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43/ 이탈리아1/ 이탈리아 이야기 - 풍경
■ 이탈리아 Italia
이탈리아 공화국, Repubblica Italiana, Italian Republic, Italy
▲국기
수도는 로마, 공식어는 이탈리아어다. 국민은 이탈리아계이며 주로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다. 화폐 단위는 유로다. 양원제를 가진 공화국이다. 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등과 이웃하고 있는 지중해의 장화 모양의 반도와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 예술 발전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현재는 크게 발달된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75% 이상의 국토가 산악지대와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알프스 산맥이 이탈리아의 북부 국경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아펜니노 산맥이 이탈리아 반도를 남쪽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평지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주요 강인 포 강 유역에 위치한다. 강력한 지질 활동으로 만들어진 3개의 지괴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 섬을 덮고 있다. 한편 베수비오 산과 에트나 산은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4개의 활화산 가운데 일부이다.
크게 발달된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주요 수출 품목에는 기계류, 운송 장비, 화학제품, 섬유, 의류, 신발, 식품류(올리브 기름, 포도주, 과일, 토마토 등)가 포함된다.
이탈리아는 양원제를 가진 공화국이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 수반은 수상이다.
이탈리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왔다. BC 9세기에 에트루리아 문명이 꽃피었으나, 로마인들을 BC 3~4세기에 그들을 몰아내고 로마 공화정을 세웠다. AD 4~5세기에는 이민족이 침략하여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 이탈리아의 정치적 분열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유럽 문화에 대한 영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고,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럽 예술 발전의 전진기지로 자리하였다.
15~18세기 이탈리아 영토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오스트리아에 의한 지배를 받았다. 나폴레옹의 점령이 1815년으로 종말을 맞았을 때, 이탈리아는 또 다시 여러 군소 독립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 이탈리아 통합운동)는 이탈리아 대부분의 영토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1861년까지 시칠리와 사르데냐를 통합하였고, 1870년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사회적 불안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을 낳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1943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1946년에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 후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와 유럽 공동체(European Community/EU)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70년대 이탈리아는 제한적 자치권을 갖기는 하지만, 입법기능과 과세권을 갖는 지방자치제도를 완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련의 정치적 격변들을 겪었지만, 사회적 안정을 유지했다.
다음백과
◆이탈리아 이야기
◇2015-04-18 로마 개선장군에게 황제가 외치게 한 말은?
로마인의 지혜
The Wisdom of Rome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는 수많은 로마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시내로 입성하는 것이 관례였다
인류의 역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하는데, 그 기준은 문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자 발명 이전을 선사시대(prehistoric period), 이후를 역사시대(historic period)로 부르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 다양한 설이 있지만, 역사시대를 대체로 3,617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268년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든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역사 =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900여 회 이상의 외침을 받아 온 우리나라 반만년의 역사는 그야말로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역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고 과시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돈일까요? 어떤 사람이 수조 원의 돈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걸 들고 다니며 자랑할 수 있을까요? 못하지요. 그러면 명예일까요? 그건 오래가지 못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자기를 떠받들 때 인간은 “아,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하는 착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공을 세워 영웅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를 치켜세우는 말에는 솔깃하지만 쓴 소리에는 귀를 막게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동서고금을 통털어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장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몽고의 징기스칸, 조선시대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 영국의 넬슨 제독, 프랑스의 나폴레옹, 제2차 세계대전의 몽고메리 장군, 니미츠 제독, 맥아더 장군과 같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은 로마에 입성하여 수많은 로마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마차를 타고 황제가 있는 곳까지 행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개선장군이 탄 마차 옆자리에 한 사람을 태워서 황제에게 한 마디를 계속 외치게 하면서 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말을 외치게 했을까요? “당신은 위대한 장군입니다.”, “당신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이 장군에게 계속 외쳤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Remember, you are a mortal!”
“당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기억하시오!”라는 의미입니다.
▲마케도니아 해군과의 해전에서 승리한 로마의 아리우스 집정관이 벤허와 함께 로마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말을 부하가 아닌 전쟁 노예가 외치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부하 장교도 아닌 전쟁 노예의 입을 통해서 이 말을 하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장군, 전쟁에 한 번 이겼다고 해서 교만하지 마시오.”라는 교훈을 개선장군에게 심어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참으로 로마인의 지혜가 돋보이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말은 2015년 4월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금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지혜(wisdom)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한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자신에게 말대꾸를 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
- Harry S. Truman -
글 | 조덕현 칼럼니스트
◇2015-06-16 로마 콜로세움 역사의 진실은
콜로세움의 어원은 콜로소(Colosso)다. 콜로소는 콜로세움 앞에 있던 네로 황제의 동상 이름이다. ‘거대한’이라는 뜻이다. 콜로소라는 단어가 세월 속에 변형되면서 콜로세움이 됐다.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제국의 상징이다. 콜로세움식 원형극장은 북아프리카 식민지에도, 소아시아 지역 식민지에도 있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해 80년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다. 긴 지름이 187m, 짧은 지름이 155m인 타원형 4층 건물이다. 건물에는 아치형 문 80개가 있다. 동선을 정교하게 설계해 정원 5만명이 입장하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높이는 48m다.
주로 열리는 공연은 검투였다. 노예, 전쟁포로 가운데 싸움을 제법 하는 사람들을 뽑아 결투를 시켰다. 맹수들과 대결도 벌였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었다. 살리기도 했다.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하늘로 향하면 살았고 땅을 향하면 죽었다. 검투가 끝나면 특별 공연이 벌어졌다. 땅에서 수조가 올라와 물이 가득 차고, 이번에는 해전(海戰)이 벌어졌다. 그 경기장을 아레나(Arena)라고 한다.
로마가 망하고 콜로세움은 교회로 사용됐다가 요새로 이용되기도 했다. 지진에 부서지기도 했고 건축 석재를 도난당하기도 했다. 아예 채석장이 아레나에 설치되기도 했다. 서기 1744년 베네딕트 교황 14세는 콜로세움에서 순교한 기독교도들을 추모하고, 콜로세움을 성역화했다. 그런데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가 죽었다는 기록은 극히 드물다. 위풍당당한 건축물의 위용과 검투사의 역사가 오버랩되면서 만들어진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로마 하면 떠오르는 게 콜로세움이다. 입장하려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야 한다. 줄이 무척 길다. 오뉴월 땡볕에 그 줄을 기다리는 거, 고역이다. 그래도 고역을 감수할 가치는 있다. 삼양옵틱스 14mm f2.8 ED AS IF UMC, 셔터스피드=1/50초, 조리개=f11, 감도=ISO125. 2015년 4월 촬영
출처 | 주간조선 2360호 박종인 조선일보 여행전문 기자
◇콜로세움...2천년 전에 어떻게 세웠을까?
동양(아시아)은 언제부터 서양에 밀리기 시작했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가졌던 의문이다. 왜 동양은 열등한가? 동양이 서양에 밀리기 시작한 시기는 대개 르네상스부터라고 보는 게 정설이다. 르네상스로 활력을 찾은 유럽이 콜럼부스 이래로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아시아는 유럽의 밥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땠는가? 중국의 당·송 문명은 대단하다. 유럽에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에 가서 직접 현장을 보니까 필자가 그동안 지녀왔던 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르네상스 이전의 고대문명에서도 유럽이 이미 앞서지 않았나 싶다. 그 증거가 모두 로마에 있다. 오늘날 서양문명의 기본 틀은 로마다. 로마가 퍼져 나가서 오늘날 서양문명이 됐다. 유럽의 범위도 로마법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까지를 유럽으로 본다. 로마법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지역은 유럽의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 그리스에서는 극장이 반달 모양인 반면 로마에서는 보름달 모양으로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 로마의 트레비분수에는 언제나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붐빈다.
로마에 들어서니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은 역시 콜로세움이다. 문명의 깊이를 보여 주는 물적인 증거는 건축물이다. 건축이 남는다. 후대에 보여 주어야 믿을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건축은 문명의 총화이다. 콜로세움은 그 높이와 규모가 상식을 뛰어 넘는다. 2,000년 전에 어떻게 이러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아파트 10층 정도의 높이에 원형으로 돌계단을 빙 둘러쌓았다.
로마문명, 즉 서양문명의 특징은 석조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목조가 주종을 이룬다. 로마는 석조다. 누가 오래 남는가? 돌이다. 목조는 불에 타 없어져 버리니까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아방궁도 없어져 버렸지 않은가? 이 정도 높이와 넓이의 석조 경기장을 세우려면 우선 수학이 발달해야 한다. 수학적 뒷받침 없이는 이렇게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다. 수학하면 역시 기하학이다. 피타고라스 이래로 기하학의 발달이 로마 석조건축에 모두 바탕이 됐다. 중국에도 ‘구장산술’이라 하는 고등수학이 있었지만 이게 실전 건축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석조 건축의 위대함은 희랍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이 남김없이 보여 준다. 언덕 위에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앙천혈’(獅子仰天穴)의 명당자리에 지은 건물이 파르테논신전인데, 로마의 콜로세움은 이 파르테논보다 한 술 더 뜬 건축이다. 높이와 규모에서 그렇다. 희랍은 극장건축이 특징이다. 곳곳에 극장이 있었다. 물론 극장은 신전의 일부분이었다. 종교적 집회를 위해서 극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극장은 반달 모양이다. 콜로세움은 보름달처럼 원형이다. 반달에서 보름달로 진화한 셈이다. 희랍문명이 반달이었다면 로마는 보름달이었다고나 할까.
희랍의 극장은 대중이 모이는 공간이다. 대중집회에서는 오락이 필요하다. 연극, 음악 공연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종교지도자 또는 정치지도자의 연설이 있었을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주는 역할이 극장의 역할이다. 마음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는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극장이다. 콜로세움은 이 극장의 역할을 포함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갔다. 살생이다. 사자, 표범 같은 맹수들과 인간이 싸우는 경지를 새로 포함시켰던 것이다. 검투사끼리의 경기도 포함시켰다. 희랍의 극장에는 없었던 종목이다. 피를 보는 것이다. 로마는 전쟁국가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려면 피에 익숙해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살생을 일상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잔인한 검투사 경기를 운영한 것 같다. 칼로 싸우다 피를 흘리며 죽는 삶을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죽음의 축제’가 검투사 시합이다. 이 점이 동양과 다른 점이다. 동양문명에서 이처럼 잔인하게 죽음을 경기로 보여 주는 문화는 없었다. 공격성과 잔인도로 보면 로마는 대단했다.
▲ 로마 성당의 웅장한 모습.
▲ 동양학으로 본 서양문명 행사에 참가한 한 여성이 로마의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보고 있다.
극장도 희랍의 반달에서 보름달로 진화
중국의 한(漢)대 이후부터는 공자의 유교적 가르침이 보편화됐다. 논어의 핵심도 인(仁)이다. 물론 전쟁도 하고 권력투쟁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인(仁)을 내세웠기 때문에 수만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검투사 경기를 하는 발상은 할 수 없었다. 로마는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진보된 전쟁국가였던 것이다. 콜로세움이 상징하는 바는 살생 오락, 집회, 전쟁의지 고취, 여론수렴이다. 볼거리를 제공해 여론을 수렴하고 동시에 통합하는 공간으로 콜로세움의 의미가 있다. 이 부분이 동양과 다른 것 같다. 여론수렴을 하는 건축적 공간을 중시했다는 점. 이 점이 서양 사회제도의 특징이다. 동양에는 이 부분이 없었던 것 같다.
서양과 동양이 다른 점이 있다면 집터에 대한 것이다. 서양은 언덕 위의 높은 자리를 선호한다. 기왕이면 높은 지대에 있는 주택일수록 고급주택에 속한다.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한국은 높은 지대를 선호하지 않는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집터를 잡는다. 물론 불교 사찰이나 도교의 도관들은 산 위에 있지만, 일반 주택이나 또는 궁궐, 공적인 건물의 터를 높은 곳에 잡지 않는 전통이 있다.
로마는 수도시설 직접 조성… 동양은 물 나오는 곳 찾아
필자는 언제부터 서양이 높은 지대를 선호하게 되었는지 관심이 많았다. 로마 시내의 정치 발원지는 7개의 언덕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 일대이다. 이 언덕 7군데에 로마의 귀족들이 살았다. 직접 이 언덕들을 보니까 매우 작으면서도 비교적 낮은 언덕들이었다. 해발 100m나 될까. 서울의 성북동 언덕들보다 훨씬 작고 낮은 그야말로 뒷동산 정도의 언덕들이었다. 성북동은 여기에 비하면 엄청난 크기의 산악지형이다. 로마 초창기부터 귀족들은 이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왜 언덕 위를 선호하였나? 언덕 아래쪽은 습기가 차고 하수구 냄새도 나고 모기를 비롯한 각종 해충들이 많았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시원하고 냄새도 덜 나고 모기도 적었다. 당연히 위로 올라갈 수밖에. 올라갈수록 쾌적한 공간이 된다. 문제는 상하수도 시설이다. 언덕 위로 가면 식수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고지대는 물이 문제다.
▲ 고대 로마의 건물들은 어디든 고지대에 지어져 있고, 도로도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고지대에 물이 샘솟는 곳을 중요시했다. 여기에 절터를 잡거나 또는 고대에 산성(山城) 터를 잡았다.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이자 산성인 오녀산성도 꼭대기에 샘물이 나온다. 산 위에서 물이 나오는 형국을 주역에서는 수화기제(水火旣濟)라고 표현한다. 매우 상서로운 징조로 본다. 백두산, 한라산이 모두 수화기제이다. 강원도 태백산이 중간지점쯤에 황지(黃池)가 있어서 수화기제에 해당하므로 성산으로 여겼던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서안 옆의 태백산도 산 정상 부근에 조그만 자연 호수가 있다. 중앙아시아 톈산(天山)의 이시쿨호수도 1,800m 지점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 이시쿨호수 옆에 자리 잡았던 도시가 바로 우리 고대사에서 중시하는 신시(神市) 아닌가! 경상도 경주의 양동마을은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양반촌이다. 우리나라에서 양동마을처럼 언덕 위에 양반들이 주택 터를 잡고 산 경우는 드물다. 물 문제가 있어서 우리나라 양반들은 위로 가는 것을 꺼렸다. 양동도 역시 이 물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하인들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날랐다. 언덕 위에 우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노비들이 물을 공급했기 때문에 양동마을의 양반들이 살 수 있었다.
로마는 언덕 위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에 집중했다. 로마의 위대함은 바로 이 상하수도 시설에 있다고 본다. 저지대의 물을 고지대로 끌어 올리는 수도(水道)의 개발과 유지에 많은 투자를 했다. 수로는 물론 석조와 벽돌로 이루어졌다. 고지대로 물을 끌어 올리는 장치를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덕 위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 인프라는 이 수로가 최고다.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야말로 대도시 수십만 인구가 밀집해서 살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이자, 로마 문명의 위대함이다. 사실 따지고 들어가면 희랍의 코린트 지역에 가 보아도 상하수도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문명 이전부터 희랍에서 이미 상하수도 시설에 집중해 왔지만, 로마에 들어와서 좀더 대규모로 보편화됐다. 로마 인근의 작은 고가도로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는 다리들이 보이는데, 이게 로마시대에 설치되었던 수로 시설인 것이다. 동양에는 이 시설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물이 공급되지 않는 고지대를 주택지로서 선호하지 않았다. 이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의 지방 도시들을 가보아도 마찬가지이다.
▲ 로마의 유적은 아직도 곳곳에서 발굴 중이다. 그래서 로마를 세계의 열린 박물관이라 부른다
▲ 로마 문명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고지대에 집을 짓고 상하수도는 직접 건립해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전쟁 시 방어에 유리하다. 요새처럼 절벽을 끼고 있는 산들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방 영주들의 본거지이자 독립된 도시들이었다. 이탈리아 전체에 이러한 독립적인 도시들이 약 4,000개에 이른다. 평지 벌판보다는 대부분 평지 위에 솟은 산에 올라가 살았다. 모두 산꼭대기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상하수도 시설들이었다. 로마는 물을 다룰 줄 알았던 것이다. ‘治’라는 글자를 풀이하면 물(氵)을 언덕(台)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광경이다. 통치자의 통치 행위는 물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양의 물 관리가 홍수를 관리하는 데에 집중되었다면, 로마의 물 관리는 홍수가 아니라 상하수도 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홍수는 농사를 위해서이지만, 상하수도는 도시 거주민들의 쾌적함이다. 물 관리의 용도가 다르다. 현대인에게 훨씬 어필하는 점은 상하수도 시설이다.
▲ 로마의 건축물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로마 대웅전이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로마의 건축물은 대부분 고지대에 지어져, 상하수도 시설을 직접 조성해서 물을 해결했다.
문명은 길에서 형성… 로마의 넓고 견고한 길이 놀라워
로마문명을 논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 도로다. 아피아 가도를 보면 반듯한 차돌들이 깔려 있어서 지금도 튼튼하다. 그 견고함에 놀라울 뿐이다. 2,000년을 버텼으니 말이다. 조선은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다. 겨우 파발마가 다니는 좁은 길이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할이 산으로 되어 있는 탓도 있다. 외적이 침입하면 방어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문명국가는 길에서 형성된다.
제대로 된 고속도로를 2,000년 전부터 깔아 놓았다는 것은 아시아 고대국가에서 발견할 수 없다. 문명의 위대함은 하드웨어를 통해서 후대인들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다. 로마 문명은 콜로세움, 상하수도 시설, 그리고 도로이다. 이 3가지 요소는 지금도 어필한다. 동양 고대문명이 약했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조용헌 칼럼니스트·동양학자
◇풍수로 풀어본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역사
화기와 수기’ 동양풍수 균형 갖춘 피렌체, 르네상스 주도
베네치아는 르네상스 이전부터 이미 번성해서 해상제국을 이루었던 제국이었지만,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주역이라는 점에서 두 도시는 다르다.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피렌체는 육지의 내륙에서 번성했다. 동양의 풍수에서 볼 때 바다는 밖으로 기운이 퍼지는 작용을 하고, 내륙인 피렌체는 기운을 가운데로 모아 주는 지세이다. 더군다나 피렌체가 있는 이탈리아의 중부 지역 일대 토스카나 지방은 들판이 넓다. 곡창지대라고 할 수 있다. 먹을 것이 풍부한 복 받은 지역이었다.
▲ 동양학적으로 보면 아름다운 미녀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지세인 옥녀탄금형에 해당하는 소렌토의 아늑한 지형이 안정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문화는 식후사(食後事)다. 밥 먹고 난 이후다. 밥 못 먹으면 문화는 없다. 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치스러워져야 문화가 발달한다. 피렌체의 지세는 곡물 생산이 풍부한 평야지대였다는 점이 문화의 기반이 된 것 같았다. 더군다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세가 피렌체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도읍지의 조건을 갖췄다. 보통 동서남북인 자오묘유(子午卯酉) 방향이나 그 사이에 해당하는 인신사해(寅申巳亥) 방향에 산이 포진하고 있으면 군왕이 도읍지를 정할 만한 터라고 본다. 그 안에 넓은 평지가 있으면서 사방에 산이 포진하고 있으면 동양에서는 수도가 들어설 만한 도읍지의 풍수라고 봤다. 경주가 이런 산세이고, 개성, 평양, 전주가 그렇다.
피렌체는 천재들을 후원하고 키워냈다
거기에다가 피렌체 주변 산세에는 악살(岳殺)이 보이지 않는다. 악살은 험난한 바위산이다. 편안한 토산(土山)들이다. 악살은 종교적 영성을 개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기운이 강해서 편안한 기운을 주지는 않는다. 피렌체 중심에는 아르노강이 흐른다. 아르노강이 없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반드시 강물이 흘러야 도읍지가 성립된다. 북경은 큰 강물이 없이 성립된 대도시라 문제가 있다. 주변의 산세와 강물, 장풍득수(藏風得水)를 갖춘 터가 피렌체였다. 도시에 들어서서 드는 느낌은 안정감이었다. 급박한 느낌이 없었다. 오래된 도시에서 풍기는 느낌이 왠지 모를 안정감이다. 화기와 수기가 균형을 갖춘 도시에서 생태적인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문화가 꽃피운다.
▲ 1 폼페이의 베수비오산과 앞쪽 바다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준다.
베네치아는 바닷물에서 오는 짠 기운, 즉 염기(鹽氣)가 많아서 인간의 섬세한 감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소금에서 오는 염기는 신장(腎臟)의 수기를 보충해 줘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해주는 이로운 작용도 있지만, 지나치면 사람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바닷가에 살면 강건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거칠게 만들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에너지가 고갈된 사람은 일정기간 바닷가에 사는 게 좋다. 하지만 장기간 거주하는 것은 체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 2 높지도 낮지도 않은 피렌체는 주변 산세와 중앙에 흐르는 강으로 도읍지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도시다. 3 피사의 사탑 주변에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는 가운데 혜초여행사 윤익희 이사가 사진 속에서 넘어지는 피사의 사탑을 받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내륙인 피렌체는 동양적인 풍수의 입지조건에 부합되는 곳이었다. 베네치아는 단결을 위해서 잘 난 인물들을 경계하는 문화였지만, 피렌체는 인물과 천재들을 후원하고 키워냈다. 각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메디치가에서 후원했던 인물들이 다빈치이고, 미켈란젤로 아닌가. 그리고 이 피렌체를 대표하던 집안이 메디치 가문이고, 이 메디치 가문은 경주의 최부자집과 같은 집안이다. 최부자집은 원래 양반이었지만 메디치 가문은 장사를 하던 상인집안이다. 귀족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상인이 지배하는 사회로 넘어가는 단초를 제공한 집안인 것이다. 유럽에서 상인이 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리드해 나간 경우가 메디치 가문이고, 이 상인계급이 성취해 낸 결과가 르네상스 아닌가. 상인이 문화의 주도권을 쥐게 된 도덕적인 배경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깔려 있었다. 주역(周易)의 문구대로 표현하자면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다. 적선을 한 집안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 메디치 가문이 적선을 해서 발생한 경사가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가 같은 상인계급이 주도권을 쥐었던 베네치아가 아니고, 피렌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는 풍수적 관점에서 내륙의 섬세한 기운이 바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바다에서 섬세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다는 진취성이고, 내륙은 섬세한 예술혼의 토양이다. 피렌체를 보고 동양의 도읍지와 그 풍수조건이 완전히 같다는 데에 놀랐다.
나폴리! 이탈리아 반도는 남쪽으로 내려가니까 지세가 달라졌다. 중부지역보다 산세가 가팔라지는 것이다. 높은 산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도 바위가 돌출되어 있는 악산(嶽山)들이다. 이런 바위산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탈리아 중부보다는 남쪽에서 훨씬 강골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한다. 현지 가이드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탈리아는 남부지역에서 장군들이나 강성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를 통일한 가리발디 장군도 남쪽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역사에서 마피아가 등장한 이후 역대 마피아의 보스들이 태어난 지역도 역시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지역이다. 독재자 무솔리니도 남쪽 출신 아닌가?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폴리 쪽 조금 못미처 바위산이 하나 보인다. 산세가 힘이 있고, 앞에도 안산(案山)이 받쳐 주고 있어서 기도발이 있어 보이는 산이다. 안산이 없으면 기운이 샌다. 기운을 못 빠져 나가게 모아 주는 역할은 안산이 한다. 한국 같으면 저런 산 7부 능선쯤에 절이 들어설 지세였고, 그 절에서 고승이 많이 배출되는 풍수다.
“저게 무슨 산이요? 영발(靈發) 있어 보이는데요?”
“저 산 정상 부근에 건물이 하나 보이죠? 그게 유명한 베네딕트수도원입니다. 얼마 전에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소개된 유명한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멀리서 눈짐작으로 볼 때 대략 1,000m급의 산으로 보인다. 그 주변 일대에서 가장 지세가 좋고, 기운이 뭉쳐 있는 곳이다. 베네딕트수도원은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수도원이다. 침묵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이런 위치에 어떻게 수도원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이탈리아 사람들도 풍수를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기도를 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것일까?
폼페이는 베수비오산의 정기 받는 도시
▲ 4 베수비오산의 화산폭발로 폐허가 된 폼페이 유적을 참가자들이 둘러보고 있다. 5 폼페이 유적 현장에서 현지 가이드가 참가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풍수는 동양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정신세계에 들어가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알고, 느끼게 되는 것이 그 터에서 품어져 나오는 신성한 기운일 것이다. 지기(地氣)를 서양 사람들은 ‘가이아’(地母神)라고 표현했다. ‘가이아’는 지령(地靈)을 서양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양도 동양과 똑같이 알고 있었다. 단지 기독교가 로마 이래로 서양문명을 통일한 뒤에는 이러한 ‘지령’이나 ‘가이아’와 같은 개념들이 지하로 잠복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일신교(一神敎)의 통일성을 헷갈리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 베수비오산 화산폭발로 사체로 굳은 당시 모습이 발굴 현장에서 발견돼,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2 베수비오산 화산폭발로 당시 마차 다니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탈리아 남부 높은 산세에서 나오는 지령이 종교적으로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도인(道人)들을 양성하는 쪽으로도 작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위에서 나오는 강력한 기운들은 마피아를 양성하는 쪽으로도 흘러갔다. 나폴리 일대는 마피아의 본고장이다. 기운이 센 지역은 장군 아니면 조폭, 아니면 도인이 나온다. 가방끈이 길면 장군이 되고, 짧으면 조폭 ‘오야붕’이 된다.
필자는 버스로 이동하면서 현지 가이드를 귀찮게 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 이름을 계속 물어보기 때문이다. “저산은 무슨 산이요, 저 산 밑에 있는 수도원은 어떤 수도원이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또 물었다.
“마피아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요?”
“‘불쌍한 내 딸’이라는 뜻입니다. 남부 지역은 고대부터 외세의 침입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침략자들이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 들어와 젊은 여자들과 딸들을 겁탈했죠. 겁탈 당하는 딸들을 보면서 그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르짖었던 절규가 바로 ‘마피아’라는 단어였습니다. ‘불쌍한 내 딸아!’라고 절규했던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생겨난 무장조직이 마피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피아는 자기를 지키고, 딸들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이웃을 지키기 위한 자위대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기 스스로 안 지키면 누가 지켜줄 것인가? 믿을 데는 자기밖에 없고, 그러자니 주변 동지들과 피를 나누는 맹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는 수백 년간 이 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정부 공권력을 대신해서 마피아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 마피아를 때려 부순 인물이 독재자 무솔리니라고 한다.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으면서 마피아 소탕 작업에 들어갔다. 마피아들이 무솔리니에게 쫓겨나면서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미국으로 탈출했던 장소가 바로 산타루치아 부두였다. 미국으로 가는 배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나폴리 해안의 항구가 산타루치아다. 노래 ‘산타루치아’는 마피아가 정든 고향땅을 떠나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려나! 마피아의 노래가 산타루치아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인간사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감미롭고 낭만적인 노래가 바로 조폭집단인 마피아 고향 노래라니 말이다.
▲ 3 폼페이 당시의 원형극장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둘러보고 있다.
나폴리는 그 지세가 유(U)자 형태의 커다란 만(灣)이다. U자의 가운데 지점에 있는 산이 베수비오산이다. 나폴리 일대의 진산(鎭山)이다. 이 산이 2,000년 전에 화산폭발을 일으켰다는 것 아닌가. 나폴리에서 인물이 나온다면 이 베수비오산의 정기를 받고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 베수비오산이 잘 보이는 곳에 고대인들은 도시를 지었다고 보인다. 그 도시가 폼페이다. 폼페이는 베수비오산의 정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택한 지점이다. 화산재에 그동안 덮여 있었기 때문에 2,000년 전의 주택 내부 구조와 도로, 여러 가지 도시 시설들을 타임캡슐처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도로에는 돌들이 깔려 있고, 주택 구조들은 오늘날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발전된 구조였다. 2,000년 전에 서양 문명이 이런 수준에 도달해 있었단 말인가?
나는 폼페이의 유적을 보고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동양문명 우월론’이 흔들렸다. 2,000년 전에 이런 정도의 도시 규모와 시설, 그리고 정밀한 도시계획을 할 정도의 문명이라면 정신세계와 문화에 대해서도 그만큼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수준을 후세에 알릴 수 있는 수단을 크게 보면 ‘건축’과 ‘미술’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미술 수준을 후세에 알려 주고 있고, 폼페이는 건축 수준을 알려 주는 유물이다. 폼페이는 베수비오산이 병 주고 약 주는 산이었던 것이다. 모든 영적인 재능과 창의력도 베수비오의 화기(火氣)에서 왔고, 비극적인 재앙도 베수비오의 화기 폭발에서 왔으니까 말이다.
소렌토는 ‘옥녀탄금’(玉女彈琴) 지세
폼페이 유적을 둘러보고 버스로 1시간쯤 이동해 가니까 휴양지로 유명한 아말피해안이 나타난다. 해안절벽에 도로를 내고 별장들을 지었다. 아말피에서 소렌토까지의 해안 절벽에 낸 도로의 길이는 20km 정도. 날씨는 온화하고 바다는 푸르고, 해산물은 맛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온 서양 문명의 풍요를 체감할 수 있는 풍광이다.
‘인간은 이런 풍광을 보면서 살아야지 제대로 사는 것이구나!’ 느꼈다. 소렌토는 특별했다. 평소 자주 들었던 이탈리아 노래가 ‘돌아오라 소렌토로’ 아닌가. 왜 돌아오라고 했는가를 보여 주는 아름답고 풍요롭고, 삶의 모든 긴장을 풀어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소렌토의 지세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옥녀탄금’(玉女彈琴)이다. 아름다운 미녀(옥녀)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지세였던 것이다. 소렌토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보니까 옥녀가 머리를 잘 감아올리고 비녀를 꽂고 있는 형상이다. 약간 둥그런 형태다. 바위 봉우리인데 바가지처럼 둥그런 형태를 발한다. 이런 봉우리를 풍수에서 옥녀봉이라고 부른다. 현지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해안가 절벽에서 멈췄다. 해안가의 깎아지른 절벽이 또한 절경이었는데, 이 해안절벽은 가야금에 해당했다. 옥녀가 무릎에 가야금을 놓고 연주하는 형국이 전체 소렌토의 모습이다. 소렌토는 옥녀가 산신령이니까 여신이 주재한다. 기독교에서는 마리아라고 나타날 것이다. 불교라면 관세음보살일 것이고. 그리스 신화에 보면 사이렌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나가던 뱃사람들을 홀리던 사이렌이 바로 이 소렌토 절벽에 살았을 것이다. 사이렌이 소렌토로 변했다고 한다. 옥녀가 연주하던 가야금 소리를 듣고 뱃사람들이 헷갈렸던 것이다.
글 | 조용헌
◇2016.08.06 피렌체의 르네상스와 메디치 효과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회화·조각·건축 등 르네상스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꽃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아름답다. 14~16세기에 걸쳐 일어난 세계 최고의 문예부흥 운동, ‘르네상스’. 그런데 왜 하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피렌체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을까.
1200년대 후반 이탈리아 반도는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 그리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나폴리 왕국과 밀라노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고 피렌체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반면 베네치아는 이 둘 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다시 말해 밀라노나 베네치아에서는 총독이나 황제가 주교를 임명해 종교와 세속 정치가 한 몸으로 통일됐었지만 피렌체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대신 성직자와 상인(나라를 통치하는 새로운 세력) 간에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을 다른 도시보다 경쟁적으로 먼저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르네상스는 나중에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말이다.
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고대 로마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했다. 전 유럽에 흩어져 있던 황금이 피렌체로 들어오면서 1300년 초반부터 피렌체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양모무역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피렌체 상인들은 오래전에 지어져 낡은 수도원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낌없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이들의 관심사는 바로 사후 세계에 있었다. 현세에서 모든 걸 이룬 부자 상인들은 죽을때 수도원 지하에 묻혀있는 수호성인들의 유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안장되기를 바랐는데 이 성인들이 최후의 심판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해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다빈치·마키아벨리 지원한 메디치家
예술가·학자들 아이디어 종합해
'대박'
한편 재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원이나 성당에서도 당시 성직자에게만 허용했던 묘지를 평신도인 부자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기 시작했고 그 보답으로 상인들에게 묘지 안쪽 기도실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수도원과 성당 벽면은 하나씩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부자 상인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또 수도원은 예술품들로 채워지면서 변화된 이 공간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신앙심을 견고히 다질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상인과 성직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르네상스 예술은 봄을 맞아 활짝 피어올랐다. 더욱이 주문이 몰리는 화가들은 공방을 운영하는 등 예술분야에서도 경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경쟁이다. 베네치아가 정치와 종교가 한 몸인 탓에 갈등도, 경쟁도 없이 신을 향한 예술품을 계속 만들면서 아직 중세시대의 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피렌체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갈등을 해결해 나가면서 경쟁을 통해 예술의 발전을 이뤄냈다.
한편 수도원의 돈줄을 쥐고 있던 상인들의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초기에만 해도 기도실에 장식할 그림의 주제는 교회가 정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작품 제작비용을 대는 상인 스스로 작품의 주제를 정하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르네상스의 기본 개념인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 즉 나에게로 중심이 옮겨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는 대목임을 알 수 있다. 조토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조토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에 남긴‘프란체스코의 생애’연작 28점 중‘재물의 포기’라는 작품이다.아시시에서는 왼쪽처럼 그려졌던 작품이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바르디 기도실에서는 오른쪽처럼 변했다.
조토가 1290~95년에 걸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에 남긴 ‘프란체스코의 생애’ 연작 28점 중에서 ‘재물의 포기’라는 작품이다. 아시시에서는 그림 왼쪽처럼 그려졌던 작품이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바르디 기도실에서는 그림 오른쪽처럼 변했다. 그림 주문자인 바르디 가문 사람들의 모습이 작품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교회도 신에서 개인으로 변하는 관점을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바르디 가문을 예로 들었지만 피렌체 르네상스 예술에서 메디치 가문을 빼 놓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안 된다. 메디치 가문이 바르디 가문보다 좀 더 깊숙이 예술 분야에 파고들어 예술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분야 인물들 교류 도운 메디치家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최대의 상인이자 노련한 정치가)’ 때부터 4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고 300년 동안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이탈리아 아니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나아가 상업·정치·종교 전반에 걸쳐 피렌체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 과학자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인물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메디치 가문은 인문주의자, 음악가, 화가 등 전혀 분야가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교류하게 해 그들의 젊은 감각에서 나오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조합, 결국에는 새로움을 창출해냈다.
예를 들면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해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는 천문항법을 발견한 후, 이 방법을 응용해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것과 같은 창조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대박의 효과’를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 ‘메디치 효과’라고 부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기업들이 이를 창출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르네상스뿐 아니라 18세기 산업혁명, 20세기에는 정보화 혁명으로 거듭난 메디치 효과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로 창의적인 인재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이 인재들을 후원하는 그룹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때에는 시민이라는 창의적인 인물들이 있었고 기술, 과학이라는 후원그룹이 있었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되는 메디치 효과가 나타났다. 20세기 실리콘 밸리에서도 창의적인 인재와 자본의 후원그룹이 만나서 이룩한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우리 개인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메디치 효과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요즘은 일생에 직업을 3번쯤은 바꿔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면 그 순간부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대신, 그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냉정을 유지해야 인생의 ‘메디치 효과’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인생의 르네상스는 언제쯤 다시 오게 될까.
박현주 엔터엠 대표
◇피렌체기행 - 마키아벨리와 단테의 발자취를 찾아서
⊙ 베키오 다리 근처 마키아벨리의 생가는 2차대전 때 파괴되고 들보만 남아
⊙ ‘단테의 집’ 앞에는 단테처럼 꾸민 사내가 《신곡》 낭송
⊙ 마키아벨리의 묘가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등도
함께 묻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전경. 왼쪽 탑이 있는 건물이 베키오궁,
가운데가 두오모(산타마리아델피오레 성당), 오른쪽에 탑이 있는 건물이 산타크로체 성당이다.
15세기 피렌체의 인문주의자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는 《피렌체 찬가》에서 이렇게 피렌체를 찬양했다.
“피렌체는 산악지대의 해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평원지대의 위험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두 곳의 환경적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곳의 기후는 온화하고 상쾌합니다. 피에솔레 지역에 자리 잡은 산맥이 마치 이 도시의 성채처럼 북쪽으로 우뚝 솟아 있어, 차갑고 저돌적이며 매서운 북녘 바람의 어마어마한 힘을 막아 냅니다. 한편 바람의 힘이 약한 동쪽 지역에는 좀 더 낮은 언덕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방향으로는, 넓은 평야가 태양과 남녘의 미풍을 받으며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렌체에는 늘 평온함과 상쾌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그의 말 그대로다. 아르노강 건너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 시가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붉은 지붕의 건물들 사이로 피렌체의 상징 베키오 다리와 두오모,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재회했던 트리니티 다리, 베키오궁전, 산타크로체 성당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는 그리 높지 않은 산과 언덕, 초장(草場)들이 이어지고 있다.
브루니의 피렌체 예찬은 끝이 없다. 이런 천혜의 지리에 걸맞게 “피렌체야말로 최고의 원리에 따라 창조된 도시”이며 “피렌체인이 지닌 천부적인 능력, 사리 분별력, 우아함, 고귀함은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비교될 수 없다”고 브루니는 노래한다.
브루니의 말은 반(半)은 맞고 반은 틀린다. 피렌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조토, 알베르티, 브루넬레스코 등 르네상스를 이끈 천재들을 배출하거나, 그들에게 활동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 피렌체의 실권자 코시모 데 메디치(1380~1464), 로렌초 데 메디치(1339~1492) 등은 치자(治者)의 사리 분별력, 우아함, 고귀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하지만 피렌체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브루니의 예찬과는 달리 피렌체에도 그늘이 있었다. 정치적 음모와 억압, 당파와 계층 간의 갈등, 선동에 흔들리는 우중(愚衆)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피렌체는 자유로운 시민(길드를 중심으로 한 ‘가진 자’들이기는 했지만)들의 공화국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예들이 세습군주로 군림하는 토스카나대공국으로 변모했다. 단테 알레기에리(1265~1321)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이러한 현실을 처절하게 고민했던 지식인이었다.
들보만 남은 마키아벨리 생가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생가. 위의 들보에는 마키아벨리의 생가에 있던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미켈란젤로 광장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벨베데레(Belvedere)요새를 지나면 토스카나대공국시대에 대공(大公)들의 거성(居城)이었던 피티궁전이 나온다.
피티궁전 앞 거리 이름은 구이차르디니 거리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1483~1540)의 이름에서 따온 거리다. 피티궁전 바로 옆에 구이차르디니의 저택이 있다. 구이차르디니도 마키아벨리처럼 냉철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근대 정치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당대에는 귀족 출신 고관이었던 구이차르디니쪽이 훨씬 명성이 높았지만, 오늘날에는 일부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를 제외하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구이차르디니의 저택 앞에는 젤라토(이탈리아 아이스크림), 가죽 제품,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지다가 문이 없이 뻥 뚫린 입구가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도자기를 파는 상점들이 있다. 이곳이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 바로 마키아벨리의 생가 자리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작가 주세페 프레촐리니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눈을 뜨고 태어났다”고 한다. 후일 도덕과 종교라는 잣대를 떠나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인간의 본성을 적확(的確)하게 들여다본 사람답다.
입구 위쪽에 얹혀 있는 오래된 들보에는 “이 들보는 1944년의 파괴 직후에 발견된 것으로서 마키아벨리의 집에 사용되었던 것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마키아벨리의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이던 1944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 와중에 파괴되었다. 이곳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표는 달성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마키아벨리의 집에서 1분 정도 걸으면 베키오 다리가 나온다. 2층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다리로 피렌체의 상징 중 하나다. 마키아벨리의 시대에는 푸줏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지만, 오늘날에는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금은방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 다리에서 서쪽으로 산타트리니타 다리가 보인다. 단테가 그의 영원한 연인(戀人) 베아트리체와 재회했던 다리다.
사보나롤라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사보나롤라가 화형된 곳에 설치된 표지. 사보나롤라는 1494년부터 4년간 신정정치를 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시뇨리아 광장이다. 광장 한쪽에는 중세 이래 피렌체의 정부청사였던 베키오궁전이 있다.
광장 한복판에는 표지석이 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가 화형(火刑)을 당한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페라라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정권 치하에서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으면서 신(神)으로부터 멀어진 피렌체인들에게 ‘신의 징벌’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던 인물이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사보나롤라는 이를 ‘신의 채찍’이라면서 자신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주장했다.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은 후 리더십의 공백을 겪고 있던 피렌체 시민들은 이 ‘예언자’에게 맥없이 투항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 정권이 무너지고 사보나롤라가 조종하는 신정(神政) 체제가 수립됐다. ‘피렌체의 호메이니’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면서 ‘적폐(積弊)청산’을 부르짖었다. 화려한 사치품들과 르네상스의 정신을 담은 예술품들이 불에 탔다. 화가 보티첼리도 자신이 그린 비(非)기독교적 주제의 작품들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던졌다.
▲베키오궁과 시뇨리아 광장. 중세 이래 피렌체 정치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인간은 회개하고 절제하는 경건한 삶을 그리 오래 이어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1498년 4월 사보나롤라 정권은 민중들의 봉기로 무너졌다. 사보나롤라는 그해 5월 23일 한때 그에게 열광했던 군중들의 조롱 속에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국가안보실장’ 마키아벨리
▲우피치 미술관 바깥 회랑의 벽감(壁龕)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상.
사보나롤라의 몰락과 마키아벨리의 등장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보나롤라 사후(死後) 피에로 소델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정부가 들어섰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죽은 다음 달인 1498년 6월 피렌체공화국의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제2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안보실장쯤 되는 자리였을 것이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소장한 우피치(Uffizi)미술관은 베키오궁전과 이어져 있다. 원래 우피치미술관은 베키오궁전에 부속된 정부청사 건물이었다. 우피치라는 말 자체가 사무실(office)이라는 뜻이다. 우피치 미술관 바깥 회랑의 벽감(壁龕)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 단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페트라르카,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 피렌체가 낳은 위인들의 상(像)이 늘어서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상도 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턱에 손을 대고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한 젊은이의 모습이다.
피렌체공화국 제2서기장으로 일하던 30대의 마키아벨리는 이런 모습으로 베키오궁의 자기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곤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프랑스, 독일(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등 강력한 외세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자레 보르자가 중부 이탈리아에 교황령(敎皇領)을 건설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피렌체의 외교·안보책임자이던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루이 12세, 체자레 보르자, 교황청,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들의 군주들과 용병대장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고, 외교 교섭을 하고, 용병료 관련 협상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통치자의 자질, 국가간의 역학 관계, 인간과 역사를 보는 눈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군주론》은 이 시기 마키아벨리의 체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박물관이 된 감옥, 바르젤로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조각품들을 소장한 바르젤로 박물관.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이곳에 투옥됐었다
1512년 8월 스페인군이 메디치가의 복귀를 요구하며 피렌체로 쳐들어왔다. 메디치가 출신인 지오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그 뒤에 있었다. 적의 포위 속에서 메디치가 지지자들이 베키오궁전에 들어가 소델리니에게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우유부단했던 소델리니는 두말 없이 망명을 떠났다.
18년 만에 권좌에 복귀한 메디치가의 눈에 소델리니 정권에서 활약했던 마키아벨리는 ‘부역자(附逆者)’였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정권을 위해서 일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해 11월 자리에서 쫓겨났다.
마키아벨리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반(反)메디치가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바르젤로성에 투옥된 것이다. 베키오궁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바르젤로성은 지금으로 치면 검찰청 내지 경찰청에 해당하는 기관이 있던 곳이었다. 오늘날 바르젤로는 도나텔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조각품을 주로 전시하는 국립미술관으로 유명하다.
모진 고문을 받으며 죽음을 기다리던 마키아벨리를 살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델리니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지오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었다. 1512년 3월 지오반니 추기경은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됐다.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짓는 등 르네상스의 후원자로 큰 역할을 했지만, 그 때문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바로 그 사람이다. 피렌체 정부는 자국 출신 교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사면령을 내렸다. 마키아벨리도 석방됐다.
《군주론》과 《로마사논고》
43살의 한창 나이에 공직에서 축출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외곽에 있는 산탄드레아의 산장으로 은퇴했다. 《군주론》(1513년), 《로마사논고(정략론)》 (1518년 혹은 1519년)는 이 시기에 저술한 것이다. 흔히 마키아벨리라고 하면 ‘통치자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계를 가져야 한다’고 한 《군주론》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로마사논고》까지 읽어야 마키아벨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종교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고 싶으면, 몇 번이고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세월은 당초에 있었던 장점도 마멸시켜 버리기 마련이다. 마멸되는 대로 방치해 두면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서 체제 유지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이런 지적 활동을 하는 한편 마키아벨리는 끊임없이 메디치 가문에 선을 대서 재기를 도모했다. 사실 《군주론》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가끔 마키아벨리를 비공식 외교자문역으로 쓰면서 용돈이나 주었을 뿐, 그를 등용하지는 않았다.
1518년에 지은 희곡 〈만드라골라〉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푸념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막혀 있죠. 다른 일로 새로운 능력을 보여줄 길이. 흘린 땀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1527년 5월 독일-스페인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침공, 로마를 약탈했다. 그 여파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도 축출되고 다시 공화정부가 수립됐다. 그해 6월 10일 마키아벨리는 전에 맡았던 제2서기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참패했다. 혁명을 일으킨 신세대 정치인들이 보기에 메디치 가문에도 한 발 걸치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이미 구(舊)시대의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반대자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知)의 사람이 아니라 충(忠)의 사람”이라고.
낙선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열흘 후인 6월 20일 병으로 쓰러진 마키아벨리는 이틀 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3년 후 스페인군을 등에 업은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로 복귀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증손자인 코시모 데 메디치(1519~1574) 치하에서 피렌체공화국은 토스카나대공국으로 바뀌었다. 메디치가의 지배는 1737년까지 계속되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난 산타마르게리타 성당
▲단테의 집’ 앞에서는 단테처럼 차려 입고 《신곡》을 낭송하는 사내를 만날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수감생활을 했던 바르젤로성에서 대각선 방향에 단테 알레기에리 거리가 있다. 말이 ‘거리(Via)’지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작은 골목이다. 이 골목에 작은 성당이 하나 있다. 산타마르게리타 성당—아홉 살 소년 단테가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던 곳이다.
후일 성인이 된 단테는 18살 꽃다운 처녀로 성장한 베아트리체와 산타트리니타 다리 앞에서 조우(遭遇)한다. 이때 단테는 이미 젬마 도나티라는 여인과 결혼한 후였다.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베아트리체는 25살의 나이에 요절, 산타마르게리타 성당 묘지에 묻혔다 (단테의 아내 젬마의 묘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았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방황하는 단테에게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버질)를 가이드로 보내서 지옥을 여행하게 하고, 천국에 온 단테를 안내하는 ‘천상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산타마르게리타 성당에서 ‘단테의 집(카사 디 단테)’은 지척간이다. ‘단테의 집’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던 곳을 피렌체시가 단테 탄생 600주년이던 1865년에 ‘단테의 집’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고 한다. 건물은 1911년에 지어진 것인데 단테기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건물 옆의 작은 광장에서는 단테처럼 붉은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낭랑한 음성으로 《신곡》을 낭송하고 있다. 이탈리아어는 모르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울림이 있다. 책에서와는 다른 감동이 느껴진다. 한창 흥이 오를 즈음, 사내는 낭송을 중단하고 청중들(관광객들)을 한번 돌아본다. 청중들이 사내 앞에 놓인 모금함에 돈을 넣으면 낭송이 다시 시작된다.
전사·정치인 단테
▲단테의 집’에 전시되어 있는 ‘단테의 칼’. 단테가 쓰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단테의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전시내용은 알차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히 《신곡》을 비롯한 단테의 작품세계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내 눈길을 끈 것은 당시의 무구(武具)와 무사의 복장을 한 단테의 초상이었다.
단테는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베아트리체와의 못 이룬 사랑에 넋을 놓고 살았던 창백한 얼굴의 시인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흔들었던 기벨린당(신성로마제국 황제파)과 겔프당(교황파) 사이의 내전에 몸을 던졌던 전사(戰士)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아레초전투에서는 겔프당의 선봉으로 전투를 치렀고 기벨린당을 물리친 후에는 피렌체 정부의 최고위층 중 하나로 활약했다.
기벨린당을 물리친 후 피렌체의 겔프당은 교황으로부터의 자립과 신흥상인계급의 권익을 추구하는 백당(白黨)과 교황 및 귀족계급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흑당(黑黨)으로 분열됐다. 단테는 백당이었다. 1301년 단테가 교황청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동안 피렌체에서 프랑스군을 등에 업은 흑당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단테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2년의 유배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단테는 유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피렌체 정부는 단테가 벌금을 내지 않고 피렌체로 돌아올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렸다. 21년간에 걸친 단테의 망명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곡》의 첫머리에서 단테는 이렇게 노래한다. ‘한평생 나그넷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던 나 컴컴한 숲속에 서 있었노라.’
후일 흑당 정권이 무너진 후 피렌체 정부와 시민들은 단테에게 귀환을 호소했다. 그러나 자신을 추방했던 조국에 대한 단테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단테는 귀국을 거부하고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1321년 라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
끝내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한 단테의 모습은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있는 도메니코 디 미첼리노의 그림 〈단테와 신곡〉에 잘 나타나 있다. 단테 탄생 200주년인 1465년 피렌체 시민들이 주문해서 그린 이 그림 속에서 단테는 《신곡》을 들고 성벽 밖에서 피렌체시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탈리아의 판테옹’ 산타크로체 성당
▲‘피렌체의 판테옹’ 산타크로체 성당 앞에 있는 단테상(像). 이 성당에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의 무덤이 있다.
베키오궁전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에 산타크로체 성당이 있다. 마키아벨리와 단테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단테의 실제 무덤은 라벤나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단테의 무덤은 빈 무덤이다. 피렌체인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단테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성당 입구에는 단테의 입상(立像)이 있다. 얼굴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지식인의 결연한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산타크로체 성당 안에는 마키아벨리와 단테 외에도 글 앞머리에서 인용했던 레오나르도 브루니,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파르티,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음악가 조아키노 로시니, 무선전신의 발명자 굴리엘모 마르코니 등 이탈리아가 배출한 위인들의 무덤이 있다. 가히 ‘이탈리아의 판테옹(萬神殿·국가적 영웅들의 묘소)’이라고 할 만하다.
▲산타크로체 성당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묘.
마키아벨리의 무덤 벽에는 그의 얼굴을 새긴 원판을 붙잡고 있는 여신(女神)상이 있다. 그 여신은 누구일까? 혹시 마키아벨리를 외면했던 ‘포루투나(운명의 여신)’는 아닐까? 그의 무덤 앞에서 가만히 마키아벨리의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내 영혼보다 더 내 조국을 사랑하노라”라던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월간조선 7월 호
◆볼거리
◇'신의 조각 작품' 세계자연유산 이탈리아 돌로미티 알타비아
▲바위와 초원이 어우러진 돌로미티의 서정적 풍경. 세네스산장 앞에서는 누구나 길을 놔두고 초원을 걷는다.
날카롭고 환상적인
'악마가 사랑한 천국'을 걷다
▲비엘라산장 앞의 코로다 델 벨코 산. 판자처럼 얇은 바위를 첩첩 붙여놓은 듯하다
▲돌로미티의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꼽히는 프라그세르호수가 트레킹의 출발점이다
▲아침 안개가 몰려오는 페네스산장. 돌로미티의 모든 산장은 그림 같은 풍경과 어우러진다.
▲라가주오이산장 가는 길의 거대한 암벽들이 압권이다.
▲누보라우산장에서 파소 지아우 고개로 내려가는 길. 알타비아1을 통틀어 가장 험난한 길이다.
▲저무는 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토파네 봉우리.
▲파소 지아우고개에서 바라본 누보라우 봉우리. 누보라우 산장에서 누보라우 봉우리를 우회해 내려왔다
▲돌로미티 360도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는 라가주오이 산장
▲신비로움이 가득한 콜다이 호수.
▲제1차 세계대전 노천박물관의 동굴에서 본 돌로미티.
전 노천박물관의 동굴에서 본 돌로미티.
사진=진우석 여행작가 제공=월간산
◆풍경
▲피란체 아르노강
▲에메랄드 빛 바다
▲저주 받은 돌다리 - 나폴리에 있는 가이올라 섬 주변 경치,두 섬이 가느다란 돌다리로 이어져 풍광이 아름답다.
▲나폴리 항구
▲끝없는 양귀비 - 이탈리아 작가
▲돌로미티 - 이탈리아 북동쪽 산악지대 전체를 이르는 지역으로 세계 4대 트래킹 코스 클리프행어 촬영지로 유명
▲돌로미티의 페네스 산장
▲맑고 깨끗한 아드리아 바다의 밤 - 카스트로
▲몽환적인 파란 바닷가 - 안치오
▲밀란의 설경
▲벨라지오 - 이탈이아와 스위스 접경에 위치
▲세상 끝의 풍경
▲전원 풍경 - 사진작가 마우로 마니요네
▲절벽 위 마을 = 해안 휴양지 포시타노
▲지중해의 돌고래를 닮은 섬 - 포지타노
▲호수 섬마을 = 피에몬테의 오르타 호수
▲푸른바다 동굴 - 이탈리아 카프리 섬 해변 길이 60m 너비 25m 해저 동굴에서 나오는 빛으로 형광물질을 뿌려 놓은 듯 파랗게 빛난다
▲동굴 수영장 - 이태리 전 총리 소유
▲이탈리아 코로다 델 벨코 산
▲수정같은 투명한 카세르타 인근의 마테세 호수
▲노바 레반테에 있는 카레자 호수
▲돌로미티의 프라그세르 호수
◇화산
▲에트니 화산 =12.1.5.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에트나 화산
▲에트나 화산의 용암
▲화산의 징조= 에트나 산 12.3.18.
▲시실리 에트나 화산의 뉴수드에스트 분화구에서 13. 3. 6. 용암이 솟구치고 있다
▲시칠리아섬 에트나 화산에서 13. 4. 27. 분출한 용암이 흘러 내리고 있다
▲시칠리아섬 에트나 화산에서 13. 4. 27. 분출한 용암이 흘러 내리고 있다
▼2017.03.02 용암 분출하는 伊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에트나 화산이 분화하며 용암을 분출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으로 꼽히는 에트나 화산은 2015년 12월 근 20년 만에 가장 큰 규모로 분화한 데 이어 작년 5월에도 분출이 발생한 바 있다. /AP연합뉴스
◇일상
▲피사의 사탑
▲피사의 사탑 - 14.3.16. 성패트릭의 날을 맞아 초록색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필사의 탈출=12.1.14. 토스카니해 질리오섬 인근 유람선 콩코르디아호가 암초에 부딪혀 승객들이 탈출하는 모습. 승객 4천여명중 6명 이상이 사망,29명이상 실종
▲좌초된 4억 5천만 달라짜리 호화유람선, 탑승객 4200명 중 11명이 사망 22명 실종
▲좌초된 콩코르디아호 주위를 순찰하는 구조대원들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모습
▲유람선의 최후
▲콩코르디아가 6개월째12.11.12
▲관광마차 13. 7. 12
▲국기 색깔의 크리스마스 전구
▲요트 경주대회 2011.10.9.
▲진화한 눈사람
▲무너진 시계탑 - 12. 5.20 피날레 지진 피해 현장
▲폭우로 휩쏠린 차량들
▲홍수에도 관광은 한다 12.10.27.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재해 베니스의 물난리
▲물의 도시 베니스의 홍수 12. 11.11.
▲물의 도시 베니스가 홍수에 잠기다 13. 11. 4.
▲진도 6.2의 강진으로 사망 최소 159명 부상자 약 370여명 16.8.24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17.3.16 분화
▲이탈리아 남부 이스키아섬의 지진 현쟝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젖먹이 7살 11살 등 3형제를 극적 구조 2017.9.21
▲북부지방 폭우로 홍수 이재민 발생 17.12.12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