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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여행/ 국가별24/ 방글라데시 - 베네수엘라 - 베트남1

상림은내고향 2022. 5. 18. 16:59

지구촌 여행/ 국가별24/ 방글라데시 - 베네수엘라 - 베트남1

■ 방글라데시 Bangladesh

▲국기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이며, 국민 대다수는 벵골어를 쓰는 벵골인이고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1947년에 인도가 분리되면서 나라는 파키스탄의 동벵골 지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동파키스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파키스탄의 5개 지방 중 하나로, 파키스탄의 다른 4개 지방으로 구성되는 파키스탄 영토로부터 1,800㎞가량 떨어져 있다. 1971년 독립국 방글라데시가 수립되었다. 독립 이후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했으나 1983년에 거의 모든 분야가 다시 사유화되었다. 전체 노동력의 3/5가량이 농업에 종사한다.

 

수도는 다카(Dhākā: 옛날에는 Dacca라고 썼음)이다. 북위 20°34∼26°38′, 최북단과 최남단 사이의 거리가 약 625km이고 동경 88°01∼92°41′, 동서길이는 약 305km이다.

 

남쪽은 벵골 만에 면하며 남동쪽은 미얀마와 경계를 이룬다. 인도와는 서쪽과 북쪽으로 서벵골 주, 북동쪽으로 아삼·메갈라야 주, 동쪽으로 트리푸라·미조람 주와 접해 있다. 인도 아대륙의 북동쪽에 있는 파드마 강(갠지스 강)과 자무나 강(브라마푸트라 강)의 삼각주 지역에 위치한다.

 

'벵골의 땅'이라는 의미의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이며, 국민의 대다수는 이슬람교도이다. 벵골이라는 역사적 지역의 동쪽 부분으로서, 그 지역은 이후 인도의 웨스트벵골 주를 따라 영국령 인도에서 벵골 지방을 형성했다.

 

1947년에 인도가 분리되면서 나라는 파키스탄의 동벵골 지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동파키스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파키스탄의 5개 지방 중 하나로, 파키스탄의 다른 4개 지방으로 구성되는 파키스탄 영토로부터 1,800㎞가량 떨어져 있다. 1971년 국가는 방글라데시라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인도의 초기 산스크리트 문학(BC 1000경)에서 삼각주 지대에 자리잡은 방(Vanga/Banga : 여기서 벵골과 방글라데시라는 말이 유래함)라는 왕국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BC 4세기 무렵 벵골은 인도 마우리아 제국(BC 325경∼185)에 속했으며 이때 불교가 전래되었다. 4세기에는 인도 북동부 마가다 지역에 자리잡은 굽타 왕조로 넘어갔으며 750∼1200년에는 토착 벵골 왕조인 팔라 왕조와 세나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힌두 왕조인 굽타 왕조를 제외하고는 장기간에 걸쳐 불교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10세기까지 단연 힌두교가 우세했다.

 

이슬람교도들이 10세기가 끝나갈 무렵 인도 북부로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206년 델리에서는 슬라브 또는 맘루크라고 알려진 왕조가 수립되었다. 1338년 벵골은 델리 술탄 왕조에서 분리되어 독립했으며 한참 뒤인 1576년 무굴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무굴 제국이 통치하던 기간에 유럽 상인들이 벵골 지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65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에 공장을 세웠다. 벵골에서 무굴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벵골의 이권에 대한 동인도회사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플라시 전쟁(1757)에서 동인도회사의 로버트 클라이브는 벵골의 태수(nawab)를 굴복시키고 영국의 이권에 더 호의적인 인물을 벵골의 후계자로 세웠다. 1765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의 세금징수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로써 영국의 실질적인 인도 지배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정책은 벵골인들에게 많은 경제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벵골 지방의 수공업, 특히 모슬린 산업은 영국 기계로 만든 제품들이 도입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천연자원들이 영국으로 유출되었다.

 

영국의 정책으로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슬람교도의 압력으로 영국은 1905년 벵골을 분할해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동(東)벵골을 만들었다. 1년 뒤 다카에서는 인도 이슬람교도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공동조직인 이슬람교도 연맹(Muslim League)이 결성되었다. 힌두교도들이 과격한 반응을 보이자 분할정책은 1912년 철회되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1947년 영국이 인도대륙에서 물러나면서 동벵골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의 일부로서 동파키스탄이 되었으나, 우세한 서파키스탄과 1,600km나 떨어져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도 서로 다른 채 분리되어 있었다. 벵골의 민족주의적 감정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정당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은 공개적으로 벵골의 자치권 획득을 위한 운동을 펴 나갔으며 1970년 국회에서 다수의석을 획득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국회 소집을 지연시켰고 이어 폭동이 일어나고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수백 만 명이 인도로 피난했으며 인도는 마침내 벵골인들의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다. 서파키스탄은 패배했으며 1971년 12월 16일 수도를 다카로 한 독립국 방글라데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무척 컸으며 독립 이후에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초대 대통령 세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1975년 암살되었고 그의 후계자 지아 울라만 역시 1981년에 암살되었다. 1982년 또다시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호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가 진압하고 1984년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0년에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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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거리

기이한 귀성객 전쟁

 

 

 

 

 

 

 

 

 

 

 

 

 

 

 

 

 

 

 

 

 

 

 

 

 

 

 

 

 

 

 

 

 

▼독립을 기념하며

 

▼이드 알피트르는 단식 성월인 라마단을 무사히 마친 것을 사흘동안 신께 감사하고 축하하는 이슬람 명절

 

□ 재해

 

 

 

 

 

 

 

 

 

 

 

▲여객선 침몰 33명 사망 11.4.20.

 

 

베네수엘라 Venezuela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Repu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

      ▲국기

 

베네수엘라에서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 시대의 인디언 문화는 흔히 알고 있는 안데스 산맥 및 중앙 아메리카 문명에 속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의 초기역사는, 이른바 안데스 산맥 주변지대의 문화가 카리브 해 및 아마존 강 유역의 문화와 결합된 변이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16세기에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오기 전까지 적어도 BC 2000년부터 고립된 종족들이 해안지역 및 야노스 평원지역에 널리 거주했다. 1498년 콜럼버스가 3번째 항해중에 베네수엘라의 해안을 발견했고 다음해에 스페인의 탐험가들이 늪이 많은 마라카이보 호 연안을 따라 지주 위에 자리잡은 인디언 원주민 부락을 보고 베네수엘라('작은 베네치아')라고 이름지었다.

 

300년 동안 베네수엘라는 스페인 식민지로 있으면서 스페인에서 온 성직자와 관료들의 지배를 받았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올이 이곳 식민지의 부유계층으로 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민족들을 예속시켰다. 1810∼25년 이들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와 시몬 볼리바르를 주축으로 해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821년 스페인이 패하고 나서 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에콰도르와 함께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1830년 탈퇴해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1830∼1958년에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1870∼88), 시프리아노 카스트로(1899∼1908), 후안 비센테 고메스(1909∼35) 장군 등을 비롯한 독재자에게 잇달아 통치를 받았다.

 

베네수엘라는 1844년부터 이전에 영국령 기아나였던 가이아나와 가이아나 영토의 약 2/3 지역을 두고 영토분쟁을 계속해왔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옛날에 스페인 영토였다는 것을 근거로 남북으로 흐르는 가이아나 중부의 에세퀴보 강을 동부 국경이라고 주장했다. 1899년 판정이 내려진 이후 대체로 영국과 가이아나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열대우림에 속하는 이 지역이 베네수엘라 지도에는 아직도 되찾아야 할 영토로서 표시되어 있다.

 

고메스가 지배한 전제적인 독재정권시대는 도로·학교건물 건설 등을 포함한 이권이 손쉽게 외세에 넘어갈 수 있는 여건이 조장된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네덜란드·미국 같은 나라들이 석유 이권에 큰 관심을 갖고 접근해왔으며, 1920년대말 베네수엘라는 생산량에서 미국 다음가는 세계적인 석유수출국이 되었다. 1940, 1950년대의 석유 붐으로 정부는 막대한 광구 사용료를 받아냈다. 독재자의 지배가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동안 이 자금 가운데 일부는 공공사업에 쓰이기도 했는데, 농촌지역 개발을 방치한 채 카라카스를 현대화하는 사업에 특히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1958년 군사독재자인 페레스 히메네스가 전복되고 민주선거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주로 좌파 정권이 통치했다. 로물로 베탄쿠르는 베네수엘라 최초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임기(1959∼64)를 만료했다. 그는 사회경제 발전을 이끌었고 마침내 정치적·경제적 안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베탄쿠르 이후 20년 동안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5번 바뀌었다. 1980년대초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경제불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확고히 다져졌다. 경제가 석유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뚜렷했던 석유수요의 급속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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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4  차베스 포퓰리즘 몰락 우파 도미노의 시작?

베네수엘라의 통화는 볼리바르다. 통화의 이름은 ‘남미의 해방자(Libertador)’라는 말을 들어온 시몬 볼리바르(1783~ 1830)의 성()과 똑같다. 볼리바르는 1820년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5개국을 독립시킨 전쟁영웅이다. 그의 꿈은 이들 5개국을 하나로 합쳐 거대한 통합 남미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각 지역의 분열과 미국의 반대 등으로 무산됐다. 하지만 이들 5개국은 지금도 볼리바르를 국부(國父)로 떠받들고 있다. 볼리비아도 ‘볼리바르의 나라’라는 뜻이다. 베네수엘라의 국명도 공식적으론 ‘볼리바르 베네수엘라 공화국’이다.
   
   
남미 최대이자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자랑해온 베네수엘라가 사상 최악의 경제난에 빠진 가운데 국부의 얼굴이 들어간 볼리바르화가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고 있다. 볼리바르화의 가치는 치솟는 인플레로 이미 땅바닥에 떨어졌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적용하고 있는 공식 환율은 달러당 6.3볼리바르지만, 암시장에선 달러당 1003볼리바르에 거래되고 있다. 볼리바르화 가치는 지난 1년간 81% 떨어졌고 올 들어 한 달 동안 16.9%나 폭락했다.
   
   
베네수엘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놓여 있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말 그대로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0%로 전년의 -4%에 이어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올해 GDP성장률을 -8%로 예상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국채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6986.77bp(1bp=0.01%포인트),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국채 1억달러어치를 살 경우 부도위험을 헤지(회피)하려면 6987만달러의 보험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고통지수(misery index) 159.7, 역시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2위인 아르헨티나(39.9)에 비해 네 배나 된다. 고통지수는 미국 경제학자 아서 오쿤이 고안한 것으로 물가상승률에 실업률을 더한 수치를 말한다.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삶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베네수엘라의 지난해 물가상승률은 98.3%, 실업률은 6.8%를 기록했고, 올해 물가상승률은 152%, 실업률은 7.7%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IMF는 베네수엘라의 올해 실제 인플레율이 720%를 기록하면서 전 세계 최고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물가 폭등에 따른 화폐 가치 폭락으로 현금이 부족해지자 외국에서 비행기로 볼리바르화를 실어 나르고 있다. 실제로 근사한 저녁 한 끼라도 먹으려면 돈다발을 들고 식당에 들어가야 한다. 토르티야와 비슷한 옥수수로 만든 빵인 아레파는 1000볼리바르나 한다. 아레파를 사먹으려면 가장 높은 단위의 지폐인 100볼리바르화(미화 10센트) 10장을 내야 한다. 현금자동인출기(ATM)는 하루 일일 인출 한도를 6000볼리바르까지 제한하고 있지만, 암시장에서 6달러에도 못 미치는 돈이다. 심지어 냅킨이 없어서 2볼리바르 지폐를 엠파나다(파이)를 싸서 먹는 데 사용하는 사례도 있다.
   
   
도둑들이 볼리바르화를 훔쳐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부족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최소 50억장의 볼리바르화 지폐를 외국에서 들여왔다. 각국은 대부분 자국에서 지폐를 찍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우 대규모로 지폐를 제작하는 시설이 없어 지폐를 해외에서 찍어 들여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앞으로 지폐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여 100억장을 주문했다고 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중앙은행(ECB)이 연간 찍어내는 지폐 80억장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게다가 베네수엘라는 미국으로부터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그 이유는 국제유가가 폭락해 재정이 파탄 난 베네수엘라 정부가 자국의 원유를 뽑아내 정제하는 데 드는 비용이 원유를 수입하는 것보다 더 비싼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산 원유는 정제하기 힘든 중질유이다. 중질유는 유황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정제와 저장 비용이 많이 든다. 반미(反美)의 기수였던 베네수엘라 정부로선 값싼 미국산 경질유를 수입하는 것이 재정난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자존심까지 접은 것이다.  


   
차베스, 國庫 탕진의 장본인 

   베네수엘라가 경제 파탄에 빠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국제유가의 폭락이 주요 요인이다. 미국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는 2980억배럴의 원유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5위 원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는 국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에 의존해왔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안팎을 유지해야 나라살림이 유지될 수 있다. 2014년 중반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대에 거래되던 국제유가는 올 들어 20~30달러대로 폭락했다. 이 때문에 국고(國庫)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외환보유고는 100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리카르도 하우스만 미국 하버드 국제개발센터 소장은 “베네수엘라의 국가부채 등을 감안할 때 100억달러 미만의 외환보유액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면서 “베네수엘라가 산유국으론 첫 번째 디폴트(채무불이행)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미 제3위의 경제 대국인 베네수엘라의 국가 부채 규모는 무려 1200억달러에 달한다.
   
   
또 다른 이유는 그동안 원유를 팔아 벌어들인 돈을 펑펑 써댔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국고를 탕진한 장본인은 바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다. 중남미 급진좌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차베스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차베스는 1982년 ‘볼리바르 혁명운동’이라는 군부 지하 정치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차베스는 공수부대 중령이던 1992 2월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해 2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와신상담하던 차베스는 1994년 제5공화국운동당을 창당하고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과 연대해 1998 12월 대선에서 4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4선을 기록하면서 2013 3월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장기집권을 했다.
   
   
차베스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저가주택 공급, 휘발유와 생필품을 무료로 나눠 주는 등 포퓰리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차베스의 야심은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국가’로 환골탈태시킨다는 것이었다. 볼리바르 혁명이란 국부인 볼리바르가 주창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남미 통합을 뜻한다.
   
   
특히 차베스는 쿠바식 사회주의 모델을 추종해왔다. 실제로 그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해 천연자원을 국유화하는 등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해왔으며, 대규모 예산을 빈민 구제 프로그램에 투입하는가 하면, 분배를 강화하는 내용의 각종 법률을 제정하는 등 베네수엘라를 남미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의사가 모자라자 석유를 주고 쿠바 의사들을 수입했다.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유휴 토지를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남의 땅을 불법 점유했더라도 점유기간이 10년 이상이면 점유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심지어 자신의 정책을 비판해온 신문사와 방송사를 폐쇄하는 등 언론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또 이란 핵 문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 현안에서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했으며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쿠바, 니카라과 등 중남미 좌파 국가들을 적극 지원해왔다.   


   
우파 도미노의 핵심 가능성 높아 

   차베스의 잘못된 정책은 베네수엘라 경제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차베스는 물가안정을 이유로 자국에서 생산한 공산품 가격을 강제로 낮추고, 해외에서 공산품을 구입해 헐값에 뿌렸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에선 제조업 기반이 사라졌으며,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치약, 비누, 기저귀, 식용유 등 생필품들은 상점에서 거의 살 수 없을 정도다. 수도 카라카스에선 상점과 슈퍼마켓들마다 생필품을 사려는 주민들이 줄을 길게 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차베스의 시신이 안장된 볼리바르 광장의 군 혁명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대형 국영 상점 앞에도 식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대신 서주는 직업도 등장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정부의 각종 보조금과 지원금의 규모는 전혀 줄지 않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석유보조금이다.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우리나라 돈으로 23원이다. 4만리터 탱크를 가솔린으로 가득 채워도 10달러밖에 들지 않는데, 이를 가져다 콜롬비아에서 팔면 2000배의 가격에 팔 수 있다. 쌀도 공식적으론 1㎏당 16볼리바르지만, 암시장에서는 30배의 가격에 팔리고 해외에 내다 팔 경우 더욱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다. 각종 불법 거래 규모는 한 해 20억달러에 달하며, 하루 10만배럴의 석유와 수입 식품의 30%, 상품의 40%가 밀매로 빠져나간다. 차베스의 선심 정책이 국민들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을 부채질한 셈이다.
   
   
경제난이 심화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정부는 뾰족한 대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포퓰리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운수노조 지도자였던 마두로 대통령은 자신을 차베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차비스타(Chavista)’라고 부른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마두로 대통령을 ‘짝퉁 차베스’ ‘실패한 후계자’라면서 비판하고 있다.
   
   
오는 2019년까지 임기인 마두로 대통령의 실정(失政) 때문에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통합사회주의당은 야당연합인 국민연합회의에 참패했다. 국민연합회의는 의회 전체 167석 중 3분의 2 2석이 모자란 109석을 차지했다. 국민연합은 마두로 대통령의 임기 중반인 2016 4월 이후 국민소환이 가능하다는 헌법 조항에 따라 전체 유권자 20%의 서명을 받아 선관위에 제출한 뒤 재신임 투표를 추진하려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치솟는 물가와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 경제 파탄 등으로 지지층인 서민들마저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마두로 대통령은 자칫하면 임기를 채우기 어려울 수도 있다. 베네수엘라 빈곤층 비율은 2년 전 27%에서 현재 75% 50%포인트 가까이 폭증했다.
   
   
특히 국제유가 폭락은 베네수엘라 경제를 더욱 낭떠러지로 밀고 있다. 원유에 기댄 경제구조는 차베스 전 대통령 집권기간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국제유가가 폭락하자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최근 가뭄에 따른 전력난까지 겹치면서 100여개에 달하는 쇼핑몰 영업시간까지 반강제로 단축됐다. 가뜩이나 생필품 사기도 어려운데 쇼핑몰까지 문을 닫자 민심은 크게 요동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베네수엘라 정부가 중남미 지역에서 창궐하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 감염환자의 숫자를 축소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보건부는 1년 전부터 주간 보건통계 공고를 하지 않고 있어 신생아에게 소두증(小頭症)을 유발시키는 지카 바이러스와 관련된 공식 통계 자료가 없다. 더욱이 해열제나 모기 살충제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도 높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베네수엘라가 앞으로 디폴트를 선언한다면 중남미의 좌파 국가들은 정치·경제적으론 물론 심정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베네수엘라는 그동안 중남미에서 급진좌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또 반미주의를 구심점으로 뭉친 볼리바르동맹(ALBA)도 자칫하면 와해될 수 있다. 볼리바르동맹은 차베스가 2004 12월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지역 통합구상에 대항해 중남미와 카리브해의 9개국을 규합해 만든 지역 공동체이다. 중남미에서 역() 좌파 도미노가 나타날 수 있다. 좌파 핵심인 베네수엘라가 우파 도미노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국가를 파탄 지경으로 몰아넣은 차베스의 ‘볼리비아 혁명’은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점이 입증된 셈이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포퓰리즘의 말로(末路)가 얼마나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교훈이다.

출처주간조선 2395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 2016-05-29  굶주린 석유왕국 베네수엘라… “시민들, 개-비둘기 사냥”

정국 불안에 경제활동 올스톱 

 남미 좌파 진영의 중심이던 산유국 베네수엘라가 길거리의 개와 고양이, 심지어 비둘기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저유가에다 좌파 정권의 무능한 정국 운영으로 생필품 수입이 거의 중단됐기 때문이다. 

분노한 시민들과 야권은 ‘경제 파탄’ 책임을 물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몰아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마두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맞서면서 정치 경제적인 혼란 상황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연일 야당 주도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면서 베네수엘라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돼 가고 있다. 

미국 USA투데이는 18(현지 시간) 현지 르포 기사를 통해 베네수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고 전했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속한 차카오 시의 라몬 무차초 시장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시민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광장에서 개와 고양이를 사냥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글을 올렸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거리의 개와 고양이, 비둘기 등을 잡아먹는 것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전문 온라인매체 팬암포스트 등에 따르면 배고픈 사람들은 길거리나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채소를 주워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심지어 키우던 애완용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고 전했다. 군인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최근엔 군인 6명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인근 농장의 염소를 훔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들은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한 행위’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소속 부대에는 식량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식료품이 진열대에서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 USA투데이 기자는 카라카스에서 남서쪽으로 88km 떨어진 빅토리아 시의 한 식료품점 앞에서 길게 줄 서 있는 300여 명의 시민들을 만났다. 옥수수나 쌀이 들어올 수 있다는 기대감에 무작정 기다리는 줄이었다. 빅토리아 시에서는 1주일 전부터 밀가루 공급이 끊겨 빵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전국 평균으로도 식료품 재고는 보름 분량뿐이다. 

 

의약품 부족이 심각해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봐야 하는 부모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다. 농장 노동자인 루이스 아빌라 씨(42)는 “네 살배기 딸이 암에 걸렸는데 아무런 치료를 못 하고 있다”며 “마두로가 이 나라를 파괴하고 있다”고 절규했다. 

가뭄으로 수력발전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의 전력 사정까지 급격히 나빠져 생활고를 부채질하고 있다. 쇼핑몰은 물론이고 병원까지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기를 아끼기 위해 공무원들은 1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형편이다.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실직한 로베르토 산체스 씨(36)는 “우리에겐 먹을 음식이 없고 전기는 하루 4시간씩 끊기면서 범죄율이 치솟고 있다”며 “베네수엘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말했다.


국제사회도 마두로 대통령의 독단적인 태도에 비판적이다. 루이스 알마그로 미주기구(OAS) 사무총장은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마두로 대통령은 반역자”라며 “국민소환 투표 절차를 방해하면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국내외의 음모가 아닌 대통령의 형편없는 리더십 때문”이라며 “열악한 의료시스템과 치안 불안,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 위기 등을 방치해 왔다”고 사설을 통해 비판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마두로 대통령의 16일 국가비상사태 포고령에 반발해 이번 주 거의 매일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18일에도 수천 명의 시위대가 수도 카라카스에서 국민소환 투표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던 도중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베네수엘라 야당은 현재 185만여 명이 서명한 국민투표 청원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상태다. 전체 유권자의 20% 400만 명 이상이 청원에 서명해야 국민소환 투표가 진행된다. 국민소환 투표가 실시되더라도 마두로 대통령이 2013년 대선에서 얻은 760만 표 이상의 거부표가 나와야 마두로 대통령은 물러나게 된다.

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 2016.06.11  석유富國 베네수엘라, 식품 배급 국가로 전락

[차베스 후계자 마두로 대통령도 포퓰리즘… 나라 꼴 '만신창이']

억지 환율로 시장 기능 마비… 빵·휴지 등 생필품 부족 사태
맥아 수입 못 해 맥주 생산 중단
굶주린 시민들 쓰레기 뒤지고 배 채우려 개·고양이 사냥하기도

 

외화 고갈로 상품을 수입하지 못해 극심한 생필품난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공산국가식 '기초식품 배급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엘 나시오날 등 현지 언론은 9(현지 시각) "여당인 사회당이 기초식품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당 하부 조직인 지역생산·공급위원회(CLAP)가 현지에서 생산되는 식료품의 70%를 구매해 국민에게 직접 배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범죄 조직과 민간 유통업자들이 식료품을 사재기하거나 암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직접 식료품을 대량 구매해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를 추진 중인 야당은 "또 하나의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 정책"이라고 반발했다. 국민도 '배급을 제대로 할 능력이 있겠느냐'며 정부를 믿지 못하고 있다.


석유 매장량 1위로 한때 남미 최고 부국(富國)이었던 베네수엘라는 전임 우고 차베스 대통령 시절 무상 복지 정책과 퍼주기로 경제가 기울었고, 최근엔 국제 유가까지 폭락하면서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외화 고갈로 물품을 수입하지 못해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올해 인플레이션이 30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공식환율을 달러당 10볼리바르로 고정하고, 50여 개 생필품은 가격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 환율이 달러당 1000볼리바르에 이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무리하게 가격을 통제하자 시장 기능이 사실상 마비돼 버렸다. 비싼 돈을 주고 수입한 원재료로 만든 제품을 정부가 정한 싼 가격에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시장에 물건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최근 코카콜라 베네수엘라 공장은 "설탕이 없다"며 생산 잠정 중단을 선언했고, 베네수엘라 맥주의 80%를 생산해온 폴라르그룹도 맥아를 수입할 외환이 없다"는 이유로 맥주 생산을 중단했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마지막 생명선은 정부가 공식환율로 수입해 국영 수퍼마켓을 통해 공급해온 생필품이었지만, 정부도 달러가 없어 수퍼엔 물건이 없다.


수도(首都) 카라카스의 무차초 시장은 최근 트위터에 "시민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광장에서 개와 고양이를 사냥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AP통신도 "해가 지면 카라카스의 중소기업가와 연금 수급자 등 중산층까지 시내 상점에서 버린 썩은 과일이나 채소 더미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길모퉁이의 쓰레기 더미로 몰려든다"고 지난 8일 보도했다. 지난달 말엔 "약이 없다"는 동영상을 온라인에 올렸던 림프종 투병 8세 소년이 끝내 숨져 국민을 분노하게 한 일이 있었다.


항공권 판매금을 받지 못한 남미 최대 항공사 라탐, 독일 루프트한자, 미국 아메리칸항공 등 외국 항공사들이 베네수엘라 취항을 무기한 중단해 하늘길마저 쪼그라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달 14 "'베네수엘라 파시스트 세력'의 요청을 받은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안정을 뒤흔들고 있다" 60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9일엔 마두 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 절차를 허용해달라고 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야당 의원들이 친정부 시위대로부터 쇠파이프 등으로 폭행을 당해, 일부 의원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카라카스의 한 한국인 사업가는 "공산국가식 배급제가 경제를 호전시킬 리는 만무하고, 친·반정부 세력 간 충돌이 심상치 않아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조선일보  뉴욕=김덕한 특파원

 

◆일상

▲베네수엘라의 선거 유세 장면 - 13. 4. 10. 메리다주 대선 후보자들의 유세

 

▲포퓰리즘의 말로 16.7.11

 

 

 

 

 

 

 

 

 

 

 

 

 

 

 

 

 

◆ 볼거리

앙헬 폭포(스페인어: Salto Ángel, 영어: Angel Falls, 문화어: 안헬 폭포)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주의 카나이마 국립공원에 있는 폭포이다. 엔젤 폭포라고도 한다. 총 높이 979m, 최대 낙차 807m, 너비 15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이며 유수량이 적을 때는 물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안개가 되어 날아가기도 한다.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로 1910년 베네수엘라의 탐험가 에르네스토 산체스 라 크루즈(Ernesto Sanchez La Cruz)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1933년 11월 18일, 비행기로 광물자원을 탐사하던 지미 엔젤(James Angel)에 의해 재발견되어 널리 알려졌고 폭포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6tJjfLxx4NY&feature=player_detailpage   -  Salto Angel | Kerepakupai Vená - Venezuela

 

 

 

■ 베트남 Vietnam 1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언어 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국기

 

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다.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 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호치민(Hồ Chí Minh 胡志明)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의 개입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 전쟁(Vietnam War) 베트남 전쟁 당시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들의 모습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크메르루즈). 이에 대응해 중국군이 베트남의 북쪽 국경을 따라 공격을 개시해 베트남의 영구 군사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약 40km 정도 진격해 들어왔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로부터 병력을 끌어오지 않고 중국군의 진격을 막았지만 9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많은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에 따라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종료했다.

 

심각한 경제상황과 소련에서 전개된 유사한 개혁 조치들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민간기업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들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개혁을 감행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아시아 및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으며, 이로써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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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둘러보기

2014-12-21 이상흔  조선일보

(1) 호찌민 박물관과 바딘 광장

베트남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1억명에 이르며, 전체 인구의 68%가 농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경제발전 수준은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기 전인 1970년대 초반의 상황과 비슷하다.
 
현재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 수준이며, 농업부문의 국내총생산(GDP)이 전체 GDP 20% 정도를 차지한다. 인구의 70% 정도가 30대 이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외세(外勢)와 오랜 전쟁을 겪은 안타까운 역사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한다.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1.5배에 이른다. 1986년 개방정책인 '도이모이' 정책 이후 연평균 7~8%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해 오다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약 5%대로 성장하고 있다. 주 베트남 대사관 측은 베트남에 현재 우리 기업 3300여 개가 진출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는 통킹 삼각주의 홍강(紅河:홍하)이 둘러싸고 있다. 홍하 내부에 있다고 해서 하내(河內)라고 불리며,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베트남 북부를 지배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곳에 도독을 두고 하노이와 베트남을 다스렸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와 최대 도시인 호찌민市의 관광지 몇 곳을 사진 기사로 연재할 예정이다. 그 첫번째로 하노이의 대표 관광지인 호찌민 박물관과 호찌민의 시신이 안장된 바딘 광장을 소개한다

 

▲하노이 시내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은 1990년 호찌민 탄생 100년 기념에 맞춰 개관했다. 구 소련의 원조로 지어졌으며, 내부 전시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박물관 입구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베트남 최고의 영웅 호찌민 동상. 관광객의 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다. 호찌민은 1890년 베트남 북중부의 응에안성()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69년 서거했다.

 

▲젊은 시절의 호찌민. 호지민은 1917~1923년 프랑스에서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펼쳤다. 박물관에는 프랑스 시절의 호찌민 관련 자료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젊은 시절 호찌민의 활동과 그의 생가 모형, 애용품, 편지 등도 볼 수 있다.

 

▲한시(漢詩)로 쓴 호찌민의 '옥중일기'. 호찌민은 1942년 중국 국민당의 간부를 만나기 위해 중국 사천성 중경을 방문했다가 프랑스와 일본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 국민당 특무대에 의해 체포된 후 18개월간 감금된 적이 있다.

 

▲호찌민이 독립을 위해 외세와 투쟁하던 시절의 베트남 생활상을 전시해 놓은 모습.

 

▲대 프랑스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의 무기들.

 

▲박물관에는 호찌민 주석이 각국 외교 사절로부터 받은 선물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바로 옆 광장에는 호찌민 묘가 조성되어 있는 바딘 광장이 있다. 바딘 광장은 호찌민이 1945년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한 곳이다호찌민 묘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 9 2일 건국기념일에 맞춰 조성되었다. 호찌민은 자신이 죽은 후 화장해서 전국에 나누어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국가통합과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그의 시신은 영구 보존되고 있다.

 

▲호찌민 묘소 맞은 편에는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金星紅旗)가 나부낀다. 묘역 주변에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상복을 상징하는 흰색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경계를 하고 있다. 한달에 한번 광장 바닥을 솔질로 청소 한다고 한다바딘 광장 일대는 관공서가 들어서 있고, 종합청사 건물 신축이 한창이다베트남에서 관공서는 주로 노란색으로 채색을 한다.

 

(2) 베트남 북부 지역의 농촌풍경

베트남의 농촌 풍경은 흡사 우리나라 70년대의 한 자락을 옮겨 놓은 듯하다. 손으로 모내기를 하는 베트남 들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학창시절 부모님과 손으로 모를 심던 시절이 생각나 감회가 남달랐다.

 

베트남은 수도가 있는 북부 지역은 홍강(紅河:홍하) 삼각주가, 국토의 남쪽에는 드넓은 메콩강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이 넓은 영토에서 생산되는 쌀 생산량은 우리의 10배에 이른다. 북쪽은 2모작이 가능하고, 남쪽은 3모작까지 가능하다. 베트남은 최근 태국을 누르고 세계 쌀 생산과 수출 1위 국에 올라섰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인근 홍강 삼각주에 펼쳐진 농토. 손으로 모내기를 하는 것이 우리의 1960~70년대 농촌풍경과 흡사하다.

 

이 밖에도 커피는 브라질 다음으로 수출을 많이 하고 있으며, 천연고무 생산량도 세계 3위권을 유지하고 있다최근 베트남의 수출 1위 품목에 농산물이 아닌 휴대전화와 관련부품이 차지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삼성전자의 진출 때문이다.

 

농업전문가들은 베트남 농업의 생산, 가공, 보관 기술이 워낙 떨어지기 때문에 농업 부문에서도 우리나라와 협력할 부분이 무궁무진 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농협은 최근 베트남에 중고 농기계를 수출하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앞으로 농업분야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협력 체계를 구축할 예정이다.

 

▲중국과 가까운 베트남 북부 산악지역으로 가면 녹차를 재배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녹차밭 외에도 바나나, 사탕수수밭도 자주 만난다.

 

▲북부 산악지역과는 반대로 베트남 남부 지역에는 대규모 고무농장이 발달해 있다. 베트남의 천연고무 생산량은 세계 3위권이다. 이 사진은 베트남 남부인 호치민市 부근에서 찍었다.

 

하노이를 벗어나 북서쪽 중국 국경방향을 향해 달리면 산세가 우리나라와 아주 유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심지어 경지정리가 되지 않아 논둑이 구불구불한 떼기논의 모습조차 우리의 옛날 농촌과 닮았다. 길가를 따라 늘어선 농가(農家) 대부분 블록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아주 간간이 베트남 전통 초가집이 보인다.

 

▲베트남 하노이 북부지역을 따라 달리면 산세와 풍경이 마치 우리나라 시골의 옛모습을 옮겨 놓은듯하다.

 

.▲산악 지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다락논 지대

 

▲계단식 논 한 머리에는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한 머리에서는 모내기를 막 끝낸 모습.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중국 국경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산세가 점점 더 험해지지만, 그렇다고 고산준령이라고 할 수 없는 산악 지형이 펼쳐졌다. 산악지역에는 몽족이나, 타이족 등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다락논을 일구어 벼농사를 짓고, 다락논을 만들지 못하는 곳은 모두 옥수수를 농사를 지었다. 아무리 경사가 험한 곳이라도 발 디딜 틈만 있으면 한뼘의 땅도 놀리지 않고 개간을 해 옥수수를 심어 놓았다.

 

 

 

 

 

▲다락논과 다락밭을 일구며 사는 베트남의 소수민족. 베트남 현지인들도 이들 소수민족에 대한 정확한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노이에서 차로 9시간을 달려 짬따우현에 도착하자, 풍경이 마치 우리나라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 마을에 온 듯 정겹다. 짬따우현에는 69개의 마을이 분포되어 있고, 인구는 약 3만명이다. 이 가운데 90%가 소수민족이며 그 대부분이 몽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베트남의 소수민족은 54개라고 알려져 있다.

 

마을이 고산지대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마을을 오가는 주요 교통수단은 주로 오토바이에 의존하고 있다.

 

▲고산지역의 교통수단은 오토바이가 많이 활용된다.

 

▲비가 오면 길이 질퍽해지기 때문에 오토바이 타이어가 낡았을 경우 사진처럼 고무줄을 감기도 한다

 

▲해발 1500미터 고산지대에서 바라본 산 아래의 모습.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모두 밭을 일군 것이 소수민족들의 강인한 적응력과 생명력을 보는 듯하다.

 

 

▲해발 1500미터 산 위에 형성된 몽족의 마을이런 마을이 산속 곳곳에 펼쳐져 있다. 집 옆 공터에 소, 돼지, 닭 같은 가축을 기른다.

 

하노이 북쪽은 이처럼 산악지역이지만, 하노이 남쪽과 해안가 쪽으로 차를 달리면 드넓은 홍강 삼각지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볼 수 있다. 산악 지역과 달리 평야지대의 농촌집은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초가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풍경은 논 한가운데 가족묘가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아직 원칙적으로는 거주이동의 자유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주소를 농촌에 그대로 두고 도시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현재 베트남 도시 인구의 절반 정도를 유동인구로 보는 통계도 있다.

 

▲홍강 삼각주 일대의 평야지대. 역시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있다사진에 보이는 파란색 모는 모를 옮겨 심기 전에 볍씨를 뿌려 모를 길러내는 못자리(모판). 이런 평야지대에서도 기계농이 거의 도입되지 않고 있다.

 

▲지방 소도시의 시장풍경

 

▲농촌의 주유소.

 

(3) 호찌민시의 대통령궁

베트남의 호찌민시(사이공) 중앙에 있는 대통령궁은 '통일궁'으로 불린다. 1868년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인도차이나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1954년 베트남이 분단된 이후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사용되었다.

 

1975 4 30일 대통령궁이 월맹(북베트남)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자유 월남(남베트남)의 패망과 함께 공산화 통일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다.

 

▲대통령궁의 전경. 현재 건물은 1962년 월맹 공군의 폭탄 투하로 파괴되어 1966년 증개축한 것이다. 1954년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부터 마지막 대통령인 두옹반민까지 이곳에서 집무했다지금은 관광지로 개방되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대통령궁 내부에는 집무실, 회의실, 국무회의실, 귀빈접견실, 부통령실  100개가 넘는 방이 있으며 옥상에는 전용 헬기 이착륙장이 조성돼 있다. 지하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종합 상황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

 

천정을 높게 지어 2개 층이 1개 층으로 되어 있어 건물은 4층 구조이지만, 8층 높이에 이른다대통령궁은 현재 호찌민시의 가장 중요한 관광명소이자, 박람회장, 귀빈접견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대통령궁 정문() 1975 4월 함락당시 당시 정문을 밀고 들어오는 월맹군(북베트남군) 탱크.

 

 

 

 

▲대통령궁 오른쪽 숲에는 이곳을 점령할 당시 진군한 북베트남의 탱크 두 대가 전시되어 있다. 아래 두 장의 흑백사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탱크다월맹군의 주력 탱크는 중국제나 소련제였다고 한다

 

1972년 여름이 되어서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본격적인 평화교섭이 다시 재개되었고, 1973 1월 파리평화협정에서 양측은 정전협정에 합의하였다. 이에따라 3월까지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후 불안안 평화가 이어지면서 남베트남의 정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국론이 좌우로 분열되었다

 

 

▲대통령궁 테라스에서 바라본 정문 방향. 대통령궁 주위에는 해외자본이 투자된 고층빌딩이 즐비하게 건설되고 있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75년 대통령궁 점령 당시 같은 위치에서 바라본 모습

 

 

▲월남의 대통령이 각료들을 맞이던 집무실의 모습. 아래 흑백 사진에 남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가운데) 대통령이 보인다뒤의 바닷가 그림은 티우 대통령의 고향 입구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전통 자수가 걸린 접견실에서 외국 사절을 맞고 있는 월남의 티우 대통령. 집기와 주변 장식이 거의 변화가 없다

 

 

 

▲남베트남 대통령이 쓰던 각료 회의실접견실연회장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최첨단 무기를 남베트남에 주고 갔지만, 분열과 정치적 혼란간첩의 활동으로 이런 무기도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1975년 비상출격한 한 공군 조종장교가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북으로 망명했을 정도로 군부 내에서도 북베트남 간첩의 활약이 극에 달했다.

 

 

▲대통령궁 옥상에 1975년 남베트남 공군이 대통령궁을 폭격한 장소를 표시해 놓았다. 정찰을 보냈더니 도리어 자국 대통령궁을 폭격한 것이다. 사진의 헬리곱터에 대해 많은 현지 가이드가 대통령궁이 함락될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이 이곳에서 헬기를 타고 도망갔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사진의 헬기는 이곳이 대통령 전용 헬리포트라는 것과 상황이 불리하면 헬기를 통해 언제든지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갖다 둔 것 같다.  티우 대통령이 사진의 헬기와 같은 기종의 헬기를 타고 시찰을 다녔다고 한다.

 

▲대통령궁 숲 한쪽에 전시된 당시의 대통령궁 폭격 전투기.

 

혼란과 분열부정부패, 권력다툼이 극에 달한 월남은 패배를 거듭했고, 결국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패망했다.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의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수용소로 보내졌고, 북베트남에 협조했던 인사들도 대부분 사형을 당했다. 통일된 베트남에서는 1980년대까지 수많은 보트피플이 생겨났다.  

 

▲전시 상황실로 쓰이던 대통령궁 지하의 벙커시설

 

▲지하 벙커 입구에 전시된 월남 대통령의 전용 벤츠

 

 

▲대나무 마디 모양의 건물 창 디자인을 바깥과 안쪽에서 각각 바라본 모습. 대나무 모양의 창틀로 인해 바람이 더 많이 들어오는 구조라 내부가 시원한 효과를 가져온다. 옥상에는 조각돌을 놓았는데 이 역시 건물의 온도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가 남아 있는 대통령궁을 둘러보는 동안 심정이 조금은 착찹했다우리도 참전했던 전쟁이면서 아직까지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첨단 무기가 있고, 세계 최강의 힘을 지닌 우방이 도와준다고 해도 안보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없고내부가 단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4) 베트콩의 근거지 구찌 터널

베트콩의 활동 근거지인 구찌 터널(땅굴)은 호찌민시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30km) 떨어진 숲속에 있다. 구찌 터털은 총연장 200km가 넘는 지하요새로 터널 인근에는 사이공강이 흐르고 있어 터널 일부가 강으로 연결되어 있다.

 

1960년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사이공의 서북 밀림지역에서 설립된 베트콩은 한자로 越共(월공)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뜻하며 남베트남(월남) 및 미국에 대항해서 싸운 무장투쟁 조직이다. 정식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으로, 1975년 월맹군과 함께 월남 정부를 무너뜨렸다.

 

구찌 터널을 가면 월남 정부가 있던 사이공(호찌민)에서 이처럼 가까운 곳에 대규모 베트콩 유격대 지하 요새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심지어 일부 땅굴 위쪽에는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었다.

 

▲구찌 터널의 현지 가이드가 관광객들에게 숲속에서 베트콩 게릴라들이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지 가이드들은 현역 군인들이다.  

 

▲호주 병사가 작전 수행중 발견된 베트콩의 땅굴 입구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출처: commons.wikimedia.org

 

베트콩의 땅굴은 막강한 미군의 공군력과 화력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땅굴은 1940년대 말 프랑스와 전쟁(인도차이나전쟁) 당시부터 구축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면서부터 땅굴이 대규모로 조성되었고본격적인 게릴라전의 근거지가 된다.

 

땅굴은 3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깊이는 30m까지 내려가는 것도 있다. 내부는 수많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미로와 같다. 중간 중간 깊은 U자형 웅덩이(구덩이)가 조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지하층을 연결하는 통로는 매우 좁은 구조로 되어 있다땅굴 내부는 병원, 막사, 지휘소조리장, 탄약고, 병기제작 및 수리소, 대피소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땅위에 노출시켜 놓은 땅굴 입구. 지표면의 흙은 시멘트 처럼 단단하다

 

▲개미집처럼 위장된 공기 구멍. 공기 구멍은 수색대에 발견되지 않으면서도 물이 스며들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갖가지 방법으로 위장되었다.

 

 

▲구찌 터널에는 미국에서 온 관광객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한 무리의 미국 관광객이 내부 체험을 위해 줄을 서 있다. 땅굴 체험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군인이다. 입구는 관광객들을 위해 확장해 놓은 상태다.

 

▲관광객들이 땅굴을 체험 할 수 있도록 일부 구간이 개방해 놓았다. 땅굴 폭이 일정하지 않아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으로 기어서 가야 한다. 습하고, 덥고, 어두워10여분에 불과한 체험이지만 땅굴 생활의 불편함이 몸으로 전해진다. 원래 베트콩의 땅굴은 0.5~1m 정도로 매우 좁지만, 체험용 땅굴은 그나마 폭이 좀 넓은 듯했다땅굴 내부를 들어가보려면 복장은 편하게 입고 오는 것이 좋다.

 

 

▲베트콩들이 밀림속에 설치했던 여러가지 함정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미군이 퍼부은 폭탄 탄피를 이용해 무기나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는 모습. 땅굴 내에는 용도에 맞게 다양한 방이 있었다고 한다.

 

▲미군이 구찌 터널 위 정글 숲에 퍼부은 폭탄 탄피를 모아 놓은 모습. 구찌 터널 관광 코스를 따라 걸으면 미군의 폭탄 투하 흔적으로 생긴 구덩이를 여럿 볼 수 있다.

 

▲미국 관객들이 지하 막사 혹은 교육장처럼 생긴 반지하 홍보영상관에서 구찌 터널에 대한 영상을 보고 있다. 한국어로 제작된 영상도 상영이 된다. 영상은 베트남 전 당시에 북베트남 인민을 위해 선전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남베트남에서는 구찌 유격대원들이 용감하게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으니 끝까지 힘을 다해 침략자와 맞서자' 내용이다. 구찌 터널은 현재도 베트남인들의 훌륭한 안보체험장으로 활동되고 있다.

 

▲영상 상영관 왼쪽에는 구찌 터널 지하도가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터널을 이해할 수 있는 모형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터널 오른쪽이 사이공강과 연결되어 있다. 굴을 파면서 나온 많은 흙을 강에 버렸다고 한다.

 

▲오른쪽 땅굴 부분을 확대한 모습. 다층 구조의 지하 땅굴 모습을 보여준다. 군데 군데 U자형 깊은 함정 혹은 배수로가 있고, 조리장에서 요리할 때 발생하는 연기가 단계적으로 작은 방을 거쳐 상당부분 제거된 후 지상으로 배출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땅굴을 파는 모습을 재현 해 놓은 모형()과 아래 흑백 사진은 실제 땅굴을 파는 모습.

▲땅굴의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위장된 출입구와 공기 구멍을 볼 수 있다. / 출처: US Army Corps of Engineers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군은 베트콩의 땅굴 때문에 많은 애를 먹었다. 미군은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지대를 통해 들어온 북베트남의 지원 물자가 남베트남 땅굴에 비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땅굴 수색 작전을 펼쳤다.

 

땅굴은 구찌 지역을 비롯해 인근의 고무나무, , 과수원 지대에 광범위하게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 일대에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정교하게 숨겨진 땅굴을 수색하기 위해 밀림에 네이팜탄과 고엽제 쏟아붇고땅굴 수색과 제거를 위해 특별히 훈련된 병사들(터널쥐)도 투입했지만, 베트콩은 파괴된 땅굴을 단기간에 복구했다.

 

▲이미지 출저: flickr

 

▲땅굴 입구와 내부를 수색중인 미군. / 이미지출처: namtour.com

 

▲베트콩 게릴라 전사들이 정글에서 쉬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미국 관광객들이 파괴된 탱크를 둘러보고 있다. 현지 여행 가이드는 작전 중 파괴된 미군 탱크라고 설명했다.

 

▲전통 베트남 쌀국수피를 만드는 모습. 요즘 시중에 유통되는 쌀국수는 대부분 기계로 만들어진다.

 

▲구찌 터널 기념품 가게많은 서방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5) '바다의 계림' 하롱베이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하롱베이(할롱만: 泳下龍)는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이다영화 <인도차이나>의 촬영지로 유명하며,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3000개의 기암괴석과 섬으로 이루어진 하롱베이는 석회암 지대가 비바람에 침식되어 생긴 곳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흔히 '바다의 계림'(桂林)이라고 불린다지질학적으로도 실제 중국의 계림과 이어진다. 

 

▲하롱베이로 가는 동안  전형적인 베트남 북부의 농촌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바둑판 처럼 넓은 농경지에 농기계는 보이지 않고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있다. 머지않아 기계화 영농이 도입되면쌀생산량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다

 

▲저 멀리 들판 너머로 검은 병품처럼 솟아나 있는 것이 바다위에 떠 있는 하롱베이의 섬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용() 이곳으로 내려와 입에서 보석과 구슬을 내뿜자 그 보석과 구슬이 바다위에 떨어지면서 기암(奇岩)이 되어 침략자를 물리 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용이 내려왔다'는 뜻의 하롱(下龍)이다.

 

▲선착장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유람선을 타고 선착장을 막 떠나면서 찍은 사진.

 

▲하롱베이의 관광 유람선은 주로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내부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관광을 하며 일행이나 가족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구조다.

 

▲유람선의 관광코스는 4시간선착장을 떠난 유람선은 점점이 떠 있는 배(유람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이윽고 기암괴석 지대로 들어간다. 하롱베이의 바다는 물결의 작은 일렁임 조차 없어 호수처럼 고요하다.

 

 

▲유람선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섬 사이의 협수로를 통과 하면서 본격적인 하롱베이 선상 관광이 시작된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수상마을 한 곳에서 횟감을 팔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회를 사서 유람선 안에서 먹기도 한다.  

 

▲이윽고 한 섬에 도착했다. 이 섬에는 '천궁동굴'이라는 아름다운 석회석 동굴이 관광 코스로 개발되어 있다.

 

▲동굴 관광을 마치자 이웃한 유람선이 우리가 탄 배로 바짝 다가왔다갑자기 우리 배에 동승했던 사진사가 이웃배로 옮겨 타더니 가버렸다. 4시간 후 유람선이 선착장에 도착하자, 인화된 사진이 봉투에 담겨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6) 동남아 최장의 메콩강과 삼각주

베트남 둘러보기 마지막편입니다. 오늘은 동남아 최대 길이를 자랑하는 메콩강 하류, 즉 메콩강 삼각주 일대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메콩강은 중국 티베트 고원에서 시작하여, 운남성(雲南省), 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을 지나 남중국해로 흐르는 4km가 넘는 긴 강입니다먼거리를 굽이굽이 흘러온 메콩강은 베트남 영토에 들어와서 다른 지류로 흩어지거나 합하면서 거대한 메콩강 삼각주를 형성합니다.

 

메콩강 삼각주 중심에는 예전부터 상업이 발달한 사이공(호찌민시)이 있으며, 사이공 시내를 가로지르는 사이공강도 메콩강의 지류로 알려져 있습니다메콩강 삼각주 일대는 고대부터 크메르인이 거주한 곳이지만수세기에 걸쳐 남진한 베트남의 여러 왕조에게 밀려 영토를 잃었고, 18세기에 이르러 이 일대의 영토를 비엣족(베트남족)에게 완전히 내주었습니다

 

▲베트남 북부 하노이가 정치적 수도라면, 남부 호찌민시는 베트남 경제를 이끌고 있는 경제수도라고 할 수 있다. 겉보기에도 호찌민시가 하노이보다 거리가 더 번화하며, 건물도 높고 시가지도 정돈된 느낌이다. 현지 교민들의 말에 의하면 호찌민시의 사람들이 하노이 사람들보다 성격이 더 온순하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동남아 여러 나라를 흐르는 메콩강. 상류쪽은 지도에 나타나지 않았다./이미지=두산백과

 

아래에 소개된 몇장의 메콩강 삼각주 사진들은 하우장성 풍협현을 향해 가는 길에 찍은 것입니다. 하우장성은 호찌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으로 ‘메콩 델타’로 불리는 메콩강 삼각주에 속한 비옥한 평야지대입니다

 

하우장성으로 가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버스로 4시간 정도 걸립니다. 하노이를 벗어나자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울창한 바나나 나무 숲과 야자수로 뒤덮인 평야가 이어집니다. 군데군데 흙탕물처럼 탁해 보이는 메콩강 지류(支流)가 수로(水路)를 이루고 있었고, 제법 넓은 강도 몇 개 건넜습니다

 

▲메콩강 하류 일대에는 최근들어 큰 다리가 여러 개 건설되었다. 다리가 없을 때는 배로 강을 건너야 했다.

 

▲군데 군데 메콩강의 소지류와 수로를 중심으로 수상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작은 배가 마을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 수단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농촌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앞에도 메콩강에서 흘러나온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홍수가 나지 않게 농촌마을의 작은 수로를 중장비를 동원해 준설하는 모습.

 

지금까지는 메콩강 삼각주의 풍경이었다면, 아래 사진부터는 메콩강과 사이공강 일대의 관광지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메콩강 일대에는 관광객들이 강을 직접 건너보고, 수로를 체험을 할 수 있게 개발된 지역이 있습니다. 사이공에서 얼마간 떨어진 미토라는 곳인데, 이곳 선착장에서 건너편 섬까지 건너가, 현지 과일을 맛보고, 조각배로 수로를 통과한 후 돌아오는 것이 하나의 관광 코스입니다. 이동시간 빼고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선착장의 모습. 부레옥잠이라는 수생식물이 강에 떠다닌다.

 

▲배로 건너편 섬에 들어오면 조각배를 타고 메콩강 수로를 돌아보는 코스가 있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섬에 들어오면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현지 주민들이 거주한다. 어느 주택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손녀들이 관광객에게 팔 과일을 수확하여 다듬고 있다과일나무는 집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었다.

 

▲과일가게의 모습. 오른쪽에 수박만한 큰 과일은 먹을 때 약간 고약한 냄새가 나는 두리안이라는 과일이다.

 

▲관광객들이 더위를 식히며, 과일을 맛보는 동안 소규묘 현지 민속 공연단이 공연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공연이 끝나자 퇴근 시간이 되었는지 옷을 갈아입고오토바이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래 사진들은 호찌민시를 흐르는 사이공강의 야간 선상관광(디너 크루즈) 모습입니다. 사이공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약 4시간에 걸쳐 사이공강을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도중에 배 안에서 각종 공연이 펼쳐지고, 음식은 뷔페식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선상에서 본 호찌민시의 야경은 그다지 볼거리는 없었지만,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선상 유람을 하는 약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선착장에 출발 대기중인 유람선.

 

▲용머리가 달린 유람선도 있고, 앞 부분을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배도 있다.

 

▲선상에서 바라본 강변의 모습. 개발이 한창인 베트남의 모습을 대변하듯이 고층 건물이 강변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어가는 중이지만, 사진에서 보는 모습 외에 별로 눈에 띄는 도시 야경이 없다.

 

▲선상 내부의 뷔페식당 모습. 한국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한국 음식이 제법 많이 준비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선상에서 야경을 즐기며 저녁을 먹는 사이가수들의 노래와 민속 공연 등이 펼쳐진다. 공연은 유람이 진행되는 4시간 내내 이어진다. 선상에서는 한국 노래도 많이 연주된다.

 

▲중국 고원에서부터 쉼없이 흘러온 메콩강이 바다를 향한 마지막 여정을 맞았다메콩강 위로 어둠이 깔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