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여행/국가별8/ 러시아2
■ 2013.05.09 러시아 군 전승기념일
▲전승 기념일 폭죽 예니세이 강변
■ 2019.05.08 미리 본 러시아 승전 기념일 퍼레이드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기념일(Victory Day) 드레스 리허설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시작됐다고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러시아 여군들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신화=연합뉴스]
올해로 74주년을 맞은 러시아 승전기념일은 옛 소련이 나치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1945년 5월 9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러시아 세르게이 국방장관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을 점검하고 있다.[AP=연합뉴스]
▲러시아 군 무기와 장비가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날 리허설에는 1만3000명 이상의 병사들이 참가, 곧게 다리를 뻗으며 열을 맞춰 붉은광장을 지나 행진했다. 여군들은 절도 있는 몸짓과 미소로 무장했다.
▲러시아 여군고등학교 학생들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EPA=연합뉴스]
▲러시아 여성 경찰들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대열을 갖추고 있다.[TASS=연합뉴스]
▲러시아 여군들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신화=연합뉴스]
▲러시아 여군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AP=연합뉴스]
또 대륙간탄도미사일, 지대공 미사일 등 130개 이상의 군 무기와 장비, 수호이 전투기 등 74대의 항공기와 헬리콥터가 퍼레이드에 동원됐고, 본 행사와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리허설이 진행됐다.
▲러시아 공군 비행기가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삼색 러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연기를 뿜으며 비행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 군 헬기가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비행하고 있다.[AP=연합뉴스]
▲RS-24 야르스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대가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이동하고 있다. [TASS=연합뉴스]
붉은 광장에 승리의 깃발과 러시아 국기가 나타나자 퍼레이드를 지휘하고 있는 올레그 살류코프 러시아 지상군 총사령관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에게 퍼레이드 준비를 보고했다. 이어 세르게이 장관과 올레그 총사령관은 아우루스 카브리오레(Aurus cabriolet) 리무진을 타고 부대를 사열했다.
▲러시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퍼레이드 리허설에 참가해 삼색 아우루스 카브리오레를 타고 군을 사열하고 있다. [TASS=연합뉴스]
중앙일보 변선구 기자
■ 볼거리
▲러시아의 겨울 풍경
▲레나 강변의 레나 기둥들
▲얼어붙은 집 - 오미야콘
▲오토바이 묘기
▲영하65도 오미야콘 마을 2018.1.16
▲낚시
▲그림 같은 고속도로
▲얼어 붙은 사하 공화국 야쿠츠쿠 거리 13.1.16.
▲얼음 수영
▲열차 사고로 유독성 구름이 러시아를 덮치다
▲체첸의 중앙이슬람사원
▲추위 속의 아름다운 커플'
▲환상적인 밤하늘과 여우
▲운치있는 예니세이강의 낚시 - 12.12.20
▲혹한 속의 낚시 12.12.28
▲얼어붙은 강 위의 사람들 13. 2. 4.
□신비한 동굴
이 동굴은 러시아 캄차카반도에 생성된 것이다. 무트노프스키 화산 인근에 형성된 이 동굴의 풍광은 말 그대로 신비하고 신기롭다. 동굴의 벽은 뭉게구름 같다
▲세계 최대동굴
▲200미터 강아래 신비의 동굴
▲뭉게 구름 동굴 - 캄차카반도
▼수중공굴
□ 바이칼 호수
▲바이칼21.세계에서 가장 깊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수심1637m)
▲바이칼 호수의 미스터리 서클(미항공우주국촬영)
▲환상적인 얼음언덕 -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바이칼 호수의 알혼섬 삼형제바위
▲알혼섬 불한바위
▲호수 박물관
▲카카시아 키프리노 호수
▲남부 카스피 해
■화산
▲러시아크로노즈키 활화산 -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 있는 활화산
▲반지의 제왕 같은 화산 - 13. 11. 러시아 캄차카 반도 클유체브스코이 화산
▲캄차카반도의 용암샘 - 2012년 화산 대폭발로 초토화된 지역에서 러시아 사진작가 가 촬영한 붉은색 웅덩이가 파란색 암석 붉은 석양 산맥의 실루엣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일상
▲푸틴 퇴진요구 시위 17.10.7 러시아
▲러시아의 홍수 12.7.8
▲모스코바 돌풍 2017.5.29
■ 모스코바
▲크렘린궁이 보이는 모스코바 강
▲모스코바의 분노=11.12.10. 러시아 총선 부정에 항의하는 수만명의 시위대
▲페미니스트 단체 푸시 라이어트 맴버들이 12.1.20. 붉은 광장 해골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며 시위하고 있다
▲빛나는 가로수
▲모스코바 바실리 대성당
▲바실리 성당앞의 불꽃놀이 11,8.30.
▲70년 만에 닥친 한파 - 붉은광장의 성 바실리 대성당 12.12.23
▲동방 정교회 신자들 부활절 예배 중 13. 5. 4. 모스코바 그리스도 대성당
2018.02.04 모스코바의 폭설
■백야의 도시 무르만스크
2016.06.21 '밤이 사라졌다' 白夜의 심장부를 가다
6월 21일은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인 하지(夏至)다.
연중 태양의 적위가 가장 커지는 시기요 태양이 황도(黃島)상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북반구에선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우리나라 낮도 연중 가장 긴 14시간35분 지속하지만 러시아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극권에 있는 나라에선 백야(白夜·white night) 현상이 나타난다.
백야란 고위도 지방에서 일몰과 일출 사이 태양광선 때문에 희미하게 밝음이 계속되는 현상이다. 통상 북위 66도 33분 이상 ‘Arctic circle’로 불리는 북극권(北極圈) 지역에서 일몰과 일출 사이에 밝은 현상이 계속돼 밤새 어두워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일출(日出)과 일몰(日沒) 사이 30분 정도 시간적 간격에서 이루어지지만 하지를 기준으로 며칠 동안은 일출과 일몰 시간이 같은 기현상이 벌어진다.
하지를 중심으로 러시아 북서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무르만스크 등은 백야 절정이다. 14일 자정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 북위 59도 56분에 있는 제정(帝政) 러시아 수도이자 핀란드만에 인접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해가 지지 않았다. 잠시 어두워지는 듯했던 도시는 오전 2시가 되자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백야의 도시 무르만스크. 휴대폰 구글 지도로 캡처한 무르만스크(사진 윗쪽 파란색 표시)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북쪽으로 1200여km 떨어진 무르만스크. 북위 67도 48분에 있는 북극권 세계 최대 도시 무르만스크는 완전히 하얀 밤의 연속이었다. 초절정 백야가 펼쳐졌다.
북극권 북쪽 200㎞ 지점이자 바렌츠해(海)로부터 48㎞ 떨어진 콜라반도 안쪽에 자리 잡은 이곳은 연중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으로 위용을 떨친다.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피격당한 채 강제착륙 당한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시내는 자정 넘어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고 오전 3시가 지나도 도시 광장에는 롤러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고 즐기는 젊은이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무르만스크역은 타지와 연결되는 철도를 이용하려는 승객들이 대낮처럼 다닌다.
하지만 관광객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수면 부족이다. 밤이 없으니 어지간해서는 잠을 잘 수 없다.
8개월 동안 겨울이 계속되는 이곳에서 낮시간보다 밤시간 이용에 익숙한 시민은 6월부터 두 달 간 지속하는 백야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건강 유지 비결이라고 말한다. 가정마다 두꺼운 커튼과 차광막을 설치하지만, 빛을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다.
▲백야의 도시 무르만스크는 하지를 중심으로 일출과 일몰시간이 같은 기현상이 벌어진다 도시는 완전히 밤이 사라진 낮의 도시가 된다.
그럼에도 겨우내 태양을 맞이하지 못한 주민들에게 이 기간은 축복의 시간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페트로프(37)씨는 “혹한(酷寒)과 밤 문화를 즐기는 무르만스크 시민에겐 백야는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시간”이라며 “방문객들이 ‘도무지 잠잘 수 없다’고 고통을 호소하지만, 우리에겐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무르만스크는 하지 때와는 달리 12월부터 두 달 동안 해가 뜨지 않고 밤이 24시간 지속하는 ‘극야(極夜·polar night) 현상'이 펼쳐진다.
무르만스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1915년 무르만스크 철도 개통으로 군수보급 항이 건설됐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 원조물자 창구였다가 독일군 폭격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러시아 북양함대 모항(母港)이자 무역항으로 어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곳은 연중 대서양 및 전 세계 해로와 연결될 수 있는 러시아 유일의 항구다. 겨울 동안 결빙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항을 대신해 러시아 북서부 주항 역할을 하며 지역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무르만스크는 이상기온과 지구온난화로 북극해 항로 개설과 관련 국제적인 관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러시아 전문가로 구성된 한러대화(조정위원장 이규형)는 백야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대표단과 ‘정치경제 콘퍼런스’, 무르만스크에서는 ‘북극항로 국제세미나’를 통해 양국 간 현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으며 북극항로 개발과 한러 공동 이용 협력 등에 관해 집중 토론했다.
정병선 기자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고 모스코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종착역이다
▲혁명광장 - 도시의 심장
▲1906년 건설된 굼백화점
▲하바롭스크
▲블라디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우수리스크
▲니콜라이2세 방문 기념으로 만든 개선문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름다운 풍경 13. 6. 28
▲인간 국기 - 13. 7.7.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골든 브리지에서 주민 26,904명이 모여 러시아 국기를 만들기 위해 적,청,흰색의 깃발을 들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 페테르부르크 박물관
▲에르미타주 미술관 -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 소장품이 300만점 돌아보는데 20km를 걸어야 한다
▲피터 대제에 의해 생긴 도시
▲예카테리나 궁전
▲1811년 지었다는 카잔 성당
▲구세주 성당의 모습
▲북방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시베리아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1NtdmNVNosA -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
□ 에니세이 강
▲겨울 수영
▲영하 30도의 강추위 =12.1.31.
▲강 얼음조각 위에 누워 있는 러시아 여인
▲얼어붙은 강
▲러시아 겨울 수영 클럽 회원들의 겨울 잔치 - 12.12.30 예니세이 강변
▲여인이 아이를 안고 예니세이 강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 12.12.30
▲클럽 회원들이 뱀 모양으로 늘어선 포즈
□야쿠티야 이야기
2015-04-17 조선일보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E-mail : kangds@hufs.ac.kr
1 곰 사냥하면 그날 먹고 혼을 달래는 원주민 에벤족
한국어가 퉁구스어인가?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선 퉁구스인 생활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퉁구스어를 직접 공부하여 한국어와 비교해 보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마침 야쿠츠크에서 800km 북동쪽에 있는 곳에서 에벤족 순록 축제가 열렸다. “토폴리노예” 마을이다. ‘백양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2010년 이곳은 에벤족 부락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을 가는 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800km 중 절반은 험준한 산길로 눈이 쌓여 있다. 도시에 사는 야쿠트들은 너무 위험하다고 강력히 말렸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바르바라 그리고리예브나 에벤어 교수가 동행하였다. 오호츠크해 연안 출신 에벤족 할머니이다.
버스에서 에벤족과 언어에 대한 많은 설명을 들었다. 사라져가는 언어와 문화를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엿보였다. 도중 한드가라는 곳에서 숙박하였다. 민박집이었다. 시베리아 한적한 마을에 개인 민박집이 있다는 게 신기하였다. 오히려 호텔보다 깨끗하였다. 저녁은 근처 슈퍼에서 사다가 해 먹으면 되었다. 편안한 친척집에 온 분위기였다. 안주인은 에벤족 여자였다. 에벤족 사람들은 야쿠츠크시를 오갈 때 비싸고 불친절한 호텔보다 이런 자기들끼리의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민박집을 이용하였다. 진짜 인간적 자본주의를 경험하였다. 이런 시골에서 개인 민박집을 허용할 정도로 러시아가 변해 있다는 것도 새삼 놀라웠다. 하룻밤에 1300루블,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였다.
다음 날 한드가의 시청을 찾아가 교육장을 만났다, 한국에서 온 교수라고 반겨 주며 우리가 가는 곳 토폴리노예의 가을 풍경 사진 액자를 선물로 주었다. 사하공화국에서 야쿠트인은 다수 중심 민족이다. 이에 비해 에벤족은 야쿠트인의 40분의 1에 불과한 소수민족이다. 1만 명 정도이다.
이들이 그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시절부터 시행되어온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 정책 덕분이었다. 소비에트 시절 소수민족은 우대를 받았다. 군대도 가지 않았다. 대학 입학에서도 혜택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세금 면제 등의 혜택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많은 것이 변하였다. 특히 경제적인 지원이 없어졌다. 소프호즈(집단농장)은 소수 민족에게 보호막이었다.
모든 것은 소프호즈가 해결해 주었다. 대기업처럼 조직된 소프호즈는 조직원인 소수민족들에게 월급을 주고 복지를 보장해 주었다. 에벤족이 속한 소프호즈도 마찬가지였다. 에벤족은 순록 치기만 잘하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변화가 덮쳤다. 소프호즈의 해체는 예상도 못 하였다. 갑작스런 소프호즈의 해체는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소수 민족에게 경제적 자립을 요구하는 조치였다. 이윤을 스스로 창출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윤이란 게 무엇인가? 순록 치기로 수백년을 살아온 에벤족은 이윤을 만들기 위해 순록을 길러 온 건 아니었다. 순록은 그들에게 운명과 같은 것이고, 하늘이 내려준 숙명이었다. 이들에게 지난 20년은 생존이냐 동화냐를 선택해야 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토폴리노예에 가는 도중 한드가 시에서 이미 변화의 문턱에서 고통받는 소수 민족의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었다.
▲에벤족에게 순록은 생명이다 강덕수
한드가는 본래 러시아인의 도시였다. 부근에 큰 탄광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 안에 지질학 전문대학도 있다. 지금은 러시아인이 대부분 떠나고 그 자리를 야쿠트인들이 대신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민족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50m 거리에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 그만큼 이곳에도 중앙아시아 출신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야채, 과일 상권을 장악한 중앙아시아인들이 여기까지 진출한 것이다.
한드가를 정오 쯤 떠났다. 토폴리노예에 당도한 시각은 거의 자정이었다. 한드가에서 토폴리노예까지는 350km. 그만큼 험난한 산길이었다. 도시의 야쿠트 사람들이 말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산을 넘으면 또 산. 에벤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저 산을 넘으면 돼요’라고 한단다. 그런데 또 산이 나온다. 가도 산이다. 산을 십여 개 지나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르렀다. 산 중턱에 산양 조각상이 있었다. 지나는 차들은 모두 서야 한다.
산양 조각상 아래에 동전, 빵조각, 담배 등을 갖다 바쳐야 한다. 자연의 주인을 숭배하는 의식이다. 샤머니즘 이전부터 내려온 믿음이다. 이것은 시베리아 민족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다. 에벤족은 샤머니즘을 거쳐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일 뿐이다. 그들 의식의 바탕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아직도 굳건하다. 그 중의 하나가 곰에 대한 숭배의식이다. 그들은 가끔 곰 사냥에 나갔다.
곰을 잡은 사냥꾼은 죽은 곰에게 경건하게 예의를 차려야 했다. 곰은 사냥꾼의 처지를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온 것이었다. 그런 곰의 선의를 먼저 감사해야 하는 것이었다. 곰을 잡은 에벤족은 마을 잔치를 열어야 했다. 곰 고기는 다 함께 그날로 다 먹어야 했다. 곰뼈는 원래의 형태로 조립하여 정돈한 다음 관에 넣고 매장하였다. 50년대까지도 곰뼈관을 작은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고대 의식이 남아 있었다.
자정에 빈 집에 여장을 풀었다. 순록 유목민의 천막집이 아니었다. 2층 아파트였다. 실내에는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난방도 중앙 공급식이었다. 따뜻했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에서 쇳내가 났다. 그러나 시베리아 벽촌에서 따뜻한 수돗물에 샤워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한드가에서 이곳까지 산길을 오느라 쌓인 피로와 긴장감을 씻어내기에 충분하였다.
이 마을이 세워진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소비에트 시대에 있었던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 정책 덕분이었다. 집안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벽장을 열어 보았다. 헌책들이 쌓여 있다. 1980년의 어느 날짜가 찍힌 소비에트 시대의 잡지가 나온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주인은 다른 곳에 자기 소유의 단독집을 따로 짓고 나갔다. 냉장고와 찬장엔 주인이 남기고 간 커피와 차가 있었다. 컵, 접시, 냄비 같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벽난로도 설치되어 있었다. 벽난로 밑에는 잘 쪼개놓은 장작이 있었다. 집안은 따뜻했지만, 한껏 분위기를 돋우고 싶었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붙이니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파트에는 순록 축제를 정보로 만들기 위해 같이 온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 둘이 더 있었다.
▲영하 6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속에서도 이동 가능한 순록썰매. 강덕수
바르바라 교수 며느리가 저녁 식사로 순록 기름에 볶은 밥을 해 주었다. 며느리는 40대 중반으로 보였다. 피부색이 희었다. 피부색이 흰 것은 에벤족의 특성이다. 이 점이 야쿠트인과 구별되는 겉모습 중 하나이다. 얼굴 모습은 오히려 한국인과 더 닮아 보였다. 이들은 과거 발해국의 백성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발해 시대에 고구려인과 이들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을까? 어느 시점에 이들이 헤어졌을까?
에벤어에선 한국어와 유사한 특성들이 꽤 발견된다. 예를 들면, 집은 ‘쥬’, 물은 ‘무’, 옷은 ‘오이’이다. 부사어 ‘위’는 에벤어로 ‘위’이다. ‘위에서’는 ‘위기치’, ‘위로’는 ‘위레’이다. 치아를 가리키는 이는 ‘잇’이다.
모든 동사의 기본형 어미는 ‘-다이’ 또는 ‘-데이’로 끝난다. 우리말의 조사 ‘도’는 에벤어로 ‘다’이다. 이렇게 추적해 가다 보면 무언가 고구마 줄기 같은 게 자꾸 나올 것 같다. 이 고구마 줄기를 당기다 보면 그 옛날 만주 어딘가에서 서로 이웃해 살던 그 시대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으며 밤이 길게 느껴졌다. 에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졌다.
2 신이 내린 영물 '순록'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에벤족은 누구인가?
에벤족은 과거 퉁구스족이라 불렸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원주민 중 하나이다. 퉁구스어족이 시베리아 중심부에 등장한 것은 AD 1000년경이다. 그전에 이곳은 유카기르인들의 땅이었다. 그들을 더 북쪽으로 밀어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순록 치기를 생업으로 선택하고 원주민이 되었다. 그 뒤 13세기경부터 투르크어족이 밀려왔다.
그들에게 중심부를 내어 주었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말과 소의 목축을 생업으로 하고 평야 지대에 정착하였다. 에벤족 일부는 이주민과 섞였다. 여기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났다. 이들이 현재의 야쿠트인이다. 이민족과 동화를 거부한 에벤족은 산악 지역으로 들어갔다. 시베리아의 산악지역에는 순록이 가장 좋아하는 “선”(이끼)라는 풀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퉁구스 북방계 얼굴형./해냄 출판사 제공
순록은 매우 순하며 참을성이 많다. 시베리아의 겨울 혹한에도 잘 견딘다. 순록은 영하 60도의 겨울에도 밖에서 서서 잔다. 순록의 가죽은 최선의 방한복을 제공한다. 순록 발목 털가죽으로 만든 겨울 구두 "운티“는 영하 60도에서도 견딜 수 있는 최상의 방한화이다. 순록 가죽으로 만든 털모자, 외투, 장갑은 최고의 방한복이다. 순록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골수는 보양식이다. 순록 혀는 더 이상 부드러운 것을 찾을 수 없는 진미이다. 순록 우유와 내장의 기름을 섞어 이것을 창자에 넣어 끓이면 ”케벨“이라고 하는 순대 요리가 된다. 뼈 조각들은 여러 가지 용도의 도구로 쓰인다. 작은 조각들은 장식품이나 애들 장난감으로 만들어진다. 녹용은 추운 지방의 순록에서 나는 것이 최상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록 뿔을 자르면 그 고통이 크고 심지어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뿔을 잘라 약용으로 쓰는 것은 하지 않는다. 순록은 에벤족에게 짐승이 아니라 바로 식구였다.
순록과 에벤족 순록 치기의 관계가 궁금했다. 유목지를 누가 선택하는지 물었다. 순록 스스로 한다고 했다. 순록 치기는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먹을 것도 주고 마실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었다. 그래서 에벤족은 순록을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여겼다.
순록이 주인인가? 사람이 주인인가? 이방인의 눈에는 구분이 안 되었다. 어느 곳에 이끼가 많은지, 어디로 유목을 갈 건지는 순록이 결정한다. 사람은 순록이 멈추는 곳에 ”발라칸“이라고 하는 텐트를 치면 잘 곳이 만들어진다. 순록은 이끼를 다 먹어치우지 않는다. 끝 부분만 먹는다. 방금 돋아난 싹만 먹는다.
그래서 열흘 이상 한곳에 머무를 수 없다. 싹을 다 먹으면 순록은 떠난다. 사람들은 가재도구를 챙겨서 순록 뒤를 쫓아간다. 이끼를 다 먹어치우지 않는 것은 순록이 얼마나 영리한 영물인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그래서 시베리아에선 먹이용 풀이 떨어지지 않는다.
▲에벤족에게 순록은 모든 것이다. 에벤족은 순록을 하늘이 주신 영물로 여긴다. 지금도 눈 덮힌 광야에서 순록을 따라 유목한다. 강덕수
순록과 비교되는 동물은 몽골의 염소이다. 염소는 풀을 밑동까지 다 캐어 먹는다. 염소떼가 지나고 나면 그 지역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이 된다. 오늘날 몽골 지역은 영토의 상당 부분이 사막이 되어 가고 있다. 12세기 칭기즈칸 시대에는 숲이 우거진 울창한 지역이었다. 몽골이 황폐화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염소 방목이다. 이에 비해 순록은 싹만 먹고, 대신 거름을 듬뿍 주고 간다. 다음 해엔 더 많은 이끼 선이 자라 있다. 시베리아에서 순록의 먹이가 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순록이 있는 한 에벤족의 미래는 영원할 것이다. 순록은 에벤족에게 신이 내린 영물임이 틀림없다. 순록과 함께 이끼 선이 자라는 곳을 찾아 유목 생활을 한 지 1000년이 되었다. 그래서 순록 없는 에벤은 에벤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한다.
3 혹한의 시베리아에 베트남-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이유?
지난 20년 간 순록의 마릿수는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왜? 전염병이 돌았는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수 세기 전 어느 땐가 전염병으로 순록이 거의 전멸한 때가 있었다. 에벤족은 서부 오호츠크 해 연안으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이들을 “라무트”라고도 불렀다. ‘바닷가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에벤족의 일부이다. 에벤족은 대부분 순록 목축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시대에 들어 이들은 부자 농민이 되었다. 이들은 소프호즈를 결성하였다. 소프호즈는 대기업처럼 운영되었다. 순록 목축에서 얻는 모든 제품은 소프호즈를 통해 공동 판매되었다. 소프호즈는 순록치기들에게 보호막이 되었다. 순록치기들은 순록만 잘 기르면 되었다.
그러면 월급이 지불되었다. 월급은 도시의 어떤 직업보다도 높았다. 또 토폴리노예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집은 아파트로 지어졌다. 이 아파트가 순록치기에게는 우선으로 배정되었다. 가족은 이 아파트에서 따뜻하게 살 수 있었다. 마을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도서관, 박물관이 세워졌다. 난방은 중앙공급식이어서 개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순록치기를 하는 에벤족 같은 소수민족에게는 사회적 특권들도 많이 주어졌다. 소수민족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군대 복무 의무가 없었다. 대학교 입학에서도 가산점이 주어졌다. 소비에트 시절 순록치기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였다. 그들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80년대 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과거에 겪은 전염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염병은 순록의 목숨을 거두어갔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에벤족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소비에트 시절 에벤족 중에선 부자 농민이 많이 나왔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이미 소비에트 시절 해외여행 경험을 하도록 하였다. 시대가 변하자 그들은 도시로 나와 쉽게 변화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대부분 에벤족에게 순록치기는 생각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에게 변화는 재앙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그들에게서 모든 특권을 거두어 갔다. 먼저 소프호즈가 해체되었다. 이제 그들은 스스로 생산자가 되고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했다. 스스로 물류를 책임져야 했다. 그들에게 이윤이란 개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의 이윤을 위해 순록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순록은 밤낮없이 먹이를 찾고 배부르면 잠깐 잠드는 생활을 한다./노르웨이 트롬소대 제공
세상은 에벤족의 순수한 삶을 더는 이해하지 않았다. 순록치기에게 주는 월급은 이제 5천 루블(10만원)에 불과하다. 그들은 순록을 지킬 수가 없다. 순록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그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종족 유지의 한계점에 이른 것이다. 에벤족에게 순록을 버리는 것은 바로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순록을 포기하고 마을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에벤족이 아니라 야쿠트인으로 살아야 한다.
에벤어는 사하공화국의 공용어 중 하나로 인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이 위의 기록에 불과하다. 토폴리노예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은 야쿠트어를 더 편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에벤어를 말하면서도 쉽게 러시아어, 야쿠트어가 튀어나왔다.
적어도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에벤어가 필수 과목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이상이 되면 아무도 배우지 않는다. 에벤어 교실을 들어가 보았다. 학생들 성적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유독 한 여자 아이의 성적이 뛰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을 보았다. 성이 “반-티엔-동”이었다.
여기까지 베트남 사람이 들어왔나? 러시아와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가까운 사이이므로 러시아에 베트남 사람들은 꽤 많이 있다. 도시라면 이해가 가는데 추운 시베리아 벽촌에 베트남 사람이 있을 거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베트남 여자아이가 에벤애들 보다 에벤어를 더 잘한다? 이 의문은 마을을 떠나 야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풀렸다. 봉고형 버스에서 운전사 옆의 앞좌석에 앉았다. 러시아에서 앞좌석은 제일 상석이다. 운전사가 에벤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야쿠트인이냐고 물었다. 바로 중국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3세대였다.
소비에트 시절 할아버지가 사하공화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주로 노동자로 여기저기 떠돌았다. 3대에 와서 에벤족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이 중 막내는 연방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에벤 아이들보다 에벤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는 여자 아이는 이 중국인 운전사의 손녀로 5세대에 해당하였다. 이 사람은 800km 떨어진 도시 야쿠츠크에서 농촌 토폴리노예로 야채를 공급해 주는 야채상이었다. 토폴리노예에서 감자를 사려면 야쿠츠크에서 보다 3배 정도 더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벤 민족 거주지”로 지정된 소수 민족의 땅, 토폴리노예의 현실이다.
토폴리노예에서 32살 된 여자를 인터뷰했다. 전통 옷을 입고 왔다. 얼굴색도 희고 선한 인상이었다. 얼굴 한 편엔 수심이 느껴졌다. 직업은 학교 보모였다. 아이가 셋이었다. 딸 둘, 아들 하나. 에벤족의 평균으로 보면 아직 셋 정도는 애를 더 낳을 것이다.
남편의 직업을 물었다. 운전사였다. 왜 순록치기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월급이 너무 적다고 했다. 그리고 유목 생활로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다고. 누가 먼저 직업을 바꾸자고 했느냐고 물었다. 아내가 먼저 권했느냐고 물었다. 남편도 고민했다고 한다. 유목 생활은 에벤족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것이 힘들다고? 그만큼 전통을 지키는 데 지쳐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운전사는 남자가 가족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수입도 훨씬 많다. 순록 썰매 대신 버스나 택시, 그들에게 변화된 세상에서 그래도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서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이것뿐인 것 같았다.
아직도 순록치기를 하며 에벤족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다. 셋째 날 순록 경주가 있었다. 남녀부로 나뉘어 순록 2마리가 이끄는 썰매를 타고 눈 덮인 강 위를 10km 달리는 것이다. 쟈먀킨이라는 가족의 부부가 각각 남녀부 우승을 차지하였다. 여자부 준우승은 쟈먀킨 부부의 처제였다.
쟈먀킨 부부의 아들은 순록 승마 달리기에서 우승하였다. 대단한 가족이었다. 쟈먀킨 부부는 30대 중반인데 아이가 아직 다섯이었다. 이들은 끝까지 순록치기 가족으로 에벤족의 전통을 지켜갈 것이다.
에벤족의 전통 노래를 “님간”이라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토폴리노예에서 할머니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가락이 우리의 전통 민요와 비슷했다. 이 할머니들과 함께 “님간”도 사라질 것이다. 저녁에 마을 예술제가 열렸다. 마지막 순서로 할머니 십여 분이 나왔다. “에벤 송”을 불렀다. 에벤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애국가 같은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다. 마지막 구절은 “에벤 만둘리”였다. 그 뜻은 “에벤족이여, 강해져라”이다.
4 '돌' '아씨' 등 우리말 쓰는 시베리아 다이아몬드 광산의 원주민, 과연 누구?
산골 마을 토폴리노예에서 들은 에벤 할머니들의 합창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에벤족이여, 강해져라!” 누구를 향한 외침인가? 과거의 영화를 애달파 하는 향수의 노래인가? 아니면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순록 치기를 위한 진혼곡인가?
그들은 묻는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왜 우리는 옛 노래만 부르고 있어야 하는가? 순록 썰매 경주에서 부부가 챔피언이 된 가족을 향한 박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순록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산을 오르는 대신 운전사가 되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고물 자동차를 몰고 산길을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
그래도 토폴리노예 마을은 나은 편이다. 2년 전 여름 남쪽 타이가 지역에 있는 에벤키 마을을 방문하였다. 에벤키족은 쉽게 말해 에벤족과 사촌쯤 되는 소수민족이다. 이 마을은 야쿠츠크에서 남쪽으로 1000km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그 마을은 레나 강 지류인 차라 강 중류에 있는 섬 “탸냐”라는 곳에 있었다. 도착한 날 환영식을 열어 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사람이 전통 복장을 하고, 할머니는 에벤키어로 노래도 부르고 주술을 외웠다.
▲에벤키 마지막 샤먼
마을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집에서 인터넷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 벽지 시골집에서 야쿠츠크에서보다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보고 놀랐다. 다음 날 학교를 가 보았다. 시골 섬마을 학교로서는 꽤 괜찮았다. 전 해에 홍수가 나서 고지대에 새로 지은 학교였다. 그 학교에도 에벤키어 교실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에벤키어를 할 줄 아는 애들은 없었다. 그냥 의무로 공부할 뿐이었다. 저녁에 촌장을 만났다. 건장한 체구에 대장부처럼 생겼다. 야쿠츠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인은 야쿠트 여자였다.
대화는 러시아어 아니면 야쿠트어였다. 촌장의 여동생들이 왔다. 여동생들은 에벤키어를 한 마디도 몰랐다. 왜 모르느냐고 물었다.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에벤키 말은 순록 치기들의 언어였다. 순록을 따라 유목을 하며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리고 손자에게 전해지는 언어였다. 그래서 이 집에서 에벤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촌장밖에 없었다. 이 사람에게 아들은 없었다. 에벤키어도 덩달아 대가 끊겼다. 딸은 야쿠츠크로 시집갔다. 그건 이미 에벤키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야쿠츠크로 돌아와 우연한 기회에 소수민족 연구소에서 에벤키어 연구원을 만났다. 촌장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에벤키어 덕분에 좋은 직장을 얻었다. 그녀에게 에벤키어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마을을 떠나기 전 샤먼을 만났다. 목소리만 들어도 치유되는 영험을 가진 샤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력이 다 해 북채도 잡을 수 없었다. 마을의 마지막 샤먼이었다.
2008년 4월 초 순록 축제를 처음 구경하였다. 야쿠츠크에서 북서쪽으로 비행기로 4시간을 올라갔다. 올료크마 마을. 올료크마 강변에 있는 그 마을은 작은 비행장이 있을 정도로 큰 시골이었다. 인구가 대략 2000명은 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 지역은 에벤키인 거주 지역이었다. 그런데 에벤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스스로 그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치원 과정부터 에벤키어를 가르치고자 선생을 초청하고 교재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에벤키어로 ‘돌’이 ‘됼’(d'ol)이고 ‘둘’이 ‘듈’(d‘ul)이란 걸 알았다. 또 ’여자‘가 ’아씨(asi)라는 말도 들었다. 충격이었다. 에벤키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계기였다. 우리말 동사 ‘잡다’에 해당하는 에벤키어 동사는 ‘잡-미’이다. ‘미’는 동사 기본형 어미이니 어근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찾은 어휘만 삼사십 개가 된다.
▲올료크마 순록축제에서 만난 에벤키 여인
올료크마 마을까지 여행을 동반해 준 사람은 국회의원 골로마료바 씨였다. 올료크마에서 야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은 우회로를 택하였다. 올료크마에서 우다치니라는 도시까지는 헬리콥터로 3시간, 우다치니에서 1박하고 우다치니에서 미르니까지는 자동차로 10여 시간, 다시 미르니에서 1박을 하고 야쿠츠크까지 비행기로 왔다. 우다치니와 미르니는 사하공화국 다이아몬드 광산 중심 지역이다.
올료크마에서 우다치니를 거쳐 미르니까지 이르는 서부 능선은 다이아몬드 광산 벨트이다. 원래 그 지역은 에벤키족이 살던 곳이었다. 45년 이 지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에벤키족은 더 북쪽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지금은 새로이 정착한 올료크마 지역에서 새로이 다이아몬드와 희토류 니오비움의 주산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올료크마의 에벤키인들에게 축복이 될 것인가? 지금 그들은 에벤키어를 얼마나 회복했을까?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그들과 에벤키어로 대화를 해 보고 싶다.
골로마료바 씨는 국회 북극 및 소수민족문제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4월 9일 그녀는 네륭그리에 있는 에벤키 마을 이엔그린에서 소수민족들의 언어 유지에 관한 특별 회의를 열었다. 과연 그런 회의가 소수민족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5 부여는 어디서 왔을까? 고구려 백제는 시베리아 만주에서 남하해 왔다?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들이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를 알려면 먼저 한국인은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해 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의 왕족이었다. 여기서 주몽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남하를 했다. 그리고 압록강변에 나라를 세운다. 주몽의 아들들이었던 비류와 온조는 부여에서 온 주몽의 맏아들 유리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전해지자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다.
부여는 어디서 왔을까? 그들은 누구였을까? 아마 그들은 더 먼 지역, 어쩌면 바이칼 부근에서 왔을 지도 모른다. 나중에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러면 그 당시 그들은 말이 서로 통했을까? 여기서 분명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는 시베리아 만주에서 남하해 왔다는 사실이다. 백제가 왔을 때 남쪽에는 이미 먼저 와 자리 잡고 있던 삼한이 있었다.
시베리아로 눈길을 돌려 보자. 야쿠트인, 에벤키인, 에벤인, 유카기르인, 축치인들이 있다. 야쿠트인은 40만이 넘는다. 사하공화국의 중심 민족이다. 그래서 여기선 소수민족으로 치지 않는다. 언어 유형으로 보면 야쿠트어는 터키어 계통이다.
에벤키어와 에벤어는 퉁구스-만주어족에 속한다. 유카기르어와 축치어는 범 아시아어계로 고대어 중 하나이다. 시베리아에 자리 잡은 순서를 보면, 시베리아의 최초 원주민은 축치인과 유카기르인이다. 이들은 기원전부터 이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1000년 경부터 퉁구스-만주어족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퉁구스-만주어족에게 동화되거나 더 북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치인과 유카기르인들이 북극권에 살게 된 이유이다. 시베리아는 오랫동안 퉁구스-만주어족의 땅이 되었다.
퉁구스어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략 AD 1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북쪽으로 들어오게 되는 시기는 대략 발해 멸망과 일치한다. 발해의 멸망으로 나라가 없어진 이들이 갈 곳은 없었다.
▲에벤사람들의 얼굴.
남쪽은 이미 먼저 간 형제들이 자리 잡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만주는 항상 약육강식의 땅이었다. 약한 부족은 견디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들이 갈 수 있는 빈자리는 추운 시베리아였다. 이곳엔 순록이 좋아하는 선(이끼)가 지천으로 있었다. 이곳에서 퉁구스족은 순록과 함께 평화를 얻었다.
에벤키와 에벤족이란 말은 러시아 혁명 후 30년대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퉁구스란 말의 어원은 중국어로 “tun-gu”, 즉 “동쪽 사람들”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러시아어에서는 ‘퉁구스’라고 되었다. 또 다른 말로 이것은 ‘툰-후’인데 한국인의 일족이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13세기경에는 칭기즈칸에게 밀린 투르크어족의 일파가 바이칼 호수 유역에서 북진한다. 이들은 말을 탄 사람들이고 소를 기르는 정착민이었다. 이들은 순록을 기르던 순한 민족 퉁구스족을 만난다. 이들은 퉁구스족을 정복하기도 하고 동화시켜 같이 살게 되었다. 이들이 지금 사하공화국을 주도하는 야쿠트인이다.
야쿠트란 명칭은 에벤키어에서 왔다고 한다. 에벤키 사람들은 이들을 “요코”라고 불렀다. 여기에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 ‘우트’가 합성되어 ‘요쿠트’가 되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어두에서 ‘요’ 발음을 회피한다. 그래서 러시아어로 야쿠트가 되었다. 이들이 중앙 대평원에 자리 잡자 원주민 퉁구스족은 다시 밀려났다. 에벤키, 에벤족이 주로 타이가와 툰드라 산악이나 숲 속에 자리 잡은 이유이다.
에벤키족은 상당수가 중국 흑룡강성, 몽골 지역에도 있다. 이것은 에벤키와 에벤을 비교할 때 에벤이 에벤키에서 분화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야쿠트인과 퉁구스인의 경쟁에서 퉁구스인들이 밀려난 원인은 생업 수단의 선택이었다. 야쿠트인은 말과 소를 키웠다.
반면 퉁구스인들 즉 에벤키와 에벤인들은 순록을 선택하였다. 말과 소는 정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순록은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정착민 야쿠트인은 문화를 만들고 전통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어가 언어적으로 퉁구스어 계통일 것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말에서 ‘후 불다’를 에벤어로는 ‘후-데이’이다. ‘안 한다’와 같은 구문에서 부정어 ‘안’은 에벤어로 ‘엔’이다. ‘없다’는 ‘아차’이다. 신라 시대에 거립간이란 왕의 명칭이 있었다. 에벤키나 에벤어에서 ‘간’(kan)은 ‘큰 것’을 의미하는 접미사이다.
알타이어 공동체에서 서쪽 끝으로 가서 성공한 민족은 바로 터키이다. 동쪽 끝으로 가서 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오늘날 성공한 민족은 한국이다. 터키는 우리를 보고 형제라 하면서 보기만 해도 열광한다. 우리는 어떤가?
21년 전 한류가 있기 전 이미 이 사람들은 한국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스스로 한국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대학교에 한국학과를 만들었다. 이곳에 한국 기업이 진출한 것도 아니다. 한국어를 공부해서 취직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래도 사하-한국학교는 이 공화국 최고 명문 중 하나가 되었다. 올해 가을엔 레나 강 건너에 있는 꽤 큰 학교에서 태권도부를 만들고 한국어를 필수로 배우게 한다. 많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어한다. 왜? 그냥 한국이 좋아서?
6 얼어붙은 시베리아강에 구멍만 뚫어도 몰려드는 물고기들… 건져내면 바로 냉동
누가 시베리아에 봄이 없다 하는가? 누가 시베리아를 황량한 벌판이라 하는가? 시베리아에도 봄은 붉은 매화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시베리아에도 사계절이 있다. 계절에 대한 정의가 다를 뿐이다.
이 사람들은 겨울을 눈이 오는 것으로 기준을 잡지 않는다. 눈은 봄에도 오고 가을에도 내릴 수 있다. 눈이 쌓여 온 세상이 완전히 하얘지면 그때 비로소 겨울이 왔음을 인정한다. 적어도 수은주가 영하 30도로 내려갈 때까지는 겨울로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이는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근심 없는 세상이 된다. 눈 덮인 하얀 길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여자를 상상해 보라! 우아한 털모자 샤프카, 반지르르한 모피코트, 긴 부츠.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가? 느낌만으로도 전율이 흐르지 않는가?
시베리아에선 어디를 가도 한겨울엔 더러운 구석을 찾을 수 없다. 모든 것을 하얀 무명천으로 덮은 듯 백색의 향연이 어우러진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백설공주가 되고 공주를 맞이하는 왕자가 되는 꿈을 꾼다. 하얀 눈은 세상을 물리적으로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이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바꾼다. 집에 들어가면 긴 털코트를 벗고 가벼운 반소매만 입어야 한다. 목욕탕에선 언제나 뜨거운 물이 나온다. 추위에 언 몸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물가가 오른다 해도 빵과 우유와 고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페레이스트로이카 이후 집단 농장은 사라졌다. 대신 기업농들이 나타나 농업의 효율성은 높아지고 있다. 밀은 러시아가 수출해야 할 정도로 풍부하다. 빵 값이 오를 리 없다. 축산업은 기업처럼 발전하고 있다. 걱정은 과일, 야채, 쌀값 정도. 그런 것은 덜 먹으면 된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 온도만 보면 분명히 춥다. 그러나 바람이 없다. 영하 50도라 해도 외투에 털모자, 부츠만 있으면 추위가 두렵지 않다. 해가 뜨는 한낮에는 오히려 한국의 3월쯤 햇살이 주는 달콤함을 느낄 수도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눈 속에 감추고 근심도 잊는다. 그러면서 봄을 기다린다.
▲시베리아 시골마을의 봄 풍경.
2월이 되면 기온은 영하 30도로 올라간다. 영하 40도와 30도는 엄청나게 다르다. 갑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난 겨울 잠깐 이곳을 방문했던 한국 사람이 옷을 가볍게 입고 모자도 쓰지 않고 나가려 해 걱정을 시킨 일이 있다. 그렇다고 모자를 벗고 외투를 가볍게 입으면 안 된다. 그럴수록 조심해야 하는 게 시베리아의 겨울이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듯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3월이 되면 거리엔 활기가 넘친다. 야외 스케이트장, 야외 스키장이 사람으로 가득 찬다. 사냥꾼들은 총을 꺼내 기름칠을 하고 사냥 준비를 한다. 강위엔 낚시꾼들이 구멍을 얼음 위에 뚫고 고기를 퍼낸다. 강 위 얼음에 구멍을 내면 한겨울 얼음 속에 갇혀 산소 부족을 느끼던 물고기들이 구멍 주위로 몰려든다. 낚시꾼은 바가지로 퍼내듯 고기를 건져내면 된다. 물고기는 얼음 밖으로 나오는 순간 냉동이 된다. 아름다운 시베리아를 경험하고 싶으면 3월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4월이 되면 여기저기서 축제가 열린다. 주로 순록 축제이다. 순록 치기들은 더 추운 북쪽으로 떠나기에 앞서 한바탕 몸 풀기를 한다. 경주를 하고 음식을 나누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눈 속에 파묻혀 겨울잠을 자던 나무들도 깨어난다. 스틀라니크(stlanik)라는 나무가 있다. 삼나무의 일종이다. 겨울이 되면 곰처럼 납작 엎드려 눈 속에 몸을 숨기고 혹한을 피한다. 4월쯤 되면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높이가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4월의 시베리아는 눈부시다.
▲에벤의 봄맞이 축제.
아침 5시면 동이 튼다. 이때부터는 커튼을 두껍게 치든가 일찍 일어나야 한다. 백야가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한낮에 나가려면 선크림이라도 발라야 한다. 아니면 얼굴이 벌써 타기 시작한다. 야쿠츠크의 봄은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한다. 모스크바에서 봄을 보낸 적이 있다. 몹시 힘들었다. 햇빛도 없고 자주 가랑비가 내렸다.
날씨는 음산하고 바람마저 불면 몸이 그냥 움츠러들었다. 그때 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았다. 그걸 야쿠츠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4월 중순이 되면 약간의 근심거리가 찾아든다. 햇살이 눈에 부시지만 발아래 길거리는 눈 녹은 물로 질퍽거린다. 동토에 하수도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녹은 물들이 그대로 물구덩이가 되어 고여 있다. 운전사들이 행인을 배려할 만큼 문화적이지는 않다. 잘못하면 흙탕물을 바가지로 쓸 수 있다.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4월의 가장 큰 근심거리이다.
5월이 되면 뜨거워지는 햇살이 모든 걸 해결한다. 눈 녹은 물은 하늘로 빨아올려져 먼지가 일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모두 여름철 휴가를 어디로 갈까 궁리하느라 다른 걱정은 다 잊는다. 6월을 지나 한여름이 되면 기온도 영상 30도를 넘는다. 사람들은 더위를 참을 수 없다는 듯 휴가를 떠난다.
소치로, 터키로, 방콕으로, 형편이 좀 좋으면 제주도로. 그 돈이 어디서 나느냐고?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좋다. 시인 추체프는 러시아를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믿으라 했다. 어쨌든 한여름이 되면 시베리아의 중심 야쿠츠크 시는 텅 비어 버린다. 바닷가로 달려가 한겨울 쌓였던 모든 피로를 떠내려 보낸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9월이 되면 한여름 미루어 놓았던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정신들이 없다. 10월까지 바쁜 가을을 보낸다. 일들을 대충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릴 만하면 눈이 내린다. 세상은 백색의 설국으로 바뀐다. 여인들은 모피코트, 샤프카, 부츠를 꺼내 겨울 왕국의 백설공주로 변신한다. 난방이 완벽한 아파트 실내에서 겨울은 두렵지 않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사내들은 사냥총을 손질하며 지난해 놓친 산양의 발자국만 생각한다. 이번 겨울엔 그놈을 잡을 수 있을까? 시베리아의 1년이 이렇게 지나간다.
7 야쿠티야 이야기
운전석 앞에 예수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토폴리노예에서 보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겸연쩍게 웃으며 “그냥”이라고 답한다. 토폴리노예 마을을 살펴보았지만 어느 구석에도 교회의 흔적은 없었다. 사진은 과거부터 내려오던 원시 신앙의 부적을 대신한 것일 뿐이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는 기독교와 원시 신앙이 화해하지 못하고 모두가 무너지고 마는 비극을 보여준다. 시베리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을까?
문헌상으로는 에벤족이 이미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에벤키족이나 야쿠트인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오히려 기독교, 샤머니즘, 토테미즘이 혼합된 민간 신앙이 발전하였다. 시베리아의 자연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과 자연현상의 “주인”에 대한 경외심과 숭배였다. 특별히 존중된 신은 사냥의 신 “바야나이”였다.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바야나이 신에게 성공을 기원하고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나뭇조각 “아물렛”을 불에 바친다.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에는 신선한 피를 얼굴에 바르고 고깃덩어리를 불에 바쳐 바야나이 신에게 감사한다. 마을에 환자가 생기면 흰털 순록을 태양에게 제물로 바치는 태양 숭배 의식도 있었다. 또 곰 숭배 의식도 오래갔다. 이런 토테미즘은 지금도 자주 볼 수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자동차가 꼭 서야 하는 곳이 있다. 그곳엔 오래된 나무들이 있고, 그 나무 위에 울긋불긋한 헝겊 조각들이 걸려 있다.
어렸을 적 보았던 서낭당 같다. 거기에 동전이나 빵조각을 바쳐 자연의 주인에게 성의를 표시한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야쿠트인들도 예외가 없다. 오히려 야쿠트인들은 토테미즘을 정신세계의 바탕으로 신화화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발전한 문학 장르가 “올롱호”이다. 이것은 2012년 유네스코에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야쿠트 샤먼.
시베리아는 기가 센 곳이다. 자연히 샤머니즘이 크게 발전하였다. 십여 년 전 한국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가서 수술도 받고 치료를 하였지만 완쾌가 되지 않았다. 두통이 계속되었다. 마침 야쿠트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야쿠티야의 영험한 샤먼을 소개하였다. 샤먼이 물었다. 당신이 사는 아파트 남쪽에 호수가 있지요? 예! 그 연못에 산 물고기를 바쳐 방생하면 나을 것이요. 환자는 그대로 했다.
토폴리노예로 가는 길에 추랍치라는 지역을 지났다. 샤먼이 될 운명을 타고난 여자가 있었다. 샤먼 교육을 받았다. 샤먼 교육은 최종 9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도중 넘어져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젊은 나이에 그 여자가 죽었다. 죽은 뒤 그 여자는 큰 샤먼이 되어 사람들 앞에 혼령이 되어 나타났다. 한 번은 크림 반도에 사는 친척 여자의 꿈에 나타났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친척 여자는 자기 고향 야쿠티야 추랍치로 돌아왔다. 그다음 해에 2차 대전이 일어나고 크림은 독일군에 점령당하였다. 지금 그 여자는 미라가 되어 야쿠츠크 시의 역사문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시베리아의 자연은 속이 깊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 그 속에서 자연에 도전한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머니 대지의 보호를 청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생각했다. 샤머니즘이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샤먼은 누구인가? 에벤키말로 ”sa-mi"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man"은 ‘최고수, 장인’이라는 뜻이다. 즉 에벤키어 ’saman'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이 ”샤먼‘의 어원이다. 야쿠트어로 샤먼은 ”이첸“(ichchen)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에벤어 ”잇-테이“(it-tej), 즉 ‘보고 있다’라는 말과 ‘최고수’라는 뜻의 접미사 ”chen"이 결합해서 생긴 말이다. 야쿠트어의 ‘잇첸’은 에벤어에서 차용된 단어이다. 야쿠트 문학 작품 “올롱호“에는 ‘박스’(bachs)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말의 ‘박수 무당’의 ‘박수’의 어원이다. 샤먼은 시베리아가 원조다. 그 샤먼의 원조가 퉁구스족 에벤키와 에벤이다. 그러나 에벤키 마을이나 에벤 마을에서는 언어와 함께 샤먼도 사라지고 있다.
▲의식을 하고 있는 야쿠트 샤먼.
토폴리노예에서 할머니를 인터뷰하였다. 자기 할아버지가 “하얀 샤먼”이었다는 얘기를 동네 어른들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다. 하얀 샤먼은 치유의 능력을 지녔다. 동네 사람들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북채를 잡은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공산당 치하의 소비에트 시절 샤먼은 박해의 대상이었다. 북채를 뺏어 갔다고 하였다. 북채 없는 샤먼은 총을 뺏긴 병졸에 불과했다. 공산당 시절 샤먼에 대한 박해는 그만큼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샤먼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에벤키나 에벤족은 샤먼을 되살릴 여력이 없다. 말도 영혼도 혼미해져 가고 있다. 그러면 샤먼이 사라진 자리를 기독교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 지난 부활절 야쿠츠크에서는 처음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야쿠트인 사제를 배출하였다. 전교 200 년 만에 단 한 사람의 사제. 여전히 동전들은 고갯길마다 서 있는 서낭당 같은 나무 밑동에 수북이 쌓여 있을 것이다.
8 시베리아에 병충해라니
토폴리노예로 가는 도중 타틴이란 곳을 지났다. 타틴 지역은 넓이가 한반도 반 만한 곳이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였다. 시베리아는 본래 나무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때 벨로룹스카야 교수가 한 마디 건넨다. 20년 전에는 이곳에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고. 흔들리는 차에서 몸을 뒤척이며 지루해하던 날 깨웠다.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고요? 왜요?”
타틴 지역은 물이 부족했다. 부근에 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자라지 못했다. 10년 전 이 지역 출신이 사하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기 고향에 큰 선물을 주었다. 300km 떨어진 레나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대형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레나강을 건너면 지름이 1m는 충분히 넘을 듯한 관이 길을 따라 달린다. 그 관을 송유관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수도관이었다. 그 관은 추랍치를 지나 타틴까지 이르러 한반도 반 만한 지역에 퍼져 있는 마을마다 물을 공급하였다.
타틴 지역은 이제 물이 부족한 곳이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이 땅은 완전 동토였다. 표면까지 동토였다. 그래서 물을 얻을 수 없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무도 물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동토에서 물이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20년 사이 기온 변화는 이 지역을 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바꾸었다. 곳곳에 늪이 생기고 숲이 우거지게 되었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숲이 검게 그을어 있었다. 숲에 병충해가 생긴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소나무 재선충. 이 병충해가 생기면 그 주변의 나무는 모두 불태워야 한다. 한국의 전문가를 불러 보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베리아에 그런 병충해는 드문 일이었다. 연구도 자연 별로 없었다. 여기선 숲에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냥 두면 탈 만큼 타다 스스로 꺼진다. 그게 시베리아다.
야쿠츠크시를 동쪽으로 거대한 레나강이 흐른다. 강폭이 좁은 곳은 3~4km, 넓은 곳은 10km가 넘는다. 강변 쪽으로 넓은 퇴적층이 발달하였다. 그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동토가 아니다. 같은 야쿠츠크 시내라 해도 건물을 지으려면 ‘스바이’라고 하는 굵은 기둥을 12m 이상 땅에 박아야 한다. 그 기둥 위에 건물을 올린다. 지하실은 팔 수 없다. 그런데 강변 퇴적층에는 기둥을 박을 필요가 없다. 지하를 파고 기초공사를 할 수 있다. 지하실도 만들 수 있다. 이 지역은 앞으로 야쿠츠크의 신시가지로 기대되고 있다.
▲혹한지 고풍스러운 건축물 주변에 건설되고 있는 빌딩./조선일보DB
분명히 온난화는 시베리아에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점만 있을까? 만일 동토가 녹으면 어찌 될까? 땅이 물러지지 않을까? 그럼 기초 없이 기둥 위에 지어진 빌딩들은 어찌 될까? 지질학을 모르는 문외한의 우려일 수도 있다. 지금 야쿠츠크 시에선 최고 26층짜리 빌딩 프로젝트가 발주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스바이라는 기둥 위에 지어질 것이다.
사하공화국에 러시아인이 본격적으로 이주한 것은 다이아몬드 때문이다. 1940년대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된 이후 러시아인들이 많이 들어와 도시를 형성하였다. 미르니는 다이아몬드 중심도시, 뉴륭그리는 석탄 도시, 틱시는 북해 항로 중심. 이런 식으로 러시아인이 주도하는 도시들이 생겨났다. 1995년 다이아몬드에 대한 연방정부의 독점권이 끝났다. 이제 사하공화국의 경제, 사회 주도권은 야쿠트인들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또 얼마나 오래갈까? 사하공화국의 발전 속도보다 인구가 너무 모자란다.
시장을 가보면 그 변화의 판도를 읽을 수 있다. 생필품 시장은 중국인들이 장악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 시장을 사람들은 그냥 ‘중국시장’이라고 부른다. 야채와 과일 시장을 가면 중앙아시아 출신 상인들만 보인다. 이들의 카르텔은 토폴리노예에 가는 길에서도 보았다. 사하공화국 깊숙한 곳에까지 이들의 손길이 미쳐 있다. 바로 얼마 전엔 북한 사절단이 왔다 갔다. 이곳에 노동력을 수출할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왔다. 시내에 가톨릭 성당이 하나 있다. 신자수라야 50명이 넘지 않을 것 같다. 작년부터 새로운 신자들이 늘었다. 필리핀 여자들을 상당수 미사에서 볼 수 있다. 필리핀에서 영문 주보를 보내고, 신부는 강론 말미를 영어로 정리한다. 새로운 풍속도를 본다. 앞으로 야쿠츠크 시 인구 25만명에 유입인구 10만명이 증가한다면 사하공화국에 어떤 일이 생길까?
야쿠트 친구에게 농담한 적이 있다. 사하공화국을 지켜 주는 군대가 있느냐고? 그것은 추위라고. 이곳은 너무 넓어 인력으로는 지킬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혹한이 이민족의 접근을 제한해 왔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도, 가스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땅엔 개발된 것보다 개발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우리나라가 눈이 빠지게 찾는 니오비움, 볼프람 같은 희토류도 그대로 묻혀 있다. 이 나라에서는 이런 지하자원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적이 없다.
▲희토류./조선일보DB
이제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야쿠트인은 13세기 바이칼 지역에서 올라와 원주민과 섞이면서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사이 이질적 문화를 가진 새로운 사람들이 눈에 띄게 들어올 것이다. 게다가 혹한은 예전 같지 않다. 혹한이 두려워 이 땅에 오지 못하는 겁쟁이들은 없어 보인다. 야쿠트인들은 이 땅의 주인으로서 길게는 400년간, 짧게는 70년간 러시아인들과 잘 지내 왔다. 이미 다민족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문화 속에 지혜를 축적해 왔다. 자연의 변화가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궁금증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동토가 녹으면 그것이 축복이 될까? 재앙이 될까? 야쿠트인들은 분명히 이것을 축복으로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고 싶다.
9 재작년 2만8000년 된 매머드 발견으로 학자들 전율… 한국 학자들 시신에서 세포 채취 성공
사하 공화국을 방문하면 꼭 안내하는 곳 중 하나가 북동연방대학교 매머드 박물관이다. 매머드가 야쿠티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1799년이다. 사냥꾼이 우연히 레나 강 하류에서 본 것이었다. 1970년에는 북쪽 인디기르카 강의 작은 지류에서 매머드 무덤이 대거 발견되었다.
160 마리의 매머드가 한꺼번에 묻힌 거대한 무덤이었다. 눈보라에 쇠약해진 매머드들이 쓰러져 죽은 것이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매머드는 1977년 발견된 7개월짜리 새끼 매머드였다. 이 매머드는 보관 상태가 양호하여 매머드가 죽은 원인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새끼 매머드에게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디마”(Dima)였다.
1994년 처음 야쿠츠크를 방문하였을 때 이 디마가 야쿠츠크 동토연구소 지하에 보관된 것을 보았다. 2년 뒤 다시 동토연구소를 방문하였을 때는 디마가 없었다. 이것이 페테르부르크로 옮겨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2002년에는 인디기르카 강 부근에서 남학생 애들이 매머드 머리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2012년 한국에서 전시된 바 있다. 최근에 발견된 것들은 더 이상 공화국 국경 밖으로 반출되지 않는다. 매머드 박물관은 최근 5년간 4000 점 이상의 화석들을 수집하였다. 그중 최근의 화석은 1만2500년 된 개 화석이다. 이것은 개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2010년 야쿠티야에서 발견된 매머드. /AFP
최근 매머드 연구 학자들을 전율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2013년 북빙양의 작은 섬 말리 랴홉스크 섬에서 매머드가 발견되었다. 매머드 암컷이었다. 이 매머드 시신에서 부드러운 세포와 얼지 않은 피가 나왔다. 2만8000 년 된 매머드였다.
이 매머드는 작은 얼음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작은 동굴에 들어가 매머드 시체를 꺼내는 일은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2014년 이 매머드 시체에서 세포와 피를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한국 학자들이 이 일을 해냈다. 이 세포와 피에서 매머드를 복제할 수 있는 세포를 배양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결과가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북동연방대학교에서는 연방 차원의 지원으로 매머드 복제를 언젠가 꼭 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적어도 반세기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한다. 매머드 복제 프로젝트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사하공화국에서는 그중에서도 한국 학자들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런데 왜 매머드 복제에 그리도 목을 매고 있는가? 매머드는 초식동물이다. 매머드 1마리가 하루에 먹는 풀은 1톤이 넘는다고 한다. 매머드가 복제되어 살아난다면 그 풀은 어디서 구할까?
여기 야쿠티야는 동토의 땅이다. 말과 소에게 먹일 풀도 모자란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건초량에 맞추어 말과 소의 머릿수를 조절한다. 야쿠티야는 매머드의 나라라고 한다. 그것은 매머드가 이 땅에서 다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살아서 걸어 다니는 매머드가 야쿠티야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매머드가 멸종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2만 년 전 갑작스런 빙하기의 도래로 멸종된 것으로 보는 가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멸종 원인의 하나는 인간의 탐욕이다. 이미 기원전 1만 년 전에 화살과 활을 사용하여 사냥하던 문화가 있었다.
숨나긴스크 문화의 고대인들은 야생동물을 사냥하였다. 그 이전에 이미 매머드는 멸종되었다. 인간의 손에 멸종된 최초의 동물을 인간의 손으로 복제한다? 시베리아 자연의 신 ‘보야나이’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들판에서 한 노인이 열심히 땅을 판다. 다음 날엔 흙을 덮어 그 땅을 메운다. 그런 일을 계속하는 걸 본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 일을 왜 하시오? 그건 왜 묻소? 러시아 우화에 나오는 노인 이야기다
10 시베리아에 한국 학교가 들어선 까닭은?
1945년 소련은 독일 히틀러의 전격적인 침공을 받고 쑥대밭이 되었다. 스탈린은 독일에 대항해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가 필요했다. 미국은 소련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소련에 무기를 보낼 루트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선택된 루트가 페어뱅크스-야쿠츠크였다. 야쿠츠크는 시베리아 깊숙한 곳에 있어 독일 정보망으로부터 안전하였다. 소련 비행사들이 페어뱅크스까지 가서 무기를 실은 수십 대의 항공기를 몰고 야쿠츠크까지 왔다. 이때 처음 야쿠트인들은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 야쿠트인들이 바깥 세계란 것에 눈을 뜨게 된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리고 45년이 흘렀다. 1991년 야쿠티야는 사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가장 먼저 외무부를 만들었다. 바깥 세계의 존재를 알려준 페어뱅크스를 기억했다. 페어뱅크스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많은 사람을 알래스카에 보내 영어를 배우게 하였다. 유네스코에 가입하였다. 교육, 문화와 과학 부문에 절실한 도움이 필요했다.
1990년대 사하 공화국의 존재는 너무나 미미하였다. 시베리아가 ‘동토의 땅’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하공화국을 다녀간 서방 사람들의 기록은 한결같았다. 음습하고, 낙후되고, 춥고, 거친 땅. 영국 여행가 안나 레이드는 1992년 이 지역을 여행한 후 “샤먼의 코트”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을 읽고 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시베리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게 시급했다. 먼저 교육 제도의 선진화 정책을 만들었다. 영재학교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제일 먼저 영재예술학교를 세웠다. 여섯살짜리 음악 영재를 모아 열여섯살까지 가르치는 전문학교이다.
캐나다가 도와주었다. 그다음 외국어 영재학교를 세웠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터키어 학교. 야쿠츠크의 고려인들이 시 교육청을 찾아왔다. 한국어 학교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 사하-한국학교가 세워졌다. 1994년의 일이다. 지난 21년간 이곳 사하와 인연이 묶이게 된 실마리기도 하다. 지금 이 학교 중 남아 있는 외국어학교는 사하-한국학교가 유일하다. 사하-한국학교는 명문이 되었다. 지난 20여년간 시베리아에서 한국 문화 전파의 교두보 역할을 해 왔다.
▲러시아 야쿠티야 자치공화국내 사하자치지역의 사하-한국학교 우등생 13명이 1997년 7월 31일 한국연수차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면서 한국외국어대 노어과 학생들로부터 환영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DB
사하 정부는 세상사람들이 시베리아의 오지를 찾아올만한 구실 마련이 절실하였다. 과학, 수학, 정보 국제 올림피아드를 1994년부터 개최하였다. 과거의 동맹국 루마니아, 불가리아, 몽골, 그리고 중국 학생들을 초청하여 국제대회로 키웠다. 아시아청소년경기대회를 4년마다 독자적으로 열어 중앙아시아, 유럽에서도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 대회로 키웠다. 사하 정부는 참가자들을 위해 체재비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다.
국제화를 위한 자기희생이자 투자였다. 유네스코 국제회의도 유치하였다. "Linguistic Diversity in Cyber Space"를 주제로 하는 유네스코 국제회의를 3년마다 개최한다. 작년에는 52개국에서 400여 명이 참석하였다. 5월부터 11월까지는 각종 국제회의로 호텔 방 잡기가 만만치 않다.
2010년에는 야쿠츠크국립대학교가 북동연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러시아에서 연방대학교는 4000개 대학 중 10개뿐이다. 우랄 산맥 동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2개 대학교밖에 없다. 북동부 시베리아의 중심 거점으로 인정되었다는 증거다. 국제학부를 만들어 영어 교육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학부 특강을 맡은 강사가 ‘북방 포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북방포럼에 한국의 강원도가 회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한국이 왜 북방이냐고? 자기들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분명히 남방이지만 북방에 과학 기술을 전수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강원도를 초빙하였다고. 북방포럼이 추구하는 목표 중 하나인 삶의 질 개선을 위해 원격의료기술에 관한 포럼을 아이슬란드에서 개최하였다. 강원도가 발표하였다. 그때 충격을 받았다고. 모든 게 미국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2011년 8월 철도 건설현장을 방문한 한국 대표단. 오른쪽이 정태익 전 주러시아 대사.
야쿠츠크에 가기엔 교통이 너무 불편하였다, 이제는 아니다. 서울과 야쿠츠크는 직항으로 4시간 반 거리이다. 철도도 야쿠츠크의 강 건너까지 건설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나가는 물류 수송도 개선되었다. 시베리아는 바로 사하 공화국이다. 사하공화국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야쿠츠크 시에는 2년 안에 26층 빌딩이 들어선다. 니오비움, 볼프람, 가스전을 두고 한바탕 국제전이 붙을 수도 있다.
대륙을 바라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참으로 절묘하다. 한반도는 대륙의 변화를 주도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니면 대륙의 끝자락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선택은 이제 우리가 해야 한다.
11 시베리아에도 안현수 열풍
동토의 땅, 사하공화국에서는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겨우내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기나긴 밤을 무얼하며 보낼까? 이곳에서는 9시가 넘어야 해를 빛을 볼 수 있다. 12월 수은주가 영하 40도 이상 내려가면 바깥세계는 완벽한 겨울 왕국이 된다.
한국에서 동토의 겨울나기를 보여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두꺼운 모피 코트, 털모자 샤프카, 운티라 불리는 부츠. 원주민은 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고도 추위에 사는 게 힘들어 보인다. 한국 TV는 따뜻한 나라에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한껏 보여준다. 정말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나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 시베리아에 살지 않는 우리는 행복한 것일까?
15년 전 어느 겨울, 아마 12월이 아니었을까?
오전 7시, 차가운 백설 위를 수은등 불빛만이 수줍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시내 중심가를 빠져나오는 순간 일행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저기 좀 봐요!” 남자와 여자가 발가벗은 채 양동이로 물을 온몸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모습이 순간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몸이 얼어붙었다. “저럴 수가!”
러시아에선 얼음을 깨고 호수에 들어가는 행사가 지역마다 있다. 모스크바 근교 또는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 지방 같은 곳에선 연중 겨울 행사이다. 그런 지방은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영하 30도를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 야쿠츠크와 같은 곳과 비교가 안 된다.
야쿠츠크의 겨울 생활은 참으로 단조롭게 보인다. 출근길에서나 퇴근 길에서나 햇빛은 볼 수 없다. 출근하는 오전 9시, 아직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오후 6시, 이미 밤길을 가야 하는 퇴근길이 종종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빨리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여자들의 마음은 더욱 바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 도시엔 영화관이나 콘서트홀이 꽤 많다. 이미 1990년대에도 발레단과 오케스트라, 연극 전용 극장이 있었다.
이런 문화 시설을 갖춘 곳은 극동과 시베리아에서 이곳이 유일하였다. 1990년대에 지방도시의 연극단이 우리의 대종상에 해당하는 황금가면상을 받은 곳은 야쿠츠크가 유일하였다. 야쿠츠크의 도시 규모는 1990년대 20만, 지금은 30만 정도이다. 작은 도시가 50~60만 정도의 도시보다도 더 많은 문화 시설과 깊은 전통이 있는 것은 긴 겨울 덕분인지도 모른다.
▲야쿠츠크 쇼트트랙전용 경기장 엘레이 보오투르 전경(위)과 연습중인 야쿠티야의 쇼트트랙 선수들.
2000년대에 들어서 체육 시설이 많이 지어졌다. 특히 수영장, 실내 축구장, 육상장이 들어섰다. 여름엔 따가운 햇볕과 모기 때문에 야외 활동이 제약을 받는다. 겨울엔 역시 추위 때문에 야외 활동이 쉽지 않다. 겨울에도 수영 같은 실내 운동이 인기를 끈다. 한겨울이 지나 3월이 되면 영하 30도를 웃돈다. 영하 50도를 견디다 바람이 없는 영하 30도가 되면 포근한 봄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한반도를 강타하는 강추위 영하 10도를 청양 고추 같다 한다면, 시베리아의 3월은 맵지 않은 고추 같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가 돈다. 스키를 메고 나와 눈 덮인 들판을 달리는 컨트리 스키를 즐긴다. 곳곳에 야외 스케이트장이 설치되어 스케이트를 탄다. 좀 더 익스트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더 북쪽으로 가서 얼음낚시를 한다. 아니면 산양이나 멧닭, 큰 사슴 같은 야생 동물 사냥에 나선다. 야쿠츠크 남자들에게 사냥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이것은 삶의 의미이며, 남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최근 야쿠츠크에는 새로운 겨울 스포츠가 하나 늘었다. 쇼트트랙이다. 스케이트를 탄다 하면 롱스케이트를 타는 스피드 스케이팅 정도였다. 지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빅토르 안(안현수)이 러시아에 쇼트트랙 첫 금메달을 안겼다. 전 러시아가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 열광은 야쿠츠크도 비켜가지 않았다. 영웅 “빅토르 안 따라 하기“는 이곳에서도 젊은 엄마들을 자극하였다. 쇼트트랙 전용 트랙이 생겼다. 쇼트트랙 코치가 초청되었다.
안현수는 러시아에서 “빅토르 안”이라는 영웅으로 탄생했다. 안현수가 조국을 떠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조국에 많은 것을 주었다. 안현수로 인해 러시아인 모두가 한국의 힘을 알게 했다. 쇼트트랙장에 고사리손을 끌고 온 엄마는 빅토르 안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잘 안다. 이들이 한국을 어찌 생각할지 굳이 궁금해하거나 물어볼 필요가 없다.
12-①② 시베리아 사람들은 왜 한국에 열광하는가?
사하 공화국 수도 야쿠츠크 시에는 사하-한국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해외에 세워진 여느 한국학교와는 의미가 아주 다르다. 이 학교는 러시아의 정규 학교이다. 학교 설립을 현지 정부가 주도한 만큼 운영을 위한 예산도 모두 현지 정부가 책임을 지고 있다. 학생들도 현지인들이다. 현지 외국인을 위한 한국 학교로서는 아마 세계에 유일한 학교가 아닐까?
1992년 사하공화국이 러시아 연방 내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이곳에 살던 고려인들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고려인 협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한국말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시 정부에 청원하였다. 다른 소수민족처럼 자기 말을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학교 설립을 요청하였다. 시 정부는 고려인들의 청원에 근거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당시 사하공화국은 국가의 근대화가 시급하였다. 사하-한국학교에 그런 역할을 기대하였다.
오랫동안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변방이었다. 모든 것이 낙후되어 있었다. 영국 여행가 안나 레이드는 1992년 야쿠티야를 다녀갔다. 그리고 한숨밖에 안 나온다고 썼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을 취재했던 외신 기자는 한국을 가리켜 “장미가 필 수 없는 쓰레기 더미”라고 말했다. 여기에 비하면 안나 레이드는 사하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19세기 야쿠티야를 관할하던 이르쿠츠크 총독의 말도 인용하였다.
▲야쿠츠크 시 중심가의 한국 병원 광고.
“야쿠트 인을 발가벗겨 돼지우리 안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겠소? 얼어 죽을까? 아니오. 1년 뒤엔 그 돼지우리가 큰 저택으로 변해 있을 거요!” 총독이 당시 그를 찾아간 영국의 탐험가에게 했다는 말이다.
총독의 에피소드는 야쿠트 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한 마디로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에는 150여 민족이 살고 있다. 야쿠트 인은 이들 민족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야쿠트인은 40만명밖에 안 된다. 그러나 한반도의 15배가 되는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이 영토 안에는 모든 희귀금속이 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타타르, 바시키르, 하카스, 네네츠, 코미, 알타이 같은 민족들은 인구 수에서 야쿠트인보다 적지 않다. 그러나 언어나 문화 정체성에서는 취약하다. 얼마 전 바쉬키르 국립대학교 교수를 야쿠츠크에서 만났다. 그가 야쿠츠크에서 가장 부러워한 것이 바로 언어 문제였다. 사하공화국에서 야쿠트 어는 공용어로서, 문화어로서 러시아어와 대등한 대접을 받고 있다. 지방으로 가면 러시아어를 몰라도 불편하지 않다. 이것은 지난 20년 사하 공화국이 이룩한 발전 중의 하나이다.
1995년 4월 사하 정부의 초청으로 처음 야쿠츠크를 방문하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몸은 얼어 있었다. 하바롭스크에서 갈아탄 비행기는 난방되어 있지 않았다. 4시간 뒤 착륙이 가까워지자 따뜻한 훈기가 돌았다. 몸을 녹이기에는 너무 늦었다. 모든 승객이 두꺼운 코트에 털모자, 부츠를 신고 있었다.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승무원에게 말을 붙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안전하게 도착한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거리엔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낡은 목조의 2층 집들이 금방 쓰러질 듯 서로 기대고 있었다. 호텔에 와서야 근사한 건물을 볼 수 있었다. 5층의 현대식 건물. 바로 한 해 전에 오스트리아 회사가 세웠다. 안나 레이드가 다녀간 지 3년 만에 처음 생긴 변화였다. 근처에 3-4층짜리 낡은 시멘트 건물이 몇 개 더 있었다. 정부 청사들이었다.
사하-한국학교는 2층 건물에 있었다. 비좁았다. 거기서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250명이었다. 선생님은 25명. 한국 외대 노어과 학생 4명이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쳤다. 아직 러시아에 언어 연수를 오기 어렵던 때였다.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연수하기 위해 자원해서 온 것이었다. 물론 항공료와 기숙사는 시정부에서 제공하였다. 월급도 주었다. 쥐꼬리만 하기는 했어도 현지 교사들보다 대우가 나았다.
시 교육청에서는 한국으로 학생 연수를 요구하였다. 학부모 약속 사항이라고. 사실 나보다 먼저 야쿠츠크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많은 것을 약속했다. 그 사람은 사하 정부로부터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로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에 야쿠티야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때는 러시아가 아직 어수선한 때라 문화재급 골동품들이 많이 반출되었다. 학생 연수? 누가 했건 그건 한국 사람이 한 약속이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95년부터 매년 여름 사하-한국학교 학생 15명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
▲사하-한국학교 전경.
한국에 다녀간 아이들은 한동안 병을 앓았다. “문화적 충격”.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95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아이들은 김포공항에서 울며불며 가기 싫다고 했다. 한국을 ‘파라다이스’라고 했다.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다. 국내의 유수한 대학교의 교수가 된 아이도 있다. 사하 정부에서 한국통으로 활약하는 아이도 있다. 사하-한국학교는 사하 공화국의 명문이 되었다.
사하-한국학교와 똑같이 출범한 학교들이 있었다. 사하-독일학교, 사하-프랑스학교, 사하-벨기에학교, 사하-터키학교. 이들 학교는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문을 닫았다. 사하-한국학교는 작년 11월 20주년을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지난 20년 많은 사람이 조용하게 도움을 주었다. 이미 10주년이 되던 2004년엔 스타렉스를 스쿨버스로 보냈다. 야쿠츠크 시에서 최초의 현대 자동차였다. 2012년엔 2대의 스타렉스가 또 갔다. 지금은 시내에서 스타렉스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르쿠츠크 총영사관을 이곳으로 옮기면 어떠냐고 농담을 할 정도이다.
사하-한국학교가 20년을 존속하고 명문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이르쿠츠크 총독이 말한 것처럼 야쿠트인의 특성 때문이랄 수 있다. 야쿠트 인은 부지런하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크다. 그들은 한국을 배우고 싶었다. 사하-한국학교는 그 열망을 채울 수 있는 통로였다. 그들은 한국 사람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 하고 싶었다. 1995년부터 여름방학마다 대학생 봉사단이 갔다. 태권도를 보여주고, 노래와 무용을 가르쳤다. 아마 한국인 사범 없이 태권도가 보급된 유일한 지역일 것이다.
야쿠츠크엔 비보이 아카데미가 있다. 스스로 홍대 부근에 와서 배워갔다. 작년부터 “야쿠티야” 항공이 인천에서 야쿠츠크 사이 직항을 운항한다. 4시간 반 거리이다. 20년 전엔 하바롭스크에서 하룻밤 자고 비행기를 타도 하바롭스크에서 야쿠츠크까지 4시간 걸렸다. 20년 사이 야쿠츠크는 북동 아시아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최근엔 한국 의료재단이 북동연방대학교와 합작으로 이곳에 병원을 세우기로 했다고 대서특필되었다. 여기선 중병에 걸린 사람도 한국만 오면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전직 차관 한 사람이 농담을 하였다. “10년 뒤엔 우리도 한국 같을 겁니다.” 그냥 웃었다. 남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13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생산지는 아프리카 아닌 시베리아 바로 이곳
사하공화국에는 멘델레프의 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광석이 묻혀 있다. 다이아몬드, 천연가스, 석유, 철, 금 같은 자원뿐만 아니라 니오븀 같은 희토류도 세계 최대 매장지 중 하나이다. 동토의 땅 야쿠티야에 왜 이런 금속이나 자원들이 많이 묻혀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지구상에는 끊임없는 싸움과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 원인은 보석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다. 신은 인간들의 탐욕에 지쳐 갔다. 더 이상 교화시킬 수 있는 묘수가 없었다. 마침내 신은 결심을 한다. 지구의 땅속에 묻혀 있는 모든 보석을 거두어들이면 싸움이 그치지 않을까? 천사를 지구에 내려 보낸다. 지구에 있는 모든 보석을 거두어 하늘로 가져 오는 임무를 주었다. 천사는 신의 명에 따라 지구의 모든 보석을 거두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무거운 보석을 품에 안은 천사는 하늘로 올라가는 지름길을 선택하였다. 지름길로 올라가던 천사는 손이 얼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보석을 품에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보석은 아래로 떨어져 모두 땅속 깊이 박혔다. 천사는 보석이 얼음 땅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안심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곳이 바로 야쿠트인들이 사는 야쿠티야였다. 야쿠트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신화 이야기다.
신화가 야쿠트인답게 매우 겸손하게 구성되어 있다. 천사가 추위 정도를 못 이겨 보석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 어쩌면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보석은 하늘나라도 망칠 수 있다. 하늘로 가져가느니 욕심이 적은 사람들에게 맡겨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천사는 야쿠트인을 선택했다. 보석을 야쿠트인이 살던 야쿠티야에 묻어 두기로 결심했던 건 아닐까? 야쿠트인은 야쿠티야 땅에 적어도 500년 이상을 살았다. 정작 그들은 다이아몬드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다이아몬드를 찾은 것은 러시아인들이다. 그들은 다이아몬드가 묻힌 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먼 곳으로 이주시켰다. 그 시대는 그게 통했다. 야쿠트인들이나 에벤키, 에벤인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쌌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다투거나 싸우지 않았다.
▲시내 중심가.
아직도 다이아몬드 하면 남아프리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하공화국이 다이아몬드 최대 생산국이 된 것은 이미 50년이 넘었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매장지이면서 생산국이다. 러시아의 다이아몬드는 대부분 사하공화국에서 난다. 사하공화국에선 석탄이 많이 난다. 석탄이 많다는 것은 과거 이 땅에 나무가 많았다는 뜻이다.
지각 변동으로 나무들이 땅속에 묻혀 석탄이 되었다. 석탄은 탄소 덩어리이다. 이것이 더 단단한 결정체로 바뀌면 다이아몬드가 된다. 이 다이아몬드 광맥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이것이 산업으로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사하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 광맥은 거대한 벨트처럼 이어진다. 우리나라 한반도의 15배가 되는 이 땅을 사각형으로 그려 본다. 중심에서 서쪽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긴 산맥이 있다. 높은 산은 없다. 이 산맥을 따라 다이아몬드 광산이 펼쳐져 있다. 미르니, 뉴르바, 우다치니와 같은 도시들이 중심지로 연결된다.
더 올라가면 올례뇨크라는 곳이 있다.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광산이다. 미르니에 살던 에벤키족을 50년대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런데 다시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것이다. 이제 러시아도 상황이 바뀌었다. 그곳의 주민이 된 에벤키족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이상 이주는 없다! 결판이 어찌 될지 궁금하다.
다이아몬드와 관련한 아쉬운 기억이 있다. 90년대 초 어느 한국 기업이 야쿠츠크에 다이아몬드 가공공장을 세우려고 했다. 거금을 투자하였다. 그런데 공장은 완공되지 못하였다. 공장 건설 책임자가 자금을 들고 도망친 것이었다. 한국 회사는 직원을 보내어 항의하였다. 다이아몬드 사업에 대해 사하공화국에서 보장하기로 한 문서를 내보였다.
계약서는 분명히 사하공화국의 책임을 명시하였다. 사하공화국 외교부는 문서를 다시 읽어 보도록 하였다. 계약 문서는 공장 라인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 사하공화국이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건은 공장에 라인을 설치하기도 전에 발생하였으니 사하공화국에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가진 국영회사 ALROSA 본사.
1994년에 사하-한국학교가 설립되었다. 한국어 선생으로 우리 학생들 넷이 가 있었다. 시장에서 한국 사람들을 보았다고 나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인사를 하려고 하니 피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다이아몬드 공장 설립 문제로 한국에서 파견된 직원들이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그들은 모든 걸 비밀로 하려고 했다.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사하-한국학교에 텔레비전이라도 1대 사다주고 현지인들과 친구가 되었으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똑같은 시기에 인도 회사가 야쿠츠크에 다이아몬드 공장을 세웠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부스러기를 가공하는 영세한 규모였다. 먼저 야쿠츠크국립대학교에 인도문화원을 세웠다. 문화원이라야 조그만 방에 인도 물품과 인형 몇 개 갖다놓은 정도였다. 당시엔 그만해도 야쿠츠크에서는 화젯거리였다. 그 회사가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다. 야쿠츠크에는 7개의 다이아몬드 가공회사가 있다. 최근엔 일본계 회사가 여기에 진입하였다.
▲야쿠츠크 시내의 다이아몬드 회사 중 한 곳.
중국의 다이아몬드 시장이 2조원, 일본이 1조원, 한국이 5천억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귀금속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계획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세하다. 원인은 우리의 시장 구조에 있다. 특소세로 다이아몬드의 정상적 수입을 막아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다이아몬드의 대부분은 밀수품이다. 시장도 아주 왜곡되어 있다. 차라리 특소세를 없애면 귀금속 산업이 활성화되고 세공을 비롯한 일자리도 많이 창출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세수도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야쿠티야는 한국이 진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겐 야쿠티야에 사하-한국학교라는 명문 학교가 있다. 야쿠티야는 한국의 기술과 예술적 능력에 무한한 신뢰를 한다. 같이 손을 잡으면 중국과 일본 시장을 겨냥해서 화장품 산업처럼 보석 산업에서도 한류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14-① ② 야쿠티야(시베리아) 상권 장악하는 중국인 알고보니 한국계?
사하공화국의 주요 원주민은 야쿠트, 에벤키, 에벤이다. 이 중에서도 야쿠트인이 다수다. ‘사하’라는 말도 야쿠트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 땅을 야쿠트인만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단일 민족으로선 야쿠트인과 러시아인이 엇비슷하다. 주요 기관의 장은 대부분 야쿠트인이다.
사하공화국에서 매우 젊고 영리한 러시아인을 사귀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고위직이었다. 판단이 빠르고 논리가 명쾌하였다. 속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사이까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직을 하고 호주로 떠났다. 더 이상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방이라는 큰 차원에서는 모스크바 영향력이 크지만, 지방이라는 작은 차원에서는 민족이라는 변수가 중요하다.
러시아에는 150개 이상의 민족이 살고 있다. 사하공화국에는 120개 이상의 민족이 있다. 야쿠트, 에벤키, 에벤, 그리고 존재감을 잃어가는 유카기르, 축치를 제외하면 모두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이 땅에 외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최초 외국인은 모피를 얻기 위해 들어온 카자크 부대였다. 그들은 총 한 방으로 야쿠트인을 제압하였다. 그리곤 무슨 권리가 있듯 밍크를 비롯한 모피를 세금처럼 요구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인과 야쿠트인이 조우하는 첫 단계였다.
▲“중국시장”이라 불리는 야쿠츠크의 제일 큰 시장 ‘스톨리치니’.
하지만 야쿠트 사회를 개화시키는데 러시아인의 역할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 정치범들의 최종 유형지가 바로 야쿠티야였다. 이곳에서 정치범들은 러시아어를 비롯한 교양을 가르쳤다. 러시아 어디를 가나 모스크바와 같은 표준 발음을 들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야쿠츠크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빌류이스크라는 도시에는 “체르니셉스키 사범학교”가 있다. 철학자이며 문학자인 체르니셉스키가 이곳에서 유형 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걸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학교에 붙인 것이다.
1920~1930년대에는 금광 발견으로, 1950~1960년대에는 다이아몬드 발견으로 많은 러시아인이 유입되었다. 1989년에는 총 인구의 50.3%로 정점을 찍었다. 현재는 러시아인이 40% 정도를 차지한다.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광산이나 건설 기술자로서 또는 교사나 의사로, 학자로 활동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야쿠트인들의 이교도적 신앙과 관습을 수용하면서 야쿠트인의 러시아화를 지원하였다. 음식을 먼저 불에 갖다 놓는다든지, 멀리 길을 떠날 때 마유주 크무스를 마신다든지 하는 것을 러시아 정교회가 수용하였다.
러시아인 외에 외국인으로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독일인,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유대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 핀란드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한국인, 부랴트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의 유입 역사가 비교적 길다. 이들은 17세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은 정치적 사건들과 연루되어 유형 당한 정치범들이었다. 1930~1950년대 1만200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부농 출신들이 이곳에 보내졌다. 이들은 대부분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체제인사들이었다.
<①편에서 계속>
폴란드는 100여 년 동안 제정러시아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에서는 러시아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폴란드에서 정치범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야쿠티야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은 엄청나다. 야쿠트인의 풍습, 언어 등이 바로 이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리되었다. 이들이 편찬한 야쿠트어 사전이나 민족학 연구서들은 지금도 고전이다.
특이한 것 중 하나가 유대인 사회이다. 1727년 유대인 안톤 마누일로비치 데비에르 백작이 처음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그 뒤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소규모 무역, 가내공업, 농업에 종사하거나 의사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유대교회당, 학교, 유대인 묘지 등을 건설하고, 야쿠츠크 시의 박물관, 도서관, 양로원 건설 등에도 많은 기부금을 내었다. 이들은 공산당원으로서도 활발하였다. 2월 혁명 후에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내려졌던 유대인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게 하였다. 지금은 대부분 이스라엘에 이민을 가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최근 20년간 유입된 외국인은 두 부류이다. 하나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카프카스지역 출신들이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인이다. 카프카스인들은 야채, 과일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전국적인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당업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한드가 시의 이슬람 사원.
하지만 이들의 유입 속도나 규모는 중국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중국인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야쿠츠크 시에서 가장 큰 생필품 시장을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 시장은 ‘수도 시장’이라는 뜻으로 공식 명칭이 ‘스톨리치니’이지만 사람들은 ‘중국시장’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장사하는 중국인의 75%가 한국계 중국인, 즉 ‘조선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활용하는 마케팅을 하고 있다. ‘코리아 사우나’, ‘서울 식당’, ‘코리아 하우스’ 같은 곳의 주인이 모두 중국계 한국인이다.
이들이 한국 브랜드를 이용하는 것은 이곳에서 한국 브랜드 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한국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1이라 한다면, 이곳에서의 신뢰도는 2라 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나 일반인들은 한국 사람이 와서 어떤 비즈니스든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한국에서는 아직도 20~30년 전 묵은 기억을 들추어내며 손사래부터 친다. 러시아가 얼마나 바뀌고 있는지, 야쿠티야가 얼마나 친한적(親韓的)인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중국인의 유입은 최근 5년 사이 새로운 유형으로 바뀌고 있다. 주로 헤이룽장성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과 홍콩 자본의 투자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고 있다. 2022년까지 레나강에 교량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하였다. 8600억 원에 달하는 공사이다. 철도, 도로, 관광, 유전 개발, 아파트 건설을 비롯한 도시 개발 분야에 중국은 전략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어느 학교 교장 선생님이 우려 섞인 한 마디를 던진다. “여기가 중국 땅이 될 것 같아요!”
15 시베리아 원주민 축치족 처녀들 러시아 군인과 결혼하는 이유?
사하의 소수민족 에벤키
에벤족 얘기를 많이 했다. 사하에서 에벤족은 소수 중의 소수이다. 에벤족과 사촌쯤 되는 민족이 에벤키이다. 두 민족은 이름도 비슷하지만 언어, 문화, 풍습 등이 다 비슷하다. 예를들면, 우리말 ‘가지다’가 에벤키어로는 ‘가-미’이고, 에벤어로는 ‘가-다이’이다. 우리말 ‘잡다’가 에벤키어로는 ‘자바-미’이고, 에벤어로는 ‘잡-다이’이다.
이 두 민족은 원래 하나로서 바이칼 부근에서 만주 쪽으로 이동하며 그곳의 원주민과 섞이면서 생긴 민족으로 보인다. 이들이 갈라진 것은 시베리아로 올라와 순록치기를 하면서이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어느 해 갑자기 순록이 전멸하였다. 일부는 바닷가로 이주하였다. 그들을 ‘라무트’라고 불렀다. 혁명 후 이들을 에벤이라고 부른다. 에벤키 족은 러시아 혁명 전까지 스스로 “퉁구스”라고 하였다.
‘동호’(東胡)에서 유래한 ‘퉁구’라는 말에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 ‘우스’가 붙어 ‘퉁구스’가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동호’는 중국 사람들이 음차하여 붙인 이름일 것이다. 지금은 만주 지역에서 사는 네기달, 솔롱 등의 민족까지를 아우르는 통칭으로 퉁구스라는 용어가 쓰인다.
▲에벤키족 가면탈.
우리말에 ‘오랑캐’라는 단어가 있다. 만주 변방 민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우랑카이’라는 말이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알타이, 투바 지역까지 이르는 시베리아 지역의 언어에서는 이 말이 보통 ‘용감한 무사’를 의미했다. 지금은 고어로서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고 한다. ‘우랑카이’라는 말의 어원은 무엇일까? 에벤키어나 에벤어에서 ‘오란’은 순록을 뜻한다. 여기에 ‘큰 사람’을 가리키는 ‘-카야’라는 접미사가 있다. 바로 ‘오란-카야’가 어원이 아닐까 한다.
본래 ‘순록을 잘 키우는 사람’이란 뜻의 ‘오란-카야’를 옛날 우리 조상은 ‘오랑캐’라고 부른 게 아닐까? 시베리아 언어들에서 ‘오란카야‘는 음성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우랑카이’가 되었을 수 있다.
에벤키와 에벤보다 먼저 시베리아에 자리를 잡은 민족이 유카기르와 축치이다. 언어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범 아시아계’라고 분류한다. 유카기르인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대략 3000년에서 6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하공화국의 동북부 지역과 마가단 주에 1500 명 정도가 남아있다.
축치인은 아시아 대륙의 동북단 끝에 있는 추코트 자치구의 원주민이다. 야쿠티야에는 400명 정도가 있다. 이들은 북동 지역 아시아에 사는 고대 민족 중 체격이 제일 크다. 기원전 1000년 경 고대 유목민이 오호츠크 해안에서 아시아 북단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유카기르인과 에스키모인이 융합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에벤키출판기념회전시된 책.
2010년 여름 레나 강에서 만난 축치 여자에 대한 기억이 아련하다. 그녀는 마가단 주의 아나디리라는 곳에서 왔다. 아나디리는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있는 조그만 도시이다. 군인들은 이곳에서 2년 의무 복무를 하고 제대를 한다. 군인들은 그 2년 동안 이곳 처녀들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 이 여자의 가족도 그랬다.
엄마는 축치인, 아버지는 러시아인이다. 아버지는 제대 후 모스크바로 떠났다. 엄마는 아버지가 떠난 뒤 혼자 딸을 키웠다. 처녀가 된 이 딸도 국경수비대 출신의 군인과 결혼하였다. 그 군인은 떠나지 않았다. 아나디리에 남아 자동차 수리공으로 가족을 부양한다. 엄마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마 엄마도 러시아인의 피를 받았을 것 같았다. 마음을 짠하게 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가계를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축치여자예요. 축치 문화를 이어갈 거예요.” 노트북을 꺼내 가족사진과 아나디리 시 전경을 보여 주었다. 움막집과 낡은 벽돌집들이 늘어선 보잘 것 없는 작은 어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참으로 당당했다.
동부 시베리아에서 수수께끼 같은 민족은 돌간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히 야쿠트어와 유사하다. 이 사람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은 야쿠트인과 잘 지내고 있다. 유독 돌간 사람들만 그렇지 않다. 돌간 사람들은 주로 사하 공화국 북서 변방과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에 살고 있다. ‘돌간’이란 명칭은 17세기 초에 처음 나타났다. 야쿠티야 중심부 레나 강변에는 에벤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민족이 들어오자 북쪽으로 밀려났다. 북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우랄어족, 케트어족들과 만나게 되었다. 오늘의 돌간인이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18세기 말-19세기 초였다. 이들의 문화는 퉁구스적인 것과 툰드라 지역적인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에벤키 학자 출판념회에서 에벤키 민속춤.
1930년대까지 이들 돌간은 야쿠트와 구분되지 않았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소비에트 민족 복원정책 때문이었다. 행정적으로 이들 대부분은 사하공화국 서쪽의 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에 살고 있다.
에벤키, 에벤, 유카기르, 축치, 돌간족들이 언어는 다르다. 그러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정신문화는 샤머니즘으로 통한다. 에벤키인들에게 자연은 최고의 신이며 근원이었다. 불의 정령에 음식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 자연을 숭배하였다. 이들에게는 일종의 윤회 사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나 짐승도 죽은 뒤 그 영혼이 새로운 모습으로 대지 위에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짐승도 반드시 땅에 묻어 주었다. 이들의 세계관은 공통으로 3개의 세계로 구성되었다. 상부, 중부, 하부로서 인간은 중부세계에 산다고 믿었다.
▲에벤족 대학생 티무르와 함께.
문화에는 분명히 우열이 없다. 이 소수민족들의 정신세계는 공통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씨족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것들은 아무리 값이 있어도 사라지고 만다. 모두 소멸의 기로에 놓인다. 손재주가 탁월한 축치인들.
그들의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새로운 문명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다. 북해 연안의 도시 틱시에서 온 에벤족 대학생 티무르를 레나강변에서 만났다. 에벤어를 아느냐고 물었다. “몰라요. 없어지고 있잖아요!” 그에게 에벤어를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은 가혹한 질문이 될 수 있다.
16 한인이 시베리아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금 때문?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사하공화국에 사는 고려인은 2000명 정도다.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인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대부분 학교, 병원, 정부 기관 등에서 주요 직책에 있거나 성공적인 기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하 사람들은 고려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보인다.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들’로 통하는 고려인은 야쿠티야의 주요 민족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
사하의 고려인은 3부류로 나누인다. 첫 번째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었다가 소련 해체 뒤 이곳으로 다시 이주해 온 사람들. 두 번째가 사할린에 살던 고려인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경우. 세 번째가 1920년대부터 금이 난다는 소문을 듣고 남부 야쿠티야에 정착한 사람들. 사하에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이다.
▲야쿠츠크 고려인.
이들은 20년대에 담배와 야채를 재배하며 시베리아의 극한 기후에 잘 적응했다. 고려인 협회를 만들고 일요 한글학교도 열었다. 그러나 30년대 후반 정치적 박해를 피할 순 없었다. 약 2000명이 체포되었다. 800 명 정도가 수용소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낸 야쿠티야 고려인은 사하 공화국을 구성하는 민족의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이 료바씨 가족은 해체되지 않고 사하 공화국의 주류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 료바씨 아버지는 1922년 블라디보스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1928년 블라고베센스크에서 태어났다. 두 가족은 일본 강점기에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금을 캔다는 소문을 따라 알단이란 곳까지 왔다. 이곳은 연해주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료바씨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다. 이 두 사람은 가난 속에서도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수학과 물리 교사가 되었다. 나중엔 시골 학교 교장이 되었다. 어머니도 교사가 되었다. 야쿠티야의 명예교사로도 선정되었다.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녀의 교육이 걱정되었다. 야쿠티야 중심인 야쿠츠크로 이주를 하였다. 야쿠츠크에 와서 아버지는 동토연구소 수리 분야 연구원이 되었다.
큰아들 슬라바씨(68)는 리가의 기술대학을 졸업하고 동토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러시아 학술원 시베리아 분원의 공훈 연구원이라는 영예를 받았다. 전산실 실장으로 퇴직한 뒤 인쇄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부인은 국립의료센터의 혈액내과 과장이다. 큰딸은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고, 작은딸은 치과의사로 미국에서 살고 있다. 아들은 야쿠츠크에서 아버지와 사업을 같이하고 있다. 며느리는 동토연구소 소장 비서로 일하고 있다.
▲동토연구소 부소장 이료바씨.
작은아들 료바씨(67)도 동토연구소 부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리물리학자로서 극한 지방에서의 식물 성장에 관한 특허도 갖고 있다. 부인은 소아과 전문의로서 보건학 권위자이다. 료바씨도 3자녀가 있다. 큰아들은 물리학 전공자로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건강보건 사업을 하고 있다. 부인은 심리학 연구소 소장이다. 딸은 언론인으로서 야쿠티야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막내아들은 노보시비르스크 대학교를 졸업하고 태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나탈리야(56)는 생물학 박사로서 생물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편은 북동연방대학교 생물학 교수이다. 아들은 영국 유학 후 돌아와 사하 공화국 외교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야쿠티야에 정착한 1세대로서 안 안나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부모는 함경북도 길주 출신이었다. 부모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와 살다가 1925년 안 안나 할머니를 낳았다. 1929년 아버지가 먼저 알단으로 와서 자리잡고 1932년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이곳엔 한국인이 100~200명 모여 살았다. 안나 할머니는 1951년 26세에 동갑내기 밀양 박씨와 결혼을 하였다. 할머니의 4남매 형제들은 모두 한국인과 결혼을 하여 한국 문화를 지켰다. 사금 채취하느라 공부를 못한 할머니는 결혼 후 경리 공부를 하여 농림부에 취직하였다. 농림부에서 22년, 기상청에서 17년, 그리고 작은 공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60년을 일하였다. 덕분에 훈장도 12개를 받고, 연금도 많이 받아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암가부군수 고려인.
영화 기술자였던 남편은 2005년 사망하였다. 딸은 유대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두 아들은 러시아 여자와 결혼하여 야쿠츠크에 살고 있다. 설날과 제삿날 가족이 모여 부모 사진을 놓고 제사를 지낸다. 안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텔레비전 방송에 초대되어 한국 음식 만들기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안 할머니는 1995년 처음 손자를 따라 서울 구경을 하였다. 2012년 안 할머니를 만난 기억이 새롭다. 다시 만나고자 수소문하니 바로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사하공화국 국립미술관에 가면 야쿠티야의 1세대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 화가 “김 알렉산드르”가 있다. 야쿠티야에 회화를 발전시킨 공훈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야쿠츠크 발레극장의 최고 발레리노는 홍 레나타이다. 최근엔 엄 씨라는 고려인, 안 씨라는 고려인이 이 지역의 야채 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사하 공화국에서 고려인은 인구 수에 비해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교육, 연구, 농업,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기여를 했다고들 한다. 가족 관계에서 부모 공경의 예는 한국인의 장점으로 간주한다. 비록 언어는 잃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자긍심과 정체성도 기억하고 있다. 한국학교를 세워달라는 청원에 앞장서 1994년에는 사하-한국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제 4-5세대로 넘어가면서 러시아 그리고 야쿠티야를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순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국이 잘 되기를 바라고 또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몸속에 흐르는 피 때문일 것이다.
▲박정남 이르쿠츠크 총영사(앞줄 가운데)와 고려인들(총영사 옆 여성 세 명과 뒷줄 가운데 남자 두 명).
17-①② 러시아인보다 소득 더 높은 시베리아 원주민 야쿠트인
에벤족과 이민족 혼혈로 생겨난 야쿠트족이란?
야쿠트인은 누구인가? 언어로 보면 분명히 터키어 계통이다. 그럼 투르크족인가? 얼굴이나 피부를 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와 아주 닮았다.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진 민족을 꼽으라 하면 그중에 야쿠트인도 들 수 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인을 빼고 인구가 많은 소수 민족은 타타르인, 부랴트인, 코미인, 알타이인, 체첸인 등이 있다. 이들 민족 중 야쿠트인은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야쿠티야는 한반도의 15배이다. 인구는 백만에 불과하다. 그중 야쿠트인은 40만 정도이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으면서도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야쿠트인을 시베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민족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야쿠트인은 어디서 왔는가?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답을 에벤 사람에게서 들었다. 에벤키어나 에벤어로 “야크”는 ‘무엇’이란 뜻을 가진 단어이다. 에벤키 사람들과 에벤 사람들은 이들을 “요크” 또는 “뇨크”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을까? 그 이유는 에벤키, 에벤인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래전, 아마도 10세기 이전부터 에벤키와 에벤 사람들은 시베리아에 터를 잡고 순록을 키우거나 사냥을 하며 살았다. 시기적으로 발해가 멸망한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 발해의 영토는 지금의 야쿠티야 남부까지 아울렀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하였다. 이 나라가 멸망한 후 발해를 구성하였던 민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야쿠트어로만 공연하는 연극전용극장,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와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지방도시 극장.
11세기 이후 시베리아 남부에서는 큰 변화가 일었다. 그 변화는 바이칼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테무친이 바이칼 지역을 통일하고 칭기즈칸이 되었다. 그 지역에는 몽골족과 타타르족이 같이 살던 곳이었다. 몽골족이 지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자 일부 타타르족이 이탈하였다. 그들은 레나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이미 터를 잡고 살던 원주민을 만났다. 그들이 에벤키와 에벤이다. 에벤키와 에벤은 순록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순록만큼이나 순한 민족이었다. 무기나 도구 같은 것을 많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이민족은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칼과 창이 있었다. 순록 치기 유목민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자연히 그들은 새로운 이주자에게 복속하거나 더 먼 숲 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에벤키, 에벤과 섞이면서 새로운 민족이 되었다. 이도 저도 아닌 혼혈족이 나타났다. 아메리카 대륙의 물라토나 메스티소 같은 혼혈족이 생긴 것이다. 순수 혈통을 고집하던 에벤키와 에벤족 사람들에게 이 혼혈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식이 바로 혼혈인들을 ‘무엇’에 해당하는 “요코”라고 부르게 된 동기일 것이다.
새로운 민족 “요코”는 대단히 개방적이며 주위 환경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였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시베리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순록 대신 소와 말을 기르며 한 장소에 정착하였다. 정착민으로서 마을을 형성하고 세력을 키웠다. 18세기 러시아인들이 나타났다. 원주민 에벤키인에게 러시아인들이 물었다. “저 사람들이 누구요?” “요코!” 러시아인들은 “요코”에 ‘-우트‘라는 접미사를 붙였다. 러시아인들은 “요쿠트” 대신 발음상 편한 “야쿠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시베리아에서 새로 생긴 혼혈족, 야쿠트인은 정착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최근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 음식도 자기네 것인 양 내놓은 것을 보았다. 전통음식을 차려놓고 외국 손님들을 초청하였다. 그 음식 중에 일본식 김밥과 간장, 생강조림이 있었다. 야쿠트인은 간장과 생강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통음식차림에 새로운 것을 슬쩍 끼워놓는 것에서 이 사람들의 탁월한 융통성을 볼 수 있다. 이런 야쿠트인들의 융통성을 살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은 많다.
<①편에서 계속>
권력의 핵심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가 있다. 아버지가 타지크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를 타지크인이라고 차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잘 생기고 능력 있는 그를 주변에서 부러워한다. 야쿠트인들 가운데에는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도 있다. 이목구비가 서양 사람처럼 생긴 사람도 있다. 주변에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아버지, 어머니 중 한쪽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그루지야, 유대인인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바실리라는 젊은 친구와 가까워졌다. 이미 마흔이 넘었는데 혼자란다. 아이들은 없다. 부인은 스위스에 있다고 한다. 생활비는 누가 대느냐고 물었다. 미국에 있는 부모들이 보낸다고 하였다. 그들은 유대인이다. 이 친구도 아버지는 반쪽이 유대인이었다. 그럼 당신도 유대인 아니냐는 물음에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이스라엘에 가서 교육도 받았다. 그럼에도 야쿠티야로 돌아와 야쿠트인으로서 사하공화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
▲김밥을 만들고 간장과 생강을 이용하는 야쿠트인들은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데 탁월한 적응력이 있다.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를 야쿠츠크에서 만났다. 야쿠트인의 러시아어 발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외교관은 중국의 원로 외교관으로 과거 소련 해체 직후 중-러시아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어도 유창하다. 중국의 원로 외교관은 러시아 연방 안의 다른 소수민족들이나 주변의 중앙아시아인들은 아무리 러시아어를 배워도 자기 고유의 악센트를 버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야쿠트인들에게서는 그런 악센트를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어에 관해선 모스크바의 러시아인들과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야쿠트인의 유연한 사고방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종교에 관해서도 야쿠트인들은 유연하다. 야쿠트인들은 종교가 뭐냐 묻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그러나 시내엔 정교회 교회가 꽤 많다. 주요 국가 행사엔 정교회 신부가 꼭 초대된다. 그리고 축복을 받는다. 동시에 그들은 미신처럼 내려오는 많은 금기사항을 어기지 않는다. 사냥터에 가면 먼저 사냥신에게 술잔을 바친다. 축제에선 불의 신에게 크무스를 바친다. 술자리에서 병이 비면 마지막 한 방울을 탁자 위에 뿌리며 3번 똑똑 두드린다. 이들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의 이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융통성을 볼 수 있다.
▲야쿠티야 지역은 2014년 여름 52개국에서 400여 명의 교육, 행정, 언어 전문가들을 초청해 유네스코 국제회의 무리없이 진행했다.
19세기 야쿠티야 지역을 관할하던 이르쿠츠크 총독은 야쿠트인의 적응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겨울에 발가벗겨 돼지우리에 집어넣으면 다음해 돼지우리에서 큰 저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하공화국이 자치권을 얻은 지 20년이 넘었다. 1998년 야쿠츠크를 방문한 한국의 중학생이 큰 시골 마을 같다고 해 여기 사람들을 웃게 하였다. 15년 지난 지금의 야쿠츠크는 현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야쿠트인들의 개인소득은 러시아 평균보다 훨씬 높다. 대략 1만8000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이 정도면 경제적 구매력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 분위기는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개인적으로도 사람들이 부지런하다. 여기에 사하공화국은 자원의 보고이다. 주요 자원들의 개발은 연방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야쿠트인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연방정부와 줄 당기기를 할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다이아몬드, 석유 같은 자원을 연방이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야쿠트인들은 실속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러시아 연방 내의 다른 소수민족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을 시베리아의 유대인이라고 할 만하다.
18 야쿠트인 축제 으스아흐와 민족 영웅서사시 올롱호
야쿠트 말을 하고 말고기를 좋아하고 마유주 쿠므스를 마시며 영웅서사시 올롱호에 감동할 수 있으면 다 같은 야쿠트 민족이다. 에벤키와 에벤인이든 자기가 어느 민족인지 말하지 않는 이상 구분되지도 않는다. 그들도 모두 야쿠트 말로 소통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축제를 즐긴다. 에벤키와 에벤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축제가 있지만 그것도 야쿠트 문화의 일부로 간주한다.
6월 22일부터 일주일간 지역마다 하지 축제가 열린다. 하지 축제를 “으스아흐”라 한다. 야쿠트어 발음으로는 “으흐아흐”이다. “으흐-”는 ‘무언가를 한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비로소 추위가 가고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부터 한 해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비에트 시절 이전에는 지역마다 너른 들판에 모여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멀리 떨어져 사는 이웃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 만남을 통해 젊은 총각 처녀들도 얼굴을 익히고 사랑을 맺을 수 있었다.
▲아쿠트 전통무용 '으흐아흐'. /강덕수
이런 모임이 소비에트 시절에는 금지되었다. 자치공화국이 된 1992년 이후 축제가 공식화되었다. 지금은 국가적 행사로 민족의 단결과 동질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대규모 행사가 되었다. 가장 큰 으스아흐는 야쿠츠크 시에서 30여 km 떨어진 ‘위스 하틍’이라는 벌판에서 열린다. 인근 100km 정도의 지역에서는 모두 모인다. 매년 20만이 되었다거나 30만이 넘었다거나 하면서 많이 모이는 걸 자랑한다. 몇 년 전에는 최대 규모의 합창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자랑한 일도 있다.
이 축제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옷장에 넣어두었던 전통의상들을 입고 나온다. 이곳에 사는 고려인들도 한복을 입고 나와 한국을 알린다. 또 외국 사절들이나 민속 음악 그룹들을 초대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판소리 성악가와 민속무용단이 초대되기도 했다.
▲축제장 고려인 캠프에 날리는 태극기. /강덕수
이 축제의 기본 주제는 민족정신의 고취와 전통의 계승이다. 이를 통해 야쿠트 문화의 확인이다. 야쿠트 문화에 대한 연구는 18세기 정치적 이유로 이곳에서 유형 생활을 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지식인들이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많은 고아를 거두어 자기 성을 주면서 가족을 만들었다. 크세노폰토프, 가비세프, 말리세프 같은 성들은 러시아 성에서 차용된 것들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야쿠트인 지식인들이 19세기 야쿠트 민족주의를 이끌었다. 이들은 암모소프, 오윤스키, 시프체프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민족 설화를 바탕으로 영웅서사시를 만들었다. 이 영웅 서사시를 “올롱호”라고 한다. 이 올롱호를 영어, 프러랑스어, 한국어 등 여러 외국어로 번역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2012년 유네스크에 인류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 올롱호는 약 6000행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시로 우리의 판소리와 유사하다. 이것을 완창하려면 적어도 사흘 밤낮을 계속해야 한다.
축제는 올롱호를 각색하여 무용, 창, 연극으로 표현되는 집단 창작극으로 진행된다. 이 창작극에는 보통 천 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된다. 기사와 함께 말도 등장한다. 민족 지도자로서 제사장은 민족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말하며 미래를 예시한다. 이 과정이 지나면 마지막은 모든 참여자의 무대가 된다. 광장에서는 둥근 원을 만들며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원무가 시작된다. “오수오하이”라는 춤이다. 우리의 강강술래와 닮은 꼴이다. “오스”는 야쿠트말로 노래한다라는 뜻이다.
▲한국의 강강술래와 비슷한 '오수오하이'. /강덕수
축제 장소에서 낯익은 노래를 들었다. 상당히 러시아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선 모두 그것을 자기네 전통음악이며 전통무용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에 해박한 발레리라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1900년에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세르게이라고 했다. 발레리의 할머니의 오빠였다. 그가 1947년 청년 축제에 초대받아 모스크바에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발레를 보았다. 충격이었다. 야쿠트에도 그런 음악과 무용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그는 모스크바에서 민속음악을 공부했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알렉산드로바 무용단에도 들어갔다. 세상을 알기 위해 아무르 지역, 몽골, 중국, 예니세이 강을 따라 크라스노야르스크 같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공부했다.
마침내 야쿠츠크로 돌아와 작곡과 안무에 몰두하였다. 민속무용단을 만들어 자기가 만든 음악과 무용을 선보였다. 야쿠트 사람들에게 아주 색다른 것이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차츰 자기네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이 무용과 음악이 자기네 전통음악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구는 40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은 으스아흐와 오수오하이, 올롱호를 통해 나머지 60만을 야쿠트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생활도 일찌감치 유목민의 습관을 버리고 정착민으로 바꾸었다. 누구의 것이든 가져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시베리아에 새로운 문화를 일구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들을 끊임없이 초대하면서 국제 사회와의 소통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끝
■캄차카 반도
▲캄차카 - 러시아 극동에 있는 반도
□생생한 화산 폭발 장면 ‘공중 촬영’-2013. 2.3
▲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4개의 화산이 동시에 격렬한 활동을 하고 있다. 180km 거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화산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드문 현상이라고 하는데, 모스크바에 있는 항공 파노라마 사진 제작업체인 ‘에어파노’가 화산 폭발의 현장을 촬영한 생생한 사진을 홈페이지에 공개해 독일 슈피겔 등의 언론에 소개되는 등 화제가 되고 있다. 에어파노는 용암이 튀고 연기가 솟아나는 악조건 속에서도 3일간 치열한 작업을 거쳐 플로스키 톨바치크 화산의 항공 파노라마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해외 네티즌 사이에서도 큰 인기인데, 바로 눈앞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살아 있는 사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네덜란드 사진작가가 러시아 캄차카에서 촬영한 화산에서 일어난 마술 같은 장면
■ 크라스노다르 - 소치
▲소치 = 13. 2. 7. 2014 동계 올림픽 카운트다운
▲소치의 오륜마크 - 13.2.18.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소치
▲소치 건설중인 동계올림픽 경기장
▲소치의 애들러 아레나 경기장 14. 2. 7. 동계올림픽 개막◎