의 대가로 천황 및 교토 조정의 공가(公家·귀족)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대표적인 것이 1615년 제정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라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 제1조에서는 “천자의 예능은 첫째가 학문이다”라고 선언했다. 딴마음 먹지 말고 고전이나 열심히 읽으면서 조상 제사나 잘 받들라는 얘기였다. 이에 따라 막부는 1687년에는 대상제(大嘗祭·천황 즉위 시 신에 햇곡식을 바치는 의식), 1740년에는 신상제를 부활시켜줬다.
다른 한편으로 막부는 교토에 쇼시다이(所司代)라는 기구를 두어 황실과 귀족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예컨대 제110대 고코묘(後光明·재위 1643~1654) 천황은 아버지인 고미즈노 상황의 병문안을 가려 했으나, 막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아래서도 에도시대 중기 이후 물밑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황의 위상에 대한 이념적 탐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국학(國學)과 미토(水戶)학, 주자학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이야말로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라고 하는 ‘천황숭배론’에 기반을 둔 국수주의(國粹主義) 사상을 발전시키는가 하면, “쇼군의 통치권은 천황이 위임한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막부 권력의 정통성의 근거를 천황에게서 찾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은 양날의 칼 같은 것이었다. 천하가 태평하고 막부 권력이 강할 때에는 막부에 정통성을 부여해주지만, 막부가 천황에게서 위임받은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천하가 어지러워질 경우에는 그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는 논리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開國 이후 천황의 정치적 가치 급상승
▲병적인 양이주의자였던 고메이 천황.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1853년 6월,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양함대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나 개국 통상을 요구한 것이다. 막부의 다이로(大老·총리)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1819~1857)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아 이 사실을 교토의 천황에게 상주(上奏)하는 한편, 널리 다이묘들의 의견을 구했다. 요즘 말로 하면 소통(疏通)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천황과 다이묘들의 정치 참여를 철저하게 봉쇄해왔던 막부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막부의 취약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조슈(長州)·사쓰마(薩摩)·도사(土佐)·히젠(肥前) 등지에서 올라온 존왕양이파 지사(志士)들이 교토로 몰려들었다. 천황의 정치적 주가(株價)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천황은 제121대 고메이(孝明·1846~1866) 천황이었다. 병적(病的)인 양이론자던 그는 막부에 기회만 있으면 조약을 폐기하고 서양 오랑캐들을 축출하라고 촉구했다. 존왕양이파는 “천황의 뜻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지 못하는 정이대장군이라면, 차라리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압박했다. 종전의 대정위임론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고메이 천황은 ‘존왕양이’ 가운데 ‘양이’에만 관심이 있었다. ‘존왕’은 천황을 받들어 막부를 타도하자는 주장인데, 고메이 천황은 막부 타도의 선봉에 설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막부와 공생하기를 바라는 보신주의자였다.
이때 이미 많은 유신 지사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새 정권을 세워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자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고메이 천황은 역사의 걸림돌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고메이 천황이 덜컥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에 고메이 천황이 죽은 직후부터 독살설(毒殺說) 등이 끊이지 않았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도 이런 음모설을 믿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죄상 가운데 하나로 ‘고메이 천황을 암살한 죄’를 꼽았다.
비록 피동적이기는 했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고메이 천황의 재위 중에 천황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메이지(明治·1867~1912) 천황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東武 천황
▲코소네가 그린 메이지 천황 초상.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1837~1913)는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했다. 메이지 천황은 다음 해인 1868년 3월 13일 공경(귀족)과 다이묘들을 거느리고 교토 황궁 안에 있는 자신전(紫宸殿)으로 나아가 신(神)에 제사를 지냈다.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1837~1891)가 ‘5개조 서약문’을 읽었다. 메이지유신의 시작이었다.
사쓰마와 조슈가 중심이 된 신정부는 서양 열강의 사절들에게 유신을 ‘왕정복고(王政復古·restoration)’라고 설명했다. 천황이 막부로부터 통치권을 환수해서 친정에 나섰다는 의미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은 천황과 쇼군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이중권력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타이쿤(Tykoon·大君에서 유래)’으로 알려진 쇼군을 일본 국왕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고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조선도 비슷했다. 천황이라는 제사장 비슷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에도의 쇼군을 ‘일본 국왕’ 혹은 ‘일본 국주(國主)’로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한때 남북조시대처럼 두 천황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삿초(사쓰마-조슈)가 주도하는 신정부에 반발하는 도호쿠(東北) 지방의 여러 번이 오우에쓰열번동맹(奧羽越列藩同盟)을 결성하고 출가한 황족인 린노지노미야(輪王寺宮)를 도부(東武) 천황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는 도후쿠 지방의 반란이 평정된 후 한동안 근신처분을 받았지만, 황족 신분을 회복했다. 그는 1895년 근위사단장으로 타이완(臺灣)으로 출정했다가 병사(病死)했다.
신정부는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를 접수한 후 1868년 7월 도쿄(東京)로 개칭했다. 글자 그대로 ‘동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메이지 천황은 그해 10~12월 도쿄의 백성들을 위무(慰撫)한다는 명분으로 순행(巡幸)했다가 교토로 돌아왔다. 교토 주민들은 천황이 도쿄로 천도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긴장했다. 정부는 천도는 없다고 다짐했다. 1869년 2월 메이지 천황은 다시 도쿄로 순행했다. 그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도 함께 도쿄로 이전했다. 공식적인 선언 없이 슬그머니 이루어진 천도였다. 정부는 교토 사람들의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일종의 지역개발자금을 풀었다. 교세라를 비롯한 교토의 많은 기업들은 그때 생겨난 회사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神이 된 천황
에도시대 내내 천황은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막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전혀 새로운 군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우선 그때까지 자기가 속해 있는 번을 나라(國·쿠니)로, 번주를 임금으로 알아 온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1876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가 일으킨 서남(西南·세이난)전쟁 때만 해도 시골 아낙들은 “천황이 쇼군 자리에 앉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가 누구일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천황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천황은 일본 곳곳을 여러 차례 순행했다. 천황이 순행에 나서기 전,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천황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천황이 지나간 후, 백성들은 천황이 밟고 간 길의 흙이나 자갈을 가져가 집 안에 고이 모셨다. 뭔가 영험한 신물(神物)인 것처럼….
메이지 천황의 모습도 널리 알려야 했다. 하지만 메이지 천황은 사진 찍는 걸 싫어했다. 일본 정부는 1875년 이탈리아인 조폐기술자 에도아르도 코소네에게 의뢰해 메이지 천황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연륜과 위엄이 묻어나는 코소네의 초상화에 천황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이 초상은 진영(眞影)이라 해서 각급 부대와 학교에 배포되었다. 해당 기관에서는 봉안전(奉安殿)이라는 시설을 지어 천황의 진영을 모셨다. 불이 났을 때 봉안전에서 천황의 진영을 구해내고 순직한 교장은 국가적 영웅이 됐다.
천황의 신격화(神格化)는 종교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종래의 신토(神道)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가신토가 됐다. 천황은 ‘아라히토가미(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떠받들어졌다.
에도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메이지 천황은 강건한 ‘군인왕(軍人王)’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육·해군의 대원수(大元帥)로 서양식 군복 차림을 하고 군대를 열병하곤 했다.
우리에게는 침략의 원흉(元兇)이지만, 메이지 천황은 성실한 군주였다. 즉위했을 때만 해도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군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각(自覺)하고,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신하들에게 국정을 위임했지만, 1873년의 정한론(征韓論) 논쟁 등 중요한 고비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했다. 신하들도 천황이 결정을 내리면 군말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메이지 천황은 검소하고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메이지유신 초기만 해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일본은,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 세계 7대 열강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섰다. 메이지 천황이 죽은 후 일본인들은 그를 ‘대제(大帝)’라고 추앙했다. 반면에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나 3년 먼저 즉위한 조선의 고종(高宗)은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그의 번신(藩臣)이 되어 있었다.
메이지시대 이전에는 한 천황의 치세 동안에도 천재지변이 있거나 국정을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는 연호를 바꾸었다. 메이지 천황 때부터는 한 천황의 치세 동안에는 하나의 연호만 사용한다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이 확립됐다. 이때부터 연호를 가지고 천황을 호칭하는 관례가 성립했다.
다이쇼 천황의 奇行
메이지 천황의 뒤를 이은 다이쇼(大正·1912~1926) 천황은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었다. 생후 3개월 무렵 앓은 뇌막염의 후유증이었다. 1915년 국회 개원식에 참석했을 때에는 개회사를 적은 종이를 둥글게 말아 망원경처럼 눈에 대고 단상 아래 의원들을 내려다보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1922년부터 황태자 히로히토(裕仁)가 섭정을 맡아 사실상 국사를 처결하게 됐다. 측실(側室) 태생인 그는 즉위 후, 후궁제도를 폐지했다. 다이쇼 천황의 치세는 ‘다이쇼데모크라시’라고 해서 일본이 의회민주주의와 국제평화주의에 근접한 시기였다.
다이쇼 천황이 1926년 세상을 떠난 후 황태자 히로히토가 정식으로 즉위했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러일전쟁의 두 영웅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39~1912) 육군대장과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1848~1932) 해군 원수였다.
히로히토는 황태자 시절인 1921년 유럽을 순방했다.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주영일본대사관 서기관으로 그의 수발을 든 사람이 후일 총리가 되어 전후(戰後) 부흥을 이끌었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였다.
다이쇼데모크라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유럽 순방까지 하고 온데다가 일찍부터 섭정으로 국정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히로히토에 대한 기대는 컸다. 1926년 천황으로 즉위했을 때 그가 채택한 연호는 ‘쇼와(昭和)’였다. 쇼와라는 연호는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백성소명 협화만방(百姓昭明 協和萬邦·백성이 밝고 똑똑해져 만방을 화평하게 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731부대, 천황 칙령으로 설립
한편 아름다운 연호와는 달리 쇼와 시대 첫 19년간은 전란(戰亂)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이 이어졌다.
전후 일본 정부나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히로히토 천황은 군부(軍部)의 폭주에 휘둘린 로봇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의 추이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군부도 통제하고 있었다. 그는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 때에는 이력과 장점과 약점을 들어 특정 육군사단의 배치 문제에까지 의견을 제시할 정도로 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악명 높은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는 천황의 칙령으로 설립됐다. 한 황족은 《히로히토: 신화의 저편》의 저자 에드워드 베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황은 옥새를 찍기 전에 모든 문서를 반드시 다 읽습니다. 옥새를 절대로 우편 스탬프처럼 찍지 않지요.”
1936년 청년 장교들이 2·26 쿠데타를 일으켜 중신들을 살상했을 때, 히로히토 천황은 진압을 망설이는 군 수뇌부에게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진압에 나서겠다”고 호령했다. 결국 쿠데타는 사흘 만에 진압됐다. 그는 1945년 8월에도 군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종전(終戰)의 성단(聖斷)’을 내렸다. 쿠데타를 진압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천황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 전 총리는 극동전범재판에서 “일본인 중 감히 어느 누구도 천황의 뜻에 반하여 행동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천황은 여왕벌 같은 존재”
▲패전 후 駐日미국대사관에서 만난 맥아더와 히로히토 천황. 일본인들은 이 사진을 보고 패전을 실감했다
미국 상·하 양원은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재판에 회부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국·호주·소련 등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 책임을 피해 가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천황을 퇴위시킬 경우 게릴라전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100만명의 병력이 일본에 주둔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뿐이 아니었다. 주일대사를 지냈던 조셉 그루 국무차관은 일본과 전쟁 중이던 1944년 12월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천황은 여왕벌과 같은 존재로서 일본 사회의 안정적 요소이다. 만일 벌떼로부터 여왕벌을 끄집어내 버린다면 그 벌집은 붕괴하고 만다”고 역설했다.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천황은 미국대사관으로 맥아더를 방문했다. 양복 정장 차림을 한 그를 맥아더는 근무복 차림으로 맞았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천황은 부동자세를 취한 반면 맥아더는 뒷호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불량한 포즈를 취했다. 이 사진을 보고 일본인들은 패전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맥아더는 “히로히토 천황이 이 자리에서 ‘국민이 전쟁을 수행할 때 정치·군사 모든 면에서 내렸던 결정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전부 제가 지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공·사석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전쟁 책임을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패전을 앞두고 고노에(近衛·1891~ 1945) 전 총리는 천황제를 보존하기 위해 히로히토 천황을 상황으로 물러나게 하고 황태자 아키히토를 즉위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육군과 해군의 일부 군인은 점령군이 천황제를 폐지할 경우에 대비해서 황실의 소년 하나를 시골에 숨겨두고 보호하면서 양육하려는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 책임을 지지도, 퇴위하지도 않았다. 전쟁 책임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총리나 육군대신·외무대신 등을 지낸 이들에게만 돌아가고 말았다.
“이젠 내가 좀 인간다워 보이오?”
히로히토 천황은 1946년 1월 1일 〈인간선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짐(朕)과 너희 신민과의 사이의 유대는 시종(始終) 상호 신뢰와 경의에 의지하여 맺어진 것이지 단순히 신화나 전설에 의지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천황을 현인신으로 삼고, 또한 일본 국민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졌다는 가공(架空)의 관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인간선언〉을 하고 난 후, 그는 황후에게 “뭐 좀 달라진 것이 있소? 이젠 내가 좀 인간다워 보이오?”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1947년 5월부터 시행된 현행 일본국헌법은 제1조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이 소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總意)에 기초한다”고 규정했다. 돌고 돌아서 가마쿠라 막부 시절 이후처럼 천황은 정치적 실권은 없는 ‘상징적 존재’로 되돌아온 것이다. 오랫동안 정치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황실이 1000년 넘게 존속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패전 후,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불경(不敬)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1946년 1월에는 나고야에서 잡화상을 하는 구마자와 히로미치(熊澤寬道)라는 사람이 자신이 제96대 고다이고 천황의 후손으로 진짜 천황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1951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천황부적격확인소송을 제기했으나 각하(却下)됐다. 1946년 5월 일본공산당이 조직한 식량획득인민대회에는 “짐은 배 터지게 먹고 있다. 너희 인민은 굶어 죽어라”라는 피켓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국민들은 점차 ‘상징천황’에 익숙해져 갔다. 전쟁 전에는 백마를 타고 군대를 사열하곤 했던 히로히토 천황은 젊은 시절부터의 도락(道樂)이던 해양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학자군주’의 이미지를 구축해나갔다. 1919년 그가 발견한 붉은 새우에는, 그를 기념해 ‘심파시페 임페리아리스(Sympathiphe Imperialis)’라는 학명(學名)이 붙었다. 평소 지방 순방을 할 때에도 “아, 그렇습니까?” 정도의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소련의 해양생물학자들과 만났을 때에는 서툰 라틴어까지 동원해가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TV시청도 좋아했는데, 가장 즐겨본 드라마는 〈오싱〉이었다고 한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그 시대 여성들의 고난이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미’라고 불린 천황
▲나루히토 새 천황은 외교관 출신 황후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사진=뉴시스/AP
4월 30일 퇴위하는 아키히토(明仁·재위 1989~2019) 천황은 12세 때 패전을 맞았다. 전쟁 후 그의 교육을 맡은 사람은 미국 여성 엘리자베스 그레이 바이닝이었다. 바이닝은 절대평화주의를 강조하는 퀘이커교도였다. 바이닝은 아키히토를 ‘지미(Jimmy)’라는 애칭으로 불러, 보수적인 황실 관리들을 놀라게 했다.
아키히토는 1959년 4월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 결혼했다. 당시 언론은 ‘현대의 신데렐라’ ‘평민 출신 황태자비’ ‘세기의 로맨스’ ‘테니스코트에서 싹튼 사랑’이라며 법석을 떨었다. 말이 ‘평민’이지 쇼다 미치코는 닛신(日淸)제분이라는 일본 유수의 대기업 회장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미 궁내청 관리들의 간택을 거친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여튼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신(新)미일안보조약 문제로 어수선하던 사회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상징천황제’에 대한 국민들의 친근감을 제고(提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계기로 일본의 TV 보급률은 두 배로 늘었다.
패전의 경험과 바이닝의 교육은 아키히토에게 평화에 대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아키히토 천황은 아베 정부가 추진해온 평화헌법 개정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새로 즉위하는 나루히토 천황은 1960년생이다. 그의 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황자를 외부 중신들에게 맡겨 기르던 황실의 관례를 깨고, 미국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포크먼의 《육아》 책을 보면서 그를 길렀다.
전전(戰前) 황족들의 교육기관이던 가쿠슈인(學習院)의 후신(後身)인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했다. 1993년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小和田雅子)와 결혼, 슬하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남자만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황실전범 개정을 고민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가 공표된 후 담화를 내고 “봄의 도래를 알리는 멋지게 핀 매화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의 희망과 함께 각각의 꽃을 크게 피울 수 있고, 그런 일본이 되기 바란다는 소원을 담아 결정했다”고 밝혔다. 전란으로 얼룩졌던 할아버지 히로히토 천황의 ‘쇼와’ 시대와는 달리 나루히토 새 천황의 시대에 그런 희망과 평화가 이웃나라들과 함께하는 시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여성 천황과 승려의 邪戀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일본 황실이지만, 황위가 다른 핏줄에게 넘어갈 뻔한 적도 있다. 제48대 쇼토쿠(稱德·재위 764~770) 천황은 여성이었다. 그는 도쿄(道鏡)는 중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도쿄는 커다란 남근(男根)의 소유자였고, 두 사람이 서로 정(情)을 통하는 사이였다는 설도 있었다. 쇼토쿠 천황은 도쿄에게 법황(法皇) 칭호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황위까지 넘겨주려 했다. 규슈의 우사하치만(宇佐八幡) 신궁에서 “도쿄를 황위에 앉히면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는 신탁(神託)이 있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황통이 바뀔 위기에 처하자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의 압박에 쇼토쿠 천황은 우사하치만 신궁으로 다시 칙사를 보냈다. 이번에는 “황실의 혈통이 아닌 자를 황위에 올려선 안 된다”는 신탁이 나왔다. 천황의 뜻에 반하는 신탁을 가져온 칙사는 귀양을 갔지만, 황통은 보존될 수 있었다. 도쿄는 제정(帝政)러시아의 괴승(怪僧) 라스푸틴에 비견된다. |
◆일본의 조상은 나체족인가
◇1930년대 일본 해녀들의 원시적 모습
이번엔 아주 귀한 사진으로 잠시 쉬어가는 내용으로 채웠다. 1930년대~1960년대까지 카메라에 담은 일본 해녀(海女)들의 모습이다. 아무런 장비 없이 팬티와 수경만으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는 작업을 찍은 것으로 지극히 원시적인 상태다. 이 당시에 우리의 해녀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일본과 우리의 문화가 조금은 달랐기 때문에 노출은 일본이 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 슈가시마 해녀들의 모습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성(性)에 관하여 관대한 일본에서는 배꼽 밑의 이야기는 그다지 추문(醜聞)이 되지 않는다. 에도(江戶)시대와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시대 부터 여성은 남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했으며 일찍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방적인 성풍속 문화가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거리낌 없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비교적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작업에 나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지인으로부터 보내온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다
▲일본 해녀들은 원래 웃옷을 입지 않았는지, 그러면 언제부터 입기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아래 옷도 벗기쉽고 해체하기 쉽게 돼 있는 듯해 보인다.
▲한 해녀가 물질 장비를 들고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녀의 옆모습이 더 눈길을 끄는 듯하다.
▲물질을 나가기 전 자신의 몸을 지탱해 줄 로프를 점검하고 있다
▲작업을 마친 듯한 해녀가 모래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일본 해녀들의 모습이 굉장히 건강해 보인다.
▲배와 연결된 로프를 허리에 묶고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모래밭에서 쉬고 있는 해녀.
▲물질을 하기 전 워밍업 차원의 몸을 적시고 있는 듯한 해녀들.
▲파도를 맞고 있는 해녀.
▲해녀들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작업과 공동분배를 하고 있다.
▲물질로 건져낸 미역을 다듬고 있는 해녀들.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다 깊숙이 해산물을 캐고 있는 해녀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찾고 있는 해녀들.
▲해녀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배 위에서 잠시 쉬고 있는 해녀의 뒷 모습을 담았다.
▲물질한 해산물을 들고 나오는 해녀.
▲ 물질할 준비로 완전무장한 해녀.
◆게이샤의 추억
▲메이지 시대의 게이샤 - 기생
◆일본에 대하여
◇2014-10-02역사 속에 나타난 일본인의 軍國性
▲戰國時代 일본 무장들의 싸움을 그린 그림. 명나라 허의준은 “왜인들은 열 살만 되면 칼 쓰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왜인(倭人)을 두고 흑치족(黑齒族)이라 하였다. 왜인은 오늘의 일본인을 뜻한다.
일본인의 선대(先代)인 흑치족은 칼싸움을 곧잘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일본인에게 이어졌다고 하는 설이 있는 것이다. 무사도는 무(武)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갈 길을 말한다. 흑치족, 그들의 갈 길은 나름대로 신념과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칼을 뽑았으면 찌르고 봐야 하는 그런 신념이고 행동이었다.
조선시대 중국 명(明)나라 사람인 허의준(許儀浚)이 항해 중 왜인들에게 나포되어 오랫동안 억류된 일이 있다. 그런 그가 명나라 조정에 보낸 상소문(上疏文)이 있다. 이 상소문에서 돋보이는 대목이 있다. “우리 명나라 군사들은 절대로 맹자(孟子)의 인의(仁義) 따위의 말엔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하는 글귀다.
이 글귀는 당시 일본인들이 어떠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무사도 정신은 곧 침략의 근성으로 발전해 갔다. 허의준이 이런 말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섬나라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정신은 무사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정신으로 한때 강국(强國)의 면모를 보였다.
“온 나라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의 풍속은 가장 광폭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후지산은 흑치국의 진산(鎭山)”이라는 기술(記述)도 나온다.
조선 영조 때 학자 유광익(柳光翼)은 그의 저서 《풍암집화(楓巖輯話)》 중 <기문집(紀聞集)>에서 “흑치들은 옛날에 성씨(姓氏)가 없었는데 중국의 제(齊), 양(梁)나라 때 가서 산성주(山城州) 주인인 윤공(允恭)이란 사람이 비로소 성(姓)을 칭했다. 여기서 등씨(藤氏)가 먼저이며 평씨(平氏), 원씨(源氏)가 그다음인데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자손이 평씨, 원씨가 되었다고 한다”고 했다. 등씨는 일본어로 ‘후지’, 평씨는 ‘다히라’, 원씨는 ‘미나모토’를 말한다.
조선시대 야사류(野史類)의 하나인 《우서(迂書)》에는 흑치족의 심성과 행동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우서》는 조선 영조 때 문신(文臣)이며 학자였던 유수원(柳壽垣)이 집필한 저서로, 그 내용에는 위정자・지식인의 심금을 울리는 대목들이 많다.
< 왜인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된 것은 신라・고려 때부터 그러했는데 고려 말기에 와서 더욱 심하였으니 대개 구주(九州)의 도망자들이었다.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왜인으로부터 근심은 별안간 없어졌으니 참으로 이상하였다. 300여 년 만에 단지 명종(明宗・1545~1567) 때 삼포왜란(三浦倭亂)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을 뿐이다. 임진왜란 뒤에 왜국의 원씨가 집권한다고 전해졌는데 그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역적이 없었기 때문에 구주에서 도망다니는 자들이 없어서 왜인들은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옛날과 지금에 이르러 없었던 일인데 왜인들의 성정(性情)은 불똥이 튀는 것 같아서 100년이나 조용히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지금까지 이렇듯 그들이 조용한 데서 오래도록 우리가 태평하니 이것은 조선이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고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 이런 내용도 있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하에 백성을 학대하고 망하지 아니한 자가 없는데 홀로 왜인만이 통치자가 백성들을 독려해서 농사짓게 하고 그 곡식을 빼앗아 가져갔다. 그래서 백성들은 곡식은 한 알도 얻어먹지 못하고 다만 토란, 무, 쌀겨나 먹고 지내는 것이 이미 중세(中世)부터 그러하였다. 그들의 그런 행동이 몇백 년이나 그러했는지 알 수 없다. 포학무도한 그들 지배자들인 것으로 지금까지 어찌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대개 그들의 지배자 한 사람이 취하는 곡식이 50만 석, 혹은 100만 석이 된다 하니 그들은 그것으로 용맹한 군사를 기르며 그 군사에게만 후하게 급료를 주고 하여 강한 군인으로 만들었다 한다.>
< 왜국은 중국의 진(秦)나라와 흡사한데 잔인하고 혹독하고 각박하고 독한 것은 진나라보다 더할 뿐만 아니라, 관백(關白) 이하 여러 장수까지 여러 대대로 물려받은 자인데 글은 전연 알지 못하고 오직 승려만이 글자를 안다 하는데, 승려로서 문서를 맡은 자는 녹(祿)이나 타 먹고 헛된 직함만 있었다. 그들은 권력만 잡고 일 처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죄는 크고 작고 간에 논할 것 없이 모두 목을 베는 형벌을 보였다. 정사(政事)는 지극히 간략하였고 진나라가 분서(焚書)한 것처럼 의사(意思)에 일률적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진시황(秦始皇)과 이사(李斯)의 지혜를 훔쳐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찌 진나라 같은 행태인지 알 수 없다. 동해(東海) 밖에 또 하나의 진나라가 있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내용들에서 당시 왜인의 심성과 침략성·군국성(軍國性)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통치자인 관백은 아래로부터 복잡한 의견 전달 같은 것은 받지 않는 군국적 독재성이 강했다.
倭人의 戰術
흑치족의 군국적 근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명나라 허의준이 조정에 보낸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 왜인들은 태어난 후 열 살만 되면 칼 쓰는 법을 배우고 활 쏘는 것을 배웁니다. 사서(四書), 《주역(周易)》 등을 배우기는 하나 문(文)과 이(理)에는 통달하지 못하고 병들어 죽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알며 대신에 싸우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평상시 그들은 자제(子弟)들에게 “열 살이나 백 살이나 모두 한 번 죽는 것은 같으니 웅크리며 조심해 살 수는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짧은 옷과 짧은 소매에 맨발과 깎은 머리에 긴 칼과 짧은 비수(匕首)를 사용하여 스스로 몸을 보호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데 높은 산에다 성을 쌓고, 못을 파서 강을 만들고, 적이 오면 먹을 양식이 있는 사람은 성(城)으로 올라가 지키게 하고, 양식이 없는 사람은 적군에게 다 잡혀 죽어도 돌보지 않는다 했습니다. 적을 공격하러 나갈 때는 병사더러 자기 양식을 먹도록 하고 장수는 언제나 뒷전에 서서 가고 병사들만 앞장서게 했습니다.
복병(伏兵)하는 계교와 거짓으로 패퇴하는 지략 같은 것은 없고 깃발을 많이 세워서 적의 기세를 꺾는 솜씨만 컸습니다. 병사 한 명이 깃발을 10개나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고 이상하게 꾸민 옷의 빛깔로써 적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탈바가지를 쓰고 전장(戰場)에 나가는 놈도 적잖았고 싸움에서 이기면 곧장 휘몰아 나가면서 뒤도 안 돌아보며 패하면 정신없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기고 나면 패한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또 패배하면 회복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육전(陸戰)은 잘하지만 수전(水戰)은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공(火攻)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장수에게는 정해진 숫자의 군사는 없고 군사는 두서너 달 먹을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나라 안을 텅 비워놓기까지 하면서 군사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뒤로 엄습할 때는 적잖은 화를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쫓아가 싸우기만 하고 편안하게 기다렸다가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전법(戰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돈을 뿌려 이간의 술책은 잘 쓰긴 하나 싸움에서 이기면 그 돈을 도로 빼앗아갔습니다. 같이 죽자는 맹세를 하는 것이 있으나 사적(私的) 이익에는 맹세고 뭐고 팽개치기만 했습니다. 화친(和親)에는 거짓이 많고 상대를 속여서 공격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을 잘 쌓아서 적군을 막고 인의(仁義)를 가장하여 적국을 현혹게 하며 욕심은 한이 없고, 법은 대소(大小)를 불문하고 털끝만 한 죄에도 목을 베었습니다. 급히 쳐들어오는 것에는 두려워하고 천천히 싸우는 것만 잘하였습니다.
살마(薩摩)와 관동(關東)에 사는 사람은 강직하고 싸움을 잘하며 수도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간사하고 꾀를 잘 썼습니다. 적군이 적으면 기운이 배나 나고 적군이 많으면 스스로 움츠리는 행세였습니다. 싸우는 데 진(陣)치는 건 없었고 죽이는 데 제한 또한 없었습니다. 형세만 떠벌려 군사를 놀라게 하니 군사 중에 능히 싸울 사람은 겨우 반밖에 안 되었습니다. 배는 면이 넓고 밑이 뾰족하고 움직이기 어려우니 그런 데서 조금만 움직이면 흔들려 엎어지려 해서 빨리 달아나기가 어려웠습니다.(이하 생략)>
허의준은 이 상소문을 올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곧 조선을 침범할 것이란 언급도 하였다.
일본, 과거사 솔직하게 반성해야
허의준의 글에서 보면 일본인의 옛 선대 기질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오늘날에도 그런 피가 남아 있어서 과거사 같은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새삼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흑치족 근성과 함께 군국주의에의 회귀성(回歸性)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였다.
위정자에게는 역사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선대가 남겨놓은 흔적에서 국정(國政)의 바른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역사에 관한 무지(無知)는 국정에서의 오류로 이어진다.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역사지식으로 바른 국정을 펼치는 것은 위정자의 도리다. 지금 일본 위정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다.
신라인의 피를 받은 이들도 적잖게 있을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서 백제인이 공헌한 바도 익히 알 것이다.
과거 한일(韓日)의 역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버릇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이웃과 화해(和解)는 요원하다. 일본인들의 무사도 정신에는 ‘앗사리’란 말이 있다. ‘솔직하게’란 뜻의 말이다. 과거사 문제도 이런 솔직하게 반성하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이제 일본은 잘못된 군국근성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아베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은 곧 군국성으로 되돌아가는 행위임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2014-10-29 류큐 왕국과 ‘조선 삐과’
21년 전 이맘때였다. 제6회 한일 친선고교야구대회가 열렸다. 취재기자로 고교야구 국가대표단과 함께 일본에 갔다. 한국이 순회경기를 모두 이겨 6전 전승을 거뒀다. 지금도 현역으로 뛰는 NC 이호준과 한화 조인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는 김재현 등이 당시 대표선수였다. 오키나와에서도 경기가 열렸다. 아열대 나무들과 푸르디푸른 바다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일본 코치 한 명이 김재현의 빠른 스윙을 배우려고 밤늦게 숙소로 찾아왔던 모습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키나와를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외신이었다. 오키나와 현이 일본 정부와 불화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종종 전해지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왕국이었다. 1609년 사무라이 3000명의 침공을 받았고 1879년 결국 일본에 병합됐다. 이후 류큐 왕국은 점차 ‘오키나와’로 바뀌어 갔다. 고유한 말 대신 ‘국어’인 일본어를 써야 했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불러야 했다. 곳곳에 신사가 세워졌으며 학교에서는 교육칙어 암송이 의무가 됐다. 일제강점기 한국과 류큐 왕국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가장 쓰라린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대전 말기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졌다. 오키나와 주민 46만 명 중 12만 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된다. 그때 일제는 ‘군관민공생공사(軍官民共生共死)의 일체화’를 들이밀었다. ‘일본군은 천황을 위해 죽겠다.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뜻이었다. 미군은 포로를 잔혹하게 죽이니 붙잡힐 바엔 자결하라고도 했다.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강제’ 집단자살이라고 말한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30km 떨어진 도카시키 섬에서도 1945년 3월 집단자살이 벌어졌다. 섬 주민 절반인 약 300명이 숨졌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뒤 일본군이 미리 준 수류탄을 터뜨렸다. 불발탄이 많아 가장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와 형제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올해 85세가 된 긴조 시게아키 씨는 7월 류큐신문에 이렇게 말했다. “지옥의 한 장면이었어요.”
오키나와에서는 한국인도 1만 명가량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에는 ‘조선 삐과’들도 있다. 삐과는 오키나와 말로 위안부를 가리킨다. 오키나와 및 인근 섬에 모두 51명의 위안부가 배속됐다. 하지만 오키나와에까지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은 1972년에야 알려졌다. 도카시키 섬에 끌려갔던 최봉기 할머니가 그즈음 특별체류허가 신청을 하면서 드러났다. 할머니는 전쟁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허드렛일을 하며 국적 없이 오키나와를 떠돌았다.
할머니와 함께 도카시키 섬에 있던 위안부 6명은 미군 폭격으로 숨지거나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끊겼다. 그중에는 16세 위안부도 2명 있었다. 어릴 때 살던 빨간 기와집을 위안소로 내준 한 여인의 기억이다. 작가 가와다 후미코 씨는 할머니의 구술을 토대로 ‘빨간 기와집’을 펴냈다. 할머니는 77세이던 1991년 풍파 많던 삶을 마감했다. 그는 생전에 한국에서 남의집살이 하는 친언니의 소식을 전해 듣자 자기 신세를 빗댄 듯 이렇게 말했다. “가련한 태생이라는 게 이런 거지요.”
일본 정부는 최근 오키나와 현의 한 섬에 집단자살은 미군 탓이라는 내용의 사회교과서 채택을 밀어붙였다. 한국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면서 실제로는 무효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래 가지고서는 오키나와 주민들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가슴속 한이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진 국제부장 leej@donga.com
◇2015-01-14 ‘동아 신질서’ 명분 아래 수많은 역사의 희생자들만
▲ ‘사진주보’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 특별편의 표지에 실린 찬드라 보스. 당시 인도는 ‘대동아공영권’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옵서버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시덕 소장
일본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빼내어 국가원수로 삼아 세운 만주국은, 만주인·몽골인·일본인·한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화해롭게 지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본의 ‘만몽(滿蒙)’ 진출을 위한 괴뢰국일 뿐이었다. 만주인을 한인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이념을 내세워 만주국을 만든 뒤에도 중국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일본 국내외에서는 이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터져나왔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일본이 새로이 내건 이념이, 중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전체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1938년의 ‘동아 신질서’ 선언이었으며, 이 이념을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이 형성되어 갔다.(‘滿州事變から日中戰爭へ’ 230쪽·加藤陽子) 일본은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 이후의 새로운 가치를 ‘대동아공영권’을 통해 만들겠다는 ‘근대의 초극’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기도 했다.
‘대동아공영권’의 실상은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국과의 장기전을 위해 ‘대동아공영권’ 내의 다른 지역을 착취하는 구조였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조선인·타이완인을 징병하여 일본군에 포함시키기도 했지만, 일본 군부의 근저에는 경계심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기 사용법을 익힌 조선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통치를 위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일본인에게 ‘명예로운 황군’의 순혈이 조선인에 의해 침해된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만약 조선인이 군대에서 훈장이라도 받게 되면 멸시하기가 곤란해지고, 조선인이 장교가 되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 일본 육군에는 중장까지 올라갔던 이를 비롯하여 지원 등을 통해 이미 입대해 있던 조선인 장교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육군은 전투부대의 조선인 비율이 20%를 넘지 않도록 기준을 정하고 조선인은 포로수용소 부대 등으로 돌렸다. 그 결과 포로 학대를 이유로 B·C급 전범이 된 다수의 조선인이 나오게 된다.”(‘단일민족신화의 기원’ 333~425쪽·오구마 에이지) 또한 1942년 11월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한 이광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순응하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데에서 오는 고뇌를 연하의 일본인 문학자들에게 말했다가 호되게 비판받는 경험을 한다. ‘대동아공영권’의 타이완 대표로 참석한 하마다 하야오(濱田雄)라는 사람의 증언이다.
“나라호텔의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날이 춥길래 바에 갔더니 (중략) 구사노 신페이(草野心平)씨와 가와카미 데쓰타로(河上徹太郞)씨가 이광수씨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광수씨가 반도(半島)의 작가로서 느끼는 괴로움을 살짝 토로했다가, ‘그런 괴로움을 말해서 뭣하는가, 문학의 괴로움은 그깟 괴로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며 질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滿洲崩壞’ 12쪽·川村湊) ‘대동아공영권’의 구성원으로서 일본인과 평등해야 할 조선인이 이상(理想)과는 달리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친일파’ 이광수의 소극적인 항거를, 동료 일본인 문학자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이 패전한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 최남선도 교수로 재직한 바 있는 만주 건국대학의 니시모토 소스케(西元宗助) 교수에게 조선인과 중국인 학생이 다음과 같이 작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조선이 일본의 예속에서 해방되고 독립해서야 비로소 한국과 일본은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조선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들의 선의가 어떤 것이었든… 만주국의 실질이 제국주의 일본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명확한 사실이었어요.”(‘키메라-만주국의 초상’ 286~287쪽·야마무로 신이치) 니시모토 교수는 학생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이념과 현실은 이처럼 달랐다. 그 이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 사람들도 있었다. 거의 백 년 동안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의 무장독립세력이 그들이었다. 영국 총독 암살에 실패하고 1915년 일본에 망명한 라쉬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는, 조선 병합과 만몽 분할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아시아주의자들의 비호를 받았다.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 기타 아시아 지역에는 아시아주의적 관점에서 환영받은 것처럼,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전쟁을 전개한 동남아 및 인도의 일부 세력은 현대 한국인의 세계관으로는 처리되기 어려운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인도가 제국주의 일본의 시야에 들어오면서, 현대 한국의 일부 기독교 종파가 ‘기독교가 쇠퇴한’ 유럽으로 역(逆) 포교를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쇠퇴한’ 인도로 자신의 가르침을 포교할 것을 지시한 개창자 니치렌(日蓮)의 유언에 따라 일본의 일연종(日蓮宗)은 근대 인도에서 포교를 시도했다. 인도 뭄바이 근교의 칸헤리 석굴에 일연종 승려가 근대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니치렌슈 석각문(石刻文)은 당시의 흔적이다. 지금도 델리에는 일연종 사찰이 있어서 일본인의 숙소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이후 1941년에 영국령 홍콩·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에 포함되어 있던 6만5000명의 인도인을 ‘인도 국민군’으로 조직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인도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하여 ‘인도 독립연맹’을 만들고, 당시 일본에 귀화한 상태였던 라쉬 비하리 보스를 이 조직의 의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당국의 결정에 여타 인도인들이 반발하자, 일찍이 공산주의적 성향을 띠었으나 당시에는 영국의 적국인 이탈리아·독일 등 파시스트 국가의 힘을 빌리고자 독일에 머물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를 1943년 5월에 잠수함에 태워 왔다.
한국에서는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간디와 네루가 주로 알려져 있지만, 당연히도 인도에는 찬드라 보스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그리고 결국 파키스탄의 독립을 이끌게 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와 같이 간디·네루와는 다른 길을 추구한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이승만과 김일성만으로 한반도 남북의 현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현대사 역시 그러하다. 똑같이 인도의 독립을 바랐던 간디, 찬드라 보스, 암베드카르였지만, 이들은 독립 인도가 어떤 형태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농본주의와 공업화 문제였다. “간디는 반공업주의자였고, 사람들이 최소한의 욕구만을 갖고 대대로 내려온 직업에 기꺼이 종사하며 살아가는 촌락을 인도의 이상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암베드카르에게 ‘촌락’은 카스트제도의 억압과 사회경제적 후진성이 존재하는 ‘시궁창’이었다. (중략) 시골마을은 억압받는 계급에게 종속을 의미했고, 간디가 혐오했던 도시와 공업사회는 달릿(불가촉천민)에게는 오히려 탈출구를 상징했다.”(‘암베드카르 평전’ 99~100쪽·게일 옴베르트) 암베드카르에게는 인도의 독립 이상으로 도시화·공업화를 통한 카스트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다. 찬드라 보스 역시 지방분권적이고 농본주의적인 간디의 이상에 반대하여 독립 인도 정부는 권위주의적으로 공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파시스트 국가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パル判事’ 41쪽·中里成章) 이처럼 인도의 독립운동은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간디와 네루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디, 네루, 암베드카르, 찬드라 보스는 현재의 인도에서 모두 존경받고 있다. 비록 선택한 길은 달랐지만 모두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영웅이라는 것이다.
무장 독립을 추구한 찬드라 보스는 일본의 힘을 빌리는 길을 택했고,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지역에서 연합국 세력을 몰아내고자 한 일본의 우파는 이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찬드라 보스는 어디까지나 인도 국민군과 일본군이 그리고 자유 인도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Free India)와 일본이 동등한 상대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군은 이들을 괴뢰군·괴뢰정부로 간주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이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임팔작전이 1944년 3월에 시작되었다. 찬드라 보스는 이 전투를 인도 해방의 첫 단계로 인식했지만, 일본군의 목적은 인도에서 북부 미얀마로 공격해 오는 영국군을 억제하는 데 있었으며 인도 해방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연합군에 적대하고 추축국과 손잡은 찬드라 보스는 전범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그는 소련 또는 만주로 망명하기 위해 일본의 비행기를 빌려 탔다가 타이완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비극적인 생애였다.
그런데 이 임팔전투에서는 조선인 독립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다. “독립군의 일파인 민족혁명당은 임정에 참여한 후인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 사령부의 요청으로 주세민과 최성오를 인도에 파견했다. 영국군은 인도·버마 전구(戰區)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 포로심문을 위해 일본어가 유창한 한국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이들은 1943년 2월 버마에 도착해 선전활동에 큰 성과를 거두고 1943년 3월경 돌아왔다.” 한국인의 활동에 주목한 영국군사령부는 이들을 재차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1943년 8월에 광복군 총사령부는 한지성 등 9명의 광복군 인면(印緬·인도, 미얀마) 전구 공작대를 인도로 파견했다. 이들이 임팔전투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다. 이들은 1945년 7월에 미얀마의 수도 양곤을 탈환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51~53쪽·정병준) 비록 이들의 활동이 이 지역의 전황을 좌우할 정도였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지만, 한반도 출신의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과 일본군에 소속되어 남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인의 일본군 참전이 일본 내에서 조선 지방의 권리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처럼 영국도 1차 대전 당시 인도인과 했던 약속, 즉 인도인이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찬드라 보스 등의 일부 인도인은 영국과의 타협 노선을 포기하고 영국의 적인 파시즘 국가들에 희망을 걸었다. 그렇기에 찬드라 보스는 전후에 전범 재판을 받을 뻔했으며, 그가 이끈 인도국민군을 1945년 11월에 재판에 회부하려던 영국 식민당국의 시도는 인도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인도 독립운동을 촉발하게 된다.(‘パル判事’ 78~81쪽) 이때 찬드라 보스의 노선에 동조하여 열정적으로 데모에 참가한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이라는 법률가는, 이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검사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인도를 식민지배하는 영국과 일본의 차이는 승전국과 패전국이라는 단 한 가지뿐이며,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중대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연합국이 추축국을 법률적·도덕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다는 입장에서 일본 무죄론을 주장했다.(‘パル判事’ 68쪽) 팔과 마찬가지 생각을 품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같은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미국의 논리에 저항하는 대신 팔 판사를 정의의 상징으로 추앙함으로써 간접적·심리적으로 미국에 저항하는 방식을 택했다. 현재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는 팔 판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책임을 져야 할 일본 우파의 운명은, 1948년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일본을 무장 해제시키고자 했던 미국은, 중국 공산화에 맞서 일본을 유라시아 동해안의 반공 기지로 재무장시키고 남한과 타이완을 그 배후 기지로 삼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일본의 전범은 반공주의라는 명분하에 기사회생한 것이다. 미국의 급격한 일본 점령 정책 변화를 ‘역코스(reverse course)’라 하며, 그 결과 신생국가 일본에는 군사력의 완전한 포기를 선언한 헌법 9조로 상징되는 평화주의의 흐름과, 미국의 지도하에 한국·타이완과 반공 동맹을 결성하는 우파적 흐름이 공존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일본 사회는 미국의 역코스가 초래한 이 모순적 상황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다. 역코스는 어쩌면 미국이 일본을 자국의 지도하에 놓기 위해 시행한 교묘한 견제의 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2차 대전 말기의 대규모 공습(1945년 3월의 도쿄 공습에서는 조선인을 포함하여 8만~1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과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피해의식, 나아가 ‘너와 내가 모두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는데 왜 나만 처벌받아야 하는가’라는 모순에 대한 불만을 일본의 책임 있는 지위의 인사가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날, 미·일동맹은 소멸하고 유라시아 동해안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의 정책은 미국의 지도와 양해, 나아가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미국의 압박하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근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19세기 말에서 1910년에 걸친 병합과정에 큰 분노를 느낄 터이다. 그러나 극동재판의 대상이 된 시기는 1928~1945년이다. 이 시기에 이미 일본의 일부였던 조선인은, 타의적이라고는 하지만 만주국의 건국에 ‘애매모호한’ 일본인으로서 참가했고 동남아시아의 전선에서는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는 비단 조선인뿐 아니라 조선보다 이른 시기에 일본의 일부가 된 타이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극동재판에서는 조선인과 타이완인 일본군도 전범으로 처벌받았고, 한반도 남부에 들어온 미군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자라기보다는 적국 영토에 대한 점령자로서 행동했다. “일본에 대한 적대적 점령에 대비해 준비된 군정요원들이 남한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교범에서 배운대로 행동했다.” (‘20세기 미국의 한반도 전략과 역할’·정병준). 한반도와 타이완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은 전황이 엄중해질수록 점점 적극적이 되어, 마침내 이들 지역의 주민을 일본군으로서 징집하게 되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많은 경우 타의적으로 징집되었으나, 어떤 이들은 조선인이 ‘혈세’를 지불함으로써 일본 내부에서 조선 지역의 권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에 난징, 1942년에 싱가포르가 함락되면서 일본에 맞설 국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자, 예언자가 아닌 다수의 조선인과 타이완인들은 독립을 현실적으로 와닿는 선택지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물론 어떤 이들은 독립이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시베리아에서, 버마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태평양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현실은 소설보다 극적인 법이어서, 광복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이렇게 되자 독립이라는 선택지를 상정하지 못하고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조선인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삼던 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적극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주장한 자들과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조선 출신 병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건국 이전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자 했다. 일본 내에서 조선인으로서 살아남고자 적극적이었던 ‘친일파’ 다수는 새로운 국제질서였던 냉전을 틈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과거를 덮었다. 마치 필리핀과 일본의 ‘전범’들이 역코스 과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것과 같이.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는 세계의 가장 주목받는 군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즉 천재적인 군사전략으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맥아더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한 돌발적인 언론 발표였다. 맥아더의 이러한 공식발표는 늘 시기상조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중략) 다른 하나는 수복된 지역의 정치 질서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재편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필리핀 수복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6월 9일 필리핀 국회는 맥아더에게 필리핀 국민을 대신해 깊은 감사를 전했다. 이때 맥아더는 로하스(Manuel Roxas)를 후원해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하스는 일본의 필리핀 점령 시기 일본에 협력한 일종의 부일협력자로 처벌을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그를 사면하고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한 정치고문은 이를 두고 맥아더가 필리핀의 향후 정치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광복 이후 한국의 정치 과정과 매우 유사한 경로를 취했기 때문에 이를 비교하는 것도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맥아더와 한국전쟁’ 51쪽·이상호)
신생국가 대한민국에서 ‘친일파’가 생존권을 얻기 위해서는, 일본군으로 복무하고 종군위안부가 되어야 했던 이들의 존재를 시민들의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자신들이 징용하고 동원했던 자들에 대한 사후처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B·C급 전범, 종군위안부, 스파이 취급을 받아 강제 이주당하고 학살당한 연해주와 사할린의 조선인,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영웅인 동시에 구일본군 전범이었던 양칠성, 일본이 천황(天皇)제도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질질 끄는 바람에 무의미하게 사망한 10만명의 오키나와 주민들, ‘프런티어’ 북만주(北滿洲)를 개척하자는 명목으로 일본에서 보낸 소년들로 구성된 만몽개척단(滿蒙開拓團), 일본군·만주군에 소속되어 북만주에 주둔하다가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조선인들…. “게다가 한국 현대사에서 부끄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일제가 만주국을 통치하던 시절 신징군관학교나 펑톈군관학교를 나와 일본군이나 만군에 근무하던 장교 출신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총리·장관 등으로 영달을 누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략) 전후 사정이 어찌됐든 이들이 재빨리 만주 등지에서 빠져나와 돌아온 반면, 가장 말단 사병으로 북만주 등지에 끌려갔던 청년들은 소련에서 어처구니없는 고생을 해야 했다.”(‘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15~16쪽·김효순)
일본의 저명한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大島渚)는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 구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잊혀진 황군(忘れられた皇軍)’이라는 영화로 남겼다. 오시마는 사할린의 조선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구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방기한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사할린 잔류 조선인 권희덕씨는 다음과 같이 일본과 남북한 정부를 모두 비판한다. “전후, 일본이 책임을 갖고 우리들을 귀국시키려고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52년 대일강화조약 발효까지 우리들은 법률적으로 ‘일본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온 1세들은 사회제도의 180도 전환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 내 눈앞에서 정신이상으로 자살한 노인이 두 사람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은 조선 사람이 돌아갈 수 없었던 원인은 38도선에 의한 조국의 분단입니다. 남쪽도 북쪽도 이념만 떠들지 말고 인도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저는 사할린의 조선 사람을 일본으로부터도,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20세기의 버림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서 과거의 배상문제는 끝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할린의 우리들은 관계없는 일입니다. 왜 우리들이 조약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까요?”(‘사할린 아리랑’ 32쪽·이토 다카시) 이와 같이 이들의 존재를 묻어버림으로써 신생국가의 과거를 순결케 하고자 했던 대한민국 정부에도 이들을 방기한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2015년에 50주년을 맞이하는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이 지불한 ‘독립축하금’은 식민지 시기 피해자 개개인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 개개인의 배상요구를 막는 법적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사상당한 한국군 병사들이 기억에서 지워지고(‘파병 50돌, 4650명의 무덤 위에서 전쟁의 의미를 묻다’·박태균), 그들의 출병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주어진 지원은 참전자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대신 ‘국가’를 위해 쓰였다. 개인의 희생 위에 국가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근대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반복해서 보게 되는 잔인한 풍경이다.
끝으로, 이번 회를 집필하는 데 도움을 주신 서울대 의대 신동훈 선생님, 도쿄외국어대 신재은 선생님,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후루이 료스케(古井龍介) 선생님, 데칸대 김용준 선생님, 가천대 유수정 선생님, 건축가 황두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은 필자였습니다. 지난 일 년간 감사했습니다.
동아일보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2015.06.08 특파원 12년간 만난 7명의 총리들
“빨리 질문하란 말이야.”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 나가타초(永田町)의 국회 중의원 특별위원회.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야당 의원에게 야유를 보내는 아베 신조(安倍晋三·60) 총리를 보며 8년 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 달랐다. 과거 그는 오른쪽·왼쪽이 7:3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의 모범생이었다. 2012년 말 2기 정권이 들어서자 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앞머리를 들어올려 힘을 줬다. 헤어스타일의 변화는 아베의 변신을 상징했다. 모범생의 신중함은 야심가의 도도함으로 변했다.
2003년 도쿄 특파원 부임 후 다음 주 이임하기까지 12년 동안 8명의 총리를 겪었다. 아베가 두 번 총리를 역임했기에 정확히는 7명이다. 인터뷰나 사석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속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당시의 취재수첩과 기억을 토대로 7인8색 스타일과 ‘혼네(속마음)’를 분석해 본다. 전후 70년을 맞는 일본의 변화, 지도자상의 변화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베가 일본을 바꿨다’기보다 ‘일본이 아베를 바꿨다’가 맞고, ‘걸출한 지도자의 부재’에 시달리는 일본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그는 강렬했다. 2003년 말 총리 관저 2층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기억에 남는 말은 “난 하나도 참고, 둘도 참고, 셋도 참는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끝까지 참는다’란 뜻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세 번 정도는 참지만 네 번째부터는 안 참는다’란 뜻임을 알았다. 그는 사석에선 “난 65세가 되면 물러나 편안히 지내겠다”고 털어놓곤 했다. 그 말대로 65세에 총리직을 던졌다. 그에게는 ‘오프 더 레코드’가 없었다. 자신의 발언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를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단(斷)이다. 결단(북한 방문), 독단(’우정민영화’ 중의원 해산), 단절(야스쿠니 참배로 한국·중국과 관계 악화)이다.
◆1기 내각의 아베=초보였다. 말도 오락가락하고 주변을 장악하지 못했다. 2007년 5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 언론사 주최 만찬에서 아베는 자민당 정조(政調)회장이던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막역한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나카가와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아베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더니 어깨동무를 했다. 하지만 아베는 세 살 위인 나카가와에 깍듯이 고개 숙이며 “안녕하십니까”라 하는 게 아닌가. 예의 바른 것일지 모르나 보스의 광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무렵 아베와 인터뷰할 때도 “선하다”는 인상밖에 느끼지 못했다. 2007년 8월 인도 방문 시 극심한 장염에 시달리면서도 인도 총리의 부인이 만든 카레라이스를 무리하게 먹다 결정적으로 몸이 망가진 것도 선함 때문이랴. 한자로 말하자면 미숙·미달의 미(未)였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신중함과 격렬함을 동시에 지녔다. 내가 본 총리 중 가장 냉소적이었다. 사임 회견 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 지방지 기자의 도발적 질문에 “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과는 다르단 말입니다”라고 격하게 반박하는 걸 보면서 일본 세습 정치인들의 우월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직(直·곧음)의 총리였다.
◆아소 다로(麻生太郞)=가장 오만한 총리였다. 외상 시절인 2005년 12월 장관 집무실에서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인터뷰 말미에 “오늘 (교과서·독도 문제 등) 공격적이고 자극적 주제의 질문만 하게 돼 미안하다”고 예를 갖추자 그는 “당신네(한국인)들은 원래 그런 국민 아니요?”라고 비꼬았다. 한국을 경멸하는 속내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실격·실언·실수의 ‘실(失)’이 딱 맞아 떨어진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 이후 첫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세습 정치인 같지 않은 세습 정치인’이었다. 9개월 남짓한 임기 중 한국 관련 행사장에서만 10번가량 만났지만 누구와도 벽을 쌓지 않는 인격자였다. 만날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며 “난 한국이 일본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 생각해요”라 말하던 게 생각난다. 인터뷰 당시 부인 미유키(幸) 여사가 열심히 익힌 한글로 써 준 ‘사랑해요. 우애(友愛)’란 글 중 우(友)가 그를 상징한다.
◆간 나오토(菅直人)=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총리였던 간 나오토는 동네 아저씨 같았다. 도쿄의 민주당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셔츠 차림에 꼬질꼬질한 양말 차림은 ‘아, 이제 일본에도 비세습의 보통 정치인 시대가 열리는구나’란 느낌이 들게 했다. 뭔가 다른 이(異)였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2011년 10월 방한을 하루 앞두고 총리 관저에서 인터뷰한 노다 요시히코는 지금 와 복기하면 자민당 색채의 민주당 총리였다. 한국·중국에 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도 노다 때부터였다. 자위대원이었던 부친의 영향이었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아베 정권 폭주의 최대 공헌자는 노다였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중의원을 해산해 자민당에 정권을 내주는 등 강(强)의 이미지가 컸다.
◆2기 내각의 아베=지난해 4월 네덜란드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의. 아베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라고 한국어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고개를 획 돌렸다. 나중에 당시 상황을 물어보자 아베는 “원래 ‘다음에 꼭 식사 같이 하십시다’란 한국어도 말할 참이었어요. 제 발음이 이상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그날 저녁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아까 내 한국어가 이상했느냐’고 물었더니 ‘정확한 발음이었다’고 하더군요. 하하.” 2기 아베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고 기민하다. 각종 연설에도 힘과 자신감, 오만함이 넘친다. 돌진·당돌·충돌의 돌(突)이 느껴진다.
중앙일보 김현기의 제대로 읽는 재팬
◇2015.07.10 그리스보다 심각한 ‘빚의 나라’ 일본
그리스가 지난 6월 30일(현지 시각) 국제통화기금(IMF)에 만기가 도래한 15억유로의 채무불이행을 결국 선언하고 말았다. 그리스는 탈세와 부패로도 유명하지만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70%를 넘었다는 점이 주목을 받아왔다. 이런 측면에서 새삼 관심이 쏠리는 나라는 일본이다. 선진경제권이나 신흥국을 통틀어 그리스보다 부채비율이 높은(240%)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다음으로 ‘변제’에 대한 불안감을 주는 남유럽의 이탈리아·포르투갈이 130%대, ‘만성적자’라는 미국이 109%, 아울러 한국 또한 35% 선인 것을 감안하면(물론 공기업 등의 공공부채를 더하면 60% 상회) 지금의 일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재정적자 상태인지 실감이 난다.
정부와 가계, 기업을 각각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라고 생각해 보자. 일본은 아버지가 무리를 해서 돈벌이에 나선 상태다. 서울 강남에 대규모 A식당을 소유 중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있었으나 벌이는 벌써 20년 이상 정체였다. 최근에는 건물에 예기치 않은 화재까지 발생(3·11 동일본대지진)하자 이대로 가다가는 예전의 영화를 다 잃겠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빚을 끌어다(일본은행의 국채매입 확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마케팅에 나서기로 했다. 아버지가 손수 연장근무를 하며 몰래몰래 무언가를 드시는데(출구전략 없는 무제한 양적완화) 이게 합법적 에너지드링크인지 마약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고객이 눈에 띄게 늘어 아들의 기분은 좋지만 예년에 비해 음식값을 20% 낮춰서 파는 바람(인위적 엔화 약세)에 절대적인 매출규모는 크게 늘고 있지 않다. 그래도 당장 돈이 잘 돌아가니 일단은 안심이다.
아들과 달리 집안의 운명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아버지지만, 막상 장부를 열어보기는 두렵다. 작년에도 적자, 올해도 적자임이 분명하다. 식당 운영경비를 충당하려면 또다시 대출에 손을 대야 한다. 계속 적자가 나는 사업이지만 대출을 받는 상황이 신기하다. 적자규모가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명동의 소규모 B식당(그리스)은 “갚을 돈이 없다”고 은행 앞에 자빠진 판국이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사업자금을 대주는 주체는 어머니였다. 은행처럼 이자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워낙 싸게 책정해 당장은 문제가 없다. 아버지의 명예를 곧 자신의 명예로 생각하므로 아버지에게 갑자기 원금 상환을 요구하지도 않을 터다. 하지만 앞으로 5년 이상 비슷한 상태가 지속된다고 하면 어머니 재산도 결국은 바닥날 것 아니냐며 동네사람들이 수군거린다. 노인이 되면서 약값도 크게 는다고(고령화에 따른 복지지출 급증) 한다. 아버지가 잘나갈 때 미국·유럽에 사 놓은 투자상품(대외순자산)이나 꼬불쳐놓은 비상금(외화보유고)까지 털면 이론적으로 몇 년 더 버틸 수야 있다지만, 그럴 경우 집안의 존재 의미는 사라진다.
이러한 비유를 한국에 대입하면 어떨까. A식당에 비하면 3분의 1 규모도 안 되지만 경기도 분당 요지에 뒤늦게 문을 연 C식당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는 아버지가 워낙 늦게 사업에 발동을 걸었으므로 유리한 부분이 있다. 먼저 명동이나 강남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대형 식당(선진국 재정운영)의 사례를 잘 학습한 덕분인지 크게 빚은 없다. 아들(기업) 역시 여태까지는 신도시로의 인구유입 및 개발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므로 경영상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지금부터가 문제다. A식당과 큰 차이점은 어머니가 오히려 주택구입 때문에 빚이 많아(가계부채 과다) 아버지보다 먼저 불상사가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다시 현실의 일본으로 돌아가 보자. GDP(국내총생산) 대비 부채비율과 더불어 GDP 대비 기초재정수지(전체 재정에서 누적 정부부채의 원리금 부담을 제외한 항목)도 최악이다. 굳이 따지면 몽골과 비슷한 세계 171위다. 당해연도의 수입과 지출 측면의 건전성도 세계 최하위권이라는 의미다. 부도난 그리스도 내년부터 GDP 대비 기초재정수지 흑자율을 1%로 달성할 것을 채권단과 협상 중이지만, 일본은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줄곧 -5~-7% 선이었다.
2020년부터 기초재정수지 흑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정부는 설명하나 액면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제성장률 초과 달성 및 소비세율 10%로의 추가인상(2014년에 5%에서 8%로 올렸으며 추가인상은 2017년으로 예정) 등 장밋빛 미래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1990년대 버블 시기부터 ‘악어 입’처럼 점점 벌어져가는 세출(歲出)과 세입(稅入)의 차이도 심각하다.
올해도 고령화에 따라 급증하는 복지예산 및 대지진 복구비 등을 포함해 국가가 지출하는 총 경비(세출)는 96.3조엔인 데 반해 국가가 민간에서 걷는 세금은 54.5조엔에 불과하다. 올해도 그렇지만, 이미 지난 10년간 해마다 40조~50조엔 정도를 신규 국채 발행을 통해 ‘땜방’ 중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세입(歲入·국가의 일반회계 수입)에서 국채의존도가 40%를 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미국, 영국이 10~20% 수준이고 독일은 0%다.
일본의 국가 부도 가능성을 낮게 보는 쪽에서는 “빚도 많지만 대차대조표상에는 변제하고도 남을 만한 돈이 있다”고 강조한다. 단순계산했을 때 현재 일본 개인의 금융자산이 1650조엔,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빚(국채 등)은 1035조엔이다. 그리고 국채의 91%를 일본 투자가가 들고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 빚을 돌려막기해 주고 있지만, 부부 일심동체로 보면 집안의 대표로서 아버지의 신용도가 크게 낮다고 볼 수 없다.
일본은 또 준(準)기축통화국답게 거의 모든 국채가 엔화로 기채(起債)돼 있다. 만의 하나 엔화 가치가 폭락한다고 해도 그 비율만큼 채무가 늘거나 하지는 않는다. 전체 130조엔에 달하는 외화보유고도 전체 부채의 10%를 상회해서 단기간 유동성 공급에는 손색이 없다.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은 2014년 말 기준 대외순자산(채권에서 채무를 차감)이 366조엔으로 24년 연속 세계 최대였으며, 2위인 중국(214조엔)과의 격차도 아직 큰 편이다.
물건 팔아서 이익 남기는 것보다 ‘돈놀이’를 통해 돈을 버는 일본의 경상수지 구조를 보면 이해가 쉽다. 2014년의 경우 무역수지 적자가 10.3조엔으로 1996년 이후 가장 저조했으나 기업의 해외 투자 배당금이나 채권 이자 등을 나타내는 1차 소득수지는 18조엔으로 1985년 이후 최대치였다. 이를 통해 역시 1985년 이후 최저치였다고는 하지만 경상수지 2.6조엔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막중한 채무에서 기인한 일본의 ‘급변 사태’를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들은 ‘일본은행의 무제한 양적완화’의 부작용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현재 일본은 정부에서 국채를 발행하면 일본은행에서 돈을 찍어 걷어가는 방식으로 돈을 풀고 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2차대전 당시 재원확보를 위해 영국 파운드화로 기채된 국채를 10~20% 고금리로 발행, 일본은행에 모두 인수(引受·underwriting)를 강제한 바 있다.
재정 규율이 느슨해지고 돈 가치가 폭락하는 바람에 전후 하이퍼인플레이션까지 겪었던 일본은 당시 교훈을 살려 재정법을 개정, 일본은행의 국채인수를 금지하는 ‘국채시장소화(消化)’ 원칙을 확립했으나 80년이 지난 현재는 다시금 유명무실화되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형식적으로만 다른 금융기관이 먼저 인수나 중개에 나설 뿐 결국 최종 구매자는 일본은행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재 일본은행은 전체 일본 국채발행분의 25%가 넘는 270조엔어치를 보유 중이며, 앞으로도 현재 추세의 완화(국채매입)가 지속될 경우 2018년에는 전체 국채 발행액의 50%를 일본은행이 보유하게 된다.
이미 전문가들은 이르면 2016년, 늦어도 2018년에는 이 같은 완화가 채권시장 전체의 왜곡을 부를 것으로 우려한다. 연 80조엔의 국채매입이 목표인데 연간 신규발행 40조엔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금융기관이 기존 보유분에서 매도해 줄 물량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후생연금(GPIF) 등 연기금을 통한 방어매도 물량도 내년부터는 소진될 전망이다.
일본은행이 국채를 확대보유하는 것보다 더 큰 근본적 문제는 기준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재무성 출신 경제평론가 노구치 유키오씨의 최근 저서 ‘금융정책의 죽음’의 시뮬레이션을 인용하면 현재 잔존만기를 감안한 일본 국채 평균금리는 1.18% 수준으로 일반회계상(총 96조엔) 이자부담이 1할 정도인 10조엔 안팎이다. 하지만 가령 신발행 국채금리가 2%로 오르면 이자부담이 2019년에는 22조엔, 4%로 오르면 2025년에는 세출 8할에 달하는 78.1조엔으로 수직상승하게 된다. 지금 일본의 10년물 채권 장기금리가 0.3% 수준이지만 2007년에는 1.8%에 육박한 적도 있으므로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아울러 국채를 보유 중인 각종 연기금과 금융기관들은 평가액이 급하락(금리와 채권가격은 반비례)하므로 막대한 평가손실이 생기게 된다. 불안한 투자주체들이 국채를 팔기 시작하면 투매가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손익의 이해관계’만 존재하는 외국인 투자자는 좀 더 기민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다. 일본 국채 보유비율은 9%에 그치지만 유통시장 거래빈도를 나타내는 매매비율은 지난해 말 통계로 현물 24%, 선물은 53%나 되기 때문이다. 과연 일본에도 ‘운명의 날’은 올 것인가.
조인직 KDB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2016.08.11 2차대전으로 본 기업 경영 - 임팔 작전과 티맥스OS
'하면 된다'만 외친 무뇌 지휘부가 부른 재앙
무다구치 "풀 뜯어먹으면 된다"며
정글 100㎞ 헤치고 인도 공격 강행
보급 끊겨 일본군 5만명 아사·병사
▲일본군 진지에 기총소사를 하는 영국군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
1944년 초 일본은 모든 전선에서 가망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해군의 진격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멈춰섰다. 육군도 1943년 2월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한 뒤 방어에 급급했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이 더 이상 먼 훗날의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일본을 짓눌렀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을 도모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미군의 군함과 잠수함·비행기가 활개치는 바다에선 공격은 커녕 병력 이동도 어려웠다. 공산당의 게릴라전술에 말린 중국 전선 역시 확전은 커녕 대도시와 철로망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노릴 만한 곳은 단 하나, 인도 뿐이었다. 일본군이 2년 전 점령한 미얀마가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해군 지원이 없어도 육상 공격이 가능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소와 노새에 보급품 싣고 산맥 넘어
하지만 실제론 아니었다. 호전성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일본군이다. 그럼에도 2년 간이나 인도 쪽을 기웃거리지 못한 건 지형이 워낙 험난했기 때문이다. 인도 동북부에는 마니푸르주가 자리잡고 있다. 주도인 임팔 부근은 평야지만 미얀마 국경 쪽은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이 가로막고 있다. 에베레스트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해발 2000m가 넘는 험준한 지형과 빽빽한 정글로 덮혀있는 땅이다. 변변한 길이 없으니 사람은 몰라도 탱크나 대포가 지날 수 없다. 이런 산악지대를 100㎞ 이상 뚫고 지나가야 한다. 식량 보급조차 장담할 수 없으니 일본군도 쉽사리 공격하기 어려웠다.
▲스크래기힐 전투를 마친 영국군들이 진지를 둘러보고 있다
일본군의 전력이 우월한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을 담당한 15군 산하엔 3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연대 뿐이었다. 연합군은 주로 인도·구르카인으로 구성된 4개 사단과 2개 여단이 지키고 있었다. 보급 역시 많은 항공기를 보유한 연합군이 우위에 서 있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를 베트남에서 하역해 태국을 가로지르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소재가 된 425㎞ 길이의 태국~버마 철도가 1943년 10월 완성됐지만 숨통이 조금 트인 정도였다.
그럼에도 1943년 7월 15군 사령관이 된 무다구치 렌야 중장은 '인도 공격'을 주창했다. 1910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러시아 혁명 뒤 일본군의 시베리아 점령에 참여했다. 1937년 노구교사건을 일으킨 제1연대의 연대장도 지냈다. 싱가포르와 필리핀에선 사단장으로 전투에 참여해 영국군과 미군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그때까지 진 적이 없으니 자신감이 충만했을 법도 하다. 그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15군은 물론 대본영참모진의 반대를 적극적으로 무마하기 시작했다. 1944년으로 접어들며 전황이 더욱 나빠지자 일본 정치권과 군 수뇌부에 렌야의 우군도 많아졌다. 다급할 수록 모험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어떻게든 성공한다면 얻을 수 있는 열매가 달콤하기도 했다. 인도 북동부를 점령하면 이곳을 통한 연합군의 지원이 차단돼 중국에서의 전황도 호전시킬수 있을 터였다.
무다구치가 구상한 '독창적인' 전략도 있었다. 다름아닌 소떼 몰이 전법이었다. 칭기즈칸의 군대처럼, 차량 대신 말과 소로 보급품 운송을 맡기고 유사시 비상식량으로 삼자는 거였다. 마침내 1944년 3월 일본군 6만5000명이 미얀마 북부 친드윈강을 넘어 임팔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소 3만 마리, 말과 노새 1만2000마리가 뒤를 따랐다. 이들이 싣고 가는 보급품으로 버틸 수 있는 건 3주였다. 연합군 물자를 빼앗지 못하면 산 속에서 아사할 각오를 해야 했다. 많은 병사, 심지어 지휘관들이 불만을 품었지만 마지 못해 명령을 따랐다.
중화기 없어 연합군 전차에 속수무책
작전은 초기부터 삐걱였다. 친드윈강을 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짐승들이 보급품과 함께 물속으로 사라졌다. 산속으로 들어가자 소와 말이 먹을 풀이 없어 많은 수가 굶어죽었다.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한 연합군 전투기가 기총 소사라도 하면 짐승들이 놀라 보급품과 함께 밀림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연합군의 판단착오 덕에 몇몇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의미 없는 포위였다. 중화기를 들고오지 못한 일본군은 연합군의 방어진지를 넘을 수 없었다. 연합군의 M3 리 중형전차와 M3 스튜어트 경전차가 나타나면 도망치기 바빴다. 포위된 연합군이 공중 보급을 받으며 여유 있게 방어하는 동안 식량 보급을 받지 못하는 일본군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영국군 구르카연대 병사들이 M3리 전자와 함께 진격하고 있다.
그래도 한달 뒤 일본군은 임팔 근처 평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보급로를 한계 이상으로 늘어뜨리기 위해 임팔 부근까지 유인하는 작전을 쓰고 있었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일본군의 공격은 손쉽게 격퇴됐다. 5월이 되자 보급이 완전히 끊긴 일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배고픈 병사가 진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어기고 식량을 구하러 주변 민가를 약탈하러 다니는 일이 흔했다.
참상을 보다 못한 31사단장은 결국 무다구치의 허락 없이 부대를 후퇴시켜버렸다. 다른 지휘관들도 공격명령을 대놓고 묵살했다. 무다구치가 휘하 지휘관 전부를 갈아치워도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 헛된 희생을 줄이려면 하루빨리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무다구치와 대본영 모두 후퇴 명령을 내리려하지 않았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결국 승산이 없다는 게 분명해지고도 두 달이 흐른 7월 3일에야 무다구치의 작전종료 명령이 떨어졌다.
결과는 처참했다. 일본군 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됐다. 돌아온 병사는 1만5000명에 불과했다. 돌아오지 못한 5만명은 대부분 전투가 아니라 굶주림과 풍토병으로 희생됐다. 동원된 짐승들을 모두 잃은 것은 이후 미얀마 내 일본군 전력을 회복하는 데 막대한 차질을 줬다. 이후 연합군이 미얀마로 진격할 때 일본군은 저항을 거의 하지 못했다. 임팔 작전의 참상은 1991년 제작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밀림 속에서 생존투쟁을 벌이는 주인공 최대치(최재성 분)가 소속된 부대가 15사단으로 설정돼 있다.
무다구치는 일본으로 소환돼 1944년 12월 예편됐다. 죽을 때까지 패장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흔히 조직을 망치는 리더의 전형으로 '머리가 나쁜데 부지런한 사람'이 꼽힌다. 무다구치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임팔전투의 결과를 보면 부인하기 어렵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무다구치는 최선의 상황만을 기대하며 부하들에게 '하면 된다',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리더의 비현실적 상상은 현실에서 숱한 비극을 낳는다.
▲영국군 병사가 공군 연락관에게 일본군 진지를 설명하고 있다.
토종 OS 실패로 휘청였던 티맥스
재도전에선 다른 결과 낼 지 관심
MS·구글에 맞설 '국산 OS'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군사 작전은 보급의 한계를 먼저 확인한 뒤 그에 맞춰 짜는 것이 정석이다. 보급이 끊긴 군대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는 러시아를 침공했던 나폴레옹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이집트 깊숙히까지 몰아부쳤던 롬멜이 잘 보여준 바 있다.
자원의 한계를 생각치 않고 "할 수 있다"는 최고경영자(CEO)의 자신감만으로 밀어부쳤다 낭패를 본 기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토종 운영체제(OS) 개발에 끈질기게 도전하는 티맥스소프트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다.
1997년 티맥스를 설립한 박대연 회장은 '상고 야간 출신의 신화'로 유명하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광주상고를 나와 은행에 취직했던 그는 전산업무를 담당하다 소프트웨어에 눈을 떴다. 30대에 유학을 떠나 8년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해 KAIST 교수와 티맥스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겸임하며 미들웨어·데이터베이스 등 20여 종의 기업용 국산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한국 최고의 엔지니어 가운데 하나라는 평도 들었다.
2007년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그는 2년 후 '티맥스 윈도9'라는 이름의 국산 OS를 내놓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와 호환되는 토종 OS로 관심을 끌었지만 시연회에서부터 게임과 동영상을 실행하는데 몇 분씩 버벅이다 결국 작동이 중지되는 불완전한 모습을 보였다. OS의 실패로 티맥스는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직원 2000명 가운데 4분의 1을 줄이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이듬해 6월 OS 개발을 담당했던 자회사 티맥스코어를 삼성SDS에 매각했다.
하지만 박 회장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올 4월 20일 '티맥스OS'를 공개한 것이다. 7년만에 다시 발표회 연단에 오른 그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온 대사인 "사과할까요, 아니면 고백할까요"를 인용하며 "한국도 독자 OS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직원 50명이 4개월간 아무 문제없이 사용했다는 티맥스OS는 이날도 다운됐다. 공개 테스트를 거쳐 올 10월 정식 출시할 예정이지만 앞날이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박 회장의 도전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티맥스는 2011년부터 실적이 호전되면서 지난해에서는 워크아웃도 졸업하며 회생에 성공했다. 미들웨어-데이터베이스로 이어지는 정부·기업용 SW 솔루션도 탄탄해서 독자 OS만 완성한다면 정부망 등에 패키지로 판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본군이 임팔만 확보했다면 인도와 중국이라는 큰 목표의 목줄을 쥐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현 가능한 목표인지가 문제다. OS는 MS와 구글 같은 업체들도 수 천명의 직원을 몇 년씩 투입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무다구치는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 (식량이 모자라면) 풀을 뜯어먹으면 된다"며 무리한 작전으로 일관하다 일제의 패망을 앞당겼다. 박 회장의 신념이 좋은 결과로 돌아올 지 무다구치의 만용으로 밝혀질 지 지켜볼 따름이다.
김창우 중앙SUNDAY 제작부장
◆일본의 만행
2015.04.06 70년 만에 참회… '日 본토에서의 생체실험' 덮을 수 없었다
[규슈의대의 美軍포로 생체실험]
- 89세 老人 된 의대생의 증언
미군포로 혈관에 바닷물 주입… 살아있는데 폐 적출하기도
- 용두사미式 단죄
23명 군사법정서 유죄판결, 6·25 터지자 美 통제완화로
옥중 자살 1명 빼고 전원 사면
일본 군부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바닷물은 인체와 성분이 비슷하니 바닷물을 이용한 혈액 대체제를 만들어보라"고 일본 의료계를 압박하고 있기도 했다. 규슈대 의료진이 미군 포로들의 폐를 적출하거나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이 사건에 대한 단죄 과정은 용두사미로 흘러갔다. 연합군 군사 법정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뒤 의료진 23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특히 그중 5명은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후 6·25가 터졌다. 미국은 당초 일본을 철저하게 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6·25 이후 일본을 병참기지로 활용하면서 일본 항복 직후 가했던 각종 정치·경제적 통제를 크게 완화했다. 이 과정에서, 생체 해부를 주도해 사형을 선고받은 주범 중 옥중 자살한 1명만 빼고 전원이 사면받았다. 굳이 자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기류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규슈대 의학부 의료진이 자행한 2차대전 당시 미군 포로 생체 해부의 전말은, 당시 이 학교 의과대 학생이자 목격자인 히가시 도시오(사진 위, 왼쪽에서 둘째)씨 등의 증언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연합군은 일본 패전 뒤 1948년 군사법정을 통해 관련자들을 사법 처리했다(사진 가운데). 규슈대는 4일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생체 해부가 자행된 해부학 교실을 복원해 의학 역사관으로 개관했다(사진 아래).
전후(戰後)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1923~1996)는 이 사건을 소재로 '바다와 독약'을 썼다. 그는 작품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일본 사회에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도 역시 나처럼 한 꺼풀을 벗기면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가. 약간의 나쁜 짓이라면 사회에서 벌 받지 않는 이상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동안 일본은 주로 만주에 설치한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에서 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 영토 내에 있는 의과대학과 다른 부대들도 자체적으로 생체 실험을 해왔다는 정황들이 관련자 증언과 기록물 발견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미군 포로 생체 해부 사건은 규슈대 안에서 오랫동안 금기였다. 하지만 전후 70년을 맞아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국내외 우려가 커지면서 서서히 분위기가 반전됐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규슈대 동창들을 중심으로 "전쟁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달 의학부 교수회의에서 의학역사관 개관을 계기로 부정적인 역사도 공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라 히로시 규슈대 의대 동창회 의학역사관건설실행위원장은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 자료를 전시하는 데 대해 동창회 내부에서 반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규슈대는 8일부터 역사관을 일반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조선일보 도쿄=김수혜 특파원 정지섭 기자
"이 끔직한 짓, 우리가 했습니다."
“미군 포로가 눈이 가려진 채 덜덜 떨면서 수술대에...
조선일보
◆일본의 민족성
2016.01.19 일본은 왜 독일처럼 반성하지 못할까?
진솔한 반성과 사과에는 조건이 없다. 그럼에도 지난해 말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사과한다면서 이런저런 조건을 달았다. 그런 사과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도리어 불편하게 만든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일본을 독일과 비교해 본다. 독일은 조건 없는 반성을 통해 유럽의 지도자로 거듭 태어났는데, 일본은 왜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할까.
이런 의문을 제대로 풀어줄 고전이 있다. 바로 ‘주신구라(忠臣藏)’이다. ‘춘향전’이 우리의 국민극(劇)이라면 ‘주신구라’는 일본의 국민극이다. 글로벌 시대에 웬 국민극 타령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극에는 정서적 원형질이 침전되어 있다. 외양이 바뀌더라도 원형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극을 통해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탐색해 보는 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서 ‘춘향전’의 내용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바로 국민극의 조건이다. 그러면 ‘주신구라’는 어떤 국민극인가. 본래 구라(藏)는 ‘곳간’이란 뜻이다. 따라서 ‘주신구라’는 ‘많은 충신들이 활약한 이야기’ 정도로 이해된다. 이것은 18세기 벽두에 발생한 실제 사건을 극화한 작품이다.
끔찍한 유혈 복수극에 열광하는 일본인
1701년 봄, 막부는 아코번의 젊은 영주 아사노(淺野)에게 천황의 칙사 접대를 맡겼다. 당연히 이런 행사에는 복잡한 의전이 수반되었다. 막부는 의전에 정통한 명문 출신 고관이 행사를 자문하도록 했다. 그때 자문역이 기라(吉良)라는 인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원만한 협조가 행사 성공의 관건인 셈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단이 벌어졌다.
음력 3월 14일 행사 마지막날. 에도성 대전(大殿)의 복도에서 아사노가 단검으로 기라를 공격했다. 기라는 이마와 등에 경미한 상처를 입은 채 구출됐다. 당시 성 내에서 칼을 뽑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아사노가 칼을 빼어든 이유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막부는 곧바로 그에게 당일 할복, 가문 단절, 영지 몰수라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젊은 영주는 그날 저녁 할복으로 34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아코번의 사무라이 300여명은 졸지에 주인과 일자리를 잃고 낭인(浪人)이 되었다. 그들의 절망과 비분강개는 충분히 짐작된다. 더구나 기라는 일방적 피해자로 여겨져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이 그들을 더욱 자극했다. 오이시(大石)를 우두머리로 하는 낭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비참하게 살면서도 복수의 기회를 엿보았다. 물론 뜻을 같이하다가 이탈하는 자도 속출했다.
이듬해(1702년) 12월 14일 오이시가 사발통문을 놓자 한밤중에 15세의 소년부터 76세의 노인까지 모두 47명의 낭인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기라의 저택을 급습하여 그를 살해했다. 곧바로 아사노의 묘소로 달려가 주인의 영전에 기라의 목을 바쳤다. 막부는 사건 처리를 놓고 고심하다가 이듬해 2월 전원 할복을 명했다. 그들은 주검이 되어 이미 센가쿠지(泉岳寺)에 묻혀 있던 주군 아사노와 나란히 누웠다.
일반 대중은 이 끔찍한 복수극에 환호했다. 여기에는 지극히 일본적인 정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사무라이는 오로지 주군(主君)을 위해 존재한다. 심지어 주군이 죽으면 따라 죽는 순사(殉死)가 여전히 유행했다. 또한 사무라이가 명예나 체면에 도전받으면 복수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들에게 할복은 명예를 지키는 죽음이었다. 이 유혈 복수극은 한마디로 사무라이 가치의 종합선물세트였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사건은 다케다 이즈모 등 세 명의 유명 작가의 손을 거쳐, 1748년 허구의 형식을 빌려 극본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나데혼 주신구라’이다. 이 극본은 곧바로 전통극, 소설, 그림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된 ‘주신구라’ 작품군의 원류가 되었다. 더구나 메이지 정부가 사무라이 정신을 국민 도덕의 골격으로 삼으려 하자 ‘주신구라’는 일본인의 국민극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에도 소설, 영화, 드라마,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운 ‘주신구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일본인의 원형질이 녹아 있는 국민극
우리의 ‘춘향전’은 픽션이다. 거기에는 사랑, 한(恨), 인고 등 인간의 평범한 정서가 녹아 있다. 꽉 막힌 현실은 암행어사 출두로 확 뚫린다. 여기선 신분적 질곡도 사회적 부조리도 문제되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의 굳은 의지로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을 획득한다. 그렇게 쟁취한 행복은 밝고 명랑하다.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다. 우리는 이런 ‘춘향전’에 울고 웃는다.
이에 반해 ‘주신구라’는 각색은 제각각이어도 뼈대는 팩트이다. 충의, 명예, 수치, 복수, 할복 등 전형적인 사무라이의 가치가 가득 담겨 있다. 그들은 치밀한 준비와 용의주도한 작전으로 뜻을 이룬다. 개인은 오로지 집단의 명예와 복수를 위해 사용될 수단의 일부일 뿐이다. 뜻을 이루고 장렬하게 죽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시종일관 비장(悲壯)하다. 일본인은 이런 ‘주신구라’에 눈물을 흘리며 열광한다.
그들은 집단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는다. 최근에도 일본에선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부패나 부조리가 불거지면 비서들이 윗사람과 조직을 위해 자살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세계적 석학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지적대로, 일본인은 집단을 위해 죽어간 사람은 많지만 진리나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위해 죽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에게 집단의 궁극(窮極)인 국가는 무조건 선(善)이다. 그들은 일본이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어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반성이나 사과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수치를 할복으로라도 씻어내려고 한다. 실제로 지난해 연말 ‘사과’ 운운은 아베 총리가 정치적으로 할복하는 시늉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후대에 사과를 물려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의 사과는 결국 가해자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일본 탓만 하고 있는 것은 무익하다. ‘주신구라’에 열광하는 일본은 우리에게 냉혹한 현실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 현실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는가. 아무래도 감성에 치우쳐 있다. 위안부 문제를 외교 테이블에 덜렁 올려 놓은 것만 해도 그렇다. 사과도 받을 태세를 갖춰야 제대로 받는다. 모든 병법의 출발은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주신구라’와 ‘춘향전’은 주제나 성격이 달라도 국민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만 한 지피지기의 재료도 드물다.
출처 | 주간조선 2391호 글 | 박종선 인문학 칼럼니스트
2016.04.22 日에서 5년간 운전하며 느낀 일본인들의 충격적인 운전습관 8가지
▲도쿄 거리./뉴시스
일본에 가보거나 살아본 사람은 많아도, 일본에서 운전을 해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듯하다. 수년을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며 느낀 점 몇 가지. (동경 버전 – 지방마다 조금 다를 수 있다.)
1) 깜빡이를 켜면 미친 듯이 양보해준다. 이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듯. 꽤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가도 깜빡이를 켜는 순간 속도를 확 줄여 양보해준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까지 양보할 필요 없는데...”라고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깜빡이 켜는 차들에게 양보해 준다.
2) 양보를 받고 나면 예외없이 비상 깜빡이나 목례로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거 안하면 무슨 병이라도 걸릴 것처럼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양보해 준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3) 신호없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한국의 좌회전에 해당)을 하기 위해 기다릴 경우, 정면에서 마주 오는 차량이 속도를 줄이면서 상향등을 내쏘는 경우가 있다. 맨 처음에는 나보고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자기가 서줄테니 먼저 가라는 양보의 사인이었다. 반대로 한국처럼 앞차한테 비키거나 빨리 가라는 의미로 상향등을 쏘는 경우는... 기억에 없다. 상향등의 사용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반대이다. 일본인은 양보를 위해 한국인은 재촉을 위해...(사실 상향등은 passing light라고 하여 추월시에 사용하는 용도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여간해서는 상향등을 추월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4) 일본 운전자들은 정지 싸인에 칼같이 맞춰 선다. 골목길의 경우 교차로(길이 만나는 곳)까지 꽤 거리가 있는데(심한 경우 20미터 이상 전 지점, 더 심한 경우는 아예 교차로가 보이지도 않는 지점) 도로 위에 흰색 페인트로 ‘토마레(stop)’ 싸인이 그려져 있다. 일본 운전자들은 그 싸인에 칼같이 맞춰 선다. 신기한 것은 그 싸인에 딱 맞춰 서야지 통행이 된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 있으면 반대편에서 (특히 꺾어들어오는) 차와 서로 걸려 통행을 못한다. 공무원들이 그 자리에 나와 실측 해보고 시뮬레이션 해보지 않으면 그 지점을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5) 반사경이 많이 있고 기가 막히게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다. 4)번과 같은 맥락에서 좁은 골목길 교차로에서 시야 확보가 충분히 안될 때 반드시 반사경이 있다. 반사경도 한두개가 덩그러니 있는게 아니라, 많은 경우 대여섯개까지 있다. ‘저 부분이 찜찜하게 잘 안보이는데’ 하는 곳을 비추는 추가 반사경이다. 이것도 담당 공무원들이 직접 실사하고 시뮬레이션 해보지 않으면 그 장소, 그 각도의 반사경을 그렇게 배려있게 설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6) 5년동안 운전하면서 크락숑(사실은 klaxon) 소리는 딱 한 번 들었다. (내가 잘못 운전해서 위험할뻔한 순간에 뒤의 트럭한테 한 방 먹음) 심지어는 걸어 다니면서도 빵빵거리는 차를 본 적이 없다. 일본인들은 크락숑을 울리는 것에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여겨질만큼 정말로 위험하거나 주의를 주어야 할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7) 자로잰듯 주차한다. 주차할 때 자로 재듯이 구역안에 좌우 간격을 정확하게 맞추고 뒷바퀴까지 돌출정지대 끝에 맞추어 한다. 그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후진과 전진을 반복해서 한다. 운전이 서툰 사람은 수십번을 반복해서라도 똑바로 대려 한다. 매일매일 면허시험 보는 사람들 같다.
8) 마지막이자 가장 충격적인 것. 법규위반하다 교통경찰한테 걸리면, 경찰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끝.
글 | 신상목 전 외교관/일식당 운영
2016.12.16 日 에도시대 출판문화 융성의 키워드 - 포르노, 카피라이트, 렌털
⊙ 1682년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오락소설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하면서 출판시장 활성화
⊙ 100만부 이상의 초베스트셀러 등장, 전업작가도 나타나
⊙ 목판인쇄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의 규범으로서 ‘판권’이란 개념 형성
신상목
1970년생. 연세대 법대 졸업, 외시 30회 합격 /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외교부 G20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핵안보정상회의 준비기획단 의전과장 역임. 현 기리야마 대표 / 저서 《일본은 악어다》
▲짓펜샤 잇규(十返舍一九)의 〈동해도중슬률모(東海道中膝栗毛)〉(1802~09)는 에도시대 여행·관광 붐의 기폭제가 되는 작품이었다.
일본의 높은 독서열과 출판문화의 뿌리는 3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는 책의 ‘융성’시대였다. 하시구치 고노스케(橋口侯之介)에 따르면 16세기 말 게이초(慶長)에서 19세기 중반 게이오(慶応)에 이르는 250년 남짓한 에도시대에 적어도 10만종 이상의 신간 서적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문화는 유럽,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뒤처져 있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상황이 반전된다. 17세기 중반 일본의 출판문화는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에는 연간 1000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며 19세기에는 모든 국민이 책을 생활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대국’이 되었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을까? 포르노, 판권(copyright), 대여업(rental business)이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출판 혁명의 시작은 포르노
16세기 말 한반도와 유럽의 선교사를 통해 도입된 활판(活版)인쇄술도 일본인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였다. 활판인쇄는 기술적으로 상용화에 어려움이 있었다. 에도인들은 목판인쇄에 다시 주목하고 기술을 가다듬어 책의 대량생산, 보급 체계를 갖춘다. 18세기 전까지 출판 중심지는 교토(京都)였다. 혼야(本屋) 또는 서림(書林)이라 불리는 교토의 출판업자들이 관(官)이나 사원에 연계되어 불서(佛書), 한서(漢書), 역사서, 의서(醫書) 등의 고전(古典) 또는 정통서(이를 ‘모노노혼·物之本’이라 한다)들을 간행했다
17세기 말엽에 일본은 일대 혁명적 전환의 순간을 맞이한다. 1682년 오사카와 에도에서 발간된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오락소설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친 것이다.
호색일대남은 ‘요노스케(世之介)’라는 남자주인공의 7세부터 60세에 이르는 54년간에 걸친 파란만장한 ‘섹스 라이프’를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인 요노스케는 7세 때 첫경험을 한 이후 전국을 방랑하며 육체적 로맨스에 탐닉하는데 친척 여동생, 유곽의 여인, 남의 아내, 미소년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단편을 이루어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8권 8책에는 한 호색남의 일생에 걸친 ‘섹스 판타지 어드벤처 로망’이 담겨 있다. 요노스케가 관계를 맺은 상대는 여성 3742명, 남성 725명이라 한다. (에도 중기까지는 남색(男色)이 드물지 않았다)
《호색일대남》은 관음증을 자극하는 에피소드지만 현대 학자들이 극찬할 정도로 고품격 포르노그래피로서의 관능미와 묘사, 은유가 절묘하게 당시 각 지역의 풍정(風情)과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생활상이 당대 언어로 생생하게 담겨 있어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한다. 이하라 자신이 직접 그렸다는 삽화는 텍스트에 독자의 이해를 돕고 흥미를 유발하였고 에도시대 ‘재미있는 읽을거리’의 전형으로서 후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일본 전역에 《호색일대남》 열풍이 불어 판매부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인쇄의 기본이 되는 판목이 오리지널 외에 5종이나 더 제작된 것은 높은 인기와 판매량을 뒷받침한다. 《호색일대남》의 히트를 계기로 일본 사회는 책의 대중소비 시장 가능성에 눈을 뜬다. 이후 ‘재미’를 표방하는 오락서적(이를 ‘草紙·소우시’라 한다) 붐이 일면서 기존의 ‘모노노혼’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대중출판물 시장이 형성된다.
시대를 풍미한 초베스트셀러의 등장
▲포르노그래피 소설 〈호색일대남〉은 에도 시대 출판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호색일대남》 이후 ‘구사조시(草双紙)’라는 장르가 유행한다. 구사조시는 에도 중기인 18세기 중반부터 에도 말기인 19세기 초반까지 에도를 중심으로 출간된 대중오락 서적의 통칭으로, 그림과 텍스트를 같은 판목에 새겨 인쇄함으로써 시각적 효과가 가미된 ‘가벼운 읽을거리’로 만화의 원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에도에 출판붐이 일면서 현재로 치면 100만부 이상의 판매량에 해당하는 초베스트셀러가 속속 등장한다. 먼저 《남총리견팔견전(南総里見八犬伝》(1814~1842)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저자인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이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28년 동안 총 106책(冊)에 걸쳐 집필한 집념의 ‘생애작(lifetime work)’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주제로 한 창작 판타지물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한 만화나 영화가 현대에도 재생산될 정도로 대중문학의 틀을 바꾼 근세 요미혼(讀本)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이다.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인 〈남총리견팔견전(南総里見八犬伝〉.
짓펜샤 잇규(十返舍一九)가 쓴 《동해도중슬률모(東海道中膝栗毛)》(1802~09)는 에도시대 여행, 관광 붐의 기폭제가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에도에 사는 평범한 중년남성과 청년이 콤비를 이루어 이세(伊勢)참배 여행을 떠나는 스토리를 코믹하게 서술한 이 작품은 당초 초편과 속편의 2편으로 종료 예정이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대히트 덕분에 이세를 넘어 오사카까지 여행을 계속하는 8편까지 연장됐다. 그후 독자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도카이도(東海道)를 벗어나 일본 각지를 돌며 여행하는 스토리를 추가하는 《속슬률모(続膝栗毛)》(1810~1822)가 출간됐다.
도중에 작가가 소재 고갈로 집필을 몇 번이나 그만두려 하였으나 제발 연재를 계속해 달라는 독자들의 간청으로 집필을 이어 갔다고 할 정도이다. 일본 각지의 명물과 풍속, 인정(人情)을 코믹한 터치로 풀어낸 에도 기행(紀行)문학의 걸작은 독자들과 같이 호흡하며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더 이상 인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원(元)판목이 닳아 판목을 다시 제작해야 했으며 패러디나 복제판이 다수 제작되며 3만권 이상이라는 당시로선 경이로운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개념 전환이 이루어지자 발달된 상업자본과 유통망에 힘입어 상업출판 시장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 에도시대 말인 18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 100만의 에도에 출판업자들이 모여들어 연간 수백 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출판 시대가 꽃을 피운다. 구사조시 서적과 우키요에 등의 화첩류, 그리고 본격 모노가타리인 ‘요미혼’ 등이 큰 인기를 모음에 따라 교토를 제치고 에도가 제1의 출판시장으로 도약한다. 에도의 출판시장에서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백과사전, 여행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가 개척되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으로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가 등장하는 등 비즈니스 생태계가 구축된다.
유교의 이상(理想)을 완성한 《경전여사(經典余師)》
▲‘다니 햐쿠넨(渓百年)’이라는 떠돌이 유학자가 쓴 초급 유교경전 해설서 〈경전여사〉.
읽을거리가 많아지자 글을 배우려는 의욕이 높아진다. 사설 교육기관 ‘데라코야(寺子屋)’는 글을 배우고자 하는 서민들로 넘쳐나고, 데라코야 교습으로 생계를 잇는 평민 지식인층이 대두한다. 데라코야는 공적 교육기관인 번교(藩校)와 달리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읽기, 쓰기 등의 기초부터 산수, 주판 등의 실용기술 그리고 사서오경 등의 간단한 유교경전 등에 대한 지식이 데라코야를 통해 서민 사회에 폭넓게 보급된다.
어느 서양 선교사가 ‘이 나라는 시골의 어린 계집아이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놀라움을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전국민의 문자해독률이 높아진 19세기 초엽, 당대 굴지(屈指)의 넘버원 베스트셀러는 《경전여사(經典余師)》라는 유교경전 풀이집이다. ‘다니 햐쿠넨(渓百年)’이라는 떠돌이 유학자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사서오경 등의 유교경전에 히라가나로 음을 달고 저자의 주해를 붙인 일종의 초급 유교경전 해설서이다.
일본은 무가(武家) 중심의 신분사회였으나, 각 번이 서로 경쟁하면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평민 계층에게도 관직의 문호를 개방하는 신분 완화의 시기를 맞이한다. 18세기 말이 되면 조닌 계층에서도 관직 등용의 꿈을 안고 통치이념인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19세기에 들어서면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은 필수 교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상하에서 홀로 유교경전을 익힐 수 있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 《경전여사》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것이다.
일본판 지적재산권의 시초, ‘판권’의 탄생
어떤 학자는 18세기 초 앤 여왕 시대에 영국이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의 개념을 법제화한 것이 영국이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선도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지적재산권은 영어로 copyright라고 한다. 저작권과 판권(板權)으로 구성되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권리의 중심이 되는 것은 판권이다. 일본의 경우 서구의 근대법제가 도입되기 전임에도 출판물에 대한 권리로서의 판권에 대한 자생적인 규범이 형성되었다.
에도시대 출판업의 중심이 된 것은 ‘한모토(版元)’였다. 한모토는 판(版)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목판(木版)은 제작하는 데 숙련 기술자들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불편이 있는 반면, 한 번 만들면 닳아 못쓰게 될 때까지 몇 백 년이고 책을 찍어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에도시대의 출판업자들은 상품성 높은 책의 판목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사업의 경제성과 지속성에 대단히 중요하였다. 당시 출판은 고료를 제외하고도 판목 제작에만 지금 돈으로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자본이 투하되어야 하는 리스크가 큰 투자였다.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1000부 이상이 판매되어야 하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센부부루마이·千部振舞’라고 하여 1000부가 팔리면 축하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당시 서민의 소득에 비추어 책은 상당히 고가여서 웬만한 책은 현재 가치로 10만원이 넘었다고 하니 1000부는 결코 적은 판매부수가 아니다.) 업자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동업자인 ‘나카마(仲間)’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출자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판목이 출판업자의 생명줄과도 같은 중요 재산이 되자 판목의 소유 및 이용 권리의 규범으로서 ‘판권’이란 개념이 형성된다. 판권은 출판업자 사이에 소유, 양도가 가능한 재산으로 인정되었으며 주식처럼 소유권을 분할하는 것도 가능했다. 당시 출판업자들은 대관(對官)업무, 자율규제, 권익보호를 위해 자체적인 조합을 만들었는데, 소속 조합원들이 신규 판목 제작 시 조합에 원부(原簿)를 만들어 판권 관련 사항을 등록하면 배타적인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원부를 기초로 소유권 이전, 분할 등 변동 사항을 경정(更訂)함으로써 판권이 재산으로서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법적 안전 장치가 마련된다.
유사한 내용의 판목이 판권 소유자의 허락 없이 제작되거나 해적판이 나돈다면 판권을 소유하는 의미가 없다. 에도의 출판 조합은 이를 위해 중판(重版) 또는 유판(類版) 등의 복제판 제작과 출판을 규제하였다. 자체적으로 등록 신청 단계에서 내용을 검수하여 중판 또는 유판에 해당하면 등록을 거부하였고, 시장에 나도는 해적판은 자체 회수하거나 관청에 신고하여 단속을 의뢰했다.
‘대본업’의 등장과 공유경제
출판시장에서는 모노노혼을 취급하는 혼야, 오락물 등을 취급하는 소우시야(草紙屋)가 공급자다. 교토, 에도, 오사카, 나고야에 거점을 둔 이들 메이저 출판업자들은 본사 격의 책방을 차려 놓고 도소매로 서적을 판매한다. 혼야는 ‘쇼시(書肆)’라고 하여 출판사, 인쇄소, 서점의 일관 공급 체계를 갖춘 출판 프로듀서로서 출판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대 거점 이외의 지방도시에서는 메이저 출판업자들과 ‘나카마’ 관계에 있는 지역 서점들이 일종의 총판대리점으로서 도매로 책을 떼어와 판매했다.
당시 출판은 작가가 ‘기요즈리(淸刷り)’라는 원고를 작성하면 판각 전문가인 ‘호리시(彫師)’, 인쇄 전문가인 ‘스리시(刷師)’ 등의 직인(職人)들이 ‘분화와 전문화’의 원리에 따라 제판, 인쇄, 제본 등에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에는 상당한 초기투자가 필요하다.
문제는 당시 책이 서민들이 구입하기에는 상당히 고가여서 아무리 인기 있는 책이라도 판매량을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공급자 측인 출판업자들이 리스크 경감을 위해 고안한 방식이 ‘공동출자와 판권의 분할’이라면, 수요 측면에서 안정적 판로 확보를 위해 고안된 방식이 ‘대본업(貸本業)이다.
에도시대의 대본업은 현재의 책 또는 비디오 대여점과 거의 유사하다. 대본소 덕분에 서민들은 저렴한 가격에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고 출판업자들은 판로가 안정됨에 따라 안심하고 좋은 콘텐츠의 기획, 출시에 힘쓸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미 에도에만 200개가 넘는 대본소가 성업하고 있었는데 각 대본소는 평균 200군데 이상의 단골 거래처를 두고 영업했다고 한다. 책을 온 가족이 돌려보는 것이 당시 시대상이었으니 책 한 권이 출간되면 에도에서만 대본소를 통해 최소한 10만에서 20만명의 독자가 확보되는 것이다. 시골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대본소 직원들이 책을 짊어지고 직접 시골로 찾아가 영업을 했다.
출판문화 융성은 출판시장 활성화의 동의어
에도시대 출판문화의 특징은 진화 과정에서 ‘시장(市場) 원리’가 주효하였다는 것이다. 현대와 유사한 출판사(publisher), 저자(author), 보급자(distributor) 사이의 기능적 ‘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지고 ‘판권’이라는 저작권(copyright)과 유사한 지식재산권이나 ‘대본업’이라는 공유경제의 맹아가 싹튼 것은 주목할 만하다. 비단 출판업뿐 아니라 사회경제 각 방면에서 유통 생태계가 구축되고 창의적 비즈니스 기법이 끊임없는 모색된 것은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일본 근세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가 종교, 윤리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지배층도 반역적이거나 지나친 풍속문란이 아니면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면)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출판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월간조선
◆2017.08.10 BEMIL사진자료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후 일본인 남녀의 시내 걷기
Japanese military Soldier and girl walking down the street destroyed Hiroshima
▲원폭후 살아남은 히로시마의 생존자들 - 1945년 8월
▲원자폭탄 폭발후 황폐하게 변해 버린 히로시마 시내를 걷는 일본군- 1945년 8월
▲원자 폭탄 폭발 한달후 비 내리는 히로시마 시내를 둘이서 다정히 걷고 있는 일본인 남녀 - 1945년 9월 8일
세계인들은 원자폭탄의 폭발이 지나간 후 폐허로 변해버린 일본 히로시마 시내를 걷고 있는 일본인 남녀의 사진을 바라 보면 과연 어떠한 생각을 할까? 라는 의문을 가질수 있다.
물론 일본인들의 견지에서 사진속의 장면과 남녀의 모습울 바라 본다면 매우 측은한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세계인들은 일본인들의 그릇된 야욕에 의한 세계 인류를 파탄으로 몰아 넣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침략전쟁의 인종범죄를 알고 있기에 그러한 느낌을 가질수는 없다.
위의 사진을 바라보면 미국이 투하시킨 원자폭탄의 폭발로 히로시마 시가지는 초토화가 되어버렸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에 따라 여성들을 마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일본인들의 그릇된 인본주의 관념이 여전한 것을 찾아 볼수가 있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당연히 남자가 우산을 펴서 여자를 씌워줘야 할것인데 그와는 반대로 여자가 우산을 펴서 남자를 씌워 주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히로시마 시내의 남녀 사진을 보자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 전쟁을 일으켜 가까운 한국과 중국및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미국등에 침략의 폭격으로 엄청난 인명의 대량 살륙과 소중한 문화재들및 국가 재산들을 송두리채 약탈해가고 파괴를 시킨 천인공노할 전쟁범죄와 사람들을 강제로 붙잡아 가두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생체 실험을 했던 희대적 인종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 평화적 상태에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를 하는 나라로서의 일본인 남녀가 온전한 상태의 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히로시마 시내를 남자가 우선적으로 우산을 펴서 여자를 보호하며 다정하게 우산을 받혀서 걷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하는 생각을 느끼게 한다.
○ http://www.youtube.com/watch?v=uc9JHQJ0f3s&feature=player_embedded - 日本 海軍의 진주만 공격
○ https://youtu.be/CCge5o1cetk- 원자폭탄 투하 영상
작성자: 슈트름게슈쯔
○이미지
▲1945.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일본
▲1945.8.6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의 폐허에 9.8 한 연합군 종군기자가 서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