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26/ 벨기에 - 벨라루스 - 벨리즈 - 보츠와나 - 볼리비아 - 부탄
■ 벨기에 Belgie
벨기에왕국, Kingdom of Belgium, 벨지움, Belgium
유럽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도는 브뤼셀이다. 남북길이는 약 193km, 동서최대너비는 약 240km이다. 북쪽과 북동쪽은 네덜란드, 동쪽은 독일·룩셈부르크, 남쪽과 남서쪽은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은 66km 길이로 북해와 접한다.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작은 국가이고 인구밀도는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1830년 독립 이래로 의회 형태의 정부를 갖춘 세습에 의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있다. 벨기에는 처음에는 중앙집권정부 형태였다. 하지만 1980, 1990년대 플랑드르, 왈론니아, 브뤼셀 수도권 지역들로 권력을 분산하는 연방국가 형태로 변모했다.
문화적인 면에서 벨기에는 서부 유럽의 로망스어와 게르만어족 사이에 있는 복합적 문화를 가진 국가이다. 나라는 동부 지역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국민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과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플라망어를 쓰는 사람들로 나뉜다. 왈론인이라 불리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1/3을 차지하고, 남부의 5개 주인 에노·나무르·리에주·왈론브라반트·뤽상부르에 주로 거주한다.
플라망인(플랑드르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고, 북부와 북동쪽에 있는 5개 주인 서플랑드르·플랑드르·동플랑드르·플랑드르브라반트·안트웨르펜·림뷔르흐에 주로 거주한다. 왈론브라반트와 플랑드르브라반트 사이의 경계 바로 북쪽에 해당되는 브뤼셀 수도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두 언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대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1/10 정도를 차지한다.
벨기에와 후에 벨기에로 통합되는 정치적 독립체들은 풍부한 역사적·문화적 관련성들을 지녀왔다. 중세 대학의 고딕적 웅장함과 상업도시 및 그 도시의 작은 마을은 강을 끼고 깎아지른 절벽 위의 성채가 지배한다. 이들은 16세기에 북부 르네상스의 정점 중 하나를 차지했던 회화와 음악에 있어서 폭 넓은 전통들을 통해 20세기 예술에 기여했으며, 지난 시대의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벨기에는 수세기 동안 유럽의 주요한 전쟁터였고,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워털루 전투(1815)와 20세기에 발생한 2차례 세계대전을 겪었다. 면적과 인구를 고려하면, 벨기에는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벨기에는 네덜란드 및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넬룩스 경제동맹을 결성했으며,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다. 이러한 국제기구들은 모두 수도 브뤼셀이나 그 근교에 본부를 두고 있다.
▲국기
■ 지역갈등 끝판왕 벨기에…독일서 수입한 왕실이 해결사?
“벨기에는 고유한 가치가 없는, 역사의 사고로 생긴 나라다”
국가에 대한 모독이 될 법한 이 발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벨기에의 이브 메테름 전 총리입니다.
총리 취임 전, 북부 플랑드르계 정당인 기독민주당 당수로 재임하던 2006년의 발언입니다.
당시 그는 “네델란드어를 배울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며 남부 왈롱 지역민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죠.
▲2013년 7월 21일 필리프 벨기에 국왕이 즉위했다. 브뤼셀에 엤는 왕궁 발코니에서 국민에게 인사하는 벨기에 로열패밀리. 오른쪽은 이날 아들에게 양위한 알베르 2세 부부, 가운데는 필리프 국왕과 마틸디 왕비. 앞줄의 어린이들은 국왕 부부의 네 자녀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7월 21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 생 미셸 성당으로 향하는 필리프 국왕 가족. 7월 21일은 초대 국왕인 레오폴드 1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벨기에의 국경일이다. 왼쪽부터 엘레오노레 공주, 가브리엘 왕자, 마틸다 왕비, 필리프 국왕, 엘리자베스 공주, 에마뉘엘 왕자. [ EPA=연합뉴스]
“벨기에를 통합하는 건 맥주·축구·국왕”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나라를 깎아내리고, 타지역민을 대놓고 비하할 만큼 벨기에의 국가 정체성과 소속감은 흐릿합니다. 내가 속한 지역이 훨씬 중요한 거죠.
지역색이 뚜렷하고, 그로 인한 지역 갈등도 첨예합니다. 벨기에라는 나라가 아주 느슨하게 결합된 공동체라는 뜻이고요.
벨기에 인구(약 1130만 명)의 59%를 차지하는 플랑드르와 40%를 차지하는 왈롱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릅니다. 각각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죠. 당연히 문화도 다릅니다.
경제력 차이도 큽니다. 잘 사는 플랑드르는 “가난한 왈롱이 우리의 세금을 쓴다”며 늘 불만이고, 아예 분리독립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16년엔 민족주의 정당 새플랑드르연대(N-VA) 소속인 플랑드르 자치정부의 한 장관이 “10년 뒤엔 벨기에라는 나라가 없어지길 바라며,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혔을 정도니, 우리의 영호남 갈등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입니다.
이처럼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게 있습니다. 메테름 전 총리도 언급했던, 맥주와 국가대표 축구팀 그리고 국왕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왕실은 어느 지역 출신이기에 벨기에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걸까요.
신생 독립국 벨기에, 국왕을 찾아라
▲벨기에 왕실의 문장. [위키피디아]
벨기에는 1830년 네델란드에서 독립했습니다. 국가를 세우면서 입헌군주제를 선택했죠. 그리고는 왕이 될만한 인물을 물색합니다.
나폴레옹의 양아들인 외젠 드 보아네르,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립의 아들인 느무르 공작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성사되지 못합니다.
당시는 나폴레옹의 패배 뒤 대(對) 프랑스 전쟁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영국 등 열강이 주도한 빈 체제가 수립됐을 때입니다. 프랑스의 팽창주의가 종식되고 마침내 힘의 균형을 되찾았는데, 프랑스 출신이 벨기에를 접수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등장한 후보가 독일의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드였습니다. 앞서 독립한 그리스로부터도 왕의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불안정한 나라는 싫다”며 고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제안은 받아들였고 1831년 7월 21일 레오폴드 1세로 즉위합니다. 이날은 벨기에의 국경일이 됐죠.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독일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인 그는 신생독립국 벨기에의 제안을 받고 왕에 즉위했다. [위키피디아]
사실 레오폴드 1세는 작은 신생국가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벨기에 국왕 자리를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뒤이어 즉위한 레오폴드 2세가 콩코를 삼킨 것도 ‘작은 나라’ 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이 있고요.
어쨌든 레오폴드 1세는 뛰어난 외교술로 벨기에의 독립을 지켰고, 아들인 레오폴드 2세에게 왕위를 무사히 넘겨 입헌군주제를 공고히 합니다.
독일에서 수입한 왕가…姓도 ‘벨기에’로 바꿔
▲벨기에의 4번째 왕인 레오폴드 3세와 스웨덴 아스트리드 공주의 결혼사진. [위키피디아
▲1969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왼쪽)를 만난 벨기에 5번째 왕인 보두앵 국왕과 파비올라 왕비.[위키피디아]
일종의 ‘독일 이민자’ 출신인 벨기에 로열패밀리는 수십년 간 ‘작센-코브르크-고타(Saxe-Coburg-Gotha)’라는 성(姓)을 사용하면서 뿌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1920년 성을 ‘van Belgie’, ‘de Belgique’, ‘von Belgien’로 바꾸는데요, 각각 네델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로 ‘벨기에의(of Belgium)’를 뜻하는 말입니다. 벨기에의 공식 언어가 셋이라 성도 각각의 언어로 따로 둔 것이죠.
의도하지 않았지만, 독일계 가문을 왕가로 섭외한 것은 플랑드르와 왈롱 양쪽 모두에 공평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나마 “왕이 벨기에를 통합해 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플랑드르에선 왈롱보다 왕실에 대한 호감도가 현저히 낮을 뿐 아니라, 왕실 따위 필요 없다는 여론도 높습니다. 분리독립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현재의 필리프 국왕이 즉위할 때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웃사이더’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물론 국왕은 이중언어 교육을 받았고, 네델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합니다. 다만 프랑스어를 더 편하게 사용할 뿐인데, 플랑드르 사람들은 그게 싫은 거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왕궁. [위키피디아
국왕의 불륜 폭로, 배후엔 분리독립파?
이처럼 플랑드르 사람들이 왕실을 싫어하다 보니 1999년 알베르 2세의 불륜 스캔들이 벨기에를 휩쓸었을 때, 그 배후에 플랑드르 정치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발단은 당시 18세인 학생이 출간한 알베르 2세의 부인, 파올라 왕비의 자서전입니다. 물론 왕실이 공인한 자서전은 아닙니다.
책엔 알베르 2세가 1966년부터 18년간 시빌이라는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지속했고, 그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내용이 실렸죠. 존경받던 왕실에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마침 책이 출간된 시기도 문제였습니다. 노총각이었던 당시 필리프 왕세자가 약혼을 앞둔 시점이었죠.
책의 내용은 사실무근이 아니었는지 왕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해 크리스마스 대국민 담화에서 알베르 2세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도 하죠.
“약 30년 전 우리 부부도 위기를 겪었고, 오랜 시간 어려움을 극복한 뒤 깊은 이해와 사랑을 되찾았다”
벨기에 언론은 이 담화를 알베르 2세의 우회적인 불륜 인정으로 봤습니다
▲알베르 2세의 혼외 딸이라고 주장하는 델피네 뵐(왼쪽). 딸과 함께 자신의 책에 사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와는 별개로 의문도 제기됐죠. ‘왕실의 경사를 앞두고 10대 학생이 국왕의 불륜이 담긴 책을 썼다?’ “책의 진짜 저자는 독립에 방해되는 왕실을 뒤흔들려는 플랑드르의 극우 인사”라는 주장이 나올만 했던 겁니다.
친자확인 소송 직후 퇴위한 알베르 2세
시간이 흘러 잠잠해졌던 알베르 2세의 ‘과거사’는 2013년 6월 막장 드라마 급으로 재등장합니다.
책에 등장했던 혼외자, 델피네 뵐이 알베르 2세와의 친자관계를 증명하겠다며 DNA 검사와 왕실가족의 증언을 법원에 요청한 겁니다.
뵐은 “재산을 노리는 것 아니다. 딸로 인정받고 싶다”는 입장이었고, 벨기에 왕실은 “사생활이라 노코멘트”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알베르 2세와 파올라 왕비. [EPA=연합뉴스]
그리고 7월 알베르 2세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발표합니다.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물러난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스캔들로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죠.
당시 뵐이 제기한 소송은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국왕 신분이었던 알베르 2세의 면책 특권 때문에 DNA 검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왕이 바뀌고 알베르 2세가 더는 면책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되자 뵐은 소송을 다시 제기했는데요, 2017년 벨기에 법원은 DNA 검사 없이 “알베르 2세는 뵐의 법적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판결합니다. “생물학적 유대만이 부녀 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가족 구성원 사이의 통합 같은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뵐은 승복하지 않고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지난해 7월 31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페젠대일 전투 100주년 행사가 열린 벨기에 조네베커에 모인 영국과 벨기에의 로열 패밀리. 왼쪽부터 영국의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 필리프 벨기에 국왕, 찰스 영국 왕세자, 마틸다 벨기에 여왕, 윌리엄 영국 왕자,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EPA=연합뉴스]
다음 편에선 벨기에 왕실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레오폴드 2세(1835~1909)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콩고를 사유지로 만들어 자신의 놀이터이자, 상아와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보물상자로 여겼던 그는 벨기에의 ‘흑역사’입니다. 광대한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프랑스조차 혀를 내두를만큼의 극악무도한 식민 지배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일상
▲벨기에 겐트
▲숲속의 융단
▲슈렌스미르호수(피스톤모양으로 벨가에정부가 1970.고속도로로 인해 형성)
▲동상의 오줌이 말랐다=벨기에 수도 브뤼셀 의 오줌싸게 청동상인 마네캥 피스가 한파로 오줌을 중단 시켰다고
▲완장 찬 오줌쌰개 동상=벨기에 브뤼셀 동상에 시에르 터널 교통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검정색 완장이 묶여있다
▲말과 함께 전통 방식으로 새우를 잡는 벨기에 어부들
▲관광마차
■ 벨라루스 Belarus
벨라루스 공화국, Republic of Belarus
6∼8세기에 슬라브족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여러 작은 공국을 이루다가 9세기 중반에는 크이우의 속국이 되었다. 1240년 몽골족들이 크이우를 전복시켰고 실질적인 자치권은 벨라루스인에게 있었지만 영토는 대부분이 리투아니아로 넘어갔다. 1386년 야기에우오 왕조의 통치하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합쳐지면서 벨라루스에는 폴란드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하는 지주계층이 성립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동방정교회를 믿었으며 16세기 들어 농노화되었다.
18세기 후반 폴란드가 3지역으로 분할될 때 벨라루스 전체를 러시아가 차지했다(벨라루스는 러시아어로 '백러시아'라는 뜻). 이 지역은 19세기초에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경제성장 속도가 느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1918∼21년 벨라루스는 독일, 볼세비키 정부가 들어선 러시아, 그리고 재수립된 폴란드와 전쟁을 치렀고, 그 결과 서부지역이 볼세비키에 의해 폴란드로 양도되었다.
1919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되었고 1922년에는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1930, 1940년대 소비에트 정부하에서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었다. 전쟁 말엽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1921년부터 폴란드가 차지하고 있던 벨라루스 서부지역을 되찾았다. 전후 복구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으며, 더욱 급속도로 산업화를 진행해 민스크는 소련 극서부의 산업화 중심도시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은 1990년 7월 독립국임을 선언했고, 1991년 8월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자 벨라루스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고, 국가명도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벨라루스로 바꾸었다. 1997년 5월 러시아와 합병조약을 체결해 '러시아-벨라루스 연방'이 되었다.
▲국기 - 다음백과
◆일상
▲벨라루스. 만종 = 민스크
▲동굴탐험 경연대회 - 민스크
▲트리머리 행사 여인-부활절을 앞두고 악귀를 쫒고 단식기간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
▲이반 쿠팔라 축제 - 민스크의 소녀들이 불을 뛰어넘고있다
▲민스크의 콜라다야 축제 - 13.1.21. 몇 세기에 걸쳐 토속 신앙과 정교회 크리스마스 의삭을 합쳐 만들어진 겨울 축제
▲독림기념일 행사 - 13. 7.3. 민스크 1944년 나치로부터 해방
▲14.7.3 민스크 독림기념일 행사
▲얼어붙은 벨라루스의 혹한
▲하얀 공원 13,1.14.
▲홍수로 침수된 집 - 13. 4. 16
▲홍수에 놀란 견공 4. 15.
▲홍수 13. 4. 22
■ 벨리즈 Belize , (스)Belice
▲국기
벨리즈에는 BC 300경∼AD 900년 마야 문명이 번영했다. 카라콜과 수난투니치의 유적을 비롯해서 마야의 의식이 행해지던 터가 아직 남아 있다.
마야인들의 사회가 최대로 팽창했던 6세기 이후 얼마 동안은 인구가 2만 5,000명가량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명목상 주권을 쥐고 있기는 했으나 벨리즈를 식민지화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이곳에 정착한 영국인들을 불법침입자로 여겼다. 17세기 중반 대부분이 해적단과 모험가였던 영국 선원들이 세인트조지스케이에 정착해 염료원료인 로그 우드(logwood)를 베어갔다. 이 로그우드는 한동안 벨리즈 제1의 수출품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마호가니가 주종을 이루었다.
영국의 식민이 여러 조약에서 인정받았고, 스페인은 무력으로 영국 점령지를 차지하려 했으나 1798년 싸움서 패배해 물러났다. 영국인 개척자들은 해안의 목재가 고갈되자 내륙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인디언들의 저항으로 19세기에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노예들은 벌목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카리브 해의 설탕농장 노예들에 비해 좋은 조건에 있었는데 1838년에 해방되었다.
1862년 당시 벨리즈는 영국의 직할식민지로서 영국령 온두라스라고 불렸다. 1859년 영국과 과테말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규정이 이행되지 않자 과테말라는 영국령 온두라스를 요구했고, 1981년 영국이 벨리즈의 독립을 승인했을 때에도 여전히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벨리즈는 영연방에 가입했으나, 미주기구(OAS)에는 들지 못했다.
다음백과
◆풍경
▲ 푸른 카리브 해의 풍경
▲그레이트 블루홀 - 신이 만든 함정으로 불리는 이 곳은 깊이 142m 지름 310m로 세계의 다이버들이 즐겨찿는다.
■ 보츠와나 Botswana
남부 아프리카의 내륙국. 옛 이름은 베추아날란드(Bechuanaland)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칼라하리 사막으로 되어 있으며, 남북 최장길이는 약 965km, 동서 최장길이는 약 965km이다. 남쪽과 남동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쪽과 북서쪽은 나미비아, 북동쪽과 동쪽은 짐바브웨와 접해 있다. 수도는 가보로네이며 화폐는 보츠와나 풀라이다.
▲국기
역사
보츠와나 일대에 제일 먼저 정착한 것은 산족이다. 그후 1600년경에 소토족이 현재의 보츠와나에 이주해왔다. 1801년 초창기 유럽 원정대가 이 지역을 답사했고, 1813년 런던 선교회가 쿠루만 강변에 선교본부를 세웠다.
1821년에 로버트 모펫이 선교 책임자가 되었다. 바로 그무렵, 줄루족 군대에 쫓긴 수천의 피난민이 보츠와나에 들어와 약탈을 자행했으며, 음질리카지가 이끄는 은데벨레족이 줄루족에서 이탈, 서부 트란스발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여러 해에 걸쳐 보츠와나를 공격했으며 1837년 보어인들에게 패한 후에도 계속 보츠와나를 괴롭혔다. 보어인들은 1835년 케이프 식민지로부터의 대이동시 보츠와나 국경지대까지 밀려들어오기도 했다.
1867년에는 타티 강 유역에서 금이 발견되어, 1884년 이 지역 일대가 영국의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몰로포 강 남부지역이 영국직할 식민지가 되었고 10년 후에는 케이프 식민지에 합병되었다(→ 대영제국). 베추아날란드는 1960년대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았다. 1961년에는 기존의 식민지 판무관제도 대신 행정 및 입법 위원회 제도가 도입되었다. 1965년에는 헌법에 따라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베추아날란드(보츠와나) 민주당이 총 31개 의석 중 28개 의석을 차지했다.
1966년 9월 30일 보츠와나 공화국은 영연방 내의 독립국으로 선포되었고, 이어 국제연합(UN)의 회원국이 되었다. 보츠와나는 1970년대 경제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의존하고 정치적으로는 주변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과의 선린을 다지기 위해 줄곧 노력했으며, 1970년대말에는 보츠와나와 잠비아를 잇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또한 같은 기간중 보츠와나는 로디지아 난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으며,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하기 직전 짐바브웨 인민혁명군 게릴라들의 거점 구실을 하기도 했다.
◆풍경
▲바오밥 나무가 있는 저녁 풍경
■볼리비아 Bolivia
볼리비아 다민족국 공화국, 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

▲국기
행정수도는 라파스이며, 헌법 또는 사법상의 수도는 대법원 소재지이며 유서 깊은 수크레이다.
볼리비아는 열대지방에 위치하며 남북 길이가 약 1.500㎞, 동서 길이는 약 1,300㎞이다. 북쪽과 동쪽으로 브라질, 남동쪽으로 파라과이, 남쪽으로 아르헨티나, 남서쪽과 서쪽으로 칠레, 북서쪽으로 페루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대 호수 마라카이보 호(湖)를 잇는 2번째 큰 호수 티티카카 호가 볼리비아와 페루에 속해 있다. 볼리비아는 태평양 전쟁(1879~84)에서 칠레에게 태평양 해안 영토를 빼앗긴 후 내륙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인접 국가들과의 협정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에의 우회 접근은 가능하게 되었다.
볼리비아는 전통적으로 고지대 국가로 여겨졌다. 국토의 1/3 정도가 안데스 산맥에 자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대도시들이 그 지역에 발달되었다. 수백 년 동안 고지대 도시들은 광업·상업·사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지만 20세기 후반에 산타크루스를 비롯한 동부의 저지대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인구와 경제면에서의 변화가 일었다.
볼리비아는 화려한 역사를 가졌다. 한때는 고대 티아우아나코 제국의 중심지였고,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는 잉카 제국의 일부였다. 신대륙 정복자들의 상륙 이후, 볼리비아는 남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포괄하는 페루 부왕령에 편입되었다. 이 식민통치로 많은 양의 은을 스페인에 제공했으며 스페인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기여했다.
역사
볼리비아의 초기 역사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데스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2만 1,000년 전부터이지만 지역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문화가 발달한 것은 1000년 이후부터였다. 감자 및 라마가 전래된 것도 이무렵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600년 이후 한때 티티카카 호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의식(儀式) 중심지 티아우아나코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번창했다. 이 문화는 500년 동안 발달하면서 외부세계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의 문화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구조물들을 남겼다.
1200년 이후에 아이마라어를 사용하는 많은 소왕국들이 티아우아나코 문화를 계승했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볼리비아 전역을 지배했다. 15세기말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서북의 잉카인이 아이마라족을 그들 제국에 합병하고 합병지역을 코야수요라고 불렀다. 토착어 및 문화는 비교적 원래대로 남겨두었지만 이 지역은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잉카의 식민지가 되었다.
1532년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침입했다.
16세기말 스페인은 지금의 수크레인 차르카스를 비롯해서 라파스·산타크루스·비야데오로페사(코차밤바) 같은 도시를 건설하고 포토시의 은을 채광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당시 페루 부왕령에 속한 차르카스의 아우디엔시아라고 일컬어졌던 지역으로 17세기에 큰 번영을 누렸다. 포토시는 한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대학이 있었던 차르카스는 '아메리카의 아테네'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말에 이르러 광물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1800년대초 독립전쟁 후 심각한 경제침체가 뒤따랐다. 국가로 성립되었을 때 볼리비아의 경제는 상당히 낙후된 상태였다. 독립에 대한 요구는 1809년 무렵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에 대한 지지가 전폭적인 차원으로 확대된 것은 시몬 볼리바르의 부관이었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1824년 아야쿠초에서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였다. 1825년 마침내 수크레가 스페인 군대를 물리쳤다.
독립 이후 볼리비아의 정치사는 폭동과 불안정으로 얼룩졌다.
1839년 짧았던 페루와의 연합이 깨어졌고 1884년 태평양 연안의 아타가마 주를 칠레에게 빼앗겼다. 1880년 민간통치 시대가 시작되어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 1932∼35년에는 파라과이와 차코보레알의 지배권을 둘러싼 국경분쟁인 차코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0년대 정당들이 잇따라 생기면서 정치안정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1952년 4월 광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여러 집단이 동맹하여 당시의 군부정권을 전복시키고 볼리비아 국가혁명을 시작했다.
이 사회혁명으로 1950년대초 주석광산이 국유화되고 처음으로 보통선거가 승인되었으며 인디언의 상당수가 토지를 분배받고 부분적으로나마 노예신분에서 자유로워졌다. 1950년대 후반 침체된 경제의 바탕을 바로 세우기 위해 1952년 혁명과 함께 시작된 몇몇 사회계획을 중지했다. 뒤이어 1980년대까지 수십 년 간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쿠데타 때문에 1980년 실시된 민주선거가 무효가 되고 군부지배가 계속되다가 1982년 민중반란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1985년 선거를 새로 실시하자는 요구가 일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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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04월 20일 우리의 먼 친척국가 볼리비아
이종철 / 駐볼리비아 대사
볼리비아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나라이긴 하지만,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구름의 도시 라파스, 하늘과 맞닿은 우유니 소금사막,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호(大湖)인 티티카카 호수 등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희망 여행지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방송을 통해 볼리비아의 유명 관광지가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볼리비아를 찾는 관광객 수가 2014년 5000명에서 2015년 1만2700명까지 늘었다.
지난해 초 지구 반대편의 볼리비아 대사로 내정됐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평균 3800m나 되는 고지에서 힘들겠다는 외교부 동료들과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었다. 본인은 평소에도 틈틈이 체력을 단련해 온 터라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듣고 나서는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역시 부임 길부터 험난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마이애미에서 또 갈아타야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인 라파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라파스에 도착해서는 시차와 고산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고산 증상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보편적인 증상은 두통과 구토, 눈 충혈 등이다.
그러나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만년설이 빛나는 6400m의 일리마니산의 위용을 보고 나니, 고산증 걱정보다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또한 라파스 도심은 안데스 산맥 한가운데 풍덩 파인 그릇 모양으로 생겼는데, 병풍 같은 자연 경관과 비탈길의 서민주택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볼리비아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볼리비아는 남미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한반도의 5배나 되는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이다. 지리상으로는 비행기로 이틀 걸려 올 수 있는 먼 나라지만, 사실 볼리비아는 우리와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 학설에 따르면, 수만 년 전 빙하기 때 우랄알타이족이 베링해를 넘어 북미대륙을 종단하고 또 남미대륙의 안데스 산맥을 따라 티티카카호 부근에 정착했는데, 현재 볼리비아 원주민의 대다수인 아이마라족과 케추아족이 그 후손이라고 한다. 이렇다 보니 이들 원주민의 언어와 풍습이 우리와 유사한 것이 많다. 우선 아이마라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같고 일부 단어는 같은 발음을 내고 뜻도 같다. 원주민 신생아들에게서는 몽고반점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업는다든지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뿌리는 고수레 풍습 등도 우리와 매우 유사하다.
또한 양국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데, 볼리비아는 스페인으로부터 수백 년에 걸친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1825년 독립한 후에는 주변국들과의 전쟁으로 국토의 절반 가까운 영토를 상실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879∼1883년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에는 태평양 연안 영토를 모두 상실해 내륙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양국 간 문화적 유사성과 역사적 아픔의 공유는 볼리비아 국민으로 하여금 한국을 더욱 친근하게 느끼도록 해주고 있으며, 이는 외교 관계에도 큰 도움이 되곤 한다. 특히, 볼리비아 정부는 중남미 내 핵심 좌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고려해 지난번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 이례적으로 대북 규탄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특별한 양국관계는 경제 분야에서도 잘 드러난다. 볼리비아는 2006년 원주민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집권 이후, 산업화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년간 연평균 5%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남미에서 보기 드문, 우량한 경제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볼리비아의 경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 정부는 볼리비아의 경제 발전을 위해 우리의 개발 경험을 공유하고 유·무상 원조를 활용해 볼리비아 정부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또한 경제부흥기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볼리비아는 넉넉한 외환보유고를 기반으로 공공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어, 우리 기업들에도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볼리비아의 성장 잠재력을 감안할 때 볼리비아는 우리 기업에 매력적인 시장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많은 우리 국민과 기업이 우리의 먼 친척국가인 볼리비아에 큰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며, 또한 볼리비아의 아름다운 풍광과 문화의 정수를 직접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문화일보
◆ 2017.07.07 빛과 소금이 만든 신의 예술... 소금 사막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
7개월간 중남미를 여행했다. 누군가 가 본 곳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는 질문을 한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수 있다.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이다. '우유니'라는 지명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도 이곳을 찍은 사진을 딱 한 장 접하게 된다면 죽기 전 반드시 가야 할 여행지 목록으로 대번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그만큼 우유니 소금 사막은 남미 여행 중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될 여행지다.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에선 하늘이 땅이고 땅이 곧 하늘이다. 모든 것이 데칼코마니처럼 대칭되는 이곳에선 멀리 보이는 산과 밤하늘의 별만이 여행길을 알려준다. /오재철 작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우유니 소금 사막
볼리비아의 포토시 주(州)에 위치한 우유니 소금 사막. 지각 변동으로 솟았던 바다가 2만 년 전 녹으면서 이 지역에 거대한 소금 호수가 생겼다. 이후 건조한 기후로 인해 물은 모두 증발했고, 소금 결정만 남아 현재의 소금 사막 지형이 형성됐다. 면적 1200㎢로 서울 면적의 20배, 경상남도보다 약간 넓다. 소금 총량은 최소 100억t으로 추산된다.
최근에는 휴대폰, 전기 자동차, 2차 전지 등에 들어가는 기본 소재인 리튬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매장량은 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막대하다.
우유니 소금 사막은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12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에 속한다. 건기에는 육각형 모양으로 마른 새하얀 소금밭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거대한 벌집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또는 '지상 위의 천국'이라는 별칭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기에 방문해야 한다. 근래에 내린 비가 그친 후 발목 언저리만큼의 빗물이 차 있어야 한다. 그보다 넘쳐도 모자라서도 안 된다. 물에 비친 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바람은 불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를 물 찬 우유니라 부른다.
조용하고 한적한 우유니 마을에서 가장 시끄럽고 북적이는 곳은 중앙 거리의 여행사들 앞이다. 우유니의 소금 사막은 현지 여행사를 통하지 않으면 여행 자체가 어렵다. 물이 차오른 울퉁불퉁한 소금 결정체 위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사륜구동 지프를 타야 하고, 지표 하나 없는 새하얀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5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됐다는 소문, 아예 행방불명됐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우유니의 시공간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원근감이 없어 동서남북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은 가늠조차 어렵다./오재철 작가
◇두 개의 태양과 두 개의 달, 선셋 투어와 선라이즈 투어
우유니 마을에서 출발하는 당일 투어는 크게 선라이즈 투어와 데이 투어, 선셋 투어로 나뉜다. 보통 선라이즈 투어는 새벽 3시에서 해 뜬 직후까지, 데이 투어는 오전 10시에서 해 지기 전, 선셋 투어는 오후 3시경부터 해가 진 후까지다.
오후 1시경 여행사 지프를 타고 물 찬 우유니를 찾아 나섰다. 우유니는 하늘이 땅이고 땅이 곧 하늘이다. 지평선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이 데칼코마니처럼 대칭된다. 빛과 소금이 만들어낸 신의 예술 같았다. 온통 새하얗게 마른 소금에 공간·시간 각도가 사라질 때쯤 꿈에 그리던 천국의 모습이 펼쳐졌다. 천국에 도착했다는 환호의 표시로 우리를 태운 지프는 신나게 원을 그리며 천국 한가운데 멈춰 섰다.
우유니의 시공간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원근감이 없어 동서남북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은 가늠조차 어렵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우유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속설이 있다. 그의 작품처럼 '초현실', '비현실'이라는 단어는 우유니를 대변한다.
천상의 우유니를 영원히 간직하고픈 마음에 끊임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고개를 드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해와 땅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이 지평선에서 만났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두 개의 태양은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두 개의 달빛 호수 아래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 맑은 소금 호수 위를 수놓은 은하수는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오재철 작가
해가 진 후에도 진한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가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 3시, 선라이즈 투어가 시작됐다. 가이드는 어둠 속에서 지프를 몰기 시작했다. 아무런 표지판이 없는 한낮의 소금 사막에서 물 찬 우유니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도 신기한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고 차를 모는 건 더 신기했다. 어떻게 길을 찾느냐는 물음에 그가 답한다. 낮에는 아주 멀리 보이는 산을 지표로 삼고, 밤에는 하늘의 별을 따라가노라고. 태어나서 어젯밤까지 본 별들을 합친 것보다 지금 이 순간 떠 있는 하늘의 별이 더 많은 것 같다. 물 맑은 소금 호수 위를 수놓은 은하수는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어느 누가 머리 위에서 쏟아져 발아래로 흐르는 별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콧날을 스치는 찬바람만이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2박 3일 투어에서 볼 수 있는 기차 무덤. /오재철 작가
◇볼리비아 우유니 마을에서 칠레 아타카마까지
볼리비아를 제대로 즐기려면 우유니 소금 사막 당일 투어와 함께 2박 3일 오프로드 투어를 하는 것이 좋다. 볼리비아의 우유니에서 칠레의 아타카마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투어다.
보통 요리가 가능한 운전사가 모는 지프를 타고 5~7명의 여행객이 함께 이동하게 된다. 자연 그대로의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기 때문에 볼리비아의 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대자연 속 다양한 볼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거나 해괴하거나 눈부시게 아름답다. 소금으로 지어진 호텔 및 기차 무덤, 형형색색의 호수와 거친 황야, 사막 한가운데 솟아오른 기이한 모양의 암석들과 대자연 속 간헐온천, 검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총총히 박힌 수많은 별까지 지루할 틈이 없는 여정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볼거리는 녹색, 적색, 핑크색, 하얀색과 같은 빛깔의 호수들이다. 물속 미네랄의 종류 및 함량에 따라 여러 색 호수가 생겨났다. 호수 뒤 배경으론 순백의 만년설이 더해져 초현실주의 같은 풍경이 그려진다.
야생 동물 보호법이 적용되는 국립공원 내를 이동한다. 핑크색 플라밍고 떼, 남미에서만 서식하는 라마, 비쿠냐 등 평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동물을 만나볼 수 있다.
라마는 낙타과 동물로 머리는 낙타를 닮았으나 그보다 몸집이 작고, 귀가 뾰족하다. 비쿠냐 또한 낙타과의 동물이나 생김새는 사슴에 가깝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리비아로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2~3회 경유해야만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 도달한다. 라파스에서 우유니까지는 버스로 10시간, 항공으로는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볼리비아는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비자가 필요한 나라다. 국내 영사관에서도 발급이 가능하지만 다른 나라를 거쳐서 들어갈 경우 해당국의 볼리비아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신청할 수 있다. 30일 단수 비자이며, 발급 후 한 달 이내에 볼리비아에 입국해야 한다. 여권과 증명 사진 1장,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서, 비자 신청서, 신용 카드 사본 등이 필요하다.
정민아·오재철 여행작가
편집=오현주
◆풍경
▲볼리비아의 소금 사막 -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우유니 소금사막
▲보석같은 볋들 - 러시아 작가 다니엘 코단
▲오렌지빛 산
▲살라르 데 우유니 소금사막
▲소금사막의 해거름
▲ 유우니호수(소금평원)
▲화성 같은 붉은 호수 - 해발 4287m 높이에 있는 소금 호수
▲소금호수 - 새파란 색, 어두운 갈색, 빛나는 초록색의 호수는 플라맹고들이 거니는 곳
▲소금호수의 판타지
■ 부탄 Bhutan
부탄 왕국, Kingdom of Bhutan
▲국기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 수도는 팀부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국민은 보태족, 네팔인, 토착부족과 기타 이민족 등으로 구성된다. 종교는 불교이나 문화는 인도 북부와 미얀마에 사는 티베트 미얀마족과 더 가깝다. 농업 국가이며 인도로부터의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다. 본래 왕정 국가였으나 2008년 위로부터의 민주화 정책이 실시되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했다.
부탄 역사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쪽으로 이주하던 티베트인들이 9세기초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17세기에 티베트에서 온 영향력있는 라마교 승려 솁톤 라 파가 부탄의 왕이 되었고 다르마 라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부탄은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실체를 이루게 된 듯하며 그후 라 파의 뒤를 이은 돕게인 솁톤이 펜로프(영주)·중펜(성주)들을 임명하는 등 부탄의 행정 체계를 공고히 했다.
그의 후계자는 정치와 종교 양 측면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돕게인 솁톤과는 달리 종교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한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대리인을 세워 데브 라자의 칭호를 주고 그에게 모든 정치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다르마 라자, 정치실무면에서는 데브 라자가 통치하는 2원(二元) 통치형태는 20세기초 마지막 다르마 라자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적 지도자인 다르마 라자라는 직위는 죽은 다르마 라자의 윤회(輪廻)가 입증되었다고 여겨질 때 승계되었는데, 마지막 다르마 라자가 죽었을 때에는 이러한 영혼의 윤회를 찾아볼 수 없었고, 따라서 이 직위와 이에 대한 예배의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세기에 부탄은 세력을 확장하려는 여러 지방영주(penlop)들이 벌인 연이은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데브 라자의 직위는 이론상으로는 펜로프들과 중펜(jungpen : 요새 통치자)들의 협의회에서 선출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가장 세력이 큰 통치자, 즉 파로(Paro)의 펜로프나 통사(Tongsa)의 펜로프가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브 라자가 임명하기로 되어 있는 펜로프도 실제로는 이 직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러 해 동안 반역과 전쟁이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패하여 중펜이나 펜로프의 자리를 잃게 된 자들은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1907년 오랜 기간 가장 강력한 펜로프로 떠올랐던 통사의 펜로프가 둑곌포(왕)가 되어 영국에 의해 부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습왕조를 수립했다. 그의 손자인 지그메 도르지 왕추크는 개화된 통치자로서 가능한 한 전통적 가치들을 보존하면서 국가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발전을 추구하려 했으며 1972년 그가 죽은 후 대를 이은 아들 지그메 싱예 왕추크 역시 진보적인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시그메 싱예 왕추쿠는 2006년 아들 남미엘 왕추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한 남미엘 왕추크는 부친의 진보적인 근대화 정책을 발전시켜, 2008년 3월,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를 실시했다.
100년 이상 지속해 온 왕정을 종지부 찍고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 선거로 부탄의 양대 정당인 여당 부탄평화번영당(DPT), 야당 인민민주당(PDP)이 탄생했다. 첫 총선에서는 평화번영당의 압승이었으나, 2013년의 선거에서는 인민민주당이 역전했고, 2018년 10월 총선에서는 소수당이었던 부탄통합당(DNP)이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서 신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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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이야기
▲ 히말라야의 작은 나라 부탄왕국의 31세 국왕 지그메 케사르와 평민 출신 젯선 페마의 결혼식이 13일부터 부탄의 옛 수도 푸나카의 사원에서 열린다. 수도 팀푸에서 주민들이 국왕 내외의 초상화를 건물 창 옆에 내걸고 있다. /AP연합뉴스 2012-12-10
작은 왕국 부탄은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산맥에 은둔하고 있다.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왔다. 오직 인도에서만 그곳으로 가는 길이 셋 있을 뿐이다.
▲부탄의 서쪽 Paro라는 소도시,인구 15,000명이 해발 2,400미터 고원에 살고 있다.
▲진흙, 돌, 목재로 된 전형적인 부탄의 가옥.
옛날에 1층에는 짐승들을 키웠으나,요즘은 창고로 사용한다
▲대표적인 박상 차,버터와 설탕을 타서 마신단다.
▲전통 옷 Kira를 입고 있는 노파
▲수도 Thimphu에서 가면을 착용하고 춤을 추는 남자들
▲건물 벽의 남근상은 부탄에서는 흔하디 흔하다.
이것은 악령을 퇴치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는 단다.
▲전통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회전 예배기를 돌리고 있다.
부탄 국민들은 대부분 산신과 선령의 존재를 믿는다.
▲불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꼬마 승려들
▲부탄 수도 팀푸의 전경. 하천을 경계로 오른쪽 건물이 타시초종이며, 왼쪽 붉은 지붕 건물이 부탄 중앙정부청사이다. 멀리 산중턱에 세계 최대의 금불상인 붓다 도르덴마가 보인다.
국민총생산지수(GNP)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상당히 가난한 국가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행복감은 매우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행복의 질이나 종류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는데 경제적으로 빈곤한 국가의 국민이 과연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부탄 국민들 스스로는 물론이고 부탄을 다녀온 수많은 부유한 나라의 외국인들조차 그들의 매우 순수하고 순박한 마음과 일상에서의 행복한 모습에 매료되어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하는 나라가 바로 부탄이다.
▲부탄 수도 팀푸의 시내 중앙로. 수도인 팀푸에는 물론이고 부탄 전국에 교통신호등이 하나도 없다.
▲협곡에 위치한 파로국제공항에 안착한 부탄 드룩항공사의 제트여객기
▲팀푸 시내 사원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시민들.
부탄 정부는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자연환경의 보존, 문화적 독창성의 유지, 넷쩨가 좋은 정부라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공정하고 지속적인 사회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동시에 영적인 성장 또한 중요시하고, 불교적 생태주의에 기반해 국토의 60%는 삼림으로 유지되어야 함을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자연환경 보존에 힘쓰고 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근무시간에는 반드시 전통복장 착용을 의무화하고, 일반 주택을 포함한 모든 건축물을 전통적 양식으로 짓도록 규제하고 있다.
결국 행복의 근원은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자질과 능력이 훌륭한 리더,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깨끗한 생활환경과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의 균형'과 올바른 '종교적 믿음'이라는 사실을 부탄 사람들로부터 느낄 수 있다.
▲파로공항 가까운 곳에 위치한 파로종
▲부탄의 전통복장인 키라를 착용한 여고생들
▲부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장소로 꼽히는 탁상사원.
국토 면적(38,394km2)이 스위스와 비슷하고 현재 인구 약 75만의 부탄은 불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이다. 6세기부터 전파된 불교로 인해 전 국토에 불교사원, 곰파, 종과 유적들이 즐비하게 존재하며 부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고 있다. 따라서 전 세계의 불교신자들이 생전에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기도 하다.
▲팀푸 외곽 산중턱에 위치한 51m 높이의 금불상인 부다 도르덴마.
▲수도 팀부 남쪽에 위치한 심토카 종. 부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사원으로 지금은 어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출라고개(3,140m)에 위치한 드룩 왕갈 초르텐(108개의 불교승탑)
▲검은목 두루미가 날아드는 폽치카계곡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쉬다르(부탄인들이 사후,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장소에 설치한 하얀 깃발).
▲푸니카 지역 사립고등학교 학생들의 축구시합
▲부탄 농촌 지역의 여인들이 감자를 심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행복은 결코 먼 곳에 또는 부유한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우리와 가까운 곳,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부탄을 가고 싶어하고, 다녀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큰 만족감을 표시하는 이유가 바로 '진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사진·글 / 양효용 객원기자 제공 / 월간산
◆'행복지수 1위 나라' 부탄 사람들 만나 보니
▲히말라야 설산 아래 불교 문화와 신화가 현실로 실재하는 곳, 부탄.
부탄관광위원회 초청으로 1주일간 부탄 역사·문화 탐방 프로그램에 다녀왔습니다. 히말라야 동쪽의 작은 나라 부탄은 8세기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라 고승 혜초(704~787)가 지났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혜초는 구법승으로 구도의 길을 따라 걷고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당시 인도 북부의 활기 넘치는 사원을 찾아 붓다의 기록을 모으고 현지 스님과 교우했습니다.
'행복하냐' 물으니 '왜 행복하지 않냐' 되물었다
그런데 솔직히 부탄의 역사보다 현재의 부탄에 더 호감이 갔습니다. ‘은둔의 왕국’ ‘지구 상의 마지막 샹그릴라’ ‘행복지수 1위의 나라’ 아닙니까. 1인당 GNP가 우리의 10분의 1 수준인 2500달러에 불과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라. 하루 7시간 노동이 철저히 지켜지는 나라. GNP보다 GNH(Gross National Happiness·국민총행복)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가 바로 부탄입니다
부탄의 서민, 농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궁금했습니다. 1월에 한국을 방문한 레케이 도르지 부탄 경제 장관은 “부탄도 빈부 격차가 있으며, 특히 도시와 농촌 간 삶의 질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가기 전부터 작정하고 물어볼 계획을 세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낍니까?’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나요?’ 라는 질문은 억지스러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당신은 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나요?’ 반문했습니다.
◇여고생 넷 “대학 입시 두렵지 않아요”
부탄의 수도 팀푸 시내에는 시계탑이 하나 있습니다. 콘크리트 바닥 광장에 먼지 쌓인 시계탑이 서 있고 주변으로 호텔과 카페, 특산품을 파는 가게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작은 읍 정도 되는 규모의 거리지만 부탄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곳입니다. 간혹 손을 잡고 데이트 중인 커플도 보이는데, 가이드는 ‘아마도 결혼한 커플일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탄에서 가장 개방적인 곳이지만, 길거리에서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는 미혼남녀 커플은 많지 않습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공개 연애를 꺼린다고 하네요
▲부탄 수도 팀푸 시계탑에서 만난 네 소녀. 왼쪽부터 남겔 라마, 텐데이 양촘, 페마 라덴, 삼펠마 양게. 대입을 앞두고 있지만 근심 없는 표정이다.
벤치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네 명의 ‘여고생’을 만났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입니다. 남겔 라마, 텐데이 양촘, 페마 라덴, 삼펠마 양게. 나이는 17~18세. 말 한 마디 뱉고 까르르 웃는 양이 딱 ‘열여덟 처녀’입니다.
부탄은 교육열이 높습니다. 고3 수험생의 6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합니다. 우리처럼 입시를 치르고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지원합니다. 더러 대학에 따라 따로 시험을 치르는 곳도 있고, 2차로 면접을 보는 것도 우리와 유사합니다.
넷은 고향은 다르지만 고등학교 동문으로 팀푸의 도서관에서 대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대학이 결정되진 않았지만 “불안하거나 걱정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듯, 자연스럽게 대학에 진학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또 모두 “남자친구가 없다”고 했는데, 이유를 물으니 “우리는 남자를 만나기엔 너무 어리다”고 답했습니다. 더러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도 있지만 “부모님 몰래 만난다”고 합니다.
열여덟 청춘들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평소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지, 아니면 질문이 뜬금없었는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아무 말 않다가 넷 중 가장 활달한 페마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 남자를 만나 한국에서 살고 싶다”며 “지상욱같은 잘 생긴 남자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까르르 웃었습니다. 부탄의 젊은이에게도 K-POP을 비롯해 드라마·영화 등 한국 대중문화는 인기입니다. 드라마 한 편을 다운로드 받는 데 드는 비용은 35눌트룸(Nu·약 500원). 소득이 없는 학생들에겐 부담되는 돈이지만 거의 모든 학생들이 받아 본다고 합니다.
나중에 SNS 친구맺기를 통해 더 알고보니이들은 부탄에서 가장 등록금이 비싸고 명문이라 알려진 푸나카(Punakha)의 한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부탄에 사는 한국인 학생도 이 학교를 다닌다고 합니다. 부탄은 대학까지 모든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되지만, 사립학교는 등록금을 내야 합니다. 이들에게 굳이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부탄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소녀들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한달 용돈 8000원 뿐이지만…"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Dzong) 중 하나인 파루 종(Paro Dzong)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님 도르지(21)를 만났습니다. 종은 불교 사원과 행정 관청, 적 방어 3가지 목표를 위해 건설한 요새입니다. 지금도 사원과 관청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사원이자 성) 중 하나인 파로 종에서 만난 님 도르지.
님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습니다. “해질녘의 종이 하루 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 ‘낭만 청년’은 파루 국립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졸업 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부탄 말로 ‘님(Nim)’은 태양(Sun)을 뜻합니다. 하지만 님의 인생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님이 태어나기 전에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님을 가진 채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에게 보내진 님은 이후로 한 번도 부모님과 같이 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친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머니를 많이 때렸다고 해요. 의붓아버지와는 한 번도 교류한 적이 없고, 현재는 어머니와도 연이 닿지 않습니다.”
드라마 소재로 어울릴 법한 슬픈 개인사를 지닌 님은 그러나 의연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없다”며 “부모 없이도 잘 성장했고,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를 낳아준 것만도 감사하다. 두 분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학교 근방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자취를 합니다. 한 달 임대료는 2500Nu(약 4만원). 관리비를 포함해 1인당 1000Nu(1만5000원)씩 내고 있습니다. 부탄은 국공립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에게 한 달에 1500Nu(2만5000원)을 지원해줍니다. 집값으로 1000Nu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은 500Nu(약 8000원). 그는 이 돈으로 한 달을 생활해야 합니다. 하지만 청년의 눈빛과 말투는 당당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부탄서 만난 젊은이 중 가장 진취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청년이었습니다. 부탄은 ‘용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툭 불거진 광대뼈와 눈두덩이 잔 근육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용의 기상’을 엿보는 듯 했습니다.
◇스무살 취준생 “취직보다 가족이 더 소중”
남겔 람(20)은 취준생입니다. 부탄도 우리처럼 구직난, 측히 젊은 층의 취업난이 사회적 이슈입니다. 외국인 관광객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으며, 시골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 팀푸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예전의 중국처럼 말이죠.
▲부탄의 성지 탁상 곰파에서 만난 남겔 람.
푸나카의 한 고교를 졸업하고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남겔은 취업시험을 치르기 위해 하루 전날 파루(Poro)에 왔습니다. 인구 4만의 푸나카는 부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파루는 여섯 번째 도시지만 국제공항이 있어서 일자리는 더 많습니다. 파루에는 관광객을 위한 호텔·리조트가 40여개 있습니다.
지난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겔은 수능 영어시험에서 44점을 받았습니다. 55점 이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점수라고 합니다. 대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시험을 치렀지만 떨어졌고, 다시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겔은 “취준생으로서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그는 부모와 오빠, 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겔은 “돈은 중요하지 않다.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하고 있는 언니가 조금씩 도와준다”며 “부모님과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사는 게 더 큰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1주일 후면 스물한 살이 되는 남겔은 아직까지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결혼할 남자가 아니면 만나지 말라’고 했다”며 본인도 그럴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남겔을 만난 장소는 부탄 사람들이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는 탁상 곰파(Taksang Gompa·곰파는 사원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남겔은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해 달라’가 아니라 “가족의 행복”을 빌었습니다.
◇스물셋 가장 “한국 음식 배워 레스토랑 내는 게 꿈”
탁상 곰파에 이어 외국인 관광객이 필수로 들르는 관광지 중 하나가 푸나카의 치미 라캉(Chime Lhakang) 사원입니다. 이 마을엔 부탄 사람들이 붓다 다음으로 존경하는 드룩파 쿤리(Drukpa Kunley·1455~1529) 스님에 관한 전설이 내려 옵니다. 드룩파 쿤리는 라마(스님을 통칭하는 말)로서 계율을 벗어던지고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 하나가 거대한 남근을 버젓이 내놓고 다니는 곳마다 아녀자들을 농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히말라야 인근 불교 사원에 만연해 있는 라마의 권위주의를 꾸짖기 위해서였습니다. 드룩파 쿤리는 악마를 제압해 치미 라캉 사원에 가둔 성자이기도 합니다. 기행을 일삼았던 ‘미친 성자(Divine Madman)’이지만, 부탄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님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드룩파 쿤리의 기행적인 전설 때문에 치미 라캉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부탄의 신혼부부는 누구나 한 번쯤 이 곳에 와서 ‘아들딸을 점지해 달라’고 빕니다. 절 아래 사하촌에는 드룩파 쿤리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거대한 남근을 그려놓았습니다. ‘남근 벽화’ 마을입니다. 너무 거대해 민망할 정도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수치심보다 자부심이 더 강했습니다. 드룩파 쿤리가 이 마을에 온 16세기 이래 지금까지 부탄은 농경사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산은 곧 노동력을 상징하죠. 드룩파 쿤리의 상징인 남근은 다산을 기원하는 뜻과 함께 나쁜 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토속 신앙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승 두룩파 쿤리의 전설을 간직한 치미 라캉 사원 아래서 만난 도르지와 샹게 그리고 딸 킬레초키. 이 마을에서 남근 벽화는 거의 벽지와 같다. 집집마다 남근을 그린 벽화와 남근석, 나무로 만든 남근상이 있다.
도르지(23)와 샹게(23) 부부는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도르지가 이곳 리조트의 주방에 취직하면서 치미 라캉 사원 아래 마을로 이사 왔습니다. 남편은 조리사로 일하며 한 달에 1만5000Nu(약 25만원)을 벌고, 아내는 탕카(불교 미술) 갤러리 점원으로 일하며 5000Nu(약 8만원)을 받고 있습니다. 18개월 된 딸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기엔 결코 많은 돈이 아니지만, 도르지는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음식을 내는 도르지는 “지금은 중국 음식밖에 못하지만 조만간 한국 음식을 배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부가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이유도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입니다. 부탄 사람이 한국으로 직업 연수를 떠나려면 큰 돈이 필요합니다. 비자 등 서류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배우고 돌아와 이곳에서 나의 레스토랑을 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아내 샹게는 “아들을 하나 더 낳는 것이 소원”이라며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고 합니다. 사원에 가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 빌면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기 전에 다시 절에 찾아가 스님에게 아이의 이름을 받으면 된답니다. 지금 딸의 이름인 ‘킬레초키’도 치미 라캉의 주지 스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가이드는 “얼마 전 아이를 낳지 못 하는 일본인 부부가 치미 라캉에 다녀간 후 아이가 생겼다고 들었다”며 전설에 소문을 하나 더 얹었습니다. 비록 우연의 일치라고는 하지만, 흥미진진한 마을입니다.
◇히말라야 소국의 강인한 여성들
부탄은 아주 작은 나라지만 제법 괜찮은 관광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관광호텔 정도 되는 2~4성급 호텔이 수백 여 개 됩니다. 호텔 인력은 거의 여성이 점하고 있습니다. 조리는 물론 객실 청소, 웬만한 수리도 여직원이 담당 합니다. 릴라(25)과 릴라(26) 그리고 리첸(25)은 푸나카의 3성급 호텔인 푸나샹추 코티지(Punatsangchu Cottage)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두 명의 릴라는 ‘릴라1’ ‘릴라2’로 불립니다.
▲푸나강이 내려다보이는 푸나샹츄 코티지에서 일하는 '릴라1'과 '릴라2' 그리고 리첸(사진 왼쪽부터). 보다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경력 4년 차인 세 여성의 한 달 월급은 4500Nu(약 7만원). 첫 월급은 3500Nu(약 6만원)이었다고 합니다. 1주일간 부탄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적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여성 중 아리안 계통의 얼굴을 한 '릴라2'만 기혼 여성입니다. 소방공무원인 남편의 월급은 3만5000Nu(약 55만원). 공무원 치고도 꽤 높은 월급이라는데 "푸나강 댐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수당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3성급 호텔의 월급은 대략 5000Nu(약 8만원)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지금은 적은 월급을 받고 있지만 장래엔 돈을 많이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충분치 않은 월급에 대해선 “앞으로 좋아지지 않겠냐”고 반문했습니다.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순종적이라고 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수도 팀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샹게 하든(왼쪽)과 예시 하든. 히말라야 설산을 닮은 강인한 여성들이었다.
샹게 하든(26)과 예시 하든(28)도 수도 팀푸의 한 관광호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샹게는 주방, 예시는 객실을 담당합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여러 개 하고 있어 ‘교제 중인 사람이 있느냐’ 물었더니 이내 “이혼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두 살짜리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탄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한 나라입니다. 거의 모든 여성이 직업을 갖기를 원하며 적극적으로 일을 찾습니다. 모계사회였던 티베트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큽니다. 지금도 부모가 사망하면 아들이 아닌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예시는 각각 여섯 살, 두 살 짜리 딸이 있습니다. 그는 5개월 전까지 산악 지역 공립학교 병설 유치원 선생님이었습니다. 큰 딸이 올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자 아이의 교육을 위해 큰 도시로 나왔습니다. ‘맹모삼천지교’는 히말라야의 작은 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일하며 받는 월급은 5000Nu(약 8만원). 선생님 월급보다 적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선생님에서 호텔 하우스키퍼(Housekeeper)로 낮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시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일단 팀푸가 산악 지역보다 따뜻하고,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탄은 부부가 맞벌이를 하게 되면 우리처럼 조부모가 육아를 돕습니다. 그는 오전에 출근해 3시간 근무 후 퇴근하고, 저녁에 다시 나와 4시간을 일합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집이 있어 쉬는 시간엔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부탄은 하루 7시간 노동을 법으로 정하고 있으며, 거의 법대로 지켜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만원 버는 팀푸의 택시운전사
팀푸의 택시운전사 킨장 도르지(38)는 부탄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하고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호텔에서 서점에 가기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하자 5분도 되지 않아 그가 달려왔습니다. 호텔 매니저는 그와 몇 마디 한 뒤 “시내 왕복 택시비는 300Nu(약 5000원)”이라고 했습니다.
▲부탄에서 만난 '가장 친절한 사람' 킨장 도르지. 팀푸의 택시운전사.
킨장 도르지는 낮에는 공무원입니다. 팀푸의 유네스코 사무실에서 운전기사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고 7시간 일합니다. 오후 5시가 되면 자신의 택시를 몰고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택시를 부른 시간은 오후 6시. 오늘의 두 번째 손님을 태운 겁니다. 서점에 가기 전 “책을 사야 하는데 부탄 돈이 없다”고 하자 그의 친구가 운영하는 신발가게로 데려갔습니다. 킨장은 “시내 환전소보다 좋은 환율로 돈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3월 현재 팀푸 시내에서 달러와 부탄 화폐(Nu) 간 환율은 1달러 60~69Nu입니다. 그의 친구 가게에서 1달러 68Nu에 환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시내에 택시를 세워두고 서점 투어에 나섰습니다. 부탄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킹코스인 스노우맨트렉(Snowman Trek) 지도를 사려 했지만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결국 헛걸음만 했습니다.
킨장이 나를 태우고 호텔을 나선 지 1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시계탑 근방에서 그의 큰딸을 만났습니다. 킨장은 이제 서른여덟 살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이 있습니다. 그는 “올해 대학에 가야 하는데 점수가 50점을 간신히 넘는다"며 “학교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 근심하는 눈빛은 아니었습니다. “돈이 있는 집은 국공립대학에 못 가면 인도로 유학을 보낸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 그렇게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큰 걱정은 안한다. 대학에 못 가면 직장을 구하면 된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집안 일을 하면 된다. 동생들을 돌보거나….”
그는 5년 전 은행에서 3만Nu(약 500만원)을 대출받아 택시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대출금을 모두 갚았다고 합니다. 그는 “부탄의 택시 번호판 중 P가 들어간 차는 프라이비트(Private)을 뜻한다며 이 차는 이제 내 차”라고 했습니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간, 호텔로 돌아와 원래의 택시비보다 200Nu을 얹어 500Nu을 주었습니다. 그는 “땡큐 선생님(Thank you Sir)"을 연발하며 차를 돌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 시간 이후 1명의 손님을 더 태우거나 아니면 그대로 퇴근했을 겁니다. 손님을 더 찾지 못했다면 그는 800Nu(1만2000원)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부탄의 과일값은 아주 비쌉니다. 치킨 값도 비쌉니다. 가족을 위해 과일 한 봉지도 치킨 한 마리도 선뜻 사지 못할 금액입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인심은 없는 사람에게서 난다’
▲감자 심는 농부들. 새참은 버터로 만는 솔티와 튀긴 쌀이 전부다.
일정 중 하루는 부탄 중부에 위치한 고원마을 포지카(Phobjikha)에서 묵었습니다.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곳입니다. 전 세계 어느 고원마을이나 주식은 감자와 밀·메밀입니다. 이 마을도 봄을 맞아 감자심기가 한창이었습니다. 규모가 큰 공동농장은 마을 사람이 한 데 모여 울력을 하고, 개개인이 경작하는 밭은 가족 노동이 주를 이룹니다
▲부탄의 고산마을 포지카에서 감자 심는 농부. 그들의 주식이자 귀한 음식을 여행자에게 건넸다.
마을 입구에서 새참을 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울력을 참여한 열에 여덟은 여성입니다. 우리 일행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티베탄(티벳인)들이 즐겨 마시는 수유차와 비슷한 솔트티(Salt Tea)입니다. 보통 ‘솔티’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외모 또한 티베탄과 유사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조상은 히말라야 북쪽에서 넘어왔을 겁니다. 솔티는 찻잎을 끊인 물에 버터와 소금을 넣고 만든 차입니다. 소나 야크의 젖이 원료라 처음 마시는 사람은 약간 비릿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예쁜 찬합에 가득 담긴 튀긴 쌀을 내놓았습니다. 찬합에 담긴 튀긴 쌀은 이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 내놓은 최고의 성의라고 합니다.
▲부탄 고산마을 포지카에서 감자 심는 아낙과 그의 아들딸.
포지카를 비롯해 부탄의 시골마을에는 팜스테이(Farm Stay)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부탄 전통 스타일의 민가에 머물며, 이들의 전통 부엌에서 밥을 먹고, 이들이 수 천 년 동안 잠자리로 삼은 방에서 잠을 잡니다. 자는 게 부담된다면 점심이나 저녁 식사 정도도 좋습니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이들이 오늘 심은 감자를 모두 수확해서 판다 해도 외국인 여행자의 하루 경비도 되지 않을 겁니다. 부탄을 하루 여행하려면 외국인 여행자는 1일 200~250달러의 체제비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 비해 가진 것 많은 나는 이들을 위해 해줄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인심은 없는 사람에게서 난다’더니 딱 그 꼴이었습니다. 부탄 시골마을에서 느낀 행복의 모습이었습니다.
위에 열거한 이들 말고도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모두 ‘나는 행복하다’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평범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탄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하다’고 느끼고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을 만난 1주일은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행복은 늘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은 일깨워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글과 사진=팀푸(부탄)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 '레어 여행지' 부탄에만 있는 10가지
▲'신화의 나라'이자 농경국가인 부탄 어딜 가나 남근상(목각)이 있다. '다산의 상징'으로 부탄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이다. 사진은 치미라캉 사원이 내려다보이는 솝소카(Sopsokha)마을 레스토랑에서. 멀리 언덕 위 안부에 자리잡은 치미라캉 사원이 보인다.
히말라야 동쪽의 작은 나라 부탄은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4분의 1, 인구는 75만명에 불과합니다. 1974년 문호를 개방했고, 지난해 입국한 외국인 수는 약 20만명입니다. 부탄 관광위원회(Tourism Council of Bhutan·이하 TCB)는 “한국인 여행객은 1000여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웃 나라 네팔에 입국하는 한국인이 연 2만~3만명인 것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치죠. 그래서 여행지로 말하면 부탄은 ‘레어 플레이스(Rare Place)’입니다. 네팔·티베트·파키스탄 등 다른 히말라야 지역은 수차례 가봤지만, 기자 또한 부탄은 처음이었습니다.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1주일간 경험한 부탄의 모든 것이 신기했습니다.
1 “부탄에 오려면 1일 200~250달러 선입금하세요”
부탄 관광위원회(TCB)는 ‘높은 부가가치 적정 수의 입국자(High Value Low Volume)’를 목표로 합니다. 입국자 수를 제한하되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제값을 받겠다’는 전략이죠. 작은 나라의 관광 정책으로는 효율적입니다.
부탄에 가려면 1일 200~250달러(비수기 200달러)를 체재하는 날짜만큼 입금해야 비자가 나옵니다. 5일을 머물면 1000달러(약 120만원). 전 세계서도 손꼽히는 비싼 여행지입니다.
▲히말라야 설산이 보이는 길을 한 학승이 걷고 있다.
1일 200~250달러(비수기 200달러) 중 정부가 가져가는, 일종의 입국비용은 130달러입니다. 130달러를 뺀 나머지 비용이 부탄에서의 호텔숙박비·식비·교통비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호텔은 3성급, 식비는 한 끼에 7~8달러 정도로 제공됩니다. 호텔과 삼시 세끼를 합치면 하루에 100달러 정도가 숙식비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불포함 내역도 있습니다. 주류비(식사할 때 맥주 등을 주문할 경우), 가이드·운전사 팁은 따로 내야 합니다. 기본에서 호텔 수준을 높이고 식사비용을 더 늘리고 싶다면, 추가 비용을 지급하면 됩니다.
부탄은 가이드 없이 혼자 여행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가이드 동반’입니다. 현재 약 3000명의 가이드가 있는데, 정부는 이 가이드 수를 제한함으로써 여행객 수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호텔의 등급과 가격도 TCB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외국인 관광을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셈이죠.
2 국민의 ‘99%’가 불교를 믿는 나라
부탄은 불교의 나라입니다. 거의 100% 불교신자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티베트 불교를 중국 당국이 통제하고 있는 요즘 지구상에서 가장 불교색이 짙은 나라는 부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Dzong, 요새이자 사원) 중 하나인 푸나카 종.
부탄은 8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태어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에 의해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지금도 부탄 불교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행정구역은 20개의 종카(Dzongkhag)로 나눠져 있는데, 여기서 종(Dzong)은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로 하나의 성(요새·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마다 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행정과 무관한 사원은 곰파(Gompa)라고 구분합니다. 종보다 규모가 작고, 스님들의 수행과 학승의 교육이 이뤄집니다.
가이드가 인솔하는 부탄 여행은 주로 종과 사원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꾸려집니다. 하루에 서너 군데 종과 곰파를 들를 때도 있습니다. 사전지식이 없으면 여행이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론리플래닛 부탄편』정도는 읽고 가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됩니다.
3 위트 있는 때론 살벌한 ‘과속 방지’ 표지판
부탄의 도로교통 표지판은 전 세계 배낭여행자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직설적인 표현 때문이죠. 위트가 넘치기도 하고, 한편으론 조금 표현이 과하다 싶습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천천히 간다고 늦게 가는 게 아냐(Be Mr late not late Mr)’,
‘커브는 젠틀하게(Be gentle on my curves)’, ‘과속은 생명을 자르는 칼(Speed is a knife that cuts life)’, ‘더 밟으면 미끄러진다(More you speed more you skid)’, ‘결혼했으면 속도를 줄이시오(If you are married divorce speed)’. 스쳐 지나가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죽고 싶으면 밟아라(More speed, kill you)’ 이런 이정표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탄의 도로 이정표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직설적인 표현으로 유명하다. '속도를 줄이시오'는 얌전한 표현. '과속은 죽음이다' '죽고 싶으면 밟아라' 등의 표지판도 있다.
하지만 부탄에 머무는 동안 과속·난폭운전을 하는 차를 본 적이 없습니다. 1주일 동안 함께한 운전기사 길레(30) 역시 단 한 번도 과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포장도로는 시속 10~20㎞, 포장도로는 최대 시속 50㎞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부탄 도로에는 ‘느림의 미학’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4 자유여행·개별여행은 없다
다시 부탄의 독특한 여행 정책 이야기입니다. 부탄에 자유여행(Free Tour)·개별여행(Individual Tour)은 없습니다. 모든 여행은 현지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해야 하며, 스케줄도 현지에서 짠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1주일 동안 기자와 동행한 운전기사 길레(30, 왼쪽)와 가이드 왕디 챠도로(33). 인상은 강하지만 푸근한 청년들이다.
패키지 여행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편하고, 개별여행을 주로 다닌 사람은 조금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혼행’을 즐기는 편이라면 가이드 주도적인 부탄여행이 불만족스러울 겁니다. 예를 들어, 프로그램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불교에 관한 것입니다. 부탄의 때묻지 않은 자연을 맘껏 걷고 싶더라도 혼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부탄에 들어가기 전 국내 여행사를 통해 가고싶은 장소를 미리 요청하는 게 방법입니다.
물론 짬짬이 ‘자유여행’ 시간이 주어지긴 합니다. 주로 팀푸(Thimphu)와 파로(Poro) 등의 도시에서 이뤄지는 쇼핑 타임이지요. 쇼핑에 가이드는 따라 오지 않습니다. 동남아 패키지 여행상품에서 흔한 쇼핑 강요는 전혀 없습니다.
5 전통 복장 키라(Kira) &고(Gho)
부탄에 들어가는 모든 여행자는 파로 국제공항에 내립니다. 곧바로 부탄의 수도 팀푸로 이동하게 되지요. 첫 번째 방문지는 아마도 팀푸 시내 시계탑 주변이 될 겁니다.
▲파루의 한 리조트 숍에서 부탄 남성 전통복장 고(Gho)를 입어봤다. 의외로 잘 어울려 깜짝 놀랐다. 사진 속 제품은 85달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독특한 풍경과 마주칩니다. 구로자와 아키라(1910~1998)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라는 영화를 본 적 있나요? 목욕 가운 같은 원피스 형태의 옷 유카타를 입은 사무라이들이 등장하지요. 팀푸 시내에 처음 도착했을 때, ‘7인의 사무라이’ 세트장인 줄 착각했습니다. 유카타와 흡사한 고(Gho·부탄 남성 전통 복장)를 입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한복과 흡사한 키라(Kira)는 여성용 전통 복장입니다.
입헌군주제인 부탄은 ‘해야 할 의무’와 ‘하지 말아야 할 규칙’이 많습니다. 전통복장인 키라와 고를 입는 일은 의무에 해당됩니다. 입지 않는다고 벌금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 공무원을 비롯해 관광 가이드, 호텔 등 관광업계 사람들은 유니폼이라 할 정도로 철저히 자신들의 전통 복장을 고수합니다. 이런 점은 참 부러웠습니다.
키라·고는 우리의 한복과 비슷합니다. 부탄 여행 마지막날 아침, 한번 입어봤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랐습니다. 남성용 고는 착용도 간단합니다. 원피스 형태라서 몸에 걸치기만 합니다. 우리의 두루마기 같다고 할까요.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고 궁궐투어를 하는 것처럼 부탄에서도 키라·고를 입고 종 투어(Dzong Tour)를 하는 외국인 여행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6 불닭만큼 매운 고추치즈커리
부탄에서 고추는 식재료 이상입니다. 거의 의약품 수준이지요. 세계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히말라야 지역은 매운 음식이 발달했습니다. 혹한을 견뎌야 하는 이들에겐 몸을 덥힐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보일러가 있다면 좋겠지만 턱도 없는 소리지요. 기껏해야 산에서 땔나무를 가져다가 불을 피우는 정도인데, 우리처럼 구들이 아니니 보온력이 떨어집니다.
▲부탄의 고원마을 포지카의 농가에서 맛본 고추치즈커리. 함부로 많이 먹었다간 큰코 다친다.
고추는 히말라야 지역에서 몸을 덥히는 음식으로 첫 손에 꼽힙니다. 부탄 시골에서는 집마다 지붕에 고추를 널어 말립니다. 날이 좋지 않을 때는 아궁이 위나 시렁에 걸어 놓지요. 그들은 “부탄 고추는 100% 오가닉”이라고 말합니다. 부탄 농가는 화학 비료를 쓰지 않으니까요. 외국으로부터의 고추 수입도 전면 금지돼 있습니다.
고추가 나는 때가 아닌 겨울이나 봄에 고추를 먹는다는 것은 아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중 부탄 농가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고추치즈커리’는 단연 으뜸입니다. 수도 팀푸에서 차로 6시간 떨어져 있는 포지카(Phobjikha)를 방문했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음식을 내온 남겔(23)은 분명 “마른 고추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눈으로 보기엔 통통한 것이 싱싱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마른 고추를 물에 불려 조리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치즈와 강황 등을 넣고 계속해서 졸이면 고추치즈커리가 됩니다. 매운 향이 진동했습니다. 평소 고추 좀 먹어본 편이라 큰 숟가락으로 듬뿍 퍼왔습니만, 결국 남기고 말았습니다. 부탄 농가에서 음식을 남기는 것은 결례인 걸 알면서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농가에서 제공하는 팜스테이 점심·저녁 식사는 1인당 400Nu(약 6000원)입니다.
7 구린내 진동하는 도마 & 파니
부탄 어딜 가나 ‘비틀 너트(Beattle nut)’라는 열매를 라임 잎에 싸서 씹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현지 말로 열매는 ‘도마(Doma)’, 잎은 ‘파니(Paney)’라고 합니다.
▲딱정벌레 너트 '도마'를 라임 잎에 싸서 씹고 있는 부탄의 아낙. 붉은 너트를 많이 씹으면 치아와 입술도 빨갛게 물든다.
문제는 딱정벌레처럼 생긴 이 열매의 냄새가 아주 고약하다는 겁니다. 부탄서 방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이것을 씹는 사람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기내처럼 밀폐된 장소에선 한 명이 씹어도 일대에 구린내가 진동합니다. 길거리에서도 서너 명이 모여 씹고 있으면 한참 떨어진 곳에서 알아차릴 만큼 냄새가 정말 강합니다.
도마와 파니를 씹으면 고추처럼 몸에서 열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악지역 농부들에겐 필수 휴대품입니다. 포지카의 한 농부가 ‘씹어보라’ 권했지만, 가이드가 “몸에서 열이 나고 두통이 올 수도 있다”면서 말렸습니다. 특히 포지카는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고산이라 가만 있어도 두통이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한 번 시도해보려 했지만, 입에서 구린내가 날까봐 결국 그만 뒀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도마&파니’를 애용하는 사람에 따라 계층이 나뉜다는 겁니다. 주로 산악지역, 남성, 나이든 사람, 저소득층이 이 너트를 즐겨 씹습니다. 반면 젊은 층, 도시 근로자, 여성, 고소득층은 하지 않습니다.
8 끝없이 전개되는 신화들
부탄은 신화의 나라입니다. ‘신화는 종교를 낳고, 종교는 신화를 퍼트린다’고 할까요. 스토리텔링에 가까운 무수한 신화가 쏟아집니다.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유명한 '미친 성자' 드룩파 쿤리. 개를 끌고 다니며 수행했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부탄에서 가장 유명한 신화는 파드마삼바바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상 부탄이라는 나라 자체가 파드마삼바바로부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파드마삼바바는 부탄 왕국의 창시자이자 인도 탄트라 불교를 티베트·부탄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부탄 사람들에게 ‘두 번째 부처’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8세기경 호랑이를 타고 부탄에 도착해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해지는 곳이 부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탁상 곰파(Takshang Gompa)입니다.11세기 카규파의 대수행자였던 밀라레파(Milarespha·1040-1123)도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밖에도 처음으로 부탄 왕국을 통일한 나왕 남겔(1594~1651), 미친 성자(Divine Madman)로 알려진 드룩파 쿤리(1455~1529) 등의 전설이 각 도시와 여행지를 방문할 때마다 등장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미리 알고 가면 부탄 여행이 훨씬 흥미진진해질 겁니다.
9 어딜 가나 남근상
남근상이 부탄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탄만큼 많은 곳도 없을 겁니다. 큰 도시인 팀푸(Thimphu)와 파로(Poro)의 관광객 대상 숍은 물론 민가·음식점·면세점에도 남근상이 있습니다. 부탄에서 ‘다산의 상징’으로 알려진 치미 라캉(Chime Lhakang) 곰파 아래에 있는 솝소카(Sopsokha) 마을의 한 레스토랑에는 왕과 왕비의 사진 앞에도 남근상을 모셔 두었습니니다.
▲국왕과 왕비의 사진 앞에도 버젓이 놓아둘 만큼 부탄 사람들에게 남근상은 친숙하다.
부탄은 몽골과 티베트 등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곳입니다. 또 유사 이래 줄곧 농경생활을 해온 민족입니다. 당연히 다산은 최대의 미덕입니다
10 노 킬링, 노 헌팅, 노 피싱(No Killing No Hunting No Fishing)
불교국가인 부탄은 살생을 금하고 있습다. 그래서 길거리엔 개가 넘쳐납니다. 부탄의 스님은 약 1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스님 숫자만큼 개가 있다’고도 하지요. 개 뿐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파리도 잡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음식점에 파리는 많지 않았습니다.
▲불교국가인 부탄은 윤회를 믿는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부탄의 산과 언덕에 꽂힌 흰 룽다는 장례식장을 의미한다.
물론 부탄 사람들도 고기를 먹습니다. 소고기·돼지고기 등 고기는 인도에서 수입합니다. 고기가 귀해서인지 돼지고기 비계를 바짝 구운 바비큐 등은 아주 맛깔나게 조리를 잘 합니다.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산악지역에서의 사냥도 금지돼 있습니다. 부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활쏘기입니만, 산에서 활을 쏘아 동물을 죽이게 되면 처벌을 받습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도 금지돼 있습니다.
◆ 부탄에 가면 저절로 되는 힐링 6가지
▲만년설 아래 빙하 물이 강을 이루는 곳에 부탄의 도시가 있고,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곰파(사원)가 있다.
『론리 플랫닛 부탄 편』의 서문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왜 당신은 여기 와서 돈을 써야 하는가” 부탄을 1주일 다녀와 세 번째 칭찬 릴레이를 하는 기자도 사실은 고민이 됐습니다. “추천해야 할 이유도 많지만, 추천했다 욕먹을 수도 있겠는 걸
'이상한 나라' 부탄은 자체로 관광상품
숙소로 전해지는 새벽 도량석 종소리
1식 6찬, 고기 빼고 모두 오가닉 푸드
길 가다가 마주치는 야생 동물들
타닥타닥 화톳불 소리에 잠이 들고
'명상의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힐링
우선 망설여지는 이유입니다. 여행비용이 비쌉니다. 현재 국내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부탄 1주일 여행상품은 300만원 정도입니다. 이 비용이면 트레커의 ‘버킷리스트’ 중 한 곳인 네팔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 트레킹’ 15일짜리 여행상품을 예약할 수 있습니다.
비싼 돈을 냈지만, 정작 부탄 정부와 현지 여행사는 “부탄은 위대한 자연을 가졌다”고 자랑할 뿐 정작 속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패키지 투어 대부분은 불교 사원을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히말라야 설산을 걷는 트레킹 상품을 파는 곳은 국내 여행사는 아직 없습니다.
여기에 부탄 여행은 반드시 가이드 동반이여야 합니다. ‘자유’가 묶여있다고 할까요. 저의 경우를 예를 들자면, 취재를 위해 아만코라 포지카(Amankora Phobjika)리조트의 아침 식사만 따로 예약하려 했습니다. 호텔 매니저는 “가이드에게 먼저 연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예약은 했습니다만, 밥 먹는것도 가이드를 통해 따로 예약해야 합니다. 호텔도 정해져 있습니다. 300만원대 상품의 경우 부탄의 3성급 호텔에 묵습니다. 1일 숙식(1박+저녁·조식) 100달러 선입니다. 호텔을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여행상품을 예약할 당시 국내여행사에 주문해야 합니다. 당연히 비용은 더 올라갑니다.
마지막으로 부탄까지 가려면 꼬박 1박2일이 걸립니다. 부탄 파루공항은 네팔 카트만두보다 동쪽에서 있어 직선거리는 더 짧습니다. 하지만 노선이 방콕-파루, 카트만두-파루뿐입니다. 문제를 부탄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이 오전에 한편씩 있기 때문에 어디를 통해 가든 1박2일이 된다는 겁니다. 저는 지난 3월 12일오후 3시 서울 서소문 사무실을 나와 이튿날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1시) 파루공항을 닿았습니다. 22시간 걸린 셈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갈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의 대답은 “예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볼만 합니다.
글·사진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1 부탄, 그 자체가 관광상품
꼬박 22시간, 몸이 녹초가 될 때쯤 부탄에어라인 A319 편은 땅에 닿을 준비를 합니다. 착륙 10분 전,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왼쪽 창문쪽을 보니 만년설로 덮힌 히말라야가 펼쳐졌습니다. 기장이 “날이 좋으면 에베레스트까지 볼 수 있다”고 해서 네팔인줄 알았는데, 부탄 히말라야였습니다. 왼쪽 마샤강(Mashagang·7145m)부터 시작해 ‘테이블 마운틴’으로 불리는 종푸 강(Zongpghugang·7100m), 부탄의 최고봉 강카르푼숨(Gangkhar Puensum·7570m) 등 7000m대 준봉들이 손에 잡힐 듯 했습니다. 3~5월, 9~11월 중에 가면 비행기 안에서 히말라야 설산을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름다운 팀푸 시내 전경. 강 옆 붉은색 지붕 건물이 부탄의 의회다.
마침 파루공항에 내린 3월 13일은 이틀 전 폭설이 내려 해발 2500m 지점까지 눈폭탄이 내려앉았습니다. 5월까지도 눈이 온다고 합니다. 부탄 사람들은 자국 땅을 ‘지구상의 샹그릴라(이상향)’라고 자랑하는데, 이 광경만큼은 ‘정말 샹그릴라네’ 생각이 들만큼 환상적이었습니다.
200석의 크지 않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 앉을 때 보이는 공항 청사의 건물도 독특합니다. ‘공항에 불교 사원이 왜 이렇게 많지?’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부탄의 모든 건물은 다 불교 사원 같습니다. 부탄 정부는 집을 지을 때 반드시 전통 양식을 고수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전통 기법의 창문을 내야 하고, 창호는 연화 문양 등을 생겨야 합니다. 그리고 건물은 3층이상 올리지 못합니다. 단, 수도 팀푸에만 6층까지 허용합니다. 정부의 규제 덕분에 여행객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것이 부탄의 첫 인상입니다. ‘천둥 용의 나라’ ‘샹그릴라’ ‘은둔의 왕국’이 어울리는 공항입니다.
2 자연스럽게 '8·8·8 리듬'에 젖어들다
피곤해 첫날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4시쯤 됐을까요.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들어보니 종(Dzong·행정과 종교를 관할하는 성)에서 들려오는 새벽 도량석(세상을 깨우는 사찰 의식) 타종 소리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머문 숙소는 부탄에서 가장 큰 타시 초에(Tashi Choe) 종과 직선거리로 200m 남짓입니다. 또 이 곳은 새벽엔 차가 안 다니기 때문에 강 건너 닭울음 소리도 옆집처럼 들리는 곳이지요.
▲팀푸 시내 키사 빌라 2층 방 안에서 타시초에 종(DZong)이 보인다.
타종은 우리의 절처럼 긴 여운을 뱉어내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예전 새벽에 울리던 두부장수의 종소리처럼 쨍쨍거린다고 할까요. 교회의 종소리, 수업시간을 마치는 땡땡땡 소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단말마처럼 짧게 끊어치는 종소리는 강 건너 숙소까지 아주 평화롭게 전해졌습니다. 히말라야 동쪽, 해발 2200m 고원 도시 팀푸의 호텔 침대에 누워 아련히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 부탄에서 맞은 첫번째 아침치고는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한 아침입니다.
우연히 들은 종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 이후에도 매일 오전 3시에 눈을 뜨고 범종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이상하게 휴대폰 알람을 예약해놓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낮에 커피를 줄이고, TV를 보지 않고, 저녁에 일찍 잠들고, 숙면을 취한 덕분입니다. 저는 평소 늦게 잠자리에 들고, 새벽 1~2시에 돼야 겨우 잠을 청하는 ‘수면 장애’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탄에 오자마자 싹 바뀌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기자와 1주일 동행한 룸메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평소 밤잠을 설치는 편인데 ‘부탄에선 매일밤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붓다는 밤 9시에 잠이 들어 3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부탄에 가니 저절로 붓다의 리듬을 따라하게 됐다고 할까요. 알고 보니 부탄 사람들의 바이오리듬도 ‘8·8·8’에 맞춰져 있다고 합니다. 하루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점심 시간 빼면 근무는 7시간), 8시간 휴식(Healing)을 취한다고 합니다. 관공서를 비롯해 거의 모든 회사의 퇴근 시간이 오후 5시로 맞춰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하겠지요. 쉴 때는 걷기, 명상, 가족·친구와의 유대에 시간을 할애한다고 하네요. 저 또한 1주일간 그렇게 살다 왔습니다.
3 맛깔난 오가닉 푸드
부탄의 농지는 아주 적습니다. 국토의 약 7%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과 들녘입니다. 부탄 정부는 “국토의 60% 이상을 꼭 숲으로 유지한다”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농사보다는 자연보호가 우선이라는 것이죠. 반면 농사 짓는 땅이 부족하기 때문에 식료품, 특히 채소와 향신료가 귀하고 그래서 비싸게 팔립니다.
▲부탄의 농가에서 내놓는 오가닉 푸드. 왼쪽부터 감자 스프, 고추치즈커리, 돼지고기 비계와 채소를 한데 볶은 부탄의 전통 돼지고기 요리.
부탄의 상차림은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수도 팀푸(Thimphu)의 3성급 호텔 키사 빌라(Kisa villa) 호텔의 첫번째 저녁은 밥과 6찬을 내놓았습니다. 부탄식 파스타, 돼지고기 조림 그리고 감자와 채소를 이용한 나물류입니다. 부탄은 나라 안에서 살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는 인도에서 수입합니다. 돼지고기 빼고 나머지는 모두 부탄에서 나는 산물이지요. 그리고 “부탄에서 나는 모든 식품은 오가닉(Organic)”입니다. 쌀과 밀, 메밀, 고추, 채소류는 모두 오가닉이라고 보면 됩니다. 돌아다니며 들판을 유심히 보았지만 화학비료를 뿌리거나 쌓아놓은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농가의 창고 또한 그렇습니다.
농경 국가 부탄의 나물 반찬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조미료 없이 살짝 데치거나 볶아서 내놓습니다. 나물은 싱겁게 간하는데, 고기는 아주 짠 편입니다. 아무래도 냉장고가 없던 시절, 고기를 보관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은 서양식으로 빵과 우유, 차 등을 선보입니다. 같은 곳에서 이틀을 묵었는데, 다음날 저녁은 대동소이한 메뉴에 고기 반찬만 돼지고기에서 소고기로 바뀌었습니다.
▲부탄 뷔페식 식사. 우리의 비빔밥처럼 고기와 삶은 채소를 한데 섞어 먹는다.
이동 중에 들르는 관광객 전용 레스토랑은 뷔페식입니다. 메뉴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것과 거의 흡사합니다. 1주일간 돌아다녀 보니 돼지고기 조림은 아주 대중적인 요리였습니다. 살코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꺼운 돼지 비계를 얇게 잘라 바짝 졸이거나 채소화 함께 기름에 튀깁니다. 비계는 노릇노릇해지기 직전, 즉 바싹 익히지 않은 상태로 나옵니다. 그래서 입안에서 살살 녹습니다. 저는 평소 한국에서 돼지 껍데기구이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부탄에서 이 메뉴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4 길 가다 만난 원숭이, 산책 중 만난 독수리
지난 1월 한국을 방문한 부탄의 레케이 도르지 경제 장관은 “부탄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야생동물이 늘고 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 왕디 챠도르(33)도 부탄의 다양한 트레일(Trail)을 설명하다가 “부탄은 뱅골호랑이 개체 수가 늘고 있는데, 방글라데시쪽에서 호랑이 사냥이 늘면서 부탄쪽으로 대피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 느닷없이 만난 부탄 원숭이. 4~5m 거리까지 근접했지만 도망가지 않는다.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한 말이라 단지 그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들었지만, 가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출라 패스(Dochula pass·3150m) 근방에서 야생 원숭이 떼를 만났습니다. 원숭이떼는 4~5m까지 근접해 카메라를 들이대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난생 처음 코앞에서 야생원숭이와 맘껏 교유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소를 뜯는 독수리와 까마귀. 포지카 동네를 산책하다 만난 장면이다.
포지카의 잣나무숲을 산책하던 중에는 죽은 소를 뜯어먹는 독수리를 봤습니다. ‘동물의 왕국’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눈앞에서 전개돼 깜짝 놀랐습니다. 가이드도 “이 곳에서 새사냥을 하는 수리는 많이 봤지만 저렇게 큰 독수리가 동물을 뜯는 광경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독수리가 소를 먹는 바로 옆엔 농부들이 감자를 심고 있었습니다. 가히 야생동물의 천국입니다. 어쩌면 다음번 부탄 여행을 하게 될 때는 트레킹을 하다 뱅골호랑이와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5 타닥타닥 화톳불 소리 나는 잠자리
새벽 종소리와 더불어 부탄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부탄의 여러 곳에서 팜스테이(Farm stay)를 운영하고 있는데, 중부 지역 왕두 포드롱(Wangdue Phodrong)의 포지카(Phobjikha·3140m) 마을은 그 중 가장 유명합니다. 부탄의 몇 안 되는 럭셔리호텔 아만코라 포지카(Amankora Phobjikha)를 비롯해 롯지(Lodge) 스타일의 호텔, 그리고 대여섯군데의 팜스테이가 있습니다.
▲방 안에 설치된 장작 난로 앞에서 휴식. 부탄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기자는 팜스테이에 묵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곳에서 전통식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철 학이 날아든다는 포지카 평원을 서너시간 트레킹한 후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이 곳의 저녁 식사도 팀푸의 호텔과 다르지 않습니다. 밥과 고기류 하나, 그리고 대부분 채소를 볶거나 삶은 나물 반찬이 제공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체험은 방에 놓인 장작 난로였습니다. 방마다 장작을 때 난방을 했는데, 특이한 점은 연기통을 창문으로 내지 않고 벽 속에 묻었습니다. 아마 연통을 통해 호텔 전체가 난방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작에 불을 붙이는 방법도 독특합니다. 장작을 넣고 톳밥을 밑에 뿌려 불을 사리는데, 성냥불을 갖다대자마자 불이 일어납니다. 톳밥을 자세히 보니 석유가 묻어있었습니다. 불을 붙이기는 쉽지만, 기름 묻은 톳밥을 난로 곁에 두면 위험하니 반드시 방 밖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포지카는 해발고도가 3000m가 넘습니다. 어둠이 내리면 다운 재킷을 입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갑니다. 한여름에도 반팔로 견디기에는 춥습니다. 이럴 때 장작 난로는 맞춤이죠. 추위를 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낭만적인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기자의 룸메이트는 아쉽게도 동성이었습다. 커플이라면 더 없이 좋은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발 3000m 고원에서 타닥타닥 화톳불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드는 밤. 그지없이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6 여행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
부탄서 만난 사람 모두 친절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포지카에서 우리에게 밥을 해준 농가의 아낙은 우리가 식사를 하는 내내 밥주걱을 들고 있었습니다. 밥그릇에 밥이 줄어들라치면 그때마다 “더 더”라며 밥을 퍼주려 했습니다. 곤혹스럽긴 했지만, 예전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의 모습과 떠올라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그 밖에에도 거리의 택시운전사, 전통 토속품을 파는 가게의 점원, 호텔 레스토랑·객실 담당 직원 모두 친절합니다. 부탄에도 한류 열풍은 불고 있는데, 아마 그래서 한국인에게 더 친절한 건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푸나카종(Punakha Dzong). 기자와 동갑인 스님을 만난 곳이다.
푸나카 종(Punakha Dzong)에서는 민두 도르지라는 스님을 만났습니다. 얘기하다보니 그는 동갑(1974년생)이었습니다. 열살 때 가사(Ghasa) 지역에서 출가해 30여 년을 수도승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탈춤을 추는 예술인입니다. 부탄은 크고 작은 사원마다 페스티벌을 여는데, 그는 축제를 여는 절을 돌아다니며 탈춤을 춥니다. 또 절에 있는 학승들에게 탈춤을 전수하는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그를 만난 때는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의 한때였습니다. 그는 벤치에 등을 대고 온 몸에 햇살을 가득 안은 채 마치 기절한 듯 앉아 있었습니다. 말투 또한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외우는 것처럼 웅얼웅얼 했습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명상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열살에 출가해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 허허, 계획은 없다. 지금처럼 절을 돌아다니며 탈춤을 추고 스님들에게 탈춤을 가르치며 살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살 지는 모르겠지만, 부탄의 스님에게도 은퇴 나이가 있다. 내 나이 마흔 셋인데, 예순둘이면 은퇴한다. 그 이후로는 또 이 절 저 절을 돌아다니며 죽을 때까지 명상을 하며 지낼 것이다. 명상은 나의 의무이자 즐거움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명상을 하다 가고 싶다.”
▲부탄의 창건설화가 간직한 탁상 곰파(Takshang Gompa). 부탄 사람들이 평생 한 번은 꼭 들른다는 불교 성지다.
가이드를 통해 몇 마디 나눈 짧은 대화였지만, 스님의 말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유심히 지켜보며 ‘욕심 부리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삶이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일상 풍경
▲부탄 국왕 결혼식 2011.10.13.부탄 푸나카의불교사원
▲나고 라 1,829m
▲셀레 라 페디 4,100m
▲랍체 4,580m
▲랍 상라 5,616m
▲고산의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