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37/ 영국4/ 엘리자베스 2세 즉위 70년 동안 일어난 일
1. 여왕 즉위 70년, 플래티넘 주빌리
1953년 6월 2일, 영국 버킹엄궁에선 스물 다섯살 영국 군주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엘리자베스 2세의 본명)의 여왕 대관식이 열렸습니다. 그 전해 부친 조지 6세가 서거한 날 즉위했지만, 선왕의 서거에 애도 기한을 두는 왕실 전통에 따라 대관식은 16개월 뒤에 이뤄졌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여전히 영국의 최장수 재위 군주로 왕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여왕의 즉위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영국 전역에서 시작됐습니다.
플래티넘 주빌리 행사는 영국 왕실 역사상 처음입니다. '70년 재위'는 1000년 가량 이어진 영국 선대 왕 중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죠. 엘리자베스 2세 이전까지 최장수 재위 기록은 그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었습니다. 63년 7개월 간 재임해,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까지 치렀습니다.세계 군주정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2세 대공 등만이 재위 70년을 넘겼습니다. 조선시대 최장수 재위 군주인 영조의 재위 기간은 52년이었습니다.
'영국인 가장 사랑하는 왕족'인 여왕의 경사에 온 나라와 영연방도 축제 분위기로 들썩입니다.국민들은 마치 여왕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이번 행사를 각별하게 여기며 화려한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런던 시내뿐 아니라 동네 구석구석까지 유니언잭(영국 국기)이 펄럭이고, 여왕 사진도 곳곳에 걸렸습니다.
플래티넘 주빌리' 세대라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여왕이 즉위한 1952년에 태어나 올해 70세가 된 영국인을 통칭하는 용어(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입니다. 이들이 영국 전후 역사상 가장 부유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
2. 살아있는 현대사,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삶은 '살아있는 현대사' 그 자체입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여왕이 열세살이던 1939년,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든 2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아버지 조지 6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는 "캐나다로 대피하라"는 총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국을 지킵니다. 이듬해 1940년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위해 14살 릴리벳 공주(엘리자베스 2세 여왕 공주 시절 애칭)는 라디오 연설을 합니다. "우리는 용감한 군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험과 슬픔을 스스로 감당해내고 있고요. 결국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라고요.
1945년 18살이 된 공주는 아버지로부터 입대 허락을 받아, 영국 육군 여군 조직(Auxillary Territorial Service· ATS)에 입대했습니다. ATS는 후방 병참 지원을 하며 335명의 전사자가 나온 곳입니다. 릴리벳 공주는 이곳에서 운전병·정비공으로 복무했습니다. 현역 입대한 최초의 왕실 여성이란 타이틀도 갖게 됩니다. 이런 경험으로 그는 운전을 즐기고 엔진을 직접 수리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여왕 즉위 이후, 1965년 그의 첫 서독 방문은 2차 대전 후 영국과 독일의 화해를 상징합니다. 1997년 대영제국의 종말로 평가된 홍콩의 중국 반환을 지켜보며 제국의 끝을 지킨 군주이기도 합니다.
2014년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투표 사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영국의 미래가 달린 최근의 굵직한 사안들도 모두 겪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역사적 순간마다 구심점이 되어준 그를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로 여기고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정치학 교수인 버넌 보그대너는 "여왕은 영국인의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신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라고 말했죠.
3. 英 총리 14명, 美 대통령 14명, 韓 대통령 '모두'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스턴 처칠(1874~1965)부터 현재의 보리스 존슨까지 총 14명의 총리와 함께 했습니다. 여왕은 매주 화요일 총리를 만나 현안에 대해 보고 받으면서도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가렛 대처(1925~2013) 총리 당시에는 때로 정책적 이견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죠. 전기 작가 키티 켈리의 책 『로열스』에 따르면, 여왕과의 독대 전후 대처 총리는 항상 두통약을 찾았다고 합니다. 여왕은 미국 대통령과도 해리 트루먼(1884~1972)부터 조 바이든까지 14명 중 린든 B.존슨(1908~73)을 제외한 모든 이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이승만(1875~1965)부터 윤석열(62)까지 모두 여왕의 시대에 집권했습니다. 영국을 방문해 여왕을 직접 만난 한국 대통령은 5명(전두환·노태우·김영삼·노무현·박근혜), 김대중(1924~2009) 대통령은 1999년 여왕의 방한 당시 그를 맞았습니다. 당시 경북 안동에서 73세 생일상을 받았는 데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주영 한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생일상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지요. 안동시는 지금도 매해 여왕의 생일에 맞춰 안동 사과를 영국 왕실로 보내고 있습니다.
'킹스 스피치'부터 '오프라 윈프리 쇼'까지…여왕의 가족사
1. 아버지 조지 6세, 영화 '킹스스피치' 주인공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애초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선대 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후계 서열 1위 왕세자는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였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8세가 즉위 직후, 미국의 평민 출신 이혼녀 월러스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를 버렸습니다. 조지 6세는 심한 말더듬증을 갖고 있었지만, 형의 빈자리를 채워 왕위에 올랐고 나치 독일과의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킹스 스피치'입니다.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남편 필립공과 영연방국인 아프리카 케냐를 방문 중이던 25세의 공주는 예상보다 일찍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죠. 그의 대관식은 BBC 최초로 야외에서 TV 생중계 됐으며, 전세계 2500만명이 지켜봤습니다.
2. 세기의 사랑…13세 공주 사로잡은 필립공
지난해 4월, 여왕은 남편 필립공(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윈저·1921~2021)과 작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둘의 첫 만남은 1934년 엘리자베스 2세가 '릴리벳 공주'로 불리던 8살일 때 왕가의 한 결혼식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리스의 몰락한 왕족이었던 필립도 하객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2차 대전 중인 1939년 두 번째 만남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공주는 다트머스의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가 안내를 맡은 1등 생도 필립를 만나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고, 필립이 2차 대전에 참전해 태평양 전선에 있을 때도 서신 교환이 이어졌습니다. 전기 작가에 따르면 13세의 릴리벳 공주는 18세의 필립을 만난 이후 다른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편지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뒤 1947년 결혼에 골인합니다. 이와 함께 필립은 영국으로 귀화해 마운트배튼이라는 영국식 성을 취득했습니다. 결혼 한 해 전 필립이 공주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승리를 맛보며 전쟁에서 벗어나고, 쉬면서 나와의 시간을 보내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랑에 빠지니 모든 개인적, 심지어 세상의 어려움까지 작고 사소하게 느껴진다."
3. 다이애나 그리고 마클…왕실의 며느리들
영국인들이 여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순간은 1997년 '다이애나비의 죽음'이었을 겁니다. 가뜩이나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의 외도, 결혼 생활의 파경 소식에 왕실의 권위를 땅바닥에 떨어진 때였죠. 이혼한 다이애나비는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 기간 동안, 여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다 비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여왕은 장례식 마지막 날 다이애나비의 관에 고개를 숙였고, TV 연설을 통해 "(소식을 들었을 때) 상실감을 표현하기 쉽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왕이자 할머니로서, 탁월하고 재능 있으며 타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두 아들에게 헌신적이었던 다이애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해 비판 여론을 잠재웠습니다.
다이애나비의 아들이자, 여왕의 손자인 해리는 부인 메건 마클의 왕실 부적응을 이유로 왕실과 절연하기까지 했습니다. 마클은 미국 CBS의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왕실에서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죠.
여왕이 가장 아끼는 왕자로 알려진 차남 앤드루가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으로 고소당하자, 왕실 입지가 흔들렸습니다. 여왕은 지난 1월 앤드루 왕자의 군 직함과 왕실 후원 자격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찰스 왕세자만 53년'… 여왕 이후 왕실의 미래는
1.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현대적 왕실 구축
대영제국의 끝자락에서 영연방을 물려받은 엘리자베스 2세의 임무는 영국 왕실을 현대 사회에 연착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총리 임명권자이지만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의회 시정 연설에서도 총리실에서 작성한 원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식물 왕실'을 만들진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 외교 선봉에 나서서 세계 여러 나라와 영국의 우호 관계를 다지면서 왕실의 권위와 역할을 알렸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을 통틀어 6개 대륙 110개국 이상을 방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여행한 군주로 등극했습니다.
몰락한 그리스 왕가 출신인 필립공의 도움도 컸습니다. 그리스 왕가의 전복을 목격한 그는 영국 왕실의 현대화에 적극 나섰고, 왕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8월, 95세의 나이로 공적인 삶에서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행사에 참석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현판 제막 기계'(plaque-unveiler)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2. '왕세자만 53년'…찰스와 왕실의 미래
지난해 코로나19를 앓은 뒤 고령인 여왕의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왕 이후의 왕실'에 대한 전망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장남 찰스 왕세자(74)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도는 여왕과 견줄 바가 못됩니다. 심지어 자식인 윌리엄 왕세손보다 인기가 없습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여왕의 승하 이후 그를 계승할 인물로 찰스 왕세자를 꼽은 응답자는 전체의 32%에 그쳤지만, 윌리엄 왕세손의 즉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는 78%였습니다.
이혼과 재혼 경력도 그의 비호감도를 높이는 데 한몫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정치적 성향을 숨기는 데 서툴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1948년생인 찰스 왕세자는 1969년(당시 21세) 공식 왕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 대기 기간만 53년째입니다.
아직 '대세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인들 사이에서 '왕실 폐지론'도 점점 힘을 얻는 분위기입니다. 영국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에 따르면, 군주제를 지지하는 비율은 75%(2012년 조사)에서 62%로 감소했습니다. 특히 젊은 층에서 군주제에 대한 지지도는 빠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2011년 유고브 조사에서 18~24세 응답자의 59%는 군주제가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최근에는 그 비율이 33%로 떨어졌습니다.
군주제 폐지 운동 단체 리퍼블릭은 최근 "여왕이 승하하고 나면 영국 왕실은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며 "찰스 왕세자가 최선이 아니며, 우리가 국가원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죠. 영국 언론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여왕의 건강에 달렸다"면서 "왕실이 영국인의 신뢰와 존경을 되찾을 기회 없이 여왕이 갑작스레 승하하면, 영국 왕실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96세 여왕의 '플래티넘 주빌리'를 축하하는 영국인들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2021.04.10 "끔찍한 잘생김" 13세 英여왕, 몰락 왕족 필립공에 빠진 순간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에딘버러공작)의 젊은 시절. [타임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릴리벳'으로 불리던 공주 시절, 영국 왕립 해군대학 사관후보생이자 몰락한 그리스 왕족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여왕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70년 가까이 국서 자리를 지킨 필립공(에딘버러 공작)이 9일(현지시간)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영국 언론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일제히 조명했다.
굴곡 없는 영국 공주와 비운의 그리스 왕자
10일(현지시간) 타임지는 "13세의 엉뚱한 소녀였던 릴리벳"이 "18세의 끔찍할 정도로 잘생긴 해군 장교"에게 푹 빠진 과정을 소개했다. 그리스 왕자였던 필립공은 가난하게 자랐지만, 특유의 남성적 매력과 호방한 성격, 출중한 외모로 여성들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필립공의 어린 시절은 불운으로 점철됐다. 1921년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그리스왕 콘스탄틴1세의 조카이자 안드레아스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내 군주제가 전복돼 온 가족이 강제 추방됐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후손이기도 한 어머니 앨리스 공녀는 망명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프랑스 남부로 도망간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1935년 그리스 군주제는 다시 복원됐지만 불안정했다. 이 시기 필립공은 영국 스코틀랜드 기숙 학교인 고든스턴에서 수학하며 마음을 다잡아 갔다. 하지만 1937년 누이 세실이 만삭인 채로 비행기 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비극을 겪으면서 또 한차례 시련을 겪었다.
이후 필립공은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1939년 해군에 입대했다. 릴리벳 공주를 처음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해군학교에서 최고 생도로 뽑힌 그는 학교를 방문한 릴리벳 공주를 안내했다. 수많은 비극을 극복하고, 해군으로서의 삶을 앞두고 있었다.
英 해군서 승승장구

▲1950년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당시 해군 중위였던 필립공이 왕립 해군 행사에서 춤을 추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는 해군이 체질에 맞았다. 21세의 나이에 영국 해군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갑판사관이자 구축함 월리스의 제2 지휘관이 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지중해와 태평양에서각각 시칠리섬 상륙작전, 영국군 구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타임지는 필립공이 구축함 웰프를 타고 태평양에 파견됐을 당시 그를 본 호주 여성들의 인터뷰를 인용했다. "우리는 모두 완전히 그에게 미쳐있었다", "그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등이 20대의 필립공을 본 호주 여성들의 반응이었다. 그 시기 릴리벳 공주의 방에도 필립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있었다고 한다.
릴리벳 공주는 참전 중인 필립에게 종종 편지를 썼고 드물게라도 답장이 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몰래 편지를 읽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졌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조지6세의 우려와 만류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1947년 11월, 릴리벳 공주가 20세, 필립공이 25세일 때다. 필립공은 왕실의 일원이 되면서 필립 윈저-마운트배튼, 에딘버러 공작이 됐다.
"자식에게 姓 못 물려주는 英유일 남자"
결혼을 결정한 순간부터 필립공의 삶은 '포기'의 연속이었다. 우선 그리스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삼촌과 자신의 대부를 따라 성(姓)도 영국식인 마운트배튼으로 정했다.
애착을 가졌던 해군 경력도 일찍 포기해야 했다. 2차 대전을 치르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쇠약해진 조지 6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다. 릴리벳이 1952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으로 즉위했을 때 필립공은 여왕의 대관식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때부터 필립공의 직업은 해군이 아닌 '여왕의 남자'가 됐다.
조지6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뒤 두 사람을 걱정했다고 한다. 남성적 기질의 필립이 너무 젊은 나이인 30세에 그동안 쌓은 모든 경력을 포기하고 여왕의 그림자로 사는 게 쉽지 않은 거라 여겼다. 실제 필립공은 즉위 초기 엘리자베스 2세와 많은 일로 다퉜다. 엘리자베스 2세와 자식들의 성에서 '마운트배튼'이 사라지는 일부터, 쏟아지는 행사와 의무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여왕의 남자로 행동해야 하는 일 등이 짜증으로 쌓인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 나라에서 자식에게 성을 물려줄 수 없는 유일한 남자"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조지6세는 생전 엘리자베스 2세에게 "필립은 뱃사람 같은 사람이다. 한 번씩 파도를 탈 때도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2015년 8월 필립공이 리치몬드 애덜트 커뮤니티 대학의 현판식에 참석해 제막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직설적인 성격으로 설화를 빚기도 했지만, 그는 70년 넘게 여왕의 곁을 지키며 의무를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리스 왕실의 몰락을 본 탓에 영국 왕실의 현대화를 위해 애썼다. 무수한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2017년 한 행사에 참석한 필립공은 자신을 두고 "여러분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현판 제막 기계(plaque-unveiler)를 보게 될 것"이라는 농담을 남겼다.

▲영국 왕실 가계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2021.04 11 다이애너가 "사랑하는 아빠"라 부른 필립공, 아들엔 엄했다

▲1981년 찰스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 필립공(맨 오른쪽). AP=연합뉴스
“아버님, 제 가정불화를 해결하고자 기울여주신 놀라운 노력에 얼마나 감사한지,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고(故) 다이애너 왕세자비가 1992년 시아버지 필립 공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다이애너가 머물렀던 켄싱턴궁의 마크가 선명히 찍힌 이 친필 편지에서 다이애너는 필립공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Dearest Pa)’라고 불렀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이 지난 9일(현지시간) 영면했다. 장례식은 오는 17일 엄수 예정이라고 영국 왕실은 밝혔다. 에딘버러 공작 작위도 받은 그를 언급하는 영국 매체 보도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는 ‘책임감(duty)’과 ‘규율(discipline)’이다. 몰락한 그리스 망명 왕가 출신으로 평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필립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의 삶을 지탱해준 두 가지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다. 99년 이어진 삶 속에서 그는 때론 외도 의심을 받는 남편이었으며, 아들에겐 때로 너무 엄혹한 아버지였고 이혼 위기의 며느리에겐 용기를 주고자 했던 시아버지였다. 그의 삶의 궤적을 가족 관계 속에서 짚어본다.
①왕의 까칠한 남자, 결혼 10년 차 맞은 위기
필립공은 핏줄부터 훤칠한 키, 조각 같은 외모까지 갖춘 타고난 금수저였다. 왕조가 몰락하면서 어머니가 정신질환인 조현병을 앓고, 각별했던 누나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을지언정, 그는 가는 곳마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를 선망한 이 중엔 훗날 영국의 통치자가 되는 엘리자베스 2세도 있었다.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스토아 학파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엘리자베스 2세가 스스로의 감정을 앞세워 손에 넣은 거의 유일한 존재가 남편이다. 13살 공주가 해군학교에서 다섯살 연상의 필립공을 본 뒤 사랑에 빠지고 둘은 편지를 주고받은 뒤 1947년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의 결혼사진. AFP=연합뉴스
왕의 남자가 될 줄 알고 한 결혼이었지만 평탄하진 않았다.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으며 다복한 가정을 꾸리긴 했지만, 결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결혼 초엔 필립공이 무용수와 같은 젊은 여성과 외도를 한다는 보도가 계속 나왔다. 왕실은 부인했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결혼 10년째이던 1957년엔 위기가 현실화했다. 필립공이 아예 나홀로 여행을 떠난 것. 부인 엘리자베스 2세를 동반하지 않고 호주와 남극 일대를 해군 요트를 타고 순방했다. 당시 로열 커플의 이혼설 등은 영국뿐 아니라 영연방(the Commonwealth)의 단골 소재였다. 그러나 필립공은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 책임과 규율로 돌아왔고, 부부는 73년을 해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머는 계속 돌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필립공에게 참다못해 테니스 라켓을 던졌다”는 등의 루머는 계속 나왔다. 존 F. 케네디 부부가 영국을 방문해 왕실을 예방했을 땐 필립공이 들뜬 모습을 보인 나머지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여사와 뭔가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여왕 부부의 2018년 사진. AP=연합뉴스
결혼 50주년 파티에서 필립공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적인 결혼의 열쇠는 서로에 대한 아량(tolerance)입니다.”
②아들의 유약함을 견딜 수 없던 아빠의 선택
찰스 왕세자는 필립공의 서거를 두고 BBC에 “어마마마를 오래 보필한 그의 에너지는 진정 놀라웠다”며 “여왕의 생애에서 그는 바위 같은 든든한 존재였다”고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 “그립다”는 말도 물론 했다. 그러나 사실 필립 공과 찰스 왕세자는 애증의 관계다. 찰스 왕세자의 장점은 부드러운 성격과 예술에 대한 열정인데, 군인의 피가 흐르는 아버지에겐 이는 유약함에 지나지 않았다.
▲고든스타운 기숙학교. 사진 위키피디아, Anne Burgess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건 찰스 왕세자의 진학을 두고서였다. 왕세자 본인은 물론 왕실은 전통적 명문이자 윈저성에서 가까운 이튼스쿨을 원했지만 필립공은 자신의 모교인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타운 기숙학교를 고집했다. 엄격한 규율과 다양한 스포츠를 통한 심신수양이 교육 목표인 곳이다. 이곳에서 찰스 왕세자가 왕따를 당했다는 건 당시 영국 매체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찰스 왕세자는 “많은 것을 배웠다”며 무사히 졸업은 했으나 자신의 두 아들은 이튼스쿨에 보냈다.
③며느리에겐 한없이 다정한 시아버지
왕실에 시집·장가 오는 것의 지난함을 본인이 알고 있어서였을까. 필립공은 유독 왕가의 며느리나 사위들에게는 따스했다고 한다. 가장 각별했던 케이스는 물론, 찰스 왕세자에게 20대 초 어린 나이에 시집온 다이애너였다. 필립공과 다이애너비는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는데, 주로 결혼생활로 힘겨워하는 며느리를 다독이는 내용이 많다. 필립공은 “이 결혼생활이 흔들리고 있는 걸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너가 많이 애쓰는 것 잘 알고 있다”고 썼고, 다이애너는 “사랑하는 아버님, 그래도 아버님께서 저를 진짜로 위해주시는 것 감사하게 생각해요”라고 적었다.
▲다이애너비가 필립공에게 1992년 보낸 친필 편지 캡처. [더 텔레그래프 캡처]
그러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너비가 1996년 결국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뒤, 필립공도 다이애너와 사이가 멀어졌다. 특히 다이애너비가 연인들과 함께 밀회하는 사진이 매체에 등장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고 한다. 다이애너가 중동의 부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알 파예드의 가족 일부는 “필립공이 꾸민 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이애너비의 장례식에서 걸어가는 왕족. 맨 왼쪽이 필립공이다. AP=연합뉴스
그러나 다이애너의 장례식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의 곁을 지켜준 건 필립공이었다. 영국 이브닝스탠더드는 당시 “윌리엄과 해리 왕자가 장례식에 어떻게 참석해야 하는지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필립공이 버럭 화를 내며 ‘엄마를 잃은 애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며 “‘아이들이 (관을 따라) 걷겠다면 나도 따라 걷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보도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2021.04 13 가짜 치아 끼고 "양배추"…英여왕 74년 웃게한 필립공의 유머
“내 삶에 큰 구멍(huge void)이 생겼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남편 필립 공의 별세에 대해 밝힌 심정이다. 11일(현지시간) 영국 BBC·가디언 등은 여왕 부부의 차남 앤드루 왕자가 예배에 참석한 뒤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신가"라고 묻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보도했다. 13살 영국 공주와 18살 해군 생도로 처음 만나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으로 살았던 두 사람의 80여 년의 연이 다한 것이다. 앤드루 왕자는 “상심이 큰 여왕을 위해 가족들이 모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 조지 6세와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하러 갔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필립 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후 두 사람은 7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고 결혼에도 성공했다. 74년간 부부로 살며 슬하에 4명의 자녀와 8명의 손주, 10명의 증손주를 뒀지만, 특별한 지위만큼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외신들은 그럼에도 두 사람이 가정과 국가를 함께 지킬 수 있던 비결로 필립 공의 희생과 외조, 유머라고 조명했다.
국적·성·종교 버려야 했던 국서(國壻)의 희생

▲1947년 11월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결혼식. 중앙포토
1947년 11월 20일, 두 사람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 세계는 쇠락한 왕실의 왕자와 왕위 서열 1위 공주의 결혼에 주목했다. 필립 공도 그리스·덴마크 왕자였던 안드레아스와 바텐베르크 가문의 앨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왕실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의 일가는 그리스 땅에서 쫓겨났다. 영국의 국서(國壻)가 된 뒤 필립 공이 제일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은 국적과 왕위 계승권이었다. 그는 결혼을 결심한 뒤 영국인으로 귀화했고, 성(姓)도 바텐베르크에서 마운트배튼으로 바꿨다. 종교 역시 그리스 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했다.
“여왕이 하는 대로 하라 (Do as the queen does)”는 왕실의 규칙을 그는 착실하게 지켰다. 52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조지 6세가 갑자기 숨지면서 26세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대관식에서 필립 공은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그는 97년 두 사람의 결혼 50주년 기념식에서 “내가 할 일은 첫째도, 둘째도, 마지막도 여왕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현실감’ 바탕으로 한 외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당시 모습. 필립 공은 행사를 TV로 생중계하는 것을 제안했다. AP=연합뉴스
몰락한 왕실 출신이었던 필립 공은 왕실이 국민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직설적인 조언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에 큰 힘이 됐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필립 공이 미친 영향을 언급하며 “오랫동안 나와 가족, 국가와 다른 나라들은 그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큰 빚을 졌다”고 말한 바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엘리자베스의 대관식을 TV로 생중계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50년대 초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 빠져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군주제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했고, 민심은 혼란에 빠졌다. 필립 공은 국민에게 기대감과 자부심을 심어줄 방법으로 생중계를 떠올렸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과 함께한 대관식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필립은 솔직담백했고, 이 때문에 나는 연설까지 사전에 논의하는 등 그로부터 큰 힘을 받았다”고 말했다.
긴장을 풀게 해준 ‘유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필립 공의 은퇴 뒤 "그가 특별한 유머감각으로 나를 지지해줬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AP=연합뉴스
두 사람은 생전 유머코드가 잘 맞았다고 한다. 영국 더 선에 따르면, 필립 공은 생전 가짜 치아를 끼는 등 장난을 자주 쳤다. 그때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웃으며 궁전 복도를 뛰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57년 여왕이 첫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공표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필립 공은 “울고 있는 치아를 떠올리라”는 농담을 해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했다.
필립 공은 이외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마다 ‘양배추’라는 애칭을 불러줬다고 한다. 평생 그 때문에 웃는 일이 많았다는 엘리자베스는 지난 2017년 남편의 은퇴를 언급하며 “특별한 유머 감각을 지니고 나를 지지해줬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2021.05.11 英여왕 필립공 사별 후 첫 '퀸스 스피치'…"코로나 지원 법안" 발표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 11일(현지시간)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의회의 새 회기를 알리며 '퀸스 스피치'를 통해 영국 정부의 입법안을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1일(현지시간) 의회에서 '퀸스 스피치'(Queen's Speech·여왕 연설)를 하고 영국 정부의 '포스트 팬데믹' 구상을 밝혔다. 지난달 9일 필립공(에딘버러 공작)을 사별한 후 첫 공식 행사다.
이날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영국 의회의 새 회기 시작을 알리며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에서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영국 정부의 주요 입법 계획을 설명했다. 재교육을 원하는 성인들의 대학 수학과 기술 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학자금 도입 방안과 신규 주택 건설을 확대하는 방안이 우선순위에 있다. 망명 신청자들이 영국 해협을 건너지 못하도록 막고 영국의 버스와 기차 등 교통수단 개선 계획 등도 담겼다.
BBC는 이날 연설문에 담긴 입법안의 많은 부분은 영국 보수당이 새로운 선거 거점으로 세운 미들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의 일자리 창출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논평했다.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 찰스 왕세자의 손을 잡고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 들어서고 있다. [AP통신=연합뉴스]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 찰스 왕세자의 손을 잡고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 들어서고 있다. [AP통신=연합뉴스]
일반적으로 여왕의 국회 개회식 연설은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웅장한 규모로 열린다. 여왕은 백마가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의사당에 도착해 각료들이 작성한 연설문을 읽는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여왕은 이날 마차가 아닌 차량을 타고 버킹엄궁에서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으로 이동했다. 평상시보다 적은 수인 74명의 의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채로 자리했다.
연설문은 집권당 각료들이 작성한다. 영국 정부는 일년에 한 두 차례 여왕의 의회 연설을 통해 정부 입법안을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알리는 기회를 갖는 셈이다.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 앉은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과 찰스 왕세자와 카멀라 콘월 공작 부인부부. [로이터=연합뉴스]
여왕은 연설문에 담긴 집권당의 입법안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요청하며 의회 연설 행사를 마친다. 이후 공은 의회로 넘어가 여야가 입법 논쟁을 펼친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2022.02.07 "자네가 '왕비'로 불리길 바라네" 영국 뒤흔든 여왕의 한마디

▲찰스 왕세자의 부인, 카밀라 파커 볼스. 현재 공식 직함은 콘월 공작부인이다. 사진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러 가는 모습. AF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한마디로 왕실이 술렁이고 있다. 지난 6일(현지시간) 재위 70주년인 플래티넘 주빌레를 맞은 여왕은 최근 맏아들 찰스 왕세자의 부인 콘월 공작부인, 혼전 이름 카밀라 파커 볼스에 대해 “찰스가 왕이 된다면 카밀라가 ‘왕비’라는 칭호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왕의 부인이니 왕비라 불리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BBC부터 미국 워싱턴포스트(WP)까지 6일 분석기사부터 칼럼까지 다양한 콘텐트를 쏟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사연은 찰스 왕세자의 첫 부인, 비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너(1961~1997)와도 관련이 깊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너 비와 이혼 전이었던 1994년, “카밀라와 혼외 관계를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다이애너와의 결혼이 돌이킬 수 없을(irretrievably) 깨져버린 뒤에 관계를 시작했다”고 부연했지만 세간의 분노는 카밀라에 쏠렸다. 카밀라는 다이애너의 결혼을 깬 악녀로 비난받았다. 다이애너 왕세자비 역시 BBC와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내 결혼생활엔 항상 (카밀라까지) 세 명이 있었고 그래서 좀 복잡했다(crowded)”고 언급한 적이 있다.

▲1981년 7월 29일 결혼식 후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키스하고 있는 다이애나와 찰스. A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가 사용한 ‘왕비(Queen Consort)’는 국왕의 배우자로서 왕실을 대표하는 여성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중전마마, 국모(國母)인 셈. BBC는 “카밀라와 찰스 왕세자가 결혼할 당시 ‘왕비’라는 직함까지는 허락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왕실에 있었다”며 “카밀라에 대해 허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공식 직함은 ‘왕세자비(Princess Consort)’였다”고 보도했다. 여론은 물론,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너의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를 배려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무엇이 엘리자베스 2세의 마음을 바꿨을까. 지난해 여왕의 배우자인 필립공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란 분석이 나온다. 공식 직함을 갖고 있는 배우자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 국왕에게 큰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 2세가 남편의 부재로 인해 절감하게 됐으리라는 논리다. 왕실 역사 전문가인 로버트 레이시는 BBC에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왕실을 ‘기업(the Firm)’이라고 부른다”며 “기업을 대표하는 이의 배우자에게 적절한 칭호를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이라는 명칭은 엘리자베스 2세가 왕실 멤버들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단순한 가족 이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이동 중인 콘월 공작부인. 2013년 사진이다. AP=연합뉴스
‘왕비’ 직함에 대해 공식 반응을 내놓은 건 카밀라 본인이 아닌 찰스 왕세자다. 그는 6일, 플래티넘 주빌레 축하연에서 “어머니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며 “그 칭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저희 부부 모두 숙지하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둘이 웨딩 마치를 올린 건 2005년이다. 다이애너가 파파라치에 쫓기던 중 불의의 사고로 프랑스 파리에서 1997년 급서한 뒤 수 년을 기다려 왕실 예법에선 간소한 예식을 치렀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의 여론을 의식해서다.
카밀라에 대해선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 많다. ‘세기의 연인’이라 불린 다이애너에 비해 외모를 비하하는 맥락의 비난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와 굳건한 관계를 유지해오며 왕실의 일원으로 조용히 자리 잡았다. BBC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카밀라는 이제 왕실의 정식 일원으로 공히 인정받았다”고 전했다. 소탈한 이미지도 어필하고 있다. 2020년 BBC와 이례적 단독 인터뷰에서 카밀라는 “(팬데믹 상황에서) 밖에 못 나가는 건 답답하고 손주들도 보고 싶지만, 솔직히 왕실 행사 예복을 안 입어도 되는 건 너무 좋다”며 “청바지 입고 지내는 게 완전 편하다”고 말했다.

▲2005년 비교적 약소한 결혼식을 올린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AP=연합뉴스
카밀라와 찰스의 관계는 다이애너와의 약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호감을 느꼈으나 왕실 내의 파워 게임 및 둘 사이의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고, 결국 카밀라가 먼저 다른 이와 결혼했다. 일각에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 미덕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찰스 왕세자가 카밀라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해석도 나온다. 관심사가 비슷하고 대화가 통했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선 카밀라가 이런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이애너 생전, 찰스 왕세자와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우리 관계를 공식화하면 세간에선 다이애너는 피해자가 되고, 그녀처럼 예쁘지도 젊지도 않은 나는 짓밟고 말겠지. 영원한 왕비는 다이애너이고 나는 그저 바람난 애인일 뿐인거야.”
그러나 올해 94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70년 이상 이어진 재위를 끝내고 나면, 왕비가 되는 건 다이애너가 아니라 카밀라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2022.06.03 엘리자베스 2세 즉위 70주년 잔치…나흘간 축제·파티만 3388건 열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2일(현지시간)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 첫날 행사에 건강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이날 오전 런던 버킹엄궁 앞 광장에서 열린 영국 전통 군기분열식인 ‘트루핑 더 컬러’ 퍼레이드 행사 도중 궁전 발코니에 등장했다. 전날 버킹엄궁이 공개한 새 초상화에서 착용했던 하늘색 정장 차림에 같은 톤의 모자까지 갖췄다. 96세의 여왕은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도 꼿꼿한 자세로 환하게 웃었다. 지난해 4월 별세한 남편 필립공 대신 여왕의 사촌동생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가 여왕 옆에 서서 근위대의 경례를 함께 받았다.
이 행사에는 군인 1200명, 말 240마리, 군악대 400명 등이 동원됐고 영국 군기(軍旗)가 휘날렸다. 말을 탄 찰스 왕세자가 근위대를 사열했다. 윌리엄 왕세손과 여왕의 외동딸 앤 공주는 말을 타고 찰스 왕세자 옆을 따라왔다. 카밀라 파커 볼스 콘월 공작 부인과 케이트 미들턴 캠브리지 공작부인, 그리고 여왕의 증손자인 조지 왕자, 샬롯 공주, 루이 왕자가 함께 마차를 타고 등장했다.
퍼레이드를 마친 왕실 가족들은 여왕이 있는 발코니로 올라가 영국왕립공군(RAF)의 곡예비행을 관람했다. 공군기 70대로 이뤄진 곡예비행단이 숫자 70 모양을 만들어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축하했다. 여왕 옆에 서 있던 네 살짜리 증손자 루이 왕자가 비행단을 향해 열렬히 환호하자 여왕이 웃으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등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70주년 기념 첫날 행사로 열린 곡예비행. [AP=연합뉴스]
지난 2020년 왕실에서 독립해 미국으로 이주한 해리 왕자와 아내 메건 마클 서섹스 공작부인은 퍼레이드에도, 발코니 인사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텔레그래프는 해리 왕자 부부가 버킹엄궁 안에서 창을 통해 퍼레이드를 지켜봤다고 전했다.
이날 새벽부터 버킹엄궁 근처에 자리를 잡은 수만명의 군중들은 왕실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BBC에 따르면 보리스 존슨 총리와 아내 캐리 존슨은 수만명의 군중 사이에서 군기분열식과 왕실 가족의 발코니 인사를 지켜봤다.
영국 왕실은 역사상 첫 플래티넘 주빌리를 맞아 나흘간 특별 공휴일로 지정하고 이날부터 5일까지 성대한 기념행사를 이어간다. 미국 대중문화 잡지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플래티넘 주빌리 기간 동안 영국에서 공식 행사 2429건, 거리 축제와 실내 파티 3388건이 예정됐다. 영국 전역에 유니언잭(영국 국기)이 게양됐고, 시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썩이고 있다.
행사 이틀째인 3일에는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여왕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예배가 열린다. 4일에는 버킹엄 궁전에서 퀸, 앨리샤 키스, 한스 짐머, 다이애나 로즈, 로드 스튜어트 등 영국 출신 유명 가수·음악가들이 출연하는 기념 콘서트가 개최된다
.
마지막 날인 5일에는 1953년에 거행된 대관식을 재현한 ‘황금마차’ 퍼레이드가 재현된다.
전날 버킹엄궁이 공개한 특별 메시지에서 여왕은 “이 축제를 통해 많은 행복한 추억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지난 70년 동안 이룩한 것을 되돌아보고 자신감과 열정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박소영·정은혜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