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談5/ 2022-1/ 01 - 04
01.11 외할머니의 간장밥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 엄마 보고 싶어 일부러 심통
그때마다 혼내지 않고 등 토닥이며 비벼주시던 간장밥 ‘꿀맛’
상추따러 갔다 넘어져 돌아가신 날, 마루엔 간장밥이 놓여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맞벌이로 대부분 혼자 있었다. 늘 미안했던 어머니는 이모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논과 들과 산이 있는 시골이었다. 이모와 누나들과 외할머니가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심술 덩어리였다. 밥을 먹다가도 많이 먹으란 말을 들으면 숟가락을 놓았다. 새 옷을 사주면 냇가에 들어가서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놀았다. 심부름을 시키면 뒷산에 올라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갔다. 혼날 마음을 먹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었는데 아무도 나를 혼내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항상 나를 감쌌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나를 감싸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더 심하게 말썽을 부려도 외할머니는 언제나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토닥거림이 괜히 서러워서 자주 울었다. 어린 나는 아마도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울 때마다 외할머니는 간장과 참기름에 밥을 비벼주었다. 그저 쓱쓱 비볐을 뿐인데 언제나 꿀맛이었다. 때로는 간장밥이 먹고 싶어서 일부러 울었다. 외할머니는 장날에 다녀올 때마다 종종 나를 위해 새로 짠 참기름을 사오곤 했다. 그 참기름을 보자마자 오늘은 무슨 이유로 울어야 할지 열심히 고민했다.
간장밥을 먹으며 나는 나이를 먹어갔다. 새해가 오고, 설날을 거쳐,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나는 전날 밤부터 들떠있었다. 엄마가 외할머니를 만나러 온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다렸는데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나는 또 슬슬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간장과 참기름을 꺼내들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간장밥을 먹고 있는데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숟가락을 내던지고 달려나갔다. 차에서 내리는 엄마에게 뛰어들었다. 외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뛰어나와 막내딸을 얼싸안았다. 고기를 구워준다며 직접 기른 상추를 따오겠다고 했다. 같이 가겠다는 엄마를 호통까지 쳐가며 마루에 앉혔다.
엄마는 나에게 용돈을 주었고, 난 그길로 마을 수퍼로 달려갔다. 외할머니가 달리다 넘어진다고 소리쳤지만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달렸다. 수퍼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과자를 골랐다. 수퍼 앞에 설치된 게임기에 동전을 쌓아놓고 신나게 게임도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양손에 과자가 가득한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와 이모들의 울음소리였다.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외할머니를 부르며 대문을 열었다. 마당 평상에 외할머니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그런 외할머니에게 매달려 울고 있었다. 상추를 따기 위해 밭으로 향하던 외할머니가 비탈길에 미끄러져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구급차가 왔고, 외할머니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채 실려갔다. 마루에는 외할머니가 비벼준 간장밥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나는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 밥을 먹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외할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오면, 그 밥을 보란 듯이 맛있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나면, 또 한 번 심통을 부리면, 어디선가 간장과 참기름을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 문득 배가 고파진 나는 무심결에 간장과 참기름을 밥에 넣고 비비기 시작했다. 다 비벼진 밥을 한입 떠먹은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열심히 비벼도 외할머니의 간장밥 맛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울어도 외할머니가 나타나서 밥을 비벼주지 않았다. 그저 혼자 울고 혼자 밥을 비빌 뿐이었다. 내가 과자를 조금만 덜 골랐더라면, 게임을 한 판만 덜 했더라면, 외할머니를 따라 상추밭으로 갔었더라면, 좀 더 오랫동안 외할머니의 간장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나는 어른이 되었다. 오래된 술버릇이 생겼다. 술 취해 집에 돌아오면 자동적으로 간장과 참기름을 집어들고 밥을 비빈다. 여전히 그때의 그 맛은 나지 않고, 이상하게도 허기는 계속 채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간장과 참기름에 밥을 비빌 것 같다.
조선일보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03.05 한국서 ‘키이우’ 쓴 날, 포화 속 엄마가 웃었다
백년 넘게 귀에 익은 ‘키예프’
세계 곳곳서 연대 담아 정정
수세에 더 빛난 ‘소프트 외교’
언어 영토에서 승자는 우크라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있는 재한 우크라이나인들. /뉴스1
지난 2일 한국 언론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수도 표기를 ‘키예프’에서 ‘키이우’로 바꿨다. 전날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침략국인 러시아식 발음으로 하는 지명 표기가 커다란 상처”라며 우크라이나식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조치였다. 이날 한국 체류 우크라이나인 220여 명이 모인 단톡방엔 모처럼 기쁨이 감돌았다. 바뀐 표기 인증샷을 올리며 감격을 나눴다고 한다.
단톡 멤버 중 하나와 연락이 닿았다. 6년 전 한국에 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 율리아다. 고향은 무자비한 폭격을 받은 지토미르. 아버지는 자원 입대했고, 어머니는 딸의 만류에도 홀로 집을 지킨다. 율리아는 “전화로 한국의 ‘키이우’ 표기 소식을 엄마에게 알렸더니 정말 기뻐하셨다. 글자 몇 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우리에겐 엄청난 힘이 됐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날은 대공습이 있던 날. 온종일 창밖으로 쏟아지는 로켓포를 보며 울었다는 엄마에게 전해진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부끄럽지만 기자는 관련 기사를 쓰면서 키예프가 러시아식 발음이란 사실을 알았다. 신문에서 외국 지명 표기는 원칙적으로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현지 발음으로 쓴다. 북경, 동경이 아니라 베이징, 도쿄로 쓰는 이유다. 우크라이나는 관심 밖이었다. 국립국어원이 정한 우크라이나어 표기 세칙도 없었다. 그간 서울을 ‘게이조’(경성의 일본 발음)로 부른 격이라 생각하니, 우크라이나인이 느꼈을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새 표기 안내 기사를 쓰면서도 반신반의했다. 키예프는 러시아와의 오랜 외교 관계 속에 한국 땅에서 100여 년 동안 굳어진 표기다. 기록을 찾아보니 조선일보엔 창간 해인 1920년, 대한매일신보엔 1910년 각각 ‘키에후’와 ‘키에부’란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둘 다 키예프의 일본식 발음을 한글로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갓 등장한 단어가 백 년 묵은 단어를 밀어낼 수 있을까. 기우였다.
말과 글을 잃어보고 전쟁까지 겪은 민족의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강했다. 굼뜬 정부보다 한발 앞서, 논조와 상관없이 신문과 방송에서 일제히 표기를 바꾸고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크라이나 역사까지 알렸다. 우크라이나 대사관의 표기 정정 요청 작업을 도운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조차 “언어 습관을 갑자기 바꾸기란 쉽지 않은데 하루 만에 표기를 고치다니 놀랍다”고 했다. 푸틴의 광기가 거세져 전쟁 기사가 많이 쏟아질수록 새 우크라이나식 지명이 한국인 눈과 귀를 깊이 파고든다. 적어도 언어의 영토에선 우크라이나가 압승한 모양새다.
지명 표기 문제는 대사관이 갑자기 들고 나온 게 아니다. 수년 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가 펼쳐온 ‘Kyiv Not Kiev(키예프가 아닌 키이우)’ 캠페인의 연장에서 나왔다. 로마자를 쓰는 국가, 주요 언론, 국제공항 등을 대상으로 ‘Kiev(키예프 영어 표기)’를 ‘Kyiv(키이우 영어 표기)’로 바로잡는 캠페인이다. 몇 해 사이 조금씩 퍼지다가 이번 전쟁에서 BBC·CNN 등이 참여하면서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 중이다. 이 무드에 동참해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도 러시아의 언어 침탈을 피력한 것이다. 체계적인 준비가 없었다면 지금의 ‘키이우 표기 연대’ 도미노는 없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분전(奮戰) 속에서 발견한 것은 이처럼 결코 만만치 않은 그들의 외교력이다. 무력으로 ‘하드 파워’를 휘두르는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문화적인 ‘소프트 파워’에 호소하며 여론 전을 유리하게 이끄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일제에 항거해 우리말과 글을 고집스럽게 지킨 한글학자 주시경은 “말[言]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키이우가 올라가고 키예프는 내려가고 있다.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일지, 답이 거기 있어 보인다.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
03.24 흥남 철수 작전의 진정한 영웅들
로버트 J 러니는 미국 뉴욕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 영향을 받은 러니는 18세에 해군에 입대해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태평양전쟁에 투입됐다. 1950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하려던 그는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그해 9월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것이다.

그가 일등항해사로 근무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선원 47명을 태운 화물선이었다. 승객은 12명까지 태울 수 있었고 적재량은 1만658t이었다. 1950년 12월 빅토리호가 전투기 연료를 비롯한 보급품을 싣고 함경남도 흥남에 도착했을 때, 미군은 장진호에서 극심한 추위와 싸우며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군은 10만 병력을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빅토리호의 임무는 미군 탱크와 트럭을 비롯한 군사 장비 철수였다.
그때 흥남부두에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북한 피란민들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미군에는 이들을 태울 군함이 없었다. 미군은 빅토리호의 레너드 러루 선장에게 피란민들을 화물칸에 태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러루 선장은 즉각 군사 장비를 부두에 되부리고 피란민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빅토리호는 흥남 부두에 남은 마지막 배였다.
러니가 말한 그때 풍경이다. “피란민들을 하역용 팔레트에 태우고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배 밑바닥부터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화물칸은 모두 세 층이었는데, 맨 밑바닥을 채우면 그 위를 강철 덮개로 덮고 또 화물을 채웠죠. 그러나 사람을 실었기 때문에 덮개를 약간 열어뒀습니다. 그래야 빛과 공기가 통하니까요. 화물칸엔 난방도 전기도 물도 음식도 없었고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가 다섯이나 태어났어요. 우리는 그 아이들을 ‘김치1′ ‘김치2′ 식으로 불렀습니다.”
승객 정원 12명이었던 빅토리호에 피란민이 1만4005명 탔다. 화물칸을 다 채우고 갑판도 가득 메웠다. 상선이었던 그 배엔 어뢰 탐지기도 없었고 함포도 없었다. 무기라곤 러루 선장이 허리에 찬 권총 한 자루뿐이었다. 중공군은 부두에서 불과 3~4㎞ 떨어진 곳까지 밀고 들어와 있었다. 빅토리호는 배 한 척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조한 사례로 기록됐다.
빅토리호는 그렇게 북한의 마지막 피란민을 태우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러루 선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작은 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싣고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느님이 그날 배의 키를 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2001년 87세로 별세했다.
그해 12월 흥남에서 열흘간 선박 193척이 군인 10만명과 피란민 9만8000명을 이남으로 실어 날랐다. 그 가운데 나의 아버지도 있었다. 함남 함흥 출신인 아버지는 고교 졸업 직전 전쟁을 맞았다. 미군이 함흥에 진격한 지 얼마 안 돼 후퇴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국방군에 자원 입대하는 것만이 남한에 갈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다.
태어나서 처음 집을 떠난다는 생각에 약간 들뜬 아버지는 부모님께 “석 달 뒤면 전쟁 끝난대요” 하고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이불 홑청을 뜯어 만든 목도리를 아버지 목에 감아주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버지는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남에서 아버지는 혈혈단신에 적수공권이었다. 아버지는 차돌 같은 사람이었다. 시장 바닥에서 20대를 보냈고 스스로 벌어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전쟁 전 이미 남쪽에 내려와 살던 역시 함남 출신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삼형제를 낳아 키웠다. 아버지가 흥남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어머니를 만날 기회는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나의 DNA는 흥남 철수 작전에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
로버트 러니는 해군 대령으로 전역한 뒤 훗날 소장으로 명예 진급했다. 그는 한미 친선 단체인 코리아소사이어티 인터뷰에서 말했다. “모두들 저를 흥남 철수 작전의 영웅으로 추켜올리지만 진정한 영웅은 북한 피란민들입니다. 그들은 자유를 찾기 위해 조상 대대로 수백 년간 살아온 터전과 자신들의 삶을 희생했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번영한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러니는 지난 10일 9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먼저 가신 아버지가 아마도 반갑게 그를 맞았을 것이다. 러니의 부고를 읽으며 1950년 스물세 살이었던 러니와 열여덟 살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이 흥남 철수 작전의 영웅들이 나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월간조선 04월 호
名士 5人의 웃음에 관한 에세이
나태주·한대수·서민·이진숙·조은산 5人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때문에 웃는다”

고백부터 해야겠습니다. 요즘은 뭘 해도 신나질 않습니다. 기사 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소식이 통, 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키보드를 쳐봐야, 사람들은 무표정으로 읽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지요. 동료 기자에게 한탄했더니, 그럽니다. “야, 너도?”
웃고 싶고, 웃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부려봤습니다. 문인(文人), 혹은 ‘글 좀 쓴다’는 인사 5명에게 “요즘 무엇 때문에 웃고 사는지”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때마침 ‘창간 42주년’이라는 명분도 좋았습니다. 마치 “밥 줘. 애는? 자자” 단 세 마디만 한다는 무뚝뚝한 41세의 중년이, 사실은 〈마녀배달부 키키〉의 OST를 칠 줄 아는 것처럼, 《월간조선》의 반전(反轉) 매력을 보일 기회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웃음 연구의 권위자인 블라지미르 쁘로쁘는 신화와 민담을 분석하면서, 웃음과 생명력의 연관성을 설명했습니다. 여러 설화에 ‘망자(亡者)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산 자는 절대 웃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웃는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리기 때문이랍니다. 5개의 에세이는 그래서 어쩌면 이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간 팍팍한 세상살이에 입꼬리 올릴 여유조차 없었던 독자 여러분. 이 지면을 읽는 시간만큼은 어깨에 힘을, 혹은 짐을, 살짝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살아 있다는 걸 알리자고요, 하하.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저희 창간기념호인데, 요즘 웃을 일이 잘 없잖아요, 그래서, 그리하여, 모쪼록” 하며 어수선하게 한 원고 청탁에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흔쾌히 글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복수초꽃 깽깽이풀 옆에서〉
- 나태주 시인

▲꽃샘추위 속 피어난 복수초. 사진=조선DB
세상을 두루 둘러봐도 웃을 일이 별로 없다. 다만 암울할 뿐. 어둡고 우울하다는 말이다. 도시가 아무리 으리으리하게 버티고 서 있고 화려한 간판과 광고판을 자랑하고 뉴스가 아무리 반짝여도 거기선 한 줌의 웃음도 찾을 수 없다.
코로나19 탓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마스크로 코와 입과 볼을 가린 채 2년 넘게 이러고 사니 정작 입술이나 볼로 웃어도 웃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들 말을 들어보면 사람의 눈만이 눈알의 하얀 바탕, 흰자위가 있어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눈웃음이란 것도 있기는 있다.
본래 웃음이란 흔한 것 같아도 예전부터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웃는 사람의 집안에는 만복이 들어온다’고 했고,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는다’고 했을까. 결국은 웃음이란 흔하지 않다는 것이고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웃음은 결코 밖에서 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먼저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누가 억지로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또 누가 다른 사람을 억지로 웃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기는 헛웃음도 있기는 있다. 억지웃음이고 거짓웃음이다.
그렇네. 폭소, 껄껄웃음, 냉소, 미소… 웃음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여기서 가장 좋은 웃음은 미소다. 얼굴 가득 머금는 잔잔한 웃음. 부처님이 설법을 전할 시 염화미소(拈花微笑)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미소는 어디서 오는가? 역시 마음에서 온다. 마음의 만족과 평화가 미소를 불러온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삶에서 그 마음의 만족과 평화가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그래, 분명한 해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은 것을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화려하고 새롭고 비싸고 큰 것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만족이 없고 평화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자기 주변의 작은 것들, 오래된 것들, 흔한 것들을 살펴보고 거기에 눈길을 주어보고 마음을 주어보자. 조금씩 관심이 생기고 사랑이 싹트고 마음의 안쓰러움까지 생긴다면 감사하는 마음,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마음이 열릴 것이다. 거기가 바로 만족의 자리이고 평화의 자리이다.
실은 나도 요즘은 많이 우울하다. 나이가 제법 많은데다가, 또래 친구들의 부음에다가 선배 문인들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자주 듣다 보니 의기소침이 되고 세상만사 귀찮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게다가 겨울이 길게, 길게 이어져 날씨까지 춥고 세상의 소식들이 영판 어지럽고 시끄러우니 더욱 그렇다.
도대체 어디서 기쁨을 찾고 어디서 웃음의 근원을 찾을 것인가. 나 자신이 웃음이란 그 사람의 마음 바탕에서 오는 것이요 미소가 가장 좋은 웃음이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나는 그 미소를 잃고 말았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빨리 날씨가 풀리고 나무에 새잎 나고 꽃이라도 피고 들판에 풀빛이라도 살아났으면 좋겠다. 눈부신 햇살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문학 강연이라도 초청받는 기회가 있어 어린 친구들이라도 만났으면 더욱 좋겠지. 그러면 한발 물러섰던 내 마음의 평화와 만족이 조금씩 다가와 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나는 날마다 풀꽃문학관에 나가 꽃밭을 들여다보곤 한다. 꽃들이 새싹을 내밀었나 살피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직은 꽃들의 새싹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수선화 촉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음을 본다. 참, 용하기도 하지. 이 추위 속에 새싹을 내밀다니. 수선화 새싹을 보는 순간 나의 얼굴엔 조그만 미소가 번진다.
수선화 다음으로 내가 기다리는 녀석은 복수초다. 일명 얼음새꽃이라고 불리는 꽃. 아직은 소식이 없다. 또 있다. 복수초 옆에 깽깽이풀. 연보랏빛으로 하늘하늘 피는 꽃. 복수초가 황금 노랑으로 피고 깽깽이풀이 연보랏빛으로 하늘하늘 꽃잎을 날릴 때 나는 그들 옆에 앉아 그들과 눈을 맞추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을 것이다. 빨리 그들이 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한대수 뮤지션

▲뉴욕 거리에서, 뮤지션 한대수. 사진=제이슨 서(Jason So)
“대수야! 우리 오늘 에이즈(AIDS) 피검사 하자!”
1989년, 나의 당시 걸프렌드 케리(Kerry)가 제의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케리! 나를 의심하다니!?”
그날 이후 나는 케리와 데이트를 안 했다.
그때 나는 뉴욕에 망명한 상태였다. 1집 〈멀고 먼 길〉, 2집 〈고무신〉을 발표했는데 ‘체제전복’이라고 누명을 쓰고 ‘판매금지’ ‘방송금지’ ‘공연금지’령을 받았다. 대한민국 해군 3년 3개월(육군보다 3개월 길다) 동안 나를 인내로 기다린 여인과 서울에서 결혼했으나, 20년의 회오리바람 같은 결혼 생활과 중년기의 권태기가 우리를 지탱시켜주질 않았다. 결국 이혼했다. 그녀는 멋진 연하의 금발 패션모델과 인생을 즐겼고, 나는 캄캄한 암실에 홀로 앉아 내일을 두려워했다.
나의 결론은 ‘혼자는 못 살겠다!’였다. 케리는 초록색 눈빛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른 백인 여자와 달리 키가 그리 크지 않고, 내 품속에 아담하게 안기는, 유머 감각이 넘치는 아이리시(아일랜드계) 여인이었다. 나는 당시 나이 41세, 그녀는 22세였다. 나이 차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를 좋아한 이유는, 화가 아버지를 일찍 잃었기에 나를 음악가로서뿐만 아니라 파더피겨(Father figure·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좋아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케리 말이 맞았다. (내가 화를 내서 미안해 케리! 나는 바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는 전 세계, 특히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중심으로 에이즈 유행병(AIDS Epidemic)이 휩쓸고 있었다. 뉴욕 싱글 여자들은 피임약을 습관적으로 복용하면서 남자와의 사랑을 자유롭게 즐길 때였다.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의 분위기가 전 맨해튼의 바(Bar)와 클럽을 안개같이 자욱하게 점령했다. (밤안개!) 아바(ABBA),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 도나 서머(Donna Summer), 비지스(Bee Gees)의 디스코 음악은 더욱 젊은이들의 ‘능동적 성생활(Sexually active lifestyle)’의 휘발유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쾌락은 끝이 온다. 에이즈라는 무서운 성병(性病)이 제일 먼저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발병하여,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간 것이다. 12년 동안 전 세계 인구 4000만 명이 죽었고, 미국만 해도 50만 명이 죽었다. 당시 내 사진 스튜디오의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 감염된 지 6개월 만에 사과즙이 말라버리듯, 온몸이 뼈만 남은 채 죽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과거에는 바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이 “안녕, 대수(Hello Daesoo)!” 하면 나는 “술 한 잔 살게(Let me buy you a drink)!”라고 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때는 여자가 윙크만 해도 남자들이 도망갈 지경이 되었다. 에이즈는 지옥같이 무서운 병이었다. 나도 너무 공포에 시달려, 이후 〈후쿠오카 라이브〉 공연에서 첫 곡으로 ‘에이즈 송(Song)’을 발표했다.
이러한 지옥이 다시 우리 지구상에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데, 2020년 나의 생일 3월 12일에 갑자기 뉴욕 1(one)뉴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 하루에 800명”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와,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퀸스 집 15분 거리의 엘름허스트 종합병원이 진원지였다. 전 세계 뉴스팀이 우리 동네로 모였다. BBC, NHK, KBS, DW…. 완전 카오스(Chaos)였다.
“나의 두 딸 옥사나, 양호. 절대 나가지 마! 내가 73세이니, 너희는 손 자주 씻고 마스크 쓰고, TV나 보라고!”
나는 새벽마다 펜트리(Pantry·교회나 학교에서 주는 공짜 음식)로 식량을 보충했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에이즈는 성적 접촉이 있어야 걸리지만, 코로나19는 공기를 통해 옮는다. 와, 정말 무섭다. 2년 동안 전 세계 사망자가 600만 명이다. 엄청나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떠한 희망을 가질 수 있나? 없다! 절망이다! 우리 ‘할배’ 세대들이 지구를 망쳐놓았다. 오염, 질병, 풍부한 곡식과 고기들은 쓰레기로 변하고 있다.(미안하다, 양호야.)
하지만 양호의 친구들을 보면 너무나도 똑똑하고 쿨하다. 그리고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같은 환경운동가를 봐도 그렇다. 우리 할배들이 망쳐놓은 지구를 바로잡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면 희망이 보인다.
“그래, 양호야! 너와 너의 친구들을 보며 나는 웃는다.”
영화음악 작곡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말했다. “인생은 꿈이다.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Life is a dream at the end of which we awaken)” 젊은이들이여, 좋은 꿈을 꾸고 좋은 꿈을 만드세요.
〈개 때문에 웃는다〉
-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는 강아지들. 사진=서민 제공
집에 도착할 때면 내 발걸음이 빨라진다. 개들이 현관 앞에서 날 기다릴 생각이 나서다. 특히 두 발로 서서 깡충깡충 뛸 여섯째 강아지와 내가 오는 걸 가장 반가워할 다섯째를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파트 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난리가 난다. 개 여섯 마리가 나한테 달려와 반가움을 표현할 때면 이보다 큰 행복이 어디 있나 싶다.
돌이켜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개가 있었다. 셰퍼드, 진돗개 등등 큰 개가 주를 이뤘는데, 당시에는 개를 키우는 목적이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둑은 쉽게 들어오지 않았기에, 그 개들은 도둑을 잡는 대신 물지 말아야 할 사람을 물곤 했다.
‘조리’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대표적이었다. 철창 안에 가둬놓는 게 미안해 가끔 마당에다 풀어줬는데, 하필 그때 우리 집에 온 이들이 희생양이 됐다. 외할머니를 문 것도 어이없지만, 당시 초등학생이던 여동생 친구를 문 건 해도 너무했다. 남의 집 귀한 자식, 그것도 외모에 더 예민한 여자아이였으니 지금 같으면 훨씬 문제가 커졌을 테지만, 그때는 그런 상해에 관대한 시절이었기에 치료비와 보상금을 물어주고, 내 아버지가 그쪽 집안에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하는 선에서 끝났던 것 같다.
이런 사고에도 불구하고 조리에 대한 내 추억은 그리 나쁘지 않다. 친구가 별로 없던 그 시절, 조리 덕분에 위안을 많이 얻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녀석에겐 미안함이 더 크다. 조리가 나한테 바라는 거라곤 다만 몇 시간이라도 같이 놀아달라는 게 전부였는데, 난 번번이 그 요구를 외면했으니까.
그 미안함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의 대부분을 집안에서 보내는 우리 개들에게 우리 집은 세상의 전부다. 그런 그들에게 아빠인 나의 부재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내가 퇴근해 집에 왔을 때 반겨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내가 개들에게 신경 써주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떠들썩한 환영회가 끝난 뒤 애들이 좋아하는 공놀이를 30분 정도 해주고 나면, 난 나만의 삶으로 돌아간다. 강의 준비도 하고, 원고를 쓰는 등등 개들의 경제적 뒷받침을 위한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 스마트폰을 하고, 유튜브나 TV를 본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개들은 수시로 날 바라보지만, 내 시선은 개들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그렇다고 개들이 날 원망할까? 잠깐은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약간의 관심만 보여주면 개들은 다시 내게 반가움을 표시한다. 정말 소박하지 않은가?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게 자기를 위해 조금만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라니! 심지어 개들은 견주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를 따지지 않으며, 나같이 외모가 안 되는 사람도 개의치 않는다.
언젠가 프랑스의 노숙자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광경이 기사에 나온 적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개를 돈벌이 수단으로 쓰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난 그 개가 그리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견주와 함께 있는데, 그보다 더 기쁜 게 뭐가 있을까? 바라는 게 별로 없는 존재, 사람들은 그래서 개를 좋아한다.
개가 견주를 좋아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가 그러는 것처럼, 견주 역시 개한테 요구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과 사이가 나빠지는 이유도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서가 아닌가? 자기 자녀가 공부 잘해서 훌륭한 어른이 되길 바라는 부모와 자기를 제발 좀 내버려 두길 바라는 아이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견주는 자기 개한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말고는 특별히 요구하는 게 없다. 간혹 원할 때 앞발을 내밀어 달라는 견주가 있긴 하지만, 못 한다고 해서 야단을 맞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내가 기르는 개들은 오라고 해도 오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개한테 말을 가르치려고 하거나, 능력에 안 맞게 마라토너로 키우려고 한다면, 갈등은 필연적이지 않겠는가? 이 교훈을 사람들 사이에도 적용시킬 수는 없을까? 쉽진 않을 것 같다. 부모든 부부든 친구 사이든,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대하기 마련이고, 그 기대는 곧잘 실망으로 돌아오니 말이다.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런 관계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인간 치유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개의 역할은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질 것 같다.
〈추억에서 미소 짓기〉
- 이진숙 前 대전 MBC 대표·종군기자

▲MBC 종군기자 시절 아랍족장과 함께. 사진=이진숙 제공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런 기억들은 주로 여행길에서 생겼다. 중동과의 오랜 인연을 처음으로 이어준 곳은 튀니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망명정부 취재를 위해 비행기를 탔던 것이 1989년이었다. 유럽의 어느 공항에서 튀니스행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승무원들의 옷깃으로부터 향긋한 향수 냄새가 진하게 다가왔다. 이국적인 냄새가 이런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공항을 나서자 몇백 년 전 성서 속 세계로 들어선 듯 낯선 문자와 낯선 옷차림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른 여성들의 짙은 눈썹과 그보다 더 짙은 눈동자가 묘하게 매력적이었고, 굵은 저음으로 쏟아내는 아랍 남성의 목소리가 여행객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유대 이스라엘과의 엇갈린 운명 속에 지도자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레바논으로, 레바논에서 튀니지로 쫓겨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난민촌에서도 삶은 지속되었다. 어른들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왁자지껄 소리를 지르며 축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기구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축구가 인기였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바다 색깔. 지중해의 진푸른 바닷빛을 묘사하기에 언어가 모자란다.
사람들은 기억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PLO 망명정부에서 일하던 할레드는 자신의 집에까지 초대해주었다. 저녁 식탁에는 홈모스와 팔라펠, 토불레, 타히니, 그리고 케밥 등이 화려한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꿈꾸던 할레드는 튀니스를 정거장이라고 표현했다. 아라파트 의장을 따라 튀니지까지 피란을 왔지만 언젠가는 고향 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으로 돌아가 독립 팔레스타인에서 살 것이라고,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며 독립이라고 말이다.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망명길에서도 떠나온 집의 열쇠를 보관한다는 말도 들었다. 이미 그들이 살던 집이 몇 번이나 부서지고 그 위에 새 집이 지어졌을지 몰라도 난민들의 기억 속에 떠나온 집은 모습을 바꾸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차 인티파다(투쟁)와 잇따른 저항의 결과 팔레스타인은 지금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군대와 외교는 빠진 초미니 자치정부다.
또 다른 기억. 이번에는 2002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 버몬트주 미들베리. 미국의 국제학 대학원 과정에서는 반드시 해당 지역의 언어 시험을 통과해야 학위를 준다. 중동 전공자들은 아랍어나 히브리어, 터키어 중 해당 전공의 자격 시험을 봐야 한다. 나의 경우는 아랍 지역을 전공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선택했다. ‘언어 서약’에 따라 해당 언어 외에는 사용할 수 없어 급우들과 이야기할 때도 통하든 통하지 않든 반드시 아랍어로 얘기해야 했다. 급우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찾았던 도서관은 붐비는 한국의 도서관과 비교해 시설이 너무나도 좋았다. 천장이 높고 곳곳에 있는 유리창에서는 햇볕도 적당히 들어왔다. 고즈넉한 미들베리대학교에서 아랍어로 단어를 외우고 작문을 하고 공부에 지루해지면 캠퍼스를 걸었다. 그 시간 덕분에 중급 아랍어 자격증을 받고 지금은 중동 나라에 가도 필요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 3년 전인가, 어머니와 태국 여행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관절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걷기 힘든 어머니였지만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가까운 나라를 선택했다. 빨리 걷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던지 산책을 하는 코스 때는 남편과 나만 가라고 등을 떠밀곤 했다. 그래도 잠시지만 한국을 떠나 휴식을 갖는 것이 어머니한테는 너무나 좋았던 모양이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환히 웃는 표정이다. 각종 새가 지저귀던 버즈 가든(Birds Garden)에서는 열대의 새들이 보여주던 화려한 깃털에 감탄사를 쏟아내던 어머니였다. 그러던 어머니는 지금 쓰러져서 병석에 누워계신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요즘이다. 지독한 역병은 아직 주변에 있다. 병에 걸릴까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길까 일부러 연락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소와 웃음을 기억에서 찾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도 현재가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 바로 이곳에서 말이다.
〈네 번째 달〉
- 조은산 국민청원 ‘시무7조’ 필자

▲식탁에 홀로 앉아 먹는 라면과 술. 사진=조은산 제공
제 이름은 조소현이에요. 올해 네 살 된 여자아이고요, 사랑하는 엄마랑 아빠 그리고 제가 닮을 뻔한, 그러나 닮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인, 원숭이처럼 큰 귀를 가진 개구쟁이 오빠와 함께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집에서 제일 예쁨 받는 존재이기도 하답니다. 물론 엄마는 제가 잠들었을 때가 가장 예쁘다고 하겠지만요.
이런 제가 너무 어려서, 혹은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저 온종일 웃고만 있는 건 아니에요. 아직 어리지만, 저는 있는 힘껏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요. 그래서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제 말과 몸짓이 답답해 괜히 떼를 쓰며 엉엉 울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저는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요. 제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의 손길에서 엄마의 기분을 느낄 수 있고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아빠의 목소리에서 아빠가 보낸 하루를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어떤 날에는, 엄마랑 아빠랑 토닥토닥 싸울지 말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기도 한답니다. 물론 엄마, 아빠는 언제나 저를 보며 환히 웃어주긴 하지만요.
그런데 요즘 말이에요, 아빠가 많이 힘든가 봐요. 아빠는 가끔 숨을 쉬는 게 답답한지 길게 한숨을 내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냉장고에서 두꺼비 주스를 꺼내 홀짝홀짝 마시곤 했거든요. 하지만 그저께도, 어저께도, 아빠는 매일 밤 혼자 두꺼비 주스를 마셨어요. 그리고 몰래 방문을 열고 내다보면 아빠는 늙은 염소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도 슬픈 늑대처럼 우우 울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아빠의 웃는 얼굴이 이제 잘 기억나지 않아요. 우리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아빠를 웃게 해주려고요. 아빠는 오늘도 늦을 거라고 엄마가 말해주었지만, 나는 괜찮아요. 코오 자는 척하며 아빠를 기다리면 될 일이니까요. 까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아빠랑 놀아줄 생각에 빠진 저는 지금 무척 신이 나지요. 왠지 아빠는 동물 카드놀이를 좋아할 것 같아요. 품 안에 카드 뭉치를 꼭 끌어안고 아빠를 기다려요. 아, 곧 아빠가 올 시간이에요. 쉿, 이제 모두 안녕.
/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닫혀 있는 방문을 열면 정확히 세 개의 달이 떠 있다. 지쳐 잠든 아내의 둥근 얼굴이 떠 있고, 모로 누워 침을 흘려대는 아들의 둥근 귀가, 그리고 윗옷을 까뒤집고 잠든 딸의 둥근 배가 떠 있다. 달덩어리들이 내뿜는 숨 내음이 방문 사이로 흘러나온다. 이제야 나는 귀가를 실감한다. 다시 조심스레 방문을 닫는다.
식탁에 홀로 앉은 나는 잠시 생각하다 결국 라면을 하나 꺼내 불에 올리고 술잔을 가득 채운다. 꽉 막힌 속에 면발이 들어가니 살 것 같기도 하고 죽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꾸역꾸역 살다 보면 가끔 체할 때도 있는 거겠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는다. 그렇겠지, 데굴데굴 굴러가며 살다 보면 언젠가 데면데면해지는 날도 오겠지. 그러나 인사 고과를 빌미로 사적인 지시를 일삼는 상관이, 초고속 승진으로 어느샌가 같은 직급에 서게 된 새까만 후배들이, 아직도 내 이름을 불러대는 것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이제 더는 직장을 다니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방문이 스르르 열린 건 그때쯤이었다. 문 밖에 선 딸아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톰한 두 발을 딛고 서서, 뭉툭한 손가락을 꼬물대며 딸아이는 내게 들고 있던 동물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물었다. 여태 안 자고 뭐 했어? (코오 잤어. 근데 아빠가 보고 싶었어.) 그랬구나. 아빠 기다렸구나. 나는 마지못해 딸아이가 내민 동물 카드를 받아 들었다.
내가 내민 카드에는 코알라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지? 그러자 딸아이는 입 안 가득 달큼한 침을 머금고 오물오물 답했다. (콜랄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다시 꺼내 든 카드에는 고릴라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지? 딸아이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긁으며 답했다. (골롤라) 이제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다음 카드는 거북이였다. 이건 뭐지? 딸아이는 확신에 찬 듯 외쳤다. (거구비!)
풋 하고 웃음이 쏟아지는데 어쩔 줄 모르겠어서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볼과 귀를 비비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나는 살고 싶다고 몸부림쳤다. 그토록 나를 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듯 딸아이는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들겨주었다. 모두가 숨죽인 이 밤에, 살아 숨 쉬는 건 나와 내 가족뿐인 것만 같았다. 모두가 열 번 웃는 세상에서, 나 혼자 열한 번 웃은 것 같았다. 그 한 번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날 밤, 딸아이는 내가 재웠다. 녀석은 모종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급히 곯아떨어지더니 대차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내가 놀아준 건지, 딸아이가 놀아준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딸아이의 배도 환하게 웃고 있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감기 골롤라(걸릴라). 그렇게 내 웃음이 네 번째 달이 되었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04.15 100세가 넘어도 김형석은 묻는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왜 태어났는가?” 누구나 스스로 물어보는 과제다. 제각기 인생을 살면서도 대답에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일찍 이 물음을 가졌다. 초등학생 때, 늦게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병신 같은 자식이지만, 생일날 저녁에 조밥을 어떻게 먹이겠느냐?”는 탄식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엄마! 나 괜찮아. 지금 영길네 집에서 ‘오늘이 장손이 생일인데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가라’ 고 해서 이팝에 고기도 먹었어. 저녁 안 먹어도 돼”라고 거짓말을 했다.
항상 어머니가 내 꺼져가는 촛불 같은 나약한 건강을 걱정했기 때문에 그런 거짓말이 쉽게 나왔다. 어머니는 “그럼 됐다. 아버지나 드시면 되니까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배고픔을 참으면서 ‘나는 왜 태어났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했다.
가난과 병에 절망했던 소년기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14살 이른 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버림받은 소년이 되었다. 가난과 병 때문에 중학교에 갈 희망도 없고 앞길이 암담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운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어른이 되도록 살게 해 주시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는 기도였다.
나는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도는 버림받지 않았다. 중학 1학년 크리스마스 때 나는 ‘앞으로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다’는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학 생활은 참담하고 가혹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했다가 되돌아가야 했고, 숭실중학교는 폐쇄되고 일본학교에서 졸업했다. 나의 10대 인생은 최악의 세월이었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라를 걱정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그때부터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며 나를 키워야 한다. 고학을 각오하고 일본으로 대학 공부를 떠났다. 어머니는 “내가 건강한데 굶기야 하겠니. 너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집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건강을 되찾은 내가 대견스러웠고 고생을 함께 나누어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대학 생활 3년 반이 지나면서 내 생애에서 치러야 하는 악운이 또 찾아왔다.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끌려가는 운명에 직면했다. 태평양 전선으로 간다면 내 삶은 종말일 수도 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성경 구절이었다. 그 뜻은 이루어졌다.
일제 말기 도피 생활을 보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나는 조국과 더불어 다시 태어났다. 해방의 소식을 듣는 날, 새벽녘의 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큰 태양이 동쪽 산 밑으로 지는 저녁인데, 나는 무한히 넓은 옥토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시간은 짧은데 일은 끝없이 많이 남아 있다는 심정이었다. 그 꿈이 나로 하여금 교육계로 진출하자, 파종과 추수는 누가 하든지 나는 마음의 밭을 갈아주자고 결심했다. 북한에서 2년 동안 교육에 종사했다. 그러나 공산세계는 자유와 인간애를 믿고 사는 사람은 살 곳이 못 된다. 탈북을 감행하다가 체포되었다. 5분만 일찍 잡혔어도 수용소를 거쳐 북으로 다시 끌려갔을 순간에 풀려났다.
육체는 늙었으나 정신은 안 그래
대한민국은 나를 따뜻한 품 안에 맞아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국민도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무에서 유를 창건하는 새로운 탄생을 체험했고 성공으로 이끌어 왔다.
30대 중반에 연세대학으로 가면서는 학문과 사상계, 교육과 사회적 활동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65세에 정년을 맞이하면서 가까운 친구들과 뜻을 모아 90까지는 사회적 책임을 같이하자고 약속했고 그 뜻을 성취했다. 나는 90을 맞으면서 자신과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찾아 일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강연, 집필 몇 권의 저서를 남길 수 있어 감사한다.
지금 나는 내 긴 생애를 후회하지 않는다. 30까지는 성실히 자신을 키웠고, 30여 년은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70부터 30년은 더 열심히 일했다. 육체는 노쇠해졌으나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금년 4월은 내가 102세를 마무리하는 달이다. 자연히 100년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장수한 것에는 감사하지만 자랑거리는 되지 못한다. 중한 것은 오랜 세월이 아니라, 누가 더 풍요롭고 보람된 인생을 살았는가, 이다. 물론 장수와 보람까지 다 갖춘다면 축복받은 인생이 된다. 나에게는 일이 건강을 유지시켰고 정신력이 신체 건강도 지탱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고, 행복은 섬김의 대가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중앙일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04.21 “우표 못 사서 1000원 동봉”…일용직 노동자 울린 우체국 답장
객지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 중인 50대 남성이 아내 생일을 기념해 편지를 보내려 했지만, 우표를 구하지 못해 1000원을 동봉해 우체통에 넣었다가 우체국으로부터 감동적인 답장을 받았다는 사연이 온라인상에서 화제다.

▲아내에게 편지를 썼지만, 우표를 못 구해 A씨가 우체통에 넣은 우표값 1000원과 메모/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
지난 20일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는 ‘오늘 감동 사연’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보잘것없는 57세 일용직 노동자라고 소개한 A씨는 “지난 3월 태안 화력발전소에 정비 공사하러 태안에 올라온 지 한 달이 지났다”고 말문을 열었다.
A씨는 “저는 직업이 객지를 떠도는 직업이라서 몇 년 전 암 수술받은 집사람 곁을 늘 떠나 있다”며 “곧 집사람 생일이라 객지 생활하면서 편지라도 한통 써서 생일 축하한다고 하고 싶어서 손편지를 썼다. 그런데 요즘 편지 보내기가 어렵더라. 여기가 시골이라 우표 살 곳도 없었다”고 했다.
A씨는 지난 10일 아내에게 쓴 편지를 들고 무작정 네비게이션에 ‘우체국’을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우체국은 태안 이원 우체국. 그러나 주변에 우표를 파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A씨는 차를 뒤져 종이 한 장을 찾았고, 거기에 메모를 남겼다.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A씨가 우체국으로부터 받은 잔돈과 자신이 쓴 메모/보배드림
‘우편물 수거하시는 분께. 일요일이라서 우표를 못 사서 이렇게 1000원을 동봉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우편을 부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달라. 번거롭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하다’
A씨는 편지와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 그리고 1000원이 든 봉투를 우체국 앞에 설치된 우체통에 넣었다.
4월 12일 화요일. A씨는 자신의 편지가 접수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체국에 전화했다. A씨는 “담당 직원이 친절하게도 잘 접수해서 보냈다고 하더라.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20일 퇴근하고 숙소에 온 A씨는 자신에게 온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내에게 편지를 부쳤던 우체국으로부터 편지가 온 것. 봉투 안에는 우표값 430원을 제하고 잔돈 570원과, A씨가 쓴 메모, 영수증이 담겨 있었다.

▲태안 이원 우체국/보배드림
A씨는 “너무 감동이었다. 너무 고맙게 일처리를 해주신 태안 이원 우체국 직원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30년 만에 감동을 느껴본다. 집사람과 연애할 때 편지 많이 썼다. 집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은 게 1992년 이후 처음이라서. 사실 정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제겐 정말 눈물이 왈칵 나올 만큼 큰 감동이었다. 객지 생활하면서 피폐해진 제 마음이 풀어졌다”고 우체국 직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A씨의 글은 보배드림에서 화제를 모았다. 조회수는 21일 오후 3시 20분 기준 6만8000회를 넘겼고, 1500명이 ‘추천’했다. 회원들은 “오랜만에 눈가가 촉촉해진다”, “감동이다”, “아직 세상을 살만하네요”라는 댓글을 남겼다.
우체통에서 A씨가 보낸 메모를 확인한 직원은 태안 이원 우체국 이경미 사무장이다. 이 사무장은 21일 조선닷컴과의 통화에서 우체통을 열고 A씨의 편지와 메모를 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우체통을 하루에 한 번씩 여는데 메모랑 내용이 너무 상세하더라. 정말 세심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우표값이 1000원이 아니기 때문에 잔돈을 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발신인의 사연은 뒤늦게 접했다. 당연히 제 업무 중 하나고, 제가 늘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한 건데, 인터넷에 알려졌다고 하니까 민망하다”며 웃었다.
조선일보 김소정 기자
04.27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한국인의 피는 더럽고, 한국인은 범죄자, 피의자, 비위생적 존재이다. 아직도 국민 일부가 이렇게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소설·드라마 ‘파친코’는 그런 일본에서 60여 년, 4대를 견뎌 온 재일 교포 가족의 이야기이다.

▲드라마 파친코 /애플TV
20세기 초부터 여러 경로로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 이주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파친코’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유미는 오사카 최악 빈민가에서 살았다. 방 한 칸뿐인 판잣집에서 돼지·닭 등 가축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아버지는 주정뱅이였다. 그들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한국인은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한국인은 가치 없는 인간이며, 더럽고 위험하고 천한 일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야쿠자가 되든가 파친코업에 종사하면 그 곤경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다. 야쿠자는 한국인을 받아주었고, 가난과 범죄 냄새가 나는 파친코업은 일본인이 기피했다. 일본인에게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곧 파친코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은 1976년 일곱 살 때 미국에 이민 갔다. 재일 교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일본에서 사는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한 재일 교포 중학생의 죽음을 들었다. 그 학생의 졸업 앨범은 욕설로 더럽혀졌다. “방귀 냄새 나는 가난한 인간들” “조선인은 문제아에 돼지들이야. 지옥으로 꺼져버려.” “할 수만 있다면 네 머리를 직접 베어버리고 싶지만 내 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그는 결국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죽음도 아무 소용 없었다. 절망한 그 학생의 아버지는 일본인 형사에게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그런 소리만 항상 하죠”라고 절규한다. 죽음은 그들의 삶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파친코’의 주인공들이 이 죽음을 이겨낸 방식은 각기 다르다. 주인공 선자는 아들 노아·모자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그녀의 생명이자 죽음이었다. 선자의 남편인 목사 백이삭에게는 신이 있었다. 그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했다. 노아의 생부이자 선자의 첫사랑인 고한수는 야쿠자 보스였다. 모자수는 파친코로 큰돈을 벌었다. 자식, 신, 권력, 돈이 각자의 버팀목이자 탈출구였다. 이들의 공통점도 있다. 모두 일본인이 되기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노아는 완전한 일본인을 꿈꾸었다. 그는 학업에 매진했고, 흠 없이 처신했다. 일본인 교사들은 그를 ‘한국인의 자랑거리’로 칭송했다. 그는 기적처럼 와세다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꿈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고한수가 생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학비는 그의 돈이었다. 노아에게 야쿠자는 일본에서 가장 더러운 인간이었다. 엄마가 자신을 더럽혔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를 중퇴했다. 지방으로 잠적하여,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았다. 16년 뒤 마침내 선자가 노아를 찾아간 날 저녁, 그는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끔찍했다.
그들은 왜 일본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모자수)
‘파친코’는 20세기 한국인의 수난사를 그렸다. 하지만 조국이나 민족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조국을 잃어버린, 조국 없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주인공 선자는 부산 영도의 가난한 어부 딸이고 무지렁이다. 자식에게 뼈와 살을 아낌없이 내준, 전형적 한국 어머니다. 하지만 ‘파친코’는 한국을 넘어서 있다. 재일 한국인에게 인간은 끔찍한 존재다. 살아가는 건 더러워지는 것이다. ‘파친코’는 그 운명을 견디며, 마침내 한 송이 꽃을 피워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일본인에게 ‘파친코’는 불편하다. “우리는 진정한 역사를 알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오직 거짓으로 점철된 역사를 주장한다. 전후에 많은 한국인, 러시아인, 그리고 미국인은 일본에서 민간인들을 강간하고 학살했다.” 재미 일본계 작가의 ‘요코 이야기’는 무한 반복된다. 하지만 ‘파친코’는 누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 상처를 먼저 보는 것, 거기에 한국과 일본,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조선일보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04.30 매버릭(Maverick)

채서영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대선 결과를 보도하며 많은 외국 언론이 윤석열 당선인을 ‘매버릭(maverick)’이라는 생소한 단어로 소개했습니다.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았던 그의 이력을 간결하게 나타내려 쓴 말이지요.
이 단어는 1800년대 초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활약한 텍사스의 목장주인 새뮤얼 매버릭(S. Maverick)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엔 뜨겁게 달군 도장을 가축의 몸에 찍어 주인을 표시했는데 그는 기르던 소에게 고통을 주기 싫다며 낙인을 찍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변 농장에서 ‘낙인이 없는 매버릭 농장의 소’를 ‘매버릭’이라고 불렀죠. 그 자신도 정파에 속하지 않은 채 텍사스 독립을 추진했고 시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매버릭은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거나 ‘독립성이 강한, 전통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됐어요.
이처럼 이름에서 단어가 만들어진 경우가 꽤 있습니다. 샌드위치는 본래 18세기 영국 백작의 이름(Earl of Sandwich)이었지요. 게임을 즐기던 그는 식사시간을 절약하려고 빵 사이에 고기를 끼워 먹었다고 하는데 그런 간편식을 샌드위치라고 부르게 됐어요. 점보(Jumbo)는 1800년대 후반 영국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코끼리의 이름입니다. 아프리카 수단 태생으로 키가 4m나 됐기 때문에 ‘크다’는 뜻의 형용사가 됐지요. 조금 복잡하지만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도 있습니다. 18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엘브릿지 게리(E. Gerry) 주지사가 자신의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나눴는데, 그 모양이 전설 속 도마뱀(salamander) 같다고 해서 둘을 합쳐 만든 단어입니다.
그런데 유래와 관계없이 단어는 인구에 회자하며 새로운 의미를 담게 마련이지요. 매버릭은 농구 팬들에겐 텍사스 댈러스 팀(Dallas Mavericks)이름으로, 영화 팬들에겐 ‘탑건(Top Gun)’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한 조종사의 콜사인이자 별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담하다는 개성이 이름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두 경우 모두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매버릭은 독자적이다 못해 독불장군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자주 쓰여요. 물론 외국 언론이 이 단어를 윤 당선인에게 사용했을 때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지요.
어려운 가운데 결단하고 특정 집단이 아닌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하는 대통령은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생각과 대담한 행동이 필요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아무쪼록 긍정적인 의미에서 독립적이며 추진력 있는, 오직 국민을 위하는 최선의 ‘매버릭 대통령’을 기대해봅니다.◎
중앙일보 채서영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