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지구촌 여행/ 국가별41/ 이스라엘 - 이슬람 국가 IS

상림은내고향 2022. 6. 8. 21:32

지구촌 여행/ 국가별41/ 이스라엘 - 이슬람 국가 IS

■ 이스라엘  State of Israel

▲국기

 

지중해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중동의 국가. 남북길이가 약 400km, 동서길이가 가장 넓은 곳이 121km에 이른다. 수도는 예루살렘이며 화폐는 이스라엘 쉐캐림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며 종교는 77%의 국민이 유대교이다.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바탕을 둔 혼합경제체제이며, 국민총생산(GNP)은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1인당 GNP는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낮은 편이다.

 

서기전 12∼8세기에 있었던 고대 이스라엘왕국의 멸망 후 전 세계로 흩어졌던 유태민족이 민족국가 건설을 열망한 끝에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지역에서 건국되었다. 성문헌법은 없고, 기본법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대외적으로 이집트를 제외한 인접 아랍 국가들과 적대관계에 있으며, 서유럽 나라들 외에는 외교관계가 단절상태였으나, 1993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의 상호승인이 이루어지고 요르단과 시리아 등과도 관계가 개선되었다.

 

유태인과 아랍계 주민간의 마찰이 사회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나 의회민주주의제도의 확립으로 정치적 안정도는 높은 편이다.

 

대외적으로는 자유를 표방하며, 친서방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49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역사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적어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BC 10000년경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한 증거가 남아 있다.

 

고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선형(線形)문자의 개발이다. 선형문자는 BC 2000∼1000년에 가나안인들이 창안한 것으로,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찾아냈다.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알려졌던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한 때는 BC 13세기말경으로 추측되며, BC 1550∼1200년에는 이집트인들이 지배했다.

 

해양 민족들의 출현으로 아시아 속국들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펠리시테인들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에 팽창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BC 10세기 중반 솔로몬 시대에 최고의 번영을 이룩했으며,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이스라엘로 알려진 북왕국과 유다로 알려진 남왕국으로 분열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나, 유다 왕국은 BC 625년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 왕국을 침략했으며 많은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키루스 2세(BC 550∼529) 때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통치 기간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했으며, 기원전 549년 메디아를 정복한 이후로는 나라의 이름을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함락한 후,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란 파사르가다에에 그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뒤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지역을 헬레니즘화하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도와 안티오코스 4세(BC 175∼164)의 성전 모독에 반발한 유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BC 141년 하스몬 왕조 때 이스라엘은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BC 65년 왕족의 내분으로 내란이 일어나 로마 제국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로마 점령기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리스도는 AD 30년경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2차례의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35년 마지막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은 극소수 집단으로 위축되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란사, 로마사).

 

그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도교 성지 보호로 인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691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웠다. 그결과 예루살렘은 3대 주요종교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1100∼1291년 이슬람교도들과 십자군에게 번갈아 점령되었으며,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그뒤 1798∼99년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고 다시 이집트의 지배 아래 들어가 무하마드 알리의 통치를 받았다. 무하마드 알리를 통해 서유럽의 영향을 받던 팔레스타인은 1840년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다.

 

19세기 후반 팔레스탄인에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가 시작되어, 1882년 최초로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촌이 세워졌으며, 1917년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왼쪽)와 밸푸어 선언문(오른쪽). 밸푸어는 1916년 외무장관에 자리에 올라,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해 1917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약속했다.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을 의미했지만,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민족은 유랑하게 됨으로써 중동 분쟁의 빌미가 되었다.

 

영국이 1918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1922년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통치를 승인받아 정치적 책임을 떠맡게 된 후 이 정책은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초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거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시온주의 국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947년 국제연합(UN)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트란스요르단(뒤의 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중동전쟁). 이스라엘이 1967, 1973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중동은 지금까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1967년 전쟁을 전후로 팔레스타인 국가와 그 영토 내의 이스라엘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1982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7년 이후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인티파다'(intifadah : '봉기'라는 뜻)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당국은 1992년 이후 아랍의 여러 국가와 팔레스타인 대표들과 직접 평화 교섭에 나섰다.

 

이듬해 이스라엘과 PLO는 5년 동안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를 점차 확대 이행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스라엘은 1994년 요르단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다음백과

 

◆홍익희의 유대인 이야기

2016.08.08  원죄 사상 없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죄는...

 

* 유대교에 원죄 사상이 없는 이유

 창조 마지막 날에 하느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창조하셨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처음으로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신 것이 무엇일까? 바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알맞은 돕는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창세기 2:18).” 그래서 아담의 몸에서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시어 그것으로 이브를 만드신다.

 

성경에 나오는 613개 율법 중 첫 계명은 이야기 무엇일까? 바로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고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28).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단 한 가지만을 금하시고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곧 그들에게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런데 약삭빠르고 말이 많은 뱀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느님처럼 지혜롭게 된다며 이브를 꼬드긴다. “이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려서 너희가 선과 악을 아시는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느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창세기 3:5).

 

잠시 망설인 뒤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도 설득해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든다. 이에 하느님은 노하신다. 하느님이 두 사람에게 당부하신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거역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엄한 징벌을 내리신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결국에는 죽는 운명에 처하며,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제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생계를 꾸려가야 하고, 이브는 남편의 그늘에서 살며 출산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전통적인 유대 주석들은 이브의 죄를 비난하지만 유대 교육자인 슈로모 바딘(Shlomo Bardin)은 이브가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은 이유를 멋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아버지가 대기업 회장인 젊은 남성과 결혼한 젊은 여성을 떠올려보자. 결혼 후 남성의 아버지는 그를 부회장 자리에 앉히고 그에게 거액의 연봉을 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는다. 남성은 매주 많은 돈을 받아가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는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소년과 결혼했고, 자신의 남편이 시아버지의 회사를 떠나지 않는 한 결코 남자로 성장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으로 하여금 안전한 아버지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만든다.” 바딘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고 결론짓는다.

 

기독교 신학은 아담과 이브의 이러한 행동을 모든 인류에게 영구적인 오점을 남긴 원죄로 규명했다. 이른바 ‘원죄 사상’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죄인이라는 사상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그들의 불복종을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들의 불복종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기에 명백한 죄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모든 아기가 저주받고 태어난다는 ‘원죄 사상’ 개념은 유대인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엄한 징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900살 넘게 살았고,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다. 인류 전체가 이 한 쌍의 남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창세기의 주장은 인종과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서로 형제자매라는 성경적 관점의 토대이다. (출처; 유대인의 상속, 랍비 조셉 텔루슈킨, 북스넛) 

 

* 유대인에게 자녀교육이란?

 이렇듯 유대교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죄는 인정하지만,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사상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유대인에게 죄란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현재’에 구속된다. 현실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유대교에서는 죄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고, 오늘을 사는 내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죄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범하는 불순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의미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당신과 닮은 영혼을 주셨다는 뜻이다그러니 당연히 하느님이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긴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과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죄가 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talent:타고난 재능)를 찾아내 힘껏 그걸 갈고 닦아 키워나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무능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죄가 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곧 자기의 달란트다. 이걸 찾아내어 게으름 부리지 않고 꾸준히 갈고 닦아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죄를 짓지 않는 길이자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다.

 

유대인에게 있어 신앙이란 이렇게 자신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과 자신의 달란트를 찾아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력이다. 죄인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죄의 여부는 현재 우리가 살아 나가는 삶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정적 차이이다.

 

유대교의 죄란 자기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삶에 편안히 안주하는 것이 죄다. 유대인 자녀교육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자세와 생각을 자녀에게 스스로 본을 보여 가르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자녀를 13살 성인식 때까지 부모에게 맡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를 한 사람의 '온전한 유대인'으로 만들어 성인식 때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한다고 믿는다.

 

온전한 유대인이란 ‘유대교를 믿는 성숙한 독립적 인격체’를 뜻한다. 그래서 그들은 13세 성인식 이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자녀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인격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도 ‘나’ 보다는 ‘우리’ 곧 공동체 정신을 우선하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 공감능력과 배려와 제대로 된 인성을 지닌 인격체로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자녀의 근본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맡긴 아이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키우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있어 교육은 그냥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의 다른 이름이다. 자녀교육이 곧 그들의 기도이자 신앙생활인 셈이다.

 

09.30  유대인 자녀교육(1) / 암송이 창의성의 산실

유대인 자녀교육(1) / 암송이 창의성의 산실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고민은 ‘내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성공한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교육문화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유대인 자녀교육의 목표는 성공에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자녀가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게끔 부모로서의 본을 보이는데 최선을 다 한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위해 내려야 하는 수많은 뿌리들, 이를테면 ‘하느님에 대한 경외, 인간에 대한 사랑, 배움의 중요성, 노동의 가치, 인내심, 사회성, 배려, 공감능력 등에 대한 가치관’을 부모가 적극적으로 자녀에게 본을 보인다. 궁극적으로 ‘나’로 사는 법이 아닌 ‘우리’로 사는 법 곧 더불어 사는 법을 자녀에게 가르친다. 그들의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2000년 이상의 떠돌이 생활에서도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은 이유이다 

 

13세 성인식

 

유대인에게 자녀란 하느님이 잠시 맡긴 귀한 선물이다. 13세 성인식(여아는 12세 성인식)에 자녀를 한 사람의 ‘온전한 유대인’을 만들어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한다. 곧 이는 부모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성인식 이전까지 자녀를 가르쳐 한 명의 독립적인 성인으로 만들어야 함을 뜻한다.

 

그들은 성인식 이후에는 자녀교육에 일절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자녀교육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만 12년뿐이다. 그들이 자녀교육을 어려서부터 서두르는 이유이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 자녀교육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가 ‘조기교육’이다. 이는 우리가 아는 조기교육 곧 선행학습과는 다른 것이다.

 

온전한 유대인이란 ‘유대교를 믿는 성숙한 독립적 인격체’를 뜻한다. 그래서 그들은 13세 성인식 이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자녀를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인격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도 ‘나’ 보다는 ‘우리’ 곧 공동체 정신을 우선하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 공감능력과 배려와 제대로 된 인성을 지닌 인격체로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자녀의 근본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맡긴 아이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키우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있어 교육은 그냥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적 행위의 다른 이름이다. 자녀교육이 곧 그들의 기도이자 신앙생활인 셈이다.   

 

유대인 엄마의 아기 목욕시킬 때 기도문


유대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의 말씀이 수놓인 강보에 싼다. 그 이유는 평생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라는 뜻이다. 유대인 엄마들은 평소 생활 속에서 자녀와 친근히 교감하면서 자연스레 가르친다. 그 일예가 아이의 목욕이다.

 

엄마는 아기를 목욕시킬 때 먼저 아기에게 동의를 구한다. “목욕시켜도 될까요?”라며 친절하게 묻는다. 어떤 형태로든지 아이의 동의를 얻어 목욕시킨다. 아이가 싫어하면 억지로 시키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응할 때까지 아이를 구스른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아이를 자신의 종속물이 아닌 자기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아기가 불편하지 않게 조심스레 목욕시키면서 아래 기도문을 외운다.

 

얼굴을 씻어주면서는
“하느님, 이 아이의 얼굴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갖고 자라게 하소서”

 

입안을 씻어주면서는,
“하느님, 이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축복의 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닦아주면서는,
“하느님, 이 아이의 손은 기도하는 손이요, 사람을 칭찬하는 손이 되게 하소서”

 

발을 씻어주면서는
‘하느님, 이 아이의 손과 발을 통해 온 민족이 먹고 살게 하소서’

 

머리를 감기면서는
‘하느님, 우리 아기의 머릿속에 지혜와 지식이 가득 차게 하소서’

 

가슴을 씻어주면서는
‘하느님, 우리 아기 가슴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소서, 5대양 6대주를 가슴에 품고 살게 하소서’

 

배를 씻어주면서는
‘하느님, 우리 아기의 오장육부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게 하소서’

 

성기를 씻어주면서는
‘하느님, 우리 아기가 자라나 이 거룩한 성기를 통해 거룩한 백성을 만들게 하소서. 결혼하는 날까지 순결을 지켜,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축복의 자녀를 준비하게 하소서’

 

엉덩이를 씻어주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리에 앉게 하소서’

 

등을 씻어주면서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안보이는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아기를 목욕시킨다.

 

아기는 평생 엄마로부터 수백 번의 목욕을 당하면서 이런 기도문을 수백 번 듣게 된다. 기도 속에 담긴 엄마의 염원은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전달된다.

 

그 결과 아이는 자기 나름의 소망을 갖고 자라면서, 자기는 축복의 말과 칭찬하는 사람, 자기 머리에는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식이 가득차야만 되는 줄 알고, 자기의 손과 발로 이 민족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안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통해 남다른 자존감이 형성된다. 인간에게 어릴 적 자존감 형성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자존감이 아이를 평생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각이 커가면서 긍정적인 자아실현의 뿌리이자 기초가 된다.

 

유대인 엄마는 아기가 말귀를 알아들으면 가장 먼저 율법을 가르쳐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들 종교의 내용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고대로부터 자기들만의 독특한 교육방법을 개발해왔다. 그 하나가 갓난아기 때부터 자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와 유대교의 핵심교리를 아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유대인에게 있어 종교는 신앙 이전에 엄마로부터 받아먹는 모유와 같다. 그들은 태어나 한 돌이 지나 말귀를 알아듣게 되면 엄마는 성경 말씀 곧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이가 율법을 이해하건 안하건 그건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아이는 그게 종교인 줄도 모르고 엄마가 가르치는 대로 무조건 따라 외운다.

 

반복 암송을 통해 율법을 귀와 몸에 체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거듭되는 가르침으로 아이에게 교리를 몸에 익히게 한다. 이렇듯 유대교는 어릴 적 엄마에게서 배움으로써 사유 이전에 먼저 몸과 마음에 체화되는 종교다.

 

그런데 이러한 엄마의 조기교육이 뜻밖의 효과를 가져 온다. 훗날 아이가 사용하는 말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와 단어에 기초하는데 이는 아이의 언어와 사고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아빠의 밥상머리 교육과 베갯머리 이야기가 더해지면 아이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진다. 유대인 아빠들은 매일 저녁 식사를 아이와 함께 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아이가 잠자리에 들면 베갯머리에서 책을 15분 이상 읽어준다. 이러한 오랜 관습은 거의 모든 유대인 가정에서 지금도 예외 없이 지켜진다.

 

그 결과 유대인 아이는 4살이 되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 인지력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높다고 한다. 보통 아이들이 800~900 단어를 아는데 비해 유대인 아이들은 1,500 단어 이상을 안다고 한다.

 

이는 이후에 부모와 더불어 하는 독서 습관을 통해 독서광이 되면서 몰입도와 이해력에서 다른 아이들과 큰 차이를 보이며 더 나아가 사유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우뚝 서는 이유이다.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

 랍비 허쉬는 “어머니란 자녀에게 육체적 생명만 주는 게 아니라 영적 신앙도 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유대교 가르침에 근거하여 유대인 어머니들은 ‘여성이야말로 최초의 교육자이며, 자녀들을 가르치는 의무는 여성의 몫’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유대인이란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다. 유대인들의 생각, 그들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유대교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로 유대교와 연결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면 사람이 매사에 신중해진다. 이것이 유대인이 일등 민족이 된 비밀의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곧 자녀가 율법의 지혜를 체화할 수 있도록 부모가 유대교의 기본원리인 ‘게밀루트 하사딤’ 곧 ‘친절을 베푸는 행위’의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교육이다. 그러기에 부모 자신의 됨됨이를 자녀에게 잘 보여주어야 한다. 

 

암송이 창의성의 산실

 유대인들은 세상의 모든 진리와 발명은 하느님이 이미 만들어 놓은 사물의 섭리를 인간이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성경공부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들은 토라(성경) 속에 숨어 있는 뜻 곧 ‘계시’를 연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암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자녀가 말귀를 알아들으면 토라(모세5)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심지어 정통파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가 4살이 되면 하루 3시간씩 토라를 암송하도록 시킨다. 13살이 되면 '미쯔바'라는 성인식을 갖게 되는데 이때 토라 곧 모세오경 중 하나를 외워야 한다. 이렇듯 유대인 자녀교육의 첫 시작은 단연 '암송'이다. 어려서 외운 암송은 뇌리에 오래 남는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무조건 외우는 ‘암송’이 창의성의 산실이라는 현대이론이 있다. 암송할 때 우리 뇌에서는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뇌신경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암송을 반복할 때 뇌는 대상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신의 패턴’을 모방한다고 한다.

 

창의성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별난 능력이 아니라 기존 우리가 아는 것에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깨달음이다. 세상의 그 어떤 창의적 이론도 무에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출처: <13세에 완성되는 유대인 자녀교육>, 홍익희,조은혜, 한스미디어)

 

10.14  유대인 음유시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유대인 음유시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시대적 메시지를 전한 음유시인 밥 딜런.

 

 올해 노벨문학상은 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이 수상했다. 가수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장 유력한 수상자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밥 딜런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의 수상 이유로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표현을 창조해 냈다"고 평했다. 노벨상위원회 새라 대니어스 사무총장은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 그의 작품은 시로 옮겨놔도 완벽하다”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자유, 평화, 인권 등 시대적 ‘저항의 메시지’를 노래로 읊조린 미국의 포크락 싱어송 라이터이자 음유시인이다. 신랄하면서도 예리한 그의 가사들은 그를 히피 세대의 대변인으로 자리 잡게 하며 대중음악인 포크 가사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그는 유대인으로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먼’ (Robert Allen Zimmerman)이다. 1962년 음반 <밥 딜런>으로 데뷔한 이래 반항과 자유,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 팝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저항음악은 그의 음악 인생 전체를 봤을 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밥 딜런은 포크와 블루스는 물론 컨트리송과 로큰롤, 재즈,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10살부터 시를 쓰다 

 그는 1941년 미네소타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자녀로 태어나 시적 감성이 조숙해 10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의 광팬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벌써 로큰롤 밴드를 조직해 공연했다. 그는 특히 시인 ‘딜런 토머스’를 좋아했다. 그는 딜런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많이 만들고 스스로 그의 예명도 ‘밥 딜런’으로 붙였다.

 

그는 1959년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해 문학을 전공하다 1961년 중퇴하면서, 그 즈음 로큰롤에서 포크송과 흑인 전통 블루스로 관심을 돌렸다. 1961년 뉴욕으로 올라와 카페에서 반주를 하며 간간이 노래를 불렀는데 이듬해 컬럼비아 레코드의 눈에 띄어 첫 앨범인 "Bob Dylan"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재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에 발표한 앨범이었다. "Blowin' In The Wind",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등의 명곡이 쏟아져 나왔다. 저항적인 노랫말은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 되었다. 시적이면서도 정치적 깊이가 있는 가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그의 음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저항가수로서의 굴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단조로운 포크와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질렸다. 

 

비틀즈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 즈음 그는 비틀즈를 만난다. 당대의 스타였던 두 뮤지션들은 곧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특히 비틀즈의 존 레논은 딜런의 가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반면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가진 에너지와 환희에 매료되었다

 

당시 비틀즈의 노래는 음악적으로는 굉장히 새롭고 강렬했지만 가사내용이 사랑타령 등 큰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당시 음악으로 세상에 저항했던 밥 딜런의 정신세계는 비틀즈에게 엄청난 자극이었다. 그 뒤 존 레논은 “밥 딜런이 비틀스의 음악을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밥 딜런역시 포크뮤직의 틀에서 벗어나 락음악을 도입해 소위 '포크락' 으로 불려지는 새로운 음악세계를 선보인다. 

 

유대인 밥 딜런, 아브라함의 행위에 반기를 들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산에게 순종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마지막에 신이 명령을 철회했지만. 이 이야기를 해석한 키에르케고르와 프로이트, 칼 융은 모두 아브라함의 신앙을 여러 각도에서 찬양한다. 하지만 이를 비판한 가수가 있다. 바로 밥 딜런이다

 

유대인인 밥 딜런은 이 이야기를 20세기 미국 상황에 빗대어 ‘하이웨이 61 리비지티드’라는 노래를 작곡한다. 이 노래에서 종교의 절대적 힘을 빌려 미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아브라함을 개탄한다.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고 가는 미국 문화의 잔인성과 권력의 폭력성을 노래에서 드러낸다. 아브라함은 미국 역사에서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폭력의 상징으로 묘사된다.(출처; 신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21세기북스) 

 

기독교로 전향한 밥 딜런, 아들의 종교 유대교를 지지하다

 이스라엘을 방문, 순례한 적도 있는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밥 딜런이 1970년대 말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가수 밥 딜런이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변신을 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밥 딜런 본인은 개신교로 개종한 뒤 가스펠 앨범을 내는 변화를 가지면서도 아들에게는 유대교 성인식인 ‘바 미츠버’를 치루게 하는 등 아들의 유대교 신앙생활을 지지했다

 

밥 딜런은 기독교에 심취함을 넘어 전도사로도 활약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전도사 생활 비중을 늘리면서 앨범 발표와 공연과 반전 운동으로 1980년대를 보낸다.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은 일종의 복음성가인 가스펠이다.

 

빌보드 12위까지 진입했던 이 노래는 ‘죽음’ ‘종말론’ ‘악행을 저지른 자가 종교적 절대자에게 귀환을 선언하는 노래’로 해석되면서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 로마를 방문했던 밥 딜런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한 뒤 이 노래를 불러 주어 팝계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복음성가 전파에 심취해 있다.

 

한국에는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원제 Chronicles) 2010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이밖에 <음유시인 밥 딜런>, <밥 딜런 평전> 등이 나와 있다. 

 

친구야, 바람만이 답을 안다네

  (1965 11일 밥 딜런(왼쪽)과 존 바에즈가 런던에서 함께 있는 모습.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을 노래했다. AFP 연합뉴스

 

그의 대표곡은 ‘Blowin in the Wind‘와 ‘Knockin on Heavens Door‘를 비롯해 ‘The Times They Are a-Changin, Like a Rolling Stone, Mr. Tambourine Man’ 등으로 이 노래들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Blowin' in the wind’는 7~80년대 우리나라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노래 ‘친구야, 바람만이 답을 안다네’('Blowin' in the wind)를 들어보자.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영원히 포탄 사용이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산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서있어야

바다로 씻겨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보이지 않는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

 

2017.06.19  예수님은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예수님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이 질문은 ‘유대인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예수님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뿌리를 알아보자

 

원래의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아왔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 특유의 외모 곧 오늘 날 중동계 사람들과 비슷한 외모를 지녔다. 예수님 역시 머리가 짧고, 턱수염이 있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이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리처드 니브 전 맨체스터대학 교수가 복원한 예수 당시의 셈족 얼굴

 

 영국의 리처드 니브 전 맨체스터대 교수는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갈릴리호수 주변에서 발굴한 예수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3개의 셈족 두개골에 컴퓨터 단층촬영과 디지털 3D 기법을 활용해 예수님 당시의 셈족 얼굴을 복원했다.

 

니브 교수가 재현한 예수님 당시의 셈족 얼굴은 담갈색 눈에 수염을 길렀으며 짧은 곱슬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이는 많은 종교적 그림에서 묘사한 긴 갈색머리를 가진 백인으로서의 예수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에서조차 바울이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언급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여자가 긴 머리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 11:14, 15). 이로 미루어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이 당대 보편적인 유대인의 모습이었다.

 

로마가톨릭의 월권 

 그런데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 가톨릭교회가 앞장서서 예수님을 유대적 바탕으로부터 끊어놓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원래 성경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여기에는 조각은 물론 그림도 포함된다.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마라.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마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마라."(신명기 4:16~18) 이렇듯 신명기에서는 분명하게 "남자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콕 찍어서 말했다

 

그럼에도 로마가톨릭은 예수님을 서양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각인시킬 필요를 느꼈다. 아니 유혹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 화가들에게 예수님을 그리거나 조각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우상숭배라고. 특히 당시 가톨릭의 본부격인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가 반대했다. 그 무렵 로마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개한 게르만족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우기면서. 사실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결국 11세기에 갈라선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이 문제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톨릭은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 뒤 교회에 속한 서구 화가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유대인의 모습과는 완전 동떨어진 장발의 백인으로 예수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백인으로 그린 이면에는 밝은 색은 선을 의미하고 어두운 색은 악을 상징한다는 발상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종교적 연원을 살펴보자.

 

유대인은 셈족 

 유대인은 셈족이다. 곧 노아의 큰 아들 셈의 후손들이다. 성경에 의하면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 , 야벳이 그들이다. 이들이 인류의 조상이다. 성경에 보면 둘째 아들 함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자는 아버지를 돌보지 않아 노아로부터 저주받는다

 

▲노아의 만취, 미켈란제로, 1509,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 세 아들의 피부색이 다르다

 

그 뒤 큰아들 셈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가 이들로부터 중동아시아계가 나왔다. 히브리, 시리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그리고 멀리 극동의 몽골족, 한민족 등이다. 셈족에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왔다. 이렇듯 원래 유대인은 셈족 곧 아시아계인 것이다. 둘째아들 함은 아프리카 쪽으로 갔고 그에게서 이집트, 이디오피아, 리비아 등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나왔다. 막내 야벳은 유럽으로 가서 그에게서 코카서스인과 아리아인 등 백인이 나왔으며 이들에게서 바다를 끼고 사는 백성들이 갈라져 나왔다. (참고로 영어로 반유대주의를 ‘anti-Semitism'이라 한다. 그만큼 서양인들에게는 유대인이 셈족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 단어는 같은 셈족에 속하는 다른 민족은 제외한 채 유대인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유대인을 향한 반감’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런 인종적 구분은 상당부분 실제적 사실로 규명되었다. 서구의 세계관과 인종 구분은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 진화론자들도 모든 인류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데에는 창조론자들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유전자 Y염색체로 본 인류의 이동 경로를 보면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온 현생인류는 중동에서 나누어졌다. 

 

수메르 말기의 사람, 아브라함 

 우리는 아브라함이 양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유목민 출신인줄 알고 있다. 아니다. 그는 수메르 문명이 가장 발달했던 우르에서 태어나 자랐다. 도시 출신인 것이다. 그 무렵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교역이 활발한 국제 항구도시였다. 당시 수메르 문명은 놀랍도록 발달한 고등문명이었다. 너무 물질이 발달하자 부작용도 일어나 사람들이 지나치게 타락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다. 유대민족의 출발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의 수메르문명을 알 필요가 있다

 

수메르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라는 사실은 수메르 점토판의 문자가 판독된 20세기 전후해서야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들 덕분에 발견됐다. 더구나 글이 적힌 점토판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그 옛날에 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 부르고 기록이 남겨진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른다. 수메르 문명이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역사시대를 최초로 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메르 문명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문자를 해독함으로써 수메르 문명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발굴된 문명의 정도가 주변에 비해 너무나 월등해 외지에서 온 이주 고등문명이라는 설까지 나왔다. 이러한 수메르 문명과 문화는 주변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히브리 문화와 유대교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문명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자.

  

동양과 유사한 풍속들 

 수메르인은 '검은머리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라 불렀다. 일부 학자들은 수메르인의 편편한 두개골 모양(편두)과 검은 머리 등으로 미루어 동아시아 민족 가운데 하나가 문명을 갖고 갑자기 나타나 세운 것이 수메르 문명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검은 머리와 편두뿐 아니라 수메르 언어가 우리 한글과 어순도 같고 토씨를 같이하는 교착어라는 주장도 있다. (출처;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교착어이다, 안창범, 제주대 명예교수

 

수메르 학자 고든박사는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동양의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학교 선생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선생은 제자를 아들이라 했다. 이외에도 신정일치와 제천의식이 동양과 비슷하며, 60진법과 음력을 사용했다. 심지어 결혼 전에 함을 지는 풍습과 순장풍속, 왼씨름 등 우리와 유사한 풍속도 있었다.

 

음력 사용하는 유대인 

 고대로부터 동양은 음력을 쓰고 서양은 양력을 사용했다. 우리 민족도 예전에는 음력을 썼다. 그러던 것이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음력을 못 쓰게 하고 지금의 양력을 쓰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음력을 써왔으며 지금도 음력을 쓴다. 그들의 생활은 고대로부터 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달이 뜨는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다창세기 1 5절을 보면, ...이렇게 첫날이 밤낮 하루가 지났다로 되어 밤을 낮보다 먼저 적고 있다그들의 안식일은 달이 뜨는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 날 곧 토요일 달이 뜰 때까지이다그리고 한 주일은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일몰부터 시작된다그리고 한 달도 처음 초승달이 보이는 저녁때부터 시작되었다해가 바뀌는 정월 초하루는 가을 추분 직후의 초승달부터 시작했다

 

“그분께서 달로 절기들을 정하셨으며...( 104:19) 

 

달의 삭망주기는 29.5일이다. 그래서 음력 한 달은 29일과 30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음력에서는 한 달 29일과 30일을 번갈아 쓰다 보니 한 해가 354일이 되어 지구의 태양 공전주기 365일을 기초로 하는 양력 보다 11일이 짧다

 

그런데 하느님이 유대인들에게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걸 기념하는 유월절의 절기를 지키라 했다. 당시 계절이 봄이었다. 유월절을 봄에 지키려면 음력을 쓰면서도 태양의 절기에 맞추어야 했다. 그래서 유대교는 음력을 쓰면서도 양력 계절에 맞추기 위해 태음태양력을 고안해냈다. 곧 음력과 양력의 11차를 극복하기 위해 음력 19년 사이에 7번의 윤달을 만들어 집어넣음으로써 음력을 태양 절기에 맞추었다. 그래서 윤달이 있는 해는 30일이 더 늘어난다. 이 개정 역법이 소위 태음태양력이다. 음력에 기준을 두면서 계절도 맞춘 역법이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이것을 유대력(히브리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1년 사시사철의 큰 주기는 태양력을 따르지만 일, 월은 그들의 전통대로 음력을 지키는 것이다

 

서기 7세기 유대교를 본 따 만든 이슬람도 음력을 쓴다. 그들은 지금도 음력만을 씀으로서 이슬람의 종교적 절기는 매년 11일씩 빨라진다. 그래서 라마단이 3년에 1달 여 씩 앞당겨져 봄에도, 겨울에도, 가을에도, 여름에도 오는 것이다.

 

유대력과 단군력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아담을 기원전 3760년에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2017년은 유대력으로는 5777년이다. 유대인은 그들의 달력을 ‘현세력’이라 부른다. 천지창조 이후의 일을 기록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단군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세웠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올해가 우리 민족이 쓰는 단군력 곧 단기로는 4350년이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이렇게 지구상에서 자기들의 민족력을 쓰는 민족은 유대민족과 한민족뿐이다.

 

유대인의 암송노래, 5음계로 우리 창 가락과 흡사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기도를 흡사 우리의 창처럼 암송하곤 한다. 그 노래를 듣다보면 영락없는 우리 창과 가락이 같다. 5음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은 암송과 노래에 강하다. 그들은 성경 읽을 때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읽는다. 아니 노래 부른다. 선율은 낭송 조로 되어있다. 탈무드에도 멜로디를 동반하지 않고 경전 읽는 것을 금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도 예전 서당공부 시절에는 음률을 집어넣어 글을 배우며 이를 암송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중매결혼이 많다. 고대로부터 양쪽 집안을 잘 아는 랍비나 공동체 원로들이 중매를 많이 섰다. 그러면서도 이혼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민족이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 궁합을 맞춰보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도 우리와는 좀 다르지만 12간지 동물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걸 갖고 궁합을 보기도 한다.

 

유대인의 두 줄기; 세파라디와 아쉬케나지 

 미국 유대인들을 보면 대부분 백인들인데 그들이 동양인 후손 맞아요? 여기에도 유래가 있다. 유대인은 크게 보면 두 줄기가 있다. 하나는 옛날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시대와 스페인 왕국 시절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라인 강변에 살았던 유대인들이다. 전자를 세파라디 유대인이라 부르며, 후자를 아쉬케나지 유대인이라 부른다. 세파라디(Sepharadi)는 스페인(Sepharad), 아쉬케나지(Ashkenazi) '독일'(Ashkenaz)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19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유대인 대부분은 세파라디계였다. 그래서 이들을 정통 유대인이라 부른다. 반면 아쉬케나지는 일반적으로 라인 강 유역과 인근 프랑스 지역에 살다가 11~13세기 십자군전쟁 때 러시아 등 동구로 이주한 유대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중세시대 라인 강은 중요한 상업교통로였다. 당시 마인츠 ·쾰른 등 라인 강 주변 지역에는 유대인 상업 공동체가 있는 마을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이 십자군 전쟁 때 박해와 학살에 시달리다 동구와 러시아로 피난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15세기 말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추방,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독일 지역에서의 유대인 피난 등 많은 유대인이 동구권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오랜 세월 게르만과 슬라브 민족들 속에 살다 보니 피가 섞여 백인화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셈족이다

 

셈어와 게르만어의 혼용에 뿌리를 둔 그들의 언어 ‘이디쉬’어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반면 세파라디의 전통적 언어는 고대 카스틸랴 어에 기반을 둔 유대즈모(Judezmo) 혹은 라디노(Ladino)어로 알려져 있다. 이 언어는 고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 히브리어, 터키어, 그리스어, 아랍어, 프랑스어 요소가 혼합된 언어이다. 라디노어는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라디오 방송과 지역신문에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언어가 그들 삶의 발자취를 반영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미국 유대인의 95%가 동구에서 이민 온 아쉬케나지들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 구성비중은 세파라디 25%, 아쉬케나지 70% 내외라고 한다

 

지금의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이렇듯 2000년 가까이 갖은 박해와 학살을 피해 다니다 많은 피가 섞였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인을 혈통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엄연한 셈의 후손들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동양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지만 인종을 초월하신 분이다. ‘정의와 평등’으로 요약되는 율법의 정신에 더해 그 본질인 ‘사랑과 믿음’의 가치를 전파한 분이다. 율법의 형식에 사로잡힌 유대교를 민족종교로 가두지 않고 이방인에게도 개방해 구원의 길을 터놓으신 분이다. 그가 동양인지 서양인인지는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다만 그를 서구 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한 틀에 가두고 싶지 않다.

 

07.11  한국인과 유대인...같은 점 5가지, 다른 점 4가지

홍익인간과 티쿤올람

 

홍익인간(弘益人間) 

 단군왕검의 건국이념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 민족만 이롭게 하자는 이념이 아니다. 우리가 주도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그 뒤 자손대대로 한민족을 규율하는 생활철학이었다. 고조선이 주변 유목민족들을 아우르며 2000년 이상의 강대국을 이룰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 뒤 부여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을 지배하는 근본사상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는 선언적 가르침이 아니라 항상 생활 속에 살아있는 되새김질이다. 이때 홍익이란 천지의 웅대한 뜻과 이상을 삶과 역사 속에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이란 하늘이 원하는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건설하는데 일조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재세이화’(在世理化)이다. 삼국유사에는 홍익인간과 함께 재세이화의 통치이념이 등장한다. '재세이화' '세상을 하늘의 이치로 교화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치는 하늘의 섭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재세이화는 하늘의 섭리에 부합되는 세상을 말한다. 곧 하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뜻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앞장 서는 사람이 홍익인간이다. 이는 단군왕검이 한민족에게 가르쳐 준 준엄한 삶의 자세이다. 하늘의 섭리에 맞게 이상세계를 건설하라는 뜻이다

 

티쿤 올람(Tikkun Olam) 

 재미있는 건, 유대인에게도 홍익인간과 비슷한 사상이 있다. 바로 “티쿤 올람” 사상이다. 티쿤은 ‘고친다’는 뜻이고, 올람은 ‘세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티쿤 올람’은 세상을 개선한다(To improve the world)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되 완벽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상태로 창조하시어 지금도 창조사업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티쿤 올람은 창조론과 진화론을 함께 아우르는 사상이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면서 종교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기독교도들은 다윈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원숭이의 이미지로 격하시켰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진화를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창조로 해석한다. 그들은 하느님이 지금도 창조사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교 신앙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로 지금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도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선두에 자기들이 있다고 믿는다

 

유대인 아이들이 13살에 치루는 성인식 때 랍비가 “사람은 왜 사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티쿤 올람”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렇듯 유대인에게 삶이란 신의 뜻에 대한 헌신이자 신에 대한 충성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상세계(理想世界)로 건설하는데 필요한 자기의 몫을 찾아내어 그 책임을 다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자 인간의 의무라고 그들은 믿는다. 이를 위해 유대인들은 평생 끊임없이 공부한다 

 

배움이 곧 신앙생활 

 인간이 하느님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느님의 섭리를 배우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유대교의 오랜 전통에 의하면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곧 배운다는 것은 기도를 올리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히브리어로 ‘기도하다’라는 말은 ‘히트 파레루’이다. 이 히트 파레루는 ‘스스로 가치를 잰다’는 뜻이다. 곧 하느님께 맹종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니라 신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그러고 난 뒤에 신의 의지에 합당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배움은 곧 신의 뜻을 살피며 신을 찬미하는 일이다. 배움이 곧 신앙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시나고그의 주된 역할도 배움의 장소를 제공함에 있다. 유대인이 배움의 민족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곧 유대인들에게 배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하느님께 다가가는 신앙생활인 것이다. 

 

현대판 집단 메시아사상 

 유대인들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배움의 중요성과 티쿤 올람 사상을 가르친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그들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자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사상이 바로 현대판 메시아사상이다. 메시아란 어느 날 세상을 구하기 위해 홀연히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협력하여 미완성 상태인 세상을 완성시키는 집단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창조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티쿤 올람 사상과 집단 메시아사상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비전에 강한 유대인들 

 유대인 기업가들이 이 세상을 이상세계(理想世界)로 만들기 위한 비전에 강한 이유가 바로 이 티쿤 올람 사상과 집단 메시아사상 때문이다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정보의 실시간 검색과 공유를 위해 세상사람 모두의 호주머니 속에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를 갖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 언제 어디서나 구글에 접속시키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게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폰이고, 인간들의 다양한 정보충족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연구되고 있는 게 인공지능이다. 이런 연유로 알파고가 탄생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도 꿈을 갖고 있다. 모든 정보의 공개와 공유가 인류를 좀 더 자유롭고 인간답게 만들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를 위해 인류 전체를 페이스북 페친으로 묶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케 하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어찌보면 그는 래리 페이지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다

 

현재 페이스북 사용자가 약 20억 명인데 이를 75억 명 인류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인터넷 접속이 안되는 오지에 인터넷 망을 개설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인공위성과 드론을 활용해 전 세계를 인터넷 망으로 촘촘하게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이동식무선기지국 역할을 하게 될 보잉 737 만큼 큰 날개 길이를 가진 초대형 드론 '아귈라'의 두 번째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스페인어로 독수리를 뜻하는 '아귈라' 드론은 날개 위에 설치된 태양열 집열판을 통해 전기를 자체생산하기 때문에 지상 6만∼9만 피트 상공에서 며칠 동안 장기비행이 가능하다고 페이스북 측은 밝혔다

 

페이스북은 인류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는 인류 공동체 계획 이외에도 개인의 취향과 선호도에 따른 맞춤정보 제공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기술을 바탕으로 개인을 식별해내는 안면인식 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80% 이상의 성공률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인과 유대인의 공통점 

 한국인과 유대인은 공통점이 많은 편이다.

 

첫째, 두 민족 공히 머리가 좋고 부지런하다. 영국 얼스트대학 리처드 린 교수팀과 핀란드 탐페레대학 타투 반하넨 교수팀이 세계 185개국을 대상으로 IQ 조사를 했다. 한국인 평균 IQ 106으로 세계 1등이었다.(출처; 월간조선 2004 2월호) 한편 이스라엘 인구 850만 명은 유대인 600만 명과 팔레스타인인 250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유대인 평균 IQ를 알려면 미국 고등학교의 IQ 조사결과를 보아야 한다. 유대인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 평균 IQ 98점보다 약 9.8점이 높았다. 무수한 외침 등 민족의 고난과 형극의 역사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머리씀이 민족의 집단 IQ 형성에 영향을 미친듯하다

 

둘째, 교육열이 높다. 이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셋째, 두 민족 모두 음력을 사용하는 같은 아시아계 후손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음력을 쓰고 있다.

 

넷째, 잃어버렸던 나라를 1948년도에 재건한 역사도 같다.

 

다섯째, 여성의 주체적 역할이 크다. 가정에서 교육을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여성인 점도 같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엄마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를 무조건 유대인으로 인정한다. 반면에 아빠만 유대인이면 그 자녀는 검증을 받아야 유대인이 될 수 있다. 결혼 후에도 여자가 배우자의 성()으로 바꾸지 않고 처녀 때 성을 그대로 쓰는 민족은 한국인과 유대인밖에 없다. 

 

한국인과 유대인의 차이점 

 반면 한국인과 유대인의 차이점 또한 크다.

 

첫째, 교육목적에 차이가 있다. 교육에 대한 높은 열정은 같지만 교육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의 교육은 시험통과를 위한 높은 성적획득을 지향하다보니 경쟁적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유대인 교육의 목적은 학습 성취에 있지 않고 성숙한 인격체로 키워져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그렇다보니 교육의 목적이 ‘나’보다 ‘우리’를 중요시하는 인성교육과 공동체정신 함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3세 성인식 때 온전한 성인의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둘째, 교육방법에 차이가 있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인 반면에 유대인 교육은 질문과 토론문화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유교식 교육전통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 위주이나 유대인은 다르다. 유대인들은 지식의 주입을 교육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과 원리를 이해시키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배양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를 위해 고대로부터 탈무드 교육은 질문과 토론으로 이루어져 왔다.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그렇다보니 공교육 역시 질문과 토론으로 진행된다

 

셋째, 교육목표가 상이하다. 우리는 ‘베스트’를 지향하는 교육이나 유대인들은 각자가 남과 다른 탈란트를 개발하여 학생 하나하나를 ‘유니크’한 존재로 키워내는 게 교육의 목표이다.

 

넷째, 유대인이 강한 건 바로 그들의 공동체 정신에 있다. 유대인은 개인적인 역량도 크지만 그보다는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단결력과 서로 돕는 협동정신이 강하다. 유대인의 도움에는 8단계의 품격이 있다. 최고 단계의 도움이 상대방이 자립, 성공할 수 있도록 화끈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물질적 도움은 물론 정보와 지혜 나눔, 인맥 소개 등 말 그대로 성공할 때까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도와준다, 이를 헤세드 정신이라 부른다. 그들이 진정 강한 이유이다.

 

07.21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 탈무드를 아시나요?

 

오늘은 저와 함께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은 모두 몇 개일까요? 유대인의 경전은 2개입니다. 하나는 ‘토라’이고 또 다른 하나가 ‘탈무드’입니다

 

여러분 토라는 읽어보셨죠? 안 읽어보셨다구요? 여러분은 토라를 조금이라도 읽어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구약성경의 도입부 첫 다섯 권.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썼다고 하여 이를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바로 이 모세오경이 토라입니다

 

구약(舊約)의 약()은 ‘계약’을 뜻하는데, 히브리어로는 혈약(血約)을 의미합니다. ‘피로 약속한 영원불변의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구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을 ‘구약’이라 부르는 걸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타나크’(TANAKH)라 부릅니다. Torah(율법서), Neviim(예언서), Ketubim(성문서)의 첫 문자를 떼어 만든 이름으로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대교는 히브리 원문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의 구약성경 보다 권수가 적습니다

 

그럼 타나크는 토라 곧 율법서 말고도 19권이 더 있는데 나머지는 뭐냐구요? 유대인들은 나머지 부분은 토라를 보조하거나 해설하는 보조경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토라만을 양피지에 손으로 필사하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 이를 갖고 예배를 봅니다.

 

토라에는 창조 이야기를 시작으로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유대인 역사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비롯해 유대민족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율법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토라에 실린 율법의 수는 613개입니다

 

이 가운데 “하지 마라”가 365개로 일 년의 날 수와 같고, “하라”가 248개로 이는 인간의 뼈와 모든 장기의 수와 같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합니다

 

토라는 특별하게 규제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이런 저런 일은 하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이런 저런 일은 하지 마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제를 최소화하는 이른바 ‘네가티브 시스템’입니다

 

토라는 ‘가르침’이란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이렇듯 토라는 유대민족이 어떻게 태동하여 왔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서이자 유대 민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율법서입니다.

 

그럼 탈무드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지킬 십계명과 율법을 내려주며 삶의 작은 부분까지 아주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초막절 절기 때에 모세에게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라는 '율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뒤 하느님은 초막을 짓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말씀은 글로 쓴 토라에 기록되어 있고 초막 짓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장로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글로 쓰여 ‘토라’로 남겨졌고 또 다른 방대한 내용은 미처 글로 쓰이지 못하고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율법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글로 쓰여 진 ‘성문율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율법’입니다

 

구전율법은 오랜 시간이 지나자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선대의 설명을 그대로 후대에 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왔을 때, 선지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더 늦기 전에 구전율법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기로 했습니다. 에스라는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구전율법을 모아,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글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작업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방대한 저작을 낳게 됩니다.

 

서기 210년경 랍비 ‘유다 하 나지’는 사람들을 모아 그간 선배 랍비들이 모아 오던 구전율법의 본격적인 편찬에 착수해 6(농업, 종교절기, 결혼, 민법과 형법, 제물, 제식) 63 520장으로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탈무드의 전신 ‘미쉬나’입니다.

 

▲가운데 부분이 미쉬나, 그 주변이 미쉬나를 해석한 게마라

 

그런데 미쉬나는 원론적 내용만 담고 있어,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미쉬나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토론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뒤 300여 년 동안 많은 랍비들은 미쉬나에 대한 보충설명과 해석을 더 했습니다. 이 해석들을 모은 것이 ‘게마라’입니다

 

이렇게 미쉬나와 그 주해 게마라를 한데 모은 것이 ‘탈무드’입니다. 사회의 모든 사상에 대해 구전으로 전해지던 율법을 모아, 해설을 덧붙여 집대성한 책입니다. 이렇게 탈무드는 원로 랍비들이 후손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기원전 500년부터 약 1천 년 동안 현인들의 말과 글을 모아놓은 지혜서의 일종으로 유대 교육의 중심서입니다

 

‘탈무드’는 히브리어로 ‘위대한 배움’이라는 의미입니다. 탈무드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침과 민족적 동질성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탈무드는 원래 이방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시중의 탈무드 책은 유대인의 삶과 생각을 규율하는 율법 자체가 나와 있지 않으며, 그저 유명한 랍비 이야기나 흔히 알려진 일화나 우화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는 일종의 우화집입니다. 이는 실제 탈무드의 양을 생각할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탈무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63권의 방대한 책입니다. 그 무게가 75 kg이나 나가는 엄청난 분량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탈무드는 히브리어-영어 대역판 72권으로 나와 있는데 이게 300페이지 책 140권 분량입니다. 탈무드는 책이라기보다는 ‘학문’입니다. 그것도 ‘위대한’ 학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탈무드는 한 가지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읽는 이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후 탈무드 교육을 통한 질문과 토론문화 곧 하브루타가 유대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육방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토론문화를 통해 유대인들의 다양한 사고와 창의성이 발현되어 자기 분야에서 우뚝 솟는 업적을 남기는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탈무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09.12  유대인들이 오랜 고난과 가시밭길의 역사를 헤쳐 올 수 있었던 이유

『탈무드』에 의하면 "하느님은 명랑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린다. 낙관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밝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비관은 좁은 길이지만 낙관은 넓은 길이다" 낙관은 많은 것을 맞아들이지만 비관은 많은 것을 물리쳐 버립니다. 낙관은 의지의 문제이고 비관은 감정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해지고. 슬픈 생각을 하면 슬퍼집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평소 생각한 대로 될 공산이 큽니다.

 

유대인 엄마가 아침에 아이에게 하는 말

 

유대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을 일으켜 ‘모데 아니’라는 아주 짧은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크신 자비와 성실하심으로 당신은 내 영혼을 내게 허락하셨나이다.” 또 다른 새 날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그들은 하루를 엽니다. 이 기도는 또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제일 먼저 배우는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건 낙관적인 집안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엄마들은 아침마다 자녀가 학교 갈 때 ‘Yeheye beseder’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라는 뜻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낙관적 기운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란 거창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유대인의 오랜 지혜이자 오랜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긍정의 암시는 아이들에게 밝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부모가 삶을 사랑하고 낙천적이며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당연히 안정되면서 부모의 본을 보고 닮아가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고난의 역사와 형극의 가시밭길을 헤쳐 온 민족입니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죽음과 직면하거나 이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박해받고 소외되고 경멸당하는 삶이었습니다. 생활이 아닌 생존이었고, 그것도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고통이 그들을 강하게 단련시켰습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 살았기에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 슬픔을 알기에 기쁨의 가치를, 밤을 알기에 태양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사고방식은 그들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쳐 시련을 이겨내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품게 해줍니다.

 

성공한 기업

 긍정적 사고방식은 기업경영에도 절대적인 힘이 됩니다. 기업 번영의 티핑 포인트를 연구한 노스캐롤라이나대 바버라 교수는 60개 기업의 업무회의 의사록을 분석했습니다. 이 연구의 핵심은 60개 기업의 회사원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긍정성’ 대 ‘부정성’의 비율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긍정 대 부정의 비율이 3:1보다 높은 기업은 번창했고, 그보다 낮은 기업은 어려웠습니다. 이 법칙을 ‘로사다 비율(Losada ratio)’이라고 부릅니다.

 

화목한 부부

 긍정적인 대화는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가정 행복의 티핑 포인트를 연구한 워싱턴주립대 존 가트맨 교수는 35년 가까이 3000쌍 이상의 부부대화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부부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5:1 비율이 필요합니다. 배우자에게 부정적인 말을 한마디 할 때마다 긍정적인 말을 최소 다섯 마디는 해야지요.”라고 말하면서 가정 행복의 티핑 포인트인 5:1을 ‘가트맨 비율’이라고 불렀습니다.

 

긍정적인 사고가 질곡의 삶을 완성시켜

 유대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케투보 111b)

 

밝고 쾌활한 태도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당신을 맞이하는 사람의 태도가 밝고 쾌활하고 다정하면 기분 좋아지듯이, 당신도 다른 사람을 맞이할 때 밝고 쾌활하고 다정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아이들을 맞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웃는 얼굴과 다정한 이야기로 정답게 자녀를 맞이하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자녀교육의 반 이상입니다.

 

조직 내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침울함과 변덕스러움으로 대하는 것은 죄악일 수 있습니다. 침울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침울함이 전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스스로 훈련하십시오.

 

그렇다고 개인의 행복과 성공만 추구하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합니까?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나를 돕는 일이자 공동체를 살리는 일입니다.

 

긍정적 사고는 세상을 널리 보며 많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부정적 사고는 세상을 좁게 가두어 자기에 맞는 것만 선택적으로 흡수합니다. 우리 인생이 다 성공으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실패와 고난도 있고 어려움도 많습니다. 결국 인생 전체를 봤을 때 긍정적인 사고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어 질곡의 삶을 완성시킵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은 명랑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 낙관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밝게 만든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Yeheye beseder).’ 유대인 부모들은 매일 아침 이 말을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한다고 한다. 아침을 낙관으로 여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의 암시는 아이들에게 밝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닌 낙관적인 집안 분위기이다.

 

"삶의 목표란 거창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라는 유대인의 오랜 지혜를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인은 20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고난과 핍박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걱정 없이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다는 것의 의미와 그 고마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부모 자신이 삶을 사랑하고 낙관적이며 남들을 배려할 때 아이 또한 정서적으로 안정되며 부모의 기질을 따라 배우게 된다. 가족을 하나로 묶는 힘은 경제적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낙관주의와 사랑이다.
(
출처; 유대인 엄마의 힘, 사라 아마스 지음, 정주은 옮김, 예담)

 

부모의 마음가짐/ 긍정적 마인드와 사랑

 

좋은 부모란 아이를 정신적으로는 밝고 건강하며 사회적으로는 능력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건전한 인격체로 키워 낸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부모가 아이를 긍정적 마인드와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그리고 자녀에게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해주어야 한다.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은 따뜻한 헤아림으로 아이의 생각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기다려주고, 배려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둘째, 자녀교육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따뜻함과 엄격함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 사랑과 교육이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붙어 다녀야 한다. 사랑 속에 교육이 행해질 때 아이는 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원리가 있다 해도 사랑으로 가르치지 못하면 결과도 효과적이지 못하다. 아이의 마음이 부모의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아이 역시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좋아하는 마음 곧 자아 존중감이 현저히 높아진다. 자아 존중감이 확립된 아이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몫을 다 하게 된다.

 

아빠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는 밝게 자란다

 

Y는 기말고사 역사시험에서 답안을 잘못 써 점수가 70점대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래서 아빠의 반응은 어떠셨니?”라는 질문부터 튀어나왔다. “처음 저지른 실수니까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어요.“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평소 완벽주의자인 아빠 때문에 심하게 주눅들어있는 아이였다. 오랜 기간 아이들을 가르쳐오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완벽주의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늘 기가 죽어있고 불안증세에 시달린다. 의사나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종 사람들 가운데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반면 아버지가 자상하고 너그러운 집 아이들은 밝고, 활달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많이 바쁘다. 업무가 끝난 뒤에도 술자리로 이어지며 이를 업무의 연장이라 여긴다. 그러니 술 취해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대화하거나 학습을 지도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버려 두고 방목하다시피 한다.

 

그러다 본인들의 사회적 입지가 약화되면 자녀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 한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표하고 성적에 욕심내기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동안 뭐하느라 자식교육 하나 제대로 시키지 못했느냐며 모든 걸 아내 탓으로 몰아간다. 집안에 냉기가 돌고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며 아이들은 밖으로 돌기 시작한다. 가정이 평온한 안식처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반면 바쁜 와중에도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비교적 없다. 아이에게 실수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격려하고 아이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버지다. 이를 몸소 실천하는 아버지를 둔 자녀는 긍정적이고 밝게 자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감 넘치는 건강한 아이로 자란다. 아이들에게 집은 삶이라는 본게임을 위한 연습장이다. 집에서 충분히 실수하고 그 실수를 거울삼아 새로운 방법을 찾고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한계를 극복하는 걸 배운다.

 

아이들은 늘 감시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아버지를 피하려 든다. 아버지 퇴근시간이면 자는 척 한다든지 함께 식사하는 기회를 되도록 갖지 않으려 한다.

 

아이가 커도 ‘아빠’로 불리는 아버지가 행복하다. 아이가 저녁이면 아빠를 기다리게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아빠를 보면 달려가 반기고 뭔가 도와달라고 매달리게 만들어야 한다. "요즘 뭐가 힘드니? 아빠가 뭘 좀 도와줄까?" 묻는 아빠가 되기를.

 

09.14  유대인은 인성교육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한국인과 유대인은 교육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유대인의 공동체정신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2000년 가까이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공동체정신 덕분이었습니다. “너희는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보호자이다. 너희는 모두 한 형제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이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게다가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공동체의 생활규범이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며 험난한 역사의 질곡을 극복해 왔습니다.

이러한 삶의 규범을 이끌어온 ‘공동체정신’은 그들의 독특한 교육 덕택입니다. 유대인은 교육열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과연 유대인들은 어떻게 교육을 시키기에 그런 평판을 듣는 것일까요? 그들의 교육내용을 유아교육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교육 가운데서도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시기인 유아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인식의 틀과 인성’이 거의 완성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의 ‘세 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한국인과 유대인의 교육목적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높은 열정은 같지만 교육의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시험통과를 위한 높은 성적획득을 목표로 베스트를 지향하는 교육이다 보니 친구 서로 간에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교육시스템입니다. 반면에 유대인 교육의 목적은 학습 성취에 있지 않고 성숙한 인격체로 키워져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동체 구성원 간의 단결력 함양에 교육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유대인 교육의 촛점은 ‘나’보다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인성교육>과 ‘나’보다 ‘우리’를 중시하는 <공동체정신>을 기르는데 있습니다.


과연 유대 교육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유대인은 13세 성인식 때까지 온전한 성인의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유대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13세 성인식 때까지 온 정성을 다 바쳐 자녀 교육에 헌신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인성과 성인의 판단력을 갖춘 아이로 만들어 성인식 때 하느님께 아이를 되돌려 드리는 것을 목표로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자녀교육에 임합니다.


유대인의 인성교육

인성은 타고 나기도 하지만 후천적으로 교육에 의해 길러질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 동질성 유지와 단결력 함양을 위해 원래는 합숙하며 교육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키부츠에서는 합숙교육을 시킵니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의 경우, 방학이면 유대인 캠프에 입소해 단체 합숙교육을 많이 받습니다. 이 교육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인성교육과 공동체정신입니다. 그들의 협동심이 강하고 단결력이 탁월한 것은 그들의 훈련된 인성과 공동체정신에 기인합니다. 뉴욕 예시바 대학 교수인 정통파 유대교 랍비 도닌(Donin)은 유대인이 갖추어야할 12가지 성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1. 예의바름(courtesy)
2.
정직(honesty)
3.
완전(integrity)
4.
진실(truthfulness)
5.
침착성 유지(even-temperedness)
6.
깔끔한 언행(clean speech)
7.
용기(courage)
8.
친절(kindness)
9.
인내(patience)
10.
수양(self-discipline)
11.
겸손(modesty)
12.
책임감(a sense of responsibility)

 

여기에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 혼동되는 단어가 honesty(정직) integrity(완전)의 차이입니다. 둘 다 ‘정직’ 또는 ‘진실성’을 뜻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정직은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정직은 상거래 할 때 꼭 필요합니다. 신뢰의 기본토대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 처음 받는 질문이 “너는 거래할 때 정직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럼 두 단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honesty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반면 integrity는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진실성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정직(honesty)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청렴결백한 완전(integrity)을 추구하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또한 여기서 ‘침착성 유지’라 함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화가 난다 할지라도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습니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먼저 기도부터 합니다. 화를 삭이고 평정심을 얻기 위한 간구입니다. 분노조절에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지혜와 평화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을 회복한 후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좋을지를 자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각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 할 때도 이 ‘침착성 유지’를 항상 신경 씁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다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엄마에게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인 엄마들은 아이가 잘못해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절대 야단부터 치지 않고 먼저 아래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유대인 엄마의 기도

아도나이(나의 주님)!

“아이의 물음에 대답해 주고, 수많은 갈등을 해결해 주고, 율법대로 살아가도록 지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비난과 매질로 아이의 영혼을 짓밟고 싶을 때마다 이겨낼 수 있는 자제력을 주소서!

사소한 짜증과 아픔, 고통, 보잘것없는 실수와 불편에 눈 감게 하소서!

참을성을, 그보다 더한 참을성을, 그리고 그 보다 더한 참을성을 주소서!

생각과 기분을 깊이 헤아리고 있음을 아이가 알 수 있도록 서로 공감하게 하소서!

고통과 좌절의 순간에도 아이의 존재를 처음 깨달았을 때 느꼈던 환희와 아이가 첫걸음마를 뗐을 때의 기쁨과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의 희열을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지치고 힘들 때에도 아이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힘과 건강을 주소서!

신념과 긍정의 힘으로 자신 있게 삶을 대하는 기쁨과 웃음과 열정을 주소서!

모진 말과 조롱, 비난으로 아이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도록 침묵을 주소서!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주소서!

아이뿐 아니라 시간과 이해와 표현을 필요로 하는 내 내면의 아이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는 어머니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기도를 통해 평상심을 찾은 다음에 아이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야단치기보단 먼저 이유를 묻습니다. 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체벌을 해야 할 상황에서도 부모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아이와 대화를 나눕니다. 자신의 입장을 들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차근차근 대화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됩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 친구 사귀는 법을 먼저 가르칩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강점이 협동심과 단결력입니다. 이는 어느 날 불현듯이 습득되는 게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친구와 어울리고 서로 도울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렇게 친구와 사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알게 모르게 부모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곧 부모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배워 아이도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점입니다. 부모가 믿음과 사랑으로 대하면 아이도 다른 사람을 믿음과 사랑으로 대하고, 갈등과 불신이 깔리면 아이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갈등과 불신이 깔리게 됩니다. 바로 부모가 아이의 사회성 육성에 앞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가 친구를 사귈 때 두 가지에 유의하라고 가르칩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단점과 허물이 있단다. 그러니 너는 친구를 사귈 때 그의 단점과 허물을 보지 말고 친구의 안에 숨어있는 그의 장점과 강점을 찾아내도록 노력해라.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말하는 시간의 두 배만큼 친구가 하는 말을 들어라.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이는 탈무드의 가르침이다. 상대방에 대해 많이 물어봐라. 친구에 대해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해라.

또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친구를 비롯한 누구의 험담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유대 경전 미드라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헐뜯는 험담은 살인보다도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곧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이러한 신뢰가 유대인들이 친구 간에 평생 도움을 주고받는 끈끈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공동체정신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인성이란 ‘나’가 아닌 ‘우리’로 사는 능력, 더불어 사는 능력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의 인성 교육을 위해 자녀가 어떠한 품성을 갖추어야 할지를 항상 고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부모가 삶 속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곧 자녀가 율법의 지혜를 체화할 수 있도록 부모가 유대교의 기본원리인 ‘게밀루트 하사딤’ 곧 ‘친절을 베푸는 행위’의 솔선수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교육입니다. 그러기에 부모 자신의 됨됨이를 삶 속에서 자녀에게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녀교육은 곧 부모 자신의 변화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출처; 13세에 완성되는 유대인 자녀교육)

 

10.31 교육으로 민족을 지켜낸 유대인 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를 아십니까?

 보통 나라들은 국가가 멸망하면 50년 내지 100년도 안되어 역사에서 그 흔적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2000년 가까이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했음에도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교육의 힘’으로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던 민족을 구해낸 한 위대한 학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탈무드에 소개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그 학자입니다

 

그는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의 ‘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유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聖殿)이 불태워지고, 결국 국가를 잃어버리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그리스어,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유대의 파멸을 초래한 이 끔찍한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로마제국 중흥기의 영웅 '카이사르'는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처음 유대 나라를 로마제국으로 편입할 때 대단히 우호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유대인 최고 제사장에게 종교적 통치권을 인정하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군사적 방어권도 허락했습니다

 

주요 항구 '야파'와 해상무역권을 돌려주었고, 그리스인과 해상교역의 경쟁관계에 있는 유대인에게 경제적으로 그리스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덕분에 유대인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당시 유대인 인구는 바빌론의 1백만을 포함해서 대략 8백만 명 정도 되었습니다.

 

서기 66년의 반란은 지금의 트리폴리인 ‘카이사리아’에서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큰 소송에서 그리스인이 승소한 직후에 발발했습니다. 승소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며 승리를 축하하는 동안 로마군 수비대는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에서도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로마총독 플로루스가 유대인들의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몰수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성한 성전을 모독한 행위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들의 종교를 건드리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성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로마 수비대를 급습해 병사들을 참살했습니다. 그 뒤 급파된 시리아 주재 로마군마저 성난 폭도들에게 참패당해 퇴각했습니다. 이에 로마황제 네로는 로마제국 최고의 명장인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영국 정복에 참전했던 제10군단 등 최정예 3개 군단과 다수의 외인부대를 주면서 유대를 정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탈출

 베스파시아누스는 부대를 이끌고 유다왕국을 공격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68년에 그는 유다왕국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유대 열심당 정예군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예루살렘만은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주민들이 굶주려 항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

 

그 무렵 강경파인 열심당의 무장투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견하는 한 유대인 평화주의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유명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였습니다. 바리새파였던 그는 상황판단과 통찰력이 뛰어난 학자로 유대전쟁이 결국에는 대학살로 막을 내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임을 예견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유대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평화를 얻기 위해 항복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강경파인 열심당에 의해 거절당하자 그는 유대 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마침내 길은 하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자신이 직접 로마군 사령관과 모종의 타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포위되어 있던 예루살렘은 아비규환이었고, 사람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하루에도 수천 명씩 죽었으나 아무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자신의 확신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함께 탈출계획을 짰습니다. 제자들은 길거리로 나가 옷을 찢으며 슬픈 목소리로 위대한 랍비 요하난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은 열심당원들에게 존경하는 랍비의 시체를 도심 외곽에 매장하여 도시에 전염병인 흑사병이 돌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랍비가 든 봉인된 관을 메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장군을 만나 머지않아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뒤,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유대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조그만 학교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에 놀랐지만 예언이 이루어지면 호의를 베풀기로 약속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멸과 랍비학교 개교

 같은 해 로마황제 네로가 자살했습니다. 그 뒤 세 명의 정치군인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몇 달 만에 살해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유대 원정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에 의해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고 서기 69년 로마 원로원이 그의 즉위를 허락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랍비의 예언이 성취된 데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랍비는 당시 로마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황제에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임사령관인 아들 '티투스'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파멸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도시에 유대학교 ‘예시바’를 세우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이로써 유대 교육과 문화유산이 소멸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로마-유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로마제국 최초의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포로로 잡힌 유대인 수는 9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유대인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1차 로마-유대 전쟁으로 인해 유대 민족 태반이 전멸했습니다.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 대지주· 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되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유대교는 사두개파의 소멸로 예배를 이끌 제사장 곧 사제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후 유대교는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지키는 종교가 되어 평신도 모두가 성경을 읽고 돌아가면서 강론을 하기 위해 글을 익혀야 했고 이후 유대 공동체는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인 랍비가 이끄는 전통이 세워졌습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를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로 갔습니다. 거기서 율법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고 율법학교를 개설했습니다. <토라>를 가르쳐 매년 소수의 랍비를 길러내어 유럽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 마을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시나고그를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전쟁으로 패망한 유대인들의 생존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교육은 곧 신앙입니다. 요하난 벤 자카이는 나라는 비록 망해서 없어졌지만 예시바를 통해 유대교와 전통이 전승되기만 한다면 유대 민족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민족을 살려낼 교육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적처럼 지켜낸 것입니다.

 

유대에서는 랍비를 길러내는 율법학교인 예시바 1학년을 ‘현자’라 불렀고, 2학년을 철학자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생’이라 불리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겸허한 자세로 배우는 자가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학생이 되려면 수년 동안 수업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율법의 기존정신, 정의와 평등 

 이러한 전통 속에 율법학교를 졸업한 랍비들은 스스로 ‘평생학생’이라는 자각을 품고 평생 공부하며 살았습니다. 랍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인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학습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랍비들은 교육을 통해 율법의 기본정신 곧 ‘정의와 평등’ 개념을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란 공동체 내의 약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능력껏 돈을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돈은 자본주의의 효율을 활용해 벌지만 그들은 이를 개인이 쓰지 않고 공동체에 다 내놓아 필요에 의해 나누어 썼습니다. 곧 분배는 공산주의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가 2000년 가까이 버텨온 힘입니다. 이러한 원형이 현재에도 살아 있는 게 이스라엘의 키부츠입니다

 

또한 평등이란 개념은 세상에 통치자는 하느님 한 분이며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나이 고하, 직위 유무에 불구하고 서로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 사상에 입각해 그들은 도전적으로 질문하고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는 ‘후츠파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 창의성의 근원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비록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 생활을 하면서도 교육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전통과 정체성 곧 민족혼을 2천년 동안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칼 보다 무서운 게 펜’이라는 사실을 역사에서 증명한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이렇듯 교육의 힘이 단절의 위험에 처한 민족혼을 구해내어 그들의 동질성을 지켜내고 이를 토대로 더욱 융숭한 발전을 이루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교육의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공동체의 전통과 정체성은 물론 공동체의 미래도 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015-02-10  전설의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과 골란고원!

▲엘리 코헨의 사진

 

전설의 이스라엘 스파이와 골란고원!

 이스라엘인 대부분은 전설적인 스파이 영웅 엘리 코헨(Elie Cohen)을 기억한다. 코헨은 이집트 출생 유대인이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의 본국 귀향을 도우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첩보원으로 변신한다. 그는 시리아계 아르헨티나 실업가로 위장하여 시리아 권력층 깊숙히 침투한다. 특히 1967 65일에 발발한 6일전쟁 전,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한 고급정보를 모사드로 수시로 타전하였다.

 
그러나 1965년 신분이 탄로나 그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공개처형 당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묻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코헨은 죽을 때도 이스라엘을 향해 눈을 뜬 채 죽겠다고 하였다이스라엘인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전설적인 스파이이면서도 철저한 애국자였던 코헨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스파이 코헨은 아르헨티나에서 가구 무역으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번 사업가로 시리아 상류층에서 알려졌다. 그의 주변에는 고급장교, 정치가, 기업가 등 소위 시리아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항상 몰려들었다. 수시로 그는 시리아 국방부와 주요 군사시설에 고급장교들과 들락거렸다. 또한 군사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는 코헨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울러 돈 많은 실업가 코헨은 정치인·군 수뇌부 인사들의 부인에게 진주목걸이, 팔찌, 모피 코트 등 온갖 사치품을 적절한 이유를 만들어 선물하곤 하였다. 뭇 남성들은 선물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내의 코헨 칭찬에 녹아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코헨이 올린 첩보 중 가장 큰 전과는 당시 시리아군 참모총장 조카인 마지 대령으로부터 입수한 골란고원의 군사기밀들이었다. 즉 민간인 출입이 절대 금지되었던 이 지역의 비밀군사기지를 마지 대령과 함께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예들 들면 코헨은 이 여행으로 골란고원 서쪽의 122M 야포(80)와 전차부대 위치, 주요 요새 내부설계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시리아군 벙커와 주변 교통호

 

  그 후에도 코헨은 시리아군의 실력자들과 함께 수차례 골란고원을 여행했다. 어떤 때는 우쭐해진 시리아군 장교들이 그에게 상세하게 병력 배치와 이스라엘 공격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마다 영민한 코헨은 “나는 일개 비즈니스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러나 명석한 이 스파이의 머리속에는 이미 시리아군 작전계획이 다 입력되어 있었다.
 
 
드디어 1963 8, 코헨('카밀 아민 터베스'라는 가명 사용)은 시리아 정권에서 빛나는 실력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정계와 군부 유력자들 사이에 신용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실업계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어 시리아 정부의 요직을 맡을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 시리아 알 하페즈 대통령은 그를 국방상 차관으로 임명하여 향후 국방상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어떨까? 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사실 알 하페즈 대통령은 과거 아르헨티나 시리아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할 때 이미 코헨이 돈독한 관계(사실 포섭함)를 맺어둔 사이였다.
 
 
그러나 긴장의 연속인 스파이 생활은 코헨의 성격을 점점 변화시켜 나갔다. 온화하며 누구보다도 친절한 품성을 가졌던 코헨이 오래간 만에 이스라엘에서 가족들을 비밀리 만났다. 그의 성격은 신경질적으로 되었고 때로는 포악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가족들은 그가 프랑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며 조용히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다시 복귀했다.
 
 
골란고원 격전지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으로 안내자 나아만은 자동차를 몰았다. 그녀 역시 이스라엘 전설의 스파이 코헨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정말 이스라엘은 특이한 나라다. 국가 간의 스파이전은 비밀리 소리없이 진행되는 줄 알았으나 이스라엘은 일반 국민들조차 적국에서 사로잡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간첩에 대해서도 이렇게 후손들이 기억하고 있다니... 그녀는 이스라엘 스파이 코헨을 “다마스커스 속의 우군(Our man in Damasus)"으로 수차례 표현했다. 보기에는 평범한 러시아계 이스라엘 여성이었지만 자기 조국의 전쟁사·수난사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고 있다. 사실 그 내용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자로서 이런 분야에 관심과 열정이 있다는 자체가 신기하게 여겨졌다.

 

 시리아군 과거 진지를 돌아보는 안내자 나아만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에 유대인 인구는 불과 60만 내외. 이런 소수의 인구로 주변 아랍민족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에 2000여 년 전에 없어졌던 선조의 나라를 결국 다시 세웠다. 그 이후 1956년 스웨즈 전쟁(2차 중동전쟁), 1967 6일 전쟁(3차 중동전쟁), 1973년 욤키브르 전쟁(4차 중동전쟁) 등 주변 아랍제국들과 무려 대규모의 전쟁을 4번이나 치루었다. 그러나 그때 마다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은 승리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1973년에 약 400만 명, 2012년에 약 700만 명에 달했다. 현 인구 중 약 200만 명 정도가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나아만이 갈리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폐기된 시리아군 벙커로 나를 안내했다. 갈릴리 호수 옆 멀리 이스라엘 정착촌도 보였다(현재 골란고원에는 약 33개의 이스라엘 집단마을이 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1960년대 이곳 시리아군 진지에서 수시로 이스라엘 마을에 포격을 퍼부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스라엘군의 반격도 있었다. 뒤이어 시리아군은 헤르몬산에서 갈릴리 호수로 흐르는 수로를 차단하여 이스라엘 식수원을 고갈시키고자 했다. 이스라엘은 절대 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했다. 따라서 그들은 생존권 수호를 위해서는 무력수단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시리아군 진지에서 내려다 본 갈릴리호수 옆 이스라엘 마을


 
이런 상황에서 스파이 코헨은 1967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나아만은 또다시 시리아군 진지 옆에 무수히 서있는 “유칼립투스” 나무와 코헨에 얽힌 이야기를 했다. 1950년대 말부터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갈릴리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골란 고원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고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골란고원은 별다른 삼림이 없어 병력과 장비의 위장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이스라엘군 정찰기가 수시로 국경근처까지 와서 골란고원 일대를 촬영하곤 하였다.
 
 
이때 시리아에서 미래 국방상까지 거론되는 코헨은 군 당국에 고원지역에서도 빠른 성장이 가능한 속성수인 “유칼립투스”를 군사기지 주변에 대거 식재할 것을 조언했다. 특히 그는 유명 가구회사를 운영하여 산림과 목재에 대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넓은 평원에 동일 종류의 산림으로 특정지역을 위장했을 때 그 지점이 쉅게 식별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군사상식을 시리아군은 간과했다. 스파이 코헨의 조언을 받아들인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의 군사기지에 대대적인 위장식수 조림사업을 시행했다. 그리고 “유칼립투스”숲 아래에 수 많은 시리아군 병영이나 장비들을 숨겨 두었다
.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위장식수 유칼립투스

 

   1967 6 7일 아침! 시리아 선제공격을 위해 출격한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은 골란고원의 “유칼립투스” 산림지역만 골라서 기습적인 폭격을 가했다. 그들은 이미 이 나무의 형상과 군락지에 대해 사전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울창하게 조성된 위장식수 아래서 은밀하게 행동했던 시리아군들은 졸지에 하늘로부터 불벼락을 얻어맞았다. 오늘날 골란고원의 유칼립투스 조림지에 가면 전쟁 당시 파괴된 시리아군 병영이나 참호·벙커 등을 쉅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국민들은 “유칼립투스”에 얽힌 전쟁사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유칼립투스숲 안에 폐기된 시리아군 병영 전경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처럼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로 스파이 코헨의 운명은 바꿔었다. 1965 1 24일 새벽! 다마스커스 시내 인도대사관 옆 숙소에서 깊게 잠들어 있던 그는 시리아 방첩부대에 포착되어 어이없이 체포되었다. 코헨이 체포되기 전날 밤, 그는 시리아 알 하페즈 대통령이 결정한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편성”에 대한 긴박하고도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그 중요한 정보는 코헨의 무전송신기를 통해 즉각 이스라엘로 타전되었다. 그러나 그 전문송신이 코헨의 마지막 보고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음 날 새벽녘, 8명의 시리아군 방첩대원들이 코헨의 숙소로 들이 닥쳤다. 그리고 코헨은 체포되고 송수신기를 포함한 일체의 스파이 장비가 압수되었다. 어떻게 시리아 방첩기관원들이 코헨의 숙소에 기습적으로 들이 닥치게 되었을까? 실로 우연한 계기가 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
 
 
코헨 숙소 바로 근처에는 인도 대사관이 있었다. 그런데 대사관 전신계가 수개월 전부터 인도 뉴델리로 보내는 무전연락에 전파방해를 받고 있다고 시리아 정부에 신고했다. 시리아 당국은 원인을 규명하려고 했으나 그럴만한 정교한 장비가 없었다. 따라서 소련 군사고문단에 그 수수께기를 풀어 달라는 의뢰했다. 소련 통신전문가들은 대사관 근처에서 누군가가 허가없이 전파를 보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전파탐지장치 탑재차량을 배치하여 은밀하게 추적했다. 추적팀은 금방 코헨의 전파 발신신호를 포착했다. 그러나 발신시간이 짧아 기술자들은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방첩부대는 발신원으로 생각되는 주변 빌딩을 철저하게 수색했다.
 
 
코헨이 체포되기 전 시리아 당국은 의도적으로 전파발신지 주변빌딩에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런 의도적인 정전을 미처 알지 못했던 코헨은 축전지를 이용하여 첩보를 이스라엘로 타전했다. 결국 전문가들은 송수신기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했고 그 곳을 급습하였다. 시리아 정보기관은 모르스 전신 전문가 입회하에 코헨에게 이스라엘로 허위첩보를 보내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코헨은 송신속도와 리듬의 미묘한 변화로 모사드에 자신의 처지를 알렸다. “나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선고를 받은 인간입니다!”라고
 
 
코헨의 체포소식은 즉시 알 하페츠 시리아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 카밀(코헨의 가명)이 이스라엘 스파이라니?.

 

시리아 정부는 일시적으로 공황에 빠졌다. 그의 체포에 따라 약 500여 명의 시리아 정치가·군인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코헨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시리아인들을 끝까지 보호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군사기밀을 알려 주었던 시리아군 대령은 코헨이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의 군판사로 앉아 있기도 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모사드는 코헨을 구하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공작을 하였다. 시리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인을 통하여 수백만 달러의 현금과 엄청난 비군사물자의 시리아 지원을 제의했다. 심지어 로마 교황까지도 시리아 대통령에게 코헨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코헨과 절친했던 알 하페츠 대통령 및 군부의 실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위해 오히려 사형선고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렸다. 즉 “우리는 이스라엘 스파이와는 전혀 무관하다!”라는 것을 정적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의 사형집행 전, 한 레바논 저널리스트는 코헨과의 인터뷰를 했다. 그 기자가 전하는 코헨의 마지막 진술.

“나는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시리아로 찾아 왔습니다. 나의 동포, 나의 아내 그리고 세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내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주기 바랍니다.
 

▲ 코헨의 교수형 사진

 

 1965 5 19일 새벽,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에르마자 형무소의 무거운 문이 열렸다.그 동안 숱한 고문과 정신적 고통으로 코헨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무장 군인 4명에 의해 끌려 나온 코헨은 대기 중인 죄인 호송차에 실려졌다. 그리고 다마스쿠스 구시가지 광장으로 갔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선 가운데 그는 교수대로 올라섰다. 사형집행인은 죄수에게 허술한 흰자루를 입혔다. 또한 코헨 머리에 용수를 씌우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그리고 코헨이 히브리어로 기도의 말을 되풀이하는 순간 발밑의 문은 떨어지고 그의 목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때가 새벽 03 35! 이 모든 장면은 시리아 텔레비전으로 중동지역에 생중계되었다.

 

코헨이 처형되고 난 이후 데이빗 벤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수상)은 시리아의 야만적인 행동에 대한 항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텔아비브 시내를 행진했다. 이스라엘의 어떤 시나 자치단체에서는 도로 이름을 『엘리 코헨』으로 개명했다. 숲이나 공원 이름은 그를 위해 바꿔어졌다. 그 시간 코헨의 아내 나디아는 남편의 목이 밧줄로 감기는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 봤다. 코헨이 사형을 당하는 순간 그녀는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그녀는 신속하게 병원으로 운반되어 목숨은 구했다. 지금도 『엘리 코헨(Elie Cohen)』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영원한 스파이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골란고원의 옛 시리아군 병영이나 진지 주변에는 아직도 어김없이 “유칼립투스”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추측컨대 현재 시리아 본토 내의 주요 군사기지에는 아직 이 나무들로 덮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일전을 앞두고 소련으로부터 대규모의 전투장비와 물자를 지원받아 전국 곳곳에 전개해 두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자국의 스파이를 영웅화하여 후세에 기억케 하는 국가는 사실 이스라엘과 북한 밖에 없다. 북한의 경우에도 한국에서 송환되어 온 이인모를 포함한 간첩출신 미전향 장기수들을 영웅으로 둔갑시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특히 “이인모 영웅 따라 배우기” 등으로 북한의 신세대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신념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적국에서의 스파이 활동은 비겁하고 부도덕한 행동이라는 인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국의 생존을 위해 적국 내에서의 간첩활동은 어느 국가에서나 일상적으로 다 있는 일이다. 6·25전쟁 당시 약 30,000여 명의 대북유격대원과 특수공작요원들이 북한지역에서 활동했다. 그 중 일부는 체포되어서도 끝까지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전향을 거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과연 이런 이들의 공적을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얼마나 될까?
 
 
안내자 나아만의 전설적인 스파이 코헨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1967년 골란고원의 전쟁은 이미 이스라엘이 이겨 놓고 시작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폐기된 시리아군 진지와 교통호 밑으로는 멀리 갈릴리 호수 옆에서 넓은 농지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보였다. 그들은 오늘 날 자신들이 누리는 평화와 자유를 위해 과거 코헨과 같은 자랑스러운 조상들이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하였다
.

 골란고원의 이스라엘 정작촌 농가 전경

 

  골란고원 키브츠내의 사업장 전경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볼거리

예루살램성전 내부구경(예수의 무덤)   - 클릭

 

▲올리브 나무

 

 

 

 

 

 

 

 

 

 

 

▲팔미라 로마극장

 

▲네게브 사막

 

▲해지는 갈릴리 호

 

▲눈덮인 예루살렘 성전산의 바위사원 13.1.10

 

▲눈덮인 올리브 산

 

▲성서에서 중요한 성지인 예루살렘

 

 

▲홍해

 

▲흑해

 

▲사해의 소금 형성 장면

 

▲지구에서 제일 낮은점 사해= 해발 마이너스 400m 지구의 최저점,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나누는 폭 15km의 거대한 국경선이다.

 

 

 

▲하늘에서 본 그림 같은 사해

 

◆일상

▲공포의 메뚜기 떼  13. 3. 5.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

 

 

▲수도 야아론 고속도로가 회개의 날 공휴일로 완전히 비어 있다

 

▲아이벡스  = 네게브 사막 바위산

 

▲염소 모는 아이들

 

▲학 한마리가 아몬드 과수원 사이를 날고 있다

 

▲해변 풍경

 

▲12.11.12. 골란고원의 시리아 바리카 마을에 포탄이 떨어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 12.11.14. 이로인해 하마스 최고사령관이 사망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반격 - 12.11.15.

 

▲팔레스타인 로켓을 추격하는 이스라엘 로켓 12.11.14.

 

▲이스라엘 아이언돔 로켓 12.11.15

 

 

 

 

▲전쟁이 끝난 가자지구의 하늘

 

 

■ 이슬람 국가 IS

Islamic State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 ISIL,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 ISIS, 다에시, Daesh

▲이슬람 국가 국기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가 이끄는 조직으로 알카에다 이라크지부에서 출발해 시리아와 이라크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국가(Islami State, IS)'를 자처했다. 인질 살해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장면을 인터넷에 공개해 선전책으로 이용하고 있다. 2017년 7월 이들이 장악했던 지역인 이라크 모술을, 10월 시리아 라카를 미군과 연합군에 함락당했다. 이후 시리아 북부에서 미군과 쿠르드족 민병대를 포함한 연합군과 전면전을 벌여 2019년 3월 마지막 근거지인 시리아의 바구즈를 잃고 지역적 기반을 상실한 상태에서, 2019년 10월 26일 최고지도자인 '칼리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31일 후계자로 아부 이브라힘 알하셰미 알쿠라이시가 지명되었다.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 이전 명칭인 'ISIS(Islamic State of Iraq and al-Sham, ‘이라크-알샴 이슬람 국가)' 등으로도 불리며, 서방에서는 이들을 폄하하는 뜻으로 '다에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9년 결성된 수니파 계열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이 전신으로, 2004년 알 카에다의 한 조직이 되었다가 2006년 이라크의 반군단체들과 합병을 거쳐 조직을 키웠으며, 알 카에다가 세력을 잃은 2013년 ISIS를 수립했고, 2014년 칼리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주도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일부에서 '이슬람국가(IS)'라는 국가를 수립했다고 선포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추종자를 모집, 훈련하면서 테러를 자행해왔다. 미국과 연합군 및 쿠르드족 민병대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2017~2019년에 걸쳐 주요 거점을 상실했으며, 2019년 10월 26일 수장인 알바그다디가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하면서 와해 국면에 이르렀다.

다음백과

 

◆ 2015.02.14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IS 리더 알바그다디와 IS, 어떻게 커왔나

- 한때는 폭력 싫어했던 40
축구 잘해 별명이 '메시', 美의 이라크 침공 맞서다 수감
극단적 테러리스트 '득실'… 조직 운영·테러 기술 배워

-
사담 후세인·빈라덴 복제품 IS
2004
년 김선일씨 살해한 무장단체 JTJ '뿌리'
알카에다 이라크支部 거쳐 후세인 잔당 유입되며 급성장

▲젊은 시절의 알바그다디

 

불과 5년 전까지도 존재감이 없었다. 수줍은 30대 이슬람 성직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 단체 이슬람국가(IS)를 이끄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자다. 바로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다.

알바그다디는 1971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25㎞ 떨어진 사마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출신 배경과 IS 가입 이전 행적은 거의 알려진 게 없지만, 여러 외신은 그가 이슬람 종파 중 수피파()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보도했다. 수피파는 이슬람 전통 율법을 중시하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배격하고 타 종교에도 관대한 편이다.

바그다드의 이슬람 대학(Islamic university)에서 이슬람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바그다드 서부 톱치의 모스크(이슬람 예배당)에서 성직자로 활동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그때까지 알바그다디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대학 동창 아메드 알다바시는 "(알바그다디는) 내성적이고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동료 성직자도 "그는 공손하고 폭력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축구 실력만큼은 모두가 주목할 만큼 탁월해서 예배당 축구 팀원들이 그를 '메시'(아르헨티나 축구 선수)라 불렀다"고 말했다.

알바그다디가 급변한 첫 계기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다.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공격했다. 이에 반발한 그는 소규모 민병대를 조직해 미군에 맞서면서 점차 테러리스트로 변모했다.

IS
의 원형인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유일신과 성전(JTJ)'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카타르의 알자지라 연구소에 따르면, 원래 JTJ는 전후(戰後) 이라크 재건을 돕는 구호단체나 외국 기업을 약탈하던 작은 단체였다. 2004년 한국인 김선일씨를 살해한 것도 이들이다. 소규모 범죄 집단에 불과했던 JTJ는 알카에다의 리더이며 9·11 테러를 주도했던 오사마 빈라덴을 만나 그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조직 이름도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AQI)'로 바꿨다.

이후 AQI는 이라크 전쟁으로 축출된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의 잔존 군벌을 대거 흡수해 현재의 IS와 같은 형태를 갖췄다. 양쪽 모두 반()서방·반()시아파 성향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융합은 어렵지 않았다. 본격 융합의 장()이 된 곳은 공교롭게도 이라크 남부 미군 포로수용소 '캠프 부카'였다. 이곳 수감자 대부분이 이슬람 급진주의자거나 사담 후세인 지지파였기 때문이다.

 

 

알바그다디도 캠프 부카의 수감자였다. 그는 2005년 테러 혐의로 투옥돼 4년간 복역했다. 4년의 시간은 그의 인생행로를 결정적으로 바꾼 두 번째 계기가 됐다. 알바그다디와 IS '테러 괴물'로 성장하게 되는 본격적인 시작점이기도 했다. 현재 IS 2인자이자 '알바그다디의 오른팔'로 불리는 아부 무슬림 알투르크마니를 비롯, 전·현 IS 대원 다수를 수용소에서 만났다. 시카고 드폴대학교 톰 모카이티스 교수는 "캠프 부카는 그에게 범죄와 테러를 가르치고, 인맥을 쌓을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후세인 군벌과의 결합은 AQI를 정규군 못지않은 조직력을 갖춘 단체로 탈바꿈시켰다. AQI는 알카에다로부터는 차량 폭탄 공격과 같은 테러 기술을 익혔지만, 전통적인 군사 전술 능력은 부족했다. 반면 후세인 군벌은 1980~1988년 이란과 화학 전쟁을 벌인 군사 전문가였다. AQI는 과거 군벌에게서 전투력을 배웠고, 이름도 '이라크의 이슬람국가(ISI)'로 변경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이 두 집단의 연합은 단순한 '정략결혼'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했다.

2009
년 수용소에서 풀려났을 때, 알바그다디는 극단적 테러리스트로 거듭나 있었다. 석방 이듬해인 2010 5, 그는 ISI의 리더로 임명됐다. ISI 2011년부터 지속된 시리아 내전을 틈타 이라크에서 시리아 북동부 변두리까지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같은 이슬람 반군이라도 명령을 듣지 않으면 잔인하게 살해하며 내전에 참여한 군소 무장 단체를 하나둘 복속시켰다. 악명을 떨친 ISI '이라크·샴 이슬람국가(ISIS)'로 개명했고, 작년 2월엔 알카에다로부터 '배신자' 소리까지 들어가며 독립을 선언했다.

작년 6 IS "칼리프(이슬람 정치·종교 지도자)가 지배하는 세계적 이슬람 국가를 건국하겠다"며 조직명에서 지역적 개념인 이라크·샴(시리아 일대)을 떼내 IS가 됐다. 알바그다디는 IS의 칼리프 자리에 올랐다.

조선일보  오윤희 기자   노석조 기자

 

◆2015.04.20  IS의 핵심은 후세인의 후예들

["후세인 정권 2인자, 티크리트 교전 중 사망"]
, 후세인 정권 인사들 전략 없이 무차별 축출
축출된 인사들 IS 합류, 다시 美 공격하는 상황 "후세인이 무덤에서 복수"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는 사담 후세인 정권 때 이라크 최고 통치 기구인 혁명평의회 부의장으로 '후세인의 오른팔'이라던 인물이다. 후세인 정권의 2인자였던 그의 행방이 묘연해진 시기는 2003년 미국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해 시작한 이라크 전쟁 이후였다. 미군은 알두리의 행방을 쫓기 위해 현상금을 1000만달러( 110억원)나 내걸었지만 10여 년째 잡지 못했다. 그사이 알두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그런데 10년간 묘연했던 알두리의 행방이 최근 확인됐다.

이라크 정부 관계자가 17(현지 시각) 이라크 정부군과 극단주의 무장세력 IS(이슬람국가)의 티크리트 교전에서 알두리가 사살돼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 중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후세인 휘하의 군인들이 IS의 핵심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일부 알려진 사실이지만, 알두리의 사망 확인으로 이 같은 정황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 18 "알두리가 지난해 IS가 티크리트를 점령할 때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후세인과 그의 ‘오른팔’ 알두리 - 1999 5월 당시 사담 후세인(오른쪽) 이라크 대통령에게 그의 오른팔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왼쪽) 이라크 부통령이 모술 시민들이 만든 메달을 걸어주는 모습. 알두리는 옛 후세인 정권에서 집권 바트당의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지낸 ‘2인자’였으나 정권 몰락 후 IS에서 활동했다. 이라크 정부는 17일 알두리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독일 일간 빌트

 

결국 미국이 IS를 키웠다는 주장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이 후세인 정권 당시의 군부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축출하는 바람에 이들이 IS로 들어가 IS의 군사적 세력을 키웠고, 결국 지금의 IS와 같은 괴물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후세인 정권 붕괴 후 과도정부 때 미군이 이라크 군인들이 일체의 공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고 연금까지 받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어 오갈 데 없어진 군인들이 IS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이라크 군인 40만명이 이 법의 적용을 받았다" "미국은 이렇게 내팽개쳐진 이라크 군인들이 향후 어떤 세력이 될지 예상 못 했다"고 전했다.

IS
세력 확장을 주도한 대표적 이라크군 인사는 2010년 사망한 IS의 전 지도자 아부 오마르 알바그다디다. 이라크군 장교 출신인 그는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쫓겨난 사령관 등 이라크군 주요 인사들을 IS로 끌어들였다. 뒤를 이어 IS 지도자가 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이라크군 출신 영입에 공을 들였고, 2011년 미군이 이라크를 떠난 이후엔 후세인 정권의 군인들을 더 많이 포섭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연간 20억 파운드( 32000억원)에 달하는 IS의 수입 가운데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석유 밀거래도 후세인 부하였던 이들 덕에 가능했다"고 전했다.

현재 IS에서 시리아 지역을 담당하는 아부 알리 알안바리, 아부 아이만 알이라키, 외국인 대원과 자살 폭탄 테러를 담당하는 아부 카셈 등 IS의 핵심 대다수가 이라크군 장교 출신이다. 워싱턴포스트는 "IS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지휘부는 대부분 이라크군 출신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이 전쟁 계획을 비롯해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후세인 휘하였던 군인들이 움직이는 IS가 미국을 비롯해 세계를 대상으로 테러를 벌이는 것을 빗대 "후세인이 무덤에서 복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곽수근  1사회정책부 기자 

 

◆2015-04-25  시리아 현지에서 전해온 IS의 새로운 공격 양상과 뉴로즈 행사

IS, 연합세력에게 코바니 뺏기자 시가지 돌발테러로 응수    

즐거움이 가득해야 할 3쿠르드족의 신년행사인 뉴로즈(Newroz)는 두 차례에 걸친 IS의 자살폭탄테러 때문에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뉴로즈는 쿠르드족의 신년행사로 보통 318일에서 24일 사이에 열린다.) 이번 IS의 폭탄테러는 시리아의 아뮤다(Amuda)() 안에 있는 하사카(Hasakah) 광장에서 발생했으며, 최소 35명이 목숨을 잃었고 15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발이 발생했을 때 나(옴라니)는 다행히도 시리아의 카미실리(Qamishli)()에 있었다

 

폭발이 있고나서 나는 좀 더 자세한 상황을 확인하고자 현지 기자들과 함께 뉴로즈 행사가 열렸던 아뮤다 시로 향했다. 아뮤다에 가서 사망자와 병원으로 후송된 부상자들의 피해상황을 정확히 확인해봤다.

 

시리아 현지, 뉴로즈 신년행사 /잔야르 옴라니


피로 물든 시리아의 새해

카미실리에서 아뮤다로 향하는 길 주변은 전부 목초지다. 광활한 목초지의 녹색 빛깔을 방해하는 것은 터키와 국경을 나누는 철조망과 감시초소들뿐이었다. 아뮤다는 자지라(Jazira)()의 수도다. 아뮤다의 병원에 가보니 불안에 떨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나지브(Nazibir). 그녀의 13살 난 딸이 폭발로 인해 부상을 당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뉴로즈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그녀는 누이와 함께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하려는 찰라 갑자기 폭발이 발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모하마드 키딜(Mohamad Khidr)이라는 부상자는 “오후 6시경 뉴로즈 행사를 구경하고자 거리로 나갔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엄청난 폭음이 들렸어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모두가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얼마 뒤 두 번째 폭발이 달리던 우리 바로 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폭발로 저는 다리를 다쳤고 출혈이 심했습니다. 저는 다친 다리를 끌고 약 200미터를 걸어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몇 분 뒤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의 차가 현장에 도착했고, 그들이 우리(부상자들)를 병원으로 실어왔습니다” 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부상자들의 아우성이 빗발치는 가운데, 4 살배기 아들과 함께 병원에 실려온 아버지를 인터뷰했다.

 

“뉴로즈 행사를 가려고 저는 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당시 부인이 제발 뉴로즈 신년행사에 가지말라고 애원하더군요. 하지만 쿠르드족에게 뉴로즈 행사의 의미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 행사입니까. 저는 아내의 간청을 거절하고 문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와 제 4 살배기 아들 무하마드는 폭탄테러로 인해 다치고 말았습니다.   

 

예견된 폭탄테러였으나, 신년행사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시리아의 쿠르드족 기자인 아지드(Agid) 씨는 이번 IS 자살폭탄 테러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자살폭탄테러에 앞서 쿠르드족 경찰이 신년행사에서 테러가 있을 것임을 미리 쿠르드족 사람들에게 귀띔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년행사로 들뜬 나머지 쿠르드족들은 이 정보를 무시하고 행사를 진행했으며, 결국 테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코바니에서 쿠르드족 민병대원들이 IS를 격퇴하고 난 뒤로 IS는 자지라(Jazira)주 안에서 자주 기습 자살폭탄 테러를 시도하고 있다. 자지라 주()는 시리아 북부에 있으며 근처에는 터키 국경이 있다. 이 자지라 주의 동쪽에는 쿠르드족의 지역정부가 있다. 아뮤다 시는 자지라 주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카미실리와 하사카는 주의 인구 밀집지역이다.

 

병원에서 나는 다른 부상자 아메드(Ahmed)씨를 만났다. 그는 심각한 화상을 입어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폭발이 저를 덮쳤습니다. 그 폭발로 심각한 현기증으로 어지러웠습니다. 제 온몸이 불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이 믿기지 않습니다.

 

쿠르드족 민병대 전사자들의 장례를 위한 운구 행렬 /잔야르 옴라니

 

응급수혈에 시민들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아뮤다 병원의 관계자인 페레즈 하모 박사는 이번 테러로 인해 병원은 부족한 혈액을 공급받아야 했다고 말했다병원은 신속히 지역주민들에게 응급수혈을 위한 헌혈 공지를 발표했다. 하모 박사는 “이번 테러의 대부분 부상자는 여성과 아이들이었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시민들의 발 빠른 헌혈로 한시름 놓았습니다. 시민들이 이렇게 자기 일처럼 도울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시리아의 도시에서는 IS 때문에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이는 병원에도 영향을 미쳐, 의약품과 치료장비가 부족하다. 병원은 부상자 치료에 의료품이 부족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번 아뮤다의 하사카 광장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신년행사 분위기는 가라 앉았다. 몇몇 사람들은 폭발이 있고난 직후 광장 주변 쓰레기들을 치우거나 삼삼오오 소규모로 신년 분위기를 내는 정도였다. 거리는 조용했고, 이웃끼리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정도로 숙연해졌다.

 

하사카 광장 주변 상점도 이번 테러로 근심이 늘어났다. 사탕과 과자를 파는 한 상점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상점주인은 이번 뉴로즈에 맞춰 다량의 사탕과 과자를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자살폭탄 테러 때문에 매출이 오르기는커녕 손님이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 우리의 상황은 좋지 못합니다. (테러의 여파로) 터키와의 국경은 막혔고 뉴로즈 행사는 제대로 시작도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쿠르드족들은 터키 다야르바키르(Dayarbakir)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뉴로즈 행사 방송을 시청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 쿠르드족 노동당 대표(PKK)가 신년 연설을 했다. 올해 그의 연설에는 시리아 내전으로 싸우고 있는 쿠르드족 민병대(YPG)의 노고를 치하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뉴로즈 행사의 유래 

뉴로즈는 시리아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들이 매년 여는 신년행사이자 축제이다. 이 행사는 정치적인 목적이 없는 순수한 신년행사로화려한 쿠르드족 전통복장을 입는다. 그리고 쿠르드족의 전통놀이인 조르나(Zorna)와 다홀(dahol)을 한다뉴로즈 불이라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불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추고, 그 불을 뛰어넘는 놀이다.

 

뉴로즈 행사는 시리아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이 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시리아 정부가 반길수만은 없었다. 쿠르드족들의 유대관계와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이나 반란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는 탓이다. 쿠르드족 기자인 파헤드 유시프(Farhad Yousif)씨에 따르면 1985년까지는 이 신년행사를 시리아 정부에서 금지했다. 시리아 정부는 몰래 이 행사를 위해 모인 쿠르드족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뉴로즈 행사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의지마저 꺾지는 못했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속하는 경찰들마저 같은 편으로 만들어 이 행사를 이어나갔다. 결국 뉴로즈 신년행사는 더 이상 시리아 정부도 단속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시리아 정부는 이 행사의 이름을 뉴로즈에서 다른 이름으로 바꾸려고 여러차례 시도했다. 행사의 이름을 바꾸면 본래 뉴로즈의 의미도 퇴색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을 뉴로즈가 열리는 날과 겹치게 만들어 공휴일로 선포한 적도 있었다고 유시프 씨는 전했다

 

이번 뉴로즈 신년행사에는 쿠르드족의 선거일이 겹쳤다. 이 때문에 신년행사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깃발을 장식하고 있다. /잔야르 옴라니

 

시리아 정부와 쿠르드족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다가 2008년 시리아 정부는 정보국을 이용해 뉴로즈 행사에 참가한 3명의 10대 청소년을 죽였다. 당시 죽은 청소년들의 이름은 모두 무하마드(Mohammad)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로즈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대대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쿠르드족 출신의 시리아 정부 관계자들도 대거 참가했다. 이 행사는 시리아 내에서 쿠르드족 밀집지역인 자지라, 아프린(Afrin), 코바니 등에서 큰 규모로 열린다.

 

이 행사의 참된 의미는 신년을 축하하는 것 외에 조상들에게 예()를 표한다는 의미가 크다. 코바니에서 열린 올해 뉴로즈 행사에서는 전사자들을 기리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코바니에 살던 쿠르드족 중 나이모(Naimo)라는 사람은 전쟁의 폐허가 된 코바니를 등지고 모두 떠난 뒤에도 끝까지 남았다.

 

코바니는 IS와 내전으로 예전의 모습을 잃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뉴로즈 행사를 열었다. 이번에 코바니에서 열린 뉴로즈 행사에 참가했던 한 쿠르드족은 “IS가 우리의 뉴로즈 행사를 막을 수는 없으며, 우리의 의욕을 상징하는 뉴로즈의 모닥불을 꺼트릴 수 없다”고 말했다.

 

▲뉴로즈 행사를 위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 /잔야르 옴라니

4 2일 시리아에서, 잔야르 옴라니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2015-06-06  IS와 맞서 싸우는 쿠르드족 연합세력의 사진들과 현지 이야기

이라크와 시리아 등 중동지역에서 취재 활동 중인 프리랜서 잔야르 옴라니 씨가 수니파 무장조직 IS(이슬람국가)와 관련된 현지 소식을 <조선Pub>에 보내왔다. 조선Pub은 옴라니씨가 현지에서 겪은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생생히 기록해 보내온 현지 정황을 단독으로 공개한다.


옴라니 씨는 현재 IS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쿠르드족 민병대를 따라 이라크와 시리아를 넘나들고 있다. 지난달 말 그는 이라크에서 현지 경찰에게 체포돼 약 15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현재는 다시 풀려났으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본 내용을 한국에 알리고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잔야르 옴라니 약력

국적: 이란 (쿠르드족)
나이: 26
직업: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학력: 이란 야즈드 대학(Yazd Univ.) 사회학 학사
언어: 쿠르드어, 페르시아어, 영어 구사
특이사항:
BBC
를 비롯한 외신에 시리아 내전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왔으며, 그의 영상을 통해 시리아 내전 상황이 해외로 전파됐다. 조선Pub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하면 옴라니 씨가 보내온 두 편의 영상도 확인할 수 있다.

- 이라크의 산악지대 샨갈(Shangal)의 약 80% IS의 손에 들어가
-
샨갈의 식용작물 코미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
-
이라크 샨갈을 덮친 학살의 그림자

▲이라크의 샨갈 산에서 내려다 본 전경, <사진= 옴라니>

 

IS가 80%가량 장악한 이라크의 산악지대 샨갈(Shangal)

디릭(Dirik, 시리아의 도시명)에 있는 바자회에서 한 야생 식용작물을 보게 됐다. 이것이 나의 지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 야생 식용작물은 샨갈(Shangal, 이라크의 산악도시)의 대부분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샨갈의 현지인들이 신성시여기는 코미(Komi)라는 작물이다.

 

이 샨갈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전설이 시작되는 땅, 메소포타미아. 샨갈도 메소포타미아 못지않은 전설을 안고 있다. 샨갈 지역주민들에 따르면 그동안 IS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샨갈의 전설은 이어지고 있다.

 

이 땅의 전설은 예지디(Yezidi : 이슬람교에서 파생된 쿠르드족의 전통종교로 샨갈지역 거주민 대다수가 믿고 있다) 난민들의 삶과 함께 숨 쉬고 있다. IS에 대항해 싸우는 전장(戰場) 최전선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그 전설의 발자취를 나는 예지디인들이 신성함으로 여기는 작물 코미(Komi)에서 찾을 수 있었다.

 

조리를 마친 코미의 모습/사진=옴라니

 

샨갈의 산(山)에서 보낸 나의 첫날은 폭우가 쏟아져 순탄치 않았다. 함께 간 일행 구에바라(Guevara), 베르소단(Berxodan)은 흰색의 작은 3인용 텐트 안에 몸을 집어넣었다. 구에바라가 베르소단에게 “오, 신이시여. 더 이상 이 샨갈에 재해가 오지 않게 해주소서”라며 농담을 던졌다. 베르소단은 폭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 “나는 이 비가 계속 왔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일 아침에 코미를 먹을 테니까” 라고 말했다.

 

비가 오면 코미는 잘 자라게 된다. 코미는 샨갈의 산악지대뿐 아니라 일부 이라크 일대에 퍼져있는 쿠르드족 민병대의 주둔지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작물을 코미가 아닌 “딤블란(dimblan)”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라크의 신성한 식용작물이자, 귀중한 수입원 코미(Komi)

맛있는 식용작물이자 신성한 작물인 코미가 나는 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가 샨갈에서 보낸 시기는 공교롭게도 코미의 철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이 작물은 감자와 유사하게 생겼으나 열을 가해 조리하면 마치 버섯처럼 부드러워진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샨갈 산악지역에서는 보통 2월말이면 싹을 틔우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보통은 한 달 동안 수확이 가능하다.

 

조리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대개는 삶거나 구워서 먹는다. 구울 때는 동물성 기름을 팬에 두르고 구워내며, 구운 토마토와 함께 먹는다. 현지인이자 예지디인인 티리지(Tirizh)라는 아이는 코미를 “치유의 음식(healing food)이자 눈(目)에 좋은 음식”이라고 말해줬다. 코미는 현지인들에게 자연이 주는 식량이자 중요한 생계수단이며 수입원이었다.

 

텐트 안에서 함께한 동료들, 그리고 가운데 갓 채취한 코미의 모습 /사진 = 옴라니

 

비가 오던 날 아침 나와 카말준디(Kamal Jundi)씨는 샨갈 산에 올라 코미를 채취하러 갔다. 평상시 같았으면 25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동했을 테지만 오늘 그의 곁에는 AK-47 소총 한 자루가 25명의 친구들을 대신했다. 산에서 코미를 발견하자 카말은 날카로운 칼로 조심스럽게 코미를 베어냈다.

 

카말에 따르면 코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신(神)의 섭리(攝理)’ 덕분이라고 했다. 이 신의 섭리를 이라크 현지에서는 ‘리스크(Risq)’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코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기술이나 뛰어난 시력이라기 보다는 신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를 따라 코미를 채취하다보니 금새 2kg쯤 되는 코미를 얻을 수 있었다. 아마도 카말의 리스크가 좋은 모양이다. 크기가 큰 코미 1kg은 이라크 현지에서 약 1만2000 디나르(dinar)에 거래된다. 미화로 약 10달러 정도이다. 작은 크기의 코미는 1kg에 6000~8000 디나르(미화 5달러 내외)에 거래된다.

 

IS와 싸우는 최전선에서 순찰 중인 샨갈 산악지역 경비대원들(YBŞ, Shangal Protection Unit)/사진=옴라니 

코미와 얽힌 구전동화

이라크의 샨갈 현지인들은 코미를 사랑한다.  지난해부터 이 샨갈 산악지역에서 위험한 전투가 지속됐지만, 현지인들의 코미 채취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이라크 현지에서 생활중인 쿠르드족 민병대원 덜심 로헬랏(Dersim Rojhelat)은 “이곳 현지인들은 비가 오는날에도 코미를 채취하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간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중 일부는 IS가 샨갈 산악지역에 심어놓은 지뢰를 밟아 죽거나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코미가 왜 코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동화(口傳童話)가 있을 뿐이다. 이라크의 예지디교 교도인 파키르(Faqir)씨가 들려준 구전동화 내용은 대략 이렇다.

 

미르 이브라힘(Mir Ibrahim)이라는 예지디교의 성직자가 매일 아침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기도문(Qawls)을 읆조렸다. 그러던 중 여느 때처럼 아침에 기도를 올리던 이브라힘은 갑자기 나타난 가젤(gazelle, 영양 羚羊) 한 마리를 보았다.

 

이브라힘은 곧장 그 가젤을 사냥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가젤이 이브라힘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자신을 3시간 뒤에 죽여달라고 간청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3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1시간은 새끼들에게 가야하는 시간, 1시간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시간, 마지막 1시간은 다시 이브라힘 앞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브라힘은 이를 허락하고 가젤을 놓아주었다.

 

젖을 먹이러 새끼들 곁으로 달려간 가젤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려고 했으나, 새끼들이 먹지 않으려 했다. 젖을 먹이려고 실랑이를 하는 사이 많은 시간이 지체되자 가젤은 하는 수없이 이브라힘에게 다시 돌아왔다. 이 와중에 젖을 먹이지 못한 가젤은 오는길에 젖을 땅에 흘리며 돌아왔다.

 

이브라힘은 가젤을 다시 만났지만, 놓아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브라힘이 가젤을 놓아주자 이에 탄복한 하늘이 그 가젤이 땅에 흘린 젖줄기에서 이 코미라는 신성한 식용작물이 자라도록 했다는 것이다.

 

쿠르드족 노동당(PKK)의 게릴라 군인들이 치커스(chikers)라는 게임을 하고 있다./사진= 옴라니

 

학살의 전과 후

이곳 현지인들 사이에서 모든 질문의 답은 페르만(Ferman)의 전과 후로 나뉜다. 페르만은 현지 예지디인들이 부르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이 학살은 역사적으로 약 70회나 이 이라크의 샨갈지역을 휩쓸어왔다. 현재 이라크의 샨갈과 주마르(Zumar)에는 쿠르드족 민병대가 주둔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지역에 IS도 머무르고 있다. IS는 최근 이라크의 곳곳을 빠른 속도로 쳐내려오고 있다. 샨갈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 가장 최근 샨갈지역에서 벌어진 학살(페르만)은 테러집단 IS의 공격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예지디인중 일부는 IS의 공격을 피해 샨갈 산의 깊은 곳으로 도망쳐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을 견디다못해 사망했다. IS의 공격으로 약 6000명의 예지디인들이 죽었고, 1만2000여 명은 실종됐다.

 

예지디인들중 일부는 샨갈을 벗어나 좀 더 안전한 도시로 도망쳤다. 다행히 쿠르드족 민병대(YPG, YPJ)에 의해 수천명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쿠르드족 민병대와 더불어 쿠르드족 노동당(PKK)의 게릴라군 그리고 페시메르가(Peshmerga, 쿠르드족 군사조직)까지 합류하여 IS의 전진을 저지해준 덕분이었다.

 

쿠르드족 노동당(PKK)이 맞고 있는 최전방에서 한 대원이 총기를 조준하고 있다. /사진 옴라니

 

샨갈에 오랫동안 살아온 현지인 코디다(khodida)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아랍국가에선 예지디인들을 일컬어 나지스(Najis)라고 부른다. 나지스는 더러운 민족을 뜻한다. 그렇게 나지스를 싫어했던 주변 중동국가의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고자 IS에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샨갈에 살면서 IS의 공격 양상을 줄곧 보아왔다. IS는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중요 건물부터 공격을 하고, 중심도로가 되는 도로와 교각 곳곳에 지뢰를 설치한다고 전했다.

 

샨갈에 거주하는 동안 이곳의 종교인 예지디교를 믿는 많은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예지디교를 믿는 샨갈지역은 주변 중동국가들로부터 많은 침략과 압박을 받아왔다. 지금 겪고 있는 IS의 공격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외부의 침략이라고 현지인 바라캇(Barakat)씨는 귀띔했다. 예지디인들의 전설 속 길가메시(Gilgamesh, 메소포타미아에서 발현한 고대왕조)와 사산 왕조(Sassanid)도 억압을 받아왔다고 바라캇 씨는 말했다.

 

▲쿠르드족 노동당(PKK)의 게릴라군의 여성대원들 /사진 옴라니

 

샨갈은 한때 인구가 8400만명에 육박하기도 했으나 74차례의 학살을 거치면서 그 수가 현저히 줄었다. 쿠르드족 민병대원들과 함께 샨갈의 산에서 싸우고 있는 현지인 라쇼(Rasho)도 여느 샨갈의 예지디인들처럼 샨갈의 전설을 믿는 사람중 한 명이다. 그의 곁에는 항상 예지디교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무샤프 라시(Mushaf Rash, the Black Book)가 있다.

 

라쇼는 그 무샤프 라시 속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성서 안에 지금과 같은 전례가 담겨 있어요. 책 안에 보면 외부인들이 샨갈로 쳐들어올 것이고 샨갈의 산을 중심으로 다른 병력이 투입되어 고립된 샨갈 주민들을 구세주처럼 구해낼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고 말했다.

 

샨갈 산을 지키는 이라크의 군인들이 트럭으로 이동 중이다. /사진 옴라니

 

앞서 말한 코미를 채취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나는 그곳에서 산 아래 전장(戰場)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산에서 보니 각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군대별 각기 다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우리의 연합세력인 쿠르드족 노동당(PKK)과 함께 PDK(쿠르드족 민주당, Kurdistan Democratic Party)와 PUK(쿠르드족 애국연맹, Patriotic Union of Kurdistan) 그리고 페시메르가는 두혹(Duhok, 지명이름)부터 샨갈까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특히 쿠르드족 노동당(PKK)는 샨갈 산악지대에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외부 언론에 공개된 것과는 달리 샨갈 산악지대의 대부분은 쿠르드족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지역은 IS가 차지하여 활개하고 있다. 샨갈의 산악지대중 오직 20%만이 우리 연합세력이 장악했을 뿐이다. 쿠르드족의 여러개의 연합세력이 이 샨갈지역에 모여있다보니, 지역주민들 중 일부는 쿠르드족이 우방세력인지조차 헷갈리고 있다. 지역주민을 위해 싸우고 있음에도 일부에서는 쿠르드족들은 우리를 속이고 있는 적이라고 모함하기도 했다. 샨갈의 대부분을 IS가 장악하면서 자신이 살던 집을 잃은 카말씨는 자신의 마을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IS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최전선 /사진 옴라니

 

▲최전방에서 쿠르드족 노동당(PKK)의 여성대원이 AK-47 소총을 적진을 향해 조준하고 있다./사진 옴라니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 잔야르 옴라니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2015.11.16  '테러 本山' 알카에다가 두손 든 IS

이슬람국가(IS)의 파리 동시다발 테러는 14년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또 다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알카에다'가 일으켰던 미국 9·11 동시다발 테러다.


세계의 중심이 일개 테러 단체에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구촌이 지켜봤다. IS 역시 이번 테러로 사실상 '세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알카에다에 이어 지구촌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고 있는 IS 5개 키워드로 분석했다.
 

[IS테러와 세계大戰] 5가지 키워드로 본 IS

①스승에게 파문당한 제자

IS는 테러의 모든 것을 알카에다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선생님'이 보기에도 '제자'가 너무 잔혹했다. 결국 2014년 알카에다는 자기들과 노선이 맞지 않는다고 조직 내 다른 단체까지 잔혹하게 공격하는 IS를 조직에서 쫓아내 버렸다. IS는 원래 시리아 내 알카에다 산하 조직이었지만, 자신들을 배척한 알카에다를 뛰어넘으며 이슬람권 테러단체의 맹주로 자리 잡았다.

 

알카에다는 미·소 냉전 상황이었던 1979년 옛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무자헤딘(아랍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오사마 빈라덴(2011년 미군 공격으로 사망)이 결성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사관학교 같은 곳이지만, 최근 IS의 악명에 밀려 빛이 바래가고 있다.

 

 

"우리는 국가다"

IS가 기존 테러단체와 차별화되는 것은 이들이 작년 6월 시리아·이라크 일부를 거점으로 '이슬람국가(Islamic State)'라는 독립국 수립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IS는 현재 중동이 서방 등 외세에 오염됐다며, 이슬람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별도의 나라 건설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 IS는 자신들이 서방을 테러하는 이유에 대해 "서방이 IS를 국가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제거하려 하기 때문에 보복하려는 것"이라 주장한다.

 

IS '영토'는 물론 자체 화폐도 갖고 있다. 점거 지역 내 석유·천연가스를 수출해 재정을 마련하기도 한다. 또 치안·사법·재정·의료·교육·지방행정 등을 맡는 부처와 선전전·전자전·테러작전을 전담하는 기관을 따로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기존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이슬람 사회에 대한 구미의 간섭에 반발한 지하드(성전)에 나선 것일 뿐, 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

 

 

③미국과 후세인이 낳은 악마

IS 최고지도자 아부 알바그다디(44)는 원래 이라크의 온건파 성직자였는데,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민병대를 조직해 미군에 맞서면서 테러리스트로 변해 갔다. 특히 2005년 테러 혐의로 미국 감옥에 4년간 투옥됐는데, 이때의 미군에 대한 반감과 감옥에서 만난 다른 테러리스트와의 교류를 통해 극단적인 테러리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석방 이듬해인 2010 5, 그는 IS 리더로 임명됐다.

 

IS는 이라크전에서 패퇴한 사담 후세인 정권의 군 병력을 흡수하면서, 기존 테러단체와 격이 다른 군사전략과 무장능력을 갖추게 됐다. 2003년 후세인 정권(수니파)이 무너지자 기득권층이었던 군 고위층은 새 정권(시아파)에서 배제됐다. 이에 군 장교들은 병력을 끌고 반정부 군벌이 됐는데, IS는 반미·반시아파라는 공통점을 앞세워 이들을 흡수·통합해 몸집을 키웠다.

 

SNS 전략의 달인

IS는 인터넷과 미디어를 완벽히 이해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한 최초의 테러단체다. 인터넷에 동영상·웹진을 뿌려대고, 세계 어느 곳이든 개인 SNS까지 뒤져 사회불만 세력을 찾고 이들을 일 대 일로 포섭했다. 포섭당한 젊은이들이 "IS 전사가 되겠다"며 시리아로 향하는 기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난 6월 튀니지 해변에서 소총을 난사해 영국인 15명 등 40여 명을 숨지게 한 테러범도 SNS 등을 통해 IS 사주를 받은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였다. IS가 미국 본토에서 벌인 첫 테러라고 주장하는 지난 5월 미국 텍사스주 '무함마드(이슬람 선지자) 풍자만화전() 테러'도 비슷한 사례다.

 

⑤무슬림도 무차별 공격

알카에다는 테러 대상에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거의 예외 없이 제외했다. 유대교 회당, 미국의 시설 등으로 공격 대상을 한정했다. 하지만 IS는 최고지도자 알바그다디를 칼리프(이슬람 정치·종교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이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했다. 이라크 마을을 점령하면서 무고한 주민을 잔인하게 집단 살해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존 테러조직과 무엇이 다른가

 

IS(이슬람국가)는 말 그대로 ‘국가’를 지향한다. 알 카에다가 반미(反美)와 이슬람 근본주의로 뭉친 아랍 지역 테러 결사이고, 탈레반의 집권 목표가 아프가니스탄에 국한된 데 반해, IS는 유럽·아프리카·인도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던 중세 이슬람 전성 시절의 ‘칼리프(이슬람 정치·종교 지도자) 제국’의 부활을 목표로 삼고 있다. IS는 중동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온라인을 통해 지구촌 전역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SNS 선동을 통해 전 세계의 사회 부적응·불만세력 등을 자극해 자생 테러리스트로 키웠다. 유럽·미주·호주 등 서방세계에서도 IS 추종 세력의 자생적 테러가 벌어졌다.

 

특히 인질을 참수하고 산 채로 불사르거나 폭사시키는 장면을 근접 촬영해 영화처럼 편집한 동영상을 SNS에 유포하며 서방세계의 공포감을 극대화시켜 존재감을 키웠다. 점령 지역에선 나름의 입법·사법·행정 체계를 갖추고 영문 월간지(다비크)까지 정기 발행하는 것도 이전 테러단체와는 다른 모습이다.

한반도 3배 면적 장악한 뒤
국경 넘나들며 ‘무차별 테러’
알카에다와 한차원 다른 집단

어떻게 운영되나

 

IS는 점령 지역의 원유 판매 및 은행·문화재 약탈 등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IS는 지난해 6월 이라크 서북부 모술을 침공하면서 은행 금고에 있던 현금 4억달러( 4500억원)를 챙겼다. 이라크 님루드와 시리아 하트라 등 고대 유적을 ‘우상’이라며 파괴하는 한편, 다른 루트로는 유물을 밀매해 최소 1억달러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구촌, IS테러와세계大戰

이슬람 국가들 "IS 파리 테러는 反종교 범죄"

단 한 번 모습 드러낸 IS 지도자 알바그다디

이라크 성직자 출신, 잔인한 살해 장면 유포시켜
美 최근 공습작전 "리비아 支部 리더 사살"

 

이슬람국가(IS)는 최고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44)를 정점으로 각 지역 지부장이 나뉘어 있는 구조다. 작년 '이슬람국가'를 건국할 때 모습을 드러낸 이후 종적을 감춘 알바그다디는 '보이지 않는 셰이크(아랍어로 '우두머리')'로 불리며 지부장들을 통솔하고 있다. 이슬람 성직자 출신으로 스스로 '칼리프(이슬람 정치·종교 지도자)'라고 칭하는 그는 원리주의 사상을 내세워 조직의 결속을 강화한다. 한때 그가 미국 공습에 사망하거나 권력 다툼에 밀려 축출됐다는 주장도 제기됐으나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IS 최고지도자 아부 알바그다디. 그는 지금껏 공식 석상에 단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IS 온라인 잡지 다비크

  

IS 지도층에 대한 정보는 최근 미국의 IS 공습으로 일부 간부가 죽거나 체포되면서 윤곽을 드러냈다. 미 국무부는 14(현지 시각) "공습 작전으로 IS의 리비아 지부 리더인 위샘 나즘 압드 자이드 알주바이디를 사살했다"고 밝혔다. 알주바이디는 올해 초 리비아 해안 도시의 건설 노동자인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참수할 때 노출돼 미 대테러팀의 추적을 받았다.

 

알바그다디의 동선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는 "알바그다디는 자신의 위치를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지부장들에게 지령을 내릴 때도 여러 경로를 거친다"고 전했다. 알바그다디의 참모진에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군부 출신 장군들이 있다. 미국은 지난 4 IS 근거지에서 후세인의 최측근이었던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를 찾아내 사살했다. IS의 조직은 전통적인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지도자들과 후세인 정권 출신 군 장교로 구성된다. 이 같은 다양한 세력을 총괄하고 있는 알바그다디가 제거될 경우 IS는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후계자는 파악되지 않았다.

 

'국경 없는 테러' IS "한국도 안전지대 아니다"

 

알바그다디의 특징은 잔인함이다. 여자아이도 참수하고, 인질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며 이를 영상으로 촬영해 인터넷에 유포하는 IS의 잔혹함도 알바그다디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분석이다. 한때 그의 우두머리였던 알카에다의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조차 이런 그를 향해 "너무 잔인하다" "무슬림이 아니다"며 비난했다.

 

이라크 출생인 알바그다디는 청소년 시절에는 수줍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대학 동창 아흐메드는 영국 언론 인터뷰에서 "알바그다디는 대학생 때도 말이 없었으며, 유일하게 축구를 할 때만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증언했다.

조선일보  최원석 기자, 예루살렘=노석조 특파원

편집= 뉴스큐레이션팀

 

◆2015년 11월 16일  이슬람국가는 어떤 조직 - “IS, 역사상 최고부자 테러단체”

美언론 “유동자산 20억달러”
이라크 영토의 3분의 1 장악

월급 · 자택 · 아내까지 제공
빈곤에 지친 젊은이들 유혹

최고 지도자는 ‘알바그다디’
북阿·중앙亞까지 세력 확장

프랑스 파리 연쇄 테러는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 중이던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전 세계적으로 존재감을 굳힌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IS는 최근 보름 사이 아프리카, 아시아(중동), 유럽 3개 대륙에서 잇달아 터진 대규모 테러를 자행했다고 주장하며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시리아 북부 락까에 본부를 둔 IS의 자금력과 군사력은 알카에다 등 이전의 다른 테러조직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IS는 지난해 이라크 주요 도시와 시리아 유전지역을 점령하면서 기반 시설을 확보한 데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걸프지역 수니파 부호들의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역사상 최고 부자 테러단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IS는 점령지역에서 약탈, 납치, 공갈, 인신매매 등 각종 범죄를 자행함으로써 활동자금을 마련해 왔다. 이들이 수천 년의 역사가 담긴 중동지역 유물을 도굴, 판매해 벌어들인 자금도 막대하다. 특히 IS가 자금을 마련하는 가장 큰 ‘돈줄’은 바로 시리아 동부지역 유전지대를 이용한 석유 밀매다. IS 2012년부터 시리아 동부 유전지역인 데이르 에조르주 등을 장악했으며 이 지역에서 탈취한 석유를 시리아 정부에 되팔거나 터키 등 인근 국가에 밀수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바탕으로 IS가 현재 확보하고 있는 자산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앞서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IS가 가진 유동성 자산이 20억 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IS
의 자금력만큼이나 인력 규모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IS 대원은 당초 15000명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지난해 말 미국 상원 정보위원장인 다이앤 파인스타인(민주·캘리포니아) 의원은 이들이 3만∼5만 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특히 여기에는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 외국 국적을 가진 지하디스트도 다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1월에는 한국인 김모(18) 군이 IS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국내에도 충격파를 던졌다. IS는 중동·북아프리카지역에서 빈곤에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월급과 자택, 아내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유럽 등 그 외 지역에서는 SNS를 통해 조직의 잔혹성과 영향력 등을 과시하며 청년들을 현혹하고 있다. IS는 트위터 계정을 통해 서방 출신 대원들을 모집하고 유튜브에 잔혹한 동영상을 올리는 등 소셜미디어를 주요 선전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IS
의 경우 과거 존재했던 테러단체와는 달리 스스로 국가 설립을 선포하고 자체적인 영토를 갖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IS가 이라크 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으며 시리아에서도 북부와 동부의 상당 부분이 IS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리 테러를 기점으로 국제적 인지도를 갖게 된 IS의 뿌리는 2000년대 초반 이라크에서 태동한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일신교와 지하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직을 이끌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조직명을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AQI)’로 바꾸며 IS의 모체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이라크 이슬람국가(ISI)’로 이름을 바꾼 조직은 2010년 현재의 최고지도자인 알바그다디에 의해 본격적인 성장세를 탔다. 조직명도 주변 지역을 아울러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로 변경했다. 이어 지난해 이라크 서부 수니파지역과 제2 도시 모술을 점령한 후에는 스스로 IS로 명명하고 건국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IS가 영향력을 확장해가는 사이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바레인 등 걸프지역은 물론 이집트, 리비아를 위시한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까지 IS에 충성을 맹세하는 지부 조직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

 

◆2015.11.23  惡名 높은 IS 지도자, 알카에다 1인자 제치고 테러두목 됐다

[IS테러와 세계大戰]
전세계 테러단체 75%가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
여전히 최고 위협 '알카에다'
9
·11 테러 등 '反서구' 주도… 阿·동남아까지 세력 넓혀
-
실질적으로 영토 점령 'IS'
초기 이슬람제국 가능성 열자 세계 무슬림들 큰 지지 받아
-
현상금 1위 알자와히리지만…
잔인한 테러 잇달아 일으킨 알바그다디가 존재감 더 커
 

미 국무부가 중앙정보국·국가 대테러센터의 정보 분석을 통해 지목한 세계 테러단체는 59개다. 전체의 약 75% 45개 단체는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이다.

미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제일 위협적인 테러단체는 여전히 9·11 테러로 악명 높은 알카에다다. 미국은 죽은 오사마 빈라덴에 이어 알카에다를 이끄는 아이만 알자와히리(64)의 현상금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2500만달러( 290억원)를 걸고 있다. 알자와히리는 알카에다라는 이름을 반서구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의 브랜드로 선전해 이슬람권의 반정부 세력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카에다이즘(Al Qaedaism·알카에다주의)'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알카에다를 추종하는 단체들이 중동·아프리카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생겨났다.


 

알카에다에서 떨어져 나간 IS의 최고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현상금은 2위인 1000만달러이지만, 그의 존재감은 이미 알자와히리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도 있다. 리더십에 위기감을 느낀 알자와히리가 공개적으로 같은 무슬림도 잔인하게 살해하는 그의 잔인함을 비난하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IS는 알카에다와 마찬가지로 '지하드(성전·聖戰)'를 선동의 도구로 쓰고 있지만, 시리아·이라크 일대에 실질적으로 영토를 점령하고 '이슬람국가'를 선언하며 세계 무슬림에게 초기 이슬람 제국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알바그다디와 함께 현상금 1000만달러씩의 공동 2위는 3명이 더 있다. 우선 2008년 아프간 주재 국제기구 직원들이 자주 묵는 카불 세레나 호텔을 테러한 하카니 네트워크의 지도자 시라주딘 하카니다. 또 그해 뭄바이 테러를 일으킨 라쉬카르 타이바의 지도자 하피즈 사이드, 알카에다 알자와히리의 측근인 야신 알수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자다.

세계 6위로 현상금 700만달러가 걸린 나이지리아의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이끄는 보코하람도 요주의 대상이다. '서구 교육은 죄'라는 뜻인 보코하람은 어린 여학생 200여 명을 집단 납치해 성 노예로 삼거나 살해하는 등 '아프리카의 알카에다'로 불렸다. 최근엔 IS에 충성 맹세를 하고 범죄 행위를 확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비이슬람 테러범들은 현상금 하위권에 랭크돼 있다.

이슬람 과격주의자의 테러 급증은 중동·아프리카에서 친미 또는 세속 정권의 부패와 독재 정치로 인한 국민의 반미·반정부 투쟁 현상을 반영한다. 이집트 사상가 사이드 쿠툽은 1950년대 아랍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대통령을 상대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1979년 소련이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해 각국의 무슬림들이 참전했는데, 그중에 훗날 알카에다를 만든 오사마 빈라덴이 포함돼 있었다. 냉전 시대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은 아프간 측 무슬림 무장단체에 무기를 제공해 이들 세력을 키우기도 했다.

이스라엘 대테러 국제연구소(ICT)의 샤울 샤이(60) 선임 연구원은 본지 인터뷰에서 "1979년 이란이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에서 반미 정권으로 전환된 뒤 무장단체를 양성했다"면서 "1980년대 말부터는 이란의 라이벌인 사우디아라비아 측이 알카에다 같은 무장단체를 지원하면서 중동 지역이 무장단체들의 각축장이 됐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바르 일란대학의 힐렐 프리시 정치학 교수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 가운데 가장 늦게 생긴 이슬람은 앞의 두 종교와 달리 아직 정교분리(政敎分離)가 되지 않아 정치 싸움이 종교 싸움이 되거나 그 반대가 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IS, 17개국서 1년간 1만여명 살해… 호주·캐나다에서도 범행

예루살렘=노석조 특파원

 

▲2015.12.04  "푸틴, 이 개야" 욕설 후… IS, 러시아 인질 참수

러의 시리아 공습 겨냥한듯 "너희 아들 죽이겠다" 경고

▲테러 단체인 이슬람국가(IS) 2(현지 시각) 러시아 인질을 참수하는 동영상〈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했다.

 

오렌지색 옷을 입고 수갑을 찬 채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으로 영상에 등장한 이 러시아 인질은 "나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정보요원 카사예브 마고메드(23)이며, IS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IS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붙잡혔다"고 밝혔다.

7
30초 분량인 이 영상은 '러시아인들이여, 너희들은 정복당하고 모욕당할 것이다'라는 러시아어와 아랍어 자막으로 시작된다. 잠시 후 장면이 바뀌고 바닷가에 꿇어앉은 인질과 칼을 들고 서 있는 IS 대원이 등장한다. 복면을 쓰지 않고 등장한 IS 대원은 러시아어로 "잘 들어라. 푸틴, 이 개야. 너희들의 공격은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 뒤 인질 목에 칼을 들이대고 참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처럼 편집한 이 영상에는 클로즈업된 푸틴의 얼굴도 등장한다.

IS
대원은 또 "너희들이 죽인 우리 아들을 위해 너희  아들을 죽일 것이고, 너희가 파괴한 우리의 집을 위해 너희들의 집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지난 9월 말부터 시리아 내 IS 공습에 나섰고, 시나이 반도 여객기 폭발 테러를 겪은 뒤 IS에 대한 공습을 강화하고 있다.

참수된 남성이 실제 러시아 정보기관 소속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러시아 측은 동영상의 진위 여부에 대한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이슬비 기자

 

◆2016-01-21  보코 하람   Boko Haram

의미

▲보코하람깃발

 

보코하람은 이슬람국가(IS), 알 카에다 등 극단주의 조직들이 주로 사용하는 속칭 '블랙 스탠더드' 깃발을 사용한다.

 

나이지리아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는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이다. '보코하람'이라는 이름은 나이지리아 북쪽 지역 방언인 하우사어로 '가짜'를 뜻하는 보코와 '금지된 죄악'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하람'이 결합된 단어다. 여기서 말하는 '보코'는 보코하람이 나이지리아의 서구식 교육기관을 공격하면서 '이슬람에 따르지 않는 서구식 교육'으로 해석됐다.

 

배경

나이지리아는 인구가 1 60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인구 대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거대 산유국이다. 북부의 하우자, 남동부의 이보, 남서부의 요루보 등 언어와 문화가 다른 250여 개의 다양한 부족들이 살고 있다. 1인당 GDP 3000불에 가까워지고 있으나 국민의 70%가 하루 2달러 이하으로 연명하는 극빈층이다.

 

▲나이지리아 최대도시 라고스

 

특히 북부와 남부 두 지역의 경제적 격차가 크다. 남북은 종교적으로도 나뉘어 있는데, 인구 중 약 9000만 명인 무슬림은 대부분 북부에 거주하고 있고, 남부에 있는 주민은 대부분 기독교도다. 남부는 최대도시 라고스를 비롯해 석유가 생산되는 유전이 밀집되어 있어 부유하다. 교육, 보건, 상하수도 등도 기반시설도 대부분 남부에 투자되어 있다. 반면 농업 위주의 북부지역은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다.

 

이는 1960년대 이래 거듭된 쿠데타의 배경이 됐다. 특히 1966년 남동부의 이보족과 북부의 하우자족이 1월과 7월 각각 쿠데타를 일으키며 대량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1967~1970년에는 원유산업을 장악한 남동부의 이보족이 분리독립을 추구하며 비아프라 공화국을 선포하고 중앙정부와 내전을 치렀다. 내전 기간 100만명의 민간인이 전투와 기아로 사망했다.

 

이후 나이지리아는 군부독재 시기를 겪다, 1999년 선거에서 오바산조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북부지역의 빈곤과 종교를 배경으로 한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다시 평화가 깨졌다.

 

보코하람의 시작

▲보코하람의 로고 

 

2002년 나이지리아 북동부 보르노 주 마이두구리에서 시작된 보코하람은 코란을 엄격한 근본주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종교세력에서 출발했다. 샤리아(이슬람 율법) 제정과 이슬람 신정국가 설립을 주장하는 성직자 모하메디 유세프가 이끌던 초반에는 크게 폭력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코하람은 경찰과 언론에서 붙인 이름으로, 스스로는 '전도와 지하드를 위해 선지자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사람들(Jama'atu Ahlis Sunna Lidda'Awati Wal-Jihad)'이라고 칭했다.

 

이들이 폭력집단으로 바뀐 것은 2009년 경찰이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유수프 추종세력 10여 명을 처형하면서부터다. 일각에서는 당시 보코하람이 보르노 주지사 선거에 개입했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반발하는 보코하람과 나이지리아 군경이 마이두구리에서 시가전을 벌였고, 리더인 유수프와 보코하람 대원, 민간인 등 700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재판도 받지 못하고 가족들과 군중이 보는 앞에서 즉결 처형됐고, 이때 동영상으로 촬영된 처형 장면은 방송에도 보도됐다. 이 사건은 보코하람이 극단적인 테러집단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잔혹한 테러 범죄

2010 7월 새 지도자 자리에 오른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정부군에 복수를 다짐하는 비디오 동영상을 공개했다. 이후 보코하람은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수차례의 자살폭탄테러와 암살을 벌이고, 바우치 주의 감옥을 습격해 보코하람 대원을 포함한 700명이 넘는 죄수를 탈출시켰다. 2011년에는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에 위치한 UN 지역 본부에 자동차 폭발 테러를 벌여 23명의 사망자를 냈다.

 

2012년부터 본격적인 테러 활동을 시작해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희생시켰다. 특히 이들은 마을, 병원, 시장, 학교 등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악질적인 테러를 저질렀다. 마을을 공격할 경우 먼저 군과 경찰을 공격하고, 무기와 탄약을 확보한 뒤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도망치려는 사람은 누구나 사살하고, 전투가 가능한 남성은 한곳에 모아 집단 처형했다.

 

2012 1월에는 나이지리아 곳곳에서 폭탄와 기관총 등을 이용한 테러로 하루에 약 185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2월에도 시장에서 민간인 38명을 살해했다. 2013년 보코하람의 활동은 더욱 잔혹해졌다. 9월 요베주립농업대학 기숙사에 난입해 자고있던 65명의 학생을 살해했고, 베니 시엑이라는 마을에서는 검문소를 세우고 군복으로 위장한 채 약 142명의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했다.

 

2014 5월 감보루 느갈라 지역의 주민 300명 가량을 살해했다. 2015년에는 1월에는 북동부 바가 지역의 민간인 마을을 공격해 건물 대부분을 파괴하고 수백명에서 2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을 살해했다. 당시 위성 지도에서 마을 하나가 사라질 정도의 공격이었다.

 

치복 소녀 276명 집단 납치 사건

 

2014년 이후 보코하람은 서구화된 교육을 실시하거나 여성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에 대한 테러 공격을 자주 벌였다. 특히 2014 4월 서구식 교육을 하는 치복시 소재 공립여자중등학교를 급습해 276명의 여학생들을 집단 납치하는 사건을 벌이면서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됐다.

 

납치된 소녀 중의 일부는 탈출했으나 납치된 219명의 생사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 보코하람이 여학생들을 트럭에 싣고 나이지리아의 유명한 열대우림 삼비사 숲[1] 안으로 사라졌다. 나이지리아 정부와 국제사회는 피랍 여학생들이 숲 여러 곳에 나뉘어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굿럭 조너선 대통령이 납치 3주 만에야 대책회의를 여는 등 정부가 미온적인 대응을 보여 시민들의 비판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보코하람은 2014 5월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서 130여명의 소녀들은 히잡을 쓴 채 코란을 외우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보코하람은 "감옥에 있는 조직원들과 소녀들을 맞바꾸자”고 제의했지만 정부는 거부했다 셰카르는 9 '납치는 여성에게 교육을 금하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에 입각해 어린 소녀들에게 학교교육을 반대하는 차원에서 벌인 것'이라며 '납치한 소녀들을 모두 신부로 팔아버리겠다'고 발표했다. 보코하람은 같은 해 11월 납치된 소녀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대원들과 결혼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에 경악한 오바마 미국 정부와 전세계 배우, 작곡가, 유명인 등은 소셜미디어에서 '우리 아이들을 돌려주세요(#Bring Back Our Girls)'라는 해시태그 캠페인을 벌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최고재판관은 보코하람의 행위가 “이슬람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인 것”이라고 비판했고, 수니 이슬람 최고 권위기관인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도 여학생들을 풀어주라고 요구했다.

 

▲미셸 오바마의 '우리 아이들을 돌려주세요(#Bring Back Our Girls)' 해시태그 캠페인

 

미국의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트위터를 통해 #Bring Back Our Girls 해시태그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2015 6월 취임한 부하리 대통령은 12월 보코하람과 여학생 석방 협상을 벌일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BBC에 따르면 부하리 대통령은 “보코하람 지도부가 신뢰할 만하다면,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대화에 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학생들의 소재와 생존 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보코하람, 최악의 테러단체

그간 보코하람의 테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국제앰네스티는 보코하람이 2014년 이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최소 300번 이상의 습격과 전투를 벌였으며 2015년 초까지 나이지리아 동북부를 휩쓸며 최소 55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2000명이 넘는 여성을 납치했다고 밝혔다.

 

또 미국 외교협회(CFR) 2011 5월부터 2015년까지 적어도 1만여명이 숨지고 2014년에만 최소 6700여명이 희생됐다고 집계했다. 보코하람의 테러을 피해 차드와 카메룬 등으로 피한 난민도 1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비영리기구 경제평화연구소(IEP) 2014년 테러 발생건을 집계해 조사한 결과 '전세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테러리스트'는 이슬람국가(IS)가 아닌 보코하람이라고 발표했다. IEP에 따르면 보코하람의 테러 주요 대상은 일반 시민들이어서 공격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코하람은 453차례 공격을 통해 총 6644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는 사망자 수 6073명을 낸 IS를 뛰어넘은 것이다.

 

특히 보코하람은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납치했다.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보코하람은 납치한 여성들을 외딴 마을의 수용소로 끌고 가 자기들 식으로 해석한 이슬람 사상을 주입시키고 강간한다. 또 전투기술을 가르쳐 고향 마을을 대상으로 한 무장 공격에 동원하기도 한다. 개종을 거부하거나 전투기술을 거부하는 이들은 살해했다.

 

2015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인근 국가 연합국이 보코하람에 납치된 700여 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구조했는데, 유엔인구기금에 따르면 최소 214명의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들이 임신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3월에는 정부군의 공격을 앞두고 보코하람 대원들이 강제결혼했던 여성 수십명을 살해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보코하람, IS에 충성 맹세

한때 알카에다에 충성과 연대를 표방했던 보코하람은 2014 IS가 국가 수립을 선포하자 IS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IS에 충성을 맹세한 전세계 이슬람주의 무장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중동과 서아프리카가 떨어져있어 인적 교류나 무기 제공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015 3 7일 아부바카르 셰카우는 IS에 충성을 맹세하는 음성 메시지를 자신들의 트위터에 올렸다. 셰카우는 "칼리프(IS의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를 지칭)에게 우리의 충성을 발표한다. 어려울 때나 번성할 때나 (칼리프에)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언 이후 보코하람은 스스로를 'IS 서아프리카 지부(ISWAP)'라고 부르고 있다.

 

앞서 2014 8월에도 보코하람은 IS에 연대를 표명하며 북부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차드, 니제르 일부 지역에 IS와 같은 칼리프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보코하람이 기존의 테러에서 점령으로 전술을 바꾸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보코하람은 나이지리아 영토의 20%에 가까운 면적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로 보르노주를 점령한 보코하람은 장악한 지역에서 강한 공포통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코하람은 도시를 점령한 직후 주민들을 소집해 여성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매일 열리는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는 등의 새로운 규칙을 발표하고, 이를 어길 경우 채찍질형이나 투석형 등 잔인한 처벌과 공개 처형으로 다스리고 있다.

 

보코하람에는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의 무슬림 주민들 외에도 차드, 소말리아, 수단, 베닌 등 주변국 출신 추종자들이 보코하람에 가담하고 있으며, 일부는 보코하람이 돈을 주고 모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북부 지역의 일부 정치인과 무슬림 성직자들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보코하람에 일정 금액을 상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부바카르 셰카우

보코하람의 지도자 아부바카르 셰카우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로 나이도 알려져있지 않다. 대략 39세에서 50세 사이로 추정된다.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여러번 셰카우가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그때마다 그는 비디오테이프 메시지에 나와 건재를 과시하며 정부군을 조롱했다.

 

2012 9월 나이지리아군이 그를 잡을 뻔 했으나, 아내와 세 아이들만 체포하고 셰카우는 다리에 총을 맞고 달아났다. 다음해 셰카우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2013 5월 여학생들을 집단 납치해 팔겠다고 선언했고, 2014년 치복시 소녀 납치로 이를 실현했다.

 

미 국무부는 2012년 보코하람을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린 후 셰카우에게 700만 달러(71억원)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며, 나이지리아 정부도 여학생 납치사건 뒤 5000만 나이라( 3억원)의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표했다.

 

대응

나이지리아 정부는 2013 5월 북부 3개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보코하람 격퇴를 위해 2만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월급 지급이 늦어지는가 하면, 무기도 대부분 구식이라 군대의 사기가 낮고 성과도 미미하다. 2015 2월 나이지리아, 차드, 카메르, 니제르, 베닌 등 서아프리카에 있는 5개국은 보코하람 등 무장단체에 맞설 지역연합군 8750명을 이 일대에 배치하기로 했으나 재정문제 등으로 연기되고 있다.

 

한편 2015 5월 취임한 부하리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보코하람을 분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이지리아 정부군도 보코하람을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 8000명을 죽게하는 등 끔찍한 민간인 학살과 인권 침해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앰네스티는 보고서에서 나이지리아군의 보코하람 격퇴작전 중 임의 체포된 이들은 2만 명을 넘으며 이중 최소 7000명이 구금중 숨지고 1200명은 재판절차 없이 처형됐다고 밝혔다.

채은하 | 전 프레시안 기자

 

◆2016.03.15  나치를 닮아가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이슬람국가(IS)가 나치의 신병 모집 전략을 모방(copy the Nazis' recruitment tactics), 어린아이들을 세뇌해 차세대 살인마로 만드는(brainwash children into becoming its next generation of killers)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르고(commit atrocious acts against humanity) 있다.

테러 싱크탱크 '퀼리엄'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이렇게 세뇌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속속 첩자, 전투원, 자살 폭탄 테러범, 사형 집행인이 돼가고(turn into spies, combatants, suicide bombers and executioners) 있다. 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극단주의와 폭력을 세뇌당하기(be indoctrinated into extremism and violence) 때문에 현재의 IS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들보다 훨씬 잔혹하고 치명적인(be even more brutal and lethal) 극단주의자들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IS는 다양한 수법으로 어린애들을 꾄다(lure them with various techniques).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주며 미사여구로 가득한 유인물(publications filled with flowery words)을 읽게 한다. 아이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퀴즈를 내고 장난감이나 휴대폰을 나눠주며(hand out toys and mobile phones) 환심을 산다(win their favor). 또 태형·고문·성폭행으로 협박을 가하거나(threaten them with floggings, torture and rape), 가난한 부모들에게 한 명당 매달 수백달러씩 주겠다며 자녀들을 보내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1934년 독일 포츠담 '제국 청소년대회'에서 히틀러식 경례를 하는 어린이. /책세상 제공

 

IS는 이렇게 아이들을 모집해 나치의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처럼 '피티안 알 이슬람(이슬람 아이들)'이라고 명명하고, 극단주의 교육과정으로 세뇌를 시킨다(indoctrinate them through an extremism-based curriculum). 교재는 나치나 북한의 그것과 흡사하다(be as like as two peas). 산수에는 소총·탱크·폭탄이 예문으로 나오고, 화학·물리 시간엔 폭탄 만드는 법과 헬리콥터 격추하는(bring down helicopters) 방법을 가르친다. 체육시간엔 총 쏘기, 수류탄 던지기, 육박전(hand to hand combat)을 한다.

무엇보다 가공스러운(be more formidable than anything)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잔혹 행위에 둔감해지게(become desensitized to brutality) 만든다는 사실. 아이들이 보게끔 일부러 길거리에 머리 없는 시신을 방치하고(leave headless bodies), 공개처형을 한다(carry out public executions). 참수당한 희생자 머리를 들고 있게(hold the heads of decapitated victims) 하고, 그걸로 축구를 하게 한다. 그런 일을 다반사로 만들어(make them commonplace) 잔혹하게 키우기 위해서다.

지리 시간엔 "이 세상에 오직 이슬람 땅과 이교도 땅만이 있다"고 가르친다. 지도는 밝은색과 어두운색, 딱 두 가지로만 칠해져 있다.

윤희영 조선뉴스프레스 부장대우

 

◆2016.06.24  우리가 모르는 새 움츠러든 IS

한국도 더 이상 IS(이슬람국가)의 테러에서 안전한 국가가 아닌 걸까. 619일 국정원의 발표에 사람들은 주목했다. 이슬람 테러단체 IS의 해킹조직이 우리나라 민간인을 테러대상으로 지목했다는 내용이 세상에 공개됐다. IS의 해킹조직인 ‘유나이티드 사이버 칼리파’가 주한미군 공군기지의 위성지도, 좌표 등과 함께 공개한 8318명의 테러대상자 명단 중에는 한국인이 한 명 포함됐다.

유나이티드 사이버 칼리파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조직이다. IS 산하에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 국가들의 주요 정부 기관들을 해킹하는 조직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최근 이들 조직 중 4곳을 통합해 만든 곳이 유나이티드 사이버 칼리파로 알려져 있다. ‘칼리파’(caliphate)는 ‘칼리프의 영토’라는 뜻이며, ‘칼리프’는 이슬람 제국 주권자의 칭호다.

한국인의 명단이 포함되자 이젠 한국도 테러 안전지대가 아니라며 경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최근 수세에 몰리고 있는 IS가 다국적군의 공격을 와해시키고 ‘두려움’을 심기 위해 실체가 없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와 비교하면 소식이 뜸한 IS. 뜸한 사이 미국과 러시아 등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서 수년 간 실행돼 온 IS소탕작전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IS 본거지에도 이미 3만 명 남짓의 대원만 남아 있으며 여기에서조차 대원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IS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IS 세력의 본거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한 번 짚어보자.  

 

 

서방 다국적군의 IS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면서 이라크 팔루자와 시리아 라카의 IS거점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 IS세력은 북아프리카 리비아, 이집트,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세 확장을 꾀하고있으나 IS에 동조하는 대원 수는 현격히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 시리아

지난 619(현지시각) AFP 통신은 “친정부 시리아군이 IS가 ‘수도’라 부르며 주요 거점으로 삼아온 라카 인근지역인 타브카까지 진격했다”고 보도했다. 현재 시리아군은 타브카 공군기지 반경 6㎞ 내부에 진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지는 IS의 근거지인 라카의 북부에 있으며 라카 중심부까지는 45㎞ 떨어져 있다.

이번 진입은 러시아의 공습 지원, 그리고 병력 강화를 등에 업은 승전보다. 시리아군은 일주일 전부터 타브카 기지를 15㎞ 앞둔 상태에서 전진하지 못해 난관에 봉착했지만 러시아의 지원으로 마침내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타브카는 IS 2014년 장악한 전략적 운송거점이다. 시리아군이 이곳을 탈환한다면 시리아군은 라카로 향하는 IS의 물자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을 전망이다. IS로선 숨통이 끊기는 격이다.

 

이라크

이라크 내의 IS 세력도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617일 하이데르 알아바디 이라크 총리는 “IS가 장악했던 팔루자 대부분 지역을 탈환했다”고 발표했다. 알아바디 총리는 이날 오후 텔레비전 방송 연설에서 이라크군이 팔루자 통제권 80% 가량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이번 선언은 이라크군이 523일 이라크 팔루자 탈환 작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나온 것이다. 강경 수니파의 밀집 거주지역인 팔루자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5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2014 1월 이후 IS 2년 간 장악해온 곳이다. IS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처음 점령한 주요 도시이기도 하다.

 

이라크, 시리아 지역에서 IS 점령지와 다국적군 탈환지. (2016426일 기준) 출처.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 BBC

 

이라크군은 팔루자의 대부분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현재 최종목표인 니네베 주 모술 탈환작전도 2단계를 개시하고 있다. 모술은 이라크에서 IS의 상징적인 수도 역할을 해왔고 시리아의 라카와 함께 IS의 정신적 근거지로 여겨져 왔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617일 기자들에게 “이라크 정부군이 팔루자 지역을 재탈환했지만, 완전한 재탈환을 위해서는 좀 더 전투를 치러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IS의 세력이 열세에 접어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쿠르드계 매체 루다우는 619일 “IS 조직원들이 모술의 정부 청사에 있던 각종 장비를 시리아 국경 지대로 옮겼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근거지가 공격받는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쿠르드민주당(KDP) 소속 이스마트 라잡은 “IS는 지금 니네베 주 지역 정부 청사에 있던 값비싼 기계를 시리아로 분주히 옮기고 있다”며 “이라크 모술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리비아

IS는 그들이 ‘칼리프’ 영토로 선언했던 이라크와 시리아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거점 리비아에서도 정부군에 밀려나고 있다. AFP 통신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리비아 통합정부군은 611 IS의 거점 도시인 시르테의 요충지인 항구와 동부의 거주 지역을 탈환했다고 밝혔다.

시르테는 리비아의 전 국가원수인 무아마르 카다피의 고향이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여파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뒤 리비아가 두 개의 정부로 갈라져 혼란에 빠진 틈을 타 IS는 세력 확산에 성공했다.

리비아군 대변인은 영국과 미국의 군사적 지원으로 예상보다 손쉽게 IS 대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리비아군은 지난 한 달 동안 시르테 외곽에서 탈환 작전을 전개해 왔다. 지난주 시르테에서 남동쪽으로 3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IS의 군사 기지를 탈환한 데 이어 68일에는 시르테 진입에 성공했다. IS는 현재 시르테 도심 5㎢ 구역 내에 포위된 채 자살 폭탄 공격과 부비트랩 설치로 저항하는 중이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은 “시르테 탈환이 리비아에서 극단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고 AFP는 전했다. 리비아에는 약 5000명의 극단주의 조직원들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CNN 방송도 이라크와 시리아, 리비아에서 IS 격퇴 작전이 승전보를 울리고 있고 IS도 내부 분열로 흔들리고 있지만, 아직 자축하기에는 이르다고 분석했다.

 

○이집트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IS는 수도 카이로까지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해왔다. 시나이반도 중북부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무장조직 안사르 베이트 알마크디스(ABM)는 지난해 11 IS 지도자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단체명을 ‘시나 윌라야트(시나이 지방)’로 바꾸고 이곳을 근거지를 삼아 활동했다. 이들은 지난해 1031일 이 지역에 추락한 러시아 민간 항공기를 자신들이 격추했다고 주장한 전적도 있다. 이집트 콥트교도들을 살해하고 시나이반도의 알 아리시 알 사파 검문소를 습격해 군경 20여명을 사살하는 등 여전히 국지적 테러행위를 이어오고 있다.

 

○나이지리아

IS는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서 점령지를 잃으며 퇴각했다. 물러난 이들이 새롭게 거점지로 삼은 곳이 리비아와 나이지리아 같은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지난해 초부터 세력을 빠르게 확장시키며 급격히 몸집을 불렸다. 뉴욕타임스 등 서방언론들은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무장단체인 보코하람이 IS와 협력관계에 있다는 정황 증거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존의 시리아나 이라크 거점에 비하면 그 규모가 현격하게 작은 편이다. 시리아와 이라크 주둔 IS 대원수가 대략 3만명이라면 나이지리아에 있는 대원수는 7000명 수준인 것으로 추산된다.

시사저널 | 김경민 기자

 

◆2016.08.26  테러집단 IS 조직원들이 턱수염을 길게 기르는 이유는?

 

턱과 뺨을 덮는 덥수룩한 수염. 푸근한 인상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테러집단 IS의 이야기다. 프랑스 니스에서 테러를 저지른 테러범, 프랑스 파리의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신문사를 공격한 테러범, 벨기에 공항을 공격한 테러범, 시리아의 IS 조직원들. 이 모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남성이며 얼굴에 수염을 길렀다는 점이다.

 

특히 니스에서 트럭으로 군중에게 돌진한 테러범, 모하메드 라후에유 부렐(Mohamed Lahouaiej Bouhlel)은 여권사진에선 수염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테러 직전 트럭을 몰고 다니며 촬영한 사진에는 턱수염이 있었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풍자전문 주간지인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쿠아치(Kouachi) 형제와 벨기에 공항 테러범, 엘 바크라위(El Bakraoui) 형제도 모두 턱수염이 난 상태였다.


IS의 조직원들과 관련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조직원 대부분이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일까. 수염의 풍성한 정도가 IS 조직내 서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IS내 고위 직급자들은 하나같이 풍성한 수염을 자랑한다. IS의 수장인 아부 알바그다디(Abu al-Baghdadi)의 수염이 대표적이다. 그는 IS의 수장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성한 수염을 만천하에 보여줬다.

 

수염은 권장사항일 뿐, 강제성은 없어 …

IS에 가담한 한 조직원의 긴 턱수염. 사진=구글

 

IS 조직원들의 수염은 콧수염보다는 뺨과 턱을 중심으로 난 턱수염(beard)이다. 이 수염은 그 모양과 길이로 볼 때 정돈되지 않은 거친 수염 본연의 모양이다. 마치 야생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포식자,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한다.


중동과 유럽의 전문매체인 〈인터내셔널 인터레스트(International Interest)〉의 편집장이자 중동전문가인 사미 함디(Sami Hamdi)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왜 IS 조직원들 대다수가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까.
IS의 수염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남성들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콧수염은 정돈(trim)하되, 턱수염은 그냥 기르는 걸 권장하고 있습니다.

 

— 그럼 ‘남자는 수염을 기르라’는 지침이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쓰여 있나요.

“코란에는 없지만 알라신의 메시아(Prophet)인 마호메트(Muhammad)가 남자는 수염을 기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답변을 토대로 기자가 마호메트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를 뒤져보니, 수염이나 털과 연관된 내용이 여럿 있었다. 용모(dress)와 관련된 장, Sahih al-Bukhari 5893을 보면 신의 전달자 마호메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콧수염은 짧게 자르고, 턱수염은 그대로 두어라.(Cut the moustaches short and leave the beard as it is)” 이외에 털과 관련된 구절 중에는 ‘인간의 몸에서 나는 모든 털에는 성적 불순함(sexual impurity)이 숨어 있으니 털과 피부를 깨끗이 씻어라’는 구절이다. 또 마호메트(Prophet)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음모(陰毛, pubic hair)를 제거했다고 쓰여 있다.

 

— 마호메트가 수염을 기르라고 할 때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나요. 왜 기르라고 했습니까.
“수염을 기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권장(recommended)사항일 뿐이지 반드시 하라는 강령(compulsory)은 아닙니다. 그런데 IS는 극단주의적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수염을 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 다른 이유는 없나요.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무슬림은 과거 쿠라이시(Quraish) 때 전쟁을 벌인 바 있습니다. 전투에서 이슬람 신자인 무슬림들은 모두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비무슬림이었던 사람들은 콧수염만 기르고 턱수염은 깎았습니다.

 

 — 그럼 당시 턱수염과 콧수염이 일종의 피아식별 요소였던 거군요.
“당시 전투에서는 그런 역할을 했던 셈이죠. 피아식별을 위한 지침이었을 뿐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현재 테러집단 IS는 수염을 기르는 목적 중 하나로 자신들의 강인함과 우월성을 표출하기 위해서도 기르는 것입니다. 이런 수염은 과거 산속에서 러시아와 전투를 벌였던 체첸 공화국의 전사들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체첸의 전사들처럼 IS도 야성적이고 강한 전사들이라는 식으로 표출하는 겁니다.
 

 

IS는 일종의 심리적 요인으로 수염을 기르라고 강요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우월함과 강함을 표출하려는 속셈이죠.

  

— 그렇다면 수염을 기른 사람을 경찰이나 정보기관에서 잠재적 테러범 등으로 분류하고 감시해야 할까요.
“수염을 길렀다는 이유만으론 범죄자로 치부해선 안 되겠죠. IS와 관계없는 일반 무슬림들 중에도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수염과 테러를 연관짓는 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발생한 일부 테러는 수염을 기르지 않은 자들이 저지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IS 조직 내에선 수염의 길이가 해당 인사의 직급과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대다수의 IS 조직원들의 수염이 긴 것은 맞지만 수염의 길이와 직급은 무관하다고 봅니다”.

 

IS가 아닌 일반 무슬림들에게 수염의 길이와 직급에 연관성이 있나요.
“무슬림 중에는 수염이 없지만 유명한 무슬림도 있습니다. 유명한 코란 암송가인 압둘바싯 압둘사마드(Abdulbasit Abdul Samad)라는 사람은 턱수염이 없습니다.

 

IS 조직원 중 만약 수염이 잘 나지 않는 남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수염을 계속 기르도록 할 거 같습니다.

  

테러집단 IS에서는 무슬림 남성이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것은 부도덕(Immoral)한 것으로 여긴다. 이 때문에 IS에 가담한 모든 남성은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다. 조직원 간에도 국적이 달라 수염의 색과 풍성한 정도 등이 제각각이다. 한때 IS는 조직 내에서 수염을 깎은 남성들을 3개월간 감금하고 면도를 다시 할 경우에는 참형에 처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IS의 규율을 어기고 면도한 조직원들을 일종의 본보기 형식으로 처벌한 셈이다. 이 내용이 영국의 매체 《미러(Mirror)》 등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앞서 인터뷰한 사미 함디 씨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슬람교에서 수염을 기르라는 명령은 없다. 이를 반증하는 것은 중앙아시아권 국가의 무슬림들이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는 무슬림이 많은데, 남성 신자들 중 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무슬림에서 수염을 기르는 것에 강제성이 있다면 모두 수염을 길러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IS 조직원들 사이에서 남성이 수염을 기르는 것은 IS만의 특수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비합리적인 강제조항이 다수 있다는 게 기자의 중동취재원 옴라니(Omrani) 씨의 전언이다. IS는 남성의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 청바지를 착용하면 안 된다는 강제조항이 IS 내부적으로는 있다고 알려졌다. 이는 IS 조직원은 물론 IS가 점령한 지역 내에 거주하는 남성들에게도 해당되며 이를 어길 시 감금이나 사형을 당한다.

 
IS 조직원 생존성 위해 수염 기르라 지시해

IS는 이 수염을 요긴하게 활용하기도 하는데 바로 기만술이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인터내셔널비즈니스타임스(IBTimes)〉에 따르면 IS는 이라크의 모술(Mosul)을 점령한 뒤 해당 지역 내 모든 남성들에게 면도하지 말고 수염을 기르라고 명령했다. 이는 유사 시 생존성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IS가 수세에 몰려 연합군의 지상군에 포위될 경우 현지의 모든 남성이 수염을 기르고 있어 누가 진짜 IS 조직원인지 헷갈리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월남전 당시 베트콩과 민간인이 모두 사복을 입고 있어 누가 진짜 베트콩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것과 유사한 전술이다.

 

이렇게 모든 남성에게 수염을 강제적으로 기르게 하는 IS 때문에 스웨덴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수염을 기르는 것을 즐기는 남성 동호회원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모임을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동호회의 마크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깃발이었다. 동호회원들은 이 깃발을 들고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 수염을 기른 남성들이 IS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모습을 본 현지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들은 이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나중에 이들이 수염을 기르는 동호회원들인 것을 알고 풀어 줬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영국의 《인디펜던트》에 실리기도 했다.

 

중동 취재원인 옴라니 씨에게도 연락을 취해 테러집단 IS와 수염에 대해 문의해 봤다. 그는 시리아 등을 직접 방문해 IS와 직접 전장에서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원(YPG)과 몇 주간 함께 생활한 바 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이슬람교에서 수염은 강제성이 없는 권장사항입니다. 이렇게 강제성이 없는 권장지침을 이슬람교에서는 ‘머스타하브(Mustahabb)’라고 칭합니다. 수염은 이 권장사항에 속합니다. 그런데 테러집단 IS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IS만의 교리가 있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슬람교를 해석합니다. 이런 예로 게이(gay)와 같은 동성애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합니다.

 

기자가 옴라니 씨가 말한 Mustahabb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권장’이라는 뜻의 Recommended로 해석됐다. 결국 IS는 자신들의 전장 생존성과 적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고자 수염을 강제적으로 기르게 하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종교적 명분은 핑계에 불과하다.

[ 월간조선 9월호/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

 

◆2016-09-03  테러 갈수록 무차별… “여전히 바리케이드식 원시적 대응”

9·11테러’ 15주년…종잡을 수 없는 수법에 세계 경악
배낭폭탄 이어 트럭까지 무기로…교회-공연장 등 공격장소도 안가려
종교적 이유-이데올로기 넘어 최근엔 불만을 테러로 표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9·11테러가 발생한 지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세계는 끊임없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여 왔지만 테러의 형태와 전술은 진화하고 있다. 테러가 일상화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9·11테러 15주년(9 11)을 앞둔 지난달 28일 뉴욕 9·11메모리얼의 동판에 새겨진 희생자 이름 옆에 작은 성조기가 꽂혀 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테러리즘을 비호하거나 후원하는 나라는 어디든 끝까지 응징할 것이다.

2001 9·11테러가 발생한 9일 후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 연방 상하원 합동의회 연설에서 처음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는 단호했다. “전 세계는 미국 편에 설 것이냐, 테러리스트의 편에 설 것이냐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존 전쟁과 다른 점은 (이 전쟁이) 우리 세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다. 결과는 부시 대통령의 자신감이 아닌 체니 부통령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것이다.

 

그동안 9·11테러 주범인 오사마 빈라덴은 사살됐고, 악의 국가로 지목됐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국은 모두 승리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는 올 7월 프랑스 니스 테러 후 “15년 동안 전 세계 지도자들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해 왔다”며 “그런데 왜 전쟁이 승리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없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오히려 프랑스 마뉘엘 발스 총리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시대는 변했고 프랑스는 테러와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중동을 넘어 확산되는 테러와의 전쟁

9·11테러 후 부시 행정부 8년간(20012008)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며 중동에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전쟁의 장기화는 서방의 피로감으로 확산됐다. 때마침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은 동력을 급격히 잃게 됐다.

 

9·11테러로 촉발된 이라크전 종전을 주요 외교 공약 중 하나로 내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중동 지역에서 군사력을 줄였다. 이라크에선 최소 질서 유지를 위한 요원을 남겨둔 채 철군했다.

 

이러자 부시 행정부 8년간 미군이 중동에서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 숨죽였던 이슬람 과격 세력은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서 ‘제2의 알카에다’를 꿈꾸며 세력을 키웠다. 그것이 바로 현재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의 가장 큰 외교적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다.

 

이들은 2014 6월 ‘칼리프 국가’ 제국 설립을 선언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오바마 대통령이 IS의 사실상 설립자”라는 과격한 주장은 차치하고라도 미군이 없는 정치 군사적 진공 상태가 IS라는 또 다른 과격 테러 세력이 똬리를 틀게 한 배경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001 9·11테러를 비롯해 각종 테러를 일으켜 테러 단체의 형님 격인 알카에다는 정치적 메시지가 명확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군대가 작전을 벌이듯 복잡한 전략을 통해 전투 형태로 진행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해당 군대의 리더를 없애거나 그 군대가 활동하는 영토를 빼앗는 것으로 해결했다.

 

2014년 미국은 같은 전략으로 IS 공습을 시작했다. 시리아에서 시작해 팔루자 모술 등 이라크까지 확장됐던 IS의 영토는 미국과 유럽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전 세계에서 IS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IS는 온라인 기반의 정보 확산 능력, 유전(油田) 운영을 통한 자체 경제력 배양 등을 토대로 기존 테러 세력과는 전혀 다른 테러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 NBC 방송이 지난달 확보한 백악관 문서에 따르면 IS는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히며 글로벌 테러 그룹으로 진화하고 있다. 2014년 미국의 첫 공습 때 7개 국가에 뻗쳐 있던 IS의 활동 반경이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말리 튀니지를 넘어 아시아의 방글라데시 필리핀 인도네시아까지 확산되고 있다.

 

극단주의 이슬람 사상에 경도돼 사지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보안컨설팅 업체인 수판그룹의 연구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IS에 합류하기 위해 시리아와 이라크로 간 사람은 전 세계 81개국에서 12000명에 이른다. 그중에는 프랑스인 1700, 벨기에인 500명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이미 전 세계로 퍼져 곳곳에서 테러를 기획하고 있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란 해리 사르포는 최근 시리아에서 지하디스트와 3개월 동안 함께 지냈다. 그는 시리아에서 나온 뒤 NYT에 “현지 테러리스트들은 유럽인들에게 시리아로 오지 말고 유럽에서 새로운 테러 바람을 일으키라고 권유했다”고 전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테러의 일상화

지난 15년 동안 테러의 형태는 진화했고 그에 대한 대응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NYT는 테러 전술이 점점 더 원초적으로 변화하고 테러 그룹은 더욱 분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테러 대처의 핵심인 정보와 보안 체계로 이들을 막는 것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라크 반군은 미국 정규군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자 특정한 목적 없이 이라크 시민이 모인 어느 곳에서든 테러를 벌이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소프트 타깃’ 테러다. 공격 대상이 불특정 다수로 확산된 것이다. 본격적인 소프트 타깃 테러의 첫 번째는 2006년 파키스탄인 무장 세력이 인도 뭄바이에서 166명을 죽인 사건이다.

 

이후 테러 그룹과 직접 연계되거나 훈련을 받지도 않은 자생적 테러리스트, 이른바 ‘외로운 늑대’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범행을 감행할 때까지 그들의 의도나 계획은 전혀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테러 수법은 진화하고 있는데 대응은 여전히 길을 막는 바리케이드와 금속탐지기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올여름 프랑스의 니스 트럭 테러, 독일의 뮌헨 총격 사건 등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테러는 종잡을 수가 없다. 무기도 칼부터 도끼, , 배낭 폭탄에 이어 트럭까지 등장했고, 테러 장소도 패스트푸드점부터 열차, 축제장, 교회, 공연장까지 다양해졌다. 피해자 연령도 4세 아이부터 86세 신부까지로 폭넓고, 범행 시간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24시간 내내 벌어진다.

 

무엇보다 심각한 현상은 테러의 동기가 과거의 종교적인 이유와 이데올로기를 넘어 사회적 불만과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지친 유럽의 젊은이들 중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니 팍스 아메리카나에 식상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IS에 가입해 반미(反美) 전선에 뛰어들어 자생적 테러리스트가 되고 있다.

 

페터 노이만 킹스칼리지런던 교수는 “이제 테러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테러에 빠져들게 만드는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라며 “고립과 무기력에 빠진 그들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그래서 시간은 더욱 오래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은 2014 9 IS와의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다시 중동에 군홧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아직까지 승전은커녕 종전의 기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을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퍼진 IS의 테러는 다양하게 진화하며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지난해 11월 미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특별 연설에서 “9·11테러 여파로 만들어진 IS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설정된 국경선 등 국제 간 협약과 약속 자체를 무시하며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미국은 필요하다면 러시아 등과도 손을 잡고 최우선 과제로 IS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9·11테러 후 세계 테러의 진화 ▼

2001 9·11테러(2977명 사망)
→알카에다가 기획한 2000년대 테러의 시초

2006 7월 인도 뭄바이 테러(166명 사망)
→최초의 ‘소프트 타깃’ 테러. 퇴근 시간대 기차역과 통근 열차에서 7건의 연쇄 폭탄 테러

2015 1월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12명 사망)
→유럽에 상륙한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

2015 11월 프랑스 파리 시내 공연장 등 테러(130명 사망)
→유럽 심장부에서 다중을 상대로 한 ‘소프트 타깃’ 테러

2016 7월 프랑스 니스 테러(84명 사망)
→급진적 이슬람에 경도된 외로운 늑대와 사회 부적응자의 결합. 트럭으로 무작정 돌진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 파리=동정민 특파원 / 황인찬 기자

 

◆2017년 04월 14일   빈곤 파고든 이슬람 극단주의… ‘폭탄조끼 청년’ 양산

중앙亞 ‘舊소련’ 국가들이 테러 온상지 된 까닭은

 

 

최근 러시아와 스웨덴에서 발생한 테러의 범인들이 모두 구(舊)소련 중앙아시아 국가 출신으로 드러나면서 이 지역이 새로운 테러의 온상지로 떠오르고 있다. 구소련 중앙아시아 국가가 테러 온상지가 된 것은 소련 붕괴 후 찾아온 정정 불안과 경제난 등이 이슬람 극단주의가 파고들 여지를 만들어준 탓이다. 또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등 테러단체가 장악한 지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문제도 작용하고 있다. 

◇빈곤과 실업 등 경제난에 빠진 중앙아시아=로이터와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3일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역 자폭 테러의 범인은 키르기스스탄 출신 20대 남성으로 밝혀졌고, 7일 4명이 사망한 스웨덴 스톡홀름 트럭 테러의 범인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30대 남성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6월 터키 이스탄불 국제공항 자폭 테러범 3명은 각각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다게스탄 출신이었고, 올 1월 이스탄불 나이트클럽 총기 난사 테러범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었다. 또 올 2월 러시아 사할린에서는 IS에 참여하려던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국적자 4명이 경찰에 붙잡혔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알카에다 일원으로 활동하던 키르기스스탄 10대 청소년이 체포됐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구소련의 일원이었던 중앙아시아 국가 출신이라는 점이다. 또 이들 국가는 모두 경제난이 심각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소련 해체 후 12개 국가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은 경제 성장이 둔화된 반면 물가는 급등하면서 국민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다. 세계 경제 성장률은 2015년 3.2%, 2016년 3.1%를 기록했지만 독립국가연합 경제는 같은 기간 -2.8%와 -0.3%로 역성장했다.

독립국가연합 중에서 최근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생겨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다. 러시아의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60달러로 전망되고 있는 데 반해 키르기스스탄의 1인당 GDP는 1016달러, 우즈베키스탄은 2117달러, 타지키스탄은 775달러에 불과하다. 이들 국가는 독립국가연합 12개국 중 1인당 GDP 최하위 3개국에 나란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소득은 낮은데 물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독립국가연합의 올해 물가상승률은 6.3%로 전망된 반면 키르기스스탄은 7.4%, 우즈베키스탄은 9.6%, 타지키스탄은 7.3%로 예상된다. 게다가 실업률도 높다. 키르기스스탄의 지난해 실업률은 7.4%다.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정확한 실업률 통계가 없지만 유엔은 양국 실업률이 각각 10.2%와 10.9%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슬람 확산과 함께 침투하는 극단주의=중앙아시아의 경제적 빈곤은 이슬람 극단주의가 파고들 틈을 만들어줬다. 홍콩 언론인 아시아타임스와 미국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산하 유로 아시아 네트는 소련 붕괴 이후 이들 지역에 이슬람이 급격히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알카에다나 IS 등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과 인접한 지리적 요인 탓에 극단주의가 쉽게 침투하고 있다. 실제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알카에다와 연계된 우즈베키스탄이슬람운동(IMU)이 나타났고, 타지키스탄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이 내전을 일으켰다.  

이들 국가 중 키르기스스탄이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고 있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정국이 가장 불안한 국가로 꼽혔던 키르기스스탄은 치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다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곳이다. 경제난은 이슬람 확산을 가져왔다. 소련 붕괴 직후 39개였던 키르기스스탄 내 모스크 수가 2300개로 늘어나면서 이슬람 극단주의도 빠르게 침투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 남부 지역인 오슈와 바트켄, 자랄-아바드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강력한 세를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키르기스스탄 국민 500여 명이 IS에 가담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키르기스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일부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기도 했다. 

저유가로 독립국가연합의 맹주인 러시아가 경제난에 빠진 것도 이슬람 극단주의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출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으러 자국을 떠나 러시아로 향하고 있지만 경제난에 일자리를 얻기는 힘들고, 그나마 구해도 저임금 일자리에 불과한 상황이다. 또 러시아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인종차별주의도 이들을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지게 하고 있다고 유로 아시아 네트는 지적했다. 
김석 기자 suk@munhwa.com 

 

◆2017.07.10  이라크, IS 몰아내고 모술 탈환 공식선언

- 작전 9개월만에 격퇴 성공
압바디 총리 군용기 타고 도착 "모술은 해방됐다" 승리 선포
AFP "
일부서 아직 총성 들려"

이라크 정부가 9(현지 시각)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이라크 내 최대 거점 도시인 모술 탈환을 공식 선언했다.

하이다르 압바디 이라크 총리는 이날 군용기를 타고 모술 시내에 도착해 IS를 상대로 한 모술 탈환전 승리를 선포하고 "모술은 해방됐다"고 발표했다고 이라크 국영 이라키아TV가 보도했다. 압바디 총리는 같은 날 트위터에도 "영웅적 전사들과 이라크 국민이 이런 대승을 거둔 것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모술 해방 선언은 이라크군이 작년 10월 모술 탈환전을 시작한 지 약 9개월 만, IS가 이 도시를 점령한 지 3년 만이다. AFP 통신은 이날 "모술에서 아직 총성이 들리는 등 일부 국지전은 벌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9(현지 시각) 이라크 경찰들이 이라크 북부 모술 도심에서 이슬람국가(IS) 격퇴를 자축하고 있다. 하이다르 압바디 이라크 총리는 이날 IS로부터 모술을 탈환했다고 선언했다. /AFP 연합뉴스

한때 인구가 200만명에 달했던 모술은 바그다드에 이어 이라크 두 번째 도시였다. 터키와 시리아를 잇는 교통 요지인 데다 유전(油田)지대가 가까워 이라크의 '경제 수도'로 불렸다. IS 2014 6월 모술을 기습 점령한 뒤 이곳에서 독립 국가 건설을 선포한 것도 모술의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IS는 모술에 행정조직·학교·경찰서·법원 등을 세우고 자체 화폐를 유통하는 등 실제 국가처럼 통치했다. 특히 모술 인근 유전은 IS의 핵심 자금원이었다. IS는 모술에서 풍요롭게 사는 주민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선전물로 인터넷에 유포했다. 동시에 모술에서 여성과 어린이 등 1000여명을 학살하고 그 장면을 온라인으로 퍼뜨린 적도 있다.

 

이라크군은 작년 10월 미군 주도의 국제동맹군 도움을 받아 모술 탈환전을 개시했다. 이라크군은 IS가 주민들을 '인질 방패'로 삼아 길목마다 폭발물을 설치하는 바람에 어려운 전쟁을 치렀다. 미군은 군사고문단과 지상군 등 5000여 명의 병력을 파병해 이라크군을 도왔다. 국제동맹군 소속인 로버트 소프지 미군 중장은 이날 로이터 통신에 "동맹군은 축하를 받고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낄 자격이 있다" "위대한 전투에서의 승리를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라크군이 IS 핵심 거점인 모술을 탈환하면서 IS는 치명상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IS는 시리아 내 최대 거점이자 '정치 수도'인 락까도 미군 지원을 받는 쿠르드군과 시리아 반군 등에 뺏길 위기에 처했다. 로이터 통신은 "앞으로 IS는 이라크 남쪽 변방이나 사막 지대로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중동 핵심 거점을 잃은 IS의 조직원들이 유럽 등으로 몸을 피할 경우, IS 테러가 유럽 등지에서 더 빈발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조선일보  변희원 기자  김은정 기자

 

◆2017.11.11 망한 나라 IS의 자체 화폐는 어떻게 되나

가공할 공포정치와 테러로 세상을 경악케 했던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 마침내 점령지에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지난 9(현지시간) 최후 거점도시였던 시리아 동부 데이르에조르 주의 알부카말에서 IS 상징인검은 깃발 내려진 거죠앞서 6 IS 최대 근거지 모술에서 쫓겨났고 지난달엔 자신들의 '수도' 락까를 잃었습니다
  

이상 지도상에 IS 영토로 표시될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3 5개월 '국가' 행세를 했던 IS 자체 화폐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망한 IS 돈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 보면  있는 기한 계뉴스] IS 화폐 뒷얘기를 들려드립니다
  

▲이슬람국가(IS) 점령지에 유통시킨 자체 화폐. 금화 단위는디나르’, 은화는디르함’, 동화는이었다.

 

'알짜' 유전지대 장악하고 국가 행세  

이슬람국가(IS) '건국일' 2014 629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날 IS 수괴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가 이라크에서칼리프 국가’(이슬람 초기의 신정일치 체제) 수립을 선포했거든요. IS 원래 2001 9.11 테러를 자행한 급진 수니파 무장조직 카에다의 지부 격으로 출발했습니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종파분쟁으로 어지러운 이라크 북부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내전으로 어지러운 시리아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2017 119일에 공식 '패망 선고' 내려졌으니 3 5개월 만이네요. 기간 동안 IS 알카에다도 하지 못한 이뤘습니다. 테러리스트 점조직에 그친 아니라 실제 영토를 가진 국가 행세를 거죠. IS 자체 행정조직, 학교, 경찰서, 법원까지 세웠습니다. 분쟁과 내전으로 통치 공백이 생긴 이라크·시리아 국경의알짜유전지대를 장악한 덕입니다
  

자칭 칼리프국가를 선포했던 이슬람국가(IS) 점령지 변화. 옅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2015 1 5 기준이고 짙은 색은 지난 10 30 기준이다. 9(현지시간) IS 마지막 근거지인 시리아 데이르에조르주() 알부카말도 함락돼 이제 지도상의 IS 영토는 거의 사라졌다. [BBC 그래픽 캡처]

 

나아가 IS 자체 화폐도 발행했습니다. 화폐를 통제한다는 경제의 흐름을 통제한단 얘기죠. IS 주민들에게 이제까지 쓰던 시리아·이라크 화폐 대신 IS 주조한 화폐를 쓰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를 통해 IS 그곳의 () 경제 활동을 장악하게 됩니다일제시대를 생각하면 됩니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은 한국은행(구한말 중앙은행) 접수해 조선은행으로 탈바꿈시켰고 여기서 발행하는 조선은행권이 땅의 공식 통화가 됐습니다. 조선은행권은 조선총독부가 직영하는 공장 혹은 일본대장성인쇄국에서 제조됐지요
  

16만원 상당 금화 만들어 과시   

▲이슬람국가(IS) 점령지에 유통시킨 자체 화폐. 금화 단위는디나르’, 은화는디르함’, 동화는이었다.

 

특이하게도 IS 지폐 대신 동전을 발행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평소 쓰는 동전과 달리 순금·순은·순동으로 만들었습니다. 2015 8 IS 자체 선전매체를 통해 유포한 동영상에 따르면 화폐 종류는 7가지입니다.

 

금화 단위는디나르’, 은화는디르함’, 동화는입니다.   

  
금화는 1, 2, 5디나르로 나뉩니다. IS 주장에 따르면 1디나르는 순금 21캐럿 순도에 무게가 4.25g. 당시 시세로 환원하면 1디나르는 139달러, 16만원에 달합니다. 금화 표면엔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등장하는 7개의 이삭과 세계 지도 등이 포함돼 있는 꽤나 정교한 도안입니다
  
금화를 만들려면 금이 있어야 합니다. 현지 증언에 따르면 IS 2014 이라크의 금융 중심지 모술을 점거했을 모술 중앙은행에는 45000 달러( 5000억원) 상당의 현금과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상당량의 금괴가 있었습니다. IS 검은 젖줄 알오마르 유전 알타나크 유전에서 나오는 원유를 팔아 수입을 올렸습니다. 하루 25000배럴만 생산해도 매일 100 달러를 거둬들일 있었습니다.   

"달러는 종이 쪼가리 사기극

하필 금화였을까요. IS 선전 동영상에서 화폐가종이쪼가리 불과한 미국 US달러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실제 미국 100달러는 ‘100달러 가치를 표기한 종이조각에 불과합니다. 그에 비해 IS 금화는 실질가치가 16만원인 금덩이죠. IS 영상에서 금화 체계가 미국 달러의 사기극을 끝장내고 중세 아랍 제국의 영화를 되찾아 거라고 주창합니다
  
홍보 영상은 요란하지만 ··동화가 실생활에 널리 쓰인 같진 않습니다. 탈주한 IS 전사들은 미국 달러로 월급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만약 주민들이 금화를 받았다면 그걸로 거래하기보단 감춰두려 했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일상에서 두루 쓰일 만큼 IS 만들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거고요. 아무래도 서구의타락한 통화 체계 오염시키기 전의 아랍 금화 시대를 부각시켜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는 상징 수단으로 제조한 듯합니다.   

 

▲미국 1달러 이미지.

 

그런데 지난 8 파이낸셜타임스(FT) 따르면 IS 패색이 짙어오기 시작한 초부터 주민들에게 화폐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다고 합니다. 수도세·전화요금·종교세(자카트) 등을 자체 화폐로 납부하게끔 거죠. 자체 화폐가 없을 경우 환전상에 시리아 파운드화나 미국 달러화를 내고 화폐를 구해서라도 납부해야 했습니다. 다른 일상 거래도 모두 자체 화폐를 통해서 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패색 짙어오자 자체 화폐 대신 달러 챙겨 

그랬을까요. 일차적으로 IS 이렇게 함으로써 화폐 주조차익을 챙겼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금화나 은화의 가치를 금은의 국제 시세보다 높게 책정해서 이윤을 남긴 겁니다. 1디나르의 실질가치는 16만원임에도 이게 20만원 가치라고 유통시키면 남는 4만원은 IS 것이 되니까요. 현지 추정에 따르면 IS 금화 10 디나르 이상을 팔아서 차익으로만 수십만 달러를 챙겼다고 합니다
  
나아가 IS 이제 쓸모없어질 자체 화폐를 이런 식으로 유통시키면서 바깥에서 교환 가능한 미국 달러를 빨아들였습니다. 주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하는 없이 비축해둔 달러를 팔아 IS 화폐를 사야 했죠. IS쓸모없는 종이쪼가리” “타락한 사기극이라고 불렀음에도 그들 역시 미국 달러를 안전자산으로 선호한 것입니다.   

 

IS 이런 식으로 얼마를 빼돌렸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지난 6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한 IS 자금 운용자 사메르 이들리스의 사례에서 전체 규모를 상상해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리스는 사망 25 동안 시리아 북서부 도시 사르마다로 8개의 가방에 돈을 채워서 1000 달러( 112억원) 빼돌렸다고 합니다. 수천 달러의 송금이 지속됐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런 송금 세탁 중동 지역의 전통적 환전 송금 시스템인하왈라 주로 이용됐습니다. 하왈라는 친인척 관계 등에 기반한 자금거래 네트워크인데 중동 아니라 유럽의 무슬림 공동체도 두루 사용한다고 합니다. 말인즉 하왈라를 통해 IS 자금이 유럽 안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거죠. 관련 보고서는 이렇게 빼돌려진 자금이 IS 연계 조직 지원 테러 자금에 쓰일 있다고 경고합니다. 돈은 이렇게 돌고 돕니다
  

IS 자금, 유럽 테러 지원금 우려

▲지난 6 공습으로 파괴된 모술의 대표적인 이슬람 사원인 알누리 대모스크. [연합뉴스]

  
, 그런데 이제 망한 나라가 IS 화폐는 어떻게 될까요. 사실 IS 존속 중일 때도 화폐는 점령지 안에서만 인정됐지 바깥에서 교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앞으론 희귀 화폐를 판매하는 e베이 경매 시장에서 만날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구글링해보니 2016 8월에 올라온 포스팅에 따르면 헝가리 딜러가 IS 동전을 판매한다고 했네요. 당시 가격은 개당 20달러( 23000) IS 주장한 명목가치에 크게 미칩니다. 포스팅에 대한 반응도진짜 IS 동전이 아닌 같다’ ‘터키에서 위조 주화가 많이 만들어졌다는데 하나 아니냐등입니다. IS 통화 관리 능력에 대한 불신이 있다 보니 돈이 제값을 받는 거죠. 결국 돈을 종이쪼가리와 구분시키는 것은 발행 주체, 돈을 관리하는 국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망한 나라의 화폐는 그래서 서글픕니다
  

▲이슬람국가(IS) 점령지에 유통시킨 자체 화폐. 금화 단위는디나르’, 은화는디르함’, 동화는이었다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