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2/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1/
2021.03.02 조선일보 장일현 기자
[1]영국인들은 요즘 브렉시트에 만족할까
“진짜 영국은 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한 건가요?”
유럽 특파원으로 2년간 영국 런던에 있었다는 말을 하면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입김이 센 유럽연합(EU)에 끌려다니는 게 자존심 상해서? EU에 내는 회원국 분담금이 너무 많고 그 돈이면 문제 투성이인 교육과 의료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기에? 함께 살기 싫은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설명과 해석, 분석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건 20대 여성의 말이었습니다. “향수지요.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 브렉시트 투표 때 젊은 세대와 중장년 세대의 찬반이 크게 갈렸는데 중장년 세대의 다수가 탈퇴를 찬성한 이유가 쏙 들어오더군요.
▲엘리자베스 여왕.
국토 면적 24만2500㎢, 한반도 (22만1000㎢)보다 약간 큽니다. 인구 6790만명, 남북한 합친 것보다 적습니다. 그런데도 한 때 전 세계 인구와 영토의 4분의 1을 지배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 바로 영국입니다.
이젠 한물간 제국인 것 같은데 영국은 요즘에도 국제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영국 관련 뉴스는 유난히 눈에 잘 밟히는데 특파원 경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뭔가 의미있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 영국이 거론되는 단골 이슈는 코로나 팬데믹 관련 입니다. 팬데믹 초기 영국은 코로나 사태에 잘 대응하지 못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의료가 붕괴된 대표적 사례로 주목받았습니다. “어떻게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라는 영국이 저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요?” 이런 말이 참 많았습니다. 코로나 발원지 중국과 유럽의 첫 대규모 확산지 이탈리아에 이어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죠.
영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420만명 정도로 세계에서 다섯째이고, 사망자도 12만명이 넘습니다. 단연 ‘유럽 톱’입니다. 인구(8300만명)가 훨씬 많은 독일의 확진자가 240만여명, 사망자가 7만여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피해가 얼마나 큰지 확실시 알 수 있죠. 인구가 비슷한 프랑스도 확진자 370만여명, 사망자 8만6000여명 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발생했다면 아마 정권이 크게 흔들렸을 겁니다. 하지만 영국 집권 보수당은 멀쩡합니다. 이런 영국의, 우리에겐 정말 색다르게 보이는 특성은 이 뉴스레터가 계속되는 동안 여러차례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악몽이 계속될 것 같더니 새해들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백신 접종과 함께 시작된 놀라운 반전입니다. 영국 정부에 따르면 지난 27일 현재 코로나 백신을 한번이라도 맞은 사람은 2000만명이 넘습니다. 전체 인구의 30%에 달합니다. 정말 부러운 수치네요. 세계에서 영국보다 백신을 많이 맞은 나라는 돈 많고 인구는 적은 이스라엘과 UAE 뿐입니다. 같은 유럽 국가인 독일은 4.6%, 프랑스는 4.3%에 불과합니다. 스페인은 4.5%, 이탈리아 4.7% 등입니다. 미국도 이 비율이 14.5%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압도적'이란 단어를 쓸만 합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올 여름까지는 모든 성인이 백신 접종을 마칠 거라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강력한 봉쇄 조치와 함께 백신 접종의 확대는 실제 코로나 환자수 감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6만명이 넘던 하루 확진자는 5000명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요 며칠은 하루에 1000명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감소 추세는 앞으로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입니다.
영국은 이번에(역사적으로 이런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국가를 이끄는 책임있는 사람들이 아주 발빠르게 의사결정을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백신 접종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백신은 2번 맞아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우선 많은 사람에게 한 번만 맞는 전략을 밀어붙였습니다. 대단히 과감하고 획기적인 한 수였습니다. 일본 등 다른 나라도 이 전략을 따라하려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맷 핸콕 보건장관(왼쪽)과 코로나 백신 접종을 받고 있는 영국 국민./유튜브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포인트가 2가지 있습니다. 영국은 주요 결정을 정말 철저하게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물론 과학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가끔 한계와 단점도 나타납니다) , 그리고 정부가 결정하면 국민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로' 잘 따른다는 점입니다. 짧은 소견이지만 이 두 가지 특성이 바로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 것이지요.
백신 접종률은 브렉시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영국은 지난 2016년 6월 브렉시트 찬반 투표를 했고, 51.9% 찬성으로 탈퇴를 결정했죠. 이후 EU와 복잡한 줄다리기 협상 끝에 작년 1월 영국은 유럽연합(EU)을 탈퇴했고, 1년간 유예기간이 끝남에 따로 올해 1월1일부로 브렉시트는 완성됐습니다.
한가지 재밌는 가정을 해볼까요. 만약 영국이 지금도 EU 회원국으로 남아 있었다면 과연 영국의 코로나 반전은 이뤄질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유럽연합 국가들은 백신 구입과 접종 시작을 ‘모두 함께 줄맞춰' 하기로 했지요. 어느 나라가 혼자 백신을 더 많이 확보하고, 더 많이 접종하는 건 어렵습니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했기 때문에 백신도 맘대로 구입하고, 접종 전략도 입맛대로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이쯤되면 영국 사람들에게 브렉시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요즘 묻는다면 “잘했다”는 대답이 훨씬 더 많이 나올거라고 추측하는 건 무리가 아닐 듯 싶습니다. 실제로 커뮤니케이션컨설팅회사인 켁스트CNC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백신 진행 과정 관련, 영국 응답자의 76%가 만족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독일은 이 수치가 26%에 불과했지요.
이 때문인지 최근 파운드화도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작년 12월 파운드당 1440원대였던 환율이 요즘 1570원대까지 올랐습니다. 그만큼 영국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긍정적이라는 뜻이겠지요.
EU과 결별한 영국은 이제 막 돛을 올리고 망망대해 항해를 나선 배와 같습니다. 영국은 나름 자신만만한 모습입니다만, 누구도 앞일을 장담할 수는 없을겁니다. 영국이 어떻게 제국을 건설했고, 어떻게 자신의 앞길을 헤쳐나가고 있는지, 또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것은 없는지 영국의 이야기 속으로 계속 들어가 보시죠.
[2]영국에 가면 젠틀맨을 만날 수 있을까
“길게 생각하지 말고 영국 신사하면 딱 떠오르는 3가지는?”
며칠 전 동료 여기자에게 물었습니다. 20년차 안팎의 경험 많고, 센스 좋고, 취재 잘 하고, 글 잘 쓰는 기자입니다. 상식과 교양까지 갖춰 이 친구가 하는 말은 늘 신뢰가 갑니다.
대답은 “우산, 수트, 독특한 영어 액센트.”
▲“킹스맨.” 2015년 1편이 개봉된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 나오는 주인공은 영국 신사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30대 후배 여기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딱 한마디 하더군요. “킹스맨.” 2015년 1편이 개봉된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 나오는 주인공은 영국 신사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전설적인 베테랑 요원 해리 하트는 말합니다. “젠틀맨에게 가장 필요한 건 멋진 수트야. 기성복이 아닌 맞춤 정장.” 이렇게 멋지게 수트를 입은 영국 신사를 떠올릴 때면 원통형 모자 실크햇과 우산을 함께 연상해도 좋을 법 합니다.
매너, 정중한 예의 또한 영국 신사에게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시 킹스맨의 해리 하트가 말하는 최고의 명대사가 떠오릅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이런 신사의 나라 이미지의 핵심 축인 영국 왕실이 요즘 걱정이 많은 듯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이자 올 6월 만 100세가 되는 필립공(公)이 지난 1월 16일부터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여기에 왕실과 공식적으로 완전 결별한 해리 왕손과 그 아내 메건 마클이 왕실에 부담주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해리 왕손 부부가 미 CBS 방송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에서 영국 왕실의 부정적인 면까지 공개하면서 영국 왕실이 벌통을 쑤셔놓은 것 처럼 들끓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 주변에서 즉각 이런 반응이 터졌습니다. “신사의 나라라더니 진흙탕이네. 왜 이런거야?”
그 실체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영국이 전 세계에 신사의 나라로 ‘각인돼’ 있습니다. 영국에서 만난 한 교포 얘기에 따르면 예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전 이런 기내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이 교포의 다음말이 묘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교포들)는 그 방송 들을 때마다 피식 웃어요.” 옆에 있던, 20년 넘게 영국에서 작품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여성 작가도 “영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지요”라고 거들었습니다. 신사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낭만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뭔가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사’라는 말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고, 많은 이견과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누구를 신사라고 할 건지 개념 정의부터 다를테고, 영국인 모두는 아닐텐데 그중 어떤 사람이냐는 등 생각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젠틀맨을 이해하는데 영국 역사와 런던 생활이 도움이 됐습니다.
우선, 젠틀맨은 중세와 근대를 거쳐 영국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자리잡은 ‘젠트리’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젠트리는 작위 귀족, 즉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아래에 있는 상류층입니다. 젠트리는 다시 세 계층(기사와 에스콰이어, 그리고 제일 하위의 젠틀맨)으로 나뉘는데, 이중 젠틀맨이 절대 다수였다고 합니다. 젠틀맨은 넓은 의미로 작위 귀족까지 포함하는 뜻으로도 사용됐다고 합니다.
옛날에 젠트리는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지대 수입만으로 여유있게 살 정도로 땅이 충분히 많은 지주 또는 소영주였던 셈이죠. 한마디로 부유층입니다. 이들은 지역에 막강 영향력을 행사했고, 의회에도 대거 진출해 국정의 향방을 좌우했습니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과시만 한게 아니라, 전쟁 참여나 세금 납부 등 책임과 의무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해요. 젠트리는 영국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영국 사회의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가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부도 많이 하고, 사회에 대한 봉사도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러니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엔 ‘신사 되기’가 범국민적 취미처럼 돼 버렸다는 평가가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젠트리=젠틀맨은 영국 사회에서 결국 소수에 불과할 수 밖에 없지요. 이런 점들을 알게되면서 영국 젠틀맨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국 남자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으로 (적어도 외부인한테는) 대단히 말이 적고, 감정이나 능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제 아들 친구 조지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의 외아들입니다. 키는 190cm가 넘고,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갖고 있습니다. 케이팝, 특히 한국 걸그룹을 ‘미치도록’ 좋아해서 재작년 고교 1학년 때 엄마와 함께 무작정 한국에 오기도 했습니다.
▲2017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국 문화 페스티벌' 당시 한국 케이팝 그룹 공연에 몰려든 영국 팬들
2017년 7월 런던에서 열린 ‘한국 문화 페스티벌’ 때 일화입니다. 행사에 EXID와 HIGHLIGHT 등 케이팝 그룹 공연이 있어 조지를 초대해 함께 갔지요. “위 아래~ 위 아래~” EXID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조지는 좌석에 얌전히 앉아 손을 무릎 쪽에 올려놓고 참 얌전히도 손뼉을 치고 있더군요. 제 아내가 가서 조지를 일으켜 세우고 같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그것도 잠시. 금방 자리에 앉아 다시 ‘무릎 위 손뼉치기’ 내공을 시연하더군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춤추며 즐기는데도 그렇게 차분히 앉아있는 이 영국 소년을 보면서 “정말 특이하다” 생각했습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가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이란 책에서 설명한 영국인의 남자다움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국 중간 계층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신사의 이상을 흠모하도록 교육받는다… 점잖고 예의 바를 것, 자존심을 지킬 것, 과묵할 것,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을 것 등의 행동 규율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런 ‘합리적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영국의 젠틀맨은 진짜 모습일까, 아닐까.
우리 눈에 보이는 영국 신사의 모습과 언행은 대단히 매력적인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속, 영국인 신사의 머리와 마음 속까지 ’'젠틀'하다고 생각했다간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유명한 제국주의자 정치인이었던 세실 로즈는 “우리(영국인)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종이다. 우리가 세계에서 거주하는 지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인류에게 이롭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 마음속엔 언제나 대영제국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때 이런 영국 사회에서 이런 인종적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이 가감없이 표출되는 것을 봤습니다.
영국은 줄을 잘 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 배경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영국의 언론인 길(A. A. Gill)은 ‘분노의 섬’(The Angry Island, 2005)에서 “영국인은 줄을 서야하기 때문에 줄을 선다. 그러지 않으면 서로를 죽일 테니까”라고 했지요.
영국인의 특성을 글 하나에 담기에 너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영국인을 젠틀맨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일부는 맞을 수 있지만 일부는 반드시 틀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아주 훌륭한 젠틀맨도 많지만, 그 중엔 속다르고 겉다른 표리부동형 신사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실용주의자’ 또는 ‘경험론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그들은 돈 문제에 대단히 강하고 또 예민합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나라, 과거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금융이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장점인 나라이기 때문일까요.
만약 영국에 가서 젠틀맨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크게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선, 길에서 만나는 영국인 중 다수는 평범한 서민들이기 때문이고, 젠틀맨을 만난다 해도 그가 워낙 과묵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만났다면 운이 좋으신 겁니다.
[3] 英 왕실 상대로 싸움 건 해리·메간, 승자가 될 수 없는 이유
영국 역사책을 읽다가 “어 이거 정말 궁금한데…” 하면서도 오랫동안 해답을 찾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책 내용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웨식스의 왕) 에드가는 973년 마침내 바스에서 통일된 잉글랜드 왕으로 대관했다. 이때의 대관식이 오늘날까지 영국 왕 대관식의 본이 되어왔다.”
이 대목에 유독 눈길이 간 이유는 ‘영국 또는 영국인은 바로 이런 존재구나’하고 벼락맞은 듯 머리 쭈뼛하게 깨닫게 된 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왕의 대관식 중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잊지 않고 머리 한 구석에 넣어놓고 있으면 언젠가 해답을 만나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특징을 꼽으라면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도통 옛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 점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영국 주택가엔 아직도 100년 넘는 집들이 수두룩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진짜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풍스럽고 멋있습니다. 하지만 내부까지 매력적이진 않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실내까지 만족감을 주는 집은 내부를 확 뜯어고친 경우입니다.
▲영국 런던 첼시의 주택가
런던에 특파원으로 발령이 난 후 처음 살았던 집은 겨울에 집안이 하도 추워 실내에서도 입김이 나왔습니다. 하루 3번 보일러 돌리는 시간을 제외하곤, 나머지 시간엔 거실에서도 두툼한 겨울 파카를 입고 지냈습니다.
한국 만큼 따뜻하게 살려면 난방비가 감당이 안되었구요. 그런 집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도 영국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된 집에 다들 잘살고 있습니다. 집 뿐만이 아닙니다. 옛것을 더욱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사회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왜 이런 특성을 갖게 됐는지 원인과 이유, 배경, 맥락을 파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거기까진 가지 않고, 영국과 영국인이 이런 특성을 가진 존재구나 하고 일단 인정한 뒤 바라보면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영국 역사로 잠깐 돌아가보겠습니다.
에드가는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입니다. 5세기 중엽부터 유럽의 덴마크 반도와 라인강 하구 일대에 살던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에 밀려들었습니다. 이들이 잉글랜드 땅에 세운 7개의 나라를 ‘7왕국’이라 합니다. (참고로 한동안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미드 ‘왕좌의 게임’에도 7왕국이 등장해 더욱 관심이 갔던 기억이 납니다.)
알프레드는 그 중 하나인 웨식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바이킹 침입으로 완전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앵글로색슨의 왕국을 지켜냅니다. 알프레드 덕분에 영국이 앵글로색슨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알프레드는 영국의 모든 왕 중에서 유일하게 ‘대왕(the Great)’으로 불립니다.
알프레드 이후 왕위는 에드워드➜애설스턴➜에드먼드➜에드가로 이어집니다. 에드가 시대에 이르러 웨식스는 잉글랜드 땅의 최고 지배자로 등극하고, 책에 나온대로 그는 ‘통일된 잉글랜드’의 왕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에드가 평화왕(Edgar the Peaceful)’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핵심 포인트는 당시 대관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2021-973=1048′ 입니다. 무려 1048년 전 있었던 의식이 지금도 실행되는 곳, 이런 나라가 바로 영국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미드 ‘왕좌의 게임’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용의 어머니인 여주인공 대너리스 타가리옌이 남주인공 존 스노우를 드디어 만납니다. 대너리스의 통역관이자 서기인 미산데이가 대너리스를 소개합니다.
▲왕좌의 게임 속 한 장면.
“①폭풍우가 낳은 ②타가리옌 가문의 대너리스 ③안달족과 ④퍼스트맨의 여왕 ⑤철왕좌의 적법한 계승자 ⑥7왕국의 수호자 ⑦용들의 어머니 ⑧대초원의 칼리시 ⑨불타지 않는 자 ⑩족쇄의 해방자.”
정말 대단한 타이틀의 소유자 입니다. 여기에는 못미치지만 영국 왕족들도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맏손자이면서 최근 여왕보다 인기가 더 좋은 윌리엄 왕세손은 ‘케임브리지 공작(잉글랜드)’ ‘스트라선 백작(스코틀랜드)’ ‘캐릭퍼거스 남작(북아일랜드)’ 작위를 갖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그는 ‘케임브리지 공작’으로 불립니다. 케임브리지 공작은 1660년 당시 왕 찰스 2세가 조카에게 처음 부여한 작위입니다.
얼마전 부인 메건 마클과 함께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에 출연해 미국과 영국에서 핵폭탄급 화제를 일으킨 해리 왕손. 그는 ‘서식스 공작’이라고 불리는데 이외에도 ‘엄버턴 백작’, ‘카일킬 남작’ 작위도 있습니다. 서식스 공작이란 작위가 처음 만들어진 건 1801년 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다음 왕이 될 찰스 왕세자는 영국에서 ‘웨일즈공(Prince of Wales)’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연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지금의 영국, 즉 United Kingdom의 정식 이름은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입니다. 지역적으로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포괄합니다. 초기 앵글로색슨족은 앵글랜드 지역에 나라를 세웠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정복해 지금의 영국을 만들게 됩니다.
1272년 왕이 된 에드워드 1세의 공적 중 하나는 웨일즈 정복입니다. 그는 정복한 웨인즈 땅을 통제하기 위해 곳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 중 하나인 카나번 성에서 태어난 아들 에드워드 왕자(나중에 에드워드 2세)가 1301년 ‘웨일즈공’에 서임됐고 이후 이 명칭은 왕세자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정착합니다. 왕세자를 웨일즈공이라고 부르게 된지가 벌써 720년이 된 것입니다.
매년 3월 초 영국 재무장관이 관저인 다우닝가 11번지를 나올 때 문 앞에 잠깐 서서 빨간 가방을 얼굴 높이로 들어보이는 장면은 신성한 의식을 연상케 합니다. 이때 기자들의 사진기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집니다. 이 가방에는 재무장관이 그날 의회에서 발표할 예산안이 담겨 있습니다
▲3일(현지 시각) 리시 수낙 영국 재무장관이 2021년도 예산안을 발표하기 위해 다우닝가를 나서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재무장관의 빨간 가방이 등장한 건 1860년이고, 이 가방을 높이 들어 보이는 전통은 1868년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조지 와트가 의회에서 그 빨간 가방을 열었는데, 안에 있어야 할 서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후로 재무장관은 “예산안을 이 가방에 잘 넣고 나왔다”는 의미로 가방을 들어보인다고 합니다.
영국 왕은 매년 의회 개원 때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 가서 연설을 합니다. 왕은 백마 여섯 마리가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가는데 이때 왕실 근위대는 램프를 들고 의사당 지하를 수색합니다. 또, 여왕이 의사당에 가 있는 동안 하원 의원 중 한 사람은 ‘인질’ 신분으로 궁에 잡혀 있어야 합니다. 의사당 왕좌에 앉은 왕은 블랙로드(Black Rod)를 시켜 의원들을 불러오라고 명하는데, 블랙로드가 하원 회의실에 도착할 때 그의 눈 앞에서 문이 쾅 닫힙니다. 블랙로드가 지팡이로 세 번 문을 두드리면 그때서야 문을 열어줍니다.
이 하나하나 행동과 절차에는 스토리가 담겨 있고,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1605년 제임스 1세 때 왕과 의원들을 암살하려 했던 ‘화약음모사건’, 청교도 혁명으로 1649년 참수형을 당한 찰스 1세 때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과 에피소드, 교훈 등을 반영한 것입니다. 영국에서 이런 케이스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차고도 넘칩니다.’ 영국인들은 이런 역사와 전통, 관행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과거와 역사란 어떤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지나간 옛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와 함께 공존하는 삶의 일부라고 봅니다. 그런 의식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 같습니다. 사람들이 “영국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곳”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듯 합니다.
이런 나라에서 해리·메건 인터뷰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일각에선 영국 왕실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영국 민심은 오히려 해리·메건에게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입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해리와 메건 인터뷰 이후 미국과 영국의 반응이 완전 갈렸습니다.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 조사 결과, 미국에선 응답자의 44%가 “두 사람이 인터뷰에 응한 것은 적절하다”고 답했습니다.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은 20%였습니다. 반면, 영국에선 “부적절하다”는 응답이 47%, “적절하다”가 21%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다시 유고브가 영국인 4654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응답자의 36%가 영국 왕실에 더 공감을 한다고 했고, 해리·메건 부부에 공감한다는 답은 22%였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보기전부터 영국 왕실쪽 편을 드는 영국인들이 더 많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에게 왕실은 찬란했던 대영제국을 이끌고 지탱해온 정신적 지주입니다. 지금도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율은 70%를 넘을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그런 왕실에 대해, 그것도 여왕의 손자인 왕손이 왕실의 치부를 들추는 내용으로 방송에 나와 비난 인터뷰를 한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해리와 마클이 영국인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영어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I don’t think so(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입니다.
[4] 제국의 후예 다시 포효하다… 자유세계 ‘넘버2’를 향해
올해 3월 16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역사에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2016년 6월 23일과 함께 손에 꼽을 만큼 의미있는 날로 평가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날 보리스 영국 존슨 총리는 ‘글로벌 영국, 경쟁의 시대(Global Britain in a competitive age)’라는 정책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유럽연합에서 나와 홀로서기에 나선 영국이 앞으로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 핵심 전략을 담은 외교·안보 보고서입니다.
#1 핵탄두
가장 먼저 눈에 띈 내용은 핵무기입니다. 영국의 핵탄두는 공식적으로 180개인데 이를 260개까지로 늘린다는 것입니다. 공식적 숫자와 달리 영국이 실제 보유한 핵탄두는 더 많습니다. 스웨덴 안보 싱크탱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영국 핵탄두를 215개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현재 전 세계 핵무기 현황이 어떤지.
▲뱅가드급 전략원잠
전 세계 핵탄두는 1만3500여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가 6375개로 제일 많고, 미국은 5800개로 2위 입니다. 중국 320개로 3위, 프랑스 290개로 4위, 영국 215개로 5위 입니다. 이 다섯 나라는 NPT(핵확산금지조약)가 인정하는 핵보유국입니다. 이들 이외에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비공식 핵보유국은 인도(150개), 파키스탄(160개), 이스라엘(90개) 입니다. 최근 북한이 이 리스트에 끼고 싶어 안달이죠. 북한 핵탄두는 30~40개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핵탄두를 50% 가까이 늘리겠다는 건 외교·군사·안보 측면에서 앞으로 국제 무대에 큰소리를 치겠다고 공개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식 목표가 260개라면 실제 보유고는 300개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세계 3위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영국 핵무기는 모두 잠수함에서 발사합니다. 영국이 보유한 뱅가드급 전략원잠은 모두 4척인데 한 척당 8발의 트라이덴트 II D5 미사일을 쏠 수 있습니다. 미사일 하나에는 핵탄두 5개가 실립니다.
#2 중국, 그리고 아시아
또 하나 의미심장한 부분은 ◆중국을 ‘국가 단위로는 가장 큰 위협’이라고 규정하고 ◆인도태평양 지역과 군사적 협력 관계를 끌어올리겠다고 한 점입니다. 이 말은 영국이 “이제부터 글로벌 무대에서 센 역할을 할 건데, 특히 아시아쪽에서 활동폭이 커질거야”라고 예고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제국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가져볼만합니다. 영국은 왜 유독 아시아에 눈독을 들일까? 중동이나 아프리카, 남미가 아니고… 무역이나 경제 협력 관계가 가장 큰 유럽은 또 왜 아닐까? 영국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인도태평양, 즉 아시아가 향후 영국의 이해관계(정치적인 것이 됐든, 경제적인 것이 됐든)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고 판단했다는 것 아닐까요.
#3 7년전쟁
대영제국이란 이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제가 갖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왜 영국은 모든 전쟁에서 이겼을까”하는 것입니다.(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짜로 모든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중요한 순간, 즉 영국이 제국으로 올라서는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전쟁 중 하나가 7년전쟁(1756~1763)입니다. 전쟁이 7년 동안 계속됐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어떤 세계사 책은 거론하지도 않는 전쟁입니다만, 대영영국이란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전쟁 못지 않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대영제국이 확실한 기반을 닦으면서 그 윤곽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원래 유럽 내 전쟁이었습니다. 전부터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붙으면서 촉발이 됐는데,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이 서로 주판알을 튕기면서 합류해 국제전이 됐습니다. 프로이센은 영국과 손을 잡았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 등과 같은 편이 됐지요.
전쟁터는 유럽을 넘어 글로벌하게 확장됐습니다. 유럽이 이미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대세가 됐기 때문에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북미와 인도 등 식민지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치열하게 붙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나중에 이 전쟁을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불렀지요. 엎치락뒤치락 전세가 요동을 쳤는데, 결론적으로 영국·프로이센 편이 이겼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전 세계 식민지 판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은 북미와 인도 모두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면서 진정한 승자가 됩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서막이 화려하게 오른 것입니다. 특히 인도는 영국에게 그 어떤 식민지와 비교할 수 없는 값지고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신비한 동경의 대상이자 거대한 부의 원천이었습니다.
북미 대륙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7년 전쟁 직후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와 영국 사이가 크게 틀어져 다툼이 벌어졌고, 불과 13년 후인 1776년 아메리카는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전쟁까지 하게 되는데 영국은 프랑스 도움을 받은 미국에 패했지요.
하지만 인도 사정은 달랐습니다. 7년 전쟁 이후 인도는 완전히 영국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철저하게 종속된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1600년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세운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고, 대영제국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됩니다. 1877년부터 빅토리아 여왕의 호칭은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의 황제이신 빅토리아 폐하'가 됐다고 하지요. 그리고 109캐럿짜리 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르(페르시아어로 ‘빛의 산')가 왕관에 박혔구요.
▲코이누르
영국와 인도의 식민지 관계는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까지 이어집니다. 영국에 유난히 인도와 파키스탄 출신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런 오랜 역사적 배경 때문이지요.
이런 역사를 알게 되면서 7년 전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7년 전쟁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전쟁은 한 가지를 변경할 수 없게 결정지어 버렸다. 인도는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200년 동안 영국 무역의 거대한 시장이며 군사적, 인적 자원의 마르지 않는 보고가 될 것을 영국에 제공해 주었다. 인도는 ‘왕관 한가운데에 박힌 보석’ 그 이상이었다.”
아시아에 대한 영국의 ‘좋은 기억’은 인도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지역을 넘어 홍콩, 중국에까지 식민지를 확대합니다. 홍콩은 1997년에야 중국에 반환되지요.
영국이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계산이라면 그 핵심 내용 중엔 분명 아시아가 포함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과대한 상상은 아닐 듯 합니다.
#4 넘버2
지금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 진영과 러시아·중국 등 좌파 권위주의 진영이 거칠게 대립하는 형국입니다.
자유민주 진영은 지역적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북미, 독일·프랑스가 주축인 유럽, 호주·뉴질랜드를 대표로 하는 오세아니아, 한국과 일본의 동북아 등으로 나뉩니다. 지금까지 영국은 유럽에 속해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여겨졌는데, 앞으로는 단독 플레이를 적극 펼칠 전망입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과는 이념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 이해관계도 그렇고 항상 거리를 두고 있는 사이라는 점에서 향후 민주진영에서 영국이 넘버2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앵글로색슨이라는 인종적 동질성에다 사회주의 색채가 강하게 곁들여진 유럽과 달리 자유주의 이념과 시스템이 국가·사회 운영의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곳입니다. 영국은 이런 식으로 글로벌 흐름을 읽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영향력, 경제적 이익을 지키고 키우는 전략적 행동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출발점은 강한 군사력일테구요. 올 하반기에는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항모 전단이 아시아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5] “우린 유럽이 아니다” 처칠의 말에 다시 주목하는 이유
“우리가 코로나 백신에서 성공한 이유는 자본주의(capitalism)와 탐욕(greed) 때문입니다.”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의 한마디가 최근 유럽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존슨 총리가 ‘농담’이라고 둘러댔지만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많은 과학자와 공공 보건 전문가들에게 이 발언은 “불편하지만 사실 아니냐'는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 성공(Success)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19일(현지시간) 런던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아스트라제네카(AZ)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을 받은 뒤 두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유럽의약품청(EMA)이 아스트라제네카와 영국 옥스퍼드대학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의 안전성을 재확인한 이후 존슨 총리와 장 카스텍스 프랑스 총리 등이 이날 AZ 백신 1차 접종을 마쳤다. /연합뉴스
최근 전 세계 코로나 상황을 보면 존슨 총리 말이 근거 없는 것도, 과장도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듯 합니다. 영국이 성공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정도로 좋은 상태인 건 사실입니다. 영국은 1회 이상 백신을 맞은 사람이 3000만명을 넘었습니다. 18세 이상 접종 대상자만 보면 전체 인구의 60%에 육박합니다. 그에 따라 확진자도 다른 유럽국에 비해 현저하게 적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최근 7일 평균 하루 확진자는 4만명 수준인데, 영국은 5200여명에 불과합니다.
유럽 대륙에선 이 발언에 열받는 사람들이 꽤 많을 듯 합니다. 남들은 아직 비참하고 희망이 안보이는 상황인데 대놓고 ‘자랑질’ 하는 게 얄밉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 상처에 굵은 소금 팍팍 뿌리는 것처럼 말이죠. 더군다나 영국과 유럽연합(EU)은 최근 백신 공급을 놓고 꽤 거칠게 맞서고 있습니다. 영국은 원하는 만큼 백신을 받아 순조롭게 접종을 진행하는데, EU 국가들은 백신이 모자라 아우성입니다.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EU에 당초 계약만큼 백신을 제때 공급하기 어렵다고 한 상황이어서 EU측은 말그대로 폭발 직전입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영국과 스웨덴 회사가 합병해 만든 제약사입니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함께 백신을 만들었지요. 이 백신은 화이자, 모더나 등과 함께 현재 서구 진영에서 접종이 이뤄지고 있는 주요 제품입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이 백신을 맞고 있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백신 생산 공장이 영국에 두 곳, 유럽에 두 곳 있습니다.
EU측은 영국과 달리 EU엔 백신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느냐며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EU 지역에서 생산된 백신 7700만회분 중 2100만회분이 영국으로 넘어갔다는 통계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생산된 백신이 유럽으로 오지는 않는다면서요.
EU 내 강경파들은 EU 역내에서 생산된 백신은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수출을 통제하는 방안을 주장했지요. 이 방안은 최근 열린 EU 정상 회의 때 통과되진 않았습니다만, 최근 유럽의 살벌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 드골
▲1944년 8월 파리가 나치 치하에서 해방되자 개선문을 통해 입성하는 샤를 드골(가운데).
최근 영국과 EU 갈등을 보면 얼마전까지 한 지붕에 있었던 친구 맞나 싶습니다. 이렇게 으르렁거리는 사이인데 어떻게 47년이나 한 집에서 살았는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됩니다. 하지만 유럽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마찰이 낯선 광경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관계를 애증(愛憎)이라고 표현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증(憎)쪽이 약간 더 무게가 쏠린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가지 않고 우선 윈스턴 처칠 총리의 말을 들어보시죠. 1953년 5월 11일 하원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우린 우리만의 꿈과 과업이 있습니다(We have our own dream and own task). 우린 유럽과 함께 하지만 그들의 일부는 아닙니다(We are with Europe, but not of it) … 만약 영국이 유럽과 열린 바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린 언제나 열린 바다를 선택해야 합니다(If Britain must choose between Europe and the open sea, she must always choose the open sea).”
처칠은 너무도 명쾌하게 영국과 유럽 대륙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국이 유럽의 한 일원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 오히려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EEC·지금의 EU)에 가입합니다. 2차 대전 이후 조성된 글로벌 정세 속에서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2차 대전 때 함께 피를 흘리면 싸운 전우들이 드러낸 관계라고는 믿기 어렵지요.
영국은 1963년과 1967년 등 두 차례나 EEC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좌절됐습니다. 드골은 영국에 대해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영국은 언제나 미국의 편에 설 것”이라며 영국을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미국의 영향력을 끌어들이는 ‘트로이 목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서독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다른 회원국 설득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EEC 가입은 드골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야 성사됩니다.
# 정복왕 윌리엄과 백년전쟁
▲'타임라인' - 14세기 백년전쟁 속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좀 더 깊이 파고들다보면 정복왕 윌리엄(윌리엄1세·1028~1087)를 만나게 됩니다.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인들이 10세기에 영국과 마주보는 지금의 프랑스 북서부 지역에 ‘노르만인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습니다. 영국에서 알프레드 대왕 후손의 대가 끊기자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정당성을 인정받기엔 쑥스러운’ 혈통을 내세우며 자신이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066년 영국 남동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결국 영국 왕에 오릅니다. 그가 창업한 노르만 왕조는 영국은 물론 프랑스에도 엄청난 땅을 보유한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그의 외증손자 헨리 2세때는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아퀴텐, 가스코뉴 등 유럽 대륙에 있는 영토가 프랑스 왕의 땅 만큼이나 컸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헨리 2세의 아들 존 왕이 프랑스와 무모한 전쟁을 벌인 끝에 이 땅의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존 왕은 세계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대헌장을 탄생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잇따른 전쟁과 가혹한 세금 징수에 분개한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존 왕으로 하여금 대헌장에 서명하게 만들었지요. 존 왕 시대에 영국 왕의 프랑스 땅은 칼레와 아퀴텐 일부로 줄어들고 맙니다.
그로부터 약 1세기가 흐른 뒤, 오매불망 프랑스 땅을 못잊는 영국 왕들은 프랑스와 ‘백년전쟁(1337~1453)’을 벌입니다. 전세는 여러차례 엎치락뒤치락 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에 혜성같이 나타난 잔다르크의 눈부신 활약으로 프랑스는 결정적 승기를 잡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영국은 아퀴텐 마저 프랑스에 넘겨주고, 손바닥만한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 지역에서 쫓겨납니다. 현재의 영국과 프랑스의 영토 골격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이후 유럽 대륙에 대한 영국의 전략은 “그들끼리 싸우고 견제하게 만들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일종의 영국식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라 하겠습니다. 너무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나면, 그래서 혹시 영국이 공격받을 수도 있다면, 주변국을 부추기고 도와줘서 견제하게 만드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생존 경쟁이 치열한 국제 사회에서 영국의 진정한 우방, 친구는 누구일까요.
# 앵글로색슨
지난 2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통화한 뒤 기자들과 만났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중국과 그들(중국)이 벌이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에 대해 얘기했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세계 전역의 도움이 필요한 공동체들을 돕는,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도출된 (일대일로와 비슷한) 이니셔티브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영국 등 서구 국가들이 협력해 ‘일대일로’처럼 저개발국의 인프라 건설을 도와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을 존슨 총리에게 했다는 뜻입니다.
일대일로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집권 직후인 2013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국제 프로젝트입니다. 중국이 저개발국의 인프라 건설을 지원해 주고 무역과 상호 교류를 확대해 ‘신(新)실크로드’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습니다. 일대일로에 따라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등 전 세계 100여개 개발도상국에 중국 자본과 기업이 뛰어들어 도로와 철도, 항만, 통신 등 각종 인프라 건설 공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금융정보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작년 현재 일대일로와 관련된 프로젝트가 2600여개에 달하고, 투입된 돈은 3조7000억달러(약 4200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미국 등 서구 사회는 중국의 거침없는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고 이를 억제하려고 하는데, 이 일에 발동을 걸면서 미국이 가장 먼저 상의한 나라가 영국인 것입니다. 두 나라는 뭘 하든 가장 먼저 상의하고,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하는 형제 또는 동맹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모습은 앞으로 더욱 자주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함께 눈여겨 볼 국가들이 있습니다. 바로 ‘파이브 아이스(Five Eyes)’ 국가들입니다. 파이브 아이스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5국으로 구성된 정보협력체입니다. 재밌는 건 이들 국가가 모두 앵글로색슨의 나라라는 점입니다. 캐나다는 지난번 편지에서 다뤘듯이 7년전쟁(1756~1763)을 통해 영국이 프랑스를 쫓아냈지요. 호주는 1788년 죄수를 태운 영국 선단이 도착하면서 영국 식민지가 됩니다.
이들 나라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뿌리내리고 작동하는 곳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즘처럼 이념과 철학, 가치에 기반한 각 세력이 강하게 충돌하는 상황에서 누구보다 먼저 손을 잡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 국제 뉴스를 볼 때, 이 앵글로색슨족 국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6] 글로벌, 망상 또는 비전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즈(Foreign Affairs)가 최근 ‘글로벌 영국의 망상(The Delusions of Global Britain)’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영국이 지난달 16일 ‘경쟁의 시대, 글로벌 영국’이라는 외교·안보 전략보고서를 발표하자 ‘현타(현실자각타임)’을 가지라고 충고한 내용입니다. 잡지는 EU(유럽연합)라는 송장에서 해방된 영국이 이제 홀가분하게 ‘글로별 영국’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찾아나섰다고 하면서 영국이 좀 더 겸손함을 갖고 다음 장(chapter)에 접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글의 요지는 영국이 ‘미들파워(middle power)’로서의 역할을 자각하고 그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영국은 절대 이 충고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듯 합니다. 정계 지도자는 물론이고 재계나 사회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다수의 일반 국민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과 축하행사가 지난 2일부터 4일간 영국 전역에서 지속됐으며, 여왕의 거처인 버킹엄궁 주변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의 거리엔 150여만 명이 몰렸다.
# 마틴 울프와 니얼 퍼거슨
파이낸셜타임스의 경제 부문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75)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2017년 유럽 특파원으로 일할 때입니다. 울프는 ‘진정한 세계 최고의 금융·경제 평론가(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저널리스트(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만 41세가 되던 1987년 파이낸셜타임스에 입사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지요.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건 울프가 자신이 글로벌한 안목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할 때였습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이 영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특히 런던에서 태어난 것이 그를 ‘국제적’으로 만든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한 것입니다.
울프는 유태계 오스트리아 극작가 아버지와 유태계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 영향 덕에 지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영어 사용, 세계 최강 제국의 역사, 무역 강국의 전통, 국가 경제 규모가 작아 다른 세계 나라와 연계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 등은 영국을 자연스럽게 국제적으로 만든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런던만큼 세계를 봐야하고, 세계와 연결돼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57)은 자신이 영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성장했다고 털어놓습니다. 영제국 덕분에 퍼거슨은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친척들을 갖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온통 식민지 아프리카에 관한 것으로 채워졌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할아버지 존은 20대 초에 에콰도르에서 인디언들에게 철물과 밀주를 팔았다고 합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영국 공군 장교로 인도와 버마에서 일본인들과 싸우며 3년 이상을 보냈다고 합니다. 작은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보낸 편지는 전쟁 당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것으로 뛰어난 관찰력과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가득찼다고 합니다.
퍼거슨의 아버지는 의대를 마치고 가족들을 데리고 케냐 나이로비에 가서 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그 덕에 퍼거슨은 케냐와 관련된 많은 추억과 기억, 인상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목각으로 된 하마와 흑멧돼지, 코끼리, 사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한때 그의 가장 소중한 재산 목록이었다고 합니다.
# 제국의 푸딩
조지 오웰이 말했습니다. 제국 없는 영국은 “우리 모두가 아주 힘들게 일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식으로 살아야 하는 춥고 하찮은 작은 섬”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 영국인에게 전 세계 무대는 없어서는 안될 공기와 식량 같은 존재입니다.
20세기 초에 국왕의 요리사가 직접 정성들여 고안한 ‘제국 크리스마스 푸딩’ 조리법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니얼 퍼거슨의 책 ‘제국’에 나온 걸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씨 없는 건포도(sultanas) 500 그램 (오스트레일리아산)
씨 없는 작은 건포도 (currants) 500 그램 (오스트레일리아산)
씨를 뺀 건포도 (stoned raisins) 500 그램 (남아프리카산)
다진 사과 170 그램 (캐나다산)
빵가루 500 그램 (영국산)
소고기 기름 500 그램 (뉴질랜드산)
설탕에 절인 과일 껍질 170 그램 (남아프리카산)
밀가루 230 그램 (영국산)
달걀 4개 (아일랜드 자유국산)
계피가루 2분의 1 (실론산)
정향가루 2분의 1 (잔지바르산)
육두구 가루 2분의 1 (해협 식민지산)
푸딩 향료 소량 (인도산)
브랜디 1 큰술 (키프로스산)
럼주 2 큰술 (자메이카산)
오래된 맥주 0.5 리터 (잉글랜드산)
퍼거슨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맛있는 조리물의 구성은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제국이 있어야 크리스마스 푸딩이 있을 수 있다. 제국이 없으면 빵가루와 밀가루, 그리고 오래된 맥주만 있을 것이다.”
▲피시 앤 칩스
영국에 관해 얘기하다보면 많은 분들이 “영국엔 도대체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나”라고 묻습니다. 저도 그분들도 적어도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피시 앤 칩스(fish & chips).” 여기서 칩스는 수퍼에서 파는 감자칩 고구마칩 같은게 아니고, 햄버거에 같이 나오는 감자튀김입니다.
영국에 정착한 지 수십년 된 교포 몇 분께 불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엔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없지요?” 그랬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런던에 가면 얼마나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데…” 그 말엔 동감입니다. 런던 시내 또는 ‘하이스트리트’라고 하는 번화가에 가면 정말 많은 음식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도 음식, 중국 음식, 일본 음식, 동남아 음식, 이탈리아 음식 등 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피시 앤 칩스’ 말고 영국 음식 중 정말 맛있게 먹을만 한게 뭐가 있냐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치킨만 해도 그렇습니다. 영국에 ‘난도스’라는 치킨 전문 체인점이 있는데요. 저와 제 가족 입맛에도 그저 그런대로 먹을만 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치킨에는 상대가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치킨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을거라 자신합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가 런던에 한국식 치킨집을 해보자고 심각하게 논의한 적도 있습니다.
# 망상 또는 글로벌
영국이 포린어페어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달리 앞으로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국제적 이슈에 나설 것이라는 점은 100% 확실합니다. 문제는 이런 포부가 영국의 밝은 미래를 활짝 여는 ‘전략적 비전’으로 드러날 것인가, 아니면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인가일텐데요. 누가 그걸 알 수 있겠습니까만, 영국의 꿈이 비관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객관적 상황을 보면, 영국의 국토는 24만2495 ㎦로 세계 78위이고, 인구는 6790만명으로 21위 입니다. 하지만 국민총생산(GDP)은 미국과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위이고, 1인당 GDP는 20위 입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고, 핵탄두를 215개나 보유한 군사 강국입니다. 최근엔 퀸엘리자베스함 프린스오브웨일즈함 등 2척의 항공모함을 새로 보유하게 됐습니다.
이 정도의 역량을 가진 국가가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그 국민의 의지이고, 그것을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여부일겁니다. 여기서 저는 인구라는 요소를 꼭 눈여겨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 소호 거리에 인파가 붐비고 있다.
최근 구글 검색을 하다 깜짝 놀랐습니다. 유럽 주요국 소개를 보다가 영국 인구가 프랑스를 추월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인구는 작년 기준 6789만명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올해 3월 기준 6740만명입니다. 유럽 내 인구 톱은 여전히 독일입니다. 2020년 기준 8317만명입니다. 그동안 인구 기준 유럽 국가 순위는 언제나 독일-프랑스-영국 순이었습니다.
영국의 인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영국 인구는 오는 2043년 724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으로 전망되며, 어쩌면 영국이 독일도 추월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독일은 거의 인구가 늘지 않고 있으며, 어느 순간 급감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2015년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는 2080년 영국이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에 등극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현재 5182만명인데 오는 2029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2043년엔 5000만명에 턱걸이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이란 책에서 중국이 미국 패권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지만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 이유를 ‘셰일 오일·가스’와 함께 ‘인구 요인’을 거론했습니다. 중국은 늙어가고 있고 인구도 줄지만 미국은 상대적으로 젊고 어린 인구가 튼튼하게 받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국이 패권을 놓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 논리로 보면, 영국은 향후 유럽 내에서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감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전 세계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글로벌을 향한 영국의 꿈은 망상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지요.
[7] 영국 王家에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
영국 王家에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
“정말 대단히 걱정된다.”
지난달 16일(현지시각)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이 한 달간 입원해 있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서 퇴원한다는 외신이 전해졌습니다. 이튿날 조선일보 국제면에 전용차를 타고 병원을 떠나는 필립공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당시 저희 국제부 기자들은 놀랍도록 수척해진 필립공 모습을 보며 “이 분이 오래 살지 못할 수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로부터 24일 후인 지난 9일 필립공이 별세했다는 부고(訃告)를 접했습니다.
필립공은 지난 2월 16일 몸에 이상을 느껴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버킹엄궁은 일주일 후 필립공이 차도를 보인다고 하면서도 그가 어떤 문제 때문에 입원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코로나와 관련된 증세는 아니라고 했지요. 2주일 후인 3월 1일 필립공은 차로 약 20분 거리인 성 바돌로매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심장 전문 병원으로 유명한 곳인데, 필립공은 이 곳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의 몸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YONHAP PHOTO-4086> 심장수술 뒤 퇴원하는 영국 여왕 남편 필립공 (런던 AFP=연합뉴스) 심장 수술을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오른쪽)이 16일(현지시간) 차를 타고 런던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을 나서고 있다. 올해로 99세인 필립공은 지난 3일 심장 수술을 받은 뒤 이 병원에서 요양해왔다. sungok@yna.co.kr/2021-03-16 20:16:27/ <저작권자 ⓒ 1980-2021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아들 찰스 왕세자는 수시로 아버지께 전화도 하고 병문안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필립공은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낀 그는 런던 근교 윈저성에 있는 자신의 침대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1947년 이후 자신이 곁을 지켰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옆에서 말이죠.
# 윈저 왕가(王家)
윈저 왕가는 74년간 여왕을 지켰던 집안의 큰 어른을 잃게 됐습니다. 1917년 등장한 윈저 왕가는 역사가 104년 밖에 안되는 젊은 왕가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할아버지 조지 5세(재위 1910~1936)가 왕가 이름을 ‘작센·코부르크·고타’에서 ‘윈저’로 바꾸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개명(改名)에는 1차 대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무려 64년간 왕위에 있었던 빅토리아(재위 1837~1901) 여왕을 끝으로 하노버 왕조가 막을 내립니다. 이후 영국 왕조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공의 가문 즉, 작센·코부르크·고타 이름을 따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불립니다. 이 왕조는 햇수로 불과 14년만 존속합니다. 참고로 배우 윤여정씨가 11일(현지시각) 영화 ‘미나리’로 아시아 배우로는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그 시상식이 열린 ‘로열앨버트홀’은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을 기리며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1차 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 전장이 크게 확장됩니다. 독일이 프랑스로 진격하자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였습니다. 빌헬름 2세와 조지 5세는 사촌지간이었던 셈이죠. 독일이 유럽에 전쟁의 광풍을 일으키자 조지 5세는 영국 왕조가 독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되도록 지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이름을 고민한 끝에 왕실의 별궁인 윈저성 이름을 땄고, ‘윈조 왕조’가 막을 올리게 됩니다.
가문 이름이 윈저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의 가문 이름으로 바뀔 여지는 없었을까요. 실제로 필립공은 1952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때 가문의 이름을 자신의 성인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자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요.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의 사이가 한동안 서먹서먹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6일(현지시간) 영국의 에든버러 공작이 설계 한 윈저성의 정원이 40년만에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다. 윈저성의 정원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어린시절 일부를 채소밭으로 바꾸어 경작하기도 했다. 1971년 필립 왕자가 정원을 재 설계를 주도하며 많은 화단을 재배치하고 중앙에 새로운 분수를 설계했다.
윈저성은 1000년에 가까운 세월 영국 역사와 함께 한 고성(古城) 입니다. 등장은 정복왕 윌리엄(재위 1066~1087)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윌리엄은 영국을 침략하고 정복한 뒤 런던 서쪽 템스강변에 성을 세웠습니다. 처음부터 왕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고 윌리엄의 셋째 아들인 헨리 1세(재위 1100~1135) 때부터 왕궁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영국 청교도 혁명과 내전 때 의회파 군대의 사령부로 사용되면서 많이 파괴되고 훼손됐지만, 왕정이 복고된 이후 복원과 확장 공사 등을 거쳐 다시 웅장한 모습을 회복했습니다. 윈저성은 런던의 버킹엄 궁전, 에든버러의 홀리우드하우스 궁전과 함께 왕실의 공식 주거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주말을 주로 이곳에서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독일 혈통
왕조의 이름은 윈저로 바뀌었지만 지금 왕가의 뿌리는 하노버 왕조에 연결돼 있습니다. 하노버 왕조는 1714년 시작합니다.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에 이어 영국에선 하노버 왕조가 닻을 올립니다. 스튜어트 왕조가 앤(재위 1702~1714) 여왕을 끝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독일 하노버 공국의 절대 군주이자 9인의 선제후 중 한 명이었던 조지 1세는 스튜어트 왕가의 초대 왕이었던 제임스 1세(1603~1625)의 후손입니다.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해 낳은 딸이 소피아이고, 소피아가 하노버의 선제후인 어니스트 오거스터스와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조지 1세입니다. 그런 관계로 조지 1세가 졸지에 영국 왕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1714년 가을에 런던에 도착한 조지 1세는 영국인들의 환영을 받지만 그는 영국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영어는 말할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고 하네요. 이렇게 시작한 하노버 왕조는 조지 1세→조지2세→조지3세→조지4세→윌리엄4세→빅토리아 여왕로 이어져 내려갑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와서 영국 왕실과 하노버 왕국과의 동군연합(同君聯合), 즉 같은 왕을 섬기는 관계는 끊어집니다. 하노버 왕국은 남성 계승자만 인정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을 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왕위만 계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일 혈통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빅토리아 여왕이 독일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윈저 이야기 : 영국 왕실의 비밀’에도 이런 스토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인 만큼이나 독일적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어 실력이 영어 못지 않았다고 합니다. 독일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에드워드 7세(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증조 할아버지)는 ‘완벽한 독일인(completely German)’이었다고 합니다. 그 아들 조지 5세는 절반은 독일인, 절반은 덴마크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덴마크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조지 5세의 부인도 독일의 방계 왕가인 뷔르템부르크 출신입니다.
이 정도면 영국 왕가에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8] 이곳에 왕이 묻혔다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는게 하나 있습니다. 벽걸이 달력만한 크기의 한 장짜리 영국 왕위 계보도입니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기념품점에서 산 것인데,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가격은 10파운드(약 1만5500원) 안팎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은 영국의 왕과 여왕(Kings & Queens of England)입니다. 둘둘 말아놓았던 것을 거실 바닥에 놓고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라 똑바르게 찍히진 않았네요. 계보도를 보면 영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보는 듯 합니다. 영국인들이 자신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설명해주려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이 계보도를 보면서 영국이란 나라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왕위 계보도
최초의 왕은 에그버트(802-839)입니다. 그림에 나온 설명은 이렇습니다. “모든 영국인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색슨족 왕.” 여기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브리튼섬에는 로마인들이 떠난 이후 5세기 중엽부터 앵글로색슨족이 본격적으로 침입해 들어옵니다. 브리튼섬 남동쪽에 처음 세운 왕국이 켄트이고, 이후 서식스, 웨식스, 에식스, 노섬브리어, 이스트앵글리어, 머시어 등이 들어서 7왕국 시대가 열립니다. 이들 왕국 중에서 가장 힘세고 영향력 있는 나라의 왕을 ‘브레트왈더(Bretwalda)’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패왕(覇王) 또는 패주(覇主)의 개념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웨식스의 왕이었던 에그버트는 827년 이 브레트왈더에 등극, 브리튼을 호령합니다.
에그버트의 손자가 알프레드 입니다. 그림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대왕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 영국 왕 중에서 유일하게 대왕이라 불리는 사나이. 그 바로 밑줄에 적힌 한 문장에 눈길이 갑니다. “윈체스터에 묻혔다(Buried at Winchester).” 이제 알프레드를 찾아 여행을 떠날 시간입니다.
◇ 왕의 도시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약 90km 떨어진 윈체스터(Winchester)는 특파원 시절 꼭 가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중 하나였습니다.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중세의 판타지를 품고 있는 도시에 들어설 무렵엔 심지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열 살 꼬마가 처음 디즈니랜드에 발을 들여놓을 때, 커피 마니아가 미국 시애틀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에 갔을 때 이런 기분일까요.
인구 4만5000명, 도시라기보다 마을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 법한 이곳. 영국에서 손꼽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윈체스터 대성당엔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648년 처음 성당이 세워졌고, 1079년 재건축, 그 이후 500년에 걸친 증·개축을 걸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작가이자,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작가라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이 묻혀 있고, 중세 웨식스 왕국의 역대 왕들 유골이 합장된 함의 존재는 자석처럼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시내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그레이트홀(The Great Hall)’. 13세기 노르만 왕조 시절 건설된 이 건축물도 인기가 좋습니다.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원형 탁자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바로 아더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원탁(Round Table)입니다. 하지만 이 원탁이 실제로 아더왕과 기사들이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아더왕 자체가 전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레이트홀에 있는 아더왕의 원탁
무엇보다 이 도시가 제 마음을 설레게 만든 건, 이 곳이 바로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71~899)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앵글로색슨 왕국 시절 윈체스터는 웨식스의 수도였습니다. 앞서 잠깐 얘기한대로 웨식스는 9세기에 노섬브리어와 머시어 등을 제치고 7왕국의 맹주(盟主) 떠올랐습니다. 한편, 8세기 후반부터 브리튼섬에 바이킹들이 출몰하기 시작하고, 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이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집니다. 여러 왕국이 멸망했고, 앵글로색슨의 브리튼 시대는 곧 막을 내릴 듯 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바로 알프레드 입니다. 그는 바이킹 침입으로 태풍 앞에 놓인 촛불처럼 위태롭던 웨식스, 그리고 브리튼섬을 구하고, 결국 이 섬을 앵글로-색슨의 나라가 되게 한 주인공입니다. 어디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알프레드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부를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가진 첫 번째 사람이다.”
◇ 하이드 애비
2018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찾은 이 도시의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칼을 든 대형 알프레드 동상이었습니다. 1901년에 세워졌다는 이 동상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 동상
“웨식스의 왕 알프레드는 덴마크 침입자들을 웨식스에서 몰아냈다. 그는 곳곳에 요새를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윈체스터는 그의 수도였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알프레드는 영국 왕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학문과 수도원의 부흥을 장려했고, 영국 왕국의 기초를 놓았다.”
구름 낀 약간 흐린 날씨.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가 온다해도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영국 날씨가 그런 것이니까요. 작은 도심이라 충분히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대성당과 그레이트홀을 둘러본 뒤, 목적지 없이 걷다 한 도로 이름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킹 알프레드 플레이스.’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말이죠. “이곳 주변 어딘가에서 알프레드를 만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그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닐까.” 이때부터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길 끝에 ‘하이드 애비 가든’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 설명서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이드 애비 가든
“이 곳은 중세 하이드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수도원은 1110년에 설립됐고, 1539년에 해체됐다. 이 곳은 알프레드와 아내 얼스위드(Earswith), 그리고 아들 에드워드(King Edward the Elder, 899-924)가 묻혔던 장소이다.”
이 글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은 제 생애 가장 심장이 강하게 뛰었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글을 읽고 가든 안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십자가 표식이 셋 있습니다. 알프레드와 아내, 아들이 묻혔던 곳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후, 책과 자료, 인터넷 등을 뒤지면서 알프레드 흔적 찾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알아낸 내용은 이렇습니다. 899년 사망한 알프레드는 윈체스터 ‘올드 민스터’에 처음 매장됐습니다. 이후 그의 시신은 903년 ‘뉴 민스터’로 이장됩니다.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침략한 1066년 이후, 올드 민스터는 노르만 성당으로 대체되고, 뉴 민스터와 그 수도사들은 바로 성벽 너머에 있는 하이드 사원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바로 제가 갔던 그 장소입니다. 알프레드를 제외한 다른 왕들의 유골은 한 곳에 모아졌고, 오늘날 윈체스터 대성당 콰이어 스크린(Choir screen) 위에 있는 상자에 담겨졌다고 합니다. 알프레드의 할아버지 에그버트와 아버지 애설울프의 유골도 함께 섞여 있다고 합니다.
◇ 헨리 8세
알프레드의 유골은 400년 넘게 하이드 수도원에 묻혀 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인 헨리 8세 때 큰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헨리 8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도원을 탄압했고, 대부분을 폐쇄시켜버립니다. 하이드 수도원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지요. 이 얘기는 나중에 또 하게 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수도원 해산 이후, 하이드 수도원 자리는 개인 주택으로 바뀌었고, 알프레드의 무덤 자리라는 것도 한동안 잊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1788년에 이곳에 브라이드웰 이라는 교도소가 들어서는데, 죄수들이 돌들을 제거하다가 알프레드 무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게 누구의 것인지 몰랐고요. 관은 납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죄수들은 그 납을 팔아먹었고, 그 안에 있던 유골과 매장품을 다 비운 뒤 관을 해체해 텅 빈 상태로 다시 묻었다고 합니다. 알프레드의 유골은 이렇게 하이드 애비 주변 흙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하이드 애비 가든을 다 둘러보고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할 때 사나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땐 비를 그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영국의 비는 우리나라 장맛비와는 달리 그리 오래 내리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알프레드의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
[9] 제국의 해군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유럽 영웅들이 최근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200년 전 세상을 떠난 나폴레옹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그의 인생과 공과를 놓고 찬반 논란이 뜨겁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그가 폐지된 노예제를 8년 만에 부활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수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전쟁광이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나폴레옹을 ‘역사상 최악의 여성 혐오주의자’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미국발(發)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유럽에 퍼졌을 때 윈스턴 처칠(1874~1965)을 비롯해 올리버 크롬웰(1599~1658), 허레이쇼 넬슨(1758~1805) 등 영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됐습니다. 이들이 인종 차별과 노예제 지지 등의 전력이 있다면서요.
이런 비판이 전체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새로 등장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로 과거의 인물들을 재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고 때때로 반(反)역사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를 겨냥해야지 과거를 다시 쓰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고도 했지요.
◇ 트라팔가
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넬슨 제독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대영제국의 이순신’입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격파했지요. 해전이 벌어진 곳은 이베리아 반도 남단 지브롤터 해협 서쪽 바다였습니다.
▲탁월한 공적을 상징하는 훈장으로 가득한 넬슨 제독의 초상화.
당시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전열함(戰列艦)이 33척이었고,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27척이었습니다. 전열함은 배 옆구리에 함포를 쭉 배열해 놓고, 줄을 지어 항해하면서 적선을 공격하는 배입니다. 이 해전 결과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20척이 나포되거나 침몰했습니다. 영국 함대는 단 한 척도 잃지 않았습니다. 인명 피해도 차이가 컸습니다. 연합 함대에선 5000여명의 수병이 사망했는데, 영국 함대에선 250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넬슨 제독이란 인물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이 전투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적이 쏜 유탄에 맞아 전사한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넬슨 제독의 경우에도 양측 함대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중 상대 저격수가 쏜 총알 한 발이 넬슨의 폐를 관통해 척추에 깊숙이 박혔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순간 그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적 열세에도 전 세계 해전 역사에 남을 대승을 거뒀고, 치열한 전투 도중 장렬하게 사망한 넬슨, 이로써 그는 영국인 가슴에 가장 뛰어난 영웅 중 한 사람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대영제국이란 관점에서 보면 그의 위상은 더욱 빛납니다. 당시 유럽에선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고 영국을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영국마저 패했다면 이제 전 유럽은 나폴레옹 손에 들어갈 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꿈을 산산조각 낸 것입니다. 이 해전 이후 영국은 한 세기 동안 전 세계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이는 대영제국의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런던 중심가의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 넬슨 제독이 화이트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넬슨 제목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런던 시내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트라팔가 광장에 가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곳에 가면 화강암으로 만든 51m 높이의 기둥, 그 위에 5m 크기의 넬슨 제독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덤도 있습니다. 광장 한쪽에는 파리 오르세, 마드리드 프라도와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내셔널 갤러리가 있습니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지요. 참고로 내셔널 갤러리 관람은 공짜입니다. 여행사들이 이곳을 관광코스에 반드시 넣는 이유입니다.
◇ 해군
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해군이 없었다면 대영제국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해군을 얘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알프레드입니다. 대영제국이 절정기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에선 알프레드를 영국 해군의 창설자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선 생각과 평가가 상당히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섬나라인 영국에선 당연히 먹고 살기 위해서, 또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배를 이용해야 했을 경우가 너무나 많았을텐데, 과연 누구를 최초의 해군 창설자라고 부를 수 있겠나 하는 것이지요. 그 ‘누구’라는 존재보다 훨씬 더 일찍 배를 이용해 전투를 한 사람은 없었을까요. 제 생각으론 이런 평가에는 영국이 웨식스 왕국의 후손이라는 점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영국에선 이 문제에 대해 논란이나 이견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알프레드가 최초의 영국 해군을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언제 알프레드가 해군을 창설했느냐를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앵글로색슨이 브리튼섬을 본격 침략하던 시기는 영국 역사상 가장 ‘희미한’ 때로 평가됩니다. 그들은 원래 문맹이어서 자신들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켈트계 수도사 길더스의 기록이 당대에 쓰여진 유일한 사료라고 합니다. 그 외 역사가들이 이용하는 주요 사료로는 8세기에 노섬브리어 수도사 비드가 쓴 ‘잉글랜드인의 교회사’와 9세기말 알프레드 대왕 때 기록된 ‘앵글로색슨 연대기’ 등이 꼽힙니다.
또 웨일즈의 승려가 쓴 전기 ‘알프레드 왕의 생애(the life of king Alfred)’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중 ‘앵글로색슨 연대기’와 ‘알프레드 왕의 생애’ 등을 통해 영국 해군의 최초 활동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연대기 등에 따르면 875년 여름, “알프레드 왕은 해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일곱 척의 배를 맞아 싸워 그 중에 한 척을 사로잡고, 다른 배들을 모두 물리쳤다”고 합니다. 이때 싸운 적이 이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인인(Danes), 즉 노르만 바이킹들입니다.
▲26일(현지시간) 유럽 최대 규모 불 축제 '업 헬리 아'가 열려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친 후 커다란 보트를 불에 태우고 있다. 업 헬리 아 축제는 1200년 전 바다를 누비던 바이킹들이 셰들랜드 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시작한 행사로, 귀제즈라고 불리는 바이킹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퍼레이드를 펼친다.
알프레드 해군의 활약은 계속 이어집니다. 882년 알프레드는 다시 한 번 바다에 나타나 두 척의 배를 사로잡고 그 배에 탄 군사들을 모두 죽인 후, 다른 두 척의 배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또 3년 후인 885년에는 알프레드가 켄트에서 이스트 앵글리아로 ‘심판의 함대’를 파병하여 평화 조약을 깨뜨린 데 대한 보복으로 바이킹 배들을 약탈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 상황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들이(알프레드의 해군) 스투어(Stour)강 어귀에 도착했을 때 열세척(실제로는 열여섯 척)의 바이킹 배들이 즉시 전쟁을 준비하여 알프레드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해전이 이뤄졌다. 곳곳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모든 바이킹들이 죽었다. 그리고 바이킹의 모든 배들이 사로잡혔다.”
896년 한 해 동안 여섯 척의 바이킹 배들은 치고 달아나는 식으로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와이트섬 (Isle of Wight)과 도싯 해안을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가 심각하여 왕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프레드는 새로 만든 아홉 척의 함대로 바이킹들을 저지하고 부수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전체적으로 62명의 잉글랜드 해군이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고, 바이킹은 120명이 숨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알프레드는 대영제국이 성립될 수 있게 만든 가장 강력한 힘의 토대, 즉 영국 해군을 만든 존재로 우뚝 서게 됩니다. 고대 로마군 시대 이후 처음으로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해상 방위 군대를 창설한 영국의 지도자가 된 것이지요.
◇ 런던
알프레드의 자취는 육지에서도 선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영국 도시의 토대가 되는 중심지를 곳곳에 만든 일입니다. 그는 바이킹 등에 맞서 싸우려고 전국 곳곳에 버러(burgh)라는 요새를 만드는데, 이 버러가 나중에 영국의 주요 도시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런던이 웨식스 왕국에 편입된 것도 알프레드 대왕 시절입니다. 런던은 2000년이 넘는 도시입니다. 기원전 55년 브리튼서에 로마군이 나타납니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1만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를 침입했습니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뽐냈던 로마는 브리튼섬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이때 도로도 만들고, 도시도 만들었습니다. 템스강가에 만든 도시가 바로 론도니움, 지금의 런던입니다.
7왕국 시절 런던은 머시아 왕국의 도시였습니다. 주민들은 대부분 앵글족이었습니다. 런던 성벽 안에는 7세기 초 켄트의 애설버트 왕이 루드게이트 힐(Ludgate Hill) 위에 세운 세인트 폴(St Paul) 성당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색슨족 주민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런던이 색슨족의 웨식스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된 때가 알프레드 통치기였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앵글로 색슨 연대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886년 “알프레드가 런던을 정복했다.”
영국인들이 알프레드를 위대하게 보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바이킹을 물리쳐 앵글로색슨의 나라를 지켰고, 해군을 창설한 것 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요새를 만들어 현대 도시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민병대도 체계적으로 조직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더 이어집니다.
오늘 알프레드 두번째 이야기 여기까지입니다.
[10] 무슬림과 흑인이 런던시장을 놓고 겨룬 승부
지난주 실시된 영국 지방선거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런던시장에 출마한 주요 정당의 두 후보자 때문이었습니다. 노동당 후보로 나선 사람은 파키스탄계 무슬림인 사디크 칸 현 시장이었고, 보수당에선 자메이카계 흑인 숀 베일리를 내세웠습니다. 무슬림 대(對) 흑인의 대결 구도였던 것이지요. 두 사람 모두 제3 세계 출신의 소수 유색인종 이민 2세라는 점은 누가 당선되느냐를 떠나 그것 자체로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이벤트였습니다.
◇ 무슬림 대 흑인
그렇게 보수적이라는 영국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을 했을까요. 더군다나 집권 여당인 보수당이 흑인을 런던 시장 후보로 내세우다니. 선거 결과는 런던이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데다 현 시장이라는 프리미엄까지 갖춘 사디크 칸 시장이 55.2%를 득표해 44.8%를 얻은 베일리 후보를 꺾었습니다.

▲사디크 칸 영국 런던 시장이 8일(현지시간) 재선이 확정된 뒤 런던 시청에서 연설하고 있다. 지난 6일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 개표 결과 노동당 소속의 칸 현 런던 시장이 55.2%의 지지를 받아 보수당의 숀 베일리 후보(44.8%)를 꺾었다. /연합뉴스
두 사람 모두 전형적인 흙수저입니다. 칸은 1970년 런던 남부 투팅 지역의 파키스탄 이민자 가정에서 7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시내버스 기사, 어머니는 재봉사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 학기 중엔 신문 배달, 방학 때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노스런던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인권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 1994년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런던 시장 선거 D-1 유세하는 베일리 영국 보수당 후보. /연합뉴스
숀 베일리도 빈곤층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그의 가족은 조부모와 고모, 삼촌 등과 함께 공공임대주택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비행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방송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강도짓을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집안 살림이 넉넉치 않으니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지요.
축구장 경비원과 공장 청소원, 맥주 배달원 등으로 일을 해서 돈을 모은 뒤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진학했고,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처럼 행복하지 못한 시절을 보내는 청소년들을 위해 2006년 ‘마이제너레이션’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했고, 이를 배경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보수당 총선 승리를 이끈 뒤 총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이 그를 청소년 범죄 담당 보좌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자기가 태어난 모국(母國)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을 합니다. 정치적인 이유, 또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최강’ ‘세계의 중심’을 자부했던 영국이기에, 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몰려든 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재밌는 건 최근에도 영국으로의 이민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이민자들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것을 뜻하는 ‘브렉시트(Brexit)’를 감행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이민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는 영국인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엔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우선, 영국인들이 갖고 있는 불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을 속속들이 들여다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교육과 의료, 두 분야에 대해 영국인들이 대단히 불평을 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속살이 드러났는데 영국 보건·의료 분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대단히 취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영국에선 병원이 모두 무료 입니다. 이 거대한 의료 체계를 유지하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 수준을 높이는게 대단히 어렵습니다.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부문 종사자들에게 넉넉하게 월급을 주기도 쉽지 않습니다. 한정된 돈으로 운영해야 하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돌려야 하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처럼 한꺼번에 의료 수요가 폭발하는 경우엔 그게 감당이 안됐던 것이지요.
교육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전체의 7%를 차지하는 사립학교와 일부 성적이 우수한 학교(예를 들어 그래머 스쿨)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반 공립 학교의 교육 서비스 수준이 아주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학부모들의 불만도 클 수 밖에 없구요.
브렉시트 찬성론자들은 이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EU에 내는 돈이 매주 3억5000만 파운드(약 5500억원)에 달한다. 왜 이런 엄청난 돈을 EU에 내야 하느냐. 브렉시트가 되면 이 돈을 영국의 의료와 교육에 쏟아부을 수 있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주장도 합니다. “영국에는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온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교육과 의료 혜택을 다 받으니, 우리(영국인)에게 돌아오는 몫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고요.

▲최근 프랑스 북부에서 불법 이주민들의 영국 밀입국 시도로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칼레에서 난민들이 유로터널로 이어지는 길목에 서 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영국은 EU에 어마어마한 돈을 보낸다. 한편, 엄청난 이민자들이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들 때문에 우리 교육과 의료가 엉망이다. 브렉시트를 하면, EU에 돈을 안 보내도 되고, 영국에서 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골칫덩어리인 이민자들을 차단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대단히 파워풀했고, 대영제국에 대한 영국인들의 향수와 맞물리면서 결국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브렉시트 찬성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이런 주장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대표적인 거짓이 매주 EU에 보내는 돈이 3억5000만 파운드라는 것입니다. BBC와 뉴욕타임스 등 영국과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팩트체킹에 나섰는데요. 영국이 EU 회원국으로서 실제로 내는 돈은 1억5000만 파운드(약 2380억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영국이 일단 돈을 낸 뒤에 여러가지 보조금 명목으로 다시 돈을 돌려받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 과학, 농업 등 분야에서 다양한 보조금을 EU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브렉시트 투표가 끝난 뒤 탈퇴파들은 발빼기·잡아떼기 신공을 보여줍니다. 탈퇴파였던 리엄 폭스 전 국방장관은 “투표 전에 얘기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실(fact)’로는 이민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EU 28국 중에서 유독 영국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특히 폴란드 등 동유럽 사람들이 영국을 행선지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독일이나 프랑스, 스페인 등이 아니고 꼭 영국이었을까요. 세 가지를 꼽고 싶습니다. ①파운드화(貨) ②치안 ③ 영어와 교육 입니다.
◇ 영어
우선 파운드화. 영국은 다른 EU 회원국과 달리 독자적인 화폐를 유지했습니다. 이 파운드화는 전 세계 모든 화폐 중 가장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월 7일 현재 1파운드는 한국 원화로는 1558.56원(하나은행 기준) 입니다. 미국 달러화로는 1.39달러이고, EU의 유로화로는 1.15 유로 입니다. 따라서 동유럽에서 온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서 번 파운드화를 모국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낸다고 가정할 때, 다른 유럽 나라에서 일해서 보낼 때보다 더 많은 돈을 가족이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특파원 근무 때, 저희 가족이 세들어 살던 집 관리인은 불가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있을 땐 하루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날 먹고 살았다. 그런데 영국에 오니 하루 벌어서 고향 가족이 한 달을 먹고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고향에 부친은 평생 차 딱 한대를 사서 탔는데, 본인은 벌써 4번째 차를 타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둘째는 안전 입니다. 영국은 다른 유럽 나라보다 치안 사정이 낫습니다. 2015년 이후 유럽에서는 테러가 아주 많이 발생했습니다. 바타클랑 극장 등에서 130명이 사망한 파리 연쇄 테러(2015년 11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에서 18t 트럭이 시민들을 덮쳐 86명이 숨진 니스 트럭 테러(2016년 7월), 연말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을 공격해 12명이 사망한 베를린 트럭 테러(2016.12), 벨기에 브뤼셀 지하철역과 국제공항에서 연쇄 폭탄 테러로 34명이 숨진 벨기에 브뤼셀 테러(2016년 3월)…. 당시 유럽에선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크고 작은 테러가 터졌습니다. 특히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테러는 소총과 폭탄, 대형 트럭 등이 사용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에서 발생하는 테러는 주로 칼을 이용한 것으로 사상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또 영국은 경찰력이 아주 강력하고, 정보기관도 적극적으로 활동해 대형 테러나 범죄를 미리 막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가족과 함께 살 나라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안전한 나라를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인도의 한 다국적기업에서 현지 직원들이 영어 교육을 받고 있다.인도는 힌디어문학이 위협받을 만큼 영어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영어입니다. 당시 브렉시트를 취재하면서 이민자들, 특히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영국에 온 사연은 저마다 다양했는데, 특히 자녀를 데리고 온 경우는 빠지지 않고 거론한 것이 영어였습니다. 영국에 가면, 비록 좋은 학교는 아니더라도 학교에 보내서 아이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 자녀를 유학보낸다면 미국이나 영국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특히 영국식 영어는 미국과는 좀 다르죠. 다른 것 뿐 아니라, 좀 더 품격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종주국이라는 자부심도 있고요. 한번은 영국인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영국인들이 미국 사람들의 영어 발음을 놓고 농담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고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실제로 영국 사람들이 미국식 영어를 그렇게 생각하는구나하는 점을 직접 겪으니 묘한 감정이 일더라구요.
영국에 정착한 앵글로색슨이 중세 때 자신들의 고대 영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알프레드 대왕이 또 등장한다는 얘기는 다음번 마지막 알프레드 이야기 때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1] 제국의 세종대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만났는데, 잠깐 딴 생각을 하다 여왕이 방금 한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나름 영어를 수십년동안 배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는 ‘pardon’ 입니다. 그런데 여왕님께 “Pardon?”이라고 한 단어로 짧게 말하면 완전 예의 없어 보일 것 같아 고민입니다. 좀 더 머리를 굴려 길게 말해 봅니다. “Beg pardon” 또는 주어, 동사, 목적어까지 다 넣어서 완전 문장으로 “May I beg your pardon?”이라고 말하면 아주 뿌듯할 것 같습니다.
◇ 세손빈 케이트 미들턴의 엄마
하지만 이건 착각입니다. 영국 왕실에서는 이럴 때 “What?”이나 “Sorry?”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pardon’이란 단어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계층 출신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볼 때도 대단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체면 구기지 않으려면 적절한 단어를 써야 하는데 ‘toilet’을 쓰면 안된다고 해요. 대신 ‘lavatory’나 ‘loo’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 첫 공식 연설장에 파란 원피스 입고 나온 케이트 미들턴-오른쪽은 2010년 경마장에 등장한 케이트의 어머니
실제로 여왕 앞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해 구설수에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 세손빈의 어머니입니다. BBC에 따르면 미들턴의 어머니는 양가 상견례 자리에서 ‘pardon’과 ‘toilet’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는 실제로 당시 영국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영국의 인류학자이자 ‘Watching the English’의 저자인 케이트 폭스는 이외에도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향수는 ‘perfume’이라고 하지 않고 ‘scent’라고 한다고 해요. 거실을 말할 때는 ‘sitting room’이나 ‘drawing room’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lounge’라고 말했다간 당장 “신분이 낮은 사람이군”이란 평가를 받게 됩니다. 또 영국에서는 저녁을 ‘tea’라고도 말하는데, 상류층에선 이 단어 대신 ‘supper’나 ‘dinner’를 쓴다고 합니다. 영어도 같은 영어가 아니네요.
이렇게까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당연히 영어가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대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영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 호주 등을 비롯해 19국이고, 정부 기관 등에서 공식 언어로 쓰는 나라는 40여국에 달합니다. 그외에도 영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 셰익스피어
지난 3월말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의 불륜 과거가 또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존슨은 그 만큼 염문을 많이 뿌린 해외 정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인물입니다. 첫 결혼은 옥스퍼드 동창과 했는데 6년 후 한 변호사와 불륜이 드러나면서 이혼했지요. 이 변호사와 25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자녀 4명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도로 부부는 불화가 잦았다고 합니다. 존슨이 런던 시장 시절 모델 출신의 미국 사업가 제니퍼 아큐리와 4년간 불륜 관계였다고 하고요. 지금은 역시 런던 시장 때 홍보 책임자로 썼던 캐리 시먼즈와 동거중입니다.
이번에 존슨의 과거가 다시 화제가 된 건 그 동안 불륜 의혹을 인정하지 않던 제니퍼 아큐리가 영국 일간 선데이미러 인터뷰에서 자신과 존슨이 혼외 정사를 즐겼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두 사람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인터뷰 내용 중 한 부분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존슨이 부인과 살던 집에서 함께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은 뒤 성관계를 나누기도 했다.”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최고의 쾌락을 위해 두 사람이 호출한 사람이 셰익스피어였다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문호로 평가받는 셰익스피어가 왜 여기서 나올까요. 그만큼 셰익스피어는 영국인들의 삶 곳곳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는 뜻일까요. 사실 영어를 말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빼놓는다면, 팥 없는 찐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작가입니다. ‘햄릿’ 등 4대 비극을 비롯해 38편의 희곡과 시집, 소네트집을 냈습니다. 그는 영어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인물입니다.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로 인정받는데 그의 공이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856년 설립된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과 함께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를 오는 29일부터 8월 15일까지 연다고 26일 밝혔다. 사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화. /연합뉴스
한편, 엘리자베스 1세 통치기는 근대에 접어든 영국의 국력이 위용을 드러낸 때였습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킨 아르마다 해전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78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기독교 세력의 실지·失地 회복운동, 711~1492)를 완성하고, 레판토해전(1571)에서 오스만투르크 해군을 박살 내 무적함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막강 해군을 보유한 당시 유럽의 최강 대국이었죠. 그런 스페인을 엘리자베스 여왕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겁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는 군사력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과 경제, 철학 등이 함께 꽃을 피웠는데요. 문학·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윌리엄 캠던의 ‘브리타니아(1586)’, 프랜시스 베이컨의 ‘수상록(1597)’, 에드먼드 스펜서의 ‘목자의 달력(1579)’ 등 수 많은 산문과 역사서, 수필, 시집이 쏟아졌습니다.
1574년에는 최초의 극단이 설립되고, 2년 후에는 런던에 첫 극장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어떤 역사책은 “오늘날의 영어는 바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이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도 평가합니다. 당시를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셰익스피어입니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였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총 2만8829개의 단어가 사용됐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영어 단어가 1700여개나 등장한다고 하네요. 영국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힘든 건 그들이 문학 작품,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 표현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욕할 때도 문학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힐러리 클린턴을 비판할 때 “아주 나쁘다(too bad)” “부패하고 일그러진 힐러리(crooked Hillary)”라고 했는데요, 존슨 영국 총리는 “머리는 금발로 염색한데다 부루퉁한 입술, 쏘아보는 차가운 눈빛, 정신병원의 새디스틱한 간호사”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재영 작가인 권석하씨가 쓴 책 ‘영국인 재발견2’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구절을 유효적절하게 대화에 사용하는 방식을 ‘셰익스피어식 모욕주기(Shakespeare Insult)’”라고 한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영국 문학과 영어… 이 언어의 발전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기여를 했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이 분의 존재감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감동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 영국의 세종대왕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임금을 꼽으라면 누구일까요. 사람마다 생각과 평가가 다르겠지만 아마도 세종대왕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바로 훈민정음(1433), 즉 지금의 한글을 창제하신 일이겠지요.
영국에서 세종대왕 같은 업적을 남긴 분이 바로 알프레드 대왕입니다. 영국인들이 영어와 학문을 말할 때 꼭 거론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영국인들의 추앙을 받는 건 바이킹 세력으로부터 웨식스와 영국을 지키고, 해군을 창설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학문과 영어를 진흥시킨 업적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 지도자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나라를 이끄느냐가 왜 중요한지 알프레드를 통해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알프레드는 ‘모든 잉들랜드의 자유민들이 영어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 인물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국내외에서 훌륭한 학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자들을 모으고 학문 부흥에 나선 것처럼, 알프레드도 궁정과 수도원에 지식인과 학자들을 초빙하고 배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책 ‘목회적 돌봄’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종종 내 마음에는 예전에 잉글랜드 전역에 어떤 학자들이 있었으며… 그 시기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알프레드의 첫 영입 대상은 머시아 왕국에 있는 우스터의 대주교 웨페르스였습니다. 나중에 그레고리우스의 ‘대화’를 영어로 번역한 인물입니다. 이어 체셔 지방의 은자였던 플레그문드를 영입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웨일즈의 수도사였던 애서, 성베르텡 수도원의 학자 겸 수도사인 그림발드, 프랑크 왕국의 올드 색슨 존, 머시아의 또 다른 두명의 인재 애설스탠과 워울프… 알프레드의 인재 욕심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
알프레드가 데려온 학자들은 자료를 모으고 번역하고 책을 썼습니다. 알프레드는 “모든 사람이 꼭 알아야 할 가장 필요한” 책들을 모두 영어로 번역하길 원했습니다. 당시 성서와 역사서 등 주요한 책들은 모두 라틴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사람들에 대한 최초의 역사서 ‘영국의 교회사’도 라틴어로 쓰여져 있었으니까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14세기 때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인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는데 교황은 이 죄를 물어 그의 사후에 시신을 파내어 뼈를 갈아 강에 뿌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위크리프의 계승자인 얀 후스는 기둥에 매달려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500년 전에 이미 알프레드는 각종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지요.
◇ 진면목
887년 11월 11일 토요일 ‘성 마틴의 날’. “앵글로·색슨 왕 알프레드가 신적인 영감으로 말미암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라틴어를) 한 번에 읽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애서가 쓴 ‘알프레드 왕의 생애’가 묘사한 이날 장면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프레드는 평소 학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자신 앞에서 큰 소리로 책을 읽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알프레드는 평소에도 “영어책을 큰 소리로 읽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시를 외우는 일 등을 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핸드북’이라고 불리는 공책에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알프레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직접 번역에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이 초빙한 학자들로부터 라틴어를 배웠고, 라틴어로 된 책들을 직접 영어로 옮겼습니다. 전 세계 어느 왕이 이런 일을 했을까요. 그것도 지금부터 1200년도 더 옛날에 말이죠. 알프레드는 자신이 번역한 한 책의 서문에 “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의미 있게 살다가, 생이 다한 후에는 후대에게 내가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는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알프레드의 첫번째 번역 작품은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목회적 돌봄’이었고, 이어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 등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성서의 시들을 번역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번역과 책 편찬에는 통치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자신의 통치력이 영향을 미치기 위해선 자신의 뜻이 담긴 영어 법전이 필요했고, 이 법전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가 잉글랜드의 국민들을 위해 영어 보급에 나선 것은 분명합니다. 일부 소수의 사람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모든 국민들이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에게 지혜보다 더 선한 것은 없으며, 무지보다 더 악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알프레드가 번역한 ‘독백’ 중에서)
알프레드의 마지막 세번째 이야기 여기까지 입니다.
[12] 왕의 시대가 저물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 29일 세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64년생으로 그의 나이 올해 만 57세, 부인이 된 캐리 시먼즈는 1988년생 만 33세입니다. 24년 나이차를 넘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지요. 현직 총리가 재임 중 결혼한 것은 1822년 당시 토리당 소속이었던 로버트 젠킨슨 이후 무려 199년만입니다. 두 사람은 미혼 상태로 동거를 하다 작년 4월 아들을 낳았고 이번에 정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번 결혼식은 ‘전격작전’처럼 비밀리에 신속하게 치러졌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극소수에게만 알려졌다고 합니다. 총리실 관계자들도 몰랐다고 합니다. 하객은 30명으로 제한됐는데 코로나 방역 규칙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네요. 당초 두 사람은 내년 여름에 결혼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타블로이드 신문 ‘더선’이 최근 두 사람이 내년 7월 30일에 결혼할 것이며 청첩장을 주변에 뿌렸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보도가 나온지 엿새만에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보리스 존슨(56) 영국 총리가 29일(현지시간) 23살 연하인 약혼녀 캐리 시먼즈(33)와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지인 30여 명만 초청한 채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총리실이 30일 확인했다. 사진은 결혼식 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실 정원에서 찍은 사진. 영국의 총리가 재임 중 결혼한 것은 1822년 리버풀경 이후 199년 만에 처음이다. [영국 총리실 제공] /연합뉴스
이번 결혼식을 포함해 존슨 총리는 최근 여러가지 일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존슨의 오른팔이었던 도미닉 커밍스 전 총리실 수석보좌관이 그와 완전히 갈라선 이후, 그를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존슨이 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를 너무 우습게 생각해 봉쇄 조치를 너무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수만 명의 영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존슨이 작년 가을 2차 봉쇄령에 반대하면서 “차라리 시체가 높이 쌓이게 방치하겠다”고 말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가전업체 다이슨의 제임스 다이슨 대표에게 세금 감면을 약속하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존슨 총리 관련 뉴스들을 보다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건 영국 총리의 연봉이 우리나라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사실입니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의 연봉은 2억3822만7000원입니다. 작년보다 2.8%가 올랐습니다. 존슨 총리는 2020~21 회계연도에 총 15만7372파운드를 수령했다고 지난 4월말 BBC가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기준 환율(하나은행) 1580.74원으로 계산하면 약 2억4876만원입니다. 최근 파운드 환율이 올라서 이런 금액이 나온 것이구요. 지난 1년 중 가장 낮았던 작년 12월 11일의 환율 1441.28원로 계산하면 대략 2억2682만원입니다.
◇ 총리 연봉 對 대통령 연봉
흥미로운 점은 존슨이 받는 연봉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총리직에 따른 보수인데 존슨은 이 명목으로 7만5440파운드를 받았습니다. 둘째는 하원의원 자격으로 받는 봉급으로 8만1932파운드였습니다. 결국, 영국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받는 보수는 1억원을 약간 넘는 수준인 셈입니다. 영국 물가를 말할 때 흔히 ‘살인적’이라는 표현을 상투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물가를 감안할 때 영국 총리의 연봉은 높은 걸까요, 낮은걸까요. 적어도 존슨 총리 자신은 상당히 낮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그는 주변 친구들에게 “(연봉이 너무 적어) 총리직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불평하곤 한다고 하네요.
영국 총리는 거주와 연관된 여러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관저에 사는 동안 전기세와 난방비, 각종 수리비 등을 내야 합니다. 다만, 이 금액은 총리직에 따른 보수의 10%를 넘지 못하게 돼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1년에 8000파운드를 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리고 총리는 관저를 새단장할 때 최대 3만 파운드를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존슨은 개인적인 수입도 있습니다. 런던과 소머셋에 있는 집의 지분을 각각 50%, 20%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1년에 1만 파운드 정도 월세 수입이 있다고 합니다. 인세 수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처칠에 관한 책 등을 썼는데요. 이런 인세로 2020년 3월부터 2021년 3월까지 2만3500파운드를 벌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그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산과 수입은 얼마나 될까요. 이 문제는 다음에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영국의 총리 얘기를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 명예혁명과 하노버왕조
영국의 첫 총리는 누구일까요. 그를 만나려면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또 그 배경으로 명예혁명을 얘기해야 합니다.
백년전쟁(1337~1453)과 장미전쟁(1455~1485)을 치른 뒤, 영국의 왕조는 튜더 왕조(헨리7세→헨리8세→에드워드6세→메리1세→엘리자베스1세)와 스튜어트 왕조(제임스1세→찰스1세→찰스2세→제임스2세→메리2세·윌리엄3세→앤)로 이어집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4번째 왕인 제임스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가톨릭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의회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가톨릭을 제외한 비국교회와 상인층을 대표하는 휘그당은 물론이고, 지주층과 국교회를 대표하면서 국왕의 대권을 지지했던 토리당과도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던 왕비 모데나가 왕자를 출산합니다. 영국의 종교계와 의회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왕과 왕비, 여기에 대를 이어 가톨릭을 믿는 또 다른 왕이 뒤를 잇는다면…. 그들에겐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윌리엄3세와 메리2세
1688년 6월 30일 밤 토리당과 휘그당, 종교계를 대표하는 7명의 지도자가 서명한 밀서가 런던을 출발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와달라는 내용이 담긴 이 편지는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 3세에게 전달됩니다. 윌리엄은 국왕인 제임스 2세의 딸의 남편입니다. 사위인 것이죠. 동시에 그는 찰스 1세의 외손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는 군주였지요. ‘영국으로부터의 초청’을 받은 윌리엄은 그해 11월 보병 1만2000명과 기병 4000명을 이끌고 잉글랜드 남서부 토베이에 상륙했고, 이에 놀란 제임스 2세는 싸울 의욕을 잃고 프랑스로 쫓겨나게 됩니다. 딸과 사위에 의해 쫓겨나는 가련한 신세가 된 것이지요. 이 역사적 사건이 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우는 ‘명예혁명’입니다.
이듬해 의회는 윌리엄과 그의 부인 메리 2세를 영국의 공동 왕으로 옹립했고, 그 유명한 ‘권리장전’이 등장합니다. 이 권리장전에 따라 영국의 주권은 국왕에서 의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전제군주정에서 지금과 같은 입헌군주정 시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좀 더 극적으로 말하면 왕이 시대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의회와 내각, 그리고 총리의 시대가 개막합니다. 그와 함께 대영제국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게 됩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고 향후 30~40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게 됩니다.
권리장전 내용에는 왕위 승계 서열도 규정했는데, 윌리엄·메리 다음에는 그들의 자녀, 그 다음은 메리의 동생인 앤, 그 다음은 앤의 자녀 순으로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메리는 뒤를 이을 자녀가 없었기에 왕위는 앤으로 넘어갔고, 앤 또한 왕위를 이을 자녀가 없어 결국 다음 왕위는 하노버 왕국의 절대군주이자 9인의 선제후 중 한 명이었던 조지1세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영국에는 하노버 왕조 시대가 열립니다. 조지 1세는 제임스 1세의 외증손자입니다.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가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했고, 이들의 외손자가 조지 1세입니다.
◇ 로버트 월폴

▲로버트 월폴
54세에 영국 왕이 된 조지 1세는 영국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제왕이었던 하노버 일에 더욱 열심이었지요. 이 때문에 영국 왕에 오른지 몇 년이 안돼 영국 내각회의에는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다음 왕인 조지 2세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국왕이 없는 내각회의는 여러 대신 가운데 한 명이 주재하게 되는데, 이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로버트 월폴입니다. 바로 영국의 초대 총리(prime minister)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통상 1721년부터 1742년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동료이자 매부였던 타운센드와 권력을 분점하다 조지 2세 즉위 이후 타운센드를 제거한 다음에는 권력을 혼자 독차지합니다. 그는 1742년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영국 총리실 관저를 흔히 ‘다우닝가 10번지’라고 하는데요. 이 건물에도 월폴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청교도 혁명을 이끈 올리버 크롬웰의 참모 중에 조지 다우닝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와 가까운 지역을 눈여겨보다 1684년 거리를 조성하고 집을 지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거리가 ‘다우닝 거리(Downing Street)’로 불리게 됩니다. 이 거리의 10번지가 바로 지금의 총리 관저입니다. 1732년 당시 왕인 조지 2세가 월폴에게 이 집을 선물하려 했고, 월폴은 “정부에 하사해서 재무장관의 거처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합니다. 이에 따라 재무장관들이 18~19세기에 이 곳에서 살았고, 총리는 이곳에 집무실만 뒀다가 1877년 총리가 입주하면서 총리 관저가 됐다고 합니다.
[13] 앵글로색슨 동맹의 업그레이드
올 가을 세계가 갑자기 잠수함 문제로 떠들썩합니다. 북한이 최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 발사에 성공, 동북아 정세에 큰 파문을 일으켰지요. 북한 잠수함과 탄도미사일은 우리나라엔 극히 예민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더 큰 화제가 된 것은 미국과 영국, 호주 등 3국이 ‘오커스(AUKUS)’라는 안보 동맹을 만들고, 이들이 첫 프로젝트로 호주의 ‘핵(核)잠수함’ 전단 창설을 추진키로 한 소식이었습니다. 오커스는 호주(A)와 영국(UK), 미국(US)의 국명에서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글로벌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자 할 때 ‘오커스’만한 좋은 소재가 없는 듯 합니다.
◇중국, 그리고 핵잠수함
우선, 오커스가 왜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많은 설명과 코멘트, 해석이 있겠지만 핵심은 이 동맹이 중국을 겨냥했다는 점입니다. 정치인들의 수사는 빼고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익명을 요구한 백악관 관계자의 코멘트였습니다. 이 관계자는 “오커스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고안됐다”라고 했습니다. 솔직한 고백이지요. 물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오커스 창설 발표 때나 그 이후에도 다른 나라 이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요.
두번째 포인트는 그렇게 중국에 맞서는 동맹을 만든 나라들이 바로 앵글로-색슨의 국가들이라는 점입니다. 오커스 창설로 무지 열받은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중국은 논외로 하고 말이죠)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향후 크게 주목을 받을 안보 동맹이 탄생하는데, 자기가 완전히 ‘왕따’ 당했다는 섭섭함이 있겠지요.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이를 두고”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를 태평양에서 당한 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가 분노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오커스의 호주 핵잠수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프랑스가 호주와 체결한 560억유로(약 77조원)짜리 초대형 계약이 물거품이 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지난 2016년 디젤 잠수함 12척을 호주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핵잠수함을 갖게 될 호주에게 디젤 잠수함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것입니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호주와 프랑스의 잠수함 계약은 전혀 문제가 없는 듯 했습니다. 호주와 프랑스의 국방·외교 장관들은 8월 30일 공동 성명을 통해 “양국의 장관들은 호주의 잠수함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오커스는 이미 물밑에서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텔레그래프 등 외신에 따르면 호주는 지난 3월 이 문제와 관련, 영국과 처음 접촉해 핵잠수함 획득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국 정상은 지난 6월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 정상회담 때 만나 오커스 출범에 대해 논의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핵잠수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핵잠수함은 바다에 접한 나라가 강한 군사력이 필요할 때 “꼭 갖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는 무기입니다. 핵 잠수함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핵 발전을 통해 추진력을 얻는 ‘공격원잠’이고 둘째는 여기서 더 한 발 나아가 핵무기를 탑재한 ‘전략원잠’입니다.
▲전 세계 핵잠수함 보유 현황/핵추진 탄도 미사일 잠수함/자료=국제 전략 연구소
영국 BBC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핵잠수함을 갖고 있는 나라는 6곳에 불과합니다. 이들 나라가 보유한 핵잠수함은 모두 129척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괄호안은 전략원잠) 미국이 68척(14척)으로 가장 많고, 이어 러시아가 29척(11척), 중국이 12척(6척), 영국 11척(4척), 프랑스 8척(4척), 인도 1척(1척) 등입니다. 핵잠수함을 갖게 된다면 그것 만으로 세계 7대 군사 강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외신들 보도에 따르면 호주는 최종적으로 8척의 공격원잠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과 영국, 호주 정상은 오커스 설립을 알리는 공동 성명에서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에 호주가 이 능력을 실전 배치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핵잠수함은 일반적인 디젤잠수함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입니다. 디젤잠수함은 물속에서 20마일 정도로 속도가 느리고, 한번 잠수하면 오래 있지 못하고 곧 물 위에 떠올라야 합니다. 디젤 엔진 가동에 쓸 공기를 보충하는 스노클링(Snorkeling) 때문이죠. 이러면 유사시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적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큽니다.
핵잠수함은 이런 단점이 전혀 없습니다. 물속에서도 30마일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한번 물에 들어가면 식량이 떨어지지 않는 한 ‘언제까지라도’ 수중 비밀 작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 또 해냈다
그런데 왜 하필 미국과 영국, 호주일까요. 이 또한 이들 나라의 지도자나 정치인들의 설명은 없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들이 앵글로-색슨이기 때문”이라고요.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앵글로-색슨의 나라를 찾아봤습니다. 북미에선 영국과 프랑스, 유럽에선 영국, 오세아니아 지역에선 호주와 뉴질랜드가 있습니다. 전에 한번 언급한 파이브 아이스(Five Eyes)’라는 다국적 정보 동맹이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5개 국가가 중요한 정보를 주고 받는 동맹체입니다. 참여국은 미국과 영국, 호주, 프랑스, 뉴질랜드 입니다. 정확히 앵글로-색슨의 나라와 일치합니다. 파이브 아이스는 “AUS/CAN/NZ/UK/US EYES ONLY”의 약칭이라고 합니다. 파이브 아이스는 1955년 공식 출범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앵글로-색슨 5개국이 뭉쳐 66년 전에 파이브 아이스라는 정보 동맹을 만들고, 이 중 세 나라가 따로 모여 오커스라는 군사 동맹을 만든 것입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프랑스에선 격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등 뒤에 칼을 맞았다”고 했지요. 같은 유럽 대륙에 있는 나라들도 프랑스 편을 들었습니다. 유럽연합(EU) 수반인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우리 회원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프랑스가 열 받은 진짜 이유는 바로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그토록 싫어했던 앵글로-색슨족인 영어권 국가들에게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영국이 주최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보리스 존슨(오른쪽)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6월 12일(현지시간) 콘월주 카비스 베이에서 양자 회담을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하지만 앵글로-색슨 국가들의 단합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위험성이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앵글로-색슨이 주름잡는 세계 무대에서 20세기 최대의 적수이자 위험이 소련이었다면 21세기에는 단연 중국입니다. 중국은 소련보다 훨씬 더 큰 위협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그 누구보다 같은 핏줄의 후예이고, 또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나라끼리 뭉칠 수 밖에 없겠지요.
만약 호주가 핵잠수함 역량을 갖추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지난 9월 17일자 조선일보에 난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매슈 크로닉 애틀랜틱카운슬 전략이니셔티브 국장은 이날 홈페이지에 ‘중국의 군사적 공격을 억지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들은 72시간 내에 중국 해군을 궤멸할 능력이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지원 하에 호주가 만들게 될 공격용 잠수함들은 적의 전함을 파괴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이런 것들이 바로 중국에 맞서 우리가 인도·태평양에서 강화해야 할 억지와 방어 능력”이라고 썼다.” 한마디로 ‘유사시 3일 내 중국 해군 궤멸’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호주는 영연방의 핵심 국가 중 하나입니다. 지금도 이 나라의 국가원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입니다. 이번에 호주가 영국에 핵잠수함 프로젝트를 도와달라고 했고, 영국이 미국을 끌어들여 앵글로-색슨 동맹의 업그레이드를 이뤄낸 것입니다. 영국이 또 한 건 해낸 셈입니다.
지난 4편 ‘제국의 후예 다시 포효하다… 자유세계 넘버2를 향해’에서 영국이 ‘글로벌 영국, 경쟁의 시대(Global Britain in a competitive age)’라는 정책 보고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영국의 외교·안보 분야 핵심 전략을 담은 보고서인데요, 그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중요성 제고입니다. 이번 오커스 등장을 보면서 영국의 전략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이슈들을 들여다보며 앵글로-색슨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에도 막대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여전히 지구촌 크고 작은 일을 설명하는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앵글로-색슨의 뿌리를 찾아서
내일 당장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분이 “어딜 가보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한다면, 개인적으로 4곳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앵글로-색슨의 나라 영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들인데, ①캔터베리 ②윈체스터 ③헤이스팅스 ④솔즈베리 등입니다. 너무도 당연히 꼼꼼히 둘러봐야 할 런던은 기본이라 제외한 리스트입니다.
런던에서 남동쪽으로 약 85km 떨어진 캔터베리는 앵글로-색슨이 처음 영국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로마인들이 물러난 뒤 5세기 중반 브리톤인들은 지금의 스코트랜드 지역에서 공격해 오는 픽트와 스코트인들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싸움 잘 하기로 소문난 용병 집단을 불러들였는데 광의의 앵글로-색슨에 속하는 주트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픽트와 스코트를 물리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뒤, 물러가지 않고 이 지역에 눌러 앉아 왕국을 건설합니다. 앵글로-색슨이 건설한 7왕국 중 첫번째인 켄트 왕국입니다. 켄트에 이어 서식스와 웨식스, 에식스, 노섬브리어, 이스트앵글리어, 머시어 등 여섯 나라가 잇따라 들어섭니다.
켄트의 왕 애설버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파견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40여명의 선교사 일행을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이후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한 애설버트는 597년에 캔터베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합니다. 이후 캔터베리 대성당은 영국 가톨릭의 본산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지금도 영국 성공회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분입니다. 영국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 등 두 명의 대주교가 있는데, 서열상 캔터베리 대주교가 위입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헨리 2세는 친구였던 수도사 출신 베케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 이후 재판권 관할 등 문제로 그와 원수 관계가 됐다. 이로 인해 1170년에 과잉충성하는 4명의 기사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케트를 살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Fictures of English History(19850년)'에 실린 토머스 베케트 살해 사건.
캔터베리 대성당은 헨리 2세와 토머스 베케트 대주교의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헨리 2세는 그가 가장 신임했던 토머스 베케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대주교가 된 이후 베케트는 성직자 독립과 교황의 우월권 등을 놓고 헨리 2세와 극렬하게 대립합니다. 둘은 갈등이 격화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습니다. 헨리 2세가 “이 미천한 신부 놈이 이렇게 나를 모멸하는데 복수해 주는 자가 아무도 없다니. 나는 바보 겁쟁이들만 먹여 살려왔나 보군”하고 탄식하자, 이 말을 들은 기사 4명이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베케트를 참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반전이 일어나 헨리 2세가 수세에 몰렸고, 결국 왕은 캔터베리에서 순례자 옷을 입고 베케트 묘를 참배한 뒤, 70명의 수도자로 하여금 자신을 매질하게 하는 굴욕을 겪게 됩니다. 베케트는 1173년 성인에 추대됩니다.
영어로 쓰인 최초의 이야기책 ‘’캔터베리 이야기’도 캔터베리와 베케트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런던을 출발해 당시 순례지로 유명했던 베케트 묘지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다음으로 헤이스팅스는 정복왕 윌리엄이 1066년 영국으로 건너와 영국 왕위를 놓고 해럴드 고드윈선과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윌리엄은 그 해 크리스마스 날 웨스터민스터에서 영국 왕에 즉위합니다. 지금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영주였던 윌리엄은 프랑스 서부와 영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을 세웠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헤이스팅스 언덕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며 영국 역사의 한 장면을 느꼈던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윈체스터는 알프레드 대왕을 다룰 때 자세히 소개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솔즈베리는 윈체스터에서 서쪽으로 약 30여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 대성당에는 현존하는 ‘마그나카르타(대헌장,1215년)’의 사본 4부 중 하나가 보관돼 있습니다. 무려 806년 전에 만들어진 대헌장 사본은 현재 솔즈베리 대성당 이외에 대영도서관에 2부, 링컨성에 1부가 보관돼 있는데 영국에서는 솔즈베리 대성당의 사본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솔즈베리에 가게 되면 신석기 시대의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도 절대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영국 관광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거든요.
[14] 선각자, 인류에 ‘의회(parliament)’를 선물하다
낭떠러지 옆으로 난 위험천만한 절벽길로 마차가 달립니다. 승객은 프랑스와 영국의 여행객들. 덜커덩거리던 마차가 한쪽으로 기울며 절벽 아래로 추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마차 안 승객들 표정은 대조적입니다. 프랑스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치는데, 영국인들은 아무일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마차는 무사히 마을에 도착합니다. 이제 승객들의 상태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프랑스인들은 언제 죽을 뻔했냐는 듯 유쾌하게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영국인들은 그제야 위기가 실감이 났는지 침대에 앓아 눕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묘사된 영국인과 프랑스인 특성이 과장됐다고 볼 수도 있는데, 분명한 건 두 나라 국민들이 여러 면에서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유럽연합(EU)이라는 한 울타리에서 수십년간 갈이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앵글로-프렌치 갈등
유럽 뉴스를 접하다 보면 두 나라는 ‘다름’을 넘어 서로에 대해 ‘혐오’ 수준의 감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두 나라의 ‘애증(愛憎)’은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지배자였던 정복왕 윌리엄이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 영국 왕에 오르면서 씨앗을 뿌리게 됩니다. 이후 두 나라 관계는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 많은 전쟁과 화해, 경제적 이해관계, 경쟁심, 얽히고 설킨 혈연 등으로 짙게 물들게 됩니다.
지금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로 남남이 됐지만, 기껏해야 35km 정도 밖에 안되는 해협을 사이에 둔 두 나라는 지금도 티격태격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앵글로색슨 3국의 안보 동맹 ‘오커스(AUKUS)’ 이슈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좀 더 이해가 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합의안이 15일(현지 시각) 영국 하원에서 부결된 직후 테리사 메이(오른쪽 아래 서 있는 사람) 영국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메이 총리는 "16일 실시하는 의회의 내각 불신임 투표에서 내각 신임이 확인되면 오는 21일까지(합의안 부결에 따른) '플랜 B'를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들은 영국 정부가 아무런 조건 설정 없이 EU와 결별하는 '노딜 브렉시트', EU와 재협상, 제2국민투표 실시, 브렉시트 시기 연기 등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최근에는 ‘어업 분쟁’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BBC와 가디언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프랑스의 작은 어선들이 영국 근해에서 고기를 잡겠다고 낸 조업 신청에 대거 ‘불허’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초 영국은 브렉시트 협상 때 영국령 저지섬 인근 해역 등 영국 영해 내에서 조업하는 EU 어선들에게 기존 만큼 충분한 조업권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어선들이 신청한 47건의 조업 신청 중에서 허가가 떨어진 건 15건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두 나라의 격한 말다툼에 또 발동이 걸렸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달 27일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11월 2일부터 영국 상품의 프랑스 통관에 애로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산 생선과 해산물 등의 하역을 막고, 이를 운반하는 트럭에 대한 검문을 강화해 유통을 어렵게 만들겠다는 것이죠. 프랑스측은 그러면서 “저지섬에 대한 전기 공급 제한 등 여러 추가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클레망 본 프랑스 유럽 담당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영국에) 주저없이 보복하겠다”고도 했고, 프랑스 어업계 회장은 “(영국의 조치는) 바다와 육지에서 전쟁을 선언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프랑스의 협박은 실망스러운 뿐만 아니라 온당치도 않다”면서 “(프랑스의) 보복 조치는 양국간 무역협력협정이나 국제법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만약 프랑스측이 국제법을 어기는 사안이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영국은 “우리 근해에서 조업하는 EU 어선들에게 허가권을 주는 건 영국 당국”이라는 입장입니다.
두 나라 정상들도 싸움에 가세를 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영국이 보여온 행동으로는 영국을 신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브렉시트) 조약 협상에 수 년을 보내놓고, 몇 달 뒤 반대로 행동한다면 신뢰성 측면에서 좋은 신호가 아니다”라면서 “영국이 보여주는 행동은 EU 뿐만 아니라 영국과 함께 일하는 다른 모든 나라에도 보내는 신호이니 실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만약 프랑스가 (무역 관련) 협정을 위반했다고 판단되면 영국의 이익 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두 나라의 힘겨루기는 지켜보는 주변을 불안하게 합니다. 특히, 기후 변화와 중국과 대결에서의 협력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함께 손잡고 풀어야 할 중차대한 이슈들이 산적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30일 “저명한 과학자와 환경운동가들이 마크롱 대통령과 존슨 총리에게 어업권과 관련된 ‘앵글로-프렌치 대립’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두 나라의 다툼이 11월 초 영국에서 열리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면서, 인류의 최대 현안인 기후변화 문제에 집중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위테나게모트
프랑스와 영국은 그 ‘다름’에 어울리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발자취도 너무나 다릅니다. 프랑스의 경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아주 빠르고 급격하게 ‘혁명적으로’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전환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건을 거치며 서서히, 상대적으로 급격하지 않게 입헌군주제로 바뀌어 갑니다.
입헌군주제가 확립되기 이전, 절대 권력을 가진 영국 왕이 중요한 통치 행위를 할 때 도움을 받거나 자문을 구하는 집단 또는 조직의 역사는 ‘웨식스 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0세기에 알프레드 대왕(재위 871~899)의 후손들이 전국에서 주요 인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위테나게모트(witenagemot)’ 또는 ‘위턴(witan)’이라고 불렸습니다. 왕은 새로운 법을 선포하거나, 당시 재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토지를 하사할 때, 전쟁을 개시할 때 위테나게모트를 소집했다고 합니다. 구성원은 왕족과 귀족, 주교와 수도원장, 왕실의 고위 관리 등이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이 창건한 노르만 왕조(윌리엄~윌리엄 루퍼스~헨리1세~스티븐) 때에도 위테나게모트와 거의 같은 기능을 하는 조직이 있었는데 명칭은 ‘대자문회의(Great Council)’였습니다.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영국 존 왕의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존왕 시대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1215)’가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이 또한 프랑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존은 프랑스 지역에 있는 ‘라 마르쉬’ 땅을 놓고 프랑스 왕 필리프와 충돌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됐고, 존은 초기에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패해 일부 지역을 빼고 프랑스 지역 땅을 모두 잃었습니다.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존은 이후에도 프랑스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1214년 ‘부빈의 전투’에서 완패했고, 옛 땅을 회복하려던 야심은 물거품이 돼 버렸습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벌이는 동안 존은 무지막지하게 세금을 거뒀고, 이에 반발한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존에게 마그나 카르타를 종용한 것입니다.
◇몽포르, 인류에 대한 최고 시혜
존에 이어 헨리 3세(재위 1216~1272)는 9세 때 왕이 됩니다. 그도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됩니다. 헨리 3세는 몇 차례 프랑스 원정에 나섰지만 패했고, 1259년 파리 조약이 체결됩니다. 그 결과 가스코뉴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지역 땅을 프랑스에 넘겨줍니다. 계속되는 왕의 실정과 가중되는 세금은 영주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시몽 드 몽포르(1208~1266) 입니다. 개인적으로 영국의 의회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이 인물의 의미를 새록새록 되새기게 되더라구요.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왕인 헨리 3세의 매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231년 레스터 백령의 상속자가 됐습니다. 1258년 영주들이 왕에 대항하기 위해 몽포르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이들은 ‘옥스포드 조항’을 만들어 왕에게 승인을 강요했는데요. 주요 내용은 당시 의회(parliament)라고 불리게 된 대자문회의를 1년에 세 번 열어야 한다는 것, 영주들로 구성된 15인 회의를 둬야 한다는 것, 세금은 왕실이 아니라 회계청에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드디어 의회라는 단어가 이 때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의회는 프랑스어인 parler(이야기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 백작과 대영주, 왕의 주요 관리 등으로 구성된 대자문회의에서 국왕과 이들 주요 신하들이 만나 ‘이야기하는’ 모임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의 존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영주들은 잘 뭉치지도 않았고, 치열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 왕은 교황으로부터 옥스포드 조항을 지키겠다는 맹세의 취소를 허락받았습니다. 영주들은 다시 몽포르를 영국으로 불러들였고, 몽포르의 지휘 아래 왕과 에드워드 왕자를 잡아 가뒀습니다. 힘의 균형이 영주들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 때 몽포르의 업적이 다시 빛을 발합니다. 그는 1264년과 1265년 대자문회의(의회)를 소집합니다. 역사에서는 ‘최초의 의회’라고 불리기도 하는 의회입니다. 당시 의회에는 영주와 주교들만이 아니라 주의 기사들과 도시 대표들까지 소집했다고 합니다. 왕과 영주가 아닌, 지금으로 따지면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과 도시 대표들을 국가 정책 결정의 장으로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도 잠시. 영주들의 시기와 몽포르의 독선, 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등이 맞물리면서 헨리 3세가 다시 세력을 얻었고, 몽포르는 1265년 이브셤 전투에서 대패합니다. 이때 몽포르의 몸은 갈가리 찢겼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의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처칠은 의회를 가리켜 “전 세계 자유들의 성스러운 전당”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한 역사가는 “불멸을 얻지 못한 인간이 세운 가장 고상한 기념탑”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국의 의회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몽포르 입니다. 벤담은 13세기에 의회의 기본적 틀을 만든 그를 놓고 “몽포르는 인류에 대한 최고 시혜자”라고 말했습니다.
2011.11.09
[15] ‘의회’라 쓰고 ‘세금’이라 읽어야 하는 까닭
2016년 6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투표 당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탈퇴파’ 주역이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현 총리)이 탈퇴 찬성을 독려하며 전국을 돌아다닐 때 타고다녔던 빨간색 대형버스입니다. 영화 클라이막스 한 장면의 ‘스틸컷’처럼 아직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브렉시트 찬성파의 ‘빨간 버스’
버스에 적힌 대형 슬로건은 두 문장이었습니다. “우리는 EU에 매주 3억5000만 파운드(약 5600억원)를 보내고 있습니다(We send the EU £350 million a week).” “이 돈을 대신 우리의 NHS 예산에 보탭시다(Let’s fund our NHS instead).”
▲브렉시트 투표 당시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이 타고 다녔던 버스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우리 건강보험에 해당합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서 봤듯 영국 의료시스템은 꽤 취약하고 허점이 많습니다. 정부와 국민 모두 NHS 재정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해결책이 마땅치 않습니다. 영국은 병원비가 모두 무료인데요, 국가가 국민의 의료를 모두 책임진다는 건 아주 큰 재정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슬로건의 위력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민자 차단 등의 이슈와 함께 탈퇴파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탈퇴파의 ‘3억5000만 파운드’ 주장이 교묘하게 왜곡된 사실이란 점은 지난 5월 10번째 편지 ‘무슬림과 흑인이 런던시장을 놓고 겨룬 승부’에서 한 차례 설명했습니다. 영국이 EU에 매주 보내는 총액이 3억5000만 파운드인 것은 맞지만 EU가 영국에 보조금 등으로 돌려주는 돈이 있기 때문에 실제 금액은 1억5000만 파운드 정도였던 것입니다.
영국 입장에서 봤을 때 과연 브렉시트가 과연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논쟁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의회민주주의 탄생지라는 곳에서 직접 눈으로 본 정치인들의 ‘낯두꺼운’ 거짓말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절망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때 벼락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국가에 낸 돈, 세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투표할 때 이걸 기준으로 삼았던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국가가 세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과 제어,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현대 의회민주주의 선구, 또는 본산이랄 수 있는 영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역사의 발전을 이런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왜 너희가 맘대로 내 돈을 가져가니? 그리고 그 돈을 왜 니 맘대로 쓰니?”
◇전쟁과 세금, 그리고 의회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됐고, 왕은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듯 ‘탐욕스럽게’ 세금을 걷습니다.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왕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영국의 의회입니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면 의회는 드디어 왕을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의회(parliament)라는 말은 13세기부터 사용됩니다. 영국 왕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둔 조직으로는 특허장 등 공문서를 작성하는 ‘상서청’, 돈을 관리하는 ‘회계청’, 측근으로 구성하는 ‘왕실(내실)’,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여론과 조언을 구하는 ‘자문회의’ 등이 있었습니다. 이중 귀족과 성직자, 영주들, 고관대작 등으로 구성되는 ‘대자문회의’가 13세기 때부터 의회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조직이 왕에 대한 자문에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왕권에 강하게 대항하면서 민주주의는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영국 의회 탄생 초기에 왕위는 존(1199~1215) 헨리3세(1216~1272) 에드워드1세(1271~1307) 에드워드2세(1307~1327) 에드워드3세(1327~1377)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단계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존왕 때 마그나카르타(대헌장, 1215)가 탄생합니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영국 땅을 놓고 프랑스 왕과 갈등하다 전쟁이 터졌고,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려 세금을 마구 걷던 존왕은 결국 대헌장에 서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의 주인공들은 영주들이었지요. 내용도 세금을 걷을 땐 자문회의(후에 의회) 동의를 거쳐야 한다는 정도의 소극적 저항 수준이었습니다.
②헨리3세 때도 프랑스와의 전쟁은 계속됩니다. 군주권을 제약하려는 영주들은 시몽 드 몽포르를 중심으로 뭉쳐 1258년 옥스포드 조항을 왕에게 내밀어 승인받았고, 1264년과 1265년에는 ‘최초의 의회’라고 불리는 의회가 소집됩니다. 몽포르의 의회는 처음으로 지방의 젠트리(하급 기사+시골 젠틀먼)와 버러·도시의 대표자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몽포르가 영국 의회를 만든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모범의회
③에드워드1세는 웨일즈를 합병한 왕입니다. 지금의 영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합친 나라입니다. 웨일즈가 영국에 완전히 편입된 것이 이 때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도 공략을 했고, 스코틀랜드 왕관을 쓰기도 했지만, 워낙 민족적 저항이 거셌던 스코틀랜드와의 합병은 1707년에야 이뤄지게 됩니다. 에드워드1세도 프랑스와 전쟁을 했습니다.
웨일즈와의 전쟁은 1270년대 후반에 시작되고, 1280년대 전반기에 절정을 이룹니다. 스코틀랜드 공략은 1290년대 초반 시작됩니다. 멜 깁슨이 메가폰을 잡고 주연도 맡았던 명작 ‘브레이브하트(1995)’를 기억하시는지요. 영화는 잉글랜드에 맞서 스코틀랜드의 저항을 이끌었던 젠트리 출신 윌리엄 월러스의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바로 에드워드 1세 때입니다.
▲영화‘브레이브하트’(1995년). 1314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배넉번 전투’를 배경으로 했다.
전쟁은 돈을 먹는 하마입니다. 그것도 아주 무지막지하게 많이 먹습니다. 각종 제도와 법을 도입해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또는 ‘잉글랜드의 법률 제정자’라고 불리는 에드워드1세 때 전비를 보면 왕과 의회의 갈등과 충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왕의 1년 수입이 3만 파운드 안팎이었는데, 1282~1284년 웨일즈 전쟁 때 들어간 비용은 6만 파운드였다고 합니다. 또 1297년 프랑스 원정 때 소요된 전비는 4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많은 돈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하게 된 에드워드1세는 의회를 소집하는데 이 때 의회를 ‘모범의회(Model Parliament,1295)’라고 부릅니다. 향후 의회들이 이 모범의회를 본 따 의원들을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책에 따르면 이 의회 참석자는 모두 432명이었습니다. 2명의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가 90명, 백작과 남작 등 귀족이 48명, 37개 주에서 각 2명씩 뽑힌 기사 74명, 버러와 도시를 대표하는 시민 대표 220명 등이었다고 합니다.
의회는 왕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정무적 역할, 최고 법정으로서의 역할도 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에 대한 정당성 제공이었습니다. 왕이 전쟁 등에 쓸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비록 아직까지는 ‘들러리’ 수준의 역할이었지만, 왕이 세금을 걷을 때 의회의 뜻을 물어봐야 한다는 건 민주주의 역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할 것입니다. 존왕~헨리3세~에드워드1세를 거치면서 이런 시스템이 마련된 것입니다.
◇귀족원과 평민원
④의회는 에드워드2세를 거쳐 에드워드3세 때 더욱 체계적인 모습을 갖춰갑니다. 동성애자였던 에드워드2세는 프랑스 지역 가스코뉴의 기사 피에르 드 가베스통을 좋아했습니다. 당연히 여론이 안좋았지요. 나라 재정은 이전까지의 전쟁에 따른 부채로 허덕였는데 그의 통치기에도 전쟁을 계속됐습니다. 왕은 또 다른 총신 휴 데스펜서에 휘둘렸는데, 이에 보다 못한 영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왕비와 왕세자까지 등을 돌리자, 에드워드2세는 결국 왕위를 내놓게 됩니다. 당시 실세이자 왕비의 정부인 모티머가 왕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왕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항문에 찔러 죽게 하는 식의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을 담은 그림. 전쟁과 함께 대기근, 페스트로 혼란이 지속됐다.
이어 등장한 에드워드3세는 그 유명한 백년전쟁(1337~1453)을 시작한 왕입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가스코뉴 땅과 프랑스 왕위를 놓고 프랑스 왕과 전쟁을 벌입니다. 치세 초기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였는데 별로 재미를 못 보자 프랑스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는 “꺾기 어려운 엉겅퀴(스코틀랜드)를 꺾는 것보다는 이름 높은 백합(프랑스)을 꺾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손쉽고, 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6세가 가스코뉴 병합을 선언하자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습니다. 근거는 그의 어머니가 바로 이전 프랑스 왕이었던 필리프 4세의 딸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필리프4세의 외손자인데 촌수로 따지면 필리프6세보다 선왕에 더 가까운 핏줄인 것입니다.
에드워드3세는 엄청난 전쟁을 하면서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결국 의회에 손을 벌리게 됩니다. 50년간 영국을 다스리면서 의회를 무려 48번이나 열었다고 합니다. 의회 구성은 에드워드1세 때의 ‘모범의회’처럼 당시 영국 사회를 대표하는 주요 계급을 포괄했습니다. 즉 성직자와 귀족, 젠트리와 도시 대표 등이었지요.
특히 이 당시 의회에서 주목할 점은 귀족원(House of Lords)과 평민원(House of Commons)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는데, 그 전형이 에드워드3세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건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에선 하원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습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것도 하원이고, 총리와 각 부처 장관도 하원에서 나옵니다. 이에 비해 상원은 하원을 견제하는 역할이나 명예직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에 의회가 소집되면 처음엔 귀족과 평민이 함께 하는데, 이후 실제 토의에 들어가게 되면 하원들은 귀족들과 별개로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참사회 회의장이나 휴게실에 따로 모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