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30/ 스페인 - 슬로바키아
■ 스페인 Spain
에스파냐, Espana, 스페인 왕국, Kingdom of Spain, Reino de Espana
▲국기
유럽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들 중의 하나로 이베리아 반도에 있으며 발레아레스 제도 및 카나리아 제도가 포함된다.
수도는 마드리드이다. 국민은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자치권을 가진 여러 지역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고유한 관습과 문화를 갖고 있다. 공동체 중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세 지역은 고유한 공식 언어를 갖고 있다. 스페인어로 히타노라 불리는 집시 인종 집단들도 국민의 소수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다. 그 외에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도 널리 사용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다. 화폐 단위는 유로(€)이다. 스페인의 커다란 중앙 고원은 에브로 강 유역과 카탈루냐 산악지역, 발렌시아 지중해 해안 지역, 과달키비르 강 유역, 그리고 피레네 산맥에서 대서양까지 뻗어 있는 산악 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스페인은 서비스 산업과 경·중공업 및 농업을 기반으로 한 시장 경제가 발달했다. 광물자원은 철광석, 수은, 석탄이 생산된다. 주요 농업은 여러 종류의 곡물 생산과 축산업이다. 스페인은 포도주와 올리브유의 세계적인 생산국이다. 관광업 또한 주요 산업인데, 특히 남부의 코스타 델 솔 지역이 유명하다. 스페인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입헌군주제로 국가 원수는 왕이고, 정부 수반은 수상이다.
약 35,000년 전 석기시대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유적이 스페인 전역에서 발견된다. 켈트계 사람들이 기원전 9세기 경에 이주해왔다. 기원전 200년경부터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약 5세기 초에 침입한 서고트족에게 지배권을 빼앗겼다. 8세기 초 북아프리카로부터 온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리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과 같은 기독교도 왕국들이 점차로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할 때까지 이슬람교도 통치가 이어졌다.
스페인은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1세의 결혼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1492년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다. 1516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왕위가 넘어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1700년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가 최초의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유발되었고, 유럽의 많은 영토를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혁명에 불이 붙었다. 1898년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해외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1931년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다. 스페인 내란(1936~39)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가주의자(내셔널리스트)들의 승리로 끝났다. 1975년 프랑코 사망 후 그의 계승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가 원수로 즉위함으로써 군주정이 부활했고, 1978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국을 세웠다.
198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 1986년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EC)에 가입했다. 1992년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첫번째 항해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비야 국제박람회와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를 개최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일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은 독립을 요구하면서 테러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는 호전적인 이슬람교도에 의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최악의 테러 행위였다.
2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했으나 빙하기 마지막 시기에 사라졌다.
그후 1만 5,000년전 호모사피엔스들이 반도에 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남겼다. 엘 아르가르 농경문화가 시작된 BC 2000년경부터는 야금기술이 발달하여 청동·은·금 등을 제련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BC 1000년경 해상무역문화를 꽃피웠던 타르테소스족들과 교류를 가졌다. BC 9∼8세기에 피레네 산맥을 통해 이주해온 중앙 유럽의 켈트계 부족들이 원주민들과 혼혈족인 켈트이베리아족을 형성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BC 218년 로마인들의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어 그후 2세기에 걸쳐 진행되다가 결국 로마인들이 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후 AD 5세기에 게르만계 부족들이 침략해왔으며, 그중 서고트족이 가장 강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반도 전역에 걸친 왕국을 세우고 7세기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8세기초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후 그리스도교 세력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재정복을 시도해 13세기말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통치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했다.
147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3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가 결혼함으로써 두 왕국은 하나가 되었고 1492년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마저 함락시켰다. 14세기말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들을 거느린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516년 네덜란드의 통치자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페르난도에 이어 왕위를 승계했다. 그후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5세라고도 불렸다.
1555∼56년에 카를로스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왕위를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스페인 왕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는 평을 받은 펠리페 2세는 종교광으로 로마 가톨릭교를 수호하고 프로테스탄트를 말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스페인은 희생이 큰 전쟁들을 치러야 했고 모험적인 군사행위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재정은 바닥이 났다. 펠리페 2세 이후 3명의 합스부르크가 왕들은 모두 성격이 유약하여 스페인이 급격히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700년 카를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고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公)이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 등극함으로써 합스부르크 시대는 막을 내렸다.
펠리페의 등극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이 유발되었고 전쟁 결과 스페인은 벨기에·룩셈부르크·밀라노·사르데냐·나폴리를 잃었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영국과 스페인 군대가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쳐 1814년 부르봉 왕가는 복위되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들의 혁명을 크게 부채질했으며,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을 끝으로 해외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1931년 공화제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으로 끝난 선거 결과에 승복하여 알폰세 8세가 퇴위한 후 스페인은 공화국이 되었다. 그후 1936년 공화파와 국가주의자(파시스트)들의 대립이 스페인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가주의자들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았으며, 공화파는 국내외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의 지원과 소련의 도움을 받았다.
내란은 결국 1939년 3월 마드리드를 장악한 국가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코 장군 정부의 초기 10년은 매우 참혹했다. 내전 결과 약 100만 명의 스페인인들이 죽거나 이민을 떠났으며, 스페인은 혹독한 정치탄압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코는 헌법을 대신해 일련의 기본법으로 40여 년간 스페인을 자의적으로 통치했으며, 국가원수·총리·군총사령관과 유일한 합법정당인 팔랑헤당의 당수직을 겸임함으로써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1945년 이후 서방 강대국들로부터 노골적으로 적대시당한 스페인은 UN에서 추방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프랑코는 교회와 결탁하고 UN으로부터의 추방을 민족단결이라는 미명하에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계기로 이용했다. 그러나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은 스페인에 대한 적대관계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으며, 1953년 스페인은 미국과 협정을 맺고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무렵 스페인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누렸다.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기적은 1973년까지 계속되어 스페인은 전통적인 농업국가에서 신흥공업국으로 변모했다.
특히 기간산업·자동차산업·조선업·장비제조업 등의 분야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외국자본이 투자되어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새로운 경제 기적으로 스페인은 어느 정도 활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만족감을 느끼는 중산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팔랑헤당 주도의 노동조합을 불신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기존의 체계와는 별도의 노동위원회를 자체적으로 설립해 법으로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파업투쟁을 벌였다.
한편 교회 내에서도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주교단의 친정권적인 성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1975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4월 바스크의 극단적인 조직들이 이끄는 테러 행위가 극에 달해 기푸스코아 주와 비스카야 주 등지는 비상국면을 맞이했다(테러리즘). 이에 8월에 반테러리즘 법이 제정되었고, 9월 27일 세계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5명의 테러리스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11월 20일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틀 후에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군주제가 부활되었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민주화에 크게 힘썼다. 1977년에 실시된 선거로 새로 구성된 의회는 정치·경제의 민주화에 착수하여 로마 가톨릭교의 공식적인 지위를 박탈했으며, 자유기업제도와 인권을 보장했다. 또한 여러지방에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바스크분리주의집단(ETA)의 테러 할동은 계속되었다(에테아). 1978년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82년 선거에서 사회 노동당이 승리해 펠리페 곤살레스 마르케스를 총리로 한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했다.
스페인은 한때 서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국가였지만 차츰 여타 유럽 국가들에 적절히 동화되었으며, 1986년에는 EEC의 일원이 되었다.
1989년 10월 사회노동당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1990년대 들어서도 중앙정부와 에우스카르디·카탈루냐 등 자치정부와의 사이에 긴장관계가 계속되었다. ETA가 정치적 지원세력을 상실하긴 했지만 옛 소련 지역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스페인 국내의 분리주의 움직임이 촉발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주요 무역 파트너인 유럽공동체(EC)와의 보다 긴밀한 정치적 연대와 대외적인 국가신임도의 제고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92년 스페인은 세비야 국제박람회를 비롯해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대회, 그리고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500주년 기념행사 등을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다음백과
◆스페인 이야기
◆ 세르반테스 유골 발굴로 들썩이는 스페인
라만차=김돈식 C.C. Ronda 부회장 조선일보
① 2015.02.17 돈키호테의 귀환
16세기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미셸 드 몽테뉴와 더불어 세계 근대문학의 대명사로 알려진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흔적 찾기가 스페인에서 한창이다. 묘하게도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 같은 날 운명했다.
스페인 정부는 400여년 전 사망한 세르반테스의 유골을 발견하려고 그동안 고고학자들과 지하탐사 전문가들을 적극 지원해왔다. 이들이 최첨단 장비를 동원해 조사한 끝에 드디어 세르반테스의 유골이 묻힌 장소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세르반테스의 사망 관련 기록을 근거로 작년 4월부터 마드리드의 트리니티(삼위일체) 수녀원을 뒤진 결과, 발굴팀은 지난 1월 26일 수녀원 지하에서 ‘MC’라고 적힌 나무관 일부를 발견했다고 한다.
‘MC’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첫 글자로 풀이됐다. 발굴팀은 트리니티 수녀원 지하 납골당 구석에 있던 관에 가느다랗고 긴 장대 같은 초정밀 적외선 탐지기를 관통시켜 유골을 발견하였다. 현재 탐사작업에 합류한 스페인 법의학자들이 최종 확인을 위해 세부 정밀조사에 착수한 상태지만 탐사팀은 세르반테스의 유골을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다.
관 뚜껑의 녹이 슨 철판 명패에는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MC라는 약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르반테스의 유골은 왜 마드리드의 수녀원 납골당에 안치돼 있었던 걸까.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 조선일보DB
1547년 9월 29일 마드리드 외곽 알칼레 데 헤나레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616년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할 때까지 세르반테스의 인생은 줄곧 험난한 파도 속의 난파선 같은 처지였다. 죽는 순간까지 그의 커다란 귓바퀴에는 소설과 희곡과 시를 쓰던 펜이 꽂혀 있었고, 궁색한 삶을 증명이나 해주듯 제대로 된 치과 치료를 받지 못해 치아가 여섯 개나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유일한 혈육인 딸 이사벨 주변에서 이런 상태로 어려운 말년을 보냈다.
외과의사 아들로 태어난 세르반테스가 청년이 되어 선택할 진로는 두 가지였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상으로 볼 때 군인으로 출세하는 길이 었었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직자로 사회적 지위를 쌓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세르반테스는 첫 번째 길을 택했다. 하지만 스페인 무적함대 입대와 함께 그의 인생은 꼬였고 역경이 찾아왔다.
그는 1571년 5월 교황 비오 5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사이에 결성된 신성기독교동맹연합함대에 전투원으로 참가했다. 연합함대는 지중해 연안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제국과 그리스 인근에서 해전을 벌였는데, 이 레판토해전에 세르반테스도 참전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세르반테스는 몸통에 두 발, 왼쪽 팔에 한 발의 총격을 받는 중상을 입는다.
이때의 총상 후유증으로 그는 평생 왼쪽 팔을 쓸 수 없는 반불구의 생을 살게 된다. 그의 사망 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확인이 제대로 될 수 없을 경우 고인의 유골 진위 여부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증표가 바로 유골에 남겨져 있을 그때의 총상 흔적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세르반테스의 험난한 삶은 정말 오묘한 운명의 장난일지 모른다. 치열했던 레판토해전이 신성기독교동맹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세르반테스는 부상당한 전쟁영웅의 들뜬 기분으로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항해길에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 동지중해에서 악명을 떨치던 해적들에게 붙잡힌 것이다.
당시 해적들은 멀쩡한 기독교인들을 인질로 잡아 노예로 사고파는 게 주업이었다. 세르반테스 역시 해적에게 붙잡혀 알제리까지 끌려왔고, 해적들은 스페인 정부와 세르반테스 가족들에게 몸값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세르반테스의 가족들은 근 5년여에 걸쳐 인질범들이 요구하는 돈을 변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게 된다.
② 세르반테스가 꿈꿨던 군인으로 출세했다면 '돈키호테'는 없었을 것
<①편에서 계속>
이때 해적들과 세르반테스 가족들, 그리고 스페인 정부 사이에서 결정적 중재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트리니티 종교인들이었다. 훗날 세르반테스가 눈을 감고 마드리드의 트리니티 수녀원 지하에 묻힌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알제리에서의 인질 신세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들과의 인연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거렁뱅이 신세로 돌아온 고향 마드리드는 그가 입대하기 전과는 딴판이었다. 세르반테스의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그를 인질범들의 손아귀에서 빼오기 위해 가족들이 주변에서 무리하게 변통한 엄청난 빚이 가문의 몰락을 재촉했다.
집안의 기둥이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던 외과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돼 귀머거리가 된 상태라 의사생활을 접은 지 오래였다. 가족들의 궁핍한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다니다 지쳐버린 그는 결국 입대하기 전에 써오던 소설과 희곡 작품에 매진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지만 만약 세르반테스가 알제리 해적들의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본인이 원하던 군인으로 출세했더라면 ‘돈키호테’와 같은걸작품이 탄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키호테'의 표지 / 조선일보 DB
‘돈키호테’의 배경이 됐던 스페인 중부 평원지대의 라만차는 필자가 직접 찾아가 본 곳이다. 돈키호테의 원제목은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 우리말로 번역하면 ‘라만차 마을의 재치 있는 시골양반 돈키호테’쯤 된다. 필자는 몇 년 전 이 라만차 마을을 찾아갔었다. 라만차 지방에는 톨레도, 시우다레알, 알바세테, 쿠엔카, 구와다라하라 등 다섯 개의 고도(古都)가 속해 있는데 필자가 방문한 도시는 톨레도의 아래역 격인 시우다레알이었다.
이 마을에 자동차로 진입하면 차창 밖으로 광활한 밀밭이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작은 구릉 하나 없이 비옥한 평원이 이어지는 목가적 풍경은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이방인에게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과 먼 지평선 한 곳에 풍차도 우뚝 서 있다. 무시무시한 풍차를 향해 창을 겨누고 진격하는 돈키호테와 그를 태운 비쩍 마른 말 로시난테, 그리고 엉뚱한 종자 산초 판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눈에 스치는 듯했다.
라만차 지방과 돈키호테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자의 스페인 친구 앙헬이 떠오른다. 20년 지기인 이 친구의 고향도 라만차이다. 이 친구는 20대 때 직장을 찾아 고향을 떠났지만 매해 초여름이면 일가친척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라만차 지방을 찾아간다. 앙헬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필자가 사는 도시로 귀환할 때는 어김없이 큼직한 만체고 치즈 덩어리를 선물로 가져오곤 했다.
라만차에서 생산되는 만체고 치즈는 스페인 문화의 상징이다. 처음 맛보는 외국인들에게는 역겨울 정도로 향이 강하지만 차츰 맛을 들이면 향만큼 중독성이 강해 치즈 맛에 매료된다. 필자는 만체고 치즈 향을 맡을 때마다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라는 시골양반과 로시난테와 산초 판자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라만차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필자는 만사 제치고 만체고 치즈를 몇 개 사들고 집에 돌아가리라는 마음을 먹을 만큼 이미 그 향에 매료된 상태였다.
라만차 지방은 여름에는 엄청 덥고 겨울에는 건조한 추위가 엄습해 오는 평야지방이다. 돈키호테 시대의 생활풍습대로 아직도 이 지방 농촌 사람들은 단열작용이 뛰어난 흙벽돌로 집을 짓는 것을 선호한다. 라만차 지방은 스페인에서 제일 많은 밀을 생산하는 대곡창 지대이며, 자연보호지역과 자연생태계지역으로 지정된 두 개의 국립공원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스페인은 지방색이 유별나다. 라만차 지방을 위시한 스페인 중부 평원 출신들은 보수적이며 대쪽같이 완고하다. 생김새부터 차돌같이 단단하다. 스페인 북부 사람들과 바스크 지방 친구들도 산악 같은 기세로 떨쳐 일어서는 강건한 성격이다. 억양 자체부터 힘이 있다. 반면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친구들은 따스한 봄날의 산들거리는 화사한 벚꽃마냥 외향적이고 열정적이다.
김돈식
◆ 2015-01-12 거대한 피레네산맥 기슭에 피어난 풍요로운 문화
프랑스 영토 내에 위치한 마지막 마을을 지나 피레네산맥을 따라 50km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스페인 영토에 들어서고 마침내 피레네 지역의 보석이라 불리는 아인사(Ainsa)마을에 도착한다.
프랑스 피레네 지역에서 스페인의 아인사마을로 가려면 해발 1,820m 높이에 위치한 비엘사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겨울이면 종종 눈 때문에 교통이 차단되는 이 비엘사 터널에서 3km만 더 달리면 스페인 국경에 도착한다. 피레네산맥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요새처럼 유럽 대륙과 이베리아반도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있는 듯하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피레네산맥을 보고 있노라면 이 거대한 산들이 옛날 옛적에는 바다 아래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힘들다. 고도 3,000m 이상 높이의 산은 언제나 눈으로 덮여 있는데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습한 바람이 이 높은 산맥에 가로막혀 이베리아반도를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건조하고 더운 지역으로 남겨 놓았다.

▲ 알케자르 마을의 이국적인 모습.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스페인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아라곤주’다. 남한 면적의 반에 해당되는 크기의 아라곤주에는 단지 12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볼거리가 다양하기로도 유명한 스페인에서도 가장 방문할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손꼽히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곳이기에 이곳을 방문하는 오늘 내 발걸음은 더욱더 빨라진다.
프랑스 태생인 나조차 ‘아라곤’이라고 하면 스페인 지도에서 어디를 찾아봐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라곤주는 피레네산맥 중앙에 위치한 지역으로 카탈루냐주와 카스티야주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아라곤주는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접촉이 덜했고 그런 이유로 아라곤주는 스페인의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지역만의 독창적인 모습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아라곤주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물론 피레네산맥으로의 산행을 빠트릴 수 없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전통 마을들과 웅장한 종교 건축물들, 여기 저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 등을 경험할 것을 계획해야 할 것이다. 아라곤주의 마을들은 놀랍도록 아직도 전통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산맥 곳곳에 자리잡은 협곡들과 폭포 때문에 이곳은 스페인 내에서 수상 스포츠의 천국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라고사시의 상징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필라 바실리카
이렇게 천혜의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아라곤주에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꽤 많으며 오븐에 구운 양고기나 수제 소시지가 유명해 식도락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와인 생산 지역이기도 한 이곳의 가장 유명한 소몬타노(Somontano) 와인을 소시지와 양고기에 곁들여 전통 스페인식 저녁식사를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711년, 아랍인들과 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된 무리들이 지금의 스페인 영토를 침입해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 그들은 그들이 정복한 이베리아의 이 영토를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고 명칭하고 그 후 800여 년간 이베리아반도에 머물렀다. 12세기부터 가톨릭을 신봉하는 왕들이 무어인들을 스페인의 영토에서 쫓아내기 시작했고 그 후 300여 년간 레콘퀴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이런 추방은 계속되었다.
가톨릭 왕들에게 영토를 다시 얻을 수 있었던 소수의 무슬림들은 계속 이베리아반도에 남아 그들의 종교 생활을 이어갔다. 무어인 혈통의 스페인 사람들을 무데하레스(Mudejares)라고 부르는데 ‘무데하’는 무어인들과 건축 양식과 고딕 양식, 또 로마네스크 양식이 결합된 건축 양식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라곤주에서는 12~16세기 사이에 지어진 이런 무데하 스타일의 건축물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무데하 건축 양식을 갖춘 성당.
우에스카의 목가적 풍경의 산들과 돌집들
아라곤주의 북쪽에 자리잡은 우에스카(Huesca)는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손꼽힌다. 그것은 이 지역이 피레네산맥에서도 가장 높은 산들과 다양한 식물들, 또 힘차게 흐르는 맑은 에브로강이 관통하며 더 없는 풍경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도 이곳처럼 다양한 풍경들이 교차하는 곳을 찾으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우에스카 지역에서도 반드시 방문해야 할 첫 번째로 꼽히는 곳이 바로 아인사마을이다. 5억 년 전 생성된 지형학적 유산은 이곳을 더욱 더 유명한 곳으로 만들었다. 지형학적 특징뿐만 아니라 중세시대에서 바로 시간을 멈춘 듯한 마을 모습은 이곳을 정말 방문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든다. 높은 언덕 위에 매달려 있는 듯이 위치한 마을에는 아주 오래 전에 세워진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는 자갈돌이 깔린 구불구불한 골목길들과 돌로 만들어진 전통 가옥들이 가득 자리잡고 있다.
아인사에 도착하면 신시가지를 먼저 접하게 되는데 별다른 특색 없는 이 모습에 실망하지 말고 바로 구시가지로 향하는 것이 좋다. 가파르게 경사진 길을 따라 차를 몰고 올라가면 아라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성벽 도시 아인사 구시가지가 나타난다. 이 구시가지의 마을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돌로 된 가옥들이 어떻게 오랫동안 손상되지 않고 완벽한 상태로 보존됐을까 경이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

▲알하페리아궁전 내부 모습.

▲인상적인 건축물인 알하페리아 궁전.
우에스카에서 96km에 위치해 있는 아인사마을의 중요한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 날 아인사마을의 랜드마크와 같은 성벽은 11세기에 무슬림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지었던 것이며 오래 전 아라곤의 소브라베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유네스코는 아라곤마을 전체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매력으로 가득 찼던 아라곤마을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7km가량 차를 몰고 내려가 보면 메디아노호수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1973년 씬카(Cinca)강 위에 만들어진 인공호수인 메디아노호수의 크기는 무려 1,714ha에 달한다. 아인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아비잔다(Abizanda)에 잠깐 내려 13세기에 건축된 인상적인 방어탑에 들러 본다.
계속 남쪽으로 길을 향하다 보면 아인사마을에서 60km 되는 거리에 알케자르(Alquezar)마을에 도착한다. 아라곤주에서 아인사와 더불어 꼭 방문해 봐야 할 관광명소로 꼽히는 이곳의 이름에서조차 그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알 카스르(al qasr)’는 아랍어로 ‘요새’를 뜻하는데 이 마을은 무슬림 지도자였던 이븐 라시드(Ibn Rasid)가 9세기 이곳에 요새를 건축하도록 명령한 데서 마을 이름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석회암의 바위들과 분홍빛의 주택들, 황토빛의 성당과 그 주변에 가득 심어진 아몬드 나무와 올리브 나무 등의 다양한 색채가 알케자르마을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낸다. 마을 자체가 유럽에서 캐녀닝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겨지는 구아라국립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고 중세적 마을과 이슬람 분위기의 성벽 덕분에 이곳 알케자르마을은 아라곤주에서도 스페인인들의 여름휴가 기간에 가장 붐비는 곳 중 한 곳으로 꼽힌다.

▲세오성당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태피스트리 작품.
볼 것으로 가득한 사라고사
자연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아라곤주의 주도인 사라고사로 향한다. 스페인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도시로 꼽히는 사라고사시는 풍요로운 역사와 중요한 예술작품들로 유명한 곳이다.이베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사라고사는 스페인의 그 어느 도시보다 역동적이며 활기차다. 비록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바르셀로나만큼 관광객이 넘쳐나진 않지만 이곳은 한 해에 수천 명씩 스페인 가톨릭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오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사라고사의 중심 광장에 위치한 17세기 건축물 누에스타라 세뇨라 델 필라(Nuestra Señora del Pilar)의 바실리카는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이 첫 번째로 들르는 곳이다.
인상적인 이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세오성당은 12세기에 건축된 성당으로 이미 세워져 있던 모스크를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성당 건축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바로크 양식 그리고 네오 클래식 양식이 아름답게 교집합된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다. 아라곤주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사 기념물로 꼽히는 이 세오성당의 곳곳을 방문하는 데는 그 섬세한 디테일들 때문에 무려 1시간 이상이 걸린다. 교회 2층에 자리잡은 태피스트리 박물관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저기 걸린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 : 다채로운 선염색사先染色絲로 그림을 짜넣은 직물) 한 점을 만드는 데 세 사람이 작업해서도 몇 개월씩이 걸린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사라고사시 성당 내부 전경.
개인적으로 내가 사라고사를 방문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알하페리아(Aljaferia)궁전을 보고 싶어서였다. 11세기 지어진 가장 큰 이슬람 건축양식의 절정을 보여 주는 이 궁전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존재하는 스페인의 무슬림 양식 건축물이라고 한다. 알 묵타디르(Al Mugtadir) 술탄의 궁전이었던 알하페리아궁전은 스페인의 무슬림 시대 전체를 보아도 그 중 가장 위대했던 걸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궁전의 건축양식은 후에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알하페리아궁전은 후에 페르디난드 왕과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고자 대서양 탐험에 나가기 위한 도움을 간청하기 위해 이사벨라 여왕을 찾아와서 허락을 받았던 곳도 바로 이 알하페리아 궁전 정원이라고 하니 이곳을 방문한 보람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대도시 사라고사를 뒤로하고 다시 우에스카 시로 향하면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는 중세 고성을 방문해 볼 수 있다. 11세기에 지어진 로아레(Loarre) 성의 잘 보존된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면 마치 중세시대 기사들의 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 헐리웃의 유명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 그의 인기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촬영한 곳도 바로 이 로아레 성이었다고 한다.
아라곤주의 문화 혹은 역사적 풍요로움과 거대한 피레네 산맥이 주는 웅장한 경이로움은 이곳으로의 여행을 마치 끝이 나길 바라지 않는 오딧세이처럼 만들어 줄 것이다.

▲(왼쪽부터) 아비잔다 방어탑. / 소브라베의 전형적 풍경. / 아인사 구시가지에서 내려다 본 씬카 강.
◇아라곤 여행정보
가는 법 한국에서 스페인 아라곤 지역으로의 직항이 없기 때문에 서울에서 파리까지 간 후 파리에서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까지 기차 혹은 국내선을 타고 내려온다. 툴루즈에서 차를 렌트해서 피레네산맥의 비엘사 터널을 통과하면 스페인의 아라곤주에 도착할 수 있다.
여행 적기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살인적 더위가 덜한 곳이기에 봄부터 가을까지 여행에 제한은 없다. 겨울은 고도가 높은 산악 지대에는 많은 눈이 내리기 때문에 여행이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국가 정보
수도 마드리드(Madrid)
인구 40,217,413명(2003년 7월 기준)
면적 501,788㎢(한반도의 약 2.3배).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로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인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북동쪽은 피레네산맥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접해 있고 북서쪽은 대서양에, 동쪽으로는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다. 남서부로는 포르투갈과 국경을 이루며, 아프리카 대륙과 접하고 있다.
주요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 그라나다(Granada), 세비야(Sevilla)
주요민족 라틴계(Latin)
주요언어 스페인어(Spanish)
기후 특색 있는 지형과 해류의 영향으로 다양한 기후를 나타낸다. 북서부의 대서양 연안은 온난한 해양성기후로 비가 많으며, 마드리드를 포함하는 중부 고원지대와 남서부는 대륙성의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또한 남동부의 지중해 연안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일년 내내 온난하다.
종교 가톨릭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으며, 3월에서 9월까지의 서머타임 기간에는 7시간 늦다. 한국이 정오이면 현지는 새벽 4시이다.
통화 유로 사용
전압 220V
비자 관광 목적이라면 90일 체류까지 무비자 입국 가능하다.

알랭 베르디에(Alain Verdier)씨는 프랑스의 브레타뉴와 노르망디 접경의 유명한 몽생미셸 사원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비고자 하는 꿈을 꾸었던 그는 영국과 스페인에서 역사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30여 년에 걸친 지구 방랑의 여정을 시작했다. 리핀과 네팔에서 대학교수, 투어가이드, 강연자, 투어매니저, 여행 컨설턴트, 작가, 사진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의 모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0여 년 동안 80개국을 여행한 그는 현재 세계 곳곳에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한국의 잡지와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15-02-11 스페인의 숨겨진 보석 칸타브리아 & 아스투리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안토니오 가우디’라고 할 것이다. 가우디의 작품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후, 가우디의 작품 세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에 시달렸고 그의 건축물들 중 비교적 덜 알려진 건축물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맘을 먹었다.
그래서 찾아낸 그의 건축물 중 하나가 엘 카프리초(El Capricho)였고, 그 훌륭한 건축물을 찾아 떠난 여행이 스페인의 칸타브라아(Cantabria)와 아스투리아(Asturia)라는 스페인의 숨겨진 보석 같은 두 지역을 찾아낸 이유가 되었다.
▲ 산탄데르 막달레나반도 궁전의 모습
멋진 휴양도시 산탄데르와 가우디의 걸작품
대서양의 녹색 해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코스타 베르데(Costa Verde)에 맞닿아 위치한 스페인 북서부의 칸타브리아 지역의 주도는 휴양 리조트 도시로 유명한 산탄데르(Santander)다. 끝없이 펼쳐진 해수욕장과 그 위로 구불구불 펼쳐진 푸르른 언덕의 경관 덕에 이곳은 여름 동안 수많은 스페인 휴양객들로 북적거린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대로와 그 길 양쪽으로 피어 있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이 도시를 더욱 화려하게 보이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서도 산탄데르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8월에 열리는 ‘국제 음악·무용 축제’ 또한 이 리조트 도시에 많은 인파를 불러들이고 있다.
이 도시에서도 막달레나반도(Magdalena Peninsula)는 반드시 방문해 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잘 가꾸어진 공원과 정원들뿐만 아니라 이 반도의 전망대에 오르면 대서양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의 한가운데에는 막달레나궁전이 세워져 있는데 13세기 스페인의 알폰소(Alfonso) 왕가를 위해 지어진 이 궁전 덕분에 이곳은 더욱 낭만적인 분위기를 갖추게 된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는 이슬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물을 찾아 볼 수 없다. 칸타브리아 지방은 8세기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했던 그 시절도 공격받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어인의 침략 당시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란 왔었다고 한다.
▲ 산티아나 델 마르의 전경이 이국적이다
하지만 산탄데르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코미야스(Comillas)마을에서 무어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1883년에 세워진 가우디의 건축물 ‘엘 카프리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엘 카프리초는 놀라움 그 자체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중세 양식이 교묘하게 잘 혼합되어 있는 이 건축물은 그 특이함 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쉽게 들어온다.
이 건축물의 양식은 전문용어로 ‘무데하르(Mudejar) 양식’이라고 불리는데 ‘무데하르’란 스페인인들이 무어인들을 몰아낸 후에도 안달루시아 지방에 남아 살았던 이슬람인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동시에 무어인들의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받은 건축양식이나 데코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몇 년 전 한 젊은 일본인 커플에게 매매된 ‘엘 카프리초’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으로 달려온 목적이 쉽게 달성되었기에 지금껏 가보지 못했던 스페인의 북서부 지역을 본격적으로 탐험해 보기로 한다.
산티아나 델 마르(Santillana del Mar)는 꼭 한 번 들러보길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중세시대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또 그 분위기 또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자갈돌들이 깔린 좁다란 골목길들과 꽃으로 장식된 발코니가 여기저기 세워진 전통 가옥들, 그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과 그 곳에 세워진 물방아 등 이곳은 정말 말 그대로 안데르센 동화 속 한 페이지의 그림 같다.
동화 같은 마을과 그 곳의 고문 박물관
이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고문 박물관’이라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중세 시대 고문의 역사와 고문 기구들을 진열해 놓고 있는데 비위가 약하거나 어린이를 동반한 경우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보는 내내 몸의 곳곳이 쑤시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박물관의 전시품들을 보고 나와 푸르른 하늘을 보니 이렇게 고통 없이 숨 쉬며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 (좌) 산티아나 델 마르에 위치한 고문 박물관. (우)안토니 가우디의 동상.
▲ 바르세나 마요르마을의 오래된 주택.
▲ 가우디의 걸작품 엘 카프리초.
▲ 우유 자판기의 모습이 재미있다.
문득 산을 보고 있노라니 바다보다는 산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바다를 뒤로하고 내륙으로 달려 산으로 향한다. 놀랍게도 이곳 도로에는 3월인데 아직 눈이 쌓여 있었다. 대서양의 푸르른 해안과 태양빛이 불과 한 시간 전 경험인데 지금 온통 눈으로 뒤덮인 계곡을 보고 있자니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하다.
파시에고(Pasiego)계곡 여기저기에는 오래전 돌로 만들어진 전통 가옥들이 그대로 드문드문 남아 있었고, 나무로 된 발코니와 큰 종을 매달아 놓은 젖소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평화스럽기만 하다.
유럽 도착의 상징 아이콘 '피코스 데 유로파'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이 계곡들을 넘고 나니 ‘피코스 데 유로파’가 자꾸 맘에 걸린다. 여기까지 와서 피코스 데 유로파를 들르지 않는다면 이는 파리에 가서 개선문이나 에펠탑을 보지 않고 오는 격일 것이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웅장한 피코스 데 유로파가 자리잡은 서쪽으로 향한다. 가는 길 중간에 우연히 예쁜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바르세나 마요르(Barcena Major)’란 이름의 이 마을은 칸타브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여겨진다. 그런 이유로 1979년 역사 유적지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마을의 가옥들은 산촌 마을 특유의 양식인 돌과 나무를 재료로 지어졌고 마을의 골목길 여기저기에는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 푸엔테 데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피코스 데 유로파.
▲ 포테스마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목가적인 절경.
만약 현지 음식에 도전해 보고 싶다면 이곳에서 메손 데 라 혼타나(Meson de la Jontana)에 들러 보길 바란다. 산에서 사냥으로 잡아온 사슴고기나 멧돼지 고기를 스튜로 끓여낸 이곳 음식은 산행 후 피로를 풀기에 제격이다. 바르세나 마요르에서 시작되는 트레킹 코스는 산행 초보자에게도 적합하다고 하니 도전해 볼 만할 것 같다.
대서양 해변으로 다시 출발해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웅장하다 못해 전율마저 이는 ‘피코스 데 유로파’의 전경이 멀리서 눈앞에 펼쳐진다. 미 대륙에서 출발한 항해자들이 유럽 대륙에 가까워 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이곳의 산 정상이었기에 마침내 유럽 대륙에 도착했음을 짐작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유럽의 봉우리’를 뜻하는 ‘피코스 데 유로파’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파시에고계곡에 눈이 내린 모습.
▲ 파시에고계곡에 위치한 전형적인 목동의 가옥
석회암으로 구성된 드높은 산들이 끝없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과 오른쪽으로 고속도로를 돌아가며 줄곧 보이는 대서양의 에메랄드빛 해양은 세계 어느 곳의 풍경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듯하다. 산행을 진정한 취미로 가진 사람들 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아름다운 진풍경에 비해 그 가치를 별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곳곳의 계곡들과 협곡, 훌륭한 트레킹 코스들, 다양한 동식물 등 이곳이 지닌 매력은 일일이 나열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대서양의 기류와 만나는 고지대이기에 비가 자주 내리며 겨울에는 눈 때문에 트레킹 코스가 차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계절을 잘 골라서 여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한적한 어촌 마을 산 비산테 데 라 바케라.
▲ 데바강이 흐르는 포테스마을의 모습이 평화롭다. 포테스에서 바라본 피코스 데 유로파의 모습
‘중앙 봉우리 트레킹 코스’로 불리는 곳이 산악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코스인데 트레킹의 종착지점까지는 2~3일 소요되며 헤르모소(Jermoso) 횡단 트레킹 코스는 가장 힘들지만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등반을 즐기고자 한다면 나란호 데 불네스(Naranjo de Bulnes) 정상까지 가는 등산로를 추천하고 싶다. 이 등산로의 최고 지점은 높이 2,648m의 토레 세레도(Torre Cerredo)인데 이 지점에서 대서양 해변까지의 거리가 불과 12km라니 이곳에 올라 해양을 바라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을 거 같다.
피코스 데 유로파에서 들를 수 있는 가장 큰 마을이자 매력적인 방문지는 포테스(Potes)마을일 것이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협곡의 산길을 따라 운전 후 도착한 매력적인 산마을 포테스는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로 유명하다. 포테스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격적인 트레킹이나 산행을 준비하거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일 것이다.
▲ 코밀리야에 위치한 소브리아노궁전이 이국적이다
거대한 자연의 건축물 찬미로 마무리
프렌테 데 (Fuente De)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는 우리를 무려 1,823m 높이의 정상으로 순식간에 올려 준다. 출발한 지 4분 만에 도착한 높은 봉우리 위에서 다가오는 추위가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 덕에 순식간에 잊혀지고 만다.
가우디의 건축물을 찾아 출발했던 이번 여행은 스페인의 피코스 데 유로파라는 거대한 자연의 건축물을 찬미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계획대로 출발하지만 계획하지 않았던 것들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게 여행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랭 베르디에(Alain Verdier)
◆ 2017.01.31 산티아고 순례길의 바스크족을 아시나요?
스페인에 두 번 근무했음에도 나에게 바스크족은 여지껏 신비로 남아 있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 일대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서남부에 거주하는 산악민족이다. 바스크 지역 대표 도시는 구겐하임 박물관으로 유명한 빌바오와 소몰이 축제로 유명한 팜플로나이다. 사람들이 근면해 다른 지역보다 소득 수준도 높다. 스페인에서 한국을 ‘Corea'라 부르는데 이 지방만 한국을 Korea라고 표기한다.
그들이 쓰는 바스크어는 스페인어와 완전히 달라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된다. 그들 문화 또한 라틴 문화와 완전히 다르다. 나는 그들의 창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 창 가락과 너무 흡사했다. 그들의 정서에 동양적 정서가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실제 바스크 민담에는 애니미즘 곧 정령신앙(精靈信仰)이 남아 있다. 이는 해, 달, 별, 강과 같은 자연계의 사물과 불, 바람, 벼락, 폭풍우, 계절 등과 같은 자연현상에 생명이 있다고 보고, 그것의 영혼은 인간처럼 의식, 욕구, 느낌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바스크어
이들 바스크 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이들은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등 게르만·라틴족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이들이 사용하는 바스크어는 어떤 어족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언어로 확실한 건 인도유럽어족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이들의 뿌리가 현 유럽인들과는 다른 민족이란 뜻이다.
이들은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인류들 보다 먼저 유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대의 유전학적 연구에 의하면 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면서 피레네 산맥 부근에서 다른 유럽인들, 곧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이들로부터 고립되어 살면서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고 기원전 5,000~3,000년부터 현재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바스크족은 오래전 유럽 지역으로 몰려온 알타이어족과의 혼혈족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몸집이 작지만 바스크 사람들은 골격이 훨씬 클뿐 아니라 그들이 지닌 생물학적 특성 중 하나가 Rh(-)혈액형이다. 바스크 사람들은 3분의 1이 Rh(-)이고 내재된 유전자형 Rh(-)까지 합치면 바스크족의 60~70%는 Rh(-)이다. 재미있는 건 유럽에서 바스크지역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Rh(-)의 비율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산악민족이자 해양민족
그들은 용감하고 민첩한 산악민족이자 바닷길 모험을 좋아한 해양민족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기질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며, 강인한 근성과 반골 기질이 강하다. 유럽 어느 왕조도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갈리아 지방을 침공했을 때도 바스크 민족만큼은 정복하지 못했다. 그들의 게릴라식 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특전사의 베레모가 바로 바스크 민족으로부터 유래했다.
바스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바다와 친숙했다. 고대로부터 바닷가에 제염소를 지어 천일염을 만들어 사용했다. 또 말린 대구와 소금에 절인 절임대구 등을 개발해 일찍부터 먼 거리 항해가 가능했다. 그들은 서양 최초로 고래잡이를 시작했다.
7세기부터 시작된 바스크 사람들의 포경산업은 날로 왕성해져갔다. 포경업이 성행하게 된 데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이 컸다. 가톨릭 교회는 매 금요일과 각종 성스러운 날에는 육식을 금했다. 그러나 이런 날에도 차가운 피를 가진 생선은 먹을 수는 있었다. 고래가 뜨거운 피 동물인지 생선과 같은 차가운 피 동물인지가 모호했는데, 교황은 고래가 차가운 피 동물이라고 판정을 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선 고래 고기 수요가 폭증했고, 바스크족은 고래잡이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들은 주 본거지인 비스케이만의 고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나 심지어 북아메리카 뉴펀들랜드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그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왕래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보니 바스크 사람들은 배를 잘 만들었다. 그들은 어선, 포경선, 상선 등 모든 종류의 선박을 건조해서 유럽 각국에 공급했다. 바스크 사람들이 조선과 항해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대항해 탐험을 할 때 이들은 바스크의 조선술과 항해술에 의존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號)도 바스크에서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콜럼버스의 선단에 탔던 항해사들 중에도 바스크 사람들이 많았다.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하다가 필리핀에서 원주민들에 의해 살해된 후 남아 있는 배를 이끌고 세비야에 돌아 온 엘까노도 바스크 사람이었다.
스페인 왕국의 뿌리
로마 멸망 후 바스크족은 자기들이 살던 땅에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바스크 공국이라고 했다가 824년 팜플로나 왕국이 되었고 나중에 나바라 왕국으로 이름을 바꾼다. 11세기 나바라 왕국의 산초 3세 왕은 주변의 아라곤과 카스티야 등을 상속 받거나 복속시키는 방법으로 안달루시아 지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북부를 통일했다.
그는 스페인 역사에서 훌륭한 왕으로 손꼽히는데, 재위기간 중 바르셀로나 백작령(카탈루냐 지방),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의 군주를 겸했다. 1034년 레온 왕국까지 점령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카톨릭 왕국들을 통치하는 대왕으로 군림했다.
아쉽게도 그가 죽고 나서 아들들에게 나라를 분할 상속했다. 그래서 다시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나바라의 큰형을 연합공격해서 나바라 영토 상당부분을 빼앗아버렸다. 이것으로 나바라라는 약소국으로 몰락하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쳐져서 탄생한 게 지금의 스페인이다. 곧 사실상 바스크족이 세운 나라에서 지금의 스페인이 탄생한 것이다. 덕분에 심각하게 위축되던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을 반격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게르니카
바스크족은 독립심이 강해 오래전부터 그들 지역 이름을 아예 'Pais Vasco'라 불렀다. '바스코國'란 뜻이다. 인구는 고작 200여 만 명밖에 안되지만 프랑코에게 분리 독립을 외치는 바스크는 눈에 가시였다. 프랑코는 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먼저 바스크어 사용을 금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바스크 언어로 말하면 즉시 체포되던 공포의 시절이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그 유명한 그림 ‘게르니카’가 바로 프랑코가 히틀러의 힘을 빌려 바스크 지방을 맹폭한 참상을 피카소가 그려 항의한 것이다. 바스크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독립을 원해 무장투쟁 단체인 ETA를 결성해 오랜 기간 무력투쟁을 벌였다.
체 게바라와 남미국가들의 국부인 시몬 볼리바르도 바스크계 이민자의 자손이다. 이외에도 혁명가들이 많다. 아르헨티나의 곤살로 이과인,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 무히카 대통령 역시 바스크 이민자의 자손이다.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바스크 출신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예수회는 그들의 상징으로 태양에서 빛이 나가는 원형을 채택해서 사용해 오고 있는데, 이는 원래 태양신을 숭배했던 바스크 민속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스크 사람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시기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많이 늦었지만 일단 가톨릭을 받아들이자 이들은 가장 경건한 신자가 되었다. 바스크 지역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나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서기 800년 이베리아 반도 서북쪽 갈리시아 지역의 은둔 수도자가 한밤에 하늘에서 내리 비추는 빛 줄기를 보고 따라갔더니 빛 줄기가 머무는 곳 잡초 속에서 로마식 작은 묘를 발견했다. 그는 이 영묘가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의 묘라고 생각했다. 이 묘는 별빛이 머문 곳, 곧 '깜푸스 스텔레'(Campus Stellae)라고 알려졌고, 나중에 콤포스텔라(Compostela)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산티아고의 정식 명칭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다.
참고로 야곱(Jacob)을 우리말로는 야고보, 영어로는 제임스(St. James), 불어권에서는 자크(Saint Jacques), 독어로는 야코프(Jakob), 스페인어권에서는 산티아고(Santiago)라 부른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 제임스로 이를 제이콥, 제이크, 제이, 짐, 코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이베리아 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왔다가 실패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 결국 헤롯에게 붙잡혀 참수를 당했다. 기독교인들이 그의 유해를 야고보가 선교 활동을 하던 갈라시아와 바스크 중간 지점에 가져다 묻었는데, 그 유해가 이렇게 발견됐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주교는 이 수도자의 발견을 인증하고 그 지점에 성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콤포스텔라에 큰 성당이 세워졌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의해 점령되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성스러운 해 곧 산티아고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해에 산티아고로 순례를 가면 지은 죄를 완전 사해주고, 다른 해의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 받는다고 대사를 선언했다. 그 뒤 기독교인들에게 콤포스텔라가 가장 유명한 순례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인 순례자가 많았는데,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저지른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순례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앞으로 다가올 7월 25일이 일요일인 성스러운 해는 2021년, 2027년, 2032년이다. 순례는 필연적으로 바스크 지역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계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출처;바스크 세계사, 마크 컬란스키, 1999, 펭귄 북스)
매운 고추도 잘먹는 이들은 오래전 알타이산맥 어디쯤에서 우리 조상들 옆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 아닌가?
글 | 홍익희 세종대 교수
◆볼거리
◇바위마을
▲현기증 나는 축구경기장
▲카나리아 제도 중에서 가장 큰 섬인 테네리페 섬의 스페인 최고봉 테이데 산 3,718m
▲그림 같은 피서 - 13. 7. 4. 과달레빈 강과 누에보 다리
▲동북부 코스타 브라바의 새파란 바다
▲라콘차 해변
▲바다 소금 언덕 2011.10..25. 마요르카섬
▲알함브라궁전 - 그라나다
▲초록색 풍경
▲포도밭 전경
▲해저 1.2.km 화산 폭발,2011.10.10.스페인 엘 에리로 섬 해안
◆일상
▲마드리드에 있는 한 사무실
▲불길뚫고 나오는 말탄 사나이= 루미나리에 의식
▲산 후안의 밤
▲공항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끝없는 택시의 행렬 - 13.2.18.
▲세비아의 한 분수 이날 낮 기온 섭씨 40도 13. 8. 20.
▲태양열 발전소 헤마솔라
▲ 병사들이 메나형제단 의식에서 예수상을 옮기고있다 - 2012. 4. 5.
▲산로케 그리스도상
▲페르민 축제 = 소와의 경주
▲해변 경마대회
▲마드리드 산타 마라톤 자선행사에 6천 여명이 참가 16.12.17
▲다르니무스에서 12. 7. 23 산불로 4명이 숨지고 13000헥타르가 불에탔으며 양떼들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소방 헬기의 진화 장면
▲폭우로 무너진 다리
▲막달레나 지역이 홍수로 물에 잠기다 13. 6. 9.
▲로차피아 지역의 홍수
▲산티아고에서 열차 탈선 사고로 56명 사망 70여명 부상 13. 7. 24.
▲물폭탄 16.12.20 발렌시아 지방
◆ 스페인의 도시
◇ 바르셀로나
▲하늘에서 본 바르셀로나
▲콜롬버스 동상이 축구 명문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다 13. 5. 22
▲스페인 동북부 카탈루냐주 주도인 바르셀로나에서 14.9.11 독립 시위에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가
◇ 세비야
2017.03.10 도시의 유혹 '스페인 세비야
▲투우 경기는 스페인 세비야 축제의 꽃이다. /이코노미조선
투우·플라멩코·오페라로 대변되는 에스파냐(스페인)의 도시는 어딜까. 맞다. 짐작대로 에스파냐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Sevilla)다. 북쪽에는 시에라모레나 산맥이 있고, 남쪽은 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하며, 서쪽은 포르투갈에 접하고 있다. 1년 내내 태양이 가득해 세비야 사람들은 남부지방 특유의 밝고 깨끗한 기질을 갖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안달루시아로 가는 스페인 국도 4번에는 양쪽으로 드넓은 올리브밭이 펼쳐져 있어 태양과 정열의 도시에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 지역 올리브 수확량은 세계 1위다. 세비야는 올리브와 더불어 포도, 셰리주(스페인 전통 와인), 담배, 섬유를 수출한다. 역사적으로 로마, 이슬람의 오랜 통치 기간을 거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통이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다.
투우·콜롬버스 등 오페라 소재 넘쳐
대표적인 유산은 세비야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1520년 건설됐다. 8세기 무렵 세워진 이슬람교의 예배당 ‘모스크’를 부수고 고딕양식의 웅장하면서도 기품 있는 이 성당을 세운 것이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을 지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첨탑만큼은 남겨뒀다. 바로 히랄다탑으로 이름에서 이슬람의 체취가 느껴진다. 대성당을 통해 탑 끝까지 올라가면 세비야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세비야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은 시기의 유산과 이슬람·기독교 지배세력의 대립·갈등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한편으론 그런 이유로 우아하고 화려하다. 25개나 되는 오페라의 배경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슬람 문명 때의 왕궁 알카사르, 담배공장, 투우, 콜럼버스 등 작품의 소재 거리가 차고 넘친다.
특히 16세기의 세비야는 문화·정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기 때문에 작가와 작곡가들이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도시 세비야에 관심이 많았다. 잘 알려진 ‘세비야의 이발사’를 비롯해 카르멘, 돈 조반니, 운명의 힘, 라 파보리타 등 25개나 되는 오페라가 세비야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이발사 피가로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피가로는 같은 인물이다. 이 두 오페라의 원작은 프랑스의 극작가 보마르셰(Pierre 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의 피가로 3부작이다. 그중 1부는 로시니가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로, 2부는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으로 만들었다. 내용상 전개로는 세비야의 이발사인 피가로가 먼저 알마비바 백작을 결혼시키고, 피가로의 결혼에서 자신이 수잔나와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로시니보다 먼저 태어난 모차르트는 피가로 3부작 중에서 2부를 골라 오페라로 무대에 올렸고(1786년 초연) 뒤이어 로시니가 1부를 무대에 올렸다(1816년 초연). 어쨌든 모차르트와 로시니 둘 다 각각의 오페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자리매김했고 이 두 오페라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오페라 부파(희극적인 오페라)로 꼽힌다.
▲오페라 '카르멘'의 1896년 미국 공연 포스터. /이코노미조선
세비야에 가면 오페라 속 등장인물 수잔나의 집도 볼 수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도 좋지만 단연 으뜸은 ‘카르멘’이다. 프랑스 작곡가 비제(Georges Bizet)가 작곡한 카르멘은 모든 오페라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재미있다. 내용이야 사랑과 유혹에 관한 뻔한 이야기이지만 그전까지의 오페라가 귀족과 왕, 신화를 소재로 했다면 카르멘은 귀족이 아닌 평민을, 그것도 가장 천대받는 밑바닥 출신 ‘집시’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집시와 그들이 추는 플라멩코, 사랑의 대상인 투우사, 이 오페라 하나만 봐도 에스파냐와 세비야의 깊숙한 내면까지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집시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인도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인더스 강 중류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이들은 페르시아·터키·그리스에서 악사, 대장장이 등을 하며 지냈고 14세기 중엽부터 파리·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에스파냐로의 긴 순례를 떠났고 마침내 안달루시아 지방에 도착하게 된다. 이들은 정착하는 대신 유랑을 하며 전 유럽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옷차림도 이상했다. 점을 치고 묘기를 부리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에스파냐에서는 이들에게 귀 자르기, 매질 등 엄청난 형벌을 가하고 모진 괄시를 퍼부었다. 오랜 방랑 세월과 탄압 속에서 견디면서 맺힌 한과 슬픔을 집시들은 노래와 춤으로 승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플라멩코다.
탄압당한 집시의 ‘한’ 승화시킨 플라멩코
플라멩코는 처음부터 지금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19세기 초까지도 집시들의 거주지인 동굴에서 노래에다 손뼉 치기, 손가락 튕기기 등을 하다가 19세기 중반부터 동굴을 벗어나 본격적인 무대로 나가게 된다. 기타 반주에 무용까지 곁들여지면서 요즘의 플라멩코는 칸테(노래)·토케(기타 연주)·바일레(춤)의 구성으로 완벽하게 균형 잡혔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속 음악이 집시의 깊은 슬픔과 합쳐지면서 관능과 심오함이 버무려진 스페인의 대표적인 예술이 됐다.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무겁고 깊이가 있다.
그럼 왜 이 떠돌이 집시들이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해 이런 예술을 발전시켰을까.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안달루시아인은 순간적이고 영구적이고 비이성적이어도 모든 창조적 충동을 포용하고 그 결과로 생기는 기묘한 조화를 즐긴다고. 그래서 기질적으로 집시들에게 공감했고, 그들의 자유로운 삶에서 안달루시아인 본연의 모습을 느껴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이다.
투우도 이런 면에선 같은 맥락이다.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생각하면 한이 없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서는 투우를 금지했다. 하지만 아직도 에스파냐에선 투우를 그들의 얼이자 삶의 본질을 다루는 정신으로 보고 있다. 인간 중 가장 남성성이 두드러진 투우사와 수소의 한판 승부. 투우사는 2마리의 수소를 상대하며 원칙적으로 땅에서 발을 떼지 않으며 소를 공격한다. 투우사가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이 한판 승부는 인간 삶의 고난과 역경을 상징한다. 수소의 숨골에 정확하게 창을 내리꽂아 승리하게 되는 순간, 이 순간을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서 싸워나간다. 이 의식은 바로 투우의 본고장 세비야의 또 다른 정체성을 보여준다.
조선일보 박현주 오현주
▲시내
▲콜럼버스 탑
◇ 카나리아 제도
대서양에 있는 군도로, 북서아프리카 본토에서 108㎞ 이상 떨어져 있다. 카스티야어를 사용한다. 1982년 제정된 자치법령에 따라 설립되었다. 원주민은 베르베르 부족이었는데, 15세기에 스페인에 정복당했다.
이 제도는 행정구역상 하나의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1927년 2개로 분리되었다. 주요섬 7개에 각각의 자치의회가 있다. 북회귀선에서 북쪽으로 4° 떨어져 있으며 아열대성 기후를 보인다.
전체적인 이주민의 수는 매우 적다. 주민의 약 1/3만 경제활동을 하는데 주요작물인 바나나는 스페인 시장에서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보호조치를 받고 있으며 11~4월에 재배된 토마토는 수출된다. 관광업의 발전이 가장 눈에 띄는데,관광업 중심지는 테네리페와 라팔마이다.
▲카나리아 제도.아프리카 서사하라 서쪽에위치. 스페인령
◇ 카탈루냐주
▲스페인 카탈루냐주 바르셀로나에서 9.11 수만명의 시민이 대규모 분리독립 시위
▲카탈루냐 독립 요구 시위 2017.10.4
▲카탈루냐 독립반대 시위 - 2017.10..7 바르셀로나
◇ 달리
▲Salvador Felipe Jacinto Daliy Domenech = 살바도르 달리 초현실주의 화가의 집 옥상
▲1974 달리가 직접 세운 극장식 미술관
▲피게레스 달리가 태어난 곳 꿈속의 미술관
▲달리의 방
▲미술관에 있는 매 웨스트의 방
▲매 웨스트의 방의 입술 의자
■ 슬로바키아 Slovakia
Slovensko 슬로바키아 공화국

기원후 초기의 수세기 동안 이곳에는 일리리아족과 켈트족이 살았으며 그후에는 게르만족들이 살았다. 6∼7세기에 슬라브족의 슬로바키아인들이 정착하여 살았으며, 아바르족들의 지배를 받다가 9세기에 보헤미아 지역 전체와 현재의 폴란드 남부 지역, 그리고 현재의 헝가리 서부 지역을 포함했던 대(大)모라비아에 합병되었다. 10세기초 모라비아가 붕괴된 후 헝가리 왕의 영토가 되었다(11세기).
15세기에 체크의 후시테스가 이 지역을 침략하여 황폐화시켰다. 종교개혁 기간중(16세기) 이곳에 있던 게르만족·슬로바키아인·마자르족 사이에 루터주의와 칼뱅주의가 널리 보급되었으나, 1526년 헝가리 왕위를 계승한 후 1918년까지 이곳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은 로마 가톨릭교를 다시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18세기 후반에 슬로바키아의 민족 부흥이 시작되었으며, 1848∼49년의 헝가리 혁명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앙집권체제가 비(非)마자르족을 지지하자 슬로바키아 민족주의는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타협(Ausgleich) 이후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은 헝가리는 마자르족화(化) 정책을 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슬로바키아인들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이주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슬로바키아인들은 헝가리와의 인연을 끊고 체크 지방(보헤미아·모라비아와 슐레지엔 일부 지역)의 체크인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겠다고 위협하자, 1938년 10월 6일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국가 안에서 자치권을 선포했다.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한 후 슬로바키아는 독일의 보호를 받으면서 1939년 3월 14일 명목상으로는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에 대한 슬로바키아인들의 적개심이 커져 1944년 8월 끝내 독일에 반대하는 격렬한 봉기를 일으켰다. 1945년초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점령을 받게 되자 체크인과 슬로바키아인들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전제로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948년 2월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 체크인들이 주도권을 쥔 엄격한 중앙집권체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0년 7월에 선포된 헌법에 따라 명목상으로는 체크와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1969년 1월 1일 이후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고 연방의회에 체크 사회주의 공화국과 같은 수의 대의원을 보낼 수 있었다. 1960년 7월 슬로바키아는 서부 슬로바키아, 중부 슬로바키아, 동부 슬로바키아 등 3개 행정지역으로 분리되었다. 1989∼90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잃게 되자 '사회주의'라는 말이 슬로바키아의 공식 이름에서 빠지게 되었다.
1991년 슬로바키아·체크 지도자들 간 회담 이후 두 공화국은 분리되었으며, 1993년 1월 1일 각각 독립국이 되었다. 그해 2월 공산당 출신의 미할 코바치가 독립한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다음백과
◆풍경

▲ 브라티슬라바 도나우강의 아름다운 야경

▲거대한 초록색 풀밭 위의 깨알 같은 양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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