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12/ 몽골2/
(3) 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다
▲영화 <징기스칸>(By The Will Of Genghis Khan)의 한 장면.
(2편에 이어 계속)
‘몽골’= 말골, 몰골, 물길, 모골, 몯골, 말갈, 모골, 무크리, 무갈
전원철 박사는 “칭기스 칸이 살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는 칭기스 칸 자신의 시대까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기드, 콩그라트 및 나이만 등 여러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며 “그때까지 이 지방을 대표하는 통일된 나라 이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나지 얼마 안 되는 시대에 쓰인 페르시아어 사서 《선별된 역사(Tarikh-igojide)》도 칭기스 칸이 처음으로 이 지방명을 ‘몽골’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음을 지적했다.
“칭기스 칸의 서로 다른 부족을 통일한 뒤 이 모든 종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이름을 고안했는데,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어원에 대해 후대의 학자들이 여려 어원설을 제시했죠. 송(宋)나라 때 팽대아(彭大雅)는 칭기스 칸에게 가는 사신으로 몽골을 방문하고 와서 쓴 자기 보고서에서 <몽골이 몽골어에서 은(銀을) 뜻하는 말인 ‘멍거’에서 왔다>고 해서 심지어 몽골의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믿었지요. 또 오늘날 부랴트 및 몽골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용감하다’는 말뜻의 퉁구스어 ‘망가’가 어원이라고 봅니다.”
-이상하네요. 몽골 사람이면 한 번에 당연히 몽골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정상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정작 몽골인들이 자기 종족명이자, 국명의 뜻을 모르는 거죠. 마찬가지로 위대한 칭기스 칸이나, 그의 본 이름인 테무진(칭기스 칸)의 뜻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냥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단어에 꿰맞춰 놓고 ‘이럴 것이다’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그 말의 뿌리가 원래의 몽골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몽골’은 사실 말갈/몰골(말 골,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에 기원을 둔 말입니다. 말갈은 ‘말 키우는 고을’이라는 뜻인데 고구려 옛 소리가 ‘몰 골’ 즉, ‘말 골’입니다. 말을 제주도 방언으로는 아직도 ‘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몰골이 선비(鮮卑) 시대에 와서 ‘몯골’, 곧 ‘몰길’, 한자로는 ‘勿吉(물길)’로 바뀝니다. 이는 ‘몰 길’, 곧 ‘말 다니는 길’이라는 말로 ‘말 고을’과 같은 말이죠. 그 ‘말골’이 결국 600년 세월이 흐른 뒤 몽골어 ‘몽골’이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부랴트어(바이칼호, 내몽고 등지의 종족이 사용하는 말)에서는 지금도 ‘勿吉(물길)’을 북방 한어(漢語)가 아니라, 남방 한어로 읽는 옛 소리인 ‘묻갈리’라고 기록한다”며 “말갈어 ‘몰골’이 기원이 되어 《삼국사기》와 《당서》 등에서는 ‘말갈(靺鞨)’로 적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아랍어에서는 ‘모골’이라고 하고, 힌두어에서는 ‘무갈제국’처럼 ‘무갈’이라고도 하지요. 고구려를 옛 산스크리트어로 ‘무쿠리(畝俱理)’, 다른 투르크 방언들로는 ‘마크리’ 또는 ‘베크린’ 등으로 부르는 것도 이 말의 변형들입니다.”
▲황금항아리 금행을 기준으로 본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 모든 몽골의 어머니로 불리는 알란 고와의 10대 손이 칭기스 칸이다. /저자 책
구전이나 전설이 아닌 족보로 기록된 칭기스 칸 선조 계보
-우리는 흔히 유목민은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서 선조에 대해서 알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칭기스 칸의 경우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네요.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이 그냥 전설이나, 구전의 형태로 내려온 것을 후대에 와서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만에요. 한 왕조의 계보들 중에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만큼 수 많은 언어와 시대에 일관되게 기록된 것은 유럽은 물론 동서방 그 어떠한 왕조에도 없습니다. 라틴어 외에 기록문화가 별로 없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예 빼두고라도, 기록 잘하기로 이름난 아랍 및 페르시아와 지나, 곧 지나(China)땅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죠.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몽골어, 한문, 만주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와 타타르어 몇 개 방언, 부랴트어, 아르메니아어, 또 러시아어 등 10개 민족어 이상의 동·서방 여러 언어로 시대를 달리하며 동·서방에서 수10 종의 사서로 대대로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하나이면서, 이만큼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또 많은 언어로 기록된 왕가의 계보는 전 세계 그 어느 왕조에도 없습니다.”
-칭기스 칸을 야만적인 생활을 한 유목민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족보를 기록하고, 전해 왔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서양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무지나, 몽골사에 관한 편견 때문에 이런 숨겨진 역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선입관이 생긴 겁니다. 또 서양학자들은 자기네들이 그 야만적 동양의 한 종족 때문에 정복을 당하거나, 위협을 느꼈다는 자격지심도 존재했지요. 그래서 ‘야만적인 한 유목민족 출신의 칭기스 칸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서 문명세계를 정복했다’고 평가하고 싶었던 점도 있죠.
유목민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해왔던 겁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의 선조 족보는 단순하게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정식 족보 이상 잘 정리된 형태로 쓰여져 책의 형태로 전해 왔습니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유럽과 세계 각지의 그 어느 문명종족보다도 더 문명적입니다.
유럽인들은 자기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지요. 또 수십만 명에 하나 드문 예외로 이른바 ‘family tree book(족보)’ 또는 ‘genealogy book(족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귀족출신 가문에만 그렇고 그것도 5~6세대를 못 가지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우리 관습입니다.
가가호호가 수천년에서 수백년 전의 선조에 이르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요. 그와 같은 전통을 가진 가문이 칭기스 칸의 가문이고, 나중에 칭기스 칸의 후손들이 자신의 왕가에 전해 내려온 선조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 바로 《몽골비사》와 제가 말씀드린 다른 서방 사서들입니다.”
전 박사는 “단순 구전으로 칭기스 칸 자신으로부터 자그마치 20대 전, 발해 반안군왕, 달리 진국공인 대야발까지의 조상들의 명단은 물론 그들이 한 행장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가 있느냐”며 “《사국사》는 대야발을 넘어서서 그 이전의 계보까지 보여주는데, 이를 합치면 적힌 것만 해도 근 30세대나 된다”고 말했다.
“이는 당연히 족보책을 보고 쓴 것입니다. 라시드 웃딘도 여러 번 자기가 쓴 《집사》에서 《황금의 책》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죠. 중요한 것은 이처럼 족보를 중시하는 민족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 민족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조선민족, 한민족입니다.”
칭기스 칸의 시조 ‘황금항아리’의 정체
-이제는 칭기스 칸 선조가 어떻게 분화되어 나갔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발해-당 전쟁으로 발해 서경 즉, 압록강네 군(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던 ‘키얀’과 ‘네쿠즈’ 후손들 중에 후에 ‘콩그라트 종족’이 먼저 그 지역을 빠져나왔다고 하셨는데.
“아, 네, 콩그라트 종족(지파)이 먼저 빠져나오고, 그다음에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 지역을 나옵니다. 콩그라트는 모골, 곧 말갈 종족 가운데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입니다. 이 콩그라트의 전설적 시조가 바로 대야발의 아들인 일하의 아들로 《집사》가 전하는 키얀에게 손자인 황금항아리입니다. 《집사》의 저자 라시드는 이 황금항아리에 대해 이름만 적어놓고, 그의 선조에 대해 적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가 추적해 봤습니다. 페르시아어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는 한자로 옮기면 ‘금관(金罐)’인데, 이는 ‘금 칸(金干)’, 달리 표현해서 ‘금 한(金汗)’과 같은 소리이고, 뜻은 ‘황금 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타타르어 사서에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라는 말로 투르크어로 번역하여 적었는데, 때마침 공교롭게도 몽골인들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군주를 ‘알탄 칸(금 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신(女眞)의 금나라 군주의 시조가 바로 《고려사》가 말하는 ‘금행(今幸, 金幸)’입니다. 그런데 나아가 다시 <투르크의 계보>, <행운의 정원> 및 <시바니의 서(書)> 등을 보니 그가 바로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발의 아들 일하, 일하의 아들 ‘간(澗)’에게 손자로 태어난 이가 바로 금행, 황금칸, 황금항아리이죠. 계보 상의 세대로 따지면, 황금항아리는 발해 왕가의 제2시조인 야발의 4대손입니다. 또한 금시조 함보 3형제의 부친이 되는 것이죠.”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황금황아리’가 ‘서해용왕’이라고 했는데요.
“그렇습니다. 황금항아리는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 승(僧: 존경받는 직위를 의미, 요즘의 ‘장로’에 해당))’이라고 나와있고, <고려세계>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고려세계>는 또 《성원록(聖源錄)》을 인용하여 ‘의조(懿祖: 곧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처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 두은점 각간(豆恩坫角干)의 딸이다’고 합니다. 서해용왕의 실명이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이라고 밝히는 것이죠.
그런데, 부랴트 전승에는 그가 ‘토곤 테무르 칸’으로 나옵니다. ‘두은(豆恩)-’의 옛소리는 ‘토곤-’이고 ‘-점(坫)’의 옛소리는 ‘-텸무ㄹ’입니다. 우리 옛말의 ‘ㄷ/ㅌ’이 ‘ㅈ/ㅊ’으로 점차 변하는 구개음화를 생각하면 금새 이해가 가지요. 또 ‘-ㄹ’밭침은 한자에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변화는 금세 이해가 갑니다. 다음으로 ‘각간(角干)’은 투르크어 ‘카간(Kaghan)’, 곧 몽골어로 ‘카안(Khaan)’, ‘칸(Khan)’입니다. 이처럼 두은점 각간이나 토곤 테무르나 고려어로 된 것이냐 부랴트어로 된 것이냐만 다를뿐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 고대어 표기 방식인 이두와 향찰에 대한 이해 필요”
▲개성 고려박물관에 소장된 고태조 왕건의 영정.
-서해용왕이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을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이라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죠.
“우리말 표기법에는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그대로 적는 이두(吏讀)와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향찰(鄕札)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려’는 우리말 ‘고을’과 그 옛소리 ‘구루(城)’의 소리를 한자 소리만을 활용하여 적은 것이고, 이것이 이두인데, 향찰의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중천왕’은 또는 ‘중양왕’이라고도 하는데 삼갈 이름은 연불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中川王 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라고 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제5 중천왕조>를 보시죠.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왕이름이 3개나 있습니다. ‘中川王(중천왕)’, ‘中壤王(중양왕)’ 그리고 삼갈 이름(諱) ‘然弗(연불)’입니다. 왜 한 사람의 이름이 3가지일까요. 힌트를 하나 드리죠. 이 3개의 이름은 다 하나의 소리이고 한 가지 뜻입니다. 감이 좀 잡히나요?”
-이 세 가지가 다 한 가지 소리이자, 한 가지 뜻이라고요?
“답은 이 세 이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두나 향찰을 안 쓰고 한글을 쓰는 우리네가 ‘中川王’은 ‘중천왕’, ‘中壤王’은 ‘중양왕’ 또 ‘然弗’은 ‘연불’로만 읽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식 향찰로 읽어 봅시다. 한자로 쓰되 우리말로 읽는 방법입니다. ‘中’은 ‘가운데 중’이고 ‘천(川)은 내’이고, 또다시 ‘中’은 ‘가운데 중’이고 ‘壤’은 ‘땅 양’입니다.
그런데 ‘한 가위’ 또는 ‘한 가우’라고 우리말로 할 때 가우/가우는 한자로 중(中)입니다. 川은 내이고 壤은 나/라입니다. 그러면 中川은 ‘가우내/가우래’이고 ‘中壤’은 ‘가우라’입니다. 또 ‘然弗’은 오늘날에는 ‘연불’이라고 읽지만, 옛소리는 ‘캰부르’입니다. 然자 옆에 개 ‘견(犬)’이 보이죠? 그것이 然자의 옛소리입니다. 이제 왜 이 세 이름이 다 같은 소리이고, 뜻인지 감이 잡히시는지요?”
-솔직히 ‘가우내/가우래’와 ‘가우라’는 비슷하긴 합니다만, ‘캰부르’가 어째서 같은 소리인지는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이 세 소리는 모두 다 우리 고어로 ‘가우라이’라고 들렸던 ‘고구려’라는 소리이고 뜻도 같은 말입니다. 고구려는 옛날 한자 소리로도 방언에 따라 ‘카부려, 고리, 까오리, 코오라이’ 등으로 소리가 나고, 오늘날 영어나 불어, 러시아 등 서양어로는 ‘코레아, 꼬레, 까례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중천왕 또는 중양왕 연불의 이름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한자들을 소리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어 보면 앞이 두 가지는 바로 ‘가우(중)-라(양/천)’이고 ‘연불’은 ‘캰부르=큰 부려=커부려=큰 부여=고구려’입니다. 여기에 다가 ‘왕’을 보태보십시오. 결국 그의 이름은 ‘가우-라=고-구려=커-부여-왕’이라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쓰고 우리말 소리와 뜻으로 읽는 표기방식이 향찰이고, 한자의 소리를 빌려, 그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소리를 적는 것이 이두입니다. 한자의 소리로 우리말 소리를 적은 ‘然弗’은 이두이고, 앞의 두 이름은 한자로 적되 우리말 소리로 읽는 것입니다. 바로 고구려 향찰이죠.”
고구려 향찰이 신라 향찰보다 먼저 쓰여
전 박사는 “우리 학자들이 신라에만 향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고구려나 백제, 발해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 왔다”며 “그런데 한자의 전래과정에서 고대 지나 대륙과 가까운 고구려나 백제가 한자를 먼저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가장 멀리 떨어진 신라가 먼저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는 상식의 문제에 속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고구려와 백제가 한자를 신라보다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간단한 진실이 학자들의 눈에는 뜨지 못하니, 왜 같은 이름이 다른 한자로 적혀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중천왕은 고구려 제12대 왕이고, 248년~270년간에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왕들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두 개는 고구려식 향찰로 세 번째 것은 고구려식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신라 향가 때문에 당연히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전하는 향찰로 적은 글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나오는 신라 향가 14수가 전하므로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구려 향가는 전하는 것이 없지만, 고구려 향찰은 오히려 신라보다 먼저 쓰인 것을 증명하는 왕 이름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 드린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왕(高麗王)의 소리만 따서 또 다른 우리말로 읽으면 바로 ‘고렝이/구레이 왕’이죠. 이것이 또 다른 향찰의 한 방법입니다. 이 ‘고렝이/구레이=고려’를 다시 이번에는 한자로 뜻 적기를 하면 바로 ‘용왕(龍王)’, 곧 ‘구렁이 왕’이 됩니다.
또 우리 서쪽의 바다 ‘서해(西海)’는 ‘발해(渤海)-만’이라고 하는 것처럼 발해입니다. 그러면 ‘서해’는 ‘발해’이고, ‘용왕’은 ‘고레이=고려왕’이라는 말이고 이제 최종적으로 그 두 말을 합치면 ‘서해용왕’은 바로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이 되죠. 이것이 바로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입니다만, 이 풀이방법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가죠. 도참설 비문에는 이런 표기방식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도참설 비문은 뭔가요.
“한자의 뜻 적기를 활용한 일종의 비밀코드입니다. 주로 비밀스러운 미래 예언 사상을 쓸 때 많이 활용했습니다. 왕건이 궁예가 세운 고려에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문 문장이나, 군데군데 비밀코드를 넣어 퍼뜨린 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글의 비밀코드가 이두나 향찰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세계>가 재인용하는 글을 보세요. ‘익재(益齋)가 인용한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에는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다’고 하는데, <금사 국어해 성씨>도 입을 맞추어 말하듯이, 금나라 완안(完顔)씨도 바로 왕(王)씨입니다. 이 왕씨는 바로 대씨(大氏)와 같은데 왜냐하면 완안씨의 시조가 대함보이기 때문이고 그는 대금행의 아들입니다.
결국 황금항아리 금행은 대(大)씨이자 달리 왕건과 같은 왕(王)씨이고, 그래서 그 8대손 완안아골타도 <금사 국어해 성씨>에 따르면 왕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골타의 8대조 금행은 우리나라 평주의 승이고, 《집사》에 따르면, ‘왕 같은 사람’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 곧 ‘토곤 테무르 칸’입니다.
이 평주승 금행은 바로 평주인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과 같은 지방 사람이고, 다 같이 그 지방의 장로이고 왕같은 인물인데, 그 성씨도 같고 시대도 같죠. 또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 곧 발해고려왕이 바로 금행인데, 평주에서 이 서해용왕 칭호를 취한 이는 바로 황금항아리, 금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는 또 완안 아골타의 선조입니다.”
-그 황금항아리가 우리 역사에서 왜 중요한 인물입니까.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고려세계>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선조가 '솔롱고(고려)'에서 왔음을 말하는 솔롱고 뷰라트인의 사진./저자 책
세 지파로 나뉜 칭기스 칸의 선조들
-그 연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요.
“《집사》에 황금항아리 아들 세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추를룩 메르겐’, ‘쿠바이시레’ 그리고 ‘투스부다우’입니다. 이 이름들은 얼핏보면 매우 낯설게 들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이는 사실 우리말인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 칭호와 말갈어 칭호, 그리고 한자로 된 칭호입니다. 이들이 바로 《금사》에 나오는 함보 3형제, 즉 카고라이(아고래, 고구려), 함보(큰보, 걸가, 걸씨, 대씨), 보코리(무구리, 고구려)입니다.
이 3형제가 각기 당시 신라의 황해도 평산에서 살다가 남국 신라의 그 땅 침략에 더불어 발해내지에서 일어난 발해 왕족간의 내분이라는 내외적인 난국을 맞습니다. 이 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큰형 아고래는 평산에 남아 신라와 싸우고, 둘째형제 함보와 막내 형제 보활리는 당시 발해의 반안군의 두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 후손들이 별도의 관향, 곧 다른 본관을 가진 지파, 즉 종족을 이루게 됩니다. 신라로 치자면 경주김씨 안동김씨, 강릉김씨라는 같은 문중의 다른 관향, 본관을 취한 것입니다.큰형 아고래의 콩그라트 종족, 둘째 금시조 함보의 예키라스 종족, 그리고 막내 형제 보활리의 코를라스 종족이 그것입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 가운데 막내 보활리의 증손자 ‘코를라스’가 바로 칭기스 칸 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종족 지파의 시조”라고 하고 “큰형의 지파인 콩크라트에서는 훗날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곧 말갈말로 ‘부르테 부인’ 및 ‘부여대(씨) 부인’으로 풀리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콩그라트는 ‘큰 고려씨’, 곧 ‘고(高) 구려씨’라는 의미입니다. 《고려사》에 오늘날 몽골리아 지방의 철륵(鐵勒)종족과 함께 왕건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를 무찌르게 했다는 ‘콩거라(驩於羅, 환어라)’ 족입니다. ‘驩於羅(환어라)’의 옛소리가 ‘콩고라’, 곧 ‘큰고려=커구려=고구려’입니다.
알려진 대로 함보 가문에서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를 배출하는데 《집사》에는 ‘예키라스 종족’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삼한(三韓)의 진한(辰韓) 역라씨(役拏氏)’라고 기록한 종족입니다. 황해도 평산이 자주 신라에 점령당해 ‘진한 땅의 역라씨’이라고 적은 것이죠.
마지막으로 막내 보활리는 《금사》에는 갸라이(耶懶, 야라)로 적히고, 《고려사》에는 ‘코라이땅(曷懶甸, 갈라전)’으로 적히고,《원사》에는 ‘코를라(合蘭路, 합란로)’로 적힌 오늘날의 함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땅의 이름 ‘코를라’ 본관을 따서 여기에 ‘씨(氏)’=‘스’를 붙여 자기 칭호로 쓴 사람이 바로 《집사》가 한자는 빼고 그 소리만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코를라스’로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는 칭기스 칸의 11대 조부이고, 칭기스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알란 고와의 아버지지요. 이 가문은 청나라 때 만주와 몽골 씨족 계보를 밝힌 《황조통지》에서는 ‘고려나씨(高麗那氏)’로 기록된 가문입니다. 좀 이해가 가시나요?”
뿌리 의식을 잃지 않은 칭기스 칸 가문
▲반안군왕 대야발의 형인 발해고왕 대조영
전 박사는 ‘코를라스’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으로 적혔는데, 이는 곧 ‘고려-나라-씨-말갈’이라는 뜻이고, 부랴트 전승들에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 또는 ‘코리도이 메르겐(고려씨 말갈)’으로 나온다고 덧붙인다.
“‘메르겐’은 오늘날 몽골어, 카자흐어 등에서는 ‘활 잘 쏘는 싸람’과 ‘현명한 사람’, ‘부족장’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원래 활 잘 쏘고 현명을 추구하는 군주들인 발해왕가의 관향인 ‘말갈(靺鞨)’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금나라 말로는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이라는 말로도 바뀌었는데, 이는 ‘씨족장’, ‘문중장’을 말합니다. 원래 대조영, 대야발의 말갈가문의 사람만이 씨족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메르겐” 및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은 고구려어로는 ‘낭(郎)’ 또는 ‘낭군(郎君)’이고, 신라어로는 ‘화랑(花郞)’과 같은 말로, 이 후자는 신라어로 김가(金哥, 김씨), 박가(朴哥, 박씨) 등 씨족의 족장 감을 말하는 ‘가랑(哥郞)’의 ‘가(哥)’를 옛날에 같은 음가를 가지나 뜻은 좀 더 예쁜 말인 ‘화(花)’로 바꾸어 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이다.
“결국 칭기스 칸의 뿌리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서 시작해서, 그 4대손인 황금항아리 금행으로 이어지고, 바로 이 금행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 보활리의 3대손 코를라스의 후손이 바로 칭기스 칸의 코를라스 종족이 되는 겁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이자면, 대야발→아들 일하→간(키얀)→키얀의 아들→금행→3아들 중 보활리→ 아들 콩글리우드(고구려씨)→바르가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 랑)→코를라스(코리라르다이 메르겐)→알란 고와라는 계보입니다.”
-결국 칭기스 칸 가문은 왕족으로서 가문에 대한 뿌리 의식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칭기스 칸은 ‘진국왕(震國王)’이라는 말인데, 그 자신이 정벌하는 금나라와 송나라 말기의 한자 소리로 읽은 ‘친기 칸’이라는 소리, 곧 ‘진국왕=발해왕=고려왕’이라는 말입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우리 사람들이 이른 바 ‘중국’이라고 잘 못 부르는 지나 땅을 정복하고 대원국, 원나라를 세웁니다.”
고구려 왕가의 후손임을 자각
전 박사는 “이 때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그의 원나라를 찾아오는데,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불행히도 감옥에 갇힌다”며 “이때 감옥 속에서 친구에게 구술하여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우리가 《동방견문록》이라고 부르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25번이나 칭기스 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단 한 번만 빼고 그의 이름은 항상 ‘친기 칸(Chinghi Kane)’으로 나옵니다. ‘칭기-스 칸’이 아니구요. 그런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르코의 시절에 몽골인들이 남쪽 오랑케라는 뜻에서 ‘만지(蠻子)’라고 불렀던 송나라 백성들의 남방한어로 ‘진국왕(震國王)’은 ‘친귀(기) 칸’이었기 때문이죠. 한자를 몰랐던 그 기록자는 마르코가 말하는 대로 이 한자의 당시소리를 토스카나 방언으로 적은 것이죠. 이 사실이 또 한 번 ‘칭기스 칸’의 진정한 소리와 그 뜻을 알려줍니다.”
-‘테무진’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시죠.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일가친척 부락인들은 칭기스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고구려 제 3대왕 ‘대무신=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테무진 자신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종친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취합니다. 이는 테무진 스스로가 자신이 고구려에서 나온 발해국 왕의 후손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이라는 이름을 보세요. 그는 당시에 땅이름조차 없었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 있던 부족들을 통일하고 ‘몽골’을 창설하는데, 그 ‘몽골=말갈=말고을’입니다 고구려-말갈이라는 두 이름 가운데, 자기가 세운 나라를 친족인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말갈’, 곧 ‘몽골’을 선택한 겁니다. 테무진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죠. ‘조선반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말입니다.”
(4편에서 이어집니다. 애초 본 인터뷰는 3편으로 기획되었으나, 4편으로 늘어났습니다. 3편까지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4편에서는 칭기스 칸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2015-08-15
(4) 칭기스 칸의 ‘세계정복’은 ‘신의 징벌 전(戰)’
(3편에 이어 이어집니다. 마지막회)
칭기스 칸은 ‘세계 정복자’라기 보다 ‘세계 징벌자’
-결국 이렇게 1300년 동안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칭기스 칸 선조의 비밀을 푸셨다는 건데, 지하에 있는 칭기스 칸이 이 사실을 알면 무척 기뻐할 것 같습니다.
“아, 네,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단, ‘지하’가 아니라 제가 본 사서에는 그가 ‘하늘로 갔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제 머릿골 속을 전기와 칼날처럼 번개처럼 스쳐가는 어떤 계시와 같은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솔직히 매일 밤 그의 넋이 저한테 찾아와 ‘자기 자신을 찾아 달라’고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동·서방의 학자들이 그의 선조의 이름들을 그 무슨 짐승들의 이름으로 죄다 바꾸어 두고, 또 한편은 위대한 정복자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냉혹한 전쟁광이나, 살인마처럼 그리는 데 대해 넋이라도 만일 있다면 어찌 유감이나 원한이 없었겠습니까.”
전 박사는 “이번에 펴낸 책 1권과 2권에서 칭기스 칸의 행적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선조들에 관해서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칭기스 칸의 업적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이 조금씩은 알고 있지만, 그의 선조에 관해 아는 사람은 없고, 또 그 선조들이 우리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3편의 인터뷰에서 칭기스 칸 선조들 계보를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칭기스 칸 자신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봤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칭기스 칸은 동·서양을 벌벌 떨게 한 ‘무자비한 정복자’로 각인돼 있는데요.
“칭기스 칸의 몽골리아 부족통일이나, 그의 이른바 세계정복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세계 정복자’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징벌자’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비록 수많은 희생과 파괴를 동반한 여러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었지만, 거꾸로 그것을 통해 그는 힘센 부락과 약한 부락, 강한 나라와 약소국, 더 큰 나라와 좀 더 작은 나라들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억압의 전제적 폭군의 세계를 징벌한 후 약하고 강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족들이, 강대국과 약소국이 좀 더 평화롭고 정상적으로 사는 세계를 추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역설적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칭기스 칸의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것이죠?
“칭기스 칸은 남의 땅을 침략하여 자기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자기가 통치하는 부족이나 나라를 더 크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무모한 희생을 강요했던 여러 제국주의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독자들 가운데 그에 관한 사서들을 읽은 분들이 있다면, 저와 공감할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치 않았던 징벌전’으로 부족을 통일해 가는 칭기스 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주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예컨대, 테무진이 칭기스 칸이 되기 전 최초로 전쟁을 통해 정복하는 메르키드 종족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이 종족과의 싸움은 테무진이 최초로 몽골의 여러 다양한 부족을 공격하게 되는 최초의 사건인데, 그 후의 그의 이른바 ‘정복활동’의 3가지 형태 가운데 그 3가지 대부분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전쟁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테무진의 메르키드 종족 공격은 결코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원치 않은 정복을 강요한 사건에 기인했습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원치 않은 정복 강요’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테무진은 나이 9살에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의 부족 올코노트 종족을 찾으러 갔다가 뜻밖에 콩그라트 종족의 데이 세첸을 만나 그 딸과 정혼했다. 나중에 테무진이 커서 다시 데려온 부인이 부르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은 어느 날, 메르키드 종족이 300명의 전사를 동원하여 새벽녘에 쳐들어와 그녀와 배다른 형제 벨구데이의 어머니를 납치해 갔다. 바로 이들을 되찾기 위해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칸과 또 다른 몽골 씨족인 자다란 종족 자모카의 힘을 빌려 탈환전쟁을 벌인다.
그다음 타이치오드 종족을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메르키드 종족을 치고 종친들의 추대를 받아 테무진은 처음으로 자기 종족의 칸, 곧 ‘부족장’이자 오늘날의 종친회장으로 ‘칭기스 칸’의 칭호를 취했다.
그때 이를 시기한 같은 부족의 경쟁자 자모카와 그에 들러붙은 테무진의 족친들인 타이치오드가 싸움을 걸어온다. 그는 텡게르(하늘)의 뜻으로 이를 이긴다. 이후 칭기스 칸은 나중에 ‘몽골리아’라고 부르게 될 그 땅에서 여러 다른 종족들을 통일하게 된다. 결국 칭기스 칸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종족이 먼저 칭기스 칸에게 침공할 때 이를 방어한 전쟁에서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 몽골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 칭기스 칸이 타타르 종족을 친 계기는 금나라와 타타르 사이의 전쟁이다. 이때 그는 옹칸과 함께 타타르족을 협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를 독살했기 때문이다.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부인과 아들을 정혼시킨 뒤 아들을 콩그라트 부족에 데릴사위로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예수게이 바아타르를 타타르 종족이 초청하여 독이 든 음식을 먹여 살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타타르 종족은 테무진 탄생 이전에 타타르 족 그들 자신에게 딸을 주면서 사돈관계를 맺으러 우호의 길을 간 칭기스 칸의 종조부 둘을 오히려 사로잡아 금나라 보내 나무 당나귀에 못 박혀 죽게 했다. 이처럼 피맺힌 한에 차 있던 칭기스 칸에게 그들(타타르 종족)이 자모카와 연합하여 쳐들어온 것이다. 결국 이 전쟁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칭기스 칸의 방어에서 시작한 복수전 내지 징벌전이다.
▲1206년 오논강 상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된 칭기스 칸.
두 번째 칸의 자리에 오른 후 금나라에 복수 결심
다음은 케레이트 종족과의 전쟁. 칭기스 칸은 한 때 자신이 의붓아버지로 모셨고, 친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옹칸과 원하지 않은 전쟁을 벌인다. 이 경우도 칭기스 칸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첫 도전에 실패한 자모카의 꾐에 빠진 옹칸의 아들이 끈질기게 권유하자, 이에 못 이겨 옹칸은 “내 아들(테무진)”을 외치면서 결국은 칭기스 칸에게 선제 공격했다.
칭기스 칸은 이 전쟁을 피하려고 계속 물러나 도망하며 싸움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자기가 예수게이 바아타르 친아버지 대신에 그를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자기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여러 번 상기시키면서…. 그러나 케레이트는 진격해 왔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칭기스 칸도 결국은 대적했다. 그 결과 역시 이를 텡게르의 뜻으로 이겼다.
이어지는 나이만의 칭기스 칸에 대한 공격도 칭기스 칸의 방어에서 시작했다. 이 전쟁도 역시 이기고 나이만은 왕은 죽고 그 아들은 카라 키타이(‘서료’라고도 하며 오늘날 동투르키스탄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지는 땅에 있던 야율대석의 망명정권)로 도망친다.
이 싸움이 끝나, 1207년 그는 이제 자기 ‘몽골’ 종족만의 칸이 아니라, 모든 여러 서로 다른 당시 몽골리아 땅 여러 부족 모두의 ‘카안’으로 두 번째로 칭기스 칸의 자리에 오른다.
바로 이때를 이어서 그는 탕구트와 금나라를 친다. 탕구트는 거기로 도망간 메르기트, 나이만 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금나라는 예전에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 곧 커부려(큰 부여=고구려) 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이다. 칭기스 칸은 하늘에 “이 원한을 갚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뒤 후일 복수의 전쟁으로 금나라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대학살을 부른 호라즘 제국의 정벌 계기
전 박사는 “대체로 칭기스 칸을 세계 정복자라고 부르는 긍정적 평판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그를 ‘살인마’로 오해되게 한 계기를 준 대학살을 부른 호라즘 제국의 정벌의 경우를 이제 한번 보자”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경우 칭기스 칸이 호라즘 샤(황제) 무함마드와 그 아들 잘랄 웃딘의 호라즘 제국을 정복한 동기와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이 제국은 당시 이집트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 사이에 있는 광대한 아랍, 이란 및 중앙아시아 영토와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에 걸치는 땅을 속령으로 거느린 대제국이다.
당시의 3개의 세계, 곧, 샤마니즘과 불교가 어우러진 아시아와 기독교 유럽세계를 잇던 중간지대가 바로 이슬람세계다. 이 때는 무슬림 아랍과 기독교 유럽은 이미 십자군 전쟁도 여러 번 치고 아직도 이를 계속하고 있던 때다. 그곳의 최고 권력자는 오늘날에도 유럽인들이 간간히 농담하듯이 말하는 ‘동방의 눈이 찢어지고, 머리색이 검은’ 칭기스 칸의 몽골사절을 무시했다.
호라즘 샤는 군주다운 예의로 외교사절단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몰살시키고, 그 막대한 물품마저 강도처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칭기스 칸은 이에 분개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 군대는 가는 곳마다, 복속하는 이들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도시들에서는 때로는 수 천명, 때로는 기록에 따르면 수 만명도 학살했다. 이것이 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 바가 컸다.
하지만 이 싸움의 계기와 과정을 보면, 그것은 바로 호라즘 샤와 그 아들 잘랄 웃딘 등의 도발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하고, 또한 칭기스 칸의 의도와 의지도 명백했다.
이에 앞서 칭기스 칸은 호라즘 샤의 상인들이 온 것을 계기로 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이 가져온 값비싼 직물, 금은보화에 후한 값을 쳐주고, 그들이 돌아 갈 때 이번에는 자신이 대사들과 대상단, 그리고 자신의 친서를 호라즘 샤에게 보내 우호와 친선, 자유무역을 제안했다. 《집사》에는 칭기스 칸이 호라즘 샤의 상인들을 극진한 우호로 접견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호라즘 샤는 당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온 상인들과 사신단을 통해 전달한 칭기스 칸의 우호와 친선의 메시지를 묵살하고, 칭기스 칸이 몸소 몽골 각 종족으로부터 선발하라고 시켜 한 조를 지어 보내온 450명의 사신단조차도 모두 몰살하고 그들이 수천리를 넘어 가져온 막대한 재물을 빼앗았다.
호라즘 샤에 대한 ‘신의 징벌전’을 시작한 칭기스 칸
이 소식을 들은 칭기스 칸은 분개하며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오만한 호라즘 샤는 이를 다시 무시했다.
칭기스 칸은 드디어 “텡게르(하늘)”의 이름 아래 이 나라를 징벌하기로 맹세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 결과 벌어진 ‘징벌전’에서 호라즘 제국의 샤 무함마드와 그 아들 잘랄 웃딘은 심지어 이라크, 페르시아, 인도의 델리까지 이리 저리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몽골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소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몽골군은 이란, 아라비아 반도, 우즈베키스탄과 아제르 바이잔, 인도, 아프가니스탄 등등 도처에서 추적전을 펼치고 이 추격전에 방해하거나 적과 연합하여 대항하는 나라들을 정복한다.
호라즘 샤를 지지한 킵차크인들이 심지어 남러시아 킵착 초원, 헝가리와 러시아로 도망쳐 러시아인들과도 연합하여 대항했다. 칭기스 칸의 아들 주치의 몽골군은 이에 맞서 러시아와 동유럽도 치게 된다. 이 과정을 후세의 사람들은 ‘세계정복’이라고 표현했다. 이 싸움 때 칭기스 칸은 그가 정복한 땅의 백성들과 아미르(왕, 재상 등)들 앞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신의 징벌’이다”고 선언한다.
전 박사는 “이처럼 칭기스 칸의 이른 바 ‘세계 정복전’은 당시의 세계가 가진 전제와 폭군의 행패에 대항한 영구평화를 위한 최후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전 박사의 이야기.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아들과 손자들이 이어간 정복전쟁은 당시 칭기스 칸이 못다 끝낸 이 징벌전쟁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전쟁을 피하기 위기 전에 사전에 갖가지 외교적 노력을 취하고 전제적 폭군들을 향해 사죄하고 복속할 것을 적어도 러 번 요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칭기스 칸을 얕잡아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이런 과정이 지나서야 결국 정벌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또 호라즘 샤를 추격하는 이 대장정에서 몽골군은 말발굽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성들과 도시에 우선 먼저 사신을 보낸다. 성주에게 “내게 복속하면 그냥 지나갈 것이요, 저항하면 절멸시키겠다”는 평화와 위협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면서 살륙을 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관행으로 한다.
그래도 현지의 아미르들과 백성들이 복속하지 않고, 오히려 칭기스 칸의 메시지로 설득하던 그의 사신들을 죽이거나, 그들에게 적대행위를 하곤 했다. 그후에야 몽골군은 화살과 창 끝을 적에게 돌렸다.
▲이상학 화백의 처인성 전투 기록화. 용인 부근 처인성에서 벌어진 고려-몽골 간 전투 상상도다.
몽골이 고려와 전쟁을 한 이유
-그가 단순한 제국주의자나, 전쟁을 통해 자기 자신 또는 자기 민족, 나라의 권력을 극대화하려 한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또는 현대의 히틀러나 일본천황 등과는 다르다는 말씀이군요. 이들과 달리 칭기스 칸의 세계정복은 일종의 징벌적 성격이 강했다는 말씀이신데, 그렇다면 고려의 경우는 어떤가요.
“이들 서방과 벌인 싸움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심지어 고려와의 전쟁도 몽골입장에서 보면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고려를 침공한 몽골에 반감을 가진 우리들의 감정도 100% 이해하고, 또 모든 전쟁은 불행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몽골의 고려 침공을 정당화할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독자들 가운데는 ‘몽골의 고려침략을 정당화하려고 하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몽골 측의 입장이 되어 당시 상황을 한번 살펴봐야 고려 몽골 간의 전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몽골은 고려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는데요.
“말할 것도 없죠. 중요한 점은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당시 다른 나라들과는 처음부터 매우 특이하였고, 달랐다는 겁니다. 칭기스 칸이 펼친 세계 정복전의 길 위에서 제가 아는 한 고려만이 몽골의 ‘형제국’이 되었던 유일한 나라입니다.”
-복속관계가 아니고, ‘형제국’이 되었나요?
“복속관계는 나중에 이야기고, 우선 형제국이 된 계기를 말씀드리면, 칭기스 칸 생전에 거란 왕조의 금산태자 일당이 대요수국을 세우려다 몽골에 쫓겨 도망가는 길에 고려의 강동성(평안남도 강동)으로 쳐들어가 점거하고는 경기도를 거쳐 충북 제천까지 쳐들어 아수라장을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추격하던 몽골은 고려에게 지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안 그래도 안마당에 붙은 불과 같은 이 사태에서 고려는 당연히 협조했겠죠. 이후 금산태자 일당 수십만을 이기고 두 나라는 ‘골세(만년)에 이르는 영원한 형제국’이 되기로 맹세합니다. 이는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칭기스 칸의 역사상 ‘형제국’을 논의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예일 것입니다.”
‘형제국’에서 적국으로
-거란을 협공으로 물리친 것을 계기로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씀이신데, 이런 형제국이 왜 전쟁을 하게 되는지요.
“형제국이 된지 8년 후 몽골사신 착고여(着古歟, 저고여라고도 함)가 살해되는데, 우리 국사에서는 몽골이 이 사건을 단순한 침략 명분으로 활용하고 고려를 침공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국사책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원사 외이열전》과 《해동역사 제14권》에 보면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형제국이 되자고 한지 얼마 후 형제관계를 맺은 몽골 장군 찰라(劄刺)를 살해했고, 또 8년도 못 가서 고려는 몽골 사신 착고여를 압록강에서 암살했고, 그 외에도 고려는 이를 책망하러 온 몽골 칙사에게 활을 겨누어 쫓아내려고 하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 등 5번의 도발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순전히 몽골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고려를 정벌할 명문이 있었다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호라즘 샤의 행동이나, 금나라에 대해서는 즉각 행동을 개시한 칭기스 칸 자신은 생전에 고려를 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인 어거데이 칸 시절에 이르기까지 고려에게 사신을 보내 몽골측은 여러 차례 사죄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금 말한 그 고려의 5가지 적대행위를 하나 하나 열거 하고는 이를 이유로 들어 고려 정벌을 시작합니다.”
전 박사는 “사료 상에는 송나라나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한대로 몽골도 조공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분명 보이지만, 몽골 측이 먼저 고려에 대해 적대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며 “그런데 고려는 칭기스 칸 때 ‘형제국’이 된 뒤 5번이나 연이어 적대행위를 했고, 이것이 결국 전쟁의 빌미가 됐다”고 말했다.
“물론 고려가 몽골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에는 오늘날 우리 국사책이 말하듯이 몽골이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는 등 그 나름대로 고려 측의 고충도 있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몽골은 이미 ‘세계정복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려는 그 몽골의 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몽골의 고려 침략이 정당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섯 가지 고려의 적대행위를 몽골 측에서 본다면 고려 정벌전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를 결국 철저히 몽골 입장에서만 이 전쟁을 보자면 고려 침략은 앞서 다른 나라를 ‘징벌’한 것처럼 악행을 한 적대국에 대한 ‘응징’ 차원이 되는 겁니다.”
▲MBC 드라마 기황후의 한장면. 기황후는 4명의 고려출신 몽골 제국 황후 중에 한명이다. 몽골 제국에서는 오직 두 씨족 출신의 여인만이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고려만 특별히 예외를 인정받았다.
‘고려공녀’에 대한 오해
-몽골이 고려에 공녀를 요구해서 반발이 심했다면서요.
“몽골이 이른 바 ‘고려공녀’를 요구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약소국의 설움으로 개탄하는데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몽골공녀’가 먼저입니다. 1231년 12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와서 수도 개성을 함락시켰고, 고려 고종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후 공식적으로 29년의 세월동안 두 나라는 지루한 전쟁과 짧기만 한 강화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241년 4월 두 나라 사이의 강화를 위해 왕의 조카를 왕자라고 속이고 볼모로 몽골로 갔던 영녕공(永寧公) 왕순(王綧)왕순이 몽케칸으로부터 먼저 몽골황녀를 아내로 내려받아 몽골에 눌러앉아 살면서 두 나라간의 화해를 위해 중재합니다. 적어도 몽골측이 먼저 두 나라 군주 가문 사이에 혼인을 제안하고 실행하여 전쟁 중에 사돈국가가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좀 더 나중에는 고려 원종의 아들이 칭기스칸의 손자 원 세조 쿠빌라이 칸 때인 1271년에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갔다가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된다”고 말했다.
“<익제난고권 제9상세가(益齋亂稿卷第九上世家)>를 보면 당시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서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만리(萬里)나 떨어진 나라이다. 당(唐) 태종(太宗)이 몸소 쳤지만 따르게 할(服) 수가 없었다. 이제 세자(世子)가 스스로 와서 내게 귀부했다. 이는 하늘의 뜻(天意)이다. 크게 상을 내려라(大加褒奬)’>라고 하고 자신의 딸 황녀 후투룩겔마스(忽都魯揭里迷失)를 시집보낸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그녀에게서 난 외손자 왕장, 곧 충선왕을 무척 총애했다고 합니다.”
-혼인 관계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 지위가 된 것을 고려공녀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미입니까.
“쿠빌라이 칸은 그로부터 훨씬 뒤 1287년에야 이른 바 고려 여인을 후궁으로 받아들이 위해 처음으로 공녀제도를 만드는데 이를 통해 고려와 몽골은 ‘쌍사돈 국가’가 됩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려 여자는 44회에 걸쳐 총170명이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이 ‘고려공녀’들을 그 무슨 ‘양공주’이기라도 하는양 묘사합니다.”
전 박사는 “이는 이른 바 ‘고려공녀’의 역할이나 성격을 완전히 잘못 파악한 오류”라며 “그여자들은 사실은 원나라 황제들의 후궁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뽑혀간 여자 중에서 황후만 해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도 기황후 하나가 아니라, 고려 왕황후(王皇后), 다르마시리 김씨 황후 등 3명이나 나왔습니다. 또 사실상의 황후급인 곽비까지 친다면 4명입니다. 그 외 후비도 치고 나아가 북원대의 후비를 치면 십수 명에 이릅니다.”
‘공녀’가 아니라 황후나 비빈으로 특별히 선별된 고관대작의 여인들
-그러니까 ‘공녀’가 아니라, 황후 후보로 선별되어 간 분들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원말의 도종의가 말했듯이 ‘몽고78종’이라는 말도 있듯이 당시 몽골씨족이 무척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도 오직 콩그라트, 예키라스 두 씨족만이 황제의 후궁과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다른 나머지 모든 몽골씨족들을 제치고 고려여인이 방금 말한 두 씨족과 같은 반열에 들어선 겁니다. 말하자면 황제의 자손들을 잇기 위해 고려에서 뽑혀온 고관대작들의 딸들이죠.
그들은 그러므로 ‘공녀’가 아니라 ‘선입고려녀(選入高麗女)’, 곧 ‘원나라 황후 비빈이 되기 위한 후보로 고려에서 뽑아들여 온 특별히 뛰어난 여성’입니다.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고려사 연구 학자들이 몽골의 ‘황후종족 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고려 측에서 여자를 보냈다는 한 가지 측면밖에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양공주 대하듯 잘못된 평가가 나온 것이지요.”
전 박사는 “반대로 고려 왕실이 원 제국의 황실과 통혼하여, ‘훈신(勳臣), 세족(世族) 및 나라를 봉 받은 군주(封國之君)’로 대우 받은 것은 심왕(瀋王) 왕고(王暠)와 고려왕 5명을 포함, 모두 6명이며, 그들과 혼인한 몽골 여인은 기록상 최소한 1명의 황녀, 7명의 공주(왕의 딸, 곧 황제의 손녀), 1명의 평민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이라며 “이런 관계는 몽골제국과 다른 그 어떤 나라와의 관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몽골의 세계정복 지도. /출처=/www.dailycotcodac.ro
칭기스 칸의 세계제국이 다른 세계제국과 다른 이유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습니다. 이제 고려의 경우를 떠나, 앞서 말씀하신 ‘세계정복’ 부분을 계속에서 말씀 해주시죠. 조금 전에 칭기스 칸과 그 일가 3대의 ‘세계정복대장정’은 단순한 침공을 통한 ‘세계정복전(征服戰)’이라기 보다 오히려 ‘세계적 규모의 징벌전’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세계제국을 지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 어떤 인물이 위대하다고만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세계제국은 그것을 누가 지었던 간에 막대한 인명의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주 대륙을 보세요. 스페인인들이 그 땅을 발견하고 들어오고, 영국과 유럽의 종교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피신해 간 유럽 이주민들은 지금부터 600년 전에 이미 남북미의 6000만을 몰살시켰다고 남미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인디언 학자들과 미국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만일 당시 인디언들이 몰살당하지 않았다면 그 인디언(아메리카 토착민, 현재 북미 인구의 1% 정도) 인구가 오늘날의 미국과 케나다의 전 인구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북미인구는 당시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한 이후 지속적으로 개척전쟁, 고의적 페스트 유포, 인디안 사냥 등으로 몰살당했고, 원주민 인구대신 유럽인들이 그 자리와 수를 채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대동아 공영권 등 다른 예는 더 들 필요가 있나요? 가능하면 이런 일이 없어야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이고 이런 일은 이미 인류역사상 여러 번 벌어졌습니다. 어차피 그 사건들은 불가피했기에 벌어진 것이죠.”
전 박사는 “그렇다면 이제 와서 이 제국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모든 제국전쟁은 ‘나쁘다’라든가, 제국을 지었다는 자체가 ‘위대하다’라는 이분법적인 평가가 아니라, 우리의 물음은 제국을 지으려던 그들이 도대체 무슨 원인, 무슨 계기, 이유로 그 제국을 지으려 했거나, 지었느냐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지을 때 어느 정도의 피해를 통해 지었느냐도 살펴봐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참살과 파괴를 동반해 이루어진 그 제국이 역설적으로 혹은 결과적으로 인류와 세계 역사에 도대체 어떤 공헌을 했느냐 하는 것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려 이웃 나라를 정복했던 역대 ‘세계 정복자’들
-인류 역사에서 세계제국을 세우려 한 경우를 들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간단히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의 무솔리니, 일본천황 등등 여러 제국주의자들이 나름대로 그들 시대에 제국을 건설하여 자신들만의 세계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패한 제국은 영국과 프로이센 및 유럽 여러 나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조금 예외이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자기에게 해도 가한 적이 없는 이웃 나라들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침략하여 거대한 제국을 세우려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시대에 망했다는 겁니다.”
전 박사는 “이들은 모두 다른 권력자, 다른 부족과 다른 나라를 자신의 정복전으로 희생시키고, 단지 자신의 권력과 자기 나라의 확장에만 관심을 가진 전형적 독제적, 침략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이었다며 “대표적으로 ‘위대한 독일’,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평화적이던 이웃나라를 침략한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경우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물들과 같은 인간의 공통적 권력욕구가 칭기스 칸에게도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 칭기스 칸에 관한 사서의 기술에 나타난 그는 제가 아는 한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분명히 정당한 이유와 명분이 없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 해를 가한 원한관계가 없는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외교 사신들을 보내 평화적 교류와 협력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아들과 손자 대에 와서의 일이긴 하지만, 유럽군주들에 대한 외교사절단들이 그런 것들이지요. 또 설사 상대가 자신 또는 몽골인에게 해를 가했더라도 사죄하거나 항복했을 경우에는 결코 더 이상 징벌하지 않았다는 특이한 점이 보입니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것이죠.”
▲호라즘 제국을 정벌하는 칭기스 칸 군대를 그린 인도 모굴제국의 그림.
칭기스 칸 가계가 벌인 세계 정복전의 일정한 패턴
-칭기스 칸의 정복전쟁이 다른 인물들의 정복전쟁과 특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흥미롭게도 칭기스 칸이 이끈 전쟁에는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는 칭기스 칸 측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선제공격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기는 것입니다. 메르키드족에게서 부르테 우진을 되찾아오기 위한 탈환전만 제외하고 몽골 여러 부족들의 통일 과정이 그런 것입니다. 칭기스 칸 자신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침공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겨 통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히틀러나 천황 같은 다른 제국주의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정복자’가 되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복을 기도하는 부족과 소왕국의 침략을 방어한 것이죠.
둘째는 자신의 선조, 몽골부족 또는 자신이나 자신의 외교대표단에 대해 다른 쪽이 가한 해에 대한 징벌전입니다. 그가 먼저 도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발을 받은 결과 징벌을 결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칭기스 칸 징벌전을 보여주는 가장 현저한 예는 유럽세계와 아시아 사이의 가장 거대했던 이슬람제국 호라즘 제국 징벌 및 정복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징벌전’ 도중에 적군 또는 상대방과 연합하여 대항하거나 그 징벌전을 방해한 측에 대한 전쟁입니다. 킵차크인, 헝가리, 러시아 공국들 등과의 다른 전쟁들이 그러한 유형입니다. 동방에서는 송나라 정벌이 그에 포함됩니다.”
전 박사는 “이 세 가지 유형의 전쟁의 결과가 이른 바 칭기스 칸 일가 3세대의 ‘세계정복전’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넷째는 좀 더 순수제국주의에 가까운 제 4형태입니다. 이는 칭기스 칸 때가 아니라, 손자 때에 와서 그것도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월남, 참파, 버마 등 인도지나와 자바 등 동남아 정복전입니다. 다른 역사상 제국주의자들이 주로 이 네 번째 전쟁 형태를 위주로 했는데, 칭기스 칸 가계 3대의 경우 이와는 다른 유형의 전쟁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칭기스 칸의 경우 정복전이 아니라, 중세기적 ‘정전(正戰: 바른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러한 정복전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단지 그를 단순히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세계정복’을 이룩했다는 한 가지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면,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도 마찬가지로 칭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단지 막대한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부른 전쟁을 쳤다는 것만 보고 그가 살인마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평가는 거꾸로 금나라나 호라즘 샤와 같은 야만적 행동으로 열국간의 세계평화를 위협한 폭군들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었다고 찬양하는 역설적인 결과가 되지요. 칭기스 칸을 무턱대고 ‘야만적 살인마’니, ‘전쟁광’이니 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대를 이어 번영한 칭기스 칸의 제국
-네, 공감이 가는군요. 오랫동안 서양 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의 영향으로 칭기스 칸을 히틀러 같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정복자나 야만적인 살인마라고 생각해 왔다는 의미군요.
“네, 칭기스 칸을 단순히 인류최대의 대제국을 지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인성과 인격, 그의 시대의 참담한 세계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웅은 한 시대가 낳은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상당부분이 자기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기보다는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전쟁을 통해 살육과 문명의 파괴만을 일삼고 자기 자신의 권력만 확장하려 한 제국의 건설가라고 보는 관점은 더더욱 당시 세계의 실정을 모르고 내린 잘못된 관점입니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족, 국가, 국제, 문명 간에서 끊임없는 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당시 세계의 진면목과 역사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편협한 관점입니다. 그의 징벌전이 나쁘다고 한다면, 거꾸로 그의 징벌전을 유발한 그 제국들의 폭행과 전제, 횡포는 정당했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제가 방금 조금씩의 예를 들어 설명 드린 바처럼 칭기스 칸이 정복의 길로 나선 원인, 이유, 동기, 그 과정의 적법성을 보아야 하고, 또 그 결과 그가 지은 세계제국이 과연 다른 제국과 달리 후세에 무슨 공헌을 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 또는 로마의 시저처럼 또는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전쟁과는, 정당한 전쟁의 계기나 명분도 없이 출발하여 당대에 무너진 다른 제국들과 다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칭기스 칸 연구가인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의 말을 빌리면, 그의 제국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30억 인구를 포괄하는 나라의 영토에 지어진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 이상 번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의 대제국이 조각 조각 나뉘어 붕괴된 후에도 러시아, 터키, 인도, 지나와 페르시아 등에서 그의 후손들은 칸, 황제,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의 다양한 칭호를 쓰면서 작은 제국과 나라로 700년 이상 존속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외에도 인도에서는 모굴 왕조로 1857년까지 존속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20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제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른 점입니다.”
칭기스 칸은 ‘현대세계의 창출자’
“또 잭 웨더포드는 그의 공로를 말합니다. 당시에 세상은 서로 갈리어져 서로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독교 사회의 유럽세계와 이슬람 세계, 아시아의 샤마니즘과 불교, 유교 세계 등으로 갈려져 있었다고요. 이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 것이 칭기스 칸의 제국입니다. 잭 웨더포드는 그래서 그를 ‘현대세계의 창출자’라고 부르죠.”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잭 웨더포드는는 칭기스 칸이 외교특권을 수립하고, 고문을 철폐했고,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와 역을 만들고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해 뜨는 극동에서 해 지는 서구까지 과학과 예술과 문화와 상품이 교류되도록 평화적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보고 극찬합니다.
인류사회에 대한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공헌을 한 그와 그 가문의 이 이야기는 또 다시 몇 권 분량의 긴 책이 필요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줄이도록 하죠. 다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오늘날 프랑스의 역사학자의 글을 하나 인용할까 합니다.”
아래는 전 박사가 소개한 프랑스 역사학자의 글 인용문이다.
<학살은 잊혀졌고, 대신 칭기스 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칭기스 칸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그는 죽었으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앵빌(Jean de Joinville: 유럽 십자군전쟁 시대의 사가)은 ‘그는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평가는 외면상으로는 역설적이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 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 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을 당하지 않은 채 [나이 먹은 여인이]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삭(칸의 칙령, 법률: 전박사 설명)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다.>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유목 제국사 및 윌리암 마일스(William Miles) 중령 번역의 《투르크의 계보》중)
-지금까지 칭기스칸이 ‘위대한 정복자’, 또는 그 반대의 ‘나쁜 사람’ 이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분석을 해주셨는데요.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박사님의 노력으로 인해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룬 칭기스 칸의 선조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실제적 진실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만약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그 동안 천추에 맺힌 한이 풀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서야 그의 혼령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그 조상들과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비록 고구려- 발해가 오래전에 망해서 사라진 나라이지만 그 후손인 칭기스 칸은 선조들이 겪은 아픈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칭기스 칸과 함께 또 다른 고구려 -발해의 후손인 우리도 현재 남북분단과 강대국 사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결코 좌절하지 말고 역경을 이겨낸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주몽의 후손인 칭기스 칸이 주는 교훈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로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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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행이 신라인이라는 독자들의 오해에 대한 답변
글 전원철
지난 3회에 걸친 제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과분하게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결국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 아니냐”, 혹은 “모든 인류는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등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어떤 분은 저보고 “우리 고대어를 제대로 공부해라” “금시조 대함보가 아니라 김함보이다” 등 비판의 소리를 보낸 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연구가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단, 우리가 아니, 전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것과 민족사의 인식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이곳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다시 우리를 집어삼키거나, 외적이 우리를 점령해도 우리는 다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자식이므로 상관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이죠. 또한 제 고대어 풀이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소략하게 나오지만, 제 책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제가 꼭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금행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책에서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발해 왕족이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금 시조의 아버지 금행이 바로 고려 왕건, 금태조 아골타, 그리고 칭기스 칸 세 가문의 직계선조로 이들 사이의 잃어버린 핵심 고리이며, 그는 또 청나라 누르하치의 선조임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독자분 중에서 금행을 왕건과 같은 시기의 ‘신라인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라고 확고하게 믿으며, 저의 연구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독자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6년 이후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이 저서나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고, 댓글을 단 독자분도 그런 잘못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그 동안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쉽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라인 김행(金幸)’과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 혹은 金幸)’은 동시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은 왕건의 외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은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합니다. 경순왕은 왕건보다 30여 년 더 나이가 적은 항렬인데 그 아들이면 왕건보다도 거의 두 세대 차이로 아래 도표가 보여주듯이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나이입니다. 또한 어느 기록에도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고 기록된 사서나 족보가 없는데도, 일부 학자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설(마의태자가 금행의 아들인 함보라던가,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는 등)을 퍼뜨려 온 겁니다.
그들은 금 희종 완안 단 시대에 송나라 사람 홍호(洪皓)가 1155년경 지은 《송막기문(松漠記聞)》과 남송 때 1234년경 우문무소(宇文懋昭)가 편찬한 《대금국지(大金國志)》에 ‘여진추장은 신라인’이라고 적어둔 것을 문자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함보가 신라인이고 그렇다면 그 아버지가 《고려사》에 금행으로 되어 있으니, 함보는 신라김씨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같은 사람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대금국지권수 금초흥본말》과 1777년~1778년에 쓰인 《흠정만주원류고》 둘인데, 이 사서들은 “대개 신라 땅(新羅之地)이 고려에 병합되어 들어갔으므로(并入髙麗), 이 때문에 어떤 이는 고려라 하고 어떤 이는 신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다 한 가지 말이다(故或云髙麗或云新羅其實一也)”고 합니다.
함보가 원래 살았던 땅이 원래 발해(-고려) 땅이었다가 당-발해-신라 전쟁으로 빼았겨 신라의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발해 선왕 때 금행이 빼앗았다가 함보 시절에 또 다시 신라 땅이 될뻔했다가 그 손자 시절에는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떠 얼마 안 가 나중에는 송나라에서는 “신라”사람으로 이해된 왕건의 땅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함보의 “지적(地籍)”이 아니라, 그의 “족적(族籍)”을 보아야 하는데, 우리 일부 학자들이 금행과 김행이 한자로 그 이름 하나가 같다는 것과 여러 사서 중에서 두 사서가 “신라인”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깊은 연구도 없이 책을 쓰고 인터넷에 올리고 KBS방송의 역사스페셜 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 유일한 이유가 단 하나 이름이 같고 한 두 사서가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는 정도로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하지만,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 이름을 원래 금행(今幸)으로 쓰고 다른 하나로 금행(金幸)으로 써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이름은 당연히 “금행”이고 뒤의 이름도 “(쇠)금행(金幸)”입니다.
발음은 신라의 “김”성이 아니고, 발해의 “대”성의 우리 말인 “큰/큼”을 이두식 한자를 써서 적은 “금(今, 金)”성이죠. 다시 말해 “금(큰)-행(칸)(今幸)”은 그 성씨를 한자로 바꾸면 “대-행(大-幸)”이라는 말이고 이는 후대에 “대칸(大汗)”으로 쓰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고려사》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글자 ‘금(今)’ 자로 쓴 겁니다. ‘안동 권씨 시조 김행’과는 구분하라고 하는 뜻에서요. 그러니까 금행과 신라인 김행(권행)은 동명이인이지 절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우선 두 분이 산 연도가 다릅니다. 금행은 아래 도표에서 보다시피 김행(권행)보다 대략 120년 전의 사람입니다. ‘신라인 김행’이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 된 이유는 김행이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를 안동에서 물리치고 그 지방을 들고 왕건에게 귀부해 왔을 때, 왕권이 그에게 공을 세운 상으로 김행에게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의미에서 ‘권’이라는 성을 하사합니다.
그 ‘권행’과 그보다 4세대전의 ‘금행’을 혼동하는 그 오류를 바루기 위해 저는 제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송(宋) 광종(光宗)소희5년(紹熙五年, 1194년)에 쓰인 《삼조북맹회편》이 함보, 곧 “여진[추장]은 주몽(朱蒙)의 후손이고 말갈(靺鞨) 씨”라고 하고 또 앞서 말한 대로 학자들이 ‘권행’이 여진추장이라고 오인할 수도 있도록 또 다시 “여진추장은 곧 신라인”이라고 말한 그 《대금국지》조차도 그가 “발해에서 갈라진 별족(別族)”이라고 한 것도 제 책에서 인용해 두었습니다.
또 《흠정만주원류고》도 “발해왕(渤海王)이 금나라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을 다시 인용해두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함보의 7세손 아골타가 《금사》에서 양박을 시켜 발해유민들에게 말한 대로 자신이 속한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同一家)”이라고 한 것도 인용해두었습니다.
또 그 외, 그들이 살던 시대가 918년 후의 여진시대가 아니라, 810년대의 발해시대이고, 그들이 살던 곳도 황해도 평산과 함경북도 길주이며, 그들의 직업 또는 직책은 서해(발해)군왕 및 반안군왕이었고, 아들의 수자도 신라인 김행(권행)의 아들 1명과는 달리 금행의 아들 수는 3명이었고, 금행이 살던 시대는 ‘신라인 김행’보다는 적어도 4세대 빠르고,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시대보다는 5세대 전의 훨씬 이른 때라는 등등 8가지 이유를 들어 기존학자의 설이 잘못임을 증명해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사》 하나만 보더라도 금사에는 “금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고 하고 있을 뿐 ‘김-함보’라고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우리 학자들, 예컨데 김운회 교수 등이 그 정사 《금사》에 그를 ‘김함보’라고 적었다고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금사세기》에는 ‘김함보’는 절대 없습니다. 또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기록했을 분, 함보에 관한 언급을 한 적도 없습니다.
<金史> | <大金國志, 卷一> | <고려사> | <고려사> | 비고 |
금행(今幸, 金幸, <고려사>) |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년?) |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 금행=서해용왕 | |
함보=큰바=큰가(函普) |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
작제건 (발해시대, ?~*849년?) | 용녀(작제건 아내) | 아들(1대) 세대 |
오로(烏魯) |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년 5월)-후삼국시대 | *궁예 세대 | 손자(2대) 세대 |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
왕건 (고려 태조, 877~943년, 재위: 918~943년) |
궁예 아들 세대 | 증손(3대) 세대 |
수가(綏可) 경순왕(909?~979년) 세대 |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제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제4대왕 광종(光宗) [925년(태조 8)∼975년(광종 26)/ 재위 949년∼975년/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년) |
4대 후손 | |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
(현종 외10촌)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년) -안종(安宗, ? ~996년) 아들 세대 |
5대 후손 | |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년) | 호래(胡來) (문종 외12촌) |
문종(文宗, 1019~1083년,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년 | 6대 후손 | |
핵리발(劾里鉢, 1039~1092년,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
양할(楊割) (숙종 외14촌)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숙종(肅宗, 1054~1105년,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년) | 7대 후손 | |
아골타(阿骨打) 1068~1123년, 핵리발 둘째 아들) |
(예종 외16촌)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예종(睿宗, 1079~1122년.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년) | 8대 후손 |
*는 추정을 나타냄
위 도표는 그들이 살던 시기를 알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바로 그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 왕우 때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말 하노니 형제나라가 되자”는 국서를 보내옵니다. 그러므로 아골타는 예종과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인데, 바로 그 예종의 8대 선조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아버지인데, 그는 왕건의 외증조부(3대 조부) 금행과 같은 세대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다시 말해 아골타의 8대 선조 금행은 예종 왕우의 선조 때 외가쪽 8대 선조 금행입니다. 이 분은 왕건의 3대 선조입니다. 그런데, 신라인 김행은 왕건과 동시대인이고, 김행과 왕건은 또 아골타의 5대 선조인 발해(跋海)와 같은 세대인물입니다. 그런 김행이 왕건의 3대 외조 금행일 수가 있습니까.
또 왕건에게 신라를 들고 귀부해온 경순왕은 왕건의 아들 세대이고, 그 아들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세대입니다. 마의태자는 아골타의 3대조인 석로(石魯)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그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8대조인 금행이나, 7대조인 함보가 될 수 있나요?
금행은 금행→키얀(澗)의 아들→키얀(澗)→일하→대야발의 계보속에 있습니다. 제 책에는 자세한 설명과 왕건과 아골타 가계도표까지 첨부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학자들의 설의 진위도 파악하지 않은 독자분들이 이미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같은 내용의 댓글을 반복해서 다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잘못된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고정관념이 될 때 그 파급효과는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 비치된 제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 이상흔
■ 2015.09.23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 주몽의 후손인 발해 왕족입니다”
<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 저자 전원철 박사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통일했습니다. 그런 칭기스 칸은 고구려와 발해인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당시 대국이었던 금나라 황제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몽골의 칸(황제)’의 자세를 보여줬습니다. 제가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진한 이유는 칭기스 칸처럼 한국도 ‘중국·일본·미국은 대국이니까 우리가 접고 들어가야지’하는 이런 사대주의적이고 소국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우리가 활동할 무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전쟁을 해서 세계를 뺏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통해서든 무역을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우리는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민족입니다.”
중앙아시아·북방민족 사학가이자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인 전원철 박사(법학박사)는 지난 6월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권을 출간했다. 전원철(全原徹) 박사는 군 제대 후, 한·몽 수교 당시 몽골어를 공부하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몽골비사>에서 “칭기스 칸의 뿌리는 높은 하늘이 점지하여 태어난 부르테 치노(蒼狼·잿빛 푸른 이리)”라는 내용을 접했다. 그는 틈틈이 몽골비사를 읽으며 몽골어 공부를 하면서도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선조가 잿빛 푸른 이리와 흰 암사슴(부르테 치노의 아내 코아이 마랄을 풀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전 박사는 이를 위해 지난 1995년부터 사료 수집에 매진했다. 특히 칭기스 칸 일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관해 남긴 <황금의 책(Altan Daftar)>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이 책은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들을 기록하고 있다. 전 박사는 <황금의 책>에 나온 계보를 기반으로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동방사서들과 대조를 통해 순서와 시대 및 연도, 그들의 행적을 파악했다.
“놀랍게도 칭기스 칸의 선조로 기록된 인물들은 <삼국사기> 등 우리 사서와 <홍사>, <황금사강> 등 티베트계 몽골 사서에 나오는 인물과 정확히 부합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위해 600권 이상의 책을 봤습니다. 제 나름대로 교차 확인을 통해 검증 작업을 한 것이죠. 이 중 제 책에 인용된 것만 150권 가까이 됩니다. 어떤 역사서의 경우엔 사본 하나를 얻는 데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 권에 200만원인 책도 있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대안 사서를 보기도 했습니다. 외교관 동료 등을 통해 다행히도 핵심 사서들은 모두 구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전 박사는 대학 때부터 외교사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외국어를 섭렵했다. 티베트어, 만주어, 한어, 아랍어 등 10여개의 민족어를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전 작가는 이번 연구를 하면서 미국 변호사 시절 잊고 지냈던 언어들을 다시 공부했다.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칭기스의 서>,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29개 언어로 된 사서를 분석했다. 업무차 방문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관련 사서란 사서는 모두 입수하기도 했다.
전 박사는 주위의 회의적인 시선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기존 역사학자들의 경우, 자신들의 입장과 전혀 다른 내용에 불만 또는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제가 레퍼런스로 참고한 것이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등으로 된, 기존 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자료다보니 ‘증명이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미국, 러시아 학자들이 제 얘기를 듣고는 책이 나오면 ‘세계사의 엄청난 재발견이 될 것’이라며 응원해줬습니다. 제 뜻을 지지해주는 몇몇 사람들 덕분에 힘을 내서 연구를 할 수 있었어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설은 전 박사가 이 책에 소개한 것만 해도 9가지가 된다. 전 박사는 이 책에서 각 주장이 왜 사실이 아닌지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카자흐스탄의 한 역사가는 칭기스 칸이 카자흐-투르크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장의 근거는 칭기스 칸의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알려진 10대 여성 선조 ‘알란 고아’가 ‘코랄라스’ 종족이고, 오늘날 카자흐에는 ‘둘라트’ 종족에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코랄라스씨가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에서 둘라트 종족은 투르크 종족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원래 투르크가 아니었던 코랄라스씨가 칭기스 칸의 시대보다 나중에 그를 따라 와서 투르크 종족의 일부로 가입한 것을 고려하면 이 역사가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앞뒤가 바뀐 논리죠. 칭기스 칸 시대 이후 많은 종족들이 드넓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그들이 어디서 왔느냐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전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왕가는 태조 왕건의 고려와 금나라, 오늘날 우리가 ‘몽골제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 그리고 청나라로 이어졌다.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몽골과 중국,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등 중앙아시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는 물론, 이집트를 제외하고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등 거의 대부분의 이슬람세계, 헝가리, 러시아 등 동구 전체와 오스트리아, 독일 변경까지 뻗어나간 방대한 세계제국이었다.
▲전원철 박사는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돌아보면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시점”이라고 말했다
중국을 지배하고 다스린 오랑캐들은 조선민족
전 박사가 외교사 중에서도 ‘우리 역사’와 ‘중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때 ‘동아시아 국제관계론’ 강의를 들었을 때다. 당시 수업 내용 중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된 ‘화이체계론(華夷體系論)’은 조공무역(朝貢貿易)을 근거로 조선과 중국을 속국과 종주국의 관계로 봤다.
전 박사는 “중공(중화인민공화국)학자들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논리를 발전시켰고, 2000년대 초반부터 동북아역사공정을 추진했다”며 “소위 말하는 중국을 건설한 청태조·명태조·원태조(칭기스 칸)들을 보니 전부 동방의 오랑캐들이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중국을 다스린 종족이 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오랑캐 종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 박사는 인터뷰 내내 ‘중국’을 언급할 때마다 앞에 ‘소위’ 또는 ‘이른바’라는 말을 붙였다. ‘중국(The Middle Kingdom)’이라는 말을 쓰자마자 대한민국이나 조선인민공화국, 혹은 미국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미가 돼버린다는 생각에서다.
전 박사는 “근본부터 틀린 이론인 동북공정은 대응할 필요도 없는 의미없는 일”이었다며 “소위 말하는 중국 땅만이 아닌 중앙아시아, 이란, 유럽,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진정한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박사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을 통해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보고 우리의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함경도 땅으로 들어간 우리 형제들이 중원을 정복했고, 그들과 일족의 선조를 가진 칭기스 칸 3대가 전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역사도 우리 민족사의 일부입니다. 그 당시 국경이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 역사를 이 한반도, 조선반도 내의 역사로 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사 속에서 우리 민족사를 봐야합니다.”
전 박사는 이 책에 기대하는 점에 대해서도 말했다.
“사실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책이 대중적으로 호소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와 몽골·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관심 있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나름대로 쉽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박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바라는 바도 덧붙였다.
“자신들의 관점과 다르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려 하지 말고 제가 틀린 게 있다면 지적하고 더 정확한 역사적 진실을 입증했으면 합니다. 중국사나 일본사, 몽골사라고 하는 이런 ‘근대국가’라는 틀, 곧 국가사(史)적 입장에서만 과거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과거 속에 들어가 그 시대의 언어와 눈으로 주변과 전 세계를 봐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의 어느 학자가, 러시아의 어느 학자가 이렇게 말했으니 나는 거기에 따른다’는 식이 아니라 새로운 그 시대의 진실이 보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법학박사(JD)를 취득하고 미국 로펌에서 변호사로 오랫동안 근무한 그는 법조인이기보다는 한 사람의 사학자에 더 가까워보였다. 많은 현대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몰두하는 시대에 과거로, 더 이전의 과거로 향하는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입니다. 내일의 나 역시,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예요. 내일의 내가 되려고 하는 것, 미래의 내가 추구하는 것은 그게 돈이든 명예든 오늘 내가 그것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전부 이뤄질 순 없어도 결국은 때가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뤄집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민족이나 국가, 전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비전을 제시하는 게 바로 역사라는 거죠.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 박사는 다시 한 번 역사적 진실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오늘날 형체도 없는 K팝(K-Pop)의 인기,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s·한류)를 자랑삼아 떠들면서도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는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해냈다면 미래에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아니 ‘전 세계’를 다스린 종족의 정체가 우리 핏줄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돌아보면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저자가 말했듯 이 책에도 분명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역사엔 다분히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29개 언어로 된 사서를 분석하는 초인적 노력으로 우리 민족, 국가, 전 세계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해보자는 논의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 전원철 박사는?
서울대 외교학과 졸, 2001년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2004년 뉴욕주립대 법학박사후과정(LLM), 96~97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2004~2008년 미국로펌 근무, 현재 미국변호사, 중앙아시아·북방민족 사학가, 고구려발해학회 회원.
출처 | 이코노미조선 9월호 글 | 백예리 이코노미조선 기자 사진 | 임영근
■ 2016.05.12 “칭기즈 칸의 조상은 고주몽”
- 29개 언어 구사하는 전원철 변호사
⊙ “몽골-튀르크계 통칭하는 ‘타타르’는 고구려 ‘대대로’에서 나온 말”
⊙ “터키인의 조상 오구즈 칸은 고구려의 후예”
⊙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 몽골·만주·튀르크·아랍어 등 29개국어 해독…, UNHCR 주재관으로 체첸에서 근무
전원철
◉ 1963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뉴욕주립대 법학박사 후 과정.
◉ 외무부 유엔국제인권사회과 유네스코 자문관, 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고구려 고(高)씨 왕가의 방계(傍系)인 대(大)씨가 세운 발해는 732년 당(唐)-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일한, 즉 발해 무왕 대무예의 사촌형 대일하(대조영의 동생 야발의 아들)가 이끌던 발해(말갈/모굴/모골)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 결과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에 이르는 땅을 신라에 빼앗긴다. 일한은 전사하고 그의 아들 키얀(칸)과 그의 7촌 조카 네쿠즈(니쿠즈·임금)는 아르카나 쿤(에르게네 쿤·압록군)이라고 하는 오지(奧地)로 들어간다.
훗날 ‘황금항아리’라고 불리는 영웅이 일족(콩크라트족)을 이끌고 아르카나 쿤에서 탈출, 신라군을 물리치고 평주(平州)에 정착한다. ‘황금항아리’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금(金)나라를 개창한 완안아골타의 선조 함보의 아버지 금행(金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라고 하는 ‘서해용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후일 율두즈 칸(조선 왕=바르카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랑)이라는 손자를 두게 되는데, 그의 아들이름은 <몽골비사>에 나오는 알란 고와의 아버지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다. 이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의 딸인 알란 고와의 둘째 남편은 아래 도표에 보듯이 궁예의 4대 손인 말릭(말갈) 바야(부여)-우드(씨)의 아들 “빛(光=干=王)”속의 사내 = 말릭(말갈) 바야(부여)-우드(씨) 아들(자)이다.
고구려 망국의 한을 가지고 머나먼 당나라 장안(오늘날 서안)에서 세상을 떠난 진 보장왕의 4대손인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왕, 어머니는 고구려 보장왕의 5대손인 여인으로 오직 성씨만 전하고 이름은 전하지 않는 궁씨녀이다. 이 궁예의 4대손이 바로 알란 고와의 두 번 째 남편이다.
한편 왕건은 금행의 아들 보활리(무쿠리=고구려)와 용녀(龍女, 고레이 딸=고려 계집) 두 오누이 중 고라이 녀와 작제건(맹갈 칸=말갈 칸=말갈 왕) 사이에서 난 용건(고랭이 칸=고려 칸)의 아들이다. 왕건(王建)의 뜻은 왕 칸(王干)이고, 그는 고구려 보장왕의 6대손인 궁예와 같은 고구려 핏줄인 셈이다. (상기 도표 참조)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죽은 후, 궁예를 위해 일했던 율두즈 칸(바르카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랑)은 궁예의 강씨부인 두 아들 청광과 신광 두 아들은 이전에 이미 죽어 마지막 살아 남은 그의 셋째 아들 동광을 데리고 아르카나 쿤(압록강네군=발해 서경 압록군, 오늘날 강계, 여연, 산수 갑산 등이 맞닿은 폐사군경 별해진)으로 들어가 발해의 지파(支派)인 도리항의 처가집안으로 발해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량하이(오량합=오랑캐)와 합류한다.
926년 발해가 멸망한 후 이들 중 일부는 만주와 오늘날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이북을 영토로 했던 북한 땅에 걸친 발해와 심양, 길림골과 흑룡강골을 지나, 오늘날의 만주 송와강을 따라 흑룡강의 발원지인 내몽고를 거쳐 러시아 땅 부랴티아로 떠나고, 두 지파는 북한 땅과 만주땅에 남았다.
그 뒤 이야기는 책에 자세한 설명이 있어 생략하지만, 발해가 멸망한 지 235년 후 이들의 후예들 가운데서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한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예이자, 후고구려왕(後高句麗王) 궁예의 핏줄도 타고난 우리 고구려의 후예인 것이다.
그 뒤 칭기즈 칸과 그의 아들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다. 그 중 한 갈래가 지금의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침공해 일한국을 건국한다. 일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들의 조상인 대일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일한국의 가잔 칸은 재상 라시드 웃딘에게 몽골제국의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그 책이 《집사》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칭기즈 칸 일족의 역사는 《집사》 외에도 《몽골비사》, 티무르 왕조의 《사국사(四國史)》 등의 사서에 비밀 코드의 형태로 숨어 있다.
한편 서양에서 몽골-튀르크계 종족을 일컫는 말인 ‘타타르’라는 말은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몽골-튀르크계 민족이 세운 왕조는 몽골제국, 일한국(이란), 테무르제국(중앙아시아), 무갈제국(인도), 등 20여 개에 달한다.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의 후예”
▲ 전원철 변호사의 서재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튀르크어·몽골어 등으로 되어 있는 다양한 사서들이 있다.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1‧2)》(비봉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을 낸 전원철(全原徹·52) 변호사의 주장이다. 기분 좋은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지는 않는다. 이런 소리 하면 “국뽕 맞았다”거나 “당신 ‘환빠’냐?”는 얘길 듣기 십상이다. ‘국뽕’이니 ‘환빠’니 하는 얘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주장을 하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이력이 흥미롭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1993년 한국 최초로 실시된 유엔회원국 정무관(국제공무원 정무직) 시험 합격,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국제협력과 근무, 외무부 유엔국 이권사회과 유네스코 담당관 겸 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 주재관, 미(美) 아이오와대 법학박사(JD), 미국변호사, 라파즈석고보드(한일시멘트 석고부)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해외 신규사업 담당이사, 한전KPS 국제계약담당 상주법률자문, 경찰청 치안연구소 책임연구관, 중동플랜트 건설전문 주식회사의 상무 등 아주 ‘글로벌’한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하다니.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을 펴낸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이 작년 봄 “29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라고 한 것도 흥미를 돋웠다. ‘1980년대 이래 《국부론》 《도덕감정론》 《자본론》 등 묵직한 책들을 펴낸 출판계의 원로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 원고를 청탁했다.
《월간조선》 작년 6월호에 ‘역사탐험/한 고대사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다’가 실렸다. 이때 그는 주몽예(朱蒙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글자 그대로 ‘고주몽의 후예’라는 의미였다. ‘칭기즈 칸’과 ‘고구려-발해’가 만났기 때문일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pub(pub.chosun.com)에 실린 이 기사의 조회 수는 6만8967회였다. 이후 조선pub에 나간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즈 칸 가계의 비밀’이라는 기사의 조회 수는 15만9261회. 총 5번에 걸쳐 나간 글은 모두 합쳐 28만4943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조선pub의 기사로서는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의 글이 《월간조선》에 나간 후 어떤 지인(知人)이 물었다.
“그 주몽예라는 사람, 혹시 본명이 전원철 아니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다닐 때에도 몽골어·터키어 공부한다고 하던 인간이야. 한여름에도 외투 입고 다니던 괴짜.”
체첸 갈 때도 《몽골비사》 챙겨
▲ 체첸 현장 주재관 시절 오세티야의 이슬람 사원 앞에서.
지난 2월 전원철 변호사가 원고를 보내왔다. 이번에 보내온 글은 <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제목이었다.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로 여기고 있는 《집사》 속의 인물 오구즈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예라는 내용이었다. 문득 ‘전원철’이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졌다.
“역사 얘기는 책을 보면 되는 거고, 당신 살아온 인생 얘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의 집 문을 열었을 때, 묘한 냄새가 확 풍겼다. 바나나 냄새와 담배냄새, 그리고 무슨 이국적 향료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베란다에서는 뭔가 퍼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꿩이었다. “웬 꿩이냐?”고 묻자, “잡아먹을까 하다가 그냥 기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7평짜리 아파트 거실에는 요가 깔려 있고, 한쪽에는 아랍어·영어·몽골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작은 방에 있는 책장에도 다양한 외국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전 변호사가 말했다. “이 책들은 페르시아어, 이 책들은 몽골어, 이건 튀르크어, 이건 우즈벡어” 전 변호사는 책을 펼쳐들면서 설명을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 이력을 보니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일했다.
“1993년 3월 유엔국제공무원시험 정무관(사무관)급 시험에 합격했다. 임용을 기다리는 동안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국제협력관, 외무부 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
-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체첸주재관도 지냈다.
“1996년 3월 외무부 유엔국 인권사회과에서 유네스코 담당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여성 사무관이 '전선생님 전화받으세요'라고 했다. '어디냐'고 물으니까 '제네바'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서 '어디냐'고 하자 '우리는 제네바 UNHCR이다'라고 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다짜고자 ‘미스터 원철 전이냐’고 묻더니 '선불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 제네바로 오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불타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했더니, '체체냐(체첸)'라고 했다. '알았다. 그럼 준비할 게 뭐냐'고 물었더니 '롱부츠와 여권만 가지고 몸만 오라'고 했다.
다음날 외무부 상부에 보고를 마치고 전쟁터로 떠나겠다고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몽골비사》를 가방에 챙겨 넣고,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레만호가 보이는 제네바에 도착했다. 인덕션(Induction: 현장투입) 교육하기 전에 행정절차로 계약서와 유언장을 읽고 서명했다. 그리고는 며칠 후 체첸 인근 다게스탄으로 갔다. 다게스탄과 체첸에 도착해 보니, 마침 3월 경이라 녹은 눈 등이 가득 쌓인 온통 진흙탕이었다. 왜 롱부츠를 준비하라고 했는지 알겠더라.”
- 무슨 일을 했나?
“전쟁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난민들에게 의약품과 식량, 천막, 구호물자 등을 지원해 주는 일을 했다.”
“체첸어 익힌 덕에 위기 모면”
▲ 체첸어를 익힌 덕분에 현지인들과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 유엔기구에서 나갔다고 해도, 러시아군이나 체첸 반군의 위협에서 자유로웠을 것 같지는 않다.
“밤 12시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조수인 샤밀과 함께 무전기와 보드카,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챙겨서 차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갔다. 현장 사무소로 포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 들으면서 새벽 4시경까지 있다 보면 상황이 끝나고, 그러고 나면 아침부터 난민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카프카스 산악 지역 마을들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러 갈 때였다. 유엔 표식이 달린 차량을 타고 가는 데도 ‘전투행위자들’이 유엔 차량이라는 걸 알면서도 총격을 가해왔다. 어느 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헬기나 초소에서 총격을 가한 일도 있었다. 적십자사 간호원 5명이 하루 밤에 무장괴한들에 사살된 적도 있다. UNHCR 직원도 나를 제외하고는 한 번씩은 납치당하는 경험을 했다.”
전 변호사는 “나는 체첸어를 익힌 덕에 그런 위험은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체첸어로 현지 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자, 현지인들이 나를 자기들 편이라고 여기게 됐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주민들이 먼저 알려줬다.”
-체첸에서 러시안군들도 만났는지.
“군인들이 싸우는 전쟁터에서 양측을 다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러시아어를 잘했기에 러시아 군인들도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5,000미터 산중턱에서 블록포스터(차량통행을 막은 콩크리트 바리케이드)를 지나면 러시아 군인들이 갑자기 튀어 나와 “뽀스토이(서라)”하고 세우곤 했다. 하루는 내가 러시아군 초병들을 다 모아 놓고 태권도 시범을 30분 정도 보여주었더니 웃으면서 통과시켜 주기도 했다.”
- 체첸 사람들은 어떠했나?
“친절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속이 있다. 한번은 가을 한기가 도는 10월중 말경 해발 3000미터쯤 되는 산길에서 차가 고장 나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됐다. 갑자기 우리나라 예비군복 같은 군복을 입은 체첸전사(아팔첸쯔이·향토수호자라는 뜻)들이 나타났다. 누구냐고 묻기에 ‘유엔이다’라고 했더니, 생김새가 자기네들과는 다르기에 자세히 보더니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총을 내렸다.
그들은 동료에게 내 차를 고쳐주라고 했다. 갑자기 수백마리의 양떼가 보이자 그들이 ‘저중에서 어떤 양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라했다. 나는 그 양을 구경시켜 주려하나보다 하며 수백마리 양 중에 ‘고동색에 검은 점이 박힌 양’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양을 잡아 손님대접을 하기에 깜짝놀랐다. 그날 동네 남자 10여 명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 체첸 그 지역도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 아무르 티무르의 원정 루트다. 체첸인은 유럽인도, 동양인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체첸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먼 옛날에 동쪽에서 온 눈이 찢어진 남자와 먼 서쪽에서 아랍 여인로 추정되는 한 여인이 이 카프카스산에서 만나 결혼하여 체첸인들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토템으로 늑대를 그린다.”
전 변호사는 체첸에 있었을 때 늑대와 관련된 한가지 일화를 들여주었다.
“전투에서 다리를 잃은 한 체첸전사가 난민에 섞여 침상밑에 숨어있다가 나한테 들켰다. 그나는 조용히 '당신은 이곳을 빠져나가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숨은 침상위에는 볼펜으로 섬세하게 그린 아름다운 그림 하나가 있었다. 산꼭대기에 서서 울부짓는 늑대 그림이었다. 나는 '그림을 나에게 줄 수 있느냐'고 말하자 그는 '가져 가라. 대신 우리의 처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내게 늑대 그림을 준 그가 지금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수 없이 되뇌었지만,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픔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다”
체첸에서 근무를 마친 전원철 변호사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오와대학 로스쿨에서 인도법(人道法)·전쟁범죄법 등 국제법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대로 나갔으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길이 달라졌다. 왜일까? “아이오와대학에는 중국계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우리 조공국(朝貢國)에서 왔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왜 너희 속국(屬國)이냐?’고 하면 ‘당(唐)나라 이래 원(元)·명(明)·청(淸) 등을 거치면서 내내 조공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나?
“‘너희가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했다.”
- 무슨 논리인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6대조 멍케티무르(孟可帖木兒)는 이성계의 지방장관이었다. 너희는 우리 함경도 사람에게 지배를 당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자금성을 지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는 고려 여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인 후예의 정권이었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나 명나라를 조선의 속국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과도하게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
“맞다. 하지만 나는 중국인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를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다. 중국인들은 ‘조선은 기자·위만 등 중국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고지(故地)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언젠가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 땅도 되찾아야 할 중국의 영역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 주장은 ‘역(逆)동북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부 한국인의 선조가 중국에 건너가서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걸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나?
“일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본 황족에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피가 섞였다는 건,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있지 않나?”
-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국, 중국, 일본은 이미 수백,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중국, 일본의 역사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나? 몽골인들이 이란에 가서 일한국을, 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를, 인도에서 무갈제국을 세웠다고 해서, 그 역사가 몽골의 역사가 되나?
“국가, 땅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피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얘기가 다르다. 맘루크 왕조는 땅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역사이지만, 몽골 사람이 이집트로 들어가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만든 몽골 종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화 속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여”
▲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국사》. 티무르제국의 황제 미르조 올룩벡이 서술한 사서이다.
- 칭기즈 칸이 고구려-발해인의 후예라는 건, 무슨 근거에서 하는 얘기인가?
“《몽골비사》를 수없이 읽으면서 나는 칭기즈 칸의 선조인 부르테 치노(푸른 이리·蒼狼)와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慘白色鹿)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들 신화(神話)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것이 실존인물이며, 고구려-말갈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조의 역사책인 《사국사》에서 칭기즈 칸의 10대모(代母)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코와(알란 고와)의 아버지 이름이 추마나 콘(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추마나 콘은 곧 주몽 칸(朱夢 可汗)이다. 추마나 콘의 형은 이름이 위마나 콘, 즉 위만 칸(衛滿 可汗)이다. 주몽과 위만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누가 있겠나?”
- 그것만으로 고주몽이 칭기즈 칸의 선조라는 건 약하지 않나?
“《몽골비사》에 보면, 알란 코와의 아버지가 ‘코리투마드’ 부족의 부족장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라고 나온다. ‘코리’는 말갈어로 《요사(遼史)》 속의 ‘고리(稿離)’ 즉 ‘고려(高麗)’라는 말이고, ‘투마드’는 ‘투만-씨’, 곧 ‘도모(都牟)-씨’ ‘동명(東明)-씨’ ‘주몽-씨’라는 말과 같다. 결국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과 추마나 콘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사국사》에 의하면, 아란 코와는 4촌 오빠인 도분(디븐) 바얀(도본 메르겐·위마나 콘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분 바얀은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알란 코와는 빛 속의 신비의 인물을 통해 ‘보잔자르 콘(《몽골비사》의 보돈자르)’을 낳는데, 이가 곧 칭기즈 칸의 9대조다.”
- 신화를 역사로 보는 건 무리 아닌가?
“고대 우리 민족은 역사를 비밀 코드로 썼다. 그 코드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인다.”
“타타르족은 대대로 연개소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는 칭기즈 칸 이전에 몽골(모굴)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오늘날 서양에서 몽골이나 튀르크계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인 타타르(Tatar)족은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타타르 종족의 시조 타타르 칸과 몽골 종족의 시조 모골 칸은 알무잔나 칸의 두 쌍둥이 아들이다.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에 기록된 ‘타타르 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자유(淵子遊)이다. 타타르는 곧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온 것이다.
히바 칸국(1511~192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걸쳐 있던 몽골계 나라)의 칸이자 역사학자인 아불가지 칸은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인명으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종족 칭호의 형태를 띠게 됐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대대로 연개소문 가문’을 지칭하다가 나중에 이 가문이 이끄는 백성과 속민을 일컫는 말이 되어 타타르로 변화한 것이다.”
- 그것만으로 타타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달단(韃靼·타타르)은 말갈(靺鞨)의 남은 씨앗(遺種)이다’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말갈은 곧 고구려(무구리: 畝俱里)이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 해(奚), 거란의 동북에 있었다. 나중에 거란에 공격 당해 부족이 나뉘어 흩어졌다. 어떤 것은 거란에 속하고 어떤 것은 발해에 속했는데, 갈린 부락이 음산에 흩어져 살면서 스스로 부르기를 달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끝 무렵에 그 이름을 가지고 중국에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 역사책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꿰맞추는 건 아닌가? 다른 증거는 없나?
“옛 돌궐(튀르크) 지역인 카자흐스탄 서쪽 러시아 땅에는 하카스공화국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타다르(Tadar)족, 혹은 코오라이, 콩구레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수레, 순대 만들기, 보쌈과 같은 약탈혼 풍속 등도 흡사하다. 귀틀집과 같은 집을 입(Yip)이라고 한다. 아마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돌궐족의 땅에 들어간 고구려의 후예일 것이다. ‘코오라이’는 ‘고려’, ‘콩구레이’는 ‘큰 고려’라는 의미다.”
전원철 변호사는 “터키인들도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한다.
“칭기즈 칸의 조상인 모골 칸에게는 카라(高麗) 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튀르크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는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튀르크인들은 서방의 튀르크 지역으로 간 고구려 백성의 무리이다. 그들 중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코로 호자라는 사람인데, ‘코로’란 ‘고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6·25 때 터키군이 참전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터키는 이렇게 혈연적으로 고구려와 형제국이다.”
“오롱키(오랑캐)어도 공부”
▲ 전원철 변호사가 칭기즈 칸의 계보를 밝히는 데 활용한 역사서들. 왼쪽부터 《몽골비사》 《승리의 서》 《집사》 《행운의 정원》.
전원철 변호사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몽골비사》나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요사》 《금사(金史)》처럼 이름은 들어본 중국 역사책(전원철 변호사는 ‘동방사서’라고 함)에서부터 일한국의 《집사》, 티무르제국의 《사국사》, 《승리의 서(書)》(티무르에 대한 기록),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에서 나온 튀르크어 역사서 《행운의 정원》 등(전원철 변호사는 ‘서방사서’라고 함)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역사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의 책장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몽골어·튀르크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으로 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설사 그의 주장이 ‘말장난’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을 넘나들면서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이 ‘언어의 천재’라고 하던데, 몇 개 국어나 하나?
“영어는 기본이고, 고교 때 2외국어로 일본어를 했다. 언젠가는 소련과 관계 개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1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독어는 대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와 헤겔을 읽기 위해 공부했고, 카뮈와 콩트를 읽기 위해 불어를, 《군주론》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세네카의 정치사상, 철학을 담은 《서간집 》을 읽으려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스페인어도 했고 그러다가 ‘서구(西歐)문명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에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알아야겠다’고 반성하게 되면서 동양어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면서 전 변호사가 꼽은 언어들은 이랬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중세 튀르크어, 터키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오롱키어(오랑캐어), 어웡키어, 중국어, 티베트어, 만주어, 다와르어, 거란어, 부랴트어, 타타르어 모두 29개다.
- 만주어, 몽골어 같은 것은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
“우리 역사로 관심을 돌리면서 전씨 집안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전씨의 조상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고구려를 떠날 때 데리고 온 10명의 신하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만주어, 몽골어는 기본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중국어도 배웠다.”
- 몽골어 같은 건 어디서 배웠나?
“대학교 도서관에서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대출해 간 적이 없는 독일어로 된 몽골어 문법서 한 권을 발견했다. 우리말과 몽골어 문법이 매우 비슷해서 기본 문법 공부는 2~3주 내에 마쳤다. 마침 우연히 알게 된 몽골인 친구가 몽골에 간다기에 《몽골비사》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독본 삼아서 몽골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 만주어 같은 건 지금도 쓰는 사람이 있나?
“책으로 공부했는데, 지금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나도 만주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는 게 아쉽다. 만주어의 먼 방언인 시보(錫伯)어를 쓰는 사람이 한 10만명 정도 된다.”
- 한 가지 언어를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됐나?
“대학 시절에는 한 학기 이상 안 걸렸다.”
“우리 역사 바로 알려면 중국사서(史書) 외에 다른 사서도 보아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찔러보았다.
- 아무래도 말장난 같다.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계보를 기반으로 그것을 동방사서의 기록들과 철저히 대조했다. ‘서방사서’에 나오는 사람들이 ‘동방사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 계보의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방 이름의 뜻과 그 위치를 역사언어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밝혔다. 문헌사, 역사언어학, 역사지리학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역사학자들이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이겠나?
“주류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내 주장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들과 토론하고 싶다. 중국 사료(史料)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튀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되어 있는 사서들도 보아야 한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 주장대로라면, 한국은 물론, 중국, 몽골, 터키 등 유라시아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게 된다. 지나친 국수주의 아닌가?
“터키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오늘날 터키공화국 영토 내에서 있었던 역사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에 유연(柔然), 돌궐부터 오구즈 튀르크,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아시아 대륙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활동했던 튀르크계 종족들의 역사를 모두 자기들의 역사로 기술(記述)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의 역사마저 말갈족의 역사라면서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 밖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닌 걸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나라 밖에서 행해진 우리 민족의 행위는 우리 역사가 아닌가?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한다.”◉
글 | 배진영 기자 사진 | 서경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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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리아 퍼스트' 내건 애국주의자, 16세에 국가대표… 국제 대회 제패
의류·요식업 등 사업가로도 성공 "'한국의 기적' 몽골도 전수받기를"
7일 실시된 몽골 대선 결선 투표에서 '레슬링 영웅' 칼트마 바툴가(54)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고 몽골 관영 몬차메(MONTSAME) 통신이 8일 보도했다. 바툴가 후보는 50.7%를 득표해 41.2%에 그친 미예곰보 엥흐볼드(53) 인민당(기존 여당) 후보를 눌렀다. 바툴가 당선인은 이날 "빚더미에 앉은 나라를 회복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바툴가 후보는 대선 슬로건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와 비슷한 '몽골리아 퍼스트'를 외치는 등 애국주의 성향을 보였다"며 "경제난 해결사로 급부상하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바툴가 당선인은 1963년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브흐(몽골 전통 씨름)' 사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세 살이던 1966년 홍수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온 가족이 울란바토르 빈민가로 밀려나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굳세게 살자'고 했다. 틈만 나면 드넓은 초원에 데리고 나가 브흐를 가르쳐줬다"고 했다.
브흐는 레슬링과 비슷하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레슬링을 시작했는데, 브흐로 단련한 덕분에 오래지 않아 에이스가 됐다. 16세에 몽골 레슬링 국가대표가 됐고, 1989년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국제대회를 제패하며 몽골의 레슬링 영웅이 됐다.
이듬해인 1990년 사업가로 변신해 청바지를 동유럽에 파는 의류 무역업을 시작했다. 당시 몽골 일반인은 정부 통제 때문에 외국 여행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레슬링 선수 시절에 외국에서 경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국외 사정에 밝았다. 바툴가 당선인은 "어린 시절 생활비를 번다고 외국 관광객에게 기념품을 팔면서 배웠던 영어가 레슬링 선수 시절 외국 친구들을 사귀고 이후 사업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의류업으로 번 돈으로 몽골에 호텔도 짓고 택시 회사도 차렸다. 그는 레슬링에서 쌓은 인지도를 앞세워 요식업과 축산업에도 뛰어들며 사업을 빠르게 키웠다. 그는 미국 마피아 영화 '대부'에 푹 빠져 자신의 회사 이름도 극 중 인물 이름인 '젠코(Genco)'를 따서 지었는데, 자신도 큰 덩치에 마피아처럼 중절모를 즐겨 써 '몽골의 대부'로 불리기도 했다.
41세이던 2004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레슬링 영웅 출신의 넘치는 카리스마에 자수성가한 사업가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됐다. 특히 몽골 유도협회장을 맡아서 치른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몽골이 최초로 유도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자 그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2008~2012년에는 도로교통건설부 장관을 맡아 철도 인프라 구축에 앞장섰다. 바툴가 당선인은 넓은 영토에 적은 인구가 흩어져 사는 몽골의 특징을 감안할 때 철도 확충이야말로 경제 성장의 필수 요건이라고 판단했다. 2011년 몽골에서 광물 개발 붐이 일면서 그의 철도 확충 정책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행정가로서도 합격점을 받은 그는 이번에 야당 대선 후보로 발돋움했다.
바툴가 당선인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몽골 유도협회장 시절 한국 유도협회와 교류하며 여러 차례 방한했다. 그는 지난달 대선 기간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은 전쟁을 겪은 데다 자원마저 부족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면서 "한국의 기적을 몽골도 전수받기를 바란다"고 했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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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징기스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