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 국가별9/
■ 레바논
Lebanon레바논 공화국, Republic of Lebanon
이 지역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며 도시국가를 세운 곳이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전쟁 때에는 셀주크 투르크와 쟁탈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에는 오랫동안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다가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통치하에 놓였다가 1943년 11월 2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 양측간의 충돌사태가 빈발하였다. 또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45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량 유입하여 베이루트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본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레바논 영토 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의 전투가 계속되게 되었다.
이에 맞물려 국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게 되었고, 1975년 4월 이와 같은 갈등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자 시리아군이 개입하여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시리아군은 레바논 동북부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에 무력분쟁이 계속되자 1978년에는 국제연합 잠정평화유지군(UNIFIL)이, 1982년부터는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주둔했다.
198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으로부터 철수하였지만, 다시 이스라엘군 및 시리아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1983년 9월 이후 레바논정부군·기독교민병대·회교민병대 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결국 1984년 2월 회교도 민병대가 서베이루트를 장악하고 친서방 레바논 정부가 시리아의 압력에 굴복함에 따라 같은 해 5월 친시리아 거국내각이 수립되었다.
그 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권력안배를 위한 정치적 절충이 이루어졌으나, 198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내전 수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1985년 12월 시리아의 중재하에 기독교와 이슬람교 시아파, 이슬람교 드루즈파의 세 거두 사이에 평화협정이 조인되어 다시 새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내전은 지속되었다.
이스라엘의 노동당 연립거국내각은 1984년 이스라엘군의 일방철수를 단행하였고, 1985년 6월 10일 잔여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으로부터 완전 철군하였다. 1987년 2월 15일 AMAL 민병대와 PSP 등 좌파연합 민병대 간에 격렬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법과 질서 회복 명목으로 7000여 명의 시리아 군대가 서베이루트에 주둔하게 되었다.
1987년 6월 1일 카라미(Rashid Karami) 수상이 피살되자 호스(Salim Hoss) 수상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1988년 9월 22일 제마엘 대통령이 기독교 지도자 Aoun 군총사령관을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오운(Aoun) 내각과 기존 이슬람교도 호스 내각의 2개 정부가 병존하였다. 1989년 3월 14일 레바논 기독교 지도자 오운 장군은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 퇴진을 목표로 해방전쟁을 선언한 후, 시리아군 및 회교 민병대와 기독교 간 전투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9월 레바논 내전이 휴전되고, 아랍연맹 레바논 주재 3국위원회의 주선으로 레바논국회(기독교계 의원 32명, 이슬람교계 의원 30명)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소집되어 대통령의 권한 축소, 국회의석 재분배 및 시리아군의 재배치 등을 골자로 하는 ‘국민화합헌장’을 잠정 합의하였다. 1990년 9월 21일 엘리아스 흐라위(Elias Hrawi) 대통령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고, 12월 24일에는 카라미(Omar Karami) 수상의 30인 내각이 출범(기독교 15명, 이슬람교 15명)하였다.
1991년 4월 정부는 민병대의 무장해제 및 해체를 실시하였고, 같은 해 5월 20일 레바논·시리아 간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1992년 8월, 20년 만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친이란의 시아파 조직인 히즈라가 처음으로 후보자를 옹립, 14석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라피크 엘 하리리(Rafic El Hariri) 수상의 신내각이 발족되었다.
레바논은 대외적으로 아랍 제국과의 선린관계 유지에 두고 있다. 따라서 중동평화문제에는 아랍권과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우호적 정책을 천명한 뒤 이를 현재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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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파도와 소년 13.1.8.
▲폭죽 쇼 13. 3. 16.
▲포도밭
▲물에 잠긴 레바논 베리루트 도로 13.1.7.
▲고대 로마 바쿠스 신전에 눈이 내린다 13. 1.10.
▲하마나 마을의 설경 13.1.10.
▲스키 13.1.13.
▲레바논 식량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밀 값이 급등하고 수입이 어려워진 가운데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한 빵 가게 앞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2-04-13
■ 루마니아
▲국기
수도는 부쿠레슈티이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국가이다. 남북길이는 약 480km이며, 가장 넓은 지점에서의 동서너비는 약 680km이다. 북쪽은 우크라이나·몰도바, 동쪽은 흑해와 물도바, 서쪽은 헝가리, 남서쪽은 세르비아, 남쪽은 불가리아와 경계를 이룬다.
루마니아는 1944년 소비에트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고, 1948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1948년부터 공산주의의 통치를 받았으나, 1989년 루마니아 지도자 니콜라이 체아우셰스쿠 정권의 몰락으로 그 체제는 막을 내렸다. 1990년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루마니아는 2004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었다.
루마니아는 약 1/3이 산악 지형이고, 또 1/3가량은 산림지형이며, 나머지는 언덕과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온화하고 뚜렷한 사계절을 보인다. 농업에 알맞은 비옥한 토양, 가축 사육에 적당한 목초지, 다양한 종류의 목재를 공급해주는 삼림, 원유, 아푸세니 산맥에 매장된 금과 은을 포함한 광물자원, 수력 발전이 가능한 수많은 강, 항구와 휴양지가 늘어서 있는 흑해의 해안선 등 루마니아는 매우 풍부한 천혜의 자연자원을 갖고 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적·문화적 특징이 로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정체성은 주요 대륙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자리잡은 루마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끊임없이 재확인되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인과 다키아인의 후손이라고 여긴다. 고대 로마인은 AD 105년 트라야누스 황제 통치기에 남부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다키아인들은 도나우 평원의 북부 산악지대와 트란실바니아의 분지에서 살았다.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통치기에 로마인들이 철수할 무렵에는 로마의 정착민들과 다키아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이민족간의 혼합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되었다. 루마니아 언어의 라틴적 뿌리와 대부분의 루마니아인들이 믿는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두 문화의 혼합에서 기인했다.
5세기에 훈족의 도래로부터 14세기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등장할 때까지 루마니아 사람들은 역사 문헌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 시기 동안 루마니아는 민족의 대이동에 의해 침략당했고, 도나우 평원을 건너 이동해 온 기마부대 전사들의 침입을 겪었다. 루마니아인들은 끊임없는 침략을 겪으면서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났으며,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비로소 평온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러시아의 장군 헬무스 폰 몰트게는 "저항이라는 것은 언제나 무익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들은 도피 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후 600년 동안 루마니아는 이웃 국가들의 야망의 격전지 역할을 했다. 루마니아인들은 여러 제국으로부터의 제국주의적 압박을 버틸 수 없었다. 비잔틴 왕국으로부터 시작된 침략의 역사는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침략해온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서쪽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과 동쪽에서 러시아가 침략해왔다.
1859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이 통합되었고, 1877년 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 직후에 루마니아는 공용어를 키릴 알파벳에서 라틴어로 바꾸었으며, 서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유럽 근대 국가로서는 뒤늦게 출발했지만, 루마니아는 20세기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여러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들 중에는 작곡가 게오르게 에네스쿠,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철학자 에밀 시오랑, 종교 역사가 미르케아 엘리아데,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조지 E. 펄라디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야에 저널리스트 로사 골드슈미트 발데크(발데크 백작부인)는 루마니아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혹한 이방인 지배자들, 수차례의 야만적 침략, 약탈적인 침략들, 사악한 군주들, 콜레라, 지진 등으로 점철된 2,000년은 루마니아인들에게 세상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강렬한 감성을 갖게 했다. 역사 속에서의 생존 경험은 개개의 추락은 예측하지 못한 기회를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어떻든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교훈을 루마니아인들에게 남겼다.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도 유일한 라틴 계열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한때 로마 제국의 트리야누스 황제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루마니아라는 국가 이름은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토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체코나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의 다른 동유럽 국가에 비해 여행객들이 덜 찾는 곳이긴 하지만, 소설 〈드라큘라〉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라는 이유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나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루마니아 공산권의 악명 높았던 차우세스쿠의 흔적은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만든 부쿠레슈티의 인민 궁전을 통해 조금 엿볼 수 있다.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명이 있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부터 다양한 볼거리가 넘치는 루마니아로 여행을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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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흡혈귀 없는… 드라큘라 城
트란실바니아 지방 브란성
▲해 질 녘 브란성의 전경. 피를 부르는 무서운 드라큘라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아름답기만 하다. / 케이채 제공
1897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흡혈귀의 이미지는 문학과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영화와 뮤지컬 등 다양한 포맷으로 소개되며 전 세계에 피를 갈구하는 흡혈귀 이미지를 각인시킨 이 작품의 모델이 된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15세기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방의 영주였던 블라드 3세다.
블라드 3세는 사후 체페슈(Tepes)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루마니아어로 '찔러 죽이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기다란 꼬챙이로 찔러 죽이는 등 잔혹한 처형 방식으로 악명을 떨쳤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또한 아버지인 블라드 2세의 이름이던 드라큘에서 따와 자신을 드라큘라라 불렀고, 그런 그의 이름과 잔혹성이 바탕이 되어 소설 드라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과 함께 블라드 3세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흡혈귀 드라큘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덕분에 루마니아 역시 드라큘라의 고향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아버린 것이다.
▲내부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브란성. / 케이채 제공
비록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그런 드라큘라와의 연결고리가 싫지만은 않은지, 루마니아는 드라큘라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의 모델인 블라드 3세와 연관이 있는 곳들은 대부분 관광상품으로 개발됐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유명하고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곳이 바로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지방에 위치한 브란 성(城)이다.
1382년에 색슨(Saxon)인들이 터키인의 왕래를 막기 위한 요새로 건축했던 브란 성은 이후 다양한 역할을 하다가 1920년 마리 여왕이 살게 되면서 여름 궁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다 1947년에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며 왕가는 소유권을 박탈당했고, 1957년에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루마니아 제2의 도시 브라쇼브(Brasov)의 남서쪽 32㎞ 지점에 위치한 이 성이 루마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성이 된 것은 일명 '드라큘라의 성'으로 널리 알려지면서부터다. 블라드 3세가 이 성에 잠시 기거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되면서 이 성은 루마니아는 물론 동유럽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유명해졌다.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뒤로는 아름다운 산을 등지고 있는 브란 성은 동화 속에 나오는 성 그 자체의 모습. 성 앞에 도착하면 우리네 민속촌처럼 중세의 모습을 재현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고, 드라큘라와 관련된 티셔츠에서 머그잔까지 다양한 상품이 팔리고 있다. 성으로 향하는 입구 앞에는 각종 흡혈귀로 분장한 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기도 하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공원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야 절벽 위에 살포시 서 있는 브란 성에 닿게 된다.
성의 내부는 완연히 박물관으로 개조되었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가며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성의 가구와 다양한 물건을 살펴볼 수 있다. 이동하는 길이 좁고, 워낙 많은 관광객이 찾기에 줄지어 걸어가며 보는 느낌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불그스름한 지붕과 각종 양식이 혼합된 이 성의 내·외부는 누구나 로맨틱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만든다. 특히 중간층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성의 모습엔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드라큘라의 성이라는 명성과 달리 역사적으론 흡혈귀와 그 어떤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성. 더하여 드라큘라의 모델이라는 블라드 3세가 이곳에 아주 잠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설만이 존재하는 성. 그럼에도 사람들은 드라큘라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이 성을 찾는다. 피를 부르는 무서운 드라큘라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아름답기만 한 브란 성이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이 성이 가진 매력을 직접 만나고 나면 드라큘라의 존재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테니까.
▶브란성 가려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h arest)에서 버스나 기차로 3시간을 올라가면 브라쇼브에 닿는다. 브라쇼브에서 버스 등의 교통수단으로 30분이면 브란 성에 닿을 수 있다. 입장은 저녁 6시까지만 가능하니 늦지 않도록 하자.
케이채 사진가·에세이스트
□ 풍경
▲루마니아 = 겨울 13.1.28
▲동화속 꽃송이 폭포 - 루마니아 카라슈세베린의 아니나 산
▲비가폭포
▲루마니아 국기 기네스 등재 - 13. 5. 27. 349.4m x 226.9m
■르완다
르완다 공화국, Republic of Rwanda
▲국기
정식 명칭은 르완다공화국(Republic of Rwanda)으로, 탄자니아·콩고민주공화국·우간다·부룬디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국이다. 면적 2만 6338㎢, 인구 1266만 1733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키갈리(Kigali)이다.
종족은 후투족(Hutu) 90%, 투치족(Tutsi) 9%, 트와족(Twa) 1%로 되어 있으며, 언어는 공용어 프랑스어, 영어가 있고, 토속어인 키냐루완다어가 있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65%, 토착종교가 17%, 개신교 9%, 이슬람교 1% 등이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이 23℃인 열대성 기후이며, 고원국으로 목축이 성하고, 가족 단위의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주산물은 커피·카사바·고구마·옥수수·콩 등이며, 최근에는 담배·원면 및 차의 생산에 주력하여 농산품 다양화를 기하고 있다. 연평균 생산량 2,000톤의 주석광 생산국으로, 주석·텅스텐 등은 커피·차 다음의 주요 수출품이다. 또한 세계 최대라는 키브호 해저의 천연가스를 채굴하고 있고, 관광도 유망한 외화 수입원이다. 2014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79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695.7달러이다.
르완다의 정체는 임기 7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8년의 상원(26석)과 임기 5년의 하원(80석)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르완다 애국전선(RPF), 민주공화운동(MDR), 사회민주당(PSD) 등을 비롯하여 16개 정당이 있다.
역사적으로 부룬디와 유사점이 많고, 1899년 독일에 의해 부룬디와 병합되어 르완다-부룬디가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로서 벨기에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부룬디와 분리된 것은 독립하기 3년 전인 1959년이고, 1962년 7월 1일 벨기에로부터 완전 독립하였다. 하뱌리마나(Habyarimana, J.) 대통령은 1973년 7월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여 장기집권해 온 카이반다(Kayibanda)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5년 7월에 국민혼합의 유일정당인 국민개발혁명운동당(MRND)을 창당하였고, 1978년 12월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면서 하비야리마나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의회는 국가개발심의회가 대행하였다.
이 정권은 부족간의 고질적인 불신감을 해소시킴으로써 국민화합을 달성하고 농촌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였다. 1990년 10월 1일 우간다에 망명해 있던 왕정파를 중심으로 하는 투치족의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국경을 넘어 침입했으나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자이레군이 르완다에 파견되어 격퇴시켰다. 이때 르완다군과 자이레군은 르완다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투치족, 그리고 투치족과 친하게 지낸 후투족 수천 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1993년 양측 평화협상이 탄자니아에서 개시돼 양측은 르완다 정부군과 RPF의 통합에 합의하고, RPF는 평화리에 르완다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 뒤에 하뱌리마라 대통령 비행기 추락 사건으로 수도 키칼리에서 일부 군인들이 우윌링이마나 총리와 10여 명의 평화유지군 병사들을 사살하는 등 난동을 일으켜 두 종족 무장 세력간의 전면 내전으로 비화되었으나 2003년 8월 카가메(Paul Kagame) 대통령이 재선되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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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르완다, 한국에서 미래를 찾다!
▲키갈리 남서쪽 3시간 거리에 있는 가샤루 라로 새마을운동 현장. 새마을운동을 통해 조합을 구성해 같이 농사를 짓고 수익을 나눈다고 한다. 사진=시릴 은데게야
곧 착륙할 테니 안전띠를 착용하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우간다 엔테베에 들러 많은 승객을 내려놓고 다시 한 시간 남짓 날고 있었다. 창밖을 보았다. 공관장(公館長)으로 봉직하라는 명(命)을 받고 금년 4월 22일 도착한 나의 새로운 임지, 르완다였다. 자정을 넘긴 현지 시각. 일부러 조명(照明)을 한껏 낮춰 놓기라도 한 것처럼 어둑한 키갈리 시내가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맥락 없이, ‘20촉 전등(電燈)’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1950년대 말, ‘문화게릴라’로 칭송되며 주목받기 시작하던 약관(弱冠)의 평론가 이어령은 신문지상(新聞紙上)에서 겁도 없이 당시 한국문학의 대들보와도 같던 김동리(金東里)와 살벌한 논쟁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거물답게, 근거 없는 부정견(不定見)에 일일이 응수하기엔 자신의 시간이 너무나 귀해 앞으로 묵살하겠다던 김동리에게, 이어령은 잡지 독자를 위해 글을 쓰고 차(茶)를 마시는 김동리의 시간이 “20촉 희미한 전등 밑에서 책을 뒤지고 앉아 있는 우리의 지루한 시간보다는 귀중할지도 모른다”고 들이받았다. 그것은 대가(大家)의 오만을 독자들 앞에 까밝히는 일격이었고, 우상(偶像)을 파괴하겠다는 패기(覇氣)로 두 달 동안 이어간 공세(攻勢)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천개 언덕의 나라’
어린 시절 읽었던 이 ‘20촉 전등’이라는 표현은 내게 그렇게 각인되었었나 보다. 주머니는 곤궁할망정 패기는 모자라지 않는 자들의 조명. 여유롭고 오만한 자들이 네온사인 아래서 벌이는 시끌벅적한 잔치보다 뭔가 훨씬 더 의미 있고 웅숭깊은 일이 조용히 도모되고 있는 작은 방의 불빛. 르완다의 인상(印象)이 그랬다. 가진 것은 아직 적지만 옹색하거나 비굴하지는 않은 나라. 비록 고단한 역사를 경험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는 결기를 가진 사람들.
우리나라처럼 르완다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작은 나라다.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의 면적(2만8000km²)에 서울시 인구 정도의 사람들(1266만명)이 살면서(그러니까 인구밀도도 우리와 비슷하다), 울산시 정도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우리가 그랬듯이, 르완다도 오래 전부터 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했고, 중앙집권적인 왕권(王權)이 미치던 자존심 강한 왕국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이것은 일반적이기보다는 예외적인 사례다.
해발 1500m 이상의 고(高)지대라서 적도(赤道) 인근임에도 연중 온화한 기후이고 산과 언덕이 많아 르완다인들은 자기 나라를 ‘상춘(常春)의 나라(land of an eternal spring)’ 또는 ‘천 개 언덕의 나라(land of a thousand hills)’라고 부른다.
온화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입은 이 땅에서 예부터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이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와미라는 왕을 중심으로 같은 언어를 쓰고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며 영역의 구분 없이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르완다에서 이 종족들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큰 결례(缺禮)에 해당한다. 마치 〈해리 포터〉의 등장인물들이 볼드모트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것처럼,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종족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어느 소설 속 악당도 감행하기 어려운 사악한 만행을 그 때문에 자행했기 때문이다.
후투와 투치
식민통치 이전 르완다에 관해서는 문자로 기록한 역사가 없지만, 이곳의 원주민은 동굴생활을 하던 피그미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오늘날 트와족으로 불리는데 르완다 인구의 1%가 채 되지 않는다. 그보다 나중에 이주해 온 후투족과 투치족의 근거지가 어디였는지에 관한 몇 가지 설(說)은 사실보다는 추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추측은 아프리카 내에서도 인종 간의 차별을 조장한 ‘함족 가설(Hamitic theory)’이라는 유럽인들의 사이비 종교적 편견과 관련이 깊다. 요컨대 같은 흑인이라도 투치족은 아브라함의 (저주받은) 먼 친족이므로 더 미개한 다른 종족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는 식이다.
서구인(西歐人)들이 르완다에 처음 왔던 19세기 당시에, 투치는 왕족의 이름이자 소수 엘리트 계급과 동의어였으며,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투치는 언제나 인구의 15% 미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치가 소를 대부분 잃으면 후투(농부)가 되고, 후투가 소를 열 마리 이상 소유하면 투치가 되는 식이었다. 1884년 독일이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1919년부터는 벨기에가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시작했다. 벨기에는 주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면서 투치-후투를 세습되는 종족(種族) 구분으로 고착시켰고, 기득권(旣得權) 세력인 투치족을 앞세워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다 보니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할 때까지, 르완다의 독립투쟁사는 후투족의 반(反)투치 투쟁사(鬪爭史)와도 겹친다. 독립 후부터 다수(多數) 후투족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었고, 투치들에 대한 박해와 집단살해가 종종 벌어졌다.
이처럼 종족 간의 긴장이 높아지다가 절정을 맞은 것이 1994년의 제노사이드(Genocide)다. 당시 자칭 ‘후투 파워’라는 인종주의적 세력은 출판물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치 바퀴벌레들을 멸절(滅絶)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끈질기게 전파하고 있었다. 그해 4월 6일 하비아리마나(Habyarimana)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키갈리 착륙 직전에 격추당하자, 이를 계기로 후투족 민병대가 중심이 되어 소수부족인 투치족과 그에 우호적인 일부 후투족까지를 대상으로 피의 광란을 벌였다. 불과 석 달 만에 100만명 가까이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정글칼로, 총으로, 주먹과 몽둥이로….
정부 사무실에 스테이플러 하나 남지 않아
지금의 르완다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는 1994년 제노사이드의 배경과 경위와 영향을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에 달려 있다. 사건 자체는 물론 그것을 극복해 온 과정이 르완다 국민을 규정하는 정체성(正體性)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저널리스트 필립 구레비치(Philip Gourevitch)는 제노사이드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국제 재난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황폐해진 나라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고(國庫)에는 달러든 르완다프랑이든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정부 사무실에서는 깨끗한 종이나 스테이플러 심은 물론이고 고장 나지 않은 스테이플러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문이 남아 있어도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설령 차량이 남아 있어도 움직이지 않기 일쑤였다. 변소에도, 우물에도 죽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전기, 전화, 수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키갈리에선 하루 종일 폭발이 있었다. 누가 지뢰를 밟았거나 미처 터지지 않은 폭발물 잔해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폐허 위에 임시로 세운 병원은 밀려드는 치료 요청을 감당하지 못했다. 교회, 학교, 그 밖에 도살장으로 사용되지 않은 공공(公共)시설은 대부분 약탈당했고, 약탈을 자행한 사람들은 대개 죽었거나 도망치고 없었다. 1년 동안 수확한 차와 커피는 온데간데없었고, 커피를 볶는 기계의 약 70%가 작동하지 않았다.〉
금융위기 불구하고 안정적 성장
이런 상태에서 출발한 르완다가 불과 20년 만에 이룩한 성취는 눈부시다. 2001~2014년 기간 르완다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평균 8%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은행이 2014년 발표한 기업환경평가에서 전체 189개 국가 중 32위를 차지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원조효과성 평가는 2011년 이래 최고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르완다는 지금도 1인당 국민소득 700달러대의 최빈국(最貧國)이다(한국이 700달러선을 넘은 것은 1975년경이었다). 시장규모가 협소한 내륙(內陸)국가라는 사정이 변할 리도 없다. 전력난(電力難) 극복, 수송비용 절감, 시장규모 확대, 민간기업 육성, 세수(稅收) 증대 등 허다한 도전과 난제들이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르완다의 정치적 안정과 좋은 치안상태, 공공부문의 책임성, 효율성, 투명성, 청렴성은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곳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이러한 무형(無形)의 자산이 다른 어떤 물증(物證)보다 르완다의 장래에 대한 낙관을 넉넉히 담보해 준다. 통계로 보아도 르완다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사하라 이남(以南) 아프리카는 세계 금융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8%에 가까운 성장으로 경제학자와 투자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4%대 성장을 유지해서 부푼 기대감을 뒷받침해 주었다.
하지만 2013년경부터 원유(原油)와 원자재(原資材)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체의 성장은 느리지만 뚜렷한 하향세(下向勢)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하라 이남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GDP규모 1~3위) 등이 자원시장 침체에 큰 영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등과 더불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자원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르완다의 경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평균(4.6%)보다 훨씬 높고 안정적인 7%대의 성장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카가메의 ‘정중한 경고’
이와 같은 발전은 폴 카가메(Paul Kagame)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제노사이드 당시 우간다에서 투치족 중심의 무장단체 르완다애국전선(RPF)를 이끌던 카가메 장군은 국내로 진격해 왔다. 제노사이드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던 RPF의 공격이 후투파워의 과격화에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식민종주국도, 다른 강대국들도, 심지어 유엔도 문제의 해결을 포기하고 철수해 버린 지옥도(地獄道) 같은 상황을 접수하고 정리한 것이 RPF를 이끌던 카가메 장군이었다. 그 나라를 어제보다 나은 나라, 내일은 더 나을 것으로 기대되는 나라로 가꾼 지도력을 발휘한 것도 그였다.
지난 9월 14일 키갈리에서는 유엔과 공동으로 조사한 제4차 종합생활여건통계 발표회가 열렸다. 그 결과에 따르면, 르완다는 빈곤퇴치 관련 일부 사항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초과달성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발표회 행사에서 카가메 대통령은 거기 참석한 각료들을 쏘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영양부족(malnutrition) 부문의 진전이 부족한 것이 아쉽습니다. 이 부분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은 여기 있는 각료들께 드리는 정중한 경고(polite warning)이기도 합니다.”
내가 르완다 경제부처 장관이었다면 등에 식은 땀이 흘렀을 것 같다. 2000년부터 대통령으로 재직해 온 카가메 대통령의 지도력은 두 가지 부분에서 가장 큰 빛을 발한다. 첫째는 경제적 성장이고, 둘째는 국민적 통합이다. 그 성과로서 나타나는 현상은 전향적이고 희망적인 사회의 분위기다. 희망은 거대한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자조적(自嘲的)인 냉소주의(冷笑主義)나 자포자기(自暴自棄)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곳에 희망은 살아 숨 쉰다. 한가로이 자기연민이나 자기비하에 빠지기에는 르완다인들이 당대에 겪은 사건의 비참함이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과거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카가메 대통령과 새마을운동
르완다의 방방곡곡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깨끗하다.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은 외교장관으로 재직하던 2006년 르완다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기까지 길이 깨끗하고 정돈이 잘되어 있어 정말 인상적이었다. 카가메 대통령을 만나 그렇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한국이 했던 것을 우리도 하는 것’이라면서 책상 위에 있던 새마을 운동에 관한 영문 책자를 집어 들어 내밀더라.”
지난 9월 29일 뉴욕에서는 유엔개발계획(UNDP)과 OECD가 공동 주최한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가 열렸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반기문 사무총장 외에 르완다, 라오스, 페루, 베트남 등 4개국 국가 정상(頂上) 및 UNDP와 OECD의 수장(首長)이 참석해 농촌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카가메 대통령은 한국의 개발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이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한국의 자생적인 해결책은 개발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주도적 역할, 자발적 참여, 국민적 단합이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요소임을 입증해 줍니다.”
필자는 지난 8월 14일 카가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그와 양국(兩國)관계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지금까지 대법원장, 상원의장, 국무총리와 16명의 각료, 키갈리 시장(市長)과 주지사(州知事)들, 군(軍) 참모총장과 경찰청장 등을 만나면서 해당 부처별로 공통 관심사항을 협의해 왔다. 그들과 나눈 대화내용을 일일이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르완다의 지도층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상(像)은 다른 어느 선진공여국(先進供與國)과 다르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들이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대부분의 목표가 달성 가능함을 증명하는 가장 확고한 징표들 중 하나다. 인간은 무엇이 가능하다고 믿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된다.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한 소수부족(少數部族)을 멸절시켜 버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을 때, 이 나라에서는 이웃이 이웃을 죽이는 광란(狂亂)이 벌어졌었다.
르완다인들의 현실주의
▲KOICA가 2010년부터 지원하고 있는 키추키로 종합기술훈련원(IPRC-K). 올해에는 교사 역량 개발을 위한 직업기술교사 교육원 건축도 시작했다. 사진=시릴 은데게야
실은 르완다가 극복해야 하는 제노사이드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형(現在形)이다. 생존자 또는 희생자의 가족들이 가해자들과 여전히 한마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레비치의 표현을 한 번 더 빌리자면, “현대사를 통틀어 다른 민족을 살육했거나 이른바 살육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민족이, 고만고만하게 작은 공동체에서 살육당한 민족의 유족(遺族)들과 완전히 뒤섞여 생활하면서 응집력 강한 국가사회를 이루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르완다 곳곳에 존재하는 제노사이드 기념관은 국민화합이 지금도 여전히 르완다 사회의 당면과제라는 사실을 아프게 말해 주고 있다.
1994년 제노사이드를 통해 국제사회와 르완다는 공히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르완다의 제노사이드 직후 세계 각국의 인도적 지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고 해외원조 정책이 지금과 같은 정도로나마 정비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평화유지군(PKO)의 활동과 특별정치임무단의 활동으로 구성되는 유엔 평화활동(peace operations)의 연혁(沿革)은 르완다 사태 이전과 이후로 또렷이 나뉜다. 1994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유엔은 민간인 보호를 위한 강력한 임무(robust mandate)를 평화활동에 포함하기 시작했고, 국제사회는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이라는 관념을 발전시켰다.
르완다로 말하자면, 문제가 생기면 외국인들은 떠나 버린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무원이건 민간인이건, 유엔이건, 비정부기구(NGO)건 생사의 기로에 처한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르완다 국민들에게 매우 현실주의적인 태도와 감성을 심어 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르완다인은 외래(外來)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쉽사리 선동되지 않을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부의 도움을 고마워하지만 거기에 전부를 의지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르완다식 진실규명과 화해
1994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르완다국제형사법원(ICTR)을 설립했지만, 르완다인들은 당초부터 그 법원이 자신들이 경험한 부조리를 깔끔하고 정의롭게 정리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ICTR은 지금까지 기껏 59개 사건을 종결지었을 뿐이고, 기소된 피고 중 9명은 아직 잡히지조차 않고 있다.
르완다는 가차차(Gacaca)라는 전통적 형태의 재판을 통해 진실규명과 화해를 추구했다. 세상의 모든 제도가 그렇듯, 그것이 완벽한 정의(正義)를 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르완다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차차 법정을 까다롭게 비판하는 인권옹호자들 중 누구도 그보다 더 나은 대안(代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자연히, 현재 르완다는 국민들의 경제적·사회적 권리 증진에 관해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자신 있게 성과를 말하지만 정치적·시민적 권리 증진에 관해서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는 그보다 적은 것처럼 보인다. 이 또한 우리의 과거 어떤 부분을 닮아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과 르완다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배워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르완다의 성공적인 발전은 동아프리카 지역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그 성공에는 아프리카와 경제협력을 확대해 나가야 할 우리의 이해(利害)도 걸려 있다. 게다가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르완다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국민화합 과정은 분단국인 우리에게 중요한 함의를 지닐 터이다. 그것이 우리가 르완다를 아프리카 7개국 우선협력파트너 중 하나로 지정한 참뜻이라고 믿는다.
KT, 르완다에 4G LTE 제공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시내의 삼성 스마트폰 판매점. KT는 르완다 정부와 합작회사를 설립, LTE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현재 르완다에서 농촌개발, 교육, 정보통신기술(ICT) 등 3개 분야를 중점협력분야로 설정하고 14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2015년 예산 2000만 달러는 KOICA 전체 사업예산의 5%에 달하고, KOICA가 금년에 아프리카에 제공한 나라별 원조금액 중 최고 액수에 해당한다. 금년에는 최초의 차관(借款) 사업으로서 5100만 달러 규모의 대외경협기금(EDCF) 공여를 통한 르완다 국립대 인프라구축 사업도 시작했다. 현재 르완다 방방곡곡에서는 50여 명에 달하는 자문관 및 봉사단원이 이 나라의 발전을 헌신적으로 돕고 있다.
우리 기업 KT는 야심적인 투자를 시행하여 르완다 정부와 AoS(Africa Olleh Services)와 oRN(Olleh Rwanda Networks)이라는 두 개의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은 통신분야에서 세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관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 사례다.
KT는 르완다 전국에 광케이블망을 설치했고, oRN은 이 망을 인수받아 4G LTE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oRN은 심지어 키갈리 시내버스에도 4G LTE 단말기를 설치하여 승객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AoS는 공공부문과 시장에 한국의 앞선 정보기술(IT) 솔루션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르완다가 추구하는 지식기반 경제로의 변혁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르완다 개발청장은 필자에게 AoS와 oRN의 성공은 르완다 정부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치안 양호하지만, 위생은 주의해야
▲르완다에서 드문 사바나 지형을 갖고 있는 아카케라 국립공원. 르완다를 찾는 관광객은 2000년 3700명에서 2013년 113만7000명으로 급증했다.
유쾌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만, 르완다는 아직까지 온 길보다 가야 할 길이 더 먼 것이 사실이다.
르완다에 사업상 진출하거나 관광을 위해 이곳에 오실 우리 국민은 적어도 부정부패나 치안, 또는 기후에 관한 걱정은 접어 둬도 좋다. 모든 여행자가 상식적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의 주의(注意)만으로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 르완다다.
그러나 위생과 의료에 관해서는 그보다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길게 쓰는 것은 어쩌면 유가족에게 결례가 될지도 몰라 삼가겠지만, 우리 대사관은 금년 7월 말 사랑하는 동료의 부인을 풍토병(박테리아 감염)으로 황망(慌忙)히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지난 6개월간 외교단 가운데는 말라리아나 뇌수막염으로 생사(生死)의 고비를 넘긴 분들도 있었다. 해서, 우리 대사관은 재(在)르완다 동포사회에 건강관리에 신경 쓸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다.
키갈리의 밀콜린(Mille Collines) 호텔은 제노사이드 당시 생존자들의 실화(實話)를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다.
지난 10월 31일, 이곳에서 유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주르완다 유엔사무소가 주최한 리셉션이 열렸다. 국제기구 대표들과 외교단(外交團)은 말할 것도 없고, 르완다의 장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정보부장과 경찰청장도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나 싶더니 음악 소리가 들렸다.
뒤편의 출입문에서 다양한 국적의 젊은 유엔 직원들이 르완다 무용수 복장을 하고 입장해 전통춤을 추기 시작했다. 행사 때 흥을 돋우는 르완다 무용수들이 자주 그러하듯, 이들도 준비된 공연 말미에는 객석의 손님들에게 다가가 함께 춤출 것을 권유했다. 잠시나마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20년 전 이 장소에서 만일 누군가가 앞으로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언했다면, 사람이 아무리 낙관적인 것도 좋다지만 제발 현실감도 좀 가지라는 지청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점점 더 커지는 나라
르완다를 비추는 조명이 있다면, 아직 그것은 희미한 20촉 전등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전벽해(桑田碧海)라지 않던가. 내게 ‘20촉 전등’의 미학(美學)을 은연중 심어준 이어령 선생도 일찍이 거인에게 돌팔매질하는 목동처럼 보이던 청년 평론가였지만 이제는 자신을 우상이라 부르며 파괴해 줄 후학(後學)을 기다리는 거목(巨木)이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르완다라는 나라는 훨씬 더 크고 탄탄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르완다라는 국명(國名)은 ‘크완다(kwanda)’라는 르완다어에서 파생되었다. ‘점점 더 커진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動詞)다.⊙
출처 | 월간조선 12월호 글 | 박용민 주르완다 대사
■ 리비아
Libya구(舊) 사회주의인민리비아아랍국,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a, 구(舊) 리비아 인민사회주의 아랍공화국, 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
▲국기
아프리카 대륙에서 4번째로 넓은 국가이다. 사실상의 수도는 트리폴리이며 법률상 수도는 방가지이다. 남북으로 1,320km, 동서로 1,449km 가량 뻗어 있다. 튀니지와 알제리(서쪽), 니제르와 차드(남쪽), 수단(남동쪽), 이집트, 지중해(북쪽)와 각각 접해 있다.
국토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 속해 있고 인구 대부분은 해안을 따라 모여 살거나 해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내륙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 지역에 발달한 도시들로는 사실상의 수도인 트리폴리와 주요 도시인 방가지가 있다.
리비아는 북서부에 트리폴리타니아, 동부에 키레나이카, 남서부에 페잔에 해당되는 3개의 역사적 지역으로 구성된다. 오스만 제국은 그 지역들을 별도의 분리된 지역으로 인정했다. 이탈리아 통치기에 그 지역들은 통합되어 단일 식민지가 되었고, 나중에 독립국가인 리비아가 되었다. 리비아의 초기 역사에는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는 서로 연관되기보다 각각의 인접 지역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950년대 후반 석유 발견 이전에, 리비아는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사막이라는 환경 때문에 극히 제한된 지역으로 여겨졌다. 국가는 경제 유지를 위해 거의 전적으로 외국 원조와 수입에 의존했다. 하지만 원유를 발견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이 변했다.
정부는 경제에 대해 오랫동안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해왔으며 원유 수입에서 얻은 막대한 부로 농업 및 산업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정부는 또한 국민들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의료 및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리비아의 지중해 연안지역은 고대로부터 페니키아인의 소도시가 번영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의 지배하에서 번영하였고, 7세기부터 아랍인의 정복하에 들어가 10세기에는 아랍족이 원주민인 베르베르족보다 다수족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터키의 세력권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1912년 이탈리아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영국·프랑스에 의해 분할통치되었다. 1951년 12월 24일 국제연합 결의에 의거, 연방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였다.
1969년 9월 집권한 카다피 정부는 석유산업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석유 수출로 증대된 소득을 재분배하여 저소득층의 지지를 받아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된 정권을 유지해 왔으며, 1977년 3월에 제정한 헌법으로 인민주권 확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급진적 사회주의정책으로 재산을 국유화당한 중산계급들로부터 반발이 일고 있고, 징병제 실시와 반대세력에 대한 과격한 탄압 등으로 일부 국민의 불만이 잠재되어 있다. 대외정책은 좌경중립으로, 아랍민족주의·반제국주의·반서구주의·반유태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1955년에 유엔, 1964년에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나 과격한 혁명수출노선을 지향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고, 이집트·차드·튀니지 등 주변 국가와의 충돌도 잦았다. 중동전 때는 석유무기화를 제창하여 생산제한·금수·가격인하 등 제반 문제에 선봉을 섰다.
특히 1986년 4월 15일 미국의 리비아 폭격 및 1988년 미 PANAM기 폭파사건에 리비아인이 기소된 이후 UN의 제재조치가 실행되고, 미·리비아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처하기도 했으나, 2003년 리비아가 대량 파괴 무기 포기를 선언한 후 서방과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어 2004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재개하였고, 이후 대외적으로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다.
다음백과
□ 리비아의 풍경








▲메뚜기떼 농작물 습격
□내전

▲전쟁중에도 기도 (리비아 반정부군)

▲민주화 2주년 기념 행사로 13.2.17.벵가지 나스르 광장에서 주민들이 천등을 날리고 있다

▲내전 = 반군의 돌무덤

▲기도

▲트리폴리 함락 축제 2011.8.21

▲반군 트르플리 장악 11.8.22.

▲리비아 해방 2011.10.23


▲카다피 처참하게 사망 2011.10.

▲카다피가 숨어있던 곳

▲카다피 개인의 타조 동물원

■ 리히텐슈타인
Liechtenstein리히텐슈타인공국, Principality of Liechtenstein

▲국기
정식 명칭은 리히텐슈타인공국(Principality of Liechtenstein)으로,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다. 면적은 160㎢, 인구는 3만 7624명(2015년 현재), 수도는 파두츠(Vaduz)이다.
주민 대부분이 독일계로 86%를 점하며, 이탈리아인 등이 14%이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며, 종교는 가톨릭교 76.2%, 개신교 7%이다.'
낙농업이 주요산업이며, 국제금융업·금속가공업도 발달하였다. 관광 및 우표 판매 수입이 국가 세입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2012년 현재 국민총생산량은 48억 달러였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13만 달러로 높은 수준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입헌군주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4년의 상원(15석)과 하원(1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진보시민당(FBP), 조국동맹(VU), 자유당(FL) 등이 있다.
1719년 1월 23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여 공국으로 성립된 뒤, 1919년 1월 1일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 독립하였고, 1921년 10월 헌법을 제정하였다. 아담(Hans Adam II) 2세 국왕이 1989년 11월 즉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중도우파를 표방하며, 1990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영세중립국으로서 군사·외교·재정은 스위스가 관장하며, 스위스에 유일하게 대사관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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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失業者 없고 빈부격차 없고 범죄 없는 3無의 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 12만 달러로 세계 최고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은 서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다.
수도는 파두츠(Vaduz), 국명은 리히텐슈타인 공국
(Principality of Liechtenstein)
알프스에 둘러싸인 천혜의 관광자원국 리히텐슈타인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작은 나라이며 유럽에서 네 번째로 작아 스위스의 어느 한 주로 착각하기 쉬운 나라 리히텐슈타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며 외교권과 국방권은 스위스가 가지고 있다.




▲국왕이 살고 있는 16세기 요제프 2세가 세운 리히텐슈타인 성
실업, 빈부격차, 범죄 없는 3無의 나라, 리히텐슈타인. 면적 160㎢, 인구 약 3만5000명,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로 현재 국가원수는 한스 아담 2세(Hans Adam II)다.
1719년에 셸렌베르크공국과 파두츠공국이 리히텐슈타인이 되었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 붕괴 이후 독일에 귀속됐다가
1866년 독일연방(라인동맹) 해체를 계기로 독립국이 됐다.
비록 소국이지만 국제특허출원 1.000건이 넘는 세계 6위로 현미경, 광학기기, 절삭기, 코팅 등 세계적 기술이 수두룩하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약 12만 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파두츠의 정부청사
▲파두츠의 미술관
▲거리에서 흔히 볼 수있는 조각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우표를 사려는 발길로 늘 북적댄다. 국가의 주 수입원이 우표일 정도로 수도인 파두츠를 중심으로 우정박물관 등이 전세계 관광객들로부터 우표의 나라라 불린다.
현재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고, 국민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없다. 작은 나라지만 王家가 소유한 富는 영국왕실을 능가하여 유럽 최고라 한다.
작은 땅, 큰 기쁨 '신비의 小國'
'작지만 강하다' 리히텐슈타인 만큼 이 말에 꼭 들어맞는 나라도 없을 듯하다. 인구 3만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인 리히텐슈타인. 남북 거리 25km, 동서로는 6km의 소국이지만 국민소득은 5만 달러로 최고의 부국 또 살기 좋은 나라를 선정하는 조사에서도 언제나 1, 2위를 다투는 복지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