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로 본 모던 경성 2022-1]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01.01 ‘잇’(IT), ‘마뽀,에꺼’...경성의 첨단유행어를 아십니까
모더니즘 기수 김기림이 쓴 1931년 ‘유행어사전’

▲1920~30년대 할리우드 배우 클라라 보. 1927년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영화 'IT'에서 주연을 맡아 가볍지만 매력있는 여성을 연기해 인기를 모았다. 김기림은 당시 유행어 '잇'을 설명하면서 클라라 보와 영화 'IT'까지 소개할 만큼 박식했다. /위키피디아
‘김기림씨가 사회부 기자로 다닐 때 편집자에게 들으니 氏의 특징은 세상 없는 통계숫자 투백이인 기사재료라도 그것이 한번 氏의 손에 들어가서 기사로 되면, 어떻게 하든지 독자들이 재미나게 읽을 수있는 사회면 기사를 만든다는 것이다.’(조선일보 1939년12월11일)
문학평론가 이원조가 김기림의 두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을 평하면서 쓴 글이다.
모더니즘 시의 기수로 꼽히는 김기림은 기사도 잘 쓰던 문인기자였다. 니혼대 예술과를 졸업한 김기림은 1930년 4월 조선일보 첫 기자공채시험에 합격해 신문사에 들어왔다. 입사한지 채 두달도 안돼 터진 ‘간도 5·30 봉기’를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특파됐다. 조선일보 1930년 6월12일자부터 12회 연재한 ‘간도기행’은 젊고 패기만만한 김기림의 글쓰기 스타일이 잘 드러나 있다.

▲1927년 클라라 보 주연 영화 'IT' 포스터/위키미디어
◇'마뽀, 에꺼’와 ‘모던’
스물셋 김기림이 입사 이듬해인 1931년 1월, 독특한 기획을 맡았다. 당시 새로 등장한 유행어해설에 나선 것이다. 첫번째는 ‘모던’이었다. 영어사전엔 ‘근대’, ‘근대풍’으로 나오지만 딴 의미로 쓰인다고 했다. ‘K씨의 양말은 아주 모던인데ㅡ’ ‘P와T는 비행기로 신혼여행을 갔단다. 참 모던이야’
김기림은 ‘(이 경우)모던은 근대풍을 의미한다는 이보다 차라리 근대의 예각적 첨단 의미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썼다.
‘마뽀, 에꺼’는 뭘까. 김기림은 ‘모뽀(모던 뽀이), 모꺼(모던 껄)’란 말이 한때 젊은 월급쟁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지만, 지금은 흘러가버린 말이라면서 ‘마뽀·에꺼’가 요즘 뜨고 있다고 소개한다. ‘맑스 뽀이’ ‘엥겔스 껄’의 이니셜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마뽀·에꺼’는 성적 방종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대개는 코론타이즘을 오해하고 그 성적(性的)해방론을 그들의 성생활에 응용하기에 급급한 성적방종군(軍)을 가르켜 모욕적 의미로 쓰여지는 것이라 한다.’(‘첨단적 유행어’, 조선일보 1931년 1월2일자)
◇잇트(IT)는 성적 매력?
대명사 ‘IT’이 당시엔 색다른 의미로 쓰였던 모양이다. 시골 중학생이 일본 잡지에서 ‘그 여자는 꽤 ‘잇’이 있어’하는 말을 보고 영어 선생에게 물었다. 이 선생님, 사전을 뒤졌지만 ‘그것’이란 뜻만 나오니 어리둥절할 수밖에없다.
김기림은 ‘잇’이 사전 이외의 뜻을 갖게 된 유래를 설명한다. 엘리너 글린의 소설 ‘잇’ (IT)에서 시작돼 미국 여배우 클라라 보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잇’(IT)으로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 것이라고 했다. 엘리너 글린(Elinor Glyn·1864~1943)은 1927년 소설 ‘IT’을 발표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영국 소설가다. 이 소설은 그해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클라라 보(Clara Bow 1905~1965)는 영화 ‘IT’주연을 맡아 말괄량이면서 성적 매력을 지닌 배우로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에서 보ㅡ는 그 천생의 ‘에로’미를 남김없이 발산하야 ‘듀아멜’의 소위 ‘막난이들의 모임’인 활동사진관의 저급한 관중을 성적으로 자극하야 흥분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잇트’란 성적 매력을 이른다.’ 영화에도 해박했던 김기림의 폭넓은 관심사를 보여주는 글이다.

▲김기림(왼쪽)이 동료 시인 신석정과 함께 촬영한 사진. 1930년 조선일보 기자 공채 1기로 들어온 김기림은 1940년 강제폐간때까지 줄곧 기자로 일했다. 사건 기사를 쓰면서, 시와 평론, 수필과 소설, 희곡까지 쏟아낸 다작의 글쟁이였다. /조선일보 DB
◇희생자 유족 돕는 ‘모풀’, 남편 길들이는 ‘사보타쥬’
당시 사회운동과 관련 깊은 용어들도 소개했다. ‘모풀’은 사회운동을 하다 처형된 희생자들의 유족을 돕기 위해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돕는 걸 가리킨다며 ‘적색구제회’로 풀이했다.
‘사보타주’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대항하는 항쟁수단이라며 ‘일을 평상시보다 게으르게 한다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자본가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하야 원료품이나 기계를 함부로 막써버리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기생집에 잘 가는 동무가 늦게 출근한 유래를 들어본 즉, 그 부인께서 남편의 버릇을 가르치기 위하야 아침에 자는대로 안 깨워주고 아침밥까지 늦게 해서 겨우 먹여보낸 까닭이라 한다. 이런 것도 물론 ‘싸보타쥬’’라고 썼다.(이상 조선일보 1931년 1월4일 ‘첨단적 유행어’)
◇분위기 있는 ‘아듀’, 도시인의 상담소 ‘아베뉴’
프랑스식 인삿말 ‘애듀ㅡ’(아듀)도 유행했던 모양이다. ‘’굿바이’로서는 도저히 근래인의 ‘델리케이트’한 감정에 잘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다’면서 여학생 사이에 ‘애듀ㅡ’가 유행했다는 것. ‘꽃 같은 여학생이 떠나가는 열차의 창에 상반신을 내놓고 흰 수건을 흔들면서 이쪽을 향하야 ‘애듀’(잘있거라)를 연해 부르는 것은 자못 풍류가 있어 보인다.’ 김기림은 ‘19세기초에 뜻을 잃고 영국을 떠나면서 ‘도버’해상에서 멀리 물결 쪽에 향하야 ‘애듀 마이 네이티브 렌드’하고 읊은 바이런은 ‘모던’ 파의 시조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아베뉴’(Avenue)는 ‘큰 거리’로 풀이한 뒤, 특유의 위트를 덧붙였다. ‘번잡한 도회의 복판에 사는 창백한 월급쟁이들이 황혼이 가까워오는 가엾은 때가 오면 O통 같은 골방에서 나와서 그들의 애인들을 끌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산보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저녁의 ‘아베뉴ㅡ’ 그것은 도회인의 위생상담소다.’

▲조선일보 1931년 1월2일자에 연재를 시작한 김기림의 첨단적 유행어. 필명이자 호인 편석촌을 크레딧으로 썼다.
◇청춘들의 특권 ‘란데부’, 자유연애 시대의 ‘쎄코핸’
청춘남녀가 ‘요리조리 겨우 기회를 만들어 공원 뒷골목에서 그리던 사람을 만난다. 이렇게 달콤한 란데부는 축복받은 청춘의 특권이라할까. 그런 까닭인지 ‘란데부’라는 말조차 아름답다.’(이상 ‘유행어’, 조선일보 1931년 1월8일) 란데부는 ‘밀회’로 풀이했다.
‘쎄코핸’은 무슨 뜻일까. ‘세컨 핸드’(second hand),중고 즉 고물(古物)을 줄여서 말한다. 여기서 파생돼 이런 뜻도 있었다고 한다. 누구의 전 애인, 전처를 이를 때 ‘그 여자는 아모개의 쎄코핸이야’하고 쓴다는 것이다. 김기림은 ‘요즘과 같이 연애 상대가 자주 바뀌는 시대에 있기 쉬운 말’(‘유행어’, 조선일보 1931년 1월11일) 이라고 해설했다.
◇기사와 함께 시, 희곡, 평론, 수필 多作
김기림이 해설한 유행어 31개는 자유연애와 사회주의, 대중문화가 밀려오던 1930년대 초반 경성을 해석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유행어사전’이면서 당대 사회의 코드를 읽는 해설서인 셈이다.
김기림은 1936년부터 3년간 센다이 동북제대(東北帝大) 유학 시절을 제외하면 1930년부터 1940년 8월 신문이 강제폐간(당시 학예부장)당할 때까지 늘 기자였다. 기사는 물론 시, 소설, 희곡, 평론, 수필을 신문과 잡지에 쏟아낸 다작가였다. 그는 문예지나 신춘문예가 아니라 조선일보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문인으로 인정받았다. 입사 첫해인 1930년 필명 G W로 시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9월6일)와 ‘슈ㅡ르레알리스트’( 9월30일)등을 발표했다.
유행어를 연재하던 1931년 1월에도 시 ‘훌륭한 아침이 아니냐’(1월8일), ‘꿈꾸는 진주여 바다로 가자’(1월23일), 평론 ‘피에로의 독백-’포에시’에 대한 사색의 단편’(1월27일), 희곡 ‘떠나가는 풍선(風船)’ (1월29일~2월2일) 등을 써냈다.
김기림은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강제폐간당한 뒤 낙향했다. 고향 근처인 함경북도 경성중학교 교사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시인 김규동과 영화감독 신상옥이 김기림에게 배운 제자다. 해방 후 서울에 내려온 김기림은 서울대사대, 중앙대, 연희대, 국학대 등에서 강의했다. 6.25 때 피난을 못간 탓에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연행돼 납북당했다.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안타까운 최후였다.
◇참고자료
김학동, 김기림평전, 새문사, 2001
조선일보 100년사, 조선일보사, 2020
조선일보 사람들, 조선일보사, 2004
01.08 누드 자화상 찍은 파격 사진가 정해창
1929년 조선인 첫 예술사진 개인전 개최
풍경 사진으로 전통 풍속화 전통 이어

▲정해창이 1929년 촬영한 여인의 초상. 흰 저고리 차림에 흰 두건을 씌워 얼굴이 두드러지게 처리했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있는 조선 여인의 미를 보여준다. 1998년 유리 원판으로부터 구본창 프린트, 사진컬렉션 지평
‘다년간 사진술을 연구하여 영리를 떠나서 예술사진을 제작하든 무허(無虛) 정해창씨는 그동안 박힌 자신 있는 사진 오십여점을 가지고 리제창씨외 여러 우인들의 후원으로 작품 전람회를 오는 29일부터 시내 광화문 빌딩(前반도신문사터)에서 개최한다는데 조선 사람으로 예술사진 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 중에도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정해창씨 사진전람’, 조선일보 1929년 3월28일)
1929년 조선일보에 ‘최초’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인 첫 예술사진개인전’을 여는 정해창(1907~1968)이 주인공이었다. 스물 둘 청년의 데뷔였지만, 동아, 중외일보는 물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까지 소개할 만큼 ‘최초’의 반향은 컸다.
◇흰 두건 쓴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
출품된 50여점 대다수는 ‘풍경 사진’이었다. 첫 전시회 출품작 중 유일하게 신문에 실린 사진이 ‘설경’(雪景·조선일보 1929년 3월29일)이다. 한겨울 눈 덮인 다리 풍경을 찍었다. 정해창 사진은 유리 원판 120여점이 남아있다. 야외에서 찍은 것 중 ‘설경’처럼 사람이 전혀 없는 사진은 13점뿐이다. 인물 사진 10여점을 포함, 대부분 사진 배경엔 사람이 들어가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 초상 사진이 있다. 흰 저고리 차림의 이 여성은 머리에 흰 두건까지 썼다. 시선은 정면이 아니라 45도 방향으로 비껴나있다. 주변 배경은 온통 흰색이고 조명을 받은 눈동자만 반짝인다. 단아하면서도 모던한 여인상이다.

▲1930년대 정해창이 촬영한 상반신 누드 자화상. 당대 어떤 조선인 화가도 시도하지 않은 파격적 작품이다. 예술적 자의식 강한 정해창의 면모를 보여준다. 1998년 유리원판으로부터 구본창 프린트. 사진 컬렉션 지평
◇관객 유혹하거나 도발하지 않는 시선처리
지난달 600쪽 가까운 저서 ‘한국사진사’(문학동네)를 펴낸 박주석 명지대 교수는 정해창의 인물 사진이 독특한 방법으로 촬영됐다고 설명한다. 먼저 사진 속 인물들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지 않고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그래서 관객을 향한 유혹이나 도발의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인물의 굴곡을 살리는 대신 평면적으로 보이게 조명을 썼다. 한국 여성의 얼굴 형태를 가장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이라고 했다. 흰색 저고리에 흰색 두건까지 씌운 것은 여인의 얼굴이 갖는 미색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모델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사진 자체가 ‘절제를 통해 기품을 만드는 조선 여인의 미학을 자기 가치로 삼은 사진 작업’이라고 했다.
◇동경 외국어학교 다니며 사진 배워
정해창은 동경 유학생 출신 사진가였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보성고보를 졸업한 후 1922년 일본 동경외국어대에서 독일어를 전공했다. 그러면서 동경 가와비타(川端)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웠고,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을 시작했다. 1927년 동경외국어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정해창은 1939년 네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 때까지 12년간 예술사진가로서 독자적 활동을 펼쳤다. 다른 사진가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한 ‘조선사진전람회’나 ‘납량사진 현상모집’같은 공모전에 출품한 적도 없다.

▲1929년 경성 광화문 빌딩에서 가진 첫 예술사진개인전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다른 이들과 달리 정해창만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45도 사선 방향을 보고 있다. 2002년 유리원판으로부터 주명덕 프린트. 사진 컬렉션 지평
◇조선일보 후원으로 지방 순회전
정해창은 1930년 10월 조선일보 후원으로 대구, 진주, 광주를 도는 지방 순회전을 열었다. 1년여 전 첫 개인전 성과를 지방에 소개하는 두 번째 개인전이었다.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다. 10월9일부터 사흘간 조선일보 대구지국 주최로 도청 앞 임시회장에서 열린 전시회엔 3000명이 몰렸다.
첫 지방 순회전이라 허술한 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이 처음인 만큼 급한 점이 많아 기대하시던 대구 여러 인사에게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며 요번 길에 남선(南鮮)을 순회하며 명승과 고적, 풍속 등을 돌아보고 계속하야 북선(北鮮) 지방을 돌아 내년 봄에는 완전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와서 여러분을 맞이하야 금번에 죄송하였음을 사과한다하며 진주로 향하였다고 한다.’(‘대구예술사진전람’, 조선일보 1930년 10월13일)
정해창은 1934년 서울 소공동 낙랑다방에서 세 번째, 1939년 종로 화신백화점 7층 갤러리에서 마지막 전시회를 가졌다. 네 번째 전시회를 알리는 기사(‘정해창씨 인화개인전’,조선일보 1939년 7월6일)에선 은퇴까지 예고했다.

▲정해창의 1929년 사진. 무제(두 여인). 1998년 유리원판으로부터 구본창 프린트. 사진컬렉션 지평
◇전각, 서예가로 변신, 동양미술사 강의
정해창은 이후 서예, 전각가로 변신해 전시회를 여는가하면, 동양미술사와 사진예술을 강의했다. 사진 입문서를 번역 출간하고 사진 관련 기고는 이어갔지만 1957년 뜻하지 않게 낙상으로 부상당해 칩거하면서 전통 사찰과 부도 등에 관심을 갖고 미술사 논문을 발표했다. 1968년 결국 낙상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1930년대 정해창이 촬영한 자화상. 역시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다. 2002년 유리원판으로부터 주명덕 프린트. 사진컬렉션 지평
◇자의식 강한 누드 자화상
1930년대 정해창을 여느 사진가와 구별짓는 게 있다. 여러 점의 자화상, 특히 당대 어떤 조선인 화가도 시도하지 않은 상반신 누드 자화상을 남겼다는 점이다. 자화상은 개인을 사유의 중심에 놓는 근대성의 산물로 주목받는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와 그 뒤를 이은 렘브란트 등이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정해창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고희동 나혜석 김용준 이상 이인성 이쾌대 등이 자화상을 남겼다.
상반신을 드러낸 자화상은 그가 몸을 개인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내세웠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자기 몸을 피사체로 내놓을 만큼, 강한 자의식을 가진 예술가였다는 사실도 알 수있다. 박주석 명지대 교수는 ‘(정해창은) 이후에 등장한 그 어떤 사진가들의 사진보다도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했고, 예술가로서 자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미적으로도 완결성을 가졌다’며 높이 평가했다.
◇참고자료
박주석, 한국사진사, 문학동네, 2021
01.15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염상섭의 자존심 건 지상논쟁
90년 전 조선일보 ‘모델소설 논쟁’으로 비화

▲1932년 1월 주요한이 발행하던 월간지 '동광'에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한 김동인. 횡보 염상섭을 모델로 삼았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모델소설논쟁'이 벌어졌다.
1932년 벽두 문화계는 김동인·염상섭의 논쟁으로 시끌벅적했다. 월간지 ‘동광’ 1932년 1월호에 실린 금동(琴童) 김동인(1900~1951)의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가 빌미가 됐다. 횡보(橫步) 염상섭(1897~1963)이 자기를 모델삼아 쓴 소설이라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총각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갖은 성병까지 걸렸다가 서른 넘어 결혼한 M이 주인공이다. 생식 기능을 잃은 줄 알았던 M은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번민한다. M처럼 서른 넘어 늦장가 가서 아이를 낳은 횡보는 금동이 자신을 욕보였다며 펄펄 뛰었다. 당장 ‘모델보복전’이란 반론을 써서 ‘동광’에 투고했다.
◇스캔들로 떠오른 ‘발가락이 닮았다’
횡보는 잡지가 나오기 직전 원고를 거둬들여 게재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횡보가 반박문을 기고했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퍼졌다. 누군가 금동에게 귀뜸했고, 원고까지 읽었던 모양이다. 좁은 바닥이었다.
‘양력 정월초승께 나는 생명이 위태롭도록 중태인 병상에 누워있을 때에 서울 어떤 친구에게서 ‘네가 동광에 낸 ‘발가락’에 대하여 염상섭군한테서 ‘이것은 나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는 항의 비슷한 반박문이 동광사에 왔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이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중한 나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할 때였으므로 그 말을 중대시하지 않았다.’(‘나의 변명1-발가락이 닮았다’, 조선일보 1932년 2월6일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종로 출입구에 있는 '횡보 염상섭 상(조각가 김영중 作)'. 횡보는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가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며 분개 , 1932년 2월 조선일보 지면에서 김동인과 '모델'소설논쟁을 펼쳤다.
◇금동, 횡보의 조선일보 紙上논쟁
하지만 문단 주변에서 ‘그게 무슨 짓이냐’는 항의부터 ‘화해를 하라’는 권고가 이어졌다. 김동인은 일이 심상치 않게 됐다고 생각했다. ‘나의 변명-’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하여’(조선일보 2월6일~2월13일·총5회)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작가가 스캔들을 해명하기 위해 집필 과정을 신문 지면을 통해 공개하는, 문학사에 드문 진기한 장면이었다.
염상섭도 맞받았다. 조선일보에 ‘소위 모델 문제’(2월21일~2월26일·총 5회)를 기고했다. 금동과 횡보가 각각 5회씩, 총10회 주고 받은 이 논쟁을 학계에선 ‘모델 소설’ 논쟁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대표적 작가 둘이 충돌한 이 논쟁은 근대 문학 초창기 문단의 이면을 흥미롭게 들춰낸다. 근대 최초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 김억(1896~?·필명 岸曙)도 이 논쟁에 얽혀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염상섭의 ‘질투와 밥’이 발단
염상섭은 1931년 10월 파인 김동환이 내던 월간지 ‘삼천리’에 단편 ‘질투와 밥’을 발표했다. 돈 있는 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가 본처에게 곤욕을 치르는 인텔리 S를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김억은 염상섭이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을 발표해 망신을 줬다고 펄펄 뛰었다. 같은 이북 출신인 친구 김동인에게 복수해달라고 매달렸다는 것이다.
김동인은 ‘문학자가 누구의 부탁을 받아서 복수적으로 붓을 잡는다 하는 일은 문학자인 염군의 양심에 물을 뿐 구구히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고 잘랐다. ‘창작은 창작이지 결코 무슨 무기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는 신조를 가지고 아직껏 문(文)에 대하여 뿐은 결벽과 자존심과 신용을 지켜온 나는 한번도 이 신조를 범하여 본 일이 없다.’
◇”두세곳 공통점 있다고 모델인가”
김동인도 ‘발가락’ 주인공 M이 염상섭과 비슷한 곳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서른이 넘도록 가난한 총각으로 있던 점, 연애도 지참금 목적도 아닌 결혼을 한 점을 들었다. 하지만 톨스토이 ‘부활’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젊었을 때 방탕했다거나 뒤돌아보지않는 저돌적 성격이 나(김동인)와 닮았다고 해서 부활이 나를 모델로 쓴 소설이라는 항의를 톨스토이에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두세가지 닮은 곳이 있다고 ‘발가락’ 주인공이 염상섭을 모델로 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게 김동인의 반박이었다. (이상 ‘나의 변명’2, 조선일보 1932년 2월7일) 금동은 이 글에서 횡보를 모델삼아 쓴 게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대여섯시간만에 쓴 ‘발가락’
김동인은 이 글에서 ‘1931년 11월23일 밤 10시부터 이튿날 새벽4시까지 썼다’(’나의 변명’ 5, 조선일보 1932년 2월13일)고 작품의 ‘출생일시’까지 밝혔다. 밤사이 아내 출산을 기다리면서 썼는데, 다 쓴지 5~6시간뒤 해산을 했다고도 썼다. 속필도 놀랍지만, 아내 출산이 임박한 시점에 이런 작품을 써낸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면서 한해전 여름 ‘동광’에 ‘결혼식’이라는 단편도 발표했는데, 실제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 전 썼다고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떠오른 생각을 작품으로 쓴 것처럼, 출산을 앞두고 소설가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발가락’이 튀어나왔다는 해명이었다.

▲조선일보 1932년 2월6일자에 실린 김동인의 '나의 변명1-'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하여'
◇염상섭의 반격
염상섭의 반박도 만만찮았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의견에 대하여 그 의견을 상대로 하고 자기 변명부터 공중에 호소한다는 것은 어떤 영문인지 나는 모른다.’(’소위 ‘모델’문제’1, 조선일보 1932년 2월21일)
이어 ‘모델보복전’이란 글을 쓴 과정과 게재를 보류한 사연을 담았다. 소설 ‘발가락’ 주인공의 서른 넘은 결혼이나 신여성과의 구식결혼, 득남은 자신의 실제 생활과 부합하므로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고 추측했고, 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소설 후반에 나오듯, 자식까지 불륜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악의적인 글이라는 주장이었다.
염상섭은 김억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모델 문제’가 도화선이 됐을 것이라고도 썼다. ‘즉 전자에 내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는 모우(某友)의 위촉을 받아서 이번에는 나를 모델로 대변자적 보복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얐든 것이다.’

▲조선일보 1932년 2월21일자에 실린 염상섭의 '소위 '모델' 문제'. 2월26일까지 모두 5회 실렸다.
◇김억의 삭제 요청
염상섭은 ‘동광’ 기고를 보류한 이유로 친구들의 만류와 함께 김억의 요청도 들었다. ‘나와 모델 문제가 되어있던 모군(某君)이 나의 글을 동광사에서 보았다고 자기에 관한 부분만은 삭제하여 달라고 재삼 요구하는 일이다…모군에 대하야 나는 별로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재삼 간탁하는 것을 무리하게 발표하는 것도 안됐다고 생각하였’(소위 ‘모델’문제2, 조선일보 1932년 2월23)다는 것이다.
◇김동인의 문단사 회고
이로부터 17년이 흐른 뒤 김동인은 ‘발가락’ 사건을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1949년 월간 ‘신천지’에 실은 ‘문단 30년의 발자취’(8)에서다. 김동인은 김억과 함께 염상섭의 아현동 신혼집을 다녀간 얘기를 쓴 뒤, 어느날 김억이 매우 흥분해서 부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안서(김억 필명)를 주인공으로 한 무슨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분하여 못 견디겠으니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었다…안서는 정거장까지 따라 나와서 꼭 복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김동인은 이렇게 썼다. ‘그것이 안서의 부탁으로 써진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더구나 염상섭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모르는 바이다.’ 17년 전 ‘나의 변명’때보다는 후퇴한 듯 보인다. 김억의 부탁이 있었던 사실과 그 부탁이 은연 중에 반영됐을 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긴 게 그렇다. 이북 동향이자 문예지 ‘창조’ 동인을 함께 한 김억과 김동인은 절친이었다.
◇조용만의 후일담
1930~1940년대 소설가 겸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였던 조용만(1909~1995)의 회고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당시 문단이 이 사건을 어떻게 봤는지 보여준다. ‘횡보는 한 때 안서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 때 안서는 여인 관계로 문제가 있었다. 횡보는 장난으로 이것을 모델로 해 단편을 썼는데 안서는 이것을 읽고 펄펄 뛰어서 동인한테 횡보에게 복수를 해 달라고 졸라댔다. 동인은 그래라 하고 역시 장난으로 ‘발가락이 닮았다’는 단편을 썼다.’
이 사건 때문에 횡보가 대노해 동인과 절교를 선언하고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지 몇 해 뒤에 우연히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 동인이 먼저 껄걸 웃으니까 횡보도 껄걸 웃고 말았다는 후문이 있었다.’(이상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161~162쪽) 문단 라이벌간의 경쟁이 빚은 문학사의 해프닝이었다.
◇참고자료
김동인, 나의 변명, 조선일보 1932년 2월6일~13일(5회)
염상섭, 소위 모델논쟁, 조선일보 1932년 2월21일~26일(5회)
염상섭, 질투와 밥, 삼천리 1931년 10월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동광 1932년 1월,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8
김동인, 문단30년사, 김동인전집 6, 삼중당, 1976
01.22 모던 보이 박태원의 ‘갓빠머리’는 어디서 왔을까
1930년대 日서 유행한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헤어 스타일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갓빠머리' 박태원과 '갓빠머리' 유행을 선도한 일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쌍둥이처럼 닮았다. 후지타는 1920년대 파리에서 성공한 유명화가였다. 1913년 파리에 건너간 후지타는 '갓빠머리'에 둥근 안경 스타일을 평생 고수했다. 1930년대 귀국한 후지타는 이런 스타일로 긴자를 활보하며 유행을 선도했다. /조선일보 DB, 퍼블릭 도메인
‘경성의 산책자’로 불린 박태원(1909~1986)은 도시의 일상과 도시인의 삶을 세련된 문장에 담아낸 작가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같은 세태소설이 대표적이다. 작품만큼이나 세련되고 남달랐던 게 박태원의 패션감각이다. 일자로 짧게 자른 앞 머리와 코에 걸친 동그란 안경이 심벌이었다. 이런 스타일로 경성 거리를 활보한 박태원은 모던 보이의 상징이었다.
◇이상, 정지용과 같은 구인회 멤버
경성제일고보를 다니다 휴학하고 1929년 일본 호세이(法政)대 예과에 들어간 박태원은 이듬해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1933년 제일고보 동창인 조용만(1909~1995)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몸을 담았다. 박태원은 고보 때부터 문학에 심취했다고 한다.
‘3학년때부터 문학병에 걸려 신경쇠약이라고 학교를 쉬고 3B수(水)라는 신경쇠약에 먹는 약병을 들고 다녔다. 2년이나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법정대학에 적을 두었지만 영화관이나 술집만 다녔다고 한다. 얼마 있다 서울로 돌아와서 춘원에게 사사하더니 그의 추천을 얻어 동아일보에 중편 소설을 연재하였다.’ 동시대 작가 겸 언론인 조용만이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137쪽)에 남긴 회고다.

▲1926년 파리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후지타 쓰구하루. 그는 피카소와 교유한 인기 작가였다. /위키피디아
◇'오갓빠화백’ 후지타 쓰구하루
박태원의 ‘갓빠머리’는 어디서 왔을까. 조용만은 박태원의 첨단 패션에 대해 증언을 남겼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가 이 머리를 하고 도쿄에 돌아와 긴자를 활보하면서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헤어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후지타를 소개하는 기사 제목이 ‘오갓빠화백, 후지타씨가 온다’(경성일보 1929년11월13일)일 정도로 ‘갓빠머리’는 후지타의 심벌이었다. 1913년 프랑스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일자 머리에 둥근 테안경을 쓴 후지타는 이 스타일을 평생 고수했다.
◇'유백색의 裸婦'로 파리서 인기
도쿄 미술학교 출신인 후지타는 1913년 파리에 건너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에콜 드 파리’ 멤버인 피카소(스페인) 모딜리아니(이탈리아) 고틀리브·키슬링(이상 폴란드) 수틴(리투아니아)과 장 콕토 등과 교유했다. 1차대전이 발발한 직후 끼니 걱정을 할 만큼 고생했으나 1917년 첫 개인전을 열면서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서구에 익숙한 여성 누드에 일본적 터치를 더한 ‘유백색의 나부(裸婦)’가 우키요에에 심취했던 인상파 화가에 뒤이어 프랑스인들의 이국적 기호를 자극했다. 프랑스 국립근대미술관, 파리 시립미술관, 벨기에 왕립미술관이 앞다퉈 그림을 사들였다. 덕분에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성공한 일본 화가로 떠올랐다. 1925년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을 정도다. 그림만큼 튀는 스타일과 여성편력 덕분에 파리 사교계에서도 스타가 됐다.
◇김환기와 김병기, 길진섭이 문하생
후지타는 한국 화가들과도 인연이 깊다. 남미 여행을 다녀온 1933년 그가 본격적으로 참여한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김환기와 김병기(106세 현역화가다!), 길진섭, 이범승이 이곳에 드나들었다. 연구소는 일본 추상미술의 요람으로 떠올랐다. 후지타의 갓빠머리는 문하생부터 퍼져나갔다. 김병기는 이 연구소에 다니던 1935년 무렵, 갓빠머리를 하고 다녔다고 회고한 바 있다.(김병기, ‘백년을 그리다’ 57쪽). 1935년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강사진과 연구생들이 찍은 단체사진에는 ‘갓빠머리’청년 김병기의 모습이 담겨있다. 후지타 흉내라기보다 뭔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던 시절의 외모라고 했다.
김병기는 후지타의 성공 비결로 ‘동양의 모필 실력을 서양에서 활용하여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500호 넘는 루벤스 그림을 본 후지타는 대작으로는 루벤스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세필(細筆)의 붓으로 꼼꼼하게 사실 묘사를 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화면을 도자기 표면처럼 만든 다음, 가는 선으로 나체도 그리고 파리의 풍경도 그려’ 인기를 얻었다고 했다.

▲1929년 11월22일 경성을 방문한 후지타 쓰구하루.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고 귀국한 뒤 조선에 들렀다. 왼쪽은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라. 육군 군의 출신으로 조선총독부의원장과 육군군의총감을 지냈다. 가운데는 프랑스인 부인 유키. 매일신보 1929년11월24일자.
◇후지타와 조선의 인연
일본 연구자 하야시 요코(林洋子)에 따르면, 후지타는 1913년 파리로 가기 전 최소한 두 차례 한반도를 여행했다. 후지타의 아버지는 육군 군의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종군했고, 1906년 조선주차군 군의부장, 1910년 병합 직후엔 조선총독부 의원장(醫院長)에 임명돼 1914년까지 근무했다. 그의 형도 1910년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총독부에 근무했다. 후지타는 1912년 신혼여행을 겸해 경성에 근무하던 부친과 형을 찾았고, 1913년엔 도불(渡佛)직전 혼자 부친을 찾아와 2개월 정도 머물렀다. 이때 순종 초상을 그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1929년 프랑스에서 처음 귀국했을 때, 부친과 프랑스인 아내 유키, 여동생과 함께 다시 조선을 방문했다. ‘매일신보’1929년 11월24일자에는 후지타 일행 사진과 함께 매일신보사 강당에서 강연회를 연다는 기사가 실렸다. 후지타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를 드나들던 조선인 유학생 단체 SPA회원들이 1935년 경성에서 연 데생전에도 출품했다. ‘동경(東京) SPA양화연구소원(洋畵研究所員) 수씨(數氏)의알선(斡旋)으로 경성(京城)에서 ‘SPA데쌍전람회(展覽會)’를 열게되었다. 장소(塲所)는 장곡천정(長谷川町) 다방(荼房)풀라탄 시일(時日) 12월23일~28일까지 출품자(出品者)는 등전사치(藤田嗣治) 씨(氏)를 비롯하야 길진섭(吉鎭燮), 김병기(金秉騏),김환기(金煥基),이범승씨 외 십인(李範昇氏外十人)이라하며 출품점수(出品點數)는 삼십여(三十餘).( ‘SPA데쌍전’. 조선일보 1935년 12월24일)
◇'전쟁화가’ 후지타
1937년 중일전쟁은 후지타의 이력에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 동료들과 함께 종군화가로 전쟁 현장을 둘러보고 작품을 그렸다. ‘남창공군기지폭격도’(1940·도쿄국립근대미술관), ‘노몬한 할루하 유역전투’(1940)등이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전쟁기록화 제작에 나섰다. ‘12월8일의 진주만’(1942) ‘솔로몬 해전 미군병사의 최후’(1943) ‘사이판 동포 황국신민의 절개를 다하다’(1945)처럼 제목만으로도 후지타가 얼마나 전쟁화 제작에 열광했는지 알 수있다. 육군미술협회 이사장이란 감투도 썼다.
자유분방했던 후지타가 전쟁화에 열중한 이유로 ‘에콜 드 파리 당시 일본에서의 싸늘한 평가에 대한 반응, 즉 ‘애국심의 고백’이란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보는 시각(김용철, ‘후치타 쓰구하루의 전쟁화’ 84쪽,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5집)이 있다. 프랑스에선 유명작가였지만 서양 여성과의 애정 편력, 사교계에서의 기행 등으로 일본에선 ‘국가적 수치’라는 말까지 들은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것이다.
◇1965년 日 생존 작가중 그림값 1위
전후 전쟁협력자로 몰린 후지타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하지만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로부터 전쟁화 수집 임무를 맡았다. 1949년 프랑스로 건너간 후지타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이름까지 레오나르 쓰구하루로 바꿨다. 프랑스의 후지타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1957년 레종 도뇌르훈장 슈발리에 훈장을 수여했다. 1968년 취리히에서 세상을 뜨자 일본 정부는 훈일등 서보장(勳一等 瑞宝章)을 추서했다.
1965년 일본 미술가구락부(美術家俱樂部)에서 낸 ‘미술가명감(美術家名鑑)’에 따르면, 후지타는 당시 일본 생존 작가 중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였다. ‘회화(繪畵)·조각(彫刻)·공예(工藝)·서예(書藝)등 각 부문에걸친 미술가(美術家)들 5~6000명이수록된 이책에서 생존하고 있는 화가(畵家)중 최고가격을 받는 이는 양화가(洋畵家) 등전사치(藤田嗣治)의 2만 달라(일화(日貨)720만圓)이다’(등전사치는 720萬圓, 조선일보 1965년 3월25일자) 해방 후 월북한 박태원은 1956년 남로당 숙청으로 펜이 꺾였다. 유행에 민감하고 세태소설이 장기였던 박태원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집필에 들어가 실명과 전신불수로 고생하며 작품을 써내려갔다. 사후인 1986년 아내 권영희와 함께 출간한 소설이 ‘갑오농민전쟁’이다. ‘갓빠머리’ 박태원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참고자료
윤범모, ‘백년을 그리다’, 한겨레출판, 2018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6
하야시 요코 지음, 윤철규 옮김, ‘藤田嗣治의 한반도 체험’, 미술사논단 통권 20호, 2005
김용철, ‘후치타 쓰구하루의 전쟁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5집, 2005
01.29 밀레는 어떻게 조선 최고의 인기 화가가 됐을까
90년전 이발소와 학교 교실에 ‘만종’, ‘이삭줍기’...20세기초 일본의 밀레 열풍 영향
▲밀레가 서른 무렵인 1845년~1846년에 그린 자화상. 밀레는 20세기 초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서구 화가였다. 소년 박수근은 밀레 그림을 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유치원생 천경자도 이발소와 학교 교실에서 '만종'을 봤다고 회고했다. /Willyman,위키피디아
영하의 한파는 덕수궁을 찾기에 딱 좋은 날씨다. 6·25직후 살얼음 같은 세월 속에 봄을 기다리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부제는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국민화가’ 박수근(1916~1965)이 주인공이다.
전시장 1층 첫번째 방에 들어서면 ‘밀레를 사랑한 소년’ 안내문이 맞는다. “하나님, 나는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강원도 양구 시골 소학교에 다니던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됐다고 한다. 원화(原畵)가 아니라 화집에 실린 복제화를 봤을 것이다. ‘만종’은 열두살 소년의 운명을 바꿀 만큼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 화가 작품이었다.
▲오는 3월1일까지 덕수궁에서 열리는 박수근 특별전. 1층 전시장 입구엔 '밀레를 사랑한 소년' 박수근 안내문이 붙어있다. 박수근은 열두살 때 밀레 그림을 보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김기철기자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전에 나온 1954년 작 '길가에서(아기업은 소녀)'. 창신동 시절 큰딸 박인숙씨를 모델삼아 그렸다고 전해진다./김기철기자
◇유치원생 천경자가 이발소에서 본 ‘만종’
천경자(1924~2015) 화백도 증언했다. 지금부터 딱 50년 전 덕수궁 석조전 본관(현 대한제국역사관)에서 열린 ‘프랑스명화전’에 나온 밀레 그림을 보고나서다. 이 전시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공수해온 ‘양치는 소녀’, ‘소치는 여인’ 등 유화 5점과 데생 등 밀레 작품 20여 점이 걸렸다. 조선일보 주최였다.
천 화백은 유치원 때 아버지와 함께 간 이발소에서 ‘만종’을 봤다며 밀레와의 첫 만남을 추억했다. 소학교 5학년 때 교실에도 ‘만종’이 걸렸었다고 했다. ‘이삭줍기’와 함께였다.( ‘밀레특별전을 보고’, 조선일보 1972년8월29일)
90년 전 소학교 교실과 이발소에 그림이 붙어있을 만큼, 밀레는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인기있는 서양화가였다. 마네,모네나 고흐, 고갱, 그도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보다 밀레가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 사연은 뭘까.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린 밀레 대표작 '만종'과 '이삭줍기'. 4년전 여름 들렀는데, 아득한 옛날같다. 1930년대 조선의 이발소와 학교 교실엔 이 그림 복제화가 많이 걸렸다. 해방후 1980년대까지도 그랬다./김기철기자
▲1925년 6월30일자 '시대일보' 1면에 실린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시대일보는 육당 최남선이 1924년 창간한 일간지다.
◇1920년 김찬영의 밀레 소개
초기 서양화가 김찬영(1889~1960)은 1920년 이런 글을 썼다. ‘밀레라 하면 근대인으로는 어떠한 인물인 줄을 모를 사람이 없겠다. 그러나 천재를 구비한 밀레도 당시에 묘출한 명작을 세상에 공포하고 일반 공중 및 미술비평가들에게 ‘예술의 반역자’라는 혹평과 위협을 당했다. 그것이 오십 년 후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인생의 대복음이라는 찬언까지 받게 된 것이다.’( ‘서양화에 대한 계통及사명’2,동아일보 1920년 7월21일)
미술사학자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따르면, 조선에서 밀레를 소개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글이다. 이 글만 보면, 밀레는 100년 전 경성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것 같다. 김찬영은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1917년 귀국 후 고향 평양에서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였다. 106세 현역화가 김병기의 선친이기도 하다. 김찬영은 ‘폐허’ ‘창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1930년대 들어 고미술품 소장가로 이름났는데, 최근 경매에 나와 논란이 된 간송 컬렉션의 ‘금동계미명(癸未銘)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안석주는 모윤숙의 시를 밀레의 '만종'에 빗댔다. '씨(氏)의시(詩)는 『말레—』 만종(晚鍾)이란그림을보고 짓는 때가 만흔지 아둑—하고 거룩하고 애틋하고 설어웁고 정(情)겨웁고 한맛이 잇는것이 간도(間島)의눈뿐아니라 서백리아(西伯利亞)의 눈까지도 녹일만하게 온기충일(溫氣充溢)의시(詩)다.' 조선일보 1933년 2월8일자에 실렸다.
◇밀레 애호가 안석주
밀레를 신문, 잡지에 자주 등장시킨 평론가는 석영 안석주(1901~1950)였다. 1920~1930년대 조선일보에 만문만화를 연재하고, 학예부장을 지낸 그 안석주다. ‘밀레는 본시 농촌에서 자라나서 그는 농촌의 풍정을 그리었나니 ‘만종’(晩鍾)이 그의 일품에 하나다…'만종’이 그의 일생중 가장 적빈할 때에 제작한 것이니 그는 농촌의 형제자매에게 이 만종을 통하야 새로운 종교를 보여주었는 바 그의 숙부와는 달리 무저항주의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찰나찰나에 관자(觀者)로 하여금 안위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라 하겠다.’(‘美展印象’2, 조선일보 1929년9월7일)
동경에서 미술 유학을 했던 안석주가 작가 등용문이던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을 둘러보고 쓴 인상기였다. 앞서 1925년 개벽사에서 발간하는 잡지 ‘신여성’에 ‘전원화가 밀레’란 글도 썼다. 밀레는 ‘노동의 정체’를 보여주고, ‘평화와 인류애를 밝히 가르쳐준 성자’였지만, 박해와 중상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한해 전 경성제일고보에 다니던 김주경(1902~1981) 그림에 대해 ‘군(君)의 작품을 대할 때 밀레의 모든 것이 추억된다’( ‘제2회 고려미전을 보고서’, 조선일보 1924년10월27일)고 쓸 만큼, 밀레는 그의 이상이었다.
모윤숙의 시를 밀레의 ‘만종’에 빗대기도 했다. ‘씨(氏)의 시(詩)는 『밀레—』 만종(晚鍾)이란그림을보고 짓는 때가 만흔지 아둑—하고 거룩하고 애틋하고 설어웁고 정(情)겨웁고 한맛이 잇는것이 간도(間島)의눈뿐아니라 서백리아(西伯利亞)의 눈까지도 녹일만하게 온기충일(溫氣充溢)의시(詩)다.’( ‘라인강반의 梳頭姬, 月岸 모윤숙씨’, 조선일보 1933년 2월8일)
◇스물한살 팔봉 김기진의 밀레
밀레는 작가, 화가들이 자주 소개한 서구 화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스물 한살 팔봉 김기진은 1924년 이런 글을 썼다. 예술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사람이 하는 운동이니 사람을 속박하지 말라. 나는 ‘아나’(아나키스트)도 테러리스트도 니힐리스트도 아니다. 다만 사람일 뿐이다. 그러다 밀레를 떠올린다. ‘나는 밀레의 그림을 생각하였다. 무엇이 귀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어떠한 것을 바라고 살아야만 할까를 생각하였다.’( ‘온돌만필’, 조선일보 1924년11월3일)
좌파 문예단체인 파스큘라와 카프 창립에 뛰어든 청년 김기진에게도 밀레는 우상이었다. 해방 후 월북해 북에서 만경대 묘향산을 그린 김주경도 1937년11월 ‘세계명화 이면의 일화’란 제목으로 밀레의 일생을 동아일보에 3번에 걸쳐 연재했다.
◇이와나미 서점의 심벌 ‘씨뿌리는 사람’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따르면, 밀레는 1930년대쯤 한국, 일본,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였다. 이발소나 집집마다 ‘만종’이나 ‘이삭줍기’ 복제화가 걸렸다. 조선의 밀레 열풍은 일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선 1890년 제2회 메이지미술전람회에서 밀레의 ‘군상’ ‘만추’ 2점이 바르비종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처음 전시됐다. 앞서 일본 서양화 거장 구로다 세이키(黑田 淸輝·1866~1924)가 프랑스 유학시절인 1875년 바르비종 밀레의 집을 찾는 등 19세기 말 바르비종을 직접 찾는 일본인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밀레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밀레화보’가 1903년 가보샤(畵報社)에서 나오는가 하면, 1906년 서구화가 개인화집으로는 처음으로 ‘밀레명화전집’ (전3권)이 세카이샤(精華社)에서 출간됐다. 화가뿐 아니라 문인들이 밀레의 작품과 생애에 대해 문예잡지에서 언급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1910~1920년대 밀레에 대한 단행본과 번역서가 많이 나오면서 밀레의 대중적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1933년 창간한 출판사 이와나미(岩派)서점이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상표로 쓰면서 대중에게 익숙해졌다. 이런 일본의 밀레 열풍이 유학생이나 그림, 화보집을 통해 소개되면서 1920년대 조선에서도 근대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외국 작가로 떠올랐을 것이다
▲정확히 50년 전인 1972년8월 덕수궁 석조전 본관에 루브르 박물관 소장, 밀레의 작품이 전시됐다. '양치는 소녀' '소치는 여인' 등 유화 5점과 데생 등 20여점이 포함된 '프랑스명화전'이었다. 조선일보 주최였다.
◇마흔 여덟 천경자의 ‘만종’
50년 전 덕수궁서 밀레 원작을 본 천경자 화백은 젊은 날에 다시 만난 ‘만종’을 얘기했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젊었던 시절은 아주 칠흑같이 불행하고 가난했던 세월이었다. 어느 해 병으로 가난속에서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다…확실히 의식을 되찾고 보니 병원 벽에는 단 하나 퇴색한 ‘만종’이 걸려있었다. 나는 반가와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하고 대화를 했다. 그림의 말은 나의 온갖 굴욕과 가난의 시련, 또 아픈 세례를 달래주고 오붓한 평화를 되찾게 해주어 나는 눈물을 흘릴 수있었다.’(’밀레특별전을 보고’,조선일보 1972년 8월29일)
씨뿌리기나 가축 돌보기 같은 농민의 노동을 소재로 삼은 밀레처럼, 박수근은 농촌 여성의 가사 노동, 도시 서민의 소박한 삶을 많이 그렸다. 미술사학자 김영나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인내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농촌의 농민과 도시 서민들의 삶의 진실성을 그렸고, 이것이 그가 밀레의 작품에서 받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도록 70쪽, 2022)고 했다.
이발소 그림이나 달력 속 ‘만종’과 ‘이삭줍기’는 지금도 추억에 남아있다. 1950년대~1960년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밀레의 전기가 실렸던 적도 있었다. 20세기 전반 농촌사회였던 조선에서 밀레 그림은 익숙한 풍경이었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된 지난 세기 후반에도 우리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만종’과 ‘이삭줍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렇게 밀레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됐다.
◇참고자료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도록, 2022
안석주, 전원화가 밀레, 신여성 1925년2월
김영나, 20세기의 한국미술 2, 예경, 2010
대한뉴스 제894호, 밀레특별전, 1972년8월26일
02.05 ‘신조사 세계문학전집 첫째권 ‘神曲', 죽자사자 달라붙어 읽었다’
1927년 대대적 신문 광고로 日 58만명 예약…조선 지식 청년들의 교양서

▲휘문고보 동기인 안회남과 김유정은 학창시절 수업을 빼먹고 남산에 올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읽곤 했다. 1927년 출간되기 시작한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일본은 물론 조선의 지식청년들의 교양을 길러준 필독서였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소설가 겸 평론가 안회남(1909~?)은 소설 ‘봄, 봄’을 쓴 김유정(1908~1937)과 단짝이었다. 1923년 휘문고보에 입학, 같은 반이었던 둘은 걸핏하면 학교 수업 빼먹고 놀러 다닌 ‘문제아’였다.
‘유정과 사귀기는 중학시대였는데 그때 우리 크라쓰에서 결석·지각·조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둘이 있었다. 그것이 유정과 나였다. 우리는 그때 일주 평균 삼사일은 으레히 학교를 빼먹었는데 유정과 나와는 이것으로 서로 알게도 되었고 나중에 친하게도 되었던 것이다.’(懷友隨筆 2, 惡童 上, 조선일보 1938년 6월8일)
둘은 취운산, 남산으로 돌아다녔다. 무작정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때 신조사 출판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기 비롯한 때였는데, 그러면 우리는 취운산이나 남산으로 올라가서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고 또 뚜하고 점심시간을 알려주면 벤또도 먹었다.’
◇작가 지망생의 ‘문학 교재’
안회남이 얘기한 신조사 전집은 1927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세계문학전집’이다. 작가 이호철의 문단 회고에도 이 책이 등장한다. 해방직후 소설가 지망생이던 손소희와 만난 김동리가 소설공부를 시키기 위해 추천한 책이 바로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이었다.
‘뒤에 동리에게서 내가 직접 들은 얘기이지만 그 때 손소희는 소설을 쓴다고는 했지만 도무지 읽어낸 것부터 너무너무 박약하더란다. 그리하여 자신이 다방 안에서 마주 앉아 문학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켰노라는 것이다...세계적인 고전들을 섭렵하도록 이끌었는며 일본 신조사에서 간행되던 37권짜리 세계문학전집부터 우선 사그리 읽도록 했다는 것이다.’(이호철, ‘우리네문단골 이야기’ 1 102쪽,자유문고, 2018)
1927년생 기업인 김정문은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기에 일본 신조사 간행 37권짜리 ‘세계문학전집’ 일본 춘추사의 ‘세계대사상전집’도 탐독했다. 이 전집에는 인류문명사 이후 철학 예술 외에 모든 학문 분야의 고전들, 신고전들이 실려 있다’고 회고했다. 우리말로 된 변변한 세계문학전집이 없던 시절, 신조사 전집은 학생이라면 읽어둬야할 교양 목록이자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독파해야 할 필독서이기도 했다.

▲경성에서 발행된 일본어신문 '경성일보' 1927년 3월1일자에 실린 신조사 세계문학전집 광고. 권당 1엔짜리 엔본전집으로 불린 이 총서는 대량 생산, 대량 선전, 대량 판매로 대성공을 거뒀다.
◇권당 1엔, 500쪽 고급 양장본
함동주 이화여대 교수에 따르면,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일본에서 서양 문학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함동주, ‘신조사판 엔본 ‘세계문학전집’의 출판과 서양문학의 대중화’, 일본학보 제104집, 2015.8)
1927년 1월30일 도쿄 아사히 신문에 2 페이지 짜리 광고가 나갔다. 신조사의 세계문학전집 예약 출판 광고였다. 1차분 38권, 500쪽 고급 양장본을 1엔 균일가로 예약 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성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와 ‘조선신문’에도 비슷한 광고가 실렸다.
그해 3월1일 마감한 예약 건수만 58만부. 그리고 바로 ‘레미제라블’ 1권이 첫 번째로 출간됐다. 출판사가 이전에 펴낸 ‘세계문예전집’에 ‘레미제라블’이 포함됐기 때문에 빨리 나올 수 있었다. 번역자는 둘 다 도요시마 요시오(豊島與志雄)였다.
당시 일본에서 단행본 출판은 보통 1000부 단위였다. 4000~5000부가 팔리면 성공이었다. 전집도 1만명 정도 독자를 확보하면 베스트셀러에 들 정도였다. 그런데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단번에 60만 가까운 독자를 예약으로 확보했다. 독자층이 획기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소설가 최일남은 '‘신곡'이 이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의 첫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자사자 달라붙은 기억이 새롭다. 맛대가리 없는 내용을 모르면 나머지 서양문학의 이해는 가망없다는 각오로 덤빈 것이 차라리 지겹다'고 썼다
◇엔본 시장 선구자, 개조사 ‘현대일본문학전집’
신조사의 세계문학전집 출간 직전엔 개조사의 ‘현대일본문학전집’이 있었다. 국판 500~600쪽, 63권으로 일본 주요 문학작품을 망라했다. 1926년 11월27일부터 신문에 예약 모집 광고를 시작해 다음달 첫 번째 배본으로 ‘오자키고요집’(尾崎紅葉集)이 나왔다. 40만 넘는 예약자가 몰렸다. ‘엔본’ 시장을 연 선구자였다.
개조사와 신조사에 이어 다른 출판사들도 엔본 전집 시장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 초까지 예약 전집 300여 종이 쏟아졌고, 수천만 권의 책이 출간됐다. 대량생산·대량선전·대량판매로 ‘출판대국’ 일본을 낳은 엔본 전성시대였다.

▲박완서는 해방 직후인 고교시절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을 탐독했다. 문학에 대한 갈증때문에 '재미없는 것 몇권빼고 후딱 다 읽어치웠는데도 책에 걸신들린 것 같은 허기증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주완중기자
◇첫권은 ‘神曲', ‘부활’ 등 러시아 소설도 4권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1차분 38권(1927년~1930년), 2차분 19권(1930년~1932년), 합계 57권이었다. 1차분에는 단테의 ‘신곡’,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셰익스피어 걸작집’,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밀턴의 ‘실락원’이 1권~5권을 차지했다. 이어 ‘파우스트’ ‘몬테크리스토 백작’ ‘두 도시 이야기’ ‘모파상’과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톨스토이 ‘부활’, ‘체홉/고르키/고골, 러시아 3인집’ 등 러시아 문학도 4권이나 들어갔다. 60명 넘는 근대 서양문학사의 대표적 작가들을 망라했다.
2차분은 1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졌다. ‘적과 흑’(스탕달) ‘제인 에어’(샬롯 브론테) ‘로드 짐’(조셉 콘래드)같은 낯익은 작품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들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신조사 세계문학전집하면, 1차분 38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 ‘에브리맨 총서’가 모델
신조사 문학전집은 당시 영국에서 출간된 에브리맨 총서’(Everyman’s Library)가 모델이었다. 출판업자 조셉 덴트(Joseph Dent)가 1906년부터 출간한 에브리맨 총서는 권당 1실링, 100권 5파운드에 모든 계층이 세계 명작을 소장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간행됐다. 1000권을 목표로 한 이 총서는 5년 만인 1910년 505권을 돌파했다. 그리고 1956년 마침내 1000권째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나왔다.
◇'서양 문학작품은 교양인의 필수품’선전
신조사는 서양의 대표적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교양인의 필수조건이라고 내세웠다. ‘세계문학에 친숙해지는 것은 아침에 기차, 전차를 이용하고, 저녁에 활동 라디오를 즐기는 자의 의무다. 옥상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서재에 본 전집을 갖추지 않은 것은 치욕이다’(도쿄아사히신문 1927년2월15일자, 함동주 위 논문 재인용)라고까지 선전했다. 이런 선전이 먹혔을까. 중산층 가정에서 엔본 전집 장서를 갖추는 게 일반화됐다.
‘외국 문학은 신조사에서 최초의 세계문학전집이 나왔을 때 익숙해졌다. 도스토옙스키도 그 인연으로 읽게 되었는데, 그중에 끌렸던 것은 포(에드가 엘런 포)였다.’ 훗날 추리 작가로 활동한 1909년 생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처럼,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20세기 전반 일본인의 독서 체험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공통 요소가 됐다.

▲이하윤은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위고의 ‘레미제라블’ ‘로망 롤랑’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다고 썼다. '아! 내 과연 이들의 장편을 얼마나 감격으로써 탐독하였었는고. 이시대야말로 나의 심금의 현은 쉴새없이 울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내 심금의 현을 울리인 작품7. 투르게네프 作 그 전날밤 기타’, 조선일보 1933년 1월25일)
◇'시를 쓰려면…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을 보라’
1930년대 조선의 문화·예술계 인사가 신문에 쓴 애독서를 보면,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이 종종 등장한다. 시인 겸 영문학자 이하윤은 투르게네프의 ‘전날 밤’ 등 러시아 문학을 꼽은 뒤 이렇게 썼다. ‘이윽도 내 취미는(물론 당시에 세계문학전집과 그밖에 많은 외국작품의 번역을 간행하던 신조사의 덕(德)이겠지만) 곧 위고의 ‘레미제라블’ ‘로망 롤랑’ ‘장 크리스토프’로 옮아갔던 것입니다. 아! 내 과연 이들의 장편을 얼마나 감격으로써 탐독하였었는고. 이시대야말로 나의 심금의 현은 쉴새없이 울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내 심금의 현을 울리인 작품7. 투르게네프 作 그 전날밤 기타’,조선일보 1933년 1월25일)
1930년대 신문엔 독자 문의에 편집국 기자들이 대답하는 코너가 있었다. 한 시인 지망생이 ‘시를 쓰려면 무슨 책을 읽어야할까’ 물었다. 시를 많이 읽고 깊이 감상하라는 얘기와 함께 이런 답변을 실었다. ‘시집으로서는 세계의 시인들을 다 각각 단행본으로 보기는 어려우니 신조사출판인 ‘세계문학전집’가운데 ‘근대시인집’(반가1원)이란 것이 있는데 이 책에는 세계 각국의 시인들의 시를 몇편씩 발췌해 모아놓은 것이니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자기의 개성이나 취호에 맞는 시인이 있거든 다시 그 시인의 전작품을 통독하고서 사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시를 쓰려면’, 조선일보 1935년 4월25일)
◇'한 질만 있으면 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신곡’은 전집 1권에 수록됐다는 이유로 더 주목을 받았다. 1932년생 소설가 최일남은 유소년 시절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다음에 읽은 것이 일본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이었는데, 단테의 ‘신곡이 이 전집의 첫째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자사자 달라붙은 기억이 새롭다. 맛대가리 없는 내용을 모르면 나머지 서양문학의 이해는 가망없다는 각오로 덤빈 것이 차라리 지겹다.’(‘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 137쪽, 민음사, 1994)
1931년 생 소설가 박완서도 이 세계문학전집 마니아였다. ‘고등학교 졸업반 무렵이었다. 문학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릴 때였다. 그때는 나도 일본 신조사에서 나온 38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그것 한 질만 있으면 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재미없는 것 몇권빼고 후딱 다 읽어치웠는데도 책에 걸신들린 것 같은 허기증은 나아지지 않았다.’(‘노란집’ 86쪽, 열림원, 2013)
박완서는 해방 이후 고교를 다녔다. 그때도 일역(日譯) 세계문학전집의 힘은 여전했다. 학생이 있고, 형편이 좀 살 만하면 집집마다 이 전집 한 세트 정도는 갖췄던 모양이다.
신조사 세계문학전집은 해방 후 출간된 우리 세계문학전집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100년전 신조사 리스트가 요즘 출간되는 세계문학전집에도 ‘정전’(正典)의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서양 문학작품 번역서 상당수가 일역본을 베꼈다는 조사 결과가 잊을만하면 나왔다. 일제 잔재 청산만 외칠 게 아니라 우리 지성사의 뿌리가 어디서 유래하는지부터 제대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자료
함동주, 신조사판 엔본 ‘세계문학전집’의 출판과 서양문학의 대중화, 일본학보 제104집, 2015.8
박숙자, 속물교양의 탄생-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푸른역사, 2012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푸른역사, 2003
박완서, 노란집, 열림원, 2013
이호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1, 자유문고, 2018
02.12 나폴레옹·괴테 100주기 기념 열풍
헤겔·베토벤 ‘百年祭’ 앞다퉈 신문 특집…'괴테의밤’, ‘위고의 밤’행사 열어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초상화. 1821년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세상을 뜬 나폴레옹은 100년 뒤 조선에서 유럽에 자유와 공화, 혁명의 깃발을 치켜든 영웅으로 조명받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붐이 일었던 '백년제'의 출발이었다. /퍼블릭 도메인
‘오인(吾人)은 본년 5월5일을 지날 때에 감개무량의 눈물로 자유의 신(神)을 조문하고 공화의 신(神)을 찬미하였다.’
1921년 조선일보에 ‘나옹(那翁) 逝後 100년’(5월11일~15일)이란 기사가 실렸다. ‘나옹’은 나폴레옹을 가리키는 말로 1921년5월5일은 그의 타계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00년 전 까마득히 먼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눈 감은 프랑스인의 죽음을 소환한 이유는 뭘까. 그것도 닷새 연속으로 나폴레옹의 생애와 공적을 곱씹다니.
◇'나옹은 자유의 母, 공화의 神'
기사는 나폴레옹이 1804년 국민투표로 제위(帝位)에 올랐다는 점을 주목했다. ‘씨저式 데모크래시’라고 불렀다. 자유와 공화의 씨를 세계에 뿌린 ‘나옹은 자유의 모(母)요 공화의 신(神)’이라고 썼다. 일제 3·1운동 탄압으로 수많은 운동가들이 투옥돼있던 시절, 나폴레옹이 상징하는 자유와 공화, 혁명은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도 ‘奈翁100년祭’(1921년5월5일)란 기사로 나폴레옹 100주기를 기념했다. 나폴레옹 사진을 커다랗게 싣고 현지 추모 분위기를 전했다. 닷새후인 10일자에도 개선문 앞 열병식 등 추모 행사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100년 단위 기념, 서구의 시간질서
100년 단위로 인물의 탄생과 서거를 기념하는 일은 동아시아에선 낯선 방식이다. 60갑자(甲子)가 한 바퀴 돌아오는 60년 단위로 기념하는 게 보통이었다.
‘우리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생각의 힘)을 낸 김미지 박사에 따르면, 동양에 주갑(周甲) 대신 세기(100년)라는 시간 단위가 들어온 것은 음력을 양력으로 대체하면서부터다. 조선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양력을 공식 채택했다. 조선이 서구의 시간 질서를 받아들이면서 60년 대신 100년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1935년 빅토르 위고 서거 50주년을 맞아 조선, 동아일보는 특집을 연재했다. 사진은 조선일보 1935년 5월22일자
◇1920년대부터 ‘백년제’ 본격보도
한국의 신문, 잡지가 100년을 단위로 특정한 날짜를 기념하는 ‘백년제’(百年祭) 형식의 행사를 본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도스토옙스키(탄생 100년·1921) 톨스토이(탄생100년·1928) 입센(탄생 100년·1928) 괴테(서거100년·1932) 푸시킨(서거 100년·1937) 졸라(탄생100년·1940)같은 저명 작가뿐 아니라 헤겔(서거 100년·1931) 스피노자(탄생300년·1932) 에라스무스(서거400년·1936)같은 사상가를 기념했다.
케플러(서거 300년·1930) 멘델(서거 50년·1934)같은 과학자는 물론 베토벤(서거100년·1927) 슈베르트(서거100년·1928) 비제(탄생 100년·1938) 파가니니(서거 100년·1940) 차이콥스키(탄생 100년·1940)같은 음악가도 들어간다.
백년제 성격상 19세기 인물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서양이 주도하는 근대 문화의 산실이 된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식민지 조선은 ‘백년제’를 근대의 길을 앞서간 서구의 경험을 되집어보는 기회로 활용했다.
◇조선·동아의 입센 백년제
‘인형의 집’ 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28년 조선일보는 사흘에 걸쳐 ‘입센百年祭’기획을 내보냈다. 학예부 기자 심훈이 희곡 작품을 해설하고, AZ생이 생애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심훈은 ‘사상으로든지 그 정치한 작극의 기교로든지 진실로 위대한 자취를 우리에게 끼쳐’준 입센의 작품이 조선 민중에게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면서 ‘’인형의 집’이 여학생들의 손으로 상연되었던 것을 극경한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요 그나마 여성에게 반역의 정신을 고취한다는 구실로 당국의 금지를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이 위대한 예술가 한 사람이 지금으로부터 백년전에 이 세계에 탄생하였으므로 말미암아 얼마나 수많은 근대인의 일그러지고 짓밟힌 가엾은 영혼들이 얼마나 큰 위자의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새삼스러히 그의 앞에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입센의 문제극’2·1928년3월21일)
1920년대 여성 해방이 조선에 소개될 무렵, 입센은 신여성들에겐 우상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해 4월1일부터 10일까지 입센백년제 기획을 실었다. 양대 민간지가 입센 기획으로 여성 해방을 내세웠다.

▲조선일보 1932년 3월22일자. 괴테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전면 특집을 실었다.
◇'괴테 백년제’에선 ‘에그몬트’ 서곡, 오페라 ‘파우스트’ 감상
1932년 3월22일은 괴테 서거 100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날 조선·동아 양대 일간지는 한페이지를 털어 괴테 백년제를 소개했다. 하루 4페이지 내던 시절 한페이지를 괴테 백년제에 바쳤다. 도쿄제대 독문학부를 졸업한 조희순과 호세이대 독문학과 출신인 김진섭이 각각 ‘괴테의 생애와 예술’ ‘괴테의 분위기’를 썼다. ‘수난 독일의 괴테 백년기념제’ 기사에선 ‘국토의 태반을 잃었을지라도 괴테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 독일은 여하한 강국에 대하여서도 자랑을 양보할 수는 없다’는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을 인용했다.
하웁트만은 1912년 희곡 작가로선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차대전 패전의 멍에를 지면서도 ‘괴테’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넘치는 독일 사회 분위기를 소개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조희순, 김진섭과 함께 도쿄제대 독문과 출신인 극작가 서항석이 ‘괴테의 경력과 작품-그의 사후 백년제를 際하야’를 썼다.
백년제 당일엔 시내 카페 명치제과점에서 김진섭 박용철 이하윤 서항석 조희순 등 해외문학파를 중심으로 ‘괴테의 밤’ 행사도 열었다. 빅타 축음기회사 후원으로 괴테 관련 음악인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오페라 ‘파우스트’ ‘미뇽’을 감상하기도 했다.

▲1927년 3월26일은 베토벤 서거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조선일보는 26일부터 29일까지 나흘간 '베토벤약전'을 연재했다. 동아일보도 특집기사를 실었다. 백년제 기념인물은 작가, 학자뿐 아니라 음악, 미술 등 예술가도 포함됐다.
◇'베토벤은 詩歌의 셰익스피어 같은 樂聖'
‘100주기’는 문호만 기린 게 아니다. 1927년 3월26일은 베토벤 타계 100주년되는 날이었다. 그날자 조선일보는 ‘구미각국은 물론이오 문화가 발달된 어느 나라에서든지 악성(樂聖)의 백년제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고 소개한 뒤, ‘베토벤 약전’을 나흘간 연재했다. 첫회분엔 ‘시가(詩歌)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잊을 수 없는 것같이 음악에 있어서 또한 베토벤의 위대함을 잊을 수가 없다’면서 베토벤을 셰익스피어에 견줬다. ‘세계 음악사상에 나타난 모든 악성들가운데서도 최고위를 점령하고 있다. 그는 재래의 음악으로 하여금 신경로(新徑路)를 찾게했으며 근대 음악계의 발달은 그의 영향으로조차 기인함이라 할만큼 그의 음악사에 처한 그 천재적 공적은 위대하다.’ 동아, 매일신보도 3월26일 전후 ‘베토벤 백년제’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백년제’는 어떤 의미였을까
서구의 이름난 작가·예술가·지식인을 기념하는 건 식민지 조선에서 어떤 의미였을까. ‘OOO백년제’기사가 나올 때마다 따라붙는 질문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였다. 단순히 복고 취미나 거장을 떠받들기만 하는 문화적 사대(事大)주의를 넘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어떻게 연결지을까 하는 고민이 뒤따랐다.
‘백년제’ 열풍은 잠든 조선의 지식 청년을 일깨우고 서구 근대를 따라잡기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문화와 예술, 과학 수준이 어느 쯤에 와있는지 주제파악을 해야 서구를 따라잡든지, 뛰어넘든지 할 테니까. 근대를 향한 지난(至難)한 뜀박질이었다.
◇참고자료
김미지, 20세기 초 한국 문학의 장에 나타난 ‘문호 백년제’ 기획에 대한 고찰, 인문논총 제76권 제1호, 2019, 2
김미지, 우리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생각의 힘, 2019
02.19 ‘빙상3걸’, 압록강 全일본선수권대회 휩쓸다
김정연·이성덕·장우식, 1936년 독일 동계올림픽에도 첫 출전

▲2010년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500m 금메달을 딴 이상화 선수가 태극기를 들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1936년 조선인 첫 동계올림픽 참가이래 74년만의 빙속 금메달이다. 당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김정연 , 이성덕, 장우식 선수의 숙원을 풀어준 쾌거였다./조선일보 DB
‘압록강 전(全)일본빙상선수권대회 조선軍 석권!’
1934년 2월 낭보가 울려퍼졌다. 4일과 5일 압록강에서 열린 제4회 전(全)일본빙상선수권대회에서 조선인 선수가 1,2,3위를 휩쓸었다는 보도였다. 일본과 만주, 조선에서 참가한 이 대회엔 일본 첫 동계올림픽(1932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참가자와 일본 신기록보유자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했다.
일본 본토는 물론 만주의 일본팀도 만만찮았다. 최대기업인 만철(滿鐵)이 소속 선수들을 빙상 본고장 유럽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원하는 등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압록강 대회는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리는 제4회 동계올림픽 대표선발 전초전 성격도 띠고 있었다.

▲1934년 2월 압록강에서 열린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에서 김정연, 이성덕, 최용진이 1,2,3위를 차지했다. 조선일보 1934년2월6일자.
◇김정연, 이성덕, 최용진 1,2,3위
막강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위를 차지한 이는 스물네 살 김정연. 평남 강서출신인 김정연은 평양고보를 나와 일본 메이지대에 유학 중이었다. 당시 빙상선수권대회는 500m, 1500m, 5000m, 1만m 순위를 합산, 총점으로 등수를 정했다. 김정연은 5000m·1만m에서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들어와 종합1위를 했다. 이성덕이 2위, 최용진이 3위였다. ‘빙상 3걸’을 환영하기 위해 신의주·평양·경성에서는 성대한 축하대회가 열렸다. ‘빙상 朝鮮’의 탄생이었다.
김정연, 최용진은 한달 앞서 열린 전일본학생빙상선수권대회도 휩쓸었다. 최용진이 500m, 1500m에서 일본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들어왔고, 김정연은 5000m, 1만m에서 우승했다. 단거리와 중·장거리 4종목 모두 조선인이 휩쓴 것이다.

▲1934년 전일본학생빙상선수권대회를 제패한 김정연 최용진의 활약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4년1월 5일자 기사
◇한강, 대동강, 압록강서 빙상대회
빙상은 20세기 들어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체육회가 첫 빙상경기대회를 연 게 1925년1월5일이었다. 한강철교 아래 임시 링크를 만들어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치렀다. 평양에 있던 관서체육회는 대동강에서 빙상 경기를 열었다. 온도가 내려가지 않아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으면 경기를 취소하던 시절이었다.
◇자비 출전한 이성덕, 감독·코치까지 거느린 일본 선수
김정연에 앞서 주목받은 선수는 이성덕(1911~1968)이었다. 신의주 출신인 이성덕은 와세다대에 유학하던 1933년1월27~30일 일본 닛코에서 열린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500m, 5000m는 1위였고, 1500m는 2위였다.(‘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이성덕군의 수훈’, 조선일보 . 조선일보 1933년 2월1일)
이성덕은 2월8일부터 나흘 연속 ‘일본빙상선수권대회 우승記’를 조선일보에 실었다. 그가 밝힌 일정부터가 초인적이었다. 1월 20일 저녁 신의주 발 평양행 기차 탑승, 21일 평양 관서체육회 주최 전선대회 참가, 당일 저녁기차로 경성행, 22일 한강 빙상대회 출전, 당일 밤 부산행 기차 탑승, 시모노세키행 연락선으로 대한해협 건너 24일 오후5시 동경역 하차, 25일 오전 11시 닛코 도착. 매일 경기를 치르고 밤기차로 다음 장소로 옮기는 일정이었다. 개막 이틀전에 도착한 이성덕은 28일 500m와 5000m, 29일 1500m와 1만m를 달렸다. 일본 선수들은 만철 같은 기업이나 지방협회 지원으로 감독·코치까지 따라온데다 자동차로 경기장까지 이동했다. 자비출전한 조선 선수들은 그런 일본 선수들을 보며 오기를 다졌다.

▲1936년 독일서 열리는 동, 하계 올림픽 대회에 출전한 조선인 선수를 조명한 기사. 조선일보 1936년 1월1일자 신년호.
◇김정연, 이성덕,장우식이 올림픽 대표로
‘괄목할 빙상계 동양의 선수권을 독점한 삼군의 위적’(조선일보 1935년 1월1일) 조선일보 1935년 신년호는 ‘빙상 조선’의 도약을 기원하는 특집을 실었다. ‘1935년의 선두에는 ‘스포ㅡ츠’조선의 봉화가 여명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용함하게 타오르고 있다. 자ㅡ돌격이다! 달려라 그러고 너는 주저없이 네 앞길을 막는 뭇장애와 특수한 곤란을 무찌르고 세계의 최전열에 나서거라.’
1935년 신년호 기사 필자는 고봉오(1907~1945) 기자였다. 평북 신의주가 고향인 고봉오는 스케이트 선수 출신이었다. 1933년1월 이성덕이 일본빙상선수권을 제패할 당시, 500m에서 3위를 했다. 대회 종료 직후인 1933년 3월 조선일보에 입사한 고봉오는 빙상과 육상을 중심으로 스포츠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김정연은 1934년에 이어 1935년 1월 닛코에서 열린 전일본빙상선수권을 2연패했다. 이성덕이 2위였다. 김정연과 이성덕이 일본 선수 둘과 함께 올림픽 정(正)대표로 선발됐다. 장우식과 일본 선수 둘이 후보로 뽑혔다.
◇痛憤의 첫 올림픽 13위
1936년 2월16일자 조선일보 석간 2면엔 조선인 첫 동계올림픽 출전선수인 김정연의 1만m경기 소식이 실렸다. ‘빙상 올림픽初무대 최후전/올림픽 기록 깨엿스나/통분! 13위/이, 장 양군은 각각 25위, 26위’. 세계 무대와의 격차는 컸다. 노르웨이가 스피드스케이팅 4 종목 전부를 석권했다.
하지만 아시아에선 조선 스케이트 선수들이 독보적이었다. 김정연은 1972년 인터뷰에서 “해방전까지 사실상 한국 스케이팅은 동양 제일을 유지했다”(조선일보 1972년 1월30일)고 말했다.
한국은 해방 후 1948년 제5회 생모리츠대회에 참가한 이래 6·25전쟁 중인 1952년 이외엔 매번 출전하고 있다. 1992년 알베르빌 대회에서 동계올림픽 첫 메달의 숙원을 풀었다. 이 대회에서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둘(김기훈 1000m, 남자 5000m 계주), 동메달 하나(이준호 1000m), 스피드 스케이팅(김윤만 10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빙상 조선’의 DNA가 반세기만에 활짝 꽃을 피웠다.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까지 한국팀이 거둔 성과는 우연이 아닌 것이다.
02.26 ‘자유, 평등 외치는 남성들이여, 우리는 왜 장난감 취급합니까’
여성 목소리 담은 투고 ‘부인 공개장’…불평등한 결혼, 여성 차별에 대한 비판 쏟아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가면을 쓴 남성들에게 보냅니다’
도발적인 제목의 글이 신문에 실렸다. 1929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 ‘가정부인’면, 요즘 말로 ‘가정면’ 기획이었다. ‘경성 李0淑’이라고 밝힌 필자는 인텔리 남성들을 향해 ‘왜 우리 여자들의 부르짖고 나오는 길을 그다지도 방해하고 있습니까’라고 항의했다.
‘우리 조선 여자가 해방을 얻자면, 먼저 조선이란 조건밑에서 신음하는 남자들과 약속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하여 남자들과 한 자리에 나아가려 하면 당신들은 한 동지로서의 교훈이나 지도를 주지 않고 의례히 첫 교제수단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ㅡ든 수단을 써가며 아직 사회적 훈련이 적은 우리 여성에게 호기심이나 사게하고 성적(性的)XX을 얻기 위하여 감언이설로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여성들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모성을 무시하느니, 처녀미를 존중치 않느니, 사회에 풍기를 문란케 하느니 하는 역선전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소위 배웠다는 진보적 남성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갑갑한 하소연, 속상하는 사정 적어보내시오’
이 글은 조선일보가 1929년 9월부터 연말까지 진행한 ‘부인 공개장’기획 의 일부였다. 조선일보 1929년 8월23일자에 ‘부인공개장 모집’이란 학예부(學藝部·요즘의 문화부) 명의 사고(社告)가 실렸다. 여성 독자를 상대로 글을 공개 모집하는 내용이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불평, 딸이 되어서 아버지에 대하여 간하고 싶은 말, 또는 자기 혼자만 알고 차마 발표하지 못했던 사정, 꼭 여러 사람에게 한번 발표를 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분한 일, 갑갑한 하소연이며 속상하는 사정 기타를 본란으로 적어보내십시오.’

▲조선일보 1929년8월23일자에 실린 '부인공개장' 모집 사고. 8월31일까지 매일같이 게재됐다.
◇불평등한 결혼제도에 대한 불만 많아
구시대적 차별과 억압 아래 있는 여성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주자는 취지였다. ‘순 조선 글로 알기 쉽게 쓸 것’ ‘다른 사람의 명예나 인신을 공격하지 말 것’ 등의 주의사항과 함께 지면에 주소·성명은 익명으로 나가더라도 신문사에는 꼭 적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무분별한 비난을 막고, 글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8월 31일까지 매일같이 사고가 나갔다.
하루에 수십통씩 투고가 쏟아졌다. 첫회인 9월3일자엔 전남 고흥읍에 사는 김봉자란 여성의 글이 실렸다. ‘아버님! 반성해주십시오’의 이 글은 부모로부터 원치않는 결혼을 강요받는 미혼 여성의 고민을 담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데, ‘부모의 몰이해로 이처럼 괴로움을 받는 이가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라고 호소했다.
‘림O갑씨에게 울며 충고합니다’(1929년9월4일), ‘하와이에 계신 P오빠께 올립니다’(9월5일), ‘나를 버리고 간 변심한 남편에게’(1929년 9월6일)처럼 술 취한 남편의 폭력이나 외도, 빈곤에 시달린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불평등한 결혼제도에 대한 고발이 가장 많았다. 영흥 김O영이 11월8일자에 쓴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는 어린 남편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도시로 유학가면서 시집에서 쫓겨난 열여덟살 여성의 하소연이었다. ‘여자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과 웃음을 함부로 웃는다는 우스운 조건을 붙이며 두들겨 쫓아내니 약한 여자의 몸이라 할 수없이 본가에 와있는 중입니다.’ 필자는 ‘이런 세상에 태어난 우리 여자입니다.얼마나 불쌍하고 애달픈 억울한 사정입니까’라며 글을 맺었다.

▲'가면을 쓴 남성들에게 보낸다'는 부인공개장. 자유와 평등을 외친다는 인텔리 남성들도 여성을 차별하고, 장난감처럼 여긴다는 비판을 담았다. 조선일보 1929년 10월30일자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윤성상.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중퇴한 스물한살 윤성상은 편집국의 유일한 여기자였다. 가정면을 전담하면서 성 차별에 반대하고 여성 계몽을 위한 기획과 기사를 썼다.
◇'이러한 남자들은 하루바삐 각성하라’
‘저주하라! 조선의 가정제도를’(9월10일), ‘여성의 해방은 건실한 투쟁에 있습니다’(10월2일) ‘이러한 남자들은 하루바삐 각성하라’(10월12일)... 연일 과감한 제목의 기고가 줄이었다. 기고는 석달간 계속됐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쏟아지자 이번엔 남자들의 의견도 반영하겠다며 ‘여성에게 보내는 말’ 공개투고도 모집했다. ‘여성운동보다 먼저 사람이 돼라’(11월26일) ‘배웠다는 여성들 정조를 지킵시다’(12월6일)같은 글이 실렸다. 요즘의 소셜미디어 논쟁과 다를 바 없는 날 선 공방이 오갔다.
◇'부인공개장’ 담당 여기자 윤성상
당시 이 기획은 학예부에 근무하던 윤성상(1907~1978)이 맡았다. 독립운동가 추계 최은희(1904~1984)에 이어 조선일보에 입사한 두번째 여기자였다.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중퇴한 그는 1928년 주필이던 민세 안재홍 추천으로 입사했다. 윤성상에게 신문사 편집국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첫 출근 때 ‘모든 시선이 험상궃게만 보였고, 무인고도에 닿은 불안을 느꼈다’고 했을 정도였다. 편집국의 유일한 여기자라는 사실이 버거웠을 것이다.
윤성상은 ‘부인공개장을 읽고서’(조선일보 1929년10월29일)란 칼럼을 썼다. ‘남성에게 받은 학대와 이혼의 선고가 바로 여성 자체의 전 가치가 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한 개 여성으로서의 살길을 찾아 새로운 생에 용감히 살아보십시오’라고 도전을 촉구했다.
훗날 그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가정란의 초점을 아직도 봉건의 깊은 안방속에 잠자고 있는 우리 여성들을 위한 계몽에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의 여기자생활 회고’,’신문평론’ 1965년4월호)고 했다. 앞선 사람의 분투가 있었기에 오늘의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03.05 백석의 연인 ‘란’과 결혼한 경성제대 反帝동맹 주동자 신현중
법학과 1학년때 日帝 만주침략 비판하는 삐라 배포…日 학생까지 포섭, 일본 전국에 충격
▲1937년 결혼한 신현중, 박경련 부부. 통영 출신으로 이화고녀를 나온 박경련은 시인 백석이 연정을 품었던 '란'이다. 백석은 시 '통영'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란을 향한 마음을 드러냈다./조선일보 DB
1931년 11월4일 경성 시내에 호외가 뿌려졌다. ‘초유의 反帝비밀결사와 학생중심의 조선공산당’이란 굵직한 제목이 긴박감을 더했다.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만주침략을 반대하는 반제동맹이 적발됐다는 내용이었다.
최고 수재들이 모였다는 경성제대에서 전투적 반일(反日) 비밀조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인 학생 3명이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반제동맹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총독부를 경악시켰다.
당시 경성제대에 다니던 조용만(1909~1995·언론인, 소설가)은 ‘조선 통치의 중추 인물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제국 대학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에게 포섭되어 조선 독립을 부르짖는 공동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본 전국에 큰 충격을 준 획기적인 사건’(‘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1988)이라고 썼다.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을 전한 조선일보 1931년 11월4일자 호외. 일제 경찰은 보도금지 조치를 내려 대규모 체포 두달 후에야 보도할 수있었다.
◇'저 피로 물든 만주 광야를 보라’
발단은 만주사변이었다. 일본 군부는 1931년 9월 17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본격화했다. 경성제대 반제동맹은 만주침략을 중단하라는 격문을 뿌리며 일제의 침략에 제동을 걸었다. ‘저 피로 물든 만주 광야를 보라. 우리 동포들이 제국주의 총칼에 도륙이 되고 있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반전격’(反戰檄) 성명을 쓴 이는 경성제대 법학과 1학년에 다니던 스물한살 신현중(1910~1980)이었다. 신현중은 예과 신입생 때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반제동맹 주역인 조규찬과 예과의 조선 학생들 책상서랍에 격문을 투입한 열혈청년이었다. 경찰은 예과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만 막았을 뿐 격문 작성자가 누군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신현중은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독서회를 조직하면서 학생들을 포섭했다. 일본인 학생 이치카와(市川朝彦), 히라노(平野而吉), 사쿠라이(櫻井三良)도 끌어들였다.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제2고보(경복고 전신)에도 독서회 삐라를 배포하면서 조직원을 늘려나갔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세 차례나 일제 검거에 걸려 와해된 상태였다. 반제동맹은 제3차공산당 사건 때 검거되지 않은 ML계 강진과 줄이 닿았다.
▲1935년 사회부로 옮긴 신현중이 동료들과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다.
◇경성제대 일본 학생까지 가담
신현중이 쓴 만주사변 격문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느슨한 사쿠라이의 하숙방에서 등사판으로 밀었다. 이틀 밤을 새며 4800장을 찍은 뒤 9월 28일 조선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에게 비밀리에 나눠줬다. 하지만 또 다른 배포책이던 강약수가 격문을 보따리에 넣고 옮기다 경찰 불심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독서회를 함께 한 경성제대 학생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경성제대에서만 일본학생 7명을 포함 20명이 끌려갔고, 치의전과 제2고보학생, 총독부·은행 급사까지 50명이 체포됐다.
신현중은 주동자가 먼저 체포되면 안된다는 의견에 따라 미리 함경남도 흥남으로 몸을 피했다. 저고리 바람에 낡은 맥고모자를 쓰고 괴나리봇짐을 진 시골뜨기 장꾼처럼 차렸다. 여차하면 중국이나 소련으로 튈 작정이었다. 격문을 뿌린 지 한 달 넘게 신문엔 이렇다할 기사가 없었다. 일제의 보도금지 조치때문이었다. 경성에 잠입한 신현중은 아지트인 이성학의 집으로 갔다가 체포됐다.
신현중은 체포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메리켄사쿠(손에 끼는 호신무기)를 생각했으나 형량이 많아질 것같아 쓰지 않고 그 순사에게 서로 갈 테니 결박하지 말라고 제의했다…그러겠다던 순사는 내가 반항하지 않을 것같자, 달려들어 포승줄로 힘껏 묶었다. 나는 몸은 묶였지만 구경꾼들 앞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비겁하지 않게 잡혀가노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
반제동맹사건으로 공판에 넘겨진 19명 중 징역형을 산 학생은 신현중(징역3년) 혼자였다. 조선일보 급사였던 안복산과 조선총독부 급사였던 이형원 등 소년범 2명이 징역 2년을 살았다. 나머지는 모두 집행유예였다. 항일운동사건으로는 유례없이 가벼운 처분이었다. 경성제대 총장 야마다 사부로(山田三良)가 ‘학생들을 관대히 처분해달라’며 호소한 덕분이 컸다고 한다.
◇징역3년 산 뒤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
형기를 꼬박 채우고 출소한 신현중은 언론계에 투신했다. 1934년 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왔다. 입사 첫해 연말 신현중은 신문에 ‘젊은 意氣가지고’란 제목의 송년사를 썼다.
‘이 무기력하고 침체한 금일의 조선이므로 일층 더 우리들 청년의 존재가 중요하고 고귀함을 자부하여야될 것이다…정열에 불타는 청년이 되자! 동시에 실무에 착실한 젊은이가 되자!’ 혹독한 시련을 겪은 스물넷 청년은 여전히 패기넘쳤다. 교정부를 거쳐 1935년 1월부터 사회부에서 일한 신현중은 ‘편집국원 상벌규정 실시 후 첫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될 만큼 유능한 기자였다. 1939년 8월 31일 신문사를 관두고 통영으로 귀향할 때까지 신나게 기자 생활을 했다.
‘과거 반평생 내 직업이 일개 기자였기 때문에 기림(김기림), 만식(채만식), 원조(이원조), 석영(안석주), 일보(함대훈), 소천(이헌구), 정희(최정희), 천명(노천명), 선희(이선희), 허준, 백석 등등 한 직장에서 비비대고 일하고 낄낄거리고 놀았더니만큼 이 쟁쟁한 문단의 별들이 내 머릿속 한 구석에 남겨준 그림자를 더듬어 회상할 수가 있다.’

▲조선일보 1936년 1월23일자에 실린 백석 시 '통영' .백석이 사랑한 '란'의 자취를 찾는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백석 연인 ‘란’과 결혼
신현중은 같은 해 입사한 백석, 허준과 자주 어울렸다. 허준은 월간지 ‘조광’ 1936년 2월호에 소설 ‘탁류’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던 소설가이자 교정부 기자였다. 신현중은 먼저 여동생을 허준에게 소개해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 결혼 회식 기념자리에 참석한 통영 출신 이화고녀생 박경련을 백석에게 소개했다. 신현중의 누나가 통영에서 교사로 있을 때 가르친 제자였다.
백석은 첫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박경련을 ‘란’(蘭)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백다운 고백도 제대로 못했다. ‘통영’이란 시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조선일보 1936년1월23일)
박경련은 백석을 피했다. 박경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신현중이었다. 둘은 1937년 4월 통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백석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이듬해 월간지 ‘여성’ 4월호에 발표한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 이렇게 썼다.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그렇게도 살틀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진주여중·통영중·부산남중·부산여중 교장으로
신현중은 1939년 8월 31일 신문사를 그만두고 통영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일꾼을 사서 밭을 일궜지만 부부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해방 후 잠시 언론사에 몸담았지만 이내 교육계로 방향을 바꿨다. 진주여중, 통영중, 부산남중, 부산여중 교장을 지내며 제자들을 길렀다.
1954년 자전적 수필 ‘두멧골’을 냈고, 국역 ‘논어’ ‘도덕경’을 썼다. 젊은 날의 ‘혁명가’ 신현중은 “조선 독립과 광복을 찾기 위한 수단 방법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접했고 그들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신현중은 사후 10년이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자료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8
신현중, 두멧집, 청우출판사, 1954
이충우, 최종고,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 푸른사상, 2013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편, 랜덤하우스 중앙, 2004
03.12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 이수일 역 맡은 ‘영화배우’ 심훈
1926년 ‘장한몽’ 주연, 영화감독·영화기자로도 활약

▲신상옥 감독이 1961년 메가폰을 잡은 영화 '상록수'. 신영균이 동혁, 최은희가 영신역을 맡았다.영화배우,감독 출신인 심훈은 생전에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애쓰다 작품 발표 이듬해인 1936년 9월 장티프스로 갑작스레 숨졌다. 서른다섯, 때이른 죽음이었다/한국영상자료원
‘우리가 모든 조선 영화를 (불)살러 버린다면 이 영화를 남겨 놓는 데에 과히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印象記’, 조선일보 1929년1월27일)
만문만화로 이름난 안석주(1901~1950)는 1929년 새해 벽두 ‘필화’를 겪었다. 연초 영화를 리뷰하면서 극찬을 했다가 다른 영화감독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것이다. 사흘뒤 신문에서 그는 이 표현을 공개취소해야 했다. ‘’먼동이 틀 때’에 대한 문구는 비록 인상기라 하더라도 다른 모든 영화에 대해 영향이 있을 것을 염려하야 이에 취소한다’(조선일보 1929년1월30일)
몇 년 뒤 영화감독까지 한 안석주가 극찬한 ‘먼동이 틀 때’는 심훈(1901~1936)이 1927년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영화였다. 훗날 ‘상록수’로 유명해진 그 심훈이다. 영화평론가 서광제도 ‘촬영과 카메라워크에 있어서도 조선에서 그 이상 갈 작품을 없을 것’이라고 쓸 만큼 인정을 받았다. ‘먼동이 틀때’는 원래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으로 촬영을 시작했는데, 총독부가 암울한 현실을 떠올린다며 제동을 거는 바람에 제목을 반대로 바꿔야 했다.

▲영화 '장한몽'을 소개하는 조선일보 1926년 3월1일자 기사. 심훈이 신태식이라는 가명으로 이수일을 연기했다.
심훈은 1926년 이경손 감독의 영화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 이수일을 연기한 배우 출신이라 더욱 주목을 받았다. 조선인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장한몽’은 일본 소설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조중환 소설로 신파극의 대명사였다. 근엄한 얼굴의 심훈이 망토를 걸친 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하고 일갈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무성영화 시대라 심훈의 육성 대신 변사가 구성지게 대사를 읊었을 것이다.
1927년 10월26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먼동이 틀때’는 관객 5만명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거액의 제작비(3000원)을 들인 영화치고는 재미를 못 봤던 모양이다. 영화사는 망했고 심훈은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영화배우, 감독을 거친 심훈은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와 영화 기사와 리뷰를 활발히 썼다. 1931년 퇴사한 이후 고향에 내려가 쓴 '상록수'가 동아일보 현상공모에 당선됐다.
◇조선일보 기자로 영화평, 기획 기사 써내
심훈은 연극과 무용 기사도 썼지만 주 관심은 영화였다. 서구와 조선의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기사를 활발하게 다뤘다. 1929년 1월 쓴 ‘조선영화총관’이 대표적이다. ‘조선에 활동사진이라는 것이 맨처음 수입되기는 1897년, 즉 지금으로부터 33년전에 이현(남산정)에 있던 ‘본정좌’(本町座)라는 조그만 송판쪽 빠라크 속에서 일본인 거류민들을 위해서 실사(實寫) 몇권을 가져다 놀린 것으로 효시를 삼는다’(조선영화총관 1, 1929년1월1일) 원각사를 거쳐 첫 상설영화관인 일본인 경영 ‘고등연예관’(高等演藝館)을 소개했다. ‘한국영화사’의 효시쯤 될 것같다.

▲먼동이 틀 때' 촬영 시작을 알린 조선일보 1927년 9월3일자 기사. 사진은 주연 신일선과 한병룡.
◇'사기 횡령해서라도 촬영장부터 만들어야’
‘관중의 한사람으로’(1928년 11월 17~18, 20일)는 흥행업자와 해설자(변사), 영화계의 모순을 매섭게 비판하면서 반성을 촉구하는 기획이었다. ‘조선서 흥행이란 영업은 양복 장사나 구두 장사 모양으로 원료를 한 가지도 우리 손으로 제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업자는 직공들의 수공값에서 겨우 몇할을 얹어가지고 남의 노력을 긁어먹게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흥행자는 제작자와 배급업자의 중간에 끼어 관중에게서 사진을 소개한 수수료 즉 심부름값을 받아먹는데 지나지 못한다.’
선전물만 믿지말고 시사 한번쯤은 미리 보고 상영시키라고 흥행업자를 매섭게 나무란다. 영화계에 대해서도 ‘조선 영화의 역사가 근 10년을 바라보건만 이날까지도 참말로 영화계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나 말하지 못할 것’이라며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든지 사기횡령을 해서라도 촬영장 하나는 지어놓고 카메라 백개와 아크등 몇 대라도 장만해놓고 나서 빈약하나마 정식으로 촬영을 개시하잔 말이다. 적어도 본격식으로 일을 하고 나서 성패간 성적을 말할 수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촬영 카메라와 조명, 촬영장도 없이 조악하게 영화를 만드는 무모한 현실을 들춰내고 있다.

▲심훈이 1930년 10월29일 연재를 시작한 소설 '동방의 애인' 연재를 중단한다는 조선일보 1930년12월 13일자 사고. '불온하다'는 총독부 검열 때문이었다.
◇총독부 검열로 연재소설 중단
심훈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다 두 번 모두 일제 검열에 걸려 중단됐다. 첫번째는 기자로 재직중인 1930년 10월29일 시작한 ‘동방의 애인’. 그해 12월10일까지 39회 연재됐으나, 12월13일 ‘사정에 의하여 중지케 되었사오며’란 짤막한 안내와 함께 중단됐다.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 검열에 걸린 것이다. 두 번째는 1931년 조선일보를 퇴직하고,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가 3개월만에 사상 문제로 추방당한 뒤로 보인다. 그해 8월 16일부터 연재한 ‘불사조’다. 이 작품 역시 검열에 걸려 1932년 2월29일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그해 9월 저항시 ‘그날이 오면’이 수록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또 검열에 걸려 무산됐다.
◇'상록수’와 문자보급운동
심훈은 1932년 본가가 있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지냈다. 이듬해 8월 여운형이 사장인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부임했지만, 1934년 1월 그만두고 다시 낙향했다. 그리고 쓴 게 ‘상록수’다. 상록수는 조선일보가 1929년 시작한 ‘문자보급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첫 부분이 문자보급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00일보사’대강당에서 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이 처음 만나는 곳이다.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자보급운동의 전 과정을 지켜본 심훈의 체험이 담겼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소설에 당선됐다. 심훈은 1924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날이 오면’ ‘오오 조선의 男兒여’
심훈은 3·1운동 11주년을 맞은 1930년3월1일 시 ‘그날이 오면’을 썼다.(’심훈시가집’외 351쪽, 글누림출판사, 2016) 조선일보 기자 시절이었다. 경성제1고보생으로 덕수궁 앞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한 기억이 생생했을 것이다. 심훈은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11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8개월 만에 출옥했다. 학교는 퇴학당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그날이 오면’ 1연)
암울한 시대, 독립과 해방을 갈구하는 외침이었다. 심훈은 ‘그날’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떴다.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를 축하하는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발표(1936년 8월11일 조선중앙일보)한 지 한 달 남짓 후였다. 소설 ‘상록수’ 출판을 준비하기 위해 경성에 올라와 한성도서 2층에서 지내다 장티프스에 걸려 9월16일 별세했다.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그날이 오면’은 해방 4년 후인 1949년 나온 유고집 제목이 됐다. 심훈은 200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자료
김종욱·박정희 엮음, 심훈 시가집 외,글누림, 2016
김윤식·유종호 외,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 민음사, 2004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 랜덤하우스 중앙, 2004
03.19 ‘조선식물향명집’이 식민잔재라고?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조선박물연구회가 편찬한 식물계의 ‘우리말본’..2000년대 들어 왜색 논란 제기
‘과학 조선 건설의 반가운 소식-경성에 있는 우리 동식물 학자들로 조직된 조선박물연구회에서는 그간 조선 식물의 이름을 수집 정리 중 제일착의 수확으로 최근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이란 국판이 백여 페이지의 훌륭한 책자가 나왔다.’( ‘四氏의 공동업적, 조선식물향명집’, 조선일보 1937년 4월10일)
1937년 4월 낭보가 전해졌다. 조선인 생물학자들이 편찬한 우리말 식물 목록집이 나왔다는 뉴스였다.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4명이 저자였다.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 연구는 일본이나 러시아 같은 외국 학자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의 조사에도 우리 말 식물 명칭이 포함됐지만, 지방 사정과 언어에 익숙치 않은 외국인들이 현지에서 쓰이는 조선어 명칭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조선식물향명집' 출간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7년4월10일자 기사. 아래쪽이 제1저자인 정태현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정리에 비견
본문 169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조선식물향명집’의 반향은 대단했다. 다음날 1면 사설 제목은 ‘과학 조선의 명랑보’ (조선일보 1937년4월11일). 조선이 과학 방면에서 뒤쳐진 현실을 비판한 뒤, ‘최근 조선어연구회의 한글 정리사업의 진보와 최현배 교수의 ‘우리말본’완성으로 한글 정리상 커다란 수확이 있었거니와 이번 조선박물연구회의 ‘조선식물향명집’의 완성은 식물학상의 공헌은 물론, 조선어 정리상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과학 조선의 명랑보 속출을 기뻐하지 않을 수없다’ 고 썼다. ‘조선식물향명집’이 단순한 분류서가 아니라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과학계의 업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조선박물연구회 주도
신문은 1933년 출범한 조선박물연구회가 우리 말로 된 통일된 동식물 표준명칭을 정하기 위해 ‘만 3년간 100여회나 회합, 연구한 결과 공동업적으로 전기 서적을 내놓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은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 1944종에 대한 학명, 일본명, 조선명을 단순 배열했다. 자생 식물인지, 재배 식물인지 알아 볼 수있도록 표시도 했다.
린네 이후 근대 식물 분류학의 관점에서 조선 식물명을 정리한 연구는 모리 다메조(森 爲三)의 ‘조선식물명휘’(1921)가 있다. 조선에서 자라는 식물 3576종에 대해 라틴 학명, 일본명 및 한자명을 병기하고, 여기에 조선명, 조선식 한자명 및 서식지·용도에 대한 정보를 더한 방대한 분량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진행한 의뢰한 연구였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식물 이름을 근대 식물 분류학에 따라 재검토하고, ‘조선식물명휘’및 ‘조선삼림식물편’등의 조선명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는 것을 내세웠다. 식물의 표준 명칭을 정하기 위해, 기존 명칭을 재검토하면서 명칭이 없는 식물에 대해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까지 포함했다.
◇조선어학회와 조선식물향명집
‘조선식물향명집’은 조선어 표준말을 정하려는 우리말 연구의 일환으로 나왔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맟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데 이어 1936년10월28일 표준어를 정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다.
‘향명집’ 저자인 이덕봉은 조선어학회의 표준말 연구 중 식물 명칭에 대한 사정(査定)에 참가했다. ‘조선식물향명집’ 발간은 조선어학회를 위시한 민족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덕봉은 1937년1월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에 ‘향명집’에 실릴 국화과 식물 139종의 기준과 유형, 명칭을 분석한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를 게재했다. 조선어학회와 조선박물연구회, ‘향명집’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조선일보 1937년 신년호는 문화계의 명장으로 양주동, 백남운, 손진태, 이극로 등 쟁쟁한 연구자와 나란히 임업시험장 '촉탁' 정태현을 소개했다.
◇42년간 임업시험장 지킨 정태현
‘향명집’ 주요 저자인 정태현은 총독부 임업시험장 직원, 도봉섭은 경성약전 교수, 이덕봉(배화여고보)·이휘재(중동중)는 생물 교사였다. 정태현(1882~1971)은 당시 식물 연구에 30년 가까이 뼈가 굵은 현장 전문가였다. 1908년 수원 농림학교를 나온 정태현은 대한제국 농상공부 임업사업부 기수로 일했다. 나라를 빼앗긴 뒤 총독부 산림과 고원(雇員)으로 강등됐지만 산림과에 남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잘 살 수있으며 한을 풀 수있을까”하는 생각에서 식물에 대한 ‘실학’을 계속 배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정태현은 특히 도쿄제대 교수이자 저명한 식물학자로 동년배인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 통역이자 조수로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근대 식물분류학을 익혔다. 1921년 기수 지휘를 회복했으나 1933년 다시 촉탁으로 강등됐다. 조선인 연구자로 이뤄진 조선박물연구회에 합류해 ‘조선식물향명집’에 참여한 데는 총독부 체제에서 겪은 차별의 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일보 1937년 신년호는 ‘향명집’ 출간에 박차를 가하던 정태현을 인터뷰한 뒤 이렇게 마무리했다. ‘당신 한분의 노력으로써 우리 이천삼백만은 우리 땅에서 나는 꽃과 나무와 풀의 조선말이름이라도 알게됩니다!’ (발문망식 이십팔년, 1937년1월1일)
정태현은 42년간 입업시험장을 떠나지 않았다. ‘조선삼림식물도설’(1943)을 편찬했고’ 해방 후에도 조선생물학회 창설을 주도해 1947~1949년 회장을 지냈다. 전남대와 성균관대에서 후학을 길러내면서 우리나라 식물학계 태두로 인정받았다.

▲도봉섭은 도쿄제대 약학과를 졸업한 1930년 경성약전 교수로 부임하면서 식물학자로 성장했다. 해방후 조선생물학회, 조선약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아내 정찬영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동양화부문 첫 특선을 한 여성화가로도 유명하다.
◇도쿄제대 출신 경성약전 교수 도봉섭
함흥의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인 도봉섭(1904~)은 1930년 도쿄제대 약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같은 해 도쿄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5명(정치, 법, 독문, 물리, 약학)중 1명이었다. 졸업과 함께 경성약전 교수로 초빙될 만큼 운도 따랐다. 일본 최고대학에서 생약학을 전공한 그에게 조선 약초에 관심이 많던 일본 기업이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봉섭의 조선 식물 연구를 이끈 이는 총독부 산림과 출신 이시도야 쓰토무(石戶谷勤)였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총독부 산림과 기수로 부임한 이시도야는 정태현과 더불어 식물, 특히 약재 연구에 공을 세웠고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도봉섭은 경성약전에 부임하자마자 식물 분류학에 밝은 이시도야의 권유로 식물 채집을 다녔다. 1932년 나온 ‘경성부근식물소지(小誌)’는 두 사람의 합작품이다. 116과 800종 이상의 식물을 과별(科別)로 나열한 후 초심자들이 채집할 때 흥미를 느낄 만한 과들에 대한 구별 요령을 덧붙인 안내서였다.
도봉섭은 경성약전 식물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식물 연구자로 급성장했다. 일본을 불편하게 하는 연구도 있었다. 왕벚나무 자생지가 제주도라고 밝히면서 일본의 벚꽃문화는 조선의 벚나무를 기리는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다.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생각해온 일본인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또 일본 열도가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한반도에서 떨어져나가 생성됐다는 대륙분리설을 주장했다. 일본의 기원이 한반도라는 주장이다. 조선인 연구자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보여준 사례로 주목받는 장면이다. 도봉섭은 해방 이후 조선생물학회와 조선약학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6.25 이후 평양의대 교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도봉섭의 아내는 1930년대 여성화가로 이름난 정찬영(1906~1988)이다.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첫 여성 특선 작가이기도 한 정찬영은 1939년 둘째아들을 잃은 후, 화가의 길을 접고 남편의 연구를 돕기위한 식물세밀화를 그렸다고 한다.
◇조선어학회와의 고리, 이덕봉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이덕봉(1898~1987)은 1933년 조선박물연구회를 경성할 당시 배화여고보 생물교사였다. 일본인이 중심이 된 ‘조선박물학회’에서 활동하던 이덕봉은 훗날 ‘그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멋적은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조선박물학회’에 더부살이를 하기 싫었다’고 회고했다. ‘향명집’ 아지트는 휘문고보 숙직실이었다.이학교에 근무하던 문학평론가 겸 불문학자 이헌구가 연락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숙질실에서 1주일에 2~3번 모여 자기가 아는 식물을 하나씩 내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한 다음 그 식물들의 표준명칭을 우리말로 정하고 부가적으로 지방명이나 異名등도 있을 땐 기록해 나갔다.’ (원로 과학기술자의 증언 5. 이덕봉 박사편 125쪽, ‘과학과 기술’ 125호, 1978)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사정 작업에서 식물 분야를 맡아 조선박물연구회를 연결한 주역도 이덕봉이었다. 그는 해방 후 숙명여대, 서울대, 고려대, 중앙대에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개쑥부쟁는 한반도 전지역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이다. 쑥부쟁이 앞에 '개'를 붙였다고 해서 우리 문화를 비하한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선일보 DB
◇뜻밖의 ‘친일 논란’
‘조선식물향명집’의 우리말 식물 명칭은 해방 이후 거의 국가표준식물목록으로 이어졌을 만큼 널리 인정받았으나 최근 뜻밖의 논란에 휘말렸다. ‘향명집’ 표준 명칭 일부가 일본어 명칭에 의존하거나 그대로 번역한 ‘식민 잔재’라는 것이다. 쑥부쟁이, 망초, 개불알꽃, 박쥐나물, 광대나물, 벼룩나물 등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이 실제 사용하는 이름을 가장 우선적으로 삼고 전통 문헌에 나오는 이름으로 보완했다는 저자들의 사정(査定)방침을 떠올리면, ‘친일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 ‘조선식물향명집’이 나온 1937년 상반기는 중·일전쟁 직전으로 일제가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인데 왜 조선말로 식물 이름을 정리하느냐”고 제지했지만 학자들은 “시골에 일본어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교육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둘러대 화를 면할 수 있었다(이우철 ‘한국 식물명의 유래’)는 회고가 당시 사정을 말해준다. ‘내선일체’로 향하던 일제 치하에서 어렵사리 쌓아간 선대 연구자들의 노고를 섣부른 ‘친일몰이’로 깎아내려도 될까.
◇참고자료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 공편,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 1937
조민제, 이웅, 최성호,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 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3호, 2018
이정,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1910~1945),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합동과정 박사학위 논문, 2013
이정, 식민지 과학 협력을 위한 중립성의 정치: 일제강점기 조선의 향토적 식물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7권 제1호, 2015
원로 과학기술자의 증언 5. 이덕봉 박사편 125쪽, ‘과학과 기술’ 125호, 1978
04.02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한다”
저항시인 이상화,1934년 대구 교남학교(대륜중고) 권투부 창설 주도…조선어, 작문교사로 재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이름난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스포츠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민족운동가들이 세운 대구의 사립 교남학교(현 대륜중고) 교사로 있던 1934년 권투부 창설을 주도했다.
당시 이상화에게 수업을 받은 졸업생 손만호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모든 직원들은 학생들의 기질이 거칠게 되고 문제아를 만든다면서 극구 반대했으나, 상화 선생님께서는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혼자 끝까지 주장을 하셔서 권투부를 창설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신체의 단련이 곧 독립투쟁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상화는 1934년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한다'며 교남학교 권투부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관철시켰다. 권투부 선수들과 함께 한 이상화(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이상화 자신도 경성 중앙학교 시절 야구선수를 할 만큼 스포츠를 좋아했다./대륜중고등학교 역사관 소장
◇1930년대 인기 스포츠, 권투
1930년대 권투는 조선의 인기 스포츠였다. 젊은 여성들이 경기장 링사이드에서 손뼉 치며 응원할 정도였다. ‘요사이 권투가 조선에도 수입되어 부녀들도 링사이드에서 손뼉을 친다. 통쾌한 운동이나 생명을 촌탁(忖度)할 수도 없는 위험한 시합이다. 다만 이 권투에 있어서는 ‘넉아웃’을 당하야도 재기하려는 그 정신이 좋음으로 기개가 커진다.’(조선일보 1933년11월19일 ‘필마를 타고ㅡ스포츠의 보편화’,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날 기사를 볼 수있습니다.)
20세기 초 조선에 들어온 권투는 1929년 조선권투구락부가 발족하고 2년 뒤 전용체육관이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32년 LA올림픽(황을수·라이트급)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규환·웰터급)에 조선인 권투선수가 일본 국가 대표로 출전할 만큼 실력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서정권은 ‘복싱의 신(神)’으로 불린 당대 최고의 스타 권투선수였다. 열여덟 살이던 1930년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석권한 뒤, 이듬해 프로로 전향했다. 1932년 여름 활동무대를 미국으로 옮긴 서정권은 서부 일대를 중심으로 3년간 54회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플라이급 6위까지 올랐다.

▲이상화(왼쪽)와 맏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 가운데는 이상정 아내이자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이다./조선일보 DB
◇승승장구한 교남학교 권투부
1934년 권투부를 창설한 교남학교는 배종민, 신구실, 이종식, 한경동 등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한 명문으로 떠올랐다. 특히 신구실은 창단 첫해인 1934년 9월 조선체육회·전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이 경성운동장 특설링에서 주최한 제1회 全조선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에 출전, 플라이급 준우승을 차지했다. 신구실은 일본 전수(專修)대학에 유학하면서 1936년 12월 전일본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 관동대표로 선발될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조선4선수, 관동선수권 획득’. 조선일보 1936년12월7일)
교남학교 권투부의 성취는 신문에도 보도됐다. ‘최근 수입된 운동으로서 선풍적 인기를 집중하면서 일반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음을 본 대구교남학교에서는 학생의 체육을 목표로 3년전에 동교에 링을 설치하고 맹연습을 한 결과,밴텀급 조선선수권 획득의 후보자인 신구실 군 등을 내었으며….’(‘남북에 호응약진하는 우리 운동계의 현세도’, 조선일보 1936년1월4일)

▲대륜고가 작년 '대륜100년사'를 준비하면서 발굴한 이상화 자필이력서. 1922년 '동경 아카데미 프랑세 수료'와 그해 4월부터 1923년 3월까지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수학했다고 썼다. /대륜중학교 소장

▲1933년 8월1일자로 발행된 이상화의 교남학교 강사임용허가서. '조선어 및 한문'담당 강사로 임용됐다./대륜중학교 소장
◇교남학교 교사로 6년8개월 재직
이상화의 마흔둘 삶에는 활동 내역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게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교남학교 교사 근무 기간이다. ‘이상화평전’을 낸 김학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1938년 교남학교 교사로 취임해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다. 그 기간은 4년여라고 하지만, 정확한 기간은 알 수없다’고 썼다.
대륜중고등학교가 작년 개교 100년을 맞아 ‘대륜 100년사’ 출간을 준비하면서 발굴한 1차 자료는 이상화의 활동 공백을 밝혀줄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이상화가 교남학교 교사로 재직한 때는 1933년 8월부터로 보인다. 경북도지사가 교남학교 설립자 김도균에게 발행한 ‘교원 임용허가서’가 1933년 8월1일자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강사로 채용된 이상화의 담당 과목은 ‘조선어 및 한문’이었다.
‘대륜 100년사’는 이상화의 재직기간을 ‘1933년8월1일~1939년3월30일’로 실었다.(’대륜100년사’ 767쪽) ‘대륜 100년사’ 편찬위원장 석은동 대륜고 교사는 “이상화가 형을 만나러 중국에 가거나 경영난으로 학교가 잠시 문 닫은 기간을 제외하면 1939년3월말까지 학교에 적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상화는 교남학교 재직시절, ‘태백산이 높솟고, 낙동강 내다른 곳에’로 시작하는 대륜고 교가 노랫말을 썼다.
◇이상화의 자필 이력서 ‘경성기독청년회 영어과 수료’
또 하나 주목할 자료는 이상화의 자필 이력서다. 교사 임용 허가서류를 내면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이력서에는 ‘1920년 경성기독교청년회 영어과 수료’ ‘1922년 동경 아테네프랑세 수료’ ‘1922년 4월1일 동경 명치대학 불어학부 입학, 1923년 3월25일 수료’한 것으로 기재돼있다. 이상화가 경성 중앙학교(현 중앙고) 3학년을 다니다 1918년 3월 그만둔 뒤 금강산을 유람했다거나 대구의 3.1운동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사전 검거를 피해 경성에 올라와 고향 친구인 성악도 박태원의 하숙집에 함께 기거한 사실은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때 YMCA영어과를 다닌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 프랑세 수료 후, 명치대 불어학부 1년 수학
이상화의 일본 유학 시기와 기간도 논란거리였다. 이상화의 벗 백기만 시인이 출간한 1951년작 ‘상화와 고월’을 비롯, 이어령의 ‘한국작가전기연구’나 김용성의 ‘한국현대문학사탐방’ 등의 연구서는 이상화의 도일 시기를 1923년초(또는 봄)로 썼다. 유학기간도 1년 쯤으로 봤다.
하지만 이상화의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고 1922년4월부터 1년간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수학한 사실이 확인된다. 프랑스 유학을 목표로 한 이상화가 늦어도 1922년 초엔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얘기다. 아카데미 프랑세는 1913년 개교한 사립 불어학교로 지금도 도쿄 간다에서 성업중이다. 그간 이상화가 아카데미 프랑세에서 불어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려졌으나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1년간 수학했다는 사실은 이력서를 통해 새로 드러났다. 이상화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듬해 봄 귀국했다. 따라서 유학기간도 2년 가량이란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마돈나, 나의 침실로’로 주목
이상화는 1922년 고향 친구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해 1월 나온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를 실으면서 데뷔했고, 이듬해 9월 ‘백조’3호에 실은 ‘나의 침실로’로 주목을 받았다. 1924년 일본서 귀국한 뒤,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박영희 등 ‘백조’ 동인들과 어울렸고, 파스큘라, 카프 같은 사회주의 성향 문학단체에서 활동했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스물다섯 살이던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했다.
이상화는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에 붙들려가 고초를 치렀다. 1927년 대구로 낙향했으나 일제 감시는 이어졌다. 맏형 이상정은 중국군 장성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1937년 중국에 건너가 맏형을 만나고 귀국했다가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고문과 구금을 당한 끝에 석방됐다.
◇조선일보 경북지사장 지내
이상화의 조선일보 근무 경력도 그동안 미스터리였다. 대부분의 이상화 연보는 1934년 ‘향우들의 권고와 생계 유지를 위해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맡아 경영했으나 경영미숙으로 1년 만에 포기했다’고 썼다. 하지만 조선일보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상화가 조선일보 경북지사장으로 일한 시기는 1938년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남짓이다. 1938년 4월1일자 조선일보 사보(제6호)에 따르면, 이상화는 3월19일자로 경북지사장에 임명됐다. 이상화가 평생 거의 유일하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진 직업이었다.
상화가 교남학교에 몸담을 당시, 학교는 늘 경영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상화 생애를 다룬 책들은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썼다. 이상화 연구자인 김학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상화는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유산으로 일본 유학도 갔고 귀국해서도 계속 유산을 팔아서 살았다’고 했다. 사업 경험 없는 시인이 지사를 운영하기엔 무리였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1938년 12월22일자엔 경북지사장 해임 인사가 실렸다.
◇IOC위원 지낸 사회학자 이상백이 동생
이상화는 1943년 4월25일 위암으로 마흔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한국사회학회 초대 회장이자 조선체육회이사장, IOC위원을 지낸 이상백(1904~1966)이 동생이다. 이상화는 저항시인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참고자료
김학동, 이상화평전, 새문사, 2015
김윤식, 유종호 외,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 민음사, 2004
대륜100년사, 2021
04.09 “폭탄 가득 싣고 日 폭격하려고 비행술 배웠다”
조선 첫 여성비행사 권기옥,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남편은 이상화 시인 형 이상정 장군

▲중국에서 비행사로 활약할 당시의 권기옥.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다 상해로 망명한 권기옥은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비행사의 길을 걸었다./조선일보DB
‘조선에 처음인 여류비행가 권기옥 양은 금년에 중국 운남(雲南)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방금 그 학교에서 비행기를 연습하는 중이다. 그의 고향은 평양이니 기질이 튼튼하고 담대하고 여성적 기분이 적으며 한번 정한 일은 기어이 하고야 마는 것은 그의 천성이라 할 수있다.’(‘외국에 노는 신여성’ 권기옥양, 조선일보 1925년 5월21일)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스물넷 권기옥이 주인공이었다. 권기옥은 1923년12월 동포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에 입교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운남 군벌 당계요(唐繼堯)의 협조를 얻어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상해 임정은 항공대 창설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1925년 2월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졸업한 권기옥은 조선 여성 최초의 비행사가 됐다.한때 조선 첫 여성비행사로 잘못 알려진 박경원(1901~1933)보다 2년 앞섰다.

▲여성비행사 권기옥은 1925년 당시 벌써 유명인사였다. 운남육군항공학교 졸업후 상해에서 비행훈련을 계속하던 권귀옥의 근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5년5월27일자 기사
◇평양 숭의여학교서 3.1운동 참가, 군자금 모집나서
권기옥은 평양이 고향이었다.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권기옥은 만세시위를 하다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 연락원과 접촉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팔아 송금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독립유공자 공훈록) 이듬해 10월 그의 뒤를 밟던 형사의 추적을 피해 두 길이나 넘는 담을 뛰어넘어 그 길로 진남포로 달아나서 목선을 타고 상해로 탈출했다.
권기옥은 1921년 항주의 홍도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1923년 6월 졸업했다. 그리곤 여학교 시절이던 1917년 경성 용산비행장에서 곡예비행을 선보인 미국인 스미스를 보면서 키웠던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운남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시작부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비행사를 지망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터무니없는 이유로 비행술을 배우려 했다.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을 할 생각이었다.’(‘공군의 날에 붙이는 공군의 할머니’, 조선일보 1965년10월3일)
신문은 ‘적수공권으로 뛰어들어간 여자의 몸으로써 한푼의 학자(學資)를 도와주는 사람없이 벌써 6년 동안이나 학업을 계속하는 그의 열성과 인내력은 과연 감탄치 않을 수없다’고 썼다. 권기옥이 당시 친구에게 쓴 편지가 그의 곤궁한 형편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벗아, 나는 오늘 오십리 밖에 비행기를 연습하러 나갔다가 배가 고파서 돌아올 수가 없었다.비행기 타고 돌아올 수 없었고 걸어서 돌아올 수없었다. 누가 나의 이런 답답한 사정을 알아주랴? 체험하여 보지 못한 너로서는 연구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리랴만은 성공을 기대하고 밟는 길이니 모든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한다.’(‘외국에 노는 신여성’ 권기옥양)
◇'중국 혁명전선의 한국인 비행가’
당시 중국은 손문과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정부가 광동에서 출발, 각 지역을 분할지배하던 군벌들을 제압하는 ‘국민혁명’을 벌이던 중이었다. 권기옥은 1925년 가을 북경의 풍옥상(馮玉祥)군 항공대에 들어갔다. 일본 침략을 받던 중국군에서 비행술을 익히면서 일제와 맞서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이다(윤선자, ‘한국독립운동과 권기옥의 비상’20쪽,한국근현대사연구 2014년 여름호)
그의 활약은 1926년 신문에 또 소개됐다. ‘국민군 제1비행대에 고빙되어 활약’하다 그해 4월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는 보도였다.(’풍진 어지러운 중국 공중(空中)에 異彩찬연한 조선 여장부’, 조선일보 1926년5월21일) 같은 날 동아,시대일보,매일신보 등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권기옥은 1926년 10월 내몽고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하고, 북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상정은 저항시인 이상화의 맏형으로 오산학교 교사를 지내다 망명,풍옥상 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있었다.
권기옥은 이듬해 상해로 가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약했다. 그 즈음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 최용덕, 민성기 등이 중국군에 들어가 창공을 누비고 있었다. ‘중국혁명전선의 조선인 비행가’(중외일보 1927년8월28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행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풍옥상군에서 그에게 비행을 가르쳐주던 조선인 서왈보가 1926년5월 비행사고로 숨졌다.안창남,박경원도 비행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권기옥은 비행시간 1300시간을 기록할 만큼 건재했다. 대단한 여걸이었다.

▲조선일보 1965년10월3일자 인터뷰. 권기옥은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할 생각에 비행술을 배웠다"고 했다.
◇임시정부 대한애국부인회 재건
상해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비행사가 된 권기옥에 대해 일제는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운남항공학교 입학과 졸업, 상해 체류, 장개석 국민정부의 비행사 활동을 주시하면서 현지 공관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보고가 이어졌다.(‘사상휘보’4, 1935년9월) 1928년 5월 남경에서 일본 영사관에 체포돼 조선에 송환된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중국 유력자의 도움으로 3주일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권기옥은 남편 이상정과 함께 1936년 하반기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다. 권기옥의 13년 비행사 경력은 이렇게 끝났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권기옥은 이상정과 함께 장개석 정부 전시수도인 중경으로 근거를 옮겼다.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했고, 중국 공군에 몸담고 있던 최용덕(1898~1969·공군참모총장·국방차관)과 광복군 비행대 편성을 의논하기도 했다.

▲권기옥이 1965년 공군의 날에 맞춰 한 조선일보 10월 3일자 인터뷰 때 촬영한 사진. 그는 "폭탄 가득 싣고 일본 폭격하려고 비행술 배웠다"고 말할 만큼 항일정신 투철한 청년이었다. /조선일보 DB.
◇‘남몰래 준 할머니 장학금’
해방은 벼락같이 왔다.이상정은 1947년 10월 모친상 급보를 받고 먼저 귀국했는데, 한달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떴다. 권기옥은 1949년 귀국했다.1950년부터 5년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고, 정계에도 입문했다가 이내 발을 뺐다.이후 한국연감 발행인,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권기옥은 일흔여섯 나이에 다시 신문에 났다. 이번엔 미담기사였다. 1975년부터 장학기금 1000만원을 만들어 고교,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몰래 주고 있다는 보도였다.(’남몰래 준 ‘할머니 장학금’, 조선일보 1977년 2월11일) 권기옥은 당시 인터뷰에서 “‘나 대신 조국에 유익한 일을 해달라’는 남편의 간곡한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기사는 ‘추운 겨울에도 방에 불을 지피지 않으면서 푼푼이 저축, 1000만원이 모인 1975년 이 돈을 은행에 장학기금으로 예치했다’고 소개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권기옥은 1988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04.16 대학생 최무룡, 국내 첫 전막 ‘햄릿’ 주연 맡다
1949년 이해랑 연출, 첫 셰익스피어 전막 공연이기도

▲1971년 제8회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30년만의 대결)을 받은 최무룡. 오른쪽은 요즘 애플TV '파친코'에서 열연중인 윤여정이다. 영화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최무룡은 중앙대 재학시절인 1949년 중앙대 연극부가 올린 '햄릿'(이해랑 연출) 전막극에서 햄릿을 맡았다.국내 첫 '햄릿' 전막공연이자 셰익스피어 첫 전막공연이었다.
1932년 12월 연희전문 연극반 ‘연희극회’가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렸다. 여배우를 구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남학생(신동욱)이 줄리엣을 맡았다. 긴 머리를 땋고 치마 입은 ‘남자 줄리엣’이 가마를 타고 등장하자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가마 탄 주인공이 신극(新劇)에 나왔으니, 웃음이 터져나올 만했다. 국내 첫 ‘로미오와 줄리엣’공연이었다.
◇延專 연희극회, ‘로미오와 줄리엣’ 최초 공연
한국인은 언제부터 셰익스피어를 알게됐을까. 구한말 교과서 등엔 셰익스피어의 이름과 작품이 나왔지만, 사상가·도덕가·문인으로 소개됐을 뿐이다. 최남선이 주재한 잡지 ‘소년’과 일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서양 문학을 소개한 ‘태서문예신보’등에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작품 속 격언이 실리곤 했다. ‘햄릿’의 명대사 ‘살가 죽을가 하는 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Hamlet)를 원문까지 소개한 최초의 인물로는 일본 유학생 장덕수가 꼽힌다(‘의지의 약동’,’學之光'제5호, 1915년5월2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 20세기초 조선에 소개된 셰익스피어는 당초 사상가, 문인으로 더 알려졌다. 1921년 현철의 '하므레트' 완역본이 소개되면서 2021년을 셰익스피어 번역 100주년으로 꼽기도 한다. /wikipedia
◇찰스 램의 아동용 책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母本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였다. 3.1운동으로 신문·잡지가 대거 창간되면서 셰익스피어가 그 바람을 탔다. 찰스 램의 아동용 책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Tales from Shakespeara)은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의 모태가 됐다. 쉬운 영어로 씌어진데다 일역본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템페스트’가 작가 주요한의 번역으로 나온 이래, 1920년대에 나온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만 16편이다.(신정옥, ‘셰익스피어 한국에 오다’ 33쪽) 그 중 램의 책에서 옮긴 게 6편이나 된다. 대다수는 일부만 옮긴 초역(抄譯)이자 일어판을 옮긴 중역(重譯)이었다.
◇현철의 ‘하믈레트’가 셰익스피어 첫 완역
초역 아닌 완역은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 현철(玄哲·1891~1965)이 1921년~1922년 월간지 ‘개벽’에 연재한 ‘하믈레트’가 처음이었다. 찰스 램의 이야기 소설이 아니라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遥)의 ‘하무렛토’를 저본으로 한 희곡체 번역이었다. 이때문에 2021년을 한국 셰익스피어 번역 100주년으로 꼽기도 한다.(권오숙, ‘한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완역본 현철의 ‘하믈레트’ 연구’ 5쪽) 현철의 ‘하믈레트’는 1923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이어 번역가 이상수가 완역한 ‘베니스 상인’(조선도서주식회사·1924)이 나왔다. ‘베니스의 상인’은 1920년대에만 번역본 4종이 나올 만큼, 가장 인기를 누린 셰익스피어 작품이었다.

▲현철이 1921년~1922년 월간지 개벽에 연재한 '하믈레트'를 1923년 박문서관에서 출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 셰익스피어 최고 인기작 ’베니스의 상인’
신정옥은 이 땅의 첫 셰익스피어 작품 공연을 1925년 12월12일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상대 전신) 어학부가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영어극 ‘줄리어스 시이저’라고 썼다. 하지만 이 학교 외국어부가 1년 10개월 전인 1924년 2월2일과 3일 경성공회당에서 ‘베니스의 상인’ 1막을 공연한다는 기사가 조선일보 1924년 1월27일자(‘외국어극 개최’)에 실렸다.셰익스피어 공연의 기점을 앞으로 더 당겨야할지 모르겠다.
이후 4년간 거의 없었던 셰익스피어 작품이 다시 올라온 것도 이화여전 학생기독청년회가 주최한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1929년 11월1일 역시 경성공회당에서였다. 유태인 샤일록의 탐욕과 ‘인육(人肉) 재판’은 조선인의 흥미를 자극했던 모양이다. 이화여전은 1931년 12월4일에도 ‘페트루키오와 캐트리나’(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공연했다.(동아일보 1932년 12월5일자) 영문학자 최정우가 번역한 전5막으로 소개했지만,홍해성은 서극과 끝막 2장을 빼고 연출했다. 연극학자 유민영은 일본 도쿄 쓰키치(築地)소극장에서 주연으로 활약한 홍해성이 연출을 지도한 덕분에 이화여전 학생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계속 공연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베니스의 상인’ 영어 원어극은 이화여전의 단골 레퍼터리였다. 이화여전은 1939년과 1940년에도 이 작품을 올렸다.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교수로 있던 영문학자 정인섭은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 ‘전체를 통해서 열정적 박력이 부족하다’(이화여전 공연 ‘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조선일보 1940년2월26일) 는 비평을 남겼다. 연기와 분장의 약점을 지적하면서도 의상과 대사암송에는 합격점을 줬다.
◇극예술연구회의 ‘베니스의 상인’
학생들이 주도하던 셰익스피어 연극은 극예술연구회(이하 劇硏)가 1933년 11월28일부터 사흘간 조선극장에서 올린 ‘베니스의 상인-법정장면’으로 전문 극단으로 넘어간다. 1931년 발족한 劇硏은 도쿄에서 외국 문학을 전공한 유학생 출신들이 만든 신극 단체로 김진섭 서항석 유치진 이하윤 이헌구 정인섭 최정우 함대훈 등 10명이 연극계 선배 윤백남과 홍해성을 영입해 만들었다.
劇硏은 공연에 앞서 붐 조성을 위해 ‘셰익스피어 전(展)’을 열기도 했다. ‘베니스의 상인’은 피란델로 작 ‘바보’ 1막과 유치진 작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과 함께 공연됐다. 하지만 당시 리뷰는 약간 비판적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전적 작품을 상연하는 데 있어서 그 작자가 위대하다고 맹목적으로 그 작품을 상연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현실 조건하에서 고전적 작품을 상연하는 데 있어서 현실과 고전에 대한 명확한 합리적 연관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며 그래야만 고전적 작품의 현대적 공연에 의의가 있게 될 것이다.’ ‘유태인 상인 샤일록과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의 대립에 있어서 샤일록의 너무나 과장된 신파적 연기가 전면에 나왔다.’ ‘이 극은 결과에 있어서 신파나 ‘소인극’(素人劇)을 보았다는 감밖에는 더 얻은 바가 없었다.’(나웅, ‘극예술연구회 제5회공연을 보고’中,조선일보 1933년 12월8일)
하지만 유민영은 긍정적으로 봤다. ‘이 무대는 관중의 시선을 끌만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레퍼터리가 전보다는 비교적 재미있게 꾸며졌기 때문이다.’극연은 1938년 해체때까지 셰익스피어 연극을 다시 올리지 않았다.
◇스물한살 최무룡의 ‘햄릿’
셰익스피어 대표작 ‘햄릿’은 1938년에야 무대에 올랐다. 신파극단 낭만좌가 ‘함리트 묘지 1막’을 올렸는데, 일종의 번안극이었다. 낭만좌의 ‘햄릿’을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 희곡은 해방될 때까지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2차대전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통틀어 셰익스피어 연극은 학생극 단체들이 여러 차례 시도했고 전문 극단이 뒤따르는 모양새를 보였다. 셰익스피어 고전극이 우리 현실에 녹아들지 못한 데다 이를 무대에서 소화할 만한 직업 극단의 역량부족도 한몫했다. 하지만 유치진은 1942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로 한 ‘대추나무’를 썼다. 셰익스피어를 한국적으로 소화한 드라마를 쓸 만큼 셰익스피어의 영향은 강력했다.
셰익스피어 연극의 시대는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열렸다. 중앙대 연극부는 1949년 12월14일과 15일 명동 시공관에서 ‘햄릿’ 전막 공연을 우리 연극사상 처음 올렸다. 이해랑 연출이었다. 스물한살 대학생 최무룡(1928~1999)이 햄릿을 맡았다. 반세기 가까이 은막을 휘저을 스타 배우는 이렇게 태어났다.
04.23 비운의 연극인 玄哲의 절규, ‘조선엔 연극도, 극장도 없다’
1920년대 신문·잡지에 ‘연극론’쏟아내…’하믈레트’로 셰익스피어 희곡 첫 완역

▲1924년 연극론을 쓰고, 배우를 길러내며 근대극운동을 벌이던 서른 셋 현철.
‘내가 지금 우리 조선에는 연극이 없다고 하면 독자 제위는 나를 타매(唾罵·욕하다)하고 허언이라 하며 그 연례(演例)로 소위 구극(舊劇)에는 춘향가나 심청가를 들고 신파로는 임성구 김도산 김소랑을 들어 내게 육박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던 극단을 가지고는 여러가지 극과학(劇科學)상으로 보아 연극이 아니고 유희이며 체조라고 한다.’(‘현당극담’, 조선일보 1921년1월24일)
일본 유학생 출신 현철(玄哲·1891~1965)이 100년 전 신문에 도발적 주장을 펼쳤다.’조선엔 연극도,극장도 없다’는 선언이었다. 판소리나 가면극, 꼭두각시 놀음 같은 전통극은 물론 당시 일본에서 들어와 성행하던 신파극까지 깡그리 부정했다. 특히 일본식 멜로드라마인 신파극을 연극에 대한 모독으로 여길 만큼 철저히 배격했다. 현철은 연극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민족의 자생력을 키우는 최선의 방편이라고 믿었다.
현당(玄堂)은 현철의 호이다. ‘현당극담’(玄堂劇談)은 현철이 쓰는 연극론이라는 뜻이다. 그는1921년 상반기 조선일보에 거의 매일같이 ‘현당극담’(1월24일~4월 21일·총 77회)을 썼다.
◇'현실 모르는 이론’ 반발 거세
신파극 진영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조선 연극의 실상을 모르는 허황된 이론이라는 반박이 쏟아져 나왔다. 이세기는 매일신보(1921년2월28일~3월16일)에 ‘소위 현당극담’이란 비평을 썼다. 현철은 다시 ‘현당극담’에 ‘식후 한담’(食後閑談)이란 소재를 붙여 재반박에 나섰다. 조선인에겐 여전히 생소한, 연극을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졌다.
◇일본서 서구 리얼리즘 연극 배워
현철은 메이지대법과 재학중인 1913년 일본 신극의 선구자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가 이끌던 극단 예술좌(藝術座) 부속 연극학교에 들어가 4년간 연극을 공부했다. 톨스토이 ‘부활’ 투르게네프의 ‘그 전야’ 입센의 ‘바다의 부인’ 체홉의 ‘곰’같은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서구 리얼리즘 연극을 배웠다. 1917년 귀국했다가 상해로 건너가 중국 연극의 흐름을 익힌 뒤, 1920년 월간지 ‘개벽’ 학예부장으로 들어갔다. ‘개벽’은 현철의 합류로 연극론과 작품 번역을 엄청나게 쏟아냈다.

▲현철이 학예부장으로 몸담은 '개벽'에 연재하던 셰익스피어 희곡 '하믈레트'.현철은 1921년5월부터 1922년 12월까지 19회에 걸쳐 '하믈레트'를 연재했다. 셰익스피어 첫 희곡 완역이었다.
◇셰익스피어 희곡, 첫 완역한 ‘하믈레트’
현철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처음으로 완역한 ‘하믈레트’를 ‘개벽’에 연재했다. 1921년5월(11호)부터 1922년12월(30호)까지 19회에 걸친 장기 연재였다. 찰스 램의 이야기체 소설을 옮긴 게 아니라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遥)의 ‘하무렛토’를 저본으로 한 희곡체 번역이었다. 현철의 ‘하믈레트’는 이듬해인 1923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나왔다. 현철은 투르게네프 소설을 각색한 쿠스야마 마사오의 희곡 ‘그 전야’를 번역한 ‘격야’(隔夜)도 개벽에 실었다.
현철이 유학 도중 연극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는 연극이 민중 계몽과 사회 개발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사살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부실하고 빈약하고 쇠폐하며 공허한 조선 사회에서 민족의 문화계발을 통하여 조선 사회의 문명화를 이루고자’(‘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개벽 제10호, 1921년4월)연극에 투신한 것이다.
◇조선배우학교 설립해 연극인 키워
현철은 1920년 2월 서울 서대문 근처에 직접 ‘예술학원’을 설립, 연극인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학원이 1년도 안돼 내분으로 문닫자 1923년 10월 동국문화협회를 세우고, 이듬해 12월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다. ‘보통과’ ‘고등과’입학생 40여명에게 연극, 영화, 가극배우 양성을 목표로 연극사와 무용, 음악이론, 분장술까지 가르쳤다. 연극계에선 조선배우학교를 ‘연극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연극 교육기관’으로 기억한다.
1926년 9월엔 졸업생들로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학교 역시 배역 문제로 내분을 겪으면서 문을 닫았다. 1927년엔 조선극장을 맡아 운영했지만 역시 몇 개월만에 관뒀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일본 통한 근대의 도입
현철이 일본 작가들의 글을 베꼈다거나 참조했다는 비판은 내내 이어졌다. 일본유학파 출신인 이세기는 ‘세상이 다 아는, 모모 씨의 극에 대한 강의의 단편’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국내 학자들의 연구로 ‘희곡의 개요’ ‘연극과 오인(吾人)의 관계’ ‘연극과 교화’ ‘문화사업의 급선무로 민중극을 제창하노라’ 등 그의 대표적 연극론이 쓰보우치 쇼요 같은 일본 작가들의 저술을 참고했거나 발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연극학자 유민영은 ‘(현철이)연극활동을 민족운동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은 한국 근대극의 정신적 기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썼다. 하지만 ‘그가 당시대 상황이나 연극계, 그리고 대중의 수준을 거의 외면한 채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려 했기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또 쉽게 연극계를 떠났던 것’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현철은 6년여만에 연극계를 떠났다. 화장품 제조에도 뛰어들었다 손을 뗐다. 해방 후에도 배우학원을 다시 열었으나 흐지부지됐다. 말년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에서 쓸쓸한 노후를 보냈다.
◇참고자료
정덕준, 玄哲 연구, 고려대 국문과 석사논문, 1976
권오숙, ‘한국 최초의 셰익스피어 완역본 현철의 ‘하믈레트’ 연구—현철의 근대극 운동과 연극론을 바탕으로 한 연극사적, 셰익스피어 수용사적 연구’, 셰익스피어 리뷰 57~1, 2021 봄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1996
신정옥, 셰익스피어 한국에 오다-셰익스피어의 한국수용과정연구, 백산출판사, 1998
04.3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어떻게 한국인의 애송시가 됐나
푸시킨의 ‘앨범詩’…1940년 전후 일어판에서 번역돼 1960년대~1970년대 대유행

▲2013년 11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 들어선 푸시킨 동상. 러시아작가동맹이 증정했다. 동상 아래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새겨져있다./김기철기자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서양시1위가 아닐까 싶다. 네이버 검색창에 ‘삶이’를 입력하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자동완성어 1위로 뜬다. 윤동주 ‘서시’(序詩), 김소월 ‘진달래꽃’처럼 많은 이들이 첫 구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서양시다.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하면, 이 시를 제목으로 딴 푸시킨 번역시집만 10권이 훌쩍 넘는다. 같은 제목의 에세이집과 소설도 여러권이다.너무 친숙하다 보니, 서양의 유명 격언처럼 들릴 정도다.

▲서울 소공동 푸시킨 동상 아래 새겨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소공동 푸시킨 동상에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9세기 초 러시아 시인이 쓴 2연짜리 이 짧은 구절이 200년 뒤 한국에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까닭은 뭘까. ‘국민작가’ 푸시킨의 시를 줄줄 외우는 러시아인이 수두룩하지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모르는 이들이 뜻밖에 많다고 한다. 실제로 이 시는 푸시킨의 대표작은 아니다. 20세기초 한국에 러시아 문학이 들어오는 경로였던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우리만큼 인기를 누리는 곳은 없다.
2013년 11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 세워진 푸시킨 동상 뒤에도 이 시가 새겨져 있을 정도다. 러시아 작가동맹이 증정한 이 동상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새겨진 것은 우리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우에다 스스무의 ‘푸시킨 詩抄’
이 시가 알려진 시기와 내력은 분명치 않다. 학계에선 우에다 스스무(上田 進·1907~1947)의 ‘푸슈킨시초(詩抄)’(1936)가 소개된 1940년 전후로 본다. 우에다는 와세다대 재학중 일본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박형규(91) 전 고려대 노문과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1930년대 말 1940년대초쯤부터 일본어시집에서 중역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애송시로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말 첫 번역본은 1950년 나온 ‘푸시킨시집’(세종문화사, 조영희 옮김)으로 알려져있다.
◇첫 러시아 원전 번역자는 백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첫번째 러시아 원전 번역자는 백석이라는 주장이 나온 적있다. 2012년 ‘백석 번역시 전집’을 낸 송준이 한 얘기다.백석이 다닌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 후배이자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고정훈의 생전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푸슈킨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첫 러시아어 원전 번역은 시인 백석, 조선일보 2012년 12월17일) 6·25 전쟁 당시 국군장교로 참전한 고정훈은 1950년 10월 평양에서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그에게 이 시를 러시아어로 수백번 암송한 끝에 우리 말로 번역했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가능성이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백석이 1949년 북한에서 펴낸 ‘푸시킨 시집’엔 이 시가 없어 여전히 논란거리다.

▲푸시킨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조선일보 1937년 2월13일 지면. 러시아 문학전문가 함대훈이 푸시킨의 생애와 예술'을 정리했고 동경 유학생 한식이 러시아문학사에서 푸시킨의 위상을 평가하는 글을 기고했다. 지면 3분의 2를 푸시킨 100년제에 할애했다.
◇푸시킨 시 번역한 이선근
푸시킨은 일제때 톨스토이나 도스도옙스키, 투르게네프, 체홉에 비해선 덜 알려졌다. 시도 그렇지만 ‘대위의 딸’같은 소설은 해방 후에야 우리말로 번역됐을 정도다. 푸시킨의 시가 국내에 소개된 것은 1922년 ‘계명’지에 번역된 ‘집시’라는 서사시다. 1926년 창간된 ‘해외문학’에 일본서 공부한 이선근, 함대훈, 김온 등이 러시아 문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면서 푸시킨 시와 작품도 차츰 알려졌다. 와세다대 사학과에 다닌 이선근은 푸시킨 시 6편을 번역하기도 하고, 푸시킨의 생애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푸시킨 100년祭
1937년은 푸시킨 서거 100주기였다. 당시 신문, 잡지는 1920년대부터 서구를 본따 100년 단위로 인물·사건을 기념하는 ‘백년제’(百年祭)를 본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모던 경성: 吾人은 자유의 神을 눈물로 조문한다’ 나폴레옹 100주기 열풍’참조) 도스토옙스키 탄생 100년(1921) 톨스토이 탄생100년(1928) 입센탄생 100년(1928),에밀 졸라 탄생100년(1940)은 물론 헤겔 서거 100년(1931) 괴테 서거100년(1932)을 기념했다. ‘백년제’는 근대 문명을 앞서 일군 서구를 학습하는 기회였다.
‘푸시킨의 문학사적 지위를 말하자면 그는 첫째 위(僞)고전주의를 지양하고 낭만주의를 거쳐 정당한 의미에 있어서의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18세기부터 19세기 초두까지 서구라파 문학의 모방에 지나지못하던 문학을 국민성의 파악 탐구를 거듭하여 러시아 생활, 러시아 정신의 정당한 대변자의 표현으로써 러시아문학의 독립성을 획득케하였으며....’(‘러시아 文學史上의 푸시킨의 지위와 업적’, 조선일보 1937년2월13일)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당시 조선일보 출판기자였던 함대훈도 ‘露문학의 시조 푸ㅡ쉬킨의 생애와 예술’을 같은 지면에 게재했다. 한 페이지 3분의 2정도가 푸시킨 100년제 기획이었다.100년제는 ‘러시아 문호(文豪)’ 푸시킨의 위상을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자취방, 공단 벌집에 걸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일제 말기와 해방 전후에 유행한 데 이어 1960~1970년대 산업화시대에 최고 인기를 누렸다. 러시아문학 전공자 이항재 단국대교수는 ‘1960년대 초에 허름한 이발소의 벽에 걸린 액자 속에서 이 시를 처음 읽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 시는 밀레의 ‘저녁종’이나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배경으로 뒤틀린 액자 속에 넣어져 이발소, 중국집, 허름한 농가의 마루벽에 약방의 감초처럼 달려있었다.’
학생들의 자취방 책상 앞은 물론 고향 떠나 대도시 공단에서 고된 하루를 이어가던 수많은 공장 노동자들의 벌집방에도 푸시킨의 시가 경구(警句)처럼 걸려있었다.힘겨운 현실을 견디게 하고 희망을 약속하는 한줄기 빛이었다.
◇'삶이 나를 속인다해도 나는 이발소에 간다’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아니 삶이 나를 속인다해도/나는 이발소에 간다.’
곽효환 시인이 2014년 낸 시집 ‘슬픔의 뼈대’에 실린 ‘이발소 그림’은 푸시킨 시를 빌려 시작한다. ‘성자께서 열두 제자와 나누는 최후의 만찬/’오늘도 무사히’를 간절히 비는 어린 소녀의 경건한 얼굴’이 그려진 이발소 그림을 ‘누가 싸구려 통속이라 했을까’라고 항변한다. ‘어떤 삶이 고단한 당신을 속였을까/하여 우울하고 슬퍼하고 노여웠는가’라며 푸시킨을 재차 등장시킨다. 이발소 그림은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함께 고단한 서민들을 위로하는 예술이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발소를 ‘내 첫번째 미술관’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내 영혼 바람되어’ 김효근 가곡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인기 가곡 ‘내 영혼 바람되어’를 쓴 작곡가 김효근은 2015년 이 시를 가곡으로 만들었다. 팝페라가수가 이 노래를 실은 음반까지 취입했다. 이 시의 위력은 현재진행형이다. 빈곤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푸시킨 시가 주는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읽어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기쁨의 날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현재는 괴로운 법/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니/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김진영 연세대 교수 역)
◇참고자료
심지은, 한국과 러시아: 푸슈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경우, ‘노어노문학’제26권-4호, 2014년12월
이항재, 한국에서의 뿌쉬낀,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2000
박형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문이당,1991
김미지, ‘우리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188쪽~215쪽, 생각의 힘, 2019◎
#김기철의 모던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