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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33/ 아프가니스탄 - 알바니아 - 알제리 - 앙골라 - 에티오피아 - 에콰도르 - 엘살바도르

상림은내고향 2022. 5. 28. 18:31

 

지구촌 여행/ 국가별33/ 아프가니스탄 - 알바니아 - 알제리 - 앙골라 - 에티오피아 - 에콰도르 - 엘살바도르

■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

▲국기

 

 아시아 중남부지역에 있는 내륙국가로 약칭으로 아프간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카불이며 남쪽과 남동쪽으로 파키스탄과 면해 있으며 서쪽은 이란,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을 경계로 한다

 

수도는 카불이며 남북으로 약 970km, 동서로 와칸 지역을 포함해서 1,300km가량 뻗어 있다. 와칸은 북동쪽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을 잇는 약 241km에 이르는 좁다란 회랑지대이다.

 

남쪽과 남동쪽으로 파키스탄과 면해 있으며 서쪽은 이란,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을 경계로 한다. 1979년 소련군 침공 이후 약 500만 명의 주민이 이웃나라로 망명했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툰족이며 타지크족·우즈베크인·하자라인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파슈툰족은 주로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살며, 지금까지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한다. 타지크족들은 대부분 농민과 장인(匠人)들이며 주로 헤라트 북동부와 서부 주변지역에 산다. 우즈베크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힌두쿠시 산맥 북쪽 지역에 살며, 하자라인들은 중부 산악지대에 살면서 유목을 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토(파슈투)어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다리어로서 2가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토어를 쓰며 약 1/3(주로 타지크족·하자라인·샤하르아이마크인·키질바시인)은 다리어를 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투르크멘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3/4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약 1/4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이다.

PDPA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소련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통치권은 20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국토방위최고회의에 주어졌다. 반면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입헌군주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단체와 일종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단체로 나누어졌다.

 

1988~89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반군은 농촌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PDPA도 도시지역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과도 정부는 모든 반군 파벌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정부 및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걸친 지방 통치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은 계속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파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 세워진 이슬람 신학교 마드라샤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탈레반이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 지방에서 무력활동을 전개한 이후, 1996년말 보수적 이슬람 분파와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슈툰족의 지원으로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북부의 타지크족, 서부의 우즈베크족, 중부의 하자라족 등 비파슈툰족들은 파슈툰족으로 구성된 탈레반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해왔던 파슈툰족의 집권 연장이라고 여겨 이에 대항했다. 탈레반은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 정책으로 이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탈레반은 각종 사회정책, 여성의 사회활동 억제, 바미안 석불과 같은 비이슬람 종교 유적 파괴,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을 강화하는 한편, 여러 차례 미국인에 대해 테러를 가한 우사마 이븐 라딘과 같은 이슬람 전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시 국방부 건물에 대한 비행기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우사마 이븐 라딘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탈레반 정권에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탈레반 정권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고, 미국은 곧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며 전쟁에 돌입하여 탈레반 정권을 축출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에는 온건 이슬람주의자인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국명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탈레반의 잔여 세력에 의한 정치적 영향력과 국지적인 테러가 이어지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다. 2014년 아슈라프 가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미군을 주축으로 한 평화유지군은 아프가니스탄 행정부가 교체된 후에도 탈레반의 정치적 영향력과 무력 대응이 지속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2020년 2월 29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배제한 채 미국과 탈레반이 오랜 전쟁의 종식을 고하는 평화협정을 맺었고, 미군은 14개월 안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치에 좀 더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했다.

 

2021년 취임한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9월 11일 전에 철수하겠다고 밝히고, 실질적으로는 8월 31일을 목표로 철수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탈레반 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수도 카불의 점령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의 뜻을 밝혀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8월 30일 자정을 앞두고 미군이 철수를 완료하면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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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병사와 소년

 

▲사는 사람도 없는 풍선 장사

 

▲로가르주 마을 = 묘지같아 묘하네

 

 

▲고통

 

 

▲브로카를 쓴 아프칸 여성들

 

▲남가하르주 한 마을

 

▲주택가

 

 

▲호숫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카불 악 바르카 언덕에서 운동하는 소년

 

▲마음대로 다이빙

 

▲기도

 

▲교통수단인 마차 13. 3. 21

 

▲일상 풍경

 

▲전쟁의 기억 = 아프카니스탄 나토군이 쓸 연료 운반 유조차들의 끝없는 행렬 12. 6.6.

 

 

 

 

 

 

 

▲북부의 하즈랏 알리 사원앞 비둘기 떼 13. 5. 9.

 

 

▲경찰의 휴식 - 13. 5. 22.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고지대 성벽 위에서 쉬고 있는 경찰

 

■ 알바니아 Albania

Shqiperia 알바니아 공화국

▲국기

 

알바니아인들은 고대 인도유럽계 민족인 일리리아인의 후손들로 적어도 BC 1000년부터 발칸 반도 서부 지역에서 계속 살아왔다. 알바니아 남부에 있던 부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러스 시와 레저 시는 그리스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들이다.

 

북부의 일리리아인들은 지역 군주들에 의해 여러번 통일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군주는 북쪽의 달마치야에서 남쪽의 비요서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슈코더르를 수도로 삼았던 아르곤 왕(BC 3세기 후반)이다. 아르곤 왕이 죽은 뒤 왕비 테우타가 정벌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로마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BC 168년에 일리리아 전체가 로마에 점령당했다. 그후 알바니아는 로마 속주인 일리리쿰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의 통치하에 일리리쿰은 번영을 누렸다. 395년부터는 행정적으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합병되었다. 3~5세기에 서(西)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을 받고 6~7세기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았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을 지켜낸 발칸 반도의 몇 안되는 민족 중 하나였다. 14세기에 들어와 투르크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투르크인들은 후에 민족의 영웅이 된 계르기 카스트리오티를 교육시켜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고 스칸더르베그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그는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물리쳤다.

 

1443년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받아들인 그는 알바니아에 대한 투르크족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대항했으나, 그가 죽은 이후 투르크의 지배가 강화되어 알바니아의 경제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스만 지배에 대한 지역적 항거가 이어졌으며 1912년의 봉기로 알바니아는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국제 사회의 승인은 1921년에서야 이루어졌다. 1939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이 침략해왔으며 1943~44년의 내란으로 알바니아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1944~85년에 엠베르 호자가 이끈 알바니아의 유일한 정당인 노동당은 경제 수단을 국유화시켰다

 

알바니아는 '자립'의 정책을 채택하기 전에는 유고슬로비아·소련·중국 등과 돌아가며 경제·군사 동맹을 맺었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로부터는 자국을 수십 년 동안 폐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성으로 경제가 어렵게 되자 호자의 후계자 라미즈 알리아는 1990년 개방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조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경제 통제를 완화하고 반체제 정치이념을 합법화시켰다.

 

1992년 3월 다당제 선거가 치러졌으며 비공산계인 민주당(PDS)과 다른 자유주의 정당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이름을 알바니아노동당에서 사회당(PSS)으로 바꾸고 인민의회 의석의 1/4을 차지했다. 1995~96년의 정치 상황은 불안했지만 경제는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1997년 피라미드식 투자사업이 붕괴되면서 이와 연계된 대다수의 국민이 하룻밤 사이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졌다. 전국은 혼란에 빠졌으며 의회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PDS 내각은 사임했으며, 1997년 6월 선거에서 PSS가 주도하는 동맹세력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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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두레스 인근에 있는 운치 있는 해변 13. 4. 28.

 

▲코소보의 전통의상 판매하는 방법 13. 5. 6.

 

▲조용한 호수와 낚시꾼 

 

 

 

▲오흐리드 호수

 

 

▲쉬로케 호수

 

 

■ 알제리 Algeria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Algeria

▲국기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수도는 알제이다. 사하라 지역이 전 국토의 85%를 차지하며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알제리 중북부와 북동부에는 세계 최대의 천연 가스 매장지가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리비아·나이지리아 다음으로 손꼽히는 유전이 있다. 또한 알제리는 아프리카 유일의 수은 생산국이며, 세계 수요량의 약 1/10을 공급한다.

 

196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가 통치하는 동안 크게 위축된 아랍 문화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술형태 가운데 하나가 문학인데, 문학에는 알베르 카뮈, 에마뉘엘 로블레스, 르네 장 클로 같이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작가들이 프랑스어로 쓴 작품과, 프랑스어로 씌어졌지만 토착 알제리의 작가들이 고유의 표현방식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그려낸 작품, 그밖에 아랍어나 베르베르어로 씌어진 시와 희곡 등이 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프랑스의 철학자, 소설가, 언론인

 

양탄자·보석·목공예품에는 전통적인 예술양식의 자취가 더욱 강하게 남아 있다. 이슬람교는 과거의 전통을 되살리는 문화적 연결고리 구실을 하는데, 시민들은 아직도 예언자 마호메트의 탄생축일인 물루드 같은 이슬람교 축일을 기념한다. 알제리에는 많은 민속학·고고학 박물관과 국립예술학교가 있으며, 훌륭한 초기 건축물의 본보기가 되는 아름다운 반구형 지붕의 유서 깊은 모스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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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07일  알제리의 잠재력

박상진 駐알제리 대사

 

 사하라 사막의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펼쳐진 클래식 공연.


알제리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독특하다고 한다. 지난해 4월 이곳에 부임한 이후로는 “잠재력은 대단한데 비즈니스 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는 말도 새롭게 듣게 되었다.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알제리는 국토면적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며, 무려 한반도의 10배가 넘는다. 국토는 남지중해 연안을 따라 구릉과 농경지가 조화를 이루는 지중해 연안과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하라 사막으로 되어 있다.


사하라 사막에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 자원이 매장돼 있다. 원유와 가스의 매장량은 각각 세계 17위와 10위를 자랑한다. 인염, 우라늄 등 지하자원과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의 잠재력도 대단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사구(砂丘)와 수백만 년 동안 풍화에 의해 침식되고 부서지면서 이뤄진 기괴한 암석들은 가위 장관을 이룬다. 지난해 주재국 문화부에서는 투아레그족(Tuareg) 근거지의 하나인 사하라 사막 동남쪽 자네트(Djanet) 지역에서,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 높이가 거의 100m에 이르는 거대한 암석 앞에서 클래식 공연을 개최한 바 있다. 필자는 극소수 대사만 초청한 이 행사에 참석하는 영광을 가졌다. 이곳에는 약 7500년 전, 물을 찾아왔다가 물이 없어 우는 소의 암각화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 전체를 마음 놓고 안전하게 관광하기에는 테러 위험 감소 등 전반적인 안전 문제가 선결돼야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지리적으로도 북아프리카 지역은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잇는 관문이다. 기원전 몇 천 년 전부터 베르베르족(Berber: 그리스어로 ‘외국인’을 의미)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 로마, 아랍, 오스만튀르크의 지배 등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과 교류의 대상이었다. 알제리의 문화적·인종적 다양성은 오늘날 글로벌 사회에서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알제리 국민은 아랍어와 프랑스어 등 2개 언어는 기본으로 하고 영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에 많은 재능을 보이고 있다.


알제리 사람들은 18301962년 프랑스 식민지배하에서도 아랍-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저항해왔다. 변화된 국제 환경하에서 1954년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독립 전쟁을 개시한다.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독립 전쟁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는 사실에 알제리 국민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독립 이후 지금까지 알제리 외교정책의 기조는 민족자결주의, 내정 불간섭,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 3원칙이다. 이는 독립 전쟁 과정에서 얻은 값진 교훈의 산물이다.


또한, 알제리 국민은 풍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과 아주 싼값의 생필품 가격으로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해 주는 국가에 큰 자긍심을 느낀다. 의료는 물론이고 대학도 학비가 전혀 없다. 심지어 대학생에게는 정부에서 용돈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알제리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환경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알제리는 1990년대 초 이슬람극단주의 세력 확대로 소위 암흑의 10년으로 불리는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1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이 내전의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다. 심각한 내전을 극복하고 지난 1999년 집권한 현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강력한 대테러 정책과 화해정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2030 비전으로 불리는 경제개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의미)로 상징되는 아랍의 문화, 느린 행정과 관료주의, 민간부문의 상대적 미발달, 복잡한 법령 및 미비한 인프라 시설 등 국제적인 비즈니스 기준에 미흡한 부분이 아직도 많아 비즈니스가 쉬운 환경은 아니다.


자부심 강하고 정서적으로 유럽에 더 가까운 알제리 국민이 우리의 고도 경제발전 경험을 배우고 싶어 하고 한국 문화와 한국어, 한식 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공관에서는 오는 10월 초 1주일간 ‘Korea Week’ 행사를 통해 공연, 전시회, 세미나, 태권도 대회 등 다양한 공공외교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과 알제리는 식민지배와 동족 간의 전쟁, 훌륭한 인적 자원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를 포용하는 다양성, 형제와 가족을 중시하는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지혜가 오랫동안 잠자고 있는 알제리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사하라 사막을 비롯한 알제리 전국 방방곡곡에서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1000여 한국 기업인의 열정과 근면 속에서 알제리의 밝은 미래를 그려 보아도 될까?

◇박상진(55) △제20회 외무고시 △주독일1등서기관 △주우크라이나1등서기관 △주벨기에겸구주연합1등서기관 △북서아프리카과장 △주LA영사 △주투르크메니스탄공사참사관 △주아랍에미리트공사 △국무조정실 외교안보정책관 △주알제리대사

문화일보

 

◆일상

▲알제리의 여성들 13. 3. 21

 

 

▲사막

 

■ 앙골라 Angola

앙골라 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Angola, Republica Popular de Angola, de Angola

▲국기

 

앙골라는 지형학적으로 크게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장 큰 지역으로서 전국토의 3/5을 차지하는 중앙고원이다. 이 지역은 높이가 1,100∼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남서 아프리카 고원과 산맥지대의 일부로서 앙골라의 남부와 중동부를 차지하고 있다.

 

둘째, 말란제·벵겔라·비에·후일라·룬다디비데 고원과 같은 산간고원지대로서 중앙고원지대의 북부와 서부에 2,400m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다. 이 산간지대에는 높이가 2,590m 이상인 봉우리가 몇 개 있으며, 앙골라 최고봉인 모코 산의 높이는 2,619m이다. 나머지 두 지역은 서해안의 사막지대, 그리고 높이가 서서히 낮아지는 고원 단층애로 된 동부지역으로서 역시 높이에 의해 구분된다.

 

산간고원지대를 기준으로 3개의 배수계가 뚜렷이 구분되는데 첫째, 북동부에서는 북쪽을 향해 콩고 민주공화국의 거대한 콩고 강 유역으로 물이 빠지며, 둘째, 남동부에서는 동쪽을 향해 잠베지로, 셋째, 역시 남동부에서 남동쪽을 향해 오카방고 강 유역 내륙배수계로 물이 빠진다. 나머지는 서쪽을 향해 대서양으로 흘러 수력발전에 이용되는데 특히 루안다 남동쪽의 콴자 강에 있는 캄밤베 댐은 앙골라 수력발전 자원의 대부분을 제공한다. 강우 형태는 남서부에서 북동부에 걸쳐 크게 다르다.

 

차가운 벵겔라 해류가 역방향으로 흐르는 남서부 해안 사막지대(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의 일부)는 그 영향으로 강우량이 매우 적지만, 앙골라의 북동부 1/3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강우량이 1,000㎜ 이상이며, 북동부 끝과 카빈다에서는 1,780㎜를 넘는다. 북부는 여름 우기가 7개월(10월부터 5월 중순)에 걸쳐 있어 남부보다 2개월 더 길다. 기온은 계절에 따른 차이는 별로 없으나 높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산간지대는 16℃로 쌀쌀하고 북부의 소요는 26℃ 정도 된다.

 

전국토의 약 40%가 숲과 삼림지대이며, 북서부(특히 카빈다 고립영토)에 가장 울창한 산림지대가 있고 남서부 사막지대를 제외한 그밖의 지역에도 듬성듬성 삼림지대가 있다. 국토의 3%에 해당하는 가경지는 대부분 남부와 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전에는 이곳에 많은 종류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발길이 닿은 이후로 점점 그 터전을 잃어가고 있으며, 아프리카산 코끼리, 검은 무소, 치타, 표범 등과 같이 멸종위기에 처한 것도 많다.

 

지하자원으로는 매장량이 풍부한 석유(아프리카 전체매장량의 4%를 차지)와 천연 가스가 있으며, 또한 다이아몬드 광산도 있다. 그밖에 철광석·망간·구리·우라늄·인산 등의 광물자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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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의 역사

 

 

아프리카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1482년 포르투갈의 항해자가 콩고강 하구를 발견한 이래 한때 네덜란드령이 되었다가 17~19세기에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51년 포르투갈의 해외주가 되었고 1975년 11월 독립하였습니다. 수도는 루안다이며 종교는 토착종교가 47%로 가장 많은 차지를 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킴분두족이 25%로 그 뒤를 잇습니다. 앙골라의 언어는 포르투갈어입니다.

 

인구는 2018 통계청기준은 약 30,774,000명으로 세계 46위입니다. 정체는 공화제입니다.

 

 

기후에 대해서

앙골라는 너비 25~100km의 해얀평야로부터 내륙을 향해 높아지다가 해발고도 2,000m급의 산지가 전개되며, 동쪽은 평균 1,000m의 고원이 나타납니다.

 

 기후는 남쪽에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열대우림의 콩고 분지가 있기에 남부는 저온건조하고 북부는고온다습하며 중부 평원지대는 사바나 기후입니다.

 

 

사회에 대해서 

앙골라의 의무교육은 초등학교에만 해당합니다. 헌법상 모든 시민에게 무상교육이 보장되어 있으나

잦은 폭동으로 인해 입학률은 매우 낮습니다.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수도 루안다에 설립된 아고스티노네토대학교가 있습니다. 언론매체는 모두 국가 소유이며 일간지가 몇 종 있으며 국영 라디오방송국과 텔레비전방송국도 있습니다.

 

 

▲앙골라 루안다 대홍수 11명 사망 이재민 수천 명 2017.03.23

 

 

 

 

 

 

 

■ 에티오피아 Ethiopia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 공화국

▲국기

 

아프리카 대륙 가장 동쪽 돌출부인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에 위치해 있다. 수도는 아디스아바바이다.

 

암하라족이 전체 인구의 1/3을, 다른 1/3은 오로모족이 차지하고, 그 외는 티그레족·아파르족·소말리족·사호족·아게우족이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언어는 암하라어와 오로모어가 주로 사용된다. 종교는 에티오피아 정교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도가 많고, 그 외 이슬람교 및 전통 신앙을 믿는다. 화폐 단위는 비르(birr/Br)이다.

 

육지로 둘러싸인 국토의 북쪽은 산악지대이고, 동쪽과 서쪽은 저지대이다. 중앙 에티오피아 고원은 동아프리카지구대(Great Rift Valley)에 의해 서부 고원지대와 동부 고원지대로 나뉜다. 고지대는 온후하여 거의 사바나성 기후이고, 건조한 저지대는 무덥다. 집약농업과 삼림 벌목은 토지의 심각한 침식을 가져왔다. 이러한 침식 현상은 주기적인 가뭄과 함께 주기적인 식량 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이전에는 다양하고 많은 야생 생물들이 서식했지만 이제는 야생 생물들의 개체 수가 격감하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농업은 주로 자급을 목적으로 하며 주요 농작물은 주식용 작물이다. 축산업 또한 주요 농업 부문이다. 주요 수출 작물은 커피이고, 가죽 및 피혁가공품도 주요 수출 품목 가운데 하나이다.

 

1995년 양원제를 채택한 새로운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고, 정부 수반은 총리이다.
성서상의 쿠시 왕조 지역이었던 에티오피아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거주지역이었으며, 한때는 고대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다. 게이즈어를 사용하는 농경민들이 BC 7세기경에 다마트 왕국을 세웠다. BC 300년 이후에는 악숨 왕국이 다마트 왕국을 대신했다. 전설에 따르면 악숨 왕국의 메멜리크 1세는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마케다의 시바 여왕 사이의 아들이었다. 그리스도교가 4세기경에 도입되어 널리 퍼졌다.

 

에티오피아의 번성하던 지중해 무역은 7~8세기에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에 의해 차단당했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남쪽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15세기 후반 포르투갈인들이 진출하면서 다시 유럽과 연결되었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는 테오드로스 2세의 통치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나라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유럽 침략의 결과로 1889년 해안지역이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되었다. 하지만 황제에 오른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1896년 그들을 축출했다. 메넬리크 2세의 통치기에 에티오피아는 번영을 누렸고, 그가 시작한 근대화 사업들은 1930년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때까지 이어졌다.

 

1936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지배권을 다시 얻었고, 1941년까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Italian East Africa)의 일부로 유지했다. 1952년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병합했다. 1974년 하일레 셀라시 왕이 폐위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정부가 1991년까지 통치했다. 이 정부 통치기에 에티오피아는 내내 내전과 기근으로 시달렸다. 1993년 에리트레아는 독립을 얻었으나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말리아와의 국경 분쟁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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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하늘 향해 우뚝 솟은 고대 악숨 왕국의 오벨리스크

▲지난달 28(현지시간) 고대 악숨왕국 당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에티오피아는 이 오벨리스크를 1937년 독재자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에 빼앗겼다가 지난 2005년에야 돌려 받았다. /연합뉴스

입력 : 2016.06.02 11:44

 

 

조선일보 & Chosun.c

 

▲천국의 땅

 

▲유황온천 - 에티오피아 달롤 화산지대 황금 온천

 

 

 

▲청나일 폭포, 공용어인 암하라어로는 불의 연기 또는 연기가 나는 물,이란 뜻의 티스 이사트 라고 부르며 이 나라 최대의 호수 해발 1860m의 타나호 사이에 있다

 

▲코카 호수

 

▲탕가노 호수의 무시개

 

▲화산

 

 

 

▲암벽교회 - 랄리발라

 

▲시미엔국립공원의 소녀

 

■ 에콰도르 Ecuador

에콰도르 공화국, Republic of Ecuador, Republica del Ecuador

▲국기

 

적도에 걸쳐 있으며, 서쪽으로 태평양에 접한다. 북쪽으로는 콜롬비아, 남동쪽으로는 페루와 경계를 이룬다. 수도는 키토이다. 주요환금작물은 세계 최대생산량을 자랑하는 바나나를 비롯해서 사탕수수·카카오·커피 등이다. 주요수출원은 연안 어장에서 양식하는 새우이고, 다랑어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에콰도르는 4년 단임제로 선출되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대의민주제 국가이다.

 

스페인인들이 에콰도르를 점령하기 이전에는 여러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카라족이 키토를 수도로 하여 세운 왕국은 1450년 이후 잉카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왕국을 정복한 잉카 제국의 황제가 죽자 제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두 아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1526년 스페인군들이 도착한 당시 잉카 제국은 이 전쟁으로 극히 쇠약해진 상태였다.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가 이끌었던 스페인군은 1532년 에콰도르에서 출발하여 잉카 치하에 있던 페루로 진군했고, 1534년에는 잉카의 중심지 키토에 입성하여 에콰도르 정복에 나섰다. 인디언들은 키토 시를 파괴하고 후퇴했다. 1534년말 벨랄카사르는 그 폐허에 비야데산프란시스코데키토를 세웠으며, 이곳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스페인인들은 인디언 노동력을 이용해 광대한 부지에 식민지를 세웠다. 농경을 주로 한 당시의 사회는 계층 구분이 뚜렷했으며 변화가 느린 편이었다. 스페인 통치를 받던 잠시 동안을 제외한다면 에콰도르는 줄곧 페루 부왕령에 속해 있다가 1740년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의 일부가 되었다.

 

중류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크리올은 스페인의 식민지 차별정책에 저항하며 변화를 선동하고 1809년 독립을 선포했다.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 이 운동은 심하게 탄압받았고 지도자들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에콰도르는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지휘하에 키토 시 부근에서 벌어졌던 피친차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830년에 독자적으로 헌법을 공포,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후 수십 년 동안 내륙지방 키토 시의 보수주의자와 귀족들, 해안지역 과야킬 시의 자유주의자, 부르주아들 사이의 경쟁과 적대관계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빈번한 정권교체와 개헌이 잇따랐고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1860∼75년 귀족 및 성직자가 지배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의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경제와 교육 분야의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자유주의자들의 불만이 컸다. 이후에 여러 정권이 들어섰으나 역시 20세기 초반까지 독재정치가 계속되었다.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안이 심해지자 군부가 정치에 심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1941년 페루가 에콰도르를 침입하여 남서해안의 엘오로 주를 황폐화시켰고, 분쟁지였던 아마존 강 지역의 상당 부분을 압류했다. 전쟁 후 상당기간 에콰도르에는 합법정부가 들어서 유지되었고, 비교적 자유 선거도 이루어졌다. 1944년 선거에서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이바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72년까지 5회에 걸쳐 재임되었다. 그러나 그중 임기를 채운 것은 단 한번뿐이다. 극도의 불안과 예측불허의 정치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진보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비로소 새 헌법이 1979년에 인준되었다.

 

1970년대에 석유로 경제가 발전하긴 했지만 인플레이션 역시 상당히 심각한 상태였다. 1981년에는 페루와의 오랜 국경분쟁이 재개되었다.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에콰도르의 경제는 기름값의 하락세, 높은 인플레이션, 지진과 폭풍 재해에 따른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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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안데스·아마존이 빚어낸 나라

2014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무상원조 사업으로 갈라파고스에 건립된 친환경 태양광 발전소 전경.

 

갈라파고스 군도는 남미 대륙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찰스 다윈이 1835년 비글호를 타고 이곳을 방문해 후일에 진화론을 세우는 데 영감을 얻었던 곳으로도 유명한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다.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독특한 생태계가 형성된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주요 대륙으로부터 고립돼 진화가 이뤄져 왔기 때문이고, 태평양의 심수 해류, 파나마의 열대 해류, 페루의 한류 등이 한 데 어우러져 해양생태계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4년 우리 정부(KOICA)가 무상원조사업으로 준공한 친환경 태양광발전소가 이러한 생태계 유지에 일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섬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혹시 아직 정답이 알쏭달쏭한 분들을 위해 몇 가지 힌트를 드리고자 한다.

이 나라는 적도를 끼고 있는 화산의 나라이다. 본토에만 30여 개의 화산이 있고, 갈라파고스에도 14개나 된다. 안데스 산맥이 남북으로 이 나라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 산맥 가운데에 긴 계곡 분지가 형성돼 이 분지를 따라 도로와 주요 도시들이 형성돼 있다. 독일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훔볼트가 이 나라를 탐험하면서 이 길을 ‘화산의 길(Avenida de los Volcanes)’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길 양쪽에 5000m 이상 높이의 화산들이 분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 나라는 사실 파나마 모자의 원산지로도 유명하다. 파나마 모자는 파하 토키야(paja toquilla)라는 야자수과 식물의 섬유를 원재료로 해 손으로 직접 짜서 만드는데, 파나마를 거쳐 전 세계에 수출됐기 때문에 원산지국 이름이 아닌 파나마 모자로 불렸다.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파나마 운하 공사 현장을 방문했을 때 이 모자를 써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쯤 되면 남미의 어느 나라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적도가 이곳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나라 이름도 적도라는 뜻이라고 하면 아하, 이 나라로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필자는 2014년 말 이곳 에콰도르에 부임해 틈틈이 지방여행을 다녔는데, 자연 풍광이 스위스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마존 열대우림부터 극지 기후까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고 ㎢당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 풍부한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알려져 있다.

에콰도르는 알고 보면 우리나라와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어왔는데, 기억해둘 만한 것이 하나 있다. 1976년 현대의 포니 자동차 5대를 최초로 해외에 수출한 국가가 바로 에콰도르란 사실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나아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역사에 있어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양국관계가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크게 확대되고 있다.

에콰도르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한국에 관심이 많고, 가보고 싶어 하고, 또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을 이미 선진국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너무 멀다고 한다. 남미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이 지리적 거리가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간 인적·문화적 교류나 경제협력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해온 점을 감안한다면, 이 지리적 거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선사시대에는 북방 아시아 민족이 베링해를 거쳐 미주대륙으로 이주했지만, 오늘날에는 첨단 정보기술(IT)과 교통수단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베링해가 양 대륙을 연결해주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남미 대륙과의 관계가 북미나 유럽, 동남아와 같은 정도의 교류협력이나 접근성, 문화적 친밀감을 가지려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단순한 호기심과 관광의 대상이 아닌 전략적 협력과 동반성장의 파트너로서 남미대륙을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여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전성기 때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즉 ‘우리들의 바다’ ‘내해(內海)’라고 불렀다. 지구촌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만큼 우리와 남미대륙 사이에 놓여 있는 태평양도 언젠가는 미래의 마레 노스트룸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이은철(64년생) △제24회 외무고시 △주베네수엘라 대사관 △주시드니 총영사관 △주이탈리아 대사관 △중미과장 △문화교류협력과장 △주보스턴 총영사관 △중남미국 심의관 △현 주에콰도르 대사

 

갈라파고스제도[Galapagos Islands]

남아메리카 동태평양에 있는 에콰도르령() 제도로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1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1,000km 떨어져 있으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준 섬으로 유명하다.

주위 해면은 해류 관계로 심해의 한랭한 물이 상승함으로써 수온은 15℃ 정도로 낮고, 바로 적도에 위치하면서도 산호초가 없다.

 

해수 온도가 낮아 기온도 25℃ 이하이고, 강수량도 1001,000mm 정도에 불과하여 야자수가 자라지 않는다. 또한 화산암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육수(陸水), 곧 민물이 충분하지 못하다.

 

 

생물은 고유종(固有種)이 많으며, 1835년 영국의 생물학자인 C.다윈이 비글호()로 이 제도를 탐험한 이래, 그 독특한 생물상이 널리 알려졌다. 체중 200kg에 달하는 코끼리거북, 몸길이 1.5m에 달하는 바다이구아나(바다도마뱀)·뭍이구아나(뭍도마뱀) 등의 파충류,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작은 갈라파고스펭귄, 다윈핀치 등의 조류, 목본성(木本性) 국화과 식물 스칼레시아류(), 기타 고유 동식물 등이 풍부하다. 전체 종류에 대한 고유 종류의 비율, 즉 고유종률(固有種率)은 포유류·조류·파충류는 80% 이상, 고등식물은 40% 전후의 높은 비율을 나타낸다. 이런 생물들이 다윈에게 진화론의 착상 동기를 주었다고 하며, 오늘날 이곳을 ‘생물진화의 야외실험장’이라고도 부른다.

 

20세기 초까지는 동물을 마구잡이로 잡았기 때문에 코끼리거북은 멸절상태에 이르렀으나, 1934년 이후 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고유생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1964년 산타크루즈섬에 다윈 연구소가 개설되었다. 이 제도는 발견된 이래 에스파냐 식민지로서 소수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832년 에콰도르의 J.비야밀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개척을 시작, 에콰도르의 영유(領有)를 선언하였다. 그 이후 인구가 증가하여 커피·사탕수수·옥수수·감자 등을 재배하며, 소·돼지·닭 등의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파나마 운하 개통 이후, 군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의 항공기지였다.

 

○산크리스토발섬[San Cristobal I]

면적 약 500km2. 인구 약 3(1990). 최고점 758m. 영어로는 채텀섬(Chatham I.)이라고 한다. 에콰도르 서쪽 약 970km 지점 태평양상에 있다. 사탕수수와 커피가 재배되고, 소 사육, 어업, 제당업(製糖業)이 행해진다. 섬의 남서단에 있는 푸에르토바케리소는 군도 제1의 항구이며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다윈연구소가 있으며 동식물 연구와 보호가 실시되고 있다.

 

 

○이사벨라섬[Isabela I]

길이 20km. 최고점은 1,432m. 태평양 적도부근에 있는 L자형 화산섬으로 알베마를섬이라고도 한다. 많은 화구(1,000여 개) 5개의 중심 화산이 있으며, 하나는 1925년에 폭발했다. 1535년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나, 1832년 이후에 에콰도르령()이 되어 유형지로 이용되었다.

 

섬의 남해안에는 몇 개의 취락이 있고, 서해안에는 양항(良港) 타구스코브가 있다. 최근에는 어업기지로서의 가치가 증대되었다. 거대한 황소거북이나 바다도마뱀의 서식지로서 생물지리학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에콰도르[Ecuador]

정식명칭은 에콰도르공화국(Republica del Ecuador)이다. 북쪽으로 콜롬비아, 남쪽과 동쪽으로 페루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면한다. 본토에서 965km 떨어진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가 국토에 포함한다. "에콰도르" "적도"를 의미하는 에스파냐어(), 실제로 적도가 국토의 북부를 지나간다. "남아메리카의 티베트"라고 불릴 정도로 국토개발이 뒤진 편이지만, 수도인 키토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유산으로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은 22개주(provincia)로 되어 있다.

 

 

1. 자연

챔피온섬의 바위해변

에콰도르는 안데스산맥이 동부산계와 서부산계로 갈라져 국토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뻗어 있다. 따라서 지형은 서부의 해안지대, 중앙산지 및 그 사이의 고원분지군과 동부의 아마존강 상류 저지대로 나누어진다. 기후는 안데스산맥과 중앙아메리카난류, 훔볼트(페루)한류의 영향을 받아 지역적 변화가 심하다. 중심지는 쿠엥카, 알라우시, 암바토, 이바라 등의 고원분지에 있으며 해발고도는 2,0003,000m로서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기후는 저온과우(低溫寡雨)인데다 기온의 연교차도 작기 때문에 인간 거주의 최적지가 되어 수도 키토(해발고도 2,850m)를 비롯한 대도시가 고원분지에 모여 있다. 에콰도르는 지진의 나라로 알려져 있어 에콰도르안데스는 전체 안데스 산맥 중에서 화산이 가장 많은데, 동부산계에 있는 세계 최고의 활화산 코토팍시산(5,897m)과 카얌베산(5,790m), 서부산계에 있는 에콰도르 최고봉 침보라소산(6,267m) 5,000m급의 화산이 8개나 있다.

 

설선은 5,000m이며 6,000m 이상은 곡빙하(谷氷河)를 이룬다. 이 중앙산지에서 발원하는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최대의 항행가능 하천인 과야스강()은 해안지대 남부에 과야스 저지라고 하는 기름진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다. 이 저지부터 해안선까지는 해발고도 200300m의 제3기 구릉지대이다. 해안지대의 북부는 무덥고 많은 비가 내려 열대우림이 발달해 있으나, 남쪽으로 갈수록 우량이 줄어들어 사바나에서 사막으로 바뀐다.

 

아마존 상류의 저지대(오리엔테 지방)에는 나포강()을 비롯하여 고원분지에서 발원하는 긴 강이 많아 동쪽으로 흐른 다음 안데스강과 합류한다. 이 지대는 고온다습하여 연강수량이 2,0003,000mm나 되며, 대부분이 밀림에 뒤덮여 있고 인구도 희박하다.

 

태평양에 있는 갈라파고스제도(국방부에서 관할)는 해류관계로 동식물의 보고(寶庫)가 되어 있으며, C.R.다윈의 진화론에 중요한 재료를 제공하였다. 전국토 중 경지가 11%, 초원 18%이며 숲과 산림지대가 56%나 차지한다.

 

 

2. 주민

키토 거리의 아이들

에콰도르 원주민인 인디오가 전인구의 35%, 메스티소(인디오와 백인의 혼혈) 45%, 유럽계 백인이 10%, 흑인과 물라토(흑인과 백인의 혼혈)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백인은 여러 고원도시에 살면서 대지주나 상공업 경영자 등의 상류계급을 이루고 있고,메스티소는 도시중간층을, 흑인은 주로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인디오는 주로 반()봉건적 대토지에서 농노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급자족 경제나 방랑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이지만, 인디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케추아족()은 케추아어를 사용하고, 히바로족은 히바로어를 사용한다. 메스티소와 도시 근교에 사는 인디오의 생활양식에는 구미풍()이 엿보이지만, 대부분의 인디오는 그들만의 풍습을 지키고 있다. 챙이 넓은 모자와 폰초(망토 비슷한 것) 차림으로 다니며 거의가 맨발이다. 종교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가톨릭교를 믿는다.

 

 

3. 역사

에콰도르에는 옛날에는 8개의 인디오 국가가 분립해 있었는데, 15세기 전반에 키토 왕국의 지배가 확립되었으며, 이 나라는 1460년 잉카제국에 정복당할 때까지 존립하였다. 그러나 잉카제국도 1532년에 에스파냐의 정복자 F.피사로의 손에 멸망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정식으로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페루 부왕령(副王領)에 속해 있었으나 1717년부터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풍습의 차이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1563년부터 독자적인 아우디엔시아(상위의 사법, 입법, 행정기관)를 형성하였으며, 이 관할구가 오늘날 영토의 기반이 되었다. 독립운동은 1809년 및 1810년의 반란에서 비롯되었는데,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S.볼리바르의 부하인 장군 수크레가 산마르틴의 원조로 키토 해방에 성공한 것은 1822년의 일이었다.

 

 

그후 에콰도르는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으나, 1830년 분리 독립하여 J.J.플로레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 상공업 경영자 중심의 과야킬과 반봉건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키토와의 지역적 대립, 이를 기반으로 한 자유당과 보수당의 분쟁 및 내란, 페루 및 콜롬비아와의 국경분쟁 등이 국가발전을 저해해왔다. 그런 속에서도 약간의 발전을 본 것은 독립 직후의 플로레스, 19세기 후반의 가르시아 모레노, 20세기 초의 알파로에 의한 3대 독재시대였다.

 

정치정세의 안정과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시작된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였다. 1944 5월 공산당, 사회당, 사회주의혁명전위당(前衛黨) 등으로 구성된 민주연맹이 반란을 일으켜 아로요 델 리오의 독재정권을 타도하였으며, 그해 7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연맹이 지지하는 벨라스코 이바라가 당선되었다. 그는 1960년 선거에서도 토지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내걸어 당선되었으나, 취임 후 독재적 경향이 심해지고 증세(增稅), 평가절하, 반정부운동 탄압 등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1961 11월 일어난 학생, 군부의 반란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부통령에서 승격한 대통령 훌리오 아로세메나는 누진소득세, 농지개혁 등 진보적 정책을 실행하였으며,1962 1월의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 외상회의 때는 쿠바 제재 결의에서 기권하였다.

 

 

그후 국내 우익세력과 미국의 압력으로 1962 3월 대()쿠바 단교(斷交)조치를 취하게 되자 쿠바지원운동, 반정부운동, 농민들의 토지점거운동이 격화되었다. 1963 7, 용공적 경향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정지, 의회해산, 공산당의 비합법화를 단행하였으며, 대령 라몬 카스트로 히혼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군사정권은 경제, 사회 발전 10개년 계획 등의 경제개발정책을 입안하여 추진하였으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정치가와 학생의 저항에 경제정세마저 악화되었기때문에 민정이양을 결의하고, 1966 3월 정부를 상원의원 이에로비 인다브로에게 이양하였다.

 

 

입헌제의 조기 복귀를 지향한 임시정부는 그해 10월에 제헌의회 선거를 시행하였고, 여당인 사회그리스도교운동당의 아로세메스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치상황의 불안과 경제 위기는 가시지 않았으며, 1968 7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벨라스코 이바라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산지의 인디오 농민이 벌이는 토지요구운동과 학생·노동자의 반정부운동 속에서 벨라스코 정권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에 대항하였으며, 에콰도르를 ‘협동조합’ 국가로 재편성하는 구상을 발표하고는 의회해산과 헌법정지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좌파의 반발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으며, 1971년에는 1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1972 2월 군부는 마침내 대통령 벨라스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무혈 쿠데타를 통해 그를 아르헨티나로 추방하였으며, 통합참모장 로드리게스 라라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6 1월 그 역시 퇴진하고, 육·해·공 3군 최고사령관으로 구성된 집정평의회가 성립되어 해군중장 포베이다가 집권, 민정 이양 준비를 시행했다. 1978 1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회의 단원제, 문맹자에 대한 선거권 부여, 대통령 재선 금지 등을 규정한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그후 1979 4월의 총선거에서 인민무력연맹(PCPF)의 롤도스 아길레라가 대통령에 당선, 민정복귀가 실현되었다. 1981 5월 대통령 롤도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부통령 우르타도가 의회의 인준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1984 1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기독교사회당의 코르데르가 승리하였고, 1988년 선거에서는 보르하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8월에 취임하였으며, 1992 7월의 총선에서는 공화연맹당(POUR)의 바벤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 정치

에콰도르는 대통령중심제 국가로,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국회는 단원제로 123석인데 지역구 103석은 인구비례에 따라 각지역별로 직접선거, 전국구 20석은 전국구로 각 정당별로 투표하여 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한다. 임기는 모두 4년이다. 사법권은 대법원과 고등법원 및 헌법과 법률에 따라 설치되는 하급법원이 가진다. 지방행정을 맡는 주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외교정책은 상호방위원조협정 등을 통하여 대미(對美)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 LAFTA(Latin American Free Trade Association:라틴아메리카자유무역연합), 안데스지역통합협정 등에 가입하여 라틴아메리카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이웃나라인 콜롬비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페루와의 국경 충돌이 잦았으나 1981년에 국교는 회복되었고‘리우 의정서’ 보장국(미국,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의 중재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1998 10 26일에는 역사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하였고 2001 10월 페루 대통령 에쿠아돌이 에콰도르를 방문하면서 양국의 협력방안을 합의하였다.

 

1973년에는 산유국으로서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석유수출국기구)에 가입하였으며,1992 11월 탈퇴하였다. 단교상태에 있던 쿠바와는 1981년 복교(復交)하였다. 1972년에는 타이완 정부와 단교하고 중국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가입을 지지하였다. 정당으로 민중민주당(DP), 기독사회당(PSC), 롤도스당(PRE), 민주좌익당(ED) 등이다. 군대는 대통령이 통수하며, 병역은 2년으로 선발 징병제이다.

 

 

5. 경제

커피콩

에콰도르는 1960년대까지는 바나나, 커피, 카카오의 3대 생산물이 수출총액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농업의존형이었는데, 1972년부터 석유의 생산, 수출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경제구조가 변하고 있다. 농업은 노동인구의 30%, 수출총액의 30%를 차지하여 여전히 중요부분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대()GNP(국민총생산) 비율은 저하하는 경향에 있어, 1975 21%, 1999년에는 14%이다.

 

농업지대는 고원분지에 있는 영세경영, 저생산성의 곡물지대와, 해안부에 있는 대규모 경영의 열대성 및 온대성 농산물지대로 대별된다. 온대성 농산물 지대의 경우는 기름진 땅과 변화가 많은 기후를 이용한 바나나, 커피, 카카오, 목화 등 수출용 농산물의 재배가 활발하다.

 

경지면적 432ha의 태반은 목초지이지만 바나나, 커피, 카카오, 옥수수가 각각 20ha 이상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쌀이 10ha, 목화가 4 5000ha이다. 중앙고지의 목초지에서는 대규모 경영의 목우(牧牛)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나나 왕국’으로서 세계 총수출액의 1/4을 차지한 바나나는 해외수요의 정체로 생산이 답보상태에 있고, 목화와 콩의 생산은 급증하고 있다. 또한 커피와 카카오는 국제시장성이 높다.

 

임산자원은 아마존 저지와 해안부에 많고, 발사재()와 아이보리넛(상아야자의 열매)이 특산물로서 유명하지만, 수송상의 어려움 때문에 미개발 지역이 많다.

 

 

광산자원은 풍부하지만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석유는 동부지방을 중심으로 1971년부터 급속히 개발되었으며, 산출된 석유는 1972년에 완성된 안데스를 넘는 송유관을 통해 라고아그리오 유전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의 발라오까지 약 50km의 거리를 수송한다.

 

2001년 현재 하루 산유량은 41만 배럴, 하루 수출량은 25 5000배럴이며 석유가 총수출액의 약 38%를 차지하는 과도한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광물자원 개발 등에 부심하고 있으며, 외국인의 투자 유치에도 노력하고 있다.

 

공업부문의 구성은 여전히 식품, 섬유, 시멘트 등 기초적 소비재의 비중이 크지만, 앞으로는 기계, 전기 제품 등의 비중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1999년 시장개방화 정책으로 수출업 절차의 간소화, 비관세 장벽 철폐, 수입관세 인하 등을 추진하였고 원유 이외의 수출 품목의 다양화와 농수산물 등 전통 수출품의 생산에 증진하였다. 2001년 수출은 45 1900만 달러, 수입은 52 97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목은 석유, 커피, 바나나, 카카오, 수입품목은 기계, 기기류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 페루, 파나마, 콜롬비아, 러시아, 이탈리아, 베네수엘라, 독일, 일본, 칠레, 한국 등이다.

 

에콰도르는 무역·재정적자 심화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에다 개혁정책의 지연, 정치적 불안정으로 경제상황이 악화한 가운데 1999년 초 브라질 금융위기 여파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10월에 외채이자 지불유예 발표로 경제파탄위기에 이르렀으나 2000 1월 달러화() 도입을 골자로 한 경제·사회 안정조치 발표를 시작으로 경제개혁을 시도하였다. 2001년에는 경제성장률이중남미국가 중 최고인 5.4%를 달성하는 등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

 

 

6. 사회

에콰도르의 사회는 오랫동안 백인들이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왔으며 원주민 인디오와 흑인들은 하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최근 경제개발의 진전에 따라 도시 인구집중 현상이 두드러지고 공업화에 의한 각 인종간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에 따라 종래의 고정적인 사회경제계층 구분은 점차 타파되어가고 있다. 생활양식은 일반적으로 에스파냐의 경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지방에는 인디오의 전통 풍속의 뿌리가 강하게 남아 있다.

 

에콰도르는 페루와의 국경분쟁, 아마존강 유역 국경분쟁, 1995년의 국경분쟁 등 3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1998년 미국과 아르헨티나 등 4개 보장국 대표와 함께 평화협정에 서명하여 60년간에 걸친 국경분쟁을 종식하였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6), 중등학교(6), 대학교(4~6)로 이루어지며 문맹률은 15%(2001)이다. 언론은 《El Universo, El Comercio, Hoy, El Telegrafo,Ultimas Noticias, La Razon》 등의 주요일간지가 있고 방송은 라디오 448, TV 15국이 있다.

 

 

7. 문화

에콰도르 나포 문명

에콰도르의 문화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영향과 토착 원주민 문화가 혼합된 형태이다.

 

AD 1460년경 남쪽으로부터 잉카제국이 침입하여 에콰도르를 점령한 후 잉카의 왕 후아이나 카팍(Huayna Capac)은 잉카의 언어를 주입하였으며 이는 아직도 에콰도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안데스의 고지대인 케추아, 오트발레노스, 살라사카스, 사라구로스 등에서는 이직도 고대 잉카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해안지역 주민은 아프리카계 에콰도르인으로 마림바 음악과 춤, 축제 등으로 유명하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는 도기, 회화, 조각, 금은 세공품 제작에 능했다.

 

현대 산업화의 압력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지역에는 샤머니즘적 전통이 존재한다. 도시들은 그 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오타볼로는 따뜻하고 진취적인 원주민들로 유명하며 쿠엥카는 빛나는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을 가진 유래 깊은 도시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축구는 전국민이 즐기는 스포츠이며

 

 

8. 대한관계

에콰도르는 한국 단독수교국이다. 에콰도르 정부는 1949 10 4일 한국을 승인하였으며, 1962 10 5일에는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19743월 상주공관을 설치하였다. 1983년 경제기술협력, 사증면제협정, 1984년 어업협정, 1985년 문화협정, 2001년 외교부간 태평양연안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상호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에콰도르에 진출하여 1977년에는 정유공장의 배관공사와 키토시의 도로포장공사에 참가하였다. 또한 원양어선이 에콰도르에 어로기술을 제공하는 등 합작투자 형식의 어로협력이 이루어져 왔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가전제품, 의류, 자동차 부품, 타이어 등이고 수출품은 원유, 바나나, 어류, 목제품 등이다.

 

 

키토[Quito]

에콰도르 북부 해발고도 2,850m에 위치하며 적도직하(赤道直下)이면서도 상춘(常春)의 쾌적한 환경에 놓여 있다. 잉카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오랜 도시로 1534년에 에스파냐의 식민도시가 되었다.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서 수많은 옛 교회 등 특이한 종교예술을 간직하고 있고 식민지 시대의 옛 모습도 많이 남아 있다.

 

서반구(西半球)에서 가톨릭교 중심지의 하나이기도 한 키토에는 1787년에 창설된 대학과 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많다.

 

모직물·피혁 등의 공업도 이루어지나 경제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 이 도시의 주요기능은 정부 각 기관의 존재로 상징되는 정치기능이며,금융면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태평양 연안의 외항(外港) 과야킬과는 국토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철도 및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시가지의 건물 대부분은 에스파냐풍()의 낮고 붉은 기와집이고, 도처에 아름다운 광장이 있다. 교외에는 인디오도 많이 살고 있으며 인디오 문화의 유적도 흔하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라틴아메리카에너지기구[Organizacion Latinoamericano de Energia]

1970년의 석유파동을 계기로 1973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제3회 라틴아메리카 석유장관회의에서 정식으로 그 설립이 결정되었다. 가맹국은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제국의 24개국이며 비산유국(非産油國)인 쿠바도 가입되어 있다.

 

이 기구는 에너지시장의 통합을 도모하는 방향에서 개발계획에 대한 자금공여(資金供與)의 조직확립과 역외(域外)로부터의 제재(制裁) ·억압 행위에 대한 지원 등을 당면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금이나 기술의 부족으로 국제석유자본을 유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고결정기관으로 각료회의를 두고 있으며 1년에 2회 회의를 연다. 본부는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있다.

 

◆일상

 

 

 

◆2016.04.18  에콰도르 강진 사망자 238명으로

▲16.4.16 지진 발생

 

 

 

 

 

 

 

 

 

 

 

 

 

강진이 휩쓸고 지나간 에콰도르의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16일(현지시간) 오후 발생한 리히터 규모 7.8의 강진으로 인해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238명, 부상자수는 최소 1557명으로 집계됐다.

  이탈리아를 방문 중이던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급히 귀국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피해 복구에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사상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매몰자가 많기 때문이다. 에콰도르 정부는 지진 피해 수습을 위해 군인 1만여명과 경찰 4600여명을 투입한 상태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번 지진은 16일 오후 6시58분(한국시간 17일 오전 8시58분) 에콰도르 무이스네에서 남동쪽으로 27㎞ 떨어진 태평양 해안지점에서 발생했고, 진원 깊이는 19.2㎞로 비교적 얕았다. 이 지진 이후 다음날 새벽 2시쯤 진앙으로부터 80km쯤 떨어진 곳에서 규모 5.6의 지진이 일어나는 등 최소 135차례 이상의 여진이 발생했다. AP통신은 “1979년 에콰도르 대지진 이후 최악의 지진”이라고 전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과야스와 마나비, 산토도밍고, 로스리오스, 에스메랄다스, 갈라파고스 등 6개 지역에 긴급 재난 사태를 선포했다. 지진 발생 이후 내려졌던 쓰나미 경보가 해제됐지만 주민들은 섣불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런 혼란을 틈타 100여명의 재소자들이 탈옥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레디 수니가 에콰도르 법무부 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탈옥 사실을 알렸다고 독일 dpa통신이 전했다. 이들 중 30여명은 만비 주(州) 포르토비에호에서 붙잡혔고, 사법당국은 나머지 재소자들을 쫓고있다.

정종문 기자 persona@joongang.co.kr

 

◆화산

▲퉁구라우아 화산의 용암 2011.11.28. 에콰도르 키토남쪽

 

▲용암분출 =11.11.29. 퉁구라우아 화산

 

 

 

▲가스와 재를 내뿜는 화산-12.3.6. 통구라우아 

 

▲센트랄산맥의 화산

 

▲12.8.21. 후암바로 퉁구라우아 화산에서 분출

 

 

 

 

 

 

▲바노스 퉁그라우아 화산이 13. 5. 8. 폭발 용암과 화산재를 뿜어 내고 있다

 

▲14.2.1 퉁그라우아 화산이 분출

 

 

 

 

 

▲안데스 사맥의 퉁구라우아 화산이 14.4.4 10km상공까지  화산재를 뿜어내며 폭발 조짐을 보이고 있다

 

 

 

 

 

▲퉁구라우아 화산이 14.8.31 화산재를 내뿜고 있다

 

 

 

 

 

▲2015.8.22  에콰도르 코도팍시 화산

 

▲에콰도르 퉁구 라우아 화산 폭발  16.2.27

 

 

 

 

 

■ 엘살바도르 El Salvador

엘살바도르 공화국, Republic Of El Salvador

▲국기

 

중앙 아메리카 7개국 중 가장 작은 나라. 태평양 연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335km에 걸쳐 태평양 쪽에 맞닿아 있고 북서쪽으로 과테말라, 북동쪽과 동쪽으로 온두라스에 접해 있다. 수도는 산살바도르이며 화폐는 US달러이다. 자유기업경제를 기초로 하는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무역적자가 발생하고 있다. 초등교육이 무상 의무교육이나 내전 등으로 입학률이 낮고 국민의 1/3가 문맹이다.

 

역사

1524년 스페인인들이 엘살바도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피필 인디언들이 이 나라 서부의 절반에 이르는 지역에 쿠스카틀란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피필족은 나우아족의 후예로 11세기에 이곳에 도착한 듯하다.

 

1539년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피필족을 정복했고, 스페인은 엘살바도르를 산살바도르 손소나테라는 2개의 과테말라 총독관할구(alcaldias mayor)로 나누었다.

 

1786년에 산살바도르는 상급 행정구(inten-dencia)로 승격되었지만 여전히 과테말라 총독령의 하급단위였다.

 

1811년 산살바도르에서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가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독립문제를 제기했고, 1821년 산살바도르는 독립되어 멕시코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1823년 제국은 붕괴되고 중앙 아메리카 연방(United Provinces of Central America)이 탄생했으며, 손소나테와 산살바도르는 합쳐져 엘살바도르라는 새로운 주(州)를 형성했다가 1840년 최후로 연방에서 탈퇴했다. 국가 설립 당시부터 엘살바도르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지만 권력은 대개 부자들이 장악했고, 대통령이 그들의 후임자를 직접 선택했다.

 

1931년 군사정부가 수립되면서 다소 줄어든 정치적 폭력은 이후 군부독재가 계속되면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좌·우익 양측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1979년 극악무도했던 정권은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고, 임시정부는 개혁·질서·자유선거를 약속했다. 1982년 보통선거로 구성된 입법부를 중심으로 새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새 입법부에는 새 헌법의 초안작성·제정 등의 권한이 주어졌다. 1983년 새 헌법이 채택되었고 1984년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기독교민주당의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미국은 새 정부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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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03. 30.  살인사건 급증에..엘살바도르식 '갱단과의 전쟁'

▲27일(현지시간) 엘살바도르 한 교도소에서 감방 수색이 이뤄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모여있는 갱단 조직원 수감자들 [엘살바도르 대통령실 제공/로이터 연합뉴스

 

 

 

▲화산재 구름 - 13. 12. 29. 엘살바도르 차파르라스티케 화산이 폭발 화산재 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