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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39/ 온두라스 - 요르단 - 우루과이 - 우즈베키스탄 - 우크라이나 - 이라크

상림은내고향 2022. 6. 7. 17:34

지구촌 여행/ 국가별39/ 온두라스 - 요르단 - 우루과이 - 우즈베키스탄 - 우크라이나 - 이라크

■ 온두라스 Honduras

온두라스 공화국, Republic of Honduras

수도는 테구시갈파이다. 온두라스는 3/4 이상이 산악지대이다. 저지대는 해안평야와 강 주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두라스의 인구는 메스티소가 압도적으로 많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작은 촌락이나 고립된 부락에서 농업을 하며 산다. 경제는 바나나·커피·설탕·목재 등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데 크게 의존하고 있다. 1인당 GNP는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광산업은 은·금·납·아연 등의 광석을 생산하는 엘모치토 지하광산에 집중되어 있다. 온두라스는 민간정부가 이끄는 공화국이지만 군부의 세력이 막강한 국가이다.

 

▲국기

 

온두라스의 인구는 메스티소가 9/10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온두라스의 메스티소는 대체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국가 메스티소보다 피부색이 더 검으며 인디언적인 특색도 더 강하다. 그 외에 인디오, 스페인계 백인이 인구의 나머지를 차지한다.

 

2022년 기준 온두라스의 인구수는 957만 명이고 인구밀도는 87명/㎢이다. 1950년 149만 명 대비 약 5배가 증가한 수치이다. 인구의 1/3이 15세 미만이며, 주민의 절반 가까이는 작은 촌락이나 고립된 부락에서 농업을 하며 살고, 도시거주자가 절반이 조금 넘는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지만 극히 소수지역에서 인디언 언어를 사용하며, 북부 해안 그리고 카리브해 섬 지역에서는 영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도가 대부분이다. 로마 가톨릭이 95%로 지배적이며 개신교와 기타 종교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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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판자크(Pulhapanzak) 폭포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15.9.16  194주년 독림기념일 행사

 

▲온두라스의 정글

 

 

 

 

▲온두라스 폭우 피해현장,11.10.17.

 

■요르단 Jordan ,

al-Urdun요르단 왕국, 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

▲국기

 

서남아시아에 있는 아랍 국가. 수도는 암만이며 화폐는 요르단 디나르이다. 국민은 대부분 아랍인으로 북아라비아의 카이스족 또는 남아라비아 예멘족의 후손이며 아랍어를 사용한다. 자유기업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고 있으며 GNP의 주요원천은 지역·사회·개인 서비스업, 무역, 건설, 제조업 등이다.

 

요르단은 지형학적으로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사막지역은 시리아 사막(북아라비아 사막)의 연장으로 국토의 동쪽 4/5를 차지한다.

 

사막 북부는 화산용암, 현무암, 침식된 모래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은 사암층의 노출로 형성되었다. 요르단 강 동쪽의 이스트뱅크 고원지대는 평균고도 600∼900m이며, 남쪽 끝 아카바 만 가까이에 요르단 최고봉인 람 산(1,754m)이 솟아 있다. 지구대로 이루어진 요르단 계곡 지역에는 사해가 있는데, 이 호수는 수면이 해수면 아래 약 400m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

 

요르단 국민의 98%는 아랍인으로 북아라비아의 카이스족 또는 남아라비아 예멘족의 후손이다. 공식어는 아랍어이다. 9/10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1/20은 그리스도교도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는 루마니아 정교회나 그리스 정교회 신도이다. 1980년대 중반 85만 명 이상의 허가받은 난민과 이주민을 비롯해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쏟아져 들어옴으로써 인구통계의 수치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 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수용소에 거주하며, 근동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국제연합 난민구제사업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UNRWA)에서 생계유지 수준의 지원을 받는다. UNRWA에서 주로 난민들의 위생·교육·복지를 맡고 있다. 모든 난민은 요르단 시민권을 갖고 있는 한편 난민구제 혜택을 받기 위해 난민의 신분도 유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요르단의 인구는 1,036만 2,190명이고, 인구밀도는 113명/㎢이다. 2020년 기준 연간 인구성장률은 1%였다.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의 2/3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 인구가 농촌에서 도심지로 많이 이주함에 따라 경제도 어려워졌다.

 

이스라엘과 함께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이라고 알려진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대부분의 역사가 이스라엘과 뒤섞여 있다. 사람이 살게 된 시기는 아득히 먼 전기 구석기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요르단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는 BC 13세기 이후 존립했던 기드온·암몬·모압·에돔 등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BC 1000경)에 지금의 요르단 동부 대부분은 이스라엘 왕국에 복속되었다. 그후 다른 중동지역과 함께 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에 차례로 넘어갔으며, BC 330년 무렵부터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서로 싸우는 사이에 아랍어를 쓰는 나바테아인이 요르단 동남부에 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은 BC 64∼63년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고,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에게 넘어갔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고, 아바스 왕조 때는 바그다드로 옮겼다. 그 이후로 요르단 지역은 권력의 중심지에서 멀어졌으며 주민들은 서서히 베두인족의 유목생활로 되돌아갔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예루살렘에 도읍한 라틴 제국이 요르단 강 동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에 요르단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마스쿠스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로 오가는 길을 보호하기 위해 체르케스인·카프카스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난민들을 요르단에 정착하게 했다.

 

요르단은 1920년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과 함께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아브둘라 이븐 후세인이 영주(군최고사령관)로 임명되었다.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통치가 계속되긴 했으나 트란스요르단은 밸포어 선언의 대상에서 제외된 후 1927년 입헌국가로 독립했다.

 

1949년 독립한 이스라엘과의 휴전으로 요르단은 웨스트뱅크를 합병했으나 1967년 6일전쟁 후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1970∼71년 요르단은 정부군과 요르단에 주둔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사이의 전투로 쑥밭이 되었다. 전투는 정부군이 팔레스타인 게릴라군을 요르단에서 몰아냄으로써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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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요르단 남부에 있는 대상 도시인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해발 950m 산악도시로서 최고 높이 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좁은 통로와 골짜기가 많은 중턱 바위를 반쯤 깎아내고 세워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 유적지중 하나이다.


세계 7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있으며 아직까지 4분의 1밖에 발굴되지 않은 광활한 유적지이다. 찬란한 고대도시 요르단 페트라는 중동의 숨은 보석으로 1985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페트라에서 가장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기원 106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다, 6세기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다가,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하였다

 

 

▲알 카즈네 - 암벽 사이의 좁은 협곡인 시크를 걸어들어가면 '보물창고'라는 뜻을 가진   카즈네가 나온다. 높이 25m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 아랍어로 '보물창고' 뜻하는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건물. 기원전 1세기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 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로마식 원형극장 - 2세기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의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서  7000명의 인원을 수용하였던 규모이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페트라 유적지 입구 - 블록(Djinn blocks)이라 불리는 이곳은 무덤길이자 페트라 유적지의 입구이다.

처음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로 알려졌다가 후에 무덤으로 밝혀졌다.

 

 

 

 

 

 

 

 

 

 

 

 

▲왕궁 무덤 - 4개의 입구가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단층 지괴의 낮은 부분에 조각되어 있다.

 

 

▲시크  -  페트라로 들어가는 2m 정도의 좁은 협곡으로 길이는 2km 달한다.

 

 

 

 

 

▲묘지문 - 요르단 페트라. 페트라는 나바테안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영위하다가  7세기부터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지진등의 자연재해로 묻히게 된다.

 

▲4  무덤군 - 요르단 페트라. 페트라는 나바테안 왕국(Nabataean kingdom) 수도였던 곳으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영위하다가  7세기부터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지진등의 자연재해로 묻히게 된다

 

 

 

 

 

 

 

 

 

 

▼페트라 요르단의 국보1호인 명승지 - 영상

 

◆풍경

▲아즐룬 성 = 요르단의 알프스. 해발760m 최대의 올리브 생산지

 

 

▲아즐룬의 해자를 연결하는 다리

 

▲아즐룬의 빛내림

 

▲아슈라피아 산 정상에 위치한 아부다르위시 모스크

 

▲아카바의 석양 = 요르단의 남서부 항구에 있는 대표적 휴양지

 

 

 

 

▲바람이 만든 물결무늬의 모래 작품 - 13. 2. 24.  와디 아라바 사막

 

▲죽음의 바다로 쏟아지는 햇살

 

▲암만 시리아 난민대피소 위로 모래폭풍 12. 7.30

 

▲사막의 나라에 내리는 눈 - 13. 12. 12.암만 공항로

 

▲유물 - BC3600청동기시대 초기 고인돌을 복원 요르단 박물관에 전시

 

 

 

 

▲극성 축구팬 - 월드컵 축구 아시아 B조 일본과 요르단 경기 13. 3. 26. 암만

 

▲럼 사막 - 요르단 고대 페트라의 신전

 

▲페트라 유적지의 나이트

 

▲요르단 암만 사막에서 낙타를 모는 배두인족

 

▲암만은 황톳빛 언덕의 도시 해발 850m 위치

 

 

 

 

 

 

■ 우루과이 Uruguay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 Oriental Republic of Uruguay

▲국기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있으며 수도는 몬테비데오이다.대다수 국민은 코카서스 인종에 속하는 스페인계와 이탈리아계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이고 인구의 3/5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주로 서비스업·경공업·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광물과 에너지 자원 보유량은 한정되어 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에게 점령되었다가 1828년 독립했다. 1973년부터 군사정부가 지배했으나 1984년 국민투표가 실시된 후 1985년 민간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역사

유럽인이 정착하기 전 우루과이에는 차루아스라고 알려진 인디언 종족이 살고 있었다. 1516년 스페인 항해사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가 라플라타 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왔다. 1680년에는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인들이 라플라타 강변에 콜로니아델사크라멘투를 세웠다. 이어서 1726년 스페인인은 포르투갈 사람들을 몰아내고, 몬테비데오를 세웠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우루과이는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고, 원주민들은 스페인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몰살당했다.

 

1811년 우루과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투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혁명은 점점 활기를 띠었으나 5년 후, 스페인인들이 혁명 지도자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를 물리치면서 일단락되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에게 차례로 점령되어 있다가, 1825년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우루과이의 독립투쟁을 재개하는 데 성공했으며, 1828년 독립이 승인되었다. 주요정당은 1830, 1840년대에 등장한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이다.

 

1839년에 일어난 내란이 1851년에 실패로 끝나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우루과이의 내정에 끼어들었다. 이때문에 1865∼70년 동안 계속된 파라과이와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결과 군부통치가 실시되었다. 1903년 콜로라도 당원이자 개혁주의자인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29년 죽을 때까지 우루과이를 통치했다. 오르도녜스가 진보된 사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이룩함으로써 20세기초 우루과이는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대공황 동안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중립상태를 거친 후, 우루과이는 1951년 새로운 헌법(1966 개정)을 채택했다. 민족주의 정당인 블랑코당이 93년간 열세에 있다가 1958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잇따라 일어난 물가상승과 경제위기로 좌익 테러리스트들이 널리 활동했고, 곧 1973년 우익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인권유린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군부정권시대는 1985년 민간정부의 출범으로 막을 내렸으며, 많은 정치범들이 풀려나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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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민주주의 경제 선진국, 우루과이

우루과이의 공식 명칭은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이며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루과이라는 명칭은 사실 강 이름이다. 수도는 몬테비데오이며 남미 최대의 무역항구 로서 도시 인구가 130만으로서 국가 전체의 30%의 인구가 몰려서 살고 있다.

 

몬테비데오

 

몬테비데오

 

우루과이가 한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우루과이 라운드’ 이다. 지금의 WTO 체제 이전에는 GATT라는 명칭의 세계 무역기구가 있었다.  세계 무역 기구는 처음에 공산품으로 시작 되었지만 각 품목을 늘리거나 관세율을 조정을 할 때에는 회원국들 회의를 하게 되는데 이 회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의 명칭을 따라서 라운드 이름을 정하게 된다.


이 우루과이 라운드 회의에서 무역 확대와 세계화를 위해 국내 농산물 시장을 개방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뇌리에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말이 깊게 박혀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관련 농민 집회


그리고 잘 알려진 축구 강국으로 1924년 초대 월드컵 개최국이자 우승국이다.  월드컵을 주도적으로 이끌던 인물이 프랑스 국적의 인물임을 시기한 유럽의 다른 축구 강국들이 초대 월드컵 참가를 거부 하여 남미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개최국 우루과이가 우승을 차지 하였다.

 

초대 우루과이 대표팀

 

남미 대륙에서 17만 제곱평방미터로 상대적으로 면적이 작고 인구도 345만명 우루과이는 중산층 비중, 민주주의, 전자정부, 청렴도, 언론자유 등 나라를 평가하는 기준에서 남미 국가 중에 모두 1위를 차지 할 정도로 남미의 선진국 이다. 극빈층 비중도 전체 인구 대비 3% 미만으로 남미 최저로 국민들의 경제가 아주 탄탄 한데 대표적인 산업으로서 축산업 소고기가 주요 상품이다. 소고기가 매년 약 15억달러 전체 수출의 20%정도 수출 1위의 상품있고 콩, 쌀이 그 뒤를 이어  농수산물이 주요 수출품이고 자동차와 핸드폰 같이 공산품을 주로 수입을 하고 있다.

우루과이가  남미에서 선진국으로 발전 된 계기는 진보적인 복지정책과 경제성장 정책이 조화롭게 혼합되어 실시 해온 덕이 크다. 1904년에 소득 수준에 따른 소득세를 부과 ,1914년에 실업수당 도입, 1915년에 주 48시간 근무제 실시, 1920년에 퇴직연금 도입을 하여서 소득이 전 국민에 골고루 분배 되는 정책을 약 100년에 도입 되었다.  


정치체계도 다른 남미 국가 대비 안정 되어 있어서 금융업이 발달하여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우기도 한다.
나라의 규모가 실질적으로 작다 보니 금융정보를 혁신적인 시도가 가능하기에 세계 최초로 디지털화폐를 발행하여서 시범적으로 운영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99년 부터 2002년 사이에 경제 위기가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와서 그 우루과이까지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 대규모 뱅크런이 발생하고 최대 수출품인 쇠고기 구제역이 발생하여 경제위기가 발생하여서 IMF 구제금융을 받는 불행을 겪게 된다.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으로 발생한 경제 위기이기 2003년 부터 2014년까지 10년게 경제 발전을 연 평균 5%넘게 하게 된다. 하지만 2015년 부터 농수산물 가격 하락으로 인하여 경제 발전이 정체 되고 있는 상태이다.


작은 인구와 거대한 인접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는 지리적인 제약이 있어  성장은 제약 되어 있으나 남미에서 청렴도가 높고 언론 자유가 보장 되어 있어 민주주의 발전이 가장 잘 되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나쁜 영향이 없다면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고 남미의 허브 국가 이다.

 

▲우루과이 카사부에블

 

▲ 파랗게 빛나는 바다

 

■ 우즈베키스탄 Uzbekistan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Republic of Uzbekistan

▲국기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다. 남동부 언어 혹은 차가타이어를 쓰는 이슬람 민족인 우즈베크족이 전인구의 7/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3세기 몽골족에 기원하며 14세기의 칸 우즈베크 통치하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여러 민족들의 점령기를 거치면서 쇠퇴하였다. 1855∼76년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924년 소련 내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세워졌다가 1991년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며 천연 가스의 주요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중앙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기계와 중장비의 주요생산지이기도 하다.

 

남동부 언어 혹은 투르크어의 분파인 차가타이어를 사용하는 이슬람 민족인 우즈베크족이 전인구의 7/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인구의 1/10 미만이며, 타지크인·카자크인·타타르인·카라칼파크스인들이 소수 민족을 이룬다. 비교적 낮은 사망률과 매우 높은 출생률로 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인구는 3,570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36%만이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15세 이하의 유소년 인구가 전체 인구의 28%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은 동쪽 끝에 있는 페르가나와 이에 연결된 계곡들, 그리고 남중부 지역의 제라프샨 강 계곡이다.

 

역사

우즈베크인들의 역사적 기원은 13세기 몽골족에서 시작한다. 13세기경 징기스칸의 손자인 시바칸은 시르다리야 북쪽, 즉 서쪽으로는 우랄 산맥과 동쪽으로는 이르티시 강 사이의 영토를 유산으로 받았다.

 

시바칸이 이끄는 몽골족은 '황금 군단'(Golden Horde : 몽골 제국 서부)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거의 100개의 주요 투르크 부족들을 지배했다. 이 부족들이 결국 몽골족들과 혼인해 우즈베크인들과 중앙 아시아의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되었다.

 

우즈베크라는 이름은 14세기의 칸 우즈베크라는 인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통치하에서 '황금 군단'은 전성기를 누렸으며, 약 1340년 이후 그가 통치했던 영토는 '외즈 베그(또는 우즈베크)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부 알 하이르 칸(1468년 사망) 통치 시대에 몽골-우즈베크인들은 남동쪽으로 이동해 시르다리야 북쪽 강안에 다다랐다. 아부 알 하이르의 손자인 무하마드 샤이바니 칸 통치 시대에는 16세기초 우즈베크인들이 결성한 부족 연맹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정착 지역을 침입해 점령했고, 나중에는 우르겐치와 타슈켄트 지역까지 점령해 티무르 왕이 세웠던 옛 제국을 무너뜨렸다. 트란속사니아('옥수스를 넘어서')로 불리는 이 지역은 우즈베크인들의 영구적인 고향이 되었다. 이 시기에도 우즈베크인들은 단일혈통과는 거리가 멀어 고대 이란 지방 민족들의 후손, 투르크어를 쓰는 부족들, 몽골족 대군주들의 혈통이 섞여 있었다. 트란속사니아를 점령한 후 카를리크족과 위구르족 등 다른 부족들과의 혼혈이 심화되었다.

 

샤이바니의 우즈베크 왕조는 1598년까지 트란속사니아를 통치했고, 이후 이 지역은 여러 민족들의 점령기를 거치면서 점차 물질적 번영과 문화생활 수준이 쇠퇴하게 되었다. 19세기 무렵 우즈베크인들은 더 이상 정치적·민족적 결합체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으며, 이들의 영토는 명목상 부하라·히바·코칸트 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세 지역은 1855∼76년 러시아가 팽창하면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1924년 소련 내에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세워졌다. 소비에트 통치하에서 우즈베키스탄은 관개·기계화·화학비료·농약 등을 이용해 면화를 재배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정책들은 우즈베키스탄을 주요 면화생산국으로 만든 반면, 심각한 환경 피해를 야기해 전체 우즈베크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게 되었다. 1990년 6월 우즈베키스탄은 중앙 아시아 공화국들 중 최초로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법률에 대한 자국 법률의 주권을 선언했다.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1991년 12월 실시된 최초의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 CPU의 초대 서기관이던 이슬람 카리모프가 86%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카리모프는 집권 후 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야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1993년에는 모든 야당에 대한 출판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같은 인권 유린에 대해 외국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항의가 있었으나 무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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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 우크라이나  Ukraine

▲국기

 

러시아 서쪽 흑해 연안에 있는 국가. 11세기에 강성했던 키이우 루스가 기원으로, 후에 동유럽 주요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부터 우크라이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1년 독립 후 소비에트 시대의 국영 경제를 신속히 개혁하지 못해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의 증가, 실업의 확산 등으로 시달렸다. 우크라이나인은 전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한다. 공화국들 가운데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었다. 경제는 중공업과 농업에 크게 의존한다. 대량의 철과 강철을 생산하는 철금속 산업이 도네츠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비옥한 흑토로 겨울밀과 사탕무의 주요 생산국이다.

 

우크라이나인은 전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어는 슬라브어군에 속하며, 러시아어·벨라루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약 20%를 차지하는 러시아인이 가장 큰 소수민족이다. 그밖의 소수민족으로는 유대인·그리스인·루마니아인·아르메니아인·집시·헝가리인·타타르족·추바슈인·리투아니아인·바슈키르인·카자크인 등이 있다.

 

소련을 이루었던 공화국들 가운데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었으며, 특히 고도로 공업화된 도네츠 분지와 드니프로 저지 및 농업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삼림-스텝 지대에 인구가 조밀하다. 주요도시는 키이우·하르키우·오데사·도네츠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자파로지예·크리보이로크·르비우 등이다. 2022년 추계인구는 4,113만 명이며, 전체 인구의 15%가 15세 이하의 유소년층이다. 또한 전체 인구의 70%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다음백과

 

◆풍경

▲우크라이나의 폐쇄된 터널을 개조한 사랑의 터널

 

▲키에프 클레벤 마을에 위치

 

 

 

▲바다 풍경

 

▲황량한 길 - 교전지역인 우크라이나

 

▲해변 13. 6. 16.

 

 

 

 

 

 

 

 

 

▲물싸움 놀이 13. 6. 16 키예프 드니프로 강

 

▲시위 35만명 - 13. 12. 1.키예프 독립광장에서 유럽연합과 협력 협정 체결 중단에 항의

 

▲한 방공호의 모녀 - 괴로운 삶 14.9.3

 

▲레닌의 말로 - 14.9.28 카르키프 중앙광장 에서 반러시아 시위대가 레니 동상을 절단 끌어내리고 있다

 

 

 

 

 

 

■ 이라크 Iraqal-Iraq,

이라크 공화국, Republic of Iraq, Al-Jumhuriyah al-Iraqiyah

▲국기

 

지형은 중부·남동부에 걸쳐 있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충적평원지대, 북부의 알자지라 고원지대, 서부·남부의 사막지대, 북동부의 고원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은 아랍계와 소수의 쿠르드족으로 구성되며,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공용어는 아랍어이고 화폐 단위는 이라크디나르(IraqDinar)이다.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아랍인과 아랍화된 주민들이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쿠르드족은 이라크 전인구의 1/5가량으로,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북동부 고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다. 터키인들과 투르크멘족들은 지역 아랍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아랍화되고 있다.

 

공식어는 아랍어이지만, 쿠르드어와 터키 투르크멘 등의 방언들도 같이 쓰인다. 이슬람교도가 인구의 95%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슬람교도 가운데서도 시아파가 대다수를 이룬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시아파가 대다수를 이루는 유일한 나라이다. 이라크의 시아파는 아랍인과 소수의 투르크멘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슬람계 주민 가운데 나머지를 흡수하는 수니파는 아랍인·터키인·투르크멘족·쿠르드족으로 이루어진다. 그밖에 그리스도교·야지디교·만다야교·유대교·바하이교 같은 종파도 있다.

 

2022년 기준 이라크의 인구수는 4,216만 4,965명이고, 인구밀도는 90명/㎢이다. 전체 인구 중 40% 이상이 15세 미만이며, 15-64세는 56%, 65세 이상이 4%로 분포한다. 인구의 약 7/10이 도시에 거주한다. 출생률은 중동에서도 높은 편인 반면 사망률은 비교적 낮다.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져온 이라크는 세계 최초로 문자기록 및 도시형성이 시작된 4대 고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기름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그 역사는 고대 문명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인들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삼각주 지역에 나타난 시기는 BC 3500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인들은 설형문자를 개발하고, 우르·우루크·라가시·키시 등을 포함하는 도시국가연합을 형성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BC 2350년경 아카드 군주인 사르곤의 통치를 받는 제국이 되었다가 아카드인들이 쇠퇴하면서 2개의 새로운 중심세력, 즉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로 나누어져 발전했다. 아시리아인들은 BC 7세기에 고대 중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으나, BC 609년에 무너졌고, 그후 칼데아인을 중심으로 신(新)바빌로니아가 일어났으나, BC 550년경 이들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전체가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페르시아인들은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으며, 그의 사후(BC 323)에는 BC 141년까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후 파르티아와 로마, 곧이어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시달렸으며, 계속된 전쟁으로 쇠약해진 사산조 페르시아가 AD 7세기에 침략해온 아랍 이슬람교도들에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정복되면서 이슬람 제국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에는 칼리프 자리를 놓고 싸우는 여러 세력들간의 싸움으로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8세기에 아바스 칼리프 왕조가 수립되면서 바그다드가 수도이자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나, 1258년 아바스 왕조가 몽골족에게 멸망하면서 함께 붕괴되었다.

 

이라크는 16세기에 오스만인들에게 넘어가 1917년까지 여러 세기 동안 지배를 받았는데, 이 기간에 내부적인 반란과 이란을 비롯한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오스만 제국). 17세기 중반에 페르시아 만 지역과 유럽의 교역이 시작되었는데, 19세기에 들어와 그 교역량이 더욱 늘었다.

 

1899년 오스만인들이 독일인들에게 내준 철도부설권에 자극받은 영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중 이라크를 점령했다. 1921년 영국의 보호를 받는 군주국이 세워졌고, 1925년 헌법이 승인되었으며, 1932년에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중 친(親)독일정책을 고수해 1941년 영국에 재점령되었으며, 대전 후에는 정치 소요가 계속되었다.

 

1958년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진 뒤 군사 쿠데타가 계속 일어나다가 1968년 사회주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1970년대부터는 바트당 지도자인 사담 후세인의 통치 아래 국가의 산업화와 사회복지 개선에 막대한 석유 세입을 사용했으나, 1980년에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란과 진퇴양난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 휴전으로 중단되었다.

 

곧이어 1990년 8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이듬해 1월 시작된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이라크는 국제연합(UN)의 지원을 받은 반(反)이라크 연합군에 패했다. 전쟁의 포화로 이라크 내의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으며, 이라크군도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었다. 패전 후 이라크 내 쿠르드족·시아파 등 주요 소수민족과 종교집단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게 달아올랐으나, 연합군의 철수로 여력을 회복한 이라크 정부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2001년 9월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테러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라크가 미국에 반감을 갖고 대량살상무기(WMD)를 제조×보유하려고 하며, 테러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UN 안전보장이사회는 2002년 11월 이라크에게 무기사찰단 입국을 허용하고 이전의 모든 결의안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1441호를 발표했다. 이라크는 무기사찰단을 받아들였지만, 부시와 블레어는 이라크가 계속해서 금지된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UN의 결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2003년 3월 20일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이라크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4월 9일 수도 바그다드가 점령당했고 4월 말에 주요 전투가 끝났다.

 

바트당이 붕괴한 후, 이라크의 통치는 미국의 고위 외교관을 수반으로 한 연합군 임시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CPA)가 맡게 되었다.

 

CPA가 임명한 이라크 통치위원회는 한정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13일 티크리트 근방에서 숨어 지내다 붙잡혔다.

다음백과

 

◆독재자 후세인의 말로

▲승리의 손 = 이란-이라크 전쟁의 승리를 위한 후세인의 기념물

 

▲후세인 검거

 

▲후세인 사형

 

◆일상

▲이라크 난민들 - is최후거점인 이라크 모술을 탈환키 위한 이라크 구느이 공습이 시작되자 탈출하는 난민들

 

 

 

 

 

 

 

 

▲이슬람의 아슈라 행사 - 12.11.25. 이라크 바그다드

 

▲카르벨라 에서 시아파 종교행사 13.1.2.

 

▲후세인 사원 13.1.2.

 

▲누루즈 축제 newroz - 13. 3. 20. 이라크내 쿠르도족 주민들이 밤과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 3.20.을 축하 하는 축제

 

▲이라크 바그다드 나선형 첨탑 대사원

▲ 이라크의 모래폭품

 

▲물난리 15.10.29 이라크 바그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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